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
소요가 그치매 - 여기서 소요란 데메드리오 사건(19:23 이하)으로 에베소 극장에서일어난 소동을 말한다. 이 소요는 바울의 에베소 사역 가운데 가장 극적인 사건의 하나이다. 이제 소동이 진정되자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것이 그자신의 안전과 에베소 성도들을 위해서 바람직하지 않다고 판단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자신의 신변의 안전을 위해서 두려움 속에서 소요가 그치는 틈을 타서 서둘러 도망가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바울은 복음 증거하는 일을 위해서는 그 어떤 희생이라도 감수할 각오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 '소요가 그치매'라는 문구는 바울이 에베소를 떠나게 된 이유나 동기를 진술하고 있다기 보다는 떠나가게 된 시간에 관해서 진술하고 있다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R.C.H. Lenski). 제자들을 불러 권한 후에 작별하고 - 이것은 바울이 놀라움에 가득차서 갑작스럽게 야간 도주하듯이 그들을 떠난 것이 아니라 작별의 의식을 다 갖추고 그들과 진지하게 헤어졌음을 뜻한다. '권한 후에'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라칼레사스'(* )는 격려하고 위로하며 권면한다는 뜻이다. 이제 자신의 전도 계획에 의해서 떠나려는 바울은 그들이 믿음 위에 굳게 서기를 격려하고 권면하며 또한 위로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따라서 여기의 권한다는 말 속에는 기독교 설교의 포괄적인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또한 '작별하고'(* , 아스파사메노스)는 권함이 끝난 후 서로 포옹하고 사랑의 입맞춤을 나눈 것을 뜻한다. 왜냐하면 그 당시 초대교회의 작별에 대한 일반적인 관습은 서로 안고 입맞추는 것이었기 때문이다(37절). 떠나 마게도냐로 가니라 - 19장의 폭동이 있은 직후에 바울은 에베소를 떠나 처음에 계획했던 대로(19:21) 마게도냐로 향했다. 람세이(Ramsay)는 바울이 에베소에서 드로아로 항해하는 연안 무역선을 탔으리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는 이전에 고린도 교회의 심상치 않은 사태에 대한 소식을 알고자 파견했던 디도를 드로아에서 만나 보고를 들을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디도를 만나지 못하였으므로 드로아에서 복음을 증거할 기회가 활짝 열려 있었는데도(고후 2:12, 13) 고린도 교회에 대한 여러 생각들 때문에 곧장 마게도냐로 향하였다.
=====20:2
그 지경으로 다녀가며 - '지경'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로스'( )란 말은 특정한 지리적인 위치를 지적하는 낱말로서 에베소에서 고린도에 이르는 긴 육로 여행도를 다 망라(網羅)하고 있다. 즉 바울은 처음 전도의 옛 중심지인 빌립보(16:12), 데살로니가(17:1), 베뢰아(17:10)의 공동체를 재방문했을 것이며 이 기간 중에 바울이 로마서 15:19에서 말한 바와같이 일루리곤(Illyricum)까지도 갔을 것이다. 또한 이때 그가 이그나티우스 대로(the Egnatian Road)를 따라 서쪽으로 여행하여 그 길의 끝인아르리아 해의 두로하키움(Dyrrhachium)에까지 여행했다고도 볼 수 있다(F.F. Bruce). 고린도 후서도 이때 기록한 것으로 본다(고후 7:6). 바울의 여행의 주 목적은 그곳 교회들을 계속 격려할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의 곤궁(困窮)한 신자들을 돕기 위하여 연보를 거두는 데 있었다(Tyndale). 바울은 이 연보를 위해 갈라디아와 아시아와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방의 교회들에게 준비시켰던 것이다(롬 15:25-32;고전 16:1-4). 이방인 교회들의 연보는 단순히 사랑을 나타내는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서 이제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복음 안에서 그리스도의 한 몸된 교회를 이루고 있음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행위였다.
=====20:3
석달을 있다가 - 그곳은 헬라, 즉 아가야 지방이었지만 실제로 바울이 체류하였던 곳은 아가야의 수도 고린도였다. 체류 기간은 삼개월로 A.D. 56-57년에 걸친 겨울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Bruce). 바울은 고린도에서 가이오의 따뜻한 대접을 받으면서(롬 16:23) 이 기간에 로마서를 기록하였다. 이 서신은 로마의 기독교인들에게 그의 방문에 대한 준비도 시키고 또한 체계적이면서도 포괄적으로 복음의 내용을 설명해 주기 위함이었다. 바을이 이처럼 로마에 깊은 관심을 기울인 것은 장차 로마를 복음 전파를 위한 전진 기지로 사용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롬 15:17-23). 자기를 해하려고 공모하므로...돌아가기를 작정하니 - 바울은 고린도에서 이제 어느 정도 자기의 사역이 완성되었음을 알고 헬라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결심하였다. 그래서 람세이(Ramsay)에 의하면, 바울은 유월절 명절을 예루살렘에서 보내기 원하는 자들이 타고 가는 순례선(Pilgerschiff)을 타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18:18). 그런데 바울을 박해해 오던 유대인들이 그가 배에 탔을 때 그를 암살하거나 또는 배 밖으로 밀쳐 버림으로써 없애버릴 계획을 세우고 있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부득불 노정을 변경하여 해상보다 훨씬 늦은 육로를 통하여 마게도냐를 거쳐 돌아가기로 하였다. 여기서 '공모'의 헬라어 '에피불레스'( )는 그의 생명을 노리는 필사적인 음모를 뜻한다. 그리고 '작정하니'의 헬라어 '에게네토 그노메스' (* )는 '결단을 내렸다'(He decided)라는 뜻으로서 그의 생각이 우연에 의해서가 아니라 의도적인 계획에 의해 결정되었음을 나타낸다(Bruce).
=====20:4
아시아까지 함께 가는 자는...두기고와 드로비모라 - '함께 가는'의 헬라어 '쉬네이페토아우토'(* )는 '그와 동행했다'는 뜻이지만 여기서는 바울을 수행(隨行)하는 것을 말한다(E. Haenchen). 이 일곱 사람은 지난 2년 동 안 이방 교회들이 예루살렘 교회의 궁핍한 성도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연보롤 냈던 것을 맡아 가지고 가는 사명을 받은 각 교회의 대표자들이다. 바울은 결코 자신의 손으로 이 연보를 관할하지 않고 각 교회의 대표자들에게 맡겼는데 이것은 초대 교회의 사도적 결정을 따른 행위로서 매우 지혜로운 일이었다(행 6:1-6). 그러면 이제 바울과 함께 동행한 각 교회의 대표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소바더 - 베뢰아 사람 부로의 아들로서 마게도냐 교회를 대표한다. 롬 16:21에 나타난 바울의 친척 소시바더와 동일인인지에 대해서는 분명치 않다. 아리스다고 - 19:29의 아리스다고와 같은 사람일 것이다. 그는 로마까지 바울을 따라 갔으며 마게도냐 교회를 대표하는 데살로니가 출신이다(27:2;골 4:10;몬 24절). 세군도 - 마게도냐 교회를 대표한 데살로니가 출신으로 단지 여기만 나오는 인물이다. 가이오 - 더베 출신으로 갈라디아 교회를 대표한다(19:29). 디모데 - 루스드라 출신으로 갈라디아 교회를 대표하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인물이다(16:1-3). 두기고 - 아시아 사람으로 아시아 교회를 대표하며 언제나 바울과 동행한 인물로서 골로새와 에베소 교회에 바울의 서신을 전달한다(엡 6:21;골 4:7;딤후 4:12;딛 3:12). 드로비모 - 에베소 출신으로 아시아 교회를 대표한다(딤후 4:20).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주목되는 것은 고린도 교회의 대표자가 없다는 것이다. 아마 바울 자신이 고린도 교회를 대표해서 예루살렘에 간 것같다는 주장도 있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디모데를 생각할 수 있다. 왜냐하면 디모데는 아가야 지방과 고린도 교회에 잘 알려졌던 사람이기(고후 1:1) 때문이다(R.C.H. Lenski). 하지만 고후 8:6 이하로 미루어보건대 고린도 교회의 연보는 바울이 그 교회에 보낸 디도와 다른 형제에게 맡겨져 보내졌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여기서 디도가 언급되지 않았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이에 대해서는 디도가 누가의 형제였다는 주장(Ramsay)에서 신빙성 있는 답변을 찾는다. 따라서 누가 자신이 고린도 교회의 연보를 수령하기 위하여 디도와 함께 파견된 두 형제 중 한 사람이었으리라고 짐작된다(F.F. Bruce). 아무튼 바울 사도는 그의
=====20:5
그들은 먼저 가서 - 여기서 그들이란 앞절에 언급된 일곱 사람을 말한다. 그들은 빌립보를 떠나 네압볼리를 경유 드로아로 갔다. 그들이 무엇 때문에 먼저 갔는지 그 이유가 뚜렷하지 않으나 바울은 빌립보에서 누가와 합류(合流)해서 유월절을 지키기 위하여 일곱 사람보다 후에 드로아로 가기로 여정을 짰던 것으로 추측된다(Lenski, Pulpit). 우리를 기다리더라 - '우리가' 누구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다만 우리 가운데 누가가 들어 있는 것만은 틀림없다(16:10). 따라서 누가를 포함한 바울 일행을 말한다.
=====20:6
무교절 후에 - 누가와 바울이 뒤에 남아 디아스포라의 관습에 따라 유월절 절기를 조용히 지켰다.특히 바울은 유월절 양처럼 희생하신 주님을 생각하면서 자기의 사명을 새롭게 하고빌립보에서 무교절 주간이 끝나기를 기다렸을 것이다(F.F. Bruce). 닷새 만에 바울은1주간이나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일행들을 생각하면서 서둘러 에베소를 향하였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닷새나 걸리는 오랜 항해를 하였다. 16:11에 보면 전에 드로아에서빌립보까지 배를 타고 이틀밖에 안 걸렸는데 여기서는 닷새가 소요된 사실에 대해서는, 역풍으로 인해 항해가 순조롭지 않았다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A.C. Hervey).
=====20:7
안식 후 첫날에 - '엔 데 테 미아 톤삽바톤'(* ) 은 그 주간의 첫째 날 혹은 안식일 다음날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 구절은 초대 교인들이 유대인들과 같이 처음에는 안식일에 모였지만(15:21;18:4) 이제는 독립되어 주일날 예배를 드리려고 모였다는 사실에 대한 중요한 증거이며 동시에 최초의 언급으로 여겨진다(E. Haenchen, 요 20:19, 26;고전 16:2;계 1:10).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령 강림이 안식 후 첫날에 일어났으므로 교회가 이 날을 교회 예배일로 지킨것은 자연스러운 변화라고 하겠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죄의 세력과 사망의 권세가 무너지고 참된 안식과 영원한 소망이 도래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날은 사도 시대부터 그리스도인들의 규칙적인 예배의 날이 되었다. 믿는 자가, 새 생명을 주사 영원한 안식의 소명을 갖게 하신 주님을 주일날에 모여서 경배함은 마땅하다(히 10:25). 이 날을 지킴으로 믿는 자들이 그리스도께 속한 하나님의 백성들이란 것이 확실하게 세상 가운데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Matthew Henry). 떡을 떼려 - '클라사이'(* )는 '클라오'(* )의 제 1부정과거 능동 부정사이며 목적을 나타낸다. 즉 안식 후 첫날에 모인 목적을 가르쳐 준다. 그런데 떡을 떼는 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 단순한 식사를 의미하는 애찬(* , 아르토스, 2:42;고전 10:16)을 가리킨다는 견해. '떡'의 헬라어 '아르톤'(* )에 정관사 '톤'(* )이 없는 것은 일반적인 식사를 말한다(R.C.H. Lenski). 초기 기독교의 풍습대로 성도들이 성례전(聖禮典)의 필수적인 순서로서 가졌던 애찬겸 성찬이었다고 보는 견해(F.F. Bruce, Pulpit, Alford). 그런데 이것은 교회 내에서 마음대로 가져다 먹으므로 어떤 이는 시장하고 어떤 이는 취하는 등 많은 폐단을 일으켜(고전 11:20-22) 후에 애찬은 없어지고 성찬만 남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 본문의 '아르톤'(* )에는 정관사 '톤' (* )이 없는 반면에 11절의 '아르톤'에는 정관사가 붙어 있는 것은 떡을 뗀다는 것이 애찬겸 성찬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뒷받침 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11절의 '톤 아르톤'은 단지 7절의 '아르톤'을 가리킨다 볼 수도 있기 때문에 설득력이 약하다. 고전 10:16, 18과 11:17-34의 가르침을 볼 때 이는 주의 거룩한 만찬(the Lord's Supper)을 기념하는 것이라고 보는 견해. 이는 다음 두 가지 이유에 의해 뒷받침된다. 많은 무리가 한꺼번에 개인집에 모
진 관습임을 알 수 있다(McGarvey). 그리고 떡을 떼는 일은 반드시 말씀을 강론한 후에 실시되었음이 성경(20:7-11)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 보낸 유스틴 마터의 둘째 해명서(Apology)에 나타나 있다(pulpit).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 바울은 의식적으로 월요일 아침에 여행길에 오를 것을 계획했다. 이는 바울이 주일을 하나님께 구별된 날로서 중요시한 데 그 이유가 있다(R.C.H. Lenski).
=====20:8
윗다락에 - '휘페로오'(* )는 9절과 1:13에도 나타났듯이 초대 교회의 집회 장소로 사용된 개인집의 다락방을 가리킨다. 이처럼 개인 집을 신앙 공동체의 목적을 위하여 제공한 것은 초대 교회의 두드러진 모습이었다(Tyndale). 그들은 모든 사람을 수용할 수 있는 화려한 성전도 회당도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불편한 장소일 망정 모이기를 힘썼다(Matthew Henry). 등불을 많이 켰는데 - 이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 그리스도교의 모임에 어두움 속에서의 제의적 매음 행위가 있다고 의심하는 자들에 대한 반박으로 등불을 많이 켜서 장소 전체를 환하게 했다(Ernst Haenchen). 모임의 분위기를 엄숙하고 화려하게 나타내기 위해서다(Kuinoel). 사람이 많이 모인 밤중의 집회에 잡담을 방지하기 위해서다(Bengle). 단순한 장식적인 효과라고 본다(Olshausen). 누군가가 떨어지는 것을 즉시 알아보기 위해서다(Meyer). 한 젊은이가 졸았다는 것을 사람들이 볼 수 있었다는 것을 설명해 주기 위함이다(Alford). 모인 수가 많았기 때문에 밤중 집회에 알맞게 많은 등불을 설치하였다는 견해(John Calvin). 혹자는 다락방 자체가 많은 회중이 모일 수가 없는 곳이라고 하지만 칼빈은 만일 그 다락방에 많은 무리가 모여 비좁지 않았다면 유두고(Eutychus)가 구태여 창에 걸터 앉지는 않았으리라는 논리로 반박을 한다. 사치스럽게 허식적으로 꾸며서 장엄한 분위기를 나타내려 했다기 보다는 밤중 집회의 필요성(必要性) 때문에 모임 전체를 환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보는 견해가 가장 자연스러운 해석이라 하겠다.
=====20:9
창에 걸터 앉았다가 - 건방지기 때문에 창에 걸터 앉았다고 비난받아 마땅하다는 견해도 있지만(Matthew Henry), 그보다는 방이 회중으로 꽉 차서 유두고는 청년이기에 노인들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창문턱에 앉았다는 것과(McGarvey) 등불들로 인해 혼탁해진 공기보다는 신선한 공기를 마시기 위해 걸터 앉았다는 것이 지배적인 해석이다(Bruce).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매 - 설교는 그리스도인의 집회(meeting)의 핵심 내용이었고 예배의 중심이었음을 여기서 알 수 있다(Tyndale). 초대 교회 성도들은 하나님께 대한지식과 믿음을 증가시키기 위하여 모일 때마다 강론을 들었고 또한 그 가르침에 부착해서 세상과 다른 독특한 삶의 원칙들을 가지고 살아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천국의 백성임을 능력있게 증시(證示)하였다. 강론이 조금이라도 길어지는 것을 싫어하는 오늘의 교회에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인상깊은 구절이다.
깊이 졸더니...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 '깊이 졸더니'의 헬라어 '카타페로메노스' (* )는 '카타페로'(* )의 현재분사로서 점차 잠으로 빠져 들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리고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의 헬라어 '카테네크데이스'(* )는 부정 과거분사로서 계속되는 졸음의 결과로 완전히 잠에 곯아 떨어진 객관적인 상태를 진술한다(Robertson). 그렇다면 거룩한 모임에, 더욱이 하나님의 말씀이 강론되는 신성한 시간에 왜 이런 현상이 생겼으며 누가는 무슨 목적으로 이 사건을 기록했을까? 유두고는 노동자로서 아침부터 해가 질 때까지 하루종일 노동으로 피곤하였는데 말씀에 관심이 있어서 졸음과 싸웠으나 결국 그것에 압도되어서 졸다가 잠에 빠져버렸을 것이다(Bruce, McGarvey). 또한 많은 등불들로 인해 방안이 더워졌을뿐만 아니라 타오르는 기름에서 검은 연기가 나와 공기를 흐리게 하여 산소부족 현상을 일으키므로 졸음이 가중되었다고 본다(Alford, Bruce). 따라서 앞의 8절에서 등불을 많이 켰다고 기술한 것은 유두고가 떨어진 사건에 대한 복선(伏線)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Meyer). 그리고 이 사건을 기록한 목적에 대해 혹자는 말씀을 들을 때에 졸음을 주의하라고 모든 사람에게 경고하기 위함이라고 한다(Metthew Henry). 그러나 칼빈(J. Calvin)의 경우는 말씀을 듣는 시간이 한밤중이었고 더구나 온종일 고된 일을 한 사람이 졸음과 싸우다가 잠에 빠진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졸음 때문에 죽음의 벌을 받았다고 유두고의 졸음을 질타하는데 초점을 둔 주석가들을 이해할 수 없다고 강한 이의를 제기한다. 이 견해에 대한 증거로 본문에서 누가는 유두고가 졸다가 잠에 빠져든 시간이 한밤중인 것을 말함로써 이미 유두고를 이해하는 입장에서 서술하고 있으며 더욱이 바울이 유두고를 책망한 기록이 없다는 점을 제시한다(John Calvin, Brece, McGarvey). 그렇다면 이 사건의 기록 의도는 무엇일까?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신을 어떤 분으로 계시하고 있는가에 해석의 초점을 맞춰야 할 것이다. 개인의 행위에 역점을 둔다면 이 사건을 통해서 말씀하시려는 성경의 메시지를 놓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일으켜 보니 죽었는지라 - 3층 정도의 높이에서 떨어졌는데 꼭 죽었겠느냐며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지만(I.B.C.) 의사인 누가가 전문적인 관찰을 통하여 진단을 내리기를 '죽은 것 같이'라는 뜻의 '호세이 네크로스'(* ;막 9:26)가 아니라 '네크로스'(*)를 사용한 것으로 보아 실제로 죽었음을 알 수 있다(Thomas Whitelaw).
=====20:10
내려가서 - '에페페센'(* )은 '뛰어 내려가' 혹은 '달려들어'라는뜻이다.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 여기서 '안고'를 가리키는 '쉼페릴라본'(* )은 '완전히 껴안다', '함께 둥그렇게 붙잡다'라는 뜻으로서 엘리야(왕상 17:21)와 엘리사(왕하 4:34, 35)의 경우를 상기시킨다. 그러나 바울의 이런 행동은 구약 예언자들을 흉내냈다기 보다는 사고를 당한 자에 대한 깊은 연민과 긍휼의 마음의 즉각적인 표현이며 그를 소생시키기 위해 모든 심정을 다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를 드리는 자세이다(J. Calvin). 떠들지 말라 - '메 도뤼베이스데'(* )란 말은 갑작스런 사고로 온통 동요되어 울고 불고하는 회중들을 진정(鎭靜)시키는 '걱정하지 말라'는 말이다(Thomas Whitelaw). 일찍이 예수께서 야이로의 딸의 죽음 앞에서 사람들이 흐느끼고 통곡하는 것을 보시고(막 5:38ff.) '티 도뤼베이스데'(* , '어찌하여 환화하느냐')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은 뜻이다. 생명이 저에게 있다 - 혹자는 이 구절에 근거하여 청년이 죽은 것이 아니라 까무라쳐 기절한 것을 바울이 현대의 인공 호흡법을 써서 살려 놓은 것이라고 한다(Ramsay, Wendt, Zoeckler). 그러나 이는 바울이 그를 끌어 안았을 때 그의 생명이 되돌아왔음을 시사하는 표현으로서(Bruce)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가 소생될 것을 확신하는 믿음의 고백이다.
=====20:11
오래 동안...이야기하고 - 갑자기 당한 불의의 사고로 인해서 모두들 크게 놀랐으나 하나님의 크신 능력에 의한 극적인 이적을 보고 회중은 두려움과 흥분, 놀라움 속에서 이 잊을수 없는 밤에 시간가는 줄 모르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여기서 '이야기하고'의 헬라어 '호밀레사스'(* )는 바울이 혼자서 더 이상 강론하지 않고 성도들과 자유스럽게 담화했음을 뜻한다. 주님의 권능과 그를 믿는 신앙에 대해서 생생한 사건을 목격한 그들은 피곤을 잊은 채 철야를 한 것이다. 참으로 아름다운 성도의 교통이다.
=====20:12
위로를 적지 않게 받았더라 - 바울 일행이 떠난 후에 드로아의 신도들은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난 큰 기쁨과 동시에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보여 주신 놀라운 사랑의 증표(證票)를 보면서 주님이 부활 승천하시면서 약속하신대로(마 28:18-20) 자기들과 함께 하심을 생생하게 경험하게 되었다. 따라서 대단한 격려와 기쁨과 용기를 갖게 된 것이다. 말씀과 경험을 통해 확실하게 된 임마누엘 신앙 이것보다 더 큰 성도의 위로가 무엇이겠는가 ! =====20:13
우리는 앞서 배를 타고...정하여 준것이라 - 드로아에서 앗소까지는 약 32km나 되는 거리인데 밤새 철야 강론을 한 바울이 일행을 먼저 보내고 왜 혼자서 육로로 가는 길을 택했는지 알 수 없다. 당시 육로를 도보로 간다는 것은 많은 위험을 예상하는 일인데도 불구하고 바울은 왜 그 길을 택했을까? 바울이 쇠약하여 배 멀미를 하기에 밤에 배 타는 것이 싫어서 육로를 택했다는 견해도 있지만, 바울이 철야 강론을 한 것이나 본서 27장을 보면 바울이 바다를 기피할 정도로 쇠약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람세이(Ramsay)에 의하면 그때는 4월의 아름다운 화창한 봄이었다고 한다. 따라서 불쑥 돌출한 렉툼 갑(Cape Lectum)을 돌아서 긴 항해를 하는 것보다 직선거리인 육로를 통해 아름다운 자연의 경치를 바라보면서 깊은 묵상을 통해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기 위해서 그길을 택하였다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한 발자국씩 예루살렘으로 다가서는 바울은 자신의 사명을 생각하면서 주님의 은혜를 간절히 구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E.M. Blaikclock).
=====20:14
바울이...우리를 만나니 - 바울은 앗소에서 일행을 만나 승선하였다. 그리고 그 배는 앗소로부터 70km 정도 떨어진 레스보스섬의 수도 미둘레네로 향했다. 여기서 '만나니'에 부정과거가 사용되지 않고 미완료 시제 '쉬네발렌'(* )이 사용된 것은 바울과 그 일행이 서로 만나는 장면을 생생하게 나타내는 효과를 준다고 볼수도 있지만(Thomas Whitelaw) 여행 보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형식이기도 하다(E. Haenchen).
=====20:15
거기서 떠나...밀레도에 이르니라 - 바울을 태운 배는 첫 날 밤에는 미둘레네에서보냈다. 둘째날 밤에는 가능한 서둘러서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도착하려는 마음 때문에 항구에 배를 정박(碇泊)시키지 않은 채 이른 아침의 바람을 기다리기 위해 기오 앞에 있었다. 그리고 셋째날에는 사모에 들렀다. 여기서 베자 사본(Codex Bezae)은 그들이 밤에 사모에 인접한 항구인 트로길리움(Trogyllium)에 체류한 것을 첨가하고 있다. 그리고 넷째 날 에베소 곁에 있는 밀레도에 도착했다.
=====20:16
바울이...예루살렘에 이르려고 급히감이러라 - 바울이 에베소를 그냥 지나가기로 한 이유를 밝힌다. 혹자는 바울이 에베소를 통과한 것은 시간이 없어서가 아니라 지난날 에베소에서 겨우 살아난 경험이 있기에(19:23-41) 신변의 안전을 위해서였다고 주장을 하지만(E. Haenchen) 그것보다는 본문에 밝히 언급된 대로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에베소에 지체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전에 바울은 유대인들의 음모 때문에 가장 중요한 절기인 유월절에 예루살렘에로 곧장 향할 계획을 포기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가능하다면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도착하려고 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방의 교회가 예루살렘 교인들을 돕기 위하여 모금한 연보를 전해 주는 일이 시급했기 때문이다. 이 연보는 단순한 구제가 아니라 이방 교회와 유대인 교회가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는 것을 가르칠 숭고한 메시지를 내포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오순절을 지키려고 도처에서 모여든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할 좋은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이다. 그동안 이방 땅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이 어떻게 전파되어 교회가 서게 되었는가에 관한 선교(宣敎) 보고를 하기 위해서다.
=====20:17
에베소로 보내어...장로들을 청하니 - 배가 밀레도 항구에 닿자마자 바울은 그곳에서 직선 거리로 약 50km 떨어진 에베소에 사자를 보내어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presbyters) 청하였다. 이것은 에베소 교회를 향한 바울의 평상시 관심과 사랑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한편 '장로들'(* , 프레스뷔테루스)란 각 교회의 지도자들(leaders)을 가리킨다(14:23). 본 설교에서 '감독자들'(* , 에피스코푸스)이라고도 지칭된 그들은(28절) 교회 내의 행정적 일은 물론이고 목회적 임무까지 수행했으리라 짐작된다(약 5:14;밸전 5:1-4). 기타 장로에 관한 사항은 신 21:1-9 주제 강해 '성경에 나타난 장로직'을 참조하라.
=====20:18
오매 - 추측컨대 에베소 장로들이 밀레도에 도착하기까지는 삼일이 걸렸을 것이다(Ramsay). 그리고 그들이 바울의 요구에 순종하는 것을 성가시게 여기지 않고 기꺼이 찾아온 것은 겸손의 표시이기도 하다. 첫날부터 지금까지 - 약 3년에 걸친(31절) 에베소 사역 기간을 가리킨다. 너희도 아는바니 - 원문에는 이 문구가 본절의 처음에 나와 강조 용법으로 표현되었다. 바울은 자신의 삶을 회고하면서 그리고 그 삶에 대한 에베소 장로들의 지식과 판단에 호소하면서 연설을 시작한다. 이처럼 바울은 중요한 순간에 언제나 가르침과 삶이 일치한 자신의 실생활을 증거삼아 복음으로 살 것을 강력히 촉구했다(고전 11:1; 살전 2:1-12).
=====20:19
겸손과 - '타페이노프로쉬네스'(* )에 대해 라이트푸트(Lightfoot)는 이 단어가 굽실굽실하는 굴종을 나타내는데 사용되었다고 하지만 사실은 주님께 예속된 자의 자발적인 봉사와 섬김의 자세를 의미한다고 한다. 눈물이며 - 31절에서도 눈물이 다시 언급되며 또한 고후 2:4과 빌 3:18에서도 그의 눈물이 언급되는데 이는 그가 고도의 지성인이었지만 뜨거운 감정의 소유자이기도 한 것을 보여준다. 이 눈물은 주님을 섬겨나가는 과정에서 주님을 거부하는 인생들을 보면서 그 아픔에 못이겨 나온 것이며 또한 자기 동족의 회심을 위한 그의 애타는 심정의 표현일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비판자들이 말하는 감상적인 눈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음의 영광스러운 확장을 위한 눈물이라 하겠다. 유대인의 간계 - 유대인의 간계로 인한 시험이 직접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았으나 유대인들은 가는 곳마다 바울을 괴롭혔으며(13:45;14:2;17:5) 또한 19:9, 13, 33, 34을보면 유대인들의 적개심(敵愾心)이 얼마나 혹독했던가를 알 수 있다. 그리고 고린도 후서 11장은 에베소에서의 유대인의 핍박이 어떠했는지를 능히 짐작케 한다. 주를 섬긴 것과 - 여기서 섬긴다는 표현을 '둘류온'(* )으로 나타낸 것은 바울 자신이 주님의 '종'(* , 둘로스)임을 깊이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현재 시제의 사용은 지금도 변함없이 주를 섬긴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겸손과 눈물 그리고 시험을 참고 오직 '둘로스'로서 주님만을 섬긴 것! 이것이 사도가 간증한 에베소에서의 생활 방식과 신앙 태도였다.
=====20:20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 바울이 복음을 전파할 때 다양한 방법을 사용하여 부지런히 목회한 것을 본다. 여기서 '공중 앞에서'란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던 회당(18:19;19:8)이나 두란노 서원을 뜻하며 '각 집에서'란 그들의 필요를 따라 바울이 심방한 에베소 교인의 집이나 또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집을 의미한다(18:26). 따라서 강단에서 왜 선포적인 설교와 동시에 한 사람, 한 사람을 개인적으로 살피고 권면(勸勉)하고 가르치는 심방의 필요성이 강조된다. 공적인 설교만으로 책임을 다했다고 생각하여 사적인 방문을 태만히 하는 목회자가 있다면 자신이 증거한 하나님의 말씀이 양들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열매맺는가를 살피지 않은 게으른 종이 될 것이다. 꺼림이 없이 - '휘페스테일라멘'(* )이란 말은 자신이 전파하고 가르치는 것이 사람의 비위를 거스릴까 무서워 억제하거나, 움추러들거나, 또는 교묘한 가장을 하거나 취소하는 것이 없이 즉 교훈과 책망을 비롯하여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삭감이나 은폐함이 없이 담대히 다 증거하였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하나님 앞에서 복음을 맡은 자로서 증거의 책임을 다한 자신의 떳떳한 사역을 변호한 말이다.
=====20:21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 회개와 믿음 ! 이것은 바울이 증거한 핵심 내용이며 기독교의 중심 진리이다. 혹자는 회개는 주로 이방인들에게 해당된 것이고, 믿음은 유대인들에게 필요한 것이라고 구별하지만(Kuinoel) 전혀 성경적 근거가 없다. 바울은 유대인과 헬라인 모두에게 회개와 믿음을 요구했다(2:38;3:19). 사람이 죄사함을 얻고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을 떠나 사는 죄의 자리에서 돌아서서 하나님께로 오는 회개(* , 메타노이아)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사람은 하나님께 범죄한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가 죄인이로소이다'는 각성과 함께 그 죄에 대한 형벌과 멸망을 알고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고 죄의 자리에서 떠나 하나님께 나오는 회개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회개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왔으면 이제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자신의 죽음을 통해 우리의 죄의 형벌을 담당하셨고 또한 자신의 부활을 통해 우리를 죄의 권세에서 해방시키고 의롭다 하시며 새생명을 주시는 길을 여셨기 때문이다. 믿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마련하신 이 은혜를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향한회개 그자체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믿음과 결부되지 않은 회개 그자체는 개과천선(改過遷善)에 머무는 세속 윤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요컨대 회개와 믿음은 불가분적 관계에 있으며 구원은 먼저 회개가 있고 이것에 우리 주 예수께 대한 믿음이 결부될 때에만 얻을 수 있다.
=====20:22
심령에 매임을 받아 - '심령에'를 가리키는 '토 프뉴마티'(* )가'심령에'(in the spirit)냐 아니면 '성령에'(by the spirit)냐에 대해서는 견해가 갈리지만, 문맥과 전체 내용으로 볼 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자신이 짊어져야 할 막중한 책임감을 느낀다는 표현으로 '심령에'라는 해석을 택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따라서 '심령에 매임을 받아'란 말은 바울의 앞에 일을 고난을 확실하게 예견하고 있었으나 하나님의 뜻에 의한 성령의 지시로 가지 않을 수 없는 당위성 속에서 느끼는 하나의 내적인 압박감(壓迫感) 같은 마음 상태를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억지로 순종한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는 이 일을 위해 자발적으로 여기까지 왔기 때문이다.
=====20:23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 바울이 친히 성령의 지시를 받았을 수도 있으나그보다는 바울이 통과해 지나가는 도시에서마다 성령이 예언자들을 시켜 그가 예루살렘에서 당하게 될 운명을 말해준 것을 가리킨다고 봄이 더자연스럽다(21:10-14). 이제 예루살렘으로 가는 바울의 앞에는 지금까지 당했던 어떠한 어려움보다도 더 심한 상황들 곧 문자 그대로 실제적인 투옥(쇠고랑)과 견딜 수 없는 극심한 환난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는 무거운 말씀을 받은 것이다. 이것이 복음을 위해 사는 사도 앞에 놓여진 현실이었다.
=====20:24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 끊임없이 그리고 오로지 주를 위해 충성했는데도 불구하고 그 결과로 나타나는 것은 결박과 환난이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본문은 이런 현실 앞에서 바울이 어떠한 태도를 취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즉 결론적으로 자기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생명이 참으로 귀한 것이로되 자기 생명이 자기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생명에 대한 맹목적인 애착에 사로잡히지 않았다. 자기 생명 때문에 자기 생명의 존재 이유를 잃지 않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자신의 생명을 관심밖에 둠으로써 자기가 존재하고 있는 그 거룩한 목적을 완성하려고 한 것이다. 바우어(Bauer)는 이 구절을 "...을 다하기만 하면(...을 위해서라면) 나는 기꺼이 내 생명을 내놓겠습니다(또는 나는 목숨이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라는 의미로 이해하여 바울이 오직 하나의 목적을 위해서만 그의 생명을 내놓은 사실을 뒷받침했다. 결국 바울에게 있어 죽느냐, 사느냐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가 살아있는 유일한 목적은 주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것을 다 마치는 데 있었다(롬 14:8;빌 1:20, 21).
=====20:25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곧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것이다(막 1:4). 왜냐하면 븍음은 하나님 나라의 진리이기 때문이다(하나님 나라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막 1:14-20 주제 강해 참조). 따라서 복음 전파와 하나님 나라를 분리해서 구별되게 생각하는 세대주의의 가르침은 그릇된 신학의 결과이다.
=====20:26
오늘 - '엔 테 세메론 헤메라'(* )는 '오늘이라고 하는 이날' 즉 '너희와 작별하는 마지막 이날'을 강조한 것이다. 증거하노니 - '마르튀로마이'(* )는 일반적으로 '증거하다', '증인이 되다'는 뜻이며 본절에서처럼 중간태로 사용되면 주로 '엄숙하게 호소하다'란 뜻을 나타낸다. 특히 이 말은 신약에서 바울만이 자주 쓴 표현으로 중대한 선언을 할 때 사용했다(갈 5:3).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 피는 생명을 가리키는 히브리적 표현이다. 바울은 여기서 겔 33:1 이하의 말씀을 자신에게 인용하고 있다. 하나님으로부터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움을 받은 자가 경비를 소홀히 하여 백성에게 화가 임하면 그 피가 파수꾼에게로 돌아가도록 되어 있었다(겔 33:1-7). 그러나 파수꾼의 간절한 경고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악행을 거듭하면 그는 죄악 중에서 죽고 파수꾼의 생명은 보존되었다(겔 33:8, 9). 따라서 바울의 이 선언은 20절의 진술을 더욱 뒷받침해 주는 엄숙한 고백으로 복음을 맡은 자로서 자기의 책무(責務)를 남김없이 수행했음을 의미한다.
=====20:27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전하였음이라 - 20절의 반복으로 하나님의 뜻이란 온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구속 경륜을 말한다.
=====20:28
너희는 - '너희'는 17절에 나타난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가리킨다. 지금까지 그들가운데서 자신이 어떻게 행하였는가를 말한 바울은 이제 그들에게도 같은 수고를 당부한다. 삼가라 - '프로세코'(* )는 '무엇에 대하여 주의를 집중하라', '전력하라', '관심을 가져라', '조심하라'는 뜻인데, 계속의 의미를 내포한 현재 명령법을 사용하여 계속적으로 근면하고 깨어 었어야 함을 강조한다. 자기를 위하여 온 양떼를 위하여 - 삼가라고 당부한 구체적인 첫번째 이유이다. 자기 영혼의 상태에 대하여 소홀한 사람은 양떼의 영적 상태에 대해서 결코 도움을 줄 수 없다. 성령이 저들 가운데 - 삼가라고 당부한 두번째 이유로 성령에 의하여 그 임무가 위탁(委託)되었다는 신성성을 상기시킨다. 사람에 의해서 임명된 것이 아니기에 더더욱 삼가라고 촉구한 것이다. 감독자를 - 여기서 감독(* , 에피스코포스)은 17절의 장로 (* , 프레스뷔테로스)와 같은 직무를 설명하는 단어이다. 이것은 사도시대 교회에서는 장로와 감독이 오늘날처럼 구별이 없었던 것을 의미한다. 즉 장로, 목사, 감독등의 직무가 제도적으로 구분되기 시작한 것은 2세기 이후였다.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 - 감독들에게 엄숙한 책임이 지워졌으니 이것이삼갈 것을 당부한 세번째 이유이다. 여기서의 하나님을 성부 하나님만으로 생각한 사람들은 이 구절에서 한 단어가 빠져버린 것이 아니냐고 주장하면서 '자기 아들의 피로'라는 말을 넣어야맞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본문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왜냐하면 성부와 성자는 본질상 하나인 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므로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곧 하나님 자신의 죽으심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피로써 자기의 것으로 만드신 교회라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으며 이러한 표현은 오히려 예수의 대속 행위가 하나님 자신의 거룩한 희생적 사랑에 대한 확증임을 강조한 것이다(G. Campbell Morgan). 그런데 본 구절이 몇몇 사본과 역본들에는 '데우' (* , '하나님의') 대신에 '퀴리우'(* , '주의')로 기록되어 있다. 어떤 주석가들은 이에 근거해서 '주님의 교회'(* , 여클레시아 투 퀴리우)라고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Lange, Meyer). 그러나 '여클레시아 투 퀴리우'라는 표현이 바울의 서신에 나타나지 않고 오히려 '여클레시아 투 데우'(하나님의 교회)라는 표현이 11번 나타날 뿐 아니라(고전 1:2;고후 1:1;딤전 3:5) 또한 많은 학자들
=====20:29
흉악한 이리가...들어와서 - 에베소 교회에서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예견(豫見)으로서 흉악한 이리에 대한 경계의 말이다. 이것이 유대주의자들인지 아니면 영지주의자들인지 확실히 알 수 없으나 분명한 것은 거짓된 교의를 가지고 기독교를 전적으로 부인하면서 믿는 자들을 넘어 뜨리는 거짓 교사들을 지칭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일찍이 양의 탈을 쓰고 침투하는 이리들에 대해 경계하신 예수의 가르침(마 7:15)과 연관된 것으로 배교의 세력으로 말미암아 어려움을 겪게 될 시대의 성격을 상기시켜 준다.
=====20:30
너희 중에서도 - 흉악한 이리가 외부로부터 침입해서 양떼를 해칠 것이라는 29절과대조적으로 에베소 교회 자체에서도 교회를 파괴하는 세력이 있을 것임을 말한다. 어그러진 말 - '디에스트람메나'(* )는 '왜곡하다', '구부러지다'는 뜻이며 복음을 곡해하고 교묘한 논리로써 그릇된 길로 인도하는 것을 뜻한다. 실제로 에베소 교회에는 자칭 사도라하는 자들이 들어왔고 니골라당이라는 이단이 생겨 분열을 획책(劃策)하기도 했는데 이런 상황들이 목회 서신(딤후 1:15;2:17)과 계시록(2:1-7)에 나타나 있다.
=====20:31
너희가 일깨어 - '그레고레이테'(* )는 '깨우다'를 뜻하는 '그레고레오'(* )의 현재 명령법으로 '방심하지 말고 계속 깨어 있으라'는 뜻이다. 예수께서 재림을 준비하고 항상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실 때도 이 말을 사용했다(막 13:35). 따라서 이는 배교의 시대의 성격을 예견한 사도가 파수를 보는 데 정신을 차려서 최선의 주의를 기울일 것을 촉구하는 목회적 용어이다(Bengel). 기억하라 - 모세가 광야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훈계할 때 자주 사용한 표현이다. 즉 하나님께서 어떻게 크신 능력을 펴서 출애굽의 은혜를 베푸셨고 또한 이 광야에서 지금까지 먹이고 입히고 가르치며 인도하신 것을 기억하고(신 8:2, 18) 그리하여 하나님을 순종하고 경외하라(신 8:1-6)고 촉구한 것과 같이 바울 자신이 삼년 동안의 모든 겸손과 눈물과 인내로 주님을 섬기고 각 사람을 가르친 것을 기억하여 그 본을 받으라는 권면이다. 언행 일치한 지도자만이 사용할 수 있는 감화력 있는 교육 방법이다.
=====20:32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 흉악한 이리들과 배교의 여러 세력들로 인해 갖가지 공격을 받게 될 교회의 어려움을 예견한 바울은 여러 권면으로 지도자들의 성실함을 촉구했지만 마지막에 바울이 부탁한 것은 바울의 모범도 지도자들의 충성스러움도 아니었다. 이런 것들은 교회를 세워가는 데 필요한 하나의 방도 도구일 뿐 근본적(根本的)으로는 교회를 배교의 세력에서 지키지 못할 것임을 알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누구한테 맡겨야 옳단 말인가? 바울은 안전의 원천을 알았으니 곧, 주와 그분의 말씀이었다. 왜냐하면 인간 지도자들의 모든 수고를 쓰셔서 친히 교회를 세워가시는 분은 교회의 머리가 되시며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부활하셔서 승천하신 주님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교회의 주인으로서 자신의 몸된 교회를 친히 다스리고 계신 것이다. 이때 그 방법은 오직 말씀으로이다. 그 말씀이 능력이 있어서교회롤 모든 악의 세력에서 지켜주고 거룩하게 서 가게 하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교회가 누구의 교회이며 무엇으로 교회가 거룩하게 서 갈 수 있는가를 정확하게 꿰뚫어 본 것이다. 한편 여기서 부탁한다는 '파라티데마이'(* )는 '넘겨주다', '위탁한다', '맡긴다', '의뢰한다'(딤후 2:2;벧전 4:19 등)는 뜻이다.
=====20:33
내가 아무의 은이나...탐하지 아니하였고 - 자신의 자랑으로서가 아니고 교회 지도자들이 탐욕을 경계해야 할 것을 가르치는 말이다. 은, 금, 의복은 고대의 중요한 재산이었다(왕하 5:22). 바울 사도는 어떤 사람의 물건도 탐하지 않았고(고전 9:4-18; 고후 11:7-12;12:14-18;살전 3:8, 9) 오직 자족(自足)한 삶을 살았다. 이것은 사무엘이 사사로서의 그의 직무롤 마칠 때 온 이스라엘 앞에 고백한 말과 같다(삼상 12:3, 5).
=====20:34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의 쓰는 것을 당하여 - 바울은 데살로니가(살후 3:7-12)와 고린도(고전 9:11-15;고후 11:7-12)에서처럼 에베소에서도 친히 노동을 하여 자신의 생계 문제를 해결했을 뿐만 아니라 동행들의 필요까지 채워주었다(18:3;고전 4:12; 살전 2:9). 그러나 모든 복음 전파자들이 자급 전도를 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은 아니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복음을 위해 일하는 자가 그 수고한 대가를 받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고전 9:14). 여기 바울의 경우는 당시 반대자로부터 탐욕을 위해 일한다는 어떤 빌미도 잡히지 않기 위한 특별한 예이다. 따라서 바울 역시 생계비를 받을 당연한 권리가 있었지만 그 권리를 다 주장하지 않고 손수 일했다는 것을 밝힌 것뿐이다. 여기서 바울이 한 일은 천막 깁는 일이며, 동행들이란 디모데, 에라스도, 누가 그리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가리킨다. 또한 여기서 '당하여'란 표현은 '휘페레테산'(* )으로 낮은 자리에서 함께한 자들을 섬겼다는 뜻으로 본서에만 나오는 단어다(13:36).
=====20:35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 바울이 인용한 주님의 이 말씀은 복음서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이 말씀은 복옴서에 나타난 예수의 사상과 행동에 그 정신이 이미 나타났으며 또한 눅 6:38과 비슷한 의미를 가진다. 바울이 이 말씀을 어떻게 알았을까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지만 가장 타당한 견해는 구전을 통해서 알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종류의 말씀이 초기에는 많이 있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이 전부 다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튼 바울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주 예수의 말씀으로 지금까지의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향한 권면의 결론을 삼는다. 그리하여 약한 사람들을 도우라 한다. 여기서 '약한 사람들'이 어떤 사람이냐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 영적인 면에서 믿음이 약한자를 가리킨다(Meyer, Bengel, Calvin). 경제적인 면에서 빈궁한 자를 가리킨다(Lenski 등). 병들고 신체상의 약점을 가진 가난한 자를 가리킨다(Matthew Henry, Pulpit). 와 의 견해가 본문의 문맥상 더 자연스럽고 또한 엡 4:28의 바울의 권고와도 일치한다.
=====20:36
무릎을 꿇고...함께 기도하니 - 지금까지 경고하고 권고한 것의 최종적인 결론으로서 기도로 마감하는 모습이다. 바울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은혜와 축복으로써만 신령한 열매를 거둘 수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제 주님을 향하여 겸손히 무릎을 꿇은 바울의 태도는 하나님께 향한 간절함과 동시에 이별의 슬픈 감정을 나타낸다고도 볼 수 있다. 일반적인 기도 자세로는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드는 것이었다(눅 18:10, 13). 그리고 다음과 같은 본문에서 바울이 기도한 내용의 본질적인 것을 짐작할수 있겠다(엡 1:15-23;빌 1:3-11;골 1:3-12;살전 1:2, 3).
=====20:37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 이것은 작별에 대한 유대인의 관례적인 인사를 소개했다기 보다는 작별에 대한 깊은 아쉬움을 견디지 못한 즉 감정을 억제하지 못한 모습을 여실히 보여준다. 목을 안았다는 것은 요셉이 그 아우 베냐민과(창 45:14) 아버지 야곱에게(창 46:29) 했던 것과 같다. 또한 '입을 맞추다'의 헬라어 '카테필룬'(* )은 미완료 시제로서 점잖게 한번 나누는 거룩한 관례적인 입맞춤이 아니라 사랑하는 마음에서 격정에 차서 몇번이고 연거푸 입을 맞추는것을 뜻한다(눅 15:20).
=====20:38
근심하고 - '오뒤노메노이'(* )는 '오뒤나오'(* ) 의 현재 중간태 분사로서 바울이 다시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고 한 말로 인해 '깊이 슬퍼했다', '몹시 괴로워 마음이 아팠다', '매우 충격을 받았다'는 뜻이다.
배에까지...전송하니라 - 정박 기간이 끝나서 이제 밀레도를 출항하려는 배에까지 전송하는 장로들의 모습을 기술함으로써 누가는 막을 내리고 있다. 이것은 바올에 대한 그들의 존경을 보여주는 아름다운 모습이다. 아무튼 본장에서 만남과 작별에 대한내용과 그 광경이 섬세하고도 생생하게 기술된 것은 본서가 당시 바울과 함께 동행하면서 모든 현장을 목격했던 누가의 기록이라는 것을 더욱 뒷받침한다.
앞장에서는 3차 전도 여행 중 특히 에베소에서의 행한 바울의 선교 사역을 다루었거
니와 본장에서는 3년 간의 심혈을 기울인 에베소 선교를 마친 시점에서 바울이 지금까
지 세 차례에 걸쳐 전도한 이방 교회들을 두루 방문하면서 그들에게 권면한 내용이 기
록되어 있다. 바울은 본장에서 제 1,2,3차 전도 여행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있으며 다
음 장에서 이어질 예루살렘 상경(上京)을 준비하고 있다. 본장의 내용을 고찰하기에
앞서 다음 세 가지 사항에 유의해 보기로 하자.
(1) 전도자 바울. 본장에서 저자는 사도 바울을 위대한 복음 전도자로 부각시키고
있다. 13장에서부터 시작된 바울의 전도 여행은 이방 선교의 전초 기지였던 안디옥으
로부터 출발하여(13:1-3) 세계 선교의 결실을 가져왔다. 제1차 전도 여행에서 바울을
갖은 핍박에도 불구하고 구르보와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그리고 루스드라 등 이
방 지역에서 복음을 전했으며(13:4-18) 제2차 전도 여행은 마게도냐 환상을 통하여 유
럽에서 이루어졌으니 곧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아덴, 그리고 고린도가 선교의
중심지였다(16:6-18:23). 또한 약 3년간에 걸친 제3차 전도 여행은 대부분 소아시아
서부 지방에서 이루어졌던 바, 바울은 주로 에베소의 복음화에 주력하였다
(19-1:21:16).
바울은 3차에 걸친 자유로운 전도 여행을 통하여 눈부신 이방 전도의 성과를 올렸으
나 사도 바울로 인하여 복음의 불길은 강력하게 번져나가고 있었다. 그는 라틴 세계와
서바나까지 복음을 전하고자 했으며(롬 15:24), 로마를 그의 복음 전파를 위한 전진
기지로 사용하고자 하였다.
본장에서 바울은 아시아에서의 마지막 체류지였던 밀레도에서 고별 설교를 통하여
자신의 세계 선교를 위한 전도자로서 얼마나 하나님과 사람 앞에 희생적인 삶을 살았
는가를 역설(力說)함으로써 후세대를 위한 모본(模本)을 보여주고 있다.
(2) 능력자 바울. 본서에서는 성자(聖子) 하나님의 능력이 사도들을 통하여 기사와
표적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행해진 이적들이 많이 생겨났
으니 이로써 예수와 초대 교회의 연속성이 증명되었다. 예수께서 그의 공생애 기간 동
안에 행하신 표적들은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능력이었고(요 5:17) 사도들이 행한 표적
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이었던 것이다(15:4).
본서에서는 베드로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이적을 행하는 능력이 나타나고 있거니와
(3:1-11) 바울 역시 이방 사역을 감당하는 가운데 여러 가지 이적을 행하는 능력자로
묘사되어 있다. 바울은 제 1차 전도 여행시에 미신의 온상지(溫床地)였던 구브로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과시했으며(13:4-12)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도 많은 표적과 기사를
행하였으니(14:3,10) 이로써 바울은 더욱 용기를 가지고 복음을 증거할 수 있었다. 본
장에서는 바울이 죽은 유두고를 소생(蘇生)시키는 장면이 등장하고 있거니와 그로 인
하여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은 사람들에게 많은 위로를 주었다.
(3) 교회 지도자 바울. 저자는 바울을 위대한 전도자와 능력자로 묘사하는 것 외에
도 본장에서는 특별히 교회 지도자로서의 바울 면모(面貌)를 강조하였다. 본서에 나오
는 바울의 설교들은 회당의 유대인 청중들이나(13:16-41) 이방인을 향한 것이었으되
(17:22-31) 본장에 이르러 바울은 자신의 사역을 정리하고자 1,2,3차 전도 여행을 통
해 결실을 맺은 소아시아와 마게도냐 및 아가야 지역의 성도들을 방문하고 그들의 신
앙을 돈독히 하기 위해 권면의 말씀과 강론을 베풀었다. 특히 밀레도에서의 바울의 설
교는 에베소 교회의 지도자들인 장로들을 대상으로 한 설교로서 그는 이 지역에 대한
자신의 선교 활동을 마감하는 시점에서 지나온 자신의 목회 경험에 비추어 장로들을
교훈하였다. 그는 전생애를 바쳐 교회에 헌신하였던 바, 그의 선교 활동은 단지 복음
을 전파하는 것으로 그치지 아니하고 복음을 영접한 자들에게 철저한 교육을 실시함으
로써 굳건한 신앙 위에 설 수 있도록 양육(養育)에도 혼신(渾身)을 기울였던 것이다.
이러한 바울의 모습은 그가 틈이 날 때마다 서신(書信)으로 각 교회에 안부하며 위
로와 교훈을 아끼지 않았다는 사실에서도 잘 알 수 있다. 저자 누가는 본장을 통하여
자신이 처했던 당시의 혼란스런 상황 속에서 훌륭한 교회 지도자로서의 바울상(像)을
부각시킴으로써 바람직한 교회 지도자의 모형(模型)을 제시하였다.
한편 본장의 내용은 세 부분으로 나뉜다. 첫째 단락은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재차 방문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으며(1-6절), 둘째 단락은 드로아에서 바울이 죽은 유
두고를 살리는 이적 이야기이며(7-16절), 셋째 단락은 밀레도에서 행한 바울의 고별
설교를 수록하고 있다(17-38절).
1.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방문함(20:1-6)
본문은 약 3년간에 걸친 에베소에서의 사역을 마친 바울 일행이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방의 교회를 재방문(再訪問)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시간적으로는 약 10개월 가량
걸린 여정(旅程)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본문의 기록은 유달리 짧다. 다음 세 가지 항목
을 통하여 본문의 내용을 상고해 보기로 하자.
(1) 확산되는 복음. 팔레스틴의 한 모퉁이에서 시작된 복음은 사도들에 의하여 세계
곳곳에 확산되었거니와 본문은 그 사실을 확연히 보여주고 있다. 동서양(東西洋)의 교
차 지점이라 할 수 있는 에베소에서의 전도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지금의 구라파 지방
인 마게도냐를 향하여 떠난 바울 일행은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일루리곤 등지
를 두루다니며 교회를 순방(巡訪)하며 복음을 널리 전파하였다. 이 지역은 제 2차 전
도 여행 때 이미 복음이 전파된 곳이었다. 또한 마게도냐를 거쳐 도착한 지방인 헬라,
즉 지금의 아시아 지방 역시 복음이 전파된 곳이었다. 바울은 이번 여행을 통하여 마
지막으로 유럽과 아시아 교회를 방문하여 돌아보고 권면하였으며 복음이 들어가지 않
은 곳곳에 복음의 씨앗을 심었던 것이다(롬 15:19).
바울의 일행이 에베소를 출발하여 마게도냐와 헬라의 고린도, 소아시아의 드로아를
일련의 환(環)모양과 같이 여행하였다는 사실은 복음이 동서 대륙을 연결하는 고리 역
할을 하였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있는 역사적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온갖 반대와 저항에도 불구하고 복음은 서방(西方)세계로까지 진출하였던 것이다.
이제 바울은 로마 전도와 더 나아가 라틴 세계, 그리고 서바나 전도를 꿈꾸고 있었으
며 그것을 위하여 예루살렘으로의 마지막 여행을 서둘렀다.
(2) 교회를 위한 바울의 사역. 바울이 이 여행 기간 동안 특별히 관심을 갖고 시행
한 일은 예루살렘으로 곤궁한 신자들을 돕기 위하여 연보를 거두는 일이었다. 바울은
전에도 수리아 안디옥 교회에서 이런 연보를 한 적이 있었으니(11:27-30) 이 연보는
그리스도의 지체된 각 교회가 한 몸이라는 사실을 상징해 주는 행위였다. 그는 마게도
냐 지방과 아가야 지방의 모든 이방 교회들에게 이 연보를 준비시켰다(롬 15:25-32;고
전 16:1-4;고후 8,9장). 바울의 이러한 사역은 이방인 신자들로 하여금 모교회(母敎
會)인 예루살렘에 대한 중요성을 깨닫게 해주며, 동시에 예루살렘 교회로 하여금 이방
교회들의 생동하는 신앙을 확실하게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한편 바울은 이 기간 동안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연보의 모금 이외에도 고린도후서
와 로마서를 기록하는 등 교회를 양육하는 사역을 감당하였다. 그는 어디에 가나 자신
이 사역한 교회에 대한 염려와 관심이 지대했던 바, 아덴에서와 고린도에서 데살로니
가 교회에 대한 염려 때문에 그곳의 교인들에게 서신을 보내어 권면했던 것처럼 드로
아에서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대한 염려로 인해 근심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게도냐
의 빌립보에서 디도를 통하여 고린도 교회에 대한 위로의 소식을 듣자(고후 7:5-16)
여기서 바울은 큰 위안을 얻고 고린도후서를 기록하여 디도 편으로 보내었다.
또한 그는 아가야의 수도(首都) 고린도에서 약 3개월간 머무는 동안 가이오의 따뜻
한 대접을 받으면서(롬 16:23) 로마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로마 교회에 보내는
서신을 기록하였다. 이렇듯 바울은 복음의 진리를 설명하며 신앙의 성숙을 도모(圖謀)
하기 위해서 노심 초사(勞心焦思)하였으니 마치 양을 치는 목자(牧者)의 심정과 같았
다.
(3) 선교의 동역자들. 본서 전체를 통하여 바울의 선교 사역은 결코 혼자만의 힘으
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물론 바울이 이방 사역에 있어서 중추
적 역할을 담당하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여러 신실한 이방인 동역자들이 바울에게 협력
해 주었기 때문에 어려운 난관에도 불구하고 이방 선교가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이다.
본문에 나타난 바울의 동역자 칠인(七人), 즉 보사더와 아리스다고, 세군도, 가이오,
디모데, 두기고 그리고 드로비모 등은 모두 마게도냐와 아시아 등지의 이방 교회의 지
도자들로서 각 교회의 헌금을 전달하는 사명을 띠고 바울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가고자
모였다. 그들은 바울에게 복음을 전해 받은 사람들인 동시에 바울과 함께 복음 증거의
사역을 맡은 동역자들이었으니 그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상경하는 바울의 마음은 심
히 흡족하였을 것이다.
* 이방 교회의 지도자 칠인(七人). 본문에 등장하는 바울의 동행인들은 모두 세 지
역 교회, 즉 마게도냐, 갈라디아, 아시아 교회를 대표하는 인물들이었다. 반면에 고린
도 교회와 빌립보 교회의 지도자들은 등장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당시 고린도 교회는
내분(內分)이 있었으므로 바울 자신이 고린도 교회를 대표했을 것으로 보이며, 누가가
빌립보 여행에 참여하였으므로 빌립보 교회를 대표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이방
교회를 대표하는 자들로서 자교회에서 거둔 헌금을 가지고 예루살렘 교회의 빈궁한 성
도들에게 전달하고자 하였다. 본 주제 강해에서는 본문에 나타난 이방 교회의 지도자
들이 인적 사항을 도표를 통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
| 이 름 | 인적사항 | 대표 교회 | 참조 구절 |
+---------+--------------------------------+----------------+------------------+
| 소바더 |베뢰아 출신, 부로의 아들. 바울의| 마게도냐 교회 | |
| |친척 소시바더(롬 16:21)와 동일 | | |
| |인물인지는 확실치 않음. | | |
+---------+--------------------------------+----------------+------------------+
| 아리스 |데살로니가 출신, 19:29과 동일 인| 마게도냐 교회 |19:29;27:2;골 4:10|
| -다고 |물로서 드로비모, 누가와 함께 예 | |;몬 1:24 |
| |루살렘에서도 동행하였고, 후일에 | | |
| |는 로마까지 동행하였다. | | |
+---------+--------------------------------+----------------+------------------+
| 세군도 |데살로니가 출신, '세군도'는 라틴| 마게도냐 교회 | |
| |어로 '두번째'라는 뜻. | | |
+---------+--------------------------------+----------------+------------------+
| 가이오 |더베 출신, 더베는 루스드라와 가 | 갈라디아 교회 | |
| |까운 곳이므로 디모데와 친한 사이| | |
| |로 추측됨. | | |
+---------+--------------------------------+----------------+------------------+
| 디모데 |루스드라 출신, 외조모 루이스와 | 갈라디아 교회 |16:1-3;17:14;18:1-|
| |어머니 유니게로부터 신앙을 물려 | |5;19:22;고전 4:17;|
| |받음. | |고후 1:19;빌 1:1;2|
| | | |:19-23 |
+---------+--------------------------------+----------------+------------------+
| 두기고 |아시아 출신, 바울이 가장 신임했 | 아시아 교회 |엡 6:21,22;골 4:7-|
| |던 조력자로서 로마 옥중에도 바울| |9;딤후 4:12;딛 3:1|
| |과 함께 있었으며, 에베소서와 골 | |2 |
| |로새서를 전달함. 후에 순교했다고| | |
| |알려짐. | | |
+---------+--------------------------------+----------------+------------------+
| 드로비모|에베소 출신, 아리스다고와 함께 | 아시아 교회 |21:19;딤후 4:20 |
| |예루살렘까지 동행함,바울과 함께 | | |
|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갔다가 유대 | | |
| |인들로부터 성전 모독죄의 누명을 | | |
| |씀. | | |
+---------+--------------------------------+----------------+------------------+
2. 죽음 유두고를 살림(20:7-12)
본문에는 바울이 드로아에 머무는 동안 하나님의 능력으로 기이한 일을 행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앞장에서도 바울은 에베소에 머무는 동안 병든 자와 귀신들린 자를 고
치는 놀라운 이적을 베풀고 있는바, 이 사건은 베드로가 죽은 다비다를 살린 기사
(9:36-43)와 더불어 본서에 등장하는 두 개의 소생 기사 중의 하나이다. 본장을 상고
하기 위하여 다음 사항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1) 사건의 배경. 복음은 갈라디아와 아시아 그리고 마게도냐와 아가야로부터 널리
퍼져나가 이방 세계 곳곳에 들어갔으니 바울은 비록 드로아에서 복음을 전하지는 않았
으나(고후 2:12,13) 그곳에서 신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바울과 누가는 이미 그곳에
도착해 있던 이방 교회의 대표들과 함께 떡을 떼며 그들에게 말씀을 강론하였다. 드로
아의 신자들은 초대 교회가 그러했듯이 주(主)의 부활을 기념하기 위하여 안식 후 첫
날에 모여 떡을 떼었다(고전 10:16,17;11:17-34). 바울의 일행은 드로아의 신자들과
함께 기쁨으로 떡을 떼며 성도의 교제를 나누었으며, 바울은 그들의 신앙이 날로 성숙
되기를 간절히 염원하는 심정에서 한밤중까지 진리의 말씀을 강론하였다. 이때 신자
중의 한 사람이었더 유두고라는 청년이 창(窓)에 걸터 앉아 깊이 졸다가 떨어져 죽은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에 바울은 그의 생명을 다시 소생시킴으로써 드로아 신자들
에게 큰 힘과 용기를 주는 메시지를 남기고 떠나게 되었다.
(2) 이적의 의미. 본문의 이적 기사는 구약의 전승과 더불어 예수의 전승과 병행을
이루고 있으며 연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시사(示唆)해 준다. 바울이 죽은 유두
고 위에 엎드려서 살려낸 이야기는 엘리사가 그와 똑같은 행동을 취하여 수넴 여인의
아들을 살린 이야기를 상기시키고 있으며(왕하 4:34),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의 아들을
살릴 때 아이 위에 몸을 세 번 펴서 죽은 아이를 살려내는 이야기와 병행을 이룬다(왕
상 17:17-24). 또한 이 이적 기사는 예수께서 누가복음에서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
려낸 이적과(눅 7:11-17)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기사를 연상케 한다(막 5:35-43).
구약성경의 위대한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했던 것처럼 예
수께서도 똑같은 일을 행하심으로 구약성경의 맥락과 궤를 같이함을 보여주셨고, 예수
께서 기사와 이적에 의해 능력을 베푸셨듯이 그가 택하여 세운 바울 역시 같은 일을
행하였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본문의 이적 기사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 역사가 구약
시대부터 사도 시대까지 계속적으로 계승되어 왔음을 암시하고 있다. 이 극적(劇的)인
바울의 이적을 통하여 그 자리에 함께 있던 모든 이들은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현
존(現存)을 느낄 수 있었다.
3. 에베소 장로들에게 행한 바울의 고별 설교(20:13-38)
드로아를 떠난 바울은 유대교에서 두번째로 큰 순례 절기인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도착하기 위하여 에베소에 들리지 않고 직접 밀레도로 향하였다. 바울은 유대인들의
음모 때문에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도착할 계획을 포기한 적이 있었다. 바울은 하루라
도 빨리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이방 교회의 연보를 전해주고자 에베소만의 입구를 가로
질러 항해하는 직선 항로(航路)를 택한 것이다.
한편 바울은 3년간의 심혈(心血)을 기울여 목회한 에베소 교회를 염려한 까닭에 그
교회의 장로들을 청하여 마지막으로 위로와 권면의 말씀을 베풀었다. 본문에 수록되어
있는 바울의 고별 설교에 관해 살펴보기로 하자.
(1) 특징. 본서에 수록되어 있는 바울의 많은 설교들 중에서 본문의 설교는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행한 설교라는 점에서 유일한 것이며, 유언(testament) 형식으로 되어
있다는 점에서 특이점을 지닌다. 바울이 본서에서 행한 세 차례의 전도 설교과
(13:16-41;14:15-17;17:22-31) 다섯 차례의 변증 설교(22-26장)는 주로 비그리스도인
들을 대상으로 한 설교이나 여기에서는 그리스도인 중에서도 교회의 장로들을 대상으
로 한 것이다. 더욱이 신학적 주제나 구성 면에서 바울의 서신(書信)들과 매우 유사하
다.
바울은 성도들을 격려하고 권면하기 위하여 서신들을 기록하였거니와 본문의 설교는
마치 바울 서신의 축소판과도 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것은 특히 용어 사용에 있어
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바, 바울이 본문에서 사용한 '교회'라는 용어는 서신에서 보
편적인 의미로 자주 사용된 단어이다(고전 1:2;고후 1:1;살전 1:1;살후 1:1). 또한 네
개의 특정한 서두 어구가 사용되어 있는 바, 18절의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까 ? '(you
know), 22절의 '여러분이 보는 대로 이제'(and now) 등의 문구는 바울의 다른 설교들
로부터 구분되는 독특한 어휘적 특징이라 할 수 있다.
(2) 내용 분석. 바울의 설교는 내용상 네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부분은 과거
를 다루고 있거니와 에베소에서의 사역을 생생하게 재현(再現)하고 있다(18-21절). 그
는 유대인들의 온갖 비방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자신의 헌신적인 삶에
관하여 증거하였으며(19절), 이는 서신의 많은 부분들과 병행을 이룬다(고전 10:33;고
후 2:4;살전 2:1-12).
둘째 부분은 현재 상태 즉, 투옥(投獄)을 향한 바울의 예루살렘 여행을 묘사하고 있
다(22-24절), 그는 예루살렘에서 결박한 환난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았으나 복음 사역
을 완수하는 데 있어서는 생명까지도 바치고자 한다는 굳은 의지를 표명하였다(21:13;
딤후 4:7).
셋째 부분은 미래를 다루고 있거니와 개인적으로는 바울의 순교가 암시되어 있고 교
회적으로는 이단(異端)의 출현이 언급되어 있다(25-31절). 바울은 교회가 외적으로는
박해에 시달리고 내적으로는 배교(背敎)의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을 예고함으로써(딤전
1:19,20;4:1-5;고후 1:15;2:17,18;3:1-9) 장로들에게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네번째 결론 부분은 축복(benediction) 및 약한 자를 돌보라는 마지막 권면이다
(32-35절). 바울의 축복에 관한 문구(32절)는 서신에 나타난 바울의 용어들과 일치한
다(롬 8:17;고전 8:1;16:23;살전 5:11).
(3) 복음을 위한 바울의 정신. 본문의 고별 설교를 통하여 바울의 복음에 대한 세
가지 위대한 정신을 엿볼 수 있다. 첫째는, 복음 사역에 대한 자부심이다(26절). 바울
은 에베소에서의 3년간에 걸친 사역은 물론이거니와 그의 삶 전체를 조명(照明)해 볼
때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 있어서 하나님과 사람 앞에 부끄럼 없이 충성하였다(고후
7:2). 그리하여 바울은 어디에 가나 자신을 본받으라고 담대하게 권면할 수 있었다.
둘째는, 자수 생활(自手生活)의 정신이다(33,34절). 바울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손수 노동(勞動)을 하여 자신뿐 아니라 동행자들의 생계까지도 유지하였으니 이는 사
도(使徒)의 특권을 포기함이 아니었으며 신자들에게 누(累)를 끼치지 않기 위함이었
다. 이로써 바울은 어디에 가나 사도로서 떳떳이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바울의 위대한 정신은 주려는 정신이다(35절). 바울은 자신을 본받아
장로들이 신자들을 돌볼 때 물질적인 보답을 생각하지 말고 값없이 헌신할 것을 당부하였다. 더 나아가 오히려 주는 것이 복이 있다고 가르치고 있거니와(눅 6:38) 바울은 종종 자신의 윤리적 교훈을 예수의 가르침과 연결시켰다(롬 12-14장;살전 4:1-12;빌 2:5-11). 복음 사역자로서의 바울의 삶은 생명까지도 아끼지 않고 내어 주신 예수를 전적으로 따르는 삶이었고 신자들은 바울을 모본(模本)으로 하여 희생적인 삶을 살아야 할 것이었다.
* 기록되지 않은 예수의 말씀. 바울이 본문에서 인용한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35절)는 예수의 말씀은 복음서의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말씀이다. 본 주제 강해에서는 복음서에 기록되지 않았으나 자주 인용되었던 예수의 말씀들을 찾아보기로 하자.
(1) "그러나 너희가 작은 것을 늘리려 하면 보다 큰 것이 작아질 것이다"(베자 사
본).
(2) 하나님의 아들이 말씀하시되, "모든 불법에 저항하고 불법을 증오하여 제지하라"(바나바 서신 4).
(3) 이리하여 그가 말씀하시되, "나를 보기를 원하면 나의 왕국에 머무르기를 원하는 자들은 수난과 고통을 지고 나를 받아들여야 한다"(바나바 서신 7).
(4) 예수는 그의 제자들에게 "큰 일을 구하라 그리하면 땅의 일도 이루어지리라"고 말씀했다(오리게네스, de Orat., 2).
(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르시되 "무슨 일에서든지 너는 나를 발견할 수 있는 것처럼 또한 여기에서 너를 심판하리라"(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Juisdiver,
40).
(6) "육신을 깨끗케 하고 영혼을 흠없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영생을 받게 되리
라"(로마의 클레멘트, Cop., ii 8).
(7) "병든 자를 위하여 나는 병을 앓았고 배고픈 자를 위하여 나는 주림을 당했으며 목마른 자를 위하여 목마름을 당했다"(오리게네스, in Matt., xiii 2).
(8) "너희가 사랑으로 너희 형제를 바라 볼 때를 제외하고는 기뻐하지 말라"(제롬,
in Ephes., V 3).
(9) 부활하신 후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와 사도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나를 잡아보고 나를 만져보라. 그러면 내가 실체없는 영이 아니라는 것을 알리라"(이그나티우스, ad Smyrn, 3).
(10)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되, "선은 반드시 임하게 된다. 그러나 선을 임하게 하
는 자는 복이 있도다"(클레멘트, Hom., xii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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