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크마 주석, 사도행전 1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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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
 이고니온 - 이고니온(Iconium)은 헬라인에 의하여 도시국가로 변형되었는데 비옥한 고원지대(高原地帶)에 형성된 도시이다. 이곳은 당시 루가오니아(Lycaonia)의 수도였으며 로마로부터 자유로운 도시였으나 하드리안(Hadrian) 황제에 의해 식민지화되었다. 현재의 터키의 중요한 상업도시로 '코냐'(Konya)라 불리어진다. 이곳에도 역시 비시디아 안디옥처럼 유대인들이 많이 거주했으며 회당을 중심으로하여 신앙 생활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회당에 들어가 말하니- 바울과 바나바는 비시디아 안디옥에서와 마찬가지로 안식일의 예배에 참여하기 위해 회당에 들어갔을 것이다. 여기서는 어떻게 설교를 하게 되었는지 언급을 생략하고 있다. 이는 아마 같은 내용을 반복하지 않으려는 문화적 배려라고 볼 수 있다.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 - 이 문장 역시 안디옥에서와 같이 이고니온에서도 유대인과 헬라인의 구별없이 기독교인으로 개종하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음을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14:2
 순종치 아니하는 유대인들 - 이 말은 바울과 바나바가 전하는 복음의 내용을 받아들이지 않는, 즉 불신앙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여기서 유대인이 바울과 바나바의 반대자로 언급된 것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와 동일하다(13:45 주석 참조).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 유대인들은 바울과 바나바의 설교를 받아들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을 선동하여 집단적인 공격 형태의 움직임까지 나타내고 있다.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거늘 - 여기서 언급된 '형제들'(* , 아델폰)은 기독교인을 가리키는 말로서 바울의 설교에서는 '형제들'이라는 말이 자주 쓰인다. 여기서의 '형제들'은 1절에서 언급한 '허다한 무리'에 속한 유대인과 이방인 개종자를 가리키며 누가가 본서에서 즐겨 사용하는 '제자'(6:1,2,7;9:1,10,19,25,26,38; 11:26,29;13:52;15:10;16:1)라는 말과 같은 의미다.

=====14:3
 두 사도가 오래 있어 - 개역성경에서는 명확하게 번역되지 않았으나 헬라어 본문에서는 이 문장은 접속사 '멘 운'(* , '뜻')과 함께 시작되어 앞에 진술된 내용과 본절 이후의 진술이 서로 인과 관계에 있음을 강조한다. 따라서 이 말을 '그래서'로 번역하여 인과 관계를 분명히 해주는 편이 좋다. 그런데 이 인과 관계가 서로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대해서 학자나 번역본에 따라 두 가지로 분류된다. (1)'개종하는 사람들을 보호하고 반대자들에게 지속적으로 기독교를 변증하기 위해 두 사도는 오래 남아 있었다'(Knowling). (2)'주께서 그들에게 기적과 놀라운 일들을 행하게 하셔서 하나님의 은총에 관하여 그들이 전하는 말이 참되다는 것을 증명해 주셨다. 그래서 두 사도는 계속 남아 대담하게 말씀을 전했다'(공동번역). 그런데 접속사 '멘 운'이 본절 초두에 나와서 2절과 본절을 인과절로 접속시키고 있다. 따라서 두 사도가 이고니온에 오래 머문 직접적인 이유는 유대인들의 선동 때문임을 알 수 있다. 대부분의 영역 성경은 이와같은 의미로 번역하고 있다(KJV, RSV, NIV, MB). 표적과 기사 - 복음서에서 이 두 단어가 함께 언급된 곳은 마24:24와 요4:48 두 곳뿐이나 본서에서는 본절 외에도 2:22,43;4:30;5:12;6:8;8:13 등 수 차례 언급되었다.이는 누가가 사도들을 통해서 나타난 성령의 역사를 강조하기 위해 그 두 단어를 함께 사용했음을 의미한다.

=====14:4
 그 성내 무리가 나뉘어 - 이고니온 성안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두 부류 즉 바울과 바나바를 추종하는 무리와 유대인들의 선동에 의해 바울 일행에 악감을 품은 사람들로 나누어지게 된다. 이것은 곧 논쟁의 출발이며 바울 일행이 겪는 박해의 시작이다. 당시 헬라계 성읍에서 이와같은 파벌적 대립과 분열 그리고 그에 따른 논쟁은 흔히 있었던 일이었으므로(Alford)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두 사도 - 이는 바울과 바나바를 지칭하는 말로서 본서에 12명의 제자가 아닌 예수 추종자에게 사도라는 명칭이 처음 붙여지게 된다. 물론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계속하여 자신의 사도됨을 강조한 적이 있다(롬1:1;고전1:1;9:1;15:9;고후1:1;갈1:1;딤전1:1;딤후1:1). 그런데 본서의 저자 누가가 바울과 바나바에게 사도의 칭호를 적용시켰다는 사실은 당시 바울과 바나바의 지위가 사도로서 인정받았을 수 있었다는 점과 사도라는 말이 예수를 직접 수행한 12명의 제자 이외의 사람에게도 폭넓게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갈1:19).

=====14:5
 그 관원들이 - 이들은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하는 세번째 부류의 사람들로 그 지역을 통치하는 지도자들(공동번역)이다. 다시 말해 바울과 바나바에 대한 박해가 단순히 회당 지도자들의 시기와 질투로 인한 박해만으로 끝나지 않고 정치 지도자들까지 가담하여 조직적이고 강력하게 대응하는 공격적 박해임을 말해주고 있다. 능욕하며 - 무례하고 모욕적인 언사(言辭)를 나타내는 '휘브리사이'(* )는 앙심을 갖고 조롱하고 학대하는 행위를 뜻하는 말이다(공동번역). 이것은 육체적으로 상해를 입히는 폭력행위라기보다는 경멸하는 어투와 마음을 가지고 상대를 괴롭히는 것을 나타낸다. 돌로 치려고 달려드니 - 그들의 능욕 행위는 투석을 통한 폭력행위로 발전하였다. 본래 돌로 사람을 쳐죽이는 처형법은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사형 집행 방법이었다. 이는 처형당하는 죄인에 대한 저주의 의미를 담고 있다. 이미 이와 같은 투석 행위는 스데반에게도 있었던 일이다(7:58). 스데반을 향해 유대인들이 돌을 던질 때 그 일에 가담했던 바울이 스데반과 똑같은 폭력을 당하게 될 위기에 직면한 것은 9:16의 예언이 그에게 성취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묘사는 당시의 전도자가 필연적으로 져야 할 공통적인 십자가임을 암시하는 듯하다. 그런데 돌을 던지려는 행위가 실제로 발생한 것은 아니다. 이 상황 묘사는 박해자들이 돌을 던질 만큼 험악한 분위기에 다달았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공동번역은 '돌로 쳐 죽이려는 움직임을 보였다'라고 번역하여 생동감있게 표현하였다.

=====14:6
 저희가 알고 도망하여 - 여기서 '도망하여'는 헬라어로 '카타퓨고'(* ) 이며 뜻은 '도망하다' 외에 '피난하다'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 같은 표현은 바울과 바나바가 단순히 폭력을 두려워해서 도망친 것이 아니라 박해자들과 무리한 충돌을 피하기 위해 다른곳으로 옮겨갔음을 암시한다. 따라서 도망했다는 표현보다는 피하였다는 말이 더 어울릴 것이다. 루가오니아 - 루아오니아(Lycaonia)는 소아시아의 중남부 지방으로 북쪽으로는 갈라디아가 있고, 동쪽에는 가바도기아, 서쪽에는 브루기아 비시디아가 인접하여 있다. 이 지역은 마게도냐에 정복된 적이 있으므로 코이네 헬라어를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후스드라 - 루스드라(Lystra0는 루가오니아의 중남부 지방에 위치한 성으로서 이고니온 성에서 약 38km 남쪽에 위치해 있다. 이곳은 소수의 로마군이 지배하고 있는 전원 도시였다. 이곳은 해상을 통한 무역을 할 수 없었으므로 그곳 주민은 주로 농사와 목축에 의존했다. 약간의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으나 회당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Robertson). 이곳에서 디모데와 그의 어머니 유니게가 살았고(16:2,3;딤후1:5) 바울 일행은 그들로부터 도움을 받은 것 같다. 더베 - 이곳은 루스드라에서 동남쪽으로 약 30여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길리기아와 인접한 곳으로 로마의 글라우디우스 황제의 이름을 따 글라우디우스 티베라 불리기도 한다. 바울은 이곳에서 1차 전도 여행을 마무리 짓고 안디옥으로 되돌아 가지만 그 후 제2차 전도 여행 때 다시 이곳을 방문하게 된다(16:1). 특히 이곳은 아시아까지 바울과 동행한 가이오의 출신지로 알려져 있다(20:4).

=====14:7
 거기서 복음을 전하니라 - 이 말은 6절에서 도망했다는 진술이 반대자들을 두려워해서 숨어버린 것이 아니라 반대자들과의 충돌을 피해 활동 무대를 옮겨간 것임을 나타내고 있다. 즉 누가는 바울과 바나바의 일행이 어떤 난관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만 전심 전력하고 있음을 묘사하고 있다. 한편 로버트슨(Robertson)은 바울과 바나바가 이곳 언어를 잘 몰랐기 때문에 안디옥이나 이고니온에서 온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복음을 전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러나 렌스키(Lenski)는 어디서나 헬라어가 통용되었기 때문에 그럴 필요가 없었다고 주장한다. 이 지역은 팔레스틴 지역과 마찬가지로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점령된 적이 있었으므로 헬라문화가 형성되었을 것이다. 이는 이 지역에서 코이네(Koine) 헬라어가 통용되었을 가능성이 큼을 암시한다. 따라서 렌스키의 의견이 설득력 있다고 볼 수 있다(11절 주석 참조).

=====14:8
 나면서 앉은뱅이 - 이 환자는 발이 있으나 무기력하여 힘을 쓸 수 없는 상태에 있었다. 저자는 이러한 상태가 태어나면서부터 있었다고 보충 설명을 하여 그의 질병이 치유 불가능한 것임을 강조한다. 이 이야기는 베드로와 요한에 의해서 성전 미문(美門) 앞에서 고침을 받은 앉은뱅이 이야기와 비슷하다(3:2). 아마도 누가는 앉은뱅이를 고친 두 사건에 중요한 의미를 둔 것 같다. (1)베드로처럼 바울도 앉은뱅이를 고침으로써 동등한 사도권이 바울에게도 인정됨을 암시하고자 했을 것이다. (2)베드로는 유대인을, 바울은 이방인을 치료한 사실을 대비시킴으로써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서 바울을 부각시키고 있는 듯하다.

=====14:9
 구원받을 만한 믿음 - 이 표현은 앉은뱅이 환자가 바울의 설교에 귀기울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바울은 이러한 그를 눈여겨 보았기에 그에게서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병고침의 기적이 일어날 수 있는 조건으로 '믿음'이 언급되고 있다. 신약성경에서 나타나는 병고침의 전제는 주로 환자의 믿음과 관계된 것으로 묘사되었다(3:16;막9:21-29;눅5:20;7:50;8:48;18:42). 여기서 언급된 '구원받을'(* , 소조)이라는 말은 '구원하다'란 의미 외에 '온전하게 하다' 또는 '건강하게 하다'의 뜻도 지닌다. 여기서는 직접적으로 앉은뱅이의 무기력한 발이 완전하게 되어 건강하게 되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본 구절의 표현을 앉은뱅이의 영적 구원과 반드시 연결지을 필요는 없다. 그리고 '믿음'이란 말도 바울 신학의 핵심 주제로서의 '믿음'과 동일시할 필요가 없다(롬1:8-17 주제 강해 '이신 득의의 이해'). 한편 본 치유사건은 3:2-6에서 언급되는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와 내용상 다르게 언급된다. 즉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는 단순히 무엇을 얻을까 하는 구결인으로 묘사된 반면 본문에서는 앉은뱅이의 마음 속에 치료받을만한 믿음이 있다고 묘사되고 있다. 여기에는 저자인 누가의 의도가 암시되어 있는 듯하다. 즉 그는 이방인에게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치병 기적을 언급함으로써 이방인에게도 구원받을 자격이 있음을 나타내며 또한 바울의 이방 선교에 대한 정당성을 선포하고자 의도했을 것이다.

=====14:10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 여기서 바울이 큰 소리로 외쳐 말한 것은 아마 환자에게 믿음을 북돋우고 확신을 주기 위한 배려로 보인다. 그런데 이는 베드로가 성전 미문 앉은뱅이에게 한 말과 차이점이 있다. 즉 베드로는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라고 명령하였으나 바울은 예수처럼(막3:5) 자신이 직접 명령했다. 이에대해 C와 D사본은 바울이 '예수의 이름'으로 명령한 말을 첨가시켰지만 대부분의 사본은 그 구절을 첨가하지 않았다. 그 사람이 뛰어 걷는지라 - 이 묘사는 3장에서 언급된 미문의 앉은뱅이가 구원받은 묘사와 비슷하다. 즉 걸을 뿐만 아니라 뛰기도 했다는 이 표현은 구원 곧 치유가 바울의 소리와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구절은 그 앉은뱅이가 차츰차츰 걷게 되었다든가 다소 불편한 걸음이 아니라 완전히 회복된 정상적인 모습을 갖추었다는 강조적 표현이다.

=====14:11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 질러 - 본구절은 앉은뱅이가 일어나 걷고 뛰는 현장을 목격한 루가오니아 사람들이 놀라와하며 흥분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즉 그들은 흥분하여 격앙된 목소리로 기적의 현장을 떠들석하게 했다. 그리고 그들이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말하였다는 표현은 이제까지 루가오니아 말로 하지 않고 다른말을 사용했을 가능성을 암시해 준다. 네일(W.Neil)에 따르면 소아시아의 다른 성읍들과 마찬가지로 루스드라는 평상시 3개의 언어가 통용되었다고 한다. (1)라틴어:루스드라는 로마의 식민지였으므로 라틴어가 공식적인 언어였다. (2)헬라어:로마의 상용어(Lingue franca)로 모든 사람들이 어느 정도 말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었다. (3)모국어:이는 성읍 사람들끼리의 통상적인 의사 소통 수단이었다. 그러나 바울과 바나바는 이 언어를 잘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Haenchen, Bruce). 바울이 설교하는 동안 헬라어가 사용되었을 것이나 그들이 흥분한 나머지 자기들의 언어인 루가오니아말로 소리쳐 말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 당시 헬라 문화권에서 신이 인간의 형상으로 인간에게 나타난다는 믿음은 보편적인 것이었다. 이는 헬라의 신화에서 신들이 인간들과 동일한 생활을 하며 사고방식을 지닌 것으로 묘사된 데서 더욱 분명해진다. 이런 면에서 예수님께서 인간의 형상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다는 교리는 헬라 문화권에 결코 생소한 것이 아니었다.

=====14:12
 쓰스...허메 - '쓰스'는 헬라어로 '제우스'(* )인데 본 구절에서는 여격(* , 디아)이 언급되어 있다. '제우스'는 헬라 신화에서 모든 신들의 우두머리로 묘사되어 있으며 '허메'는 제우스의 대변자로서 언어를 지배하는 신으로 묘사되어 있다(Jamblichus). 아마 바나바는 당당한 체구와 존경받을 만한 위용(威容)을 지닌 사람(Chrysostom, Zahn)이었기에 '제우스'로 불리었을 것이며, 바울은 앉은뱅이에게 말을 하였다는 점에서 언어를 지배하는 신인 허메로 불리어졌을 것이다. 한편 루스드라에 사는 사람들이 헬라 신화 속에 나오는 신으로 바울과 바나바를 이해한 것은 앉은뱅이를 고친 사건이 얼마나 놀랍고 경이적인 사건이었는지를 암시해준다.

=====14:13
 성밖 쓰스 신당의 제사장 - 일반적으로 헬라 지역 내의 도시들은 신전을 중심으로 방사선형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런데 루스드라의 쓰스 신당과 같이 헬라 지역 이외의 신전들은 성 밖에 세워졌던 것 같다. 그리고 뷔켄하우저(Wikenhauser)에 따르면 신전이 성 밖에 있었던 것은 그렇게 드물지 않았다고 전한다. 한편 신당과 제사장이 있었다는 점으로 보아 종교적인 제사가 행해지고 있었음을 시사해 준다. 이 지역은 본래 헬라 문화권 밖에 있었으나 알렉산더에 의해 소아시아 지방이 헬라화될 때 헬라문화가 뿌리를 내렸다. 이때 헬라의 다신교가 이곳에 전해져 정착된 것 같다. 소와 화관 - 이는 제사장이 예배하기 위해 가져온 제물이다. '소'로 번역된 헬라어 '타우로스'(* )는 엄격한 의미에서 황소를 뜻한다. 그리고 화관은 꽃다발(harland, RSV)을 뜻한다. 당시 제우스와 머큐리 신에게는 황소를 제물로 바쳐 제사하며 화환을 함께 올려 놓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Robertson). 대문 앞 - 바울의 설교가 행해졌고 앉은뱅이가 치유되는 기적이 일어났으며 신당의제사장이 달려온 이 장소는 대문 앞이라고만 언급되어 있으므로 정확한 위치와 장소를 알 수 없다. 성 밖에 있는 신당의 대문이라고 볼 수도 있으나(Ramsay, Bruce) 문맥상 바울의 설교가 성 안에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오히려 성 안에서 일어난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즉 성 안의 자신들이 머물렸던 집 대문이라든가 아니면 어떤 큰 집 대문을 뜻할 수도 있을 것이다(Alford, Lumby). 그러나 대중 설교를 할 수 있는 대문이라면 가정 집이라기보다는 대중들이 쉽게 모일 수 있는 성문 앞으로 생각할 수 있다(Hervey, Blass). 당시 이곳은 앉은뱅이였던 사람이 구걸도 하며 많은 사람들이 모여 거래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래서 공동번역과 새 번역도 '성문 앞'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따라서 본문에서 언급된 대문 앞은 성문 앞으로 이해하는 것이 무난하다.

=====14:14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 옷을 찢는 행위는 참을 수 없는 울분과 비통한 심정이나 절망과 증오를 위한 것으로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습관이었다(창37:29,34;수7:6;삼하13:19;왕하18:37;19:1;마26:65). 그리고 군중 속으로 뛰어들었다는 묘사는 옷을 찢는 행위를 통해 보여준 바울과 바나바의 단호한 의지를 더욱 강조하고 있다. 즉 그들은 루스드라 주민들의 그같은 행위를 절대 용납할 수 없음을 단호하게 보여준다. 아마 바울과 바나바는 처음 루스드라 사람들이 그들의 언어로 말할 때는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르다가(11절 주석 참조) 제사를 준비하게 되자 그 내용을 알아차리고 당황하여 다급한 심정으로 이 같은 행동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14:15
 성정(性情)을 가진 사람이라 - 바울과 바나바는 여기서 제사를 받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님을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다. 성정(性情)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호모이오파데이스'(* )로 동일한 본성을 의미한다. 이는 사람의 몸을 취했으나 인간과 본성이 다른 신적 존재가 아니라 인간적 본성을 지닌 존재임을 강조한다. 이 헛된 일 - 헛된 일은 제우스 신에게 제사하는 행위 또는 사람을 신으로 알고 경배하는 행위를 말한다. 아마 바울과 바나바는 두 가지 의미를 모두 염두에 두고 그렇게 말한 것 같다. 그리고 이것은 곧 루스드라인들에게 신관(神觀)에 대한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다.

=====14:16
 자기의 길들을 다니게 묵인하셨으나 - 여기서 말하는 길이란 삶을 살아가는 가치관이나 종교적 진리, 세계관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본 구절은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각 이방 나라의 관습과 종교생활 등에 대해 책망하시거나 벌하시지 않았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14:17
 그러나 - 이말의 헬라어 '카이토이게'(* )는 '그렇다해도', '그러면서도'(공동번역)를 의미하는 복합 접속사이다. 이 접속사는 앞 문장과 뒷 문장을 반대적 의미로 연결한다기보다는 앞의 진술과 관련이 있으면서 또 다른 내용의 진술로 전환하는 기능을 갖고 있다. 자기를 증거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 각 민족들이 자신들의 다양한 종교, 가치관, 세계관을 갖고 살아왔지만 그것 역시 하나님과 무관하지 않고 자연의 변화 속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각 민족들에게 계시하셨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15절에서 언급한 창조자로서의 하나님께서 자연 가운데 자신을 계시하셨으므로 자연을 통해서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는 자연 계시에 대한 진술이다. 바울은 17:24-29과 로마서 1:19,20에서도 이와 같은 내용을 설교하고 있다. 따라서 어느 민족 누구에게나 하나님의 자기 계시는 열려 있었다는 말이 된다. 너희 마음에 만족케 하셨느니라 - 이 말은 어느 민족 누구에게나 하나님의 은혜가 풍족하게 주어졌으며 모든 민족이 하나님의 은혜에 만족하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것은 보편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말해 주는 것이다. 즉 모든 민족을 하나님은 공평히 사랑해 왔음을 말하는 일반 은총에 대한 진술이다.

=====14:18
 겨우 무리를 말려 - 바울과 바나바가 자신들을 신격화하는 루스드라 사람들의 잘못된 열심을 꺾는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음을 '겨우'라는 단어를 통해 알 수 있다.

=====14:19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 바울과 바나바의 선교활동을 시기하며 비방했던 안디옥 유대인들(13:14 주석참조)과, 바울과 바나바가 루스드라로 오게 된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던 이고니온에 사는 유대인들(2,5절)이 루스드라까지 쫓아와서 박해를 가하였음을 진술한다. 무리를 초인(招引)하여 - '초인하여'의 헬라어 '페이산테스'(* )는 '설득하다'(공동번역)라는 의미를 지니지만 여기서는 '선동하다'란 의미를 더 강하게 나타낸다. 그들이 루스드라 사람들을 어떤 방식으로 선동했는지 본문에는 전혀 언급되지 않았으나 짐작건대 그 두 사람이 마술과 같은 속임수로 루스드라 사람들의 종교를 파괴하려 한다고 선동했을 것이다. 실제로 본서 19장에서 은장색(銀匠色) 데메드리오가 에베소 지방의 사람들을 선동할 때도 바울이 에베소의 여신 '아데미'를 무시하고 그 종교를 폐하려 한다고 소리쳤다(19:26,27). 돌로 바울을 쳐서 - 본절에서 돌에 맞은 사람이 바울 한사람으로 언급되고 있다. 왜 바울만 폭력을 당하고 바나바는 언급이 없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다만 바울이 말을 계속 해왔기 때문에(12절) 표적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여기서 돌로 친 주체자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문맥상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온 유대인들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미 이고니온에서 음모가(5절) 루스드라에서 성공하게 되었음을 보여 주면서 누가는 그들의 핍박이 매우 집요했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 사건을 바울은 고후 11:25에서 회상하며 언급하고 있다. 성 밖에 끌어 내치니라 - 이 표현으로 보아 바울을 돌로 친 현장이 성 안이었음을 알 수 있다. 13절에서 언급된 장소, 즉 앉은뱅이를 고치고 설교하던 곳에서(13절 주석 참조) 폭행을 당한 듯하다. 스데반을 돌로 쳐죽일 때는 성 밖으로 스데반을 끌어낸 다음 돌로 쳤으나(7:58) 바울은 성 안에서 돌에 맞은 후 밖으로 끌어내졌다는 점에서 두 사건은 서로 대조된다. 이는 바울을 쳐죽이려 하는 무리들이 절차를 무시할 정도로 격분해 있었음을 암시해 준다. 따라서 바울에 대한 그들의 박해가 스데반보다 더 잔인한 것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 누가는 이 사실을 부각시켜 스데반의 박해자가 스데반과 똑같은 방식으로, 더 나아가 훨씬 더 잔인하게 박해를 당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14:20
 제자들이 둘러섰을 때 - 19절에서 바울이 거의 죽은 것 같이 되어 성 밖으로 내다 버려졌던 사실이 언급되었듯이 바울은 죽음에 이를 만큼 깊은 상처를 입고 고통의 신음을 하고 있었을 자리에서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어났다. 그리고 누가는 그 일의 증인들로서 제자들을 언급했다. 이 제자들이 쓰러진 바울을 중심으로 둘러섰던 것은 바울의 상태를 알아보고 죽었으면 장례 절차를 집행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Robertson, Bengel). 그러나 본문은 그들이 쓰러진 바울에게 어떠한 조치를 취했는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아마 누가는 바울이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건강하게 일어선 것을 보여주고자 했을 것이다. 이는 제자들이 그의 주위에 둘러서서 어떤 행위를 취하기 전에 바울이 일어났음을 암시한 데서 더욱 분명해진다. 더베 - 루스드라에서 죽을 고비를 넘긴 바울은 바나바와 함께 1차 선교 여행의 마지막 지점인 더베(Derbe)로 오게 된다. 이곳에 대해서는 6절 주석을 참조하라.

=====14:21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 이곳 더베에서는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처럼 박해를 받았다는 언급이 없으며 설교의 내용이나 기적사건에 대해서도 전혀 언급이 없고 간략하게 이 곳에서의 활동만이 서술되어 있다. 아마도 주목할 만한 사건이 없었거나 순조롭게 전도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특히 루스드라에까지 쫓아와서 바울을 돌로 쳤던 유대인들은 그가 죽은 줄 알았으므로(19절) 왔던 곳으로 되돌아갔을 것이다.그렇기 때문에 소수의 유대인이 거주하던 더베에서는 박해가 없었을 것이다. 한편 바울의 1차 전도여행을 마감하면서 저자는 많은 제자를 얻었다는 성공적인 성과를 언급함으로써 바울의 선교 전체가 성공적이었다는 사실을 독자들에게 알려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간결한 어투와 함께 루스드라와 이고니온 그리고 안디옥으로 돌아갔다는 짤막한 언급은 그곳에서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뿌린 복음의 씨앗이 어떻게 결실을 맺고 있는지 확인해 보고 싶은 바울의 믿음을 암시한 듯하다. 이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 대한 바울의 깊은 애정과 세심한 배려를 보여준다.

=====14:22
 마음을 굳게 하여 - 여기서 사용된 헬라어 '에피스테리조'(* )는 '힘있게 해준다', '튼튼하게 만든다'는 뜻을 갖고 있다. 이는 바울이 방문한 곳에서 개종자들을 격려하며(공동번역) 믿음 위에 굳게 서게 하였다는 말이다.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다 - 이같은 바울 일행의 권면은 초기 기독교의 신앙을 잘 반영해 준다. 즉 예수에 대한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곧 고통과 박해를 겪는 것으로 이해되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본절에서 이것은 초기 기독교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모든 사람이 겪어야 하는 것으로 언급되었다는 점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의 공통된 실존(實存)에 해당되는 말이라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의 이 말은 당시 바울 및 초대 교회의 성도들이 당했던 박해와 수난들에 신학적 의미를 부여하여 예수의 이름으로 인해 고난받는 모든 자들에게 위로가 된다.

=====14:23
 각 교회에서 - 바나바와 바울이 전도한 루스드라, 이고니온, 안디옥에 신앙 공동체가 성립되었음을 명시해 주고 있다. 그들은 박해를 받으면서도 자기들을 따르는 제자들을 계속 배출했으며(4,20,21절) 제자들을 중심으로 이방지역에서 견고한 조직체를 만들어 갓다. 장로들을 택하여 - 집단적인 공동체를 조직적으로 관리하고 활동적으로 이끌기 위한 지도자로 장로를 택하게 되었는데 이미 11:30에서 장로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 그러나 장로를 택하여 세웠다는 언급은 여기서 처음 나온다. 장로(elder, NIV)는 감독자라는 직분으로 언급되기도 하며(20:28) 다스리며(롬12:8;살전5:12) 수고하는 자(고전16:16)로 언급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언급만으로 당시 장로들의 정확한 직분을 규명하기 곤란하다. 단순한 교회의 봉사직으로서 설교할 권한은 부여되지 않았다는 주장(Zahn)도 있으나 오늘날의 목회자와 같은 기능을 하며 성도들을 돌보는 자로서 언급된 점으로 보아(딛1:5;약5:14) 사실상 목회자였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대해 자세한 내용은 6:1-7의 주제 강해 '교회의 직분'을 참조하라. 한편 본절에서 장로를 어떠한 방법으로 택했는지에 대해서 정확히 알 수 없다. 예루살렘이나 기존 교회들로부터 파송된 사람이 장로의 직분을 맡았는지 아니면 각 지역 자치 내에서 믿음이 충만한 자를 택하여 그 일을 맡겼는지 확실치 않다. 다만 바울과 바나바가 예루살렘이나 안디옥 등과 같이 기존의 교회로 갔다가 다시 돌아와서 장로를 세운 점으로 보아 각 지역 자체 내에서 장로들을 선출하여 임명한 것 같다. 금식 기도하며...주께 부탁하고 - 교회 공동체의 지도자들을 세우면서 금식하고 기도하며 지도자들을 주께 부탁한 것은 선출된 자들에게 지도자로서의 권위와 직분의 거룩성을 부각시켜 주고 있다. 한편 여기서 바울이 사도의 권한을 행사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즉 누가는 하나님과 교회 지도자를 중재(仲載)하는 바울의 역할을 보여줌으로써 바울의 사도적 권위를 암시적으로 내세웠다.

=====14:24
 비시디아...밤빌리아 - 왔던 길을 되돌아가고 있음을 간략하게 언급함으로써 빠르게 이야기를 진행시키고 있다. 이들 지역에 대해서는 13:13,14 주석을 참조하라.

=====14:25
 앗달리아 - 바울 일행은 버가(13:13)를 거쳐 앗달리아(Attalia)로 방향을 바꾸어 진행하게 된다. 왜 방향을 바꾸어 앗달리아로 갔는지 그 이유는 언급하지 않고 있지만 버가에서도 복음을 전한 점으로 보아 귀환 길에도 쉬임없이 전도활동을 계속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바울 일행은 전도의 목적을 갖고 앗달리아로 갔을 것이다. 앗달리아는 항구도시(port city)로서 버가의 서남쪽 약 26km에 위치해 있는데 이 항구도시는 B.C.159-138에 버가몬의 왕으로 지냈던 아탈루스(Attalus II) 왕이 건설한 것이다(Jacquier). 지금은 아달라(Adala)라는 지명으로 남아 있다. 바울과 바나바가 이 도시를 찾은 것은 소아시아의 남단에서 이 도시가 가장 큰 항구도시로 인구가 많아 전도 전략상 중요하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14:26
 배타고 안디옥에 이르니 - 앗달리아에서 복음을 전한 결과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또한 전도 여행시 처음 찾은 곳인 구브로(Cyprus)섬(13:4-12)으로 돌아가지 않고 곧바로 안디옥으로 직행한 이유도 밝히지 않고 있다. 이는 앗달리아에서는 다른 지역에서의 선교 사역과 비교해 볼 때 뚜렷한 성과나 특별한 일이 없었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던 곳 - 여기서 누가는 바울 일행이 구브로를 거쳐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더베 등에서 성공적 결과를 거둔 전도 활동이 안디옥 교회에서 출발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여기서 '부탁하다'라는 말은 23절에서 언급된 '파라티데미'(* )와 동일한 의미를 가진 '파라디도미'(* ) 가 사용되었다. 따라서 이는 안디옥 교회가 바울과 바나바를 전도자로 임명하여 파송한 사실을 다시 확인시키는 것이다(13:1-3 주석 참조).

=====14:27
 교회를 모아 - 그들이 돌아와 교회를 모았다는 것은 교회 신도들을(공동번역) 불러 모은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러나 선교사들의 모임이라는 주장은(Fern-ux) 자연스럽지 못하다. 아마 바울과 바나바의 귀환은 안디옥 교회의 큰 경사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래서 온 교우들이 모인 자리에서 선교 보고회를 열었던 것이다.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 - 본절에서 누가는 이방인의 개종 사실이 하나님의 역사하심 속에 이루어진 것임을 밝힘으로써 바울과 바나바에 의해 시작된 이방인에 대한 선교(宣敎) 활동이 하나님에 의한 일임을 밝혀 그 정당성을 인정받고 있다. 물론 베드로나(9:32;11:18) 빌립보에 의해서도(8:4-13) 이방인들에 대한 선교가 이루어졌지만 바울과 바나바가 행한 것처럼 본격적인 것이 아니었다. 특히 이방 선교를 위해 안디옥 교회가 직접 나서서 이방 선교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니고 있다.

=====14:28
 오래 있으니라 - 이 표현은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 교회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음을 의미한다. 이미 누가는 9:43과 10:48에서도 베드로가 한 곳에 오래 유(留)한 것을 보여줌으로써 베드로의 선교 활동이 매우 고무적인 것이었음을 암시해 준 바 있다. 여기서도 역시 바울과 바나바의 선교 활동에 대해 안디옥 교회가 열렬히 찬사를 보내고 환영했음을 짐작케 해준다. 또한 오래 머물렀다는 말은 긴 휴식을 취했다는 의미로 선교 활동이 얼마나 힘들었는지에 대한 간접적 표현이기도 하다. 또한 바울과 바나바에게는 제2차 전도 여행을 준비하는 기간이기도 하다. 바울은 여기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까지 머물렀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상당한 기간이었을 것이다. 그 기간을 대부분의 학자들은 약 1년 안팎으로 본다(Levin, Alford, Lenski). 이렇게 함으로써 안디옥은 이방 선교를 위한 중심 교회로서 그 자리를 굳히게 된다.



  앞장에서 시작된 바울의 제1차 전도 여행은 본장에서 그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13
장에서는 수리아 안디옥을 떠나 구브로와 소아시아의 비시디아  안디옥에서의  활동이
대체로 순조롭게 진행된 반면 본장에서의 여정인 이고니온(1절)과 루스드라(6절) 그리
고 더베(6절)에서의 활동은 고조되는 핍박을 피할 요량으로 찾아다닌 지역들에서 이루
어진 가시밭과 같은 사역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까닭에 본장에서의 복음을  중
심으로 한 긴장과 갈등이 구석구석에서 확인되는 바, 그 내용을 '복음을 위한 사람들'
과 '복음을 반대하는 사람들'이라는 측면에서 살펴보기로 하자.
  (1) 복음을 위한 사람들. 이 부류에 속하는 대표적인 인물들은 두 말할  나위도없이
사도 바울과 바나바를 들 수 있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 두 사람은 수리아  안
디옥 교회의 실질적인 책임을 들 수 있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 두 사람은  수
리아 안디옥 교회의 실질적인 책임을 진 목회자들로서,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방 선
교를 수행하기 위하여 파송되었다(13:1-3). 13장에서부터 전개되는 이들의 선교  활동
은 많은 열매를 맺게 되지만 한편으로는 그들의 사역에 대한 방해가 만만찮다. 그  방
해 책동은 다양한 부류와 방법으로 제기되는데, 그 구체적인 실례들은 본장에서  더욱
여실히 나타난다. 그러나 고조되는 핍박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과 바나바의 복음  전
파의 열기는 꺼질 줄 모르는 활화산처럼 분출하고 있다. 이처럼 이들의  복음  전파의
열정은 다양한 형식으로 표현되고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가) 대담한 복음 전파. 비시디아 안디옥에서의 핍박을  피하여(13:50)  이고니온
지역으로 도피해 온 두 사도는 여기서도 복음의 전도 사역을 그칠 줄 모른다.  이방인
의 구원을 시기하는 유대인들(2절)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복음 전파를  방해했
지만 그들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더욱더 공개적인  복음  전파를  감행했다(3
절). 그 결과 바울은 돌에 맞아 죽음의 사경을 헤매기도 했지만, 이런 핍박들은  오히
려 복음 전파의 열정을 더 강하게 만들 뿐이었다(21절). 이처럼 복음 전파에 있어  일
사 각오(一死覺悟)의 자세로 임한 바울과 바나바의 태도는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히
1:38) 복음의 산증인이 취하는 자세가 아닐 수 없다.
    (나) 지혜로운 피신(5,6절). 전투에서 군인의 도망은 직무 유기로서 비겁한  행위
일 것이다. 그러나 모든 피신이 다 직무 유기에 해당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경우에
따라서는 작전상 후퇴로서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를 취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바울과 바나바가 선교 전략상 사용했던 피신도 이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들은 가능한 한, 복음을 대담하게 전했지만, 그 결과 목숨이 위태로울  때
는 다른 지역으로 피신하는 지혜를 보이고 있다. 이 방법은 "이 동네에서 너희를 핍박
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마 10:23)고 하는 예수의 말씀에 부합되는 것으로서 효과적
이고 더 광범위한 이방 선교를 이루기 위해서 필요했던 방법인 것이다. 더욱이 이  피
신의 방법은 기독교를 항상 적으로 간주하며, 핍박과 박해를 상례화한 지역과  시대에
서 늘 적용되었던 선교 원칙으로서, 작위적(作爲的)인 순교만이 능사가 아님을 말해준
다. 기독교 역사가 순교자의 피로 얼룩진 것은 엄연한 사실이진만 이것을  공식화시킬
수 없는 것은, 선교는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하에 진행되는 특별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고로 사도 바울과 바나바의 피신은 하나님의 인도에 따른 것으로서 그들이 처한  상
황과 여건하에서는 하나님께서 '순교자의 피'보다 '전도자의 발걸음'을 더 원했던  것
이라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바울 일행의 피신은 부끄러운 후퇴가  아니라  지혜로운
행보(行步)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2) 복음을 반대하는 사람들. 이 부류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불순종한 유대인
들과 무지한 이방인들이라고 할 수 있다. 불순종한 유대인들은 바울과 바나바의  이방
선교에 제일 큰 걸림돌로서, 바울 일행의 진로를 방해했을 뿐  아니라(4,5절)  그들의
목숨까지도 노렸던 사람들이다(19절).
  유대인들의 박해 이유는 여러 가지로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중에 가장 큰 이유
는 구원의 순서에 있어서 유대인의 우선권을 인정하지 않고 이방인들과 동등하게 취급
한 바울 일행의 태도를 들 수 있다. 유대인들은 스스로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고 이런 선민 으식은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에게 편만해 있던 사상이었다.  따
라서 유대계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도 모든 이방인에게 무차별적으로 적용되는 바울의
복음에 강한 의구심을 나타내고 있었던 상황이 종종 발생했었다. 이러한 상황은  본서
15장을 통해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는 바, 여기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15장 강해를  참
조하기로 하자.
  그 다음 사도 바울 일행을 핍박했던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의 적극적 박해에 비할  때
그 박해의 양상이 소극적이라고 할 수 있다. 본문에 의하면 이방인들은 주로 유대인들
의 사주(使嗾)에 의해서 선동당하는데, 이고니온과 루스드라 성에서의 박해가 좋은 예
가 된다. 특히 루스드라 성에서 야기된 사건은 이방인들의 박해 동기를 엿볼 수  있는
대표적 실례가 된다고 하겠다. 이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내용에 관해서는  해당  단락
강해를 참조하기로 하자.
  이상에서 살펴본 대로 본장 전체에는 복음을 중심으로 긴장과 갈등이 면면히 흐르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긴장과 갈등이 수리아 안디옥에 귀환한 사도 바울 일해의
보고를 통해서 해소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즉 복음을 위한 사람과 복음을  반대하는
사람들 사이에 조정된 긴장과 갈등은 복음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일방적인 폭력에 의하
여 외형적 승리를 거둔 것처럼 보이지만, 바울 일행의 보고에 의하면 그 결과는  정반
대다. 바울 일행은 많은 고난과 박해를 받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선교 여행을  통해
서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이 열리는 사실을 목도하였고 이를 교회앞에  고백하고  있
다. 이것은 결국 복음을 위한 사람들의 궁극적인 승리를 말해주는 중요한 대목이 된다
고 하겠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구속사의 물결이 이방의 바다로  도도히
흐르는 시점에서 복음을 대적하는 무리들의 암초는 일순간 나타났다가 잠겨  버렸다는
사실을 감지할 수 있다.
  한편 본장의 내용은 선교 지역에 따라 세 부분으로 나뉜다. 그것은  각각  이고니온
전도(1-7절), 루스드라 전도(8-18절), 안디옥으로의 귀환 여행(19-28절) 등으로  구분
되는 바, 상세한 내용은 문단 강해를 통해서 상고하기로 하자.

  1. 이고니온에서의 전도(14:-17)
  바울의 1차 전도 여행은 비시디아 안디옥 전도를 끝을 맺었다(13장).  이  시점에서
바울 일행은 어디로 갈 것인지에 대해 고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에베소에서
유브라데까지 이르렀던 로마의 대로(大路)는 B.C.6년경에 남부 갈라디아의 중심지까지
연장되었고 이 길은 비시디아 안디옥으로부터 두 갈래로 나누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본문은 바울 일행이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이고니온 쪽을 택하였음을 보여준다.
당시 이고니온은 로마의 식민지로서 철저히 로마화된 번창한 도시였다. 그리고 인종적
으로 유대인, 헬라인, 로마인 등이 골고루 섞여 살고 있었다. 누가는  이고니온에서의
사역에 대해 간략히 언급하고 넘어갔지만, 훗날 이곳은 선교 확산의 중심지로서 큰 역
할을 담당하였다. 아마 누가는 비시디아 안디옥에서의 사역과 이고니온에서의  사역에
있어서 유사한 점이 많았기 때문에, 장기간의 체류(3절)를 단 몇줄로  요약해  버렸을
것이다. 로마의 직접적 통치를 받는 대도시일수록 폭도들의 만행은 허락되지  않았다.
그 반면에 이고니온과 같이 로마 본토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서는  폭력이  난무했던
것으로 보인다(5절).
  한편 이고니온에서 발생한 사건들을 면밀히 검토해 보면 복음서에 언급된 여러 사건
들과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유사점들은 특히 예수의 행적과 깊은 연관이  있
는 바, 이것에 대한 연구는 매우 유익한 교훈을 제공해 줄 것이다.  바울의  이고니온
전도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 전파와 그 궤를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 그  유사
점의 몇몇을 간추려 보기로 하자.
  (1) 복음 전파의 결과들. 바울의 선교 여행시 항상 뒤따랐던 결과는 사람들의  양분
된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양분된 사람들의 사람들의 상이한 반응은 복음의  수
용과 거절이라는 현상이며 이러한 현상은 이미 예수의 하나님 나라 전파에서 그  기원
을 찾아볼 수 있다.
  (2) 복음 전파에 따르는 분쟁들. 바울의 이고니온 지방 선교는 허다한 무리의  복음
영접과 유대인들의 박해라는 양분된 여론 형성과 여기에서 야기되는 분쟁을  초래하였
다. 이러한 분쟁의 현상은 일찍이 예수의 사역 가운데 항상 뒤따랐던 반응이었다.  그
구체적인 예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특히 예수의 출생, 사역, 그리고 죽음이라는
생의 과정을 통해서 투영해 보면 일목 요연하게 정리가 될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복
음서의 강해를 참조하기 바라며, 여기서는 예수께서 자신의 사역에 이어 분쟁을  예견
했던 사건 하나를 설명하는 데 그치기로 하자. 그것은 마태복음 10:34-39의 말씀이다.
여기에서 예수는 자신의 사역의 결과가 이웃뿐만 아니라 가족간의 분쟁과 불화까지 일
으킬 수 있음을 제시하셨고 아울러 복음 전파가 일으키는 분쟁에 동요하지 맒것을  경
계하셨다.
  (3) 피신의 지혜. 바울 일행이 이고니온에서 핍박의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을 때, 저
들은 우선적으로 몸을 피신하였다. 이 피신에 대한 전반적 설명은 장 강해에서 언급하
였으므로 여기서는 피신의 방법에 관한 예수의 말씀과 행적에 초점을 보기로 하자.
  예수는 공생애 기간 중 여러 차례 대적들로부터 생명의 위협에 직면했거니와 이  때
마다 예수는 자신의 때가 임하기 전까지 군중 속으로 피신하셨다. 또한 예수께서는 열
두 제자들을 전도자로 각 고을에 파송할 때, 피신의 방법을 적극 활용할 것을  당부하
셨다(마 10:23). 이렇게 볼 때 바울 일행이 이고니온에서 극한 핍박에 직면하게  루스
드라와 더베 성으로 피신한 것은(6절) 전도자의 지혜로운 처신이라 볼 수 있다.
  (4) 핍박의 과정. 이 부분에 관해 더 자세한 내용은 장 강해를 참조하기로 하고  여
기서는 핍박의 주체자들에 초점을 맞추어 보기로 하자. 본문에서 바울 일행을  핍박했
던 주체자들은 유대인들과 이방인, 그리고 관원들이었다(2,5절). 이 중에서 특히 유대
인들은 적극적인 주체로, 나머지는 소극적 주체로 분류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서
로 다른 입장에도 불구하고 공동의 이익을 위해서 복음 전도자들을  핍박했다는  데에
합일점을 가졌다. 이러한 현상은 예수의 십자가 처형시에도 찾아볼 수 있다. 평소  정
치적, 신학적 견해를 달리하는 이스라엘 내의 세 정파와(막 5:35-43 주제 강해  '예수
당시의 주요 사회 계층 및 종교 계층' 참조) 로마 정권으로 대표되는  빌라도  정권의
공생 공존의 합일점이 예수의 십자가 처형이라는 데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처럼  기
독교에 대한 핍박의 동기와 과정이 예수의 십자가 처형에서 여실히 노출된 것과  같이
기독교의 복음 전파시 나타나는 하나의 전형적인 현상이 될 수 있다.
  한편 이 같은 과정 속에서 대비 구조가 나타났는데, 그것은 담대한  진리와  비루한
비진리의 구조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복음의 대적자들은 바울 일행을 박해하기
위해서 선동과 폭력 등과 같은 비합리적인 수단을 동원한 반면 복음의 진리를 바울 일
행은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하게 설파했다는 점이다. 고로 이러한 진리와  비진리
의 접전 싸움은 이미 판결이 난 상태라고 할 수 있는 바, 비진리의 세력은 폭력과  선
동에 의지할 때부터 그들의 정당성은 상실했다고 하겠다.
  실로 본문 속에서 예수 사역의 새싹이 움트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현상은
어쩌면 예수께서 참 생명이시며 유일한 진리되심을 올바르게 전파하는 곳이면  으례히
일어나는 양상일 것이다. 이에 본문의 내용은 현대 교회의 성도들이 전파하는 바 복음
의 순도를 측정하는 시금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2. 루스드라에서의 전도(14:18)
  본문에 수록된 루스드라에서의 사건은 매우 극적으로 전개되어 있어 목격자의  생생
한 보고를 토대로 하여 기록된 것임에 틀림없다. 그 목격자란 루스드라 출신인 디모데
였을 가능성이 많다(16:1,2). 이고니온의 남쪽 38km가량 떨어진 루스드라는 B.C.6년경
에 로마의 식민지로 흡수되었고 로마 황제 아구스도는 이곳으로 고참  직업  군인들과
그 가족들을 이주시켜 변방도시로 만들었다. 그 주민은 대부분이 교육을 받지 못한 루
가오니아인들로서 자기네 언어를 따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그 지배 계층은 로마의  직
업 군인들로 이루어졌고, 교육이나 상업등은 소수의 헬라인들에 의해  장악되어  있었
다. 또한 거기에는 유대인들도 살고 있었으나(16:1-3) 그 영향력은 보잘 것 없었던 것
같다. 이렇게 추정할 수 있는 이유는 루스드라의 회당이 없었기 때문이다.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대개 거주지에서 10명이 이상의 유대인들이 생기면 하나의 회당을  건립했
던 사실로 미루어 볼 때 루스드라 지역에는 유대인들이 기껏해야 10명 이내였던  것이
다.
  이런 점에서 먼저 회당을 방문했던 바울의 선교 전략은 루스드라 지역에서는 적용될
수 없었다. 이런 사실은 루스드라 주민들의 신 개념을 추측할 수 있게 해 준다.  적어
도 회당이 존재했던 이방 지역의 주민들은 유일신 하나님에 대한 선이해(先理解)가 있
었고,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은 복음을 수용할 수 있는 마음의 준비
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회당이 없었던 지역의 주민들은 유일신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전무했으므로 설령 하나님의 계시를 설명한다고 해도 자신들의 신 개념으로 이해할 수
밖에 없는 신앙적 무지를 드러내고 있다. 이 같은 측면을 가장 잘 드러내 주는 사건이
바로 본문이거니와 그 내용을 '신 개념'이라는 주제하에 살펴보기로 하자.
  (1) 루스드라 주민의 신 개념. 고고학적 고증에 의하면 루스드라의 주민들은 제우스
와 헤르메스 신을 숭배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더욱이 이들의 우상 숭배를 더욱 부채질
한 것은 그들의 저급한 문화 수준과 문맹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우상 숭배와 신
비한 전설에 대해 루스드라 주민들이 바울 일행의 기적을 보고 그들은 제우스와  헤르
메스 신의 방문으로 생각하게 된 이유는 이런 배경에서 기인되는 것이다. 사실 루스드
라 지방에는 제우스와 관련된 신화가 퍼져 있었다. 그 신화에 의하면 이들 두 신이 자
신들의 신분을 감추고, 이곳 루스드라 지방을 방문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필레몬
과 바우시스라는 가난한 부부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이 두 신을 경홀히 여겼으며 따
라서 제우스와 헤르메스는 그 부부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을 홍수로 몰사시켰다는 것이
다.
  이 같은 관념에 사로잡혀 있던 주민들에게 바울과 바나바의 기적은  그들의  지나간
과오를 상기시켰음에 틀림없다. 다시 말하면 또다시 자신들의 지역을 방문한 두  신을
소홀히 취급한다면, 또다른 재앙을 당할 지 모른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날  때부
터 앉은뱅이였던 사람을 걷게 했던 바울 일행을 신처럼 섬기려 제사를 준비한 것은 어
쩌면 이들의 신 개념에서 볼 때 지극히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이와 같이 루스드라 주민들의 신 개념은 세상적 신 개념의 한 단면을 잘 보여  주는
데, 그 대표적인 것은 그리스 로마 신화라 하겠다. 이에 관한 상세한 내용은 본문  주
제 강해 '헬라.로마의 신과 예수 제일 신앙'을 참조하기로 하자. 다만 여기서  간략히
살펴볼 수 있는 것은 루스드라 주민의 세속주의적 신 개념이다. 그들의 신은 인과  응
보에 철저한 신으로서, 인간들에게 공양을 요구하는 게걸스러운 신이다. 또한  사람보
다 강한 힘을 소유했던 까닭에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그들의 신은  강력한  힘을
소유하고 있다. 하지만 그 힘의 행사는 인간의 지성에 달려 있기에, 엄밀한  의미에서
는 인간의 범주 안에 갇혀있는 신이다.
  이와 같은 신을 섬긴 루스드라의 주민들은 이적을 행한 바울 일행을 매우  난처하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끝내 제사를 물리친 바울 일행에게 강한 악감을 품었음 것으로 짐
작된다. 이런 사실은 이들의 신 개념의 한계를 보여주는 실례가 된다. 루스드라  주민
에게서 볼 수 있는 인간 중심적 신 개념은 오늘날 성도들의 신관(神觀)에서도 흔히 발
견되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거룩한 삶에 대한 관심과 결단보다는  자신들의
성공을 보장해 주기를 바라는 일체의 모든 생각과 행동은 그들의  마음속에  수호신을
섬기는 것과 같다. 요컨대, 기도와 헌금하는 태도에서도 수호신을 달래고 위로하는 모
습을 엿볼 수 있다. 이런 신앙은 루스드라 주민들이 범했던 오류로서 하나님을 제한하
고, 하나님을 바로 증거하지 못하는 크나큰 과오가 아닐 수 없다.
  (2) 바울의 신 개념. 루스드라 주민들의 잘못된 신 개념에 대한 바울 일행의 신  개
념을 매우 대조적이다. 선천적 불구자인 앉은뱅이를 치유한 바울의 행동 동기는  결코
능력의 과시가 아니었다. 바울은 앉은뱅이에게서 완치의 가능성인 믿음을 보았던 것이
다. 이것은 치유의 근원이 바울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확연히  보여준다.  또한
바울의 신 개념은 루스드라 주민의 제사를 거절하는 모습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바울
은 앉은뱅이의 치유가 하나님께서 행하신 역사이심을 누구보다 잘 인식했던 반면 루스
드라 주민들은 바울을 능력의 신으로 생각하셨다. 이러한 생각에서  그들은  바나바와
바울을 각각 쓰스와 헤메라 부르며 제사를 준비했다. 하지만 교만은 패망의  지름길임
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바울 일행은 자신들을 우상화하려는  주민들의  제사를
극렬히 반대했다(14절). 이 같은 바울 일행의 단호한 거부는 비상 사태에 대한 안타까
움을 표시하는 강렬한 거부의 몸짓으로 표현되었던 것이다. 결국 바울 일행의  행동은
인간의 신격화나 우상화는 결코 용납될 수 없다는 유일신 하나님 신앙의 표출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바울의 신 개념을 하나님 앞에 겸손하고 또한 하나님의 힘을 받아  살아가는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런 점은 당시 군사적 업적이다 지적 과시를 통해서 스스로
우상화시키려고 했던 로마 제국의 시류와도 대조를 이룬다 하겠다.

  * 헬라.로마의 신과 예수 제일 신앙. 우리는 신.구약성경을 통해서 여러 형태의  우
상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이들 우상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즉 외면성이
강한 구약성경의 우상과 내면성이 강조된 신약성경의 우상이 그것이다.  다시  말해서
구약성경에 나타난 우상들이 주로 자연 현상을 통한 사단의 미혹임에 반해 신약성경의
우상들은 주로 인간의 교만심을 부채질하는 사단의 미혹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차
이는 시대적인 배경에서 비롯되는 당위적인 것이라 하겠다. 특히  신약성경의  배경을
이루고 있던 로마 제국은 다신론, 범신론 사상에 젖어 숱한 우상을  신봉하고  심지어
제국의 지배자들은 자신들의 '신의 아들'이라는 착각에 빠져 종교적 숭배까지  강요한
적이 많았다.
  여기서는 그들의 이런 잘못된 신관의 중심이 되는 헬라.로마 신화의 12주신(主神)을
중심으로 그 특징을 고찰해 보기로 하자. 무엇보다도 이 신들은 그들 스스로가 창조자
가 못되고 당시 사람들이 꿈꾸던 가장 바람직한 인간상의 신격화로서 자기 중심적  희
노 애락(喜怒哀樂)과 권모 술수 특히 육욕과 관련된 숱한 애증 관계를 표출해 내고 있
으며 이런 신들이 실제 존재한 것은 아니다. 유일신 앞에서의 자기 존재를 깨닫지  못
한 인간들의 억눌린 욕구의 표현에 불과한 것이다. 즉 그들은 실재(實在)하는 신이 아
니라 인간이 모든 가공의 신이며 창조나 윤리의 신이 아니라 피조물과 불의한  측면을
충동질하는 신이다. 이러한 신들을 다음 도표를 통해 살펴보기로 하자.
              
+------------+------------+---------------------------------+------------------+
| 헬  라  명 | 로  마  명 |        속           성          |  성       경     |
+------------+------------+---------------------------------+------------------+
|  제우스    |  주피터    |하늘의 신, 기후의 조절자, 모든 신| 행 14:12,13      |
|  (Zeus)    | (Jupiter)  |과 인간을 다스리는 주신          |                  |
+------------+------------+---------------------------------+------------------+
|  헤  라    |  주  노    |여성의 신                        |                  |
|  (Hera)    |  (Juno)    |제우스의 부인                    |                  |
+------------+------------+---------------------------------+------------------+
|  데미테르  |  케레스    |농업의 여신                      |                  |
| (Demeter)  | (Ceres)    |결혼의 수호자                    |                  |
+------------+------------+---------------------------------+------------------+
|  포세이돈  |  녀  툰    |바다(물)의신                     |                  |
| (Poseidon) | (Neptune)  |지진의 신                        |                  |
+------------+------------+---------------------------------+------------------+
|  하데스    |  플루트    |지하 세계의 신                   |                  |
|  (Hades)   | (Pluto)    |                                 |                  |
+------------+------------+---------------------------------+------------------+
|  아레스    |  마르스    |전쟁과 농경의 신                 | 행 17:22         |
|  (Ares)    |  (Mars)    |                                 |                  |
+------------+------------+---------------------------------+------------------+
|헤파이스토스|  불  칸    |불의 신                          |                  |
|(Hephaistos)|(Vulcanus)  |장인(匠人)의 신                  |                  |
+------------+------------+---------------------------------+------------------+
| 디오니소스 |  바커스    |자연, 술, 연회(宴會)의 신        |                  |
| (Dionysos) | (Bacchus)  |                                 |                  |
+------------+------------+---------------------------------+------------------+
| 아프로디테 |  비너스    |미와 사랑의 신                   |                  |
| (Aphrodite)|  (Venus)   |                                 |                  |
+------------+------------+---------------------------------+------------------+
|  헤르메스  | 메르쿠스   |전령, 사자(使者)의 신            | 행 14:12         |
|  (Hermes)  |(Mercurius) |                                 |                  |
+------------+------------+---------------------------------+------------------+
|  아폴로    |  아폴로    |목축과 태양의 신                 |                  |
| (Apollon)  | (Apollo)   |시, 음악, 예언, 사냥을 관장      |                  |
+------------+------------+---------------------------------+------------------+
|  아테네    | 미네르바   |지혜의 여신                      |                  |
| (Athene)   | (Minerva)  |풍요의신                         |                  |
+------------+------------+---------------------------------+------------------+

  현대에 이르러 이런 신들을 믿는 자들은 없다. 하지만 인간들은 끊임없이 자신을 신
격화하며 자기 욕망을 만들어낸 각종 명예, 권력, 쾌락 등을 우상처럼 섬긴다. 시대가
갈수록 그 정도는 병적으로 심해지고 있다. 더욱이 기독교 내에서도 기복주의적  신앙
이 좀먹이 들어오는 것은 극히 경계할 일이다.
  끝으로 이것은 현대 서양 사상의 양대 주류인 헬레니즘(Hellenism)  과  헤브라이즘
(Hebraism)의 우열을 논한 것은 아니다. 이는 인본주의적 신앙과  신본주의적  신앙의
질적 차원이 완전히 다름을 강조할 뿐이다. 실체로 참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민족  중
심, 율법 중심의 인본주의적 신앙이 아니라 오로지 자유와 경건의 기쁨을  전해  주는
예수 제일 신앙인 것이다.

  * 안디옥 교회로의 귀환(14:19-28)
  본문은 바울 일행이 그동안 전도했던 여정을 역으로 돌아보면서 선교의 전초 기지였
던 안디옥 교회로 귀환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1차 전도 여행을 출발한  바울  일행은
수많은 고초와 어려움 속에서 조금도 동요함 없이 임무를 마치고 귀환하였거니와 이는
매우 귀중한 의미를 지녔다고 할 수 있다. 바울 일행의  선교보고에서도  언급되듯이,
바울은 1차 선교 여행을 통해서 이방인에게 복음의 문을 여신 하나님의  섭리를(27절)
깊이 체험했던 것이다. 이 사실은 뒤이은 바울의 3차 전도 여행을 독려(督勵)했을  것
이며 또한 그 비전을 가질 수 있는 근거로 작용했을 것이다. 이 같은 내용을 중심으로
한 본문에서 우리는 바울의 선교 전략에 관한 중요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으며  또한
바울이 고난을 받았던 지역과 순방했던 도시의 지명들이 서신서의 내용과 일치함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착안하여 본문을 상고하고자 한다.
  (1) 귀환 여정의 의미. 본문에 언급된 지명들은 1차 선교 중 방문한 적이 있던 지역
이었기 때문에 두번째 방문에 해당된다. 즉 더베나 루스드라, 이고니온, 그리고  비시
디아 안디옥 등은 바울이 복음을 전하여 많은 성도들이 생겼던 곳이다. 물론 1차 선교
여행의 전반부 여정은 주로 핍박을 피하여 방문했던 까닭에 구체적인 일정까지 짜여있
었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후반부 특히 본 단락의 여정은 바울 일행의 계획적인  방문
이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기독교 성장의 필수적인 두 요소를 든다면 '선교'와 '교육'을 들 수 있다. 이에  본
문의 여정은 복음 전파의 결실인 성도들에 대한 교육에 강조점을 두었다고 할  수  있
다. 실제로 바울 일행은 루스드라와 이고니온 그리고 안디옥을  돌아보면서  '환난'에
대한 특별한 마음가짐을 당부하였다(22,23절). 이것은 성도수를 늘리기에만 급급한 선
교, 혹은 전도 정책에 혈안이 되어 있는 교회에 경종이 되고도 남음이 있다.
  (2) 서신서와의 내용의 일치. 본문의 내용은 본서의 역사적 진위성에  대한  충분한
보증이 되고 있다. 특히 바울 일행이 당한 핍박과 방문했던 지명은 서신서들의 그것과
일치하고 있어 신빙성을 더해 주고 있다.
    (가) 핍박 내용의 일치. 본문 19,20절에 의하면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돌에  맞아
사경을 헤매던 적이 있었다. 이 내용은 고린도후서 11:24,25에 언급되고 있다. 바울은
스데반의 경우처럼 강제로 성 밖으로 끌려나가서 투석을 당하진 않았지만, 그가  루스
드라 거리에서 돌에 맞은 사건은 고린도후서에서 '한번 돌에 맞는'사건과 일치하고 있
는 것이다.
    (나) 지명의 조화. 본문 23-25절에 보면 사도 바울의 여정이 언급되어 있는데, 여
기에 기록된 지명은 거의 디모데후서 3:11의 그것과 일치한다. 한 가지 언급되지 않은
곳이 있다면 '디베'라는 지명인데, 이 차이점은 다음과 같은 설명에 의해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즉 본서에서는 일반적인 여정을 가볍게 언급했던 반면,  디모데후서에서
는 이 도시 중 바울이 핍박을 각별하게 당했던 곳을 강조하여  언급하였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더베'라는 도시는 바울이 복음을 전파한 도시이지만(20-25절), 그  곳에
서는 안디옥과 이고니온 그리고 루스드라에서처럼 핍박을 받지 않았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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