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크마 주석, 사도행전 1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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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가이사랴에 고넬료 - 베드로의 세번째 방문지로 언급되는 가이사랴는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해안 도시로서 예루살렘으로부터 약 104km 서북쪽에 위치해 있는데 8:40에 의하면 빌립이 선교 활동을 벌였던 지역 가운데 하나로 언급되는 곳이다. 이 지명에 대해서는 12:19 주석을참조하라. 당시 가이사랴에는 총독의 관저가 있었으며 로마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는데고넬료는 주둔군의 하급 지휘관이었던 것 같다. B.C. 82년 만 명의 노예를 해방시켰던고넬료 슐라(Cornelius Sulla)의 이름을 본따 당시 고넬료라는 이름이 흔했었다(Longenecker). 아마 고넬료 역시 그 중의 한 사람인 것 같다. 이달리야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 - 이는 이탈리아인으로 구성된 부대로서 총독 보호를 위해 배치된 지원 부대로 보인다. 한편 '대'(* , 스페이라)는 본래300-600명의 군인으로 구성되는 부대를 가리키는 말로 이해된다. 따라서 이 부대는 오늘날의 대대 병력 정도를 의미하며 그중에 백부장은 100명의 지휘관이라는 점에서 오늘날의 중대장급에 속하는 지휘관으로 볼 수 있다. 신약성경에서 이방인 백부장이 자주 언급되지만(마 8:13;27:54;막 15:39;눅 7:2;23:47) 부대 이름을 밝한 것은 본문 외에 27:1에서 '아구사도대'뿐이다. 따라서 팔레스틴에 주둔해 있었던 황제 직할 부대는2개 이상이었을 것이다.

=====10:2
그가 경건하여 - '경건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유세베스'(* )에 대하여 혹자는 이방인 개종자들이 지닌 독특한 경건이라고 생각한다(T. Whitelaw). 이에 대해 혹자는 그가 완전히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proselyte)이라고 주장한다(Olshausen, Neander,Fecht, Ritshl). 그러나 몇몇 학자는 11:3을 근거로 그가 회당 집회에는 참석했으나할례 받은 개종자는 아니라고 주장한다(H. Marshall, Neil, Haenchen, Bruce,Hervey). 내용 전개상으로 보아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 이말은 할례받은 유대 공동체의 일원이 아니면서 회당 예배에참석하는 이방 유대교인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Haenchen). 특히 이 말은 이방 유대교인을 뜻하는 누가의 일반적인 표현이다. 혹자는 당시 이방 유대교인들은 유대인들에게별로 환영받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22절을 볼 때 이 견해가 당시 유대인들의보편적인 의식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 고넬료가 경건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임을 알리기 위해 누가는 본 구절과 같은 표현을 사용했다. 특히 백성을 구제(救濟)했다는 말은 곧 궁핍한 자들을 경제적으로 많이 도왔다는 말로서 초대 교회 당시 궁핍한자에 대한 구제가 깊은 관심거리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가 유대인들로부터 칭찬을들었던 점으로 미루어 보아 유대인들에게 많은 구제를 했던 것 같다. 따라서 본문에경건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는 말은 구제와 기도에 열심을 내는 사람임을 말하고 있다.

=====10:3
하루는 제 구시쯤 - 9시경은 오후 3시경이다. 고넬료는 아마 유대인들의 관습을 따라 오전 9시와 오후3시경에 기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누가가 고넬료가 기도한 시간을 언급한 것은(1) 환상에 대한 사실성 강조를 위한 의도와 (2) 규칙적으로 기도하는 고넬료의 습관을 암시한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고넬료의 경건성을 부각시키는 효과도 지닌다. 환상 중에 밝히 보매 - 고넬료가 경험한 이 환상은 9:10에서 언급된 아나니아의 경험과 비슷하게 묘사되었다. 환상에 대해 혹자는 '인간의 의식이 깨어 있는 상태에서하늘의 소리를 듣거나 천사를 만나는 상태를 의미한다'고 정의를 내린다(Haenchen).고넬료는 기도 중이었으므로 환상 가운데서 실제를 보듯 천사와 대면했던 것이다. 사자(使者)가 들어와 - 구약 시대에 '사자'는 왕의 전령,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선지자, 또는 제사장, 그리고 천사를 가리킬 때 사용되었다. 그렇지만 신약 시대에는 주로 '천사'에만 한정되어 사용되었다. 여기서 사자가 '들어온다'고 표현된 점으로미루어 보아 고넬료가 공개된 장소가 아니라 개인 기도실에서 기도하고 있었던 것 같다.

=====10:4
주여 - 환상 중에 하나님의 사자를 바라본 고넬료의 반응은 놀라움과 두려움에 찬 것이었다. 고넬료는 주의 사자를 '주여'라고 부르고 있지만 이는 절대자이신 하나님 또는 예수에 대한 호칭이 아니다. 다만 자신 앞에 갑자기 나타난 초자연적 사건 앞에 당황하며 놀라서 자신도 모르게 자기 입에서 터져 나온 소리였을 것이다(9:5).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 주의 사자가 언급한 말은 고넬료의 신앙과 행실을 용납하였다는 의미를 지닌 '상달하여'(* , 아나바이노)라는 단어를 사용하고있는 이는 고넬료의 기도가 하나님 보좌에까지 올라갔음을 의미한다. 즉 고넬료의 기도가 하나님 보좌에까지 올라갔음을 의미한다. 즉 고넬료의 기도와 구제 행위가 하나님의 뜻과 일치되었다는 말이며 고넬료가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되었다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기억하신 바 - 이 말은 구약적인 표현으로(출 2:23;17:14) 위로와 격려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Haenchen). 본 구절에서 누가가 강조하고자 한 것은 위로와 격려 외에(1) 고넬료가 기독교인이 되기 이전에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았다는 점 (2) 이방인인 고넬료가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을 통해 기독교인으로 개종되는 과정이다. 따라서 이방인에 대한 선교 정당성은 그만큼 강화된다.

=====10:5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 이 지명은 9:43에서 언급된 것과 연계되어 있다. 이는 본문의 지명과 이야기를 서로 연결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저자의 의도였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본문의 이야기가 역사적 사실임도 암시한다. 뿐만 아니라 베드로의 욥바 체류는 고넬료를 위한 하나님의 섭리로 나타내 보이려고 의도했을 가능성도 있다.

=====10:6
그 집은 해변에 있느니라 - 사자는 계속해서 베드로가 머물고 있는 피장(皮匠) 시몬의 집을 지시하면서 그 집이 해변에 위치하고 있다는 새로운 사실을 추가하고 있다. 따라서 언급된 지명이 더욱정밀해짐으로써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더욱 섬세하게 느껴지게 한다. 피장 시몬의 집이해변가에 위치한 것은 그의 직업적인 이유로 이해된다. 아마 피혁 가공 작업상 바다를낀 곳이 유리하기 때문일 수 있으며(Lenski) 무역을 위해 바닷가에 위치해 있을 수 있다.

=====10:7
하인 둘과 종졸...하나. - 사자의 지시에 대해 고넬료는 즉각적이고 정중하게 실행에 옮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저자는 고넬료의 행위를 매우 진지하고 정중하게 묘사하려 했다. 그 근거는 (1)단순히 사람을 보냈다고 언급하지 않고 보냄을 받은 사람을 구체적으로 명시했으며,(2) 특히 '종졸'이 경건한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한편 '종졸'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트라티오테스'(* )는 '군사'를 의미한다. 이군사는 고넬료 자신의수하(手下)에 있으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였을 것이다.

=====10:8
욥바로 보내니라 - 가이사랴에서 욥바까지의 거리는 약 50여km 정도로 사람이 걸어서 약 10시간이 걸린다. 때문에 9절에서 이튿날 제육시경에 도착했다는 언급과 무리없이 연결하자면 이들이 출발한 시각은 고넬료가 환상을 본 시각인 제 9시 직후이며 도중에서 잠을 잔 후계속 길을 갔던 것으로 추정된다.

=====10:9
이튿날...제 육시더라 - 고넬료가 보낸 심부름꾼들은 최소한 전날 오후 3시 이후부터 그 다음날 정오 12시경까지 약 20여 시간을 소요하여 욥바에 당도했다(10:1-6 주제 강해 '유대인의 시간구분'의 도표 참조). 이에 대해 혹자는 밤을 세워 50km의 거리를 걸어서 가기에는 곤란하다는 점에서 말을 타고 갔을 것으로 가정한다(Bruce).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 베드로가 기도하러간 지붕은 헨헨(Heanchen)의 말처럼 통풍이 잘되고 햇빛이 잘드는 옥상을 가리킨다(신 22:8;왕하 23:12;렘 19:13;습1:5;눅 5:19). 아마 피장 시몬은 베드로가 머무는 동안 그곳을 기도처로 예비한 것 같다. 제 육시 - 시각은 낮 열 두 시로 유대인들의 기도 시간과 상관없다. 따라서 본절에서 베드로는 유대인의 습관과는 상관없이 기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같은 시간적 언급은 베드로의 환상에서도 언급되는 바처럼 유대교의 종교적 관습을 타파하려는선교적 동기를 암시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짐작된다=====10:10
시작하여 먹고자 하매 - 배가 고파서 음식을 먹으려 하는 베드로의 심리 상태를 그린 본문은, 곧이어 언급되는 환상과 깊은 연관이 있다. 보통 유대인들은 오전 기도시간(9시)을 지나서 아침식사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는 기도를 시작한 즉시(12시경)에 배고픔을 느낀것이 아니라 아마 기도하러 옥상에 올라가서 상당한 시간에 걸쳐 기도하던 중 배고픔을 느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누가는 환상의 배경을설명하기 위해 언급했을 것이다. 따라서 다음에 나오는 환상을 먹고 싶은 베드로의 욕구 때문에 나타난 환각과 천청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아마도 누가는 환상이 사람의 일상적인 삶을 매개로 하여일어날 수 있음을 암시하는 듯하다. 비몽 사몽간에(* , 에게네토 에크스타시스) - 이말은 환상을 경험하는 베드로의 심리 상태를 묘사하는 말로서 신비적이고 초월적인 심리경험을 묘사하는 말이다. 여기서는 '환상'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에 대해서 3절 주석을 참조하라.

=====10:11
하늘이 열리며 - 이 말은 매우 문학적이며 심정적 표현으로 베드로의 경험이 하나님으로부터 직접온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그리고 이 표현은 환상에 대한 신약적인 표현 방식으로(7:56;마 3:16;계 19:11)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를 나타낸다.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 개역성경은 여러 소문자 사본에 따라 번역했으나,권위 있는 시내산 사본(* )과 알렉산드리아 사본(A) 및 바티간 사본(B)은 '매어'란단어가 생략되어 있다. 생략된 대로 직역하면 '네 모퉁이로 땅 위에 머물렀다'란 표현이 되어 그 뜻이 매우 애매 모호하게 된다. 이는 보자기 같은 그릇의 네 귀가 땅에 드리워진 모양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렇지 않고 개역 성경처럼 번역되면 그 그릇의네 귀가 매여 땅으로 내려 오는 모습이 강조된다. 그런데 여기서 보자기 같은 것이란표현으로 보아 네 귀가 매여 땅 위로 드리워졌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렇지 않고여러 학자들이 지지하는(Holtzmann, Westcott, Hort) 권위있는 사본을 따라 번역하면보자기 같은 그릇이 어떠한 모습으로 드리워졌는지 모호하다. 한편 그것의 네 귀퉁이가 동서남북 사방을 가리킨다고 볼 수도 있으며 하늘로 부터 땅 위로 내려왔다는 점에서 땅 위의 모든 영역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Lange, Bengel, Neander). 즉환상에서 보여주듯이 정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의 구별을 파기한 것처럼 유대의 배타적선민 의식(選民意識)도 파기되고, 하늘이 온 세상을 덮듯이 온 세계가 유대인과 이방인 곧 민족적 구별이 없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임을 암시하고 있다.

=====10:12
땅에 있는 각색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 - 짐승들에 대한 이목록은 창 1:24, 25을 연상하게 하는 데 아마도 여기서는 하나님의 거룩한 피조물임을 암시하려는 의도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즉 이 짐승 목록은14절로 보아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부정한 짐승이라고 규정하여(레 11장;신 14:3-20)상종하지 않으려 했던 짐승들을 가리킨다. 여기서 창조물의 목록 중 물고기가 빠져 있다. 아마도 물이 없는 공중의 그릇이라는 이유로 물고기를 언급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Weiss, Knowling).

=====10:13
잡아 먹으라 - 누구의 음성인지 전혀 언급없이 베드로에게 보여준 짐승들을 잡아 먹으라는 명령문이 언급되고 있다. 이 명령은 10절에서 베드로가 배가 고파 먹을 것을 준비했다는 진술과 상응하고 있다. 왜냐하면 베드로의 먹고자 하는 식욕 앞에, 제공된 짐승을 잡아먹으라는 명령은 매우 반가운 제안으로 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 명령에베드로를 시험하는 의도가 내포된 것은 아니다. 다만 그 명령은 베드로의 대답을 예견한 명령으로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에 대한 베드로의 생각을 바꾸기 위한 것이었다.

=====10:14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 베드로의 대답은 당시 유대인들이 갖고 있던 대표적 생각을 나타낸 것 뿐이다. 즉그의 대답은 생활과 종교 영역에서 뿐만 아니라 먹는 음식에까지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분하는 유대인들의 이분법적 사고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한편 베드로는 '결코...아니다'라는 강한 부정어를 사용하여 전면적으로 주님의 명령을 거부하고 있다. 이 같은 부정적 대답은 주의 명령을 거부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자신의 생활이 얼마맡큼 철저한 율범적 생활인지를 강조하는 것이다. 이 같은 베드로의 대답은 모든 유대인들의대답으로 상징될 수 있다(겔 4:14).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 - 본 구절은 베드로가 그 짐승들을 잡아 먹을 수 없는이유에 대한 설명으로 다음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한다. (1) 제공된 짐승이 종교적으로부정한 짐승으로서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먹지도, 가까이 하지도 않는 속(俗)된 것이기 때문이다. (2) 자신이 어려서부터 이 짐승들을 멀리하고 정한것과 부정한 것을 철저하게 구별하며 살아온 바처럼 지금도 지켜야 될 규범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역시이 같은 베드로의 대답은 유대인들의 일반적 견해다. 베드로는 아직 환상의 의미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10:15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니 말라 - 이 말은 곧 유대인들이 이제까지 전통적으로 규범시해 왔던 이분법적(二分法的) 사고를 뒤엎는 타격적 선언이다. 이 같은 메시지는 이미 12절에서 짐승들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연상케 하고 11절에서 하늘이 열리고 짐승들을 담은 그릇이 땅에 늘어져 닿았다는 표현 속에 암시되어 있다. 본절에서 하나님의 선언은 베드로에게 보인 짐승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고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피조물을 포함하고 있다. 본 구절은 당시 속되다고 인식되던 것을 깨끗하다고 하나님께서 선포하시면 속되지 않다는 의미를 지니므로 전통적인 유대인들의 사고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는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의 이분법적 상상들을 인간 구원이라는 차원에서 파기(破棄)하고일치와 화해, 용서와 사랑의 시대를 선언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 같은 메시지는초기 기독교의 중요한 과제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10:16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 - 여기서 말하는 '이런 일'이 이제까지 묘사된 환상을 말하는 것인지 15절에서 언급된 음성, 곧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속되다 하지 말라'는 선언을 뜻하는 것인지 아니면 베드로가 계속 명령을 거부하기 때문에 세 번씩 같은 말을 반복한 것인지분명하지 않다. 공동번역은 '이런 말이 세 번 오고 갔다'고 말함으로써 베드로가 완강하게 거부했음을 암시하고 있다. RSV는 이런 일이 단순히 세 번 일어났음을 언급하고있다. 어쨌든 저자 누가가 관심을 가졌던 것은 하나님이 깨끗케 하신 것을 속된 것으로 여기지 말라는 명령에 대해 베드로의 거부가 세 번 반복되었다는 데 있다. 즉 전통적으로 세 번 반복하는 형태가 지극히 강조적 묘사라는 점에서(요 21:15-17), 본절의세 번 반복은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보이신 환상이 (1) 매우 명백했다는 사실과 (2)베드로가 반드시 실천해야 할 사실과 관련이 있음 및 (3) 베드로가 유대적인 전통을하나님 앞에서 고집했음을 의미한다. 그 그릇이 곧 하늘로 올리워 가니라 - 베드로가 체험한 환상에 관한 이야기를 마무리짓는 이 구절은 11절의 '땅에 드리웠더라'는 표현과 대응되는 구절이다. 즉 하늘로부터 내려왔던 그릇과 짐승들이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는 이 묘사는 이야기 전체가 나타내고 있는 메시지를 함축하고 있다. 유대인들이 거룩의 개념으로 이해하는 하늘에서그들이 속되고 부정한 것이라고 규정하는 짐승들이 내려오고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는것은 유대인들의 전통적 사고를 완전히 뒤집는 것이며, 그들이 속되고 부정하다고 판단한 것들이 깨끗하고 거룩된 것이 될 수 있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예수가 세상에 오심 이후부터 깨끗하고 부정한 것의 구별이 없고 이방인과 선민이라는구별도 파기되었다(고전 10:26).

=====10:17
무슨 뜻인지 속으로 의심하더니 - '의심하더니'로 번역된 '디아포레오'(* )는 본래 출구가 없는 사면초가(四面楚歌)의 상태를 의미하며 공동번역은 이 단어를 '어리둥절하다'라고 번역하고 있다. 따라서 아직 베드로는 환상의 의미를 파악하고 있지 못함이 분명하다. 마침 - 이 말은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도착한 시각을 알 수 있는 단서로 베드로가 환상을 본 직후 도착했음을 의미한다. 이 시각이 베드로의 기도 시작 시간인 정오였는지(92절) 아니면 정오가 지난 어느 시간인지는 정확하지가 않다.

=====10:18
우거하느냐 - 이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크세니제타이'(* )는 '거주하다'는 의미와는 달리 손님으로서 잠시 유숙(留宿)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로 보아 베드로는 피장 시몬의 집에 오랫동안 머문 것이 아니라 손님의 자격으로 잠시 머무른 것 같다.

=====10:19
그 환상에 대하여 생각할 때 - 이 말은 17절의 "환상이 무슨 뜻인지 속으로 의심하더니"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베드로는 자신이 보았던 환상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으므로 그것을 깨닫고자 고민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가 환상의 의미를 깨닫기 위해 기도하고 있었던 것 같지는않다. 성령께서 저더러 말씀하시되 - 비록 베드로는 환상 가운데 있지도 않았으며 기도하고 있지 않았으나 성령의 음성을 듣게 되었다. 이는 성령의 역사가 아무런 제한없이이루어짐을 보여준다. 여기서 누가는 그 음성이 설명에게서 비롯되었음을 밝히면서 조금 전의 환상과 구분 시키고 있다. 이 같은 묘사는 초기 사도들의 활동이 철저하게 성령의 인도를 따라 이루어진 것임을 강조하려는 저자의 숨은 의도를 나타내고 있다.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 베드로를 찾는 이들이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라면(17절)두 명이 아니라 두 명의 하인과 한 명의 종졸을 포함해서 모두 세 명이어야 하는데(7절) 여기서는 두 명이라고만 언급되고 있다. 그래서 베자사본(D)에서는 숫자를 언급하고 있지 않다. 한편 사본 * ,A, C, E에서는 '세 사람'이라고 언급하는데 본문은 바티칸 사본(B)을 따라 두 명으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두 명이란 표현은 결코 잘못된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언급된 두 명은 고넬료의 직접적인 사명을 부여받은 두사람을 가리키며 그들을 호위한 종졸은 그 수에 포함되지 않았을 뿐이기 때문이다.

=====10:20
내려가 의심치 말고 함께 가라 - 내려가라는 성령의 지시는 베드로가 기도하기 위해 지붕 위에 올라간 후 아직 내려오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한편 성령은 베드로가 자신의 경험에 대해 고심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유없이 무조건 두말하지 말고 그들을 따라가라고 지시하고 있다. 이것은 성령의 주권적인 역사를 암시한다. 내가 저희를 보내었느니라 - 고넬료로 하여금 하인을 베드로에게 보내도록 지시한이가 4절에서는 하나님의 사자 곧 천사들로 묘사된 반면 여기서는 성령으로 언급되었다. 따라서 천사와 성령이 동일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3, 4절의 천사는 환상 중에 하나님의 보냄을 받아 임무를 수행하는 존재로서 묘사되지만 본절의성령은 환상 중이 아니라 음성으로 직접 말씀하시는 하나님으로 묘사된다. 따라서 결코 동일한 표현으로 볼 수 없다. 특히 본절에서 '내가'(* , 에고)가 강조됨으로써 그 음성의 주제가 하나님이심을 부각시키고 있으므로 여기서는 '성령'이란 표현이적절하다.

=====10:21
무슨 일로 왔느냐 - 베드로는 성령의 지시에 담긴 의미를 알고 싶은 마음에서 다른 말보다도 제일 먼저그들이 온 목적에 대해서 물었다. 이로 보아 아직도 베드로는 환상과 두사람의 방문이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확실히 이해하지 못했음이 분명하다.

=====10:22
의인이요 - 유대인들이 말하는 의인은 율법 준수의 기준에 따라 구분되었다(Lenski). 그런데고넬료는 유대교로 개종한 자도 아니고 더욱이 유대인들을 지배하는 로마의 군인이기에, 그에게 붙여진 의인이라는 말은 매우 파격적인 표현이다. 그런데 문제는 의인이라는 표현을 유대인들이 고넬료에게 직접 사용한 것인지 아니면 두 하인이 그렇게 표현한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그가 비록 유대교로 개종하지는 않았지만 회당 예배에 참석했다는 전제하에서(2절 주석 참조) 유대인들에 의해 고넬료의 경건한 삶이 인정되었을것이며, 그에 따라 그는 의인으로 칭송받았을 것이다. 유대 온 족속이 칭찬하더니 - 베드로와 대면한 고넬료의 하인들은 먼저 자신들을보낸 주인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그 소개의 내용 중 유대 온 족속들이 고넬료에게 하고 있는 칭찬을 언급한 것은 베드로가 유대인이므로 이방인인 고넬료에게 관심을 가질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고넬료의 인물됨에 대해서 2절에 언급되었으나 본절과 같은칭찬은 생략되어 있다. 따라서 본 구절은 하인들이 베드로를 설득시키기 위해 특별히언급한 이야기로 이해된다. 거룩한 천사의 지시를 받아 - 계속해서 집중적으로 강조되는 점은 이 모든 일들이하나님의 주권적 행위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4절에서 언급되었던 '천사'(*, 앙겔로스) 앞에 '거룩한' 명령임을 시사하고 있다. 또한 '지시하다'라는 말에 헬라어 '크레마티조'(* )의 제1부정과거 수동태 '에크레마티스데'(*)가 사용되어 고넬료가 받은 지시가 불가항력적인 하나님의 명령이었음을 암시한다.따라서 이방인에 대한 선교는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명령임을 베드로로 하여금 깨우쳐 주고 있다. 말을 들으려 하느니라 -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레마타'(* )는 생동감있는 말씀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베드로의 입을 통해 나오는 성령에 감동된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킨다. 이 '말'은 베드로의 설교뿐 아니라 간증이나 예수 사건에 대한베드로의 증언 등을 포괄하고 있다.

=====10:23
베드로가 불러들여 - 방문객으로부터 이야기를 들은 후 그들을 집 안으로 영접한 베드로의 행위는 그 방문객들이 이방인이었다는 점에서 각별한 의의를 지닌다. 즉 베드로가 그들의 말을 신뢰하였다는 뜻과 함께 이방인을 한형제로서 용납함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유대인인 베드로가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을 시몬의 집으로 영접한 것은 아직 이방인과의접촉이 신학적으로 정립되지 않은 상황에 비추어 보아 잘 이해되지 않는다. 아마 베드로는 그 두 사람의 말을 듣고 자신이 본 환상의 의미를 깨달았으므로 그렇게 행동한것 같다. 유숙하게 하니라 -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을 집으로 불러들이고 함께 잠을 자게 한다는 사실은 당시에 매우 반 유대교적 행위로서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11:1-3). 그럼에도 이러한 행동을 하게 된 베드로는 자신이 경험한 환상이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게되어 이제 무할례자인 이방인에 대한 편견을 버렸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편 베드로가그들을 유숙하게 한 것은 그들이 먼 길을 쉬지 않고 달려왔으므로 다시 가이사랴까지가기 위해서는 충분한 휴식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던 데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아무튼본절의 핵심은 이방인을 전적으로 용납하였다는 사실에 대한 강조다. 욥바 두어 형제 - '두어'로 번역된 부정대명사 '티네스'(* )는 확정되지않고 또한 많지도 않은 수효를 가리킬 때 사용된다. 그런데 11:12에서 여섯 명이 베드로와 함께 고넬료의 집으로 갔다고 언급되어 있으므로 본절에서 언급된 형제는 세명이분명하다. 이 표현상의 차이점을 다음과 같이 해결할 수 있다. 누가는 본절은 관찰자의 입장에서 기록하고, 11:12은 베드로의 고백의 입장에서 기록되었으므로 베드로의고백 부분에서는 정확한 숫자가 언급되어 그 고백의 사실성을 드러낸다. 그러나 본절에서는 누가가 관찰자의 입장에서 서술하므로 정확한 숫자를 언급할 필요가 없었다.한편 욥바에서 세 사람이 베드로를 동행하게 된 이유에 대해 본문에서 명백하게 언급되지 않고 있다. 다만 다음 두 가지로 추측할 수 있다. (1) 이방인에게 일어나는 성령의 역사를 그 세사람이 목격하고 증인이 될 수 있게 하기 위함 (2) 아직도 고넬료가보낸 사람의 신분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베드로가 그들과 동행하게 되어혹시 어려움에 처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임.

=====10:24
이튿날 가이사랴에 들어가니 - 본 구절에서 구체적 도착 시간은 언급되지 않고 욥바로부터 출발한지 이특째 되어가이사랴에 도착했다고 언급되었다. 그런데 30절에 따르면 고넬료가 환상을 체험했던그때와 어느 정도 일치함을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그들은 오후 3시를 전후해서 가이사랴에 도착했을 것이다. 일가와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 이는 고넬료가 환상을 굳게 믿었다는 사실을 의미하며 동시에 형제 사랑과 신앙에 대한 강한 열정을 보여준다. 만약 그에게 그 사랑과열정이 없었다면 자기 가족만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자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친족과 친구들까지 초청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듣고자 했으며 함께 구원의은혜에 동참하고자 원했다.

=====10:25
베드로가 들어올 때 - 고넬료가 베드로를 맞이한 장소가 고넬료의 집인지 가이사랴로 들어가는 어귀인지구분할 수 없다. 어떤 사본(D)에서는 베드로가 도시로 들어가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으나 24절의 정황으로 보아 집으로 들어올 때라고 보는 것이 정황으로 보아 집으로 들어올 때라고 보는 것이 문맥상 적절하다(Haenchen). 발 앞에 엎드리어 절하니 - 고넬료가 베드로를 마중할 때 보여준 자세는 마치 신적인 존재나 로마 황제를 대하는 듯하였다. 이는 당시에 사도들이 지녔던 권위를 보여주며 또한 고넬료의 겸손하고 순수한 성품을 나타낸다. 특히 고넬료가 베드로를 대할 때신적인 권위 앞에서는 것처럼 행동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베드로를 환상 중에 경험한천사의 말과 관계된 사람으로서 특별히 선택된 하나님의 사람으로 여겼기 때문이었을것이다(5절 참조).

=====10:26
나도 사람이라 - 고넬료의 행위에 대한 베드로의 반응은 신적 권위를 사양하며 동등한 사람임을 전제하고 있다. 이 같은 베드로의 행위는 겸손을 모범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있으나 한편으로는 사도와 일반 성도는 하나님 앞에 동등한 사람으로서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가 있을 수 없는 것임을 시사하는 것으로도 이해될 수 있다. 고넬료가 로마 군인이라는 점에서 그의 경배 행위가 로마인들의 황제 숭배와 관련된 것으로도 이해될 수 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인간에 대한 신적인 숭배는 있을 수 없는 것이라는 암시와 함께 로마 황제에 대한 숭배를 부정하는 의도를 가지고 이러한 말을 했을 것이다.

=====10:27
더불어 말하며 들어가 - 누가는 이표현을 통해 베드로가 고넬료에게 상당히 호의적이었음을 강조하려 했을것이다. 즉 베드로가 이방인에 대해 지니고 있던 배타적 우월감을 버리고 15절에서 지시한 주의 말씀을 따라 이방인을 한 형제로 용납하였음을 보여준다. 한편 이 같은 베드로의 행위는, 17절에서 베드로가 자신의 경혐한 환상의 의미에 대해 고심했지만 지금은 그 환상의 의미를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10:28
위법인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 고넬료 집 안에 모여 있는 고넬료의 가족과 가까운 친구들(24절)을 향해 베드로는자신의 방문에 대한 정당성을 설명하기에 앞서 먼저 유대인들의 전통적 관습을 언급하고 있다. 즉 신 7:3, 4규정을 확대 해석하여 모든 이방인과의 교제를 죄악시하고 이방인들이 만들어 낸 물건이나 식품까지도 부정한 것으로 대했던 유대인들의 관습에 따르면 베드로 자신의 고넬료집 방문은 유대인으로서 해서는 안 될 행위였다. 이러한 사실을 고넬료와 그곳에 모인 사람들에게 상기시킴으로써 베드로는 자신의 행위가 일종의모험임을 강조했다.

=====10:29
사양치 아니하고 왔노라 - 여기서 언급된 '사양치 아니하고'라는 단어 '아난티르레토스'(*)는 직역하면 '반대하는 말을 할 수 없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는 베드로가 고넬료가 보낸 사람의 요청을 거절할 수 없는 이유를 강조해 준다.

=====10:30
나흘 전 이맘때까지 - 고넬료가 환상을 체험한 날로부터(3절)나흘이 지났음을 밝히고 있는데, 고넬료의하인들이 이틀만에 욥바에 도착하였고(9절) 욥바서 하루를 묵고(23절) 욥바에서 가이사랴까지 이틀 걸려 도착하였으므로 3박 4일이 지난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흘'이란 표현은 타당하다. 한 사람이 빛난 옷을 입고 - 본 구절은 3, 4절에 언급된 천사에 대한 묘사로 70인역 자료를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Haenchen). 희고 빛난 옷은 거룩한 천사의 옷으로 자주 묘사된다(1:10;마 28:3;막 16:5;눅 24:4).

=====10:31
들으시고...기억하셨으니 - 4절과 내용상 같다. 다만 4절보다 간략하게 진술되고 있을 뿐이다. 용어상의 차이로 4절에서는 '상달하여'가 사용되었으나 본절에서는 '들으시고'가 사용되었다. 그러나 의미상 아무런 차이는 없다.

=====10:32
베드로...우거하느니라 - 이 부분의 헬라어 본문은 세 가지로 읽혀지고 있다. (1) '바닷가'란 말이 생략되었다. (2)'바닷가' 다음에 '와서 너에게 말할 자'(*, 호스파라게노메노스 랄레세이 소이)가 첨가되어 있다. (3) 개역성경과 같은 독법을취한다. 여기서 대부분의 사본들은 2)의 독법을 취하고 있다. 그런데 '청하라'는 말속에 (2)의 첨가된 내용이 내포되어 있다. 그리고 누가는 앞의 사건을 간략하게 묘사하고 있으므로 (2)의 독법은 타당하지 않다. 따라서 (3)의 독법이 가장 무난하다.

=====10:33
하나님 앞에 - 본 구절이 사본에 따라 조금씩 달리 표현되어 있다. (1) '하나님 앞에, 대부분의 사본이 이 독법을 취한다. (2) '주님 앞에', 몇몇 소문자 사본이 이 독법을 따른다. (3) '당신 앞에', 서방 사본과 역본이 이 독법을 따른다. (3)의 독법에 따르면 베드로의 권위가 강조되지만 (1)과 (2)는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종하는 자세를 지닌 고넬료의 모습이 강조된다. 특히 '하나님 앞에'라는 표현은 구약에서 '여호와 앞에서'와 함께 자주 사용되어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순종과 경건을 나타낸다. 따라서 본구절에서는 '하나님 앞에'가 가장 무난하다.

=====10:34
베드로가 입을 열어 - 빌립이 이방인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전도할 때(8:35), 또는 산상 설교에서 예수가설교를 시작할 때(마 5:2) 처럼 '입을 열어'라는 표현은 곧이어 언급될 이야기의 권위와 잔중함을 암시해 준다. 여기서는 이방인에 대한 구원을 선언하는 중대한 선언을 나타내기 위해 이 표현이 사용되었다.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 하나님은 사람의 외적인 조건에 따라 판단하지않는다. 이 구절은 신 10:17의 인용구로 짐작된다. 여기서 언급된 '외모'는 유대인들이 지키는 율법과 종교적 제의와 관습들을 가리키는 말이며 형식적인 경건주의를 상징한다. 더 나아가 유대인과 이방인의 외형적 구분에 대해서도 적용된다.

=====10:35
이제는 유대인들이 갖고 있던 선민의식과 같은 배타적 우월감이 하나님 앞에 용납되지 않는다. 여기서 구원받을 대상의 범위가 온세상 사람으로 확대된다. 한편 본절의 표현은 구약적인 표현인데 이를 신약적으로 표현하면 '예수를 믿고 영접한 자'로 해석할 수 있다. 깨달았도다 - 헬라어 본문에서 이 동사는 현재형으로 베드로가 고넬료를 만나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신에게 보여진 환상의 의미를 깨닫기 시작하여 이제 분명하게 그 의미를 파악하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 - 이제는 유대인들이 갖고 있던 선민의식과 같은 배타적 우월감이 하나님 앞에 용납되지 않는다. 여기서 구원받을 대상의 범위가 온세상 사람으로 확대된다. 한편 본절의표현은 구약적인 표현인데 이를 신약적으로 표현하면 '예수를 믿고 영접한 자'로 해석할 수 있다. 깨달았도다 - 헬라어 본문에서 이 동사는 현재형으로 베드로가 고넬료를 만나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신에게 보여진 환상의 의미를 깨닫기 시작하여 이제 분명하게 그 의미를 파악하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10:36
만유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 - 베드로는 창조주 하나님에게 사용하던 칭호를 예수에게 사용하면서 이제 구원의 유일한 길로서 예수를 내세우고 있다. 여기서 '만우'(萬有)는 헬라어로 중성과 남성 모두에 해당되어 '세계 만물' 또는 '모든 사람'을 뜻한다. 그래서 혹자는 '만유'를 '모든 사람'을 뜻한다. 그래서 혹자는 '만유'를 '모든 사람'으로 해석하기도 한다(Haenchen, Bruce). 이는 롬 10:12의 '모든 사람의 주'란 표현과도 일치한다. 이에 따라 공동번역은 본 구절을 '만민'(萬民)으로 해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절에서'만유'를 '만민'으로 해석해야 할 정당한 근거를 발견할 수 없으므로 '만유'로 해석하는 편이 무난하다. 왜냐하면 이 '만유'란 표현은 모든 피조물을 지칭하므로 '만민'이란 의미도 포함하기 때문이다.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 - 베드로는 평화를 예수가 전한 복음의 핵심으로 본다. 이평화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해를 뜻한다(Haenchen). 과거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심판하는 자와 죄인의 관계였으므로 화해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 그러한 관계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화해의 관계로 바뀌게 된 것이다(롬 5:10, 11). 또한 이 평화는사람간의 평화를 말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엡 2:14, 22),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유대인과 이방인과의 관계에 있으서, 그동안 그 둘을 가로 막았던 장벽이 무너짐으로써 하나님 안에서 민족적 편견과 편애가 없어졌다. 이런 의미엥서 복음은 모든 장벽을 제거하는 도구의 역할을 한다.

=====10:37
요한이 그 세례를 반포한 후에 - 예수가 선포했던 평화의 복음은 요한의 세례에서 부터 출반된 것임을 시사한다. 여기서 언급된 '그 세례'는 메시야이신 예수를 예비하는 것이다. 요한의 세례는 백성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으나 본질적으로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을 전하는 기능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하기에 앞서 세례요한을 언급했던 것이다. 갈릴리에서 시작되어 - 본 구절이 예수의 사역이 시작된 지역에 대한 설명인지 아니면 예수의 출생에 대한 것인지 명확하지 않다. 다만 36절에서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란 표현이 사용된 점으로 비추어 보아 본 구절은 예수의 사역과 관련된 것으로 짐작된다. 두루 전파된 그것 - '전파된 그것'에 해당하는 헬라어 '토 게노메논 레마'(*)는 '되어진 말씀'으로 직역될 수 있다. 이는 이미 예수를 통해 온 지역에 전파된 말씀으로 앞에서 언급된 '화평의 복음'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여기서는 비록 '말씀'으로 언급되어 있으나 이 말씀 속에는 예수께서 선포하신 말씀 외에 행하신 표적도포함될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를 통해 나타난 계시는 말씀에 의한 것과 행위에 의한것이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10:38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 누가는 '나사렛'이라는 지명과 함께 예수를 언급하여 그가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사실을 강조했다. 한편 누가는 역사적 예수가 수행하신 모든 언행에 대한 권위를 언급하려는 의도로 본문을 서술했다. 즉 앞절에서 언급한 '그것'은 나사렛 예수의 언행과 일치하는 것이고 나사렛 예수의 언행은 하나님의 영향 아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예수가 행했던 모든 언행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예수의 모든 가르침과 행위는 하나님의 권위에 의해 그 정당성이 인정받게 됨을 보여준다.그래서 누가는 본절 마지막에 '이는 하나님의 함께 하셨음이라'고 덧붙여 놓았다. 착한 일을 행하시고 - 이에 대해 혹자는 헬라적인 의미에서 백성들에게 은인으로인정받는 군주에 대한 암시를 주기 위해 이 표현을 사용한 것으로 추정한다(Haenchen). 즉 군주가 백성들을 보살피고 그들에게 애정으로 도움을 베풀어 줄 때 헬라인들은 그 군주를 향해 선한 일을 행한다고 평가한다. 다시 말해 군주를 자신의 은인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베드로는 예수의 통치자적인 모습을 연상하면서 착한 일을 행하시는 것으로 진술한 것이 아니다. 다만 그는 선하신 본질을 지니신예수가 행하신 일에 대해서 유대적인 윤리 개념으로 진술했을 뿐이다.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예수의 기적 행위를 치유의 행위로 연결시켜 모든 악마의 세력으로부터 해방시키는것 즉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시키는 것을 말한다. 베드로는 이 모든 능력을 하나님이함께하는 증거로 말하여 예수의 모든 언행을 하나님의 권위로 전당화하여 설명하려고한 것 같다(2:22).

=====10:39
우리는...모든 일에 증인이라 - '우리'란 이야기를 하고 있는 베드로와 그 동료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아마도 열 두사도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예수에 관한 모든 일을 증언할 수 있는 증인,즉 역사적 목격자이며 동시에 그 역사적 사실을 전하고 선언하는 전도자의 사명을 부여받았다.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 예수는 온 인류를 우해 죄에 대한 저주를 담당하셨다. 그리고 이 저주는 신 21:22에 따라 나무에 달린 것 곧 십자가 지심과 깊은 연관이 있다.5:30에서 베드로와 사도들은, 예수께서 나무에 달려 죽으셨다고 묘사하였다. 따라서본문은 초기 기독교의 상투적 증언 내용으로 예수의 죽음을 구약 예언의 성취로 보면서 또한 예수를 메시야로 증거하는 이중적 효과를 나타낸다.

=====10:40
하나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리사 - 베드로는 예수의 죽으심에 이어 부활 사건에 대해 증거함으로써 당시 사도들의 증거 내용이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에 관한 것임을 보여준다. 본 구절에서는 부활 사건의주체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이 강조되고 있다. 베드로가 이미 본문과 같은 내용의 설교를 여러 차례에 걸쳐 설교한 점을 미루어 보아(2:32;3:15;4:10;5:30) 부활이 초대 기독교에 있어서 선표의 주된 내용임을 알 수 있다.

=====10:41
본 구절은 베드로 자신을 포함한 사도들의 권위를 보증하려는 의도로 언급되었다.즉 예수의 십자가 부활 사건이 모든 백성에게 보여진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이 선택한 몇몇 증인에게만 나타난 것이다. 이 표현을 다음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첫째는 사도권에 대한 배타적(排他的) 강조이다. 특 자신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증언자로서 선택되었다는 특권 의식을 강조함으로써 초대 기독교의 교권 중심을 사도 중심으로 해야 된다는 당위성을 강조하는 것이다(8:14 주석참조). 둘째는 부활 사건에대한 증인이 소수였다는 사실에 대한 해명(解明)으로 이해될 수 있다. 즉 하나님이 불특정한 다수를 통해 일을 하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자신이 불러 세운 소수의 증인을통해서 일하심을 밝힘으로써 소수에게 예수의 부활을 목격하게 하심이 하나님의 뜻임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 - 부활의 증인으로 세움을 받은 사도 들의 새로운 소명(召命) 체험의 시기와 사건에 대한 진술로서 아마도 눅 24:36-49의 내용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베드로는 부활 후 함께 식사를 나눌 때 주어진 예수의 명령을부활에 대한 증언자로서 선택된 사도들의 소명의식으로 이해했다. 초대 기독교에서 사도의 권위에 대해 문제가 되었을 가능성은 본서에서 사도권에 대한 계속된 강조 속에암시되어 있다(1:2;2:42;4:35-37;5:12, 41;6:6). 본절 역시 사도권에 대한 정당성과그 권위를 강조하려는 변증적 입장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10:42
산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 - 지금까지 베드로는 세상에 오신 메시야의 사역에 대해서 언급했으나 본절에서는 세상 마지막 날 수행하실 그의 사역에 대해 진술한다. 이는 초대 기독교 인들의 고백으로서 부활하신 예수가 장차 종말적 심판의 주가 되신다는 사실에 대한 선포다. 증거하게 하셨고 - 베드로는 앞에서 언급된 내용이 하나님의 지시에 따른 것임을고백함으로써 자신의 증언 내용을 정당화하며 증언의 권위를 부각시키고 있다.

=====10:43
그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 이 내용은 이미 구약 시대의 선지자들에 의해 예언된 것임을 전제하고 있다(3:18,19;사 33:24;53:5;렘 31:31-34;49:6;눅 24:46, 47). 이 사실로 미루어 보아 설교의 내용이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믿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죄사함이 선포됨으로써 베드로의 설교가 종결되면서 복음이 사람에게 끼치는 결과가 핵심적으로 진술되었다. 즉 베드로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나타나는 결과가 믿는자들에게 주어짐으로 인간에게 가장 심각한 죄 문제가 해결됨을 선포했다.

=====10:44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 본절로 미루어 보아 성령 강림(降臨)의 시점이 베드로의 설교가 끝난 뒤라기보다는성령 강림으로 인해 베드로의 설교가 중단된 듯한 인상을 더 강하게 보여주고 있다.여기서 독특한 점은 설교를 듣는 모든 사람에게 성령이 임했다는 표현이다. 당시 성령의 임재가 곧 기독교인됨에 대한 징표로 여겨졌지만(8:14-20), 무엇보다 본문의 사건은 안수나 세례 없이 성령이 강림하였다는 점이 처음 성령 강림의 때와 유사하다. 이는 '말씀'의 권위를 나타내면서 동시에 성령의 임재가 어떤 의식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님을 입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성령을 받은 이들이 이방인들이었다고그들이 기독교인이 되려고 기독교인의 어떤 집회에 참여했다는 언급도 없다는 점에서성령은 인간이 같춘 어떤 조건에 상관없이 자유롭게 활동한다는 사실을 시사하고 있다. 이로써 이방인에 대한 선교의 정당성이 확실하게 제시되었다. 한편 여기서는2:2-4과 같이 성령이 강림함을 객관적으로 식별할 수 있는 어떤 묘사가 없지만 46절에서는 방언을 말하고 그들이 하나님을 찬양하였다는 점이 유일한 성령 강림의 외적 증거로 묘사되어있다. 이는 고넬료의 가정에도 2:2-4와 같은 현상이 있었느나 누가가 자세한 묘사를 생략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10:45
할례받은 신자들이...놀라니 - 본절은 오랫동안 간직해 왔던 유대인들의 절대적 신념이 무너지는 순간을 묘사한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할례받은 신자들이란 여기서 정통 유대인을 말하며 욥바에서 베드로를 따라 동행했던 자들로서 기독교로 개종한 자들이었을 것이다. 그들의 놀람은구약 시대에서부터 시행된 할례 의식을 통하지 않고 이방인도 구원의 경험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경험하였다는 사실에 있다. 이 같은 장면 묘사는 첫째로 기독교인이 된 유대인들도 아직까지 이방인 구원에 대해 회의적인 생각이 있었다는 점을 말해주는 것이고 둘째로 유대인을 이방인에게 직접 임재하는 성령의 활동을 목격한 증언자로 언급하여 이방인 선교의 정당성을 유대인들에게 강조하려는 누가의 의도가 숨어 있음을 볼수 있다. 여기서 이방인 선교와 이방인 에게도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 한다는 바울의구원관이 암시되어 있다.

=====10:46
방언을 말하며 - 오순절 사건(2:4)과 같은 현상으로 묘사되었으나 그 당시와 같은 각국 방언 현상은아닐 것이다.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 '들음이러라'의 헬라어가 미완료 과거형으로 '계속해서 들었다'의 뜻을 담고 있다. 이는 성령의 역사가 이방인들에게서 계속 되고 있음을의미한다. 그들의 찬양 행위가 노래였는지 말로 표현되었는지 아니면 방언으로 찬양한것인지는 정확히 규명할 수 없으나 베드로의 일행이 그 찬양을 이해했다는 점에서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하나님을 찬양했을 가능성이 높다.

=====10:47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 이방인들의 성령 받음을 베드로는 자기들의 성령받음과 동일시하고 있다. 즉 베드로는 이 사실을 선포함으로써 이방인들의 성령 체험을 정당화했다. 이는 이방인 전도문제에 있어서 하나의 이정표(里程標)가 될 수 있다. 누가 능히 물로 세례줌을 금하리요 - 반문 형식으로 된 본문은 강한 긍정의 대답을전제한 어투이다. 첫째는 이미 성령을 받은 사울에게 기독교인됨의 형식인 세례행위(8:12)는 마땅히 수행되어야 함을 암시하고, 둘째는 성령 받음은 기독교인됨의 가장확실한 징표임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베드로의 어투는 이방인에게 세례를 베푸는 행위가 당시 할례자들에게 매우 문제시 될 수 있을 것으로 짐작한 데서 비롯된 것 같다.따라서 본절에서 베드로의 증언은, 이방인에게 성령이 임재하였다는 사실이 이방인에게 세례를 베풀고 기독교인으로 입교시키는 데 아무 하자가 없음을 보증하는 의미를지니고 있음을 진술하고 있다.

=====10:48
세례를 주라 하니라 - 베드로가 직접 세례를 베풀지 않고 누구인지는 언급이 없지만 베드로는 그에게 세례를 주라고 지시하고 있다. 이것은 빌립이 세례를 주라고 지시하고 있다. 이것은 빌립이 세례를 베풀었던 사실과 마찬가지로(8:12) 당시 세례를 베푸는 것이 사도들의 고유 권한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때 베드로를 대신해서 세례를 베푼 자들은 이방인들이 성령을 받는 것을 보고 놀란 할례자들, 곧 욥바에서 베드로를 수행한 자들이었을 것이다(23절). 저희가 베드로에게 수일 더 유하기를 청하니라 - 본문은 베드로가 이방인들에게 설교한 것 만큼 중요한 사실이기에 언급되었다. 왜냐하면 누가는 이방인과 사도가 함께자고 먹었다는 사실을 암시함으로써 이방인이 기독교인이 될 수 있으며 유대인의 의식절차를 밟지 않고 서로 교제할 수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한편 비록 본 구절에서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더 머물렀는지에 대해서 누가가 언급하지 않았으나, 11:1-3로미루어 보아 그가 그곳에 머문 것은 틀림 없는 사실이다. 특히 누가는 어떤 사건이 다음에 문제시되거나 그 내용이 반복된다면 그 진술들이 상호 보충되도록 서술하는 방법을 취했다.



본장은 기독교의 복음이 유대와 사마리아를 넘어 이방 세계로 확산되는 선교사상의 획기적인 사건을 다루고 있다. 다시 말해서 본장에 등장하는 고넬료 가(家)의 성령 강림 사건은 전장(前章)에 서술된 사도 바울의 회심과 더불어 기독교의 세계적 확산을 위한 기틀을 마련한 역사적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본장의 내용을 상고하기 위해 본장이 지니는 구속사적(救贖史的) 의의와 전후 문맥의 흐름에 유의한 다음, 본장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인 고넬료와 베드로의 만남을 가능케 한 제요인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1) 구속사적 의의. 오늘날 기독교가 세계의 곳곳에 퍼져 있지만, 이렇게 되기까지는 초대 교회의 복음을 위한 남다른 열정과 몸부림이 있었다. 그것은 복음이 세계 만방에 확산되기 전에 수많은 장벽들과 난관을 뚫고 헤쳐나가야 했던 바, 초대 교회의 중추적 인물들인 사도들의 역사적 삶의 정황과 긴밀한 연관을 갖는다.
열 두 사도들이 직면한 장벽과 난관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하게 꼽을 수 있는 것은 당시 팔레스틴과 그 주변을 장악하고 있었던 로마라는 거인을 들 수 있다. 기독교는 당시 세계의 정치와 문화를 주도하고 있었던 로마 제국을 통하지 않고서는 세계에 진출하기가 어려웠다. 더욱이 초대 교회의 주요 구성원들은 거의가 유대인들이었다. 로마의 지배를 받았던 유대인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로마를 전복(顚覆)시키고 정치적으로 해방되글 갈구한만큼, 로마인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기보다는 미움과 증오의 마음을 갖는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일 것이다.
따라서 피지배국인 유대와 지배국인 로마 사이에 가로 막힌 장벽을 깨드리는 것이 복음 전도에 앞서 선행되어야 했다. 본장은 결정적으로 이러한 장벽이 부숴지고 복음이 세계를 향해 본격적으로 줄달음치게 된 전기(轉機)를 맞아히게 되었다는 구속사적 의의를 갖는다 하겠다.
(2) 문맥상의 특징. 본장의 내용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서 전체에서 점하는 본장의 위치와 전.후의 내용과 본장의 관계성에 주의하는 것이 필요하다.
(가) 교량적 위치. 본장은 본서 전체의 내용에 있어서 선교사상 획기적인 전환을 이루게 하는 교량적 위치에 있다. 본서의 내용은 관점에 따라 여러 가지로 구분될 수 있지만, '지리 중심'의 관점에서 보면 1:8에 따라 세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1:1-8:3;8:4-12:25;13:1-28:31), 그 각각은 차례대로 '예루살렘에서의 선교'와 '유대와 사마리아에서의 선교' 그리고 '땅 끝까지 이르는 선교' 등으로 제목을 붙일 수 있다.
이 구분에 따르면 본장은 '유대와 사마리아에서의 선교'(8:4-12:25) 부분에 해당된다. 특히 이 부분은 예루살렘에서의 선교와 땅 끝까지 이르는 선교 사이의 교량적 역할을 해주고 있으며, 그 중에서 본장은 그 성격을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하겠다. 예컨대, 본장의 공간적 배경이 되고 있는 '가이사랴'는 사마리아 땅이며 회심의 주인공인 '고넬료'가 이방인이라는 사실은 본장의 교량적 성격을 잘 보여준다. 이를 도표화하면 다음과 같다.

+--------------+------------+----------------+---------------------------------+
| 구분 | 인명.지명 | 특 징 | 의 미 |
| 배경 | | | |
+--------------+------------+----------------+---------------------------------+
| 공간적 배경 | 가이사랴 | 사마리아 땅 | '사마리아 선교'의 성취 |
+--------------+------------+----------------+---------------------------------+
| 인물적 배경 | 고 넬 료 | 이 방 인 | '땅 끝까지 이르는 선교'의 선취 |
+--------------+------------+----------------+---------------------------------+

도표에서 보듯 본장의 공간적 배경인 가이사랴는 사마리아 지방으로서, 1:8의 선교 명령 중 사마리아 선교의 성취(成就)로 볼 수 있다. 실제로 10장 이전부터 사마리아 선교는 빌립과 베드로에 의해서 이미 개척되었고(8:4-9:43) 본장에 이르러서는 완숙한 단계에 이르고 있다. 이는 '가이사랴'의 지정학적 위치를 고증할 때 이해할 수 있는 바, '가이사랴'는 예루살렘 북서쪽 104km 떨어진 사마리아의 천연적 항구 도시로서 역대의 로마 총독이 생각하던 교통의 요지요 전략적 기지였던 것이다.
또한 본장의 인물적 배경이 되는 고넬료는 이방인인데, 이 사람의 회심은 1:8의 미래적 예언에 해당하는 '땅 끝까지 이르는 선교'의 선취(先就)라고 할 수 있다. 엄밀한 의미에서 선교의 대상은 지역이 아닌 사람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둘 때, 이방인 고넬료의 회심이 비록 사마리아 지방에서 일어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땅 끝까지 이르는 선교'로 표현되는 이방인 선교의 실제적 첫열매가 된다. 따라서 고넬료 가의 성령 강림 사건은 도표에서 나타난 것처럼 사마리아 선교의 성취요 땅 끝까지 이른 선교의 선취를 동시에 함유하는 교량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하겠다.
(나) 이방 선교의 점진성. 본장을 전.후 장(章)들과의 연관하에 살펴보면 이방 선교의 점진적 진행을 엿볼 수 있다. (가) 에서 잠깐 언급한 것처럼 8장에서는 빌립을 통한 사마리아 선교가 시작되었다. 또한 9정에서는 장차 새로운 사도로 활약할 사울이 회심함과 동시에 베드로가 룻다와 욥바에서 각각 애니아와 다비다라는 여인을 살리는 이적을 행하였다.
그 다음 본장에서 베드로는 가이사랴에 이르러 고넬료의 회심 사건을 맞게 되고 본장 이후에는 바울이 서서히 전도 사역에 경주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일련의 추이(推移)를 보면 본장과 본장 전.후의 내용들은 주로 사도 바울의 이방 선교를 예비하는 준비 과정임을 알 수 있다. 즉 베드로는 이방 선교의 전초적 활동으로서 사마리아 지방을 순회하며 전도 활동을 폈고 본장에서는 유대와 로마 사이의 장벽을 깨뜨리는 고넬료가의 성령 강림 사건을 성취하는 도구가 됨으로써 바울의 선교 활동의 길을 터 놓은 것이다.
(3) 양인(兩人)의 상면을 이루게 한 요인들. 본장은 선교사상 분수령적 기점을 이루는 사건을 다루고 있거니와 이는 베드로와 고넬료라는 두 사람의 만남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우리가 주(主)를 알게 된 것은 만남을 통해서요 이 만남은 주의 부르심에 의하여 단독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지만, 대개는 자기 주변의 사람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아무튼 기독교는 만남을 통해서 시작되고 만남을 통해서 지속적인 성장과 내실을 기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서로 만나게 함으로써 당신의 뜻을 이루시는 것이다.
실제 본장의 두 사람은 서로 만날 수 없는 위치에 있었다. 베드로는 피지배국의 평범한 유대인이요 고넬료는 당시 세계의 판도를 주름잡고 있는 군국주의 로마의 관료였던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이 만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고매한 신앙 인격과 무엇보다도 그들의 배후에서 역사하신 하나님의 개입하심 때문이다. 이 내용을 간략하게 살펴 보기로 하자.
(가) 고넬료의 신앙. 고넬료는 로마 총독 직속 군영의 백부장으로서 유대교에 출석하는 자였다. 당시 유대교 신앙에 관심을 갖고 출석하는 이방인들 가운데는 두 부류가 있었다. 한 부류는 유대교로 개종한 자들이고 나머지 한 부류는 개종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하여 회당의 예배에 참석하는 자들이다. 고넬료는 이중에서 후자(後者)에 속한다(2절). 그는 자기만 아니라 온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믿는 모범적인 신앙의 가정을 이루었고 밖으로는 로마의 훌륭한 지취관으로서 이 민족을 구제하는 데까지 힘쓴 사랑과 기도의 사람이었다. 고넬료 가에 성령의 충만한 은혜가 임할 수 있었던 것은 남다른 그의 신앙 인격 때문일 것이다.
(나) 베드로의 순종. 고넬료의 적극적인 신앙에 못지 않게 두 사람의 만남을 가능케 한 요소로서 베드로의 순종하는 신앙 자세를 들지 않을 수 없다.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라는 선민 의식이 깊이 배여 있었고 이방인들에 대해서는 편견과 적대감을 갖고 있었다. 역사상 그들은 수많은 이민족의 침입을 받아 왔고 그 와중에서 여호와 신앙을 지켜왔으되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방향으로 치우치게 되었다. 특히 로마 당국의 지배를 받던 초대 교회의 시대적 상황은 로마인에 대한 유대인의 배타적 감정을 더하고도 남았다.
이런 상황을 감안하면 로마의 핵심 관료인 고넬료를 베드로가 방문한다는 사실을 용납되기 어려운 일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예수의 부활 이후 성령의 충만함을 입고 새롭게 변화된 베드로는 이전과는 달리 오직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일념을 가졌다. 처음에는 환상을 보았음에도 무슨 영문인가 반신 반의(半信半疑)하는 그였지만, 하나님의 계시가 명료하게 현실로 다가오자 그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부름에 순종하였고 그렇게 해서 고넬료를 만나게 된 것이다.
(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개입. 양자가 상면하게 된 결정적 요인으로서 본문은 하나님의 주도적이며 적극적인 개입을 증거한다. 고넬료와 베드로라는 인격체를 통해서 하나님은 세계 선교의 계획을 성취해 나가시고자 했다.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여러 장벽이 복음 전도의 대로에 놓여 있었지만,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은 당신의 종들을 통하여 그 장벽들을 제거케 하시고 세계를 향해 복음이 뻗어 나가게 하신다. 고넬료와 베드로에게 환상이 임한 것은 그와 같은 뜻과 섭리를 이루기 위해서 인간의 마음과 생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간섭을 의미한다. 일을 하는 객체는 사람이었지만, 일을 성취하는 주체는 하나님이시다.

1. 고넬료와 베드로의 환상(10:1-16)
본 단락은 사건의 발단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고넬료와 베드로의 환상이 각각 기록되어 있다. 양자에 나타난 환상들은 하나님의 계시로서, 부분적이고 미숙한 믿음의 소유자들을 보편적이고 범세계적인 복음으로 통합하기 위한 하나님의 개입의 첫걸음이라고 할 수 있다. 복음이 예루살렘이라는 지역적 범주와 유대인 중심의 민족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채 정체(停滯)되어 버릴 위기에서 하나님의 간섭이 가이사랴와 욥바에서 환상을 통한 계시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에 본 단락을 계시라는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1) 계시의 성격. 이방 선교를 진작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계시는 환상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베드로와 고넬료의 환상은 성격상 약간의 차이가 있다. 그것은 환상의 명료성이라고 할 수 있는데 고넬료의 환상은 더 이상의 사족(蛇足)이 필요 없을 정도로분명하다. 환상을 통해서 베드로가 묵고 있는 정확한 위치(6절)를 고지(告知)받았을 뿐 아니라 환상을 본 즉시로 사람을 보내고 있다(8절). 이런 사실들은 베드로의 환상과 비교해 볼 때 고넬료의 환상은 매우 구체적이고 명료했다 할 수 있다.
반면 베드로의 환상은 명료성의 정도가 불분명했다. 그 증거로서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고넬료는 환상 중에서 자신의 시각을 통해 명백하게 천사를 목도한 반면(3,4절) 베드로는 환상을 비몽 사몽간에 보았다(10절). 둘째, 베드로는 환상을 본 후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속으로 의심했다(17절). 이것은 고넬료가 환상 직후 베드로를 청하기 위해 사람을 보냈던 점과 대조된다(7,8절). 이런 점들은 고넬료와 베드로의 환상에 있어서 그 명료성의 차이를 잘 보여준다. 그런데 한 가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베드로의 환상은 그 명료성에 있어서 고넬료의 환상보다 약하다고 할 수 있으나, 그 내용에 있어서는 매우 정확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다만 베드로의 이해는 유대교적 관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사도 베드로의 제한된 생각과 사고 방식을 일방적으로 옹졸하고 편협하다고 몰아붙일 수만은 없다. 왜냐하면 베드로를
포함한 유대교 그리스도인들의 그 당시 인식도(認識度)를 고려해 보건대, 여전히 '성별'(聖別)의 문제로 고심했을 수 있기 때문이다.
(2) 계시의 선행 조건. 장 강해에서 언급한 바거니와 고넬료와 베드로 사이에는 신분과 지위로 미루어 볼 때 함께 교제를 나누기 힘든 장벽이 놓여 있었다. 고넬료는 로마 군인으로서 피지배 계급인 유대인들을 면담할 기회는 행정적 필요가 있을 때 뿐이고, 그것도 매우 중대한 사건이 발생하였을 때만 한정되었다. 또한 유대인들은 선민 의식이 강하였던 터라 이방인을 접촉하는 것 자체가 금기시되었으며 더욱이 그들을 지배하는 로마인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었다.
따라서 베드로와 고넬료가 상면할 기회나 가능성은 애초부터 없었다고 하겠다. 이런 사회적 상황을 고려해 볼 때 최첨단의 상극인 베드로와 고넬료에게 하나님께서 환상을 통해서 면담을 주선하신 것은 최선의 방법이었다. 다만 여기서 고려해야만 하는 것은 '왜 하나님의 환상이 이 두 사람에게만 특별히 역사하셨겠는가 ?'라는 점이다. 물론 무소 부재하시고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의도하신 구속 계획을 한치의 오차도 없이 수행하시는 분이시며, 그 선택에 있어서도 자유로우신 분이시다. 따라서 그 환상의 수신자들이 꼭 베드로와 고넬료가 아니어도 무방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구속 계획을 수행함에 있어서 인간을 파트너로 삼으시기를 원하셨고 가장 적절한 사람을 사역의 파트너로 삼으시고자 하셨다. 그러면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고넬료와 베드로의 어떠한 점이 하나님 보시기에 적절한 사역의 도구가 될 수 있을까 ?
이 문제에 대한 답으로서 본문은 그들이 기도하는 사람들이었음을 제시하고 있다(2,3,9절). 고넬료는 범사에 기도하는 경건한 사람이었고 그의 경건은 하나님의 환상을 받게 될 주요한 원인이 된다(4절). 예컨대, 그는 유대인처럼 일정한 시간을 정해놓고 하나님께 기도드렸으며 백성을 구제하는 일을 즐겨 하였으니 이러한 그의 신앙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기에 충분하였다. 베드로 역시 마찬가지이다(9절). 고로 우리는 베드로와 고넬료에게서 '경건'이라는 공통 분모를 추출할 수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선택에 있어서 유대인과 로마인과 같은 민족적인 우월감보다 하나님께 향한 온전한 경건이 우선한다는 사실을 직접으로 보여준다.
(3) 계시의 내용. 본 단락에서 언급되는 환상은 두 가지지만, 고넬료의 환상은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하지 않은 명백한 성질의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상징적 요소로 구성되어 있는 베드로의 환상에 관해서만 그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베드로가 비몽 사몽간에 본 환상에 의하면 큰 보자기에 유대인들이 부정하다고 생각하는 각종 짐승들이 있었고(레 11:2-47;신 14:3-20)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을 '잡아 먹으라'고 베드로에게 지시하셨다. 여기에 대해 베드로는 세 번에 걸친 항변을 하고 있다.
이 환상은 아직도 유대주의적 관점에 한정해서만 복음을 생각하고 있는 베드로의 편견을 교정할 목적으로 계시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베드로는 그 의미를 고넬료 집에 이르기까지 완전히 깨달을 수 없었다. 그만큼 환상의 내용에는 베드로가 수용하기 힘든 장벽이 있었다. 그 장벽이란 이방인과 함께 할 수 없다는 편견이요 이것은 유대인들이 분류한 부정한 음식으로 표현된 것이다.
한편 본문에 언급된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음식은 깨끗하다'고 하신 예수의 말씀(막 7:19)과 일맥 상통할 뿐 아니라 바울의 음식에 관한 권면(딤전 4:4)과도 부합된다. 아무튼 이방인 역시 복음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교훈을 담고 있는 베드로의 환상은 처음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지만 점차 환상의 전모가 밝혀지자 베드로는 고넬료에게 복음 전파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이처럼 막혀 있었던 이방 선교의 물길을 터 주는 계기가 된 베드로의 환상은 베드로와 유사한 배타주의적 사고 방식에 젖어 있었던 예루살렘의 기독교인들의 시각을 교정하는 강력한 증거가 되고 있다(11:5-10).

* 유대인의 시간 구분.

+----+-----------------+---------------------+---------------------------------+
|시대| 구 분 | 시 간 | 관 련 성 구 |
+----+----+------------+---------------------+---------------------------------+
| | | 초 경 | 해질때-오후10시 | 에 2:19 |
| | 밤 | 이 경 | 오후10시-오전2시 | 삿 7:19 |
| 구 | | 삼경(새벽) | 오전2시-해뜰때 | 출 14:24 |
| +----+------------+---------------------+---------------------------------+
| | | 아 침 | 해뜰때-오전1시 | |
| 약 | 낮 | 오 정 | 오전10시-오후3시 | 창 18:1 |
| | | 서늘할 때 | 오후3시-오후6시 | 창 3:8 |
| | | 저 물 때 | 오후6시 | 잠 7:9 |
+----+----+------------+---------------------+---------------------------------+
| | | 저 물 때 | 해질때-오후10시 | 막 13:35 |
| | 밤 | 밤 중 | 오후10시-오전1시 | 막 13:35 |
| | | 닭 울 때 | 오전1시-오전4시 | 막 13:35;눅 22:61 |
| | | 새 벽 | 오전4시-해뜰때 | 마 14:35;막 13:35 |
| 신 +----+------------+---------------------+---------------------------------+
| | | 24시 간 제 |
| | +---------+---------------+---------------+---------+----------------+
| | | |밤중기점-로마식|새벽기점-유대식| 시 간 | 관 련 성 구 |
| | | | (요한복음) | | | |
| | +---------+---------------+---------------+---------+----------------+
| | | 아 침 | 제 6 시 | 제 0 시 |오전 6시| 요 19:14 |
| | |(마 16:3)| 제 9 시 | 제 3 시 |오전 9시| 마 20:3 |
| | 낮 | | 제 10 시 | 제 4 시 |오전 10시| 요 1:39 |
| 약 | | 정 오 | 제 12 시 | 제 6 시 |오전 12시| 마 20:5 |
| | | (22:6) | 제 3 시 | 제 9 시 |오후 3시| 마 20:5 |
| | | 저 녁 | 제 5 시 | 제 11 시 |오후 5시| 마 20:6 |
| | |(마 16:2)| 제 6 시 | 제 12 시 |오후 6시| 요 4:6 |
| | | | 제 7 시 | 제 1 시 |오후 7시| 요 4:52 |
+----+----+---------+---------------+---------------+---------+----------------+

유대인의 시간 구분 방법은 현대의 시간 구분법과 다르다. 현대의 시간 구분은 로마식 구분법에 의한다. 그런데 우리는 같은 성경 안에서 요한복음과 타복음서의 시간 구분의 차이가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요한복음은 다른 복음서가 한결같이 유대인의 시간 구분에 따라 사건을 말한 것과 달리 로마식을 따랐다.

2. 고넬료 가(家) 사람들의 방문(10:17-23)
본문은 베드로와 고넬료의 환상이 구체적으로 현실화되는 장면을 극적으로 묘사한다. 베드로를 초청하기 위해 고넬료가 보낸 사람을 베드로가 영접한 것은 그 자신의 확신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 베드로가 자신의 환상을 여전히 의심하고 있을 때에 성령께서 역사하사 곧 일어날 일을 예고하셨고 이에 베드로는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이 같은 본문의 내용은 베드로와 고넬료가 상면(相面)하게 되는 사건(24-48절)의 전단계로서 앞 문단에 부각된 하나님의 주권적인 개입과 이에 대한 인간의 순종하는 자세를 말한다. 본문을 드라마틱한 요소에 입각하여 하나님의 연출과 인간의 출연이라는 관점에서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하자.
(1) 하나님의 연출. 이방인 선교의 첫열매로서 고넬료를 회심시키신 하나님의 계획은 매우 치밀하게 전개되었다. 예컨대 가이사랴에 있는 고넬료가 환상을 본 시간은 우리 시간으로 오후 3시이고, 베드로가 욥바에 머무른 시간을 그 이튿날 정오 12시이다. 즉 두 환상의 발생 시간 격차는 20여시간이다. 그런데 가이사랴에서 욥바까지의 거리는 하룻길에 해당한다. 따라서 고넬료가 환상을 본 직후 보낸 사람들이 베드로가 머무는 욥바에 도착한 시간을 베드로가 환상을 본 직후이거나 얼마 안 되었을 때였다. 여기에서 우리는 공간적 거리와 시간을 절묘하게 활용하는 하나님의 치밀한 계획을 보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의 의심이 깊어지기 전에 적절한 때에 환상이 실현되게 하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본 단락에서는 성령께서 직접 베드로로 하여금 이방인들을 홀
대(忽待)하지 않고 영접하도록 적절하게 간섭하시고 계신다.
이런 정황들을 종합해 볼 때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이 완전한 한편의 드라마처럼 사전(事前) 각본이 매우 치밀했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다. 복음은 결코 민족주의적 편견에 정체(停滯)되어 있을 수 없는 것이니 하나님꼐서는 강권적으로 역사하시사 복음의 물결이 예루살렘을 넘어 온 땅에 가득하게 하신다.
(2) 인간의 출연. 본 드라마의 출연자들은 베드로 및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었다. 한 편의 드라마를 훌륭하게 완성하기 위해서는 출연자들의 각본에 대한 충실한 연기가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과 연관해 볼 때 본 단락의 출연자들은 가장 이상적인 연기를 하고 있다 하겠다. 그들은 하나님의 연출에 따라 전적 순종의 태도를 보인다. 베드로의 경우를 살펴보면, 그는 분명 환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낯선 이방인들의 방문을 받게 되었다. 이때 그는 유대인들의 습관대로 하지 아니하고, 그 순간 깨닫게 하시는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였다(19,20절).
또한 고넬료의 보냄을 받은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도 순종의 미덕을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은 베드로에게 주인 고넬료의 의도를 조금도 손상하지 않고 그대로 전달하였을 뿐만 아니라 베드로 앞에서 주인 고넬료에 대한 최대의 존경을 덧붙였다(22절). 고넬료의 종들의 이런 모습은 주인에 대한 존경뿐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신앙도 지녔음을 짐작 할 수 있게 해주는데(7절)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 단락에서 언급하고자 한다. 이와 같은 모습들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구속 계획이 인간들의 순종 속에서 아름답게 진행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3. 고넬료 가(家)의 성령 강림(10:24-48)
본 단락은 고넬료 가에 베드로가 방문하는 데서 시작해서 성령 강림을 끝으로 마감된다. 이 단락은 내용상 세 부분으로 구분되는 바(24-33절;34-43절;44-48절), 그 제목을 각각 '베드로와 고넬료의 상견례'와 '베드로의 설교' 그리고 '성령 강림'으로 붙일 수 있다. '상견례'(24-33절) 부분에서는 베드로와 고넬료가 그동안 자신들이 체험했던 환상에 대해 상호 소개를 함으로써 미진하나마 남아 있는 베드로의 의심을 완전히 해소하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
연이어 계속되는 '베드로의 설교'(34-43절)에서는 베드로가 복음의 전수를 전하는 바, 이것은 오순절 성령 강림 직후 베드로가 행했던 설교(2:14-36)와 비교된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본문 주제 강해를 참조하기로 하자. 아무튼 베드로는 자신의 설교를 통해서 이방인인 고넬료의 신앙을 온전하게 유지시킬 수 있는 예수의 행적을 압축적으로 가르쳤다.
마지막 부분인 성령 강림 사건(44-48절)은 본장의 절정을 장식하는 바, 이 사건은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과 유비된다. 유대인에 대한 본격적인 설교가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에서 비롯되었듯이 이방인 설교에 대한 필요성과 중대성은 고넬료 가의 성령 강림 사건에서 부각되었다. 따라서 고넬료 가의 성령 강림 사건을 '가이사랴의 오순절'이라고 명명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사건은 분명히 베드로를 위시한 동행인들의 유대적 관습과 전례를 뒤엎는 것으로서, 그들에게는 의외의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45절). 순수한 이방인들에게 성령이 임한 것은 전대 미문(前代未聞)의 사건으로서, 이를 목도한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자유로우심에 놀랄 뿐이었다. 더구나 고넬료 가의 사람들이 방언과 찬양을 하는 현장을 목격한 것은 그들도 하나님이 받으시는 백성임을 확증해 주는 것이었다. 당시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은 성령 세례와 방언을 매우 밀접하게 연관시켰다(2:4). 따라서 이방인들이 방언을 하였다는 것은 그들에게도 성령이 임한다는 결정적 증거가 되는 셈이었다(11:18).

* 베드로의 설교 비교. 본서 2장과 본장에는 베드로의 설교가 수록되어 있는 바, 양자간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
| 비 교 | 구 분 | 2장 설교 | 본장 설교 |
+-----------+----------------+-------------------+-----------------------------+
| | 핵 심 | 예수 그리스도 | 예수 그리스도 |
| 유 사 점 +----------------+-------------------+-----------------------------+
| | 결 과 | 회개(2:38절) | 방언과 찬양(46절) |
| | | 물세례(2:38절) | 물세례(48절) |
+-----------+----------------+-------------------+-----------------------------+
| | 대 상 | 유대인 | 이방인 |
| 차 이 점 +----------------+-------------------+-----------------------------+
| | 성령 강림 시간 | 설교전 | 설교 도중 |
+-----------+----------------+-------------------+-----------------------------+

위의 도표에서 우리는 2장과 본장에 나타난 베드로의 설교를 분석해 보았다. 여기서 우리는 두 설교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분류했는데, 전자에서는 설교의 핵심과 결과를, 후자에서는 그 대상과 성령 강림 시간을 구분했다. 이것을 요약하면 2장 설교의 핵심이 본장에서 동일하게 유지되면서, 그 대상이 유대인에서 이방인으로 확대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전환이 하나님의 계획 아래 수행되고 있음을 성령의 강림으로써 알 수 있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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