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content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6:1 - 6
갈릴리에서의 설교와 치병 기적을 통한 예수의 분주했던 활동(제 2차 갈릴리 사역, 마 8:5 - 13:58)은 갈릴리를 떠나 고향으로 돌아옵으로써 새로운 국면(局面)을 맞게 된다. 고향으로 돌아온 이유는 선교 사역의 연장 선상에서 또는 휴식 시간을 갖고자 하는 의도에서라는 등의 여러 주장들이 있다. 어쨌든 예수의 활동에 변화가 온 것은 사실이다. 예수가 고향에 돌라왔을 때 환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도리어 배척을 받고 있는 장면은 평행구인 마 13:53 - 58에 잘 나타나 있다. 이로써 예수는 가버나움 중심의 갈릴리 사역에서 좀더 적극적으로 이방인의 거주지를 위시한 각 지역들을 순회하면서 선교하시는 제 3차 갈릴리 전도 사역의 계기를 마련하신다.

====6:1
거기를 떠나서 - "거기"라는 말은 한 사건에서 다른 사건으로 이야기를 옮겨갈 때 사용 는 장소적 부사로서 7:24 ;9:30 ; 10:1에서도 똑같은 방법으로 사용된다. 여기서 가리키는 "거기"는 가버나움을 가리키고 있음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5장의 이야기와 전혀 무리없이 본 사건이 연결되고 있기 때문이다.
고향으로 가시니 - 예수의 고향은 나사렛이다(1:9, 24 ; 요 1:46). 이곳은 가버나움의 남서쪽에 있는 한적한 지방이다(마 2:23 주석 참조). 한편 "고향"으로 번역된 헬라어 "파트리스"는 원래 "조상으로부터 살아온 곳", "자기의 원(原) 출생지"등으로 이해된다. 하지만 이 나사렛이란 장소가 예수의 출생지(베들레헴)는 아니라 해도 이곳 나사렛에서 30여년 간 자라났으며 또 가족들이 그곳에 있었다는 점에서 예수의 고향이라 할 수 있다. 누가는 예수가 자라난 곳은 나사렛이라고 장소명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눅 4:16). 여기서 예수가 고향을 방문하는 것이 처음인가 아니면 두 번째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이에 대해 예수의 계속되는 박해 장면이 공생애 기간 내내 있었던 관계로 각 복음서 기자들이 자신의 편집의도에 따라 적절히 배치하였기 때문에 본 사건은 눅 4:16 이하 기사는 분명 예수의 제 1차 갈릴리 사역 중에 발생했던 것이며 그 방문 내용도 본문과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점에서 본문의 예수는 공생애 후기에 제 2차 고향 방문을 하고 계신 것으로 보인다. 한편 문맥상으로 보나 전체적인 예수의 활동상으로 보아 마가복음의 이야기가 마태의 기록보다 더 사실적으로 보인다.
제자들도 좇으니라 - 예수의 고향 방문이 단순한 휴가나 가족 상봉만을 목적한 것이 아님을 암시하는 구절이다. 즉 예수는 일종의 랍비(Rabbi)로서 당신의 제자들을 대동하고 고향 방문길에 오른 것이다. 그런데 마태는 이 사실을 다루지 않고 있는데 비해 마가는 제자들의 수행 장면을 분명히 기록함으로써 제자들이 예수를 좇으면서 계속 제자로서 필요한 훈련을 받고 있었음을 넌지시 보여주고 있다(Cranfield).

======6:2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 예수는 회당에서 설교할 기회를 갖게 되었는데 당시에는 회당을 방문한 선생에게 회당장이(5:22) 성경을 강해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한편 예수는 이 회당을 통한 선교 사역에 매우 익숙했었다(1:21). 따라서 누가는 "규례대로"라는 말로 예수의 가르침이 지극히 상례적인 것임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누가는 예수가 읽은 성경의 내용까지 밝히고 있다. 그 성경은 사 61:1, 2이었다. 그런데 본문의 회당 설교 이후 예수의 회당을 통한 선교는 큰 어려움에 봉착(逢着)하게 된다.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 . . . 어찌됨이뇨 - 이것은 예수의 가르침에 대한 청중들의 반응이다. 우선 청중들은 예수의 가르침에 매우 큰 충격을 받은 것 같다. 그래서 그들은 "이 사람의 받은 지혜. . . . 어찌됨이뇨"하며 믿기지 않을 만큼 놀라와 하는 것이다. 사실 그들은 예수의 30여 년 성장 과정을 줄곧 지켜보아왔던 터라 예수의 탁월한 성경 교수를 경악스러움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어쩌면 그들은 천박한 시기심과 질투심의 노예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그분의 탁월한 지혜와 권능을 직접 목격하고서도 오히려 "그의 가르침과 그의 권능의 근원은 무엇인가?" "그것이 과연 하나님께로서냐 사단에게로서냐?"하는 의심에 휩싸이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인과 비신앙인의 차이점이다. 즉 예수의 초월적 권능에 대해 신앙인은 "무릎"으로, 비신앙인은 "놀람과 의심"으로 맞아들인다.

=========6:3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 청중들의 입을 통해 예수의 신원이 밝혀지고 있다. 물론 이 말의 저의는 "이 사람도 보통 사람과 마찬가지로 손으로 일해서 생계를 유지하는 천한 신분이 아니냐?" 또는 "이 자가 랍비라 칭하면서 이적을 행하고 돌아다니는데 이 어찌된 일인가?"라는 비아냥거림이 숨겨져 있다. 이쨌든 마가복음에는 예수의 출생이나 성장에 대한 언급이 없고 족보에 대한 언급도 없다. 여기서 비로소 예수의 신변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이 밝혀진다. 즉 예수에게 어머니와 형제. 자매가 있음이 밝혀진 것이다. 그리고 예수 자신이 목수였음이 드러난다. 그러나 마태복음에서는 "목수의 아들"로 언급되고(13"55), 누가복음에서는 단순히 요셉의 아들로 묘사되고 있다(4:22). 즉 목수라는 직업에 대한 언급이 없다. 어쨌든 마가는 예수를 마리아의 아들이고 목수의 직업을 가졌던 소시민으로 묘사한다. 여기서 마리아의 아들임을 밝힌 것은 예수 탄생 설화, 즉 처녀 탄생과 간접적으로 연결지으려는 마가의 의도에서라는 의견이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설득력 있는 의견은 다음과 같다. 즉 유대인의 전통적 관습에 의하면 비록 아버지가 생존하지 않은 때에라 하더라도 그 자녀를 그의 어머니의 아들로 묘사하는 것이 용인(容認)되지 않았다(Taylor). 따라서 마리아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당시에 아버지의 아들이 아닌 어머니의 아들로 호칭하는 것으로써 사생아를 지칭하는 경멸적 표현이라는 점을 들어 예수를 경멸하기 위한 표현으로 보는 것이다(Orgen). 이 주장은 당시 나사렛 사람들이 마리아가 처녀의 몸으로 잉태하여 예수를 낳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잔제한다면 충분히 타당한 이야기다. 따라서 나사렛 사람들은 이와 같이 존경받을만한 자격이 없는 예수를 생각할 때 비록 예수의 설교와 능력이 놀랄만한 것이었다 하더라도 예수를 용납하지 못했으리라는 추측은 충분히 가능하다. 특별히 그들의 말투("아니냐. . . . . 아니냐. . . 아니하냐")로 볼 때 그들은 고의적이고도 맹목적으로 그리고 천박한 시기심에 따라 예수의 존재 가치를 떨어뜨리려고 몸부림을 쳤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야고보와 요셉과. . . 그누이들 - 이들은 예수의 사촌(Jerome)이나 요셉이 마리아와 결혼하기 전에 다른 여인과 결혼하여 낳았던 자녀들(Epiphanius)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예수의 친 형제요 자매들이다. 사실 제롬과 에피파니우스의 견해는 모두 마리아가 죽기까지 순결(virginity)을 지켰다는 로마 카톨릭의 교리에 큰 영향을 받은 것이다. 더욱이 제롬의 견해는 심지어 요셉의 동정성(童貞性)까지 가능케 하였다. 그러나 위의 두 견해는 성경적 근거를 갖지 못한 그릇된 가설에 불과하다. 실로 여기 언급된 형제. 자매들은 예수의 동정녀 잉태와 출산 후, 마리아와 요셉 사이에서 자연스런 성관계로 인해 출생한 예수의 친동생들인 것이다(Helvidiys). 여기서 "야고보"는 예수의 바로 아래 동생으로 여겨지며, 초대교회에 지대한 역할을 했으며 특히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로서(행 12:17 ; 15:13 ; 21:18 ; 고전 15:7 ; 갈 1:19 ; 2:9, 12) 그의 이름으로 된 서신서(야고보서)의 저자이기도 하다(약 1:1)/ 그는 유대사가 요세푸스와 유세비우스의 기록에 의하면 변사(變死)한 것으로 나온다. 한편 "유다"는 공동 서신 가운데 유다서의 저자로 여겨진다. 그리고 요셉과 시몬 및 기타 자매들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으나 예수의 부활, 승천 이후 회심하여 초대교회의 성장에 밑거름이 되ㅣ었던 것으로 보인다(행 1:14).
예수를 배척한지라(에스칸달리존토 엔 아우토) - 먼저 여기서 "배척하다"는 뜻은 "넘어지다"는 의미의 헬라어 "스칸달리조마이"에서 유래하였다. 그런데 이 단어가 뜻하는 바는 이 뿐 아니라 "배척당하다", ". . . . 와 말다툼하다", ". . . 을 공격하다" 등 다양하다. 어쨌든 본문을 직역하면 "그에게 걸려 넘어지다"는 뜻이다. 즉 마치 그들이 덫에 걸리듯 ㅇ례수로 인해 걸려 넘어졌다는 의미이다. 실로 그들은 예수를 현상적, 육신적, 신적 존재의 실상을 파악하지 못함으로써(불신앙함으로써) 결국 그분을 통해 실족하고 또한 그분을 배척하게 된 것이다.

==========6:4
선지자가. . .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 이 구절은 고향 사람들의 배척에 대한 예수의 반응으로서 당시 보편적으로 알려져 있는 격언구를 인용한 것이다. 속담형의 이 인용구는 유대, 헬라 문헌에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데 그중 "철학자가 자기 고향에서는 어렵게 산다" 또는 "침밀함은 오히려 경멸을 낳는다"는 등의 격언구들이 있다. 그러나 유대 및 헬라 문헌들과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예수가 ""선자자"(영감받은 선생 정도로 이해됨)라는 말을 사용했다는 점이다. 사실 이 "선지자"라는 말은 유대 및 이교도들의 속담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전정 나사렛 사람들이 예수의 실존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은 예수 자신의 가족과 마찬가지로 그들이 예수 의 평범한 모습, 곧 자신들과 하등 다를 바 없는 한 사람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너무 집착했기 때문이었다. 특별히 본문에서 마가는 "친척"과 "자기 집"이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자신의 가족까지 예수를 신뢰하지 못하는 불신앙자로 묘사한다. 당시 예수 추종자들도 많았지만 반대자들도 많았음을 상기한다면, 고향 사람들과 가족들까지 예수를 이해하지 못하고 배척하는 것은 예수의 활동에 대한 중대하고도 근본적인 위협으로 볼 수 있다. 어쨌든 마가는 이와 같이 고조된 긴장을 표현함으로써 예수의 고독성과 당시 사람들의 부신앙을 극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6:5
거기에서는 아무 권능도 행사할 수 없어 - 어떻게 보면 이와 같은 표현은 예수의 능력과 권위에 대한 치명적 표현이라고 몰 수 잇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의 한계성(限界性)을 강조한 것이기 보다 예수의 능동적인 절제를 이끌어낸 근본적인 원인을 은연중에 시사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평행구인 마 13:58에서는 "많은 능력을 행하지 않았다"고 표현함으로써 예수가 의지에 따라 행치 않으셨음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는 행할 수 없는 근본적인 원인이 예수의 능력 결여 때문이 아니라 고향 사람들의 불신 때문인 것으로 암시되고 있다. 즉 예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당신이 권능을 행할 수 없었던 상황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분석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결론은 권능이 일어날 수 있는 큰 변수가 청중의 신앙이라는 사실이다. 즉 당신에게 치유의 은총을 덧입고자 하는 믿음을 소유한 자가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실로 사람의 믿음 없이는 기적이 일어날 수 없는 법이다. 예수의 권능과 사람의 믿음이 서로 만나야 기적이 일어난다는 말이다)마 8:5 - 13). 따라서 "다만 소수의 병인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 " - 라는표현은 고향에 예수를 신뢰하는 믿음을 가진 자가 극소수였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마가는 이와 같은 묘사를 통해 예수의 권위를 궁지로 몰아넣으려는 것이 아니라 예수와 만나는 신앙인의 책임있는 자세를 강조하려 한 것이다. 진정 예수의 권능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그것은 ① 당신의 백성에게 확고한 사랑의 증거를 제공하고 ② 신앙인의 최종적 구원을 위한 도구로서 실현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권능의 발현에 앞서 무엇보다 그 대상인 인간의 믿음이 요구되는 것이다. 결국 예수께서 권능 베푸실 구속론적인 근거를 스스로 거부한 자들에게는 그 어떤 은혜의 시여도 불가능하다고 본다.

=======6:6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더라 - 이 묘사는 고향 사람들의 배척을 옛수는 전혀 예측하지 못했음을 간접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또한 무척 당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별히 고향과 자기 집이라는 친근한 의미와 기대는 그들의 골 깊은 불신앙으로 인해 완전히 빗나간 것이었다. 이러한 실망은 4절에서 보여준 예수의 반응과 연관지어 본다면 회당 안에서의 설교에 대한 청중들의 반응으로 인한 실망보다는 권능을 행하지 못한 실망감이 훨씬 더 컸으리라 생각된다. 왜냐하면 4절에서는 당연한 것으로서 받아들이고 있지만 여기서는 이해하지 못할 일로 받아드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실망과 극적으로 대비되는 장면이 마 8:10에 나온다. 즉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로마 백부장의 진실한 믿음을 보고 기이(奇異)하게 여기고 이스라엘에서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다고 경탄하는 장면이다. 이 두 사건은 모두 예수의 복음이 유대인의 거부로 인해 오히려 이방인에게 전달되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는데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와 같은 극적인 장면을 통해 분명하게 드러나는 사실은 역시 전폭적인 신뢰와 믿음의 중요성이다. 또 한 가지 이 두 사겅에서 발견되는 놀라운 사실은, 예수도 예측하지 못하는 일로 당황하는 제한적인 인간성을 지닌 철저한 인간이시라는 점이다(Robertson). 물론 이같은 모습이 예수의 거룩한 신성(神性)을 훼손하지는 않는다. 실로 하나님과 동등한 신분이신 예수께서는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셔서(빌 2:6) 놀라기도 하시고 울기도 하신 완전한 인간의 모습을 지니시었다.
이에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더라 - 다시 예수는 전도 여행을 떠나고 있다. 결국 이 장면은 고향에서 예수의 활동은 실패로 끝나고 고향을 떠나는 것을 보여 준다. 여기서 특별히 "두루 다니시며"란 미완료 시상을 지니고 있어 예수의 "가르치시는"사역이 계속 진행되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이러한 지속적 가르치심의 대상인 "모든 촌"이 구체적으로 어디 어디를 말하는지 알 수 없지만 갈릴리 지방일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본문은 예수의 제 3차 갈릴리 사역 기간의(6:66 - 9:50) 실질적인 시작으로 볼 수 있다. 이때부터 예수는 제자 훈련에 박차를 가하셨으며, 당신의 십자가 수난에 관한 비밀을 서서히 공개 하시게 된다.

===6:7 - 13
이제 새로운 형태의 활동이 시작된다. 12제자의 파송은 ① 예수의 선교 활동이 조직화, 저변화되어감을 보여 주며 ② 그 활동영역이 확장되고 장기화됨을 보여 준다. 따라서 본문 이하에서부터 예수의 선교 활동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됨을 알 수 있다.

=========6:7
열 두 제자를 부르사 - 예수는 제자 파송 직전에 그들에게 선교에 관련된 유의 사항을 설교하시기 위해 그들을 부르셨다. 평행 구절인 마 10:1ff. 에서는 이같은 표현에 좀더 보충적 설명이 가해지고 있다. 예수는 이미 3:14에서 12제자를 선택하신 바 있다. 그런데 이제 그들이 선택된 원래 목적(3:14, 15)을 실현키 위해 그들을 파견하고자 하시는 것이다.
둘씩 둘씩 보내시며 - 예수께서 당신이 훈련한 사람들을 똑립적으로 파송한 첫 번째 경우이다. 한편 눅 10:1에서 70명을 불러 파송할 때도 둘씩 둘씩 짝지어 파송한 이유는 유대인의 풍습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11:1 ; 14:13 ; 행 13:2, 4 ; 16:40). 즉 이것은 신 17:6에 나타난 바와 같이 증인을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을 세우라는 관습에 근겋산 것으로서 예수도 역시 천국 복음 전파 활동에 관한 증인으로서 제자들을 파송할 때 이와 같은 관습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이로써 6싸의 제자들은 갈릴리 전역에 여섯 방향으로 산개(散開)되어 천국 확장 사업에 매진하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보내시며"(아포스텔레인)란 말 속에는 "보내는 사람을 공식적으로 대표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당신의 권위를 부여하신 후 파송하셨음을 암시한다. 따라서 제자들은 보냄받은 자로서 예수의 권위에 힘입어 그분의 거룩한 뜻만을 각 지역에 펴야 했다.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를 주시고 - 이 구절은 파송하는 제자들에게 주는 직무이다. 평행 본문인 눅 9:1에서는 병고치는 능력을 첨가하고 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파송에 대한 구체적 언급은 없다. 다만 더러운 귀신을 제어할 능력을 준 것은 12, 13절의 내용을 미루어 보아 복음 전파와 병의 치유를 위한 것임을 추측할 수 있다. 실로 사단의 권세가 정복되는 그곳에 주의 복음이 생명력 넘치게 자라나며 모든 부정하고 파괴적인 것들이 소멸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새롭게 건설되는 것이다.

========6:8 - 9
이 구절은 전도 여행을 떠나는 제자들에게 주는 여행 지침이다.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 . . . 신만 신고 두 벌 옷도 입지 말라 하시고 - 평행 본문인 마 10:10, 눅 9:3에서는 지팡이도 가지지 말라고 명한다. 이러한 차이에 대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기록된 지팡이는 보호를 목적으로 한 복자들이 소지하는 몽둥이고 마가복음의 지팡이는 보행에 도움을 주는 여행용 지팡이라고 보면서, 보행에 도움을 주는 것만 허용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구애됨 없이도 예수의 의도는 계속 이어지는 명령들에서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한편 본문의 "양식"은 어떤 종류의 음식이든 다 포함되며, "주머니"는 양식이나 생필품을 넣고 다니는 여행 가방을, "전대"는 일종의 허리띠로서 동전 등을 보관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돈"(칼로스)은 로마와 헬라에서 통용되던 작은 구리 동전으로서 소량의 잔돈으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신"은 일종의 샌달(sandal) 같은 매우 간편한 여행용 신발을 가리킨다. "두 벌 옷"은 "여벌의 옷"이라는 뜻으로 이 같은 여분의 옷은 여행자가 노숙(露宿)할 때 밤의 한 기운을 막아주는데 매우 요긴하다. 그러나 예수는 그것조차 금하셨다. 한편 지팡이와 신을 신는 것만 허용된 것이 출 12:11과 비슷한 것에 착안하여 출애굽과 광야에로의 여행을 앞두고 내려졌던 명령과 일치시켜 전도 여행을 떠나는 제자들에게 출애굽적인 긴박감과 하나님의 능력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출애굽 신앙을 상기시키기 위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U. Mauser). 이 주장은 앞에서 두 사람씩 짝지어 보내는 전략과 더불어 가치있는 주장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 명령을 이해하면 ① 먼저 자신들이 전파하는 복음에 깊은 관심을 두고 자기 신변에 대한 염려는 일체 하지 말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② 제자들이 매일 그들에게 호의를 베푸는 다른 사람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도우심에 대해 신뢰하는 법을 배우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다. ③ 복음 전파나 병자 치유를 위해 부름 받은 전도자는 청빈(淸貧)해야 한다는 규범적 명령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자기가 의지할 수 있는 모든 소유를 버림으로써 하나님께 절대 의존할 수 있도록, 즉 자기소유에ㅔ 의존함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약화되는 일을 막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명령은 결국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전폭적인 믿음으로부터 출발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당신이 12제자들에게 위임하려는 사명이 매우 긴박하다는 사

=======6:10
뉘 집에 들어가거든. . . . 거기 유하라 - 평행 본문 마 10:11에는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그곳에 유(留)"하라고 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신세를 질 만한 집을 찾으라는 말인데, 그 조건은 아마도 경제적 여건도 고려해야 했을 것이고 더욱 중요한 것은 제자들의 전도 활동을 이해하고 용납할 수 있는 사람을 택해야 했을 것이다. 이렇게 거처할 집을 정하면 떠날 때까지 옮기지 말고 한 집에 머물라는 이유는 제자들의 행동이 주인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고려했을 것으로 보인다. 즉 최초 거주지에 만족치 못하고 더 편한 안식처를 찾아 여러 집으로 옮겨 다니게 되면 주민들 간에 불화를 조성하고 또 좋지 않은 소문을 낳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 여러 사람들에게 신세를 지게 되면 주민들에게 폐를 많이 끼치게 됨으로 피해를 줄이기 위한 배려(配慮)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한 집을 정했으면 많은 불편이 있다 해도 참고 떠날때까지 거처를 옮기지 말아야 한다. 이는 곧 자신의 안락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일에 전념하는 사명자의 태도인 동시에 이웃에게 선한 이미지(image)를 제공함으로써 결국 그리스도께 영광돌려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아름다운 태도인 것이다.

======6:11
너희를 영접지 아니하고. . . 듣지도 아니하거든 - 이 구절은 예수가 제자들을 파송하면서 제자들에게 전도 활동이 순탄하지 않을 것이라는 불길한 암시를 주고 있는 내용이다. 이러한 암시는 심지어 당신의 고향에서조차 배척받은 바 있는 예수 자신의 경혐에서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사실이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복음 증거자로서 배척당하게 될 상황에서 과연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 것인지를 가르치고 계신다.
발아래 먼지를 떨어버려. . . 증거를 삼으라 - 이러한 행위는 유대인들의 생활 습관 중의 하나이다. 즉 경건한 유대인들이 이방 땅을 밟거나 여행하고 돌아올 때는 발과 옷에 묻은 이방 땅의 먼지를 모두 떨어내는 관례가 있었다. 그들은 이방인을 부정한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이처럼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단호한 행동을 요구하신 것은 복음을 배척하는 지역은 마치 이방인 지역과 같이 멸망의 자리에 놓이게 됨을 알리고 또 복음을 거절한 자들이 그들 스스로에 대하여 분명히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즉 어떤 의식주의(儀式主義)를 고수하거나 편당주의를 옹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방인들에게 하는 경멸적 행위를 유대인들에게 함으로써 반대자들에게 복음을 거부(拒否)하는 것이 얼마나 크나큰 잘못인가를 분명히 알려주기 위한 목적에서 이 같은 행동을 명하신 것이다. 결국 이러한 행위는 오직 믿음과 순종으로만 들어가게 되는 하나님 나라의 원리와 진리를 선명하게 밝히기 위한 상징적 행위로서 그들이 급기야 구원의 가능성에서 단절됨을 선언하는 한 증거이다. 이는 개인적 원한 관계의 차원에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의 복음과 그 권위를 거부했다는 관점에서 이해해야만 한다.

====6:12
회개하라 전파하고 - 제자들의 선교 주제가 스승인 예수의 선교 주제와 일치하고 있다. 즉 예수도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외치면서 활동을 시작했다(1:15). 다른 평행 본문에는 이런 묘사가 없으나 마가는 예수와 제자들의 선교, 그리고 세례 요한의 선교 메시지를 일치시킴으로써 천국 복음 전파의 대주제를 명확히 밝히고 있다(1:4). 그리고 세례 요한으로부터 시작하여 제자들의 활동까지 "회개"라는 말로 묶어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다. 실로 천국 입성의 전제 조건은 과거의 죄악된 삶의 길과 방식을 전격적으로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참된 "회개"로부터 시작된다. 물론 이 "회개"와 "믿음"은 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이 병행된다.

========6:13
귀신을 쫓아내며. . . . 기름을 발라 고치더라 - 제자들의 복음 전파와 병행되는 정신적(영적), 육체적 치유 사역의 대표적 행위가 각각 제시되고 있다. 물론 이 같은 치유 이적은 복음의 진실을 확증하고 많은 사람들을 신앙의 길로 들어서게 하기 위한 궁극적 목적하에 이뤄졌다. 한편 이를 통해 볼 때 제자들의 활동이 설교내용만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 치병 기적까지 일치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예수의 활동이나 제자들의 활동은 주 가지로 크게 구별할 수 있다. 즉 하나는 복음 선포 즉 설교와 가르침을 통한 진리 선포이다. 다른 하나는 치병 활동을 통하여 육체적, 정신적 병으로부터 사람을 해방시키는 일이다. 따라서 참으로 온전한 인간 구원은 사람의 영과 육이 모두 구원을 얻는 전인적인 구원임을 보게 된다. 결국 지상에서 펼쳐지는 모든 선교 활동은 인간의 영. 육 모두가 구원의 대상이 됨을 실천해 보여야 할 것이다. 한편 본문에서 보듯이 제자들의 치료 방법은 예수의 방법과 차이점이 있다. 즉 기름을 발라 치유한 점이다. 이러한 치유 방법은 복음서 중 이곳과 눅 10:34 이외에 다른 곳에서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치유 방법은 당시 유대교와 헬레니즘 세계에서 널리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당시 교회 공동체에서도 이 같은 방법의 치유 행위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물론 이같은 기름 바름은 단지 그것이 치료 효과가 있다는 의학적 측면에서만 사용된 것이 아니라 약 5:14, 15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병자에게 주는 하나님의 도움 곧 신유의 은혜와 그 능력을 상징하기도 한다.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하여 로마 카톨릭은 제 2차 바티칸 공의회(1962)에서 도유(Unction)라는 성례전을 제정하여 환자에게 기름 바름을 통한 죄사함과 병나음을 소원하게 했다. 이것이 발전하여 9세기 카톨릭 개혁 시대에는 병든 자가 아니더라도 죽음에 직면한 자에게 교회가 베풀 수 있는 최종 예식으로 이 도유를 행하게하여 그로 하여금 죽음을 예비하게 했다. 흔히 이것을 부
유식(傅油式) 또는 종유식(Extreme Unction)이라 부른다.

==========6:14 - 29
세례 요한의 죽음에 대하여 상세히 서술하고 있는 본문은 예수의 제자들이 행하는 선교 활동(6:13 ; 30 - 45절) 사이에 삽입된 일종의 중간 삽화이다(마 14:1 - 12 ; 눅 9:7 - 9), 따라서 13절과 30절을 곧바로 연결하여 읽어도 무방하다. 마가는 예수의 활동이 새로운 국면을 맞아 성공적인 성과를 올릴 때에 이 삽화를 통해서 세례 요한의 죽음과 극적인 대비를 이루게하여 예수의 본질과 그 사역의 혼동을 불식시키고 메시야의 선구자에 불과한 세례 요한과 메시야 되신 예수 사이에 엄격한 구분을 증명해 보이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6:14
이에 예수의 이름이 드러난지라 - 13절의 내용과 무난하게 연결되는 듯하다. 즉 제자들의 활동을 통해 예수의 명성이 높아지게 되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보문은 예수의 제 3차 갈릴리 사역 중간에 발생한 일로 볼 수 있다.
헤롯 왕이 듣고 가로되 - 헤롯대제(Herod the Great)와 부인 말타스(Malthace) 사이에 태어난 헤롯 안티파스(Herod Antipas)를 가리킨다. 그는 헤롯 대제 사후 분봉왕으로서 갈릴리와 베레아의 분봉왕(한 나라의 1/4 영주)이 되었다. 그는 왕의 신분을 얻지 못한 군주였는데 로마의 칼리굴라(Galigula) 황제 시절에 로마로부터 왕의 신분을 얻으려 하다가 실패하여 A. D. 39년에 실각(失脚)하였다. 그럼에도 여기서 왕이라는 칭호를 쓴 것으로 보아 당시 사람들이 실제로 헤롯을 왕이라고 호칭했을 가능성이 있거나 아니면 마가가 역설적인 의미에서 이 칭호를 사용한 것 같다(Taylor). 어쨌든 헤롯은 아버지보다 유능하지 못하다고 평가되었다. 그는 아라비아 왕인 아레타스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였지 자신의 동생 처인 헤로디아를 다시 아내로 맞아들였다. 그 때문에 본처는 친정으로 가버리고 이에 불만을 품은 아라비아는 전쟁을 일으켜 헤롯을 패전시켯다. 한편 당시 헤롯이 "들은"것은 12제자들의 전도 사역을 의미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예수의 제자들이 갈릴리 호수의 남서쪽 해변 위에 있는 디베랴(Tiberias)까지 먼 전도 여행을 했는데, 이 디베랴는 헤롯이 그의 수도를 세운 곳으로 당시의 로마 황제인 티베리우스(Tiberius)의 이름을 따서 디베랴로 부른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헤롯이 "들은"것은 이러한 제자들의 활동 이상으로 예수의 권능 있는 사역들을 가리킬 수도 있다. 오히려 앞의 견해보다 이 견해가 더욱 타당한 듯하다. 왜냐하면 14 - 16절의 주된 관심이 예수가 누구인가 하는 문제에 집중되기 때문이다.
세례 요한이. . . . . . . 살았났도다 - 헤롯은 자신의 비윤리적 행동을 비판한 세례 요한을 죽인 후 늘 양심에 가책을 받고 있던 중 예수의 활동을 보면서 세례 요한이 예수 안에서 되살아나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실로 범죄자는 심리 상태가 늘 불안하며 항상 피해 의식 속에 살아가기 때문에 사소한 일이라도 자신과 결부시켜 생각하거나 큰 두려움에 떨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운동하느니라 - 이는 헤롯의 종교관을 반영한 말로서 헤롯은 세례 요한이 살아 생전에는 이적을 행하지 못했으나(요 10:41) 그가 부활함으로써 이제 이적을 행하게 되었다고 단정했던 것이다. 특별히 본문에서 "능력"(에네르구신)이란 "활동적인 능력", "힘찬 역사" 등을 의미하는 말로서 당시 예수께서 행하신 이적과 기사가 헤롯에게 얼마나 큰 이미지(image)로 다가갔는지를 예상케 한다. 여하튼 헤롯이 이 미신적인 발상은 결국 예수의 활동 자체가 자신에게 대단히 위험한 결과를 안겨 줄 것이라는 불길(不吉)한 예감을 느겼음을 반영 하는 것이라 본다.

==========6:15
어떤이는 . . . . 엘리야라 하고. . . . . . 선지자 중의 하나와 같다 하되 - 아마도 헤롯의 신하가 헤롯을 안심시키려는 의도로 세례 요한이 되살아온 것이 아니라 사람들은 엘리야나 아니면 선지자로 여긴다고 말했을 것이다. 이 이야기로 보아 당시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활동을 선지자의 활동이나 엘리야가 와서 활동하는 것으로 오해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그들이 예수를 엘리야로 생각한 것은 유대인들의 신앙 중의 하나가 여호와께서 심판의 날에 앞서 엘리야를 보낼 것이라는 약속(말 4:5)을 믿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사람들은 세례 요한이 예언한 바 있는 "오실 이"(1:7)가 엘리야 이외에 다른 특정 인물이라 볼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또 예수의 활동이 당시 유대인들이 설화를 통해 알고 있는 엘리야의 활동과 비슷하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리고 뒤이어 언급되는 "선지자"는 신 18:15 - 19에 예언된 "그 선지자"(the prophet)와 같은 어떤 특정한 선지자가 아니라 조상들의 시대에 활동하였던 많은 예언자들과 같은 반응들을 살펴 볼 때 당시 부활 사상이 보편적으로 자리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죽은 사람이 부활하여 다른 사람의 몸 속에서 활동한다는 헤롯의 말은 매우 흥미있다. 이것은 단순한 부활이 아니라 윤희설과 비슷하다. 이로 보건대 당시에는 영혼 불멸 사상에 대한 다양한 형태의 이야기들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6:16
내가 목배인 요한 그가 살아났다 - 여기서 헤롯의 불안한 마음이 간접적으로 강하게 표출된다. 신하들이 다른 의견을 제시하지만 헤롯은 틀림없이 예수의 활동이 죽은 세례 요한의 활동이라고 본다. 여기서는 자신이 직접 "내가 목베인"이라는 말을 사용하여 자신이 직접적인 책임을 의식하고 있음을 암시해 준다. 그리고 세례 요한이 복수하러 올 것이라는 예감 때문에 두려워하는 헤롯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또한 그의 이러한 양심의 가책 때문에 예수가 부활한 세례 요한일 것이라고 단정했음을 알 수 있다.

=======6:17 - 18
전에 헤롯이 . . . 동생의 아내를 취한 것이 - 여기서부터 세례 요한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된다. 14 - 16절은 이 이야기의 도입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 세례 요한을 헤롯이 직접 목을 베었다는 언급과 세례 요한의 부활이라는 생각으로 두려워하는 헤롯의 모습은 그 이유에 대한 호기심을 갖게 한다. 그 의문을 겨기서 밝히고 있다. 이제 이야기는 14 - 16절의 시간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마가는 "전에"라는 시간부사를 사용하고 있다. 세례 요한이 헤롯에게 죽임을 당한 이유는 헤롯의 부도덕성에 대한 비판 때문이었다. 헤롯이 자기의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에게 장가를 들은 것이 비판의 이유이다. 그 행위는 출 20:14, 17의 간음 금지와 동생의 아내와 결혼하는 근친 상간(레 20:21) 금지를 범한 것이다. 사실 헤롯 가문의 가계는 왕위 계승을 둘러싼 살인과 치정(癡情)이 뒤엉킨 참으로 수치스러운 모습으로 이뤄져 있다. 특히 본문에 언급된 헤로디아는 헤롯 대제의 아들들 가운데 하나인 아리스토볼로스(Aristobolos)의 딸로서 자신의 이복 삼촌인 헤롯 빌립 1세(Herod Philip)의 아내 였으나 그 남편을 버리고 남편의 형제이자 자신의 이복 삼촌인 헤롯 안티파스와 재혼하였다. 따라서 세례 요한은 지도자의 범죄로 보고 과거의 예언자들처럼 단호하게 비판하였다. 즉 다윗왕의 간음에 대해 나단이 비판하였던 것처럼(삼하 12:1 - 15) 또 지도자들의 죄악을 무섭게 비판했던 엘리야처럼(왕상 18:1 - 15 ; 21:17 - 29 ; 왕하 1:1 - 16 ; 대하 21:12 - 15) 세례 요한 역시 그렇게 했다. 특히 18절의 "말하되"(엘레겐)는 미완료 시상으로 세례 요한이 거듭해서 헤롯의 불의를 직고했음을 보여준다. 실로 세례 요한은 불의에 대해서는 권력의 힘도 개의치 않고 직언(直言)과 비판을 서슴치 않았다. 이것은 그의 소명 의식에서 발동된 것이라고 본다(1:3). 이러한 세례 요한의 행동에 대한 헤롯의 첫 반응은 세례 요한을 옥에 가두는 것이었다. 마가는 세례 요한의 투옥처를 언급하지 않고 있으나 유대 사가 요세푸스(Josephus)는 요한이 베레아 지방에 속하며, 사해 동쪽에 위치한 요새 마케루스(Machaerus) 산성의 감옥에 투옥되었다고 전한다. 그런데 마가는 요한의 투옥 이유가 "그 여자"를 위한 것이었다고
전한다. 즉 헤롯이 헤로디아를 위해 세례 요한을 옥에 가두었다는 말이다. 이것은 아마도 헤로디아의 요구에 의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왜냐하면 24절에서 헤로디아가 요한의 목을 요구하는 것으로 보아 그 추측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또 19절에서는 헤로디아가 죽이고자 마음 먹었음을 밝히고 있고 20절에서는 역시 요한을 죽이는 것에 헤롯이 반대하였음을 시사하고 있다. 따라서 헤로디아의 요구에 의해 세례 요한이 옥에 갇혔음이 분명하다. 한편 요세푸스의 증언에 따르면 요한의 투옥 이유 가운데 또다른 이유는 그가 민중들에게 상당한 호응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헤롯이 정적(政敵)을 이찌감치 제거할 목적으로 투옥시켰다고 전한다. 어찌되었든 세례 요한은 경건하고 의로운 메시야의 선구자이자 그 시대 정신으로서 끝내 불의한 정치 집단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6:19
헤로디아가 요한을 원수로 여겨 - 문자적으로 "헤로디아가 요한에게 원한을 계속(미완료 시제) 품고 있었다. " 더나아가서 "헤로디아가 반드시 그를 처벌받게 할 것이다" 등의 뜻으로 헤로디아의 깊디깊은 적의를 소개하고 있다. 그녀는 자신의 치부를 가리기 위해 더깊은 죄악(살인)을 도모하고 있었던 것이다.

=========6:20
헤롯이. . . . . 두려워하여 보호하며. . . . . . . 달게 들음이러라 - 19절에서는 헤로디아가 요한에 대해 원한을 품고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반면에 20절에서는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 곧 아무런 범죄를 저지른 일이 없는 사람으로 여기고 요한을 "보호하려는"(미완료 시제로 계속적인 헤로디아의 간청에 대해 헤롯이 거듭하여 요한의 신변을 보호해왔음을 암시) 사람으로 묘사되어 두 사람이 극적으로 대비되고 있다. 따라서 마가는 헤로디아를 상대적으로 매우 악한 여자로 부각시킨다. 이러한 묘사가 평행 구절인 마 14:5에서는 없고 다만 헤롯이 요한을 죽이려 했다고만 밝힌다. 그러나 여기서는 오히려 헤롯이 세례 요한의 말을 듣고 요한의 비판을 긍정하면서("달게 들음이라") 내적으로 몹시 괴로워하는 매우 심약하고 우유 부단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마가는 이와 같이 헤로디아와 헤롯의 극적인 대비를 통해 헤로디아의 악함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며 또한 헤롯의 선함을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세례 요한의 의로움과 거룩함을 강조하고자 한다. 즉, 요한으로부터 공격받은 헤롯이 직접 요한을 가리켜 "의롭고 거룩한 사람"이라고 고백함으로써 요한의 의로움이 크게 강조되고 있다.

=========6:21
마침 기회 좋은 날이 왔으니. . . . . 잔치 할새 - 이 구절은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헤로디아임을 암시한다. 즉 "기회 좋은 날"이란 헤롯의 보호 장벽을 뛰어넘어 세례 요한을 죽이기에 좋은 날이라는 것이 문맥상 분명하기 때문에 결국 좋아할 사람은 헤로디아가 된다. 헤로디아가 왜 좋아했는지는 24절에 나오고 있다. 그것은 요한을 죽이겠다는 자신의 의견을 거절할 수 없도록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여기서 "좋은 날"은 헤롯의 생일이다. 그날은 매우 큰 기념 잔치로서 대연(大宴)을 베푼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교적 관습으로 치부하여 이 생일 지키는 것을 매우 싫어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헤롯은 자기 생일에 이교도들 보다 더 어마어마하게 생일 잔치를 펼치고 있으니 이것이 문제였다(Lenski). 한편 본문의 "잔치"(데이프논)는 가장 친근하고 귀한 손님들을 모시는 큰 만찬(晩餐)을 가리킨다. 한편 마가는 이 생일에 초대되는 사람들을 크게 세 부류로 나누어 소개하였다. 그 첫째가 "대신들"이다. 대신들은 헬라어로 "메기스타네스"라고 하는데 이 말은 "위대한", "큰"(great, large), "중요한"(important)의 뜻을 가진 "메가스"에서 유래된 말이다. 따라서 고위 관리자나 유력자에게 붙이는 호칭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분봉와 아래에 있는 행정 사무를 담당하는 직속 고위 관료로 부는 것이 타당하다. 두 번째로 "천부장"들이다. 이들은 1, 000명의 군사를 지휘하는 장교로서 군사적으로 고위 계층의 인물이다. 그리고 세 번째로 갈릴리의 귀인들, 즉 갈릴리 지방의 유지 및 상류 계층의 사람들이다. 이와 같이 나열한 사람들의 성격을 보아 헤롯의 권세가 상당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이러한 그의 지위에도 불구하고 요한의 비판(20절)과 요한의 능력에 찬 활동(14 - 16절)을 두려워하는 헤롯의 모습을 통해 마가는 비록 세례 요한이 그의 정치적 희생물이 되었지만 그에게 대한 요한의 심대한 힘을 은연중에 나타내 보이고 있다.

========6:22
헤로디아의 딸이....춤을 추어 - 헤로디아와 그의 전남편 빌립 사이에서 태어난 여아로서 이름은 "살로매"라고 하였다(Josephus). 그 당시 그녀의 아니는 14 - 15세 또는 17세 아니면 20세 이하 정도였을 것으로 보는 견해들이 있다. 그 이유는 마가가 사용한 "그 여아"를 뜻하는 헬라어 "코라시온"이라는 말이 이제 막 어린 소녀 티를 벗어나 결혼기에 이른 처녀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이 살로매가 손님들 앞에서 춤을 추게 된다. 아마 그녀가 자청해서라기 보다 그녀의 어미 헤로디아의 지시로 연석에 앉은 손님들이 어느 정도 취기가 돌았을 때에 무대로 나아갔을 것이다(Marrher). 한편 본문의 정황, 곧 모두가 흡족했던 것으로 보아 춤솜씨가 매우 탁월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분봉왕의 딸이면 공주라고 부를 수 있는데 과연 그런 신분으로 연회장에서 춤을 추었겠는가 하는 의문이다. 왜냐하면 그런 술자리에서 춤추는 것은 일반적으로 고용된 무희들(일종의 위안부)로서 대개 천한 심분 출신들이었기 때문에 그렇다. 더욱이 당시 연회석상에서 추던 춤은 노출이 심한 옷에 매우 외설적이고 음란한 몸짓으로 남성들의 말초 신경을 극도로 자극하는 춤이었던 관계로 감히 왕족의 고귀한 신분으로서 그런 춤을 춤다는 것은 거의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헤롯 궁전의 도덕이 땅에 떨어질 만큼 문란(紊亂)하고 퇴폐적이었음을 감안할 때 그녀의 음란한 몸짓은 능히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헤로디아와 그의 딸을 아주 부정한 자로 강조하고 있는 마가의 의도대로라면 헤로디아는 요한이 비판했던 부도덕한 결혼의 책임을 져야 하는 간교하고 음란한 여자임이 분명하다. 때문에 그런 여자라면 자기의 딸을 공중의 눈요기감으로 능히 춤추게 할 수 있었을 거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무엇이든지.....내가 주리라 - 당시 특권 계급의 專橫)과 무소 불위(無所不爲)한 그들의 횡포 및 정치, 사회 전반에 걸친 헤이한 기풍을 감지할 수 있는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매우 충동적이고 즉흥적이며 자기 과시적인 헤롯의 인간성을 넌지시 보여주고 있다.

==========6:23
맹세하되 - 이는 구두로 제시된 왕의 인준 및 서약으로서 결코 변경할 수 없는 절대 약속인 것이다. 따라서 헤롯은 그 어떤 일이 있다 하더라도 자신의 약속을 지켜야만 했다. 한편 율법에는 이 같은 맹세의 불변성이 강조되고 있다(민 5:21).
내 나라의 절반까지라도 주리라 하거늘 - 헤롯은 딸에게 엄청난 약속을 하고 있다. 즉 자기가 다스리고 있는 땅의 절반을 딸에게 주겠다는 것이다. 물론 이 말은 문자적인 의미로 이해되어서는 안 되며, 무엇인가를 후히 주고자 할 때 사용하는 일종의 속담과 같은 말이다(왕상 13:8 ; 에 5:3 ; 7:2). 사실 이러한 약속은 헤롯의 신분으로는 전혀 불가능한 것이다. 왜냐하면 헤롯은 자기 영토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자주권을 지닌 통치자가 아니라 로마의 명령을 받는 하급 군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는 헤로디아의 딸의 춤솜씨가 너무 매혹적이어서 허풍스럽고도 과장된 반응을 표출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결국 자기 맹세의 올무에 걸려들고 말았다.

======6:24
내가 무엇을 구하리이까 - 여기서 헤로디아의 음모(陰謀)가 드러난다. 그런데 헤로디아와 그의 딸이 공모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확실한 단정을 내릴 수 없다. 그러나 두 가지의 가능성을 모두 가정할 수 있다. 먼저 공모했을 가능성은 딸이 어머니에게 찾아와서 무엇을 구하면 좋겠느냐고 물었을 때 어머니가 요한의 목을 달라고 하라는 대답에 조금도 놀라는 기색도 없이 돌아가 덧 여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담아 달라고 태연하게 말하는 것은 충분히 사전모의를 했을 가능성을 내포한다. 그러나 반대로 사전 모의를 했으면 왜 그 어미에게로 찾아가 무었겠는가 하는 점이 의문시 된다. 따라서 딸은 어머니와의 사전 모의 없이 시키는 대로만 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 두 가능성을 포함할 수 있는 제 3의 가정은 모의는 하되 헤로디아의 결정적인 문제, 즉 요한의 목을 요구하는 것은 헤로디아 혼자만의 생각이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6:25
저가곧. . . . 급히 들어가 - 헤로디아의 딸은 헤롯의 약속 의지가 옅어지기 전에 그리고 그 고조된 분위기가 식기 전에 잽싸게 자신들의 음모를 수행할 생각으로 "곧", "급히" 헤롯에게 달려가 소청했다.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담아 - 세례 요한의 최후가 심히 비극적이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쉽게 짐작케 하는 소름끼치는 요구이다. 여기 "소반"은 대형 접시(charger)를 가리킨다(마 14:8).

========6:26
왕이. . . . . 자기의 맹세한 것 - 헤롯은 자기가 한 맹세에 대해서 몹시 후회하고 있다. 여기서 특히 "맹세"(디아 투스 호르쿠스)란 복수로 표기되어 있어 그의 맹세가(23) 한 번에 그친 것이 아니라 여러 번 반복, 확인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그 같은 맹세가 잔치에 참속한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한 것이라서 자신의 위신과 체면 때문에 거절할 수 없는 진퇴 양난에 빠지게 됐다. 그리고 20절에서 언급된 바처럼 헤롯이 요한을 지금껏 계속해서 두둔해왔기 때문에 헤롯의 딜레마(dilemma)는 더욱 심각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의 체면 유지는 한 사람의 의로운 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양심의 소리보다 더욱 중요하고 절실한 것이 되고 만다. 여기서 22, 23절에 이미 묘사된 바 있듯이 헤롯이 치밀하지 못하여 지도자로서 판단력이 부족한 것으로 보여진다. 즉 무능하고 마음이 여린 것으로 비춰진다. 물론 이 같은 기질은 그의 심성 자체가 온유해서라기보다 그가 진리와 정의에 대해 용기가 없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빚어진 현상이다. 결국 그는 간교한 헤로디아의 올무에 꼼짝없이 걸려들게 되었다.

========6:27
시위병(스페쿨라토라) - 라틴어 "스빼꿀라또르"(speculator)에 해당하는 말로서 "정탐꾼", "정찰병", "감시자" 혹은 "사형 집행자"라는 뜻으로 쓰인다. 그러나 본문에서 이 용어는 시위병 곧 궁을 지키며 왕의 신변 경호를 위해 있는 병사를 가리킨다. 한편 이때 헤롯은 마케루스 궁 안에 머물렀으며 그 사형 집행 장소는 그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을 것이다.

=======6:28
그 머리를 소반에 담아다가. . . . 주니 - 시위병이 명령에 따라 요한의 목을 베어 소반에 담아 오는 동안 헤로디아의 딸은 침착하게 그 연회 석상에서 기다렸던 것 같다. 참수된 요한의 머리는 그 냉혈적(冷血的)인 딸에게 주어졌고 그 딸은 다시 어미에게 그것을 건네 주었다. 여기서 헤로디아의 악마성이 부각된다. 살인을 공모. 교사하는 것 뿐만 아니라 그 러미를 직접 받아들고 있는 모습은 참으로 인간의 탈을 쓰고는 하지 못할 것이다. 한편 어떤 전승에 따르면 이때 요한의 머리을 전해 받은 헤로디아는 그의 머리 핀 끝으로 진실과 정의를 부르짖었던 세례 요한의 혀를 찔러보고 또 그의 혀를 뽑아 내기까지 했다고 전한다(마 14:10, 11).

========6:29
요한의 제자들이. . . . 장사하니라 - 세례 요한에 관한 이야기가 이제 마무리된다. 당시 요한과 긴밀히 소식을 교환하고 있었던 그의 제자들은(마 11:2) 스승의 죽음을 전해듣고 살의(殺意)가 채 가라낮지 않은 마케루스 성에 찾아가 담대히 스승의 목없는 시신을 요구했던 것이다. 한편 요한의 죽음으로 헤롯은 자기와 요한과의 관계가 모두 끝난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이 같은 헤롯의 만행을 깊이 염두에 두고 있었으며, A. D. 30년 나바티아 족(Nabataeans)과의 전투에서 참패했을 때 그것이 헤롯에 대한 하나님의 엄중한 징벌이었다고 단정할 만큼 헤롯과 그 가족의 만행을 두고두고 되새기고 있었다. 한편 마태는 본 사건을 기술하면서 요한의 제자들이 장사(葬事)를 마친 후 그 모든 일을 예수께 고했다고 전한다(마 14:12). 이로써 결국 세례 요한에 관한 이야기는 예수 이야기의 배경 역할을 하게 된다. 실로 세례 요한이 생존시 고백했듯이 그 자신은 쇠하여야 하겠고 오실 그분, 곧 예수는 흥하여야 했던 것이다(요 3:30).

=======6:30 - 44
이 사건을 오병 이어(五餠二漁)기적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평행 본문은 마 14:13 - 21과 눅 9:10 - 17에 있다. 정소는 게네사렛 호수 동쪽 해안 지대일 것이다. 마가의 기록에서 특징적인 것은 서론이 치밀하게 구성되어 있고 사천 명을 먹이신 일을(8:1 - 10) 그 후편으로 다루고 있으며 제자들과의 대화가 좀더 많은 점이 돋보인다. 또 삽화로 나온 헤롯의 잔치 곧 헤롯 궁전의 현란하고 호화로운 분위기와 예수가 일개 서민의 주식에 불과한 음식으로 배부르게 해야 했던 일반 백성들의 궁핍한 형편을 극적으로 잘 대비시키고 있다(Lane). 한편 본 이적은 사복음서(요 6:1 - 15) 모두가 소개 되는 유일한 기사라는 점에서도 그 의미를 더해주고 있다.

=======6:30
사도들이 예수께 모여. . . . 고하니 - 이 구절은 13절에 이어지는 것이다. 즉 제자들이 파송받아 복음 전파와 치병 기적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돌아와 예수께 보고하는 장면이다. 그러나 마가는 제자들의 활동 기간이나 그 활동 내용에 관해서는 구체적인 언급을 하고 있지 않다. 다만 그들이 예수의 위임을 받아 갈릴리 전역에 흩어져 선교 사명을 완수하고 동아온 사실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여기서 마가는 "모여"라는 말을 현재 시제로 묘사함으로써 그 장면에 생동감을 더하고 있다. 그리고 제자들이라는 말 대싱에 "사도들"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마가는 본절에서만 유일하게 그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사도"는 헬라어로 "아포스토로스"라고 하는데 이는 "특수한 사명을 띠고 파송받은 사신"을 말한다. 따라서 여기서는 제자들이 예수로부터 복음 전파와 치병 활동을 위해 특별히 파송받은 것이므로 적절한 단어 사용이라고 볼 수 있다(Gould). 어쨌든 예수께서는 그들이 감격어린 음성으로 전하는 모든 선교 활동의 보고를 하나하나 귀담아 들으시는 성실함을 보이셨다(눅 9:10).

======6:31
따로 한적한 곳에. . . 쉬어라 - 제자들의 활동 보고에 대한 예수의 반응은 한적한 곳에서 휴식을 취하라는 배려이다. 이것은 제자들이 전도 활동을 하는 동안 상당히 피로해 있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며 제자들을 아끼는 스승으로서의 애틋한 마음의 펴현이기도 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휴식은 새로운 내일을 위한 영. 육의 재충전이라는 측면에서도 충분히 생각되어야 한다. 사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바 "쉬어라"(아나파우사스데)는 말은 중간태 명령형으로서 "충분히 휴식을 회복하라"는 의미도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그런데 본문에 의하면 지금 대화를 하고 있는 장소가 매우 분주한 장소인 것으로 보여진다. 즉 음식을 먹을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오고가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마가의 전형적인 묘사법으로서 예수가 가는 곳에는 항상 둔중이 쉴새 없이 모여들고 있는 생동적인 장면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마가는 이와 같은 장면 연출을 통해 예수 활동을 극적으로 고조시키려 하고 있다. 즉 식사할 겨를조차 없이 분주하게 활동하는 예수의 열정적 모습과 그를 좇는 수많은 무리들을 통해 당시 예수의 영향력을 감동적으로 느낄 수 있게 한다. 여기에 모여든 꾼중들중에는 유월절이 다가와 예루살렘으로 여행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고 또 예수와 제자들의 활동을 통해 그 명성을 듣고 모여든 주총자들도 많았을 것이다. 한편 본문의 "한적한 곳"(에레모스)이란 외롭고 적막한 "광야"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마가는 본 사건을 기록하면서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광야에서의 휴식"이란 주제를 염두에 둔 것 같다. 즉 이스라엘의 출애굽 당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휴식을 제공하셨던 곳이 광야였다. 그런데 바로 이 사건이 선지자 이사야(사 63:14)와 예레미야(렘 31:2) 때에 이르러, 하나님의 새 백성이 제 2의 출애굽 때에 받기로 약속된 제 2의 휴식(a seoind rest)에 대한 모형으로 발전하였다.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바로 이 약속을 성취했다. 왜냐하면 구름 기둥과 불 기둥 대신 예수가 곧 하나님의 임재이며, 만나 대신 예수가 곧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신령한 떡, 곧 생명의 양식이 되셨기 때문이다.

======6:32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에 갈새 - 예수와 제자들이 무리들을 피하는 방법으로 육지에서 배를 타고 한적한 곳으로 뱃머리를 돌렸다. 아마도 그들은 호수 북동쪽으로 갔을 것이다. 이때 예수를 좇던 무리들은 황급히 요단강 본류에서 갈릴리 호수로 물이 흘러 들어가는 얕은 곳을 따라 요단강을 횡단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편 본문에는 한적한 곳이 어디인지 밝히지 않고 있다. 분명한 것은 호숫가에서 배를 이용하여 다른 호숫가로 이동하는 점이다. 그러나 눅 9:10을 참고하면 행선지는 이름이 "어촌"이라는 뜻을 지닌 "벳새다"라 하는 광야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45절에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건너편 벳새다"로 가라고 지시한다. 그렇다면 33절에서의 도착 지점은 "베새다"가 아니라는 말이 된다. 하지만 이같은 모순은 갈릴리 해변에는 이 지명을 지닌 곳이 두 곳(갈릴리 북동쪽과 갈릴리 서안쪽)이었다고 봄으로써 어느 정도의 이해를 도울 수 있을 것이다. 한편 갈릴리 북동쪽 벳새다는 헤롯 빌립이 도시(city)로 승격시키고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딸인 율리아스(Julias)의 이름을 따서 그곳에 명명함으로써 벳새다 율리아스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6:33
많은 사람이 저희인중 안지라 - 이 구절로 보아 군중들이 배가 떠난 뒤 뒤늦게 야 배에 탄 자들이 예수의 일행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이해할 수도 있겠으나 문맥상 적절치 못하다. 호히려 배를 타고 가는 것을 보고 예수의 일행이라는 사실을 안 사람들은 호수 주면에 있는 여러 마을에 살고 있는 주민들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각각 자기 마을에서 호수를 가로질러 가는 배를 보고(아마 당시 역풍으로 인해 배의 진행이 지체된 듯함) 그 배에 탄 사람들이 예수의 일행임을 알아보았을 것이다. 따라서 호숫가에 위치한 여러 마을 사람들이 멀리서도 예수의 일행을 알아보았다면 그들은 이미 예수에 대한 명성을 잘 알고 있었던 사람들로 보여진다. 이러한 이해를 뒷받침해 주는 구절이 곧이어진다.
모든 고을로부터 도보(徒步)로. . . . 저희보다 먼저 갔더라 - 이는 마가의 현장감 넘치는 문장 기법이 돋보이는 장면으로 휴식을 위해 한적한 곳으로 이동하는 예수의 일행과 그 일행을 따라 달리는 군중들의 모습을 대비적으로 생동감 있게 보여준다. 즉 부정적 시각에서 보면 모여드는 군중들에게 시달리며 피곤해 하는 예수의 일행을 생각할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휴식하러 떠나는 예수의 일행을 조보(徒步)로 좇아가는 군중들의 열성을 생각할 수 있다. 실로 예수께 대한 기대로 충만했던 무리들의 열정은 대 했다. 그들은 수십km가 넘는(가버나움에서 벳새다까지는 약 30km) 먼거리를 지칠 줄 모르고 걸어 예수의 일행보다 먼저 당도했던 것이다. 예수께 대한 무리들의 기댜 심리는 이제 최고조에 달했음
을 알게 한다.

========6:3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 앞절에서 묘사된 바와 같ㅇ이 군중들이 예수가 탄 배와 같은 방향으로 달려 예수 일행이 도착하기전 이미 도착해 있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 예수는 배를 대고 배에서 내려오는 장면이다. 이것 역시 마가의 특유한 묘사이다. 항상 배, 바다, 군중이 함께 증장한다(3:7 - 9 ; 4:1, 36 ; 5:2, 21).
목자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 자신을 만나려고 모여드는 군중들을 보고 예수는 휴식의 장(場)을 빼앗긴데 대한 불쾌한 반응을 보이시지 않았다. 오히려 자기와 제자들의 피곤함을 모두 잊고 깊은 감동과 연민의 정을 강하게 느끼셨다. 실로 예수의 이 "불쌍히 여기는" 연민의 정이야말로 모든 구원과 생명의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마 14:14 주석 참조). 한편 예수의 이같은 뜨거운 사랑의 감정을 "목자없는 양"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이는 민 27:17의 사상을 반영한 것으로서 예수께서 간혹 사용하신 표현이다(마 9:36). 이 말은 먼저 자기 의무를 잊은 거짓 목자에 대한 비판적 이해할 수 있다(왕하 22:17 ; 겔 34:5). 왜냐하면 당시 율법학자, 바리새인, 서기관 증의 종교 지도자들이 있었음에도 무리들이 예수를 이렇게 열성적으로 따르는 것은, 예수의 가르침과 기적 행위가 당시 종교 전통에 어긋나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는 진리로 받아들여졌다는 증거가 된다. 따라서 종교 지도자들이 무리들에게 진리를 공급해주지 않았음으로 무리들은 진리에 심히 굶주려 있었음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이해는 반대로 예수 자신이 지금부터 민중의 새로운 목자로 나선다는 의미로도 이해될 수 있다. 그래서 마가는 예수가 배에서 내려 자신의 피곤함에도 불구하고 불쌍히 여기며 여러 가지로 가르친다고 표현하였다. 사실 양보다 더 그의 지도자를 필요로 하는 짐승은 없을 것이다. 목자없는 양은 살았으나 이미 죽은 존재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들에게는 물도, 꼴도, 안식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모세처럼 그의 백성을 인도하며(사 40:11), 다윗처럼 그들에게 휴식을(겔 34:23 - 25) 제공하심으로(Lane Mauer) 그들 이스라엘의 참 목자가 되셨던 것이다(요 10:1ff). 또 한가지 주목해야 할 점은 무리들과 굶주려 있는 무리들을 향한 예수의 인간애는 애절한 것이었다. 8:2에 나오는 4. 000명 급식 이적에서 보여준 예수의 감정은 무리들의 영적인 굶주림만 아니라 육체적 굶주림까지 걱정하며 애통해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예수의 인간 사랑은 인간의 영. 육 구원, 즉 전인(全人) 구원을 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이해가 뒤에 나오는 급식 이적에 대한 이해의 바탕이 되어야 할 것이다.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 이 그르침의 주 내용은 천국 복음일 것이다. 이에 대해 누가는 "하나님 나라의 일"이라 기록하고 있다(눅 9:11). 그리고 마태와 누가는 각각 병고치시는 장면을 더불어 기록하고 있다(마 14:14 ; 눅 9:11). 이로 보건대 예수는 모인 무리들의 모든 필요(영. 육간)을 채워 주셨음을 보게 된다. 진정 그 무리들에게 "부족함"이 없는 목자가 주어진 것이다(시 23:1).

=========6:35 - 36
빈 들이요 때도 저물어 가니 - 급식 이적의 치밀한 도입부를(30 - 34) 거쳐 이제 본론부에 들어선다. 이곳에 도착한 시각이 언제쯤인지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얼마동안 예수가 가르쳤는지 알 수 없지만 지금의 시각은 일반적으로 저녁 먹을 시간 곧 초저녁 때가 된 것으로 보인다. 예수는 가르치느라고 시간이 지난 것을 못느끼는 듯하며 그 시간의 경과를 제자들이 예수에게 보고하며 제안하고 있다. 그 제안은 가르치는 일을 중단하고 사람들을 해산시키자는 것이었다. 이유는 그곳이 "빈들" 곧 보통 때는 인적이 없는 한적한 광야이기 때문에 저녁 식사를 해결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한편 이러한 표현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이곳이 베새다에서 조금 떨어진 외딴 곳이었다는 사실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곳을 벳새다 남쪽의 "엘바디하" 평야가 동쪽으로 뻗어 있는 구릉의 중간 지역이라고 한다. 여하튼 실로 현상적으로 볼 때에 시간적, 장소적으로 모두 어려운 상황에 처해져 있었다. 그래서 제자들은 가까운 마을로 나가 각자 식사를 해결하게 하자는 지극히 합리적인 제안을 하였다. 이와 같은 제안을 통해 예수와 제자들의 활동이 31절의 묘사와 같이 식사할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쁘고 열정적(熱情的)이었다는 것을 강하게 암시래 준다. 그리고 식사 시간을 지나칠 정도로 예수의 활동과 청중들의 태도가 진지했다는 것이다. 아마도 설교 현장은 빈 들이었지만 그들의 진지함과 열정은 빈 들을 채우고도 남았을 것이다. 한편 본문에 언급된 "촌"(아그루스)은 들판에 자연 발생적으로 이뤄진 조그마한 촌락을, "마을"(코마스)은 조금 발달된 소읍을 가리킨다.

=======6:37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 제자들의 제안에 대해 예수의 대답은 뜻밖의 것이었다. 그것은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준비하여 청중들에게 나눠 주라는 것이다. 이 사실을 분명히 하기 위해 예수는 강조적 인칭 대명사를 사용하여 "너희가"(훼메이스) 먹을 것을 주라 하신 것이다. 이는 예수께서 제자들의 능력을 과시한 명령이기 보다 오히려 제자들의 절대적 무능을 일깨우고 또 그들의 당신께 대한 영적 무지를 깨우치기 위한 매우 충격적인 말씀이라 본다.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 - 제자들의 대답은 예수의 명령에 크나큰 충격을 받은 듯이 보인다. 그들은 자신들이 무리들을 먹이기 위해서는 자신들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큰 액수가 필요하다는 조로 예수께 반문을 한 것이다. 제자들은 청중이 얼마나 되는지를 밝히지 않았지만 그들이 파악한 청중의 숫자를 통해 식사에 필요한 예산을 추정한 것으로 보인다. 200데나리온은 당시 한 사람의 하루 임금을 한 데나리온이라고 할 경우 한 사람이 약 8개월 정도 벌 수 있는 액수일 것이다. 혹자(Bruce)의 주장대로 당시 제자들에게 이만한 돈이 있었을지는 모르겠으나 제자들에게는 매우 큰 돈이었음이 분명하다. 특별히 요 6:7에서 빌립이 200데나리온을 사용해도 청중들을 먹이기에 부족하다고 말할 정도로 당시 제자들의 능력으로는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처럼 계산에 밝았던 그들이었지만 그들에게 불합리하게 보이는 명령을 내리고 계신 그분의 뜻과 그분의 초합리적이고 초자연적인 능력에 대해서는 전혀 무지(無知)했다는 사실이다.

=========6:38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 - 예수는 직접 문제 해결에 참여한다. 먼저 예수는 즉시 구할 수 있는 떡이 몇 개인지 제자들에게 알아보라고 명한다. 제자들은 이러한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이같은 말씀을 하신데는 다음과 같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① 자신의 관점에서 모든 상황을 판단하지 말고 자신의 상황을 깊이 이해하고 계신 예수께로 시선을 돌리는 것이 중요하다. 즉 문제의 해결자로 자신을 내세우지 말고 예수께 전적인 의뢰를 하는 참 믿음의 자세가 필요하다. ② 비록 하찮은 존재이나 예수의 도구로 사용 되기만 하면 위대한 효력을 발휘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분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분이요(롬 4:17), 약한 자를 들어 강하게 하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이다(고전 1:27).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 확인된 음식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뿐이었다. 떡과 물고기의 숫자는 4복음서 모두 동일하다. 다만 요한 복음에서는 떡이 구체적으로 보리떡이고 소유자가 어린 아이임을 덧붙이고 있다(요 6:9). 이 음식의 양은 37절에서 제자가 어림잡아 산출한 예산과 대비되어 엄청나게 부족한 것임을 강조한다. 거기 모인 5, 000명 이상의 군중에 비하면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 양이다. 그리고 요한복음에서처럼 보리떡은 가난한 사람들의 음식이고 더군다나 어린 아이가 먹으려고 소유했던 것임을 감안한다면 한 사람의 식사 양으로 충분한 것이 못되었을 것이다(마 14:17 ; 요 6:9, 13 주석 참조). 이로 보건대 마가는 아주 적은 양으로 놀라운 기적을 일으킨 사실에 강조점을 두려 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여기서 밝힌 음식의 양은 기적의 효과를 고무시키기 위한 배경이 된다.

=========6:39 - 40
명하사. . . . 떼를 지어. . . 앉게 하시니. . . . 앉은지라 - 예수의 행동은 점점 이해할 수 없는 신비함으로 나아간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청중즐을 무리지어 앉게 하라고 지시한다. 여기서 "데를 지어"(쉼포시아 쉼포시아)란 마치 집안에서 식탁 주위에 앉은 것처럼(주로U자형으로 앉음) 옹기 종기 모여 앉은 상태를 일컫는다. 그렇게 모여 앉은 한 때가 50명 혹은 100명씩 되는 규모였다. 한편 마가는 그들이 앉은 장소가 "푸른 잔디"위임을 밝히고 있다.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직접 50명씩 앉게 하라고 명하나(눅 9:14) 푸른 잔디라는 말은 없다. 마태와 함께 "푸른 잔디"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마가는 이 단어를 통해 의도하는 바가 있다. 먼저 35절에서 언급한 "빈들"이 황량한 광야가 아니라 신선하고 생동감 있는 들판임을 암시해 줌으로써 식사를 위한 준비와 함께 한층 더 희망적인 분위기를 창출한다. 또 "푸른 잔디"에 앉게 하는 예수의 지시는 시 23편을 연상케 한다. 즉 목자가 양떼들을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는 듯한 모습을 이 구절에서 보게 된다. 결국 예수는 설교도 하시고 푸른 초장 위에서 음식까지 먹임으로써 민중의 손색없는 목자가 된다. 이는 34절에 나오는 예수의 탄식과 잘 어울린다. 또 "푸른 잔디"라는 단어가 주는 의미는 편히 "쉼"과 평화로운 풍경이다. 참으로 예수 앞에서 쉼과 평화가 이루어지는 장면을 마가는 그려내고 있다. 그와 더불어 "푸른 잔디"는 그 때가 팔레스틴의 우기가 막 끝난 후인 3, 4월경이었음을 보여준다(마 14:19). 특히 요한은 이 때를 유월절이 가까운 때(니산월 14일, 태양력으로 3, 4월경)라고 분명히 언급하고 있다(요 6:4). 그렇다면 이때는 예수께서 마지막 유월절 양으로 잡하시기 만 1년 전의 사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50명 또는 100명 단위로 무리를 지어 앉는 것은 식사와 교제를 위한 공동체적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출애굽 당시의 야영(野營)생활을 연상케 한다(출 18:21). 이것은 하나님 나라에 관한 예수의 설교와 더불어 제 2의 출애굽을 경험하면서 예수와 함께 하는 새 공동체를 경험 게 한다.
이와 같은 이해는 급식 기적의 최고점이라고 할 수 있는 41 - 44절로 이야기를 감동적으로 이끌어들인다. 한편 40절에 언급된 바 있는 "떼로"(프라시아이 프라시아이)에서 "프라시아이"란 "작은 정원", "꽃밭"이나 "정원"같은 인상을 주었음을 짐작케 해준다. 아마 이러한 인상은 무리들이 매우 질서있게 앉아 있었고, 또 그들이 입은 옷들의 색깔이 매우 다양했음을 은연중에 나타내 주고 있다 할 것이다(Donald W. Burdick).

=========6:41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 . . . 제자들에게 주어 - 예수는 유대의 전통적인 공동 식사 관습에 따라 자신이 가장의 위치에서 그리고 그 모인 무리들을 당신의 가족으로 삼고 먼저 하늘을 향해 감사와 찬양을 한다. 특히 하늘을 우러러 보는 것은 찬미와 감사의 기도를 상징한다(요 11:41 ; 17:1). 그리고 이때 드리는 기도의 형식은 "찬송하리로다! 땅에서 양식을 내신 만유의 왕이신 주 우리 하나님이시여 !"일 것이다. 한편 이러한 예수의 행위를 성만찬과 연결시키는 해석들도 있지만 적절하지 못하다. 여기서는 포도주도 없고 또한 성만찬에는 없는 물고기가 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공동 식사의 전통적 관습으로 보아야 한다. 예수께서는 기도를 한 다음, 직접 떡을 떼어 제자들로 하여금 각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게 하셨고 또 물고기도 그렇게 하셨다. 이것 역시 유대 공동 식사의 관습 곧 가장 또는 그 식탁의 주빈이 음식을 떼어 나누어주는 전통적 관례에 따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거기서 "떼어"(카테크라센)란 직설법 부정 과거 시상으로서 그 행위의 사실성돠 장중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뒤어어 언급된 "주어"(에디두)는 능동태 미완료 시상으로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계속 나눠주어 분배케 하셨음을 암시한다. 실로 그 떡은 떼시는 예수의 손 안에서 계속 커져서 예수께서 무리들을 모두 먹이실 때까지 불어났을 것이다. 마가는 예수의 이적 사역을 이처럼 생생하게 묘사해 주고 있다.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매 - 아직 몇 명이나 되는 사람인지 밝혀지지 않았지만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덩이를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이 단어는 기적을 간접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마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떡과 물고기가 골고루 돌아갔음을 밝힘으로써 창조의 능력으로 만물을 주장하시는 예수의 초월적(超越的)인 군능을 단적으로 묘사해주고 있다.

========6:42
다 배불리 먹고 - 이 표현은 매우 함축적 의미를 시사한다. 우선 이제까지 진행되어온 이야기를 총 마감하고 있다. 즉 저녁 식사를 해야 하는 처지였으나 사실상 불가능했던 환경, 그리고 궁여 지책(窮餘之策)으로 등장한 아주 작은 양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38정 주석 참조)의 빈약함에 대조되어 그 많은 사람들이 모두 배부르게 되었다는 말로 기적을 완결짓는다. 또 다른 의미는 배부르다는 말은 충분히 만족해 하는 표현이다. 즉 더 이상 부족하지 않다는 말이다. 충분한 식사가 이루어진 것이다. 세째로 생각할 수 있는 의미는 식사가 공동체 안에서 교제의 장이 된다는 점이다. 여기서는 50명, 100명 단위로 식사가 진행되었다. 이것은 더불어 나눔을 뜻하고 모두 하나됨을 뜻한다. 그들 모두는 떡 다섯 개와 물고기 주 마리로 큰 이적을 이루신 예수를 중심으로하여 모두가 함께 배불리었으므로 하나의 공동 식사를 한 셈이다(40절 주석 참조). 마지막으로 모두가 배불리었으니 풍요와 여유가 있고 따라서 공동체 안에 평화가 찾아온다. 이 장면은 31절의 분주함이나 33절의 군중 이동과 같은 긴박감과는 대조적으로 평온한 휴식을 연상케 한다(39절 주석 참조). 따라서 마가가 묘사하는 기적의 장면은 이 이야기의 서론부에서 표현된 상식 밖의 기대와는 달리 소박(素朴)하게 처리된다. 그 기적에 대해 놀라거나 소동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식사의 평화로움이 깃드는 조용한 잔치로 인상지워진다. 이것은 마가가 표현한 예수의 이상적 공동체에서 볼 수 있는 참모습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6:43
남은 떡 조각. . . . . 열 두 바구니에 차게 - 앞절에서 밝힌 기적의 결과를 다시 확인하고 그 효과를 증폭시키고 있다. 즉 모두가 배불럿을 뿐만 아니라 먹고 남았다는 말은(그것도 최초의 음식 양보다 훨씬 많게) 넉넉한 공동 식사였음을 확인해 준다. 여기서 남은 떡과 물고기를 거두어 담은 "바구니"(코피노스)는 유대 사람들이 평소에 휴대하고 다니는 것으로서 나뭇가지로 엮어 만든 휴대용 작은 바구니이다. 요즈음으로 말한다면 손가방 정도일 것이다. 그들은 이방인의 음식을 먹음으로써 스스로 더럽히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하여 이 바구니에 점심 식사와 몇 가지 생필품을 넣어 가지고 여행을 했다고 한다(W. W. Wessel). 한편 남은 떡과 물고기를 담은 바구니가 12개인 것은 제자들의 수가 12명인 것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왜냐하면 제자들이 음식을 각 사람에게 날라준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남은 음식을 거둔 사람도 제자들이라고 추측하는 것은 무리가 없다. 특히 요 6:12에서는 예수가 직접 제자들에게 남은 음식을 거두라고 지시하고 있다. 따라서 제자들의 수가 "12명"이었으므로 떡과 물고기를 담은 수효는 12 바구니가 되는 것이 당연하다 하겠다. 한편 이러한 "12"란 숫자는 상징적으로 이스라엘 12지파를, "남은것"은 구약에서 누누이 강조해온 "남은 자" 사상(스 9:8)을 은연중에 암시 한다고 보는 학자도 있다(Talor Grant). 더욱이 예수는 이러한 상황을 통해 생명의 떡으로 오신 당신이 기갈(飢渴) 중에 있는 뭇심령들에게 생명을 주시되 더 풍성히 주시고자 하신다는 사실을 알리고자 하셨을 것이다(요 10:10).

===========6:44
떡을 먹은 남자가 오천 명 - 식사가 끝났을 때 군중의 수효가 밝혀진다. 아마도 50명 또는 100명씩 모여 앉았었꼬 식사 동안의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오천 명의 수를 셀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마가는 남자만 오천 명이라고 밝히고 있으나 마 14:21에서는 여자와 아이를 제외하고 남자만 오천이라고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이러한 표현법은 유대인들의 전통적 관습으로 그들은 남자 장정만을 공식적인 통계에 넣는다(민 1:3). 따라서 본문에서 가리킨 "남자"는 청중이 모두 남자로만 구성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남녀로 구성된 청중 중 남자만 수효를 센 것이다. 그렇다면 아마도 급식 대상이 된 사람의 수효는 약 2만 명 정도로 훨씬 불어나게 될 것이다. 마가는 이러한 암시를 통해 독다로 하여금 예수의 권능이 얼마나 탁월하고 놀아운 것인지를 은연중에 강조하고 있다. 물온 이 이적은 단지 "떡"이나 "오천 명"이라는 현상적 사실에만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생명의 떡"으로 오신 예수의 "인류 구원"이라는 궁극적 목적에로 모든 독자들의 눈길을 이끈다.

=======6:45 - 52
예수가 물 위를 걷는 기적의 평행 본문은 마 14:22 - 33 ; 요 6:16 - 21에 나타난다. 그러나 누가복음에서는 평행 본문이 없다. 이 기적 사건은 앞서 급식 기적 사건과 연관되어 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52절에서 급식 이적에 관한 언급을 하면서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물 위에서 일어난 기적이 본문 이외에 4:35 - 41에서 나오는데 그 기적의 주제는 자연 현상까지 제압(制壓)하는 예수의 권위를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여기서도 같은 주제로 설명될 수 있다. 그러나 분명한 차이점은 4:35 - 41에서는 제자들의 요청에 의해서 예수가 자발적으로 제자들과 합유하기 위해 취하신 행동이었다.

======6:45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 급식 기적 직후 예수는 친히 무리들을 서둘러서 해산시키기 위해 먼저 제자들을 배로 떠나보내고 있다(32절 주석 참조). 그 상황은 매우 급한 것처럼 비춰진다. 특히 본문에서 "즉시"(유데오스)와 "재촉하사"(에나그카센, '억누르다', '강권하다', 강요하다'는 뜻)란 말은 예수께서 얼마나 적극적으로 제자들을 몰아세우셨는지를 짐작케 한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조금 전까지 고조되었던 급식 기적의 분위기와는 달리 서둘러 군중을 해산시키고 장소를 옮기려 한 까닭이다. 마가는 그 이유를 전혀 밝히지 않고 있다. 그러나 평행 본문인 요 6:14, 15에서는 그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즉 급식 기적을 통해 사람들이 예수를 "그 선지자"곧 메시야라고 하면서 그분을 자신들의 임금으로 모시려는 움직임이 고조되고 있었다고 전한다. 이처럼 비록 당신을 메시야로 알되 인간들의 궁극적인 구원자로 알기 보다 정치적(政治的) 성격의 메시야로 호해함으로써 극도의 흥분 상태로 이끌리던 무리들의 마음을 조용히 가라앉히기 위해, 예수는 그들과의 교제를 잠시 중단하기를 원하셨다.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시고 - 제자들에게 가라고 지시한 장소는 "벳새다"이다.
평행 본문 마 14:22 - 33에서는 지명이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물 위의 기적 직후 닿은 곳이 "게네사렛"이라고 밝히고 있다. 또 요 6:17에서는 가버나움을 향한 것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이 기적을 언급하고 있는 3복음서가 서로 일치하지 않고 있다. 이렇듯 행서지가 "벳새다", "가버나움", "게네사렛" 등으로 나타나는 것은 서로 비슷한 방향에 위치하기 때문에 나타난 착오 때문일 수도 있고 또한 도착한 곳과, 육지 도착 후 다시 재개된 사건과 그 발생한 곳이 각 복음서간에 서로 다를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러한 불일치는 늘해 극복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본문에 엄급된 "벳새다"는 32절에서 이미 언급한바 있듯이 급식 기적 사건이 일어났던 벳새다 율리아스(Bethsaida Ju;ias, 눅 9:10)가 아니라 갈릴리 서안의 가버나움 근처에 위치한 또 하나의 벳새다일 것이다. 어쨌든 예수께서는 당신의 복음 선교의 활발한 전개를 위해서 뿐 아닐라 무지한 민중들의 그릇된 메시야관을 훼파(毁破)하기 위해 갈릴리 해안을 두루 다니시며 당신의 목적을 수행해 가셨다. 진정 예수께서는 무리들이 가장 많이 모여 당신께 가장 극진한 칭송을 할 때가 바로 당신께 가장 위험한 위기적 상황임을 자각하셨던 것이다.

=====6:46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다 - 예수는 군중들을 다 해산시키고, 제자들을 떠나 보낸 수 혼자 산으로 기도하기 위해 들어간다. 문자적으로 볼 때 예수는 기도하실 목적으로 "산속으로" 들어가신 것이다. 단순히 외견상으로 볼 때 이 장면은 예수 자신에게 삼한 갈등이나, 고민 또는 밀려오는 고독감을 이기지 못한 듯이 보인다. 그러나 요 6:14, 15에서의 보고(報告)처럼 그때 군중들이 예수를 왕으로 추대하려 했던 것이 사실이라면(31절 주석 참조) 예수께서는 하나님이 당신에게 주신 사명, 곧 고통과 배척당함과, 죽임당해야 할 사명 완수를 방해하는 바로 이 같은 유혹을 물리치시고 그들의 무지에 대한 염려를 해결하시기 위ㅣ해 산속으로 기도하러 가신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가 함께 예수께서는 헤롯왕의 박해가 임박해옴을 예감하시어 군중들을 해산시키고 혼자 조용히 하나님과의 깊으 영교(靈交)를 하시고자 했다고 볼 수 있다. 실로 예수가 활동 초기에 지신의 기적 사건을 비밀에 부치도록 지시했던 사실과(1:44), 지금의 공개된 대규모 대중 집회를 서둘러 해산시킨 점, 그리고 6:14에서 묘사된 헤롯의 불안을 종합해보면 헤롯의 공격을 충분히 예감하고 있었으며 그 문제로 예수는 고민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예수는 이와 같이 큰 사건을 전후하여 혼자 기도하는 경우가 어려 번 있었다(1:35 ; 14:32 - 36 ; 눅 3:21 ; 5:16 ; 6:12 ; 9:18, 28 ; 11:1 ; 22:41, 44). 이렇듯 어려운 일, 위험하고 힘든 일을 앞두고 기도하는 예수의 모습은 그분이 지니신 능력과 권위와 지혜가 과연 더디에서부터 출발하는가를 조용히 증거해 주고 있다. 실로 혼잡한 곳을 피하여 오직 하나님 한분만을 바라볼 수 있는 곳("산")에서 그분과 속깊은 영적 교제를 하신 예수에게 그 어떤 어려운 난관도 더 이상 문제가 될 수 없었다.

===========6:47
저물매 배는 바다 가운데 있고. . . 뭍에 계시다가 - 마가의 생동감 넘치는 문장 기법이 돋보이는 장면 묘사로, 본 사건의 장소와 시간에 대한 배경 설명이다. 급식 이적이 있었을 때 이미 저녁 때가 되었으므로(35절) 날이 저물어 어두워졌다는 것은 아주 긴 시간이 아닌 약간의 시간이 경과했음을 보여준다. 이때의 시간은 계절적으로 본 사건이 유월절 기간에 있었던 것으로 단정한다면(31절) 오후 6시가 넘어가는 늦은 저녁으로 본다. 그렇지만 유월절의 보름달 아래서 해변에 있는 사람은 능히 호수 한 가운데 있는 배를 쉽게 볼 수 있는 상황일 것이다. . 한편 예수께서는 지금 기도하러 들어가셨던 산에서 내려오셔서 해변의 평지에 계신다. 즉 예수는 "산"(오로스)에 계신 것이 아니라 "뭍"(게), 곧 바다에 대칭되는 육지 위에 계신 것이다. 그리고 배의 위치는 갈릴리 바다의 가운데이다. 이것은 예수가 물 위를 걸어오신 것이 얕은 곳을 걸어 온 것이 아니라 깊으 곳을 그것도 한 가운데까지 걸어왔음을 암시해준다. 또 예수가 뭍에 서있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은 예수가 뭍에서부터 바다 가운데까지 걸어왔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배경 설정(設定)이 될 수 있다. 마가는 이러한 이해를 통해 예수의 기적에 대한 신빙성을 높이려 하고 있다.

=========6:48
바람이 거스리므로, - 갈릴리 바다는 지중해보다 200m 아래에 위치하여 주변의 협곡을 통해 회오리같은 바람이 가끔 불어와 파도를 일으키기도 한다(4:37 주석 참조). 이 바람은 제자들이 가는 방향에서 마주 불어오는 역풍(逆風)으로, 배를 복적지에서 자꾸만 이탈시켜 항진하는데 어려움을 겪게 하고 있었던 것같다. 이 묘사는 첫 번째 바다 위의 기적에서 묘사된(4:37) "광풍"과는 성격이 다른 은근하고도 끈덕진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다. 제자들의 괴로이 노 젓는 것을 보시고 - 여기서 먼저 "괴로이"(바사니조메누스)란 "시험하다", "고문하다", "지치게 하다"는 뜻을 지닌 수동태 현재 분사로서 비록 제자들 중에 어부 출신들이 많앗다 하더라도 그들의 능력으로는 역부족을 느끼고 심히 고통 당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뒤이어 나오는 "보시고"(이돈)는 "주목하다"는 뜻인 "호라오"의 제 2과거형 분사로서 예수께서 그 광경을 지속적으로 예의 주시하셨음을 나타내 준다. 한편 갈릴리 바다의 폭이 약 10km 라고 할 때 배의 위치가 바다 한가운제이므로 뭍으로부터 약 5km 정도 떨어진 거리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과연 뭍에서 먼 거리에 있는 제자들의 노젓는 모습을 바라볼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가 된다. 적어도 보통 사람의 시야밖에 있었거나 조그마한 형체로서 사람을 구분할 수 없을 정도였을 것이다. 또 날이 저물어 어두워진 상태에서 식별(識別)이 더욱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반대의 추측도 가능하다. 예수는 이미 배를 타고 떠나는 제자들을 보았을 것이고 조그마한 점같은 물체만 보아도 제자들이 탄 배로 추측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그때 유월절 즈음이었다면 비록 바람이 세차게 물었다 하더라도 보름달이 호수 전체를 비추고 있었을 것이므로 시야가 그렇게 흐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계속 바람이 불고 있었으므로 멀리서도 항해에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라고 짐직하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이러한 가능성을 모두 부정한다 하더라도 예수는 여전히 제자즐의 현재 당하고 있는 고초를 신적인 직관(intuition)으로 조용히 응시하고 계셨을 것이다.
밤 사경 즈음에 - 유대인들의 시간 구분법으로는 밤을 3등분하는 것이(초경 - 해질때부터 오후 10시까지, 이경 - 오후 10시부터 오전 2시까지, 삼경 곧 새벽 - 오전 2시부터 해 뜰때까지) 상례였으나 그들이 로마 통치하에 편입됨으로써 밤을 4등분하는(일경 - 오후 6시에서 9시, 이경 - 오후 9시에서 12시, 삼경 - 새벽 12시에서 2시, 사경 - 새벽 3시에서 6시) 관례가 생겨났다. 마가는 바로 이 로마인의 시간 부분법에 맞추러 본 사건을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저희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 - 예수는 제자들이 고생하는 모습을 보고 물위를 걸어 그들에게로 갔다. 그러나 문제는 그냥 지나치려 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서술처럼 보인다. 여기서 본문을 직역하면 "그는 그들의 곁을 지나가기를 원하고 있었다"가 된다. 이 말은 예수의 의도를 표현한 것이기보다 그 순간 막 일어나려는 일을 목격한 사람이 받은 독특한 인상을 표현한 것이라 볼 수 있다(W. W. Wessel). 그렇지 않다면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자신을 향해 소리치지 않았다면 곧장 지나치기라도 할 듯이 그 배를 향해 곧장 걸으신 것이 아니라 비스듬히 스치듯 걸어가셨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실로 이 구절은 결코 예수께서 그들의 고난을 간과하고자 하심이 아니요 그들을 구원하시되 그들이 당신을 향한 믿음을 보일 때 그들을 구원코자 하셨던 것이다. 예수는 제자들이 자기들 배로 초청하여 자신들의 고통을 호소하며 예수를 향한 전적인 신뢰를 보일 것을 원하신 것이다(히 11:6). 즉 예수는 제자들의 신앙에 근거한 초청(招請)을 기다리고 계셨던 것이다(Lenski).

========6:49
유령인가하여 소리 지르니 - 제자들은 물 위로 걸어온 예수를 보면서 놀라고 있다. 특히 "소리지르니"(아네크 산)란 경악을 금치 못할 정도로 거함치며 두려워하는 장면을 묘사한 것으로 제자들의 심적 상태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실로 그들은 예수의 모습을실체가 없는 환영으로 보았던 것이다(마 14:26 주석 참조). 여기서 ". . . . 인가 하여"(에 산)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측면에서 내린 자연적인 결론으로 이해된다(Robertson). 즉 그들은 자신들의 이성과 경험에만 따른 추측을 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그들의 한계(限界)였다. 한편 이 장면은 당시 유령에 대한 이야기가 사람들 사이에 민담 형식으로 널리 소개되어 있었던 것임을 반영해 준다. 그리고 유령에 대한 인상은 tladgl 두려운 존재로 퍼져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그런제 제자들이 예수를 보고 그분의 실체로 여기지 못한 것은 너무나 뜻밖의 상황, 즉 산에서 기도하고 있을 것으로 믿었던 예수가 갑자기 시. 공을 넘어 물위로 나타난 사실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4:35 - 41에서 광풍 제압 기적을 경험한 제자라면 적어도 이 상황에서 어느 정도 침착했어야 마땅했을 것이다. 그리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당시는 바람불고 혼란스런 밤이었기 때문에 예수의 얼굴을 분명히 식별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여러 이유로 인해 유령으로 생각할 수도 있었으리라고 본다. 그리하여 그들은 내심 짙게 드리워진 죽음의 그림자를 체온으로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6:50
안심하라(다르세이테) - "용기를 내라", "담대하라", "두려워 말라"는 뜻의 2인칭 복수 현재 명령형으로 용기와 위로를 더하는 강한 명령이다. 그들은 이제(현재형) 더 이상 바람과 유령의 악몽에 짓눌리지 말고 예수를 바라보고 담대히 떨쳐 일어나야 할 것이다. 한편 이 위로의 말은 치유 이야기 속에서도 자주 나온다(10:49 ; 마 9:2, 22). 따라서 이 단어의 사용 의미는 분명 문제의 완전한 해결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두 가지 의미의 문제 해결을 생각할 수 있는데 먼저는 바람으로 인해 향해가 곤란한 상황이었다는 점이고, 둘째는 유령이 아니라는 점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내니 두려워 말라고 안심시키고 있다. 여기서 "내니"(에고 에이미, It is I)라는 말은 마치 출애굽 당시 하나님이 모세에게 스스로를 계시하실 때의 표현인 "여호와", 곧 "나는 스스로 있는 자"(I am who I am)라는 표현과 마찬가지의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출 3:14). 따라서 예수의 "나" 선언은 곧 신의 현현(theophany)으로서의 당신의 존재 계시로 이해된다(요 8:58). 이러한 예수의 자계시(自啓示)는 심한 두려움에 놓여있던 제자들에게는 더없는 위로와 격려가 아닐 수 없다. 즉 바람과 풍랑과 지구의 중력까지도 정복하시고 바다 위에 우뚝 서 계신, 그분이 바로 제자들이 믿고 따른 자신들의 스승일 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지닌 모든 공포와 유혹을 물리쳐주실 수 있는 만유의 주이심을 "내니"라는 그 한 마디를 통해 전달하신 것이다. 한편 "두려워 말라"(메 포베이스데)는 말은 현재 명령형으로서 지금 당장 그 무서워하는 상태를 중단하라(stop fearing)는 참으로 단호한 명령이다. 이제 나 예수가 너희들 가운데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당신께서 그 험한 바다 위를 친히 걸어오신 이유이며 목적이었다.

=========6:51
바람이 그치는지라 - 예수의 기적이 물 위로 걷는 것에만 국한되지 않고 바람을 잠재우는 권능까지 나타내고 있다. 즉 예수는 무언의 명령으로서 바람의 기운을 지치게 만드셨던 것이다. 결국 이 기적의 주제는 자연을 다스리는 신적(神的) 권위가 예수에게 있음과 그러한 권능의 모든 귀결점은 바로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고 그들에게 위안과 용기를 주시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한편 마가는 본 사건을 기록하면서 베드로가 물에 뛰어든 사실에 관해 침묵하고 있다(마 14:28 - 31). 이는 아마도 마가에게 예수의 행적에 관한 귀한 정보를 제공해 주었던 베드로가 자신의 철없이 날뛰던 모습을 통한히 여긴 나머지 물에 뛰어든 장면에 대해 침묵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마음에 심히 놀라니 - 이 말은 내색하지 않고 놀란다는 말인데 예수가 물 위로 걸어오심과 당신께서 배위로 오르시는 것과 동시에 바람이 잠잠해진 사실을 보고 놀라와하는 표현이다. 평행 본문 마 14:33에서는 제자들이 그들 앞에 서신 예수에게서 거부할 수 없는 신적 권위를 느끼고 하나님의 아들임을 깨닫게 되는 장면이다. 그러나 마태의 장면에 비하여 마가의 묘사는 제자들이 기적의 의미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놀라기만 하는 것으로 소개한다. 이러한 차이는 마태가 제자들의 외면적 행동에 그 초점을 맞추어 기술한데 비해 마가는 제자들의 숨겨진 내면적 상황을 주시했던 데서 비롯된다. 즉 마가는 비록 제자들이 예수께 대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바른 신앙 고백을 하기는 했으나 그들의 마음속 깊이에서는 여전히 완전한 믿음에 이르는데 방해되는 요소가 잠재해 있었음을 여실히 추출시켜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제자에 대한 부정적 묘사는 뒤이어 일관된 표현 방식을 취하고 있다. 즉 마가는 영적 감각이 무디고 현명치 못한 것으로 제자들의 실체를 묘사하고 있자.

======6:52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 - 마가는 물 위에서 일어난 두 기적을 보고 제자들이 깨닫지 못하고 놀란 일을 제자들이 급식 기적의 의미를 깨닫지 못한 것과 연결시키고 있다. 만약 그들이 앞선 오병이어의 이적의 의미, 곧 우주의 주관자와 참 생명의 주인이신 그분이 그곳에 계셨다는 사실을 깨닫기만 했다고 한다면 그들은 예수가 물 위로 걸으실 뿐 아니라 물결을 잠재우신 것을 보고 그렇게까지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실로 그들의 가장 큰 과오는 험악한 환경을 극복하는 지혜가 없어서가 아니라 예수가 과연 누구이신지를 바로 깨닫지 못하는 기족론적 지식(知識)의 결핍에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들이 마 14:33 ; 16:16 ; 요 6:68, 69) 등에서 자신들의 예수께 대한 신앙 고백을 할 수는 있었지만 그것을 전인격적으로 수용하고 그 삶에서 구체적으로 이해된 행동을 취하지 못하고 모히려 "마음이 둔하여져" 있었던 것이다.

===========6:53 - 56
게네사렛에서의 활동을 요약하여 치병 기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평행 본문은 마 14:34 - 36에만 나온다. 내용도 서로 비슷하다. 그리고 두 본문 모두 의도적으로 압축된 묘사를 하고 있다. 즉 본문은 수많은 사건을 요약한 일종의 삽화로서 "치료자"되신 그분의 이미지를 강렬히 부각시키고 있다.

========6:53
건너가 게네사렛 땅에 이르러 대고 - 이야기가 앞절과 무리없이 연결되고 있다. 따라서 52절에 이어 계속 진행되는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렇다면 또 문제가 생긴다. 즉 출발할 때 "벳새다"를 향하라고 예수가 지시한 것으로 45절에 언급되었었는데 그렇다면 예정지와는 다른 곳에 도착한 것인가라는 문제가 발생한다(45절 주석 참조). 이에 대해 예수의 일행의 운 목적지는 갈릴리 서안의 벳새다였으나 온 밤 동안의 심한 바람 때문에 그 벳새다에서 몇 km 떨어진 게네사렛에 도착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본문 이하 내용은 바람을 잠잠케 하신 이적과 약간의 시차를 둔 독립된 내용으로 이해할 수 있다. 어쨌든 예수 일행은 호수 건너 게네사렛에 도착하셨는데 그곳은 호수 서쪽에 위치한 막달라(Magdala) 북쪽의 광야이든지 아니면 광야에 있는 한 도시였을 것이다(Dalman). 게네사렛은 한 도시를 지칭하기도 하지만 갈릴리 서안의 한 평야지대를 통칭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 게네사렛 평야의 토양이 매우 비옥했기 때문에 그곳에는 많은 촌락들이 군데군데 형성되어 있었다. 한편 유대사가 요세푸스(Josephs)는 이곳에 대해 "이곳은 자연의 야심작(野心作)이라 불리울 수 있다. 그 까닭은 이곳이 근본적으로 서로 섞여 살 수 없는 식물들까지도 함께 섞여 자랄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표현했다.

========6:54 - 55
예수신줄을 알고. . . 달려 돌아다니며 - 예수 일행이 도착한 시간이 언제인지는 밝히지 않고 있지만 낮 시간일 것으로 보인다. 사람들이 뭍에 나와 있었고 사람들은 곧 예수라는 사실을 알아 본다 그 사람들은 그 지역 여러 곳에 다니며 소식을 알리고 그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환자들을 메고 예수 앞으로 달려오는 장면을 마가 특유의 분주하고 생동적이며 긴박감 있는 묘사로 처리하고 있다. 특히 2:4에서도 한 번 언급된 바 있는 "침상"의 이동 장면은 가히 예수의 인기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케 해준다. 이러한 묘사를 통해 예수에 대한 명성이 "게네사렛"에서 아주좋게, 특히 병고치는 기적으로 신뢰있게 알려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장면을 급식 기적의 결과와 함께(45절 주석 참조) 생각해보면 예수의 인기와 명성, 그리고 영향력은 마치 어떤 크나큰 변화를 예감케라도 하듯이 민중들 사이에 놀랍게 퍼져가고,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예수는 당시 사회적으로 중요한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는 말이다. 그것은 정치가들에게도(헤롯처럼)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도 큰 관심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고 이는 결국 더욱 짙게 다가오는 핍박(逼迫)의 그림자를 예감케 한다.

========6:56
마을이나 도시나 촌에서 병자를 시장에 두고 - 예수의 열정적 활동과 사람들의 열관적인 추종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먼저 이 구절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예수의 활동 영역이 어느 특정 지역에 국한되지 않고 조그마한 "마을"이나 잘 발달되고 붐비는 "도시"나 한적한 들판 위에 세워진 "촌"이나를 불문하고 당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면 그 어디나 선교의 발길을 멈추지 않았다는 것이다. 특히 본문에서 보호자들이 환자들을 "시장"에 두고 예수를 기다리고 있는 장면이 나온다. 아마도 예수는 사람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곳인 시장을 당신의 복음전파 대상지로 택했던 것 같다. 이 "시장"(아고라)은 한 마을 어귀에 있는 넓은 광장으로 이곳에는 마을 법정과 공공 기관이 형성되며, 또 사람들의 상거래와 교제의 장소로 활용된다. 이러한 분주하고 생동감 넘치는 분위기를 연출하는 곳에서 예수의 선교 사역이 진행된다는 것은 참으로 역동적이고 생명력 넘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예수의 옷자락이라도 손을 대게 - 먼저 "옷가"란 "옷가에 다느 술"(5:27)을 가리키는 말로서 예수는 다른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율법이 명한 바에 따라(민 15:37 - 39 ; 신 22:12) 옷가에 술을 달고 다니셨던 것이다. 한편 사람들은 예수의 옷가에 손을 대기라도 허락할 것을 바라고 있다. 특별히 여기서 "간구하니"(파레칼룬)는 능동태 미완료 시상으로서 무리들의 간곡한 요청이 거듭거듭 계속되었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당시 사람들의 일반적 믿음이었다. 이와 같은 장면이 혈루증 여인 이야기에서도 나타난다(5:27). 마가는 이와 같은 열광적이고 열정적이며 생동감있는 예수의 치병 활동을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으니라"는 말로 끝맺는다. 물론 사람들이 완전한 치유의 은총을 입은 것은 그들이 예수의 옷가를 만졌기 때문은 아니다. 비록 그들의 행동 근저에는 당시 팽배(膨湃)해 있던 미신적 의도가 곁들여져 있었다고 할망정, 예수가 그들을 치유하신 것은 분명 예수의 옷가라도 만지기를 열망했던 그들의 순수한 믿음 때문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는 법이다(히 11:6). 여하튼 본문의 마지막 글귀는 예수의 활동은 성공적이었으며 시간이 갈수록 더 열기가 높아짐을 느끼게 하며 갈릴리 사역이 거의 절정에 다다랐다는 조용한 암시를 남기고 있다.



하나님의 아들의 결정적 중요 본장에 이르러 예수의 갈릴리 사역은 두 가지 면에서 새로운 전화점을 갖는다. 첫번째로는, 본장에서 예수의 제 2차 갈릴리 사역과 제 3차 갈릴리 사역이 교차되고 있다. 예수께서 고향인 나사렛에서 배척당하신 기사(1-6절)를 기점으로 하여 제 2차 갈릴리 사역이 끝나게 되는 것이다. 두번째로는, 본장 이후로부터 예수의 교육 대상이 다수 군중들에서 열 두 제자에게로 집중된다. 이는 차츰 가까와 오는 공생애의 마감 시점에 대비하여 열 두 제자를 굳건히 세우기 위함이었다.
이와 같이 새로운 전화점을 제시하는 본장에는 갈릴리 전도의 절정을 장식하는 이적 사건들 또한 수록되어 있는 바, 본장을 상고함에 있어 우리는 여기에 핵심적으로 떠오른 주제를 전후 문맥과의 연관 하에 살펴본 후, 본장의 내용을 간략히 분석해 보기로 하자.
(1) 중심 주제. 본장의 내용은 그 구성상 '확장되는 종의 사역과 고조되는 핍박'을 다루는 3장과 유사하며 문맥의 흐름상 본장의 전후 내용들과 매우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본장에는 앞장들에서 다루어진 중심 주제들이 집약된 듯한 인상을 주는 여러 주제들이 뚜렷이 나타나는 바, 이를 열거해 보면 다음과 같다.
(가) 종에 대한 배척. 고난당하는 종의 이미지는 본서 여러 곳에 걸쳐 심도 있게 부각되고 있는데, 본장 또한 그중 하나이다. 종에 대한 핍박은 2장에서부터 대두하기 시작하여 3장에 이르러 더욱 고조되는 양상을 보이며, 이러한 양상이 본장에 계속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5장에 묘사된 주의 이적적 권능은 대적들의 핍박을 가중화시키는 주요 원인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본장에는 예수께서 고향 사람들로부터 배척받는 기사가 수록되어 있는데(1-6절), 이는 마 10:3-6의 내용과 더불어 인간적인 친분 관계가 오히려 진리를 거스리는 걸림돌 역할을 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아울러 이는 외면만 보고 진리의 실상을 꿰뚫어보지는 못한 당시 유대인들의 영적 무지를 여실히 드러낸다. 그리고 본장에 수록된 세례 요한의 처형 기사는 당시 로마 제국의 사주를 받았던 헤롯의 핍박을 보여주는바(14-29절), 이는 장차 예수를 갈보리 산상에서 십자가에 못박는 일에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 뿐만 아니라 정치 지도자들 또한 깊이 연루(連累)될 것임을 암시한다. 이처럼,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인류 구원을 위한 자발적 순종의 결과였지만 표면상으로는 분명히 대적들의 핍박의 결과였다. 따라서 대적들은 그들을 구원하러 오신 하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그 엄청난 죄악에 대해 아무런 핑계도 댈 수 없게 된 셈이다.
(나) 종의 권능. 본장에 수록된 오병이어의 이적과 물 위를 걸으신 이적은 갈릴리 사역 동안에 나타난 예수의 권능 중 절정에 해당한다. 특히 오병이어의 이적은 쉴 틈없이 분주한 가운데서도 무리들을 긍휼히 여기사 그들의 영육간의 주림을 채우고자 노심 초사하시는 무한하신 은혜와 종되신 예수의 헌신적 봉사 정신을 잘 보여 준다.
(다) 제자화 훈련. 이 주제 또한 본서 전체를 통해 일관되게 강조된다. 앞에서 잠시 언급하였듯이 공생애의 중반에 들어서면서 예수는 여러 무리들 중에서 택하신 열 두 제자들에게 집중적인 훈련과 교육을 시행하심으로써 장차 초대 교회의 튼튼한 기둥으로 세우고자 하셨다. 뿐만 아니라 예수의 대군중(對群衆) 사역의 확대를 위해서도 제자화 훈련이 절실히 요청되었다. 3장에서는 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세우신 사실이 소개되었거니와, 여기서는 이들을 전도자로 파견하는 내용이 소개된다(7-13절). 이는 공생애의 기간이 점점 경과되어감과 함께 제자화 훈련의 방법도 보다 심층적인 단계에로 나아감을 나타낸다.
(2) 내용 구성. (1) 항에서는 본장의 중심 주제를 세 가지로 열거하였거니와, 이를 다시 요약하면 본장의 내용은 주제에 따라 크게 둘로 나누어진다. 먼저 1-6절과 14-29절은 계속적으로 고조되어가는 핍박의 기세를 소개하며, 다음으로 7-13절과 30-56절은 핍박의 기세에 아랑곳하지 않고 예수의 사역이 날로 확대되어가는 내용이다. 그리고 14-29절에 수록된 세례 요한의 죽음에 관한 기사는 열 두 제자들이 파송된 후에 다시 돌아오기까지의 사이에 삽입된 내용이며, 53-56절은 본장과 유사한 상황 속에서 발생하였던 수많은 사건을 요약한 일종의 삽화라 하겠다.

1. 고향에서 배척당하심(6:1-6)
이 기사를 끝으로 제 2차 갈릴리 사역은 막을 내린다. 예수께서 나사렛 사람들로부터 배척받은 일은 제 1차 갈릴리 사역의 초기에도 있었으며(4:16-30), 본문의 사건은 두번째로 배척당하신 것이다. 예수의 출생지는 베들레헴이었지만 가족과 더불어 나사렛에서 성장하셨기 때문에 나사렛이 고향이나 다름 없었다. 본문을 상고할 때, 우리는 배척의 원인(동기)과 결과 및 이 배척 사건에 담긴 중요한 의미 등을 밝히는 순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1) 배척의 원인. 나사렛인들이 예수를 배척하게 된 데에는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그 중 가장 큰 것은 그들의 시기심이라 하겠다(잠 14:30;고전 13:4;갈 5:26), 이방 및 갈릴리의 성읍들 중 하나인 나사렛은 유대인들로부터 멸시와 천대를 당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나사렛의 주민들은 무식하며 그 풍속이 추잡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수의 크신 권능과 명망에 관한 소문을 이미 들었음에 분명하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이나 나사렛 거민들이나 예수의 명성을 시기하고 질시하였다는 점에서는 일치하지만, 그 동기면에서는 다소 차이를 보인다. 즉, 전자는 자신들의 종교적 정치적 기득권을 침해받지 않으려는 욕심에서 시기 하였던 것에 비해 후자는 자신들의 비천한 모습과 대조적으로 비쳤던 예수의 높으신 명망에 대해 시기의 뜻을 나타내었던 것이다. 이는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우리나 속담과 일맥 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한편 나사렛인들이 예수를 '마리아의 아들'이라 부른 것은 멸시의 뜻을 담고 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아버지가 사망한 연후에도 그 '아버지의 아들'로 부르는 것이 상례였으며, 여자의 아들로 부르는 것을 멸시를 나타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마리아의 아들'이라는 표현 속에는 예수를 심지어 사생아로 의심하는 뉘앙스까지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요 9:29). 요컨대, 본 기사는 인간적인 눈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된 하나님의 신령한 비밀들을 결코 알 수 없음을 보여줌과 아울러, '친밀함은 경멸을 낳는다'는 유대의 속담처럼 인간적 친분 관계가 도리어 진리에 대해 왜곡된 시각을 갖게 만들 수 있음을 시사한다.
(2) 배척의 결과. 고향 사람들이 예수를 배척함에 따라 예수께서 나사렛에서는 권능을 행하실 수 없었다(5절). 이는 주께서 이적을 베푸실 능력이 없었다는 말이 아니라 그처럼 패역한 성읍에서는 이적을 베풀지 않기로 결심하셨다는 뜻이다(마 13:58). 예수는 모든 사람들이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시는 까닭에 인간의 외모를 보지 않고 만민의 마음 문을 두드리며 구원의 잔치에 초대하신다(사 45:22;55:1;요 7:37;계 3:20;22:17). 하지만 그 두드리는 소리를 외면하고 마음 문의 빗장을 스스로 걸어 잠그는 자는 구원의 은혜를 받을 수 없는 것이다. 한편 예수는 배척당하는 그 와중에서도 몇몇 병자들은 안수하여 고치셨으니 이는 영육간의 병고에 힘겨워하는 자들에 대한 주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긍휼을 보여 준다 하겠다.
(3) 본 기사에 내포된 의미. 예수의 고향 사람들의 배척 사건이 주는 의미는 대략 다음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가) 먼저 본문은 인간의 불신이란 하나님의 은혜의 전류를 차단시키는 절연체(絶緣體)임을 상기시킨다. 심지어 성도들은 자신의 온 생애와 구체적 걸음들을 주께 다 맡기기 보다는 스스로 경험과 방법에 의지하려는 경우가 많다. 그리하여 환경의 호불호(好不好)와 목전의 성패에 따라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며 점점 세상의 가치 기준과 세상적 삶의 방식에 함몰되어간다. 반면에 하나님을 굳게 믿고 신뢰하는 자는 항상 기뻐하며 자족함을 누리는 은혜를 맛보게 되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창고는 온갖 진귀한 보화들로 가득 차 있으며, 하나님은 당신을 믿고 순종하는 자들에게 영육간에 필요한 모든 것을 차고 넘치도록 주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나) 두번째로 우리는 본문을 통해 구원의 복음이 이방인에게 향하게 된 경로를 엿볼 수 있다. 여기 묘사된 나사렛 주민들의 완악한 불신 상태는 본질상 대다수 유대인들의 영적 상태와 별로 다를 바가 없었으며, 가버나움의 한 백부장의 믿음과 뚜렷이 대조된다(마 8:5-13). 유대인과 이방인에 대한 예수의 태도는, 귀신들린 딸의 치유를 위해 예수께 나아와 간구했던 가나안 여인에 관한 기사에서 극적으로 제시된다(마 15:21-28). 사실 3년이라는 짧은 공생애 동안 예수의 사역은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 집중되었다. 하지만 복음은 본질적으로 천하 만민에게 개방되어 있었으며, 예수의 제자들은 '땅 끝까지'이르러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도록 명령받았다(행 1:8). 이에 따라 사도 바울도 복음 전도를 '먼저는 유대인에게 다음으로 이방인에게'라는 원칙에 입각하여 추진하였다(롬 1:16). 이 문제에 관한 보다 상세한 설명은 마 8:1-17의 주제 강해 '이방인과 유대인의 구원 관계'를 참조하라.
(다) 끝으로 본문에는 제자화 훈련을 위한 주의 의도가 암시되어 있다. 1절의 '제자들도 좇으니라'는 말은 본서에만 나오는데, 이는 마가가 제자화 훈련이라는 시각을 가지고 본기사를 기록하였음을 시사한다. 예수는 고향에서 배척당하실 것을 미리 알고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과 더불어 나사렛을 재차 방문하사, 제자들로 장차 다가올 핍박과 환난의 시기를 대비하게 하심과 아울러 무지한 군중들의 일시적 환호에 마음을 두지 않게끔 하려는 의도를 지녔을 것으로 보인다.

* 참된 신앙을 방해하는 선입관. 예수께서는 눅 4:16-30의 첫번째 고향 방문에 이어 두번째로 제자들과 더불어 고향을 방문하셨다. 즉 그분은 단지 한 인간으로서 가족의 안부를 알아보기 위해 고향을 찾으신 것이 아니라 참선지자요 구세주로서 복음 전파의 한 과정상 고향을 방문하신 것이다. 그런데 예수의 방문을 접한 그곳 고향 사람들의 반응은 환영과 존경은 커녕 오히려 시기와 배척으로 일관하였다.
이처럼 그들이 예수를 무시하고 배격한 데는 여러 요인이 있겠으나 그 무엇보다도 그들의 선입관이 그들의 마음을 완악하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실로 그들은 예수의 인간적인면, 곧 그의 출신('이 사람이 목수가 아니냐 ? ')과 그의 가족 상황('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이 아니냐 ? ', '야고보와. . .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 ')에 근거한 선입관에 집착함으로써 예수를 올바로 아는 일에 실패하고 말았다.
진정 인간에게 있는 편협하고 왜곡된 선입관은 이와 같이 진리를 분별할 수 없게 만들뿐 아니라 예수께 대한 참다운 신앙을 갖지 못하게 만든다.
우리가 이러한 오류투성이의 선입관에 헤어나오기 위해서는 (1) 우리를 온전케 하며 바른 지식과 지혜에 이르게 하는 주의 말씀을 깊이 상고해야 한다(시 119:105;잠 6:20-23;요 5:39;딤후 3:15-17;히 4:12). (2) 자신의 편협하고 그릇된 지식에 안주하지 말고 자신의 한계와 부족을 솔직이 시인하며, 참된 지혜 얻기를 간구해야 한다(약 1:5). (3) 하나님에 대한 간접적이고 피상적인 인식에 그치지 말고 개인적이고 인격적으로 그분을 깊이 영접하고 또 그분의 품성과 뜻과 계획을 알기를 힘써야 한다(호 6:3).
이럴 때 비로서 바른 가치와 참된 신앙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 우리의 왜곡된 선입관에서 진정 해방될 수 있다.

2. 열 두 제자 파송(6:7-13)
본문은, 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당신의 사역을 대신하는 대리자로 파송하면서 전도 방법을 조심스럽게 당부하신 내용이다. 처음 제자들을 부를 때 예수는 그들로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약속하셨으며(1:17), 기회있을 때마다 그들을 따로 불러 특별 교육을 시켜 오셨다(4:10). 그리고 열 두 제자들은 예수와 함께 생활하면서 당신의 무수한 이적적 권능들을 목격하고 그 메시지의 핵심들에 이미 익숙해져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제 바야흐로 주께서 열 두 제자를 파견하실 시점에 도래한 것이다. 이 열두 제자 파송은 제자화 훈련 및 예수의 사역의 확대라고 하는 이중의 목적을 지니는데, 이에 관해서는 마 10장 장강해를 참조하기 바란다. 마태복음에서는 10장 전체에 걸쳐 열 두 제자를 파송하시며 베푸신 교훈을 강화 형식으로 소개하고 있으며, 전도 방법 뿐만 아니라 전도 대상과 전도 내용 및 전도인에게 따르는 핍박에 대한 각오와 자세 등의 내용이 매우 상세히 소개되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전도 방법에 대해서만 상고해 보기로 하자.
(1) 제자들을 각각 둘씩 짝을 지워 보내셨다. 이는 두 세 사람의 증인을 내세웠던 이스라엘의 재판 풍습과 연관된다고도 볼 수 있다(신 17:6). 즉, 제자들을 둘씩 파견됨으로써 예수께 대한 증거의 진정성을 강화하실 목적이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증거의 진정성을 위한 의도를 별도로 하더라도, 두 사람이 합력하여 사역을 감당하게 되면 각기 따로 하는 것보다 일의 효율을 훨씬 더 높일 수 있었음이 분명하다. 두 사람이 함께 동역하면 한 쪽이 낙심하거나 기진해 있을 때 위로하고 세워주며, 혼자서 감당키 힘든 문제도 두 사람의 힘으로써 능히 극복해 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이방인의 사도였던 바울과 그의 충실한 동역자였던 실라와의 아름다운 협력의 이야기는 유명하다(행 16:40), 또한 두 사람이 협력하여 일을 도모하는 모습에 관해 전도서 기자도 갈파한 바 있다(전 4:9-12).
(2) 전도 여행을 위한 장비들을 구태여 갖출 필요가 없다고 가르치셨다. 이는 파송된 제자들이 오직 맡은 바 임무에만 전심 전력할 수 있게끔 하기 위함임과 아울러, 그들로 하여금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여 주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끔 하시기 위함이었다. 이들은 예수의 사역을 대행하였으므로, 당연히 신자들로부터 숙식을 제공받을 권리가 있었던 반면, 주께로부터 받은 권능을 행사하여 재물을 탐하는 시험에 빠져서도 안 되었다(시 62:10;잠 8:20;딤전 6:9). 한편 성 프란시스코는 8, 9절의 말씀에 깊은 감화를 받고서 '빈곤이라는 아내'와 결혼했다고 고백하였다고 한다.
(3) 한 마을에 들어갈 때, 처음 그들을 영접하는 자의 집에서 계속 기거하도록 하셨다. 만일 제자들이 보다 안락한 숙소에 마음이 끌려 여기저기 옮겨다니면 사람들의 눈에 이기적 욕심에 사로잡혀 있다는 비난을 받을 수도 있었다. 따라서 처음 영접받은 집이 설령 초라하다 할지라도 그 집안 사람들의 호의를 무시해서는 안 되었던 것이다.
(4) 배척받게 될 상황에서 취할 태도를 가르쳐 주셨다. 예수는 자신도 많은 이들의 핍박과 배척을 경험하신 것처럼 제자들 또한 사람들에게 항상 환영받지는 못하며, 심지어는 적극적인 적대 세력에 직면케 되리라는 점을 예견하고 계셨다. 이 핍박에 관한 주제는 평행 부분인 마 10장에 보다 상세히 언급되어 있다.
이와 같은 전도 방법을 오늘날에도 문자 그대로 적용하는 데에는 약간의 어려움이 따를 것이다. 하지만 현대의 전도자들도 이러한 가르침에 담긴 깊고 신령한 의도와 정신만은 최대한 살려야 하며, 거기에 현대에 맞는 보다 효과적이고 구체적 방법들을 접목시켜야 할 것이다.

* 열 두 사도의 행적. 예수께서는 천국 확장 사업의 일환으로서 12명의 제자를 친히 선택하셨다. 그리고 그들과 약 3년 동안을 동거동락하시면서 천국 일꾼으로서 필요한 제자화훈련에 힘쓰셨다. 이러한 훈련을 통해 예수의 제자요 주의 사도로 인정된 그들은 예수 승천 이후에 초대 교회의 기둥같은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더욱이 예수께서 시작하신 천국 확장 사업의 대역사를 이어받아 땅끝까지 복음 전하는 일에 온 생애를 다바쳤다. 여기에 그들이 눈물어린 행적을 모아 보았다.

+----+----+----------+----------+----------+------+---------+------------------+
| |이름| 성(별칭) | 부모 | 고향(집) | 직업 | 저서 | 행 적 |
| +----+----------+----------+----------+------+---------+------------------+
| | | | | | | | 갈릴리에서 주의 |
| | | | | | | | 부르심을 받은 이 |
| | | | | | | | 후로 열두 제자 중|
| | | | | | | | 지도적 위치에 있 |
| | | | | | | | 었다. 예수를 메시|
| | | | | | | | 야로 고백한 직후 |
| | | | | | | | 에 십자가 수난을 |
| | | | | | | | 말리는 등(마 16:2|
| 중 | 시 | 베드로 | 요나 또는| 벱새다 | 어부 | 베드로 | 2) 모순된 면을 보|
| | | | | | | | 이기도 했으나, 오|
| | 몬 | 게바 | 요한 | 가버나움 | | 전후서 | 순절 이후 성령의 |
| | | | | | | | 충만함을 받고 초 |
| | | | | | | | 대교회의 지도자로|
| | | | | | | | 서 활약했다(행 2:|
| | | | | | | | 4 ff.;4:4). 그의 |
| | | | | | | | 사역은 주로 유대 |
| | | | | | | | 인들을 대상으로 |
| | | | | | | | 하였으며 전설에 |
| | | | | | | | 의하면 로마에서 |
| 심 | | | | | | | 순교했다고 한다. |
| +----+----------+----------+----------+------+---------+------------------+
| | | | | | | | 매우 격정적인 성 |
| | | | | | | | 격의 소유자로서( |
| 인 | | | | | | | 막 3:17) 베드로, |
| | | | | | | | 요한과 함께 주의 |
| | | | | | | | 특별하신 교훈을 |
| | 야 | | | | | | 받고 또 다른 사도|
| | | | | | | | 가 보지 못한 이적|
| | | | | | | | 을 여러번 목격하 |
| | 고 | | | | | | 였다(5:37;14:32; |
| | | | | | | | 마 17:1). 주후 44|
| | | | | | | | 년 경에 헤롯 왕에|
| | 보 | | | | | | 게 참살당함으로써|
| | | | | | | | (행 12:1-3) 사도 |
| | | | | | | | 중 첫번째 순교자 |
| | | | | | | | 가 되었다. |
| 물 +----+ 보아너게 | 세배대와 | 벱새다 | 어부 +---------+------------------+
| | | | | | | | 열 두 사도 중 가 |
| | | | 살로매 | 가버나움 | | | 장 젊었고 예수의 |
| | | | | | |요한복음,| 사랑을 많이 받았 |
| | | | | 예루살렘 | | | 다(요 13:25). 예 |
| | | | | | | 요한1,2,| 수께서 심문당하실|
| | 요 | | | | | | 때 제자들 가운데 |
| | | | | | | 3서, 계 | 혼자 따라 들어갔 |
| | | | | | | | 으며 십자가상의 |
| | | | | | | 시록 | 예수께서 그 모친 |
| | | | | | | | 의 봉양을 요한에 |
| | | | | | | | 게 부탁했다. 베드|
| | 한 | | | | | | 로와 함께 예루살 |
| 들 | | | | | | | 렘 교회의 주석(柱|
| | | | | | | | 石)의 역할을 담당|
| | | | | | | | 했고(행 8:14,25),|
| | | | | | | | 예배소에서 전도하|
| | | | | | | | 던 중 도미시안 황|
| | | | | | | | 제의 핍박으로 밧 |
| | | | | | | | 모섬에 유배당하였|
| | | | | | | | 으며 A.D.100년 경|
| | | | | | | | 별세했다. |
+----+----+----------+----------+----------+------+---------+------------------+
| | | | | | | | 원래는 세례 요한 |
| | | | | | | | 의 제자였으나 세 |
| | | | | | | | 례 요한으로부터 |
| | | | | | | | 예수께 관한 증거 |
| | 안 | | | | | | 를 듣고서 그 형제|
| | | | | | | | 베드로에게 전도하|
| 조 | | | 요나 또는| 벱새다 | 어부 | | 여 그와 함께 예수|
| | 드 | | | | | | 의 열두 제자 중에|
| | | | 요한 | 가버나움 | | | 참여하여 일생토록|
| | | | | | | | 봉사하였다(요 1:4|
| | 레 | | | | | | 0-42). 후에 스구 |
| | | | | | | | 디아, 헬라, 소아 |
| | | | | | | | 시아 등지에서 전 |
| | | | | | | | 도하였고 십자가 |
| | | | | | | | 순교를 당했다고 |
| | | | | | | | 전해진다. |
| 용 +----+----------+----------+----------+------+---------+------------------+
| | | | | | | | 주를 처음 만난 후|
| | | | | | | | 나다나엘을 주께 |
| | | | | | | | 인도한 바 있으며 |
| | 빌 | | | | | | (요 1:45,46), 하 |
| | | | | | | | 나님 아버지를 보 |
| | | | | 벱새다 | | | 여달라고 주께 요 |
| 한 | | | | | | | 청하기도 했다(요 |
| | | | | | | | 14:8). 예수 승천 |
| | 립 | | | | | | 후 브루기아에서 |
| | | | | | | | 전도하였고 히에라|
| | | | | | | | 볼리에서 순교한 |
| | | | | | | | 것으로 전해진다. |
| +----+----------+----------+----------+------+---------+------------------+
| | | | | | | | 친구 빌립의 소개 |
| 사 | 바 | | | | | | 로 예수를 뵙고서 |
| | | | | | | | 그 제자가 되었다.|
| | 돌 | 나다나엘 | 탈마이 | 갈릴리의 | | | 전설에 의하면 아 |
| | | | | | | | 라비아와 인도에 |
| | | | | 가나 | | | 가서 전도하다가 |
| | 로 | | | | | | 순교했다고 한다. |
| | | | | | | | 제롬에 의하면 그 |
| | 매 | | | | | | 가 바돌로매 복음 |
| 역 | | | | | | | 서를 썼다고 한다.|
| +----+----------+----------+----------+------+---------+------------------+
| | | | | | | | 부활을 의심하여 |
| | | | | | | | 그 손의 못자국을 |
| | 도 | | | | | | 보고서야 믿었다( |
| | | 디두모 | | 갈릴리 | | | 요 20:24,25). 전 |
| | | | | | | | 설에 의하면, 바대|
| 자 | 마 | | | | | | , 바사, 인도 등에|
| | | | | | | | 서 전도하다가 순 |
| | | | | | | | 교했다고 한다. |
| +----+----------+----------+----------+------+---------+------------------+
| | | | | | | | 세리로서 세관에 |
| | | | | | | | 앉아 있다가 예수 |
| | | | | | | | 부르심을 받고 모 |
| 들 | 마 | | | | | | 든 것을 버려두고 |
| | | | | | | | 주를 좇았으며, 예|
| | | 레위 | 알패오 | 가버나움 | 세리 | 마태복음| 수를 위해 잔치를 |
| | | | | | | | 베풀었다(눅 5:27-|
| | | | | | | | 29). 오순절 성령 |
| | 태 | | | | | | 강림 이후에 아시 |
| | | | | | | | 아와 마게도냐에서|
| | | | | | | | 전도하다가 에디오|
| | | | | | | | 피아에서 순교했다|
| | | | | | | | 고 한다. |
+----+----+----------+----------+----------+------+---------+------------------+
| 유 | 소 | | 알패오와 | | | 야고보서| 블레셋과 애굽에서|
| 명 | 야 | | | | | | 전도하다 애굽에서|
| 하 | 고 | | 마리아 | | | (?) | 순교했다고 한다. |
| 지 | 보 | | | | | | |
| +----+----------+----------+----------+------+---------+------------------+
| 않 | 유 | | | | | | 앗수르와 바사에서|
| 은 | | 다대오 | 야고보 | 갈릴리 | | 유다서 | 전도하고 바사에서|
| | 다 | | | | | (?) | 순교한 것으로 전 |
| | | 르바오 | | | | | 해진다. |
| 제 +----+----------+----------+----------+------+---------+------------------+
| 자 | 시 | 가나안인 | | 갈릴리 | | | 십자가에 못박혀 |
| 들 | 몬 | 셀롯 | | | | | 순교했다. |
+----+----+----------+----------+----------+------+---------+------------------+
| | | | | | | | 은 30에 예수를 팔|
| 배 | 유 | | | | | | 고서 후일 자살하 |
| | | | | | | | 였다(마 26:14-16;|
| | | 가룟 | 시몬 | 유다의 | | | 27:3-5). 그를 대 |
| 반 | | | | | | | 신하여 맛디아가 |
| | 다 | | | 가룟 | | | 보선되어 열 두 사|
| | | | | | | | 도의 자리를 메웠 |
| 자 | | | | | | | 다(1:23-26). |
+----+----+----------+----------+----------+------+---------+------------------

3. 세례 요한의 순교(6:14-29)
본문은 열 두 제자들이 파송되어 다시 돌아오기까지의 내용 사이에 끼인 중간 삽화에 해당한다. 열 두 제자들의 전도 활동으로 인해 예수의 이름이 더 널리 알려졌고, 이에 따라 예수에 관한 항간의 평(評)도 각양으로 나타났다. 마가는 이러한 세평(世評)과 함께 헤롯의 평을 소개하면서 자연히 세례 요한의 순교 기사를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마가가 단지 빠뜨린 기록을 채우는 식으로 이 순교 기사를 기록한 것은 아니며, 나름대로의 뚜렷한 의도를 가지고 이 기사를 삽입하였음이 분명하다.
이 내용은 마 14:1-12에도 수록되었으나, 본문이 비교적 더 상세하다. 전후의 문맥에 중점을 둔 마태복음 평행 부분의 강해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세례 요한의 순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수난을 암시하는 전조(前兆)라 할 수 있다. 결국 마가는 본서 전체를 통해 강조하고 하는 수난받는 종의 이미지를 부각시키려는 의도에서 세례 요한의 순교기사를 상세히 수록하였던 것이다. 세례 요한의 사역에 관해서는 불과 몇 절로 요약하였던(1:2-8) 마가가 순교 기사를 이렇듯 소상하게 묘사한 것 또한 수난에 강조점을 두려는 기록 의도를 보여 준다 하겠다. 문맥적 차원에서는 마 14:1-12 강해에서 다루었으므로, 여기서는 본문 내용 자체에 초점을 맞추되 여기 등장하는 세 인물의 대조적인 모습을 중점적으로 고찰해 보기로 하자.
(1) 세례 요한의 선지자적 용기. 본문을 통해 우리는 선지자다운 진정한 용기를 보게 된다. 비록 세례 요한이 헤로디아의 개인적 양심의 희생물로 죽음을 당하였지만, 보다 거시적으로 보면 그의 죽음은 타락한 시대의 핍박으로 말미암은 비극적 결말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어느 시대에나 하나님의 뜻에 입각한 정도(正道)와 대도(大道)를 외치는 자는 모진 환난과 핍박에 직면하는 경우가 대다수이기 때문이다(딤후 3:12). 물론 그리스도의 앞길을 예비하는 선구자적 사명을 감당하는 일이 세례 요한의 중심적 사역이었지만(1:2) 그는 백성들의 윤리적, 도의적 기강을 해이하게 만드는 사회적 불의 또한 간과하지 않았다. 곧, 신성한 혼인 관계를 멋대로 파기하였던 헤롯과 헤로디아의 불륜의 세계는 세례 요한에 의해 노골적으로 비난받은 바 있는데(눅 3:19), 이는 일신상의 고통을 불사하는 선지자적 용기로써만 가능한 양심의 외침이었다.
이와 같이 담대한 용기는 여러 선지자들에게서도 발견된다. 예컨대, 나단 선지는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불법으로 빼앗은 다윗에게 하나님의 무서운 경고를 대언하였으며(삼하 12:7-14), 엘리야는 바알 숭배에 빠져 백성들을 수렁으로 몰아넣는 아합의 악행을 담대히 질책하였다(왕상 18:18). 이들은 한결같이, 현재의 고난이 장차 누리게 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으리라는 소망을 가졌으며(롬 8:18), 또한 몸을 죽일 뿐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할 자들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눅 12:4).
(2) 헤롯의 우유 부단함.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와 헤롯 왕가 등을 통해 이중적 통치를 받았으며, 헤롯가는 헤롯 대왕이 죽은 후 공식적 왕의 지위를 박탈당하고 헤롯 대왕의 아들들에게는 영토 일부씩을 관할하는 분본왕의 지위가 할당되었다. 본문의 헤롯은 헤롯 대왕의 아들인 헤롯 안디바스로서 갈릴리와 베레아 및 요단강 동편의 남부 지역을 관할하였다(마 2:19-23 주제 강해 '헤롯의 세 아들들에게 분할된 영토). 본문의 내용으로 미루어 헤롯은 세례 요한을 내심으로 존경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며, 그 아내 헤로디아의 계략으로 말미암아 본의 아니게 요한을 처형한 후 심한 양심의 가책에 시달렸던 것 같다. 하지만 그가 세례 요한을 어떻게 보았건 간에, 결과적으로 그는 진실과 정의 보다는 자신의 체면과 위신에 더 연연하였고 여인의 치마폭에서 벗어나지 못한 소신 없는 졸부요 비겁자로서의 오명만을 남기게 되었다.
(3) 헤로디아의 간악성. 헤로디아는 악녀의 전형으로 나타난다. 그녀는 세례 요한의 질책을 듣고 회개하기는 커녕, 자신의 수치를 드러낸 그 순간부터 요한을 제거해 버릴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그리하여 남편 헤롯을 부추겨서 요한을 옥에 감금시킨 데에 만족하지 않고 온갖 계략을 동원하여 마침내 요한의 목을 베고서야 만족해 했다. 그녀의 발은 악을 행하는 일에 빨랐으며 의인의 피흘리는 일에 집요하였다(잠 1:16). 요컨대, 우리는 헤로디아의 모습을 통해 그 남편을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요부의 전형을 보며, 남편의 위광(威光)을 등에 업고 제 마음껏 세도를 부리는 악녀의 허영과 간교함의 진면목을 목격할 수 있다.

* 세례 요한의 선구자 사역. 세례 요한이 '주의 길을 예비하며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는' 선구자였다는(1:3;사 40:3) 사실은 다음 두 가지 측면에서 고찰될 수 있다.
(1) 세례 요한 자신의 활동과 메시지의 측면. 이 측면에 관해 살펴보기 이전에 우리는 먼저 당대의 역사적 배경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말라기 선지자를 고비로 하여 수세기 동안 선지자들의 경고와 예언의 생생한 목소리는 침묵을 지켰다. 이런 상황에서 이스라엘에는 종교 생활의 두 가지 대표적인 흐름이 생겨났던 바, 율법에의 순종이라는 관점에 치중한 서기관들의 종교와, 미래의 구원에 대한 소망을 표현한 묵시론적 종교가 그것이다. 그리고 열강의 지배에 시달려 오면서 민족적 독립을 쟁취하여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도래케 하기 위해 무력으로 대항하는 세력들도 많이 생겨났다.
이렇듯 열강의 억압에 시달리면서 하나님의 침묵을 안타까워하던 백성들에게 천국의 도래를 알리는 세례 요한이 나타났던 것이다. 그는 예수의 공생애 직전에 활동하였으며,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예수와 공동 사역을 수행 하였다고도 볼 수 있다(요 1:35-51;3:32). 그리고 세례 요한은 약속의 시대에 활동하였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약속 성취의 시대에 속하였다고도 볼 수 있다. 그는 결국 구속사에 있어 하나의 분계선에 위치하였으며, 구약의 메시야 예언은 세레 요한에게서부터 성취되기 시작했다(마 11:10-15). 세례 요한은 당시 종교 지도자들과는 달리 단순히 종교적 의식을 준수하거나 형식적 율법 준수에 중점을 두지 않고, 종말론적 입장에 서서 회개에 입각한 새로운 예배를 내세웠다는 점에서 하나님을 향한 새로운 전환의 길을 열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그가 베푼 세례는 예수에 의해 베풀어지게 될 성령 세례에 대한 상징이었다(행 19:1-7 주제 강해 '물 세례 연구' 참조).
다음으로, 요한의 메시지를 살펴보면, 그 메시지가 구약의 내용과 이미지를 생생하게 반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컨대, 곡식을 키질하는 키(사 30:28;마 3:12), 타작 마당(호 13:3;마 3:12), 나무 뿌리에 놓인 도끼 (겔 26:9;마 3:10) 등에 관한 언급이 그러하다. 이처럼 그의 메시지는 구약에 뿌리박은 것이었으며 윤리적 교훈과(눅 3:11-14) 선지자적 질책을 강조하였다는(눅 3:7-9) 점에서 당시의 통념적 교훈들과는 분명한 차이를 보였다. 또한 그의 메시지는 주로 종말론적 절박성과 관련된 것이었던 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는 말씀이 그 대표적 경우라 하겠다. 이 말씀은 예수의 메시지의 핵심 주제로서 이어지며, 또한 예수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성취될 것이었다(마 4:17).
(2) 예수께 대한 증언자라는 측면. 앞에서 우리는 세례 요한의 메시지와 활동 자체가 신구약을 잇는 가교의 위치에서 예수의 길을 예비하는 역할을 하였음을 살펴보았다. 이제 여기서는 요한의 모든 활동과 메시지의 핵심 요소라 할 증거자로서 사명을 살펴보기로 하자.
예수께 관한 예언은 구약에도 곳곳에 나타나지만(사 9:6, 7;말 3:1등) 세례 요한은 이러한 구약의 예언을 더욱 심화시켜 메시야를 증거하였다. 예컨대, 요한은 예수를 불과 성령으로 세례 주시는 분(사 44:3-5;겔 37:14;욜 2:28-32;마 3:11), 종말론적 심판을 행하실 분(사 30:13;나 1:6;말 4:1;마 3:12)으로 증거했을 뿐만 아니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요 1:29) 그리고 자기보다 훨씬 능력이 많으신 이(마 3:11)등으로 증거했다. 역으로 예수는 친히 세례 요한을 당신의 선구자로서 오리라고 말 4:5, 6에 예언된 '엘리야'라 증거하셨다(9:12, 13;마 11:10). 요컨대, 세례 요한은 구약 인물들 중 가장 큰 자요 모든 선지자와 율법의 마지막에 위치한 자로서(마 11:11, 13) 이스라엘의 잠자는 영혼을 일깨워 예수 앞으로 인도했던 위대한 선구자였다.

4. 오병 이어의 이적(6:30-44)
열 두 제자의 전도 사역에 대한 이야기를 서술해 가다 잠시 세례 요한의 순교 사건을 회상하며 언급한 마가는 이제 다시 열 두 제자의 전도 사역에 대한 기사로 돌아왔다.
본문에 수록된 오병이어의 이적은 본서 뿐만 아니라 사복음서 모두에 기록되어 있으며, 여러 가지 면에서 중요한 의의를 내포하고 있다. 이 이적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은 마 14:13-21의 강해에서 상세히 다루었으므로 참조하기 바라며, 여기서는 긍휼에 풍성하신 예수의 넘치는 은혜에 초점을 맞추어 보충적 설명을 덧보태는 데에 그치기로 하자.
이 이야기는 헤롯의 연회에 대한 기사 다음에 바로 이어지는데, 이는 헤롯 궁전의 호화롭고 현란한 분위기와 일반 민중들의 궁핍한 형편을 대조시킨다. 또한 본문에 등장하는 무리들은 출애굽한 후 광야에서 방황하며 고생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다시 말해서 본 기사는 목자 없는 양과도 같이 궁핍하고 답답한 처지에 놓인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사 영육간의 필요를 채워 주시는 선한 목자 되신 주님의 사랑을 여실히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요 10:11). 뿐만 아니라 본문에는 잠시 쉴 틈도 없이 가련한 무리들을 위해 애쓰며 봉사하시는 '종'의 수고가 부각되어 있다. 요컨대, 오병이어의 이적은 천지를 지으시고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로 식탁을 차리게 하셨던 그분의 창조적 권능과(민 11:4-9) 영육간의 궁핍함에 처한 인생을 위해 종으로서 봉사하시는 그분의 자애로우신 사랑을 함께 보여 준다 하겠다.
광야같이 험악하고 삭막한 이 세상에서 사람들은 생존 경쟁을 넘어 생존 전쟁을 치르고 있다.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마 6:31)하는 염려에서 놓여나기 위한 유일한 길은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 이상을 먹이고도 남게 하신 권능과 자비의 주 예수께 온전히 의탁하는 것이다.

5. 물 위를 걸으심(6:45-56)
이 이적은, 주께서 오병이어로 5천 명 이상을 배불리 먹이신 후,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를 건너 벱새다로 급히 가는 도중에 발생했다. 갈릴리 바다는 해수면이 지중해보다 훨씬 낮고 험준한 산으로 둘러싸여 때때로 돌풍(突風)이 부는 경우가 있었는데, 본문에서 제자들이 밤새도록 시달린 것도 바로 이 돌풍 때문이었다. 본문 내용을 상고하기에 앞서 타 복음서의 평행 부분과 비교해 보면 보다 정확하고 풍부한 의미를 파악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1) 타 복음서와의 비교 고찰. 예수께서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신 이적을 목격한 무리가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에 관해서는 본문에 언급되지 않았지만, 분명 어떤 반응이 있었을 것이다. 요 6:15은 무리가 예수를 억지로 잡아 임금으로 삼으려고 하였기 때문에 예수 일행이 서둘러 떠났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당시 혁명의 본거지라 할 만했던 갈릴리 주민들은 예수를 민족 해방을 위한 정치적 지도자로 삼으려고 열광했던 것 같다. 이들은 외관상으로는 예수를 환호했지만, 그 깊은 내면은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욕망 충족에만 연연해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예수의 신분이나 사역의 본질을 알지 못했으며, 또한 그들이 대망했던 정치적 메시야는 인류를 죄와 사망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십자가 수난을 당하시는 종되신 예수의 모습과는 너무도 판이하였다. 그리하여 공생애를 마감하는 시점에 이르러 예수께서 자발적으로 수난의 길로 나아가시자 그들의 환호는 순식간에 분노와 저주의 함성으로 돌변하고 말았던 것이다. 마 14:22-23에는 물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를 보고서 베드로도 건너 보고자 시도했던 사실과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고백했던 신앙 고백 등도 상세히 수록됨으로써, 제자화 훈련이라는 주제가 부각되었다.
(2) 본 이적의 목적. 평행 부분인 마 14:22-36의 강해에서 우리는 이 이적의 의의 혹은 목적이 첫째로 그리스도의 신성을 증거하며, 둘째로 제자들의 신앙을 연단시키며, 세째로 임박한 환난과 핍박을 암시하는 데에 있었음을 지적하였다. 본문에서도 이 세 가지 의의가 모두 함축되어 있지만, 특히 앞의 오병이어의 이적과 더불어 그리스도의 신성을 증거하는 데에 더욱 역점이 주어져 있다. 거센 풍랑을 가라앉게 하신 이적(4:35-41)과 함께 본 이적은 주께서 자연 법칙을 지배하시는 창조주이심을 뚜렷이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요 1:3;고전 8:6;엡 3:9;골 1:16;히 1:1, 2).

* 제자들을 곤경에 방치해 두신 이유. 갈릴리 전도 사역이 한창이던 때에 혁명의 본거지라 할 수 있던 갈릴리 주민들 사이에는 예수를 민족 해방을 위한 정치적 지도자로 옹위하려는 기운이 상당히 고조되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악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그곳에서 먼저 떠나 보내고, 당신은 친히 당면한 문제들(점점 고조되는 적대자들의 핍박, 정치적 메시야에 대한 백성들의 그릇된 기대, 당신이 감당해야 할 십자가 사역 등)을 놓고 하나님과 내밀한 교제의 시간을 보내고자 하셨다. 그런데 바로 그 상황에서 갈릴리를 출발했던 제자들에게 심각한 위기 국면이 전개되고 있었다. 즉 제자들은 여러 시간 동안(저녁 9시부터 시작되었다면 지금의 시간이 사경 곧 새벽 3-6시 정도였으니 약 9시간이 소요된 것으로 추정) 심한 풍랑 속에서 죽을 위기를 넘기며 있었던 것이다(마 14:24). 실로 그들 중에는 노련한 어부 출신들이 여럿 있었음에도 그들조차 어찌할 수 없었던 크나큰 자연의 장애 앞에서 심히 고통당했던 것이다. 이때에 겉으로 볼 때에 예수는 물에서 조용히 기도만하고 있었던 것 같으나 사실은 당신의 마음 속에는 제자들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염려로 가득차 있었던 것이다
(48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 곤경에 처한 제자들의 상태를 그대로 방치해 두신 이유는 무엇일까 ? 그것은 다음과 같다.
(1) 신앙의 연단을 위해. 제자들은 장차 예수의 수난에 직면하여 어떤 두려움을 느낄지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앞으로 교회를 설립하고 확장하는 과정에서 어떤 역경에 부딪칠지 모르는 터였다. 따라서 그러한 불같은 시험에 대비하여 미리부터 신앙 훈련이 절실히 요청되었던 것이다(벧전 4:12).
(2) 구원의 소중함과 신앙적 열의를 강조하기 위해. 구원의 복음 등 하나님의 여러 신령한 축복들은 간절히 희구해야할 대상이지 마지 못하는 듯한 애매한 태도로 받아들여져야 할 성질의 것이 결코 아니다. 밤새껏 천사와 더불어 씨름한 야곱이나(창 32:24) 주위 사람들의 꾸짖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예수께 도우심을 간구하였던 소경 거지 바디매오(10:46-48) 등은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열의를 가졌다는 측면에서 넉넉히 축복을 시여받을만 했었다.
(3) 오직 예수께 참 구원이 있음을 체험적으로 가르치시기 위해. 예수께서는 풍랑이 격심한 중에도 당신의 제자들의 생명을 보존하시기 위해 그 험란한 물결 위를 걸어 그들에게 친히 찾아오셨다. 그리하여 그들에게 모든 염려와 절망과 슬픔의 궁극적인 해결자가 바로 당신이심을 명확히 깨우치셨던 것이다.
이처럼 예수는 곤경에 처한 당신의 백성들을 방치해 두시되 조용한 사랑의 보살핌으로 그들의 신앙적 성숙함을 꾀하시고 계셨다. 실로 풍파 이는 이 역사의 중심에도 주님은 이같은 사랑의 보살핌으로써 우리의 문제를 근원적이고도 세밀하게 해결해 주시며, 우리의 영적 성숙을 위해 역사하시고 계신다. 이것이 바로 절망할 수밖에 없는 인류 역사 가운데 살면서도 새 희망의 날개짓을 계속할 수 있는 우리의 이유이다.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공지 호크마 주석과 강해
239 마태복음 호크마 주석, 마태복음 22장
238 마태복음 호크마 주석, 마태복음 23장
237 마태복음 호크마 주석, 마태복음 24장
236 마태복음 호크마 주석, 마태복음 25장
235 마태복음 호크마 주석, 마태복음 26장
234 마태복음 호크마 주석, 마태복음 27장
233 마태복음 호크마 주석, 마태복음 28장
232 마가복음 호크마 주석, 마가복음 01장
231 마가복음 호크마 주석, 마가복음 02장
230 마가복음 호크마 주석, 마가복음 03장
229 마가복음 호크마 주석, 마가복음 04장
228 마가복음 호크마 주석, 마가복음 05장
» 마가복음 호크마 주석, 마가복음 06장
226 마가복음 호크마 주석, 마가복음 07장
225 마가복음 호크마 주석, 마가복음 08장
224 마가복음 호크마 주석, 마가복음 09장
223 마가복음 호크마 주석, 마가복음 10장
222 마가복음 호크마 주석, 마가복음 11장
221 마가복음 호크마 주석, 마가복음 12장
220 마가복음 호크마 주석, 마가복음 13장
219 마가복음 호크마 주석, 마가복음 14장
218 마가복음 호크마 주석, 마가복음 15장
217 마가복음 호크마 주석, 마가복음 16장
216 누가복음 호크마 주석, 누가복음 01장
215 누가복음 호크마 주석, 누가복음 02장
214 누가복음 호크마 주석, 누가복음 03장
213 누가복음 호크마 주석, 누가복음 04장
212 누가복음 호크마 주석, 누가복음 05장
211 누가복음 호크마 주석, 누가복음 06장
210 누가복음 호크마 주석, 누가복음 07장
209 누가복음 호크마 주석, 누가복음 08장
208 누가복음 호크마 주석, 누가복음 09장
207 누가복음 호크마 주석, 누가복음 10장
206 누가복음 호크마 주석, 누가복음 11장
205 누가복음 호크마 주석, 누가복음 12장
204 누가복음 호크마 주석, 누가복음 13장
203 누가복음 호크마 주석, 누가복음 14장
202 누가복음 호크마 주석, 누가복음 15장
201 누가복음 호크마 주석, 누가복음 16장
200 누가복음 호크마 주석, 누가복음 17장
199 누가복음 호크마 주석, 누가복음 18장
198 누가복음 호크마 주석, 누가복음 19장
197 누가복음 호크마 주석, 누가복음 20장
196 누가복음 호크마 주석, 누가복음 21장
195 누가복음 호크마 주석, 누가복음 22장
194 누가복음 호크마 주석, 누가복음 23장
193 누가복음 호크마 주석, 누가복음 24장
192 요한복음 호크마 주석, 요한복음 01장
191 요한복음 호크마 주석, 요한복음 02장
190 요한복음 호크마 주석, 요한복음 03장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Next
/ 24

All the Bibles, Commentaries and Dictionaries here have their own rights.
All rights are reserved for them, not for us. Thanks! Praise our great God, Christ Jesus!

HANGL Lingua Franca 한글 링구아 프랑카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