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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영적인 생활(골로새서 3:1-4)

사도는 본 서신의 전반부에서 그리스도가 주신 특권들과 의식적인 율법의 멍에로부터의 우리의 해방을 서술한 후 이제 여기서는 거기에서 귀결되는 우리의 의무에 대하여 역설한다. 비록 우리가 의식적인 율법의 의무에서 자유하게 된다 할지라도 자동적으로 우리가 원하는 대로의 삶이 시작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복음적인 모든 순종의 실례들에서 보여주는 바와 같이 더욱 하나님과 밀접하게 살아야만 한다. 사도는 그들의 마음을 천국에 두고 그리고 이 세상에 두지 말 것을 그들에게 권하는 것으로 본장을 시작한다. 본문에 보면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1절)이라고 시작됨을 보게 된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다는 것은 바로 우리의 특권이다. 성화되고 영화롭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가 "위에 것을 찾아야"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이 세상보다 더 저 세상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 우리는 하늘 나라를 우리의 목적으로 삼고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며 믿음과 소망과 거룩한 사랑에 의하여 위에 세계와 교제를 유지하고 그리고 천국의 지복을 위한 우리의 권리와 자격을 확보하는 것을 우리의 끊임없는 관심과 일거리로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의 최선의 친구이며 우리의 머리이신 그는 하늘 나라의 최고의 위엄과 존귀를 얻으셨고 그리고 우리 앞서 우리를 위해 천국의복을 확보하기 위하여 가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가 너무나 막대한 희생으로 획득한 것을 구하고 확보해야 하며 그리고 그 일에 관해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능력에 따라 그리스도께서 여기 지상에서 살으셨고 그리고 이제 천국에서 사시는 바 그런 생활을 여기서 영위해야 한다.

Ⅰ. 그는 이 의무를 설명한다. 그것은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지 않는"것이다(2절). 하늘의 것들을 찾는 것은 그것들에 애정을 품고 그것들을 사랑하고 그리고 우리의 욕망을 그것들을 향하도록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해 두자. 우리의 마음에 애정의 날개를 달므로 그것은 위를 향하여 치솟아 올라가게 되며 영적이며 신성한 것들을 향하여 나아가게 된다. 우리는 영적인 것들과 친숙해야 하며 그리고 그것들은 다른 모든 것들보다 존귀히 여기며 또 그것들을 소유하기 위한 준비에 투신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다윗은 여호와의 일을 구하고 그것을 위해 준비함으로 자신의 하나님의 집을 향한 사랑을 증명했다(시 27:4). 이것은 마음이 영적인 성품으로 변모되는 것이며(롬 8:6)보다 좋은 나라 즉 "천국을 찾고 바라는 것이다"(히 11:14, 16). 본문에서 지상의 것들은 위의 것들과 반대 위치에 놓여진다. 우리가 그것들에 대한 사랑에 빠져서도 안 되며 그리고 그것들로부터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해서도 안 된다. 우리는 위의 것을 사모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늘과 땅은 서로 반대되기 때문에 그리고 두 가지를 모두 최상의 것으로 섬기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에 대한 우리의 사랑의 우세함은 다른 편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비례적으로 약화시키게 될 것이다.

Ⅱ. 그는 이 의무를 행해야 하는 세 가지 이유들을 제시한다(3,4).

1. 우리가 죽었기 때문이다. 즉 현재의 것들에 대해서 그리고 우리의 세상에서의 분깃에 대해서 죽었다는 말이다. 우리가 이렇게 된 것은 우리의 신앙 고백과 그것에 근거한 삶을 통해서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그의 죽음과 같은 모습을 지니게 되었기 때문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대해 십자가에 못박혔고 그리고 세상은 그에 대해 십자가에 못박혔다"(갈 6:14). 그리고 만일 우리가 세상에 대해 죽고 그것을 우리의 복으로 여기기를 거부했다고 하면서 이제 우리가 세상에 마음을 두고 그것을 구한다고 하면 그것은 모순이다. 우리는 세상에 대해서 죽은 자처럼 되어서 그것에 대해 무감동하며 애정을 느끼지도 말아야 한다.

2. 우리의 참된 생명은 저 세상에 있기 때문이다.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 이니라"(3절). 그러므로 새 사람을 거기서부터 삶의 의무를 발견하게 된다. 우리의 참된 생명은 위로부터 났고 또 거기서 자양분을 공급받는다. 그리고 그 나라를 위하여 이 생명을 완전하게 보전하는 것이 요구된다. 그런데 이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감추어진 것이다." 감추어졌다는 말은 그것이 우리에게 비밀이 된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의 안전을 위하여 감추어졌다는 뜻이다. 그리스도인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감추어졌다." 이는 "내가 살았으므로 너희도 살 것이라"(요 14:19)는 뜻과 같은 말씀이다. 현재로 그리스도는 숨겨진 그리스도이며 "우리가 보지 못한" 그러한 분이시다. 그러나 우리의 "생명이 그와 함께 감추어졌고" 그와 함께 안전하게 보전되었다는 것이 우리의 위안이 된다. 우리가 까닭이 있어 보지 못한 그를 사랑하듯이(벧전 1:8) 또한 우리는 볼 수 없으나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보관된" 축복으로 위안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3.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완전한 복을 받을 것을 우리가 소망하기 때문이다. 즉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만일 우리가 그때 그리스도인의 순수하고 헌신적인 삶을 산다면 "우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4절). 다음의 사실을 생각해 보자.

(1) 그리스도는 믿는 자의 생명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사도는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다"(갈 2:20)고 하였다.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인의 생명의 목적이며 원리이다. 그는 영으로 우리 안에 사시며 그리고 우리는 행하는 모든 일을 통해 그를 위하여 산다. 그 이유를 바울은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빌 1:21)고 하였다.

(2) 그리스도께서 다시 나타나실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는 지금 숨어 계신다. 그가 지금은 하늘에 거하시는 것이 틀림 없다. 그러나 그는 위에 세계의 모든 영광을 입으시고 그의 "거룩한 천사들과"함께 그리고 "그의 자신의 영광과 그리고 그의 아버지의 영광으로"나타나실 것이다(막 8:8; 눅 9:26).

(3) 그때 우리는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날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가 구속하신 자들이 그와 자리를 같이 하게 될 때 그가 영광을 받게 될 것이다. 또한 그는 강림하사 그의 성도들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살후 1:10). 그리고 그와 함께 오는 것과 그와 함께 영원히 있는 것은 그들에게 영광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모든 성도들의 전체적인 만남이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의 생명이 지금 그리스도와 함께 숨겨진 자들은 그때에는 그리스도 자신이 누리는 그 영광 가운데서 그리스도와 함께 나타날 것이다(요 17:24). 우리는 그런 복을 내다보고 있으면서 우리가 그 세계를 사모하지 않을 수 있으며 또한 이 세상을 넘어서서 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거기에 비하면 도대체 이 세상을 넘어서서 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이 여기가 아니라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닌가? 우리의 보화가 거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기에 영원히 있기를 바란다.

 

3:2 없음.

 

3:3 없음.

 

3:4 없음.

 

3:5

죄의 극복의 필요성(1)(골로새서 3:5-7)

사도는 골로새 교인들에게 의해 있는 것들을 찾는 데 큰 장애가 되는 죄를 극복할 것을 권고한다. 하늘의 것들을 사모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므로 "지상에 있는 것" 그리고 세상의 것들에게로 우리를 향하게 하는 "우리의 지체들을" 억제하는 것 또한 우리의 의무다. 그러므로 사도는 말한다. "죄를 억제하라. 즉 너희의 이방인의 상태에서 만끽했던 마음의 약한 습관을 억제하라. 그것들을 금하라. 그것들을 없애라. 없애되 마치 너희가 만연하는 잡초나 해충들을 제거하고 그것들의 모든 것을 멸절시키는 것과 같이 하고 또는 너희를 상하고 너희에게 싸움을 거는 원수를 살해하는 것처럼 죄를 없이 하라"고 한다. 본문에 보면 "땅에 있는 지체"라고 하였는데 이는 우리 가운데 흙으로 이루어진 부분 즉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은"(시 139:15) 몸의 지체를 말하는 것이든지 아니면 우리를 땅의 것들로 인도하는 마음의 부패한 성질 즉 죽은 몸의 지체들을 말하는 말씀이다(롬 7:24). 그는 다음과 같이 세분한다.

Ⅰ. 육에 속한 경우들. 이것들에게 그들이 전에는 사로잡혀 지냈었다. 그것들은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으로써 이 육체적 욕망들과 육체적 부정함으로 인하여 다양하게 나타난 것들이다. 그들은 이전의 생애에 있어서 이 가운데 깊이 빠졌었고 또한 이것들은 그리스도의 나라와 하늘의 소망에 매우 상반되는 바로 그러한 것들이었다.

Ⅱ. 세상에 대한 사랑, 이것을 사도는 "탐심 곧 우상 숭배니라"(5절)고 하였다. 즉 이것은 현세적인 물질과 외적인 즐거움에 대한 무절제한 사랑이다. 이것들에 대한 우리의 마음의 지나친 편애와 지나친 추구는 우리도 그것들을 적절히 사용하고 향유하지 못하게 방해하며 그리고 그것들을 잃어버리지나 않을까 하는 데 대한 지나친 슬픔과 조바심 나는 불안을 일으키게 한다. 탐심은 영적인 우상 숭배라는 사실을 명심하자. 마땅히 하나님께만 돌려야 할 사랑과 관심을 세상의 부요에 기울이는 것이며 세상적 부에 대한 사랑에는 대단한 정도의 악의가 숨겨 있으며 일반으로 생각되는 것보다 더 심하게 하나님을 거스리고 있다. 선한 사람들이 범한 죄에 대해 성경에 기록되어진 모든 실례를 살펴 보면(성서의 인물 가운데도 몇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든 인물이 그들의 생애 과정에서 한두번 죄를 범하였다)그들이 범한 죄에서 탐심의 죄는 없었음을 주의해 볼 필요가 있다.

사도는 더 나아가 계속 죄를 억제하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가를 보여 준다(16,17절)

1. 왜냐하면 우리가 그것들을 제거하지 않으면 그것들이 우리를 죽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문에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자녀들에게 임하느니라(6절)고 하였다. 우리가 본질상 어떠하였는지를 잠시 살펴 보자. 먼저 우리는 불순종의 자녀들이었다. 불순종의 자녀일 뿐만 아니라 죄의 세력 아래 있으면서 본래 불순종하는 경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므로 시편은 "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음이며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하는도다"(시 58:3)라고 노래한다. 그리고 불순종의 자녀이므로 또한 진노의 자녀가 된다(엡 2:3). 하나님의 진노는 모든 불순종의 자녀들에게 임한다. 율법의 교훈에 순종치 않는 자들은 그것에 의한 벌을 초래한다. 그가 말하는 죄들은 그들의 이교의 그리고 우상 숭배의 상태에서 있었을 때의 죄이다. 그리고 그들은 특별히 불순종의 자녀들이었다. 그러나 이 죄들은 그들에게 심판을 가져 왔고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 앞에 드러내 놓았다.

2. 우리는 이 죄들이 우리 안에 거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들을 극복해야 한다. 우리가 이전에 죄 가운데 살았다는 사실은 우리가 이제 그것을 버려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된다. 우리는 곁길로 행하였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그 길로 가지 말도록 하자. 그러므로 욥은 "만일 내가 악을 행하였으면 다시는 아니하겠나이다"(욥 34:32)라고 고백하였다. 우리에게는 이방인의 뜻을 좇아 음란 가운데 살던 지나간 때가 족한 것이다(벧전 4:3). 본문에 이르기를 "너희가 그런 일들을 행한자들 가운데서 살았을 때는 너희가 그 악한 습관 속에서 살았었다"고 한다. 어두움의 일들을 행하는 자들 가운데 살아가면서 그들과 교제하지 않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마치 진창 속을 걸으면서 흙을 묻히지 않으려는 것과도 같다. 악을 행하는 자들의 길을 삼가 조심하자.

 

3:6 없음.

 

3:7 없음.

 

3:8

죄의 극복의 필요성(2)(골로새서 3:8-11)

우리가 과도한 욕망들을 억제해야 하듯이 또한 과도한 열정도 억제해야 한다(8절). 그러므로 본문에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버리라. 곧 분과 악의와 훼방이라"고 하셨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불순할 뿐만 아니라 복음의 의도와는 전혀 반대되기 때문이다. 복음신앙은 영혼의 보다 낮은 기능을 보다 높은 기능까지 변화시키며 욕망과 정열에 대하여 올바른 이성과 양심이 지배권을 장악하도록 지지한다. 성냄과 격노는 나쁘지만 악의는 더 나쁘다. 왜냐하면 그것은 더욱 뿌리 깊고 의도적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강화되고 고착된 성냄이다. 그리고 부패된 원리들이 마음 속에서 제거되어야 하듯 그 부패된 원리들의 부산물은 혀에서도 제거되야 한다. 본문의 "훼방"은 인간들에게만 폭언을 써서 중상하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하여 나쁘게 말하는 것까지 의미하는 말이다. 또는 "훼방"은 사람들을 중상하거나 악한 궤교로 좋은 이름을 더럽히는 행위를 말한다. 또한 본문의 "부끄러운 말"이란 모든 추잡하고 부정한 강론으로 이것은 말하는 자의 더러워진 마음에서 나오며 그리고 듣는 자에게 같은 더러움을 오염시킨다. 그리고 본문에서 또한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9절)고 하였다. 왜냐하면 그것은 진리의 율법과 사랑의 율법에 모두 반대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부정하며, 불친절하며, 그리고 본래 인간 가운데 있는 친교와 모든 믿음을 파괴하는 경향이 있다. 거짓말은 우리를 악마와 같이 만든다(악마도 거짓말의 아버지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영혼에 섬겨진 악마의 형상 중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에 이러한 죄를 경계해야 한다. 즉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9,10절)고 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신앙 고백에 의하여 죄를 제거하고 그리스도의 주장과 이윤을 지지하기로 한 사실을 생각하여 우리는 모든 죄를 믿게 하고 그리스도와 계약을 맺고 이 거짓말의 죄에 대해 스스로를 강하게 무장해야 한다. 옛사람을 벗어버린 자들은 옛 사람의 행위들도 함께 벗어 버려야 한다. 그리고 새 사람을 입은 자들은 새 사람의 모든 행위들을 함께 입어야 한다. 그들은 선한 원리들을 함께 입어야 한다. 그들은 선한 원리들을 지지해야 할 뿐만 아니라 선한 생활 가운데서 그것들은 실현시켜야 한다. 새 사람은 "지식에 있어서 새롭게 된"자라고 말하여진다. 왜냐하면 무지한 영혼은 선한 영혼일 수 없기 때문이다. 지식이 없이 그 마음이 선할 수 없다(잠 19:2).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이해를 새롭게 하므로 의지와 생각에 영향을 가한다. 빛은 태초에서 그러하였듯이 새 창조에 있어서도 첫째로 존재한다. "새 인간은 자기 창조주의 형상을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져야 한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형상을 따라 무흠하게 지음을 받았다는 젓은 인간에게 영예로움이 된다. 그러나 그 현상은 죄 때문에 망가지고 상실되었다. 그러므로 이제 거룩하게 하는 은혜에 의하여 새롭게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새롭게 된 영혼은 아담의 타락하기 전에 모습과 같을 것이다. 성화의 특권과 의무에 있어서 "거기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당이나 무할례당이나 야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분별이 있을 수 없다"(11절). 지역의 차이나 삶의 환경이나 조건의 차이에서 일어나는 아무런 차별도 거기에는 있을 수 없다. 거룩하게 되는 것은 누구에게나 의무가 된다. 그리고 하나님께로부터 그렇게 되는 은혜를 받는 것도 차별이 있을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막힌 담을 헐기 위하여 오셨으므로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같은 위치에 즉 의무와 특권에 있어서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이러한 이유 즉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의 모든 것이 되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인의 모든 것 즉, 그의 유일한 주이시며 구주 그리고 그의 모든 소망과 복이 되신다. 그리고 전자는 물론, 후자 그리고 다른 관점들에서 그들이 무엇이든지 간에 성화되어진 자들에게 그는 모든 것의 모든 것이 되시며 알파와 오메가이며 처음과 나중이 되신다. 그는 그들에게 모든 것 가운데 모든 것이 되신다.

 

3:9 없음.

 

3:10 없음.

 

3:11 없음.

 

3:12

사랑에 대한 권고(골로새서 3:12-17)

사도는 여기에서 상호간의 사랑과 동정을 권고한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그는 "그러므로 긍휼의 심정을 옷 입으라"(12절)고 하였다. 우리는 성냄과 분노를 벗어나 버려야 할 뿐만 아니라(8절과 같이) 동정과 친절을 옷 입어야 한다. 악을 행하기를 멈출 뿐만 아니라 우리가 누구에게나 할 수 있는 대로 선한 일을 해야 한다.

Ⅰ. 본문에서의 권고는 강조적인 논법으로 전개된다. 본문에 보면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옷 입으로"(12절)고 하였다. 다음의 사실을 생각해 보자.

1. 거룩한 자들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한 그들은 사랑을 받는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입어야 함은 물론 누구에게나 사랑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2.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고 거룩하고 사랑받는 자들은 모든 일에서 그들답게 처신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또한 그들은 그들의 거룩함의 신임을 잃어버리지 말아야 하며 선택받고 사랑받은 자로서의 위로를 잃어버리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 거룩한 자들은 누구에게나 낮아지고 사랑스럽게 되어야 한다. 우리가 특별히 옷입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자.

(1) 불쌍한 자들에게 대한 동정의 옷을 입어야 한다. "긍휼의 심정" 즉 가장 부드러운 긍휼을 입어야 한다. 너무나 많은 긍휼을 입은 자들은 긍휼의 받아야 할 모든 대상들에 대해 긍휼을 베풀어야 한다. 그러므로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같이 너희도 자비하라"(눅 6:36)고 하였다.

(2) 우리의 친구들, 우리를 사랑하는 자들에 대하여 친절을 옷입어야 한다. 정중한 성품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에게 적절한 것이다. 왜냐하면 복음의 의도는 인간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온화하게 하고 하나님과의 화해는 물론 사람들 가운데 교제를 증진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3) 우리보다 낮은 자들에 대하여는 겸손과 그리고 우리보다 위에 있는 자들에 대하여는 복종할 수 있는 "마음의 겸손함"을 옷입어야 한다. 겸손한 마음뿐만 아니라 겸손한 행위도 있어야 한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게 배우라"(마 11:29).

(4) 우리를 격노케 하거나 혹은 우리에게 해를 입히는 자들에게 "온순한"을 옷입으라고 하신다. 모욕과 무시에 대한 원한으로 인하여 우리가 불손함을 표해서는 안 된다. 도리어 신중하게 자신의 분노를 자제하면서 그리고 참을성있게 다른 사라들의 분냄을 견뎌야 한다.

(5) 우리를 계속 격분시키는 자들에 대해 "길이 참음"을 입으라고 하신다. "사랑은 온유함은 물론 오래 참는다"(고전 13:4). 순간적인 도전은 잘 참아내는 사람들도 그 도전이 끈질기게 계속될 때는 흔히 참지를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들의 해함과 그리고 하나님의 섭리로 기인한 힐책을 오래 참아야 한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그에 대한 도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대해 오래 참으신다면 우리도 같은 경우에 다른 사람들에게 오래 참아야만 한다.

(6) 우리 모두가 연약함과 결함으로 가득찬 존재라는 점을 고려해서 서로 용납함을 옷입으라고 하신다. 그러므로 본문에 "서로 용납하라"고 했다. 우리 모두에게는 남의 관용을 필요로 이 우리와 반대되는 입장을 취한다 해도 이를 용납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관용을 나타낼 때 그들도 우리를 용납해 주게 되는 것이다.

(7) 우리를 향한 타인의 해함을 용서할 마음을 옷입으라고 하신다. 고로 본문에 "만일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라"고 하였다.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우리 마음 속에는 많은 부패함이 있으며 분쟁과 다툼이 끊이지 않고 일어난다. 그리고 이러한 요소는 거룩하고 사랑을 입은 하나님의 선택함을 입은 자들 가운데서 조차도 일어난다. 바울과 바나바는 "격렬한 논쟁"을 하여 "피차 갈라졌음"(행 15:39)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바울과 베드로 사이에도 논쟁이 있었다(갈 2:14). 그러나 그러한 경우에 서로 용서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다. 그렇다고 원한을 품으라는 것이 아니다. 모욕을 참으며 그리고 그것을 간과해야 한다. 그리고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같이 너희도 그러하다"(13절). 우리가 그리스도에 의해서 많은 범죄를 사함 받았다는 사실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은 용서해야 할 좋은 이유가 된다. 그리스도가 "세상에서 죄를 용서할 능력을 가졌다는 것은"그리스도의 신성을 입증해 주는 사실이다. 만일 우리 자신들이 용서받고자 한다면 우리가 그의 본을 또한 따라야 한다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마 6:12)라고 기도할 수 있는 것이다.

Ⅱ. 이 모든 것을 위하여 본문에서 우리는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일들을 권고 받는다.

1. 우리 자신을 사랑으로 옷 입히라고 한다(14절). 그러므로 본문에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하였다. evpi. pa,si de. tou,tij-즉 모든 것 위에란 우리의 생활 전반을 가리키는 말이다. 즉 사랑으로 겉옷을 삼으라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사랑으로 우리의 분별됨과 위엄의 표시를 삼으라는 말이다. 또는 사랑으로 우리의 생활 신조를 삼으라는 말이다. 이 사랑은 모든 계명의 축소판인 것이다. 그러므로 베드로 후서에도 "믿음에 덕을 더하고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벧후 1:5-7)고 하였다. 그는 믿음을 기초로 삼고 사랑은 머릿돌고 삼아야 한다. 사랑은 "온전하게 매는 때로써" 행복한 사회를 공고히 하는 접착제이며 그 구심점이다. 그리스도인의 단합은 일치와 상호 사랑으로 이루어진다.

2. 하나님의 평강의 통치에 우리 자신을 굴복시키라고 한다(15절). 그러므로 본문에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고 하였다. 즉 하나님과 평강을 유지하고 그가 너희를 받으시고 사랑한다는 위로를 인식하라는 말씀이다. 혹은 너희 자신가운데 평화로운 마음 곧 평화를 유지하며 평화를 만드는 평화의 정신을 지니라는 말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평강"이라고 일컬어 진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의 백성인 모든 사람 안에서 그가 일하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의요 평강이다"(롬 15:17). 사도는 그러므로 "이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즉 그리스도의 평강으로 너희 마음을 통치하게 하며 또한 너희 가운데 그를 심판자로 모셔들여 모든 갈등을 해결하게 하라"고 한다. 또한 사도는 이 일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하였다. 우리는 이 평강에 부르심을 받았다. 하나님과의 평화는 우리에게는 특권이며 형제와 평화함은 우리의 의무이다. 우리가 한 몸으로 연합될 때 인간의 홈의 지체들이 그러하듯이 우리는 서로 평화를 누리고 있다고 칭하여질 수 있겠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기 때문이다"(고전 12:27). 우리 안에 이 평화로운 마음을 보전하기 위하여 우리는 감사해야 한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일은 매우 유쾌하고 즐거운 일이므로 그것은 우리에게 모든 사람에 대하여 유쾌하고 즐거운 일이므로 그것은 우리에게 모든 사람에 대하여 유쾌하고 즐거운 마음을 갖도록 해 줄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다른 사람이 지닌 어떤 특별한 은혜와 뛰어남을 인하여 서로 시기하는 대신에 너희 누구에게나 공통된 "그의 긍휼하심에 감사하라"고 한다.

3.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안에 풍성히 거하도록 하라"고 하신다(16절). 복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에게 오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그것은 우리 안에 거하며 우리를 지키게 되어야 한다. 또한 그가 우리 안에 거하되 다른 사람의 지배를 받는 하인으로가 아니라 자기 지붕 아래 있는 모든 사람을 명령하며 지시할 권리를 가지고 있는 주인으로 그가 거하셔야 한다. 우리는 집 주인으로서의 말씀으로부터 훈육과 지시를 받아야 하며 그리고 때를 따라 은혜와 위안과 힘과 식량의 우리의 몫을 공급받아야 한다. 말씀은 우리안에 거해야 한다. 즉 모든 일에 있어서 우리와 항상 가까이 있어 적절한 때를 따라 그것의 감화를 받고 또 그것을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그것을 친숙히 알아야 하며 그리고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것을 알아야 한다"(욥 5:27). 이 말씀은 또한 우리 안에 풍성하게 거해햐 한다. 즉 그것이 우리 마음을 지켜 줄 뿐만 아니라 좋은 집으로 유지시키도록 해야 한다.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그들 안에 모시기는 하나 그러나 그것은 그들안에 다만 빈약하게 거할 뿐일 때가 많다. 그것은 그들에게 강력한 함에 영향을 갖지 못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풍성히 거할 때" 우리가 그것의 풍성함을 우리 안에 가질 때 그리고 성경과 그리스도의 은혜로 충만하게 될 때, 그때 영혼이 부요하게 된다. 그리고 말씀은 우리로 지혜롭게 한다. 지혜란 우리가 아는 것을 우리가 자신의 훈육을 위하여 자신에게 적용하게 하는 기능을 한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우리를 모든 지식과 사변에 있어서 박사로 만들기 위하여 우리 안에 거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지혜로 훌륭한 그리스도인으로 만들고 모든 일에 있어서 우리를 지혜의 자녀들답게 행할 수 있도록 해 주기 위하여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이다.

4. 서로 가르치고 권고하라고 한다. 이것은 우리로 모든 은혜에 진보를 이루는 데 기여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다른 사람의 작성에 의하여 자극을 받고 그리고 그들의 교회에 대해 서로 지식 교환함으로 자신의 지식을 개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시와 찬미로 서로를 격려해야 한다." 시를 노래하는 것은 복음이 정한 의식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자. "falmoi/j ka.i u[mnoij kai. w/|dai/j"란 말은 다윗의 시편과 영적인 찬미와 송시(頌時)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것들은 성경에서 모아져서 특별한 경우에 알맞게 선별된 것으로 그들의 우상 숭배의 음탕하고 속된 노래들을 대신하여 그들에게 주어진 것이었다. 신앙적 시들도 이런 표현 형태를 통하여 불리워진 것 같으며 좋은 감화력을 미치었다. 그러나 우리가 시를 노래할 때 만일 우리가 마음이 은혜로 충만하고 노래하는 내용에 적절하게 감동되지 않고 그 안에 참된 헌신과 이해가 수반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흥겹게 노래할 수 없게 된다. 시편에 대한 노래는 찬양의 의식에는 물론 가르치는 의식에도 효과가 있다. 그리고 우리는 노래로써 자신들을 활기있게하고 격려할 뿐만 아니라 "서로를 가르치고 권고하며" 서로의 관심을 자극시키며 교훈적인 효과를 낼 수 있어야 한다.

5. 모든 일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해야 할 것이 권고된다(17절).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라." 즉 그의 명령에 따라서, 그리고 그에게서 나오는 힘에 의해서, 그의 권위에 일치하여, 또한 그의 영광을 보고, 선한 것을 받아들이시며 잘못된 것은 용서하시는 그의 공로를 의지하여 모든 일을 행하라는 말씀이다. 또한 이르기를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고 하신다. 다음의 사실들을 생각해 보자.

(1) 우리는 모든 일들에서 감사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하는 일이 무엇이든지 여전히 우리는 감사해야 한다(엡 5:20). "항상 모든 일에 감사하라."

(2) 주 예수는 우리의 기도의 중재자이신 동시에 우리의 찬양의 중재자도 되신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항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엡 5:20).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든 일들을 하는 자들은 결코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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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감당해야 할 상대적 의무(골로새서 3:18-25)

앞의 에베소서와 같이 사도는 본장을 상대적인 의무들에 대한 권고로써 결론을 맺는다.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나타내는 데, 그리고 주 예수를 찬미하는데 대부분을 할애하고 있는 서신들은 여러 가지 상관 관계 속에서 생기는 의무들을 역설하는 데 가장 특별하고 분명하다. 우리는 복음 신앙에서 특권들과 의무들을 분리해서는 안 된다.

Ⅰ. 그는 아내들과 남편들의 의무에 대한 말씀으로 시작한다(18절).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 복종은 아내들의 의무다. u`poka,ssesqe은 관리들에 대한 우리의 의무를 표현할 때 사용되는 말이기도 하다(롬 13:1 에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력에게 굴복하라"는 말씀에 이 용어가 씌여졌다). 그리고 이 말은 복종과 존경을 표현하는 말이다(엡 5:24, 33). 아내가 복종해야 되는 이유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후며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먼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기"(딤전 2:13, 14) 때문이다. 또 남자가 복종을 받아야 하는 것은 남자가 먼저 창조되었고 범죄는 나중에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고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여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다"(고전 11:3, 8, 9)라고 하였다. 그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약속임은 물론 사물들의 이치와 자연의 질서에로 합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자기 마음대로 마구하는 포악한 격한 주인이나 혹은 절대적인 폭군에게 이렇게 복종하라는 것이 아니라 가장 가까운 관계에 있으며 또한 서로 적절한 의무에 대한 엄격한 약속을 맺은 자기 자신의 남편에 대하여 복종하라는 말이다. 그리고 이것은 "주 안에서 마땅한" 일이다. 그리고 이렇게 의무를 행하되 그들은 그리스도의 법과 권위에 복종하는 것과 같이 그렇게 해야 한다. 반면에 "남편들은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해서는 안 된다"(19절).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같이 그리고 그들 자신의 몸과 같이 심지어 자기 자신들같이 부드럽게 그리고 신실한 애정으로 사랑해야 한다(엡 5:25, 28, 33). 그리고 가장 가까운 관계 아래 있으면서 서로 생명의 최대 위안과 축복을 나눈자답게 특별한 사랑으로 그들은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 그들은 아내를 괴롭혀서는 안 되며 거친 말이나 혹은 가혹한 태도로 그들에게 불친절하게 해서도 안된다. 모든 일에서 아내 들에게 친절해야 하며 그들은 잘 돌봐 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았으되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그리고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난 것이기 때문이다"(고전 11:9, 11, 12)

Ⅱ. 자녀들과 부모들의 의무들.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20절). 그들은 기꺼이 부모의 모든 당연한 명령을 행해야 하며 그들의 지시와 처분에 따라야 한다. 부모들은 그들을 지도할 권리를 섭리에 의해 부여받았고 또 자녀들이 스스로 처신하기 보다 그들의 지시를 따르는 것이 더 안전하기 때문이다. 사도는 (엡 6:2) 자녀들에게 부모의 명령에 순종할 뿐 아니라 그들을 존귀케 할 것을 요구한다. 즉 그들은 부모를 존경해야 하며 그들은 귀하게 생각해야 한다. 또한 그 복종은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복종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요" 혹은 그가 받으실 만한 태도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약속있는 첫 계명이기"때문이며(엡 6:2) 또한 거기에는 즉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엡 6:3)는 뚜렷한 약속이 주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순종하는 자녀들은 세상에서 가장 잘 번성하며 그리고 장수를 즐긴다. 또한 자녀들이 순종해야 하듯이 부모들은 온화해야 한다(21절). 그러므로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격노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 너희의 자녀들에 대한 권위를 그들이 너희에게 분을 품거나 의무를 행함에 있어 실망하지 않도록 가혹하고 매정하게 행사하지 말고 친절하고 부드럽게 행사되도록 하라. 그리고 고삐를 너무 단단히 쥠으로 그들이 참을 수 없어서 달아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사도는 권한다. 신중하지 못한 부모들의 나쁜 기질과 행실은 그들의 자녀들에게 큰 거침이 되며 그들의 길에 걸림돌이 된다는 사실이 자주 입증된다(엡 6:4 을 참조). 하나님께서는 부모들의 온화함과 자녀들의 의무를 다함을 통하여 그의 교회에 그를 섬기고 세세무궁토록 신앙을 전파할 자손이 있게 하시는 것이다.

Ⅲ. 종들과 상전들의 상호 의무.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라"(22절). 종들은 그들이 서 있는 위치에서 주어진 의무를 행하고 모든 일들에서 그들 상전의 명령에 순종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의무 수행은 그들의 하늘의 주인이신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의무에 일치되는 한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또 한 복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라"고 한다. - 즉 그들 상전이 볼 때뿐만 아니라 그들의 상전이 보지 않을 때에도 그러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은 바르고 부지런해야 한다. 또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고 하였다. - 즉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를 경외하는 입장에 선 자들처럼 이기적인 의도나 위선이나 혹은 거짓없이 하라는 말이다. 마음을 지배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사람으로 모든 관계에서 선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종들은 그들 상전의 눈 앞에 있지 않을 때에도 바르고 신실해야 할 것이다. 그 이유는 그들이 자기들은 하나님의 감찰 아래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이 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다고 생각했다"(창 20:11)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디나 계신 것이다. 그러므로 느헤미야 5장 15절에 보면 "그러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또한 본문에서도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23절) 즉 근면하고 게으르고 나태하게 하지 말라"고 하였다. 이 말씀은 또는 "너희를 그 관계에 두신 하나님의 뜻에 불평하지 말고 즐거웁게 하라"는 뜻이었다. 또한 "주께 하듯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고 한다. 섬김을 하나님께 하듯 할 때 그 섬김은 종의 일을 거룩하게 한다. 즉 하나님께 하듯 할 때 그 섬김은 종의 일을 거룩하게 한다. 즉 하나님께 하듯 한다는 말은 그의 영광을 보고 그리고 그의 명령에 순종함으로하며 단순히 사당에게 하듯 혹은 그들만 전심으로 섬겨서도 안된다. 우리가 사람에게 대한 우리의 의무를 행한 것이 된다. 그리고 종들에게 용기를 주기 위하여 선하고 충성된 종은 하늘 나라에서 더 이상 종노릇 하지 않게 되리라는 것을 알게 하자. 그러므로 본문에도 "이는 유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앎이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24절). 너희가 그리스도의 명령을 따라 상전을 섬김으로 너희는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며 그리고 그가 너희의 수고에 대해 지불하실 것이다. 너희는 마침내 영화로운 상을 받게 될 것이다. 비록 지금은 너희가 종이지만 장차 너희가 아들의 유업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반면에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을 것이라"(25절)고 하였다. 하나님은 의로우셔서 만일 종들이 그 상전들에게 부당한 일을 한다면 비록 그들이 그것을 그 상전이 모르게 감출 수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그 일에 대하여 그들에게 갚으실 것이다. 그리고 그는 신실한 종을 상주시듯이 분명히 불의한 종은 벌하실 것이다. 반면에 만일 상전들이 그 종들에게 잘못을 행해도 마찬가지이다. 이는 "주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심이 없으시기 때문이다." 세상에 대한 의로운 재판관이신 주님은 누구에게나 공평할 것이며 그리고 그는 상전들의 외적인 환경들과 생활 조건들에 의하여 동요됨이 없으실 것이다. 종이나 주인이나 그의 법정에서는 동등한 위치에 서게 될 것이다. 고린도 전서 7장이 그리스도인과 이방인, 유대교에의 개종자와 무할례 이방인 등 신앙을 달리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어떻게 공동적인 태도로 신앙 생활을 할 것인가를 놓하는데 중점이 주어지고 있다. 과연 만일 복음의 신앙이 어디에서나 힘을 나타낸다면 그것은 세상을 얼마나 복되게 만들겠는가! 그리고 그것은 세상사와 인간의 모든 관계에 얼마나 많은 공헌을 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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