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크마 주석, 사도행전 1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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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
 어떤 사람들이 - 이 사람들은 예루살렘에서 온 기독교인들로 유대인들이었을 것이다. 또한 이들은 갈2:12에서 바울이 말한 바 있는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과 같은 부류의 인물로 추정된다. 이들은 기독교 안에서 유대교적 전통을 고수하려는 한 분파에 속한 사람들로서 구원을 얻는데 할례를 필수적 조건으로 전제하고 이방인들도 할례를 받아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이들은 바울과 바나바에 의해 소아시아 이방인들이 기독교인으로 개종하고 이방인 기독교 공동체가 세워지자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시켜 자기파에 끌어들이기 위한 의도로 안디옥까지 내려온 듯하다. 이러한 내용으로 볼 때 초대 기독교 안에서 이방인 선교와 함께 분파가 형성되었던 것 같다. 6:1에서는 헬라파와 히브리파가 대립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뿐만 아니라 고전 1:10-17에서도 나타나는 바처럼 지도자별로 각 분파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24절의 진술에 비추어 볼 떠 예루살렘 교회 안에서 결정된 바도 없이 이들이 독단적인 행동을 취했다는 점에서 계파간에 배타적 대립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들은 열성적 유대주의자들로서 바리새파에 속했던 사람도 있었는데(5절) 바울 서신에서 나타나는 주요한 논쟁의 대상이 이 부류의 사람들인 것 같다. 형제들을 가르치되...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 바울과 바나바가 중심이 되어 가르치는 안디옥 교회(13:1)에 할례없이 구원이 불가능함을 가르친 이들의 사상은 바울과 바나바에 대한 일종의 도전이었으며 안디옥 교회에 대한 충격적 도전이었다. 따라서 안디옥 교회 안에서는 적잖은 동요가 일어났을 것으로 짐작된다. 한편 본 구절에서 율법의 계명중 할례만 언급되었는데 이는 할례가 모든 율법조항을 대표하는 것으로 유대인들에게 취급되었던 데서 비롯된 것 같다. 이러한 사실은 할례 문제를 다루던 예루살렘 총회가 결국 할례와 전혀 관계없는 몇몇 의식법의 조항들을 금기시킨데서 더욱 분명해진다.

=====15:2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 - 바울과 바나바와 유다파 기독교인들 사이의 논쟁은 매우 격렬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왜냐하면 그들의 주장은 바울과 바나바에 의해 생겨난 이방 기독교회의 뿌리를 흔드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문제는 바울의 사도권(使徒權)에 대한 도전이기도 하며 예루살렘 교회의 선교 방침에 대한 문제 제기이기도 하다. 이미 11:2에서도 베드로의 이방인 선교에 대해 할례주의자들이 비난하고 도전해 왔음을 보여준 적이 있다. 이 문제는 기독교의 이방 선교와 함께 분명하게 정리해야 할 교리적 문제이기에 모든 교회가 함께 의논하여 해결해야만 했다.
 형제들이...작정하니라 -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은 안디옥 교회는 바울과 바나바와 안디옥 교회에 속한 몇 사람의 성도를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결정하게 되는데 이 중에 디도도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갈2:1,3;Alford, Robertson).

=====15:3
 저희가 교회의 전송을 받고 - 이 진술에는 다음 두 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1)바울 일행이 안디옥 교회의 공식 대표임을 보여준다. (2)안디옥 교회는 바울과 바나바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며 유대주의 기독교인들의 가르침에 동요되지 않음을 암시해 준다. 따라서 여기서 언급된 전송은 예루살렘 교회에 가서 할례없는 기독교인이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뜻을 확증하고 유대주의 기독교인에 대해 승리하기를 바라는 안디옥 교회의 구체적인 행동이라고 볼 수 있다. 베니게와 사마리아로 다녀가며 - 바울 일행은 곧바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지 않고 자기들이 지나가는 성읍에서 복음을 전하는 열성(熱誠)을 보였다. 이 지역들이 비록 팔레스틴에 속해 있으나 유대인들에게 소외된 지역이면서 큰 성읍에 해당되므로 그들은 복음을 전하면서 또한 기존 성도들에게 자신들의 교리를 전파했다. 베니게는 이방 지역으로서, 11:19에 따르면 스데반의 순교로 예루살렘에서 피신해 간 기독교인들에 의해 교회가 형성된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사마리아에는 빌립에 의해서(8:5) 기독교 공동체가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 두 지역은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싫어하는 지역이라는 점에서 그들이 이방인에 대한 바울 일행의 전도성과를 듣고 기뻐했을 것이라는 사실은 족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누가는 이 지역들이 바울의 사상에 동조함을 잠시 언급함으로써 바울의 권위를 더욱 세우고 있다.

=====15:4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 예루살렘의 온 교회와 지도자들로부터 환영받게 된 바울의 모습은 9:26-30과 매우 대조된다. 즉 회심 후 처음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에는 의심과 냉대를 받았지만 1차 선교 여행 후 지금은 예루살렘 교회에서 큰 환영을 받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이미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바울과 바나바의 선교 여행 결과에 대해 호의적으로 평가하고 있음을 암시해 준다. 한편 헬라어 본문에서는 '사도'가 복수형으로 나와 있다. 이로보아 갈1:18,19에 언급된 예루살렘 방문이 아니라 2:9에 언급된 방문임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바울은 1:19에서는 야고보만 만난것으로 진술했으나 2:9에서는 세 명의 사도를 만난 것으로 진술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 예루살렘 교회에서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에서와 마찬가지로 선교여행의 결과에 대하여 보고를 하게 되었는데 안디옥 교회에서의 보고와 마찬가지로 바울과 바나바는 자신들의 업적을 하나님이 함께 하신 결과임을 말하고 있다(14:26,27). 누가는 이렇게 하나님의 개입(介入)을 거듭 강조하여 이방인의 선교가 하나님의 뜻에 따른 것임을 초대 교회에 인식시킴으로써 반대론자의 도전을 하나님에 대한 도전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15:5
 바리새파 중에 믿는 어떤 사람들 - 당시 예루살렘 교회 안에 바리새파 출신 개종자들도 있었다는 점은 기독교의 세력이 상당히 확장되었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종교 지도자급의 철저한 유대주의자들이 기독교로 개종해 왔음을 보여줌으로써 유대교적 전통과 기독교가 갈등 관계에 놓이게 되었음을 암시한다. 한편 이 바리새파 출신 기독교인들이 예루살렘 교회에서 이방 선교에 대한 문제를 공식적으로 제기했다는 점에서 이들이 유대교적 기독교 운동의 핵심 인물이었을 것이며 1절에서 언급된 '어떤 사람들'도 이들이 파송했을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여기서 언급되는 할례에 대한 주장이 1절에서 언급된 주장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15:6
 이 일을 의논하러 모여 - 그 의안(議案)은 앞서 언급된 대로 바리새파 출신들이 제기한 이방인에 대한 할례 문제를 검토하기 위한 것이다. 이 회의는 기독교가 발생된 후 최초로 시작된 교회 총회라는데 큰 의미가 부여되고 있다. 즉 기독교가 이방인들에게 전파되자 유대인들이 그동안 매우 자랑스럽게 지켜왔던 선민 의식에 큰 상처를 받게 되면서 나타난 민족적 감정에 교회가 공식적으로 대응했다는 점과 종교적으로 중요한 구원에 관한 교리를 취급했다는 점에서 종교 회의의 모태가 된 것이다.

=====15:7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 회의 진행을 압축적으로 전해주는 본 구절을 통해 회의가 상당히 진지하고 열띤 분위기 속에서 장시간 계속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의 변론(* , 제테시스)은 논쟁이나 토론을 뜻하는 말인데 일방적인 변론이 아니라 상호간의 주장을 내놓고 토의한다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따라서 회의에는 유대주의자들의 주장과 바울과 바나바를 지지하는 주장들이 맞서 열렬한 토론이 진행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헬라어 본문에서는 '변론'이라는 단어 앞에 형용사 '폴뤼스'(* )를 두어 강조하고 있는데 개역성경에서는 '많은'이라고 번역하고 있으나 공동번역에서는 '오랜'이라는 시간적 의미로 번역하고 있다. 여기서 '폴뤼스'의 의미로 어느 것이 정확한지 분간할 수 없다. 대부분의 영역 성경은 개역성경과 같이 번역하고 있지만(KJV, RSV, NIV, MB) 공동번역의 해석을 무시할 수 없다. 왜냐하면 '폴뤼스'란 용어 자체가 수나 양, 공간 및 시간적 의미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 지속되면서 토론의 열기 또한 뜨거웠을 것으로 짐작된다. 베드로가 일어나 - 매우 긴 시간의 토론 속에서 언급된 발언자는 베드로와 야고보(13절) 두 사람 뿐이다. 이를 미루어 베드로와 야고보가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 역할을(갈2:9) 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특히 베드로의 발언 결정적(決定的)인 것으로 언급된다는 점에서 베드로의 영향력이 예루살렘 교회 안에서 절대적인 것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너희도 알거니와 - 이 말은 10:1-48에서 언급된 내용, 즉 가이사랴의 고넬료가 베드로에 의해서 기독교인이 된 사실과 하나님이 보여준 환상(10:10-16)을 뜻한다. 베드로는 이방인을 구원시키는 자신의 일이 하나님의 뜻에 따른 것임을 밝힘으로써 이방인 선교에 대한 정당성을 못박아 두고자 한다.

=====15:8
 저희에게도 성령을 주어 - 베드로는 이방인도 유대인과 동등하게 하나님의 은총 안에 있음을 확인하기 위해 이방인에게도 성령이 임재함을 진술하고 있다. 이 사실은 고넬료 뿐 아니라 그와 함께 있던 모든 이들이 성령을 받았다는 10:44-47의 내용과 관계가 있다. 이미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를 방문한 사건을 두고 할례자들이 공격해 왔을 때에도(11:2) 베드로는 고넬료와 그의 친지들이 성령받은 사건을 언급함으로 그들을 잠잠케 한 바가 있다(11:18). 여기서도 역시 아무도 베드로의 말에 반론을 제기하지 못하고 있다(12절).

=====15:9
 믿음으로...분간치 아니하셨느니라 - 하나님이 유대인이나 이방인을 차별하지 않는 이유가 믿음 때문임을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구원은 오직 믿음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지 전통이나 민족에 의한 차별을 통해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이 갖고 있는 배타적인 선민 의식이나 우월감(優越感)은 지양되어야 한다. 어느 누구나 하나님 앞에서 동등한 것이다. 지금까지 베드로의 변론은 공의회가 소집하게 된 내용인 할례 문제와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고 단지 이방선교의 정당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이는 회의 진행 도중 이방 선교 자체에 대해서도 이의를 제기한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추측케 한다.

=====15:10
 어찌하여 - 이 말의 헬라어 '티'(* )는 의문 대명사(who)로 쓰이기도 하고 이유를 묻는 부사(why)로 사용되기도 한다. 여기서는 후자의 용도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문맥상 단순히 이유를 묻는다기보다는 왜 그러는지 이유를 알지 못하겠다는 뜻으로 말하면서 책망하는 형식의 어투로 보는 것이 좋다. 하나님을 시험하여 - 할례를 강조하는 유대인들의 행위를 베드로는 하나님에 대한 시험으로 이해하고 있다. 여기서 언급된 '시험'이라는 단어 '페이라조'(* )는 '시도하다', '시험하다'(make trial of;RSV)외에 '유혹하다'(tempt)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본문에서의 의미는 문맥상 하나님의 일을 그르치도록 장애물을 설치하거나(Alford) 하나님의 일에 인간이 간섭하는(공동번역) 불경건한 행위를 말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본 구절을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행위의 의로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네일(W.Neil)의 견해는 타당하지 않다. 왜냐하면 다음에 이어지는 구절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행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행위에 걸림돌이 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 - 베드로의 논점은 유대인 자신들조차 메지 못하는 멍에를 이방인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상징적으로 언급된 '멍에'라는 단어 '쥐코스'(* )는 무거운 짐을 끌거나 밭을 갈기 위해 쟁기를 끌도록 소의 목에 걸었던 도구로 구약성경에서는 인간에 대한 강제적인 압제(사9:4) 또는 인간에게 가하는 고통을 상징하며(신28:48) 신약성경에서는 율법이 인간에게 요구하는 종교적 의무나 율례를 뜻한다. 여기서도 역시 5절에서 언급된 바 있듯이 유대교의 종교적 의무나 계율을 뜻하며 '조상'과 우리가 모두 언급되었다는 점에서 유대교의 전통적 율례를 뜻한다. 특히 초기 기독교 당시(1세기 중엽) 베드로가 활동하던 때에는 샴마이(Shammai)학파의 극단적인 해석으로 율법이 그 어느 때보다 사람들에게 무거운 짐이 되었다(F.F.Bruce). 바울도 역시 율법을 종의 멍에로 묘사하며(갈5:1) 그것을 비인간적인 억압 구조로 이해하였다. 이러한 율법을 조상때부터 지금까지 완전하게 지켜내지 못했음을 베드로는 전제하고 율법의 멍에는 사람이 질 수 없는 것이므로 강요해서는 안 됨을 강하게 암시해 준다. 그런데 베드로는 바울 서신에서와 같이 율법과 그리스도의 관계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그 관계

=====15:11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 베드로가 유대인들에게 확신시키고자 하는 설교의 핵심이 언급되고 있다. 즉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가 하나님 앞에 동일하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러한 그의 사상은 바울의 사상과도 일맥 상통한다(롬1:16;3:30;5:15;갈2:14-16;엡2:14). 바울이 베드로를 이방인들에게 개방적이지 못하다고 비판한 적이 있듯이(갈2:11-14), 베드로는 바울만큼 율법과 그리스도인의 관계에 대한 인식을 갖고 있지는 못했지만 본 구절처럼 이방인 선교의 정당성(正當性)에 있어서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이는 아마 베드로 자신이 고넬료 사건을 직접 체험한 데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15:12
 온 무리가 가만히 있어 - 베드로의 변론을 듣는 청중들의 분위기를 묘사하는 본문은 7절과 대조를 이룬다. 이것은 논쟁으로 시끄럽던 회의장이 베드로의 변론으로 침묵하게 되었다는 말로 베드로의 주장이 회의에서 받아들여졌음을 암시해 준다. 이로써 공의회는 바울과 바나바의 선교활동을 공인하고 바리새파 출신을 중심한 유대교적 기독교인들의 주장을 배격하게 되었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해 준다. 하나님이 자기들로 말미암아 - 이미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에서 영접을 받고 이방 선교에 관한 보고를 한 바 있다. 여기서는 공식적 회의장에서 자신들의 경험을 이야기하여 이방인들이 구원받았다는 객관적 사실을 설명하고자 한다. 즉 바나바와 바울은 여기서도 4절에서 언급한 바처럼 자신들의 이방선교를 하나님의 역사로 이루어진 것이며 이방인들이 구원받게 된 것은 하나님의 강권적 역사임을 증언하고 있다. 표적과 기사 - 그들이 하나님의 역사를 객관적으로 증명하기 위해 언급한 것은 이방인들에게 나타난 기적적인 사건이었는데 아마 14:3,8-10에서 나타난 기적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이방 선교가 철저히 하나님의 뜻이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15:13
 야고보가 대답하여 - 여기서 언급된 야고보는 주의 형제(마13:55)를 말하며 예루살렘 교회에서 존경받는 지도자의 위치에 있었던것 같다(12:17;21:18;갈2:9).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의회에서는 의장의 직분을 담당하여 회의를 이끌고 마무리짓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13-21). 따라서 야고보가 베드로의 연설에 곧이어 응답한 것은 의장으로서 베드로의 의견을 전적으로 수용하면서 회의의 결론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15:14
 하나님이 처음으로...처희를 권고하신 것 - 야고보는 베드로의 연설내용을 다시 상기시키며 이방인을 부르시는 하나님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즉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을 선택하여 부르신 사건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고넬료의 집에서 일어난 성령 강림 사건(8절 주석 참조)을 예로 들고 있다. 야고보는 베드로의 이름을 시므온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는 베드로의 히브리식 옛 이름으로서 베드로가 야고보와 상당한 친분 관계가 있음을 암시하며 회의장에서 언급되었다는 점에서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 모두가 베드로의 옛 이름을 알 정도로 서로를 잘 아는 유대인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특히 이방선교 문제를 거론하면서 베드로의 히브리식 이름을 사용한 것은 의장인 야고보가 아랍어로 말하고 있음을 암시하거나(Haenchen) 아니면 그 회의에 모인 사람들이 유대인들뿐이었음을 암시한다.

=====15:15
 선지자들의 말씀이 - 야고보는 구약성경 중 선지서를 인용하여 그 예언이 베드로를 통해 성취되었음을 증명하여줌으로써 베드로의 주장을 회의 결론(結論)으로 확정지으려 한다.

=====15:16
 이후에 내가 돌아와서 - 마소라 히브리 본문(Masoretic Text)에서는 '그 날에 내가 다시 돌아와'로 읽혀진다. 그리고 70인역도 마소라 본문과 동일하게 읽고 있다. 그러나 야고보가 인용할 때는 한글 개역성경과 같이 변형되어 있다. 이처럼 야고보의 인용이 정확히 70인역(LXX)의 암9:11,12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 야고보는 70인역을 인용한 것이 아니라 당시 유대인들에게 읽혀지던 히브로 본문이나 아람어 본문을 인용했을 것이다. 다윗의...일으키리니 - 본문은 아모스의 예언을 베드로의 연설과 접목시키면서 아모스가 예언한 '그 날'이 바로 지금임을 암시해 주고 있다. 야고보는 허물어진 다윗 왕국을 다시 세우고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낸다는 아모스의 예언을 유대주의의 배타적 세계관이 무너지고 메시야에 의해 재건된 세계관으로 전환됨을 강조하기 위해 인용했다.

=====15:17
 그 남은 사람들 - 마소라 본문(MT)에서는 '에돔의 남은 자'로 되어 있는데 70인역에서는 단순히 '남은 사람들'로 번역하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 살아남은 자가 마소라 본문에 따르면 이방인을 가리키는 말이 될 수 있으나(Robertson) 70인역의 번역은 유대인들 중에서 살아 남은 사람들을 의미할 수 있다. 이로 보아 아마도 야고보는 마소라 본문 보다는 70인역과 유사한 히브리어 또는 아람어 본문을 사용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그 본문을 인용하여 유대인을 언급하고자 했던 것 같다.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 - 이는 야고보가 강조하고자 했던 핵심 내용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모든 이방인들을 한정짓는 관계절인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은 '하나님의 백성이 된'(공동번역)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 구절은 모든 이방인들에게도 하나님의 백성이 될 가능성이 구약 시대에서부터 열려있었음을 확언하는 말이 된다.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짓게 되는 목적이 모든 이방인들이 주를 찾도록 하는 것에 있음을 강조하여 야고보는 이방인들의 기독교인됨이 구약의 예언 성취임을 밝히고 있다. 이로써 이방 선교의 정당성이 구약의 예언(豫言)을 통해 확증된 셈이다.

=====15:18
 예로부터...주의 말씀이라 - 본문은 야고보의 자유로운 변형이거나 인용일 수 있다. '예로부터'라는 말이 아모스의 본문에서 나타나지 않으나 야고보의 말에서는 첨가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야고보는 사45:21의 어투를 따왔거나 아니면 야고보가 인용한 사본에 이 말이 첨가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본 구절은 이방인의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의도가 구약 시대에도 계시되어 왔음을 밝혀준다. 이 사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이방인의 구원사업을 계속적으로 펴왔음을 뜻한다.

=====15:19
 그러므로 - 여기서 사용된 접속사 '디오'(* )는 결론이 자명한 것을 연결해 준다. 즉 야고보가 인용한 아모스의 예언대로라면 자신이 제안하는 다음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것이 당연하다는 뜻이다. 내 의견 - 이 말의 헬라어 '에고 크리노'(* )는 '내가 판단하다' 또는 '내가 심판하다'의 의미로 야고보 자신이 단순히 의안을 상정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토론의 결론을 내리는 재판장으로서 최종 판결을 내리는 듯한 어감을 주고 있다. 이는 '내가'(* , 에고)란 표현이 강족적으로 사용된 점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한편 본절에서 야고보의 의견을 채택하는 형식 절차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점에서 우리는 야고보의 의견을 최종적 결정으로 받아 들일 수 있다. 이로 보아 예루살렘 교회에서 야고보의 권위가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괴롭게 말고 - 여기서 괴롭히고 있는 주체는 유대주의적 기독교인들이며(1,5절) 그 내용은 이방인들에게 할례와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는 요구인데 이는 엄격한 의미에서 이방인들에 대한 유대인들의 배타적 우월감의 상징이다. 야고보는 이와 같은 우월감을 유대인들이 포기할 것을 요구했다. 여기에 제시된 네가지 권면 조항은 세 개의 의식적 부분과 하나의 도덕적 구분으로 구분된다. 이로보아 예루살렘 총회에서 논의된 내용이 단순히 할례 문제만이 아니라 율법 전반(全般)에 대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15:20
 다만...멀리 하라고 편지하는 것 - 이 어투는 강제적 명령이라기보다는 권면의 성격을 띠고 있다. 우상의 더러운 것 - 29절에서는 '우상의 제물'로 다시 언급된다. 이는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의미한다.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에 관한 논쟁은 이방 선교 과장에서 부딪힐 수밖에 없는 문제 중의 하나였다. 예루살렘 총회는 우상의 음식에 대해 부정적인 결론을 내렸으나 고전8:1-13;10:27,28;갈2:11-14에서 바울은 각자의 양심에 맡김으로써 보다 자유로운 입장을 취했다. 이 부분의 권면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음식 섭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상 숭배로 빗나가는 신앙을 경계하는데 있다. 음행 - 십계명에 언급되어 있는 이 규정이 예루살렘 총회의 권면 조항에도 나타나게 되었으므로 학자들에게 여러 가지 해석을 불러일으켰다. 그 해석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우상에 바친 음식을 먹음으로써 범하는 영적 음행(Beza, Selden). (2)우상의 신전에서 행하는 육체적 음행(Stolz, Heinrichs). (3)음행을 조장하고 매개하는 포주(抱主)의 죄(Salmasius). (4)축첩행위(J.Calvin). (5)근친혼(Lightfoot). (6)이도교와의 결혼(Teller, Bruce, J.W.Packer). (7)재혼(Schwegler). (8)돼지고기(Bentl- ey). (9)금지된 혈존간의 결혼(Haenchen). 그런데 여기서 언급된 음행(* , 포르네이아)은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을 향한 용어로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네일 (W.Neil)이나 마샬(H.Marshall)의 견해처럼 율법의 음행 조항들로 볼 수도 없다. 오히려 이방인들이 범할 수 있는 여러가지의 음행을 포괄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Alford,Meyer). 목매어 죽인 것과 피 - 이는 이미 구약에서 금지된 것이다(창9:4;레17:14;신12:16,23). 여기서 목매어 죽인 짐승은 피가 체내에 남아 있기 때문에 피채 먹지 말라는 것과 동일하다. 그리고 구약에서 피를 먹지 못하게 규정한 것은 피가 생명을 뜻하기 때문이다(레17:11).

=====15:21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읽음이니라 - 이는 이방인 지역마다 율법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살고 있는 대부분의 지역에는 회당이 있었으며 그곳에서 유대인 교사들이 가르쳤다. 그렇게 때문에 유대인들의 율법이 이방인들에게 전혀 생소한 것이 아니므로 이방인 개종자들은 예루살렘 총회에서 결정된 네 가지 조항도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야고보가 이 사실에 대해 언급한 것은 그 권면 조항들이 지닌 의미에 대해 이방인 개종자들이 잘 모르고 있기 때문에 자세한 것은 자기들이 살고 있는 지역의 회당 교사들에게 배우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15:22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가 - 이는 예루살렘 총회의 구성원들에 대한 진술이다. 여기서 온 교회는 모든 지역 교회의 대표를 의미하므로 사도 및 장로와 함께 언급됨으로써 예루살렘 총회의 결의 사항이 모든 교회의 찬성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강조해 주며 바울 일행과 동행(同行)하게 된 자들의 권위도 암시한다. 사람을 택하여...보내기를 가결하니 - 21절과 22절은 매우 압축적으로 문장이 연결된다. 즉 이방 선교 문제에 대한 어떤 결정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고 그 대신 사람을 뽑아 바울과 바나바와 동행하게 했다는 이야기를 통해 예루살렘 교회가 바울과 바나바의 선교 활동을 공인했음을 간접적으로 밝혀주고 있다. 그리과 바울의 선교 활동뿐 아니라 그의 가르침도 공식적으로 교회 지도자들에게 인정을 받고 그 정당성이 확인되었다. 이 파송으로 인해 바울은 실라를 만나게 되어 이후 함께 전도 여행을 떠나게 되었을 것이다. 한편 '가결하니'로 번역된 헬라어 '도케오'(* )는 '생각한다', '작정한다', '결정한다'의 뜻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예루살렘 총회가 유다와 실라를 보내기로 결정하게 된 것이 반드시 찬반(贊反)을 묻는 투표를 통해 결정되었다고는 볼 수 없다. 즉 이 용어를 만장일치 또는 이의없이 그 두 사람을 보내기로 결정했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다. 형제 중에 인도자 - 유다와 실라가 예루살렘 교회에서 지도적인 위치에 있었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그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직임을 받았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바사바라 하는 유다 - 유다에 대해서는 그가 선지자라는 것과(32절) 요셉 바사바의 형제일 가능성이 있다(1:23)는 사실 외에 이렇다할 자료가 없다. 실라 - 본서에서는 그의 히브리식 이름인 '실라'로 언급되지만 바울 서신에서는 로마식 이름인 '실루아노'로 언급된다(살전1:1). 따라서 실라도 바울과 같이 로마 시민권을 가진 유대인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16:21). 그는 바울의 2차 선교 여행에 동행하게 되는데(40절;16:19-29;17:4,10,14;18:5)베뢰아에 혼자 남은 적도 있고(17:14) 디모데와 함께 전도한 사실도 있다(18:5;고후1:19). 그리고 확실하지는 않지만 베드로전서를 소아시아의 교회에 전해준 사실이 있는 것으로 짐작되며 베드로와 친분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벧전5:12).

=====15:23
 사도와 장로된 형제들 - 이 표현은 사본에 따라 차이가 있다. (1)'형제들'에 관사가 붙은 경우 : 이 때는 개역성경과 같이 해석되어야 한다. (2)'형제들'에 관사가 생략된 경우 : 공동번역과 같이 '형제된 사도와 장로들'로 번역되어야 자연스럽다. (3)'형제들'앞에 접속사 '카이'(* )와 관사가 함께 붙은 경우 : '사도와 장로와 형제들'로 번역되어야 한다. 여기서 사본상 가장 많은 지지를 받는 것은 (3)의 경우다. 그 이유는 그와 유사한 표현이 본장에서(4,22절) 사용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3)의 것이 사본상 많은 지지를 받으나 그 중 많은 사본들이 후대에 속하는 것으로 '카이'와 관사를 의도적으로 첨가하였을 것이라는 강한 암시를 주고 있다는 데 있다. 사본 비평상 가장 간단한 구절이 원문에 가깝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 경우 (2)의 해석이 가장 무난하다. 이방 교회에 편지를 보내는 주체로서 예루살렘 교회의 대표자인 '사도와 장로'가 언급된 사실은 편지의 권위를 확정지어 주는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본 구절은 (2)의 해석이 가장 무난하다. 이방 교회에 편지를 보내는 주체로서 예루살렘 교회의 대표자인 '사도와 장로'가 언급된 사실은 편지의 권위를 확정지어 주는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본 구절은 (2)의 의미로 해석하는 편이 좋다. 안디옥과 수리아와 길리기아 - 이는 편지를 받게 될 지역에 대한 진술이다. 수리아 지역을 언급하면서 그 지역의 수도인 안디옥을 특별하게 언급한 것은 논쟁의 발단이 안디옥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수리아 지역에 대해 언급한 것은 바울이 처음 개종하여 다메섹 등지에서 활동했기 때문이다(9:19-22). 그리고 길리기아는 바울의 고향 다소를 중심한 수리아 북서 지방을 말한다. 길리기아 지역 교회는 바울이 다소에 머물렸었으므로(9:30;11:25) 바울의 전도로 기독교인이 된 자가 많이 있었을 것이다.

=====15:24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시킨 것도 없이 - 사도와 장로들은 이 문구를 사용하여 예루살렘 교회에서 그런 사람들을 파손한 바가 없음을 재확인하며 강조하고 있다.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 이방 기독교인들을 괴롭히는 것이 폭력적 박해가 아니라 유대 기독교인이 저지르는 말, 곧 그들이 전파하는 잘못된 가르침임을 밝히고 있다. 여기서 '말'은 이방인들에게 유대의 율법적 규정들을 강요하는 잘못된 가르침이라는 점에서(1절) 종교적 갈등과 혼동을 촉발시키는 거짓 진리를 뜻한다. 마음을 혹하게 한다 - 이는 헬라어 본문에서 '아나스큐아존테스 타스 프쉬카스 휘몬'(* )으로 진술되어 있는데 직역하면 '너희의 혼을 파괴하면서'이다. 이는 유대인들이 이방 교회의 성도들을 단순히 미혹하는 차원이 아니라 교회 자체를 붕괴(崩壞)시키려는 의도로 그들의 가르침을 전파했음을 의미한다. 특히 여기서 '혼을 파괴한다'는 것은 각 사람의 마음에 심각한 신앙적 갈등을 일으키게 하여 결국 믿음의 도에서 떠나 사망의 길로 가게 한다는 의미다.

=====15:25
 사람을 택하여 - 22절에서 사용된 형태(* , 에클렉사 메노이스 안드라스)와 같은 관용구다. 이는 유다와 실라가 예루살렘 교회의 공식 대표임을 보증함과 동시에 바울과 바나바 역시 예루살렘 교회가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선교사임을 뜻한다. 이로 미루어 아직까지 바나바와 바울의 권위보다는 예루살렘에서 직접 보냄을 받는 특사로서의 권위가 더 신뢰있게 받아들여지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물론 그 권위는 파송되는 유다와 실라의 권위가 아니라 예루살렘 교회의 권위를 뜻한다. 그 이유는 아직 예루살렘에 대부분의 사도들이 머물고 있었으며 그들에 의해 최초로 교회가 설립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해 예루살렘 교회의 권위는 사도들의 권위에 의해서 지지되었다.

=====15:26
 우리의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 - 이 표현은 잘못된 가르침과 투쟁한 바나바와 바울을 격려하고 이방 기독교인들 앞에 찬사하며 그들의 노력과 공적을 치하하고 그들의 가르침에 대해 공적인 보증을 해주고 있다. 따라서 이제까지의 논쟁은 바울과 바나바의 승리로 끝나고 있다. 예루살렘 교회가 보내는 이 같은 애정어린 찬사는 이방 기독교인에게 보내는 격려이며 유대교적 기독교인들의 공격으로부터 해방을 선언하는 것이고 공격자들에 대한 예루살렘 교회의 거부를 암시한다. 뿐만 아니라 바나바와 바울의 공식화된 권위를 뜻한다. 이 편지에서 바울보다 바나바가 먼저 언급된 점으로 보아 예루살렘 교회안에서는 바울보다 바나바가 더 친숙함을 엿볼 수 있다. 바나바는 예루살렘 교회가 처음 확장될 때 헌신했던 자였다(4:36,37). 그런 이유로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와 장로들은 바나바를 바울보다 먼저 언급했을 것이다. 일치 가결 - 한 마음이 되어 뜻을 모았다는 말이다. 이것은 예루살렘 교회의 결집된 총의(總意)를 나타내는 것으로서 파송되는 유다와 실라 그리고 바나바와 바울의 권위를 보증하기 위한 표현이다.

=====15:27
 이 일을 말로 전하리라 - '이 일'은 25,26절의 내용 곧 바나바와 바울에 대한 공식적인 보증 및 유다와 실라의 파송에 대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으나 문맥상 자연스럽지 못하다. 왜냐하면 유다와 실라가 파송된 것은 예루살렘 교회의 권위에 의한 것임을 선포하기 위함이 아니라 바나바와 바울의 가르침을 이방 교회에 공식적으로 인정하며 또한 예루살렘 총회의 의결사항을 전달하기 위함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일'은 예루살렘 총회의 의결 사항을 가리킨다.

=====15:28
 성령과 우리는 -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유다와 실라를 보내게 된 결정권자 즉 예루살렘 총회의 결의의 주체가 곧 성령과 자신들임을 언급하고 있다. 이것은 자신들의 결정, 곧 예루살렘 교회의 결의가 성령의 인도에 따른 것임을 천명하는 것이다. 성령의 활동은 본서 전체가 강조하고 있는 점이기도 하다. 이 같은 언급은 예루살렘 회의의 결정을 신적인 명령으로서 복종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요긴한 것들 - 이 말의 헬라어 '에파낭케스'(* )는 신약성경에서 유일하게 사용된 용어로 본래 부사이지만 본절에서는 명사형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 의미는 '필요 불가결 한 것',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 등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본문을 이용할 때 '마땅히 해야 할 의무'로 보는 것이 좋으며 그 구체적인 예는 20절에서 야고보가 제의한 4가지 금지(禁止) 조항으로 이해해야 된다. 아무 짐도 - 앞에서 제안했던 4가지 금지 조항외에 예루살렘 교회가 이방 교회에 요구하는 것은 더이상 없음을 천명하고 있다. 따라서 유대 기독교인들이 무분별하게 요구하는 할례 등의 요구는(1절) 공식적으로 무시되는 것이다.

=====15:29
 스스로 삼가면 잘되리라 - 개역성경에는 분명하게 번역되지 않았으나 헬라어 본문에서는 '실천하다'(* , 프랖세테)란 말이 강조적으로 들어가 있다. 이는 교회에서 덕을 세우기 위해 가장 기본적으로 성도들이 실천해야 하는 것임을 강조한다. 그리고 이 단어가 사본에 따라 시제상에 있어서 조금씩 차이가 난다. 그런데 개역성경처럼 미래형이 사본상으로 가장 많은 지지를 받고 해석상으로도 가장 자연스럽다.

=====15:30
 무리를 모은 후에 편지를 전하니 - 여기서 사용된 '무리'의 헬라어는 '플레도스' (* )로 일반적으로 공적, 정치적, 종교적 모임을 나타내는 단어다(Lenski).그렇다면 이 모임은 예배를 위해 모인 단순한 집회 이상의 의미를 지닐 수 있다. 즉 이 모임은 안디옥 집회 이상의 의미를 지닐 수 있다. 즉 이 모임은 안디옥 교회의 전체적인 모임으로서의 성격을 지녔을 것이다. 모교회로부터 전달된 공식 문서를 다시 자기들 교회에서 받아들이고 그것을 온 회중에게 선포하기 위해 모였을 것이다.

=====15:31
 그 위로한 말을 기뻐하더라 - 편지는 회중 앞에서 대표자에 의해 낭독되었을 것으로 짐작되며 회중들은 그 내용을 다 들은 후 크게 만족하면서 편지의 내용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따라서 '기뻐하더라'는 말은 안디옥 교회가 예수살렘 교회의 제안을 전폭적(全幅的)으로 수용했다는 의미를 더욱 부각시켜 준다. 그것은 안디옥 교회가 예루사렘 교회에서 제안한 4가지 금지 조항을 짐으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성도된 의무로 받아들였으며 할례와 같은 율법적 짐을 벗게 한 복음으로 받아들인 까닭일 것이다. 그래서 누가는 편지의 내용을 '위로한 말'이라고 표현한다. 위로한다는 단어 '파라클레시스'(* )는 '격려' 또는 '권면', '간청' 등 다양한 뜻을 갖고 있다. 공동번역은 '격려'로 해석하는데 문맥상 가장 적절한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본 구절에서 권면(勸勉)의 뜻도 배제될 수 없다. 왜냐하면 다음 절에서 이 용어가 동사형으로 다시 언급되어 권면의 의미를 강하게 나타내기 때문이다. 안디옥 교회가 그동안 유대적 가르침과 바울의 가르침 사이에서 수많은 갈등을 겪었으나 끝까지 견뎠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도 그런 일이 있을 경우 흔들리지 말라는 격려의 의미도 되며 다른 한편으로는 편지를 읽은 후 그에 따른 권면의 말을 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누가는 이 두가지 의미를 동시에 전달하기 위해 '파라클레시스'란 말을 사용했을 것이다. 아무튼 안디옥 교회에서는 유대적 전통에 종속됨 없이 독립된 교회로 공인받았다는 사실 때문에 고조된 기쁨으로 충만했을 것이 틀림없다. 뿐만 아니라 유대교적 기독교인들의 공격에 대한 승리로 여기고 당당한 기독교인으로 새로 태어남을 경험했을 것이다.

=====15:32
 유다와 실라도 선지자라 - 유다와 실라가 안디옥 교회에서 성도들을 격려하게 된 것에 대한 권위와 정당성을 설명하기 위해, 누가는 그들의 신분이 '선지자'임을 언급하고 있다(선지자에 대해서는 11:27,28주석을 참조하라). 그들은 편지에서 언급된 바처럼(27절) 편지의 내용에 대한 설명과 예루살렘 교회의 입장을 구두로 전달하며 예루살렘 교회의 주역인 사도들이 가르치는 복음의 핵심을 간략하게 전달하여 안디옥 교인들에게 견고한 믿음을 북돋우도록 격려했을 것이다. 굳게 하고 - 14:22에서도 같은 단어가 언급된다. 유다와 실라의 활동이 갈등과 불안한 신앙을 소유하고 있던(24절) 안디옥 교인들의 신앙을 진정시키고 견고(堅固)하게 하는데 공헌하였음을 뜻한다. 따라서 이 단어는 예루살렘 교회가 그 회의 결정 사항을 담은 편지와 두 선지자를 파송한 결과가 성공적이었음을 암시해 주고 있다.

=====15:33
 평안히 가라는 전송 - 유다와 실라가 얼마동안 지내다가 전송을 받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갔다는 언급을 함으로써 누가는 유다와 실라의 활동이 안디옥 교회의 성도들에게 호의적인 반응을 받았음을 암시해 주고 있다. 이 같은 묘사는 이방 교회로 대표되는 안디옥 교회와 모교회인 예루살렘 교회와의 긴밀하고 두터운 형제애를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따라서 안디옥 교회는 이방 선교에 새로운 용기를 갖고 박차를 가할 수 있게 되며 바울의 2차 선교 여행이 준비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15:34
 주요 사본에서는 34절이 생략되고 35절이 시작된다( , A,B,E, ). 따라서 개역성경과 공동번역 그리고 대부분의 영역 성경도(RSV,NASB,NIV,LB)도 34절을 생략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번역 성경은 난외주를 통해 어떤 사본에 언급된 본문을 소개하고 있다. 어떤 사본에 '실라는 거기에 머무르기로 작정하였다'(* , 에돝세 데 토 실라 에피메이나이 아우투스, 모노스 데 유다스 에포류데)란 구절이 첨가되었다. 이에 대해 혹자는 '유다만 떠났다'란 표현만 불필요한 첨가로 판단하여 배제했다(Zahn). 그런데 이러한 사본들에서 실라가 안디옥에 머물렀다는 사실을 첨가시킨 것은 40절에서 바울이 2차 전도여행을 떠날 때 실라를 데리고 갔다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나 33절은 유다와 실라 두사람 모두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음을 강하게 시사한다. 그리고 바나바와 함께 전도여행을 떠나게 된 마가 요한은 예루살렘에 거주하고 있었을 것이 확실하므로 굳이 실라가 안디옥에 머물렀다고 첨가시킬 필요가 없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37-40절 주석을 참조하라.

=====15:35
 바울과 바나바는...다수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 바울과 바나바는 계속하여 안디옥에 머물면서 전도 활동에 열심을 다했는데, 유다와 실라가 예루살렘을 떠난 후에도 계속되는 바나바와 바울의 변함없는 활동을 보여준다. 즉 안디옥 교회는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1,2절에서와 같은 혼란 이전의 모습을 되찾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한편 여기서 언급된 '다른 여러 사람들'이란 13:1에서 언급된 바처럼 안디옥 교회에 있는 여러 교사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15:36
 수일 후 - 여기서 언급된 며칠 후는 유다와 실라가 떠난 이후의 날 수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며(Lenski) 그리 오랜 시간이 경과된 날은 아닐 것으로 짐작된다.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 제2차 선교여행에 대해 바울이 바나바에게 제안하고 있는 점이 독특하다. 1차 여행 당시는 성령의 지시에 따라 안디옥 교사들이 안수하여 파송한 것이지만(13:1-3) 여기서는 바울 자신이 직접 계획하고 있다. 바울은 예루살렘 회의의 결정과 안디옥 교회의 빠른 성장에 고무되어 새로운 전도 여행의 사명을 느끼게 된 듯하다. 그러면서 안디옥 교회가 겪었던 혼란을 미연(未然)에 방지하기 위해 이전에 전도했던 지역을 찾아가 예루살렘 총회의 의결사항을 전달하고자 했을 것이다.

=====15:37
 마가라 하는 요한 - 바울의 제안을 받은 바나바는 전적으로 찬성한 듯하다. 그런데 바나바는 요한을 동행시키자고 바울에게 제안하고 있다. 요한은 12:12에서 언급된 인물과 동일인물로 추정된다(12:12 주석 참조). 또한 마가는 바나바의 생질로 알려져 있다(골4:10). 또한 1차 여행 때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까지 동행하였다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사실이 있다(13:13). 그러나 요한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까지 왔는지 아니면 바나바가 그를 데리러 예루살렘으로 간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실라와 마가가 동일하게 예루살렘에 있었다는 사실로 보아 바나바와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갔을 가능성이 있다.

=====15:38
 바울은...옳지 않다 하여 - 바나바의 제안을 거부하는 바울의 이유는 1차 여행 당시 요한이 중도에서 포기했다는 점(13:13)이다. 아마도 바울은 요한에게 선교에 대한 소명의식이 부족하고 용기가 없음을 13:13의 사건을 통해 인식했던 것 같다. 그래서 바울은 전도여행에 마가 요한이 별 도움이 못되리라 판단했을 것이다.

=====15:39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 바울을 위해 헌신적으로 애썼던 바나바(9:27;11:25)의 관대함에도 불구하고 바울과 바나바는 동행자 문제로 언쟁 끝에 헤어지게 된다. 이 다툼은 감정적(感情的) 요소가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즉 예루살렘 회의 이후 바울의 입지가 강화되고 독자적 권위가 인정됨으로써 바나바의 도움이 바울에게는 상대적으로 축소되어 바울 자신의 고집을 굽히지 않는 바울에게서 실망감을 느꼈을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이 다툼은 대등한 입장의 두 사람이 서로에게 양보를 거부하게 된 지극히 감정적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훗날 바울 서신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바나바와의 다툼과 요한에 대한 냉대가 지나친 바울의 고집이었음을 알 수 있다. 즉 마가 요한은 훗날 바울의 동역자로서 바울의 사역에 많은 도움을 줌으로써 바울로 하여금 감사하게 한다(골4:10;딤후4:11;몬24절). 바나바는...구브로로 가고 - 바나바의 행적은 구브로를 떠남으로써 막을 내리고 있다. 구브로는 바나바의 고향이었다(4:36). 그가 구브로로 가게 된 것은 1차 여행의 첫 선교지였고 바울이 제안한대로 선교지를 다시 방문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15:40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 - 바나바가 떠나자 바울은 실라를 택하지만 실라가 예루살렘으로 갔다가(33절) 바울의 요청으로 예루살렘에서 왔는지 아니면 바울이 다시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실라에게 전도여행을 제안했는지 확실치 않다. 어쨌든 바울은 바나바와 헤어져서 실라를 동역자로 맞아드리고 선교여행을 준비한다.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 바울이 안디옥을 떠나는 장면 묘사는 바나바와 매우 대조된다. 즉 바나바는 매우 화난 사람이 훌쩍 떠나버린 듯한 묘사(39절)를 하고 있는 반면 본문에서는 바울의 떠남이 교회 성도들의 환송과 축복을 받으며 떠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따라서 본서의 저자 누가의 초점은 바울에게로 모아지고 바울의 비중(比重)을 높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5:41
 수리아와 길리기아 - 바울의 행선지는 육로를 통해 북상하여 자신의 고향인 다소를 향한 것으로 보인다. 고향을 1차적으로 향했다는 점에서 바나바와 흡사한 점이 있다. 그러나 바울이 처음 여행을 제안했을 때 첫 방문지를 재방문하자고 하였던(36절) 계획이 수정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바울의 2차 여행에서 바나바의 고향인 구브로가 빠져있다는 것은 바나바와의 감정적 대립 때문이 아닌가 하는 의혹도 갖게 한다. 그러나 바나바가 구브로로 떠났기 때문에 바울이 다시 그곳을 방문할 이유가 없어졌다고 볼 수 있다. 또 23절에서 언급된 바처럼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편지의 수신처가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있는 기독교인이었다는 점에서도 바울의 행선지는 자연스러울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 바울이 그 지역에 편지를 전하기 위해 그 길을 택했다든가 아니면 직접 편지를 전해준 사실이 언급되지 않았다. 어쨌든 본절에 비춰볼 때 바울의 2차 전도여행은 단순히 바나바에게 처음 제안했던 것과 같이(36절) 1차 여행지의 재방문이 아니라 기독교를 확장하기 위한 새로운 모험과 도전을 시작하는 대장정(大長程)의 출발이었다.



  앞장에서 바울과 바나바는 제1차 전도 여행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안디옥 교회에  가
서 이방 선교의 놀라운 성과를 보고하였다. 본장에서는 그들이 제2차 전도 여행을  시
작하기 직전, 할례에 관한 논쟁에 휘말린 사건을 다루고 있다.
  즉 이방인의 구원 사실과 관련하여 바울 일행과 유대인 신자들이 논쟁을 벌이게  되
었고 이로 인하여 역사적인 예루살렘 공의회가 소집되었으며 바울의 이방 선교는 드디
어 예루살렘 교회의 공식적인 승인을 받게 되었다. 본장의 내용에 들어가기 전에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할 사항은 다음과 같다.
  (1) 본장의 위치. 본장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본서의 전환점(轉換點)을 이룬다.  위
치상으로도 본장은 본서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지리적으로도  분기점(分岐點)을
이루고 있다. 즉 본서에서는 모든 길이 예루살렘으로 통하고 있는 바, 기독교가  전파
되는  이방  지역들이  유대의  수도인  예루살렘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8:14-25;11:22-30).
  그러나 본장 이후부터는 예루살렘으로부터 초점이 옮겨질 뿐 아니라 이방 선교의 중
심지 또한 다양해진다. 즉 이방 선교의 전초 기지인 안디옥 교회 이외에 선교의  중심
지가 소아시아를 떠나 마게도냐, 아덴, 고린도, 로마 등 유럽으로 옮겨지게 된다.  또
한 본장에서 전환점을 이루고 있는 사실은 예루살렘 교회의 주역이었던 베드로가 마지
막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으며 야고보가 베드로 다음으로 주요(主要) 인물로 등장
한다는 점이다. 이제부터,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는 베드로와 사도들에게서 주(主)의
형제 야고보와 장로들에게로 전환된 것이다.
  한편 바울이라는 인물 역시 본장에서 전환점을 이루고 있거니와 바울은 본장 이후부
터 이방 선교의 중심 인물로 부각되며 이후로부터는 바울이라는 이방 선교사에게로 모
든 관심이 집중된다.
  (2) 본장의 교회사적 의의.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사도 회의는 교회사적으로  볼  때
중차대한 의의를 지닌다. 당시 교회 밖으로는 종교적으로 유대교의 핍박과 정치적으로
로마 정권의 박해가 있었으며, 교회 안으로는 유대 신자와 이방 신자사이의 갈등 문제
가 매우 심각하게 대두되고 있었다. 그 중에서 할례에 관한 논쟁은  가장  대표적이며
근본적인 문제였다. 예루살렘 교회는 이 문제에 관하여 확실한 입장을 취함으로써  앞
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즉 복음을 땅 끝까지  증거해야
할 교회의 역사적 사명을 완수하기 위하여 반드시 치뤄야 할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이에 대하여 예루살렘 교회가 신중하게 결단함으로써 이방 교회와의  대립을  해소(解
消)하고 이방 전도의 길을 확장시켰다는 사실은 교회사적으로 큰 의의를 갖는다. 이로
써 바울을 주축(主軸)으로 한 이방 전도는 본 궤도(軌道)에 오르게 된 것이다.
  (3) 본장의 신학적 의의. 본장에서 제기(提起)된 근본적인 문제는 예루살렘과  안디
옥, 유대인과 이방인, 율법과 믿음의 대립이었다. 다시 말해서 선민(選民)이 아닌  율
법없는 이방인들도 구원을 받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이방인
도 유대인처럼 할례와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었으니 이는 신학적으로 중요한 사항
이었다. 이 문제는 앞으로도 계속 율법에 열심있는 유대인 신자들에게 의하여  문제시
될 것이다(21:20,21).
  만일 이방인들이 유대인처럼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기독교는  민족주의적인  유대교의  색체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며  복음의  정체성
(identity)도 상실할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논점(論点)은 오직 믿음
(Sola fide)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이에 예루살렘 공의회를  주도(主導)하고
있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바울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율법으로
부터 이방인을 자유케 한다는 회의(會議)의 결론은 기독교 역사상 매우 중대한 의의를
내포한다.
  한편 본장의 내용은 세 부분으로 나뉜다. 첫째 단락에서는 할례로 인한 논쟁이 예루
살렘 공의회를 소집하게 했으며(1-21절), 둘째 단락에서는 회의의 결과를 이방 선교회
에 통보하며(22-35절), 마지막 단락에서는 바울와 바나바가 대립하여 각기 다른  방향
으로 가게 된다(36-41절).
 
  1. 예루살렘 공의회가 열림(15:1-21)
  본문에는 처음으로 개최된 예루살렘 공의회의 전모(全貌)가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
서는 이방인 개종자의 할례 문제 및 유대 그리스도인과 이방 그리스도인 사이의  사회
적 접촉 문제등 초대 교회들이 안고 있었던 문제들이 다루어지고  있거니와  사도들의
증언과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 야고보의 결론으로 인하여 원만한 해결책이 제시된다.
본문의 의미를 상고하기 위하여 다음 사항을 살펴보기로 하자.
  (1) 사건의 발단. 기독교로 개종했으나  유대교의  전통을  간직한  유대인  신자들
(Judiazers)은 바울의 제1차 전도 여행이 성공적으로 수행되자 이에 충격을 받고 논쟁
을 유발(誘發)시키기에 이르렀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도 구원을 허락하셨
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철저한 선민 의식(選民意識)과 율법주의에  사로
잡혀 있던 그들에게 이방인 구원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방인
들도 모세의 율법에 따라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조건을 내세웠다. 할례(circumcision)
란 본래 언약 공동체의 일원(一員)임을 뜻하는 표징으로  사용되었다(창  17:10-14;렘
4:4).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들은 이 의식의 근본 정신을 망각하고 형식에 얽메이
게 되었으며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구원을 얻지 못한다는 사상에 젖어 들었다.
  이처럼 율법과 복음의 올바름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의 주장을  들은  바울과
바나바는 진리를 수호(守護)하기 위하여 극심한 변론(辯論)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은 갈라디아서에 암시되어 있는 바, 베드로는 유대주의자들 앞에서 불확실
한 태도를 보였고 바울은 베드로의 그러한 행동을 외식이라고 면책(面責)하였던  것이
다(갈 2:11,12). 안디옥 교회는 이 논란(論難)이 반드시 해결되어야 할 중요한 것임을
인식하고 바울과 바나바를 당시 교회의 중심지였던 예루살렘으로 파송하였다.  이로써
최초의 예루살렘 공의회가 열리게 된 것이다.
  (2) 사도들의 증언. 예루살렘 교회의 영접을 받은 바울 일행은 온 교회 앞에서 이방
전도에 함께 하신 하나님의 크신 경륜을 보고하였다. 그러나 예루살렘 교회는  유대인
중심의 교회였기 때문에 유대주의자들의 세력이 막강하였다. 그들은 바울 일행의 의견
에 동조하지 않고 계속적으로 논쟁을 벌였다.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사도  베드로가
결정적으로 발언을 하였던 바, 그는 여기에서 안디옥에서의 실수(갈  2:12)를  완전히
회복하였다.
  즉 베드로는 고넬료 사건(10:1-33)을 예로 들어 유대인과 이방인간의 장벽이 무너졌
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전적으로 성령의 능력이었음을 피력하였다. 유대인과 이방
인의 구원은 모두 주 예수의 은혜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방인에게 할례를 강
요하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며, 조상들도 메지 못한 멍에를 이방인에게  지게
하려는 것이라고 역설(力說)하였다.
  이 같은 베드로의 발언은 바울의 이방 사역이 결국 하나님의 뜻과 부합된다는  것이
었으니 이에 힘입은 바나바와 바울은 다시금 그들의 이방 사역 중에 나타난  하나님의
놀라우신 표적과 기사를 낱낱이 증거하였다. 이 당시 베드로는 예루살렘의 공적인  지
도자는 아니었으나 유대인 선교의 선구자로서 영향력있는 인물이었다. 베드로 및 바나
바와 바울의 증언은 논쟁의 전환점을 이루었거니와 이제 예루살렘 공의회는 진리 편으
로 기울게 되었다.
  (3) 야고보의 결론적 제안. 사도들의 증언이 끝나자 예루살렘 회의에 참석했던 모든
사람들은 이제 야고보에게 시선(視線)이 집중되었다. 그는 예루살렘 교회의  존경받는
지도자였으며 경건한 유대주의자였다. 야고보는 결론을 내리기 전에 구약성경의  말씀
(암 9:11,12)을 인용하여 사도들의 증언을 보충 설명하였다. 그는 논지(論旨)는  베드
로의 언사(言辭)가 선지자들의 말씀과 합치된다는 것이니 이방인의 구원은 종말론적인
사건으로서 하나님 뜻의 성취라는 것이다.
  이로써 야고보는 할례나 기타 율법 의식이 결코 구원을 위한 조건이 아니므로  율법
을 통하여 이방인 개종자들을 괴롭히지 말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방인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섭리이며 은혜인 까닭이었다(롬 3:22;10:12). 하지만 그는 유대 신자들과 이
방 신자들 사이의 원만한 교제와 전도 사업을 위하여 이방 신자들이 일부 관습을 삼가
도록 하라는 제안(提案)을 하였다. 그 네 가지 요구 사항은 다음과 같다.  즉  우상의
더러운 것, 음행, 목매어 죽인 것, 그리고 피를 먹는 것을 금하였다.  이러한  결의는
교리적 차원이 아니라 실제적 차원의 성격을 지닌 것으로서 이방인들의  신앙  성숙을
도모하기 위함이었다 하겠다.
 
  * 주(主)의 형제 야고보. 본문에 등장하는 주의 형제 야고보는 예루살렘 교회의  수
석(首席) 목회자로서 엄격한 율법주의자로 알려진 인물이었던 바, 그가 공의회에서 내
린 결의 사항은 유력한 영향을 끼쳤다. 본 주제 강해에서는 야고보에 관하여 간략하게
고찰해 보기로 하자.
  야고보는 예수의 형제 중에 바로 아래 동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마 13:55;막 6:3).
그는 분명히 예수의 지상 사역 기간 동안 예수의 제자는  아니었지만(마  12:46-50;막
3:31-35;눅 8:19-21), 십자가 사건 이후 부활의 증인이 되었고(고전 15:7) 또한  사도
로 간주되었으며, 아주 초기부터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로 등장하고 있다. 바울은 개
종한 지 3년후 예루살렘을 처음 방문했을 때 그를 만났다(갈 1:19).
  야고보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나타나 특별히 부활의 증인이 되라는  위임
(委任)을 받고 사도가 되었다. 전도 여행을 떠난 다른 사도들(고전 9:5)과는 달리  야
고보는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었으나 바울이 자신은 이방인에게로, 야고보와  베드로와
요한은 유대인에게로 가기로 상호 동의했다고 언급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갈 2:9)  야
고보의 소명(召命)은 분명하다. 즉 교회에서 그가 차지하게 된 지위는 예수와의  육적
인 형제 관계 때문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에 대한 그의 신앙이 근거가 되는 것이다.
  야고보는 초대 교회에서 의인(義人)으로 알려져 있었으며 금욕적인  생활과  율법을
지키기에 힘썼다. 스데반은 성전의 형식적 예배를  배격(排擊)했지만(7장),  야고보는
나름대로 성전 예배를 행하는 자들과 함께 했다(21:17-26).
  그러나 야고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 시대를 시작하실 것이라는  종말
론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러한 신앙은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필요
하다는 것을 믿었다는 점에서 바울과 견해를 같이 하였다. 또한 이방인들이  유대교의
율법을 반드시 따라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데 동의했다(12-21절). 그는 유대 전통에
충실했으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새로운 법 안에서 수정(修正)하고자  노력
했던 자였다 하겠다.
  전승에 의하면 야고보는 주후60년대에 다른 몇몇 사람들과 함께 사두개인  대제사장
아나누스(Ananus)의지시로 돌에 맞아 죽었다고 한다.

  2. 공의회의 결정과 통치(15:22-35)
  예루살렘 교회는 야고보의 제안을 수락하여 공문(公文)을 보내기로 확정하였으며 바
나바와 바울 이외에 유다와 실라를 안디옥 교회에 공식 파송하여 결과를 전하게  하였
다. 본문을 상고하기 위하여 다음 세 가지 사항에 초점을 맞추어 보기로 하자.
  (1) 공문으로 확정된 결의 사항. 야고보의 판정(判定)에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가
동의하였으니(22절) 이는 예루살렘 공의회가 특권자들만의 회의가 아니었으며, 야고보
를 의장(議長)으로 하여 회중들이 함께 심의(審議)에 관여한 회의였음을 말해준다. 예
루살렘의 그리스도인들이 내린 결의 사항은 교회 역사상 최초로 공문(公文)으로  기록
되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으며, 공의회의 결의를 성령의 결정으로 못박고 있다는  점
에서(28절) 매우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이 결의 사항으로 말미암아 예루살렘 교회는 이방인들에 대한 교회의 입장을 확실히
할 수 있게 되었다. 공문으로 된 서신(書信)은 야고보의 제안(20절), 즉 네 가지 금지
사항에 관한 규정이 순서만 조금 바뀐 채 반복되고 있으며, 율법으로  인하여  이방인
신자들을 괴롭히지 않겠노라는 의지를 표명(表明)하고 있다.
  (2) 결의 사항의 여파(餘波). 성령의 뜻으로 말미암아 채택된 결의안은 당시 유대인
의 신자와 이방인 신자 사이의 첨예화(尖銳化)된 갈등을 적절히 해소시켜 주었다.  또
한 이방인이 율법의 의무에 구애되지 않았도 된다는 공의회의 결의 사항은 이방  선교
와 이방인 신자들의 입장을 강화시켜 주었다. 또한 바나바와 바울의 사역을  공식적으
로 인정하고 격려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으니 이로써 이방 사역자들이 늘어나게 되
었으며(40절) 이방 전도는 활기를 띠고 새롭게 전개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공의회의 결정은 다수의 율법주의적인 유대인들로 하여금 영구적으로
적대적인 위치에 서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바울에 대한 오해는 해명(解明)되었으나
안으로는 유대인 신자 중에 바울을 한층 미워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하였고 밖으로
는 이방인의 구원을 공식 승인한 예루살렘 교회가 민족주의적 편견에 얽매여 있던  유
대교인들로부터 심한 핍박을 받게 된 것이다.앞으로 바울의 눈부신 이방 사역이  전개
되겠거니와 그에 못지 않은 유대인들의 집요한 반대와 저항도 병행될 것이었다.
  (3) 이방 선교의 본격화. 예루살렘 공의회는 바울와 바나바 이외에  유다와  실라를
안디옥 교회로 공식 파송하여 회의 결과를 전하게 하였다. 안디옥 교회는 공의회의 결
의 사항을 기쁘게 받아들였으며, 유다와 실라는 회의 결과를 전한 후 다시 예루살렘으
로 돌아갔고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 계속 머물면서 주의 말씀을 가르치고 전했다.
  결론적으로 볼 때 공의회의 결의 사항을 (聖靈)의 결정으로 못박고 있다는  사실(28
절)은 바울의 이방 사역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다. 본문의 사도 회의에서 비록  바울
은 중요한 인물로 부각되어 있지는 않지만, 바울이 주도(主導)한 이방 사역이  하나님
의 뜻으로 해명(解明)되고 사도들의 공식적인 승인을 받게 됨에 따라 이방 선교의  개
시(開始) 단계는 마무리되고 절정 단계로 들어가게 되었다.
  안디옥 교회를 비롯한 이방 교회들은 승리의 기쁨으로 넘쳤으니 이후로부터 이방 선
교는 본격적으로 활기를 띠고 소아시아를 넘어서서 마게도냐, 아덴, 고린도, 로마  등
지로 뻗어나갈 것이었으며 바울은 이방 사역의 핵심적(核心的)인 인물로 활약하여  후
세대에 전도자의 모본(模本)이 될 것이었다.

  * 사도 칙령에 관하여. 본문에서 야고보는 이방인 신자들도 따를 수 있는  최소한의
요구만을 제시하고 있거니와, 이른바 이 제안들을 가리켜 '사도 칙령'이라고  부른다.
사도 칙령은 네가지 금지 사항으로 이루어져 있는 바, 본 주제 강해에서는 이 네 가지
조항에 관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1) 우상의 더러운 것을 금함. 희생 제물로 잡은 짐승의 고기 중 희생 제사에  사용
되지 않은 부분으로, 이교도들은 그것을 일상적인 음식으로 시장에서 판매했으나 유대
인들은 우상에게 일단 바쳐진 것으로서 그것을 먹는 자는 우상 숭배 죄를 범하는 것으
로 간주하였다(롬 14:15;고전 8:10).
  (2) 음행을 금함. 당시 이교도들은 그들의 신(神)들을 축하하는 축제와 관련하여 문
란한 성적(性的) 행위를 일삼았으니 이를 엄중히 금해야 했다.
  (3) 목매어 죽인 것을 금함. 이는 일반적으로 방법으로 죽인 것이 아니라 피를 빼지
아니하였으므로(레 17:13,14;신 12:16,23) 유대인들에게는 그것을 먹는 일들이 허용되
지 않았다.
  (4) 피를 금함. 이교도들은 축제시 자주 피를 마셨고 평상시에도 음식에 섞어  먹었
으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피는 생명을 상징하는 것이었으며 이를 먹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레 3:17;17:10-14;신 12:16,23).
  이러한 내용의 사도 칙령은 교회 내의 유대인들과 이방인의 식탁  교제를  원활하게
함으로써 그들을 화목케 하고 나아가 복음 전파를 수월히 하기 위한 실제적인  차원에
서 결의됐던 것으로 보인다.

  3. 바울과 바나바의 결별(15:35-41)
  예루살렘 공의회의 인정을 받은 바울 일행은 다시 안디옥으로 돌아와 복음을 전하였
으나 계속 안디옥에만 머물러 있지 아니하고 새로운 전도 여행을 결심하게 되었다. 이
여행을 바울이 처음으로 복음을 심었던 지역들을 되돌아보고 남은 사역들을  감당하기
위한 동기(動機)에서 계획된 제2차 전도 여행으로 이어진다.
  한편 본문은 여행이 시작되기 전에 바울과 그의 동역자 바나바 사이에 일어난  불화
(不和)사건을 다루고 있다. 다음 사항들을 통하여 본문의 의미를 고찰해 보기로 하자.
  (1) 사도들의 의견 대립. 당시 안디옥 교회는 이방 교회 중에서 가장 막강한 교회로
서 교사 및 전도자들이 충분히 있었으나 그 이외의 지역에 설립한 교회들은 매우 미약
했으므로 바울은 바나바에게 안디옥을 떠나 다른 이방 교회들을 돌아볼 것을  제의(提
議)하였다. 그러자 바나바는 마가 요한을 함께 데리고 갈 것을  주장하였으니  여기에
바로 사건의 발단이 있었다. 마가 요한은 바나바의 생질(甥姪)로서(골 4:10) 제1차 선
교 여행 때에 성경 읽는 것을 도와 함께 사역에 참여했었으나 도중에 예루살렘으로 돌
아간 적이 있었다(13:13). 아마도 바울의 이방 선교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했던  까닭
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제 예루살렘 공의회의 결의 사항으로 인하여 그는 이방 선교에 대하여  새
로운 이해를 갖게 되었던 바, 다시금 이방 사역에 참여하고자 했으며  바나바도  그를
동참시켜 자질(資質)을 키워주고 싶었던 것이다. 한편 바울은 한창 어려웠던 그의  초
기 사역 당시 마가 요한의 중도 이탈로 말미암아 입었던 상처와 불신감으로 인하여 그
를 용납하지 않았으니, 사도(使徒)이기 이전에 인간 바울의 단호한 성격이 여기에  잘
묘사되어 있다. 여기에서 본서를 기록하는 데 있어서의 저자 누가의 솔직성을 엿볼 수
있다.
  (2) 새로운 동역자. 바울과 바나바는 심히 다투어 서로 갈라지게  되었으며  이로써
각기 다른 길로 가게 되었다. 그들은 신앙이나 교리에 관한 문제때문이  아니라  성격
문제와 실제적인 필요성 때문에 결별하게 된 것이다. 당시 그들에게는 각기 마음에 맞
는 동역자가 필요했으며 그것이 사역을 감당하는 데 있어서 효과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새로운 동역자를 주셨으니 바나바
에게는 마가 요한을, 바울에게는 실라(Silas)를 동행케 한 것이다.  실라는  예루살렘
교회의 회중 가운데 지도자의 한 사람이었으며 선지자였으며(22,23,27,32절), 헬라 말
을 유창하게 했을 뿐 아니라 로마 시민이었다(16:37). 바울은 예루살렘과 수리아 안디
옥에서 실라와 교제하며 훌륭한 동역자로서의 호감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이  새로운
동역자는 앞으로 펼쳐질 바울의 이방 사역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인물로 등장하게  되
었다.
  (3) 하나님의 섭리. 본문의 사건을 통하여 배후(背後)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
를 깨달을 수 있거니와 두 개의 이방 전도단, 즉 바나바를 중심으로 한  팀과  바울을
중심으로 한 전도팀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는 복음이 더욱 확산(擴散)될 가능성을  의
미하는 것으로서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그들의 불화를 이용하시어 이방 사역을  갑절로
이루시고자 하셨던 것이다.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그들의 친척이 많이 살고 있었더 구브로로 돌아가 전도하였
으니 마가 역시 바나바의 새로운 동역자로 쓰임받게 되었다. 또한 바울은 실라와 함께
안디옥 교회의 축복을 받으며 수리아와 길기리아로 가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웠으
니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되었다(롬 8:28). 본문을 통하여  인간의  분열이
때로 하나님의 섭리를 이룬다는 사실과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주의 복음이  증거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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