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그 즈음에 - 문자적으로 그 날들 동안 으로서 본 사건을 앞의 귀먹고 어눌한 사람을 치유한 사건(7:31-37)과 연결 시킨 것이라 본다. 마가는 지금의 장소에관해 침묵하고 있으나, 대개 이곳이 갈릴리 호수 동편에 위치한 데가볼리로 인정되고 있다.
=============8:2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 . 먹을 것이 없도다 - 예수가 제자들을 부른 이유와 본 이적의 근본 동기를 말하고 있다. 즉 예수의 가르침을 듣기 위해 모여든 수많은 군중들을 불쌍히 생각하여 그 대책을 마련코자 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바로 인류를 지극히 사랑하셔서 당신의 몸을 버리기 까지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심정이다.
=============8:3
만일 내가 저희를 굶겨 집으로 보내면. . . 멀리서 온 사람도 있느니라 - 여기서 군중들을 향한 예수의 애정과 책임 의식이 구체적으로 나타나는데 마치 자상한 어머니처럼 군중들의 굶주림을 자기의 책임으로 여기며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8:4
이 광야에서 어디서 떡을 얻어 - 예수의 제안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은 무기력했으며 부정적인 것이었다. 이유는 5, 000명 급식 기적때의 금전 문제와는 달리 장소 문제 였다. 즉 집회 장소가 이 광야 곧 내륙 한가운데로서 인가와 마을로 부터 상당한 거리에 있는 외진 광야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자들은 그 많은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공급한다는 것은 실질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판단 하였으 것이다.
=============8:5
일곱이로소이다 - 제자들의 불가능한 대답을 듣고 예수는 희망적인 암시를 갖고 남아있는 음식에 대해 묻고 있다(6:38주석 참조). 여기서추측할 수 있는 것은 군중들이 오랫동안 굶주렸다면 음식이 남아있을리 없기 때문이다. 7이라는 수는 하나님의 수, 완전한 숫자로 보아 하나님으로 부터 주어지는 충만한 축복을 상징한다는 주장도 있다.
=============8:6
땅에 앉게 하시고. . . 축사 하시고 - 예수는 6:41에서와 같은 형식으로 급식 기적을 행한다. 그러나 6:39, 40과 많은 차이점이 나타나는데, 6:39에서는 무리들을 푸른 잔디위에 앉도록 했다고 언급하고 있으나 여기서는 그냥 땅에 앉게 했다고만 한다. 이는 분명 장고적 차이뿐 아니라 시간적 차이를 여실히 증명해 주는 것이라 본다.
=============8:7
작은 생선 두어 마리 - 여기서는 6:41과 달리 물고기 숫자가 불분명하게 언급되고 있는데 생선 두어마리 는 헬라어 잊뒤디아 올리가 를 번역한 것으로서 생선 몇마리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공동번역).
=============8:8
남은 조각 일곱 광주리 - 이처럼 주님께서는 필요한 바에 넘치도록 채워 주시는 분이시다(눅6:38). 왜냐 하면 하나님께서는 만우의 주로서(대상29:11)지극히 충만하신 분이실 뿐만 아니라 (요1:16)성도의 필요를 먼저 아시기 때문이다(마6:32).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환난과 궁핍에 처했을때, 하나님께 의뢰하여 해결책을 찾으려 하기 보다는 스스로 고민하고 좌절하는 등 매우 근시안적이고 즉각적인 반응으 보이는 경우가 있다.
=============8:9
사람은 약 사천 명이었더라 - 6:44에서는 남자가 오천명이었다고 언급하는데 여기서는 그러한 구분이 없고 사람이 4, 000명 이라고 말한다.
=============8:10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달마누다지방으로 - 6:45에서는 벳세다로 갔다고 언급하지만 여기서는 물통 이란 이름의 뜻을 지닌 달마누다 지방으로 갔음을 밝히고 있다.
==============8:11- 13
이 이야기의 발생 장소가 어디인지 알 길이 없고 앞에서 언급된 급식기적과도 아무런 관계가 없어 전혀 다른 사건의 이야기가 삽입된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8:1 - 10주석에서도 언급했듯이 6:31 - 7:37에 포함되어 있는 7:1 - 23과 평행을 이루는 부분을 8:1 - 30에 서도 만들기 위하여 마가가 이곳에 본사건(11 - 13절)을 하나의 독립된 부분으로 기록 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7:1 - 23과 본사건은 모두 바리새인과 예수와의 충돌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본 사건의 주제는 하늘의 표징에 대한 것이다. 이와 같은 형태의 논쟁이 복음서에서 여러 곳 나타나고 있다(마12:38 - 42;16:1 - 4;눅11:29 - 32).
==============8:14
떡 가져 오기를 잊었으매 - 여기서 말하고 있는 떡이 어디에 필요한 떡인지 또는 어디에 있는 떡을 가져오지 않았는지 불분명하다. 그러나 본문을 1 - 10절의 급식 기적과 연결시켜 이해한다면 4, 000명을 먹이고 남은 떡을 말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떡은 예수와 그의 제자들의 활동에 필요한 식사였을 것이다.
==============8:15
경계하여 가라사대 - 여기서 경계하여 란 미완료 중간태를 취하고 있어, 예수께서 몇 번이고 계속해서 지시하시고 당부하셨음을 보여 주고 있다.
==============8:16
이는. . . 없음이로다 - 헬라어 원문상으로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호티 (왜냐하면)가 포함되어 있는데 이는 제자들의 말을 직접 인용문으로 전달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이를 그대로 옮기면, 이는 우리에게 떡이 없기 때문에 하시는 말씀이다 . 가된다. 그리고 이를 보다 자연스럽게 옮기면, 하지만우리에게는 떡이 없는걸 로 된다.
=============8:17
의논하느냐 - 평행구인 마16:8에서는 서로 라는 말을 추가 함으로서, 본절의 의미를 더욱 명확히 드러 내었다. 즉 제자들은 근심되거나 의혹스렁ㄴ 문제에 봉착하여 먼저 조님께 진실하게 의뢰하기 보다는 그들끼리 왈가왈부함으로써 해결의 실마리를 놓쳐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형제들끼리의 교제가 신앙생활에 있어 필수적이긴 하지만, 자칫하면 서로를 비신앙적인 방향으로 흐지부지 하게 끌고 가는 합리화의 도구로, 전락될 우려가 있다. 따라서 후자의경우에 직면했을 때에, 우리는 혼자서라도 과감히 진리를 위해 설 수 있는 용기와 지혜를 갖추어야 할 것이다(잠4:27).
=============8:18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마태의 평행 본문에는 없는 말인데 이 구절은 4:12 에서 군중들을 향해 했던 말과 비슷하다. 아마도 이 구절은 사6:9, 10을 인용하여 책망한 것으로 보인다. 이 택망은 17절의 책망보다 더 강도 있게 들리는데 제자들에게만 내리는 책망이기 보다는 미련하고 돌이킬줄 모르는 백성과 하나님의 뜻을 배반하기를 일삼는 유대 백성들을 향한 심판적 탄식으로 들린다. 아마도 예수는 제자들을 나무라면서 실은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탄식적인 책망을 하였을 것이다.
==============8:19, 20
몇바구니. . . 몇 광주리를 거두었더냐 - 예수는 격한 책망과 더불어 제자들에게 질문을 통해 그들의 깨닫지 못함에 대한 안타까운 심정을 내비치셨으며, 또 그들에게 바른 개달음을 주시기 원하셨다. 예수를 따르는 것은 육적인 해방과 함께 7광주리, 또는 12광주리의 떡만큼이나 넉넉한 영적 풍요함을 준다는 암시적인 메시지를 제공하고 있다.
==============8:21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 여기서 예수가 제자들에게 되묻는 말로 이야기의 끝을 장식하고 있는데(제자들이 깨달았는지 못깨달았는지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이 없다)평행 본문인 마16:11, 12에서는 예수의 반문이 더 친절하게 묘사되고 있다. 즉 제자들에게 깨닫지 못하느냐고 반문한 후 자신의 이야기가 단순히 누룩에 관한 것이 아니라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에 관한 것임을 밝히면서 급식 기적과 15절의 교훈을 연결 시키고 있다.
==============8:22 - 26
벳세다에서 소경을 치우하신 본 사건은 다른 복음서에서는 소개 되지 않은 마가만의 이야기인데 내용 전개가 7:31 - 37과 비슷한 점이 많다. 즉 환자의 환부에 침을 바른다거나 제자들에 대한 언급이 없는점, 그리고 은밀한 곳에서 치유하는 모습이 그렇다.
그래서 이 두 이야기는 같이 전해져온 이야기라고 보면서 오히려 이 본문이 7:31 - 37보다 앞선 이야기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본문의 위치가 정확히 어딘지는 알 수 없다.
==============8:27
가이샤랴 빌립보 - 이곳은 갈릴리 호수 북방에있는 헤르몬산 기슭에 위치하여 요단강의 수원지가 있는 경치 좋고 비옥한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8:28
세례요한. . . 선지자 중의 하나 - 제자들이 파악한 여론을 통해 대중들은 예수에 대해서 다양하면서도 신화적 인물로 상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미 예수를 세례 요한으로 언급하고 있음을6:14에서 헤롯의 입을 통해 밝혔고, 뿐만 아니라 예수를 엘리야나 선지자 또는 옛 선지자 중의 하나와 같다는 평을6:15에서 대중들의 여론으로 밝힌 바 있다(6:14, 15주석 참조).
===============8:29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 예수께서 지금껏 던지신 질문들은 바로 본문의 이 질문에 귀착되고 있다. 즉 예수는 비록 당신을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은 차치하고서라도 당신과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믿을만한 제자들은 과연 당신을 누구라 생각하고 믿고 있느냐는 것을 묻고 싶으셨던 것이다.
==============8:30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 여기서 예수는 베드로의 대답에 대해 옳다, 그르다 하는 일체의 반응 없이 늘 하던 것처럼 침묵을 지시 하고 있다. 예수의 침묵 명령은 아직 자신의 신분과 목적을 공개적으로 노출시킬 시기가 아님을 말하면서 한 쪽으로는 간접적인 암시를 통해 자신의 신분을 나타낸다고 볼 수있다.
==============8:31
본절은 본서 가운데 유일하게 메시야적 비밀 이 공개 되고 있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사실 예수께서는 당시의 메시야임을 좀처럼 밝히려 하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메시야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고난. 죽음, 버림받음등의 수모를 감수해야 하는데, 당시 유대인들이 고대 하던 메시야관은 그것에서 완전히 벗어났기 때문이다. 즉 당시 유대인들은 고난 받는 메시야상을 제쳐놓고 오직 영광의 메시야상만을 고대해 왔기 때문에 만약 예수가 자신의 메시야성을 공개 하게 된다면 분명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메시야적 사역을 성취하는데 방해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8:32
드러내놓고 이말씀을 하시니 - 여기서 드러내놓고 라는 말은 파르레시아 인데 숨김없이 . 명백하게 라는 뜻을 갖고 있으며 자유롭게 말하는 언론의 자유라는 의미도 있다.
===============8:33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 마태는 예수께서 베드로에게로 돌아서신 것만을 언급하는데 비해(마16:23)마가는 베드로 이외의 제자들까지를 향해 서신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즉 마가는 예수께서 꾸짖으시고자 하신 대상을 베드로 한 사람에게만 국한시키지 않고 모든 제자들에게도 주의를 환기시키고 계심을 묘사하고 있다.
===============8: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 27절에서는 길가는 중에 제자들에게 말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제자들과 무리에게로 그 대상이 확장되고 있다. 따라서 그 대상은 12제자들에게만 국한된것이 아니라 예수를 따르기로 결심한 모든 신자들에게로 확장 되는 것이다.
===============8:35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 역설의 극치를 아루는 이문장은 왜냐하면 이라는 말로 시작되고 있는데 34절의 선언을 설명하기 위한것으로 보인다. 즉 자기 부인과 고난과 죽음을 요청한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다.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고 자기 집착이나 이기심에차 자기 존제 보호에철저히 집착해 있다면 궁극적 측면에서 그는 영원한 생명에서 멀어져 있다는 뜻에서 자기 목숨을 살리려하면 잃게 될것이라고 경고하는 것이다.
===============8:3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 여기서는 문장이 반문하는 형태로서 격언적인 어투인데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지거나 당연한 결론을 이끌어내는 형태의 질문을 통해 34, 35절에서 언급한 내용을 이해시키고자 한다.
===============8:37
무엇을 주고 제목숨을 바꾸겠느냐 - 이 말은 단순하게 생각하면 앞절의 결론구, 즉 이 세상에서 생명과 맞바꿀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자명한 대답을 요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목숨과 맞바꿀만한 것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대답해 보라는 질문으로 이해 할 구 있다. 그 디답은 35절에서 이미 언급된 것이기 때문에 자명해진다. 즉 참으로 목숨과 맞 바꿀 수 있는 것은 예수 와 복음 이다. 따라서 예수의 가르침과 질문의 내용은 죽지 않고 사는 길에 대한것이 아니라 참된 삶을 위한 참된 죽음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와 복음을 위해 죽을 수 있는 용기를 촉구하는 것 이다. 결국 예수를 따르는 제자가 되기 위해서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목숨까지 내어 놓을 수 있는 결단을 촉구 하고 있는 것이다(마1:38; 눅9:23).
================8:38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 - 예수는 자신의 입장을 결정적으로 밝히면서 이 시대를 음란하고 죄많은 세대로 규정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음란과 죄는 예수와 복음을 부인하고 부끄러워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를 모독하고 교회를 업신여기는 세대를 말한다.
이 본문의 핵심은 33 - 37에서 언급한 제자됨과 그리스도인됨을 위한 예수의 요구의 필연성과 정당성을 종말에 임할 심판묘사로 명백하게 밝히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같은 희망찬 종말 언급을 통해 박해받는 제자들과 추종자 곧 그리스도인들에게 죽음을 각오한 용기와 믿음으로써(요16:33)예수 자신의 길을 따라오라고 촉구하는 것이다.
앞장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갈릴리 전도 후기에 유대교 지도자들의 격렬한 핍박을 받고 난 후 갈릴리를 떠나 이방 지역으로 가셔서 사역하신 사실을 보았다. 이제 본장에서 예수께서 갈릴리 지역으로 돌아와 잠깐 사역하다가 다시 갈릴리로 떠나신 일을 전후로해서 발생한 사건들이 수록되어 있다. 본장을 상고(詳考)함에 있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특징에 유념해야 할 것이다.
(1) 문맥상의 특징. 본장의 사건들은 예수의 공생애를 결산하는 중요한 시기에 발생하였다. 특히 베드로의 신앙 고백에 이은 예수의 수난 예고는 바야흐로 예수의 공생애의 마감 시점이 박두하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즉, 이 수난 예고는 수난받는 종으로서의 사명을 완수할 절정의 순간에 가까왔음을 알리는 종의 공개적 자기 계시인 것이다. 또한 수난 예고와 함께 부활을 예고하신 것이나 다음 장에 나타나는 변화산 사건 등은 주께서 수난받으신 후에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을 회복할 것이라는 벅찬 소망을 시사한다. 한편 본장을 기점으로 하여 대적들의 핍박은 더욱 가속화되어가고 예수의 사역 또한 열 두 제자들을 훈련시키는 일에 더욱 집중된다.
(2) 구성상의 특징. 본장의 1절부터 26절까지의 내용과 6:35-7:36의 내용은 구성상 유사한 내용이 반복되는 형식을 보여 준다. 6:35-44의 오병이어(五餠二漁)의 이적과 1-9절의 칠병이어(七餠二漁)의 이적이 유사하며, 6:45-56과 10절은 예수 일행이 바다를 지나 건너편에 이르는 내용이다. 7:1-23과 11-13절은 모두 예수와 유대교 지도자들과의 충돌을 다루는 기사이며, 7:24-30과 14-21절은 구체적 내용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지만 둘 다 떡에 관한 대화를 소개한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그리고 7:31-36과 22-26절은 예수의 이적적 치유 권능을 소개하고 있다.
이처럼 마가가 유사한 내용을 반복적으로 수록한 것은 나름대로의 독특한 의도에서였다. 그 의도란, 제자들의 영적 깨달음을 강조하고자 한 것이었다. 즉, 27-38절에 수록된 바와 같은 메시야적 자기 공개를 앞두고 제자들의 믿음을 강화시키기 위해 예수께서 탁월한 이적들을 거듭 행하셨음을, 마가가 강조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의도와는 달리 제자들의 관심은 여전히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보다는 이 땅의 현실에 있었고, 영적 양식보다는 육식의 양식에 있었다(14-21절;6:52).
(3) 내용상의 특징. 예수의 공생애 사역의 결산기에 일어난 사건들을 기록한 본장의 내용상의 특징은 당신의 신분을 드러내심과 아울러, 메시야 사역의 궁극적 목적을 드러내시는 것이다.
(가) 본장에는 본서 전체에 걸쳐 부각되는 여러 주제들이 집약되어 있다. 먼저, 메시야의 자기 계시(self-revelation)란 측면에서 살펴보면, 본장은 메시야 사역의 본질과 메시야의 신분이 확연히 계시되어 있다는 점에서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앞에서 무수하게 시행된 예수의 이적적 권능들은 한결같이 메시야의 신성을 증거하는 것이긴 하였지만, 그것은 본장에서 드러난 공개적 자기 계시를 위한 준비 단계였다는 점 또한 간과될 수 없다. 예수는 이전의 여러 이적적 권능들을 결산하는 의미에서 칠병이어로 사천명을 먹이는 이적과(1-10절) 소경의 눈을 뜨게 하는 이적을 베푸셨고, 이 이적들은 베드로의 신앙 고백을 유도하는 기폭제가 되었으며(27-29절), 나아가 예수는 제자들조차 미처 깨닫지 못하였던 종의 수난을 예고하신 것이다(31절).
(나) 본장에서도 대적들의 핍박과 예수의 복음이 교차적으로 서술되어 있는데, 이러한 교차 서술은 본서 전체에 걸쳐 나타나는 주요 특징 중 하나이다. 즉 본장의 내용은 네 단락으로 구분되며, 그 중 첫째(1-10절)와 세째(22-26절) 단락은 예수의 이적적 권능을 소개하며, 그 사이에 위치한 둘째 단락(11-21절)에는 예수와 바리새인들 간의 충돌이 묘사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네째 단락(27-38절)은 대적들의 핍박이 가속시하시는 내용이 주를 이루며, 9:1에까지 이어진다.
예수는 영원 전부터 약정된 계획에 따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최선의 순종을 이미 장래사를 환히 내다보시는 예수께서는 단지 하나님의 정해진 시기에 순응해 가실 뿐이었다(마 8:29;26:28).
1. 칠병이어의 이적(8:1-10)
떡 일곱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사천 명을 먹이신 본 이적은 마 15:32-38에도 수록되어 있다. 오병이어의 이적은 사복음서에 모두 기재되었음에 반해(6:30-44;마 14:13-21;눅 9:10-17;요 6:1-14), 칠병이어의 이적은 마태와 마가만 기록하였다. 특히 마가는 타복음서에 비해 매우 간략하며 요약적인 서술 방식을 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방인 독자들을 의식하여 이 기사를 빠뜨리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혹자는 본문을 6:30-46의 오병이어의 이적과 동일한 사건으로 단정하지만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충분히 반박될 수 있다. 첫째로, 1절에 나타나는 헬라어 '팔린'(* )은 '또다시'라는 뜻으로 이 사건이 앞의 것과 별개임을 가리킨다. 둘째로, 예수께서 친히 두번 무리를 먹이신 사실을 상기시키셨다(19, 20절). 세째로, 구전(口傳)의 특성상 동일한 사건이 후에 상이한 것으로 옮겨지기 보다는 오히려 상이한 사건이 후에 동일한 사건처럼 묘사되는 경향이 더 많다. 네째로, 두 본문을 비교해 보면 세부 사항에 있어 여러 차이점들이 발견된다. 이에 관해서는 마태복음 평행 부분의 주해에서 별도의 도표를 첨부하였으니 참조하기 바란다.
요컨대, 본 이적은 오병이어의 이적과 더불어 메시야의 창조 권능을 보여 주는 결정적인 이적이다.
* 칠병이어의 이적에서 얻는 영적 교훈. 물고기 두 마리와 떡 일곱 개로 4,000명을 먹이신 이 초자연적 역사를 통해 다음의 교훈들을 얻을 수 있다.
(1) 이방인들의 구주이심을 나타내심. 앞에서도 잠깐 언급하였듯이 본문의 이적을 체험한 무리들은 대개가 이방인들이었다. 이는 오병이어의 이적이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하여 베풀어진 사실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즉, 예수께서는 유대인들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을 위해서도 당신의 몸을 생명의 떡으로 내어 놓으신 것이다(눅 2:32). 이처럼 복음의 우주적 성격은 마가가 부각시키고자 노력한 주제들 가운데 하나이다(3:10;16:15;마 24:14;28:19;눅 24:47;계 14:6).
(2) 육신의 굶주림을 도외시하지 않으심을 보여 준다. 예수의 1차적 관심은 물론 무리들이 영적으로 새로와지게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예수는 육신의 떡에만 연연해 하는 무리들과(요 6:26) 제자들을(16절) 책망하셨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저들은 육신적 고통을 외면하신 것은 아니다. 예수의 사랑과 관심은 전인적(全人的) 성격을 띠고 있었기 때문에 굶주림이나 병고에 시달리는 자들을 만나면 먼저 그들의 당면 문제부터 해결해 주시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나님이 비를 선인에게나 악인에게 똑같이 내려 주시듯이(마 5:45) 예수의 사랑도 본질상 범인류애적이었다(말 2:10;행 17:26). 원수마저 사랑해야 할 것을 가르치신 것 또한 이렇듯 크고 넓으신 주의 긍휼에 비추어 이해될 수 있다(마 5:44).
(3)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이 암시되어 있다. 약간의 무리가 있긴 하지만, 2절의 '사흘'을 예수께서 무덤 속에 사흘 동안 장사되셨던 사실과 연관시켜 볼 수도 있다. 즉, 이는 죽은 지 사흘 만에 무덤을 깨치고 부활하신 예수께서 친히 생명의 떡이 되사 성도들의 갈급하고 핍절한 영혼을 풍성히 채워주신 사실을 암시하는 것이다(요 6:35). 자연인의 눈으로는 칠병이어로 사천명을 먹이고 남게하신 이 위대한 이적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듯이, 죽으신 주님이 사흘 만에 부활하신 사실이나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의 공효(功效)가 모든 성도들에게 미친다는 사실은 오직 믿음으로써만 납득할 수 있는 신령한 비밀이다.
(4) 그리스도께는 불가능이 있을 수 없음을 증거한다. 얼마 전에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시는 이적을 엄연히 목격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또다시 불신을 드러 내었다. 이는 인생의 내면 깊숙히 자리잡은 뿌리깊은 완고성을 여실히 보여 주는 실례라 하겠다. 자연 법칙의 지배를 받는 인생들로서 제자들이 제기한 반문(4절)은 그 자체로서는 합리적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아버지께서 모든 충만으로 예수안에 거하게'하신 사실을 깨닫는 일에 너무도 아둔하였다(골 1:19). 예수는 하늘과 땅에 속한 모든 권세를 소유하신 만유의 주권자이며(마 28:18),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실 수 있는 하나님이시다(롬 4:17). 예수께서는 공생애 기간 동안 믿음이 없는 연약하고 완악한 제자들을 누차 나무라셨고(마 17:17;눅 24:38;요 11:40) 당신의 권능을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으리라고 확증하셨다(9:23;눅 1:37). 그러므로 성도는 자신의 보잘 것 없는 현 처지를 보고 좌절하거나 이 세상의 사악한 흐름에 지레 동화(assimiliation)되어 갈 것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계셔서 이적적 권능으로 역사하시는 그리스도를 전폭적으로 믿고 의지해야 할 것이다.
2. 적대 세력에 대한 경계(8:11-21)
본문의 구체적 세부 내용을 살펴보면, 독립되는 두 단편 기사가(11-13, 14-21절) 별다른 연관성 없이 단지 자연스러운 사건의 추이에 따라 연결되어 있는 듯이 생각되기도 한다. 하지만 좀더 거시적으로 전후의 문맥을 염두에 두고 보면, 본문의 두 기사는 메시야의 자기 공개를 앞둔 당시의 상황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긴밀히 연관된다. 따라서 우리는, 본문의 세부 내용인 표적을 구한 이유와 누룩에 비유될 두 세력에 관해 살펴보기 전에 본문의 문맥상의 의미를 먼저 상고하기로 하자.
(1) 문맥상의 의미. 본문이 이면적으로는 바로 앞 단락의 칠병이어 사건과 연결되며 아울러 예수의 자기 공개의 영적 배경을 보여 준다는 사실에 관해서는 마 16:1-12주해에서 상세히 다루었으므로 참조하기 바란다.
예수께서는 자기 공개를 앞두고 제자들에게 대적들의 핍박과 위협을 만나더라도 낙심하지 말고 꿋꿋이 메시야 되신 당신만을 믿으라는 의도에서 누룩에 빗대어 말씀하셨다. 오병이어의 이적을 위시한 앞의 여러 이적들도 바로 그러한 의도에서 베풀어진 것이다. 하지만 정작 제자들이 나타낸 반응은 그들의 영적 무지를 폭로시키는 것이었을 뿐이다. 즉, 그들의 주요 관심사는 예수의 이적에 담긴 깊은 의미보다는 이적 그 자체에 있었고, 신령한 영적 양식보다는 눈 앞의 영적 양식에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제자들의 영적 무지는 예수를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고백하고서 곧 이어 예수의 수난을 만류하려고 했던 베드로의 모습에서도 잘 나타난다(32절).
(2) 표적을 구한 이유. 본문의 바리새인들이 표적을 구한 것은 그 표적을 보고 예수를 메시야로 인정하기 위함이 아니라 어떻게든 예수의 무능을 폭로시켜 그를 사기꾼으로 몰아붙이기 위함이었다. 이 무렵은 예수의 공생애 후기로서, 그들로 이미 예수의 수많은 권능들을 목격하거나 들었음에 분명하다. 따라서 다시 표적을 구한 것은 예수의 이전의 이적적 권능들을 모두 무시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심지어 그들은 예수의 이적을 사단의 힘을 빌은 것이라고까지 여겼다(3:22). 물론 초대 교회의 전도자들을 통해 놀라운 이적들이 많이 일어났던 것처럼(행 3:1-10;20:7-12), 표적이 불신자들을 믿음에로 불러 들이는 적으로 예수와 그 복음을 대적하려는 자들은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할' 것이다(눅 16:31).
(3) 누룩에 비유된 두 세력의 의미. 성경에서 누룩은 급속한 팽창력을 나타내기 위한 비유적 표현으로 사용되었으며, 천국의 확장(마 13:33;눅 13:21) 및 악의 침투력(고전 5:6)등과 같이 선이나 악, 양자 모두를 비유하는 말이다. 여기서는 물론 죄악된 세력의 급속한 팽창과 그 악영향을 일컫는다.
(가) 바리새인들의 누룩은 눅 12:1에서 '외식'이라는 말로 단정적으로 표현되었다. 이는 겉으로는 하나님께 열심인 체하며 경건과 선행을 과시해 보이나 속으로는 진리와 정반대는 삶을 사는 가증스러운 태도를 지칭하며 위선, 형식주의, 권위주의 등으로도 표현될 수 있다(사 58:2;딤후 3:5;딛 1:16). 이러한 외식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속으로 곪은 상처라는 점에서 더욱 심각하다.
(나) 헤롯의 누룩은 1차적으로는 로마 제국과 결탁하여 진리를 핍박했던 당시 헤롯의 지지자들을 가리키며, 거시적으로는 주님 오시는 그 날까지 세상에 창궐(猖獗)해 있을 거대한 세속의 물결 전체를 지칭한다.
요컨대, 종교적 열심가인 체하는 위선자들과 속권(俗權)과 결탁하는 세속주의자들은 오늘날 교회에서도 큰 도전 세력들 중의 하나이다.
3. 소경을 치유하심(8:22-26)
예수는 공생애 기간 동안 수많은 소경들을 고치셨지만(마 9:27-31;요 9:1-41), 본서에만 기록된 이 기사는 예수의 자기 공개 직전에 시행된 치유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 치유 기사에서 우리가 주목해 보아야 할 사항은 다음 두 가지이다.
(1) 본치유 사건의 의의. 이점은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는 바, 그것은 시기적인 의미와 사건 자체가 주는 영적 의미이다.
(가) 메시야의 자기 증거. 본문이 전후 내용의 구성상 7:31-36과 짝을 이루는 반복적 서술 부분이라는 사실은 본장 강해의 (2)항에서 언급하였다. 이 두 부분은 구성상으로뿐만 아니라 내용상의 의의에 있어서도 공통점을 보인다. 즉, 양자 모두는 사 29:18의 예언이 성취된 사실을 보여 주는 바, 예수께서 구약에 예언된 바로 그 메시야이심을 증거하는 것이다. 특히 이 두 이적은 메시야의 자기 계시를 바로 앞두고 행해졌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심장하다.
(나) 영적 개안(開眼)에 대한 암시. 이 이야기는 제자들의 믿음의 눈이 열리는 사건을 예시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제자들은 예수의 공생애 초기부터 예수와 더불어 늘 함께 지냈음에도 불구하고 영적인 측면에서는 여전히 소경이나 다름없었다. 따라서 예수는 당신의 이적적 권능으로 소경의 눈을 뜨게 해주셨듯이, 초자연적 은혜로써 제자들의 영안을 밝혀 줄 것을 암시하고 계신 것이다. 여기서 암시된 바와 같이, 곧 이어 행해지게 될 베드로의 놀라운 신앙 고백(29절)은 베드로가 남보다 지혜로와서 연구해낸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분명코 하나님의 깨닫게 해주시는 주권적 은혜에 힘입은 것이었다. 물론 베드로를 위시한 제자들의 영적 깨달음은 심지어 신앙 고백이 있은 그 당시에도 매우 불완전하였으며, 훗날 갖가지 시행 착오를 거치고 마침내 오순절 성령 강림을 체험한 연후에야 비로소 환히 밝아지게 되었다.
(2) 치유 방법상의 특징. 7:31-36에서는 예수의 치유 효력이 즉시로 완전하게 나타났음에 비해, 여기서는 그 효력이 두 단계를 거쳐 나타났다(22-24절과 25절). 이렇듯 주께서 소경의 눈을 점진적으로 치유해 주신 이유에 대해 마가는 아무런 설명도 덧붙이지 않지만 우리는 대략 다음과 같이 추측해 볼 수 있다.
(가) 예수의 주권적 의지를 보여 줌. 단 한번에 소경의 눈을 밝아지게 하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 7:31-36의 경우에서와는 다른 방식을 택하신 것은 질병을 치유하는데 있어 어떤 방식이든지 채택하실 자유가 있음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나) 소경의 믿음의 상승 과정을 보여줌. 이 소경이 다른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예수 앞에 나아왔을 때만 하더라도 그는 예수의 치유 능력에 대한 반신반의(半信半疑) 하였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예수는 그의 믿음을 강화시켜 주기 위해 눈에 침을 뱉고 안수하시는 등 치료 활동이 진행되고 있음을 소경에게 친히 주지시키신 후 차츰 눈을 밝혀 주셨고,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소경의 마음속에는 확고한 믿음이 생겨나게 되었을 것이다.
(다) 구원에 이르는 단계를 암시함. 소경의 치유가 점진적으로 이루어진 데에는 상징적 진리가 내포되어 있다. 즉,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는 자는 영생을 확실히 보증받기는 하되 곧바로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자신의 모든 인생 행로를 설정하고 그 설정한 목표를 실행에 옮기는 장성한 수준에까지 이르는 데에는 대체로 많은 연단 과정이 요구된다.
4. 메시야의 자기 공개(8:27-38)
마가복음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때, 그 두번째 부분이 바로 8:27에서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베드로의 신앙 고백과(27-29절) 예수의 수난 예고를(30, 31절) 분수령으로 하여, 이후로부터는 열 두 제자를 훈련하시는 일에 예수의 사역이 집중되며, 또한 여러 차례에 걸쳐 당신의 수난이 예고된다. 사실상 여기서부터 십자가가 기다리는 예루살렘에로의 마지막 여행이 시작된다 하겠으며, 수난받는 종의 모습이 역력히 드러나게 된다. 그리고 34-38절에서도 명백히 언급되었듯이, 예수는 제자들이 당신의 사역의 본질적 측면을 이해하고 나아가 그들 또한 당신의 뒤를 좇아 헌신과 희생의 삶을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 '십자가의 도'를 교훈의 핵심으로 삼으셨다(10:42-45등). 하지만 '누가 크냐'(Who is the greatest, NIV)고 하는 논쟁(9:34)에서 드러나듯이, 제자들은 주님이 십자가에 못박히는 그 순간까지도 메시야의 수난을 이해하지 못했다.
한편 제자들이 어떻게 생각하건 간에 예수께서 짊어지실 십자가는 엄연하게 앞에 놓여 있었고, 예수의 수난 예고는 동시에 최후의 승리를 예고하고 있었다(8:38;9:1). 제자들을 위시한 당시 사람들의 무지, 대적들의 음모 그리고 십자가를 목전에 두고서도 예수는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였던 까닭에 궁극적인 최후의 승리를 단 한번도 의심해 보지 않으셨다. 과연 이러한 확신에 찬 예고대로,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신지 30년 후 기독교는 소아시아는 물론 이집트에까지 확장되었으며, 지중해를 건너 로마와 그리이스 전역을 파죽지세(破竹之勢)로 휩쓸었다. 기치와 창검을 앞세운 나폴레옹의 군대가 처음에는 온 세계를 정복할 듯이 보였지만 허무하고 무기력한 종국을 맞이해야 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예수는 모든 사람들의 눈에 초라하고 나약한 모습으로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는 듯이 보였지만 사랑의 복음으로써 오히려 온 세계를 정복하신 것이다.
본문은 27-29절(베드로의 신앙 고백), 30, 31절(예수의 첫번째 수난 예고) 및 32-38절(베드로의 만류와 예수의 교훈)등 세 개의 소단락으로 구분된다. 이 중 27-29절에 관해서는 마 16:13-20의 주제 강해 '베드로의 신앙 고백이 지니는 해석학적 관점', '베드로의 신앙 고백에 따른 약속'을 참조하고, 30, 31절에 관해서는 31절의 주제 강해 '예수의 수난 의식'과 마 16:21-28의 주제 강해 '예수의 수난 예고'를 참조하라. 그리고 32-38절에 관한 주해는 마 16:21-28의 주제 강해 '베드로의 만류와 예수의 책망' 및 '고난 동참과 상급 약속'을 보라.
* 메시야 사상의 전개.
'메시야'(Messiah)란 문자적으로 '기름부음 받은 자'(the Anointed)를 뜻한다 구약에서는 왕(삼상 12:3, 5;왕상 1:39), 제사장(레 4:3;6:22), 선지자(시 105:15) 등이 기름부음을 받아 신정(神政) 체제 하에서의 신성한 직무를 수행하도록 되어 있었다.
한편, 소위 메시야 사상이 유대 민족들 사이에 강렬하게 부각되기 시작한 것은 신구약 중간기라 할 수 있다. 당시 대다수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을 열강의 억압으로부터 구원해 줄 메시야를 간절히 대망하였던 것이다. 이렇듯 유일 무이한 메시야에 관한 개념이 이스라엘 역사상으로는 대개 다윗 시대에 배태(胚胎)되어 신구약 중간기 말엽에 강렬하게 발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소위 메시야 사상은 구약성경 전체에 걸쳐 이미 풍부하게 계시되어 있다. 이제 메시야 사상의 전개 과정을 편의상 네 단계로 나누어 고찰해 보기로 하자.
(1) 다윗시대 이전까지. 인생을 죄와 사망 가운데 빠뜨리는 사단을 멸하실 유일한 메시야는 창 3:15의 '여자의 후손'에 관한 예언에서 이미 계시되어 있다. 그리고 창 22:18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씨', 창 49:10의 '실로'(Shiloh) 혹은 민 24:17의 '한 별'(홀, a scepter) 등도 유일 무이한 메시야에 관한 예언들이다(마 1:22, 23, 주제 강해 '메시야 예언과 그 성취' 참조).
(2) 예루살렘 함락 이전까지. 왕정 시대에 접어들면서 사울 왕이 기름부음을 받고 초대(初代) 왕으로 즉위하였으나 신정 왕국의 통치자로서 부적합하였다(삼상 15:11). 따라서 하나님은 다윗을 택하사 당신의 통치를 대행케 하셨으며, 다윗과 언약을 맺으사 그 왕권을 영원토록 지속되지도 않았고 엄격한 의미에서 이상적(理想的)인 왕도 나타난 적이 없다. 따라서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성취된다는 절대 불변의 사실과 참 목자로서 하나님의 통치를 구현시킬 이상적인 왕이 출현한 적도 없고 또한 영원히 다윗 왕가가 존속되지도 않았다는 사실, 이 두 사실간의 갈등에서부터 메시야에 관한 종말론적 대망이 싹트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다윗의 후손으로 나실 영원한 왕이신 메시야, 곧 왕적 메시야에 관한 사상은 여러 예언서들 속에서 더욱 심화되고 새로와진 모습으로 전개되어 나갔다. 즉, 사 9:6에는 '평강의 왕'이신 메시야가 예언되었으며, 그 외에도 이새의 뿌리에서 난 '싹'(사 11:10), '의로운 가지'(렘 23:5), '목자'(겔 34:23), '인자'(단 7:13) 등으로 소개되었다. 특히 사 53:1-9는 고난받는 종으로서의 메시야를 계시하고 있다.
(3) 예수 당시까지. B. C. 586에 예루살렘이 함락된 이후로 이스라엘은 바벧로, 바사, 헬라, 로마 등으로 이어지는 열강들의 억압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이렇듯 암담한 민족적 상황 속에서 이스라엘에는 두 가지 대조적인 메시야 사상이 나타났다. 그 중 하나는 암담한 현실 자체를 일절(一切) 무시하고서 오직 영원한 천상의 왕국 곧 내세의 축복을 도래케 할 초월적 메시야에 관한 사상이다(참조, 위경 에녹 48:10;52:4). 그리고 또 하나는 이방 세력을 몰아내어 버리고 이 땅에 이상적 왕국을 건설할 지상적, 정치적 메시야에 관한 사상이다(참조, 위경 솔로몬의 시편 17:4 ff. ). 이 두 사상은 내용상 상반되는 면도 많지만, 신적 권능의 소유자 혹은 당당한 승리자로서의 메시야가 대망되었다는 사실에 있어서 만큼 일치하였다.
(4) 신약 속에서의 메시야. 예수 당시의 대다수 민중들은 그들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해방시켜줄 정치적 메시야를 대망하였다. 예수께서 행하시는 이적적 권능을 거듭 목격하자 그들은 예수를 왕으로 삼고자 했다. 이처럼 예수를 지상적, 정치적 메시야로 알고 추종한 것은 열 두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사역 초기부터 메시야적 권능을 밝히 드러내셨으되 스스로는 오히려 신분을 감추셨다(3:12). 그리고 공생애 후반에 이르러 당신의 메시야 신분을 공개하실 때에도 고난받는 종으로서의 사역을 강조하셨다(마 16:21). 예수께서 죄와 그로 말미암은 온갖 저주들로부터 인생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구세주시라고 하는 참된 메시야관은 당신의 죽으심과 부활 및 오순절(the day of Pentecost) 성령 강림 이후에야 비로서 확립되었다(갈 3:18).
한편 메시야되신 예수께서는 신약성경에서 '인자'(31절). '하나님의 아들'(마 16:16), '구주'(행 5:31), '주'(롬 10:9) 등으로 묘사되었다. 부언컨대, 예수는 구약의 선지자직과 제사장직 및 왕직을 모두 완수하신 분이라 하겠다(히 5:1-10).
* 예수의 수난 의식.
예수는 당신의 원래적 신분이 무엇이며(눅 2:49), 이 땅에 오시사 이루고자 하신 사명이 또한 무엇인지를 애초부터 알고 계셨다. 우리는 예수의 공생애를 다룬 사복음서의 기록을 통해, 예수의 자의식(self-consciousness) 속에는 늘 대속(代贖)의 십자가가 예견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크신 권능으로 병을 치유하고 바다의 풍랑을 잔잔케 할 때나 머리 둘 곳도 없어 빈 들에서 노숙하실 때에나 예수는 자기의 온 생애가 인류를 위한 봉사와 희생 그 자체로서 바쳐져 있음을 항상 유념하셨다. 따라서 예수는 당신의 이적만 믿고 환호하는 무리들의 영적 무지나 혹은 세상적 기득권 수호를 위해 당신을 경계하고 핍박했던 유대교 지도자들의 완악한 심령을 모두 한심하게 여기셨음에 분명하다. 결국 주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당신의 무력(無力) 때문도 아니고 유대교지도자들의 간계나 로마 군병들의 창검 때문도 아니었으며, 궁극적으로는 인류 대속을 온전히 성취하고자 하신 예수의 자발적 순종에 전적으로 기인한다(마 26:53, 54;히 5:8, 9).
메시야가 수난당해야 한다는 사상이 예수 당시에는 생소했고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예수께서 당신의 수난을 예고하실 때에는 제자들마저 당황해 하거나 오해하기다 다반사였다(마 16:22). 하지만 훗날 예수의 부활을 목격하고 오순절 성령 강림을 체험한 연후에는 제자들도 십자가 수난의 비의(秘義)를 깨닫게 되었다. 특히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고난의 신비를 깨닫고 놀라움과 위로를 받으며 그 고난에 참예하고자 했다(롬 8:17;고후 1:5;빌 3:10;골 1:24).
한편, 사복음서에는 예수의 수난 의식을 증거하는 구절들이 많이 나온다. 예컨대,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마 9:15;눅 5:35), '나는 받을 세례가 없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눅 12:50),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눅 13:33)는 등등의 말씀이나, 또 아들마저 죽임당했다는 포도원 농부의 비유라든가 (12:8;마 21:39;눅 20:15), 당신의 몸에 향유를 바른 여인을 두둔하며 하신 말씀(막 14:8) 등이 그러하다. 특히 공관 복음서에는 예수의 직접적인 수난 예고가 네 차례에 걸쳐 수록되어 있는 바 이를 비교해 보면 다음 도표와 같다.
+---------+-----------------------------+---------------------------------------------------------------------------------------------+
| 순서 | 성 구 | 내 용 |
+---------+-----------------------------+---------------------------------------------------------------------------------------------+
| |8:31;9:1; | 예수께서 유대 지도자들에 의해 고난을 받고 |
| 1 차 | 마 16:21-28; | 죽임 당한 후 사흘만에 부활하시리라는 예고 |
| |눅 9: 22-27 | 이다. 수난의 전반적 측면을 나타내며 이에 |
| | | 대한 제자들의 동참을 촉구하고 있다. |
+---------+-----------------------------+---------------------------------------------------------------------------------------------+
| 2 차 | 9:30-32;마 17:22,23;눅 9:4|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체포되어 죽임을 당하나|
| | 3-45 | 사흘만에 부활하신다는 내용 |
+---------+-------------------------------------------+-------------------------------------------------------------------------------+
| | |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를 이방인들에게 넘겨 |
| |10:32-34;마 20:17-19;눅 18| 채찍질과 침 뱉음을 당하시게 하고, 마침내 |
| 3 차 | :31-34 | 십자가에 못박는다는 내용으로서, 십자가 수 |
| | | 난을 가장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
+---------+-------------------------------------------+-------------------------------------------------------------------------------+
| | 마 26:1-5 | 인자(人子)가 유월절에 팔리우리라는 예언으 |
| | | 로서, 유다에게 배반당하실 것을 시사한다. |
+---------+-------------------------------------------+--------------------------------------------------------------------------------+
그 즈음에 - 문자적으로 그 날들 동안 으로서 본 사건을 앞의 귀먹고 어눌한 사람을 치유한 사건(7:31-37)과 연결 시킨 것이라 본다. 마가는 지금의 장소에관해 침묵하고 있으나, 대개 이곳이 갈릴리 호수 동편에 위치한 데가볼리로 인정되고 있다.
=============8:2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 . 먹을 것이 없도다 - 예수가 제자들을 부른 이유와 본 이적의 근본 동기를 말하고 있다. 즉 예수의 가르침을 듣기 위해 모여든 수많은 군중들을 불쌍히 생각하여 그 대책을 마련코자 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바로 인류를 지극히 사랑하셔서 당신의 몸을 버리기 까지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심정이다.
=============8:3
만일 내가 저희를 굶겨 집으로 보내면. . . 멀리서 온 사람도 있느니라 - 여기서 군중들을 향한 예수의 애정과 책임 의식이 구체적으로 나타나는데 마치 자상한 어머니처럼 군중들의 굶주림을 자기의 책임으로 여기며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8:4
이 광야에서 어디서 떡을 얻어 - 예수의 제안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은 무기력했으며 부정적인 것이었다. 이유는 5, 000명 급식 기적때의 금전 문제와는 달리 장소 문제 였다. 즉 집회 장소가 이 광야 곧 내륙 한가운데로서 인가와 마을로 부터 상당한 거리에 있는 외진 광야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자들은 그 많은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공급한다는 것은 실질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판단 하였으 것이다.
=============8:5
일곱이로소이다 - 제자들의 불가능한 대답을 듣고 예수는 희망적인 암시를 갖고 남아있는 음식에 대해 묻고 있다(6:38주석 참조). 여기서추측할 수 있는 것은 군중들이 오랫동안 굶주렸다면 음식이 남아있을리 없기 때문이다. 7이라는 수는 하나님의 수, 완전한 숫자로 보아 하나님으로 부터 주어지는 충만한 축복을 상징한다는 주장도 있다.
=============8:6
땅에 앉게 하시고. . . 축사 하시고 - 예수는 6:41에서와 같은 형식으로 급식 기적을 행한다. 그러나 6:39, 40과 많은 차이점이 나타나는데, 6:39에서는 무리들을 푸른 잔디위에 앉도록 했다고 언급하고 있으나 여기서는 그냥 땅에 앉게 했다고만 한다. 이는 분명 장고적 차이뿐 아니라 시간적 차이를 여실히 증명해 주는 것이라 본다.
=============8:7
작은 생선 두어 마리 - 여기서는 6:41과 달리 물고기 숫자가 불분명하게 언급되고 있는데 생선 두어마리 는 헬라어 잊뒤디아 올리가 를 번역한 것으로서 생선 몇마리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공동번역).
=============8:8
남은 조각 일곱 광주리 - 이처럼 주님께서는 필요한 바에 넘치도록 채워 주시는 분이시다(눅6:38). 왜냐 하면 하나님께서는 만우의 주로서(대상29:11)지극히 충만하신 분이실 뿐만 아니라 (요1:16)성도의 필요를 먼저 아시기 때문이다(마6:32).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환난과 궁핍에 처했을때, 하나님께 의뢰하여 해결책을 찾으려 하기 보다는 스스로 고민하고 좌절하는 등 매우 근시안적이고 즉각적인 반응으 보이는 경우가 있다.
=============8:9
사람은 약 사천 명이었더라 - 6:44에서는 남자가 오천명이었다고 언급하는데 여기서는 그러한 구분이 없고 사람이 4, 000명 이라고 말한다.
=============8:10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달마누다지방으로 - 6:45에서는 벳세다로 갔다고 언급하지만 여기서는 물통 이란 이름의 뜻을 지닌 달마누다 지방으로 갔음을 밝히고 있다.
==============8:11- 13
이 이야기의 발생 장소가 어디인지 알 길이 없고 앞에서 언급된 급식기적과도 아무런 관계가 없어 전혀 다른 사건의 이야기가 삽입된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8:1 - 10주석에서도 언급했듯이 6:31 - 7:37에 포함되어 있는 7:1 - 23과 평행을 이루는 부분을 8:1 - 30에 서도 만들기 위하여 마가가 이곳에 본사건(11 - 13절)을 하나의 독립된 부분으로 기록 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7:1 - 23과 본사건은 모두 바리새인과 예수와의 충돌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본 사건의 주제는 하늘의 표징에 대한 것이다. 이와 같은 형태의 논쟁이 복음서에서 여러 곳 나타나고 있다(마12:38 - 42;16:1 - 4;눅11:29 - 32).
==============8:14
떡 가져 오기를 잊었으매 - 여기서 말하고 있는 떡이 어디에 필요한 떡인지 또는 어디에 있는 떡을 가져오지 않았는지 불분명하다. 그러나 본문을 1 - 10절의 급식 기적과 연결시켜 이해한다면 4, 000명을 먹이고 남은 떡을 말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떡은 예수와 그의 제자들의 활동에 필요한 식사였을 것이다.
==============8:15
경계하여 가라사대 - 여기서 경계하여 란 미완료 중간태를 취하고 있어, 예수께서 몇 번이고 계속해서 지시하시고 당부하셨음을 보여 주고 있다.
==============8:16
이는. . . 없음이로다 - 헬라어 원문상으로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호티 (왜냐하면)가 포함되어 있는데 이는 제자들의 말을 직접 인용문으로 전달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이를 그대로 옮기면, 이는 우리에게 떡이 없기 때문에 하시는 말씀이다 . 가된다. 그리고 이를 보다 자연스럽게 옮기면, 하지만우리에게는 떡이 없는걸 로 된다.
=============8:17
의논하느냐 - 평행구인 마16:8에서는 서로 라는 말을 추가 함으로서, 본절의 의미를 더욱 명확히 드러 내었다. 즉 제자들은 근심되거나 의혹스렁ㄴ 문제에 봉착하여 먼저 조님께 진실하게 의뢰하기 보다는 그들끼리 왈가왈부함으로써 해결의 실마리를 놓쳐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형제들끼리의 교제가 신앙생활에 있어 필수적이긴 하지만, 자칫하면 서로를 비신앙적인 방향으로 흐지부지 하게 끌고 가는 합리화의 도구로, 전락될 우려가 있다. 따라서 후자의경우에 직면했을 때에, 우리는 혼자서라도 과감히 진리를 위해 설 수 있는 용기와 지혜를 갖추어야 할 것이다(잠4:27).
=============8:18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마태의 평행 본문에는 없는 말인데 이 구절은 4:12 에서 군중들을 향해 했던 말과 비슷하다. 아마도 이 구절은 사6:9, 10을 인용하여 책망한 것으로 보인다. 이 택망은 17절의 책망보다 더 강도 있게 들리는데 제자들에게만 내리는 책망이기 보다는 미련하고 돌이킬줄 모르는 백성과 하나님의 뜻을 배반하기를 일삼는 유대 백성들을 향한 심판적 탄식으로 들린다. 아마도 예수는 제자들을 나무라면서 실은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탄식적인 책망을 하였을 것이다.
==============8:19, 20
몇바구니. . . 몇 광주리를 거두었더냐 - 예수는 격한 책망과 더불어 제자들에게 질문을 통해 그들의 깨닫지 못함에 대한 안타까운 심정을 내비치셨으며, 또 그들에게 바른 개달음을 주시기 원하셨다. 예수를 따르는 것은 육적인 해방과 함께 7광주리, 또는 12광주리의 떡만큼이나 넉넉한 영적 풍요함을 준다는 암시적인 메시지를 제공하고 있다.
==============8:21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 여기서 예수가 제자들에게 되묻는 말로 이야기의 끝을 장식하고 있는데(제자들이 깨달았는지 못깨달았는지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이 없다)평행 본문인 마16:11, 12에서는 예수의 반문이 더 친절하게 묘사되고 있다. 즉 제자들에게 깨닫지 못하느냐고 반문한 후 자신의 이야기가 단순히 누룩에 관한 것이 아니라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에 관한 것임을 밝히면서 급식 기적과 15절의 교훈을 연결 시키고 있다.
==============8:22 - 26
벳세다에서 소경을 치우하신 본 사건은 다른 복음서에서는 소개 되지 않은 마가만의 이야기인데 내용 전개가 7:31 - 37과 비슷한 점이 많다. 즉 환자의 환부에 침을 바른다거나 제자들에 대한 언급이 없는점, 그리고 은밀한 곳에서 치유하는 모습이 그렇다.
그래서 이 두 이야기는 같이 전해져온 이야기라고 보면서 오히려 이 본문이 7:31 - 37보다 앞선 이야기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본문의 위치가 정확히 어딘지는 알 수 없다.
==============8:27
가이샤랴 빌립보 - 이곳은 갈릴리 호수 북방에있는 헤르몬산 기슭에 위치하여 요단강의 수원지가 있는 경치 좋고 비옥한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8:28
세례요한. . . 선지자 중의 하나 - 제자들이 파악한 여론을 통해 대중들은 예수에 대해서 다양하면서도 신화적 인물로 상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미 예수를 세례 요한으로 언급하고 있음을6:14에서 헤롯의 입을 통해 밝혔고, 뿐만 아니라 예수를 엘리야나 선지자 또는 옛 선지자 중의 하나와 같다는 평을6:15에서 대중들의 여론으로 밝힌 바 있다(6:14, 15주석 참조).
===============8:29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 예수께서 지금껏 던지신 질문들은 바로 본문의 이 질문에 귀착되고 있다. 즉 예수는 비록 당신을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은 차치하고서라도 당신과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믿을만한 제자들은 과연 당신을 누구라 생각하고 믿고 있느냐는 것을 묻고 싶으셨던 것이다.
==============8:30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 여기서 예수는 베드로의 대답에 대해 옳다, 그르다 하는 일체의 반응 없이 늘 하던 것처럼 침묵을 지시 하고 있다. 예수의 침묵 명령은 아직 자신의 신분과 목적을 공개적으로 노출시킬 시기가 아님을 말하면서 한 쪽으로는 간접적인 암시를 통해 자신의 신분을 나타낸다고 볼 수있다.
==============8:31
본절은 본서 가운데 유일하게 메시야적 비밀 이 공개 되고 있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사실 예수께서는 당시의 메시야임을 좀처럼 밝히려 하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메시야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고난. 죽음, 버림받음등의 수모를 감수해야 하는데, 당시 유대인들이 고대 하던 메시야관은 그것에서 완전히 벗어났기 때문이다. 즉 당시 유대인들은 고난 받는 메시야상을 제쳐놓고 오직 영광의 메시야상만을 고대해 왔기 때문에 만약 예수가 자신의 메시야성을 공개 하게 된다면 분명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메시야적 사역을 성취하는데 방해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8:32
드러내놓고 이말씀을 하시니 - 여기서 드러내놓고 라는 말은 파르레시아 인데 숨김없이 . 명백하게 라는 뜻을 갖고 있으며 자유롭게 말하는 언론의 자유라는 의미도 있다.
===============8:33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 마태는 예수께서 베드로에게로 돌아서신 것만을 언급하는데 비해(마16:23)마가는 베드로 이외의 제자들까지를 향해 서신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즉 마가는 예수께서 꾸짖으시고자 하신 대상을 베드로 한 사람에게만 국한시키지 않고 모든 제자들에게도 주의를 환기시키고 계심을 묘사하고 있다.
===============8: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 27절에서는 길가는 중에 제자들에게 말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제자들과 무리에게로 그 대상이 확장되고 있다. 따라서 그 대상은 12제자들에게만 국한된것이 아니라 예수를 따르기로 결심한 모든 신자들에게로 확장 되는 것이다.
===============8:35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 역설의 극치를 아루는 이문장은 왜냐하면 이라는 말로 시작되고 있는데 34절의 선언을 설명하기 위한것으로 보인다. 즉 자기 부인과 고난과 죽음을 요청한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다.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고 자기 집착이나 이기심에차 자기 존제 보호에철저히 집착해 있다면 궁극적 측면에서 그는 영원한 생명에서 멀어져 있다는 뜻에서 자기 목숨을 살리려하면 잃게 될것이라고 경고하는 것이다.
===============8:3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 여기서는 문장이 반문하는 형태로서 격언적인 어투인데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지거나 당연한 결론을 이끌어내는 형태의 질문을 통해 34, 35절에서 언급한 내용을 이해시키고자 한다.
===============8:37
무엇을 주고 제목숨을 바꾸겠느냐 - 이 말은 단순하게 생각하면 앞절의 결론구, 즉 이 세상에서 생명과 맞바꿀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자명한 대답을 요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목숨과 맞바꿀만한 것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대답해 보라는 질문으로 이해 할 구 있다. 그 디답은 35절에서 이미 언급된 것이기 때문에 자명해진다. 즉 참으로 목숨과 맞 바꿀 수 있는 것은 예수 와 복음 이다. 따라서 예수의 가르침과 질문의 내용은 죽지 않고 사는 길에 대한것이 아니라 참된 삶을 위한 참된 죽음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와 복음을 위해 죽을 수 있는 용기를 촉구하는 것 이다. 결국 예수를 따르는 제자가 되기 위해서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목숨까지 내어 놓을 수 있는 결단을 촉구 하고 있는 것이다(마1:38; 눅9:23).
================8:38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 - 예수는 자신의 입장을 결정적으로 밝히면서 이 시대를 음란하고 죄많은 세대로 규정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음란과 죄는 예수와 복음을 부인하고 부끄러워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를 모독하고 교회를 업신여기는 세대를 말한다.
이 본문의 핵심은 33 - 37에서 언급한 제자됨과 그리스도인됨을 위한 예수의 요구의 필연성과 정당성을 종말에 임할 심판묘사로 명백하게 밝히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같은 희망찬 종말 언급을 통해 박해받는 제자들과 추종자 곧 그리스도인들에게 죽음을 각오한 용기와 믿음으로써(요16:33)예수 자신의 길을 따라오라고 촉구하는 것이다.
앞장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갈릴리 전도 후기에 유대교 지도자들의 격렬한 핍박을 받고 난 후 갈릴리를 떠나 이방 지역으로 가셔서 사역하신 사실을 보았다. 이제 본장에서 예수께서 갈릴리 지역으로 돌아와 잠깐 사역하다가 다시 갈릴리로 떠나신 일을 전후로해서 발생한 사건들이 수록되어 있다. 본장을 상고(詳考)함에 있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특징에 유념해야 할 것이다.
(1) 문맥상의 특징. 본장의 사건들은 예수의 공생애를 결산하는 중요한 시기에 발생하였다. 특히 베드로의 신앙 고백에 이은 예수의 수난 예고는 바야흐로 예수의 공생애의 마감 시점이 박두하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즉, 이 수난 예고는 수난받는 종으로서의 사명을 완수할 절정의 순간에 가까왔음을 알리는 종의 공개적 자기 계시인 것이다. 또한 수난 예고와 함께 부활을 예고하신 것이나 다음 장에 나타나는 변화산 사건 등은 주께서 수난받으신 후에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을 회복할 것이라는 벅찬 소망을 시사한다. 한편 본장을 기점으로 하여 대적들의 핍박은 더욱 가속화되어가고 예수의 사역 또한 열 두 제자들을 훈련시키는 일에 더욱 집중된다.
(2) 구성상의 특징. 본장의 1절부터 26절까지의 내용과 6:35-7:36의 내용은 구성상 유사한 내용이 반복되는 형식을 보여 준다. 6:35-44의 오병이어(五餠二漁)의 이적과 1-9절의 칠병이어(七餠二漁)의 이적이 유사하며, 6:45-56과 10절은 예수 일행이 바다를 지나 건너편에 이르는 내용이다. 7:1-23과 11-13절은 모두 예수와 유대교 지도자들과의 충돌을 다루는 기사이며, 7:24-30과 14-21절은 구체적 내용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지만 둘 다 떡에 관한 대화를 소개한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그리고 7:31-36과 22-26절은 예수의 이적적 치유 권능을 소개하고 있다.
이처럼 마가가 유사한 내용을 반복적으로 수록한 것은 나름대로의 독특한 의도에서였다. 그 의도란, 제자들의 영적 깨달음을 강조하고자 한 것이었다. 즉, 27-38절에 수록된 바와 같은 메시야적 자기 공개를 앞두고 제자들의 믿음을 강화시키기 위해 예수께서 탁월한 이적들을 거듭 행하셨음을, 마가가 강조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의도와는 달리 제자들의 관심은 여전히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보다는 이 땅의 현실에 있었고, 영적 양식보다는 육식의 양식에 있었다(14-21절;6:52).
(3) 내용상의 특징. 예수의 공생애 사역의 결산기에 일어난 사건들을 기록한 본장의 내용상의 특징은 당신의 신분을 드러내심과 아울러, 메시야 사역의 궁극적 목적을 드러내시는 것이다.
(가) 본장에는 본서 전체에 걸쳐 부각되는 여러 주제들이 집약되어 있다. 먼저, 메시야의 자기 계시(self-revelation)란 측면에서 살펴보면, 본장은 메시야 사역의 본질과 메시야의 신분이 확연히 계시되어 있다는 점에서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앞에서 무수하게 시행된 예수의 이적적 권능들은 한결같이 메시야의 신성을 증거하는 것이긴 하였지만, 그것은 본장에서 드러난 공개적 자기 계시를 위한 준비 단계였다는 점 또한 간과될 수 없다. 예수는 이전의 여러 이적적 권능들을 결산하는 의미에서 칠병이어로 사천명을 먹이는 이적과(1-10절) 소경의 눈을 뜨게 하는 이적을 베푸셨고, 이 이적들은 베드로의 신앙 고백을 유도하는 기폭제가 되었으며(27-29절), 나아가 예수는 제자들조차 미처 깨닫지 못하였던 종의 수난을 예고하신 것이다(31절).
(나) 본장에서도 대적들의 핍박과 예수의 복음이 교차적으로 서술되어 있는데, 이러한 교차 서술은 본서 전체에 걸쳐 나타나는 주요 특징 중 하나이다. 즉 본장의 내용은 네 단락으로 구분되며, 그 중 첫째(1-10절)와 세째(22-26절) 단락은 예수의 이적적 권능을 소개하며, 그 사이에 위치한 둘째 단락(11-21절)에는 예수와 바리새인들 간의 충돌이 묘사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네째 단락(27-38절)은 대적들의 핍박이 가속시하시는 내용이 주를 이루며, 9:1에까지 이어진다.
예수는 영원 전부터 약정된 계획에 따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최선의 순종을 이미 장래사를 환히 내다보시는 예수께서는 단지 하나님의 정해진 시기에 순응해 가실 뿐이었다(마 8:29;26:28).
1. 칠병이어의 이적(8:1-10)
떡 일곱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사천 명을 먹이신 본 이적은 마 15:32-38에도 수록되어 있다. 오병이어의 이적은 사복음서에 모두 기재되었음에 반해(6:30-44;마 14:13-21;눅 9:10-17;요 6:1-14), 칠병이어의 이적은 마태와 마가만 기록하였다. 특히 마가는 타복음서에 비해 매우 간략하며 요약적인 서술 방식을 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방인 독자들을 의식하여 이 기사를 빠뜨리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혹자는 본문을 6:30-46의 오병이어의 이적과 동일한 사건으로 단정하지만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충분히 반박될 수 있다. 첫째로, 1절에 나타나는 헬라어 '팔린'(* )은 '또다시'라는 뜻으로 이 사건이 앞의 것과 별개임을 가리킨다. 둘째로, 예수께서 친히 두번 무리를 먹이신 사실을 상기시키셨다(19, 20절). 세째로, 구전(口傳)의 특성상 동일한 사건이 후에 상이한 것으로 옮겨지기 보다는 오히려 상이한 사건이 후에 동일한 사건처럼 묘사되는 경향이 더 많다. 네째로, 두 본문을 비교해 보면 세부 사항에 있어 여러 차이점들이 발견된다. 이에 관해서는 마태복음 평행 부분의 주해에서 별도의 도표를 첨부하였으니 참조하기 바란다.
요컨대, 본 이적은 오병이어의 이적과 더불어 메시야의 창조 권능을 보여 주는 결정적인 이적이다.
* 칠병이어의 이적에서 얻는 영적 교훈. 물고기 두 마리와 떡 일곱 개로 4,000명을 먹이신 이 초자연적 역사를 통해 다음의 교훈들을 얻을 수 있다.
(1) 이방인들의 구주이심을 나타내심. 앞에서도 잠깐 언급하였듯이 본문의 이적을 체험한 무리들은 대개가 이방인들이었다. 이는 오병이어의 이적이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하여 베풀어진 사실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즉, 예수께서는 유대인들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을 위해서도 당신의 몸을 생명의 떡으로 내어 놓으신 것이다(눅 2:32). 이처럼 복음의 우주적 성격은 마가가 부각시키고자 노력한 주제들 가운데 하나이다(3:10;16:15;마 24:14;28:19;눅 24:47;계 14:6).
(2) 육신의 굶주림을 도외시하지 않으심을 보여 준다. 예수의 1차적 관심은 물론 무리들이 영적으로 새로와지게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예수는 육신의 떡에만 연연해 하는 무리들과(요 6:26) 제자들을(16절) 책망하셨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저들은 육신적 고통을 외면하신 것은 아니다. 예수의 사랑과 관심은 전인적(全人的) 성격을 띠고 있었기 때문에 굶주림이나 병고에 시달리는 자들을 만나면 먼저 그들의 당면 문제부터 해결해 주시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나님이 비를 선인에게나 악인에게 똑같이 내려 주시듯이(마 5:45) 예수의 사랑도 본질상 범인류애적이었다(말 2:10;행 17:26). 원수마저 사랑해야 할 것을 가르치신 것 또한 이렇듯 크고 넓으신 주의 긍휼에 비추어 이해될 수 있다(마 5:44).
(3)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이 암시되어 있다. 약간의 무리가 있긴 하지만, 2절의 '사흘'을 예수께서 무덤 속에 사흘 동안 장사되셨던 사실과 연관시켜 볼 수도 있다. 즉, 이는 죽은 지 사흘 만에 무덤을 깨치고 부활하신 예수께서 친히 생명의 떡이 되사 성도들의 갈급하고 핍절한 영혼을 풍성히 채워주신 사실을 암시하는 것이다(요 6:35). 자연인의 눈으로는 칠병이어로 사천명을 먹이고 남게하신 이 위대한 이적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듯이, 죽으신 주님이 사흘 만에 부활하신 사실이나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의 공효(功效)가 모든 성도들에게 미친다는 사실은 오직 믿음으로써만 납득할 수 있는 신령한 비밀이다.
(4) 그리스도께는 불가능이 있을 수 없음을 증거한다. 얼마 전에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시는 이적을 엄연히 목격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또다시 불신을 드러 내었다. 이는 인생의 내면 깊숙히 자리잡은 뿌리깊은 완고성을 여실히 보여 주는 실례라 하겠다. 자연 법칙의 지배를 받는 인생들로서 제자들이 제기한 반문(4절)은 그 자체로서는 합리적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아버지께서 모든 충만으로 예수안에 거하게'하신 사실을 깨닫는 일에 너무도 아둔하였다(골 1:19). 예수는 하늘과 땅에 속한 모든 권세를 소유하신 만유의 주권자이며(마 28:18),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실 수 있는 하나님이시다(롬 4:17). 예수께서는 공생애 기간 동안 믿음이 없는 연약하고 완악한 제자들을 누차 나무라셨고(마 17:17;눅 24:38;요 11:40) 당신의 권능을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으리라고 확증하셨다(9:23;눅 1:37). 그러므로 성도는 자신의 보잘 것 없는 현 처지를 보고 좌절하거나 이 세상의 사악한 흐름에 지레 동화(assimiliation)되어 갈 것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계셔서 이적적 권능으로 역사하시는 그리스도를 전폭적으로 믿고 의지해야 할 것이다.
2. 적대 세력에 대한 경계(8:11-21)
본문의 구체적 세부 내용을 살펴보면, 독립되는 두 단편 기사가(11-13, 14-21절) 별다른 연관성 없이 단지 자연스러운 사건의 추이에 따라 연결되어 있는 듯이 생각되기도 한다. 하지만 좀더 거시적으로 전후의 문맥을 염두에 두고 보면, 본문의 두 기사는 메시야의 자기 공개를 앞둔 당시의 상황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긴밀히 연관된다. 따라서 우리는, 본문의 세부 내용인 표적을 구한 이유와 누룩에 비유될 두 세력에 관해 살펴보기 전에 본문의 문맥상의 의미를 먼저 상고하기로 하자.
(1) 문맥상의 의미. 본문이 이면적으로는 바로 앞 단락의 칠병이어 사건과 연결되며 아울러 예수의 자기 공개의 영적 배경을 보여 준다는 사실에 관해서는 마 16:1-12주해에서 상세히 다루었으므로 참조하기 바란다.
예수께서는 자기 공개를 앞두고 제자들에게 대적들의 핍박과 위협을 만나더라도 낙심하지 말고 꿋꿋이 메시야 되신 당신만을 믿으라는 의도에서 누룩에 빗대어 말씀하셨다. 오병이어의 이적을 위시한 앞의 여러 이적들도 바로 그러한 의도에서 베풀어진 것이다. 하지만 정작 제자들이 나타낸 반응은 그들의 영적 무지를 폭로시키는 것이었을 뿐이다. 즉, 그들의 주요 관심사는 예수의 이적에 담긴 깊은 의미보다는 이적 그 자체에 있었고, 신령한 영적 양식보다는 눈 앞의 영적 양식에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제자들의 영적 무지는 예수를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고백하고서 곧 이어 예수의 수난을 만류하려고 했던 베드로의 모습에서도 잘 나타난다(32절).
(2) 표적을 구한 이유. 본문의 바리새인들이 표적을 구한 것은 그 표적을 보고 예수를 메시야로 인정하기 위함이 아니라 어떻게든 예수의 무능을 폭로시켜 그를 사기꾼으로 몰아붙이기 위함이었다. 이 무렵은 예수의 공생애 후기로서, 그들로 이미 예수의 수많은 권능들을 목격하거나 들었음에 분명하다. 따라서 다시 표적을 구한 것은 예수의 이전의 이적적 권능들을 모두 무시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심지어 그들은 예수의 이적을 사단의 힘을 빌은 것이라고까지 여겼다(3:22). 물론 초대 교회의 전도자들을 통해 놀라운 이적들이 많이 일어났던 것처럼(행 3:1-10;20:7-12), 표적이 불신자들을 믿음에로 불러 들이는 적으로 예수와 그 복음을 대적하려는 자들은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할' 것이다(눅 16:31).
(3) 누룩에 비유된 두 세력의 의미. 성경에서 누룩은 급속한 팽창력을 나타내기 위한 비유적 표현으로 사용되었으며, 천국의 확장(마 13:33;눅 13:21) 및 악의 침투력(고전 5:6)등과 같이 선이나 악, 양자 모두를 비유하는 말이다. 여기서는 물론 죄악된 세력의 급속한 팽창과 그 악영향을 일컫는다.
(가) 바리새인들의 누룩은 눅 12:1에서 '외식'이라는 말로 단정적으로 표현되었다. 이는 겉으로는 하나님께 열심인 체하며 경건과 선행을 과시해 보이나 속으로는 진리와 정반대는 삶을 사는 가증스러운 태도를 지칭하며 위선, 형식주의, 권위주의 등으로도 표현될 수 있다(사 58:2;딤후 3:5;딛 1:16). 이러한 외식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속으로 곪은 상처라는 점에서 더욱 심각하다.
(나) 헤롯의 누룩은 1차적으로는 로마 제국과 결탁하여 진리를 핍박했던 당시 헤롯의 지지자들을 가리키며, 거시적으로는 주님 오시는 그 날까지 세상에 창궐(猖獗)해 있을 거대한 세속의 물결 전체를 지칭한다.
요컨대, 종교적 열심가인 체하는 위선자들과 속권(俗權)과 결탁하는 세속주의자들은 오늘날 교회에서도 큰 도전 세력들 중의 하나이다.
3. 소경을 치유하심(8:22-26)
예수는 공생애 기간 동안 수많은 소경들을 고치셨지만(마 9:27-31;요 9:1-41), 본서에만 기록된 이 기사는 예수의 자기 공개 직전에 시행된 치유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 치유 기사에서 우리가 주목해 보아야 할 사항은 다음 두 가지이다.
(1) 본치유 사건의 의의. 이점은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는 바, 그것은 시기적인 의미와 사건 자체가 주는 영적 의미이다.
(가) 메시야의 자기 증거. 본문이 전후 내용의 구성상 7:31-36과 짝을 이루는 반복적 서술 부분이라는 사실은 본장 강해의 (2)항에서 언급하였다. 이 두 부분은 구성상으로뿐만 아니라 내용상의 의의에 있어서도 공통점을 보인다. 즉, 양자 모두는 사 29:18의 예언이 성취된 사실을 보여 주는 바, 예수께서 구약에 예언된 바로 그 메시야이심을 증거하는 것이다. 특히 이 두 이적은 메시야의 자기 계시를 바로 앞두고 행해졌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심장하다.
(나) 영적 개안(開眼)에 대한 암시. 이 이야기는 제자들의 믿음의 눈이 열리는 사건을 예시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제자들은 예수의 공생애 초기부터 예수와 더불어 늘 함께 지냈음에도 불구하고 영적인 측면에서는 여전히 소경이나 다름없었다. 따라서 예수는 당신의 이적적 권능으로 소경의 눈을 뜨게 해주셨듯이, 초자연적 은혜로써 제자들의 영안을 밝혀 줄 것을 암시하고 계신 것이다. 여기서 암시된 바와 같이, 곧 이어 행해지게 될 베드로의 놀라운 신앙 고백(29절)은 베드로가 남보다 지혜로와서 연구해낸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분명코 하나님의 깨닫게 해주시는 주권적 은혜에 힘입은 것이었다. 물론 베드로를 위시한 제자들의 영적 깨달음은 심지어 신앙 고백이 있은 그 당시에도 매우 불완전하였으며, 훗날 갖가지 시행 착오를 거치고 마침내 오순절 성령 강림을 체험한 연후에야 비로소 환히 밝아지게 되었다.
(2) 치유 방법상의 특징. 7:31-36에서는 예수의 치유 효력이 즉시로 완전하게 나타났음에 비해, 여기서는 그 효력이 두 단계를 거쳐 나타났다(22-24절과 25절). 이렇듯 주께서 소경의 눈을 점진적으로 치유해 주신 이유에 대해 마가는 아무런 설명도 덧붙이지 않지만 우리는 대략 다음과 같이 추측해 볼 수 있다.
(가) 예수의 주권적 의지를 보여 줌. 단 한번에 소경의 눈을 밝아지게 하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 7:31-36의 경우에서와는 다른 방식을 택하신 것은 질병을 치유하는데 있어 어떤 방식이든지 채택하실 자유가 있음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나) 소경의 믿음의 상승 과정을 보여줌. 이 소경이 다른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예수 앞에 나아왔을 때만 하더라도 그는 예수의 치유 능력에 대한 반신반의(半信半疑) 하였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예수는 그의 믿음을 강화시켜 주기 위해 눈에 침을 뱉고 안수하시는 등 치료 활동이 진행되고 있음을 소경에게 친히 주지시키신 후 차츰 눈을 밝혀 주셨고,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소경의 마음속에는 확고한 믿음이 생겨나게 되었을 것이다.
(다) 구원에 이르는 단계를 암시함. 소경의 치유가 점진적으로 이루어진 데에는 상징적 진리가 내포되어 있다. 즉,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는 자는 영생을 확실히 보증받기는 하되 곧바로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자신의 모든 인생 행로를 설정하고 그 설정한 목표를 실행에 옮기는 장성한 수준에까지 이르는 데에는 대체로 많은 연단 과정이 요구된다.
4. 메시야의 자기 공개(8:27-38)
마가복음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때, 그 두번째 부분이 바로 8:27에서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베드로의 신앙 고백과(27-29절) 예수의 수난 예고를(30, 31절) 분수령으로 하여, 이후로부터는 열 두 제자를 훈련하시는 일에 예수의 사역이 집중되며, 또한 여러 차례에 걸쳐 당신의 수난이 예고된다. 사실상 여기서부터 십자가가 기다리는 예루살렘에로의 마지막 여행이 시작된다 하겠으며, 수난받는 종의 모습이 역력히 드러나게 된다. 그리고 34-38절에서도 명백히 언급되었듯이, 예수는 제자들이 당신의 사역의 본질적 측면을 이해하고 나아가 그들 또한 당신의 뒤를 좇아 헌신과 희생의 삶을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 '십자가의 도'를 교훈의 핵심으로 삼으셨다(10:42-45등). 하지만 '누가 크냐'(Who is the greatest, NIV)고 하는 논쟁(9:34)에서 드러나듯이, 제자들은 주님이 십자가에 못박히는 그 순간까지도 메시야의 수난을 이해하지 못했다.
한편 제자들이 어떻게 생각하건 간에 예수께서 짊어지실 십자가는 엄연하게 앞에 놓여 있었고, 예수의 수난 예고는 동시에 최후의 승리를 예고하고 있었다(8:38;9:1). 제자들을 위시한 당시 사람들의 무지, 대적들의 음모 그리고 십자가를 목전에 두고서도 예수는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였던 까닭에 궁극적인 최후의 승리를 단 한번도 의심해 보지 않으셨다. 과연 이러한 확신에 찬 예고대로,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신지 30년 후 기독교는 소아시아는 물론 이집트에까지 확장되었으며, 지중해를 건너 로마와 그리이스 전역을 파죽지세(破竹之勢)로 휩쓸었다. 기치와 창검을 앞세운 나폴레옹의 군대가 처음에는 온 세계를 정복할 듯이 보였지만 허무하고 무기력한 종국을 맞이해야 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예수는 모든 사람들의 눈에 초라하고 나약한 모습으로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는 듯이 보였지만 사랑의 복음으로써 오히려 온 세계를 정복하신 것이다.
본문은 27-29절(베드로의 신앙 고백), 30, 31절(예수의 첫번째 수난 예고) 및 32-38절(베드로의 만류와 예수의 교훈)등 세 개의 소단락으로 구분된다. 이 중 27-29절에 관해서는 마 16:13-20의 주제 강해 '베드로의 신앙 고백이 지니는 해석학적 관점', '베드로의 신앙 고백에 따른 약속'을 참조하고, 30, 31절에 관해서는 31절의 주제 강해 '예수의 수난 의식'과 마 16:21-28의 주제 강해 '예수의 수난 예고'를 참조하라. 그리고 32-38절에 관한 주해는 마 16:21-28의 주제 강해 '베드로의 만류와 예수의 책망' 및 '고난 동참과 상급 약속'을 보라.
* 메시야 사상의 전개.
'메시야'(Messiah)란 문자적으로 '기름부음 받은 자'(the Anointed)를 뜻한다 구약에서는 왕(삼상 12:3, 5;왕상 1:39), 제사장(레 4:3;6:22), 선지자(시 105:15) 등이 기름부음을 받아 신정(神政) 체제 하에서의 신성한 직무를 수행하도록 되어 있었다.
한편, 소위 메시야 사상이 유대 민족들 사이에 강렬하게 부각되기 시작한 것은 신구약 중간기라 할 수 있다. 당시 대다수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을 열강의 억압으로부터 구원해 줄 메시야를 간절히 대망하였던 것이다. 이렇듯 유일 무이한 메시야에 관한 개념이 이스라엘 역사상으로는 대개 다윗 시대에 배태(胚胎)되어 신구약 중간기 말엽에 강렬하게 발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소위 메시야 사상은 구약성경 전체에 걸쳐 이미 풍부하게 계시되어 있다. 이제 메시야 사상의 전개 과정을 편의상 네 단계로 나누어 고찰해 보기로 하자.
(1) 다윗시대 이전까지. 인생을 죄와 사망 가운데 빠뜨리는 사단을 멸하실 유일한 메시야는 창 3:15의 '여자의 후손'에 관한 예언에서 이미 계시되어 있다. 그리고 창 22:18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씨', 창 49:10의 '실로'(Shiloh) 혹은 민 24:17의 '한 별'(홀, a scepter) 등도 유일 무이한 메시야에 관한 예언들이다(마 1:22, 23, 주제 강해 '메시야 예언과 그 성취' 참조).
(2) 예루살렘 함락 이전까지. 왕정 시대에 접어들면서 사울 왕이 기름부음을 받고 초대(初代) 왕으로 즉위하였으나 신정 왕국의 통치자로서 부적합하였다(삼상 15:11). 따라서 하나님은 다윗을 택하사 당신의 통치를 대행케 하셨으며, 다윗과 언약을 맺으사 그 왕권을 영원토록 지속되지도 않았고 엄격한 의미에서 이상적(理想的)인 왕도 나타난 적이 없다. 따라서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성취된다는 절대 불변의 사실과 참 목자로서 하나님의 통치를 구현시킬 이상적인 왕이 출현한 적도 없고 또한 영원히 다윗 왕가가 존속되지도 않았다는 사실, 이 두 사실간의 갈등에서부터 메시야에 관한 종말론적 대망이 싹트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다윗의 후손으로 나실 영원한 왕이신 메시야, 곧 왕적 메시야에 관한 사상은 여러 예언서들 속에서 더욱 심화되고 새로와진 모습으로 전개되어 나갔다. 즉, 사 9:6에는 '평강의 왕'이신 메시야가 예언되었으며, 그 외에도 이새의 뿌리에서 난 '싹'(사 11:10), '의로운 가지'(렘 23:5), '목자'(겔 34:23), '인자'(단 7:13) 등으로 소개되었다. 특히 사 53:1-9는 고난받는 종으로서의 메시야를 계시하고 있다.
(3) 예수 당시까지. B. C. 586에 예루살렘이 함락된 이후로 이스라엘은 바벧로, 바사, 헬라, 로마 등으로 이어지는 열강들의 억압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이렇듯 암담한 민족적 상황 속에서 이스라엘에는 두 가지 대조적인 메시야 사상이 나타났다. 그 중 하나는 암담한 현실 자체를 일절(一切) 무시하고서 오직 영원한 천상의 왕국 곧 내세의 축복을 도래케 할 초월적 메시야에 관한 사상이다(참조, 위경 에녹 48:10;52:4). 그리고 또 하나는 이방 세력을 몰아내어 버리고 이 땅에 이상적 왕국을 건설할 지상적, 정치적 메시야에 관한 사상이다(참조, 위경 솔로몬의 시편 17:4 ff. ). 이 두 사상은 내용상 상반되는 면도 많지만, 신적 권능의 소유자 혹은 당당한 승리자로서의 메시야가 대망되었다는 사실에 있어서 만큼 일치하였다.
(4) 신약 속에서의 메시야. 예수 당시의 대다수 민중들은 그들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해방시켜줄 정치적 메시야를 대망하였다. 예수께서 행하시는 이적적 권능을 거듭 목격하자 그들은 예수를 왕으로 삼고자 했다. 이처럼 예수를 지상적, 정치적 메시야로 알고 추종한 것은 열 두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사역 초기부터 메시야적 권능을 밝히 드러내셨으되 스스로는 오히려 신분을 감추셨다(3:12). 그리고 공생애 후반에 이르러 당신의 메시야 신분을 공개하실 때에도 고난받는 종으로서의 사역을 강조하셨다(마 16:21). 예수께서 죄와 그로 말미암은 온갖 저주들로부터 인생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구세주시라고 하는 참된 메시야관은 당신의 죽으심과 부활 및 오순절(the day of Pentecost) 성령 강림 이후에야 비로서 확립되었다(갈 3:18).
한편 메시야되신 예수께서는 신약성경에서 '인자'(31절). '하나님의 아들'(마 16:16), '구주'(행 5:31), '주'(롬 10:9) 등으로 묘사되었다. 부언컨대, 예수는 구약의 선지자직과 제사장직 및 왕직을 모두 완수하신 분이라 하겠다(히 5:1-10).
* 예수의 수난 의식.
예수는 당신의 원래적 신분이 무엇이며(눅 2:49), 이 땅에 오시사 이루고자 하신 사명이 또한 무엇인지를 애초부터 알고 계셨다. 우리는 예수의 공생애를 다룬 사복음서의 기록을 통해, 예수의 자의식(self-consciousness) 속에는 늘 대속(代贖)의 십자가가 예견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크신 권능으로 병을 치유하고 바다의 풍랑을 잔잔케 할 때나 머리 둘 곳도 없어 빈 들에서 노숙하실 때에나 예수는 자기의 온 생애가 인류를 위한 봉사와 희생 그 자체로서 바쳐져 있음을 항상 유념하셨다. 따라서 예수는 당신의 이적만 믿고 환호하는 무리들의 영적 무지나 혹은 세상적 기득권 수호를 위해 당신을 경계하고 핍박했던 유대교 지도자들의 완악한 심령을 모두 한심하게 여기셨음에 분명하다. 결국 주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당신의 무력(無力) 때문도 아니고 유대교지도자들의 간계나 로마 군병들의 창검 때문도 아니었으며, 궁극적으로는 인류 대속을 온전히 성취하고자 하신 예수의 자발적 순종에 전적으로 기인한다(마 26:53, 54;히 5:8, 9).
메시야가 수난당해야 한다는 사상이 예수 당시에는 생소했고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예수께서 당신의 수난을 예고하실 때에는 제자들마저 당황해 하거나 오해하기다 다반사였다(마 16:22). 하지만 훗날 예수의 부활을 목격하고 오순절 성령 강림을 체험한 연후에는 제자들도 십자가 수난의 비의(秘義)를 깨닫게 되었다. 특히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고난의 신비를 깨닫고 놀라움과 위로를 받으며 그 고난에 참예하고자 했다(롬 8:17;고후 1:5;빌 3:10;골 1:24).
한편, 사복음서에는 예수의 수난 의식을 증거하는 구절들이 많이 나온다. 예컨대,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마 9:15;눅 5:35), '나는 받을 세례가 없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눅 12:50),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눅 13:33)는 등등의 말씀이나, 또 아들마저 죽임당했다는 포도원 농부의 비유라든가 (12:8;마 21:39;눅 20:15), 당신의 몸에 향유를 바른 여인을 두둔하며 하신 말씀(막 14:8) 등이 그러하다. 특히 공관 복음서에는 예수의 직접적인 수난 예고가 네 차례에 걸쳐 수록되어 있는 바 이를 비교해 보면 다음 도표와 같다.
+---------+-----------------------------+---------------------------------------------------------------------------------------------+
| 순서 | 성 구 | 내 용 |
+---------+-----------------------------+---------------------------------------------------------------------------------------------+
| |8:31;9:1; | 예수께서 유대 지도자들에 의해 고난을 받고 |
| 1 차 | 마 16:21-28; | 죽임 당한 후 사흘만에 부활하시리라는 예고 |
| |눅 9: 22-27 | 이다. 수난의 전반적 측면을 나타내며 이에 |
| | | 대한 제자들의 동참을 촉구하고 있다. |
+---------+-----------------------------+---------------------------------------------------------------------------------------------+
| 2 차 | 9:30-32;마 17:22,23;눅 9:4|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체포되어 죽임을 당하나|
| | 3-45 | 사흘만에 부활하신다는 내용 |
+---------+-------------------------------------------+-------------------------------------------------------------------------------+
| | |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를 이방인들에게 넘겨 |
| |10:32-34;마 20:17-19;눅 18| 채찍질과 침 뱉음을 당하시게 하고, 마침내 |
| 3 차 | :31-34 | 십자가에 못박는다는 내용으로서, 십자가 수 |
| | | 난을 가장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
+---------+-------------------------------------------+-------------------------------------------------------------------------------+
| | 마 26:1-5 | 인자(人子)가 유월절에 팔리우리라는 예언으 |
| | | 로서, 유다에게 배반당하실 것을 시사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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