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애가 0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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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시온의 참극의 원인 (예레미야 애가 2:1-9)

여기에서 그 야곱과 이스라엘의 하나님되시고 시온과 예루살렘의 하나님이 되시는 하나님의 교회의 상태를 매우 슬프게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이 구절들에 있어 강조점은 그들이 신음하는 재앙은 모두 하나님의 손에 놓여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하나님께서 진노로 나타나셔서 그런 일들을 그렇게 하셨으므로 그 슬픔은 그렇게 커다란 것이 못된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채찍질하고 진노와 격렬한 노하심으로 그들을 징벌하신다. 하나님께서 그들과 원수가 되어 그들과 싸우신다. 이것이 고통과 재난 중에 더욱 이들을 괴롭히는 쑥과 담즙인 것이다.

Ⅰ. 하나님의 기쁨이 자신의 교회에 있었고 이스라엘을 위하여 이스라엘에게 친구로 나타나셨었다. 그러나 지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대하여 불쾌해 하신다. 화를 내시고 적으로 나타나시고 행동하신다. 이점이 여기에서 자주 반복되어 말해지고 그들이 슬프게 애곡하는 점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진노 가운데서 행하시니 이 때문에 우리의 오늘은 정말 침울한 날이 된다. 즉 "진노하신 날" (1절)이고 "노하신 날" (2절)이며 "맹렬한 진노 가운데 끊으시고 던지시며" (3절) "진노로 분개하신 날이다" (6절).

하나님의 사랑의 가치를 아는 사람들에게는 그의 진노보다 더 두려운 것이 없으며, 사랑의 교정은 쉽게 견딜 수 있지만 사랑의 책망은 깊은 상처를 준다. "맹렬한 불이 사름같이 야곱을 사르신 것은 하나님의 진노이다" (3절). 그 불은 소멸시키는 불이며, 모든 명예들과 위안들을 통째로 삼키는, "사면을 사르는" 불이다. 이것은 소돔과 고모라에 내린 불과 유황과 같이 "불처럼 쏟으시는 노이다" (4절). 그러나 이 불을 일으킨 것은 그들의 죄이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에게 자애스런 아버지이시다. 우리 자녀들이 하나님을 조롱하고 노하게 하지만 않는다면 결코 우리에게 노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하나님은 결코 노하게 하는 원인 이상으로 노하시지 않는다. 그들과 맺은 하나님의 계약은 만일 그들이 하나님의 "목소리를 잘 청종하면" (출 23:22) 그리고 그들의 하나님에게 가까이 하는 한 하나님은 "그들의 원수에게 원수가 되신다" 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원수가 되셨다. 또는 최소한 "원수와 같이" 되셨다(57절). 그는 "원수같이 활을 당기셨다" (4절). 하나님은 그들에게 대하여 "대적처럼 모든 손을 들고" 칼을 뽑았다. 하나님은 정말로 그 백성의 원수가 아니시다. 그들에게 노하시는 때에도 원수로서 노하시는 게 아니라 노하심으로 그들을 바로 잡으시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가장 사랑하는 친구나 친한 사람들에게 심하게 화를 낼 수 있다. 그러나 원수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때때로 하나님은 그들에게 대한 모든 그의 섭리가 표면상으로는 그들을 파멸시키려는 것인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하나님께서 행하는 모든 것이 그들을 적대하고 전혀 아무 것도 그들을 위한 것이 아닌 것처럼 보일 때 이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원수와 같이 되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축복을 주시는 분이시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요, 화평케 하시는 이시다. 그리스도는 이 불화를 제거하셨다.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는 우리의 원수와 화합한다. 이것이 지혜로운 일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다투는 것은 헛된 일이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유익한 평화의 조건을 제공하시기 때문이다.

Ⅱ. 과거에 하나님의 교회는 나라들 중에 빛나고 뛰어나고 유력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여호와께서 처녀 시온을 구름으로 덮으셨다." 캄캄한 구름, 그것은 이스라엘에게 대단히 두려운 것이었다. 그것으로 인하여 교회는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가 없다. 두꺼운 구름, 검은 구름, 그것은 하나님의 모든 영광을 침식하고 하나님의 존엄을 숨긴다. 이 구름은 하나님이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한 것과 같은 구름이 아니고 또는 성전을 둘러싸서 그의 영광으로 성전을 충만하게 하였던 그 구름이 아니다. 아니 홍해에서 애굽인을 가로 막았던 구름과 같이 지금 이 구름의 측면은 그들을 향하여 가로막고 있다. "이스라엘의 아름다운 것을 하늘에서 땅에 던지셨음이여" 그들의 방백들과 그들의 성전예배와 그들의 아름다움과 그들의 이웃에게 호의와 존경을 받게 한 모든 것들 그리고 그들에게 상냥하게 보답하던 모든 것들, 그것들은 그들을 "하늘에까지 올리었으나" 지금은 시들어버리고 없어졌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구름으로 그것을 덮으셨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모든 뿔을 자르셨음이여" (3절). 그의 모든 아름다운 것과 장엄한 것(시 132:7), 모든 그의 부요와 충만한 것, 그리고 그의 권력과 권위들을 자르셨다. 그들은 거만하게 그들의 뿔을 하나님께 향하여 쳐들었었다. 그러므로 당연히 하나님은 그들의 "뿔을 자르신"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적들에게 저항하고 대적하기에 무능하게 하셨다. "오른손을 거두셨으므로" 그들은 그들이 전에 하였던 것같이 공격을 할 수가 없고 또한 공격을 방어할 수도 없었다. 하나님이 그 오른손을 거두실 때 그리고 여로보암에게 하사한 것같이 이스라엘의 오른손을 마르게 하실 때 그들의 오른손이 그 적들에 대하여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용기있다고 평판높던 한 백성이 그들의 땅에 설 수도 없고 그들의 위치를 지킬수도 없을 때 "이스라엘의 아름다운 것은 이렇게 던져진 것이 되었다."

Ⅲ. 과거에 예루살렘과 유다의 성읍들은 강했고 잘 요새화되었었다. 그러나 주민들에게 신뢰를 받았고 난공불락으로서 적들이 감히 가까이 하지 못했다. 지금은 여호와께서 진노하셔서 그들을 "삼키셨다." 그것들은 아주 없어져 버렸다. 요새와 방벽들은 점령당했고 침략자들은 저항도 받지 않았다. 그들의 힘이요, 아름다움이었던 위엄있는 구조물들이 함락되었고 황폐하게 되었다.

1. 여호와께서 "노하셔서 야곱의 모든 거처를 삼키셨다" (2절). 성읍들과 촌락의 집들은 불탔고 또는 다른 방법으로 파괴되었다. 전체가 파괴되었으므로 그것들은 삼키워진 것처럼 보였고 남은 것이라곤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삼키시고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셨다." 어떤 사람은 그토록 훌륭히 건축되고 장식된 호화로운 집은 집이 없어 방황하는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사용했어야 했으므로 완전히 파괴해 버려선 안 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늘 베푸셨던 동정심을 이젠 그만인 것처럼 보인다. 하나님은 먹이를 삼키는 사자와 같이 이스라엘을 "삼키셨다" (5절).

2. 하나님은 보통의 거처들뿐 아니라 궁전들까지도 "삼키셨다." 그 "모든 궁들은' 그들의 왕자들과 존귀한 자들의 거처였다. 이것들은 가장 장엄했고 튼튼했으며 또 부요했고, 잘 감시되었지만 역시 삼키워졌다. 하나님의 심판의 명령이 떨어졌을 때 궁전이나 시골집이나 차별이 없이 삼켜 버린다. 만일 궁전들이 이스라엘의 궁전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죄로 인하여 더러워진다면 저주가 그들을 방문하도록 기다리게 하라. 그 저주는 "나무와 돌을 아울러 사를 것이다" (슥 5:4).

3. 하나님은 그들의 저주하는 곳뿐만 아니라 그들의 요새와 성곽을 성체와 방어진지까지도 파괴하셨다. 하나님은 "진노로" 이것들을 땅에 엎으셨다.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방해하며 또한 심판의 진행을 저지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다. 그들로 하여금 가을 나뭇잎처럼 떨어지게 하고 그들을 바닥부터 무너뜨려서 땅에 닿게 하라(2절). 다시(5절에서) 하나님은 그의 "견고한 성을 파괴하셨다." 그러니 무슨 힘으로 그들이 하나님을 대항할 수 있었겠는가? 이렇게 하나님은 "처녀 유다의 근심과 애통을 더하셨다." 그들에게서부터 그들의 의존하는 모든 것들이 떠나가는 것을 보았을 때 그들은 두려워 간담이 서늘하도록 놀라게 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7-9절에서 다시 주장된다. 그들의 "궁들을 삼키기" 위하여 궁장(宮墻)을 "원수의 손에 붙이셨다." 궁장은 그들을 안전케 하는 것이었다. 궁장(궁벽)이 부서졌을 때 궁전들이 곧 허물어졌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둘러싼 부담이 되시지 않는 한 궁벽이 그들을 보호할 수가 없다. 하나님은 "노하심으로" 이를 행하셨다. 그것을 계획적으로 행하셨다. 그것은 목적의 결과로 되어졌으며 현명하고 꾸준한 섭리에 의해서 행해졌다. "여호와께서 처녀 시온의 성을 헐기로 결심하시고" 이것을 실행하시기 위한 목적으로 갈대아군을 불러들이셨다.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서 무엇을 황량하게 하시든지 그것은 하나님의 의도를 따르는 것임에 주의하라. 하나님은 우리를 치시는 일까지도 우리를 위하여 작정하신 일로서 실행하신다. 그러나 그것이 행하여질 때 하나님은 그것을 정확하게 행하기 위하여 "측량줄을 띄신다." 여기까지만 파괴가 행하여질 것이다. 더 이상은 파괴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표시되어진 곳까지만 "잘라내어질" 것이다. 또는 수평을 이루게 하는 줄인 "혼란의" 줄을 의미한다(사 34:1).

하나님은 그의 일을 계속하실 것이고 적과 같이 그의 백성들에 대하여 내뻗는 모든 손을 "훼파함에서 거두지 아니하신다" (4절). 목적이 세워졌으면 실행이 계속되어질 것이다. 그의 손은 끝까지 그의 의도를 성취하실 것이고 거두어지지 아니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 백성이 기뻐하고 즐거워하였던 그 "성과 곽(廓)으로 애통하게 하셨으며 저희와 함께 쇠하게 하셨다." 그 곽과 성 또는 성곽은 함께 그들 위에 무너지고 그들의 함락에 대하여 서로 조위(弔慰)하는 일만 남게 되었다. 이스라엘의 문은 순식간에 없어졌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그 문의 무게로 인하여 땅속으로 꺼져버렸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문빗장이 꺾여 훼파되었다." 이 예루살렘 성문의 빗장은 이전에는 "견고하였었다" (시 147:13). 그러나 문과 빗장은 하나님이 그의 보호를 거두시면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못한다.

Ⅳ. 과거에 그들의 통치는 번영하였고 방백들은 장관이었으며 그들의 왕국은 이웃 나라 사이에서 위대하였었다. 힘의 균형이 그들편에 기울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주 다르다. 하나님은 "나라와 방벽으로 욕되게 하셨다" (2절). 그들은 먼저 우상 숭배로써 그들 자신을 더럽혔고 그 후에 하나님은 그들을 더러운 것으로 취급하셨다. 하나님은 그들을 그들에게 가장 적당한 장소인 거름더미에 던지셨다. 하나님은 신성한 것(우리는 그것을 장엄한 것이라고 하였다)으로 보여졌던 그때의 영광을 버리셔서 짓밟히고 모욕을 받게 하셨다. 항상 덕망이 있고 신성한 것으로 여겨지던 왕과 제사장들이 모든 사람들에게 경멸을 받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하나님이 진노하사 왕과 제사장을 멸시하셨다" (6절).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셨다. 하나님은 그들이 왕직과 제사직의 계약을 더 이상 전수받을 가치가 없으므로 그들을 모두 몰수하셨으며 그들을 버려두셨다.

그러므로 시드기야 왕은 모욕을 당하였고 대제사장 스라야는 범죄인으로서 죽음을 당하였다. 왕관이 그들의 머리에서 떨어졌다. "왕과 방백들이 이방인 가운데 있으며" 그들 중에 있는 죄인들로서 그들에게 모욕을 받았고(9절), 보통 사람들과 같이 취급받았을 뿐아니라 그들의 품격은 거들떠보지 않았고 가장 천한 자로서 취급을 받았다. 주의할 것은 죄로 인하여 그들 자신을 욕되게 한 사람들을 심판하시며 모욕하시는 이는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다.

Ⅴ. 과거에는 하나님의 법령이 힘있게 그리고 순결하게 그들 중에서 집행되어졌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께서 현존하신다는 표들을 가졌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표들을 빼앗겼고 실로 그들의 가장 아름다운 것이었던 이 이스라엘의 아름다움이 없어졌다.

1. 법궤는 그룹(cherubim) 사이, 자비의 보좌 아래 있는 하나님의 발등상이었다. 이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현현의 가장 신성한 상징이었다. 그것은 그의 발등상이라고 불리워졌다(대상 28:2; 시 99:5; 132:7). 거기에 세키나(shechinah)가 있어서 이스라엘을 지켜보며 때때로 이스라엘을 보호하고 구하여 주었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은 "그의 발등상을 기억하지 아니하신다." 법궤 자체도 갈대아인의 손에 떨어짐으로서 수난을 받았는데 이는 마땅히 그렇게 되었다고 여겨진다. 노하신 신께서 그것을 던져버리셨다. 왜냐하면 그것은 더 이상 그의 발등상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전에 법궤가 버려졌던 것처럼 지구가 또한 그렇게 될 것이다(시 66:1). 하나님의 현존이 떠나갔는데 그 현존의 표가 무슨 가치가 있을 것인가! 더욱이 하나님께서 그의 법궤를 포로로 내어 주신 것이 이것이 처음이 아니다(시 78:61).

하나님과 그의 나라는 발등상 없이도 존재할 수 있다.

이 거룩한 것들을 관리하는 사람들은 "처녀 시온의 장막을 보는 것이 즐거웠다." 그것들은 "눈보다 깨끗하고 우유보다 희었었다" (4:7). 모든 선한 백성들의 눈에는 하나님의 장막에서 섬기는 것보다도 더한 즐거움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 이들은 죽임을 당하였고 그들의 피는 "희생 제물에 섞여졌다." 이렇게 제사장들은 왕과 마찬가지로 모욕을 받았다. 주의할 것은 시온의 장막을 보는 게 즐거웠던 사람들이 살륙을 당했을 때 하나님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그것을 행하셨다. "여호와께서 불을 붙여서 타는 것이기" 때문에 나답과 아비후의 경우와 같이(레 10:6) 이스라엘의 모든 집이 애곡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3. 성전은 하나님의 장막이었었다(장막은 그것이 있을 동안에는 성전이라 불려졌던 것과 같이, 시 27:4). 그런데 하나님은 이것을 헐어버리셨다(6절). 말뚝을 뿌리째 뽑아 버리시고 그 줄을 끊어버리셨다. 그것은 더 이상 장막이 아니니 하물며 하나님의 장막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은 마치 동산지기가 그의 오두막집이나 원두막을 허물어 버리듯이 그것을 허물어 버리셨다. 하나님은 그것을 쉽고도 빠르게 헐어버리셨고 마치 그것이 다만 "포도원의" 망대나 참외밭의 상직막인 것처럼 아무 후회나 주저없이 허셨다(사 1:8; 욥 27:18). 사람들이 하나님의 성전을 모독할 때에 그들로부터 성전을 취하여 가심은 그에게 타당한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의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셨다" (암 5:21).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로부터 떠나가시도록 하나님을 자극하였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그들의 거룩한 장소를 파괴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예배가 혐오스런 것이 되어버렸는데 그들의 예배 장소는 무슨 쓸 데가 있는가? "여호와께서 자기 성소를 미워하시며" (7절) 성소는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유일한 것인 죄로 더럽혀졌다. 그리고 그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셨고 "나의 영원히 쉴 곳" 이라고 부르셨던(시 132:14) 성소까지도 미워하신다. 하나님은 "실로" 에 대하여 이같이 행하셨었다. 전에는 "절기의 날" 에 성전의 노래와 음악으로 떠들썩하였던 "여호와의 집에서" 지금은 원수들이 주연을 베풀고 모독하는 소리로 떠들썩하게 되었다(시 74:4).

어떤 이들은 그 "공회처소" (6절)는 성전뿐만 아니라 적들이 불태워 버린 회당과 선지 학교도 가리킨다고 이해한다(시 74:8).

4. 절기와 안식일은 주의 깊에 기억되어졌고 백성은 끊임없이 그것들을 마음속에 간직하였었다. 그러나 이제는 "여호와께서" 먼 시골에서 사는 사람들 사이에서 뿐만 아니라 시온에 사는 자들까지도 "그것들을 잊어버리게 하셨다." 왜냐하면 기억할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았고 그들이 바라보곤 하던 장소들도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 시온은 멸망해 버렸기 때문에 안식일과 다른 날들의 구별은 무너져 버렸다. 매일매일이 애곡의 날이었으므로 "모든 절기가 빼어버려졌다." 그들에게서 안식일과 절기가 지닌 유익과 위로를 빼앗은 이는 하나님이시다. 그들은 절기와 안식일을 충분하게 존중하지도 아니하였고 성실하게 준수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이 날들을 모독하였다. 그것은 유대인이 자주 범한 죄 중의 하나이다. 인자의 날을 보고도 그 날을 가볍게 여기는 자는 "때가 이르리니 너희가 인자의 날 하루를 보고자 하되 보지 못하리라" (눅 17:22).

5. 예물을 바치던 제단은 이제 내어버려졌다. 하나님은 그들의 예물을 더 이상 받지도 아니하시고 그들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지도 아니하시기 때문이다(7절). 제단은 "여호와의 우상이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더 이상 그들 중에 집을 가지지 아니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잔치를 베풀지도 아니하시고 그들과 더불어 즐기지도 아니하신다.

6. 그들은 예언자들과 율법 교사들을 축복으로 받았었다. 그러나 지금은 더 이상 율법이 없다(9절). 율법은 백성들에게서 읽혀지지 않고 서기관들은 더 이상 율법을 해설하지 않는다. 십계명은 법궤와 함께 없어졌다. 율법책은 그들로부터 취하여지고 백성들은 율법책을 소유하지 못하게 금지되었다. 율법을 가지고서도 더 좋은 진보를 하지 못한 그들이 성서를 가지면 또 무엇을 할 것인가?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은 여호와의 묵시를 받지 못한다. 하나님은 다시는 선지자로도 꿈으로도 대답지 아니하시나이다." 이것은 사울의 슬픈 경우이었다(삼상 28:15). 그들은 하나님의 예언자들을 핍박하고 주께로부터 오는 환상을 멸시하였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들이 더 이상 예언자와 환상을 갖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들로 하여금 자기 마음의 생각을 묵시라고 속이고 아첨했던 예언자에게로 가게 하라.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을 위로해 주고 또 언제까지 재앙이 계속될지를 그들에게 말해 줄 하나님으로부터 온 사람을 가지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의 예언자들을 학대한 자들에게는 예언자들을 잃어버리는 게 마땅하다.

 

2:2 없음.

 

2:3 없음.

 

2:4 없음.

 

2:5 없음.

 

2:6 없음.

 

2:7 없음.

 

2:8 없음.

 

2:9 없음.

 

2:10

복합적인 슬픔 (예레미야 애가 2:10-22)

이것이 애가라고 불려지는 것은 당연하다. 이것들은 매우 애상적인 것들이다. 완전한 비탄의 표현과 화에 대한 애곡 그외의 다른 것은 없다. 마치 에스겔의 두루마리의 내용과 같다(겔 2:10)

Ⅰ. 앞에서와 꼭 같은 애가들이 여기에서 나타나는 데 이것들은 생생하게 그려진다.

1. 관복을 입고 나타나곤 하던 법관들과 장관들이 그 관복을 버리거나 혹은 그 옷들을 벗어버리고 슬픔의 옷을 입는다(10절). 장로들은 더 이상 "다윗의 집의 보좌" 인 재판하는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그들을 편안하게 하는 방석 없이 "땅에 앉는다." 또는 큰 슬픔의 표시로서 욥의 친구들처럼 "땅에 앉는다" (욥 2:13).

그들은 더 이상 그들의 의견을 제시하기 위하여 성문에서 입을 열지 않고 슬픔에 압도되어 "잠잠하며" 말할 바를 알지 못한다. 그들은 깊은 슬픔을 가진 자가 하는 것처럼 "티끌을 머리에 무릅쓰고 굵은 베를 허리에 둘렀다." 그들은 그들의 힘과 건강을 잃었으니 이것이 이토록 그들을 슬프게 하였다.

ploratur lachrymis amissa pecunia veris-즉 잃어버린 번영으로 인하여 우리가 흘린 눈물은 진심에서 우러난 것이다.

2. 그렇게도 화려하게 옷을 입고 "늘인 목으로" 걷곤하던(사 3:16) 처녀들은 이제 비천하게 되었다. "예루살렘 처녀들은 머리를 땅에 숙였다." 슬픔에 대해서 도도하며 항상 즐겁기만 하던 처녀들이 슬픔을 알게 되었다.

3. 예언자 자신이 슬퍼하는 자들의 표본이시다(11절). "내 눈이 눈물에 상하여" 더 울 수 없을 때까지 울었다. 거의 그의 눈이 쇠하기까지, 거의 눈이 멀게 되기까지 울었다. 슬픔의 내적 느낌은 슬픔의 외부적 표현보다 오히려 강하다. 그가 이 재난들이 오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 그의 창자가 끓었다(렘 4:19, 20).

어떤 사람은 이 예언자는 지금 이 화들을 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테지만 이 예언자도 조금도 다를 바 없이 그의 "간이 땅에 쏟아질" 정도로 견딜 수 없는 슬픔을 느꼈다. 그는 자신의 완전한 파멸을 느꼈다. 그의 모든 창자가 녹고 용해되었다(시 22:14). 예레미야 자신은 그의 이웃들보다도 좋은 대우를 받았고 전에 그가 자기의 동포에게서 받았던 것보다도 좋은 대우를 받았다. 아니 그들의 파멸은 그의 구원이었고 그들의 포로됨은 그 자신이 커지는 것이었다. 그들을 죄수로 만든 것이 그를 유익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의 사적인 관심은 대중을 위한 관심 속에 삼켜진다. 그리고 이 공통적인 재난 속에서 그 자신이 가장 고난을 받는 자인 것처럼 "그의 백성의 패망" 을 몹시 슬퍼한다. 비록 우리 자신들은 훌륭히 빠져나올 수 있더라도 바로 우리들이 나라와 그 백성들 위에 내려진 하나님의 심판에 대하여 애곡해야 함을 주의하자.

Ⅱ. 여기에서 애가를 부르고 있다. "저희 마음이 주를 향하여 부르짖기를" (18절) 어떤 사람들은 그것은 진실한 회개가 아니고 통렬한 불평의 외침이라고 염려한다. 그들의 마음은 담을 수 있는 한도까지 슬픔으로 가득 채워져서 슬픈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를 발한다. 그 부르짖음 속에서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한다. 우리들은 그들 중의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재난 중에서 하나님의 자비를 얻기 위하여 성실하게 부르짖었다고 너그럽게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예언자는 가서 계속 그렇게 하라고 명령한다. "처녀 시온의 성곽아! 성곽 위에 서 있는 너, 성벽 위에 서 있는 파수꾼인 너마저(사 62:6) 네가 적들이 성벽 주위에 야영하는 것과 그들이 성벽으로 접근하는 것을 볼 때에 또는 성벽 때문에(그것은 애가의 주제이다). 성벽의 무너짐 때문에(그것은 그 성읍이 취하여진 후 약 한 달이 되기 전까지는 무너지지 않았다) 이 커다란 재난 때문에 처녀 시온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애곡하게 하라." 이것은 느헤미야가 훨씬 이후에 애곡한 것이었다(느 1:3, 4). "밤낮으로 눈물을 강처럼 흘릴지어다. 중단하지 않고 울며 스스로 쉬지 말고 네 눈동자도 쉬게 하지 말지어다." 이것은 다음을 의미한다.

1. 재앙은 계속될 것이다. 또한 슬픔의 원인은 자주 되살아날 것이다. 그리고 그들 자신을 슬프게 하기 위한 새로운 일들이 밤낮으로 그들에게 주어질 것이다.

2. 그들은 하나님의 손 아래에서 점차로 무감각해지고 둔해지는 것이 어느 정도 적절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교만과 굳는 마음이 충분히 겸손하고 부드럽게 되기까지 그들의 영혼을 아직도 더 괴롭게 하는 것이 요청될 것이다.

Ⅲ. 슬픔의 원인들이 여기에서 주어진다. 애곡해야 할 재난들은 대단히 독특하게 그리고 동정적으로 서술된다.

1. 대다수의 백성들이 매우 심한 심판인 기근으로 멸망한다. 그리고 그 심판 아래 떨어지는 사람들의 경우는 가련하다. 하나님은 얼마 전에 가뭄과 식량 부족을 통하여 그들을 바로 잡으셨었다(렘 14:1).

그러나 이런 정도의 낮은 심판으로는 그들을 회개로 이끌지 못했다. 그러므로 지금은 하나님께서 포위의 긴장으로서 그들을 이 극한 상황으로 몰아 넣으신다. 그것은



(1) 그 자녀들이 그 어머니의 품 속에서 굶주려 죽었다. "자녀와 젖먹는 아이들은" 순수하고 아무런 힘이 없는 상태이므로 "상한 자처럼" (12절) "길거리에서 혼미할 때" (11절) 가장 먼저 구원받을 권리가 있다. 그들을 위하여 주어질 식물이 없기 때문에 굶주려 죽는 이들도 칼에 찔려 죽는 이들과 같이 틀림없이 죽었다. 많은 아이들이 먹을 곡식과 그들을 소생시킬 포도주를 구하여 그들의 가난한 어머니에게 울부짖으며 누워 있다. 그들은 포도주로 양육을 받아 왔기 때문에 이제 그것을 원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 줄 것이 아무 것도 없으므로 결국엔 "그들의 혼이 그 어미의 품 속으로 쏟아진다." 그리고 그들의 마지막 숨을 쉬는 것이다. 이것은 다시 언급되어진다(19절). "각 길머리에서" 굶주려 "쇠약하여진다." 그러나 이것이 최악의 경우는 아니다.

(2) 자기 어미의 손으로 죽임 당하고 먹혀지는 어린아이들이 있는 것이다(20절).

식량이 부족함으로 그 부녀들은 그들이 죽게 되었을 때 그 자신들의 "몸의 열매" 즉 "손으로 받든" 그들의 자녀들까지도 먹었다(시 28:53). 이와 같은 것이 사마리아가 포위되었을 때에도 행하여졌었다(왕하 6:29). 이러한 극한 상황, 아니 이러한 야만은 기근으로 인하여 초래되었다. 우리는 풍부함으로 우리 자신을 위하여서 뿐 아니라 우리 자녀들을 위해서도 필요한 식물을 갖고 있다는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자.

2. 많은 사람들은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을 삼켜버리는 칼날로 인하여 죽었다. 특히 칼이 갈대아인과 같은 잔인한 적들의 손에 돌려졌을 때 그들은 칼에 죽었다.

(1) 그들은 사람을 가리지 아니하고 죽였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모든 사람들 중에서 가장 구별이 되어졌던 사람들 또한 세상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자들은 보호를 받을 것이라고 하였지마는 그들까지도 차별없이 죽음을 당하였다. 그들은 홉니와 비느하스같이 그들의 처소도 아니고 전쟁 마당에서도 아닌, 그들이 피난할 수 있으리라 희망하였던 그들의 직무 장소인 성소에서 죽음을 당하였다.

(2) 그들은 연령을 가리지 아니하고 죽였다. 어리거나 노쇠한 사람이라고 해서 칼의 취함으로부터 면제되지 아니하였다. 그들은 다 똑같이 칼로 "멸하였다." "아직 무기를 들 수 없는 어린 사람과 일을 하지 못하는 노인들도 매장할 어떤 친절한 손길을 만날때까지 길바닥에 엎드려졌고 죽음을 당했다."

(3) 그들은 성(性)을 구별하지 않고 죽였다. "내 처녀들과 소년들이 칼에 죽었나이다." 우리가 읽은 가장 야만적인 군인들의 행위에서도 처녀들은 전리품으로 남아 있었다(민 31:18; 삿 5:30). 그러나 여기서는 처녀들도 소년들과 같이 칼에 죽음을 당하였다.

(4) 이것은 여호와의 행하심이었다. 그는 이렇게 차별없이 칼이 멸망시키도록 묵인하셨다. "주께서 진노하신 날에 살육하셨나이다." 왜냐하면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죽이시기도 하고 살리시기도 하는 이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음의 것들은 대단히 가혹하다. 주께서는 "죽이시되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셨나이다." 그의 영혼은 "이스라엘의 재난으로 인하여 슬퍼한다." 이같이 잔인하게 행한 원수들은 하나님께서 소집하시고 소환하셨다(22절). "주께서 두려운 일을 사방에서 부르시기를 절기에 무리를 부름같이 하셨나이다. 내게 이같이 두려운 자들은 갈대인들이다." 지금 원수들은 전에 절기날에 그러하였던 것처럼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붐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 수에 아주 압도되었고 아무도 도망하거나 살아 남는 사람이 없었다. 예루살렘은 완전한 도살장이 되었다. 어머니들은 오랫동안 그들이 그렇게 돌보고 고통을 같이 했으며 그렇게 자상하게 해 주었던 아이들이 이렇게 비인간적으로 갑자기 죽음을 당하는 것을 보고서 가슴이 찢어졌다. "내 손에 받들어 기르던 자를 내 원수가 다 멸하였나이다." 마치 그들은 살인자들을 위하여 출생된 것 같고 도살자들을 위한 양과 같았다(호 9:13). 그들 모두의 어머니였던 시온은 그들이 그의 뜰에서 양육을 받고 성서의 교훈을 받았던 이들이 이렇게 먹혀짐을 보고서 애곡하였다.

3. 그들은 거짓 선지자들을 속였다(14절). 이것은 예레미야가 오래 전에 슬퍼하고 큰 관심을 가지고 주목하여 보았던 것이다(렘 14:13). "아! 여호와여 그들이 말하기를 너희가 칼을 보지 아니하겠고." 여기에서 그는 그의 애가 중에 이것을 삽입한다. "네 선지자들이 네게 대하여 헛되고 어리석은 묵시를 보았으므로" 그들은 백성을 위하여 또한 백성에 대하여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발견한 것처럼 가장하고 어마어마한 환상을 본 것처럼 가장하여 그것을 그의 말씀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헛되고 어리석은 것이다. 그들의 환상은 모두 다 그들 자신의 공상이다. 그리고 만일 그들이 어떤 환상을 받았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다만 그들의 미친 두뇌의 소산이거나 열이 오른 상상의 산물이다. 그것은 그들이 게으르고 주제넘은 자신의 행동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아니 그것은 그들이 가장했던 환상이 위조품이고 가짜였다는 것을 그들 자신이 알았을 것임이 거의 틀림없다. 그리고 그들이 백성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에게 관심을 갖게 하기 위하여 백성들을 고의적으로 속여서 다만 빛깔로만 사용하였다는 것을 그들 자신이 알았을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예언자가 아니고 백성들의 예언자였다. 하나님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셨고 그들은 하나님의 심정을 따르는 목자도 아니었다. 그러나 백성들은 그들을 예언자로 세우고 이 거짓 예언자들이 해야 할 말을 말해 주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백성들의 마음을 따르는 예언자들이다.

(1) 예언자들은 백성들에게 그들이 회개하게 하고 그들의 파멸을 예방하기 위하여 그들의 허물을 말해야 하며 그들의 죄를 보여 주어야 한다. 그러나 이 예언자들은 그런 말은 사랑과 헌물을 잃게 할 것임을 알았고 그들은 그들 자신들을 동시에 책망함이 없이 청중들을 질책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백성들의 죄악을 드러내지 아니하였다." 그들은 스스로가 죄악을 보지 아니하였다. 만일 보았다고 하면 그들은 그 안의 악과 그 위험을 조금 밖에 보지 못했고 그러므로 그들이 그것을 말하는 것이 그들의 불의를 제거함으로서 포로에게 돌이키는 수단이었다 할지라도 그것을 백성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다.

(2) 예언자들은 그들 위에 오고 있는 하나님의 심판을 백성들에게 경고하였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거짓 경고만 보았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그들에게 온 것으로 가장한 말씀이 거짓임을 알았다. 그리고 거짓으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세속적인 안전으로 그들을 만족시킴으로서 순수하게 행동하였으면 예방할 수 있었던 추방을 초래하였다.

4. 그들의 이웃들은 그들을 비웃었다(15절). "지나가는 자는 다 너를 향하여 박장했다." 예루살렘은 이웃 나라들 사이에 위대한 모습을 이루었고 위대한 이름을 얻었으며, 위대한 세력을 가졌었다. 그는 주변에 있는 모든 나라에 공포와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이 성읍이 이렇게 쇠약해져서 성이 함락될 때 그들은 모두 기뻐 날뛰었다. 인간들은 이 같은 경우에 이러한 경향이 있다. 그들은 예루살렘이 이전에 뽐내던 것으로부터 떨어진 것을 보고 기뻐하면서 "비소하고 그들의 머리를 흔들었다. 사람들이 온전한 아름다움이라고 부르던 성이 이 성이냐?(그들이 말하기를)(시 50:2) 그러던 것이 지금은 얼마나 온전히 흉한 모습이냐? 지금은 그 모든 아름다움이 어디에 있느냐? 천하의 희락이라 일컫던 성이 이 성이냐?" (시 48:2)

다른 어떤 곳보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선물을 받아 즐거워하던 성이 이 성이냐? 그리고 이 성이 온 땅의 기쁨이냐? 모든 그 기쁨과 영광이 지금은 어디 있느냐? 이와 같이 사람들의 다른 재난들을 웃음거리로 만들고 고통받는 자들에게 더 많은 고통을 추가한 것은 커다란 죄이다.

5. 그들의 원수들은 의기양양하였다(16절). 예루살렘에 대하여 불행을 원했지만 겉으로는 평화를 기원했던 이들이 이제는 전에 감추었던 그들의 악의와 앙심을 드러낸다. 이제 그들은 "그들의 입을 벌리며" 아니 그들의 입을 넓히며 조소하고 분개하며 "비소하며 이를 간다." 그들은 예루살렘을 정복한 승리를 기뻐한다. 그리고 그들이 예루살렘의 주인이 됨으로 많은 전리품을 얻었으므로 즐거워한다. "우리가 저를 삼켰도다. 그것은 우리가 행한 것이요, 우리가 얻은 것이다. 그것은 모두 우리의 것이다. 예루살렘은 더 이상 전과 같이 재판자가 되거나 두려움이 되지 아니할 것이다. 우리가 바라던 날이 과연 이 날이라. 우리가 얻기도 하고 보기도 하였다.

아 우리는 그렇게도 그것을 갖기를 원하였었다."

교회의 적들이 파괴하기 위하여 충격을 가하고 따라서 이 파멸을 기뻐 날뛰기가 쉽다는 것을 주의하라. 그러나 그들은 자신이 속았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왜냐하면 "음부의 문이 교회를 이기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6. 이 모든 것에 있어서 그들의 하나님은 그들에 대항하여 나타나셨다(17절). "여호와께서 이미 정하신 일을 행하시고" 예루살렘의 파괴자들은 "위로부터 그들에게 주어지지 않았으면 예루살렘을 파괴할 힘을 가질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손에 있는 칼일 뿐이다. "내버리시고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이 논쟁에 있어서 우리는 우리에게 향하시는 하나님의 연민의 통상적인 예를 가질 수 없었다. "원수도 너를 인하여 즐거워하게 하며" (욥 30:1) "너의 대적의 뿔을 높이 들리게 하셨도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힘을 주시고 자랑거리를 주셨다. 하나님이 그들의 원수가 되는 이것은 실로 가장 괴로운 고난이다. 그러나 그 아래서 인내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가장 강한 논쟁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것에 복종해야 하도록 되어 있다. 왜냐하면



(1) 그것은 하나님의 목적의 실행이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이미 정하신 일을 행하셨다." 그것은 신중하고 심사숙고하여 결정된 것이고 경솔하거나 성급한 결정에 의한 것이 아니다. "그가 너희에게 재앙을 계획했도다" (렘 18:11).

우리는 그 의사에 정확하게 응답할 수 있도록 계획된 것임을 확신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 대하여 고안하신 것은 그들을 위하여 설계하신 것이다. 결국은 그러한 것임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2) 그것은 하나님의 예언의 성취이다. 그것은 성서의 성취이다. 하나님은 그가 옛날에 말씀하신 것을 이제 실행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그의 율법을 그들에게 주실 때에 그들이 그 율법을 범할 때에 그들에게 과하여지는 심판이 무엇인가를 그들에게 확실히 말씀하셨다. 그리고 이제 그들은 선언한 율법을 어기는 죄를 범하였다(레 26:16). 그의 교회에 관한 하나님의 모든 섭리에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말씀을 성취하신다는 사실에 유의하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손의 심판과 그 입의 말씀의 심판시에는 정확한 일치가 있으며 이 둘을 비교해 보면 이 둘은 서로 설명하고 예중하기 때문이다.

Ⅳ. 이 애가들의 치료를 위한 위로가 여기에서 나타나며 처방되어진다.

1. 이 위로들은 찾아지고 요청되어진다(13절). 이 예언자는 이 경우에 그에게 말할 적당하고 타당할 말을 발견해 내려고 애쓴다. "처녀 시온이여 무엇으로 네게 비교하여 너를 위로할꼬? 우리는 슬퍼하는 재앙을 만난 사람들을 위로하기를 힘써야 한다는 사실에 유의하자. 우리의 열심이 그들을 최악의 상태로 만들었을 때 우리의 지혜는 그들을 바로 잡고 최상의 상태로 만들도록 노력하여야만 한다.

우리는 우리의 고난받는 친구들에 대한 우리의 동정이 그들의 위로가 되도록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제 고난의 상황 중의 위로에 대한 두 개의 가장 일반적인 총론을 여기에서 시도하여야 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파악되지 아니할 것이기 때문에 시도되는 것이다. 우리는 보통 말로서 우리의 친구들을 위로하려고 노력한다.



(1)그들의 경우는 유일한 것도 아니고 전례가 없지도 않다. 그들보다 더 고통이 컸던 사람들과 더 무거웠던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고. 그러나 예루살렘의 경우는 이런 논쟁을 허락하지 않는다. "무엇으로 내가 너처럼 되며, 무엇으로 너와 동등하게 되어 너를 위로할 수 있으리요?" 어떤 도시와 나라의 슬픔이 너의 것과 동등할 수 있습니까? 어떤 증거를 내가 말하여 너의 이 비참한 상태를 말해 줄 실례를 증명할 수 있겠는가? 아! 아무 것도 없도다. 너의 슬픔 같은 슬픔이 없으니 이는 그 영광이 너와 같은 자가 없기 때문이다.

(2) 우리는 그들의 경우는 절망적은 아니라고 말한다. 쉽게 치료받을 수 있다고. 그러나 여기에 인간의 가망성이라곤 용납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너의 불화는 바다와 같이 크며," 가끔 바다와 육지는 불화한 것 같아서 복구될 수가 없고 점점 더 넓어만진다.

네가 상처를 입었으니 "누가 너를 치료하리요?" 인간의 지혜도 능력도 이렇게 산산이 부서진 상태의 황량함을 복구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이러한 통상적 강장제들을 투약하는 것은 쓸 데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2. 처방된 치료법은 그들 자신이 그들이 하나님께서 범한 죄를 회개하는 기도로서 하나님께 말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도는 즉시해야 하며 끈질기게 해야 한다(19절). "너는 땅으로부터, 너의 절망으로부터 일어나 밤중에 부르짖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이 잠들어 있을 때 기도자는 깨어 있어서 무릎을 꿇고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하나님께 성가시게 졸라대야 한다. 밤의 사경 중에 "초경에 일어나" (네 눈이 "야경이 깊기 전에 깨어 있게 하라." 시 119:148) "네 마음을 여호와 앞에" 물처럼 쏟아 놓으며 자유롭게 그리고 완전하게 기도하라. 네 마음을 열고 너의 경우를 하나님께 펼쳐 놓으며 성실하고 진실되게 기도하라.

거룩한 바램과 기대로 "손을 주를 향하여 들고 네 어린 자녀의 생명을 위하여 기도하라." 이 불쌍한 어린 양들은 그들이 무슨 죄가 있는가? (삼하 24:17) 너는 이 말을 하라(20절). "여호와여 감찰하소서. 눠게 이같이 행하셨는지요?" 누구에게 이렇게 대우한 적이 있는지요? 그들은 당신의 백성이 아니며 당신의 친구 아브라함과 당신이 선택하신 야곱의 자손이 아닙니까? 주여 긍휼을 베풀어 주소서!

주의할 것은 기도는 모든 아픔을 극심한 아픔까지도 고통을 가라 앉히는 약이 되며 모든 질병을 가장 비참한 질병까지도 치료하는 약이 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기도할 때 우리가 할 일은 명령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지혜와 뜻에 승복하는 일이다. 우리의 처지를 하나님께 말씀드리고는 하나님께 그것을 맡겨야 한다. "주여 보시고, 살피소서. 그리고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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