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크마 주석, 사도행전 1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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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 - 11:19-30예서 언급되었던 안디옥 교회가 새로운 이야기의 장소적 배경으로 언급되고있다. 그리고 여기서 여러 명의 교사와 선지자들이 언급되는 점으로 보아 안디옥 교회는 11:19에 언급될 당시보다 많은 성장을 한 것으로 짐작된다. 여기서 언급된 선지자들과 교사듸은 설립된 지 얼마되지 않은 안디옥 교회를 이끌어가는 중요한 직분자들로 보인다. 한편 11:27에서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왔음이 언급되어 있으므로 본절에 언급된 선지자들에 예루살렘에서온 선지자들이 포함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혹자는 여기서 언급된 선지자들은 아가보와 같이 미래의 일을 예언하는 기능이 아니라 말씀을 가르치고 해석하는 목회적 직분을 지녔으므로 예루살렘예서 왔던 선지자듸을 제외한 본래 안디옥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선지자들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Lenski). 그러나 이 주장을 취할 경우 선지자들이 함께 언급되는 '교사들'(* , 디다스칼로이)과 엄격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이와 달리 허비(A.C. Hervey)는, 선지자들을 당시 교회의 정규 전도요원으로 생각하여 가르치는, 기능이 강조된 교사들과 구분시키고있다. 그리고 아사노 중이찌는 선지자를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받아 전하는 은사를 구비한 사람으로 이해하여 지적인 입장에서 신앙을 변증하며 성도들을 가르치는 교사와 구분하기도 했다.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은 고전 12:28, 29와 엡 4:11에서 함께 언급되어 별 구분없이 비슷한 기능을 가지고 교회 사역을 담당한 자들로 생각될수 있으나 선지자란 표현 자체가 예언과 대언(代言)의 은사를 받은 자에 대해서만 적용될 수 있으므로 그 둘은 서로 구분되어야 한다. 한편 누가는 안디옥 교회의 지도자 그룹 즉 신지자들과 교사들의 명단을 언급하면서 바나바를 맨 처음에 언급하고 사울을 맨 나중에 언급하고 있다. 아마도 안디옥 교회에 있어서 중심 서열 내지 신앙의 연륜에 따라 언급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바나바를 비롯하여 시므온, 루기오는 사울이 안디옥 교회에 오기 이전부터 직분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11:20). 그러나 누가 선지자인지 누가교사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 따라서 혹자의 주장처럼 바나바와 시므온 그리고 루기오는 선지자로, 마나엔과 사울은 교사로 보는것은(Meyer, Longenecker, Hervey) 분명하지 않다.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 - 니게르라는 말이 검다는 뜻이라고 생각할 때 시므온은 아프리카 출

=====13:2
주를 섬겨 금식해때 - 27:9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금식(禁食)절기를 정해 놓았다. 그러나 여기서는 '주를 섬겨'라는 단서를 달아 유대교적인 금식과 구별하고 있다. 여기서 '섬기다'는 봉사한다는 의미와 함께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 행위를 뜻하기도 한다. 본절예서는 예배행위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래서 공동번역은 본 구절을 '주님께 예배드리고 있을 때에'라고 번역했다.
성령이 가라사대 - 성령의 지시가 기도하는 무리들에게 임하였는데 성령의 음성을들은 사람들은 앞절에서 언급한 바나바 외에 4명이다. 성령의 지시는 바나바와 사울을 이방선교를 위한 사역자들로 구별시키는 것이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안디옥 교회는 이방 선교를 위한 중심지가 되며 성령의 지시로 인해 사울은 사도로서 그 권위를 인정받게 된다. 따로 세우라 - 름 1:1; 갈 1:15에서는 이 표현이 바울의 소명(召命)을 표현하는데 사용되었다. 여기서는 특별히 사울이 이방인을 위한사도로 임명받은 것을 강조해 주고 있다. =====13:3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 여기서 언급되는 금식 기도가 2절에서 시작되었던 금식기도와 동일한 것인지(Lenski) 아니면 2절의 금식기도가 끌난 다음 바나바와 사울을 파송하기 위하여 일종의 임명 예배를 다시 했다는 것인지(Alford, Haenchen, Hervey)분명하지 않다. 두사람의 선교사를 파송하기 위해 특별히 정해진 예배라고 보는 것이 문맥상 적절하다. 따라서 2절과 3절의 진술 사이에는 시간적 간격이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안수하여 보내니라 - 바나바와 사울에게 안수(按手)를 베풀고 선교사로 파송한 주체가 누구인지 본절에 언급되어 있지 않다. 아마 1절에 언급된 시므온과 루기오 그리고 마나엔 이 세 사람이 그들에게 안수했을 것이다. 그 세 사람이 그들에게 안수했다고해서 안수받은 두사람보다 직책상 높은위치에 있었다고는 말할수 없다. 다만 그들은 성령의 지시로 두 사람을 안디옥 교회의 대표자로 혹은 사도로 인정하는 의식을 집행했을 따름일 것이다.

=====13:4
실루기아에 내려가 - 바나바와 사울의 일행이 실루기아(Seleucia)로 내려간 것은 배를타기 위한 것으로 이해된다. 안디옥은 내륙에 있는 도시이기 때문에 실루기아를 외항(外港)으로 삼아야 했다. 실루기아는 안디옥 서쪽 약 26km 정도의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이 도시는 B.C. 300년경 셀류시드(Seleucid) 왕조의 첫 왕 셀류쿠스(Seleucus) 1세 니카토르(Nicator)에 의해 개항되었다. 구브로에 가서 - 이곳은 사울과 동행한 바나바의 고향이고(4:36) 안디옥 교회구성원의 일부가 이곳 출신의 사람들이었다(11:20). 따라서 첫 선교지로 구브로(Cyprus)가 선택된 것은 바나바와 구브로 출신 안디옥 교회의 교인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13:5
살라미 - 구브로섬 동쪽에 위치한 해안도시이다. B.C. 58년 이후 로마의 지배를 받으며 지중해를 통한 해상 무역으로 인해 상업 도시로 커갔다. 그러나 A.D. 116년 트라야누스(Trajanus) 황제에 의해 파괴되었다. 유대인의 여러회당에서 전할새 - 살라미에는 유대인들이 많이 거주하여 회당도 여러 곳에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들은 회당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있는 기회를 포착했다. 비록 그들은 이방인들의 사도로 전도 여행을 떠났지만 실제적으로 전도는 주로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에서 비롯되었다. 이는 유대인들도 그들의 전도 대상에 포함되었음을 의미한다. 요한을 수종자로 - 요한은 12:25에서 언급된 마가 요한을 가리킨다. 그는 아마 두 사람을 대신해서 세례를 베푸는 일을 도왔을 가눙성이 있다(Alford). 왜냐하면 바울은 전도 여행시 몇 사람에게만 직접 세례를 베풀었기 때문이다(고전 1:14-17). 또한 요한은 두사람의 여행 경비를 관리하는 등 전도 여행 중 그들이 불편하지 않도록 도왔을 것이다.

=====13:6
온 섬 가운데로 지나서 바보에 - 바나바와 사울의 일행은 살라미의 반대편 즉 구브로섬의 서쪽 끝에 위치한 도시인 바보에 도착했다. 이 도시는 살라미로부터 약 180여km의 거리에 있다. 본래 바보(Paphos)는 두 군데가 있었다. 즉 한 군데는 옛 베니게의 도시이고 여기서 언급된 바보는 이곳으로부터 서북쪽 약 11km의 거리에 있는 로마령의 도시를 가리킨다. 바예수(* , 바르예수스) - '예수의 아들' 혹은 '여호수아의 아들'이라는 뜻을 가진 유대식이름이다. 바예수는 총독 관저에서 일하는 유대인으로 그의 신분은 '거짓 선지자 박수'였다. 박수(* , 마고스)는 당시 마술적 또는 주술적 치료 행위릍 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여기에 거짓 선지자라고 덧불여진 점으로 보아 자칭 하늘의 계시자로 행세하면서 동시에 주술적인 방법으로 사람들을 치료한 것으로 보인다. 유대인인 그가 그같은 행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그 활동을 지속했다는 사실은 그곳에 거주하던 유대인들이 그의 행동에 미혹되었거나 아니면 총독이 그쁠 보호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경건한 유대인들이 그를 율법에 따라(레 20:6) 처벌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13:7
총독 서기오 바울 - 서기오 바울(* , 세르기오스 파울로스)에 대해서 성경의 다른 곳에 언급되어 있지 않아 더이상 알 수 없다. 그가 글라우디오 황제 때 티베르강 관리자로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F.F. Bruce)도 있지만 정확한 인물 고증(考證)이 어렵다. 다만 누가의 묘사로 보아 지혜있고 유력한 통치자로 추측할 수 있다. 지혜있는 사람 - '지혜있다'(* , 쉬네토스)는 맡은 본래 신중하고 지성적이며 자기 주관이 뚜렷한 사람을 말한다. 여기서 이 말은 총독의 통치력과 밀접한연관이 있는 표현으로 사용된다. 아마 누가는 총독으로서 서기오 바울이 공명 정대하면서 분별력이 있는 정치를 한 것을 이 한단어로 묘사향것 같다.

=====13:8
엘루마 - 아람어 또는 아랍어에서 온 것으로 추정되는 이 단어는 6절에서 언급된 박수와 동의어다. 본래의 뜻은 요술장이 또는 마법사로 통한다. 그는 총독과 바나바 일행과의 만남을 방해하는 반(反)기독교적인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에 따라 총독 서기오 바울의 지혜는 더욱 돋보이게 된다. 즉 측근의 블경건한 술수를 물리치고 바나바와 사울 일행을 만남으로써 지혜있다는 누가의 묘사가 증명되는 셈이다.

=====13:9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 - 처음으로 바울(Paul)이라는 이름이 언급되었다. 이후로는 사울이 아니라 바울이라는 이름으로만 언급된다. 사울이라는 이름에서 바울이라는 이름으로 바뀌게 된 이유에 대해서 사울이 회계한 이후부터 새사람된 표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보는 견해도있으나(Bengel, Olshausen, Meyer) 이는 주관적추측에 불과하다. 오히려 바울이라는 이름을 본래부터 갖고 있었는데 서기오 바울을 만난 이후부터 저자가 사울을 로마식 이름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Zahn, Lightfoot, Ramsay, Knowling, Vincent). 당시 유대인들 중에는 유대식 이름 외에 로마식 이름을 동시에 갖고있는 사람들이 있는데(1:23;12:25;13:1) 특히 사울은 나면서부터 로마 시민권을 가졌던 사람이었으므로(22:28) 로마식 이름을 가졌을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가가 바울이라는 사울의 로마식 이름을 이제야 언급하게 된 것은 아마도 이제 비로소 사울이 이방선교를 위한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인 것 같다. 즉 이방 지역에서는 로마식 이름으로 언급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보여질 것이고 설교에도 도음이 되리라고 판단했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성령이 충만하여 - 여기서 누가가 의도하는 바를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1) 모든 악령과의 싸움에서 승리로 이끄는 것은 성령의 역사임을 말한다. (2) 거짓 선지자와 대결하는, 성령이 충만한 바울을 부각시킴으로써 이제까지 앞세웠던 바나바로부터 이야기의 초점이 바울로 옮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3:10
모든 궤계와 악행이 가득한 자 - 바울은 엘루마에 대한 일차적인 공격으로서 엘루마의 정체를 폭로하고 있다. 여기서 언급된 '궤계'에 해당하는 혤라어 '돌로스'(* )는 '미끼로 잡다'의 '델로'(* )에서 유래된 단어로 '교활', '간교', 또는 '올무', '미끼' 등의뜻으로 사용된다. 한마디로 사기꾼이라는 말이될 수 있다. 6절에서 '거짓 선지자'라고 언급된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리고 '악행'이라는 말은 본래 경솔하거나 무절제한 행위를 의미한다(Robertson). 여기서는 부주의하고 반(反)신앙적 행위로 인해 다른 사람들로하여금 실족케하는 것을 의미한다. 마귀의 지식 - 이와 같은 저주는 바리새인에 대한 예수의 저주와 같은 형식을 취하고 있다(요 8:44). 이 말은 엘루마에 대한 저주이면서 그의 악한 행실에 대한 폭로이다. 주의 바른깊을 굽게 하기를 - 엘루마의 행위가 '주님의 길을 훼방'(공동 번역)하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이는 총독 서기오 바울과 바나바와 바울 일행의 만남이 주님의 뜻임을 간접적으로 시사한다.

=====13:11
주의 손...소경이 되어 - 저주 또는 축복에 대한 묘사로 주의 손이 본서에서 언급되는데(11:21) 여기서는 성령의 일을 거스른 죄에대해 하나님의 진노가 임함을 의미한다. 진노가 임한 결과 엘루마는 소경이 되어 앞을 보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형태의 징벌은 구약성경에서 범죄자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묘사되었다(신 28:28, 29). 안개와 어두움 - 눈이 멀어진 상태를 점층적 표현으로 묘사한 듯 하다. 즉 엘루마의 눈은 안개처럼 희미하다가 어두움처럼 전혀 보이지 않게 되었다. 인도할 사람을 두루 구하는지라 - 엘루마가 완전히 실명(失明)하여 혼자 걸을 수 없을 정도가 되었음을 묘사하고 있다. 바울을 만나기 이전에는 자칭 선지자라 하여 다른 사람에게 진리를 가르치고 갈길을 지시해 주는 일을 했지만 지금은 혼자서 걸을 수도 없어 인도자를 찾는 엘루마의 모습은 거짓 선지자의 상징적 모습이라 할 수 있다.

=====13:12
그렇게 된 것을 보고 믿으며 - 본 구절은 총독 바울이 예수를 영접하게 된 결정적인동기에 대한 설명이다. 엘루마가 소경된 사건이 총독 바울의 회심(回心)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만 그렇다고 회심을 유발시킨 전체 동기는 아니다. 즉 기적적인 사건이 총독 바울의 회심에 영향을 크게 준 것은 사실이나 그러나 여기에만 강조점을 둘 수 없다. 왜냐하면 그가 엘루마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바울 일행을 만나고자 했다는점은 바울의 가르침이나 그에 관한 이야기에 이미 호의적인 입장에서 관심을 두었다는 것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엘루마가 소경된 사건은 그가 회심하는 데 외형적 동기 부여의 기능을 갖고 있다. 주의 가르치심을 기이히 여기니라 - 여기서 '주의 가르치심'은 총독 바울이 엘루마의 저주를 목격하면서 받은 교훈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주의 일을 훼방하고 사기와 악행을 일삼아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거짓 선지자의 비참한 말로를 통해 하나님의 임재함과 눙력을 체험하게 되었을 것이다.

=====13:13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 - 박수 엘루마의 사건 이후 누가는 여기서부터 바울을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설정하고 있다. 그 이유는 누가의 관점에서, 바울이 엘루마와의 대결에서 승리하고 총독 서기오 바울을 기독교인으로 회심시킴으로써 선교 사역에 있어서 지도자격으로 부상된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 - 구브로 섬을 떠나 바울 일행이 두번째로 찾은 밤빌리아는 지중해 북단에 있는 소아시아의 남쯤 해안에 접한 지역이다. 해안의 길이가 120km이며 내륙쪽으로 폭이 48km 정도의 이 지역은 동편에는 길리기아, 서쪽에는 루기아, 북쪽에는 비시디아가 인접해 있다. 그리고 버가는 밤빌리아의 중심 도시로 해안에서 내륙쪽으로 13km정도에 위치해 있다. 바울은 돌아오는 길에서 다시 이곳을 들르게 된다(14:25). 이곳에서의 바울 일행의 선교 행적에 관한 언급은 없다. 아마 별다른 성과가 없었을 것이다. 요한은...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 예루살렘에서부터 바울과 바나바를 동행하여(12:25) 그들을 도우며 따라왔던(5절) 마가 요한은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지만 누가는 그 이유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그래서 요한이 떠난 이유에 대해서 학자에 따라 다음과 같이 추측이 다양하다. (1) 사전에 구브로까지만 동행하기로 함. (2) 사촌 바나바를 따라왔다가 바울이 선교의 주도권을 잡고 바나바가 소외된 데 대한 불만(Alexander), (3) 향수병, (4) 용기 부족으로 여행을 포기함(Lenski), (5) 바울이 풍토병에 걸려(고후12:7;갈 4:13, 14) 겁을 먹었음(Ramsay). 그러나 모두 다 설득력이 부족하다. 어쨌든 나중에 요한 때문에 바울과 바나바가 갈라지게 되는 점으로 보아 바울은 요한의 귀향으로 크게 실망하고 상심한 듯하다(15:37-39).

=====13:14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러 - 이곳은 안디옥 교회가 있는 수리아 안디옥과 구별되는곳으로(11:27) 해발 약 100m에 달하는 고원지대이다. 오늘날의 터키 중남부 지방의 얄바크(Yalvach) 근처의 폐허 지역을 말하며 당시에 이곳은 로마의 식민지였다. 바울은3차전도 여행때에도 이곳을 들르게 된다(18:23). 회당에 들어가 앉으니라 - 셀류쿠스 왕조 때 상당수의 유대인들이 거주했으므로 유대인들을 위한 회당이있었다. 따라서 바울 일행은 안식일에 회당에서 거행되는 예배에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구브로나 이곳에서도 바울 일행이 회당올 먼저 찾은것은 이방땅에서 동족에 대한 친밀감을 소중하게 생각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를통해 이방 선교 이전에 유대인에 대한 방문이 선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13:15
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읽은 후 - 회당의 예배 순서 중 한 부분이 소개되고 있다. 여기서 율법서는 모세 오경을 가리키며 선지자의 글은 예언서를 말한다. 1세기경의 회당 예배는 쉐마(신 6:4-9) 기도, 율법서와 예언서 낭독, 그리고 설교나 권면의 말씀과 축복의 순서로 진행되었던 것 같다. 성경이 회당에서 낭독되었던 전통은 바벧론 포로기 이후에 시작되었으며 B.C. 163년부터는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Antiochus Epiphanes)가 율법서 낭독을 금지하여 예언서만 낭독되었으나 마카비 혁명 때에 다시 율법서가 낭독되었다. 회당에서 성경은 히브리어로 낭독된 다음 다시 아람어나 코이네 헬라어로 통역되었다(Robertson). 회당장들이 사람을 보내어 - 예배순서상 권면의 말씀을 할 차례가 되었는데 회당장은 바울에게 사람을 보내어 설교할 수 있는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다. 당시 예배 중에 설교 또는 권면의 말씀을 담당할 대상을 회당장이 자유롭게 선정할 수 있었다. 따라서 랍비나 방문자에게 설교를 요청할 수 있었다. 그러나 회당장은 예배 전에 설교자를 선정해야지 예배 도중에는 할 수 없었다(Haenchen, Robertson). 그러나 여기서는 예외로 회당장이 예배 도중 바울에게 설교를 요청하게 되는데 아마도 바울과 바나바의 일행이 예배 시작과 더불어 회당에 들어왔기 때문에 미리 설교를 부탁할 수 없었던 것으로 추측할수 있다. 이를 통해서 블 때 회당장에 바울 일행에 관한 소문을 많이 듣고, 그들에 관해 깊은 관심을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권할말이 있거든 말하라 - 바울에게 설교를 요청하는 본문의 어투는 '만일'(* , 에이)이라는 단어로 시작되는 조건적 제안으로서 상대방에게 공손하게 요청하는 말이다. 그래서 공동번역에서는 이러한 의미를 최대한 살려 "두 분께서 혹 격려할 말씀이 있거든 이 회중에 한 말씀 해주셨으며 좋겠습니다"라고 번역하고 있다.

=====13:16
바울이 일어나 손짓하며 - 회당장의 제안에 대한 응답으로 바울은 곧바로 일어나 설교를 하기 시작한다. 본래 회당 안에서의 설교는 관습적으로 앉아서 하는데(눅 4:20) 바울은 일어서서 손짓까지 하면서 설교를 한다. 이러한 바울의 모습은 열정적인 웅변가로 보여지게 된다. 아마 누가는 바울을 헬라적인 연설가로 묘사하려 했을지도 모른다(Haenchen). 어쨌든 이러한 형태의 설교는 유대 회당의 전통과는 다른것이었음에 틀림없다. 이스라엘 사람들과 및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 - 여기서부터 바울의 설교가 시작된다. 서두에서 누가는 설교를 듣는 청중이 누구인지를 간접적으로 시사해 주고 있다. 이에 대해 학자에 따라 다음 두 가지로 해석한다. (1) 이스라엘로 언급된 사람들은 유대인들을 가리키는 말이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란 유대교에 입교한 이방인들을 말하는 것이다(Lenski, Robertson). (2) 이스라엘 사람들은 출생에 의한 유대인 및 유대교로 완전히 개종한 이방인들을 가리키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은 10:2의 '경건한 사람'과 같은 의미로서 유대교로 개종하지는 않았으나 회당 예배에 참석하는 이방인을 가리킨다(Haenchen, Bruce, Neil). 유대교로 완전히 개종한 자들은 이스라엘 벡성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졌으므로 이스라엘 사람에 포함된다. 따라서 (2)의 견해가 더 타당하다.

=====13:17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 - 여기서부터 22절까지의 내용은 이스라엘 역사에 대한 요약으로 신앙 고백적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설교의 형태는 7장에서 소개된 스데반의 설교와 그형식이 비슷하다. 그러나 바울의 설교는 스데반보다는 간략하다. 바울이 이스라엘을 구원시킨 하나님을 언급하면서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라고 말한 것은 아마도 이방인 청중을 의식하여 언급한 듯하다(Lenski). 즉 이방인들이 생각하는 신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경험한 출애굽의 하나님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이러한 형태의 호칭은 당시 일반적인 것으로 보이며 70인역(LXX)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어투였다(Laenchen). 우리 조상들을...백성을 높여 - 본절에서 '조상들'과 '그 백성'이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는지 아니면 다른 의미로 사용되었는지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히브리인들은 시문학에서는 병행 대구법(parallelism)을 사용해서 그 구절의 의미를 강조하거나 명확하게 하곤 했다. 만일 본절이 그러한 형식을 취했다면 두 용어는 같은 의미가 될 것이다. 그렇지 않고 두 용어가 다른 의미로 쓰여 역사적인 흐름을 차례로 설명하고 있다면 '조상들'은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 그리고 야곱의 12아들을 칭하는 의미이며 '족장들'로 번역되어야 할 것이다. 스데반의 설교 내용과 본절의 바울 설교를 비교해 볼 때 '족장들'로 해석하는 편이 무난하다. 큰 권능으로 - 에굽의 압제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킨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표현인 '큰 권능'은 70인역(LXX)역에서 영향받은 어투로(Robertson) 출 6:1, 6;신 5:15;시 136:12의 내용을 연상시킨다.

=====13:18
저희 소행을 참으시고 - 본 구절은 광야 40년간의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의 관계를 함축하고 있다. '참으시고'로 번역된 혤라어 본문은 사본에 따라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된다. (1) '에트로포포레센'(* ):공동번역 및 많은 영역 성경이 이 용어를 따라 '참으시고'로 번역했다. 이 용어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40년 동안 하나님께 많은 잘못을 범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참으신 사실을 부각시켜 준다. (2) '에트로포포레센'(* ):영역 성경 중 리빙 바이블(Living Bible)이 번역을 취하며 몇몇 대문자 사본 및 소문자 사본, 그리고 번역본들이 이 용어를 선택한다. 이는 '돌보다'는 의미로 신 1:31의 70인역(LXX)에 따른 것이다. 몇몇 학자들이 (해석을 지지하지만(Holtzmann, Zahn, Bruce)어떤 학자들은 이 두 가지 중 어느 하나만을 강조하지는 않는다(Haenchen, Marshall, 아사노 중이찌). 사본상으로 '참으시고'가 더 많은 지지를 얻고 있으나 의미상으로는 '돌보시고'가 더 어울 리기에 어느 하나를 강조하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신 1:31의 히브리어 본문은 70인역의 '돌보시다'란 의미보다 '참으시다'의 의미에 더 가깝다. 따라서 본 구절에서는7'에트로포포래센'(* )이 더 적합하다.

=====13:19
가나안 땅 일곱 족속을 멸하사 -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이스라엘 민족을 정착하게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요약한 본문은 신 7:1과 연관이 있다. 신 7:1에서 그 일곱 족속이 헷, 기르가스, 아모리, 가나안, 브리스. 히위, 여부스로 언급되어 있다. 그 땅을 기업으로 주시고 - '기업으로 주다'에 사용된 동사 '카타클레로노메오'(* )는 70인역(LXX)에서는 종종 나타나지만 신약성경에서는 본절에서만 언급된다. 그 뜻은 '몫을 따라 분배하다'란 의미로 유산 상속과도 관계가 있다. 본절에서 이 동사는 각 지파가 받을 분깃에 따라 가나안 땅을 분배받은 것에 대해 적용되었다. 약 사백 오십 년간 - 여기서 450년이라는 기간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계산한 것인지 이해하기가 매우 모호하다. 특히 사본에 따라 본 구절의 위치가 다르다. (1) 개역성경처럼 20절에 언급되는 '그후'란 표현 앞에 본구절을둔다(* ,A,B,C). 이 경우450년은 사사 시대 이전까지의 기간이다. (2) 20절의 '그후' 다음에 450년을 둘 때 애굽에서 탈출한 후 광야생활부터 사사 시대까지 포함하여 450년이 된다. 첫번째 견해를 취할 경우 애굽에서400년, 광야에서 40년, 가나안 정복 기간 10년을합친 450년을 뜻한다(Bauernfeind, Lenski, Bruce, Knowling, Weiss, 아사노 중이찌). 그러나 실제로 광야 40년과 사사 시대는 사무엘 이전까지 약 370여 년간 지속되었다. 그리고 사무엘이 사사로 앉으면서 활동한 기간이 다윗왕까지 이어지는 70여 년간으로 계산할 경우 450여년이 된다. 그런데 본문에서 450여 년은 이스라엘백성이 가나안 땅을 정복한 후 정착하여 왕을 세우기까지의 기간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해되므로 (2)를 따르는 편이 무난하다.

=====13:20
그 후에 - 앞절이 가나안 정복까지의 기간을 의미하므로 '그 후'란 가나안 정복 이후 사사 시대를 뜻한다. 사무엘 때까지 사사를 주셨더니 - 가나안 땅에 입성한 이후 이스라엘을 이끌어 갔던 지도자들을 요약하여 언급하고있다. 가나안 정복 후 사사들이 이스라엘을 다스렸다. 이 기간은 가나안 정복 전쟁(B.C. 1405)에서부터 사무엘이 그의 사역을 마치기까지(B.C. 1017) 약 400여 년이다.

=====13:21
그 후에 저희가 왕을 구하거늘 - 사사 시대가 끌나고 왕정 국가 시대가 언급되고 있다. 왕정 국가의 시작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요청에 의한 것으로서 사무엘이 너무 늙었다는 이유와 함께 다른 열방들의 왕권 통치에 대한 부러움예서 시작되었다(삼상 8:5). 사실 이러한 이스라엘백성들의 요구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을 거부하는 것이며 신정 시대(神政時代)를 폐지시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울을 사십년간 주셨다가 - 백성들의 요구를 하나님은 들어주셨으나 호 13:11에 의하면 하나님 자신이 분노하여 왕권을 허락했다고 언급되고 있다. 즉 왕권에 대한 요구는 부당한 것임을 말해 주고 있다. 사울의 통치는 40년간(B.C. 1050-1010) 계속 되었는데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패함과 동시에 그와 그의 아들들이 죽음으로써 그의 통치는 끝나게 된다(삼상 31:1-6). 본 구절에서 언급되는 사울의통치 기간 40년은 성경 어느 곳에서도 언급되지 않으므로 다만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의 추측에 의존한 것으로 보인다(Haenchen, Lenski).

=====13:22
폐(廢)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 바울은 사울의 죽음과 다윗의 등극을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으로 묘사하고 있다. 즉 사울왕을 '폐하시고'라는 말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표현(호 13:11)임을 보여준다. 이는 왕정국가가 성립되었어도 하나님 개입이 계속 되었음을 말해 준다. 아마도 바울은 18절의 표현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과 불신앙에도 불구하고 끝없이 참고 보살피시는 하나님을 묘사하려는 듯하다.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 삼상 13:14과 시 89:20을 인용한 것으로 보이는 본문은 이스라엘의 왕정(王政)을 인정한다는 의미를 간접적으로 포함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다윗이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았다는 점은 왕가(王家) 의 정통성을 신적인 권위로 세우고자 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열망을 대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마음에 합한'이라는 표현은 다윗이 하나님에 의해 계획된 구속사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할 인물임을 부각시킨다.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 다윗에게 거는 하나님의 기대는 23절에서 언급되는 메시야탄생의 씨앗이 될 것이라는 점이다. 이는 결국 다윗 선택이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구속사(救贖史)에 속한 것임을 의미한다. 따라서 바울은 이스라엘 역사 속에 나타난 구속사를 이스라엘 백성이 대망하던 메시야에게로 초점을 맞추어 진행시키고 있다.

=====13:23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 다윗에게 주어진 약속은 삼하 7:12에서 볼 수 있다. 이약속은 아브라함의 경우에서처럼 언약을 맺는 형식을(창 15:1-21) 취하지 않고 선지자 나단을 통해서 주어졌다. 그렇지만 언약 맺음에 있어서 수반되는 축복과 저주, 충성과 복종의 조항이 언급되므로 삼하 7장을 '다윗 언약의 장'이라 부른다. 아무튼 바울은 청중들에게 하나님의 구속사를 설명하면서 다윗 언약을 상기시켜 메시야가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왕통을 이어받았음을 증명하였다.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 - 이 말은 다윗에게 약속한 하나님의 언약이 예수안에서 성취되었음에 대한 표현이다. 그런데 본 구절은 약간의 오해가 발생될 수 있다. 즉 본절의 내용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여 온 인류를 위한 구원자로서 예수를 이해하는 데 걸림돌이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방인의 구원을 위한 소명자로서의 바울과도 모순되는 것처럼 이해된다. 그러나 바울의 이러한 진술은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메시야 사상에 입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유대인들은, 다윗에게 약속한 메시야는 다윗 왕국을 강건하게 복원시키는 정치적 인물임을 믿었다(삼하 7:12-16). 그러나 구약성경에는 메시야에 대해 다앙한 예언이 있다. 즉 수난의 '종'(사 42:1-7;49:1-7;50:4-9;52:13-53)또는 '인자'(단 7:13), '왕'으로서의 메시야와 '대제사장'으로서의 메시야(슥 4:11-14) 등이 나타난다. 이처럼 구약성경은 한 메시야에게 다양한 상(像)이 복합적으로 존재함을 말해주고 있으나 유대인들은 굳이 일부분만을 취하여 메시야를 정치적인 즉 이스라엘에 국한된 메시야로 한정시켜 생각했다. 그러나 바울이 이방인의 구원을 말하면서도 예수를 이스라엘의 구주로 말한 것은 유대인들의 배타적인 메시야 사상을 말하기보다는 예수가 이스라엘의 전 역사를 통해 예언되었고 하나님에 의해 약속된 구주임을 권위있게 증언하고자 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본 구절은 예수를 이스라엘의 구주로 국한시키는 말로서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13:24
요한이 먼저 회개의 세례를 - 바울은 예수의 메시야됨에 대한 권위를 강조하기 위해 세례 요한을 언급하고 있다. 바울이 세례 요한을 예수의 권위를 보증하는 데 이용한 것은 당시 사람들이 세례 요한을 선지자로 믿고 있었으며 이러한 세례 요한의 회개의 세례가 유대인들 사이에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다(18:25;눅 3:7-15). 따라서 바울은 세례 요한이 예수에 대해 증거했다는 사실을 근거로 청중들에게 이러한 세례 요한의 활동을 회상시켜 그의 말에서 예수의 권위를 찾고자 했다. 그러나 그는 예수가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사실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아마 그는 이 사실이 예수의 권위를 높이는 데 도움이 안 될 것이라고 판단하였을 것이다. =====13:25
그 달려갈 길을 마칠 때에 - 이 말은 딤후 4:7에서도 나오는데 헬라적 어투로서 바울의 독특한 어법이다(Haenchen). 본 구절은 요한이 예수에 대한 증거 사역을 다하였을 때를 의미한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 바울이 세례 요한의 이야기를 언급한 의도는 이 표현 속에 함축되어 있다. 즉 요한 자신이 메시야임을 직접적으로 거부했다는 사실을 밝히는 본문은 눅 3:15, 16과 요 1:19-27의 내용으로 당시 세례 요한을 메시야로 믿었던 유대인들이 많았음을 반증함과 동시에 요한이 대중들로부터 대단한 신뢰와 인기를 얻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바울은 유대인들이 신뢰하는 요한이 직접 자신이 메시야가 아니라 예수가 참 메시야이며 따라서 세례 요한 자신은 그 증언을 위한 사명자에 불과함을 분명히 밝혔다고 주장함으로써 예수를 메시야로 확증하고자 한다.

=====13:26
형제들 - 청중들을 부르는 이 말은 회당 안에 모인 유대인들과 개종한 이방인들 및회당 예배에 참석한 이방인들 모두를 포함하는 말로 이해되어야 한다. 바울은 청중을 다시 부름으로써 주위를 환기시키면서 자신의 설교를 본론으로 이끌었다. 아브라함의 후예 - 이 말은 혈통적인 유대인들을 제한적으로 지칭하는 표현이지만 여기서는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도 의미한다. 이 용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16절 주석을 참조하라. 너희 중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 - 본 구절은 개종하지는 않았으나 회당 예배에 참석하는 이방인들로 이해된다. 이에 대해서도 16절 주석을 참조하라. 이 구원의 말씀을 우리에게 보내셨거늘 - 본 구절을 헬라어 본문에 따라 직역하면 '이 구원의 말쏨이 우리에개 보내졌거늘'이란 의미가 된다. 개역성경은 주어를 하나님으로 전제해서 보내신 주체(主體)인 하나님을 강조했으나 헬라어 본문에는 '구원의 말씀'이 강조되었다. 본절부터가 바울의 설교에 있어서' 본론 부분에 해당하므로 당연히 '구원의 말씀이 강조되어야 한다. 한편 '우리에게'란 표현은 어떤 사본에서는 '너희에게'로 언급되어 있다. 본절의 구원의 말쏨이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차별없이 주어졌음을 볼 때 '우리에게'가 무난하다.

=====13:27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저희 관원들 - 바울은 예수를 처형했던 주범을 언급하고있는데 이것은 누가의 견해와 동일하다. 왜냐하면 누가는 그의 복음서에서 예수를 처형한 장본인들이 이스라엘 종교.정치 지도자들임을 진술하고 있기 때문이다(눅 23:1-25). 예수와 및 안식일마다 외우는 바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하므로 - 15절에서 언급한 바 있듯이 그들은 예배때마다 예언서를 읽지만 예언서의 올바른 뜻을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예수를 구셰주로 이해하지 못하였다. 이 같은 바울의 지적은 유대 지도자들의 무지함을 강조하며 또한 예수의 처형에 대한 책임이 그들에게 있음을 밝히는 것이다. 응하게 하였도다 - 결국 예수의 불법적인 처형도 선지자들의 예언에서 이미 제시된 하나님의 뜻이었음을 밝히는 바울의 설교는 3:18에서 언급되는 베드로의 설교와 일치되고있다. 이렇게 볼 때 베드로와 바울은 신학적으로 동일성을 갖고 있었던 듯하다. 그렇지만 이 두 설교가 누가에 의해 기록되었다는 점에서 누가 자신의 신학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Haenchen). 누가는 베드로의 설교에서나 바울의 설교에서 같은 내용을 언급하여 초대 교회 시대에 있어서 케리그마가 어느 지역에서나 동일했음을 보여준다.

=====13:28
죽일 죄를 하나도 채지 못하였으나 - 본 구절은 예수의 무죄함을 강조한다. 이는 눅 23:14, 15에서 언급된 빌라도의 무죄 선언을 연상하게 한다. 그런데 혹자는 본절의 무죄 선언과 눅 23:14, 15에서의 무죄 선언의 주체를 구분하고있다(Haenchen). 즉 그는 눅 23:14, 15에서는 빌라도가 무죄를 선언한 것이고 본절에서는 유대인들이 예수의 무죄함을 입증한 것이라고 본다. 이처럼 죄가 없으신 예수에 대한 무죄 선언은 재판 과정에서나 신학적으로나 정당한 것으로 인정될 수밖에 없었다.

=====13:29
말씀을 다 응하게 한 것이라 - 바울은 예수의 재판과 처형을 이미 성경에 예언된 바의 성취로 이해하며 예수 사건을 전체 구속사의 핵심으로 바라보고 있다. 나무에서 내려다가 무덤에 두었으나 - 예수의 십자가상의 죽음을 재확인하면서 부활 이야기를 준비하고 있다. 즉 장사지내고 무덤에 돌어갔다는 점이 예수의 죽음을 분명하게 증명해 주는 것이라고 바울은 믿는 듯하다. 여기서 '십자가'라는 말 대신 '나무'라고 언급한 것은 신 21:23에서 언급된 예언과 일치시키려는 바울의 의도로 보여진다. 한편 바울은 십자가 사건을 복음서처럼 자세하게 설명하지않았다. 이는 바울의 관심이 예수의 완전한 죽음 그리고 그 죽음의 구속사적 의의를 간략하게 설명하는 데 있음을 보여준다.

=====13:30
하나님이...저를 살리신지라 - 부활신앙에 대한 고백은 초대 교회에서 이미 공통된교리로 고정된 자리를 잡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3:15;4:10). 그리고 예수를 부활하게 한 주체가 하나님이라는 고백은 예수에 대한 유대인들의 정죄와 처형을 하나님께서 불법적이고 부당한 것으로 보증하셨음을 의미한다. 나아가서 예수의 말과 행동이 하나님에게 정당한 것으로 용납되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13:31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에 함께 올라간 사람들 - 본 구절은 갈릴리에서부터 예수와 동행했던 사람들을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지는 불명확하다. 복음서에서도 증언하는 부활 목격자는 매우 다양하다. 즉 마태는 예수의 부활 현현(顯現)의 장소를 갈릴리로 제한시켜 언급하고 있으며(마 28:7, 10, 16) 마가 역시 마태와 동일하다. 요한은 예루살렘과 갈릴리에 각각 부활 현현이 있었던 것으로 언급하고 있다(요 20장;21:2, 14). 또한 누가는 엠마오 도상에서 두 제자가 예수의 부활 현현을 목격했으며(눅 24:18) 예루살렘에 있던 열 한사도와 그 외의 추종자들도 목격했다고 기록했다(눅 24:33). 이와 같이 각 복음서마다 부활 현현의 장소와 대상이 다양하게 언급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바울도 고전 15:6에서는 열 두사도와 5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예수의 부활을 목격했다고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성경 전반에 걸친 부활 현현에 대한 증언을 토대로 할 때 본문의 의미는 불특정한 같릴리 출신인들을 지칭한다고 볼 수 있다. 또 한편으로는 10:39-41에 나타난 베드로의 설교처럼 사도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Haenchen, Bruce). 그러나 본문에서 바울이 자신의 다메섹 경험을(9:1-8) 언급하고 있지 않으며 고전 15:6에서 언급한 500명의 목격에 관한 언급도 없다는 점에서 본문의 내용은 저자인 누가의 관점에서 묘사된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복음에서 언급된 바처럼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을 중심으로 한 갈릴리 출신의 예수 추종자들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여러 날 - 여기서 언급한 부활 현현의 기간은 1:3에서 언급된 400일간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된다(Haenchen, Robertson, Beyer). 백성 앞에 그의 증인이라 - 부활한 예수를 목격한 사람들이 부활의 산증인임을 언급하는데 바울 자신이 그 증언자에 포함되는 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32절에서 본절의 증인들과 구분하여 '우리도'라고 바울 자신과 바나바를 언급한 점으로 보아 사도들을 중심으로 한 최초의 목격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한다(10:39-41).

=====13:32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 - 이 약속은 23절에서 언급한 하나님의 약속을 의미한다. 바울은 롬 4:13과 갈 3:16에서도 같은 형태의 진술을 하여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오셔서 사역했음을 밝혔다. 따라서 바울은 자신의 복음이 유대인들에게 이단적인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믿는 그 하나님의 약속이며 그 약속이 성취된 소식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예수에 대한 유대인들의 오해와 무지를 벗겨주고자 노력했다.

=====13:33
우리 자녀들에게 - 몇몇 사본들에는(* ,A,B,C,D 등) 약속이 성취된 세대가 '우리의자녀들'로 언급되었다. 그러나 다른 사본에서는(C,E,P 등) '그들의 자녀된 우리에게'로 언급되었다. 본절은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된 세대에 대한 것이므로 '우리 자녀들에게'란 표현은 적합하지 않다. 바울은 지금 예수께서 활동하시던 당대의 세대를 지칭하고 있다. 따라서 본 구절은 대부분의 영역처럼 '그들의 자녀된 우리에게'로 해석되는 것이 무난하다. 너는 내 아들이라 - 시 2:7을 인용한 본문은 본래 이스라엘 사회에서 왕의 대관식(戴冠式)때 사용되던 시로서 이스라엘 왕이 기름부음을 받을 때 그 왕이 하나님으로부터 다시 태어나 하나님과 부자(父子)의관계를 맺는다는 의미이다. 바울이 이 시편의말씀을 예수에게 적용시킨 것은 바울의 독특한 인용이 아니다. 사실 복음서에서도(막 1:11; 눅 3:22) 예수가 메시야로서 성령의 능력을 받을때 본문과 갈은 내용을 인용하고있다(Bruce). 그리고 히브리서에서도 시 2:7을 예수에 대해 적용시켜 인용하였다(히 1:5). 이는 시 2:7이 비록 왕의 대관식에서 많이 사용된 구절일지라도 유대인의 전통에서 그 구절을 메시야와 연관시켰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초대 교회는 예수께서 다윗의 가문에서 나온 왕권적인 권리를 가진 메시야로서 하나님께 세움을 받았다고 믿었던 것이다.

=====13:34
다윗의 거룩하고 미쁜 은사 - 바울은 예수가 죽어서 썩지 않고 부활할 것이라는 구약적 근거를 다시 한번 강조하면서 다윗의 가문에서 부활할 메시야가 나올 것이라는 구약적 증거로 칠십인(LXX)역의 이사야 55:3을 들고 있다. 이러한 신학적 의도는 베드로의 설교에서도 나타나고 있다(2:27). 여기서 바울은 기독교를 유대교 전통과 분리된 이단이 아니라 유대교가 필연적으로 가야 할 길임을 강변하고있다. 즉 본절은 당시 전통적인 유대교 앞에 소수종교로서 기독교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는 바울의 끈질긴 설득이다.

=====13:35
또 다른 편에 - 이 말은 33절에서 언급한 들째 편(시 2:7)과 구분되는 시편을 뜻한다. 여기서 바울은 시 16:10 근거로 구약적인 부활 사상을 다시 언급하여 예수의 부활에 대한 증거를 더욱 심도있게 진술하고 있다. =====13:36
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좇아 섬기다가 - 바울은 22절에서 언급했던 다윗을 다시 언급하여 예수의 부활과 다윗의 죽음을 대조시켜 예수의 부활 사건을 강조했다. 먼저 바울은 육대인들이 갖고 있는 다윗에 대한 인상을 재확인하고있다. 즉 22절에서는 다윗을,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세움을 받았으며 또한 하나님에게 용납된 자로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낼 사람으로 언급하였는데 여기서도 역시 다윗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았던 인물임을 말하여 다윗을 높이고있다. 그렇지만 바울은 곧이어 다윗의 죽움과 썩어짐을 예수의 부활과 대조시켜 썩지 않음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계속 유효했음을 강조한다. 한편 '섬기다'란 동사의 목적어로 사용된 '하나님의 뜻을 좇아'란 구절은 전치사 없이 여격으로 사용되었다. 그래서 본 구절은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라고 번역될 수 있다(Robertson, Alford, Haenchen). 이 해석을 취할 경우 본 구절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다윗이 그 시대에 자기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일을 수행했던 사람'임을 의미한다. 여기서 바울은 다윗의 업적과 죽음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었음을 22절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 그 조상들과 함께 묻혀 썩음을 당하였으되. 비록 다윗은 하나님으로부터 썩음을당하지 않으리라는 약속을 받았으며 하나님에의해 맡겨진 사명을 잘 수행했을지라도 죽었다. 그렇다면 그에게 주어진 약속은 성취의 여지를 남겨두고있다. 바울은 이 사실을 예수와 연관지어 35절에 이어 다시 한번 더 언급함으로써예수가 구약에 약속된대로 부활하셨음을 강조했다.

=====13:37
하나님의 살리신 이 - 부활하신 예수를 가리키는 본 구절은 죽음으로부터 예수를 부활시킨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다윗의 유한한 생명과 예수의 영원한 생명을 대조시켜 하나님의 궁극적 뜻이 예수를 통해서 성취됨을 주장한다.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였으나 - 이 말은 36절의 '썩음을 당하였으되'라는 말과 반대되는 표현으로 다윗과 예수를 극명하게 구분시키는 것이다. 바울은 유대교 전통에 붙잡혀 있는 유대인들에게 다윗보다 예수가 위대함을 논증해 보임으로써 예수에 대한 유대인들의 선입관이나 잘못된 의식을 바꾸고자 했던 것같다.

=====13:38
이 사람을 힘 입어 - 이 말은 문자적으로 '이 사람으로 말미암아'를 의미하여 어떤결과의 유래(由來)를 나타낸다. 그것은 '죄사함의 선언'을 한 이가 예수임을 의미한다. 죄사함 - 바울이 예수의 부활을 '죄사함'과 곧바로 연결시킨 것은 약간 논리의 비약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예수의 부활이 어떻게 해서 죄사함의 근거가 되는 지에 대해서 전혀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가가 자세한 설명을 생략한것 같다. 한편 바울이 '죄사함'을 복음의 핵심으로 선포한 것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정죄'의 문제가 신앙의 억압적 요소로 크게 작용하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유대인들은 장로들의 유전(遺傳)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여야 했으며 그 중 하나라도 범하게 되면 죄인으로 판명되므로 죄문제로 인해 항상 억압당하는 신앙 생활을 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의 예수에 의한 죄사함의 선포는 바리새인이었던 자신이 예수를 만남으로써 체험했던 사실에 대한 것임과 동시에 초대교회의 교리의 핵심이었다.

=====13:39
모세의 율법으로...의롭다 하심을 - 본 구절은 바울 서신과 일치된 사상을 전달하고 있으므로 본장에 언급된 바울의 설교를 본서의 저자인 누가의 작품으로 평가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본 설교가 누가의 필치에 의해 다듬어졌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으나 '부활'과 '의의선포'같은 내용은 바울의 독특한 신학을 형성하는 골격이 되므로 전체적인 내용은 분명히 설교자 바울의 것임에 틀림없다. 바울은 의롭게 되는일에 온갖 정성을 다 바쳤던 유대인듸의 삶을 지적하면서 의롭게 되는 새로운 길을 제시하고있다. 이러한 바울의 설교에는 (1) 사람이 율법으로는 결코 의롭게 될 수 없다는 사실과 (2) 예수를 통해서만 의롭게 될 수 있다는 사실이 강하게 암시되어 있다.

=====13:40
너희에게 미칠까 삼가라 - 바울은 자신의 설교를 마무리 지으면서 마지막 경고를 주기위해 41절에서 합 1:5를 인용하였다. 여기서 언급된 '삼가라'는 말은 41절의 인용 구절 중'멸시하는'과 연관되어 '멸시하는 자가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아니면 '놀라고 망하라'는 표현과 연관되어 '놀라고 망할까 조심하라'는 의미로 해석되어야 할지 확정할 수 없다.

=====13:41
일렀으되 - 이 말은 앞절에서 언급했듯이 '선지자들'이 한 말을 다시 상기시키는 것으로 예언서에서 발췌된 것임을 암시해 주고 있다. 여기서 인용되는 구절은 합 1:5로서 70인역을 약간 변형시켜 사용되었다. 히브리 본문에서 이 구절은 갈대아 사람의 등장에 대한 예언과 관련되어 있다(Haenchen). 그러나 바울은 이문구를 인용하여 유대인들이 배타적으로 우월감에 빠진 선민의식(選民意識)으로 인해 버림받고 오히려 이방인들이 구원의 길로 인도될 것임을 예고하였다.

=====13:42
저희가 나갈새 - 본 구절은 바울이 설교를 마치고 회당에서 퇴장하는 장면에 대한묘사다. 문맥상 바울과 바나바가 설교 후 곧바로 퇴장한 것으로 묘사되어 있으나 예배 도중에 바울과 바나바가 퇴장했을 가능성은 희밖하다. 바울과 바나바가 유대교 전통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두 사람은 예배를 마치기 전, 즉 자신의 설교만 마치고 퇴장한 것(Meyer, Knowling)이 아니라 예배를 마친 다음 다른 사람들과 함께 퇴장했으나 누가가 그 과정을 생략하고 간결하게 표현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Haenchen). 사람들이 청하되 - 본 구절은 다음 두 가지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1) 47절부터 시작되는 다음 안식일의 설교가 있게 된 배경을 설명해 주고 있다. (2) 바울의 설교가 유대인들로부터 매우 고무적인 반응을 얻었음을 암시한다. 이는 유대교인들 중에서 기독교로의 개종이 일어나고 있음을 나타내 준다.

=====13:43
폐회한 후에 - 예배의 종료(終了)를 알리는 본문은 앞절에서 언급된 폐회의 암시와부자연스럽게 연결되고 있다. 즉 앞절에서 이미 예배의 종료가 함축적으로 언급되었다면 또다시언급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앞절에서 바울과 바나바가 퇴장할 때가 예배 도중이었을것으로 추측될 수 있다. 그러나 바울과 바나바가 도중에 퇴장했을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점에서(42절 주석) 본절은 예배 종료를 알리는 말이라기보다는 본절에서 언급되는 사건이 예배가 패회된 이후에 있었음을 알리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 - 16절주석 참조. 바울과 바나바를 좇으니 - 본 구절은 42절에서 언급된 바울의 설교를 다시 듣기로 간청한 것과 맞물려 이방 지역의 유대인 공둥체에서 기독교의 새로은 공동체가 발생하게 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13:44
온 성이 거의 다...모이니 - 이 같은 묘사는 바울의 설교가 성공적이었음을 강조하기위한 극적인 표현이다. 왜냐하면 당시 온 성의 사람들이 거의 다 모일 수 있을 정도의 회당이 있었는지에 대해 의문이 가기 때문이다(Bauernfeind). 누가가 이처럼 과장법을 사용한 것은 바울을 성공적인 설교가로 묘사하고자 했기 때문일 것이다(Haenchen). 하여튼 본절에서 누가가 진술하고자 하는 요지는 바울의 설교가 성공적이어서 비시디아 안디옥 온 성이 떠들썩했으며 더욱 많은 무리가 바울의 설교를 듣기 위해 회당으로 몰려왔다는 사실이다.

=====13:45
유대인들이 - 이들은 회당의 구성원들로 바리새파의 유전을 철저히 추종하는 유대인들로 추정된다. 이들은 회당의 핵심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바울의 설교가 자기 공동체에 심각한 도전이 된다고 느꼈기 때문에 바울의 설교에 대해 무조건 비방하는 자세를 취했을 것이다. 따라서 유대인들의 시기와 비방은 새로이 형성되는 기독교 공동체가 유대교 공동체를 위협하고 있다는 위기감에서 나온 것으로 볼 수있다.

=====13:46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 유대인들의 비방에 대해 바울과 바나바가 응답함에 있어서 누가는 바울과 바나바의 진술을 권위있게 묘사하기 위해 '담대히 말하여'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즉 이 말의 헬라어 '파르레시아사메노이(* )는 '자유릅게 말하다' 또는 '숨김없이 확신을 가지고 말하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즉 누가는 바울과 바나바의 대답이 매우 확신에 찬 것으로 청중을 설득하는 호소력이 있다는 암시를 주고 있다.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 이 말은 유대인들이 복음을 무가치한 것으로 여겼음을 의미한다. 이는 유대인들 자신이 자처(自處)한 것이므로 복음을 전해 받지 못하는 책임이 그들 자신에게 있음을 가리킨다. 이러한 언급은 바울 자신도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이를 통해서 그는 비방하는 자들이 자신을 반(反) 유대적인 교리를 전파하는 자로 오해하지 않기를 바랬을 것이다.

=====13:47
주께서...명하시되 - 바울은 다시 자신의 이방 선교의 정당성을 구약성경을 인용하여 주장하고 있다. 동시에 자신의 사역이 하나님의 명령에 의한 것임을 선포하여 그 사역의 신적권위를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자신이 선포하는 내용도 인간의 지혜나 마귀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그토록 섬기던 바로 그 하나님으로부터 나왔으므로 자신을 비방하는 자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자라는 암시를 주고 있다. 내가...구원하게 하리라 - 이 인용구는 사 42:6;49:6에서 발췌된 것이다. 이 이사야서의 말씀은 메시야에 대한 예언으로서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바울과 바나바예게 하신 말씀은 아니다. 하지만 바울에 대해 하나님께서 아나니아에게 예언하신 내용과 연관지어 볼 때(9:15) 이는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에게 적절히 적용될 수 있다 하겠다. 즉 바울은 사 42:6;49:6에 예언된 내용을 전파하는 자로 자신들이 선택되었음을 증명하기 위해 그 구절을 인용했을 것이다.

=====13:48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 여기서 누가는 바울과 바나바의 설교를 들은 이방인들의 기쁨을 강조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는 45절에서 언급된 유대인들의 반응과는 매우 대조되고있다. 본절은 이방인들이 바울과 바나바의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음을 보다 적극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작정된 자 - '작정(作定)된'으로 번역된 '테탁메노이'(* )는 완료 수동태 분사로서 '작정'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 이전에 이루어졌음을 암시한다. 왜냐하면 과거 완료는 과거를 시점으로 어떤 사건이 그 과거 이전에 완료되어 그 시점까지 영향을 미칠 때 사용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작정은 과거의 한 사건으로 끝나버리지않고 모든 세대에게 영향을 미치게 된다.

=====13:49
주위 말씀이 퍼지니라 - '퍼지니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에페레토'(* )는 미완료 과거로 '게속 퍼지고 있었다'를 의미한다. 이는 주의 말씀이 점점 널리 퍼져가는것을 묘사한다. 그런데 누가는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믿게 된 자들의 부류에 대해서는 언급하지않고 있다. 아마 이 부류에는 유대인뿐 아니라 많은 이방인들이 포함되었을 것이다.

=====13:50
경건한 귀부인들 - 유대인들은 바울과 바나바 일행의 설교가 육대교 회당 중심의 공동체에 위협을 주고 았다고 판단되자 그들을 추방하기 위해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영향력있는 인물들을 이용했다. 여기서 언급된 귀부인들은 유대교로 개종하지는 않았으나 회당 예배에 참석하는 이방 여인들로서 사회적 지위가 높거나 영향력 있는 사람들로 짐작된다. 그 성내 유력자들 - 이들은 앞에 언급된 '경건한 귀부인들'의 남편(William Neil) 일 수 있으며 아니면 단순히 그 성읍에서 지도적인 인물로서 육대인들에게 호의적인 사람들일 것이다.

=====13:51
발에 티끌을 떨어버리고 - 추방당하는 바울과 바나바는 제자들에게 명령했던 예수의말씀(마 10:14)을 그대로 실천했다. 이러한 풍속은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의 종교적 행위로서 이방인들의 지역으로부터 나올 때 행한다. 이고니온 -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으로부터 추방당하여 그곳에서 동쪽으로 약 120km정도의 거리에 위치한 이고니온(Iconium)으로 떠나게 된다. 이 곳 역시 B.C. 25년경 갈라디아가 로마의 한 도(道)로 복속될 때 로마에 합병되었다(F.F. Bruce).

=====13:52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 여기서 언급된 제자들은 바울과 바나바의 전도로 기독교인이 된 비시디아 안디옥의 거주자들을 가리킨다. 누가는 그들에게 '기쁨과 성령이 충만'했다는 말로서 그 지역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들과 동일한 성령을 받았음을 보여줌과 동시에(2:4;4:31;10:44) 기독교 공동체가 융성해 갔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



교회사적 의미에서 바울의 선교 여행을 음미해 볼 때 그 중요성은 막중하다고 하겠
다. 그것은 이전까지 예루살렘과 사도 중심적인 유대교적 기독교에서 환골 탈태(換骨
奪胎)하여 전세계에로 향한 범민족적인 기독교로 전환하게 된 분기점을 바울의 선교
여행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바울의 제1차 이방 선교 여행은 이방인의 세속
사를 향한 하나님의 구속사 진입의 제 일보에 해당하는 이정표로서, 그 파급 효과는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다. 따라서 당시 동방의 도시 안디옥(시리아)에서 별 주목을 받
지 못한 성도들의 거룩한 열심(holy zeal)은 훗날 세계사의 판도를 뒤바꾸어 놓는 기
폭제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참고적으로 바울의 제1차 전도 여행 경로를 도표화하면
다음과 같다.
여기서 우리는 겨자 씨와 같은 복음의 생명력과 성장력을 다시금 확인하는 바, 그것
은 필경 하나님의 구속사가 지니는 세속의 보편사에 대한 우위를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이러한 기독교적 역사관을 이해하는 데 있어 바울의 선교 여행은 그 실마리를
제공해 주고 있다. 이러한 점을 염두해 두면서 본 장 강해에서는 바울의 선교 여행의
전모를 살펴보기로 하자.
(1) 바울의 선교에 나타난 방법들. 당시 로마 제국 내에 존재했던 무수한 종교들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던 기독교가 오늘날 세계적인 종교로 성장하기까지는 많은 사람들
의 숨은 헌신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 중에서 바울의 이방 선교는 그 방향성을 정
하는데 결정적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하겠다. 또한 그의 선교 여행에서 주로했던 선교
방법은 오늘날의 선교학에서도 변할 수 없는 원칙으로 자리잡고 있다.
즉 본장에서 사도 바울이 이방 선교를 함에 있어 가장 큰 비중을 두었던 것은 말씀
(12,16-47절)과 이적(11절)을 들 수 있다. 이 방법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생애 기
간동안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데 주로 사용하셨던 수단으로서, 어쩌면 예수를 구
주로 전도하는 임무를 부여받은 사도로서 바울이 말씀과 이적을 선교의 방편으로 이용
한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가) 말씀(16-47절). 이것은 주로 회당에서(14절) 사용된 선교의 방편으로서 사실
말씀 전파는 기독교 진리를 가장 극명하게 설명해 줄 수 있는 본질적인 방법이다. 비
록 이적 역시 선교의 한 방편으로 채택되고 있기는 하지만, 이것 역시 말씀 전파에 동
원되는 부차적인 것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바울이 자신의 이방 선교에
있어서 말씀 전파를 가장 중요하게 취했던 사실은 오늘날 비복음적 말씀의 난무(亂舞)
와 비성격적 수단의 무차별적 유입이라는 커다란 세속적 파도에 완전 노출되어 있는
한국 교회에 중요한 귀감이 된다.
(나) 이적. 성경에서 축귀(逐鬼)나 병고침과 같은 이적들은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실현의 가시적 현상으로 동원되고 있다. 본장에서 나타나는 이적 또한 이와 같은 맥락
에서 이해할 수 있다. 예컨대 총독 서기오 바울로 하여금 복음을 영접하는 데 가장 큰
장애가 된 것은 유대인 거짓 선지자였다(6절). 이 유대인 거짓 선지자는 사단의 직접
적인 사주를 받은 사단의 자식이라고 할 수 있거니와 하나님의 자녀인 사도 바울은 이
사단의 자식을 소경되게 하였고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현존적 임재의 표시라고 할 수
있다. 바울의 이적이 복음 전파에 가장 충실하게 기여했던 한 결과로 총독 서기오 바
울이 복음을 영접한 것을 들 수 있을 것이다.
(2) 바울의 복음 전파의 결과들. 본 항목에서 다루고자 하는 내용들은 본서에서 계
속 반복되는 현상들로서 바울의 선교에 있어서 필연적으로 수반된 결과들이었다. 즉
이방인들은 복음을 감격적으로 수용하는 한편 유대인들은 배타적으로 시기하는 상반되
는 반응이 본장에 두드러진다(45,48절). 이것은 예수의 십자가를 대신 진 이방인 구레
네 시몬과 그를 십자가에 못박도록 했던 유대인들의 대조된 반응과 동일한 연장선상에
서 이해될 수 있다. 이처럼 유대인들의 복음 배척과 이방인의 복음 영접이라는 상반
현상이 수차에 걸쳐 반복된 사실은 사도 바울로 하여금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을 받았
다는 소명을(15:7) 더욱더 강하게 확신하게 해주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울의 선교에
대한 전모(全貌)는 무리들에게 두 가지 역사 이해를 제공해 준다.
첫째, 선교의 방법과 관련해서 우리는 기독교인의 사회에 대한 접근 방법에 대해 생
각해 볼 수 있다. 예수의 교훈처럼 이기적 자아와 온갖 우상으로 치부된 세상에 대한
성도들의 접근은 오직 말씀과 여기에 근거한 하나님 나라의 증거에 있다. 복음의 능력
은 비록 겨자 씨와 같이 작아서 큰 위력을 발휘하지 못나는 것 같지만 그 생명력 때문
에 결국은 승리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바울이 이방인에게 뿌렸던 복음의 씨앗이 성장
하여 오늘날과 같은 거대한 기독교가 탄생했다는 사실에서 증명된다. 따라서 세상 속
에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가장 큰 무기는 복음뿐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둘째, 선교의 결과와 관련해서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遺棄)가 뚜렷하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유대인의 시기와 이방인의 수용이라는 공식은 지금도 동일하게 반복되는 현상
으로서, 복음의 수납은 은혜로서, 그리고 복음의 배척은 저주로서 이해될 수 있다. 따
라서 구원을 받은 성도들은 아직도 사단의 영향아래 신음하고 있는 약속의 자녀들에게
구원의 메시지를 열심히 전파해야 함이 마땅할 것이다.
한편 본장의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첫째 단락(1-3절)은 제1차 전도 여행
의 출발을 다룬 내용이며 둘째 단락(4-12절)은 구브로에서의 사역을, 그리고 셋째 단
락(13-52)은 소아시아 지방에서의 선교를 다룬 내용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본장의 내
용을 통해 바울이 이방 선교의 주역으로 활동함을 알 수 있다. 1장 강해에서 언급한
바거니와 복음 사역의 주요 등장 인물을 중심으로 본서를 구분할 때 1-7장은 베드로
가, 8-12장은 베드로와 바울이, 13-28장은 바울이 복음 사역의 주역으로 묘사되고 있
거니와 본장부터 전개되는 마지막 대문단(13-28장)은 이른바 '바울 행전'이라고 불린
다. 또한 본서를 지리 중심으로 구분할 때 바울의 제1차 전도 여행이 시작되는 본장부
터는 복음 전도 활동의 무대가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이방 지역으로 확대되는 획기적인
양상을 띠게 된다.

1. 선교의 전초 기지가 된 안디옥 교회(13:1-3)
예루살렘 교회 이외에 이방 지역에 최초로 설립한 교회는 안디옥 교회이다. 안디옥
교회는 복음의 무차별성에 소극적이었던 예루살렘 교회와 비교해 볼 때 이방인 선교에
더 적합한 조건들을 지니고 있었다. 요컨대, 유대인들로만 구성된 예루살렘 교회는 아
직도 '율법의 완성으로서의 복음'이라는 복음주의적 신학보다는 율법과 복음의 조화
문제를 두고 갈등하는 저급한 신학을 지니고 있었다. 급기야 그들 중 일부는 복음을
율법의 빛 아래서 해석하는 등 복음의 진수(眞髓)를 충분히 증거하지 못하는 지경에까
지 이르게 되었다.
반면 안디옥 교회는 주로 이방인들로 구성된 교회였던 까닭에 복음의 핵심을 받아들
이는 데 장애물이 될 만한 것이 없었다. 오히려 그들은 은혜의 복음으로 인해 하나님
께 대한 감사와 열심이 남달랐다. 이러한 이유로 안디옥 교회는 이방 선교를 위해 정
열적으로 헌신하기에 더 적합한 조건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다음은 이방 선교의
전초 기지가 될 수 있었던 안디옥 교회의 인적 구성과 운영 방식을 고찰해 보기로 하
자.
(1) 인적 구성. 본 단락에서는 안디옥 교회를 인도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실질적인
선지자와 교사들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이들의 구체적인 역할과 위상에
관해서 자세하게는 알 수 없지만 분명 이들은 교회를 바르게 세워가는 데 주된 임무를
맡았던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그 중에 바나바와 바울은 안디옥 교회의 발전 도상에서
영입된 사람들이었다(11:19-30).
특히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의 부흥 소식을 접한 예루살렘 교회에서 파견된 사람으로
서 안디옥 교회의 설립이 하나님의 직접적 역사임을 친히 목격한 바 있었다. 그러던
중 그는 안디옥 교회의 계속되는 양적 부흥에 질적 성장을 접목시키고자 다소에서 활
동 중이었던 바울을 초빙하였다(11:25,26). 그 후 바나바와 바울은 안디옥 교회의 실
질적인 지도자로서 안디옥 교회가 후일 선교의 전초 기지가 되는 데 견인차 역할을 감
당하게 되었다.
한편 스므온과 루기오 그리고 마나엔은 바나바와 바울과는 달리 안디옥 교회의 토착
인물들인 것으로 추정된다. 아니면 스데반의 순교 이후 핍박을 피하여 안디옥에 이르
렀던 구브로나 구레네 사람(11:19)일 것이다. 어쨌든 이들은 비유대인들로서 이방인
전도에 적극적 열정을 가질 수 있었던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니게르'라는
시므온은 이름의 어원에 비추어 보건대 흑인이었을 가능성이 높고, 마나엔은 분본왕
헤롯의 젖동생으로서 신분상 고위직에 속했던 사람이었다. 이렇듯 안디옥 교회는 다양
한 신분과 출신으로 구성된 교회였지만, 하나님께 대한 거룩한 열심으로 하나의 신앙
공동체가 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다양성의 공존으로 말미암아 이방인 설교를 진행
하는 데 적합한 교회가 되었다.
(2) 운영 방식. 예루살렘 교회가 사도들과 집사라는 제도를 역할에 따라 구분했던
것과 비교해 볼 때(6:1-6) 안디옥 교회는 아직도 미분화(未分化)된 상태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본문에서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와 교사들을 언급한 것은 교회 조직에 대
한 암시라기보다는 일반적인 명칭을 사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다만 여기서 안디옥
교회의 운영 방식과 관련해서 눈여겨 볼 것은 안디옥 교회가 금식을 통하여 하나님의
계시를 수용했다는 점이다. 이 사실은 안디옥 교회의 운영 방식을 엿볼 수 있게 하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 주거니와 예루살렘 초대 교회와 마찬가지로 안디옥 교회 역시
금식과 기도를 교회 운영의 중요한 방식으로 삼았다는 것을 시사한다. 금식과 기도의
진정한 의미가 그렇듯이 안디옥 교회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역사가 굴절없이 나타나기
를 원했던 것이다. 이것은 안디옥 교회의 선교사 파송과 관련해서 잘 증명되고 있다.
사람의 생각과 입장에서는 당시 안디옥 교회를 실질적으로 관할했던 담당 목회자인 바
울과 바나바를 낯선 땅에 선교사로 파송하는 것이 비효율적이고, 불합리하게 비칠 수
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사람의 계산과는 달라서 사도 바울과
바나바를 이방인 선교사로 파송하는 것이 더 유익했다. 아무튼 안디옥 교회의 성도들
은 교회의 모든 일을 전적으로 하나님의 경륜에 의탁하였고 따라서 교회를 향하신 하
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그 뜻대로 이방 선교의 대업을 구체적으로 진행하기에 이르렀
다.
이상과 같은 사실에서 안디옥 교회의 성도들이 행했던 금식은 오로지 하나님의 뜻을
수용하기 위한 자기 비하(自己卑下)의 자세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니 오늘날 자신의 뜻
을 더욱 확신있게 하려는 데서 비롯되는 자해적(自解的)인 금식과는 천양지차(天壤之
差)가 아닐 수 없다.
이처럼 안디옥 교회의 인적 구성과 교회의 운영 방식은 안디옥 교회가 이방 선교의
전초 기지로서의 충분한 여건과 신앙적 자질이 겸비되었음을 보여주는 충분한 근거가
된다. 따라서 안디옥 교회의 모범적인 실례는 현재 신도를 교회 유지인 방편이나 구색
정도로 여기는 교회에 경종이 된다고 하겠다.

* 초대 교회의 선교사(宣敎史). 처음에 사도들은 전도의 지상 명령의 범위(마
28:19;막 16:15)에 대하여 깨닫지 못하였다. 때문에 회심한 유대인, 즉 유대인 개종자
들로 구성된 유대인 교회를 세우려고 작정하였다. 그러나 성령의 가르치심으로 복음의
보편적인 부름을 깨닫고는 이방인들이 함께 교회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게 되었고 순
교와 헌신으로 말씀을 전파하게 되었다.
다음 삼단계 도표는 (1) 유대(조직기)와 (2) 사마리아(전환기)와 (3) 땅끝(확장기)
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지상 대명(The Great Commission)이 어떻게 그 짧은 시기
안에 갖은 박해와 불신을 이기고, 또 인간적으로 볼 때에는 아무 내세울 것이 없는 사
람들을 통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잘 보여준다.
참고적으로 아래의 도표는 예수의 승천부터(A.D.30) 바울이 로마에서 순교하기까지
(A.D.67)의 초대 교회 선교사를 개관하였으며, 도표에 명기된 연대는 절대적으로 정확
한 것은 아니다. 성경의 역사 고증에 있어서 정확성을 기하기로 정평있는 독일 개혁 교회의 교회사가(敎會史家) 하르낙(Adolf von Harnack, 1851-1930)의 말처럼 성경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성경의 절대적 연대기보다는 상대적인 관련성에서 만족을 얻어야 할 것이다.



+---------------+------+--------+----------------------------------------------+
| 삼단계  기간  | 연대 |사도행전|        중   요   한      사   건             |
+---------------+------+--------+----------------------------------------------+
|               |A.D.30| 1:4-12,|* 그리스도 승천 이후 10일간 기도하면서 맛디아 |
| 1. 조직기     |      |   15-26|  를 유다 대신에 사도로 세우다.               |
|교회의 구성원을|      +--------+----------------------------------------------+
|유대인에 국한시|      | 2:1-13 |* 오순절 성령이 믿는 자들 위에 강림하여 봉사할|
|키고 이방인은  |      | 2:14-36|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함. 베드로의 설교로 삼|
|제외함         |      |        |  천 명이 회개하다.                           |
|               |      +--------+----------------------------------------------+
|               |      | 3:1-4:1|* 첫 박해, 앉은뱅이를 고치고, 담대히 설교한 베|
|               |      | 4:23-33|  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잡힌 후에 놓임을 받고  |
|               |      |        |  교회가 합심하여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큰 능력 |
|               |      |        |  이 나타남.                                  |
|               |      +--------+----------------------------------------------+
|  예루살렘이   |  30  | 5:1-11 |* 무서운 심판이 아나니아와 삽비라 위에 떨어져 |
|    중심       |      |        |  즉시 죽음, 이 슬픈 사건은 교회가 급격히 성장|
|               |      |        |  하고 이적적인 능력이 충만히 나타날 때에 일어|
|   (1-7장)     |      |        |  났음.                                       |
|               |      |        |  핍박이 일어나고 사도들이 투옥되었으나 천사의|
|               |      |        |  구출을 받고 박해를 무릅쓰고 열심히 전도 사업|
|               |      |        |  을 계속함.                                  |
|               |      +--------+----------------------------------------------+
|               |  30  |6:1-7:60|* 일곱 집사를 세움. 그중 기적을 행하고 능력있 |
|               |      |        |  는 설교를 했던 스데반은 첫순교자가 되다.    |
+---------------+------+--------+----------------------------------------------+
|               |      | 8:1    |* 첫번째 복음 전도 운동. 다소 사람 사울의 핍박|
|  2. 전환기    |      |        |  으로 전역에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이 예루살렘  |
|               |      |        |  밖에서 복음을 전파함.                       |
|               |      | 8:4-17 |  빌립, 베드로, 요한이 사마리아에서 복음을 전 |
|복음을 이방인들|      |        |  하여 성령이 임하심. 이방 전도의 전조가 됨.  |
|에게 전해야 할 |      | 8:25-40|  부흥의 물결이 전지역을 뒤엎었고 빌립은 가사 |
|교회의 임무를  |      |        |  로부터 가이사랴에 이르기까지 해안 도시들에서|
|점차적으로 인식|      |        |  전도함.                                     |
|함             |      +--------+----------------------------------------------+
|               |  34  | 9:1-22 |* 다소 사람 사울의 회심. 다메섹으로 교회를 핍 |
|               |      |        |  박하러 가는 중에 회심하여 기독교 역사상 큰  |
|  예루살렘이   |      |        |  영향을 끼침.                                |
|    중심       |      |        |  그는 먼저 다메섹에서 전도하였고 그후 아라비 |
|               |      |        |  아로(갈 1:17) 물러 갔다가 다메섹으로 돌아와 |
|   (8-12장)    |      |        |  서 유대인들에 의해서 추방될 때까지 거기서 일|
|               |      |        |  함                                          |
|               |      | 9:26-30|  그후 그는 예루살렘으로 가서 교회를 돕고자 하|
|               |      |        |  였으나 그에 대한 증오심이 커서 할 수 없이 자|
|               |      |        |  기의 옛집이 있는 다소로 돌아옴.             |
|               |      | 9:31   |  그가 떠난 후 교회가 평안한 기간을 맞이함.   |
|               |      +--------+----------------------------------------------+
|               |      | 9:32-42|* 베드로의 환상. 사도가 전도 여행을 하는 중 룻|
|               |      | 10:9-17|  다에 와서 애니아를 고치고 욥바에서 다비다를 |
|               |  35  |        |  살림. 여기서 베드로는 가이사랴에 있는 고넬료|
|               |      |        |  의 집에서 이방인들에게 설교함.              |
|               |      |        |  성령이 이방인 위에 임하여 베드로의 전도를 증|
|               |      |        |  명함.                                       |
|               |      +--------+----------------------------------------------+
|               |      |11:19-21|* 이방 전도의 여명. 핍박으로 인해서 예루살렘  |
|               |      |        |  밖으로 나간 그리스도인들의 전도 사업이 구브 |
|               |      |        |  로, 페니키아, 수리아의 안디옥에까지 미침.   |
|               |      | 11:22  |  예루살렘 교회가 바나바를 안디옥에 파송함. 바|
|               |      |        |  나바는 여기서 좋은 일터를 찾았고 다소에 있는|
|               |      |        |  사울을 불러 일년간 함께 일함. 나중에 이방 전|
|               |  41  |        |  도의 중심지가 된 튼튼한 교회가 세워짐.      |
|               |      +--------+----------------------------------------------+
|               |      | 12장   |* 두번째 박해. 이즈음 예루살렘 교회는 헤롯 아 |
|               |      |        |  그립바에 의하여 큰 핍박이 일어났는데 그가 요|
|               |      |        |  한의 형제 야고보를 처형하였다.              |
|               |      |        |  베드로 역시 체포되어 감금되었으나 천사의 구 |
|               |      |        |  출을 받음.                                  |
+---------------+------+--------+----------------------------------------------+
|               |47-49 | 13장   |* 바울의 1차 전도 여행. 행 13:1-14:28         |
|  3. 확장기    |      | 13:1-3 |  성령의 지시로 안디옥 교회는 사울(후에는 바울|
|               |      |        |  로 개명함)과 바나바를 이방 전도자로 세워서  |
|이방 전도 사업 |      |        |  파송함. 요한 마가가 동행하다.               |
|의 확장 및 성장|      | 13:4-13|  그들은 먼저 구브로 섬에서 활동을 시작했고 그|
|               |      |        |  다음 소아시아 버가로 갔는데 요한 마가는 중도|
|               |      |        |  에서 떠나다.                                |
|               |      |13:14-52|  바울과 바나바는 비시디아 안디옥까지 전도 활 |
|               |      |        |  동을 전개하고 거기서 남쪽으로 이고니온과 루 |
|               |      |        |  스드라로 갔다.                              |
|               |      |14:1-19 |  여기서 바울은 돌에 맞았고 일행은 더베로 향함|
|               |      |   20-26|  더베에서 다시 돌아와서 버가와 앗달리아에 이 |
|교회 지도자의  |      |        |  름. 여기서 처음 출발지 수리아 안디옥으로 향 |
|안목이 넓어짐  |      |        |  하여 배를 타고 떠남.                        |
|               |      |        |  이들의 여정은 약 2,400km 가량되고 2년 정도  |
|               |      |        |  걸렸음.                                     |
|               +------+--------+----------------------------------------------+
|               |50-52 |        |* 바울의 2차 전도 여행. 행 15:36-18:22        |
|               |      | 15:40  |  안디옥에서 실리와 함께 출발하여 1차 전도 여 |
|               |      |        |  행 때에 세운 소아시아 교회들을 돌아보다.    |
|유대인들의 의식|      | 16:6   |  새로이 갈라디아와 브루기아까지 가고 서쪽으로|
|과 예식을 행하 |      |        |  드로아로 내려감.                            |
|지 않고도 이방 |      | 16:9-12|  전도단은 환상으로 지시를 받아 유럽으로 건너 |
|인들이 동등한  |      |        |  가서 빌립보에 이름.                         |
|권리를 갖는 것 |      | 16:26  |  매를 맞고 투옥되었으나 기적으로 지진이 일어 |
|이 허락됨      |      |        |  나 구출됨. 떠나기 전에 여기서 교회를 세움.  |
|               |      | 17:1-4 |  데살로니가에 도착하여 교회를 세움.          |
|               |      |17:10,11|  베뢰아 사람들이 진리의 말씀에 열심인 것을 발|
|               |      |17:22,23|  견함. 그러나 아덴 사람들은 복음의 씨앗이 자 |
|               |      |        |  랄 좋은 땅이 아니었으므로 고린도로 향함.    |
|               |      |18:1-18 |  여기서 큰 반대 세력에 부딪쳤으나 환상으로 격|
|               |      |        |  려를 받고 남아서 든든한 교회를 세움.        |
|               |      |18:19,21|  안디옥으로 출발하여 가는 길에 에베소에 잠시 |
|               |      |        |  머무름. 이들의 여행은 약 삼년 반 정도 걸렸고|
|               |      |        |  약 5,600km의 먼 거리였음.                   |
|               |      +--------+----------------------------------------------+
|안디옥이 이방  |      |        |* 바울의 3차 전도 여행. 행 18:23-21:16        |
|전도의 중심지가|53-58 | 18:23  |  안디옥 교회를 떠나서 바울은 갈라디아와 보르 |
|됨             |      |        |  기아 교회들을 찾아 보고 에베소로 감.        |
|               |      |18:24-28|  바울이 가기 전에 아볼로가 전도의 기초를 쌓음|
|  (13-28장)    |      |        |  설교와 이적을 행한 능력은 그들에게 큰 감동을|
|               |      |        |  주었다.                                     |
|               |      | 19:1-20|  마술을 행하여 백성을 속이는 자들에게 큰 혼란|
|               |      |        |  을 야기함.                                  |
|               |      |29:23-41|  큰 일이 성취되었고 교회를 설립되었으나 소동 |
|               |      |        |  때문에 바울은 떠나서 마게도냐와 헬라로 감.  |
|               |      |20:1-12 |  고란도에 3개월 머무르고 그 다음 마게도냐를  |
|               |      |        |  다시 방문한 뒤에 드로아로 옴. 밤에 설교하는 |
|               |      |        |  중 유두고가 떨어져 죽었으나 다시 살림.      |
|               |      |20:17-38|  예루살렘으로 오는 도중 밀레도에 머물러 에베 |
|               |      |        |  소 장로들을 불러 고별의 권면을 함.          |
|               |      |21:28-32|  예루살렘에 도착하여서 자신이 증오의 대상이  |
|               |      |        |  되어 있음과 음모가 있음을깨달음.            |
|               |      |21:33-40|  무고로 체포되었으나 로마 군병들이 폭도들에게|
|               |      |        |  구출함. 로마 시민권이 그에게 얼마간의 권리를|
|               |      |        |  줌.                                         |
|               |      +--------+----------------------------------------------+
|               |      |23:31-35|* 로마 여행. 바울은 가이사랴에 호송되었고 2년 |
|               |59-61 |        |  간 죄수의 신분으로 있었음.                  |
|               |      | 24-28장|  벧릭스와 베스도와 아그립바 앞에 섬. 그러나  |
|               |      |        |  가이사에게 호소하였으므로 로마의 보내어짐.  |
|               |      |        |  자기에게 오는 모든 자들에게 전도함.         |
|               |  67  |        |  이 기간에 자기가 세운 교회들에게 서신을 보냄|
|               |      |        |  최후로 로마에서 죽음.                       |
+---------------+------+--------+----------------------------------------------+

2. 구브로에서의 선교(13:4-12)
이제 바야흐로 바울의 제1차 전도 여행이 시작된다. 바울과 바나바가 도착한 첫번째
선교지인 구브로는 안디옥의 서남방에 위치한 섬으로 바나바와 출신지였다(4:36). 여
기서 이들의 복음의 능력은 무속(巫俗)과 대결하여 그것은 단숨에 거꾸러뜨렸는데 이
는 이들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향후 험난한 선교
사명을 감당해야 할 바울에게 큰 위로와 용기를 주었다. 우리는 여기서 본 사건의 상
징적 의미와 본 사건에 개입한 복음 사역의 주역이라는 두 가지 사항에 주목해 볼 필
요가 있다.
(1) 상징적 의미. 서기오 바울의 공식 직책은 로마 총독이었다. 당시 로마의 총독
(governor)은 특정한 지역을 효과적으로 치리하기 위해서 로마의 황제가 임명하였다.
특히 총독은 로마제국을 대신하여 그 지역을 관할했는데(벧전 2:14), 이들에게는 사형
권과 사법권이 주어졌으므로 그 권한은 절대적이었다고 하겠다.
한편 구브로의 총독인 서기오 바울은 당시 로마의 원로원 의원과 같은 가문 출신으
로서 B.C.58년에 악명 높았던 배교자(背敎者) 루시어스 서기오 카스틸라와도 동일한
가문의 귀족이었다. 이런 사실들을 종합해 보면, 구브로의 총독 서기오 바울은 복음을
받아들이기에는 가장 큰 장애가 있었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이방인이었다는
사실은 복음에 대해 생소함을 말하며 또한 그가 로마의 귀족과 총독이었다는 사실은
복음을 불필요한 것으로 여길 수 있는 가능성이 다분했음을 말해준다. 이 같은 상황에
서 구브로 총독 서기오 바울이 기독교로 개종했다는 사실은 두 가지 측면에서 하나님
의 구속사에 대한 이해를 가능하게 해준다.
첫째, 그가 바울의 이방 선교를 통한 최초의 공식적인 개종자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속사에 있어서 한 특정한 시기에 구속사의 도구로 사용되었던 유대 민족의
임무가 실질적으로 마감되었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이 사건 이후로 전
개되는 구속사의 실질적인 대상이 이방인이 되므로 이 사건은 복음을 유대교적 범주
속에서 재해석하려는 유대인의 모든 시도를 부인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둘째, 이 사건은 오늘날 세대주의자들의 견해를 정면으로 공박하고 있다. 그들은 종
말에 천년 왕국이 건설될 때 유대 나라의 복귀와 예루살렘 성전 중심의 피제사가 거행
된다고 주장하고 있는 바, 이러한 주장은 하나님의 구속사의 최종적 목적을 망각한 소
치로서, 유대인 역시 구원의 대상임을 거부하는 교만한 성경 해석에서 비롯된 것이다.
(2) 사역의 실질적인 주역. 모든 사역의 진정한 주체가 하나님임은 이론(異論)의 여
지가 없다. 그런데 여기서 특별히 강조하고자 하는 점은 하나님께서 그 사역의 도구로
서 반드시 사람을 사용하신다는 사실이다. 본문에서 서기오 바울의 개종 사건의 실질
적인 주역은 사도 바울이라고 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은 이 사건을 통해서 1차 선교 여
행의 중요한 결론을 내리게 되었으니, 그것은 자신이 이방인의 사도로 하나님께 부름
받았음을 다시 한번 깊이 인식하게 되었다는 점이다(15:7).
그는 자신을 '빚진 자'(롬 1:14)로 표현할 정도로 이방인의 사도로서 자신의 소명을
확신하였다. 따라서 그는 하나님의 선교가 자신을 통해서 전개된다는 신앙 아래 필설
로 다할 수 없는 고초와 위험 속에서도 이방 선교의 발길을 그치지 않았다. 이런 사실
들은 '하나님의 사역은 하나님이 하신다'는 미명 아래 자신의 헌신을 기피하는 게으른
성도들에게 적절한 교훈을 주고 있다.

* 바울의 이름 연구. 본서 12장까지 바울이 사울이란 이름으로 등장하고 있으며, 본
장에서부터 비로소 바울이란 이름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는 바울이 본장에서부터 이
방인의 사도로서 공식적 선교 활동을 편 사실과 긴밀한 연관성을 갖고 있다. 그러나
본서나 기타 성경의 기록에는 바울로 고쳐 부르게 된 사실에 대해서 그 직접적 동기나
이유를 말하고 있지 않다. 이에 본 주제 강해를 통하여 바울의 이름에 관련된 문제를
간략하게 고찰해 보기로 하자.
(1) 문제 제시. 통설적인 견해에 의하면 '바울'이란 이름은 사울이 개종한 이후에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할 때의 사울고, 예수를 전도하는 바울
과의 대조를 통해서 바울이 된 사울의 회심이 성도들에게 적지 않은 은혜를 끼쳐왔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과연 '바울'과 '사울'이란 이름의 연관성에 대한 성경적인 근
거는 어디에 있는가 ?
(2) 답변. 본문 9절에 의하면 바울과 사울이라는 이름이 나란히 언급되어 있다. '바
울'이란 이름은 헬라식 이름으로 '작다'라는 뜻을 지닌다. '사울'은 히브리적 이름으
로 '구하였다', '하나님께 청함을 받다'라는 뜻을 지닌다. 여기서 확대 해설이 출발하
고 있는 바, 흔히 바울의 히브리식 이름인 '사울'의 의미가 종종 '큰 자'라는 뜻으로
곡해되고 있는 것이다. 즉 예수를 핍박하며 스스로 '큰 자'로 자처했던 '사울'이 예수
를 영접한 후 '작은 자'로 자처했다는 근거 없는 해석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성
경에서는 사울이 본서 9장의 개심 뒤에도 여전히 같은 이름으로 기록되고 있을 뿐 아
니라 '사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예수를 열심히 전파했다고 전하고 있다
(9:19,22,26,28). 또한 그는 안디옥 교회에서 이방 선교사로 파송받을 때도 '사울'이
라는 이름으로 지명되었다(1절).
이 같은 사실들을 미루어 보건대 '바울'과 '사울'이란 이름은 사울의 회심과는 무관
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러면 이 두 이름간의 연관성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
이것은 선교의 기능적 용도에 따른 차이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즉 히브리식 이
름인 '사울'은 주로 이방 선교 여행을 하기 전 사용된 반면 이방 선교 여행이 시작된
이후부터 '바울'이라는 이름이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사실 13절 이후 '사울'이라는 이
름은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바울'이라는 이름이 이방인들에게 더 친
숙한 이름으로서, 바울의 선교 기능적인 측면에서 고려된 이름임을 알 수가 있다.

3. 소아시아에서의 선교(13:13-52)
본 단락은 구브로 성을 떠나 소아시아 지방에서 있었던 바울과 바나바의 선교 현황
을 비교적 상세하게 언급하고 있다. 특히 여기서는 바울의 공개적인 설교(16-47절)와
그 반응(48-52절) 이 양 축(軸)을 이룬다. 바울의 설교는 본장 이외에도 여러 번 언급
되어 있거니와(14:14-18;17:22-31;20:17-35;21:40-22:21;22:30-23:9;24:10-21,25;25:
10,11;26:1-29;27:21-26;28:17-20,25-28) 베드로나 스데반의 설교와 유사하다. 즉 이
스라엘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경륜을 약술한 다음 구약성경을 인용해 가면서 기독론을
전개시키는 것이 공통된 설교의 체계인 것이다. 그러나 바울의 설교는 베드로나 스데
반에 비해 교리적으로 진일보한 흔적이 역력하다. 즉 율법으로는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고 그리스도를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이신 칭의(以信稱義)
의 원리(39절)는 바울의 설교에서만 볼 수 있는 기독교 교리의 핵심 내용이다(롬
1:17). 참고적으로 16-41절에 수록된 바울의 설교를, 탁월한 역사 의식으로 유대인들
의 완악한 불신앙을 견책한 스데반의 설교(7:1-53)와 비교하면 다음 도표와 같다.

+------------+--------------------------------+--------------------------------+
| | 바 울 | 스 데 반 |
+------------+--------------------------------+--------------------------------+
| 성 경 | 16-41절 | 7:1-53 |
+------------+--------------------------------+--------------------------------+
| 설교장소 | 비시디아 안디옥 | 예루살렘 |
+------------+--------------------------------+--------------------------------+
| 대 상 | 흩어진 유대인(Diaspora)과 이방 | 유대인 |
| | 인(16절) | |
+------------+--------------------------------+--------------------------------+
|설교에 포함 | 출애굽-그리스도의 부활(B.C.1446| 아브라함의 소명-그리스도의 죽음|
|된 역사 기간| -A.D.30) | (B.C.2091-A.D.30) |
+------------+--------------------------------+--------------------------------+
| 내 용 |출애굽->광야 생활->가나안 점령->|아브라함의 소명->이삭과 야곱->애|
| |사사 시대->왕정 시대->다윗을 택 |굽으로 팔린 요셉->하나님이 요셉 |
| 전 개 |함(언약을 주심)->세례 요한->예수|을 높이심->흉년으로 야곱의 가족 |
| |의 출생->예수의 죽음과 부활->그 |이 애굽으로 내려감->모세의 출생 |
| 과 정 |의 부활을 믿음으로 인한 구원 |과 성장->모세의 소명->출애굽->다|
| | |윗과 솔모론->의인을 죽임 |
+------------+--------------------------------+--------------------------------+
| 설교의 |하나님의 언약에 근거한 그분의 사|이스라엘 역사에 나타난 조상들의 |
| 중심주제 |랑과 죄인의 구원 |패역한 모습을 통하여 현재 유대인|
| | |들의 죄를 지적 |
+------------+--------------------------------+--------------------------------+
| 중 심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 |
| 구 절 |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39절)|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53절) |
+------------+--------------------------------+--------------------------------+
| |설교를 다시 청하고 바울과 바나바|마음이 찔렸으나 회개하기 보다는 |
| 청중의 |를 많이 좇았다. |오히려 그를 돌로 쳐죽이고 더 심 |
| 반 응 | |하게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였다. |
+------------+--------------------------------+--------------------------------+

위의 도표에서 눈여겨 볼 것은 청중의 반응 부분이다. 바울과 스데반의 설교를 대표
적으로 거부했던 자들은 유대인들이었다. 특히 이들이 스데반을 죽이고, 사도 바울을
핍박했던 중요한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내용 때문이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수욕과 죽음 및 예수의 부활에 대한 증거와 그 사역의 영향이 이방인의 구원에까지 미
쳤다는 바울의 설교는 유대인의 교만한 신앙에 거슬리는 내용이 아닐 수 없었다.

* 바울의 선교 원리. 바울이 선교 여행을 하면서 처음 말씀을 전파했던 것은 회당이
었다(5,14절). 여기서 하나의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바, 바울은 스스로 이방인의 사
도로 자처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위해서 바울을 회심시켰다고까지 하
였는데(9:15) 그는 왜 처음부터 이방인의 거주지로 가지 않고,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을 찾아갔겠는가 ? 이 질문은 사도 바울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요소가 된
다. 많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이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변하면서 바울의 신학까지 곡
해하고 있다.
즉 바울은 애초부터 그의 소명 가운데 이방인에 대한 선교의 열정은 없었다고 주장
한다. 그러던 중 복음을 전파할 때 나타난 유대인의 배척과 위협을 절실하게 느낀 나
머지 자신의 선교 방향을 이방인에게로 향했다는 것이다. 이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또한 바울 신학의 핵심인 '이신 칭의'도 초기 바울 신학에는 없었다는 것이다. 이 교
리는 이방인 선교를 하면서 발생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후기에 고안해 낸 신학 사상
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주장들은 바울의 중요한 선교 원리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데서
비롯되는 소치가 아닐 수 없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회당을 주로 이용했던 까닭을 선
교 전략적 차원에서 살펴보기로 하자.
(1) 실질적인 차원. 당시 유대 땅 이외에 존재했던 회당은 주로 흩어진 유대인 즉
디아스포라들을 위해서 존재했다. 이곳을 통해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신앙적 결속
을 이어갔다. 그런데 이 회당들이 아빙인 세계에 있었던 관계로 약간의 이방인들도 이
곳에 출입을 했으며 이들은 성경에 '경건한 사람들'이라고 언급되었다(43절;10:2). 이
들 이방인들은 자신의 거주지에 있는 유대인들과 회당을 통해서 유일신 하나님에 대한
전반적 이해를 갖고 있었던 자들이다. 따라서 회당에서의 사도 바울의 설교는 이들 이
방인들에게는 복음이 되었던 것이다. 이를 생각해 보건대 사도 바울이 회당을 이용할
때에는 이들 경건한 이방인들까지 염두에 두었다고 할 수 있다.
(2) 신학적인 차원. 로마서에 의하면 바울은 이방인과 유대인의 관계에 대하여 자세
하게 언급하고 있다. 특히 이 중에서 로마서 10장 11절에 보면 바울의 회당을 이용했
던 신학적인 이유를 알 수 있다. 즉 사도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받았다는 사실
은 부동의 사실이다(15:7;갈 2:9).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유대인들이 죽음을 이루는
회당을 이용했던 것은 그의 선교 전략적 용어를 빌리자면 유대인들의 시기를(롬
11:11,13;행 13:45) 촉발시키기 위해서였다. 다시 말하면 회당에서의 복음 전파 이후
이방인들의 열렬한 복음 수용은 유대인들의 엄청난 시기를 야기시켰는데(15:45) 바울
은 유대인의 소수라도 구원할 요량으로 의도적으로 그렇게 했다고 고백하고 있다(롬
11:13). 사도 바울은 이방의 사도로 자처했지만 인지상정(人之常情)인지라 이스라엘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기를 간절히 원하였던 것이다(롬 9:1-3;10:1).
고로 상기한 두 가지 측면을 통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바울은 애
초부터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받았던 사람으로서, 그의 회당 출입은 결코 그의 이방 사
도직의 위임을 희석시키는 요소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오히려 그가 이방인 선교에 매우 용의 주도한 계획을 가지고 임했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된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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