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역자가 갖추어야 할 인내(디모데 후서 2:1-7)
여기서 바울은 디모데가 그의 일을 함에 있어서 성실과 인내를 가지도록 격려한다. 본문에 보면 "네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하고"(1절)라고 하였다.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는 사람들은 그 일을 행함에 있어서 열심을 내야하며 그 일을 하기 위해 강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해지라는 본문의 말씀은 우선 은혜가 약해진다는 것과 반대되는 뜻으로 사용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은혜의 진리가 있는 곳에서는 은혜의 힘에 의한 수고가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시련이 증가하면 할수록 우리의 마음이 강해지고 우리의 결심이 강해지고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점점 강해져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또는 본문에 "은혜 속에서 강해지라"는 말은 우리 자신의 힘이 강해진다는 것과 반대되는 뜻으로 사용된 말씀이라고 볼수도 있겠다. 즉 "강하라. 그러나 네 인간적인 능력이 강해지지 말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 안에서 강해지라"는 말로 볼수도 있을 것이다. 에베소서 6장 10절의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경건하여지고"라는 말씀과 비교해 보라. 베드로가 주를 부인하기 보다는 차라리 주를 위하여 죽겠다는 약속하였을 때 그는 자신을 강함을 믿고 있었다. 만일 그가 그 때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안에서 강하게 되었다면 그는 보다 더 믿음 위에 설수 있었을 것이다. 다음을 생각해 보자. 첫째, 은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나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기 때문이다(요 1:17). 그 안에는 우리 모두를 위한 은혜가 풍성하게 있다. 둘째, 우리는 이 은혜 가운데서 강하여져야 한다. 즉 우리 자신 안에서도 아니요 우리가 소유한 힘 안에서도 아니요, 또 우리가 이미 받은 은혜 안에서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안에서 강하여지라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은혜 안에서 강하게 되는 방법이다. 셋째, 아버지가 아들에게 권고하는 것처럼 다정함과 사랑으로 바울은 디모데에게 권고하고 있다. "그러므로 내 아들아 네가 그리스도 안에서 강하라." 다음을 생각하여 보자.
Ⅰ. 디모데는 고난 피흘리는 것까지도 받을 각오를 해야만 했다. 그러므로 디모데는 복음 사역을 계승할 다른 사람들을 훈련하여야 했던 것이다(2절). 디모데는 다른 사람들을 훈계하고 또 그들을 복음 사역을 할 수 있도록 훈련을 시키고 그가 들은 바를 그들에게 위탁하여야 했다. 또한 디모데는 그들을 복음 사역자로 임명하고 복음을 그들에게 위탁하여야 했으며 그렇게 하여 그가 들은 바를 전해 주어야 하였다. 디모데가 목회자를 임명하는데 두 가지 사실을 유의하여야 했다. 그 하나는 그들의 신실성 또는 성실성이었다(즉 바울의 말은 다음과 같은 뜻이다. "복음 사역을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영광과 그리스도의 영예와 인간의 영혼들의 잘됨과 구세주의 왕국의 이 땅에서의 실현을 진심으로 목적할 사람에게 이 일을 맡기라"). 다른 하나는 그들의 복음 사역자로서의 역리들이었다. 사역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아는 사람이어야 하며 또한 남을 가르치기를 잘하고 가르치는 일에 소질이 있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의 것을 알 수 있다.
1. 디모데는 그가 많은 증인들 앞에서 바울에게 들은 것을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위탁해야 했다. 그는 그 이외의 어떤 것 즉 바울이 주 예수 그리스도께 가르침을 받아 디모데와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 준 것이외에 어떤 것도 다른 사람에게 위탁해서는 안 되었다.2. 그는 그에게 위탁된 신령한 것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위탁하므로 그들이 그것을 또 다른 사람들에게 순수하고도 흠없이 전하도록해야 했다.
3. 디모데가 이러한 것을 부탁할 사람들은 충성스러운 사람이어야 했다. 즉 신용이 있고 또 다른 사람을 잘 가르치는 사람이어야 했다.
4. 비록 신실하고 다른 사람을 잘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이 직분을 맡음에 있어서는 목회자인 디모데에 의하여 위임을 받아야 했다. 왜냐하면 복음 사역은 아무도 자신이 스스로 위임 받을 수 없으며 그 일에 이미 종사하고 있는 사람에 의해서만 위임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Ⅱ. 그는 "고난을 받아야만 하였다"(3절).
1. 그 이유는 모든 그리스도인들 특히 복음 사역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군사"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주의 깃발 아래서 주님을 위해 그의 적에 대항하여 싸우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는 우리 구원의 대장이시기 때문이다(히 2:10).2. 예수 그리스도의 군사는 자신이 좋은 군사됨과 대장에게 신실함과 주님만을 위할 것을 입증해 보여야 하며 싸움을 결코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그들을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길때"까지 싸움을 포기하여서는 안 되는 것이다(롬 8:27).
3.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임을 보여 주고자 하는 자는 고난을 참을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동안 고난을 받을 것을 예기하고 또 염두에 두어야 한다. 또한 그 고난이 왔을 때 그것을 참으며 자신을 고난에 숙달시키고 견디며 고난에 의해 충성심이 흔들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
Ⅲ. 그는 이 세상에 속한 일에 자신이 얽매여서는 안 되었다(4절). 군인이 징병을 받았을 때는 자기의 직업을 떠나는데 이는 대장의 명령을 따르기 위해서이다. 따라서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자신을 바친다면 우리는 이 세상을 매이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은 생활을 위하여 직업에 종사하는 수밖에 없지만(우리는 마땅히 이 세상에서는 무언가 일을 해야 한다)그렇다고 우리는 생활에 얽매여서 그 일로 인하여 하나님께 대한 의무와 그리스도인으로서 지켜야 할 관심사들을 한쪽으로 밀어 버려서는 안 된 것이다. 선한 싸움을 싸우고자 하는 이는 이 세상에 매여서는 안 된다.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기 때문이다." 다음을 유의하라. 군사가 해야 할 가장 큰 일은 대장을 기쁘게 하는 일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가장 큰 일은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하는 일이며, 주님께로부터 인정받은 일이다. 우리를 군사로 뽑아 주신 주님을 기쁘게 하는 길은 이 세상의 생활에 얽매이지 않고 우리의 거룩한 전쟁에 방해가 되는 그러한 얽매임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이다.
Ⅳ. 영적인 전쟁을 해 나가는 사람은 법칙대로 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즉 전쟁의 법을 지켜야 함을 알아야 한다(5절). 그러므로 본문에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면류관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다. 우리는 우리의 욕망과 부패를 극복하고 선한 일에 뛰어나기 위해 애써야 한다. 그래야 규칙을 잘 지킬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규칙을 잘 지켜지 않는 한 상받을 것을 기대할 수는 없다. 또한 우리는 선을 행할 때에도 그것을 올바른 방법으로 행하고 있는가를 주의해야 하는데 이는 우리가 선을 행하고도 비방의 대상이 되지 않기 위해서인 것이다. 다음을 명심하자.
1. 그리스도인은 자기 극복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는 자기의 욕망과 부패를 정복하는 것을 목적해야 한다.2. 또한 그리스도인은 자기에게 주어진 경기의 규칙에 따라서 싸워야 할 것이다. 그는 반드시 합법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3. 그렇게 하는 사람은 반드시 승리를 얻고 또한 면류관을 받게 될 것이다.
Ⅴ. 그는 기쁜 마음으로 보상을 기대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6절)고 하였다. 이것은 야고보서 5장 7절과 비교하여 볼 때 다음과 같이 읽을 수도 있다. "수고한 농부는 그 결실에도 참여하는 것이 마땅한 것이다." 따라서 만약 우리가 열매를 얻고자 한다면 일을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상급을 얻으려면 우리는 경주를 하여야 한다. 더욱이 우리가 열매를 얻기 전에 농부처럼 부지런하며 인내하여 먼저 수고하여야 하는 것이다. 이같이 우리는 약속된 것을 받기 전에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야 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인내가 필요한 것이다(히 10:36). 바울은 디모데에게 명한 것을 다시 한 번 권한다. 그리고 디모데에 대한 희망과 기대를 표현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내 말하는 것을 생각하라. 주께서 범사에 네게 총명을 주시리라"(7절)고 하였다. 여기서 다음의 사실을 알 수 있다.
1. 바울은 자신이 디모데에게 훈계한 것에 대하여 디모데가 깊이 생각할 것을 권고하였다. 바울은 디모데를 일깨워 하나님의 일에 관하여 생각하게 하였다. 사고하는 힘은 회심에도 필요할 뿐만 아니라 선한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다.2. 바울은 디모데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주께서 범사에 네게 총명을 주시리라"고 하였다(7절). 총명을 주시는 이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자. 가장 지식있는 사람도 더욱 더 이 은사를 필요로 한다. 만약 말씀으로 계시하신 이가 우리 마음 속에 총명함을 주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알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 주께서 총명을 그들에게 주시도록 기도하는 동시에 우리는 또한 그들에게 우리가 말할 것을 생각하도록 권고하고 또 자극해 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사고력은 우리가 듣고 읽은 바를 이해하고 기억하고 실행하게 하는 매개체이기 때문이다.
복음 사역자들에게 주는 격려의 말씀(디모데 후서 2:8-13)
Ⅰ. 고난받는 디모데에게 용기를 주기 위하여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디모데에게 상기시킨다. 이에 대하여 본문에 "나의 복음과 같이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8절)고 하였다. 부활은 그리스도의 신적 사명에 대한 위대한 증거가 된다. 따라서 부활을 깊이 생각하는 것은 우리를 기독교 신앙에 대해 신실하도록 만들어 주며 특히 복음을 인하여 고난받을 용기를 불어 넣어 준다. 지금 고난받고 있는 성도들은 부활을 기억하도록 하자. 다음을 명심하자.
1. 우리는 우리의 믿음의 주(主)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 보자! 그분은 자기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셨고 부끄러움 당함을 개의치 아니하셨고 그리하셨으므로 지금은 하나님 보좌의 우편에 앉으신 것이다(히 12:2).2. 예수 그리스도의 수육과 부활을 진심으로 믿고 올바로 생각하면 그것은 현생에서 모든 고난을 당하고 있는 성도들에게 힘이 될 것이다.
Ⅱ. 디모데가 고난을 감연히 맞설 수 있도록 그에게 격려가 되고 있는 또 하나의 사실은 고난의 본보기로써 바울이 그에게 있었다는 것이다. 다음을 명심하자.
1. 바울은 어떻게 고난을 당하였는가(9절). 본문에 그는 "내가 죄인과 같이 고난을 받았으나"(9절)라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아들인 디모데가 아버지인 바울보다 더 나은 대우를 받으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는 것이다. 바울은 선을 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죄인과 같은 대우를 받았다. 선을 행한 사람이 이 세상에서 나쁜 대우를 받고 가장 선한 사람이 가장 최악의 대우를 받는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이 가운데서도 사도에게 위로가 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매이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권력자들의 박해가 목회자들로 침묵하게 하고 또 그들의 활동을 억누를 지라도 인간의 마음과 양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의 역사는 막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힘에 의해 매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않는다"는 이 사실은 디모데로 하여금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묶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도록 용기를 주었다. 왜냐하면 디모데에게 있어서는 자기 자유보다도, 또한 자신의 생명보다도 그리스도의 말씀이 결코 매이지 않는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여기서 다음의 사실을 알 수 있다.(1) 바울이 세상에서 받은 대우. 그것을 고난이었다. 그러므로 본문에 그는 "내가 고난을 받았다"고 말하였다. 그는 고난에로 부르심 받았고 또 그에게 고난이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2) 세상이 그에게 고통을 가하기 위해 내세운 구실. 그는 본문에 고백하기를 "나는 죄인과 같이 고난을 받았다"고 하였다. 이같이 유대인들도 예수님에 관하여 빌라도에게 말하기를 "이 사람이 행악자가 아니었다면 우리가 당신에게 넘기지 아니하였겠나이다"(요 18:30)라고 하였던 것이다.
(3) 바울이 죄인처럼 고난을 받은 진정한 이유. 본문에 "복음을 인하여"라고 기록된 것과 같이 바울은 복음을 인하여 고난을 받은 것이다. 바울은 사슬에 매인 바 되었고 그 후에 그는 죄와 싸우되 피흘리기까지 대항하였던 것이다(히 12:4). 비록 복음 사역자들이 때때로 사슬에 매인 바 되는 때가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매이지 않을 것이다.
2. 바울이 즐거이 고난을 당한 이유. 그는 본문에서 "내가 택하신 자를 위하여 모든 것을 참았다"고 하였다(10절). 다음을 유의 하라.
(1) 선한 복음 사역자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교회에 좋은 것들을 가져다 주실 것이요, 또 그의 택하신 자들에게 모든 것이 유익되로록 하실 것을 기억하고 가장 힘든 봉사와 어려운 고난 가운에서도 용기를 내야 하며 또 용기를 얻어야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내가 모든 것을 참음은 저희들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라"(10절)고 하였다. 우리 영혼이 구원받은 후에 우리는 다른 사람의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도 기꺼이 일하고 고난당해야 하는 것이다.
(2) 선택된 자는 구원을 얻기 위해 예정된 자인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이다"(살전 5:9)고 하였던 것이다.
(3) 이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던 그는 구원의 근원이시고 구원의 구입자이시며 구원을 주시는 분이다. 또한 그 구원에는 영원한 영광이 동반된다. 예수 그리스도가 베푸시는 구원에 영원한 영광이 따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4) 바울이 고난받은 것은 택함받은 자들을 위해서였다. 즉 그들에게 확신과 용기를 주게 하기 위해서였다.
Ⅲ. 디모데가 용기를 얻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저 세상에 대한 소망이 있기 때문이었다.
1. 그리스도와 그의 진리와 그의 법도에 충실한 사람은 그들이 그것을 위해 얼마나 값비싼 대가를 치루더라도 저 세상에서 그들의 희생의 대가를 확실히 얻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11절)라고 말한 것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 때문에 우리가 세상에서의 쾌락과 유익과 명예를 무시하고 살았다면 우리는 더 좋은 세상에서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지만 그 고난에 의해 소멸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리스도를 위하여 이 땅에서 고난을 받는 사람들"은 하늘 나라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리게 될 것이다(12절). 다윗이 곤경 중에 있을 때 우리가 그와 함께 그의 고난에 참여하였던 자들은 다윗이 왕위에 올랐을 때 그와 함께 영광을 얻었다. 마찬가지로 다윗의 자손과 함께 고난을 받은 사람들에게도 이러한 영광이 주어질 것이다.2. 우리가 주께 불성실하다는 것이 판명된다면 우리는 멸망당할 것이다.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신다"(12절). 즉 우리가 사람들 앞에서 주를 부인하면 주께서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다(마 10:33). 주께서 마지막 날에 내 것이 아니라고 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영원히 불행하게 되고야 말 것이다. 우리가 이 사실을 믿든 안믿든간에 이것은 확실히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에 "우리는 진실하지 못해도 그분은 언제나 진실하시어 약속을 어길줄 모르는 분이시다"라고 하였다(13절)(역주: 공동번역 인용). 주는 그의 약속도 틀림 없이 이행하시지만 멸망에 대한 경고의 말씀에도 틀림이 없으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그의 앞에서는 하나라도 예외가 없을 것이다. 그는 아무리 적은 점이나 칭호도 빠뜨리지 않으실 것이다. 만약 우리가 주께 신실하다면 주는 우리에게 신실하게 대해 주실 것이며 우리가 주께 불성실하다면 주께서는 틀림 없이 심판으로 우리에게 갚으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약속을 어길 줄 모르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주는 자기가 말씀하신 바 어떤 말이라도 감할 수 없으신 분이다. 왜냐하면 그는 "예"가 되시고 아멘이시며 충성된 증인이시기 때문이다. 다음을 유의 하라.
(1) 그리스도와 함께 살기 이전에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함께 죽는다는 것은 함께 산다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즉 그와 함께 죽는 것은 그와 함께 살기 위해서이다. 또한 그를 위한 우리의 고난 역시 그와 함께 통치하는 길(way)인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에 이르기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마 19:28)고 하였던 것이다.
(2) 이 말씀은 신실한 말씀이며 그러기에 우리가 의지하고 또 믿어야 할 말씀인 것이다.
(3) 그러나 만약 우리가 두려움이나 수치로 인하여 혹은 어떤 세속적인 이익으로 인하여 주를 부인한다면, 주는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며 주님 자신이 잘못하신 것으로 여기지 않으실 것이다. 그는 약속을 성실히 수행하시듯이 심판도 마찬가지로 틀림 없이 이행하실 것이다.
과오에 대한 경고(1)(디모데 후서 2:14-18)
디모데에게 담대히 고난을 받도록 촉구하고 난 다음 바울은 이어서 디모데가 해야 할 일들을 지시하였다.
Ⅰ.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가 담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믿음에로 교화시키는 일을 전념하라고 지시하였다. 즉 디모데에게 저들이 이미 알고 있는 그것들을 "생각나게 하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이것이 목회자가 할 일이기 때문이다. 사역자들의 할 일은 교인들이 이전에 결코 알지 못했던 것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교인들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다시 기억이 나도록 일깨워 주는 것이다. 즉 그들로 "말을 가지고 서로 논쟁을 벌이지 못하게 경고하는 것이"사역자의 일인 것이다. 원래 논쟁하기를 좋아하는 자들은 보통 매우 적은 문제를 가지고 다툼을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말다툼이란 하나님의 일에 대단히 파괴적인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아무 유익이 없는 말을 가지고 다투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만약 사람들이 신앙에서의 말다툼의 거의 무익한 것임을 생각할 수만 있다면 듣는 자들을 망하게 하는 말다툼을 그렇게도 열심히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말다툼은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에게서부터 사람들을 멀어지게 하여 불신자들로 기독교의 대해 격분케 하고 증오하게 하며 그로 말미암아 진리까지 유실될 위험을 초래케 하는 것이다. 사람들에게는 누구에게나 말다툼을 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말다툼은 사람을 혼란시키고 멸망시키는 것외에 어떤 가치도 없는 것이다. 그것은 무익할 뿐 아니라 매우 해로운 것이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성도들에게 말다툼을 하지 않도록 권고하고 주님 앞에서 그들을 권고할 때 먼저 자신의 행동으로 그것을 본보임으로 위엄을 잃지 말고 경고해야 하는 것이다. 즉 사역자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또한 그의 말씀으로 엄하게 경고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들이 경고하는 대로 먼저 실행해야 말의 권위가 서는 것이다. 그러므로 "네 자신을 인정된 자로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15절)고 한 것이다. 목회자가 주의할 것은 하나님께 자신들이 인정되어야 한다는 것임을 명심하라. 또한 주님에게 받으실 만하여야 하며 자신이 하나님께 인정받았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어야 한다. 이같이 하기 위해 사역자들은 끊임없이 조심하고 근면하여야 한다. 그래서 본문에 "네 자신을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 자로 드리기를 힘쓰라"고 하였다. 목회자는 일군이 되어야 한다. 그들은 해야 할 일이 있어야 하고 또 그 일을 위해 수고를 하여야 한다. 서투른 일군이나 불성실하고 게으른 일군은 부끄러워하여야 한다. 그러나 자기 직분에 전념하고 자기의 맡은 바 직무에 충실한 사람은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는 일군이다. 그들의 할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는 것이다." 새로운 복음을 창안해 내는 것이 아니고 자기에게 위임된 말씀을 올바로 분변하는 것이다. 그는 말씀을 분변하여 멸망에 속한 자에게는 두려움을 위로를 받을 자에게는 위로의 말씀을 선포해야 한다. 그는 때를 따라 모든 사람에게 양식을 나누어 주어야 하는 것이다(마 24:45). 여기서 다음의 것을 생각해 보자.
1. 복음 사역자가 설교하는 말씀은 진리의 말씀이다. 왜냐하면 그 말씀의 저자는 진리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2. 진리의 말씀은 올바로 분변하기 위해서는 지혜와 노력과 주의가 요구된다. 디모데는 이 일을 잘 행하기 위하여 힘써야 했다.
Ⅱ. 그는 목회를 하는데 방해가 되는 것을 조심하여야 했다(16절). 그는 오류를 조심하여야 했다. 그러므로 본문에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고 하였다. 자기들의 박식과 명확한 논리를 자랑하는 이단자들은 자기들의 박식과 명확한 논리에 자신들을 의존하고 있었다. 그러나 바울은 그것을 "망령되고 헛된 말"이라고 불렀다. 사람이 한 번 망령되고 헛된 말을 좋아하게 된다면 그들은 경건치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게 된다. 오류의 길은 내리막길인 것이다. 한 가지 잘못을 허용하게 되면 수만 가지의 잘못이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법이다. 그러기에 "저희 말은 독한 창질의 썩어져 감과 같은 것이라"고 한 것이다. 교회 안에 한 가지 오류나 이설(異說)이 들어와 한 사람이 물들게 되면 많은 사람에게 전염되며 한 가지 오류가 한 사람에 들어오면 그 오류는 그 사람으로 하여금 많은 잘못을 저지르게 한다. 바울은 최근에 이러한 경우에 처하게 되어 잘못된 교리에 빠진 사람들을 실례로 들도 있다. 그들은 "후메네오와 빌레도"였다. 바울은 거짓 선생들의 이름을 지적한다. 그리고 이같이 그들의 이름을 지적하므로 그들에게 씻겨지지 않을 불명예의 화인을 찍고 또 듣는 모든 사람에게 이 일이 경고가 되게 하고 있다. 그들은 "진리에 관하여 그릇 되었도다"라고 했다. 즉 저희가 진리인 기독교의 기본 교리에 대하여서 잘못되었다고 하였다. 즉 그들은 그리스도의 가장 위대한 가르침인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해 잘못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뱀과 뱀의 후손의 교활함을 보게 된다. 그들은 부활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대담하고 공공연하게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항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진리의 교훈에 대하여 잘못된 해석을 하였다. 즉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고 말을 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부활에 대하여 하신 말씀을 신비적으로 또 비유적으로 이해했다. 그리하여 예수가 말한 부활은 단지 영적인 것만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영적인 부활이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영적 부활이 있으므로 마지막 날에 몸의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진리를 교란시켜 서로 대립시키는 잘못된 주장이었던 것이다. 이 주장을 통해 그들은 "어떤 사람의 믿음을 무너뜨렸다." 즉 어떤 사람들은 죽은 자의 부활을 믿는 믿음에서 떠나게 했다. 그러나 만약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미래의 상태는 없을 것이며 우리의 봉사와 고난에 대하여 앞으로 올 세상에서의 보상도 없을 것이므로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우리가 가장 불쌍한 사람이 될 것이다(고전 15:19). 내세에 대한 교리를 제거해버리는 교훈은 무엇이든지 그리스도인의 믿음을 무너뜨리는 교훈이다. 바울은 이러한 잘못들을 크게 반박하였다(고전 15:). 그러므로 그러한 논쟁에 끌려 들어가지 않도록 유의해야 할 것이다. 다음을 명심하자.
1. 디모데가 피해야 했던 불경스러운 것이요 공허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것들은 공허한 그림자이며 망령된 곳으로 우리를 이끌어 가는 것들이다. 왜냐하면 "저희는 경건치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2. 오류라는 것은 대단히 번식력이 강한 것이고 그러기에 더욱 위험한 것이다. 즉 그것은 "독한 창질의 썩어져 감과 같은 것이다."
3. 사람이 진리에 대하여 오류를 범하였을 때 그들은 항상 그럴 듯 한 허위로 가장하려고 노력한다. 후메내오와 빌레도는 부활을 부정하지는 않고 다만 부활이 이미 지나간 것인 양 말하였던 것이다.
4. 특별히 기독교의 초보적인 진리에 대해 범한 오류는 어떤 사람들의 믿음까지 무너뜨리는 것이다.
과오게 대한 경고(2)(디모데 후서 2:19-21)
여기서 우리는 오류와 이단적인 요소가 교회를 크게 감염시킬 수 없고 또한 잘못되게 할 수 없다는 말씀을 통하여 위로를 받게 된다.
Ⅰ. 사람들의 불신앙이 하나님의 약속에 아무 영향도 끼칠 수 없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된다. 비록 어떤 사람들의 믿음이 무너진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확고히 서 있는 것이다(이렇게 볼 때 하나님의 터는 곧 선택된 사람이 된다). 그러나 또는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터"란 망령된 자들이 비난하는 진리 자체를 의미하는 말씀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어두움의 권세가 그리스도의 교훈을 총공격한다 할지라도 그 권세가 그것을 혼란시킬 수 없는 것이다. 그 진리를 대적하여 일어나는 모든 풍파에도 그것은 굳게 서 있을 것이며, 또 견디어낼 것이다. 선지자들과 사도들은 굳게 서 있을 것이며, 또 견디어낼 것이다. 선지자들과 사도들 즉 다시 말해서 구약과 신약의 교훈은 여전히 확고히 서 있다. 이 성서의 교훈의 앞 뒤는 다음의 두 가지 말씀으로 인봉되고 있다.
1. 이 한편쪽에 인봉된 위에 새겨진 말씀은 우리를 위로하는 말씀이다. 즉 그 새겨진 내용의 말씀은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는 것이다(19절). 또한 자기 백성이 아닌 자들도 알고 계시다는 것이다. 그는 그들을 알고 계신다. 따라서 주께서는 결코 그 백성들을 잃지 않으실 것이다. 비록 어떤 사람들의 믿음이 무너진다 할지라도 주께서는 의인의 길은 아신다고 말씀하신다(시 1:6). 하나님께서 선택한 백성의 믿음은 그 누구도 무너뜨릴 수 없는 것이다.2. 또 다른 편쪽인 인봉 위에 새겨진 말씀은 우리의 의무에 대해 선포되고 있다. 즉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 지어다"라고 하였다. 그리스도가 주시는 위로의 특권을 바라는 자들은 자기의 의무를 영념하고 있어야 한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른다면 우리는 부정한 것을 떠나야 한다. 그렇지 아니하다면 주께서는 우리를 버리실 것이다. 주께서는 최후 심판날에 이렇게 말씀하실 것이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3). 다음을 명심하자.
(1) 교회 안에 어떤 잘못된 가르침이 들어온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터는 굳게 서며 주의 목적은 결코 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2) 하나님은 교회 안에 자기의 백성들을 가지고 계시고 누가 자기의 백성인지를 아신다.
(3)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며 그의 이름에 의해 불리움을 받은 자들은 마땅히 부정한 것을 떠나야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내어 주신 것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해서였기 때문이다"(딛 2:14).
Ⅱ.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또 하나의 사실은 비록 믿음이 무너뜨려진 어떤 사람들이 있다 할지라도 아직도 자신의 순수성을 지키고 복음을 굳게 붙잡은 다른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20절). 그러므로 본문에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라"(20절)라고 하였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모든 것이 있는 큰 집이다. 큰 집에는 그릇 뿐 아니라 가구 중에는 가치있는 것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것은 가치가 적어 나무와 질그릇처럼 마구 쓰이는 기구도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집도 이와 같다. 교회 내에도 나무 그릇이나 질그릇과 같이 신앙이 시원치 않은 자들도 있다. 그것들은 별 가치가 없는 그릇들이다. 그러나 모든 그릇이 다 무가치하지는 않은 것이다. 그곳에는 주님이 쓰시기 위해 거룩하게 구별된 귀한 그릇들인 "금 그릇과 은 그릇"도 있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사람들이 나쁜 행실로 말미암아 실망을 할 때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반면에 좋은 사람들이 있음을 생각하고 용기를 얻어야 한다. 우리는 귀한 그릇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이런 잘못된 견해들로부터 자신을 깨끗케 하여야 한다. 즉 우리 주인이 사용하실 수 있도록 성별되어야 한다. 다음을 명심하자.
1. 교회 안에는 귀히 쓰는 그릇들과 천히 쓰는 그릇들이 있다. 긍휼의 그릇도 있고 진노의 그릇도 있는 것이다(롬 9:22, 23). 어떤 사람들은 자기들의 부정한 생각과 사악한 생활로 인하여 교회에 불명예를 가져 오고 또 다른 사람은 자기들의 본받을 만한 생활로 인하여 교회에 영광이 되고 명예가 된다.2. 누구든지 귀한 그릇이 되고 주인이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이 되기 전에 이러한 부정한 것들로부터 자신을 깨끗하게 하여야 한다.
3. 모든 그릇은 주인이 쓰시기에 합당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그의 주인을 봉사하는데 헌신해야 하며 그의 쓰시기에 합당하도록 되어야 한다.
4. 마음의 성화는 모든 선행을 위해 우리가 갖추어야 하는 것이다. 좋은 나무가 되어야 좋은 열매를 맺는 것이다.
다툼에 관한 경고(디모데 후서 2:22-26)
Ⅰ. 바울은 디모데에게 "청년의 정욕"을 피하라고 권고하였다. 디모데가 경건하고 선한 인간이었고 또 이 세상에 대해 금욕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디모데에게 청년의 정욕을 피하라는 경고를 함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는 "젊음의 정욕을 피하고 그런 것으로부터 깨끗이 하기 위하여 수고와 노력을 다하라"고 명하였던 것이다. 육신의 정욕은 청년 시절에 가장 왕성하다. 그러므로 젊은이들은 주의 깊게 육의 정욕을 경계해야 한다. 정욕 앞에는 아무리 선한 사람도 큰 소리를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는 여기서 젊은이의 정욕을 피할 수 있는 탁월한 처방을 기록하고 있다. 즉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으라"는 것이다. 다음을 생각해 보자.
1. 청년의 정욕은 대단히 위험한 것이다. 왜냐하면 장래가 총망되는 젊은일지라도 그것으로 위험에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정욕은 영혼을 거스리는 것이기 때문이다(벧전 2:11).2. 우리의 은혜의 충만함은 정욕을 가라앉게 할 것이다. 우리가 선을 향하여 더 빨리 앞으로 나아갈수록 우리는 악으로부터 멀어지게 되는 것이다. 의와 믿음과 사랑은 젊음의 정욕을 제거하는 좋은 약이 될 것이다. 거룩한 사랑은 불순한 정욕을 무마해 준다. 그러기에 "주를 부르는 자들과 함께 사귀며, 또는 사랑하며 화평을 좇으라"고 하였다. 우리가 서로 나누는 성도의 교제는 우리로 하여금 어두움의 나쁜 일들과의 교제를 끊게 하여 준다. 여기 그리스도인의 특징이 언급된다. 곧 그리스도인 "깨끗한 마음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르는 자들이다." 그리스도를 부른다는 말은 곧 기도를 말하는 것이요 따라서 그리스도는 기도의 대상이 되신다는 것을 명심하자.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특징은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드리는 기도가 깨끗한 마음으로부터 그리는 기도가 아니라면 그 기도는 용납되지 못하며 또 성공적인 기도가 되지 못한다.
Ⅱ. 바울은 디모데에게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도록 주의를 주었다. 그러한 것들은 무익하며 말다툼을 일으키는 것들이다. 그런 것들에 깊이 들어가서 그 속에 빠지는 사람들은 비록 그들 자신은 스스로 현명한 지식인이라고 자처할지 모르지만 그러나 바울은 그들을 어리석고 무식한 자들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것들이 범하는 잘못은 "다툼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들은 또한 그리스도인과 복음 사역자들 사이에 다툼과 언쟁을 야기시킨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신앙 생활을 하는 가운데 논쟁을 피하라고 자주 또 진지하게 경고 한 것은 기억해 둘 만한 일이다. 이 말씀은 신앙이란 교묘한 논쟁을 일삼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것을 믿고 행하는데 있음을 우리에게 알려 준다. 그러기에 "주의 종은 다투지 아니하고…"(24절)라고 말씀했다. 주님께서는 다투거나 외치시지 않으셨다(마 12:19). 그는 다투시기 보다 모든 사람에게 온유와 부드러움과 친절함을 본이 되셨다. 이 그리스도를 본받을 때 그의 종들에게 잘못이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주의 종은 반드시 "모든 사람에 대하여 온유 하여야 하며" 또 이를 통하여 그가 자신이 설교하고 전파하는 거룩한 종교의 능력있는 명령에 복종하고 있음을 보여 주어야 한다. 또 "마땅히 가르치기를 잘하며"라고 (24절) 하였다. 다투거나 난폭하고 그 집을 잘 부리는 사람은 가르치기에 합당하지 않은 사람이다. 사역자는 반드시 자기에게 주어지는 해를 참고 견뎌야 했다. 그리고 자기에게 복종하는 사람에게 뿐만 아니라 자기를 대적하는 자들에게도 "온유함으로 가르쳐야 한다." 다음을 생각해 보자.
1. 우리는 진리를 대적하는 사람들을 가르쳐야 한다. 왜냐하면 가르침은 오류에 빠진 자들에게 그들의 잘못을 깨우쳐 주는 좋은 도구이다. 그러나 바울은 이들 대적자들의 영혼을 구해 준다는 구실 아래 우리로 그들의 육신을 죽이라고 명하지는 않는다(역주: 구교에서 예전에 영혼을 구한다는 구실 아래 배교자들을 처형한 사실을 저자는 공박한다).2. 우리는 진리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온유함으로 훈계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 주께서 온유하고 겸손하셨기 때문이다(마 11:29). 온유야말로 주의 종이 지녀야 할 품성이다(24절). 그러므로 본문에 "주의 종은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24절)라고 말씀하였다. 이것이 진리를 빛나게 또 능력있게 전달하는 방법이며 선으로 악을 이기는 방법이다.
3. 진리를 대적하는 자들을 가르칠 때 사역자들은 그들을 돌이키는 것을 목적 삼아야 한다.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지 모르기 때문이다"(25절). 다음을 명심하자.
(1) 회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2) 진리를 반대하는 자들이 돌이키는 경우에 참으로 드물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단념해서도 안 되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멋대로 생각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다만 하나님께서 저희에게 "진리를 알게 하실까"하는 마음으로 일해야 한다.
(3) 우리에게 진리를 대하게 하시는 하나님께서는 또한 은혜를 베푸사 그것을 깨닫도록 우리를 인도하신다. 그렇지 않는다면 우리의 마음은 계속 진리를 거역하려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마음으로 믿고 또 그와 같이 입으로도 시인하는 것은(롬 10:9, 10) 하나님의 도우심 때문인 것이다. 이 도움 때문에 죄인들은 사탄의 올무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다음을 유의하라.
[1] 죄인의 비참성. 그들은 "악마에게 사로잡혀 악마의 종노릇을 한다"(26절). 그들은 가장 악한 주인의 노예가 되어 지낸다. 그리고 이 악마는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인 것이다(엡 2:2). 그들은 올무에 걸려 있는데 그 중에도 가장 나쁜 올무에 걸려 있다. 왜냐하면 그 올무는 사탄의 올무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물에 걸린 고기와 같으며 덫에 걸린 새와 같다. 더욱이 그들은 창세기 9장 25절에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고 저주받았던 함의 저주 아래 있으며 그들은 또한 노예이며 하인이었던 함의 노예인 것이다.
[2] 회개한 자들의 행복. 그들은 사냥군의 올무에서 벗어난 새와 같이 올무로부터 벗어난 자들이다. 올무는 부서지고 그들은 거기서 도망치게 된 것이다. 위험이 클수록 해방도 커지는 것이다. 죄인들이 회개했을 때 이전에 사탄의 종이 되었던 자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누릴 수 있는 영광스러운 자유를 얻게 될 것이다. 또한 그들의 뜻이 주 예수의 뜻으로 변할 것이다. 선하신 주께서는 우리를 모든 올무로부터 자유케 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