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튜 헨리 주석, 요한일서 0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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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화목 제물이 되신 그리스도(1) (요한 1서 2:1,2)

이 구절은 사도 요한이 참된 그리스도인에 대한 죄를 언급하고 있는 1장의 결론과 연결된다. 여기에서 그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하지 말아야 할 것과 아울러 마땅히 해야 할 바를 말하고 있다.

Ⅰ. 첫째 하지 말아야 할 것은 죄지을 기회를 주지 않은 것이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1절). 이 서신의 의도와 목적, 즉 나와 하나님과의 사귐 그리고 불신앙적인 행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사귐을 파괴시킴에 대해 언급한 의도는 저희로 하여금 죄를 금하고 떠나게 하기 위함이다. 여기에서 애정에 넘치는 사도의 권고를 들어 보라! "나의 자녀들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얻은 바된 자녀들, 또한 연령과 경험에 있어서 사도 보다 좀더 어린 자녀들,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으로 하나가 되어 있는 사랑스러운 어린 자녀들, 이렇게 성도들에 대한 목회자의 사랑이 가장 충만하게 흘러 넘치고 있는 곳에 또한 그러한 때에 확실히 복음은 가장 효과적으로 전파되었다. 아마도 사려 깊은 독자는 이러한 금지와 경고에 대한 사도 요한의 의도는 바로 아래와 같은 말에서 찾아 볼 수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이 한 말씀은 독자로 하여금 그가 앞에서 말한 바 있는 죄의 확실한 용서에 대한 언급을 다시 돌이켜 보게 할 것이다. 곧 "하나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1:9)란 말씀이다. 하나님의 호의와 은혜에 대한 남용을 방지하는 것이다. "죄의 용서는 통회 자복을 하는 자에게 주어진다 할지라도 내가 이를 씀은 죄를 조장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이유 곧 죄를 짓지 않게 하려 함이다. " 한편 사도는 죄인들을 위한 대언자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 하고 있다. 즉 예상할 수 는 대로 그것은 실수와 의식적으로 짓는 죄를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것을 씀은 너희가 죄를 짓게 하려 함이 아니다. 너희로 하여금 죄사함을 얻을 수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함이다. " 그러나 아래와 같이 잘못된 생각(마치 어느 학자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을 하고 있는 자들도 있다. 곧 "그러나 사람은 죄를 짐으로 하나님의 도우심과 치유하심을 경험하게 된다"는 생각이다.

Ⅱ. 죄 가운데서 믿는 자가 받을 도움과 구원에 대해 생각해 보자. 그리고 "만약 누가 죄를 범하면(우리 중 누가 혹은 앞서 언급한 하나님의 사귐이 있는 자가)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1절)라는 말씀을 주시해 보자. 구원의 복음 가운데 속해 있는 신도자신들도 아직은 죄 가운데 있다. 그러나 세상의 죄인들 간에는 큰 차이가 있다. 즉 세상에는 기독교화된 자(그리스도의 신비적이며 영적인 몸에 대해 거룩한 구원의 특권 아래 있는 자)와 비기독교화되어 있는 자, 즉 중생한 죄인과 중생하지 못한 죄인들이 있다. 진실로 죄를 범했을지라도 다른 사람에 비하여 죄를 짓지 않은 자로 간주되어진 사람들이 있다(3:9). 곧 신도들은 용서와 의롭다하심을 입게 하는 하늘의 대언자를 소유하고 있다. 그는 죄 중에 있는 신도들에게(혹은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에게) 도움과 속죄 그리고 피난처가 되신다. 곧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다. " 대언자란 말은 간혹 성령을 일컫는 말로 사용된다. 이 성령은 보혜사(위로자)로 호칭되기도 하며 그는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며, 우리의 심령에는 기쁨을, 입에는 변론을 가져다주신다. 그가 우리를 위해 변호해 주심으로 우리들의 대언자가 되어 주신다. 대언자의 맡은 바 사명과 책임은 심판자를 향한 것이다. 심판자 앞에서 그는 소송 의뢰인의 소송 사유를 변호해 준다. 심판자는 아버지 곧 그의 아버지가 되시며 또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 그는 복음의 법정(범법자를 다스리는 법정) 곧 하늘나라 법정 또는 은혜의 법정에 서 계시는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이시다. 그의 왕좌와 심판석은 긍휼과 자비를 베푸는 자리가 된다. 우리의 아버지 되신 하나님은 현세에 있어서나 생사 문제 또는 시간과 영원에 대한 최고의 심판자가 되신다. "너희는 만민의 심판자가 되시는 하나님께 이르렀느니라"(히 12:23). 신도들은 그들의 소송 사유가 성립되면 대언자는 그들에게 힘이 되도록 아래의 몇 가지 신분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신다.

1. 대언자의 인격과 그 이름으로 나타내 주고 싶다. 곧 그는 중보의 절대적 사명과 구원의 온전한 역사 그리고 중재자와 대언자의 사명 성취를 위해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

2. 그는 사명 수행을 위한 적격자이심을 나타내 주고 있다. 그리스도는 심판대에서 또한 심판자의 면전에서 유일한 의인이 되신다. 다른 어느 대언자(혹은 다른 법정에서의 대언자)는 이 불의한 자일 것이며, 그리고 여전히 변호할 만한 정당한 이유(이러한 경우 정당한 사람에 대한 소송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를 가지고, 이에 따라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여기에서 소송받은 죄인은 범죄자이다. 즉 그들의 무죄와 법적인 정당성은 변론될 수 없다. 그들의 죄는 고백되어지거나 또는 필히 전제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의로운 대언자만이 죄인들을 변호할 수 있다. 그리스도는 죽을 때까지 그들을 위해 의로우셨다. 그는 영원한 의로움에 기초를 두고 있다. 이점을 심판자는 결코 묵인하지 않을 것이다. 이를 의지하고 대언자는 죄인들의 죄가 그들 자신에게 돌아가지 않도록 변호한다.

3. 그가 우리의 대언자가 되실 수 있는 이유를 밝혀 주고 있다. 즉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시다"(2절). 그는 속죄를 위한 희생 제물이요, 그의 위엄과 계명, 그리고 그의 권위에 대해 우리가 범한 모든 죄를 위해 심판자에게 드리어진 화목 제물이시다. 로마의 신앙 고백자들은 공연히 구속자로서의 대언자와 또는 중재자로서의 대언자 혹은 각기 상이한 임무에 대한 중보자를 구별하는데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 중재자를 위한 중보자 혹은 우리를 위한 대언자가 곧 구속자로서의 중보자 또는 우리의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시다. 그의 변호는 곧 그가 화목 제물이 됨을 말해 주고 있다. 만일 그리스도가 피를 흘린 이후 하늘에 있는 중보자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면 그 피의 가치와 효능이 상실되었다고 생각되기 쉬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교회를 위하여 중재자로서 위대한 대언자(검찰 총장)의 사명을 계속한 이상 지금 우리는 그 피의 귀중함을 알게 된다. 그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오는 자들을 휘한 중재를 이룩하기 위하여 그는 일찍이 살아 역사하고 있다.

4. 대언자의 변호 대상과 화목 제물의 영향이 미칠 수 있는 범위를 밝혀 주고 있다. 이는 단순히 한 나라에만 국한된 것이거나 하나님이 택하신 옛날 이스라엘에게 만 특별히 한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우리의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 되신다. 즉 그는 우리의 죄뿐만이 아니라(유대인인 우리의 죄 뿐만 아니라 다시 말해서 육신을 따라 아브라함의 씨가 다니 우리의 죄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온 세상 사람들의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 되신 것이며(2절) 단순히 과거나 현재에서 믿는 우리만을 위함이 아니라, 그를 앞으로 믿게 될 모든 자들과, 그를 통해 하나님께 나오는 모든 자들의 죄를 위한 것이다. 중보자의 죽음은 모든 족속과 모든 민족 그리고 모든 나라에 이르는 것이다. 그가 유일한 존재인 것같이 그는 하나님에게 부름을 입어 그의 사랑과 용서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될 모든 사람들을 위한 유일한 속죄물과 또는 화목 제물이 되신다.

 

2:2 없음.

 

2:3

화목 제물이 되신 그리스도(2) (요한 1서 2:3-6)

이 구절들은 앞에서 언급한 바 있는 1장 7절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여기에 나타난 구절들과 1장 7절 말씀 사이에는 죄중에 있는 신도의 의무와 구원에 관한 토론이 대두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신도의 특권 즉 중보자의 피로 말미암아 죄에서 깨끗게 함을 얻는 특권이 언급되었다. 이 구절에서 사도 요한은 빛 가운데서 행함으로 얻는 유익한 결과에 대해 말하고 있다. 우리가 서로 사귐을 가지게 되면, 이러한 거룩한 사귐과 친교는 그리스도의 교회의 특권이 된다. 여기서 빛과 사랑을 따르는 데에는 또한 증거가 따라야 한다.

Ⅰ. 빛에 대한 시험.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3절), 하나님의 빛과 지식은 마음의 아름다움과 진보를 말한다. 지혜와 지각이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중보자)의 제자가 됨을 의미한다. 젊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새로운 빛을 과대 평가하며, 그들 자신이 갑자기 짧은 기간에 얻은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기 쉽다. 그리고 나이가 든 사람들은 자신들의 지식이 만족할 만큼 충분한 것으로 잘못 생각하기 쉽다. 즉 그들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을 알고 있으며 복음의 많은 내용을 알고 있다고 큰 소리를 친다. 그러나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게 하는" 지식만이 우리들의 지식이 건전하고 완전하다는 증거가 된다. 하나님의 온전함이 그의 권위를 이룩케 한다. 즉 지혜로운 생각과 풍성한 은혜 그리고 위대한 그의 역사가 그의 율법과 나라를 권위 있게 만든다. 주의 깊게 그의 계명에 의식적으로 순종함은 하나님의 권위를 이룩케 한 이 모든 일들에 대한 이해와 지식이 영혼 속에 은혜 깊게 자리잡고 있음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4절)라고 하신 말씀을 명심해야 한다. 진리를 고백하는 사람들은 가끔 그들의 무지로 부끄러움을 당하며, 때로는 그 진리를 소유했다고 하다가 부끄러움을 당한다. 곧 그들은 간혹 하나님의 신비에 대한 지식을 가장 많이 소유하고 있는 것처럼 자부한다. "네가 하나님을 자랑하며,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기며 네가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를 가진 자로서 소경의 길을 인도하자요…"(롬 2:19). 그러나 하나님을 보다 완전하고 철저한 순종의 대상이 됨을 깨닫지 못하는 지식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그리고 이러한 지식이 나타나고 알려진다 할지라도 그 지식이 마음을 순종으로 이끌지 못하게 될 때 이 지식은 얼마나 헛되며, 또한 피상적인 것에 불과한 것인가! 순종하지 않는 생활은 거짓된 신앙적인 지식에 대한 면박과 수치를 나타낸다. 그것은 이러한 자신의 자랑과 구실에 대해 거짓말임을 폭로하며 또한 여기에는 어떠한 신앙이나 진실도 없다는 것을 보여 준다.

Ⅱ. 사랑에 대한 증거.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5절). 하나님의 말씀 또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키는 일은 곧 삶의 길과 동기를 거룩하게 만든다. 말씀을 지키므로 이러한 삶이 이루어지며 그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온전케 된다. 여기에서 사람들은 좀 더 적극적인 면에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이해를 가지게 된다. 그의 말씀을 실제로 지키지 아니하고서는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온전케(또는 그 사랑의 온전한 의도와 열매가) 이루어질 수 없다. 우리들은 사랑 가운데서 하나님 앞에 거룩하며 부끄러움이 없는 자는 부르심을 받았다고 우리는 선한 일을 이루도록 특별한 백성으로 구별되었다. 즉 거룩하신 성령으로부터 좀 더 완전한 성화에 참여하도록 용서함을 받고, 또한 의롭다하심을 받았다. 우리들은 거룩과 복종의 길을 행하도록 성결함을 받았다. 하나님의 말씀에 경건히 접하지 아니하고서는 우리들로 하여금 사랑의 온전한 경건과 결과 내지는 효과를 이룩할 수 있는 거룩한 사랑의 실현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오히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나타내고 있다. 즉 15절에서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리라" 하신 말씀과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 보냐?"라고 하신 3장 17절의 말씀에서 나타난다. 지금 빛은 사랑의 촛불을 켜들고 있다.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야 하며, 또한 지키게 될 것이다. 그는 항상 기뻐하며, 섬김을 받고, 하나님의 선포된 뜻을 지키기를 기뻐하며, 또한 섬기기를 즐긴다. 여기에서 사랑은 활용되어지며 또한 자신의 위력을 나타내게 된다. 이로써 사랑은 자태를 나타내게 되며, 사랑의 완전한 효능과 힘, 그리고 기쁨을 소유하게 된다. 이로써(하나님 또는 그리스도의 뜻에 충실히 따름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안에 있음을 알게 되며, 5절) 우리로 하여금 복종하도록 도우시는 성령에 의하여 그와 함께 연합되어 있음을 인정한다면 아래와 같이 우리에게 강권하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주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거하시는 분이요, 또한 이 곳에서 행하시는 분이시다. 바로 이곳에서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순종을 모범적으로 보여 주셨다. 그의 편에 서서 그와 함께 거하는 자들은 그와 더불어 행하며, 또한 그가 보여 준 표본과 모범을 따라 행해야 한다. 옛날 몇몇 철학파에 속해 있던 무리들은 그들의 존경할 만한 선생들과 학파의 요원들의 가르침과 행실에 대해 크나 큰 존경을 했다. 그리스도 안에 또한 그와 함께 거하기로 고백한 그리스도인은 어느 누구보다 그의 변치 않는 주와 대장을 닮도록 하며, 그의 지시와 명령을 따르도록 더욱 힘써야 한다. "너희가 나의 명한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고 하신(요 5:4) 말씀대로 그의 말씀을 따라 순종해야 한다.

 

2:4 없음.

 

2:5 없음.

 

2:6 없음.

 

2:7

세상의 사랑(1) (요한 1서 2:7-10)

7절은 바로 앞서 기록한 바(여기에서 새롭게 나타난 것이 아니다. 옛 계명으로 나타나있는 바 그리스도를 따라 행하는 것을 말하며 또한 사도들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으로부터 이끌어 온 것을 확실히 가르치고 있음을 말한다.)를 돌이켜 보거나, 또는 사도가 말하려 하고 있는 것과 형제애에 대한 법을 미리 예견하도록 하는 것을 생각케 하는 귀절이다. 이것은 처음부터 전하여진 메시지이며(3:10), 옛 계명인 것이다. 이러한 방법으로 권고를 시도하면서 아래와 같은 사랑에 넘치는 칭호로써 교훈을 위한 준비를 갖추고 있다. "사랑하는 자들! 곧 너희에게 간청하는 바 사랑으로 피차 결속되어진 것 가운데 있는 사랑스러운 자들이여!" 이러한 칭호로 시작해서 그들에게 형제애의 교훈을 가르치고 있다.

Ⅰ. 옛 계명으로써의 교훈.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라"(7절). 사랑의 교훈은 인간의 본성이 오래된 것과 같이 옛 것에 속하는 것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그것은 몇 가지의 규율과 시행(enforcement) 그리고 동기를 수락해야 한다. 만일 순수한 가운데 인간의 본성이 전달되었다면, 인간들은 한 피를 나눈 형제로서 서로 사랑하며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 땅 위에 살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죄의 상태에서 또한 그 죄를 사함 받으리라는 약속 안에서 그들은 창조주 되신 하나님과 관련을 맺고 있는 자로서 또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한 피를 나누고 그들과 동일한 소망을 나누는 자로서 서로서로 사랑해야만 한다. 히브리인들은 각별히 한 공동체를 이루어 살게 되었을 때 그들은 언약과 선택함을 받고 그들로부터 메시야와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가 나신 바 특권이 부여된 민족으로서 피차간 사랑해야만 했다. 그리고 사랑의 법은 하나님의 새로운 이스라엘에 대해 새로운 의무를 부여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것은 옛 계명 혹은 복음적 이스라엘의 자녀들이 처음부터 들은 바 있는 말씀이다(7절).

Ⅱ. 새로운 계명. "또 다시 저희에게 이러한 의무를 더욱 일깨워 주기 위해 내가 너희에게 새로운 계명, 즉 저희에게도 참되며 그 공동체의 머리가 되신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가장 참다니 새로운 공동체 혹은 기독교 공동체의 법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다. 곧 새로운 공동체의 진리는 그 안에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며 또한 풍부하게 있었다. 그가 교회를 사랑했으며 교회를 위해 자신을 바치셨다. 그것은 너희에게 참된 것이다. 이 법은 너희 마음 안에 얼마간 이미 기록되어 있는 법이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기를 하나님으로부터 배웠다. 이는 더구나 이미 어두움이 즉 저희의 중생하지 못한 마음(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간에)과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비참할 정도의 무지가 지나갔고, 진리의 빛이 비치고 있기 때문이다(8절). 복음적인 계시의 빛이 생명과 크나큰 힘으로 저희의 마음에 비치었다. 기독교의 사랑의 탁월성을 안 이상에는 이로써 기본적인 의무를 안 것이 된다. " 기독교의 기본적인 것(특별히 기본적인 교훈)을 알게 되면 새로운 것이거나 옛 것이거나 간에 드러나게 될 것이다. 개혁 교회에 있어서 개혁된 교리 또는 개혁된 신앙은 새 것이며 동시에 옛 것에 속하는 것이다. 새 것이라 함은 지루한 어두움 후에 개혁의 빛으로 말미암아 깨우쳐진 것이요, 로마의 변조된 것으로부터 깨끗해짐을 받은 바 새 것을 이름이다. 그러나 옛 것은 처음부터 배웠고 또한 들은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참되었던 은혜와 능력은 또한 우리 안에서도 참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우리들은 우리의 머리에 일치될 수 있다. 어두움이 지나갈수록 또한 복음의 빛이 우리에게 비치면 비칠수록 옛 것이든 새 것이든 간에 하나님의 계명에 더욱 더 순종하기에 이르게 된다. 빛은 적당한 열을 발산할 수 있다. 이에 따라 그리스도인의 빛에 대한 하나의 시련이 있게 된다. 하나님께 대한 복종으로 인정함을 받기 전에 그리스도인의 사랑으로 인정함을 받아야 한다.

1. 이러한 사랑을 가지지 못하고 있는 자는 그의 빛을 헛되이 받은 자들이다.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움 가운데 있는 자다"(9절).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서 그들의 영혼을 위하여 이루신 일들을 수락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가시적인 교회(visible church) 안에는 사실 이상으로 자신을 평가하는 자들이 종종 있다. 즉 그들은 스스로가 빛 가운데 있다고 하며 또한 하나님의 계시가 그들의 마음과 영혼에 감화를 미쳤다고 말하면서도, 그들은 믿는 형제들을 계속 미워하며, 적의에 찬 행동을 한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써 형제를 대하도록 감동을 입을 수 없다. 그러므로 그들이 기독교 신앙으로 중생함을 입은 척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계속 어두운 상태에 머물러 있다.

2. 이러한 사랑으로 지배를 받는 자는 그의 빛이 선하고 아름다움을 증거 한다.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의 형제로서) 빛 가운데 거하게 된다"(10절). 그는 기독교적인 사랑의 근본과 동기를 알고 있다. 그는 기독교의 구원의 중요성과 그 가치를 깨닫는다. 그리스도가 사랑한 자들을 우리도 사랑해야 함이 마땅함을 알게 된다. 이렇게 되면 결과적으로 그 안에 거리낌이 없게 된다(10절). 그는 그의 형제에게 걸림돌이나 장애물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는 그의 형제를 죄짓도록 유도하지 않으며, 신앙의 길에서 돌이키지 아니하도록 항상 의식적으로 주의할 것이다. 기독교의 사랑은 형제의 영혼을 귀중히 다루도록 하며, 그의 순결성과 평화로움을 해치게 될 모든 것을 두려워하도록 가르쳐 준다.

3. 두려워함은 영적인 어두움의 표징이다.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움 가운데 있는 자이다(11절). 심령의 빛은 성령의 은혜로 말미암아 스며들며, 성령의 첫 열매 중의 하나는 사랑이다. 믿는 형제들에 대해 악의를 품는 자는 영적인 빛의 결핍 상태에 있는 자들임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결과적으로 그는 "어두움 가운데 행하게 된다"(11절). 그의 생활은 어두운 마음과 양심에 일치하게 되며, 그는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를 모르며, 이 어두운 영이 자신을 어디로 이끌어 가는지 보지 못한다.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했으므로(11절)" 어두운 영은 그를 극심한 암흑의 세계로 이끌어 갈 것이다. 악한 영으로 말미암아 나타난 죄의 암흑은 생명의 빛과는 정반대의 것이다. 곧 어두움이 거하는 곳에는 마음, 판단 그리고 양심이 어두워지게 되며, 거룩한 생명의 길을 잃어버리게 한다. 여기에서 우리의 사도는 맹렬하고도 불에 타는 듯한 그의 감정의 치유함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입었는가를 엿볼 수 있다. 무지한 사마리아인들이 제자들을 영접지 아니한 때 사도 요한은 하늘로부터 불이 그들 위에 떨어지기를 구한 때가 있었다. 그러나 주님은 그가 자신의 감정(기분)을 알지 못하고 있으며 그 감정이 결과적으로 그를 어디로 이끌어 갈 것인지를 알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 사도는 그리스도의 영에 충만되어 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선한 뜻과 또한 모든 형제들에게 사랑을 베풀 수 있었다. 사랑으로 충만된 위대하신 주(Master)는 주 예수이시다. 사랑의 학교는 그의 학교(교회)이다. 그의 제자들은 사랑의 제자들이며, 그의 가족은 사랑의 가족임에 틀림이 없다.

 

2:8 없음.

 

2:9 없음.

 

2:10 없음.

 

2:11 없음.

 

2:12

세상의 사랑(2) (요한 1서 2:12-17)

거룩한 사랑에 대한 자극적인 어조로써 이루어진 이 새로운 지시는 여기에서 언급되어진 바 제자들의 몇 가지 계층에 대해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카톨릭 교회의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은 피차간 신성한 사랑 안에서 결속을 유지해 온 것이 확실하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형제에 대한 사랑에 있어서 생명력 있는 신앙이 아니고서는 결속될 수 없기에, 서로 지켜야 할 중요한 금지와 권고가 있기 때문에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의 학교(교회)에서 사랑을 몇 가지 형태의 교훈으로 우선 정정당당히 언급하고 있는 것 같다.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어린아이나 미성년자, 성인 또는 연장자(teleioi)들로 하여금 이 세상을 사랑하지 말아야 할 것을 일러주고 있다.

Ⅰ.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 이루어진 여러 가지 형태와 계층에 따라 주어지는 권고가 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동일한 위치와 신분에 있지 않다. 즉 그리스도 안에는 애기들이 있는가 하면 성숙된 사람들과 노년층이 있다. 이 사람들이 각기 다른 상태에 있는 것같이, 그들은 그들의 독특한 직분을 가지고 있다. 각별히 서로 사랑하고 세상을 미워하는 가운데 그들 모두에게 공통적인 교훈과 상응하는 복종이 주어지고 있다. 현명한 목회자는 주의 깊게 생명의 말씀을 나누어주고 그리스도의 권속들에게 그들이 차지할 몫을 부여하게 될 것이다. "나는 자녀들과 아비들 그리고 청년들인 너희에게 편지하노라." 이렇게 계층에 따라 사도는 아래와 같은 권고를 하고 있다.

1. 기독교 학교(교회)에서의 초보자.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12절), 여기에서 그들은 기독교 신앙의 기초 단계에 이르고 있다. 초보자들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아기들과 같은 자들이다. 사도 요한은 누구보다 먼저 그들을 지원함으로써 그들을 격려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연소자들에게 일러 준 말을 귀담아 듣는 것도 성숙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으로 보여진다. 초보적인 원리는 반복되어져야 한다. 이러한 원리는 모든 것의 기본이 되기 때문이다. 사도 요한은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교회 안에 있는 자녀에게 말하고 있다.

(1) 사도 요한이 그들에게 말하는 이유는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었기 때문이다. " 가장 순진하고 진실한 제자는 용서함을 받는다. 성도의 친교는 죄의 용서로 이루어진다. 죄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그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 용서되고(그의 온전하심은 용서에서 나타났다) 그리스도의 공로와 구원의 능력과 더불어 그의 이름으로 용서함을 받는다. 그리고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방해하는 세상의 사랑을 단호히 끊어 버려야만 한다.

(2) 두 번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있기 때문이다.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로부터 계신 이를 앎이요"(12절), 어린아이들은 그들의 아버지와 같이 쉽게 깨달아 알 수는 없다. 기독교 안에서 신앙 생활을 하고 있는 아이들은 하나님을 알아야 만하고 또한 알게 된다.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나를 앎이라"(히 8:11).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녀들은 하나님이 그들의 아버지가 됨을 알아야 한다. 이렇게 함이 그들의 지혜가 된다. 우리들은 아버지를 아는 자만이 참 지혜로운 자식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그들의 아버지를 알아야 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중생 되어지고 그의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확신할 수 있어야 한다. 아버지를 아는 자는 이 세상의 사랑을 미련 없이 버리게 될 것이다. 사도는 아래와 같이 그의 말을 계속하고 있다.

2. 사도 요한이 존칭을 사용하리만큼 보다 높은 지위와 신분을 가지고 있는 자들과 교회 안에 있는 연장자들에게 말하고 있다. 즉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13,14절)이라든가, "오래된 제자, 나손에게 쓴다"(행 21:16)는 말씀으로 알 수 있다. 사도는 교회 안에 있는 밑바닥에서부터 높은 데까지, 또한 가장 낮은 신분에서부터 가장 높은 신분에 있는 자들에게까지 직접 다루고 있는데 이는 중간에 있는 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배운 바를 기억하고 또한 그들이 이르러야 할 목표를 깨닫게 하기 위한 것이다. "아비들아 내가 쓰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학교에 오래 머물러 있는 자들일수록 더 많은 권고와 교훈이 필요하다. 가장 오래된 제자는 그의 손에 책 곧 성경을 가지고 하늘나라(하늘에 있는 대학)에 가야만 한다. 곧 아비들은 그곳에서 등록되어야 하며 또한 배워야 한다. 누구나 너무 나이가 많아서 배울 수 없을 정도에까지 이른 자는 없다. 사도는 그들이 이미 하나님에 대해 알고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쓴 것이다.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로부터 계신 이를 아는 까닭"(13,14절)이라는 것이다. 노인들은 지식과 경험을 소유하고 있으며 또한 존경받기를 기대한다. 사도는 노인들에 대한 지식과 이에 대해 노인들을 축하할 준비를 갖추고 있다. 그들은 태초로부터 있는 주 그리스도에 대해(1:1) 특별히 알고 있다. 그리스도가 알파와 오메가가 되시는 것같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지식에 대해 처음과 마지막이 된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빌 3:8). 그가 이 세상이 생기기 전 곧 태초부터 계신 분임을 아는 자들은 이로써 용이하게 이 세상을 포기하기에 이르게 될 것이다.

3. 한창 중에 있는 중년층 그리스도인들에게 권고하고 있다. "젊은 너희에게 쓰는 것은"(13,14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 건전한 정신과 마음으로 선악을 식별할 수 있는 성숙한 단계에 이른 성년들이기 때문이다. 사도는 아래와 같은 이유로써 그들을 격려하고 있다.

(1) 그들의 훌륭한 전공(戰功)으로 그들을 칭찬하고 있다. 즉 그들은 그리스도 편에 있는 모범적인 병사들이다.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니라"(13절). 계속적으로 사람들에게, 특별히 주의 제자들에게 도전적인 "악한 자"가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도장에서 잘 교육을 받은 자들은 그들의 무기를 활용하여 악한 자를 섬멸하게 된다. 악한 자를 섬멸할 수 있는 자들은 마귀의 크나큰 도구인 세상을 또한 섬멸시킬 수 있는 자라고 볼 수 있다.

(2) 성공을 이룩한 그들의 강함 때문에 그들을 칭찬하고 있다.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니라"(14절). 젊은이들은 보통 자신의 힘을 자랑하게 된다. 그리스도와 그의 은혜 안에서 강함은 젊은이의 자랑이 될 수 있다. 이는 그들의 기쁨이요 마귀를 이기는 힘이 된다. 만일 그들이 마귀를 대항하기에 어렵지 않다면 마귀는 그들을 대항하여 이기지 못할 것이다. 활기 있는 그리스도인들이여 세상을 정복하는데 힘을 나타내시라! 마귀정복을 위해 활용되었던 힘이 또한 세상을 정복하는 데에도 쓰여져야 한다.

(3)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있음을 칭찬하고 있다.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있음이라"(14절). 하나님의 말씀은 성숙한 제자들 안에 거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들에게 영양소와 힘이 된다. 이로써 그들은 악한 자를 이기는 무기로 삼게 된다. 성령의 검, 곧 이것으로 마귀의 맹렬한 공습을 막는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 안에 거하는 자들은 세상 정복을 위한 힘을 공급받게 된다.

Ⅱ. 생명적인 종교에 있어서 기본적인 경고가 되는 훈계와 충고가 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15절). 세상에 대해 못 박히고 물욕과 세상의 향락을 억제하라."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대해 죽음으로 이 교훈 안에서 합치되어야 한다. 만일 그들이 이와 같이 합리 되었다면 그들은 즉시 또 다른 동기에 일치하게 된다. 즉 그들의 사랑은 하나님을 향해야 한다. 세상을 위해 사랑을 소비하지 말라. 여기에서 이러한 충고와 주의를 하는 이유를 알 수 있다. 이러한 권고의 필요성은 불가피하다. 제자들 스스로가 세상에 대한 사랑을 금하도록 하기는 쉽지 않다. 이러한 권고의 동기는 아래 몇 가지 점에서 찾아 볼 수 있다.

1. 이 세상에 대한 사랑과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일치할 수 없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15절), 인간의 마음은 좁아서 두 가지 사랑을 모두 포함할 수 없다. 세상은 인간으로부터 하나님 사랑을 끌어내린다. 세상에 대한 사랑이 더하면 더 할수록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더욱 감소하며 시들어 버린다.

2. 세상적인 사랑이나 정욕에 대한 금지로써 이러한 충고와 훈계는 불가피하다. 즉 세상적인 사랑이나 정욕은 하나님의 정하신 바가 아니다. "이는 아버지의 것이 아니라, 세상에 속한 것이다"(16절). 하나님은 세상적 사랑과 정욕으로부터 우리를 부르셨다. 그러나 세상적 사랑과 정욕은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강요한다. 세상은 사랑의 약탈자이다. 십자가에 못박고 거부하여야 할 세상에 대한 온당한 견해와 관점이 여기에 나타나 있다. 육체적인 면으로 생각해 볼 때 세상은 선하며 하나님의 작품과 그의 완전하심이 비치는 거울로써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그러나 세상은 지금 부패된 상태에 있는 우리와 관련해서 생각해야 한다. 세상은 우리의 연약함을 조장하며 우리의 사악한 애착심을 자극하고 불을 지른다. 이 세상과 육신간에는 크나큰 유사성과 동일성이 있다. 그리고 이 세상은 육신을 침투하며 부식케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을 대항하는 하나의 파당을 이룬다. 그러므로 세상의 일들은 부패된 본성에 대해 뚜렷한 경향에 따라 세 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다.

(1) "육신의 정욕"이 있다. 여기서 육신은 "안목"과 "이 생"과는 구분되는 것으로 육체(body)를 의미하는 것이다. 육신의 정욕은 내적으로 탐욕적인 욕신의 기질과 욕망을 이름이다. 이 정욕은 일반적으로 "쾌락"이라고도 일컬어진다.

(2) "안목의 정욕"이 있다. 눈은 물질로 기쁨을 삼는다. 부(富)와 부의 소유는 쾌락적인 눈에 의하여 갈망되어진다. 이것은 탐욕적인 정욕이다.

(3) "이 생의 자랑"이 있다. 허황된 마음은 모든 사치와 화려한 장신구와 그리고 헛된 이생의 쾌락을 추구한다. 이것은 욕망을 이름이며, 항상 명예와 칭찬만을 바라고 있다. 어느 점에서 이것은 귀가 병들어 있음을 의미한다. 허황된 마음은 감탄과 칭찬에 의하여 움직여지게 된다. 이러한 욕망의 대상은 스러짐을 당하고 포기되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는 애착과 욕망을 독차지하는 바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다"(16절). 무리한 정욕이나 욕망은 제어되어야 하며 또한 감소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정욕에 빠지는 것은 아버지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라 유혹적인 세상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3. 이러한 것들을 만류하는 세 번째 이유는 이 세상 것들의 허무성 때문이다. "이 세상도 정욕도 다 지나가는 것이다"(17절). 정욕 그 자체와 정욕을 즐기는 기쁨은 시들어 없어질 것이다. 정욕적인 모든 것은 끊어지게 될 것이다(전 12:5). 무덤에서 지금 썩어져 누어 있는 모든 자들의 향락과 기쁨은 어찌 되었는가?

4. 네 번째의 이유는 영원불변한 하나님의 거룩하신 사랑 때문에 이러한 훈계와 주의를 주는 것이다. 이 세상의 것이나 없어질 세상을 사랑하는 자와는 반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살게 된다(17절). 없어질 정욕과는 반대로 그의 거룩한 열정과 사랑은 영원히 살아남게 된다. 사랑은 없어지지 아니한다. 그는 영원한 생명의 상속자로 현세에서 내세로 이르게 될 것이다. 이러한 모든 구절을 통해 우리들은 사도적인 교훈의 순수성과 영적인 면을 통찰할 수 있다. 동물적인 삶은 거룩한 신적(神的)인 삶에 복종해야 하며 육체는 사랑으로 말미암아 영혼에 순복해야 한다. 또한 영혼은 신앙과 하나님께 대한 승리적인 사랑으로 말미암아 지배되어야 한다.

 

2:13 없음.

 

2:14 없음.

 

2:15 없음.

 

2:16 없음.

 

2:17 없음.

 

2:18

적그리스도에 대한 경고 (요한 1서 2:18,19)

Ⅰ. 여기에서 "때"에 대한 예시가 나타나 있었다.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18절). 우리들은 여기에서 사도 요한이 다시 한번 초보적인 단계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말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들은 항상 유혹에 빠지기 쉽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신앙에 있어서 어린 상태에 있는 아이들아! 죄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하라"라고 타이르고 있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그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당되는 경고를 주기 위한 호칭이 될 수 있다.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곧 교회나 국가에 있어서 유대인들의 모든 무리는 마지막을 재촉하고 있다. 모세의 제도와 교훈은 사라져가는 중이다. 또한 다니엘의 때(weeks)는 끝나 가고 있으며 히브리인들의 성읍과 성소의 멸망이 눈앞에 다가오고 있다. "그의 종말은 홍수에 밀려남 같을 것이며, 또한 전쟁이 있으리니 크게 황폐할 것이다"(단 9:26). 제자들이 때의 종말에 대해 경고하며 예언적인 종국을 설명해 주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Ⅱ. 이 마지막 때의 징조는 무엇인가? 이는 적그리스도가 나타나게 된다는 사실이다(18절). 그들은 그리스도와 그의 교훈과 나라를 대적한다. 적그리스도가 용납되어지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섭리 중에 하나이지만, 그러나 그들이 이를 경우 제자들이 적 그리스도를 식별할 수 있다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목회자들은 이스라엘 집을 지키는 파수군들이다. 이러한 적 그리스도가 존재한다는 것은 제자들에게 있어서 크나큰 타격이나 손실이 될 수 없다.

1. 적 그리스도의 도래는 이미 예언된 바로 "적 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바와 같다"(18절).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에 지속적이며 숙명적인 적수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하나님의 계시로 말미암아 드러났다(살후 2:8-10). 그러므로 이에 대한 많은 전조와 증거가 나타났음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미 지금 악한 일을 이루고 있는 많은 적그리스도가 있다.

2. 적 그리스도는 마지막 때의 징조로써 이미 예언된 것이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로 미혹하게 하리라"(마 24:24). 이러한 것들은 유대인의 나라와 민족 그리고 종교의 몰락에 대한 전조를 나타낸 것이었다. "이로써 마지막 때가 이르렀음을 알게 된다"(18절). 세상에 일어나고 있는 미혹자들이 있음을 이미 알았으므로 이러한 예견으로 모든 미혹자를 대항해 싸울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강화하자.

Ⅲ. 미혹자들 또는 적 그리스도에 대한 설명을 들어보자.

1. 좀 더 적극적인 면을 생각해 보자. 그들은 한 때 사도적인 교훈을 받아들이며, 또한 이 교훈에 대해 조예가 깊은 사람들이었다. 사도행전 15장 1절에 나타난 바와 같이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쳤으나 그들은 우리들의 동료와 예루살렘 교회와 유대 교회로부터 나갔다"(19절). 가장 순수한 교회는 배교자와 배신자를 가지게 된다. 사도적 교훈이 이를 듣는 모든 사람들을 개종시키지는 못했다.

2. 소극적인 면을 들어 생각해 보자. "그들은 우리들과 같은 자가 아니었다. 즉 그들은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다. 그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바 건전한 교훈에 순종하는 마음을 가지지 못했다. 즉 머리대신 그리스도와 연합하지 못한 자였다."

(1) 그들이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고, 진실하지 못했다는 결혼을 얻게 되는 이유는 그들의 배신적인 행위 때문이다. "그들이 우리에게 속하였다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을 것이다."(19절). 만일 거룩한 진리가 그들 안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면 그 진리가 그들과 우리를 하나로 묶어 놓았을 것이다. 만일 그들이 위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고 이로써 진실하고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 그들은 적그리스도의 편으로부터 떠나 배교의 상태에 이른 자들은 배교 이전의 신앙이 위선적이었음을 충분히 암시하고 있다. 복음의 진리를 받아들인 자들은 파괴적인 죄로부터 보호함을 받게 된다.

(2) 이와 같이 그들이 사도적인 교훈과 친교에서 떨어져 나가게 된 이유는 그들의 불성실함에 기인된다. "저희가 이런 일을 행함은(저희가 나간 것은)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다"(19절). 교회는 누가 그의 진실하고 생명적인 성원인지 아닌지를 잘 모른다. 그러나 교회는 내적으로 성화된 상태를 점검하게 된다. 여기에서 위선자는 드러나게 되며, 그들이 죽을죄를 짖지 아니하였다든가, 타인에 대해 귀찮은 존재나 경계를 요하는 인물이 아니라 할지라도 진리에 비추어 볼 때 그들의 부드러운 점이나 덕스러운 점이 드러나게 된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 그리고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벧후 3:17, 18).

 

2:19 없음.

 

2:20

적 그리스도에 대한 언급 (요한 1서 2:20-27)

Ⅰ. 사도 요한은 미혹자들이 성행하는 위태로운 시대에 그의 편지를 받고 있는 자들을 격려하고 있다. 즉 배교가 성행하는 이 시대에 그들에게 안전을 보장해 주기 위해 격려하고 있다.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20절). 여기에서 우리는 아래와 같은 몇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1. 제자들은 하늘로부터 내려온 기름으로 말미암아 부요해지는 축복을 얻게 되었다. "너희가 기름 부음을 받았느니라." 진실한 그리스도인은 기름 부음을 받은 자들이며 그들의 이름은 이와 같은 뜻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은혜의 기름과 은혜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은사와 온갖 영적인 선물로써 기름 부음을 받았다. 그들은 하나님께 속한 선지자, 제사장, 그리고 왕들로서 주님의 사명과 흡사한 것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다. 성령은 불과 물이라고 비유될 수 있는 것같이, 기름으로도 비유될 수 있다.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심은 곧 기름 부음을 의미한다. 이 모든 것을 말씀하신 이는 거룩하신 자로 이러한 축복은 거룩하신 자, 성령 혹은 두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것이다(계 3:7). 두 그리스도는 그의 거룩하심에 있어서 탁월하신 자다. 주 그리스도는 거룩하신 성령의 은혜를 부어 주신다. 그리고 그의 제자들이 그 자신과 같도록, 또한 그의 도구로 쓰시기 위해 그의 제자들에게 기름을 부으신다.

2. 기름 부음의 효과는 안약과 같다. 기름 부음은 이해의 눈을 밝혀 주며 또한 이를 강화한다.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20절).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와 그의 신앙에 대한 것이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약속되어지고 또한 부여된 것이다(요 14:26). 주 그리스도는 그의 모든 제자들을 똑같이 취급하지 않았다. 어떤 제자들은 다른 제자들 보다 더 많은 기름 부음을 받았다. 이와 같이 기름 부음을 받지 못한 자들은 그리스도에 대해 진실하지 못하게 되므로 오히려 적 그리스도에게 돌아가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와 영광에 반역하는 자리에 이르게 될 위험이 있다.

Ⅱ. 사도는 본서를 기록한 의도와 뜻을 그들에게 말하고 있다.

1. 첫째로 부정적인 방법으로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사도가 본서를 기록한 의도가 그들의 지식을 의심하거나 복음의 놀라운 진리에 대해 무지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진리를 알지 못함을 인함이 아니다(21절). 진리를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 너희의 안전을 충분히 보장할 수도 없으며 또한 위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것도 경하할 만한 것이 못된다." 믿는 형제에 관해 심사숙고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우리들의 추측을 뒤엎을 때까지 우리는 그들을 주시해야 한다. 즉 신앙인들에 대한 정당한 신뢰는 그들의 신실성을 더하게 하며 고무시키는 결과가 된다.

2. 확신과 인정의 방법으로써 사도는 본 서신의 의도를 밝히고 있다. "너희가 예수 안에 진리를 앎을 인함이니요, 또 모든 거짓은 진리에서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느 점에서든지 진리를 아는 자들은 이로써 진리에 반대되는 것이 무엇임을 식별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추게 된다. Rectum e stindex sui et obligui - 즉 목 바른 줄은 삐뚤어진 줄이 어떤 것임을 보여준다. 참과 거짓은 혼합되거나 함께 어울릴 수 없다. 기독교의 진리를 잘 알고 있는 자들은 이로써 적 그리스도의 죄악과 미혹에 대항하여 싸울 수 있는 힘을 강화하게 된다. 거짓말은 자연 종교나 계시 종교 어느 것에도 속할 수 없다. 대부분의 사도들은 거짓을 저주한다. 그리고 그들의 교훈과는 모순됨을 폭로했다. 만일 거짓말로 진리를 전파했다면 사도들은 어느 누구보다 자신을 멸망케 하는 자들이었을 것이다. 기독교가 자연 종교와 일치하고 있음은 기독교를 높이 평가해야 할 점인데 기독교는 자연 종교의 기초가 되며 기독교의 요소와 원리를 지니고 있는 유대교와도 곧잘 일치하고 있다. "모든 거짓은 진리에서 나지 않음을 인함이니라." 즉 사기와 협잡은 진리를 선포하는데 가장 부적합한 도리가 되기 때문이다. 만일 부적합한 방법이 사용되지 아니하였더라면 종교의 상태가 보다 낫게 되었음을 상상해 보자. 사기와 협잡의 부적합한 방법을 사용한 결과가 우리들의 어지러운 시대에 나타나고 있다. 예로부터 이루어진 사기와 사악한 행위에 대한 탐색이 무신론과 불신앙 가운데 있는 우리의 세대에서 행해졌다. 그리고 기독교의 진리를 나타내기 위해 보다 크게 공헌을 이룩한 사람들은 "거짓은 진리에서 나지 않음을" 우리에게 확신시켜 주었다.

Ⅲ. 사도는 새로 일어난 미혹자들을 또 다시 소추(訴追)하며, 고발하고 있다.

1. 그들은 거짓말쟁이며, 거룩한 진리에 대해 지독한 반대자들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누가 거짓말쟁이, 아니 누가 악명 높은 거짓말하는 자이겠는가?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닌가?" 하나님은 거짓되며 거짓말하는 자들의 아버지라고 세상에 유포된 낭설은 가장 유해하며, 오래된 것이며,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해 허위와 거짓을 말하고 있다. 세상에는 완전 무결하게 증명되어진 진리는 없다. 오히려 혹자들은 진리에 반대하며, 또한 진리를 부인한다.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였다는 사실은 하늘과 땅 그리고 지옥에 의하여 증거 되었다.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으로 말미암아 어떤 자는 강한 미혹에 버려짐을 당한 자가 있는 것 같다.

2.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자는 아버지의 증거와 증언을 거부하며, 아버지가 그의 아들에 대해 나타낸 확증을 거부한다(22절). "즉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임을 거부한다(요 6:27).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아버지의 증거와 증언을 거부하는 자는 하나님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되심을 거부하는 것이며, 결과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계시와 세상과 화해를 이룩하는 바 그리스도 안에서의 모든 특별한 계시를 저버리는 것이다. 사도 요한은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을 추론하고 있다(23절). 즉 그는 아버지에 대한 참된 인식을 가지고 있지 못한 자이다. 그 이유는 아들은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최선의 계시자가 되기 때문이다. 그는 아버지에 대해서, 그의 호의와 은혜 그리고 구원에 대해 무관심한 자다. 이는 "아무도 아들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나타난 대로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게 된다. 아버지와 아들간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과 같이 양자간에는 교훈과 지식 그리고 관심사에 있어서 피할 수 없는 동일한 점이 있다. 그러므로 아들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아버지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기독교의 계시를 고수하는 자들은 그 위에 자연 종교에 대한 능력과 축복을 얻게 된다.

Ⅳ. 여기에서 사도는 처음부터 그들에게 들리어진 옛 교훈을 지키라고 권고하고 있다.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24절). 진리는 오류보다 더 오래 된 것이다. 성도들에게 맨 처음으로 주어진 그리스도께 대한 진리는 어떤 새로운 사건으로 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받은 바 그리스도께 대한 진리는 가장 확실한 것이며 이 진리는 그들의 수고와 노력 끝에 얻어진 것으로 길이 소유하기를 원하는 것이었다. 기독교 진리는 옛 것을 변호하며 이로써 또한 권고할 수 있다. 권고는 이러한 면에서 강화되어진다.

1. 기본적인 진리와 믿음을 고수함으로써 참된 유익을 얻을 수 있다.

(1) 이로써 그들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함께 거룩한 연합을 이루게 될 것이다.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아버지의 안에 거하리라"(24절). "그리스도의 진리가 우리 안에 거함은 죄를 멀리하게 하고 동시에 하나님과 우리를 연합하는 수단이 된다"(요 15:34). 아들은 우리로 하여금 아버지와 연합하게 하는 매개체 또 매개자가 된다. 이러한 복음의 진리에 우리들은 어떠한 가치를 부여할 수 있겠는가?

(2) 이로써 그들은 영생의 약속을 얻게 될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까지도, 5:11) 우리에게 영생을 약속하신 것이다"(25절). 하나님이 그를 진실하게 따르는 자에게 이루시는 약속은 실로 위대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 자신의 위대한 능력과 선하심에 기인한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실 수 있는 "영원한 생명"이다. 축복의 하나님은 그의 아들에게 위대한 가치와 진리를 부여하신다. 그들이 진리 안에(진리의 빛과 능력과 그 영향권 안에) 거하게 될 때 하나님은 영생을 약속해 주시기를 기뻐하신다.

2. 본문 기록의 목적을 말하는 바 앞에서 언급된 권고는 더욱 강조되고 있다. 본 서신은 미혹하는 자들을 대항할 수 있도록 그들을 강화하기 위해 기록된 것이다. "너희를 미혹케 하는 자들에 관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26절). 그러므로 처음부터 들은 것에 거하지 아니하면 본서의 기록과 또한 모든 봉사는 헛된 것이 될 것이다. 우리는 사도들의 모든 서신과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무의미하며 열매 없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내가 저를 위하여 내 율법을 만가지로 기록하였으나 저희가 관계없는 것으로 여기도다"(호 8:12).

3. 하늘로부터 받은 유익한 축복으로 그의 권고를 강조하고 있다.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니"(27절), 참된 그리스도인은 그들이 받아들인 바 거룩한 진리에 대한 내적인 확증을 가지고 있다. 즉 성령이 그들의 마음과 심령에 진리에 대한 내적인 확증을 나타내셨다. 주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의 심령에 계속적인 증거를 나타낼 수 있었던 것은 당연하다. 신실한 제자들에게 충만하게 쏟아 부어 주는 은사 곧 기름 부음은 그리스도의 진리와 교훈에 대한 하나의 징표(seal)이다. 이 징표는 어느 누구도 할 수 없으며 다만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것이다.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고후 1:21) 이 거룩한 성유(聖油) 또는 거룩한 기름 부음을 받는 것은 아래와 같은 이유로 권유할 만한 것이다.

(1) 그것은 지속적이며 영원한 것이다. "기름이나 연고는 물과 같이 쉽게 말라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27절에 있는 말씀대로 거하는 것이다. 너희 안에 확실한 것을 위해서 거룩한 조명은 지속적이며 영구적인 것이어야만 한다. 시험과 올무 그리고 미혹이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기름 부음은 영원히 존속하게 된다.

(2) 기름 부음은 인간의 교훈보다 월등하다. 즉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다"(27절). 주어진 사명이 없이는 당신에게 기름 부음으로 해서 가르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이 원하시기만 하면 기름 부음으로 당신을 가르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치 않으신다면 기름 부음이 우리들 보다 더 잘 가르칠 수 있을지라도 기름 부음으로 해서 당신을 가르치지 않을 것이다.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다"(27절). 당신들이 기름 부음을 받기 전에 우리들에 의하여 가르침을 받았으나 우리의 가르침은 기름 부음에 족히 비교될 수가 없다. "하나님은 그 권능으로 큰 일을 청하시나니, 누가 그같이 교훈을 베풀겠느냐?"(욥 36:22) 거룩하게 기름 부음을 받는 것은 부수적인 교훈을 무효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완전케 한다.

(3) 기름 부음은 명확한 진리이며, 그것이 가르치는 모든 것은 틀림없는 진리이다.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27절). 성령은 진리의 영임이 틀림없다(요 14:17). 그가 주신 교훈과 모든 가르치심은 진리 안에 있는 것이며 또는 진리에 속한 것임이 확실하다. 즉 진리의 영은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그는 현세에서 필요한 모든 것과 그리스도와 복음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에 관한 우리의 지식에 필요한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신다.

(4) 거룩한 기름은 보존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즉 거룩한 기름을 소유하고 있는 자들로 하여금 유혹자들과 그 유혹들로부터 보존함을 받도록 할 것이다.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27절). 기름 부음은 당신들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 거하도록 인도할 것이다. 그리고 당신을 인도하듯이 또한 당신을 구원할 것이며 그리스도를 반역하지 않도록 당신의 마음과 심령을 주장할 것이다. "우리에게 기름을 붓고 또한 인을 치고 우리의 심령에 순수한 성령을 부어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다"(고후 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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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강림 (요한 1서 2:28,29)

거룩한 기름 부음 받음에 대한 축복을 언급한 다음 사도는 그리스도 안에 또는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라는 충고와 권고를 하고 있다. "자녀들아 이제 그 안에 거하라"(28절). 사도는 "어린 자녀"란 친절한 칭호를 반복하고 있는데 내가 생각하기로는 이 칭호는 작은 자라기보다는 "사랑하는 자녀"를 의미하는 것 같다. 그는 사랑으로 타이르고 이성으로 뿐만 아니라 사랑스러운 표현으로 권고하고 있다.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만이 아니라 너희에 대한 사랑이 너희에게 인내를 가르치도록 우리를 강권한다. 이는 그의 인격을 말하고 있는 진리 안에와 그와 연합된 가운데 그리고 그에 대한 충성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 거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복음적인 특권은 복음적인 의무를 수반한다. 주 예수에 의하여 기름 부음을 받은 자들은 어떠한 반대에도 저항하여 그와 함께 살아야 할 크나큰 의무를 지닌다. 시련기에 있어서 참고 견뎌야 할 의무는 아래와 같은 두 가지 관점에서 강조되어진다.

1. 이는 주의 재림을 대비하기 위함이다.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 되면 그의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28절). 주 예수께서 다시 오실 것은 여기에서 당연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것은 그들이 처음부터 들은 사실이다. 그가 다시 오시게 될 때,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공공연하게 나타나게 될 것이다. 이에 비하면 그의 탄생은 은밀한 중에 이루어졌다. 그는 태초로부터 나와 조용히 마구간에 누이셨다. 그러나 그가 다시 오실 때에는 열려진 하늘로부터 임할 것이며 모든 사람들이 그를 보게 될 것이다. 모든 시험 중에도 그와 함께 거하는 자들은 그를 봄으로써 담대함과 확신, 기쁨을 얻게 될 것이다. 그들은 그로부터 온전한 구원이 이루어질 것을 알고 있으므로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머리를 들게 될 것이다. 이와 반대로 그를 저버린 자들은 그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이다. 즉 그들은 스스로 부끄러움을 자처하고 구세주의 영광을 저버린 가운데 불신앙과 배신, 만용 그리고 어리석음으로 부끄러움을 면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를 저버림으로 소망과 기대에 반해 비겁과 위선과 모든 불의의 삶으로 말미암아 부끄러움을 면치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함이다." 사도는 자기 자신도 그들의 수에 포함시키고 있다. "너희로 부끄러움을 당하지 있게 하려 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우리들로 하여금 그가 오실 때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m,n aivscunqwmen avpV autou/). 그가 공공연하게 나타나서 그를 저버린 모든 사람들을 부끄럽게 할 것이며, 그들을 모른다고 부인함으로 그들을 당황하게 만들 것이며, 사람들과 천사들 앞에서 그들을 부끄럽게 할 것임을 선포하면서, 그들을 어둠과 마귀와 끝없는 절망의 구렁이로 내던질 것이다(막 8:38). 사도는 동일한 충고와 권고를 계속하고 있다.

2. 시련기에 있어서 참고 견뎌야 할 의무는 그리스도와 그에 대한 신앙을 고수하고 있는 자들에게 주어질 권위와 특권이 있기 때문이다. "너희가 그의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29절). 의를 행하는 자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에게 주시는 또 다른 명성을 얻게 된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는 그리스도의 법과 사랑에 거하게 되며 결과적으로 그에게 충성하며 복종하는 생활에 이르기 때문이다. 주 안에 거하는 자는 역사하고 실천하며, 의와 복음의 능력을 행하여야 한다. 이렇게 행하는 자는 "그에게서 난 자임이 틀림없다." 그는 그리스도의 영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되었고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 주 그리스도가 의로우신다는 것(그의 본질과 성품에 있어서 우리를 성결케 하시는 자요 우리에게 성결함이 되시는 의로우심)을 안 이상 믿음의 행실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 사는 자는 이것이 당신에게 있어서 유일한 관심이 되는 그리스도로 난 자임을 알게 된다. 새로운 영적인 성품은 주 그리스도로부터 비롯된다. 시련기에 있어서 신앙을 실천하기 위해 계속 힘쓰는 자는 위에 계신 주 그리스도로부터 난 자임을 나타내는 좋은 확증을 얻게 된다. 주 그리스도는 영원하신 아버지시다. 그에게서 난다는 것은 크나큰 특권과 권위가 아닐 수 없다. 그에게서 난 자는 하나님의 자녀이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이 말씀은 3장의 문맥과 연결이 되어지고 있다.

 

2:29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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