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크마 주석, 요한복음 0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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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예수는 감람산으로 가시다 - 7:53-8:11까지의 기사는, 사본상 문제가 있는 부분이다. 이 중요한 사본들(* , B, L, T, W)에는 없고, 중요하지 않는 사본들(D, E)에만 있을 뿐이다. 알포도(Alford)와 하스킨스(Hoskyns)는 말하기를, 이 부분이 진정한 역사성을 띠었지만 요한의 친필은 아니고, 구전적(口傳的)으로 돌아가던 것이 여기에 삽입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부분(7:53-8:11)의 순정성(純正性)을 변호한 학자들도 있다(I.W. Burgon, C.H. Van Herwerden, J.J. Van Oesterzee etc). 헨드릭센(Hendriksen)에 의하면, 이 부분을 요한 복음의 순정 부분이 아니라고 하는 학자들의 이유는, (1) 여기 있는 어떤 낱말들이 요한의 기록한 다른 책들에는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 (2) 위에 말한 바와 같이, 이 부분이 중요한 사본과 번역에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롸벌트손(A.T. Robertson)은, 이것이 본래는 변주(變註)에만 있던 것인데 후에 서사자(書寫者)의 잘못으로 본문에 삽입되었다고 한다(Introduction to the Textual Criticism of the New Testament, New York, 1925, p.154). 그러나 이 부분이 요한 복음의 순정 부분이라고도 할 수 있다. 우리가 들 수 있는 이유는, (1) 여기 예수님께서 그 여자를 정죄하시지 않았다고 하였으니, 그것은, 그가 8장에 가르치신 바 진리가 죄인을 놓아준다는 사상(32절)과 부합한다. (2) 요한의 제자 파피아스(Papias)도 이 부분의 이야기를 알고 있는 듯하다. 유세비우스(Eusebius)는 말하기를, "파피아스가 히브리 복음에 있는대로 주님 앞에 고소 당한 많은 죄 있는 여자에게 관한 이야기도 해석하였다"고 하였다(Ecclesiastical History, III. 39:17). (3) 어거스틴(Augustine)은 말하기를, "어떤 사람들이 그들의 사본에서 간음한 여자의 이야기는 뽑았다. 그들이 그렇게 한 이유는, 여자들이 그 이야기를 근거하고 정조 없는 행동의 구실을 삼을까 두려워한 까닭이었다"라고 하였다(De Adulternis Conjugiis II. 7). 이 점에 있어서 헨드릭센(Hendriksen)은 결론하기를, "여기 기록된 것이 확실히 역사적으로 있는 사건이었겠고, 거기 포함된 사상이 사도적 사상과 충돌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것을 우리의 복음에서 제외시키는 것보다는 차라리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마땅히 보수해야 된다. 전도자들이 이 부분 말씀에 근거하고 설교하기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하였다(New Testament Commentary, The Gospel of John, II. pp. 33-35).

=====8:2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 그가 감람산으로 가신 것(1절)은 기도하시기 위함이었겠고, 일찌기 성전으로 들어오신 것은 진리를 가르치시기 위한 것이었다. 기도하심과 가르치심은 그의 주요한 일이었다.

=====8:3,4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언제나 예수님의 흠을 잡아 보려고 애쓴 자들이었다. 그들은, 범죄한 여자를 끌고 예수님 앞에 나오는 잔인한 월권행위를 감행하였다.
죄인은 법정에서 취급되어야 하는데, 법관이 아닌 그들로서 죄인을 끌고 다닐 권리는 어디 있었는가

=====8:5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 레 20:10; 신 22:22 참조. 그들이 이런 문제를 가지고 온 목적은, 진실히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만 예수님의 대답에서 트집을 잡으려는 것이었다. 예수님이 만일 그 여자를 돌로 치라고 하셨을 것이면, 로마의 정권을 거스리게 되었을 뻔하였다. 그 이유는, 그때에 로마의 정권이 유대 민간에게 사형 집행권을 허락하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만일 그 여자를 돌로 치지 말라고 하셨더라면, 모세의 율법을 거스린 자라는 죄인 취급을 받으실 뻔하였다.유대인들은 저렇게 교묘하게 예수님을 딜레마(Dilemm=窮地)에 빠뜨리려고 시험하였다.

=====8:6
저희가 이렇게 말함은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 위에 말한 것과 같이, 로마 법에는 간음한 여자를 돌로 치는 법이 없으니 만큼, 만일 예수님께서 모세의 법대로 하라고 명하신다면 로마 법에 걸리게 되고, 모세의 법대로 하지 말라고 하신다면 산헤드린 공의회에 걸리게 될 것이었다. 성경에 기록된대로 예수님께서 글을 쓰신 일은, 이 사건에 관련하여 한번 있었을 뿐이다. 그 글의 내용은 무엇이었는지 알 수 없다.

=====8:7
저희가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가라사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 저희가 묻기를 마지 아니함은, 그들이 예수님에게서 실언하시는 허물을 찾아 보려는 간교한 마음에서 그리한 것이다.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이것은, 그 여자보다 먼저 각기 자기 자신을 심판하라는 말씀과 같다. 이것은, 신약 시대에 있어서 범죄자를 취급하는 새 계명(사랑)의 원리이다(갈 6:1). 이 말씀은,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마 7:5)고 한 말씀과 같다. 그가 이렇게 말씀하셨으므로 저희의 올무에 걸리지 않으시고, 도리어 그들의 양심을 찌르셨다.

=====8:8
다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 혹설에, 그 때 그 쓴 글은 거기 왔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이름이었겠다고 한다. 그들의 이름을 땅에 쓰신 목적은, 그 이름의 소유자들이 생명책에는 기록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이려 함이라고 한다(렘 17:13). 그러나 이런 해석은 추측에 불과하다.

=====8:9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 크로솨이데(Grosheide)는, 그들의 나가게 된 원인이 예수님의 말씀 뿐만 아니라, 그의 기록하신 글에도 있다는 의미로 말하였다. 곧, "그들은, 예수님의 땅에 기록하신 말씀을 읽었으나 항복하지는 않고 부끄러움을 당하였으니 만큼, 거기서 나가는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Het Heilige Evangelie Volgens Johannes, Kommentaar II,1950,P.7). 그들이 "하나씩" 나간 것은, 그들이 감심으로 행동하지 않고 마지 못하여 행동한 증표이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양심적으로 옳은 줄 알면서 그래도 대항해 보려는 억지를 부릴 듯이 머뭇거리다가 할 수 없어서 나가게 된 것이다. 그들은 저렇게 진리를 눌러 보려는 강퍅한 심술의 소유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양심을 찌르신 주님의 옳은 말씀의 권위 앞에서 그들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모두 다 물러갔다.

=====8:10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 예수님의 이 말씀은, 그 여자의 죄과를 가볍게 보시는 의미가 아니다. 이것은, 다만 제멋대로 재판장이 되어 남을 정죄하는 인간들의 월권 행동을 옳지 않게 여기시는 것 뿐이다. 그 뿐 아니라, 그것은, 이제 신약 시대를 당하여 누구든지 주님을 믿을 때에 영적(靈的)으로 사죄함이 될 수 있는 사실을 암시한다.

=====8: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 예수님은, 회개자에게는 사죄를 선고하시는 사명을 가지셨다. 그러니 만큼, 그가 그 여자에게 회개를 권고하실 뿐이고 정죄하지 않으셨다.

=====8:12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 크로솨이데(Grosheide)는, 여기 이른 바 "나는 세상의 빛"이란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만물 창조의 근본을 이룬 첫째 날의 빛을 연상케 한다고 하며, 그 빛이 없을 때에는 피조물이 하나의 혼돈체였으나, 그 빛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질서 있는 우주가 되었다고 하였다(Het Heilige Evangelie Volgens Johannes, Kommentaar II,P.10). "빛"은 영적으로 세 가지 작용을 의미하는데, 곧, 밝혀 주어 알게함 (계시를 의미함)과 구원하여 줌과 깨끗하게 함(성결을 의미함)이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빛"이라고 하신 동기는, 메시야를 빛과 같다고 한 구약을 생각하신데 있었을 것이다(사 9:2, 42:6, 49:6; 말 4:2). 눅 2:32 참조. "따르는 자"란 말은, 어두움 가운데서 빛만을 따르는 것과 같은 태도를 생각케 한다. 그런 사람은, 예수님 밖에 다른 데는 어두움만 가득한 줄 확신하고 전적으로 그 분만을 의지하고 따라 간다. 그러므로 여기 "따른다"는 말은, 신앙의 동향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어두움"은 무지와 죄와 불행을 모두 가리키는 비유이다. "생명의 빛"이란 것은, 생명에서 나는 빛, 곧, 하나님과 사귄 생명에서 나는 빛으로서 우리의 지능을 밝게 하여 주는 것이라고, 고데이(F,Godet)는 말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생명을 주는 빛이라고 해석되어야 한다. 6:35의 "생명의 떡"이란 말, 6:68의 "영생의 말씀"이란 말, 계 21:6의 "생명수"란 말이, 모두 다 같은 성격 있는 문구로서 생명을 주는 떡, 말씀, 물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바이스(B.Weiss)는,이것을 "생명 중개(仲介)의 빛" 이라고 해석하였다(das zum Leben gehorige Licht, welches dieses vermittelt). 그러면, 생명을 얻음이, 그리스도의 선물인 빛을 소유함에 달렸다. 폰 슈렝크(Von Schrenk)와 푸리브노우(Prinbnow)등도 이 말을 그런 뜻으로 해석하여 말하기를, "빛은 진리를 아는데 인도하고, 진리는 생명으로 인도한다"라고 하였다(Das Licht fuhrt zum Erkennen der Wahrheit und dieses zum Leben. a. w. S. 72).

=====8:13,14
여기 바리새인들의 힐난한 말은 모순된 것이다. 그들은 빛의 자중성을 모른 것이다. 빛은 다른 것의 증거를 요구하지 않고 직접 자체의 밝음을 나타냄으로, 그 빛된 사실을 성립시킨다. 그와 같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높은 진리요 생명이시다. 그는 자기가 친히 자기를 증거하심으로만 자기를 나타내신다. 이런 의미에서도 그는 빛과 같다. 이 점에 대하여 228 페이지에 있는 설교를 참조하여라.

=====8:15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치 아니하노라 - 이 귀절과 다음 귀절은, 사람에게 대한 바리새인들의 지식 방법과 예수님의 것을 대조한다. 바리새인들은 남들을 외모(육체)로 판단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셨으므로 판단(심판) 하시지 않는다. 그는 누구든지 그 때에 판단하실 필요가 없었다. 모든 사람이 죄인인 것은 일반인데,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처지에서 그는 판단하실 필요가 없으셨다.

=====8:16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 -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에 대하여 판단하심을 가리킨다. 그가 이렇게 자기 자신에 대하여 판단하시며 증거하실지라도 그 증거는 참되다고 하신다. 그 이유는, 그 증거는, 그와 및 그를 보내신 이(하나님 아버지)가 합하여 나타내시는 유력한 두 증인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8:17,18
너희 율법에도 두 사람의 증거가 참되다 기록하였으니 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자가 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느니라 - "두 증인"에 관하여는, 민 35:30; 신 17:6, 19:15을 참조하여라. 예수님은, 두 증인의 증거가 유력한 사실을 여기 지적하시고, 자기에게 대한 이런 이중의 증거자들이 계심을 말씀해 주신다. 아버지의 증거는 성경의 증거를 가리킨다(5:37-39). 여기 이 귀절을 보아서도 신약에 사용된 "증거", 혹은 "증인"이란 말이 법정의 증거 원칙에 의한 것임이 알려진다. 예수님은, 자기에게 관한 증인이 두 분인 사실을 유대인의 율법에 근거하여 논하신 것이다. 스키페르스(R.Schippers)는, 예수님에게 대한 신약 증인들의 증거가, 법정 증거의 엄중한 성격을 가졌다는 의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곧, "예수님은 역사적 사실이다. 예수님을 증거하는 증인들은, 법정 증거의 성격을 가지고 사실 그대로에 대하여 증거하는 증인들은, 법정 증거의 성격을 가지고 사실 그대로에 대하여 증거한 자들이다. 법정 재판도 그들을 정당성 있다고 간주해야 된다. 더욱 이 요한의 저술에 있어서는, '증거'란 말이 구약에서 처럼 법정 술어의 성격을 띤 것이다. 거기서(요한 복음)는, 증인이란 것은 친히 보고 들은 사실을 증거하는 자였다. 거기 기록된대로, 증인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는, 성부와 성령처럼 그의 무소부지(無所不知)의 성품에 기준하여 사실을 밝히 아시고 말씀하신 증거이다. 그리고 요한 복음에 있는 모든 증거는, 예수님에게 대한 사람들의 불신앙과 비진리를 걸어서 법정 증거의 성격으로 고소한 것이다. 법적 정당성과 사실, 이 두 가지는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관련성을 가지고 있다. 법정에서는 사실이라면 정당성 있는 판결을 내리는 법이다. 이 둘의 관련성은 엄중한 것이다. 이런 성격을 띠고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이, 요한 복음의 증거이다. 따라서 그 증거된 사실을 신앙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 만큼 그 증거는 엄중하고 참된 법정 증거의 사실주의에 입각한 것이다"(意譯)라고 하였다(Getuigen van Jezus Christus in Het Nieuwe Testament, 1938, PP.198-199).

=====8:19
이에 저희가 묻되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 못하는도다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 - 그들은, 예수님의 아버지, 곧, 참 하나님을 모르는 처지에서,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라고 질문한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 아버지를 모르는 원인은, 그들이 예수님을 알아 드리지 않음(믿지 않음)에 있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계시(啓示)하시는 중보자(中保者)시다(5:38, 14:7, 9; 마 11:27).

=====8:20
이 말씀은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연보궤 앞에서 하셨으나 잡는 사람이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 "연보궤"는 성전 안에 여자들이 서는 뜰 밖에 있다. 그곳은 산헤드린 고의회가 모이는 방에서 멀지 않다. 예수께서 거기서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잡지 못한 것은, 아직 하나님께서 하락하시지 않기 때문이었다.

=====8:21
다시 이르시되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 이것은, 그 때에 저렇게 강퍅하여 회개치 않던 유대인들을 경성시키려고 하신 말씀이다. 곧, 그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기회는 그들에게 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가 별세하시어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실 날이 온다. 기회가 다 지난 다음에는 그들이 그것을 회상하고 사모하여도 소용이 없다.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을 취하시고 그들과 함께 계신 기회는 천지 창조 이후 처음이요, 후에도 없을 희귀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 기회를 귀한 줄 몰랐다. 그들은 빛이 있을 때에 빛을 믿어야 된다(12:35-36).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들은 저희 죄 가운데서 영원히 멸망할 것 밖에 없다.

=====8:22
유대인들이 가로되 저가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하니 저가 자결하려는가 - 그들은, 이 말로써 그들의 지독한 강퍅과 불회개의 철면피를 그대로 드러냈다. 앞절에 있는 예수님의 경고는, 그들에게 회개할 기회가 많지 못함을 알려주신 무서운 말씀인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꼼짝하지도 않고 그냥 예수님을 모독하는 말만 토한다. 자살은 유대인에게 있어서 지옥 가는 길이다(Josep,. Bell. Jud., 3, 8, 5).

=====8:23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 하였느니라 - 이 말씀은, 예수님과 그 때 강퍅한 유대인들과의 사이에 영적 융통성이 도무지 없었던 사실을 지적한다. 그들은 땅에 속하여 죄악에 젖었고, 예수님은 하늘에서 오셨기 때문에 전적으로 거룩하시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한, 예수님의 가시는 곳(하나님 아버지의 계신 곳)에 갈 수 없다.

=====8:24
이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 인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 여기 "내가 그 이"란 말은, 그가 영원 자존자, 곧, 하나님 자신이시란 뜻이다(출 3:14; 신 32:39; 시 90:2).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이 말씀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과 생명의 관계를 가장 힘있게 고조한 것이다. 곧, 믿음 없는 곳에는 죽음이 있을 뿐이라는 의미이다.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는 말은 "죄 가운데서 영멸하리라"는 뜻이니, 곧, 그 죄인이 죄 안에 있고 또한 죄로 인한 형벌 아래 있는 상태이다. 그것은 하나님과 그 사람과의 절대적 분리(絶對的分離)를 가리킨다(Grosheide). 엡 2:1 참조.

=====8:25
저희가 말하되 네가 누구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 자니라 - "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자니라"이 말씀에 대하여는 몇 가지 해석이 있다. 곧, (1) 그리스도는, 옛날부터 모든 족장들이나 선지자들을 통하여 계시되신 내용이란 뜻이라고 함. 유대인들은 그를 모를 수 없으리 만큼 겹겹이 계시(啓示)를 받아 왔고, 계약도 받아 왔다. (2) 예수님께서 그 성역 초기부터 자기가 누구라고 주장하여 오시던대로의 "그 이"란 뜻이라고 함. (3) 나는 너희에게 말하는 "그 처음"(곧, 만물을 지으신 영원하신 자)이라는 뜻이라고 함(Augustine). 그러면, 이 해석에 의하면, "그 처음이신 분이 너희에게 말씀도 하신다"(계시하신다)는 뜻을 이 문구에서 찾아 볼 수 있다. (4) 고데이(Godet)는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 곧, "처음부터"란 말을, "절대로"란 뜻이라고 하며, "나는 절대로 내가 선언하는 그대로이다"라는 말씀이라고 한다. 곧, 그가 선언하시는대로 메시야란 뜻이라는 말이겠다. (5) 본질적으로는 나는 너희에게 말하는 그 내용과 같다는 뜻이라고 함(J.H.Bernard). 곧, 예수님의 말씀이 계시하는 바 내용이 예수님 자신이라는 뜻이다. 위의 모든 해석들 중에서 첫째나 둘째가 옳다고 생각된다. 그 이유는, 이 해석들이 그 아래 문맥에 잘 부합하기 때문이다.

=====8:26
내가 너희를 대하여 말하고 판단할 것이 많으나 나를 보내신 이가 참되시매 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게 말하노라 하시되 - 곧, 그가 그들을 책망("판단")하실 말씀이 많아도, 그는 그런 말씀은 하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그를 보내신 이, 곧,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복음)을 말씀하신다고 한다. 그런 말씀을 하실 수 있는 이는 메시야 밖에 없다. 이 말씀의 내용은, 그가 메시야라고 주장하심과 같다.

=====8:27
저희는 아버지를 가리켜 말씀하신 줄을 깨닫지 못하더라 - 이것은, 얼마나 그들이 불신앙으로 어두워진 사실을 통탄하는 저자의 말이다. 예수님께서 윗절에 말씀하신바 "나를 보내신 자"란 말은, 하나님 아버지를 가리켰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 뜻을 아직 몰랐다. 그들이 그것을 몰랐다는 사실은, 결국 자신을 메시야라고 증거하신 예수님의 주장을 모른다는 것이다.

=====8:28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 인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목적은, 하나님께 대한 예수님의 부자 관계를 모르는(27절) 유대인들을 깨우치려 하심이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대하여 이런 관계를 가지신 예수님을, 그의 죽음 당하신 후에야 알게 된다고 여기 밝힌다. 벴겔(Bengel)의 말한 바와 같이, 그들이 지금 그의 말씀을 근거해서는 믿지 않던 그 이를, 장차 그에게 일어날 사실(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실 사실)로 인해서 알게 될 것이다. 여기 "너희"란 말은 그 때의 유대인들을 총칭하는 것이 아니고, 그들 중에서 후에 예수님을 어느 정도 알게 될 자들을 가리킨다. 그리스도께서 들리우신 뒤에야 그를 알게 된 자들은, 예컨대 백부장(마 27:54)과, 가슴을 친 백성들과(눅 23:27), 회개한 3,000명이다(행 2:41). "그 인줄안다"는 말은, 그가 바로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시고 메시야이신 사실을 유대인들이 발견하게 된다는 뜻이다.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자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내신 메시야란 뜻이다. 5:17,19,30 참조. 유대인들 중에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으신 다음에야 그의 메시야이신 사실을 깨닫게 된 자들이 많이 생겼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은, 그를 알지 못하게 하는 인간들의 죄악의 장벽을 없애는 능력이다.

=====8:29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 이 때에 유대인들은,예수님을 반대함에 있어서 매우 강퍅하였다(22,25).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역사(役事)에 있어서 고독을 느끼지 않으시고 외축하지도 않으셨다. 그 이유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온 세계보다 강하시다.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함께 하시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항상"행하실 수 있는 이는 하나님의 아들 뿐이시다. 우리 일반 신자들은 예수님을 믿어서 그 안에 있으므로만, 하나님의 함께 하여 주시는 혜택을 누릴 수 있다.

=====8:30
이 말씀을 하시매 많은 사람이 믿더라 - 이 귀절이 말하는대로 "많은 사람이 믿더라"는 문구가, 일시적 신자를 가리키지 않고 참 신자들을 의미했다면 문제가 생긴다. 곧, 그들이 왜 잠시 후에는 예수님의 말씀을 반항하였을까 하는 문제이다. 31-59절 참조. 이 문제는 다음과 같이 해결된다. 곧, 33절 이하에 나타난대로 예수님을 항거한 사람들은, 30절의 "많은 사람" 가운데 포함되었던 일부 불순 분자들일 것이다.

=====8:31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 "자기를 믿은"이란 말은, 아직 구원 받는데 이를 수 없는 자들이다. 이 사실은, 여기 나타난대로 그들이 예수님과의 변론에 있어서 여러가지 좋지 못한 언행을 취한 것을 보아서도 알려진다. 40,48,52,59 절 참조. "내 말에 거하면" 이란 말은 계속적으로 신앙함을 가리킨다.

=====8: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 "진리"란 말 (* )은 "그 진리"란 뜻이니, 그 유일하신 진리를 가리킨다(14:6). 이것은, 철학적인 추상적 진리, 곧, 개념적인 진리가 아니다. 이것은, 예수님 자신을 둘러싸고 계시(啓示)된 그의 말씀인 동시에, 예수님 자신으로 구체화 된 계시이기도 하다. 그 이유는, 36절 에서 밝혀 준것과 같이, 하나님 아들(예수님 자신)이 그 속죄의 죽으심에 의하여 신자들을 죄악에서 해방시켜 주신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귀절에 있어서 왜 예수님 자신을 "진리"라고 하였는가? 그것은 다음과 같이 생각된다. 예수님을 찾아 만난 결과가 진리이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진리와 예수님을 동일체라고도 할 만하다(14:6). 예수님의 모든 언행은 진리이며, 그의 보내신 성령의 하시는 모든 기적적인 역사도 진리이다. 참된 기적은 진리를 지니고 있다. 진리 없는 기적이나 역사(役事)는 성령의 것이 아니다.

=====8:33
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 - 여기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이란 말은, 어떻게 해석될 말씀인가? 이것이 영적 의미일 것인가, 육적 의미일 것인가? 고데이(F.Godet)는, 이것을 육적 의미로 생각하고 유대인의 국민 자유를 가리켰다고 한다. 그러나 그 학설은 부당하다. 유대 나라는 그 당시에도 로마의 속방(屬邦)으로서 이미 종이 되어 있지 않았던가? 그 전에도 저희 조상들이 여러번 외국의 침략을 당하여 종으로 끌려 간 일이 있었다(Grosheide). 그러므로 이 문구는 영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곧,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자기의 것으로 택하실 때에 아브라함을 그 계약 대상의 머리로 정하셨으니 만큼,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은 아브라함이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이런 전통을 지킨다는 의미에서 말하기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다고 한 것이다. 곧, 언제나 그들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섬겨 왔고, 어떤 다른 나라의 신(神)을 섬긴 적이 없다고 한다(우상을 섬긴 일이 있었던 이스라엘의 汚點은 잊어버렸음). 유대인들이 외식으로 행한 것은 틀렸지만 계약 신관만은 가지노라고 하였다. 하나님은 체계 없이 변동하시는 이가 아니시고, 옛 사람에게 약속하신 대로 일하시며, 이루어 가시며, 그의 택하신 백성을 버리지도 않으신다. 신자는 이런 역사적 신관을 가지고, 또 저런 든든한 구원사관(救援史觀)을 가지고 있어야 된다. 그리고 그는, 저렇게 계약 사상에 기준하여 교회를 생각해야 된다. 교회는, 계약 사상을 배경하고 이 세상 기관으로서의 한 방면을 가짐에 있어서 낙관한다. 교회는 아무래도 이 세상에 있어서 기관으로서의 성격을 띠지 않을 수 없고, 그 기관 성격 때문에 세상과 접촉을 가진다. 그러나 교회는 하나님의 계약을 배경하고 있는 것인 만큼, 그 자체가 포함하고 있는 회원들에게 결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성결성이 불변하는 것이다. 그것은, 세상과 접촉하여 세상을 이긴다. 이렇게 진정한 교회는 하나님의 계약을 배경하고 성립된다. 그러나 땅위에는 계약 성격을 무시하고 취미 본위로 사람끼리의 연락만을 치중하여 나타나는 단체들이 있다. 그것은 교회라고 하기보다는 종파(sect)라고 함이 적합하다. 이런 종파들이 있어서는 사람이 사람을 심판하게 되는 경향이 많고, 객관적인 계약(하나님의 말씀)의 지배를 필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8: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 "죄의 종"이란 말은, (1) 범죄하는 자마다 결국 그 죄의 지배를 받게 되어진다는 뜻과, (2) 그가 거기서 놓이는 길은 오직 속량함이 되는 길 밖에 없다는 뜻을 가진다. 과연 죄는 무섭다. 그것은, 가장 작은 것이라도 사람을 힘있게 주관하여 망하게 만든다. 전에 아일랜드 해역(海域)에서 배가 파선된 일이 있었다. 그 배를 운전하는 선장도 퍽 능한 사람이었다. 어느 날 그가 나침반이 들어 있는 상자를 열고 지남침을 점검하는데, 칼 끝이 조금 떨어져 상자에 떨어졌다. 그것 때문에 지남침의 작용이 잘못되어 결국 딴 방향으로 가다가 파선 당한 것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죄는 작은 것이라도 사람을 주장하여 망하게 한다. 롬 7:23에 말하기를,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있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라고 하였다. 죄는 사람에게 붙어 있는 가장 악독한 원수이다. 사람이 그것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사람을 주장하여 그로 하여금 죄를 범하도록 만든다. 롬 7:15-20 참조. 이렇게 죄는 사람을 사로잡아 망하게 한다. 사람을 잡는 무서운 뱀을 하나 잡아 훈련시켰는데, 그의 팔에 챙챙 감겨 머리를 들고 있으면서 그 사람이 먹을 것을 주면 받아 먹곤 하였다. 그는 날마다 사람들에게 그 구경을 시켰다. 한 번은, 그 뱀이 그렇게 그 사람의 팔을 챙챙감은 다음 그의 팔을 물었으므로 당장 그 사람이 죽게 되었다고 한다. 죄를 심상히 여기며 죄로 더불어 즐기는 자는 결국 이렇게 된다. 어떤 써커스(Circus)단에서, 사람이 호랑이의 입에 머리를 넣고 구경을 시키는 순서가 있었다고 한다. 하루는, 그가 머리를 호랑이 입에 넣었을 때에 그 호랑이가 그의 머리를 깨물었다고 한다. 죄를 즐기는 자도 이와 같이 위험한 짓을 하다가 망하는 자와 같다. 종이 속량되어 놓이는 것처럼, 죄인도 속량되어 놓이는 사실에 대하여는 다음 귀절들의 해석에서 참조하여라.

=====8:35,36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 종은, 아브라함의 집의 축복 언약을 누릴자가 못되고 일시 그 집에 거하는 것처럼, 구속을 받지 못한 사람, 곧, 죄의 종 된자는 하나님의 나라 기업을 누리지 못한다. 그는 마침내 택한 백성과 나누일 때가 있다. 그러나 아들, 곧, 예수 그리스도는 천국 기업을 영원히 누리실 자니, 그가 구속자(救贖者)의 자격을 가지셨다. 눅 4:18; 갈 4:1-7, 4:28, 31, 5:1 참조. 롬 8:1에 말하기를,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고 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모범이 되실 뿐아니라, 모든 죄악을 도말하여 없애 주시는 구주님 이시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죄인을 놓아 주시는 자격을 지닌 이유는, 위에 벌써 말한 것과 같이,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까닭이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만큼, 하나님의 집을 지으신 자시며 또는 그 집을 맡으신 이로서(히 3:3-6), 영원히 살아 계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를 믿기만 하면, 그 집에 속하여 영원히 죄의 노예된 자리에서 벗어 나서 참된 자유를 누릴수 있다. 세상 나라에 충성하는 이들은, 자기 자신의 희생에 의하여 민족을 위한 육적인 생활에 유익을 준다. 그러나 그들이, 사람을 죄악에서 해방시켜 영원히 하나님의 집이 되도록 할 수는 없다.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집이 되도록 하시는 이는, 하나님의 아들밖에 없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죄에서 자유케 하시며 우리가 자유를 얻는다. 만일 사람들이 물질로서 죄중에서 건짐이 된다면, 하나님께서 지구보다 큰 금덩이라도 그들을 위하여 내실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물질로는 죄에서 건짐이 되지 못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죄에서 건지시기 위하여 보다 귀하신 아들을 희생시키셨다. 사람이 죄의 조이 된 것을 그의 힘으로는 면할 길이 없다. 그러나 그가 원하기만 한다면, 그리스도께서 그의 종 된 불행을 없애 주실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38년된 병자에게 찾아 가셔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하시며, 그의 고침 받을 소원있는 여부를 알아 보셨다(요 5:6).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해방하신 혜택 아래서는 우리가 확실한 소망을 가진다. 그러므로 히 3:6 하반절에 말하기를,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고 하였다. 우리는, 애국자의 담대함과 자랑을 잘 안다. 그들은 국가의 소망을 위하여 생명을 초개같
람이 묻기를, "왜 그러는가?"하니, 그는 대답하기를, "나는 도망치는 병정인데 먹을 양식이 없어 그럽니다"라고 하였다. 그때에 그 말탄 사람이 말 하기를, "저 동네에 들어 가시오"라고 하니, 그 병정은 말하기를, "내가 거기 가면 군인들이 총살합니다"라고 하였다. 그 말탄 사람이 말하기를, "지금은 정전이 되었소"라고 하였다. 그 소식을 들은 병정은 기뻐하며 마을로 들어 갔다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주이시다. 우리는 이 귀한 소식을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

=====8:37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일 줄 아노라 그러나 내 말이 너희 속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 예수님은, 그 때의 유대인들이 육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인 것을 인정하셨다. 그러나 그는, 그들이 영적으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님을 지적하신다. 그의 말씀이 그들의 속에 있을 곳이 없음은, 그 둘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크로솨이데(Grosheide)가 말한 것과 같이,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멸시하고 그를 죽일 계획을 세웠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용납 될 수 없는 존재였다. 이렇게 된 것은, 그들이 예수님과 영적으로 한 계통이 아닌 사실을 드러낸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자처하면서도 아브라함이 바라보며 기뻐하던 메시야(56절)를 죽이려고 하였다.

=====8:38
나는 내 아버징게서 본 것을 마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것을 행하느니라 - 이 말씀도, 유대인들이 영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닌 사실을 지적한다. 이 사실은, 역시 그들과 예수님과의 영적 차이점에서 나타난다. 그들이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손이었더면 아브라함의 참 자손이셨던 예수님과 일치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과 예수님 사이에는 불일치가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그 현재에도 하나님 아버지 곁에 계셔서 그의 보시는 것들을 세상 사람들에게 계시하여(말씀하여) 주신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들의 아버지(곧, 마귀)에게 들은 것을 행하였다. 예수님의 역사는, 모두 다 계시를 목적한 것이기 때문에, 그 모든 언행이 "말씀하심"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언행은, 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한, 그 모든 것이 다 죄악이다.

=====8:39,40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할 것이어늘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 예수님은 여기서도 그 때의 유대인들이 아브라함을 아버지라고 하면서도, 실상 아브라함과 같은 의(義)를 행하지 않는 모순을 지적하신다.

=====8:41,42
이 부분에서 유대인들은 저희 아버지가 "하나님"이라고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주장이 틀렸음을 다시 지적하신다. 그들이 만일 하나님의 자녀였더라면 그리스도를 사랑하였을 뻔하였다(요일 5:1-2).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사랑하기는 커녕 도리어 죽이려고 하였다.

=====8:43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 - 이것은 예수님께서 그들의 불신앙을 꾸짖는 말씀이다. 곧,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원인이 있었으니, 그것은, 그들에게 예수님과 통할 수 있는 영적 통찰력이 없었던 까닭이다. 그만큼, 그들은 하나님과 관계 없는 무서운 처지에 있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두려워해야 되며, 자신을 걱정해야 될 처지였다.

=====8:45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 하는도다 - 이 말씀은, 그 때 유대인들의 마귀적인 성격을 지적하심이다. 그는, 이렇게 날카롭게 말씀하셔서 그들의 심령 상태의 위험성을 지적하신다.

=====8:46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 내가 진리를 말하매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아니하느냐 -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라는 도언(挑言)은,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말씀이다. 이것은 큰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회개하신 일이 없는(죄가 없으시니 만큼) 사실도 그가 하나님이신 증거이지만, 여기 이 말씀도 그러하다. 무죄자가 진리를 말씀하시는데, 듣는 자들은 그것을 믿을 것 밖에 없다. 아무리 진리를 말하여도 그 말하는 자 자신에게 허물이 있으면, 듣는 자들이 잘 믿어주지 않는다.

=====8:47,48
하나님께 속한 자 -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자녀를 가리킨다.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너를 사마리아 사람이라 또는 귀신이 들렸다 하는 말이 옳지 아니하냐 - 유대인들은, 타락한 자와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를 가리켜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욕한다. 이 때에 그들은, 자기들이 부패하여 하나님께 속하지 못한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저희의 부패를 지적하신 예수님을 "사마리아 사람이라", 또는 "귀신이 들렸다"하며 욕하였다.

=====8:49-51
이 귀절들은, 예수님의 자아주장의 말씀이 중대한 것임을 지적한다. (1) 그 말씀은, 귀신 들린 자의 미친 소리가 아니고 도리어 그와 정반대로 극치(極致)의 진리인 것이다. 그 이유는,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를 공경하심에서 나타난 말씀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그가 하나님을 공경하시는 것을 가리켜 귀신 들렸다고 하는 것은, 경건을 모욕하는 극단이요, 하나님의 말씀 계시를 그런 미친 일로 여기는 것도 그러하다(49절). (2) 예수님의 주장은, 저렇게 자기 자신 공경이 아니고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찾아 드리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주장이 무시를 당하도록 그냥 두시지 않고 반드시 그것을 세워 주시는 것이다(50절). (3) 예수님의 주장을 믿는 자는 영생하게 된다(51절). 위의 세 가지로 나타난 것과 같이, 예수님의 말씀은 중대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그의 주장이 귀신 들린 자의 미친 소리라는 뜻으로 모욕하였으니, 그들이 극도로 강퍅해진 것이 드러났다.

=====8:52,53
이 부분에서는, 유대인들이 또 다시 예수님을 가리켜 귀신 들렸다고 한다. 유대인들의 변론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곧, 예수님께서 어떻게 신자들을 죽지 않게 하여 주실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자기가 영생하고야 비로소 남들도 영생케 할 터인데, 예수님 자신이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말인가? 선지자들과 아브라함도 다 죽지 않았는가?"한다.

=====8:54-57
예수님은, 그들의 난제들을 다음과 같이 해결하여 주셨다. 곧, (1) 그의 말씀은 절대로 믿을 만한 것이라는 것. 그의 주장은, 순전히 하나님 아버지의 계시를 그대로 순종하여 전하시는 것 뿐이니 만큼, 그것은 절대적 진리라는 의미의 변론이다. 그의 주장, 곧, 그의 말씀은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말씀하시기를, "내가 내게 영광을 돌리면 내 영광이 아무 것도 아니거니와 내게 영광을 돌리시는 이는 내 아버지시니 곧 너희가 너희 하나님이라 칭하는 그 이니라"고 하셨다. 이렇게 그의 주장은 하나님의 말씀이신 것 만큼, 절대적 진리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이 불신앙한 원인은, 하나님을 아는 그들의 지식이 형식 뿐이고 참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불신앙의 원인을 지적하시는 의미에서 그는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너희 하나님이라 칭하는 그이시라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되 나는 아노니"라고 하셨다(54-55상반). (2) 그가 유대인들의 그릇된 사상(예수님을 선지자들이나 아브라함보다 낮게 보는 사상((52-53)을 시정시키심, 특별히 유대인들에게는 선지자들보다도 높다고 생각된 아브라함의 지위에 대하여, 그는 말씀하셨다(56-58).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56절) - 랍비들의 사상에도, 일찌기 아브라함에게 메시야 시대가 계시되었다는 신념이 있었다(C.K.Barrett,P.291). 그러나 그보다도 이 귀절 상반절의 내용,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의 출생에 대한 약속을 받고 기뻐한 사실이다(창 17:17). 이삭의 출생 약속은,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창 22:18)란 약속 내용을 가진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메시야께서 그의 후손으로 나시게 될 것을 내다보게 한 것이다. 아브라함은 그것을 내다보고 즐거워하였다.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이 말씀은, 과연 약속되었던대로 1년 후에 이삭이 출생하게 되었는데, 아브라함은 그 약속 성취를 보고 기뻐했다는 뜻인 듯하다(Hendriksen, PP. 64-65). 그러나 크로솨이데(Grosheide)는 말하기를, "여기 보고 기뻐하였다는 말은 아브라함이 땅에 있을 동안에 기뻐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하늘에 가서 체험한 것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하였다(Het Heilige Evangelie Volgens Johannes, Kommentaar II,1950, P.60). 그러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아브라함을 관설하신 목적이 무엇인가? 그것은, 아브라함도 예수님을 메시야로 알았으니 만큼, 그가 아브라함보다 자기의 위대하심을 증거하시려는데 있다. 58절 참조. 네가 아직 오십도 못 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57절). 여기 "오십도 못 되었는데"란 말 때문에, 학자들은 예수님의 그 때 연세에 대하여 생각해 본다. 곧, 그 때에 그의 연세가 30대라면, "네가 오십도 못 되었는데"라고 한 유대인들의 말이 자연스럽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크리소스톰(Chrysostom)은, 여기 "오십"이란 말 대신에 "사십(* )이라고 읽었다. 그러나 그것은 상상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 이레네오(Irenaeus)는 말하기를, 그 때에 예수님의 연세가 50세에 가까왔을 것이라고 하나(Adv. Haer. 2, 22:6), 그것도 역사적 사실에 맞지 않는 추측에 불과한 말이다. 여기 "오십"이란 것은, 예수님과 아브라함 사이의 시간 거리(2000년동안)에 대조하여 생각된 짧은 연수이다.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이 말씀에 대한 사본상 독구(獨句)들이 서로 다른것이 있다.(1) 우리의 한역이 채택한 헬라 원문(* )은, * ,A,C,D,N의 것이고, (2) "아브라함이 너를 보았는가"(* )란 독구도 있는데, 그것은, 수리아역(Syr. sin)과 애굽역의 지지를 받는 시내산 사본(* )의 독
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58절) - "네가 오십도 못 되었는데"(57절) 라고 한 유대인들의 힐문에 대하여 그는 대답하신다. 예수님은 그의 이 세상 연령에 의하여 위대해지신 분이 아니다. 그의 생애는 33년 밖에 안되는 짧은 기간이었다. 그의 하신 일의 위대는 그의 초자연적 인격에 달렸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는 초역사적(超歷史的)인 인격이시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말씀하시기를,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고 하셨다. 여기 이른바, "내가 있느니라"고 하신 말씀의 헬라 원어(* )는 현재사이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나기 전에 계셨다는 뜻이 아니고, 그 때나 지금이나 그의 존재는 늘 현재란 뜻이다. 비켄하우젤(Alfred Wikenhauser)은, 여기 "내가 있느니라"고 한 말씀에서 그의 존재가 어느 역사적 시간에든지 지배를 받지 않는다는 것이 표현되어 있다고 하였다(Durch bin ich "bringt er zum Ausdruck, dass seine Existenz unabhangig ist von jeder Zeit.- Das Evangelium nach Johannes, P.185). 다시 말하면, 그는, 전에도 계시고 지금도 계시고 장차도 계시는 하나님이란 뜻과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히 13:8의 말씀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는 의미이다. 그는, 이렇게 초시간적 인격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 세계에서 33년 동안 행하신 그의 행적도 무한한 가치를 가진다. 우리는, 이렇게 위대하신 구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 어떤 파선 당한 선객이 바다 가운데서 수면에솟아 오른 바위 때문에 생명의 구원을 받았다. 그 바위의 꼭대기 면적은 비록 좁았으나 그 바위 밑은 매우 크며, 또 깊이 뿌리 박고 있었으므로 안전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 역사의 생애는 짧게 가지셨지만, 그 인격은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하게 된다. 우리의 이 세상 생애가 짧아도 걱정될 것은 없다. 우리의 중요성은 영원하신 그리스도와 연합하는데 있다.

=====8:59
저희가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시니라 - 10:31-33, 11:53 참조.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정하신 때가 되기 전에 그 생명을 원수들에게 내어 맡기지 않으셨다. 그는 위험을 피하여 숨기도 하셨다. 희생이 귀하지만,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 것은 낭비된 희생으로서 도리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할 수도 있다.



8:3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끌고 와서 - 고대 헬라의 교회들이 이 이야기를 모
르고 있었음은 매우 확실하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들은 이 이야기가 다른 곳에서 삽입
된 것이라고 추측을 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라틴계 교회들이 받아들이지 않은 적이
없고 또한 많은 헬라어 사본들 속에 나타나 있으며 또한 사도적 정신에 합당치 않은
내용은 하나도 내포하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이야기 사용하기를 거부할 아
무런 이유가 없는 것이다. 본 복음서 기자가 서기관들이 한 여자를 그리스도께 끌고
왔다고 말함으로 뜻하는 바는 그들이 그리스도 앞에 올무를 놓기 위해 일치단결하여
행동했다는 것이다. 본 복음서 기자가 바리새인들을 특별히 언급하고 있는 것은 그들
이 서기관 반열에 있어서 중진급 인물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리스도를 비방하기
위해서 이러한 구실을 채택했다는 것은 극히 악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한 바로
그 말이 그들 자신을 폭로한 것이다. 그들은 율법 중에 분명한 계명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은폐시키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의심스럽다는 듯이 악의에
찬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된다. 그러나 그들의 의도는 그리스도로 하여
금 은혜를 전파하는 사명을 포기하고 강요하는 데 있었다. 그래야만 그가 변덕스럽고
우유부단한 사람으로 보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모세가 간음하는 여자들을 정죄
하고 있다는 것을 명백하게 말함으로써 그리스도를 율법의 판결로서 꼼짝할 수 없도록
하려 했던 것이다. 이는 율법이 정죄한 자들을 놓아주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기 때문
이었다. 그러나 만약 그리스도께서 율법에 동조한다면 그리스도는 다소 그 자신답지
않게 보일 것이다.


8:6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은 자세를 취하심으로 그들을 멸시
하고 계심을 나타내셨다. 예수님께서 몸을 굽히시고 그러한 글을 땅바닥에 쓰셨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잘못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또한 이와 같은 방법으로 그리스도께서
돌비에 쓰지 아니 하시고 진토인 사람 위에 쓰셨다는 점에서 율법과 은혜의 차이가 보
여졌다고 생각하는 어거스틴의 뛰어난 생각도 나는 인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리스도
께서는 아무런 일도 하지 아니하심으로 그들의 말은 들을 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을 보
여주시고자 하셨다. 이것은 마치 어떤 사람이 그에게 대화하고 있는 동안에 그의 손가
락으로 벽에 줄을 긋는다든지 혹은 등을 돌리거나 또는 기타 다른 표현으로 현재 진행
되고 있는 말에 주의하고 있지 않는 경우와 마찬가지다. 이와 같이 오늘날 사단이 여
러가지 방법으로 우리를 복음의 정도에서 탈선시키려 할 때에 우리는 그가 우리 앞에
쳐 놓은 많은 장애물들을 경멸하는 마음으로 비켜 가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가톨릭
교도들은 여기저기 공중에 흩어져 있는 여러가지 시시한 것들을 트집잡아 우리를 최대
한도로 근심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복음의 진보를 방해하는 이러한 종류의 장애물들은
지혜롭게 무시해 버려야 한다.

8:7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관례를 따라서 이런 말씀을 하셨
다. 이는 증인들이 행악자들에게 먼저 손을 대어 죽여야 한다고 하나님께서는 명하셨
기 때문이다. 이렇게 함으로 증언함에 있어서 최대 한도로 신중을 기하도록 했다. 경
솔하게 형제를 위증으로 억누르는 사람들이 많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들의 혀로서
치명적인 상처를 입힌다는 것을 깊이 생각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이 악한 사람들이었
지만 이 논법은 중상하는 그들에게 적중했다. 그리하여 그 논법이 그들에게 적용되었
을 때 그들은 예수님을 찾아올 때 불태우던 맹렬한 분노를 버리게 되었다. 하지만 그
리스도의 말씀은 율법의 명령과는 다르다. 그때 하나님은 다만 자기
손을 대어 죽이도록 허용된 사람을 제외하고는 말로서 사람을 정죄하지 말 것을 경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그리스도는 완전한 결백을 요구하고 계신다. 그러므
로 어느 누구도 자신이 결백하고 또 전혀 혐의 사실이 없지 않는 한 다른 사람의 범죄
에 대해서 복수하고자 흥분하지 않게 된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그때 소수의 무리에
게 말씀하신 것을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신 것으로 우리는 받아야만 한다. 그러므로 누
구든지 다른 사람을 송사하는 자는 마땅히 자기에게 결백의 원리를 부과해야 하는 것
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악한 행위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자체를 대적하
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면을 겉으로 보기에는 그리스도께서 세상에서 공의를 제거하는 것같이
보인다. 그래야만 아무도 그리스도께서 죄를 벌한다고 감히 말하지 않게 될 것이다.
재판관으로서 자기 속에 그 어떤 잘못을 의식하고 있지 않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
을까? 또한 그 무엇인가 잘못을 저지른 가책을 가지고 있지 않은 증인을 단 한 사람이
라도 내세울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외관상으로는 증인석에서 모든 증인들
을 그리고 재판석에서는 모든 재판관들을 쫓아내시는 것 같다고 나는 답변한다. 즉 그
리스도께서 죄인들로 하여금 다른 사람의 범죄를 시정하려 하지 말라는 것은 절대적이
며 단순한 금령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단지 이런 말씀으로서 자
신과 자신의 죄악은 관용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가혹할 뿐만 아니
라 잔인한 판단자가 된 위선자들을 책망하고 계신다. 그렇다면 아무도 자신의 죄 때문
에 다른 사람의 죄를 고쳐주거나, 필요하면 그 죄를 범하는 것까지도 사양해서는 안된
다. 단 그가 자기와 다른 사람 속에 있는 정죄받아 마땅한 죄를 미워하는 한 그렇다는
말이다. 뿐만 아니라 사람마다 마땅히 자신의 양심을 검토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함으로
써 다른 사람을 향하기 전에 먼저 자신에 대해서 증인과 판단자가 되어야 한다. 이런
면으로 우리는 사람들을 미워하지 않고서도 죄와 싸우게 될 것이다.


8:11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 그리스도께서 그 여자를 단순히 방면했다고만
하지 않고 그를 보냈다고 했다. 이것이 놀라운 일이 아님은 그리스도는 그의 소관이
아닌 일에 관여하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잃어버린 양을 모으기 위해
서 아버지께 보내심을 받으셨으므로 그소명을 생각하사 그 여자에게 회개할 것을 권하
시고 은혜로운 약속으로 위로하고 계신다. 이 사실을 근거로 해서 간음죄는 사형해서
는 안된다고 추론하는 자들은 그와 똑같은 논리로써 기업을 분할해서는 안된다고 한
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두 형제 사이에 중재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만약 간음죄에 대한 형벌이 면제된다면 진실로 모든 범죄는 율법의 처벌로 부터 면제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때에는 그것이 어떤 종류의 배반, 독살, 살인, 및 강도를 공공
연히 허용하는 경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간음한 여자가 사생아를 낳을 경우
에 그는 단지 가족의 성을 도용할 뿐만 아니라 참 자녀로부터 상속권을 박탈하여 타인
에게 넘겨주는 것이 된다. 그러나 가장 큰 죄악은 아내가 자기 몸을 파는 수치스러운
행위로서 그와 결합된 남편을 욕되게 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언약을 위반한 것이다. 이
것이 없이는 어떤 건전한 성결도 세상에 계속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가톨릭 신학은 이 대목의 말씀을 들어 그리스도께서 간음한 자들의 처벌을
면할 수 있는 은혜의 법을 소개하셨다는 것이다. 비록 그들이 온갖 수단을 다 써서 인
간들의 마음으로부터 그리스도의 은혜를 지워버리고자 하지만(이 은혜는 복음전파를
통해서 도처에 선포되어 있는 것이다) 이 한가지 점에서 그들은 은혜의 법을 소리높여
전파한다. 이것은 그들이 무절제한 정욕으로 거의 모든 결혼의 침소를 태연하게 더럽
히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이것이 저 고약한 독신주의의 결과이며 또
합법적인 아내를 가지는 것이 허용되지 않은 자들에게 무차별한 음행을 허용하는 결과
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실지라도 사회 질서를 뒤엎거나 법적
처형 및 처벌을 파기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굳게 믿자.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 이 말씀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은혜를 베푸시는 목적을
깨닫게 된다. 즉 죄인이 하나님과 화목되었을 때 그는 경건하고 화목한 생활로 그를
구원하신 주님을 영화롭게 해야 된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에게 사죄를 주시
는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회개를 동시에 요구하신다는 말이다. 아밖에, 비록 이
권면의 말씀이 미래를 향한 것일지라도 과거의 생활을 회상하게 함으로써 죄인들을 낮
춘다.


8:12
나는 세상의 빛이니 - 앞의 이야기를 삭제하는 사람들은 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명
절 마지막 날 전파하신 설교와 연결시킨다. 그리스도를 '세상의 빛'이라고 칭하는 것
은 매우 아름다운 그리스도에 대한 칭호이다. 우리는 다 날 때부터 소경이지만 우리를
흑암으로부터 구원하여 자유케 해서 우리로 참 빛에 참여하게 할 치유법이 우리에게
제공되어 있다. 이 축복은 이곳이나 저곳에 있는 어느 한 사람에게 수여되는 것이 아
님은 그리스도는 온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일
반적인 말씀으로 유대인과 이방인, 유식한 자와 무식한 자 그리고 귀족과 서민과의 차
별을 없애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이 빛을 찾을 필요를 알아야 한다. 이는 이 세상이 암흑이고 또
그들 자신이 완전히 소경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한, 아무도 비취임을 받고자 그리스
도께 자신을 드리려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빛을 얻는 방법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보여졌을 때 우리는 다 소경으로 정죄를 받고 있는 것이며 또한 우리가 빛이
라고 생각한 모든 것이 흑암과 캄캄한 밤으로 비유되고 있는 것임을 우리는 알자. 그
리스도는 자신이 다른 사람과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자기 특유의 것으로 주장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결론은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참 빛의 한 섬광도 없다는 것이다. 빛과 비슷한 것은 있을지언정 그것은 단지 눈을 현
혹케 하는 번개와 같은 것일 뿐이다. 우리가 또 한가지 유의해야 할 것은 조명의 힘과
기능이 그리스도의 육체적 임재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리스
도께서 우리와 몸으로는 멀리 떨어져 계시지만 복음의 가르침과 그 성령의 비밀한 능
력으로는 날마다 그의 빛을 우리에게 비추어 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복음과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서 비취임을 받은 것을 알 때까지 우리는 이 빛에 대한 완전한
정의를 가지지 못한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모든 지식과 지혜의 근원이 그리스도 안에
감취어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나를 따르는 자 - 그리스도께서는 이 가르침에 즉각 약속을 확증하고 있는 권면을
부언하고 계신다. 그리스도의 지배를 받고자 자기를 내맡긴 모든 자들이 탈선할 위험
이 없다는 말을 들을 때 우리는 경각심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따라야만 한다. 그리스도
는, 솔직히 말하자면 손을 내밀어 우리를 자기에게로 이끌어 주시는 것이다. 그 약속
이 크고 거대하기 때문에 그 능력도 또한 충만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를 바라보
는 자들은 어둠 속을 통과할 때라도 확실한 길을 가게 된 것을 분명히 알게 된다. 그
리고 그것도 잠시 동안만 그런 것이 아니라 그들의 목적지에 도달할 때까지 그렇다.
그것이, 즉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미래 시제로 말씀하
신 중요한 뜻이다. 이것은 또한 빛의 영속성을 분명하게 진술하고 있는 그 하반절의
뜻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여행의 중도에서 실패할까 두려워 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이 빛은 우리를 생명에까지 인도하기 때문이다. 히브리어 문법으로 형용사
대신에 소유격이 쓰여진 것은 마치 생명을 발하는 빛이라고 말씀한 것처럼 결과를 나
타낸다.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사람의 수가 극소수이기 때문에 세상에 오류와 미신의
빽빽한 흑암이 다스리고 있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8:13
바리새인들이 가로되 - 그들은 자기를 변명하는 말을 믿지 말라는 격언이 있다는
이유로서 반대한다. 합법적이고 믿을 만한 것에는 참 증거가 필요하다. 간단히 말해서
그들의 말은 그리스도께서 객관적인 증거를 제사하지 않는 한 그의 말씀은 터무니 없
다는 것이다.

8:15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 이 말씀은 두 가지 면으로 설명할 수 있다. 즉 육
체의 타락한 관점에서 판단하는 것이거나 또는 사람의 외모를 보고 판단하는 것이다.
육체란 낱말은 때때로 사람의 외모를 가리키는 데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두 가지
뜻이 다 이 대목에 잘 맞는다. 왜냐하면 육체의 태도가 지배하는 곳이나 또는 사람에
대한 차별이 심판을 지배하는 곳에는 진리나 공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육체를 성
령과 대조할 때 그 뜻은 한층 확실해지는 것 같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들이 정당하고
유력한 심판자가 되지 못함을 말씀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아무도 판단치 아니하노라 - 주석가들은 이 점에 있어서도 의견을 달리하고 있
다. 어떤 주석가들은 그리스도께서 사람과 같이 판단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는가
하면, 또 다른 사람들은 그 이유를 시간에 두는데, 즉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계시는 동
안은 심판자의 직분을 아직 취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어거스틴은 이 두 가지
설명을 하고 있지만 그 중 어느 한 결론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전자의 주장
은 전혀 맞지 않는다. 이 문장은 두 절로 되어 있는데 그 한절은 그리스도께서 판단하
지 아니하신다는 것이고, 다른 한 절은 만약 그리스도께서 판단하신다 할지라도 그의
판단은 확고하고 권위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 판단이 신적(神的)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판단하지 않는다고 말씀하고 있는 그 앞
절을 본문의 내용에 한정시킨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그 원수들로 하여금 교만심
에 대한 가책을 더욱 깊이 받게 하기 위해서 그들이 맘대로 판단할 특권을 가지면서
도, 그리스도를 정죄할 수 없는 것과 그리스도께서 단지 가르치시기만 하시고 판단자
의 직권 행사를 삼가하고 있는 것을 비교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8:16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권리를 완전히 포기하는 것같이 보
이지 않기 위해서 그의 말씀에 수정을 가하고 계신다.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
은 참되다고 그리스도는 말씀하고 계신다. 말하자면 그 판단은 권위가 부여될 만하다.
그런데 그의 권위는 아버지의 계명에 맞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으로부터
나온다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 라고 한 귀절의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인간들 가운데
속해 있는 분이 아니라 아버지께러부터 사명을 받으신 분으로 보아야만 하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진실하고 공정한 입장에서 자신의 신성을 주장할
수도 있었는데 왜 그렇게 하고 있지 않은가? 그 이유는 그의 신성이 육체의 베일 속에
감추어져 있으므로 그 신성이 더욱 뚜렷이 나타나 있는 아버지를 그들 앞에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이야기의 취지인즉 그리스도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는 모
든 일이 신적인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8:17
너희 율법에도 - 처음 얼핏 듣기에는 아무도 자기가 자기 일에 증인이 될 수 없다
는 이 쟁론이 약하게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내가 이미 말한대로 그리스도는 사사로운
개인도 아니고 또한 자기 개인의 사사로운 일을 처리하는 분이 아닌 까닭에 그는 인간
들과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그리스도는 자신을 아버지와 구
별하심으로 자신을 말씀 듣는 무리들의 입장에 적응시키고 계신다. 그리스도는 그의
직분상 이렇게 하고 계신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세상에 계실 때 아버지의 일군이셨
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그가 가르치는 모든 말씀이 아버지께로부터 난 것
이라고 주장하고 계신 것이다.

8:19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 물론 그들은 조소하는 마음으로 아버지에 대해서 물은
것이다. 그들은 평소의 교만심을 가지고 주님께서 아버지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을 경
멸적으로 취급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주님께서 아버지의 근원을 하늘에서부터
미루어 살펴본 것처럼 아버지를 지극히 높인다고 하여 조롱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
므로 이 말로서 그들은 아버지로 인해서 그 아들에게 그 무엇을 돌릴 만큼 그렇기 이
그리스도의 아버지를 귀하게 여기지 않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오늘날 가는 곳
마다 그리스도를 그렇게 담대하게 경멸하는 이유는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
은 분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적기 때문이다.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고 - 그리스도께서는 겸허하게 솔직한 대답을 해주지 않으시
고 오히려 퉁명스럽게 그들의 우쭐대는 무식을 책망하신다. 그들이 아버지에 대해서
물었지만 아들이 그들 앞에 와 계신 것을 보면서도 알아보지를 못했다. 그러므로 그들
에게 그렇게 확실하게 공개된 하나님의 아들을 멸시한 자들이 끝내 아버지께로 나오지
않았다는 것은 그들의 교만심과 배은망덕에 대한 공변된 형벌이었다. 죽을 인생이 하
나님의 손에 의해서 높임을 받지 않는 한 어떻게 그가 하나님의 높이까지 올라갈 수
있겠는가?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인생들에게 자비의 손을 펴시기 위하여 인간의
비천에까지 내려오셨다. 그런고로 이와 같이 그들에게 가까이 오신 하나님을 거절하는
자들이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이 똑같은 사실이 우리 모두에게 전해지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자. 그리스도로부
터 시작하지 않고서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나 미궁에서 방황하기 마련이
다. 이는 이미 말씀드린 대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불리워진 것이 목적
없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떠나서 하늘나라에 들어가고자 애쓰는 사람
은 누구나 하나님에 대한 모든 바른 지식을 박탈당하는 것과 같이 그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께로 향하는 사람은 누구나 아버지께로 즉각 인도될 것이다. 이는 사도 바울
이 진실하게 선언하고 있듯이 우리가 복음의 거울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
님을 밝히 바라다 본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고후3:18). 그리스도 앞에서 자기를
낮추는 자가 모든 하늘, 심지어는 천사들이 보고 경탄하는 그 신비들까지도 꿰뚫어 보
게 되는 것은 진실로 믿음의 순종이 받는 최상의 상급이다.


8:20
이 말씀은...하셨으나 - 연보궤가 있는 곳은 거룩한 예물을 저장해 두는 성전의
일부분이다. 이곳은 사람들이 자주 드나드는 곳이었으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이 설
교 말씀을 큰 회중에게 전파했다는 것과 또 그러므로 백성이 핑계할 여지가 더욱 없어
지게 되었다는 것을 미루어 생각하게 된다. 본 복음서 기자는 또한 하나님의 놀라우신
능력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는데, 즉 조금 전만 해도 그들이 죽이려하던 그리스도께
서 성전에서 말씀을 공공연히 가르치셔도 그들이 그것을 용납할 만큼 강권함을 받았기
때문이다. 성전에 대한 그들의 치리권은 절대적이어서 그들은 폭군의 횡포로서 성전에
서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으므로 말 한 마디로 그리스도를 추방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교사의 직무를 취하셨을 때 어찌하여 그들은 즉각 그리스도를 강제로 붙
잡지 아니하였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
게 하시고 또 친히 그리스도를 보호해 주셨으므로 맹수가 이 주님을 향하여 그 턱을
벌리고 있으면서도 주님께 손을 대지 않은 사실을 깨닫게 된다. 주님은 다시 그의 때
를 말씀하시고 계시다. 이것은 우리의 살고 죽는 것이 사람들의 뜻에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뜻에 있음을 가르쳐 주기 위함이다.


8:21
내가 가리니 - 주님께서는 자신이 이 완고한 사람들 가운데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고 계심을 깨닫게 되자, 그들에게 멸망을 경고하고 계신다. 따라서 이것이 복음을
배척하는 모든 사람들의 종말이다. 이는 복음이 공중에 헛되이 뿌려진 것이 아닐 뿐
아니라, 또한 생명이나 사망의 냄세를 풍겨 내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
의 요지는 이런 것이다. 즉 마지막에 악인들은 그들 앞에 값없이 제시된 그리스도를
배척한 것이 얼마나 커다란 죄악이었는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
러나 그때는 이미 늦어서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게 될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심판이 가까왔다는 말씀으로 그들을 한층 더 두렵게 하기 위해 그가 곧 떠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즉 복음이 잠시 동안만 그들에게 전파될 것인데 만약 그들이
그 기회를 잃는다면 은혜의 때와 구원의 날은 영원토록 지속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
다. 이와 같이 오늘날도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 문을 두드리실 때에 우리는 즉시
그리스도를 맞이하기 위해 나아가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는 우리의 태만함
에 싫증을 느끼시고 우리로부터 떠나가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리스도께서 떠나
가신다는 것이 얼마나 크게 두려워할 일인지는 여러 시대의 여러 경험들을 통해서 잘
알려진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여기 나오는 이 사람들이 어떻게 그리스도를 찾
고 있었느냐 하는 사실이다. 만약 그들의 마음 속에 참다운 변화가 있었다면 그들이
그리스도를 찾은 것은 허사가 아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죄인이 애통하는 순간에 주
님은 즉각 그를 도와 주실 것을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뜻하신
바는 그들이 믿음의 바른 길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찾지 않았다고 하는 사실이다. 오히
려 그들은 극심한 환난에 빠진 사람들처럼 아무 데서나 도움을 구했던 것이다. 불신자
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찾아와 화목케 주시기를 원하면서도 계속 하나님께로부터 도
망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들을 부르신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은 믿음과 회
개를 통해서이다. 그러나 그들은 강퍅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대적한다. 따라서 절망에
압도될 때에 그들은 하나님을 원망한다. 간단히 말해서, 그들은 하나님을 동경하기는
커녕 하나님께 그들을 도울 기회도 드리지 아니한다. 하나님은 절대로 자기를 부정하
지 않으신다.
이와 같이 만약 그리스도께서 서기관들이 바라는 대로 태도를 바꾸기만 하셨다면,
그들이 아무리 악하였을지라도 기꺼이 그리스도의 손을 통해 약속된 구속을 자기들에
게 적응시켰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이런 말씀으로서 모든 믿지 않는 사람들
을 경고하시며 책망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그들이 복음의 말씀을 멸시했을 때 이와 같
은 궁지에 몰리게 되므로 하나님께 부르짖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러나 그들의 부르
짖음이 효력이 없을 것은 이미 앞에서 말한대로 그리스도를 찾아도 만나지 못하기 때
문이다. 이것이 아주 명확하게 그 다음 귀절에 나타나 있는데, 즉 그리스도께서 말씀
하신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고 한 말씀이다. 이는 그들이 멸망하게 되는 원인이
바로 그들의 불순종이며 또한 끝까지 하나님을 반역하는 것이라고 주님께서는 그들에
게 말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들의 죄악의 선생에 대해서는 곧 살펴 보게 될 것이다.


8:22
저가 자결하려는가 - 서기관들은 계속해서 담대히 조소하는 말을 할 뿐만 아니라
무례한 말도 하고 있다. 이는 그들이 주님이 가는 곳을 따라 갈 수 없다고 하는 주님
의 말씀을 조롱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과도 같다. 즉
"그리스도가 자살한다면 우리는 그를 따라 갈 수 없음을 인정한다. 우리는 그렇게 하
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떠나가신다는 생각은 전혀 하고 있지
못하고 모든 면으로 그리스도를 굴복시킬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주
님께 원하는 곳으로 가라고 말하고 있다. 사람이 이렇게 우둔할 수 있을까! 그러나 사
단은 이렇게 버림받은 자를 꾀는 것이다. 그리하여 정신이상보다 더 심하게 혼취되게
해서 하나님의 진노의 불꽃 속에 자기 몸을 던지도록 한다. 오늘날도 우리는 자기 양
심을 마취시키는 많은 사람들에게서 이와 똑같은 격정을 보고 있지 않는가? 그들은 하
나님의 무서운 심판에 대해 듣는 모든 말을 농담과 무례한 조롱의 말로 조소하는 자들
이 아닌가? 하지만 이것은 분명히 냉소적이다. 이는 그들이 내적으로는 보이지 않는
상처로 마음의 찔림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갑자기 감각을 잃은 자들과
같이 너털웃음을 마구 웃어대는 것이다.


8:23
너희는 아래서 났고 - 그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기 때문에
주님은 그들을 엄중하게 책망하기만을 원하셨다. 그래서 주님은 이 대목에서 말씀하시
기를 그들이 주님의 가르침을 받지 않는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전혀 싫어하
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주님은 '세상'과'아래'라는 낱말 가운데 사람들이 본성적으로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내포시킴으로 주님의 복음과 인간 마음의 민감성과 통찰력의
차이점을 나타내고 계신다. 복음은 하늘에 속한 지혜이지만 우리의 마음은 땅으로 굽
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그의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만이 정당한
제자가 되는 법이다. 이러므로 세상에는 믿음이 그렇게 희귀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
스도께서 그의 성령의 특별하신 은혜로 높이 일으키신 자들을 제외하고는 온 인류가
본성적으로 그리스도를 대적하며 싫어하기 때문이다.


8:24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 처음에는 주님께서 죄라는 낱말을 단수로 사
용하셨으나 지금은 복수로 사용하고 계신다. 물론 그 의미는 똑같은 것이지만 단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전자의 경우에 주님께서는 불신이 모든 죄악의 근원이
된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것은 단지 불신만이 죄라던가, 또는 어떤 사람들이 함부로
말하듯이 불신만이 하나님 앞에서 영원한 죽음을 당하게하는 범죄를 만드는 것은 아니
다. 그러나 불신은 우리를 그리스도로부터 분리시키며 우리에게서 주님의 은혜를 빼앗
아 간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죄악으로부터 해방을 받고자 해야 한다. 유대인들의 치
명적인 병폐는 그들이 완강한 악의를 갖고 약속을 거절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단의
노예가 된 자들도 쉬지 않고 죄 위에 죄를 더 쌓아 계속적으로 자신들에게 새로운 죄
책감을 가지게 한다. 그러므로 주님은 즉각적으로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줄 믿지 아
니하면"하고 부언하고 계시는 것이다. 이는 잃어버린 자가 그리스도께로 달려가는 길
외에는 구원을 회복하는 다른 길이 없기 때문이다. 이 말씀에서 '나'라는 데 강조점이
있는 것이다. 이것으로써 우리는 성경이 메시아에게 돌리고 있는 모든 것과 또한 성경
이 우리로 메시아로부터 기대하라고 하는 모든 것을 이해해야만 한다. 그러나 요지는
교회의 회복이다. 이 회복의 시작은 믿음의 빛인데 여기로부터 의와 새 생명이 솟아나
는 것이다. 고대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그리스도의 신적 본질에 잘못 적용
시켰다. 사실은 주님은 우리를 향한 그의 직무를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그 말씀이 주
목할 가치가 있음을 사람들이 결코 자기가 빠져 있는 죄악들을 충분히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자신들의 멸망을 인정할 만큼 강권을 받으면서도 그들은 그
리스도를 소홀히 하고 쓸데 없는 치유법을 찾기 위해 자기 주위를 돌아본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구원하기까지는 각종 죄악의 끝없는 감정의
교착이 다스리고 있다는 것을 믿어야만 한다.


8:25
처음부터 - 그리스도께서 여기서 그의 영원하신 신성을 주장하시는 것처럼 '처음'
을 주격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은 완전히 틀린 것이다. 헬라어에는 모호한 것이 없다.
그러나 헬라어 주석가들도 서로 의견이 다르다. 그들은 전치사가 들어가야 된다고 하
는 데는 다 동의하고 있지만 많은 수의 주석가들은 그것을 부사로 해석한다. 이것은
마치 그리스도께서 "이것은 첫번째로 주목할 일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크리
소스톰같은 이들도 그것을 이렇게 한결같이 읽으려 한다. '처음!' 이것도 너희에게 말
한다. 내가 너희에 대해서 말하며 판단할 일이 많다. 논누스는 이런 뜻을 삽입시켰다.
그러나 더 일반적으로 받아들이는 다른 해독이 있는데 그것이 내가 보기에도 옳은 것
같다. 나는 * (텐 알켄)을 '처음부터'라고 해석한다. 내 생각에 그 의
미는 이런 것이다. "나는 갑자기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전에 한 약속대로 나
는 지금 공적으로 나오노라"
"나도 너희에게 말하기 때문에"라고 주님은 부언하고 계신다. 주님께서 뜻하시는 이
말씀은 오직 그들이 들으려고만 한다면 주님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명백하게 선언하고
계시다는 사실이다. 이따금 나오는 * (호티)라는 불변화사(不變化詞)는 단지 이
유를 말하기 위해서만 씌여지지 않았다. 즉 주님께서 지금 말씀하고 계시므로 자신이
처음부터 계셨음을 증명하시기 원하셨던 것처럼 말이다. 오히려 주님은 주님의 가르침
과 주님께서 말씀하신 영원간의 일치가 그러한 관계에 있으므로 주님의 가르침은 주님
의 영원성을 의심할 여지 없이 확증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고 계
신 것이다. 그 말은 이렇게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처음에 의하면, 그 분은 내가 지
금 새로이 확인하는 것처럼 내가 옛적에 확인한 분이시다" 또는 "그리고 진실로 내가
지금 말하는 것은 예언에 대한 확실한 증거로서 모든 시대의 예언들과 일치한다" 간단
히 말해서 이 대답은 두 절로 되어 있다. '처음' 이란 낱말 속에 주님은 하나님께서
조상들과 언약을 맺으신 때로부터 계속되어 온 일련의 시대들을 포함하고 계신다. 주
님께서 자기도 말씀하신다고 하실 때 주님은 자기현재의 가르침을 옛 예언들과 결부시
키고 있는 것이며, 또한 그 현재의 가르침이 옛 예언들에 의존되어 있음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무지하게 된 유일한 이유는 그들이 선지자들이 증
거하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왜냐하면 선지자들과 복음에 나타나신 분
이 바로 같은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을 선지자들의 제자로 자처하면
서 하나님의 영원하신 언약을 바라보는 체 했다. 그렇지만 그들은 처음부터 약속된 분
이시요 그들 앞에 제시된 그리스도를 배척했다.

8:26
내가...많으나 - 주님은 자신이 귀머거리들에게 말씀을 전파하고 있음을 아시고
설교를 계속하지 않으신다. 다만 주님은 하나님께서 그 교훈을 변호하실 것이라고 선
언하신다. 곧 이 교훈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며 그들이 멸시하는 것이다. 주님은 이렇
게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를 고소하고자 한다면 너희의 악의와 사악이 나에게 풍족한
자료가 된다. 그러나 나는 너희를 지금은 내버려둔다. 나에게 직무를 주신 내 아버지
께서는 그 하실 일을 등한히 하지 않으실 것이다. 내 아버지는 인간들의 경건치 아니
하고 신성모독적인 경멸을 물리치시기 위해 항상 그의 말씀을 정당화하신다" 이 그리
스도의 말씀은 사도 바울이 말한 바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일향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딤후2:13)고 한 말씀과 매우 흡사하다. 간단히 말해
서, 주님은 그의 말씀을 믿기를 거절하는 불신자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을 경
고하고 계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의 진리를 변호하셔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
런데 우리 믿음의 참 반석이 되는 것은 이것이다. 비록 온 세상이 주님의 말씀을 배척
할지라도 하나님은 능히 그의 가르침의 권위를 세우시기에 충분하시다는 것을 우리가
믿는 것이다. 이 교훈을 의뢰하며 그리스도를 신실하게 섬기는 모든 사람들은 거침업
시 온 세상의 거짓됨을 고소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들은 그것을 - 주님은 아버지께 받지 않은 것은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신다. 목사가 자기가 말하는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증거할 때 이것이
가르침에 대한 유일한 확증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목사의 임무를 수행하신 것으로
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하나님의 명령을 사람들에게 전하시기 때문에 경청해 줄 것
을 요구하셔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더우기 주님은 친히 본을 보이심으로써 온 교회를
위해서 이렇게 일반 법칙을 세워놓고 계신다. 즉 사람이 하나님을 대변하지 않는다면
그의 말을 들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하나님의 말씀없이 나서는 자들
의 패역한 오만을 물리치시는 반면에 자기의 소명을 잘 알고 있는 신실한 교사들을 굳
건하고 담대하게 무장시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아무도 대항할 수 없는 모든 죽
을 인생들을 담대히 대항하도록 하신다.


8:27
저희는...깨닫지 못하더라 - 이 말씀에는 사단에게 마음을 빼앗긴 사람들이 얼마
나 어리석은가 하는 것이 나타나 있다.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나와 있다는 사
실이 이보다 더 확실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매일 복음을 대적하는 다른 원수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그
들의 이와 같은 우맹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갖다주어야 할 것이다.

8:28
너희는 인자를 든 후에 - 본 복음서 기자가 묘사한 무딘 마음을 마땅치 않게 여기신 그리스도는 그들이 더 이상 자기 말을 들을 가치가 없음을 또 선언하고 계신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다. "말하자면 너희의 생각이 꾀임에 빠졌으므로 내가 하는 말을 하나도 깨닫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한 선지자가 너희 가운데 거하면서 너희에게 말씀했다는 것을 앞으로 깨달을 때가 올 것이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우리는 경건치 않은 자들을 다루어야 한다. 우리는 적극적인 방법으로 그들을 대법관의 재판석으로 이끌어 가야 한다. 그러나 경건치 않은 자들이 형벌을 받기 위해 끌려 나와서 그들이 잠잠하게 경외해야 했던 하나님이 바로 그들의 재판장이심을-싫지만-자백하게 될 때는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는 지식은 때 늦게 임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은 그들에게 회개를 약속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진노로 인해 새삼 생각지 않은 공포에 질리게 되었을때 그들은 현재 앉아있는 무감각한 상태로부터 일깨움을 받게 될 것이다. 아담도 이렇게 눈띄움을 받아 부끄러움을 못이겨 숨을 곳을 찾았지만 헛일이었다. 마침내 그는 자기가 버림 받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하지만 아담의 이 지식은 그 자체로서는 무익한 것이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에게 유익한 것이 되었다. 그러나 버림받은 자가 이 절망에 빠질 때 곧 깨닫게 되는 것은 오직 그의 멸망 뿐이다. 하나님은 여러 가지 면을 통해서 이와 같은 지식에 이르게 하신다. 종종 그들은 환난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노하고 계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때로 하나님은 그들에게 어떤 외적인 형벌을 가하지 않으시고도 내적으로 괴로움을 당하도록 하신다. 또 때로는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불러가실 때까지 계속 잠을 자도록 내버려 두시기도 하신다.
'든다'는 말씀으로 주님은 자신의 죽음을 시사하고 계신다. 주님께서 자신의 죽음을 말씀하시는 목적은 그들이 육체를 따라 주님을 죽임으로 얻는 이득이 아무 것도 없을 것임을 경고하기 위함이다. 이것은 마치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즉 "너희는 지금 거만하게 나의 말하는 것을 조롱한다. 그러나 너희의 사악은 머지 않아 한 걸음 더 나아가 나를 죽이는 데까지 이를 것이다. 그때 너희들은 너희 소원이 이루어진 것처럼 의기양양해 할 것이다. 그러나 머지 않아서 너희는 나의 죽음이 나의 멸망이 아닌 너희의 파멸이 된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주님께서 '든다'는 말을 사용하심은 그들의 마음을 더욱 깊이 찌르기 위하심이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최대 한도로 깊이 빠뜨리기를 원했다. 주님은 그들이 완전히 실망하게 될 것과 또 그 결과의 정반대가 될 것을 말씀하신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들리시게 됨은 주님의 죽으심이 외적인 형태를 가리킨 것이었음이 틀림 없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줄곧 그 죽음의 영광스러운 결과를 바라보고 계셨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예상을 뒤엎고 곧 임했다. 물론 십자가 위에서도 주님께서 하나님과 천사들 앞에서 사단을 크게 이기신 것은 사실이다. 죄를 도말하시고 죽음의 정죄를 없이 하시는 등 말이다. 그러나 복음이 전파된 후에야 비로소 이 승리가 사람들에게 뚜렷이 나타나게 되었다. 곧 이어 일어난 일 즉 그리스도께서 무덤에서 살아나서 하늘로 승천하신 사실은 우리가 매일 기대해야만 하는 것이다. 경건치 않은 자들이 아무리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그 교회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압박하려고 할지라도, 주님은 그들을 능히 이기실 뿐만 아니라 또한 그들의 악한 노력을 바꾸어 그의 나라를 확장하는 데 사용하실 것이다.
내가 그인 줄을 알고 -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이것은 그리스도의 본질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직책을 말하는 것이다. 문맥을 살펴 보면 이것은 한층 더 명확하게 나타난다. 주님은 그 아버지의 명령 이외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으신다고 주장하신다. 이것은 주님께서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그의 직무를 충실히 이행하고 계심을 말씀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 이 말은 내가 나를 앞세워 무슨 일을 경솔하게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말한다'는 낱말은 가르치는 직무를 가리킨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명령 없이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기 원하실 때 주님은 아버지께 가르치심을 받은 대로 말씀한다고 하신다. 이러므로 말의 요지는 이렇다. "너희가 정죄하는 나의 모든 활동에는 내 것이란 하나도 없다. 나는 하나님께서 내게 명하신 것을 수행할 따름이다. 너희가 내 입술을 통해 듣는 말은 아버지의 말씀이다. 나의 소명은 나를 부르신 그분에 의해서만 지배를 받는다" 그러나 우리가 이거해야 할 것은 이 말씀들이 전에 내가 말한 대로 청중의 수준에 맞추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단지 서민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여겼기 때문에 주님은 그 속에 있는 신적인 것은 무엇이든 자기의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신다. 이것은 이렇게 말씀하는 것과도 같다. 즉 이것은 사람에게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주님을 통해서 우리를 가르치시며 또한 주님을 세워 교회의 유일하신 선생이 되게 하셨기 때문이다. 이러므로 주님께서는 자신이 아버지께 가르치심을 받았다고 말씀하신다.

8:29
나를 보내신 이가 - 주님은 다시 하나님께서 그를 도우실 것이고 또 그러므로 그의 수고는 헛되거나 무익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포하신다. 주님은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권위 하에서 모든 일을 하신다. 이것을 마치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이 그의 사역에 결부되어 있음을 말씀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모든 충성된 교사들은 같은 담대함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깨끗한 양심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일을 이루어 나갈 때 하나님의 손이 그들 가까이에 계실 것을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말씀으로 무장시키실 때 하나님은 그들이 냉냉하고 텅빈 소리로 허공을 치게 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주님은 주님의 성령을 은밀하신 역사로 말미암아 그의 말씀을 형통케 하신다. 그리고 동시에 그들을 그의 보호 아래 지키사 그들의 원수들로 진멸되게 하시고 또한 그들로 온 세상 앞에 당해낼 수 없는 자로 서있게 하신다. 만약 그들이 자신들과 자신들의 능력만을 판단한다면 그들은 매순간 정복을 당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서는 유일한 길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손에 보호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 자기 편에 계시다고 말씀하시는지 또한 항상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는다고 말씀하시는지 그 이유를 유의해야만 한다. 그것은 주님께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시고 또 하나님을 성실히 섬기시기 때문이다. 이것이 '항상'이라는 부사가 의미하는 것이다. 즉 주님께서 하나님을 복종하시되 부분적으로 하시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예외없이 헌신적으로 복종하시는 것이다. 그런고로 우리가 이와 같은 하나님의 임재를 즐기려 한다면 우리의 온 이성이 주님의 지배를 받아야만 하는 것이다. 만약 우리의 생각이, 다스리는 일에 조금이라도 참여 한다면 우리의 모든 노력은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의 축복이 결여될 것이기 때문이다. 잠시 동안은 성공했다고 하는 느낌이 우리를 흥겹게 할지 몰라도 최후의 결과는 불행할 것이다.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 고 말씀하신 것은 주님께서 간접적으로 그 민족의 반역을 개탄하고 계신 것이다. 주님은 그들 가운데서 자기를 옹호하는 사람을 거의 발견하지 못하셨다. 하지만 주님은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시는 것만으로 아주 충분하다고 증거하신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이다. 그리해야 우리는 신자들의 숫자가 적어도 실망하지 않게 된다. 비록 온 세상이 우리의 가르침을 대적할지라도 우리는 홀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또한 가톨릭 교도들의 자랑은 명백하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에 대하여 무관심하고 그들의 많은 수를 자랑하기 때문이다.

8:30
이 말씀을 하시매 - 비록 그 당시에 유대인들이 메마른 불모지와 같았을지라도 하나님은 그의 말씀의 씨가 완전히 잃어지는 것을 허락지 않으셨다. 바랄 수 없는 중에 그리고 많은 장애물들 가운데서 어떤 열매가 나타난다. 그러나 본 복음서 기자는 믿음에 대한 일종의 준비에 불과한 것을 믿음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는 주님께서 그들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고자 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들에 대해서 아주 좋은 면을 말씀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다음의 경고도 이에 대해서 말씀한다.

8:31
이 말씀을 하시매 - 비록 그 당시에 유대인들이 메마른 불모지와 같았을지라도 하나님은 그의 말씀의 씨가 완전히 잃어지는 것을 허락지 않으셨다. 바랄 수 없는 중에 그리고 많은 장애물들 가운데서 어떤 열매가 나타난다. 그러나 본 복음서 기자는 믿음에 대한 일종의 준비에 불과한 것을 믿음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는 주님께서 그들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고자 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들에 대해서 아주 좋은 면을 말씀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다음의 경고도 이에 대해서 말씀한다.

8:31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 만약 어느 누구든 끝까지 전진하지 않는다면 그가 시작을 잘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한 것이 못된다는 것을 그리스도는 여기서 그들에게 제일 먼저 경고하신다. 이러므로 주님께서는 그의 가르침을 맛본 자들에게 믿음 안에 거해 있을 것을 경고하신다. 주님의 말씀에 굳게 뿌리박고 그 안에 계속 거하는 자들은 참으로 그의 제자가 될 것이다. 주님께서 뜻하시는 바는 참다운 제자가 아니며 또 그렇게 취급받을 자격이 없는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제자라 자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믿음을 거짓 고백한 사람들은 처음부터 그만두거나 최소한 중도에 그만두는 데 반해서 참 신자들은 결승점까지 견디어 나간다. 주님은 이것으로서 참 제자와 위선자를 구별하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그의 제자로 여기시게 하려면 우리는 끝까지 견디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8:32
진리를 알지니 - 진리에 대한 지식을 어느 정도 얻은 자들이 진리를 알게 될 것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신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는 대상이 아직 교육을 받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 초보 교육도 거의 받지 못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그의 가르침을 더욱 깊이 알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하더라도 그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일반적으로 하신 말씀이다. 우리 중에 어느 누가 복음서 연구에 얼마 만큼의 진보를 이룩했다 할지라도 그가 알 것은 그에게 새로운 부가물이 필요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인내에 대해서 수여하시는 상급은 그들을 주님 자신과 더욱 친밀하게 만들어 주는 데 있다. 그러나 이렇게 함으로써 단순히 전자에게 또 하나의 선물을 더해 주신다. 그리하여 아무도 그가 상급으로 그 무엇을 받는다고 생각하지 않게 하신다. 주님의 말씀을 성령으로 우리 마음 속에 넣어주신 분은 복음의 광채를 흐리게 하는 무지의 구름을 매일같이 우리의 마음 속에서 내어 쫓아주시는 분이시다. 진리가 우리에게 완전히 계시되도록 우리는 진실하고 진지하게 진리를 힘써 구해야 한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그 제자들에게 시종 일관하여 가르치신 불변하는 진리이다. 그러나 처음에 주님은 말하자면 조그만 섬광으로 그들을 비추시지만 마지막에는 완전한 빛을 쏟아 주신다. 이와 같이 신자들은 완전히 확증을 받을 때까지는 어느 면에서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을 다른 면에서는 모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믿음의 지식은 이처럼 작고 희미하기 때문에 구원을 받는 데 효력이 없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 주님은 우리가 복음의 지식에서 얻은 열매나 또는 그 결과로부터 그것을 평가하신다. 즉 그것은 우리에게 자유를 회복시켜 준다. 이것은 아무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큰 축복이다. 그러므로 자연히 복음의 지식보다 더 고상하고 더 사모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게 된다. 노예의 신세보다 더 비참한 일이 없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느끼고 인정하고 있는 바이다. 복음이 우리를 노예의 신세로부터 해방시켜 주기 때문에 복된 생활의 보화가 자연히 복음으로부터 임하게 된다.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께서 여기서 묘사하고 있는 자유가 어떤 것인지를 확인해 보아야 한다. 이 자유는 우리를 사단의 죄와 죽음의 속박으로부터 자유케 해주는 것이다. 우리가 복음을 통해 자유를 얻는다면 우리가 날 때부터 죄의 노예임은 틀림없는 일이다. 다음에 우리는 해방받는 방법을 알아보아야 한다. 우리가 자신의 생각과 본성의 지배를 받는 한 죄의 노예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의 성령으로 우리를 중생케 할 때 우리를 자유하게 해 주신다. 이리하여 우리는 사단의 올무로부터 해방되어 즐거운 마음으로 의를 쫓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중생이 믿음으로부터 임한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가톨릭 교도들은 가히 그들이 자유의지를 자랑할지라도 자신이 노예임을 아는 우리는 오직 우리의 해방자 그리스도만을 자랑하리라. 우리가 복음이 우리를 해방시켜준 것으로 믿어야 하는 이유는 복음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여 죄의 명예로부터 자유함을 받게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믿음의 분량에 따라 자유의 정도가 다르다는 것을 유의해야 한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미 해방은 받았지만 완전한 자유를 얻기 위해서 여전히 탄식하며 한탄하고 있는 것이다.

8:33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 본 복음서 기자가 여기서 소개하고 있는 사람들이 동일한 대상인지 아닌지는 확실하지 않다. 흔히 무질서한 군중들 가운데서 보는 바와 같이 나는 그들이 그리스도께 난잡하게 대답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들은 믿는 자들이기 보다는 멸시하는 자들이었다. 군중의 일부가 언급될 때 그 일부에게만 해당되는 것을 일반적으로 전체에게 돌리는 것은 성경에 있어서 관례적인 표현 방법이다. 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노예가 된 적이 없었다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하는 자들은 노예된 그들에게 자유가 약속되었었다는 사실을 그리스도의 말씀으로부터 쉽게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노예라는 말을 듣는 것을 참기 어려워 했다. 이들은 거룩한 택한 백성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로 여김을 받지 않았었다면 그들은 다른 민족과 구별되게 한 양자됨과 언약의 유익은 무었이었는가? 그러므로 그들은 자기들에게 생소한 자유를 축복으로 제시했을 때 모독을 당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이 여러 군주들에 의해서 그렇게 자주 압박을 당하고 또 그 당시에도 로마 제국에 예속되어 가장 호된 노예의 고역으로 탄식하고 있으면서도 그들이 노예된 사실을 부인했다는 것은 이상스럽게 생각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로부터 우리가 쉽게 알 수 있는 것은 그들의 자랑함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이었던가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변명할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 즉 그들 적국의 부당한 지배가 그들이 누리는 정당한 권리로써의 계속자유를 방해하지 못하였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들은 잘못이었다. 즉 첫째 양자의 권리가 오직 중보자에게만 기초된 사실을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자유한 것은 어째서인가? 온 인류에게 공통된 속박이 구속자의 특유한 은혜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의 자손에게만 면제된 때문이 아닌가? 그러나 보다 쉽게 용납할 만한 또 하나의 오류가 있었다. 그것은 그들이 완전히 타락했으면서도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간주 되기를 원했다는 것과 아브라함이 정당한 자손이 되는 것이 오직 성령의 중생케 하심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은 생각지 않은 사실이다.
그렇다, 하나님의 특수한 은사들을 육적인 기원에 돌리는 것과 또 하나님께서 본성을 고치기 위하여 수여하시는 그 치유법들을 본성에 돌리는 것은 거의 모든 시대에서 너무나 흔히 볼 수 있는 죄악이었다. 더우기 거짓된 믿음으로 부풀고 또 그들의 상태를 자랑으로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이 어떻게 그리스도의 은혜를 배격하는지를 우리는 깨닫게 된다. 그런데도 이런 교만심은 온 세상에 퍼져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하게 느끼는 사람은 백에 한 사람도 드물다.

8:34
죄를 범하는 자마다 - 이것은 정반대 쪽에서 논하는 것이다. 그들은 종된 적이 없음을 자랑했다. 주님은 그들이 죄의 종임을 증명하신다. 그들이 육신의 소욕에 노예가 되어 계속적으로 죄를 범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스스로의 경험으로는 죄를 깨닫지 못하면서도 겸손하기를 배우며 교만을 버린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것은 오늘날 너무나 흔한 현상이다. 누구든지 묻혀 있는 죄악이 크면 클수록 그는 더욱 크고 과장되게 자유의지를 찬양한다.
그리스도는 전에 철학자들이 논의한 것과 별로 다를 바 없는 것을 말씀 고 계신 것 같다. 즉 자기 정욕에 빠져있는 자들보다 더 큰 노예는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보다 깊고 보다 은밀한 뜻이 있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초래하는 죄악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인간 본성의 상태에 대해서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철학자들은 생각하기를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선택에 따라서 노예가 되기도 하고 또 자유인으로 돌아오기도 한다고 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선언하고 계신 바는 그리스도께 자유함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다 노예의 신세가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타락한 본성으로부터 죄의 독소를 유전받는 사람들은 다 날 때부터 노예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여기서 강조하시는 은혜와 본질의 이러한 비교점을 파악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로부터 우리가 쉽게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인간이 어디를 통해서든지 자유를 회복하지 못하면 자유를 약탈당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 노예의 신세가 되는 것은 자원함으로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득이 죄를 범하는 자들이 억지로 죄를 범하는 것이 아니다.

8:35
종은 - 주님은 관습및 사법상의 비유를 들어 부언하신다. 비록 종이 얼마동안 권세를 가지고 있을지라도 그는 그 집의 후사가 아니다. 이로부터 주님께서 추론하시는 것은 아들을 통해서 얻는 자유를 제외하고는 완전하고 항구적인 자유가 없다는 것이다. 이런 방법으로 주님은 유대인들의 허식을 나무라신다. 즉 그들은 가면으로 진실을 대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브라함 후손의 탈을 쓴 자들에 불과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한 위치를 점유했다. 그러나 자유의 몸으로 태어난 형제를 주장하여 잠시동안 월권을 행사한 노예의 신분을 가지 이스마엘과 같은 위치이다. 결론은 이것이다. 즉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태어난 것을 자랑하는 모든 사람은 일시적인 거짓의 탈을 쓰고 있을 뿐이다.

8: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하면 - 주님께서 이 말씀으로서 뜻하시는 바는 자유에 대한 권리가 오직 자신에게만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나면서부터 노예이며, 오직 그의 은혜로서만 해방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를 자녀로 입양하실 때 그 성품에 있는 모든 것을 우리에게 전해주신다. 그때 우리는 믿음으로 그의 몸에 결합되며 그의 지체가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가 전에 말한 바 주님께서 서명 날인한 석방증서를 통해서 우리를 해방시키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러므로 우리긔 자유는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혜택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믿음으로 얻는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또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의 성령을 통해서 우리를 중생케하신다. 주님께서 그들이 "참으로 자유하리라"고 말씀하실 때 강조점은 '참으로'란 낱말에 있다. 우리는 유대인들의 부풀어 있는 어리석은 신념과 대조해 보아야 한다. 이것은 마치 대부분의 세상 사람들이 가장 비참한 노예의 생활을 하면서도 왕국을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흡사하다.

8:37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아노라 - 나는 주님께서 이 말씀을 양보해서 하신 말씀으로 해석한다. 하지만 동시에 주님은 그런 무가치한 문벌만 자랑하는 그 어리석음을 비웃으신다. 즉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과 같다. "너희가 그렇게 자랑하는 것을 사실로 인정한다 하더라도 하나님과 그의 종들에 대해서 격분하며, 또한 그렇게 악하고 무서운 마음으로 진리를 미워한 나머지 무죄한 피를 흘리고자 광분하니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불리우는 자들이 나은 점이 무엇인가?" 이러므로 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칭함 받기를 원하는 것보다 허탄한 일은 없는 것이다. 그들에게 아브라함을 닮은 곳이 없기 때문이다.
너희가...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 주님의 말씀이 그들 속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그들이 주님을 죽이려 한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의도는 그들이 단순한 살인자들이란 말이 아니고, 하나님과 그의 진리를 미워함으로 인해서 그러한 분노에까지 이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이 심히 악한 것임은 그 횡포가 단순히 사람들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 또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주님은 "그들이 주님의 말씀을 받을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이는 그들의 마음이 악의로 인해 닫혀 있고 또 그들은 건전한 것은 어떤 것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8:38
나는 내 아버지의 본 것 - 주님은 이미 주님의 아버지에 대해서 많이 말씀하셨다. 그런데 이제 주님은 반대 논법을 이용해서 그들이 주님이 가르침을 반대하는 까닭에 그들은 하나님의 원수요 마귀의 자녀라고 추론하신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내 아버지께 배운 것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것도 말하지 아니한다. 너희 아버지가 다르지 않다면 어찌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를 그렇게 격분하게 만드는가?" 주님께서는 자신은 '말하고' 그들은 '행한다'고 말씀하신다. 즉 주님은 교사의 직무를 행하신 데 반해서 그들은 주님의 가르침을 소멸하려고 열심히 노력했기 때문이다. 동시에 주님은 복음으로 경멸을 당치 않게 하신다.'왜냐하면 복음이 마귀의 자녀들로부터 반대를 받은 경우 그것은 놀랄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처럼 해석한다. "이제 와서 나를 대적함으로 너희가 마귀의 자녀인 것을 드러내라. 이는 나는 하나님께서 내게 명하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8:39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 이 분쟁은 그들이 얼마나 오만하고 무정하게 그리스도의 모든 책망을 멸시했는가 하는 것을 아주 선명하게 보여준다. 그들은 계속해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주장한다. 이 말은 그들이 단순히 아브라함에게서 태어난 자손만이 아니라 성민이요 하나님의 기업이며 하나님의 자녀라는 뜻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육체를 신뢰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믿음을 결(缺)한 육적 혈통은 가면에 불과한 것이다. 주님께서 그들을 그렇게 혼미케 만들고 또 우뢰같은 소리를 발하셨을지라도 주님이 그들에게 아무런 관심거리가 되지 못한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를 우리는 이제 이해하게 된다. 이렇게 우리를 책망할 하나님의 말씀이 오늘날 가톨릭 교도들에게 마치 꾸며낸 신화인 양 조소를 당하여 칼과 불로써 맹렬히 핍박을 당하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하는 것은 단지 그들이 교회라는 거짓 이름을 의뢰하고 하나님과 인간을 미혹할 수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서 위선자들은 그럴 듯한 구실만 생기면 마치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꿰뚫어 보실 수 없는 것처럼 완강한 태도로 하나님을 대적한다.
너희가 아브라함이 자손이면 - 주님은 지금 아브라함의 자손과 참 자손을 한층 더 명확하게 구별하시어 아브라함과 같지 아니한 모든 사람들로부터 그 이름을 박탈해 가신다. 자녀들이 품행에 있어서 그들을 낳은 아버지를 반영하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서 육적 혈통 문제를 논의하고 계시지 않는다. 단지 믿음으로 양자의 은혜를 지키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간주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확언하고 계신 것 뿐이다. 주님께서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그들의 하나님이 되실 것을 약속하셨기 때문에 모든 불신자들은 그 약속을 배척함으로 아브라함의 족속으로부터 탈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입장은 이런 것이다 : 하나님의 말씀에서 그들에게 수여된 축복을 거절하는 자들이 아브라함의 자손, 그러므로 성민, 하나님의 택한 백성, 왕같은 제사장으로 간주되어야 하는가? 그리스도는 그것을 부정하신다. 그리고 그의 말씀은 정당하다. 약속의 자손이 된 자는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하며 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들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의 육적 혈통에다 진리가 첨부되었던들 그것은 진실로 얼마나 중요하고 유익했겠는가 말이다. 선택이 아브라함의 자손 속에 잠재하고 있지만 그것은 자유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의 성령으로 거룩하게 하는 자들이 생명을 유업으로 받을 자들로 여김을 받는 것이다.

8:40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 주님은 모양을 보시고 그들의 자랑과는 달리 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님을 입증하신다. 그들이 하나님을 대적하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믿음의 순종을 제외하면 칭찬할 만한 것이 무엇인가? 이것이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과 타인을 구별하는 분별 원칙이다. 명예란 세상이 아무리 크게 평가하는 것일지라도 하나님께는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그들이 참되고 건전한 교훈을 결사적으로 대적하기 때문에 마귀의 자녀라고 다시 결론을 내리신다.

8:41
우리가 음란한 데서 나지 아니하였고 - 그들은 전과 다름없이 주장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것이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같은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크나큰 잘못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온 자손에게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 점이다. 그들은 이렇게 생각한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 족속을 양자로 택하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 이상 하나님의 자녀임이 틀림없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깨닫는 것은 그들이 거룩한 뿌리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모태에서부터 거룩하게 태어났다고 생각한 사실이다. 간단히 말해서, 그들은 거룩한 족장들에게서 태어난 이유로써 하나님의 교회라고 주장한다. 교부들로부터 이어왔다는 사실이 오늘날 가톨릭 교도들을 교만하게 하고 자부하게 한다. 사단은 이와 같은 속임수로 그들을 미혹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교회와 믿음을, 천국과 성령을 분리시킨다.
그렇다면 생명의 씨를 더럽힌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님을 알자. 비록 육체를 따라서는 그들이 불법이 아니고 교회라는 그럴 듯한 주장을 하더라도 말이다. 그들이 아무리 샅샅이 피할길을 찾는다 하더라도 그들은 그들의 유일한 자랑이 "우리는 거룩한 교부들을 계승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이다."라고 하는 사실을 절대로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만약 그리스도의 대답이 유대인들을 논박하기에 충분했다면 그것은 지금 가톨릭 교도들을 폭로하는 데도 그렇지 못할 리 없다. 위선자들은 언제나 매우 악한 담대함을 가지고 하나님의 이름을 거짓되이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중언부언하는 거짓된 자랑의 근거는 그리스도에 대한 결정을 굳게 지키는 모든 자들에게 결코 조롱거리가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8:42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 그리스도의 논리는 이렇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모든 사람은 그의 맏아들을 인정하며 사랑할 것이다. 그런데 너희는 나를 미워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주장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우리는 이 대목의 말씀을 주의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배척을 당하신 곳에는 경건이나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없기 때문이다. 위장된 종교는 확실히 하나님의 뒤에 가서 담대히 숨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독생자와 일치하지 않는 자들이 아버지와 어떠한 일치를 가질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살아있는 형상이 거절된 곳에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있다면 그것은 어떤 것인가?
이것이 주님께서 "아버지께로 나서 왔다"고 선언하신 말씀의 뜻이다. 주님의 뜻하시는 바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은 신성하므로 하나님을 참 예배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진리와 의로부터 피한다는 것은 불합리하다는 것이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 "나는 스스로 오지 않았다. 너희는 나에게서 하나님께 적대되는 아무 것도 찾을 수 없다. 간단히 말해서 너희는 나의 가르침이나 나의 사역 전체에서 세속적이거나 인간적인 아무 것도 찾지 못할 것이다". 주님은 자신의 본질이 아닌, 자신의 직무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8:43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 이 대목에서 주님은 유대인들의 완고함을 나무라신다. 그것이 너무 커서 그들은 주님의 하시는 말씀을 듣는 것조차 감당할 수 없었다. 이로부터 주님은 그들이 악마의 분노에 자극되어 이끌리고 있음을 추론한다 어떤 사람들은 여기서 언어와 말을 구별한다. 말하는 것보다 이야기하는 것이 더 많다는 점에서이다. 그러나 나는 그 구별을 발견하지 못한다. 더 작은 낱말을 먼저 사용한다면 맞지 않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 질문을 '언어'라는 낱말로 끝나게 하려고 이 귀절을 구분한다. 마치 이것이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는 말씀으로만 되어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는 이유를 즉각 제시하고 있다.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이 문장은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처럼 한 연속된 문장으로 읽어야 한다 : "내가 너희에게 말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고, 또 너희는 내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 들으려 하지도 않는가?" 첫 절에서 주님은 그들의 어리석음을 책망하시고 두번째 절에서는 주님의 가르침에 대한 그들의 완강하고 무절제한 증오심을 책망하신다. 후에 주님은 그들이 마귀에게서 나왔다고 말씀하심으로 그 두 사실에 대한 이유를 말씀하신다. 주님은 그들에게 질문하심으로써 그들이 주님을 대적하는 이유와 판단에 의해 인도되고 있다는 그들의 계속적인 자부심을 제거하기 원하셨다.

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 주님은 지금 이미 두번이나 모호하게 말씀하셨던 바 곧 그들이 마귀의 자녀라는 것을 더욱 확실히 천명하신다. 만약 그들의 아비가 하나님의 영구적인 원수가 아니었다면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그렇게 미워할 수 없었을 것이다. 더우기 주님께서 그들을 마귀의 자녀라고 부르시는 것은 그들이 단지 마귀를 모방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또한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그의 선동에 인도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닮았기 때문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성령으로 우리를 다스리시고 또한 그리스도께서 우리 속에 살아 활동하시므로 우리로 그 아버지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다른 한편 마귀는 그가 혼미하게 하고 또 불의를 행하도록 충동케 한 자들의 아비라고 한다. 간단히 말해서 마귀는 그들 속에서 강하게 역사하며 그의 지배력을 행사한다(고후4:4, 엡2:2등).
마니 교도들은 헛되고 어리석게 그들의 광란성을 증명하기 위해서 이 대목의 말씀을 오용했다. 성경이 우리를 가리켜 하나님의 자녀라고 부를 때 그것은 일체의 유전이나 기원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중생케하여 새생활을 하게 한 성령의 은혜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이 그리스도의 말씀은 본체의 유전이 아닌 본성의 타락과 관계된다. 이에 관해서는 인간의 타락이 그 원인과 기원이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마귀의 자녀로 태어나는 것은 창조가 아닌 죄의 타락에 돌려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기꺼이 자발적으로 마귀를 쫓기를 원한다는 점에서 이것을 증명하신다.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 주님은 그 욕심이 무엇인지는 설명하시며 잔인성과 거짓됨의 두 가지 예를 들고 계신다. 이런 점에서 유대인들은 마귀를 많이 닮았다. 주님께서 마귀를 살인한 자라고 말씀하시는 뜻은 그가 인간의 멸망을 획책했기 때문이다. 사람이 창조되자마자 사단은 사람을 해할 악한 생각에 충동되어 그를 멸망시키는 데 그의 힘을 집중시켰다. 그리스도는 창조의 시작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그 속에 해칠 마음을 심어준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사단이 스스로 초래한 그 속에 있는 본성의 흠을 정죄하고 계신다.
이것이 두번째 절에 더욱 명확하게 나오고 있다. 주님은 두번째 절에서 말씀하시기를 마귀는 "진리에 서지 못한다"고 하셨다. 비록 마귀를 본성적으로 악하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이로부터 헤어 나오려고 할지라도 이 말씀은 확실히 악화된 것을 나타낸다. 또한 사단은 진리를 버렸다는 점에서 거짓말장이라고 말한다. 그가 거짓말장이가 된 것은 그의 본성이 항상 진리를 대적한 데서 임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유의사에 의한 타락으로 말미암은 그의 변절에서 임하는 것이다. 이 사단에 대한 묘사는 우리에게 매우 유익하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그의 올무를 경계하고 또한 그의 능력과 세력을 격퇴시켜야 한다. 이는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고"(벧전5:8) 또 사람을 미혹할 천 가지 속임수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자들은 더욱 더 철저히 싸움을 위해서 영적 병기로 무장해야 하며 더욱 더 간절히 경계심과 근신하는 마음으로 감시해야 한다. 사단의 이 기질을 벗겨버리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에 대해 염려해서는 안된다. 마치 여러가지 오류가 생기는 것이 새롭고 이상한 일인 것처럼 말이다. 사단은 선동하는 자와 같이 그의 추종자들을 충동하여 세상을 그들의 사기(邪氣)로 혼란시킨다. 그러므로 사단이 진리의 빛을 소멸하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는 진리의 빛이 영혼의 유일한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혼을 죽이는 가장 치명적이고 주된 무기는 거짓이다. 눈을 가리고 있는 사람이면 누군 오늘날 가톨릭 안에서 그러한 사단의 그림을 볼 수 있으므로 그들은 먼저 대적하여 싸우는 것을 생각해야 하며 다음으로는 그들의 대장되신 그리스도의 명령에서 위안을 얻어야 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 싸운다.
다음에 이어지는 "그 속에 진리가 없으므로" 한 말씀은 결과로부터의 확증이다. 사단은 진리를 미워하며 진리를 감당하지 못하고 도리어 거짓으로 완전히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이러므로 그리스도는 사단을 완전히 타락하고 진리로부터 떠난 자로 추단(推斷)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단이 매일 그 배도의 열매를 보인다 할지라도 놀라지 말자.
거짓을 말할 때 - 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거짓에 대한 책임이 본성을 지으신 하나님께 있음을 부정하시고 또 거짓이 부패로부터 나오는 것임을 확증하신 것을 가리킨 것으로 흔히 설명된다. 그러나 나의 해석은 더욱 간단하다. 즉 마귀가 거짓말하는 것은 습관적이며, 또 기만과 허위와 속임을 꾸미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이 말을 정당하게 추론하는 것은 이 악습을 마귀 자신으로부터 생겨난 것이며, 또한 그것은 동시에 우발적인 것이 될 만큼 그에게 이상한 일이라고 하는 사실이다. 비록 그리스도께서 거짓말을 만드는 자라고 부르실지라도 그리스도는 확실하게 마귀를 하나님과 분리시킨다. 아니 그를 하나님과 반대된다고 선언하신다. 주님께서 지금 부언하시는 아버지라는 낱말의 범위도 같다. 사단은 하나님으로 부터 떨어졌기 때문에 거짓의 아버지라고 한다. 오직 하나님 안에만 진리가 거하고 또 하나님으로부터 진리는 유일한 샘물처럼 흘러간다.

8:45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 주님은 위의 말씀을 확증하신다. 즉 그들이 진리를 싫어하고 참기 어려워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리스도를 대적할 아무런 다른 이유가 없기 때문에 그들은 스스로 사단의 자녀임을 밝히 드러내고 있다.

8:46
너희 중에 누가 - 이 질문은 완전한 신뢰로부터 온 것이다. 주님은 자신이 어느 혐의 사실에도 결백하심을 아시므로 그의 원수들을 이기고 자랑하신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의 비방이 자신에게 없었다고는 말씀하지 아니하신다. 그들은 아무런 비방할 이유가 없으면서도 그리스도에 대한 인신공격을 그치지 않았다. 그러나 주님은 자신에게 아무런 흠이 없다는 뜻으로 말씀하신다. 이것이 사람이 죄로 책잡혔을 때 사용하는 낱말인 * (엘렉케인), 라틴어로는 Coarguere(죄로 책잡다)의뜻이다. 그러나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인생들 가운데 홀로 흠이 없다는 점에서 자신의 완전한 결백을 여기서 주장하고 계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잘못이다. 이는 주님께서 변호하시는 말씀이 본문의 상황에 제한을 받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충성된 종이 아님을 증거하기 위하여 인증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음을 주장하고 계신다. 이와 같이 바울도 자기를 자책할 아무 것도 알지 못함을 자랑한다(고전4:4). 이것은 그의 전 생애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의 가르침과 사도직에 대한 변호일 뿐이다. 그러므로 어떤 이들처럼 하나님의 아들에게만 있는 의의 완전성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주님의 단 하나의 목적은 그 하시는 일에 대해서 인정을 얻는데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다음에 나오는 말씀 즉 주님께서 다시 즉각 부언하실 말씀인 "내가 진리를 말하매..."라고 하신 말씀에 더욱 확실하게 나타난다. 이로부터 우리가 추론할 수 있는 것은 주님은 주님 자신보다도 주님의 가르침을 변호하고 계시다는 사실이다.

8:47
하나님께 속한 자는 - 주님은 자신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대사이시며 또 맡기신 사명을 충성되이 이행하고 계심을 당연한 것으로 여길 권리를 가지고 계신다. 그러므로 주님은 더욱 강하게 그들을 책망하신다. 이는 그들이 그렇게 완강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하여 그들의 경건치 않음이 완연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주님은 그들이 주님께서 가르치신 말씀 가운데 어느 것도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님을 지적할 수 없었음을 증거하셨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하나님과 공통되는 것이 하나도 없음을 주님은 결론내리신다. 이는 그들이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기 때문이다. 주님은 자신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으시면서 그들이 하나님을 대항한다고 나무라신다. 더우기 우리는 이 대목의 말씀을 통해서 이런 것을 배웠다. 즉 사람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지 못하는 것같이 버림받은 마음의 뚜렷한 증거가 없다는 사실이다. 설사 그가 다른 면에서는 외적으로 천사와 같은 깨끗한 생활로 빛나고 있어도 말이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즐겁게 받아들일 때 그것이 우리가 택함받은 확연한 증거가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을 직접 즐거워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모습을 버리는 사람은 의와 생명을 박탈당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무서운 선고 아래 떨어지는 것보다 더 두려워 할것은 없는 것이다.

8:48
우리가...말이 옳지 아니하냐 - 그들은 점차 그들이 얼마나 깊이 사단에게 심취되었는지를 나타낸다. 왜냐하면 그들이 양심의 가책을 받을 만큼 받으면서도 절망에 빠져 들어가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비록 그들이 그리스도에 대해서 두가지 비방을 말하고 있지만, 그들의 바라고 있는 목적은 주님은 저주받을 자이며, 또 악령에 이끌리고 있다는 것을 짤막한 몇 마디로 말해 주고 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배도자이며 율법을 더럽히는 자들로 취급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느 사람을 비방할 때 그를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보다 그리스도를 비방할 더 좋은 말이 없음으로 이 야비한 말을 함부로 무비판적으로 택한다. 간단히 말해서 사람들이 미친 개처럼 노하여 할 말이 없을 때 흔히 하는 것처럼 그들이 주님을 저주하는 것을 우리는 깨닫게 된다.

8:49
나는 귀신들린 것이 아니라 - 주님께서 첫번째 비방은 묵과하시면서 두번째 비방을 해명하시는 사실에 대해서는 어떤 사람은 주님께서 자신에 대한 모독은 묵과하시고 단지 주님의 가르침만을 변호하신 것으로 본다. 그러나 내 판단에 그들은 잘못이다. 이는 유대인들이 주님이 생활과 가르침을 구별하는 데 그렇게 세밀했을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이 밖에 사마리아 사람이란 이 이름에 대한 증오심은 이미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그들이 율법을 의곡되고 변질되게 지켜왔을 뿐만 아니라 또한 여러가지 미신과 와전으로 율법을 추락시키고 또 이방인의 고안품으로 하나님의 예배를 더럽힌 사실에서 야기된 것이다. 어거스틴은 이것을 비유에 들어 말하기를 주님께서 사마리아인이라 칭함을 거절하지 않은 이유는 주님께서 양의 참 보호자가 되시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그리스도께서 뜻하신 바는 다른 것 같다. 주님께 던진 두 가지 비방에는 같은 목적이 있었다. 따라서 주님은 전자를 논박하신다. 사실상 우리가 그 문제를 곰곰히 생각해 보면 사마리아인이라고 한 모독은 귀신들렸다고 한 모독보다 더 심한 것이었다. 그러나 내가 말한 바와 같은 주님은 아버지의 영광을 목적으로 삼는다고 주장하시면서 상대방에게서 이끌어낸 간단한 논박으로 만족하고 계신다. 아버지를 정당하고 진실하게 공경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인도를 받는 하나님의 충성된 종임에 틀림없다.
너희가 나를 무시하는도다 - 이 말씀은 마치 주님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도모하는 사람에게 당연한 존귀를 받지 못하시는 것을 섭섭하게 생각한 것처럼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주님께서 한 단계 높여서 하나님의 영광을 자기의 영광과 결부시키고 계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나 같다. "나는 나를 위해서 아버지의 영광이 되지 않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아버지의 위엄이 내 속에서 빛난다. 아버지의 능력과 권세가 내 속에 거한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그렇게 부당한 취급을 받을 때 너희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하나님께서 이 모독을 복수하실 것이라고 즉각 부언하신다. 주님께서 하나님의 존귀와 욕이 관계되지 않는 하나 자신에게 돌아오는 존귀나 욕에 대해서 개인적으로나 인간적으로 염려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셨다면 그들은 주님께서 야심을 가지고 있다고 비난했을 것이다.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하더라도 우리가 진실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고자 한다면 모든 사람이 확실히 알 것은 풍성한 칭찬이 하나님과 더불어 그에게 예비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삼상2:30) 한 말씀이 언제나 사실임을 우리는 깨닫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그를 멸시할 뿐만 아니라 많은 비방의 짐을 지운다면 그는 고요한 마음으로 주의 날이 임하기를 기다릴 것이다.

8:51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 그리스도께서는 물론 그 군중들 가운데 고침을 반대하지 않는 사람도 있음을 아셨다. 이러한 이유로써 주님은 절망적으로 악의에 찬 사람들을 두렵게 하기를 원하셨지만, 착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위로의 근거를 남겨두어 아직 버림 받지 않은 사람들을 이끄시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아무리 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싫어할지라도 경건한 교사는 악인들을 책망하는 데 그의 전 시간을 부여해서는 안되고 도리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구원에 대한 가르침을 주어서 고칠 수 있는 자를 건전한 마음으로 돌아오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 대목에서 그리스도는 그의 제자들에게 영생을 약속하고 계시지만, 당나귀와 같이 단지 목만 끄덕이거나 주님의 가르침을 찬성한다고 혀로만 고백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고귀한 보화와 같이 간직할 제자들을 요구하신다. 주님은 "그들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신다. 믿음이 한사람의 영혼을 소생시킬 때 죽음의 쏘는 것은 이미 무디어 지고 그 독은 깨끗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치명적인 상처를 주지 못한다.

8;52
지금...아노라 - 버림받은 사람들은 그들의 어리석음을 고집함으로 위협과 마찬가지로 약속으로도 그들의 마음이 감동되지 않는다. 그 결과로 그들은 그리스도께로 인도되거나 끌리지 못한다. 어떤 이들은 그들이 비방하기 위하여 주님의 말씀을 곡해한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그들이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그렇게 말씀하지 아니하셨다. 그러나 내가 볼 때 그것은 근거가 없는 것 같다. '죽음을 맛본다'는 말과 '죽음을 본다'는 말은 히브리어에서는 '본다'는 말과 같은 뜻으로서 '죽는 것'을 뜻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의 영적인 가르침을 육신에 결부시킨 점에서 잘못 해석한 사람들이다. 신자들은 썩지 아니할 씨로 거듭났으므로 죽는 때에도 살기 때문에 죽음을 보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들의 머리되신 그리스도께 결합되었으므로 죽음에 의해서 소멸될 수 없기 때문인데, 그것에 죽음이 그들에게 있어서는 하늘나라로 들어가기 때문이며, 또 그들 속에 거하시는 성령은 죽음의여분을 삼키실 때까지 의로 인한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사람은 육적이어서 죽음이 몸에 밝히 나타나지 않는 한 죽음으로부터 해방받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단지 그들의 육적인 감각지각으로만 판단하기 때문에 그들이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해서 거의 아무런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은 세상의 너무나 흔한 병폐이다. 이같은 일이 우리에게 임하지 않도록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일깨워 죽음 한복판에서 영적인 생명을 감별하지 않으면 안된다.

8:53
우리 조상 아브라함보다 - 여기에 또 하나의 잘못이 있다. 그들은 아브라함과 성도들의 영화를 가지고 그리스도의 영광을 어둡게 하려고 한다. 그러나 태양의 광채가 모든 별들을 의미하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도들에게서 발견될 모든 영광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광채 앞에서 사라져야만 한다. 그렇다면 그들은 종을 주님과 대조하는 불의하고 불합리한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심지어 아브라함과 선지자들의 이름을 그리스도에 비하여 오용함으로써 그들에게 해를 끼친다. 그러나 이 죄악은 거의 모든 시대에 유행했고 현대에까지 내려왔다. 그리하여 경건치 않은자들이 하나님의 일을 잔해하여 모순되이 보이도록 만들었다. 하나님은 사도들과 순교자들을 통해서 그 이름을 비추셨다. 가톨릭 교도들은 스스로 사도들과 순교자들을 우상화하여 하나님을 대신하게 한다. 그렇게 함으로 그들은 바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파괴할 무기를 제조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가톨릭 교도들이 그렇게 방탕하게 성도들에게 수여할 것을 성도들이 정말 소유하고 있다면 하나님께나 그리스도께 남은 것은 얼마나 적겠느냐! 그러므로 선지자들과 사도들과 모든 참된 성도들을 그리스도보다 훨씬 아래에 놓음으로 주님 홀로 높임을 받게 하지 아니한다면 하나님 나라의 모든 질서는 수라장이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사실상 우리는 성도들을 그리스도께 순복시키는 것 외에 그들에게 더 큰 존귀를 끼칠 수 없다. 그러나 가톨릭 교도들은 자신들이 성도들을 정직하게 숭배하는 자들이라고 자랑함으로써 무식한 자들을 미혹하지만 사실은 하나님과 성도들에게 해를 입히는 것이다. 이는 그들이 성도들을 높임으로 인해서 그리스도를 성도들의 표준으로 격하시키기 때문이다. 사실상 그들은 이중적으로 잘못을 범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가르칠 때 그리스도보다 성도들을 더 좋아하기 때문이며 또한 그리스도로부터 취한 것으로 그들을 옷 입힘으로써 그리스도에게서 거의 모든 능력을 빼앗기 때문이다.

8:54
내가 내게 영광을 돌리면 - 주님은 그들의 불공평한 비교에 답하시기 전에 자신의 영광을 구하지 아니한다는 내용의 말씀을 시작하신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 그들의 비방에 대처하신다. 그리스도께서도 자기를 영화롭게 하셨다고 만일 누가 이의를 제기해 온다면 그 대답은 쉽다. 주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시와 권위에 의해서 하신 것이다. 다른 많은 대목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주님은 자신과 하나님을 구별하심으로 그들에게 양보하신다. 간단히 말해서 주님은 아버지께 받은 영광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영광도 바라지 않는다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교훈하는 바는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영화롭게 하실 때 하나님은 세상으로 하여금 그 아들을 태연스럽게 멸시하도록 허락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이다.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이 하늘로부터 들려온다.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그리고 "모든 천사들은 하나님께 경배하게 하라" 그리고 "모든 무릎이 그리스도께 굻게 하라" 그리고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그리고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찾게 하라" 그리고 또 "모든 육체는 낮아지게 하라"는 이런 하나님의 말씀들은 신자들을 크게 격려하여 그리스도를 예배하게 한다. 우리가 또한 이 말씀을 통해서 깨닫게 되는 것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위해서 취하는 모든 영광은 사소하고 가치가 없다는 사실이다. 야심이란 얼마나 눈먼 짓이냐 그 헛된것을 위해서 그렇게 애쓰니 말이다! 우리는 바울이 말한 바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고후10:18)고 한 말씀을 항상 명심하여야 한다. 더우기 우리는 다 하나님의 영광을 잃어버린 자들이니 그리스도로서만 자랑하자. 이는 주님께서 그의 은혜로 우리를 그의 영광에 참여케 하시기 때문이다.
너희가...칭하는 그이시라 - 주님은 그들이 곧잘 만홀히 여기는 하나님의 이름을 빼앗으신다. "나는 너희가 얼마나 뻔뻔스럽게 하나님의 백성임을 자랑하는지 안다. 그러나 그것은 그릇된 주장이다. 이는 너희가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이다"라고 주님은 말씀하신다. 이로부터 우리는 또한 진실한 믿음의 고백은 참된 지식으로부터 오는 것임을 배운다. 그런데 그 지식이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 어디서 오는가?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없이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는 사람들은 다 거짓말장이일 뿐이다. 그러나 주님은 양심의 담대함을 가지시고 그들의 뻔뻔스러움에 대항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모든 종들은 자기 편에 하나님을 모시고 있는 것만으로 만족할 마음의 각오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온 세상이 주님을 대적하여 일어날 경우라도 말이다. 이와 같이 옛날에는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아무도 꺽을 수 없는 영혼의 힘을 가지고서 온 세상의무서운 공격을 굳게 대처했었다. 이는 그들이 자기들을 보내신 하나님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근본적인 지식이 부족할 때 우리를 붙들어 줄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8:55
내가 만일 알지 못한다 하면 - 이 말씀으로써 주님은 주님의 직무에 대한 사명감이 주님으로 말씀하시도록 강요하며 또 말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실을 배반하는 것이 된다고 선언하신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신다는 이 말씀을 주목할 만한 것이다. 이는 우리로 사람 앞에서 우리 마음의 믿음을 고백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체 가장을 하고 악한 생각으로 진리를 부인하거나 의곡하는 자들이 그저 가볍게 책망을 받는 것이 아니라, 마귀의 자녀로 추방당하게 된다는 사실은 우리를 무서운 공포에 사로잡히게 하고 만다.

8:56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 오직 말씀으로 주님은 전에 그들에게 거절하셨던 것을 허락하신다. 즉 아브라함이 그들의 조상이라는 사실 말이다. 그러나 주님은 아브라함의 이름으로부터 오는 반론이 얼마나 약한지를 그들에게 보여주신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 "아브라함이 평생토록 가졌던 단 한 가지 목적은 나의 나라가 번성하는 것을 보는 것이었다. 그는 내가 없을 때 나를 사모했지만 너희는 내가 있을 때 나를 배척했다." 주님께서 여기서 아브라함이 온 교회의 아버지가 되는 점에서 아브라함에 관해서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러므로 경건한 자들 가운데 포함되기를 원한다면 당연히 그리스도의 임재를 기쁨으로 받아야 한다. 아브라함은 그것을 열렬히 사모했다. 이는 '기뻐하다'는 낱말이 크고 열렬한 애정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제 대조법을 보완하지 않으면 안된다. 비록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당시에 그렇게 희미했다 할지라도 아브라함은 그렇게 강한 열망에 불타서 그것이 성취되는 것을 모든 좋은 것보다 더 귀하게 여겼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밝히 계시된 그리스도를 멸시하고 심지어 배척하는 자들의 배은망덕은 얼마나 저주스러운 것인가! '날'이란 낱말은 어거스틴의 생각과 같이 이 대목에서는 영원을 의미하지 않고 오히려 그리스도께서 구속자의 직무를 성취하기 위해 육체로 옷입고 세상에 오시는 그리스도의 왕국시대를 뜻한다.
그러나 지금 의문이 되는 것은 아브라함이 믿음의 눈을 가졌다 할지라도 어떻게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뵐 수 있었느냐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바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눅10:24) 한 말씀과는 잘 맞지 않는 것 같다. 나의 대답은 이렇다. 즉 믿음에 따라 그리스도를 보는 정도가 다르다고 하는 것이다. 옛 선지자들은 주님께서 그들에게 약속하신 대로 그리스도를 뵙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즉 주님께서 하늘로부터 인생들에게 내려오셔서 자신을 자세하고 완전하게 보여주셨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더우기 우리가 이 말씀을 통해서 배우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소원을 물리치지 않으신 것과 똑같이 주님은 지금도 자기를 사모하는 어느 누구도 실망시키지 않으시고 그의 경건한 소원을 만족케 해주신다는 사실이다. 주님께서 많은 사람들에게 자기를 기뻐하도록 허락하지 않는 이유는 인간들의 악의 때문이다. 이는 주님을 사모하는 사람들이 적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기뻐한 것은 그가 그리스도의 왕국에 대한 지식을 큰 보화로 여겼던 것을 증거한다. 아브라함이 그리스도의 날을 보고 기뻐했다고 우리는 듣고 있는데, 그것은 아브라함이 그보다 더 귀하게 여긴 것이 아무 것도 없었음을 우리로 알게 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모든 경건한 사람들은 그들의 믿음으로부터 열매를 거둔다. 즉 그리스도로서만 만족하게 되고 그 안에서 온전히 행복을 누리게 되며 또 그들의 양심은 조용하고 즐거워한다. 그렇다,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쉬는 존귀를 그리스도께 드리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브라함이 죽은 후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나타나셨을 때 그리스도의 임재를 느꼈다고 해석한다. 이와 같이 그들은 바란 때와 본 때를 구분한다. 그리스도의 오심이 죽은 후의 성도들의 영들에게 계시되었었다는 것은 물론 사실이다. 그들은 평생토록 그리스도의 오심을 내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재치있는 해석이 그리스도의 말씀과 일치하는지는 모르겠다.

8:57
오십도 못 되었는데 - 오십 세도 되지 않은 사람이 수백년 전에 죽은 아브라함과 자기를 동등시 한다는 이유로써 그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있을 수 없는 말로 논박하려고 한다. 그리스도는 삼십 사 세도 안되셨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을 보다 연세가 많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주님을 대함에 있어서 너무 완강하고 세밀하게 보이지 않기 위함인 것 같다. 마치 그들이 이렇게 말한 것과 같다. "네가 이미 오십 세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할지라도 분명코 너 자신을 그렇게 나이가 많은 것 같이 보이게 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주님의 얼굴이 실제 연령보다 더 늙어 보였거나 또는 본문에 언급된 년수가 태양력이 아니었다고 짐작하는 사람들은 헛수고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사십 세 이상 사셨다고 전하는 가톨릭 교도들의 생각은 전혀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8:58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 불신자들은 그저 육체의 겉모양만을 보고 판단한다. 그러므로 주님은 자신이 인간 모습 외에 더 위대하고 더 높은것을 소유하고 있음을 그들에게 깨닫게 하신다. 그런데 그것은 육체의 생각으로는 알 수 없는, 오직 눈으로서만 볼 수 있는 것이다. 이같은 방법으로 주님께서는 육체로 밝히 나타나기 전에 거룩한 선조들로 자기를 보게 하셨다. 그러나 주님은 다른 동사를 사용하신다 :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나는 있다"라는 말씀으로써 주님은 자신을 보통 사람들로부터 제외시키시며 하늘에 속한 신령한 능력이 자기에게 있음을 주장하신다. 그리고 이에 대한 인식은 창세로부터 그후 모든 시대를 통해 유포되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두가지 면으로 설명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단순히 그리스도의 영원하신 신성에 관계 되는 것으로 "나는 스스로 있는자니라"(출3:14)고 한 모세의 글에 있는 말씀에 비유한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훨씬 크게 확대해서 본다. 즉 주님께서 세상의 구속자이시기 때문에 그 능력과 은혜가 모든 시대에 공통되었다는 점에서이다. 그러므로 이 말을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느니라"(히13:8)고 한 사도의 말씀과 잘 맞는다. 이는 문맥이 이러한 해석을 요구하는 것같이 보이기 때문이다. 주님은 일찌기 말씀하시기를 아브라함이 불타는 마음으로 주님의 날 보기를 사모했다고 했다. 이 말이 유대인들에게 믿어지지 않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주님께서도 친히 그때 계셨다고 부언하신다. 우리가 주님께서 그때에도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게 하는 중보자로 인정받으셨던 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여기에 주어진 이유는 유력하게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시대에서 중보자의 은혜가 번성했다는 것은 주님의 영원하신 신성에 의거한 것이었다. 따라서 이 그리스도의 말씀은 주님의 신적본질에 대한 놀라운 말씀을 포함한다.
우리는 또한 맹세의 엄숙한 형식인 '진실로 진실로'란 말씀을 주목해야 한다. 이 동사의 현재 시제에 큰 비중이 있는 것으로 보는 크리소스톰의 견해를 나는 인정하지 않는다. 이는 주님께서 "나는 과거에 이랬었다"거나 "나는 있었다"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처음부터 끝까지 똑같은 상태를 의미하는 "나는 있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있기 전에"라고 주님은 말씀하지 않으시고 "아브라함이 나기 전에"라고 말씀하심으로 그에게 시작이 있음을 말씀하신다.

8:59
저희가 돌을 들어 - 그들은 율법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께서 돌에 맞아 죽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하므로 이렇게 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이 맹목적인 열심에서 나온 미친 짓임을 추론하게 된다. 그들은 사건의 진상을 알아볼 귀는 가지고 있지 않지만 살인할 손은 준비하고 있다. 주님께서 겉으로는 힘 없는 모습을 하고 계셨을지라도 나는 주님께서 비밀스런 능력으로 자기를 구출한 사실을 의심하지 않는다. 이는 주님께서 인간의 연약함에 대한 여지를 남겨 두지 않고는 그의 신성을 밝히 드러내기를 원치 않으셨기 때문이다. 어떤 사본에는 "그들 가운데로 지나갔다"는 말씀이 있다. 에라스므스는 그것을 누가복음 4장에서 빌려온 것으로 생각한다. 악한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신성이 충만한 그리스도를 추방한 후에 성전 뜰을 여전히 보유하고 있음은 또한 주목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데도 성전을 소유하고 있다고 스스로 크게 속고 있다. 이와 같이 오늘날 교황과 그의 추종자들도 그리스도를 몰아내고 교회를 그렇게 더럽히면서도 어리석게 교회의 가면을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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