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윤선 주석, 요한계시록 0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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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 2:1
 에베소 교회.- "에베소"는, 소아시아의 가장 중요한 도시인데 무역항이고, 당시 동서양 문화의 교류 지점이었다(Greijdanus). 에베소는 소아시아의 중요한 교회인 고로 여기 첫머리에 기록된 듯하다.
 오른 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 일곱 서신은 그 첫 머리에 이처럼 주님의 사역적 명칭(使役的名稱)을 내걸고 시작하는데, 각 명칭은 각 서신 내용에 부합한다. "일곱 별을 붙잡"으시고다니시는 분은 곧, 교회의 선악을 아실 것이니, 에베소 교회의 내용을 잘 아실 것은 시실이다.

 계 2:2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 "행위"는 어떤 특별한 한개의 덕행(德行)이라기보다 이 아래 있는 몇 가지 덕행들을 총괄하는 머리말이다. "수고"란 말은 헬라 원어로 코포스(* )인데 특별히 신산(辛酸)한 수고를 가리킨다. 에베소 교회에는 거짓 스승들의 활동이 적지 않은 듯하니, 그들을 축출(逐出)하는 일은 용이하지 않은 것이었다. 그것은, 혈기로 할 수 있는 투쟁이 아니고 덕을 쌓으면서 싸워 나아갈 일이다. 이런 영전(靈戰)을 체험하지 못하고는 그 고생이 어떠함을 이해하기 어렵다. "인내"란 말은, 헬라 원어로 휘포모네(* )라고 하는데 그 어원(語源)은 "아래에 머문다"는 뜻이다. 인내야 말로 모든 고초하(苦楚下)에서도 개의(介意)치 않고 머물러 서는 것이며 백절불굴(百折不屈)함이다. 이것은, 소극적으로 견디는 것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극복(克服)하고 나아가는 것을 가리키는 글자이다.
 "악한 자"- 란 말의 헬라 원어(* )는, 관사(冠詞)없는 복수 명사(複數名詞)이므로 "악한 것들"이라고 번역함이 적합한 듯하다(Greijdanus). 이 말의 헬라 원어 카코스(* )는, 본질적 악성(本質的惡性)을 의미하나니, 인자하신 하나님과 및 교회도 그런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런 악은 거짓 스승들의 교훈 곧, 이단일 것이다.
 자칭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그런 거짓 스승들의 화를 주의하라고 미리 경고한 바 있었다(행 20:28-30). 그 교회는 그대로 잘 주의하려고 한 듯하다. 마 7:26; 고후 11:13; 갈 1:8,9 참조.

 계 2:3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 이 귀절은, 앞절 초두에 있는 말씀 내용을 중복하여서 역설한 듯하다. "내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하신 복음이다.

 계 2: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대하여 칭찬할 바를 먼저 찾으시고, 꾸지람은 뒤에 하시니, (1) 사람을 긍휼히 여기시는 인자(仁慈)요, (2) 후에라도 책망할 것은 반드시 책망하셨으니 그의 공의이다. 그러나 이 꾸지람도 혈기에 속한 것이 아니고, 사람의 죄과를 고쳐 주시는 사랑의 동기로 하신 것이다. "처음 사랑"(하나님과 사람에게 대한)은, 에베소 교회 신자들이 처음 예수님을 믿을 때에 가졌던 사랑이다. 그들이 교리를 지키려는 열심은 가졌는데 왜 사랑을 버리게 되었던가? 그것은, 경험과 역사가 증명함과 같이 그렇게 되기 쉽다. 논전(論戰)과 투쟁이 있는 곳에는 사랑과 인정이 식어지기 쉽다. 그 이유는, 사람은 그 생활의 양면(兩面)을 구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힘써 사랑을 지키려고 하면 은혜 가운데서 될 수 있다. 논전(論戰)이 필요한 시기가 있으나 그것을 혈기로 혹은 포학(暴虐)으로 하지 말고, 지혜(智慧), 인내, 노력, 건덕(建德)으로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일 개인 신자가 단독(單獨)으로 하기 어렵고 모든 신자들이 합력하여야 할 일이다. 그들이 합력하면, 지혜, 인내, 노력, 건덕이 있다. 에베소 교회에는 인내와 노력은 있었으나(2절), 지혜와 건덕이 부족하였던 듯하다. 만일 그들에게 지혜와 건덕이 있었더면 사랑도 있었을 번하였다.

 계 2:5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이것은, 죄의 원인을 탐지하는 행위의 필요를 역설함이다. 회개와 사죄(赦罪)의 길은 오직 기독교에만 있다. 산 같은 죄라도 진심으로 회개하면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누가, 한번 죄를 회개했다가 불행히 다시 범죄했어도,그가 참으로 회개하면 하나님은 사하시는가? 사하신다. 그것이 곧 사죄다운 사죄이다. 그것이 곧 하나님이 생각하신 사죄이다(마 18:21,22). 회개는 이와 같이 귀한 것이로되, 사람들이 범죄하고도 뻔뻔스럽게 그 귀한 회개를 하지 않는 때가 많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런 죄인들로 하여금 회개케 하기 위하여 그들을 징벌하시는 일이 있다. 그런데, 이 징벌은, 회개를 목적한 것이요, 영멸(永滅)을 목적한 것이 아니니 만큼, 그것은, 육신적 고통을 받는 정도의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무서운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범죄했으면 곧 회개해야 된다. 회개하되 그 죄행의 출발점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죄는 번연성(繁延性)을 가진 것이기 때문에 출발점을 완치(完治)해 버려야 근치(根治)가 된다.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이것은, 에베소에서 교회가 없어질 것을 예언(豫言)함인데, 오늘에는 과연 그 도시 전체가 폐허만 남았다고 한다(greijdanus, Charles). 그 교회가 예수님의 이 권면을 듣지 않은 까닭으로 이렇게 된 것이다(Newell). 램세이(Ramsay)는, 이 말씀의 의미가 그 교회가 딴 곳으로 옮겨진다는 뜻이라고 하나 옳지 않다.

 계 2:6
 니골라당.-이레네오(Irenaeus)는, 이것을 서도 행전의 일곱 집사 중 한 사람이 타락하여 꾸민 이단(異端)이라고 한다(Adv. haer I,26, 3). 그러나 성신 충만한 집사(행 6:5)가 어떻게 타락할 수 있을까? 어떤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곧 "니골라"란 원어는 "백성을 이긴다"는 뜻을 가진 말인데, 구약(민 22:12)의 히브리어 발람(* =백성을 이김)에 해당하는 바 개인(個人)의 이름이 아니고, 이단 교훈으로 신자들(하나님의 백성들)을 정복하며 파괴하는 거짓 스승들의 무리라고 한다. "니골라당"이 가르친 교훈은, 2:14, 20에 있으니, 그것은 물론 행 15:28,29에 있는 성령님의 명령을 순종치 않은 것이다(Charles).

 계 2:7
 이기는 그에게.- 이것은, 과거 분사(過去分詞)가 아니고 현재 분사(現在分詞, * )이니 승리의 완필(完畢)이 아니고 진행을 염두에 둔 말이다(Greijdanus)(마 24:13 참조). 신앙의 승리는 현세에 완성되는 시간을 가지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의 별세 시각(別世時刻)까지 되어 가는 일이다. 여기 "이김"이란 말은 사도 요한의 필적(筆跡)이다. 요한 일서에도 이 말씀이 있다. 요일 5:4,5 참조.
 하나님의 낙원.- 이것은 의인(義人)이 별세한 후 그 영혼이 가는 곳이다(눅 23:43). 바울이 거시 가 본 일이 있으니, 곧, 삼층천(三層天)과 동일시(同一視) 된다(고후 12:4). 이 밖에 예수님께서 낙원(樂園)에 대하여 직접 말씀하시지는 않았으나, 간접적으로 "아브라함의 품"이라고 비유적으로 말씀하신 것이 있다. 가경(假經)저자들이 낙원에 대하여 감성적(感性的)으고 많이 말한 바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과 그 사도들이 말한 것에 비교하면, 이채(異彩)를 띠고 있으니, 그것은 인간의 상상(想像)에서 나온 그릇된 것이다. 페론(Perowne)은 말하되, "낙원에 대하여 정경서(政經書)가 침묵하는 점을 신비주의 문학은 가장 화사(華奢)하게 묘사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정경 문서의 간결한 기록을 오히려 진실미 있게 본다. 일설에, "낙원"은 음부의 일부(一部)라고 한다. 곧, 음부의 일부에는 악인들의 영혼들이 가 있고, 다른 일부에는 의인들의 영혼들이 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옳지 않은 학설이다. 구약에서 음부란 말로써 별세한 육신 상태 (무덤)을 가리켜 말한 적이 많다(욥 10:21, 26:5; 시 88:10-12, 94:17, 22, 115:12; 잠 2:18, 15:11, 21:16; 사 14:, 26:14). 이 귀절들은 모두 무덤을 의미한 것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은 또한 음부를 가리켜 악인들의 영혼이 가 있을 곳으로도 말한다(시 44:23; 겔 26:20; 사 9:9, 10;마 11:23 참조). 그리고 "낙원"은 천계(天界)에 있는 것이다(고후 12:4).
 생명 나무의 과실.- 이것은, 구약 창세기(창 2:9, 3:22)에 처음 나온 말인데, 풍유적(諷諭的)으로 보는 해석도 있고, 역사적(歷史的)으로 보는 해석도 있다. 풍유적 해석은 이 과수가 실재(實在)한 것이 아니고, 다만 "영생"의 개념(槪念)을 시적(詩的)으로 이렇게 비유한 것 뿐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도 너무 지나친 독단(獨斷)이다. 우리는, 이 과수(果樹)를 실재한 과수로 보면서 그것이 생명의 주(主) 그리스도를 비유하였다고 한다(Dr. Geerhardus Vos). 몸이 영생하여 있으면서 식물(食物)을 섭취한다고 함이 역시 내세의 현상이다(계 22:2 참조). 이기지 못한 아담은 이러한 영생의 식물을 상실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는 자들은 이것을 도로 받는다. 그 과수 자체가 사람을 영생케 하는 마술적 능력을 가진 것이 아니다. 영생하게 하는 능(能)은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있다. 그 과수는 내세(來世)에서 성도들의 분깃이 된다.
 가경(假經)에 이 과수에 대하여 여러가지로 이야기한 바가 있으니, "성도들이 이 생명수를 향유(香油)로 사용한다"고 하였고(2 Esd. 2:12), "이 생명 나무의 향기는 모든 향기에 뛰어나고, 그 잎과 꽃과 나무는 시들지 않고, 그 실과는 대추 야자의 열매와 같다"고 하였다(Ethiopic Enoch 24:4). 그러나 가경의 이 이야기는 사랑의 상상(想像)의 산물이고 진리는 아니다.
 귀 있는 자.- 이것은, 하나님 말씀을 알아 들을 수 있는 신령한 귀의 소유자를 가리킨다. 그렇기 때문에 그 아래 "성령이...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라고 하였다. 이 문구는 , 교회를 상대하고 가르치는 말씀인 동시에 각 개인별로 그 회중(會衆)을 다룬 것이 분명하다.
 교회들에게(* ).- 에베소 개교회에 보내는 말씀을 "교회들(複數)에게"하시는 말씀이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이 서신이, 모든 교회를 상대하고 기록된 것임을 보여 준다.

 계 2:8
 서머나.- 이것은, 에베소 북쪽에 있는 곳인데 현존하며, 그곳에 강이 있는데 멜레(Meles)라고 한다. 당시에, 폴리갑(Polycharp)이 이 지방 교회의 감독이었으며, 그가 순교한 연대는 주후 168년이었다.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 이것은, 수난하는 서머나 교회에게 위안과 소망이 될만한 주님의 칭호이다. 여기 7서신(書信)에 있는 주님의 칭호는 이렇게 각 교회 형편에 적합하도록 고안 되었다. "처음"과 "나중"은 영생하신 자란 의미도 있고, 우주를 지으시고 유지하시고 귀정하시는 자란 의미도 있다. "죽었다가 살아나신 자"란 이름은, 죄인을 구속하시려고 죽으셨다가 사망을 이기시고 부활하시어, 완전히 신자들에게도 같은 부활을 주시는 자라는 것이다.

 계 2:9
 환난과 궁핍.- "환난"(* )은 그리스도 신앙을 인하여 받는 외래(外來)의 압박이고, "궁핍"(* )은 그 압박의 결과로 당한 생활상 빈곤을 가리킨다. 이런 핍박은 그 때에 기독자들이 불신 유대인 또는 이방인 폭도(暴徒)로 말미암아 당했던 것이다(히 10:34).
 부요한 자.- 그들이 육신상으로는 빈핍하나 영적으로는 부요할 것을 가리킨다. 눅 12:21; 딤전 6:17,18; 고후 6:10; 계 3:17; 약 2:5 참조.
 자칭 유대인.- 유대주의는, 서머나 지방에서 강하여 기독교를 박해 하였다고 한다(Just. Dial. 16,11, 3). 유대주의자들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지 않고 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 곧, 유대인 된 것을 천국 시민권으로 오해하였다. 폴리갑이 순교할 때에도 그들은 이방의 폭도들과 합작했고, 그 시체도 기독 신자들에게 주지 못하게 한 것이다(Moffatt). 그들은, 그렇게 기독 신자들을 박해하면서 스스로 유대인 된 자세를 한 것이다.
 사단의 회.- 이 말이 구약에는 없고 다만 악인들의 회(민 14:27,35; 시 21:16)라고만 하였으나 계시록의 "사단의 회"라는 의미와 비슷할 것이다. 이런 유대인의 무리는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고 또 기독 신자들을 기탄 없이 박해하였다. 서머나 교회 감독 폴리갑(Polyc. Mart. 13-)의 글에도 복음을 박해한 유대인들에게 관한 말이 있다. 그리고 서머나 주민의 종류표를 보이는 조각서(彫刻書)에도 이스라엘 종교를 내버린 유대인들에게 대한 말이 있다고 한다(CIG. 3148).

 계 2:10
 십일 동안 환난.- 이것은 알기 어려운 말이다. (1) 어떤 주석가들은 여기 날수(日數)는 햇수(年數)의 상징이라 하여 로마의 디오클레시안(Diocletian)황제의 10년 간 혹독한 핍박을 가리킨다고 말하며, (2) 또 어떤이는 말하기를, 이것은 로마의 십대 핍박자(十代逼迫者) 곧, 네로, 도미시안, 트라얀, 하드리안, 아우렐리우스, 세베루스, 맥시멈, 데키우스, 발레리안, 도미클레시안 황제(Nero(54-68), Domitian(81-96), Trajan(98-117), Hadrian(117-138), Marcus Aurelius(161-180), Septimins Severins(193-211), Maximinus(236-238), Decius(249-251), Valerianus(253-260), Deocletianus(284-305))등의 열 시대를 가리킨 것이라고 하였으나 확실하지 않다. (3) 크레다너스(Greijdanus)는 이것을 한정(限定)있고 길지 않은 기간을 비유한 것이라고 하였다(De tien dagen spreken van een bepaalden tijd die eindigt, aan welken vaste grenzen gesteld zijn)(11:3, 12:6, 11:9-11 참조). (4) 여기 십일이란 것은 단 1:12,14에 나온 것이라고 생각된다. 곧, 기독자가 받는 고난은 결국 그의 영혼을 유익하게 해주는 뜻 있는 것이라는 것이다. 다니엘은, 십일 동안 채소와 물만 먹는 시험을 당했으나 결국 그의 얼굴은 윤택하여졌다고 한다.
 우리는, 세째 해석과 네째 해석을 합하여 생각하는 것이 합당 하다고 본다. 기독자들이 받는 환난은 하나님의 견지에서 보실 때에 사실 "십일 동안"과 같은 잠간 되는 것이다(벧전 1:6; 롬 8:18). 그 뿐만 아니라 그들이 당하는 환난은 그들의 영혼을 유익하게 하여 준다.
 생명의 면류관.- 이것은 내세의 생명을 받을 뿐 아니라 영광까지 가리킨다. 우리가 현세에서 그것이 어떠한 것이라고 형언하기는 어렵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 순교에 참예하는 자가 죽음에 아주 빠지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살고, 살 뿐만 아니라, 그 삶의 극치(極致)에 빛나기까지 하는 영화로운 생명에 이른다. 이런 의미에서 크레다너스(Greijdanus)는 적합한 평주(評註)를 썼다(Gaan de geloovigen dus ook den marteldood in, toch zullen zij daarin niet onder gaan, maar leven, en in onvergankelijke levensheerlijkheid schitteren). 본장 끝에 있는 설교(죽도록 충성하라)를 참조하여라.

 계 2:11
 둘째 사망의 해.- 이것은, 멸망 받을 자들이 최후로 받는 분깃이니, 곧, 계 19:10, 20:10, 21:8에 있는 불못과 동일시 된다. 일설에 말하기를, "불못"은, 필자(筆者)가 사해(소돔과 고모라의 자리)라는 흉해(凶海)를 들어서 불가 형언(不可形言)의 흉소(凶所)인 지옥을 상징한 듯하다고 한다. 에녹경에 사해를 악령들의 벌 받는 곳으로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우리는, 계시록이 말하는 지옥을, 악한 자들이 영벌(永罰)받는 곳인 줄로 믿을 뿐이다.

 계 2:12
 버가모.- 이것은 무시아의 카이쿠(Caicus) 강 가에 앉은 땅인데 여기는 로마 황제를 예배하는 신전(神殿)이 있고, 또 제우스(Zeus) 신전이 있으니, 우상 숭배의 총 본부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그러므로 우리 본문은 이곳을 가리켜 사단의 위가 있는 곳이라고 하였다.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이.- 영전(靈戰)의 필요가 있는, 버가모 교회에 대하여 이런 칭호를 가지시고 임하심은 매우 적합하다(2:16 참조). "좌우(左右)에 날선 검"은,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하는데, 죄인들을 귀정(歸正)시키며, 혹은 심판하는데 사용되는 것이다(1:16 해석 참조).

 계 2:13
 사단의 위가 있는데.- 이것은 버가모가 사신 우상의 중심지였음을 염두(念頭)에 둔 말이다. 버가모에는 제우스, 다오니우스, 아데나, 에이스클레피우스의 네 개의 큰 우상 전각들이 있었고, 또 로마 황제 숭배를 위한 두 개의 전각이 있었다. 특별히 에이스클레피우스 전각에는 각처에서 불구자(不具者)들이 모여 들어 있어 에이스클레피우스라는 신이 주는, 요법 현몽(療法現夢)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버가모는 요한의 때에 아시아에서 우상 숭배의 본부(本部)로 되어 있었다. 제우스 우상 숭배의 고적(古蹟)은, 독일 사람 휴만(Humann)의 발굴(發掘)한 바 있어 백림 박물관(伯林博物館)에 간직되었다(E.J. Banks).
 안디바.- 이 사람은 버가모에서 순교한 성도인 듯한데, 제 3세기에 버가모의 어떤 조각에 이 이름이 있고(Deissm. 187), 터툴리안(Tertullian)은, 이 사람을 실제적 버가모의 순교자로 여긴다(adv. Gost Scrp. 12). 그러나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에 대한 상세한 역사는 없다. 시몬 마타프라테스(Simon Mataphrates)의 보도(報導)하는 전설(이는 전설이고 성경은 아님)에 의하면, "안디바"는, 버가모 교회의 강의(强毅)한 감독이었는데 그의 명성(名聲)이 높은 고로, 로마 황제 예배 종파(皇帝禮拜宗派)에게 잡혀서 놋으로 만든 황소 속에 소살(燒殺)되었다고 한다(Moffatt). 유세비우스(Eusebius)는, 칼푸스(Carpus), 파필루스(Papyus), 아가도니게(Agathonike), 기타 다른 순교자들이 요한의 후대(後代)에 버가모 교회에서 났다고 하였다(Eusebius H.E. 4:15,48). 핍박자들이, 그 순교자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훼방하는 말을 하게 하려고, 불가형언(不可形言)의 악형을 가했으나 그들은 항복하지 않았다고 한다.

 계 2:14,15
 두어가지 책망할 것.- 여기 "두어가지"란 말은, 헬라 원어로 올리가(* )라고 하는데 적은 수량을 의미하며, 둘 이상의 복수를 가리키거나 한 수(一數)도 역시 이 말로 표시될 수 있다(Greijdanus).
 이스라엘 앞에 올무.- 민 31:16, 25:1-5 참조. 발람이 발락의청구대로 이스라엘을 거슬러 저주는 안했지만, 이스라엘을 유혹하여 모압 여인들과 음행케 하는 꾀를 발락에게 가르쳐 주었다(민 24:25, 26:1, 31:16). 버가모 교회에도 이런 악한 자들이 몰래 들어와, 신자들을 유인하여 우상 섬기는 장소에 가게 하고, 그 제물까지 먹게 하였으니 참으로 괴악하다. 이런 행동은, 사도행전 15장에 사도들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제정하여 이방 교회에 보낸 금령을 어긴 것이다(행 15:20,29).

 계 2:16
 본절은, 발람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고 모압 왕 발락의 요청대로 가다가 칼을 뽑아 든 천사를 만나게 된 사실을 염두에 두고 한 말씀이다(민 22:31 참조). 겔 3:17-20, 33:6,13 참조.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주님께서는 선민을 해하는 자들을 그대로 두지 않고 반드시 대적하신다. 이런 대적은 발람을 향하여도 있었던 것이다(민 22:31,32 참조). 위태하다 하나님의 백성을 해하려는 어리석은 행동이여!

 계 2:17
 감추었던 만나.- 랍비의 전설에 의하면, 예레미야나 이사야가 "만나"를 담은 법궤를 어디 감추었는데 메시야 시대에는 이 만나가 다시 공개된다고 한다(2 Macc. 2:4-6, Mechilta Ex 16:25). 본절의 이 말씀은 이런 전설을 염두에 둔 것인가? 우리는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 마이어(Meyer)는 여기 "감추었던"이란 말을, 이 세상에는 없고 하늘에만 있다는 의미로, "만나"는 천계(天界)에서 먹는 양식이라고 하였으니, 적당한 해석인 듯하다. 클다너스(Greijdanus)도 역시 이와 비슷한 해석을 취하여 말하기를, "감추었던 만나는 신령하고 놀랍고 영화롭고 참된 양식이라"고 하였다.
 흰돌.- "돌"은 신자의 상징이며(벧전 2:5,6), 택한 백성의 표호(標號)이다(출 28:15-21). "흰" 빛은 성결을 의미한다. 모팟드(Moffatt)는, "흰 돌"이 이방의 미신 사상에서 유래(由來)한 것이라고 잘못 생각하여,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미신을 소개하였다. (1) 고대인들에게는, 흰 돌은 운수 좋은 부적(符籍)을 의미하는데 거기 신(神)의 이름을 쓰면 그것으로 사귀를 물리칠 수 있다 하였고, 또 자기들이 섬기는 신의 거처에 접근하여 출입할 수 있다고 한다(Dieterich. Mithras Liturgie 31). 이 미신에 의하여 흰 돌에 그리스도의 이름을 쓴 것은 그 소유자로 하여금 모든 위험에서 안전을 얻게 하고 또 하나님 앞에 밀접히 나아갈 수 있게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해석은 너무도 성경 저자의 마음을 몰이해한 것이다. 성경 저자들은 미신의 풍습(風習)을 미워하고 멀리하였다. (2) 모팟트는 다시, 로마 황제 예배와 관련된 제사장이, 그 이름의 영존을 위하여 말한, "내 이름을 돌 위에 써라 그리하면 영존(永存)하리라"고 한 말을, 이 점에 연결시켜 본다. 그러나 이것도 억설이다. 성경 기자들은, 우상 숭배를 미워했는데 어찌 그것과 관련된 사상을 채용하였으랴! (3) 그는 또 다시 신비종파(神秘宗派)의 견습생(見習生)이 그 종교의 정회원으로 입참(入參)할 때에 흰 돌에 그의 새 이름을 쓰는, 그 풍속에서 이 말씀이 유래한 듯하다고도 하였다. 그러나 이것도 성경 저자들의 마음을 모르고 한 말이다. 성경 저자들은 이교(異敎)의 풍속을 미워할 뿐이고 결단코 채용하지 않았다.
 새 이름...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크레다너스(Greijdanus)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으니, 곧, "흰 돌에 쓴 새 이름은, 그 이기는 자에게 세워 주는 그의 본질과 인격과 거기에 해당하는 영광과 지위의 선물을 상징한다. 이 세상에서 우상 제연(祭宴)에의 참석을 거절한 신자는 모두 박해를 받았으며, 심지어 생활의 길까지 빼앗긴 것이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다 모르게 그는 천적(天的)으로 영예(榮譽) 있는 인격과 지위를 얻는 것이다"-(意譯)라고 했다(Greijdanus, Openbaring, p. 77). 이 해설은 정견(正見)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로마여(Lohmeyer)는 여기 "새 이름"은 그리스도의 것이라고 한다. 그는 말하기를, "그것은 새 것이다. 그 이유는, 그것이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다가 그것을 받는 자만 비로소 하늘에서 알게 되는 까닭이다"(Der name ist naturlich der Christi; er ist "ne", Wenn er in der Form bisher unbekannter, nur dem Empfager verstandlicher Zeichen und Zahlen auf dem stein eingeschrieben ist.-Die Offenbarung Des Johannes, p. 27)라고 하였다. 계 19:12을 참조해 보면, 이 해석도 일고(一考)할만하다.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새 이름"을 흰 돌에 써서 이기는 자에게 주신다 함은, 그리스도께서 그 이긴 자에게 전에 없던 긴밀한 교제를 시작해 주시는 특은(特恩)을 의미한 듯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 해석을 신임하기 어렵다.

 계 2:18
 두아디라.- 이는 현명(現名) 아키사(Akhissar)라고 하는데 무시아의 접경에 있고, 자주 장사 루디아가 이곳 여인이었는데(행 16:14), 그로 말미암아 여기 교회가 설립된 듯하다. "두아디라"에는 남신(男神)과 여신(女神)을 우상으로 섬기는 악한 풍속이 있었는데, 특별히 그 신당 중의 하나에는, 그 사신(邪神)의 신탁(神託)을 받는 소위 여선지(女先知)가 있었다고한다. 어떤 이는 말하되, 이 인물이 계 2:20의 이세벨이라고 하나 확실하지 않다. (2) 그곳에 공인 조합(工人組合)이 많이 있었느데, 동업 조합(銅業組合), 염료 조합(染料組合) 등이다. 루디아는 이 지방 출신으로서 염료(染料) 행상(行商)을 하고 있었다(행 16:14). 이렇게 조합의 지배력이 강한 곳에는 생활 통제가 있어서, 복음과 충돌된 경우도 많이 있었을 수 있다. 그러므로 미약한 교회는 그 충돌을 면하려고 타협의 길을 취하기 쉬웠다. 두아디라 교회의 신자들은 그 지방 조합의 지도에 따라서 우상 관계의 연석(宴席)에 끌려서 참예한 듯하니, 그렇게 된 경우에는 그들이 우상의 제물을 먹었겠고, 또한 우상 숭배자들과 함께 음란한 일에까지 유인 되었을 수 있다. 복음은 신자를 율법에서 해방해 준다는 대교리(大敎理)를 오해하여, 반 율법주의(反律法主義)로 떨어지는 악한 사상이 고대 교회에 유행되었다. 그 악한 사상에 감염(感染)된 무리는,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과 음행 같은 것을 기탄 없이 행하였을 듯하다.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1:14,15 - 의 해석 참조. 심판적 행위로 경계하는(22, 23)이 서신에 있어서는 이 칭호(稱號)가 적절하다.

 계 2:19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 여기 "사업"이란 말은 그 아랫 말들의 총괄어(總括語)이다. "사랑"이 첫 머리에 놓인 것을 보면, 이 교회는 사랑에 붕한 듯도 하다. 그러나 여기 나온 어순(語順)으로 보아 사랑 다음에 "믿음"이 놓였으니, 이 교회의 경건이 순리(順理)대로는 자라지 못했다는 의미가 포함된 듯하다(살전 1:3, 3:6, 5:8 참조). 사랑은, 마땅히 믿음을 근본으로 하고 나와야 신본주의(神本主義)의 것이다. 먼저 계시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거기서 나타나는 결실로서 사랑이 와야 할 것이다. 그러나 두아디라 교회는, 소위 "사랑"을 앞 세우다가 "믿음"(하나님의 말씀 대로 믿는 믿음)을 둘째로 여긴 듯하다. 따라서 그 교회는 진리를 기본으로 파수하지 않고, 포옹주의(抱擁主義)의 사랑만 위주(爲主)하다가 비진리(非眞理) 곧, 이세벨 이단 같은 것을 포용(包容)하게 된 듯하다. 그것은 선후 전도(先後轉倒)에서 생긴 과오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말의 순서에서 뜻을 캐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듯하다. 크레다너스(Greijdanus)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 곧, "여기 사랑이란 것은 그 아래 나타나는 모든 활동의 근본이다. 사랑에서 믿음(신실한 활동)과 섬김과 인내가 나온다"는 것이다.
 특별히 "섬김과 인내"는 그 위에 있는 "사랑"의 외부적 표현이다. 두아디라 교회의 형편은 에베소 교회의 그것과 대조된다. 에베소 교회는 믿는 도리를 강조하노라고 아였으나 그것을 건전히 못하여 사랑을 떨어뜨렸고, 두아디라 교회는 사랑을 힘쓰노라고 하다가 그것을 진리대로 하지 못하여 탈선하였다.

 계 2:20
 여자 이세벨.- 즈안(Zahn)은, 어떤 사본(A.Q)에 "너의"란 말이 있음을 보고 "너의 여자 이세벨"이라고 번역하였다. 그리고 "너의 여자"란 말이 그 교회 교역자의 아내란 의미라고 하였다. 모팟트(Moffatt)는 여기 "너의"라는 사구(寫句)가 몇몇 유력한 사본의 지지를 가지면서도 신뢰하기는 어렵다고 하였다. 또한 어떤 이는 이것이, 바벧론 신(神) 사이빌)이름이 이세벨과 비슷함=Sibylle)과 상관되는 어떤 인물을 가리킨다고 한다. 쉬렐(Schurer)의 증거 (Theol. Abhandlungen, p. 39)에 의하면 두아디라에 바벧론 신당(神堂)도 있다고 한다. 우리는 이 점에 대하여 확실한 결론은 못내린다. 요컨대 이세벨은 이스라엘 왕 아합의 아내니 이방의 우상 숭배를 수입하여 이스라엘의 종교를 어지럽게 한 요망한 여자였다(왕상 16:31; 왕하 9:22). 엘리야가 이 여자를 두고 예언하기를, (1) 개가 그 죽은 시체를 핥으리라고 하였는데(왕상 21:23), 과연 그대로 성취되어 예후로 말미암아 창문에서 내려 던지움이 되어 떨어져 죽었고(왕하 9:33), (2) 그 자녀들에 관하여 예언하기를,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 멸망시키리라고 하였는데(왕상 21:21), 과연 그대로 성취되었다(왕하 9:6-37). (3)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 바알 선지 450인을 죽였다(왕상 19:40). 위의 세 큰 사건은, 계 2:22,23 의 세 큰 위협은, 1 그여자 자신을 병상에 던져 죽일 것(22절), 2 그와함께 음행하는 자들 곧, 그의 교훈과 타협하면서 교역하는 자들을 환난 중에 던짐, 3 그의 자녀 곧, 완전히 그에게로 귀속(歸屬)한 자들을 죽임이다. 그러므로 두아디라 교회의 이세벨은 외래의 이교 인물로서 자기의 사상을 가지고 복음을 변경시킨 자이다. 이 인물이 여자인지 남자인지는 알 수 없으나, 교회에 들어와서 이세벨의 역할을 하였던 사실은 분명하다. 그 인물의 교훈은, 그노시스학(Gnosticism)의 율법파(物質皆惡說을 주장하며 苦行主義를 爲業함)가 아니라, 그 반 율법파(反律法派)에서 영혼과 물질과의 무관계를 믿고 몸으로 자행 자지(自行自止)케 하여 무슨 추행이든지 꺼릴것 없다는 교훈이다. 두아디라 교회에는 이런 이단이 침입하여 교권(敎權)을 잡은 것이 분명하다.
 행음하게 하고.- 당시의 음행은 우상 숭배와 함깨 묻어 다니는 죄악이었다(민 25:1-5). 우상 숭배 그것이 영적으로 벌써 하나님께 대한 변절(變節)이니, 하나님께 대하여 변절하므로 영적 음행을 범한 자가, 인륜상(人倫上) 불결한 죄는 더욱 쉽게 범할 위험성을 가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우상 숭배와 및 그 제물을 멀리 하라고 엄명(嚴命)하신 것이 성경에 많이 있다(행 15:20, 28, 29).

 계 2:22,23
 침상에 던질 터이요.- 이것은 이세벨을 벌하여 질병에 걸리게 히시겠다는 말씀이다(1 Macc. 1:5). 소아시아에서 발견된 여러 조각문(彫刻文)에 음행으로 인하여 벌받아 병든 사실이 적지 않다(Moffatt).
 그로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 이들은 그 여자의 우상 숭배에 이따금 동참하는 자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그의 자녀"- 는 그 여자의 교훈에 아주 귀화(歸化)한 자들을 가리켜서 말한다. 그들에게 화벌(禍罰)이 미치는 것은, 이스라엘의 이세벨의 자녀들이 죽임 당한 사실과 비슷하다(왕상 21:20; 왕하 10:7, 8).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면.-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언제나 은혜로우신, 참되신 신(神)이심을 알 수 있다. 가장 큰 죄를 범한 자도 회개만 하면, 하나님은 그를 용서하신다.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찌라.- 시 7:10; 렘 11:20 참조. 여기 "뜻"이란 말은, 헬라 원어로 네프루스(* )니 사람의 가장 깊은 욕구(慾求)와 감각의 근원을 가리킨다.
 "사람의 가장 깊은, 그 감추인 속에도 하나님 앞에서는 절대로 감추일 것이 없다"(Bavinck, Bijbelsche en Religieuze Psychologie, blz. 65-Er in het verborgenste wezen van den menseh volstrekt niets voor God verborgen is).

 계 2:24
 사단의 깊은 것.- 이것은 당시 두아디라 교회를 둘러싸고 침입한 그노시스주의였다. 그들은, 사리(事理)의 가장 깊음에 대한 지각의 필요를 말하고, 또 그 지각(知覺)을 얻으려면 내 자신을 그것에 적응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죄의 의미를 알려고 죄악에 몸을 적시는 일을 한 것이다(Zahn, julicher). 그들은 생각하기를, 그렇게 몸을 죄악에 던져도 그들의 고상한 심령의 정체(正體)는 아무런 더럽힘을 입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마귀 숭배를 해 보기도 한 것이다. 이 사상에 미혹 받아 들든 어떤 기독교인들은 그 때의 우상 숭배나 음행에 참가하기를 기탄 없이 한 듯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이런 위험한 일을 여기서 엄금하신 것이다. 이와 같은 해석은 모팟트도 한 것이다.(The Expositors' Greek Testament, Revelation of St. John by James Moffatt, p. 362). 모팟트가 보수파(保守派) 학자는 아니지만 그의 주석에 역사 문학(歷史文學)의 재료들이 있는 대로 우리가 참고할 만한 것이 있다.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이 없노라.- 행 15:28, 29 참조.

 계 2:26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 시 2:8을 보면, 그리스도께서 이 권세를 받으신다. 기독 신자들은 그리스도와 연합되었기 때문에 그의 이 영광에 동참한다(딤후 2:11, 12 참조).

 계 2:28
 새벽 별.- 이것은 그리스도 자신을 상징한다(제 22:16). 왜 그리스도를 "새벽 별"로 비유하였는가? 그것은 그의 왕적(王的) 영광을 생각하여 그리한 듯하다(민 24:17).

 계 2:29
 귀 있는 자.- 7절에 있는 같은 말 해석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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