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니고데모 - 헬라식 이름의 뜻은 '백성의 정복자'로서, 공관복음서에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았으나 본서에서는 세 번에 걸쳐 나타난다(7:50;19:39). A.D. 70년 예루살렘 성전이 완전히 파멸되던 당시 나퀴드몬(Naqidmon)이라고 하는 부유하고 관대한 사람이 예루살렘에 살고 있었는데 그가 혹시 40년 전 예수를 찾아온 니고데모일지 모른다는 추측이 있기도 하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Moutefiore, Loewe). 요한이 전해 주는 바에 의하면 니고데모는 (1) 예수의 시체에 바르도록 '몰약과 침향을 섞은 백 근'(19:39) 정도를 선뜻 내놓는 부유한 사람이었다.(2) 엄격한 유대교를 신봉(信奉)하는 종파인 바리새파 사람이었다. 바리새인으로서의 니고데모는 하나님의 백성되는 자격이 아브라함을 통해 계승되는 자연적, 육적 출생에 있음을 강조한데 반해, 예수는 영적 중생을 강조하셨다. (3) 그는 유대인의 관원이다. 관원의 뜻은 '아르콘'(' )은 산헤드린 공회의 회원을 가리키는데, 산헤드린은 그 당시 유대인의 최고 종교 회의 기관으로 그 구성원의 수는 71인으로 알려졌으며 고위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다른 말로 하면 백성의 지도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한편 니고데모가 그러한 사회적 고위층에 속해 있으면서도 친히 예수를 방문한 사실은, 매사에 편견(偏見)이 없고 사리가 깊었음을 보여준다. (4) 그는 조상들의 율법에 정통하여 모든 백성들로부터 존경받는 율법 교사들 중의 한 명이었다. 율법 학자가 된 사람은 종교법과 의식(儀式)의 문제들에 대해 독자적임 판결을 내릴 수 있었으며(Sanh), 형사 소송 때에는 재판관으로서 참여할 수 있었으며, 민사 소송 때에는 여러 재판관들과 함께 판결을 내리거나 아니면 단독 재판으로서 판결을 내릴 수 있었고 또한 랍비라는 칭호를 가질 수 있었다(Jeremias).
=====3:2
밤에 예수께 와서 - 니고데모가 굳이 밤에 예수를 방문했던 이유에 대해서는 (1)타인의 이목이 두려워서 (2)분주한 낮시간을 피해 예수와 예수와 친밀한 대화를 오래도록 나누기 위해 혹은 (3)밤늦게까지 연구하고 논쟁하였던 당시 랍비들의 관례에 따라서 등 여러 견해가 있으나 정확히 단정하기는 어렵다. 어쨌든 이는 니고데모의 신중성을 보여줌과 아울러 예수께서 그의 마음을 온통 사로잡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요한은 19:39에서 다시 한번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를 찾아온 사실을 언급한다. 요한의 사상(思想)에서 '밤'은 악과 거짓과 무지의 실재(reality)로서 상징되고 있다(11:10). 그리고 13:30에서 유다는 '밤'에 예수를 떠남으로써 빛이신 예수에게로 나아온 셈이다(the Anchor Bible).
랍비여 - 니고데모는 안드레와 요한 그리고 나다나엘과 마찬가지로(1:38, 49) 예수를 '랍비'라 부름으로써 대화를 시작하고 있다. 서품(敍品)을 받아 율법학자단에 가입하고자 하는 사람은 수 년 동안의 정규적인 연구 과정을 마쳐야 했다. 이 과정을 통해서 그들은 모든 전승 자료와 할라카의 해석 방법을 통달하게 되고, 비로소 종교법과 형법(刑法)의 문제들에 대해 독자적인 판결을 내릴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서품을 받은 율법학자가 되려면 40세가 되어야 했다. 그러나 예수와 같이 '랍비'가 되기 위한 공부를 전혀 하지 않은 사람은 서품을 받은 율법학자들이 누리는 특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Jeremias). 한편 니고데모가 사용한 이 '랍비'라는 말이 예수에 의해서 부정되거나, 제자들에게 있어서 놀라운 일로 여겨지지 않은 것으로 보아 예수는 이미 그의 제자들이나 일반 대중들로부터 '랍비'라고 불리고 있었을 것이다. 특히 니고데모가 예수를 '랍비'라고 불리고 있었을 것이다. 특히 니고데모가 예수를 '랍비'라고 부른 것은 유대의 상층 계급에 속한 사람으로는 처음 있었던 일이요 따라서 예수가 이미 그러한 계층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었음을 추측케 한다.
우리 - 본절에서 말하는 '우리'는 뒤따르고 있는 말들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듯이 예수가 행한 표적을 보고 믿는 자들 곧 2:23에 나오는 많은 사람들을 언급한다고 봄이 무난하다.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 - 니고데모는 이 말을 강조하는 위치에 첨가함으로써, 예수를 선생 이상의 존재 즉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모세, 예레미야, 세례 요한 등과 같은 선지자 중의 한 사람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표현은 예수의 산적 본성을 나타내고 있다고까지는 볼 수 없지만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이 예수가 과연 대망의 메시야인가 하는 의문을 담고 있다. 이 사실을 확인하는 일이 니고데모의 방문의 주목적이었는지도 모른다. 한편 니고데모가 예수를 받아들이게 된 것은 바로 표적을 통해서이다(2:23). 공관복음서 기자들보다 요한이 즐겨 사용한 이 '표적'이라는 헬라어 '세메이온'(' )은 신적 권위와 위엄의 증거를 보여주는 이적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 표적은 그것을 목격한 자의 주의(注意)를 그 행위 자체 보다는 그 일을 행하신 이에게로 이끄는 것이 그 특징이다. 표적 자체로서는 참된 구원의 신앙을 창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는 이 표적들을 통해 당신의 교훈들을 확증하셨다. 본문에서 니고데모가 예수의 표적들을 통해 예수의 탁월하신 교훈 능력을 인정하였던 것은 중요한 통찰이었다. 그러나 그는 온전히 예수의 교훈보다는 표적 자체에 더 큰 관심을 드러내고 있었다.
=====3:3
거듭나지 아니하면 - '거듭'으로 번역된 헬라어 '아노덴'(' )은 (1)'처음부터', '완전히', '철저히'의 뜻과 (2) '다시', '두번째'의 뜻 그리고 (3)'위에서부터' 곧 '하나님께로부터'의 뜻이 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이 기도, 제사, 세례로써 유대교에 개종하면 그를 중생한 자라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선택받은 백성인 유대인들조차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은혜와 능력에 의혜서, 어느 한 부분만이 개선되는 것이 아니라 전체 본성이 새롭게 되는 사건(Calvin)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중생이란 죄와 허물로 죽었던 영적 생명을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 살리는(고후 5:17) 성령의 역사로서(엡 2:5), 성령 혹은 말씀으로 거듭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생은 육에 속한 자연인의 지(知), 의(意), 정(情)을 항상, 계발(啓發)하는 것이라기보다 근본적이며 전인적인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라 하겠다. 그리고 병든 자가 회복(回復)하는 것과 같이 점진적인 것이 아니라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과 같은 즉각적인 변화이다.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 '보다'로 번역된 헬라어 동사 '에이돈'(' )은 단순히 어떤 물체나 형상을 바라본다고 하는 '블레포'(' )와는 달리, '경험하다'(experience) '참여 하다'(participate) 또는 '인식하다'(perceive) 등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 구절은 하나님 나라에 참예하는 것을 뜻한다(눅 9:27).
=====3:4
사람이...날 수 있삽나이까 - 이러한 니고데모의 대답은 일견 매우 아둔해 보인다. 하지만 니고데모는 예수의 말씀에 반대 주장을 제기하거나 반항하고자 하는 의도는 없었으리라 추측된다. 다만 그는 예수의 말씀을 선뜻 이해할 수 없었던 자신의 난점을 극복하려는 의도에서 보다 자세한 설명을 요청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대답은 니고데모가 둔감해서가 아니라 깊은 생각 끝에 나온 것이라 할수 있다. 아울러 이 질문 속에는 '사람이 다시 모친(母親)의 배 속에 들어갔다 나올 수 없는 것처럼 인간 본질의 재창조라고 하는 고차적 이적 또한 어찌 가능 하겠는가'라고 하는 강한 의문이 내포되어 있을 법하다. 어쨌든 니고데모는 중생에 관한 예수의 말씀의 뜻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깊은 의문에 휩싸였던 것이다.
=====3:5
물과 성령으로 - '거듭난다'고 하는 것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다. 여기서 '성령'에 대해서는 해석상에 별반 어려움이 없으나 '물' 에 관해서는 여러 견해로 엇갈린다. 즉 혹자는 이를 '세례 요한의 세례' 혹은 '기독교의 세례' 와 관련시키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자연적 출생'으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본 구절의 강조점은 어디까지나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사실에 있다고 보아야 무방할 것이다. 1:26, 31; 마 3:11;막 1:8;눅 3:16에서는 물과 성령이 세례와 관련해서 나란히 언급되고 있다. 물은 깨끗하게 하는 상징으로 유대인들에게는 희생 제사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요소이다. 특별히 제사장은 몸을 씻지 않고서는 언약의 피를 갖고 성소에 들어갈 수 없었으며, 엣세네파(Essenes)에서도 개종자를 받아들일 경우 물세례를 행하던 관습이 있었다. 또한 세례 요한은 사람들에게 죄사함을 받기 위한 회개를 촉구하였고 이러한 촉구롤 받아들여 죄를 회개한 자에게는 물로 세례룰 주었다. 한편 고넬료와 그의 친구들은 물세례를 받기 전에 이미 성령의 선물을 받았으며(행 10:47, 48) 에디오피아의 내시도 또한 그러했던 것으로 추측해 불 수 있다(행 8:26-39). 결국 '물'이 무엇을 나타내든간에 본절의 의미에는 큰 변화가 없다. 물을 자연적 출생으로 볼 경우에는, 사람은 육적 출생 뿅만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은 영적 출생을 통해 비로소 하나님 나라에 참여케 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이를 세례 요한의 세례와 관련시킬 경우에는, 세례 요한의 세례가 증거하고자 했던 성령 세례를 통해 중생이 이루어진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끝으로 이를 기독교의 세례와 연관시킨다면, 본문은 중생이 그리스도와의 연합 곧 성령 세례를 통해 이루어지며 물세례는 이 사실에 대한 공적 선포(宣布)이자 상징적 의식으로서의 의의를 지님을 가르치는 것이다.
=====3:6
육으로...영이니 - 사도 바울은 '육'에 해당하는 '사르크스'(' ) 라는 헬라어를 타락한 인생의 죄악되고 부패한 본성을 지칭하는 용어로 자주 사용했다(롬 8:3-9). 그러나 여기서는 이 땅에 속한 존재 곧 연약하고 사라져 갈 인생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된다. 따라서 여기서 육(flesh, NIV)과 영(spirit, NIV)은 인간 본성의 보다 높은 차원(영적)과 보다 낮은 차원(신체적)을 구분한 것으로 이해된다.
=====3:7
기이히 여기지 말라 - '기이히 여기지'로 번역된 헬라어 '다우마조'(' )는 일반적으로 '이해력이 결여된 놀라움'을 의미 한다. 니고데모가 놀란 것은 중생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 때문이었다. 예수는 어떤 민족적. 신분적 구분도 없이 모든 사람이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셨다(3절). 따라서 이 원칙은 율법의 준수자요 바리새인인 니고데모에게도 물론 적용될 수밖에 없었다. 그는 한편으로는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해 당혹하였을 것이며 또 향편으로는 이 중생의 방법이 과연 가능한가 하는 의혹(疑惑)에 잠겼을 것으로 보인다.
=====3:8
바람이 임의(任意)로 불매 - '성령'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루아호'( )와 이에 대한 헬라어 '프뉴마'(' )는 둘 다 '바람'을 의미할 수도 있다. 신약성경에서만 370회 정도 사용된 이 '프뉴마'는 대부분 영(靈) 또는 성령의 뜻으로 사용되고 '바람'이라는 의미로는 구약성경(시 104:4)의 인용 구절인 히 1 : 7에서 한 번 사용되었다. 이 '프뉴마'가 본문에서는 '바람'의 뜻으로 '성령의 역사'를 적절하게 비유하는 것으로서 사용되었다. (1) 바람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소리를 통해 그리고 그 결과에 의해 그 실재성(reality))을 보여준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령의 존재 또한 거듭난 사람의 구체적 행실에서 드러나는 여러 가지 변화들을 통해 인식되어질 수 있다. 폘돈(Fenton)에 의하면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은 '자신들의 기원(起源)과 운명을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께 두고 있다'고 하였다. 다시 말해서,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의 행위에 대해서 평범한 이성으로써 이해할 수 없고 다만 성령의 역사에 의한 결과만을 알 수 있을 뿐인 것이다. 실제로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속사람이 변화된 사람은 이전의 죄악된 습성들을 자연히 버리게 되며 갈 5:22, 23에 기록된 바와 같은 소위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된다. (2) 현대의 과학을 총동원 해도 바람이 어디서 생겨나 어디로 향하는지를 정확히 규정하지 못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령의 역사 또한 인간의 능력으로는 그 기원을 헤아릴 수 없으며 다만 우리는 믿음으로 성령께서 곧 하나님과 동등된 분이요 우리의 구원을 위해 역사하시는 분임을 알 따름이다.
=====3:9
어찌...있을 수 있나이까 - 회의심(懷疑心)을 나타내는 질문인지 아니면 보다 정확한 설명을 요구하는 간청인지 명확치는 않다. 아무튼 니고데모는 그러한 사건이 어떻지 경험될 수 있는지 알고 싶었을 것이다. 4절에서 니고데모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중생의 교훈이 '어떻게' 가능하냐고 하는 가능성 자체를 놓고 의문을 제기하였다. 반면 본절에서는 일단 그 가능성만은 인정한 상태에서 그 방법을 보다 구체적으로 알고자 하여 재차 '어떻게'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유대교에서 이러한 영적 거듭남을 강조하지는 않았지만 겔 36:25-28 등에 서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거듭남과 중생의 원리가 나타나고 있는데 이에 대한 유대교의 간과(看過)와 무시 때문에 니고데모는 예수로부터 책망을 받게 된다(10절). 사실 니고데모와 같은 바리새인들은 하나의 고정 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즉 그들은 혈통상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하나님의 언약에 따라(창 17 :1-8) 자연히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생각하였으므로, 거듭남에 대한 예수의 교훈을 지극히 생소하다고 여긴 것이다.
=====3:10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 우선 예수는 니고데모 개인의 영적 무지를 지적하시 고 이어 바리새인들을 위시한 유대인들을 책망 하신다(11절). 니고데모가 이스라엘의 지도자 층에서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잘 알수 없지만 헬라어 본문에 '호'( )라는 정관사가 사용된 것으로 보아 그는 분명히 중요한 인물이었던 것 같다. 쇠트겐(Schottgen)과 뤼케(Lucke)는 여기서 사용된 '관사'가 산헤드린의 의장 또는 특별한 위치에 있는 현자(賢者)등 어떤 특수한 직책을 가리키는 것은 아닐까 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니고데모는 바리새파요, 율법학자요, 산헤드린 의회원으로서 백성들에게 널리 알려진 그리고 공식적인 선생의 위체에 있던 사람임에는 틀림없다. 예수께서는 니고데모 자신이 성령의 의미와 위로부터 태어난다고 하는 말의 의미를 구약성경의 연구를 통해 좀더 잘 알고 있어야만 했다고 하는 점을 이 칭호(이스라엘의 선생)를 사용하여 상기시켜 주었을 것이다(Farrar). 더구나 니고데모 자신은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 참 진리와 거짓을 가리고 판별해 내는 일을 맡고 있던 산헤드린의 한 회원이었기 때문이다.
=====3:11
우리 - 이들이 누구를 뜻하는가에 대해서 여러 학자들의 견해가 있다. (1) 메이어 (Meyer)는, 주님께서 단순히 자기 자신만을 가리켜 '권위의 복수'(pluralis majestaticus) 즉 '경어적 복수'를 사용한 것이라고 하였으며, (2) 바이스(Weiss)와 루타르트(Luthardt)는 '그리스도와 세례 요한'을, (3) 벴겔(Bengel)과 스티어(Stier)는 '삼위 일체로서의 그리스도'를, (4) 루터(Luther)는 '그리스도와 선지자들 전체'를, (5) 고데(Godet)와 웨스트콧(Westcott)과 행스텐베르그(Hengstenberg) 등은 '예수와 그의 제자들'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주장하는데 이중 두번째와 다섯번째 주장이 가장 설득력 있는 것 같다. 아는 것...
본 것 - 니고데모를 비롯한 영으로 거듭나지 못한 자들이 알지 못하는 성령의 역사와 그 활동을 가리킨다.
너희 - 니고데모를 위시해서 예수가 행한 표적에 의해 영향을 받았으나, 예수를 믿는 참 신앙에까지는 이르지 못한 무지한 유대인들을 가리킨다.
증거를 받지 아니하는도다 - 오랜 세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선지자와 구약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교훈을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예수 당시의 유대 사람들 역시 예수의 교훈을 결코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어두움은 빛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1 : 5). 여기서 예수는 영생에 관한 자신의 가르침이 단순한 추상적 지식이나 논쟁의 대상이 아니라 엄연한 진리임을 분명히 하고서 이를 선포적 차원에서 증거하고 있다. 기실 이러한 신령한 지식은 성령의 조명을 통한 믿음의 눈으로만 감지할 수 있는 비밀에 속한 것이라 하겠다.
=====3:12
땅의 일...하늘 일 - 이에 관한 해석은 다양하다. (1) 헌터(A. M. Hunter)에 의하면 '땅의 일'이란 물, 바람, 탄생 등과 같은 지상적인 현상이나 사건들인 반면 '하늘의 일'이란 아버지가 아들을 보내는 것과 같은 초월적 사건들이라고 하였다. (2) '땅의 일'이란 니고데모가 결국 이해하지 못했던 영적 거듭남을 포함한 하나님 나라의 사업이며, '하늘 일'이란 14절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은 것 즉 십자가에서의 대속의 죽음과 부활의 사건 등을 의미한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3) 전자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세상 안에 거하게 되신 것으로 그리고 후자를 그리스도가 그의 사역을 모두 마치고 하늘로 올라가시고 장차 모든 성도들에게 영원한 처소를 제공하실 것을 의미한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4) 마지막 견해로서, '땅의 일'을 예수께서 실례로 드신 바람부는 현상으로 이해 하기도 한다. 즉, 예수께서 자연 현상인 땅의 일을 예로 들어 설명해 주어도 이해하지 못한 다면 '하늘 일' 곧 영적 실재를 직접 설명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 자명하다는 말씀이다. 이중 네 번째 견해가 무난하리라 짐작된다.
=====3:13
하늘에 올라간 자(' , 아나베베켄 에이스톤 우라논) - 직역하면 이 말은 '하늘에 계신 자'란 뜻이다. 그리고 여기 사용된 동사는 현재 완료형으로 미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따라서 이 구절은 상반절의 의미를 이어 받아서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人者) 외에는' 그 누구도 하늘에 있는 자가 없기 때문에 하늘 일을 말할 수 있는 분은 인자 자신 뿐이라고 하는 자기 증거가 된다. 물론 구약의 두 인물 에녹(창 5:24)과 엘리야(왕하 2 : 9-11)가 승천(昇天) 했다는 기사가 나오지만, 그들은 땅에 살던 자로 하늘에 올라갔으나 그리스도는 하늘에 계시던 자로 땅으로 내려와 하늘의 일을 말씀하셨다는 점에서 확연히 구분된다. 여기서 우리는 성육 신하신 예수의 인성과 신성에 관한 신학적 의미를 상고해 볼 수 있다. 본절에서 '하늘에서 내려온 자'와 '인자' 그리고 '하늘에 올가간 자'는 모두 동격이다. 다시 말해서 인자(人者)로 계신 예수는 원래 하늘에 계셨던 성자(聖子) 하나님으로서 인간 구원과 새창조롤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다. 따라서 예수는 일체의 모든 인간과는 근본적으로 구별된 분이다. 바울의 말대로 사람들은 모두 땅에서 났고 흙에 속한 자이지만(고전 15:47) 예수는 영원 전부터 하늘에 계신 분이다. 이러한 성육신의 신비 또한 인간의 유한한 이성(理性)으로서는 도무지 설명할 길 없는 비밀이다.
=====3:14
모세가...인자도 들려야 - 예수는 민 21:4-9의 내용을 들어 자신의 구속 사업 즉 하늘의 일을 설명하셨다.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생활 가운데서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다가 불뱀에 물려 죽게 되었으나 모세가 장대 위에 매달아 놓은 놋뱀을 쳐다본 사람은 살아날 수 있게 된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은 그리스도께서 십자자에서 돌아가실 것과 그 십자가의 예수를 바라보고 믿는 자는 구원을 얻게 될 것임을 예표(豫標)하는 것이다. 이는 놋뱀 자체가 어떤 치유의 능력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님에게로 이끌므로써 구원을 받게 하였던 것이다. 유대 학자들은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성경을 공부하거나 오경뿐만 아니라 구약성경 전체의 말씀을 외우는 열로 보내었으므로, 니고데모는 오경에서 인용한 이 말씀의 내용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특히 뱀은 마귀 또는 사단이라고 불리는 '옛 뱀'(계 20:2)을 상징하며, 이 구리 뱀은 사단의 세력을 없애기 위해 십자가상에서 대속의 죽음을 당한 예수의 회생을 예표한다. 따라서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구리 뱀을 쳐다봄으로써 그들의 죄악과 그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진노를 깨닫고 회개해야 했던 것이다. 한편 '들려야'에 해당하는 헬라어 '휴소오'(' )는 아람어 '제캅'에 해당하는 말로 추측되기도 하는데 이 아람어는 '들어 올리다' 혹은 '교수대에 처형되다'의 의미가 있다. 따라서 이 말에는 (1) 십자가에 달리심(8:28;12:23) (2) 승천하실 때 영광 속에서 들어 올려지실 것(행 2:33;5:31;빌 2:9) 등의 두 가지 뜻이 내포되어 있으며, 문맥상으로 볼 때 직접적으로는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가리킨다.
=====3:15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 예수의 십자가 희생의 목적을 설명하는 본절은 구원론 (救援論)의 핵심을 간파하고 있다. 본절에 나오는 '영생'은 본서 전체에 걸쳐 요한이중점적으로 부각시키는 주제이며, 이 영생에 이르기 위한 기본 전제로서 예수께 대한 믿음이 지적 되고 있는 것이다. '저를 믿는 자'란 예수의 대속하심을 받아들이고 예수와 함께 동행하는 삶을 사는 자를 뜻한다. 특히 '믿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피스튜온'(' )은 현재 분사형으로서 신앙의 행위가 계속적이어야 함을 강조한다.
영생 - 요한의 애용어(愛用語)로서 문자적으로는 '영원의 생명' 또는 '올 세대의 생명'의 의미이다. 요한이 사용한 영생은 공관복음서의 하나님 나라와 마찬가지로 종말론적인 요소와 하나님의 현재적인 선물이라고 하는 두 요소를 모두 담고 있다. 한편 요한은 '생명'과 '영생'이라는 말을 상호 교환적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그외 복음서에서 생명은 19번, 영생은 17번 나온다. 17:3에 의하면 영생이란 예수 그리스도 곧 인간에게 보내신 하나님의 사자를 통해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아는 것이며, 14:6에 의하면 영생은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유일한 참 길이요, 살아있는 길이신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교제이다. 이러한 앎과 교제는 현재 이 땅에서 시작되지만 그 완성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처소에서 이루어진다(14:3).
=====3:16
속에 있는 복음'(the Gospel within the Gospels) 혹은 '작은 복음서'(Little Gospel)라고 불리기도 한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 전체 대표할 수 있는 요절인 본절은 복음의 진수(眞髓)로서, 복음이 담고 있는 모든 계시의 말씀을 사랑의 개념에서 천명(天命)한다.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 '세상'을 뜻하는 헬라어 '코스모스'(' )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포함한 온 인류를 가리킨다. 유대인의 전통적인 사고 방식으로는 하나님의 사랑은 선민 이스라옐에게만 국한되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요한은 하나님의 사랑이 민족이나 계급을 초월하여 모든 인류에게 미친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힌다. 이는 곧 복음의 보편성과 그 맥을 같이한다.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개방되어 있지만 그 은혜틀 받을 수 있게 하는 것은 오직 믿음임은 물론이다. 그리고 본절에는 독생자를 보내신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동기가된 것임이 밝혀져있다. 특별히 '사랑'의 헬라어 '아가페'(' )는 요한복음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들 중의 하나로서, 하나님 편에서 선수권(先手權)과 주도권(主導權)을 가지고 인생의 연약함과 죄성을 끝없이 감싸 안으신다고 하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사랑은 바로 하나님의 본성이라 하겠으며(요일 4 : 8)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통해 그 절정에 이르렀다. 그리고 본질상 하나님과동등하신 예수의 생애를 보면 우리는 그 사람을 보다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사랑은 결코 타율적인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성격의 것이며 막연한 이론이나 말로써 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응분(應分)의 대가를 아낌없이 지불하는 것이다. 그리고 '독생자'라는 표현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관계의 특수함을 강조하는 말이며, 루터의 말을 빌리면 예수는 '참 하나님이시며 영원 전부터 계시는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다. 결국 예수의 탄생은 영원 전부터 독생자로 존재하셨던 성자 하나님의 성육신(成肉身)이었다는 점에서 유일 무이한 사례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독생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모노게네스'(' )는 '외아들'이란 뜻 외에 '그 속성과 성품에 있어서 유일 무이하신 분'이란 의미도 내표한다. 그리고 본서에서는 '아들'의 뜻인 '휘오스'(' )를 주로 그리스도에 대해서 사용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3:16, 36;5:20, 23;8:36 등). 한편 '주셨으니'의 헬라어 '디도미'(' )는 '보내다'(send)와 '넘겨주다'(hand over), '값을 지불하다'(pay) 등의 뜻이 있는데 본절에서도 이 말은 성육신(Incarnation)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심(crucifixion)까지도 의미하고 있다. 웨스트콧(Westcott)은 이 낱말이 재물을 바치는 일을 암시하고 있다고 본다(창 22:2 주석 참조).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궁극적인 목표가 바로 믿는 자의 구원에 있음을 15절에 이어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멸망'과 '영생' 사이에 어떠한 중립적인 선택은 없으며 그것은 절대적인 양자 택일의 문제이다. '멸망하다'의 뜻인 '아폴뤼미'(' ) 또한 요한이 자주 사용한(10번 정도)단어로서,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져 있다. 첫째, 이 말은 '잃다', '상실하다'(to be lost)의 뜻과 둘째, '없어지다', '파괴되다'(to perish, be destroyed)의 뜻이 그것이다. 또한 이 동사는 구원과 반대되는 개념을 나타내는 용어이며, 생명과 반대되는 '죽음'을 나타낼 때(막 3:6), 존속되는 것과 반대되는 '멸망'을 나타낼 때 (고전 1:19), 그리고 무엇을 얻거나 받는 것 과는 반대되는 '상실'을 나타낼 때 등의 경우 에도(요이 8절) 사용되었다. 특히 여기서는 하나님의 품을 떠나 살아가는 자들은 필경 절망과 파멸로 치달을 수밖에 없게 됨을 암시한다. 그들의 모든 수고와 노력은 허망하며 하나님과의 친교에서 배제된다는 것은 곧 죽음과 멸망을 뜻한다.
=====3:17
심판하려 하심이...구원을 받게 하려 - 목적을 나타내는 접속사인 '하나'(' )에 의해 이끌리는 두 문장이 뚜렷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이는 not..., but...식의 영어 문장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요한은 심판하시는 그리스도(5:30;8:16)에 관해 즉, 그리스도의 말씀이 사람들을 심판하시며(12:48) 하나님이 일체의 심판을 그리스도께 위임하셨다고(5:22) 증거 했다. 그리고 예수께서 마지막 날 재림하실 때 에는 분명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는 의로운 재판장으로 나타나실 것이다(딤후 4:1, 8). 그러나 적어도 예수의 초림 목적을 말할진대는 심판보다는 구원에 더 큰 비중을 두어야 함이 확실하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과 자비로운 용서와 구원은 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 로되, 이 양자는 엄밀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반응하는 인간의 태도에 따론 결과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은 항상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게 되기롤 원하시며(딤전 2:4) 이 일을 위해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박히시게까지 하셨지만 인간의 불순종과 완악함이 끝내 구원의 문을 막아버릴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심판이 주목적이라면 하나님은 굳이 독생자를 보내지 않고서 물이나 불 혹은 기타 천재 지변(天災地變)을 통해서도 심판하실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이 적극적이라는 점에 유의해야 하겠다. '심판하다'의 뜻인 '크리노'(' )는'선과 악을 분별하다'(discriminate), '분리하다'(separate)의 의미와 '정죄하다'(condemn)의 의미가 있는데 본절에서는 후자의 의미가 더 강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구원을 받게'란 말은 본절에서 '영생을 얻는 것'과 동의어로 사용되었는데 '구원'의 뜻인 '소테리아'(' )란 본래 아주 무서운 멸망의 위기 속에 빠진 자, 예를 들면 물에 빠져 죽어가는 자를 구출해 주는 행위를 가리킨다. 여기서 본 구절의 의미는 죄악된 불의의 삶으로부터 야기되는 모든 불안과 죄책에서,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벗어나며 또한 죄사함과 의롭다하심(justification)을 받고 성화의 삶을 살아가는 것과 아울러 장래에 하나님 앞에서의 평강과 희락의 삶을 누리게 될 것임을 말한다.
=====3:18
저를 맏는 자는...벌써 - 앞의 두 절에서 요한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독생자 예수의 초림 목적이 바로 구원에 있었음을 강조했다. 이제 본절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은혜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에게는 엄하고 무서운 심판이 불가피하게 될 것임을 설명한다. 그는 이 진리를 즐겨 사용하는 논리 전개 방식인 부정과 긍정의 연결을 통해 변증하고 있다. 심판 가운데 처해 있으므로 마지막 대심판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다는 것이 본절의 요지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아담의 후예(後裔)로서 원죄와 자범죄로 말미암아 영원한 형벌에 처해질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 있으며 따라서 구속주로 오신 예수를 영접하지 않으면 자연히 멸망과 정죄 가운데 있는 것이기 때문 이다. 그러므로 결과적으로 볼 때 예수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구원과 멸망 이 두 편으로 확연히 구분되었다.
심판을 받은 - 완료 시제 '케크리타이'(' )는 심판은 이미 과거에 시작되어졌고 그 판결은 지금까지도 유효한 것임을 나타낸다. 불신자들은 장차 있을 종말론적인 대심판을 받기도 전에 이미 죄인으로서의 삶(즉 정죄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진리 안에서 자유하지 못하고 죄에 얽매여 죄에게 종노릇을 하고 있다.
=====3:19
이것이니 - 논리 전개를 더 강화시키기 위해 자주 사용된 요한의 독톡한 표현을 반영하는 어구이다(15:12;17:3;요일 1:5;5:11, 14).
빛보다 어두음을 더 사랑한것 - 여기 사용된 '빛'의 헬라어 '포스'(' )는 달빛이나 별빛, 불빛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태양 빛'을 의미하는 말로, 본서에서는 주로 그리스도에게 적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이 빛은 '유일한 빛'(the one light), '참 빛'(1:9)이신 그리스도 자신이다. 어두움의 뜻인 헬라어 '스코토스'(' )는 빛과 반대되는 완전한 어두움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단순히 어두운 밤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과는 다르다(Westcott). 따라서 어두움은 하나님과 단절된 영적인 죽음의 상태를 의미한다. 이와 같은 어두움 속에 처해 있는 자는 빛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려 들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다만 외부로부터 빛이 적극적으로 비춰들 때 비로소 그 빛을 인정한다. 그러나 빛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과 그 빛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또 별개의 문제이다. 고리고 빛 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했다고 하는 표현이 믿지 않는 자들이 빛도 어느 정도 사랑했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뤼케(Lucke)는 말하기를, '더'에 해당하는 헬라어 '말론'(' )이라는 단어가 '오히려'의 뜻 보다는 '더 많이'란 의미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빛에 대한 어느 정도의 사랑을 인정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말론'이 사용된 다른 많은 구문에서는 그 뜻이 '비교급'으로 보다는 부정 적인 의미에서의 '...보다 도리어'(rather)의 뜻으로 많이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12:43;마 10:6;딤후 3 : 4). 따라서 본 구절은 빛보다는 어두움 즉 하나님과의 영생의 교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단절된 삶을 사랑했던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3:20
19절과 마찬가지로 본절에서도 원인을 나타내는 전치사 '가르'( )가 사용되었 다. 19절에서 이 전치사는 사람들이 죄악된 길을 택하게 된 원인을 설명해 주며 본절에서는 19절에서 밝혀진 원인을 보층 설명한다. 앞절에서는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다고 하는 소극적 어투로 설명했으나 여기서는 보다 적극적이며 능동적인 의미에서의 '악행'을 지적한다. 특히 본절은 더욱 더 죄악으로 치닫는 인간의 성향에 대해 도덕적 이유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즉 인간의 본성 자체가 악하므로 빛보다는 어두움을 택하며 더 나아가 죄로 점점 오염될수록 악행으로 나아가는 속도에 가속도가 붙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드러날까 - 헬라어 '엘렝코'(' )는 '죄를 깨닫게 하다'(convince) '밝히 드러나다', '혐의를 두다', '교정하다'(correct) 등의 뜻을 지니는 바 악을 행하는 자가 죄를 감출 뿐만 아니라, 이미 지은 그 죄에 대해서 회개조차 하지 않으려는 습성이 있음을 나타낸다.
=====3:21
진리를 좇는 자 - 진리 안에서 행하는 자 곧 '단순히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아니라, 그 신앙의 열매(마 3:8, 10)를 맺는 자'(A. M. Hunter) 즉 참된 기독교적인 신앙과 삶을 실천 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진리'의 의미나 본성에 대해서는 폭넓게 논의될 수 있지만, 여기서는 하나님과의 연합 관계와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즉 영원 전부터 계획하신 바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진리를 가리킨다. 이 진리의 빛이 죄악으로 인해 어두워진 인간의 심령을 뚫고 들어 오면 회개와 전인적 삶의 변화가 수반되기에 이르는 것이다.
빛으로 오나니 - '에르케타이 프로스 토 포스'(' )는 '빛에게로 나아오다'란 뜻이다. 사람이 빛되신 하나님에게로 나아오는 것은 원래의 자기 자신의 기원(起源)에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charlesworth).
=====3:22
이 후에...유대 땅으로 가서 - 많은 학자들은 22-30절을 현재의 위치에서 옮겨서 2:12 뒤에 놓아야 자연스럽다고 주장한다(Barrett, Senders). 왜냐하면 '유대 땅으로'라고 하는 표현이 예수께서 갈릴리로부터 왔다고 하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메시야에 대해 냉담한 예루살렘 도시를 떠나 유대 지경 내의 변두리 마을로 물러가신 것을 나타 낸다고 볼 수도 있다.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그곳이 요단 강 근처의 평야이거나 아니면 여리고빠 근접한 지점일 것으로 추정된다.
세례를 주시더라 - 예수께서 세례(baptizing, NIV)를 베푸셨다는 기록은 사복음서를 통틀어 여기에만 나오고 또 4 : 2로 미루어 보건대 실제로 세례를 베푼 자는 예수의 제자를이었을 것이다. 이 세례를 기독교의 세례전(洗禮典)과 동일한 것으로 보기는 어려우며 그 보다는 세례 요한의 세례와 동일선상에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예수께서는 친히 세례 요한의 증거를 진정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셨으며 또 세례 요한의 제자들 중에 예수를 열렬히 따르는 자들이 있었으므로, 자연스러운 과도기적 수단으로서 세례 요한식 세례를 긍정적으로 허용하셨으리라 이해된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예수의 첫 메시지도 세례 요한의 주된 강조 사항인 '회개하라'는 내용이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마 3:2;4:17). 한편 예수께서 몸소 세례를 베풀지 않고 제자 들에게 대행시킨 이유 중의 하나는 역시 제자화 훈련(弟子化 訓練)의 맥락에서 이해된다. 이 제자들은 훗날에 오순절(the day of Pentecost, NIV)의 성령 세례를 체험하고 난 후 죄사함을 얻게 하는 세례를 베풀어야 할 것이었다(행 2:1-4, 37-41).
=====3:23
살렘 가까운 애논 - 이 두 지명이 현재의 어느 위치를 가리키는 지는 분명지 않다. '살렘'(Salim)은 '평화'라고 하는 셈어적 기원을 갖고 있는 지명이며, '애논'(Aenon)은 '샘'이라고 하는 아람어의 복수형으로부터 나온 말이다. 이 지명들에 대해서는 전통적으로 다음과 같은 주장들이 있다. (1) 베레아 지역 요단강 건너편으로 보는 견해. 우리가 알다시피 세례 요한은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었다(1:28). (2) 스키토폴리스(Scythopolis) 남방 8마일 지점 즉 요단 계곡의 동쪽으로 보는 견해(4세기의 유세비우스). (3) 세겜으로부터 동서쪽으로 4마일 떨어진 곳에 옛부터 알려졌던 '살림'이라는 마을이 있다. 그리고 이곳으로부터 북동쪽으로 약 8마일 정도 떨어진 곳에 현재 '아이눈'이라고 불리는 곳이 있는데 이곳이 '애논'일 것이라고 보는 견해. 비록 현재 이곳은 물이 전혀 없지만 과거에는 많은 샘이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Albright) (4) 또한 1세기 초기에는 '살렘'이 예루 살렘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듸여졌었다고 하는 견해가 있다(Cheyne). 이 중에 세번째 견해는 그곳이 유대 지역이 아니라 완전히 사마리아 지역이라고 하는 점에서 본문과 다소 거리가 먼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 크리거(Krieger)는 저자의 확실치 않은 지리적 보고(報告)를 상징적으로 이해하려고 하였는데 즉 요한의 세례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평화에 가까이 갈 수 있게 해주지만 그러한 평화를 제공하지는 못하는 반면 예수의 세례는 구원과 평화(살렘)의 샘(애논)이 펑펑 솟는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불트만(Bultmann)도 역시 살렘과 애논, 이 두 지명이 실재적인 것이지만 복음서 저자에 의해 상징적인 의미로써 사용된 것일 수 있다고 믿었다(the Anchor Bible).
=====3:24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지 아니하였더라 - '옥에'에 해당하는 원문은 '그 감옥에'(' , 에이스 텐 퓔라켄)이다. 이는 저자와 당시의 직접적 독자들이 세례 요한의 투옥 사실을 모두 알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세례 요한의 투옥에 관해서는 눅 3:19이하를 참조하라. 저자가 세례 요한의 투옥 사실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은 이유는 공관복음서에 소상히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점 및 요한의 관심사가 예수의 사역에 보다 밀도있게 집중되고 있다는 점 등에서 찾을 수 있다. 본서에서 셰례 요한이 등장하는 유일한 의의는 예수를 증거하는 것이다. 한편 요한은 공관복옴서 저자들이 서술하고 있지 않는 내용즉 세례 요한과 예수의 동시적 사역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신 이후에 요한이 투옥되고 갈릴리에서의 공적인 등장이 있기 이전에 초기에 유대 지방에서 전도 사역을 행하셨던 셈이다.
=====3:25
결례에 대하여 변론이 - 요한의 제자들은 어떤 한 유대인과 더불어 정결(淨潔)에 관한 논쟁을 하고 있었는데, 이 논쟁(argument, NIV)이 유대인들이 행하는 일반적인 정결 예식에 관한 것인지 아니면 그러한 정결 예식에 반대하여 요한과 예수가 행하는 세례에 관한 것인지 또는 요한과 예수가 각자 따로 행하는 세례에 관한 것인지 명확지 않다. 본문에서는 '결례'(ceremonial washing, NIV)의 뜻인 헬라어 '카다리스모스'(' )가 '세례'와 동의어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한편 '변론'의 뜻인 헬라어 '제테시스'(' )에 대해 바울은 '위험하고 쓸데 없으며 분노에 찬 논쟁'(딤전 6:4; 딤후 2:23; 딛 3 :9)이라고 하였다. 아마도 요한의 제자는 유대인과 더불어 세례 요한이 주는 세례의 의의와 효력에 대해서 바리새파와 엣세네파 그리고 예수가 행하시는 세례와 비교하여 변증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특히, 이어지는 내용으로 짐작하건대 세례 요한의 세례와 예수의(제자들의) 세례 중 어느 것이 더 확실한 근거를 가질 것인가에 관한 변론이었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3:26
함께 요단강 저편에 있던 자 -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라고 하는 정확한 호칭으로 부르지 않은 것은 예수를 깎아 내리고자하는 그들의 의도를 반영한다. 요단강 저편인 베다니에서 세례 요한은 예수의 메시야이심을 증거하였고(1:19-28) 또한 예수께 세례를 베풀었다 (마 3:13).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보기에, 예수는 세례 요한에게 빚을 진 자요, 감사해야 할 자였지만 도리어 세례 요한의 명성을 떨어 뜨리는 경쟁자로 나선 것처럼 보였다. 따라서 결례(缺禮)에 대한 논쟁을 요한의 제자들이 스승에게 가져왔을 때, 그것은 단순한 논쟁 거리가 아니라 예수께 대한 불평과 비난으로 변화되었다. 곧 선생님이 증거하시던 자 - 역시 예수의 이름을 피하고 있다. '증거하다'의 뜻인 헬라어 '메마르튀레카스'(' )는 현재 완료로서 과거 어느 한 시점에서 시작된 세례 요한의 예수에 대한 증거가 지금까지 계속되어 왔음을 암시한다. 세례 요한은 줄곧 사람들에게 예수를 증거해 왔으나 그의 제자들은 그러한 증거에 대해 긍정적인 자세를 취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다.
세례를 주매 - 원문에는 이 말 앞에 '보라', '보옵소서'의 뜻인 헬라어 감탄사 '이데'(' )가 붙어 있다. 이는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혹은 그의 제자들이)가 세례를 베푸는 행위에 대해서 상당히 흥분하고 분노를 느끼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가더이다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르콘타이'(' )는 연속적인 행위를 나타내는 현재 중간태 직설법으로 '그들이 지금도 계속해서 나아가고 있다'고 하는 뜻을 나타낸다. 막 1:45;3:7은 갈릴리 사역 동안의 예수의 호소(呼訴)가 많은 사람들로부터 긍정적인 반응을 일으켰다는 사실은 본서에서도 잘 나타난다(11:48).
=====3:27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 목적어가 생략된 문장이다. 본문에 있어서는 대화의 내 용상 세례를 베푸는 자의 자격을 의미하는 것 같다. 따라서 하나님께로부터('하늘'은 하나님을 지시하는 완곡어로서 사용됨) 세례를 베풀도록 허락받은 사람은 (1) 요한 자신(Bengel, Calvin)이나 (2) 예수 그리키스도(Godet, Meyer)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3) 그 일을 행하도록 허락된 많은 선지자, 예수의 제자들 등도 포함 된다(Lange, Lucke, Moulton). 여기서 세례 요한은 높아가는 예수의 명성에 대해 시기하는 마음을 갖기는 커녕 오히려 예수의 모든 사역이 바로 하나님께 그 기욍을 두고 있다는 점을 역설하고 있다.
=====3:28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 1:20에서 산헤드린(Sanhedrin)에서 파견된 대표자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다시 한번 천명(闡明)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세례 요한 자신을 메시야로 오해하는 데서 발생되는 모든 혼란을 없애기 위하여 자신의 제자들에게 분명하게 확언하고 있다. 여기서 '나의 말한 바'는 세례 요한이 예수께 대해 이미 여러번 증거하였던 사실을 나타낸다.
너희니라 - 이 말은 원문상 강조법으로서 '너희가 내 설교를 귀담아 듣고 그 의미를 헤아렸다면 이미 너희들 스스로(yourselves) 답변을 가지고 있다'는 뜻을 시사한다. 한편 세례 요한의 우려대로 그의 가르침과 세례를 고지식 하게 추종하는 인물이 1세기 중엽까지도 상당히 존재했음에 분명하다. 예컨대 에베소에서 사역 했던 알롄산드리아의 아볼로의 경우가 그러하다(행 18:24-26). 그 후 에베소에 도착한 바울도 세례 요한의 추종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사역에 관해 온전히 이해할 수 있도록 가르쳐 준 바 있다(행 19:1-7).
=====3:29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 신부는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이며, 신랑은 그리스 도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는 종종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님의 신부로 상징하였고(사54:5;렘 3:20; 호 2:7;말 2:11) 신약성경에서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상징되었다(엡 5:32;계 19:7). 본절에서의 강조점은 신랑과 신부와의 관계보다는 신랑인 예수와 그 친구인 세례 요한과의 관계에 있다. 세례 요한은자신이 아니라 그긔스도가 새 이스라엘의 주인이심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C.K. Barrett).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 - 히브리어에서 '쇼쉐벤'( )은 신랑의 친구로서, 신랑과 신부 사이를 중매하는 역할과 신부를 신랑에게 무사히 인도 하는 역할과 결혼식에서의 신랑의 들러리 역할 그리고 마지막으로 결혼 잔치를 주관하는 역할 까지도 담당했다. 모세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결혼 잔치에 있어서 그 중매자 역할을 담당하였고(출 19:17) 바울도 역시 자기 자신이 정결한 처녀인 성도들을 남편이신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일올 담당하는 자라고 표현하였다(고후 11 : 2).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가나의 결혼 잔치에서 등장했던 연회장(2:9)도 신랑의 가장 가까운 친구로서, 그 잔치를 주관하였을 것이 라고 추측해 볼 수도 있다. 또한 세례 요한은 신랑의 친구는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다고 말함으로써, 그 친구가 마치 종과 같은 태도로 혼인 예식을 위해 헌신적으로 돕고 있는 것임을 분명히 했다.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 '페플레로타이'(' )는 완료 수동태형으로 마치 물이 컵의 끝까지 가득 차 있는 상태처럼 세례 요한의 기쁨이 가득 차 있었음을 나타낸다. 그의 기쁨은 완벽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이 그에게 부여했던 일 곧 메시야의 선구자로서의 사명을 완수하였으며 또한 그토록 바라던 메시야를 친히 목격하고 증거했기 때문이다(A. M. Hunter).
=====3:30
그는 흥하여 야...
나는 쇠하여야 - 이 말은 본서에 나오는 세례 요한의 마지막 진술로서 그의 선지자적 위대성을 단연 돋보이게 하는 구절이다. 위대한 이상이나 목표를 내걸고서 수많은 사람들을 감화시키는 일 자체도 크고 힘든 일이거니와, 그의 주변에 모여든 열렬한 추종자들에게 자신의 한계성(限界性)을 분명히 주지시키고 그들의 관심을 다른 사람에게로 돌리게 하는 일에 이토록 적극성을 보이기란 더욱 어려운 일이다. 세례 요한은 '...해야 한다'는 표현으로써 자신의 주장의 배후에 있는 하나님의 뜻히 필연성과 당의성을 확고히 천명 하고 있다. 실제로 세례 요한의 삶은 오직 그 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을 위해 온전히 바쳐졌으며, 예수의 공생애가 본격적으로 궤도에 오르기 시작할 무렵에 헤롯의 핍박을 받아 참수형(斬首刑)을 당함으로써 '주의 길을 곧게하는 자' 로서의 생애를 마감하게 된다(막 1 : 14 ; 눅 3:18-20).
=====3:31
위로부터 오시는 이...
땅에서 난 이 - 본격적으로 예수와 세례 요한과의 대조와 세례 요한에 대한 예수의 우월성이 증거되고 있는 31-36절까지의 본문은 니고데모와의 대화 속에서 언급된 내용과 유사한 일면이 있다(12, 13절). 본서를 기록한 요한의 근본 의도는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이신 예수의 신적 탁월성(卓越性)을 드러내는 데 있었기 때문에(20:31), 처음부터 끝까지 이 주제가 일간되게 부각되어 있다. 여기서 저가가 강조하는 바는 세레 요한에 대한 예수의 상대적 우위의 개념이 아니라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탁월성에 대해서 이다. 세례 요한이 '여자가 낳은 자 중 가장 위대한 자'임은 분명한 사실이지만(눅 7:28) 여전히 '땅에서 난 이'라는 점에서 감히 예수의 신적 존재와 비길 상대가 못되는 것이다. 한편 '땅에서 난 이'란 직접적으로는 세례 요한을 가리키지만 일반적인 측면으로 확대해서 생각 하면 아담 이후의 모든 인류를 동시에 지칭하는 말이다. 또한 '오시나 이'라는 표현은 대망의 메시야에 대한 또 다른 칭호로서 세례 요한에 의해 사용되곤 했다(1:30;마 11:3;눅 7:19). 그리고 위로부터 오시는 이란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이며, 이 표현은 그리스도의 신적 초월성과 유일성을 포함하고 있다. 반면에 여기서 '땅'(the earth, NIV)이란 표현이 '세상'이라는 표현 속에 들어 있는 '악한 것', '속한 것'을 의미한다고 단정 지을 수 없으며 그렇다고 하나님께 향하는 어떤 요소를 지녔다고 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요한의 표현에 있어서 '땅'은 초자연적이고 신성한 것과는 대조적인 의미에서의 인간 실존의 자연 상태 즉 창조주와는 구별되는 피조물을 지칭한다. 즉 흙으로 지음을 받은 존재 말이다(창 2:7).
땅에 속한 것 - 이 구절 또한 앞에서 설명한 '땅'의 개념에 근거하여 이해되어야 한다. 직접적으로는 세례 요한의 모든 사역 즉 회개에의 권유와 회개한 자들에게 행한 물세례 등등을 가리킨다. 세례 요한을 위시한 모든 선지자의 사역은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에게로 인도하는 것일 뿐 직접 영생(eternal life)을 제공하지는 못한다. 예수가 오시기 이전의 모든 선지자의 사역은 예수의 오심을 알리기 위한 '전령(傳令)'에 해당하는 것이고, 예수가 세상에 오셔서 하늘로 다시 올라가신 이후의 모든 제자들의 사역도 결코 예수에 대한 '증언'(testimony, NIV)의 범주를 넘지 못한다.
=====3:32
보고 들은 것 - 이 표현 역시 앞서 니고데모에게 예수께서 하신 말씀과 유사하며 (11절), 헬라어 '보고'에 해당하는 동사는 현재 완료형이고, '들은'에 해당하는 동사는 부정 과거형이라고 하는 점에서 다소 문제시 된다. 어떤 학자는 전자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하신 존재성과 관련시키며 후자를 공생애 동안의 사역과 관련시킨다. 그리고 이러한 시제상의 차이로 인해 '보는 것'에 더 강조점이 있다고 하는 주장을 펴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요일 1 : 3에는 보는 것과 듣는 것이 동일하게 강조되어 있다. 보고 들은 바의 구체적 내용은 알 수 없으나 하늘로부터 난 자가 알고 있는 사실 즉 하나님 나라에서 이루어지는 신령하고 비밀스러운 일들이나 하나님이 그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목적 그리고 그가 바로 나사렛 예수라고 하는 사실, 그를 믿는 자는 이미 영생을 얻었고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정죄를 받았다고 하는 사실 등을 두루 포함한다.
받는 - '받는'으로 번역된 헬라어 '람바노'(' )는 '능동적으로 취하다'(take), '영접하다'(receive), '깨닫다'(apprehend) 등의 뜻으로 복음에 대한 성도의 합당한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 지를 보여준다.
=====3:33
하나님을...
인쳤느니라 - 예수는 오직 하나님의 뜻과 그 말씀을 전하러 오셨기 때문에 그의 증거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거짓말장이로 만드는 것이다(12:44-50;요일 5:10). 반면에 그리스도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예수의 기원이 하늘로부터임과 하나님의 계시가 예수를 통해 밝히 드러났다는 사실 및 하나님의 성품과 그 모든 약속이 진실되고 참되다는 사실을 모두 인정하고 증거하게 되는 셈이라는 의미이다. 물론 하나님의 진실성은 인간의 인정이나 증거를 반드시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다. 결국 하나님의 진실하심에 대한 인침(certification)은 하나님 자신을 위함이 아니라 인간의 구원을 위한 것이라 하겠다. '인치다'로 번역된 헬라어 '스프라기조'(' )는 본래의 뜻인 '밀봉하다'의 의미보다는 '재가(裁可)하다', '증명하다'(certify) 등으로 잘 사용되고 있는데 본절에서도 마찬가지로 사용되었다.
=====3:34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 - 이 구절에 대해서는 세 가지 해석이 있다. (1) 하나님이 메시야의 증거자인 세례 요한에게 성령을 충만히 부어주셨다고 보는 견해(R. C. H. Lenski). 렌스키에 의하면 '주심이니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도신'(' )은 '계속적인 수여'를 뜻하는 현재 시제로 사용되었으므로 예수께 적용하기에 적절치 않다고 한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게 생각해야 할 근거는 없다. (2) 하나님이 성도들에게 성령을 주심을 뜻한다고 보는 견해. 성도들이 성령 충만한 은사를 받을 수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엠 4 : 7)라는 말씀이 있듯이, 성도들에게 무제한적으로 성령을 부어주신다고보기는 어렵다. (3) 하나님이 예수께 성령을 한없이 (without limit, NIV) 부어주셨음을 뜻한다고 보는 견해. 전후의 문맥으로나 사용된 어휘의 용례 등으로 볼 때 이 세번째 견해가 가장 무난하리라 생각된다. 예수는 곧 성자(聖子) 하나님이시므로 하나님의 모든 신성(神性)을 지니셨고 성령과도 하나이셨던 것이다.
=====3:35
만물을 다 그 손에 주셨으니 - 이 말씀에는 두 가지 사실이 강조되어 있다. (1) 사랑으로 연합된 아버지와 아들 간의 상호 관계 이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마 28:18;고전 15:27;계 1:18)의 표현과 유사한 본 구절은 예수께서 아버지의 이름과 그 권세로써, 만물 즉 모든 피조물들을 그의 뜻대로 지배하시고 명령하실 수 있는 완전한 권위를 부여받으신 분임을 의미한다. 따라서 모든 만물은 각각 예수와의 관계에 절대적으로 의존되어 있다. (2) 인간 예수께서 성부 하나님께 의존하시는 모습이다. 전능성(全能性)은 삼위(三位) 하나님 모두에게 속한 것이며 어느 쯤에서 다른 쪽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예수는 하나님의 신성과 아울러 진정한 한 인간으로서 이 땅에 오셨고 바로 이런 차원에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모든 권세를 수여받으셨던 것이다. 이 사실에서 우리는 예수의 '낮아지심' 과 인생의 완전한 모범을 보게 된다.
=====3:36
본절은 사람들에게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양자 택일을 권고한다. 예수를 구세주로 믿고 영생에 이를 것인지 아니면 불순종 가운데서 멸망에 처하든지 둘 중 하나가 앞에 놓여 있을 뿐 그 중간 지대는 없다는 것이다.
영생이 있고 - 아버지가 그 아들이신 예수를 사랑하고 만물의 지배권을 주셨다는 앞절의 말씀이 결코 이론적이거나 추상적이지 않음을 보여준다. 이 영생이야말로 성도들에게 가장 직접적으로 그리고 가장 근본적으로 적용되고 주어질 하나님의 가장 귀한 선물인 것이다. 특히 우리는 여기서 영생이 현재적 소유의 측면에서 언급되고 있음을 주시해야 한다. 성도둘 또한 시간의 경과와 더불어 육체적 죽음을 경험해야 하지만 영원한 생명으로 거듭나는 결정적 사건은 예수를 구주로 영접할 때 이미 발생하였으므로 그는 영원한 삶에로 들어간 것이다.
영생을 보지 못하고 - 요한에게 있어서 '영생'과 '하나님 나라'는 매우 유사한 단어이다. 본절에서 영생은 하나님 나라를 보는 것 또는 영원한 평화와 사랑의 나눔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의 삶을 이미 경험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진노...
머물러 있느니라 -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또 다른 표현이다. 구약 성경에서 즐겨 사용되고 있는(출 22:24;32:11;신 13:17; 스 10:14) 이 표현은 인간의 일시적인 성냄이나 분노를 의미하는 헬라어 '뒤모스'(' )와는 달리,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있어서 패역한 세대에게 내리시는 일관된 '심판', '벌' 등의 뜻인 '오르게'(' )를 의미한다. '머물러 있느니라'로 번역된 '메노'(' )를 직역하면 '남아 있다'(remain)의 의미가 된다. 따라서 이는 하나님의 진노가 새롭게 부여된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원래 하나님의 진노(God's wrath, NIV) 아래서 살아가던 그대로 내버려 둔다고 하는 것을 의미한다(롬 1:24). 예수의 증거를 용납하지 않는 자는 죄와 사망과 악의 권세에서 결코 해방되지 못한다. 하나님은 그들을 악의 세력 속에 그대로 방치(放置)하신다. 그리고 그러한 처벌은 이미 시작되었고 장래에 끝마치게 될 것이다.
3:1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 니고데모라는 사람을 통하여 복
음서 저자는 이제 그리스도의 표적을 보고 감동되어 성급하게 그의 편을 택한 사람들
의 믿음이 얼마나 일시적이며 연약한 것인가를 보여 주고 있다. 이 사람은 바래새파에
속해 있었고 그 나라 관원의 직위에 있었던 것으로 보아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앞서
있는 사람이었다. 보통 사람들은 대부분이 변덕에 의해서 좌우된다. 그러나 학문과 경
험에 능한 사람은 또한 진지하고 지혜롭기도 하다고 생각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
가? 그러나 그리스도의 답변에 비추어 볼 때, 니고데모가 찾아 온 목적은 종교의 기
초에 대해 배우고 싶은 욕망 외에 다른 것이 없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만일 사람을
다스리는 관원이 소년만도 못하다면 일반 대중을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되겠는가?
비록 복음서 저자의 목표하는 바는, 거울에 비추어 보듯이, 예루살렘에 복음을 받아들
일 만큼 마음이 제대로 준비되어 있는 사람이 얼마나 희소했는가를 보여 주자는 데 있
지만, 이 이야기는 다른 점에 있어서도 극히 유용하다. 특별히 우리는 이 대화 속에서
인류의 부패한 성품에 대하여 배우게 되고, 그리스도의 학교에 바로 입학하는 길이 무
엇이며 하늘에 속한 교훈에서 자리기 위하여 어떠한 기초를 밟아야 하는가를 배우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의 요지는 그의 참된 제자가 되려면 우리가 새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더 나아가기 전에, 복음서 저자가 우리
에게 들려준 내용에서, 니고데모가 자신을 완전히 그리스도에게 내어 맡기지 못한 장
애물이 무엇이었는가를 살펴 보아야겠다.
바리새인 중에 라는 것은 물론 니고데모에게 있어서 백성들 앞에 명예로운 칭호였
다. 그러나 복음서 저자는 그의 명예를 인하여 그를 바리새인이라 한 것이 아니라, 오
히려 그것이 니고데모로 하여금 담대히 그리고 자유롭게 그리스도에게 나아오지 못하
도록 하는 장애물이 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이 세상의
높은 지위에 있는 자들은 대개가 악의 그물에 걸려 있음을 상기하게 된다. 참으로 그
들은 너무나 단단한 올무에 걸려서 일생 동안 한 마디의 기도도 드리지를 못한다. 우
리는 다른 곳에서 그들이 바리새파라고 불리우게 된 이유를 설명했다. 즉 그들은 자기
들이 성경의 골수와 숨은 뜻을 소유하기라도 한 것처럼, 율법의 유일한 해석자로 자처
했던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들은 자신을 페루심(Perushim)이라고 불렀다. 비
록 에센서(Essenes)파가 바리새인보다 더 엄격한 생활로 인하여 거룩하다는 정평을 받
고 있었지만, 이들은 은둔자와 같이 일반인의 생활을 버리고 인간의 습관을 포기하고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바리새파를 더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더구나 복음서 저자는
니고데모가 바래새파에 속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나라 관원 중의 한 사람이었음을 언
급하고 있다.
3:2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 그가 밤에 주님을 찾아 왔던 것으로 보아 우리는
그가 매우 마음이 약했던 사람이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그의 눈은 말하자면, 자기 자
신의 명성에 의하여 현혹되었던 것이다. 그는 또 수치를 당하게 될까 봐서 밤을 택했
는지도 모른다. 세상에 야망과 포부가 큰 사람은 다스리는 권세자의 위치에서 학자의
계급으로 낮아지면 그들의 명예가 큰 손상을 입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니고데모는
자신의 학문에 대한 어리석은 견해로 인하여 마음이 높아져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짧
게 말해서, 그는 자신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에 그는 전혀 자신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
다. 그런데 그에게 어떤 경건의 씨앗이 보이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선지자가 있
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는 하늘로서 온 가르침을 멸시하거나 소홀히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러한 교훈을 갈망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갈망은 순전히 하나님을 경
외한 데서 생겨난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신기한 것을 찾아 쓸데없이 호기심을 돋구
고 있다. 그러나 종교심과 양심의 지각이 니고데모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좀
더 자세하고 친밀하게 알고 싶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그 씨는 오랫동안 죽은 채로 숨
어 있었지만,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후에는 거것이 아무도 기대하지 못했던 열매를 맺
었다.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 - 이 말씀은 "선생님
이여, 우리는 당신이 선생으로 오셨음을 알고 있습니다"라는 말과 같은 것이다. 그러
나 당시에 학식있는 사람들을 흔히 선생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니고데모는 그리스도를
보통 방법대로 랍비라고 불러 인사드린 다음, 후에 선생의 직분을 수행하는 사람은 하
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았다고 선언하고 있다. 그리고 교회 내의 모든 교사(선생)들
의 권위는 이 원칙에 달려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
터 지혜를 배워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입을 통하여 말씀하시지 않는
다면 누구의 말도 경청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비록 유대인들 가운데
종교가 크게 부패하고 타락되어 있었지만, 그들은 언제나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
은 사람이 아니면 정당한 선생일 수가 없다는 원칙을 고수하고 있었음을 알아야겠다.
그러나 거짓 선지자들 보다 더 교만하게 그리고 자랑스럽게 그들의 칭호를 내세우는
사람이 없으리 만큼 그들은 분별의 영으로 시험해 볼 필요가 있다. 그래서 니고데모는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것이 확실하다고 덧붙이고 있다. 니고데모는 하나님께서
자기 사역자들을 통하지 않고는 일하시지 않는다는 것과 그리함으로 하나님께서 그들
에게 맡기신 직분(사역)에 인치신다는 것을 당연시하고 있다. 니고데모의 태도는 옳았
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표적을 자기의교훈에 대한 보증(도장)으로 의도하셨기 때문
이다. 하나님이 함께 계시지 아니 하시면 아무도 이러한 표적을 행할 수 없다고 말할
때, 하나님을 표적의 유일한 주인으로 인정하고 있는 것도 옳은 것이다. 그것은 마치
이런 표적은 인간적인 행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그 표적에 완연히 드러나 있다
고 말하는 것과 같다. 한 마디로 말해서 표적은 믿음을 위해 우리를 준비시키는 결과
와 말씀에 의해 잉태된 믿음을 더욱 강건하게 하는 결과 등 두 가지 효과를 지니고 있
다. 따라서 니고도모는 전자의 유익을 얻었던 것이다. 표적을 통하여 니고데모는 그리
스도를 하나님의 참 선지자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결론적인 것이 아니다. 선지자들이 마치 참된 표적에 의하여 자신을
하나님의 사역자로 증명하기라도 한 것처럼 무지한 자들을 그들의 기만책으로 속일 수
도 있기 때문이다. 믿음이 표적에 의존한다면 참과 거짓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겠는
가? 과연 모세는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지의 여부를 이러한 방법으로 시험
받게 된다고 선언하고 있다(신13:3). 우리는 또한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이 많은
사람들의 눈을 미혹할 것이기 때문에 신자들은 거짓된 표적을 경계해야 한다고 했던
그리스도와 바울의 경고를 알고 있다(마24:4). 나는 이러한 일이 하나님의 의로운 승
락에 의하여 가능하다고 대답한다. 왜냐하면 미혹을 받을 자는 사단의 간계에 의해 미
혹을 받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이 표적을 통하여 택
한 자들에게 나타나는 것을 막지는 못한다고 말한다. 표적은 택한 자들에게 참되고 건
전한 교훈을 확인시켜 주는 가치있는 확증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도 그
의 사도됨이 표적과 기사와 능력에 의해 확증되었다고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고후
12:12). 그러므로 사단이 아무리 어두움 속에서 하나님을 흉내내느라고 설친다해도,
눈이 뜨이고 신령한 지혜의 빛이 빛날 때는, 표적과 기사가 하나님의 임재하심에 대한
충분한 증거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이 사실임을 니고데모의 발언을 통하여 느끼
게 된다.
3:3
진실로 진실로 내게 이르노니 - 그리스도는 니고데모의 시선을 모으기 위해 진실
로(amen)라는 말을 반복하고 있다. 주님께서 가장 중요한 주제에 대하여 말씀하려 할
때에, 그는 니고데모로 하여금 한층 더 주의를 환기시킬 필요를 느꼈다. 그의 주의를
끌지 않는다면 니고데모가 여기에 기록한 전체 교훈을 가볍게 지나쳐버릴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진실로'라는 말씀을 두번이나 반복하시는 목적이다.
비록 이러한 말씀이 가능성이 희박하고 거의 경우에 맞지 않는 말처럼 보이지만, 이
렇게 말문을 연 것은 그리스도에게 아주 적절한 것이었다. 갈지 않은 땅에 씨를 뿌리
는 것이 쓸데 없는 일인 것처럼, 복음의 말씀은 우선 듣는 사람이 가르침을 받고 순종
할 준비를 갖추지 않는다면 허공에 던져 버리는 말씀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
스도께서는 니고데모의 마음이 가시로 가득차 있고 많은 독초로 무성해 있기 때문에
신령한 교훈을 받을 마음의 여지가 거의 없음을 아셨다. 이러한 권고는 어떠한 방해물
도 그의 가르침을 헛되게 하지 못하도록, 니고데모의 마음 밭을 갈아 깨끗이 한 것과
같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이 말씀을 단 한 사람에게 했음을 기억하도록 하자. 하
나님의 사자들이 우리 모두에게 매일 같은 어조로 말씀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주시기 위
해서 한 사람에게 대표적으로 말씀하셨다. 우리 중에 "나는 부패한 성품에서 제외되기
때문에 이와같이 새롭게 될 필요가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
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학교에서 유용하게 공부하기를 바란다면, 여기서부터
출발하도록 하자.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 바꾸어 말하자면, 하나님이 나라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너에게 결여되어 있는 한, 네가 나를 선생이라고 인정한다 해서 별로 대수로울 것이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첫 걸음은 새사람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말씀은 아주 뒤어난 말씀이니만큼 각 부분을 상세하게 검토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본문의 문맥에 나타나 있듯이 하나님 나라를 보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
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하늘나라를 뜻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생
각이다.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에서 믿음으로 시작되어 매일 믿음의 계속적
인 향상에 따라 늘어가는 신령한 생명을 말한다. 그러나 이 말씀이 뜻하는 바는, 사람
이 먼저 거듭 나지 않는다면 교회에 들어올 수도 없고 하나님의 자녀로 간주될 수도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말씀은 무엇이 그리스도인의 생활 즉 신앙 생활의 시초인지
를 간결하게 보여주고 있다. 동시에 우리는 이 표현에서, 우리 모두가 나면서부터 하
나님 나라와는 관계 없는 외국인과 나그네라는 가르침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또한
그리스도께서 중생(重生)을 통하여 우리를 변화시키기 까지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대치 상태가 계속되는 것이다. 이 말씀은 보편적인 것이며 모든 인류에 해당되는 말씀
이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한 사람이나 혹은 몇몇 사람에게만 그들이 먼저 거듭나지 아
니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면, 주님께서 특정한 종류의 사람들만이
뜻하셨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에 관하
여 말씀하고 계신다. 여기에는 예외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여기에 쓰인 용어는 제
한이 없는 것으로서 "누구든지 거듭나지 아니하면"과 같은 보편적인 표현이기 때문이
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는 '거듭난다'(born again)는 표현을 통하여 일부분의 개조를
뜻할 뿐만 아니라 인격 전체의 혁신을 의미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안에 불
완전하지 않은 부분이 전혀 없음을 알 수 있다. 전체와 각 부분에 변혁이 필요하다면
전체적으로 모두 다 부패한 것이 틀림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에 대하여 잠시 후 좀
더 상세히 언급하기로 하겠다.
에라스므스(Erasmus)는 씨릴(Cyril)의 의견을 따라 * (아노텐)라는 부사
를 위로부터(from above)라고 잘못 번역했다. 나는 이 낱말의 의미가 헬라어상으로 모
호함을 인정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니고데모에게 히브리어로 말씀하셨음을
알고 있다. 그런 경우 니고데모로 하여금 육신의 두번째 탄생을 놓고 어린 아이와 같
이 주저하도록 할 만한 모호함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니고데모는 그리스도의 말
씀을 사람이 '다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뜻으로 받아
들였다.
3:4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 비록 그리스도의 표현 방법이 율법과
선지와의 글에 그대로 쓰이고 있지는 않지만, 재생은 성경에 전체적으로 언급되어 있
는 것으로서 믿음의 제1차적인 원칙 중의 하나님을 우리가 인정한다면, 당시의 서기관
들이 성경에 얼마나 무지했는가를 알 수 있다. 물론 중생의 은혜를 알지 못함으로 결
함이 있었던 것은 이 사람 하나만이 아니었다. 거의 모든 서기관들이 교묘하고 난해한
말장난을 일삼고 있었기 때문에, 경건의 교훈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소홀히 하고
있었다. 오늘날 우리는 가톨릭 신학자들 속에서 비슷한 예를 발견한다. 이들은 난해한
추리를 늘어 놓으면서 그들의 일생을 허송하지만, 하나님께 대한 예배나 구원의 확신
이나 경건의 연습에 관해서는 구두 수선공이 천문학에 대하여 아는 것 만큼도 모른다.
또한 이들은 이방의 신화에는 몰두해 있으면서도 성경의 참된 가르침은 교사의 권위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멸시하기를 좋아한다. 그렇다면 니고데모가 지푸라기에 걸려 넘어
졌다고 해서 놀랄 필요는 없다. 스스로 지혜롭고 저명한 교사로 생각하며 보통 평범한
교훈을 낮고 천하다고 평하는 자들이 작은 일에 놀라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마땅한
응징이기 때문이다.
3:5
사람이 물과...로 나지 아니하면 - 이 말씀은 여러가지로 설명되어 왔다. 어떤 사
람들은 여기에 중생의 두 가지 다른 부분이 명확히 표현되어 있다면서, 물은 옛 사람
을 부인하는 것을 뜻하고, 성령(Spirit)은 새 생명을 뜻한다고 말하고 있다. 또 어떤
이들은 마치 그리스도께서 물과 성령을-즉 순수한 액체 요소를-인간의 땅에 속한 성품
과 대조시키기라도 하듯, 그 비교가 암시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이들은 이
말씀을, "그리스도께서 무겁고 짐스러운 우리의 육신 덩어리를 벗어버리고 물처럼 변
화되어 위로 향해 올라가고, 적어도 땅에 매이지는 말라고 명령하고 계시다"라고 비유
적으로 풀이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위의 두 가지 의미가 모두 그리스도께서 뜻하
시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더 많은 사람이 공감하고 있는 크리소스톰(Chrysostom)은 이 '물'이라는 낱말을 세
례와 연관시키고 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세례에 의하여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간다는 뜻이 될 것이다. 세례를 받을 때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를 거듭나게 하기 때문
이다. 그래서 이로부터 영생의 소망을 위해 세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믿음이 생
겨난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여기에 세례를 말씀하고 있다고 우리가 인정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제한시켜 구원을 외부적인 표적에 연관시키는 잘
못을 범해서는 안되겠다. 오히려 그리스도께서는 물을 성령과 연관시키고 있다. 눈에
보이는 표징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우리 속에 이루어 주시는
새 생명을 증거하고 인치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세례를 소홀히 한다면 구원에서 제외
된다는 것은 과연 사실이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세례가 필요하다고 자인한다. 그러나
구원의 확신을 세례에 국한 시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이 말씀에 관한 한, 나는
도저히 그리스도께서 세례에 대해 말씀하고 있다고 믿을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상황과 시기에 맞지 않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앞에서 설명한 대로, 니고
데모를 새 생명에 참여하도록 권유하려면 그리스도의 목적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
다. 새 사람이 되기 시작할 때까지는 니고데모가 복음을 받을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하여 반드시 거듭나야 하며 성령께서 이 둘째 탄생
(중생)의 주가 되신다는 말은 단 하나의 문장이다. 니고데모가 피타고라스가 말하는
어떤 신생(新生)에 대하여 공상하고 있을 때,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그와 같은 오류에
서 해방시키기 위하여 설명조의 어투로 사람이 두번째 태어나는 것은 자연 현상으로
되는 것이 아니며 또 새로운 몸을 입고 다시 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은혜에 의하여
심령이 새롭게 될 때 거듭나는 것이라고 부언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물
과 성령'이라는 낱말을 같은 것을 뜻하는 것으로 쓰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억지 해석
으로 간주되어서는 안되겠다. 성령이 언급될 때, 그의 능력을 표현하기 위해 물이나
불이라는 말을 부언하는 것은, 성령에 흔히 자주 나타나는 화법이다. 우리는 때때로
그리스도께서 성령과 불과 세례를 주신 것을 듣게 된다. 불은 성령과 다른 것을 뜻하
는 것이 아니라 다만 우리 속에 역사하는 이 성령의 능력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 주는
것이다. 주님께서 물이라는 말을 먼저 쓴 것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 어귀는
다른 것보다 더 쉽게 흐르고 있을 뿐이다. 한 마디로 평범한 문장이 은유에 어울리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사람이 물로 새롭게 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
다고 그리스도께서 말한 것과 같다. 그리고 이 물은 우리를 새롭게 씻어주고, 우리가
전혀 불모의 상태로 태어났을 때, 우리위에 부어진 그의 능력을 따라 우리에게 하늘의
생명의 원기를 옮겨주는 성령이라고 말한 것과 같다. 그리고 니고데모의 무지함을 책
망하기 위해 그리스도는 성경에 흔히 나오는 화법을 적절히 구사하고 있다. 니고데모
는 결국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이 선지자들의 일반적인 교훈에서 나온 것임을 인식하
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물은 단순히 성령의 깨끗게 하시고 소생케 하시는 역사를
뜻하는 것이다. 그것을 설명하는 의미로서 '과'(and)라는 말을 쓴 것도 이례적인 것이
아니다. 후자가 전자를 설명하는 뜻으로 쓰일 때 이러한 표현이 쓰이기 때문이다. 그
리고 역시 그 문맥이 나의 생각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거듭나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를 말할 때 그가 요구하는 새 생명이 성령으로부터만 오는 것임을
보여 줄 때 물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물이 성령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것임을 알 수 있다.
3: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 그리스도께서는 거듭남에 의하여 입구가 우리에게 열리
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닫혀있음을 대조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신령하기 전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음을 그리스도는 당연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모태로부터 육에 대한 것외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면서부터 하늘의 생명을 박탈당하고 죽음의 노예가 된 채 하나님의 나라에서
추방당한 상태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사람은 모두가 육신
뿐이기 때문에 거듭나야 된다고 역설하실 때, 그는 육(flesh)이라는 낱말 하나에 전
인류가 갇혀 있다고 본 것이 분명하다. 여기 육은 몸만이 아닌 혼을 그리고 혼의 각
부분을뜻하고 있다.가톨릭 신학자들은 어리석게도 육을 그들이 육욕적(sensual)또는
관능적이라고 부르는 부분에 국한시키고 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중생
이 즉 두번째 거듭남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신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 부적당한 것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가톨릭 교도들 말대로 한다면, 우리의 일부분이 썩은 것이기 때문이
다. 그러나 육이 건전한 것에 비교하여 부패한 것을 대조시킨 것처럼 성령에 대조되는
말로 쓰였다면, 그리고 곧은 것에 대한 굽은 것을, 거룩한 것에 대한 더러운 것을, 순
결한 것에 비추어 오염된 것을 대조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인간의 본성 전체가 한 마
디로 정죄되어 있음을 결론지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이
해와 사고가 육적이기 때문에 썩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마음의 모든 정욕이 역시
육적이기 때문에 타락되어 있고 부패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영혼(soul)은 인간의 번식에 의하여 생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의 주
요 부분은 육에서 난 것이 아니라는 어려운 난제가 제기될 수 있다. 이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은 우리의 몸(육체)뿐만 아니라 영혼도 그 근원이 번식 과정을 따라서 부모로부
터 물려받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모든 영혼이 샘에서 흘러나오듯, 한
영혼에서 유출된 것이 아니라면 우리의 영혼에 자리잡고 있는 원죄가 한 사람으로 말
미암아 모든 그의 후손에게 퍼지게 되었다는 말은 모순적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과연 그리스도의 말씀은 언뜻 보기에는 우리가 단순히 육에서 났기 때문에 육이라고
암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가 태어날 때 우리는 육
적인 것임을 의미하고 있을 뿐이라고 대답한다. 우리가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는 한 우리의 성품은 오로지 육적인 것에만 취향을 갖고 있다는 뜻이
다. 주님은 단순히 인간의 성품과 초자연적인 은사의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류가 부패한 것은 생식에 의하여 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된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한 사람 안에서 우리 모두를 꾸려주셨던 것
처럼, 그는 또한 그 한 사람 안에서 그의 모든 은사를 우리로부터 앗아갔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들의 부모로부터 각자의 악덕과 부패를 유전받은 것이 아니라 아담 한 사
람 안에서 우리가 한결같이 부패되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아담이 타락한 즉시 하나님
께서는 자신이 스스로 인간에게 하사하셨던 것을 인간의 본성으로부터 취하여 가셨기
때문이다.
여기에 또 다른 난제가 일어난다. 이 타락한 본성에 하나님의 은사 중 몇가지가 아
직 남아있는 것이 확실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모든 부분이 다 타락한 것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온다. 해답은 간단하다. 주님께서 타락 후에 우리에게 남겨 두셨던 은사들은
그 자체를 보아 분명 칭찬을 받을 가치가 있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악의 감염이 온 전
신 각 부분에 퍼져나가자, 더러움에 감염되지 않은 깨끗하고 순수한 것은 우리 안에서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하나님께 대한 내재적인 지식이 어느 정도 우리 안에서 있다
든가,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는 것이 우리 양심에 새겨져 있다든가, 현재의 생명을
유지, 적응할 능력이 있다든가......간단히 말하여, 우리가 여러 면으로 짐승보다 뛰
어나다는 것은, 그것이 하나님께로서 말미암은 이상 그 자체가 우수한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우리 안에 오염되어 있다. 이것은 마치 포도주를 담은 가죽부대의 악취
에 의하여 완전히 부패된 포도주가 그 향긋한 향취를 잃고 쓰디 쓴 맛을 내는 것과 같
다. 이제 인간에게 남아 있는 하나님께 대한 지식은 무서운 우상 숭배와 각종 미신의
원천일 뿐이다. 사물을 선택하고 구별하는 판단력의 일부인 눈이 멀었고 무지하게 되
었으며, 불완전하고 혼동되었다. 그리고 무엇이든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헛된 것
과 사소한 일에 낭비되어 있으며 의지는 악으로 달려가기에 바쁘다. 따라서 우리의 인
격 안에는 의(義)의 광선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가 거듭남으로써 하
나님 나라를 위해 다시 창조되어야 함은 자명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말씀이
뜻하는 바는 사람이 그의 모태로부터 육적인 존재로 나왔기 때문에, 신령해 지려면 성
령에 의해 새로 지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령이라는 말은 은혜를 위하
여, 그리고 은혜의 성취 또는 효능을 위하여 두 가지 의미로 쓰여졌다. 우선 그리스도
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성령이 순수하고 의로운 성품의 유일한 주체가 되신다고 가
르치고 계신다. 그리고 후에 그리스도는 우리가 그의 능력에 의하여 새로와졌기 때문
에 신령하다고 말하고 있다.
3:7
기이히 여기지 말라 - 주석가들은 이 말씀을 여러가지로 의곡해서 풀이해 왔다.
어떤 이들은 이 말씀이 니고데모나 그와 같은 사람의 어리석음을 공격하고 있다고 생
각한다. 그들이 하늘로부터 말미암은 중생의 비밀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조금도 놀라
울 것이 없다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기라도 하듯 이들 주석가들은 니고데모의 어리석
음을 나무라고 있다. 그런데 이런이들은 자연의 질서 가운데서도 지각있는 일에 대한
이유를 터득하지 못한다. 어떤 이들은 또 독창적이긴 하나 너무나 억지가 섞인 의미를
생각해 낸다. 이들은 바람이 임의로 부는 것처럼 우리가 성령의 거듭나게 하심으로 자
유하게 되어 죄의 멍에로부터 벗어나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달려가게 된다고 말하고 있
다. 하나님의 성령은 그의 기쁘신 뜻대로 역사한다고 한 어거스틴의 제언도 그리스도
께서 뜻하신 바와는 거리가 멀다. 바람으로 비유를 들어 이 말씀에 적용시켜 "그 능력
을 느낄 수 있으나 바람의 근원과 원인은 숨겨있다"고 말한 크리소스톰과 씨릴(cyril)
은 사실 어거스틴 보다 낫다. 나는 그들의 의견에 크게 반대하지 않으나 그리스도께서
뜻하는 바를 좀 더 명확하게 설명해 보기로 한다. 내 논리의 시발점은 그리스도께서
자연의 질서로부터 비유 방법을 빌려왔다는 것이다. 니고데모는 자기가 중생과 새 생
명에 대하여 들은 것을 믿을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중생의 방법을 도저히 이해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니고데모로부터 이러한 어려움을 제거해 주기 위하여 그리
스도께서는 육신의 생활 속에서도 그 원칙이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능력이 놀랍게 나
타나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모든 것이 공기의 생동적인 호흡에서 연유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공기의 움직임까지도 파악할 수 있는 것이지만, 공기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
는지는 알지 못한다. 만일 임시적이고 잠정적인 생활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너무나 힘
있게 역사하셔서 우리가 그 능력을 기이하게 생각한다면, 우리의 제한된 마음으로 하
늘에 속한 초자연적인 생명 안에서 하나님께서 비밀스럽게 행하시는 일을 헤아리려 하
고 보는 것 이상은 믿지 못하겠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짓이냐! 그래서 바울
은 썩을 몸이 흙으로 돌아간 후에 복된 생명의 몸으로 덧입게 된다는 말씀이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는 근거를 내세워 부활의 교훈을 거역하는 자들에게 의분을 터뜨리고 있
다. 바울은 그들에게 곡식 한 알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고려하지 못하는 그
들의 어리석음을 책망하고 있는 것이다(고전15:36,37). 이것이 다윗이 시편 104편 24
절에서 노래하고 있는 하나님의 기이한 지혜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지으신 자연의
일반적인 질서를 보고도, 한 걸음 더 올라가 그리스도의 신령한 나라에서는 하나님의
손이 훨씬 더 능력이 있음을 인정하지 못하는 자들은 극히 어리석은 것이다. 그리스도
께서 그에게 기이히 여기지 말라고 했을 때, 그가 마치 우리의 최대의 경탄을 받을 가
치가 있는 하나님의 훌륭한 솜씨를 멸시해도 좋다는 뜻으로 말한 것처럼 오해해서는
안되겠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방해할 정도로 그저 놀라움에 사로 잡혀
서는 안된다고 지적하고 계신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고상하고 어렵다고 생각하는
것을 터무니 없는 것으로 돌려버리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성령에 의하여
우리가 새로 지음을 받아 새 사람이 되는 것을-비록 주님께서 우리를 중생시키는 방법
이 우리에게 숨겨져 있다하더라도-의심하지 않도록 하자.
3:8
바람이 임의로 불매 - 엄격히 말하자면, 바람이 자발적으로 분다는 뜻이 아니라,
바람의 움직임이 자유롭고 변화무쌍하기 때문에, 공기는 때때로 이 방향으로 또 어떤
때는 저 방향으로 이동된다는 말씀이다. 이것은 적절한 말씀이다. 왜냐하면 바람이 물
처럼 정해진 방향으로만 흐른다면 그것은 기이함이 덜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영의 움직임과 작용
은 공기의 움직임이 이 지상의 외적인 생활 가운데 나타나는 것만큼 중생한 사람의 생
활에 나타나 보이게 마련이지만, 그 모양은 숨겨져 있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우리
가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능력을 사모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감사하지 못하고 인색
하게 된다. 하늘에 속한 하나님의 능력에 대하여 주님께서는 아주 뛰어난 예를 이 세
상에서 보여주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혼의 구원을 회복하는데 주님의 능력으로 돌리
는 것보다 우리의 육체를 보전하는데 더 많은 주님의 은혜가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감사드리는 일에 인색한 것이다. 이 문장을 "거듭난 사람안에서
역사하는 성령의 능력과 효능이 이와 같으니라"고 바꾸어 표현한다면 의미가 좀 더 분
명해 질 것이다.
3:9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 우리는 여기서 니고데모의 가장 주된 어려
움이 무엇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그가 듣는 것은 모두가 터무니 없이 엉뚱하게 보인
다. 그 말씀의 내용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의 교만보다 우리에게 더
큰 장애물은 없다. 우리는 항상 정도 이상으로 더 현명해지기를 원한다. 그러므로 우
리는 마치 하나님의 무한하신 능력을 우리의 유한한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것이 정당한
태도인 것처럼, 우리의 이성에 따라 설명되지 않는 모든 것을 사단적인 교만으로 거절
해 버린다. 우리는 물론 정중하게 경건한 마음의 태도로, 어느 정도는 하나님께서 하
시는 일의 방법과 이유를 탐색해도 좋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
지 않는다는 반대 이유를 내세워 그것을 하나의 신화로 돌려버린다. 우리는 이 주제를
6장에서 더 상세히 다루게 될 것이다.
3:10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 - 그리스도께서는 이 교
만한 사람을 가르치는데 그의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제
니고데모를 책망한다. 과연 이러한 사람들을 가르치는데 있어서는, 그들을 부풀게 하
고 있는 그 비뚤어진 자만심이 무너지기 전에는 어떠한 진전도 기대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그의 교만을 누르는데 있어 아주 적절한 반박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께서는 니고데모가 스스로 가장 조예가 깊다고 생각하고 있는 문제에 대하여 그가 얼
마나 무식한가를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불가능한 것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 신
중하고 지혜롭다고 생각했다. 어떤 문제에 대해 잘 알아보기도 전에 남의 말을 받아들
이는 사람은 어리석은 정도로 잘 속기 때문이다. 그러나 행정관리처럼 교만하고 어처
구니없게 행동하는 것은 니고데모다. 그는 제 일차적인 원칙들에 대하여 국민학교 학
생보다 더 당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의심은 저속하고 부끄러운 것이다. 만
일 사람이 하나님의 성령에 의하여 거듭난다고 믿지 않는다면, 무슨 종교를 가질 수
있으며, 하나님께 대하여 무슨 지식과, 바른 행동에 대해 어떤 규범을, 그리고 영원한
생명에 대해 무슨 소망을 가질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강조점은 '이런'이란 낱말에 있
다. 성경은 이 부분의 교리에 대하여 거듭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아주 어린 초심자에
게까지 이 진리는 알려지지 않으면 안된다. 따라서 하나님의 교회 내에서 교사로 자처
하는 사람이 이것을 모르고 이에 숙련되지 않았다고 하는것은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3:11
우리 아는 것을 말하고 - 어떤 이들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세례요한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다른 이들은 복수는 단수 대신에 쓰인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나
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하나님의 선지자들과 연합하고 있으며 또 그들을 위하여 말하고
있음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철학자들과 스스로 지혜있는 체하는 선생들은 종종
자기들이 지어낸 사소한 이론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확실한 것만을
교훈하는 것은 자기와 하나님의 종들 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나님은 자기 종들이
알지 못하고 의심하는 것을 얘기하라고 그들을 내보내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은 자
기에게서 배운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라고 그들을 그의 학교에서 훈련시킨다. 뿐
만 아니라 그리스도는 이 증언에서 자기의 교훈의 확실함을 우리에게 자천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그의 사역자들에게 그들의 꿈이나 추측을 제시하거나
확실성이 희박한 인간적인 발상을 선전하지 말고, 하나님을 순수하고 진실되게 증거하
여 중용을 지킬 것을 간청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 각자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
신 것에 유념하여 각자의 믿음의 한계를 벗어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끝으로 우리는 주님께서부터 들은 것 외에는 아무 것도 말하지 말도록 하자.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말씀이 우리에게 완전한 권위를 지니도록, 그의 교훈을 하나의
맹세로서 확증하고 있음을 주목해야겠다.
그러나 너희가 우리 증거를 받지 아니하는도다 - 인간의 배은망덕한 태도에 의해 복
음이 손상을 받지 않도록 이 말씀을 부언하고 있다. 하나님의 진리는 그것을 믿는 소수의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가는 곳마다 세상의 거부를 받기 때문에, 우리는 복음을 멸시하는 거의 전 세상과, 불신앙으로 복음을 흐리게 하는 세상에 의해 진리의 권위가 약화되는 일이 없도록 진리를 세상의 멸시로부터 구출해야 한다. 비록 말씀의 의미는 간단하고 직설적인 것이지만, 우리는 이 말씀에서 두 가지의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첫번째는 이 세상에 복음을 믿고 따르는 제자 수가 아주 적다하더라도 복음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 흔들려서는 안되겠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비록 너희가 나의 가르침을 받아 들이지 않지만, 나의 교훈은 언제나 확실하고 영원한 것으로 남아있다. 너희 불신앙이 하나님의 항상 미쁘심을 막을 수는 없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그리고 두번째 교훈은, 오늘날 복음을 믿지않고 거부하는 사람들을 결단코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진리는 어김없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진리의 방패를 무장
하여, 인간의 불순종에 대항하며 복음에 순종하는 가운데 인내해야 할 것이다. 이 원칙은 꼭 지켜져야 한다.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의 터 위에 서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건축자로 모실 때, 우리는 하늘 위로 올리운 것처럼, 온 세상을 발 아래 두고 어떠한 불신앙의 사람을 만나더라도 당황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불평에서 그의 증거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것과 말하자면, 하나님의 말씀의 운명이 모든 시대를 통하여 극소수의 사람들에게만 믿음의 호응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너희가...받지 않는다"고 했을 때 그는 대다수의 사람들, 즉 거의 모든 사람들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믿는 자의 수가 적다고해서 우리가 낙망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3:12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 그리스도께서는 니고데모와 그의 동료들이 복음의 교
훈을 깨닫지 못한다면 그들에게 문제가 있다고 결론을 내린다. 그는 우리가 바로 교육을 받지 못한 것은 그의 잘못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하늘로 들어올리기 위하여 지상에 직접 내려오셨기 때문이다. 난해하고 학구적인 문장으로 배우기를 원하는 것이 보통 사람들이 흔히 범하는 잘못이다. 그래서 많은 수의 사람들이 고상하고 난해한 추리와 철학을 좋아하는 것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복음에서 그들의 귀를 즐겁게 해줄 만한 화려한 언어를 찾을 수 없기 때문에 복음을 무가치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이들은 평범하고 낮게 보이는 교훈은 연구하려고 마음을 쓰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무식한 처지에까지 자신을 낮추셨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그만큼 낮은 경의를 표한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무례한 태도인가, 주님께서 성경 안에서 낮고 평범한 어조로 우리와 대화를 나누는 것은 우리를 위해서임을 알자.
누구든지 성경이 너무나 평범하고 세족적인 용어로 되어 있기 때문에 불쾌하다든가 또는 성경이 너무나 서민적이기 때문에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에 맡길 수 없다고 핑계를
대는 자는 거짓말장이가 된다. 주님께서 가까이 계실 때에 하나님을 영접할 수 없는
자는 구름 저 편에 있는 하나님께로 날아 올라갈 리가 없기 때문이다.
"땅의 일을" 어떤 이들은 이것을 영적인 교훈의 기초라고 설명한다. 우리 자신을 부
인하는 것은 경건을 연습하는데 있어서 첫 단계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가르치는 형태에 연관시키는 이들과 의견을 같이한다. 비록 그리스도의 말씀이 모두
하늘에 의한 것일지라도 너무나 평범한 방법으로 표현하셨기 때문에 그의 어조는 어떤
의미에서 땅에 속한 것처럼 보였다. 뿐만 아니라 이 말씀은 이 한번의 대화에 국한시
켜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평상적인 교훈방식이-평범한 간결성-야망과 허영
에 들떠 있는 사람들이 반해있는 화려한 선전과 대조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3:13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 주님은 다시 니고데모에게 자신과 자신의 명철을
믿지 말라고 권유하고 있다. 어떠한 사람도 자신의 노력에 의하여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고 다만 하나님의 아들의 인도함을 받는자 뿐이기 때문이다. 하늘에 올라간 자에게
는 하나님의 비밀에 대한 순수한 지식과 신령한 지혜의 빛이 따르게 마련이다. 그리스
도께서는 여기서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좇지 아니하나니"(고전
2:14)라고 했던 바울과 똑같은 진리를 가르치고 있다. 그리함으로써, 바울은 하나님의
일에서 인간의 지혜의 모든 총명을 제외시키고 있다. 인간의 지혜는 하나님의 지혜보
다 훨씬 열등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말씀이 하늘에 속한 그리스도만이 "하늘에 올라가고"나머지 모든
사람에게 그 입구가 닫혀 있다고 말하고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바로 앞의 문장에서그
는 온 세상을 하늘 밖에 둠으로써 우리를 겸허하게 만들고 있다. 바울은 하나님께 지
혜주시기를 원하는 자는 자기에게 미련한 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고전3:18). 우리
에게 이보다 하기 싫은 일이 또 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관계할 때 우리
의 모든 지각이 사라지고 약화됨을 믿어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하늘
문을 닫으신 후 그는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용인되지 않았던 것이 인자에게 주어졌다
고 덧붙임으로써 즉시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 그가 하늘에 오르신 것은 자기 개인을
유익하게 하려함이 아니고, 우리의 지도자와 안내자가 되기 위함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로 모든 축복에 참여케 하고 우리와 같은 육체로 옷 입으신 자신과 함께 같은 옷
을 입고 있음을 의미치 않게 하기 위하여 자신을 사람의 아들(인자)이라 부르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유일한 해석자가 되시기 때문에, 그는 우리를 자기가
아니었으면 그대로 감추어져 있을 비밀로 인도한다.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거하고 있으
면서 하늘에 있다고 말하는 것은 어처구니 없는 말로 들릴지 모른다. 그러나 자신이
그의 신성은 사실이었다고 대답한다면, 이 표현은 전혀 다른 뜻을 지니게 된다. 즉 그
가 사람이지만 하늘에 계시다는 것이다. 여기에 장소가 언급되어 있지 않다고 말할 것
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신분상으로 다른 사람들로 부터 구분되어 있을 뿐이다. 그는
전 인류가 추방당한 상태에 있는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
도 안에 위격(位格)의 일치를 위해 하나의 성격에서 또 다른 특징으로 표현을 바꾸는
것은 종종 있는 일이기 때문에 우리는 또 다른 해결책을 찾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
래서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육체를 입으시고, 우리를 자기와 함께 하늘로
올리우시기 위하여 사랑의 손을 뻗치신 것이다.
3;13
모세가 광야에서 -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이 왜 자기에게만 열려 있는지를 더욱 분
명히 설명하고 있다. 그는 자기를 그들의 지도자로 모시고 따르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
들을 그곳에 데리고 가기를 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
의 능력을 부어 줄 수 있도록 만인에게 공개적으로 계시된 것을 선언하고 있기 때문이
다.
뱀을 든 것 같이 - 들었다는 말은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눈에 띄는 곳에 놓여진
것을 뜻한다. 이것은 복음이 전파되는 중에 일어났다. 이것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결
부시켜 해석하는 사람들의 설명은 그 문맥과 일치하지 않으며 그리스도의 말씀과 거리
가 있다. 이 말씀의 단순한 의미는 이사야가 예언했던 대로, 복음이 전파됨으로 말미
암아 그리스도께서 하나의 본보기로 높이 들기게 된다는 것이다(사2:2). 이와 같이 높
이 들렸던 놋 뱀을 선택했다. 민수기 21장 9절에 잘 나타나 있는 대로, 누구든지 뱀에
물린 사람은 장대 끝에 달린 놋뱀을 보기만 하면 즉시 고침을 받았다. 이 말씀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복음이 전파되는 가운데 자기가 모든 사람의 눈 앞에 세워짐으로, 누구
든지 믿음의 눈으로 자기를 바라보면 구원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
기 위하여 놋뱀을 소개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복음 안에서 분명히
우리 앞에 제시되어 있으며, 아무도 복음이 모호하다고 불평할 수 없음을 인식하게 된
다. 이 계시는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것이며 믿음의 눈은 그가 우리에게 나타나 있음
을 보는 것이다. 그리하여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지 않느냐(갈3:1)고 물었던 것이다.
이 비유는 부적당하거나 과장된 것이 아니다. 놋뱀이 외양(外樣)만 뱀이지 아무런
독의 요소를 가지지 않았던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우리 속에 있는 치명적인 죄의 상
처를 고쳐주려고, 죄와 관계 없는 분으로서 죄있는 육신의 모양을 입으셨다. 유대인들
이 뱀에게 물렸을 때 그와 같은 해독제로 맞선 것은 결코 헛된 일이 아니었다. 그리스
도께서 자기가 이름없는 비천한 존재로 멸시당하고 있음을 아셨을 때 뱀이 들렸던 사
실을 지적한 것은 아주 적절한 일이었다. 그것은 마치 그리스도께서, 이미 율법에 뱀
의 형태로 윤곽이 제시되어 있는 것처럼, 인간의 의견에 반하여 그가 아주 낮은 처지
에서 높이 들리게 된다 해도, 이상한 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고 말슴하시는 것과 마찬
가지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자기와 뱀 사이에 유사점이 있어서 스스로를 뱀에
비교했는지, 아니면 그것을 만나와 같은 예식으로 생각하고 말씀하셨는지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왜냐하면 만나가 육신적으로 몸에 좋은 것이었으나 바울은 그것이 신령한 비
밀이었다고 선언하고 있기 때문이다(고전10:3). 이 성경 말슴에서 비추어 볼 때 나는
놋뱀도 마찬가지였다고 생각한다. 이 놋뱀은 후에 백성의 미신에 의하여 우상으로 변
할 때까지 후손으 루이하여 보전되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누가 달리 생각한다면
나는 그것에 대하여 변론하고 싶지 않다.
3:14
모세가 광야에서 -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이 왜 자기에게만 열려 있는지를 더욱 분
명히 설명하고 있다. 그는 자기를 그들의 지도자로 모시고 따르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
들을 그곳에 데리고 가기를 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
의 능력을 부어 줄 수 있도록 만인에게 공개적으로 계시된 것을 선언하고 있기 때문이
다.
뱀을 든 것 같이 - 들었다는 말은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눈에 띄는 곳에 놓여진
것을 뜻한다. 이것은 복음이 전파되는 중에 일어났다. 이것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결
부시켜 해석하는 사람들의 설명은 그 문맥과 일치하지 않으며 그리스도의 말씀과 거리
가 있다. 이 말씀의 단순한 의미는 이사야가 예언했던 대로, 복음이 전파됨으로 말미
암아 그리스도께서 하나의 본보기로 높이 들기게 된다는 것이다(사2:2). 이와 같이 높
이 들렸던 놋 뱀을 선택했다. 민수기 21장 9절에 잘 나타나 있는 대로, 누구든지 뱀에
물린 사람은 장대 끝에 달린 놋뱀을 보기만 하면 즉시 고침을 받았다. 이 말씀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복음이 전파되는 가운데 자기가 모든 사람의 눈 앞에 세워짐으로, 누구
든지 믿음의 눈으로 자기를 바라보면 구원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
기 위하여 놋뱀을 소개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복음 안에서 분명히
우리 앞에 제시되어 있으며, 아무도 복음이 모호하다고 불평할 수 없음을 인식하게 된
다. 이 계시는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것이며 믿음의 눈은 그가 우리에게 나타나 있음
을 보는 것이다. 그리하여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지 않느냐(갈3:1)고 물었던 것이다.
이 비유는 부적당하거나 과장된 것이 아니다. 놋뱀이 외양(外樣)만 뱀이지 아무런
독의 요소를 가지지 않았던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우리 속에 있는 치명적인 죄의 상
처를 고쳐주려고, 죄와 관계 없는 분으로서 죄있는 육신의 모양을 입으셨다. 유대인들
이 뱀에게 물렸을 때 그와 같은 해독제로 맞선 것은 결코 헛된 일이 아니었다. 그리스
도께서 자기가 이름없는 비천한 존재로 멸시당하고 있음을 아셨을 때 뱀이 들렸던 사
실을 지적한 것은 아주 적절한 일이었다. 그것은 마치 그리스도께서, 이미 율법에 뱀
의 형태로 윤곽이 제시되어 있는 것처럼, 인간의 의견에 반하여 그가 아주 낮은 처지
에서 높이 들리게 된다 해도, 이상한 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고 말슴하시는 것과 마찬
가지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자기와 뱀 사이에 유사점이 있어서 스스로를 뱀에
비교했는지, 아니면 그것을 만나와 같은 예식으로 생각하고 말씀하셨는지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왜냐하면 만나가 육신적으로 몸에 좋은 것이었으나 바울은 그것이 신령한 비
밀이었다고 선언하고 있기 때문이다(고전10:3). 이 성경 말슴에서 비추어 볼 때 나는
놋뱀도 마찬가지였다고 생각한다. 이 놋뱀은 후에 백성의 미신에 의하여 우상으로 변
할 때까지 후손으 루이하여 보전되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누가 달리 생각한다면
나는 그것에 대하여 변론하고 싶지 않다.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 그리스도께서는 제1차적인 원인을, 다시 말하
자면 우리의 구원의 원천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는 어떠한 의심도 남지 않도록
구원의 원천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비로운 사랑으로 나아가기 까지는
우리의 마음이 쉴 수 있는 평안한 안식처가 없기 때문이다. 구원의 본질과 내용은 '그
리스도 안'이 아닌 다른 곳에서는 도저히 찾아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방법으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까지 들어오시고 왜 그가 우리의 구주로서 들
려졌는지를 알아야 한다. 이 두 가지 요점이 이 곳에 분명히 제시되어 있다-그리스도
를 신뢰하는 믿음이 모두를 살리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자신이 사랑하는 인류가
멸망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생명을 가져왔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때 전후 시제를 주의 깊게 살피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의 본성에 내재하고
있는 인간적인 야심은, 우리가 구원의 원천에 대하여 생각할 때에 우리 자신의 공로에
대한 마귀적인 생각이 즉시 우리 마음에 스며들도록 유도한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우리를 자기의 환심을 살 가치가 있다고 보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셨다고 우리는 상상한다. 그러나 성경은 전체적으로 주님의 깨끗하고 단순
한 자비와 은혜를 선포하고 있다. 이것은 인간적인 모든 공로를 삭제해 버리는 것이
다. 그리고 원인은 주님께서 하나님의 사랑에 있다고 말씀하실 때 그리스도의 말씀도
다른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이 이상 높이 올라가려 할 경우에는, 성령께
서 이 사랑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에 기초를 두고 있다고 한 바울의 선언으로 우
리를 막으신다(엡1:5).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의 눈을 자신으로부터 하나님의 자
비로 되돌리기 위하여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 분명하다. 그는 또 우리 안에 어떤 축복
을 받을 만한 가치나 자격이 있다고 보셔서 하나님의 마음이 감동되어 우리를 구원했
다고 말하지도 않았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의 영광을 전적으로 그의 사랑에 돌리
고 있다. 그리고 이는 문맥상으로 더욱 분명해진다. 주님은 사람들이 심판을 받아 멸
망할까봐서 아들을 인간에게 주셨다고 부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잃어진
자들을 구출해 내기 전까지는, 모든 인간이 영원한 멸망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말이
다. 바울도 또한 우리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원수되었을 때 우리를 사랑해 주셨다
고 시제를 통하여 이를 시사해 주고 있다(롬5:8,10). 과연 죄가 다스리는 곳에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와 그에 따르는 사망 외에 다른 것을 찾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케 하고 또 우리를 생명으로 회복시켜 주는 것도 자비뿐인 것이
다. 그러나 이와 같은 식의 표현은 성경의 여러 증거와 엇갈리는 것처럼 보일수도 있
다. 성경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첫번째 근거를 그리스도 안에 두고, 그리스
도를 떠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
리는 내가 이미 말한 바대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우리를 포옹하는 숨은 사랑은,
하나님께서 영원히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서 흘러나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어떤 이유
보다 근원적인 이유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증거하기를 원하는
은혜, 우리를 구원의 소망으로 인도하는 은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마련된 화해로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증거하기를 원하는 은혜, 우리를 구원
의 소망으로 인도하는 은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마련된 화해로 시작되는 것이다.
주님은 언제나 죄를 미워하신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하여 진노하고 계신
그 죄가 모두 속죄되기 전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심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겠는
가?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자비로우신 사랑에 대해 어떤 느낌을 가질 수
있기 전에,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시키기 위하여 관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의 독생자를 주시어 우리
를 위해 죽게 하였다는 말씀을 듣게 된다. 그러므로 바로 말해서 믿음이 바라 보아야
할 대상은 그리스도 한분 뿐이라고 즉시 부언하고 있는 것이다.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 참된 믿음의 눈은 자기 눈
앞에 그리스도를 놓고 사랑 가운데 부은 바된 하나님의 마음을 본다. 우리의 튼튼하고
흔들리지 않는 증거는 오직 그리스도의 죽음이다. 독생자라는 말은 우리를 향한 하나
님의 사랑의 열도(熱度)를 강조하기 위하여 쓰인 말이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말하면 쉽게 곧이 듣지 않는다. 그래서 모든 의심을 제거하기 위하여,
주님께서는 우리가 그에게 너무나 사랑스럽고 귀한 존재이기 때문에 심지어 외아들까
지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위해 내어 주셨다고 명확히 표현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아주 확실하게 선언하셨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증거로
만족하지 못하고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에게 심한 상처를 입혀주는 것이다.
그러한 사람은 사실상 그리스도를 우연한 사고에 의하여 죽어갔던 평범한 사람으로 취
급하는 것이다. 우리는 오히려 자기의 독생자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구원이
그에게 얼마나 귀중했는가를 측정해 주는 척도임을 생각하고,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독
생자의 죽음으로 그 속죄의 값이 되도록 섭리하셨음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
는 성격상으로 하나님의 외아들인 것처럼, 그의 권한에 따라 독생자라는 이름을 소유
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그의 몸에 접붙인 바 될 때 우리를 양자로
삼아주심으로 이 영예를 우리와 나누신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 믿음의 놀라운 점은 믿음이 우리를 영원한 멸망으로
부터 구원해 준다는 것이다. 그는 특별히 우리에게, 비록 우리가 죽기 위하여 난 자
같을지라도,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분명한 구원이 우리에게 주어졌다고 말해
주기를 원했다. 그래서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차별없이 생명으로 초대하기 위하여 일반적인 용어를 쓰고 계신다. 따라
서 불신자들은 여기에 어떠한 핑계도 댈 수 없는 것이다. 주님께서 이에 앞서 쓰셨던
'세상'이라는 말의 의의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비록 세상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가치가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지만,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모든 사람을 예외없이
초대하는 것을 볼때 그가 온 세상에 대하여 호의적인 관용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스도
를 신뢰하는 것은 과연 생명으로 들어가는 관문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생명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일반적으로 약
속되어 있는 것이지만,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겠다. 그리스도는 모
든 사람에게 열려 있고 모든 이가 볼 수 있도록 공개되어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그를 찾고 구하는 택함 받은 자들의 눈만 열어 주신다. 믿음의 놀라운 효과
가 여기에도 나타나 있다. 믿음에 의하여 우리는 그리스도를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주
신 대로 영접한다. 즉 영원한 죽음의 심판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시고 죽음의 희생을
통하여 우리의 죄를 속죄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영생의 상속자로 삼아주신 분을 우리
는 믿음으로 영접하는 것이다. 이제 아무 것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기 자녀로 인정하
지 못하도록 방해할 것이 없다. 그러므로 믿음이 그의 죽음의 효능과 부활의 열매를
그리스도와 함께 신뢰할 때, 우리가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생명을 획득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믿음이 어떻게 그리고 무슨 이유로 우리에게 생명을 가져
다 주는지는 아직 분명치 않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그의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사 하
나님의 의가 우리 안에 흘러 넘치게 되는 것인지, 아니면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해진
우리가 거저주시는 바 용서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의롭다 인정함을 받게되는
것인지 확실하지가 않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양상이 항상 함께 조화되는 것은 틀림없
는 일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구원의 확신에 대해 관심이 있는 만큼, 중심이 되는
사상은 하나님게서 우리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아니하심으로 얼마든지 우리를 사랑하
시기 때문에 우리가 산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저주와 죽음과 죄를 함께 폐
하고 멸하는 제사(제물)가 언급된 것이다. 나는 이미 이 두 귀절의 경향을 설명했다.
이들은 우리 스스로에게 결핍되어 있는 생명을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할 수 있다고 그
들에게 가르친다. 왜냐하면 이와 같이 비참한 상태에 있는 인간에게는 구속이 구원보
다 우선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3: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 이것은
앞에 나온 문장에 대한 확인이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헛된 것
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온 것은 멸하려 함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에게 맡겨진 적절한 기능은 구구든지 믿는 자는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 것이
었다. 이제 아무도 어떻게 죽음을 피할 수 있는가 염려하거나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
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망에서 건지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임을 우리는 믿기 때문이다.
여기에 다시 '세상'이라는 말이 쓰인 것은, 사람이 누구든지 믿음의 길을 택하면, 아
무도 이 놀라운 은혜에서 제외될 수 없음을 확언하기 위한 것이다.
이 곳에 쓰인 심판(judge)이라는 말은 다른 귀절에서 쓰인 정죄(condemn)라는 말 대
신에 쓰인 것이다. 그가 오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라고 말함으로 주님께
서는 자기가 온 목적을 지적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미 수 없이 멸망된 상태에 있는 우
리를 멸하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올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그의 무한하신 사랑 가운데 잃어진 우리를 돕고 구원하기를 원하신
것 외에 다른 것을 보아서는 안된다. 그리고 우리의 죄가 우리 위에 짓눌러 올때 사단
이 우리를 절망으로 몰아갈 때 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영원한 멸망 가운데 압도당
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이 방패를 높이 들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세상
의 구원이 되도록 확정하셨기 때문이다. 다른 곳에서 그리스도께서 심판하러 오셨다고
말할 때, 그리스도께서 거침 돌이라고 불리울 때, 그가 많은 사람을 넘어지게 하려고
세움을 입었다고 말할 때, 그것은 우연한 것으로 간주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제시되어 있는 은혜를 거절하는 자들은 그에게서 그와 같이 충격적이고 무가치한 멸시
를 보응하는 심판자를 발견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대표적인 예를 우리
는 복음에서 볼 수 있다. 비록 복음이 믿는 사람에게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지만, 많은 사람의 배은(背恩)에 대하여는 멸망으로 변해버린다는 것이다.
바울은 경건한 자들의 복종이 온전히 이루어진 후에 자기의 복음에 대적하는 자들을
벌하려고 예비하는 중에 있다고 즐거워 할 때 이 두가지 측면을 다 표현하고 있는 것
이다(고후10:6). 이 복음의 말씀은 특별히 그리고 우선적으로 신자들을 위한 것으로
서, 그들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자는 것이며 후에 그리스도의 은혜를 멸시하고 그를 생
명의 주가 아닌 사망의 주인으로 받아들였던 모든 불신자들이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말씀과 같은 것이다.
3:18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 주님께서 자주 모든 믿는 자는 사
망의 위험을 벗어나 안전하다는 것을 강조하신 것을 보면, 우리의 양심이 계속 가책을
받지 않고 고통을 겪지 않기 위해 믿음을 확고히 하고 확실히 하는 것이 얼마나 필요
한 것인가를 유추해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을 때 정죄함이 없음을 선언하고
있다. 주님께서는 제 5장에서 이를 더 상세히 설명해 주실 것이다. 히브리어의 관습을
따라서 미래 시제 대신에 현재 시제가 쓰이고 있다. 주님은 믿는 자가 심판의 두려움
을 갖지 않아도 좋다고 말씀하고 있다.
믿지 아니하는 자는......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 곧 이어 나오는 이 문장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을 거절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는 사망이외에 남은 것이
없음을, 다시 말해서, 죽음을 피할 수 있는 어떠한 구제책도 없음을 뜻하고 있다. 생
명은 믿음에만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불신자는 완전히 멸망을 받은 것임을
더 잘 표현하기 위하여 동사의 과거 시제를 강력하게 쓰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는 복음을 공개적으로 멸시하는 불경건한 사람들에 대하여 말슴하고 있음을 유의해야
겠다. 사람이 그리스도에게로 피신하는 길 외에 달리 죽음을 피할 수 있는 길이 없었
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서 전 세계에 전파될 복음의 도에 대하
여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께서 불붙여 준 빛을 고의적으로 그리고 악의
적으로 꺼버리는 사람들을 향하여 말씀의 방향을 돌리고 있는 것이다.
3:19
그 정죄는 이것이니 - 주님께서는 불경건한 사람들이 그들이 원하는 것보다 하나
님께서 지나치게 엄하시다고 하나님의 가혹하신 위엄이라고 말하기를 좋아하는 불신자
들의 불평과 불만을 응수하고 있다.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은 멸망에 내어 주어야
한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 가혹하다고 사람들은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어떤 사람도 심
판을 그리스도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못하도록,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이 심판을 받
게 되는 책임을 자기 자신에게 돌려야 한다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다. 그 이유 중 불
신은 악한 양심을 증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불신자들은 그리스도에게 나오
지 못하게 하는 것은 그들 자신의 완악함에 이유가 있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것이
심판을 시사하는 것에 불과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목적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습관에 따라서, 마치 하나님께서 믿지 않는 죄를 영원한 죽음으로 심판하실
때, 그들을 불공평하게 대우하기라도 하는것처럼 하나님을 힐난하거나 불평하지 못하
도록 인간의 간악함을 억제하려는 데 있다. 그러므로 그는 이러한 심판이 정당한 것이
며 누구의 비판도 받을 수 없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그들이 빛보다 어두움
을 더 좋아하고 그들에게 거저 주어진 빛으로부터 도주함으로 악을 행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빛을 미워하는 것은 악을 의식하고 있는 간악한 마음에만 태동할 수 있는 것
이기 때문이다. 복음을 대적하는 사람들 속에 거룩한 모양이 아름답게 빛날 수도 있
다. 그러나 비록 그들이 천사보다 거룩하게 보일지라도 그들은 그들의 간사함을 숨길
수 있는 숨겨진 내적 자아를 더 사랑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거절하는 위선
자임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이들의 위선이 하나님을 대적하도록 만들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정죄된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다. 이들이 교만에 눈이 멀어 그들의 악을 증거
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기꺼이 복음의 진리를 받아들였을 것이다.
3:20
악을 행하는 자마다 -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그들이 할 수 있는한 죄를 숨기려
하고 또 악하기 때문에 빛을 증오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치유책을 멀리함으
로써 계획적으로 심판받을 원인을 고수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복음에 반
기를 드는 사람들이 신령한 열정에 감동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오히려 이들은 어두움 가운데 스스로를 탐닉하기 위하여 빛을 증오한다.
3:21
진리를 쫓는 자는 - 말씀은 부정확하고 엉뚱한 말씀처럼 보인다. 우리가 어떤 이
들은 하나님의 성령에 의하여 거듭나기 전에 이미 정직하고 참되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모르지만, 이것은 성경의 일반적인 가르침과 일치하지 않는 말씀이다. 왜냐하면 믿음
만이 모든 선행을 유발하는 근원이 됨을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은 '진
리를 쫓는'이라는 말을 "우리가 얼마나 비참하며 또 선행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가
를 깨닫는 것"이라고 설명함으로써 이 어려움을 풀이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우리 자신
에 대한 부족함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게 만든다면 그것은 참으로 믿
음을 위한 준비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께서 뜻하시는 의미와
거리가 멀다. 주님은 단순히 진실하게 행동하는 자는 빛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없음을
말하고 싶었던 것 뿐이다. 이러한 시험에 따라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그들이 모든 간
사와 기만으로부터 자유로운 참된 사람임이 더 분명해진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에서 그릇되고 무지한 판별을 함으로써 사람은 믿음을 갖기 전부터 선한 양심을
소유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리스도는 택한 자들이 믿어 그들의 선행에 칭찬을
받는다고 말하지 않고 다만 그들이 악한 양심을 갖지 않았다면 믿지 않는 자들이 무엇
을 할 것인가를 밝혀주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진리'라는 말을 쓰고 있다. 이는 우
리가 의식적인 행위의 아름다움을 보고 속게 될 때, 안에 숨어 있는 것을 생각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은 건전하고 조금도 거짓됨이 없는 사람은 우리의 행위의 참된
재판관이 되시는 하나님의 존전에 기꺼이 나아간다고 말씀하고 있다. 이 말씀에 보면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으로, 그리고 하나님이 인정하신 행위로 하나님의 기
준에 따라 선한행위로 언급되어 있다. 그러므로 어떠한 행위든 복음의 빛에 비추어 보
기전에 판단하지 않도록 하자. 우리의 이성은 완전히 맹목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3:22
이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유대땅으로 가서 - 명절이 지났을 때 그리스도께서 아
마 애논 가까이 유대지방으로 가셨던 것같다. 복음서 기자는 그곳에서 많은 물이 있었
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유대지방에는 별로 강이 없었다. 지리학자들은 이 애논과
살렘 두 마을에 얍복강이 요단강으로 들어가는 곳에서 별로 멀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
다. 뿐만 아니라, 이 말씀에서 우리는 요한과 그리스도가 완전한 침례(浸禮)에 의하여
세례를 베풀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물론 외적인 예식도 영적인 진리와 일치되고 주님
께서 설정하신 제도와 규율과 일치만 된다면 그렇게 염려할 것은 없다. 우리가 추측할
수 있는데로는, 살렘과 애논은 이와 같이 가까운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많은 소문을
퍼뜨리게 했다. 그리고 용법과 하나님께 대한 예배와 교회의 상태에 대하여 사방에서
갖가지 토론을 유발시켰다. 왜냐하면 세례를 베푸는 이 두 인물이 같은 때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복음서 저자가 그리스도께서 세례를 주었다고 말할 때, 나는 그가 아버지께
서 그리스도에게 명하실 직책을 공적으로 이행하기 시작했던 초창기를 가르키고 있다
고 생각한다. 그리고 비록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들을 통하여 세례를 행하셨지만, 그
는 이곳에서 세례의 주인으로 언급되어 있고, 그리고 그의 사역자들은 제외되어 있는
데 이는 그들이 그리스도의 이름과 그의 명령이 아니면 아무 것도 행치 아니했기 때문
이다. 이 주제에 관해서는 다음 장(章)초반에서 보다 더 부언하기로 하자.
3:25
이에 요한의 제자 중에서......결례에 대하여 변론이 되었더니 - 복음서 저자가
이곳에서 요한의 제자들 사이에서 변론이 일어났다고 한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논쟁을 시작한 그들의 자신감은 그들의 신학적인 지식이 적었던 것 만큼이나 컸다-무
지는 언제나 앞 뒤를 가리지 않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그들에게 먼저 변론을 걸어
왔다면 그들에게 변명의 여지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요한의 제자들에겐, 유대인과
논쟁하는데 기우는 점도 있었지만, 도전도 받지 않고 변론을 걸었던 것이 경솔한 것이
었고 잘못된 것이었다. 말씀에 비추어 볼 때 변론은 제자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러
므로 이들은 자기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논쟁을 하고 자기들의 학문의 범
위를 넘어서 논쟁한 것이 잘못이었을 뿐만 아닐, 그들의 선생의 뜻을 변호하기 위하여
세례의 정당성을 주장하는데 별 관심을 쓰지 아니함으로 똑같이 두가지면에서 큰 실수
를 범했다. 이들은 세례의 참 뜻을 깨닫지 못함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예식을 조롱거리
로 만들었고 죄스러운 욕망에 의하여 그들의 선생의 대의(大義)를 그리스도와 상치되
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리스도께서도 세례를 준다는 대답을 들었을 때 그말 한마디에 그대
로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들은 사람의 가르침 보다는 그의 인격에 더 마음을 빼앗
기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실례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열심을 내는 것보다 사람에게
비뚤어진 열심을 기울일 때 그러한 사람의 종국이 어떻게 되는가를 보게 된다. 결국
우리는 여기서 우리가 항상 염두에 두고 마음을 써야 할 것은 그리스도 한 분만이 으
뜸된 위치를 차지해야 한다는 것을 경고받고 깨닫게 된다.
"결례에 대하여" 이것은 결례에 대한 것이었다. 율법은 유대인들을 위하여 여러가지
세례를 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율법에 있는 세례들로 만족하지 못한 이들은 조상들로
부터 물려받은 다른 결례를 정성들여 지키고 있었다. 이미 그들이 지키는 결례도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리스도와 요한에 의하여 새로운 결례 양식이 소개되니 유대인들은
이를 이치에 맞지 않는 불합리한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3:26
선생님이 증거하시던 자가 - 이러한 논조에 따라 요한의 제자들은 그리스도를 요
한보다 못한 존재로 만들려 했거나, 또 요한이 그리스도에게 바쳤던 경의를 인하여 그
리스도께서 요한에게 의리를 지키는 사람처럼 만들려 했다. 그들은 요한이 그리스도에
게 그와 같이 영예로운 증거를 해 준것을 하나의 특권으로 생각했다. 마치 요한이 그
리스도를 선포하는 것이 당연한 의무가 아니었던 것처럼 말이다. 아니, 하나님의 아들
을 알리는 전령이 된 것이 요한의 최대의 영예가 아니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리스도를
요한보다 못하게 취급한 것은 완전히 그릇된 것이었다. 그리스도는 요한의 증거에 의
하여 칭송을 받은 분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요한이 증거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
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라고 한 저들의 발언은 비뚤어진 경쟁심에서 나온
소리다. 그들은 자기들의 선생이 곧 무리에 의하여 버림을 받게 될 것이 두려웠던 것
이다.
3;27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 어떤 사람들은, 마치 요한의 제자들이 아버
지께서 그리스도에게 주신 것을 빼앗음으로 하나님께 대항하여 주제넘은 생각을 한다
고 요한이 그의 제자들을 책망하기라도 한 것처럼, 위의 말씀을 그리스도에게 결부시
킨다. 그러므로 이들은 이 말씀이 뜻하는 바가 "이와 같이 짧은 기간에 그가 그와 같
은 영예를 차지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일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자기 손으
로 높이신 분을 너희가 끌어 내리려하는 것은 헛된 일이다"라고 생각한다. 다른 이들
은 이 말씀을 세례 요한이 자기 제자들이 너무나 진보가 없기 때문에 화가나서 했던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그리스도라고 그렇게 자주 들었던 분을 평범한 사람들의
위치로 국한시키기를 원하는 것은 분명히 아주 어리석은 짓이었다. 그래서 요한은 사
람들의 마음이 새로와지기 전에는 어리석은 채로 남아 있기 때문에 그들을 가르치는 것은 시간 낭비라고 정당하게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요한이 자기를 위대하게 만드는 것은 자기 자신이나 제자들의 권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신분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 그 이상 높거나 낮아질 수 없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사람들과 의견을 같이한다. 하나님의 아들도 그의 영광을 스스로 취하지 않았는데, 그의 양떼 중에 감히 누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 이상을 바랄 수 있겠는가? 이 한가지 생각이 모든 사람의 마음에 뿌리를 내릴 수 있다면 사람들은 그들의 야망을 억제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야심이 시정되어 무너진다면 경쟁과 갈들의 질병도 동시에 사라질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왜 사람들이 마땅히 생각할 바 자기 위치를 지키지 않고 정도 이상으로 자기를 높이며,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신분으로 만족하고 주님을 의지하지 못하는 것일까?
3:28
증거할 자는 너희니라 - 요한은 그의 제자들이 자기의 말을 믿지 않은 것을 타이
르고 있다. 그는 종종 자기는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그들에게 밝혔었다. 그러므로 요한은 나머지 모든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아들의 수하에 있는 종에 불과했다. 이 말씀은 특히 유의할 만한 말씀이다. 왜냐하면 요한은 자기가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말함으로 자기는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는 것,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며 다른 이들과 같이 교회에서 봉사하는 것 이외의 다른 사명이 없음을 천명함으로써 머리되신 그의 영광을 흐릴 정도로 자신을 높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요한은 왕의 신하들이 왕을 위해 하듯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길을 예비하도록 먼저 보내심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다.
3:29
신부를 취하는 자는 - 이와 같은 비교를 함으로써 요한은 그리스도 만이 보통 사
람의 영역 밖에 계신 분이심을 더욱 힘있게 확증하고 있다. 결혼하는 사람은 자기 신
부를 친구들에게 내어 주려고 결혼식장에 친구들을 부르거나 초청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 권리를 포기하고 친구들에게 자기 아내를 취하도록 허락하기 위하여 친구를 초청
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친구들이 옴으로써 그 결혼이 더 영예롭게 되고 보다 더 경
건하게 하기 위하여 손님들을 초청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 자기 사역
자들을 불러 그들에게 가르치는 직분을 주는 것은 그들로 하여금 교회를 약화시키고
교회를 정복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신실한 사역자
들을 이용하여 교회를 자기와 연합시키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의 위격을 대
표하는 권위자로 교회를 다스릴 권세를 위임받는 것은 굉장히 위대한 일이다. 그들은
신랑과 함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하여 신랑과 함께한 친구들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
들은 자신과 신랑의 차이를 유념하여 신랑에게 속하는 권한을 자신들에게 적용하지 않
도록 스스로의 위치를 기억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을 요약하자면, 선생들이 아무리 뛰
어난다 하더라도 그리스도 한 분만이 그의 교회를 통치하고 그의 말씀으로 자기 교회
를 다스리는 일에 방해를 놓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기와연합
시키는 양자의 관계를 표현하려 하실 때, 이러한 비교가 성경에는 종종 나온다. 그리
스도께서는 우리가 그를 즐길 수 있도록 그리고 우리의 소유가 되기 위하여 자신을 우
리에게 내어 주신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아내가 남편에게 바쳐야 하는 사랑과 정절을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바울이 가르치고 있는 대로(엡
5:30) 우리는 그의 살과 뼈로서 모든 면에서 이 결혼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는 것
이다. 그리스도께서 요구하시는 정절은 특별히 복음에 순종함으로써 그리고 우리 자신
이 복음의 순수성에서 이탈하지 않음으로써 지키게 되는 것이다(고후11:2,3). 그러므
로 우리는 그리스도에게만 순복해야 한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유일한 머리이시다. 우
리는 단순한 복음의 가르침에서머리털 만큼도 이탈해서는 안된다. 그리스도가 우리들
사이에서 신랑으로서의 마땅한 권리와 자리를 지킬 수 있도록 그리스도만이 영광 중에
으뜸이 되셔야 한다.
그러나 사역자(ministers)들은 어떠한가? 하나님의 아들은 거룩한 결혼을 주관하는
가운데 그에 대한 임무를 수행하도록 목사(사역자)들을 부르신다. 그러므로 남편에게
드려질 정숙한 처녀로서 그들에게 맡겨진 신부를 위해 제반준비를 갖추는 것은 그들이
할 일이다. 이미 인용한 말씀에서 바울은 기쁨으로 이 일을 이행했다고 말하고 있다.
교회를 그리스도보다 자기 자신에게 유리하게 하는 자들은 그들이 존귀히 여겨야 할
결혼을 부정(不貞)하게 파기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신부를 우리에게 맡길 때
우리에게 내려주는 영예가 크면 클수록, 우리가 그의 권리를 지키려 하지 않는다면 우
리의 부정(不貞)은 더욱 악화되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 요한은 자기가 바라는 것을 성취했기 때문에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다스리는 것을 보았고 사람들
이 그리스도에게 경청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자기 자신에 대한 생각을
제쳐놓고 그리스도를 높이며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는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은 교회
를 치리하는 데 있어서 성실할 것이며 성공할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그러한 목표에
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사람은 불순하게 간음한 자로서 그리스도의 신부를 타락시킬
뿐이다.
3:30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 요한은 한걸음 더 나아가 태도를 더욱 분명히 하고 있다.
전에 주님께서 요한을 최고의 영예로 높이신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일시적인 것
에 불과했던 것으로서 이제 의(義)의 태양이 솟았기 때문에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은 인간의 그릇된 생각에 의하여 자기에게 덮여졌
던 영광이 헛된 광채를 몰아낼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 자기에게 내려 주었던 참으로 정
당한 그 영예가 그리스도의 광채를 흐리지 않도록 각별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이러
한 이유로 인해서,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잠시동안 높은 위치에 놓였던 만
큼, 위대한 선지자로 간주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오셨을 때 그는
바톤을 넘겨주어야 했다. 반면에 그는 그리스도께서 온 세상을 그의 광채로 채우기만
한다면 자기는 기꺼이 무가치한 존재로 감소될 용의가 있다고 선언하고 있다. 교회의
모든 목사들은 요한이 열성을 본받아 그리스도를 높이기 위해 자신을 낮추어야 할 것
이다.
3;31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다른 모든 사람들과 어떻게 다르며
그들보다 얼마나 높이 계신 분인가를 보여주기 위하여 또 다른 비교법을 쓰고 있다.
요한은 그리스도를 높은 보좌에서 말씀하시면 그의 권위를 인하여 경외함으로 귀를 기
울이게 될 어떤 왕이나 지도자에 비유하고 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아주
낮은 의자에 앉아 이야기한다고 해도 스스로 만족한다고 말하고 있다. 요한은 그리스
도께서 하나님이 되시기 때문에 위에서 오셨다고 말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하늘
에 속한 것 외에 다른 것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위로부터 오셨다고 말하고 있다. 보통
번역은 '땅에 속하여'라는 말을 한번 밖에 쓰지 않고 있다. 그러나 헬라어 원본은 다
른 사본과 일치하고 있다. 나는 이 어귀가 그것을 같은 말의 반복이라고 생각했던 무
지한 사람들에 의해 삭제되었다고 추정하고 있다(우리 한글 성경은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고 정확하게 번역되어 있다). 그러나 이 말슴
의 의미하는 바는 땅에 속한 자는 그 근원을 버릴 수 없는 만큼 그의 성격을 따라 땅
의 위치에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요한은 하늘로부터 내려 오셨기 때문에 위로부
터 말씀하실 수 있는 분은 그리스도 한분 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는 요한
도 그의 소명과 직분으로 볼 때 하늘로서 내려 온 것이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다. 주
님께서 그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으로 들렸기 때문이다. 요한은 그가 전파했던 하
늘에 속한 가르침에 맞지 않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직설적이
며 결론적인 말씀이 아니라 하나의 비교라고 대답한다. 목사들이 스스로를 생각할 때,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명한것을 최대의 권위를 가지고 하늘로부터 말하는 것처
럼 말한다. 그러나 스스로를 그리스도와 견주기 시작하면 그들은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사도는 율법과 복음을 비교하면서 히브리서 12장 25절에 "땅에서 경고하신
자를 배반하는 우리일까보냐!"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그의 사역자들
안에서 인정받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그분만이 혼자 주로 남고 그들은 종으로 만족하
게 되기를 원하는 것이다. 특별히 그리스도께서 비교법을 쓸 때는 차이를 드러내어 자
신이 높아지기를 원하신다.
3:32
그가 그 보고 들은 것을 - 요한은 자신의 임무를 계속 수행한다. 그리스도를 위한
제자들을 준비시키기 위하여,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로부터 받은 것 외에는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않기 때문에 그의 교훈은 확실하다고 천명하고 있다. 보고 듣는 것은
의심스러운 의견이나 빈 소문이나 각종 허구에 대조되는 것이다.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온저히 알지 못하는 것은 말씀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들은 것 밖에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에게 신뢰할 것이 별로 없지 않겠느냐고 말할 수도 있다. 나는
이 말씀을,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 속한것, 하나님께서 계시하시고 하나님께서 가르
쳐 주신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제시하지 않는다는 말씀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리고 이
것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하나님의 전권대사(全權大使)와 해석자로 보내심을 받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인격과 완전히 부합되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요한은, 이와 같이 확실하고 진실한 하나님의 증인을 반항적으로 거절
한 세상의 배은망덕을 책망하고 있다. 요한은 많은 사람을 믿음에서 떠나게 하고 다른
이들의 진보를 방해하거나 지연시키는 죄를 미리 앞질러 공격하고 있다. 우리는 사람
이 판단에 지나치게 의지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복음을 세상이
이를 멸시하는 것에 따라 판단한다. 아니면 적어도, 가는 곳마다 복음이 배척을 받는
것을 보기 때문에 사람들은 편견에 사로잡혀 있으며 따라서 믿기를 싫어하거나 믿는
일을 나중으로 미룬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상에서 이와 같은 완고함을 접할 때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께로서 온 진리라는 이 경종이 늘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도
록 해야 한다. 요한이 "그의 증거를 받는 이가 없도다"라고 할 때, 그는 방대한 불신
의 무리에 비교해 보면 믿는 자는 극히 적어서 거의 없는 것이나 다름이 없음을 지적
하고 있다.
3:33
그의 증거를 받는 이는 - 그는 이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수가
적음을 인해서 부끄러워 하거나 염려할 이유가 없으니, 담대하게 복음의 가르침을 받
아들이라고 권하고 있다. 그들은 홀로 우리들의 모든 것이 되어 주시기에 충분한 하나
님을 그들의 믿음의 주(主)로 모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록 온 세상이 복음을 믿는
신앙을 거절하거나 보류하더라도 그것이 선한 사람들이 하나님과 합의하는 것을 막는
요소가 되어서는 안되겠다.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에 찬성하는
것인만큼, 그들에겐 안심하고 의지할 것이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 안에 쉼
을 얻고 그의 말씀 안에서 굳게 서는 것이 믿음의 내용임을 알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
께서 말씀을 하심으로 주관하지 않는다면 동조나 찬성이 있을 수 없다. 이러한 의미에
서, 믿음은 모든 인간적 발상과도 다를 뿐 아니라 의심스럽고 불확실한 의견과도 구별
되는 것이다. 믿음은 모든 의심으로부터 해방되어 하나님과 소통하기 때문이다. 그러
므로 하나님께서 거짓을 말할 수 없는 것처럼, 믿음이 흔들린다는 것은 모순이다. 사
단이 어떠한 간계로서 우리를 방해하고 흔들려고 해도 우리가 이러한 방패로 무장한다
면 우리는 항상 승리할 것이다.
이것은 또한 믿음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얼마나 귀하고 받으실 만한 제사인가를 우리
에게 말해준다. 그의 진리보다 하나님께 더 귀한 것이 없는 만큼, 우리는 하나님은 참
되시다고 믿음에 찬 고백을 하는 것보다 더 흡족한 예배를 하나님께 드릴 수 없는 것
이다. 그러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 참된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반면에 인간이 복음을
믿지 않는 것보다 하나님께 더 큰 죄악은 없다. 진리가 약탈을 당하면 그의 영광과 위
엄도 함께 무너지기 때문이다. 진리는 복음으로 싸여 있으며 하나님은 복음을 통하여
인간에게 알려지기를 원한다는 말씀은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이 믿음을
장식해 주는 고상한 복음의 말씀은, 우리의 마음이 돌보다 단단하지 않다면, 우리의
마음에 불을 붙여 복음을 사랑하도록 만들 것이다. 하나님께서 거짓과 허용 뿐인 인간
을, 단순히 하나님의 진리를 믿음으로 인정했다고 해서 가치있게 여겨주시니 이 얼마
나 엄청난 영예인가 !
3:34
하나님의 보내신 이는 - 우리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영접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
진정으로 관심을 갖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그는 앞의 문장을 재확인
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다름 아닌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 오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말씀하시는 분은 하나님 뿐이시다. 만일 그리스도의 말씀
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지 않는다면 우리는 마땅히 하여야 할 만큼 그리스도의 교훈
을 대우하지 않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 - 이 말씀은 두 가지로 풀이되고 있다.
어떤 이들은, 모든 선(善)의 원천이 되시는 하나님께서 그의 풍성한 은혜를 인간에게
부어주실 때 그의 은사가 다 하는 것이 아니라는 일반적인 하나님의 경륜을 적용시킨
다. 사람들이 남에게 나누어 주는 것을 어떤 그릇에서 길어닐 때 결국에는 밑바닥에
다다르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와같은 위험이 있을 리 없다. 그의 은사의 풍
성함에는 다함이 없기 때문에 늘 새로운 풍성함으로 우리에게 부어 주신다. 이러한 풀
이에는 약간 부가되어야 할 말이 있을 수 있다. 그것은 언어가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차라리 어거스틴의 해석을 택하고 싶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대
로 이 말씀을 잘풀이하고 있다. 이 귀절에서 그는 그리스도께서 확실하게 언급되어 있
지 않다고 반대하는 것도 타당성이 없다. 그것은 다음 귀절이 모든 의문을 제거해 주
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에게 차별없이 주어지는것처럼 보이던 것이 그리스도에게 국한
되고 있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 손에 주셨으니"라는 말씀은 분
명히 설명으로 부가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같은 문맥 안에서 읽혀져야 한다.
현재 시제의 동사는 계속되는 행동을 암시한다. 비록 그리스도께서 한때 최고로 완전
한 상태에서 성령을 받으셨지만, 성령은, 말하자면 하나의 원천에서 계속 흘러나가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지금 아버지로부터 성령을 받는다고 말하는 것은 틀린 말
이 아니다. 만일 누가 이 말씀을 보다 더 간결하게 해석하기를 원한다면, 이와 같은
동사의 시제는 바꾸어 생각해도 좋다고 생각한다. 의미는 이제 분명하다. 성령은 그리
스도께서 소유하고 있는 은혜의 원천이 어떤 방법으로 제한되기라도 한 것처럼 한정을
두고 그에게 부어진 것이 아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2장 7절과 에베소서 4장 7절에
서 가르치고 있는 것처럼, 아무도 혼자서 충만한 것처럼 하지 못하도록 각 사람에게
은혜의 분량을 따라서 성령의 나타남을 주시는 것이다. 우리 사이에는 형제의 교제라
는 상호유대가 있어 아무도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고 서로를 필요로 하게 되어 있지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는 한량 없는 분량의 성령을 부어주셨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다르다. 우리가 제1장에서 살펴 본 것처럼, 성령은 그리스도 안에 한량 없이 거하셔서
우리가 그의 충만한 데서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 다음에 나오는 말씀도 또한 이와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서, 아버지께서 만물을 다 그의 손 안에 주셨다고 말하고 있다.
요한은 이 말씀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우월함을 선포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소유하
고 있는 풍성한 부(富)의 목적과 용도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관리인
으로 임명되었기 때문에, 그의 선하신 뜻대로 그리고 덕을 세우는 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다. 바울은 앞에서 언급한 에베소서 4장에서 이를 더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
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다양하게 그의 백성을 채워주시지만, 그리스도 한분만이 만
물을 다 그의 손 안에 소유하고 계시다는 말이다.
3:35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 그러나 이 설명의 뜻하는 바가 무엇이냐? 아버지께
서 아들 이외에 다른 사람들을 모두 싫어한단 말인가? 대답은 간단하다. 그는 하나님
께서 창조하신 모든 인간이나 그의 모든 피조물에 대한 일반적인 사랑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아들에서 시작되어 그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에 흘러퍼지는
특이한 사랑을 논하고 있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심으로 우리를 그 안에서 포옹
하는 이 사랑은 그의 모든 은택을 그리스도의 손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달하시는 원인
이 되는 것이다.
3:36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 이 말씀은 우리가 모든 선한 것을 그리스도에게
서 구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 선한 것을 누리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하여 첨가되었다. 그는 이것을 믿음에 의해서 누릴 수 있다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오직 믿음에 의하여 의(義)와 의의 열매인 믿음을 우리에게 선사해 주는 그리스
도를 소유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생명의 원천으로 불리우는
것으로 보아, 생명이 그리스도 한 분에 국한되어 있으며 따라서 그리스도의 은혜에 의
해서만 그 생명에 참예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에게
전달되는 방법에 대하여는 여러가지 의견이 있다. 어떤이들은 이렇게 이해하고 있다.
즉 우리는 믿음에 의하여 의(義)로 인도하는 성령을 받으며 또한 같은 중생(거듭남)에
의하여 구원을 받는다. 나 자신은, 비록 성령이 우리를 다스릴 때 믿음으로 우리가 거
듭나게 된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우리가 첫째로 생각해야 할 문제는 죄(sins)를 거저
사함 받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죄사함을 받음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영접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나는 이 한가지 경험에서 우리의 구원에 대한 확신이
근거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않
는 것 이외에 다른 방법으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의로와 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 요한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을 선포함으로 그
향기에 의하여 우리를 초청했듯이, 그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을 모두 영원한 사
망에 판결하고 있다. 그리함으로써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건져주시는 길 외에
달리 죽음에서 도피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음을 경고함으로 하나님의 고귀한 사랑을 드
러내고 있다. 이 문장은 아담 안에서 우리가 모두 잃어진 상태에 있다는 사실에 의거
하고 있다. 그러나 잃어진 자를 구원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직분이라면, 그리스도 안에
베풀어져 있는 구원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사망에 거하는 것이 마땅하다. 우리는 이미
이 말씀이 저들에게 전해진 복음을 거절하는 자들에게 특별히 적용된다고 밝힌 바 있
다. 비록 전 인류가 똑같은 멸망에 관련되어 있지만, 하나님의 아들을 그들의 구세주
로 영접하기를 거절하는 자들에게는 두 배나 더 무서운 진노가 기다리고 있다. 세례요
한이 믿지 않는 자들을 죽음으로 협박함으로써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인하여 그리스도
를 믿도록 유도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뿐만 아니라 세상이 그리스도 밖에서 누리
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의(義)는 완전히 정죄되어 있고 전멸된 상태임이 분명하다.
또 믿지 않는 자들이 단순히 믿지 아니함으로 멸망하는 것은 불공평하다고 아무도 반
발할 수 없다. 그리스도께로서 주어진 거룩함과 의로움이 아니라면, 인간안에 어떠한
거룩함이 있다고 상상하는 것 자체가 헛된 일이기 때문이다. 영생을 보지 못하고"라고
할 때의 영생을 본다는 말은 영생을 누린다는 말대신에 쓰인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아무런 희망도 없다는 것을 더 명확히 표
현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불신자들 위에 머물러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나
는 "머물러 있다"는 말이 우리가 모두 진노의 자녀로 태어났기 때문에 모태로부터 죽
기로 작정되어 있음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기 위하여 쓰인 것이라고 한 어거스틴의 생각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어찌 되었든지, 내가 이미 말한 바대로, 죽음은 불신자들에게 부담이 되고 도저히 피할 수 없도록 그들을 억압하고 있다는 순수하고 단순한 뜻을 배격하지 않는다면 나는 이러한 제안을 얼마든지 받아들일 용의가 있다. 그리고 비록 버려진 자들이 이미 정죄받은 상태에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들은 불신(不信)에 의하여 새로운 죽음을 자초한다. 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복음이 사역자들에게 "맬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을 뿌리치는 자들은 죽음의 사슬로 자신을 속박하도록 하는 것이 인간의 완악함에 대한 공정한 심판이 되기 때문인 것이다.
니고데모 - 헬라식 이름의 뜻은 '백성의 정복자'로서, 공관복음서에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았으나 본서에서는 세 번에 걸쳐 나타난다(7:50;19:39). A.D. 70년 예루살렘 성전이 완전히 파멸되던 당시 나퀴드몬(Naqidmon)이라고 하는 부유하고 관대한 사람이 예루살렘에 살고 있었는데 그가 혹시 40년 전 예수를 찾아온 니고데모일지 모른다는 추측이 있기도 하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Moutefiore, Loewe). 요한이 전해 주는 바에 의하면 니고데모는 (1) 예수의 시체에 바르도록 '몰약과 침향을 섞은 백 근'(19:39) 정도를 선뜻 내놓는 부유한 사람이었다.(2) 엄격한 유대교를 신봉(信奉)하는 종파인 바리새파 사람이었다. 바리새인으로서의 니고데모는 하나님의 백성되는 자격이 아브라함을 통해 계승되는 자연적, 육적 출생에 있음을 강조한데 반해, 예수는 영적 중생을 강조하셨다. (3) 그는 유대인의 관원이다. 관원의 뜻은 '아르콘'(' )은 산헤드린 공회의 회원을 가리키는데, 산헤드린은 그 당시 유대인의 최고 종교 회의 기관으로 그 구성원의 수는 71인으로 알려졌으며 고위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다른 말로 하면 백성의 지도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한편 니고데모가 그러한 사회적 고위층에 속해 있으면서도 친히 예수를 방문한 사실은, 매사에 편견(偏見)이 없고 사리가 깊었음을 보여준다. (4) 그는 조상들의 율법에 정통하여 모든 백성들로부터 존경받는 율법 교사들 중의 한 명이었다. 율법 학자가 된 사람은 종교법과 의식(儀式)의 문제들에 대해 독자적임 판결을 내릴 수 있었으며(Sanh), 형사 소송 때에는 재판관으로서 참여할 수 있었으며, 민사 소송 때에는 여러 재판관들과 함께 판결을 내리거나 아니면 단독 재판으로서 판결을 내릴 수 있었고 또한 랍비라는 칭호를 가질 수 있었다(Jeremias).
=====3:2
밤에 예수께 와서 - 니고데모가 굳이 밤에 예수를 방문했던 이유에 대해서는 (1)타인의 이목이 두려워서 (2)분주한 낮시간을 피해 예수와 예수와 친밀한 대화를 오래도록 나누기 위해 혹은 (3)밤늦게까지 연구하고 논쟁하였던 당시 랍비들의 관례에 따라서 등 여러 견해가 있으나 정확히 단정하기는 어렵다. 어쨌든 이는 니고데모의 신중성을 보여줌과 아울러 예수께서 그의 마음을 온통 사로잡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요한은 19:39에서 다시 한번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를 찾아온 사실을 언급한다. 요한의 사상(思想)에서 '밤'은 악과 거짓과 무지의 실재(reality)로서 상징되고 있다(11:10). 그리고 13:30에서 유다는 '밤'에 예수를 떠남으로써 빛이신 예수에게로 나아온 셈이다(the Anchor Bible).
랍비여 - 니고데모는 안드레와 요한 그리고 나다나엘과 마찬가지로(1:38, 49) 예수를 '랍비'라 부름으로써 대화를 시작하고 있다. 서품(敍品)을 받아 율법학자단에 가입하고자 하는 사람은 수 년 동안의 정규적인 연구 과정을 마쳐야 했다. 이 과정을 통해서 그들은 모든 전승 자료와 할라카의 해석 방법을 통달하게 되고, 비로소 종교법과 형법(刑法)의 문제들에 대해 독자적인 판결을 내릴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서품을 받은 율법학자가 되려면 40세가 되어야 했다. 그러나 예수와 같이 '랍비'가 되기 위한 공부를 전혀 하지 않은 사람은 서품을 받은 율법학자들이 누리는 특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Jeremias). 한편 니고데모가 사용한 이 '랍비'라는 말이 예수에 의해서 부정되거나, 제자들에게 있어서 놀라운 일로 여겨지지 않은 것으로 보아 예수는 이미 그의 제자들이나 일반 대중들로부터 '랍비'라고 불리고 있었을 것이다. 특히 니고데모가 예수를 '랍비'라고 불리고 있었을 것이다. 특히 니고데모가 예수를 '랍비'라고 부른 것은 유대의 상층 계급에 속한 사람으로는 처음 있었던 일이요 따라서 예수가 이미 그러한 계층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었음을 추측케 한다.
우리 - 본절에서 말하는 '우리'는 뒤따르고 있는 말들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듯이 예수가 행한 표적을 보고 믿는 자들 곧 2:23에 나오는 많은 사람들을 언급한다고 봄이 무난하다.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 - 니고데모는 이 말을 강조하는 위치에 첨가함으로써, 예수를 선생 이상의 존재 즉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모세, 예레미야, 세례 요한 등과 같은 선지자 중의 한 사람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표현은 예수의 산적 본성을 나타내고 있다고까지는 볼 수 없지만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이 예수가 과연 대망의 메시야인가 하는 의문을 담고 있다. 이 사실을 확인하는 일이 니고데모의 방문의 주목적이었는지도 모른다. 한편 니고데모가 예수를 받아들이게 된 것은 바로 표적을 통해서이다(2:23). 공관복음서 기자들보다 요한이 즐겨 사용한 이 '표적'이라는 헬라어 '세메이온'(' )은 신적 권위와 위엄의 증거를 보여주는 이적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 표적은 그것을 목격한 자의 주의(注意)를 그 행위 자체 보다는 그 일을 행하신 이에게로 이끄는 것이 그 특징이다. 표적 자체로서는 참된 구원의 신앙을 창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는 이 표적들을 통해 당신의 교훈들을 확증하셨다. 본문에서 니고데모가 예수의 표적들을 통해 예수의 탁월하신 교훈 능력을 인정하였던 것은 중요한 통찰이었다. 그러나 그는 온전히 예수의 교훈보다는 표적 자체에 더 큰 관심을 드러내고 있었다.
=====3:3
거듭나지 아니하면 - '거듭'으로 번역된 헬라어 '아노덴'(' )은 (1)'처음부터', '완전히', '철저히'의 뜻과 (2) '다시', '두번째'의 뜻 그리고 (3)'위에서부터' 곧 '하나님께로부터'의 뜻이 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이 기도, 제사, 세례로써 유대교에 개종하면 그를 중생한 자라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선택받은 백성인 유대인들조차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은혜와 능력에 의혜서, 어느 한 부분만이 개선되는 것이 아니라 전체 본성이 새롭게 되는 사건(Calvin)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중생이란 죄와 허물로 죽었던 영적 생명을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 살리는(고후 5:17) 성령의 역사로서(엡 2:5), 성령 혹은 말씀으로 거듭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생은 육에 속한 자연인의 지(知), 의(意), 정(情)을 항상, 계발(啓發)하는 것이라기보다 근본적이며 전인적인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라 하겠다. 그리고 병든 자가 회복(回復)하는 것과 같이 점진적인 것이 아니라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과 같은 즉각적인 변화이다.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 '보다'로 번역된 헬라어 동사 '에이돈'(' )은 단순히 어떤 물체나 형상을 바라본다고 하는 '블레포'(' )와는 달리, '경험하다'(experience) '참여 하다'(participate) 또는 '인식하다'(perceive) 등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 구절은 하나님 나라에 참예하는 것을 뜻한다(눅 9:27).
=====3:4
사람이...날 수 있삽나이까 - 이러한 니고데모의 대답은 일견 매우 아둔해 보인다. 하지만 니고데모는 예수의 말씀에 반대 주장을 제기하거나 반항하고자 하는 의도는 없었으리라 추측된다. 다만 그는 예수의 말씀을 선뜻 이해할 수 없었던 자신의 난점을 극복하려는 의도에서 보다 자세한 설명을 요청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대답은 니고데모가 둔감해서가 아니라 깊은 생각 끝에 나온 것이라 할수 있다. 아울러 이 질문 속에는 '사람이 다시 모친(母親)의 배 속에 들어갔다 나올 수 없는 것처럼 인간 본질의 재창조라고 하는 고차적 이적 또한 어찌 가능 하겠는가'라고 하는 강한 의문이 내포되어 있을 법하다. 어쨌든 니고데모는 중생에 관한 예수의 말씀의 뜻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깊은 의문에 휩싸였던 것이다.
=====3:5
물과 성령으로 - '거듭난다'고 하는 것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다. 여기서 '성령'에 대해서는 해석상에 별반 어려움이 없으나 '물' 에 관해서는 여러 견해로 엇갈린다. 즉 혹자는 이를 '세례 요한의 세례' 혹은 '기독교의 세례' 와 관련시키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자연적 출생'으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본 구절의 강조점은 어디까지나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사실에 있다고 보아야 무방할 것이다. 1:26, 31; 마 3:11;막 1:8;눅 3:16에서는 물과 성령이 세례와 관련해서 나란히 언급되고 있다. 물은 깨끗하게 하는 상징으로 유대인들에게는 희생 제사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요소이다. 특별히 제사장은 몸을 씻지 않고서는 언약의 피를 갖고 성소에 들어갈 수 없었으며, 엣세네파(Essenes)에서도 개종자를 받아들일 경우 물세례를 행하던 관습이 있었다. 또한 세례 요한은 사람들에게 죄사함을 받기 위한 회개를 촉구하였고 이러한 촉구롤 받아들여 죄를 회개한 자에게는 물로 세례룰 주었다. 한편 고넬료와 그의 친구들은 물세례를 받기 전에 이미 성령의 선물을 받았으며(행 10:47, 48) 에디오피아의 내시도 또한 그러했던 것으로 추측해 불 수 있다(행 8:26-39). 결국 '물'이 무엇을 나타내든간에 본절의 의미에는 큰 변화가 없다. 물을 자연적 출생으로 볼 경우에는, 사람은 육적 출생 뿅만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은 영적 출생을 통해 비로소 하나님 나라에 참여케 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이를 세례 요한의 세례와 관련시킬 경우에는, 세례 요한의 세례가 증거하고자 했던 성령 세례를 통해 중생이 이루어진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끝으로 이를 기독교의 세례와 연관시킨다면, 본문은 중생이 그리스도와의 연합 곧 성령 세례를 통해 이루어지며 물세례는 이 사실에 대한 공적 선포(宣布)이자 상징적 의식으로서의 의의를 지님을 가르치는 것이다.
=====3:6
육으로...영이니 - 사도 바울은 '육'에 해당하는 '사르크스'(' ) 라는 헬라어를 타락한 인생의 죄악되고 부패한 본성을 지칭하는 용어로 자주 사용했다(롬 8:3-9). 그러나 여기서는 이 땅에 속한 존재 곧 연약하고 사라져 갈 인생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된다. 따라서 여기서 육(flesh, NIV)과 영(spirit, NIV)은 인간 본성의 보다 높은 차원(영적)과 보다 낮은 차원(신체적)을 구분한 것으로 이해된다.
=====3:7
기이히 여기지 말라 - '기이히 여기지'로 번역된 헬라어 '다우마조'(' )는 일반적으로 '이해력이 결여된 놀라움'을 의미 한다. 니고데모가 놀란 것은 중생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 때문이었다. 예수는 어떤 민족적. 신분적 구분도 없이 모든 사람이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셨다(3절). 따라서 이 원칙은 율법의 준수자요 바리새인인 니고데모에게도 물론 적용될 수밖에 없었다. 그는 한편으로는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해 당혹하였을 것이며 또 향편으로는 이 중생의 방법이 과연 가능한가 하는 의혹(疑惑)에 잠겼을 것으로 보인다.
=====3:8
바람이 임의(任意)로 불매 - '성령'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루아호'( )와 이에 대한 헬라어 '프뉴마'(' )는 둘 다 '바람'을 의미할 수도 있다. 신약성경에서만 370회 정도 사용된 이 '프뉴마'는 대부분 영(靈) 또는 성령의 뜻으로 사용되고 '바람'이라는 의미로는 구약성경(시 104:4)의 인용 구절인 히 1 : 7에서 한 번 사용되었다. 이 '프뉴마'가 본문에서는 '바람'의 뜻으로 '성령의 역사'를 적절하게 비유하는 것으로서 사용되었다. (1) 바람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소리를 통해 그리고 그 결과에 의해 그 실재성(reality))을 보여준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령의 존재 또한 거듭난 사람의 구체적 행실에서 드러나는 여러 가지 변화들을 통해 인식되어질 수 있다. 폘돈(Fenton)에 의하면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은 '자신들의 기원(起源)과 운명을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께 두고 있다'고 하였다. 다시 말해서,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의 행위에 대해서 평범한 이성으로써 이해할 수 없고 다만 성령의 역사에 의한 결과만을 알 수 있을 뿐인 것이다. 실제로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속사람이 변화된 사람은 이전의 죄악된 습성들을 자연히 버리게 되며 갈 5:22, 23에 기록된 바와 같은 소위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된다. (2) 현대의 과학을 총동원 해도 바람이 어디서 생겨나 어디로 향하는지를 정확히 규정하지 못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령의 역사 또한 인간의 능력으로는 그 기원을 헤아릴 수 없으며 다만 우리는 믿음으로 성령께서 곧 하나님과 동등된 분이요 우리의 구원을 위해 역사하시는 분임을 알 따름이다.
=====3:9
어찌...있을 수 있나이까 - 회의심(懷疑心)을 나타내는 질문인지 아니면 보다 정확한 설명을 요구하는 간청인지 명확치는 않다. 아무튼 니고데모는 그러한 사건이 어떻지 경험될 수 있는지 알고 싶었을 것이다. 4절에서 니고데모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중생의 교훈이 '어떻게' 가능하냐고 하는 가능성 자체를 놓고 의문을 제기하였다. 반면 본절에서는 일단 그 가능성만은 인정한 상태에서 그 방법을 보다 구체적으로 알고자 하여 재차 '어떻게'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유대교에서 이러한 영적 거듭남을 강조하지는 않았지만 겔 36:25-28 등에 서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거듭남과 중생의 원리가 나타나고 있는데 이에 대한 유대교의 간과(看過)와 무시 때문에 니고데모는 예수로부터 책망을 받게 된다(10절). 사실 니고데모와 같은 바리새인들은 하나의 고정 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즉 그들은 혈통상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하나님의 언약에 따라(창 17 :1-8) 자연히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생각하였으므로, 거듭남에 대한 예수의 교훈을 지극히 생소하다고 여긴 것이다.
=====3:10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 우선 예수는 니고데모 개인의 영적 무지를 지적하시 고 이어 바리새인들을 위시한 유대인들을 책망 하신다(11절). 니고데모가 이스라엘의 지도자 층에서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잘 알수 없지만 헬라어 본문에 '호'( )라는 정관사가 사용된 것으로 보아 그는 분명히 중요한 인물이었던 것 같다. 쇠트겐(Schottgen)과 뤼케(Lucke)는 여기서 사용된 '관사'가 산헤드린의 의장 또는 특별한 위치에 있는 현자(賢者)등 어떤 특수한 직책을 가리키는 것은 아닐까 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니고데모는 바리새파요, 율법학자요, 산헤드린 의회원으로서 백성들에게 널리 알려진 그리고 공식적인 선생의 위체에 있던 사람임에는 틀림없다. 예수께서는 니고데모 자신이 성령의 의미와 위로부터 태어난다고 하는 말의 의미를 구약성경의 연구를 통해 좀더 잘 알고 있어야만 했다고 하는 점을 이 칭호(이스라엘의 선생)를 사용하여 상기시켜 주었을 것이다(Farrar). 더구나 니고데모 자신은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 참 진리와 거짓을 가리고 판별해 내는 일을 맡고 있던 산헤드린의 한 회원이었기 때문이다.
=====3:11
우리 - 이들이 누구를 뜻하는가에 대해서 여러 학자들의 견해가 있다. (1) 메이어 (Meyer)는, 주님께서 단순히 자기 자신만을 가리켜 '권위의 복수'(pluralis majestaticus) 즉 '경어적 복수'를 사용한 것이라고 하였으며, (2) 바이스(Weiss)와 루타르트(Luthardt)는 '그리스도와 세례 요한'을, (3) 벴겔(Bengel)과 스티어(Stier)는 '삼위 일체로서의 그리스도'를, (4) 루터(Luther)는 '그리스도와 선지자들 전체'를, (5) 고데(Godet)와 웨스트콧(Westcott)과 행스텐베르그(Hengstenberg) 등은 '예수와 그의 제자들'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주장하는데 이중 두번째와 다섯번째 주장이 가장 설득력 있는 것 같다. 아는 것...
본 것 - 니고데모를 비롯한 영으로 거듭나지 못한 자들이 알지 못하는 성령의 역사와 그 활동을 가리킨다.
너희 - 니고데모를 위시해서 예수가 행한 표적에 의해 영향을 받았으나, 예수를 믿는 참 신앙에까지는 이르지 못한 무지한 유대인들을 가리킨다.
증거를 받지 아니하는도다 - 오랜 세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선지자와 구약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교훈을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예수 당시의 유대 사람들 역시 예수의 교훈을 결코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어두움은 빛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1 : 5). 여기서 예수는 영생에 관한 자신의 가르침이 단순한 추상적 지식이나 논쟁의 대상이 아니라 엄연한 진리임을 분명히 하고서 이를 선포적 차원에서 증거하고 있다. 기실 이러한 신령한 지식은 성령의 조명을 통한 믿음의 눈으로만 감지할 수 있는 비밀에 속한 것이라 하겠다.
=====3:12
땅의 일...하늘 일 - 이에 관한 해석은 다양하다. (1) 헌터(A. M. Hunter)에 의하면 '땅의 일'이란 물, 바람, 탄생 등과 같은 지상적인 현상이나 사건들인 반면 '하늘의 일'이란 아버지가 아들을 보내는 것과 같은 초월적 사건들이라고 하였다. (2) '땅의 일'이란 니고데모가 결국 이해하지 못했던 영적 거듭남을 포함한 하나님 나라의 사업이며, '하늘 일'이란 14절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은 것 즉 십자가에서의 대속의 죽음과 부활의 사건 등을 의미한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3) 전자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세상 안에 거하게 되신 것으로 그리고 후자를 그리스도가 그의 사역을 모두 마치고 하늘로 올라가시고 장차 모든 성도들에게 영원한 처소를 제공하실 것을 의미한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4) 마지막 견해로서, '땅의 일'을 예수께서 실례로 드신 바람부는 현상으로 이해 하기도 한다. 즉, 예수께서 자연 현상인 땅의 일을 예로 들어 설명해 주어도 이해하지 못한 다면 '하늘 일' 곧 영적 실재를 직접 설명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 자명하다는 말씀이다. 이중 네 번째 견해가 무난하리라 짐작된다.
=====3:13
하늘에 올라간 자(' , 아나베베켄 에이스톤 우라논) - 직역하면 이 말은 '하늘에 계신 자'란 뜻이다. 그리고 여기 사용된 동사는 현재 완료형으로 미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따라서 이 구절은 상반절의 의미를 이어 받아서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人者) 외에는' 그 누구도 하늘에 있는 자가 없기 때문에 하늘 일을 말할 수 있는 분은 인자 자신 뿐이라고 하는 자기 증거가 된다. 물론 구약의 두 인물 에녹(창 5:24)과 엘리야(왕하 2 : 9-11)가 승천(昇天) 했다는 기사가 나오지만, 그들은 땅에 살던 자로 하늘에 올라갔으나 그리스도는 하늘에 계시던 자로 땅으로 내려와 하늘의 일을 말씀하셨다는 점에서 확연히 구분된다. 여기서 우리는 성육 신하신 예수의 인성과 신성에 관한 신학적 의미를 상고해 볼 수 있다. 본절에서 '하늘에서 내려온 자'와 '인자' 그리고 '하늘에 올가간 자'는 모두 동격이다. 다시 말해서 인자(人者)로 계신 예수는 원래 하늘에 계셨던 성자(聖子) 하나님으로서 인간 구원과 새창조롤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다. 따라서 예수는 일체의 모든 인간과는 근본적으로 구별된 분이다. 바울의 말대로 사람들은 모두 땅에서 났고 흙에 속한 자이지만(고전 15:47) 예수는 영원 전부터 하늘에 계신 분이다. 이러한 성육신의 신비 또한 인간의 유한한 이성(理性)으로서는 도무지 설명할 길 없는 비밀이다.
=====3:14
모세가...인자도 들려야 - 예수는 민 21:4-9의 내용을 들어 자신의 구속 사업 즉 하늘의 일을 설명하셨다.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생활 가운데서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다가 불뱀에 물려 죽게 되었으나 모세가 장대 위에 매달아 놓은 놋뱀을 쳐다본 사람은 살아날 수 있게 된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은 그리스도께서 십자자에서 돌아가실 것과 그 십자가의 예수를 바라보고 믿는 자는 구원을 얻게 될 것임을 예표(豫標)하는 것이다. 이는 놋뱀 자체가 어떤 치유의 능력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님에게로 이끌므로써 구원을 받게 하였던 것이다. 유대 학자들은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성경을 공부하거나 오경뿐만 아니라 구약성경 전체의 말씀을 외우는 열로 보내었으므로, 니고데모는 오경에서 인용한 이 말씀의 내용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특히 뱀은 마귀 또는 사단이라고 불리는 '옛 뱀'(계 20:2)을 상징하며, 이 구리 뱀은 사단의 세력을 없애기 위해 십자가상에서 대속의 죽음을 당한 예수의 회생을 예표한다. 따라서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구리 뱀을 쳐다봄으로써 그들의 죄악과 그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진노를 깨닫고 회개해야 했던 것이다. 한편 '들려야'에 해당하는 헬라어 '휴소오'(' )는 아람어 '제캅'에 해당하는 말로 추측되기도 하는데 이 아람어는 '들어 올리다' 혹은 '교수대에 처형되다'의 의미가 있다. 따라서 이 말에는 (1) 십자가에 달리심(8:28;12:23) (2) 승천하실 때 영광 속에서 들어 올려지실 것(행 2:33;5:31;빌 2:9) 등의 두 가지 뜻이 내포되어 있으며, 문맥상으로 볼 때 직접적으로는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가리킨다.
=====3:15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 예수의 십자가 희생의 목적을 설명하는 본절은 구원론 (救援論)의 핵심을 간파하고 있다. 본절에 나오는 '영생'은 본서 전체에 걸쳐 요한이중점적으로 부각시키는 주제이며, 이 영생에 이르기 위한 기본 전제로서 예수께 대한 믿음이 지적 되고 있는 것이다. '저를 믿는 자'란 예수의 대속하심을 받아들이고 예수와 함께 동행하는 삶을 사는 자를 뜻한다. 특히 '믿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피스튜온'(' )은 현재 분사형으로서 신앙의 행위가 계속적이어야 함을 강조한다.
영생 - 요한의 애용어(愛用語)로서 문자적으로는 '영원의 생명' 또는 '올 세대의 생명'의 의미이다. 요한이 사용한 영생은 공관복음서의 하나님 나라와 마찬가지로 종말론적인 요소와 하나님의 현재적인 선물이라고 하는 두 요소를 모두 담고 있다. 한편 요한은 '생명'과 '영생'이라는 말을 상호 교환적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그외 복음서에서 생명은 19번, 영생은 17번 나온다. 17:3에 의하면 영생이란 예수 그리스도 곧 인간에게 보내신 하나님의 사자를 통해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아는 것이며, 14:6에 의하면 영생은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유일한 참 길이요, 살아있는 길이신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교제이다. 이러한 앎과 교제는 현재 이 땅에서 시작되지만 그 완성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처소에서 이루어진다(14:3).
=====3:16
속에 있는 복음'(the Gospel within the Gospels) 혹은 '작은 복음서'(Little Gospel)라고 불리기도 한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 전체 대표할 수 있는 요절인 본절은 복음의 진수(眞髓)로서, 복음이 담고 있는 모든 계시의 말씀을 사랑의 개념에서 천명(天命)한다.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 '세상'을 뜻하는 헬라어 '코스모스'(' )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포함한 온 인류를 가리킨다. 유대인의 전통적인 사고 방식으로는 하나님의 사랑은 선민 이스라옐에게만 국한되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요한은 하나님의 사랑이 민족이나 계급을 초월하여 모든 인류에게 미친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힌다. 이는 곧 복음의 보편성과 그 맥을 같이한다.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개방되어 있지만 그 은혜틀 받을 수 있게 하는 것은 오직 믿음임은 물론이다. 그리고 본절에는 독생자를 보내신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동기가된 것임이 밝혀져있다. 특별히 '사랑'의 헬라어 '아가페'(' )는 요한복음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들 중의 하나로서, 하나님 편에서 선수권(先手權)과 주도권(主導權)을 가지고 인생의 연약함과 죄성을 끝없이 감싸 안으신다고 하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사랑은 바로 하나님의 본성이라 하겠으며(요일 4 : 8)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통해 그 절정에 이르렀다. 그리고 본질상 하나님과동등하신 예수의 생애를 보면 우리는 그 사람을 보다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사랑은 결코 타율적인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성격의 것이며 막연한 이론이나 말로써 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응분(應分)의 대가를 아낌없이 지불하는 것이다. 그리고 '독생자'라는 표현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관계의 특수함을 강조하는 말이며, 루터의 말을 빌리면 예수는 '참 하나님이시며 영원 전부터 계시는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다. 결국 예수의 탄생은 영원 전부터 독생자로 존재하셨던 성자 하나님의 성육신(成肉身)이었다는 점에서 유일 무이한 사례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독생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모노게네스'(' )는 '외아들'이란 뜻 외에 '그 속성과 성품에 있어서 유일 무이하신 분'이란 의미도 내표한다. 그리고 본서에서는 '아들'의 뜻인 '휘오스'(' )를 주로 그리스도에 대해서 사용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3:16, 36;5:20, 23;8:36 등). 한편 '주셨으니'의 헬라어 '디도미'(' )는 '보내다'(send)와 '넘겨주다'(hand over), '값을 지불하다'(pay) 등의 뜻이 있는데 본절에서도 이 말은 성육신(Incarnation)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심(crucifixion)까지도 의미하고 있다. 웨스트콧(Westcott)은 이 낱말이 재물을 바치는 일을 암시하고 있다고 본다(창 22:2 주석 참조).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궁극적인 목표가 바로 믿는 자의 구원에 있음을 15절에 이어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멸망'과 '영생' 사이에 어떠한 중립적인 선택은 없으며 그것은 절대적인 양자 택일의 문제이다. '멸망하다'의 뜻인 '아폴뤼미'(' ) 또한 요한이 자주 사용한(10번 정도)단어로서,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져 있다. 첫째, 이 말은 '잃다', '상실하다'(to be lost)의 뜻과 둘째, '없어지다', '파괴되다'(to perish, be destroyed)의 뜻이 그것이다. 또한 이 동사는 구원과 반대되는 개념을 나타내는 용어이며, 생명과 반대되는 '죽음'을 나타낼 때(막 3:6), 존속되는 것과 반대되는 '멸망'을 나타낼 때 (고전 1:19), 그리고 무엇을 얻거나 받는 것 과는 반대되는 '상실'을 나타낼 때 등의 경우 에도(요이 8절) 사용되었다. 특히 여기서는 하나님의 품을 떠나 살아가는 자들은 필경 절망과 파멸로 치달을 수밖에 없게 됨을 암시한다. 그들의 모든 수고와 노력은 허망하며 하나님과의 친교에서 배제된다는 것은 곧 죽음과 멸망을 뜻한다.
=====3:17
심판하려 하심이...구원을 받게 하려 - 목적을 나타내는 접속사인 '하나'(' )에 의해 이끌리는 두 문장이 뚜렷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이는 not..., but...식의 영어 문장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요한은 심판하시는 그리스도(5:30;8:16)에 관해 즉, 그리스도의 말씀이 사람들을 심판하시며(12:48) 하나님이 일체의 심판을 그리스도께 위임하셨다고(5:22) 증거 했다. 그리고 예수께서 마지막 날 재림하실 때 에는 분명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는 의로운 재판장으로 나타나실 것이다(딤후 4:1, 8). 그러나 적어도 예수의 초림 목적을 말할진대는 심판보다는 구원에 더 큰 비중을 두어야 함이 확실하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과 자비로운 용서와 구원은 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 로되, 이 양자는 엄밀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반응하는 인간의 태도에 따론 결과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은 항상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게 되기롤 원하시며(딤전 2:4) 이 일을 위해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박히시게까지 하셨지만 인간의 불순종과 완악함이 끝내 구원의 문을 막아버릴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심판이 주목적이라면 하나님은 굳이 독생자를 보내지 않고서 물이나 불 혹은 기타 천재 지변(天災地變)을 통해서도 심판하실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이 적극적이라는 점에 유의해야 하겠다. '심판하다'의 뜻인 '크리노'(' )는'선과 악을 분별하다'(discriminate), '분리하다'(separate)의 의미와 '정죄하다'(condemn)의 의미가 있는데 본절에서는 후자의 의미가 더 강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구원을 받게'란 말은 본절에서 '영생을 얻는 것'과 동의어로 사용되었는데 '구원'의 뜻인 '소테리아'(' )란 본래 아주 무서운 멸망의 위기 속에 빠진 자, 예를 들면 물에 빠져 죽어가는 자를 구출해 주는 행위를 가리킨다. 여기서 본 구절의 의미는 죄악된 불의의 삶으로부터 야기되는 모든 불안과 죄책에서,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벗어나며 또한 죄사함과 의롭다하심(justification)을 받고 성화의 삶을 살아가는 것과 아울러 장래에 하나님 앞에서의 평강과 희락의 삶을 누리게 될 것임을 말한다.
=====3:18
저를 맏는 자는...벌써 - 앞의 두 절에서 요한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독생자 예수의 초림 목적이 바로 구원에 있었음을 강조했다. 이제 본절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은혜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에게는 엄하고 무서운 심판이 불가피하게 될 것임을 설명한다. 그는 이 진리를 즐겨 사용하는 논리 전개 방식인 부정과 긍정의 연결을 통해 변증하고 있다. 심판 가운데 처해 있으므로 마지막 대심판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다는 것이 본절의 요지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아담의 후예(後裔)로서 원죄와 자범죄로 말미암아 영원한 형벌에 처해질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 있으며 따라서 구속주로 오신 예수를 영접하지 않으면 자연히 멸망과 정죄 가운데 있는 것이기 때문 이다. 그러므로 결과적으로 볼 때 예수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구원과 멸망 이 두 편으로 확연히 구분되었다.
심판을 받은 - 완료 시제 '케크리타이'(' )는 심판은 이미 과거에 시작되어졌고 그 판결은 지금까지도 유효한 것임을 나타낸다. 불신자들은 장차 있을 종말론적인 대심판을 받기도 전에 이미 죄인으로서의 삶(즉 정죄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진리 안에서 자유하지 못하고 죄에 얽매여 죄에게 종노릇을 하고 있다.
=====3:19
이것이니 - 논리 전개를 더 강화시키기 위해 자주 사용된 요한의 독톡한 표현을 반영하는 어구이다(15:12;17:3;요일 1:5;5:11, 14).
빛보다 어두음을 더 사랑한것 - 여기 사용된 '빛'의 헬라어 '포스'(' )는 달빛이나 별빛, 불빛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태양 빛'을 의미하는 말로, 본서에서는 주로 그리스도에게 적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이 빛은 '유일한 빛'(the one light), '참 빛'(1:9)이신 그리스도 자신이다. 어두움의 뜻인 헬라어 '스코토스'(' )는 빛과 반대되는 완전한 어두움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단순히 어두운 밤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과는 다르다(Westcott). 따라서 어두움은 하나님과 단절된 영적인 죽음의 상태를 의미한다. 이와 같은 어두움 속에 처해 있는 자는 빛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려 들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다만 외부로부터 빛이 적극적으로 비춰들 때 비로소 그 빛을 인정한다. 그러나 빛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과 그 빛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또 별개의 문제이다. 고리고 빛 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했다고 하는 표현이 믿지 않는 자들이 빛도 어느 정도 사랑했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뤼케(Lucke)는 말하기를, '더'에 해당하는 헬라어 '말론'(' )이라는 단어가 '오히려'의 뜻 보다는 '더 많이'란 의미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빛에 대한 어느 정도의 사랑을 인정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말론'이 사용된 다른 많은 구문에서는 그 뜻이 '비교급'으로 보다는 부정 적인 의미에서의 '...보다 도리어'(rather)의 뜻으로 많이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12:43;마 10:6;딤후 3 : 4). 따라서 본 구절은 빛보다는 어두움 즉 하나님과의 영생의 교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단절된 삶을 사랑했던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3:20
19절과 마찬가지로 본절에서도 원인을 나타내는 전치사 '가르'( )가 사용되었 다. 19절에서 이 전치사는 사람들이 죄악된 길을 택하게 된 원인을 설명해 주며 본절에서는 19절에서 밝혀진 원인을 보층 설명한다. 앞절에서는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다고 하는 소극적 어투로 설명했으나 여기서는 보다 적극적이며 능동적인 의미에서의 '악행'을 지적한다. 특히 본절은 더욱 더 죄악으로 치닫는 인간의 성향에 대해 도덕적 이유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즉 인간의 본성 자체가 악하므로 빛보다는 어두움을 택하며 더 나아가 죄로 점점 오염될수록 악행으로 나아가는 속도에 가속도가 붙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드러날까 - 헬라어 '엘렝코'(' )는 '죄를 깨닫게 하다'(convince) '밝히 드러나다', '혐의를 두다', '교정하다'(correct) 등의 뜻을 지니는 바 악을 행하는 자가 죄를 감출 뿐만 아니라, 이미 지은 그 죄에 대해서 회개조차 하지 않으려는 습성이 있음을 나타낸다.
=====3:21
진리를 좇는 자 - 진리 안에서 행하는 자 곧 '단순히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아니라, 그 신앙의 열매(마 3:8, 10)를 맺는 자'(A. M. Hunter) 즉 참된 기독교적인 신앙과 삶을 실천 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진리'의 의미나 본성에 대해서는 폭넓게 논의될 수 있지만, 여기서는 하나님과의 연합 관계와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즉 영원 전부터 계획하신 바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진리를 가리킨다. 이 진리의 빛이 죄악으로 인해 어두워진 인간의 심령을 뚫고 들어 오면 회개와 전인적 삶의 변화가 수반되기에 이르는 것이다.
빛으로 오나니 - '에르케타이 프로스 토 포스'(' )는 '빛에게로 나아오다'란 뜻이다. 사람이 빛되신 하나님에게로 나아오는 것은 원래의 자기 자신의 기원(起源)에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charlesworth).
=====3:22
이 후에...유대 땅으로 가서 - 많은 학자들은 22-30절을 현재의 위치에서 옮겨서 2:12 뒤에 놓아야 자연스럽다고 주장한다(Barrett, Senders). 왜냐하면 '유대 땅으로'라고 하는 표현이 예수께서 갈릴리로부터 왔다고 하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메시야에 대해 냉담한 예루살렘 도시를 떠나 유대 지경 내의 변두리 마을로 물러가신 것을 나타 낸다고 볼 수도 있다.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그곳이 요단 강 근처의 평야이거나 아니면 여리고빠 근접한 지점일 것으로 추정된다.
세례를 주시더라 - 예수께서 세례(baptizing, NIV)를 베푸셨다는 기록은 사복음서를 통틀어 여기에만 나오고 또 4 : 2로 미루어 보건대 실제로 세례를 베푼 자는 예수의 제자를이었을 것이다. 이 세례를 기독교의 세례전(洗禮典)과 동일한 것으로 보기는 어려우며 그 보다는 세례 요한의 세례와 동일선상에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예수께서는 친히 세례 요한의 증거를 진정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셨으며 또 세례 요한의 제자들 중에 예수를 열렬히 따르는 자들이 있었으므로, 자연스러운 과도기적 수단으로서 세례 요한식 세례를 긍정적으로 허용하셨으리라 이해된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예수의 첫 메시지도 세례 요한의 주된 강조 사항인 '회개하라'는 내용이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마 3:2;4:17). 한편 예수께서 몸소 세례를 베풀지 않고 제자 들에게 대행시킨 이유 중의 하나는 역시 제자화 훈련(弟子化 訓練)의 맥락에서 이해된다. 이 제자들은 훗날에 오순절(the day of Pentecost, NIV)의 성령 세례를 체험하고 난 후 죄사함을 얻게 하는 세례를 베풀어야 할 것이었다(행 2:1-4, 37-41).
=====3:23
살렘 가까운 애논 - 이 두 지명이 현재의 어느 위치를 가리키는 지는 분명지 않다. '살렘'(Salim)은 '평화'라고 하는 셈어적 기원을 갖고 있는 지명이며, '애논'(Aenon)은 '샘'이라고 하는 아람어의 복수형으로부터 나온 말이다. 이 지명들에 대해서는 전통적으로 다음과 같은 주장들이 있다. (1) 베레아 지역 요단강 건너편으로 보는 견해. 우리가 알다시피 세례 요한은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었다(1:28). (2) 스키토폴리스(Scythopolis) 남방 8마일 지점 즉 요단 계곡의 동쪽으로 보는 견해(4세기의 유세비우스). (3) 세겜으로부터 동서쪽으로 4마일 떨어진 곳에 옛부터 알려졌던 '살림'이라는 마을이 있다. 그리고 이곳으로부터 북동쪽으로 약 8마일 정도 떨어진 곳에 현재 '아이눈'이라고 불리는 곳이 있는데 이곳이 '애논'일 것이라고 보는 견해. 비록 현재 이곳은 물이 전혀 없지만 과거에는 많은 샘이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Albright) (4) 또한 1세기 초기에는 '살렘'이 예루 살렘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듸여졌었다고 하는 견해가 있다(Cheyne). 이 중에 세번째 견해는 그곳이 유대 지역이 아니라 완전히 사마리아 지역이라고 하는 점에서 본문과 다소 거리가 먼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 크리거(Krieger)는 저자의 확실치 않은 지리적 보고(報告)를 상징적으로 이해하려고 하였는데 즉 요한의 세례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평화에 가까이 갈 수 있게 해주지만 그러한 평화를 제공하지는 못하는 반면 예수의 세례는 구원과 평화(살렘)의 샘(애논)이 펑펑 솟는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불트만(Bultmann)도 역시 살렘과 애논, 이 두 지명이 실재적인 것이지만 복음서 저자에 의해 상징적인 의미로써 사용된 것일 수 있다고 믿었다(the Anchor Bible).
=====3:24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지 아니하였더라 - '옥에'에 해당하는 원문은 '그 감옥에'(' , 에이스 텐 퓔라켄)이다. 이는 저자와 당시의 직접적 독자들이 세례 요한의 투옥 사실을 모두 알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세례 요한의 투옥에 관해서는 눅 3:19이하를 참조하라. 저자가 세례 요한의 투옥 사실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은 이유는 공관복음서에 소상히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점 및 요한의 관심사가 예수의 사역에 보다 밀도있게 집중되고 있다는 점 등에서 찾을 수 있다. 본서에서 셰례 요한이 등장하는 유일한 의의는 예수를 증거하는 것이다. 한편 요한은 공관복옴서 저자들이 서술하고 있지 않는 내용즉 세례 요한과 예수의 동시적 사역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신 이후에 요한이 투옥되고 갈릴리에서의 공적인 등장이 있기 이전에 초기에 유대 지방에서 전도 사역을 행하셨던 셈이다.
=====3:25
결례에 대하여 변론이 - 요한의 제자들은 어떤 한 유대인과 더불어 정결(淨潔)에 관한 논쟁을 하고 있었는데, 이 논쟁(argument, NIV)이 유대인들이 행하는 일반적인 정결 예식에 관한 것인지 아니면 그러한 정결 예식에 반대하여 요한과 예수가 행하는 세례에 관한 것인지 또는 요한과 예수가 각자 따로 행하는 세례에 관한 것인지 명확지 않다. 본문에서는 '결례'(ceremonial washing, NIV)의 뜻인 헬라어 '카다리스모스'(' )가 '세례'와 동의어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한편 '변론'의 뜻인 헬라어 '제테시스'(' )에 대해 바울은 '위험하고 쓸데 없으며 분노에 찬 논쟁'(딤전 6:4; 딤후 2:23; 딛 3 :9)이라고 하였다. 아마도 요한의 제자는 유대인과 더불어 세례 요한이 주는 세례의 의의와 효력에 대해서 바리새파와 엣세네파 그리고 예수가 행하시는 세례와 비교하여 변증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특히, 이어지는 내용으로 짐작하건대 세례 요한의 세례와 예수의(제자들의) 세례 중 어느 것이 더 확실한 근거를 가질 것인가에 관한 변론이었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3:26
함께 요단강 저편에 있던 자 -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라고 하는 정확한 호칭으로 부르지 않은 것은 예수를 깎아 내리고자하는 그들의 의도를 반영한다. 요단강 저편인 베다니에서 세례 요한은 예수의 메시야이심을 증거하였고(1:19-28) 또한 예수께 세례를 베풀었다 (마 3:13).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보기에, 예수는 세례 요한에게 빚을 진 자요, 감사해야 할 자였지만 도리어 세례 요한의 명성을 떨어 뜨리는 경쟁자로 나선 것처럼 보였다. 따라서 결례(缺禮)에 대한 논쟁을 요한의 제자들이 스승에게 가져왔을 때, 그것은 단순한 논쟁 거리가 아니라 예수께 대한 불평과 비난으로 변화되었다. 곧 선생님이 증거하시던 자 - 역시 예수의 이름을 피하고 있다. '증거하다'의 뜻인 헬라어 '메마르튀레카스'(' )는 현재 완료로서 과거 어느 한 시점에서 시작된 세례 요한의 예수에 대한 증거가 지금까지 계속되어 왔음을 암시한다. 세례 요한은 줄곧 사람들에게 예수를 증거해 왔으나 그의 제자들은 그러한 증거에 대해 긍정적인 자세를 취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다.
세례를 주매 - 원문에는 이 말 앞에 '보라', '보옵소서'의 뜻인 헬라어 감탄사 '이데'(' )가 붙어 있다. 이는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혹은 그의 제자들이)가 세례를 베푸는 행위에 대해서 상당히 흥분하고 분노를 느끼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가더이다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르콘타이'(' )는 연속적인 행위를 나타내는 현재 중간태 직설법으로 '그들이 지금도 계속해서 나아가고 있다'고 하는 뜻을 나타낸다. 막 1:45;3:7은 갈릴리 사역 동안의 예수의 호소(呼訴)가 많은 사람들로부터 긍정적인 반응을 일으켰다는 사실은 본서에서도 잘 나타난다(11:48).
=====3:27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 목적어가 생략된 문장이다. 본문에 있어서는 대화의 내 용상 세례를 베푸는 자의 자격을 의미하는 것 같다. 따라서 하나님께로부터('하늘'은 하나님을 지시하는 완곡어로서 사용됨) 세례를 베풀도록 허락받은 사람은 (1) 요한 자신(Bengel, Calvin)이나 (2) 예수 그리키스도(Godet, Meyer)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3) 그 일을 행하도록 허락된 많은 선지자, 예수의 제자들 등도 포함 된다(Lange, Lucke, Moulton). 여기서 세례 요한은 높아가는 예수의 명성에 대해 시기하는 마음을 갖기는 커녕 오히려 예수의 모든 사역이 바로 하나님께 그 기욍을 두고 있다는 점을 역설하고 있다.
=====3:28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 1:20에서 산헤드린(Sanhedrin)에서 파견된 대표자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다시 한번 천명(闡明)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세례 요한 자신을 메시야로 오해하는 데서 발생되는 모든 혼란을 없애기 위하여 자신의 제자들에게 분명하게 확언하고 있다. 여기서 '나의 말한 바'는 세례 요한이 예수께 대해 이미 여러번 증거하였던 사실을 나타낸다.
너희니라 - 이 말은 원문상 강조법으로서 '너희가 내 설교를 귀담아 듣고 그 의미를 헤아렸다면 이미 너희들 스스로(yourselves) 답변을 가지고 있다'는 뜻을 시사한다. 한편 세례 요한의 우려대로 그의 가르침과 세례를 고지식 하게 추종하는 인물이 1세기 중엽까지도 상당히 존재했음에 분명하다. 예컨대 에베소에서 사역 했던 알롄산드리아의 아볼로의 경우가 그러하다(행 18:24-26). 그 후 에베소에 도착한 바울도 세례 요한의 추종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사역에 관해 온전히 이해할 수 있도록 가르쳐 준 바 있다(행 19:1-7).
=====3:29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 신부는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이며, 신랑은 그리스 도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는 종종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님의 신부로 상징하였고(사54:5;렘 3:20; 호 2:7;말 2:11) 신약성경에서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상징되었다(엡 5:32;계 19:7). 본절에서의 강조점은 신랑과 신부와의 관계보다는 신랑인 예수와 그 친구인 세례 요한과의 관계에 있다. 세례 요한은자신이 아니라 그긔스도가 새 이스라엘의 주인이심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C.K. Barrett).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 - 히브리어에서 '쇼쉐벤'( )은 신랑의 친구로서, 신랑과 신부 사이를 중매하는 역할과 신부를 신랑에게 무사히 인도 하는 역할과 결혼식에서의 신랑의 들러리 역할 그리고 마지막으로 결혼 잔치를 주관하는 역할 까지도 담당했다. 모세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결혼 잔치에 있어서 그 중매자 역할을 담당하였고(출 19:17) 바울도 역시 자기 자신이 정결한 처녀인 성도들을 남편이신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일올 담당하는 자라고 표현하였다(고후 11 : 2).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가나의 결혼 잔치에서 등장했던 연회장(2:9)도 신랑의 가장 가까운 친구로서, 그 잔치를 주관하였을 것이 라고 추측해 볼 수도 있다. 또한 세례 요한은 신랑의 친구는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다고 말함으로써, 그 친구가 마치 종과 같은 태도로 혼인 예식을 위해 헌신적으로 돕고 있는 것임을 분명히 했다.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 '페플레로타이'(' )는 완료 수동태형으로 마치 물이 컵의 끝까지 가득 차 있는 상태처럼 세례 요한의 기쁨이 가득 차 있었음을 나타낸다. 그의 기쁨은 완벽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이 그에게 부여했던 일 곧 메시야의 선구자로서의 사명을 완수하였으며 또한 그토록 바라던 메시야를 친히 목격하고 증거했기 때문이다(A. M. Hunter).
=====3:30
그는 흥하여 야...
나는 쇠하여야 - 이 말은 본서에 나오는 세례 요한의 마지막 진술로서 그의 선지자적 위대성을 단연 돋보이게 하는 구절이다. 위대한 이상이나 목표를 내걸고서 수많은 사람들을 감화시키는 일 자체도 크고 힘든 일이거니와, 그의 주변에 모여든 열렬한 추종자들에게 자신의 한계성(限界性)을 분명히 주지시키고 그들의 관심을 다른 사람에게로 돌리게 하는 일에 이토록 적극성을 보이기란 더욱 어려운 일이다. 세례 요한은 '...해야 한다'는 표현으로써 자신의 주장의 배후에 있는 하나님의 뜻히 필연성과 당의성을 확고히 천명 하고 있다. 실제로 세례 요한의 삶은 오직 그 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을 위해 온전히 바쳐졌으며, 예수의 공생애가 본격적으로 궤도에 오르기 시작할 무렵에 헤롯의 핍박을 받아 참수형(斬首刑)을 당함으로써 '주의 길을 곧게하는 자' 로서의 생애를 마감하게 된다(막 1 : 14 ; 눅 3:18-20).
=====3:31
위로부터 오시는 이...
땅에서 난 이 - 본격적으로 예수와 세례 요한과의 대조와 세례 요한에 대한 예수의 우월성이 증거되고 있는 31-36절까지의 본문은 니고데모와의 대화 속에서 언급된 내용과 유사한 일면이 있다(12, 13절). 본서를 기록한 요한의 근본 의도는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이신 예수의 신적 탁월성(卓越性)을 드러내는 데 있었기 때문에(20:31), 처음부터 끝까지 이 주제가 일간되게 부각되어 있다. 여기서 저가가 강조하는 바는 세레 요한에 대한 예수의 상대적 우위의 개념이 아니라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탁월성에 대해서 이다. 세례 요한이 '여자가 낳은 자 중 가장 위대한 자'임은 분명한 사실이지만(눅 7:28) 여전히 '땅에서 난 이'라는 점에서 감히 예수의 신적 존재와 비길 상대가 못되는 것이다. 한편 '땅에서 난 이'란 직접적으로는 세례 요한을 가리키지만 일반적인 측면으로 확대해서 생각 하면 아담 이후의 모든 인류를 동시에 지칭하는 말이다. 또한 '오시나 이'라는 표현은 대망의 메시야에 대한 또 다른 칭호로서 세례 요한에 의해 사용되곤 했다(1:30;마 11:3;눅 7:19). 그리고 위로부터 오시는 이란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이며, 이 표현은 그리스도의 신적 초월성과 유일성을 포함하고 있다. 반면에 여기서 '땅'(the earth, NIV)이란 표현이 '세상'이라는 표현 속에 들어 있는 '악한 것', '속한 것'을 의미한다고 단정 지을 수 없으며 그렇다고 하나님께 향하는 어떤 요소를 지녔다고 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요한의 표현에 있어서 '땅'은 초자연적이고 신성한 것과는 대조적인 의미에서의 인간 실존의 자연 상태 즉 창조주와는 구별되는 피조물을 지칭한다. 즉 흙으로 지음을 받은 존재 말이다(창 2:7).
땅에 속한 것 - 이 구절 또한 앞에서 설명한 '땅'의 개념에 근거하여 이해되어야 한다. 직접적으로는 세례 요한의 모든 사역 즉 회개에의 권유와 회개한 자들에게 행한 물세례 등등을 가리킨다. 세례 요한을 위시한 모든 선지자의 사역은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에게로 인도하는 것일 뿐 직접 영생(eternal life)을 제공하지는 못한다. 예수가 오시기 이전의 모든 선지자의 사역은 예수의 오심을 알리기 위한 '전령(傳令)'에 해당하는 것이고, 예수가 세상에 오셔서 하늘로 다시 올라가신 이후의 모든 제자들의 사역도 결코 예수에 대한 '증언'(testimony, NIV)의 범주를 넘지 못한다.
=====3:32
보고 들은 것 - 이 표현 역시 앞서 니고데모에게 예수께서 하신 말씀과 유사하며 (11절), 헬라어 '보고'에 해당하는 동사는 현재 완료형이고, '들은'에 해당하는 동사는 부정 과거형이라고 하는 점에서 다소 문제시 된다. 어떤 학자는 전자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하신 존재성과 관련시키며 후자를 공생애 동안의 사역과 관련시킨다. 그리고 이러한 시제상의 차이로 인해 '보는 것'에 더 강조점이 있다고 하는 주장을 펴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요일 1 : 3에는 보는 것과 듣는 것이 동일하게 강조되어 있다. 보고 들은 바의 구체적 내용은 알 수 없으나 하늘로부터 난 자가 알고 있는 사실 즉 하나님 나라에서 이루어지는 신령하고 비밀스러운 일들이나 하나님이 그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목적 그리고 그가 바로 나사렛 예수라고 하는 사실, 그를 믿는 자는 이미 영생을 얻었고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정죄를 받았다고 하는 사실 등을 두루 포함한다.
받는 - '받는'으로 번역된 헬라어 '람바노'(' )는 '능동적으로 취하다'(take), '영접하다'(receive), '깨닫다'(apprehend) 등의 뜻으로 복음에 대한 성도의 합당한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 지를 보여준다.
=====3:33
하나님을...
인쳤느니라 - 예수는 오직 하나님의 뜻과 그 말씀을 전하러 오셨기 때문에 그의 증거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거짓말장이로 만드는 것이다(12:44-50;요일 5:10). 반면에 그리스도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예수의 기원이 하늘로부터임과 하나님의 계시가 예수를 통해 밝히 드러났다는 사실 및 하나님의 성품과 그 모든 약속이 진실되고 참되다는 사실을 모두 인정하고 증거하게 되는 셈이라는 의미이다. 물론 하나님의 진실성은 인간의 인정이나 증거를 반드시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다. 결국 하나님의 진실하심에 대한 인침(certification)은 하나님 자신을 위함이 아니라 인간의 구원을 위한 것이라 하겠다. '인치다'로 번역된 헬라어 '스프라기조'(' )는 본래의 뜻인 '밀봉하다'의 의미보다는 '재가(裁可)하다', '증명하다'(certify) 등으로 잘 사용되고 있는데 본절에서도 마찬가지로 사용되었다.
=====3:34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 - 이 구절에 대해서는 세 가지 해석이 있다. (1) 하나님이 메시야의 증거자인 세례 요한에게 성령을 충만히 부어주셨다고 보는 견해(R. C. H. Lenski). 렌스키에 의하면 '주심이니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도신'(' )은 '계속적인 수여'를 뜻하는 현재 시제로 사용되었으므로 예수께 적용하기에 적절치 않다고 한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게 생각해야 할 근거는 없다. (2) 하나님이 성도들에게 성령을 주심을 뜻한다고 보는 견해. 성도들이 성령 충만한 은사를 받을 수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엠 4 : 7)라는 말씀이 있듯이, 성도들에게 무제한적으로 성령을 부어주신다고보기는 어렵다. (3) 하나님이 예수께 성령을 한없이 (without limit, NIV) 부어주셨음을 뜻한다고 보는 견해. 전후의 문맥으로나 사용된 어휘의 용례 등으로 볼 때 이 세번째 견해가 가장 무난하리라 생각된다. 예수는 곧 성자(聖子) 하나님이시므로 하나님의 모든 신성(神性)을 지니셨고 성령과도 하나이셨던 것이다.
=====3:35
만물을 다 그 손에 주셨으니 - 이 말씀에는 두 가지 사실이 강조되어 있다. (1) 사랑으로 연합된 아버지와 아들 간의 상호 관계 이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마 28:18;고전 15:27;계 1:18)의 표현과 유사한 본 구절은 예수께서 아버지의 이름과 그 권세로써, 만물 즉 모든 피조물들을 그의 뜻대로 지배하시고 명령하실 수 있는 완전한 권위를 부여받으신 분임을 의미한다. 따라서 모든 만물은 각각 예수와의 관계에 절대적으로 의존되어 있다. (2) 인간 예수께서 성부 하나님께 의존하시는 모습이다. 전능성(全能性)은 삼위(三位) 하나님 모두에게 속한 것이며 어느 쯤에서 다른 쪽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예수는 하나님의 신성과 아울러 진정한 한 인간으로서 이 땅에 오셨고 바로 이런 차원에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모든 권세를 수여받으셨던 것이다. 이 사실에서 우리는 예수의 '낮아지심' 과 인생의 완전한 모범을 보게 된다.
=====3:36
본절은 사람들에게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양자 택일을 권고한다. 예수를 구세주로 믿고 영생에 이를 것인지 아니면 불순종 가운데서 멸망에 처하든지 둘 중 하나가 앞에 놓여 있을 뿐 그 중간 지대는 없다는 것이다.
영생이 있고 - 아버지가 그 아들이신 예수를 사랑하고 만물의 지배권을 주셨다는 앞절의 말씀이 결코 이론적이거나 추상적이지 않음을 보여준다. 이 영생이야말로 성도들에게 가장 직접적으로 그리고 가장 근본적으로 적용되고 주어질 하나님의 가장 귀한 선물인 것이다. 특히 우리는 여기서 영생이 현재적 소유의 측면에서 언급되고 있음을 주시해야 한다. 성도둘 또한 시간의 경과와 더불어 육체적 죽음을 경험해야 하지만 영원한 생명으로 거듭나는 결정적 사건은 예수를 구주로 영접할 때 이미 발생하였으므로 그는 영원한 삶에로 들어간 것이다.
영생을 보지 못하고 - 요한에게 있어서 '영생'과 '하나님 나라'는 매우 유사한 단어이다. 본절에서 영생은 하나님 나라를 보는 것 또는 영원한 평화와 사랑의 나눔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의 삶을 이미 경험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진노...
머물러 있느니라 -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또 다른 표현이다. 구약 성경에서 즐겨 사용되고 있는(출 22:24;32:11;신 13:17; 스 10:14) 이 표현은 인간의 일시적인 성냄이나 분노를 의미하는 헬라어 '뒤모스'(' )와는 달리,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있어서 패역한 세대에게 내리시는 일관된 '심판', '벌' 등의 뜻인 '오르게'(' )를 의미한다. '머물러 있느니라'로 번역된 '메노'(' )를 직역하면 '남아 있다'(remain)의 의미가 된다. 따라서 이는 하나님의 진노가 새롭게 부여된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원래 하나님의 진노(God's wrath, NIV) 아래서 살아가던 그대로 내버려 둔다고 하는 것을 의미한다(롬 1:24). 예수의 증거를 용납하지 않는 자는 죄와 사망과 악의 권세에서 결코 해방되지 못한다. 하나님은 그들을 악의 세력 속에 그대로 방치(放置)하신다. 그리고 그러한 처벌은 이미 시작되었고 장래에 끝마치게 될 것이다.
3:1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 니고데모라는 사람을 통하여 복
음서 저자는 이제 그리스도의 표적을 보고 감동되어 성급하게 그의 편을 택한 사람들
의 믿음이 얼마나 일시적이며 연약한 것인가를 보여 주고 있다. 이 사람은 바래새파에
속해 있었고 그 나라 관원의 직위에 있었던 것으로 보아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앞서
있는 사람이었다. 보통 사람들은 대부분이 변덕에 의해서 좌우된다. 그러나 학문과 경
험에 능한 사람은 또한 진지하고 지혜롭기도 하다고 생각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
가? 그러나 그리스도의 답변에 비추어 볼 때, 니고데모가 찾아 온 목적은 종교의 기
초에 대해 배우고 싶은 욕망 외에 다른 것이 없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만일 사람을
다스리는 관원이 소년만도 못하다면 일반 대중을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되겠는가?
비록 복음서 저자의 목표하는 바는, 거울에 비추어 보듯이, 예루살렘에 복음을 받아들
일 만큼 마음이 제대로 준비되어 있는 사람이 얼마나 희소했는가를 보여 주자는 데 있
지만, 이 이야기는 다른 점에 있어서도 극히 유용하다. 특별히 우리는 이 대화 속에서
인류의 부패한 성품에 대하여 배우게 되고, 그리스도의 학교에 바로 입학하는 길이 무
엇이며 하늘에 속한 교훈에서 자리기 위하여 어떠한 기초를 밟아야 하는가를 배우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의 요지는 그의 참된 제자가 되려면 우리가 새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더 나아가기 전에, 복음서 저자가 우리
에게 들려준 내용에서, 니고데모가 자신을 완전히 그리스도에게 내어 맡기지 못한 장
애물이 무엇이었는가를 살펴 보아야겠다.
바리새인 중에 라는 것은 물론 니고데모에게 있어서 백성들 앞에 명예로운 칭호였
다. 그러나 복음서 저자는 그의 명예를 인하여 그를 바리새인이라 한 것이 아니라, 오
히려 그것이 니고데모로 하여금 담대히 그리고 자유롭게 그리스도에게 나아오지 못하
도록 하는 장애물이 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이 세상의
높은 지위에 있는 자들은 대개가 악의 그물에 걸려 있음을 상기하게 된다. 참으로 그
들은 너무나 단단한 올무에 걸려서 일생 동안 한 마디의 기도도 드리지를 못한다. 우
리는 다른 곳에서 그들이 바리새파라고 불리우게 된 이유를 설명했다. 즉 그들은 자기
들이 성경의 골수와 숨은 뜻을 소유하기라도 한 것처럼, 율법의 유일한 해석자로 자처
했던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들은 자신을 페루심(Perushim)이라고 불렀다. 비
록 에센서(Essenes)파가 바리새인보다 더 엄격한 생활로 인하여 거룩하다는 정평을 받
고 있었지만, 이들은 은둔자와 같이 일반인의 생활을 버리고 인간의 습관을 포기하고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바리새파를 더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더구나 복음서 저자는
니고데모가 바래새파에 속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나라 관원 중의 한 사람이었음을 언
급하고 있다.
3:2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 그가 밤에 주님을 찾아 왔던 것으로 보아 우리는
그가 매우 마음이 약했던 사람이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그의 눈은 말하자면, 자기 자
신의 명성에 의하여 현혹되었던 것이다. 그는 또 수치를 당하게 될까 봐서 밤을 택했
는지도 모른다. 세상에 야망과 포부가 큰 사람은 다스리는 권세자의 위치에서 학자의
계급으로 낮아지면 그들의 명예가 큰 손상을 입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니고데모는
자신의 학문에 대한 어리석은 견해로 인하여 마음이 높아져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짧
게 말해서, 그는 자신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에 그는 전혀 자신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
다. 그런데 그에게 어떤 경건의 씨앗이 보이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선지자가 있
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는 하늘로서 온 가르침을 멸시하거나 소홀히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러한 교훈을 갈망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갈망은 순전히 하나님을 경
외한 데서 생겨난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신기한 것을 찾아 쓸데없이 호기심을 돋구
고 있다. 그러나 종교심과 양심의 지각이 니고데모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좀
더 자세하고 친밀하게 알고 싶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그 씨는 오랫동안 죽은 채로 숨
어 있었지만,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후에는 거것이 아무도 기대하지 못했던 열매를 맺
었다.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 - 이 말씀은 "선생님
이여, 우리는 당신이 선생으로 오셨음을 알고 있습니다"라는 말과 같은 것이다. 그러
나 당시에 학식있는 사람들을 흔히 선생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니고데모는 그리스도를
보통 방법대로 랍비라고 불러 인사드린 다음, 후에 선생의 직분을 수행하는 사람은 하
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았다고 선언하고 있다. 그리고 교회 내의 모든 교사(선생)들
의 권위는 이 원칙에 달려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
터 지혜를 배워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입을 통하여 말씀하시지 않는
다면 누구의 말도 경청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비록 유대인들 가운데
종교가 크게 부패하고 타락되어 있었지만, 그들은 언제나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
은 사람이 아니면 정당한 선생일 수가 없다는 원칙을 고수하고 있었음을 알아야겠다.
그러나 거짓 선지자들 보다 더 교만하게 그리고 자랑스럽게 그들의 칭호를 내세우는
사람이 없으리 만큼 그들은 분별의 영으로 시험해 볼 필요가 있다. 그래서 니고데모는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것이 확실하다고 덧붙이고 있다. 니고데모는 하나님께서
자기 사역자들을 통하지 않고는 일하시지 않는다는 것과 그리함으로 하나님께서 그들
에게 맡기신 직분(사역)에 인치신다는 것을 당연시하고 있다. 니고데모의 태도는 옳았
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표적을 자기의교훈에 대한 보증(도장)으로 의도하셨기 때문
이다. 하나님이 함께 계시지 아니 하시면 아무도 이러한 표적을 행할 수 없다고 말할
때, 하나님을 표적의 유일한 주인으로 인정하고 있는 것도 옳은 것이다. 그것은 마치
이런 표적은 인간적인 행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그 표적에 완연히 드러나 있다
고 말하는 것과 같다. 한 마디로 말해서 표적은 믿음을 위해 우리를 준비시키는 결과
와 말씀에 의해 잉태된 믿음을 더욱 강건하게 하는 결과 등 두 가지 효과를 지니고 있
다. 따라서 니고도모는 전자의 유익을 얻었던 것이다. 표적을 통하여 니고데모는 그리
스도를 하나님의 참 선지자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결론적인 것이 아니다. 선지자들이 마치 참된 표적에 의하여 자신을
하나님의 사역자로 증명하기라도 한 것처럼 무지한 자들을 그들의 기만책으로 속일 수
도 있기 때문이다. 믿음이 표적에 의존한다면 참과 거짓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겠는
가? 과연 모세는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지의 여부를 이러한 방법으로 시험
받게 된다고 선언하고 있다(신13:3). 우리는 또한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이 많은
사람들의 눈을 미혹할 것이기 때문에 신자들은 거짓된 표적을 경계해야 한다고 했던
그리스도와 바울의 경고를 알고 있다(마24:4). 나는 이러한 일이 하나님의 의로운 승
락에 의하여 가능하다고 대답한다. 왜냐하면 미혹을 받을 자는 사단의 간계에 의해 미
혹을 받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이 표적을 통하여 택
한 자들에게 나타나는 것을 막지는 못한다고 말한다. 표적은 택한 자들에게 참되고 건
전한 교훈을 확인시켜 주는 가치있는 확증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도 그
의 사도됨이 표적과 기사와 능력에 의해 확증되었다고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고후
12:12). 그러므로 사단이 아무리 어두움 속에서 하나님을 흉내내느라고 설친다해도,
눈이 뜨이고 신령한 지혜의 빛이 빛날 때는, 표적과 기사가 하나님의 임재하심에 대한
충분한 증거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이 사실임을 니고데모의 발언을 통하여 느끼
게 된다.
3:3
진실로 진실로 내게 이르노니 - 그리스도는 니고데모의 시선을 모으기 위해 진실
로(amen)라는 말을 반복하고 있다. 주님께서 가장 중요한 주제에 대하여 말씀하려 할
때에, 그는 니고데모로 하여금 한층 더 주의를 환기시킬 필요를 느꼈다. 그의 주의를
끌지 않는다면 니고데모가 여기에 기록한 전체 교훈을 가볍게 지나쳐버릴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진실로'라는 말씀을 두번이나 반복하시는 목적이다.
비록 이러한 말씀이 가능성이 희박하고 거의 경우에 맞지 않는 말처럼 보이지만, 이
렇게 말문을 연 것은 그리스도에게 아주 적절한 것이었다. 갈지 않은 땅에 씨를 뿌리
는 것이 쓸데 없는 일인 것처럼, 복음의 말씀은 우선 듣는 사람이 가르침을 받고 순종
할 준비를 갖추지 않는다면 허공에 던져 버리는 말씀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
스도께서는 니고데모의 마음이 가시로 가득차 있고 많은 독초로 무성해 있기 때문에
신령한 교훈을 받을 마음의 여지가 거의 없음을 아셨다. 이러한 권고는 어떠한 방해물
도 그의 가르침을 헛되게 하지 못하도록, 니고데모의 마음 밭을 갈아 깨끗이 한 것과
같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이 말씀을 단 한 사람에게 했음을 기억하도록 하자. 하
나님의 사자들이 우리 모두에게 매일 같은 어조로 말씀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주시기 위
해서 한 사람에게 대표적으로 말씀하셨다. 우리 중에 "나는 부패한 성품에서 제외되기
때문에 이와같이 새롭게 될 필요가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
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학교에서 유용하게 공부하기를 바란다면, 여기서부터
출발하도록 하자.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 바꾸어 말하자면, 하나님이 나라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너에게 결여되어 있는 한, 네가 나를 선생이라고 인정한다 해서 별로 대수로울 것이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첫 걸음은 새사람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말씀은 아주 뒤어난 말씀이니만큼 각 부분을 상세하게 검토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본문의 문맥에 나타나 있듯이 하나님 나라를 보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
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하늘나라를 뜻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생
각이다.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에서 믿음으로 시작되어 매일 믿음의 계속적
인 향상에 따라 늘어가는 신령한 생명을 말한다. 그러나 이 말씀이 뜻하는 바는, 사람
이 먼저 거듭 나지 않는다면 교회에 들어올 수도 없고 하나님의 자녀로 간주될 수도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말씀은 무엇이 그리스도인의 생활 즉 신앙 생활의 시초인지
를 간결하게 보여주고 있다. 동시에 우리는 이 표현에서, 우리 모두가 나면서부터 하
나님 나라와는 관계 없는 외국인과 나그네라는 가르침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또한
그리스도께서 중생(重生)을 통하여 우리를 변화시키기 까지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대치 상태가 계속되는 것이다. 이 말씀은 보편적인 것이며 모든 인류에 해당되는 말씀
이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한 사람이나 혹은 몇몇 사람에게만 그들이 먼저 거듭나지 아
니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면, 주님께서 특정한 종류의 사람들만이
뜻하셨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에 관하
여 말씀하고 계신다. 여기에는 예외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여기에 쓰인 용어는 제
한이 없는 것으로서 "누구든지 거듭나지 아니하면"과 같은 보편적인 표현이기 때문이
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는 '거듭난다'(born again)는 표현을 통하여 일부분의 개조를
뜻할 뿐만 아니라 인격 전체의 혁신을 의미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안에 불
완전하지 않은 부분이 전혀 없음을 알 수 있다. 전체와 각 부분에 변혁이 필요하다면
전체적으로 모두 다 부패한 것이 틀림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에 대하여 잠시 후 좀
더 상세히 언급하기로 하겠다.
에라스므스(Erasmus)는 씨릴(Cyril)의 의견을 따라 * (아노텐)라는 부사
를 위로부터(from above)라고 잘못 번역했다. 나는 이 낱말의 의미가 헬라어상으로 모
호함을 인정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니고데모에게 히브리어로 말씀하셨음을
알고 있다. 그런 경우 니고데모로 하여금 육신의 두번째 탄생을 놓고 어린 아이와 같
이 주저하도록 할 만한 모호함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니고데모는 그리스도의 말
씀을 사람이 '다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뜻으로 받아
들였다.
3:4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 비록 그리스도의 표현 방법이 율법과
선지와의 글에 그대로 쓰이고 있지는 않지만, 재생은 성경에 전체적으로 언급되어 있
는 것으로서 믿음의 제1차적인 원칙 중의 하나님을 우리가 인정한다면, 당시의 서기관
들이 성경에 얼마나 무지했는가를 알 수 있다. 물론 중생의 은혜를 알지 못함으로 결
함이 있었던 것은 이 사람 하나만이 아니었다. 거의 모든 서기관들이 교묘하고 난해한
말장난을 일삼고 있었기 때문에, 경건의 교훈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소홀히 하고
있었다. 오늘날 우리는 가톨릭 신학자들 속에서 비슷한 예를 발견한다. 이들은 난해한
추리를 늘어 놓으면서 그들의 일생을 허송하지만, 하나님께 대한 예배나 구원의 확신
이나 경건의 연습에 관해서는 구두 수선공이 천문학에 대하여 아는 것 만큼도 모른다.
또한 이들은 이방의 신화에는 몰두해 있으면서도 성경의 참된 가르침은 교사의 권위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멸시하기를 좋아한다. 그렇다면 니고데모가 지푸라기에 걸려 넘어
졌다고 해서 놀랄 필요는 없다. 스스로 지혜롭고 저명한 교사로 생각하며 보통 평범한
교훈을 낮고 천하다고 평하는 자들이 작은 일에 놀라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마땅한
응징이기 때문이다.
3:5
사람이 물과...로 나지 아니하면 - 이 말씀은 여러가지로 설명되어 왔다. 어떤 사
람들은 여기에 중생의 두 가지 다른 부분이 명확히 표현되어 있다면서, 물은 옛 사람
을 부인하는 것을 뜻하고, 성령(Spirit)은 새 생명을 뜻한다고 말하고 있다. 또 어떤
이들은 마치 그리스도께서 물과 성령을-즉 순수한 액체 요소를-인간의 땅에 속한 성품
과 대조시키기라도 하듯, 그 비교가 암시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이들은 이
말씀을, "그리스도께서 무겁고 짐스러운 우리의 육신 덩어리를 벗어버리고 물처럼 변
화되어 위로 향해 올라가고, 적어도 땅에 매이지는 말라고 명령하고 계시다"라고 비유
적으로 풀이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위의 두 가지 의미가 모두 그리스도께서 뜻하
시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더 많은 사람이 공감하고 있는 크리소스톰(Chrysostom)은 이 '물'이라는 낱말을 세
례와 연관시키고 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세례에 의하여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간다는 뜻이 될 것이다. 세례를 받을 때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를 거듭나게 하기 때문
이다. 그래서 이로부터 영생의 소망을 위해 세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믿음이 생
겨난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여기에 세례를 말씀하고 있다고 우리가 인정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제한시켜 구원을 외부적인 표적에 연관시키는 잘
못을 범해서는 안되겠다. 오히려 그리스도께서는 물을 성령과 연관시키고 있다. 눈에
보이는 표징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우리 속에 이루어 주시는
새 생명을 증거하고 인치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세례를 소홀히 한다면 구원에서 제외
된다는 것은 과연 사실이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세례가 필요하다고 자인한다. 그러나
구원의 확신을 세례에 국한 시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이 말씀에 관한 한, 나는
도저히 그리스도께서 세례에 대해 말씀하고 있다고 믿을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상황과 시기에 맞지 않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앞에서 설명한 대로, 니고
데모를 새 생명에 참여하도록 권유하려면 그리스도의 목적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
다. 새 사람이 되기 시작할 때까지는 니고데모가 복음을 받을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하여 반드시 거듭나야 하며 성령께서 이 둘째 탄생
(중생)의 주가 되신다는 말은 단 하나의 문장이다. 니고데모가 피타고라스가 말하는
어떤 신생(新生)에 대하여 공상하고 있을 때,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그와 같은 오류에
서 해방시키기 위하여 설명조의 어투로 사람이 두번째 태어나는 것은 자연 현상으로
되는 것이 아니며 또 새로운 몸을 입고 다시 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은혜에 의하여
심령이 새롭게 될 때 거듭나는 것이라고 부언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물
과 성령'이라는 낱말을 같은 것을 뜻하는 것으로 쓰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억지 해석
으로 간주되어서는 안되겠다. 성령이 언급될 때, 그의 능력을 표현하기 위해 물이나
불이라는 말을 부언하는 것은, 성령에 흔히 자주 나타나는 화법이다. 우리는 때때로
그리스도께서 성령과 불과 세례를 주신 것을 듣게 된다. 불은 성령과 다른 것을 뜻하
는 것이 아니라 다만 우리 속에 역사하는 이 성령의 능력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 주는
것이다. 주님께서 물이라는 말을 먼저 쓴 것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 어귀는
다른 것보다 더 쉽게 흐르고 있을 뿐이다. 한 마디로 평범한 문장이 은유에 어울리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사람이 물로 새롭게 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
다고 그리스도께서 말한 것과 같다. 그리고 이 물은 우리를 새롭게 씻어주고, 우리가
전혀 불모의 상태로 태어났을 때, 우리위에 부어진 그의 능력을 따라 우리에게 하늘의
생명의 원기를 옮겨주는 성령이라고 말한 것과 같다. 그리고 니고데모의 무지함을 책
망하기 위해 그리스도는 성경에 흔히 나오는 화법을 적절히 구사하고 있다. 니고데모
는 결국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이 선지자들의 일반적인 교훈에서 나온 것임을 인식하
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물은 단순히 성령의 깨끗게 하시고 소생케 하시는 역사를
뜻하는 것이다. 그것을 설명하는 의미로서 '과'(and)라는 말을 쓴 것도 이례적인 것이
아니다. 후자가 전자를 설명하는 뜻으로 쓰일 때 이러한 표현이 쓰이기 때문이다. 그
리고 역시 그 문맥이 나의 생각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거듭나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를 말할 때 그가 요구하는 새 생명이 성령으로부터만 오는 것임을
보여 줄 때 물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물이 성령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것임을 알 수 있다.
3: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 그리스도께서는 거듭남에 의하여 입구가 우리에게 열리
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닫혀있음을 대조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신령하기 전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음을 그리스도는 당연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모태로부터 육에 대한 것외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면서부터 하늘의 생명을 박탈당하고 죽음의 노예가 된 채 하나님의 나라에서
추방당한 상태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사람은 모두가 육신
뿐이기 때문에 거듭나야 된다고 역설하실 때, 그는 육(flesh)이라는 낱말 하나에 전
인류가 갇혀 있다고 본 것이 분명하다. 여기 육은 몸만이 아닌 혼을 그리고 혼의 각
부분을뜻하고 있다.가톨릭 신학자들은 어리석게도 육을 그들이 육욕적(sensual)또는
관능적이라고 부르는 부분에 국한시키고 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중생
이 즉 두번째 거듭남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신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 부적당한 것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가톨릭 교도들 말대로 한다면, 우리의 일부분이 썩은 것이기 때문이
다. 그러나 육이 건전한 것에 비교하여 부패한 것을 대조시킨 것처럼 성령에 대조되는
말로 쓰였다면, 그리고 곧은 것에 대한 굽은 것을, 거룩한 것에 대한 더러운 것을, 순
결한 것에 비추어 오염된 것을 대조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인간의 본성 전체가 한 마
디로 정죄되어 있음을 결론지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이
해와 사고가 육적이기 때문에 썩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마음의 모든 정욕이 역시
육적이기 때문에 타락되어 있고 부패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영혼(soul)은 인간의 번식에 의하여 생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의 주
요 부분은 육에서 난 것이 아니라는 어려운 난제가 제기될 수 있다. 이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은 우리의 몸(육체)뿐만 아니라 영혼도 그 근원이 번식 과정을 따라서 부모로부
터 물려받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모든 영혼이 샘에서 흘러나오듯, 한
영혼에서 유출된 것이 아니라면 우리의 영혼에 자리잡고 있는 원죄가 한 사람으로 말
미암아 모든 그의 후손에게 퍼지게 되었다는 말은 모순적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과연 그리스도의 말씀은 언뜻 보기에는 우리가 단순히 육에서 났기 때문에 육이라고
암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가 태어날 때 우리는 육
적인 것임을 의미하고 있을 뿐이라고 대답한다. 우리가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는 한 우리의 성품은 오로지 육적인 것에만 취향을 갖고 있다는 뜻이
다. 주님은 단순히 인간의 성품과 초자연적인 은사의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류가 부패한 것은 생식에 의하여 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된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한 사람 안에서 우리 모두를 꾸려주셨던 것
처럼, 그는 또한 그 한 사람 안에서 그의 모든 은사를 우리로부터 앗아갔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들의 부모로부터 각자의 악덕과 부패를 유전받은 것이 아니라 아담 한 사
람 안에서 우리가 한결같이 부패되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아담이 타락한 즉시 하나님
께서는 자신이 스스로 인간에게 하사하셨던 것을 인간의 본성으로부터 취하여 가셨기
때문이다.
여기에 또 다른 난제가 일어난다. 이 타락한 본성에 하나님의 은사 중 몇가지가 아
직 남아있는 것이 확실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모든 부분이 다 타락한 것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온다. 해답은 간단하다. 주님께서 타락 후에 우리에게 남겨 두셨던 은사들은
그 자체를 보아 분명 칭찬을 받을 가치가 있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악의 감염이 온 전
신 각 부분에 퍼져나가자, 더러움에 감염되지 않은 깨끗하고 순수한 것은 우리 안에서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하나님께 대한 내재적인 지식이 어느 정도 우리 안에서 있다
든가,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는 것이 우리 양심에 새겨져 있다든가, 현재의 생명을
유지, 적응할 능력이 있다든가......간단히 말하여, 우리가 여러 면으로 짐승보다 뛰
어나다는 것은, 그것이 하나님께로서 말미암은 이상 그 자체가 우수한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우리 안에 오염되어 있다. 이것은 마치 포도주를 담은 가죽부대의 악취
에 의하여 완전히 부패된 포도주가 그 향긋한 향취를 잃고 쓰디 쓴 맛을 내는 것과 같
다. 이제 인간에게 남아 있는 하나님께 대한 지식은 무서운 우상 숭배와 각종 미신의
원천일 뿐이다. 사물을 선택하고 구별하는 판단력의 일부인 눈이 멀었고 무지하게 되
었으며, 불완전하고 혼동되었다. 그리고 무엇이든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헛된 것
과 사소한 일에 낭비되어 있으며 의지는 악으로 달려가기에 바쁘다. 따라서 우리의 인
격 안에는 의(義)의 광선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가 거듭남으로써 하
나님 나라를 위해 다시 창조되어야 함은 자명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말씀이
뜻하는 바는 사람이 그의 모태로부터 육적인 존재로 나왔기 때문에, 신령해 지려면 성
령에 의해 새로 지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령이라는 말은 은혜를 위하
여, 그리고 은혜의 성취 또는 효능을 위하여 두 가지 의미로 쓰여졌다. 우선 그리스도
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성령이 순수하고 의로운 성품의 유일한 주체가 되신다고 가
르치고 계신다. 그리고 후에 그리스도는 우리가 그의 능력에 의하여 새로와졌기 때문
에 신령하다고 말하고 있다.
3:7
기이히 여기지 말라 - 주석가들은 이 말씀을 여러가지로 의곡해서 풀이해 왔다.
어떤 이들은 이 말씀이 니고데모나 그와 같은 사람의 어리석음을 공격하고 있다고 생
각한다. 그들이 하늘로부터 말미암은 중생의 비밀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조금도 놀라
울 것이 없다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기라도 하듯 이들 주석가들은 니고데모의 어리석
음을 나무라고 있다. 그런데 이런이들은 자연의 질서 가운데서도 지각있는 일에 대한
이유를 터득하지 못한다. 어떤 이들은 또 독창적이긴 하나 너무나 억지가 섞인 의미를
생각해 낸다. 이들은 바람이 임의로 부는 것처럼 우리가 성령의 거듭나게 하심으로 자
유하게 되어 죄의 멍에로부터 벗어나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달려가게 된다고 말하고 있
다. 하나님의 성령은 그의 기쁘신 뜻대로 역사한다고 한 어거스틴의 제언도 그리스도
께서 뜻하신 바와는 거리가 멀다. 바람으로 비유를 들어 이 말씀에 적용시켜 "그 능력
을 느낄 수 있으나 바람의 근원과 원인은 숨겨있다"고 말한 크리소스톰과 씨릴(cyril)
은 사실 어거스틴 보다 낫다. 나는 그들의 의견에 크게 반대하지 않으나 그리스도께서
뜻하는 바를 좀 더 명확하게 설명해 보기로 한다. 내 논리의 시발점은 그리스도께서
자연의 질서로부터 비유 방법을 빌려왔다는 것이다. 니고데모는 자기가 중생과 새 생
명에 대하여 들은 것을 믿을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중생의 방법을 도저히 이해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니고데모로부터 이러한 어려움을 제거해 주기 위하여 그리
스도께서는 육신의 생활 속에서도 그 원칙이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능력이 놀랍게 나
타나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모든 것이 공기의 생동적인 호흡에서 연유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공기의 움직임까지도 파악할 수 있는 것이지만, 공기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
는지는 알지 못한다. 만일 임시적이고 잠정적인 생활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너무나 힘
있게 역사하셔서 우리가 그 능력을 기이하게 생각한다면, 우리의 제한된 마음으로 하
늘에 속한 초자연적인 생명 안에서 하나님께서 비밀스럽게 행하시는 일을 헤아리려 하
고 보는 것 이상은 믿지 못하겠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짓이냐! 그래서 바울
은 썩을 몸이 흙으로 돌아간 후에 복된 생명의 몸으로 덧입게 된다는 말씀이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는 근거를 내세워 부활의 교훈을 거역하는 자들에게 의분을 터뜨리고 있
다. 바울은 그들에게 곡식 한 알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고려하지 못하는 그
들의 어리석음을 책망하고 있는 것이다(고전15:36,37). 이것이 다윗이 시편 104편 24
절에서 노래하고 있는 하나님의 기이한 지혜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지으신 자연의
일반적인 질서를 보고도, 한 걸음 더 올라가 그리스도의 신령한 나라에서는 하나님의
손이 훨씬 더 능력이 있음을 인정하지 못하는 자들은 극히 어리석은 것이다. 그리스도
께서 그에게 기이히 여기지 말라고 했을 때, 그가 마치 우리의 최대의 경탄을 받을 가
치가 있는 하나님의 훌륭한 솜씨를 멸시해도 좋다는 뜻으로 말한 것처럼 오해해서는
안되겠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방해할 정도로 그저 놀라움에 사로 잡혀
서는 안된다고 지적하고 계신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고상하고 어렵다고 생각하는
것을 터무니 없는 것으로 돌려버리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성령에 의하여
우리가 새로 지음을 받아 새 사람이 되는 것을-비록 주님께서 우리를 중생시키는 방법
이 우리에게 숨겨져 있다하더라도-의심하지 않도록 하자.
3:8
바람이 임의로 불매 - 엄격히 말하자면, 바람이 자발적으로 분다는 뜻이 아니라,
바람의 움직임이 자유롭고 변화무쌍하기 때문에, 공기는 때때로 이 방향으로 또 어떤
때는 저 방향으로 이동된다는 말씀이다. 이것은 적절한 말씀이다. 왜냐하면 바람이 물
처럼 정해진 방향으로만 흐른다면 그것은 기이함이 덜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영의 움직임과 작용
은 공기의 움직임이 이 지상의 외적인 생활 가운데 나타나는 것만큼 중생한 사람의 생
활에 나타나 보이게 마련이지만, 그 모양은 숨겨져 있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우리
가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능력을 사모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감사하지 못하고 인색
하게 된다. 하늘에 속한 하나님의 능력에 대하여 주님께서는 아주 뛰어난 예를 이 세
상에서 보여주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혼의 구원을 회복하는데 주님의 능력으로 돌리
는 것보다 우리의 육체를 보전하는데 더 많은 주님의 은혜가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감사드리는 일에 인색한 것이다. 이 문장을 "거듭난 사람안에서
역사하는 성령의 능력과 효능이 이와 같으니라"고 바꾸어 표현한다면 의미가 좀 더 분
명해 질 것이다.
3:9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 우리는 여기서 니고데모의 가장 주된 어려
움이 무엇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그가 듣는 것은 모두가 터무니 없이 엉뚱하게 보인
다. 그 말씀의 내용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의 교만보다 우리에게 더
큰 장애물은 없다. 우리는 항상 정도 이상으로 더 현명해지기를 원한다. 그러므로 우
리는 마치 하나님의 무한하신 능력을 우리의 유한한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것이 정당한
태도인 것처럼, 우리의 이성에 따라 설명되지 않는 모든 것을 사단적인 교만으로 거절
해 버린다. 우리는 물론 정중하게 경건한 마음의 태도로, 어느 정도는 하나님께서 하
시는 일의 방법과 이유를 탐색해도 좋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
지 않는다는 반대 이유를 내세워 그것을 하나의 신화로 돌려버린다. 우리는 이 주제를
6장에서 더 상세히 다루게 될 것이다.
3:10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 - 그리스도께서는 이 교
만한 사람을 가르치는데 그의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제
니고데모를 책망한다. 과연 이러한 사람들을 가르치는데 있어서는, 그들을 부풀게 하
고 있는 그 비뚤어진 자만심이 무너지기 전에는 어떠한 진전도 기대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그의 교만을 누르는데 있어 아주 적절한 반박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께서는 니고데모가 스스로 가장 조예가 깊다고 생각하고 있는 문제에 대하여 그가 얼
마나 무식한가를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불가능한 것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 신
중하고 지혜롭다고 생각했다. 어떤 문제에 대해 잘 알아보기도 전에 남의 말을 받아들
이는 사람은 어리석은 정도로 잘 속기 때문이다. 그러나 행정관리처럼 교만하고 어처
구니없게 행동하는 것은 니고데모다. 그는 제 일차적인 원칙들에 대하여 국민학교 학
생보다 더 당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의심은 저속하고 부끄러운 것이다. 만
일 사람이 하나님의 성령에 의하여 거듭난다고 믿지 않는다면, 무슨 종교를 가질 수
있으며, 하나님께 대하여 무슨 지식과, 바른 행동에 대해 어떤 규범을, 그리고 영원한
생명에 대해 무슨 소망을 가질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강조점은 '이런'이란 낱말에 있
다. 성경은 이 부분의 교리에 대하여 거듭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아주 어린 초심자에
게까지 이 진리는 알려지지 않으면 안된다. 따라서 하나님의 교회 내에서 교사로 자처
하는 사람이 이것을 모르고 이에 숙련되지 않았다고 하는것은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3:11
우리 아는 것을 말하고 - 어떤 이들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세례요한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다른 이들은 복수는 단수 대신에 쓰인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나
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하나님의 선지자들과 연합하고 있으며 또 그들을 위하여 말하고
있음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철학자들과 스스로 지혜있는 체하는 선생들은 종종
자기들이 지어낸 사소한 이론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확실한 것만을
교훈하는 것은 자기와 하나님의 종들 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나님은 자기 종들이
알지 못하고 의심하는 것을 얘기하라고 그들을 내보내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은 자
기에게서 배운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라고 그들을 그의 학교에서 훈련시킨다. 뿐
만 아니라 그리스도는 이 증언에서 자기의 교훈의 확실함을 우리에게 자천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그의 사역자들에게 그들의 꿈이나 추측을 제시하거나
확실성이 희박한 인간적인 발상을 선전하지 말고, 하나님을 순수하고 진실되게 증거하
여 중용을 지킬 것을 간청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 각자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
신 것에 유념하여 각자의 믿음의 한계를 벗어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끝으로 우리는 주님께서부터 들은 것 외에는 아무 것도 말하지 말도록 하자.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말씀이 우리에게 완전한 권위를 지니도록, 그의 교훈을 하나의
맹세로서 확증하고 있음을 주목해야겠다.
그러나 너희가 우리 증거를 받지 아니하는도다 - 인간의 배은망덕한 태도에 의해 복
음이 손상을 받지 않도록 이 말씀을 부언하고 있다. 하나님의 진리는 그것을 믿는 소수의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가는 곳마다 세상의 거부를 받기 때문에, 우리는 복음을 멸시하는 거의 전 세상과, 불신앙으로 복음을 흐리게 하는 세상에 의해 진리의 권위가 약화되는 일이 없도록 진리를 세상의 멸시로부터 구출해야 한다. 비록 말씀의 의미는 간단하고 직설적인 것이지만, 우리는 이 말씀에서 두 가지의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첫번째는 이 세상에 복음을 믿고 따르는 제자 수가 아주 적다하더라도 복음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 흔들려서는 안되겠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비록 너희가 나의 가르침을 받아 들이지 않지만, 나의 교훈은 언제나 확실하고 영원한 것으로 남아있다. 너희 불신앙이 하나님의 항상 미쁘심을 막을 수는 없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그리고 두번째 교훈은, 오늘날 복음을 믿지않고 거부하는 사람들을 결단코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진리는 어김없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진리의 방패를 무장
하여, 인간의 불순종에 대항하며 복음에 순종하는 가운데 인내해야 할 것이다. 이 원칙은 꼭 지켜져야 한다.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의 터 위에 서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건축자로 모실 때, 우리는 하늘 위로 올리운 것처럼, 온 세상을 발 아래 두고 어떠한 불신앙의 사람을 만나더라도 당황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불평에서 그의 증거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것과 말하자면, 하나님의 말씀의 운명이 모든 시대를 통하여 극소수의 사람들에게만 믿음의 호응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너희가...받지 않는다"고 했을 때 그는 대다수의 사람들, 즉 거의 모든 사람들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믿는 자의 수가 적다고해서 우리가 낙망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3:12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 그리스도께서는 니고데모와 그의 동료들이 복음의 교
훈을 깨닫지 못한다면 그들에게 문제가 있다고 결론을 내린다. 그는 우리가 바로 교육을 받지 못한 것은 그의 잘못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하늘로 들어올리기 위하여 지상에 직접 내려오셨기 때문이다. 난해하고 학구적인 문장으로 배우기를 원하는 것이 보통 사람들이 흔히 범하는 잘못이다. 그래서 많은 수의 사람들이 고상하고 난해한 추리와 철학을 좋아하는 것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복음에서 그들의 귀를 즐겁게 해줄 만한 화려한 언어를 찾을 수 없기 때문에 복음을 무가치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이들은 평범하고 낮게 보이는 교훈은 연구하려고 마음을 쓰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무식한 처지에까지 자신을 낮추셨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그만큼 낮은 경의를 표한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무례한 태도인가, 주님께서 성경 안에서 낮고 평범한 어조로 우리와 대화를 나누는 것은 우리를 위해서임을 알자.
누구든지 성경이 너무나 평범하고 세족적인 용어로 되어 있기 때문에 불쾌하다든가 또는 성경이 너무나 서민적이기 때문에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에 맡길 수 없다고 핑계를
대는 자는 거짓말장이가 된다. 주님께서 가까이 계실 때에 하나님을 영접할 수 없는
자는 구름 저 편에 있는 하나님께로 날아 올라갈 리가 없기 때문이다.
"땅의 일을" 어떤 이들은 이것을 영적인 교훈의 기초라고 설명한다. 우리 자신을 부
인하는 것은 경건을 연습하는데 있어서 첫 단계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가르치는 형태에 연관시키는 이들과 의견을 같이한다. 비록 그리스도의 말씀이 모두
하늘에 의한 것일지라도 너무나 평범한 방법으로 표현하셨기 때문에 그의 어조는 어떤
의미에서 땅에 속한 것처럼 보였다. 뿐만 아니라 이 말씀은 이 한번의 대화에 국한시
켜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평상적인 교훈방식이-평범한 간결성-야망과 허영
에 들떠 있는 사람들이 반해있는 화려한 선전과 대조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3:13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 주님은 다시 니고데모에게 자신과 자신의 명철을
믿지 말라고 권유하고 있다. 어떠한 사람도 자신의 노력에 의하여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고 다만 하나님의 아들의 인도함을 받는자 뿐이기 때문이다. 하늘에 올라간 자에게
는 하나님의 비밀에 대한 순수한 지식과 신령한 지혜의 빛이 따르게 마련이다. 그리스
도께서는 여기서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좇지 아니하나니"(고전
2:14)라고 했던 바울과 똑같은 진리를 가르치고 있다. 그리함으로써, 바울은 하나님의
일에서 인간의 지혜의 모든 총명을 제외시키고 있다. 인간의 지혜는 하나님의 지혜보
다 훨씬 열등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말씀이 하늘에 속한 그리스도만이 "하늘에 올라가고"나머지 모든
사람에게 그 입구가 닫혀 있다고 말하고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바로 앞의 문장에서그
는 온 세상을 하늘 밖에 둠으로써 우리를 겸허하게 만들고 있다. 바울은 하나님께 지
혜주시기를 원하는 자는 자기에게 미련한 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고전3:18). 우리
에게 이보다 하기 싫은 일이 또 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관계할 때 우리
의 모든 지각이 사라지고 약화됨을 믿어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하늘
문을 닫으신 후 그는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용인되지 않았던 것이 인자에게 주어졌다
고 덧붙임으로써 즉시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 그가 하늘에 오르신 것은 자기 개인을
유익하게 하려함이 아니고, 우리의 지도자와 안내자가 되기 위함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로 모든 축복에 참여케 하고 우리와 같은 육체로 옷 입으신 자신과 함께 같은 옷
을 입고 있음을 의미치 않게 하기 위하여 자신을 사람의 아들(인자)이라 부르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유일한 해석자가 되시기 때문에, 그는 우리를 자기가
아니었으면 그대로 감추어져 있을 비밀로 인도한다.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거하고 있으
면서 하늘에 있다고 말하는 것은 어처구니 없는 말로 들릴지 모른다. 그러나 자신이
그의 신성은 사실이었다고 대답한다면, 이 표현은 전혀 다른 뜻을 지니게 된다. 즉 그
가 사람이지만 하늘에 계시다는 것이다. 여기에 장소가 언급되어 있지 않다고 말할 것
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신분상으로 다른 사람들로 부터 구분되어 있을 뿐이다. 그는
전 인류가 추방당한 상태에 있는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
도 안에 위격(位格)의 일치를 위해 하나의 성격에서 또 다른 특징으로 표현을 바꾸는
것은 종종 있는 일이기 때문에 우리는 또 다른 해결책을 찾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
래서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육체를 입으시고, 우리를 자기와 함께 하늘로
올리우시기 위하여 사랑의 손을 뻗치신 것이다.
3;13
모세가 광야에서 -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이 왜 자기에게만 열려 있는지를 더욱 분
명히 설명하고 있다. 그는 자기를 그들의 지도자로 모시고 따르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
들을 그곳에 데리고 가기를 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
의 능력을 부어 줄 수 있도록 만인에게 공개적으로 계시된 것을 선언하고 있기 때문이
다.
뱀을 든 것 같이 - 들었다는 말은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눈에 띄는 곳에 놓여진
것을 뜻한다. 이것은 복음이 전파되는 중에 일어났다. 이것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결
부시켜 해석하는 사람들의 설명은 그 문맥과 일치하지 않으며 그리스도의 말씀과 거리
가 있다. 이 말씀의 단순한 의미는 이사야가 예언했던 대로, 복음이 전파됨으로 말미
암아 그리스도께서 하나의 본보기로 높이 들기게 된다는 것이다(사2:2). 이와 같이 높
이 들렸던 놋 뱀을 선택했다. 민수기 21장 9절에 잘 나타나 있는 대로, 누구든지 뱀에
물린 사람은 장대 끝에 달린 놋뱀을 보기만 하면 즉시 고침을 받았다. 이 말씀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복음이 전파되는 가운데 자기가 모든 사람의 눈 앞에 세워짐으로, 누구
든지 믿음의 눈으로 자기를 바라보면 구원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
기 위하여 놋뱀을 소개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복음 안에서 분명히
우리 앞에 제시되어 있으며, 아무도 복음이 모호하다고 불평할 수 없음을 인식하게 된
다. 이 계시는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것이며 믿음의 눈은 그가 우리에게 나타나 있음
을 보는 것이다. 그리하여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지 않느냐(갈3:1)고 물었던 것이다.
이 비유는 부적당하거나 과장된 것이 아니다. 놋뱀이 외양(外樣)만 뱀이지 아무런
독의 요소를 가지지 않았던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우리 속에 있는 치명적인 죄의 상
처를 고쳐주려고, 죄와 관계 없는 분으로서 죄있는 육신의 모양을 입으셨다. 유대인들
이 뱀에게 물렸을 때 그와 같은 해독제로 맞선 것은 결코 헛된 일이 아니었다. 그리스
도께서 자기가 이름없는 비천한 존재로 멸시당하고 있음을 아셨을 때 뱀이 들렸던 사
실을 지적한 것은 아주 적절한 일이었다. 그것은 마치 그리스도께서, 이미 율법에 뱀
의 형태로 윤곽이 제시되어 있는 것처럼, 인간의 의견에 반하여 그가 아주 낮은 처지
에서 높이 들리게 된다 해도, 이상한 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고 말슴하시는 것과 마찬
가지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자기와 뱀 사이에 유사점이 있어서 스스로를 뱀에
비교했는지, 아니면 그것을 만나와 같은 예식으로 생각하고 말씀하셨는지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왜냐하면 만나가 육신적으로 몸에 좋은 것이었으나 바울은 그것이 신령한 비
밀이었다고 선언하고 있기 때문이다(고전10:3). 이 성경 말슴에서 비추어 볼 때 나는
놋뱀도 마찬가지였다고 생각한다. 이 놋뱀은 후에 백성의 미신에 의하여 우상으로 변
할 때까지 후손으 루이하여 보전되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누가 달리 생각한다면
나는 그것에 대하여 변론하고 싶지 않다.
3:14
모세가 광야에서 -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이 왜 자기에게만 열려 있는지를 더욱 분
명히 설명하고 있다. 그는 자기를 그들의 지도자로 모시고 따르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
들을 그곳에 데리고 가기를 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
의 능력을 부어 줄 수 있도록 만인에게 공개적으로 계시된 것을 선언하고 있기 때문이
다.
뱀을 든 것 같이 - 들었다는 말은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눈에 띄는 곳에 놓여진
것을 뜻한다. 이것은 복음이 전파되는 중에 일어났다. 이것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결
부시켜 해석하는 사람들의 설명은 그 문맥과 일치하지 않으며 그리스도의 말씀과 거리
가 있다. 이 말씀의 단순한 의미는 이사야가 예언했던 대로, 복음이 전파됨으로 말미
암아 그리스도께서 하나의 본보기로 높이 들기게 된다는 것이다(사2:2). 이와 같이 높
이 들렸던 놋 뱀을 선택했다. 민수기 21장 9절에 잘 나타나 있는 대로, 누구든지 뱀에
물린 사람은 장대 끝에 달린 놋뱀을 보기만 하면 즉시 고침을 받았다. 이 말씀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복음이 전파되는 가운데 자기가 모든 사람의 눈 앞에 세워짐으로, 누구
든지 믿음의 눈으로 자기를 바라보면 구원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
기 위하여 놋뱀을 소개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복음 안에서 분명히
우리 앞에 제시되어 있으며, 아무도 복음이 모호하다고 불평할 수 없음을 인식하게 된
다. 이 계시는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것이며 믿음의 눈은 그가 우리에게 나타나 있음
을 보는 것이다. 그리하여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지 않느냐(갈3:1)고 물었던 것이다.
이 비유는 부적당하거나 과장된 것이 아니다. 놋뱀이 외양(外樣)만 뱀이지 아무런
독의 요소를 가지지 않았던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우리 속에 있는 치명적인 죄의 상
처를 고쳐주려고, 죄와 관계 없는 분으로서 죄있는 육신의 모양을 입으셨다. 유대인들
이 뱀에게 물렸을 때 그와 같은 해독제로 맞선 것은 결코 헛된 일이 아니었다. 그리스
도께서 자기가 이름없는 비천한 존재로 멸시당하고 있음을 아셨을 때 뱀이 들렸던 사
실을 지적한 것은 아주 적절한 일이었다. 그것은 마치 그리스도께서, 이미 율법에 뱀
의 형태로 윤곽이 제시되어 있는 것처럼, 인간의 의견에 반하여 그가 아주 낮은 처지
에서 높이 들리게 된다 해도, 이상한 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고 말슴하시는 것과 마찬
가지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자기와 뱀 사이에 유사점이 있어서 스스로를 뱀에
비교했는지, 아니면 그것을 만나와 같은 예식으로 생각하고 말씀하셨는지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왜냐하면 만나가 육신적으로 몸에 좋은 것이었으나 바울은 그것이 신령한 비
밀이었다고 선언하고 있기 때문이다(고전10:3). 이 성경 말슴에서 비추어 볼 때 나는
놋뱀도 마찬가지였다고 생각한다. 이 놋뱀은 후에 백성의 미신에 의하여 우상으로 변
할 때까지 후손으 루이하여 보전되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누가 달리 생각한다면
나는 그것에 대하여 변론하고 싶지 않다.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 그리스도께서는 제1차적인 원인을, 다시 말하
자면 우리의 구원의 원천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는 어떠한 의심도 남지 않도록
구원의 원천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비로운 사랑으로 나아가기 까지는
우리의 마음이 쉴 수 있는 평안한 안식처가 없기 때문이다. 구원의 본질과 내용은 '그
리스도 안'이 아닌 다른 곳에서는 도저히 찾아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방법으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까지 들어오시고 왜 그가 우리의 구주로서 들
려졌는지를 알아야 한다. 이 두 가지 요점이 이 곳에 분명히 제시되어 있다-그리스도
를 신뢰하는 믿음이 모두를 살리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자신이 사랑하는 인류가
멸망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생명을 가져왔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때 전후 시제를 주의 깊게 살피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의 본성에 내재하고
있는 인간적인 야심은, 우리가 구원의 원천에 대하여 생각할 때에 우리 자신의 공로에
대한 마귀적인 생각이 즉시 우리 마음에 스며들도록 유도한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우리를 자기의 환심을 살 가치가 있다고 보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셨다고 우리는 상상한다. 그러나 성경은 전체적으로 주님의 깨끗하고 단순
한 자비와 은혜를 선포하고 있다. 이것은 인간적인 모든 공로를 삭제해 버리는 것이
다. 그리고 원인은 주님께서 하나님의 사랑에 있다고 말씀하실 때 그리스도의 말씀도
다른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이 이상 높이 올라가려 할 경우에는, 성령께
서 이 사랑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에 기초를 두고 있다고 한 바울의 선언으로 우
리를 막으신다(엡1:5).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의 눈을 자신으로부터 하나님의 자
비로 되돌리기 위하여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 분명하다. 그는 또 우리 안에 어떤 축복
을 받을 만한 가치나 자격이 있다고 보셔서 하나님의 마음이 감동되어 우리를 구원했
다고 말하지도 않았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의 영광을 전적으로 그의 사랑에 돌리
고 있다. 그리고 이는 문맥상으로 더욱 분명해진다. 주님은 사람들이 심판을 받아 멸
망할까봐서 아들을 인간에게 주셨다고 부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잃어진
자들을 구출해 내기 전까지는, 모든 인간이 영원한 멸망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말이
다. 바울도 또한 우리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원수되었을 때 우리를 사랑해 주셨다
고 시제를 통하여 이를 시사해 주고 있다(롬5:8,10). 과연 죄가 다스리는 곳에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와 그에 따르는 사망 외에 다른 것을 찾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케 하고 또 우리를 생명으로 회복시켜 주는 것도 자비뿐인 것이
다. 그러나 이와 같은 식의 표현은 성경의 여러 증거와 엇갈리는 것처럼 보일수도 있
다. 성경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첫번째 근거를 그리스도 안에 두고, 그리스
도를 떠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
리는 내가 이미 말한 바대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우리를 포옹하는 숨은 사랑은,
하나님께서 영원히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서 흘러나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어떤 이유
보다 근원적인 이유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증거하기를 원하는
은혜, 우리를 구원의 소망으로 인도하는 은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마련된 화해로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증거하기를 원하는 은혜, 우리를 구원
의 소망으로 인도하는 은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마련된 화해로 시작되는 것이다.
주님은 언제나 죄를 미워하신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하여 진노하고 계신
그 죄가 모두 속죄되기 전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심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겠는
가?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자비로우신 사랑에 대해 어떤 느낌을 가질 수
있기 전에,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시키기 위하여 관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의 독생자를 주시어 우리
를 위해 죽게 하였다는 말씀을 듣게 된다. 그러므로 바로 말해서 믿음이 바라 보아야
할 대상은 그리스도 한분 뿐이라고 즉시 부언하고 있는 것이다.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 참된 믿음의 눈은 자기 눈
앞에 그리스도를 놓고 사랑 가운데 부은 바된 하나님의 마음을 본다. 우리의 튼튼하고
흔들리지 않는 증거는 오직 그리스도의 죽음이다. 독생자라는 말은 우리를 향한 하나
님의 사랑의 열도(熱度)를 강조하기 위하여 쓰인 말이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말하면 쉽게 곧이 듣지 않는다. 그래서 모든 의심을 제거하기 위하여,
주님께서는 우리가 그에게 너무나 사랑스럽고 귀한 존재이기 때문에 심지어 외아들까
지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위해 내어 주셨다고 명확히 표현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아주 확실하게 선언하셨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증거로
만족하지 못하고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에게 심한 상처를 입혀주는 것이다.
그러한 사람은 사실상 그리스도를 우연한 사고에 의하여 죽어갔던 평범한 사람으로 취
급하는 것이다. 우리는 오히려 자기의 독생자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구원이
그에게 얼마나 귀중했는가를 측정해 주는 척도임을 생각하고,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독
생자의 죽음으로 그 속죄의 값이 되도록 섭리하셨음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
는 성격상으로 하나님의 외아들인 것처럼, 그의 권한에 따라 독생자라는 이름을 소유
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그의 몸에 접붙인 바 될 때 우리를 양자로
삼아주심으로 이 영예를 우리와 나누신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 믿음의 놀라운 점은 믿음이 우리를 영원한 멸망으로
부터 구원해 준다는 것이다. 그는 특별히 우리에게, 비록 우리가 죽기 위하여 난 자
같을지라도,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분명한 구원이 우리에게 주어졌다고 말해
주기를 원했다. 그래서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차별없이 생명으로 초대하기 위하여 일반적인 용어를 쓰고 계신다. 따라
서 불신자들은 여기에 어떠한 핑계도 댈 수 없는 것이다. 주님께서 이에 앞서 쓰셨던
'세상'이라는 말의 의의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비록 세상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가치가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지만,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모든 사람을 예외없이
초대하는 것을 볼때 그가 온 세상에 대하여 호의적인 관용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스도
를 신뢰하는 것은 과연 생명으로 들어가는 관문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생명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일반적으로 약
속되어 있는 것이지만,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겠다. 그리스도는 모
든 사람에게 열려 있고 모든 이가 볼 수 있도록 공개되어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그를 찾고 구하는 택함 받은 자들의 눈만 열어 주신다. 믿음의 놀라운 효과
가 여기에도 나타나 있다. 믿음에 의하여 우리는 그리스도를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주
신 대로 영접한다. 즉 영원한 죽음의 심판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시고 죽음의 희생을
통하여 우리의 죄를 속죄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영생의 상속자로 삼아주신 분을 우리
는 믿음으로 영접하는 것이다. 이제 아무 것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기 자녀로 인정하
지 못하도록 방해할 것이 없다. 그러므로 믿음이 그의 죽음의 효능과 부활의 열매를
그리스도와 함께 신뢰할 때, 우리가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생명을 획득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믿음이 어떻게 그리고 무슨 이유로 우리에게 생명을 가져
다 주는지는 아직 분명치 않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그의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사 하
나님의 의가 우리 안에 흘러 넘치게 되는 것인지, 아니면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해진
우리가 거저주시는 바 용서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의롭다 인정함을 받게되는
것인지 확실하지가 않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양상이 항상 함께 조화되는 것은 틀림없
는 일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구원의 확신에 대해 관심이 있는 만큼, 중심이 되는
사상은 하나님게서 우리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아니하심으로 얼마든지 우리를 사랑하
시기 때문에 우리가 산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저주와 죽음과 죄를 함께 폐
하고 멸하는 제사(제물)가 언급된 것이다. 나는 이미 이 두 귀절의 경향을 설명했다.
이들은 우리 스스로에게 결핍되어 있는 생명을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할 수 있다고 그
들에게 가르친다. 왜냐하면 이와 같이 비참한 상태에 있는 인간에게는 구속이 구원보
다 우선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3: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 이것은
앞에 나온 문장에 대한 확인이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헛된 것
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온 것은 멸하려 함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에게 맡겨진 적절한 기능은 구구든지 믿는 자는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 것이
었다. 이제 아무도 어떻게 죽음을 피할 수 있는가 염려하거나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
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망에서 건지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임을 우리는 믿기 때문이다.
여기에 다시 '세상'이라는 말이 쓰인 것은, 사람이 누구든지 믿음의 길을 택하면, 아
무도 이 놀라운 은혜에서 제외될 수 없음을 확언하기 위한 것이다.
이 곳에 쓰인 심판(judge)이라는 말은 다른 귀절에서 쓰인 정죄(condemn)라는 말 대
신에 쓰인 것이다. 그가 오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라고 말함으로 주님께
서는 자기가 온 목적을 지적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미 수 없이 멸망된 상태에 있는 우
리를 멸하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올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그의 무한하신 사랑 가운데 잃어진 우리를 돕고 구원하기를 원하신
것 외에 다른 것을 보아서는 안된다. 그리고 우리의 죄가 우리 위에 짓눌러 올때 사단
이 우리를 절망으로 몰아갈 때 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영원한 멸망 가운데 압도당
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이 방패를 높이 들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세상
의 구원이 되도록 확정하셨기 때문이다. 다른 곳에서 그리스도께서 심판하러 오셨다고
말할 때, 그리스도께서 거침 돌이라고 불리울 때, 그가 많은 사람을 넘어지게 하려고
세움을 입었다고 말할 때, 그것은 우연한 것으로 간주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제시되어 있는 은혜를 거절하는 자들은 그에게서 그와 같이 충격적이고 무가치한 멸시
를 보응하는 심판자를 발견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대표적인 예를 우리
는 복음에서 볼 수 있다. 비록 복음이 믿는 사람에게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지만, 많은 사람의 배은(背恩)에 대하여는 멸망으로 변해버린다는 것이다.
바울은 경건한 자들의 복종이 온전히 이루어진 후에 자기의 복음에 대적하는 자들을
벌하려고 예비하는 중에 있다고 즐거워 할 때 이 두가지 측면을 다 표현하고 있는 것
이다(고후10:6). 이 복음의 말씀은 특별히 그리고 우선적으로 신자들을 위한 것으로
서, 그들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자는 것이며 후에 그리스도의 은혜를 멸시하고 그를 생
명의 주가 아닌 사망의 주인으로 받아들였던 모든 불신자들이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말씀과 같은 것이다.
3:18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 주님께서 자주 모든 믿는 자는 사
망의 위험을 벗어나 안전하다는 것을 강조하신 것을 보면, 우리의 양심이 계속 가책을
받지 않고 고통을 겪지 않기 위해 믿음을 확고히 하고 확실히 하는 것이 얼마나 필요
한 것인가를 유추해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을 때 정죄함이 없음을 선언하고
있다. 주님께서는 제 5장에서 이를 더 상세히 설명해 주실 것이다. 히브리어의 관습을
따라서 미래 시제 대신에 현재 시제가 쓰이고 있다. 주님은 믿는 자가 심판의 두려움
을 갖지 않아도 좋다고 말씀하고 있다.
믿지 아니하는 자는......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 곧 이어 나오는 이 문장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을 거절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는 사망이외에 남은 것이
없음을, 다시 말해서, 죽음을 피할 수 있는 어떠한 구제책도 없음을 뜻하고 있다. 생
명은 믿음에만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불신자는 완전히 멸망을 받은 것임을
더 잘 표현하기 위하여 동사의 과거 시제를 강력하게 쓰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는 복음을 공개적으로 멸시하는 불경건한 사람들에 대하여 말슴하고 있음을 유의해야
겠다. 사람이 그리스도에게로 피신하는 길 외에 달리 죽음을 피할 수 있는 길이 없었
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서 전 세계에 전파될 복음의 도에 대하
여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께서 불붙여 준 빛을 고의적으로 그리고 악의
적으로 꺼버리는 사람들을 향하여 말씀의 방향을 돌리고 있는 것이다.
3:19
그 정죄는 이것이니 - 주님께서는 불경건한 사람들이 그들이 원하는 것보다 하나
님께서 지나치게 엄하시다고 하나님의 가혹하신 위엄이라고 말하기를 좋아하는 불신자
들의 불평과 불만을 응수하고 있다.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은 멸망에 내어 주어야
한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 가혹하다고 사람들은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어떤 사람도 심
판을 그리스도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못하도록,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이 심판을 받
게 되는 책임을 자기 자신에게 돌려야 한다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다. 그 이유 중 불
신은 악한 양심을 증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불신자들은 그리스도에게 나오
지 못하게 하는 것은 그들 자신의 완악함에 이유가 있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것이
심판을 시사하는 것에 불과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목적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습관에 따라서, 마치 하나님께서 믿지 않는 죄를 영원한 죽음으로 심판하실
때, 그들을 불공평하게 대우하기라도 하는것처럼 하나님을 힐난하거나 불평하지 못하
도록 인간의 간악함을 억제하려는 데 있다. 그러므로 그는 이러한 심판이 정당한 것이
며 누구의 비판도 받을 수 없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그들이 빛보다 어두움
을 더 좋아하고 그들에게 거저 주어진 빛으로부터 도주함으로 악을 행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빛을 미워하는 것은 악을 의식하고 있는 간악한 마음에만 태동할 수 있는 것
이기 때문이다. 복음을 대적하는 사람들 속에 거룩한 모양이 아름답게 빛날 수도 있
다. 그러나 비록 그들이 천사보다 거룩하게 보일지라도 그들은 그들의 간사함을 숨길
수 있는 숨겨진 내적 자아를 더 사랑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거절하는 위선
자임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이들의 위선이 하나님을 대적하도록 만들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정죄된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다. 이들이 교만에 눈이 멀어 그들의 악을 증거
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기꺼이 복음의 진리를 받아들였을 것이다.
3:20
악을 행하는 자마다 -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그들이 할 수 있는한 죄를 숨기려
하고 또 악하기 때문에 빛을 증오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치유책을 멀리함으
로써 계획적으로 심판받을 원인을 고수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복음에 반
기를 드는 사람들이 신령한 열정에 감동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오히려 이들은 어두움 가운데 스스로를 탐닉하기 위하여 빛을 증오한다.
3:21
진리를 쫓는 자는 - 말씀은 부정확하고 엉뚱한 말씀처럼 보인다. 우리가 어떤 이
들은 하나님의 성령에 의하여 거듭나기 전에 이미 정직하고 참되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모르지만, 이것은 성경의 일반적인 가르침과 일치하지 않는 말씀이다. 왜냐하면 믿음
만이 모든 선행을 유발하는 근원이 됨을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은 '진
리를 쫓는'이라는 말을 "우리가 얼마나 비참하며 또 선행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가
를 깨닫는 것"이라고 설명함으로써 이 어려움을 풀이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우리 자신
에 대한 부족함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게 만든다면 그것은 참으로 믿
음을 위한 준비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께서 뜻하시는 의미와
거리가 멀다. 주님은 단순히 진실하게 행동하는 자는 빛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없음을
말하고 싶었던 것 뿐이다. 이러한 시험에 따라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그들이 모든 간
사와 기만으로부터 자유로운 참된 사람임이 더 분명해진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에서 그릇되고 무지한 판별을 함으로써 사람은 믿음을 갖기 전부터 선한 양심을
소유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리스도는 택한 자들이 믿어 그들의 선행에 칭찬을
받는다고 말하지 않고 다만 그들이 악한 양심을 갖지 않았다면 믿지 않는 자들이 무엇
을 할 것인가를 밝혀주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진리'라는 말을 쓰고 있다. 이는 우
리가 의식적인 행위의 아름다움을 보고 속게 될 때, 안에 숨어 있는 것을 생각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은 건전하고 조금도 거짓됨이 없는 사람은 우리의 행위의 참된
재판관이 되시는 하나님의 존전에 기꺼이 나아간다고 말씀하고 있다. 이 말씀에 보면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으로, 그리고 하나님이 인정하신 행위로 하나님의 기
준에 따라 선한행위로 언급되어 있다. 그러므로 어떠한 행위든 복음의 빛에 비추어 보
기전에 판단하지 않도록 하자. 우리의 이성은 완전히 맹목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3:22
이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유대땅으로 가서 - 명절이 지났을 때 그리스도께서 아
마 애논 가까이 유대지방으로 가셨던 것같다. 복음서 기자는 그곳에서 많은 물이 있었
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유대지방에는 별로 강이 없었다. 지리학자들은 이 애논과
살렘 두 마을에 얍복강이 요단강으로 들어가는 곳에서 별로 멀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
다. 뿐만 아니라, 이 말씀에서 우리는 요한과 그리스도가 완전한 침례(浸禮)에 의하여
세례를 베풀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물론 외적인 예식도 영적인 진리와 일치되고 주님
께서 설정하신 제도와 규율과 일치만 된다면 그렇게 염려할 것은 없다. 우리가 추측할
수 있는데로는, 살렘과 애논은 이와 같이 가까운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많은 소문을
퍼뜨리게 했다. 그리고 용법과 하나님께 대한 예배와 교회의 상태에 대하여 사방에서
갖가지 토론을 유발시켰다. 왜냐하면 세례를 베푸는 이 두 인물이 같은 때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복음서 저자가 그리스도께서 세례를 주었다고 말할 때, 나는 그가 아버지께
서 그리스도에게 명하실 직책을 공적으로 이행하기 시작했던 초창기를 가르키고 있다
고 생각한다. 그리고 비록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들을 통하여 세례를 행하셨지만, 그
는 이곳에서 세례의 주인으로 언급되어 있고, 그리고 그의 사역자들은 제외되어 있는
데 이는 그들이 그리스도의 이름과 그의 명령이 아니면 아무 것도 행치 아니했기 때문
이다. 이 주제에 관해서는 다음 장(章)초반에서 보다 더 부언하기로 하자.
3:25
이에 요한의 제자 중에서......결례에 대하여 변론이 되었더니 - 복음서 저자가
이곳에서 요한의 제자들 사이에서 변론이 일어났다고 한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논쟁을 시작한 그들의 자신감은 그들의 신학적인 지식이 적었던 것 만큼이나 컸다-무
지는 언제나 앞 뒤를 가리지 않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그들에게 먼저 변론을 걸어
왔다면 그들에게 변명의 여지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요한의 제자들에겐, 유대인과
논쟁하는데 기우는 점도 있었지만, 도전도 받지 않고 변론을 걸었던 것이 경솔한 것이
었고 잘못된 것이었다. 말씀에 비추어 볼 때 변론은 제자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러
므로 이들은 자기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논쟁을 하고 자기들의 학문의 범
위를 넘어서 논쟁한 것이 잘못이었을 뿐만 아닐, 그들의 선생의 뜻을 변호하기 위하여
세례의 정당성을 주장하는데 별 관심을 쓰지 아니함으로 똑같이 두가지면에서 큰 실수
를 범했다. 이들은 세례의 참 뜻을 깨닫지 못함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예식을 조롱거리
로 만들었고 죄스러운 욕망에 의하여 그들의 선생의 대의(大義)를 그리스도와 상치되
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리스도께서도 세례를 준다는 대답을 들었을 때 그말 한마디에 그대
로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들은 사람의 가르침 보다는 그의 인격에 더 마음을 빼앗
기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실례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열심을 내는 것보다 사람에게
비뚤어진 열심을 기울일 때 그러한 사람의 종국이 어떻게 되는가를 보게 된다. 결국
우리는 여기서 우리가 항상 염두에 두고 마음을 써야 할 것은 그리스도 한 분만이 으
뜸된 위치를 차지해야 한다는 것을 경고받고 깨닫게 된다.
"결례에 대하여" 이것은 결례에 대한 것이었다. 율법은 유대인들을 위하여 여러가지
세례를 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율법에 있는 세례들로 만족하지 못한 이들은 조상들로
부터 물려받은 다른 결례를 정성들여 지키고 있었다. 이미 그들이 지키는 결례도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리스도와 요한에 의하여 새로운 결례 양식이 소개되니 유대인들은
이를 이치에 맞지 않는 불합리한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3:26
선생님이 증거하시던 자가 - 이러한 논조에 따라 요한의 제자들은 그리스도를 요
한보다 못한 존재로 만들려 했거나, 또 요한이 그리스도에게 바쳤던 경의를 인하여 그
리스도께서 요한에게 의리를 지키는 사람처럼 만들려 했다. 그들은 요한이 그리스도에
게 그와 같이 영예로운 증거를 해 준것을 하나의 특권으로 생각했다. 마치 요한이 그
리스도를 선포하는 것이 당연한 의무가 아니었던 것처럼 말이다. 아니, 하나님의 아들
을 알리는 전령이 된 것이 요한의 최대의 영예가 아니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리스도를
요한보다 못하게 취급한 것은 완전히 그릇된 것이었다. 그리스도는 요한의 증거에 의
하여 칭송을 받은 분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요한이 증거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
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라고 한 저들의 발언은 비뚤어진 경쟁심에서 나온
소리다. 그들은 자기들의 선생이 곧 무리에 의하여 버림을 받게 될 것이 두려웠던 것
이다.
3;27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 어떤 사람들은, 마치 요한의 제자들이 아버
지께서 그리스도에게 주신 것을 빼앗음으로 하나님께 대항하여 주제넘은 생각을 한다
고 요한이 그의 제자들을 책망하기라도 한 것처럼, 위의 말씀을 그리스도에게 결부시
킨다. 그러므로 이들은 이 말씀이 뜻하는 바가 "이와 같이 짧은 기간에 그가 그와 같
은 영예를 차지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일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자기 손으
로 높이신 분을 너희가 끌어 내리려하는 것은 헛된 일이다"라고 생각한다. 다른 이들
은 이 말씀을 세례 요한이 자기 제자들이 너무나 진보가 없기 때문에 화가나서 했던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그리스도라고 그렇게 자주 들었던 분을 평범한 사람들의
위치로 국한시키기를 원하는 것은 분명히 아주 어리석은 짓이었다. 그래서 요한은 사
람들의 마음이 새로와지기 전에는 어리석은 채로 남아 있기 때문에 그들을 가르치는 것은 시간 낭비라고 정당하게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요한이 자기를 위대하게 만드는 것은 자기 자신이나 제자들의 권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신분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 그 이상 높거나 낮아질 수 없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사람들과 의견을 같이한다. 하나님의 아들도 그의 영광을 스스로 취하지 않았는데, 그의 양떼 중에 감히 누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 이상을 바랄 수 있겠는가? 이 한가지 생각이 모든 사람의 마음에 뿌리를 내릴 수 있다면 사람들은 그들의 야망을 억제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야심이 시정되어 무너진다면 경쟁과 갈들의 질병도 동시에 사라질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왜 사람들이 마땅히 생각할 바 자기 위치를 지키지 않고 정도 이상으로 자기를 높이며,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신분으로 만족하고 주님을 의지하지 못하는 것일까?
3:28
증거할 자는 너희니라 - 요한은 그의 제자들이 자기의 말을 믿지 않은 것을 타이
르고 있다. 그는 종종 자기는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그들에게 밝혔었다. 그러므로 요한은 나머지 모든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아들의 수하에 있는 종에 불과했다. 이 말씀은 특히 유의할 만한 말씀이다. 왜냐하면 요한은 자기가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말함으로 자기는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는 것,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며 다른 이들과 같이 교회에서 봉사하는 것 이외의 다른 사명이 없음을 천명함으로써 머리되신 그의 영광을 흐릴 정도로 자신을 높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요한은 왕의 신하들이 왕을 위해 하듯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길을 예비하도록 먼저 보내심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다.
3:29
신부를 취하는 자는 - 이와 같은 비교를 함으로써 요한은 그리스도 만이 보통 사
람의 영역 밖에 계신 분이심을 더욱 힘있게 확증하고 있다. 결혼하는 사람은 자기 신
부를 친구들에게 내어 주려고 결혼식장에 친구들을 부르거나 초청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 권리를 포기하고 친구들에게 자기 아내를 취하도록 허락하기 위하여 친구를 초청
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친구들이 옴으로써 그 결혼이 더 영예롭게 되고 보다 더 경
건하게 하기 위하여 손님들을 초청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 자기 사역
자들을 불러 그들에게 가르치는 직분을 주는 것은 그들로 하여금 교회를 약화시키고
교회를 정복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신실한 사역자
들을 이용하여 교회를 자기와 연합시키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의 위격을 대
표하는 권위자로 교회를 다스릴 권세를 위임받는 것은 굉장히 위대한 일이다. 그들은
신랑과 함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하여 신랑과 함께한 친구들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
들은 자신과 신랑의 차이를 유념하여 신랑에게 속하는 권한을 자신들에게 적용하지 않
도록 스스로의 위치를 기억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을 요약하자면, 선생들이 아무리 뛰
어난다 하더라도 그리스도 한 분만이 그의 교회를 통치하고 그의 말씀으로 자기 교회
를 다스리는 일에 방해를 놓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기와연합
시키는 양자의 관계를 표현하려 하실 때, 이러한 비교가 성경에는 종종 나온다. 그리
스도께서는 우리가 그를 즐길 수 있도록 그리고 우리의 소유가 되기 위하여 자신을 우
리에게 내어 주신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아내가 남편에게 바쳐야 하는 사랑과 정절을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바울이 가르치고 있는 대로(엡
5:30) 우리는 그의 살과 뼈로서 모든 면에서 이 결혼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는 것
이다. 그리스도께서 요구하시는 정절은 특별히 복음에 순종함으로써 그리고 우리 자신
이 복음의 순수성에서 이탈하지 않음으로써 지키게 되는 것이다(고후11:2,3). 그러므
로 우리는 그리스도에게만 순복해야 한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유일한 머리이시다. 우
리는 단순한 복음의 가르침에서머리털 만큼도 이탈해서는 안된다. 그리스도가 우리들
사이에서 신랑으로서의 마땅한 권리와 자리를 지킬 수 있도록 그리스도만이 영광 중에
으뜸이 되셔야 한다.
그러나 사역자(ministers)들은 어떠한가? 하나님의 아들은 거룩한 결혼을 주관하는
가운데 그에 대한 임무를 수행하도록 목사(사역자)들을 부르신다. 그러므로 남편에게
드려질 정숙한 처녀로서 그들에게 맡겨진 신부를 위해 제반준비를 갖추는 것은 그들이
할 일이다. 이미 인용한 말씀에서 바울은 기쁨으로 이 일을 이행했다고 말하고 있다.
교회를 그리스도보다 자기 자신에게 유리하게 하는 자들은 그들이 존귀히 여겨야 할
결혼을 부정(不貞)하게 파기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신부를 우리에게 맡길 때
우리에게 내려주는 영예가 크면 클수록, 우리가 그의 권리를 지키려 하지 않는다면 우
리의 부정(不貞)은 더욱 악화되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 요한은 자기가 바라는 것을 성취했기 때문에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다스리는 것을 보았고 사람들
이 그리스도에게 경청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자기 자신에 대한 생각을
제쳐놓고 그리스도를 높이며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는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은 교회
를 치리하는 데 있어서 성실할 것이며 성공할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그러한 목표에
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사람은 불순하게 간음한 자로서 그리스도의 신부를 타락시킬
뿐이다.
3:30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 요한은 한걸음 더 나아가 태도를 더욱 분명히 하고 있다.
전에 주님께서 요한을 최고의 영예로 높이신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일시적인 것
에 불과했던 것으로서 이제 의(義)의 태양이 솟았기 때문에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은 인간의 그릇된 생각에 의하여 자기에게 덮여졌
던 영광이 헛된 광채를 몰아낼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 자기에게 내려 주었던 참으로 정
당한 그 영예가 그리스도의 광채를 흐리지 않도록 각별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이러
한 이유로 인해서,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잠시동안 높은 위치에 놓였던 만
큼, 위대한 선지자로 간주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오셨을 때 그는
바톤을 넘겨주어야 했다. 반면에 그는 그리스도께서 온 세상을 그의 광채로 채우기만
한다면 자기는 기꺼이 무가치한 존재로 감소될 용의가 있다고 선언하고 있다. 교회의
모든 목사들은 요한이 열성을 본받아 그리스도를 높이기 위해 자신을 낮추어야 할 것
이다.
3;31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다른 모든 사람들과 어떻게 다르며
그들보다 얼마나 높이 계신 분인가를 보여주기 위하여 또 다른 비교법을 쓰고 있다.
요한은 그리스도를 높은 보좌에서 말씀하시면 그의 권위를 인하여 경외함으로 귀를 기
울이게 될 어떤 왕이나 지도자에 비유하고 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아주
낮은 의자에 앉아 이야기한다고 해도 스스로 만족한다고 말하고 있다. 요한은 그리스
도께서 하나님이 되시기 때문에 위에서 오셨다고 말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하늘
에 속한 것 외에 다른 것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위로부터 오셨다고 말하고 있다. 보통
번역은 '땅에 속하여'라는 말을 한번 밖에 쓰지 않고 있다. 그러나 헬라어 원본은 다
른 사본과 일치하고 있다. 나는 이 어귀가 그것을 같은 말의 반복이라고 생각했던 무
지한 사람들에 의해 삭제되었다고 추정하고 있다(우리 한글 성경은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고 정확하게 번역되어 있다). 그러나 이 말슴
의 의미하는 바는 땅에 속한 자는 그 근원을 버릴 수 없는 만큼 그의 성격을 따라 땅
의 위치에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요한은 하늘로부터 내려 오셨기 때문에 위로부
터 말씀하실 수 있는 분은 그리스도 한분 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는 요한
도 그의 소명과 직분으로 볼 때 하늘로서 내려 온 것이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다. 주
님께서 그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으로 들렸기 때문이다. 요한은 그가 전파했던 하
늘에 속한 가르침에 맞지 않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직설적이
며 결론적인 말씀이 아니라 하나의 비교라고 대답한다. 목사들이 스스로를 생각할 때,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명한것을 최대의 권위를 가지고 하늘로부터 말하는 것처
럼 말한다. 그러나 스스로를 그리스도와 견주기 시작하면 그들은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사도는 율법과 복음을 비교하면서 히브리서 12장 25절에 "땅에서 경고하신
자를 배반하는 우리일까보냐!"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그의 사역자들
안에서 인정받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그분만이 혼자 주로 남고 그들은 종으로 만족하
게 되기를 원하는 것이다. 특별히 그리스도께서 비교법을 쓸 때는 차이를 드러내어 자
신이 높아지기를 원하신다.
3:32
그가 그 보고 들은 것을 - 요한은 자신의 임무를 계속 수행한다. 그리스도를 위한
제자들을 준비시키기 위하여,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로부터 받은 것 외에는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않기 때문에 그의 교훈은 확실하다고 천명하고 있다. 보고 듣는 것은
의심스러운 의견이나 빈 소문이나 각종 허구에 대조되는 것이다.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온저히 알지 못하는 것은 말씀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들은 것 밖에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에게 신뢰할 것이 별로 없지 않겠느냐고 말할 수도 있다. 나는
이 말씀을,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 속한것, 하나님께서 계시하시고 하나님께서 가르
쳐 주신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제시하지 않는다는 말씀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리고 이
것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하나님의 전권대사(全權大使)와 해석자로 보내심을 받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인격과 완전히 부합되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요한은, 이와 같이 확실하고 진실한 하나님의 증인을 반항적으로 거절
한 세상의 배은망덕을 책망하고 있다. 요한은 많은 사람을 믿음에서 떠나게 하고 다른
이들의 진보를 방해하거나 지연시키는 죄를 미리 앞질러 공격하고 있다. 우리는 사람
이 판단에 지나치게 의지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복음을 세상이
이를 멸시하는 것에 따라 판단한다. 아니면 적어도, 가는 곳마다 복음이 배척을 받는
것을 보기 때문에 사람들은 편견에 사로잡혀 있으며 따라서 믿기를 싫어하거나 믿는
일을 나중으로 미룬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상에서 이와 같은 완고함을 접할 때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께로서 온 진리라는 이 경종이 늘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도
록 해야 한다. 요한이 "그의 증거를 받는 이가 없도다"라고 할 때, 그는 방대한 불신
의 무리에 비교해 보면 믿는 자는 극히 적어서 거의 없는 것이나 다름이 없음을 지적
하고 있다.
3:33
그의 증거를 받는 이는 - 그는 이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수가
적음을 인해서 부끄러워 하거나 염려할 이유가 없으니, 담대하게 복음의 가르침을 받
아들이라고 권하고 있다. 그들은 홀로 우리들의 모든 것이 되어 주시기에 충분한 하나
님을 그들의 믿음의 주(主)로 모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록 온 세상이 복음을 믿는
신앙을 거절하거나 보류하더라도 그것이 선한 사람들이 하나님과 합의하는 것을 막는
요소가 되어서는 안되겠다.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에 찬성하는
것인만큼, 그들에겐 안심하고 의지할 것이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 안에 쉼
을 얻고 그의 말씀 안에서 굳게 서는 것이 믿음의 내용임을 알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
께서 말씀을 하심으로 주관하지 않는다면 동조나 찬성이 있을 수 없다. 이러한 의미에
서, 믿음은 모든 인간적 발상과도 다를 뿐 아니라 의심스럽고 불확실한 의견과도 구별
되는 것이다. 믿음은 모든 의심으로부터 해방되어 하나님과 소통하기 때문이다. 그러
므로 하나님께서 거짓을 말할 수 없는 것처럼, 믿음이 흔들린다는 것은 모순이다. 사
단이 어떠한 간계로서 우리를 방해하고 흔들려고 해도 우리가 이러한 방패로 무장한다
면 우리는 항상 승리할 것이다.
이것은 또한 믿음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얼마나 귀하고 받으실 만한 제사인가를 우리
에게 말해준다. 그의 진리보다 하나님께 더 귀한 것이 없는 만큼, 우리는 하나님은 참
되시다고 믿음에 찬 고백을 하는 것보다 더 흡족한 예배를 하나님께 드릴 수 없는 것
이다. 그러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 참된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반면에 인간이 복음을
믿지 않는 것보다 하나님께 더 큰 죄악은 없다. 진리가 약탈을 당하면 그의 영광과 위
엄도 함께 무너지기 때문이다. 진리는 복음으로 싸여 있으며 하나님은 복음을 통하여
인간에게 알려지기를 원한다는 말씀은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이 믿음을
장식해 주는 고상한 복음의 말씀은, 우리의 마음이 돌보다 단단하지 않다면, 우리의
마음에 불을 붙여 복음을 사랑하도록 만들 것이다. 하나님께서 거짓과 허용 뿐인 인간
을, 단순히 하나님의 진리를 믿음으로 인정했다고 해서 가치있게 여겨주시니 이 얼마
나 엄청난 영예인가 !
3:34
하나님의 보내신 이는 - 우리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영접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
진정으로 관심을 갖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그는 앞의 문장을 재확인
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다름 아닌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 오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말씀하시는 분은 하나님 뿐이시다. 만일 그리스도의 말씀
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지 않는다면 우리는 마땅히 하여야 할 만큼 그리스도의 교훈
을 대우하지 않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 - 이 말씀은 두 가지로 풀이되고 있다.
어떤 이들은, 모든 선(善)의 원천이 되시는 하나님께서 그의 풍성한 은혜를 인간에게
부어주실 때 그의 은사가 다 하는 것이 아니라는 일반적인 하나님의 경륜을 적용시킨
다. 사람들이 남에게 나누어 주는 것을 어떤 그릇에서 길어닐 때 결국에는 밑바닥에
다다르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와같은 위험이 있을 리 없다. 그의 은사의 풍
성함에는 다함이 없기 때문에 늘 새로운 풍성함으로 우리에게 부어 주신다. 이러한 풀
이에는 약간 부가되어야 할 말이 있을 수 있다. 그것은 언어가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차라리 어거스틴의 해석을 택하고 싶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대
로 이 말씀을 잘풀이하고 있다. 이 귀절에서 그는 그리스도께서 확실하게 언급되어 있
지 않다고 반대하는 것도 타당성이 없다. 그것은 다음 귀절이 모든 의문을 제거해 주
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에게 차별없이 주어지는것처럼 보이던 것이 그리스도에게 국한
되고 있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 손에 주셨으니"라는 말씀은 분
명히 설명으로 부가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같은 문맥 안에서 읽혀져야 한다.
현재 시제의 동사는 계속되는 행동을 암시한다. 비록 그리스도께서 한때 최고로 완전
한 상태에서 성령을 받으셨지만, 성령은, 말하자면 하나의 원천에서 계속 흘러나가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지금 아버지로부터 성령을 받는다고 말하는 것은 틀린 말
이 아니다. 만일 누가 이 말씀을 보다 더 간결하게 해석하기를 원한다면, 이와 같은
동사의 시제는 바꾸어 생각해도 좋다고 생각한다. 의미는 이제 분명하다. 성령은 그리
스도께서 소유하고 있는 은혜의 원천이 어떤 방법으로 제한되기라도 한 것처럼 한정을
두고 그에게 부어진 것이 아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2장 7절과 에베소서 4장 7절에
서 가르치고 있는 것처럼, 아무도 혼자서 충만한 것처럼 하지 못하도록 각 사람에게
은혜의 분량을 따라서 성령의 나타남을 주시는 것이다. 우리 사이에는 형제의 교제라
는 상호유대가 있어 아무도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고 서로를 필요로 하게 되어 있지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는 한량 없는 분량의 성령을 부어주셨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다르다. 우리가 제1장에서 살펴 본 것처럼, 성령은 그리스도 안에 한량 없이 거하셔서
우리가 그의 충만한 데서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 다음에 나오는 말씀도 또한 이와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서, 아버지께서 만물을 다 그의 손 안에 주셨다고 말하고 있다.
요한은 이 말씀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우월함을 선포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소유하
고 있는 풍성한 부(富)의 목적과 용도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관리인
으로 임명되었기 때문에, 그의 선하신 뜻대로 그리고 덕을 세우는 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다. 바울은 앞에서 언급한 에베소서 4장에서 이를 더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
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다양하게 그의 백성을 채워주시지만, 그리스도 한분만이 만
물을 다 그의 손 안에 소유하고 계시다는 말이다.
3:35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 그러나 이 설명의 뜻하는 바가 무엇이냐? 아버지께
서 아들 이외에 다른 사람들을 모두 싫어한단 말인가? 대답은 간단하다. 그는 하나님
께서 창조하신 모든 인간이나 그의 모든 피조물에 대한 일반적인 사랑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아들에서 시작되어 그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에 흘러퍼지는
특이한 사랑을 논하고 있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심으로 우리를 그 안에서 포옹
하는 이 사랑은 그의 모든 은택을 그리스도의 손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달하시는 원인
이 되는 것이다.
3:36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 이 말씀은 우리가 모든 선한 것을 그리스도에게
서 구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 선한 것을 누리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하여 첨가되었다. 그는 이것을 믿음에 의해서 누릴 수 있다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오직 믿음에 의하여 의(義)와 의의 열매인 믿음을 우리에게 선사해 주는 그리스
도를 소유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생명의 원천으로 불리우는
것으로 보아, 생명이 그리스도 한 분에 국한되어 있으며 따라서 그리스도의 은혜에 의
해서만 그 생명에 참예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에게
전달되는 방법에 대하여는 여러가지 의견이 있다. 어떤이들은 이렇게 이해하고 있다.
즉 우리는 믿음에 의하여 의(義)로 인도하는 성령을 받으며 또한 같은 중생(거듭남)에
의하여 구원을 받는다. 나 자신은, 비록 성령이 우리를 다스릴 때 믿음으로 우리가 거
듭나게 된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우리가 첫째로 생각해야 할 문제는 죄(sins)를 거저
사함 받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죄사함을 받음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영접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나는 이 한가지 경험에서 우리의 구원에 대한 확신이
근거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않
는 것 이외에 다른 방법으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의로와 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 요한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을 선포함으로 그
향기에 의하여 우리를 초청했듯이, 그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을 모두 영원한 사
망에 판결하고 있다. 그리함으로써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건져주시는 길 외에
달리 죽음에서 도피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음을 경고함으로 하나님의 고귀한 사랑을 드
러내고 있다. 이 문장은 아담 안에서 우리가 모두 잃어진 상태에 있다는 사실에 의거
하고 있다. 그러나 잃어진 자를 구원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직분이라면, 그리스도 안에
베풀어져 있는 구원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사망에 거하는 것이 마땅하다. 우리는 이미
이 말씀이 저들에게 전해진 복음을 거절하는 자들에게 특별히 적용된다고 밝힌 바 있
다. 비록 전 인류가 똑같은 멸망에 관련되어 있지만, 하나님의 아들을 그들의 구세주
로 영접하기를 거절하는 자들에게는 두 배나 더 무서운 진노가 기다리고 있다. 세례요
한이 믿지 않는 자들을 죽음으로 협박함으로써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인하여 그리스도
를 믿도록 유도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뿐만 아니라 세상이 그리스도 밖에서 누리
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의(義)는 완전히 정죄되어 있고 전멸된 상태임이 분명하다.
또 믿지 않는 자들이 단순히 믿지 아니함으로 멸망하는 것은 불공평하다고 아무도 반
발할 수 없다. 그리스도께로서 주어진 거룩함과 의로움이 아니라면, 인간안에 어떠한
거룩함이 있다고 상상하는 것 자체가 헛된 일이기 때문이다. 영생을 보지 못하고"라고
할 때의 영생을 본다는 말은 영생을 누린다는 말대신에 쓰인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아무런 희망도 없다는 것을 더 명확히 표
현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불신자들 위에 머물러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나
는 "머물러 있다"는 말이 우리가 모두 진노의 자녀로 태어났기 때문에 모태로부터 죽
기로 작정되어 있음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기 위하여 쓰인 것이라고 한 어거스틴의 생각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어찌 되었든지, 내가 이미 말한 바대로, 죽음은 불신자들에게 부담이 되고 도저히 피할 수 없도록 그들을 억압하고 있다는 순수하고 단순한 뜻을 배격하지 않는다면 나는 이러한 제안을 얼마든지 받아들일 용의가 있다. 그리고 비록 버려진 자들이 이미 정죄받은 상태에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들은 불신(不信)에 의하여 새로운 죽음을 자초한다. 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복음이 사역자들에게 "맬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을 뿌리치는 자들은 죽음의 사슬로 자신을 속박하도록 하는 것이 인간의 완악함에 대한 공정한 심판이 되기 때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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