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그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 바다 곧 디베랴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매 - 여기 "디베랴 바다"란 이름은, 주님 당시의 이름이 아니고 좀 후대의 것이었으나, 저자가 이방 교회의 식별을 위하여 "갈릴리 바다"란 말에 첨부한 것이다. 디베랴 바다라고 해야 당시 이방 사람들이 잘 알았다.
=====6:2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인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봄이러라 -표적"이란 말(* 은, 예수님의 이적으로서 메시야이신 사실을 보여주는 표란 뜻이다. 이 표적들에 대하여는, 마 14:14; 막 1:34,40-42,2:11-12.3:1-5,6:5; 눅 9:11; 요 2:11을 참조하여라. 그러나 대중은 예수님의 이적의 표적 성격을 잘 깨닫지 못하였다. 그들은, 호기심과 육적요구를 위하여 예수님을 좇았던 것이다. 26절 참조, 그들은 아직 그의 말씀이 이적보다 귀한 줄 몰랐던 것이다.
=====6:3
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시니 - 여기 말한 "산"(* )은 언덕을 의미하므로 이것은 갈릴리 바다의 해변 언덕을 가리킨다. 유대의 랍비들은 보통으로 높은 데 앉아서 그 제자들을 가르쳐 주었다. "제자들"은 열 두 제자를 가리킨다.
=====6:4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 "유월절"에 대하여는 2:13의 해석을 참조하여라. 여기 "유월절"이란 말(* )이 모든 사본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교부들의 증거는, 이것이 없는 편을 지지한다. 홀트(Hort)도 그렇게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있는 것이 연대적으로도 자연스럽고 저자의 신학적 견지에서도 자연스럽다(Schlatter, Barrett).
=====6:5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하시니 - 예수님께서 눈을 드시고 큰 무리를 보신 것은, 그들을 위하여 무슨 좋은 일을 하시려고 그리 하신 것이다. "빌립"에 대하여는 1:44, 12:21, 14:8 을 참조하여라. 예수님께서 빌립에게 물으신 문제는 그의 신앙을 시험하시는 것이었다. 그런데 빌립은 신앙적으로 이 문제를 취급하지 못하였다. 그의 당한 것은 모세가 주린 백성을 앞에 두고 당한 난제와 같으며(민 11:13,22), 엘리사의 종이 당한 것과도 같았다(왕하 4:42-43).
=====6:6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코자 하심이라 - 예수님께서는, 이 때에 자기의 권능으로 군중을 먹이실 대책을 벌써 생각하고 계셨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육신을 먹이는 문제보다 영적 문제, 곧, 제자들의 신앙 교육을 더욱 중히 하셨다. 그는 빌립의 신앙을 시험해 보시려고 그에게 문제를 주셨다. 그것은, 빌립이 그 군중의 가련한 정형을 보고 동정심을 가지는 여부를 아시려는 시험이 아니다. 그것은, 비범한 방법으로 먹을 것을 준비해 주실 수 있는 주님의 능력에 대한 그의 신앙 여부를 알아 보시려는 시험이었다(Grosheide). 이와 같은 시험은 신앙을 배양하는데 유익하다.
=====6:7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 한 사람의 하루 품삯이다. 그러므로 200 데나리온이면 상당한 금액이다. 빌립의 이 계산은 다만 현실적이고 타산적인 것이다. 그에게는 건전한 이해력은 있었으나 신앙은 없었다(Godet).그는 일찌기 예수님의 이적들을 보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는 이때에 신앙적으로 생각하지 못하였다. 사람들은 이렇게 주님의 권능에 대해서는 건망증이 많다.
=====6:8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 빌립과 안드레는 종종 함께 나타난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그들이 같은 고향 사람인 사실과 그들이 제자 중 가장 먼저 선발된 까닭인 듯하다. 12:20-22, 1:41-44 참조. 안드레의 말(9절)은, 이 부분 기사를 깨닫는데 도움이 된다. 곧, 그 때에 그 많은 사람 가운데 음식물이라고는 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 뿐이었으므로 이적으로만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사실을 밝혀 주었다. 이 부분 기사가 이적이 아니고 단지 각 사람에게 있었던 음식물을 먹도록 하였다는 합리주의 해석은 안드레의 말을 위반하는 것이니, 그것은 그릇된 해석이다.
=====6:9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 - "보리떡"은 가난한 사람들의 양식이다. "물고기"라고 한 것(* )은 멸치와 같이 작은 고기라고 한다. 안드레도 여기서 그리스도의 권능을 믿지 못하고 현실주의 견지에서 낙심하고 만 것이다.
=====6:10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신대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효가 오천쯤 되더라 - 무리를 앉힌 것은 그리스도의 긍휼의 표현이며, 그들이 앉은 것은 그들의 순종이다. 그들은, 그저 단순한 마음으로 예수님의 권위 있는 지도를 받으려고 감심으로 순종하였다. 언제나 신앙의 태도는 이런 것이다. 사람들은 마땅히 자기 스스로 지혜 있는체 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 권위(權威)를 믿고 순종하며 기다려야 한다. 여기 5,000명이란 것은, 여자와 아이들 외에 남자들만을 계수한 것이다(마 14:21). 이때에 남자들만 계수한 것은, 여자들과 아이들의 인권을 무시한 것이 아니고, 남자들의 대표적 지위를 염두에 둔 것이다.
=====6:11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은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저희의 원대로 주시다 - "예수께서 떡을 가져"란 말씀은, 그 제공한 다섯 개의 보리떡을 받으셨다는 뜻이다. 예수님이 여기서 전연 없는 데서 창조하심이 아니고, 조금이라도 있는 것을 가지시고 많게 하셨다. "축사"하셨다는 말은 감사하셨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적은 것을 가지고도 하나님께 감사하셨다. 감사하는 자리에 더 많은 축복이 임한다.
=====6:12,13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 예수님은 선물을 관대하게 주시지만 낭비하는 것을 금하신다. 물질이 헛되이 내버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남은 조각이 열 두 바구니에 찼더라 - 유대풍속에, 식사에 봉사하고 남은 음식은 그 봉사자들의 분깃이 되었다고 한다(Lightfoot, Hor., 3,302).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봉사한 12사도들은 저렇게 필경 받은 상급이 컸다.
=====6:14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 "그 선지자"에 대하여는 신18:15에 예언되었으니 곧, 메시아를 가리킨다. 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았기 때문에 억지로 임금 삼으려고 하였다(15절 참조).
=====6:15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 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았으나, 진리대로 바로 알지 못하였다. 그들은 예수님을 저희의 물질 문제나 해결하여 주실 메시아로 알았던 것이다. 그런 생각으로 그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고 하니, 그가 거기 응하시지 않았다. 어쨌든 이 사건은, 그 떡 먹이신 이적이 얼마나 위대하였던 것을 증명해 준다. 그들이 그 권능을 본 뒤에는, 로마 정권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막바로 예수님을 유대의 임금으로 추대하려고 하였다. 예수님께서 거기에 응하시지 않은 것은, 그가 군중의 메시아 관념이 육적인 것을 합당치 않게 보셨기 때문이었다.
=====6:16
저물매 제자들이 바다에 내려가 - 그들이 예수님의 명령을 받들어 이렇게 하였다(마14:22). 그가 그렇게 그들을 지도하신 목적은, 그 자신이 홀로 떨어져 기도하시기 위한 것이었다(마14:23). 그는 많은 무리가 따르는 때를 도리어 위기(危機)로 보시고 기도에 열중하셨다. 이것이 그의 특이하신 점이고, 사람들에게 모범을 보여 주심이다. 사람들은 인기가 올라갈 때에 그것을 성공으로 알고 안심한다.
=====6:17
예수는 아직 저희에게 오시지 아니하셨더니 - 그가 아직 저희에게 오시지 않은 것은 무의미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이 때에 제자들의 신앙을 연단시키려고 하셨다. 제자들은, 이때에 예수님 없이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죽을 지경에 빠졌다가 예수님의 권능으로 구원 받게 될 것이다. 그들이 그 때에 예수님을 더 믿었어야 될 것이었다. 신32:11 참조.
=====6:18
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나더라 - 지중해보다도 682피드나 낮은 갈릴리 바다에는 사방 높은 언덕사이의 골짜기로부터 강한 바람이 뜻밖에 불어오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제자들이 예수님 없이 배를 타고 풍랑 중에 있는 것은, 마치 교회가 세상에서 환란을 당하고 있음과 같다. 예수님은 얼마동안 그 배로 찾아 오시지 않았으나, 마침내 오셔서 풍랑을 잔잔케 하셨다. 그와같이, 환란중에 있는 교회도 마침내 주님의 권고로 말미암아 평안해진다.
=====6:19
제자들이 노를 저어 십 여리쯤 가다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심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 어떤 학자들은, "바다 위"란 말(* )이 해안을 의미한다고 하며, 예수님께서 물 위로 걸러 오신 것이 아니고 바닷가의 언덕으로 걸어 오셨다는 말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기사(記事)는 이적을 기록하는 것임이 분명하다. 그 이유는, (1) 제자들이 두려워한 까닭이며, (2) 공관 복음의 동일한 기사가 이적을 기록하는 심리를 명백히 보여주기 때문이다(막6:29; 마14:26).
=====6:20
가라사대 내니 두려워 말라 하신대 - "내니"란 말(* )은, 예수님께서 그 때에 자신의 현림(現臨)하심을 가리킬 뿐 아니라,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심을 계시(啓示)하심이다. 하나님이 계신 곳에 안전과 평안이 있다.
=====6:21
배는 곧 저희의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 - 여기 "배는 곧"이란 말을 주목해야 한다. 예수님이 함께 하시므로 말미암아 또 다시 배는 초자연적으로 순조롭게 가게 되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자연계를 통솔하실 수 있는 권능으로써 자기가 하나님 아들이심을 증거하셨다(마14:33 참조).
=====6:22
이튿날 바다 건너편에 섰는 무리가 배 한 척 밖에 다른 배가 거기 없는 것과 또 어제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그 배에 오르지 아니하시고 제자들만 가는 것을 보았더니 - 곧, 떡 먹은 무리들은, 예수님께서 아직 바다 이 편(저희 있는 곳)에 계신 줄 알고 안심한 적이 있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그들의 생각에는, 제자들만이 거기 한 척 밖에 없었던 배를 타고 건너갔고, 바다 이 편에 남아 계셨던 예수님은 아직 머물러 계시는 줄로 알았다. 그런데, 뜻 밖에도 예수님도 거기 계시지 않은 사실을 그들은 발견하게 되었다(24절).
=====6:23
(그러나 디베랴에서 배들이 주의 축사하신 후 여럿이 떡 먹던 그곳에 가까이 왔더라) - 이 귀절 말씀은, 그 무리가 어떻게 바를 건너 가게 된 사실을 알게 하는 것이다. 본래는 배 한 척 밖에 없었으나, 그 뒤에 여럿이 왔으므로 그들이 그 배 편들을 이용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여기 알려진다. 이런 자세한 기록을 보아서도 이 사실에 대한 목격자였던 사도 요한이 이책을 기록한 것이 분명하다.
=====6:24
곧 배들을 타고 예수를 찾으러 가버나움으로 가서 - 이 말씀을 보니, 그들은 예수님을 찾는 일에 열중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을 바로 알지는 못하였으니, 그것은, 예수님을 찾는 그들의 동기가 불순한 것을 보아서 알 수 있다. 예수님을 찾는 동기는, 예수님의 말씀이 바로 전해지는 여부에 중대한 관계를 가진다(Grosheide).
=====6:26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 부른 까닭이로다 - "진실로 진실로"란 말은, 그 장차 말씀하시려는 사실의 중대성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 무리가 예수님을 찾은 이유는, 그를 영적 메시야로 바로 안 까닭이 아니다. 그들은 떡을 위하여 따라 다녔던 것이다. 곧, 그들은, 5천명 이상의 무리에게 떡 먹이신 그 이적에서 그리스도의 증표를 깨달음보다 물질적인 떡에 흥미를 가졌다. 인간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육체적 만족을 위하는 때가 많다. 그것은 인간의 부패성의 결과이다.
=====6:27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 치신자니라 -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은,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영력(靈力)을 가리킨다. "인자"는 인성(人性)을 가지신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바 그가 살과 피를 희생하셔서 속죄하여 주시므로 영적 생명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임하게 된다. "인 치셨다"는 뜻은, 예수님을 구주로 세우시고 인정하시고 신임하셨다는 뜻이다. 이런 구주를 믿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기가 하나님보다 높다는 참람한 죄악이요, 하나님을 거짓말 하시는 이로 여기는 죄악이다.
=====6:28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 여기 이른 바, "하나님의 일"이란 말의 헬라 원어(* )를 직역하면, "하나나님의 일들"이란 뜻이다. 이 때에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 곧,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는 것을 오해하여, 영생의 대가(代價)로 많은 인간적 업적을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들더러 일 하라고 하신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니었다. 그가 말씀하신 "일"이라는 것은 신앙을 의미하였다. 신앙은 일 아닌 일, 곧, 그리스도 안에 안식함이다. 유대인들은 저렇게 인간의 힘으로 어떤 고등 노동들(하나님의 일들)을 하므로 영생을 얻고자 하였다. 그들이 "하나님의 일들"이라고 복수 명사를 사용하였으니, 일의 수량에 의하여 문제 해결을 보려고 한 것이다. 인간은 언제나 자기의 어떤 고등 노동을 통하여 천국에 들어가려고 한다. 그것은 어리석다. 사람들은 오직 믿음에 의하여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천국에 들어간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의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은 대답하시기를,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고 하셨다(29절).
=====6:2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 사람들로 하여금 주님을 믿도록 하심이 하나님의 일이다. 인간은 하나님을 신앙하기 위하여 지음을 받았고, 신구약의 모든 말씀들은 인간에게 믿음을 가르친다. 특별히 우리 본문에서,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일들이 아님)하심은, 의미심장하다. 여기 단수 명사로 된 "일"(* )은 "그 일"이란 말인데, 모든 다른 일들 곧, 율법적인 일들과 엄격히 구분된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구원에 이르도록 하는 유일한 일이다.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은 무슨 내용을 가진 신앙인가? 그것은, (1) 하나님을 신임하는 믿음, 하나님의 보내신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불신임하는 것이니 하나님을 모독하는 큰 죄이다. (2)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신을 완전히 계시하시는 살아 계신 신(神)이심을 믿음. 하나님께서 그 독생자를 성육신(成肉身)하여 보내신 것은, 인간과 깊은 교제를 가지시기 위한 최고의 사랑을 보여준 것이다. 이것을 믿지 않는자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내버리신 무의 무정(無意無情)하신 이로 오해하는 자이다. (3) 하나님 자신을 인간의 눈과 귀로 친히 보며 듣는 것과 같이 믿음. 땅에 오신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자는 하나님 자신을 받아 가진자이니, 그로서는 하늘의 하나님을 보겠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 어떤 성도는 말하기를, "만일 전적으로 신앙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일어난다면, 세상의 역사는 변화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스펄죤(Spurgeon)은 말하기를, "작은 믿음은 영혼을 하늘로 가져가고, 큰 믿음은 하늘을 영혼에게 가져온다"라고 하였다. 아브라함은 남들의 권면을 받지 않고도 믿었고 (창 18:9-15; 롬 4:19-21), 수로보니게 여자는 하나님의 권면 없이도 믿었고(마 15:22-28), 노아는 경험한 바 없이도 홍수에 의하여 세상이 망할 것을 믿었다(히 11:7).
=====6:30
저희가 묻되 그러면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 일찌기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은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 곧, 신학적 문제에 접촉하였고, 이제 갈릴리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믿는 문제 곧, 구원론에 접촉하여 각각 불신앙을 나타냈다(Godet). 예수님께서 자기가 메시야이신 사실을 보여주시는 "표적"을 행하셨으나, 그들은 그것을 통하여 표적다운 내용을 보지 못하였다. 고데이(Godet)는 말하기를, "그들이 예수님을 임금 삼으려고 할 때에 그의 거절하신 태도로 인하여 그들은 낙망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를 메시야 아닌줄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다시 표적을 찾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그들은, 예수님의 메시야격이 이 세상의 정치적 임금이 아닌 사실을 깨닫지 못하였다. 다시말하면, 예수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명 이상의 무리에게 먹이신 표적(메시야 표적)을 그들이 깨닫지 못했으니, 유감스럽다(26절).
=====6:31
기록된 바 하늘에서 저희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셨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 출 16:15; 시 78:24 참조. 저 유대인들이 구약 성경을 인용한 것을 보니, 그들은 지도자들이었든지, 혹은 서기관인 듯하다(Belser). 그들은, 메시야가 온다면 또 다시 만나를 내려 먹게 해 줄 것으로 잘못 알았다(Midrash Koheleth, P.73).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님에게 그렇게 하여 주시기를 간접적으로 청원한 것이다.
=====6:3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 -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내린 떡"이란 말을 쓰실 때에 만나를 염두에 두시고 하신 말씀이 아니다. 이것은 신령한 떡, 곧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유대인들은, 하늘에서 내린 떡이란 말로써 옛날의 물질적인 떡 곧, 만나를 생각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진정한 의미의 하늘 떡은 그것이 아니라고 하신다. 진정한 의미의 하늘 떡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시다. 저 유대인들은, 만나보다 더욱 위대하신 떡("참 떡" 곧, 예수님)을 소유할 수 있음에 대하여 불신앙했으므로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6:33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 여기 "하나님의"(* )란 어귀가 강세(强勢)를 띤 말이라고 한다(Goebel).그렇다면, 이 어귀가 그 "떡"을 가리켜 그 영성(靈性)과 그 영원성과 생명성과 및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사실을 고조한다. "하늘에서 내려"란 말씀이, 이 부분 예수님의 교훈에 일곱 번 나온다(33, 38, 41, 42, 50, 51, 58).그 만큼 이 말씀은 역설체(力說體)로서 그 떡의 특이한 성격을 보여준다. 곧, (1) 그것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인 만큼 광범위한 세계에 분배된다. (2) 그것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고 영원 불멸의 생명을 주는 것이다.만나는 영양을 줄 수 있었으나 하늘 떡은 생명을 주는 것이다. (3) 만나는 보이는 하늘에서 내려왔으나, 생명의 떡은 보이지 않는 하늘에서 내려온다(Calvin). (4) 하늘에서 "내려오는" 이란 말의 헬라 원어(* )는, 현재 분사로서 계속적으로 내려오는 활동을 가리킨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적 양식은 사실상 모든 시대를 통하여 끊임 없이 내려온다.
=====6:34
저희가 가로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 이것은, 또 다시 유대인들의 불신앙 표현이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생명 떡"이 육신의 양식인 듯이 오해하고 욕심을 부린다. 여기서 그들은 그것을 "항상" 주시기를 청원한다.
=====6:3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 마르지 아니하리라 - (1) 예수님께서 자신을 가리켜 "생명의 떡"이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께 대한 우리의 신앙이 먹는 행위와 같이 실제적이어야 할 것을 암시하심이다. 믿음은 하나의 이론이 아니고 실제이다. 먹음으로 우리의 주린 것을 멈추는 것처럼, 믿음으로 우리의 영적 기갈이 멎어진다. 음식을 먹지 않으면 죽는 것처럼,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멸망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먹는 것처럼 믿어 그를 내 분깃으로 섭취해야 된다. 예수님에게 대한 이론만 알고 그를 내게 섭취시키지 않으면, 그것은 큰 곡창(穀倉) 문 앞에서 굶어 죽는 것과 같은 가석한 일이다. 그리고 우리가 음식 먹기를 계속하는 것처럼, 예수님을 믿는 일을 계속해야된다. 작년 이 때 먹은 것이 오늘의 주림을 멈추어 주지 못한다. 신앙 생활을 먹고 마시는 행동에 비유한 것은, 성경에 많이 있다. 사 55:1에도 말하기를, "너희 목 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고 하였다. 계 3:20, 22:17 참조. (2) "내가 곧 생명의 떡"이란 말씀은, 예수님 자신이 생명이신 동시에 생명을 주시는 이시란 뜻이다. 그는 주시는 자시며, 또 주시는 선물 자체도 되신다(Zahn). 그 자신이 대제사장인 동시에, 자신이 제물도 되신다. 그를 믿는 자는, 그의 속죄제의 효과를 받아 누리며 따라서 그와 일체(一體)되도록 밀접히 연합하게 된다. 그가 자기를 떡에 비유하신 이유는, 음식물은 그 먹는 자와 밀접하게 연합하여 일체가 되기 때문이다. "내게 오는 자"란 말과 "나를 믿는 자"란 말은, 서로 병행하여 동일한 뜻을 가리킨다. 온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지향한 영적 동태(靈的動態)를 말함이고, 믿는다 함은 계속적으로 그리스도와 밀접하게 연합해 있음을 가리킨다(Grosheide, Het Heilige Evangelie Volgens Johannes, Kommentaar I,P.439).
=====6:36
그러나 내가 너희더러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 하는 도다 하였느니라 - 이 말씀은, 26절의 내용에 암시된 뜻을 가리키는 것이다. 사람이 하늘 것을 본다고 반드시 믿어지는 것은 아니다. 보는 것이 믿는 데 이르는 최선의 방법은 아니다. 보지 못하고 믿는 것이 더욱 복되다(요 20:29). 벧전 1:8-9 참조.
=====6:37-40
이 귀절들은 (1)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의 이유가, 그리스도의 말씀이나 권위가 부족한 탓이 아니고 다만 그들이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지 못한 까닭이라는 것, (2) 믿는 자들은 그들의 의지력(意志力)으로 믿는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인도로 말미암아 되어진 것이니 만큼, 그 구원이 확고 불변하다는 것이다. 신앙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다.그러므로 그것을 소유한 자는, 그것을 소유한 것이 벌써 확실한 구원 소유인 줄 알고 위로를 받는다. 딤후 1:12에 말하기를, "이를 인하여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하였고, 빌 1:6에도 말하기를,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고 하였다. 위대한 신앙가요 과학자인 미카엘 파라디(Sir Michael Faraday)는, 임종시에 어떤 사람들이 "당신의 영혼이 장차 어떻게 되겠다고 추측합니까?"하고 물을 때에 그는 대답하기를,"추측? 나는 추측에서 살지 않는다. 나는 확신에서 살고 있노라"고 하였다. 어떤 성도는 늘 기쁘게 노래하기를, "나는 가련한 죄인이고 그 밖에 아무 것도 아니로라. 그러나 그리스도는 나의 모든 것이로다"라고 하였다. 우리의 신령한 체험이나, 혹은 도덕 생활에는 굴곡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언제나 죄인인 사실은 변치 않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주이신 사실도 변치 않는다. 혹시 우리의 도덕 수준이 올라갔다 해도 죄인임을 면치는 못한다. 우리의 소망은 예수님 밖에 없다. 히 13:8에 말하기를,"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고 하였다. 진실한 성도들은, 끝까지 구원해 주시기로 약속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생명을 건다. 해버갈(Havergal)이란 성도는, 임종시에 자기 친구더러 사 42장을 읽어 달라고 하였다. 그 친구가 읽을 때 그는 6절 말씀에서 주의를 시켰다. 곧,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라고 한 말씀이다. 그는 이 말씀에서 "불렀다"는 말씀, "손을 잡았다"는 말씀, "보호한다"는 말씀을 맏고 세상을 떠난다고 고백하였다.
=====6:41,42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인간으로만 알았기 때문에, 그가 자기를 가리켜, "하늘로서 내려 온 떡"이라고 말씀하심을 듣고 원망하였다.사람들은 이렇게 그리스도의 위대(偉大)를 그의 인간성 때문에 의심한다. 그러나 그가 인성을 취하신 것은, 인간들에게 나타낸신 그의 지극한 사랑이다.
=====6: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 유대인이 그리스도를 믿지못한 이유는, 그 실상 그리스도에게 하늘로서 오신 증표가 없는 까닭이 아니었다. 다만 그들만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로 이끌지 않으신 까닭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동시에, 그의 백성도 이끌어 그에게(그리스도에게)로 모으신다(호 11:4). 이끈다 함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중생의 역사를 가리킨다(롬 8:9; 고전 3:16, 6:19, 12:3; 요일 3:24). 그 때는 아직 성령이 강림하시기 전이었음으로 여기서는 성령의 인도에 관한 말이 사용된지 않았다.
=====6:45
선지자의 글에 저희가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 "선지자의 글"은 사 54:13을 가리킨 것이다. 우리와 신학처지가 다른 버나드(Bernard)도 이 귀절에 대하여 "사람이 그리스도의 신자가 되려면 진리를 배워야 되고, 한번 듣기만 해서는 신자가 되기 어렵다. 예정의 도리가 요한 복음에 있으나 이렇게 인간편의 책임있는 노력을 무시하지 않았다"라는 의미로 말하였다.
=====6:46
이는 아버지를 본 자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 윗절에,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로 한 말씀이 있었다. 그것은, 사람이 직접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이 예수님과 그 사자들로 말미암은 전도의 말씀을 들음으로 하나님에게로 오게 된다는 뜻이다). "하나님에게서 온 자"는, 오직 하나님과 함께 계시다가 이 세상에 오신자 곧, 예수님 뿐이시다. "하나님에게서"란 문구의 "에게서"란 말(* )은 본래의 근원으로 부터 관계된 사실을 보여준다. 그것은, 하나님과 함께 계시다가 세상에 오신 예수님에게만 사용될 말이다. "보았느니라."이 말의 헬라 원어(* )는, 보았고 또 그 본 결과를 계속해서 보존하고 있는 사실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시기 전에 하나님을 보셨고, 또 그 보신 사실이 그에게 계속해 있음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예수님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을 알 자가 없다(1:18, 14:9; 마 11:27). 하나님은 먼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의 말씀을 전하신 것이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만이 하나님 아버지를 보셨고, 또 그의 말씀을 들으셨기 때문이다.
=====6:47,48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 "믿는 자"란 말은 예수님을 믿는 자란 뜻이다. 크로솨이데(Grosheide)는, 이 문구의 짧은 것을 가리켜 사상의 표현을 강력하게 하려는 문체라고 하였다. 그것이야말로 간단 명료한 진리 표현이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다."이 문구에 대하여는 35절의 해석을 참조하여라.
=====6:49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 예수님도 인간 편으로는 유대인이고, 그들의 조상이 예수님의 조상도 된다. 그러나 영적으로 말할 때에, 그들과 그들의 조상은 불신앙에 속하였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는, 물질적인 만나와 달라서 영적인 하늘떡이시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그를 영접하는 자들은 영생한다.
=====6:50,51
이 귀절들은, 33, 35절에 있는 말씀을 거듭한 셈이다. 중언체(重言體)는 역설체(力說體)이다. "내 살"이란 말은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을 가리킨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 위에서 죽임이 되시므로 그를 믿는 자들은 영생을 얻는다.
=====6:52
이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가로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 유대인들이 서로 다툰 원인은, 그들의 의견이 서로 다른데 있었다. 그들 중 어떤 자들은 예수님의 속죄 교훈을 믿었으나, 어떤 자들은 믿지 않았다. 믿지 않은 자들은 예수님의 살이 세상 사람의 생명이 된다는 말씀(51절 끝)에 걸렸다.
그들은, 메시야가 죽어서 속죄하시는 진리를 왜 믿지 못했던가? 그 진리는 이사야서 53장에 명백히 예언되지 않았는가?=====6: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세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 여기서는, "인자의 살"이란 말에 "인자의 피"란 말을 더하여 말씀하신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무었인가? (1) 그것은, 살과 피는 인간성을 모두 가리키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인간성 전체가 우리의 속죄 제물이 되셨으니, 그것은 우리 구원의 완성을 위하신 것이다. (2) 피를 첨부하여 말씀하신 또 한가지 이유는, 피는 특별히 생명을 의미하는데 (창 9:4; 레 17:11,14), 그것을 흘리셔서 속죄 제물을 성립시키기 때문이다(출 12:7,8; 레1:5; 히9:12,20). 살을 먹으며 피를 마신다는 말씀은 문자적 의미보다 비유적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생활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믿는 것은, 곧, 그의 살과 피를 먹으며 마시는 행위와 같이, 예수님을 영접하여 나 자신의 분깃으로 만드는 실제적 행위이다. 신앙은 이론 뿐이 아니다. 이 말씀에 근거한 기독교 성찬 교리에 대하여, 불트만(Bultmann)은, 그것이 헬라 신비 종교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Theology of the New Testamant I, p.148). 그러나 헬라 신비 종교에서 그 의식에 참여한 자들이 신(神)을 먹는다고 한것(그들의 신으로 표상된 소위 고기 같은 것을 먹는 것)은, 범신론 사상과 마술적 사상에 근거한 것이다. 따라서 그 먹음에 참여하는 자가 신(神)이 된다는 그릇된 주장도 거기 있다. 그러나 기독교의 성찬은 그와 정반대로서 유신론적인 속죄의 역사적 사실을 기념하는 것이다. 그 뿐 아니라, 기독교의 성찬은, 구약에 있는 유월절 잔치의 후신(後身)이다. 예수님께서 성찬을 제정하실 때에 바로 유월절 만찬을 잡수시면서 그것을 성찬으로 변전시키신 것 뿐이다(눅 22:7-23). 요 6장에서 신자들이 그의 살을 먹으며 그의 피를 마실 필요성에 대하여, 그가 강조하신 때도 유월절이 가까운 시기였다(4절). 그 뿐 아니라, 유월절 잔치의 영적 의미가 성찬의 그것과 같다. (1) 유월절 잔치를 먹는 것이 이스라엘에게 구속을 준 것처럼(출 12:13), 성찬을 먹는 것이 기독 신자에게 그런 의미를 가지며, (2) 유월절의 만찬이 애굽을 떠나 먼 길을 가는 이스라엘에게 양식이 된 것처럼, 성찬은 기독자에게 영적 양식이 되기도 한다. 이와 같은 사실들을 보면, 성찬과 헬라의 신비 종교와는 전연 관계가 없다. 헬라의 신비 종교들 중 다요니시스(Dion
=====6: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 헬라 원어에 의하면, 여기 "먹고"란 말(* )이 이때까지 사용된 먹는다는 말(* )과 다르다. 여기 사용된 말은 맛있게 먹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속죄를 받아 누림에 대한 적합한 술어이다. 이 귀절 말씀은, 기독 신자가 이 세상에서부터 영생을 얻고 내세에는 몸의 부활까지 받는, 구원의 복락 전부를 가리킨다.
=====6: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 여기 "참된"이란 말이 사용된 목적은 이렇다. 곧, 만나와 같은 물질적 양식에 비교하여, 예수님의 살과 피(속죄의 은혜)는 참되다는 것을 표시하려는 것이다. 곧, 물질적 양식은 그림자와 같고 물완전하나, 예수님의 속죄의 은혜는 실물이요 영원히 살리는 효과를 가진 것이다.
=====6:56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 이것은, 그리스도의 속죄를 받은 자가 주님과 연합하게 됨을 가리킨다. 요한의 신학 사상대로 보아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1) 주님의 계명을 지킴(요일 3:24), (2)주님을 본받음(요일 2:6), (3) 열매를 맺음(요 15:2), (4) 죄를 범치 아니함(요일 3:6), (5) 기도 응답을 받음(요 15:7), (6) 생명을 가졌음(요 6:57), (7) 주님의 재림에 대하여 담력을 가진다(요일 2:28).(Bernard, the International Critical Commentary on the Gospel of St. Jhon, p.
212)
======6: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 "아버지로 인하여 산다"는 말은, 예수님에게서는 영원 자존의 생명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 말씀은, 다만 중보자(中保者)로서의 그의 처지를 가리킨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위치에 계신 것 만큼, 그의 생명 주시는 역사는 아버지로 말미암는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영원 자존하신 것 만큼, 그도 그러하시다. 신자들은 그리스도를 먹는 것과 같이 실제적으로 믿어야 그의 생명을 받아 누린다. 고데이(Godet)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곧, "자연계의 생명의 열매가 떡덩이로 나타날 때에 사람에게 섭취됨과 같이, 신적 생명(神的生命)도 그리스도로 화육(化肉)되어 나타났으므로 우리에게 접촉되어 받아진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생명떡이시다. 그러나 우리가 떡도 먹어야 우리의 생명 영양이 되는 것처럼,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어야 그가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다"고 하였다.
=====6:58
이 귀절은, 32-33 절 말씀 내용이 거듭 나온 셈이다. 같은 말씀을 거듭 하는 것은, 그 말씀을 힘 있게 하려는 목적으로 그리한다.
=====6:60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가 있느냐 한대 - 그들이 듣기 어렵다는 부분은 어느 말씀이가? 그것은 58절 말씀이 대표한 사상, 곧,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한다는 말씀이다. 그의 살을 먹으며 그의 피를 마시면 어떻게 영생을 얻는가? 그것이 어려운 문제란 뜻이다. 그 말씀 뜻이 어렵다고 하므로 예수님께서 답변하시기를, "인자의 이전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볼 것 같으면 어찌하려느냐"라고 하셨다(62절). 곧, 그가 승천하시면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시므로 사람들로 거듭 나게 하며 그리스도의 속죄를 믿게 하여 살리신다는 뜻이다.
=====6:61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가라사대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 예수님은 인간의 마음을 잘 아시는 것만큼, 그 때 그들의 불평을 아셨다. 그들은, 예수님의 교훈을 영적으로 바로 이해하지 않고 육적으로만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 말씀에 걸려 넘어진 것이다(벧전 2:7-8).
=====6:62
그러면 너희가 인자의 이전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볼 것 같으면 어찌 하려느냐 - 이 귀절에 대한 해석은 몇 가지 있다. (1) 여기 이른 바 "인자의 이전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이란 말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것을 가리키는데(십자가에 못 박히심은 다시 살아 승천하심에 이르는 한 계단임), 그 때에는 그들이 더욱 예수님을 저버리게 될 것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2) 예수님의 속죄에 대한 말씀이 피와 살로써 설명될 때에도 그들은 깨닫지 못하였다. 그렇다면, 그가 승천하셔서 그의 속죄를 영적으로 이루시며 나타내실 때에는 더욱 깨닫기 어려울 것이라는 의미라고 한다(Westcott), (3)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다시 사셔서 하늘로 올라가시는 때에 저희는 믿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가 이 말씀을 하시는 내막은, 그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과 같은 속죄 신앙의 효과가 그의 승천하시는 때에 확실히 성립되고야 만다는 것이다. 여기 "볼 것 같으면"(* )이란 말은, 하필 육신의 눈으로 본다는 것이 아니고 심령의 눈으로 봄을 가리키기도 한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신앙을 육안(肉眼)으로 본 것에 근거하도록 한 것이 아니고, 말씀을 들음에 근거하도록 한 것이다(Er band den Glauben nicht an das Sehen, sondern an das Horen des Worts.-Schlatter, Der Evangelist Johannes, P.181).
=====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 이것은, 예수님의 역사가 성령으로 말미암는다는 새로운 선언이다(Schlatter). 이것은, "인자의 살을 먹고 그의 피를 마시는 자가 영생을 가졌다"는 말씀에 대한 유대인의 오해를 시정하는 것이다. 살을 먹는다 함은, 육체적 식음으로 오해할 것이 아니고 영적 식음(靈的食飮)으로 간주해야 된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은 영적인 것으로서 살리는 성령의 역사가 함께 하는 것이다.
=====6:64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 예수님께서 이렇게 그 제자들 중에 불신앙 사실이 있음을 지적하시어 그들을 경성시킨다. 우리는, 우리의 죄악을 알게 될 때에 경성하게 된다.
=====6:65
내 아버지께서 오게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는 목적은, 그의 주장이 저렇게 탁월하심에도 불구하고 믿지 않는 자들이 있는 모순을 해결하시기 위한 것이다. 곧, 예수님을 안믿는 원인은, 예수님 자신의 증거가 불충분하여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오묘한 작정에 달려 있는 것이었다.
=====6:66
제자 중에 많이 물러 가고 - 이 귀절에 대하여 어거스틴(Augustine)은 말하기를, "그들이 생명체와 교제를 끊었으니 만큼 그들의 생명은 떠났다"고 하였다. 고데이(Godet)는 이 사건에 있어서 예수님의 메시야 역사(役事)의 비결이 나타난 것을 지적하였다. 곧, 이렇게 오합 군중(烏合群衆)은 일단 헤어질대로 헤어지고 소수(少數)만 남게 된다. 기드온의 300명 군대는 많은 군대보다 오히려 유력하였다.
=====6:67
너희도 가려느냐 - 열 두 제자는, 외부적 관계로 볼 때에 언제든지 모두 다 예수님을 따를 듯이 나타났던 것이다. 그러나 신앙은 외부적 관계에 달린 것이 아니다. 그들 중에도 가룟 유다가 있었다는 것은 놀랄 만한 일이다. 예수님은 이런 일을 염두에 두시고 "너희도 가려느냐"라고 물으셨다. 곧, 그들도 늘 경성하여 있을지언정 방심하면 안된다는 사실을, 여기 암시하신다.
=====6:68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 "영생의 말씀"이란 것은 63절의 말씀을 염두에 둔 것이겠다. 베드로는 언제나 모든 제자들 중에서 대표자 격으로 솔선하여 나서곤 하였다(13:6,24,36,18:10,20:3,21:3,7; 마 14:28).
=====6:69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줄 믿고 알았삽나이다 -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란 말은, 메시야의 성역을 위하여 성별하여 보내심이 된자란 뜻이다. 막 1:24; 눅 4:34; 사 43:14 참조.
=====6:70,71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 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저는 열 둘 주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 - 이 말씀은, 제자들이 신앙 생활에 있어서 너무 자신 있게 지나지 말아야 할 것을 암시하신다. 그가 택하신 열 두 사도 중에도 넘어질 자가 있다고, 그는 경고하신다. 가룟 유다를 가리켜, "마귀"라고 하신 것은, 그가 마귀의 도구로 사용되리라는 의미이다.
6:1
그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 바다 곧 디베랴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매 - 요한은 보통
처음 세 명의 공관복음서 저자들이 생략한 그리스도의 언행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 상례인데, 이 부분에서는 그의 습관과 달리 공관복음서 저자들이 기록한 기적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요한은 다음날 그리스도께서 가버나움에 가셔서 전하신 말씀을 기록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를 기록하고 있다. 이 표적과 다음에 나오는 내용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기록된 말씀은 다음 세 명의 복음서 저자가 공통적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또 다른 목표로 연결된다는 의미에서 특별한 데가 있다. 우리는 곧 이를 알게 될 것이다. 다른 이들은 이 일이 세례 요한이 죽은
직후에 일어났다고 말한다. 그러나 시간을 따져서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떠나신 이유를
밝히려고 한다. 왜냐하면 폭군이 경건한 사람들의 약점을 알게 되면, 절제없이 마시는
술이 술고래의 구미를 더욱 부채질하듯이 폭군은 더욱 심한 야만성을 나타내게 되는
것이 상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자리를 뜨심으로 헤롯의 분노를 가
라 앉히기를 원했다. 요한은 게네사렛 호수 대신에 '갈릴리 바다'라는 말을 쓰고 있
다. 그리고 '갈릴리 바다'가 '디베랴 바다'라고 불리웠음을 부언함으로써 그리스도께
서 어느 곳으로 물러 가셨는지를 더욱 더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왜냐하면 호수 전체
가 그렇게 불리운 것이 아니고 디베랴가 있는 해변 일대만을 디베랴 바다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6:2
큰 무리가 따르니 -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데 있어서 그와 같은 열심을 나
타낸 것은 그들이 표적을 통하여 그의 능력을 보고, 그가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어떤 위대한 선지자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그러나 복음서 저자 요한은 다른 세 명의
공관복음 저자들이 기록하고 있는 부분을 즉, 주님께서 그날 병자를 고치고 사람들을
가르치면서 보낸 이야기와 해질 무렵에 제자들이 주님께 무리를 돌려 보낼 것을 요청
한 이야기를 생략하고 있다. 요한은 아마 사건의 핵심과 요지만을 언급하는 것이 충분
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그 다음에 나오는 내용으
로 유도하기를 원했다. 이제 우리는 백성들이 무엇보다도 먼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
는 것을 얼마나 간절히 원했던가를 볼 수 있다. 그들은 자신을 돌보지 않고 광야에서
하루 밤을 보내는 것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의 게으름과 나
태함으로 인하여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는 것보다, 배고픔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더
관심을 갖는 것은 더욱 핑계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하늘에 속한 생활을 생각하다가도
조금만 다른 일이 생기면 즉시 우리는 사소한 일에 사로잡힌다. 사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세상의 장애에 방해를 받지 않고 자유로울 때를 거의 발견하실 수가 없다.광야
나 산이나 주님을 따라가는 것은 고사하고, 우리가 편하게 집에 있을 때에 그리스도께
서 우리를 찾아 오신다해도 그를 맞아들일 사람은 열중에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비록 이 병이 거의 세계 전역에 퍼져 있다 하더라도 이런 안이한 육신의 병에 구애를
받지 않을 정도로 간절히 영혼의 선(善)을 갈구하기만 한다면,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
라에 합당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육체가 주의를 끄는 만큼, 우리는 또한 그리스도께서 그의 기쁜뜻을 따르기
위하여 그들 스스로를 돌보지 않는 자들을 오히려 돌보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님
께서는 그들이 기진해서 먹을 것이 없다고 아우성을 칠 때까지 기다리지 아니하시고
요청을 받기 전에 그들에게 먹을 것을 마련해 주신다. 어떤 이는 이것이 항상 그런 것
이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경건한 사람들이 궁핍하고 먹을 것이 없어
쇠잔해 가는 것을 볼때가 있지 않느냐고 반문할 것이다. 나는 비록 그리스도께서 우리
의 믿음을 단련하고 이와 같이 우리의 인내를 시험할지라도, 그분은 하늘에서 우리의
필요를 감찰하시며 우리에게 유익한 때에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신다고 대답한다. 주
님께서 즉시 우리를 돕지 아니할 때는, 그 이유가 우리에게 감추어져 있기는 일을지라
도, 가장 좋은 이유 때문에 그렇게 하시는 것이다.
6:3
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시니 - 그리스도께서는 유월절이
될 때까지 한적한 곳에 물러가 있기를 원하셨던 것이 틀림없다. 그래서 본문 말씀에
주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앉으셨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인간으로서 주님이 의도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다른 데 있었으므로 그는
이에 기꺼이 순종했다. 그러므로 주님은 사람의 눈을 피하여 한적한 곳으로 걸음을 옮
겼지만, 그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말하자면 많은 사람이 모인 군중 속으로 들
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 산에는 어느 동네의 사람 수보다도 많은 큰 무리
가 모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님께서 행하신 기적은 디베랴 넓은 시장터에서 행한 것
보다 더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의 계획을 사태의 발전에 따라
적용함으로써, 만일 일이 우리가 예상한 것과 달리 전개된다 해도 걱정해서는 안된다
는 것을 배우게 된다. 하나님은 모든 것보다 높이 계셔서 자기의 기쁘신 뜻을 따라 모
든일을 관할하시고 이루어가시기 때문이다.
6;5
예수께서......빌립에게 이르시되 - 우리가 여기서 빌립에게 말씀하셨던 것으로
기록된 내용을 다른 복음서의 저자들은 모든 사람에게 이르신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아무런 모순이 없다. 빌립은 모든 제자들의 공통된 의견을 대변하는
대변인이어서, 그리스도께서 특별히 그에게 대답하셨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 다음
에 안드레가 말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안드레가 말한 것을 다른 복음서 저자들은
마찬가지로 모든 제자가 말한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빌립이라는 제자를 통하여 예수
께서는 제자들이 잠시 후에 목도했던 것과 같은 기적을 과연 바라고 있는가를 시험하
고 있다. 주님께서 그들이 비상 대책에 대하여 어떠한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음을 아
셨을 때, 그는 그들의 잠자고 있는 마음을 일깨워, 멀어지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볼
수 있도록 그들의 눈을 뜨게 해준다. 제자들이 하였던 모든 말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그들의 목적은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을 더이상 지체시키지 말고 돌려 보내도록 설득하
는 것이었다. 아마 제자들은 자기들도 함께 불편을 겪게 될 것을 염려해서 이 말을 할
대에 그들 자신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반대를 돌
아보지 아니하시고 자기의 목적하신 바를 추진하셨던 것이다.
6:7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 한 데나리온은 한 사람의 하루 노임에 해당
하는 것으로써 부대우스(Budaeus)의 계산에 의하면 이는 35프랑에 해당한다. 이를 5천
명에게 분배한다면 각 사람에게 상당한 돈을 나누어 주었어야 했을 것이다. 또한 여자
와 어린이가 1,000명 쯤 있었다고 계산한다면 막대한 돈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대개 큰 무리의 경우에 좀 지나치게 생각하게 되는 것이 상례이듯이, 빌립도 사람 수
를 좀 지나치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고 제자들은 가난하고 돈이 없었기 때문에, 안
드레는-자기들이 이 모든 사람들을 대접할 만큼 부유하지 못하다고 말하기라도 하듯이
-거액이 필요하다고 말함으로 그리스도를 놀라게 할 생각이었다.
6:10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 제자들이 그들의 선생께서 그들에게 준 소망을 좀 더 빨
리 포착하지 못하고 마땅히 주님께 돌려야 할 능력을 그에게 돌리지 않은 것은 꾸중을
들어 마땅한 어리석음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이 주님의 명령을 준행하는데 있어서
부여준 즉각적인 순종은 칭찬을 해 줄만한 것이다. 그들은 주님께서 명령하는 의도나
또는 그 명령이 무슨 결과를 가져올지 알지 못했다. 그리고 일반 사람들도 똑같은 순
종의 태도를 보여주었다. 왜냐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지만 사람
들이 한 마디 명령에 일제히 앉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말하자면, 어두움 가운데
행하라고 말씀하실 때 순종하는 이것이 참된 믿음의 증거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
리는 스스로 지혜있는 채 하지 말고, 커다란 혼란과 어두움 가운데서도 자기 백성을
결코 실망시키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지도자로 모시고 따를 때, 좋은 결과가 따를 것
을 조용히 바라보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6:11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 그리스도께서는 여러 차례 본을 보이심으로
우리가 기도로 식사를 시작할 것을 가르쳐 주셨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소용을 위해서
정하신 모든 사물이 우리에 대한 주님의 무한한 자비와 아버지다운 사람의 상징으로
주님을 찬양할 것을 종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울이 디모데전사 4장4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은 모두 다 선한 것으로 감사함으로 받으면
그것이 우리에게 거룩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감사할 생각을 하지 않고 식
물을 삼켜버리는 자들은 하나님의 선물을 모독하고 더럽히는 자들인 것이다. 그리고
이 가르침에 우리는 더욱 더 유의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아직도 대부분의 세상사람들
이 동물처럼 자신을 채우고 있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떡을 제자들
에게 주어 그들의 손에서 불어나는 것을 원하신 사실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서로 섬길 대 우리의 노력을 축복해 주신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이제 우리는 표적의 의미를 전체적으로 요약해 보기로 한다. 여기서 행한 기적은 다
른 기적에서와 마찬가지로 주님께서 그의 자비와 능력을 행사하셨다는 점에서 공통점
을 찾아 볼 수 있다. 이것은 또한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시리라
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재확인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갑작스런 충동에 의하여 주님께
인도된 사람들도 주님께서 돌보아 주시는데,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주님을 찾는 우리
를 주님께서는 결코 외면하지 않을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물론 주님께서는 그의 백
성으로 굶주리게 하실 때도 있다. 그러나 내가 이미 앞에서 말한대로, 주님께서는 결
코 우리를 돕지 않고 버려두시지는 않는 것이다. 그리고 최후 수단으로서가 아니라면
주님께서 우리를 돕지 않는 데는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신령한 생명을 공급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몸에 양분을
공급해 주도록 아버지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다고 밝히 말씀하셨다. 모든 축복은 그리
스도께서 그것을 우리에게 전달해 주시도록 그의 손에 맡겨졌다. 나는 주님을 축복의
통로라고 부르기를 싫어한다. 왜냐하면 주님은 영원한 아버지로부터 면면히 흐르는 생
명샘이 되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울은 모든 축복이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기를 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고전1:3). 그리고 또
다른 곳에서 바울은 모든 일에 언제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버지 하나
님께 감사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엡5:20). 그리고 이것은 그의 영원한 신성에 어울
리는 직분일 뿐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아버지께서는 그리스도를 청지기로 임명하여 우
리를 먹이시도록 섭리하신 것이다. 비록 우리가 매일같이 기적을 보지는 못하지만 그
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후히 먹여 주심으로 그의 능력을 나타내 보이시고 있다. 그리
고 주님께서 그의 친구들에게 음식을 공급하기 원하실 때 어떤 고상한 방법을 쓰지 않
는 것을 읽을 수 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든, 어떤 특별한 방법으로 먹을 것과 마
실 것을 달라고 주님께 구한다면 그것은 그릇된 요구일 것이다.
다음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에게 어떤 희귀한 별미를 나누어 주지 아니하셨다.
그 음식에서 주님의 놀라운 능력을 본 사람들은 보리떡과 마른 물고기로 만족해야 했
다. 그리고 비록 지금 보리떡 다섯개로 오천 명을 만족하게 먹이시지는 않지만, 주님
께서는 온 세상을 놀랍게 먹이시는 일을 그치지 아니 하신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고 하는 말씀(신8:3)은 우리에게
모순처럼 보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너무나 외적인 방법에 마음이 젖어 있으며
따라서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선물에 의지하시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먹을 것이 떨어지면 그와 같이 소란을 피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모든
것을 바로 생각할 수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음식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악의는 어리석음이라기보다 방해거리가 되는 것
이다. 끊임없이 계속되는 마음의 오류를 안고 지구를 수백 번 돌아 볼지언정, 자신을
보내주신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으려는 것이 인간의 패역한 마음이기 때문이다.
6:13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 - 마태는
보리떡 일곱개로 사천 명을 먹이셨을 때에 보리떡과 같은 숫자의 광주리가 남았음을
기록하고 있다(마15:37). 더 큰 숫자의 사람에게 충분한 더 작은 양의 음식과 거의 두
배 가까이 남은 음식은 우리가 고의적으로 눈을 감고 모르는 체하고 있는 그 하나님의
축복이 얼마나 능력이 있는 것인가를 더욱 분명히 보여 주고 있다. 우리는 또한 그리
스도께서 광주리를 채우라고 명하신 것이 기적을 강조하려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었지
만,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고 명하실 때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동시에 근검절약을 권고하고 있음을 유의해야 하겠다. 하나님의 은택이 풍성한 것이
우리를 사치로 이끌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풍부하게 누리고 있는 자들은
주의 깊고 성실하게 그들의 남아도는 재산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목적에 사용하지
않는다면, 언젠가 그들의 잉여 재산에 대해 하나님께 회개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
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6:14
그 사람들이 예수의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 그 사람들이 표적의 주인을 메시아
로 인정하고 있는 것을 보면, 표적이 약간의 유익을 가져다준 것 같다. 그리고 그리스
도께서 표적을 행하신 목적이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은 곧 그들이
그리스도에 대하여 갖고 있던 지식을 엉뚱한 방향으로 잘못 적용시킨다. 그리고 사람
들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그들에게 나타내시자마자 저희의 허위로써 그리스도의 진리
를 더럽히고 그릇되이 적용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오류를 아주 자주 범한다. 심지어 올
바르게 길을 걷는 것처럼 보여도, 사람들은 곧 타락하고 마는 것이다.
6:15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 이 사람들이 그리스도에게 임금
의 칭호와 영예를 안겨 주려는 데에는 좋은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그로 임금
삼을 수 있는 자유가 자기들에게 있다고 생각한 것은 커다란 잘못이었다. 성경은 이러
한 권리를 하나님 한 분에게 국한시키고 있따. 이는 시편 2편 6절에 "내가 나의 왕
을...세웠다"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들은 어떤 종류의
나라를 상상했을까? 그들은 그리스도의 인격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지상 왕국을 상상
했다. 이에서 우리는 영적인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우리 자신의 이성으
로부터 새삼스러운 것을 지어내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를 배우게 된다. 우리의
패역한 마음이 범하는 거짓에는 한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의 패역하고 비뚤어
진 예배에 의하여 어떤 사람이 고의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공격하는 것보다 더 악하
게 하나님을 대적한다면, 열심있는 체하는 가식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우리는 주님의 원수들이 전에 그의 영광을 가리기 위하여 갖가지로 노력했던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 무례함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실때에 극에 달했다. 그
러나 이러한 방법에 의하여 세상은 구원을 얻게 되었으며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사단과
사망을 이기고 승리하셨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이 시점에 임금의 자리에 앉으신다면
그의 신령한 나라는 멸망했을 것이며, 복음은 영원한 누명을 쓰게 되고 구원의 소망은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거짓된 예배와 사람이 경솔하게 지어낸 예식은 하나
님의 참된 영광을 흐리고 주님께 치욕과 수치의 짐을 지워주는 결과 밖에 가져오지 못
한다.
우리는 또한 '억지로 잡아'라는 표현에 유의해야겠다. 복음서 저자는 그들이 억지로
그리스도를 잡으려 했다고, 즉, 충동적인 완력을 써서 그들은 그리스도를 그의 뜻에
관계없이 그들의 임금을 삼으려고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에게
드리는 영광을 주님께서 승인해 주기를 원할 때에, 우리는 언제나 주님께서 요구하시
는 내용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자신이 지어낸 예식을 하나님께 강요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공격하는 것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그에게 푠행을 가하는 것이다. 왜
냐하면 참된 예배의 기초는 순종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에서 우리는 얼마나 경건한 마
음으로 순수하고 단순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하는가를 배우게 된다. 우리가 조
금만 곁길로 간다해도, 진리는 우리의 누룩에 감염되는 것이며, 진리는 더 이상 그 진
실성을 유지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약속된 구속자가 하나
의 왕으로 나타나신다는 것을 배워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의 마음에서 지
상에 속한 왕국을 제시한다. 우리가 우리의 의견을 하나님의 말씀과 혼합할 때마다,
믿음은 비참한 지경으로 전락하게 된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사단이 그들을 거짓된 열
심으로 유도하지 못하도록 겸손하게 스스로를 단련시켜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
리에게 스스로를 계시하신 그대로 우리가 그를 영접하여 모실 때에만, 바로 예배를 받
으신다.
오천 명의 남자들이 주저하지 않고 새로운 임금을 세우려는 대담성을 발휘했다는 것
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빌라도의 군대와 로마 제국의
세력에 반기를 든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들이 만일 선지자들의 예언을 믿고 하나님
께서 자기들 편이 되어 싸워주시리라고 믿지 않았다면 그와 같이 대답하게 나오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선지자들이 약속한 적이 없는 왕국을 고안해 냄으로써
큰 잘못을 범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들의 계획이 하나님의 손의 도움을 받지
못할 만큼 하나님의 뜻과 거리가 먼 행동을 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떠나
셨따. 가톨릭교의 그늘 아래서 불행한 사람들이 그와 같이 오랫동안 방황하고 있는 것
도 여기에 원인이 있는 것이다. 그들은 마치 하나님이 없다고 믿는 것처럼, 그들의 고
안해 낸 방법으로 하나님의 예배를 더럽히기를 서슴치 않고 있다.
6:16
저물매 제자들이 바다에 내려가서 - 그리스도께서는 분명히 무리가 다 흩어질 때
까지 뒤로 물러나 계시기를 원하셨다. 우리는 대중의 소요(騷擾)를 진정시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알고 있다. 그들이 의도했던 것을 공개적으로 실행에 옮기려고 했
다면, 그 소문이 곧 퍼져서 나중에는 그 오점을 주님에게서 지워버리기가 어렵게 되었
을 것이다. 반면에 다른 복음서 저자가 기록하고 있듯이 주님께서는 기도하는 중에 그
때의 시간을 보내셨다. 아마 주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격정적인 욕구를
시정해 주시도록 기도하셨을 것이다. 주님께서 기적적으로 호수를 건너가신 것은 제자
들의 믿음을 강건하게 해줌으로써 그들에게 유용한 것이었다.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
어서 건너심으로 사람들은 그 다음날 주님께서 배를 타고 그곳에 오신 것이 아니라 자
신의 능력에 의하여 그곳까지 오셨음을 더 쉽게 알 수 있게 되었다. 왜냐하면 사람들
은 주님께서 출발해야 할 해변을 모두 봉쇄했으며, 또 제자들이 배를 타고 바다를 건
너는 것을 보지 않았다면 사람들은 자리를 뜨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6:17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가버나움으로 가는데 이미 어두웠고 - 요한은 다른 저자들
처럼 제자들이 몇 시간 동안 강풍과 싸운 것과 같은 상세한 내용을 기록하지 않고 있
다. 강풍은 해가 진 직후에 불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관복음 저자들은 그리
스도께서 4경이 될 때까지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 요한은 제자
들이 노를 저어 십여리쯤 갔다고 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셨을 때는 그들이
아직 바다 한 가운데 있었다고 추리하는 사람들은 제자들이 바다 건너편 또는 반대편
으로 항해하고 있었다고 생각함으로써 그릇된 판단을 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 기적이
행해졌다고 누가가 말하고 있는 베세다와, 배가 목적해서 가고 있는 가버나움은 같은
지역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다. 플리니(Pliny)는 그의 다섯번째 책에서 이 바다는 폭
이 10Km쯤 되고 길이가 26Km쯤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는
그의 세번째 책에서 유대의 전쟁에 대하여 기록하는 가운데 이 바다의 길이가 20Km쯤
되고 폭이 8.5Km쯤 된다고 말하고 있다. 이 두 사람이 추정한 거리를 비교해 보아도
우리는 거리상에 별 오차가 없음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 항해에 관한 한, 나
는 그들이 직접 목적지로 노를 저어 항해한 것이 아니라 이리 저리로 몰려 다녔다고
추정한다. 어쨌든 복음서 저자는 제자들이 위험에 봉착해서 근심하고 있을 때에 그리
스도께서 나타나셨다는 것을 알려 주려 했던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잔잔하고 평탄한
항해를 하는데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이와 같이 괴롭힘을 당했다는 것은 좀 이상하게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종종 그의 백성을 심각한 위험 가운데 몰아 넣으심
으로 그들이 곤경에서 구원을 받는 중에 주님을 더 잘 그리고 더 가까이 알아볼 수 있
기를 바라시는 것이다.
6:19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심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 다른 복음서
저자들은 그들이 두려워한 원인을 그들이 주님을 유령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설명
하고 있다. 유령이 우리 앞에 출현했을 때 경악과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사단이 우리를 기만하고 있다고 생각하거나 하나님께서 무엇인가를 전
조(前兆)로 보여주신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요한은 여기서-마치 거울에 비쳐 보여주듯
이-말씀이 없이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하여 가질 수 있는 지식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
고 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그의 신성(神性)을 본보기로 제시해 주신다면 우리는 곧
상상에 빠져들게 되고 각 사람은 그리스도 대신에 자기 자신을 위한 우상을 조작해 내
기 때문이다. 이러한 마음의 오류 뒤에는 반드시 혼란과 혼돈된 마음의 공포가 따른
다.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을 시작하실 때, 그의 음성에서 우리는 분명하고 본질적인
지식을 얻게 되고 기쁨과 평안이 우리 마음에 비취게 된다.
"내니 두려워 말라"고 하신 말씀은 무게가 있는 말씀이다. 이러한 말씀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존전에서 확신 가운데 평안과 안정을 유지할 근거가 있음을 배우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제자들에게만 적용되는 말씀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나중에 악한 사람들
이 같은 말씀을 듣고 땅에 엎드러진 것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18:6). 두 가지 경우의
차이점은 주님께서 잃어버린자와 불신자의 심판을 위하여 보냄을 받은 재판관이 되신
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삼킨 바 되지 아니 하고는 주님의 임재하심을 견딜 수
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경건한 사람들은 주님께서 그들에게 화해의 제
물로 주어졌으며, 그의 이름이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그들의 구원에에 대한 확실
한 보증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이 주님의 음성을 들을 때, 그들은 죽
음에서 생명으로 되살아난 것처럼 용기를 얻게 되고 말하자면 아름다운 날씨를 유쾌하
게 즐기며, 안전히 땅에 거하며, 모든 악을 이기고 주님의 도우심으로 모든 위험을 극
복하는 것이다. 주님은 그의 말씀으로 우리를 격려하고 위로할 뿐만 아니라, 폭풍을
진정시키심으로 두려움의 원인을 제거하기도 하시는 것이다.
6:22
이튿날 바다 건너편에 섰는 무리가 - 여기서 복음서 저자는 무리로 하여금 그리스
도께서 바다를 건너신 것이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생각되도록 할 만한 상황을 기록하
고 있다 . 배는 하나 밖에 없었다. 그들은 그 배가 그리스도를 태우지 않고 떠나는 것
을 보았다. 다음날 배들이 다른 곳에서 와서 그들을 가버나움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
고 거기서 그들은 그리스도를 찾았다. 따라서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기적적으로 그곳까
지 오신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이 귀절 앞 부분에서, 요한은 거기 배가 한 척 밖
에 없었으며 그 배가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그곳을 출발했으며 그리스도는 그 배에
오르지 아니하셨다고 말하고 있다. 요한은 또 배들이 후에 디베랴로부터 와서 해변에
서 기다리던 무리를 태우고 가버나움으로 건너갔다고 덧붙이고 있다.
6:23
배들이 주의 축사하신 후 여럿이 떡 먹던 그곳에 가까이 왔더라 - 이 귀절의 내용
에는 모호한 데가 있다. 이 말씀은 예수께서 보리떡 다섯개로 무리를 먹이신 곳 가까
이에 디베랴가 위치해 있다고 설명될 수도 있고 배들이 그곳 가까이에 있는 해변에 이
르렀다는 뜻으로 설명할 수도 있다. 기적을 행한 곳에서 가깝다고 누가가 기록하고 있
는 벱세다는 디베랴와 가버나움 중간에 위치해 있다. 따라서 그곳에서 내려온 배들은
무리가 서있던 해변을 따라 항해했던 것이다. 그리고 의심할 것 없이 그들은 승객을
태우기 위하여 배를 해변에 대었을 것이다.
요한이 여기서 '주의 축사하신 후'라는 말을 다시 언급한 것은 불필요한 반복이 아
니다.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기도에 의하여 몇 개 되지 않는 보리떡으로 그와 같이 많
은 사람을 먹일 수 있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기도에 대하여 너무
나 냉담하고 나태하게 때문에 같은 것을 다시한번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6:25
바다 건너편에서 만나 - 우리는 이미 가버나움이라는 동네가 바다 건너편에 위치
해 있는 동네가 아님을 밝힌 바 있다. 디베랴는 호수의 가장 넓은 부분에 위치했고 그
다음에 벱세다가 있으며, 가버나움의 요단강 입구에서 별로 멀지 않은 낮은 부분에 위
치해 있었다. 이제 요한이 바다 건너편이라고 가버나움을 말할 때, 우리는 이 지역이
바로 반대편에 있었다고 오해해서는 안되겠다. 오히려 이 바다는 하구가 둥글게 휘어
있었기 때문에 중간에 끼어 있는 만(灣)으로 인해서 걸어서 가는 길은 돌아서 가는 길
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복음서 저자는 일반적인 용어로 '바다 건너편'이라는 말을 쓴
것이다. 가버나움까지 곧 바로 가는 길은 배를 타고 가는 방법 뿐이었기 때문이다.
6:26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 그리스도께서는 표적에 나타난 그의 능력을 내세우
기 위하여 그들의 질문에 대답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그들이 생각 없이
몰려 다니는 것을 꾸짖고 있다. 그들은 주님께서 행동하시는 참된 이유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에게서 그리스도 아닌 다른 무엇을 찾고 있었다. 그들은 표
적으로 인하여 주님을 찾은것이 아니라 배를 치우기 위하여 주님을 찾는 잘못을 범하
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표적을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더구나 복음서 저자들는 그들이 표적으로 인하여 그리스도를 좇을 마음이 생겼다고 기
술한 바 있다. 그러나 그들은 표적을 다른 목적으로 번복하여 생각했고 기술한 바 있
다. 그러나 그들은 표적을 다른 목적으로 번복하여 생각했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그들
이 표적 보다도 먹는 것에 더 관심이 있다고 그들을 꾸짖으셨던 것이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하나님의 일에서 마땅히 이득을 얻어야 할 만큼 유익을 얻지 못했다고 말한 것
이나 다름이 없다. 유익을 얻을 수 있는 참된 방법은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인정함으로
써 그의 가르침과 다스림에 순종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
아 하나님의 나라의 일을 돕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구했
던 것은 이 세상에서 행복하고 편하게 사는 것이었다. 이것은 그리스도로부터 그의 주
된 능력을 빼앗는 것과 같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하나님아버지께서 성령을 주신
자들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재창조하고 또 아버지께서 그의 의를 옷 입혀준 성도들을
영생으로 인도하도록 보내심을 받아 사람에게 나타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희구하지 아니하고 현재의 생활의 안락에만 마음
을 쓰는 자들은 배를 채우는 데만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도마찬가지로, 복음에
서 십자가의 쓰라림은 제외되고 육신적인 쾌락만을 가져다 주는 것이라면 많은 사람들
이 복음을 환영해 마지 않을 것이다. 과연 우리는 많은 이들이 보다 즐겁게 그리고 자
유롭게 살기 위하여 그리스도편에서는 것을 보고 있다. 어떤 이들은 개인의 이득으로
인하여 또 어떤 이는 두려움으로 인하여 또 다른 이들은 그들이 기쁘게 해주고 싶은
사람들로 인하여 그리스도의 제자로 자처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찾는 데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이 세상을 미워하고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훌륭하게 추구하고 있다고 자신하고 있지만, 실
은 주님의 모든 능력을 악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늘 하시는 대로, 우
리의 위선 아래에 숨어있는 악덕을 그늘에서 끄집어내기라도 하려는 듯이, '진실로'라
는 말을 두번 되풀이하고 있다.
6:27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 여기서 주님은 자기가 그의 백성에게 목표로
삼아 희구하기를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있다. 다시 말해서 우
리는 영생을 얻기 위하여 일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깨달으이 둔하
므로 우리는 항상 땅에 속한 일에 몰두하기 때문에 우리가 마땅히 행할 일을 지적하기
전에 주님께서는 이 선천적으로 타고 난 병을 시정하고 있다. 그의 가르침을 한 마디
로 말한다면 "썩지 않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는 것이다. 그러나주님께서는 인간의
의식이 세상의 염려로 묶여 있기 때문에 먼저 그들을 그 굴레에서 벗겨 위의 것을 바
라 보도록 유도하고 있다. 이는 주님께서 자기 백성들로 일용할 양식을 얻게 하기 위
하여 수고하는 일을 금하셨다는 말이 아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천국의 생활이 땅에
속한 생활보다 우선적인 것이어야 한다고 경고한다. 경건한 자들이 이 세상에 살아 있
는 유일한 이유는, 세상의 순례자로서, 천국의 본향을 바라보고 믿음의 경주를 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우리는 이 말씀의 요점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능력이 먹을 것과 세상적인 것에 의하여 더럽힘을 받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추구해야 할 것이 무엇이며 왜 그것을 구해야 하는지를 논하고 계신다.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는 그 때의 상황과 어울리는 비유를 쓰고 있다. 만일 양식이 언급되
지 않았다면, 주님은 비유를 쓰지 않고 세상의 염려를 버리고 하늘에 속한 생명을 구
하라"" 고 말씀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짐승과 같이 그들의 사료를 얻는 데에만
급급하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말씀을 비유적으로 돌려서 새로운 생명에 관계
되는 것은 무엇이나 양식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성령의 능력에 따라 말씀
이 우리 안에 역사할 때에, 우리의 영혼이 복음의 말씀을 먹고 영양을 공급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믿음이 영혼의 생명인 것처럼, 믿음에 영양을 공급하고 믿
음을 증진시키는 모든 것을 양식에 비유하고 있다. 이런 종류의 양식을 주님은 썩지
않는 양식이라고 부르며, 이것이 영생하도록 하고 있다고 말씀하신다. 우리의 영혼은
하루 동안만 영양 공급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영생의 복된 소망 가운데 양육을 받는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기 위한 것이다. 주님께서는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셔서 주 예수의 날
에 완성하도록 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영생의 보증으로서 성령의 은사를 받지 않으면
안된다. 비록 잃어진 영혼이 이 양식을 맛보고 뱉아 버리는 일이 종종 있지만, 믿는
성도들은 성령의 은사에서 끊이지 않고 계속되는 성령의 능력을 의식할 때 그들의 영
혼에 지속적인 힘을 느끼게 된다.
어떤 이들이 '일'이라는 말에서 우리가 일함으로 영생을 얻는다고 추리하는 것은 헛
된 궤변에 속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미 말한 대로,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에게 세상
일에만 급급하는 대신에 하늘에 속한 생명에 관해 묵상하도록 권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이 양식은 이자가 너희에게 준다"고 말씀하실 때, 친히 모든
의문을 제거하고 계시다. 우리가 주님의 선물(은사)을 받는 것은 아무도 자기의 노력
에 의해서 마련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휘상으로 분명한 모순이 있는 것 같으나, 두
문장은, 영혼의 신령한 양식은 그리스도께서 거저 주시는 은사이며, 우리는 그와 같이
위대한 축복에 참예하기 위하여 마음을 다하여 노력해야 된다는 데 똑같이 일치하고
있다.
인자는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 주님은 앞의 문장을 재확인하고 있다. 아버지께서
는 이러한 목적으로 그를 인쳐서 우리에게 보내셨기 때문이다. 옛날 작가들은 이 말씀
의 의미를 의곡하여,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인(印)과 영상이시기 때문에 인치신 자라
고 말해진 것처럼 이를 그리스도의 신성에 적용시켰다. 주님께서는 여기서 그의 영원
한 본체를 논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맡겨진 사명이 무엇이며, 우리를 향한 그
의 직책이 무엇이며, 그로부터 우리가 무엇을 찾고 구해야 하는가를 말씀하고 있는 것
이다. 종합해서 요약하자면, 누구나 우리의 영혼에 썩지 아니할 양식으로 먹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나오셔서 자신이 이 축복의 근원이라고 주장하시면서 아
버지 하나님께서 그를 승인하셨고 인치신 자로부터 인맞은 표를 가지고 사람들에게 보
냄을 받았다고 부언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양식을 공급받기 위하여 영혼을 그리스도께 내놓는 사람들의 욕망은 반드시
채워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각자가 틀림없이 그 생명을 열망할 수 있도록 생명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제시되었다는 것을 인식해야겠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그
리스도 아닌 다른 사람에게 이 찬양을 올리는 모든 자는 하나님 앞에 거짓 증거죄에
걸리게 된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따라서 가톨릭 교도들은 그들의 가르치는 모든 분야
에서 온통 거짓말을 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들이 그리스도 대신에 다른 구원의 길을
대치시킬 때마다 그들은 그들의 악한 상상과 저속한 배반으로 이 특이하고 확실한 하
나님의 인을 더럽히고 흐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두려운 죄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아버지께서 주님께 허락하신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 그대로 보전하도록 우
리는 노력해야 할 것이다.
6:28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 무리는 그리스도께서 현세의
안락보다 더 높은 차원의 삶을 추구하도록 그들에게 권고했으며, 그리고 다른 곳에서
하나님이 부르신 사람들은 땅의 일에만 집착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를 묻지 않는 사람들은 일의 종류를 이해하지 못함으로써 부분적인
실수를 범하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무엇이든지 신령한 생활을 위해서 필요한 것
을 아들의 손에 의해서 우리에게 내려 주신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았다. 첫째로 그들은
무엇을 하여야 하는가를 물었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의 일(works)을 언급할 때, 그
들은 방향없이 방황하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그들의 무
지를 드러냈다. 그리고 그들은 여기서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책망할 자격이 없다는듯
이 거만스럽게 그리스도께 불평을 늘어 놓고 있다. "당신은 우리가 영생에 대하여 관
심이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왜 우리의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일을 우리에게
하라고 말하십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서요구하시고 인정하시는 일인 것
이다.
6:29
사람들은 일(works)들에 대하여 물었지만, 그리스도는 그들을 한가지 일, 즉 믿음으로 유도하고 있다. 이 말씀에서 주님은 사람이 무슨 일이든 믿음이 없이 행하는 것은 쓸 데 없는 헛된 일이며 반면에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것은 믿는 것 한가지 뿐이기 때문에 믿음 하나면 족하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믿음과 인간의 염려와 노력이 암시적으로 비교되어 있다. 주님은 마치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믿음이 없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함으로써 헛되이 분주하기만 했다. 그들은 목적지까지 꾸준히 코스를 따라 뛰지 않고 코스를 벗어나 무조건 달리기만 했던 것이다." 이것은 놀라운 말씀으로써 사람이 비록 평생 동안 노력한다 할지라도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그들의 생애를 지배하지 않는다면 헛된 일에 분주할 뿐인 것이다. 이 말씀에서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그릇된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서 하나님이 우리 안에 만들어 주시는 것을 가르치고 있지 않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고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믿음 한 가지만을 인정하신다는 것은 어처구니 없는 말처럼 보인다. 사랑도 업신여기지 말 것이며 다른 신령한 행위도 모두 그 위치와 가치를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믿음이 제일 중요하다 할지라도 다른 행위 역시 필요한 것이다. 대답은 간단하다. 믿음은 사랑이나 다른 신령한 행위를 배제하지 않는다. 오히려 믿음 그 자체 안에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다. 믿음에 의하여 우리는 그리스도를 소유하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때문에 믿음만이 유일한 하나님의 일이라고 불리우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성령으로 우리를 다스리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믿음과 그 열매를 구분하지 않는 만큼, 그리스도께서 믿음이 전체를 대표하는 것처럼 말씀하신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제 3 장에서 '믿는다'는 말의 의미에 대하여 논한 바 있다. 믿음의 능력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가 믿는 그리스도가 어떠한 분이며 아버지께서 왜 그를 우리에게 주셨는가를 판별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항상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믿음이 또한 일이라고 불리우고 있기 때문에, 믿음이 의롭게 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일에 의하여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냐고 주장하는데 이 말씀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은 궤변을 좋아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첫째로 그리스도께서 믿음을 일이라고 부를 때 그는 정확하게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는 바울이 믿음의 법과 행위의 법을 대조시킬 때도 마찬가지다. 둘째로, 우리가 행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없음을 뜻한다. 믿음은 하나님께 아무 것도 가져가지 못한다. 오히려 믿음은 사람을 가난하고 텅 빈 채로 하나님 앞에 세움으로 그를 그리스도와 그의 은혜로 채운다. 그러므로 믿음은 말하자면 아무런 보상도 지급할 수 없는 피동적인 일이다. 그리고 믿음은 우리가 그리스도에게서 받는 것 외에 다른 의를 사람에게 부여하는 것이 아니다.
6:30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 - 이들의 완악함은 다른 곳에서 이미 언급한 내용이 사실임을 힘있게 증명해 주고 있다. "이 악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마12:39) 그들은 처음에 그의 표적을 보고 그리스도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다가 새로운 표적을 보고 그들은 그리스도가 메시아라고 고백했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에서 그들은 그리스도를 임금으로 세우려 했다. 그리고 이제 와서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알려지지 않은 분인 것처럼 그로부터 표적을 구한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께 감사할 줄 모르고 또 하나님의 능력을 보고도 악의적으로 눈을 가린 것이 아니라면, 이와 같이 갑작스레 모든 것을 잊는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바라는 바대로 응해 주지 않았고, 또 그리스도께서 그들이 상상했던 분이 아님을 알았기 때문에, 그들이 이미 보았던 표적을 모두 잊어버리는 것이 틀림없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세상적인 행복에 대한 희망을 약속했다면 그들은 계속해서 주님을 찬양했을 것이며, 틀림없이 그를 하나의 선지자와 메시아로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로 환영했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들을 너무나 육신에 빠져 있다고 책망했기 때문에 그들은 더 이상 주님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다. 오늘날 이러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처음에는 그들이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흠을 덮어주시는 줄 알았기 때문에, 그들은 열심히 복음을 붙들었고 증거를 요구하지 않았다. 그러나 육체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라고 하자, 그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고 복음이 어디서 온 것인지를 묻고 있다. 결국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요구대로 응하지 않고 그는 이제 그들의 선생된 자리를 중지하게 된 것이다.
6:31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그의 배를 채우기 위하여 사나운 짐승과 같이 몰려왔다고 말씀하셨을 때 그들의 아픈 데를 찔렀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양식을 제공해 줄 메시아를 요구했을 때 이러한 태도를 보여 주었다. 그리고 그들이 만나를 내세워 하나님의 은혜를 높이 찬양했을 때,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썩을 양식에 대한 욕심을 정죄한 데 대한 책략에 불과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질책에 대항하여 만나를 가리켜 하늘에서 내려준 떡이라고 영광스러운 이름을 만나에 붙여 줌으로써 맞섰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하나님이 돼지 떼를 먹이듯이 그의 백성을 먹이시고 더 이상 귀한 것을 그들에게 주지 않았다고 하는 뜻으로 만나를 하늘에서 내린 떡이라고 부르신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지금 베풀어 주시는 영혼의 신령한 양식을 악하게 거절할 때 그들에겐 핑계할 것이 없는 것이다.
6:32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 - 그리스도께서는 시편에서 인용된 말씀과 상치되는 말씀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는 다만 비교적으로 말하고 있을 뿐이다. 만나(* ;manna)는 육신의 양식인데도 하늘의 떡이라고 불리웠다. 참으로 하늘에서 내려준 떡으로 간주되어야 할 떡은 영혼에 신령한 양분을 공급해주는 떡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서 하늘과 세상을 대조해서 말씀하고 있다. 썩지 않는 생명은 하늘나라에서만 구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귀절에서 진리는-다른곳에서와 같이-숫자로 비교되고 있지 않다. 오히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참 생명을 다루고 있다. 이러한 생명으로 인해서 인간은 다른 짐승과 다른것이며 모든 피조물 가운데 으뜸이 되는 것이다.
주님께서 후에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라고 덧붙이셨을 때, 그는 마치 "모세가 너희 조상에게 주었던 만나는 하늘에 속한 생명을 가져다 주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 너희에게 주어졌다고 말씀하신 것이나 다름이 없다. 주님께서 아버지를 떡을 주신 분으로 부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주님은 그것이 자기 자신으로 말미암아 주어졌다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대조는 모세와 하나님 사이의 대조가 아니라 모세와 그리스도의 대조인 것이다.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자신보다 아버지께서 이 선물을 주시는 분이라고 말함으로써 "나를 하나님의 보내신 사역자로 인정하라. 나의 손을 통하여 아버지께서는 너희 영혼에 영생에 이르는 양식으로 먹이기를 원하신다"고 말씀하신 것과 다름이 없다. 그러나 이것은 바울의 가르침과 상치되는 것처럼 보인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0장 3절에서 만나를 신령한 식물이라고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다루고 있는 사람들의 수준에 따라 그들의 수준에 맞추어서 말씀하고 계시다고 대답한다. 그리고 이것은 성경에 흔히 있는 일이다. 우리는 바울 자신이 할례에 대하여 얼마나 여러가지로 쓰고 있는지를 살펴 볼 수 있다. 바울이 이 예식에 대해 언급할 때, 그는 이것을 믿음을 인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거짓 사도들과 맞서 싸워야 할 때, 할례는 저주를 인치는 것이라고 말함으로 그들의 생각을 빌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제 그들이 그리스도에게 대항하여 제기했던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자. 그들은 예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육신의 양식을 공급해 주지 않는다면, 메시아임을 증명하지 못한 것이라고 반기를 들었던 것이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만나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인가를 공적으로 말하지 않고 만나가 그들의 배를 채워주기 위해 공급해 주었던 떡은 참 떡이 아니라고 부인하고 있다.
6:33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 그리스도께서는 정의를 내린 대상과 정의 그 자체를 비교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하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떡이다. 만나에는 그런 요소가 전혀 없었다." 동시에, 주님은 그가 모세가 했던 것보다 사람에게 훨씬 더 좋은 것으로 먹이기 위해 아버지께서 자기를 보내신 것이라고 하였던 말씀을 재확인하고 있다. 만나는 분명히 보이는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지, 생명을 우리에게 부어주는 영원한 하늘 나라에서 온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있던 유대인들은 그들의 조상들의 배가 가득 채워졌던 그 광야에서 그 이상 높은 것을 바라보지 못했다.
주님께서 전에 하늘의 떡이라고 불렀던 것을, 그는 이제 하나님의 떡이라고 부른다. 우리의 현 생명을 보전해 주는 떡이 하나님이 아닌 다른 원천으로 말미암는다는 말이 아니라, 오직 우리의 영혼을 살려 복된 영생으로 인도 하는 것만이 하나님께로 말미암았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귀절은 온 세상이 하나님께서 보면 죽어 있다고 가르쳐주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소생시키지 않는 한 세상은 죽어 있다. 그 까닭은 생명은 그리스도 안에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늘에서 내려"라는 말에서 두 가지를 유의해야겠다. 우리는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한다. 주님은 우리에게 생명의 주인이 되기 위하여 아버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기 때문이다. 둘째로, 하늘의 생명은 우리 가까이에 있다. 그래서 구름 위로 날아 올라갈 필요도 없고 바다 건너로 날아갈 필요도 없다. 아무도 주님께로 올라갈 수 없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내려 오셨기 때문이다.
6:34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 그들은 주님께서 생명의 떡을 주신 다고 선언했기 그리스도의 독단적인 자만심을 송사하기 위하여 빈정대는 투로 이야기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그러므로 불행한 사람들은 단순히 하나님의 약속을 거부하는 죄만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믿지 않는 불신의 죄를 그리스도에게 전가하는 것이다.
6:35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 첫째로 그들이 경멸하는 투로 요구했던 그떡이 그들 앞에 있다는 것을 주님은 그들에게 일러주고 있다. 그리고 나서 주님은 그들을 책망하고 있다. 주님은 그들의 은혜를 모르는 배운망덕한 태도를 부여주기 위하여 하나의 교훈으로 시작하고 있다. 그리고 이 교훈에는 두 가지 부분이 있는데, 하나는 우리가 생명을 어디에서 구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것이고 다음은 우리가 그 생명을 어떻게 소유할 수 있는가에 대한 말씀이다. 우리는 만나와 일용할 양식이 이미 언급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이런 비유를 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비유의 말씀은 직설적인 연설보다도 무지한 자들을 감동시키는 데 더 적절한 것이다. 우리가 육신의 영양 공급을 위하여 떡을 먹을 때, 하나님께서 어떤 비밀스런 능력으로 음식이 없이 우리 몸에 영양을 공급하시는 경우보다 우리의 연약함과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은 더욱 더 분명히 드러난다. 그러므로 몸과 영혼을 비유해서 말씀하신 것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더욱 더 분명히 인식시켜 주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영혼을 먹여 주시는 떡이 되신다는 말을 들을 때 그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단순히 자기가 우리의 생명이 되신다고 말씀하신 것보다 더욱 더 깊이 우리 마음에 새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떡이라는 말이 우리가 경험하는 것만큼 그리스도의 소생시키는 능력을 표현하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떡은 생명을 시작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이미 존재하는 생명을 양육하고 보전해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생명을 주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우리는 생명을 보전할 뿐만 아니라 생명을 얻기 시작하기 때문에 이 비교는 부분적으로 적절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여기에 무슨 모순이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그전에 하신 말씀의 상황에 맞추어서 그의 어귀(語句)를 조절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을 먹이는 데 모세와 그리스도 둘 가운데 어느 분이 더 두드러진 역할을 보여 주었느냐 하는 질문이 계속 있었다. 주님께서 이를 떡이라고 불렀던 것도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들이 주님을 반대하기 위하여 사용했던 것은 만나뿐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님은 이를 다른 종류의 떡에 비교하는 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여기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단순한 교훈은 우리의 영혼이 소위 내재적인 능력에 의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그리스도로 부터 공급받는다는 사실이다.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 이제 주님께서는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라고 말하며 먹이는 방법을 밝히고 있다. 왜냐하면 믿지 않는 자들은 항상 텅 빈 채로 남아 있으므로 그리스도께서 생명의 떡이 되신다는 것은 그들에게 아무런 효용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주린 상태로 우리를 채워 달라고 구하면서 나아갈 때에 우리의 떡이 되어 주신다. 그리스도에게 나아가는 것과 믿는 것은 여기서 같은 뜻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전자의 어휘에는 우리가 배가 고프기 때문에 생명을 얻기 위하여 그리스도에게 달려간다는 믿음의 결과가 표현되어 있다고 하겠다. 뿐만 아니라 이 말씀에서 그리스도를 먹는 것은 믿음 만을 뜻하는 것이라고 유추하는 사람들은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물론 나는 믿는 것 이외에 다른 방법으로는 그리스도를 먹을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먹는 것은 믿음의 결과와 열매이지 믿음 그 자체는 아니다. 믿음은 멀리서 그리스도를 바라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우리의 소유가 되게 하고 우리 안에 거하게 하기 때문이다.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그의 몸 안에서 연합되게 하고 그와 함께 생명을 공유하게 하며 한 마디로 말해서 그와 하나되게 한다. 그러므로 믿음이 어떻게 우리를 그에게 연합시키는가를 이해한다면, 우리가 믿음에 의해서만 그리스도를 먹을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 이 말씀을 여기에 삽입시킨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 같다. 떡의 목적은 허기를 채워주는 것이기 목마른 갈증을 채워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떡에다 떡의 성격이 허용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부여하고 있다. 나는 만나와 우리의 영혼을 생명 가운데 보전시키는 하늘의 능력을 대조하는 데 필요하기 때문에 주님께서 떡이라는 말만을 쓰고 있다고 이미 설명한 바 있다. 동시에 주님께서는 그의 민족이 흔히 쓰는 용법을 따라서 일반적으로 모든 영양 공급을 뜻하는 말로 떡이라는 말만을 쓰고 있다고 이미 서령한 바 있다. 동시에 주님께서는 그의 민족이 흔히 쓰는 용법을 따라서 일반적으로 모든 영양 공급을 뜻하는 말로 떡이라는 낱말을 쓰고 있다고 이미 설명한 바 있다. 동시에 주님께서는 그의 민족이 흔히 쓰는 용법을 따라서 일반적으로 모든 영양 공급을 뜻하는 말로 떡이라는 낱말을 쓰고 있다. 히브리어에서는 대유(代喩)에 따라 '떡을 먹는다'는 표현을 '식사한다' 또는 '마신다'는 말 대신에 쓰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구할 때 우리는 마실 것과 기타 다른 생활 필수품을 포함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의 의미하는 바는 누구든지 그리스도께로부터 생명을 얻기 위하여 그에게 나아가는 자는 아무 것도 부족을 느끼지 않을 것이요, 생명 보전에 필요한 모든 것으로 완전히 충족된다는 것이다.
6:36
그러나 내가 너희더러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 - 주님께서는 이제 그들에게 베풀어진 하나님의 선물을 악의적으로 거절한 데 대하여 그들을 꾸짖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신것인 줄 알면서 이를 거절하는 자는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능력을 그들에게 나타내지 않고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분명히 증거하지 않았다면 주님이 어떠한 분이신가를 몰랐다는 핑계가 그들의 죄책감을 덜어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메시아라고 고백했던 분의 가르침을 이제 와서 거절할 때 그들은 주님을 극단적으로 모욕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사람들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의식하고 일부러 하나님을 저항하는 일은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바울의 한 말이 여기에 적용된다.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전2:8). 그러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은 스스로 빛에 대하여 눈먼 자이다. 그리고 사단이 그들의 마음을 혼미케하기 때문에 그들이 본 것도 즉시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지게 마련이다. 주님께서 '너희는 나를 보고도'라고 말씀하셨을 때, 주님은 그의 육체적인 외모를 가리켜 말씀한 것이 아님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오히려 주님은 그들의 의도적인 완악함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완악함이 그들을 가로막지 않았다면 그들은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6: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 주님께서는 그들의 믿지 아니함이 그의 교훈을 약화시키지 못하도록 그들이 완악한 원인은 그들이 버림받은 자로서 하나님의 양무리 밖에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주님은 여기서 택한 자와 버림받은 자를 구별하심으로 비록 많은 사람이 믿지 아니할지라도그의 가르침의 권위가 흔들리지 않도록 하셨다. 불경건한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약화시키고 이를 멸시할 뿐만 아니라, 연약하고 무식한 많은 사람들은 대부분의 세상 사람들이 거부하고 있는 것이 과연 하나님의 말씀인가를 의심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믿지 아니하는 자들은 자기의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실 때 이 거침돌을 다루고 계시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싫어할 때 그의 모든 자녀들이 그 진리를 영접하고 환영하는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우선 주님께서는 아버지께서 그에게 주시는 자는 다 그에게로 온다고 말씀하고 있다. 이 말씀에서 주님께서는 믿음은 사람의 수중에 있는 것이 아니며,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 그저 무분별하게 우연에 따라 믿게 되는 것이 아니라고 밝히고 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아들에게 넘겨주는 자를 택하시는 것이다. 주님께서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라고 말씀하실 때, 우리는 모든 사람이 다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유추해 볼 수 있다. 다음으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성령의 효능으로 그의 택한 자 속에서 역사하시기 때문에 그들 중 아무도 실족하지 않는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주신다는 말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서는 자기가 택한 자들을 거듭나게 하셔서 복음을 순종하도록 내게 주신다"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 이 말씀은 경건한 자들에게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에게 나아갈 수 있는 분명한 길이 있다는 것을 확신시키고, 또 그들이 주님의 신실하심과 보호하심에 자신을 맡기는 즉시 친절히 그들을 영접해 주신다는 뜻에서 믿는 자들을 위로하시기 위하여 부언한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의 가르침은 모든 경건한 신자들에게 유익을 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로 나서는 사람 가운데서 그 결과로 주님이 신실하고 참된 스승이 되신다는 것을 느끼고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6:38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 이는 우리가 헛되이 그리스도를 찾지 않는다는 내용의 말씀을 재확인해 주는 말씀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일로써, 믿음에 의해서 하나님은 우리가 그의 것임을 보여 주시며 또 그의 아들을 정하여 우리의 구원의 감독자를 삼으시는 것이다. 그러나 아들의 유일한 목적은 그의 아버지의 명령을 이루는 것이다. 결국 주님은 아버지께서 보내 주신자들을 결코 내어 쫓지 않으신다. 끝으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믿음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뜻과 아버지의 뜻을 구분해서 말씀하신 것은 듣는 자들의 태도에 응해서 그리한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의 마음을 불신하려는 경향이 있어서 의심을 자아낼 만한 것을 지어내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악한 공상에 대한 모든 핑계를 제거하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구원에 대하여 선포하신 것을 그대로 이행하기 위하여 세상에 나타내신 바 되었다고 선언하고 있다.
6: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 이제 주님은 아버지의 목적하시는 바는 믿는 자들이 그리스도 안에 확보되어 있는 구원을 발견하도록 하는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복음의 가르침에서 유익을 얻지 못하는 모든 자는 버리운 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복음에 실족되어 많은 사람이 멸망에 이르는 것을 보더라도 절망할 이유가 없다. 이러한 사람들은 스스로 멸망을 자초하기 때문이다. 복음은 언제나 택한 자들을 구원으로 모아 들이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 다시 말해서 "나로부터 취하여 감을 당하거나 멸망당하는 것을 허락지 않겠다"는 말씀이다. 이 말씀에서 주님은 자기가 우리의 구원을 그저 하루 이틀 동안 지켜주는 분이 아니요, 끝까지 우리르 보전해 주시고, 말하자면 처음 출발할 때부터 끝나는 지점까지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약속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마지막 부활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약속은 육신의 연약함 가운데 쓰러지지 않으려고 애쓰는 사람들을 위하여 매우 필요한 것이다. 우리는 모두 이 육체의 연약함에 대하여 충분히 알고 있다. 만일 믿는 자들이 그리스도의 손에 의지하여 부활의 날을 향하여 힘차게 전진하지 않는다면 온 세상의 구원은 단번에 흔들리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향해 구원의 손길을 뻗치셨으며 절대로 중도에 우리를 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 마음 속에 깊이 새기도록 하자. 우리는 오히려 주님의 인도하심에 의지해서 담대히 저 마지막 날을 향하여 우리의 눈을 들어야 할 것이다.
주님은 또 다른 이유에서 부활을 언급하고 있다. 우리의 생명이 감추어져 있는 동안 우리들은 죽은 사람과도 같다. 믿는 자들이 불경건한 사람들과 다른 것은 믿는 사람들이 불행한 빈곤에 눌려있고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과 같이 한 쪽 배은 무덤에 들여놓고 있다는 것 외에 무엇이 있는가? 이것은 과연 그렇다. 그리고 그들은 죽음에 의하여 삼킨 바 될 위험에 늘 직면해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과 인내를 위한 대응책은 우리의 현재 생활상태에서 눈을 돌려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마지막 날로 향하게 함으로써 우리의 믿음의 열매가 나타나는 날까지 세상의 장애물을 헤치고 나가는 것 뿐이다.
6: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 주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우리의 구원을 보전하는 직책을 그에게 맡기셨다고 말씀하신 바 있다. 이제 주님은 그 방법을 밝히고 있다.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순종하는 방법을 통해서다. 주님께서는 전에도 이에 대해 살핀 바 있지만, 이제 그는 전에 약간 모호하게 말했던 것을 더욱 분명히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만일 하나님의 뜻이 자기가 택한 사람들이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라면, 그리고 이러한 방법으로 주님께서 그의 영원한 뜻을 이행하는 것이라면, 그리스도로 만족하지 않고 영원한 운명에 대하여 호기심을 가지고 묻기만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에 반해서 구원 받기를 바라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하나님의 선택 그 자체는 감추어진 비밀이다. 주님께서는 그가 우리를 영화롭게 하는 부름에 의해서 이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정론의 미망(迷妄)에서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구원을 구하는 사람은 미친 사람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그를 믿었다가 믿음을 버리도록 우리를 끝까지 선택하셨다면 그 선택은 불완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는 시작과 종말의 순서를 깨뜨리는 것은 옳지 못하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은 반드시 그의 소명(부름)을 동반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 실제로 그리스도를 믿도록 하셨을 때, 그것은 주님께서 손으로 새긴 도장으로 우리의 구원을 확증한 것과 같은 효능을 지녀야 할 것이다. 성령의 증거는 우리를 양자로 택하심을 인치시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각자의 믿음은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에 대한 풍성한 증거로써 이에 대해 더 이상 따지는 것은 신성을 모독하는 것이다. 성령의 단순한 증거에 동의하기를 거부하는 자는 성령님께 무서운 상처를 가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유대인들이 보고도 믿지 아니한 데 대하여 이전에 그들을 책망하신 말씀이 있는데 '보고' '믿는'것과 대조시키고 있다. 이제 하나님의 아들들에 관해서는, 주님께서 믿음의 순종을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깨닫는 것과 연결시키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 말씀은 믿음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흘러 나오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믿음에 하나님의 단순한 말씀외에 다른 것이 필요하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를 신뢰하면 우리는 그가 누구인지 그리고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 주시는 분인지를 깨닫게 된다는 말이다.
6:41
유대인들이 예수께 대하여 수군거려 - 복음서 저자는 유대인들이 육신의 비천함을 보고 속단함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어떠한 신령한 것이나 하늘에 속한 것을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 가운데서 수군거림이 시작되었다고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그는 그들에게 두 가지 어려움이 있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첫째는 그들이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라고 말한 데서 알 수 있듯이 그들이 그릇된 생각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또 다른 난관은 그리스도께서 그들과 같은 육신을 입고 사람 가운데 오셨기 때문에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알아 보지 못하는 그릇된 판단을 내렸던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비어 종의 형태를 취하셨기 때문에 영광의 주를 멸시한다면 우리는 아주 악랄한 판단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주님께서 종의 형체로 취하신 것은 오히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보여 주는 것이며 그의 놀라운 은혜에 대한 본보기가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령한 위엄은 그 갖가지 광채를 발하지 못할 정도로 육신의 낮고 천한 외모 속에 감추어져 있었던 것이 아니다. 다만 저 무지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에게 그의 영광을 볼 만한 눈이 결여되어 있었던 것이다.
우리들도 매일 이 두 가지 면에서 죄를 범하고 있다. 첫째로 우리가 다만 육신적인 눈으로 그리스도를 바라 보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뛰어난 양상을 보지 못하는 것은 우리에게 커다란 장애가 된다. 우리는 우리의 죄로 가득찬 안목으로 그리스도와 그의 가르침을 의곡시킨다. 따라서 우리는 거짓된 해석자가 되는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이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여러가지 허위와 거짓된 것을 붙잡음으로써 복음을 혐오하기에 이르게 된다. 따라서 세상은 고의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배척하는 것이다. 복음서 저자는 수군거림이 믿음이 있고 교회를 대표한다고 자부하던 유대인들 사이에서 일어났다고 명기하고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우리 위치로 내려 오실 때 경건한 마음으로 그를 영접하도록,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까이 오실 수록 더욱 즐거운 마음으로 그에게 나아갈 수 있게 하셨다.
6:43
너희는 서로 수군거리지 말라 - 주님께서는 수군거림에 대한 책임을 그들에게 전가시키고 있다. 그는 마치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내 가르침에는 너희 감정을 상할 만한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러나 너희는 버려진 상태이기 때문에, 그것이 너희의 병든 영혼을 자극하는 것이다. 너희는 복음에 대한 취향을 잃었기 때문에 이를 좋아하지 않는다."
6: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 주님은 그들의 편벽됨을 송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기가 선포한 교훈을 받아들이는 것도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에 속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들의 믿지 아니함이 연약한 자들의 믿음을 약화시키지 못하도록 이 말씀을 하고 있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일에 있어서 사람의 의견과 판단에 좌우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이 복음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보자마자 그들은 복음을 불신한다. 반면에 그들의 완고함으로 스스로 아첨의 말을 주고받는 불신자들은 복음을 정죄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복음이 그들을 기쁘게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서, 그리스도께서는 비록 복음의 가르침이 모든 사람에게 차별없이 전파된다 하여도, 그것이 모든 사람에 의해서 깨달아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새로운 마음의 태도가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사람의 마음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려 주시는 선물인 것이다.
그리스도께로 '오는'것이 믿는 것 대신에 비유적으로 쓰였기 때문에, 복음서 저자는 상대 귀절에 이 비유를 연결시키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밝혀주고 그 마음을 움직여 그리스도께 순종하도록 역사하는 사람은 그리스도께 이글림을 받는다고 말하고 있다. 한 마디로 줄여서 말하자면, 많은 사람이 복음에서 뒤로 물러선다 해도 놀라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성령으로 예비시켜 주지 않는다면 자기 스스로 그리스도께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사람이 이글림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들을 이 은혜로 입혀주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끄는 방법에 있어서, 하나님은 어떤 외부적인 완력에 의하여 사람을 강제적으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효능으로 말미암아 내키지 않는 마음을 기꺼이 영접하는 마음으로 바꾸어 놓는다. 그러므로 사람이 마치 자기 마음대로 하나님께 순복할 수 있는 것처럼 자원하는 사람만 이글림을 받는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된 것이다. 사람이 기꺼이 하나님을 따를 때 그것은 이미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결과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도록 그 마음을 감동시킨 것이다.
6:45
선지자의 글에 저희가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 이사야의 증거를 인용함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도 그에게 나아올 수 없다고 한 말씀을 재확인하고 있다. 주님께서는 선지자(prophets)를 말할 때 복수로 말하고 있다. 모든 선지자들의 예언이 한 덩이로 뭉쳐져 있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선지자 중 한 사람을 생각할 수 있다. 여기에 인용된 말씀은 이사야 54장 13절과 예레미야 31장 34절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 귀절들은 교회의 회복에 대하여 말하면서, 교회가 하나님의 교훈으로 가르침을 받은 아들들을 갖게 될 것을 약속하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가 회복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께서 교사의 직책을 담당하셔서 신자들을 자기 자신에게로 접근시키는 길 밖에 엄싸음을 우리는 쉽게 연역할 수 있다. 선지자가 말하고 있는 가르침의 방법은 외적인 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숨은 역사에도 있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이 하나님의 가르침은 내적인 마음의 깨우침을 말하는 것이다.
주님께서 '다'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실 때, 이 '다'라는 말은 선택된 자들, 즉 교회의 참된 자녀들에게만 국한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이 예언을 현재 논의되고 있는 주제에 적용시키고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께 가르침을 받을 때에만 교회가 참으로 세움을 입는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람의 눈을 뜨게 하여 주지 않으면 사람은 빛을 볼 눈이 없다고 주님께서 결론을 내리고 있음은 당연한 것이다. 동시에 주님은 하나님께로서 가르침을 받은 사람은 결과적으로 다 주님께 나아오게 된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주님께서 즉시 덧붙인 말이 바로 여기에 해당하는 것이다.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 이 말씀의 요점은 믿지 아니하는 자는 모두 버리운 자로서 멸망에 넘겨진 자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모든 자녀와 생명을 유업으로 받은 자들을 그의 제자로 삼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택한 자들은 모두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그리스도께서 앞서 사람이 이끌리지 아니하면 믿을 수 없다고 언급하신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이제 성령이 역사하시는 은혜에 이끌리면 사람은 반드시 믿게 된다고 선언하고 있다.
가톨릭 교도들이 꿈꾸고 있는 자유의지의 전 기능은 이 두 문구에 의해서 완전히 붕괴되고 무력해진다. 아버지께서 우리를 이끌 때에만 그리스도에게 나아갈 수 있다면, 믿음의 시작도 준비도 우리 안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반면에,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자들이 모두 온다면 주님은 그들에게 믿을 자유뿐만 아니라 믿음 그 자체를 허락하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꺼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른다면 그것은 은혜를 인치는 것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손만을 우리를 향해 뻗치시고 우리의 의지를 정지 상태에 정체시켜 두신다면 그는 우리를 이끌지 아니하실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의 믿음을 완성시켜 주실 때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이끄신다고 말해도 좋은 것이다. 아버지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실 때 기꺼이 그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사람을 성령께서 그들의 마음을 인도하시기 때문에 그말씀을 하나님께 들었다고 말할 수 있다.
"내게로 오느니라" 주님은 여기서 자기와 아버지 사이에 존재하는 끊을 수 없는 유대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의 제자 중 누구도 그리스도께 순복하지 않거나 또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가르침을 받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택함 받은 자들이 하나님의 학교에서 배우는 유일한 지혜는 그리스도께로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들을 보면 아버지께서 자기 자신을 부인하실 수 없기 때문이다.
6:46
이는 아버지를 본 자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 지금까지 주님은 그의 아버지의 은혜를 찬양했다. 이제 주님은 믿는 자들을 자기 자신에게로 열심히 부르고 있다. 다음의 두 가지는 나눌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본래부터 눈이 먼 자들을 그의 성령으로 깨우쳐 주시지 않으면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그 길을 인도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무 소용이 없다. 하나님의 위엄은 인간의 지각이 미칠 수 있는 곳보다 더 높기 때문이다. 과연 그렇다. 그리스도를 떠나서 하나님을 안다고 가정하는 것은 혼돈의 수라장에 불과하다. 자기만이 아버지를 안다고 말씀하실 때, 그는 감추어져 있는 하나님을 인간에게 나타내는 직분은 자기에게만 속한 직분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6:47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 이것은 앞의 문장을 설명하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을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알려진다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때에 우리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거울로 보듯, 또는 살아 있는 형상을 보듯이 보기 시작한다. 하나님께 대하여 우리에게 선포되고 있는 모든 것이 우리를 그리스도께 인도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지식은 저주를 받을지어다! 나는 이미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설명했다. 우리는 그리스도에게서 그의 능력을 앗아가는 텅 비고 혼돈된 믿음을 상상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자기 생각에 맞는 만큼 그리스도를 믿는 가톨릭 교도들과 같이 되어서는 안되겠다. 우리의 생명의 모든 부분이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져 있는 것을 아는 만큼, 우리들은 믿음에 의해서 생명을 얻는다. 어떤 이들은 이 귀절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그리스도나 그의 살을 먹는 것과 같다고 유추한다. 그러나 이것은 전자나 후자와 같이,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것과 그리스도를 마시는 것과 같이 차이가 있다.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것이 먼저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리스도를 믿음에 의해서만 먹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 이유는 우리가 믿음으로 그를 영접함으로 주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고 우리가 그에게 참여하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먹는 것은 믿음의 열매 또는 믿음의 행위인 것이다.
6:48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 주님께서 전에 자기를 우리의 영혼을 살찌게 하는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지만, 이제 그 말씀을 더 잘 설명하기 위해, 이 떡과 옛날 만나를 다시 한번 대조시키고 있다. 그리고 거기에 관련된 사람을 대조시키고 있다.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다"고 주님은 선언한다. 그는 만나가 그들의 조상들의 죽을 몸을 위한 양식이었기 때문에 그들을 죽음에서 면해 주지 못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생에 이르는 생명의 떡을 찾을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분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본인이 다른 곳에서 언급한 대로, 이 말씀은 만나가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감추어진 모형으로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겠다. 그러한 관점에서는 바울이 이를 신령한 양식이라고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담화를 청중의 수준에 맞추어서 진행하고 있다는 것을 이미 밝힌 바 있다. 그의 말씀을 듣던 사람들은 그들의 배를 채우는 것만을 생각하고 있었고 만나에서 그 이상의 것을 바라고 있지 않았다. 따라서 그들은 저들의 조상이 죽었다고 선언한다. 그들의 조상도 역시 배를 채우는 데에만 급급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와서 먹을 수 있도록 자기가 왔다고 말씀하실 때 주님은 그들을 초청하고 있다.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라는 표현은 주님이 단순히 그를 먹고 싶어하는 사람을 위하여 항시 준비되어 있다고 말한 것과 같다. 한 번 그리스도를 먹은 사람은 결코 죽지 아니한다는 말은, 우리가 5장에서 밝힌 대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내려 주시는 생명은 결코 멸절될 수가 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6:51
나는 하늘로 내려온 산 떡이니 - 주님은 같은 것을 자주 반복하고 있다. 알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듣고도 이를 믿기 어려워하며 들은 것도 또 얼마나 빨리 사라지는지 모른다. 우리가 모두 생명을 갈구한다. 그러나 생명을 구하는 데 있어서 우리는 어리석게 곁기롤 나가 방황하기를 잘한다. 설령 생명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를 구미에 맞지 않는다고 밀어낸다. 자기 스스로 그리스도 밖에서 살기를 원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리고 그리스도로 만족하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되는가?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자기만이 생명을 공급할 수 있는 산 떡이라고 자주 되풀이 하는 것은 결코 불필요한 것이 아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마음에서 삶에 대한 모든 허구적인 소망을 제거해 버리기 위하여 스스로 산 떡이라고 주장하신다. 주님은 자기가 전에 생명의 떡, 즉 살려주는 떡이라고 말씀하셨던 것과 같은 의미에서 자신을 산 떡이라고 부르고 있다.
주님은 종종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신령하고 썩지 않는 생명은 이 세상에서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행적은 사라져 없어지는 것이지만, 썩지 않는 생명을 우리는 하늘에 속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누릴 수가 있는 것이다. 주님께서 '먹는다'는 말을 쓸 때마다 그는 우리를 믿음으로 초청하고 있는 것이다. 믿음만이 이 생명에 이르게 하는 떡을 즐길 수 있도록 하기 때문이다. 또 이 말씀은 헛된 말이 아니다. 자기 손을 내밀어 이 떡을 바로 그들의 입에까지 대주어도 이를 맛보는 사람은 극히 적다. 어떤 사람들은 술로 배를 채우고 있고 또 다른 사람들은 스스로의 어리석음에 의해서 음식을 바로 뒤에다 두고 굶어 죽어가고 있다.
나의 줄 떡은 - 주님께서 말하고 있는 생명을 부여하는 이 '숨은능력'은 신의 성품을 가리키는 것으로 주님은 이제 두번째 단계로 와서 이 생명이 자기 살 속에 거하고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그 생명을 저 살 속에 담아 우리 앞에 나타내셨다는 것은 그의 뜻이 아닐 수 없다. 전에는 살 속에 죽음의 자료 밖에는 없었는데 이제 주님의 살 속에 영원한 생명이 담겨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우리의 약함을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생명을 베풀어 주셨다. 그는 우리를 그의 나라의 비밀로 끌어 올리기라도 하려는 듯이, 우리를 구름 위로 불러 생명을 주리게 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이 땅 위에다 생명을 베풀어 주셨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 마음의 교만을 시정하는 동안 생명을 구하는 자들에게 외모상으로 보잘 것이 없는 그의 살에 의존토록 명령함으로써 우리의 믿음의 겸손과 순종을 시험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살은 생명을 줄 수 없다. 그리고 그 살은 죽을 수 밖에 없으며 지금도 살 그 자체는 죽을 수 밖에 없다. 게다가 영혼에 생명을 공급하는 것은 전혀 살의 소관이 아니다. 사람들은 위와 같이 반박할 수 있다. 그러나 비록 이 능력이 살이 아닌 다른 근원으로 말미암은 것이지만, 이 직분이 그와 일치하지 못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은 생명의 원천이 되는 것처럼, 주님의 살은 그의 신성 안에 본래부터 거하는 생명을 우리에게 부어주는 통로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것은 '생명을 준다', '살려준다'고 불리우는 것이다. 다른 데서 빌린 생명을 우리에게 교통(交通)해 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삶의 이유, 즉 의(義)를 고려한다면 이것은 전혀 모호한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비록 의의 물줄기가 하나님 한분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지만, 그리스도의 살을 떠나서는 그 의가 완전히 나타난 것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그의 윤신에서 인간의 구속이 성취되었고, 그의 육신에서 우리의 죄를 속하기 위한 제물이 드려졌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화목케 하기 위한 순종이 치러졌기 때문이다. 그 육신은 하늘의 영광으로 영접되어 올라갔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살 속에 생명의 모든 부분이 놓여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생명이 숨겨있고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어서 생명을 누릴 수 없었다고 불평할 자는 아무도 없는 것이다.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다 - '주다'라는 말은 여러 가지로 쓰이고 있다. 첫째로 주는 것은-주님께서 전에 언급했듯이-그리스도께서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는 만큼 자주, 즉 매일같이 이루어진다. 둘째로, 준다는 말은 주님께서 자신을 제물로 아버지께 드릴 때 십자가 상에서 이루어진 그 특이한 희생을 암시한다. 다음으로 주님은 사람의 생명을 위해서 자기 자신을 내어 주었다. 그리고 이제 주님은 그의 죽음의 열매를 받아들이도록 우리를 초청하고 있다. 우리가 그 거룩한 잔치상에서 먹지 않는다면 그리스도게서 한 번 제물로 드려졌다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별 소용이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살을 제물로 바친 직분을 맡았음을 주장하고 있는 것에도 우리는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가톨릭 교도들이 미사를 드릴 때 저 위대한 대제사장 한 분에게 속했던 권한을 찬탈할 때 그들이 스스로를 더럽히는 흉악한 모독의 죄를 드러내는 것이다.
6:52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가로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 주님께서는 유대인들의 불신의 죄를 송사할 목적으로 그들을 다시 언급하고 있다. 이는 그들에게 잘 알려진 영생에 대한 가르침을 그들이 받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그것이 아지 까모호하거나 의문스럽다면 철저히 상고해야 마땅한 것이었을 것이다. 그들이 서로 다투었다고 말씀하셨을 때, 그것은 그들의 완악함과 경멸의 표현이다. 사실 다투는 식으로 논쟁을 벌이는 자들은 스스로의 길을 막아 진리의 지식에 이르지 못한다. 그러나 그들은 단순히 따져 물었기 때문에 견책을 받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과 동정녀 마리아에게도 같은 책망이 가해졌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알지 못해서 그릇된 길로 갔든지, 다투는 열심 대문에 솔직함이 결여되어 있든지 둘 중에 하나일 것이다. 복음서 저자가 정죄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유대인들이 먹는 방법에 대하여 묻는 것이 불가한 것이라도 되는 듯이 '어찌'라는 말을 공격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풀어진 난제를 얽히고 얽힌 채로 남겨둔다면, 그것은 믿음의 순종 때문이라기 보다 게으름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살을 먹는 방법에 대하여 따지고 묻는 것은 합당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성경에 설명되어 있는 대로 깨닫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로서는 그리스도께서 자기 살은 참된 양식이라고 말씀하실 때 그리스도의 말씀 하나남으로 족하다. 나머지에 대하여는 나는 기꺼이 눈을 감고 받아들이겠다"고 하는 외식적이고 가면적인 겸손을 멀리해야 할 것이다. 이교도들도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잉태된 것을 일부러 모르는 척 할 때 같은 핑계를 대지 않는가! 그들도 예수께서 아브라함의 씨에서 나신 것을 믿는다 하면서 더 이상 하나님께서 비밀히 행하시는 일에 대하여 중용을 지킴으로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으로 정하신 것 이상으로 알려고 하지 않도록 스스로를 살펴야 할 것이다.
6:53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 이와 같은 교만과 멸시에 의하여 그의 은혜가 거절당하자 주님께서는 이러한 맹세를 하셨던 것이다. 주님은 여기서 직설적인 가르침을 쓰지 아니하고 그들이 겁에 질리도록 위협을 섞어가며 말씀하셨다. 주님께서는 자기의 살에서 생명 얻기를 거부하는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저주를 선언하고 있다. 그는 마치 "내 살이 너희에게 경멸해 마당한 것으로 보인다면, 너희를 위한 생명의 다른 어떤 소망도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확실히 알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나 다를 것이 없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업신여기는 모든 자들에겐 그들의 교만과 함께 비참한 멸망을 당한다는 진노가 머물러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겐 스스로 아첨함으로 자신을 속이지 말도록 심한 경고의 권면을 들려주어야 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병자들에게 약을 먹지 않으면 죽는다고 위협한다면, 불경건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만큼 생명 그 자체를 파괴하려고 서루 다툴 때 이 믿지 않는 자들에게 우리는 무엇을 해야겠는가? 주님께서 '인자의 살'이라고 말할 때 그는 이를 강조하고 있다. 주님은 그들의 멸시하는 태도를 꾸짖고 있다. 그들의 경멸은 그리스도께서 다른 사람과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보면서 시작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의 의미는 "내 육체의 낮고 천함을 인하여 원한다면 얼마든지 나를 멸시하라. 그러나 멸시받는 육체 안에 생명이 들어 있다. 너희에게 그 생명이 없다면 다른 어디서도 너희에게 생명을 공급해 줄 원천을 찾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옛날 사람들은 어린아이에게 성체(聖體)를 주지 않는다면 그들에겐 영생이 없다고 생각하는 실수를 범했다. 이 설교는 성만찬에 관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의 만찬을 받는 것과 관계없이 계속적으로 갖게 되는 교통을 가리켜 말씀하고 있다. 이 말씀에서 잔(cup)은 모든 사람에게 차별없이 주어져야 한다고 증명했던 후스(Huss)의 신봉자들도 그릇된 것이다. 어린아이에 관한 한, 그리스도의 예식은 그들의 주의 만찬에 참예하는 것을 금하고 있다. 그들은 아직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같은 법에 따라 모든 사람은 잔과 떡을 함게 나눌 수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에게 그잔을 마시도록 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6: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 이것은 반복이지만 불필요한 것은 아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몸이 먹고 마심으로 지탱되듯이 영혼도 똑같은 방법으로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한다고 한 믿기 어려운 말씀을 재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생명을 주님의 살이 아닌 다른 곳에서 찾으려 하는 자에게는 다만 죽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라고 선언했듯이, 주님께서는 이제 경건한 자들의 마음을 일깨워 소망 중에 그리스도의 살에 있는 생명을 바라보도록 유도하고 있다.
주님께서 부활과 영생을 얼마나 자주 연결시키고 있는가에 유의하라. 우리의 구원은 마지막 날까지 감추어져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상의 차원을 넘어서 자기의 눈 앞에 마지막 부활을 바라보는 사람이 아니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내려주시는 것을 아무도 느낄 수 없는 것이다. 이 말씀에서 볼 때, 이 귀절은 주의 만찬에 적용해서 풀이하는 것이 잘못임은 아주 분명하다. 주의 거룩한 만찬상에 나아오는 사람은 모두가 주의 살과 피에 참여하게 된다면 모든 사람이 한결같이 생명을 획득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 중 많은 사람이 멸망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주님께서 이를 설정하시기도 전에 주의 만찬에 대하여 설교하는 것은 도리에 어긋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계속적인 믿음의 행위를 다루고 계심이 분명하다. 동시에 주의 만찬 때에 믿는 자들에게 제시되지 않은 경우 여기 새삼스럽게 언급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우리는 주의 거룩한 만찬이 이 담화를 상징하는 결과가 되도록 의도하셨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이 장을 풀이할 때 적절한 순서를 따라서 맨 끝에 가서야 주의 만찬을 언급하고 있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은 교회들이, 어떤 곳에서는 날마나 또 어떤 곳에서는 매 주일에, 거룩한 만찬을 행할 때마다 이 비밀이 상징적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6:56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 달리 말해서 주님은 "몸이 금식에 의하여 쇠약해져 기진하는 것처럼, 영혼도 하늘에서 내려온 떡으로 양분을 공급받지 않는다면 허기로 곧 쇠잔하게 될 것이라"고 확언하고 있다. 주님께서 자기의 살이 참된 양식이라고 말했을 때, 그는 사람들의 영혼에 그 양식이 결핍되면 그 영혼이 아사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그리스도의 살에서 생명의 본질을 구할 때에만 그 안의 생명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 바울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 외에 더 자랑할 것이 없다(고전2:2)고 주님의 죽음을 자랑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의 제물을 떠나는 순간 우리는 죽음 밖에 대면할 것이 없다. 또 그의 죽음과 부활 외에 다른 방법으로는 그의 신에 속한 능력을 인식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아버지의 종으로 받으라. 그러면 주님께서 당신에게 생명의 주인으로 나타날 것이다. 주님이 자신을 비움으로 우리는 모든 축복으로 부요하게 되었고, 그가 멸시를 받고 낮아지심으로 우리는 하늘까지 높이 들리움을 받았으며, 그가 십자가의 저주를 받으심으로 공의(公義)의 기치를 높이 드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혼을 그리스도의 육체로부터 멀어지게 인도하는 자들은 거짓 교사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피가 살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인데, 왜 이를 따로 언급하셨을까? 나는 주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인하여 그렇게 하셨다고 대답한다. 주님께서 양식과 음료를 구분해서 말씀하실 때, 그는 자기가 내려주는 생명은 모든 부분에서 완전한 것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불완전한 생명을 연상하지 않도록 하셨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그의 살을 먹고 그의 피를 마시기만 한다면 생명의 모든 부분이 완전히 우리에게 공급될 것이라고 확언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가르침과 일치되고 있는 성만찬에 대한 말씀에서도, 주님은 떡의 상징으로만 만족하지 아니하시고 잔을 첨가하셔서 자기 안에 있는 생명을 이중적(二重的)으로 표시하게 하셨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주님 한 분으로 만족할 수 있도록 조치하셨던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생명을 소유하고 있는 자만이 그 안에서 부분적인 생명도 찾아 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6:57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 그리스도께서는 지금까지 우리가 어떻게 생명에 참여한 자가 되는가를 설명하셨다. 이제 그는 일차적인 근원으로 방향을 돌리고 있다. 생명의 일차적인 원천은 아버지 안에 있기 때문이다. 주님은 자기 스스로를 생명의 원천으로 만들었을 때에, 하나님께 속한 것을 자기가 취하여 가는 것처럼 보일것을 염려하여 미리 사람들의 반대를 막고 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자기가 다른 이들에게 베푸는 것은 또한 다른 분으로부터 그에게 주어진 것임을 인정하는 식으로 스스로를 생명의 주인으로 주장하고 있다. 이 설교도 또한 그리스도의 회중을 수용할 수 있는 정도에 맞추어 행해졌음에 유의하자. 주님께서 육신(살)에 관계해서만 자신을 아버지에 비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아버지께서 생명의 시초가 되시지만 영원한 말씀도 또한 마땅히 생명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영원한 신성이 여기서 거론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육신을 입고 세상에 나타내신 바 된 그대로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아버지로 인하여 사신다고 말씀하실 때, 그것은 그리스도의 신성 그 자체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며 단순히 그의 인간성에 속하는 것도 아니다. 이는 다만 육신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아들을 묘사하고 있을 뿐이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자기 안에 존재하는 신성한 모든 것을 아버지에게 돌리는 것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여기서 그리스도께서 세 단계의 생명을 열거하고 있음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첫째로 생명의 원천 이시지만 멀리 숨어 계시는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가 계신다. 그다음으로 생명의 원천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신 아들이 계신다. 그를 통하여 생명이 우리에게로 흘러 온다. 셋째로 우리가 주님에게서 공급받는 생명이 있다. 이제 우리는 문제의 핵심을 볼 수 있다. 하나님 아버지 안에 생명이 거하고 있지만 그분은 우리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다. 그리고 우리들 사이에 놓여 있는 그리스도는 두번째 생명의 원천이 되신다. 그래서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는 것이 우리에게 까지 미쳐 올 수 있게 된 것이다.
6:58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 주님은 처음의 주제, 즉 만나와 자기의 살을 비교하는 것으로 화제를 돌리고 있다. 이 말씀을 마치는데 필요한 끝맺음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너희는 모세가 광야에서 너희 조상들을 먹였다고 해서 나보다 그를 더 좋아할 이유가 없다. 나는 너희에게 훨씬 더 좋은 음식을 공급하고 있다. 나는 하늘에 속한 생명을 지니고 있다." 내가 전에 밝힌 대로, 이 떡은 세상적이거나 썩어질 요소를 지니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나라의 영원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말할 수 있다. 배만을 채우려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만나 안에서 이 능력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만나에는 두 가지 용도가 있었으나 그리스도와 변론하고 있는 유대인들은 만나 안에서 육신에 속한 음식 밖에 보지를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영혼의 생명은 일시적인 것으로 사람이 완전히 거듭 날 때까지 점처 증가하는 것이다.
6:59
이 말씀은 예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하셨느니라 - 요한은 많은 사람이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하여 장소를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설교는 심각하고 중요한 주제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나 본문은 이와 같이 큰 무리 속에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유익을 얻은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고 즉시 덧붙이고 있다. 그리스도의 제자로 자처하던 많은 이들이 떨어져 나갔다. 만일 복음서 저자가 무리 중 몇명이 걸림이 되었다고 한다면 우리는 이를 심각하게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떼를 지어 일어나 공모했다면 우리는 이것을 무엇이라 부르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실 때는 절대로 그에게 대항하는 일이 없도록 이 말을 깊이 마음에 새기자. 그리고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서 이와 같은 것을 목격한다면, 우리는 그들의 교만이 우리의 믿음을 저해하는 것을 절대로 허락해서는 안되겠다.
6:60
이 말씀은 어렵도다 - 오히려, 어려움은 그들의 마음에 있는 것이며 말씀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버리운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단단한 돌을 주워모아 스스로에게 던지기를 좋아한다. 그리고 그들이 고집과 단단한 마음으로 그리스도에게 대항할 때, 그들은 그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해 주어야 할 말씀을 가리켜 어렵다, 단단하다고 불평한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겸손히 순복하는 자는 그 안에서 단단하거나 어려운 것을 발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를 완악하게 대적하는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주님의 말씀이 반석을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와 같은 것이다(렘23:29). 그러나 우리 모두의 마음 속에 똑같은 단단함이 내재하고 있다. 만일 우리의 감정에 따라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판단한다면, 그의 말씀은 수많은 모순과 같이 보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각자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자신을 맡기는 길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 그렇게 할 때 성령은 우리가 귀로 듣는 말씀을 우리의 마음에 새겨 주신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 여기서 우리는 불시느이 죄가 얼마나 악의적인 것인지를 보게 된다. 구원의 가르침을 완악하게 거절하는 자들은 핑계를 대는 것으로만 만족하지 아니하고 거만스럽게 하나님의 아들에게 죄를 돌리고 그의 말은 들을 가치가 없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오늘날 가톨릭 교도들은 대담하게 복음을 거절할 뿐만 아니라, 이유없이 하나님을 배척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서 가공할 만한 모독을 늘어놓고 있다. 그들은 어두움을 원하기 때문에 사단이 허구적인 징조로 그들을 기만한다 해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이 무절제하고 지나친 가운데 감당할 수 없는 것을, 겸손하게 절제하는 자들은 감당할 뿐만 아니라 거기서 안위를 얻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고집스런 아우성을 치며 버림 받은 자들은 더 심한 멸망을 자초할 것이다.
6:61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 그리스도께서는 물론 버림 받은 자들이 걸림이 될 것을 아셨다. 그의 가르침은 그들의 마음을 상한 것 이상으로 그들의 내적인 병을 드러내 주었다. 그러나 주님은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마음이 상한 자들 중에 한 사람이라도 치유될 수 있는지로 알아보고, 또 나머지 사람들의 입을 막을 방법이 없는가를 알아보기를 원했다. 이 질문을 하심으로써 주님은 그들이 수군거릴 이유가 없다고 말씀하고 있으며, 마음에 걸림이 되는 근본 원인이 가르침 그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밝히고 있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슴을 중상모략하려고 미쳐 날뛰는 악인들을 억제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경솔하게 진리를 공격하는 자들의 어리석음에 채찍을 가해야 할 것이다.
주님게서는 스스로 아셨다고 말하고 있다. 그들은 아직 그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공개적으로 밝히지 않고 조용히 수군거리기만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의 공개적인 불평을 미리 막고 있다. 만일 누가 그들이 분명한 마로 그리스도의 말씀을 배척한 바 있기 대문에 그들의 성격은 모호하지 않았다고 반박한다면, 나는 요한이 기록한 말이 분명히 이를 드러내고 있음을 시인한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그들이 원수들처럼 서로 우물거리고 작은 소리로 수군거렸다고 말하고 싶다. 그들이 터놓고 이야기했다면, 거기에는 더 많은 희망이 있을 수 있었다. 그들에게 가르침을 줄 수 있는 길이 열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자기들끼리 수군거릴 때, 그들은 스스로 배울 수 있는 길을 멀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의 의미하는 바를 즉시 깨닫지 못할 때는, 주님에게 직접 나아가서 이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구함으로 주님이 문제를 해결토록 하는 것이 최선의 길인 것이다.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 그리스도께서는 이 말씀으로 그들의 마음에 걸림이 된 것을 제거해 주기보다 오히려 그들의 뒤집힌 마음을 더 이어 놓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누구든지 그들이 걸림이 된 이유를 좀더 자세히 살펴본다면, 그 다음 문장에는 그들의 마음을 충족시켜 줄 만한 것이 들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주님이 육신을 입고 있을 때, 그들이 실제로 보았던 그의 낮고 비천한 상태는 그들에게 그의 능력을 보여 줄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주님께서는 휘장을 찢어 제치면서, 하늘에 속한 그의 영광을 바라보라고 그들을 부르고 있다. 그는 "내가 사람들 가운데 영광을 받지 않고 사니까 너희가 나를 멸시하고 내 안에서 신적인 요소를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곧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나를 위대한 능력으로 관 씌우시고 이 죽을 인생의 비천한 상태에서 나를 하늘 위로 끌어올리실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바울이 로마서 1장 4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부활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분명히 보여주는 성령의 위대한 능력이 나타났던 것이다. 그리고 시편 2장 7절에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라고 말씀하실 때, 부활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시인하는 증거로 세워진 것이며 그리스도의 승천은 그 영광을 축하하는 천사와도 같은 것이었다. 그가 전에 하늘에 있었다고 한 말은 그의 인성과 엄격한 의미에서 일치되지 않는 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두 가지 성품이 그의 인격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한 성품을 다른 성품에 옮겨서 말하는 것은 전혀 새삼스런 화법(話法)은 아니다.
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 이 말씀에서 그리스도는 그의 가르침이 신경하고 소생시키는 힘이 있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그 교훈에서 유익을 얻지 못했다고 가르쳐 주고 있다. 그리스도는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 귀를 접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말씀은 여러 가지로 설명되기 때문에 먼저 이 말씀은 여러 가지로 설명되기 때문에 먼저 이 말씀의 참된 뜻이 무엇인가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하면 그리스도의 목적이 쉽게 드러날 것이다. 크리소스톰(Chrysostom)은 주님의 살이 육적인 마음의 유대인들에게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했다고 주님의 말씀을 설명하고 있는데, 내가 보기에는 그릇된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하늘의 비밀을 논하는데는 인간의 모든 지혜가 패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말씀은 억지로 의곡하지 않는 한 그런 의미를 갖지 않는다. 이와는 반대로 살리는 것은 성령의 조명이라는 억지 견해가 있다. 또한 그리스도의 육체가 십자가에 못박혔을 때는 우리에게 유익을 주지만, 그 살을 먹을 때는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들도 잘못되어 있다. 오히려 우리가 유익을 얻기 위해서는 십자가에 못 박힌 육체(살)를 먹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육(flesh)은 무익하니라"라는 말씀에 '육'만으로는 또는 '육 그 자체만으로는'이라는 말을 첨가시켜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육은 성령과 연결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은 본문과 잘 어울린다. 그리스도께서는 단순히 먹는 방법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님은 육(flesh)은 아무것에도 쓸모가 없다는 듯이 모든 유용성을 완전히 배제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주님은 다만 육이 신령하지 않다면 어디서 살리는 힘을 얻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육의 땅에 속한 성품만을 생각하나 사람은 그 육에서 죽은 것 밖에 찾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육이 힘을 공급받고 있는 성령의 능력에 눈을 돌리는 사람은 그 효능과 믿음의 경험에서 살린다는 말이 절대 빈 말이 아님을 느낄 것이다.
이제 우리는 육이 어떻게 참된 양식이 되면서도 무익하고 쓸모가 없는가를 이해하게 되었다. 영이 육에 의하여 우리에게 생명을 조달한다는 의미에서육은 과연 양식이 된다. 하나님은 육에서 우리와 화목의 관계를 맺으며 육에서 구원의 모든 부분이 성취된다. 그러나 육의 원천과 성격을 생각한다면 육은 무익하다. 아브라함의 자손은 그 자체가 죽음에 종노릇하는 존재로서 생명을 주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주님의 육은 성령으로부터 우리를 먹일 힘을 공급받는다. 그러므로 우리도 믿음의 신령한 입을 가져야만 참으로 영양 섭취를 할 수 있는 것이다.
문장은 짧게 단축되었다. 그리스도께서 믿지 않는 자들에게 그와 같이 행동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그래서 주님은 그의 설교를 이 말씀으로 끝내버렸다. 그들은 더 이상 주님의 말씀을 들을 자격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은 신령한 자들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이 몇마디 말씀은 그들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 이것은 앞의 문장에 대한 암시적인 언급이다. 주님은 영이란 말을 다른 의미로 쓰고 있기 때문이다. 주님은 지금까지 성령의 숨은 능력에 대하여 말씀하셨으나 이제 이를 신령한 그의 말씀에 적용시키고 있다. 이제 말씀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통하여 하늘의 영광 중에 계신 그리스도를 구하도록 유도하기 때문에 신령하다고 표현된다. 육적인 인식에서가 아니라 믿음에 의하여 깨닫게 되는 것이다. 위에 말씀한 내용은 믿음에 의해서만 깨달아질 수 있는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리고 주님께서 생명을 성령과 연결시키고 있음은 주목할 만하다. 주님은 그의 말씀을 그 결과에 따라 생명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그가 말슴을 살리는 힘이 있다고 하셨던 것과 같다. 그러나 이를 영적으로 받는 사람에게만 생명으로 나타나는 것이지 다른 사람들은 이에서 죽음을 자아낼 뿐이다. 경건한 자들을 위하여서 이 말씀은 가장 즐거운 복음이 아닐 수 없다. 말씀이 그들의 영원한 구원을 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자신을 순수한 제자로 나타내기를 힘쓰라고 경고를 받고 있다.
6:64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 주님은 다시 그들을 나무라고 있다. 그들은 성령이 없는 자들로서 그의 가르침을 악하게 부패시키고 더렵혀 멸망을 자초하고 있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당신은 당신의 말에 실리는 힘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그러나 우리는 그런 것을 경험하지 못했다"고 반대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그러므로 주님은 그들이 스스로를 방해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불신은 언제나 교만하여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아무 것도 깨달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선생의 지도를 받기 원한다면 우리 마음이 그의 말씀을 경청할 준비를 갖추어야 할 것이다. 주님의 가르침을 받으러 들어가는 입구가 경외심과 겸손에 의해서 열리지 않는다면, 우리의 깨달음은 돌만도 못할 것이며 어떠한 건전한 교훈도 용납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복음을 듣고도 유익을 얻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그들이 패역한 상태에 있기 때문임을 잊지 말자.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스도에게 헌신하는 사람들이 과연 몇이나 되는가? 주님께서 거의 모든 사람에게 믿지 아니한다고 했어야 온당하지만 그저 너희 중에 믿지 않는 자들이 있다고만 말씀하신 것은 아직 고침을 받을만한 사람들이 낙망하지 않도록 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군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 - 복음서 저자는 아무도 그리스도께서 듣는 자들의 심중을 너무나 성급하게 판단했다고 생각지 않도록 이 말을 덧붙이고 있다. 많은 사람이 그의 울타리 안에 들어왔다고 자처했으나 그들의 갑작스런 배도(背道)가 그들의 위선을 드러내고 말았다. 그러나 복음서 저자는 그들이 배반할 것을-다른 사람이 전혀 알 수 없을 때-이미 그리스도께서는 알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그리스도 자신을 위하여 말해진 것이라기 보다는 우리가 문제의 진상을 알 수 있을 때까지는 판단을 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려는 데 그 뜻이 있다 하겠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처음부터 아셨다는 것은 주님의 신성에 국한된 특징이다. 우리는 경우가 다르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람의 중심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불경건이 외부적인 모양으로 표현될 때까지 판단을 보류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무는 그 열매를 보고 아는 것이다.
6:65
이러하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 주님께서는 다시 한번 믿음이 성령의 희귀하고 특별한 선물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사람이 사방에서 다 복음을 받지 않는다고 놀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온 세상이 복음에 공감하지 않으면 우리는 이를 비관하고 복음을 덜 귀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 마음에는 "어째서 더 많은 수의 사람들이 구원의 복음을 배척할 수가 있겠는냐?"하는 생각이 일어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믿는 자의 수가 극히 적은 이유를 대고 있다. 아무도 자신의 직관에 의하여 믿음에 도달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에 의하여 깨우침을 받기 전에는 눈이 먼 상태이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참여토록 영광을 베푸는 사람만이 이 위대한 축복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만일 이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차별없이 주어진 것이라면 이 귀절에서 이런 말슴을 하는 것은 온당치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믿음은 성령의 숨은 계시에서 말미암는다고 하는 사실 때문에, 많은 사람이 복음을 믿지 않는다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는 취지를 파악해야 한다.
주님께서는 이제 전에 사용하셨던 "내 아버지께서 이끌지(draw) 아니하시면"이라고 한 표현 대신에 "내 아버지께서 오게하여 주지 아니하시면"이라는 말을 쓰고 있다. 이 말씀에서 주님은 아버지께서 이끄는 유일한 이유는 그가 우리를 무조건 친구로 삼아주시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와 은사로 부터 얻는 것은 아무도 자신의 노력이나 부지런함에 의해서 스스로 쟁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6:66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 복음서 저자는 이제 그 설교가 얼마나 많은 혼란을 초래했는가를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그와 같이 친절하고 온순한 많은 사람의 마음을, 특히 그때까지 그의 편을 들던 사람들이나 심지어 그의 가까운 제자들까지 그의 마음을 소외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은 이상하고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이 세상의 패역과 배은(背恩)이 얼마나 극심한 것인가를 보여주는 거울로써 우리 앞에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인생의 평탄한 길 위에까지 걸려 넘어질 재료를 쌓음으로써 사람들이 그리스도께 나아오지 못하도록 방해하기에 바쁘다. 많은 이들은 그와 같이 다수의 제자들을 떨어져 나가게 만든 그런 설교는 아예 하지 말았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를 전혀 다른 각도에서 보아야 한다. 그리스도께 대하여 예언된 내용이 그의 가르침 가운데 나타나는 것은 그 때에도 필요했고, 지금도 매일 같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거치는 돌과 걸리는 반석이 되신다고 했기 때문이다(사8:14).
우리는 물론 우리의 실수로 인하여 사람들이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전도에 있어서 조심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될 수만 있으면 우리는 모든 사람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간단히 말하자면, 무식한 자들의 마음을 뒤집어 놓고 마음이 연약한 자들을 거치게 하지 않도록 우리의 말을 은혜롭게 다듬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많은 사람에게 거침이 되지 않을 정도로 조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멸망에 넘겨진 버림 받은 자들은 아주 건전한 음식에서도 독을 빨아내고 꿀에서도 쓸개를 빨아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물론 무엇이 가장 유익한 것이지를 아셨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자기 제자 중 다수를 거치게 하는 일을 피하지 않으신 것을 보게 된다. 따라서 많은 사람이 순전한 교훈을 싫어하지만, 우리에게는 그러한 교훈을 억누를 자유가 없는 것이다. 오히려 교회의 교사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라고 한 바울의 권면(딤후2:15)을 기억하고 담대하게 거치는 말씀까지 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만일 복음을 전함으로 많은 사람이 떨어져 나간다 해도, 그것이 버림받은 자들을 즐겁게 하지 않았다 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힐책해서는 안될 것이다. 몇 사람의 배도에 마음이 흔들리는 사람은 너무나 소심하여 사람이 좀 걸려 넘어지면 실망하는 것이 예사다.
복음서 저자가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라."고 덧붙일 때, 그는 그들이 완전히 배도한 것이 아니라 다만 그리스도와 가까이 동행하는 관계에서 물러났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그러나 요한은 그들을 배도자라고 부르지는 않았다.
6:67
예수께서 열 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 사도들이 큰무리 가운데서 소수의 사람만이 남은 것을 보시고 마음이 심각하게 흔들렸을지 모르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화제를 사도들에게 돌려 다른 사람들의 경박함과 변덕스러움에 의하여 동요될 이유가 없다고 말씀하셨다. 주님께서 그들도 가기를 원하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그들의 믿음을 확인하기 위하여 그리했던 것이다. 주님께서는 스스로를 그들이 남아서 동행한 자로 내세움으로써 또한 그들에게 배도자의 친구가 되지 말 것을 권면하고 있다. 그리고 사실 믿음이 그리스도를 기초로 해서 세워지는 것이라면, 믿음은 사람에 따라 좌우되지 않을 것이며 천지가 무질서와 혼돈에 빠지는 것을 보더라도 조금도 동요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우리는 또한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들을 거의 다 상실하게 되었을 때 열 두 제자만을 보전하셨음에 유의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이사야(사8:16)는 "너는 증거의 말씀을 싸매며 율법을 나의 제자중에 봉함(封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러한 예에서 각 성도는 동료가 없다 하더라도 주님을 따라야 한다는 교훈을 얻게 된다.
6:68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 베드로는 다른 곳에서처럼 여기서 모든 사람의 이름으로 대답하고 있다. 유다를 제외한 모든 제자들이 같은 마음이었기 때문이다. 이 대답은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첫째는 베드로가 자기와 동료 제자들이 기꺼이 그리스도와 함께 남아 있겠다는 이유를, 그의 가르침이 건전하고 생명이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하고 있다. 둘째로 베드로는 그들이 그리스도를 떠나 누구에게로 가든지 죽음만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베드로가 '영생의 말씀'이라고 말할 때, 그는 형용사 대신에 소유격을 쓰고 있는데, 이는 히브리어에 흔히 있는 일이다. 복음이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바울이 말한 것처럼(롬1:16) 복음이 우리에게 영생을 가져다 준다는 것은 복음은 놀라운 강점이다. 율법에도 생명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율법은 범법자들에게 영원한 죽음의 심판을 선언하기 때문에 율법은 죽이는 일 밖에 하지를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않고 우리를 자기와 화목케 하실 때에 복음 안에서 우리는 영생을 누리게 된다. 뿐만 아니라 베드로가 주님에게 '영생의 말씀'이 계시다고 선언할 때 그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보통 평범한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베드로는 이를 그리스도에게 속하는 영생의 말씀으로 돌리고 있다. 따라서, 내가 위에서 지적한 대로, 그들이 그리스도를 떠나 어느 곳으로 가든지 그들에게 남는 것은 죽음 밖에 없다는 선언이 나오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그들의 선생인 것에 만족하지 아니하고 인간이 지어낸 공교한 말에 끌려가는 사람에겐 확실한 멸망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6:69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줄 믿고 알았삽나이다 - 동사는 과거 시제로 되어 있으나, 이는 현재로 바꿀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의미에는 별 차이가 없다. 이 말씀에서 베드로는 믿음에 대한 간단한 요약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고백은 당면 주제와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문제는 그리스도의 살을 먹는 것에 관한 것이었기 때문이라고 나는 대답한다 ; 비록 열 두 제자가 그리스도께서 가르치는 것을 다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그들의 믿음의 분량에 따라 주님을 구원의 주라고 고백하고 모든 일에 그에게 순복하는 것으로 족했다.
"믿고 알았삽나이다"라는 고백에서 믿는다는 말이 먼저 쓰인 것은 믿음의 순종이 참된 이해(깨달음)의 시초가 되기 때문이다. 아니, 믿음 그 자체가 마음의 참된 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즉시 그릇되고 거짓된 의견과 믿음을 구별하는 지식이 언급되어 있다. 터어키인과 유대인 그리고 가톨릭 교도들이 다 믿지만, 어떤 지식이나 깨달음이 없이 믿고 있기 때문이다. 지식은 믿음과 직결되어 있다. 우리는 인문 과학을 이해하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확신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그 진리를 우리 마음에 인칠 때 확실한 지식에 이르는 것이다.
6:70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 그리스도께서 모든 제자에게 말씀하셨다는 사실은 모든 제자가 베드로의 입을 통해서 이야기했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리고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새로운 거침돌에 대하여 열 한 제자를 준비하고 무장시키고 있다. 제자의 숫자가 소수로 줄어 들었다는 것은 이미 그들의 믿음을 흔들어 놓을 만한 사단의 강력한 도구였다. 그러나 유다의 타락은 그들을 온통 실망시킬 수도 있었다. 그리스도께서 그 열 둘이라는 숫자를 택하셨는데, 그 열 둘의 완전성이 파괴되리라고 누가 생각했겠는가?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권면은 다음과 같이 풀이될 수 있을 것이다. "큰 무리 중에서 오직 너희 열 둘만 남았다. 많은 사람의 불신에 의해서 너희 믿음이 흔들리지 않았다면 이제 새로운 시련을 위해 준비하라. 열 둘은 적은 수이지만 아직도 한 사람이 더 줄어야 하리라."
그리스도께서 '열 둘'을 택하셨다고 말씀하실 때, 그는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두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생명을 소유하기로 예정된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떨어져 실족한다는 것을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도의 직분에 택함을 받은 사람들은 마땅히 경건과 거룩함에 있어서 다른 모든 사람을 능가해야 했다. 그래서 주님은 보통 범인들로부터 택정함을 받은 제자들에게 '택했다'(chosen)는 말을 쓰고 있다.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 - 이러한 칭호로 그를 부름으로, 주님은 유다를 밉살맞은 존재로 만들려고 한 것이 분명하다. 주님의 말씀이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하여 유다를 두둔하는 사람들은 그릇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거룩한 직분을 그처럼 훼손시키고 더럽히는 자들을 우리는 아무리 저주해도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자기의 직분을 충실히 이행하는 교사들을 천사라고 불렀다(말2:7). 그와 같이 명예로운 직분을 받은 후에 배반과 완악함으로 타락하는 자는 마귀라고 불러 마당한 것이다. 여기에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보통 사람들에게 베푸는 자유와 능력보다 사단에게 더 많은 자유와 능력을 불경건하고 악한 사역자들 위에 사용토록 허락하신다. 그러므로 목사로 택함을 입은 사람들이 마귀적인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면 그들은 야생의 맹수와 같이 변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의 직분을 무시해서는 안되겠다. 오히려 그 직분을 더럽힌 자가 그와 같이 무서운 심판을 받는 것을 볼 때 더욱 그 직분을 공경하게 된다.
6:71
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 비록 유다는 나쁜 양심을 가졌지만, 우리는 그가 마음이 움직였다든가 감동되었다는 기록을 읽지 못한다. 수많은 위선자들은 자기 자신의 상처를 느끼지 못하며 사람들 앞에 너무나 마음이 굳어 있기 때문에 가장 훌륭한 사람들보다 자기 자신을 먼저 내 세우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 바다 곧 디베랴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매 - 여기 "디베랴 바다"란 이름은, 주님 당시의 이름이 아니고 좀 후대의 것이었으나, 저자가 이방 교회의 식별을 위하여 "갈릴리 바다"란 말에 첨부한 것이다. 디베랴 바다라고 해야 당시 이방 사람들이 잘 알았다.
=====6:2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인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봄이러라 -표적"이란 말(* 은, 예수님의 이적으로서 메시야이신 사실을 보여주는 표란 뜻이다. 이 표적들에 대하여는, 마 14:14; 막 1:34,40-42,2:11-12.3:1-5,6:5; 눅 9:11; 요 2:11을 참조하여라. 그러나 대중은 예수님의 이적의 표적 성격을 잘 깨닫지 못하였다. 그들은, 호기심과 육적요구를 위하여 예수님을 좇았던 것이다. 26절 참조, 그들은 아직 그의 말씀이 이적보다 귀한 줄 몰랐던 것이다.
=====6:3
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시니 - 여기 말한 "산"(* )은 언덕을 의미하므로 이것은 갈릴리 바다의 해변 언덕을 가리킨다. 유대의 랍비들은 보통으로 높은 데 앉아서 그 제자들을 가르쳐 주었다. "제자들"은 열 두 제자를 가리킨다.
=====6:4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 "유월절"에 대하여는 2:13의 해석을 참조하여라. 여기 "유월절"이란 말(* )이 모든 사본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교부들의 증거는, 이것이 없는 편을 지지한다. 홀트(Hort)도 그렇게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있는 것이 연대적으로도 자연스럽고 저자의 신학적 견지에서도 자연스럽다(Schlatter, Barrett).
=====6:5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하시니 - 예수님께서 눈을 드시고 큰 무리를 보신 것은, 그들을 위하여 무슨 좋은 일을 하시려고 그리 하신 것이다. "빌립"에 대하여는 1:44, 12:21, 14:8 을 참조하여라. 예수님께서 빌립에게 물으신 문제는 그의 신앙을 시험하시는 것이었다. 그런데 빌립은 신앙적으로 이 문제를 취급하지 못하였다. 그의 당한 것은 모세가 주린 백성을 앞에 두고 당한 난제와 같으며(민 11:13,22), 엘리사의 종이 당한 것과도 같았다(왕하 4:42-43).
=====6:6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코자 하심이라 - 예수님께서는, 이 때에 자기의 권능으로 군중을 먹이실 대책을 벌써 생각하고 계셨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육신을 먹이는 문제보다 영적 문제, 곧, 제자들의 신앙 교육을 더욱 중히 하셨다. 그는 빌립의 신앙을 시험해 보시려고 그에게 문제를 주셨다. 그것은, 빌립이 그 군중의 가련한 정형을 보고 동정심을 가지는 여부를 아시려는 시험이 아니다. 그것은, 비범한 방법으로 먹을 것을 준비해 주실 수 있는 주님의 능력에 대한 그의 신앙 여부를 알아 보시려는 시험이었다(Grosheide). 이와 같은 시험은 신앙을 배양하는데 유익하다.
=====6:7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 한 사람의 하루 품삯이다. 그러므로 200 데나리온이면 상당한 금액이다. 빌립의 이 계산은 다만 현실적이고 타산적인 것이다. 그에게는 건전한 이해력은 있었으나 신앙은 없었다(Godet).그는 일찌기 예수님의 이적들을 보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는 이때에 신앙적으로 생각하지 못하였다. 사람들은 이렇게 주님의 권능에 대해서는 건망증이 많다.
=====6:8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 빌립과 안드레는 종종 함께 나타난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그들이 같은 고향 사람인 사실과 그들이 제자 중 가장 먼저 선발된 까닭인 듯하다. 12:20-22, 1:41-44 참조. 안드레의 말(9절)은, 이 부분 기사를 깨닫는데 도움이 된다. 곧, 그 때에 그 많은 사람 가운데 음식물이라고는 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 뿐이었으므로 이적으로만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사실을 밝혀 주었다. 이 부분 기사가 이적이 아니고 단지 각 사람에게 있었던 음식물을 먹도록 하였다는 합리주의 해석은 안드레의 말을 위반하는 것이니, 그것은 그릇된 해석이다.
=====6:9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 - "보리떡"은 가난한 사람들의 양식이다. "물고기"라고 한 것(* )은 멸치와 같이 작은 고기라고 한다. 안드레도 여기서 그리스도의 권능을 믿지 못하고 현실주의 견지에서 낙심하고 만 것이다.
=====6:10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신대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효가 오천쯤 되더라 - 무리를 앉힌 것은 그리스도의 긍휼의 표현이며, 그들이 앉은 것은 그들의 순종이다. 그들은, 그저 단순한 마음으로 예수님의 권위 있는 지도를 받으려고 감심으로 순종하였다. 언제나 신앙의 태도는 이런 것이다. 사람들은 마땅히 자기 스스로 지혜 있는체 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 권위(權威)를 믿고 순종하며 기다려야 한다. 여기 5,000명이란 것은, 여자와 아이들 외에 남자들만을 계수한 것이다(마 14:21). 이때에 남자들만 계수한 것은, 여자들과 아이들의 인권을 무시한 것이 아니고, 남자들의 대표적 지위를 염두에 둔 것이다.
=====6:11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은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저희의 원대로 주시다 - "예수께서 떡을 가져"란 말씀은, 그 제공한 다섯 개의 보리떡을 받으셨다는 뜻이다. 예수님이 여기서 전연 없는 데서 창조하심이 아니고, 조금이라도 있는 것을 가지시고 많게 하셨다. "축사"하셨다는 말은 감사하셨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적은 것을 가지고도 하나님께 감사하셨다. 감사하는 자리에 더 많은 축복이 임한다.
=====6:12,13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 예수님은 선물을 관대하게 주시지만 낭비하는 것을 금하신다. 물질이 헛되이 내버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남은 조각이 열 두 바구니에 찼더라 - 유대풍속에, 식사에 봉사하고 남은 음식은 그 봉사자들의 분깃이 되었다고 한다(Lightfoot, Hor., 3,302).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봉사한 12사도들은 저렇게 필경 받은 상급이 컸다.
=====6:14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 "그 선지자"에 대하여는 신18:15에 예언되었으니 곧, 메시아를 가리킨다. 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았기 때문에 억지로 임금 삼으려고 하였다(15절 참조).
=====6:15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 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았으나, 진리대로 바로 알지 못하였다. 그들은 예수님을 저희의 물질 문제나 해결하여 주실 메시아로 알았던 것이다. 그런 생각으로 그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고 하니, 그가 거기 응하시지 않았다. 어쨌든 이 사건은, 그 떡 먹이신 이적이 얼마나 위대하였던 것을 증명해 준다. 그들이 그 권능을 본 뒤에는, 로마 정권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막바로 예수님을 유대의 임금으로 추대하려고 하였다. 예수님께서 거기에 응하시지 않은 것은, 그가 군중의 메시아 관념이 육적인 것을 합당치 않게 보셨기 때문이었다.
=====6:16
저물매 제자들이 바다에 내려가 - 그들이 예수님의 명령을 받들어 이렇게 하였다(마14:22). 그가 그렇게 그들을 지도하신 목적은, 그 자신이 홀로 떨어져 기도하시기 위한 것이었다(마14:23). 그는 많은 무리가 따르는 때를 도리어 위기(危機)로 보시고 기도에 열중하셨다. 이것이 그의 특이하신 점이고, 사람들에게 모범을 보여 주심이다. 사람들은 인기가 올라갈 때에 그것을 성공으로 알고 안심한다.
=====6:17
예수는 아직 저희에게 오시지 아니하셨더니 - 그가 아직 저희에게 오시지 않은 것은 무의미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이 때에 제자들의 신앙을 연단시키려고 하셨다. 제자들은, 이때에 예수님 없이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죽을 지경에 빠졌다가 예수님의 권능으로 구원 받게 될 것이다. 그들이 그 때에 예수님을 더 믿었어야 될 것이었다. 신32:11 참조.
=====6:18
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나더라 - 지중해보다도 682피드나 낮은 갈릴리 바다에는 사방 높은 언덕사이의 골짜기로부터 강한 바람이 뜻밖에 불어오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제자들이 예수님 없이 배를 타고 풍랑 중에 있는 것은, 마치 교회가 세상에서 환란을 당하고 있음과 같다. 예수님은 얼마동안 그 배로 찾아 오시지 않았으나, 마침내 오셔서 풍랑을 잔잔케 하셨다. 그와같이, 환란중에 있는 교회도 마침내 주님의 권고로 말미암아 평안해진다.
=====6:19
제자들이 노를 저어 십 여리쯤 가다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심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 어떤 학자들은, "바다 위"란 말(* )이 해안을 의미한다고 하며, 예수님께서 물 위로 걸러 오신 것이 아니고 바닷가의 언덕으로 걸어 오셨다는 말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기사(記事)는 이적을 기록하는 것임이 분명하다. 그 이유는, (1) 제자들이 두려워한 까닭이며, (2) 공관 복음의 동일한 기사가 이적을 기록하는 심리를 명백히 보여주기 때문이다(막6:29; 마14:26).
=====6:20
가라사대 내니 두려워 말라 하신대 - "내니"란 말(* )은, 예수님께서 그 때에 자신의 현림(現臨)하심을 가리킬 뿐 아니라,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심을 계시(啓示)하심이다. 하나님이 계신 곳에 안전과 평안이 있다.
=====6:21
배는 곧 저희의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 - 여기 "배는 곧"이란 말을 주목해야 한다. 예수님이 함께 하시므로 말미암아 또 다시 배는 초자연적으로 순조롭게 가게 되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자연계를 통솔하실 수 있는 권능으로써 자기가 하나님 아들이심을 증거하셨다(마14:33 참조).
=====6:22
이튿날 바다 건너편에 섰는 무리가 배 한 척 밖에 다른 배가 거기 없는 것과 또 어제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그 배에 오르지 아니하시고 제자들만 가는 것을 보았더니 - 곧, 떡 먹은 무리들은, 예수님께서 아직 바다 이 편(저희 있는 곳)에 계신 줄 알고 안심한 적이 있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그들의 생각에는, 제자들만이 거기 한 척 밖에 없었던 배를 타고 건너갔고, 바다 이 편에 남아 계셨던 예수님은 아직 머물러 계시는 줄로 알았다. 그런데, 뜻 밖에도 예수님도 거기 계시지 않은 사실을 그들은 발견하게 되었다(24절).
=====6:23
(그러나 디베랴에서 배들이 주의 축사하신 후 여럿이 떡 먹던 그곳에 가까이 왔더라) - 이 귀절 말씀은, 그 무리가 어떻게 바를 건너 가게 된 사실을 알게 하는 것이다. 본래는 배 한 척 밖에 없었으나, 그 뒤에 여럿이 왔으므로 그들이 그 배 편들을 이용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여기 알려진다. 이런 자세한 기록을 보아서도 이 사실에 대한 목격자였던 사도 요한이 이책을 기록한 것이 분명하다.
=====6:24
곧 배들을 타고 예수를 찾으러 가버나움으로 가서 - 이 말씀을 보니, 그들은 예수님을 찾는 일에 열중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을 바로 알지는 못하였으니, 그것은, 예수님을 찾는 그들의 동기가 불순한 것을 보아서 알 수 있다. 예수님을 찾는 동기는, 예수님의 말씀이 바로 전해지는 여부에 중대한 관계를 가진다(Grosheide).
=====6:26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 부른 까닭이로다 - "진실로 진실로"란 말은, 그 장차 말씀하시려는 사실의 중대성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 무리가 예수님을 찾은 이유는, 그를 영적 메시야로 바로 안 까닭이 아니다. 그들은 떡을 위하여 따라 다녔던 것이다. 곧, 그들은, 5천명 이상의 무리에게 떡 먹이신 그 이적에서 그리스도의 증표를 깨달음보다 물질적인 떡에 흥미를 가졌다. 인간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육체적 만족을 위하는 때가 많다. 그것은 인간의 부패성의 결과이다.
=====6:27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 치신자니라 -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은,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영력(靈力)을 가리킨다. "인자"는 인성(人性)을 가지신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바 그가 살과 피를 희생하셔서 속죄하여 주시므로 영적 생명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임하게 된다. "인 치셨다"는 뜻은, 예수님을 구주로 세우시고 인정하시고 신임하셨다는 뜻이다. 이런 구주를 믿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기가 하나님보다 높다는 참람한 죄악이요, 하나님을 거짓말 하시는 이로 여기는 죄악이다.
=====6:28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 여기 이른 바, "하나님의 일"이란 말의 헬라 원어(* )를 직역하면, "하나나님의 일들"이란 뜻이다. 이 때에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 곧,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는 것을 오해하여, 영생의 대가(代價)로 많은 인간적 업적을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들더러 일 하라고 하신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니었다. 그가 말씀하신 "일"이라는 것은 신앙을 의미하였다. 신앙은 일 아닌 일, 곧, 그리스도 안에 안식함이다. 유대인들은 저렇게 인간의 힘으로 어떤 고등 노동들(하나님의 일들)을 하므로 영생을 얻고자 하였다. 그들이 "하나님의 일들"이라고 복수 명사를 사용하였으니, 일의 수량에 의하여 문제 해결을 보려고 한 것이다. 인간은 언제나 자기의 어떤 고등 노동을 통하여 천국에 들어가려고 한다. 그것은 어리석다. 사람들은 오직 믿음에 의하여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천국에 들어간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의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은 대답하시기를,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고 하셨다(29절).
=====6:2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 사람들로 하여금 주님을 믿도록 하심이 하나님의 일이다. 인간은 하나님을 신앙하기 위하여 지음을 받았고, 신구약의 모든 말씀들은 인간에게 믿음을 가르친다. 특별히 우리 본문에서,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일들이 아님)하심은, 의미심장하다. 여기 단수 명사로 된 "일"(* )은 "그 일"이란 말인데, 모든 다른 일들 곧, 율법적인 일들과 엄격히 구분된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구원에 이르도록 하는 유일한 일이다.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은 무슨 내용을 가진 신앙인가? 그것은, (1) 하나님을 신임하는 믿음, 하나님의 보내신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불신임하는 것이니 하나님을 모독하는 큰 죄이다. (2)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신을 완전히 계시하시는 살아 계신 신(神)이심을 믿음. 하나님께서 그 독생자를 성육신(成肉身)하여 보내신 것은, 인간과 깊은 교제를 가지시기 위한 최고의 사랑을 보여준 것이다. 이것을 믿지 않는자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내버리신 무의 무정(無意無情)하신 이로 오해하는 자이다. (3) 하나님 자신을 인간의 눈과 귀로 친히 보며 듣는 것과 같이 믿음. 땅에 오신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자는 하나님 자신을 받아 가진자이니, 그로서는 하늘의 하나님을 보겠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 어떤 성도는 말하기를, "만일 전적으로 신앙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일어난다면, 세상의 역사는 변화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스펄죤(Spurgeon)은 말하기를, "작은 믿음은 영혼을 하늘로 가져가고, 큰 믿음은 하늘을 영혼에게 가져온다"라고 하였다. 아브라함은 남들의 권면을 받지 않고도 믿었고 (창 18:9-15; 롬 4:19-21), 수로보니게 여자는 하나님의 권면 없이도 믿었고(마 15:22-28), 노아는 경험한 바 없이도 홍수에 의하여 세상이 망할 것을 믿었다(히 11:7).
=====6:30
저희가 묻되 그러면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 일찌기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은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 곧, 신학적 문제에 접촉하였고, 이제 갈릴리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믿는 문제 곧, 구원론에 접촉하여 각각 불신앙을 나타냈다(Godet). 예수님께서 자기가 메시야이신 사실을 보여주시는 "표적"을 행하셨으나, 그들은 그것을 통하여 표적다운 내용을 보지 못하였다. 고데이(Godet)는 말하기를, "그들이 예수님을 임금 삼으려고 할 때에 그의 거절하신 태도로 인하여 그들은 낙망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를 메시야 아닌줄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다시 표적을 찾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그들은, 예수님의 메시야격이 이 세상의 정치적 임금이 아닌 사실을 깨닫지 못하였다. 다시말하면, 예수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명 이상의 무리에게 먹이신 표적(메시야 표적)을 그들이 깨닫지 못했으니, 유감스럽다(26절).
=====6:31
기록된 바 하늘에서 저희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셨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 출 16:15; 시 78:24 참조. 저 유대인들이 구약 성경을 인용한 것을 보니, 그들은 지도자들이었든지, 혹은 서기관인 듯하다(Belser). 그들은, 메시야가 온다면 또 다시 만나를 내려 먹게 해 줄 것으로 잘못 알았다(Midrash Koheleth, P.73).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님에게 그렇게 하여 주시기를 간접적으로 청원한 것이다.
=====6:3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 -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내린 떡"이란 말을 쓰실 때에 만나를 염두에 두시고 하신 말씀이 아니다. 이것은 신령한 떡, 곧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유대인들은, 하늘에서 내린 떡이란 말로써 옛날의 물질적인 떡 곧, 만나를 생각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진정한 의미의 하늘 떡은 그것이 아니라고 하신다. 진정한 의미의 하늘 떡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시다. 저 유대인들은, 만나보다 더욱 위대하신 떡("참 떡" 곧, 예수님)을 소유할 수 있음에 대하여 불신앙했으므로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6:33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 여기 "하나님의"(* )란 어귀가 강세(强勢)를 띤 말이라고 한다(Goebel).그렇다면, 이 어귀가 그 "떡"을 가리켜 그 영성(靈性)과 그 영원성과 생명성과 및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사실을 고조한다. "하늘에서 내려"란 말씀이, 이 부분 예수님의 교훈에 일곱 번 나온다(33, 38, 41, 42, 50, 51, 58).그 만큼 이 말씀은 역설체(力說體)로서 그 떡의 특이한 성격을 보여준다. 곧, (1) 그것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인 만큼 광범위한 세계에 분배된다. (2) 그것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고 영원 불멸의 생명을 주는 것이다.만나는 영양을 줄 수 있었으나 하늘 떡은 생명을 주는 것이다. (3) 만나는 보이는 하늘에서 내려왔으나, 생명의 떡은 보이지 않는 하늘에서 내려온다(Calvin). (4) 하늘에서 "내려오는" 이란 말의 헬라 원어(* )는, 현재 분사로서 계속적으로 내려오는 활동을 가리킨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적 양식은 사실상 모든 시대를 통하여 끊임 없이 내려온다.
=====6:34
저희가 가로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 이것은, 또 다시 유대인들의 불신앙 표현이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생명 떡"이 육신의 양식인 듯이 오해하고 욕심을 부린다. 여기서 그들은 그것을 "항상" 주시기를 청원한다.
=====6:3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 마르지 아니하리라 - (1) 예수님께서 자신을 가리켜 "생명의 떡"이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께 대한 우리의 신앙이 먹는 행위와 같이 실제적이어야 할 것을 암시하심이다. 믿음은 하나의 이론이 아니고 실제이다. 먹음으로 우리의 주린 것을 멈추는 것처럼, 믿음으로 우리의 영적 기갈이 멎어진다. 음식을 먹지 않으면 죽는 것처럼,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멸망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먹는 것처럼 믿어 그를 내 분깃으로 섭취해야 된다. 예수님에게 대한 이론만 알고 그를 내게 섭취시키지 않으면, 그것은 큰 곡창(穀倉) 문 앞에서 굶어 죽는 것과 같은 가석한 일이다. 그리고 우리가 음식 먹기를 계속하는 것처럼, 예수님을 믿는 일을 계속해야된다. 작년 이 때 먹은 것이 오늘의 주림을 멈추어 주지 못한다. 신앙 생활을 먹고 마시는 행동에 비유한 것은, 성경에 많이 있다. 사 55:1에도 말하기를, "너희 목 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고 하였다. 계 3:20, 22:17 참조. (2) "내가 곧 생명의 떡"이란 말씀은, 예수님 자신이 생명이신 동시에 생명을 주시는 이시란 뜻이다. 그는 주시는 자시며, 또 주시는 선물 자체도 되신다(Zahn). 그 자신이 대제사장인 동시에, 자신이 제물도 되신다. 그를 믿는 자는, 그의 속죄제의 효과를 받아 누리며 따라서 그와 일체(一體)되도록 밀접히 연합하게 된다. 그가 자기를 떡에 비유하신 이유는, 음식물은 그 먹는 자와 밀접하게 연합하여 일체가 되기 때문이다. "내게 오는 자"란 말과 "나를 믿는 자"란 말은, 서로 병행하여 동일한 뜻을 가리킨다. 온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지향한 영적 동태(靈的動態)를 말함이고, 믿는다 함은 계속적으로 그리스도와 밀접하게 연합해 있음을 가리킨다(Grosheide, Het Heilige Evangelie Volgens Johannes, Kommentaar I,P.439).
=====6:36
그러나 내가 너희더러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 하는 도다 하였느니라 - 이 말씀은, 26절의 내용에 암시된 뜻을 가리키는 것이다. 사람이 하늘 것을 본다고 반드시 믿어지는 것은 아니다. 보는 것이 믿는 데 이르는 최선의 방법은 아니다. 보지 못하고 믿는 것이 더욱 복되다(요 20:29). 벧전 1:8-9 참조.
=====6:37-40
이 귀절들은 (1)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의 이유가, 그리스도의 말씀이나 권위가 부족한 탓이 아니고 다만 그들이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지 못한 까닭이라는 것, (2) 믿는 자들은 그들의 의지력(意志力)으로 믿는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인도로 말미암아 되어진 것이니 만큼, 그 구원이 확고 불변하다는 것이다. 신앙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다.그러므로 그것을 소유한 자는, 그것을 소유한 것이 벌써 확실한 구원 소유인 줄 알고 위로를 받는다. 딤후 1:12에 말하기를, "이를 인하여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하였고, 빌 1:6에도 말하기를,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고 하였다. 위대한 신앙가요 과학자인 미카엘 파라디(Sir Michael Faraday)는, 임종시에 어떤 사람들이 "당신의 영혼이 장차 어떻게 되겠다고 추측합니까?"하고 물을 때에 그는 대답하기를,"추측? 나는 추측에서 살지 않는다. 나는 확신에서 살고 있노라"고 하였다. 어떤 성도는 늘 기쁘게 노래하기를, "나는 가련한 죄인이고 그 밖에 아무 것도 아니로라. 그러나 그리스도는 나의 모든 것이로다"라고 하였다. 우리의 신령한 체험이나, 혹은 도덕 생활에는 굴곡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언제나 죄인인 사실은 변치 않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주이신 사실도 변치 않는다. 혹시 우리의 도덕 수준이 올라갔다 해도 죄인임을 면치는 못한다. 우리의 소망은 예수님 밖에 없다. 히 13:8에 말하기를,"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고 하였다. 진실한 성도들은, 끝까지 구원해 주시기로 약속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생명을 건다. 해버갈(Havergal)이란 성도는, 임종시에 자기 친구더러 사 42장을 읽어 달라고 하였다. 그 친구가 읽을 때 그는 6절 말씀에서 주의를 시켰다. 곧,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라고 한 말씀이다. 그는 이 말씀에서 "불렀다"는 말씀, "손을 잡았다"는 말씀, "보호한다"는 말씀을 맏고 세상을 떠난다고 고백하였다.
=====6:41,42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인간으로만 알았기 때문에, 그가 자기를 가리켜, "하늘로서 내려 온 떡"이라고 말씀하심을 듣고 원망하였다.사람들은 이렇게 그리스도의 위대(偉大)를 그의 인간성 때문에 의심한다. 그러나 그가 인성을 취하신 것은, 인간들에게 나타낸신 그의 지극한 사랑이다.
=====6: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 유대인이 그리스도를 믿지못한 이유는, 그 실상 그리스도에게 하늘로서 오신 증표가 없는 까닭이 아니었다. 다만 그들만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로 이끌지 않으신 까닭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동시에, 그의 백성도 이끌어 그에게(그리스도에게)로 모으신다(호 11:4). 이끈다 함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중생의 역사를 가리킨다(롬 8:9; 고전 3:16, 6:19, 12:3; 요일 3:24). 그 때는 아직 성령이 강림하시기 전이었음으로 여기서는 성령의 인도에 관한 말이 사용된지 않았다.
=====6:45
선지자의 글에 저희가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 "선지자의 글"은 사 54:13을 가리킨 것이다. 우리와 신학처지가 다른 버나드(Bernard)도 이 귀절에 대하여 "사람이 그리스도의 신자가 되려면 진리를 배워야 되고, 한번 듣기만 해서는 신자가 되기 어렵다. 예정의 도리가 요한 복음에 있으나 이렇게 인간편의 책임있는 노력을 무시하지 않았다"라는 의미로 말하였다.
=====6:46
이는 아버지를 본 자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 윗절에,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로 한 말씀이 있었다. 그것은, 사람이 직접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이 예수님과 그 사자들로 말미암은 전도의 말씀을 들음으로 하나님에게로 오게 된다는 뜻이다). "하나님에게서 온 자"는, 오직 하나님과 함께 계시다가 이 세상에 오신자 곧, 예수님 뿐이시다. "하나님에게서"란 문구의 "에게서"란 말(* )은 본래의 근원으로 부터 관계된 사실을 보여준다. 그것은, 하나님과 함께 계시다가 세상에 오신 예수님에게만 사용될 말이다. "보았느니라."이 말의 헬라 원어(* )는, 보았고 또 그 본 결과를 계속해서 보존하고 있는 사실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시기 전에 하나님을 보셨고, 또 그 보신 사실이 그에게 계속해 있음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예수님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을 알 자가 없다(1:18, 14:9; 마 11:27). 하나님은 먼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의 말씀을 전하신 것이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만이 하나님 아버지를 보셨고, 또 그의 말씀을 들으셨기 때문이다.
=====6:47,48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 "믿는 자"란 말은 예수님을 믿는 자란 뜻이다. 크로솨이데(Grosheide)는, 이 문구의 짧은 것을 가리켜 사상의 표현을 강력하게 하려는 문체라고 하였다. 그것이야말로 간단 명료한 진리 표현이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다."이 문구에 대하여는 35절의 해석을 참조하여라.
=====6:49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 예수님도 인간 편으로는 유대인이고, 그들의 조상이 예수님의 조상도 된다. 그러나 영적으로 말할 때에, 그들과 그들의 조상은 불신앙에 속하였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는, 물질적인 만나와 달라서 영적인 하늘떡이시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그를 영접하는 자들은 영생한다.
=====6:50,51
이 귀절들은, 33, 35절에 있는 말씀을 거듭한 셈이다. 중언체(重言體)는 역설체(力說體)이다. "내 살"이란 말은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을 가리킨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 위에서 죽임이 되시므로 그를 믿는 자들은 영생을 얻는다.
=====6:52
이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가로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 유대인들이 서로 다툰 원인은, 그들의 의견이 서로 다른데 있었다. 그들 중 어떤 자들은 예수님의 속죄 교훈을 믿었으나, 어떤 자들은 믿지 않았다. 믿지 않은 자들은 예수님의 살이 세상 사람의 생명이 된다는 말씀(51절 끝)에 걸렸다.
그들은, 메시야가 죽어서 속죄하시는 진리를 왜 믿지 못했던가? 그 진리는 이사야서 53장에 명백히 예언되지 않았는가?=====6: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세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 여기서는, "인자의 살"이란 말에 "인자의 피"란 말을 더하여 말씀하신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무었인가? (1) 그것은, 살과 피는 인간성을 모두 가리키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인간성 전체가 우리의 속죄 제물이 되셨으니, 그것은 우리 구원의 완성을 위하신 것이다. (2) 피를 첨부하여 말씀하신 또 한가지 이유는, 피는 특별히 생명을 의미하는데 (창 9:4; 레 17:11,14), 그것을 흘리셔서 속죄 제물을 성립시키기 때문이다(출 12:7,8; 레1:5; 히9:12,20). 살을 먹으며 피를 마신다는 말씀은 문자적 의미보다 비유적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생활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믿는 것은, 곧, 그의 살과 피를 먹으며 마시는 행위와 같이, 예수님을 영접하여 나 자신의 분깃으로 만드는 실제적 행위이다. 신앙은 이론 뿐이 아니다. 이 말씀에 근거한 기독교 성찬 교리에 대하여, 불트만(Bultmann)은, 그것이 헬라 신비 종교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Theology of the New Testamant I, p.148). 그러나 헬라 신비 종교에서 그 의식에 참여한 자들이 신(神)을 먹는다고 한것(그들의 신으로 표상된 소위 고기 같은 것을 먹는 것)은, 범신론 사상과 마술적 사상에 근거한 것이다. 따라서 그 먹음에 참여하는 자가 신(神)이 된다는 그릇된 주장도 거기 있다. 그러나 기독교의 성찬은 그와 정반대로서 유신론적인 속죄의 역사적 사실을 기념하는 것이다. 그 뿐 아니라, 기독교의 성찬은, 구약에 있는 유월절 잔치의 후신(後身)이다. 예수님께서 성찬을 제정하실 때에 바로 유월절 만찬을 잡수시면서 그것을 성찬으로 변전시키신 것 뿐이다(눅 22:7-23). 요 6장에서 신자들이 그의 살을 먹으며 그의 피를 마실 필요성에 대하여, 그가 강조하신 때도 유월절이 가까운 시기였다(4절). 그 뿐 아니라, 유월절 잔치의 영적 의미가 성찬의 그것과 같다. (1) 유월절 잔치를 먹는 것이 이스라엘에게 구속을 준 것처럼(출 12:13), 성찬을 먹는 것이 기독 신자에게 그런 의미를 가지며, (2) 유월절의 만찬이 애굽을 떠나 먼 길을 가는 이스라엘에게 양식이 된 것처럼, 성찬은 기독자에게 영적 양식이 되기도 한다. 이와 같은 사실들을 보면, 성찬과 헬라의 신비 종교와는 전연 관계가 없다. 헬라의 신비 종교들 중 다요니시스(Dion
=====6: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 헬라 원어에 의하면, 여기 "먹고"란 말(* )이 이때까지 사용된 먹는다는 말(* )과 다르다. 여기 사용된 말은 맛있게 먹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속죄를 받아 누림에 대한 적합한 술어이다. 이 귀절 말씀은, 기독 신자가 이 세상에서부터 영생을 얻고 내세에는 몸의 부활까지 받는, 구원의 복락 전부를 가리킨다.
=====6: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 여기 "참된"이란 말이 사용된 목적은 이렇다. 곧, 만나와 같은 물질적 양식에 비교하여, 예수님의 살과 피(속죄의 은혜)는 참되다는 것을 표시하려는 것이다. 곧, 물질적 양식은 그림자와 같고 물완전하나, 예수님의 속죄의 은혜는 실물이요 영원히 살리는 효과를 가진 것이다.
=====6:56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 이것은, 그리스도의 속죄를 받은 자가 주님과 연합하게 됨을 가리킨다. 요한의 신학 사상대로 보아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1) 주님의 계명을 지킴(요일 3:24), (2)주님을 본받음(요일 2:6), (3) 열매를 맺음(요 15:2), (4) 죄를 범치 아니함(요일 3:6), (5) 기도 응답을 받음(요 15:7), (6) 생명을 가졌음(요 6:57), (7) 주님의 재림에 대하여 담력을 가진다(요일 2:28).(Bernard, the International Critical Commentary on the Gospel of St. Jhon, p.
212)
======6: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 "아버지로 인하여 산다"는 말은, 예수님에게서는 영원 자존의 생명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 말씀은, 다만 중보자(中保者)로서의 그의 처지를 가리킨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위치에 계신 것 만큼, 그의 생명 주시는 역사는 아버지로 말미암는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영원 자존하신 것 만큼, 그도 그러하시다. 신자들은 그리스도를 먹는 것과 같이 실제적으로 믿어야 그의 생명을 받아 누린다. 고데이(Godet)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곧, "자연계의 생명의 열매가 떡덩이로 나타날 때에 사람에게 섭취됨과 같이, 신적 생명(神的生命)도 그리스도로 화육(化肉)되어 나타났으므로 우리에게 접촉되어 받아진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생명떡이시다. 그러나 우리가 떡도 먹어야 우리의 생명 영양이 되는 것처럼,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어야 그가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다"고 하였다.
=====6:58
이 귀절은, 32-33 절 말씀 내용이 거듭 나온 셈이다. 같은 말씀을 거듭 하는 것은, 그 말씀을 힘 있게 하려는 목적으로 그리한다.
=====6:60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가 있느냐 한대 - 그들이 듣기 어렵다는 부분은 어느 말씀이가? 그것은 58절 말씀이 대표한 사상, 곧,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한다는 말씀이다. 그의 살을 먹으며 그의 피를 마시면 어떻게 영생을 얻는가? 그것이 어려운 문제란 뜻이다. 그 말씀 뜻이 어렵다고 하므로 예수님께서 답변하시기를, "인자의 이전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볼 것 같으면 어찌하려느냐"라고 하셨다(62절). 곧, 그가 승천하시면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시므로 사람들로 거듭 나게 하며 그리스도의 속죄를 믿게 하여 살리신다는 뜻이다.
=====6:61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가라사대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 예수님은 인간의 마음을 잘 아시는 것만큼, 그 때 그들의 불평을 아셨다. 그들은, 예수님의 교훈을 영적으로 바로 이해하지 않고 육적으로만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 말씀에 걸려 넘어진 것이다(벧전 2:7-8).
=====6:62
그러면 너희가 인자의 이전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볼 것 같으면 어찌 하려느냐 - 이 귀절에 대한 해석은 몇 가지 있다. (1) 여기 이른 바 "인자의 이전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이란 말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것을 가리키는데(십자가에 못 박히심은 다시 살아 승천하심에 이르는 한 계단임), 그 때에는 그들이 더욱 예수님을 저버리게 될 것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2) 예수님의 속죄에 대한 말씀이 피와 살로써 설명될 때에도 그들은 깨닫지 못하였다. 그렇다면, 그가 승천하셔서 그의 속죄를 영적으로 이루시며 나타내실 때에는 더욱 깨닫기 어려울 것이라는 의미라고 한다(Westcott), (3)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다시 사셔서 하늘로 올라가시는 때에 저희는 믿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가 이 말씀을 하시는 내막은, 그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과 같은 속죄 신앙의 효과가 그의 승천하시는 때에 확실히 성립되고야 만다는 것이다. 여기 "볼 것 같으면"(* )이란 말은, 하필 육신의 눈으로 본다는 것이 아니고 심령의 눈으로 봄을 가리키기도 한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신앙을 육안(肉眼)으로 본 것에 근거하도록 한 것이 아니고, 말씀을 들음에 근거하도록 한 것이다(Er band den Glauben nicht an das Sehen, sondern an das Horen des Worts.-Schlatter, Der Evangelist Johannes, P.181).
=====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 이것은, 예수님의 역사가 성령으로 말미암는다는 새로운 선언이다(Schlatter). 이것은, "인자의 살을 먹고 그의 피를 마시는 자가 영생을 가졌다"는 말씀에 대한 유대인의 오해를 시정하는 것이다. 살을 먹는다 함은, 육체적 식음으로 오해할 것이 아니고 영적 식음(靈的食飮)으로 간주해야 된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은 영적인 것으로서 살리는 성령의 역사가 함께 하는 것이다.
=====6:64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 예수님께서 이렇게 그 제자들 중에 불신앙 사실이 있음을 지적하시어 그들을 경성시킨다. 우리는, 우리의 죄악을 알게 될 때에 경성하게 된다.
=====6:65
내 아버지께서 오게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는 목적은, 그의 주장이 저렇게 탁월하심에도 불구하고 믿지 않는 자들이 있는 모순을 해결하시기 위한 것이다. 곧, 예수님을 안믿는 원인은, 예수님 자신의 증거가 불충분하여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오묘한 작정에 달려 있는 것이었다.
=====6:66
제자 중에 많이 물러 가고 - 이 귀절에 대하여 어거스틴(Augustine)은 말하기를, "그들이 생명체와 교제를 끊었으니 만큼 그들의 생명은 떠났다"고 하였다. 고데이(Godet)는 이 사건에 있어서 예수님의 메시야 역사(役事)의 비결이 나타난 것을 지적하였다. 곧, 이렇게 오합 군중(烏合群衆)은 일단 헤어질대로 헤어지고 소수(少數)만 남게 된다. 기드온의 300명 군대는 많은 군대보다 오히려 유력하였다.
=====6:67
너희도 가려느냐 - 열 두 제자는, 외부적 관계로 볼 때에 언제든지 모두 다 예수님을 따를 듯이 나타났던 것이다. 그러나 신앙은 외부적 관계에 달린 것이 아니다. 그들 중에도 가룟 유다가 있었다는 것은 놀랄 만한 일이다. 예수님은 이런 일을 염두에 두시고 "너희도 가려느냐"라고 물으셨다. 곧, 그들도 늘 경성하여 있을지언정 방심하면 안된다는 사실을, 여기 암시하신다.
=====6:68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 "영생의 말씀"이란 것은 63절의 말씀을 염두에 둔 것이겠다. 베드로는 언제나 모든 제자들 중에서 대표자 격으로 솔선하여 나서곤 하였다(13:6,24,36,18:10,20:3,21:3,7; 마 14:28).
=====6:69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줄 믿고 알았삽나이다 -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란 말은, 메시야의 성역을 위하여 성별하여 보내심이 된자란 뜻이다. 막 1:24; 눅 4:34; 사 43:14 참조.
=====6:70,71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 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저는 열 둘 주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 - 이 말씀은, 제자들이 신앙 생활에 있어서 너무 자신 있게 지나지 말아야 할 것을 암시하신다. 그가 택하신 열 두 사도 중에도 넘어질 자가 있다고, 그는 경고하신다. 가룟 유다를 가리켜, "마귀"라고 하신 것은, 그가 마귀의 도구로 사용되리라는 의미이다.
6:1
그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 바다 곧 디베랴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매 - 요한은 보통
처음 세 명의 공관복음서 저자들이 생략한 그리스도의 언행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 상례인데, 이 부분에서는 그의 습관과 달리 공관복음서 저자들이 기록한 기적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요한은 다음날 그리스도께서 가버나움에 가셔서 전하신 말씀을 기록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를 기록하고 있다. 이 표적과 다음에 나오는 내용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기록된 말씀은 다음 세 명의 복음서 저자가 공통적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또 다른 목표로 연결된다는 의미에서 특별한 데가 있다. 우리는 곧 이를 알게 될 것이다. 다른 이들은 이 일이 세례 요한이 죽은
직후에 일어났다고 말한다. 그러나 시간을 따져서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떠나신 이유를
밝히려고 한다. 왜냐하면 폭군이 경건한 사람들의 약점을 알게 되면, 절제없이 마시는
술이 술고래의 구미를 더욱 부채질하듯이 폭군은 더욱 심한 야만성을 나타내게 되는
것이 상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자리를 뜨심으로 헤롯의 분노를 가
라 앉히기를 원했다. 요한은 게네사렛 호수 대신에 '갈릴리 바다'라는 말을 쓰고 있
다. 그리고 '갈릴리 바다'가 '디베랴 바다'라고 불리웠음을 부언함으로써 그리스도께
서 어느 곳으로 물러 가셨는지를 더욱 더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왜냐하면 호수 전체
가 그렇게 불리운 것이 아니고 디베랴가 있는 해변 일대만을 디베랴 바다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6:2
큰 무리가 따르니 -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데 있어서 그와 같은 열심을 나
타낸 것은 그들이 표적을 통하여 그의 능력을 보고, 그가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어떤 위대한 선지자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그러나 복음서 저자 요한은 다른 세 명의
공관복음 저자들이 기록하고 있는 부분을 즉, 주님께서 그날 병자를 고치고 사람들을
가르치면서 보낸 이야기와 해질 무렵에 제자들이 주님께 무리를 돌려 보낼 것을 요청
한 이야기를 생략하고 있다. 요한은 아마 사건의 핵심과 요지만을 언급하는 것이 충분
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그 다음에 나오는 내용으
로 유도하기를 원했다. 이제 우리는 백성들이 무엇보다도 먼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
는 것을 얼마나 간절히 원했던가를 볼 수 있다. 그들은 자신을 돌보지 않고 광야에서
하루 밤을 보내는 것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의 게으름과 나
태함으로 인하여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는 것보다, 배고픔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더
관심을 갖는 것은 더욱 핑계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하늘에 속한 생활을 생각하다가도
조금만 다른 일이 생기면 즉시 우리는 사소한 일에 사로잡힌다. 사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세상의 장애에 방해를 받지 않고 자유로울 때를 거의 발견하실 수가 없다.광야
나 산이나 주님을 따라가는 것은 고사하고, 우리가 편하게 집에 있을 때에 그리스도께
서 우리를 찾아 오신다해도 그를 맞아들일 사람은 열중에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비록 이 병이 거의 세계 전역에 퍼져 있다 하더라도 이런 안이한 육신의 병에 구애를
받지 않을 정도로 간절히 영혼의 선(善)을 갈구하기만 한다면,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
라에 합당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육체가 주의를 끄는 만큼, 우리는 또한 그리스도께서 그의 기쁜뜻을 따르기
위하여 그들 스스로를 돌보지 않는 자들을 오히려 돌보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님
께서는 그들이 기진해서 먹을 것이 없다고 아우성을 칠 때까지 기다리지 아니하시고
요청을 받기 전에 그들에게 먹을 것을 마련해 주신다. 어떤 이는 이것이 항상 그런 것
이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경건한 사람들이 궁핍하고 먹을 것이 없어
쇠잔해 가는 것을 볼때가 있지 않느냐고 반문할 것이다. 나는 비록 그리스도께서 우리
의 믿음을 단련하고 이와 같이 우리의 인내를 시험할지라도, 그분은 하늘에서 우리의
필요를 감찰하시며 우리에게 유익한 때에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신다고 대답한다. 주
님께서 즉시 우리를 돕지 아니할 때는, 그 이유가 우리에게 감추어져 있기는 일을지라
도, 가장 좋은 이유 때문에 그렇게 하시는 것이다.
6:3
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시니 - 그리스도께서는 유월절이
될 때까지 한적한 곳에 물러가 있기를 원하셨던 것이 틀림없다. 그래서 본문 말씀에
주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앉으셨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인간으로서 주님이 의도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다른 데 있었으므로 그는
이에 기꺼이 순종했다. 그러므로 주님은 사람의 눈을 피하여 한적한 곳으로 걸음을 옮
겼지만, 그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말하자면 많은 사람이 모인 군중 속으로 들
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 산에는 어느 동네의 사람 수보다도 많은 큰 무리
가 모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님께서 행하신 기적은 디베랴 넓은 시장터에서 행한 것
보다 더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의 계획을 사태의 발전에 따라
적용함으로써, 만일 일이 우리가 예상한 것과 달리 전개된다 해도 걱정해서는 안된다
는 것을 배우게 된다. 하나님은 모든 것보다 높이 계셔서 자기의 기쁘신 뜻을 따라 모
든일을 관할하시고 이루어가시기 때문이다.
6;5
예수께서......빌립에게 이르시되 - 우리가 여기서 빌립에게 말씀하셨던 것으로
기록된 내용을 다른 복음서의 저자들은 모든 사람에게 이르신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아무런 모순이 없다. 빌립은 모든 제자들의 공통된 의견을 대변하는
대변인이어서, 그리스도께서 특별히 그에게 대답하셨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 다음
에 안드레가 말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안드레가 말한 것을 다른 복음서 저자들은
마찬가지로 모든 제자가 말한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빌립이라는 제자를 통하여 예수
께서는 제자들이 잠시 후에 목도했던 것과 같은 기적을 과연 바라고 있는가를 시험하
고 있다. 주님께서 그들이 비상 대책에 대하여 어떠한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음을 아
셨을 때, 그는 그들의 잠자고 있는 마음을 일깨워, 멀어지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볼
수 있도록 그들의 눈을 뜨게 해준다. 제자들이 하였던 모든 말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그들의 목적은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을 더이상 지체시키지 말고 돌려 보내도록 설득하
는 것이었다. 아마 제자들은 자기들도 함께 불편을 겪게 될 것을 염려해서 이 말을 할
대에 그들 자신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반대를 돌
아보지 아니하시고 자기의 목적하신 바를 추진하셨던 것이다.
6:7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 한 데나리온은 한 사람의 하루 노임에 해당
하는 것으로써 부대우스(Budaeus)의 계산에 의하면 이는 35프랑에 해당한다. 이를 5천
명에게 분배한다면 각 사람에게 상당한 돈을 나누어 주었어야 했을 것이다. 또한 여자
와 어린이가 1,000명 쯤 있었다고 계산한다면 막대한 돈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대개 큰 무리의 경우에 좀 지나치게 생각하게 되는 것이 상례이듯이, 빌립도 사람 수
를 좀 지나치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고 제자들은 가난하고 돈이 없었기 때문에, 안
드레는-자기들이 이 모든 사람들을 대접할 만큼 부유하지 못하다고 말하기라도 하듯이
-거액이 필요하다고 말함으로 그리스도를 놀라게 할 생각이었다.
6:10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 제자들이 그들의 선생께서 그들에게 준 소망을 좀 더 빨
리 포착하지 못하고 마땅히 주님께 돌려야 할 능력을 그에게 돌리지 않은 것은 꾸중을
들어 마땅한 어리석음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이 주님의 명령을 준행하는데 있어서
부여준 즉각적인 순종은 칭찬을 해 줄만한 것이다. 그들은 주님께서 명령하는 의도나
또는 그 명령이 무슨 결과를 가져올지 알지 못했다. 그리고 일반 사람들도 똑같은 순
종의 태도를 보여주었다. 왜냐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지만 사람
들이 한 마디 명령에 일제히 앉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말하자면, 어두움 가운데
행하라고 말씀하실 때 순종하는 이것이 참된 믿음의 증거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
리는 스스로 지혜있는 채 하지 말고, 커다란 혼란과 어두움 가운데서도 자기 백성을
결코 실망시키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지도자로 모시고 따를 때, 좋은 결과가 따를 것
을 조용히 바라보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6:11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 그리스도께서는 여러 차례 본을 보이심으로
우리가 기도로 식사를 시작할 것을 가르쳐 주셨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소용을 위해서
정하신 모든 사물이 우리에 대한 주님의 무한한 자비와 아버지다운 사람의 상징으로
주님을 찬양할 것을 종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울이 디모데전사 4장4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은 모두 다 선한 것으로 감사함으로 받으면
그것이 우리에게 거룩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감사할 생각을 하지 않고 식
물을 삼켜버리는 자들은 하나님의 선물을 모독하고 더럽히는 자들인 것이다. 그리고
이 가르침에 우리는 더욱 더 유의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아직도 대부분의 세상사람들
이 동물처럼 자신을 채우고 있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떡을 제자들
에게 주어 그들의 손에서 불어나는 것을 원하신 사실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서로 섬길 대 우리의 노력을 축복해 주신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이제 우리는 표적의 의미를 전체적으로 요약해 보기로 한다. 여기서 행한 기적은 다
른 기적에서와 마찬가지로 주님께서 그의 자비와 능력을 행사하셨다는 점에서 공통점
을 찾아 볼 수 있다. 이것은 또한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시리라
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재확인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갑작스런 충동에 의하여 주님께
인도된 사람들도 주님께서 돌보아 주시는데,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주님을 찾는 우리
를 주님께서는 결코 외면하지 않을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물론 주님께서는 그의 백
성으로 굶주리게 하실 때도 있다. 그러나 내가 이미 앞에서 말한대로, 주님께서는 결
코 우리를 돕지 않고 버려두시지는 않는 것이다. 그리고 최후 수단으로서가 아니라면
주님께서 우리를 돕지 않는 데는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신령한 생명을 공급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몸에 양분을
공급해 주도록 아버지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다고 밝히 말씀하셨다. 모든 축복은 그리
스도께서 그것을 우리에게 전달해 주시도록 그의 손에 맡겨졌다. 나는 주님을 축복의
통로라고 부르기를 싫어한다. 왜냐하면 주님은 영원한 아버지로부터 면면히 흐르는 생
명샘이 되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울은 모든 축복이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기를 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고전1:3). 그리고 또
다른 곳에서 바울은 모든 일에 언제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버지 하나
님께 감사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엡5:20). 그리고 이것은 그의 영원한 신성에 어울
리는 직분일 뿐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아버지께서는 그리스도를 청지기로 임명하여 우
리를 먹이시도록 섭리하신 것이다. 비록 우리가 매일같이 기적을 보지는 못하지만 그
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후히 먹여 주심으로 그의 능력을 나타내 보이시고 있다. 그리
고 주님께서 그의 친구들에게 음식을 공급하기 원하실 때 어떤 고상한 방법을 쓰지 않
는 것을 읽을 수 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든, 어떤 특별한 방법으로 먹을 것과 마
실 것을 달라고 주님께 구한다면 그것은 그릇된 요구일 것이다.
다음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에게 어떤 희귀한 별미를 나누어 주지 아니하셨다.
그 음식에서 주님의 놀라운 능력을 본 사람들은 보리떡과 마른 물고기로 만족해야 했
다. 그리고 비록 지금 보리떡 다섯개로 오천 명을 만족하게 먹이시지는 않지만, 주님
께서는 온 세상을 놀랍게 먹이시는 일을 그치지 아니 하신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고 하는 말씀(신8:3)은 우리에게
모순처럼 보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너무나 외적인 방법에 마음이 젖어 있으며
따라서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선물에 의지하시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먹을 것이 떨어지면 그와 같이 소란을 피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모든
것을 바로 생각할 수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음식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악의는 어리석음이라기보다 방해거리가 되는 것
이다. 끊임없이 계속되는 마음의 오류를 안고 지구를 수백 번 돌아 볼지언정, 자신을
보내주신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으려는 것이 인간의 패역한 마음이기 때문이다.
6:13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 - 마태는
보리떡 일곱개로 사천 명을 먹이셨을 때에 보리떡과 같은 숫자의 광주리가 남았음을
기록하고 있다(마15:37). 더 큰 숫자의 사람에게 충분한 더 작은 양의 음식과 거의 두
배 가까이 남은 음식은 우리가 고의적으로 눈을 감고 모르는 체하고 있는 그 하나님의
축복이 얼마나 능력이 있는 것인가를 더욱 분명히 보여 주고 있다. 우리는 또한 그리
스도께서 광주리를 채우라고 명하신 것이 기적을 강조하려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었지
만,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고 명하실 때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동시에 근검절약을 권고하고 있음을 유의해야 하겠다. 하나님의 은택이 풍성한 것이
우리를 사치로 이끌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풍부하게 누리고 있는 자들은
주의 깊고 성실하게 그들의 남아도는 재산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목적에 사용하지
않는다면, 언젠가 그들의 잉여 재산에 대해 하나님께 회개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
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6:14
그 사람들이 예수의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 그 사람들이 표적의 주인을 메시아
로 인정하고 있는 것을 보면, 표적이 약간의 유익을 가져다준 것 같다. 그리고 그리스
도께서 표적을 행하신 목적이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은 곧 그들이
그리스도에 대하여 갖고 있던 지식을 엉뚱한 방향으로 잘못 적용시킨다. 그리고 사람
들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그들에게 나타내시자마자 저희의 허위로써 그리스도의 진리
를 더럽히고 그릇되이 적용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오류를 아주 자주 범한다. 심지어 올
바르게 길을 걷는 것처럼 보여도, 사람들은 곧 타락하고 마는 것이다.
6:15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 이 사람들이 그리스도에게 임금
의 칭호와 영예를 안겨 주려는 데에는 좋은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그로 임금
삼을 수 있는 자유가 자기들에게 있다고 생각한 것은 커다란 잘못이었다. 성경은 이러
한 권리를 하나님 한 분에게 국한시키고 있따. 이는 시편 2편 6절에 "내가 나의 왕
을...세웠다"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들은 어떤 종류의
나라를 상상했을까? 그들은 그리스도의 인격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지상 왕국을 상상
했다. 이에서 우리는 영적인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우리 자신의 이성으
로부터 새삼스러운 것을 지어내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를 배우게 된다. 우리의
패역한 마음이 범하는 거짓에는 한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의 패역하고 비뚤어
진 예배에 의하여 어떤 사람이 고의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공격하는 것보다 더 악하
게 하나님을 대적한다면, 열심있는 체하는 가식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우리는 주님의 원수들이 전에 그의 영광을 가리기 위하여 갖가지로 노력했던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 무례함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실때에 극에 달했다. 그
러나 이러한 방법에 의하여 세상은 구원을 얻게 되었으며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사단과
사망을 이기고 승리하셨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이 시점에 임금의 자리에 앉으신다면
그의 신령한 나라는 멸망했을 것이며, 복음은 영원한 누명을 쓰게 되고 구원의 소망은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거짓된 예배와 사람이 경솔하게 지어낸 예식은 하나
님의 참된 영광을 흐리고 주님께 치욕과 수치의 짐을 지워주는 결과 밖에 가져오지 못
한다.
우리는 또한 '억지로 잡아'라는 표현에 유의해야겠다. 복음서 저자는 그들이 억지로
그리스도를 잡으려 했다고, 즉, 충동적인 완력을 써서 그들은 그리스도를 그의 뜻에
관계없이 그들의 임금을 삼으려고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에게
드리는 영광을 주님께서 승인해 주기를 원할 때에, 우리는 언제나 주님께서 요구하시
는 내용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자신이 지어낸 예식을 하나님께 강요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공격하는 것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그에게 푠행을 가하는 것이다. 왜
냐하면 참된 예배의 기초는 순종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에서 우리는 얼마나 경건한 마
음으로 순수하고 단순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하는가를 배우게 된다. 우리가 조
금만 곁길로 간다해도, 진리는 우리의 누룩에 감염되는 것이며, 진리는 더 이상 그 진
실성을 유지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약속된 구속자가 하나
의 왕으로 나타나신다는 것을 배워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의 마음에서 지
상에 속한 왕국을 제시한다. 우리가 우리의 의견을 하나님의 말씀과 혼합할 때마다,
믿음은 비참한 지경으로 전락하게 된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사단이 그들을 거짓된 열
심으로 유도하지 못하도록 겸손하게 스스로를 단련시켜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
리에게 스스로를 계시하신 그대로 우리가 그를 영접하여 모실 때에만, 바로 예배를 받
으신다.
오천 명의 남자들이 주저하지 않고 새로운 임금을 세우려는 대담성을 발휘했다는 것
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빌라도의 군대와 로마 제국의
세력에 반기를 든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들이 만일 선지자들의 예언을 믿고 하나님
께서 자기들 편이 되어 싸워주시리라고 믿지 않았다면 그와 같이 대답하게 나오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선지자들이 약속한 적이 없는 왕국을 고안해 냄으로써
큰 잘못을 범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들의 계획이 하나님의 손의 도움을 받지
못할 만큼 하나님의 뜻과 거리가 먼 행동을 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떠나
셨따. 가톨릭교의 그늘 아래서 불행한 사람들이 그와 같이 오랫동안 방황하고 있는 것
도 여기에 원인이 있는 것이다. 그들은 마치 하나님이 없다고 믿는 것처럼, 그들의 고
안해 낸 방법으로 하나님의 예배를 더럽히기를 서슴치 않고 있다.
6:16
저물매 제자들이 바다에 내려가서 - 그리스도께서는 분명히 무리가 다 흩어질 때
까지 뒤로 물러나 계시기를 원하셨다. 우리는 대중의 소요(騷擾)를 진정시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알고 있다. 그들이 의도했던 것을 공개적으로 실행에 옮기려고 했
다면, 그 소문이 곧 퍼져서 나중에는 그 오점을 주님에게서 지워버리기가 어렵게 되었
을 것이다. 반면에 다른 복음서 저자가 기록하고 있듯이 주님께서는 기도하는 중에 그
때의 시간을 보내셨다. 아마 주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격정적인 욕구를
시정해 주시도록 기도하셨을 것이다. 주님께서 기적적으로 호수를 건너가신 것은 제자
들의 믿음을 강건하게 해줌으로써 그들에게 유용한 것이었다.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
어서 건너심으로 사람들은 그 다음날 주님께서 배를 타고 그곳에 오신 것이 아니라 자
신의 능력에 의하여 그곳까지 오셨음을 더 쉽게 알 수 있게 되었다. 왜냐하면 사람들
은 주님께서 출발해야 할 해변을 모두 봉쇄했으며, 또 제자들이 배를 타고 바다를 건
너는 것을 보지 않았다면 사람들은 자리를 뜨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6:17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가버나움으로 가는데 이미 어두웠고 - 요한은 다른 저자들
처럼 제자들이 몇 시간 동안 강풍과 싸운 것과 같은 상세한 내용을 기록하지 않고 있
다. 강풍은 해가 진 직후에 불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관복음 저자들은 그리
스도께서 4경이 될 때까지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 요한은 제자
들이 노를 저어 십여리쯤 갔다고 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셨을 때는 그들이
아직 바다 한 가운데 있었다고 추리하는 사람들은 제자들이 바다 건너편 또는 반대편
으로 항해하고 있었다고 생각함으로써 그릇된 판단을 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 기적이
행해졌다고 누가가 말하고 있는 베세다와, 배가 목적해서 가고 있는 가버나움은 같은
지역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다. 플리니(Pliny)는 그의 다섯번째 책에서 이 바다는 폭
이 10Km쯤 되고 길이가 26Km쯤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는
그의 세번째 책에서 유대의 전쟁에 대하여 기록하는 가운데 이 바다의 길이가 20Km쯤
되고 폭이 8.5Km쯤 된다고 말하고 있다. 이 두 사람이 추정한 거리를 비교해 보아도
우리는 거리상에 별 오차가 없음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 항해에 관한 한, 나
는 그들이 직접 목적지로 노를 저어 항해한 것이 아니라 이리 저리로 몰려 다녔다고
추정한다. 어쨌든 복음서 저자는 제자들이 위험에 봉착해서 근심하고 있을 때에 그리
스도께서 나타나셨다는 것을 알려 주려 했던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잔잔하고 평탄한
항해를 하는데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이와 같이 괴롭힘을 당했다는 것은 좀 이상하게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종종 그의 백성을 심각한 위험 가운데 몰아 넣으심
으로 그들이 곤경에서 구원을 받는 중에 주님을 더 잘 그리고 더 가까이 알아볼 수 있
기를 바라시는 것이다.
6:19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심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 다른 복음서
저자들은 그들이 두려워한 원인을 그들이 주님을 유령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설명
하고 있다. 유령이 우리 앞에 출현했을 때 경악과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사단이 우리를 기만하고 있다고 생각하거나 하나님께서 무엇인가를 전
조(前兆)로 보여주신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요한은 여기서-마치 거울에 비쳐 보여주듯
이-말씀이 없이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하여 가질 수 있는 지식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
고 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그의 신성(神性)을 본보기로 제시해 주신다면 우리는 곧
상상에 빠져들게 되고 각 사람은 그리스도 대신에 자기 자신을 위한 우상을 조작해 내
기 때문이다. 이러한 마음의 오류 뒤에는 반드시 혼란과 혼돈된 마음의 공포가 따른
다.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을 시작하실 때, 그의 음성에서 우리는 분명하고 본질적인
지식을 얻게 되고 기쁨과 평안이 우리 마음에 비취게 된다.
"내니 두려워 말라"고 하신 말씀은 무게가 있는 말씀이다. 이러한 말씀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존전에서 확신 가운데 평안과 안정을 유지할 근거가 있음을 배우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제자들에게만 적용되는 말씀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나중에 악한 사람들
이 같은 말씀을 듣고 땅에 엎드러진 것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18:6). 두 가지 경우의
차이점은 주님께서 잃어버린자와 불신자의 심판을 위하여 보냄을 받은 재판관이 되신
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삼킨 바 되지 아니 하고는 주님의 임재하심을 견딜 수
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경건한 사람들은 주님께서 그들에게 화해의 제
물로 주어졌으며, 그의 이름이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그들의 구원에에 대한 확실
한 보증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이 주님의 음성을 들을 때, 그들은 죽
음에서 생명으로 되살아난 것처럼 용기를 얻게 되고 말하자면 아름다운 날씨를 유쾌하
게 즐기며, 안전히 땅에 거하며, 모든 악을 이기고 주님의 도우심으로 모든 위험을 극
복하는 것이다. 주님은 그의 말씀으로 우리를 격려하고 위로할 뿐만 아니라, 폭풍을
진정시키심으로 두려움의 원인을 제거하기도 하시는 것이다.
6:22
이튿날 바다 건너편에 섰는 무리가 - 여기서 복음서 저자는 무리로 하여금 그리스
도께서 바다를 건너신 것이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생각되도록 할 만한 상황을 기록하
고 있다 . 배는 하나 밖에 없었다. 그들은 그 배가 그리스도를 태우지 않고 떠나는 것
을 보았다. 다음날 배들이 다른 곳에서 와서 그들을 가버나움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
고 거기서 그들은 그리스도를 찾았다. 따라서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기적적으로 그곳까
지 오신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이 귀절 앞 부분에서, 요한은 거기 배가 한 척 밖
에 없었으며 그 배가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그곳을 출발했으며 그리스도는 그 배에
오르지 아니하셨다고 말하고 있다. 요한은 또 배들이 후에 디베랴로부터 와서 해변에
서 기다리던 무리를 태우고 가버나움으로 건너갔다고 덧붙이고 있다.
6:23
배들이 주의 축사하신 후 여럿이 떡 먹던 그곳에 가까이 왔더라 - 이 귀절의 내용
에는 모호한 데가 있다. 이 말씀은 예수께서 보리떡 다섯개로 무리를 먹이신 곳 가까
이에 디베랴가 위치해 있다고 설명될 수도 있고 배들이 그곳 가까이에 있는 해변에 이
르렀다는 뜻으로 설명할 수도 있다. 기적을 행한 곳에서 가깝다고 누가가 기록하고 있
는 벱세다는 디베랴와 가버나움 중간에 위치해 있다. 따라서 그곳에서 내려온 배들은
무리가 서있던 해변을 따라 항해했던 것이다. 그리고 의심할 것 없이 그들은 승객을
태우기 위하여 배를 해변에 대었을 것이다.
요한이 여기서 '주의 축사하신 후'라는 말을 다시 언급한 것은 불필요한 반복이 아
니다.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기도에 의하여 몇 개 되지 않는 보리떡으로 그와 같이 많
은 사람을 먹일 수 있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기도에 대하여 너무
나 냉담하고 나태하게 때문에 같은 것을 다시한번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6:25
바다 건너편에서 만나 - 우리는 이미 가버나움이라는 동네가 바다 건너편에 위치
해 있는 동네가 아님을 밝힌 바 있다. 디베랴는 호수의 가장 넓은 부분에 위치했고 그
다음에 벱세다가 있으며, 가버나움의 요단강 입구에서 별로 멀지 않은 낮은 부분에 위
치해 있었다. 이제 요한이 바다 건너편이라고 가버나움을 말할 때, 우리는 이 지역이
바로 반대편에 있었다고 오해해서는 안되겠다. 오히려 이 바다는 하구가 둥글게 휘어
있었기 때문에 중간에 끼어 있는 만(灣)으로 인해서 걸어서 가는 길은 돌아서 가는 길
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복음서 저자는 일반적인 용어로 '바다 건너편'이라는 말을 쓴
것이다. 가버나움까지 곧 바로 가는 길은 배를 타고 가는 방법 뿐이었기 때문이다.
6:26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 그리스도께서는 표적에 나타난 그의 능력을 내세우
기 위하여 그들의 질문에 대답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그들이 생각 없이
몰려 다니는 것을 꾸짖고 있다. 그들은 주님께서 행동하시는 참된 이유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에게서 그리스도 아닌 다른 무엇을 찾고 있었다. 그들은 표
적으로 인하여 주님을 찾은것이 아니라 배를 치우기 위하여 주님을 찾는 잘못을 범하
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표적을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더구나 복음서 저자들는 그들이 표적으로 인하여 그리스도를 좇을 마음이 생겼다고 기
술한 바 있다. 그러나 그들은 표적을 다른 목적으로 번복하여 생각했고 기술한 바 있
다. 그러나 그들은 표적을 다른 목적으로 번복하여 생각했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그들
이 표적 보다도 먹는 것에 더 관심이 있다고 그들을 꾸짖으셨던 것이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하나님의 일에서 마땅히 이득을 얻어야 할 만큼 유익을 얻지 못했다고 말한 것
이나 다름이 없다. 유익을 얻을 수 있는 참된 방법은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인정함으로
써 그의 가르침과 다스림에 순종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
아 하나님의 나라의 일을 돕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구했
던 것은 이 세상에서 행복하고 편하게 사는 것이었다. 이것은 그리스도로부터 그의 주
된 능력을 빼앗는 것과 같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하나님아버지께서 성령을 주신
자들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재창조하고 또 아버지께서 그의 의를 옷 입혀준 성도들을
영생으로 인도하도록 보내심을 받아 사람에게 나타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희구하지 아니하고 현재의 생활의 안락에만 마음
을 쓰는 자들은 배를 채우는 데만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도마찬가지로, 복음에
서 십자가의 쓰라림은 제외되고 육신적인 쾌락만을 가져다 주는 것이라면 많은 사람들
이 복음을 환영해 마지 않을 것이다. 과연 우리는 많은 이들이 보다 즐겁게 그리고 자
유롭게 살기 위하여 그리스도편에서는 것을 보고 있다. 어떤 이들은 개인의 이득으로
인하여 또 어떤 이는 두려움으로 인하여 또 다른 이들은 그들이 기쁘게 해주고 싶은
사람들로 인하여 그리스도의 제자로 자처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찾는 데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이 세상을 미워하고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훌륭하게 추구하고 있다고 자신하고 있지만, 실
은 주님의 모든 능력을 악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늘 하시는 대로, 우
리의 위선 아래에 숨어있는 악덕을 그늘에서 끄집어내기라도 하려는 듯이, '진실로'라
는 말을 두번 되풀이하고 있다.
6:27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 여기서 주님은 자기가 그의 백성에게 목표로
삼아 희구하기를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있다. 다시 말해서 우
리는 영생을 얻기 위하여 일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깨달으이 둔하
므로 우리는 항상 땅에 속한 일에 몰두하기 때문에 우리가 마땅히 행할 일을 지적하기
전에 주님께서는 이 선천적으로 타고 난 병을 시정하고 있다. 그의 가르침을 한 마디
로 말한다면 "썩지 않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는 것이다. 그러나주님께서는 인간의
의식이 세상의 염려로 묶여 있기 때문에 먼저 그들을 그 굴레에서 벗겨 위의 것을 바
라 보도록 유도하고 있다. 이는 주님께서 자기 백성들로 일용할 양식을 얻게 하기 위
하여 수고하는 일을 금하셨다는 말이 아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천국의 생활이 땅에
속한 생활보다 우선적인 것이어야 한다고 경고한다. 경건한 자들이 이 세상에 살아 있
는 유일한 이유는, 세상의 순례자로서, 천국의 본향을 바라보고 믿음의 경주를 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우리는 이 말씀의 요점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능력이 먹을 것과 세상적인 것에 의하여 더럽힘을 받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추구해야 할 것이 무엇이며 왜 그것을 구해야 하는지를 논하고 계신다.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는 그 때의 상황과 어울리는 비유를 쓰고 있다. 만일 양식이 언급되
지 않았다면, 주님은 비유를 쓰지 않고 세상의 염려를 버리고 하늘에 속한 생명을 구
하라"" 고 말씀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짐승과 같이 그들의 사료를 얻는 데에만
급급하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말씀을 비유적으로 돌려서 새로운 생명에 관계
되는 것은 무엇이나 양식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성령의 능력에 따라 말씀
이 우리 안에 역사할 때에, 우리의 영혼이 복음의 말씀을 먹고 영양을 공급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믿음이 영혼의 생명인 것처럼, 믿음에 영양을 공급하고 믿
음을 증진시키는 모든 것을 양식에 비유하고 있다. 이런 종류의 양식을 주님은 썩지
않는 양식이라고 부르며, 이것이 영생하도록 하고 있다고 말씀하신다. 우리의 영혼은
하루 동안만 영양 공급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영생의 복된 소망 가운데 양육을 받는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기 위한 것이다. 주님께서는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셔서 주 예수의 날
에 완성하도록 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영생의 보증으로서 성령의 은사를 받지 않으면
안된다. 비록 잃어진 영혼이 이 양식을 맛보고 뱉아 버리는 일이 종종 있지만, 믿는
성도들은 성령의 은사에서 끊이지 않고 계속되는 성령의 능력을 의식할 때 그들의 영
혼에 지속적인 힘을 느끼게 된다.
어떤 이들이 '일'이라는 말에서 우리가 일함으로 영생을 얻는다고 추리하는 것은 헛
된 궤변에 속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미 말한 대로,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에게 세상
일에만 급급하는 대신에 하늘에 속한 생명에 관해 묵상하도록 권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이 양식은 이자가 너희에게 준다"고 말씀하실 때, 친히 모든
의문을 제거하고 계시다. 우리가 주님의 선물(은사)을 받는 것은 아무도 자기의 노력
에 의해서 마련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휘상으로 분명한 모순이 있는 것 같으나, 두
문장은, 영혼의 신령한 양식은 그리스도께서 거저 주시는 은사이며, 우리는 그와 같이
위대한 축복에 참예하기 위하여 마음을 다하여 노력해야 된다는 데 똑같이 일치하고
있다.
인자는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 주님은 앞의 문장을 재확인하고 있다. 아버지께서
는 이러한 목적으로 그를 인쳐서 우리에게 보내셨기 때문이다. 옛날 작가들은 이 말씀
의 의미를 의곡하여,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인(印)과 영상이시기 때문에 인치신 자라
고 말해진 것처럼 이를 그리스도의 신성에 적용시켰다. 주님께서는 여기서 그의 영원
한 본체를 논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맡겨진 사명이 무엇이며, 우리를 향한 그
의 직책이 무엇이며, 그로부터 우리가 무엇을 찾고 구해야 하는가를 말씀하고 있는 것
이다. 종합해서 요약하자면, 누구나 우리의 영혼에 썩지 아니할 양식으로 먹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나오셔서 자신이 이 축복의 근원이라고 주장하시면서 아
버지 하나님께서 그를 승인하셨고 인치신 자로부터 인맞은 표를 가지고 사람들에게 보
냄을 받았다고 부언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양식을 공급받기 위하여 영혼을 그리스도께 내놓는 사람들의 욕망은 반드시
채워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각자가 틀림없이 그 생명을 열망할 수 있도록 생명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제시되었다는 것을 인식해야겠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그
리스도 아닌 다른 사람에게 이 찬양을 올리는 모든 자는 하나님 앞에 거짓 증거죄에
걸리게 된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따라서 가톨릭 교도들은 그들의 가르치는 모든 분야
에서 온통 거짓말을 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들이 그리스도 대신에 다른 구원의 길을
대치시킬 때마다 그들은 그들의 악한 상상과 저속한 배반으로 이 특이하고 확실한 하
나님의 인을 더럽히고 흐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두려운 죄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아버지께서 주님께 허락하신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 그대로 보전하도록 우
리는 노력해야 할 것이다.
6:28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 무리는 그리스도께서 현세의
안락보다 더 높은 차원의 삶을 추구하도록 그들에게 권고했으며, 그리고 다른 곳에서
하나님이 부르신 사람들은 땅의 일에만 집착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를 묻지 않는 사람들은 일의 종류를 이해하지 못함으로써 부분적인
실수를 범하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무엇이든지 신령한 생활을 위해서 필요한 것
을 아들의 손에 의해서 우리에게 내려 주신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았다. 첫째로 그들은
무엇을 하여야 하는가를 물었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의 일(works)을 언급할 때, 그
들은 방향없이 방황하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그들의 무
지를 드러냈다. 그리고 그들은 여기서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책망할 자격이 없다는듯
이 거만스럽게 그리스도께 불평을 늘어 놓고 있다. "당신은 우리가 영생에 대하여 관
심이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왜 우리의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일을 우리에게
하라고 말하십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서요구하시고 인정하시는 일인 것
이다.
6:29
사람들은 일(works)들에 대하여 물었지만, 그리스도는 그들을 한가지 일, 즉 믿음으로 유도하고 있다. 이 말씀에서 주님은 사람이 무슨 일이든 믿음이 없이 행하는 것은 쓸 데 없는 헛된 일이며 반면에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것은 믿는 것 한가지 뿐이기 때문에 믿음 하나면 족하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믿음과 인간의 염려와 노력이 암시적으로 비교되어 있다. 주님은 마치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믿음이 없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함으로써 헛되이 분주하기만 했다. 그들은 목적지까지 꾸준히 코스를 따라 뛰지 않고 코스를 벗어나 무조건 달리기만 했던 것이다." 이것은 놀라운 말씀으로써 사람이 비록 평생 동안 노력한다 할지라도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그들의 생애를 지배하지 않는다면 헛된 일에 분주할 뿐인 것이다. 이 말씀에서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그릇된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서 하나님이 우리 안에 만들어 주시는 것을 가르치고 있지 않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고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믿음 한 가지만을 인정하신다는 것은 어처구니 없는 말처럼 보인다. 사랑도 업신여기지 말 것이며 다른 신령한 행위도 모두 그 위치와 가치를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믿음이 제일 중요하다 할지라도 다른 행위 역시 필요한 것이다. 대답은 간단하다. 믿음은 사랑이나 다른 신령한 행위를 배제하지 않는다. 오히려 믿음 그 자체 안에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다. 믿음에 의하여 우리는 그리스도를 소유하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때문에 믿음만이 유일한 하나님의 일이라고 불리우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성령으로 우리를 다스리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믿음과 그 열매를 구분하지 않는 만큼, 그리스도께서 믿음이 전체를 대표하는 것처럼 말씀하신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제 3 장에서 '믿는다'는 말의 의미에 대하여 논한 바 있다. 믿음의 능력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가 믿는 그리스도가 어떠한 분이며 아버지께서 왜 그를 우리에게 주셨는가를 판별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항상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믿음이 또한 일이라고 불리우고 있기 때문에, 믿음이 의롭게 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일에 의하여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냐고 주장하는데 이 말씀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은 궤변을 좋아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첫째로 그리스도께서 믿음을 일이라고 부를 때 그는 정확하게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는 바울이 믿음의 법과 행위의 법을 대조시킬 때도 마찬가지다. 둘째로, 우리가 행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없음을 뜻한다. 믿음은 하나님께 아무 것도 가져가지 못한다. 오히려 믿음은 사람을 가난하고 텅 빈 채로 하나님 앞에 세움으로 그를 그리스도와 그의 은혜로 채운다. 그러므로 믿음은 말하자면 아무런 보상도 지급할 수 없는 피동적인 일이다. 그리고 믿음은 우리가 그리스도에게서 받는 것 외에 다른 의를 사람에게 부여하는 것이 아니다.
6:30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 - 이들의 완악함은 다른 곳에서 이미 언급한 내용이 사실임을 힘있게 증명해 주고 있다. "이 악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마12:39) 그들은 처음에 그의 표적을 보고 그리스도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다가 새로운 표적을 보고 그들은 그리스도가 메시아라고 고백했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에서 그들은 그리스도를 임금으로 세우려 했다. 그리고 이제 와서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알려지지 않은 분인 것처럼 그로부터 표적을 구한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께 감사할 줄 모르고 또 하나님의 능력을 보고도 악의적으로 눈을 가린 것이 아니라면, 이와 같이 갑작스레 모든 것을 잊는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바라는 바대로 응해 주지 않았고, 또 그리스도께서 그들이 상상했던 분이 아님을 알았기 때문에, 그들이 이미 보았던 표적을 모두 잊어버리는 것이 틀림없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세상적인 행복에 대한 희망을 약속했다면 그들은 계속해서 주님을 찬양했을 것이며, 틀림없이 그를 하나의 선지자와 메시아로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로 환영했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들을 너무나 육신에 빠져 있다고 책망했기 때문에 그들은 더 이상 주님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다. 오늘날 이러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처음에는 그들이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흠을 덮어주시는 줄 알았기 때문에, 그들은 열심히 복음을 붙들었고 증거를 요구하지 않았다. 그러나 육체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라고 하자, 그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고 복음이 어디서 온 것인지를 묻고 있다. 결국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요구대로 응하지 않고 그는 이제 그들의 선생된 자리를 중지하게 된 것이다.
6:31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그의 배를 채우기 위하여 사나운 짐승과 같이 몰려왔다고 말씀하셨을 때 그들의 아픈 데를 찔렀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양식을 제공해 줄 메시아를 요구했을 때 이러한 태도를 보여 주었다. 그리고 그들이 만나를 내세워 하나님의 은혜를 높이 찬양했을 때,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썩을 양식에 대한 욕심을 정죄한 데 대한 책략에 불과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질책에 대항하여 만나를 가리켜 하늘에서 내려준 떡이라고 영광스러운 이름을 만나에 붙여 줌으로써 맞섰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하나님이 돼지 떼를 먹이듯이 그의 백성을 먹이시고 더 이상 귀한 것을 그들에게 주지 않았다고 하는 뜻으로 만나를 하늘에서 내린 떡이라고 부르신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지금 베풀어 주시는 영혼의 신령한 양식을 악하게 거절할 때 그들에겐 핑계할 것이 없는 것이다.
6:32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 - 그리스도께서는 시편에서 인용된 말씀과 상치되는 말씀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는 다만 비교적으로 말하고 있을 뿐이다. 만나(* ;manna)는 육신의 양식인데도 하늘의 떡이라고 불리웠다. 참으로 하늘에서 내려준 떡으로 간주되어야 할 떡은 영혼에 신령한 양분을 공급해주는 떡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서 하늘과 세상을 대조해서 말씀하고 있다. 썩지 않는 생명은 하늘나라에서만 구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귀절에서 진리는-다른곳에서와 같이-숫자로 비교되고 있지 않다. 오히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참 생명을 다루고 있다. 이러한 생명으로 인해서 인간은 다른 짐승과 다른것이며 모든 피조물 가운데 으뜸이 되는 것이다.
주님께서 후에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라고 덧붙이셨을 때, 그는 마치 "모세가 너희 조상에게 주었던 만나는 하늘에 속한 생명을 가져다 주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 너희에게 주어졌다고 말씀하신 것이나 다름이 없다. 주님께서 아버지를 떡을 주신 분으로 부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주님은 그것이 자기 자신으로 말미암아 주어졌다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대조는 모세와 하나님 사이의 대조가 아니라 모세와 그리스도의 대조인 것이다.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자신보다 아버지께서 이 선물을 주시는 분이라고 말함으로써 "나를 하나님의 보내신 사역자로 인정하라. 나의 손을 통하여 아버지께서는 너희 영혼에 영생에 이르는 양식으로 먹이기를 원하신다"고 말씀하신 것과 다름이 없다. 그러나 이것은 바울의 가르침과 상치되는 것처럼 보인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0장 3절에서 만나를 신령한 식물이라고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다루고 있는 사람들의 수준에 따라 그들의 수준에 맞추어서 말씀하고 계시다고 대답한다. 그리고 이것은 성경에 흔히 있는 일이다. 우리는 바울 자신이 할례에 대하여 얼마나 여러가지로 쓰고 있는지를 살펴 볼 수 있다. 바울이 이 예식에 대해 언급할 때, 그는 이것을 믿음을 인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거짓 사도들과 맞서 싸워야 할 때, 할례는 저주를 인치는 것이라고 말함으로 그들의 생각을 빌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제 그들이 그리스도에게 대항하여 제기했던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자. 그들은 예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육신의 양식을 공급해 주지 않는다면, 메시아임을 증명하지 못한 것이라고 반기를 들었던 것이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만나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인가를 공적으로 말하지 않고 만나가 그들의 배를 채워주기 위해 공급해 주었던 떡은 참 떡이 아니라고 부인하고 있다.
6:33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 그리스도께서는 정의를 내린 대상과 정의 그 자체를 비교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하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떡이다. 만나에는 그런 요소가 전혀 없었다." 동시에, 주님은 그가 모세가 했던 것보다 사람에게 훨씬 더 좋은 것으로 먹이기 위해 아버지께서 자기를 보내신 것이라고 하였던 말씀을 재확인하고 있다. 만나는 분명히 보이는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지, 생명을 우리에게 부어주는 영원한 하늘 나라에서 온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있던 유대인들은 그들의 조상들의 배가 가득 채워졌던 그 광야에서 그 이상 높은 것을 바라보지 못했다.
주님께서 전에 하늘의 떡이라고 불렀던 것을, 그는 이제 하나님의 떡이라고 부른다. 우리의 현 생명을 보전해 주는 떡이 하나님이 아닌 다른 원천으로 말미암는다는 말이 아니라, 오직 우리의 영혼을 살려 복된 영생으로 인도 하는 것만이 하나님께로 말미암았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귀절은 온 세상이 하나님께서 보면 죽어 있다고 가르쳐주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소생시키지 않는 한 세상은 죽어 있다. 그 까닭은 생명은 그리스도 안에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늘에서 내려"라는 말에서 두 가지를 유의해야겠다. 우리는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한다. 주님은 우리에게 생명의 주인이 되기 위하여 아버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기 때문이다. 둘째로, 하늘의 생명은 우리 가까이에 있다. 그래서 구름 위로 날아 올라갈 필요도 없고 바다 건너로 날아갈 필요도 없다. 아무도 주님께로 올라갈 수 없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내려 오셨기 때문이다.
6:34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 그들은 주님께서 생명의 떡을 주신 다고 선언했기 그리스도의 독단적인 자만심을 송사하기 위하여 빈정대는 투로 이야기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그러므로 불행한 사람들은 단순히 하나님의 약속을 거부하는 죄만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믿지 않는 불신의 죄를 그리스도에게 전가하는 것이다.
6:35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 첫째로 그들이 경멸하는 투로 요구했던 그떡이 그들 앞에 있다는 것을 주님은 그들에게 일러주고 있다. 그리고 나서 주님은 그들을 책망하고 있다. 주님은 그들의 은혜를 모르는 배운망덕한 태도를 부여주기 위하여 하나의 교훈으로 시작하고 있다. 그리고 이 교훈에는 두 가지 부분이 있는데, 하나는 우리가 생명을 어디에서 구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것이고 다음은 우리가 그 생명을 어떻게 소유할 수 있는가에 대한 말씀이다. 우리는 만나와 일용할 양식이 이미 언급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이런 비유를 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비유의 말씀은 직설적인 연설보다도 무지한 자들을 감동시키는 데 더 적절한 것이다. 우리가 육신의 영양 공급을 위하여 떡을 먹을 때, 하나님께서 어떤 비밀스런 능력으로 음식이 없이 우리 몸에 영양을 공급하시는 경우보다 우리의 연약함과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은 더욱 더 분명히 드러난다. 그러므로 몸과 영혼을 비유해서 말씀하신 것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더욱 더 분명히 인식시켜 주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영혼을 먹여 주시는 떡이 되신다는 말을 들을 때 그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단순히 자기가 우리의 생명이 되신다고 말씀하신 것보다 더욱 더 깊이 우리 마음에 새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떡이라는 말이 우리가 경험하는 것만큼 그리스도의 소생시키는 능력을 표현하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떡은 생명을 시작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이미 존재하는 생명을 양육하고 보전해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생명을 주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우리는 생명을 보전할 뿐만 아니라 생명을 얻기 시작하기 때문에 이 비교는 부분적으로 적절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여기에 무슨 모순이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그전에 하신 말씀의 상황에 맞추어서 그의 어귀(語句)를 조절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을 먹이는 데 모세와 그리스도 둘 가운데 어느 분이 더 두드러진 역할을 보여 주었느냐 하는 질문이 계속 있었다. 주님께서 이를 떡이라고 불렀던 것도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들이 주님을 반대하기 위하여 사용했던 것은 만나뿐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님은 이를 다른 종류의 떡에 비교하는 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여기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단순한 교훈은 우리의 영혼이 소위 내재적인 능력에 의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그리스도로 부터 공급받는다는 사실이다.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 이제 주님께서는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라고 말하며 먹이는 방법을 밝히고 있다. 왜냐하면 믿지 않는 자들은 항상 텅 빈 채로 남아 있으므로 그리스도께서 생명의 떡이 되신다는 것은 그들에게 아무런 효용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주린 상태로 우리를 채워 달라고 구하면서 나아갈 때에 우리의 떡이 되어 주신다. 그리스도에게 나아가는 것과 믿는 것은 여기서 같은 뜻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전자의 어휘에는 우리가 배가 고프기 때문에 생명을 얻기 위하여 그리스도에게 달려간다는 믿음의 결과가 표현되어 있다고 하겠다. 뿐만 아니라 이 말씀에서 그리스도를 먹는 것은 믿음 만을 뜻하는 것이라고 유추하는 사람들은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물론 나는 믿는 것 이외에 다른 방법으로는 그리스도를 먹을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먹는 것은 믿음의 결과와 열매이지 믿음 그 자체는 아니다. 믿음은 멀리서 그리스도를 바라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우리의 소유가 되게 하고 우리 안에 거하게 하기 때문이다.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그의 몸 안에서 연합되게 하고 그와 함께 생명을 공유하게 하며 한 마디로 말해서 그와 하나되게 한다. 그러므로 믿음이 어떻게 우리를 그에게 연합시키는가를 이해한다면, 우리가 믿음에 의해서만 그리스도를 먹을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 이 말씀을 여기에 삽입시킨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 같다. 떡의 목적은 허기를 채워주는 것이기 목마른 갈증을 채워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떡에다 떡의 성격이 허용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부여하고 있다. 나는 만나와 우리의 영혼을 생명 가운데 보전시키는 하늘의 능력을 대조하는 데 필요하기 때문에 주님께서 떡이라는 말만을 쓰고 있다고 이미 설명한 바 있다. 동시에 주님께서는 그의 민족이 흔히 쓰는 용법을 따라서 일반적으로 모든 영양 공급을 뜻하는 말로 떡이라는 말만을 쓰고 있다고 이미 서령한 바 있다. 동시에 주님께서는 그의 민족이 흔히 쓰는 용법을 따라서 일반적으로 모든 영양 공급을 뜻하는 말로 떡이라는 낱말을 쓰고 있다고 이미 설명한 바 있다. 동시에 주님께서는 그의 민족이 흔히 쓰는 용법을 따라서 일반적으로 모든 영양 공급을 뜻하는 말로 떡이라는 낱말을 쓰고 있다. 히브리어에서는 대유(代喩)에 따라 '떡을 먹는다'는 표현을 '식사한다' 또는 '마신다'는 말 대신에 쓰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구할 때 우리는 마실 것과 기타 다른 생활 필수품을 포함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의 의미하는 바는 누구든지 그리스도께로부터 생명을 얻기 위하여 그에게 나아가는 자는 아무 것도 부족을 느끼지 않을 것이요, 생명 보전에 필요한 모든 것으로 완전히 충족된다는 것이다.
6:36
그러나 내가 너희더러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 - 주님께서는 이제 그들에게 베풀어진 하나님의 선물을 악의적으로 거절한 데 대하여 그들을 꾸짖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신것인 줄 알면서 이를 거절하는 자는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능력을 그들에게 나타내지 않고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분명히 증거하지 않았다면 주님이 어떠한 분이신가를 몰랐다는 핑계가 그들의 죄책감을 덜어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메시아라고 고백했던 분의 가르침을 이제 와서 거절할 때 그들은 주님을 극단적으로 모욕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사람들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의식하고 일부러 하나님을 저항하는 일은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바울의 한 말이 여기에 적용된다.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전2:8). 그러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은 스스로 빛에 대하여 눈먼 자이다. 그리고 사단이 그들의 마음을 혼미케하기 때문에 그들이 본 것도 즉시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지게 마련이다. 주님께서 '너희는 나를 보고도'라고 말씀하셨을 때, 주님은 그의 육체적인 외모를 가리켜 말씀한 것이 아님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오히려 주님은 그들의 의도적인 완악함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완악함이 그들을 가로막지 않았다면 그들은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6: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 주님께서는 그들의 믿지 아니함이 그의 교훈을 약화시키지 못하도록 그들이 완악한 원인은 그들이 버림받은 자로서 하나님의 양무리 밖에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주님은 여기서 택한 자와 버림받은 자를 구별하심으로 비록 많은 사람이 믿지 아니할지라도그의 가르침의 권위가 흔들리지 않도록 하셨다. 불경건한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약화시키고 이를 멸시할 뿐만 아니라, 연약하고 무식한 많은 사람들은 대부분의 세상 사람들이 거부하고 있는 것이 과연 하나님의 말씀인가를 의심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믿지 아니하는 자들은 자기의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실 때 이 거침돌을 다루고 계시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싫어할 때 그의 모든 자녀들이 그 진리를 영접하고 환영하는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우선 주님께서는 아버지께서 그에게 주시는 자는 다 그에게로 온다고 말씀하고 있다. 이 말씀에서 주님께서는 믿음은 사람의 수중에 있는 것이 아니며,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 그저 무분별하게 우연에 따라 믿게 되는 것이 아니라고 밝히고 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아들에게 넘겨주는 자를 택하시는 것이다. 주님께서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라고 말씀하실 때, 우리는 모든 사람이 다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유추해 볼 수 있다. 다음으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성령의 효능으로 그의 택한 자 속에서 역사하시기 때문에 그들 중 아무도 실족하지 않는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주신다는 말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서는 자기가 택한 자들을 거듭나게 하셔서 복음을 순종하도록 내게 주신다"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 이 말씀은 경건한 자들에게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에게 나아갈 수 있는 분명한 길이 있다는 것을 확신시키고, 또 그들이 주님의 신실하심과 보호하심에 자신을 맡기는 즉시 친절히 그들을 영접해 주신다는 뜻에서 믿는 자들을 위로하시기 위하여 부언한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의 가르침은 모든 경건한 신자들에게 유익을 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로 나서는 사람 가운데서 그 결과로 주님이 신실하고 참된 스승이 되신다는 것을 느끼고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6:38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 이는 우리가 헛되이 그리스도를 찾지 않는다는 내용의 말씀을 재확인해 주는 말씀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일로써, 믿음에 의해서 하나님은 우리가 그의 것임을 보여 주시며 또 그의 아들을 정하여 우리의 구원의 감독자를 삼으시는 것이다. 그러나 아들의 유일한 목적은 그의 아버지의 명령을 이루는 것이다. 결국 주님은 아버지께서 보내 주신자들을 결코 내어 쫓지 않으신다. 끝으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믿음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뜻과 아버지의 뜻을 구분해서 말씀하신 것은 듣는 자들의 태도에 응해서 그리한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의 마음을 불신하려는 경향이 있어서 의심을 자아낼 만한 것을 지어내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악한 공상에 대한 모든 핑계를 제거하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구원에 대하여 선포하신 것을 그대로 이행하기 위하여 세상에 나타내신 바 되었다고 선언하고 있다.
6: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 이제 주님은 아버지의 목적하시는 바는 믿는 자들이 그리스도 안에 확보되어 있는 구원을 발견하도록 하는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복음의 가르침에서 유익을 얻지 못하는 모든 자는 버리운 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복음에 실족되어 많은 사람이 멸망에 이르는 것을 보더라도 절망할 이유가 없다. 이러한 사람들은 스스로 멸망을 자초하기 때문이다. 복음은 언제나 택한 자들을 구원으로 모아 들이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 다시 말해서 "나로부터 취하여 감을 당하거나 멸망당하는 것을 허락지 않겠다"는 말씀이다. 이 말씀에서 주님은 자기가 우리의 구원을 그저 하루 이틀 동안 지켜주는 분이 아니요, 끝까지 우리르 보전해 주시고, 말하자면 처음 출발할 때부터 끝나는 지점까지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약속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마지막 부활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약속은 육신의 연약함 가운데 쓰러지지 않으려고 애쓰는 사람들을 위하여 매우 필요한 것이다. 우리는 모두 이 육체의 연약함에 대하여 충분히 알고 있다. 만일 믿는 자들이 그리스도의 손에 의지하여 부활의 날을 향하여 힘차게 전진하지 않는다면 온 세상의 구원은 단번에 흔들리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향해 구원의 손길을 뻗치셨으며 절대로 중도에 우리를 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 마음 속에 깊이 새기도록 하자. 우리는 오히려 주님의 인도하심에 의지해서 담대히 저 마지막 날을 향하여 우리의 눈을 들어야 할 것이다.
주님은 또 다른 이유에서 부활을 언급하고 있다. 우리의 생명이 감추어져 있는 동안 우리들은 죽은 사람과도 같다. 믿는 자들이 불경건한 사람들과 다른 것은 믿는 사람들이 불행한 빈곤에 눌려있고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과 같이 한 쪽 배은 무덤에 들여놓고 있다는 것 외에 무엇이 있는가? 이것은 과연 그렇다. 그리고 그들은 죽음에 의하여 삼킨 바 될 위험에 늘 직면해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과 인내를 위한 대응책은 우리의 현재 생활상태에서 눈을 돌려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마지막 날로 향하게 함으로써 우리의 믿음의 열매가 나타나는 날까지 세상의 장애물을 헤치고 나가는 것 뿐이다.
6: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 주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우리의 구원을 보전하는 직책을 그에게 맡기셨다고 말씀하신 바 있다. 이제 주님은 그 방법을 밝히고 있다.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순종하는 방법을 통해서다. 주님께서는 전에도 이에 대해 살핀 바 있지만, 이제 그는 전에 약간 모호하게 말했던 것을 더욱 분명히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만일 하나님의 뜻이 자기가 택한 사람들이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라면, 그리고 이러한 방법으로 주님께서 그의 영원한 뜻을 이행하는 것이라면, 그리스도로 만족하지 않고 영원한 운명에 대하여 호기심을 가지고 묻기만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에 반해서 구원 받기를 바라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하나님의 선택 그 자체는 감추어진 비밀이다. 주님께서는 그가 우리를 영화롭게 하는 부름에 의해서 이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정론의 미망(迷妄)에서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구원을 구하는 사람은 미친 사람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그를 믿었다가 믿음을 버리도록 우리를 끝까지 선택하셨다면 그 선택은 불완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는 시작과 종말의 순서를 깨뜨리는 것은 옳지 못하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은 반드시 그의 소명(부름)을 동반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 실제로 그리스도를 믿도록 하셨을 때, 그것은 주님께서 손으로 새긴 도장으로 우리의 구원을 확증한 것과 같은 효능을 지녀야 할 것이다. 성령의 증거는 우리를 양자로 택하심을 인치시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각자의 믿음은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에 대한 풍성한 증거로써 이에 대해 더 이상 따지는 것은 신성을 모독하는 것이다. 성령의 단순한 증거에 동의하기를 거부하는 자는 성령님께 무서운 상처를 가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유대인들이 보고도 믿지 아니한 데 대하여 이전에 그들을 책망하신 말씀이 있는데 '보고' '믿는'것과 대조시키고 있다. 이제 하나님의 아들들에 관해서는, 주님께서 믿음의 순종을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깨닫는 것과 연결시키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 말씀은 믿음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흘러 나오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믿음에 하나님의 단순한 말씀외에 다른 것이 필요하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를 신뢰하면 우리는 그가 누구인지 그리고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 주시는 분인지를 깨닫게 된다는 말이다.
6:41
유대인들이 예수께 대하여 수군거려 - 복음서 저자는 유대인들이 육신의 비천함을 보고 속단함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어떠한 신령한 것이나 하늘에 속한 것을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 가운데서 수군거림이 시작되었다고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그는 그들에게 두 가지 어려움이 있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첫째는 그들이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라고 말한 데서 알 수 있듯이 그들이 그릇된 생각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또 다른 난관은 그리스도께서 그들과 같은 육신을 입고 사람 가운데 오셨기 때문에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알아 보지 못하는 그릇된 판단을 내렸던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비어 종의 형태를 취하셨기 때문에 영광의 주를 멸시한다면 우리는 아주 악랄한 판단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주님께서 종의 형체로 취하신 것은 오히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보여 주는 것이며 그의 놀라운 은혜에 대한 본보기가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령한 위엄은 그 갖가지 광채를 발하지 못할 정도로 육신의 낮고 천한 외모 속에 감추어져 있었던 것이 아니다. 다만 저 무지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에게 그의 영광을 볼 만한 눈이 결여되어 있었던 것이다.
우리들도 매일 이 두 가지 면에서 죄를 범하고 있다. 첫째로 우리가 다만 육신적인 눈으로 그리스도를 바라 보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뛰어난 양상을 보지 못하는 것은 우리에게 커다란 장애가 된다. 우리는 우리의 죄로 가득찬 안목으로 그리스도와 그의 가르침을 의곡시킨다. 따라서 우리는 거짓된 해석자가 되는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이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여러가지 허위와 거짓된 것을 붙잡음으로써 복음을 혐오하기에 이르게 된다. 따라서 세상은 고의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배척하는 것이다. 복음서 저자는 수군거림이 믿음이 있고 교회를 대표한다고 자부하던 유대인들 사이에서 일어났다고 명기하고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우리 위치로 내려 오실 때 경건한 마음으로 그를 영접하도록,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까이 오실 수록 더욱 즐거운 마음으로 그에게 나아갈 수 있게 하셨다.
6:43
너희는 서로 수군거리지 말라 - 주님께서는 수군거림에 대한 책임을 그들에게 전가시키고 있다. 그는 마치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내 가르침에는 너희 감정을 상할 만한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러나 너희는 버려진 상태이기 때문에, 그것이 너희의 병든 영혼을 자극하는 것이다. 너희는 복음에 대한 취향을 잃었기 때문에 이를 좋아하지 않는다."
6: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 주님은 그들의 편벽됨을 송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기가 선포한 교훈을 받아들이는 것도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에 속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들의 믿지 아니함이 연약한 자들의 믿음을 약화시키지 못하도록 이 말씀을 하고 있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일에 있어서 사람의 의견과 판단에 좌우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이 복음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보자마자 그들은 복음을 불신한다. 반면에 그들의 완고함으로 스스로 아첨의 말을 주고받는 불신자들은 복음을 정죄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복음이 그들을 기쁘게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서, 그리스도께서는 비록 복음의 가르침이 모든 사람에게 차별없이 전파된다 하여도, 그것이 모든 사람에 의해서 깨달아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새로운 마음의 태도가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사람의 마음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려 주시는 선물인 것이다.
그리스도께로 '오는'것이 믿는 것 대신에 비유적으로 쓰였기 때문에, 복음서 저자는 상대 귀절에 이 비유를 연결시키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밝혀주고 그 마음을 움직여 그리스도께 순종하도록 역사하는 사람은 그리스도께 이글림을 받는다고 말하고 있다. 한 마디로 줄여서 말하자면, 많은 사람이 복음에서 뒤로 물러선다 해도 놀라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성령으로 예비시켜 주지 않는다면 자기 스스로 그리스도께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사람이 이글림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들을 이 은혜로 입혀주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끄는 방법에 있어서, 하나님은 어떤 외부적인 완력에 의하여 사람을 강제적으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효능으로 말미암아 내키지 않는 마음을 기꺼이 영접하는 마음으로 바꾸어 놓는다. 그러므로 사람이 마치 자기 마음대로 하나님께 순복할 수 있는 것처럼 자원하는 사람만 이글림을 받는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된 것이다. 사람이 기꺼이 하나님을 따를 때 그것은 이미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결과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도록 그 마음을 감동시킨 것이다.
6:45
선지자의 글에 저희가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 이사야의 증거를 인용함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도 그에게 나아올 수 없다고 한 말씀을 재확인하고 있다. 주님께서는 선지자(prophets)를 말할 때 복수로 말하고 있다. 모든 선지자들의 예언이 한 덩이로 뭉쳐져 있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선지자 중 한 사람을 생각할 수 있다. 여기에 인용된 말씀은 이사야 54장 13절과 예레미야 31장 34절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 귀절들은 교회의 회복에 대하여 말하면서, 교회가 하나님의 교훈으로 가르침을 받은 아들들을 갖게 될 것을 약속하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가 회복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께서 교사의 직책을 담당하셔서 신자들을 자기 자신에게로 접근시키는 길 밖에 엄싸음을 우리는 쉽게 연역할 수 있다. 선지자가 말하고 있는 가르침의 방법은 외적인 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숨은 역사에도 있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이 하나님의 가르침은 내적인 마음의 깨우침을 말하는 것이다.
주님께서 '다'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실 때, 이 '다'라는 말은 선택된 자들, 즉 교회의 참된 자녀들에게만 국한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이 예언을 현재 논의되고 있는 주제에 적용시키고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께 가르침을 받을 때에만 교회가 참으로 세움을 입는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람의 눈을 뜨게 하여 주지 않으면 사람은 빛을 볼 눈이 없다고 주님께서 결론을 내리고 있음은 당연한 것이다. 동시에 주님은 하나님께로서 가르침을 받은 사람은 결과적으로 다 주님께 나아오게 된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주님께서 즉시 덧붙인 말이 바로 여기에 해당하는 것이다.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 이 말씀의 요점은 믿지 아니하는 자는 모두 버리운 자로서 멸망에 넘겨진 자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모든 자녀와 생명을 유업으로 받은 자들을 그의 제자로 삼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택한 자들은 모두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그리스도께서 앞서 사람이 이끌리지 아니하면 믿을 수 없다고 언급하신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이제 성령이 역사하시는 은혜에 이끌리면 사람은 반드시 믿게 된다고 선언하고 있다.
가톨릭 교도들이 꿈꾸고 있는 자유의지의 전 기능은 이 두 문구에 의해서 완전히 붕괴되고 무력해진다. 아버지께서 우리를 이끌 때에만 그리스도에게 나아갈 수 있다면, 믿음의 시작도 준비도 우리 안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반면에,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자들이 모두 온다면 주님은 그들에게 믿을 자유뿐만 아니라 믿음 그 자체를 허락하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꺼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른다면 그것은 은혜를 인치는 것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손만을 우리를 향해 뻗치시고 우리의 의지를 정지 상태에 정체시켜 두신다면 그는 우리를 이끌지 아니하실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의 믿음을 완성시켜 주실 때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이끄신다고 말해도 좋은 것이다. 아버지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실 때 기꺼이 그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사람을 성령께서 그들의 마음을 인도하시기 때문에 그말씀을 하나님께 들었다고 말할 수 있다.
"내게로 오느니라" 주님은 여기서 자기와 아버지 사이에 존재하는 끊을 수 없는 유대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의 제자 중 누구도 그리스도께 순복하지 않거나 또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가르침을 받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택함 받은 자들이 하나님의 학교에서 배우는 유일한 지혜는 그리스도께로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들을 보면 아버지께서 자기 자신을 부인하실 수 없기 때문이다.
6:46
이는 아버지를 본 자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 지금까지 주님은 그의 아버지의 은혜를 찬양했다. 이제 주님은 믿는 자들을 자기 자신에게로 열심히 부르고 있다. 다음의 두 가지는 나눌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본래부터 눈이 먼 자들을 그의 성령으로 깨우쳐 주시지 않으면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그 길을 인도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무 소용이 없다. 하나님의 위엄은 인간의 지각이 미칠 수 있는 곳보다 더 높기 때문이다. 과연 그렇다. 그리스도를 떠나서 하나님을 안다고 가정하는 것은 혼돈의 수라장에 불과하다. 자기만이 아버지를 안다고 말씀하실 때, 그는 감추어져 있는 하나님을 인간에게 나타내는 직분은 자기에게만 속한 직분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6:47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 이것은 앞의 문장을 설명하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을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알려진다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때에 우리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거울로 보듯, 또는 살아 있는 형상을 보듯이 보기 시작한다. 하나님께 대하여 우리에게 선포되고 있는 모든 것이 우리를 그리스도께 인도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지식은 저주를 받을지어다! 나는 이미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설명했다. 우리는 그리스도에게서 그의 능력을 앗아가는 텅 비고 혼돈된 믿음을 상상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자기 생각에 맞는 만큼 그리스도를 믿는 가톨릭 교도들과 같이 되어서는 안되겠다. 우리의 생명의 모든 부분이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져 있는 것을 아는 만큼, 우리들은 믿음에 의해서 생명을 얻는다. 어떤 이들은 이 귀절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그리스도나 그의 살을 먹는 것과 같다고 유추한다. 그러나 이것은 전자나 후자와 같이,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것과 그리스도를 마시는 것과 같이 차이가 있다.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것이 먼저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리스도를 믿음에 의해서만 먹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 이유는 우리가 믿음으로 그를 영접함으로 주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고 우리가 그에게 참여하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먹는 것은 믿음의 열매 또는 믿음의 행위인 것이다.
6:48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 주님께서 전에 자기를 우리의 영혼을 살찌게 하는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지만, 이제 그 말씀을 더 잘 설명하기 위해, 이 떡과 옛날 만나를 다시 한번 대조시키고 있다. 그리고 거기에 관련된 사람을 대조시키고 있다.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다"고 주님은 선언한다. 그는 만나가 그들의 조상들의 죽을 몸을 위한 양식이었기 때문에 그들을 죽음에서 면해 주지 못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생에 이르는 생명의 떡을 찾을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분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본인이 다른 곳에서 언급한 대로, 이 말씀은 만나가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감추어진 모형으로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겠다. 그러한 관점에서는 바울이 이를 신령한 양식이라고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담화를 청중의 수준에 맞추어서 진행하고 있다는 것을 이미 밝힌 바 있다. 그의 말씀을 듣던 사람들은 그들의 배를 채우는 것만을 생각하고 있었고 만나에서 그 이상의 것을 바라고 있지 않았다. 따라서 그들은 저들의 조상이 죽었다고 선언한다. 그들의 조상도 역시 배를 채우는 데에만 급급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와서 먹을 수 있도록 자기가 왔다고 말씀하실 때 주님은 그들을 초청하고 있다.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라는 표현은 주님이 단순히 그를 먹고 싶어하는 사람을 위하여 항시 준비되어 있다고 말한 것과 같다. 한 번 그리스도를 먹은 사람은 결코 죽지 아니한다는 말은, 우리가 5장에서 밝힌 대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내려 주시는 생명은 결코 멸절될 수가 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6:51
나는 하늘로 내려온 산 떡이니 - 주님은 같은 것을 자주 반복하고 있다. 알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듣고도 이를 믿기 어려워하며 들은 것도 또 얼마나 빨리 사라지는지 모른다. 우리가 모두 생명을 갈구한다. 그러나 생명을 구하는 데 있어서 우리는 어리석게 곁기롤 나가 방황하기를 잘한다. 설령 생명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를 구미에 맞지 않는다고 밀어낸다. 자기 스스로 그리스도 밖에서 살기를 원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리고 그리스도로 만족하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되는가?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자기만이 생명을 공급할 수 있는 산 떡이라고 자주 되풀이 하는 것은 결코 불필요한 것이 아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마음에서 삶에 대한 모든 허구적인 소망을 제거해 버리기 위하여 스스로 산 떡이라고 주장하신다. 주님은 자기가 전에 생명의 떡, 즉 살려주는 떡이라고 말씀하셨던 것과 같은 의미에서 자신을 산 떡이라고 부르고 있다.
주님은 종종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신령하고 썩지 않는 생명은 이 세상에서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행적은 사라져 없어지는 것이지만, 썩지 않는 생명을 우리는 하늘에 속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누릴 수가 있는 것이다. 주님께서 '먹는다'는 말을 쓸 때마다 그는 우리를 믿음으로 초청하고 있는 것이다. 믿음만이 이 생명에 이르게 하는 떡을 즐길 수 있도록 하기 때문이다. 또 이 말씀은 헛된 말이 아니다. 자기 손을 내밀어 이 떡을 바로 그들의 입에까지 대주어도 이를 맛보는 사람은 극히 적다. 어떤 사람들은 술로 배를 채우고 있고 또 다른 사람들은 스스로의 어리석음에 의해서 음식을 바로 뒤에다 두고 굶어 죽어가고 있다.
나의 줄 떡은 - 주님께서 말하고 있는 생명을 부여하는 이 '숨은능력'은 신의 성품을 가리키는 것으로 주님은 이제 두번째 단계로 와서 이 생명이 자기 살 속에 거하고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그 생명을 저 살 속에 담아 우리 앞에 나타내셨다는 것은 그의 뜻이 아닐 수 없다. 전에는 살 속에 죽음의 자료 밖에는 없었는데 이제 주님의 살 속에 영원한 생명이 담겨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우리의 약함을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생명을 베풀어 주셨다. 그는 우리를 그의 나라의 비밀로 끌어 올리기라도 하려는 듯이, 우리를 구름 위로 불러 생명을 주리게 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이 땅 위에다 생명을 베풀어 주셨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 마음의 교만을 시정하는 동안 생명을 구하는 자들에게 외모상으로 보잘 것이 없는 그의 살에 의존토록 명령함으로써 우리의 믿음의 겸손과 순종을 시험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살은 생명을 줄 수 없다. 그리고 그 살은 죽을 수 밖에 없으며 지금도 살 그 자체는 죽을 수 밖에 없다. 게다가 영혼에 생명을 공급하는 것은 전혀 살의 소관이 아니다. 사람들은 위와 같이 반박할 수 있다. 그러나 비록 이 능력이 살이 아닌 다른 근원으로 말미암은 것이지만, 이 직분이 그와 일치하지 못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은 생명의 원천이 되는 것처럼, 주님의 살은 그의 신성 안에 본래부터 거하는 생명을 우리에게 부어주는 통로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것은 '생명을 준다', '살려준다'고 불리우는 것이다. 다른 데서 빌린 생명을 우리에게 교통(交通)해 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삶의 이유, 즉 의(義)를 고려한다면 이것은 전혀 모호한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비록 의의 물줄기가 하나님 한분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지만, 그리스도의 살을 떠나서는 그 의가 완전히 나타난 것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그의 윤신에서 인간의 구속이 성취되었고, 그의 육신에서 우리의 죄를 속하기 위한 제물이 드려졌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화목케 하기 위한 순종이 치러졌기 때문이다. 그 육신은 하늘의 영광으로 영접되어 올라갔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살 속에 생명의 모든 부분이 놓여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생명이 숨겨있고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어서 생명을 누릴 수 없었다고 불평할 자는 아무도 없는 것이다.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다 - '주다'라는 말은 여러 가지로 쓰이고 있다. 첫째로 주는 것은-주님께서 전에 언급했듯이-그리스도께서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는 만큼 자주, 즉 매일같이 이루어진다. 둘째로, 준다는 말은 주님께서 자신을 제물로 아버지께 드릴 때 십자가 상에서 이루어진 그 특이한 희생을 암시한다. 다음으로 주님은 사람의 생명을 위해서 자기 자신을 내어 주었다. 그리고 이제 주님은 그의 죽음의 열매를 받아들이도록 우리를 초청하고 있다. 우리가 그 거룩한 잔치상에서 먹지 않는다면 그리스도게서 한 번 제물로 드려졌다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별 소용이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살을 제물로 바친 직분을 맡았음을 주장하고 있는 것에도 우리는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가톨릭 교도들이 미사를 드릴 때 저 위대한 대제사장 한 분에게 속했던 권한을 찬탈할 때 그들이 스스로를 더럽히는 흉악한 모독의 죄를 드러내는 것이다.
6:52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가로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 주님께서는 유대인들의 불신의 죄를 송사할 목적으로 그들을 다시 언급하고 있다. 이는 그들에게 잘 알려진 영생에 대한 가르침을 그들이 받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그것이 아지 까모호하거나 의문스럽다면 철저히 상고해야 마땅한 것이었을 것이다. 그들이 서로 다투었다고 말씀하셨을 때, 그것은 그들의 완악함과 경멸의 표현이다. 사실 다투는 식으로 논쟁을 벌이는 자들은 스스로의 길을 막아 진리의 지식에 이르지 못한다. 그러나 그들은 단순히 따져 물었기 때문에 견책을 받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과 동정녀 마리아에게도 같은 책망이 가해졌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알지 못해서 그릇된 길로 갔든지, 다투는 열심 대문에 솔직함이 결여되어 있든지 둘 중에 하나일 것이다. 복음서 저자가 정죄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유대인들이 먹는 방법에 대하여 묻는 것이 불가한 것이라도 되는 듯이 '어찌'라는 말을 공격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풀어진 난제를 얽히고 얽힌 채로 남겨둔다면, 그것은 믿음의 순종 때문이라기 보다 게으름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살을 먹는 방법에 대하여 따지고 묻는 것은 합당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성경에 설명되어 있는 대로 깨닫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로서는 그리스도께서 자기 살은 참된 양식이라고 말씀하실 때 그리스도의 말씀 하나남으로 족하다. 나머지에 대하여는 나는 기꺼이 눈을 감고 받아들이겠다"고 하는 외식적이고 가면적인 겸손을 멀리해야 할 것이다. 이교도들도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잉태된 것을 일부러 모르는 척 할 때 같은 핑계를 대지 않는가! 그들도 예수께서 아브라함의 씨에서 나신 것을 믿는다 하면서 더 이상 하나님께서 비밀히 행하시는 일에 대하여 중용을 지킴으로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으로 정하신 것 이상으로 알려고 하지 않도록 스스로를 살펴야 할 것이다.
6:53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 이와 같은 교만과 멸시에 의하여 그의 은혜가 거절당하자 주님께서는 이러한 맹세를 하셨던 것이다. 주님은 여기서 직설적인 가르침을 쓰지 아니하고 그들이 겁에 질리도록 위협을 섞어가며 말씀하셨다. 주님께서는 자기의 살에서 생명 얻기를 거부하는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저주를 선언하고 있다. 그는 마치 "내 살이 너희에게 경멸해 마당한 것으로 보인다면, 너희를 위한 생명의 다른 어떤 소망도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확실히 알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나 다를 것이 없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업신여기는 모든 자들에겐 그들의 교만과 함께 비참한 멸망을 당한다는 진노가 머물러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겐 스스로 아첨함으로 자신을 속이지 말도록 심한 경고의 권면을 들려주어야 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병자들에게 약을 먹지 않으면 죽는다고 위협한다면, 불경건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만큼 생명 그 자체를 파괴하려고 서루 다툴 때 이 믿지 않는 자들에게 우리는 무엇을 해야겠는가? 주님께서 '인자의 살'이라고 말할 때 그는 이를 강조하고 있다. 주님은 그들의 멸시하는 태도를 꾸짖고 있다. 그들의 경멸은 그리스도께서 다른 사람과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보면서 시작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의 의미는 "내 육체의 낮고 천함을 인하여 원한다면 얼마든지 나를 멸시하라. 그러나 멸시받는 육체 안에 생명이 들어 있다. 너희에게 그 생명이 없다면 다른 어디서도 너희에게 생명을 공급해 줄 원천을 찾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옛날 사람들은 어린아이에게 성체(聖體)를 주지 않는다면 그들에겐 영생이 없다고 생각하는 실수를 범했다. 이 설교는 성만찬에 관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의 만찬을 받는 것과 관계없이 계속적으로 갖게 되는 교통을 가리켜 말씀하고 있다. 이 말씀에서 잔(cup)은 모든 사람에게 차별없이 주어져야 한다고 증명했던 후스(Huss)의 신봉자들도 그릇된 것이다. 어린아이에 관한 한, 그리스도의 예식은 그들의 주의 만찬에 참예하는 것을 금하고 있다. 그들은 아직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같은 법에 따라 모든 사람은 잔과 떡을 함게 나눌 수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에게 그잔을 마시도록 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6: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 이것은 반복이지만 불필요한 것은 아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몸이 먹고 마심으로 지탱되듯이 영혼도 똑같은 방법으로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한다고 한 믿기 어려운 말씀을 재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생명을 주님의 살이 아닌 다른 곳에서 찾으려 하는 자에게는 다만 죽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라고 선언했듯이, 주님께서는 이제 경건한 자들의 마음을 일깨워 소망 중에 그리스도의 살에 있는 생명을 바라보도록 유도하고 있다.
주님께서 부활과 영생을 얼마나 자주 연결시키고 있는가에 유의하라. 우리의 구원은 마지막 날까지 감추어져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상의 차원을 넘어서 자기의 눈 앞에 마지막 부활을 바라보는 사람이 아니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내려주시는 것을 아무도 느낄 수 없는 것이다. 이 말씀에서 볼 때, 이 귀절은 주의 만찬에 적용해서 풀이하는 것이 잘못임은 아주 분명하다. 주의 거룩한 만찬상에 나아오는 사람은 모두가 주의 살과 피에 참여하게 된다면 모든 사람이 한결같이 생명을 획득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 중 많은 사람이 멸망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주님께서 이를 설정하시기도 전에 주의 만찬에 대하여 설교하는 것은 도리에 어긋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계속적인 믿음의 행위를 다루고 계심이 분명하다. 동시에 주의 만찬 때에 믿는 자들에게 제시되지 않은 경우 여기 새삼스럽게 언급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우리는 주의 거룩한 만찬이 이 담화를 상징하는 결과가 되도록 의도하셨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이 장을 풀이할 때 적절한 순서를 따라서 맨 끝에 가서야 주의 만찬을 언급하고 있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은 교회들이, 어떤 곳에서는 날마나 또 어떤 곳에서는 매 주일에, 거룩한 만찬을 행할 때마다 이 비밀이 상징적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6:56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 달리 말해서 주님은 "몸이 금식에 의하여 쇠약해져 기진하는 것처럼, 영혼도 하늘에서 내려온 떡으로 양분을 공급받지 않는다면 허기로 곧 쇠잔하게 될 것이라"고 확언하고 있다. 주님께서 자기의 살이 참된 양식이라고 말했을 때, 그는 사람들의 영혼에 그 양식이 결핍되면 그 영혼이 아사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그리스도의 살에서 생명의 본질을 구할 때에만 그 안의 생명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 바울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 외에 더 자랑할 것이 없다(고전2:2)고 주님의 죽음을 자랑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의 제물을 떠나는 순간 우리는 죽음 밖에 대면할 것이 없다. 또 그의 죽음과 부활 외에 다른 방법으로는 그의 신에 속한 능력을 인식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아버지의 종으로 받으라. 그러면 주님께서 당신에게 생명의 주인으로 나타날 것이다. 주님이 자신을 비움으로 우리는 모든 축복으로 부요하게 되었고, 그가 멸시를 받고 낮아지심으로 우리는 하늘까지 높이 들리움을 받았으며, 그가 십자가의 저주를 받으심으로 공의(公義)의 기치를 높이 드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혼을 그리스도의 육체로부터 멀어지게 인도하는 자들은 거짓 교사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피가 살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인데, 왜 이를 따로 언급하셨을까? 나는 주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인하여 그렇게 하셨다고 대답한다. 주님께서 양식과 음료를 구분해서 말씀하실 때, 그는 자기가 내려주는 생명은 모든 부분에서 완전한 것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불완전한 생명을 연상하지 않도록 하셨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그의 살을 먹고 그의 피를 마시기만 한다면 생명의 모든 부분이 완전히 우리에게 공급될 것이라고 확언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가르침과 일치되고 있는 성만찬에 대한 말씀에서도, 주님은 떡의 상징으로만 만족하지 아니하시고 잔을 첨가하셔서 자기 안에 있는 생명을 이중적(二重的)으로 표시하게 하셨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주님 한 분으로 만족할 수 있도록 조치하셨던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생명을 소유하고 있는 자만이 그 안에서 부분적인 생명도 찾아 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6:57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 그리스도께서는 지금까지 우리가 어떻게 생명에 참여한 자가 되는가를 설명하셨다. 이제 그는 일차적인 근원으로 방향을 돌리고 있다. 생명의 일차적인 원천은 아버지 안에 있기 때문이다. 주님은 자기 스스로를 생명의 원천으로 만들었을 때에, 하나님께 속한 것을 자기가 취하여 가는 것처럼 보일것을 염려하여 미리 사람들의 반대를 막고 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자기가 다른 이들에게 베푸는 것은 또한 다른 분으로부터 그에게 주어진 것임을 인정하는 식으로 스스로를 생명의 주인으로 주장하고 있다. 이 설교도 또한 그리스도의 회중을 수용할 수 있는 정도에 맞추어 행해졌음에 유의하자. 주님께서 육신(살)에 관계해서만 자신을 아버지에 비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아버지께서 생명의 시초가 되시지만 영원한 말씀도 또한 마땅히 생명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영원한 신성이 여기서 거론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육신을 입고 세상에 나타내신 바 된 그대로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아버지로 인하여 사신다고 말씀하실 때, 그것은 그리스도의 신성 그 자체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며 단순히 그의 인간성에 속하는 것도 아니다. 이는 다만 육신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아들을 묘사하고 있을 뿐이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자기 안에 존재하는 신성한 모든 것을 아버지에게 돌리는 것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여기서 그리스도께서 세 단계의 생명을 열거하고 있음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첫째로 생명의 원천 이시지만 멀리 숨어 계시는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가 계신다. 그다음으로 생명의 원천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신 아들이 계신다. 그를 통하여 생명이 우리에게로 흘러 온다. 셋째로 우리가 주님에게서 공급받는 생명이 있다. 이제 우리는 문제의 핵심을 볼 수 있다. 하나님 아버지 안에 생명이 거하고 있지만 그분은 우리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다. 그리고 우리들 사이에 놓여 있는 그리스도는 두번째 생명의 원천이 되신다. 그래서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는 것이 우리에게 까지 미쳐 올 수 있게 된 것이다.
6:58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 주님은 처음의 주제, 즉 만나와 자기의 살을 비교하는 것으로 화제를 돌리고 있다. 이 말씀을 마치는데 필요한 끝맺음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너희는 모세가 광야에서 너희 조상들을 먹였다고 해서 나보다 그를 더 좋아할 이유가 없다. 나는 너희에게 훨씬 더 좋은 음식을 공급하고 있다. 나는 하늘에 속한 생명을 지니고 있다." 내가 전에 밝힌 대로, 이 떡은 세상적이거나 썩어질 요소를 지니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나라의 영원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말할 수 있다. 배만을 채우려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만나 안에서 이 능력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만나에는 두 가지 용도가 있었으나 그리스도와 변론하고 있는 유대인들은 만나 안에서 육신에 속한 음식 밖에 보지를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영혼의 생명은 일시적인 것으로 사람이 완전히 거듭 날 때까지 점처 증가하는 것이다.
6:59
이 말씀은 예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하셨느니라 - 요한은 많은 사람이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하여 장소를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설교는 심각하고 중요한 주제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나 본문은 이와 같이 큰 무리 속에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유익을 얻은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고 즉시 덧붙이고 있다. 그리스도의 제자로 자처하던 많은 이들이 떨어져 나갔다. 만일 복음서 저자가 무리 중 몇명이 걸림이 되었다고 한다면 우리는 이를 심각하게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떼를 지어 일어나 공모했다면 우리는 이것을 무엇이라 부르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실 때는 절대로 그에게 대항하는 일이 없도록 이 말을 깊이 마음에 새기자. 그리고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서 이와 같은 것을 목격한다면, 우리는 그들의 교만이 우리의 믿음을 저해하는 것을 절대로 허락해서는 안되겠다.
6:60
이 말씀은 어렵도다 - 오히려, 어려움은 그들의 마음에 있는 것이며 말씀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버리운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단단한 돌을 주워모아 스스로에게 던지기를 좋아한다. 그리고 그들이 고집과 단단한 마음으로 그리스도에게 대항할 때, 그들은 그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해 주어야 할 말씀을 가리켜 어렵다, 단단하다고 불평한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겸손히 순복하는 자는 그 안에서 단단하거나 어려운 것을 발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를 완악하게 대적하는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주님의 말씀이 반석을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와 같은 것이다(렘23:29). 그러나 우리 모두의 마음 속에 똑같은 단단함이 내재하고 있다. 만일 우리의 감정에 따라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판단한다면, 그의 말씀은 수많은 모순과 같이 보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각자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자신을 맡기는 길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 그렇게 할 때 성령은 우리가 귀로 듣는 말씀을 우리의 마음에 새겨 주신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 여기서 우리는 불시느이 죄가 얼마나 악의적인 것인지를 보게 된다. 구원의 가르침을 완악하게 거절하는 자들은 핑계를 대는 것으로만 만족하지 아니하고 거만스럽게 하나님의 아들에게 죄를 돌리고 그의 말은 들을 가치가 없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오늘날 가톨릭 교도들은 대담하게 복음을 거절할 뿐만 아니라, 이유없이 하나님을 배척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서 가공할 만한 모독을 늘어놓고 있다. 그들은 어두움을 원하기 때문에 사단이 허구적인 징조로 그들을 기만한다 해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이 무절제하고 지나친 가운데 감당할 수 없는 것을, 겸손하게 절제하는 자들은 감당할 뿐만 아니라 거기서 안위를 얻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고집스런 아우성을 치며 버림 받은 자들은 더 심한 멸망을 자초할 것이다.
6:61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 그리스도께서는 물론 버림 받은 자들이 걸림이 될 것을 아셨다. 그의 가르침은 그들의 마음을 상한 것 이상으로 그들의 내적인 병을 드러내 주었다. 그러나 주님은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마음이 상한 자들 중에 한 사람이라도 치유될 수 있는지로 알아보고, 또 나머지 사람들의 입을 막을 방법이 없는가를 알아보기를 원했다. 이 질문을 하심으로써 주님은 그들이 수군거릴 이유가 없다고 말씀하고 있으며, 마음에 걸림이 되는 근본 원인이 가르침 그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밝히고 있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슴을 중상모략하려고 미쳐 날뛰는 악인들을 억제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경솔하게 진리를 공격하는 자들의 어리석음에 채찍을 가해야 할 것이다.
주님게서는 스스로 아셨다고 말하고 있다. 그들은 아직 그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공개적으로 밝히지 않고 조용히 수군거리기만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의 공개적인 불평을 미리 막고 있다. 만일 누가 그들이 분명한 마로 그리스도의 말씀을 배척한 바 있기 대문에 그들의 성격은 모호하지 않았다고 반박한다면, 나는 요한이 기록한 말이 분명히 이를 드러내고 있음을 시인한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그들이 원수들처럼 서로 우물거리고 작은 소리로 수군거렸다고 말하고 싶다. 그들이 터놓고 이야기했다면, 거기에는 더 많은 희망이 있을 수 있었다. 그들에게 가르침을 줄 수 있는 길이 열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자기들끼리 수군거릴 때, 그들은 스스로 배울 수 있는 길을 멀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의 의미하는 바를 즉시 깨닫지 못할 때는, 주님에게 직접 나아가서 이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구함으로 주님이 문제를 해결토록 하는 것이 최선의 길인 것이다.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 그리스도께서는 이 말씀으로 그들의 마음에 걸림이 된 것을 제거해 주기보다 오히려 그들의 뒤집힌 마음을 더 이어 놓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누구든지 그들이 걸림이 된 이유를 좀더 자세히 살펴본다면, 그 다음 문장에는 그들의 마음을 충족시켜 줄 만한 것이 들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주님이 육신을 입고 있을 때, 그들이 실제로 보았던 그의 낮고 비천한 상태는 그들에게 그의 능력을 보여 줄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주님께서는 휘장을 찢어 제치면서, 하늘에 속한 그의 영광을 바라보라고 그들을 부르고 있다. 그는 "내가 사람들 가운데 영광을 받지 않고 사니까 너희가 나를 멸시하고 내 안에서 신적인 요소를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곧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나를 위대한 능력으로 관 씌우시고 이 죽을 인생의 비천한 상태에서 나를 하늘 위로 끌어올리실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바울이 로마서 1장 4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부활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분명히 보여주는 성령의 위대한 능력이 나타났던 것이다. 그리고 시편 2장 7절에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라고 말씀하실 때, 부활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시인하는 증거로 세워진 것이며 그리스도의 승천은 그 영광을 축하하는 천사와도 같은 것이었다. 그가 전에 하늘에 있었다고 한 말은 그의 인성과 엄격한 의미에서 일치되지 않는 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두 가지 성품이 그의 인격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한 성품을 다른 성품에 옮겨서 말하는 것은 전혀 새삼스런 화법(話法)은 아니다.
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 이 말씀에서 그리스도는 그의 가르침이 신경하고 소생시키는 힘이 있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그 교훈에서 유익을 얻지 못했다고 가르쳐 주고 있다. 그리스도는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 귀를 접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말씀은 여러 가지로 설명되기 때문에 먼저 이 말씀은 여러 가지로 설명되기 때문에 먼저 이 말씀의 참된 뜻이 무엇인가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하면 그리스도의 목적이 쉽게 드러날 것이다. 크리소스톰(Chrysostom)은 주님의 살이 육적인 마음의 유대인들에게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했다고 주님의 말씀을 설명하고 있는데, 내가 보기에는 그릇된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하늘의 비밀을 논하는데는 인간의 모든 지혜가 패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말씀은 억지로 의곡하지 않는 한 그런 의미를 갖지 않는다. 이와는 반대로 살리는 것은 성령의 조명이라는 억지 견해가 있다. 또한 그리스도의 육체가 십자가에 못박혔을 때는 우리에게 유익을 주지만, 그 살을 먹을 때는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들도 잘못되어 있다. 오히려 우리가 유익을 얻기 위해서는 십자가에 못 박힌 육체(살)를 먹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육(flesh)은 무익하니라"라는 말씀에 '육'만으로는 또는 '육 그 자체만으로는'이라는 말을 첨가시켜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육은 성령과 연결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은 본문과 잘 어울린다. 그리스도께서는 단순히 먹는 방법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님은 육(flesh)은 아무것에도 쓸모가 없다는 듯이 모든 유용성을 완전히 배제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주님은 다만 육이 신령하지 않다면 어디서 살리는 힘을 얻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육의 땅에 속한 성품만을 생각하나 사람은 그 육에서 죽은 것 밖에 찾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육이 힘을 공급받고 있는 성령의 능력에 눈을 돌리는 사람은 그 효능과 믿음의 경험에서 살린다는 말이 절대 빈 말이 아님을 느낄 것이다.
이제 우리는 육이 어떻게 참된 양식이 되면서도 무익하고 쓸모가 없는가를 이해하게 되었다. 영이 육에 의하여 우리에게 생명을 조달한다는 의미에서육은 과연 양식이 된다. 하나님은 육에서 우리와 화목의 관계를 맺으며 육에서 구원의 모든 부분이 성취된다. 그러나 육의 원천과 성격을 생각한다면 육은 무익하다. 아브라함의 자손은 그 자체가 죽음에 종노릇하는 존재로서 생명을 주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주님의 육은 성령으로부터 우리를 먹일 힘을 공급받는다. 그러므로 우리도 믿음의 신령한 입을 가져야만 참으로 영양 섭취를 할 수 있는 것이다.
문장은 짧게 단축되었다. 그리스도께서 믿지 않는 자들에게 그와 같이 행동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그래서 주님은 그의 설교를 이 말씀으로 끝내버렸다. 그들은 더 이상 주님의 말씀을 들을 자격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은 신령한 자들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이 몇마디 말씀은 그들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 이것은 앞의 문장에 대한 암시적인 언급이다. 주님은 영이란 말을 다른 의미로 쓰고 있기 때문이다. 주님은 지금까지 성령의 숨은 능력에 대하여 말씀하셨으나 이제 이를 신령한 그의 말씀에 적용시키고 있다. 이제 말씀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통하여 하늘의 영광 중에 계신 그리스도를 구하도록 유도하기 때문에 신령하다고 표현된다. 육적인 인식에서가 아니라 믿음에 의하여 깨닫게 되는 것이다. 위에 말씀한 내용은 믿음에 의해서만 깨달아질 수 있는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리고 주님께서 생명을 성령과 연결시키고 있음은 주목할 만하다. 주님은 그의 말씀을 그 결과에 따라 생명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그가 말슴을 살리는 힘이 있다고 하셨던 것과 같다. 그러나 이를 영적으로 받는 사람에게만 생명으로 나타나는 것이지 다른 사람들은 이에서 죽음을 자아낼 뿐이다. 경건한 자들을 위하여서 이 말씀은 가장 즐거운 복음이 아닐 수 없다. 말씀이 그들의 영원한 구원을 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자신을 순수한 제자로 나타내기를 힘쓰라고 경고를 받고 있다.
6:64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 주님은 다시 그들을 나무라고 있다. 그들은 성령이 없는 자들로서 그의 가르침을 악하게 부패시키고 더렵혀 멸망을 자초하고 있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당신은 당신의 말에 실리는 힘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그러나 우리는 그런 것을 경험하지 못했다"고 반대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그러므로 주님은 그들이 스스로를 방해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불신은 언제나 교만하여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아무 것도 깨달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선생의 지도를 받기 원한다면 우리 마음이 그의 말씀을 경청할 준비를 갖추어야 할 것이다. 주님의 가르침을 받으러 들어가는 입구가 경외심과 겸손에 의해서 열리지 않는다면, 우리의 깨달음은 돌만도 못할 것이며 어떠한 건전한 교훈도 용납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복음을 듣고도 유익을 얻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그들이 패역한 상태에 있기 때문임을 잊지 말자.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스도에게 헌신하는 사람들이 과연 몇이나 되는가? 주님께서 거의 모든 사람에게 믿지 아니한다고 했어야 온당하지만 그저 너희 중에 믿지 않는 자들이 있다고만 말씀하신 것은 아직 고침을 받을만한 사람들이 낙망하지 않도록 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군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 - 복음서 저자는 아무도 그리스도께서 듣는 자들의 심중을 너무나 성급하게 판단했다고 생각지 않도록 이 말을 덧붙이고 있다. 많은 사람이 그의 울타리 안에 들어왔다고 자처했으나 그들의 갑작스런 배도(背道)가 그들의 위선을 드러내고 말았다. 그러나 복음서 저자는 그들이 배반할 것을-다른 사람이 전혀 알 수 없을 때-이미 그리스도께서는 알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그리스도 자신을 위하여 말해진 것이라기 보다는 우리가 문제의 진상을 알 수 있을 때까지는 판단을 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려는 데 그 뜻이 있다 하겠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처음부터 아셨다는 것은 주님의 신성에 국한된 특징이다. 우리는 경우가 다르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람의 중심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불경건이 외부적인 모양으로 표현될 때까지 판단을 보류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무는 그 열매를 보고 아는 것이다.
6:65
이러하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 주님께서는 다시 한번 믿음이 성령의 희귀하고 특별한 선물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사람이 사방에서 다 복음을 받지 않는다고 놀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온 세상이 복음에 공감하지 않으면 우리는 이를 비관하고 복음을 덜 귀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 마음에는 "어째서 더 많은 수의 사람들이 구원의 복음을 배척할 수가 있겠는냐?"하는 생각이 일어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믿는 자의 수가 극히 적은 이유를 대고 있다. 아무도 자신의 직관에 의하여 믿음에 도달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에 의하여 깨우침을 받기 전에는 눈이 먼 상태이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참여토록 영광을 베푸는 사람만이 이 위대한 축복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만일 이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차별없이 주어진 것이라면 이 귀절에서 이런 말슴을 하는 것은 온당치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믿음은 성령의 숨은 계시에서 말미암는다고 하는 사실 때문에, 많은 사람이 복음을 믿지 않는다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는 취지를 파악해야 한다.
주님께서는 이제 전에 사용하셨던 "내 아버지께서 이끌지(draw) 아니하시면"이라고 한 표현 대신에 "내 아버지께서 오게하여 주지 아니하시면"이라는 말을 쓰고 있다. 이 말씀에서 주님은 아버지께서 이끄는 유일한 이유는 그가 우리를 무조건 친구로 삼아주시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와 은사로 부터 얻는 것은 아무도 자신의 노력이나 부지런함에 의해서 스스로 쟁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6:66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 복음서 저자는 이제 그 설교가 얼마나 많은 혼란을 초래했는가를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그와 같이 친절하고 온순한 많은 사람의 마음을, 특히 그때까지 그의 편을 들던 사람들이나 심지어 그의 가까운 제자들까지 그의 마음을 소외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은 이상하고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이 세상의 패역과 배은(背恩)이 얼마나 극심한 것인가를 보여주는 거울로써 우리 앞에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인생의 평탄한 길 위에까지 걸려 넘어질 재료를 쌓음으로써 사람들이 그리스도께 나아오지 못하도록 방해하기에 바쁘다. 많은 이들은 그와 같이 다수의 제자들을 떨어져 나가게 만든 그런 설교는 아예 하지 말았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를 전혀 다른 각도에서 보아야 한다. 그리스도께 대하여 예언된 내용이 그의 가르침 가운데 나타나는 것은 그 때에도 필요했고, 지금도 매일 같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거치는 돌과 걸리는 반석이 되신다고 했기 때문이다(사8:14).
우리는 물론 우리의 실수로 인하여 사람들이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전도에 있어서 조심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될 수만 있으면 우리는 모든 사람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간단히 말하자면, 무식한 자들의 마음을 뒤집어 놓고 마음이 연약한 자들을 거치게 하지 않도록 우리의 말을 은혜롭게 다듬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많은 사람에게 거침이 되지 않을 정도로 조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멸망에 넘겨진 버림 받은 자들은 아주 건전한 음식에서도 독을 빨아내고 꿀에서도 쓸개를 빨아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물론 무엇이 가장 유익한 것이지를 아셨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자기 제자 중 다수를 거치게 하는 일을 피하지 않으신 것을 보게 된다. 따라서 많은 사람이 순전한 교훈을 싫어하지만, 우리에게는 그러한 교훈을 억누를 자유가 없는 것이다. 오히려 교회의 교사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라고 한 바울의 권면(딤후2:15)을 기억하고 담대하게 거치는 말씀까지 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만일 복음을 전함으로 많은 사람이 떨어져 나간다 해도, 그것이 버림받은 자들을 즐겁게 하지 않았다 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힐책해서는 안될 것이다. 몇 사람의 배도에 마음이 흔들리는 사람은 너무나 소심하여 사람이 좀 걸려 넘어지면 실망하는 것이 예사다.
복음서 저자가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라."고 덧붙일 때, 그는 그들이 완전히 배도한 것이 아니라 다만 그리스도와 가까이 동행하는 관계에서 물러났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그러나 요한은 그들을 배도자라고 부르지는 않았다.
6:67
예수께서 열 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 사도들이 큰무리 가운데서 소수의 사람만이 남은 것을 보시고 마음이 심각하게 흔들렸을지 모르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화제를 사도들에게 돌려 다른 사람들의 경박함과 변덕스러움에 의하여 동요될 이유가 없다고 말씀하셨다. 주님께서 그들도 가기를 원하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그들의 믿음을 확인하기 위하여 그리했던 것이다. 주님께서는 스스로를 그들이 남아서 동행한 자로 내세움으로써 또한 그들에게 배도자의 친구가 되지 말 것을 권면하고 있다. 그리고 사실 믿음이 그리스도를 기초로 해서 세워지는 것이라면, 믿음은 사람에 따라 좌우되지 않을 것이며 천지가 무질서와 혼돈에 빠지는 것을 보더라도 조금도 동요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우리는 또한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들을 거의 다 상실하게 되었을 때 열 두 제자만을 보전하셨음에 유의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이사야(사8:16)는 "너는 증거의 말씀을 싸매며 율법을 나의 제자중에 봉함(封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러한 예에서 각 성도는 동료가 없다 하더라도 주님을 따라야 한다는 교훈을 얻게 된다.
6:68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 베드로는 다른 곳에서처럼 여기서 모든 사람의 이름으로 대답하고 있다. 유다를 제외한 모든 제자들이 같은 마음이었기 때문이다. 이 대답은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첫째는 베드로가 자기와 동료 제자들이 기꺼이 그리스도와 함께 남아 있겠다는 이유를, 그의 가르침이 건전하고 생명이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하고 있다. 둘째로 베드로는 그들이 그리스도를 떠나 누구에게로 가든지 죽음만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베드로가 '영생의 말씀'이라고 말할 때, 그는 형용사 대신에 소유격을 쓰고 있는데, 이는 히브리어에 흔히 있는 일이다. 복음이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바울이 말한 것처럼(롬1:16) 복음이 우리에게 영생을 가져다 준다는 것은 복음은 놀라운 강점이다. 율법에도 생명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율법은 범법자들에게 영원한 죽음의 심판을 선언하기 때문에 율법은 죽이는 일 밖에 하지를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않고 우리를 자기와 화목케 하실 때에 복음 안에서 우리는 영생을 누리게 된다. 뿐만 아니라 베드로가 주님에게 '영생의 말씀'이 계시다고 선언할 때 그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보통 평범한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베드로는 이를 그리스도에게 속하는 영생의 말씀으로 돌리고 있다. 따라서, 내가 위에서 지적한 대로, 그들이 그리스도를 떠나 어느 곳으로 가든지 그들에게 남는 것은 죽음 밖에 없다는 선언이 나오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그들의 선생인 것에 만족하지 아니하고 인간이 지어낸 공교한 말에 끌려가는 사람에겐 확실한 멸망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6:69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줄 믿고 알았삽나이다 - 동사는 과거 시제로 되어 있으나, 이는 현재로 바꿀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의미에는 별 차이가 없다. 이 말씀에서 베드로는 믿음에 대한 간단한 요약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고백은 당면 주제와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문제는 그리스도의 살을 먹는 것에 관한 것이었기 때문이라고 나는 대답한다 ; 비록 열 두 제자가 그리스도께서 가르치는 것을 다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그들의 믿음의 분량에 따라 주님을 구원의 주라고 고백하고 모든 일에 그에게 순복하는 것으로 족했다.
"믿고 알았삽나이다"라는 고백에서 믿는다는 말이 먼저 쓰인 것은 믿음의 순종이 참된 이해(깨달음)의 시초가 되기 때문이다. 아니, 믿음 그 자체가 마음의 참된 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즉시 그릇되고 거짓된 의견과 믿음을 구별하는 지식이 언급되어 있다. 터어키인과 유대인 그리고 가톨릭 교도들이 다 믿지만, 어떤 지식이나 깨달음이 없이 믿고 있기 때문이다. 지식은 믿음과 직결되어 있다. 우리는 인문 과학을 이해하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확신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그 진리를 우리 마음에 인칠 때 확실한 지식에 이르는 것이다.
6:70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 그리스도께서 모든 제자에게 말씀하셨다는 사실은 모든 제자가 베드로의 입을 통해서 이야기했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리고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새로운 거침돌에 대하여 열 한 제자를 준비하고 무장시키고 있다. 제자의 숫자가 소수로 줄어 들었다는 것은 이미 그들의 믿음을 흔들어 놓을 만한 사단의 강력한 도구였다. 그러나 유다의 타락은 그들을 온통 실망시킬 수도 있었다. 그리스도께서 그 열 둘이라는 숫자를 택하셨는데, 그 열 둘의 완전성이 파괴되리라고 누가 생각했겠는가?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권면은 다음과 같이 풀이될 수 있을 것이다. "큰 무리 중에서 오직 너희 열 둘만 남았다. 많은 사람의 불신에 의해서 너희 믿음이 흔들리지 않았다면 이제 새로운 시련을 위해 준비하라. 열 둘은 적은 수이지만 아직도 한 사람이 더 줄어야 하리라."
그리스도께서 '열 둘'을 택하셨다고 말씀하실 때, 그는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두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생명을 소유하기로 예정된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떨어져 실족한다는 것을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도의 직분에 택함을 받은 사람들은 마땅히 경건과 거룩함에 있어서 다른 모든 사람을 능가해야 했다. 그래서 주님은 보통 범인들로부터 택정함을 받은 제자들에게 '택했다'(chosen)는 말을 쓰고 있다.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 - 이러한 칭호로 그를 부름으로, 주님은 유다를 밉살맞은 존재로 만들려고 한 것이 분명하다. 주님의 말씀이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하여 유다를 두둔하는 사람들은 그릇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거룩한 직분을 그처럼 훼손시키고 더럽히는 자들을 우리는 아무리 저주해도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자기의 직분을 충실히 이행하는 교사들을 천사라고 불렀다(말2:7). 그와 같이 명예로운 직분을 받은 후에 배반과 완악함으로 타락하는 자는 마귀라고 불러 마당한 것이다. 여기에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보통 사람들에게 베푸는 자유와 능력보다 사단에게 더 많은 자유와 능력을 불경건하고 악한 사역자들 위에 사용토록 허락하신다. 그러므로 목사로 택함을 입은 사람들이 마귀적인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면 그들은 야생의 맹수와 같이 변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의 직분을 무시해서는 안되겠다. 오히려 그 직분을 더럽힌 자가 그와 같이 무서운 심판을 받는 것을 볼 때 더욱 그 직분을 공경하게 된다.
6:71
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 비록 유다는 나쁜 양심을 가졌지만, 우리는 그가 마음이 움직였다든가 감동되었다는 기록을 읽지 못한다. 수많은 위선자들은 자기 자신의 상처를 느끼지 못하며 사람들 앞에 너무나 마음이 굳어 있기 때문에 가장 훌륭한 사람들보다 자기 자신을 먼저 내 세우기를 주저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