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1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 (* , 카오 키위티).문자적인 뜻은 기다림 속에서 기다렸다'이다. 문자 그대로의 표현이 보여주듯이 시편 기자의 기대와 소망의 행위는 일순간적인 단회적인 것이 아니라 연속적 행위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본절은 그의 기도가 당장에 그 응답을 보지 못했지만 여러 차례의 반복 끝에 그 응답을보았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40:2
기가 막힐 웅덩이 - '웅덩이'는 '보르'(* )로서 '감옥', '퇴비 구덩이', '무덤' 등을 뜻하는데 특히 '무덤'이란 의미는 28:1 ; 88:4 ; 사 14:19 ; 38:18등에서 발견된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구덩이에 빠진 것과 같은 '재앙' 그리고 그로 인한 '고통' 혹은 '무덤'을 의미하는것 같다(Barnes). 그리고 본절의 또 다른 단어 '기가 막힐'(* , 솨온)의 문자적인 뜻은'소음', '포효하는 소리', '(특히 파도에서 들을수 있는, 혹은 전쟁이나 군중의 회집으로 야기되는) 소동' 등이다. 그러나 이 단어는 죽음(무멈)에도 적용될 수 있는 바 '황량' 혹은 '멸망'이란 의미로 사용될 수도 있다. 그런데 이러한 의미들을 종합하여 어떤 학자는 이곳의 웅덩이를 아비 규환으로 가득찬 동굴 혹은 너무 소란스럽고 야단법석이어서 그곳을 통과할 수 없는 무저갱과 같은 곳으로 이해한다(De wette). 한편, 또 다른 학자들은 그곳에 물이 넘실거려서 으시시함과 공포가 가득한 동굴 혹은 깊은 어두움으로 해석하는데 이 해석이 전자의 견해보다는 바람직한 것 같다(Rosenmuller).왜냐하면 70인역(39:3, LXX)이 이 단어를 '랖쿠 탈라이포리아스'( ),즉 '재앙의호수'로 번역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표현을 사용하여 본 시편 기자는 소망이 없는 깊고 시시한 동굴과 같은 곳, 분명한 멸망과 같은 상태에서 자신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
수렁에서 - (* , 미티이트 하야이인). 문자적인 뜻은 '웅덩이의 밑바닥으로부터'이다. 이곳은 그 위에 설 수 있는 단단한 기초가없는 것이 특징인데(69:2, 14 ; 렘 38:6), 이 단어는 바로 뒤에 이어지는 '반석'과 대비를 시키기 위해 사용된 것이 분명하다.
내 걸음을 견고케 하셨도다 - 하나님께서 저자로 하여금'단단한 땅 위를 걷듯 그 발걸음을 든든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다시는 내려가거나 빠지는 웅덩이와 같은 위험한 곳이 없이 안전하게 인도하셨다는 것이다. 한편, 이 표현을 구속주(Gedee-mer)라는 관점에서 이해한다면 그것이 완전히 성취되는 때는 그분의 속죄 사역이 완성되어 모든 슬픔이 사라진 때이다. 다시 말해서 이제 다시는 위험에 노출되는 일이 없고 항상 안전한 가운데 하나님께 영광만을 돝리게 되는 때, 즉 '주의 재림의 때'일 것이다.
=====40:3
새노래...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 본 표현이 뜻하는 바는 하나님께서 찬양할 만한 새로운 경우를 허락하셨다는 것이다. 이번에 베푸신 구원은 너무 특징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이전의 자비 행위에 덧붙여진 것이기 때문에 새로운 감사의 표현을 매우 적절히 하고 있다. 그리고 이번의 구속 행위는 과거의 자비 행위에 대한 감사를 표현할 때 사용하였던 언어로는 불충분할 만큼 놀라운 하나님 편에서의 중재 사역이었다는 것이다. 또한 이번의 구원 사역은 슬픔의 깊음 이후 영광으로 승귀(昇貴)하신 그리스도의 사건 때만큼 하나님에 대한 감사를 표현하기에는 언어가 불충분할 정도의 위대한 사역이었다는 뜻이다(Barner). 많은 사람이...두려워하여...의지하리로다 - 인류의 많은 백성들이 저자가 노래했었던 것과 같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목도하고 그 결과로 하나님을 존경하고 예배하고 경와하는 것을 배워서 그분만을 온전히 의뢰하게 된다는 것이다. 곧 그의 진실된 예배자들과 친구가 된다는 것을 나타낸 표현이다.
=====40:4
교만함 자 - 원문에 복수형인 '레하빔'(* )으로 되어 있는 이 단어는 그 뜻을 알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그 단수형 '라하브'(* )는 자기 자신의 힘을 소문내듯 소란스럽게 잰체하듯 의존하는 자를 의미하는 애굽 이름으로 사용된다는 점을 고려할 때 결국에는 실망속에 낙담할 힘을 의존하는 교만한 자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겠다(Perowne). 한편, 어떤 학자는이 '라하브'를 신비스러운 바다 괴물인 라합으로 보고 이를 '이방 우상'으로 해석하고 있는데 이같은 해석은 70인역(LXX)의 지지를 받는다(Da-hood). 이 두 해석 중 전자가 신뢰할 만한데 그 이유는 전(前) 문맥이 '의존'의 개념을 말하고있기 때문이다.
거짓에 치우치는 자 - 문자적인 뜻은 바른 길예서 이탈하는 자, 즉 영적인 의미로는 속임수에 잘 넘어가는 자이다. 그러나 '거짓'으로 번역된 '카자브'(* )가하나님과 인간 혹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왜곡된 관계를 표현할 때 사용하는 용어임을 고려할 경우(Ander-son)이 단어는 '하나님을 배교하는 자'의 개념 으로까지 볼 수 있다(Perowne).
=====40:5
주의 생각도 많도소이다 - 여기에서'생각'이란 성도의 필요를 채우고 유익을 제공하기 위한, 즉 성도의 복지를 위해 하나님 경영하신 계획들, 목적들, 섭리들을 가리킨다(17절).
주의 앞에 베풀 수도 없고 - 이 구절을 해석하는 관건은'베풀'로 번역된 '아라크'(* )의 의미 규정에 있다. 그런데 이 '아라크'는 '열을 따라 배열하다', '질서있게 정돈하다'의 뜻을 지닌 군대 용어인 바 '줄을 세우다' 혹은'전투 대형으로 포진하다'(삿20:20, 22)란 말이다. 또한 이 용어는 '논쟁을 위해 개념들을 정리하다'혹은 '논쟁을 위해 사고를 논리 정연하게 하다'(욥 13:18) 등의 의미와 '재판관 앞에 소송을 제기하다'(욥 13:18)라는 뜻도 더불어 갖고 있다. 그러나 아주 독특하걔 '어떤 것과 함께 배치하다' 혹은 '무엇을 나란히 놓다', 즉 '무엇과 비교하다'의 의미(Gesenius)도 갖고있다. 이러한 게졔니우스(Gesenius)의 견해는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서 이미 본절의 전반부에서 다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역, 그분의 자비로운 그리고 선하신 생각에관해 암시적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40:6
주께서 나의 귀를 통하여 들으시기를 - 본 구절 해석의 관건인 '들리시기를'(* ,카라)은 그 문자적인 뜻은 '우물을 파다'(창 26:25), '무덤을 파다'(창50:5),'구멍을 뚫다' 등과 같은 '파다'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이 난해한 단어롤 포함한 본 구절에 대한 해석의 여러가지 견해는 다음과 같다.(1)'주께서 나를 위하여 귀를 건설하셨다'로 번역하는 견해. 이 의견은 제롬(Jerome)과 같은 초대 교부들의 생각인데 이것의 초점은 하나님께서 영적인 것을 들을 수 있는 상태의 귀를 부여하셨다는 사실에 있다. 즉, 하나님께서 들을 수 있는 귀를 부여하셨다는 것인데 이는 사 6:9,10과 신 29:4의 '볼 수있는 눈', '이해할 수 있는 마음' 등과 평행구를 이룬다 하겠다. (2)'주께서 귀를 관통하셔서 진리의 계시를 전달하셨다'로 번역하는 견해. 이 의견은 신적 전달, 초자연적인 지식의 전달을 암시하는 많은 구절, 즉 삼상 9:15 ; 20:12, 13 ; 욥 33:16등의 '귀를 열다'와 동일한 의미로본다. 그러나 이 견해는 '파다'라는 의미의 '카라'를 기준으로 한 해석이 아니라 '카라'의 의미를 유추적으로 해석한 '꿰뚫다', '관통하다'를 기준으로 삼아 석의(釋義)의 논리를 이끌어갔다는 점을 생각할 때 타당한 견해로 보이지는 않는다. (3) '주께서 나로 하여금 순종케 하셨다'로 해석하는 견해. 이 생각은 대부분의 랍비들이 갖는 의견인데 그들은 '순종하는(듣는)것이 희생보다 낫다'고 하는 삼상 15:22을 바탕으로 듣는 것과 순종하는 것 사이의 어떤 연관성을 부여한 나머지 이러한 견해를 내놓고 있다. 이 견해 역시 문법적 근거가 미약하다고 할 수 있다. 이상의 소찰(小察)을 통해 볼 때 그 과정은 분명치 않으나 하나님께서 저자로 하여금 하나님이 들려주실 계시의 말씀을 분별할 수 있는 어던 영적인 귀를 부여받았던 사실에 초점을 맞추는 (1)의 견해가 가장 바람직한 것으로 이해된다(Ba-rnes, Perowne).
제사와 예물 - '제사'에 해당하는 원어는 '제바흐'(* )로 속칭 '피 제사'를 뜻하고 '예물은 '미하흐(* )로 피없는 제사, 예를 들면 감사제와 같은 제사를 의미한다(사1:11). 본절에 등장한 네 단어, 제사, 예물, 번제, 석죄제는 히브리 공동체가 알고 있는 모든 종류의 희생과 예물을 포함하는 말인데 그들이 드리는데 익숙해져 있덩던 바로 이러한 희생과 예물을 하나님은 요구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이 본 시편 기자를 통해 밝혀지고 있다.
=====40:7
내가 왔나이다 - 쉽게 풀이하면 '당신앞에 섰나이다'라는 말이다. 이 같은 표현은 열등한 자가 존귀한자 앞에 나아갈때, 혹은 노예가 그 주인 앞에 설 때 흔히 사용되는 말인데(민 22 :38) '보소서 제가 여기 있나이다'로 나타내기도 한다. 이것은 대체적으로 가까운 마음에 대한 강조적 표현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 - '의무로 내게 부과된 것'으로 바꿔 쓸 수도 있는데 이 말은 율법책을 발견한 후 요시야가 그 책에 대해 말했던 내용이 실린 왕하 22:13에 등 장하는 표현과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기에 본절은 저자 자신에게 부과된 의무는 다른 것이 아니라 이제 입을 열어 동료들에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외적인 희생이나 예물이 아니라 내적인 순종이며, 그 순종은 하나님이 부여하는 불법의 내용을 지키는 것으로 되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선포하는 일임을 나타내고 있다. 한편 이 구절을 메시야에 관한 언급으로 해석하는 학자도 있는데 그는 6절의 '제사'나 '예물'의 무용성에 관한 표현이 있는 사실을 중시하여 본절의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란 이제 완전한 제사와 예물이 되실 메시야를 암시하는 것이라고 혜석한다. 따라서 후속절의 '두루마리 책'은 시편뿐 아니라 구약 성경 전체를 가리킨다고 주장하고 있다(Barnes). 그러나 전후 문맥이 외적인 종묘 의식이나 형식 대신 하나님의 법을 마음에두는 것(8절)을 강조하고 있는 성향을 고려할때, 후자의 메시야적 해석은 견강 부회(牽强附會)의 느낌이나이 없잖아 있다.
두마리 책에 - 앞서 하나님께서 그의 귀에 들려주신 혹은 가르쳐 주셨던 내용이 하나님의 율법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즉, 율법책에는 하나님의 영이 저자의 마음에 이미 기록했던 것과 동일한 진리가 있다는 고백 이다. 이 율법책은 모세의 율법책이며 두루마리는 그 율법의 내용이 양피지에 기록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이 사실은 예레미야서와 에스겔서 등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Perowne).
=====40:8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 문자적인 뜻은 '주의 기쁨을 행하기 위하여'이다. 이 표현은 선행 구절 '내가 왔나이다'(7절)의 연장선에서 해석되어야 하므로 앞절과 본절을 합쳐'주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기 위하여 내가 왔나이다'로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나의 심중에 - (* , 베토크 메아이). 문자적로는 '나의 창자 중간에'라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법이 자신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있다는 표현을 통하여 저자는 하나님의 법이 그의 행동과 자세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임을 강조하고 있다(37:31 ; 신 6:6 ; 렘 31:33).
=====40:9
대회 - 이에 대한 원어는 '카할'(* )로 예배 공동체를 가리키는 것 같다(22:25 ; 35:18 ; 89:5). 여호와의 전령과도 같이 구원받은 경험이 있는 자는(1, 2절)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그 구원을 선포하기 마련이다. 한 공동체의 요원이 구원받은 사실은 하나님의 모든 백성에게 좋은 소식이 되며 그 공동체의 연합과 교제의 분위기를 북돋우기도 한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이 대부분의 현대 교회 공동체 속에서는 드문 일로 여겨긴다.
=====40:10
의 - 이것의 히브리어 '체데크'(* )는 구약 용어들 가운데 가장 해석하 어려운 용어 중의 하나인데 그 이유는 여러 차례 다양하게 등장하기 때문이다(116회 등 장). 따라서 그 문맥에 따라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한데 어떤 학자는 본 시편이 하나님의 구원하심에 대한 선포로부터 출발되는 사실을 중시하여 '구원하시는 도움'으로 이 단어를 번역한다(Anderson). 또 다른 학자는 이를 '인간을 의롭게 하는 신적인방법'으로 해석한다. 이 방법이란 '칭의'(秤義)를 가리키는데 이 혜석의 경우 롬 1:17에 동일한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에 근거를 둔다(Ba-rnes). 그런데 만일 이 해석을 따른다면 본장 1절의 구원 사실은 바로 불신앙 상태로부터 신앙의 상태로의 구원이라는 이야기가 되는데 이것은 온당치 않다. 왜냐하면 본 시편은 다윗의 것으로 그는 이 시편을 기록하기 훨씬 전에 하나님으로부터의 구원을 받은 자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자의 번역이 타당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숨기지 아니하고...선포하였으며...은휘(隱諱)치 아니하였나이다 - 9절 '전하였나이다', '입술을 닫지 아니하였다'등과 의미가 동일한 단어들이 이와 같이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음을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감사를 보이기 위해 타오르는 듯한 마음의 의욕을 표현하기 위함이다.
=====40:11
긍흘을...그치지 마시고- 여기서 시편 기자는 지금까지의 분위기를 바꾸어간절한탄원을 하고있다. 그렇다면 그는 현제 슬픔 가운데 있는 자기 자신을 위로하기 위하여 과거의 구원을 회상하면서 과거 자신의 행실을 근거로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여기에서 저자의 '행실'이란 하나님의 구원, 성실, 인자, 진리를 입이 닳도록 회중에게 선포하고 선전한 일을 가리킨다(9, 10절).
=====40:12
무수한 재앙이 나를 둘러 싸고 - 저자의 죄가 초래한 결과들을 말하고 있다. '재앙'은 고통당하는 자를 파멸시키기 위하여 위협하고있는 일종의 홍수의 물줄기를 가리키는 표현이다(삼하22:5 ; 욘 2:5).
나의 죄막 - 저자가 자기의 불행이 본질적으로 자신의 죄에 대한 징계임을 인정하는 표현이다(32:1 ; 51;2). 그런데 이 구절은 본 시편을 메시야적 시편으로 해석하려는 경향에 결정적인 제동을 거는 구실을 하고있다(Perowne). 즉, 자신의 죄 때문에 고 통 당하고 있는 저자를 죄없이 고통당하셨던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우러러 볼수도 없으며 - 삼상 3:2 ; 4:15) 왕상 14:4등의 용례와 같이 연약함 혹은 노쇠로 인한 시력의 쇠퇴 및 상실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앞을 제대로 보고 비전을 가질 수 없을정도로 임한 재앙이 무겁고 혹독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표현이다.
내 마음이 사라졌음이니이다 - (* , 리비 아자바니). 문자적인 뜻은 '내마음이 나를 버렸다'이다. 그런데 문맥상'마음'을가리키는 '레브'(* )가때로는 '용기' 를 뜻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고려 할 때 '용기가 사라져 버렸다'로 번역하는 것이 좋다.
=====40:13
여호와여...도우소서 - 본절로부터 본 시편 끝절(17절)까지의 내용은 70편과 거의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 따라서 70편이 삽입절의 의미로 이곳에 첨가되었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Hupfeld). 그러나 그것보다는 이 시편의 후반부는 그 내용에 있어서 전반부의 내용을 사용하는 것이 도무지 적합하지 못하다고 느꼈을 수 있는 어떤 후대 저자에 의하여 분리되었거나 변형되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 할 수 있다(Pero-wne).
여호와여 - 원문에는 이 단어 앞에 '라차'(* ) 즉, '즐거워하소서', '기쁨을 가지소서'라는 의미의 표현이 있다. 그렇다면 본절 전반부의 의미를 정확히 말하면 '여호와여 은총 베푸시기를 즐거워 하소서'이다. 한편, 이 구절은 분명히 8절의 '즐기오니'(* , 레촌카)와 평행구를 이룬다.
=====40:14
나의 영혼을 찾아 멸하려 하는 자 - 이에 해당하는 원어의 문자적인 뜻은 '나의 생명을 파괴하려고 찾는 자'이다. 말하자면 나를'죽이기 위하여 찾는자', '죽이기를 원하는 자'를 나타내는 표현이다. 만일 13-17절을 후대 저자에 의해 삽입 및 변형된 구절로 본다면 이 구절을 메시야적 구절로 간주하여 해석하는 것이 가능한데 그 이유는 12절과는 달리 13-17절은 득죄에 대한 언급이 없기 때문이다(12절 주석참조). 만약, 메시야적 언급으로 볼 경우 이 구절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거의 임박한 혹은 죽을위기에 처한 시기에 대한 예언으로 볼 수 있겠다(마 26:16 요 7:6,Barnes). 신약 성경에 의하면 이 당시 그리스도의 대적들은 예수의 말씀이 확산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그의 사역을 저지키 위하여 그를 죽이려고 힘썼다.
수치와 낭패를 당케 하사며 - (* ,예보슈 에야흐페루). 원어의 문자적인 뜻은 '그들이 수치를 당하고 뒤죽박죽이 되게 하소서' 이지만 이 기도의 실현에 대한 기자의 강력한 믿음을 엿볼 수 있는 두 강조 동사가 연결되어 있음을 고려할 때 '그들이 수치를 당하고 뒤죽박죽이 될 것을 믿습니다'로 의역하는 것이 좀더 원문에 가깝다. 즉, 이 구절은 소원이나 바램보다는 일종의 확신에 찬 기대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Barnes). 한편, 뒤죽박죽이 된다는 것은 대적의 목적, 의도가 그렇게 된다는 것이므로 대적의 목적이 실패로 돌아는것을 뜻한다.
=====40:15
하하 - (* , 헤아흐 헤아흐). 이것은 비난이나 경멸을 표시하는 의성어로 다른사람에 대한승리, 특히 다른 사람이 재난 당함을 보고 즐거워하는 태도를 가리킬 때 사용되는 용어이다(35:21, 25 ; 겔 25:3).
자기 수치를 인하여 놀라게 하소서 - 여기 '놀란다'는 말의 뜻은 황폐케 된다는 것, 무용하게 된다는 것인데 이 말은 대적들이 그 목적들, 소원들이 완전하게 성공적이지 못하고 성취되지 못함을 보고 예상 밖의 일이라는 듯 깜짝 놀라는 것을 나타내는말이다. 또한 '수치를 인하여'(* , 알 에케브 바슈탐)는 그 문자적인 뜻이'그들의 수치의 보상 때문에'이다. 여기서 보상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 에케브'(* )로'끝', '어떤 것의 마지막', '어떤 행위 과정의 종국', '결과' 등인 바 '배상', '보상', '임금','상급'을 뜻한다. 그러므로 본절은 저자가 대적들에에 대해 기도한 '황폐케 됨'은, 대적들의 목적 혹은 그들이 말했었던 내용에 대한 적절한 보상이될 것이다.
=====40:16
찾는 자 - (* ,바케쉬). '찾다'는 '그 하나님 여호와께 구할 것이며 그들이 그 얼굴을 시온으로 향하여 그 길을 물으며'의 렘 50:4, 5의 경우처럼 일반적인 의미에 있어서의 예배를 암시하는 예식 용어로 흔히 사용되고 있다(24:3 ; 69 ; 105:4 ; 호 3:5 ; 말 3:1). 그러나 때때로 이 용어는 호5:15-6:1의 경우처럼 '여호와께로의 귀환'을 의미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서 ...'저희가 고난을 받을 때에 나를 간절히 구하여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와께로 돌아가자'라는 표현과 같이 쓰이기도 한다(122:9 ; 느:10).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 '주의구원'이란 (1) 하나님의 구원 방법, 혹은 그것을 따라 인간을 구원하기로 약속된 방법,(2) 죄책 죄의 지배로부터의 구원, 그리고 하나님의 은총에로의 완전하고 영원한 회복(Barnes)을 말한다. 한편,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란 하나님 이외의 어떠한 것에도 의지하거나 의뢰하지 않는, 오직 여호와만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신뢰하자를 가리킨다(62:6, 7).
여호와는 광대하시다 - 이 구절은 대적듸의 조롱하는 외침과 대조를 이루는(15절) 예배자들의 반응이다(Ander-son).
=====40:17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나 - (* , 아니 아니 에브욘). 문자적인 뜻은 나는 고통당하고 있고 가난하다'이다. 여기서 사용된 용어들은 고통을 당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가난했기 때문에 하나님 한 분만을 의지할 수 밖에 없었던 사람의 절박한 상황을 묘사하고있다(Barnes).
나를 생각하시오니 - (* , 야하솨브). 이와 동일한 단어를 '나에게 속히 임하소서'로 번역하고 있는 70:5에 비추어 볼 때 이 구절과 하반절의 '지체하지 마소서'는 서로 평행구를 이룬다고 볼 수 있다(Anderson). 한편 이 유사한 표현이 욘 1:6에서도 발견된다.
나의 도움 - (* , 에즈라티). 70인역(LXX은 이용어를 '나의 구원자'와 나란히 사용하고 있음을 생각해 볼 때 '나의 도움'은 '나의 구원자'로도 번역할 수 있다.
본 시편은 저자가 수많은 위험으로부터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감사한
노래이다. 다윗의 저작에 대해 일부 비평 학자들은 의심을 하고 있지만 이 시는 표제
문에 나타난 것처럼 다윗의 저작인 것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내용으로 볼
때 이스라엘의 지도자의 위치에 있었던 사람에 의해 쓰여졌고, 원수들에 대한 언급으
로 보아 다윗 왕의 작품인 것을 증거하고 있다. 그런데 비평학자들은 본 시편이 27편
의 경우와 같이 2편의 별개의 시가 후에 하나로 다시 편집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들
은 앞 부분(1-10절)이 개인적인 감사의 내용을 담고 있는 반면, 뒷부분(11-17절)은 탄
식의 간구를 담고 있다는 이유를 내세워 별개의 시였음을 주장한다. 그러나 일반적인
견해는 비평학자들의 이러한 주장을 거절하여 본래부터 다윗이 하나의 시로 지었다고
본다. 사실 시의 구성으로 볼 때 감사로부터 탄식의 분위기로 전환함에도 불구하고 본
시는 뛰어난 통일성(unity)을 반영하고 있다.
본시의 배경에 대해서는 사울 왕의 핍박을 피해 도망다녔던 시기였거나 압살롬의 반
역이 진행되었던 시기라는 견해가 있지만 확실한 그거를 제시하기는 힘들다.
본 시편은 크게 (1) 감사의 찬양을 내용으로 한 전반부(1-10절)와, (2) 간구의 내용
을 담고 있는 후반부(11-17절)로 나눌 수 있다. 전반부에서 다윗은 큰 위험으로부터
건져내신 하나님의 구원을 찬송하고, 이어서 하나님께서 베푸신 행적들을 나열하였다.
또한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한 기자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그 뜻을 증거하는 자가
되겠다는 다짐을 천명한다. 그리고 후반부에서느 지금 그가 원수들로부터 겪고 있는
고통을 하소연하며 보호해 주시기를 간구한다. 또한 시인이 빼놓지 않고 있는 것은 자
기의 죄가 많다는 고백이다(12절). 이는 자신이 지은 죄를 회개하고 원수들에게서 구
원하여 주시기를 바라는 것이다.
한편 13-17절은 70편의 내용과 거의 유사한데, 이 점에 관해서는 70편 강해를 참조
하기 바란다.
1. 주의 구원을 노래함(40:1-10)
전체적으로 감사의 찬양이 돋보이는 본문에서 먼저 시인은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
에 빠져 있었다(2절)고 자신의 처지를 밝힌다. 어떤 학자들은 이 구절에 근거하여 본
시가 예레미야의 저작이라고 주장한다. 예레미야가 말기양의 구덩이에 던져졌을 때 에
벱멜렉이 시드기의 명(命)에 의해 건져준 그 사건을 기록한 것이라는 근거를 제시한다
(렘 38:6-13). 그러나 이는 신빙성이 결여된 잘못된 견해이며, 다윗이 처했던 극한 상
황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즉, 다윗은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헤쳐나올
수 없었던 무력한 상황을 묫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은 기나긴 고통과 질병 중에서 여
호와 하나님을 인내로써 소망한다. 그리고 자신의 부르짖음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기
를 간절히 송원하고 있다.
이와 같은 다윗의 끈질긴 간구는 마침내 결실을 보게 된다. 기도는 즉각적으로 응답
되는 경우도 있으나(사 38:3-8;65:24), 늦어지는 경우도 있으므로 낙심치 말고 인내로
써 응답되어질 때까지 간구를 계속해야 한다(눅 18:1-8).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간구에 응답하신 사실을 좀더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고통의
자리에서 건져내어 '반석'(2절), 즉 안전 지대로 옮기셨다. 그러기에 그의 발걸음은
든든하게 세워졌다. 여기서 '반석'은 메시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그래서 학자에 따라서는 이 시편을 '메시야 시'의 범주에 넣어 해석하기도
한다.
구원을 체험한 다윗은 하나님께 올릴 새 노래가 자기 입에 있다고 한다(3절). 하나
님께서 그의 입에 주신 새노래는 구원을 경험한 자들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찬송
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다(33:3;96:1;사 42:10; 계 5:9). 하나님의 구원을 본 사
람들은 경외하는 마음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게 된다. 다윗이 수년 간 질병의 고
통으로 인해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줄 알았으나(41:8), 하나님의 기적적인 구원의 역
사로 인해 깨끗이 일어남을 본 주위 사람들은, 두려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
었다는 것이다. 구원받은 성도의 경건한 생활을 본 사람들은 하나님을 참으로 두려운
분으로 알게 되고(2:11; 마 10:28),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성도
는 구원받은 자로서의 마땅히 나타나야 할 생활을 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기
때문이다(마 5:13-16).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교만한 자와 거짓에 치우친 자들을 가
치 있는 자로 여기지 않고 하나님만 가장 존귀한 분으로 여기기에 복(福)있는 사람이
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를 존대하고 망령된 자를 멸시하
여야 한다(15:4).
이어서 기자는 자신이 경험한 은혜를 간증하고 있다(5절). 시인은 하나님께서 행하
신 기적들이 너무 많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생각도 많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을 일일
이 다 열거할 수 없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구원을 다 기록하려 한다면
평생의 작업으로도 불가능할 것이다(시 115:12; 렘 31:3).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
도하시는 섭리는 인간이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오묘한 것이다(92:5;139:17, 18). 자
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한 하나님의 생각을 누가 측
량할 수 있었으며 헤아려 알 수 있었겠는가! 이 비밀이 구원 역사가 나타날 때까지는
천사들에게도 감추어졌었고(엡 3:9, 10;벧전 1:2). 다니엘도 계시를 받고도 그 뜻을
몰라 알아 보려고 애썼으며 그 결과 마지막 때까지 봉함하라는 명령을 받았었다(단
8:27;12:4, 9). 그러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구원을
늘 찬양하는 것이다. 일평생 그 은혜를 찬양한다해도 그 구원의 은혜를 다 갚을 수는
없으므로 우리는 그 구원의 감격을 늘 되새기며 아직 그 은혜를 깨닫지 못한 주위 사
람들에게 그 사랑을 전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후 5:14;살전 3:12;히 13:1).
또한 다윗은 하나님께서 진정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자기의 깨달음을 독자들에게
밝히고 있다. 히브리서 기자는 6-8절을 인용하여 그것을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로 사용
하고 있다(히 10:5-7). 순종이 제사보다 앞선다는 것은 사무엘 선지자가 사울에게 말
한 그 진리 그대로이다(삼상 15:22). 또한 수백 년 후의 이사야 선지자도 순종이 따르
지 않는 제사는 오히려 가증한 것에 지나지 않음을 말한다(사 1:11, 12).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피나 제물이 아니라 피가 상징하는 생명을 원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이 구절은 그리스동의 속죄제 드림의 예표라고 할 수 있다. 죄 없으신 그리스도의 생
명은 죄인들의 생명을 대신하여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영원한 희생 제물이 된 것이다
(히 9:14;10:4-10). 이어서 본 기자는 하나님께서 순종을 원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겠다는 자세를 보인다. 마치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를 행하기
위해 그 앞에서 대기하겠다는 표현으로 자기의 심정을 밝히고 있다. 진정한 제사는 희
생 제물을 바치는 그 이상의 의미로서 종교적, 도덕적으로 순종하는 삶이 포함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 순종은 기록된 율법서 전체에서 요구되고 있는 요소이다. 예수께서도
율법을 폐하려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기 위해 오셨다고 밝힘으로써(마 5:17) 성경
전체가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 율법의 요구에 순종할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의 마침이 되시므로(롬 10:4) 그를 믿는 자들은 예수께서 요구하시는
순종의 삶을 살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신 것처럼 그리스도
인들은 그리스도를 닮아가야 한다(빌 2:5).
본시의 전반부는 9, 10절의 증거로 끝맺고 있다. 여기서 시인은 적극적인 증거(...
하였나이다)와, 소극적인 증거(...아니하였나이다)를 병행하고 있다. 시인은 그의 입
술을 닫지 아니하였고 주님의 의를 숨기지 아니하였다 또한 그는 하나님의 인자와 진
리를 은휘(隱諱)치 아니하였다. 다윗은 적그적인 행동으로 기쁜 소식을 전했고, 하나
님의 성실한 구원을 전파하였다. 그가 증거하는 '의의 기쁜 소식'(9절)이란 하나님께
서 어려운 자리에서 그를 건져내신 사건을 가리킨다. 그 은혜가 너무 크므로 입술을
닫지 못하며 계속 증거하였다는 것이다. 특히 대회 중에서 그 사실을 숨기지 아니하고
선포하겠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많은 대중을 상대로 복음을 증거한다는 것이다. 시인
은 복음 전파의 사명을 남다르게 느꼈기 때문에 대중 앞에서 담대히 증거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가 전하는 '의의 기쁜 소식'은 우리를 대속하여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
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다윗처럼 복음 전판의 사명을 최선을 다해 감
당해야 한다. 사도 바울과 같이 복음을 전하지 않았을 때 화(禍)가 미칠 것이라는 각
오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이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이다(롬 15:19, 20; 고전 9:16;
딤후 4:2).
2. 탄식의 간구(40:11-17)
27편에서와 같이 중간 부분에서 내용이 갑자기 일신(一新)되고 있다. 시인은 앞 부
분(1-10절)에서 환난 중에서 자신이 하나님의 구원을 맛보았음을 노래하며 하나님께
감사하였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탄식과 저주의 내용이 등장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
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내용의 부자연스러운 연결이라는 이유로 이 부분이 후대에
첨가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Briggs). 그러나 시의 흐름이 그들이 우려하는 바화
는 달리 매우 자연스럽게 되어 있다.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했다고 해서 원수들로부터
완전히 놓임을 받게 된 것은 아니다. 그들은 아직 건재해 있다. 그러므로 시인은 구원
을 노래하고, 이어서 또 다른 구원을 호소하는 간구를 하게 된다. 그의 기도는 죄로
말미암아 맞게 된 영적 침체에서 구원해 달라는 기도와(11-13절), 원수들의 위험으로
부터 구원해 달라는 기도(14-17절)로 나눌 수 있다.
먼저 다윗은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한 자로서 그 구원의 은총이 계속 이어지기를 간
구하고 있다(11-13절).왜냐하면 셀 수없을 만큼의 재앙이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긍휼하심과 인자와 진리로 보호하여 주시지 않으면 자신의 죄악 때문
에 하나님을 우러러 볼 수가 없다고 말하고 있다. 지금 시인은 죄로 인하여 위험과 곤
경에 처해 있다. 그가 수많은 재앙에 쌓여 있다고 말한 것은 자기가 받아야 할 형벌
이상의 것을 받고 있다고 하소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에 대하여 언급함으로 자
신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질책이라는 것을 밝히는 것이다. 죄는 강하므로 사람의 힘으
로 제어하기가 불가능 할 뿐 아니라 헤아릴 수 없을만큼 많다. 그렇기 때문에죄는 사
람의 영혼을 내려앉게 만든다. 시인은 이러한 절망 가운데서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
고 있는 것이다(13절). '속히 나를 도우소서'라는 구절에 잘 나타나듯이 그는 심각한
고통과 마음의 불안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간구는 더욱 간절하 수 있었
고, 여러 고통 때문에 괴로우므로 조속한 구원을 부르짖고 있는 것이다. 시인의 마음
은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42:1) 하나님의 도우심의 손길을 애타게 소원
하고 있다. 이와같이 죄는 가공할 만한 힘을 가지고 있으므로 인생은 만인의 죄값을
이미 지불하신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와 죄의 문제를 해결 받아야 한다(고후 5:21;히
4:15, 16;9:28;요일 1:9).
마지막 간구에서 시인은 두 종류의 '구하는 사람'을 대조시키고 있다(14-17절). '나의
영혼을 찾아 멸하려 하는 자들'(14절)과 '주를 구하는 자들'(16절)이 대조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경건한 자들과 불경건한 자들로 구분되는 자들이다. 다윗은 이
불경건한 원수들이 자기를 어떻게 괴롭혔는지 구체적으로밝히고 있다. 그들은 다윗의
영혼, 즉 그의 생명을 주이려고 찾아 다닌다고 한다. 이것은 다윗이 처한 상황이 어떠
했는지 명백히 암시하고 있다. 원수들은 다윗을 단순히 왕위에서 쫓아내려는 것뿐자
아니라 죽이려고 찾아 나서고 있다. 일례로, 아히도벧이 일만 이천 명을 이끌고 다윗
왕을 죽이고 모든 백성을 압살롬에게 돌아오게 하겠다고 자신의 모략을 압살롬에게 보
고한 것을 볼 때, 그들이 노린 것은 왕위뿐만 아니라 후한을 없애기 위해 다윗을 처치
하려 했음을 알 수 있다(삼하17:1-3). 그리고 다윗은 자기가 육체적 질병과 위험 중에
처해 있을 때 원수들이 기뻐하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하하'하면서 다윗을 비욱고 졸
롱하면서 다윗의 아픔을 즐기고 있었다. 이 구절은 장차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상
에서 당하실 많은 조롱을 예표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마 27:40-44). 시인은 이렇게
자기를 공격하는 원수들을 도말해 달라고 세 번이나 반복하여 간구하고 있다(14, 15
절).
하나님자의 백성을 모욕하는 자는 곧 하나님을 모욕하는 결과를 빚는다. 그러므로
그들의 악한 계획이나 음모는 반드시 실패로 끝난다(시 37:2;129:6;사 40:7). 그들은
모두 수치와 낭패를 당하게 될 것이며 자신들이 당하는 수치로 인하여 스스로 놀라게
될 것이다(15절). 예수님을 향해 야유하고 조롱하던 입들이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
아 다물어지게 된 것같이,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간구를 들으시고 원수를 쳐서 그들의
입을 닫게 하시며 성도에게 온전한 승리를 선사하실 것이다(롬 8:31, 37;고전
15:55-57;요일 2:13).
반면에 시인은 '주를 찾는 자들;에 대하여는 원수들과 완연히 다른 결과에 이르게
해달라고 간구한다(16, 17절). 주를 찾는 자들이란 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는 자들이
요, 하나님의 구원을 항상 바라는 자들이다. 다윗은 그들이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체험
하기를 기원하고, 그들의 입에서 '여호와는 광대하시다'라는 고백이 나올 수 있게 해
달라고 간구한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는 자는 하나님게서 만나 주실 것이며(렘
29:13;마 7:8),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체험하여 입술로 고백할 수 있게 된다.
성도는 매일 하나님의 구원을 기대하며 바라야 한다. 성도는 주님께서 몸을 드려 피
흘려 죽으심으로 베풀어주신 사죄의 은총을 늘 기억하는 동시에 그 은총의 복을 마음
껏 누리는 자유자들이어야 한다(70:4;105:3; 눅 4:18;롬 8:2;고후 3:17).
이런 와중에서 시인은 다시 한번 자신을 돌아보며 이 시를 끝맺고 있다(17절). 그는
자신에게 되돌아가 자신이 한없이 가난하고 궁핍한 자임을 자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
고 하나님께서 지금도 자기를 구원하시며 배려해 주실 것이라고 되새긴다. 그느 하나
님에 대해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건지시는 자'임을 알고 있기에 장래에 대해 불안해
하지 않고 더욱 절대적인 확신을 갖느느다. 마지막으로 다윗은 도움이신 하나님게서
속히 자신을 구해 달라는 간구로 이 시를 마치고 있다. 이것은 다윗이 하나님의 절대
적인 구원을 확신하며 곧 회복될 것을 바라고 있는 기도라고 할 수있다. 그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해 왔다. 비록 그가 심각한 위기에 이르렀다고
하지만 여전히 하나님께서 자신을 돌보시고 곧 구원하실 것을 바라보고 있다. 이와같
이 성도는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하면서 장래에 대한 더욱 큰 확신을 갖게 되는 것이
다.
이와 같은 본시의 큰 주제는 하나님의 구원이다. 그러므로 본시는 구원에 대한 감사
의 노래와 지금 펼쳐지는 상왕에서와 장래에 있어지게 될 고통에서의 구원을 바라며
확신하고 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하나님의 구원은 그를 신뢰하는 백성들에게 가장 큰
관심이며 중요한 문제이다. 성도는 하나님으로부터 구체적인 상황에서 수많은 구원을
체험하게 된다. 성도는 구원이 요구되는 상황들을 수시로 만나게 되는데 그때마다 하
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때가 차면 반드시 그의 간구에 귀를 기울이시어 건져 주신다. 그리고 구원 받은 성도는 그 구원을 기쁨을 맛보며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찬송하게 된다. 또한 성도들은 구원의 경험을 통해 현재와 미래의 하나님의 도우심을 강하게 확신하게 된다. 지금까지 구원하신 하나님게서 미래의 구체적 상황에서도 구원하실 것을 신뢰하게 되는 것이다. 성도들이 해야 하는 것은 그 구원의 감격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절대적 복종뿐이다. 또한 죄에 대한 경각심을 갖는 것이 요구된다. 우리는 이 시를 읽으면서 다시 한번 하나님의 구원을 노래할 이유를 찾게 되고 장래에 대한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대하게 된다. 요컨대 우리는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로서 그분의 말씀을 신뢰하며 순종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