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1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 자신이 곤궁에 처해 있음을 알리며, 그 곤궁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간절함을 호소하기 위해 사용되는 상투적 표현이다(54:1;55:1;56:1;59:1;61:1).
믈들이 내 영혼까지 흘러 들어왔나이다 - 이는 물이 자신을 덮고 자신의 목구멍 으로 들어가서 숨을 쉬지 못하게 된 것 만큼의 곤궁한 상황에 도달했음을(for the waters have come up to my neck, NIV, RSV)보여주는 상용적 표현이다(18:4;42:7;88:7, 17;욥 22:11;27:20;욘 2:5). 물론 여기서 '물'은 2절의 '수렁'이나 '큰물'과 마찬가지로 죽음의 영역이나 그 영향력을 뜻하는 표현이다(Anderson).
=====69:2
설 곳이 없는 깊은 수렁 - 빠져들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치면 칠수록 더욱 깊이 빠져 들게 되는 늪을 뜻하지만 여기서는 심각한 환난이나 죽음의 위협에 대한 상징적 표현이다. 따라서 이는 저자의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고통을 가중시켜오는 두려운 상황을 가리킨다.
깊은 물에 들어가니 큰물이 내게 넘치나이다 - 사람이 본의 아니게 물에 빠져 거기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허우적 거리면서 죽어가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그런데 '큰물(* , 쉬볼레트)은 '넘치다'는 뜻의 동사 '솨발'(* )에서 나온 단어로서,정적(靜的)으로 가만히 있는 물이 아니라 동적(動的)으로 거세게 덮쳐오는 물을 가리킨다. 그리고 '넘치나이다'(* , 쉐타파트니)의 기본형인 '솨타프'(* )는 '질주하다', '창궐하다', '휘말아 삼켜버리다'의 뜻으로서, 홍수가 모든것을 휩쓸어가 버리듯 환난니 급속도로 몰려오는 까서을 가리킨다(Hamilton, Victor P.).
=====69:5
여기서 다윗은 40:122에서처럼 하나님을 향하여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다가 급변하여 자신의 죄를 자백한다. 이는, 원수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잘못이 없으나 하나님 앞에서는 허물많은 인생에 블과함을 자각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우매함을 아시오니 - 원문대로 하면 '하나님이여 당신께서는 나의 우매함을 아시오니'로 번역된다. 그런데 '아시오니'(* , 야다타)라는 동사는 그 자체가 '당신께서 아신다'의 뜻을 갖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별도의 2인칭 주어 '아타'(* )를 첨가함으로써 하나님이 자신의 '우매함을'아시되 분명히 아신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 같은 강조는, 다윗이 자신의 '우매함'의 죄를 확실히 인식한 결과일 것이다. 한편, '우매함'(* , 이웰레트)은 불분명한 판단력에 따른 '도덕적 결함'(Goldberg)혹은 '죄의 욕구'(Keil)를 뜻한다. 이와 같은 '우매함'은 성경 도처에서 죄로 인정되고 있다(롬 1:21,22;갈 3:1). 그리고 '아시오니'의 기본형 '야다'(* )는 부부가 동침을 하는 과정을 거침으로써 상대에 대해서 잘 파악하듯이 체험적으로 분명하게 아는 것을 가리킨다(겔 15:7).
내 죄가 주의 앞에서 숨김이 없나이다 - 하나님께서 저자의 '우매함'을 알고계시되 너무나 분명히 알고 계시므로, 자연스럽게 저자의 '죄' 곧 '우매함'은 숨겨질 까닭이전혀 없는 것이다. 다윗의 이러한 깨달음은,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라고 하는 그의 또 다른 시편(139:1-4)과 너무나 잘 부합된다.
=====69:6
만군의 주 여호와 - 우주 만물의 주(主) 이시며, 언약에 신실하신 분이며 또한 크신 능력으로써 대적들을 파하는 왕(王)이신 하나님을 암시하는 이 칭호는(VangEmeren)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에게 특별한 보호의 은총을 베푸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시사한다(7:5).
주를 바라는 자로 나를 인하여 수치를 당케 마옵소서 - '주를 바라는 자'는, 다른 많은 백성들이 다윗의 대적을 좇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계속 다윗을 추종하던 사람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곤경에 처해 있었던 다윗에게 하나님이 구원의 손을 뻗치 시리라는 것을 믿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주를 바라는 자'로 불리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만일, 이들의 기대와는 달리 하나님이 구원의 손길을 뻗치지 않으실 경우, 그들은 불의한 자들로부터 조롱을 당하게 되며 또한 그 자신들은 낙심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69:7
내가 주를 위하여 훼방을 받았사오니 - 다윗이 원수들로부터 받았던 고난이 그의 개인적 실수나 잘못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었음을 말해준다. 다윗은 다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 곧 정도(正道)대로 행하였을 뿐이다. 이러한 탄식어린 고백은 그가 평소에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기 위해 얼마나 열심이었던가를 잘 드러내어 준다(44:22;렘 15:15 참조).
수치가 내 얼굴에 덮었나이다 - 44:15와 83:16에도 이와 유사한 표현이 나온다. 여기서 '수치'(* , 켈림마)는 '공적인 굴욕으로 인하여 입게 되는 마음의 상처' 혹은 '패배와 속박으로 인한 정신적상처'를 가리킨다삼상 20:34;사 50:6).
=====69:8
다윗이 오직 하나님이 원하시는 한 길을 걸어가는 과정에서 심지어 가족들로부터도소외되는 처지에까지 이르렀다는 뜻이다. 이것은 마치 예수께서 혈육의 어머니와 형제들에 의해서까지 오해를 받았던 것과 같다(마 13:57, 58;눅 2:48;요 7:1-10). 예수께서는 바로 이와 같은 오해로 인하여 실로 엄청난 고독을 경험하셔야만 했다(마 8:20).
내가 내 형제에게는 객이되고 - 여기서 '객이 되고'(* , 무자르)의 기본형인 '주르'( )는 원래 '고개를 돌리다'의 뜻이며(KB) 여기서는 수동형이므로 '고개 돌림을 당한' 혹은 '혐오의 대상이 된' 등의 뜻으로 이해될 수 있다. 실제로 다윗은 그 형제들, 특히 장형(長兄) 엘리압으로부터 많은 미움과 시기의 대상이 되었다(삼상 16:6-13;17:28). 자신이 소속된 공동체, 특히 그중에서도 가족에 대한 의존성이 유달리 강했던 고대 사회에서 가족으로부터 소외당하는 것은 충격적이기에 충분했을 것이다(Anderson).
=====69:9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는 삼키고 - 여기서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은 협의적으로는 (1) 언약궤를 예루살렘에 안치한 일(삼하 6:12-19) (2) 언약궤를 훌륭하고 영구적인 장소에 안치하려는 염원(132:2-5;삼하 7:2) (3) 성전 건축을 위해서 성심 성의껏 그 재료를 수집한 일(대상 28:11-18;29:2-5) (4)성전 건축과 관련해서까지 솔로몬에게 유언을 남긴 일(대상 28:9, 10, 20)등을 뜻한다(Rawlinson). 그러나 광의적으로는 하나님의 백성, 곧 언약 공동체를 성결하게 지키려는 일까지도 포함된다(Calvin).여기서 '열성'(* , 킨아트)은 '짙거나 붉은 빛으로 되다'라는 뜻이 있는 아랍어 동사에서 유래한 '카나'(* )에서 파생됐으며, 어떤 일을 이루기 위한 뜨거운 열정을 가리킨다(Keil). 따라서 '하나님의 집'을 위하는 그 뜨거운 열정이 하나의 불꽃이 되어 다윗의 뼈 속에서 타오르는듯 끊임없이 거세게 일었음을 시사한다(렘 20:9;23:9, Keil).
주를 훼방하는 훼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 문자적으로는 '당신을 훼방하는 자들의 훼방이 나에게 떨어졌나이다'의 뜻이다. 이는 다윗이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에 몰두함 우로써 불의한 자들로부터 당한 불이익을 가리킨다. 다윗이 이러한 불이익을 예상치 못한 것은 결코 아니었을 것이다. 다윗은 다만, 주님의 일에 온 정성을 기울이는 것이 자신의 마땅한 도리임을 알고 그 결과에 개의치 않은 채 그 길을 행하였을 뿐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물욕(物慾)에 사로잡힌 자들에 의해서 더럽혀진 성전을 청결히 하는 일이 당위적(當爲的)이므로 종교지도자들로부터 거센 반발을 받게 될 것을 뻔히 예상하면서도 그 일을 담대히 수행하신 바와 동일하다(요 2:13-16). 그래서 사도 요한은, 예수께서 성전을 청결케 하신 그 일에 관한 제자들의 깨달음을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殿)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말하면서, 예수님의 그 열심과 다윗의 열심을 동일시하였다(요 2:17).
=====69:10
내가 곡하고 금식함으로 내 영혼을 경계하였더니 - 다윗은 불의한 핍박자들에게 무자비한 무력 공격을 감행하거나 혹은 무절제한 욕설과 비난을 가하지 않았다. 다윗의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은 매우 잘 단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단단하기 그지없는 강철이라도 부드럽게 할 수 있었다(Calvin). 다윗은 다만, 하나님의 집이 당하는 불행에 대하여 애통하며 금식하여 기도 했을뿐이다(Keil). 다윗의 금식에 대해서는 35:13과 109:24 그리고 삼하 12:16, 22을 참조하라. 한편, '내 영혼을 경계하였더니'(* , 나프쉬)는 원문상으로 다만 '나의 영혼'의 뜻이다. 따라서 개역 성경은 문맥에 비추어 의역한 것이다. 원문대로 하자면 여기의 '나의 영혼'을 본 문구의 주어로 볼 필요가 있다. 그럴 경우, 본문은 '나의 영혼이 곡하고 금식하였더니'로 번역될 수 있다(NIV). 이처럼 '나의 영혼'이라는 허다하다(62:1;63:5, 8).
=====69:11
내가 굵은 베로 내 옷을 삼았더니 - 10절의 '내가 곡하고 금식함으로 내 영혼을 경계하였더니'와 같은 뜻이다. 왜냐하면, '굵은 베'는 금식할 때에 혼히 착용했던 옷이기 때문이다(왕상 21:27;느 9:1;단 9:3).
=====69:12
성문에 앉은 자가 나를 말하며 - '성문'은 재판관에 의해서 재판이 행하여지던 곳이며(창 19:1;룻 4:1) 또한 상인들과의 상거래가 이루어지던 곳이기도 하다. 따라서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한담(閑談)이나 잡담을 늘어놓는 곳이었다. 그러나 여기의 '성문에 앉은 자'는 비록 복수(複數)이기는 하지만, 한가하게 앉아있는 일반 서민들을 가리키지 않는 것 같다. 본 문구 중 '앉은 자'(* , 요시베)의 기본형인 '야솨브'(* )가 공직(公職) 수행과 관련한 좌정(座定)을 가라킬 때 사용된다는 점에서(왕상 2:12;왕하 13:13), 백성들의 송사를 담당하는 재판관이나 거기에 버금가는 왼로(元老)들을 뜻할 것이다. 한편, '나틀 말하며'(* , 야 시후)의 기본형인 '시아흐'(* )는 '되풀이하며 험담하다'의 뜻도 내포한다(Gray G. Cohen). 결국 이는 상류 계급의 인사들이 공무(公務) 중 에도 다윗을 험담했음을 가리킨다. 추측컨대, 이같은 상류층의 다윗에 대한 험담은, 백성들의 마음을 다윗으로부터 멀어지도록 하기 위해서 압살롬이 불의한 재판을 했던 사실(삼하 15:2- 6)과 일맥 상통할 것이다.
취한 무리가 나를 가져 노래하나이다 - 문자적으로는 '폭음을 한 자들의 노래가 있나이다'라는 뜻이다. 본문은 심지어 술주정뱅이들의 입에까지 다윗을 조롱하는 말이 오르내리는 상황이었음을 말해준다. 이러한 불경건한 조롱의 노래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께 거룩한 찬송을 드렸던 다윗 자신의 내면 세계와 극명한 대조를 보여준다(Briggs).
=====69:13
여호와여 열납(悅納)하시는 때에...주제 기도하오니 - '여호와'는 하나님의 언약적신실성을 강조할 때 사용되는 호칭이다. 저자는 이 같은 호칭을 사용함으로써 당신의 백성을 지키시겠다는 언약이 신속히 이해되기를 하나님께 암시적으로 촉구하고 있다.그리고 '열남하시는 때'에 대해서는 두 가지 해석이 있다. 하나는, 이때를 현재적으로 보는 해석(Matthew Henry)이며 또 다른 것은, 이를 미래적으로 보는 해석(Calvin)이다. 그러나 본문에서 다윗은 현재 닥친 위기 상황 중에서 하나님께 기도드리고 있다는점에서, 위의 두해석 중 첫째 것이 보다 타당성이 있다. 사실, 신자들에게 있어서는 환난의 때가 오히려 하나님께서 '열납하시는 때'임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이 원수들로 말미암아 고통을 심하게 당하고 있을수록 그 백성에 대하여 더욱 간절한 동정심을 지니실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자들에게는 고통이 극심하여하나님의 신실성을 의심하기 쉬운 때가 바로 '열납하시는 때'요 그래서 '기도해야만 하는 때'이다.
많은 인자와 구원의 진리로 내게 응답하소서 - 얼핏 생각하기에 본문은 환난을 당하고 있는 지금 당장이 하나님이 '열납하시는 때'임을 말하고 있는 앞 문구와 모순되는 듯하다. 왜냐하면 본 문구는 기도 즉시 그 기도가 '응답'되리라는 시사를 주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신자들의 기도를 '열납하시는 때'와 구쳬적으로 응답하시는 때가 동일하다고 봐서는 안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신자들의 기도를 '열납하심'으로써 신자들의 곤고한 형편을 파악하신 다음에는, 당신의 선하신 뜻(롬 12:2)에 따라 적절한 때에 백성을 구원하기 위한 은총을 베푸시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인자와..진리'는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시는 대표적 동기들이다(57 :3). 그중 '인자'(* , 헤세드)는 하나님께서 언약 백성들을 향하여 품고 계시는 결코 변할수 없는 사랑을 뜻한다(51:1). 그리고 '진리'(* , 에메트)는 당신의 원수들을 징벌하게끔 만드는 공의로운 기준이라는 뜻으로 자주 사용되었다(57:3). 그러나 이 문맥에서는 좀 다른 뜻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 단어 앞에 '구원'이라는 한정적 단어가 놓여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진리'는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반드시 구원하시는 공의적 성실성을 가리킨다고 봐야 할 것이다(54:5;91:4).
=====69:14
나를 수렁에서 건지사 빠짖 말게 하시고 - '수렁'은 2절에서 '설 곳이 없는 깊은 수렁'으로 표현되고 있으며, 구체적으로는 극한 환난을 가리킨다. 이처럼 기자는 '수렁'이나 '물'(15절)과 갈은 이미지를 거듭 사용함으로써 자신에게 닥친 위협의 정도가 매우 심각한 점을 토로하고 있는 것이다.
나를 미워하는 자 - 원문에는 복수로 되어 있다. 사실, 다윗을 대적하는 자들은 도처에 깔려 있었다(4절).
깊은 물 - 이에 대해서는 2절 주석을 참조하라.
=====69:15
엄몰(淹沒)하거나 - 히브리어상으로 2절의 '넘치나이다'와 동일한 동사이다.
깊음이 나를 삼키지 못하게 하시며 - 여기서 '깊음'은 본절 앞 부분의 '큰 물'과 다를 바 없다. 따라서 '깊음이 나를 삼키지'는 본절 앞부분의 '큰 물이 나를 엄몰하거나'와 거의 동일한 뜻이다. 이처럼 저자는 유사 어구의 반복 사용을 통하여, 당면한 상황의 다급성과 기도의 간절성을 강력하게 표현하고 있다. 웅덩이로...그 입을 닫지 못하게 하소서 - '웅덩이'(* , 베에르)는 파서 만든 우물(창 21:25, 7), 구덩이(창 14:10) 혹은 무덤이나 스올(55:23 참조) 등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마치 결코 만족할 줄 모르는 식욕을 지닌 괴물처럼 은유적으로 표현되어 있다(Anderson).
=====69:16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선하시오니 - '여호와'는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성을 강조하는 명칭이라는 점에서,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을 가리키는 '인자'(* )와 대단히 잘 어울린다. 시인은 이러한 적절한 표현을 통해서, 당신의 보호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언약이 신속히 이행되기를 촉구하고 있다. 특히 '주의 인자하심이 선하시오니'는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은 절대로 변할 수 없음을 말하며 하나님께서는 환난을 당하고 있는 백성들을 필연적으로 구원하신다는 뜻이기도 하다.
긍휼(* ,레헴) - '깊이 사랑하다'는 뜻의 '라함'(* )에서 파생된 것으로 자연적인 유대(紐帶)에 뿌리를 둔 깊은 사랑을 뜻하며 특히 윗 사람의 아랫 사람에 대한 사랑을 말한다. 성경에서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동정심을 가리키는 데 주로 사용된다(왕상 8:50;렘 42:12).
=====69:17
주의 엎굴을 주의 종에게서 숨기지 마소서 - '얼굴을 숨기는 것' 혹은 '외면(外面)하는 것'은 타인에 대한 무관심이나 미움을 행위로 표현하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다윗은 하나님께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실 뿐더러 곤고한 형편에서 빨리 구출해내달라고 호소하고 있다.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 - '내게 응답하소서'가 이미 앞에서 두 번씩이나 반복되었다(13, 16절). 저자는 이러한 반복을 통하여, 또한 '속히'라는 단어를 덧불임으로써, 자신이 얼마나 곤궁한 형편에 처해 있었는지를 알리며 거기로부터의 구원을 강력히 탄원하고 있다.
=====69:18
내 영혼에게 가까이 하사 구속하시며 - '가까이 하사'라는 표현은 다윗이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사용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하나님이 자신의 기도를 열남하고 계시다고 느낄 만큼(13절)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확고했다. 여기서 다윗은 다만 자신의 기도 응답이 지연되고 있다는 사실과 관련하여, 그 응답을 촉구할 목적으로 이 표현을 쓴 것이다. 한편, '구속하시며'(* , 게알라)의 기본형인 '가알'(* )은 속전(贖錢)을 대신 지불하여 억압의 상태에서 구원해 내는 것을 가리킨다(출 6:6;사 52:3;렘 31:11). 이러한 표현은 본 구절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에 의한 구속 사역을 예표적으로 보여줌을 암시한다.
내 원수를 인하여 나를 속량하소서 - '내 원수를 인하여'는 '원수들의 음모나 흉계 혹은 비난(13:4) 때문에'로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Rawlinson). 시인은 만일 경건한 성도가 대적들의 억압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그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조차 경멸당할 우려가 있음을 걱정하고 있다(Anderson). 한편, '속량하소서'(* , 페데니)의 기본형 '파다'(* )는 앞 문구의 '가알'과 것의 동일한 뜻의 동사이다.
=====69:19
나의 훼방 - '훼방'(* , 헤르파)은 '비난하다' 혹은 '조룽하다'를 뜻하는 동사 '하라프'(* )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상대를 얕잡아 보고 도전적인 언사로서 비웃는 것을 가리킨다(삼상 17:10).
수치(* , 보쉐트) - '창피를 주다' 혹은 '부끄러워하다'의 뜻인 동사 '보쉬'(* )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외부의 모욕적 언행에 따라 극도로 창피한 마음을 느껴는 것을 가리킨다.
능욕(* , 켈림마) - '상처를 입히다'라는 뜻인 동사 '칼람'(* )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마음의 상처를 입을 만큼 치욕을 당하는 것을 가리킨다(삼상 20:34).
내 대적(對適)이 다 주의 앞에 있나이다 - 하나님께서 '대적'들이 본 시편 기자에게 행하는 횡포에 대해서 철저히 알고 게시는 까닭이 무엇인지를 말해준다. 즉, 하나님은 '대적'의 모든 횡포를 친히 보고 계시므로, 다윗의 고통도 알고 계시는 것이다.
=====69:20
훼방이 내 마음을 상하여 - 여기서 '훼방'은 대적들이 다윗의 과거 행적을 문제삼아 과장적으로 그에게 인신 공격을 가한 것을 말하는 듯하다. 한편, '상하여'(* , 솨브라)의 기본형 '솨바르'(* )는 '산산이 부서지다' 혹은 '산산 조각을 내다'의 뜻이다(출 34:1;신 9:17;10:2;사 21:9). 따라서 본문은 원수들의 '훼방'으로 인하여 다윗의 마음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음을 나타낸다.
근심이 충만하니(* , 아누솨) - 구약 성경에서 유일하게 사용된 동사이다. 기본형 '누쉬'(* )는 '아프다'의 뜻이며, 이 기본형과 직접 관련있는 어떤 단어도 여기의 '아누사'를 제외하고는 성경 안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이 단어는 본 문맥에서, 마음의 고통으로 인하여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을 만큼 기력이 완전히 쇠잔하게 된 상태를 가리킬 것이다.
긍휼히 여길 자를 바라나 없고 - '긍휼히 여길'(* , 라누드)의 기본형 '누드'(* )는 '불쌍히 여기다'의 뜻으로서, 다른 사람의 딱한 형편을 동정하여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가키킨다(Keil). 한편. '바라나'(* , 아카웨)의 기본형 '카와'(* )는, '간절한 기대감으로 고대하다'의 뜻으로서. 끈기있게 참으면서 자신이 바라는 바가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는 것을 가리킨다(창 49:18;사 40:31). 따라서이는 다윗이 오랫동안 자신의 입장을 이해하고 동정해줄 친구를 찾아 기다렸으나, 발견치 못했음을 뜻한다. 그런데 과연 다윗에게는 실제로 그러한 친구가 없었을까 ? 결코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다윗의 휘하에는 적지 않은 충성스런 막료(幕僚)들이 있었다(삼상 22:2;삼하 23:8-39).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이런 말을 한 것은, 아주 절친했던 자들로부터까지 모욕당한(8절) 자신의 마음을 헤아려 줄 자는 하나님 외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강조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것일 듯하다. 한편, 본문의 문자 그대로의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한 수난과 고독의 상황에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Alexander). 예수는 고난당하실 즈음에, 당신을 궁휼히 여길 아무도 없으셨다. 심지어 제자들까지도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였던 것이다(마 26:56).
=====69:21
저희가 쓸개를 나의 식물을 주며 - 이러한 다윗 예언적 묘사는, 예수 그리도의 수난에 의해 그대로 성취되었다(마 27:34). 즉, 무리들은 기진 맥진하신 예수께 '쓸개 탄 포도주'를 마시게 한 것이다. '쓸개'(* ,로쉬)는 '독'(毒)을 가리키기도 하지만(호 10:4), 셈어에서는 '독'과 '쓴 것'을동일한 개념으로 본다는 점에서, 여기서는 '쓴 것' 곧 '쓸개'를 뜻한다고도 볼 수 있다(Keil). 70인역도 '쓸개'(* , 콜렘)로 번역하였다.
갈할 때에 초로 마시웠사오니 - 이 문구도 예수님에 의해서 문자 그대로 성취되었다. 즉, 예수꼐서 십자가에 달려 목이 마르실 때(요 19:28, 29, 무리들은 해융에 '신 포도주를 머금게'한 후 그것을 갈대에 꿰어 예수님의 입에 대어 마시게 하였다(마 27:48). 이 '초'(* , 호메츠)는 중근동에서 노예나 죄수들에게 주었던 시큼한 술로서, 최소의 양(量)으로써 그둘의 갈중을 해소키 위해 사용되곤 하였다(James Anderson). 따라서 이처럼 '초'를 마시게 한다는 것은, 예수를 마치 죄수나 노예로 취급한 것과 결코 다를 바 없었다.
=====69:22
여기서부터 28절까지는, 다윗의 독특한 시적 표현으로써 악인들을 징벌해 달라고 간구한 내용이다.
저희 앞에 밥상이 올무가 되게 하시며 - '저희 앞에 밥상'은 악인들의 부요함을 상징한다(겔 23:41;눅 16:19). 따라서 본문은 악인들이 그들이 누리는 부요로 인하여 도리어 절망하게 해달하는 간구이다. 추측컨대, 이 악인들은 자신들의 부요를 자랑하면서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멸시하였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징벌을 받지도 않고 부요하게 지냄에 따라, 하나님은 인생의 일에 관여치 않으신다고 결론을 내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그들은 의인에 대한 훼방을 그치지 않았을 것이나, 그러한 계석적인 훼방은 결국 그들 자신들에게 임할 진노를 쌓는 꼴이었다(롬 12:20).
저희 평안이 덫이 되게 하소서 - 이것도 앞 문구와 동일한 의미이다. 즉, 악인들은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평안'으로 인하여 스스로 교만해졌으니(살전 5:3). 그 결과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받기에 이르도록 해달라는 뜻이다.
=====69:23
저희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게 하시며 - 롬 11:10에 인용된 문구이다. 악인들은 그들의 눈을 악행을 일삼을 대상을 찾는 데 사용 하였다. 이에 따라, 저자는 그들을 소경으로 만들어 그들이 더 이상 악행을 하지 못하도록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본 문구를, 하나님의 계명을 무시한 자들에게 각종 질병의 저주가(신 28:27,28) 임하게 해달라는 간구로(Anderson), 혹은 그들의 판단력을 상실케 하여 더 이상 흉계를 꾸미지 못하게(사 6:9, 10) 해달라는 간구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Rawlinson).
그 허리가 항상 떨리게 하소서 - '허리'는 힘이나 능력을 상징한다. 악인들은 그 '힘'을 의인을 핍박하는 데 사용했다. 이에 따라, 저자는 그들이 더이상 그 '힘'을 악용하여 의인들을 못살게 굴지 못하도록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69:24
주의 분노를 저희 위에 부으시며 - 79:6;겔 21:31;22:31;습 3:8에도 이와 유사한 표현이 나온다. 이는 하나님의 철저한 보응이 악인들에게 임하기를 간구하는 말이다.한편. 본문은 언약에 불순종하는 자들에게 임하는 저주를 연상시킨다(신 28:15, 45).
=====69:25
저희 거처로 황폐하게 하시며 - 고대 중근동에서는, 자신의 집을 파괴당한 사람을 가장 불행한 사람 중의 하나로 여겼다고 한다(Keil). 따라서 본문은 악인들이 의인들을 박해하여 그들을 비참하게 만들었던 것처럼 그 악인들도 마땅히 보응을 받아 그렇게 되도록(마 23:38)해 달라는 간구이다. 여기서 '거처'(* , 티라)는, '둘러싸다'를 뜻하는 동사 '투르'(* )에서 파생되었으며, 둥그런 모양의 촌락을 이루는 유목민의 천막(창 25:16)을 가리킨다(Keil). 그 천막에 의해서 둘러싸여진 공간에는 가축들이 방목(放牧)되었다(민 31:9, 10).
그 장막에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 이는 앞 문구와 거의 동일한 뜻이지만, 앞 문구보다 그 의미가 훨씬 강하다. 즉, 여기서는 악인들의 죄에 따른 영향이나 결과가 그 후손들에게까지 미치게 해달라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저주는,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러 삼, 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출 20:5)라는 말씀을 연상시킨다.
=====69:26
저희가 주의 치신 자를 핍박하여 - '주의 치신 자'는, 다윗이 자신에게 닥친 시련이 하나님의 허용하심으로 말미암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이미 다윗은 하나님 외에는 그 누구 앞에서도 떳떳하다는 뜻을 표한 바있다(5, 7절) '주의 치신 자'는 인류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대신 형벌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요 1:29). 아무튼 다윗 시대의 악인들이나, 예수 그리스도 시대의 악인들 모두, 하나님의 징벌을 당해 고통을 당하는 자를 동정하기보다는 오히려 애매히 '핍박'함으로써 그 고통을 가중시켰다.
=====69:27
저희 죄악에 죄악을 더 정하사 - '더 정하사'(* , 테나)의 기본형 '타나'(* )는 단순히 '주다'의 뜻이다. 본 문구는 악인들을 타락한 심령 그대로 방치하여(롬 1:24, 28)). 그들도 하여금 계속적으로 죄악을 범하면서 살게끔 내어버려 두시라는 뜻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적극적으로 그들로 하며금 선을 행치 못하게 하거나 또는 그들로 하여금 악을 행하도록 조장 하시라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인간들은 하나님의인도하심을 받지 못할 경우, 스스로의 타락성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계속 죄악을 행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사 26:10).
주의 의(義)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서서 - 악인들이 계속적으로 악행 가운데 있음으로 말미암아 결국 구원을 경험하지 못하게 해달라는 뜻이다(Anderson).
=====69:28
저희를 생명책에서 도말(塗抹)하사 - '생명책'이란 의인의 이름이 기록된 천상의 명부를 가리킨다(출 32:32;사 4:3;단 12:1;계 3:5;13:8). 이 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는구원과 온갖 축복들을 누리지만, 그렇지 못한 자는 영원히 멸망당하고 만다. 고대 이스라엘 백성듸은 태어나면서부터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되었다. 그러나 그 백성 중 악인들은 그들의 악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바되고, 이에 따라 그들은 구원받은 자의 반열에 끼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69:29
여기서 다윗은 악인과는 대조적인 자신의 모습을 소개하고 있다.
오직 나는 가난하고 슬프오니 - '가난하고'(* , 아니)는 '괴롭히다' 혹은 '압제하다'를 뜻하는 동사 '아나'(* )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약한', '고생하는', '겸손한' 등의 뜻이다. 그러나 경제적인 결핍 상패를 강조하는 '에브욤'(* )과는 좀 다르다. 즉, '아니'라는 단어에는 자신의 무능과 그로 인한 비통의 뜻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Leonard J. Coppes). 한편, '슬프오니'(* , 코에브)는 '아프다' 혹은 '슬프다'를 뜻하는 동사 '카아브'(* )에서 파생되었으며, 육신적 혹은 정신적 고통을 막룐하고 그로 인하여 느끼게 되는 비통함을 가리킨다(욥 33:19;셀 28:24). 이처럼 다윗은 현저히 낮아져 있는 상태라는 점에서, 스스로 자고(自高)하여 의인들을 모해하려는 악인들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22절).
주의 구원으로 나를 높이소서 - 높아지고자하는 자는 낮아질 것이요 낮아지는 자는 높아질 것이라는 주님의 교훈(마 23:12)에 비춰 볼 때 이러한 기도는 지극히 합당하다. 어쨌든 이는 원수들의 훼방에서 벗어나게 하심으로써, 더 이상 그들에 의해 짓밟히는 비천한 지경에 떨어지지 않도록 해달라는 간구이다.
=====69:30
여기서부터 마지막절까지에서는 하나님이 의인을 구원하시리라는 확신과 그에 따른찬양이 나오고 있다.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 다윗은 비록 여전히 악인들의 핍박을 당하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믿음의 눈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자신을 구원하시리라는 선취적(先取的)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히 11:1).
=====69:31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 하나님께 드릴 제물로서 전혀 흠이 없는 '소'임을 말해준다(레 11:3, 4).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라 - 하나님께서는 값비싼 제물을 드리는 의식적(儀式的) 제사보다는 감사하는 마음의 제사를 더 좋아하실 것이라는 뜻이다. 그렇다고 해서 다윗이 의식적 제사를 무가치하게 본 것은 결코 아니였다. 다만 그는 만일 감사하는 마음이 담겨져 있지 아니한 의식적 제사라고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차라리 의식이 없되 감사하는 마음의 제사를 더 기뻐하신다는 주장을 펴고 있는 듯하다. 다윗이 환난을 당하고 있으면서 하나님께 행한 서원에서 자주 번제 혹은감사제를 말하고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54:6;56:12;68:29). 추측컨대 다윗은 환난에서 구출함을 받았을 때마다 감사하는 마음의 제사뿐만 아니라 의식적 제사도 함께 드렸을 것이다.
=====69:32
온유한 자가 이를 보고 기뻐하나니 - '온유한 자'(* , 아나윔)는 29절의 '가난하고'와 동족(同族)의 단어로서 복수이다. 이는 다윗과 같이 자신의 무능력을 알며 그럼으로써 애통하는 마음을 소유한 자들을 가리킨다. 한편, '이를 보고 기뻐하나니'는 '온유한 자'들이 다윗이 받은 일로 말미암아 다윗과 함께 즐거워한다는 뜻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공의가 나타난 그 일로 인하여 기뻐한 것이다(64:10).
너희 마음을 소생케 할지어다 - 더 이상 의기소침하지 말고 세상에 대하여 담대한 마음을 가지라는 권면이다. 앞 문구는 다윗이 악한 자들의 훼방에서 구출됨을 보고 의인들이 기뻐하게 될 것을 예언하고 있는 반면, 본 문구는 의인들이 그 예인을 실제로 성취하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신자들이 하나님에 의해서 예언된 바를 선하게 실현하는 것은 마땅한 도리이다.
=====69:33
히브리 원문에는 초두에 '왜냐하면'을 뜻하는 접속사 '키'(* )가 있어서, 본절이 32절의 이유임을 말해준다.
여호와는 궁핍한 자를 들으시며 - '궁핍한 자'(* , 에비오님)는 일반적으로 경제적으로 곤란을 당하는 사회적 약자를 가리킨다(29절). 여기서는 32절의 '온유한 자'와 동일하게 '의인'(28절)을 가리키고 있다. 그런데 32절의 '온유한 자'가 심령의 상태를 강조하는 것이라면, 여기의 '궁핍한 자'는 삶의 현장에서 당하는 빈곤을 강조한다. 아마도 이 의인들의 이러한 경제적 빈곤은 (1) 권세를 잡은 악인들에 의한 수탈이나 (2) 불의한 방법에 의한 돈 벌기를 기피하였기 때문에 발생하였을 것이다. 한편, '들으시며'는, (1) 하나님이 의인들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고 계시며 (2) 더 나아가 그 기도에 응답하며 구원할 채비를 하고 계심을 암시한다.
자기를 인하여 수금(囚禁)된 자 -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자'(마 5:10)로 표현될 수 있다.
=====69:34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한 의인들이 그에 대한 감사와 기쁨을 주체하지 못할 것을 나타내는 시적인 표현이다. 즉, 의인들은 구원받은 벅찬 감격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찬양할 것이며, 다윗은 그 감격을 나누고 싶어서 심지어는 지각이 없는 자연계도 하나님께 대한 찬양의 대열에 참여하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자연 만물은 결코 찬양의 대열에 끼일 수 없지만 하나님의 위대한 창조 능력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암시적으로 찬양을 드리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8편;148:3 등 참조). 결국 본문은 위대하신 하나님께 드이는 찬양은 우주적인 성격을 띠고도 남음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사 44:23;55:12). 만일 이처럼 지각 없는 자연 만물도 하나님께 대한 찬양의 대열에 끼어야 한다면, 하나님의 형상을 부여받은 인간(창 1:26, 27), 특별히 구원받은 백성 들은 더 말할 나위 없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 결코 게을러서는 안 될 것이다.
=====69:35
이 예언은 1차적으로는 다윗 당시의 예루살렘 구축 혹은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 포로생활에서부터 해방되어 약속의 땅으로 귀환함으로써 성취되었으며,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보호적 섭리에 따라 구원받게 됨으로써 성취되어가고 있으며 또 온전히 성취될 것이다.
하나님이 시온을 구원하시고 - 여기의 '시온'은 구약적 관점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그리고 신약적 관점에서는 영적 이스라엘(롬 9:6, 30)을 가리킬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항상 보호하셨고 또한 지금도 보호하고 계신다.
=====69:36
그 종들의 후손이...이를 상속하고 - 약속의 땅이 이스라엘에 의해서 영원히 소유될 수 있을 것임을 말하고 있다. 즉, 구약 시대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 팔레스틴을 소유하였으며, 신약 시대에는 그 땅의 실체인 하나님 나라를 영적 이스라엘이 소유하고 있다. 더구나 영적 이스라엘은, 세상 끝날에 이루어질 새 하늘과 새 땅을 자신의 영원한 기업으로 삼게 되는 것이다(벧후 3:13).
그 이름을 사랑하는 자가 그 중에 거하리로다 - 이는 어떤 자가 기업을 누릴 수 있게 될지를 말한다. 즉, '그 이름을 사랑하는 자' 곧 (1) 하나님을 증거하기를 부끄러워 하지 않으며(마 10:32) (2) 하나님안을 구원자로 의지하는(잠 16:20) 자가 그 기업을 소유하게 된다.
개인적인 한탄의 내용을 담고 있는 본 시편은 22편 다음으로 신약 성경에서 가장 많
이 인용되고 있을 만큼 비중 있는 시다. 본 시편의 배경이 되는 사건은 성경이 명시하
고 있지 않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어떤 사건을 배경으로 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학자들은 본 시편의 내용을 통해 몇가지 사건을 유력한 배경으로 제시한다.
첫째는 압살롬의 반역 사건(삼하15장)이나 아도니야의 모반 사건(왕상 1장)등과 같
은 자식들의 내란에 직면하여 다윗이 개인적인 고통을 하나님께 토로하는 것이리라 추
측한다. 왜냐하면 8절을 통해 '내 형제에게는 객(客)이 되고 내 몬친의 자녀에게는 외
인(外人)이 된' 다윗의 정황을 예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다윗은 말년에 그의 자
식들에 의해왕우리르 위협당하는 수모를 격었으며 그의 친족으로부터 소외당하기도 했
다. 뿐만 아니라 이런 배반으로 인해 25절처럼 집없이 유리하는 수모를 당햇다. 한편,
본 시편에 등장하는 박해를 근거로 학자들은 아마 이 시편의 배경이 된 사건이 '예레
미야 순교'였거나 마카비 시대의 '종교적인 박해'였거나 B.C. 5C 에스라 시대 때 성전
건축을 둘러싸고 있었던 이방인과의 전투 때였을 것이라는 가정을 한다. 그러나 본 시
편이, 계속되는 다윗의 시 다음에 연이어 등장함과 이 시편에 등장하는 절규는 앞선
여러 시를 지은 다윗을 연상케 한다. 따라서 이런 사실을 통해 이 시는 다윗의 시라는
사실을 지지할 수 잇다.
아무튼 박해를 배경으로 함이 틀림없기에 이 시는 시편에 등장하는 여러 시들의 부
류속에 개인적 '비탄시'에 속한다 할 수 있다. 그러나 본 시편에 등장하는 '온유한
자', '하나님을 찾는 너희'(32절) 등의 구절을 통해 미루어 볼 때 이 시가 공예배 때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특히 이 시는 비탄시가 가진 일반적인 내용 구성을 보여준
다. 시편 전반에 걸쳐 비탄시에는 대체로 (1)대상, (2) 고소, (3)신뢰, (4) 구원 간
구, (5) 확신, (6) 찬양의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 시편도 이러한 제반 사항들을
잘 보여준다.
먼저 시인은 자신의 슬픔을 토로하는 대상을 밝히고 있는데 물론 그분은 하나님이시
다(1절). 여호와만이 자신의 고통과 고뇌를 듣고 해결해 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사실
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어서 이러한 하나님께 시인은 자신이 당한 구체적인 어려움을
고소(complaint)하고 잇다(2-15절). 그러면 시인에게 닥친 문제가 무엇이며 그가 여호
와의 도움을 찾고 있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는 자기에게 닥친 고난으로 인해 하나
님을 찾고 있다. 이 고난은 자신의 영혼까지 뒤흔드는 고난이다(1, 2절). 생명을 위협
할 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불안케 한다. 더군다난 기자느 자신이 지속적인 간구가 잇었
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응답이 없으신 하나님께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3절). 시인에
게 닥친 고통은 이러한 내멸넉인 문제만은 아니었다. 그에겐 또 다른 외부적 문제들도
산적해 있었다. 주변에는 그를 대적하여 학대하는(4절) 잔인한 원수들과 신뢰의 대상
이어야 할 친구와 친척들의 냉대, 그리고 끊임없이 그에게 퍼부어지는 비난이 자신을
두르고 있었다. 기자는 이러한 문제를 하나님께 호소하고 잇다.
그러나 만일 시편 기자가 자신의 간구를 여기서 그쳤더라면 이 시의 가치는 그리 높
게 평가될 수 없었을 것이다. 기자는 하나님께 고하는 자신의 간구를 이제 자기 내면
에 있는 문제로 전환한다. 그래서 시인은 자신의 우매함을 하나님께 고백한다(5절).
타인의 비난과 조롱을 듣게 되면 자기를 정당화하고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는 것이 대
다수 인생의 마음이지만, 그는 하나닉게 나아와 자신도 별수 없는 죄인임을 숨김없이
고백한다. 시인은 이러한 진지한 죄의 고백은 시인의 진실성을 드러내는 바, 앞 구절
들에게 간구한 시인의 고뇌가 진실이라는 사실을 더욱 강화시키는 증거이다. 시인의
간구는 6, 7 , 9절에서 더욱 간절함을 띠고 있다. 아울러 시인은 그토고 암담한 상황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간절한 기도를 올리수 있었던 것이 하나님을 굳게 신뢰했기
때문이라고 밝힌다(16절). 그는 자신의 간구를 들으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분명
히 알았다. 이러한 영적 자각은 그로 하여금 신뢰의 단계로 나아가게 한다. 그가 궈게
믿어 의심치 않았던 하가님은 바로 크신 인자(仁慈)를 베푸시는 하나님이었다. 그분의
인자하심으로 인하여 시인은 자신의 어려운 상황을 호소할 수 있었으며, 긍휼의 풍성
함을 통해 자신의 죄를 숨김없이 고백할 수 있었다(5절). 또한 하나님께 대한 이러한
신뢰는 시인으로 하여금 구원에 대한 구체적인 간구를 하게 한다(17-28절). 하나님게
대한 신뢰를 고백하고 난 후, 시인은 간구했던 바(2-15절)의 구체적인 해결책으로서의
구원의 상황으로 시를 전개시킨다. 시인이 하나님께 요구한 구원은 어더한 상태로의
구원인가? 시인은 궁극적으로 자신을 곤궁에 빠뜨리게 한 자신의 대적으로부터 구원을
바라고 있다(22, 23절). 저희는 시인을 훼방하였고, 수치와 능욕을 당케 하였으며(20
절), 쓸개를 식물로 줄만큼 그를 학대하였다. 특히, 쓸개를 식물로 준다는 표현은 강
한 적대감을 나타내는 시적인 은유이다. 이런 일로 시인은 마음이 상하여 근심이 가득
하였다(20절). 이러한 상한 마음을 치료할 존재는 그 어디에도 없다(20절). 인간적 한
계를 극복해 줄 수 있는 존재, 그는 인간 이상의 능력과 자비와 은혜를 가진 자이어야
한다. 따라서 시인은 앞선 단락에서 그의 신뢰의 대상이었던 하나님을 바라고 그에게
구원을 요청하게 된 것이다.
결국 시인은 그가 신뢰한 분이 하나님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분만이 구원의 확실한
길로 인도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에, 진정한 기쁨에서 나온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노래가 황소와 같은 물질적 제사보다 더욱 여호와를 기쁘게 랄 것이라는 확신
가운데 거하게 된다(31절). 이어서 시인의 확신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곳으로 나아가게
한다(32-26절). 시인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기리며(33절), 천지의 미물(微物)에게까
지 그분의 긍휼이 넘치리라는 사실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34절). 그리고 이런 찬
양을 통해 시인은 자기 백성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높인다(35, 36절).
우리는 시인의 이와같이 확신 있는 찬양을 통해 그가 하나님을 정확히 알고 신뢰하
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자신의 문제를 듣고 해결할 수 없는 분에게 우리는 결코 간
구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신뢰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
찰하사 선한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 그런 하나님은 전폭적 신뢰의 대상으로 삼아야
마땅하다. 그럴 때 우리의 고난이나 고통이 시인의 고백처럼 마침내는 찬양으로 변화
되는 전화 위복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1. 고난에 대한 호소(69:1-20)
다윗은 본 단락을 통해 자신에게 임한 고통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묘사혀 이 고통으
로부터 구원해 줄 것을 호소하고 있다. 특히 그는 서두에서 시적인 비유를 통해 전달
하고자 하는 내용을 한층 강조하고 잇다. 다시 말해서 서두에서 다윗은 자신의 고통을
숨막히는 고통의 언어에 담아 비유로 표현했다(1-3절), 여기서 등장하는 '물'(1절),
'깊은 수렁'(2절), '깊은 물'(2절), '큰 물'(2절)이라는 단어들은 다윗이 현재 당한
고통이 생명을 위협할 만큼 심각함을 극명하게 나타낸다. 이런 고통의 언어로 표현된
자신의 상황은 구체적인 고통의 현실에 대한 하소연으로 이끌어진다(4절). 즉 다윗은
5절로부터 비유를 사용치 않고 직접적인 현실 상황을 이야기 한다. 그토록 심각했던
고통의 원인은 무엇인가? 다윗의 표현을 빌리며 (1) 많은 악인들의 이유없는 증오(4
절), (2) 그러한 자들이 창궐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건한 자들에게 욕
이 되고 있는 상황(6절), (3) 가장 가까운 사이인 가족에게마저 소외당한 사실, 그리
고(4) 하나님만을 의뢰하고자 했던 자신의 신앙이 조롱거리가 되고 만 현실 등이었다.
한편 5절 내용은 1차적으로는 하나님 앞에서 죄인일 수밖에 없음을 솔직하게 고백하는
말이다. 그런데 4절과 관련하여 이 말의 이면에는 자신의 결백함이 시적 반어법을 통
해 강하게 표출되어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즉 대적들은 시인의 허물과 약점을 지적하
고 정죄하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은 자신의 무죄함에 대해
서 증거해 주시리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만일 그 하나님으로부터 정당성을 입증받을
수 있다면 그의 대적으로부터도 승리할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덩구이 다윗은 그
하나님을 향해 '만군의 주 여호와'(6절)라는 칭호로 고백하고 있다. 이런 칭호를 통해
다윗은 고통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해결해 주실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믿음을 명확히
하였던 셈이다.
한편 우리는 다윗이 7절에 가서 고통의 원인을 '주를 위하여'라는 표현으로 전환시
키는 이유가 무엇인지 캐묻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고통의 우너인을 아무런 이유
없이 대적들로부터 하나님께로 바꾸었다며 시인은 의식없는 횡설 수설자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시인의 의도는 무엇인가? 왜 그가 논리의 전개를 갑자기 바꾸는가? 이에 대
한 해답은 본 단락의 논리적인 흐름에서 찾아 내어야 하며, 저자의 의도를 파악함으로
써 찾아져야 한다. 저자는 자신의 결백함을 고백하였다(5절). 본 시편에 언급되는 '원
수'들은 다윗을 제거하고자 하는 악한 계획이 일반 백성들로부터 지지받을 수 있도록
온갖 거짓과 술수로 다윗의 허점을 공격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적당한 명분을 얻고자
했을 것이다. 물론 다윗도 연약한 인생인지라 하나님 앞에서는 회개의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는 존재였고 또 밧세바 사건 등과 같이 실제로 흉학한 범죄에 빠진 적도 있었
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헌 믿음과 순종의 자세가 그의 일생을 통해 견지(堅持)되었기
때문에 그는 그 누구 못지않게 하나님과 가까이 살려고 노력하였던 것이다. 더욱이 당
시 다윗을 해하고자 했던 무리들은 전혀 근거도 없는 유언 비어와 흑색 선전을 쏟아대
었다. 따라서 다윗은 자신에게 닥친 당시의 환난은 자신에게 특별한 허물이 있어서라
기보다는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는 열성에 대해 시기하는 자들로부터 말미암았다고 이
해하기에 이른 것이다. 여기서 다윗이 보여주는 하나님과 자신과의 강한 연대감 내지
결속은 그의 탁월한 믿음에게서 연유햇음에 분명하다. 이런 맥락에서 7절 내용 또한
시적인 반어법이 사용된 표현으로 이해 가능하며 9절에 나타난 '주의 집을 위하는 열
성이 자신을 삼켰다'는 표현이나 '주를 훼방하는 헤방이 자신에게 미쳤다'는 표현 역
시 시적 반어를 통해 자신의 진실함(4, 5, 7절)을 더욱 강조하는 말로 이해 가능하다.
14절부터 시인은 서두에서 자신의 고통을 비유적으로 나타내었던 '수렁', '깊은
물', '큰물'이라는 단어들을 다시 반복시키고 있다. 이런 반복을 통해 그는 자신이 당
한 고통의 막중함을 표현하고 있지만 이 표현을 주의 깊게 보면 앞선 구절(1, 2절)의
단순한 반복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앞선 구절에서는 자신의 답답하고 쓰라린 감정을
토로하는 데에 중점을 두고 있는 반면에, 14절 이후 부터는 당면한 고통과 고난에서부
터 구원해 줄 것을 호소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다시 말해서 시인은 단순한 반
복이 아니라 반복적인 듯한 리듬을 통해 고난의 상황에서 어떻게 구원의 상황으로 나
아가야 하는 지를 효과적으로 보여주고자 한 것이다. 시인이 구원에로 이르기 위한 실
마리로 포착한 근원적인 비결을 우리는 15절, 17절을 통해 발견할 수 있다. 곧 고난에
서 구원으로 나아감은 여호와의 인자왓 너으로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여호와의 인자와 선을 구하기 위해 간구하는 일은 고난당하는 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임을 시인은 강력히 피력하고 있다. 믿음에 근거하여 시인은 자신의 도움을 어는 곳
에서도 어떤 인격적인 존재에게서도 찾지 않고 오직 자신의 고통을 다 아시는 하나님
에게서만 찾는다.
우리의 경우는 어떠한가? 시인이 도달한 결론처럼 하나님만 의지하고 그 뜻대로 살
아가는 과정에서 당하는 고통으로 고민하고 있는가? 아니면 자신의 욕심 때문에 당한
일로 괴로워 하는가? 더욱이 그 고통이 무엇으로 인한 것이든 문제의 해결은 우리의
모든 상황을 다 아시는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됨을 확신할 수 있는가?
2. 저주와 찬양(69:21-36)
슬픔과 탄원으로 시작되었던 이 시편은 본 단락에서 찬야과 기쁨으로 끝을 맺는다.
저자는 하나님께 궁극적인 찬양을 드리기에 앞서 자신을 고통 속에 몰아 넣었던 대적
들에게 임할 심판의 상황을 기록하는 데 여섯 번의 저주를 대적들에게 퍼붓고 있다
(22-29절). 이러한 저주는 자신을 대적하는 자의 결과가 결국은 멸망이라는 사실을 통
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필경 당할 비참한 종국의 일반(一般)에 대해 가르치고 있
다. 뿐만 아니라 이런 사실 뒤에는 시인이 하나님 편에서 정직히 행했기에 자신을 대
적하는 일이 곧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임을 지적하여 이제 자신을 핍박하는 악한 일을
그만 두라는 경고성의 권고 또한 내포되어 있다.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을 믿는 자가 이렇게 잔인한 저주를 퍼부을 수 있을까 하고 의
하해 할 수 있지만 사실 시인은 단순히 개인적인 원한에 사무쳐 있는 것이 아니라 하
나님의 공의를 어지럽히는 악한 세력들에 대해 저주한 것이며 또한 장차 구세주를 대
적할 악한 세력들을 예언적으로 저주하고 있다고 생각해도 무방하겠다. 특히 21절의
말씀은 마 27:34, 48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과 관려하여 언급된 구절이므로 나먼
지에서 계속되는 저주의 대상 또한 시인의 개인적인 원한 관계를 뛰어 넘어 하나님을
대적했던 원수들에게 미쳐져야 할 예언적인 저주로 이해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앞선
시인의 개인적인 고통은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와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교회가 원
수들로부터 당하는 고통으로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시인은 먼저 자신의 원수 곧,
주 하나님의 원수에게 일상적인 살이 영위되지 못하게 저주를 퍼붓는다. 즉 생존을 위
한 기본적인 욕구('밥상')가 충족되지 못하며 삶의 도처에서 불행이 엄습해 올 것을
저주한다(22, 23절). 더욱이 그들의 경제적 원천인 토지가 황폐되어져서 지극히 궁핍
한 삶을 살게 될 것을 저주하고 있다(25절). 그러나 가장 크고 무서운 저주는 '생명책
에서 도말'되는 것이다. 결국 주를 대적하는 일은 곧 영원한 죽음과 심판을 의미하게
되는 일임을 밝히고 있다.
이제 시인은 29절로부터 시의 분위기를 감사와 찬양으로 전환시킨다. 이전까지 어떤
의미에서 본시가 암울한 분위기였다면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서는 보다 밝고 확신에 차
있다. 시인은 자신의 대적 곧 주의 대적이 멸망과 죽으므로 끝날 것을 확신하므로 현
재도 여전히 고난 속에 있지만 그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찬양할 결심을 한다(30, 31
절). 뿐만 아니라 여타 백성으로 더불어 장차 원수를 멸하실 하나님을 찬양할 것을 권
고한다(32, 33절).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궁핍자가 부르짖을 때 그 부르짖음을 듣고,
필요한 모든 것을 베푸시는 분이시며 고난 속에 갇힌 자에게 자유를 주시는 분이기 때
문이라는 것이다. 시인의 이런 감정은 모든 만물에게까지 극대화시켜 천지 만물의 주
인이신 하나님, 바로 그분을 찬양함이 마땅하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34절). 더욱
이 시인은 시의 마지막에서 시온과 유다가 장차 회복될 것이라는 소망으로 글을 매듭 짓는다. 그러나 시인의 기쁨의 근원은 외적인 환경의 변화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그가 하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에(29절) 고난의 상황에서도 선취적인 믿음으로써 기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근본적인 평안의 근거인 하나님을 신뢰할 수만 있다면, 우리에게 당한 환난이나 장차 당하게 될 고난은 우리를 고민케 할 수 있을 지는 몰라도 근원적으로 우리를 흔들지는 못할 것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신뢰하면서 현재의 어려움 속에서도 시인처럼 하나님을 찬양하여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