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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교회의 초청에 대한 그리스도의 응답 (아가 5:1)

이 말씀은 앞장 마지막에서 "나의 사랑하는 자가 자기 동산에 들어가기를 원하노라"고 교회가 기도한 것에 대한 그리스도의 응답이다. 여기에 그는 와 계시며 이 여인에게 그 사실을 알리고 있다. 우리는 그의 부르심을 듣고 그의 초대를 응락하는 데에 게을리하는 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즉각적으로 우리 기도를 들으시며,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백성의 초대를 얼마나 기꺼이 받아 들이시는지 유의하도록 하자. 우리는 그에게 올라 가기를 부끄러워하나 그는 스스럼없이 자신을 낮추시고 우리에게 오신다.

요청에 어떻게 응답하는지, 또 그 답변은 요청보다 얼마나 더 완벽한 것인지 살펴보자.

1. 이 여인은 그를 사랑하기 때문에 "나의 사랑하는 자"라고 부르고(실제로 그는 사랑을 받을 만한 분이셨다) 그를 초대하였다. 그는 이에 답하여 4장에서도 몇 번이나 그랬던 것처럼 이 여인을 자기 "누이요" "신부"라고 부른다. 그리스도를 자기들의 가장 사랑하는 분으로 삼는 자들은 그에게 가장 가깝고 가장 사랑스러운 관계에 있는 자로 인지(認知)받을 것이다.

2. 이 여인은 그 동산을 "그의 것"이라고 부르며 그 동산의 아름다운 실과도 "그의 것" 이라고 부르는데 그도 그것을 인정하신다. 그것은 "내 동산"이요 "나의 향재료"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노여워하시게 되셨을 때 그는 그들을 일축하여 모세한테로 보내버리셨던 것이다(저희는 "내 백성"이라. 출 32:7). 그리고 그는 여호화의 정하신 절기를 "저희의 정한 절기"라고 부르셨다(사 1:14). 그러나 이제는 그들이 자신의 마음에 들게 되자 그는 그들을 자기 동산이라고 인정하신다. "비록 하찮은 것이긴 하나 이 동산은 내 소유이다." 성실하게 자기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께 바치고 자기의 전 소유와 자기의 전 소유와 자기가 그에게 해드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바치는 자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명예의 도장을 찍으실 것이며 그들이 소유하는 모든 것과 자기를 위해 행하는 모든 것에 자기의 표를 해주시면서 "이것은 내 것이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3. 이 여인은 그에게 "그의 동산으로 들어오라"고 초청하였는데, 이에 대해 그는 "내가 들어왔다"고 답하신다. "내가 부르짖을 때에 그는 내가 여기 있다고 말하리라"(사 58:9). 솔로몬이 하나님께서 오셔서 자기가 그를 위해 지은 전을 소유하시도록 기도드렸을 때 그는 정말로 오셨던 것이다. "그의 영광이 그 전에 가득하였고"(대하 7:2) 또 그는 자기 "이름이 거기에 영원히 있도록" 하시기 위하여 그 전을 택하여 성별하셨다는 것을 솔로몬에게 알려 주셨다(16절). 자기 영혼의 문을 그리스도께 활짝 열어놓는 자들은 그리스도께서 기꺼이 들어오시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가 자기 이름을 기록해 두는 곳이면 어디서나 그는 자기 백성과 만나실 것이며 그들을 축복해 주실 것이다(출 20:24).

4. 이 여인은 그가 "자기의 아름다운 실과를 잡수시고" 자기 성전에서 드리는 제물을 받으시기를 원하였다. 이 제물은 곧 그의 동산의 실과와 같은 것이었다. 그는 그녀의 소원대로 행하시려 하나 그 실과가 거두어져 있지도 않고 즉시 먹을 수 있도록 준비가 돼있지 않음을 보시고 친히 그것들을 거두신다. 여러 실과가 그의 것이기에 그 준비도 그가 하시는 것이다. 그는 심령이 자기가 들어가 즐길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지 않음을 발견하시나 자기가 그곳에 심어 놓으셨던 은혜로운 속성들을 끄집어 내셔서 작동시키신다. 그가 만약 거두셔서 자기 스스로를 위해 보전시키지 않으신다면 우리 속에 있는 보잘 것 없는 선조차 흘러나가 없어지고 말 것이다.

5. 이 여인은 단지 그가 동산의 "실과를 먹는 것"을 바랐으나 그는 그외 딴 것도 많이 가지고 왔으니 그것은 곧 "꿀"과 "포도주"와 "젖"이었다. 이들은 풍부한 영양이 담긴 것이었고 임마누엘의 땅 가나안의 생산품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것을 백성에게 나눠주고 그들과 어울리셨으며 그러한 것을 크게 기뻐하신다.

아니면 우리는 에스더가 자기 남편되는 임금을 위해 "주연"을 준비한 것 같이 이것도 신부가 준비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것은 평범한 식사에 불과하며 더욱이 꿀과 젖은 자연식이다. 그러나 이것이 자상하게 생각하여 미련된 것이므로 그는 자상하게 받으시는 것이다. 그는 불완전성을 간과하시며 꿀과 함께 벌집을 잡수신다. "심령은 원하고" 있으므로 육신의 연약함을 묵과하시고 용서하여 주신다. 그리스도께서 부활 후 그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그는 그들과 함께 한 조각의 꿀송이(원어는 벌집)도 드셨다(눅 24:42, 43, 흠정역), 즉 이 구절이 요구하는 것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는 포도주만 마시지는 않으셨다. 포도주는 어른들, 큰 사람들을 위한 술이지만 그는 포도주와 함께 아이들, 작은 아이들을 위한 음료인 우유도 마셨다. 그것은 그가 젖을 필요로 하는 "거룩한 아이 예수"로 태어나실 것이었기 때문이다.

6. 이 여인은 그를 혼자 오라고 초대하였으나 그는 자신이 즐길 음식과 함께 자기 친구들도 데리고 오시며 그들에게 그 음식을 나누어 먹도록 권유하신다. "많으면 많을수록 더욱 더 즐거운" 것이다. 이토록 풍성한 곳에 나쁜 음식은 없었다. 우리 예수께서 5천 명을 한꺼번에 먹이셨을 때 "그들은 모두 먹고 배가 불렀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가 친히 마시는 "포도주와 젖"을 마시러 오라고 그의 모든 친구들을 초대하시며(사 55:1)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포도주의 연회"로 초청하신다(사 25:6). 인간의 구원이라는 위대한 사업과 풍성한 은혜의 계약을 주 예수님의 잔치이며 동시에 그것은 우리의 잔치도 되어야 한다. 그 초대는 대가를 원치않는, 정중하고 사랑이 넘쳐 흐르는 것이었다. "오! 친구들아! 먹으라."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우리와 함께 잡수시면 그와 더불어 먹게 되는 것은 우리이다(계 3:20). "친구들아! 먹으라." 그리스도의 친구가 되는 이들만 그의 식탁에 영접된다. "그를 자기들의 지배자로 모시려 하지 않는" 그의 원수들은 "그 일에 아무런 몫도, 없으며 분깃도" 없다.

"마시고, 많이 마시라." 그리스도께서는 가난한 영혼들을 위해 풍족한 양식을 그의 복음 안에 만들어 놓으신 것이다. "그는 굶주린 자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려 주신다." 거기에는 모든 자들을 배부르게 할 만큼 충분한 것이 있으며 각자에게도 충분한 것이 있다. "우리는 그 분 안"이나 그의 은혜 속에 "있으면 궁핍을 당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들 자신의 가슴만 의지하다가 궁핍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할 것이다. "네 입을 크게 벌리라.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가득 채워 주실 것이다." 그러나 "술 취하지 말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엡 5:18). 그리스도를 접대하는 자들은 그와 함께 그의 친구들도 환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은 혼인 잔치에 함께 초대를 받으셨다(요 2:2).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자기 교회와 혼인하는 날에 그의 모든 친구들도 자기와 함께 기뻐하실 것이며, 그 증거로 자기와 함께 잔치를 즐기게 하실 것이다. 영적이고 성스러운 기쁨에는 과식할 염려가 없다. 거기서 우리는 "풍족히 마시고 하나님의 복락의 강물을 마실 것이며"(시 36:8) "크게 만족할 것이다"(시 65:4).

 

5:2

그리스도의 은총과 물러가심 (아가 5:2-8)

이 사랑과 기쁨의 노래에서 우리는 매우 우울한 장면에 접하게 된다. 이 여인이 여기에서 사랑하는 자에게 직접 말하는게 아니라(이전같이 그에게 직접 말하지 않음은 그가 물러갔기 때문이다) 그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이 여인이 자신의 어리석음과 비행에 대해서 언급하는 슬픈 이야기이다. 그의 친절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그릇되이 행동했던 자신의 비행을 말하고 있으며 그로 인해 자신이 받아야 마땅할 책망을 스스로 되뇌이고 있는 것이다. 아마 이 말씀은 하나님을 배반한 솔로몬 자신의 행적과 그 배반 후의 슬픈 결과를 가리키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나님께서 자기 동산에 들어오셔서 그가 건축한 성전을 소유하셨으며 그는 희생 제물을 놓고 하나님과 함께 잔치를 하였었는데(1절), 그 뒤 그는 이렇게 하나님께로부터 이탈해 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이 말씀은 또한 교회나 개개 신자들의 경우에도 적용될 수 있다. 그들은 부주의나 태만심으로 그리스도를 노엽게 만들어 자기들에게서 물러나시게 하는 수가 흔히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다음 사실을 살펴보자.

Ⅰ. 이 신부가 느끼고 있던 언짢음과 그녀를 사로잡은 불안감(2절). "내가 잘지라도 마음은 깨어 있다."

1. 그 행동에는 타락한 면이 나타난다. "나는 잔다." 지혜로운 처녀들은 선잠을 잔다. 그러나 이 여인은 자기 침상 위에서 자고 있다. 영적 질환은 처음에 맞부닥쳐 싸우지 않으면 갈수록 심해져서 지반을 구축하기 쉽다. 이 여인이 "잠을 잤다"는 것은 그녀의 경건한 애정은 냉각되었고 그녀가 자기 의무를 소홀히 하였고 그것에 태만하게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녀는 자신의 안일에 탐닉하게 되었고 그것을 든든하게 생각하여 경계를 하지 않게 되었다. 좋은 일도 그것이 정도 이상으로 커지면 나쁜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풍부한 여러 계시를 얻었다. 이로 인해 그는 자만심에 차서 "영혼아, 네 평안을 누리라"고 말하려는 위험에 처하여 있었다. 따라서 그에게는 그가 잠자지 못하도록 할 육체의 가시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동산 곧 고뇌의 동산에 들어 가셨을 때 그의 제자들은 잠을 이기지 못하여 그와 함께 깨어있지 못하였다. 진정한 크리스챤이라고 언제나 그 신앙 생활이 생기가 있고 활력이 넘치는 것은 아니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혜는 그 속에 남아 있다. "내 마음은 깨어 있다. 나 자신의 양심은 자고 있는 나를 꾸짖으며 나태 속에 있는 나를 끊임없이 일으켜 세웁니다. 마음으로는 원하고 있습니다. 속 사람을 따라 나는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하고 있으며 내 마음으로 그것을 섬기고 있나이다. 현재로는 내가 유혹에 압도되고는 있습니다만 나라고 해서 모든 것이 외길만으로 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나는 자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죽은 자의 잠이 아닙니다. 나는 그것에 대항해 싸우고 있습니다. 그것은 깊은 잠도 아닙니다. 나는 이런 언짢은 기분으로는 편안할 수가 없습니다."

(1)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동산에서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 오셨을 때 우리가 잠자고 있었던 사실을 슬픔과 수치로써 반성하지 않으면 안 되며 우리 자신의 영적 졸음이나 심신의 불안에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

(2)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잘못된 것을 슬퍼할 때에라도 우리 안에 작용하고 있는 선한 것, 아직 살아 남아 있는 선을 간과해서는 아니 된다. "내 마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깨어있다. 그는 내게 있어서 내 자신의 심장처럼 소중하신 분이시며 내 생명이시다. 내가 잘 때에 그는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신다."

Ⅱ. 신부가 이런 언짢음 가운데에 있을 때 그리스도께서 이 여자를 부르시는 소리. "나의 사랑하는 자의 소리가 들리는구나." 이 여인은 그것이 그의 소리라는 것을 알았고 또 곧 알아 채렸다. 이것은 그녀의 마음이 깨어있었다는 증거였다. 이 여인은 소년 사무엘처럼 처음 부를 때에 들었으나 사무엘처럼 사랑을 오인하지는 않았다. 이 여인은 그것이 그리스도의 목소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우리에게 잠에서 깨어나 자기를 들이라고 문을 두드리신다. 그는 말씀과 성령으로써 두드리기도 하시고 환란 고통을 통해 두드리기도 하시며 우리 양심에 의해 두드리기도 하신다. 이것은 분명하게 표현되지는 않았지만 아마 요한계시록 3장 20절에서 언급되는 것 같다. "볼찌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라." 그는 죄인들에게는 자기와 계약을 맺으러 오라고 부르시며 성도들에게는 자기와 교제를 갖자고 부르신다. 그는 자기가 사랑하시는 자들을 부주의 속에 그대로 버려두지 않으실 것이며, 어떤 방법으로든 그들을 깨우시고 책망 하시며 또 억제하실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잊어버리는 때에도 그는 우리를 생각하시며 우리 믿음이 약해지지 않도록 도와 주신다.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부인하였지만 주님께서는 그를 돌아보심으로써 그로 하여금 제 정신이 돌아오도록 해 주셨다. "나의 누이, 나의 사랑아! 내게 문열어다오"라는 부르심이 얼마나 감동적인가 살펴보자.

1. 그는 문을 열라고 요구할 수 있는 자임에도 불구하고 들어가게 해달라고 애원하고 있다. 그는 쉽게 문을 부술 수 있지만 두드리고 서 계신다.

2. 그는 생각해 낼 수 있는 온갖 친절한 칭호와 사랑스러운 호칭을 이 여인에게 사용하고 있다.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그는 자기를 위해 앉아서 기다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불쾌한 호칭을 붙이거나 그녀의 몰인정을 탓하지 않고, 도리어 어떻게 하면 이 여인에게 대한 자기의 인자한 애정을 변함없이 표현할 수 있을까 하고 궁리한다. "그는 자기의 인자를 완전히 거두어 가버리지는 않으실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믿음으로써 자기와 혼인한 자들을 자기의 누이로, 사랑으로, 비둘기로, 모든 친근한 자로 간주하실 것이다. 그들은 그의 의로움으로 옷입혀졌으므로 더럽혀지지 않는다. 이러한 생각은 이 여인(교회)으로 하여금 그에게 문을 열어 주고 싶은 생각이 들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생각하면 우리는 가장 자기 부인한다고 하는 경우에 있어서도 우리의 것을 그에게로 들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내게 문열어 다오." 우리는 그런 친구를, 그런 손님을 들어오지 못하도록 할 수 있을까? 그리스도는 우리가 알고 지낼 만한 무한한 가치가 있는 분이며, 그와의 교제로 득볼 수 있는 자는 우리 뿐인데도 그는 풍부한 사랑으로 우리와 어울리기를 매우 바라신다. 우리는 이러한 자와 많은 얘기를 나누며 사귀어야 하지 않겠는가?

3. 그는 자신의 고난을 호소하며 sub forma panperis, 즉 하룻밤 유숙을 원하는 "불쌍한 여행객의 모습"으로서 받아들여 자기를 청하고 있다. "내 머리에는 이슬이, 찬 밤 이슬이 가득하였다. 너와의 해후를 위해 내가 겪어온 난관이 어떤 것인지 생각해 보아라. 따라서 나는 실로 네게서 이와 같은 조그만 친절을 받을 만하다." 그리스도께서 가시관을 쓰셨을 때 가시는 틀림 없이 그의 복되신 머리에서 피를 흘리게 만들었을 것이고 이 때 그의 머리에는 "이슬이 가득하였던" 것이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밤에 아내가 자애로운 남편을 문 밖에 세워두웠을 때 그 남편이 당하는 슬픔처럼, 이렇게 불친절한 대우를 받는 나의 슬픔은 어떠하겠는지 생각해 보아라." 우리는 그의 사랑에 대해 이렇게 갚고 있는 것이 아닐까? 부주의한 영혼은 예수 스리스도를 냉대한다. 그런 냉대는 그에게 있어서 "무척 비 많이 오는 날에 끊임없이 떨어지는 빗방울과 같다."

Ⅲ. 이런 부르심에 응하기를 주저하며 말하는 이 여인의 핑계(3절). "내가 옷을 벗었으니 어찌 다시 입겠느냐?" 이 여인은 반쯤 잠들어 있어서 자기가 사랑하는 자의 음성도 알고 그가 두드리고 있는 것도 알고 있으나 그 마음 속에는 그에게 문열어 주고자 하는 생각이 생기지 않았다. 이 여인은 옷을 벗고 있었으며 다시 옷을 입는 수고는 하지 않으려 하였다. 이 여인은 "자기 발을 씻었던" 후라 다시 발씻을 번거로움도 원하지 않았다. 그녀는 딴 사람을 보내 문을 열게 할 수 없었다(그리스도를 우리 마음에 들어오시도록 하는 일은 우리 자신의 행동과 행위하여야 한다). 그럼에도 이 여인은 손수 가기를 싫어하였다. 이 여인은 "내가 문을 열지 않겠다"고 말하지는 않으나 "내가 어찌 할까?"하고 말한다.

경박한 구실은 신앙 생활에 태만한 자가 곧잘 쓰는 말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문열어 달라고 부르시나 우리는 그럴 마음이 없다고 하거나 그렇게 할 만한 힘이나 시간이 없다고 가장한다. 그리고서는 책임을 면하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는 마치 "추위 때문에 밭을 갈지 않는 게으름뱅이"와 같다. "허리에 띠를 매고" "주님의 오심을 주시"해야만 할 자들이 만약 허리띠를 풀고 옷을 벗고 있다면 그들은 자기들의 이전 결심을 회복하거나 옷을 다시 입은 작업이 어렵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물샐틈 없이 방비하고 있는 것이 가장 상책이다. 구실을 대는 것(눅 14:18)은 그리스도를 경시하는 것(마 22:5)으로 해석된다. 그리스도를 위해 찬바람을 맞거나 따뜻한 침상에서 뛰쳐나오려고 생각지 않는 자들은 그리스도를 멸시하는 자들인 것이다.

Ⅳ.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신의 은총. 이로 인해 그녀는 기꺼이 일어나 그 사랑하는 자에게 문을 열어 주게 되었다. 그는 설득으로 이 여인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게 되자 기다리기에 지친 자로서 문빗장을 따기 위해 "문틈으로 손을 들이 밀었다"(4절). 이것은 그녀의 영혼에 대한 성령의 역사를 암시한다. 즉 성령의 역사에 의해 이 여인의 마지못해 하던 마음이 즐거이 하려는 마음으로 변화된 것이다(시 110:3). 루디아의 개종은 "마음을 여셨다"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으며(행 16:14),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제자들의 마음을 열어 깨닫게 하셨다고 나타나 있다(눅 24:45). "인간 안에 사람의 영을 만드신" 이는 그 심령에 접근하는 모든 수단을 알고 계시며 그 안에 들어가기 위한 길이 어느 것인지 아신다. 그는 편견을 타파하고 자기의 교훈과 율법을 도입시키기 위해 자기 손을 들이밀 수 있는 "문틈"을 능히 발견할 수 있다. 그는 "다윗의 열쇠"(계 3:7)를 가지고 계셔서 그것으로써 심령의 문을 여신다. 그가 마음의 문을 여시는 때에는 열쇠가 자물쇠의 흠에 딱 맞듯이 마음에 꼭 들어맞게 하시며, 마음의 본래적인 성질에 무리한 힘을 가하시는게 아니라 비뚤어진 성품에만 힘을 주어 여시는 것이다.

Ⅴ. 이러한 신의 은총의 방법에 드디어 이 여인의 순응함. "내 마음이 그에게 동하였다." 선한 역사가 그 애정에 작용하여 그러한 마음(意志)을 얻어냈다. 그리스도께서 두 제자의 "마음을 속에서 뜨겁게" 하셨을 때 그들의 마음이 그랬던 것처럼 "나의 오장육부가 그에게 동하는구나" 이 여인은 그의 "머리가 이슬에 젖어 있었기" 때문에 그 사랑하는 자에게 대한 연민으로 마음이 움직였다.

부드러운 심령과 인정어린 마음으로 인해 영혼은 그리스도의 영접을 위해 준비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대한 그의 사랑은 극히 감동스러운 모양으로 표현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연민 가운데에서 우리를 구원하셨는가? 우리도 연민으로 그를 받아 들이자. 또 그의 소유가 되는 자들이 언제라도 곤경에 처해 있을 때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들도 불쌍히 여기고 영접하자. 이 선한 역사가 그녀의 애정에 작용하여 그녀를 일으켜 세우고 그녀로 하여금 자기의 둔함과 게으름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였으니("내가 일어나서 내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문을 열어 주었다." 5절), 그의 은혜가 그녀로 하여금 그 일을 행하고 싶게 만들고 불신앙의 방해를 억눌러 버린 때문이었다. 이것은 그녀 자신의 행동임에 틀림없으나 그가 이 여인 안에서 역사하셔서 이 일을 행하게 하신 것이다. 그리고 이 때에 그녀의 "손에서 몰약이 문빗장에 듣는구나." 이것은 다음 두 가지 중 하나를 의미할 것이다.

1. 이 여인은 문빗장을 벗기기 위하여 빗장에 자기 손을 대었고 그 때에 이 여인은 그 몰약을 발견하였다(본문 말씀은 "문 빗장 위의 몰약이 내 손에 듣는구나"라고도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역주). "문틈으로 자기 손을 들이민" 그가 거기 있었다는 표적으로 이 몰약을 남겼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영혼에 대해 강력히 작용하실 때는 그 안에 복된 단맛을 남기시는데 그것은 영혼에게는 매우 즐거운 것이 된다. 이 몰약으로 그는 빗장이 잘 열리도록 기름칠을 하신 것이다.

우리가 신의 은총으로 믿음이 활발하게 움직이며 의무에 열중할 때는 우리가 기대한 것 이상으로 신의 은총이 한층 더 신속히 그리고 감미롭게 진보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께 문 열어드리기 위해 일어나기만 해도 우리가 염려하던 어려움들이 이상하게 극복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며, 다니엘처럼 "주께서 나로 힘이 나게 하셨사오니 내 주여, 이제 말씀하시옵소서"(단 10:19)라고 말하게 될 것이다.

2. 이 여인이 몰약을 그리로 가져왔다. 춥고 습한데 그토록 오래 서 있던 "자기의 사랑하는 자에게 마음이 동하여" 이 여인은 문을 열어주려고 했을 때 그의 머리에 발라서 힘을 돋우고 그를 위로하며 아마도 그가 감기드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이 몰약을 예비해 가지고 왔을 것이다. 그녀는 그를 맞기에 너무나 다급하여 일상적인 준비를 할 만큼 지체하려 하지 않고 그녀의 기름이 든 옥합에 손을 담그기만 하였으니 이는 그가 맨 처음 들어올 때 재빨리 그의 머리를 기름으로 적셔 주기 위해서였다. 자기 마음의 문 즉 그 "영원한 문"을 열어드리는 자들은 믿음과 은혜의 활발한 움직임으로 그를 맞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며 이들로써 그에게 기름을 부어 드려야 한다.

Ⅵ. 이 여인이 가기의 사랑하는 자에게 문을 열어 주었을 때 당하게 되는 슬픈 실망. 이 기사 중 가장 우울한 부분이 여기에 나오는 것이다. "내가 의도하던 대로 나의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문을 열었다. 그러나, 아! 내가 사랑하는 자는 벌써 물러나가 버렸네, 내 사랑하는 자는 가고 없네, 가고 없네."

1. 이 여인은 맨 처음 그가 두드릴 때에 문을 열어 주지 않았다. 그 후에 이 여인이 "이 축복을 상속받고자" 하여 왔을 때는 이미 너무 늦은 때였다. 그리스도는 찾을 만한 때에만 찾아질 것이다. 우리가 만일 우리 시간을 놓치면 배편도 놓치게 될 것이다.

(1)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지체를 그의 거절로써 마땅히 책망하시며 의무 수행에 태만하고 조는 자들에게는 위로의 교류를 유예하신다.

(2) 신도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떠남이란 크게 비탄하고 애통해야 할 일이다. 제왕 시편 기자는 어떤 일에 대해서도 그들에게서 하나님이 "그의 얼굴을 숨기시는 일"이나 "자신을 일축"하시거나 "버리시는 일"에 대해 호소할 때보다 더 슬퍼한 적은 결코 없었다. 이 신부는 여기에서 자기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옷을 찢으며 자기 손을 비비꼬면서 "그는 가고 없네, 그는 가고 없네"라고 목놓아 울려는 찰라에 있다. 더욱이나 그녀의 마음을 찢어놓는 것은 이것이 그녀 자신의 탓이란 사실이다. 그녀는 그를 노엽게 하여 물러가게 했던 것이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떠나가시면 그것은 무언가 부당한 대우를 받으시는 까닭이다.

2. 이 경우 그녀가 하는 일은 무엇이며 그녀에게 발생하는 일은 무엇인지 살펴보자.

(1) 이 여인은 여전히 그를 자기가 "사랑하는 자"라고 부른다. 이 여인은 아무리 날이 흐리고 어둡더라도 그와의 관계와 그분 안에서 얻는 자기 이익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단단히 마음을 먹고 있다. 우리들 자신의 실패나 하나님의 철수를 염려하는 때마다 우리의 영적 상태에 대해서는 거의 결론을 내리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약하기 때문이다. 버리신다고 해서 모두가 절망할 일은 아니다. "주여! 나의 불신앙을 도와 주소서" 하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될 때에 라도 "주여! 내가 믿습니다"라고 나는 말하겠다. 그가 나를 떠나더라도 나는 그를 사랑한다. 그는 내 것인 것이다.

(2) 이 여인은 그가 자기를 부르시면서 한 말씀을 기억하며 그 말씀이 자기에게 어떤 감명을 주었는지 회상하고서, 자기가 그 때에 즉각 자기의 확신을 따라 행동하지 못했던 어리석음을 자책하고 있다. "그가 말할 때에 내 혼이 나갔구나, 그가 내 머리에는 이슬이 가득하다고 말했을 때 그의 말은 내 마음을 움직였었다. 그러나 나는 가만히 누워서 구실만 만들고 그에게 문을 열어 주지 않는 몹쓸 인간이었다." 우리의 확신을 질식시키고 답답하게 만드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눈을 열어 주실 때 지나간 일을 돌이켜 보게 되고 그로써 매우 쓰라림을 느끼는 일이다. 때때로 말씀은 마음에 즉각적으로 효과를 나타내지 않는 수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후에 다시 생각함으로써 마음을 감동케 한다. 그가 이전에 했던 "그 말씀 때문에" 이제 "내 혼이 녹는구나."

(3) 이 여인은 다시 잠자리로 돌아가지 않고 그를 찾으러 나섰다. "나는 그를 찾았다. 나는 그를 불렀다." 이 여인이 그가 처음 부를 때 분기(奮起)했더라면 이런 수고를 줄일 수 있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기회의 활용에 대한 우리 자신의 나태와 부주의로 인하여 많은 일들을 놓치고 아주 많은 곤란을 자초하게 된다. 이 여인이 자기의 사랑하는 자가 물러갔는데도 계속하여 그를 찾은 것은 칭찬할 만하다. 그의 물러감으로 인해 그에게 대한 이 여인의 사모는 더욱 강하게 되고 그를 찾으려는 탐문은 더욱 열렬하게 되었다. 이 여인은 기도로써 그를 부르며 뒤따라 가면서 부르고 그에게 돌아오라고 간구한다. 그녀는 기도할 뿐만 아니라 늘 하던 수단을 사용하기도 한다. 그녀는 이전에 자기가 그를 찾곤 하던, 길에서 그를 찾아 다닌다.

(4) 그러나 이 여인은 여전히 그를 만나지 못하였다. "나는 그를 발견하지 못하였다. 그는 내게 아무런 응답도 주지 않았다." 이 여인은 그의 은총의 증거도, 눈에 보이는 위로도 갖지 못 하였으며 전혀 캄캄한 중에 있었고 자기에게 대한 그의 사랑을 의심하는 가운데 있었다.

그리스도께 대해 참사랑을 품고 있으면서도 저희 기도에 대한 즉각적 응답으로서 그의 미소를 받아 보지 못하는 자들이 있다. 그러나 만약 그가 저희 영혼을 강건하고 강건하게 하여 자기를 계속 찾도록 힘을 주신다면 그는 저들에게 그것에 상당하는 응답을 주시는 셈이다(시 138:3). 사도 바울은 "육체의 가시"를 제거하는 데에 성공할 수는 없었으나 그에 대해 충분한 은혜로 응답을 받았던 것이다.



(5) 이 여인은 행순군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 "그들이 나를 만나매 나를 쳐서 상하게 하였다"(7절). 그들은 이 여인을 윤락녀로 오인하였고(그들이 자기들의 순번을 도는 그러한 밤중에 그녀가 길거리를 배회하고 있었으므로) 따라서 그녀를 때렸던 것이다. 위로받지 못하여 마음둘 곳 없는 성도들은 죄인으로 오해받고 그런 무리로서 비난을 당하며 욕을 본다. 이와 같이 한나가 "그 마음의 괴로워서" 기도하고 있을 때도 우두머리 행순군 중 하나인 엘리가 한나를 무뢰한 벨리알의 한 딸로 생각하고 "네가 언제까지 취하여 있겠느냐?" 고 말하며 그녀를 상하게 하고 쳤던 것이다(삼상 1:14, 15). 시온 왕의 충성스럽고도 사랑하는 신하들인 자들이 시온의 파수군들에 의해 시온왕국의 원수나 치욕거리로 그릇되게 묘사하는 것은 새로운 일이 아니다. 그들은 저희에게 누명을 씌우는 방법 이외에는 저희를 학대하거나 박해할 길이 없었던 것이다. 혹자는 이 말씀을 목회자에게 적용하여 생각한다. 직분으로서는 행순군이면서도 소생한 양심의 소유자들에게 말씀을 오용함며 서툴러서 그렇든, 타인의 슬품을 도외시해서 그렇든지 간에 고통당하는 자들에게 고통을 더하고 "하나님께서도 슬프게 하지 아니한 의인의 마음을 슬프게 만들며"(겔 13:22), 용기를 북돋아줘야만 할 자들에게서 용기를 꺾고, "하나님께서 상하게 하신 자의 슬픔"(시 69:26)을 말하여 그들에게 근심이 되도록 하는 목회자들은 이런 부류에 든다. 그 행순군들은 아주 악한 자들이어서 자기의 사랑하는 자를 찾아 나선 이 여인에게 도움을 줄 수도 없고 주지도 않으려는 자들이었다(3:3). 더구나 그들이 이 여인에게 가혹하고도 무자비한 비난을 퍼부으면서 훼방을 놓고 "그녀를 쳐서 상하게 한 것"은 한층 더 악한 짓이었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벽를 파수하는 자들"이면서 마치 그것을 파괴하는 자들과 같이 행동하였다. 그들은 이 여인의 너울(우리 성경에는 웃옷)이 다만 정절에 대한 가식에 불과하고 그 정반대의 것에 대한 은폐물이기도 한 듯 그녀로부터 "그 너울(혹은 웃옷)을" 거칠고 야만스럽게 "벗겨 취하였다." 외모가 모두 훌륭한 데도 불구하고 불공평하게 정죄당하며 위선자로 욕을 먹는 자들은 여기에 나오는 신부처럼 "저희의 웃옷을 벗겨 취해간다"고 호소할 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6) 자기의 탐문을 수행하려는 이 여인에게 파수군들은 학대를 가하였고 이로 인해 그녀는 무력하게 되자 자기 주변 사람들에게 자기의 탐색 작업에 조력해 줄 것을 당부한다(8절). "예루살렘 여자들아! 나의 모든 친구들과 친지들아! 너희에게 내가 부탁한다. 너희는 나보다 먼저 그를 만날지도 모른다. 만약 너희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만나면 너희는 그에게 무어라고 말할 건가?" (이렇게 해석하는 이도 있다.) "나를 위해 좋은 말을 해 다오. 그에게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다고 하려무나."

여기에서 다음 사실을 살펴보자.



[1] 이 여인의 상태는 어떠했는가? 이 여인은 그의 부재로 병이 날 만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했다. 만약 그가 계시지 않는다면 지독히 병을 앓고 도저히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사랑했다. 해산하는 여인과 같은 아픔으로 그의 돌아옴을 기다렸다. 이 여인은 아합이 그가 몹시 탐내는 나봇의 포도원 때문에 병이 나듯 앓고 있었던 것이다. 이 여인의 병 앓이는 영혼의 건전함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그 병의 경과는 틀림 없이 양호할 것이며 그것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 아니라 삶에 이르는 병일 것이다. 세상에 대한 사랑으로 편안한 것보다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으로 병나는 것이 더욱 낫다.

[2] 이런 상황에서 이 여인이 취한 행동. 그녀는 절망에 빠져 들거나 이 병으로 자기는 죽고 말 것이라고 체념하지 않고 자기가 사랑하는 자를 찾으러 사람들을 보냈다. 그녀는 자기 이웃 사람들의 조언을 구하였고 자기를 위해 기도해 줄 것을 부탁하였으며 그들이 자기를 위해 그와 중재해 줄 것을 청하였다. "내가 비록 부주의하였고 어리석었으며 게을러서, 벌떡 일어나 마땅히 그에게 문을 열어주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나는 여전히 그를 사랑하고 있었노라고 그에게 말해 주오. 그는 만사를 다 알고 계시니 그는 내가 사랑하는 줄을 아십니다. 비록 내가 의무의 길에서 모자라는 경우가 한 두 번이 아니지만 나를 그에게 진실한 자로 나타내 주오. 뿐만 아니라, 그가 내게 동정심을 품고 나를 도와 줄 수 있도록 나를 그에게 연민의 대상으로 표현해 주오." 이 여인은 야경군들이 어떻게 학대하였는지를 그에게 말해달라고 부탁하지는 않는다. 그녀는 행순군들이 그 일로 아무리 불의했다고 하더라도 주님께서는 의로우시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녀는 이런 고난도 끈기있게 참고 있다. "그러나 내가 그에게 대한 사랑으로 상처를 입었다고 말해 주오." 은혜로운 영혼은 다른 어떤 괴로움보다 그리스도의 물러 가심으로 인한 고통에 한층 더 민감할 것이다. Langnet amans, non langnet amor─"연인은 초췌해지거나 그의 사랑은 초췌해지지 않는다."

 

5:3 없음.

 

5:4 없음.

 

5:5 없음.

 

5:6 없음.

 

5:7 없음.

 

5:8 없음.

 

5:9

그리스도의 뛰어나심과 그에 대한 교회의 탐구 (아가 5:9-16)

Ⅰ. 이 여인의 부탁에 답하여 예루살렘의 여자들이 그녀의 사랑하는 자에 대해 묻는다(9절).

여기에서 다음 사실을 살펴 보자.

1. 그들이 이 신부에게 부치는 경애스런 칭호. "너, 여자 중 극히 어여쁜 자야!" 우리 주 예수님은 그의 신부를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예수살렘의 모든 딸들의 눈에도 참으로 사랑스러운 자가 되게 하신다. 교회는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사회이고 성도의 교제도 마찬가지로 가장 훌륭한 교제이며 지성소의 아름다움은 초월적인 미라고 할 수 있다. 성도들은 가장 훌륭한 백성이다. 거룩함은 영혼의 조화이다. 그것은 그것 자체와의 일치이다. 그것은 그것을 적절히 판단할 수 있는 자라면 누구의 눈에든지 돋보인다. 여기에 나오는 예루살렘 여자들처럼 그리스도를 잘 모르는 자들조차 그의 형상을 띄는 자들이 가지는 사랑스런 아름다움을 보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비록 상이한 의복을 걸치고 있더라도 우리가 어디서 보게 되든지 간에 그의 형상을 사랑해야 한다.

2. 그녀의 사랑하는 자에게 대한 그들의 물음. "너의 사랑하는 자가 남의 사랑하는 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인가? 네가 우리로 하여금 너를 위해서 그를 찾게 하려거든 우리가 그를 보더라도 그인줄 알 수 있도록 그의 특징을 말해다오."

(1) 어떤 이들은 이것을 그토록 야단법석을 떠는 이 여인에 대한 비난으로 해석한다. "어째서 너는 딴 사람들이 자기 사랑을 찾아 다니는 것보다 더 열정적으로 이토록 네 사랑하는 자를 찾으려 하느냐? 왜 너는 딴 사람들이 그에게 대해 친절심을 품고 있는 것보다 더 그에게 집착하려는가?" 신앙 생활에 열성적인 자들은 그것에 무관심한 자들에게 의혹을 품게 한다. 그리고 많은 부주의한 자들이 열심이고 신실한 소수의 사람들을 비웃는다. "그가 딴 사람들보다 그토록 더 매력적인 점은 무엇이냐? 그가 가고 없다면 너는 여자들 중 극히 어여쁜 자이니까 쉽사리 딴 사람을 마찬가지의 정열로 소유할 수 있을 것 아니냐?"

이와 같이 육욕에 찬 마음으로는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아무런 훌륭함도 비상함도 찾아볼 수 없다. 그의 품성이나 직분, 그의 교훈이나 은총 안에서도 계속적인 마음으로는 훌륭하고 비상한 아름다움을 도무지 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세상을 아는 지식이나 세상과의 교제보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나 그와의 교제가 하나도 나을 것이 없는 것같이 보일 것이다.



(2) 그러나 딴 사람들은 이것을 오히려 진지한 질문으로 받아들이고 이 질문을 제기하는 자들의 의도를 다음 두 가지로 생각한다.

[1] 신부를 위안하기 위하여. 그들은 이 여인이 자기의 신랑에 대해 잠깐 얘기만 하더라도 새로운 심령으로 회복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사랑하는 자의 아름다운 점들을 묘사하는 즐거운 작업보다 이 여인을 더 기쁘게 할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그녀의 슬픔을 이보다 강력하게 전환시킬 수 있는 것도 없을 것이었다.

[2] 그들 스스로가 정보를 얻기 위하여. 그들은 그가 훌륭하며 영화로운 분이라는 것을 대체로 알았지만 한층 상세하게 알기를 원하였다. 그들은 무엇이 이 신부로 하여금 그토록 대단한 격정과 관심을 가지고 자기 사랑에 대해서 자기들에게 부탁하도록 감동시켰을까 궁금히 여겼다. 따라서 그들은 그에게는 딴 사랑스러운 자들과 다른 어떤 점이 틀림 없이 있으리라는 결론을 내리고 이 점을 확실히 알고 싶어하였다.

그리스도와 그의 초월적인 완전함에 대해 사람들이 탐문하기 시작하였을 때 그들에게는 모종의 희망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사도들이 이방인의 믿음으로 유대인을 격동시켜 거룩한 경쟁을 붙였듯이(롬 11:14) 때로는 그리스도를 찾는 자의 비상한 열심은 많은 사람을 분기시키는 수단이 된다(고후 9:2; 요 4:10 참조).

Ⅱ. 신부는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자기의 사랑하는 자를 설명한다. 우리는 항상 그리스도를 찾는 이들에게 교훈을 베풀고 도와 줄 태세가 갖춰져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를 스스로 잘 알고 있는, 경험이 풍부한 크리스챤은 딴 사람들도 그분을 숙지하도록 하기 위해 최선을 다 하지 않으면 안 된다.

1. 이 여인은 전반적으로 그가 비할 데 없이 완전한 분이시며 그 누구도 필적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닌 분임을 그들에게 확신시켜 준다(10절). "너희는 나의 사랑하는 자를 알지 못하는가? 예루살렘의 딸들이 예루살렘의 면류관이시고 그 면류관을 쓰신 머리가 되시는 그분을 모를 수 있단 말이냐? 만약 모른다면 내가 말해 주마."

(1) 그는 사랑스럽고 귀여운 것이라면 무엇이나 다 자기 안에 지니고 계신다. "나의 사랑하는 자는 희고도 붉다." 이러한 색은 완전한 아름다움을 이루는 색이다. 이것은 그가 성육하셨을 때 그의 몸이 비상히 아름답다는 것을 가리키는 말씀이 아니라(아기 예수께 대해서는 아기 모세가 태어났을 때 그가 "매우 아름다왔다"고 한 그런 표현이 없다. 행 7:20 아니, "그는 모양도 없고 아름다움도 없었다." 사 53:2) 그의 신적 영광을 가리키며 중보자로서의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이 연합됨을 시사한다. 이것은 신적 조명을 받아 영적 사물을 식별하게 되는 자들의 눈에는 참으로 그가 사랑스러운 자로 보이도록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주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 그는 거룩한 아기 예수였다. 그것이 그의 아름다움이었다. 만일 우리가 우리에게 계시되신 대로 그의 "지혜로우심"과 "의로우심"과 "성별되심"과 "구원하심"을 바라 본다면 그는 모든 것에서 아름다우신 자로 나타나신다. 우리에게 대한 그의 사랑은 그로 하여금 아름다운 자로 보이게 만든다. 그는 티하나 없는 순결하신 삶으로는 "희고" 죽기까지 당하신 피흘림의 고초로는 "붉으며" 하나님으로서 그의 영광으로는 "희고"(그가 변형되셨을 때는 "그의 의복이 빛과 같이 희었다") "아담"(붉은 흙이란 뜻)의 성질 곧 인성(人性)을 취하셨다는 점으로서는 "붉다." 또한 자기 백성에게 대한 그의 따사로우신 온정으로는 "희고" 그와 자기 백성의 대적들에게 대한 그의 두려우신 모습으로는 붉다. 그의 외양은 매우 행복하면서도 복합적인 성격을 지닌다.

(2) 그는 다른 어떤 자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는 사랑스러움을 갖고 계신다. 그는 "만 사람에게 뛰어난다." 그는 둘도 없는 아름다움을 가지시며 "인간의 자손들보다 더 어여쁘고" 그 어떤 사람보다 모든 사람들보다도 더 아름답다. 그와 같은 자는 없으며 그에게 비교될 자도 없다. 그 외의 모든 것은 "그와 비교하면 잃어버려도 좋은 것이요 오물 같은 것"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다(빌 3:8). "그는 세상 열왕들보다 더 높으시며"(시 89:27) 상계나 하계의 어떤 주권자나 권세자보다 "더욱 뛰어난 이름을 얻으셨다"(빌 2:9; 히 1:4). 그는 "만 사람 중 기수"이다(뛰어난다는 단어는 깃대를 드는 자란 의미도 지닌다). 기는 으레 부대원 중에서 가장 키가 크고 용모가 아름다운 자가 들게 마련이다. 그는 친히 "기호로 섰으며"(사 11:10) 우리는 그 깃발 아래로 모여야 하며 언제든지 그 기호에서 눈을 떼서는 안 된다. 그는 "일만인 중 가장 아름답고" 이만인 중에서 우리에게 가장 적합한 분이시다. 왜 그가 우리의 영혼 속에서 가장 내면 깊숙히 그리고 가장 윗자리를 점유해야 하는 지의 모든 이유는 여기에 있다.

2. 이 여인은 그의 재예(才藝)에 관한 개개의 명세서를 제시하며 그의 능력이나 팔등신 같은 균형미를 숨기지 않고 있다.

그리스도께 있는 것은 무엇이나 다 사랑스럽다. 여기에서 이 여인이 그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제시해 주는 사례는 열 가지로서 우리는 이 말씀을 너무 엄격히 적용할 필요가 없다. 이것을 억지로 비틀어 해석하려 드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에 상처를 내어 피흘리게 만드는 일이며 말씀을 왜곡시키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전체적으로 보아 이 열 가지 비유의 목적은 그가 어느 모로 보더라도 자기의 사업에 적합한 자격을 구비하고 계시며, 우리의 존경과 사랑과 신뢰의 대상이 될 만한 모든 점을 다 자기 안에 갖추고 계신 분임을 나타내는 데에 있다. 그리스도께서 요한에게 나타나신 일(계 1:13 이하)은 본문의 신부가 그에게 대해 묘사하는 표현에 비할 수 있으며 이 양자의 의도는 그를 초월적 영광의 소유자로 나타내는 데에 있다. 즉 위대하시고 은혜로우신 그분이 신도들의 눈에 사랑스런자로 보이게 하고 신도들로 하여금 그의 안에서 행복을 누리도록 하는 것이 바로 이 두 표현의 의도인 것이다.



(1) "그의 머리는 정금 같다."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 이시고"(고전 11:3) 성도들에게는 "전능자가 저희의 금," 곧 저희의 방어자, 저희의 보물이 되실 것이라는 약속을 해 주셨다(욥 22:25). 하물며 "하나님의 신성의 모든 충만하심이 육체로 거하시는"(골 2:9) 그리스도께는 한층 더 그러하지 않겠는가! 그리스도의 머리는 만물에 대한 그의 지고하신 통치권과 자기 교회와 그 모든 구성원에 대한 그의 생생한 영향력을 나타낸다. 이것은 "금"과 같고 또한 "금"이기도 하다. 앞에 나오는 금이란 단어는 원래 의미대로 금의 번쩍거림을 뜻하고 뒤에 나오는 금이란 말은 금의 강함과 굳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주권은 아름답고 강력하다. 느부갓네살의 군주 정치는 여타의 모든 왕권을 능가하였기 때문에 "금 머리"(단 2:38)에 비유되는데 그리스도의 다스리심도 그와 같은 것이다.

(2) "그의 머리털은 고불고불하고 검구나." 그러나 그의 두 발은 "게달의 장막처럼 검은" 것이 아니다. 게달의 장막에게는 검은 것이 보기에 흉한 것이었고 따라서 교회는 스스로 그것을 피했었다(1:5). 반면에 그의 머리털은 "까마귀처럼 검다." 까마귀에게는 검다는 것이 곧 그의 아름다움이다. 때때로 그리스도의 모발은 "희다"고 표현(계 1:14)되는데, 이는 그의 영원성 곧 그는 "옛적부터 계신 분"임을 의미한다. 그러나 본문에서 "검고 고불고불하다"고 표현한 것은 그가 언제나 젊고 그에게는 쇠함이 없으며 늙게 하는 것이 없음을 상징한다. 신자들의 눈에는 그리스도께 속하는 것은 무엇이나 사랑스럽게 보이는 까닭에 그의 머리털조차도 아름다워 보인다. 그러한 그의 "머리털"이 그가 은혜를 주시기 위해 기다리시는 동안 "밤이슬에 젖고" 그의 "머리에 이슬"이 가득하였다고 하는 것은 유감된 일이 아닐 수 없다(2절).

(3) "그의 눈은 시냇가의 비둘기 같이" 아름답고 맑으며 정결하고 인자하구나. 비둘기들은 시냇물을 좋아하며 거울처럼 그 물속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본다. 그 눈은 깨끗하게 하기 위해 씻겨졌고 희게 하기 위해 젖으로 씻겨졌으며 "아름답게 박혀서" 튀어나오지도 움푹하게 들어가지도 않았구나. 그리스도께서는 "눈이 너무나도 정결하여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는데"(합 1:13) 이는 그 눈이 비둘기 눈인 까닭이다. 여기에서 신부가 "그의 눈"에 대해 말하듯이 모든 신도들은 그리스도의 전지(全知)하심에 대해 즐거움을 가지고 말한다. 그의 눈이 비록 자기 대적들에게는 "불꽃"같아서 공포를 안겨 주지만(계 1:14)그의 친구들에게는 "비둘기 눈"처럼 다정스럽고 위안을 주는 눈이니, 이는 그의 눈이 그들의 성실함에 대한 증인이 되는 까닭이다. "주께서는 모든 것을 아시며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아시나이다." 늘 그리스도의 시선 하에 있는 것처럼 행하는 자들은 복되고 거룩하다.

(4) "그의 뺨"(얼굴의 돌출부)은 정원에서 재배되는 "향기로운 꽃밭 같다." 꽃밭은 정원의 아름다움이며 그 재산이 된다. 또 그의 뺨은 "향기로운 풀 언덕"이나 달콤함의 망대와도 같다. 그리스도의 용안에서 모든 성도들의 눈에 사랑스럽게 비치는 곳은 바로 이 뺨이다. 극히 짧은 시간에 흘낏 쳐다봐서도 사랑스러운 것은 이 뺨이 그의 얼굴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스스로 영혼에게 대해 잠깐만 살펴보시더라도 그것은 그 영혼을 소생시키며 원기를 북돋아 주고 가장 현란한 꽃이나 짙은 향기보다 더욱 향기롭게 된다.

(5) "그의 입술은 백합화 같다." 그러나 백합처럼 흰 게 아니라 백합과도 같이 향기롭고 즐거운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의 입술에서 나오는 말씀"도 성별된 모든 자에게 "꿀이나 꿀송이(벌집)보다 더 달다." "그 입술의 입맞춤" 즉 그의 모든 은혜로운 교제도 향기롭고 즐거운 것이다. "그의 입술에는 은혜가 담겨져 있어서" 그의 말씀을 듣는 이들은 "그의 입에서 나오는 은혜로운 말씀에 놀랐다" "그의 입술"은 "백합화"같고 "몰약의 즙이 뚝뚝 떨어진다." 자연 속의 그 어떤 백합화에서도 몰약이 떨어지지는 않았으며 자연 속에 있는 어떤 사물도 그리스도의 아름다우심과 빼어나심을 완전히 그려 낼 수는 없다. 그러나 비유로써 이것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의 혼합으로 그 영상을 나타낼 수밖에 없다.

(6) "그의 손은" 유명한 보석. 즉 "황옥을 물린 황금 노리개 같다"(14절). 위인들은 손가락에 다이야몬드가 기타 보석을 박은 금반지를 끼고 손장식을 하였다. 그러나 이 여인에게는 "그의 손" 자체가 "금반지처럼" 보였다. 그의 권력에 의한 모든 일기, 그의 손이 하시는 일, 그리고 그의 섭리와 은총이 수행해 내시는 모든 것은 전부가 다 황금처럼 부요하며 "보배로운 줄마노(onyx)와 청옥(sapphire)처럼" 귀중하고, "금반지"가 손가락에 꼭 맞듯이 모두가 다 그 의도대로 목적에 부합하며 "황옥을 물린 반지처럼" 전부가 다 아름답고 매우 어울린다. 자기 백성을 영접하거나 그들에게 선물을 주기 위해 펼치신 그의 손은 이렇게 부요하고 아름답다.

(7) "그의 몸은 아로새긴 상아같다." "그의 심금(원래의 뜻은 내장)은 찬란한 상아 같구나." 원문에서는 그의 배(腹部)라고 되어 있으나 그 보다는 그의 마음이라도 번역하는 게 옳을 듯하다. 4절의 "마음"이란 말에 사용한 단어도 이 단어와 동일하며 하나님께 드리는 말씀(사 63:15; 렘 31:20)에서도 동일한 단어가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말은 그의 배우자에게 자애로운 동정심과 애정을 의미하며 황량하고 버림받은 상태에 처한 그녀에게 대해 그가 품고 있는 사랑을 뜻한다. 그가 품는 이 사랑은 훌륭하게 손질해 놓고 "청옥으로" 화려하게 "입혀 놓은, 아로 새긴 상아" 같다. 그 사람 자체만 해도 강열하고 견고하지만 그 사랑의 사례와 상황은 휘황 찬란하여 측량할 수 없는 그 사랑의 가치에더 더 많은 것을 보낸다."

(8) "그의 다리는 화반석 기둥 같아서" 매우 강인하고 당당하며 아무런 흠이 없어서 그 다리가 놓이는 "정금 받침에" 조금도 치욕이 되지 않는다(15절). 이 표현은 그의 안정성과 견실함을 말해 주고 있다. 그는 자기 발을 놓는 곳이면 그 곳에서 발을 고정시키고 계실 것이다. 그는 자기 어깨 위에 놓인 통치의 모든 무게를 감당하실 수가 있으시며 그의 다리는 결코 쓰러지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우리 하나님, 우리 왕이 그의 성소에서 행차" 하실 때의 위풍당당하심과 장려하심을 나타내는 것이며(시 68:24) 자기 백성에게 대한 그의 모든 섭리가 시종일관하고 공평함을 표현하는 것이다. "여호와의 길은 공평하며" 그 모두가 "자비요 진리"이다. 이들은 하늘이 기둥보다 더욱 오래가는 "화반석 기둥"이다.

(9) "그의 형상"(그의 외양과 풍채)은 저 웅자(雄姿)를 드러낸 레바논 같구나. 그의 아름답고 매혹적인 모습은 저 즐거운 숲이나 공원의 경치 같으며, 높이나 강도에 있어 딴 나무를 능가하며 훌륭하게 쓰이는 "백향목처럼 훌륭하구나." 그리스도는 좋은 분이시다. 우리가 그를 많이 보면 볼수록 우리는 그에게서 더욱 많은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10) "그의 입을 심히 달다." 그의 입은 감미로움 그 자체이다. 그것은 "여러 가지 감미로움"이다(이 단어는 추상 명사임에도 복수형으로 되어 있다). 그의 입은 단 것의 순수한 정수(精髓)이다. 아니 그것은 모든 즐거움의 진수(眞髓)이다(16절). 그 입의 말씀은 믿는 자들에게는 매우 달아서 어린 아이들에게 주는 젖과 같이 달고(어린 아이에게는 젖이 기분 좋은 음식이다) 다 자란 이들에게 주는(성인들에게 꿀은 맛이 나는 음식이다) 꿀과 같이 달다(시 119:103). 그 입의 입맞춤은 그의 사랑에 대한 모든 표시로서 그 입맞춤 자체에 초월적 감미로움을 포함하고 있기에 자기들의 "영적 감각을 활동"시키고 있는 자들에게는 커다란 즐거움을 준다. "믿는 너희들에게는 그가 보배로우신 분이다."

3. 이 여인은 믿음과 소망에 대한 충분한 확신을 가지고 결론을 내리며 따라서 자기의 고난을 극복하고 있다.

(1) 여기에는 주 예수의 완전하신 아름다움에 대한 전적인 믿음의 확신이 나온다. "그 전체가 사랑스럽구나. 전체가 아무런 흠하나 없는데 어찌하여 내가 구석구석 세부적으로 언급해야 하나?" 이 여인은 자기가 그에게 대한 세부적 묘사를 함으로써 그를 잘못 대우한다는 사실을 감지하며 자기의 묘사가 그 대상의 위엄이나 장점에는 미쳐 불급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이 전체적인 찬사로써 돌연 끝을 맺는다. "그는" 참으로 "사랑스러우며" 전체적으로 사랑스럽다. 그에게는 사랑스런 것밖에는 아무 것도 없고 그에게 있는 것외에는 아무 것도 사랑스럽지 않다. "그는 온갖 사모와 소원의 대상이다." 그는 사람이 바랄 수 있는 모든 것을 자기 안에 갖고 계신다. 그러므로 이 여인의 모든 소원은 그를 향한 것이며 이 여인은 이토록 주의를 기울여 그를 찾고 그가 없이는 만족히 쉴 수도 없는 것이다. 그토록 사랑스런 그를 누가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2) 여기에는 그에게서 얻은 이익에 대한 이 여인의 전적인 소망의 확신이 나온다. "이는 나의 사랑하는자요 나의 친구이다. 그러므로 내가 이토록 그를 그리워한다고 하여 이상히 여기지 말아라." 이 여인이 얼마나 거룩하고 담대하게 그와의 관계를 주장하며 얼마나 거룩하고도 의기양양하게 사실을 선언하고 있는지 살펴보라. 훌륭함을 달콤하게 하는 것은 그것을 소유한다는 데에 있다. 그리스도를 보되 그를 우리의 것으로서 보지 못한다면 그것은 행복이라기 보다 오히려 고통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토록 아름다운 자를 보며 동시에 그가 우리의 소유임을 보게 된다면 그것은 완전한 민족이 될 것이다.

여기에서 참된 신자의 모습이 부각되고 있다.



[1] 그리스도께 전적인 동의를 보내는 자. "그는 내것이요" "나의 주, 나의 하나님"(요 20:28)이시다. 복음의 언약이 갖는 취지에 따라 그는 내것이며 나에게 부여된 모든 관계에서 내 것이고, 내게 모든 것이 되어 주셔서 나의 불쌍한 영혼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채워 주시는 분이시다."

[2] 그리스도께로부터 완전한 만족을 얻는 자. 이것은 여기에 뽐내는 듯한 태도로 서술되고 있다. "이분은 내가 택한 자요, 나 자신을 들어바친 분이시다." 나는 그리스도밖에는 아무도 선택하지 않았고 그리스도 이외에는 나 자신을 죄다 들어 바친 분은 없노라. 그는 내 마음이 지향하고 있는 분이시니 그는 나의 가장 사랑하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는 내가 신뢰하는 분이시며 모든 선을 기대하는 자이시니 "그는 나의 친구인 까닭이다."

그리스도를 자기의 사랑하는 자로 삼는 자들은 그를 자기들의 친구로 가지게 될 것이다. 그는 모든 신자들에게 특별한 친구가 되시니 이것은 과거에도 그러하셨고 미래에도 그러하실 것이다. 그는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사랑하신다. 그리고 그를 친구로 삼고 있는 자들은 그를 자랑하고 그에 관해 기쁨으로 말할 만한 이유를 가진다. "딴 사람들은 이 세상에 대한 사랑에 의해 지배받고 세상과의 교제나 세상의 호의 속에서 자기들의 행복을 구하지만 이는 나의 사랑하는 자요 나의 친구이다. 타인들은 자기들 좋은 대로 행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 영혼이 택한 분은 이분이시다. 그는 내 영혼의 안식이요, 내 생명이며, 나의 기쁨이고, 나의 전부다. 그는 내가 함께 살고, 함께 죽고 싶어하는 분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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