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3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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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1

약속의 보증 (예레미야 33:1-9)

본문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고찰하여 봄으로 은혜를 받자.

Ⅰ.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위탁한 위로의 예언이 선포된 시기. 정확한 시기를 말하기는 어렵다. 단지 말할 수 있다면 전 장의 사건의 연속으로 사태가 더욱 악화되어 가고 있을 때였다. 이것은 하나님의 두번째 말씀이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격려하시기 위하여 한 번뿐 아니라 두 번씩 말씀하신다. 우리는 불복종하므로 우리의 의무를 실행케 하려면 "경계에 경계" 가 요구된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믿지 못하므로 우리로 위로를 받게 하기 위해서는 약속에 약속이 필요하다. 이 말씀은 전과 같이 그가 "시위대 뜰에 갇혔을 때에 예레미야에게 임한 것이었다." 하나님의 백성을 그 어떤 곳에 유폐시킨다고 하여도 그들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어떠한 자물통과 빗장도 하나님의 은총의 방문을 막지 못한다. 오히려 "고통이 더할수록 위로가 더욱 넘치는 경우가 있다." 세상이 그들을 못마땅하게 여길 때 그들은 가장 고무적인 그의 사랑의 속삭임을 듣게 된다. 바울의 주옥과 같은 서신들도 실상 감옥 속에서 이루어진 것들이었다.

Ⅱ. 예언의 내용. 포로들이 안심하도록 이 예언 속에는 무한한 위로의 말씀이 포함되어 있다. 이는 그들로 절망의 나락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하심이다.

1. 이 위를 그들에게 보장하신 분은 누구인가?(2절) 그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이시다. 그는 천지의 창조자시다. 그러므로 모든 권력이 그의 수중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레미야는 기도할 때(32:17) 이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그는 예루살렘 곧 시온의 창조자시며 제일 먼저 그 성을 세운 분이다. 그러므로 그가 다시 성을 재건할 수 있는 것이다. 지으시되 그의 자신의 찬양을 위해서 뜻하신 바대로 하실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것을 지어 성취하셨다" 고 하였다. 흔들리지 않고 영원히 있을 그리스도 교회가 출현할 때까지 이 성은 견고히 서 있을 것이라 한다. 그는 이 약속을 말씀하신 분이다. 그는 예루살렘 회복의 계획을 세우셨고 그 계획을 세우셨으니 또한 그대로 성취시키신다. 약속을 하신 분이 약속을 아름답게 이루신다. 왜냐하면 약속하신 분의 이름이 여호와이기 때문이다. 그는 약속을 하실 뿐 아니라 수행하신다. 그가 약속을 이루실 때 그는 그 이름으로 알려지신다. 그는 곧 온전하신 하나님이시다(출 6:3). 천지가 창조되었을 때는 그의 이름이 여호와라 불리우지 않았던 것이다(창 2:4).

2. 이 예언이 성취되는 길은 기도에 의해서일 뿐이다(3절). 그러므로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응답하겠다" 고 말씀하신다. 예언자는 이 같은 응답을 받았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로운 뜻을 알려고 그는 더욱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귀를 기울인다. 그는 기도하였다(32:16). 그러나 이제 그는 다시 기도해야만 하였다. 하나님으로부터 위로를 받으려는 사람들은 절실하게 계속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자. 우리가 그를 부르면 그는 우리에게 응답하신다. 그리스도께서도 구하셨으므로 그것이 그에게 이루어졌다(시 2:8). 예레미야도 간구했으므로 그에게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는 응답이 주어진다. 보이시겠다는 말은 예레미야에게 앞으로 이루어질 일의 확실한 전망을 알리시겠다는 말이다. 알지 못하는 일이란 예레미야가 이해할 수 없었던 말씀이요 비밀한 일은 부분적으로 밖에는 나타나지 않은 일을 이제 확실히 드러내보여 주신다는 말이다. 이 말씀은 예레미야로 즐거움을 얻게 하려는 의도가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도 이 예언에 힘을 얻어 이 말씀의 성취를 위하여 간구하도록 하시려는 데서 주어진 말씀이다. 약속이 주어졌다고 기도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더욱 기도를 힘쓰도록 격려하기 위하여 약속은 주어진다(겔 36:37 참조).

3. 예루살렘의 참혹상. 이것 때문에 위로가 그들에게 있어야 했다. 그러므로 이러한 참혹에도 불구하고 때가 이르면 이스라엘의 회복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약속된다(4,5절). 갈대아인들은 토성을 쌓고 성을 부수는 병기를 이용하여 그들을 친다. 또한 칼과 도끼와 망치로 성을 친다. 이 공격에 유다의 궁전도 예외가 되지 못하고 훼파된다. 에스겔 26장 9절에도 이러한 말씀이 있다. 거기 이르기를 "도끼로 망대를 찍는다" 고 하였다. 최상의 장비를 갖춘 가장 강한 요새일지라도 남김없이 부서져 지면과 같이 된다. 5절은 예루살렘의 현재의 참혹상을 더욱 열거하려는 뜻에서 넣은 삽입구이다. 저희들이 "갈대아인의 흉벽과 칼을 막아 싸우려 하였고" 포위망을 뚫으려 하였으나 오히려 사태를 악화시키고 말았다. 이 때문에 적들은 더욱 기세를 부려 공격을 하였고 미친 듯이 학살하였다. 그리하여 예루살렘의 가옥마다 포위망을 뚫으려고 출전했다가 받은 상처로 인하여 죽은 "남자들의 시체로" 가득 찼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노함과 분함으로 그들을 죽였다" 고 말씀하신다. 원수들의 검은 바로 하나님의 검을 대행하는 것이요, 원수들의 분노는 바로 하나님의 진노를 대행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기 살해를 당한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두드러지게 악했던 사람들처럼 보여진다. 바로 이 사람들은 "그들의 악을 인하여 하나님이 얼굴을 가리시고 이 성을 돌아보지 못하도록 하시게 한" 장본인들이다. 그러므로 그가 그들에게 이 모든 징벌을 내리신 것은 정당한 일이었다.

4. 하나님께서 유다와 예루살렘을 위해 준비해 놓으신 축복. 이 축복이야말로 그들의 모든 슬픔을 치료하여 준다.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물으신다.

(1) 그들이 중병을 앓고 있는가? 이 성이 상처를 입었는가?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병을 고치실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계신다. 비록 그 병이 치명적이고 난치의 병인 것 같지만 그는 하실 수 있다(8:22).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온 머리가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나" (사 1:5) 그러나 "내가 이 성을 치료하며 고쳐 낫게 하겠다" 고 하신다(33:6). 그가 죽음을 사전에 예방하며 질병을 퇴치하시고 모든 것을 정상이 되게 하시겠다고 한다(30:17). 아무리 절망적인 경우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치료하고자 하시면 그는 하실 수 있다. 예루살렘의 병의 원인은 그의 죄였다(사 1:6). 그러므로 회개하면 치료는 이루어진다. 이 치료가 어떻게 임할 것을 본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평강과 성실함에 풍성함을 그들에게 나타낼 것이라. 내가 이것을 그들에 적절한 시기에 베풀리니 때가 이르면 희망적인 미래의 전망을 보여 주겠노라" 고 하신다. 본문의 평강은 모든 축복된 것을 상징한다. "평강은 약속에 의거해 주어진 평강이요, 성실함은 그 약속을 실행하시는 성실이다. 또는 "평강과 성실함" 이 평화와 참 신앙을 뜻할 수도 있고 평강과 하나님에 대한 참된 예배를 뜻할 수도 있다. 즉 이 말씀은 그들을 하나님에게서 멀리하게 하려는 모든 거짓과 속임수에 대한 상반개념이다. 우리는 평강과 성실함이란 말씀을 더 일반적으로 적용할 수도 있다.

[1] 하나님의 계시의 참 모습이 바로 평강과 진리이다. 그러므로 본문의 약속들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복음에로 인도한다. 복음속에서 하나님은 평강과 진리를 나타내셨다. 거기 참된 평강의 길이 있다. 진리(성실이라 한글판에는 번역되었으나 여기서는 진리가 오히려 타당하다고 보여진다:역자 주)가 우리에게 길을 가리켜 주며 평강은 우리를 쉬게 하여 준다. 그리고 은혜와 진리의 풍성함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온다. 평강과 진리는 영혼의 생명이며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생명을 얻게 하며 더욱 풍성히 얻게 하시려 오신 것이다. 그리스도는 진리의 능력(요 18:37)으로 통치하시며 그 능력으로 "풍성한 평강을 주신다" (시 72:7; 85:10).

[2] 평강과 진리의 하나님의 계시는 믿음으로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모든 자들에게 치료와 건강의 근원이 된다. 평강과 진리는 성화의 방편이 되므로 그것이 접촉되는 영혼마다 질병의 치료를 얻는다(요 17:17). 그러므로 "저가 말씀을 보내어 저희를 고치셨다" (시 107:20)고 하였다. 평강과 진리는 인간의 영혼에 질서를 주며 영적이며 신령한 생활을 하기에 좋은 상태로 보존해 주신다.

(2) 그들이 흩어져버리고 사로잡혔으며 국토는 폐허가 되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은 약속하신다. "내가 유다의 포로와 이스라엘의 포로를 돌아오게 하리라" 하신다(7절)(스룹바벨의 지휘 아래 돌아온 자들은 주로 유다와 베냐민과 레위 자손들이었다. 그러나 그 후에 다른 모든 지파들 가운데서도 많은 사람들이 돌아왔다). 또한 "그 성들을 처음과 같이 세울 것이라" 하신다. 그들이 먼저 할 일인 회개를 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회복시키는 일을 착수하신다.

(3) 죄가 그들의 모든 고통의 원인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그 죄가 용서될 것이고 정복될 것이며 따라서 심판의 원인이 근절될 것이라 하신다(8절).

[1] 죄로 인하여 그들은 더러워졌고 하나님의 거룩함을 거들떠보지도 않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깨끗게 하시며 그들을 불법에서 순결케 하신다. 저들이 우상을 섬기므로 더럽혀지면 성전에 용납될 수 없었다. 그러나 저들이 "정하게 하는 물로 뿌리움을 받으면" 다시 성소에 들어가도록 허용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모든 죄악에서 정하게 하시면" 그들의 조국에 들어갈 특권이 허용된다. 물을 뿌려 정결케 되는 예식을 생각하고서 다윗은 "우슬초로 나를 정하게 하소서" 라고 기도하였다.

[2] 죄로 인하여 그들은 정죄함을 받았고 따라서 그의 공의의 처벌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의 모든 죄악을 사하신다." 그리고 그들이 얽매여 있는 죄의 속박으로 말미암아 받을 수밖에 없는 형벌을 제거하신다. 거룩케 하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들은 더러운 죄에서 깨끗함을 받고 또 용서하시는 자비로 말미암아 정죄함으로부터 자유케 된다.

(4) 그들의 죄와 고통이 하나님의 명예를 손상시켰는가? 그러나 이제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옴으로 그를 찬양하게 될 것이라고 하신다(9절). 이제 예루살렘은 재건되며 유다에는 사람들이 거하게 되며 하나님에게 그들은 "기쁜 이름이 된다." 그들이 하나님의 노를 격발시킨 만큼 이제 그들의 찬양은 하나님에게는 기쁨이 된다. 또한 하나님은 "열방 앞에서 찬송과 영광이 되신다." 그들은 돌아와서 하나님께 복종함으로 그에게 영광을 돌릴 것이며 또한 하나님은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심으로 스스로 영광을 취하신다. 이 민족이 과거에는 신앙에 먹칠을 하였지만 새롭게 형성된 국가는 신앙을 만방에 떨치게 한다. 열방들이 하나님께서 은혜로 "이 백성에게 베푼 모든 복을 들으며" 그의 섭리에 의하여 그들에게 베푸신 복을 듣게 될 것이다. 그들이 애굽에서 해방될 때에 세상이 놀람으로 소란스러웠듯이 바벨론에서의 그들의 귀환도 놀라운 소식이 된다. 이제 열방이 "이 모든 복을 인하여 두려워하며 떨게 된다."

[1] 하나님의 백성들까지 두려워 떨게 된다. 그들은 이 사실을 인하여 깜짝 놀랄 것이다. 또한 이렇게 선하신 하나님께 범죄하고 그의 은혜를 배신한 것을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여호와와 그의 선하심을 두려워하리로다" (호 3:5)라 하였다.

[2] 인접 국가들이 예루살렘의 번영으로 인하여 두려워하게 된다. 그들은 유대 민족이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강성하여짐을 바라보며 유다의 적국이 될까 두려워할 것이다. "주님의 교회가 달처럼 아름답고 태양처럼 맑을 때 교회는 기치를 든 군대처럼 두려움의 대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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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의 격려 (예레미야 33:10-16)

본문에는 그들이 영광스럽게 사로잡혔던 곳에서 돌아온 후 맛볼 유다와 예루살렘의 행복한 상태가 예언되고 있다. 결국 이 예언은 메시야 왕국에서 영광되게 실현된다.

Ⅰ. 슬픔을 오랫동안 겪었던 백성들이 다시 기쁨으로 충만할 것이 약속된다.

사람마다 이제 이 땅이 영원히 황폐하게 되었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유다 땅에는 가축들이 없고 예루살렘 거리에는 주민이 없다고 탄식했다. 다만 어디 가나 끝없는 우수만이 깔리어 있었다(10절). 그러나 눈물을 한동안 참고 견디면 다시 기쁨이 돌아온다. "기뻐하는 소리 즐거워하는 소리가 거기서 그치고 말 것이라" 는 위협이 가해졌었다(7:34; 16:9). 그러나 본문에는 다시 그들이 소생할 것과 "이 땅에 포로들이 돌아오므로" 기쁨과 즐거움의 소리가 들릴 것이라" 고 약속된다.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였다" (시 126:1, 2).

1. 누구나 다 즐거움을 맛보게 된다. 그것은 혼인의 기쁨이다. 그러므로 본문에 "신랑의 소리 신부의 소리가 들린다" 했으니 곧 다시 결혼식이 거행됨을 일컫는 말이다. 바벨론에서는 수금을 버드나무에 걸어놓고 노래를 부르지 않았는데 이제는 전처럼 노래를 불러 결혼을 축하한다.

2. 거기 신앙의 기쁨이 깃든다. 성전의 노래가 다시 불리워지며 "여호와의 노래" 가 불리워진다. 이 노래는 그들이 낯선 땅에 거할 때는 부를 수 없던 노래였다. "만군의 여호와를 찬양하라고 말하는 자들의 음성이" 성전에서 뿐만 아니라 집집마다 거리마다 울려 퍼진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높이는 것보다 더 좋은 찬양과 높힘이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찬양은 그들을 귀향케 한 자비를 온전케 한다. 찬양을 통해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심에 대하여 감사할 마음이 그들에게서 우러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마음이 생긴다. 이 영광은 곧 그 능력과 선하심에 대한 영광이다. 이 능력과 선하심으로 귀환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만군의 여호와로 또한 선하시며 자비가 영원하신 분으로" 찬양한다. 이것은 예전에 부르던 노래였다. 그러나 이 새로운 사건을 계기로 새롭게 불리운다. 그러므로 이 노래는 새 노래이다. 우리는 그들이 바벨론에서 돌아올 때에 문자 그대로 이 말씀이 이루어진 것을 보게 된다(스 3:11). 그들은 함께 여호와를 찬양하였다. "이는 그가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대한 공중 예배가 계속하여 부지런히 드리워진다. "그들은 여호와의 집에 감사제를 드린다." 모든 제물은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본문의 말씀은 겸손한 예배와 기쁨의 감사를 통해 드리는 영적인 제사를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호세아 14장 2절에서는 이를 표현하여 "우리 입술의 숫송아지" 라 하였다(영적인 예배이므로 입술로 부르는 찬양이 곧 제물이 된다는 뜻이다. 한글 개역은 다소 다르다:역자 주). 유대인들은 메시야의 시대에는 모든 희생 제사가 끝나고 찬양의 제사만이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 약속도 메시야의 날들에 이루어질 것을 언급해 주고 있다.

Ⅱ.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준비하신 축복 가운데 가장 으뜸되는 축복이 본문에 있는 메시야에 대한 약속이요 그가 실현하실 영원한 의이다(15,16절). 이것이야말로 장차 오는 날에 이루어질 가장 큰 복이다. 하나님께서 유다와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하셨으므로 그는 이 약속대로 이루실 것이다. 이 약속 가운데는 그들이 사로잡혔던 곳에서의 귀환과 조국에서의 정착이 예고된다. 참으로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는 주목할 만한 시대이다(마 1:7). 이 메시야에 대한 약속은 앞에서도 언급되었다(23:5, 6). 거기서는 하나님께서 그들 위에 세우실 목자들에 대한 약속을 확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본문에 있는 약속은 목자들과 양떼들까지 포함된 약속이다. 이 말씀은 상징적으로 이해된다. 본문은 그리스도를 이렇게 예언하고 있다.

1. 왕위 계승자. 그는 "의로운 가지이다." 그는 왕위를 찬탈한 자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다윗 혈통이기 때문이다. 그는 왕위가 약속된 자의 줄기에서 태어났다. 그의 자손에게 언약은 이루어져야 했다. 그러므로 그가 받은 칭호는 지당한 것이다.

2. 의의 왕. 법을 정하시며 전쟁을 행하시며 심판하시는 일에 그는 의로우시다. 또한 잘못을 저지른 자들을 처벌하시며 억울함을 당한 자들을 옹호하시는 일에 그는 의로우시다. 그러므로 본문에 "그가 이 땅에 공평과 정의를 실현할 것이라" 고 하였다. 이 사람은 그 유형에 있어서 공평으로 다스린 스룹바벨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스룹바벨은 여호야김이 행하듯이 하지 아니하였다(22:7). 그러나 분문의 주인공은 더 나아가 모든 자들을 심판할 권위가 위탁되신 분이요 세상을 의로 다스릴 분이신 메시야이시다.

3. 그의 신민들을 모든 해받음에서 보호하실 왕. 그로 인하여 유다가 진노와 저주에서 구원을 받게 되며 이러한 구원을 받으므로 예루살렘은 악으로 인한 두려움에서 떠나 안연히 거하게 된다. 그들이 평강의 왕의 통치에 의지하므로 그들은 거룩한 안식을 즐기며 마음의 평정을 누린다.

4. 신민들에 의하여 찬양받으실 왕. 마지막으로 본 단원에서 고찰할 부분은 16절 하반절의 번역이다(본문은 한글판 개역과 다소 차이가 있음:역자 주). 갈대아 사본은 16절 하반절을 "이 이름이야말로 그들이 메시야를 가리켜 부를 이름이라" 고 번역했다. 그러나 시리아 사본과 라틴어 사본에 의하면 "그의 이 이름을 그들이 찬양할 것이며 이 이름으로 그들이 그를 부를 것이라" 고 하였다. 그러나 원문에 가장 가까운 번역은 이러하다. "그 성을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으신 분이 바로 이 분이라." 모세의 제단을 "여호와 닛시" (출 17:15)라 하였고 예루살렘은 "여호와 삼마" 라 하였는데(겔 48:35) 이는 여호와께서 현재 그들과 함께 계시며 그들의 깃발이 되심을 찬양하라는 뜻이다. 마찬가지로 본문에서 이 성은 "여호와 우리의 의" 라고 불리우고 있는데 이는 그들이 여호와를 그들의 의로 여기고 찬양하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가테이커 씨(Mr. Gataker)는 이렇게 말한다. 전에는 그리스도의 명칭이던 것이 본문에서 와전되어 예루살렘 곧 메시야의 도성이요 그리스도의 교회를 가리키는 것으로 변화하였다는 것이다. 그분이야말로 이 성에 의를 전해 주신 분이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을 거쳐서 우리를 의롭게 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이 성이 이 이름을 지니므로 의를 고백한다. 그러나 이 성에 속한 의가 아니라 그에게서 온 의이다. 그러므로 "의와 힘은 여호와께만 있다" (사 45:24)고 하였다. 그리고 "우리는 그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로서 형성된다." 예루살렘 주민들은 이 메시야의 이름을 입에서 떼지 아니하였으므로 이제 그들이 그 이름으로 호칭될 것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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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계약의 확실성 (예레미야 33:17-26)

포로기가 계속되는 동안은 하나님의 세 가지 계약 즉 다윗과 그의 자손들과 맺은 왕권 계약, 아론과 그의 자손들과 맺은 제사직의 계약,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과 맺은 선택의 계약, 이 모든 계약이 파기되고 잊혀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한동안 이 계약들이 계속 이행되지 못하고 중단되었으나 그런데 다시 실행될 것이 약속되고 있다. 이 계약들의 참된 취지와 의도는 신약 시대에 이르러 축복으로 풍성하게 실현될 것이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이 계약들이 유대인들이 포로되었던 곳에서 돌아온 후에 저들에게 수여될 것으로 예시되고 있다.

Ⅰ.font> 왕권 계약의 영원한 보증. 이 약속은 다윗의 아들인 그리스도의 왕국에서 완전 성취된다(17절). 이스라엘이 사로잡혀 감으로 왕위는 끊어졌다. 왕은 왕관을 빼앗겼고 "이스라엘 집 위(位)에는 앉을 사람이" 끊어졌다. 더구나 여호야김은 대를 이을 자식이 없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들이 사로잡혔던 곳에서 돌아온 후 다윗 왕가는 대를 이을 자를 세웠다. 그러나 "이스라엘 집위에 앉을 사람이 다윗에게 영영히 끊어지지 아니할 것" 이라는 약속이 명실공히 이루어진 것은 메시야에게서였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세계를 통치하시기 때문이다. 그가 세상을 다스리는 것은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이다. 그는 교회에 활력적인 머리이시며 만물을 다스리시는 영광스러운 머리이시다. 또한 그는 "거룩한 산 시온에서 통치하시는 왕이시다." 이같이 그리스도께서 다스리는 한 다윗에게 계승자가 있을 것이며 다윗과 맺은 계약이 파기될 염려는 없는 것이다. 독생자이신 예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그에 관하여 선포되기를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노릇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눅 1:32, 33)했다. 이 말씀이 본문에 약속되고 있다.

1. 다윗과 맺은 계약은 천체의 운행 법칙만큼이나 확고부동하다. 하나님의 약속의 불변성이 31장 35,36절에서 우주의 불변성에 비교된다. 하나님은 자연과도 계약을 맺으신다. 그 계약에 의하여 일반 섭리는 정해져 있으며 그 계약 위에 자연의 조화는 기초를 두고 있다. 본문에서는 이 계약이 "낮에 대한 나의 약정, 밤에 대한 나의 약정" 이라고 불리우고 있다(20,25절). 이 계약은 창조시에 하나님이 명하신 것으로 "때를 따라 낮과 밤이 있으라" 명령되었었다. 즉 낮과 밤의 분리는 창조시에 이루어졌다. 그때 하나님은 빛과 어두움을 구분하셨고 빛과 어두움이 서로 교차되도록 명하셨다. 그리고 태양으로 낮을 주관하게 하셨다(창 1:4, 5, 16). 이 관계는 홍수후에 새롭게 확인되고 있고(창 8:22). 그 이후 지금까지 변함없이 계속되고 있다(시 19:22). 또 아침과 저녁으로 정한 때에 교차되도록 하셨으며(시 65:8), 태양으로 하여금 그 떠오를 시기와 장소를 알게 하셨고 땅 그림자가 지는 시간도 이와 같이 운행되도록 하셨다. 세상이 존속하는 한 이 법칙은 변경되지 않을 것이며 이 약정도 파기되지 않으리라. 하나님이 정하신 "천지의 규례" 가 어긋날 수는 결코 없다(하늘과 땅의 관계를 말한다면 땅은 하늘의 규례에 의해 지배된다)(25절을 욥 38:33 과 비교하여 보라). 천지의 규례가 어긋날 수 없듯이 구속자와 맺은 구원의 계약도 변함이 없을 것이다. 이 구속자는 하나님의 종이요 우리에게는 다윗과 같은 왕이시다(21절). 구원의 계약이 변함없으리란 말은 그리스도께서 세상 끝날까지 지상에 교회를 구실 것을 의미하는 말씀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자녀들을 세상 끝날까지 두실 것이다. 그리스도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다. 세상의 끝날이 있겠지만 그의 나라는 그때에도 끝나지 않는다. 이 나라는 그때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넘겨진다. 이 교회가 천지의 법칙과 비교된 데는 또 다른 의미도 있다. 즉 자연 법칙에 의해서 빛과 어두움, 낮과 밤이 교차되듯이 세상에서의 교회의 상태도 번영과 재난이 교차되며 계속되리라는 뜻이다. 이 사실이 분명히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오늘밤 태양이 저물지만 내일 아침 태양이 다시 떠오르는 것이 분명하듯 우리가 살아서 그 결과를 볼지 못볼지는 모르나 이 세상에서의 주님의 나라가 잠시 동안 타락과 박해에 의하여 구름이 덮이고 쇠약해지는 것 같지만 그 교회는 다시 때가 되면 비치며 광채를 발할 것이란 사실이다.

2. 다윗의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무수해지리라고 한다. 마찬가지로 메시야의 영적인 자손도 그렇게 될 것이다. 그의 복음과 또 복음과 함께 역사하는 그의 성령의 효능에 의해 영적인 자손들이 메시야에게서 출생하는 것이다. 이를 가리켜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시 11:3)라고 하였다. 즉 그들이 그의 기뻐하시는 백성됨을 뜻한다. 그리스도의 자손들은 다윗의 자손들처럼 계승권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복들이다. 그러나 날이 이르면 그들도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리게 된다(22절). 또한 본문에 "하늘의 만상은 셀 수 없듯이 내가 그와 같이 다윗의 자손을 번성케 하리라" 하신다. 이와 같이 그의 자손이 많으므로 계승자가 없어서 왕국이 쇠망할 염려는 없으리란 말씀이다. 그리스도의 나라에도 무수한 자녀들이 있다. 그리고 "자녀라면 또한 후사가 되는 것이다."

Ⅱ. 제사직에 대한 계약의 영원한 보증과 그 약속의 성취. 포로기 동안은 제사직의 계약도 잊혀진 것처럼 여겨졌다. 이 때에는 제사장들이 섬겨야 할 제단도 없었고 성전도 없었다. 그러나 제사직의 계약도 다시 소생할 것이라 한다. 이 사실은 약속대로 실행되었다. 본문에 약속된 대로(18절) 예루살렘에 돌아온 즉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번제를 드릴 준비를 하고" 그후 "조석으로 여호와께 번제를 드렸다" (스 3:2, 3). 그러나 그 제사직도 곧 부패하였다. 그리하여 "너희가 레위의 언약을 파하였느리라" (말 3:8)하였다. 끝내는 로마인들에 의하여 예루살렘이 훼파됨으로 제사직은 최후를 맞게 되었다. 그렇다면 레위인들과 맺은 계약이 정말 확고한 것인지 또한 지금도 "낮과 밤에 대한" 여호와의 약정과 같이 지속되고 있는지를 찾아보아야 한다. 실상 이 제사직의 계약은 지금도 틀림없이 수행되고 있다.

1. 그리스도의 제사직을 통하여 그 약속은 실행되고 있다. 그리스도의 제사직은 아론의 제사직을 계승한 것이며 아론의 제사직은 실상 그리스도의 제사직의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었다. 우리의 신앙 고백의 대상이신 위대한 대제사장이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서 있으며 그의 피를 드림으로 구속을 이루시는 한은 "레위 사람 제사장들도 끊어지지 아니한 것이라" 할 수 있다(히 7:3, 17). 그리스도는 실로 영원한 제사장이시다. 또한 제사직의 계약은 "평강의 계약" (민 25:12)이라, "생명과 평강의 계약" 이라고(말 2:5) 불리운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생명이 되시고 화평이 되시는 한 이 계약이 파기된 것도 아니며 효력이 미약하여진 것도 아님을 확신할 수 있다. 본문에서 제사직의 계약은 계속 왕권 계약과 연결되고 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는 멜기세덱과 같이 "왕좌에 앉으신 제사장" 이시기 때문이다.

2. 확장된 복음 사업을 통하여 그 약속은 실행되고 있다. 신실한 주의 종들이 신앙적인 집회를 주관하며 기도와 찬양의 영적인 제사를 드리는 한 세자장과 레위인들은 그 후계자가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아니 오히려 더 훌륭한 후계자를 획득한 것으로 보아 틀림없다. 고린도 전서 9장 13,14절에서 사도는 복음 전하는 자들을 제단을 섬기는 자들과 비교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3. 모든 참된 신자들을 통해 그 약속은 실행되고 있다. 이들 신자들은 거룩한 제사장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다(벧전 2:5, 9). 이들은 우리 하나님께서 "왕들과 제사장들로 삼으신" 자들이다(계 1:6). 그들은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영적인 제사를 드리며" 또한 그들 자신이 "산 제물" 이다. 본문의 약속은 바로 이들 믿음의 레위인들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들이 "바닷가의 모래처럼" 무수할 것이라 하였는데 과연 그렇게 이루어진 것이다. 같은 약속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도 주어졌는데 이 또한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이루어진다(창 22:17). 왜냐하면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영적인 이스라엘이며 이들은 동시에 영적인 제사장들이기 때문이다(계 5:9, 10; 7:9, 15).

Ⅲ. 선택의 계약의 영원한 보증. 이 계약의 약속은 영적 이스라엘인 기독교인들에게서 완전히 성취된다. 다음 사실을 고찰해 보자.

1. 이 계약도 포로기 동안은 파기된 것으로 간주되었다(24절). 하나님께서는 예언자에게 이렇게 물으신다. "이 백성이 말한 바를 네가 듣지 아니하였느냐. 네가 생각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나님과의 계약을 어긴 것은 그들이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소홀히 여기셨기 때문인 것처럼 그에게 항의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여호와께서 그 택하신 두 족속" 이스라엘과 유다를 "버리셨다" 고 항변한다(그들은 두 족속이라고 하였으나 그가 그들을 선택하실 때 그들은 한 족속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잘못 때문이었다. 이로 인하여 이방인들도 "여호와의 백성을 멸시한다." 그들은 여호와의 백성된 특권이 가치를 상실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또 인접 국가들은 이스라엘을 국가가 아닌 것처럼 보며 멸망하여 모든 영광이 진토 속에 누웠다고 하였다.

2. 그러나 이 계약은 낮과 밤의 대한 그의 약정처럼 확고하다고 한다. 밤과 낮이 규례대로 되지 않는 일이 일어날 수가 있어도 "야곱의 자손" 을 그가 버리지 않을 것이라 하신다. 그러나 이 말씀은 육적인 야곱의 자손을 말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지금도 추방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약속은 기독교 교회를 향한 것으로 모든 약속은 여기서 실현되고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은 로마서 14장 1절 이하의 사도의 강론에서 나타난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에게 영원한 군주였던 다윗의 자손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그리스도와 같은 왕을 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도 이러한 백성을 원하시지 않는다. 기독교가 그리스도의 지배 아래 계속될 것이다. 또한 기독교인들이 그의 신민이 될 것이다. 이렇게 하기를 낮과 밤이 계속될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이 약속의 대한 보증으로 다시 이 약속이 반복되고 있다. 내가 그 포로된 자를 돌아오게 하리라." 그리고 돌아오게 한 후에 "그를 긍휼히 여기리라" 하신다. 이 약속이 주어진 자들이 갈라디아서 6장6절에 등장한다. 그들은 곧 "복음의 규례대로 행하는 모든 사람들로" 이들이 곧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다." 이들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33:18 없음.

 

33:19 없음.

 

33:20 없음.

 

33:21 없음.

 

33:22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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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26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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