나는 백향목 궁에 살거늘. 예루살렘 정복(5:6-10) 및 주위 대적들을 모두 제압한 때에 다윗은 두로 왕 히람으로부터 호의를 입었다. 그것은 곧 히람이 다윗을 위해 예루살렘에 백향목 궁을 지어 준 것이었다. 이후 다윗은 그 곳에서 살게 되었는데 본 절은 바로 그 일을 가리킨다(5:11).
휘장 가운데에 있도다. 여기에서 휘장(curtains)은 가늘게 꼰 베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로 수놓은 10폭의 휘장을 의미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것으로 성막 전체를 덮었다(출 26:1, 36:8). 다윗은 이처럼 천으로 덮여 있는 성막 속에 여호와의 궤가 있는 것을 안타까워 하였다(시 69:9).
마음에 있는 모든 것을 행하소서. 나단의 이와 같은 말은 하나님의 뜻을 받아 한 말이 아니었고 단지 자기 생각을 피력한 것에 불과하였다(Keil, Lange). 즉, 그는 다윗의 성전 건축에 대한 소원이 곧 하나님의 뜻에 부합될 줄로 알고 즉흥적으로 대답했다. 물론 일반적으로 볼 때 이러한 나단의 생각이나 말이 잘못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에 앞장서거나 그에 협력하는 것은 성도의 당연한 본분이기 때문이다(고전 10:31). 그러나 이번 경우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다.
여호와의 말씀이 나단에게 임하여. 아마도 나단은 꿈(민 12:6, 왕상 3:5)이나 이상(민 12:6, 단 2:19, 7:2, 13) 또는 직접적인 계시(창 26:24, 민 22:20, 삿 6:25-27, 삼상 3:1-21)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17절에서는 이것을 ‘계시’(vision)로 칭하고 있다.
네가 … 건축하겠느냐. 다윗의 성전 건축 의사를 분명히 반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같은 내용을 기록한 대상 17:4에서는 ‘너는 … 건축하지 말라’고 더욱 확실하게 말씀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반대 이유를 대상 22:8에서 찾아볼 수 있다.그것은 곧 다윗이 전쟁에서 피를 많이 흘렸기 때문이다. 이는 분명 평화를 상징하는 성전을 건축할 자로서의 이미지는 아니다(Keil & Delitzsch Commentary). 그러나 이와 같은 사실에도 불구하고 본 절의 하나님의 말씀은 성전을 건축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겠다는 다윗의 진실한 마음을 무시한 것은 아니다. 이는 다만 아직 그 시기가 이르지 않았다는 말씀일 뿐이다. 이같은 사실은 하나님께서 다윗의 아들 솔로몬 때에 이르러 성전 건축을 허락하신 것을 보면 알 수있다(13절, 대상 17:12, 대하 3-6장).
내가 …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과거 430년 동안 종노릇 하였던 애굽 땅에서 건져 내셨던 역사적인 날을 가리킨다. 정통주의 학자들에 따르면 그 날은 B.C. 1446년경 아빕월 15일이었다고 한다(출 12:41).
집. 이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바이트’는 (1) 어떤 재료로 만들어진 영구한 건축물(16:21, 창 19:2, 33:17), (2) 예배 장소, 또는 성전(출 23:19, 왕상 6:5), (3) 사람이 거하여 안식하는 장소(욥 17:13, 전 12:5) 등을 의미한다. 그런데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영구히 거하시며 안식하시며 경배 받으실 만한 견고한 건축물을 의미한다.
장막과 성막. 장막(tent)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오헬’은 ‘단순히 이동할 수 있는 임시 거주지’, 곧 천막을 의미한다(삼상 17:54, 대하 14:15). 반면 이와 달리 성막(tabernacle)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미슈칸’은 ‘하나님의 법궤를 모셔 놓은 장막’을 의미한다. 즉 ‘미슈칸’의 동사형 ‘샤칸’은 본래 ‘자리잡다, 앉다, 휴식을 취하다, 살다’란 뜻이다. 이렇게 볼 때 ‘미슈칸’의 의미는 하나님의 가시적 보좌, 곧 법궤가 자리잡고 있는 장막을 의미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출 25:9, 민 1:50, 시 46:5, 84:2). 그러나 이와 같은 두 용어의 차이점은 본 절에서 그다지 중요한 것은 아니다. 다만 본 절에서 중요한 것은 두 용어가 모두 이동용 거처를 가리킨다는 사실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고정된 집에 거하시지 않고 이동용 천막에 거해 오셨다는 사실이다. 아무튼 이와 같이 지극히 거룩하시고 존귀와 영광으로 가득 차신 여호와 하나님(대상 16:27, 겔 39:7)께서 화려한 장소에 계시지 않고 비천한 장소에서 거하셨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당신 백성들을 사랑하사 그들을 인도하시기 위해 인간의 수준으로 낮아지신 것을 의미한다.
먹이라고. 여기서 ‘먹이다’(히, 라아)는 말은 본래 목자가 가축을 돌보는 것을 의미한다(창 37:13, 민 14:33, 삼상 16:11). 따라서 이 말은 주권자가 백성을 다스리거나 하나님께서 당신 백성을 인도하는 사실을 묘사할 때에도 사용되었다(삼하 5:2, 시 23:1, 슥 10:2). 여기서도 이 말은 백성을 ‘통치하다, 지도하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Keil).
이스라엘 어느 지파들. 학자들은 본 절의 ‘지파’라는 말을 놓고서 서로 해석을 달리하고 있다. 즉 그들은 이 말에 대하여 상반된 견해를 보이고 있는데 곧 다음과 같다. (1) 지파를 사사로 보는 견해이다(Bertheau, Ewald, Thenius). 이러한 사람들의 주장은 본 절과 같은 내용을 기록한 대상 17:6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즉, 본 절의 ‘지파’(히, 쉬브테)라는 말이 대상 17:6에서는 ‘사사’(히, 쉬프테)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이들은 본 절의 ‘지파’는 ‘사사’의 오기(誤記)라고 주장한다. (2) ‘지파’란 말을 그대로 지파로 보는 견해이다(Keil, Lange, Hengstenbery, Maurer). 이 견해에 따르면, 여기서 ‘어느 지파’란 다윗 이전에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던 에브라임, 므낫세, 베냐민, 단과 같은 지파들을 의미한다고 한다. 이상과 같은 두 견해 중 어느 것이 보다 정확한 해석인지는 판단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 두 견해를 다 염두에 두고 본 절을 대하는 것이 보다 무난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사사(士師)들 대부분이 에브라임, 므낫세, 베냐민, 단과 같은 지파 출신이기 때문이다.
백향목 집. ‘백향목’(cedar)은 그 당시 최고급 건축 자재이며 궁궐과 성전을 짓는데 사용되었다. 5:11 주석 참조. 그리고 ‘집’(히, 바이트)은 이미 6절에서 나온 말로 영구히 거할 수 있는 견고한 구조물을 의미한다. 즉 다시 말하면, 이는 곧 궁궐이나 성전 따위를 의미한다.
내가 … 양을 따르는 데에서 데려다가. 다윗이 하나님께로부터 부르심을 받기 전까지는 아비의 양을 치던 자였음을 상기시켜 준다(삼상 16:11).
주권자. 이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기드’는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선택하신 하나님의 일꾼을 의미한다. 6:21 주석 참조. 따라서 이 말에 포함되어 있는 강한 의미는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이다. 즉 이러한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으로 말미암아 다윗은 양치는 목자에서 이스라엘의 왕이 될 수 있었다.
다시 옮기지 못하게 하며. 여기서 ‘옮기지’란 말은 잘못된 번역이다. 왜냐하면 이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가즈’는 ‘옮긴다’는 의미가 아니라 (두려움으로) ‘떨다’(신 2:25, 시 4:4, 사 32:11)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 절의 바른 해석은 ‘다시는 두려움으로 떨지 않게 하며’이다(Lange, Keil). 즉 이러한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은 이제 신정 국가 이스라엘은 과거 사사 시대의 혼란했던 무정부(無政府) 상태와는 완전히 다른 평화스러운 나라가 될 것이라는 의미이다(11절).
집. 여기에 나오는 집은 앞에서 이미 언급된 집(5, 7절)과는 의미상 큰 차이가 있다. 왜냐하면 앞에서 언급된 집은 다윗이 하나님을 위해 짓고자 했던 성전을 의미하나 여기에서의 집은 오히려 하나님께서 다윗을 위해 지어 주실 집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다윗을 위해 지으시겠다고 약속하신 집은 단순히 다윗이 거할 웅장한 건축물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다윗은 이미 웅장한 백향목 궁(1, 2절, 5:11)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다윗을 위해 세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집은 외형상의 집이 아니라 다음과 같은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 집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1) 성경에서 ‘집’이란 말은 ‘가족’, 곧 부모나 자식이나 친족을 나타내기 위해 쓰여진 용례가 있다(창 7:1, 35:2, 출 2:1, 왕상 11:38, 12:16, 13:2). 따라서 다윗을 위해 집을 세우시겠다는 하나님의 언약은 무엇보다도 그의 온 가정을 복되게 세우시겠다는 내용의 말씀이다. (2) 이 집은 또한 ‘나라’를 상징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 근거로 16절에서 ‘네 집’과 ‘네 나라’가 서로 병행하고 있음을 들 수 있다. 즉 ‘네 집과 네 나라가 영원하리라’는 말씀 속에서 우리는 집이 곧 다윗의 나라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다윗을 위해 집을 세우시겠다는 언약의 말씀은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세우시겠다는 의미이다. (3) 집이란 용어 속에는 ‘다윗의 후손들’이란 개념도 포함되어 있다(12, 16, 19, 26, 29절). 왜냐하면 다윗의 나라가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곧 그의 후손들을 통하여 성취되는 것이기 때문이다(Kaiser).
네 몸에서 날 네 씨. 여기에서 ‘씨’(seed)란 말을 한 가지 의미로만 해석하는 것은 곤란하다. 왜냐하면 본래 다윗 언약의 내용은 다윗 당대와 그 후손, 그리고 영원한 세계까지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씨’의 개념을 우리는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해석해야 한다. (1) 여기에서 ‘씨’는 집합적(collective)인 의미를 가진다. 즉, 이 말은 다윗의 사후(死後 )그의 뒤를 이을 모든 왕들을 집합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왜냐하면 본문에서 이 씨(seed)가 다윗 왕조를 대대로 이어나가면서 견고케 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그 ‘씨’는 곧 다윗의 왕손(王孫)들 모두를 의미할 것이기 때문이다. (2) 이 ‘씨’는 한 자손, 곧 솔로몬을 지칭한다. 왜냐하면 첫째, 이 말은 단수(singular number)이며, 둘째, 본문은 이 씨에 의해 성전이 건축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13절). (3) 또한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한다. 왜냐하면 본 절과 16절에서 이 ‘씨’에 의해 세워질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며 견고한 나라라고 되어 있는데, 이러한 나라를 최종적으로 세우신 이는 오직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눅 1:31-33, 행 2:29-31, 13:22, 23).
매와 …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아버지가 아들에게 체벌(體罰)을 가하면서까지 훈육하듯 하나님께서도 당신 백성들을 징계하면서까지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것을 뜻하는 문학적 표현이다(시 89:32, 잠 3:12, 히 12:6, 7). 한편 하나님께서 다윗의 범과(犯過)한 자손들에게 가하셨던 징계의 손길은 열왕기 군데군데에 언급되어 있다(왕상11:14-40, 왕하 9:27).
앉아서. 이 말은 다윗이 하나님의 궤 앞에서 반드시 앉아서 기도했음을 증명해 주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1) 유대인들은 좀처럼 앉아서 기도하지 않았으며(왕상 8:22, 느 8:4, 9:4), (2) 이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야샤브’도 반드시 ‘앉아 있다’는 뜻이 아니라 ‘머물러 있다, 지체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말은 다윗의 기도 ‘자세’를 묘사하는 말이 아니라 다윗이 시간을 내어 기도한 ‘행위’ 자체를 묘사하고 있는 말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Lange, Wycliffe).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이오며. 다윗은 그의 기도 첫 마디에서 위대하신 여호와 하나님과 비천한 자신을 대조시키고 있다. 이와 같은 그의 대조적인 표현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베푸신 놀라운 약속이 자기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과분한 은혜와 축복임을 고백하고 하나님께 크게 감사하는 마음 자세에서 나온 것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에서 다윗의 기도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과 감사로 시작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창 32:10, 시 8:5, 144:3).
장래의 일. 이에 해당하는 ‘레메라호크’는 ‘미래에 관한 일’이란 뜻이다. 원래 이 말의 기본 뜻은 시간적,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의 법이니이다. 이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조트 토라트 하아담’을 직역하면, ‘이는 인간의 율례입니다’이다. 그러나 이 말이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다음과 같이 해석이 분분하다. (1) ‘토라’를 율례로 보지 않고 ‘교훈’으로 해석하는 견해이다. 따라서 이 견해에 따르면, 이 말은 ‘주 여호와여, 인간이 그 이웃에게 교훈을 하듯이 당신의 원대한 뜻을 깨닫게 하셨나이다’라는 뜻이 된다. 그러나 성경에서 ‘토라’가 교훈이란 의미로 사용된 적이 거의 없다는 점에서 이 견해는 옳지 않다. (2) ‘토라’를 인간의 도리, 또는 관습으로 보는 견해이다. 이 견해에 따르면, 이 말은 ‘주 여호와여 당신은 사람의 도리, 즉 사람이 자기 후손의 장래를 축복하듯 나와 내 가문에 축복을 베푸셨나이다’라는 뜻이 된다(Clericus). (3) 본 절을 ‘이러한 하나님의 언약은 전 인류를 지배할 명령입니다’라고 해석하는 견해이다(Pulpit Commentary, Vulgate). 그러나 이는 전체 문맥과는 약간 동떨어진 주관적인 해석이라는 느낌을 떨칠 수 없다. (4) ‘토라’를 구약 성경에서 대개 그러하듯 하나님의 율례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견해이다. 그럴 경우 여기서의 ‘토라’는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레 19:18, 미 6:8)는 인간 상호간의 규례로 보아야 한다(Keil, Hengstenberg). 따라서 이 견해에 의하면, 본 절은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규례에 따라 한 인간이 이웃에게 친절과 사랑을 베풀어 줌과 같이 주 여호와께서 나에게 극진한 사랑과 친절을 베푸셨나이다’라는 뜻이 된다(Lange). 이상에서 본 절의 전후 문맥과 비교적 일치되는 견해는 (2)와 (4)이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평행 구절인 대상 17:17에 의거할 때 보다 타당성을 지니고 있는 견해는 (4)로 보아야 할 것이다.
땅의 어느 한 나라가 … 같으리이까. 여기서 강조되고 있는 점은 이스라엘의 위대성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위대하게 하신 하나님의 은총이다. 즉, 다윗은 여기에서 그 어떤 나라도 이스라엘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총을 누리지 못하였음을 밝힘으로써 옛부터 지금까지 이스라엘에게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총을 찬송하고 있다.
주의 명성을 내시며.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건져 내시며(출 12장) 대적들의 위협에서부터 보호해 주시는 것과 같은 구속적인 사역을 통하여 당신이 참된 하나님이심을 열방 중에 스스로 증거하신 것을 의미한다(신 4:39, 수 2:11).
말씀하신 대로 행하사. 본 절은 다윗의 간절한 소원(26-29절)이 사적(私的)인 생각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묵시를 통해 보여 주신 하나님의 말씀(4-17절)에 근거한 것임을 보여 준다. 즉, 다윗은 하나님의 궤를 모시고자 했던 그의 생각(1-3절)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그의 소원을 일치시키고 있다. 이는 분명 이제 다윗이 하나님의 언약을 통해 자신의 생각보다 하나님의 생각이 더 깊고 오묘하며 원대하시다는 것(사 55:8, 9)을 깨달은 결과일 것이다.
만군의 여호와. 5:10 주석 참조.
말씀하셨사오니. 이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테다베르’는 기본형이 ‘다바르’로 주어의 능동적인 행동을 강조하는 강의형(Piel) 동사이다. 따라서 이 말이 강조하는 바는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이 언약을 선포하셨다는 사실이다. 이와 같이 다윗이 하나님의 일방적인 언약의 선포를 의미하는 강의형 동사를 사용했다는 사실은 그가 하나님의 주권을 전적으로 인정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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