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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그런즉 - 2:1에서 언급된 '그러므로'라는 접속사처럼 별 의미 없이 다른 화제로 전환하고자 사용된 접속사이다. 자세한 것은 2:1 주석을 참조하라. 3:19-31에서 바울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라 믿음에 의해 의롭게 된다는 사실에 대해 설명하고 이제 본절부터는 이신 칭의의 구체적 실례로 아브라함을 예(例)로 들고 있다.
 육신으로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타사르카'( )는 직역하면 '육신을 따라'이다. 이 말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1) 하나는 '우리 조상'과 연결된 수식어로 해석하는 경우이며 (2) 또 하나는 동사 '얻었다'를 수식하는 부사구로 해석하는 경우이다. 이는 사본에 따라 다소 차이를 두고 있는데 만약 '얻었다'를 뜻하는 헬라어 '휴레케나이'( )가 '아브라암'( , '아브라함')앞에 있는 것으로 인정한다면 '카타 사르카'는 (1)의 의견에 따라 자연적인 혈연 관계를 나타내는 말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반면 '휴레케나이'를 '헤몬'( , '우리') 뒤에 위치시키는 소문자 사본들에 의하여 해석한다면 '카타 사르카'는 (2)번의 의견에 따라 윤리적인 의미, 다시 말해서 '육신의 원리를 따라' 또는 '율법의 행위를 따라'라는 의미로 해석해도 될 것이다. 전자를 주장하는 자는(J. Murray) 바울이 보편적으로 사용했던 '육신'의 개념을 증거로 제시한다. 바울은 '육신'이라는 말을 '죄의 지배를 받고 있는 인간의 본성'과 동의어로 사용하기도 하였으며(8:4, 5, 12;고전 1:26) 때로는 '육신으로'라는 표현을 '썩어질 육체의 소욕과 충동에 의하여'라는 경멸적인 의도로 사용하기도 하였으나 순수한 자연적 출생 관계를 나타내는 의미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증거할 때(1:3) 또는 다른 사람들을 육신적인 형제 관계로 표시할 때 등이다(9:3;고전 10:18). 이와 같은 의미에서 '육신'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면 바울이 '우리의 조상'이라고 부르면서 혈연적인 관계를 나타내는 '육신'이라는 말을 추가한 것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전자의 경우를 따를 때에는 '우리'라는 말이 유대인만을 칭하는 말인가 ? 라는 문제를 해결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바울은 본서에서 '우리'라는 말을 사용할 때에 보통 모든 이방인들까지 포함하는 포괄적인 의미로 사용하기 때문이다(3:31). 한편 후자의 견해를 지지하는 자들(Lenski, Calvin, Meyer, Godet, Hodge)은 '육신으로'라는 말을 '얻었다'라는 동사에 연결시킴으로써 '육신'을 '행위' 또는 '율법'의 의미로 취급한다. 이 경우 본절의 뜻은 '아브라함이 육신의 행위로 무엇을 얻었는가 ?' 라는 의문문 형태가 된다. 본 구절의 앞 뒤의 문맥으로 보면 후자의 견해가 더 타당하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에게는 행위로 말미암아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2절;3:27) 사실이므로 본절의 '육신으로'라는 의미는 유
 얻었다 하리요 - '얻었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휴레케나이'( )는 완료형으로 '발견했다'(have found), '얻었다', '만났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문제는 이 단어가 어떤 사본에서는 생략되어 있다는 점이다. 혹자는 이 단어의 삽입에 의문을 제기하여 생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Lightfoot, Murray). 이 견해를 취할 경우 '육신으로'는 자연스럽게 '우리 조상'과 연결된다. 그리고 '우리'란 대명사는 바울과 유대인 특히 로마에 있는 유대인이 된다. 그러나 '우리'가 유대인을 지칭하는 것이 아님을 이미 3:9에서 밝힌 바 있다. 또한 2절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이란 구절은 '얻었다'는 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본절에서 '얻었다'라는 말이 첨가되어 있어야 바울의 의도가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4:2
 아브라함이 - 바울이 아브라함을 설명한 것은 유대주의자들도 아브라함의 의로움을 인정하고 있으며 또한 선민의 조상으로 아바라함을 높이고 있기 때문이다. 유대교 랍비들의 문헌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3살부터 하나님을 섬기기 시작하였으며 할례와 율법을 예비적으로 수행함으로써 의롭다함을 받았다고 기록한다. 그들 역시 창 15:6의 말씀을 인용하여 아브라함의 공로를 증명하려고 했으며 특히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공로'에 의하여 후사(後嗣)가 되어 의롭다함을 받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Hendriksen). 그 당시의 유대교적 가르침보다 성경을 중요시한 바울은 '나는 너를 열방의 조상으로 세웠다'라는 말씀에 근거하여 이방인을 포함한 모든 믿는 자들의 조상으로서 아브라함을 칭의를 받는 신앙의 본질적인 모범으로 인정함으로써 모든 시대의 사람들이 따라야할 신앙의 본질적인 통일성을 추적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의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완성된 구원을 돌이켜 보는 믿음 속에 있는 반면 아브라함은 장차 되어질 일들에 대하여 믿음으로 기다렸다는 것에서 서로의 차이를 발견할 수는 있으나 본질적인 '의'의 개념에 있어서 양자는 동일한 신앙을 소유하고 있다.
 행위로써 - 아브라함 시대에는 아직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시지 않았으나 바울은 율법의 원리 곧 행함의 원리를 아브라함 시대까지 적용시키고 있다. 이로써 바울은 (1) 믿음의 원리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 이미 율법이 주어지기 이전부터 시작되었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2) 행위의 원리가 단순히 모세에 의해서 주어진 율법에만 국한된 것이 아님을 암시해 주고 있다. 만일...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 바울은 '에이'( , '만일')에 부정 과거 직설법 수동태 동사 '에디카이오데'( )를 연결시킴으로 하나의 조건문을 만들었다. 이 조건문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는 두 가지로 나뉜다. (1) 혹자는 논리적이며 형식적인 가정으로서 현실적이며 실재적인 근거에 있어서는 '없느니라'는 부정(不定)을 유도하는 조건문으로 인정하는 반면, (2) 혹자는 바울이 부정 과거 가정법을 사용하여 단회적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조건문으로 해석한다(Lenski). 다시 말해서 아브라함은 '행위로'( , 여스 에르곤) 의롭다 함을 받았으므로 일차적으로는 자랑할 것이 있다는 뜻이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치려 하였던 구체적인 행위의 결과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인정을 받았다는 것이다. 렌스키(Lenski)는 바울의 주장이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을(3:19-31에서 말한 것과) 증명하기 위해 '여스 에르곤'과 '여스 에르곤 노무'( , '율법의 행위')를 서로 구별하려 한다. 신앙의 행위로서 '행위'는 칭의의 근거가 되지만 '율법의 행위'는 칭의의 근거가 되지 못한다는 주장이다. 이런 의미에서 본절의 '행위'는 유대주의자들의 거짓 자랑과 구분이 되는 것으로서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아 생긴 것이 아니라 순수한 신앙으로 말미암아 나오는 '행위'인 바, 바울이 자신을 자랑할 수 있었던 것(고후 11;21;12:12)과 같은 성격의 행위라고 한다. 그러나 만약 이 주장에 따른다면 우리는 자칫 믿음을 공로로 인정하는 유대 랍비적인 교훈에 빠지게 되는 오류를 범할 수도 있다(1절 주석 참조). 칭의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사역에는 신앙이라는 인간의 공로조차 아무 효력을 발생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한편 전자를 주장하는 자는(J. Murray)아브라함이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면 자랑할 근거가 있다는 형식적인 논리를 인정하나 그 논리가 실제로 아브라함에게 적용될 수 있느냐하는 문제는 단호하게 거부한다. 왜냐하면 본절 하반절은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없다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브라하미 자랑할 것이 없다라는 구절은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결정적인 근거가 된다. 바울은 가정적인 추론 속에서 아브라함이 행위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보다 확실하게는 가정문을 반증(反證)하기 위해 다음절에서 창 15:6을 인용하고 있다.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 본문에는 누구에게 자랑하는 것인지 그 자랑의 대상이 언급되어 있지 않다. 이런 이유로 혹자는 '자랑할 것'이란 말을 '영광받을만한 것'으로 대치할 것을 주장한다(Meyer). 그렇지만 그렇게 의도적으로 본문의 의미를 바꾼다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의 주장대로라면 영광을 주는 대상이 하나님이 되어야 하는데, 곧바로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는 구절이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문 전체가 다음과 같은 의미로 수정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하나님 앞에서도 자랑할 것이 있겠으나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없다.

=====4: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 일반적으로 문어체에서는 '기록된 바'( , 카도스 게그라프타이)란 용어를 사용하여 구약성경을 인용한다(3:10). 본절에서 바울이 의문문의 형식으로 구약성경을 인용한 것은 구어체적(口語體的)인 것으로 독자들과 보다 밀접한 관계에서 지금 논하고 있는 주제에 대하여 심사숙고해 보기 의함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 본 구절은 창 15:6을 인용한 것이다. 혹자는 본절을 약 2;21과 배치되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Luther). 그런데 엄격한 의미에서 약 2:21은 창 26:5과 관계된 것으로 보아야 하고, 야고보 사도는 믿음 자체를 무시한 것이 아니라, '믿음'에 따르는 삶(행위)에 강조점을 두고 있음을 상기해야 한다. 아무튼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은 것은 창 15:5에서 하나님을 통해 선포된 약속에 대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인격과 능력에 대한 신뢰이다. 아브라함 자신은 스스로의 능력으로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을 이룰 수 없다. 오직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약속을 성취시키실 뿐이며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신뢰를 두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에게 이루어진 약속의 성취는 그 자신의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그의 믿음을 통해서 값없이 주어진 것이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바 되었느니라 - 믿음과 행위의 대립적 관계를 설명함에 있어서 구약에 기록된 또 하나의 구절을 극복해야 한다. 시편 106:31은 비느하스의 열정적인 행위로 인하여 하나님이 '저에게 의로 정하였으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다 여기심을 받았으며 비스하스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의롭다 여기심을 받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비스하스가 의롭게 여김을 받았다는 것은 경건치 아니한 자들도 의롭게 여기시는 하나님의 칭의와 구별이 되어야 한다. 비느하스의 행위는 앞에서 살펴본대로 믿음의 한 열매로서 주어진 결과로 보아야 한다(J. Murray). 경건치 아니한 자, 또는 할례받지 아니한 자들의 칭의를 논하는 문제에 있어서 '의롭다 여기시는 것'과 '믿음의 선한 열매로 인한 결과'를 구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한편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엘로기스데'( )는 '로기조마이'( )의 부정과거 수동태로서 (1) 의롭다 여김을 받은 수동적 행위를 의미하며 (2) '의롭게 만들었다'라는 의미가 아니라 단지 '그렇게 평가해 주었다'라는 의미를 강조한다. 다시 말해서 아브라함이 의롭다 여김을 받을 정도로 인격(person)에 변화가 있었다는 뜻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과의 신분적 관계에 있어서 새로운 지위를 부여받았다는 뜻이다.

=====4:4
 일하는 자에게는 - 본 구절에 대해 혹자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이 마땅히 열심으로 추구해야 할 선행을 행하는 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행적을 내세워 자기 공로를 자랑하려는 사람을 의미한다고 설명하고 있다(Calvin). 본절 전체가 일상적인 고용 관계에 대한 것을 비유적으로 진술하고 있는 점에서는 1차적으로 삶을 위해 일하는 일꾼을 의미하며, 2차적으로는 다음절에 기록된 '일을 한 것이 없는 자'와 '믿는 자' 등과 대조를 이루는 개념으로서 단지 행함으로 의롭게 되려는 자들을 의미한다.
 그 삯을 - 일꾼이 요구하는 '삯'( , 미스도스)은 문자적으로 일해준 것에 대한 품삯을 의미하지만(눅 10:7;딤전 5:18) 은유적으로는 '보상'(reward)을 뜻하는 말로 사용된다고 한다. 이외에도 신약에는 삯을 뜻하는 말로 '와소니온'( )이라는 단어가 있었는데 이는 눅 3:14에 병사의 급료라는 뜻으로 쓰였으며 본서에서는 죄의 '삯'(6:23)이라는 의미로 쓰였다. 일꾼이 그의 일한 대가를 요구하는 것은 정당한 일이며 당연한 요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본절에서 바울이 이 정당한 요구를 '빚'( , 오페일레마)이라는 개념과 동일시하고 있는 것은 매우 특이한 용법이다.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 '빚'( , 오페일레마)은 '삯'이라는 말과 동의어로 쓰였으나 '은혜'( , 카리스)와는 대조적인 뜻으로 사용되었다. '빚'은 히브리어로 '맛솨아'( )로서 주로 모세의 율법에 나타나는 바, 채무 관계를 지적하는 데 쓰여졌다(출 22:25). 무엇을 빌린 자는 반드시 갚아야 했으며 만일 채무자가 정당하게 갚지 못했을 경우 채권자는 권리를 주장할 수 있었고 채무자로부터 생계 수단이 되는 어떠한 것들을 전당물로 잡을 수 있었다(신 24:6). 신약에서 '오페일레마'는 구약에서와 같이 사업적인 용어로 쓰이기도 하였으며(눅 7:41) 특히 비유 속에서는 채무자를 용서하거나 또는 죄인으로 취급할 때 쓰였다. 채무자는 빚을 다 갚기 전에는 옥에 갇혀 있어야 했으며(눅 12:57-59) 또한 송사(訟事)하는 자에 의하여 재판관에게 고발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본절에서 일하는 자가 삯을 요구하는 것은 마치 채권자가 송사하는 것과 같이 마땅히 받아야 할 돈을 요구하는 것으로서 빚을 탕감받은 자들이 탕감받은 것을 은혜로 여기는 것과는 다르다. 따라서 그들에게 있어서 '일'은 자랑이며 동시에 정당한 자기 평가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바울은 일하는 자들의 정당한 삯을 언급함으로써 다음절에 나오는 일하지 아니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용서와 칭의(稱義)의 위대함을 강조하고 있다. 행함으로 의롭게 되려는 자에게 있어서 행위의 결과는 일꾼이 일한 것에 상응한 대가를 받는 것과 똑같은 이치이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설 만한 자리가 없다. 오로지 행위의 주체인 자신의 자랑만이 존재할 뿐이다.

=====4:5
 일을 아니할지라도 - 삯을 위해서 일하지 않은 사람, 즉 행함으로 의롭게 되려는 자가 아니라 의를 얻기 위해 아무 수고도 하지 않은 사람을 가리킨다. 바울이 본절에서 의를 얻기 위해 아무 행위도 하지 않고서 의롭게 되는 것에 대하여 계속 진술했듯이 오직 하나님은 행위로써가 아니라 '그의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 하신다. 4절과 비교해 볼 때, 이 믿음은 곧 하나님의 은혜로운 활동과 관련된다(엡 2:8).
 경건치 아니한 자 - 이는 행함으로 의롭게 되려 애쓰지 않는 자와 동의어지만 죄인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으므로 그보다 더욱 강한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이 용어는 하나님의 은혜의 깊이와 넓이를 보여 주고 있다(Murray).
 의롭다 하시는 - '의로 여기시나니'( , 톤 디카이운타)라는 현재 분사형 포현은 그 시제에 있어서 '믿는 자'( , 피스튜온티)와 일치하는 것으로서 의롭다 여기시는 것이 철저하게 믿는 것과 연결되어 있음을 강조한다. 경건치 아니한 자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죄인에게도 임한다는 구원의 진리를 적용한 것으로서 아브라함에게 적용되었던 원리와도 일치한다.

=====4:6
 일한 것이 없이 - 이 말은 원문상으로 '행위와 상관없이'( , 코리스 에르곤)라는 의미를 지닌다(without works, KJV). 바울이 거듭 강조하여 이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것이 인간의 행위 내지 노력과 아무 상관없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 '행복'에 해당하는 헬라어 '마카리스몬' ( )은 '축복'이나 '행복'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특별히 이 단어는 단순한 '축복'이나 '행복'만을 의미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총'에 강조점이 있다. 그래서 혹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복되다고 선포되는 것'이라고 의역하기도 했다(Black). 이 해석을 따를 때, 본절은 '하나님으로부터 사람이 받은 바 축복에 대한 다윗이 선포하기를'로 번역될 수 있다. 따라서 '사람이 받은 축복'이라는 구절은 그 속에 이미 하나님의 은총을 내포하며 동시에 믿음으로 참여한 모든 자들에게 임할 동일한 축복을 선언하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4:7
 그 불법...복이 있고 - '불법'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하이 아노미아이'( )이다. 이 말은 '율법'( , 노모스)이란 말에 부정 접두어 '아' ( )가 첨가되어 이루어진 파생어이다. 포괄적으로는 법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을 의미하나 보다 정확하게는 '율법을 어긴 행위'를 가리킨다. 그리고 '율법을 어긴 행위'는 이스라엘 사회에서 죄로 규정된다. 그렇기 때문에 본절에서 '불법'과 '죄'는 동의어의 반복으로 보아야 한다. 뿐만 아니라 '사하심을 받고'( , 아페데산)라는 동사와 '가리우심을 받고'( , 에페칼뤼프데산)라는 동사 역시도 동의어의 반복이다. 일반적으로 히브리 시문학에서는 평행 대구법(parallelism)을 사용하여 앞절과 뒷절이 동일한 의미를 가지고 있으면서 뜻을 강조하고 그 내용을 보다 명확하게 구체화시키곤 하였다(시 6:1). 한편 '아페데산'과 '에페갈뤼프데산'은 둘다 부정 과거 수동태로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능동적인 사역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축복의 상태를 나타낸다. 자신의 죄를 용서함 받거나 가리움 받는 것은 이미 과거에 성취되었으므로 그에게 남은 것을 성취된 구원 속에서 누려야 할 축복 외에 아무것도 없다.

=====4:8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 - 본절은 7절의 중복으로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면서 하나님의 사유(私有)하시는 은혜를 보다 강조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앞절에서는 '불법이 사함을 받는 것', '죄가 가리움을 받는 것' 정도로 언급했으나, 본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죄인으로 규정되는 '죄'조차 없는 것으로 인정한다는 사실이 강조되었다. 바울이 이신 칭의에 대해 설명할 때에 본 구절은 결정적인 논리의 뒷받침이 되고 있다. 5절에서는 하나님께서 '행위와는 상관없이' 그 사람의 믿음을 의로 여기신다고 할 때 논리상 믿음이 의로 여겨지는 중간 과정이 생략되었다. 그 논리의 틈을 본절이 메우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믿는 사람이 의로 여김을 받기 위해서는 실제로 그 사람이 행한 죄악이 어떻게 여겨지게 되는 가에 대해 설명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7절과 본절의 인용 구절에 분명히 언급되어 있기 때문이다.

=====4:9
 할례자에게뇨 혹 무할례자에게도뇨 - 바울은 죄인을 의인으로 간주하는 하나님의 축복의 범위에 대해서 진술하고 있다. 지금 예로 들은 아브라함은 유대인의 조상이므로 무할례자된 이방인이 이 축복에서 제외될 수 있다는 문제가 유대인에 의해 제기될 수 있다. 그래서 행위에 관계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축복이 할례자인 유대인에게만 주어지는 것인가 아니면 이방인에게도 동등하게 주어지는 것인가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바울은 본절의 질문을 제기했다. 할례는 율법과 더불어 유대인들에게 있어 하나님의 선민(選民)임을 보증해 주는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그래서 바울은 본절에서 할례의 문제를 언급한 것이다. 바울 논지의 핵심은 비록 할례가 유대인들에게 중요시되고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베푸시는 칭의의 축복에 할례가 전혀 중요하게 작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J. Murray). 바울은 이러한 논지를 본절의 질문을 제기함으로 더욱 확고히 하고자 했던 것이다.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 3절에서 언급했던 구절이 다시 반복되고 있다. 그러나 이 구절은 3절에서와 같이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을 재차 강조하기 위한 구절이 아니다. 이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의로 여겨지게 되었던 시점으로 화제를 전환하기 위하여 반복되는 것이다.

=====4:10
 이를 어떻게 여기셨느뇨 - 이 구절의 헬라어 본문은 '포스 엘로기스 데'( )인데, 이를 직역하면 '그것이 어떻게 여겨졌느뇨 ?'가 된다. 다시 말해 '어떻게 해서 그의 믿음이 의로 여겨졌느뇨 ?'라는 질문이 된다. 그런데 이에 대한 대답이 의롭다고 여겨지게 된 시점(時點)에 관한 것이므로 '어떻게'보다는 '언제'라고 번역하는 편이 적절하다.
 할례 시가 아니라 무할례 시니라 - 아브라함의 믿음이 의롭다고 여겨진 것은 할례 의식을 한 때로부터 20여년 전이었다(창 15:6;17:23, 24). 이 대답은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할례와 전혀 상관이 없다는 바울의 논리를 뒷받침해 주는 결정적인 단서이다. 행 15:1에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는 말씀이 언급되어 있듯이 초대 교회 시대에 유대인들은 예수를 믿으면서도 자기들이 받은 바 우선권을 포기하지 않았다. 또한 예로 베드로는 이방인들(무할례자들)과 함께 애찬을 나누다가 할례자들이 들어오자 그들을 두려워하여 슬그머니 그 자리를 빠져나갔다(갈 2:12). 이처럼 초대 교회 당시는 할례자와 무할례자에 대하여 구별하는 관습이 남아 있었고, 그로 인해 복음의 본질이 변질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바울이 아브라함을 예로 들어 하나님의 의(義)의 전가(轉嫁)가 보편성을 지닌다는 점을 역설하고 있는 것은 그 당시 팽배되어 있는 그러한 분위기에 대하여 명백한 복음적인 해결책을 보여 주기 위함이었다.

=====4:11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 본절에서 바울은 그동안 문제시되었던 '할례'의 의미에 대해서 진술한다. 유대인들은 할례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되는 유일한 증표로 믿고 있었으나, 바울은 그들의 신학이 잘못되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창17:10, 11에는 할례가 '언약의 표징'( , 세메이온 디아데케스)으로 언급되어 있다. '언약의 표징'이라는 것은 언약을 맺은 것에 대한 증거로 나타내 보이는 표시(sign)이다. 그리고 구약 시대에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간에 언약을 맺는 것은 쌍무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것이었다(Robertson). 그러면서도 그 언약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 대하여 취하신 은혜와 사랑의 증표이며 약속이었다. 따라서 할례가 '언약의 표징'이라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할례 이전에 베푸신 은혜와 사랑에 대한 증거이며, 앞으로도 그렇게 하실 것에 대한 약속이라는 의미를 함축한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와 같이 할례에 내포된 은혜의 비밀을 간과하고 겉모양만 취하여 그것이 매우 귀중한 것처럼 자랑하였다.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 '인'( , 스프라기스)은 신약에서 책을 봉(封)하거나(계 5:1), 도장 찍는 것과 같은 증표(딤후 2:19;계 7:2) 등의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주로 모든 일을 결론짓는 마무리를 나타낼 때나 또한 어떠한 것을 그대로 보존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예수의 무덤을 봉인하였다는 것도 그의 죽음이 확인되었다는 뜻이다. 예수의 부활이 확실한 것은 세상이 인봉을 통하여 그의 죽음을 확고하게 증명했기 때문이다(마 27:65). 이와 같이 인(印)이라는 것은 어떤 사건에 대한 진실성을 최종적으로 확인하는 수단으로 쓰였다. 특히 본절에서는 이미 무할례시의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실을 확인하는 외적 보증의 의미로 이 용어가 쓰여졌다. 다시 말해서 할례는 의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며 또한 의의 수단도 아니며 단지 이미 의롭게 된 것을 입증하는 표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늘날 성도들에게 있어서 구원의 표적은 성령의 오심(엡 1:13;4:30)과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또한 함께 살아났다는 사실을 예표하는 세례라고 할 수 있다.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 바르트(K. Barth)는 본절을 주석하면서 원(元)역사계와 역사계를 구분하여 설명하고자 시도했다. 즉 아브라함이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원역사적인 사실의 믿음의 의가 역사계에 나타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 있어서 역사적인 사건은 원역사적인 것 속에 파묻히게 된다. 이러한 주장은 암시적으로 율법 폐기론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율법은 원역사적인 하나님의 의가 현 역사 속에서 단순히 나타나진 것에 불과할 뿐 그 이상의 의미도 갖지 않는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울은 율법이 의의 전달 내지 계시로서 충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강조했다(3:31). 성도의 신앙은 히 11:1에 언급된 바와 같이 원역사적인 것과 역사적인 실재가 동시적으로 의미를 지닐 때 올바른 길로 나아가게 된다. 예수의 천국 비유에서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도 원역사적인 실재임과 동시에 현 역사적인 실재이다(Ridderbos). 할례는 무할례시에 주어진 믿음의 의(원역사적인 것)가 현 역사 속에서 공표되는 의미를 지닌다. 그런 연고로 구약 시대에는 할례가 의미있는 의식이었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는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으므로 그 표는 단지 그리스도를 부각시키고 확증시켜 주는 역할을 담당할 뿐이다. 따라서 할례 자체가 전혀 필요없는 것이 아니라 율법과 같이 그리스도 중심의 예언적 사건으로 그 의미는 항상 남아 있게 된다.

=====4:12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 아브라함이 할례자의 조상이 될 수 있는 것은 (1) 그가 처음으로 할례를 받아 혈통으로 자기에게서 난 자들에게 그 할례 의식을 전했으며, (2) 그 할례를 전할 때 할례만이 아니라 자기가 무할례시에 받았던 '믿음의 의'에 대한 것도 동시에 전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11절만 떼어서 생각하면 아브라함은 단지 무할례자의 조상이 되어 할례받은 유대인의 조상은 되지 않는다는 오해가 발생될 수 있다. 그래서 본절에서 바울은 아브라함이 할례자의 조상도 되는 이유를 설명하게 된 것이다.
 무할례 시에 가졌던 - 본절에서는 '할례받을 자들'과 '믿음의 자취를 좇는 자들'을 동일 선상에 놓고 있다. 할례받은 유대인이라 할지라도 믿음없는 자는 아브라함의 후사가 될 수 없듯이 아브라함의 믿음의 자취를 따르지 않는 이방인 무할례자들도 당연히 아브라함의 후사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무할례 시'가 아니라 아브라함이 가졌던 '믿음의 인'이다. 따라서 무할례든 할례이든 그것이 결코 구원에 있어서 유리하거나 불리한 조건이 될 수 없다. 우리가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1)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았다는 사실이며 (2) 또한 그 할례가 믿음으로 받았던 의를 '인치는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이 두 가지는 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두에게 중요하게 받아들여져야 한다(J. Murray). 바울이 할례 자체를 일방적으로 매도하지 않았다는 것은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한 사실속에 잘 나타나며(행 16:3) 또한 할례를 믿음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은 디도에게 할례를 행하지 아니한 사건 속에 잘 나타난다(갈 2:3).
 믿음의 자취를 좇는 자들 - 이 부류에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구별없이 다 포함된다. '자취'에 해당하는 헬라어 '이크네신'( )은 신약 성경에서 '보조'(步調;고후 12:18) 또는 '본이 될 만한 모범'(벧전 2:21) 등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으며 갈라디아서에서는 예수의 '흔적'이라는 말로 번역되기도 하였다(갈 6:17). 본절에서 '믿음의 자취'는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살았던 삶의 흔적을 의미한다. 예수께서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할 것이어늘"(요 8:39)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 여기서 '아브라함의 행사를 하라'는 것은 '아브라함이 걸었던 그 신앙의 노선을 따라가라'는 의미이다. 이 가르침은 혈통상 아브라함의 자손이 됨을 시사한다. 한편 '좇는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토이케오'( )는 '대오(隊伍)를 이루어' 또는 '줄을 맞추어 행진한다'라는 뜻을 가진 군사 용어로서 '일관성 있는 행함'의 의미로 번역되었다(갈 5:25;빌 3:16). 여기서는 아브라함의 발자취를 따르는 대열에서 낙오되지 않고 일관성 있게 전진하는 것을 의미한다.

=====4:13
 세상의 후사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 - 이 약속은 창 17:4-8에 언급되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은 율법보다 430년 앞서 주어졌으며, 후에 생긴 율법이 이미 주어진 언약을 취소할 수 없었다(갈 3:17).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은 율법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약속은 율법에 선행하며, 약속의 원리를 따르는 자는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이 약속의 원리는 바울이 본절에서 진술하고 있는 바대로 '믿음의 의'뿐이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후에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던 것이지 율법에 근거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편 '세상의 후사'란 일차적으로 창 17:8의 말씀대로 가나안 땅을 그의 후손이 유업으로 받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보다 포괄적인 의미로는 창 17:4에 언급된 대로 아브라함은 '열국의 아비'이므로, 그의 신앙의 자취를 좇는 모든 민족이 후사가 되며 유업을 이을 자가 된다(갈 3:29). 따라서 본절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인하여 모든 땅의 족속들이 복을 받으리라는 보증'(Hendriksen)과 관련된 것임이 분명하다.

=====4:14
속된 자들'을 의미하며 바울의 또다른 표현에 의하면 '율법의 종노릇하는 자들'로서 종의 멍에를 멘 자들을 뜻한다. 이들은 하나님의 약속도 오직 율법의 행위를 통해서만 성취된다고 믿고 있는 자들이다. 신약 시대에 이르러 펠라기우스(Pelagius)와 그의 추종자들, 그리고 로마 카톨릭 교회(Roman Chatholic Church)는 하나님의 약속이 선행을 통해서 성취된다고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헛되이 만들었다. 이런 자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질시키는 자들이며(갈 1:7), 이렇게 전하는 자들에게 바울은 저주를 선언하고 있다(갈 1:8, 9). 만일...
후사이면 - '후사'를 뜻하는 '클레로노모스'( )는 '상속자'라는 의미로서 아브라함에게 약속되어진 것을 물려받을 자를 뜻한다. 구약의 개념으로 상속자가 얻을 것은 (1) 약속의 땅 가나안(창 12:7;13:14, 15), (2) 믿음으로 자손된 이방인들을 포함하는 후손을 얻게 될 하나님의 축복, (3) 한 후손 메시야에 의한 세계 통치를 의미한다.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위에 열거한 세 가지 조건의 상속자라면 믿음은 의미를 잃게 되고 약속된 언약은 가치없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실제로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이 자기들의 아버지이기 때문에 자기들이 세상의 상속자라는 주장을 한다(요 8:39). 한편 본절에 대하여 바울은 율법과 믿음의 대립적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먼저 약속으로 시작된 구원의 역사가 믿음에 의하여 성취되었다는 것을 증명할 것인데 유대인들은 이를 두고 바울이 시작과 성취 중간에 들어온 율법의 무용성(無用性)을 말한 것이라고 한다(5:20). 그러나 바울이 의도한 요점은 율법 무용론이 아니다. 다만 바울이 말한 것은 중간에 끼어 들어온 율법이 앞서 있었던 약속을 변경시킬 수 없으며 율법에 의하여 후사가 결정될 수 없다는 것이다.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폐하여졌느니라 - '헛것이 되고'( , 케케노타이)라는 것은 무가치한 것이 되었다는 의미보다는 원문상 '그 속의 내용이 없어졌다'라는 뜻에 더 가깝다. 다시 말해서 믿음이라는 것이 무가치한 것이 되었다는 의미보다는 믿음이 포함하고 있는 내용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허망한 것이 되고 말 것이라는 의미이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무 내용 없는 것으로 변해 버린다면 약속도 더 이상 설 자리를 잃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와 연결되지 않는 약속은 효력을 발생할 수 없게 될 것이며( , 카테르게타이, '폐하여졌다') 또한 법적 신실성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잃게 될 것이다. 만약 율법의 행위로 약속이 보증된다면 율법 이전에 이미 보증받았던 아브라함이 약속은 무가치한 것이 되고 그 약속에 의하여 성취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 십자가를 좇는 모든 믿음은 오히려 율법의 종이 되고 말 것이다. 또한 율법으로만 약속이 보증되고 의롭다 여김을 받을 수 있다면 이스라엘의 신앙은 여타의 윤리 종교와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4:15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 율법은 행위의 완전함을 요구한다. 그러나 인간은 완전해질 수 없는 죄인에 불과하다. 이에 대한 율법은 인간을 정죄하고 저주를 선포한다(신 28:58ff.). 따라서 인간 편에서 볼 때 율법은 구원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정죄와 저주의 근거로서의 기능만을 가진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을 받은 모세의 직분을 '정죄(定罪)의 직분'(고후 3:9)이라고 진술했으며,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심은 '율법의 저주'를 담당한 것이라고 선포했다(갈 3:13). 이런 의미에서 율법은 인간들을 위해 의를 이룰 수 없으며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시킬 수 없다.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 - 쉬운 예로 어느 나라든지 그 나라의 법이 없다면 그 나라에 사는 백성은 아무런 범죄자가 되지 않는다. 오직 범죄자가 범죄자로 성립될 수 있는 것은 그 나라의 법률에 따라서만 가능하다. 이처럼 법률이 있음으로써 범법자는 죄인으로 정죄받고 심판을 받는다. 율법이 주어지기 전에 살았던 아브라함은 율법에 따른 정죄를 받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믿음의 원리에 따라서만 살았다. 또한 노아는 아브라함처럼 할례에 대한 규례도 받지 않고 살았던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의인'으로 인정되었다(창 6:9). 그가 의인으로 또한 완전한 자로 칭함을 받은 것은 율법적 판단에 따른 것이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 당시 사람들이 하나님께 정죄를 받은 것(창 6:5)은 율법적 판단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불신앙 때문이었다. 그런 이유로 율법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믿음'이 중요한 것이다.

=====4:16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 '후사가 되리라'는 약속은 은혜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취되었다. '믿으으로'( , 에크 피스테오스)라는 말은 '율법을 통해서'( , 디아 노무)라는 개념과 반대적인 의미이다. 특히 바울에게 있어서 '믿음으로'라는 말은 약속이라는 개념과 절대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서 약속된 그리스도를 포함하는 포괄적인 개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원문이 '수단과 방법'을 뜻하는 전치사 '디아'( )를 사용하지 않고 '에크'( )를 사용한 것도 믿음이라는 것을 수단과 방법적인 것으로 전락시킬 수는 없기 때문이다. 믿음은 약속이 내용이며 동시에 약속 그 자체이다. 따라서 믿음은 약속이 성취된 곳에 나타나는 결과이며 동시에 약속이 하나님에 의하여 성취되었음을 나타내는 증거이다. 본절에서는 이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표현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약속이 은혜로 말미암아 성취되도록 하려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라는 주장이다. 따라서 본절에서 보다 강조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은혜'라는 개념이다. 믿음에 의하여 은혜가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은혜에 의하여 믿음이 좌우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1) 믿는 자로 하여금 믿음의 의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하며 (2) 신앙의 확실성을 갖게 하며 (3) 궁극적으로 하나님 자신의 영광과 신실하심을 선포하심으로써 믿는 자들의 의를 성취하도록 하는 방편이며, 또한 궁극적인 의의 보증이다.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 율법은 진노를 이루는 것이기에 율법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약속이 보증될 수 없다(15절). 하나님의 약속이 보증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만이 유효하며, 이 하나님의 은혜는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따라서 믿음과 하나님의 은혜만이 하나님의 약속을 확증하고 보증해 준다.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니 - 바울은 '그 모든 후손'이 누구인지를 설명하기를 '율법에 속한 자'와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라고 했다. 통상적으로 '율법에 속한 자'는 단순히 유대인을 총칭하는 의미로 사용된다(14절). 이런 사실 때문에 헨드릭슨(Hendriksen)은 '율법에 속한 자'가 단지 '유대인'만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전반부에 언급된 '그 모든 후손' 곧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약속을 보증받은 '그 모든 후손'에는 분명히 '믿지 않는 유대인'은 배제되어 있다. 따라서 '율법에 속한 자'는 율법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원리를 따르는 '유대인'을 의미하며, 그리고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는 믿음의 원리를 따르는 '이방인'을 가리킨다(12절 주석 참조). 이에 대해서는 곧이어 언급되는 하반절에 의해 더욱 지지를 받는다.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 바울이 '우리'라고 표현한 것은 믿음 안에 있는 '신앙의 공동체'에 대한 것이다. 이 신앙의 공동체에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구별없이 오직 믿음의 원리를 따르는 모든 족속이 포함된다. 지금 바울이 논하고 있는 것은 혈통적인 조상이 아니라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에 대한 것이다. 14절에서 바울은 혈통적으로만 '율법에 속한 자들'은 후사가 될 수없다고 선포했다. 그러므로 본절에서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모실 수 있는 후사는 믿음의 원리를 따르는 자들뿐이다.

=====4:17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바울이 여기서 창 17:5의 말씀을 인용한 것은 아브라함이 혈통과 관계없이 모든 사람의 조상이 되는 이유에 대한 성경적인 증거를 위한 것이다. '많은 민족'은 문자적으로 '혈연 공동체'이면서 동시에 영적으로 '믿음의 원리를 좇는 모든 사람들'을 의미한다. 여기서 '모든 믿는 자들의 새로운 공동체'는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둔 이유로 인하여 아브라함의 후사에게 주어진 특권과 유익을 함께 소유하는 공동체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모든 사람의 조상이 됨으로 말미암아 인종적 보편성이 성취되었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우심을 받았다는 표현은 '무할례자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라는 표현과 '할례자의 조상'이란 표현을 포괄하는 보다 광범위한 표현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들이 차별없는 동등한 부르심을 받았음을 시사하며 또한 세계 도처의 모든 민족들이 아브라함의 믿음의 자취를 따름으로 후사가 될 수 있다는 개연성을 강조한다(J. Murray).
 그의 믿은 바 하나님 - 바울은 아브라함이 믿었던 하나님을 정의함으로써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관(神觀)을 정의하며 동시에 모든 믿는 자들의 신관을 정의한다. 이는 두 가지의 사실을 전제로 하는데, (1) 창조주 하나님으로서 그분은 모든 사람들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것이며 (2)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는(16절) 사실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정의한 후에 그 하나님께서 인정하고 확고히 하신 '아브라함의 조상됨'을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아브라함을 모든 사람의 조상으로 삼으신 하나님 곧 예수를 죽인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을 믿는 자는 누구든지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죽은 자를 살리시며 - 이 구절은 살아 역동하는 하나님의 속성을 말해주며 또한 생명을 부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고 있다(엡 1:20). 본절에서 그 의미는 크게 두 가지를 포함한다. (1) 이삭의 출생이며 (2)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이다. 바울은 아브라함과 사라가 자식을 낳지 못하는 상태에 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후손에 대한 약속을 저버리지 아니하고 믿음으로 끝가지 기다렸던 역사적 사건을 상기하면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유추하고 있다. 아브라함은 이삭의 출생을 기다리며 장차 있을 메시야의 세계와 그의 승리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Lenski, J. Murray, E.F. Harrison). 사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이'라는 표현은 유대인들이 흔히 부르는 하나님에 대한 일반적인 표현이었으나 바울은 유대인 뿐만 아니라 모든 믿는 자들에게 적용함으로써(24절)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셨다는 것과 또한 그것을 믿는 자들을 의로 여기신다는 두 가지의 핵심적 진리를 동시에 증거하였다.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 - 이 구절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창조주로서의 특성을 묘사한 것이다. 하나님은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들 수 있는 분이시며(마 3:9;눅 3:8) 그 어떠한 인간의 공로나 반항에도 구애받지 아니하시고 택하신 자들을 부르시는 절대 주권의 능력을 행사하는 분이시다. 그분 앞에서는 아브라함의 늙은 육체도 문제가 되지 않으며 죄인의 추함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무엇인가 될 수 있는 것 같은 가능성 속에서 역사하지 아니하시고 그의 미리 정하신 작정과 통치 속에서 결정해 놓으신 것들을 성취해 나아가신다. 다시 말해서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후손을 바라보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언약이 성취될 것을 확신하였다는 뜻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결정하시고 약속하신 것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을지라도 성취된 것으로 인정하였던 것이다. 바로 이와 같은 확신이 아브라함의 믿음이었으며 본절과 같이 하나님을 정의할 수 있는 신앙이다.

=====4:18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 아브라함은 인간적인 차원에서 자기 아내 사라가 잉태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 앞에 자기의 상속자는 자기의 종인 엘리에셀이 될 것이라고 고했다(창 15:2). 그럼에도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번성케 하실 것을(창 15:5) 믿었다. 키에르케골(Kierkegaard)은 아브라함의 모리아 산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어떤 사람은 영원한 것을 기대함으로써 위대하게 되었다. 그러나 가장 위대했던 사람은 불가능한 것을 기대했던 사람이다"라고 함과 동시에 '불가능한 것을 기대했던 사람'을 '하나님과의 투쟁에서 승리한 자'라고 정의를 내리고 있다([공포와 전율] 중에서). 그러나 아브라함이 인간적으로는 불가능한 것을 아브라함이 바라고 믿었다는 것은 자신의 소망에 대하여 믿음을 가졌다는 뜻은 아니다. 더 나아가 개인의 소망이 성취되는 것을 하나님과의 투쟁에서 승리하는 것으로 묘사하는 것은 바울의 의도와 모순된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바랐기 때문에 소망이 성취된 뒤에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었다(20절). 그는 믿고 바라는 모든 것의 근원을 하나님의 영광으로 돌리고 있다. 과학에 있어서 사실에 대한 '확신'은 과학자가 세워 놓은 가설을 추론(推論)하여 밝혀진 사실(비록 이 사실이 진리는 될 수 없을지라도) 또는 추론에 의해 세워진 가설에 대한 '확신'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신앙은 전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한 것으로 믿고 바라는 것이며, 보다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의 전능성과 목적의 결정성(determinateness), 곧 약속의 신실성을 믿고 바라는 것이기에(J. Murray)전제된 가설을 추론하여 믿는 과학적 확신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 이 내용은 창 15:5 b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는 말씀의 인용구이다. 여기서 '후손'이란 문자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되지만, 창세기 본문에서나 본절에서는 '율법에 속한 자'와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 모두를 지칭한다(16절 주석 참조).

=====4:19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 바울은 생식(生殖) 능력이 없는 것을 '죽은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헬라 본문에서 '죽은 것 같음'이란 말이 아브라함에게는 완료 수동태 분사형으로( , 네네크로메논) 언급되어 있으며, 사라에게는 명사형( , 네크로신)으로 언급되어 있다. 사라에게 명사형으로 사용된 것은 앞에서 사용된 분사형의 반복이며, 아브라함에게 완료 수동태가 사용된 것은 이미 생식 능력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개역 성경의 번역에서 사용된 '같음'이란 말은 헬라 본문에서는 사용되지 않고 있다. 특히 개역 성경에는 번역되지 있지 않으나 헬라 본문에는 '이미'를 의미하는 헬라어 '에데'( )가 사용되어 두 사람 모두 생식 능력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17절에서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라는 말씀이 '이미 생식 능력을 상실한 아브라함과 사라의 생식 능력을 회복시키시고'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말씀은 24절의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라는 구절과도 연결되어 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사건은 사라의 태(胎)가 생산 능력이 없는데서 생산의 능력을 갖추게 된 사실과 영적으로 일맥 상통한다. 영적인 의미에서 생산 능력이 없는 사라가 그의 후손을 생산하게 된 것이나 죽었던 그리스도가 다시 살아나셔서 '생명을 주는 영'(고전 15:45, life-giving-spirit)으로서 잠자는 자의 첫열매가 되신 것은 같은 의미를 지닌다.

=====4:20
 의심치 않고 - '의심하다'의 헬라어 '디에크리데'( )는 '디아크리노'( )의 부정 과거 수동태로서 아브라함의 의심하지 아니한 행위가 개인의 능동적인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님을 시사한다. '디아크리노'는 '가려내다'(마 16:3), '구별하다'(약 2:4) 또는 '스스로 마음에 갈등을 일으키다'(14:23;막 11:23)라는 의미인데 본절에서는 아브라함의 '확신'( , 플레로포레오)과 반대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의심치 않았다'는 것은 소망에 근거해서( , 에프 엘피디) 믿음으로 살았기에 갈등할 수가 없었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네뒤나모데 테 피스테이'( )에서 '믿음'(피스테이)은 앞에 전치사가 없이 여격으로 사용되었다. 메첸(Machen)은 전치사가 없는 단순한 여격은 수단이나 방법을 의미한다고 기술하고 있다. 한 예로 '에게이론 타이 토 로고 투 퀴리우'( )는 '그들이 주님의 말씀으로 일으킴을 받는다'를 의미하는데 주님의 '말씀'이 '일으킴을 받게 되는' 수단이 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절은 문자적으로 '믿음으로 강하여져서'라는 의미를 지닌다. 즉 '믿음'이 '강하여지게 되는' 수단이 된다. 그리고 '믿음으로 강하여져서'라는 말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강하게 붙들었다는 의미를 지닌다. 여기서 한 가지 난제가 발생한다. 창 15장에 언급된 하나님의 약속을 아브라함이 끝까지 변함없이 믿었다는 사실이 창 17:17의 "아브라함이 엎드리어 웃으며 심중에 이르되 백 세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생산하리요"라는 말씀에 의해 도전받게 된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이와 같이 분명하게 의심을 나타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해서 바울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강하여져서'라고 진술하고 있는가 ? 그러나 이러한 어려움은 다음과 같이 해결될 수 있다. 비록 혹자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연약하여져서 의심을 하였으나 다시 하나님께서 그것을 강하게 해주셨다는 것으로 이해하지만(Hendriksen) 이 해석은 타당하지 않다. 다만 아브라함이 의심을 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방법에 대한 것이었다. 즉 그의 자손이 수없이 많아지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이고, 그 약속은 문자적으로 사라의 몸종인 하갈을 통해서가 아니라 사라를 통해서만 성취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을 통해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생각하였을 것이다. 비록 하갈은 사라의 몸종이었지만 하갈의 자식은 바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앞에 고하기를 하갈의 아들인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창 17:18)라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창 15장에서 말씀하셨던 그 약속을 재차 창 17:19-21에서 말씀하심은 아브라함의 약해진 믿음을 다시 확고히 해주기 위함이 아니라 사라의 태에서 난 자만이 그 약속을 성취시킬 것이라는 점을 아브라함에게 못박으신 것이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 본 구절에 대해서 구약성경에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다만 다음과 같이 추론해 볼 수 있다. 창 17:19-21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재보증받은 아브라함은 곧바로 하나님께서 이전에 명하신 할례 의식을 행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방법에 대해 확고히 믿게 되었음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4:21
 약속하신 그것 - 본문에 언급된 약속의 구체적인 내용은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리라'(17절)는 것과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18절)고한 것이다. 이약속은 아브라함의 소망과 확신에 의하여 얻어낸 보증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도록 보여 주신 하나님의 능력과 신실하심에 근거한다. 아브라함의 확신보다 더 확실한 것은 그분의 약속이다. 왜냐하면 약속은 하나님 자신의 전능성과 신실성을 나타내신 목적있는 작정이기 때문이다.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 이 말은 '능치 못할 것이 없는 여호와 하나님'(창 18:14)에 대한 확신이며 또한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라'(창 18:19)는 말씀에 대한 확신이기도 하다. 본 구절에 대하여 혹자는 본절이 "아브라함의 신앙의 힘과 활기를 완벽하게 표현해 주고 있다"고 진술하기도 한다.

=====4:22
 그러므로 - 개역 성경에는 번역되지 않았으나 헬라어 본문에는 '그러므로'( , 디오) 다음에 '카이'( )가 언급되어 있다. '카이'는 일반적으로 접속사로 사용되어 '그리고'를 의미하지만 본문에서는 '또한 역시'라는 의미를 지닌다. 바울이 이 단어를 사용하게 된 것은 9절 하반절에서 언급했던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라는 말씀을 다시 반복하면서 그 의미를 강조하기 위함이다.

=====4:23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사실은 동시성(Synchronism)과 통시성(Diachronism)을 동시에 지닌다. 즉 그 원리는 아브라함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의 후손 모두에게도 적용된다. 이에 대해서 성경 자체의 증거로는 15:4;시 102:18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바울의 진술은 '당신이 주장하는 것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만 적용되며 모세 이후부터는 율법만이 적용될 뿐이다'라고 주장하는 유대인들에 대한 것이다.

=====4:24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 '우리'는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을 믿는 자들을 가리킨다. 본절은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손길이 열려 있음을 시사하고 있으며, 이는 유대인의 특권을 부인하고 있는 23절의 '아브라함만을 위한 것이 아니요'라는 내용과 호응을 이룬다. 여기서 바울은 자신의 논리를 '믿음의 내용'으로 옮기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화제를 끌어내고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 자기가 언급했던 하나님의 약속이 최종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시고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신 하나님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은 동일한 분이심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결국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것을 믿는 것과 신약 시대에 성도가 예수를 믿는 것은 내용상 동일하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아브라함의 믿음은 실현될 '약속'에 대한 것인 반면, 신약 시대 성도의 믿음은 성취된 '약속'에 대한 것이다.

=====4:25
 예수는...살아나셨느니라 - 본절에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사건을 성도에게 적용시키면서 반대되는 의미를 지닌 두 구절을 대조시키고 있다. 즉 '우리 범죄함'과 '우리를 의롭다하심'이 대조되어 있고,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와 '위하여 살아나셨으니라'가 대조되어 있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내어 줌이 되었다는 것은 우리 죄를 위한 대속적(代贖的)인 죽음을 의미하며, 우리를 위하여 살아나심은 대속의 결과인 '의'를 보증하고 선포하시기 위함이었다. 이와 같이 바울은 24절에서 믿음의 내용으로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 살리신' 것에 대하여 언급했던 것을 성도들에게 다시 적용시키는 논리의 순서를 밝고 있다. 한편 바울이 예수의 대속적 죽으심에 대하여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은 것은 사 53:1-9과 같이 구약 시대에서 메시야의 고난에 대한 내용이 언급되어 있어 유대인들이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사건이 논리적으로 설명되고 증명되어질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방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 사건에 대해 구약 성경을 인용하면서까지 굳이 증명을 시도할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그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내용이 지니고 있는 하나님의 비밀을 밝혀내는 것이 유대인에게나 이방인을 위해 더 유익한 것으로 판단되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그는 5장에서 8장까지 줄곧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성도들에게 어떤 의의를 갖게 되는지에 대해서 진술하게 되었다.

 

 

 

  앞장에서 바울은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원리를 설명하였거니와 본자에서는 그  구체
적 실례(實例)로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제시하고 있으며 다윗의 신앙 고백을  인용하고
있다. 바울은 이 같은 성경의 권위를 받들어 논증을 계속 이끌어 가고 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이치는 지금 새롭게 등장한 말이 아니라 이미 구약 시대의 인물인 아브
라함의 행적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복음은 역사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행위의
연속이다. 바울은 본장에서 유대교의 전통적 해석을 넘어서고 있으며 신앙에 대한  새
로운 이해를 보여주고 있다. 본장의 내용을 상고하기 위해 다음 세 가지 사항에  초점
을 맞추어 보기로 하자.
  (1) 칭의의 모형(模型)인 아브라함. 칭의에 관한 바울의 논증은 구약성경에  의거하
여 그 정당성이 입증된다. 바울은 종종 유대인과의 논쟁에서 구양성경을 인용함으로써
자신의 논리가 성경의 전통과 부합되는 것임을 강조하였다. 본장에서는 아브라함을 믿
음의 전형(典型)으로 택하고 있는바, 이는 계약(testament)을 아브라함 및 모세와  밀
접히 연결시키고 족장(族長)들을 '우리의 조상'이라 부르는 유대교 전통을 염두에  둔
것이다.
  구약 시대에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는 원리는 인간의 행위나 율법의  준
행에 있지 않고 오직 믿음에 근거한다는 사실이 본장에 나타난 핵심내용이다. 참 아브
라함의 후손이란 율법과 할례를 소유한 육적인 자들이 아니라 영적 믿음을 수유한  자
라는 것이다. 바울은 이러한 사실을 이미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거니와(2:28)  표면적
인 유대인은 아무 의미가 없으며 영적으로 참 믿음에 속하여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
을 입은 자라야 진정한 이스라엘의 자녀인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믿음으로  말미
암는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이 된다는 것이니 이는 당시 유대인들에게 충격적인 발언
이 아닐 수 없었다.
  여기에서 중요한 바울의 논점(論點)은 아브라함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칭의
의 모형이라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구약 시대에 이미 하나님을 믿어 의롭다 함을 얻은
것은 장차 예수 그리스도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의를 입혀 주실 것의 모형으로서,
신약 시대의 성도들이 누릴 그리스도의 의와 영광을 소급하여 적용함을 암시한다.  예
수께서도 이러한 사실을 언급하셨다(요 8:56).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
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바울은 이제 모든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아브
라함의 발자취를 따라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되어 영생을 누릴 것을 촉구하고 있다.
  (2) 약속의 성취와 믿음.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무엇을 믿었는가 하는 질문이 제기된
다. 아브라함은 무엇을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는가? 본장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하나님
의 약속을 굳게 믿었다. 바울은 여기에서 약속의 개념을 중요시 하고 있다. 약속은 계
약과 유사한 개념이나, 계약은 의식적(儀式的)인 면을 내포하고 있고 약속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하겠다. 아브라함은 전혀 소망이 없는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그의 위대한 점이다. 그는 하나님의 신실
하심에 자신을 내어 맡겼던 것이다.
  바울은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약속은 일방적이며 무조건적임을 강조하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는 한 번 인간과 약속을 맺으시면 절대로 폐기(廢棄)하지 않으시며  인간의
행위와는 상관없이 꼭 이루신다는 것이다(수  23:5-15;왕상  8:56;행  7:6;갈  4:4;히
6:12-20).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큰 민족을 이루며 지상의 모든 민족이 아브라함을
통하여 축복받을 것을 수차례 약속하셨다(창 12:7;13:14;15:18;26:3). 아브라함은  자
신의 불가능한 상황을 보고 결코 좌절하지 않았으며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약속을 시행
하시는 신실하신 분이심을 믿었기 때문에 약속의 성취를 가져올 수 있었다.
바울은 아브라함의 믿음이 약속의 성취를 가져온 실례를 들면서 온인류에게 적용될 복
음의 약속으로 초점을 옮긴다. 인류의 죄인된 상황으로 볼 때에는 아브라함처럼  되는
것이 도저히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으 복음의 약속, 즉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약속을
믿는 자에게는 아브라함에게 일어난 하나님의 약속이 동일하게 성취된다는 것이다. 결
국 바울은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을 믿는 자는 죄사함의 은총을 받아 그 약속대로 의롭
다 칭함을 받을 것이라는 논리로 아브라함의 예증(例證)을 이끌어 가고 이싸.
  (3)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구약시대의 중요한 인물인 족장 아브라함을 모델로 제시
하여 칭의의 원리를 역설한 바울은 그의 목표 지점에 거의 도달하고 있다. 인간은  그
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믿음으로만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다고 상론(祥論)한 바울
은 본장의 결론으로서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통한 이신 득의(以信得義)의 진리
를 종합하여 결론을 내리고 있다. 메시야를 보내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예수  그리
스도에게서 성취되었으며 그것을 믿는 자에게는 의로바 칭함을 받는 놀라운 은혜가 주
어진다는 사실이다.
  앞장에서도 그러했듯자 바울은 본장에서도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대속적(代贖的)  의
미를 강조하고 있다(25절). 예수께서는 구약의 대속죄제(레 16:8-10)의 예표로서 인류
의 죄를 속죄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 속죄제로 드리는 희생 제물이 되셨다. 그는 인간
이 받아야 할 심판과 형벌을 대신 받으셨으니 그를 믿는 자는 누구든지  면죄(免罪)받
고 죄의 사슬에서 풀려나 자유와 해방을 맞게 된다. 그러므로 예수의 십자가는 인간의
의가 되는 것이다.
  또한 바울은 예수의 십자가와 동시에 부활을 강조한다. 복음은 예수의 십자가  뿐만
아니라 부활하심까지 포함한다. 십자가 사건이 인간으 구원을 위한 사역이라면,  부활
은 그 십자가로 모든 구원이 완성된 결과의 선포이다. 다시 말하면  십자가는  인간이
구원받을 수 있는 조건을 전부 완수한 것이요, 부활은 그 구원을 온 세상에 선포한 것
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으면 인간의 믿음은 헛되고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고전 15:17). 이 사실은 그리스도의 부활이야말로 죄의 세력과  싸워
이기신 승리의 결과요 율법의 완성(골 2:14, 15)을 의미하는 것임을 입증해준다. 그리
스도의 부활은 생명과 사랑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을 깨뜨리고 삼켜버린 결과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에서 비로소 완전한 의를 발견하였다. 죄와 사망과  율
법을 완성하신 승리자 그리스도를 믿을 때 인간은 그분의 의를 얻어서 그분과  동일한
의인이 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바울은 아브라함이라는 역사의 증인을 끌어들여 칭의
의 원리를 증거하였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으로 연결하여 구속의 진리를 설파하였다.
의의 근원이신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아브라함과 같이 율법이나 할례와 무관하게 의롭
다 칭함을 받는다는 것이 본장에서 바울이 역설한 논증의 골자(骨子)이다.
  한편 본장은 내용상 세 단락으로 나누어 고찰해 볼 수 있다. 첫째 단락은 구약성4경
의 인증(認證)으로서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소개되며 그것을 뒤받침해 주는 다윗의  시
(詩)가 함께 소개되고 있다(1-8절). 둘째 단락은 할례와 축복, 그리고 할례와  약속의
관계성에 관한 문제들을 다루고 있으며(9-17절) 마지막 단락에서는  믿음의  본질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가 진행된다(18-25절).

  1. 아브라함의 의(4:1-8)
  바울은 지금까지 인간이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율법의 행위와는 관계없이 하나님  앞
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는 문제에 관하여 논의하였다. 분문에서 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이신득의의 진리는 그리스도 이후 신약 시대의 새로운 복음이지만 이는  구약  시대에
이미 하나님께서 예시해 주신 진리라는 점이다. 복음의 진리는 거듭 새롭게  발견되어
지는 것이다. 본문에서는 아브라함의 칭의 사건과 더불어 죄사함에 대한 다윗의  고백
이 소개되고 있다. 이렇듯 구약 성경에 근거한 바울의 명백한 논증은  율벅과  할례의
의(儀)만을 고집하던 유대인들을 무색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본문을  상고하
기 위하여 다음 사항들에 초점을 맞추어 보기로 하자.
  (1) 율법의 행위와 믿음. 바울은 앞장에서 율법은 믿음을 굳게  세운다는  의미에서
중요한 것이긴 하나(3:31)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얻는 근거는 되지 못
한다는 사실을 역설하였다. 본문에서는 믿음의 조상이라 하심을 얻는  근거는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임을 증거하고 있다. 신약성경의 기자들은 믿음에 대하여 논할  때
에 대부분 아브라함을 언급하였다(히 11:8-10;약 2:21-24).
  바울은 먼저 다음과 같이 문제를 제기한다. 아브라함은 과연  유대인들의  주장대로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얻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 앞에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한다. 자랑은 인간의 주장이나 능력, 즉 인간의 의를 의미하는바, 거
기에는 그리스도가 들어갈 여지가 없다. 바울은 아브라함의 사건을 통하여 행위와  믿
음이라는 양자 택일(兩者擇一)의 상황에서 단호하게 믿음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의를
주장하고 있다.
  인간의 행위와는 전혀 관계없는 칭의를 말하면서 바울은 하나님께서는 경건치  아니
한 자를 의롭게 여기시는 은혜로운 분이심을 상기시키고 있다(4, 5절). 예컨대,  일하
는 자는 그 품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긴다는  것이다(레  19:13;마
10:10). 고용주가 노동의 대가를 치르는 행위는 은혜가 아니다. 노동자에게 있어서 보
수는 당연히 요구해야 할 권리이며 고용주는 빚진 채무자와 같다.
  이와 마찬가지로 만일 사람이 행함으로 인하여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한다면 하나님
은 그 행위에 대하여 대가를 지불한 것이 되며 그 의는 하나님의 은혜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를 의의 근거로 내세우는 유대인들의  사고(思考)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인간은 어떠한 경우에서든 자기를 자랑할
수 없는 나약한 존재라는 사실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 함을 얻어 영생에 이를
수 있는 존재임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 신.구약성경의 가르침이다.
  (2) 죄사함의 은총. 바울은 이신 득의의 진리를 확증하기 위하여 또 한 사람으 대표
적인 인물로서 다윗을 들고 있다. 다윗은 족장 시대의 아브라함과는 달리 모세 율법이
적용되던 시대의 인물이었다(삼상 16:12, 13;대상 28:4). 그러므로 그 당시 의로운 사
람으로 칭송받던  다윗이  율법에  어긋나는  행동을  함으로  죄를  범하였지만(삼하
11:1-17) 하나님께서 그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의롭다 여겨 주셨다는  사실은  바울의
논증을 더욱 확고히 해주고 있다.
  본문에서 바울이 인용하고 있는 구약성경의 말씀은 시편 31:1이하로서 시편  51편과
더불어 다윗의 참회시로 알려져 있다. 이 시(詩)는 죄의 참회와 더불어 사죄의 약속을
받은 자의 행복을 묘사하고 있다. 바울은 이 시를 통하여 죄사함의 은총이 행위에  관
계된 것인가 아니면 믿음에 관계된 것인가를 논하고자 한다. 율법의 지배 아래 살았던
다윗이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6절)에 대하여 말
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가 하나님 앞에 범죄한 후에는 인간의 행위가 얼마나  무력하고
무능한 것인가를 깨닫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는 자신의 행위로써 범죄 행위를  도말
할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죄로 간주하지 않으셨으니 죄사함의 은총만이  그를
죄로부터 구원할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죄로 간주하지 않으셨으니 곧  다윗은
그의 행위에 관계없이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었다. 바울은 여기에서 죄사함과  칭의를
동일시하고 있다.
  율법의 세계에 있어서 사죄(赦罪)와 칭의(稱義)는 새로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다
윗은 죄사함을 받고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는 행복하다고 거듭  고백하고  있다(7,  8
절). 이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최고(最高)의 경지를 지시하고 있는 바,  인간은
하나님의 은총 안에서만이 존재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는 증언이다.  죄사함의  은총,
즉 칭의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최대의 축복 선언이라 하겠다.
  (3) 믿음과 의. '인간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에 의해 하나님께 의로 인정받는
다'는 바울의 주장에 대하여 그를 비난하는 자들이 있었으니 그들은 바울이 율법을 지
킬 가치가 없다고 하면서 부도덕(不道德)을 장려하는 자라고 비난하였다.  또한  당시
민족주의 감정이 고조되어 가던 때에 바울은 율법의 무용론(無用論)을 주장하여  유대
인의 정체성을 무너뜨리는 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리고 그들은 유대 역사에서  숭배
를 받고 있던 아브라함은 그 의로운 행위 때문에 의롭다 인정받았다고  주장해  왔다.
고로 바울은 유대인의 역사를 무시하는 자라는 것이 그들의 공격이었다.
  이러한 비난에 대하여 바울은 아브라함은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믿음에 의해서 의
롭다 함을 얻었다는 사실을 그의 기사(記事)를 통하여 입증하였고(창 15:6) 덧붙여 다
윗의 시를 인용하여 증명하였다. 구약의 율법에 의하면 재판관은 악인을 정죄하고  의
인을 의롭다 판결하였다(신 25:1). 그러나 하나님께서 재판관이 되실 경우 악인도  믿
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판결받을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는  것이다(5절).  인간은
자기 행위와 관계없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여김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바울이
말하는 복음의 핵심이다.
  그렇다면 믿음과 의는 어떠한 관계에 놓여 있는가?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
贖)의 죽음과 부활을 믿음으로 인하여 하나님께로부터 의로바 함을 얻을 수 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 마음대로 소유하거나 버릴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데에 그 절
대성(絶對性)이 있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며(엡 2:8)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택하신 자를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구원 행위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 바울의 구약성경 인용에 관하여. 바울은 그의 서신들 속에서  구약성경을  논증의
자료로 사용하였다. 그에 있어서 성경은 모든 생각과 행동에 대한 최초의  규범이었고
그가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에도 유대인들과 논쟁을 할 때마다 성경에 기초해서 그  정
당성을 찾고자 하였다. 특히 본서에는 구약성경 인용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1) 바울의 구약성경 이해. 바울은 구약성경을 복음이 예시(例示)되어 있는  책으로
보았다. 복음은 이미 구약성경에 증거되었다(1:2;3:21;갈 3:8). 구약성경 속에는 이미
하나님의 은혜스러운 약속이 있고 믿음으로 구원받은 아브라함과 같은 사람이  있다는
것이 기록되어 있다. 구약의 모든 말씀들은 예수가 메사야임을 입증하며 예수  그리스
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증거한다. 바울에 의하면 구약은 미완성 드라마이며 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약과 신약은 서로 분히해서  생
각할 수 없다. 왜냐하면 신약은 구약의 완성이기 때문이다. 구약은 계시(啓示)인 동시
에 약속의 말씀이며 그 약속은 신약에 와서 성취되는 것이다.
  (2) 인용 방법. 바울은 구약성경을 인용할 때 어떤 특정한 양식에 구애받지 않았다.
자구적(字句的)으로 인용할 때도 있고, 암시적으로 인용할 때도  있다.  예컨대  본서
3:10-18에서는 몇 개의 다른 구절들을 계속 나열하여 마치 한 곳에서  온  인용구처럼
사용하였다. 또한 체계적이지는 않지만, 유대인으 방식을 따라 율법서와 예언서와  성
문서에서 성구들을 모아 사용하기도 하였다(11:8-10). 개개의 인용구들이  구약성경의
문맥과는 상관없이 사용되고 있기도 하다(고전 14:21). 이처럼  다양하게  구약성경을
인용하는 바울은 어휘 사용에 있어서도 어떤 특정 의미를 강조하거나 얻기 위하여  그
것을 다른 말로 바꾸어 표현하기도 하였다(10:5;레 18:5;갈 3:12). 바울이 구약성경을
비유적으로 사용한 적이 있는 데(갈 4:22), 이 한 가지에만 비유를 사용했을 뿐  구약
의 역사 자체를 하나의 비유로 서술한 적은 없다. 고린도전서 10:1이하에서는  바울이
구약의 사건들을 묘사하면서 유형론적 방법론은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바울의
주석 방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한 모형(模型), 즉 권고를 위하여 끌어 온  예
화에 지나지 않는다. 이상 바울은 다양한 방법으로 구약성경을 인용함으로써 옛  계약
(Old Testament)과 새 계약(New Testament)의 관계를 보다 더 이해하기 쉽도록 설명하
였다.
  (3) 교회사적 의미. 바울이 구약성경을 증빙 자료로 인용한 방법을 칼빈(J. Calvin)
과 정통 교회가 채용하였다. 오늘날 교회도 말씀을 찾는 근본적인 태도에 있어서는 바
울을 따라야 할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 즉 구약은 복음을 지향
(指向)하고 있다는 사실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구약이 완성되었다는  사실이  그것이
다. 구약의 역사 안에 있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인간의 죄와 구원에  관한  문제가
예수 안에서 해결되었다는 신앙이 밑받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구약의  모든
문구(文句)들을 모두 이같이 해석하면 알레고리칼(allegorical)한 해석으로 빠질 위험
이 있다. 구약도 그 자체로서 하나님의 말씀인 바, 당시의 정황과 역사의 자리 가운데
울려퍼진 고유의 소리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2.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4:9-17)
  바울은 앞 문단에서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실을 증명하
였거니와 본문에서는 다시 한번 아브라함의 의에 관하여 논증하고 있다. 즉  아브라함
의 의는 할례와 율법과 구체적으로 어떠한 관련을 지니는 것인가? 할례와 율법에 관하
여는 앞장에서도 다루었듯이 유대인들이 자랑거리로 여기는 것이었다. 본문에서도  역
시 바울은 아브라함의 의와 관련하여 유대인들의 자랑거리를  무익(無益)하게  만들고
있다. 다음 세 가지 사항을 통하여 본문을 상고해 보기로 하자.
  (1) 할례와 무관한 칭의. 바울은 본문에서 아브라함이 할례받은 시점과 관련하여 아
브라함을 의롭다 여기신 사실을 논의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아브라함은 할례받기  전
에 의롭다 하심을 얻었는가 아니면 할례받은 후에 얻었는가 하는 것을 중요한  문제로
삼고 있다(10절). 당시 유대인들은 할례를 통하여 그들의 선민 의식(選民意識)을 강하
게 구축하였다. 할례자에게만이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고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  하심
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물론 다윗은 할례를 받은 자였다. 그러나 바울
은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향유했던  은총과  칭의(시
32:1, 2)를 동일하게 누렸음을 강조하고 있다(창 15:6).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을 때는 하례를 받지 않았을 때였다. 성경에 의하면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
은 것은 칭의 사건이 있은지 14년이 지난 후였다(창 17:24-26). 그러므로 할례는 사실
상 그가 이미 가진 것에 대한 하나의 약속의 표에 불과했다(창 17:10). 즉 할례는  믿
은 사실을 추후적으로 인증(認證)한 도장이다. 그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칭의에 대한
하나의 증거였지 자랑거리는 아니라는 것이다(2:25-29).
  구약의 역사는 할례 이전에 시작되었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으 은총에 의해  선민의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것이 본문에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논점(論點)이다.  아브라함
이 할례받지 않고 믿는 모든 사람의 조상이 되었다는 것(11절)은  유대교의  주장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할례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는 것의 표징(表徵)이며,  이방인
도 믿으면 의롭게 될 수 있다는 결론이었으니 이는 새로운 복음이었다. 아브라함은 유
대인의 조상뿐 아니라 이방인의 조상도 된다는 것이다. 그는 믿음의 발자취를  따르는
모든 영적 선민의 아버지가 된다.
  (2) 율법과 무관한 칭의. 아브라함의 칭의가 할례와 무관하다는 것을 역설한 바울은
또한 율법과 칭의가 무관한 것이라는 사실로 나아가고 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과의 약속을 상속받기 위해서 자신의 노력으로 율법이 명하는 모든 일을 준행하
여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율법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과 언약을 맺으신 지 수백년만에 나타난 것이다. 고로 율법과 아브라함의 칭의는 무관
하다는 것을 바울은 강조하고 있다. 오히려 아브라함의 칭의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약
속과 관련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후손(後孫)이 하늘의 별처럼 많아져서 큰
민족을 이루며 지상의 모든 민족이 아브라함을 통하여 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셨다(창
12:1-3). 이러한 약속은 결코 율법의 행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결과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아비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은 동시에 믿음을 소유한 한  인
간이 후대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리라는 예언의 말씀이기도 하다. 율법 이전의  인간이
었던 아브라함은 후대의 모든 믿는 이들의 조상이 되었던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언약은 율법에 의하여 좌우되지 않는다는 것이 바울의 요지이다.  바
울에 의하면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는  것이며  죄를  깨닫게  한다(3:20;5:13,
20;7:8). 즉 율법이 있기 때문에 구체적인 범죄 행위가 위법(違法)이 된다는  것이다.
율법이 있기 전에도 물론 죄가 있었으나 율법이 생김으로써 비로소 무엇이 죄인지  지
적할 수 있으며 심판할 수 있게 된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이 이러한 율법 준수를  조건
으로 이루어진다면 하나님의 은총은 사라지고 심판만이 남게 될 것이다. 또한  완전하
게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인간의 무능력은 약속의 실현을 불가능하게 만들 것이다.  이
렇듯 약속이 율법이라는 조건에 의하여 방해를 받게 된다면 약속의 가치는  상실된다.
율법을 실천한 사람이 약속의 상속자가 된다면 믿음과 약속이 모두 의미없는 것이  되
고 말것이다.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는 법의 역사가 아니라 철저하게 믿음의 역사이다.
'아브라함의 자손'은 율법에 속한 사람, 곧 유대인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의거
하여 믿은 이방인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이 본문의 중요한 논점이라 하겠다.
  (3) 칭의와 믿음. 바울이 본서 전체를 통하여 추적하고 있는 것은 바로 '믿음'이다.
사람이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에 있다는  것이  바울의
명제이거니와 분문에서 역사적 인물인 아브라함을 들어 그 사실을 구체적으로  증명하
였다. 할례와 율법을 받은 유대인일지라도 믿음이 없다면 참된  의미에서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즉 그들은 무할례 시대의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아야  비
로소 하나님께로부터 의를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이 바울의 주장이었다. 할례나  율법
에 의해서가 아니라 믿음에 의하여 의로 인정받는다는 논리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을 막
론하고 어느 민족에게나 해당되는 원칙이다.
  바울이 말하는 믿음이란 미덕(美德)도 종교적 열심도 아니며 그것은 구원의  약속에
동참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유대교에서 생각하듯이 특출한 종교적 인물의 한 전형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신앙 없는 불경건한 가정에서 성장한 자였다(수  24:2).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구원사(救援史)에 겸허하게 참여하였기 때문에 칭의의 축복을 받게  되
었다(갈 3:6).
믿음은 자기 자신이 무엇인가 되려고 애쓰고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자
에 대하여 행동하도록 내맡기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자기 자신을 떠나 믿음으로  순종
하여 하나님의 면전에 섰기 때문에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었다. 한편 칭의는  종말론
적인 하나님의 구원 행위로서 무죄의 선언을 통하여 새로운 피조물의 삶을 영위하도록
한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믿음으로써 종말론적인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그는  오늘
날 에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총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들의  모형(模型)인
것이다.
  * 믿음에 대한 바울과 야고보의 해석. 신약시대의 대표적인 두 저자 바울과  야고보
는 모두 아브라함의 역사를 중요하게 취급하며 논의하고 있으나 각각 서로 다른  결론
을 이끌어내고 있다는 점에서 신학적으로 논쟁의 대상이 되어 왔다.  바울은  "사람이
행위 없이 믿음으로 의롭다 인정된다"고 말하며(3:28;4:1-8) 야고보는 "사람이 행함으
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고 결론 짓고 있다(약  2:24).  그렇다면
성경의 진리는 서로 모순되는 것인가? 바울과 야고보는 어떠한  관점에서  아브라함의
신앙을 해석했는가? 본 주제 강해세서는 믿음에 대한 바울과 야고보의 개념적  차이점
을 분석함으로써 두 사상의 근본적인 일치점을 찾아보고자 한다.
  (1) 바울의 경우. 바울에게 있어서 신앙이란 유대교 신앙에다 예수  신앙을  첨가한
종합적 신앙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말미암은 새로운 경험이었다.
그것은 순수한 은총으로 주어지는 것이며 결코 행위로써 입증되는 것이 아니었다.
   (까) 믿음의 개념. 바울이 말하는 믿음은 전인적(全人的)으로 영향을 주는 지성적,
도덕적, 영적 신앙을 뜻하며, 사람을 하나님과 생동적인 관계로 인도하는 신앙을 말한
다. 그것은 죽은 신앙이 아니라 끊임없이 인간 안에 역동하는 구속(救贖)하는  신앙이
다.
   (다) 행위의 개념. 바울에게 있어서 행위란 율법주의자들의 죽은 행위, 억압당하는
상태하에서 혹은 의무감에서 행하는 행위, 율법이 엄격한 주종 관계가 되어 순종을 강
요당하여 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바울은 이런 죽은 행위는 결코 생명을 줄 수  없다고
단언하나.
   (따) 의(義)의 개념. 바울이 말하는 의로움이란 그리스도인의 내적  의를  뜻한다.
칭찬받을 만한 의로운 행위가 없어도 인간은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구원은 공로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 에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
여기에서 바울이 말하는 의는 구원과 동일한 의미로서 하나님의 선물, 즉 은총으로 이
해되고 있다.
  (2) 야고보의 경우. 야고보느 하나님을 한 분이라고 믿는 단순히  교리를  인정하는
지적인 믿음을 유대 전통적 신앙으로 보고 있으며(약 2:19) 하나님 앞에서 존재한다는
것은 말로만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데 있다고  보았
으며 아브라함을 그렇게 행한 사람으로 여겼다. 야고보에게는 이미 하나님 신앙이  전
제되어 있었고 신앙의 윤리적 측면을 강조하였다.
   (까) 믿음의 개념. 야고보에게 있어서 믿음이란 하나의 죽어버린 전통적 신앙과 생
활속에서 실제적 의를 발휘하지 못하는 무감각한 신앙을 염두에 두고  있다.  구호(口
號)에 그치고 공식화(公式化)됨으로 양심의 증거를 듣지 못하는 믿음은  결코  구원을
가져다 주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다.
   (다) 행위의 개념. 야고보가 말하는 행위는 신자의 행위를 뜻하고 있는  바,  모든
믿는 자의 마음에서 생겨나고 증명된 신앙과 사랑의 결실을 뜻한다. 믿음은 일상 생활
에서의 행위와 대화에서 증명되어야 할 것이며 이러한 증거가 없는  피상적인  신앙은
인간을 구원하지 못한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다.
   (따) 의(義)의 개념. 야고보가 주장하는 의로움이란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에  그리
스도인의 생활 속에서 있어야 할 의를 말하며 심판대에 서기 이전의 결정적인  의로움
을 말하고 있다. 그는 선행이란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의당한 것이며 선행이  없이는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없다고 보았다.
  (3) 결론적 고찰. 지금까지 믿음과 행위와 의로움에 대한 바울과  야고보의  이해를
살펴보았다. 두 사람의 결론은 상반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각기 다른  각
도에서 보았기 때문에 비롯된 것이다. 바울은 뿌리를 보고 있고 야고보는  그  열매를
보고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시작에 관하여 말하고 있고 야고보는 그것을 지
속하고 성취하는 것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에 의하면 신앙보다 앞서는 행위는 버려야 할 것이며 그러한 행위는 죽은  행위
라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야고보는 행위와 격리된 형식적인 신앙을  고발하고  있다.
경건한 행위의 필요성을 믿는 점에 있어서  바울과  야고보는  동일하다(고후  9:8;엡
2:10;살후 2:17). 또한 의로움이란 결국 행위로 말미암아 판단된다는  논리(2:6-10)에
있어서도 그렇다 바울과 야고보는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행위가 병행되어야 한다고  하
는 데에 일치하고 있다(약 2:22). 그리스도 안에서 행위없는 신앙은 죽은 것이요 신앙
없는 행위는 죽은 행위라는 점에서 두 사람의 근본적인 입장은 동일하다고 볼  수  있
다.

  3. 아브라함의 믿음(4:18-25)
  앞 문단에서 바울은 할례와 율법이 약속과 어떠한 관련을 가지며  칭의와는  어떠한
연관성을 가지는가에 대하여 고찰하였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구체
적으로 묘사함으로써 믿음의 본질을 규명하고 있으며, 그러한 아브라함으 믿음이 기독
교 신앙을 선취(先取)한 것이라는 결론을 내림으로써 그의 목표를 달성하고 있다.
  (1) 아브라함이 믿는 하나님. 바울은 앞에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복음의
진리를 설명하면서 구약 시대의 위대한 인물 아브라함을 모형으로 제시하였다. 그런데
율법의 행위로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아브라함의 모형에서  한가
지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그것은 "아브라함은 도대체 무엇을  믿었는가?"라는  것이
다. 몰론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인
가? 본문에서 바울은 매우 중요한 성경적 신관(神觀)을 제시하고 있다.
  바울은 아브라함을 단지 믿음의 모험을 감행한 인물 정도로 본 것이 아니라 그가 죽
음에서 생명을, 무에서 유를 이끌어내는 하나님의 전능성을 믿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믿음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믿는 신앙으로 직접  연결되는
것으로서 바울은 이삭의 출생 사건과 예수의 부활 사건을 함께 생각하고 있다. 생리적
으로 출산 능력이 없는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 사이에서 약속의 아들 이삭을 출생
하게 하신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전능하신 분이시기
도 하다는 것이다. 이렇듯 바울이 옛 신앙 가운데서 부활의 접촉점을  찾았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돌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내실 수 있듯이  인간
의 공로와는 상관없이 택하신 자를 새로이 일으키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부활은  새로
운 창조이다. 아브라함은 인간의 경험과 논리로써는 전혀 도달할 수 없는  믿음으로써
하나님으 새로운 창조 사역에 동참하였으니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음으로 인
하여 새롭게 태어나는 모든 신자들의 원형(原形)이 되었다는 것이다.  바울은  이같이
아브라함의 믿음과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을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하였다.  구약성경은
은혜의 증언이요 복음의 책이었다.
  (2) 신앙의 본질. 본문에서 바울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통하여 신앙의 본질을 잘  말
해주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무자(無子)한 아브라함에게 자손의 번성을 약속하신 바 있
다(창 15:4, 5). 그러나 이러한 약속을 받은 후에도 그들은  자녀를  갖지  못했다(창
16:16;17:24, 25). 약속이 성취된 것은 그들의 생식(生殖) 능력이 완전히 상실된 후였
다(창 17:16, 17). 아브라함은 이미 자신의 신체적 조건을 알고도 마음이 약해지지 않
고 하나님의 략속이 성취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는 소망할 수 없는 상황에 처
하여서도 여전히 소망을 가지고 믿었다. 인간의 타산적인 기대가 아니라 하나님을  바
라는 소망으로 일관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바울이 말하는 신앙의 본지이다.
  앞에서도 언급하였거니와 본문에 흐르고 있는 사상은 죽은 자의 부활 사상이다.  사
도들의 주요 메시지는 예수는 부활이었고 그것은 예수가 메시야라는  증거가  되었다.
바울은 아브라함이 연로(年老)하여 자식을 낳으리라는 약속을 죽음에서  생명이  솟아
나리라는 약속으로 이해하였다. 신앙이란 죽은 자의 부활을 믿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불가능한 것을 가능한 것으로 믿는 것이다. 아무것도 바랄 것이 없는 곳에서 믿는  마
음으로 바라기를 감행하는 것이다.
  본문에는 구약의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에 관하여 잘 나타나 있다. 하나님께서는  약
속하신 것을 행하실 능력이 있는 분이라는 것이 바울의 고백이다(21절). 하나님은  능
력으로 세상을 창조하시고 권능으로 인간을 구원하시는 분이시다. 능력의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가능성의 여부는 완전히 무시된다. 거기에  인
간의 행위로 말미암은 의가 자리잡을 틈은 전혀없다. 인간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게 되며 그렇게 될 때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받게 된다는 것이 바울의 설파하는 신
앙의 본질이다.
  (3) 아브라함의 믿음과 예수의 부활. 바울은 이제 마지막으로 아브라함의 믿음을 예
수의 부활에 적용한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라고 믿는  것,  없는
자를 존재케 하는 분을 믿는 것, 죽음에서 생명을 불러 일으키는 분을 믿는 것이었다.
바울이 이러한 아브라함의 믿음을 소개한 것은 예수의 부활을 믿음으로써 의롭다 인정
받게 하기 위함이다(24절). 바울은 구약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아브라함의 경험과 예수
그리스도 이후의 신자(信者)들의 경험을 병행시키고 있다. 구약성경은 오실 예수 그리
스도를 예표하고 있으며 모든 성경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는 것이 바울의 성경관이다.
  물론 부활하신 예수에 관한 언급은 역사로서의 구약에 속할 수 없는 요소이다. 그러
나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키신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죽은 몸을 소생시켜  모
든 믿는 자의 조상이 되게 하셨다는 점에서 같은 맥락에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신앙
은 이념(理念)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행위에 대한 응답이다. 아브라함이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권능을 믿음으로 응답했듯이, 오늘날 인류는 예수를 죽은 자  가운
데서 살려 내신 하나님의 권능을 믿어야 살 것이다. 예수의 부활은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진리인 바, 그것은 예수의 신성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이며(1:4;행 17:31;
고전 15:14) 그의 죽으심이 대속적 의미를 갖는다는 증거이다(23절). 예수께서는 우리
의 죄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었고 우리의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
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부활은 칭의와 깊은 관련을 맺는다.
  지금까지 예수의 부활에 관하여 다루었다. 하나님의 권능을 믿은 아브라함의 믿음은
예수의 부활을 믿는 모든 자들의 모형이라는 사실과 믿음은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 하
심을 얻는 근거가 된다는 바울의 논중에 귀기울여 보았다. 아브라함이 그러하듯이  자
신의 공로나 자랑거리를 내버리고 예수의 속죄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는  자는  의롭다
칭함을 얻을 것이다.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도록 의롭게 만드는 것이 바로 예수
의 부활의 업적이다. 따라서 예수의 부활을 믿음으로 망미암는 칭의야말로 인간능  하
나님과의 생동적(生動的) 관계로 이끌어 줄 것이다.
  * 아브라함의 신앙. 바울은 아브라함의 신앙이 그리스도 신앙을 예표하고 있고 궁극적으로 그것과 동일한 것이었음을 본장에서 갈파하였다. 본 주제 강해에서는 아브라함의 실례를 통해 증거된 믿음의 본질에 관하여 고찰해 보기로 하자.
  첫째로, 믿음이란 하나님으 은총에 대한 인간 편의 응답이라고 할 수 있다.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들일 만한 마음의 공간이 있었다. 즉 자기 자신의 의나 공로 및 의지적 주장이 그에게는 없었다. 그는 자신의 행위를 다 버리고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행위를 수납하며 묵묵히 긍정하였다. 이로써 그는 하나님의 은총을 입고  의롭다 인정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둘째로, 본장에서 보여주고 있는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굳게 잡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암울한 상황 속에서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으며 그분의  약속을 붙잡고 자신을 온전히 내맡길 수 있었다. 그가 믿은 하나님의 약속은 결국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취되었으니, 약속은 곧 복음이요 아브라함은 그리스도  신앙의  원형(原型)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셋째로, 믿음은 창조주 하나님의 권능을 믿는 것이다. 아바라함은 무와 죽음의 상태에서 생명이 창조될 것을 믿었다. 그가 믿은 하나님은 헬라 철학의 관념적인 신이  아니라 태초부터 끊임없이 생명을 창조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이었다. 부활하게 하시는 하나니미 권능을 믿는 신앙이야말로 의인(義認) 신앙이다. 부활은 창조주의 구원 행위이며 불의한 자의 의롭게 됨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브라함의 신앙으로부터 이미 구원사(救援史)의 중심을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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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 요한복음 호크마 주석, 요한복음 15장
177 요한복음 호크마 주석, 요한복음 16장
176 요한복음 호크마 주석, 요한복음 17장
175 요한복음 호크마 주석, 요한복음 18장
174 요한복음 호크마 주석, 요한복음 19장
173 요한복음 호크마 주석, 요한복음 20장
172 요한복음 호크마 주석, 요한복음 21장
171 사도행전 호크마 주석, 사도행전 01장
170 사도행전 호크마 주석, 사도행전 02장
169 사도행전 호크마 주석, 사도행전 03장
168 사도행전 호크마 주석, 사도행전 04장
167 사도행전 호크마 주석, 사도행전 05장
166 사도행전 호크마 주석, 사도행전 06장
165 사도행전 호크마 주석, 사도행전 07장
164 사도행전 호크마 주석, 사도행전 08장
163 사도행전 호크마 주석, 사도행전 09장
162 사도행전 호크마 주석, 사도행전 10장
161 사도행전 호크마 주석, 사도행전 11장
160 사도행전 호크마 주석, 사도행전 12장
159 사도행전 호크마 주석, 사도행전 13장
158 사도행전 호크마 주석, 사도행전 14장
157 사도행전 호크마 주석, 사도행전 15장
156 사도행전 호크마 주석, 사도행전 16장
155 사도행전 호크마 주석, 사도행전 17장
154 사도행전 호크마 주석, 사도행전 18장
153 사도행전 호크마 주석, 사도행전 19장
152 사도행전 호크마 주석, 사도행전 20장
151 사도행전 호크마 주석, 사도행전 21장
150 사도행전 호크마 주석, 사도행전 22장
149 사도행전 호크마 주석, 사도행전 2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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