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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여러가지 권고들(빌립보서 4:1-9)

사도는 본장을 여러 가지 그리스도인의 의무들에 대한 권고로써 시작한다.

Ⅰ. 우리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신앙 고백에 대하여 견고히 서라는 권고(1절). 그것은 앞 장의 마지막에서부터 서두가 시작되었던 것이었다. 그러기에 본장 1절에 "그러므로 견고히 서라"는 말로 시작되었다. 즉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고" 그리고 거기에서 와서 거기로 우리를 데려갈 구원자를 우리가 기다린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그러므로 굳게 서라"는 말씀이다. 믿음에 의거 한 영생에 대한 희망과 기대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행로에 있어서 한결같게 그리고 끊임없이 할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여기에서 다음 사실을 생각해 보자.

1. 사랑에 넘치는 호칭들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본문에 보면 그들을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이라 하였고 다시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하였다. 이런 식으로 그는 그들로 인하여 갖는 기쁨과 그들에게 대한 사랑의 심정을 표현한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표현은 그들로 그의 교훈에 대하여 마음을 열게 하는데 대하여 큰 기여를 하고 있다. 비록 그가 위대한 사도였다 할지라도 그는 그들을 자기의 형제들로서 간주했다. "우리는 모두 형제들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같은 형상을 따라 같은 영에 의해서 새롭게 되었으므로 형제인 것이다. 마치 한 집의 자녀들이 비록 키와 나이와 얼굴이 다르다 할지라도 같은 부모의 자식들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1) 같은 형제이므로 그는 그들을 사랑했고 사랑하되 극진히 사랑했다. 그러므로 그는 "참으로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말하고 다시 "나의 참으로 사랑하는 자들아"라고 말한다. 사역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은 서로를 향하여 따뜻한 온정을 품어야 한다. 형제의 관계가 형성되었다면 그것에는 언제나 형제애가 수반되어야 하는 것이다.

(2) 그는 그들을 사랑했고, 그를 사모했다. 그리고 그들은 보기를 원했고 그들로부터 소식 듣기를 원했다. 그리고 그들의 안녕을 갈망하되 진지하게 그것을 바랐다. 그러므로 그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사모한다"(1:8)고 하였다.

(3) 그는 그들을 사랑했고 그리고 그들 때문에 기뻐하였다. 그들은 그의 기쁨이었다. 그들의 영적 건강과 부요함보다 더 큰 기쁨은 그에게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러므로 말씀되기를 "너의 자녀 중에 진리를 행하는 자를 내가 보니 심히 기쁘다"(요이 4;요삼4)고 하였다.

(4) 그는 그들은 사랑했고 그들을 영광으로 여겼다. 그들은 그의 기쁨은 물론 그의 면류관이었다. 교만한 야심적인 사람일지라도 바울이 그들의 신앙과 순종의 신실함에 대한 증거들로 기뻐했던 것보다 자기들이 명예로 인하여 더 기뻐하진 못했을 것이다. 이것이 바울을 위대하게 한 요소였던 것이다.

2. 권고의 내용을 고찰하여 보자. 교훈의 내용은 "주 안에 견고히 서라"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므로 동시에 그들은 그의 안에서 견고히 서야 하며 그리고 그와 동행함에 있어야 꾸준해야 하며 최후까지 변함이 없어야 한다. 또는 "주 안에 견고히 서라"는 말씀은 그의 강함과 그리고 그의 은혜 안에 견고히 서라는 말로도 볼 수 있다. 그것은 자신을 신뢰하지 않는 것이며, 그리고 자신에 대한 어떠한 자부심도 부인하는 것이다. 우리는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하게 되어야 한다"(엡 6:10). 그의 말의 뜻은 다음과 같은 뜻이다. "견고히 서되 너희가 지금까지 해 온 바가 같이 최후까지 굳게 서라. 너희가 나의 사랑하는 자요, 나의 기쁨이요, 나의 면류관답게 마지막까지 굳게 서라. 또한 내가 너희의 안녕과 관심을 갖고 있다는 사실에 부끄러울 것이 없이 굳게 서라"고 한다.

Ⅱ. 그는 그들에게 일치와 상부 상조를 한다(2,3절). 그러므로 그는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도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어떤 특정 인물들에게 주어진 교훈이다. 때때로 일반성을 띤 복음의 교훈들이 특수한 사람들과 사건들에 적용시킬 필요가 있다. 본문에 의거한다면 유오디아와 순두게가 서로 의견이 대립되었든지 혹은 그들의 교회에 대한 입장은 달랐던 것처럼 여겨진다. 그것이 사회적인 이유에서이건(그들이 소송 관계에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면들이 보인다) 혹은 신앙적 이유에서든 그들은 서로 입장을 달리하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권하노니 그들이 나를 본받아 주 안에서 살기를 바란다. 서로 훼방을 하고 충돌을 일으키지 말고 서로 같은 마음을 갖기를 바라노라. 또한 화평을 유지하고 사랑 안에서 살기를 바란다. 서로 훼방을 하고 충돌을 일으키지 말고 서로 같은 마음을 가지며 교회의 다른 사람들과도 같은 마음을 가져 그들과 적대적인 행동을 하지 않기를 바라노라." 그리고 나서 그는 상부 상조를 권고한다(3절). 이 권고를 그는 특정한 사람들에게 한다. 그러므로 본문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자 네게 구한다"(3절)고 하였다. 그가 참으로 멍에를 같이 한자라고 부른 이 사람이 누구인지는 분명치 않다. 어떤 이는 에바브로디도라고 생각한다. 또 어떤 이들은 "그와 멍에를 같이 한 자"는 알려지지 않은 뛰어나게 훌륭한 부인, 아마도 바울의 아내가 아니겠느냐고도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가 자기와 "멍에를 같이 한 자"에게 "그와 함께 힘쓰던 저 부녀들을 도우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사도와 멍에를 같이 한 자가 누구였든간에 그는 바울의 동료들과 멍에를 같이 하는 자였을 것임이 틀림 없다. 복음을 위하여 바울과 함께 수고했던 여인들이 있었던 것같이 보인다. 그들은 공적인 사역을 한 것이 아니고(사도는 그것을 명백히 금하였기 때문이다. 딤전 2:12 에 보면 "내가 여자의 가르치는 것을 허락치 않는다"고 하였다) 사역자들을 대접하고 병자들을 방문하고 무지한 자들을 지도하고 잘못된 자들을 권고하는 일을 한 것으로 보여진다. 이같이 복음의 사역을 위한 사역자들에게 도움이 되어야 한다. 이제 사도는 "너는 그들을 도우라"고 말한다. 남을 돕는 일은 기회가 있을 때 자신에 대한 도움으로 돌아온다. 즉 다음과 같은 뜻의 말이다. "그들을 도우라. 즉 그들과 연합하여 그들의 손을 강하게 하고 곤경에 서 있는 그들을 격려하라"는 말이다.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도 도우라고 하였다. 바울은 그의 모든 동역자들에게 친절했다. 그리고 그는 그들의 도움의 유익함을 알았으므로 그들도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는다면 큰 위로가 될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였다. 그는 자기 동역자들에 대하여 "그 이름이 생명책에 있는" 자들이라 하였다. 이 말은 그들이 영원부터 하나님이 선택하신 자들이라는 뜻이든지 아니면 그들이 영생의 특권이 부여되는 단체나 협의회에 그들의 이름이 등록되고 기록되었다는 뜻일 것이다. 이것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그 도시의 주민들이나 혹은 자유민들의 명부를 작성한 사실을 빗대어 말한 것이라고 하겠다. 이와 같은 뜻의 말씀들 곧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라"(눅 10:20). 그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르지 아니하리라"(계 3:5).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계 21:27)과 같은 말씀들을 성경에서 또한 찾아 볼 수 있다. 생명책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리고 그 책에는 이름들이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도 기억하자. 우리는 그 책을 조사할 수도 없고 누구의 이름이 거기에 기록되었는지를 알 수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복음을 위해 수고하며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영혼의 이 일을 위해 신실한 자들은 그들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었으리라 결론을 내릴 수 있겠다.

Ⅲ. 그는 하나님 안에서 거룩한 기쁨과 즐거움을 누릴 것을 권한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4절)고 본문에서 사도는 말한다. 우리의 모든 기쁨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에게 귀결되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 우리에게 기쁨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시편 기자는 "여호와를 기뻐하라(시 37:4)고 하였고 내 속에 생각이 많을 때에(근심되고 괴로운 생각들) 주의 위안이 내 영혼을 즐겁게 하시나이다"(시 94:19). "우리가 그를 묵상함을 가상이 여기신다"(시 104:34)고 노래하였던 것이다.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되 그 안에서 항상 기뻐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며 또한 특권임을 기억하자. 항상이란 말은 어떤 조건에 처해 있든지 늘 기뻐하라는 말로 심지어 우리가 그를 인하여 고난받든가 혹은 그에 의해서 채찍을 맞을 때에도 기뻐하는 말이다. 우리가 그를 섬김으로 고난에 직면하게 된다고 해서 하나님이나 혹은 그의 법도에 대해서 나쁘게 생각해서는 안된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최악의 상태에 처해 있다고 하여도 하나님 안에서 오히려 우리는 기쁨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사도는 전에도(3:1) "종말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고 말하였었다. 그리고 본문에서 그는 그것을 다시 말한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4절). 하나님 안에서의 기쁨을 그리스도인은 거듭 이 의무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 만일 선한 사람들이 마음에 이 기쁨의 축제를 유지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들 자신의 잘못이다.

Ⅳ. 본문에서 우리는 공정함과 온화함 그리고 형제에 대해 온화한 마음을 품을 것을 권고 받는다. 본문은 다음과 같이 말해주고 있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5절). 사소한 문제로 극단으로 치닫지 말라. 악의와 고집을 피하라. 서로에 대하여 자비하게 판단하라. o. e,piei`ke.j는 다른 사람에게 대하여 좋은 성품을 지니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절제는 로마서 14장에도 설명되고 있다. 어떤 이들은 관용이란 말을 고난을 참는 태도 또는 세상적인 쾌락에 대한 절제를 뜻하는 말로 이해한다. 이렇게 볼 때 이 말은 다음 구절 즉 "주께서 가까우시다"는 말씀과 일치한다. 주님 오실 때가 가까워온다는 사실과 우리가 최종적으로 그의 앞에서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생각은 우리로 동료를 상해하는 행위를 자제하게 하며 당면한 고난을 우리로 참게 하며 그리고 이 세상적인 즐거움에 대한 사랑을 절제하게 한다. 그가 우리 원수에게 원한을 갚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인내를 상 주실 것임을" 우리가 알기 때문이다.

Ⅴ. 본문은 또한 어지럽히고 당혹시키는 근심에 대하여 경고한다(6절). mhde.n meri,mn te-즉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와 같은 내용이 마태복음 6장 25절에서 "목숨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는 형태로 표현되고 있다. 즉 생명의 궁핍과 곤란 때문에 지나치게 염려하거나 마음이 동요되지 말라는 말이다. 염려없이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마음이 동요되지 말라는 말이다. 염려없이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의무이며 이익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자. 우리의 의무를 근면하게 수행하려는 염려는 마땅한 것이다. 이러한 염려는 앞을 내다 볼 줄 아는 현명함과 통하는 말이다. 그러나 망설임은 마음을 어지럽히고 분산시킬 뿐이다. 그러므로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 그 이유는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을 불신하는 것이요 또한 그를 섬기는 데 네 자신이 합당하지 않음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Ⅵ. 당황케 하는 염려에 대한 특효가 있는 해독제로써 그는 우리에게 끊임없는 기도를 추천한다.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6절). 다음의 사실을 생각해 보자.

1. 우리는 정해진 기도의 시간을 지킬 뿐만 아니라 특별히 긴급한 일에 부딪칠 때마다 기도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본문에 "모든 일을 기도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하였다. 어떤 일이 영혼을 괴롭힐 때 우리는 기도로 우리의 마음을 편하게 해야 한다. 우리의 경영하는 일들이 걷잡을 수 없게 되고 근심스럽게 될 때 우리는 지시와 도우심을 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2. 우리의 기도와 간구에 감사가 필연적으로 따라야 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시도록 간구해야 할 뿐만 아니라 우리를 자비로 받아 주시는 은혜도 지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이미 받은 것에 대하여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이 감사는 우리의 구함의 동기가 선함을 입증해 준다. 그리고 감사는 더 큰 축복을 주는 유리한 계기 노릇을 하는 것이다.

3. 기도는 하나님께 대한 요구의 제시이며 또는 우리의 소원을 그에게 알리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너희 구할 것을 하나님께 아뢰라"고 하였다. 하나님이 우리의 부족된 것이나 요구들을 우리에게 들으셔야 할 무슨 이유가 있는 것보다 더 잘 우리의 부족함을 알고 알리기를 바라시며 우리가 그에 베푸는 자비의 가치를 인정하고 또 그를 의뢰하고 있다는 사실을 표현하기를 원하신다.

4. 우리의 기도의 결과. "우리의 마음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평강이" 임할 것이다(7절). "하나님의 평강"이란 즉 우리와 하나님과 화해, 그의 은총에의 우리의 참여, 그리고 하늘 축복에 대한 희망과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기쁨 등을 의미하는 말이다. 또한 "모든 지각에 뛰어나는"이란 말은 필설로 표현할 수 있는 이상의 좋은 것이란 뜻의 말씀이다. 그것은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했던"(고전 2:9) 평강이란 뜻의 말씀이다. 이 평화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실 것이다." 그것이 우리를 어려움을 당하여 죄짓는 데서 그리고 그 아래 떨어지는 데서 지키실 것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감정의 불안을 없애 주며 내적 만족을 부여할 것이며 우리를 평온하고 침착하게 해 줄 것이다. 그러므로 "주께서 심지(心支)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실 것이다"(사 26:3)고 하였다.

Ⅶ. 우리가 좋은 이름을 얻고 또 유지할 것이 권고된다. 즉 하나님과 선한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사람이 되기를 권고되고 있다. 그러므로 본문에 "무엇에든지 참되며 그리고 경건하라"(8절)고 하였다. 이 말은 우리의 말과 약속이 진실한 것과 우리의 행동이 예절 바르고 말과 일치할 것과 우리의 생활 여건과 어울리는 삶을 사는 것을 뜻한다. 또 무엇에든지 "옳으며 정결하라"고 하였다. 즉 우리의 모든 인간과의 관계가 공의의 법도에서 벗어남이 없고 또 무슨 일에든지 "사랑할 만하며 그리고 칭찬할 만하며"라고 하였다. 즉 귀히 여김받을 만하다는 말이다. 이래야 다름 사람이 우리를 사랑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라고 하였다. 즉 "덕스러운 것이나 권고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 있다면"이란 뜻의 말이다. 다음의 사실을 생각해 보자.

1. 사도는 이방인들에게 덕스러운 것이나 권고할 만한 것이 있으면 그리스도인들로 그것을 배우게 하려고 시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만일 어떤 덕이 있으면 이것들을 생각하라. 즉 그들 가운데 참으로 고상한 것들이 있으면 그것들을 본받아 어떤 선한 일에 있어서도 너희가 그들에게 떨어짐이 없게 하라." 우리는 악한 자들에게서, 그리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장점을 갖지 못한 자들에게서, 무슨 좋은 점이 있다면 그것을 배우기를 수치스럽게 여기서는 안 된다.

2. 덕은 칭송을 받는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모든 덕스러운 길을 가야 하며, 그 안에 거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우리가 사람들에게서 칭찬을 받든 안 받든 간에 하나님께 칭찬을 받을 것이다(롬 2:29). 이 모든 사실들에 대하여 그는 자신을 그들에게 모본으로써 제시한다(9절). 그러므로 그는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고 하였다. 이 말씀을 통하여 바울의 교훈과 생애는 서로 모순되지 않고 일치하는 것이었음을 생각해 보자. 그들은 그에게서 들은 대로 그가 또한 생활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기에 그는 그의 교훈뿐만 아니라 자신까지도 그들이 본받을 것을 제시하였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전하고자 하는 것을 그들이 우리에게서 발견하게 될 때 우리의 말은 강한 호소력을 지니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생활이야말로 "평강의 하나님을 우리 안에 거하시게 하는 길이요." 그에 대한 우리의 의무에 보다 충실한 생활인 것이다. "우리가 그와 함께 할 때 주님께서도 우리와 함께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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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 교회에 대한 바울의 감사(빌립보서 4:10-19)

이 구절들에서 사도는 자기의 의식(衣食)을 위하여 선물을 보낸 빌립보 교인들의 친절에 대해서 감사한다. 로마에서 그가 죄수로 있을 때 그들은 그의 부족한 것을 공급해 주었다.

Ⅰ. 그는 그들이 이전에 그에게 베푼 친절에 감사하며 특별히 그 사실을 언급한다(15,16절). 바울은 감사의 정신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의 벗들이 그를 위하여 행한 것이 그가 그들에게 준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지만 그는 그들이 베푼 친절에 대해 마치 그것이 관대한 자선인 것처럼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바울이 마땅히 받아야 할 것에 훨씬 미달되는 것이다. 만일 그들이 그들 재산의 반을 그에게 보냈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그에게 많은 것을 주었다고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의 영혼을 위하여 그에게 큰 은혜를 입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이 그에게 작은 선물을 보냈을 때 호의를 갖고 그것을 받았으며 또한 기록으로 남겨져 모든 세대를 걸쳐 교회 안에서 읽혀질 이 서신에서 조차 그는 감사함으로 그 사실을 기록하였던 것이다. 이로써 이 서신이 읽혀지게 될 곳에서는 어디서나 그들이 바울에게 행한 이 일이 기억될 것이요. 또 이로써 그들의 행적이 칭송받게 된 것이다. 타인에게 베푼 사랑은 반드시 보답을 받는 것이다. 그는 그들에게 상기시키기를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케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예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느니라"(15절)고 했다. 그들은 그가 함께 있을 때 그를 편안하게 부양했을 뿐만 아니라 그가 마게도니아를 떠났을 때 그들은 그에 대한 자기들의 호의의 징표로 그에게 선물을 보냈다. 그리고 이것은 전혀 다른 교회들이 그렇게 하지 않았을 때의 일이었다. 그들 이외에 아무도 그에게서 그들이 영적인 것을 부여받은 것을 생각하고 그들을 소유의 일부를 떼어 그의 부족함을 채우려 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자선을 행할 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하고 있는가를 살피고 그에게 준하여 하려고 한다. 그러나 빌립보의 교회는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빌립보 교회만이 은혜를 갚을 줄 알았다는 사실은 그들의 영예를 더욱 높여 주는 것이었다. 그들은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그가 마게도니아에서 떠난 뒤) 그들은 "한 번, 두 번 그의 쓸 것을 보내었었다"(16절). 다음의 사실을 생각해 보자.

1. 그들이 보낸 것은 사소한 것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그의 필수품만을 보냈다. 그것은 그가 겨우 쓸 수 있을 정도의 것에 불과하였다. 아마 그것은 그들이 능력껏 보낸 것일 것이다. 또한 바울도 그들이 충분히 좋은 것들을 보내 줄 것을 바라지도 않았다.

2.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들의 능력에 따라 사역자들을 공급하게 하시며 사역자들은 또한 이들을 통하여 필요한 것을 공급하게 하시며 사역자들은 또한 이들을 통하여 필요한 것을 공급받을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이라는 사실이다. 사도는 본문에서 "너희가 한 번, 두 번 보내었다"고 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한 번 자선을 베푼 것으로 자기의 할 바를 다 했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또 다시 자선을 베풀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는 사실을 대단히 이상한 일이다. 그러나 빌립보 교인들은 한번 뿐 아니라. 두 번씩 그에게 쓸 것을 공급하였다. 그들이 그가 궁핍한 때에 종종 그를 안심하게 하고 새 힘을 부여해 주었다. 그는 감사해서 뿐만 아니라. 그들을 격려하기 위해 그들의 이전에 베푼 친절에 대하여 본문에서 언급하였다.

Ⅱ. 그는 최근에 그들의 그에 대한 무성의에 대하여 이해하는 입장을 취한다. 얼마동안 그들은 그를 문안하지도 않았고, 또는 그에게 선물을 보내지도 않았던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제 다시 너희가 나를 염려하던 것이 싹이 났다"(10절)고 그는 말한다. 이것은 마치 겨울 내내 정말로 죽은 것 같았던 나무에서 봄에 싹이 나는 것과 같은 일이었다. 이제 바울은 그의 위대한 스승이신 주님의 모본을 따라 그들의 태만에 대하여 그들을 나무라는 대신에 그는 그들을 관대하게 용납한다. 그러므로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10절)고 말하고 있다. 정말 그들이 마음은 있었는데 기회가 없어서 그에게 안부를 전하지 못했을까? 아마 그들은 그에게 사자를 파견할 수도 있었을 것이었으리라. 그러나 사도는 그들을 좋게 생각하여 만일 정당한 기회가 주어졌다면 그들이 그렇게 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바울의 태도는 많은 사람들이 자기 친구들에게 행하는 것과 얼마나 차이가 있는가? 사람들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 친구가 그들에게 부주의했다고 하여도 그것을 이해하기 보다는 분을 품는 것이 상례가 아니던가? 그러나 바울은 사실 그들의 부주의가 비난받아 마땅한 것이었음에도 그것을 넓게 관용하였던 것이다.

Ⅲ. 그는 그들의 현재의 관대함에 대하여 칭찬한다. 그러므로 그는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예하였으니 잘 하였도다"(14절)라고 말한다. 곤경에 처한 선한 사역자를 원조하고 돕는 것을 선한 일이다. 본문에서 참된 그리스도인이 지녀야 할 동정이 어떤 것인지를 보게 된다. 그것은 곤경에 처한 우리의 친구에게 관심을 가질 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들을 도울 수 있는 것을 돕는 것이다. 그들은 사도가 고난 가운데서도 위로를 받게 하기 위하여 "그의 고난에 참여하였다." 야고보 선생은 "덥게 하라, 베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약 2:16)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지 아니하였다. 사도는 그들의 자기에 대한 관심으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였다(10절). 왜냐하면 그것은 그에 대한 그들의 사랑을 증명해 주었고 또한 그들 가운데서 그의 사역의 성공을 증명해 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호의의 열매가 사도를 향하여 풍성할 때 그의 사역의 열매 또한 그들 가운데 풍성했던 것이 입증되는 것이다.

Ⅳ. 그는 그들이 그에게 선물을 보낸 사실에 대하여 너무 많이 언급한 점들 그들 가운데 누가 혹 악용하지나 않을까 하여 이러한 계기가 될 동기를 제거해 버린다(11절). 그러므로 그는 그들의 호의를 그가 언급한 것이 불만과 불신으로부터 혹은 세상에 대한 욕심과 사랑(12절)에서 나오지 않았음을 기술한다.

1. 그의 말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불만이나 불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는 "내가 궁핍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11절)고 말한다. 즉 그가 이 말을 한 것은 그가 궁핍을 경험하였기 때문에 또는 궁핍을 두려워해서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는 비록 궁핍하게 지내왔으나 그는 그가 가진 적은 것으로 만족하였고 그리고 그 적은 것이 그를 만족케 했다. 또한 앞으로 있을지도 모르는 궁핍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었고 그 하나님이 그에게 매일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시리라고 믿었다. 그러므로 그는 이 문제 대하여서도 염려하지 않았다. 이같이 그는 궁핍 때문에 그들에게 말한 것은 아니었다. 그 이유를 그는 "내가 어떠한 형편에 처하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기 때문이다"(11절)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본문에서 바울이 자기가 배울 것에 대하여 설명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의 이러한 것에의 배움은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배운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문하에서 배운 것이었다. 그는 자족하기를 배웠다. 그는 자주 매임을 받았고 궁핍했었다. 그러나 이 모든 가운데서 그는 자족하기를 배웠다. 즉 자기 마음을 상황에 따라 적응시키고 그 환경을 최선의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므로 그는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한 줄도 안다"(12절)고 말할 수 있었다. 어떤 삶의 정황에도 자신을 적응시키고 변화무쌍한 인생의 행로 속에서도 환경 같은 마음을 지닐 수 있다는 것은 특별한 은총의 결과라고 하겠다.

(1) 우리는 고난의 여건 속에서도 자신을 적응시킬 수 있어야 한다. 즉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배고픔에 처할 줄도 알며 궁핍을 극복할 줄도 알아 그것으로 인한 유혹에 넘어가지 않으며 그로 인해 하나님 안에서 주어지는 위로를 상실하지도 않으며 그의 섭리를 불시하지도 않으며 우리의 필요한 것을 채우기 위하여 편법을 쓰지도 않을 수 있어야 한다.

(2) 또한 우리는 풍부한 데 처할 줄도 알아야 한다. 즉 바르게 풍부하게 되는 법도 알고 배부르게 되는 법도 알아 이것 때문에 교만하거나 자만하거나 사치스러워지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앞의 것 만큼 힘든 과제다. 왜냐하면 배부름과 부요의 유혹도 상해와 궁핍의 유혹보다 결코 못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떻게 우리는 그것을 배울 것인가? 이에 대하여 사도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13절)고 하였다. 우리는 그리스도에게서 오는 힘을 필요로 한다. 이 힘만이 우리로 순수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의무들 뿐만 아니라 도덕적인 의무까지도 행할 수 있게 한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자족하도록 우리를 가르치는 그의 힘을 필요로 한다. "내가 비천에 처할 줄 안다"는 본문은 얼핏보면 사도가 자신에 대하여 그리고 자신의 힘에 대하여 자랑하는 것같이 보인다. 그는 그러나 그의 의도는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본문에서 모든 영광을 그리스도에게 돌린다. 그의 의도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비천에 처할 줄 알고 풍부에 처할 줄 안다고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에 근거해서인가? 내가 그것을 할 수 있는 것은 내 자신의 힘으로는 아니며 다만, 그것을 할 수 있는 것은 내 자신의 힘으로는 아니며 다만, 내게 능력 주시는 그리스도 안에서만이다"고 그는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도 "주 안에서와 그의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기를" 바라야 할 것이며(엡 6:10),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할 수 있기를"(딤후 2:1) 바라야 하겠고 또한 우리는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속 사람이 능력으로 강건하게 되기를"(엡 3:16) 바라야 하겠다. evn tw/| e=udounamonivti, me cr stw/|-즉 능력 주시는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만 말씀으로써 현재 분사로 표시되어 있다. 그 뜻은 그의 능력 주심이 한번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재적이요 또한 지속적으로 역사함을 뜻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말은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도 있다. "그리스도가 나를 현재도 강건하게 하시며 그리고 계속해서 나를 강건하게 하신다. 그의 끊임없고 늘 새로 주어지는 힘에 의해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나의 모든 영적 힘에 있어서 전적으로 그를 의지한다."

2. 그의 말은 세상적인 부에 대한 욕심이나 사랑에서부터 온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다(17절). 즉 내가 너희의 호의를 기쁨으로 받은 그것이 나의 즐거움을 더하기 때문이 아니라 너희의 유익을 더하기 때문이라." 그는 자신을 위하여 많은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었고 그들을 위하여서는 그리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나는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과실이 번성하기를 구한다(17절). 즉 너희가 너희의 세상 재물들을 그렇게 선용함으로 너희가 기쁨으로 이 일을 말할 수 있기를 바라서이다. 내가 이를 말하는 것은 너희에게 보다 많은 것을 끌어 내려는 계획으로 함이 아니고 너희로 이러한 유익한 일을 계속하도록 격려함으로 이후 영화로운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하다(18절). 풍족하니 그 이상 무엇을 바랄 것이 있겠는가? 나는 단순히 너희의 선물을 받아내기 위해 선물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나는 모든 것을 가졌고 또 풍부하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그들은 그에게 작은 성의를 표시하였으나 그러나 그는 더 많은 아무 것도 바라지 않았다. 그는 현재의 여유있는 삶을 원하지도 않고 미래에 쓸 것이 준비되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그러기에 그는 "내게도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의 준 것을 받았노라"(18절)고 말한다. 선한 자에게는 이 세상에서도 살기에 충분한 만큼 주어진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들은 세상에서 겨우 사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세상에서 넉넉한 것이 공급될 것이다. 탐욕적인 속인은 너무 많은 것을 갖고도 여전히 그 이상의 것을 갖기를 원한다. 그러나 하늘에 속한 그리스도인은 비록 그가 적게 가졌다 할지라도 풍성한 것으로 여기고 산다.

Ⅴ. 사도는 하나님이 그에 대한 그들의 친절을 열납하셨고 그리고 보답하신다는 것을 확신있게 말한다.

1. 하나님께서 그것을 받으셨다고 했다. 그러므로 그는 그것을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다"(18절)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의 선물이 그들의 죄에 대한 대속의 제물이 되었다는 말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아무도 죄를 대속하지 못하며 그리스도만이 그리할 수 있으시기 때문이다. 다만 그것은 감사의 제물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었다. 그것을 바울이 그의 궁핍에 대한 공급으로 기꺼이 받은 것 이상으로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을 받으셨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들이 받은 은혜의 결과였기 때문이었다. "이 말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다"(히 13:16).

2. 하나님께서 이에 대하여 보상하실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러므로 그는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19절)고 말하였다. 그는 하늘 나라의 국고에서 이 계산서에 대하여 지불될 것처럼 말한다. 그리고 그들이 그에게 보여 준 호의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보상하도록 맡긴다. "너희의 하나님으로 뿐만 아니라 나의 하나님으로서 그가 그것에 대해 보상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나에게 행하여질 것은 자신에게 행하여진 것으로 여기시기 때문이다. 너희는 너희의 가난한 중에도 나의 쓸 것을 공급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자기의 부함을 따라 너희의 쓸 것을 공급하실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여전히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서 가능하여진다. 그를 통하여 우리는 선한 것을 행할 수 있는 은혜를 받으며 그리고 그를 통해 또한 우리는 그것에 대한 보상을 기대해야 한다. 그렇다고 우리가 무슨 빚에 대하여 당연한 보상을 받을 것으로 기대한다는 것이 아니고, 오직 은혜로 보상되기를 바랄 뿐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일을 하면 할수록 더욱 우리는 그에게 빚을 지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생활 속에서 우리가 해 드린 이상으로 보답을 받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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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빌립보서 4:20-23)

사도는 아래와 같은 내용으로 본 서신을 끝맺는다.

1. 하나님께 대한 찬양으로 본 서신을 끝맺는다. 그는 본문에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께 세세 무궁토록 영광을 돌릴지어다. 아멘"(20절)이라고 하였다. 다음의 사실들을 생각해 보자.

(1)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생각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께"라고 하였다. 하나님께서 죄인들과의 부자 관계를 승인하시고 그리고 우리로 그를 "우리 아버지"라고 말하게 하신 것은 그의 큰 겸비와 은총의 결과이다. 그리고 그것은 복음의 시작과 함께 주어진 특별한 명칭이다. 또한 우리가 그를 아버지로 여길 수 있다는 것, 즉 그를 우리와 가까운 분으로서 또 우리를 향해 부드러운 사랑을 가진 분으로 대할 수 있게 된 것을 우리에게 큰 특권이며 격려가 된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연약함과 두려움 속에 살면서 하나님을 폭군이나 원수로 보지 않고 우리에게 동정을 베풀고 우리를 돕는 아버지로서 볼 수 있어야 한다.

(2) 우리는 영광을 아버지로서의 하나님께 돌려야 한다. 또한 그분의 탁월하심과 그리고 우리를 향한 그의 모든 자비에 대하여 영광을 돌려야 한다. 우리는 감사함으로 그에게서 받은 모든 것에 대해 인정하고 그에게 모든 찬사를 드려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찬사도 항상 계속하며 불변해야 한다. 우리는 "세세 무궁토록 영광을 돌려야 하는 것이다."

2. 빌립보에 있는 그의 벗들에게 인사의 말을 함으로 본 서신을 끝맺는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도에게 각각 문안하라(21절). 너희 중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나의 진심어린 사랑을 전한다"고 말한다. 그는 감독과 집사들, 그리고 전체 교회뿐만 아니라 모든 성도를 각각에서 안부가 전하여지기를 바란다. 바울은 모든 선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정다운 애정을 가졌다.

3. 그는 로마에 있는 자들의 인사말을 그들에게 전한다. "나와 함께 있는 형제들이 너희에게 문안한다. 동역자들과 여기에 있는 모든 성도들이 너희에게 그들의 정다운 안부를 보낸다. 그 중에도 특별히 가이사 집 사람 중 몇몇이 너희에게 안부하노라"(22절)고 하였다. 다음의 사실을 생각해 보자.

(1) 가이사의 집에도 성도들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비록 바울이 복음을 전함으로 황제의 명령에 의해 투옥되었다 할지라도 황제의 가족 중에 얼마의 그리스도인들이 있었다. 여기서 초기의 복음의 역사에 부한 자들과 지체 높은이들 중에서 몇 사람도 자기의 것으로 참여한 것을 볼 수 있다. 아마도 바울은 궁전에 있는 그의 벗들에 의해 보다 좋은 것을 대접받았고 약간의 특전을 받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2) 가이사의 사람들이 "특별히" 문안하였다는 사실이다. 궁전에서 자라난 그들은 다른 사람보다 더 정중했다. 성별된 예절이야말로 신앙에게는 더 없는 귀한 장식 역할을 한다.

4. 사도의 축복. 그것은 통상관례적인 것이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23절). 그리스도의 거저 주시는 은혜와 선하신 뜻이 너희의 분깃이 되며 행복이 되기를 원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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