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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그리스도의 겸비와 그의 영광(빌립보서 2:1-11)

사도는 전장(前場)에서 못다한 그리스도인의 의무에 대한 권고를 본장에서 계속한다. 여기에서 그는 그들에게 간청하기를 겸비와 사랑의 위대한 분이신 주 예수를 본받아 같은 마음과 겸비한 마음을 갖기를 권한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의 사실들을 살펴 보자.

Ⅰ. 우리에게 강요된 위대한 복음의 교훈에 대해 살펴 보자. 그것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왕국의 법도이며, 그 학교의 교과목이며 그의 가정의 제복(制服)이다. 이 사랑을 그는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는 것"으로써 표현하였다(2절). 우리가 같은 사랑을 가질 때 우리는 같은 마음을 품게 된다. 그리스도인들은 견해에는 차이가 있더라도 사랑에 있어서는 하나가 되어야 한다. 이것은 항상 그들의 능력에 속한 것으로 언제나 그들의 의무이며 그들로 심판을 극복하게 하는 가장 좋은 길이다. 또 "같은 사랑을 가지라"고 하였다. 다음 사실을 명심하자. 우리에 대해 다른 사람들에게 표현하도록 요구되는 "같은 사랑"은 다른 사람들도 그 사랑을 우리에게 표시하라는 요구를 받는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상호적인 사랑이어야 한다. 사랑하라. 그러면 너희가 사랑을 받을 것이다. 또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으라" 하였다. 서로 괴롭히거나 방해하거나 혹은 서로 다른 이익을 추구하지 말고 일치하여 하나님의 위대하신 일에 하나가 되고, 여러 가지 차이가 있을 수 있으나 그 가운데서 성령의 통일을 보존하라는 말이다. 여기서 다음의 사실을 명심하자.

1. 의무에 대한 사도의 애절한 간청. 그는 그들에게 매우 끈질기게 간청한다. 우리의 의무를 다함은 우리의 성실성에 대한 증거이며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보존과 교화를 위한 필수적인 매개체인 것이다. 형제애를 가져야 하는 이유들은 다음과 같다.

(1)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어떤 위로를 경험하였다면, 형제애를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본문은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위로를 경험한 일이 있는가? 서로 사랑으로써 그 경험을 입증하라"는 말씀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가르침에서 찾은 아름다운 맛은 우리의 영혼을 유쾌하게 해 준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의 위안을 기대하는가? 만일 우리가 실망을 맛보지 않으려면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위로를 얻지 못한다면 달리 어디에서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가? 그리스도에게 관심이 있는 자들은 그의 안에서 위안을 얻는다. 그리고 그것은 강하고 영원한 위안이다(히 6:8; 살후 2:16). 그러므로 서로 사랑해야 한다.

(2) "사랑의 위로"를 경험하였으면 형제애를 가져야 한다.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서로의 사랑 가운데서 또 하나님께 향한 너희의 사랑 가운데서, 혹은 우리에게 향한 너희의 형제들이 사랑 가운데서 위로를 맛보았다면 이 모든 것을 생각하여 같은 마음을 품으라. 만일 너희가 그 위로를 얻었다면, 또는 너희가 그것을 얻고자 한다면 또한 너희가 실제로 사랑의 은혜가 위로의 은사임을 믿는다면 그 사랑으로 풍성케 하라"는 말이다.

(3) "성령의 교제"를 가졌다면 형제애를 가져야 된다고 말한다. 즉 "만일 성령에 의한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교제같은 것이 이루어지고 있다면 또"한 분 같은 성령에" 의하여 그들이 생기를 받고 활력을 받음으로 성도들 사이에 교제 있다면 너희는 같은 마음을 품으라. 이는 그리스도인의 사랑과 같은 마음을 지님이 우리로 "우리의 하나님과 형제간의 교제를 보존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는 말이다.

(4) 너희를 향한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긍휼이나 자비"가 있다면 형제애를 가져야 한다. "만일 너희가 너희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긍휼 은혜를 기대한다면 너희가 먼저 서로 긍휼을 베풀라. 만일 그리스도의 추종자들 가운데 자비를 베풀어야 할 경우가 있다면 또한 만일 성결하게 된 모든 자들에게는 거룩한 연민의 성향이 있다면, 이 자비와 연민을 형제애로서 표현하라"는 말이다. 이러한 사도의 논증은 매우 설득력 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논증이라면 가장 난폭한 자도 유순하게 할 수 있으며 가장 완악한 마음을 가진 자도 수그러지게 하기에 충분하다고 누구나 생각할 것이다.

(5) 형제애를 베풀라는 또다른 근거는 이를 행함으로 사도 자신에게 위로가 되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사도는 "너희는 나의 기쁨을 채우라"고 하였다. 교우들이 같은 마음을 가지고 사랑 안에서 사는 것을 보는 것이 사역자들의 기쁨이다. 그는 그들을 그리스도의 은혜에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끌어 오는 도구 역할을 해 왔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제 만일 너희가 그리스도의 복음에 참여함으로써 어떤 은혜를 얻었다면, 만일 너희가 그 안에서 어떤 위안을 얻었다면 혹은 그것에 의해서 유익을 얻었다면 복음을 너희에게 전해 준 너희의 가난한 사역자들의 기쁨을 채우라."

2. 그는 형제애를 증진시킬 몇 가지 방법들을 제시한다.

(1)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라는 것이다"(3절). 그리스도인의 사랑에는 교만과 분냄보다 더 큰 원수는 없다. 만일 우리가 형제들을 불쾌하게 할 일들을 한다면 이것은 그들에게 싸움을 거는 것이 되고 만다. 만일 우리가 교만에 빠져 무슨 일을 한다면 형제들에게 허영을 자랑하는 것이 되고 만다. 그 모두가 그리스도인의 사랑을 파괴하여 비 그리스도인적인 불씨를 일으키는 것들이다. 그리스도는 모든 원수됨을 폐하기 위해 오시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적대감이 없도록 해야한다.

(2) 우리가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것이다"(3절). 그리고 우리 자신의 결점에는 엄격하고 다른 사람에 대한 우리의 판단에서는 자비해야 하며, 우리 자신의 결함과 약점들을 살피기에는 재빠르되 다른 사람들의 결점에 대해서는 관대히 용납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 안에 있는 선한 우리 안에 있는 그것보다 낫게 여겨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신의 무가치성과 불완전성을 가장 잘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3) 우리가 다른 사람의 일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호기심과 비난하는 태도를 혹은 다른 사람들의 일에 쓸데없이 간섭하는 자세로써가 아니라 그리스도인다운 사랑과 동정으로 그들의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러므로 "각각 자기 일을 돌아 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4절)고 하였다. 이기적인 정신은 그리스도인의 사랑을 파괴한다. 우리는 자신의 영예와 평안과 안전을 위하여서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명예, 평안, 안전을 위하여서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자신과 같이 우리의 이웃을 사랑해야 하며 그리고 그의 일을 자신의 이로 여겨야 한다.

Ⅱ. 여기에 우리가 본받아야 할 복음적 생활관이 제시된다. 그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다. 고로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5절)라고 하였다. 다음의 사실을 명심하자.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음으로 은혜를 입고자 한다면 우리는 또한 그의 생활을 모방해야 한다. 고로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영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우리는 그의 사람이 아니다"(롬 8:9)고 하였다. 이제 그리스도의 마음이란 어떤 것인가? 살펴 보자. 그는 뛰어나게 겸손하셨다. 이것이 우리가 특별히 그에게서 배워야 할 점이다. 그는 "나를 배우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마 11:29)라고 말씀했다. 만일 우리가 마음이 겸손하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와 같은 마음을 품은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같은 마음을 품고자 한다면 우리가 겸비한 마음을 갖게 될 것이다. 우리는 주 예수와 동일한 정신과 동일한 보조로 걸어야 한다. 그는 우리를 위하여 고난과 죽음을 받기까지 스스로 낮아지셨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키고 그리고 우리의 구속에 대한 값을 치르기 위하여서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본을 보임으로 우리가 그의 발걸음을 따라가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제 여기서 우리는 본문에서 주 예수의 두 가지 본성과 두 가지 입장을 볼 수 있었다. 사도는 주 예수와 그리고 그의 안에 있는 마음에 대하여 말할 기회를 얻게 되자 이를 이용하여 예수의 인격을 상술하고 그에 대해 특별한 해석을 하려고 함을 보게 된다. 주 예수는 기쁨을 주는 주제이다. 그러므로 복음의 사역자들이 다른 말들을 하다가 그에 대하여 말하게될 때 주제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주 예수는 그 어느 경우에나 어울리는 주제인 것이다.

1. 여기에 그리스도의 두 가지 본성이 있다. 즉 그의 신성과 그의 인간성이다.

(1) 그의 신성.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다"(6절). 그는 하나님의 영원하시고 유일하신 독생자로서 신성에 참여하셨다. 이 말씀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는 요한복음 1장 1절과 일치한다. 본문은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씀과(골 1:15)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히 1:3)이라는 말씀과 동일한 취지의 말씀이다. "그는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는 것을 도적질이라고 여기지 아니하셨다"(역주: 본문에 대해서는 희랍어avrpagmo.n을 능동적 의미로 해석하느냐 수동적 의미로 해석하느냐에 따라 두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그 하나는 능동적으로 해석한 것으로 "예수께서 하나님과 동등됨을 의미로 취하는 것을 도적질로 여기지 않으셨다." 즉 자신이 하나님과 동등됨을 기존 사실로 인정하셨다는 말이 된다. AV 영역판은 이에 의거하고 있다. 그러나 수동적으로 해석하면 "예수가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해도 될 것으로 여기지 않으셨다"는 뜻을 갖게 되며 한글 개역과 공동 번역은 이에 준하고 있다. 본서의 저자는 원칙적으로 흠정판 번역을 따라서 본문을 주석하고 있으나 뒤에서는 같은 본문을 수동적 뜻을 지닌 것으로도 해석한다. N.B.C 주석 참조). 즉 그는 자기에게 속하지 않은 권리를 침입하였다거나 다른 분의 권한이라고 간주되는 것을 침입하였다는 자책을 느끼시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나와 나의 아버지는 하나이라"(요 10:30)고 말한다. 단순한 인간 혹은 스스로를 "아버지와 하나"라고 공언한다면 이는 최고의 강도질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강탈하는 것이다. 이것은 헌물들과 십일조를 강탈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하나님됨을 즉 본질을 강탈하는 것이라고 하겠다(말 3:8). 어떤 이들은 evnmorfh|/ qeou/ u`pa,rcwn-즉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다는 말씀을 구약에서 족장들과 유대인들에게 신의 위엄있는 영광으로 나타나시는 모습과 같은 것으로 이해한다. 구약에서 이러한 하나님의 나타남은 종종 "영광"과 "쉐기나"(Shechinah)로 불리운다. "mo,rfh"란 말은 70인역(LXX)과 신약 성서에서 본체란 뜻으로 사용되었다. 마가복음 16장 12절에 보면 evn evte.ra morrh/|-즉 그가 두 제자들에게 다른 형체로 나타나셨다 했고 또 마태복음 17장 2절에는 Metemrfw,qh-즉 그가(그들 앞에서)변형되었다(마 17:2)고 기록되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셨다고 하였다(역주:여기서도 해석되기 때문에 한글 개역을 그대로 인용했음) 그는 하나님의 영광으로 나타나는 것을 욕심스럽게 붙잡으려 하지도 않았고 그것을 턱없이 탐내거나 취하러 하지 않았다. 그는 지상에 있는 동안 그의 이전의 장엄한 외양을 포기하였다. 이것이 "ouvk avrpagm o.n h`gh/|sato"이란 말씀이 지닌 뜻으로 생각된다.

(2) 그의 인성. "그는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7,8절). 그는 실제로 그리고 참으로 사람이었고. "우리의 혈육을 입으시고" 인간의 본성과 관습을 지니시고 나타나셨다. 더구나 그는 자원하여 인간의 본성을 취하였다. 그것은 그 자신의 행위였고 그리고 그 자신의 동의에 의해서 그리하였다. 우리는 우리가 인간 본성을 입은 것도 그와 같은 방식으로 입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로써 그는 "자신을 비우시고" 즉 천상의 그리고 그의 이전의 존귀와 영광된 모습을 벗어버리고 인간 본성의 누더기를 입으셨다. "그는 범사에 우리와 같이 되셨다"(히 2:17)

2. 그의 두 가지 상태 즉 겸비와 높임이 본문에 기록되고 있다.

(1) 그의 겸비. 그는 인간의 형상과 모습을 취하셨을 뿐아니라 종의 형제 즉 천한 인간의 모습을 취하셨다. 그는 하나님이 선택하신 그의 종일 뿐 아니라 그가 인간들에 대한 사역자가 되시었으며 그리고 그들 가운데 천한 종의 몸을 입으시고 봉사하셨다. 어떤 사람은 생각하기를 만일 주 예수가 인간이 되려고 하셨다면 그는 왕자가 되어 그리고 영광 중에 찬란하게 나타났어야 옳았을 것이라고 가정한다. 그러나 그와는 정반대로 "그의 중의 형체를 취하셨다"(7절). 그는 미천하게 자랐다. 그리고 아마도 그의 일시적인 아버지와 장사 일을 함께 했던 것 같다. 그의 전생애는 겸비와 천함과 빈곤과 불명예의 삶이었다. 그는 머리 둘 곳도 없었으며 남의 도움을 받아 살았고, "슬픔의 사람이었고, 비탄에 익숙한 사람이었고" 외적인 거드름을 피우시지도 않았고 다른 사람과 구별될 무슨 표식도 없었다. 그의 생의 비천한 것이었다. 무엇보다 그의 최고의 겸비는 십자가에서의 그의 죽음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8절)고 하였다. 그는 고난을 받았을 뿐 아니라, 능동적으로 자원해서 복종하였다. 그는 중재자로서 스스로 이룬 법에 복종했고 그리고 그 법에 따라 죽음을 감수하셨다. 그러므로 그는 "나는 생명을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요 10:18). 그리고 그는 "율법 아래 태어나셨다"(갈 4:4)고 하였다. 그의 죽으심의 태도가 강조되고 있다. 그의 죽으심에 온갖 겸비함이 빠짐없이 들어 있었다. 그것은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었다." 이 죽음은 저주 받은 죽음(나무에 달린 자는 저주를 받는다)이었다. 또한 이 죽음은 몸에 가장 신경이 예민한 부분(손과 발)에 못을 박아 십자가에 그 온 체중을 실어야 하는 고통에 가득 찬 죽음이었고 자유민의 죽음이 아니라 행악자의 노예의 죽음이었으며 공중의 구경거리로써의 죽음이었다. 축복받은 예수께서는 이 정도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낮추셨다.

(2) 그의 높임.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이섰다"(9절). 그의 높임은 그의 겸비에 대한 보상이었다. 그가 자신을 추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를 높이셨다. 높이시되 그는 u`peru;fwse-즉 지극히 그를 높이셨다. 최고의 높이에까지 올리셨다. 하나님은 예수의 전 인격 즉 신성은 물론 인성까지도 높이셨다. 왜냐하면 그는 인간의 형체는 물론 하나님의 형체를 입으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이 높임은 그의 신성의 입장에서 볼 때 어떤 새로운 영광을 부여한 것이라기 보다 그의 권리를 되찾은 것 또는 "그가 세상이 있기 전에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그 영광"(요 17:5)을 다시 회복한 것일 뿐이었다. 그러므로 아버지 자신이 높임을 받으신 것이라고 거론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아버지 자신이 높임이 신성과 관련되기는 하지만 정작 높임을 받는 것은 그의 인성이었고 그것만이 높임이 가능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그의 높임은 본문에 영예와 권세로 구성된다. 먼저 그의 영예로움을 관찰해 보자. "그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가지신다." 그것은 모든 피조물 즉 인간과 천사들보다 높은 존귀의 명칭이다. 다음 그의 권세에 대해 생각해 보자. "모든 무릎을 그에게 꿇게 하셨다." 즉 온 피조물이 그에게 복종해야만 한다는 말이다. 고로 "하늘에 있는 것들과, 땅에 있는 것들과, 땅 아래 있는 것들과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사람들 즉 산 자와 죽은 자 모두가 그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말이다. 복종하되 "예수의 이름에" 복종한다. 이것은 공허한 말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권위에 복종하는 것이다. 그 이름에 모든 자가 엄숙한 경의를 표현해야 한다. 그래서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해야 한다." 즉 모든 민족이 각기 자기 언어로 높임을 받은 구속자의 우주적 왕국에 대해 공개적으로 시인을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권세있는 자들"이 그에게 무릎을 꿇는다(마 28:18). 그리스도의 왕국의 광활함을 생각해 보고 지나가자. 그것은 하늘과 땅에 그리고 그곳들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 즉 인간은 물론 천사들에게 그리고 산자는 물론 죽은 자에게까지 미친다. 이로써 "아버지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신다." 다음의 사실을 명심하자.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고백하는 것이 곧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이 된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시는 것"(요 5:23)이 그의 뜻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에게 주어지는 존경은 무엇이든 결국 아버지의 존귀가 된다. 고로"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라(마 10:40)"고 하셨다.

 

2:2 없음.

 

2:3 없음.

 

2:4 없음.

 

2:5 없음.

 

2:6 없음.

 

2:7 없음.

 

2:8 없음.

 

2:9 없음.

 

2:10 없음.

 

2:11 없음.

 

2:12

실천적인 신앙에 대한 권고(1)(빌립보서 2:12,13)

Ⅰ. 그는 그들에게 그리스도인의 길을 감에 있어서 근면과 진지성을 지닐 것을 그들에게 권고한다. 그러므로 "너희 구원은 이루라"(12절)고 한다. 곧 우리 영혼의 구원(벧전 1:9)과 우리의 영원한 구원(히 5:9)을 이루라는 말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죄가 우리에게 가져 왔고 우리를 거기에 들어가게 한 모든 악으로부터의 구원이 포함되며 우리의 완전하고 궁극적인 행복에 필요한 모든 것과 모든 선의 소유가 포함한다. 다음의 사실을 명심하자. 무엇보다 우리의 관심이 되어야 할 것은 우리의 영혼의 안녕을 확립하는 일이라는 사실이다. 다른 것들이야 어떻게 되는지 우리는 우리의 최선의 이익에 관심을 갖자. 그것은 우리 자신의 구원 즉 우리 자신의 영혼의 구원이다. 우리의 최대의 관심사는 다름 사람을 심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자신을 돌보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벅차다. 그리고 비록 할 수 있는 한에서 우리가 전체적인 구원을 이루도록 힘써야 하겠지만 그러난 우리가 자신의 구원을 어떤 이유에서도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katergaxisqe-즉 우리의 구원을 이룰 것이 요구되고 있다. "이루라"는 말은 어떤 일을 "철저히 해내는 것" 그리고 이를 위해 "참된 수고를 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음의 사실을 명심하자. 우리는 우리를 구원에로 이끌어 주는 모든 방법을 사용함에 있어 근면해야 하겠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구원에 필요한 것을 때때로 함으로써 우리의 구원을 이룰 뿐만 아니라 행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행함으로써 그리고 끝까지 견딤으로 우리의 구원을 성취해야 한다. 구원은 우리가 염두에 두고 마음을 쏟아야 할 중대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최고의 배려와 근면이 없이는 구원을 성취할 수 없다 그는 "두려움과 떨림으로"라고 덧붙인다. 즉 매우 주의 깊게 그리고 신중하게 구원을 성취하라는 말이다. "너희가 구원에 미치지 못할까 하는 두려움으로 지내야 한다. 최선을 다하여 신앙의 제반 의무를 주의 깊게 행하며 너희가 도달할 모든 유익함에 행여 미치지 못할까 두려움을 품도록 하라'(히 4:1)는 뜻이다. 두려움은 악으로부터 우리를 지켜 주며 보호해 준다.

Ⅱ. 그는 그들에게 늘 복음에 복종할 자세를 갖춤으로 구원을 이룰 것을 촉구한다. 그러므로 그는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함으로"(12절)라고 말한다. 즉 너희가 항상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때마다 기꺼이 그것에 순응하여 왔었다. 내가 있을 때는 물론이고 내가 없을 때에도 그리하였었다. 또한 "너희는 더욱 그리스도를 존경하고 너의 영혼을 돌보며 그리스도에 대한 표면적인 약간의 존경하는 태도보다 그로 하여금 너희를 지배하게 하라"는 뜻의 말씀이다. 그들은 사도가 있을 때에 두려워했을 뿐 아니라. 그가 없을 때에 더욱 그렇게 하였다. 이에 대하여 "너희 안에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라. 그러니 너희는 너희 구원을 이루라. 그가 일하시니 너희도 일하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역사한다는 사실을 우리가 최선을 다 하도록 우리를 격려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일하시므로 "우리의 수고가 헛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의 은혜를 내려 주시며 우리의 신실한 노력을 도울 준비를 갖추고 계신다. 다음의 사실을 명심하자. 비록 우리가 우리의 구원을 이루는 데 있어서 우리의 최선의 노력을 해야 한다 할지라도 우리가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여 나아가고 일을 계속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의 은혜는 우리의 본성에 적합한 방식으로 그리고 우리의 노력과 일치하여 우리 안에서 역사하신다.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는 단순히 우리의 잘못을 묵인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노력에 활기를 띠게 하고 더욱 열심을 내도록 하여 준다. 그러기에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자. 이는 그가 너희 안에서 역사하시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우리의 모든 행함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그의 역사에 의존한다. "태만과 부주의에 의해 하나님을 소홀히 여기지 말라. 이는 너희가 그를 격노케 함으로 그가 도움을 거두어 버리시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요 또한 너희의 모든 노력이 헛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두려움으로 일하라. 이는 그가 그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일하시기 때문이다." 그의 일을 할 마음을 우리에게 일으키는 것과 행하게 하는 것이 모두는 하나님의 주시는 재능이다. 선한 것에 뜻을 두게 하는 것을 행할 수 있게 하며 그리고 우리의 정한 도리에 따라 행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고로 이르기를 "주께서 우리 모든 일을 우리를 위하여 이루심이니라"라고 하였다(사 26:12). 또한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라고 하였다. 우리에게 아무런 힘도 없는 것 같이 또한 우리 안에는 아무 공로도 없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없이 행동할 수 없는 것과 동시에 우리는 그것에 대해 권리를 주장할 수 없고 그리고 그것을 받을 자격이 있는 척해서도 안 된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한 뜻 때문에 그는 우리 안에서 그의 선한 사업을 이루셨다. 그리고 그는 그의 피조물에게는 아무런 책임도 없으시고 다만 그가 은혜로 약속한 자들에게만이 책임을 지신다.

 

2:13 없음.

 

2:14

실천적인 신앙에 대한 권고(2)(빌립보서 2:14-18)

본문 가운데서 사도는 여러 가지 예를 들어서 그들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고백에 다가 거기에 알맞은 적절한 성품과 행위를 더할 것을 권고한다.

1. 하나님의 명령에 즐거이 복종함으로써(14절) 그렇게 하라고 한다. 그러므로 본문에 "모든 일 즉 여러 가지의 의무를 원망이 없이 하라. 그리고 너희 의무를 행하되 흠이 없이 행하라. 너희 일을 상념하며 그것으로 인하여 쟁론하지 말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명령은 사람들에게 복종하라고 주어진 것이지 그것을 대상으로 쟁론하라고 주어진 것은 아니다. 그의 명령에 대한 우리의 복종은 우리의 신앙을 돋보이게 하며 또한 우리가 선한 주인을 섬긴다는 것을 나타내 준다. 그 결과 그는 우리에게 자유를 주며 우리의 복종에 대한 보상으로 그는 우리 안에서 역사하신다.

2. 서로 사랑과 평화를 베풀므로써 그렇게 하라고 한다. "시비가 없이 즉 서로 다투는일이나 논쟁함이 없이 모든 일을 행하라. 이는 종종 진리의 빛과 신앙의 생명이 열띤 논쟁의 분위기 가운데서 상실되게 때문이다.

3. 모든 사람들에 대한 흠없는 생활을 함으로써(15절) 그렇게 하라고 한다. "탓할 것이 없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너희가 흠없고 순전하도록 하라. 그래서 너희가 말이나 행실에 있어서 어느 누구에게도 해가 되지 말아야 하며 불쾌하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우리는 순전할 뿐 아니라 흠 없도록 노력해야 된다. 또한 남에게 해롭게 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러한 혐의조차 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 "흠없고 신실하라"는 말씀을 어떤 사람은 인간에게 흠이 없고, 하나님께 대하여 신실하라는 말로 이해한다.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함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에 있어 흠없고 순전한 자들이 되며 하나님으로부터 은총을 입어 특권을 부여 받는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인간들의 아들들과는 달라야 한다. 그는 avmw,mhta-즉 흠이 없어야 한다. 모무스(Momys: 역자주-그리이스 신화에 나오는 조롱, 비난의 신)는 헤시오드(Hesiod)와 루시안(Lucian)에 의해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희랍인들이 불평의 신으로 섬기고 있는 신이었다. 자신은 내버려 두고 모든 사람과 모든 일마다 흠을 찾아내며 다녔다. 이 신의 명칭에서 다른 사람들을 혹평하며 다른 사람들의 한 일을 엄하게 비평하는 자들을 "모미(Momi)"라고 부르게 되었다. 사도가 본문에서 "흠잡힐 데가 없이 하라"고 한 말의 뜻은 "모무스(Momus)까지도 흠을 잡지 못하도록 그리고 가장 혹독한 비평가도 너를 비난하지 못하도록 조심스럽게 행하라"는 뜻이다. 우리는 하늘을 목적삼고 거기에 이르기 위해 노력해야 할 뿐만 아니라 흠없이 거기에 이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또한 데메드리오와 같이 "뭇사람에게도, 진리에게로 증거를 받아야 한다"(요삼 12장). 또한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라고 본문에 기록되어 있다. 즉 이는 이방인들 그리고 외부에 있는 자들 가운데서라는 뜻이다. 다음의 사실을 명심하자. 참 신앙이 없는 곳에서는 어그러짐과 거스림밖에 기대할 것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우리가 생활하는 가운데 같이 지내는 자들이 어그러지고 거스릴수록, 그들이 공연히 헐뜯으려고 할수록 우리는 더욱 조심하여 흠없고 순전하도록 해야 한다. 아브라함과 롯은 다투지 말아야만 옳았다. "왜냐하면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이 그 땅에 거(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창 13:7). 또한 세상에서 빛이시며 그리고 선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가운데 있는 빛들이다. 하나님이 어디서든 착한 사람을 세우실 때 그는 그를 그곳에 빛으로 세우신 것이다. 또한 본문을 명령법적으로 읽혀질 수도 있다. 즉 "세상에서 너희가 그들 가운데 빛으로 나타나라"는 뜻으로 볼 수도 있다. 이 말씀을 마태복음 5장 16절의 "너희 빛을 그와 같이 사람들 앞에 비치게 하라"는 내용과 비교해 보라.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에 대해 하나님께 인정받기 위해 노력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기 위하여 그들에게 자기 자신을 내보일 수 있어야 한다. 그들은 신실한 것은 물론 빛을 발해야 한다. 즉 "생명의 말씀을 밝혀야 한다"(16절). 복음이 생명의 말씀이라고 불려지는 것은 제시해 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저를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셨다"(딤후 1:10)고 하였다. 생명의 말씀을 굳게 잡는 것뿐만 아니라 그것을 밝히는 것이 우리의 의무다. 또한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그것을 굳게 잡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하여 그것을 제시해야 한다. 우리는 촛대가 주위의 모든 것을 유익하게 만드는 촛불을 지탱하여 그것으로 빛을 발하게 천체들처럼 세상을 밝혀야 한다. 바울은 그들에게 이것이 "그의 자랑거리라고"말한다. 고로 본문에 "그리스도의 날에 나로 자랑 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즉 너희의 견고함 뿐 아니라 너희의 유용함으로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고 한다. 그는 그들로 그의 고통이 헛되지 않았음을 깨닫게 하려고 하였다. 또한 "그가 헛되이 달리지 아니하였고 그리고 헛되이 수고하지도 않았음"(16절)을 알리려 하였다. 다음 사실을 명심하자.

(1) 목양의 사명은 우리에게 전력을 투신할 것을 요구한다는 사실이다. 우리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다 기울여도 목양을 위해 달리며 수고하는 데 충분하지 못하다. 달리는 일은 온 힘을 다 기울여야 하는 것이며 또한 계속적으로 돌진해야 하는 일이다. 또한 수고는 꾸준함과 대단한 열심을 요하는 것을 뜻한다.

(2) 사역자들에게 있어서 그들이 "헛되이 달리지 아니하고 그리고 헛되이 수고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처럼 큰 기쁨은 없다. 그리고 그것은 그리스도의 날에 그들의 자랑거리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때 그들로 인하여 회개한 자들이 그들의 면류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다른 곳에서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니라"(살전 2:19, 20)고 말 하였다. 사도는 만족스럽게 그들을 위하여 달리는 일과 수고를 했을 뿐 아니라 또한 그가 그들의 유익을 위하여 고난받을 각오까지 되었음을 보여 준다(17절). 그러므로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계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라"고 하였다. 만일 그가 교회의 존귀와 교회의 육성과 그리고 인간들의 영혼의 안녕을 증진시킬 수 있다면 자신이 행복한 것으로 여겼다. 비록 이로 인해 그가 고난을 당할 뿐 아니라 그의 생명을 내어 놓게 되더라고 그는 기뻐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선택된 자들의 믿음을 돕기 위하여 기꺼이 그들의 제단에 희생 제물이 될 수도 있었다. 바울은 교회를 섬기기 위하여 그의 피를 흘리는 것도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는데 우리가 교회를 위해 약간의 고통을 받는다고 그것을 많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인가? 그가 그의 생명을 바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그 수고를 우리가 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가치있는 일인가? 그러므로 그는 "만일 내가 관계에 드리는 포도주처럼 드려지고 부음이 되어야 한다면"(딤후 4:6)(ape.ndomai) "나는 그렇게 드려질 준비가 되었노라"고 하였다. 그의 가르침을 자기의 피로써 인치는 것을 기뻐할 수 있었다(18절). 또한 그는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고 권한다. 선한 그리스도인들이 넘치는 기쁨을 생활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그리고 훌륭한 사역자들에게 기쁨을 주는 사람들은 그들의 사역자들과 함께 그들로 기뻐하고 즐거워할 충분한 자격이 있는 것이다. 만일 사역자가 그 회중들을 사랑하고 자신이 기꺼이 그들의 안녕을 위하여 바치며 또 바치어지고 있다면 그 회중들은 그 사역자를 사랑하고 그리고 "그와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할"이유가 되는 것이다.

 

2:15 없음.

 

2:16 없음.

 

2:17 없음.

 

2:18 없음.

 

2:19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에 대한 칭찬(빌립보서 2:19-30)

바울은 두 선한 사역자들에게 대해 특별히 언급한다. 비록 그는 자신이 위대한 사도였고 "그들 모두 보다 더욱 많이 수고를 했지만" 그러나 그는 자기보다 훨씬 못한 그들에 관하여 온갖 좋은 말과 천사를 아끼지 않았다.

Ⅰ. 그는 디모데에 관하여 말한다. 그는 디모데를 빌립보 사람들에게 보내고자 작정하고 있었고 그는 가서 자기들의 처지를 빌립보에 통지하게 되어 있었다. 바울의 교회들에 대한 염려를 보자. 그리고 그가 그들의 잘 해나가고 있음을 통하여 위로를 받는 모습을 보자. 그는 오랫 동안 그들에 대하여 소식을 듣지 못했으므로 괴로워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디모데를 보내어 교회 사정을 살펴 보고 그에게 소식을 가져오게 하려고 하였다. 그가 그를 보내려 한 것은 "이는 뜻을 같이 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 밖에 내게 없음"(20절) 때문이었다. 바울에게 디모데는 둘도 없는 적격자였다. 그들이 가르치는 자들의 영혼들에 대하여 세심한 정성으로 기울이는 많은 사역자들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뛰어난 정신과 부드러운 마음의 소유자였던 디모데와 비교될 만한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디모데를 가리켜 "너희 사정을 진실히(naturally) 생각할 자"라고 하였다(역주: 흠정판은 "진실히"를 "naturally"로 번역하였다). 다음의 사실을 명심하자. 우리의 의무가 우리에게 습관처럼 몸에서 우러나오게 될 때(naturally) 그것은 최상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디모데는 축복된 바을의 참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디모데 보조를 맞추어 걸었다. 본문에 "몸에서 우러나는"(naturally)이란 말은 "신실하게"라는 뜻으로 하는 척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기꺼운 마음과 고결한 입장을 취하는 것을 말한다. 즉 그의 마음의 생각과 일치하는데 태도를 말하는 것이다. 다음의 사실을 기억하자.

1. 그들의 회중의 형편을 돌보는 것과 그들의 안녕에 관심을 갖는 것이 사역자들의 의무라는 사실이다. "나의 구하는 것은 너희 재물이 아니요 오직 너희니라"(고후 12:14).

2. 참 마음으로 교우들을 돌보고 그들의 안녕에 관심을 갖는 사역자를 발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한 자는 그의 형제들 중에서 뛰어나고 구분된 자라고 하겠다. 이러한 자들이 귀하므로 바울은 "저희가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한다"(21절)고 말하였다. 그런데 이 말을 다윗이 "모든 자가 거짓말하는 자다"(시 116:11)라고 말할 때에 고통스러웠던 것처럼 바울도 고통스러운 마음으로 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까? 과연 초대 교회에서 그들의 회중의 형편을 돌 볼 자들을 그토록 발견하기 어려울 정도로 당시의 사역자들 가운데 부패가 만연되어 있단 말인가? 우리는 그렇게 이 말을 이해해서는 안 된다. 사도는 보편적으로 볼 때 디모데만큼 교우들에 대하여 관심이 지대한 자가 없다는 뜻에서 이 말을 한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우리의 이익을 구하고자 예수 그리스도를 경홀히 여기는 것은 매우 큰 죄이며 그리고 이것은 그리스도인들과 사역자들 가운데 흔히 있을 수 있는 사실이라는 것을 기억하자. 많은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명성과 안일과 안전을 진리와 거룩함 그리고 그의 의무보다 좋아하며, 그리고 그들 자신의 쾌락의 일들과 명성을 그리스도 왕국의 일들과 세상에서의 그의 존귀한 이익보다 더 좋아 한다. 그러나 디모데는 이러한 자들과 같지 않았다. 고로 사도는 "너희가 그의 연단을 안다"(22절)고 말했다. 디모데는 고난을 받았으며 "전도인의 직무를 다하였고"(딤후 4:5) 그리고 그는 그에게 닥친 모든 일에 신실하였다. 그와 교분이 있는 모든 교회들에게 닥친 모든 일에 신실하였다. 그와 교분이 있는 모든 교회들은 그의 연단을 알았다. 그는 명실상부한 선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로서 하나님께도 기뻐하심을 받으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았다(롬 14:18). 그러므로 사도는 "너희는 그의 이름과 그의 얼굴뿐 아니라 그의 진실됨을 안다. 그리고 너희의 섬김에서 그의 사랑과 충성을 경험을 했으며 자식이 아비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음을 아노라"(22절)고 말한다. 그는 바울이 말씀을 선포하던 많은 곳에서 그의 조역자로 수고를 하였고 그리고 자녀가 마땅히 아버지를 존경하듯이 그러한 태도로 그는 복음 안에서 그를 섬겼고 그리고 자녀가 아버지에게 드리는 사랑과 기쁨을 가지고 복음 안에서 그와 함께 수고하였다. 그들의 동역은 한편은 대단한 존경으로 다른 한편은 대단한 온화함과 친절로써 서로를 대하는 가운데 이루어졌다. 이것은 같은 임무에 협동으로 수고하는 선배와 후배의 사역자들에게 귀감이 되는 본이다. 바울은 그를 곧 보낼 계획을 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내가 내 일이 어떻게 될 것을 보아서 곧 이 사람을 보내기를 바란다"(23절)고 그는 말하였다. 당시 그는 죄수였기 때문에 결과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므로 사태의 추이에 따라서 그는 디모데를 보내려 하였다. 뿐만 아니라 사도 자신도 그들에게 가길 원했다(24절). 그러므로 "나도 속히 가기를 주안에서 확신하노라"고 말한다. 그는 곧 자유롭게 되어 그들을 방문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 바울은 자기가 자유롭기를 바랐다. 그것은 그가 쾌락을 보고자 함이 아니라 그가 선을 행하기를 원해서였다. 그는 자신의 자유에 대하여 "내가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고 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뜻에 대해 겸손히 의지하고 굴복하는 자세로 그들은 보게 될 희망과 확신을 표현하였다(행 18:21; 고전 4:29; 약 4:15; 히 6:3 을 참조)

Ⅱ. 에바브라디도에 관하여. "그는 그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된 자요, 그가 사랑하는 같은 그리스도의 형제이며 복음을 위한 사역과 고난에 함께 참여한 동지로 그와 같은 수고와 고난을 겪었고 또한 그들이 보낸 사자(使者)라"고 부른다. 디모데는 빌립보인들이 그들의 교회에 관한 몇 가지 사건들에 대해 바울에게 물어보기 위하여 보낸 사람이었든지 또 바울이 그를 가리켜 "나의 쓸 것을 돕는 자라"고 한 것을 보아 그들이 바울에게 생활 필수품을 공급해 주기 위해 보낸 사람인 것으로 보여진다. 그는 골로새서 4장 12절의 "에바르라"와 동일 인물인 것 같다. 에바브라디도는 자신도 그들에게 자기를 열렬히 원했고 바울도 그가 갈 수 있기를 원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다.

1. 에바브라디도가 병이 들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가 병든 것을 그들이 들었다"(27절)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다. 질병은 선한 사람들이나 사역자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된 재난이다. 그런데 죽은 자를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질병을 치유하는 능력을 받은 사도가 왜 그를 치료해 주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게 된다(행 20:10). 아마도 이러한 능력은 다른 사람들에게 표적으로 주어진 것으로 복음의 진리를 확증하기 위한 것이었고 따라서 신도들 상호간에 이를 이용할 당위성을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복음서에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정이 따르리니, 그들이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막 16:17, 18)고 하였다. 그러나 아마도 그들의 임의로 그리고 언제든지 그 능력을 발휘할 수는 없었던 것 같고 다만 이로 인하여 어떤 큰 목적을 이루는데 도움이 되기 위해서 또는 하나님이 적합하다고 보실 때 만이 그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이러한 조치는 측량할 수 없는 영을 가지신 그리스도다운 적절한 조치였다고 하겠다.

2. 빌립보 교인들은 그의 질병의 소식을 듣고 대단히 염려했다. 그 소식을 듣고 에바브라디도가 아픈 만큼이나 그들도 심히 근심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를 특별히 존경하고 사랑한 것 같이 보이며 그 때문에 그들은 그를 사도에게 뽑아 보내기에 적합한 인물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3. 하나님은 그를 다소 회복시키시고 또 사역을 당분간 쉬도록 하는 것을 기뻐하셨다. 그러므로 본문에 "하나님이 그를 긍휼히 여기셨다"(27절)고 하였다. 사도는 그가 빌립보로 돌아가는 것이 에바브라디도나 다른 사람은 물론 자신에게도 큰 긍휼이 있었음을 고백한다. 비록 당시 교회가 특별한 은사들로 축복받았다 할지라도 그들은 질병 때문에 선한 사역자를 쉬게 하기로 하였음을 볼 수 있다. 그는 에바브라디도를 보내지 않아서 큰 손실이 주어지지나 않을까 염려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그를 보내는 일을 "내 근심 위에 근심을 면케 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 여겼다. 즉 "내가 투옥으로 당하는 슬픔에다가 그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을 당하지 않도록 그렇게 하신 것이다"는 말씀이다. 또는 그가 말한 그의 근심이란 최근에 그와 함께 있던 훌륭한 사역자들이 죽어서 그가 맛보고 있는 상심을 말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고 게다가 에바브라디도까지 지금 죽으면 이것이 그에게는 새로운 슬픔이 되었을 것이고 따라서 "근심 위에 근심을 더하는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4.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 교인들을 방문하기를 몹시 원하였다. 그는 그가 병들었을 때, 그로 인하여 근심할 자들과 함께 위로를 나누기를 원했다. 그러므로 "너희로 저를 다시 보고 기뻐하게 함이다(28절). 즉 그가 얼마나 건강이 회복되었는가를 너희들을 직접 봄으로 그로 인하여 너희로 감사함과 기쁨을 맛볼 수 있게 하려 함이라"고 한다. 또한 그는 그들이 사랑하는 친구를 보게 함으로써 그들이 위로 받는 것을 통해 자기도 위로받는 것을 말한다.

5. 바울은 그들에게 그를 존경하고 사랑해 줄 것을 부탁한다. 그러므로 본문에 "이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저를 영접하고 또 이와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29절)고 하였다. 즉 "이같이 복음을 위한 사역에 열심이고 신실한 자를 귀하게 여기고 최상의 존경과 사랑을 베풀라. 진심어린 사랑과 좋은 말로 그에 대한 너희의 기쁨과 존경을 보여 주라"는 말이다. 그가 병에 걸린 것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가운데 있어진 일인 것으로 보여 진다. 이 사실은 본문에서 사도가 "저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었다"(30절)는 말씀을 통해 나타난다. 사도는 그가 가진 생명까지 아끼지 않았던 무분별함에 대해서 그를 꾸짖은 것이 아니라 그 이유로 그들이 그를 더욱 사랑해야 한다고 말한다. 다음 사실들을 명심하자.

(1) 참으로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리고 그의 나라의 유익을 위해 진실한 마음을 품은 자들은 그를 섬기기 위하여 그리고 그의 교회의 육성을 증진시키는 일을 귀하게 여겨 자신들의 건강과 생명을 내어 놓는 것도 서슴치 않는다는 사실이다.

(2) 그들은 질병에서 거의 회복된 그를 기쁨으로 환영했다는 사실이다. 자비로 말미암아 죽음의 고비를 넘기게 될 때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비는 더 가치있는 것으로 부가되며 또한 우리는 그 자비를 더욱 증진시키고자 노력하게 된다.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써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큰 감사와 기쁨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2:20 없음.

 

2:21 없음.

 

2:22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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