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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오순절 날이 - '오순절'이란 말에는 원래 '제50'의 뜻이 있다. 이 날은 유월절 주간의 안식일로부터 50일째 되는 날에 지키는 유대인의 3대 절기(유월절, 오순절, 초막절 ; 신 16 : 1, 10, 13)의 하나이다(레 23 : 15, 16). 오순절은 유월절 기간 동안처음 익은 보리 곡식단을 제단에 드린 날로부터 시작하여 밀 추수로 끝나는 49일(7주)간히 추수 기간 다음 날이기 때문에 '칠칠절'이라고도 한다(출 34 : 22 ; 신 16 :10).또한 이 날은 처음 수확한 밀을 가지고 떡을 만들어 제사를 드리는 절기이므로 '맥추절'(출23 : 16) 혹은 '초실절'(출 34 : 22)이라고도 향다. 그러나 1세기경부터 오순절은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신 것을 기념하는 명절로 여겨지게 되었는데(Jubilees 1 : 1 , 6 : 17 ; TB Pesachim 68b ; Midrash Tanchuma 26c) 출 19:1에 암시된 연대를 추론해 볼 때 율법을 받은 날이 오순절날임이 분명하다. 이 절기는 대개유대력 시반(Sivan)월16일에 해당되는데 현재의 태양력으로는 5월말이나 6월 초순이 된다. 이 날에 흩어져 사는 모든 유대인들은 예루살롑에 와서처음 익은 모맥(牟麥)으로 떡을 만들어 성전에서 제사를 드렸다. 유월절이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을 예표하는 것이라면 오순절은 신약 시대에 교회의 시작으로 영적 의미를 지닌다.
이미 이르매(* , 쉼플레루스다이)- 이 말의 원뜻은 '가득 채우다'(눅 8:23) 또는'(시간이) 거의 닥쳤다'라는 뜻으로 본절에서는'오순절 날이거의 가까워'라는 의미이다.
저희가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앞에서 언급뒤 3대절기에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 절기들을 지켰다. 이런 역사적 배경으로 미루어보아 많은 사람들이오순절 절기를 지키기 위해서예루살렘으로 모여 들었을 것이며 예수의 제자들은 그혼잡을 피할 뿐만 아니라 예수에 대해 적대적이었던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한곳에 모였을 것이다. 한 곳에 모인 사람은 열두 사도들과 1:13,15에 언급된 무리들을 포함하여 상당수의 부활을 목격한 자들로 볼 수 있다(Alfor, R. C. H. Lenski).그러나 그들이 모인장소에 대해 본절에서는 확실히 언급하지 않는다. 1:13에서는 '다락'으로만 언급되어 있으나 12:12에서는 마가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이 언급되고 있다. 만일 본절과 1:13 및 12:12의 장소가 서로 일치한다면 일반적으로 알려진 '마가의 다락방'이란 표현이 어느 정도 타당하다.모인 모든 무리들은 주님의 명령(1 : 4)을 따라열심으로 기도하면서 성령 강림을 기다렸던 것이다.

=====2:2
홀연히 하늘로 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같은 소리가 있어 - 2-4절에는 성령 강림이 세가지 징표(徵表)로 나타난 것으로 기록한다. 곧'바람'과 '불'(마 3 : 11, 12)과 '방언'인데 이것들은 모두 유대인들이 전통에서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나타내는 표시로 여겨졌다. 본 구절에는'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로 성령의 임재가 상징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여기서 '바람'이 성령의 임재하심에 대한 징표로서 나타난 것은 어원적으로 볼 때 '영'(* , 프뉴마)이라는 단어가 '바람'(* , 프노에)과 깊은 연관이 있다는 사실에서 그 근거를 찾음 수 있다.이러한 연관은 예수가 니고데모에게 중생에 대해 말씀하실 때에도 발견된다(요 3 : 8). 또한 구약 에서도 하나님의 임재를 '바람'으로 표시한 곳이많이 있는 것을 볼 때(왕상 19 : 11 ; 시 104 : 4)이연관이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사상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바람 같은'이라했기 때문에 바람과 성령이 동일하다는 의미는아니다. 다만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소리'는 성령의 능력과 그의 오심의 충만함가리키는 것이다(Stanley D. Toussaint). 뿐만아니라 이 말은 제자들이 지금까지 체험하였던것보다 더 친밀하고 인격적이며 강력한 방법으로성령께서 임재(臨在)하셨다는 것을 나타내 주는말이다(Richard N. Longenecker).
저희 앉은 온집에 가득하며 - '온 집'은 헬라어 본문상으로 '그온 집'을 말한다. 이것은 이미 한 번 언급된 집을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으므로 1 : 13, 15 등에서 말한 집을 지시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이'집'을 혹자가 주장하듯이 성전의 집(성전 안에는 30개의 홀이 있었음)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Bengel, Bruce)세심한 관찰력과 주의력을 지닌 의사인 누가가 '성전'(* , 히에론)이란말을 왜 언급하지 않았겠는가라는 의문이 제기된다. 따라서 이 '집'은 앞서 언급한(1 : 13, 15)'그 집'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Alford , Knowling, Hervey, Toussaint).

=====2:3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 '불의 혀'는 성령의 임재를 묘사한다. 이와 괸련하며 구약에서 여러 번 하나님의 임재를 불로 표현한것을 볼 수 있다(출 3 : 2-5; 13 :21 ; 24 : 17 ; 40 : 38). 복음서에서 세례 요한은 성령의 오심을 불과 밀접하게 관련시켜 말하고 있다(마3 : 11 ;눅 3 :16). 여기이서 '불의 혀'란 실제로 불이타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불'구약 시대에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과 더러운 것을 깨끗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을 상징한다(Blaiklock, Ralph Earle). 그뿐아니라 '불'은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하기도 한다(창 19 : 24 ; 레 10 : 2 ; 민 16 : 35 ; 왕하 1 : 9-12 ; 사 47 : 14).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임하여 있더니 - 커다란 불덩어리 같은 것이 불의혀같이 나타나서 각 사람의 머리 위에 임했다.이것은 약속된 주의 성령이(1 : 4 ; 요 14 : 16-21,26 ; 15 : 26, 27 ; 16 : 7-15) '각 사람'위에 임했다는 사실로 요엘 선지자의 예언(욜2: 28-32)과 예수의 약속이 구체적으로 성위되었음을 보여 준다. 구약의 옛 언약하에서는 하나님의 임재는 특수한 목적을 위해서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한정(限定)되었으나(민 11 : 26-19 ; 삼상 10 : 6-12) 이제는 예수를 믿는 모든 무리 가운데 성령이 임하셨다. 이는 신약 시대의 성도들이 각양 은사에 따라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될것을 암시한다.

=====2:4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 성령의 충만함은 성령 세례와는 다른 것이다. 성령의 충만은 여러 번 되풀이 될 수 있어서 구원의때 뿐 아니라 그 후에도 계속 일어날 수 있다(4 : 8, 31 ; 6 : 3,5 ; 9 : 17 ; 13 : 9,52). 그러나성령의 세례는 구원의 순간에 모든 믿는 자들에게 단회적(one for all)으로 일어난다. 그러면 성령의 충만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울의 경우그의 서신에서 성령의 충만에 대해 꼭 한 번만(엡5 : 18) 언급하고 있다. 심지어 그가 성령에 대해서 심층적으로 다루는, 이른 바 성령장이라고 할 수 있는 롬8장 에서도 성령 충만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지 않다. 이것은 특이한 현상이라 할수 있는데 바울은 오히려 성령의 인도나 지배(롬8 : 5, 9, 11, 14 참조)에 대해서 말하고 있을뿐이다. 따라서 그는 성령의 인도나 지배를 받는상태를 성령의 충만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그러므로 성령의 충만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미 내주하신 성령(롬 8 : 9 ; 고전12: 3)의 지배와 인도함을 받는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이지 공간적으로 성령이 채워지거나 다시들어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 하나님은 바벧탑의 사건을 통해서 사람들의언어를 혼잡케 하셔서 그들을 흩어버리셨다(창11 : 1-9). 제자들이 성령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말하게 된 이 사건은 혼잡케 되었던 언어가 다시회복된 것으로서 새시대의 도래를 예고하고 있다. 이것은 또한 주님의 부활의 소식이 우주적 로 확산(擴散)될 것을 암시한다. 그런데 메이어(Meyer)외에 많은 비평학자들은 오순절 체험이 비역사적이라고 주장하면서 본절과 같은 이적을 저자가 미화시킨 것으로 주장한다(Bauer, Schnekenburger. De Wette). 이러한 주장은 근본적으로 본서의 역사성을 부정하고 누가의 의도적 편집에 의한 것으로 았던 편견에서 비롯되었다. 이 견해를 따르게 되면 결국 본서가 바울이라는 인물을 부각시키고 미화시키기 위한 전기biography)에 불rhk 며 결코 영감받은 책이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비평주의자들의 견해는이런 면에서 배격되어야 한다. 한편 이 구절에서 성령의 세례를 말하지 않고 오히려 성령의 충만을 말하지만 이미 1 : 5에서 성령의 세례를 예언했고 또 11 : 15, 16에서는 성령 세례가 오순절에 일어났다고 회고하고 있다. 따라서 본 구절은 오순절에 성령 세례와 성령 충만의 사건이 거의 동시적으로 발생했음을 암시한다. 우리는 이 사건이 교회가 세워지기 위한 처음의 특수한 상황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제자들에게 성령세례의 증거는 방언이었다. 그들은 성령을 받고 자신들이 아직 배운 바가 없는 언어로 말하기 시작했고, 다른 여러 지방에서 온 사람들은 그것을 이해했다. 이것들은 성령이 그의 경륜에 찬사역을 이루시기 위하여 강림한 증거들일 뿐 일반적이며 영속적인 은사는 아니다.

=====2:5
그 때에 - 이 시점은(1)유대인의 명절인 오순절을 지칭할 수 있고 (2)성령 강림의 때를 의미할 수 있다. 여기서는 두 가지 의미를 모두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경건한 유대인이 - 누가가 '경건한'(* , 율라베스)이란 뜻 으로 사용한 이 말은 신약에서 유대인들에게만 사용되고 있다(8 : 2 ; 22 : 12 ;눅 2:25).유대인들은 본래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경건하게 살아보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경건한 유대인'이란 표현은 이방인들을 가리켜 경건하다고 할 때(10 : 2) 사용되었던 말과 전혀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본절에서 이표현은 오순절과 그 규례(민 28 : 26-31)를 지키기 위해 모인 유대인 중에서 율법을 잘 준수(遵守)하는 사람들을 지칭한다.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우거하더니 - 유대인 중 다수가 바벧론에 의해 남쪽 유다가 멸망당한 후(B. C. 586)각국에서 흩어져 사는 '디아스포라'(* ; 약 1 : 1 ; 벧전 1: 1)였다.한편 '우거하다'(* , 카토이쿤테스)는 말은 보통 한곳에 머물러 사는것을 뜻한다. 특히 헬라어 본문의 9절에서 각 지역에'거주하는 사람들'을 가리킬 때 이 말이 사용된것을 볼 때. 어떤 사람은 예루살렘에 거주했던것으로 짐작할 수도 있다(De Wette). 그러나 8-11절의 내용이 외국에 거주하던 '디아스포라'암시하므로 오순절의 절기를 지키기 위하여 일시적으로 온 나그네였을 것이다(Meyer, Alfoed, Knowling, H. Marshall).

=====2:6
이 소리가 나매 - 이 소리는 바람 소리(2절)인지, 방언으로 말하는 소리(4절)인지 주석가들 간에 견해가 각기 다르다. 그러나 ' 소리 '를 뜻하는 헬라어 '포네'(* )가 보통 인간의 소리를 의미하기 때문에 후자가 더 타당하다(Black, Marshall, Lake, Neil, Bruce).
큰 무리가 모여 - 이는 4절의 '다른 방언'으로 말하는 소리를 듣고 큰 무리가 모여들었던 것을 뜻한다(Robertson).이로 보아 제자들이 머물러 기도헹던 장소가 예루살렘 성 안에서 많은 사람이 붐비는 장소에 위치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의 말하는 것을 듣고 - '듣고'(* , 에쿠온)란 미완료시상으로서 무리들이 소리를 들은 시각이 한참 방언하고 있을 때였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것은 제자들이 방언이 다락방에서 처음으로 일어났고 주변의 골목과 안뜰에서 계속 일어났으며 마지막에는 예루살렘 성전 경계 지역까지 퍼져 나갔던것을 암시하여 주고 있는 듯하다(Richard N. Longenecker). 따라서 제자들의 방언은 잠시 동안이 아니라 상당히 오랜 시간 지속 되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방언'(* , 디알려토스)은 '자신들의 언어'(NIV, NASB)로서 고전 14장에 언급된 성령의 은사(恩賜)인 방언은 아니다. 각 사람은 자신들이 거주하던 나라의 언어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들었던 것이다.

=====2:7
다 놀라 기이히 여겨 이르되 - '놀라'(* , 여시스탄토)란 말의 원뜻은 '어떤 장소에서 떠난다'는 뜻인데 입을 다물지 못하는 놀라움을 의미한다. 또 '기이히 여겨'(* , 에다우마존)는 미완료 과거형으로 그 놀라움이 점점 커져서 어떤 사건이 뜻하는 바를 어떻게 설명할지 몰라서 당황하는 표현이다. 그들은 방언을 말하는 제자들이 갈릴리사람(1 : 11)인데다가 또 배우지 못한 자들이면서도 그와 같이 자신들의 언어로 말하는 것을 듣고 심히 놀란 것이다.
보라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 이 첫째 질문은 제자들의 출신에 관한 것이다. 갈릴리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뛰어난 언어 구사력(驅使力)이 없는무식한 자들로 여겨졌으므로 나다나엘도 빌립에게 갈릴리에 속한 동네 나사렛에서 선한 것이 나올 수 있느냐고 의문을 제기한 적이 있다(요1 : 46). 그렇기 때문에 제자들이 다른 나라의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들었을 때 모여든 사람들은 놀라움을 표시할 수밖에 없었다.

=====2:8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것 - '각 사람의 난 곳'은 9-11절에 기록되어있는 곳을 가리킨다.

=====2:9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 - 이사람들은 유대의 동쪽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그리고 이들 지역은 과거 앗수르인들이 북쪽 이스라엘의 열 지파로부터 포로로 잡혀온자들을 이주시켰던 지역으로(왕하 17 : 6) 가장 먼저 디아스포라(Diaspora) 유대인들이 생겨난 곳이었다. 그 후에도 느부갓네살 시대에 유다의 포로들로 말미암아 그 수는 더욱 증가되었다(단 1 : 1, 2)그들은 나중에 바사 왕국이 쇠퇴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팔레스틴으로 귀환(歸還)하지 않고 살던 곳에 머물렀다. 이 지명에 대해서는 서론지도 '1세기의 근동' 을 참조하라. 한편 여기서'우리'는 바대와 메대 그리고 엘람이란 곳에 사는유대인들인지 아니면 그곳에 살면서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인지 분병하지 않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곳에 살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로 추정한다(Bruce, Ralph Earle, Hervey, W. Neil). 그러나 10절 하반절의 진술로 미루어 보아 디아스포라 유대인들뿐 아니라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도 포함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또 메소보다미아 - 티그리스 강과 유브라데 강 사이의지대로 비옥한 초생달 지역(Crescent)으로 잘알려져 있다. 유대인들은 그 지역에 자리잡고있던 바벧론 제국에 의해 B. C. 589년 이후에 포로로 잡혀가서 그곳에 정착하게 되었다. 1세기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는 메소보다미아와 그 인접지역에 정착해 살던 유대인들에 대해 많은 것들을 언급하였다.

=====2:10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 아시아와 가바도기아의 중간에 위치한 로마의 행정 구역이었다.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 유대인들은 B. C. 6세기초엽부터 계속 애굽에 거주해 왔다. 예수 당시 애굽에는 유대인이 백만 명 가량 살았는데 알렉산드리아의 다섯 구역 중에 두 구역의 전 주민이 유대인이었다고 한다(Philo, on Flaccus 6, 8).애굽의 톨레미 1세(Ptolemy )는 그의 왕권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하여 많은 유대인들을 구레네에 정착시켰는 그때에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의 여러 지방에 유대인들이 흩어져 살게 되었다(6 : 9 ; 11 : 20 ; 13 : 1).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은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와 동격(同格)으로 봐야 할 것이다(R. C. H. Lenski). B. C.2세기 경에 로마에는 유대인 거주지역이 있을 정도로 많은 유대인이 있었다. 본문의 사람들은 B. C. 62년에 폼페이(Pompeii)에 의해 포로로 잡혀왔다가 후에 자유케 되었던 자들로 볼수 잇다. 본절에서 로마에서 왔던 사람들 중에 나면서 부터 유대인들이었던 사람과 이방인 개종자들이 '둘다'(NVI와 NASB 는 both를 사용함) 포함되었다는 사실은 당시 로마에서 이방인들을 개종시키는 유대인의 활동이 상당히 봤발했다는 것을 암시해주고 있다.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 이란 곧 재종자로 말하는데 유대인의 율법을 완전하게 지키고 그들의 의식을 준수한다는 점에서 유대인들과 교제를 누리도록 허용된 이방인을 가리킨다.

=====2:11
끄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 그레데는 발칸 반도 남방의 섬이고 아라비아는 홍해에서 유브라데에 이르는 지역, 곧 시리아와 팔레스틴 동쪽 지방에 있는 나바티안 왕국(the Nabataean)을 가리킨다. 누가는 지금까지 15개국(또는 지방)에서 살던 유대인 또는 이방인 개종자들이 예루살렘으로 모였던 것을 일일이 열거했다. 서론리 지도를 통혀여 보는 바처럼 열거된 그 나라들은 당시 지중해를 중심한 근동과 유럽지역에까지 획장되어 있었다. 이것은 앞으로 복음이 이처럼 세계 각국에 각 나라의 말로 전과될것을 상징하는 것이다(4절 ; 창 11 : 1-9 참조).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 이 말은 8절에서말했던 것을 다시 강조한 말이다. 그 강조점 소유격 '우리의' 란 말에 있다(R.H.Lenski).'우리'가 각국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들과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 모두를 지칭하므로, 본절에서는 그들이 속한 지역의 방언을 강조하기 위해'우리의'란 소유격이 첨가되었다.
하나님의 큰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 여기에서 말한 '하나님의 큰일을'(* , 타 메갈레이아 투데우)이란 그리스도의부활과 같은 특별한 사실에 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하셨던 구원의 전 사역에 관한 것을 말한다(H.Bavinck).사도들은 성령이 부어지자마자 모든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하나님의 큰 일'을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하나님은 사도들에게 성령부어주시사 이 큰 일을 깨닫고 자랑하며 하나님께감사하고 찬양하도록 하신 것이다. 이러한 이적(異蹟)은 이미 예수가 제자들에게 약속하셨던것으로(요 16 : 13. 14) 본절에 특별히 언급되어 약속의 성취를 보여준다.

=====2:12
다 놀라며 의혹하여 서로 가로되 - '의혹하여'라는 말은 '완전히 당황하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 '디아포레오'(* )의 미완료형으로 신약성경에서 누가만 사용한 독특한 용어다(5 : 24 ; 10 : 17 ; 눅 9 : 7 ).이 동사의 시제가 암시하듯이 그들은 계속해서 놀라고 당황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어찐 일이냐 하며 - 모여든 무리들은 사도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의심을 가진사람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그에 대한 긍정적인 관심을 보인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그런데 바로 다음 구절에 조롱하는 어떤 이들이 있었음을 볼 때 부정적인 시각을 사람들도 상당수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2:13
또 어떤이들은 조롱하여 가로되 - '어떤 이들'이 9-11절에 언급된 사람들을 가리키는지 또는 그외 다른사람들을 가리키는지 명확지않다. 오순절을 지키기 위해 팔레스딘 지역에거주하는 유대인들도 그 곳에 많이 왔을 것이다(14절). 따라서 누가는 조롱한 자들이 특정 부류의 사람들이 아니라 방언하는 소리를 들은 불특정인임을 지칭하기 위해 단순히 '어떤'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저희가 새 술이 취하였다 하더라 - 바울이 아덴에서 죽은 자의 부활을 주제로 전 도하는 것을 듣고 기롱한 사람들이 있었다(17:32). 또한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이 방언으로 말하면 '미쳤다'고 생각할 위험이 있다(고건 14 :23). 이처럼 '자연인은 저들의 무지와수치를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초자연적인 사실을 자연적인 원인으로 돌리는 법이다'(Bengel). 한편 '새 술'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글류코스'(* )로 '감미로운'을 뜻하는 '글뤼퀴스'(* )에서 파생된 용어다. 본래 '글류코스'는 발효(醱酵)되지 않은 포도즙을 의미했다. 본절에서는 아마 발효되기 시작한 감미로운 포도즙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된다.

=====2:15
제 삼시니...취한 것이 아니라 - 유대인들은 낮의 시간, 해 뜰 때부터 해 질 때까지를 열 둘로 나누었다. 제 삼시란 아침 9시로 유대인들의 기도 시간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이 시간에 술을 마시지 않았다(살전 5 : 7).1세기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 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제 4시까지는 식사도 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2:16
이는 곧 선지와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 이 구절은 요엘의 예언(욜2 : 28-32)이 성취되었다는 뜻이다. 여기에서 베드로는 요엘서의 예언 부분들을 상세하게 해석 하고자하는 시도가 없이 그 예언 성취 자체에만 모든 강조점을 두고 있다. 또한 베드로는 신약의 모든 저자들이 공통적으로 사용한 전형적인 인용의 기본형태, 곧 '이것이...이다'(* ,투토에스틴)라는 방법을 따라 요엘서를 인용하고 있다.

=====2:17
하나님이 가라시대 - 베드로 자신이 인용한 구절들의 중요성과 엄숙성을 강조함과 동시에 하나님이 약속하신 말씀이라는 것을 명백히 하기 위하여 이말을 사용했다. 본 구절 이후에 인용된 구절들이 약 800여 년 전에 주어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가라사대' 란 동사를 현재형으로 표현한 것은 그 예언이 불변(不變)의 진리임을 보여주고 있다.
말세에 - 욜 2:28의 맛소라 본문(MT. ; 욜 3:1)이는 '이후"(* , 아하 레이 켄)로, 70인역(LXX ; 욜 3:1)에는 '이(일)후'(* , 메타 타우타)로 표기되었으나 베드로는 "말세'라는 표현으로 대체시켰다. 유대인들의 말세란 엄밀히 말해서 메시야가 오시는 때를 가리킨다(사 2 : 2 ; 미 4 :1).베드로가 이 말을 오순절날에 임한 성령 강림과 관련하여 사용한 것을 볼때 이 말은 그리스도의 초림에서 재림까지를 지칭하는 종말 개념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종말 개념은 신약 시대에 와서 생겨난 것으로 하나님 나라의 개념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내가 내 영으로 - 이 말은 원래'내 영으로부터'(* ,아포 투 프뉴마토스무)란 의미로 70인역(욜 3 : 1)의 인용구다. 이는 성령을 각 사람에게 부어 주실 것을 가리킨다(딛 3 : 6).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 "모든 육체'란 '모든 사람'을뜻한다. 모든 사람이 흩어진 유대인들만 가리킨다는 견해(Knowling) 가 있으나 이는 타당하지않다. 그 이유는 본서의 전체적인 문맥에 비추어볼 때(10 : 45참조) 오순절 성령 강림이 복음의 우주적인 확산을 상징하는 사건일 뿐 아니라 모든 육체에 성령을 부어준다는 말은 이후에 있게 될 성령의 보편적인 강령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렇다. 따라서 여기에서 말하는 모든 육체란 이방인을 포함한 모든 사람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된다(Meyer).지금까지 성령은 그리스도의 구속을 위해서 유대 지역에서 제한적(制限的)으로 활동하셨으나 오순절 이후부터는 온 세상으로 활동 영역을 넓히셨다.
너희의 자녀들은...꿈을꾸리라 - '예언', '환상', '꿈'은 모두 구약 시대에 어떤 특수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계시 방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오순절을 기점으로 하여 모든 사람이 누리게 될 것이라는 사실은 신약 시대에서는 모든 사람이 성령의 은혜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신약 시대는 모든 사람이 믿음을 통하여 성령을 부여받으며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것이다. 그래서 혹자는 오순절 성령 강림이야말로 하나님의 최종적인 계시이며 그것은 모든 교회를 위한 것이라고 한다(Grosheide).

=====2:18
남종과 여종 - '종'에 해당하는 엘라어 '둘로스'(* )는 히브리어 '에베드'(* )와 거의 동의어로 사용된다. 이말은 구약에서 '사환'(使喚)을 의미하는 '타아르"(* )와는 달리 주인의 재산 일부로서 간주된 '노예'(slave)에 해당한다. 그렇기 때문에 '둘로스'는 주인에게 충성과 헌신을 다해야 했다. 본절에서는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는 성도를 가리킨다. 예언할 것이요. 이 표현이 요앨서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아마 베드로가 앞 부분과 문장구조를 맞추기 위해 삽입시킨 것으로 추정된다.그래서 베자 사본(D)과 터툴리안(Tertullian)은 이 단어를 생략했다.

=====2:19
기사와...징조를...피와 불과 연기론다 - 혹자는 본 구절과 다음 구절에 묘사된 자연계의 기사와 표적들이 베드로가 설교할 당시의상황에서는 무리들에게 더욱 호소력있게 작용될수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예수를 통하여 여러가지 초자연적인 기사가 이루어졌을 뿐 아니라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에 잠시 해가 어두워진 사실을 예루살렘 사람들이 목격한 지 불과7주 정도 밖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F. F. Bruce) 따라서 이러한 기사와 징조는'여호와의 날'의 도래에 대한 표시이며 이 날은 심판의 날 곧 "마지막 날'인 동시에 보다 직접적으로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구원을 얻는(초대 교회 당시를 포함한) 모든 날들을 지칭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성경 본문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볼 때(눅21 : 25 - 28)오히려 본절의 표현은 마지막 날 있을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묘사로 이해됨이 무난하다. 한편 '기사'와 '징조"란 다같이 하나님의 초자연적 역사를 표시하는데 전자는 주로 하나님의 이적적 권능(wonders)을 나타내고 후자는 장래 일어날 일이다.하나님의 권능에 대한 표시(sign)을 가리킨다. 이 '기사'와 '징조'는 '피와 불과 연기'라는 구체적인 표현으로 설명되고 있다.

=====2:20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 '영화로운'(* , 에피파네)은 그리수도의 재림에관하여 사용된(살후2 : 8 ; 딤전 6 : 14 ; 딤후4 : 1 ; 딛 2 : 13) '타나나심'( 8 ,에피파네이아)과 동일한 어근을 갖는다. 따라서 본구절은 주님의 재림에 대한 표현으로서(고존 1 : 8 ; 고후 1 : 14 ; 빌 1 : 10 ; 살전 5 : 2)심판과 동시에 구원이 완성되는 날을 말한다. 이 '주의날'은 구약에서도(사 13 : 10 ; 암 8 : 9 등)하나님의 심판의 날을 가리킨다. 이러한 표현은 예수께서도 세상의 종말과 관련해서 언급하신(마 24 : 29)것이다.

=====2:21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 - 사람이 주의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기도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여기서 '부른다'는 표현을 '기도'로 한정시킬 필요는 없다. 오히려 본절에서 '부른다'는 표현은 '믿는다'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롬 10 : 13, 14).

=====2:23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 '정하신'(* , 호리스메네)이란 '고정되어진, 결정되어진'의 의미로 하나님의뜻을 영원 속에 두었다는 말이다. 이는 하나님이 영원 속에서 예수를 통한 구원 계획을 가지셨다는것을 보여 준다. 하나님의 정하신 뜻은 인간에의해서 변하지 않는다. 따라서 유대인의 악한행위가 하나님의 영원 전에 세우신 계획을 바꿀수 없었던 것이다. 내어준 바 되었거늘 - '내어준바'(* , 에크도톤)는 동사적 형용사로서 수동분사와 같은 용법으로 사용되었다. 이에대해 혹자는 이 표현이 유다에 의하여 내어준 바되었다는 것으로 이해한다(Robertson). 그러나 오혀려 본절에서 베드로는 내어준 자에 단순히 유다만 포함시키지 않고 예수에 대해 거짓 증거하고 조롱했던 유대인들도 포함시키고 있는듯하다.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 이표현은 팔레스틴의 로마 당국자들을 가리키는데 그들은 유대 당국자들에 의하여 선동(煽動)되는그대로 실행하였던 자들이다(Richard N. Longenecker). 유대교 문헌에서는 이방인들이 '악한자들'(고전9 : 21)로서 종종 표현되고 있는데 이것은 그들이 고의로 죄를 짓는다거나 또는 단순히 모세의 율법을 지키지 못한 자들이라는 이유때문이었다. 못박아 죽였으나 - 독자들은 그곳에모인 자들 모두가 예수를 못박아 죽인 것처럼베드로가 표현하는 듯한 인상을 받게 된다.그러나 실제로 그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죽음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가 그렇게 표현한 것은 예수를 죽음에 내어주어 십자가에 못박은 것은 개개인의 죄가 아니라 유대 민족 전체의 죄였기 때문이다.

=====2:24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 본문에서는 예수의 부활이 법 없는 자들의 어떤 행동과는 전적으로 무관하게 하나님의 역사하심(엡 1: 19,20)을 따라 되어진 일임을밝혀주고 있다. 예수의 부활은 본서에서 핵심되는 주제이다(32절 ; 3 : 15 ; 4 : 10 ; 5 : 30 ; 10 : 40 ; 13 : 30-34, 37 ; 17 : 31 ; 26: 23) 여기에서 '사망의 고통'은 히브리어의 배경에 의하면 사냥꾼들이 포획하기 위하여 놓은 덫과 같은'죽음의 덫', 혹은 '매는 줄'을 뜻한다. 예수께서는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셨으나 죄가 없으시므로(히 4 : 15 ; 9 : 28 ; 벧전 2 : 21 ; 요일 3 : 5) 그 사망의 올무에 매여 있지는 않으셨다. 그는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신 것이다(고전 15 : 4-6).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수 없었음이라 - 이 구절은 예수의 메시야 되심을 다시 한번 강조하는 말이다(요 20:9). 사망조차 예수 위에 왕노릇 할수 없다는 사실을 언급함으로써 베드로는 예수가 항나님의 아들되신 권위를 입증하고자 했다.

=====2:25-28
베드로는 자신의 주장을 확증하기 위하여 구약의 시편(16: 8-11)을 인용한다.이는 자신이 8절에서 예수에 대하여 말한 바를성경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한 것이다. 시 16: 8-11은 대표적인 메시야 예언에 대한 기록 중 하나로서 메시야의 부활(復活)에 대한 내용을 담고있다. 그는 이 예언의 말씀을 들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나사렛 예수가 바로 메시야인 것을 입증하려는 것이다. 베드로의 이와같은 논중은 예수 자신에 의하여 세워진 해석에 기초하고(막12: 35-47 참조), 부활 이후의 기독교 전통에도 부합되며, 또한 그 당시에 일반적으로 인용되었던 미드라쉬의 제반 해석 방법과도 일치되게끔 표현된 하나의 논증이다(Richard N. Longenecker). 이 부분의 각절 주석은 본서의 시편 주석을 참조하라.

=====2:29
형제들아 - 이 말은 헬라어 본문에 따라 직역하면 '사람 형제들아'라는 말이다. 이는'유대인들아'(14절)라는 말이나 '이스라엘 사람들아'(22절)라는 말보다 친근감있는 표현이다.베드로는 이제까지 인용한 구약의 맡씀에 대한 결론을 말하려고 공손히 청중들의 주의를 끌고있다. 내가 조상 다윗에 대혀여 담대히 말할수 있노니 - 여기에서 "말할 수 있노니'란 헬라어 본문에 따르면 '말하게 허락하면'의 뜻이다. 흠정역(KJV)에서는 이를 잘 반영하여 '나로 말하게하라'(Let me speak)고 번역했다. 여기서 베드로는 '조상 다윗에 대하여' 말할 때 자신이 청중들과 형제로서, 이스라엘의 왕통의 선조로서존경받는 다윗에 대해 말할 수 있게 허락해 달라는 공손한 태도를 나타냈다.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 다윗의 묘는 실로암 못 남쪽에 있었는데(Bruce)현재는 예루살렘 마가의 기념교회 가까운곳에 다윗의 무덤으로알려진 유대교의 성기가있다고 전해진다. 다윗은 이처럼 죽어서 그 무덤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기 때문에 앞서 인용한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을을 당치 않게 하실 것'이란 구절은 자신을 가리킨 것이 아니라 오실 메시야에 대한 예언이었음이 분명하다.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다윗의 묘는 여러 개의 방으로 구성되어있었으며 그 중에 하나는 요한 힐카누스(John Hyrcanus)에 의해 3,000달란트의 돈이 도난당했으며 그후 헤롯에 의해 다른 방도 도굴(盜掘)되어 더 많은 돈이 도난당했다고 전해진다.

=====2:30
그는 선지자라 - 다윗은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메시야에 대해 예언했기 때문에 선지자였다(삼하23:2;마 22:43). 비록 구약에서 그가 예언하는 무리 중에 포함되어 예언한 적은없으나 자신의 후손 중에서 메시야가 나올 것을 미리 알고 예언했으므로 영감받은 선지자 중 하나로 여겨질 수 있다.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하심을 알고 -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처음 하신약속은 삼하 7:11-16에 기록되어 있다. 그 본문에서 언급된 것처럼 '맹세'에 관한 표현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시 89:3,35에서는 '내종 다윗에게 맹세하기를...', '나의 거룩함으로 맹세하였은즉...', 이라고 언급되어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약속하신 말씀들은 하나님 자신의 신실성과 거룩함에 근거하여 영원 불변한 서약으로 맹세하신것을 알수 잇다.

=====2:31
미리 보는 고로...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 이 구절은 이미 인용된(27절) 시 16:10에 대한 해석이다. '미리본다'는 것은 선지자로서 계시와 영감을 가지고 행하는 것을 의한다. 이스라엘 사회에서 선지자는 예언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기능을 갖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선지자를 단순히 예언자 정도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다윗은 장래에 될 일을 미리보고 예언한 예언자이면서 영감받은 시(詩)를 많이 써서 하나님을 찬양한 선지자였다. 다만 본절에서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예언과 관련된 다윗의 선지자의 기능이 강조되고 있다.

=====2:32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 베드로는 이미 22절에서 '예수'를 언급했으며 그 다음부터 예수에 대해 적용된 예언을 설명했으므로 본절에서 '이(사람을)'(* ,투톤)라는 표현을 사용할수 있었다. 그리고 베드로는 '이'를 사용함으로써 다윗에 의해 예언된 메시야가 바로 '예수'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베드로는 자연스럽게 예수의 부활이 예언의 성취임과 역사적 사실임을 강조했다. 우리가 다 이일에 증인이로다 - 본 구절의 헬라어 본문에 관계대명사 '후'(* )가 사용되어 해석상의 문제를 야기 시킨다. 즉 본 구절은 이 관계대명사의 선행사(先行詞)가 무엇이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1)하나님 : 이에 따라 본문을 직역하면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증인이다.' 벴겔(Bengel)같은 학자들이 이해석을 지지한다. (2)앞절 전체 :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를 받는 것으로 이해하여 개역 성경처럼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다(Meyer, Lenski, Bruce, Ralph Earle). 대부분의 영역 성경도 이번역을 취한다. (3) 예수 : '우리 모두가 예수의 증인이다' 란 의미가 된다(Alford, Knowling). 그런데 베드로는 예수의 부활을 강조하여 설교하고 있으므로 '예수'아 '하나님'을 선행사로 취하는 것보다 앞절 전체를 선행사로 보는것이 가장 무난하다. 따라서 베드로는 예수의 부활을 목격한 모든자들이 부활에 대한 증인임을 진술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의 부활은 사도들의 중심 메시지였고, 그들은 본절 외에 네 차례나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증인들이라고 강조했다(3 : 15 ; 5 : 32 ; 10 : 39-41 ; 13 : 30,31). 그들은 자기들이 보고 들은것들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2:33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 여기에서 '오른손으로"란 하나님의 전능과 그의 권능을 상징하는 말이지(엡 1 : 20 ; 히 1 : 3 ; 8 : 1 ; 10 : 12 ; 12 : 2 벧전 3 : 22 비교)승천한 예수의 위치에 대한 직접적인 표현은 아니다. 물론 허비(Hervey)는 '오른손으로'를 '오른편에'로 해석하여 예수가 승천하여 하나님의보좌 우편에 계시는 것으로 주장한다. 그러나 이주장은 여격이 장소로의 의미보다는 방법의 의미를 나타내므로 타당하지 않다. 한편 '높이시매'라는 말은(3 :13 ; 빌 2 : 9)그리스도의 몸의부활과 승천으로 말미암아 나타난 영광스러움을내포하는 말이다. 이것은 신학적인 용어로 예수의 승귀(昇貴)라 칭한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 예수가 약속하신 성령(1 : 5 ; 요 14 : 16 ; 16 : 13)을 아버지께 받아서 보내는 권능을 얻었다'(1 : 8 ; 요 14 : 26 ; 15 : 26 ; 16 : 7)는 표현은 성경의 곳곳에서 언급되고 있다.이처럼 성령은 성부께로부터 나와서 성자를 통해오시는 것이다. 여기서 성령이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온다는 종교 회의의 결정이 비롯되었다(니케아 신조).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 무리들이 보고 들은 것은 성령이 임했을 때 일어났던 현상에 대한 것으로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3절)과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2절)와 백이십 명이 '다른 방언으로 말하는 것'(4절)을가리킨다. 부어주셨느니라 - (* ,여세케엔). 이 말은 '에크케오'(* ,쏟아버리다)의 부정과거형으로 예수께서 약속하신 것을 성취하셨음을 보여주고 있다. 동시에 이 말은선지자 요엘에 의하여 사용되어진 표현으로(17절)그의 예언이 여기에서 성취되었음을 의미한다.

=====2:34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 그는 죽어서 장사되었고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당시에 그의 무덤은 예루살렘 가까이에 있었다.그리고 그의 육체는 무덤에서 썩었고 승천하지못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지금 인용할 이 시는다윗 자신에 적용시킬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승천에 대하여 이야기할 것이었다. 주께서 내주에게 - 이 구절은 시 110 : 1의 인용으로 후기 유대교 시대에 유대교 해석자들이 난해한 문제로삼았던 구절이다. 문제는 '내 주'가 과연 누구인가 하는 문제인데 몇몇 고대의 랍비들은 이시편을 아브라함과 관련지어 해석했고, 또 어떤사람들은 다윗과 관련지어 해석했으며 심지어는 히스기야 왕과 관련지어 해석할 자들도 있었다.그리고 기원후 약 7년이 될 때까지 랍비 문헌에서 이 시편 110편이 메시야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된 확실한 중거도 없다(D. M. Hay)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시 110: 1을 메시야에 대한예언으로 해석하여 그것을 자신에게 적용(適用)시킨 적이 있다(마 22:41-46 ; 막 12 : 35-37 ; 눅 20 : 41-44).베드로는 이 시편이 메시야에 대한 예언임을 분명히 인식하고 언급했다.

=====2:35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 바울이'모든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빌2 :10)라고 가르친 적이 있듯이 '발등상 된다"는것은 항복을 의미한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시 110 : 1 주석을 참조하라.

=====2:36
그런즉 이스리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 베드로는 본문에 이르러 예수를 주와 메시야로 선포하여 자기 설교의 절정이자 결론에 도달했다. '온 이스라엘'(* ' ,파스 오이코스 이스라엘)이란 문자적으로는 "이스라엘의 모든 집'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말은 매우 강조적인 표현으로 이스라엘 전 민족 또는 종교적 공동체를 가리킨다.
너희가 십자기에 못박은...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 예수는 자신의 메시야 직분을 공생애를 통하여 죽기까지하심으로 완전히 성취하셨고 또한 하나님에 의해 부활하셨으며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므로 '주와 그리스도'란 칭호가 그에게 참으로 합당한 것이다. 또한 이 칭호가 그에게 합당한 이유는 신약의 다른 여러 곳에 나타나는 기독론적인 진술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롬 1 : 4 ; 빌 2 : 9-11 ; 히 3 : 14 ; 요일 5 : 6).특별히 이 '주와 그리스도'라 는 칭호는 바로 베드로의 메시지의 제목이요 초대 교회 신앙 고백의 내용이었다(롬 10 : 9 ; 고전 12 : 3). 한편 여기서 그리스도에 적용되는 주(* , 퀴리오스)는 아마 구약의 여호와와 일치되는 표현이다. 즉 34절에 인용된 '주께서'가 시 110 : 1에 서 '여호와께서'로 언급되었으며 70인역(LXX)에서 '퀴리오스'로 번역되었다. 또한 '여호와'란 표현을 70인역은 거의 대부분 '퀴리오스'로 번역하고 있다. 따라서 베드로는 구약의 '여호와'와 '예수'를상호관련시키고 있는듯하다(Stanley D. Taussaint). 또한 베드로는 설교 속에서 '주'란 표현을 예수와 하나님께 동시에 적용시키고 있다(21,34,39절). 그러므로 여기에 이 단어가 사용된 것은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에 대한 강조적인 표현이라 할수 있겠다. 이 ' 주와그리스도'는 유대인들의 유일한 소망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최고의 능력과 영광으로 유대 민족을 로마의 속박에서 해방시켜 모든 민족 위에 높여주는 정치적인 위대한 통치자로서의 주와 그리스도, 곧 메시야를 기대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그들은 예수가 자신들의 메시야 사상과 부합되지 않게 가르치며 활동하는 것으로 생각했기에 '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던 것이다.

=====2:37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 '찔려'(* , 카테뉘게산)라는 동사는 '때리다' 혹은 '격하게 찔러 관통하다','실신시키다'의 뜻을 담고 있다. 따라서 이 말은 격심한 마음의 염려와 양심의 가책이 엉켜진 매우 심각한 고통을 의미한다. 호머(Homer)는 '발굽으로 땅을 옴푹 패게 한다'는 단어를 사용하여 그 내면적 의미를 잘 묘사해 주고 있다. 아무튼 무리들이 '마음에 찔렸다'는 것은 양심의 가책과 더불어 이성적인 죄책감(罪責感)을 강하게 느끼고 있었음을 의미한다(Alexander). 이처럼 제자들 속에 역사하신 성령은 예수의 예언대로(요 16 : 8-11)그들의 죄를 책망하는 일을 행하신 것이다. 무리들은 베드로의 설교를 경청하고 나서 저희의 유일한 소망이며 오랫동안 고대하던 그 메시야를 스스로 배척하여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는 것을 깨닫자 몸서리치도록 놀라며 '마음에 찔린' 것이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 - 베자사본과 몇몇 서방 본문들에는 '다른 사도들'이란 말에서 '다른'이란 형용사가 생략되어 있는데 이것은 베드로를 사도들과 특별하게 구별하기위한 의도적인 생략으로 이해될 수 있다. 즉'다른'이란 표현이 삽입되면 베드로와 같은 사도의 범주에 들어가지만 생략될 경우 베드로가 사도들보다 우월한 어떤 권위를 지닌 인물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누가가 강조하고있는 것은 초대 교회 안에서의 사도들의 주도권이지 베드로 자신의 주도권이 아니다(Richard N.Longenecker). 사실상 누가는 그의 복음서와 본서에서 다른 복음서와 마찬가지로 베드로를 사도들 가운데서 으뜸되는 것처럼 묘사하고 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도들의 대변자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우리가어이할꼬 - 이 물음은 필사적(必死的인 부르짖음이었다(16 : 30). 바울도 회개할 때 이와 같은 표현을 사용했다(22 : 10).그들은 자신들의 죄를 깨닫고 애통하면서 사도들에게 도움을 청하게 된 것이다. 또한 그들은 이제 성령의 지시를 기다리는 겸손한 자세를 가지게 되었다.

=====2:38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회개하다'는 마음의 완전한 변화와 죄의 고백을뜻한다. 마음의 변화란 전인격에 대한 것으로 죄와 불신에서 떠나 그리스도에게 향하는 인격그리고 신앙과그리스도를 통한 성결로 나아가는 인격에로의 변화를 의미한다. 이러한 회개의 메시지는 본서에 여러 번 반복되었다(3 : 19 ; 5 : 31 ; 8 : 22 ; 11 : 18 ; 13 : 24 ; 17 : 30 : 19 : 4 ; 20 : 21 ; 26 : 20).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 이 말은'너희들 한 명 한 명이 각각 세례를 받으라'는뜻으로 여기에서 맡하는 세례는 유대교에서 시행해왔던 회개와 사과의 외적 상징으로서의 물세례(13 : 24 ; 18 : 25 ; 19 : 3 ;막 1 : 4)와는 판이하게 구별되었다. 왜냐하면 베드로가 말한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받는 세례일 뿐아니라 성령을 받는 일과 관련된 세례이기 때문이다. 한편 '세례를 받으라'는 명령은 나머지부분과 연관해서 여러 견해가 나올 수 있다. (1)회개와 세례가 사죄의 요인(要因)이 된다는 견해이다. 이 견해에 따르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세례가 필수적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견해는 성경의 진술과 일치하지 않는다. 성경은 어디서나 죄사함 곧 구원은 오직 믿음에 기초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요 3 : 16 ;롬 4 : 1-17 ;11 : 6 ; 갈 3 : 8-9 ; 엡 2 : 8, 9). (2) 죄사함의 근거로 세례를 받아야 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견해이다. 이 견해에 의하면 이 구절에서 사용되는전치사(* ,에이스)는 '근거하여'라고 번역된다. 따라서 이 구절을 번역하면 '세례를 받으라...너의 죄사함의 근거로서'가 된다는 것이다.그러나 여기에서는 '근거하여'란 의미보다 '의도나 방향'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3)'각각...세례를 받고'의 구절을 삽입구로 취하는 견해이다. 따라서 이 견해에 의하면 '회개하여, 죄사함을 얻으라'고 자연스럽게 연결되어진다('회개하다'는 동사가 복수이고 '너희 죄사함을 받으라'의 '너희'도 복수이기 때문이다).그러나 해석상의 난제를 피하기 위해 헬라어 본문을 의도적으로 변경할 필요가 없다. 본문을직역하면 '죄사함을 위하여'란 의미를 지니며 대부분의 영역 성경도 이렇게 번역한다. 왜냐하면 베드로가 본절에서 단순히 '세례 받으라'는의미로 설명한 것이 아니라 "예수의 이름으로'라는 말을 강조하여 이 이름과 세례를 연관시켰기때문이다. 즉 유대인들이 생각하던 세례와는 질적으로 다른 예수의 이름에
미가 구분된다. (1) '그리고' 이 의미는 '카이'의 일반적인 용법이며 본절에서도 '그리고'로 번역될수있다. 이렇게 번역될 경우 본구절과 앞구절은 단순히 대등적일 뿐 인과 관계가 없다.(2)'그리하면' : 이 의미는 '카이'의 특별한 용법이다.이 번역을 취하면 앞 구절과 본 구절은 인과관계에 놓이게 된다. 즉 회개와 죄사함을 위한 세례가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되는 조건이 된다.그런데 앞 문장이 명령문이므로 여기서 "카이'는 두번째 의미로 번역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한편 '성령을 선물로'란 표현을 직역하면 '성령의 선물'(the gift of the Holy Soirit, NIV ;성령의 은사들)과 구별되어야 한다. 전자는 그리스도를 통해 아버지께서 보내신 성령 자체이시며, 후자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세우며 그 유익을 위하여 각 사람 에게 나눠주시는(고전 12 :11)성령의 은사들을 말한다. 따라서 본 구절은 개역성경처럼 번역되는 편이 타당하다.

=====2:39
이 약속 - 이것은 예수께서 하신 약속이며(1 : 4) 또한 선지자 요엘이 예언한 약속로서(욜2 : 28-32)죄사함과 성령의 은사(38절)를 포함한 것이다.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 베드로는 이 약속이 자기 설교를 듣는 청중들(너희)과 그들의 자녀들(너희 자녀) 그리고 모든 먼 지방(나라)에 있는 자들(모든 먼 데사람)을 위한 것이라고 선포하였다. 이 구절에서'모든 먼 데 사람'이라는 표현을 장차 태어날유대 자손들에 대한 언급으로 보는 자들도 있다.그러나 '먼 데'(* , 마크란)라는 단어가 70인역 (LXX)에서나 신약의 어느 곳에서도 시간적인 의미로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용어는자연히 공간적(空間的)으로 핵석되어야 할 것이다(Richard N. Lingenecker). 그러나 이렇게 해석할 때 '먼 데'라는 말이 절대적으로 디아스포라에게만 해당되는 것인지(Meyer, Wendt)이 이방인도 포함한 것인지(Bengel, Alford, Alexander, Knowling)문제가 제기된다. 그러나 유대인과 이방인이 조금의 차별도 없이 구원에 참여하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인 것을 고려할 때 베드로가 여기에서 유대인만 지칭하고 이방인을 제의시켰다고는 볼 수 없다. 특히 '너희'란 표현속에는 팔레스틴에 거주하는 유대인들과 디아스포라 유대인들 및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이포함되므로 '먼 데 사람'은 유대교 밖에 있는 이방인들을 가리킴이 분명하다. 따라서 누가는 본문의 '먼 데'라는 말을 22 : 21에서와 같은 의미로 사용했다고 결론지을 수 있을 것이다.

=====2:40
또 여러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가로되 - '여러 말' 이란 누가가 본문에서 기록한 것보다 더 많은 말을 베드로가 하였다는것을 암시하고 있다. 한편 '확증하며'(* ,디아마르틔로마이)란 동사와 '권하여'(* , 파라칼레오)란 동사에 접두어(prefix) 로 덧붙여진 전치사들(* , '디아' * , '파라')은 본래적 의미에서 파생되었으나 강조적으로 사용된다. 곧 이 전치사들은 마르튀레오(* , '증거하다'), 칼레오(* , '부르다')라는 원형 동사에 강의적(强意的)인 의미를 부여해 준다(R.N.Lonfenecker).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 당시의 세대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야를 거역하고 십자가에 못박았기에(눅 11 : 29 ; 17 :25) 예수님의 말씀대로 '믿음이없고 패역한 세대'(눅 9 : 41)요 '악한 세대'(마 16: 4; 17: 17)였다. 패역한 세대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은 구약에서도 보편적으로 인정되었다(창 7 :22;19 : 24).그러나 그러한 불신앙 가운데서도 유대인들이 회개한다면 그들은 그 세대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마21 :41 - 44 ; 22 : 7 ; 23 : 24 - 24 : 2)

=====2:41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 이 말은 모든사람은 포함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말이다. 이는 베드로의 '말'(* , 톤로곤)에 찬동하여 수긍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 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 혹자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확성기(擴聲器)도 없이 베드로의 설교를 들을수 없으며 또한그 당시의 예루살렘 인구가 통틀어 25,000-30,000명에 불과했으므로 3,000명의 회개 사실을부정했다(Haenchen). 이에 대해 롱게네커(Richard N.Longenecker)는 다음 두 가지 근거로그 견해를 반박했다.(1) 그는 크라이슬러(B. C. Crisler)가 팔레스틴 지방에서 실험한 결과를 따른다. 즉 그는 팔레스틴에서는 설교자가 어떤위치에 있을 때 소리의 반항음에 의해 수많은무리가 들을 수 있는 설교를 할 수 있었다고 진술했다. 아마 예수도 이러한 지리적 입지를 고려해서 그를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설교할수 있었을 것이다. (2)그는 '더하더라'는 동사가 미완료 과거형으로 사용된 점에 주의를 기울였다.이것은 더해지는 수가 단회적인 것이 아니라 설교의 결과로서 더해지는 과정이 계속 있었음을의미한다. 즉 3,000명의 대중들이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한꺼번에 반응했다는 의미가 아님을보여준다. 따라서 3,000이라는 수효 자체는 부정될 수 없다. 한편 본 구절에서 3,000명이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도 학자에 따라 문제시 된다.왜냐하면 3,000명이나 되는 사람이 세례를 받을수 있는 곳은 요단강뿐인데 베드로의 설교 장소는 예루살렘으로서 그 만큼의 수효가 세례 받기에는 적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난제는 다음두 가지로 해결될 수 있다.(1) 3,000명이 일시에 세례 받은 것이 아니라 분산되어 12제자에 의해지속적으로 셰례받았을 것이다(H. Marshall, W. Neil). 즉 제자의 수가 점점 더해진 것처럼 세례도 점진적으로 제자들에 의해 행해졌을 것이다.(2) 여기서 세례를 침례로 이해할필요는 없으며 굳이 약식 세례로도 생각할 필요가 없다. 3,000명이예수의 이름을 믿게 된 것을 누가는 보다 실감나는 표현인 '세례'로 언급했을것이다.

=====2:42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 여기에서 '사도의 가르침'은 헬라어 본문에 따르면 문자적으로 '사도들의 가르침'으로 번역된다.여기서 '사도'는 복수형이지만 '가르침"은 단수형이다. 이것은 사도들이 주께서 허락하신 권위를 가지고 각기 주어진 바 임무대로 가르침에 전력했지만 그 교훈의 통일성(統一性)을 유지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들이 가르친 내용은 예수님의 말씀들(20 : 35)과 행하신 일들이었다.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여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 여기에서 '교제'와 '떡을 떼며 기도하기'사이에 '그리고'란 접속사가 생략되었으므로 이는 떡을 떼며 기도하는 것이 교제와 동격인 것을보여준다. 교제(* , 코이노니아)에 있어서 희생적인 사랑의 정신으로 이웃에게 봉사하며 물질적으로 도와 주는 것과 영혼의 교통곧 기도하는 일은(Bruce) 필수적이라 하겠다.또한 떡을 뗀다는 것은 성찬과 애찬을 동시에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46절 ; 20 : 7 ; 고전 10 : 16 ; 11 : 23-25). 그런데 46절에서 '떡을 떼는것'과 '음식을 먹는 것"이 서로 구분되어 언급되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본 구절에서 떡을떼는 것은 예수께서 제정하시고 제자들로 하여기념하라고 명령하신 '성찬'(눅 22 : 19)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한편 '전혀 힘쓰니라"는동사는 미완료과거형으로 어떤 행동 방침에 전심전력을 다하여 지속적(持續的)으로 교제했음을의미한다(1 : 14 ; 6 : 4 ; 8 : 13 ; 롬 12 : 12 ; 13 : 6 ; 골 4 : 2). 그리고이 말은 제자들이 '교제'를 매우 중요시했음을 암시한다.

=====2:43
사람마다 두려워 하는데 - '사람마다"라는 말은 44절의 '믿는 사람'과 대비되는데 여기서는 예루살렘의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 대한 수사법상 과장된 표현이다. 본 구절의 직접적인의미는 '모든 혼에게 두려움이 되고있더라'로 공포가 아니라 존경심과 경외심에서 비롯된 두려움을 의미한다(막 4 : 41 ; 벧전 1 : 17). 사도들로 인혀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 기사와 표적들은 그들이 사도라는 것을 확실히 증명해 보였다(고후 12 : 12 ; 히 2 : 3-5). 이러한 증명을 위해 사도들은 성령을 통하여 표적과 기사들을 많이 행했다(4 : 30 ; 5 : 12 ; 6 : 8 ; 8 : 6, 13 ; 14 : 3 ; 15 : 12). 그것들은 예수께서 지상에있을 때 행하신 기적들이 하나님 나라의 표적들이었던 것과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다.

=====2: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 그들이 각자의 가정을 버리고 한 공동체 생활을 구성한것은 아니었다. 여기에서 '있어'란 미완료 과거형으로 신자들이 늘 함께 모이고 있었다는 것을보여준다. 그들은 이전에는 구약의 규례를 준수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모였지만 이제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때문에 함께 모이게 되었다. 이처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은 여러 가지 외적인 요인들을 극복하고 그들을 하나의 몸으로 결속(結束)시켰던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영적 백성으로 참된 교제를 했음을 의미한다. 구약시대에 '언약'(* , 브리트) 언약을 맺는 당사자 곧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결속을 의미했다. 예수를 통한 신약의 공동체도 그 언약에 기초하여 예수 안에 있음으로써 하나님과 결속될뿐 아니라 공동체간에 또한 공동체를 구성하는각 개인간에 영적 결속이 이루어졌다. 한편 여기에 언급된 사람들이 오순절 성령이 강림했을때 성령을 체험했던 사람들만을 가리키는지 성도의 수에 가입된 3,000명도 포함되는지 분명하지 않다. 아마 오순절 성령 강림을 체험한 사람외에 예루살렘에 거주하면서 예수를 믿게 된 자들이 교제에 참여하게 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외국에서 온 디아스포라 유대인들과 유대교로개종한 이방인들은 오순절 절기 행사가 끝난 후 자기들이 거주하던 나라로 돌아갔을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 예루살렘의 그리스도인들 상호간에 이루어진 영적인 일치는 서로 필요한 물건을 공유하는 생활의 형태로 표출되었다. '물건을 서로 통용했다'는 것은 공산주의와 같은 방식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물건을 서로 통용하려고 했고, 모든 재산을 필요에 따라 언제든지 공동의 유익을 위하여 내어놓을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 공동체는 또한 토마스 모어(Thomas More)와 캄파넬라(Campanella)가 꿈꾸던 이상향과도 다르다. 이들에게는 공동체가 유지될 수 있는 성령이 빠져 있으며 사랑도 강조되지 않는다. 이들의 이상향은 원시 시대의 공동체 생활과유사한반면, 성령에 의한 공동체는 철저히 사랑이라는 원리와 언약이라는 결속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유지된다는 점에서 뚜렷이 구별된다.

=====2: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 여기서 묘사된 유무 상통(有無相通)의 현상은 오직 성령의 하나되심을 따라 이루어진 특이한 현상을 보여주는 일례라 하겠다. 이러한 현상은 성령께서 초자연적으로 역사하신 예루살렘 교회에 한정되었고 그외 다른지역에서는 일어나지 않았다. 따라서 이것은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의 역사가 얼마나 큰 일을하도록 하셨는가 를 보여주는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특이한 현상이라 하겠다.특히 예루살렘 공동체는 바울을 통해 이루어진 이방인 공동체와 이 점에서 구별된다. 이방인 공동체에서는 결코 유무 상통의 흔적이 발견되지않고 오히려 사유 재산이 인정되었다(고전 11 : 21, 22).

=====2:46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 성령을 받은 초기 예루살렘 성도들은 날마다 성전에 모이는 유대 전통과 관습에따라 행동함으로 그들의 신앙을 표현하였다. 이는 아직까지 그리스도인들과 유대인들 사이에 아무 불화도 일어나지 않고 있었음을 암시한다.초대 교회의 신자들이 자주모이는 장소는 성전과 성전 바깥뜰 동편에 있는 솔로몬 행각이었다(3:11; 5: 12). 그들은 거기서 서로 마음을 같이하여 예배와 찬양을 드린 것이다.그러면서 또한 성전에 오는 유대인들을 전도하기 위해서도 제자들은 성전에서 모임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비록 그들이 계속해서 모이기를 힘썼지만 전적으로 유대인들의 방식과는 달랐다. 유대인 들은대부분 율법의 형식과 그에 따른 관습에 의해모였으며 제사를 드렸으나 초대 교회 성도들은 성령에 의해 자발적(自發的)이요, 기쁨으로 충만한 상태에서 모였다(5 : 41 ;8 : 8 ; 11 : 23 ; 12 : 14 ; 13 : 48,52 ; 14: 17 ; 15 : 3, 31 ; 16 : 34 ; 21 : 17).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 여기서 누가는 성전에서의 모임과 집에서의 모임이 구분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본 구절의 '집에서'가 헬라어 본문에서 매우 애매한 표현으로 언급되어 있다. 즉 이말의 헬라어 '카트 오이콘(* )에서 전치사 '카타'(* )를 어떤 의미로 취하느냐에 따라 조금씩 의미상 차이가 생긴다.(1) 다른 집으로'로 번역될 수있다(KJV). (2) 선택의의미 ; '어떤 집들 중에 한 집에서'란 의미를 나타내게 된다.(3)장소의 의미 ; '집에서'란 의미로 번역될 수 있다. 그런데 '오이콘"은 단수이면서 관사가 없다. 이 말은 떡을 떼는 집이 특별하게 정해져 있지 않음을 시사한다. 따라서(1)의 번역이 가장 타당하지만 의미상 RSV 나 NIV 처럼 '그들의 집에서'(in their homes)라는 번역도 가능하다. 그러나 이 말이 ' 그들 각자의 집에서' 란 의미로 표현된다면 타당하지 않다. 왜냐하면 여기서 떡을 떼는 것은 각 가정에서 음식을 먹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성찬과 애찬의 의미를 동시에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도들은 넓은 공간이 있는 집으 을 택해서 하루씩 돌아가면서 모였음이 분명하다. 그들은 기쁨이 넘쳐 이집 저집을 돌아다니며 모임을 갖고 음식을 나누면서 교제를 나누었다.

=====2:47
하나님을 찬미하며 - 이미 성령의 선물을 통하여 최고의 축복을 발견했으므로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찬미는 자발적인 마음의 표현이었다. '하나님을 찬미한다'는 표현은 누가가 즐겨 사용한 표현으로서 신약성경에서 9번 언급된 중에 누가가 7번 사용했다(본절 ; 3 : 8, 9 ; 눅2 : 13,20 ; 19 : 37 ; 24 :53 ; 롬 15 : 11).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 이와 같은 초대 교회의 분위기는 총독이었던 플리니우스(Plinius)가 트랴안(Trajan)황제에게 보낸 서신에서 잘 나타나있다. 즉 그는 박해로 인해 비밀리에 모이는 기독교 공동체를 은밀히 조사해 본 후 '그들은 법이상을 실천하는 사람들'이라고 보고함으로써 초대 교회 기독교인들의 영적, 윤리적 삶이 칭송받을 만했음을 로마의 정치가로서 입증시켜주었다. 이처럼 성령 충만한 성도는 세상의 법을 초월해서 살게 되므로 온 백성의 칭송(稱頌)을받을 수 있다. 반면에 이름뿐인 그리스도인은 오히려 백성에게 욕을 당한다.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 이 구절에서'주께서'란 말이 헬라어 본문에서 첫머리에 나타나는데 이것은 단순히 문법상의 이유 때문이아니라 구원받는 사람을 더하게 하시는 분이 예수임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또한 '구원받는 사람을'이란 말도 반복을 나타내는 수동태 분사로서 구원의 주체가 예수인 것을 강조하고 있다.한편 '더하게 하시니라'(* , 프로세티데이 )는 미완료 과거형으로 '계속 더하게하셨다'는 의미이다. 이 말에 대하여는 41절 주석을 참조하라. 누가는 지금까지 예루살렘 초대교회의 생성을 기록하면서 그것이 성공적이었음을 강조했다. 그러나 누가의 이러한 강조는 단지 성령 강림의 역사에 대한 첫 전주곡에 불과한것임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후로 계속되어질 누가의 기록은 성령께서 역사하심으로 복음이 예루살롑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확장되는 승리의 찬가들로 가득차있기 때문이다.



앞장에서는 예수의 부활과 승천을 목격한 제자들이 기도에 힘쓰며 복음 사역을 준비
하는 모습을 다루었거니와 본장에는 오순절이 이르매 주께서 약속하신 성령이 임하는
놀라운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성령의 강림(降臨)으로 인하여 제자들의 본격적인 전도
사역이 시작된 것이다. 본장의 내용을 상고하기 위하여 다음 사항들을 염두에 둘 필요
가 있다.
(1) 구조적 특징. 본서의 내용을 인물(人物) 중심으로 나눈다면, 베드로를 주역(主
役)으로 한 전반부(1-12장)와 바울을 주역으로 한 후반부(13-28장)의 두 부분으로 나
눌 수 있다. 이러한 구분에 따르면 전반부는 '베드로행전'으로, 후반부는 '바울행전'
으로 칭할 수도 있다.
그런데 본서의 이 두 부분은 내용상 평행 구조를 이룬다. 즉 본장에는 성령의 강림
하심과(1-4절) 베드로의 설교가 이어지고 있으며(14-40절) 3장에는 앉은뱅이를 고치는
베드로의 이적이 소개되고 있으며(3:1-10). 뿐만 아니라 4장 이후에는 베드로의 전도
사역이 계속해서 소개되고 있으며 10장에서 고넬료 가(家)를 전도하는 데서 베드로의
전도 사역이 절정을 이룬다. 그리고 12장에 이르러서는 베드로의 투옥(投獄)과 탈옥
(脫獄)으로 끝을 맺고 있으며 베드로의 최후에 관한 특별한 언급이 없이 갑자기 상황
이 바뀌어 버린다(12장).
이와 유사한 구조가 후반부에서도 진행된다. 즉 성령께서 나타나 바울과 바나바를
이방 선교자로 세우시며(13:1-3) 유대인들을 향하여 바울이 설교하며(13:16-40) 또한
앉은뱅이를 고치는 이적을 행한다(14:8-13). 본서의 후반부는 바울의 투옥으로 끝나며
역시 바울의 최후에 관한 별다른 언급 없이 이야기가 중단된다.
그러나 전반부와 후반부 모두 복음 전파의 성공에 관한 보고(報告)로 각각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있다(12:24;28:30,31). 저자는 유대인을 위한 사도의 대표자로 베드로를,
이방인을 위한 사도의 대표자로 바울을 부각시키고 있는 바, 이 두 사람은 한 성령의
지도(指導) 아래 동일한 사역을 감당한 것이라 하겠다.
(2) 베드로와 예수. 본서에 등장하는 중요한 세 인물이 있다면 베드로와 스데반, 그
리고 바울일 것이다. 그런데 주목할 점은 이 세사람이 예수의 제자로서 그들의 스승과
일치하는 점이 많다는 사실이다. 특히 본장에서 베드로는 예수의 수제자였던만큼 예수
의 공생애에서 사역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다.
예수께서 공생애 초기에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고 성령을 체험하였거니와(눅 3:21)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도 사역을 시작하기 전 오순절에 성령을 체험하였으며(1-4절),
예수께서 나사렛에서 첫 설교와 함께 공생애를 시작하셨듯이(눅 4:16-30) 베드로도 예
루살렘에서 첫 설교를 시발점으로 그의 복음 사역을 시작하고 있다(14-40절).
또한 베드로가 중풍병자를 고친 이적이나(3:1-10) 죽은 다비다를 살린 사건
(9:36-43)은 예수께서 행하신 표적들과 병행을 이룬다(눅 5:17-26;7:11-17). 그밖에도
예수께서 백부장의 초대를 받으셨던 것처럼(눅 7:1-10) 베드로도 백부장 고넬료의 초
청을 받았으며(10:22), 예수께서 이방인들과 접촉한 이유로 바리새인들의 비난을 당하
셨듯이(눅 7:36-50) 베드로도 같은 비판을 받았다(11:1-9).
이 같은 병행 기사(記事)를 통하여 저자 누가는 예수의 부활과 승천 이후 복음 사역
이 그의 제자 베드로에 의하여 여전히 지속되고 있음을 표명(表明)하고자 하였다.
(3) 성령 시대의 시작. 오순절의 성령 강림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에
견줄만한 특이한 사건으로서 구약의 성부(聖父) 시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인한
성자(聖子) 시대에 이은 성령(聖靈) 시대의 시작을 의미한다. 제3위(位)이신 성령 시
대로 접어드는 문턱에서 성령 강림 사건은 매우 의의있는 사건이었으며 어떤 한 개인
의 주관적인 체험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공개적으로 체험한 사건이었다.
성령 시대란 교회 안에 성령께서 임하여 활동하시는 새로운 시대이다. 특히 새 시대
를 여는 획기적인 사건으로서의 방언 현상은 온 인류의 화해(和解)의 상징으로서 하나
님의 구원 역사가 사도들을 통하여 계속 진행될 것임을 암시한다.
한편 본장의 내용은 세 부분으로 나뉜다. 첫째 단락은 오순절 성령의 강림 사건을
다루고 있고(1-13절) 둘째 단락에는 성령 강림에 이어지는 베드로의 설교가 수록되어
있으며(14-41절) 마지막 단락에는 성령 강림 이후에 변화된 교회 분위기가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다(42-47절).

1. 오순절 성령 강림(2:1-13)
본서는 성령의 역사(役事)를 그린 책이라고 할 수 있는 바, 예수의 승천 후 약속대
로 보내어진 성령 강림의 역사와 그의 활동에 의해 이루어지는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
다. 본장에 소개되는 첫 기독교 오순절(The First Pentecost)에 일어난 성령 강림 사
건은 신약성경에서 매우 독특한 사건으로 유일회적 현상으로 나타난다. 다음 세 가지
항목을 통하여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1) 사건의 역사적 배경. 본문은 예수께서 약속하신 바, 성령을 기다리며(1:4,5) 마
가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던 120문도(門徒)에게 성령이 임한 사건이다. 여기에서 성
령이 오순절에 강림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오순절'은 유월절 다음
날부터 계산하여 50일째 되는 날로서 구약성경에서는 '맥추절'(출 23:16), '칠칠절'
(출 34:22;신 16:10), 또는 '처음 익은 열매드리는 날'(민 28:26)이라고 불렀는데 그
이유는 이 때가 보리를 수확하는 시기였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오순절 절기를 지킴
으로써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의 첫 수확을 상기(想起)시키며 하나님께 감사드렸다. 출
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오순절은 새로운 삶의 출발을 의미하는 날이었던 것처럼 오
순절의 성령 강림은 교회 시대의 새로운 장(場)을 여는 뜻깊은 사건이었던 것이다.
한편 예루살렘은 절기를 지키려 몰려든 사람들로 인산 인해(人山人海)를 이루었으며
성대한 축제가 벌어졌거니와 바로 이때 성령 강림의 사건이 일어났으니 성령 강림은
교회 역사상 가장 기쁜 사건이었다.
(2) 성령 강림의 현상. 본문의 오순절 사건은 구약의 시내산 사건(출 16-25장)과 그
현상에 있어서 병행을 이룬다. 즉 성령이 강림하는 모습은 율법이 시내산에서 공포(公
布)되는 모습과 매우 유사하다. 본문에는 성령이 임할 때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
람 같은 소리가 나고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나타났다고 표현되어 있다. 시내산
현현(The Sinai Theophany) 사건에서는 우뢰와 번개와 나팔 소리로 인하여 온 산이 진
동하고 연기가 자욱했으며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 강림하셨다고 묘사되어 있다(출
19:16-30).
또한 이 두 사건에서 공통되는 특징은 백성들이 혼연 일체(渾然一體)가 되어 있었다
는 점이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을 받았고 기독교 공동체는 방언을 받았다.
이 같은 현상들은 구약과 신약에서 각기 신의 현현을 나타내는 유일회적인 독특한 현
상으로서 모두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 행동을 의미하는 것이다.
(3) 성령 강림의 결과. 성령이 교회에 나타나면서 일어난 첫 결과는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방언이라는 것은 그것
을 말하는 사람이 전혀 배우지도 않은 각 나라의 말, 즉 외국어를 가리킨다. 다시 말
해서 전혀 들어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고 상상조차 하지못한 다른 나라의 말이 입
에서 터져 나온 것이다. 모든 인간의 언어 장벽(言語障壁)이 무너져 버렸으니 비록 이
는 일시적인 현상이기는 했지만 성령만이 하실 수 있는 참으로 놀라운 기적적 사건이
었다.
이러한 현상은 첫 기독교 오순절에 특이하게 일어났던 일로서 그 이후에는 다시 일
어나지 않았으며, 고린도 교회에 나타났던 방언(고전 12:4)은 오순절의 방언과는 매우
다른 것이었다. 여하튼 오순절 성령 강림의 결과로 일어난 방언은 성령의 능력을 증명
해 주는 것으로서 당시 예수의 승천으로 인하여 불안해 하던 제자들에게 새로운 힘과
용기를 북돋아 주는 기폭제(起爆劑)가 되었다. 그들은 이 놀라운 사건을 통하여 하나
님과 사람, 그리고 사람과 사람을 가로 막고 있는 모든 장벽들이 무너지고 복음이 온
세계에 전파되어야 하리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 오순절 성령 강림의 의미.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은 구속사 속에서 그리스도의 탄
생에 버금가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교회사의 큰 분수령을 이
루었던 본사건의 구속사적 의미는 다음과 같다.
(1) 오순절과 그리스도. 오순절에 성령을 보내신 분은 그리스도시다. 세례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던 자기와 대조시켜 그리스도를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이'로 묘사한
바 있다(요 1:33). 그런데 이 예언은 오순절에 내린 성령 강림 사건을 통하여 성취되
었다. 따라서 오순절의 진의(眞意)는 그리스도 사역의 성취라는 시각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베드로도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하여 성령의 오심을 설명하였고, 바울도 그리
스도를 '살려주는 영이 되었다'고 해석하면서 성령의 오심을 기독론적 시각으로 보았
다(고전 15:45). 오순절 성령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이며 승귀하신 그리스도의 불
가시적(不可視的) 현림(現臨)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성령의 은사 역시 교회에 주시
는 그리스도 자신의 은사라고 할 수 있다.
(2) 오순절과 교회. 오순절은 하나님의 새 언약 공동체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설립한 날이었다. 오순절에 내린 성령은 하나님의 거하시는 처소이자 하나님의 성전인
그리스도의 몸을 세웠던 것이다(고전 3:16;엡 2:22). 구속사 속에서 이처럼 결정적이
고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 오순절 성령 강림은 또다시 되풀이 될 수 없는 유일회적 사
건이다.
(3) 오순절과 성도. 오순절 성령 강림은 그 의미나 성격상 구속사적으로 일회적 사
건이기 때문에 오늘날 성도들은 그것과 동일한 사건을 체험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놀랍게 역사하시는 성령의 사역은 얼마든지 경험할 수 있다. 누
구든지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는 순간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며, 성경 말씀에 따라 순
종하며 살아가는 그리스도 중심의 생활 속에서 성령의 충만을 경험하게 된다(고전
12:13;엡 3:16,17,19).

* 사도행전의 방언과 서신의 방언 비교 연구. 오순절에 일어난 특이한 사건은 방언
의 이적에 있다. 이 방언의 이적은 인간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육적 차원이 아니라 하
나님께서 개입하신 사건이라는 점에 그 의의가 있다. 본문에 소개된 방언은 역사상 유
일회적인 사건이었던 바, 오순절 이후에 나타난 방언과는 차이점을 지니고 있다. 본
주제 강해에서는 본서의 방언과 바울 서신의 방언을 도표를 통하여 비교해 보고자 한
다.

+--------------------------------------+---------------------------------------+
| 유 사 점 | 차 이 점 |
+--------------------------------------+---------------------------------------+
|(1) 성령과 방언이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1) 본서의 방언은 외국어를 의미하는 것 |
|. 본서에서는 성령을 받는 것과 관련하여|으로 외국으로부터 온 많은 무리들이 알아|
|방언이 등장하며(4절;10:44-46;19:6,7) |들을 수 있었다(6절). 그러나 서신의 방언|
|서신에서도 방언은 성령의 은사로 나타난|은 인간의 언어로서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다(고전 2:10). |소리로 구상되어 있어 통역의 은사없이는 |
|(2) 방언을 듣는 무리들은 반응이 동일하|해석할 수 없는 것이었다(고전 14:2). |
|다(13절;고전 14:23). 즉 방언은 세상이 |(2) 오순절의 방언은 집단적으로 나타난 |
|알지 못하는 하나님 차원의 일이었다. |현상이나(4절) 서신의 방언은 신자들에게 |
| |개인적으로 나타난 은사였다(고전 14:4). |
| |(3) 오순절의 방언은 유일회적인 사건이었|
| |으나 서신의 방언은 교회에서 종종 일어난|
| |현상이었다. |
+--------------------------------------+---------------------------------------+

2.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2:14-41)
오순절 축제에 참석하기 위해 모여든 유대인들은 제자들의 방언을 듣고 새 술에 취
했다고 조롱하였다. 이에 대하여 베드로는 자신들에게 임한 성령의 역사와 외적으로
나타난 방언 현상을 설명하기 위하여 담대하게 그들 앞에 서서 설교하였다. 본문은 본
서에 수록되어 있는 베드로의 아홉 개의 설교(1:16-22;2:14-41;3:12-26;4:8-12;5:29-
32;8:20-25;10:34-43;11:5-17;15:7-11) 중 두번째의 것이다. 본문에 나타난 베드로의
설교를 상고하기 위하여 다음 항목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1) 설교의 구조. 본서에 나타난 베드로의 설교들은 구조면에서나 내용면에서 거의
유사한 형태를 지니고 있으며 바울의 설교들과도 비슷한 점이 많은 것이 나타난다. 이
는 본서가 변증적이며 선교적인 의도에서 기록된 것이기 때문이다. 본문에 베드로가
행한 오순절 설교의 구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다른 설교들과도 마찬가지로 직접적 담화로 시작되고 있으며(14a;3:12a;4:8a;13:16b
;14:15a;17:22a), 주의를 기울이라는 호소가 이어지며(14b절;4:10a;10:37a;13:16b) 청
중들의 오해를 지적하고 있다(15,16절;3:12b;4:9;5:29;14:15a;17:22,23). 다음에는 구
약성경을 인용하고 있으며(17-21절;3:13a;5:30,31;17:24a) 기독론적 메시지가 등장한
다(22-28절;3:13-15;4:10:5:30;10:37-42;13:27-31). 기독론적 메시지는 구약성경을 통
해 다시 증명되고(25-31,34,35절;3:18,21-29;4:11;10:43;13:33-37) 마지막으로 회개에
대한 권면과 구원의 선포로 끝을 맺는다(37-40절;3:19;4:12;5:31;10:43;13:38,39;14:1
5;17:30).
(2) 중심 메시지. 당시 사도들은 복음을 전하는 데 있어서 구약성경을 인용하였다.
본문에서도 베드로는 선지자의 말을(욜 2:28-32)을 통하여 오순절 사건의 진의(眞意)
를 설명하였다. 즉 성령의 강림의 역사는 말세(末世), 즉 메시야 시대에 일어나는 징
조(徵兆)이며 누구든지 메시야를 믿는 자는 구원을 얻겠거니와 이는 구약성경에 이미
약속된 사실이라는 것이다. 이로써 예수의 참 메시야되심을 증언하였다.
사도들이 행한 설교의 핵심은 '예수의 메시야되심'이었던 바, 본문에도 독특한 기독
론적 케리그마(Kerygma)가 등장한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
셨다는 것'이 바로 기독론적 케리그마의 핵심이다. 그는 시편의 말씀(시
16:8-11;110:1)을 근거(根據)로 본격적인 기독론을 전개하였다. 즉 하나님이 다윗에게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의 왕위에 앉게 하겠다고 약속하신 것(삼하 7:12,13;시
89;4;132:11)을 다윗이 시편에서 메시야의 부활을 예언한 것과 동일한 것으로 보고,
하나님이 예수를 살리셨으므로 예수는 곧 메시야라는 결론이다. 이러한 기독론적 케리
그마가 당시 사도들이 행한 설교의 중심 메시지가 된 것은 당시 유대인들이 예수를 메
시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3) 설교의 결과.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베드로의 설교는 단번에 3천 명이 회개하는
놀라운 결과를 낳았다. 이는 성령 강림 이후에 일어난 최초의 회개 운동으로서 성령의
능력이 과시되 사건이었다. 베드로의 설교에 감화(感化)된 무리들은 마음에 찔림을 받
아 탄식하였거니와 이에 베드로는 회개를 촉구하고 그들에게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
은 것과 그리하여 패역한 세대(世代)에서 구원을 받을 것을 명하였다. 회개하여 세례
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면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된다는 약속(38절)은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하신 말씀으로서 베드로의 설교에는 이방인을 향한 하나님의 은총의
메시지가 포함되어 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듣던 무리들 중에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있었을 것이며 그들은
모두 죄의 권세로부터 구원받아야 할 자들이었던 것이다. 3천 명이나 회개한 본문의
사건은 성령 안에서 민족과 계급과 성(性)의 모든 담이 헐리고 하나가 됨으로써 모든
성도가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되는 새로운 시대의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건이었
다.

* 그리스도의 승귀(昇貴) 신분. 그리스도의 승귀 신분이란 그리스도께서 가장 낮은
인간의 위치로 비하(卑下)하셔서 구속 사역을 수행하신 후 다시 신적인 위치로 돌아가
심을 뜻하는 바, 본 주제 강해에서는 다음 네 가지 항목을 통하여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1) 부활. 기독교의 가장 기본적 요소가 되는 부활(고전 15:14)은 이미 구약성경과
(시 16:10) 예수 자신에 의해서도 예언되었다(마 16:21;20:17-19;막 8:31,32). 예수의
부활은 기전설, 시체 도난설, 착각설 등으로, 또한 부활의 목격은 환상설, 강령설 등
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그러나 예수의 부활은 구약성경과 예수 자신의 예언일뿐 아니
라 사복음서 저자들의 증언(마 28:1,9;눅 24:13;요 20:19-29;고전 15:6-8) 및 죽음을
불사하고 부활을 증거한 사도들을 통해서도 충분히 입증된다. 예수의 부활은 성도의
부활의 표징이 되었으며(롬 6:4;8:11;빌 3:12), 예수의 부활로 인하여 성도의 구원의
길이 열려지게 되었다(롬 4:25;5:11;벧전 1:3,4).
(2) 승천. 이는 예수의 예언(요 6:62;14:2,12:16:5;20;17)과 누가의 증언(1:9-11;눅
24:50,51) 및 사도 바울의 증언(엡 1:20;4:10;딤전 3:16)으로 확실한 보증을 받는 바,
성경에 기록된 문자 그대로의 유형적(有形的) 승천이었다(1:9-11;계 1:7). 그리스도의
승천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가) 원래 신의 처소인 하늘로 올라가신 것으로 그리스도의 신성을 증명한다.
(나) 구속 사역의 온전한 완성을 보여준다.
(다) 그리스도의 왕국이 궁극적으로 하늘에서 이루어질 것을 보여준다(요 18:36).
(라) 하나님 앞에서 대언자가 되셔서(요일 2:1) 대제사장적 사역으로 하나님과 성
도 사이를 화목하게 한다.
(마) 구원 사역을 위한 성령을 보내시기 위해 승천하셨다(요 16:7).
(바) 성도들이 장차 누리게 될 영광을 보여준다(요 17:24;엡 2:6).
(사) 성도들이 장차 거할 처소를 예비한다(요 14:2,3).
(3) 하나님 우편에 앉으심. 이는 예수의 예언(마 26:64)과 베드로(2:35,36;5:31;벧
전 3:22)와 바울(엡 1:20) 및 요한의 증언(계 22:1)으로 확실시되는데 장소적인 의미
로 해석되서는 안 되며 하나님으로부터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위임받은 상태로 이
해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그리스도는 성령을 보내어 진리를 깨닫게 하는 선지자적 사
역과(마 10:19,20;요 14:26)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적 사역(히
7:11,12;8:1,2,6;10:19-22;요일 2:1) 및 교회의 머리가 되시며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왕적 사역(엡 1:20-22;빌 2:9-11)을 수행하신다.
(4) 재림. 그리스도의 재림은 성령 강림과 분명히 구분되는 것으로서 성경은 그리스
도의 재림의 양상(樣相)을 인격적이며 유형적이며 영광스러운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고전 1:7;4:5;빌 3:20;골 3:4;계 1:17). 재림의 목적은 다음과 같다.
(가) 인간의 부활을 위하여(요 5:28,29).
(나) 성도의 공중 들림을 위하여(살전 4:15-17).
(다) 성도의 상급을 위하여(딤후 4:8).
(라) 심판을 위하여(마 24:36-51).

3. 초대 교회의 생활 모습(2:42-27)
본문은 초대 교회의 원형(原形)을 보여주는 자료로서 성령 강림 사건 이후 초대 교
인들의 생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사도들의 가르침,
그리고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하나가 된 공동체였다. 초대 교회 공동체의 특징을 살펴
보기로 하자.
(1) 교제하는 공동체. 초대 교회의 특징을 들자면 첫째로 교제하는 공동체였다고 할
수 있다. 저자 누가는 성령으로 하나가 된 초대 교회 공동 생활의 특징을 묘사하기를,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서로 사귀며 기도하는 일에만 힘썼다'는 것이다. 즉
그들은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여 떡을 떼며 하나님을 찬양했다.
먼저 그들이 서로 사귀며 떡을 떼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한몸된 것을 상징하는 이
웃간의 영적(靈的) 교제를 의미하고, 기도하며 찬양하는 일에 주력했다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과 영적 교제를 풍성히 나누었음을 뜻한다. 초대 교회는 하나님과 이웃과의 관
계를 올바로 가지려고 애쓰는 공동체였다.
(2) 나누는 공동체. 초대 교회의 생활에 있어서 두번째로 중요한 모습은 그들이 모
든 물건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공동으로 사용했으며 소유를 팔아 사람의 필요대로 나누
어 주는 생활을 했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저자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떠한 경제관(經濟觀)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가를 계시하고 있다.
예수께서도 부자 청년과의 대화에서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줄 것을 명령하셨고(막 10:21),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실제로 사유 재산 없이 가룟 유다가 관리하는 공동 기금으로 생활하였다(요 12:6). 초대 교회는 이러한 예수의 가르침을 본받아 재산과 물건을 팔아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대로 나누어 주었다.
그러나 이 같은 행동은 교회의 요구에 의한 것이 아니라 신자들의 자발적(自發的)인 사랑의 행위였다. 이로써 초대 교회는 함께 나누는 사랑의 공동체였음을 알 수 있다. 초대 교회가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이러한 나눔의 정신을 십분 발휘하여 곤경에 처한 이웃들을 도왔다는 기록들이 앞으로 등장하게 될 것이다(롬 15:25,26;고전 16:1-4). 본장에 나타난 경제적 교훈은 구약의 율법과도 일치하는 것이며(신 15:4,5), 사도 바울도 받는 것 보다 나누어 주는 것이 복이 있다고 권면함으로써(20:33-35) 그리스도인들의 올바른 경제관을 제시하였다.
(3) 선교하는 공동체. 끝으로 초대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전하는 일에 힘쓰는 공동체였다. 저자는 본서 전체를 통하여 건전한 교회상(敎會像)을 제시하고 있는 바, 바람직한 교회는 예수의 구원 사업을 계승하여 선교하는 교회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루살렘 초대 교회가 그러했고 베드로, 스데반, 빌립, 바울 등의 사도들이 선교에 일생을 바쳤으며, 안디옥 교회를 위시한 이방 교회들도 선교하는 교회였다. 성령의 강림을 체험함 자의 증거는 바로 복음 전파의 삶을 통하여 나타나고 있거니와 저자는 이러한 설교를 통해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 초대 교회가 날로 부흥하였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47절), 이러한 강조는 앞으로도 계속 반복될 것이다(6:7;9:21;12:24;16:5;19:20).
본장을 통하여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다음과 같으니, 성령 강림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계속 진행된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택하여 인류 구원의 도구로 삼으셨고 마침내 메시야신 예수를 보내셨으며 그의 부활, 승천 후 성령을 보내사 사도들로 하여금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하나님의 우주적 사업에 동참하는 길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영혼 구원에 힘쓰는 교회, 즉 선교하는 공동체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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