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를 구함(예레미야 14:1-9)
1절은 14장 전체의 표제이다. 본장 전체가 실로 가뭄에 대한 것이지만 그 대부분은 기근에 대한 선지자이 기도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가뭄에 대하여 예레미야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고 말한다해서 부적절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열납되는 기도는 전부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넣어 주심으로써 입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상달되는 말은 우리의 것이 하나도 없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먼저 그의 말씀이 되지 아니한 것은 그에게 이르지 못하는 때문이다.
Ⅰ. 재난을 슬퍼하는 자연계의 언어가 여기에 구사되고 있다. 하늘이 놋같이 되어서 이슬을 내리지 않게 되면 땅은 철이 되어 산물을 내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비탄과 혼란이 천지에 미만하였다.
1. 그 땅의 백성은 전부가 눈물에 젖었다. 그들의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를 망쳐 보라. 그러면 그들의 모든 희락이 그치게 될 것이다(호 2:11, 12). 그들의 모든 기쁨은 수확의 기쁨 곧 곡식이나 포도주의 즐거움과 함께 사라지고 만 것이다. 유다가 슬퍼함은 죄악을 인함이 아니라 환난 때문이며 하나님의 은총이 철회됐다고 해서가 아니라 비가 내리지 않아서 이다. 성문의 무리 즉 성문을 출입하는 자들은 생명의 유지에 필요한 물자의 부족과 이 심판의 치명적 결과가 계속될 것에 우려 때문에 모두 파리하게 보이고 쇠약하게 되었다. 이전에는 이 성문이 각 성읍으로 양곡을 공급할 때 거쳐가는 관문이었다. 그러나 딴 나라에서 양식을 구하기 위해 그 성민이 떠나가고 있는 이제는 그 모습이 침울하지 그지없다. 성문에 앉아 있는 자들조차 기진맥진해 있다. 그들은 땅에서 검으며(우리 성서:애통하니) 상주처럼 검은 복장으로 다니고 성문의 불쌍한 걸인처럼 땅에 앉으며 음식을 못먹어 그 얼굴이 검되 숯보다 더 검다(애 4:8). 기근은 검장 말로 묘사되고 있다(계 6:5). 그들은 거리를 따라 걸을 힘이 없어서 땅에 엎드러진다." 예루살렘의 부르짖음이 위로 오르도다." 즉 성민들이나(도시는 밭에서 나는 것으로 공궤받기 때문에) 전국 각처에서 온 사람들이 비를 빌기위해 예루살렘에 회집하였다고 해석하는 이도 있으나 나는 이것이 저희 기도의 부르짖음이라기 보다 저희 고통의 절규요 저희 죄악의 부르짖음이라고 해석하고 싶다.
2. 그 땅의 내노라 하는 자들은 이 심판으로 뼈저린 고통을 느꼈다(3절). 귀인들은 자기 사환들(원문:작은 자들)을 보내어 물을 길으라 하였다. 그들은 아마 자기 자식들을 보냈을 것이다. 종을 거느릴 여유가 없었으므로 자기 종들과 헤어지지 않을 수 없었던 때문이다. 또 그들은 자식이 어릴 때 훈련시키고 노동을 시키고 싶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이와 같이 어려운 시기에는 더욱 그럴 필요가 있었다. 우리는 아합 왕과 그의 시종장 오바댜가 이와 같은 곤경에 놓이게 되자 몸소 물을 구하러 다닌 사실을 기억한다(왕상 18:5, 6). 사환이란 하급 관리를 뜻한 것이다. 귀인들은 이들을 보내어 물을 구하려고 하였다. 물이 없이는 살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은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그들은 빈 그릇으로 돌아 왔다." 샘은 말라붙어 있었다. 마른 샘을 축여 줄 비가 오지 않았던 까닭이다. 그렇게 되니 그들을 보낸 주인들은 실망과 함께 부끄럽고 근심하였다. 그들은 자기 죄를 부끄러워하거나 죄책감에 근심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과 높은 지위만 있으면 회개 따위는 자기들과 관계가 없는 것으로 생각하여 말씀의 책망에도 불구하고 겸비하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로 하여금 자기들이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던 것을 부끄러워하게끔 조치를 취하셨다. 그들은 지옥 이편에서 조차 자기들의 고관대작으로도 한 방울의 물을 사서 혀를 시원하게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는 이 한재에 대한 기사를 읽고 물의 고마움에 대해 감사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발의 괴롬을 겪지 않고서도 물의 귀중함을 평가할 수 있도록 깨달음이 있어야 하겠다. 가장 필요한 것이 가장 풍부하다는 것은 놀랍지 않은가!3. 한발에 가장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즉각적인 타격을 입은 자는 농부였다(4절). 밭가는 자가 부끄러워한 것은 땅이 너무나 메마르고 단단해져서 쟁기가 들어가지도 않았으며 지면이 너무 갈라지고 균열이 심하여 경작이 필요성마저 없는 듯이 보였기 때문이다. 농부들이 놀고 있는 것이 부끄러웠다. 그들은 할 일도 없었고 따라서 기대할 것도 없었다. 게으른 자는 추위 때문에(한문 개역:가을에, 잠 20:4) 밭갈지 않으면 하면서도 자신의 미련함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부지런한 농부는 불볕의 더위 때문에 밭갈 수 없게 됐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재난을 부끄러워하고 있다. 농부는 하나님의 섭리에 얼마나 직접적으로 의존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그러므로 농부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섭리에 시선을 돌리고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밭고랑에 물을 대 주지 않으시면 그들은 소망 가에 밭갈 수도, 심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시 65:10).
4. 야수들의 경우조차 매우 가련하였다(5,6절). 인간의 죄악은 하등 동물까지도 신음하게 만들 심판을 땅 위에 초례한다. 선지자는 이 점을 주목하여 하나님께 자비를 바라는 탄원으로 삼고 있다. "읍다와 예루살렘은 범죄하였으나 암사슴과 들나귀는 무슨 잘못을 저질렀읍니까?" 암사슴은 싹싹한 동물로서 사랑스럽고 사랑이 많으며 특히 제 새끼한테는 자애롭다. 그러나 암사슴이 본능과는 달리 갓 낳아서 어미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새끼를 놔두고 풀을 찾아 딴 곳으로 떠나 갈 만큼 그 상황을 악화되어 있는 것이다. 또 풀을 찾지 못한다면 젖을 빨릴 수도 없기 때문에 새끼는 내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암사슴을 슬프게 한 것은 어미 자신을 위한 풀이 없었다는 것 보다도 새끼에게 줄 게 아무 것도 없었다는 점이었다. 가족을 위해 마땅히 예비해 두어야 할 것을 자신의 욕망 추구에 탕진해버리는 자들은 이것을 보고 수치를 느껴야 할 것이다. 암사슴은 새끼를 낳으면 그 괴로움을 지내어 버린다고 하는데도(욥 39:3) 계속해서 새끼 걱정을 한다. 그러나 욥기의 그 다음 기사에 의하면 암사슴은 곧 유종의 미를 거두게 되는데 이는 그 새끼들이 쉬 장성하여 제 어미를 더 이상 괴롭히지 않기 때문이다(욥 39:4). 그렇지만 여기에서는 제 새끼에게 아무 것도 줄 수 없다는 것이 무엇보다 암사슴의 큰 어려움이 되고 있다.
아니, 아마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들나귀한테조차 모두가 연민의 감정을 품게 된다. 들나귀의 처소는 기껏해야 짠 땅이 고작이었다(욥 39:5, 6). 그러나 여기서는 그 서식처가 너무도 뜨거워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정도이다. 그래서 들나귀는 될 수 있는 한 높은 곳으로 올라가(고지의 공기를 극히 시원하기에) 너무 더워서 끊임없이 헐떡이는 시랑같이 바람을 들이마신다. 그 들나귀는 지탱하게 해 줄 풀이 없으므로 그 눈은 아득해 하며 그 힘도 탈진된다. 길든 나귀는 소유주에게 소용이 되는 까닭에 자기 구유를 마음대로 사용하며(사 1:3) 수고에 대한 댓가로 사육받게 되는 반면 어거하는 자의 지르는 소리가 들리지 아니하는 들나귀는 공기를 먹고 살 수밖에 없으며 섬기지 않는 데 대한 보답을 톡톡하게 받는다.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게 하라(살후 3:10).
Ⅱ. 불의를 애도하고 재난을 하나님께 호소하는 은혜의 언어가 여기에 나오고 있다. 백성들은 자진하여 기도하려고 하진 않지만 선지자는 몸소 그들을 위해 기도함으로써 그들이 자기 자신들을 위해 기도하도록 자극시키며 성공되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그들의 입에 사용하기 가능한 말을 넣어 주고 있다(7,9절). 이 기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죄에 대한 겸손한 고백. 심판의 예방이나 제거를 위하여 기도하게 될 때 우리는 그 벌을 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언제나 인정해야 한다. 아니, 그 심판에 비해 우리는 천만 배나 더 악하다고 자인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죄에 대한 변명으로 벌의 경감을 기대할 수가 없다. 우리는 우리의 죄에 대한 변명으로 벌의 경감을 기대할 수가 없다. 우리는 우리의 죄가 우리를 쳐서 증거한다고 고백하지 않으면 안 된다(사 52:12). 우리의 죄는 우리를 치는 증인이며 진정으로 회개하는 자가 그런 점을 수긍한다. 죄악은 증거한다. 왜냐하면 죄는 분명하고 확실한 까닭이다. 우리는 혐의를 부인할 수 없다. 죄는 우리가 유죄 선고를 받도록 쳐서 증거한다. 죄는 우리의 현재적 수치와 당황 그리고 미래의 저주를 지켜본다. 죄는 우리가 자신을 위해 변명하고 탄원하는 모든 것에 반증을 제시함으로써 그 주장을 번복시켜 버린다. 그래서 우리는 고소할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불리한 답변까지도 한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훌륭함을 자랑하고 우리 자신의 의를 신뢰하면 우리의 불의가 우리를 쳐서 증거하고 그렇지 않다는 것을 증명한다.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고난을 주심으로써 부당하고 불친절하게 다루신다고 그와 언쟁하게 되면 우리의 불의가 우리의 부당성에 대하여 증거할 것이다. 이는 우리의 타락함이 많으며 우리의 배반은 크고 우리는 주께 범죄하였기 때문이다. 즉 우리의 죄가 너무 무수하여 감출 수 없음은 우리의 타락함이 많기 때문이며 너무 극악하여 용서를 빌 수 없음은 주께 대한 범죄인 까닭이다.2. 자비를 열심히 간구하고 있다. "우리의 죄악이 우리에게 대하여 증거할지라도 주는 일하소서. 우리 형편은 당신의 은총을 꼭 필요로 하고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불의가 은총의 허여를 반대하여 증거하더라도 주께서는 은총을 내리시옵소서!" 그들은 자기들이 무엇을 행했는지 세세히 말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참회자와 구걸자답게 그들은 문제를 하나님께 의뢰하고 있다. "주의 보시기에 좋은 데로 우리에게 행하소사" (삿 10:15). 그러나 이 말씀은 "주께서 이런 모양으로 이 때에 일하소서" 란 말이 아니라 "주의 이름을 위하여 일 하소서" 라는 말이다. 즉 "주의 이름을 극히 영화롭게 할 일을 하소서." 기도시에 우리의 최선의 간원이 되는 것은 곧 하나님의 영화로우신 이름을 위해 드리는 말씀이란 점에 유의하자. "주여 당신의 자비가 확대되고 당신의 약속이 성취되며 당신의 세력이 이 세상에서 유지되도록 일하소서. 우리 스스로는 아무 것도 자중할 게 없습니다. 모든 것은 주 안에서 주장할 수 있을 뿐입니다."
이 기도에서 또 다른 탄원이 나온다. 그것은 매우 겸손한 탄원이다(9절). "우리는 버리지 마옵소서. 주의 은총과 임재하심을 거두지 마옵소서." 우리가 갖고 있는 어떤 것, 우리의 모든 육체적 위안물이 소실될까봐 전전긍긍하는 것이 현실이지만 우리는 그 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떠나가실까봐 두려워해야 하며 그렇게 하시지 마시기를 기원해야 한다.
3. 그가 하나님께 극히 애상적으로 탄원하고 있는 것은 이 백성이 하나님과 맺고 있는 관계와 하나님께 두고 있는 그들의 이해(利害) 그리고 이에 근거한 그들의 기대 등이다(8,9절).(1) 그들은 하나님을 자기들에게 대한 구조 의무자로 간주하고 있다. 비록 그들이 저지른 죄악이 자기들을 구출해 주셔야 한다고 생각할 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옛날에 모세처럼 예레미야 선지도 자기 백성의 경우를 활용하는 데 최선을 다하려고 애썼다. 그러므로 그는 그들의 큰 죄를 많이 범하였다는 것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출 32:31) "주는 이스라엘의 소망이시라" 고 주장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에게 소망을 두라고 백성들을 격려하셨다. 누차 스스로를 이스라엘의 하나님, 이스라엘의 반석,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로 부르시는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직접 이스라엘의 소망으로 되셨다. 또 그는 소망이 될 자기 말씀을 이스라엘에게 주셨으며 그들로 그 말씀에 소망을 두도록 하셨다. 또 이스라엘에는 아직도 하나님 한 분만을 자기들의 소망으로 삼고 곤란할 때에 구원자로 되실 것을 고대하는 자들이 있으며 그들은 딴 어떤 자에게서 구원을 구하지 아니한다. "주께서 이 백성이 극히 곤란한 때에 구원자가 되신 적은 비일비재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어떤 경우에 처하든지 간에 전능한 구원자가 되시므로 하나님의 백성된 자는 최대의 역경을 당하더라도 그에게 소망을 두어야 마땅하다. 또 그 분만이 유일한 구원자이시기 때문에 그 분 혼자에게만 소망을 두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자. 그들은 이렇게 주장한다. "주는 우리중에 계십니다. 우리에게는 주께서 우리와 함께 임재해 계신다는 특별한 표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성전과 법제와 신탁입니다. 우리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라고 불리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께서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리라고 소망할 만한 자들입니다. 우리는 당신의 것이오니 우리를 구원하소서. 우리는 당신이 이름을 부르며 또 당신의 이름으로 불리워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재앙을 당하고 있다는 것은 곧 당신께서 자신의 소유를 구할 능력이 있는 분이시기라도 하듯 당신께 대한 수치를 나타냅니다." 선지자는 이제까지 신앙 고백을 한다고 하여 하나님의 심판이 면제되는 것은 아니하고 백성들에게 누차 말하였는데 여기서는 모세처럼 하나님께 그 점을 들어서 호소하고 있다(출 32:11) 자비의 하나님께는 현세적 벌에 대해서도 이토록 탄원할수가 있다. Valeat quantum Valcre potest-즉 무리하지 않는 데까지는 탄월을 활용하라.
(2)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구원을 위해 나타나시지 않음을 생각하고 그들은 비탄에 젖는다. 그들은 하나님을 불의한 분이라고 비난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이 왜 은혜로우셔야 하는지 그 이유를 들어서 겸손히 호소하고 있다. 그러지 않으신다면 다음 두 가지로 오인되실 것이기 때문이다.
[1] 자기 백성에게 무관심한 분으로. "애굽인들이 무엇이라고 이르겠읍니까? 그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소망이시요 구원자이신 분이 이스라엘을 염두에 두지 않으며 이 땅에서 낮선 자같이(한글 개역: 거류하는자 같이)되어 그 백성의 이해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다. 자기의 영원히 쉴 곳(시 132:14)이라고 부르던 그의 성전도 이제는 그렇지 않다. 그는 주막에서 하룻밤을 유숙하는 행인같이 자기 성전이 일을 묻지도 않고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는다."
하나님은 결코 그런 분이 아니시지만 때로는 자기 교회야 어찌됐건 상관하지지 않으시는 듯이 보인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제자들이 폭풍에 시달리고 있을 때 주무시고 계셨던 것이다.
[2] 그들에게 구원을 베푸실 수 있는 분. 원수들은 한때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들을 가나안으로 인도할 능력이 없는 고로 광야에서 죽게 하신다고(민 14:16) 말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여호와의 지혜나 능력은 소용이 닿지 않는다. 그는 놀라 벙벙하는 자 같으며(이지적 인물이면서도 놀라서 어쩔 줄 모르며 꾀가 다 해버린 자처럼)보다 힘센 자에게 제압당하여 구원치 못하는 용사 같다. 그는 비록 강력한 용력을 소유하고 있긴 하나 그 힘의 한계가 있는 자에 불과하지 않는가?" 고 말할 것이다. 이러한 말 중 어느 것도 하나님의 완전성에 대해 참을 수 없는 모욕이 된다. 그런데 "우리 중에 계시다고 믿는 하나님이 어찌하여 행인같이 하시나이까?" 전능하신 하나님이 어찌하여 놀라며 구원할 수가 없는 용사처럼 보이시는가? 기도시 우리 자신의 위안 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많은 관심을 나타내는 것이 우리에게 어울리는 태도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크신 이름에 대하여 어찌 하시렵니까?"
백성을 위해 슬퍼하라(예레미야 14:10-16)
여기서 하나님의 선지자간의 논쟁을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에 대한 소유주와 과원지기 사이의 논난과 비슷한 것 같다(눅 13:7). 소유주의 공의는 그 나무를 찍어버리라고 정죄하나 온화한 과원지기는 연기를 위해 중재하고 있다. 예레미야는 이 백성에게 자비로이 돌아와 주시기를 기도로써 하나님께 간절히 구하였다.
Ⅰ. 하나님께서는 선지자가 백성에게 은총을 베풀어주시도록 요청한 탄원을 기각하시고 그에게 그 탄원이 빛을 보지 못하리라고 설명해 주신다(10절). 하나님께서는 "내 백성에 대하여" 라고 말씀하지 않으신다. 그들이 자기와 맺은 언약을 파기하였으므로 자기 백성으로 인정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고 자기들 중에 그의 임재하심을 나타내는 표징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은 범죄하였고 하나님을 격노하시게 하여 물러가시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선지자는 이 점을 인정하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보와 희생을 통하여 그들에게 자비를 획득해 주고 싶어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선지자에게 다음과 같은 점을 말씀해 주신다.
1. 그들은 용서받기에 적격이 아니라는 것. 선지자는 그들의 타락함이 많다는 것을 시인하였다. 또 비록 그들의 부패가 무수하다고 하더라도 만일 그들이 들이킨다면 그래도 소망이 있을 터였다. 그러나 이 백성은 돌이키려는 기미를 추후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방황하였고 어그러진 길을 사랑하였다. 그들의 타락함은 그들에게 수치가 되고 고통이 되었어야 했는데도 그들의 취향이 되고 즐거움이 되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택하고 즐거워했던 타락은 그들을 멸망케 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길을 버리고 우상을 좇아 어그러진 길로 가는데 즐거움을 느끼면서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안식을 누리시도록 기대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들의 방황은 실수나 불가피하게 저지른 일이 아니었다. 그들은 어그러진 깊을 사랑한다. 죄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유리하여 방황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방황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은총을 상실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은총으로부터 완전히 끊어버리는 것은 바로 그들이 방황을 사랑한다는 점이다. 그들은 방황의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를 충고받았었다. 즉 하나의 죄는 또 다른 하나의 죄를 재촉하며 그들 모두를 파멸로 몰고 간다는 것을 누차 지적받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 경고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자기들의 발을 금하지 않았다. 그들이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거절한 것은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선지자나 심판으로도 그들의 범죄 추구를 억제하는 데 아무런 효험을 보지 못하셨다. 하나님께서 지금 그들에게 따지고 계신것은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그들에게 비내리시기를 거부하시는 것은 그들의 죄를 기억하시고 그 죄를 벌하시는 중에 계신 셈이다. 그들의 옥토가 이처럼 염밭이 된(시 107:34)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2. 그들은 자기들이 버린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받아들이실 것이라고 기대할 만한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는 것. 그들이 설사 금식과 기도를 해보고 비용을 들여서 번제와 희생을 드린다고 해도 용납되지 않을 터였다. "여호와가 그들이 받지 아니하신다" (10절). 즉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즐거워하지 않으신다" (원뜻은 그러함). 하나님의 대적들을 기뻐하고 하나님을 위한 예배나 모임 보다 오히려 하나님의 대적들을 섬기고 그의 모임을 더 즐거워하는 자들에게서 거룩하신 하나님이 무슨 즐거움을 얻으실 수 있겠는가? 금식은 회개와 개심을 표현하는 데 적합한 행위이다. 번제와 소제의 목적은 중보자에게 대한 신앙을 나타내는 데 있다. "그들이 이와 같은 방법으로 기도를 드리며 과거라면 으례 열납되었을 수단으로 제사를 드릴지라도 그것이 겸손하고 회개하는 가운데서 나오는 것이므로 그 부르짖음 소리가 아무리 크다고 해도 내가 그 부르짖음을 듣지 아니하리라. 또 그들을 받지 아니하리리 그들 개개인 뿐만 아니라 그들의 행위도 용납하지 않겠노라." 악인의 제사가 여호와께는 가증한 것이 되며 선을 행하는 자들만 열납된다는 말씀은 오래전부터 선포되었다(창 4:7).
3. 그들은 선지자가 해 주는 설교를 존중하지 않았으므로 선지자의 도고에 의한 모든 혜택도 상실하게 될리라는 것. 이것은 바로 선지자에게 반복해서 내리신 금지의 의미이다(11절).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복을 구하지 말라." 이 말씀은 앞서도 나왔다(7:16; 11:14). 이것은 백성들에게 대한 선지자의 호의로 표현하지 말라는 금지가 아니라-모세도 하나님께서 나대로 하게 하라고 말씀하신 뒤 이스라엘을 위해 계속 중재하였다. 출 32:10-그들이 율법에 청종하기를 거절하고 자기 귀를 돌리는 한 그로부터 좋은 결과를 기대하지 말라는 금지였던 것이다. 배척받을 사울의 운명이 "네가 그를 위하여 언제까지 슬퍼하려느냐?" (삼상 16:1)고 사무엘에게 하신 말씀으로 확정되었듯이 회개하지 않는 재의 업보는 이렇게 인준되었다(12절). "내가 이 기근뿐만 아니라 칼과 염병이란보다 쓰라린 심판으로 그들을 멸하리라."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전통에 화살을 많이 꽂아 가지고 계신다. 하나의 화살로 깨우침을 얻어 교환받지 않는 자들은 딴 화살로 멸망을 당하게 될 것이다.
Ⅱ. 선지자는 백성의 완고함에 대한 변명으로 또 다른 탄원을 제기하고 있다. 그것은 그들을 위한 변명에 지나지 않지만 선지자는 그들의 슬픈 처지를 중식시키는 데 도움이 될 만한 것이면 무엇이든 기꺼이 여쭈려고 한다. 그가 한 주장은 하늘의 선탁자로 자처하는 선지자들이 이 백성을 기만하였으며 그들이 죄의 길로 계속 향하는데도 평안하니 안심하라는 말로 백성에게 아부하였다는 것이다(13절). 선지자는 애통하면서 이 말을 하고 있다. "주 여호와여! 불쌍한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나오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다 즐겨 주목하는 듯합니다만 그들이 칼이나 기근을 보지 못하리라고 주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말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그 말이 당신께로부터 나온 것 인양 선지자의 온갖 엄숙함과 자신감으로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이곳에 계속 머무르게 하시고 여기서 너희에게 확실한 평강 곧 진리의 평강을 주시리라고 말합니다. 나는 그들과 반대로 말합니다만 나 혼자서는 중과부적입니다. 누구든지 자기에게 유리한 말을 곧이 듣기가 쉽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여! 그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살려 주옵소서! 그들의 인도자가 그들로 하여금 실족하게 하는 때문입니다." 만약 백성들이 이전에 거짓 선지자와 또 거짓 선지자의 식별법에 대해 경고를 받지 않았더라면 이 변명이 다소 설득력을 보유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거짓 예언자에게 현혹됐다고 해도 그것은 순전히 그들 자신의 잘못할 뿐이었다. 여기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 있다. 우리는 진실이 허용하는 테두리 안에서 악한 자들을 최대한 선의로 받아들이고 경우가 닿는 데까지 남을 자비로이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 곧 그것이다.
Ⅲ. 하나님께서는 이 탄원을 기각하실 뿐만 아니라 소경된 인도자들과 맹목의 추종자들을 함께 구덩이에 빠지는 자들로 정죄하신다.(마 15:14 참조).
1. 하나님께서는 입에 발린 말을 용언하지 않으신다(14절). "그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 예언을 하도다." 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예언하라는 위임을 받기는커녕 예언의 예자도 모르는 자들이다. "나는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고 그들에게 명하거나 이르지 아니하였다." 그들은 절대로 하나님의 심부름꾼으로 고용된 자들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자신을 그들에게 알리신 적이 없으셨다. 하물며 그들을 통해 백성들에게 자신을 알리셨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말이다. 여호와의 말씀은 한 마디도 그들에게 도달하지 않았으며 어떤 부르심도, 인종도 어떤 교훈도 그들 거짓 예언자들에게는 내리지 않으셨다. 더군다나, 백성들을 달래어 안도감 속에 잠재우라는 심부름을 그들에게 시켰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 아닌가! 인간들은 제딴에 괜찮은 줄로 믿고 사탄을 그들이 안심하도록 추어 주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러지 않으신다. 그것은 거짓 제시와 허탄한 것이다. 거짓되고 허무맹랑한 것은 허탄하고 무가치한 것임을 명심하자. 참되지 못한 계시는 아무리 즐겁다고 하더라도 아무 소용이 없다. 그것은 그들의 마음을 속이는 것이며 그들 자신의 뱃 속에서 나온 거미줄이다. 그들은 그 거짓 계시를 자신의 도피처로 삼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거미줄처럼 순식간에 일소되어 버리고 큰 속임수로 판명될 것이다. 자기 생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반대하는 자들은(하나님께서는 참으로 그렇다고 말씀하시지만 그들은 그렇지 않은 줄로 생각한다) 자기 마음을 속이는 가운데 행하는 자들이다. 그리고 그것은 자기들을 파멸시키는 것이 될 것이다.2. 그는 입발린 말로 호리는 자들에게 선고를 내리신다(15절). 백성에게 평강하다고 말함으로써 그들을 이렇게 기만하는 자들은 그들 스스로가 절대로 평안을 누리지 못한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그들은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그와 같이 말하였으므로 하나님께도 이러한 모욕을 가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심판을 면할 수 있다는 소망으로 남에게 아첨하여 안심을 시켰다. 그러나 그 심판을 맨 먼저 만나게 될 자들은 바로 그들일 것이다. 그들은 칼과 기근이 이 땅에 이르지 아니하리라는 것을 백성에게 보증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 자신이 칼과 기근으로 멸절당하게 될 때는 그들의 보증이란 것이 얼마나 무용지물인지 곧 드러나게 될 것이다. 자신의 안전도 보장하지 못하고 자신의 재난을 면할 만한 통찰력도 갖지 못한 주제에 어찌 남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으며 그들의 평강을 예언할 수 있으라! 죄의길로 행하면서도 무사하리라고 고대하는 죄인들에게는 가장 쓰라린 형벌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유의하자.
3. 하나님께서는 미혹당하는 자들 역시 같은 운명에 처할 것이라고 규정하신다. 그들의 거짓 예언을 받고 즐겨 속아넘어가는 백성은 칼과 기근으로 죽으리라(16절). 미혹당하여 믿지 않는 자들은 미혹하는 자의 온갖 사술로 인하여 하나님의 위협적 경고에도 움쩍달싹하지 않게 된다는 점에 주목하자. 기만하는 무리가 아무리 다른 말을 하더라도 칼과 기근은 도래할 것이다. 지옥 따위는 믿을 수 없다고 말하면서 뉘우치지 않는 죄인은 지옥의 저주를 면하지 못할 것이며 두럽지 않으리라고 하던 것 때문에 뜨거운 맛을 보게 될 것이다. 여기에는 이 백성이 칼과 기근에 엎드러진다는 것 뿐만 아니라 그들이 무시했던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기념물로서 말하자면 굴비엮듯 사슬로 매달릴 것이라는 말씀도 경고된다. 그들의 시체는 심지어 예루살렘 거리에 던짐을 입을 것이다. 누구나 예루살렘 거리는 구석구석 마다 그런 귀찮은 오물이 절대로 없으리라고 생각해야 마땅하다. 그런데 그들의 시체는 거기서 매장당하지 않은 채 버려져 있게 될 것이다. 사망자의 가장 가까운 친척은 마지막 사람의 도리로 그들을 장례지내 주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장례비를 부담할 수 없을 만큼 가난하거나 기아에 의하여 장례에 참석할수 없는 정도로 기진하였거나 아니면 너무나 비탄에 잠겨 그들은 장례지낼 마음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또는 너무나 육친의 애정이 결핍되어 매장의 예의조차 표하려 하지 않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악을 그들 위에 부으실 것이다. 즉 저희 악함의 형벌을 그들 위에 부으실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를 가득 담은 대접이 그들에게 쏟아지게 될 것이며(계 15:7; 16:1), 그것은 그들 스스로도 악한 것으로 여겨 싫어하던 것들이다. 죄인들이 고통에 사로잡히는 때에는 그 환란 속에서 악한 것이 자기들 위에 쏟아짐을 보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거짓 선지자의 악함이나 백성의 악함을 다 암시한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다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며 그들은 그 구덩이 안에서 서로의 불행한 위로자가 될 것이다.
계속되는 예레미야의 기도(예레미야 14:17-22)
유다와 예루살렘의 참상은 여기서 선지자의 애곡의 대상이 되어(17,18절) 그들을 위한 선지자의 기도와 중재를 유발시키고 있다(19절). 본인은 전자와 함께 후자도 하나님의 지시에 의한 것으로서 "너는 이 말로 그들에게 이르라" (17절)는 말씀은 중보와 애통을 다 가리킨다고 믿고 싶다. 그래서 이것은 그들을 위해 기도하지 말라는 지시(11절)의 철회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나오는 기도에서 분명한 한 가지 사실은 선지자가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요 5:16)는 말씀처럼 그 지시를 금지로 이해하지 않고 다만 하나의 기를 꺾는 행위로 이해하려 했다는 것이다. 다음 사실을 살펴보자.
Ⅰ. 선지자는 자기 조국의 패망을 슬퍼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애곡하라고 지시하신다. 이것은 그가 자신의 감정을 나타내 보임으로써 가능하다면 백성도 임박하고 있는 재난을 예견하고 감동을 받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예레미야는 그것을 자기 혼자 말할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도 말해야 했다. "내 눈이 눈물을 흘리리라" (17절). 그는 이와 같이 하여 다가오고 있는 칼과 딴 종류의 기근을 자기가 확실히 미리 보았으며 그 재난은 현재 그들이 신음하고 있는 것보다 더 비참한 것임을 그들에게 나타내 주어야만 되었다. 농촌에는 비가 오지 않아 그리하며 도시는 포위가 엄중하므로, 그러할 터였다. 선지자는 여기에서 마치 갈데아인의 공격에 수반되는 불행을 눈으로 보기라도 하는 듯이 말하고 있다. "딸이 아버지에게 소중하듯 내게 소중한 처녀, 딸 내 백성이 큰 파멸, 중한 창상 즉 여지껏 받은 어떤 것보다 크고 중한 파멸과 창상으로 망함이라." 들에는 칼에 살륙되어 너머진 자가 즐비하며 성안에는 많은 자가 양식 부족으로 죽어가고 있다. 이 얼마나 참혹한 장면인가! 거짓말로 아첨하던 거짓 선지자와 참 선지자들을 박해하던 악한 제사장들은 이제 자기 나라에서 추방되어 죄수나 포로로서 알지 못하는 땅을 두루 다닌다. 그들은 정복자들이 끌고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간다. 또 그들은 도망자나 방랑자로서 돌아다닌다. 그러나 그들은 어디를 가든 도피처와 안식처를 발견하지 못한다." 흑자는 이 말씀을 에스겔이나 다니엘 같은 참 선지자에게 대한 예언으로 이해한다. 그들 선지자들은 나머지 무리와 함께 비벨론으로 끌려갔던 것이다. 예레미야 선지는 이런 것을 예기하고 주야로 눈물을 흘렸다. 그는 이렇게 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이 흉한 날이 기필코 이를 것이며 그 날은 참으로 슬픈 날이 되리라는 것을 깨닫게 하려고 하였다. 동시에 그는 자기가 그런 재난의 날을 전혀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백성에게 납득시키려고 하였다. 하늘로부터 인허만 얻는다면 자기도 거짓 선지자들처럼 평강의 메시지를 백성에게 전하고 싶다는 것을 알리고자 하였다. 하나님인 비록 죄인에게 죽음의 고통을 주시지만 그 일을 기뻐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그 사역자들도 비록 하나님의 이름으로 죄인의 죽음을 선포하지만 그 일을 슬퍼하는 것이 어울린다는 점에 주목하자.
Ⅱ. 그는 그들을 위해 도고 하려고 일어선다. 하나님께서 돌아오사 마음을 돌이키실지 누가 알라? 생명이 있는 한 소망이 있고 기도드릴 여지가 있는 것이다. 백성 중에는 스스로 기도하지도 않고 선지자의 기도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자들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개중에는 보다 선한 감동을 받고 그와 함께 신앙 행위에 참여하려고 하며 그의 기도를 아멘하고 인치려는 자들도 더러 있었다.
1. 그는 저들의 통탄할 만한 상태에 대하여 하나님께 겸손히 간하고 있다(19절). 그들의 형편은 지극히 비참하였다.(1)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기대는 송두리째 무너졌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유다를 자기의 소유로 공언하셨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이 유다를 온전히 버리시고 축출하셨으며 앞으로는 어떤 관계도 인정치 않으시며 아무런 관심도 기울이지 않으실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시온이야말로 주의 심령이 사랑하시는 곳이며 하나님의 영원한 안식처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의 심령조차 시온을 싫어하신다.
(2) 그렇다면 저희의 딴 모든 기대가 무너진다고 해서 놀랄 일은 못된다. 그들은 강타를 당했고 많은 상처를 입었지만 치료를 받지 못했다. 그들은 평강을 바랐다. 폭풍이 지나고 오랜 비가 끝나면 으례 고요하고 좋은 날씨가 오는 법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좋은 것이 없었으며 사태는 점점 더 악화되었다. 그들은 치료받을 시간을 기다렸으나 숨쉴 시간조차 얻을 수 없었다. "보소서. 평강이 오리라고 기대하던 문에서 우리는 환난(한글 개혁 성서:놀람)을 보나이다. 주께서 보시니 그렇습니까? 주께서는 참으로 유다를 버리셨읍니까? 주께서 그렇게 하심은 지당합니다. 주의 심령이 시온을 싫어합니까? 우리는 그런 냉대를 받아 마땅합니다. 그렇지만 주께서는 노하신 가운데서도 결국 자비를 기억지 않으시렵니까?"
2. 그는 죄악에 대한 참회의 고백을 하고 있다. 이것은 그들 모두가 구사해야 할 언어였다. 그러나 이 말을 하는 자는 거의 없었다(20절). "우리는 우리 조상이 죄악을 인정하나이다. 우리이 땅에는 악이 충만했습니다. 우리는 우리 조상의 죄악을 인정하나이다. 우리는 그들의 불의를 흉내내었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에 대한 따끔한 맛을 봐야 마땅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주께 범죄하였다는 것을 아오며 또 그것을 인정하나이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우리에게 내리신 모든 일로서도 공의로우시다는 것을 우리가 인정하나이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죄를 고백하기에 주께서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는 가운데 신실하시도 공정하신 분이라는 걸 우리가 깨닫게 되기를 희망하나이다."
3. 그는 하나님께 노여워하지 마실 것을 애원하며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명예와 약속에 호소하고 있다(21절). 그의 탄원은 "우리를 미워하지 마옵소서" 라는 것이었다. "주께서는 우리에게 고난을 입히실지언정 우리를 미워하시지는 마옵소서. 주께서 손을 돌이키사 우리를 대하시더라도 마음을 그리하지는 마옵시며 주의 마음을 우리에게서 멀리하지 마옵소서." 이것이 바로 그의 탄원이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당연히 자기들을 미워하실 수는 있으시며 자기들이 스스로 하나님 보시기에 미운 존재가 된다는 것을 자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우리를 미워하지 마옵소서" 라고 기도할 때는 "우리를 다시 주의 온총 속으로 받아들이소서. 주께서는 심령으로 시온을 싫어하지 마옵소서(19절). 우리가 피우는 향을 가증한 것으로 여기지 마소서" 란 것을 의미한다.
(1) 그들은 하나님의 명예와 그를 통해 자기를 알리신 성서의 명예와 그의 모든 이름보다 크게 하신다(시 138:22) 그의 말씀의 명예에다 호소하고 있다. "주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미워하지 마옵소서. 바로 주의 그 이름으로써 우리는 불리우며 또 우리는 바로 그 이름을 부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지성소의 영광을 들어 탄원하고 있다. "여호와여 우리를 미워하지 마옵소서. 그것은 주의 영광의 위를 욕되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성전은 원시부터 높이 계신 영화로우신 보좌라고 불리운다. 렘 17:12). 온 땅의 기쁨이 되었던 곳을 놀람과 모욕거리가 되게 하지 마옵소서. 우리는 치소를 입어 마땅하지만 당신께는 수치가 돌아가게 마옵소서. 성전이 황무하게 됨으로써 이방인들이 그곳서 예배되던 분을 성전도 보호할 능력이 없으며 보호할 의사가 없거나 갈데아 신들을 감당하지 못할자로 비난할까 하나이다." 선한 사람들은 어떤 개인적 이익과 자신의 관심사보다 종교의 명예와 세상에서의 신앙 고백에 마음을 더 쓴다는 데 주목하자. 그런 마음에서 나오는 기도야말로 강력한 청운이되며 크게 믿음을 뒷받침하는 것이 된다. 우리는 하나님이 땅에서 자기 영광의 의를 욕되게 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걸 믿을 수 있다. 하나님은 한 가지 섭리로써 자기 보좌의 영광이 가리우게 되면 반드시 또 다른 섭리로써 곧 자기 보좌가 빛을 발하게 하시며 전보다 더욱 빛나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결국 명예에 있어서 손상받는 분이 되지 않으실 것이다.
(2) 하나님의 약속을 들어 호소하고 있다. 그들은 겸손하면서도 대담하게 이 점을 하나님께 상기시키고 있다. "우리와 세우신 주의 언약을 기억하시고 그 언약을 패하지 마옵소서."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성실성을 불신한다거나 자기들에게 하신 그의 약속을 상기시켜 드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였다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하신 말씀을 가지고 자기 자신과 변론하려고 하셨다. 그들은 이 점을 들어 하나님과 변론할 자유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내가 내 언약을 기억하리라" (레 26:42).
4. 그는 고마운 비로 하나님께 대한 의존을 고백하고 있다. 이때 그들에게는 강우량이 부족하였다(22절). 그들이 언약으로 자기들에게 하나님되신 분에게서 받을 이익을 상실했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자연의 하나님되시는 그를 결코 놓지 않을 것이다.
(1) 그들은 이방인의 우상에게 결코 의뢰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어리석고 수확없는 짓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열방의 허무한 것 중에 능히 비를 내리게 할 자가 있나이까?" 아합 시절에 이스라엘은 큰 한발을 당한 적이 있었다. 그 때 온 이스라엘은 바알에게 비를 내려 달라고 기도하였다. 그러나 바알은 그들을 한발에서 구하지 못했다. 물로써 응답할 수 있었던 분은 불로써 응답하신 하나님 한분 뿐이셨다.
(2) 그들은 제 2원인(즉 자연)에게 대한 주목을 중단하지 않을 것이나 자연으로부터 공급만 기대하지도 않을 것이다. "하늘이 능히 소나기를 내릴 수 있으리까?" 하늘의 하나님께로부터 명령이 없으면 소나기도 내리지 않는다. 그는 구름의 열쇠를 가진 분이시며 하늘의 창을 열고 자기 방에서 땅을 적시는 분이시다.
(3) 그러므로 그들의 모든 기대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며 그들의 모든 신뢰는 하나님께 있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그리하는 분은 주가 아니시이니까? 우리가 구조를 기대할 수 있고 의뢰해야 하는 분은 당신이 아니옵니까? 당신은 비를 오게 하고 소나기를 내리는 분이 아니십니까? 왜냐하면 주께서는 이 모든 것을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만물에게 존재를 부여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그들에게 법을 주시며 그 모두를 당신의 명령 아래 두고 계십니다. 당신은 자연 가운데서 끊임없이 순환하는 습기를 만드셨고 그들로 섭리의 의도를 이루게 하십니다. 당신은 그 습기에게 명령을 내리시고 원하시는 대로 그것을 사용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당신을 구할 것이옵니다(슥 10:1). 우리는 주께서 적시에 비를 내려 주시며 그 시간을 지체치 않으실 것이라고 신뢰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신뢰하는 것은 합당한 일이며 또 그 신뢰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최고의 주권을 가진 본이시며 전능하신 분이란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어떤 경우에도 그를 섬기고 그에게서 기대하게 하며 그렇게 하도록 격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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