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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눅 24:1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여자들이 이렇게 일찌기 예수님을 무덤을 찾아간 것은 예수님에게 대한 그들의 정성스러운 봉사를 표시한다. 그들은 안식일이 지난 그 밤이 밝기를 고대하여 지금 이렇게 예수님의 무덤에 찾아 온 것이다.  이 말씀은 그들의 심리와 행동을 그대로 그린 진실한 역사를 드러낸다.
  이 여자들.- 이들은 눅 23:55, 56에 기록된 여자들이니 갈릴리에서 예수님과 함께 온 여자들이다.  마태는 이들을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28:1)라 하고, 마가는,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막 16:1)라 하였고, 누가는,"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와 또 저희와 함께한 다른 여자들"(눅24:10)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기록의 차이는 동일한 사건에 대하여 저자들의 취급이 다소 다른데서 일어났다.  다시 말하면, 저자들의 기록의 오착이 아니고 각기 관점과 필요에 의하여 혹은 간단하게 기록하고 혹은 상세하게 기록한 것 뿐이다.
  그 예비한 향품을 가지고.- 여인들이 예수님의 몸에 바르려고 "향품"을, 가지고 왔다.

 눅 24:2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기운 것을 보고.- 이 "돌"은, 한 두 사람의 힘으로는 굴려 옮길 수 없는 큰 돌이다.  그러므로 그 여자들이 서로 말하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막 16:3)라고 하였다.  불신앙하는 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부인하면서 말하기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완전히 죽지 않고 기절하였다가 후에 무덤에서 깨어난 것 뿐이다"라고 하나, 그것은 너무도 부당한 억설이다.  기절하였던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그 큰 돌을 굴러 옮겼을까?  

 눅 24:3
   주 예수의 시체가 뵈지 아니하더라.-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진 이유는, 오직 그가 부활하신 까닭이었다.  그러므로 순교자 손 양원 목사는 말하기를, "기독교는 교조의 무덤을 소유하지 않았다.  그것이 기독교의 특징이다.  부활의 사실을 소유하지 못한 다른 종교들은, 그 교조의 무덤을 성대히 쌓고 있으며 거기에 제사를 지낸다.  예컨대 공자교나 모하메트교도 그리한다"고 하였다.

 눅 24:4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이 두사람이란  말은  천사들을
가리킨다. 그들이 그 곳에 오는 행동은 그 여자들에게 보이지 않았는데 어언간 그들의 곁에 서서 있었다. 이것은 천사들의 사역의 성질을 잘 나타낸다. 그들은 그들이  책임 실행에 있어서만 그들의 자신을 보인다. 그들은 그들이 안락을 위하여 시간을 쓰지 않고 내왕을 위하여서도 자신을 제재시키거나 오랫 동안 보이지도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받은 사명에 이렇게 충성한다. 마태와 마가는 천사 한 사람이 나타난  것으로 말하나, 누가와 요한은 두사람으로 말한다. 우리가 이 점에  있어서  문학의법리를 생각하면 문제는 해결된다. 문학은 수학과 달라서 수를 말할 때에 편집 본위로 약식으로 말한다. 성경은 수학이 아니고 문학체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마태와 마가는 그 나타난 천사들 중에 특별히 그 말하는 천사만을 대표적으로 들어 말한 것이다.

 눅 24:5-7
   여자들은 초자연계에서 온 자들을 만날 때에 죄감이 일어나고 따라서 징벌을  받을까 두려워 하였을 것이다. 저희는 그 천사들이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전하는  기쁨의 사자들인 줄 몰랐던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에게 공포가 무서워할 만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기뻐하여야 할 것으로 드러난다. 하나님의 자녀에게 나타나 있는 공포는 실상으로 공포가 아니다. 그것은 비유컨대 공포의 얼굴만 가지고 나타난 희극의  일막과 같다고 할 사람이 있을 지도 모른다. 우리는 모든 쓰라린 고통 거리와 공포건으  생각할 때에 이렇게 낙관적으로 생각함이 정당한 태도이다.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 산 자"란 말은 헬라 원어로 존-
타(  )라고 하는데 그것은 "살아 있는 자"라는 의미를  가진다."  죽은
자가운데서" 란 말은 헬라 원어로 메타 톤 네크론(*   ) 이라고 한다. 그것은 죽은 자들로 더불어 혹은 죽은 자들과 함께라고 번역할 수 있다. 천사의 이 말은 여기서 그 여자들을  꾸짖음이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그들에게 주는 복음이다. 사람이 죽었으면 죽은 것 뿐이라는 인상은 너무나 굳에 사람들의 머리와 마음에 새겨졌다. 따라서 사람들은 부활의  사실을 믿기 어렵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할 것은 죽는 법도 하나님께서 내셨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법을 내시지 않았으면 사람이 죽을 수 없다. 인간은 그 죄 값으로 인하여 사망의 법 아래 메이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게서는 죽은 사람이 다시 살 수 있는 법도 내실 수 있다. 그는 과연 그 법을 내시었다. 예수님은 영광의 부활을 받으신 첫 사람이었다. 이 첫 부활의 사실을 믿기만 하면 이 후에 모든 성도들의 받을 부활을 믿기 어렵지 않다.
 이렇게 그가 예언하신 사실을 천사들은 기억하고 그 여자들에게 기억시킨다. 그 여자들은 그 때에야 그것을 기억하기 시작한 것이다. 인간은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기에 둔하고 그것을 신앙하기에도 둔하다. 지금은 천사들이 하늘의  일을  기억하며 믿는 일에 있어서 땅위의 신자들보다 민첩하다.

 눅 24:9,10
  무덤에서 돌아와 이 모든 것을 열 한 사도와 모든 다른 이에게 고하니.- 이 말씀을
보니 이 부활 기사는 천연스럽게 또는 솔직하게 이루어진 사실 그대로를  보고  한다. 여자들이 무덤에서 떠나서 사도들을 찾아 간 행동은 그들이 피할 수 없는 여성의 심리 경향이었다. 그들은 중대한 일에 있어서 결국 사도들의 처사를 구한 것이다.
 막달라 마리아.- 이는 일곱 사귀가 들렀던 여자였는데 부활하신 예수님을 가장  먼저 보았다. 예수님은 무한하신 긍휼을 가지셨고 또 창조의 권능을 가지셨으므로 그런  가련한 사람을 구워하시고 또 개초하시어 천국의 귀한 인물을 만드신다.
 "요안나"는 눅8:3을 보면, 제산이 많은 여자였던 듯하고,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는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의 이름인 듯하고(요19:25), "또 저희와 함께한 다른  여자들"중에는 살로메도 포함되었을 것이다.(막16:1)
요한은 이 여러 여자들을 다 말하지 않고 막달라 마리아에게 대해서만 말하였다. 그러나 여기 기록된 막달라 마리아의 보고에 "우리"란 말이 있는 것을 보아서 그와 동행하였던  다른 여인들이 있었던 것이 명백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다. 처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갔고 , 그 다음에 다른 여자들도 간  듯하다  .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에서 돌이 굴러진 것을 보고 들어가 보지는 않고 뛰어  돌아와서 베드로와 요한에게 보고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다시 돌아서서 무덤에 갔다가  거기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뵈였을 것이다.  그때에는 다른 여인들이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무덤에서 떠나 돌아간 틈이 었다. 그들은 돌아가는 도중에 예수님을 만나  보았다.(마28:8,9)

 눅 24:11
  사도들은 저희 말이 허탄한듯이 뵈어 믿지 아니하나.- 여기 "허탄"이란 말은  헬라
원어로 레로스(*          )라고 하는데 정신벙에 걸린 병자가 되는 대로 하는 이야기
를 이름이다. 이것은 의학상 용어라고 한다. 이 말을 보면 사도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게 된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들은 남들의 보고를 듣고는 믿지 않았다. 철벽같은 그들의 불신앙은 이제 그 사실을 직접 보고 명백히 파혹하는 확실한 경험의 시기가 필요하였던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그들이 신앙은 여러번 그 사실을 보므로 생긴 것이다. 여자들이 보고를 듣고 믿지 않던 그들은 후에 여러번 예수님의 나타나심을 보고 믿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눅 24:12
  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에 달려 가서 구푸려 드여다 보니 세마포만 보이는지라.-  이 점에 있어서 요한 복음의 가시는 더욱 상세하게 말하기를 "시몬 베드로도 따라 왓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개켜 있더라"(요20:6,7)라고 하였다. 이렇게 시체를 쌌던 옷이 무덤 속에  질서 있게 놓여 있는 것은 예수님이 확실히 부활하신 사실을 증명한다.  만일에  인간이 예수님의 시체를 운반하였다면 시체 쌌던 옷을 벗겼을 리가 만무하다.

 눅 24:13
  제자 중 둘이.- 이들은 사도들이 아니고 일반 제자들을 의미한다.
 엠마오.- 이 곳은 지금의 니코폴리라고 하는 학자들이 있으나. 엘 쿠바이벡이라는 곳과 같다고 하는 학자들도 있다.

 눅 24:14
  이 모든 된 일.- 이것은 예수님께서 죽으신 일과 또한 여인들이  예수님의  무덤에
가서 본 일을 가리킨다.

 눅 24:15,16
  예수께서 가가이 이르러 저희가 동행하시나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 인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 주님께서 이렇게 우리가 모르는 가운데 오묘하게 행하신다. 그가 아브라함에게는 행객으로 나타나셨고, 야곱에세는 씨름하는 사람으로 나타나셨고,  여호수아에게는 군인으로 나타나셨고, 엘리야에게는 한 고요한 소리로 나타나셨다.

 눅 24:17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저들은 저희가 애모하는  선생을  잃었
다. 그런데 여인들이 무덤에 갔다 와서 이상한 보고를 하엿다. 그렇지만 저희는  아직 그 여인들의 보고대로 신앙하지 않았으니만큼 , 저희의 마음에 기쁨이 있을  리  없었다.

 눅 24:18
  글로바.- 이렇게 그 제자의 이름까지 여기 기입된 것은 이 기사의 진실성을 표시한다. 그 다른 사람은 누구였나 하는 문제에 대하여는 여러 학설이 있다. 혹은 그가  누가 자신이라 하고 , 혹은 나다니엘이라 하고, 또 혹은 트라얀 황제  시대에  예루살렘 교회의 가독이었던 시몬이라고 한다.

 눅 24:19,20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능하신 선지자여늘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원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 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여기 이 말씀은  예수님께  대한 두 가지 서로 대조되는 태도를 나타낸다. 곧, 하나님과 모든 백성은 예수님을  선지자로 인정하나 대제사장들과 관원들은 그를 죽였다는 것이다. 그 때의 대 제사장들의 부패를 이 말씀이 잘드러낸다. 그 두 제자는 예수님을 선지자로만 알지 않았다.  그것은 다음 귀절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들은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구속자로도 알았다.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는 메시야 곧,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눅 24:21-24
  여기서 글로바는 그 마음 속에 있는 쓸쓸함과 놀란 감상을 발표한다. 그가 큰 유감으로 생각하는 점은 구원의 메시야로 알았던 예수님이 죽으신 일이었다. 그가  성경을 알았더면 메시야께서 그 죽으심으로 인하여 그의 백성을 구원하실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성경을 잘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하여 실망하였다. 사람들이 메시야를 죽인 일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비통한 일이다. 그러나  메시야의 죽으신 일은 헛되지 자낳고 바라로 다 할 수 없는 큰 구원의 열매를  가져온  것이다. 그리고 글로바가 크게 놀란 일은 무덤에 갔다 돌아온 여인들의 보고였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천사의 말을 전함이었다.

 눅 24:25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께서 저희를 "미련하다"고 꾸짖으신 것은 마땅하다. "미련한"자는 다른 사람이 아니고 성경의 진리를 알지 못하는 자요 또 믿지 않는 자이다. 렘17:9에 말하기를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고 하였으니, 성경 말씀을 믿지 않는  자는 비록학자라도 미련한 자임을 면치 못한다. 여기 말한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이란 것은 구약 성경의 권위가 어떠함을 우리에게 알게 한다. 구약의 말씀은  부분적으로만 하나님의 말씀인 권위를 가진 것이 아니고, 그 "모든 것"이 다 그러하다. "더디"다 함은 헬라 원어로 브라데이스(*              )라고 하는데 더디고 졸며 힘  없고  취미 없는 태도를 의미한다. (greijdanus, dit spreekt van loomheid slapheid  gemis  aan energie en bdlangstelling.-lucas. II) 신앙은 께어 일어나는 영적 총명과 민첩을 가진 것이다. 이런 영적 총명과 민첩은 사람의 자연적 심성에는 없고 오직 성령님의  역사로만 생기는 것이다.

 눅 24:26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여기  
"...야 할 것"이란 말은 헬라 원어로 에데이(*        )라고 하는데 하나님의  작정과
설계에 의하여 반드시 될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영원하신 작정대로 성경이  보여주는 메시야는 그저 처음부터 영광과 권세로 오시는 이가 아니었다. 그런 메시야는 구약 성경을 바로 이해하지 못한 유대인들이 상상한것이다. 구약 성경이 보여주는 메시야는먼저 고난을 받으신 후에 영광에 들어가신 분이시다.

 눅 24:27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구약의 모든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대하여 예언적으로 가르친  것이다. 모세 5경으로 말하면, 창3:15, 22:6; 민24:17; 신18:15은 물론이고, 만나와  구리 뱀과 희생제물과 기타의 모든 의식적 사물에 관한 말씀들은 모두 다 그리스도를 예표한 것이다. 이 말씀들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하여 직설적으로 혹은  포함적으로 가르친다. 예수님은 그의 부활을 못믿는 두 제자에게 다른 것으로  증거하시지 않고 오직 성경으로 증거하셨다. 그 이유는 땅 위에서 가장 믿을만한것은 성경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렇게 성경을 진실한 기록으로 알으셨다.

 눅 24:28,29
   예수는 더 가려하는 것 같이 하시니.- 이것은 예수님께서 진심으로 그들과  작별하시려고 한 태도였다. 그는 상대방으로부터 간절한 요구를 받으시기 전에는 무엇을  주시기 좋아하시지 않는다. 그는 우리를 기계로 취급하시지 않고  인격으로  대우하신다 그는 우리의 의지와 욕구와 선택을 귀히 여기신다. 따라서 그는 우리의  기도가  있은 후에 은혜를 주시기 좋아하신다. 그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를 이 점에서 작별하시려고 하셨으나 그들의 기원에 응하시어 그들과 함께 그 촌에 들어가셨다.

 눅 24:30,31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매 저희 눈에 밝아져 그인줄 알아  보더니.- 부활하신 예수님이 떡을 떼시는 그 모양은 그의 부활 전과 같다. 그러므로  두 제자는 이 때에 그가 예수님이신 줄 알았다.  그런데 그의 부활 후에  제자들이  얼른 알아 보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영광이 그에게 있는 까닭이다.  그가  떡을 떼시는 재래의 행동 방식을 보는 자도 그의 영광을 꿰뚫어서야 분별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의 영광을 꿰뚫어 그의 본래의 특성들을 볼 수 있는 영안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 말미암아서야 열린 것이다. 그는 떡을 떼시면 자기의 부활 전에 특성을 나타내시는 동시에 두 제자의 영의 눈을 여시었다.

 눅 24:32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뜨겁"다 함은 헬라 원어로 카이오메네 엔(*                         )이라고 하는데 불타는 중에 있었다는 말이다.  그들이 마음은 예수님이 성경 해석을 하시는 동안에 줄곧 마음이 불타듯이 뜨거워 있었다. 그 이유는 성령님께서 역사로 인하여 우리의 마음이 성경 진리에 부닥칠  때에는  우주의 전 진리를 아는 기쁨과 만족을 느끼는 법이다. 우리는 그런 대에 다른 지식을 더 구할 필요 없다는 쾌족의 감상을 가진다. 그 때에는 성경의 어려운 문제도  해결하기  전에 믿어진다.

 눅 24:33
   곧 그시로 일어나.- 이것은 그들이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인하여 가졌던 심경을 잘 보여준다. (1) 그들은 희열에 불탔을 것이며 (2)그들의 인생관이 코퍼니커스적으로 새롭게 전환하려는 경향으로 움직였을 것이며 (3) 그들은 행여나 개인적으로 어떤  축복과 영광의 자리에서 떨어질까 하여 놀라며 두려워하는 감상도 가졌을 듯하다.  그들은 이제 방심할 수는 없고, 긴장할 대로 긴장하여 번개 같이 급히 뛰어 그들의  두잊들을 찾아 다닌다.

 눅 24:34,35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고하는지라 두 사람도 길에서 된 말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이  기사를 보면, 예수님이 부활하신 사실은 한쪽 지역에서만 보고 증거된 것이 아니고 다른 지역에서도 그렇게 된 것이다. 이렇게 여러 방면으로 들어오는 증인들은 그 사건에 대하여 서로 미리 아무런 연락한 일이 없었으나 증거함에 있어서 같은 내용을 말한다. 이것을 보면, 그들이, 아무런 주관적 욕구나 편견이 없는 엄정한 객관적  사건에  공동적으로 부닥쳤던 것이 분명하다. 그들의 증거는 참으로 믿을만하다. 미국 하바드대학  교수로서 세계 최대의 법률학자인 그리리프씨는 예수님의 부활 기사가 법정  증거의  원리로 보아서 가장 믿을 만한다고 발표하였다.  

 눅 24:36
   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 하시니.- 이 사건은 예수님의 부활 사건에 대한 다각적인 증거의 또 한 가지  재미로운 것이다. 그는 그의 제자들로 하여금 귀중한 부활의 사실을 믿게 하려고 이렇게 여러방면으로 증거하신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본 양편의 인물이 모여서  그 사건을 논제로 하고 말하는 그 공석상에 또 다시 예수님은 나타나셨다. 두 증인의  증거가 등장하여 언론되어진 그 연구적 증거 석상에 부활하신 예수님  자신이  나타나신 사실은 믿기에 충분한 두 증인의 증거의 합치점에 또 다시 가세함이다.
 친히 그 가운데 서서.- 그가 이렇게 그 회석의 중앙점에 서신 이유는 그석상의  모든 사람드로 하여금 주목케 하시려는 까닭이었다. 그는 이렇게 자기의  부활하신  사실을 밝히 증거하시려고 하였다. 이것을 보면 우리가 한 가지 중요한 일을 알 수 있다. 곧,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는 운동의 최초 출발이 사도들에게서 난 것이 아니었고 죽으신 이후의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난 것이었다는 것이다. 그가 그의 부활하신 사실을  그의 사도들과 제자들에게 증거하시지 않았더라면 사도들이 그것을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본문에 "예수께서 친히 "란 말은 그가 그의 부활에 대하여 친히 증거하셨다는 것이니 의미 있는 말이다. 그가 죽었다가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그의 부활하신 사실을 증명하셨을 수 없을 번하였다. 죽고 만 자가 어떻게 그런 증거를 할 수  있으랴?  예수님의 부활하신 사실에 대한 첫 증인이 예수님 자신이라는 사실도 확실히 그가  부활하신 증거 중 하나이다.

  눅 24:38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이 말씀을 보면, 그 때까지 그 회중은 예수님의 부활하신 사실을 알지 못하였다.  저희는 다시 사신 예수님을 보고도 아직 마음에 부활 하신 예수님이라고 확신하지 않고  도리어 생소하고 낯설고 두렵고 의심하는 마음을 가졌다. 예수님은 이런 마음을  정복하시기까지 많은 증거를 하시게 된 것이다.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따뜻한  구면  스승 그대로 알게 된 것은, 결단코 그들의 어떤 선입관념에서 발생된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께서 장기적으로 자신을 보이시며 또 증거하셨기 때문에 그의 부활하신 사실이 진리로 드러났고 저희는 그것을 믿은 것이다.

 눅 24:39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이것은 그의 못박히셨던 수족을 보고 그가 그들
을 위하여 죽으셨던 옛 스승인 사실을 알라는 말씀이다. 그가 그이신  사실을  증명할 여러가지 다른 증표들도 없지 아니할 것이다. 그러나 특별히 그의 못 박히셧던 수족은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사랑의 표이니만큼, 그들의 마음 속에 지금까지 있었던  낯선 생각을 없이해주고, 천애하는 생각을 회생시킬 수 있다. 따라서 그들은 그를 옛날  따르던 예수님으로 알고 또 믿기 쉽게 될 것이었다. 예수님에게 대한 우리의 지식이  완전을 기하기 어려우나 한가지는 확실히 알아야 한다. 그것은 그가 우리를  사랑하시되 죽으심에 이르기까지 사랑하셨다는 것이다. 그가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시여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신 사실만 우리가 알면 그에게 대한 우리의 지식이 족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이
말씀은 부활하신 그의 몸이 영이 아니고 진정한 몸이신 사실을 증명하시려는 것이다.

 눅 24:41
   저희가 너무 기쁘므로 오히려 믿지 못하고 기이히 여길 때에.- 인간은 너무큰 은혜를 받을 때에는 그것을 믿지 못한다.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으냐 하시니.- 먹는 일은 진정한 몸을 가지신 분이심을  증겨하는 것이다.

 눅 24:42,43
   예수님께서 음식을 잡수신 것은 그가 확실히 몸으로 다시 사신 것을 증거하신 행위이다. 다시 말하면, 이 행위로 말미암아 단순한 영 뿐이 아니시고 몸을 가지신 분이심이 알려졌다.

 눅 24:44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이것은 그가 죽으시기 전에 그들과 함께 계신  사실
을 이름이다.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 이것은 구약의 전부를 가리킨 말씀이다.
 이것이라.- 이 번역대로 보면, 이 귀절의 뜻을 알기 어렵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번약할 수 있다.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는 이것이라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야 하리라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눅 24:45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우리가 성경을 바로 알고 또 생명  얻는
깨달음에 이르려고 하면 성령의 감화로 깨달아야 된다. 단순하  인간적  지식으로써만 성경을 이해하는 것은 구원받을 만한 완전한 지식을 이르지 못한다.

 눅 24:46
    이 같이 .- 곧, 위에 말한 "나를 가리켜 기록된 것과 같이"이다.

 눅 24:49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 이는 성령님을 보내시겠다고 하신 약속을 의미한다.  
 "이 성"은 예루살렘을 말한다.

눅 24:50
   베다니 앞까지.- 그는, 그의 제자들을 한적한 곳으로 인도하시고 거기서  축복하셨다.

 눅 24:51
  행 1:3-11 참조.

 눅 24:52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들어가.- 그들은 그들의 주님을 작별하고도 기뻐한다.  그것은 순연히 인간의 심정으로 된 일이 아니다. 자연적 인정은 그런 이별 끝에  쓸쓸할 것 뿐이겠다. 그러므로 플러머는 말하기를  "허구의 이야기를 짓는  사람이었다면  그 제자들이 그 스승을 작별한 뒤에 슬퍼하였다고 기록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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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6 마가복음 박윤선 주석, 마가복음 07장
225 마가복음 박윤선 주석, 마가복음 08장
224 마가복음 박윤선 주석, 마가복음 09장
223 마가복음 박윤선 주석, 마가복음 10장
222 마가복음 박윤선 주석, 마가복음 11장
221 마가복음 박윤선 주석, 마가복음 12장
220 마가복음 박윤선 주석, 마가복음 13장
219 마가복음 박윤선 주석, 마가복음 14장
218 마가복음 박윤선 주석, 마가복음 15장
217 마가복음 박윤선 주석, 마가복음 16장
216 누가복음 박윤선 주석, 누가복음 01장
215 누가복음 박윤선 주석, 누가복음 02장
214 누가복음 박윤선 주석, 누가복음 03장
213 누가복음 박윤선 주석, 누가복음 04장
212 누가복음 박윤선 주석, 누가복음 0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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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 누가복음 박윤선 주석, 누가복음 0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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