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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그리스도에 대해 교회가 갈구하는 사랑 (아가 3:1-5)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자손에게 "너희가 나를 찾아도 헛되리라"고 말씀하시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여기에서 우리는 이 배필이 아주 오랫동안 자기의 사랑하는 자를 찾았지만 허사였다는 사실을 대하게 된다. 그러나 그 여인은 마침내 그를 발견하고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만족을 얻게 된다. 구약 교회가 의식 율법 속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장차 올 좋은 일"에 대한 예표와 상징을 찾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이스라엘인들은 오랫동안 기다린 후에야 그 위로를 찾았다. 구약 교회의 파수군은 그리스도에 관하여 묻는 이들에게 거의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시므온은 마침내 "자기 영혼이 사랑하던"그를 자기 팔에 안을 수 있었다. 이것은 개개 신자들의 입장에도 적용할 수 있다. 신자들은 왕왕 아주 오랫동안 캄캄한 중에 다니지만 "바로 그 때가 되면 빛이 비칠 것이다." 그리스도를 끝까지 찾는 이들은 결국 그를 만나게 될 것이다.

여기서 다음 사실을 살펴보자.

Ⅰ. 이 여인은 자기 "침상에서" 어떻게 그를 찾았으며, 어떻게 그것이 허사가 되었는가?(1절) 이 여인이 일어나 자기 주위를 둘러 보았을 때, 사랑하는 사람이 비록 물러가긴 했으나 은혜의 활동과 작용으로 그녀는 멀리서 그를 볼 수 있었다(2:8). 그러나 이제는 경우가 다르다. 이 여인의 애정은 계속 그에게 있었고 이 여인의 "마음에 사랑하는 자"는 여전히 그였으며 언약의 결합력은 여전히 공고하였다. "비록 그가 나를 죽인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를 신뢰하리라. 그가 나를 떠나더라도 나는 그를 사랑하리라. 내가 그를 내팔로 안지 못하는 때에라도 내 마음 속에 그를 모시리라." 이 여인은 "하나님을 살아계신 하나님을 목마르게 찾던" 때의 다윗처럼 그와 늘 가지던 교제를 원하였다. 이 여인은 그를 탐색하였다.

1. 그러나 그것은 "밤에 침상에서"였다. 그것은 이미 늦은 때였고, 게으른 탐색이었다. 그녀의 오성은 어둡게 되어 있었다. 그것은 밤에 하는 암중모색이었다. 그녀의 애정은 냉냉하였고 그녀의 침상에서 반쯤 잠들어 있었다. 지혜로운 처녀들도 신랑의 부재시에 졸았었다. 그것은 신자에게 있어서 어두운 때였다. 이 여인은 자기의 표적을 보지 못하였는데도 그 표적들을 찾았다. 그 영혼이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들은 비록 침묵과 고독 속에 있더라도 계속하여 그를 찾을 것이다. 그들의 "고삐"는 그들에게 심지어 "밤에"까지도 그렇게 하도록 가르친다.

2. 이 여인의 노력은 실패하였다. 때로 그는 "그를 찾지 아니하는 자에게 찾아냄이 되나"(사 65:1). 여기에서는 그를 찾던 자에게도 발견되지 않는다. 이것은 이 여인의 타락, 나태와 안심에 대한 징벌을 위한 것이었거나(우리가 위로하심을 놓치게 됨은 그것을 올바로 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면 이 여인의 은혜, 믿음과 인내심을 단련하고 이 여인이 계속해서 찾을지를 시험해 보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가나안 여인은 그리스도를 찾았으되 처음에는 그를 찾아내지 못 하였으니, 이는 그를 발견함으로써 그 명예와 위로가 더 많아지게 하고자 하심이었다.

Ⅱ. 어떻게 이 여인은 밖에 나가 그를 찾았는데도 찾지 못하였는가(2절).

그녀는 은밀한 예배를 시도도 해보았고 골방에서 하는 제반 의무도 고루 거쳐 보았다. 침상에서도 그를 기억하였고 "밤중에"도 그를 묵상하였으나(시 63:6), 만남의 위로를 얻지 못하였다. "내 아픔이 밤에 뻗치매 내가 하나님을 생각하고 불안하나이다"(시 77:2, 3).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여인은 실망하지 않고 좀 더 다른 수단을 강구한다. 이 여인은 다음과 같이 결심한다. "이제 내가 일어나리라.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여기서 찾을 수 없다면 여기에 누워 있지도 않겠고, 그가 물러갔다면 가만히 있지도 아니하겠다. 나는 이제 지체하지 않고 일어나 그가 내게서 더 멀리 가 버리기 전에 즉시 그를 찾겠다." 그리스도를 찾기 위해 그를 탐색하는 자들은 시간을 지체해서는 안 된다. "나는 따뜻한 침상에서 일어나겠다. 깜깜하고 차가운 밤이지만 나는 내 사랑하는 사람을 찾으러 나가겠다." 그리스도를 찾는 자들은 어려운 일에 놀라서는 아니 된다.

"이에 내가 일어나서 성중으로, 즉 거룩한 성중으로 돌아다니며 길거리나 큰 길에서 찾으리라." 이 여인은 그가 어떤 막다른 골목에서 찾을 수 없는 분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도시에서, 예루살렘에서 그를 찾지 않으면 안 되는데 이것은 복음 교회의 예표였다.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는 가장 유망한 장소는 성전이며(눅 2:46), 복음 교회라는 길거리와 거룩한 예식이다. 시온의 아들들은 모든 시간에 이곳을 통행하며 왕래한다. 이 여인이 "내가 이제 일어나리라"고 말했을 때 그녀는 선한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 전부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것은 선한 실행이었다. 그 여인은 일어나서 "그를 찾았다"(그리스도와 그에게 관한 지식과 그와의 교제를 추구하는 자들은 갖가지 시도를 다해 봐야하며 안간 데 없이 다 찾아다녀야 한다). 그런데도 이 여인은 "그를 찾지 못하였다." 이 여인은 여전히 만족을 얻지 못하였고 평안을 얻지 못하였으며, 마치 사면팔방을 둘러 보았으나 어떤 신적 은총의 표징도 감지되지 않았던 때의 욥과 같았다(욥 23:8, 9). 또한 이따금 하나님이 자기에게서 얼굴을 숨기셨다고 불평한 시편 기자와 같았다(시 88:14). 우리는 의무의 길에 서 있으면서 위로를 얻지 못하는 수도 있다. 이는 "바람이 그 불고 싶은 대로 임의로 부는"까닭이다. "내가 그를 찾았으나 발견치 못하였다"라는 호소가 되풀이되는 것을 보면 그것이 얼마나 강하게 강조되는 지를 알 수 있다. 막달라 마리아의 말도 이와 같다. "그들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요 20:13).

Ⅲ. 이 여인은 그를 찾기 위해 행순하는 자에게 어떻게 물었는가?(3절)

밤에는 야경군이 "성 중으로 돌아다니는데" 이것은 치안과 안녕 질서의 보전을 위해서이다. 그들은 정직하고 평화로운 자들에게는 길을 안내하기도 하고 도와 주기도 한다. 그러나 그뿐만 아니라 질서를 잘 지키지 않는 자들에게는 제재(制裁)자가 되기도 한다. 이 여인은 걸어다니는 중에 이 야경군들을 만났고 그녀는 그들에게 자기의 사랑하는 자에게 대한 어떤 정보라도 가지고 있는지 물었다. 이 여인은 예루살렘 길거리와 큰 길에서, 이 여인이 설령 자기의 사랑하는 자를 만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 여인의 추구를 딴 데로 돌이키고 즐겁게 해 주기에 충분한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을 그와 비교한 그 여인은 그 외에는 아무도 중히 여길 수가 없었다. 은혜로운 영혼은 그리스도를 추구하여 산더미같은 다른 기쁨과 만족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나아간다. 그들은 저희의 가장 중한 기쁨보다도 그리스도를 우위에 놓는다.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 속에서 천사들을 보게 되나 그것도 그리스도를 볼 수 없는 이상 그녀에게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내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너희가 보았는냐?"

우리는 그리스도를 찾기 위한 끈덕진 물음에 의하여 그리스도께 대한 우리 사랑의 성실성을 증명해 보이지 않으면 안 된다. "신랑을 빼앗기는 날에 혼인 집 손님들을 슬퍼할 것이며"(마 9:15), 특히 신랑을 물러가게 할 만큼 그를 노엽게 한 죄에 대해 슬퍼할 것이다. 만약 우리가 그렇다면 그의 은총에 대한 인식을 회복하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며 이를 위해서 적절한 수단을 사용하는 일에 부지런하고 꾸준해야 할 것이다. 즉 우리는 성경을 탐색하지 않으면 안 되며 기도를 많이 해야 하고 거룩한 의식에 집착해야 하며, 우리 마음에 다음과 같은 말씀을 새기고 있어야 한다. "너는 내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보았느냐?" 그리스도를 직접 본 자들만이 타인들에게 그를 보는 것에 대해 지도를 해 줄 수가 있을 것이다. 명절에 헬라인 몇이 예배하러 올라 왔을 때 그들은 여기 이 여인이 행순하는 자들에게 한 것과 같은 말을 빌립에게 하였다.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뵙고자 하나이다."(요 12:21).

Ⅳ. 이 여인은 마침내 그를 어떻게 발견하였는가?(4절)

이 여인은 행순하는 자들이 자기에게 그녀의 사랑하는 자에 대해서 아무 소식도 제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간과하자마자 곧 그들에게서 "떠났다." 이 여인은 그가 그들 중에 없었으므로 그들과 함께 머물러 있으려 하지 않고, 계속하여 그를 찾는 일에 정진하였다. 그 이유는(에인즈워드 선생의 견해처럼) 형제들의 사교나 교회의 교제나 목사들의 모임도 믿음으로써 그리스도를 직접 인지할 수 없는 경우에는 고통받는 양심에게 위로를 주지 못하는 까닭이다. 그러나 이 여인은 그 행순자들과 헤어지자 곧 자기가 찾던 자를 발견하였다. 그래서 그녀는 이전에 열망하던 만큼 이제는 기쁨으로써 그를 "내 마음에 사랑하는 자"라고 부른다. 그리스도를 계속해서 찾는 자들은 결국 그를 발견하게 될 것이며 아마 그의 탐색을 바야흐로 포기하려고 할 즈음에 만나게 될 것이다(시 42:7, 8; 77:9, 10; 사 54:7, 8 참조). 우리는 실망으로 인해 은혜로운 추구를 포기해서는 아니된다. 믿음과 인내를 끝까지 견지하라. "환상을 보는 데에는 정해진 때가 있으며," 파수군이 우리에게 설명해 주지 않더라도 종말에 가서는 그것이 저절로 "말할 것이며 거짓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적당한 방법을 사용해 가며 오래 기다리던 끝에 찾아 오는 위로는 마지막에 가서 그만큼 더 달콤할 것이다.

Ⅴ. 이 여인은 그를 발견하게 되지 어떻게 그에게 가까이 매어 달렸는가?

이 여인은 이전에 그를 찾으려고 고심하던 때에 못지 아니하게 이제는 그를 잃을까봐 불안해 한다. "나는 그를 붙잡았다." 부활 후의 그리스도를 만난 여인들처럼 그를 꽉 붙잡았다. 이들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그의 발을 붙잡고 경배하였었다"(마 28:9). "나는 그가 가도록 놓지 않겠다. 나는 그가 화나서 떠나가도록 할만한 일은 절대로 하지 않을 뿐 아니라 믿음과 기도로 그가 머물도록 설득하고 은혜의 작용에 의지하여 그가 내적 평안을 보존하도록 하겠다." 위로를 손에 넣는 일이 얼마나 힘들며 그것이 얼마나 값비싼 대가로 구입되는 것인지를 아는 자들은 그것을 몰수당하거나 탕진해 버리게 될까봐 두려워할 것이며 그것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온갖 힘을 다 기울일 것이다. Non minor est virtus quam cuoerere parta tueri─즉 "그것들을 만드는 데에 든 만큼 우리가 획득한 것을 안전하게 지키는 데에도 많은 것이 내포된다." 지혜를 얻은 자들은 그 지혜를 보유하지 않으면 안 된다(잠 3:18). 믿음과 사랑의 팔로 그리스도를 꽉 잡은 자들은 "그가 가도록 놓지 않을 것"이며 그는 그들과 함께 거하실 것이다.

Ⅵ. 이 여인은 타인들로 하여금 그를 잘 알도록 하기를 얼마나 열망하였는가?

"내가 그를 내 어미의 집으로 데려 갔으니 이는 나의 모든 친척들, 내게 소중한 모든 자들로 하여금 그와 교제하는 혜택을 누리도록 하기 위함이다." 삭게오가 그리스도를 발견하였을 때, 아니, 오히려 그가 그리스도께 발견되었을 때 "구원이 그의 집에 이르렀던 것이다"(눅 19:9). 우리가 그리스도를 어디에서 발견하든지 간에 우리는 그를 우리와 함께 집으로 모시지 않으면 안 되며 특히 우리의 마음 속에 모셔오지 않으면 안 된다. 교회는 우리의 어머니이다. 우리는 교회의 이익에 관심을 가짐으로써 교회가 항상 그리스도를 모실 수 있도록 해야 마땅하며,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이나 사역자와 늘 함께 계시도록 간절한 기도를 드리지 않으면 안 된다. 자기들의 영혼에 대한 그리스도의 은총의 표징을 즐기는 자들은 교회나 공공의 기능을 띄는 모든 경건한 집회도 자기들과 마찬가지로 그 은총의 표징을 즐길 수 있게 되기를 열망해야 하는 것이다.

Ⅶ. 그에게 어떤 방해도 가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 여인은 무엇을 배려하였는가?(5절)

그녀는 자기가 이전에 했던 명령(2:7)을 되풀이하는데 그것은 "예루살렘의 딸(여자)들에게 자기가 사랑하는 자를 흔들지도 말고 깨우지도 말라"는 것이다. 그녀는 "그를 자기 어머니의 집," 자기 자매들에게로 "데려왔을" 때 자기 형제들에게 엄명을 내렸다. 모든 것을 조용하고 질서정연하게 행하며, 그를 매우 조심하여 주시하며 그를 즐겁게 하도록 주의를 기울이고 그를 화나게 하지 않도록 유의하라는 것이다. 광야에 있던 교회는 언약의 사자에 대해 명령을 받았는데 그들 가운데 있던 언약의 사자에 관한 명령은 이렇게 설명되고 있다(출 23:21). "너희는 삼가 그 목소리를 청종하고 그를 노엽게 하지 말라." 너희 중 아무도 자기 위치에서 뛰쳐 나와 그에게 방해가 되는 일이 없도록 하고 "조용히" 일하며 "네 자신의 일에만 몰두하라." 떠들지 말라. 모든 "소요와 악독을 네게서" 멀리 "내 버려라." 이런 것은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것"임이라(엡 4:30, 31). 혹자는 이것을 그리스도께서 예수살렘 여자들에게 내리신 명령, 곧 자기 교회를 방해하거나 불안케 하지 말며 제자들의 마음을 괴롭게 하지 말라는 명령이라고 해석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교회의 안녕을 돌보는 분이시며, 그 모든 식구들과 작은 자까지도 지키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을 요동케 하는 자들은 "심판을 받을 것이다"(갈 5:10).

 

3:2 없음.

 

3:3 없음.

 

3:4 없음.

 

3:5 없음.

 

3:6

하나님의 은총 (아가 3:6)

이 말씀은 명령을 받은 "예루살렘 여자들"(5절)의 말이다. 그들은 신부가 검기 때문에 그녀를 부끄럽게 여겼다(1:6). 그러나 이제는 그 여인에게 경탄하면서 큰 존경심을 품고 말한다. "이 여인이 누구인가?" 그녀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거친 들에서" 그토록 아름답고 훌륭한 사람이 "나오리라"고 누가 기대할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께서 말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승리의 입성을 하셨을 때와 같이 사람들은 "이 자가 누구인고?"라고 말했다. 이와 같이 낯선 자들이 교회로 다가오자 교회는 경이감을 가지고 "누가 내게 이 무리들을 낳아 주셨는가?"(사 49:21)하고 혼자말을 한다.

1. 이것은 광야에서 사십 년동안 방랑 생활을 하다가 거기서 나와 영광스러운 약속의 땅을 소유하게 되었던 유대 교회에 적용할 수 있다. 이 말씀은 당시에 발람이 이스라엘에 대해 했던 말로써도 잘 설명할 수 있다. 그들이 "연기 기둥 처럼 광야에서" 올라 왔을 때 발람은 그들을 찬미하며 서 있었다. "내가 바위 꼭대기에서 그를 보노라, 야곱이여! 네 장막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민 23:9; 24:5)

2. 이것은 하나님 교회의 어떠한 공적 해방에 적용되고, 특히 구약의 바빌론 해방과 신약의 바빌론 해방같은 것에 적용될 수 있다. 이 때에는 교회가 경건한 애정과 찬미의 향으로 위로 올라가는 "연기 기둥과 같으며," 하나님께서는 노아의 제사에서 그러하셨듯이 이들로부터 "아름다운 향기를 흠향하신다." 이럴 때는 교회는 그 친구들의 눈에 사랑스러운 자로 보이고 그 대적들도 그에게 대해 존경심을 품지 않을 수 없으며,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하시는 줄로 알고 그 발 앞에 경배하지" 않을 수 없다(계 3:9). 때로는 "유대인에게 대한 두려움"이 그들의 이웃에 미치기도 하는데 이것은 그들의 인근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참으로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보기 때문이다(에 8:17).

3. 이것은 버림과 낙담의 상태로부터 회복된 은혜로운 영혼에다 적용할 수 있다.

(1) 이 여인은 "거친 들에서" 올라온다. 광야는 메마른 불모지이다. 그 곳에는 "길도 없으며 물도 없다." 여행자들은 계속 궁핍을 느끼는 곳이며 언제나 어쩔 줄 몰라 하는 곳이다. 이런 거친들에 불쌍한 영혼이 오래도록 방치되어 있을지 모르나 결국에 가서는 위로하시는 분(Comforter), 곧 성령의 인도로 올라오게 될 것이다.

(2) 이 여인은 "연기 기둥처럼" 올라온다. 즉 제단으로부터 올라오는 향연기처럼, 번제물의 연기처럼 올라온다. 이것은 영혼속에 있는 경건하고도 신실한 사랑의 불을 암시한다. 이 연기는 이불 속에서 피어나며, 이 연기 속에서 영혼은 하늘로 향해 올라가고(삿 13:20 처럼) "불꽃이 위로 올라가듯" 마음은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그리스도가 영혼에게 돌아오시면 그 영혼의 믿음은 생명을 얻으며, 영혼이 "광야에서" 올라올 때 하나님과 가지던 그의 교제는 매우 생생하게 된다.

(3) 이 여인은 "몰약과 유향으로 향기롭게 된다." 그녀는 냄새 좋은 향료같은 성령의 여러 가지 은혜로 다시 채워진다. 그리스도의 은혜로운 귀환으로 불붙여진 거룩한 향은 매우 향기로운 냄새를 풍긴다. 이제─자기의 신앙심이 매우 활기를 얻게 된 그녀는 하나님께 열납될 뿐만 아니라 타인들의 눈에도 사랑스럽다. 따라서 사람들은 감탄한 나머지 "이게 누구야?" "이 자비의 기념비는 얼마나 놀라운가!" 라고 부르짖게 되는 것이다. 이 여인에게 "향기롭게 뿌려진" 은혜와 위로는 "장사의 여러 가지 향품"이라고 칭해지는 데 이는 복되신 장사군, 우리 주 예수께서 멀리서 가져오신 것이요 비싸게 사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긴 항해 끝에 우리에게 은혜와 위로의 향을 내놓으셨고 우리를 위해 그 향들을 사는 데에 매우 값비싼 비용을 지불하셨으니 그 향은 곧 그 자신의 보혈을 주고 산 것과 다름없다. 이들은 우리 자신의 토양에서 생산된 것이 아니며 우리 자신의 나라에서 자라난 것도 아니다. 그것들은 더 좋은 나라, 곧 하늘의 가나안에서 수입된 향품인 것이다.

 

3:7

그리스도에 대한 찬양 (아가 3:7-11)

"예루살렘 여자들"은 이 배우자를 찬미하고 칭찬하였다. 그러나 이 여인은 그들의 찬사를 간과해 버리며 그들의 칭찬에 으쓱거리지도 않고, 그 모든 영광을 그리스도께 돌린다. 따라서 그들에게 자기한테서 눈을 떼고 그리스도를 바라보라는 훈령을 내린다. 그들에게 그를 존경하라고 권장함과 아울러 그를 찬양하는 일에 직접 뛰어든다. 여기에서만도 그는 "솔로몬"이란 칭호를 세 번이나 받고 있다. 솔로몬이란 이름이 이 아가서에 나타나기는 하지만 본 성구 이외에서는 모두 합쳐 봐야 세 번밖에 안 된다(1:5; 8:11, 12). 여기에서 의미하는 분은 솔로몬보다 더 크신 분, 곧 그리스도이시다. 솔로몬은 그의 지혜, 그의 재산, 특히 그의 성전 건축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빛나는 예표가 되었었다. 여기에 이 여인이 그를 찬미하는 세 가지 이유가 나온다.

Ⅰ. 그의 침상의 안전함(7절). "그의 침상(우리 성경과 다름)을 보라." 이는 "솔로몬"의 침상과 같이 매우 호화롭고 아름답다. 왜냐하면 "솔로몬의 휘장"도 그러했었기 때문이다. 어떤이들은 "그의 침상은 솔로몬의 것보다 뛰어난 것이다"라고도 해석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비록 "당신의 머리둘 곳도 없으셨지만" 그의 침상은 솔로몬의 가장 훌륭한 침상보다 더 나은 것이다. 교회가 그의 침상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대해 "이것은 나의 영원한 안식처라. 내가 여기에 거하리라"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신도들의 마음은 그의 침상이다. 즉 그는 밤새도록 신도들의 품 가운데 누워계신다(엡 3:17). 천국은 그의 침상이요, 그가 자기 역사를 마치고 나서 들어가신 안식처이다.

혹은 이것은 은혜로운 영혼이 그리스도와의 교제에서 얻는 달디단 휴식과 만족을 의미할 수도 있다. 이것이 "그의 침상"이라고 불리우는 것은 우리에게 그 침상이 허용되기 때문에 "우리의 침상"이라고 불리기는 하나(1:16), 우리에게 안식이 되는 것은 곧 그의 평안이 되기 때문이다(요 14:27).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그것은 그 이름이 "화평"을 뜻하는 "솔로몬의 침상이다." 솔로몬 당시에 유다와 이스라엘이 "그들의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안전하게 거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여인이 그의 침상을 칭찬하는 이유는 그 침상 주위에 둘러선 호위병들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쉼을 얻는 자들은 편안하게 거할 뿐만 아니라(최대의 위험 속에 있으면서도 그리스도 안에서 편안하게 거하는 자들은 많다) 안전하게 거하기도 한다. 저들의 성스러운 고요는 성스러운 방호의 보호 아래 있다. "이 침상 주위에는 용사 육십인"이 근위병으로서 혹은 한 떼의 사병(私兵)으로서 있었다. 저들은 "이스라엘인 용사"이었다. 다윗의 치세시에는 담대하고 용감한 자들이 수없이 많이 배출되었다. 이 호위병들은 잘 무장하고 있다. "그들은 다 칼을 잡고" 또 칼 잡는 법을 알고 있다. 그들은 "싸움에 익숙한 자들" 이며 모든 전쟁 기술에 잘 숙달된 자들이다. 그들은 침상 주위을 따라 적당한 거리로 배치되었다. 그들은 방어 자세를 취하고 있다. "각기 허리에 칼을 차고" 그 칼에 손을 대고서 여차하면 뽑아들 태세를 취하고 있으니, 이는 "밤의 두려움 때문이며 두려워할 만한 위험 때문이다." 군주의 생명, 특히 가장 지혜롭고 훌륭한 군주의 생명은 한층 더 고귀한 만큼 더 많은 위험에 노출되기 때문에 여늬 사람보다 더 많은 호위를 필요로 한다. 혹은 이 배우자가 위험에 대하여 "두려움"과 염려를 갖기 " 때문에"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이 호위병들이 배치되었을 것이다. 즉 그 여인으로 하여금 "악에 대한 공포로부터" 평온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신자들도 "악에 대한 두려움"을 배제하기란 어려우며 특히 그들이 그들의 영적 상태에 대하여 의심을 받거나 평상시보다 더 많은 외적 환난 가운데 있는 때, 곧 "밤에는" 더욱 그러하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모든 사업을 하실 때 그의 아버지의 특별한 보호 아래 계셨던 것이다. "그가 나를 그의 손 그늘 안에 숨기셨느니라"(사 49:2). 그는 마음대로 부리실 수 있는 여러 군단의 천사들을 거느리고 계셨다. 교회는 잘 호위받고 있었고 교회에 대적하는 자보다 함께하는 자가 더욱 많다. 아무도 이 포도원을 해하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친히 "밤낮으로 그것을 지키신다"(사 27:2, 3). 개개의 신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또 그와 더불어 휴식을 할 때에는 비록 그 시간이 밤이라고 하더라도 또 그들이 "밤에 두려움"을 가지더라도, 그들은 호위병들 한 가운데에 있는 솔로몬만큼이나 안전하다. 천사들이 그들을 보호하며 사역자들이 "그들의 영혼을 감시"하기 위해 이 명을 받고 있는 것이다. "저들은 용감한"자들이어야 하며 영적인 싸움에 "익숙" 해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령의 검"을 잡아야 한다. 그들은 이 말씀의 칼을 "허리에 차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밤에 두려워하는 것"을 가라앉히기 위하여 언제라도 대처할 수 있는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신자들의 안전을 위해선 하나님의 모든 부속물이 동원되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권능에 의해서 견고한 요새 속에 있는 것 같이 보호되고(벧전 1:5) "그의 이름 안에서" 안전함을 얻으며(잠 18:10), 그의 평강이 그들을 지배하고 지켜 주신다(빌 4:7). 그들 안에 작용하는 의로움의 공효(功效)는 "평안"과 "안전"이다(시 4:8). 우리의 위험은 "이 세상의 어두움을 지배하는 자들"로부터 나온다. 그러나 우리가 "빛의 갑주"를 입으면 그 때는 안전하다.

Ⅱ. 그의 연(輦)의 화려함(9, 10). 그리스도와 신도들이 쉴 때에는 충분하신 호위 아래에서 매우 안전하다. 또한 그들이 대중 앞에 나타날 때에는 으리으리한 마차 속의 임금처럼 아주 근사하게 나타난다. 이 연(혹은 수레)은 솔로몬이 직접 고안하여 만든 것으로 그 재료는 "은", "금", "백향목", "자색담"과 같은 매우 값비싼 것이었다. 그는 자신을 위해 이 연을 만들었으나 이것은 또한 "예루살렘 여자들을 위해서" 만든 것이기도 하다. 이로써 그녀들에게 은혜를 입히기 위함이었다.

혹자는 이 "연" 혹은 "수레"나 "역마차"(이 단어는 성서 안에서 딱 한 번 나온다)를 신성(神性)이 무개 마차를 타고 나온 것과 같은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이라고 이해한다. 그것은 신적 솜씨였다("몸은 당신이 저에게 예비하신 것이니이다"). 그 구조는 매우 정교하였다. 그러나 그 기저에 깔린 것은 사랑 곧 인간들에게 대한 순수한 사랑이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이것을 복음의 상징으로 받아들이는데 그리스도께서는 이 복음이란 무개 마차를 타고 나타나시고 전차(戰車)처럼 승리의 행군을 하시면서 "무찌르고 정복하신다"는 것이다. "기둥", 즉 일곱 기둥(잠 9:1)이 "은"으로 되어 있음은 여호와의 말씀이 단련된 은과 같기 때문이다(시 12:6). 아니, 그것은 "수 천의 금은"보다 더 낫다.

그 수레는 "자색" 곧 제왕의 색깔로 설비되었다. 그 모든 장식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염색되었으며 여기에서 나타나는 빛깔도 바로 그 색이다. 그러나 그 영화를 절정에 이르도록 완성시켜 주는 것은 "사랑"이다. "그 안에 사랑이 입혔구나." 사랑으로 그 안을 대었으되 태만하던 때의 솔로몬처럼 이방 사람들의 사랑으로 안을 입히지 아니하고, "예루살렘 여자들의 사랑" 곧 거룩한 "사랑"으로 입혔다. 은은 백향목보다 낫고 금은 은보다 낫다. 그러나 사랑은 금보다 나으며 모든 것보다 낫다. 사랑보다 나은 것은 아무 것도 없으니 사랑이 가장 귀한 것이다. 복음은 전부가 다 "사랑"이다.

더람(Durham)선생은 이 말씀을 우리를 구원하는 수단이 되는, 구원의 언약에다 적용한다. 구원의 약속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으로 고안되었고 또 성서 안에서 나타나 있다. 이것은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 하신 사업이다. 이 안에서 죄인들에게 주신 그의 은혜와 사랑의 영화스러움이 가장 현저히 나타나며, 이것은 그리스도를 신자들의 눈에 사랑스럽고도 놀랄 만한 분으로 비치게 만든다. 사랑은 이 언약의 수레를 타고 인간들에게로 운반되며 또 인간(신도들)은 이 안에서 온전한 사랑에 이르게 된다. 즉 개선의 행차를 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영광이나 신도들의 위로를 위해서 놀랄만하게 되고 비상하게 고안된 것이다. 그것은 "만사에 잘 구비하고 견고하게 하신 것"이다(삼하 23:5). 그것은 흔들리지 않는 "기둥"을 가졌다. 그것을 결코 썩지 않는 "레바논 나무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 바닥은 가장 오래 가는 금속인 "금"으로 되어 있다. 이 수레의 뚜껑은 짙은 "자색담"곧 언약의 피로 되었는데, 신도들은 이로써 신의 진노인 비 바람이나 이 세상 환란의 폭풍우로부터 보호를 받는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 있는 것, 이 수레의 모든 부분 중 진수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사랑" 이며 그것은 "모든 지식을 능가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이고 그 깊이를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이다.

Ⅲ. 그가 호화찬란하게 나타날 때 보여 주는 그의 제왕다운 광채(11절).

여기서 다음 사실을 살펴 보자.

1. "시온의 여자들"에게 "솔로몬의 왕"의 영화를 잘 알라고 명령하고 있다. "나와서" 그를 "보라." 근사한 행렬의 아름다움을 덧보이게 하는 것은 무수한 관중의 수효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복음 안에 나타나신다. 우리는 그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만족을 얻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 각자는 그런 자들의 수에 가담하여 관중의 수를 늘임으로써 그에게 영광을 돌리도록 해야 한다. 시온의 딸 외에 시온의 왕에게 영광을 드릴 자가 누구이냐? 그가 오실 때 그들은 크게 기뻐할 만한 이유를 가진다(슥 9:9).

(1) "그를 보라." 자기 영광 중에 계신 그리스도를 즐겁게 바라보자. 믿음의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고정된 시선을 그에게 던지라. 여기에 볼 만한 장면이 있다. 그를 "보라." 그리고 감탄하라. 그를 "보라." 그리고 사랑하라. 그를 보고 그를 다시 알아라.

(2) "나와서" 그를 "보라." 주 예수 안에서 볼 수 있는 것과 비교해 본다면 아무런 아름다움이나 훌륭함도 찾아볼 수 없는 이 세상에서 나오너라. 너 자신에게서도 나오너라. 그의 초월적인 아름다움을 보고 네 자신을 기만하는데서 탈피하라. 삭개오처럼 그를 볼 수 있는 데로, 그가 통과하시는 거리로 "나오너라."

2. 그들에게 매일 볼 수 없는 것을 특히 주의해서 보라고 명령하고 있다. 즉 솔로몬의 "면류관"을 주목하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보석으로 장식된 금 면류관으로 그의 대관식 날 쓴 것이었다(솔로몬의 어머니 밧세바는 비록 그 왕관을 자기 아들에게 직접 준 것은 아니더라도 아도니야가 그것을 가지려 하자 때맞추어 솔로몬이 왕관을 획득하도록 도움을 주었던 것이다). 아니면, 이것은 화관이었을 것이다. 그의 엄숙한 혼례식을 장식하기 위해 그의 어머니가 만들어 준 면류관으로서 갖가지 꽃과 푸른 가지를 리본으로 묶어서 만든 화관이었을 것이다. 아마 솔로몬의 대관식은 그의 결혼일 즉 "그의 혼인날"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때 그의 머리에는 백성들이 그에게 씌워 준 왕관에다 그의 어머니가 씌워 준 화관이 더해졌을 것이다.

이것을 그리스도께 적용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1) 그리스도께 무수한 영예가 바쳐지고 권세와 주권이 맡겨져 있다. "나와서" 예수 임금님을 보라. 하나님께서 그를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라고 선포하셨을 때 "그의 아버지가 그에게 씌우신 면류관이 그 머리에 있구나." 그 때에 그의 아버지는 "그를 왕으로써 자기의 거룩한 산 시온에 세우셨다." 또 그를 자기의 우편에 나아가 앉게 하셨으며 그에게 "하늘과 땅에서의" 지고한 권세를 다 주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엎드리게 하셨다."

(2) 그리스도의 박해자들은 그에게 불명예를 드렸다. 혹자는 이 면류관을 "그의 어미" 즉 유대 교회가 그의 사망일에 "그에게 씌운 가시관"이라고 해석한다. 그리스도가 돌아가신 날은 그가 "교회를 사랑하사 교회를 위해 자기 자신을 내어주신 날"(엡 5:25)이요, 자기 교회와 "혼인하신 날"이다. 그가 "가시관을 쓰고 끌려 나왔을" 때 빌라도가 입을 열어 "시온의 딸들"에게 "이 사람을 보라!"고 말한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3) 이것은 특히 그의 어미로서의 교회와 그의 모든 참신도들이 그에게 드리는 존귀를 의미하는 것 같이 보인다. 교회와 참다운 신자의 가슴 속에는 그리스도가 계시며 그리스도께서는 이들에 대해 "이들이야 말로 내 어머니요 자매요 형제니라"(마 12:50)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들은 그에게 그가 하신 사업의 영광을 드린다. "교회 안"의 영광은 그에게 있다(엡 3:21).

신자들이 그를 자기 것으로서 영접하고 영원하신 언약 안에서 그에게 연합될 때는 다음과 같은 날이 된다.



[1] 이 날은 그들의 영혼에 대한 대관식이 된다.

회심하기 이전에 그들은 스스로 면류관을 쓰고 다녔다. 그러나 참회로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고서는 그리스도께 면류관을 씌워드리기 시작하며 이 일은 그날로부터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자기들의 머리(수령)로 삼고, 그에게 "모든 생각을 복종" 시킨다. 그들은 자기들의 마음 속에다 그의 보좌를 설치하고 자기들의 면류관을 모두 그의 발 앞에 바친다.



[2] 이 날은 그리스도의 "혼인날"이 된다.

그는 이 혼인으로 그들을 영원하신 인자와 자비 안에서 자기 연분을 맺게 하시며, 믿음과 사랑 안에서 자기와 연합되게 하시고, 약속 안에서 그 자신을 그들에게 내어 주시며 그가 가지신 모든 것을 그들 것이 되도록 내 주신다. "너는 다른 자를 좇지 말라. 나도 네게 그리하리라"(호 3:3). 그리고 그에게는 그들이 "정결한 처녀"로서 바쳐진다.



[3] 이 날은 "그의 마음이 기쁜 날"이 된다. 그는 자기 백성이 드리는 존경을 기뻐하시며, 자기의 세력이 자기 백성 중에 퍼지는 것을 즐거워하신다. 그들 앞에서 "사탄이 떨어지느냐?" "바로 그 시각에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기뻐하신다"(눅 10:18, 21). 회개하는 죄인들에게는 하늘에서 기쁨이 있다. 탕자가 돌아올 때는 온 가족이 반가와하는 것이다. "나와서" 죄인들께로 향하신 그리스도의 은혜를 "보라." 이는 그의 "면류관"이요, 그의 가장 밝은 영광이다.

 

3:8 없음.

 

3:9 없음.

 

3:10 없음.

 

3:11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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