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3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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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1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약속 (예레미야 31:1-9)

본문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보증하신다.

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의 계약이 파기된 것이라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다시 계약을 체결하실 것이라고 한다. 동시에 하나님께서 악인의 머리는 치시고(30:24), 자기의 백성들을 그의 사랑스러운 자녀로 삼으시겠다고 하신다. 본문말씀에는 "내가 이스라엘 모든 가족의 하나님이 되리라" 고 되어 있다(1절)(즉 내가 그들에게 하나님됨을 스스로 나타내리라는 말씀이다). 이 말씀의 뜻은 그들의 두 지파만이 아니라 모든 지파, 아론의 집과 레위 자손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모든 자손, 또한 전체로서의 국가만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가족 하나 하나, 이스라엘의 모든 산업이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 아래서 은혜를 입을 것이라는 말이다. 훌륭한 백성의 일원들인 모든 가족들은 하나님의 마음에 들어야 하며 또한 그를 그들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이고 의지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만일 우리나 우리의 집안이 여호와를 섬기면 그의 보호를 받고 또 축복을 받게 된다(잠 3:33).

Ⅱ. 하나님께서 그들을 바벨론에서 인도해내실 것이라고 한다. 과거에 그들의 조상을 애굽에서 인도해낼 때 행하셨듯이 행하시며 그들의 조상을 택하여 그의 백성 삼으시던 때에 하시었던 대로 행하실 것이라고 한다.

1. 먼저 하나님께서는 그가 애굽에서 그들의 조상들을 인도해 내실 때 그들을 위하여 행한 것이 무엇인지를 상기시키신다(2절). 지금의 경우와 같이 그들도 칼날 아래서 목숨이 경각에 달린 백성이었고 바로는 그 칼로 모든 남자 어린이들을 태어나자마자 죽게하였다(참으로 그들은 피를 부르는 칼의 위협을 겨우 피하였다). 또한 그가 홍해까지 그들을 추격하여 와서 그 칼로 그들을 없애려고 위협하였다. 이 위험을 모면하자 지금 이스라엘이 낯선 땅에서 지내던 것처럼 그들은 "광야에서" 거하며 모든 사람들에 게 잊혀진 듯 하였으나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그의 소유하신 바 되고 그가 그들을 높이시고 특별하신 사랑으로 축복하셨던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그들을 "가나안 복지" 에서 안식하게 하신 것이라고 한다. 우리가 매우 비천하게 되고 견디기 어려운 곤경에 부닥칠 때 이전의 교회도 그랬던 것을 기억하고 위로받자.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를 그 비천한 데서 일으키사 광야의 모든 어려움을 통과시킨 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신다. 하나님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심을 기억하자.

2.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의 조상들에게 행하신 일을 하나님에게 상기시킨다. 그러면서 지금은 그와 같은 기적을 보지 못한다고 불평하며 기드온처럼 "우리 조상들이 우리에게 들려 준 모든 표적이 지금은 어디 있읍니까?" 라고 묻는다. "여호와께서는" 애굽과 광야에서 "옛적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셨고" (3절),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영광 중에 이스라엘에게 계속 나타나셨던 것은 사실이다. 예전의 시대는 영광스러운 시대였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예전에 우리에게 나타나셨던 하나님이 이제는 우리로부터 숨어 계신다. 그렇다면 그것이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사 45:15)라고 묻는다. 곤경을 당하여 과거에 즐거웠던 때를 기억하고 위로를 받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임을 기억하자.

3.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하나님은 그의 사랑의 지속성을 확증해 주신다. 그리하여 "내가 무궁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였노라" 고 하신다. 그 사랑은 순간에 식어버리는 사랑이 아니었다. 한 때는 사랑의 위로가 보류된 적도 있었지만 결코 변할 수는 없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의 사랑이 무궁한 사랑이기에 그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너희 조상뿐만 아니라 너희도 인자함으로 인도하겠고 그 인자를 베풀어 우상들에게 마음을 빼앗긴 너희를 내게 돌이키노라" 하신다. 이 하나님의 무궁한 사랑을 은총으로 받는 자들은 행복하다(그 사랑은 시종 여일하신 사랑이다). 그 누구도 우리를 이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는 없음을 기억하자. 하나님은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들을 성령으로 영혼을 감화시킴으로 계약을 맺으시고 그들과 교통하신다. 그는 인자하심으로 그들을 인도하시는데 이 사랑에 비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하겠다.

Ⅱ. 하나님이 다시 그들을 한 민족을 이루시고 즐거이 조국에 정착시키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4,5절). 하나님의 교회는 그의 집이며 성전이 아닌가? 그것이 무너졌다니! 그렇다면 "내가 다시 너를 세우리니 네가 세움을 입을 것이라" 고 말씀하신다. 이 건물의 기명(器皿)들이 빼앗겼는가? 그렇다면 그것들 다시 찾아 제자리에 놓여질 것이다. 하나님이 세우려 하시면 성전은 건축될 것이며 어떠한 반대도 가능할 수 없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아름다운 처녀였다. 그런데 그녀가 모든 장식품을 빼앗기고 슬픔에 잠겨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네가 다시 장식될 것인데 소고를 들고 춤추며 나오며 신방은 장식되고 즐거워하게 되리라" 고 하신다. 이제 버드나무에 걸어두었던 수금을 다시 꺼내어 연주하게 될 것이며 이를 위하여 조율을 하게 되리라. 마음이 기쁘니 노래하게 되고 그래서 소고로 그들이 장식할 것이다. 이제 소고가 어울리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그의 섭리에 따라 소고를 들라 하실 것이며 그러므로 그것이 그들에게 기쁨의 악기가 될 것이라 한다. 전에 그들이 재난을 당함으로 슬퍼할 때 소고는 그들에게 수치가 되었었다. 그러나 이제 소고는 종교적인 절기를 축하하는데 사용될 것이며 사사기 21장 19,21절에 나오는 "실로의 딸들" 처럼 "춤추며 나올 것" 이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고 우리의 즐거움을 하나님의 은혜로 여길 때 그 즐거움은 진정한 기쁨이 될 수 있다. 농촌의 농산물이 풍성해야 도시도 배부르게 살게 된다. 그러므로 "네가 다시 사마리아 산들에 포도원을 심을 것" 이 약속된다. 이 사마리아는 남 왕국 유대와 적대국인 이스라엘 나라의 수도였었다. 그러나 이제 두 나라가 통일될 것이며(겔 37:22), 절대적인 평온이 유지되므로 백성들은 땅을 경작하는 데만 전념하게 될 것이라 한다. 농부들은 군대가 몰려와 그들이 심은 과실을 먹어치우고 농작물을 해칠까 두려워하지 않고 심게 될 것이며 심은 것을 마음대로 먹게 될 것이다(레 19:23-25 에서 경작한 지 오년째되는 해에 먹으라 한 것처럼). 다시는 하나님이 과일 먹는 것을 제한하지도 않겠고 주인이 망을 보지도 않을 것인데 이는 과일이 모든 사람에게 넘치도록 풍성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Ⅳ. 또한 그들은 하나님이 명하신 법에 따라 자유로이 예배할 기회를 얻게 될 것이며 기쁜 마음으로 서로 권면하며 예배에 참석할 것이라 한다(6절). 적의 침략을 지키기 위하여 에브라임산 위에서 파수를 보는 파수꾼이 전혀 위험의 징조가 없으므로 교대할 때만 바라게 될 것인데 이는 시온으로 올라가서 평화로운 무리와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고 싶기 때문이다. 이 영광스러운 날이 이를 것이라 한다. 또는 파수꾼이 파수를 보는 것이 아니라 포도원이나 돌보며 서로 이웃을 권하며 예루살렘의 성스로운 축제에 참여하자고 권하게 될 것이라 한다. 이 말은 시온에서 다시 하나님을 예배하게 된다는 말이요 다윗왕의 시대처럼 기쁨에 들떠서 거리가 흥청거릴 때가 이르리라는 뜻이다(시 122:1). 그러나 무엇보다 본문에서 특기할 만한 사실은 이것이다. 전에는 "에브라임의 파수꾼이 하나님의 전에 대하여 원한을 품고" (호 9:8) 사람들을 시온으로 청하는 대신에 예루살렘을 연모하는 자들을 비웃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들이 솔선하여 하나님께 예배하러 예루살렘으로 가자고 권고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하나님께서는 참된 하나님 예배와 신앙에 대하여 원수되었던 자들을 변화시키시어 하나님 예배에 앞장서게 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모든 사람이 자유롭게 하나님을 예배하리란 약속은 메시아의 날에 완전히 성취되었다(종말의 때가 아니라 그리스도 강림 이후를 말함:역자 주). 이때에 복음은 이들 모든 나라에 전파되었고 그리스도의 교회로 나오라는 초대가 누구에게나 베풀어졌다. 이러 의미에서 시온은 그리스도의 교회의 예표였다.

Ⅴ. 하나님께서 찬양받으시게 될 것과 교회는 축복된 생활을 하는 영광과 위로를 얻게 될 것이라고 하신다(7절). 이제 구체적으로 고찰해 보자. 먼저 본문에 "야곱을 위하여 기뻐 노래하라" 하였는데 이 말은 이스라엘의 모든 우방들과 이 나라의 축복을 바라는 자들이 이스라엘과 함께 기뻐하라는 뜻이다. 로마서 15장 10절에서 바울도 신명기 32장 43절을 인용하여 "열방들아 주의 백성과 함께 즐거워하라" 했는데 같은 의미의 뜻이다. 즉 야곱의 나라의 회복이 모든 열방에 알려지게 되겠고 이 사실이 그들에게 기쁨이 될 것이라는 뜻이다. 그들은 야곱의 즐거움에 참여할 것이며 야곱을 높이 숭앙할 것이다. 이제 "만국의 머리된 자" 인 영광된 이스라엘은 만방이 야곱의 회복을 축하하는 것을 명예롭게 여겨 축하 사절을 보내게 됨을 당연히 여길 것이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만국을 향하여 "너희는 외쳐 전파하며 찬양하라" 고 하신다. 이 소식을 전파함으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찬양하여 둘을 동시에 영광되게 하라신다. 복음 선포자들은 찬양함으로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 그러므로 시편에서도 복음은 찬양과 합하여 말씀되고 있다(시 67:3; 96:2, 3). 우리가 복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증거하거나 또 그것으로 자신의 위로를 삼으려 할 때 하나님 찬양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그러므로 본문에 "찬양하며 이르기를 여호와여 주의 백성을 구원하소서" 라고 하였다. 즉 그들의 구원을 성취하시어 얽매인 이스라엘의 남자들을 계속 구원하소서란 뜻이다(시 126:3, 4). 우리가 그의 행하신 일로 인하여 하나님을 찬양할 때 그의 교회가 필요로 하여 대망하고 있는 바를 앞으로 이루어 주시기를 그에게 구해야 한다. 우리가 그에게 기도할 때 진심으로 그를 찬양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자. 그러므로 그는 간구함을 들으신다.

Ⅵ. 그들의 본국에 안전하게 정착하기 위해서 그들은 포로되었던 땅에서 즐거이 돌아올 것이며 발걸음은 가벼울 것이라고 하신다(8,9절). 이와 같이 긍휼을 얻기 시작하므로 다른 모든 축복도 보증이 될 것이라고 한다.

1. 이스라엘이 아무리 먼 곳에 흩어져 있다 할지라도 그들은 "북편 땅에서 인도되며 땅 끝에서부터" 함께 모이게 될 것이다. 그들이 어디 있든지 하나님은 그들을 찾아내시고 말 것이다.

2. 그들 중에 많은 무리가 여행하는데 어려움이 많을 것으로 여겨지나 그러나 이 문제가 그들에게 장애가 될 수 없다고 한다. "소경과 절뚝발이" 도 오게 된다. 그들은 각오를 단단히 하고 출발할 것이며 마음의 평안이 그들에게 임하게 된다. 그들은 자기들이 "소경이요 절뚝발이" 이므로 그냥 머물러 있겠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동무들이 그들을 도와 소경에게는 눈이 되며, 절뚝발이에게는 다리가 되어 줄 것이다. 이와 같이 신실한 기독교인들도 하늘가는 여로에서 서로 동무가 되어야 하겠다(욥 29:15). 그러나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도우시겠다고 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는 자는 그가 소경이라고 호소하지 않아도 되며 하나님이 힘을 주시는 자는 그가 절뚝발이라고 호소하지 않아도 된다. "잉태한 여인들은" 몸이 무겁다. 그들에게 이러한 여행은 적당치가 못하다. 더구나 "해산하는 여인" 의 경우는 더욱 심하다. 그러나 시온으로 돌아올 때는 아무 것도 어려움이 되지 못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 올 수 없다고 호소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들 부르신 그가 우리를 도우시고 힘을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3. 이스라엘의 수효가 감소되어 얼마 안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그들이 모두 함께 모일 때 그들은 "큰 무리를 이룰 것이라" 하신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영적인 이스라엘인 우리도 현재는 작은 무리에 불과할 것 같지만 우리가 함께 만날 때 큰 무리가 이루어질 것이다.

4. 이스라엘에게 그들의 귀향은 기쁨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눈물과 기도가 쌓여서 무기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한다(9절). "그들이 울며 올 것이며 간구할 것이라" 했다. 즉 죄로 인하여 울며 또 용서를 위하여 간구할 것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선하시므로 그들을 회개하게 하신다. 그들은 그들의 고통 중에 있을 때보다 포로에서 풀려나오는 지금 죄로 인하여 더욱 가슴을 치게 되고 착한 마음을 품는다. 눈물과 기도는 서로 따르게 마련이다. 눈물은 기도의 생활을 하게 하는 자극제이며 기도가 살아있다는 표현이기도 하다. 그리고 기도는 눈물을 씻어 주는 힘이 된다. 이제 하나님께서 "그들을 친절히 인도하실 것이다." 여행 중에 그들은 하나님의 가호함을 옷 입게 되며 그의 가호의 결과를 맛보게 될 것이라 하신다.

5. 그들의 여로가 험난할 것이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안전할 것이라 하신다. 그들이 통과할 땅은 메마른 불모의 땅이 분명하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하숫가의 바른 길로 행하게 하리라" 하신다. 그것은 여름이면 메말라 버리는 홍수가 지는 땅의 하숫가와는 다르다. 그들이 지나는 곳은 길도 없는 광야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실 것이라" 하신다. 그러므로 그들은 길을 잃게 되지 않을 것이다. 그 땅은 거칠고 돌로 이루어진 땅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들은 넘어지지 않을 것이라" 신다. 하나님이 분명히 가라고 명하신 곳이라면 그는 또한 그들을 위하여 길을 예비하시고 계신다는 것을 기억하자.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를 따르기만 하면 그의 섭리 또한 우리를 모른 체 하지 않으신다.

끝으로 하나님께서 어찌하여 그의 백성을 돌보시는지 이유가 명시된다. 왜냐하면 "나는 이스라엘의 아비" 이기 때문이라 하신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나은 아버지이기 때문에 자식에 대한 아비의 연민과 동정으로 그를 돌보시는 것이다(시 103:13). 또한 "에브라임은 나의 장자니라" 고 하신다. 하나님을 멀리 떠나 이제는 더 이상 아들이라 칭할 가치도 없는 에브라임일지라도 장자로 여기실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특별한 사랑이 베풀어지며 두 몫의 축복을 유업으로 얻을 것이라 하신다. 애굽에서 그들을 해방하실 때와 같은 이유가 바벨론에서 해방되는 그들에게도 주어진다. 그들은 본래 자유민으로 태어났고 따라서 노예 상태로 지낼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에게서 출생되었으므로 인간들에게 종노릇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그러니 내 아들을 놓아서 나를 섬기게 하라" 고 기록되었다(출 4:22, 23).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삼고 "장자의 교회" 에(그리스도의 교회:역주) 참여한다면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없음을 확신해도 좋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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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에게 행하신 약속 (예레미야 31:10-17)

본문은 하나님이 그의 백성에 대한 사랑의 취지를 교회뿐만아니라 세계에 선포한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 내용은 열방이 알아야만 하는 여호와의 역사(役事)에 대한 예언이기 때문에 열방이 귀 기울여야 하는 "여호와의 말씀이다." 그들이 들어서 이해하고 행실을 고치도록 하라신다. 또한 그것을 들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전파하여 "먼 섬에까지 전파하라" 하신다. 이 소식은 앞으로 전 세계에 퍼질 소식이요, 또 역사 속에서 위대하게 역사할 것이라고 하신다. 그러면 무엇이 예언되고 있는지 살펴보자.

1. 흩어졌던 자들이 그 흩어진 곳에서 다시 돌아오게 될 것이라 예언한다. "이스라엘을 흩으신 자가 그를 모으시고" 라고 본문은 전해준다. 여호와께서는 그가 흩으신 곳을 아시기 때문에 어디서 찾을지 아신다(10절). Una eademque manus valnus opemque tulit-즉 상처를 입히신 분의 손이 다시 상처를 고치신다. 그리고 그가 다시 그들을 하나로 모으실 때는 "목자가 그 양무리에게 행함 같이" 다시는 그들이 흩어지지 않도록 "그를 지키신다."

2. 이제 팔려가 객이 된 사람들을 구원하사 돌아오게 하실 것이 예언된다(11절). 이스라엘을 사로잡은 원수가 다 "그들보다 강할지라도" 그 누구보다 강하신 "여호와께서 야곱을 속량하시고 구속하시겠다" 하신다. 이 구속은 대가를 지불하고 사는 것이 아니라 조상들을 애굽의 손에서 건지신 것같이 능력으로 행하신다.

3. 그들은 자유롭게 풍부함과 기쁨을 누리게 되겠고 하나님은 이들의 기쁨 때문에 명예를 누리며 섬김을 받으시리라고 예언된다(12절). 그들이 조국에 돌아올 때는 "그들이 와서 시온의 높은 곳에서 찬양할 것이다." 이 거룩한 산의 꼭대기에서 노래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할 것이다. 성전의 기초가 거기 이루어졌을 때 그들이 찬양했음을 다른 말씀에서 우리는 읽게 된다. "서로 찬송가로 화답하며 여호와께 감사하였다" (스 3:2)로 하였다. 또한 "그들은 모여서 여호와의 선하심을 함께 찬양하였다." 즉 그들은 무리를 이루어 서로 앞장을 서며 물이 흐르는 것처럼 기쁨으로 "여호와의 선하심" 과 그가 백성에게 선을 베푸시는 성전을 찬양할 것이다. 그들은 "거룩한 집회에 함께 모여서 여호와의 선하심을 인하여 그를 찬양하고" 그 선하심의 아름다운 결실을 간구하며 그 선하심이 지속되기를 기도할 것이다. 그들은 여호와의 선하심 때문에 와서 야곱에게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어린양의 떼와 소의 떼를" 줄 것이라 하신다. 야곱은 자유를 누리겠고 비교할 수 없는 부를 맛보며 이를 평안히 즐길 것이며, 그들이 그의 제단에 드린 첫 소산물로 하나님을 영광되게 할 것이라신다. 자연의 섭리를 통해 베풀어지는 은사 속에서 여호와의 선하심을 느끼며 그 가운데서 계약 사랑을 맛본다는 것은 즐거운 일임을 기억하자. "궁핍과 기근 가운데서 나와 풍부를 누리게 되므로 그들은 크게 기뻐할 것이며" "그들의 심령은 물댄 동산 같겠고" 실과가 풍성하며 윤택하리라. 그리고 "모든 좋은 것이 풍족하리라" 하신다.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이 지으신 동산처럼 가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에도 하나님의 성령과 은혜의 이슬이 내리면 고귀해질 수 있음을 기억하자. 뒤이어 귀중한 약속이 주어진다. 그 약속은 이 세상에서는 완전히 성취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시온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다시는 애통함이 없을 것인데" 이유는 새 예루살렘에서 "모든 눈물이 씻겨질 것이기 때문이다" (계 21:4). 귀환된 포로들은 이전에 그들이 지녔던 슬픔의 원인을 더 이상 지니지 않을 것이요, 그러므로 (43절) "청년과 노인이 함께 즐거워할 것이다." 젊음이들은 노인들과 즐거움의 자리를 함께할 만큼 원숙하여지겠고 노인들은 젊은이들과 자리를 같이하므로 기뻐할 것이라신다. Salvares est, saltat senex-즉 나라가 번영하니 노인들이 춤을 추도다 함과 같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슬픔을 돌이켜 즐겁게 해 주며" 또 그들의 금식을 즐거운 잔치로 변케 하실 것이라신다(슥 8:19). 그들이 바벨론에서 돌아올 때면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린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게 된다" 고 하신다(시 126:5, 6). 하나님께서 위로하시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요, "하나님이 그들의 슬픔을 돌이켜 즐겁게 하실 때" 그들도 고통을 잊게 될 것이라 하신다. 그 기쁨은 고통 후에 맛보는 값있는 기쁨이다. 그들의 슬픔으로 인하여 기쁨은 더욱 찬란할 것이며 기쁨으로 인하여 슬픔은 가리워지고 만다. 그들이 고통의 순간을 기억할수록 그들은 더욱 구속의 순간을 기뻐하게 하리라고 하신다.

4. 목회자들과 그들의 치리를 받는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것으로 인하여 만족을 얻을 것이라고 예언된다(14절). 본문에 의하면 "내가 기름으로 제사장들의 심령에 흡족케 하리라" 고 하였다. 즉 제단에 바쳐지는 희생 제물이 많으므로 거기에 생계를 의지하는 제사장들이 매우 안락을 누릴 것이라는 뜻이다. 그들과 그들의 가족은 "기름으로 흡족케 될 것이며" 그들은 충분한 소유를 갖게 될터인데 최상품으로 갖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내 은혜로 내 백성에게 만족케 하리라" 고 하신다. 백성들은 생활 속에서 그들에게 행복을 주는 많은 요소들을 발견할 것이며 사실이 그러하리라고 하신다. 그들은 세상에 비해 적은 것을 소유한 것에 불과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흡족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자. 하나님의 사랑에 만족하고 그 이상의 무엇도 바라지 말자. 이러한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구속함을 받은 백성들이 누리는 영적인 축복에도 적용된다. 이 영적인 축복은 곡식이나 포도주나 기름이나 또 그것들을 소유하는데서 오는 정신적인 만족감보다 가치 있는 것이다.

5. 특별히 자녀들이 포로로 사로잡혀 감으로써 그들을 잃은 슬픔을 당한 사람들은 자녀들이 돌아옴으로 슬픔이 기쁨으로 변하리라고 예언된다(15-17절).

본문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말해 준다.



(1) 자녀들을 잃은 어머니들의 슬픈 통곡(15절).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린다" 고 한다. 당시는 포로로 사로잡혀 가는 때이다. 그러니 슬픔과 통곡 외에 무엇이 남겠는가. 예레미야 40장 1절에 보면 느브사라단이 포로들을 옮기다가 라마에서 그가 예레미야를 석방하는 내용을 본다. 본문에 또한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슬퍼하는 것이라" 하였는데 라헬의 묘는 라마와 베들레헴 사이에 있었다. 베냐민과 에브라임은 라헬의 후손들이다. 그녀는 두 아들을 둔 것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들 중 맏아들은 그의 부친이 슬픔으로 위로받기를 거절한 아들이었고(창 37:35) 다른 아들도 "나의 슬픔의 아들" 이란 뜻에서 "베노니" 라고 그의 어머니가 이름을 지었다(창 35:18). 라헬이 그의 자녀들을 위하여 통곡한 것과 마찬가지로 라마에 사는 그의 후손들이 "자기들의 아들들과 딸들이" 사로잡혀 가므로 슬퍼한다(삼상 30:6). 이러한 통곡소리가 라헬이 그녀의 무덤에서 일어나 그들과 함께 통곡하는 것이라고 시적으로 묘사된다. 착한 부모들은 "자식들이 없으므로 위로받기를 거절한다." 그들의 자녀들은 이제 그들을 떠나 원수들의 수중에 사로잡힌 것이다. 부모들은 이제 결코 자식들을 볼 수 없는 것으로 여겼다. 복음서 기자들은 이 기사를 베들레헴에서 헤롯이 어린 자녀들을 학살함으로 일어난 통곡의 사건에 인용한다(마 2:17, 18). 그리고 이 말씀이 그 때에 성취되었다고 하였다. 그들에게는 어떤 위로도 소용이 없었으며 그리하여 자녀들을 위해 울었고 "위로받기를 거절하였다." 자녀들이 없어졌으니 무엇이라 위로할 수 있겠는가. 자녀를 잃은 슬픔이야말로 가장 큰 슬픔인 것을 기억하자.

(2) 적절한 위로의 말씀이 그들에게 주어진다(16,17절). 그들은 슬픔을 억누르고 자제하라는 충고를 받는다. 본문에 의하면 "네 소리를 금하여 울지 말며 네 눈을 금하여 눈물을 흘리지 말라" 고 한다. 이러한 슬픔을 당하여 울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다. 본능적인 감정은 폭발되도록 허용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맛보는 기쁨이 방해되고 그에 대한 우리의 의무가 저지될 정도로 극한적인 슬픔에 잠겨서는 안 된다. 슬퍼하더라도 슬픔 때문에 불평은 하지 말자. 또 야곱처럼 내가 슬픔으로 죽게 되리라고 마음먹어서도 안 된다. 무절제하게 슬퍼하지 않으려면 "미래에 대한 소망을 품어야 한다." 모든 고통이 언제인가 끝나리라는 소망, 결국 모든 일은 행복하게 끝나고 평화를 누릴 것이라는 소망을 지녀야 한다. 고통 중에라도 우리에게는 좋은 결과가 있으리라는 것을 기억하자. 그러므로 "의인은 그 죽음에도 소망이 있느니라" 고 하였다(잠 14:32). 의인의 슬픔은 오히려 축복의 시기이며 기쁨으로 가는 복된 길이다. 어떤 이들은 이 말씀은 "의인은 죽은 후에 그 후손에게 소망이 있다" 로 해석한다. 우리가 당대에는 영광스러운 날들을 누리지 못한다고 하여도 우리의 후손들은 소망이 있을 것이라는 말씀이다. 한 세대는 광야에서 죽었지만 그 다음 세대는 가나안에 들어간 경우와 마찬가지이다. 두 가지 소망으로 인하여 위로받으리라고 한다.

첫째, 그들의 행위에 대한 보상의 소망이다. 이렇게 말씀된다. "너희 고통당하던 일이 갚음을 받을 것이다. 석방을 통해 얻는 위로로 사로잡힐 때의 슬픔은 씻은 듯이 사라지리라" 하신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이 고통을 당한 날의 수만큼 기쁨을 더하신다." 노력과 그에 대한 보상이 비례되듯이 슬픔과 기쁨도 정비례된다. 성도들이 최후의 날에 바라는 "계시된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된다" (롬 8:18).

둘째, 그들의 자녀들이 석방되리라는 소망이다. "그들이 그 대적의 말에서 돌아오리라" (16절) 하셨고 "너희 자녀가 자기들의 경내로 돌아오리라" (17절) 하신다. 멀리 사로잡혀간 자녀가 귀향하리란 소망이다. 야곱이 요셉을 다시는 못 볼 줄 알고 낙담하였으나 후에 그는 아들을 큰 기쁨 속에서 만났던 것과 같은 것이라 한다. 죽음을 맛본 자녀들도 마찬가지로 "경내로 돌아오리라" 는 소망이 주어진다. 그것은 부활로 주어지는 행운이다. 그것은 하늘의 가나안 땅으로의 귀향이요 하나님의 성소에로 들어감이다. 우리는 우리의 자녀가 죽었더라도 슬픔을 참을 만한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그들이 하나님과 맺은 계약에 의해 취하여졌기 때문이며 또 그들이 영생으로 부활하리라는 소망 때문이다. 그들은 아주 사라진 것이 아니라 앞서 간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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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브라임의 회개와 그가 누릴 혜택 (예레미야 31:18-26)

Ⅰ. 에브라임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옴.

유다뿐만 아니라 북왕국 에브라임도 회복될 것이며 이를 위한 준비가 진행되며 합당한 자격을 갖추게 하시리라고 한다(호 14:8). "에브라임의 말이 내가 다시 우상과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 라 한다. 에브라임이 본문에서 단수로 취급되는데 이는 그들의 뜻의 일치를 의미한다. 그들은 한 사람이 회개하듯 마음을 합하여 회개할 것이며 일심으로 단합하여 한 목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이다. 이러한 표현은 실상 회개자들에 대한 친숙성을 나타낸다. 본문이 의도하는 바는 그들의 방향을 제시해 주는 것이요, 용기를 북돋아 주는 데 있다. 이제 에브라임은 죄를 인하여 울며 돌아온다. 그들이 에브라임이란 명칭을 따온 조상 에브라임은 착한 마음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그의 자녀들을 위하여 여러 날을 울었다" (대상 7:21, 22). 이제 자녀를 잃은 슬픔은 독자를 잃은 슬픔에 비교된다. 회개자들은 다음과 같은 모습으로 돌아온다.

1. 자신과 현재 자신이 처한 비참함을 탄식하며 돌아온다. 참된 회개자들은 이렇게 스스로 탄식한다.

2. 자기를 고발하며 자기를 큰 죄인으로 정죄하며 돌아온다. 그의 양심이 그에게 죄를 고한다. 그는 지금 더욱 죄책감을 느껴 자신을 고발한다. 징계를 받는 것은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다. 그리하여 이렇게 말한다. "주께서 나를 징벌하시매 내가 멍에 아래 있고 또 그 벌을 받아 마땅합니다. 내가 송아지처럼 징벌을 받았나이다. 송아지가 멍에를 메지 않으려고 항거하지 않았다면 결코 매를 맞지 않았을 터인데......한데 우리도 송아지처럼 항거하므로 매를 맞았나이다" 라고 말한다. 참된 회개자들은 그들에게 가해진 형벌을 부친의 사랑의 채찍으로 여긴다. 그러므로 "주께서 나를 징벌하시매 내가 형벌을 받았나이다. 내게 징벌이 내릴 것은 잘된 일입니다. 그렇지 않았으면 내가 계속 행악하였으리이다. 채찍은 내게 양약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나를 위한 것이었으나 내가 그것을 참지 못하였나이다" 라고 고백한다. 또는 이 말씀은 그가 채찍을 맞으면서도 깨닫지 못하였음을 후회하는 의미도 된다. 이런 뜻으로 해석할 때 본문은 다음과 같이 진행될 것이다. "주께서 나를 징벌하시매 내가 징벌을 받았나이다. 그러나 그것뿐 나는 징벌을 받고도 일어나지 못하였고 각성하지도 않았나이다. 나는 징벌의 숨은 뜻을 몰랐습니다. 나는 멍에에 익숙지 못하여 제멋대로 걷어차는 망아지처럼 또는 그물에 걸린 양처럼(사 51:20) 징벌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현재의 그가 깨닫지 못한 죄를 말한다. 그러나 그는 이제 그의 이전의 죄까지 기억한다. 그는 그의 젊은 시절에 지은 죄까지 기억한다(19절). 한 가지의 죄를 깨닫게 되면 다른 죄도 발견이 된다. 이제 그는 "어렸을 때의 치욕" 을 기억한다. 민족으로서의 에브라임은 그들이 처음 민족으로 형성되기 시작할 때 그들의 조상들이 지은 죄까지 기억한다. 죄는 이렇게 구체적인 성격을 띤다. 우리가 어릴 때 지은 죄는 어릴 때의 치욕이 됨을 기억하자. 우리는 괴롭더라도 자주 어린 때의 죄를 기억하고 통회하는 슬픔과 부끄러움을 느껴야 한다.

3. 그는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에 대하여 분노를 품고 돌아온다. 자기의 죄와 어리석음에 대한 거룩한 분노이다. 그는 세리가 가슴을 쳤듯이 "그의 볼기를 친다." 그는 자신의 모습에 그리고 자기의 완고함과 어리석음에 놀라기까지 한다. 그는 "부끄럽고 욕됨을" 느낀다. 그는 편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지도 못하며 자신에 대한 아무런 긍지도 느끼지 못한다.

4. 그는 자기를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하심에 의탁하고 돌아온다. 그는 하나님과 등지고 있는 자기를 발견한다. 그리고 자기의 힘으로는 도저히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없음도 안다. 그는 한 때 반역하였으나 이제 돌아오기를 원하여 간구한다. "나를 이끌어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돌아오겠나이다" 하고 기도한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그를 돌이키지 않으시는 한 그는 결코 돌이킬 수 없고 끝없이 방황하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는 회개하게 하시는 은혜를 매우 갈망한다. 그리고 그 은혜에 의존하며 그 은혜로서 충분할 것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다. 또한 그 은혜가 그가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길에 부딪치는 온갖 고난을 극복하도록 도와주실 것을 믿는다. "나를 고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낫겠나이다" 라고 한다(17:14). 하나님은 능력으로 일하신다. 그는 마지못해 하는 자를 기꺼이 일하도록 만드신다. 그가 한 영혼을 회개시키고자 작정하시면 그 영혼은 회개하고야 한다.

5. 그는 이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된 것을 기뻐하며 돌아온다. 그는 "내가 돌이킴을 받은 후에 뉘우쳤다" 고 고백한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려는 모든 경건한 역사는 우리 안에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있는 역사의 결과임을 기억하자. 그가 "돌이킴을 받은 후에 뉘우쳤다" 고 했는데 이 말은 진리로 세상을 심판하시리라는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그의 뜻을 하나님께서 돌이켰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영혼을 회개시켜 그에게로 돌아오도록 하시는 방법으로 그들의 이해의 눈을 열어 주심을 기억하자. 이로써 모든 아름다운 일들이 뒤이어 발생하게 된다. 그러므로 본문에 "내가 가르침을 받은 후에 내 볼기를 쳤다" 고 고백한다. 죄인들이 의로운 지식을 얻으려면 바른 길로 돌아와야 한다. 에브라임이 징벌을 받았을때는 바람직한 결과라고는 생기지 않았다. 그것으로 끝났을 뿐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령의 교훈이 그의 섭리의 징벌을 뒤따라 주어지자 회개의 역사는 완성되었고 그러므로 그는 "그의 볼기를 쳤다." 즉 죄를 너무나 부끄러이 여기므로 그것과는 더 이상 상관하지 않고자 하였다.

Ⅱ. 에브라임을 향한 하나님의 연민과 하나님의 용서에 대한 에브라임의 깨달음(20절).

1. 하나님은 에브라임이 불충실한 자녀요 탕자에 불과하였지만 그를 자녀로 삼으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에브라임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식이 아니냐?" 라고 선포하신다. 따라서 에브라임이 스스로 탄식할 때 하나님도 그를 위하여 탄식하신다. 어머니가 자식을 꾸짖더라도 자식은 어머니의 위로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의 원리다(사 66:13). 고로 "에브라임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 내 기뻐하는 자식이 아니냐" 고 반문하신다. 영혼까지 슬픔에 가득차 그토록 탄식하는 것이 나의 아들이 아닌가 라고 물으신다. 사울의 경우도 이러하였다(삼상 26:17). 그는 다윗에게 "내 아들 다윗아 이것이 네 음성이냐?" 하고 묻는다. 이제 에브라임은 회개하고 그에게 돌아왔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의 아들인 것이다. 불충하고 몹쓸 자녀라해도 그들이 진지하게 돌아서 회개하면 아무리 그들이 몽둥이로 맞았다 하더라도 하나님에게는 사랑스럽고 귀여운 자녀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에브라임은 자신으로 인하여 벌을 받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고치신다. 에브라임은 스스로를 인하여 치욕을 당했으나 하나님은 그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신다. 돌아온 탕자는 "아들이라 불리워질" 아무런 가치도 없다고 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제일 좋은 옷" 을 입히고 "그의 손에는 반지를 끼워 주었다."

2.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향하여 관대히 대하시고 대단히 부드러운 연민으로 그에게 말씀하신다. 내가 위협적인 말로 "그를 책망해 말할 때마다 깊이 생각하노라" 고 본문은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은 에브라임을 평강으로 대하신다. 하나님이 그의 백성에게 고통을 가하셔도 그들을 잊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들을 그들의 거처에서 내어쫓으셨으나 그의 시야 밖으로 보내시지도 않았고 마음에서 잊지도 않으신다. 하나님이 우리를 견책하실지라도 그는 우리를 위하여 일하시고 만사에 우리가 잘 되도록 계획하신다. 설혹 우리가 하나님을 잊는다할지라도 "여호와께서 우리를 생각하신다" 는 사실이 고통 가운데서도 우리에게 위로가 된다. 여호와께서는 "내가 그를 아직도 깊이 생각하며 그러므로 내 마음이 측은하다" 라고 말씀하신다. 이러한 하나님의 심정을 요셉이 겉으로는 거칠게 그의 형들에게 말하면서도 속 마음은 애타게 그들을 사모하던 것과 같다고 하겠다. 이스라엘이 고통으로 인하여 회개하며 복종할 때 하나님은 그들의 비참함으로 마음이 아프시다(사 10:16). 왜냐하면 그는 때리시되 부드러운 마음을 걷우시지는 않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연민이 에브라임에 대한 형벌을 감하신다. 그러므로 호세아 11:8,9절에서는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아섰다" 고 하셨다. 이제 이와 같은 연민이 에브라임의 회개를 용납하신다. 에브라임은 "주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시라. 그러므로 내가 이제 당신께 돌아오며 당신의 자비와 은혜로 의지하나이다" (18절)라고 간구하였다. 하나님은 이 호소를 좋게 여기시고 들으신다. 왜냐하면 에브라임은 당신이 하나님이시며 인간이 아니고 바로 에브라임의 하나님임을 분명히 했기 때문이다.

3. 하나님은 에브라임에게 선을 베푸실 것을 결심하신다. "내가 반드시 그를 긍휼히 여기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고 본문에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진정으로 그에게 간구하고 복종하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풍부하고 적절하며 확고한 긍휼을 베푸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우리가 우리의 죄 때문에 많은 고통을 받을수록 우리를 위한 긍휼의 위로도 더욱 잘 준비되었음을 알아야 한다.

Ⅲ. 바벨론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귀향을 준비하라는 약속과 격려의 말씀이 주어진 하나님은 그들에게 두려워 떨며 넋 빠진 사람처럼 행동하지 말라고 하신다. 또 서로 말다툼이나 하면서 시간을 소일하지 말라신다. 그리고 단단히 결심하고 전념하여 귀향을 준비하라고 하신다(21,22절).

1. 그들은 이제 쫓겨났던 조국으로 귀향하는 것 이외에는 다른 아무 생각도 말아야 했다. 그러므로 "처녀 이스라엘아 돌아오라. 너의 하나님에게 다시 신부가 되도록 하라, 네 성읍들로 돌아오라. 이 성읍들은 하나님이 네게 주신 것이 아니냐. 그러니 그곳으로 돌아오라" 고 선포된다. 그들은 자유로이 시온으로 귀환할 때까지 결코 바벨론을 만족스럽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2. 그들은 그들이 사로잡혀 왔던 길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그러므로 예전의 슬픔을 다시 기억하여 각성하게 될 것이며 또는 그들의 부친들이 이 길을 지날 때 무슨 일이 있었다고 말해 줄 것이며 직접 그 장소들을 봄으로 기억이 생생하여져 더욱 그들의 해방에 대하여 감사하게 될 것이라 한다. 죄의 멍에를 인하여 하나님에게서 멀어졌던 사람들은 그들이 길을 잃어버리고 헤매던 그 길로 돌아와야 한다. 그들은 그들이 태만히 하였던 임무로 돌아와야 하며 이전에 그들이 하던 사명을 감수해야 한다.

3. 그들은 귀향에 온 정열과 마음을 쏟아 전념해야 한다. 그러므로 "길에 착념하라" 고 말씀되어 있다. 귀향에 신경을 써라. 네 임무와 너의 유익이 무엇이 될까 생각하라. 기쁨으로 이 일에 착수하라고 하신다. 바벨론에서 시온으로 가는 길! 죄의 속박을 벗어나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스러운 자유를 얻는 길, 그것은 대로(大路)임을 기억하자. 그 길은 곧고 평탄하고 안전하다. 그 길은 잘 포장되어 있다(사 35:8). 그렇지만 그들이 "그 길에 마음을 착념하지 않는 한" 그 길을 걸을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이다.

4. 그들은 또한 여행에 필요한 모든 준비를 갖추어야 했다. 그러므로 "너를 위하여 길표를 세우며 너를 위하여 표목을 만들라. 길을 잃을 위험이 있는 곳마다 안내판을 붙이라. 사람들을 앞서 보내어 길에 익숙토록 하여 그들이 다른 사람의 길을 안내하게 하라" 고 하신다.

5. 그들은 여행을 위해야 마음을 정리해야 된다고 하신다. 그러므로 "패역한 딸아. 네가 어느 때까지 방황하겠느냐" 고 반문하신다. 마음이 변덕스러워서는 안 된다. 또 귀향에 회의를 품어도 안된다. 단단히 결심을 하고 염려와 두려움으로 곁길로 나아가면 안된다. 피조물에게 도움을 구해도 안되며 그들에게 교태를 부려서도 안 된다. 이렇게 함으로 그들은 자주 하나님을 등졌던 것이다. 오직 하나님에게 자신들을 맡기고 마음을 하나님에게만 쏟아야 한다.

6. 그들은 힘을 내서 이 일을 행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들에게(기이하고 놀라운) "새 일을 세상에(이스라엘 땅) 창조하였는데 곧 여자가 남자를 알게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교회는 여자처럼 사건을 기피한다(사 54:6). 그렇지만 교회는 강한 남자(여기서는 세상을 말함:역자 주)를 대항하여 그들을 둘러싸 포위하고 승리하게 될 것이라 한다. 요한계시록 12장 1절에서도 교회는 여자에 비유된다. "저희 군대들이 성도들의 진을 두르나" (계 20:9) 이제는 오히려 성도들의 진지가 저들을 포위한다. 하나님은 그들을 그 땅에 돌려보내시려 새 일을 계획하셨고 이 일은 그들에게 앞으로 있을 징조를 뜻하기도 하였다. 많은 훌륭한 성서 주석가들에 의하여 이스라엘 땅에서 일어난 "새로운 일" 은 그리스도의 화육으로 해석되었다(사 7:14; 9:6). 본문에 의하면 "여자" 곧 처녀 마리아의 태가 "전능하신 분" 에 의해 둘러싸인다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왜냐하면 본문의 게베르(Geber)란 단어는 여자를 의미하는 동시에 기보르(Gibbor)는 "능하신 하나님" (32:18)으로 해석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화육이 언급되는 기보르(사 9:6)는 그리스도를 뜻하기도 한다. 그는 엘-기보르 곧 "전능하신 하나님" 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결코 버리시지 않을 것을 그들은 확신해도 좋다. 왜냐하면 이 축복은 이미 그들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사 65:8).

Ⅳ. 이스라엘이 그들의 조국에 다시 안주하게 되리라는 즐거운 약속이 주어짐.

1. 그들은 그들의 이웃들이 베푸는 존경과 친절에 감사할 것이다. 그들의 이웃들은 그들에게 충고를 줄 것이며 축복 기도를 드려 줄 것이다(23절)(유다 땅과 예루살렘이 오랫동안 놀람과 조롱거리가 되어 왔지만). 전에와 같이 "이제 유다 땅과 그 성읍들에서 다시 이 말을 쓰리니 곧 "의로운 처소요 거룩한 산이여, 여호와께서 네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 라고 할 것이다. 이 사실이 그들이 새로워져서 또 모든 면에서 훌륭하게 되어 돌아올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너무나 현저하므로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약탈자들의 소굴이 되었던 "성읍들이 의로운 처소 이스라엘의 산" 이 될 것이다(그러므로 시 78:54 에서는 온 땅이 이스라엘의 산이라 불리운다). 그리고 특별히 시온산은 "거룩한 산" 이 될 것이다. 인간들에게는 의롭게, 하나님에게는 거룩하게 사는 것, 이 둘은 늘 병존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고 경건과 정직은 하나님이 결합시키신 것으로 이 둘을 따로 분리시켜 생각할 수는 없다. 둘 중의 하나만으로 다른 것을 보상할 수는 없다. 고통을 당하여 새롭게 되는 백성에게는 만사가 잘되며 또 더 큰 행복이 약속되기도 한다. "의로운 처소" 인 가정들과 "거룩한 산" 인 성읍들 위에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시기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당연하다. 여호와께서는 틀림없이 그 곳에 축복을 내리실 것이다.

2. 그들 가운데 온갖 좋은 것들이 풍성히 있을 것이라 한다(24,25절). 유다가 지금은 황폐하였지만 예전에 가인과 아벨이 가진 명예로운 직업인 농경과 목축에 종사하는자가 "함께 거하리라" 하신다(창 4:2). "의로운 처소와 거룩한 산" 은 그들의 아름다운 주거지가 된다. "농부와 목자들은 그들의 수고의 결실을 먹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그 피곤한 심령을 만족케 하며 무릇 슬픈 심령을 상쾌케 하셨기 때문이다." 즉 여행에 지칠 대로 지쳐서 포로생활에서 오랜 슬픔을 경험하였던 자들이 풍요를 즐기게 된다. 이것은 영적인 축복에도 적용이 되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참으로 회개하는 사람들 즉 의롭고 거룩한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준비하신 것이다. 그들은 신의 위로와 은혜로 만족을 얻게 된다. 하나님의 사랑과 친절 속에서 피곤한 영혼은 쉼을 얻게 되고 슬픔에 잠긴 영혼은 기쁨을 얻게 된다.

Ⅴ. 예언자가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기쁨을 우리에게 전해 준다(26절). 하나님께서 때때로 유다와 예루살렘의 재난에 대하여 그에게 보여 주신 예견들은 극도로 그를 고통스럽게 하였다(4:19). 그러나 이 환상은 비록 오랜 시간 후의 일이기는 하나 유쾌한 것이었다. "내가 깨어보니 기쁨이 넘쳤고 잠에서 저절로 깨어나게 되었도다. 내가 꿈을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 꿈이 이렇게 아름다웠으므로 나의 잠이 달았더라" 고 고백한다. 하나님의 가호 속에서, 그와의 친교 속에서 눕고 깨는 사람들은 단 잠을 잘 수 있다. 이 세상에 대한 어떠한 이상도 선한 사람들과 훌륭한 목회자들에게는 하나님의 교회의 번영보다 더 기쁨을 주지는 못한다. 우리의 사는 날 동안 "예루살렘의 잘됨과 이스라엘의 평화" 를 보는 것만큼 즐거운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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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계약 (예레미야 31:27-34)

단 잠에서 깨어난 예언자는 하나님의 은총의 계시에 의하여 더 기쁜 사실을 알게 되리라는 희망 속에 다시 잠이 든다. 그리고 그러한 기대는 헛된 것이 아니었다. 본문에 보면 더욱 큰 약속이 주어진다.

Ⅰ. 하나님의 백성은 그 인구가 늘고 번영하여 돌아올 것이라 한다. 이제 이스라엘과 유다는 씨를 뿌려 수십 배로 결실되듯이 인구와 가축이 급증하게 된다(27절). 그들은 밭에 심은 옥수수처럼 급격히 증가할 것이다. 그리고 이는 하나님의 축복의 결과이다(23절). 하나님은 그들에게 축복하셨고 또 "번성하라" 고 말씀하셨었다. 그리스도의 교회도 이러한 형태로 놀랍게 발전해야 한다. 또 하나님이 세우시고 심으실 것이라고 하였다(28절). 여호와께서 "경성하사" 선을 그들에게 베푸시며 그들이 번영할 수 있는 어떠한 기회도 놀리지 않으신다. 오랫동안 만사가 그들에게 불리하였었고 일어나는 사건마다 그들을 파멸로 이끌어 갔었다. 이 모든 정황은 마치 "여호와께서 경성하여 그들을 뽑으며 훼파하며 멸하며 곤란케 하려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제는 그들을 실망시키던 모든 일들이 그들의 이익을 강화시켜 주고 더해 주는 방향으로 움직이게 되었다. 하나님은 죄를 회개하고 죄를 인하여 겸손한 사람들을 위로하시고자 준비하고 계신다. 반면에 그는 죄와 사랑을 속삭이며 그들의 마음을 강퍅케 하는 자들에게 벌을 내리시기도 하신다.

Ⅱ. 그들의 조상의 죄 때문에 그들이 더 이상 해를 당하지 않을 것이라 한다(29,30절). "그때에 하나님께서 아비의 죄를 자손에게 갚으시리라는 말을 그들이 다시는 듣게 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을 사로잡혀가게 하심으로 조상의 죄를 자손에게 갚으셨는데 이는 특별히 므낫세의 죄 때문이었다. 그들은 이 일을 당하고는 견디기 어렵다고 불평하였다. 성서의 다른 곳에서는 보응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을 정당화시키고 있다. 또한 우리 주님께서도 그가 사시던 당시의 악한 유대인들이 그들의 조상의 죄 때문에 벌을 받은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그들이 죄를 고집하였기 때문이었다(마 23:35, 36). 그러나 본문에서는 이렇게 혹독한 하나님의 통치가 끝날 것이라는 사실이 약속되고 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조상의 죄 때문에 더 이상 그들과 쟁론하시지 않을 것이라 한다. 그대신에 그가 그들의 조상들과 맺은 계약을 기억하시고 그 계약에 따라 축복을 베풀겠다고 하신다. 이제는 전에 그들이 행한 것처럼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들의 이가 시다" 고 불평하지 아니하게 된다. "이제는 각기 자기 죄악으로만 죽는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민족의 죄를 적용시켜 처형하시는 일은 없게 되었으나 아직도 그는 자신을 거스린 특정 개인에게 벌을 내리신다. 공동체 구원 원칙에도 불구하고 범죄한 개인에게는 그것이 보장이 되지는 못한다는 것을 기억하자. 스스로 "신 포도를 먹는" 사람마다 "그 이가 시게 된다." 금단의 과일을 먹는 자들은 그 과일이 아무리 근사하게 보인다고 할지라도 결국 신 포도에 불과함을 알게 될 것이며 이로써 그의 이가 실 것임을 기억하자. 그들은 이 사실을 먹자마자 느끼게 될 것이며 괴로운 심정으로 그 일을 기억할 것이다. 신포도는 먹자마자 이가 신 것처럼 죄는 인간을 곧 불안하게 하는 힘이 있다.

Ⅲ. 하나님께서 그들과 계약을 갱신하실 것이라 한다. 그러므로 이제 그들이 갖게 된 모든 축복은 섭리에 따른 것일뿐 아니라 이제 약속에 의한 것이 되었다. 이제 그들은 행복과 안정을 누리게 된다. 이 계약은 후에 실현될 복음의 시대로 상징한다. 사도들은 이 계약을 복음의 은총으로 후에 이해한다(히 8:8, 9 등). 히브리서 8장 8,9절에서 본문의 구절 이하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는 자들과 맺어질 은총의 계약의 핵심으로 인용되고 있다. 이제 다음과 같은 사실을 고찰해 보자.

1. 누가 누구와 맺은 계약인가? 계약의 대상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 곧 그리스도 복음의 교회요, "평강이 머무는 하나님의 이스라엘" (갈 6:16) 곧 믿음의 아브라함과 기도의 야곱의 영적인 자손들이다. 유다와 이스라엘은 둘로 분열된 왕국이었다. 그러나 포로에서 돌아온 후 그들은 연합될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같은 사랑을 그들에게 부어 주신다. 또한 그리스도의 교회와 계약에 있어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이같이 연합된다.

2. 계약의 본질. 이것은 "새 계약" 으로 "그들의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하다." 즉 시내산에서 그들과 맺은 계약 같지도 않으며 아담을 창조할 때의 그들과 맺은 계약과 같지도 않다. 이 새 계약은 본질상 은총의 계약이다. 복음 시대에 있을 새 계약에 비하면 옛 계약은 소극적인 사면에 불과하다. 이 새 계약에 근거하여 죄인들도 회개하면 구원을 받는다. 또 장차 올 메시야에 대한 신앙과 그의 피에 대한 신앙이 이 계약을 확증시켜 준다. 이러한 새 계약은 율법적인 희생 제사에 기초한 옛 계약에 의하여 모형이 제시되었었다(출 24:7, 8). 이외에도 이 계약은 그전 것에 비교할 때 여러 가지 면에서 새 계약이라 칭할 만하다. 예법과 약속들은 더욱 영적이요, 천상적으로 되고 있으며 나타날 일들은 더욱 분명해진다. 하나님이 전에 그들과 맺었던 계약은 그들이 장님이나 절름발이나 노약자이기나 했던 것처럼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리라" 는 계약이었다. 이 "언약을 그들은 파하였다." 옛 계약을 맺으신 분도 하나님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깨뜨린 것은 인간이었음을 기억하자. 이로 보건대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요, 우리들 자신에게는 죄와 파멸밖에는 없음을 기억하자. 하나님은 "그들에게 남편이 되셨다." 하나님이 자진하셔서 그들과 혼인관계를 맺으신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이 계약을 파기하였다. 그 계약은 하나님과 그들 사이에 이루어진 결혼 계약이었는데 그들은 우상을 섬김으로 그 계약을 파괴했고 이런 행위는 곧 영적인 간음 행위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비하고 상냥하며 보살펴 주시는 남편이시었다. 그는 우리에게 신실하셨다. 그러나 우리는 그에게 거짓되었다. 이것으로 하나님과의 비극적인 이별이 이루어진 것이다.

3. 새 계약의 특성. 이제 그들은 모두 영적인 축복을 받게 된다. "내가 너희에게 가나안 땅을 주겠고 여러 가지 조목의 축복을 내리리라" 는 그러한 축복이 아니다. 그 대신 그들에게 "용서와 평안과 은혜와 좋은 생각과 아름다운 마음을 주시겠다" 고 하신다. 그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약속하신다.

(1) 그들로 하여금 맡은 바 임무에 자진하여 충성하도록 하게 하시겠다고 하신다.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겠다" 고 하신다. 내가 그들에게 새로운 율법을 주겠다고 하신 뜻이 아니다[가테이커씨(Mr. Gataker)가 이 사실을 바르게 지적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도 "내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케 하러 왔다" 고 하셨다. 다만 같은 율법을 전에는 돌 판에 새기었으나 이제는 성령의 손가락으로 그들의 마음 판에 새기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율법을 모든 믿는 자들의 마음에 새기시사 그들로 하여금 이 율법에 친숙하게 되고 또 사건에 준비가 되게 하신 다. 그것이 마음에 새기어졌으므로 그것을 적용해야 할 때 손쉽게 적용하게 하신다(잠 3:3). 하나님께서는 그들로 하여금 율법을 주의 깊게 지키도록 하신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 마음 가까이에 있기 때문에 우리가 더욱 그것을 사모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복종하는 마음을 주신다는 말이다. 본문에 이러한 내용이 약속되고 있다. 그러기에 이 축복을 기도로써 간구해야 한다. 우리는 주어진 의무로 의식적으로 또한 기쁨으로 완수해야 한다.

(2)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 자신과 교분 관계로 맺게 하겠다고 하신다.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하신다." 즉 하나님은 그들에게 만사에 충족하신 분이 되실 것이며 백성들은 하나님에게 충성스러운 백성이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모든 행복의 핵심은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 되심에 있다. 하늘에 있는 본향은 세상 나라에 비할 것이 못된다(히 11:16; 계 21:3). 우리가 그의 백성이 되는 것은 우리편에서 갖추어야 할 조건이다(참으로 기꺼이 하나님에게 백성되기를 자원하는 사람들 그들에게만이 하나님은 하나님되신다). 이 약속은 한 걸음 더 나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의 은총에 의해서 그의 백성으로 삼으시겠다고 하신다. 그들은 마지못하여 그의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자원하는 백성이 된다. 누구든지 그의 백성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에 의한 것이다.

(3) 온갖 부류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충만할 것이며 이 지식으로 말미암아 온갖 선한 축복의 파급 효과가 있게 되리라 한다. 하나님의 이름을 올바르게 아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바라며 그를 섬길 것이요, 그를 신뢰하게 될 것이다(34절). 그러므로 본문에 "다 나를 앎이니라" 하신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알기를 기뻐할 것이며 그를 아는 방법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제 그를 아는 길이 온 땅에 알려질 것이다. 오랫동안은 유대만이 하나님을 알았다. 구약 시대는 이방인들에게는 무지의 시대였다. 그들에게 참 하나님은 알지 못하는 신이었다. 그러나 구약 시대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게 될 것이다. 복음의 시대에 이르러 하나님께 속한 일들은 더욱 분명하고 알기 쉽게 될 것이다. 그리고 백성들이 모세를 쳐다볼 수가 없으므로 모세가 "얼굴을 천으로 가리웠던 것" 이상으로 가장 천한 사람들도 이와 같이 그를 알게 되리라고 하신다. 이렇게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일반화되므로 이전처럼 교육을 시킬 필요가 없게 된다. 어떤 이들은 이 말씀을 과장된 표현법으로 여긴다(그리고 유대인들의 무감각한 상태를 깨우기 위하여 이러한 표현법이 필요한 것이라고 한다). 그들에 의하면 이 말씀은 복음 시대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율법 시대에 그들이 하나님을 알았던 것이 이상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과장되게 표현했다고 본다. 어떤 이들은 또 이렇게도 생각한다. 즉 복음시대에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 는 위임을 받은 사람들에 의한 공중 설교가 율법 시대 보다 훨씬 많고 또 계속될 것을 뜻한다는 것이다. 이제는 전처럼 가족이나 이웃끼리의 소규모의 복음 전달 방법의 의미가 감퇴된 것으로 본다. 제사장들은 가끔 성전에서 비교적 적은 무리에게 가르쳤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인들의 집회가 자주 개최되므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교회의 여러 기관들을 통하여 아름다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가르쳐질 것이라 한다. 또 어떤 이들은 이렇게 생각한다[가테이커씨(Mr. Gartaker)가 이 사실을 말하였다]. 즉 하나님에 속한 일에 대한 이해가 이같이 명백해진 것은 교훈이라는 간접적인 방법에 의하지 않고 어떤 직접적인 계시에 의하여 가르침을 받기 때문이라고 한다. 결론적인 얘기는 모두 하나님의 속한 일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의하여 전보다 더 분명하여졌다는 말이다(딤후 1:10). 또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리스도의 은총에 의하여 전보다 더욱 분명히 하나님에게 속한 일들을 깨닫게 되었다는 의미이다(엡 1:17, 18).

(4) 이 모든 축복들을 얻기 위하여 먼저 죄가 용서될 것이라 한다. 죄의 용서가 다른 모든 축복의 근원이 된다. 그러므로 "내가 그들의 죄를 사하겠다" 고 하신다. 즉 그들에게 죄를 묻지도 않으시며 죄를 따라서 그들을 다루시지도 않겠다는 말이다. 용서하시고 아주 잊으실 것을 말씀한다. 그러므로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고 하셨다. 우리에게 축복이 보류되는 것은 죄 때문이다. 죄가 하나님 사랑을 막아 버린다. 용서하시는 자비를 힘입어 죄를 내어버리자. 장애물들이 제거될 때 하나님의 은혜가 강처럼, 급히 흐르는 하수처럼 쏟아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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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의 약속 (예레미야 31:35-40)

앞에서는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장차 이루어질 영광스러운 사실들이 취급되었다. 포로에서 돌아옴으로 시작되었던 유대 교회의 신기원은 결국 그리스도의 교회의 시작으로 종료되었고 그때에 제시되었던 모든 약속들은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완성되었다. 그런데 과연 우리들은 이 약속들을 믿어도 좋은가? 본문에는 그에 대한 답변으로 그 약속들이 다시 재기되고 있다. 그리고 그 약속 가운데서 포함된 축복들이 영원할 것을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확증해 주고 있다. 본문에서 약속된 가장 큰 사실은 세상이 있는 동안 하나님은 이 세상에 교회를 유지하실 것이라는 것이다. 때때로 교회가 낮아질 때도 있으리라. 그러나 그것은 다시 솟아오를 것이며 교회에 대한 관심이 새롭게 될 것이라 한다. 교회는 "반석 위에 세워진 연고로 지옥의 세력이 그것을 넘어뜨리지 못한다." 이 일에 대한 우리의 신앙을 확고히 해 주기 위하여 본문에 두 가지 사실이 언급된다.

Ⅰ. 세계라는 건물의 존재. 그리고 그 건물의 견고함과 영속성은 그의 교회의 설립을 착수하신 하나님의 능력과 신실하심의 증거가 된다.

" 태초에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며" (히 3:4) 그 분이 현재도 만물을 존재하게 하신다. 자연계의 지속적인 영화로운 모습을 보므로 우리는 은총의 나라의 영광이 영원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게 된다. 노아의 홍수 후에 세상을 물로 멸하지 않으리라 맹세하신 것처럼 은혜의 나라는 영속적인 것이다.(사 54:9) 더욱 상세하게 본문을 고찰하여 보자.

1. 자연계의 영광을 말함. 그리고 이 대자연의 하나님을 그들의 하나님으로 영원토록 모시는 자들의 행복이 어떠한가를 말하고 있다. 다음과 같은 사실을 기억하자.

(1) 천체의 규칙적이고 변함없는 움직임을 기억하자. 하나님은 자연의 첫 번째 동인(動因)이시며 그 최상의 감독자이시다. 그는 "해를 낮의 빛으로 주셨다" (35절). 그가 처음에 해를 그렇게 지으셨을 뿐 아니라 지금도 그와 같도록 관할하신다. 태양이 내는 빛, 그 열 그리고 모든 태양의 영향력은 계속 대창조자에게 의존되고 있다. 또한 "그는 달과 별들을 밤의 빛으로 규정하셨다." 그들의 움직임이 "규정" 되었다고 하였다. 이 말은 그들이 규칙적이며 법칙에 의하여 움직이기 때문이며 그들은 법칙 아래 결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2) 바다의 운행을 기억하고 또 거만스러운 파도를 저지시키는 힘을 기억하자. 본문은 다음과 같이 전한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바다를 나누시며 파도가 격동할 때에 바다를 좌정시키시도다" (한글 개역과 다소 틀림:역자). 즉 바다가 극심하게 요동칠 때는 하나님께서 그 파도를 규제하시며(22절) 곧 잠잠케 하사 다시 평온케 하신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능력을 찬양해야 한다. 그는 천체의 질서를 유지하실 뿐 아니라 바다의 격동을 규제하신다.

(3) 하늘의 광대함과 궁창의 무한함을 기억하자. 위대한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누구도 이와 같은 대자연을 운행하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본문은 "위의 하늘을 측량할 수 없다" 고 고백한다(37절). 그러나 하나님은 이렇게 무한한 우주를 충만하게 채우신다.

(4) 창조의 세계의 신비를 기억하자. 이 피조물계에 우리의 운명도 속해 있고 우리는 이 피조물계와 깊은 관련을 갖는다. "창조자께서 땅을 공간에 다시므로 밑에서 땅의 기초를 찾을 수 없음이여" (욥 26:7)라 하였고(한글 개역과 다소 다름:역자 주) "그 주초는 무엇 위에 세웠는지 우리가 알지 못한다" (욥 36:6)고 하였다. 이렇게 이 세계는 신비로운 곳이다.

(5) 이 모든 자연이 변할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자(36절). 그러므로 본문은 "이 규정이 내 앞에서 폐할 수 없도다" 라 하였다(한글 개역과 다소 틀림:역자 주). 하나님께서는 천체와 이 땅을 그리고 그것들의 움직임을 항상 보살피신다. 그가 그것들을 지으셨다. "천지가 그의 규례대로 오늘까지 있음은 만물이 그의 종된 연고이다" (시 119:90, 91). 하늘에는 자주 구름이 덮히기도 하고 태양과 달은 자주 구름에 가리운다. 땅이 흔들리기도 하며 바다가 요동할 때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제 위치를 지키며 움직이고 있으며 경로를 벗어나지 않는다. 이를 보고 우리는 창조주의 선하심과 능력과 성실하심을 인정해야만 한다.

2. 하나님의 은혜의 나라가 확고부동하리라는 사실이 언급되고 있다. 우리는 "이스라엘 자손이 영영히 나라가 될 것" 임을 확신해도 좋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교회인 영적인 이스라엘은 "거룩한 나라요, 선택된 백성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벧전 2:9). 육에 속한 이스라엘이 국가로서의 자격을 잃을 때 "약 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으며" (롬 8:8) 그들이 악을 행하였지만 "이스라엘 자손의 행한 모든 일을 인하여 그들을 다 버리지는 않을 것이라" 한다(37절)(한글 개역과 다소 틀림:역자 주). 하나님께서는 공의로서 이스라엘을 폐하실 수도 있었지만 그가 그들을 폐하시지는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들의 조국에서 쫓아냈지만 일시적인 것에 불과한 것이요, 영구히 그들을 추방하신 것은 아니라 한다. 물론 그들 중 몇 명은 추방되었으나 다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 바울 사도의 말씀도 이 사실을 말하고 있는(롬 11:1)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고 하였다. 왜냐하면 "이제도 남은 자가 있기 때문이다" (롬 11:5). 이 사실은 비록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불신으로 멸망을 당하였지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모든 씨를 멸하시지는 않으리라" 는 약속을 보증할 만큼 충분한 것이었다. 우리는 다음의 사실을 고찰해 봄으로 이러한 우리의 신념에 확신을 더할 수 있다.

(1) 교회를 보존해 주시기로 약속하신 하나님은 전능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다. 그는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보존하시는 분이며 우리를 도우시는 능력은 하늘과 땅을 지으신 분의 이름에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으시다.

(2)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돌보실 뿐만 아니라 이 보살핌을 통하여 자신이 영광을 받으시기를 바라신다는 사실이다. 그가 영광을 받으시는 길은 이 세상 속에 교회를 두시고 그의 이름을 찬양할 백성을 확보하심에 있다. 그 외에 그가 영광 받으실 길은 없다.

(3) 만일 창조의 질서가 태초에 확실히 고정되었기 때문에 지금도 변함없이 계속된다면 또 창조의 질서에 어떤 변화가 필요없기 때문에 변경되지 않고 있다면 같은 이유로 은혜를 내리시는 방법도 변치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은총도 태초에 잘 확립되었기 때문이다.

(4) 스스로 교회를 보존하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은 세상의 기초를 든든히 하시겠다고 하신 말씀을 성실히 실행하시므로 교회 보존의 약속도 지키시리라는 사실이다.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영원한 약속" 을 하셨기 때문에 그 계약에 대하여 신실하셨던(창 9:9, 16)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 또한 그의 영적인 자손들과 맺은 계약에도 거짓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후자의 계약 역시 "영원한 계약" 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잘못 저지른 범죄도 그것이 아무리 많다고 하여도 계약이 갖고 있는 자비로운 의도를 제거하지는 못한다(시 89:30 참고).

Ⅱ. 파괴된 예루살렘의 재건과 확장. 이 사업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교회 곧 하늘의 예루살렘을 위하여 행하실 위대한 역사(役事)의 전조가 된다(38-40절). 비록 오래 지연될지는 알 수 없으나 "날이 이르리라" 고 하신다. 그 때에는 아래와 같은 일들이 이루어진다.

1. 예루살렘이 다시 전처럼 웅장하게 건축된다. 그 성전의 면적이 지명에 의해 정확히 설명되고 있고 그것을 통하여 측량줄이 띠워진다. 과연 느헤미야가 세운 성벽은 예언이 그대로 응하여 본문에 언급된 대로 "하나넬 망대" 에서부터 시작되었고(느 3:1) 본문에 언급된 만큼의 면적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본문에서 "모퉁이 문과 가렙산" 이라고 칭해지고 있는 곳이 정확히 어디인지는 결정할 수 없다.

2. 성전이 완성되면 그것은 하나님께 봉헌되고 그를 예배하는 데 쓰일 것이다. 고로 본문에 "여호와를 위하여 건축할 것이라" 하였다(38절). 또한 외곽과 성전 뜰까지 "여호와에게 성별될 것이라" 고 한다. 이제 성전은 그전처럼 우상으로 더러워지지 않고 하나님만이 찬양되고 높여진다. 전처럼 온 도성 전체가 곧 성전이며 거룩한 곳이 된다. 새 예루살렘은 이같이 성이 곧 성전이므로 따로이 성전이 필요 없게 된다.

3. 이 성전은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지어졌고 또 그를 찬양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므로 "영영히 다시는 뽑히거나 전복되지 아니한다." 즉 다시 말하면 이 도성은 오래 지속될 것이다. 옛 도성이 다윗왕으로부터 포로기까지 유지되었듯이 새 예루살렘도 그들이 귀향한 때부터 성의 멸망까지는 오랜 시간이 경과될 것이라 한다. 그러나 본문의 약속은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온전히 이루어진다. 이 교회는 영적인 이스라엘이므로 하나님이 멸하지 않으신다. 또한 이 교회는 거룩한 성이므로 인간들의 어떤 힘으로도 "뽑거나 전복시킬 수 없다." 예루살렘처럼 주님의 교회도 때로는 황폐해질 때도 있으리라. 그러나 교회는 다시 회복된다. 주님의 교회는 폭풍우도 견뎌내며 성장하므로 "지옥의 세력이 교회를 당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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