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바다 건너편 - 이 말은 4:35에서 예수께서 언급한 "저편으로 건너가자"를 받고 있는 말이다. 여기서 "건너편"이란 호수 동쪽편을 가리킨다고 본다. 예수와 제자들은 항해 도중 한 차례 큰 풍랑을 통해 예수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한 뒤 예정했던 장소에 도착하게 된다.
거라사인 지방에 - 여기서 "거라사"는 지명에 대한 논란이 많다. 실제로 거라사 인들이 살고 있는 지방은 갈릴리 호수에서 약 30마일 동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이방 땅이기 때문에 과연 예수께서 그곳까지 갈 수 있었겠는가 하는 의문점이 있다. 따라서 이 지방의 성읍이 아닌 갈릴리 호수 가까이에 있는 한 작은 지방(地方)으로 이해할 수 있다(Donald W. Burdick). 더욱이 이곳은 호수 근처의 "가다라" 지방을 가리키는 말로 볼 수도 있다. 사실 마태복음에서는 본문의 사건이 일어난 곳을 "가다라"지방이ㅣ라고 펴기한다(마 8ㅣ28). 한편 이 지역의 지명에 대해서는 세 종류의 이름들이 발견된다. 즉 마가의 기록대로 "거라사"(게라세논), 그리고 마태의 기록대로 "가다라"(가다레논), 또 오리겐(Origen)이 주장한대로 "걸게사"(게르게세논)가 있다. 이에 대해 테일러(Taylor)는 말하기를 "이처럼 지명상의 차이점들이 발견되는 이유는 거라사(갈릴리 동남쪽으로 48km 지점)와 가다라(갈릴리 동남쪽으로 9. 6km 지점)가 갈릴리 호수에서 너무 멀리 떨어진 지점이며 깎아지른 산들이 갈릴리 호수로 이어져 있다는 기록 때문이다"고 했다. 그러나 마가는 이곳을 분명히 "가라사인의 지방"이라고 못박고 있으며, 이것은 그 도시에서 갈릴리 호수까지 미치는 전지역을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마 8:28의 "가다라"지방이라는 말도 이렇게 이해할 수 있음). 그리고 또 다른 한 가능성은 "거라사"라는 지명이 갈릴리 동쪽 해변에 위치하고 있는 마을, 즉 "케르사"(Kersa)와 동일 지역이라는 생각이다. 바로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40km 높이 정도의 절벽과 옛 무덤들이 있다고 한다(W. W. Wessel). 어쨌든 이 지방은 로마인들에 의해 10개의 도시가 세워진 "데가볼리"(20절)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대인 분 아니라 많은 이방인들이 함께 살았던 곳이었음이 분명하다.
=====5:2
배에서 나오시매 곧 더러운 . . . . 무덤 사에에서 나와 - 배가 도착하고 예수께서 배에서 내리자 곧 귀신들린 자를 만났다고 묘사하고 있다. 이 장면은 마치 배가 도착한 장소가 무덤 가까이인 것처럼 보이게 한다. 즉 무덤 사이에서 나오는 귀신들린 사람을 예수께서 막 만나는 장면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6절을 보면 멀리서 예수를 보고 귀신들린 사람이 달려왔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배가 닿은 곳이 무덤 근처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 한편 4:35의 상황으로 볼 때 이미 날이 저물었을 때였으므로 호수를 횡단(橫斷)한 후 거라사인의 지방에 도착했을 때에는 어두음이 짙게 깔려 있던 때였음이 분명하다.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 - 여기서 "귀신"(프뉴마티)은 문자적으로 숨, 바람, 기운, 생명, 영혼, 영(spirit), 유령, 귀신, 성령(the Holy Spirit) 등의 다양한 뜻을 갖고 있다. 그리고 "더러운"(아카다르토)은 "불순한", "더러운", "부정한" 등의 뜻으로 쓰인다. 직역하면 "부정한 영"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이는 선한 의지가 완전히 결여되어 버리고 오직 약령의 지배하에서 자기 파괴적인 우울 증세를 보이는 상태를 의미한다(1:23 주석 참조). 이에 대해 공동번역은 "더러운 악령 들린 사람"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한편 눅 8:27과 본문에서는 악령들린 사람이 단수이다(안드로포스). 그러나 마태복음에서는 두 사람으로 묘사된다(마 8:28). 아마도 이같은 차이점은 마태는 그 보고가 상세한데 비해 마가와 누가는 그 둘 중 가장 대표될 만하고 특징적인(치명적인) 한 사람을 강조하고자 했던 차이일 것이다(Calven). 나머지 한 사람은 여기 소개된 자의 휘하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Lenski).
==========5:3
무덤 사이에 거처하는데 - 3 - 5절은 귀신들린 자의 현상태를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팔레스틴에서는 죽은 자의 무덤으로 자연 동굴이나 석회암을 깎아 만든 무덤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마음에 거리낌만 없다면 이곳을 거처로 삼기에 적절했을 것이다. 더구나 공동 무덤은 귀신들이 좋아하는 곳이라는 일반적인 믿음으로 볼 때 귀신들린 자의 거처로는 안성 맞춤이었을 것이다. 이때 귀신들린 자는 아마도 동네에서 쫓겨나 절대적인 고독과 죽음과 같은 극악한 환경에 처하면서 내. 외적인 괴로움에 몸부림치고 있었던 것같다. 특히 "(거처)하는데"(에이켄)와 뒤에 나오는 ". . . . . 맬 수 없게 되었으니"(에뒤나토)라는 말이 모두 미완료 시제를 이루고 있어 그의 최악의 상태가 계속되고 있음을 알려 주고 있다.
아무나. . . . . . . 맬 수 없게 되었으니 - 사람들은 그 광인을 심히 두려워한 나머지 그를 묶어두기 위해 쇠사슬까지 동원하였다. 즉 그들은 오직 자신들의 불안을 극복하고 안전을 도모할 목적으로 그 광인의 몸을 쇠사슬로 묶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도무지 거친 그를 부드럽게 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파괴적이고 무진장한 힘을 제어하지 못했다. 한편 여기 사용된 "쇠사슬"은 일종의 수갑 내지는 쇠고랑과 같은 것으로 보통 사람이 풀 수 없는 매우 단단한 것이었던 듯하다. 그런데 그 광인은 이러한 결박을 떨쳐버릴 정도로 괴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나"(우데이스) 그를 제어할 수 없었다. 이러한 사실을 묘사함 헬라어 본문에는 세 개의 부정어(2개의 ou와 1개의 a가 소개됨)가 들어 있어 그 어려운 상황을 더욱 적나라하게 나타내 보이고 있다.
=======5:4
여러 번 고랑과 쇠사슬에 매였어도 - "여러 번 . . . . 매였어도"(폴라키스. . . . 데데스다이)는 완료 수동태 부정사 구조로 되어 있어 그가 과거에 완벽한 상태로 여져 있었던 것이(Robertson) 사실이었다는 것과 동시에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암시를 제공하고 있다. 한편 "고랑"(페다이스)은 발을 의미하는 "폐자"에서 유래한 말로서 발을 옭암배는 형구(形具)를 의미한다. 실로 그 광인은 이같이 발에 인 사슬과 손에 묶인 사슬을 모두 끊어버릴 정도로 강했기 째문에 그 어느 누구도 감히 그를 제어할 수 없었다. 이 같은 그의 처지에 대해 혹자(Jdhnson)는 "조울병 환자의 조증(躁症)의 상태를 생생하게 표현해 준 것이다"라고 언급했다.
끊고. . . . 깨뜨렸음이러라 - 여기서 "끊고"(디에스파스다이)란 문자적으로 "당기다"는 뜻의 "스파오"와 "둘"이란 뜻의 "디아"의 합성어로서 잡아뜯어 두조각 내버린 상태를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깨뜨렸음이러라"(쉰테트리프다이)는 말은 "비벼서 부수어버리다"는 뜻이다. 결국 이 두 표현은 그 광인의 행동이 얼마나 거칠고 무지막지했는지를 시사해 주고 있다.
아무도 . . . . 제어할 힘이 없는지라 - 3절에 이어 거듭 그의 괴력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 마치 그는 야생의 포악한 짐승처럼 흉포하게 굴었끼 때문에 인간적인 힘으로는 그를 꺾을 만한 자가 아무도 없었다. 실로 그는 예수가 오시기 전까지 가장 무서운 괴력을 발휘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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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낮 무덤. . . . 산에서나 - 광인(狂人)의 발작은 "시간"(밤낮)과 장소(무덤, 산)에 전혀 구애됨이 없이 계속되었다. 특별히 여기서 "밤낮"이라 한 것은 단지 ㅇ시간으로 특정할 수 없는 길고 긴 하루들의 연속을 암시하며, "무덤"과 "산"은 그의 비정상적인 생활상을 상징적으로 나타내 주고 있다. 즉 그는 정신 분열증적 증세로서 뜻 없는 언어를 사용하여 계속 고함쳐댔으며(미완료 능동태 분사), 또 "제몸을상하고 있었다"(카타코르톤 헤아우톤 리도이스) 여기서 "상하다"는 말은 완료적 의미로 사용되어 마치 부숴지게라도 하듯 자기를 짓이겨 깊은 상처를 입혔음을 보여 준다.
=======5:6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와 절하며 - 광인은 예수를 최초 목격했을 때 거의 발작적으로 적의를 품고 예수께로 질주해 왔을 것이다(눅 8:27). 그러나 그가 예수께 당도했을 때 직감적으로 그분의 초월적 권능과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권위를 발견하고는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여기서 "절하며"란 엄밀히 따져서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라고 번역하는 것이 좋다. 즉 그 귀신은 자기 앞에 서신 이가 자기보다 더 탁월한 분이심을 알아보고 경읠글 표한 것이다. 물론 이것은 신앙적 경배가 아니라 단지 지적인 굴종에 불과하다(약 2:19). 이로써 예수는 자연계를 지배하시는 분일 뿐 아니라(4:35 - 41) 당신의 권위로 영계(靈界)도 능히 지배하시는 초월자이심을 드러내 보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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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소리로 부르짖어 가로되 - 예수께 접근하는 귀신들의 특징적인 모습이다(1:23).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 귀신은 예수의 신성을 믿는 신앙 고백으로서 이 말을 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예수를 자기와 떼어 놓을 생각으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어쨌든 그의 저의(底意)가 불순한 것이었다 하더라도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곧 메시야로 확신한 것은 그의 영적 감지력이 상당히 탁월했음을 보여 준다(1:24 주석 참조). 한편 겨기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라는 극존칭을 사용하는 것은 하나같이 절대 지존자이신 하나님을 가리킨 표현이다(눅 1:32, 35, 76 ; 행 7:48 ; 16:17 ; 히 7:1).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티 에모이 카이소이) - 히브리인들이 대인 관계에서 흔히 사용하던 관용적 표현으로서 "나를 버려두고 네 일에나 신경쓰라"는 뜻이다(1:24). 이에 대해 공동번역에서는 "왜 저를 간섭하십니까"라고 번역되어 있다. 이같은 표현은 귀신이 예수에게 간청하는 부르짖음이다. 그 간청은 귀신이 예수 앞에 굴복하는 모습이다. 귀신은 이미 예수께서 자기를 위협하고 압도하는 무서운 분임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 귀신의 간청은 자신을 괴롭히지 말라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는 하나님께 대한 서원을 할 때 쓰던 표현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바라오니"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것이 귀신을 내어쫓을 때 사용하는 말이라는 점을 들어 귀신이 예수를 조롱하는 표현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렇다면 귀신의 이 말은 조롱을 위한 조롱이 아니라 예수의 등장으로 파멸의 위기를 인식한 자신이 절망적 패배감으로 하는 발악적 부르짖음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귀신의 상황은 완전히 뒤바뀌게 되었다. 사람을 괴롭히고 파괴하며 무서운 힘으로 다른 사람까지 위협하던 존재가 이제는 예수 앞에 파멸적 위기를 맞고 있는 것이다. 특별히 그가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라고 간청한 것은 귀신이 자기 생활의 안전을 극도로 위협받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편행 구절인 마 8:29에는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로, 눅 8:31에는 "무저갱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하고 있다. 이로 보건대 지금 귀신들이 받을 괴로움은 종말적 심판날에 있을 징계를 의미하며, 바로 그 순간이 이를 때까지 그 귀신들은 무저갱 행(行)에 처해지지 않기를 소원하고 있는 것이다.
=======5:8
예수께서 이미. . . . 이르시기를 - 본절은 7절의 상황에 대한 마가의 보충 설명이다. 즉 귀신이 예수 앞에 절망적 부르짖음으로 간청하는 이유가 예수께서 이미 귀신을 향해 그 사람으로부터 나오라고 하였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6절과 7절 사이에 귀신돠 예수의 만남에 대한 상황 묘사가 행략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여기서 "이미. . . . 이르시기를"(에레겐)은 미완료 시제를 이루고 있어 예수께서 이미 계속해서 말씀해 오셨음을 암시한다. 따라서 예수의 명령은 즉각적으로 시행되지 않았음을 보여 주고 있다.
이 같은 지연은 그 귀신의 항거라고 볼 수도 있으나(마 8:29 - 31) 오히려 "당신의 때"를 정확히 맞추어 행하시고자 하는 예수의 주권적인 섭리로 인한 지연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더러운 귀신아. . . . . 나오라 - 예수께서 귀신 축출 선언은 곧 인간 해방 선언이다. 사실 귀신은 지금껏 그가 차지하고 있던 그 인간의 인간됨을 파괴하고 있었다. 따라서 예수께서 귀신을 향해 그 사람으로부터 떠나 나오라 명령하신 것은 그 사람의 본래적 품성과 인격으로의 회복을 원하시는 당신의 지극한 사랑과, 그 모든 회복을 홀로 주관. 명령하시는 당신의 절대적인 권위를 함께 보여 준 것이라 할 수 있다(욥 24:22). 실로 예수의 주권이 인정되 그분의 영광이 드러나는 그 현장에는 항상 하나님의 형상을 입고 창조되었으나 사단의 권세로 그 형상을 손상입은 영혼들의 건강하고도 완전한 회복이 뒤따르게 된다.
========5:9
네 이름이 무엇이냐 - 이 말은 예수께서 더러운 귀신에게 묻는 질문이다. 이러한 귀신과의 대화는 고대 귀신 축출 이야기에서 많이 나타나는 형식이다. 그리고 고대 전쟁사를 통해 볼 수 있듯이 적운의 장수 이름을 안다는 것은 그 전쟁에 있어서 중요한 준비 요건 중에 하나로 간주되었다. 본절도 귀신의 정체를 분명히 밝힘으로써 귀신의 본성을 보여 주려고 한다. 그것은 인간을 파괴하고 있는 주범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돕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 귀신은 예수의 명령에 따라 자신의 이름을 밝히고 있다. 특히 그는 앞에서는 "나"라는 단수 인칭을 사용한 데 비해 뒤에서는 "우리"라는 복수 인칭으로 말하여 어법이 모순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차이는 귀신 중 우두머리가 대표로 예수와 대화했디 때문에 생겨났을 뿐이다. 귀신의 이름은 "군대"이다. "군대"라는 말은 헬라어로 "레기온"인데, 이것은 로마 군대의 군사 용어로서 6, 000명으로 구성된 1개 군단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군사 용어로서 "레기온"이라는 말을 사용한 이유를 "귀신의 수가 많기 때문"이라고 맑히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 사람에게 들어간 귀신의 수효가 많이 있는 집단적(集團的) 의미로서 표현하기 위해 "레기온"이라는 집단적 의미의 군대 용어를 사용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따라서 그 광인에게 침입한 귀신의 세력이 얼마나 강력하고 파괴적이었을까 하는 사실을 족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혹자는 이 귀신을 죽은 뒤에 안식을 얻지 못하는 원한을 갖고 있는 영들의 집합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한 배경 설명으로 귀신이 무덤 사이에서 살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집단적인 의미의 군대 용어를 사용한 점으로 보아 로마와 투쟁하며 저항하다 죽어간 희생자들의 영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추측은 일면의 타당성을 갖고 있지만 설득력이 희박하다. 왜냐하면 뒤에 나오는 사건들은 결국 귀신들을 몰사시키는 것인데(13절) 그렇다면 로마에 저항했던 사람들에 대한 저주가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사람을 괴롭히고 있는 귀신은 매우 많은 숫자를 가진 집단으로서 하나의 집합된 힘을 발휘하고 있던 존재들임이 분명하다. 이처럼 실로 사단은 한 사람의 건강한 영혼을 지배하기 위하여 수많은 자신의 부하 귀신들을 동원하는 집념과 무자비함이 있다(마 12:45 ; 눅 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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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방에서 내어 보내지 마시기를 간절히 - 여기서 귀신이 예수께서 다시 간청을 하고 있다. 마가는 "간절히"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간청하는 귀신의 자세가 7절의 모습과는 다름을 보여 준다. 즉 귀신의 자세는 그 기세가 모두 꺾인 모습이다. 귀신의 요구는 자신을 이 지방으로부터 추방하지 말아달라는 것이다. 이 제안은 7절의 반항, 즉 간섭하지 말라는 식과는 전혀 다르게 이 지방에만은 있게 해달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사람으로부터는 나오겠다는 말이다. 이는 구체적으로 예수에게 항복하는 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지방"이 과연 어디냐는 점이다. 이는 분명 거라사라는 특정한 장소를 의미한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 한편 마태복음에서는 여기에 대해 구체적인 언급이 없다. 그런제 누가복음에서는 귀신이 "무저갱"(無低坑)으로 보내지 말라고 간청한 것으로 묘사한다(눅 8:31). "이 지방"에 무물기를 원한다는 뜻이기 보다 "다른 지방" 곧 자신들이 최후 심판 전에 감금당하는 무저갱에로 쫓겨나기를 원치 않는다는 뜻일 것이다. 실로 귀신은 최후의 순간이 이르기 전까지 계속하여 활동할 장소를 필요로 하고 있다.
=======5:11
마침. . . . 돼지의 큰 떼가 - 이 절은 삽화적이다. 즉 배경 그림같이 묘사되고 있다. 예수가 내리신 호수 가까이에 산이 있고 무덤도 있으며 많은 돼지를 방목시키는 비탈진 넓은 곳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곳은 이방인 지역이기 때문에(1, 20절 주석 참조) 돼지를 많이 길렀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돼지를 부정한 동물로 취급하여 먹지도 않고 가까이 하지도 않았으므로(레 11:7 ; 신 14:8) 좨지는 기르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돼지의 주인은 이방인일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그 주인이 로마인들(로마 군대)을 위해 돼지를 사육하는 불경스런 유대인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5:12
우리를 돼지에게로 보내어 - 11절에서 돼지떼에 대한 풍경 묘사를 한 이유가 밝혀진다. 귀신은 이 지방을 떠나지 말게 해달라는 간청과 함께 사람으로부터 나오겠다는 생각을 밝힌다. 그러나 자신들은 돼지 무리에게로 옮겨 갈 것을 예수에게 제안하고 있다. 이것은 수동적인 의미에서 허락을 간청하고 있은 것이다. 그래서 "보내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돼지에게 들어가고 안 들어감도 예수께 그 권한이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실로 귀신들은 무엇이든지 파괴하는 경향이 있다. 귀신들은 그 사람을 파괴할 수 없데 되자 이제 돼지 때를 파괴하고자 한다.
========5:13
허락하신대 - 귀신들이 돼지에게 자신들이 들어가게 해주면 계속 활동하며 살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예수께 간청한 부탁을 예수께서 들어 주셨다. 이로 보건대 돼지의 몰사 사건의 원인자가 외관상으로는 그 군대 귀신들이었음과 돼지 몰사 사건의 궁극적 결정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셨음을 알게 된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타인의 재물을 고의로 손상시킨 예수의 윤리적 타당성 여부이다. 물론 그 소유주가 유대인어었다면 그가 모세의 율법을 어긴 파렴치한이었기 때문에 그를 징책(懲責)할 목적으로 이 같은 큰 손해를 입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소유주가 이방인이었다면 문제는 달라지는 것이다. 그런데 앞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본문을 자세히 살피면 돼지 떼를 몰살시킨 주 원인자는 예수가 아니라 그 군대 귀신이었음을 보게 된다. 즉 예수는 적극적 요구를 "허락"하신 것이었다. 따라서 예수께 모든 책임을 전가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이외에 또 다른 견해들에 대해서는 마 8:32 주석을 참조하라). 그리고 무엇보다 이러한 예수이 "허락"이 지닌 재산상의 피해보다 그 피해를 딛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계획(計劃)이 무엇인지를 면밀히 살펴야 한다. 실로 하나님은 이러한 재산상의 피해를 통해 영적, 정신적, 사회적 회복과 건강을 허락하셨던 것이다(15, 19, 20절). 이러한 하나님의 초월적 경륜은 동방의 의인 욥에게서도(욥 1, 2장) 발견된다(Dona;d W. Burdick). 한편 예수께서 귀신을 돼지 떼로 옮기게 허락한 사실에서 두 가지 주목해야 할 점을 발견하게 된다. 첫째는 사람의 존귀성 문제이다. 예수는 사람과 돼지를 두고 사람 안에서 귀신들이 활동하지 못하게 하시는 권위적 모습을 보여줌으로써(8절 주석 참조) 사람을 높이셨다. 반대로 돼지 떼에게는 귀신들이 들어가도록 하락함으로써 그 어떤 피조물보다 인간의 존엄성을 더욱 강조하셨다. 둘째는 돼지에게 귀신들이 들어가게 허락하심으로써 상대적으로 귀신의 활동 영역에 대한 암시를 제공한다. 사실 당시에는 돼지를 부정한 동물로 취급하고 있었다(11절 주석 참조). 이러한 돼지에게 귀신들이 들어가도록 예수께서 허락하심으로써 귀신의 활동 장소가 부정한 곳으로 한정됨을 보여 주고 있다. 귀신이 머물 수 있는 곳은 부정한 곳이다(벧후 2:22).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니 - 사람의 온 인격을 지배하던 귀신들이 영혼 없는 돼지에게로 들어가 그들을 조정한다는 사실은 결코 어려운 문제가 아닐 것이다. 실로 귀신은 생명 있는 것들에 대해 항상 부정적인 영향력을 직. 간접 행사한다.
이천 마리 죄는 떼가. . . . 바다에서 몰사하거늘 - 이 장면은 매우 드라마틱(dramaric)하다. 파괴자 사단의 사자인 귀신들은 자신들이 활동할 수 있는 또 다른 장소인 돼지 떼를 죽음에로 질주하게 했다. 특히 이 사건의 급받함은 "비탈길을 내리달아 갔다"는 펴현과 2, 000마리나 되는 돼지의 숫자를 통해 강조되고 있다. 실로 귀신으 2, 000마리나 되는 돼지에게 각각 그 파괴적 영향력을 행사하여 거의 발작적으로 행동하게 했고 곧장 몰사시킴으로써 그 사악한 위력을 과시했다. 실로 예수는 그 시점에서 주위의 사람들에게 귀신의 최후 목적이 인간과 자연 파괴라는 엄숙한 진리르 암묵적으로 보여 주고 계셨던 것이다. 한편 "몰사(沒死)하거늘"(에프니곤토)이란 말은 미완료시상을 취하고 있어 2, 000마리의 돼지 떼가 계속해서 물속으로 빠져들어 죽어가는 장면을 더욱 생생하게 묘사해 주고 있다.
=======5:14
치던 자들이 도망하여 - 여기서부터 20절까지의 내용은 "돼지 몰사 사건"에 대한 반응들을 묘사하고 있다. 본절에서는 현장에서 직접 사건을 경험한 돼지치는 사람들의 반응이 나타나 있다. 그들은 현장에서 "도망"하였다고 묘사한다. 이 말은 당시에 벌어진 사건이 너무도 급작스러웠고 상상을 초월한 광경이었기 때문에 주채할 수 없는 놀라움을 묘사하는 뜻으로 사용된 말이다. 따라서 "도망"했다는 말은 무서워서 달아났다기 보다는 놀라운 사건을 알리기 위해 급히 달려간 사실을 긴박(緊迫)하게 묘사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읍내와 촌 - 여기서 "읍내"(폴리스)란 성벽으로 둘러싸인 성읍을 가리키며(히 12:22), 대체로 발달된 도시, 변화한 마을 정도로 이해된다. 그리고 "촌"(아그로스)이란 원래 "들", "밭"(fiekl)등으로 이해되나 흔히 시골로 번역되기도 한다. 따라서 이 양자를 합하여 "도시와 시골"이라는 말로 이해할 때 "돼지 몰사 사건"이 그 지방 전역에 알려졌음을 보여 준다. 이에 대해 마태는 "온 시내"(마 8:34)로 언급한다. 어쨌든 이 사건은 삽시간에 여러 곳으로 퍼져갔고 그 소문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현장으로 모여들었음을 알 수 있다.
=======5:15
예수께 이르러. . . 보고 두려워하더라 - 여기서는 소문을 듣고 달려온 사람들이 바라보는 현장을 보여 주고 있다. 특히 마가는 "이르러"와 "보고"라는 말을 현재형으로 기술함으로써 그 현장성과 생동감을 더해 주고 있다. 즉 그들은 좨지 묘사 사건을 듣고서는 지체없이 이곳에 달려와서 뚫어지게 그 상황을 확인하며 여러 관점에서 세밀히 관찰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이 장면은 13 , 14절에서 나타난 연속적인 사건의 급박성과 긴박감과는 대조적으로 평온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3 - 5절에서 험악하게 묘사되었던 귀신들린 사람이 정신을 되찾고 예수 앞에 앉아 있는 장면은 폭풍우가 걷힌 다음 쏟아지는 햇살을 생각나게 한다. 특히 "옷을 입고", "앉은 것"이란 표현은 그의 상태가 건강한 정상인으로 되돌아왔음을 확증케 하는 외적인 증표이다. 실로 그는 오랫동안 옷을 벗어 던진채(눅 8:27) 무덤과 산을 뛰어다니며 괴성을 지르고 자기 몸을 상하게 하는 등의 극히 불안정한 심적 상태를 유지해 왔었던 것이다. 그러나 귀신들려 인간성을 상실했던 사람이 이제는 온전한 제정신으로 회복되었다(고후 5:13), 여기 "정신이 온전하여"(소프로니조)란 건전한 마음과 올바른 자각 및 바른 판단 등을 할 수 있는 건강한 정신 상태가 되었음을 뜻하는 말이다. 이제 그에게는 평화가 회복되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장면을 면밀히 검토한 사람들은 그 귀신들렸던 자가 그 처절했던 상황에서 벗어난 것을 보고 기뻐하기는커녕 "두려워하였다". 여기서 "두려워하다"는 표현은 사건의 놀라움에 대한 강조적 묘사인 동시에 이 사건의 궁극적인 주체자인 예수에 대한 경외감(敬畏感)을 표현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물론 이것은 온전한 신앙 상태와는 다르다. 왜냐하면 예수의 본질적 특성(공의와 사랑의 주)을 이해한 자는 감정적으로 그분을 두려워하는 데서 해방되어 그분의 사랑의 역사를 이해하게 되기 때문이다(요일 4:18).
========5:16 - 17
이에 귀신들렸던. . . . . .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 다른 목격자들이, 소문을 듣고 달려와 현장을 보고 놀라는 사람들에게 이제까지 일어났던 사건을 설명하였다. 그러자 그들의 반응은 예수에게 이 지방에서 떠나달라고 간청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 이유는 그들이 예수를 심히 두려워했기 때문이다(15절). 즉 그들은 자기들의 상상을 초월하여 감히 지신들로서는 제어할 수도 없는 능력이 예수 안에서 역사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따라서 만일 예수가 좨지 2. 000마리를 몰사시키셨다면 다음에 그보다 더 심각하고 두려운 일을 충분히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했능 것이다. 이러한 두려움과 무지와 경제적 이기심 때문에 그들은 예수를 떠나라고 간청했던 것이다. 실로 그들은 자신들의 미신적 상상력과 물질적 욕심 때문에 생명의 주를 거부(拒否)하고 말았던 것이다(4:19). 예수께서는 그들의 소원대로 그곳을 떠나시게 된다. 진정 그분은 당신을 원치 않는 곳에 오래 머물지 않으신다.
===========5:18
예수께서 배에 오르실 때에 - 예수는 배를 타시고 동쪽 지경에 오셨다가(2절) 이제 다시 뱃머리를 돌려 자신의 곳으로 돌아가시려 한다. 실로 예수께서는 이 지방을 떠나라고 하는 그곳 주민들의 제안을 즉각(卽刻)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함께 있기를 간구하였으나 - 이에 대해 새번역 성서에서는 "함께 가기를"원했다로, 공동번역 성서에도 역시 예수를 "따라 다니게"해 달라고 간청한 것으로 번역되어 있다. 따라서 "함께 있기를" 간구한 것은 그곳에 머물라는 뜻이 아니라 자신이 예수를 따라 나서겠다는 뜻이다. 이것은 한 인간이 가장 비참한 처지에서 인간이 아닌 짐승과 같은 삶을 살다가 구원받고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된 감사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Bengel). 사실 예수를 따라 나서겠다는 고백은 제자가 되어 주님의 길을 같이 가겠다는 뜻이고 자기 몸을 다 바쳐 주님을 섬기겠다는 표현이다. 또 그 자신이 따라 나서겠다는 것은 자신의 과거 때문에 마을에서 자기를 용납해 주지 않을 것같기 때문일 것이라고, 또는 다시 귀신이 자기를 억누를까 두려워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주장도 많지만 그보다는 진실한 감사와 헌신의 표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러한 장면은 17절에서 보여 준 다른 사람들의 모습과는 대조적이다. 자신을 구원해 주고 자신에게 진정한 사랑과 자유를 허락한 분에게는 타산적인 생각이 개입될 수 없다. 다만 전적인 헌신이 있을 뿐이다.
========5:19
집으로 돌아가. . . . . . . 네 친속에게 고하라 - 귀신들렸던 사람의 간청은 예수로부터 거절당한다. 그 이유는 첫째, 자기 집으로 돌아가 가족들과 새 삶을 시작해야 되기 때문이고, 둘째, 이와 같은 구원 사건을 가족들에게 알려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1:44에서 문둥병자에게 침묵을 명하신 것과는 대조를 이룬다. 이는 아마도 이번의 사건은 이방 지역에서 일어났기 째문에 자신이 메시야이심을 사람들에게 전파한다 하더라도 무방했기에 그렇게 한 것같다. 사실 유대 지경에서 예수 자신의 메시야 주장은 아직까지 때가 이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상당히 큰 위험을 무릅써야 했던 것이다. 어쨌든 예수의 명령은 곧 당신의 귀신 축출에 대한 깊은 의미를 알게 한다. 첫째,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게 한 것은 한 인간의 인간성이 철저히 파괴되었다가 다시 본래의 모습을 되찾는 구원이 한 개인의 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살고 있는 공동체에 다시 정상적인 모습으로 복귀할 때 비로소 완성된다는 것을 뜻한다. 이 사람은 병으로 인해 가족과 사회로부터 격리되어 있었기 째문에 다시 그러한 관계를 회복함으로써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하다. 둘째는 기적적인 놀라운 구원 사건을 경험한 사람이 가야 할 곳은 가정과 사회, 즉 삶의 현장(現場)이라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삶의 현장과 가정 안에서 구원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 구원받은 사람의 과제이다. 즉 가정과 사회에 봉사하며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실천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 구원받은 사람은 세속 사회를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세속 사회 안에서 주님을 전파하며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다. 한편 마가는 이 일을 행하신 분을 "주님"(퀴리오스)으로 표현한데 비해 누가복음에서는 "하나님"(눅 8:39)으로 표현한다.
======5:20
데가볼리에 전파하니 - 예수는 가족에게 알리라고 했지만 이 사람은 제가볼리 전역에 알리게 된다. "데가볼리"는 갈릴리 호수 동편과 요단강가에 인접한 10개 도시를 가리킨다. 여기서 10개 도시란 거라사(Gerasa) 와 가다라(Gadara) 및 다메섹(Damascus), 빌라델비아(Philadelphia), 스구도볼리쓰(Scythopolis), 힙보스(Hippos), 벨라(Pella), 라바나(Raphana), 디오스(Dios), 가다나(Kathana) 등이다. 이중 스구도볼리쓰만은 요단 서편에 위치해 있다. 이 도시들은 자치적인 연맹 도시였다. 1절에서 언급한 "거라사"도 이 10개 연맹 도시 중의 하나이다. 이러한 도시들은 B. C. 3세기경 수리아의 셀류시드(Seleucid)의 통치 기간에 헬라화 정책의 시험 도시들로 조직되었다. 그리고 유대 마카비 시대에 이르러 하스몬(Hasmonian) 왕조 때 힐카누스의 지배를 받다가 다시 로마의 폼페이(Pompey) 장군에 의해 로마 관할로 편입되었ㄷㅏ. 이와 같이 광역 도시에 예수께서 행하신 "미친 돼지 몰사 사건"과 "귀신들린 사람의 구원 사건"이 퍼져나갔고 모든 사람들이 놀랐다. 여기서 예수의 선교 활동이 이방 지역에서도 성공적으로 진행됨을 보여 주고 있다. 실로 한 인간이 거듭나는 체험(體驗)으로 그리고 거듭난 한 인간이 자기 사건을 전한으로써 10개 도시의 넓은 지역에 예수에 관한 이야기는 전파되는 드라마틱한 장면이다.
=========5:21
다시 저편으로 건너 가시매 - 돼지 몰사 사건이 발생했던 위치가 갈릴리 호수 동편이므로 건너편이라고 할 때 서쪽 해안 곧 가버나움 지경으로 추측된다(마 9:1). 이곳은 바로 갈릴리 선교의 전진 기지였다. 그곳에서도 역시 큰 무리가 모여들었다. 이 표현은 4:1의 표현과 비슷하다. 그리고 "거라사"지방과는 대조적이다. 즉 거라사 지방에서는 떠나줄 것을 요구했지만 갈릴리 지방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예수의 인기를 보증해 준다.
바닷가에 계시더니 - 이 표현은 바닷가에 도착한 시각과 22절에 나오는 다음 사건이 발생한 시각에 간격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바닷가가 많은 군중들을 향해 말씀을 가르칠 수 있는 용이한 지역이었으므로 이곳을 자주 당신의 교육의 장(場)으로 활용하셨다.
======5:22
회당장 중 하나 - 이는 "한 회당장"으로 번역될 수 있다. 따라서 그는 가버나움에 있는 한 회당장으로 이해된다. 당시 회당의 조직은 회당장, 핫잔(Hazzan), 랍비 그리고 평신도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중에서 특별히 "집회의 우두머리"로 일컬어지는 회당장은 건물을 관리하며, 예배 순서의 작성 및 질서 유지, 심지어 재판과 같은 사무 증을 관할하던 장로 출신의 지도자였다(눅 4:13 ; 8:41 ; 행 18:8, 17). 실로 이들은 제사장 계급의 상대적 실추(失墜)로 인해 소위 종교 민주화를 통해 등장한 평신도 계급(the laymen classes)들로서 이들의 등장은 곧 종교적 관심을 일반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들은 제사장은 아니지만 예배를 주관하고 회당을 관리하며 다스리는 사람들이다. 때로 "회당장"이라는 명칭은 명예직으로서 행정적인 의무는 없으나 회중 가운데 탁월한 인물에게 이 직위가 주어지기도 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당시 대중들로부터 상당한 존경의 대상이었다. 야이로(Jairus)는 바로 이들 중에 한
사람이었다. 따라서 야이로 역시 그 지방에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사람이었다고 보는데는 의심할 바 없다.
야이로 - 이는 "깨달은 사람" 내지는 "그는 빛난다"는 뜻의 히브리어 이름 "야일"의 헬라식 발음으로 이해된다(민 32:41 ; 삿 10:3).
예수를 보고 발 아래 엎드리어 - 발 아래 엎드렸다는 것은 최대의 존경을 표현하는 것이다. 회당장의 신분이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존경받는 사회적 지위를 가졌다면 이 장면은 ① 예수를 최고의 지위로 높이는 절대 겸손의 모습니다. 사실 그 당시 예수는 일반적으로 한 새로운 랍비 정도에 불과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던 터였기 때문에 유대의 종교를 대표할 만한 종교 지도층 인사가 그 앞에 무릎 꿇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다. ② 예수의 치료이적이 그 지방에 아주 신빙성있고 믿을 만한 소문으로 알려져 있음을 암시한다. 즉 그 지방의 존경받는 회당장이 기적을 요청한 사실은 예수의 이적 행위에 대한 공적인 신뢰감을 증명하는 것이다. ③ 우발적 사건이 아니라 철저한 믿음과 확실한 소망을 가지고 취한 회당장의 신앙적 행동을 보여 준다. 회당장이 직접 바닷가에 많은 무리가 모인 곳으로 예수를 찾아왔고 그러한 행동에 옮기기까지는 예수에 대한 믿음이 뒷받침되지 않고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5:23
많이 간구하여 - 회당장은 마치 자신이 죽을 위기에 처한 자처럼 필사적(必死的)으로 거듭 반복해서 예수께 간절히 매어달렸다.
내 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 회당장이 예수께로 온 목적을 밝히고 있다. 이유는 "어린 딸이 다 죽게 된" 때문이다. 여기서 "어린 딸(뒤가트리온)이란 조그마한 여아를 깊은 애정으로 부를 때 사용하던 말이다. 이를 통해 야이로의 자식에 대한 애끙ㅎ는 심정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죽게 되었사오니"(에스카토스 에케이)란 지금 즉음이 문 앞에 서 있을 만큼 그 병세가 최악의 상태임을 시사해 주고 있다. 물론 그 딸의 병명은 구체적으로 밝혀져 있지 않다. 한편 누가 복음에서는 회당장이 직접 말하지 않고 기록자 누가가 담담히 설명하고 있는데, 어린 딸의 나이가 12살임을 밝히고 있다(눅 8:42). 그리고 회당장은 다만 예수께서 자기 집으로 가주기만을 간청한다(눅 8:41). 그러나 마태복음에서는 "내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마 9:18)라고 말함으로써 절망적인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키고 있다. 즉 마가와 누가복음은 "죽게 된 지경"을 말하고 마태복음은 이미 죽은 것으로 묘사한다. 이 같은 차이점은 마태가 마가복음에도 뒤에 기술되고 있는(35절) 이미 딸이 죽었다는 사실을 본시점과 종합하여 서술한 째문인 것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어쨌든 세 복음서의 공통된 점은 사태가 매우 급박(急迫)하다는 것이다.
손을 얹으사 - 회당장 야이로는 예수께서 그 손을 딸의 몸위에 얹으면 곧 회복될 것이라는 믿음을 간직하고 있다. 실로 회당장의 간청은 확신적이고 매우 구체적이다. 이는 병 치유에 대한 전권을 인정한 것이다. 여기 손을 얹어 안수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바라는 행위이자 치병을 이한 일반적 행위로 알려져 있다(6:5 ; 8:23, 25 ; 약 5:14 - 16). 따라서 회당장의 이 같은 안수에서 요청은 예수의 능력과 권위를 온전히 인정하는 것이ㅣ며 그의 은혜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 - 여기서 "구원을 얻어"(소데)란 "구원하다", "보전하다", "놓아주다", "병을 고치다"는 뜻을 지닌 (소조)의 부정과거 가정법 수동태로서 예수로 인한 병의 회복, 곧 건강을 기원한 말이다. 따라서 본문을 재해석하면 "(당신으로부터) 건강을 회복하여 (계속) 살게 하소서"가 된다.
=======5:24
그와 함께 가실새 큰 무리가. . . . 에워싸 - 야이로의 간청을 받아들여 그의 집으로 출발하는 장면 묘사이다. 여기서 "가실새"(아펠덴)란 부정 과거 시제를 취하여 예수께서 곧바로 출발하셨음을 암시한다. 즉 예수는 즉각적 응답으로써 그의 간청에 호응하셨다. 이렇게 예수께서 급히 이동하자 바닷가에 모였던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따라 이동하는 광경을 볼 수 있다. 그런데 그 무리들의 행동을 표현한 "따라가며", "에워싸 밀더라"는 표현은 각각 미완료시제를 사용하여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예수를 좇으며, 더욱이 예수께 접근하기 위해 계속 몸을 부딪히는 혼잡함을 보여 주고 있다. 실로 이 같은 장면은 그 당시 예수를 중심한 분위기가 매우 열기가 있음을 보여 주며, 따라서 예수의 명성과 인기가 대단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5:25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 여기서 상황이 바뀌고 있다. 야이로 회단장의 이야기에서 갑자기 12년동안 혈루증(血漏症)을 앓는 여인이 등장한다. 여기서 혈루증(subject to bleeeding, NIV)은 현대의학 용어인 "혈루병"이 아니다. "혈루병"은 여자에게 유전 인자로 잠재할 수는 있어도 병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남자에게는 유전으로 잠재성과 병으로 모두 나타난다. 따라서 여기서의 혈루증은 만성 하혈증(下血症)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자궁(uterus) 안에 종기가 생기거나 어떤 이상이 생겨 불규틱적으로 피가 흐르는 중세일 것이로 간주했다(레 15:25). 따라서 종교 생활 뿐 아니라 사회적 활동에 많은 제약을 받았다. 특히 이 여인의 병이 12년("12"는 완전수 또는 하나님의 계회과 성취를 나타내는 수로 상징됨)이나된 병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 병이 치유될 수 없는 불치의 병임을 암시하고 있다. 또 이 여인이 병으로 받는 육체적 고통이나 정신적 고통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처참(悽慘)하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이러한 형편은 25절에서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한편 역사가 유세비우스(Eusebius)는 그녀가 파네아스 출신의 이방인 베로니카(Veronica)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확실한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5:26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 혈루증을 앓는 이 여인은 많은 의사를 찾아다니며 치료를 위한 노력을 한 것으로 소개된다. 그러나 이러한 자의적 노력을 더하면 할수록 오히려 그 의원들은 그녀에게 더 심한 고통만을 안겨 주었다. 이에 대해 의사 출신인 누가는 "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했다"(눅 8:43)는 말로써 동료 의사들의 한계 상황을 깊이 배려하며 적절히 묘사하고 있다(Robertson). 한편 당시의 시대적 배경으로 보아 이 여인의 가정은 어느 정도 부자였을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당시는 부자가 아니면 의사를 찾아 갈 수 없었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재산을 치료비로 다 써버리고 이제는 가난한 처지가 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병은 더 악화되었다는 묘사는 25절에서 12년 동안 병을 앓아왔다는 표현과 함께 ① 병의 불치성과 ② 의술의 무력함을 나타내 보이고 ③ 인간적인 모든 수고가 허사로 돌아 갔다는 절망적인 상황 묘사와 ④ 그 여인이 받고 있는 고통이 진퇴 양난(進退兩難)의 절박(切迫)한 상황임을 암시하고 있다. 재산을 치료비로 다 허비하고 남은 것은 병든 몸 하나이고 그나마 병은 더욱 악화되고 병의 부정함 때문에 사람들과 사회로부터 소외된 여인의 모습은(레 15:25 - 28) 인간 최악의 한계 상황에 다다른 것이다. 삶과 존재의 기반이 송두리째 상실되는 위기감을 느끼고 있는 이 여인의 모습은 4장의 풍랑을 만난 제자들의 모습과 2 - 5절의 귀신들린 사람과 2, 23절의 죽음 직전에 이른 야이로의 딸과 함께 인간들이 보편적으로 경험하고 있는 인간의 유한성과 인간적인 노력의 한계를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것이다. 이처럼 그 혈루증의 여인은 더 이상 자기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절박한 상황에 처했을 때 비로서 번정한 구원자 예수를 찾게 된 것이다.
=====5:27
소문을 듣고. . . . 옷에 손을 대니 - 절망의 벽에 부딪힌 이 여인은 예수의 치병 기적에 대한 소문을 상세하게 들은 것으로 보인다. 이 여인의 믿음은 예수의 옷에만 손을 대도 자신의 병이 치유될 것이라는 믿음이다. 이러한 믿음은 앞에서(23절) 언급된 야이로 회당장의 진술과는 차이가 있ㄷ. 야이로의 믿음처럼 예수께서 주체가 되어 환자와 접촉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환자가 예수에게 접촉을 함으로써 병을 낫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형태는 3:10 ; 6:56에서도 나타난다. 즉 예수를 만지게 해 달라거나 옷에라도 손을 대게 해 달라는 간청은 예수에게 치유의 능력이 충만하다는 확신에 찬 믿음의 결과이다. 따라서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치유받고자 하는 사람의 믿음을 강조하는 점이다. 이 여인은 직접 보고 믿은 것이 아니라 소문을 통하여 믿게 된 것이다. 어쨌든 그녀는 "무리 가운데 섞여 뒤로 와서" 예수를 만지게 되는데, 이 같은 사실은 그녀의 담대함(간절함)과 겸손함을 대변해 주는 행동이다. 즉 그녀는 사회 통념상 여자로서 뿐 아니라 부정한 자로서 공중(公衆) 앞에 나설 수 없는(접촉 불가) 입장이었으나 그러한 사회, 종교적 장애를 극복하고 담대히 예수께 접근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존재를 몰래 감추고 자신의 병을 가만히 치유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예수의 "뒤로" 온 것이다. 한편 마태는 그녀가 예수의 "겉옷 가"(the edge of his cloak, NIV)를 만졌다고 기록하고 있다(마 9:20). 즉 그녀는 예수와 접촉함으로써 율법적으로는 예수를 부정케 만든 결과가 되었다(레 15:19 - 27). 그러나 생명의 주께서는 이 모든 의식적 부정을 초월(超越)하여 그녀의 믿음을 받아 들이셨다.
=======5:28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 . . 얻으리라 함일러라 - 그녀가 예수의 옷자락에 손을 댄 이유를 설명한다. 사실 그녀의 이 같은 심정에는 미신적(superstitious) 요소가 전혀 없었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녀는 오직 예수만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구원자이심을 믿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중요한 일이었다. 한편 "함일러라"(엘레겐)는 미완료 시제로서 그녀가 마음속으로 그 같은 사실을 되뇌이고 또 되뇌였음을 보여 준다.
=======5:29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 여인의 믿음대로 병은 즉각적으로 치료되었다. 실로 12년 동안 한시도 그녀의 몸에서 출혈(出血)이 떠나지 않은 그 지독한 병증이 완전히 제거된 것이다. 이 상황을 공동번역은 "출혈이 그치고"라고 번역하고 있다. 특히 "혈루의 근원"이라는 표현은 병의 치료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완벽하게 치료된 것을 암시한다. 이와 같은 표현법은 치료의 즉각성과 피료의 완벽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로써 그녀는 12년의 정신적 고통이 함께 해결된 것이다. 이러한 치료는 예수와의 전인격적(全人格的) 접촉(교제)이야말로 인간이 지닌 모든 문제의 유일한 해결 방법이라는 사실과 동시에 예수의 능력과 권위를 더 높이는 것이었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 병이 나았다는 것을 자신이 직접 알게 되었다는 말이다. 즉 그녀는 혈루의 근원이 근절되자 곧 자신의 치유를 자각(自覺)하게 된 것이다. 결국 이 같은 자각은 곧 그 치유가 몸으로 직접 느낄 정도로 완전하고도 신속하게 치유되었음을 말한다. 이와 같은 즉각적이고 근원적인 치유 기적이 발생한 놀라움과 대조를 이루는 것은 27절에서 묘사된 여인의 행동이다. 그녀는 환자의 연약한 몸과 여자라는 핸디캡(handicap)을 갖고 그 많은 군중 속에서 겨우 예수의 뒤쪽에서 손을 옷에 대었다. 간청을 한 적도 없고 믿음을 예수께 밝힌 적도 없는 이 여인에게 기적이 발생한 것이다. 이 사실은 이 여인이 갖고 있는 믿음이 공개된 사실은 없지만 이미 숨겨진 믿음도 기적을 일으킬 만한 가치가 있음을 암시한다(히 11:6). 실로 예수는 인간의 심령을 살피는 분으로서 그 소원의 깊이를 조용히 알아보고 계셨던 것이다(마 6:6).
======5:30
능력이. . . . . .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 치유 기적이 예수와 상관없이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여기서 알 수 있다. 즉 예수께서 자신에게서 치유의 능력이 나간 사실과 누가 자신의 옷에 손을 댄 사실을 감지한 것이다. 사실 그 치료받은 여인은 모든 것을 은밀히, 조용히 심지어 예수마저 모르게 해결하고자(27절) 했었다. 물론 이 같은 그녀의 생각은 심히 어리석은 것이었지만 그녀의 겸손하고도 조용한 일면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어쨌든 예수는 사람들이 혼잡한 다운데서도(31절) 당신의 전지성(全知性)으로써 그녀의 간절한 소망을 이미 알고 계셨고 또 그녀가 당신의 옷자락을 만지신 것도 알고 계셨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당신이 친히 그녀의 소망을 들어 주셔서 그녀의 치유를 허락해 주신 것이다. 여기 "스스로 아시고"(에피그누스 엔헤아우토)란 완전하고도 초월적인 지식을 의미한다. 결국 이 말은 예수께서 그 여인의 행위의 동기와 그 결과에 이르기까지 모두 알고 계셨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당신의 능력이 나간 줄 아신 것이 수동적인 의미에서의 지식이 아니라 곧 그 여인이 치료된 사실을 예수께서 뒤늦게 아신 것이 아니었다. 이는 예수께서 그 치료의 전반적인 상황에 대한 능동적인 깨달음, 곧 당신이 그 능력을 능동적으로 계획하셨고 또한 발휘하셨음을 보여 준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 예수께서 그 간은 사실에 대해 전혀 모르셨기 때문에 이 질문을 하신 것이 아니었다. 예수는 내밀한 이적을 주위의 모든 사람들에게 공개하시기 위해 이 같은 빌문을 의도적으로 하셨을 것이다(Calvin Donald W. Burdick). 그와 더불어 생각되는 바는 33, 34절의 내용으로 보아 치료받은 사람과 인격적(人格的)인 관계를 기 위함인 것으로도 보인다. 병의 치료는 단순히 물리적인 치료만이 완전 치유가 아니다. 병으로 인한 정신적 고통 역시 신체적 고통 못지 않게 큰 것이므로 인격적 만남 속에 병이 치유되어야 함을 보여 준다. 그리고 그녀가 그녀의 졍을 고침받은 것이 미신적 신앙 때문에서가 아니라 진정한 신앙 때문이라는 사실을 그녀가 손으로 당신의 옷자락만 잡기보다 그 영(靈)으로 당신의 거룩한 인격을 잡기를 바라셨던 것이다.
=======5:31
제자들이 여짜오되. . . . . 물으셨나이까 - 여기서 제자들은 예수께서 손을 댄 사람을 찾으시는 것에 대하여 불만 섞인 응답을 하고 있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려 혼잡하고, 또 사람들이 밀리고 있는 상황에서 누가 옷에 손을 대었는지 어떻게 알겠느냐는 식의 반문이다. 이 사실은 혈루증을 치유한 사실이 예수와 환자 자신밖에 므른다는 사실과 제자들의 영적 무지(육체적 접촉만 생각하고 영적 교감(靈的交感을 도외시함)를 암시하고 있다. 그리고 치유받은 여인은 즉각 나타나 고백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여인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 상당히 큰 두려움을 갖고 있음을 보게 된다.
======5:32 - 33
예수께서. . . . . . 둘러 보시니. . . . . 여자가. . . . . 사실을 여짜온대 - 예수께서는 바로 군중들을 향해 몸을 돌리고 직접 찾으신다. 그리고 이 광경을 지켜 보는 치유받은 여인은 더 이산 사실을 숨긴 채 있을 수 없었다. 이 여인은 몹시 뚜려워하며 예수 앞에 엎드려 사실을 고백한다. 여기서 두 가지 강조점을 결견할 수 있다. 첫째는 예수께서 여인을 찾으시는 행위이다. 제자들의 충명스런 변명에도 불구하고 계속 치유된 여인을 찾고 있는 장면("둘러 보시니"는 미완요시제)은 치유받은 자로부터 감사의 인사를 받기 위힘도 아니고 치유를 확이니하기 위한도 아니다. 오직 치유받은 사람과의 인격적 만남을 통해 그녀로 하여금 바른 신앙을 갖게끔 하기 위힌 것이다(30절 주석 참조). 이것은 예수께서 고난받고 고통당하는 사람에 대한 강한 관심과 뜨거운 사랑 및 다함 없는 연민을 갖고 있음이 암시된다. 둘째는 치유받은 여인의 행위이다. 그녀는 몹시 두려워 하고 있었다. 이유는 ① 자신의 병이 종교적으로 부정한 것이고 따라서 죄인 취급받는 신분이기 때문에 군중들 틈에 끼여들였다는 것을 공개하기에는 두려운 사실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② 또 그런 부정한 몸으로 예수의 옷자락을 만졌다는 사실이 특히 여자의 신분으로서 불경건한 행위였기 때문일 것이다. ③ 그녀는 자신이 지금 받은 은혜를 예수로부터 훔쳐 낸 것 같은 심령을 가졌을 것이다. 즉 그녀는예수 몰래 예수의 신적 능력을 이용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④ 마지막으로 예수에 대한 깊은 경외감(敬畏感)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이 여인이 예수 앞에 엎드린 모급은 22절의 장면을 연상케 한다. 즉 치유의 기적을 체험한 이 여인은 예수에 대하여 신적인 권위와 초월적인 능력을 느꼈을 것이고 따라서 그에 따른 경외감이 두려움으로 나타났을 것이다. 한편 그녀는 예수의 강권적인 요구로(내밀한 요구였음) 자신의 만성적인 몹쓸 질병과 그 기적적 치유에 대한 모든 사연들을 무리들 앞에서 공개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소위 신앙간증오로서, 결과적으로 예수의 크나큰 은혜에 부응하여 그분께 무한한 존귀와 영광을 돌리는 일이 되었으며, 또 그녀가 완전한 정상인이 되었음을 공개적으로 알리는 일이 되기도 했다. 실로 "은혜 위에 은혜"의 역사가 주어진 것이다.
==========5:34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 예수께서 치유받은 여인에게 공개적으로 내린 구원 선언이다. 여기서 "딸아"(뒤가테르)란 성숙한 여자나 소녀를 향하여 애정어린 마음으로 친밀히 부르는 호칭으로서(23절) 예수께서 여인을 향하여 친히 이렇게 말씀하신 곳은 복음서 가운제 본문이 유일하다. 실로 예수께서는 그녀로 하여금 그녀가 예수의 옷자락을 만졌기 때문에 치유의 기적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그녀가 지닌 "믿음" 떼문에 완전한 회복(구원)을 얻은 것임을 주지시키셨다. 그 "믿음"은 그녀가 예수에게 치유의 능력이 충만함을 확신한 것이다(27, 28절 주석 참조). 그리고 그 믿음을 행위로 옮겼을 때 이 여인의 가장 절망적 문제였던 혈루증이 완전히 치유된 것이다. 여기서 "구원하였으니"(세소켄)란 완료시제를 취하고 있어 그 구원이 이미 그녀에게 확실히 주어졌음을 소개한다. 그리고 여기서 이 구원은 현상적으로는 육체적 구원과 영적 구원은 서로 밀접히 연관되어 묘사되고 있다(2:1 - 12). 따라서 이 치유의 체험은 질병으로 인한 모든 육체적 고통과 자신이 부정한 죄인이라는 정신적. 영적 굴레로부터 벗어남을 뜻한다(25절 주석 참조). 이와 같은 구원 선언을 예수께서는 군중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선언함으로써 이 여인이 더 이상 죄인이 아님을 선언하고 있으며, 아울러 예수는 이 여인을 소외 당했던 사회로 다시 복귀시키고 있다. 예수께서는 이 같은 자유와 회복을 허락하시려고 그 여인을 그렇게 찾았던 것이다. 이 여인은 더 이상 죄인이 아니며 또한 부정한 여인이 아니다. 한 사람의 구원은 죄의식으로부터 풀려나는 것 뿐만 아니라 건강과 평화로운 사회 공동체에 복귀하여 행복한 삶을 누리는 것까지 포함되는 것이다. 때문에 예수께서는 구원 선언을 한 다음"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 라고 감동적인 선언을 하고 있다. 여기서 "평안히 가라"(Go in pease, NIV)는 문자적로 "평화를 향하여 가라"는 뜻보다 "평화의 상태를 지니고 가라"로 보는 것이 좋다. 즉 예수께서는 그녀에게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평화의 은총을 선사하신 것이다. 이 평안은 히브리인들의 전통적 인사말인 "샬롬"(삿 18:6 ; 삼상 1:17)을 훨씬 능가하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제공하신 것이다(요 14:27). 이 "평안"에 대해 혹자(Anderson)는 말하기를 "여기서 꼭 내적인 고뇌로부터의 해방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가짐으로써 얻게 되는 생명의 완전
======5:35
아직 말씀하실 때에 - 마다의 현장감 넘치는 서술 기법이 또 한 번 돋보인다. 여기서 이야기는 급전환된다. 혈루증 치유 기적으로 무리들과 함께 멈추어서 지체하는 사이에 야이로의 집으로부터 전갈이 왔다. 물론 지금껏 예수 곁에서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던 야이로의 마음은 탈대로 다 타버린 상태였을 것이다. 그러한 애타는 상황 가운데 전해 진 내용은 야이로의 딸이 죽었다는 사실이다. 이 이야기는 혈루증 치유와 예수의 구원 선언으로 고조된 분위기를 잠재우는 소식이었다.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 여기서 "죽었나이다"(아페다넨)는 제 2과거 직설법의 형태를 취하고 있어 그 죽음이 변할 수 없는 확실한 사실임을 보고하고 있다. 따라서 이제는 더 이상 손 쓸 필요가 없다는 암시를 주고 있다.
어찌하여 선생을 괴롭게 하나이까 - 이는 더 이상 희망이 없는 상황을 강하게 묘사하고 있다. 즉 야이로의 딸의 죽음을 전한 자는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예의 바르고 합리적인 발상으로써 예수를 더 이상 괴롭히지 말 것을 간한 것이다. 한편 본문의 "괴롭게 하다"란 뜻의 원어 (스퀼로)는 원래 짐승의 가죽이나 나무의 껍질을 벗길 때 사용하던 말로서 가혹하리만치 혹독한 고통이나 쓰라림을 뜻한다(마 9:36). 따라서 이 말은 더 이상 예수를 "귀찮게 하거나 마음에 부담을 주지 말라"는 매우 단호한 요청으로 볼 수 있다.
========5:36
곁에서 들으시고 - 야이로의 딸이 죽었다는 사실을 예수께서 직접 들은 것이 아니라 심부름꾼이 야이로에게 하는 말을 "엿들으셨다"(파라쿠사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이 전한 말을 아예 무시하셨다. 실로 예수의 생명을 충성하게 하시는 사역 앞에서 이같은 절망적 소식은 아무런 가치가 없었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계속 당신이 목적하신 바를 추진해 가셨고, 더불어 딸의 죽음 소식 앞에 절망하고 있는 야이로를 격려하셨다. 이에 예수는 절망에 사로잡힌 야이로를 향해 희밍을 선언한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메 포부 모논 피스튜에) - "두려워 말라", "믿기만 하라"는 이 이중 명령은 모두 현재형을 취하고 있어 그 같은 상태를 계속 유지하라는 엄명이다. 이는 곧 죽음의 소식에 마음 흔들리지 말고 지금껏 나를 향해 지니고 있었던 그 믿음, 그것을 계속하여 지니라는 말씀이다(롬 4:20, 21). 실로 예수는 당신의 신적 본성을 의지하고 죽음을 훨씬 뛰어넘는 당신의 초월적인 능력을 계속 바라보게 하신 것이다 두려움과 믿음은 항상 적대적 관계이다. 따라서 극한 절망 속에 있을 바로 그 시점에 모든 부정적 요소(두려움)를 떨치고 절대적 존재이신 예수를 절대 신뢰하는 것은 참 용기요 참믿음이다. 예수께 지속적 신뢰를 갖는 이 믿음이야말로 곧 생명의 유일한 열쇠이다.
====5:37
베드로와 야고보와. . . 요한 - 여기서부터 예수의 동행인이 제한된다. 즉 베드로아 야고보 그리고 요한만 예수와 동행한다. 예수께서는 지금 곧 일어나게 될 생명의 이적을 직접 확인하고 후세에 전할 증거자로 3인의 가장 친밀한 제자를 선택하신 것이다(신 19:15). 이 외에도 변화산 사건 때에도 이 세 제자가 언급되었고(9:2 ; 마 17:1 ; 눅 9:28), 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할 때에도 이 세 제자의 이름이 거론된다(14:33 ; 마 26:37). 이 사실로 미루어 예수는 제자들 중에 이 세 제자를 가장 신뢰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예수께서 이 세 사람 외에 다른 여타의 사람을 물리신 이유는 확실치 않으나 아마도 당신의 사역의 진지함을 더하게 하시기 위해서 이거나(구경거리로 삼게 되지 않기 위해) 또 다른 방해 요인을 제거하기 위해서 였을 것이다. 혹자(Robertson)는 야이로 가정의 주택 구조가 작았기 때문이라고 하는 재미있는 이유를 제시하기도 하나 당시 야이로가 사회적으로 유력한 인사였다는 점에서 그의 주택이 내우 협소했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는 주장이다.
=========5:38
훤화함과. . . . . 울며. . . . . 통곡함 - 여기서 "훤화함"이란 어지러울 정도로 시끄러이 떠드는 것을, "심히 통곡함"이란 마치 꽹과리가 울려 대듯이 크게 울어대는 상태를 일컫는 말이다. 예수께서 야이로의 집에 도착하였을 때 이미 집안은 초상집의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모여서 시끄럽게 떠들며 통곡하고 있었다. 마태복음에서는 피리를 불고 소란스럽게 떠들고 있음을 묘사한다(마 9:23). 유대인들의 장례식은 흔히 정중한 분위기 보다는 조금 격앙스럽게 피리를 불고 통곡하며 소란하다. 또 돈을 주고 사람을 고용하여 피리를 불고 울게도 하였다. 이처럼 직업적으로 울어 주는 자들은 주로 여인드로서 머리카락을 풀어 헤치고 대성통곡하는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그 통곡 소리는 가슴 또는 손바닥을 치며 함창 혹은 교창(交昌)으로 이뤄 다. 한편 사ㅚ적으로 유력한 인사였던 야이로 집안이었기에 이러한 고용 통곡꾼 뿐 아니라 많은 조문객(弔問客)과 가족 친지들을 합한다면 야이로의 집은 참으로 혼란스러웠을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풍경은 죽음의 절망감과 함께 정신 못차릴 정도의 소음과 호란스러움으로 인해 또다른 절망감으로 들어가세 한다. 어쨌든 야이로 집에 모여든 사람들은 다만 슬퍼하거나 그 아이의 죽음을 이용하여 자신의 이익을 챙길 뿐 그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거나 야일로 집안에 궁극적인 평안을 제공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5:39
어찌하여 훤화하며 우느냐 - 예수께서는 절망적인 초상집 분위리를 극적으로 전환시키고 있다. 즉 장례 풍습에 따라 통곡하며 소람스럽게 떠드는 행위를 급지시키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이 말씀을 달리 표현하면 "어찌하여 이처럼 야단들이냐 이제 그만 치우라"는 뜻이 될 것이다. 그 이유는 아이가 죽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 혹자는 이를 축어적(逐語的)으로 해석하여 아이가 정말 죽지 않고 단지 기절한 상태에 있었다고 주장한다(Olshausen). 그러나 누가의 기록(눅 8:55) 중 "그 영이 돌아와"라는 표현에서 보듯이 그 아이는 분명 영(靈)과 육(肉)이 분리된 죽은 상태에 있었다. 그리고 죽은사람을 잠자는 것으로 표현하는 것은 헬레니즘(Hellenism)과 유대 문화권에서 나타나는 완곡 어법이다(창 47:30 ; 단 12:2 ; 요 11:11 ; 행 7:60 ; 고전 15:18 ; 살전 5:10). 특별히 생명과 부활(Resurrection)의 주이신 예수께서 인간의 죽음을 바라보실 때 그것은 영원한 허무나 절망이 아니라 잠시 잠간의 잠에 불과한 상태였음이 분명하다. 특별히 이 말씀은 그 소녀의 소생을 전제한 말씀이라는 점에서 볼 때 비록 죽음의 실재성은 명확한 사실이나 그것은 단지 한시적(限時的)인 수면 상태와 같은 것에 불과했던 것이다(고전 15:51).
진정 죽음과 삶의 지배권을 가지신 이 예수의 말씀은 모든 죽은 자와 죽어가는 우리 인생들에게 부활의 아름다운 희망을 갖게 하는 복음이 아닐 수 없다(욥 19:25 - 27).
=====5:40
저희가 비웃더라 - 예수께서 선언한 희망의 믿음이 다시 한 번 절망의 벽에 부딪힌다. 즉 인간의 죽음을 영구한 종말로 보았던 주변의 사람들이 본질적(本質的)으로 무지한 자신들의 실상은 파악하지 못하고 오히려 예수의 무지를 비웃었던 것이다. 여기서 "비웃더라"(카테게론)는 단어는 미완료 시제로서 그들의 조롱섞인 비웃음이 계속되었음을 보여 준다. 어쨌든 이 비웃음은 결과적으로 그 소녀의 죽음이 현상적(現象的)으로 명확한 사실이었다는 점과 또 이후에 그 소녀를 살리신 예수의 능력은 참으로 신비하고 초월한 이적이었음을 반증하는 일이 되고 말았다.
저희를 다 내어 보내신 후에 - 여기 "내어 보내셨다"(에크발론)는 말은 강압적으로 몰아내셨다는 뜻으로 위엄에 찬 예수의 권위를 엿보게 한다. 실로 예수는 당신의 능력과 존재를 부인ㅇ하고 희심하는 자들은 생명의 기적을 체험하는 특권에서 제외시키고자 비난과 조소로 일관하는 무리들을 매몰차게 쫓아내셨다. 그리고 그곳에 당신의 이적의 세 증인(제자들)과 그 아이의 부모만을 동참케 하셨다. 이 장면은 한 방문객에 불과한 예수가 그 집의 참 주인으로 향사하시는 기이한 모습을 보여 준다(Benger, Robertson). 실로 예수가 주인으로 있는 가정은 곧 생명의 기적을 맛볼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질 것이다.
========5:41
아이의 손을 잡고 - 예수의 치유 행위는 다양하게 나타난다. 여기서는 아이의 손을 잡는다. 이는 죽음을 향해 뻗는 생명의 손길로서 처음 야이로가 바닷가에 찾아와 예수께 간청할 때 아이에게 손을 얹어 달라고 한 사실을 기억나게 하는 장면이다(23절). 이처럼 어린아이의 손을 잡는 예수의 모습은 참으로 진지하고 애정어린 인자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절망에 처한 사람을 주님이 손잡아 주리라는 표현은 출 3:20 ; 7:5 ; 시 37:24 ; 눅 1:66 ; 행 11:21 등 여러 군대 나타난다. 진정 주님은 절망 속에 헤메이는 영혼들의 손을 부드럽게 잡으시고 참생명에로 인도하시는 친절한 안내자요 신실한 보호자가 되신다(시 23:2, 4). .
달리다굼(탈리타 쿰) - 이 말은 예수 당시 팔레스틴에서 통용되던 아람어 탈리타 쿰에서 유래한 말로서 "탈리다"(소녀야란 뜻)와 "쿰"(일어나라는 뜻)의 합성어이다. 이를 번역하면 "소녀야 일어나라"는 말이다. 그런데 본문에서 해석할 때 "내가 네게 말하노니"라는 말을 첨가시키고 있다. 이것은 "달리다굼"이라는 말이 어머니가 아침에 아이를 깨울 때 사용하는 평범한 일상어라고 보았을 때, 그 말의 신적 권위를 높이기 위해 마가가 추가시켜 해석한 첨가어로 보인다. "달리다굼"이라는 말은 여기서만 나오고 마태복음(일으키시는 행동만 기록)과 누가복음(번역문만을 기술)에서는 이 말이 없다. 여기서도 사실성과 생동감(生動感)을 특히 강조하는 마가의 문장 기법이 돋보인다. 즉 마가는 주님께서 친히 사용하신 아람어의 이 단문을 마치 현장을 재현하듯 분명히 기록하여 독자들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는 것이다. 한편 마가는 이 아람어와 함께 번역문을 병기함으로써 아람어에 생소한 이방 독자들을 향해 성실한 노력을 보여 주고 있다.
소녀야. . . . . . . . 일어나라(토 코라시온. . . . . 에게이레) - 여기서 "일어나라"는 뜻의 "에게이레"는 2인칭 단수 현재 명령형으로서 단호하고도 권위에 찬 예수의 명령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사실 이 말은 앞에도 언급했듯이 해가 뜨는 아침에 부모가 아이를 사랑스러운 어조로 깨울 때 흔히 쓰던 말이었다는 점에서 본 장면은 새 아침의 환희와 정겨움을 더해 준다. 실로 생명(生命)과 부활(復活)의 새 지평을 여신 예수께서는 친히 그 아침을 마면하셨을 뿐 아니라 모든 죽어 있는 영혼들에게 그 아침을 맞이하도록 "달리다굼"으로 친히 깨우고 계신 것이다.
====5:42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 여기서는 치유의 결과가 즉각적으로 나타난다. 즉 예수의 말씀대로 일어났을 뿐만 아니라 걸었다고 묘사한다. 더욱이 마가는 "일어난"(아네스테) 동작을 단순 과거 시제로 처리하고 곧이어 "걸어다닌"(페리에파테이) 동작을 미완료 시제로 묘사하여, 즉각적으 로깨어나 계속 방안을 이리저리 걸어다닌 사실을 생생히 기록하고 있다. 특히 그녀의 나이가 12세였다는 사실은 그녀의 동작이 얼마나 가볍고 발랄했을까 하는 상상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실로 그녀는 생명은 물론 원기(元氣)까지 회복하였던 것이다(Swete). 한편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걸었다는 이야기가 없다. 그 이유는 소녀가 다시 살아난 사실에 모든 관심을 집중시켜 기술하고자 했던 기록적 특징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소녀의 나이가 12살이라는 사실을 누가복음에서는 이 이야기의 첫 부문에서 밝혔지만(눅 8:42) 마가는 이야기의 마지막에서 밝히고 있다. 실로 이 12살이라는 나이는 인생에 있어서 이제 막 꽃이 피려는 시기(유대법상으로는 만 12년 6새월 이후에는 겨혼 가능 연령이 됨)이다. 특이한 점은 소녀의 나이와 이야기의 중간에 일어났던 혈루증에 걸린 여인의 투병 기간이 같은 12년으로 일치하고 있는 점이다. 성경에서 이 "12"라는 숫자가 완전수인 동시에 하나님의 경륜과 계획의 성취를 나타내는 수라는 사실과 연결하여 생각해 봄직하다(창 49:28 ; 겔 43:16 ; 계 21:12, 14).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 소녀의 소생과 원기 회복은 주위 사람들에게 정신을 잃게 할 만큼 큰 충격으로 다가갔다. 여기서 놀라는 사람들은 40절에서 언급한 사실로 미루어 소녀의 부모와 요한, 베드로, 야고보이었을 것이다. 그 중 누가의 기록에 의하면 그 부모가 가장 큰 충격을 맏은 것으로 나타난다(눅 8:56). 특히 마가는 그들이 놀란 것을 "크게"라는 말과 "놀라거늘"이라는 반복법을 통하여 그들이 마치 황홀지경(恍惚之境)에라도 빠진 듯이 완전히 이 나간 상태에ㅔ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 기적은 둔중 속에서 공개적으로 일어난 혈루증 치유 기적과는 전혀 달리 실내에서 그리고 몇 명 안되는 목겨자만 있는 은밀한 곳에서 조용하게 일어난 점이 특징적이다.
========5:43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 - 여기서 예수는 또 다시 기적적인 사건에 대해 목격자들에게 비밀로 할 것을 명령한다(1:44 ; 3:12 ; 마 12:16 ; 16:20 ; 17:9 ; 눅 8:56). 이것은 귀신들린 자를 치유하고 그 사실을 알리라고 한 점과(19절) 혈루증 환자의 치유를 공개적으로 선언한 사실(34절)과는 대조적이다. 예수의 이 같은 행위는 메시야의 자기 공개 시기가(마 16장) 이를 때까지 언제나 그러했듯이 당신의 놀라운 이적과 가사에 관한 소문이 대중들에 의해 문제화(問題化) 되지 않게 되기를 바란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 아이가 살아난 것을 비밀로 하기에는 불가능하기 때문에(이미 많은 사람들이 아이의 죽음을 알고 있었고, 따라서 그 부모들이 그 아이들을 숨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여기서 마가는 메시야 은닉의 주제(Messianjc - secret motif)를 인위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에 대해 혹자(Cranfield)는, 예수께서 그러한 말씀을 한 것은 그 일을 절대적으로 비밀에 붙이라는 의미로 한 것이 아니라 단지 가능한 한 그 일이 널리 알려지지 않기를 원했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즉 알 필요가 없는 자들에게까지 그 기적에 대해 알게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실로 메시야로서 예수의 신성은 그것을 믿을 준비가 되어 있는 자들에게는 공개되지만 그것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감춰진다. 어쨌든 마태는 그 소문이 온 땅에 퍼진 사실을 보고하고 있다(마 9:26).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 이 명령은 소녀가 완벽하게 다시 살아났음을 확인하게 한다. 즉 모든 몸의 기능이 정상적인 모습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이는 즉각적이면서도 완전한 인간 회복이요, 부분적 구원이 아니라 전체적인 구원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예수의 치유 기적을 소개한 본장에서 치유 받은 모든 사람들의 완전한 회복이 강조되었다. 귀신들린 자는 가족과 사회 공동체로 복귀함으로써 구원을 받았고 혈루증 환자 역시 근본적 치료로써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 문제가 모두 해결되었다(34절 주석 참조). 아야로의 딸도 죽은 것이 아니라 잠자는 것이라고 말하심으로써 소녀에게 전혀 이상이 없음을 말리면서 정상적으로 잠에서 막 깨어난 아이처럼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신 것이다. 한편 예수의 이 같은 명령은 전인적인 생명을 다시 제공하신 크나큰 사랑과 더불어 그 아이가 몹시 아파있을 동안 매우 굶주려 있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아시고 그 아이에게 자상하게 먹을것까지 제공하게 하시는 당신의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사랑을 보여 준다. 진정 예수는 영혼의 문제뿐 아니라 육신의 문제까지도 해결하시는 궁극적인 해결자이셨던 것이다.
예수의 사역이 확대됨과 아울러 예수께 대한 핍박의 기세가 더욱 고조되며, 이에 비해 예수의 사역은 점증되는 핍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점차 확대되어갔다는 사실에 관해서는 3장 강해에서 이미 설명한 바 있다. 종의 사역과 종에 대한 핍박이라고 하는 이 대조적인 두 주제는 본서 전체에 걸쳐 교차되거니와, 본장에서는 다시 종의 권능과 사역에 초점을 맞추어져 있다. 전후 문맥이나 내용 분석상 본장에서 주의깊게 고찰되어야 할 사항은 다음과 같다.
(1) 종의 위대한 치유 권능을 보여 준다. 4:35-41 강해에서 짧게나마 언급하였듯이, 본장 또한 4장의 비유에 등장하는 하나님 나라의 설립으로부터 완성까지의 전과정을 주관하시는 분이 바로 예수이심을 증거하는 역할을 한다. 4:35-41에서는 자연계를 지배하시는 창조주로서의 예수의 권세를 보여주거니와, 본장에서는 위대한 의사이신 예수의 권능을 소개한다. 이러한 여러 이적적 권능들은 하나님의 아들이자 메시야로서의 예수의 신분을 분명히 입증하고 있다. 예수는 인류 구원을 위해 스스로를 비어 종의 형체로 낮아지셨지만 본질상 하나님과 하나이셨던 것이다(빌 2:7).
(2) 종에 대한 핍박을 고조시키는 주요 요인을 보여 준다. 서두에서 말하였듯이, 예수의 사역이 날로 확대되고 놀라운 이적적 권능을 목격한 무리들의 환호 소리가 높아감에 따라, 대적들의 핍박 또한 한층 교묘(巧妙)해지고 악랄해져 갔다. 이러한 맥락에서 다음장인 6장은 예수께 대한 대적들의 핍박이 고조되는 상황을 간접적으로 암시하기 위해 고향 사람들의 배척 기사(6:1-6) 및 세례 요한의 순교 기사(6:14-29)를 소개하고 있다 하겠다.
(3) 봉사하시는 종의 모습을보여 준다. 본장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의 놀라운 권능을 증거할 뿐만 아니라 온갖 질병과 죄악으로 신음하는 인생들을 긍휼히 여기사 그들을 사랑의 손으로 어루만지시는 종의 봉사를 표현하고 있기도 하다. 예수께서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소유하셨지만, 이 권세를 군림하거나 자신의 명성을 떨치는 데 사용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인들을 위해 섬기며 봉사하는 데에 사용하셨다. 장차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것이었지만, 이 또한 권세와 권능이 없어서가 아니라 오직 인류를 향한 간절한 사랑 때문에 스스로 택한 고난과 죽음의 길이었을 뿐이다.
한편 본장에는 세 치유 기사가 수록되어 있는데(1-20, 21-34, 35-43절), 이 세기사에서 나타나는 공통점을 살펴봄으로써 본장의 강해를 끝맺기로 하자.
첫째로, 이들 세 치유 기사에는 공히 유대 의식법상 불결하게 여겨지던 것들이 등장한다. 즉, 귀신들린 사람이 그 사이에 거했던 '무덤'(3절), 혈루증 걸린 여인의 '피'(25절) 그리고 야이로의 딸의 '시신'(35절;레 21:1) 등이 그것이다.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이 의식법상 불결하다고 여겨 접근하기를 꺼려했던 자들에게 가까이하사 치유하심으로써, 형식에 얽매인 자들에게(3:4) 무언의 책망과 아울러 병들고 상한 자들에 대한 당신의 크신 긍휼과 사랑을 밝혀 보여 주셨다.
둘째로, 본장의 세 기사는 한결같이 치유함 받은 과정을 극적인 상황으로 묘사함으로써 주님의 이적적 권능의 탁월성을 여실히 부각시키고 있다. 즉, 아무도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광폭하게 날뛰던 광인이 온전해진 것이나, 열 두 해를 앓으면서 온갖 약을 다 써 보아도 효험이 없던 혈루병 환자가 예수의 옷에 손만 대고도 나은 사실 혹은 장사 지낼 준비를 하고 있던 죽은 아이를 한 마디 말씀으로 소생시키신 것 등이 모두 극적이라 하겠다.
1. 귀신들리 광인을 치유하심(5:1-20)
예수께서 귀신을 내어쫓으신 기사는 본서의 곳곳에 등장하지만(1:21-28;3:7-12등) 전후 상황을 본문처럼 소상하게 묘사한 예는 없다. 그리고 마 8:28-34;눅 8:26-39에도 평행 기사가 나오지만, 그중 본문이 가장 자세하게 소개한다. 귀신들림과 축사에 관한 내용은 9:14-29 주제 강해에서 다루었으니 참조하기 바란다. 그리고 마 8:28-34의 강해에서는 예수의 자기 계시적 측면, 곧 예수의 메시야적 권세를 부각시켰거니와, 본 강해에서는 주께서 크신 사랑과 선을 베푸시고도 오히려 경원시당하신 사실에 좀더 유념하기로 하자.
(1) 예수의 크신 긍휼. 풍랑을 잠잠케 하신 4:35-41의 이적 기사와 마찬가지로 본문 또한 예수의 메시야적 권능을 증거하시고 있음은 앞에서 언급한 바 있고, 마태복음 평행 기사의 주해에서도 집중적으로 다루었으니, 여기서는 사단의 잔인성과 귀신들린 자의 비참함 및 이에 대한 예수의 크신 긍휼에다 초점을 맞추어 보자.
무덤 사이에 거하면서 밤낮 소리지르며 돌로 자해 행위를 일삼는 광인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사단의 잔인한 파괴성을 절감할 수 있다. 실로 사단은 인간을 죽이고 멸망시키는 일에 골몰할 뿐이다(요 10:10). 때로 사단은 고아명의 천사로 가장하여 나타나기도 하고(고후 11:14), 달콤한 말로 유혹하기도 하지만, 그러한 사단의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과 인간사이를 이간시켜 파멸로 이끄는 것이다. 사단 자신 또한 영원한 파멸에 처해질 운명이기 때문에 사단의 달콤한 유혹에 넘어가는 자들의 궁극적 운명은 불을 보듯 환한 것이다(계 19:20).
어쨌든 이처럼 포악한 사단의 공략을 받아 함몰되어 버린 영혼과 정신 및 육체를 지니게 된 그 광인은 그야말로 가장 비극적인 인간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예수께서는 바로 이렇게 상실한 인격, 절망적인 영혼에게 찾아오셔서 당신의 다함없는 사랑과 완전한 구원의 은총을 제공하셨던 것이다. 실로 이것이 당신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목적이기도 하다. 더욱이 예수는 당시 사회로부터 완전히 소외된 그 광인을 소생시키기 위해 주변에 있던 약 2, 000마리의 돼지 떼를 희생시킴으로써 인간을 향한
당신의 크신 긍휼을 나타내 보이셨으며 천하보다 귀한 인간의 존엄함으로 재천명하셨다(요 21:26).
(2) 배척받으신 예수. 본문에도 예수께서 그 크신 긍휼대로 은혜를 베푸셨음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배척당하시는 고난받는 종의 모습이 나타난다(17절). 거라사인들은 한 영혼이 귀신의 올무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된 엄청난 축복과 은혜에 대해 감격하기 보다는 이천 마리의 돼지떼가 몰살당함으로 말미암은 경제적 손실에 연연하여 예수를 경원시하였다. 이는 인생의 근본 문제 보다는 목전의 현실적 손익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현실주의와 남이야 어떻게 되든 자신의 일만 염려하는 이기주의를 보여 주는 실례라 하겠다.
요컨대, 우리의 주위에는 우리를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사단의 세력이 항상 기회를 엿보고 있다. 사단은 불순종의 아들들의 마음속에서 역사하며(엡 2:2), 할 수만 있으면 택한 자들마저 미혹케 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마 24:24). 본문의 광인과 같이 꼭 귀신들린 상태는 아니라 할지라도 사단의 역사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이 각종 환난과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거라사 광인의 참담한 발작은 어쩌면 죄악 속에서 허둥대는 인생의 가련한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비참한 상황에로 몰아넣는 사단의 계교(計巧)를 분쇄하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엡 6:11).
* 예수의 행적. 이천년 전, 수많은 선지자들과 주의 백성들의 고대하던 메시야가 이스라엘 한 작은 마을에 탄생하셨다. 그리고 30년 후, 그분은 지금까지의 자신의 개인적인 삶을 마감하시고 마침내 인류 구원을 위한 위대한 공생애를 시작하셨다. 불과 3년, 아주 짧은 공생애 기간이었지만 그분은 우리의 영혼을 살찌우는 수많은 말씀과 우리의 삶에 기쁨과 희망을 불어넣는 수많은 이적을 이루시면서 그 흙먼지 나는 팔레스틴의 고을과 산야(山野)를 찾아 다니셨다. 오직 잃어버린 백성, 절망한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말이다. 이제 3여년 짧은 세월 동안 그분이 순례하셨던 팔레스틴의 여러 곳을 추적해 보면서 땀내음 나는 그분의 그 진한 사랑과 은혜를 다시 한번 회상해 보기로 한다.
2. 혈루증 앓는 여인을 고치심(5:21-34)
혈루증에 걸린 여인에 대한 치유 기사(25-34절)는 야이로의 딸을 소생시키신 내용(21-24, 35-43절) 사이에 삽입되어 있다. 이러한 삽입 기사는 시간의 경과를 알려줌과 아울러 본치유기사의 긴박감을 극적으로 고조시키는 효과를 드러낸다.
마 9:20와 눅 8:43-48에도 본문과 평행을 이루는 내용이 나오지만 간략한 언급에 그칠 뿐이며, 그 중 본문의 기록이 가장 상세하다. 즉 본문에는 여인이 혈루병에 걸려 고생하는 모습과 예수께 나아와 치유함받는 과정 등이 비교적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물론 본문에서 이야기의 초점은 병자를 긍휼히 여기사 그 질병을 치유해 주신 예수의 권능과 자비에 맞추어져야 하지만 편의상 내용 전개의 순서에 따라 혈루병에 걸린 여인의 투병 과정과 믿음 그리고 결과적 축복 등의 순서로 고찰해 보기로 하자.
(1) 투병 과정. 마가는 이 여인의 절망적인 상황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12년 동안 수시로 하혈하는 심각한 병을 치유하기 위해 이 여인은 유명하다는 의원을 다 찾아다니며 온갖 종류의 치료를 다 받아보느라고 갖가지 고통을 당했으며, 그 결과 가산마저 탕진하는 이중 삼중의 난관에 처해 있었다. 모진 질병에 걸려 완치를 쉽사리 낙관(樂觀)할 수도 없는 처지에서 수술실로 실려 들어가는 경험을 해본 사람은 이 여인의 답답한 심경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건강할 때는 건강의 소중함과 고마움을 별로 느끼지 못하다가 막상 병상에 드러눕게 되면 건강이 최상의 소원으로 부각되며 다른 어떤 것을 다 허비하면서라도 건강하게만 될 수 있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이 여인 또한 이와 동일한 생각에서 모든 것을 허비하였지만 남은 것은 더 악화된 질병이었으므로 그 절망감이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을 터였다.
(2) 여인의 믿음. 이 혈루병 걸린 영인은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 본 후 그 한계에 직면하여 자포자기 상태에 있던 중 예수에 관한 소문을 듣고 나아왔다. 물론 이 여인의 마음속에는 물에 빠져 허덕이는 자가 지푸라기라도 잡아 보려 한다는 식의 심리가 작용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전후 문맥으로 미루어 보건대, 우리는 그런 식으로만 단정할 수는 없으며 오히려 예수의 신적 권능을 확신한 여인의 신령한 믿음의 눈에 주목하게 된다. 여인이 치유함받기 위해 예수의 겉옷을 만진 것 또한 다분이 미신적인 느낌을 주지만, 오히려 역(逆)으로 여인의 큰 믿음을 보여 주는 행동이라 할 수 있다. 여인은 혈루병이 의식법상으로 부정하게 여겨짐을(레 15장) 알았던 까닭에 감히 예수 앞에 나서지 못하고 비록 예수와 직접적으로 대면하지 않더라도 그의 옷에 손만 닿는다면 자신의 병이 나으리라고 굳게 믿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중요한 것은 여인이 예수의 옷을 만진 것 자체가 아니라 옷을 만지는 행동 이면에 있는 절박감과 굳은 확신이라 하겠다.
(3) 결과적 축복. 예수께서는 여인이 몰래 자기 옷에 손을 대어 치유받은 사실을 알고서 그 여인을 찾으셨다(32절). 이는 그 여인을 꾸짖기 위함이 아니라 그녀와의 인격적 만남을 통해 신령한 축복을 나눠주시기 위함이었다. 이 여인의 간절한 소망은 육신상의 건강을 회복하는 것이었지만 예수는 육신 뿐만 아니라 영혼까지 치유해 주고자 하셨던 것이다(2:5).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의 여러 치유 이적들은 병자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주님의 자비로우심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주께서 우리 영혼의 질병 곧 죄악을 치유하시기 위해오신 권세있는 분임을 입증하는 역할까지 하고 있다 하겠다.
전쟁터의 참호 속에서는 무신론자가 없다는 말이 있듯이, 인생의 벼랑에 서서 극적으로 신앙을 갖게 되거나 새로이 회복하는 경우는 흔하다. 하지만 우리는 상황과 여건에 관계없이 늘 주께 의탁, 헌신함으로써 모든 무력감과 좌절, 고뇌와 번민, 타락과 방종 혹은 이기나 교만으로부터 벗어나는 복된 삶을 누려야겠다.
* 성경에 나타난 육체의 질병들. 이스라엘 백성은 아열대성 기후로 말미암아 생기는 질병에 잘 걸렸던 것 같다. 그러나 구약 시대에는 물론이고 신약 시대에 이르러서까지도 이스라엘인들이 가진 의료에 관한 지식은 극히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고대 팔레스틴에서 유행한 여러 질병들에 대한 성경상의 보고는 불충분한 것이다. 즉, 성경에는 열, 출혈, 고름, 가려움 등과 같은 증세만을 언급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병의 특징이 어떤 것인지에 관해 추측할 뿐인 경우가 많다. 다음에서 성경에 주로 등장하는 몇 가지 주요한 병에 대해 살펴보겠다.
(1) 문둥병. 이스라엘 사람들은 문둥병을 대단히 두려워하였다. 그 까닭은 이 질병으로 인해 생기는 신체적 괴로움 때문만 아니라 이 병에 걸리면 의식적으로 부정한 자로 간주되어 사회에서 엄격히 격리, 추방되었기 때문이다(레 13:24-46, 주제강해 '문둥병 규례의 제반 의의' 참조). 문둥병은 두 가지 주요 형태로 나타나는데, 첫번째는 레프로마투스(Lepromeatous)라고 명명되며 치료받지 않으면 치명적인 상태에까지 이른다. 두번째는 보다 양성적(陽性的)인 형태로서 투베르쿨로이드(Tuberculoid)라 명명되며 1-3년 내에 치유된다. 구약성경에서 치유함받은 문둥병자가 제사장에게 가서 확인받은 경우는 후자의 형태에 걸린 것으로 보인다(레 14:2-9).
(2) 간질. 유전이나 사고에 의한 뇌손상 등이 원인이며, 마 17:15-18의 경우에는 귀신들림이 원인으로 되어 있다. 증세로 환자가 갑자기 나뒹굴어지며 의식을 잃고 경련으로 인해 온몸을 떨며 입에서 거품을 흘리는 발작을 한다.
(3) 종기. 성경에서 사용된 종기라는 말은 여러 형태의 피부병, 곧 농포(膿疱), 단순한 종기, 뾰루지, 농양(膿瘍) 등을 망라했던 것 같다. 히스기야의 종기는 피부 깊은 곳에서 곪은 농양이었음이 분명하며(왕하 20:7), 애굽에 내린 여섯번째 재앙인 독종은 극심한 가려움 증세와 함께 물집이 생기고 급기야 화농해서 고름이 흐르게 되는 피부병이다(출 9:8-12).
(4) 하혈. 자궁 출혈 혹은 질 출혈의 원인은 대략 다음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는, 호르몬 불균형으로 인해 월경 주기가 늘어나거나 연속적으로 출혈이 빈발하는 경우이다. 둘째는, 유섬유종(Fibroid Tumors)으로 인한 출혈이며, 세째는 암의 초기 형태인 악성 종창으로 인한 출혈이다. 5:25에 나오는 여인은 아마 첫번째 혹은 두번째의 경우에 해당될 것이다.
(5) 설사병. 근동인들에 있어 이 병은 매우 흔했다. 때에 따라서는 치질로 발전하여 때때로 결장 하단부가 탈장(脫腸)되기도 하는데, 여호람의 병이 바로 이 경우에 해당한다(대하 21:18).
(6) 폐병. 이 병은 성경에 두 번 언급되며(레 26:16;신 28:22), 두 경우 모두에 있어 폐병은 이스라엘의 패역함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로 말미암아 생겼다.
(7) 소경. 이는 고대의 팔레스틴 지역에 있어 일반적인 질병이었다. 가난, 비위생적 생활 조건, 밝은 태양, 지나친 열, 불어오는 바람, 사고 등도 소경이 되게 하는 몇 가지 요인이었지만, 주요 원인은 전염성 병균에 대한 무지였다. 성경에 언급된, 날 때부터의 장님은(요 9:1) 아마도 눈의 임질이었을 것이다. 이 병은 산모의 질 속에 잠복하고 있던 임질균이 해산 당시 태아의 눈 속에 침투함으로써 생긴다. 그리고 드라코마로 인해 소경이 되기도 하는데, 이 질병의 전염균은 바이러스(virus)이다.
(8) 열병. 이스라엘의 여름철 기온은 매우 높았으나 이 뜨거운 공기를 조절하는 장치가 없었다. 따라서 뜨거운 뙤약볕 아래 힘든 육체 노동을 해야 하는 경우에는 일사병에 걸리기 쉬었다. 일사병의 특징은 체온이 106-7 F 가량 높아지면 계속 땀을 흘리고 의식을 잃는 데 있다. 신 28:22에 언급된 열병은 아마 이 일사병으로 짐작된다. 성경에는 이외에도 여러 질병들이 언급되나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3. 야이로의 딸을 소생시키심(5:35-43)
중간에 삽입된 혈루병 걸린 여인에 대한 치유 기사(25-34절)에 이어 본문은 22절로부터 시작된 야이로의 딸에 관한 이야기로 다시 우리의 주의를 집중시킨다. 본문의 사건에 담긴 의미를 상고하기 이전에 우리는 딸을 구하기 위해 예수 앞에 나아온 야이로의 모습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야이로는 회당장이라는 사회적 체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예수의 발 앞에 엎드려 간구하였다(22절). 이는 그가 딸을 구하기 위해 얼마나 노심초사하였는지를 보여줌과 아울러 예수의 치유 권능에 대한 강한 믿음을 가졌음을 시사한다. 그는 한 순간이라도 빨리 예수를 자기 딸이 누워있는 집으로 모셔 가고자 조바심내었으므로, 무리들 사이에 멈추사 혈루병에 걸린 여인을 고치시는 예수의 느긋하신 모습을 보고 인내의 한계점에 도달했는지도 모른다(시 13:1;69:3;119:82;요 11:6). 하지만 인간의 절망이 곧 하나님의 기회라는 사실을 확신하였다면 야이로는 그토록 조급해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이에 본문의 사건에 담긴 의미를 상고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생명의 주(主)이신 예수. 앞에서는 자연계를 다스리시는 창조주요(4:35-41), 또한 영계를 지배하시는 분(1-20절)으로서 자신을 계시하셨던 예수께서 이제 생명의 주인이 되심을 계시하신다. 본문 외에도 성경에는 죽은 자를 소생시키는 몇몇 이적들이 수록되어 있다. 하지만 엘리사가 수넴 여인의 아들을 회생시킨 것이나(왕하 4:32-37), 바울의 유두고를 살린 것과는(행 20:7-12) 달리, 예수는 자신의 능력으로써 죽은 여아를 살리심으로써 나사로를 살리실 때와(요 11:1 ff. ) 마찬가지로 당신의 신성(神性)을 밝혀 증거하셨다.
(2) 부활에 대한 예시. 죽은 아이를 살리신 사건은 예수께서 죽음을 물리치고 부활하사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실 것을 암시한다(고전 15:23). 첫 사람인 아담의 범죄 이후로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다가오는 저주가 되고 말았다(롬 5:17). 부유한 자나 가난한 자, 학식이 있는 자나 무식한 자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에게 죽음이 닥친다는 점에서 죽음은 차라리 공평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으로서 죽음 이후에는 심판이 있다고 성경은 증거한다(히 9:27). 따라서 심판 이후에 맞게 될 두번째 죽음 곧 영원한 지옥에 처하게 되는 것이야말로 가장 두려운 형벌이다(계 20:14). 예수께서는 죄악으로 말미암아 초래된 모든 저주들에서 인생을 해방시키기 위해 십자가를 대신 지셨을 뿐만 아니라 사흘 만에 부활하사 스스로 죽음의 권세를 잡은 사단을 물리치시고 당신을 믿는 모든 성도들에게도 동일한 부활의 새생명을 허락하셨다(시 49:15;요 5:25;6:40;요 11:25).
(3) 믿음의 중요성.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야이로는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버린 듯한 허탈감에 사로잡혔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는 '믿기만 하라'고 당부하셨다(36절). 죽음이라는 한계 상황 앞에서는 누구나 체념이 앞서게 마련이지만, 하나님은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전능자이시므로 모든 한계 상황을 타개하실 수 있음을 본문은 시사한다(롬 4:17).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하나님이 이루고자 하시는 일이 당신의 뜻에 부합되느냐 아니냐 하는 것이며, 2차적으로는 받아들이는 자에게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다. 실로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에 참여케 하는 으뜸가는 요소라 하겠으며, 인간측에 요구되는 최선의 노력이자 최소한의 노력이기도 하다. 요컨대, 본문은 혈루증 여인의 치유 기사와 함께(25-34절)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치유 이적의 근본 목적이 예수의 메시야적 신성을 증거하는 데 있었음을 보여 준다.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주께서 지금도 우리 속에 인격적으로 내주하사 역사하고 계심을 확고히 믿는 믿음은 불안과 절망의 자리를 평강과 소망의 자리로 변화시켜 줄 것이다.
(4) 제자화 훈련의 중요성. 공생애가 진전됨에 따라 예수께서 수많은 무리들에게 복음을 전하시고 그들의 질병을 치유하시는 사역을 계속해 나가셨지만, 갈수록 정예화(精銳化)된 소수 제자들에 대한 훈련과 교육에 비중을 많이 두셨음을 우리는 유의해야 한다.
야이로의 죽은 딸을 소생시키는 현장에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등 세 제자만 동행이 허락되었다(37절). 이들 세 사람은 변화 산상이나(9:2), 겟세마네 동산(14:33) 등 예수의 공생애 중 중요한 순간에 항상 예수 곁에 있었다. 수많은 추종자들 중 열 두 제자를 따로 세우신 예수께서는 열 두 제자들 중에서도 이 세 제자를 특별히 구별하여 장차 초대 교회에서 중추적 역할을 감당할 수 있도록 집중적인 훈련을 시키셨다(행 3:11-16;8:14, 25). 이 세 사람이 특별히 지목된 데 대해서 나머지 제자들은 인간적인 질투에 사로잡혔을지도 모른다(마 20:21). 그러나 이러한 선택은 주님의 주권적인 뜻에 의한 것이며, 또한 장차 탄생할 초대 교회의 전체 성도들의 유익을 도모하기 위한 목적에서 취해진 배려였기 때문에 이기적이며 편파적인 동기에서의 편애와는 차원이 달랐다.
오늘날 날로 심각한 양상을 띠어가는 교권주의도 그러한 섬김의 도를 망각함에서 기인한 것이다. 하나님의 교회 내에 여러 교직자들을 세우신 것은 세상 제도에서처럼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게 하시기 위함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하는 하나의 단일체 곧 한 몸을 세우기 위한 봉사자들로 삼으시기 위함이었다(마 20:25-28;고전 12:4-31).
* 예수 당시의 주요 사회 계층 및 종교 계층. 성경 본문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 중에 하나는 그 역사, 문화, 종교, 배경을 정확히 이해하는 일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배경 이해를 통해서 성경 시대 당시의 상황을 좀더 깊이 살펴볼 수 있으며, 그 성경 본문이 형성되게 된 이유와 목적을 추정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여기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활동하셨던 당시의 중요 사회, 종교 계층에 대한 대략적인 연구를 해두었다.
1. 사회 계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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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 분 | 특 징 및 역 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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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회당의 우두머리로 집회를 인도하고 회당 건물의 유지, 운용, |
| | 회당장 | 보존을 책임질 뿐만 아니라 예배 질서와 신성함을 유지하는 책 |
| | | 임을 맡고 있었으며, 또한 토라(율법)의 낭독이나 설교 등을 |
| | | 할당해 줄 권리를 갖고 있었다. |
| +----------+------------------------------------------------------------+
| 회당 | 핫 잔 | 회당의 서열 2위로 종교 회의의 지도자 역할을 하며 회당장의 |
| | | 조수로서 제반 직무를 수행하고 정리하였으며 후에는 기도를 |
| | (Hazzan) | 암송하는 일과 성서를 낭독하는 일을 맡았다. |
| +----------+------------------------------------------------------------+
| | 랍 비 | 랍비 학교를 졸업한 자들로 안식일에 회당에서 율법의 어려운 |
| | (Rabbi) | 점을 해석하고 가르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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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유대인의 최고 재판소였던 산헤드린에서 주로 제사장과 사두개 |
| | 산헤드린 | 인들로 구성된 72명의 공회원이 있었다. 대제사장은 이 집단의 |
| | 공 회 원 | 의장이었으며, 이들은 사법권과 행정권을 가진 영향력 있는 정 |
| | | 치적 집단으로 군림했다. |
| +----------+------------------------------------------------------------+
| 공회 | 지방 | 각 지방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처리하는 지방 공회에는 7-23명에|
| | 공회원 | 이르는 장로들로 구성된 공회원이 있었다. |
| +----------+------------------------------------------------------------+
| | | 산헤드린은 유대 백성에게 세금을 받아 총독에게 바치는 일을 |
| | 세 리 | 대행하였다. 이들은 이 일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세금 |
| | | 청부인, 곧 세리를 채용하였다. |
+------+----------+------------------------------------------------------------+
| | | 1년에 한 번 속죄일에 지성소로 들어가는 특권과 산헤드린 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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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제사장 | 장의 권한을 가졌다. 구약의 세습 제도가 중지되고 왕으로부터 |
| | | 임명되는 관행이 생기고 부터는 그 권위가 상당히 실추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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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 전 의 | 대제사장 차기 후보로서 희생 제사 집행에 있어서 대제사장을 |
| | | 돕고 경우에 따라 그 권한을 대행하였으며 산헤드린 회원이었 |
| | 두목 | 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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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전 | 수석 | 봉헌 제물과 성전 재정을 주관하는 상당한 권리자로서 산헤드 |
| | 제사장들 | 린 회원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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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반 | 1만 8천명에 이르는 이들은 24반열로 나뉘어져서 매년 두 번 |
| | | 일주일씩 성전 희생 제사를 수행하였다. 이들은 나름대로의 직 |
| | 제사장들 | 업을 가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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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레위인 | 1만여명에 이르는 이들은 24반열로 나뉘어 음악 및 다양한 형 |
| | | 태의 성전 봉사를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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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유대인들이 바벧론 포로로 잡혀 있을 때 율법에 대한 깊은 연 |
| 자유 | 서기관 | 구가 시작되었고 율법을 복사하는 전문가들이 생겼는데 이들이 |
| | | 서기관이다. 이들은 랍비, 율법사등으로 불리워지기도 하였는 |
| 처소 | (율법사) | 데 대부분 바리새인으로 각각 공공기관 또는 사설 단체에 속하 |
| | | 여 율법의 이론적 발전, 율법의 교수, 율법의 적용에 힘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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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종교 계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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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분 | 바 리 새 파 | 사 두 개 파 | 엣 세 내 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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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스라로부터 시작된 유| 다윗과 솔로몬 시대 때 | 마카비 전쟁 약 50년전 |
| | 대주의에 충성하는 한 | 유명했던 대제사장 사독| 제사장 제도가 속화되기|
| 기 | 부류가 마카비 시대 때 | 의 이름에서 기원된(삼 | 시작할 때, 헬레니즘에 |
| | 생겨났다. 이들은 '하시| 하 8:17) 이 집단은 하 | 반대하고 유대 정통주의|
| | 딤', '하시디안'이라 불| 스모니안 시대에(B.C.16| 를 표방한 집단이 나타 |
| | 리워진 경건 집단으로서| 6-63) 구체적인 집단으 | 났다. 이들은 처음에는 |
| | 에스라를 모세 다음가는| 로 두각을 나타내었다. | 작은 공동단체에 머물렀|
| 원 | 유대교의 창설자로 숭앙| 예루살렘 귀족이나 대제| 으나 B.C말에는 사해 엔|
| | 하였던 바리새파이다. | 사장 무리들로 구성된 | 게디에서 큰 집단을 이 |
| | | 이들은 A.D. 70년 예루 | 루었다. |
| | | 살렘 성전 파괴로 몰락 | |
| | | 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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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세 율법(토라) 외에도| 모세 오경만을 정경으로| 모세 율법을 기본으로 |
| 경 | 각종 구전 전승을 정경 | 인정하고 나머지 전승 | 다른 종교 서적을 심도 |
| | 과 동일하게 취급하여 | 문서들의 권위는 부인하| 있게 연구하였다. |
| 전 | 권위있고 영감된 것으로| 였다. | |
| | 인정하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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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자유 의지와 하나님 | 1. 제사 의식에 대해 지| 1. 율법의 각종 정결 |
| | 의 주권은 상충되지 | 대한 관심을 가졌다.| 예식을 철저히 지켰 |
| 교 | 않는다고 보았다. | 2. 인간의 자유 의지를 | 다. |
| | 2. 천사와 마귀는 체계 | 강조했다. | 2. 성전 제사에는 불참 |
| | 적인 계급 제도를 가| 3. 내세, 부활, 영적 세| 했으나 예물은 드렸 |
| | 지고 있다고 보았다.| 계, 천사와 마귀 등 | 다. |
| 리 | 3. 사후 세계와 영혼의 | 의 존재를 믿지 않았| 3. 경전 연구와 경전 생|
| | 불멸, 보상과 상급을| 다. | 활을 강조하였다. |
| | 믿었다. | | 4. 맹세를 중히 여기고 |
| | | | 영생을 믿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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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율법을 중요시하는 | 1. 사두개파는 당시 보 | 1. 극단적인 종파주의자|
| | 바리새인은 당시 민 | 수주의 자로서 민중 | 로 공동생활을 하였 |
| | 중들의 존경의 대상 | 들의 종교 성향을 이| 다. |
| | 이었다. | 해하지 못했다. | 2. 사유 재산을 부인하 |
| 특 | 2. 민중과 밀착된 그들 | 2. 민중들로부터 유리되| 고 검약한 생활을 하|
| | 의 교리는 신약 성경| 었으므로 민중들과 | 였다. |
| | 에 자주 등장하여 그| 더불어 생활하신 그 | 3. 노예 제도를 부인하 |
| | 리스도의 비판을 받 | 리스도와 큰 마찰을 | 고 결혼을 꺼려하였 |
| | 았다. | 일으키지 않았다. | 다. |
| | 3. 율법에 대한 집착과 | 3. 현세에 집착했으므로| 4. 숙명론적인 경향이 |
| | 더불어 이상적 메시 | 경건한 마음과 태도 | 있었다. |
| 징 | 야 왕국에 대한 소망| 를 상실하였다. | |
| | 이 강했다. | | |
| | | | |
| | 4. 그들의 교훈은 신학 | | |
| | 적인 면보다는 윤리 | | |
| | 적인 면이 강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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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건너편 - 이 말은 4:35에서 예수께서 언급한 "저편으로 건너가자"를 받고 있는 말이다. 여기서 "건너편"이란 호수 동쪽편을 가리킨다고 본다. 예수와 제자들은 항해 도중 한 차례 큰 풍랑을 통해 예수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한 뒤 예정했던 장소에 도착하게 된다.
거라사인 지방에 - 여기서 "거라사"는 지명에 대한 논란이 많다. 실제로 거라사 인들이 살고 있는 지방은 갈릴리 호수에서 약 30마일 동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이방 땅이기 때문에 과연 예수께서 그곳까지 갈 수 있었겠는가 하는 의문점이 있다. 따라서 이 지방의 성읍이 아닌 갈릴리 호수 가까이에 있는 한 작은 지방(地方)으로 이해할 수 있다(Donald W. Burdick). 더욱이 이곳은 호수 근처의 "가다라" 지방을 가리키는 말로 볼 수도 있다. 사실 마태복음에서는 본문의 사건이 일어난 곳을 "가다라"지방이ㅣ라고 펴기한다(마 8ㅣ28). 한편 이 지역의 지명에 대해서는 세 종류의 이름들이 발견된다. 즉 마가의 기록대로 "거라사"(게라세논), 그리고 마태의 기록대로 "가다라"(가다레논), 또 오리겐(Origen)이 주장한대로 "걸게사"(게르게세논)가 있다. 이에 대해 테일러(Taylor)는 말하기를 "이처럼 지명상의 차이점들이 발견되는 이유는 거라사(갈릴리 동남쪽으로 48km 지점)와 가다라(갈릴리 동남쪽으로 9. 6km 지점)가 갈릴리 호수에서 너무 멀리 떨어진 지점이며 깎아지른 산들이 갈릴리 호수로 이어져 있다는 기록 때문이다"고 했다. 그러나 마가는 이곳을 분명히 "가라사인의 지방"이라고 못박고 있으며, 이것은 그 도시에서 갈릴리 호수까지 미치는 전지역을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마 8:28의 "가다라"지방이라는 말도 이렇게 이해할 수 있음). 그리고 또 다른 한 가능성은 "거라사"라는 지명이 갈릴리 동쪽 해변에 위치하고 있는 마을, 즉 "케르사"(Kersa)와 동일 지역이라는 생각이다. 바로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40km 높이 정도의 절벽과 옛 무덤들이 있다고 한다(W. W. Wessel). 어쨌든 이 지방은 로마인들에 의해 10개의 도시가 세워진 "데가볼리"(20절)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대인 분 아니라 많은 이방인들이 함께 살았던 곳이었음이 분명하다.
=====5:2
배에서 나오시매 곧 더러운 . . . . 무덤 사에에서 나와 - 배가 도착하고 예수께서 배에서 내리자 곧 귀신들린 자를 만났다고 묘사하고 있다. 이 장면은 마치 배가 도착한 장소가 무덤 가까이인 것처럼 보이게 한다. 즉 무덤 사이에서 나오는 귀신들린 사람을 예수께서 막 만나는 장면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6절을 보면 멀리서 예수를 보고 귀신들린 사람이 달려왔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배가 닿은 곳이 무덤 근처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 한편 4:35의 상황으로 볼 때 이미 날이 저물었을 때였으므로 호수를 횡단(橫斷)한 후 거라사인의 지방에 도착했을 때에는 어두음이 짙게 깔려 있던 때였음이 분명하다.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 - 여기서 "귀신"(프뉴마티)은 문자적으로 숨, 바람, 기운, 생명, 영혼, 영(spirit), 유령, 귀신, 성령(the Holy Spirit) 등의 다양한 뜻을 갖고 있다. 그리고 "더러운"(아카다르토)은 "불순한", "더러운", "부정한" 등의 뜻으로 쓰인다. 직역하면 "부정한 영"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이는 선한 의지가 완전히 결여되어 버리고 오직 약령의 지배하에서 자기 파괴적인 우울 증세를 보이는 상태를 의미한다(1:23 주석 참조). 이에 대해 공동번역은 "더러운 악령 들린 사람"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한편 눅 8:27과 본문에서는 악령들린 사람이 단수이다(안드로포스). 그러나 마태복음에서는 두 사람으로 묘사된다(마 8:28). 아마도 이같은 차이점은 마태는 그 보고가 상세한데 비해 마가와 누가는 그 둘 중 가장 대표될 만하고 특징적인(치명적인) 한 사람을 강조하고자 했던 차이일 것이다(Calven). 나머지 한 사람은 여기 소개된 자의 휘하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Lenski).
==========5:3
무덤 사이에 거처하는데 - 3 - 5절은 귀신들린 자의 현상태를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팔레스틴에서는 죽은 자의 무덤으로 자연 동굴이나 석회암을 깎아 만든 무덤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마음에 거리낌만 없다면 이곳을 거처로 삼기에 적절했을 것이다. 더구나 공동 무덤은 귀신들이 좋아하는 곳이라는 일반적인 믿음으로 볼 때 귀신들린 자의 거처로는 안성 맞춤이었을 것이다. 이때 귀신들린 자는 아마도 동네에서 쫓겨나 절대적인 고독과 죽음과 같은 극악한 환경에 처하면서 내. 외적인 괴로움에 몸부림치고 있었던 것같다. 특히 "(거처)하는데"(에이켄)와 뒤에 나오는 ". . . . . 맬 수 없게 되었으니"(에뒤나토)라는 말이 모두 미완료 시제를 이루고 있어 그의 최악의 상태가 계속되고 있음을 알려 주고 있다.
아무나. . . . . . . 맬 수 없게 되었으니 - 사람들은 그 광인을 심히 두려워한 나머지 그를 묶어두기 위해 쇠사슬까지 동원하였다. 즉 그들은 오직 자신들의 불안을 극복하고 안전을 도모할 목적으로 그 광인의 몸을 쇠사슬로 묶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도무지 거친 그를 부드럽게 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파괴적이고 무진장한 힘을 제어하지 못했다. 한편 여기 사용된 "쇠사슬"은 일종의 수갑 내지는 쇠고랑과 같은 것으로 보통 사람이 풀 수 없는 매우 단단한 것이었던 듯하다. 그런데 그 광인은 이러한 결박을 떨쳐버릴 정도로 괴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나"(우데이스) 그를 제어할 수 없었다. 이러한 사실을 묘사함 헬라어 본문에는 세 개의 부정어(2개의 ou와 1개의 a가 소개됨)가 들어 있어 그 어려운 상황을 더욱 적나라하게 나타내 보이고 있다.
=======5:4
여러 번 고랑과 쇠사슬에 매였어도 - "여러 번 . . . . 매였어도"(폴라키스. . . . 데데스다이)는 완료 수동태 부정사 구조로 되어 있어 그가 과거에 완벽한 상태로 여져 있었던 것이(Robertson) 사실이었다는 것과 동시에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암시를 제공하고 있다. 한편 "고랑"(페다이스)은 발을 의미하는 "폐자"에서 유래한 말로서 발을 옭암배는 형구(形具)를 의미한다. 실로 그 광인은 이같이 발에 인 사슬과 손에 묶인 사슬을 모두 끊어버릴 정도로 강했기 째문에 그 어느 누구도 감히 그를 제어할 수 없었다. 이 같은 그의 처지에 대해 혹자(Jdhnson)는 "조울병 환자의 조증(躁症)의 상태를 생생하게 표현해 준 것이다"라고 언급했다.
끊고. . . . 깨뜨렸음이러라 - 여기서 "끊고"(디에스파스다이)란 문자적으로 "당기다"는 뜻의 "스파오"와 "둘"이란 뜻의 "디아"의 합성어로서 잡아뜯어 두조각 내버린 상태를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깨뜨렸음이러라"(쉰테트리프다이)는 말은 "비벼서 부수어버리다"는 뜻이다. 결국 이 두 표현은 그 광인의 행동이 얼마나 거칠고 무지막지했는지를 시사해 주고 있다.
아무도 . . . . 제어할 힘이 없는지라 - 3절에 이어 거듭 그의 괴력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 마치 그는 야생의 포악한 짐승처럼 흉포하게 굴었끼 때문에 인간적인 힘으로는 그를 꺾을 만한 자가 아무도 없었다. 실로 그는 예수가 오시기 전까지 가장 무서운 괴력을 발휘하고 있었던 것이다.
========5:5
밤낮 무덤. . . . 산에서나 - 광인(狂人)의 발작은 "시간"(밤낮)과 장소(무덤, 산)에 전혀 구애됨이 없이 계속되었다. 특별히 여기서 "밤낮"이라 한 것은 단지 ㅇ시간으로 특정할 수 없는 길고 긴 하루들의 연속을 암시하며, "무덤"과 "산"은 그의 비정상적인 생활상을 상징적으로 나타내 주고 있다. 즉 그는 정신 분열증적 증세로서 뜻 없는 언어를 사용하여 계속 고함쳐댔으며(미완료 능동태 분사), 또 "제몸을상하고 있었다"(카타코르톤 헤아우톤 리도이스) 여기서 "상하다"는 말은 완료적 의미로 사용되어 마치 부숴지게라도 하듯 자기를 짓이겨 깊은 상처를 입혔음을 보여 준다.
=======5:6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와 절하며 - 광인은 예수를 최초 목격했을 때 거의 발작적으로 적의를 품고 예수께로 질주해 왔을 것이다(눅 8:27). 그러나 그가 예수께 당도했을 때 직감적으로 그분의 초월적 권능과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권위를 발견하고는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여기서 "절하며"란 엄밀히 따져서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라고 번역하는 것이 좋다. 즉 그 귀신은 자기 앞에 서신 이가 자기보다 더 탁월한 분이심을 알아보고 경읠글 표한 것이다. 물론 이것은 신앙적 경배가 아니라 단지 지적인 굴종에 불과하다(약 2:19). 이로써 예수는 자연계를 지배하시는 분일 뿐 아니라(4:35 - 41) 당신의 권위로 영계(靈界)도 능히 지배하시는 초월자이심을 드러내 보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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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소리로 부르짖어 가로되 - 예수께 접근하는 귀신들의 특징적인 모습이다(1:23).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 귀신은 예수의 신성을 믿는 신앙 고백으로서 이 말을 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예수를 자기와 떼어 놓을 생각으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어쨌든 그의 저의(底意)가 불순한 것이었다 하더라도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곧 메시야로 확신한 것은 그의 영적 감지력이 상당히 탁월했음을 보여 준다(1:24 주석 참조). 한편 겨기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라는 극존칭을 사용하는 것은 하나같이 절대 지존자이신 하나님을 가리킨 표현이다(눅 1:32, 35, 76 ; 행 7:48 ; 16:17 ; 히 7:1).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티 에모이 카이소이) - 히브리인들이 대인 관계에서 흔히 사용하던 관용적 표현으로서 "나를 버려두고 네 일에나 신경쓰라"는 뜻이다(1:24). 이에 대해 공동번역에서는 "왜 저를 간섭하십니까"라고 번역되어 있다. 이같은 표현은 귀신이 예수에게 간청하는 부르짖음이다. 그 간청은 귀신이 예수 앞에 굴복하는 모습이다. 귀신은 이미 예수께서 자기를 위협하고 압도하는 무서운 분임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 귀신의 간청은 자신을 괴롭히지 말라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는 하나님께 대한 서원을 할 때 쓰던 표현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바라오니"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것이 귀신을 내어쫓을 때 사용하는 말이라는 점을 들어 귀신이 예수를 조롱하는 표현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렇다면 귀신의 이 말은 조롱을 위한 조롱이 아니라 예수의 등장으로 파멸의 위기를 인식한 자신이 절망적 패배감으로 하는 발악적 부르짖음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귀신의 상황은 완전히 뒤바뀌게 되었다. 사람을 괴롭히고 파괴하며 무서운 힘으로 다른 사람까지 위협하던 존재가 이제는 예수 앞에 파멸적 위기를 맞고 있는 것이다. 특별히 그가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라고 간청한 것은 귀신이 자기 생활의 안전을 극도로 위협받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편행 구절인 마 8:29에는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로, 눅 8:31에는 "무저갱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하고 있다. 이로 보건대 지금 귀신들이 받을 괴로움은 종말적 심판날에 있을 징계를 의미하며, 바로 그 순간이 이를 때까지 그 귀신들은 무저갱 행(行)에 처해지지 않기를 소원하고 있는 것이다.
=======5:8
예수께서 이미. . . . 이르시기를 - 본절은 7절의 상황에 대한 마가의 보충 설명이다. 즉 귀신이 예수 앞에 절망적 부르짖음으로 간청하는 이유가 예수께서 이미 귀신을 향해 그 사람으로부터 나오라고 하였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6절과 7절 사이에 귀신돠 예수의 만남에 대한 상황 묘사가 행략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여기서 "이미. . . . 이르시기를"(에레겐)은 미완료 시제를 이루고 있어 예수께서 이미 계속해서 말씀해 오셨음을 암시한다. 따라서 예수의 명령은 즉각적으로 시행되지 않았음을 보여 주고 있다.
이 같은 지연은 그 귀신의 항거라고 볼 수도 있으나(마 8:29 - 31) 오히려 "당신의 때"를 정확히 맞추어 행하시고자 하는 예수의 주권적인 섭리로 인한 지연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더러운 귀신아. . . . . 나오라 - 예수께서 귀신 축출 선언은 곧 인간 해방 선언이다. 사실 귀신은 지금껏 그가 차지하고 있던 그 인간의 인간됨을 파괴하고 있었다. 따라서 예수께서 귀신을 향해 그 사람으로부터 떠나 나오라 명령하신 것은 그 사람의 본래적 품성과 인격으로의 회복을 원하시는 당신의 지극한 사랑과, 그 모든 회복을 홀로 주관. 명령하시는 당신의 절대적인 권위를 함께 보여 준 것이라 할 수 있다(욥 24:22). 실로 예수의 주권이 인정되 그분의 영광이 드러나는 그 현장에는 항상 하나님의 형상을 입고 창조되었으나 사단의 권세로 그 형상을 손상입은 영혼들의 건강하고도 완전한 회복이 뒤따르게 된다.
========5:9
네 이름이 무엇이냐 - 이 말은 예수께서 더러운 귀신에게 묻는 질문이다. 이러한 귀신과의 대화는 고대 귀신 축출 이야기에서 많이 나타나는 형식이다. 그리고 고대 전쟁사를 통해 볼 수 있듯이 적운의 장수 이름을 안다는 것은 그 전쟁에 있어서 중요한 준비 요건 중에 하나로 간주되었다. 본절도 귀신의 정체를 분명히 밝힘으로써 귀신의 본성을 보여 주려고 한다. 그것은 인간을 파괴하고 있는 주범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돕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 귀신은 예수의 명령에 따라 자신의 이름을 밝히고 있다. 특히 그는 앞에서는 "나"라는 단수 인칭을 사용한 데 비해 뒤에서는 "우리"라는 복수 인칭으로 말하여 어법이 모순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차이는 귀신 중 우두머리가 대표로 예수와 대화했디 때문에 생겨났을 뿐이다. 귀신의 이름은 "군대"이다. "군대"라는 말은 헬라어로 "레기온"인데, 이것은 로마 군대의 군사 용어로서 6, 000명으로 구성된 1개 군단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군사 용어로서 "레기온"이라는 말을 사용한 이유를 "귀신의 수가 많기 때문"이라고 맑히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 사람에게 들어간 귀신의 수효가 많이 있는 집단적(集團的) 의미로서 표현하기 위해 "레기온"이라는 집단적 의미의 군대 용어를 사용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따라서 그 광인에게 침입한 귀신의 세력이 얼마나 강력하고 파괴적이었을까 하는 사실을 족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혹자는 이 귀신을 죽은 뒤에 안식을 얻지 못하는 원한을 갖고 있는 영들의 집합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한 배경 설명으로 귀신이 무덤 사이에서 살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집단적인 의미의 군대 용어를 사용한 점으로 보아 로마와 투쟁하며 저항하다 죽어간 희생자들의 영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추측은 일면의 타당성을 갖고 있지만 설득력이 희박하다. 왜냐하면 뒤에 나오는 사건들은 결국 귀신들을 몰사시키는 것인데(13절) 그렇다면 로마에 저항했던 사람들에 대한 저주가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사람을 괴롭히고 있는 귀신은 매우 많은 숫자를 가진 집단으로서 하나의 집합된 힘을 발휘하고 있던 존재들임이 분명하다. 이처럼 실로 사단은 한 사람의 건강한 영혼을 지배하기 위하여 수많은 자신의 부하 귀신들을 동원하는 집념과 무자비함이 있다(마 12:45 ; 눅 8:2).
========5:10
이 지방에서 내어 보내지 마시기를 간절히 - 여기서 귀신이 예수께서 다시 간청을 하고 있다. 마가는 "간절히"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간청하는 귀신의 자세가 7절의 모습과는 다름을 보여 준다. 즉 귀신의 자세는 그 기세가 모두 꺾인 모습이다. 귀신의 요구는 자신을 이 지방으로부터 추방하지 말아달라는 것이다. 이 제안은 7절의 반항, 즉 간섭하지 말라는 식과는 전혀 다르게 이 지방에만은 있게 해달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사람으로부터는 나오겠다는 말이다. 이는 구체적으로 예수에게 항복하는 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지방"이 과연 어디냐는 점이다. 이는 분명 거라사라는 특정한 장소를 의미한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 한편 마태복음에서는 여기에 대해 구체적인 언급이 없다. 그런제 누가복음에서는 귀신이 "무저갱"(無低坑)으로 보내지 말라고 간청한 것으로 묘사한다(눅 8:31). "이 지방"에 무물기를 원한다는 뜻이기 보다 "다른 지방" 곧 자신들이 최후 심판 전에 감금당하는 무저갱에로 쫓겨나기를 원치 않는다는 뜻일 것이다. 실로 귀신은 최후의 순간이 이르기 전까지 계속하여 활동할 장소를 필요로 하고 있다.
=======5:11
마침. . . . 돼지의 큰 떼가 - 이 절은 삽화적이다. 즉 배경 그림같이 묘사되고 있다. 예수가 내리신 호수 가까이에 산이 있고 무덤도 있으며 많은 돼지를 방목시키는 비탈진 넓은 곳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곳은 이방인 지역이기 때문에(1, 20절 주석 참조) 돼지를 많이 길렀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돼지를 부정한 동물로 취급하여 먹지도 않고 가까이 하지도 않았으므로(레 11:7 ; 신 14:8) 좨지는 기르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돼지의 주인은 이방인일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그 주인이 로마인들(로마 군대)을 위해 돼지를 사육하는 불경스런 유대인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5:12
우리를 돼지에게로 보내어 - 11절에서 돼지떼에 대한 풍경 묘사를 한 이유가 밝혀진다. 귀신은 이 지방을 떠나지 말게 해달라는 간청과 함께 사람으로부터 나오겠다는 생각을 밝힌다. 그러나 자신들은 돼지 무리에게로 옮겨 갈 것을 예수에게 제안하고 있다. 이것은 수동적인 의미에서 허락을 간청하고 있은 것이다. 그래서 "보내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돼지에게 들어가고 안 들어감도 예수께 그 권한이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실로 귀신들은 무엇이든지 파괴하는 경향이 있다. 귀신들은 그 사람을 파괴할 수 없데 되자 이제 돼지 때를 파괴하고자 한다.
========5:13
허락하신대 - 귀신들이 돼지에게 자신들이 들어가게 해주면 계속 활동하며 살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예수께 간청한 부탁을 예수께서 들어 주셨다. 이로 보건대 돼지의 몰사 사건의 원인자가 외관상으로는 그 군대 귀신들이었음과 돼지 몰사 사건의 궁극적 결정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셨음을 알게 된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타인의 재물을 고의로 손상시킨 예수의 윤리적 타당성 여부이다. 물론 그 소유주가 유대인어었다면 그가 모세의 율법을 어긴 파렴치한이었기 때문에 그를 징책(懲責)할 목적으로 이 같은 큰 손해를 입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소유주가 이방인이었다면 문제는 달라지는 것이다. 그런데 앞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본문을 자세히 살피면 돼지 떼를 몰살시킨 주 원인자는 예수가 아니라 그 군대 귀신이었음을 보게 된다. 즉 예수는 적극적 요구를 "허락"하신 것이었다. 따라서 예수께 모든 책임을 전가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이외에 또 다른 견해들에 대해서는 마 8:32 주석을 참조하라). 그리고 무엇보다 이러한 예수이 "허락"이 지닌 재산상의 피해보다 그 피해를 딛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계획(計劃)이 무엇인지를 면밀히 살펴야 한다. 실로 하나님은 이러한 재산상의 피해를 통해 영적, 정신적, 사회적 회복과 건강을 허락하셨던 것이다(15, 19, 20절). 이러한 하나님의 초월적 경륜은 동방의 의인 욥에게서도(욥 1, 2장) 발견된다(Dona;d W. Burdick). 한편 예수께서 귀신을 돼지 떼로 옮기게 허락한 사실에서 두 가지 주목해야 할 점을 발견하게 된다. 첫째는 사람의 존귀성 문제이다. 예수는 사람과 돼지를 두고 사람 안에서 귀신들이 활동하지 못하게 하시는 권위적 모습을 보여줌으로써(8절 주석 참조) 사람을 높이셨다. 반대로 돼지 떼에게는 귀신들이 들어가도록 하락함으로써 그 어떤 피조물보다 인간의 존엄성을 더욱 강조하셨다. 둘째는 돼지에게 귀신들이 들어가게 허락하심으로써 상대적으로 귀신의 활동 영역에 대한 암시를 제공한다. 사실 당시에는 돼지를 부정한 동물로 취급하고 있었다(11절 주석 참조). 이러한 돼지에게 귀신들이 들어가도록 예수께서 허락하심으로써 귀신의 활동 장소가 부정한 곳으로 한정됨을 보여 주고 있다. 귀신이 머물 수 있는 곳은 부정한 곳이다(벧후 2:22).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니 - 사람의 온 인격을 지배하던 귀신들이 영혼 없는 돼지에게로 들어가 그들을 조정한다는 사실은 결코 어려운 문제가 아닐 것이다. 실로 귀신은 생명 있는 것들에 대해 항상 부정적인 영향력을 직. 간접 행사한다.
이천 마리 죄는 떼가. . . . 바다에서 몰사하거늘 - 이 장면은 매우 드라마틱(dramaric)하다. 파괴자 사단의 사자인 귀신들은 자신들이 활동할 수 있는 또 다른 장소인 돼지 떼를 죽음에로 질주하게 했다. 특히 이 사건의 급받함은 "비탈길을 내리달아 갔다"는 펴현과 2, 000마리나 되는 돼지의 숫자를 통해 강조되고 있다. 실로 귀신으 2, 000마리나 되는 돼지에게 각각 그 파괴적 영향력을 행사하여 거의 발작적으로 행동하게 했고 곧장 몰사시킴으로써 그 사악한 위력을 과시했다. 실로 예수는 그 시점에서 주위의 사람들에게 귀신의 최후 목적이 인간과 자연 파괴라는 엄숙한 진리르 암묵적으로 보여 주고 계셨던 것이다. 한편 "몰사(沒死)하거늘"(에프니곤토)이란 말은 미완료시상을 취하고 있어 2, 000마리의 돼지 떼가 계속해서 물속으로 빠져들어 죽어가는 장면을 더욱 생생하게 묘사해 주고 있다.
=======5:14
치던 자들이 도망하여 - 여기서부터 20절까지의 내용은 "돼지 몰사 사건"에 대한 반응들을 묘사하고 있다. 본절에서는 현장에서 직접 사건을 경험한 돼지치는 사람들의 반응이 나타나 있다. 그들은 현장에서 "도망"하였다고 묘사한다. 이 말은 당시에 벌어진 사건이 너무도 급작스러웠고 상상을 초월한 광경이었기 때문에 주채할 수 없는 놀라움을 묘사하는 뜻으로 사용된 말이다. 따라서 "도망"했다는 말은 무서워서 달아났다기 보다는 놀라운 사건을 알리기 위해 급히 달려간 사실을 긴박(緊迫)하게 묘사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읍내와 촌 - 여기서 "읍내"(폴리스)란 성벽으로 둘러싸인 성읍을 가리키며(히 12:22), 대체로 발달된 도시, 변화한 마을 정도로 이해된다. 그리고 "촌"(아그로스)이란 원래 "들", "밭"(fiekl)등으로 이해되나 흔히 시골로 번역되기도 한다. 따라서 이 양자를 합하여 "도시와 시골"이라는 말로 이해할 때 "돼지 몰사 사건"이 그 지방 전역에 알려졌음을 보여 준다. 이에 대해 마태는 "온 시내"(마 8:34)로 언급한다. 어쨌든 이 사건은 삽시간에 여러 곳으로 퍼져갔고 그 소문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현장으로 모여들었음을 알 수 있다.
=======5:15
예수께 이르러. . . 보고 두려워하더라 - 여기서는 소문을 듣고 달려온 사람들이 바라보는 현장을 보여 주고 있다. 특히 마가는 "이르러"와 "보고"라는 말을 현재형으로 기술함으로써 그 현장성과 생동감을 더해 주고 있다. 즉 그들은 좨지 묘사 사건을 듣고서는 지체없이 이곳에 달려와서 뚫어지게 그 상황을 확인하며 여러 관점에서 세밀히 관찰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이 장면은 13 , 14절에서 나타난 연속적인 사건의 급박성과 긴박감과는 대조적으로 평온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3 - 5절에서 험악하게 묘사되었던 귀신들린 사람이 정신을 되찾고 예수 앞에 앉아 있는 장면은 폭풍우가 걷힌 다음 쏟아지는 햇살을 생각나게 한다. 특히 "옷을 입고", "앉은 것"이란 표현은 그의 상태가 건강한 정상인으로 되돌아왔음을 확증케 하는 외적인 증표이다. 실로 그는 오랫동안 옷을 벗어 던진채(눅 8:27) 무덤과 산을 뛰어다니며 괴성을 지르고 자기 몸을 상하게 하는 등의 극히 불안정한 심적 상태를 유지해 왔었던 것이다. 그러나 귀신들려 인간성을 상실했던 사람이 이제는 온전한 제정신으로 회복되었다(고후 5:13), 여기 "정신이 온전하여"(소프로니조)란 건전한 마음과 올바른 자각 및 바른 판단 등을 할 수 있는 건강한 정신 상태가 되었음을 뜻하는 말이다. 이제 그에게는 평화가 회복되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장면을 면밀히 검토한 사람들은 그 귀신들렸던 자가 그 처절했던 상황에서 벗어난 것을 보고 기뻐하기는커녕 "두려워하였다". 여기서 "두려워하다"는 표현은 사건의 놀라움에 대한 강조적 묘사인 동시에 이 사건의 궁극적인 주체자인 예수에 대한 경외감(敬畏感)을 표현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물론 이것은 온전한 신앙 상태와는 다르다. 왜냐하면 예수의 본질적 특성(공의와 사랑의 주)을 이해한 자는 감정적으로 그분을 두려워하는 데서 해방되어 그분의 사랑의 역사를 이해하게 되기 때문이다(요일 4:18).
========5:16 - 17
이에 귀신들렸던. . . . . .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 다른 목격자들이, 소문을 듣고 달려와 현장을 보고 놀라는 사람들에게 이제까지 일어났던 사건을 설명하였다. 그러자 그들의 반응은 예수에게 이 지방에서 떠나달라고 간청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 이유는 그들이 예수를 심히 두려워했기 때문이다(15절). 즉 그들은 자기들의 상상을 초월하여 감히 지신들로서는 제어할 수도 없는 능력이 예수 안에서 역사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따라서 만일 예수가 좨지 2. 000마리를 몰사시키셨다면 다음에 그보다 더 심각하고 두려운 일을 충분히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했능 것이다. 이러한 두려움과 무지와 경제적 이기심 때문에 그들은 예수를 떠나라고 간청했던 것이다. 실로 그들은 자신들의 미신적 상상력과 물질적 욕심 때문에 생명의 주를 거부(拒否)하고 말았던 것이다(4:19). 예수께서는 그들의 소원대로 그곳을 떠나시게 된다. 진정 그분은 당신을 원치 않는 곳에 오래 머물지 않으신다.
===========5:18
예수께서 배에 오르실 때에 - 예수는 배를 타시고 동쪽 지경에 오셨다가(2절) 이제 다시 뱃머리를 돌려 자신의 곳으로 돌아가시려 한다. 실로 예수께서는 이 지방을 떠나라고 하는 그곳 주민들의 제안을 즉각(卽刻)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함께 있기를 간구하였으나 - 이에 대해 새번역 성서에서는 "함께 가기를"원했다로, 공동번역 성서에도 역시 예수를 "따라 다니게"해 달라고 간청한 것으로 번역되어 있다. 따라서 "함께 있기를" 간구한 것은 그곳에 머물라는 뜻이 아니라 자신이 예수를 따라 나서겠다는 뜻이다. 이것은 한 인간이 가장 비참한 처지에서 인간이 아닌 짐승과 같은 삶을 살다가 구원받고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된 감사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Bengel). 사실 예수를 따라 나서겠다는 고백은 제자가 되어 주님의 길을 같이 가겠다는 뜻이고 자기 몸을 다 바쳐 주님을 섬기겠다는 표현이다. 또 그 자신이 따라 나서겠다는 것은 자신의 과거 때문에 마을에서 자기를 용납해 주지 않을 것같기 때문일 것이라고, 또는 다시 귀신이 자기를 억누를까 두려워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주장도 많지만 그보다는 진실한 감사와 헌신의 표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러한 장면은 17절에서 보여 준 다른 사람들의 모습과는 대조적이다. 자신을 구원해 주고 자신에게 진정한 사랑과 자유를 허락한 분에게는 타산적인 생각이 개입될 수 없다. 다만 전적인 헌신이 있을 뿐이다.
========5:19
집으로 돌아가. . . . . . . 네 친속에게 고하라 - 귀신들렸던 사람의 간청은 예수로부터 거절당한다. 그 이유는 첫째, 자기 집으로 돌아가 가족들과 새 삶을 시작해야 되기 때문이고, 둘째, 이와 같은 구원 사건을 가족들에게 알려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1:44에서 문둥병자에게 침묵을 명하신 것과는 대조를 이룬다. 이는 아마도 이번의 사건은 이방 지역에서 일어났기 째문에 자신이 메시야이심을 사람들에게 전파한다 하더라도 무방했기에 그렇게 한 것같다. 사실 유대 지경에서 예수 자신의 메시야 주장은 아직까지 때가 이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상당히 큰 위험을 무릅써야 했던 것이다. 어쨌든 예수의 명령은 곧 당신의 귀신 축출에 대한 깊은 의미를 알게 한다. 첫째,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게 한 것은 한 인간의 인간성이 철저히 파괴되었다가 다시 본래의 모습을 되찾는 구원이 한 개인의 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살고 있는 공동체에 다시 정상적인 모습으로 복귀할 때 비로소 완성된다는 것을 뜻한다. 이 사람은 병으로 인해 가족과 사회로부터 격리되어 있었기 째문에 다시 그러한 관계를 회복함으로써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하다. 둘째는 기적적인 놀라운 구원 사건을 경험한 사람이 가야 할 곳은 가정과 사회, 즉 삶의 현장(現場)이라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삶의 현장과 가정 안에서 구원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 구원받은 사람의 과제이다. 즉 가정과 사회에 봉사하며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실천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 구원받은 사람은 세속 사회를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세속 사회 안에서 주님을 전파하며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다. 한편 마가는 이 일을 행하신 분을 "주님"(퀴리오스)으로 표현한데 비해 누가복음에서는 "하나님"(눅 8:39)으로 표현한다.
======5:20
데가볼리에 전파하니 - 예수는 가족에게 알리라고 했지만 이 사람은 제가볼리 전역에 알리게 된다. "데가볼리"는 갈릴리 호수 동편과 요단강가에 인접한 10개 도시를 가리킨다. 여기서 10개 도시란 거라사(Gerasa) 와 가다라(Gadara) 및 다메섹(Damascus), 빌라델비아(Philadelphia), 스구도볼리쓰(Scythopolis), 힙보스(Hippos), 벨라(Pella), 라바나(Raphana), 디오스(Dios), 가다나(Kathana) 등이다. 이중 스구도볼리쓰만은 요단 서편에 위치해 있다. 이 도시들은 자치적인 연맹 도시였다. 1절에서 언급한 "거라사"도 이 10개 연맹 도시 중의 하나이다. 이러한 도시들은 B. C. 3세기경 수리아의 셀류시드(Seleucid)의 통치 기간에 헬라화 정책의 시험 도시들로 조직되었다. 그리고 유대 마카비 시대에 이르러 하스몬(Hasmonian) 왕조 때 힐카누스의 지배를 받다가 다시 로마의 폼페이(Pompey) 장군에 의해 로마 관할로 편입되었ㄷㅏ. 이와 같이 광역 도시에 예수께서 행하신 "미친 돼지 몰사 사건"과 "귀신들린 사람의 구원 사건"이 퍼져나갔고 모든 사람들이 놀랐다. 여기서 예수의 선교 활동이 이방 지역에서도 성공적으로 진행됨을 보여 주고 있다. 실로 한 인간이 거듭나는 체험(體驗)으로 그리고 거듭난 한 인간이 자기 사건을 전한으로써 10개 도시의 넓은 지역에 예수에 관한 이야기는 전파되는 드라마틱한 장면이다.
=========5:21
다시 저편으로 건너 가시매 - 돼지 몰사 사건이 발생했던 위치가 갈릴리 호수 동편이므로 건너편이라고 할 때 서쪽 해안 곧 가버나움 지경으로 추측된다(마 9:1). 이곳은 바로 갈릴리 선교의 전진 기지였다. 그곳에서도 역시 큰 무리가 모여들었다. 이 표현은 4:1의 표현과 비슷하다. 그리고 "거라사"지방과는 대조적이다. 즉 거라사 지방에서는 떠나줄 것을 요구했지만 갈릴리 지방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예수의 인기를 보증해 준다.
바닷가에 계시더니 - 이 표현은 바닷가에 도착한 시각과 22절에 나오는 다음 사건이 발생한 시각에 간격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바닷가가 많은 군중들을 향해 말씀을 가르칠 수 있는 용이한 지역이었으므로 이곳을 자주 당신의 교육의 장(場)으로 활용하셨다.
======5:22
회당장 중 하나 - 이는 "한 회당장"으로 번역될 수 있다. 따라서 그는 가버나움에 있는 한 회당장으로 이해된다. 당시 회당의 조직은 회당장, 핫잔(Hazzan), 랍비 그리고 평신도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중에서 특별히 "집회의 우두머리"로 일컬어지는 회당장은 건물을 관리하며, 예배 순서의 작성 및 질서 유지, 심지어 재판과 같은 사무 증을 관할하던 장로 출신의 지도자였다(눅 4:13 ; 8:41 ; 행 18:8, 17). 실로 이들은 제사장 계급의 상대적 실추(失墜)로 인해 소위 종교 민주화를 통해 등장한 평신도 계급(the laymen classes)들로서 이들의 등장은 곧 종교적 관심을 일반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들은 제사장은 아니지만 예배를 주관하고 회당을 관리하며 다스리는 사람들이다. 때로 "회당장"이라는 명칭은 명예직으로서 행정적인 의무는 없으나 회중 가운데 탁월한 인물에게 이 직위가 주어지기도 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당시 대중들로부터 상당한 존경의 대상이었다. 야이로(Jairus)는 바로 이들 중에 한
사람이었다. 따라서 야이로 역시 그 지방에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사람이었다고 보는데는 의심할 바 없다.
야이로 - 이는 "깨달은 사람" 내지는 "그는 빛난다"는 뜻의 히브리어 이름 "야일"의 헬라식 발음으로 이해된다(민 32:41 ; 삿 10:3).
예수를 보고 발 아래 엎드리어 - 발 아래 엎드렸다는 것은 최대의 존경을 표현하는 것이다. 회당장의 신분이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존경받는 사회적 지위를 가졌다면 이 장면은 ① 예수를 최고의 지위로 높이는 절대 겸손의 모습니다. 사실 그 당시 예수는 일반적으로 한 새로운 랍비 정도에 불과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던 터였기 때문에 유대의 종교를 대표할 만한 종교 지도층 인사가 그 앞에 무릎 꿇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다. ② 예수의 치료이적이 그 지방에 아주 신빙성있고 믿을 만한 소문으로 알려져 있음을 암시한다. 즉 그 지방의 존경받는 회당장이 기적을 요청한 사실은 예수의 이적 행위에 대한 공적인 신뢰감을 증명하는 것이다. ③ 우발적 사건이 아니라 철저한 믿음과 확실한 소망을 가지고 취한 회당장의 신앙적 행동을 보여 준다. 회당장이 직접 바닷가에 많은 무리가 모인 곳으로 예수를 찾아왔고 그러한 행동에 옮기기까지는 예수에 대한 믿음이 뒷받침되지 않고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5:23
많이 간구하여 - 회당장은 마치 자신이 죽을 위기에 처한 자처럼 필사적(必死的)으로 거듭 반복해서 예수께 간절히 매어달렸다.
내 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 회당장이 예수께로 온 목적을 밝히고 있다. 이유는 "어린 딸이 다 죽게 된" 때문이다. 여기서 "어린 딸(뒤가트리온)이란 조그마한 여아를 깊은 애정으로 부를 때 사용하던 말이다. 이를 통해 야이로의 자식에 대한 애끙ㅎ는 심정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죽게 되었사오니"(에스카토스 에케이)란 지금 즉음이 문 앞에 서 있을 만큼 그 병세가 최악의 상태임을 시사해 주고 있다. 물론 그 딸의 병명은 구체적으로 밝혀져 있지 않다. 한편 누가 복음에서는 회당장이 직접 말하지 않고 기록자 누가가 담담히 설명하고 있는데, 어린 딸의 나이가 12살임을 밝히고 있다(눅 8:42). 그리고 회당장은 다만 예수께서 자기 집으로 가주기만을 간청한다(눅 8:41). 그러나 마태복음에서는 "내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마 9:18)라고 말함으로써 절망적인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키고 있다. 즉 마가와 누가복음은 "죽게 된 지경"을 말하고 마태복음은 이미 죽은 것으로 묘사한다. 이 같은 차이점은 마태가 마가복음에도 뒤에 기술되고 있는(35절) 이미 딸이 죽었다는 사실을 본시점과 종합하여 서술한 째문인 것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어쨌든 세 복음서의 공통된 점은 사태가 매우 급박(急迫)하다는 것이다.
손을 얹으사 - 회당장 야이로는 예수께서 그 손을 딸의 몸위에 얹으면 곧 회복될 것이라는 믿음을 간직하고 있다. 실로 회당장의 간청은 확신적이고 매우 구체적이다. 이는 병 치유에 대한 전권을 인정한 것이다. 여기 손을 얹어 안수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바라는 행위이자 치병을 이한 일반적 행위로 알려져 있다(6:5 ; 8:23, 25 ; 약 5:14 - 16). 따라서 회당장의 이 같은 안수에서 요청은 예수의 능력과 권위를 온전히 인정하는 것이ㅣ며 그의 은혜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 - 여기서 "구원을 얻어"(소데)란 "구원하다", "보전하다", "놓아주다", "병을 고치다"는 뜻을 지닌 (소조)의 부정과거 가정법 수동태로서 예수로 인한 병의 회복, 곧 건강을 기원한 말이다. 따라서 본문을 재해석하면 "(당신으로부터) 건강을 회복하여 (계속) 살게 하소서"가 된다.
=======5:24
그와 함께 가실새 큰 무리가. . . . 에워싸 - 야이로의 간청을 받아들여 그의 집으로 출발하는 장면 묘사이다. 여기서 "가실새"(아펠덴)란 부정 과거 시제를 취하여 예수께서 곧바로 출발하셨음을 암시한다. 즉 예수는 즉각적 응답으로써 그의 간청에 호응하셨다. 이렇게 예수께서 급히 이동하자 바닷가에 모였던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따라 이동하는 광경을 볼 수 있다. 그런데 그 무리들의 행동을 표현한 "따라가며", "에워싸 밀더라"는 표현은 각각 미완료시제를 사용하여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예수를 좇으며, 더욱이 예수께 접근하기 위해 계속 몸을 부딪히는 혼잡함을 보여 주고 있다. 실로 이 같은 장면은 그 당시 예수를 중심한 분위기가 매우 열기가 있음을 보여 주며, 따라서 예수의 명성과 인기가 대단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5:25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 여기서 상황이 바뀌고 있다. 야이로 회단장의 이야기에서 갑자기 12년동안 혈루증(血漏症)을 앓는 여인이 등장한다. 여기서 혈루증(subject to bleeeding, NIV)은 현대의학 용어인 "혈루병"이 아니다. "혈루병"은 여자에게 유전 인자로 잠재할 수는 있어도 병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남자에게는 유전으로 잠재성과 병으로 모두 나타난다. 따라서 여기서의 혈루증은 만성 하혈증(下血症)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자궁(uterus) 안에 종기가 생기거나 어떤 이상이 생겨 불규틱적으로 피가 흐르는 중세일 것이로 간주했다(레 15:25). 따라서 종교 생활 뿐 아니라 사회적 활동에 많은 제약을 받았다. 특히 이 여인의 병이 12년("12"는 완전수 또는 하나님의 계회과 성취를 나타내는 수로 상징됨)이나된 병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 병이 치유될 수 없는 불치의 병임을 암시하고 있다. 또 이 여인이 병으로 받는 육체적 고통이나 정신적 고통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처참(悽慘)하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이러한 형편은 25절에서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한편 역사가 유세비우스(Eusebius)는 그녀가 파네아스 출신의 이방인 베로니카(Veronica)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확실한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5:26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 혈루증을 앓는 이 여인은 많은 의사를 찾아다니며 치료를 위한 노력을 한 것으로 소개된다. 그러나 이러한 자의적 노력을 더하면 할수록 오히려 그 의원들은 그녀에게 더 심한 고통만을 안겨 주었다. 이에 대해 의사 출신인 누가는 "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했다"(눅 8:43)는 말로써 동료 의사들의 한계 상황을 깊이 배려하며 적절히 묘사하고 있다(Robertson). 한편 당시의 시대적 배경으로 보아 이 여인의 가정은 어느 정도 부자였을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당시는 부자가 아니면 의사를 찾아 갈 수 없었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재산을 치료비로 다 써버리고 이제는 가난한 처지가 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병은 더 악화되었다는 묘사는 25절에서 12년 동안 병을 앓아왔다는 표현과 함께 ① 병의 불치성과 ② 의술의 무력함을 나타내 보이고 ③ 인간적인 모든 수고가 허사로 돌아 갔다는 절망적인 상황 묘사와 ④ 그 여인이 받고 있는 고통이 진퇴 양난(進退兩難)의 절박(切迫)한 상황임을 암시하고 있다. 재산을 치료비로 다 허비하고 남은 것은 병든 몸 하나이고 그나마 병은 더욱 악화되고 병의 부정함 때문에 사람들과 사회로부터 소외된 여인의 모습은(레 15:25 - 28) 인간 최악의 한계 상황에 다다른 것이다. 삶과 존재의 기반이 송두리째 상실되는 위기감을 느끼고 있는 이 여인의 모습은 4장의 풍랑을 만난 제자들의 모습과 2 - 5절의 귀신들린 사람과 2, 23절의 죽음 직전에 이른 야이로의 딸과 함께 인간들이 보편적으로 경험하고 있는 인간의 유한성과 인간적인 노력의 한계를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것이다. 이처럼 그 혈루증의 여인은 더 이상 자기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절박한 상황에 처했을 때 비로서 번정한 구원자 예수를 찾게 된 것이다.
=====5:27
소문을 듣고. . . . 옷에 손을 대니 - 절망의 벽에 부딪힌 이 여인은 예수의 치병 기적에 대한 소문을 상세하게 들은 것으로 보인다. 이 여인의 믿음은 예수의 옷에만 손을 대도 자신의 병이 치유될 것이라는 믿음이다. 이러한 믿음은 앞에서(23절) 언급된 야이로 회당장의 진술과는 차이가 있ㄷ. 야이로의 믿음처럼 예수께서 주체가 되어 환자와 접촉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환자가 예수에게 접촉을 함으로써 병을 낫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형태는 3:10 ; 6:56에서도 나타난다. 즉 예수를 만지게 해 달라거나 옷에라도 손을 대게 해 달라는 간청은 예수에게 치유의 능력이 충만하다는 확신에 찬 믿음의 결과이다. 따라서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치유받고자 하는 사람의 믿음을 강조하는 점이다. 이 여인은 직접 보고 믿은 것이 아니라 소문을 통하여 믿게 된 것이다. 어쨌든 그녀는 "무리 가운데 섞여 뒤로 와서" 예수를 만지게 되는데, 이 같은 사실은 그녀의 담대함(간절함)과 겸손함을 대변해 주는 행동이다. 즉 그녀는 사회 통념상 여자로서 뿐 아니라 부정한 자로서 공중(公衆) 앞에 나설 수 없는(접촉 불가) 입장이었으나 그러한 사회, 종교적 장애를 극복하고 담대히 예수께 접근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존재를 몰래 감추고 자신의 병을 가만히 치유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예수의 "뒤로" 온 것이다. 한편 마태는 그녀가 예수의 "겉옷 가"(the edge of his cloak, NIV)를 만졌다고 기록하고 있다(마 9:20). 즉 그녀는 예수와 접촉함으로써 율법적으로는 예수를 부정케 만든 결과가 되었다(레 15:19 - 27). 그러나 생명의 주께서는 이 모든 의식적 부정을 초월(超越)하여 그녀의 믿음을 받아 들이셨다.
=======5:28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 . . 얻으리라 함일러라 - 그녀가 예수의 옷자락에 손을 댄 이유를 설명한다. 사실 그녀의 이 같은 심정에는 미신적(superstitious) 요소가 전혀 없었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녀는 오직 예수만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구원자이심을 믿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중요한 일이었다. 한편 "함일러라"(엘레겐)는 미완료 시제로서 그녀가 마음속으로 그 같은 사실을 되뇌이고 또 되뇌였음을 보여 준다.
=======5:29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 여인의 믿음대로 병은 즉각적으로 치료되었다. 실로 12년 동안 한시도 그녀의 몸에서 출혈(出血)이 떠나지 않은 그 지독한 병증이 완전히 제거된 것이다. 이 상황을 공동번역은 "출혈이 그치고"라고 번역하고 있다. 특히 "혈루의 근원"이라는 표현은 병의 치료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완벽하게 치료된 것을 암시한다. 이와 같은 표현법은 치료의 즉각성과 피료의 완벽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로써 그녀는 12년의 정신적 고통이 함께 해결된 것이다. 이러한 치료는 예수와의 전인격적(全人格的) 접촉(교제)이야말로 인간이 지닌 모든 문제의 유일한 해결 방법이라는 사실과 동시에 예수의 능력과 권위를 더 높이는 것이었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 병이 나았다는 것을 자신이 직접 알게 되었다는 말이다. 즉 그녀는 혈루의 근원이 근절되자 곧 자신의 치유를 자각(自覺)하게 된 것이다. 결국 이 같은 자각은 곧 그 치유가 몸으로 직접 느낄 정도로 완전하고도 신속하게 치유되었음을 말한다. 이와 같은 즉각적이고 근원적인 치유 기적이 발생한 놀라움과 대조를 이루는 것은 27절에서 묘사된 여인의 행동이다. 그녀는 환자의 연약한 몸과 여자라는 핸디캡(handicap)을 갖고 그 많은 군중 속에서 겨우 예수의 뒤쪽에서 손을 옷에 대었다. 간청을 한 적도 없고 믿음을 예수께 밝힌 적도 없는 이 여인에게 기적이 발생한 것이다. 이 사실은 이 여인이 갖고 있는 믿음이 공개된 사실은 없지만 이미 숨겨진 믿음도 기적을 일으킬 만한 가치가 있음을 암시한다(히 11:6). 실로 예수는 인간의 심령을 살피는 분으로서 그 소원의 깊이를 조용히 알아보고 계셨던 것이다(마 6:6).
======5:30
능력이. . . . . .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 치유 기적이 예수와 상관없이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여기서 알 수 있다. 즉 예수께서 자신에게서 치유의 능력이 나간 사실과 누가 자신의 옷에 손을 댄 사실을 감지한 것이다. 사실 그 치료받은 여인은 모든 것을 은밀히, 조용히 심지어 예수마저 모르게 해결하고자(27절) 했었다. 물론 이 같은 그녀의 생각은 심히 어리석은 것이었지만 그녀의 겸손하고도 조용한 일면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어쨌든 예수는 사람들이 혼잡한 다운데서도(31절) 당신의 전지성(全知性)으로써 그녀의 간절한 소망을 이미 알고 계셨고 또 그녀가 당신의 옷자락을 만지신 것도 알고 계셨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당신이 친히 그녀의 소망을 들어 주셔서 그녀의 치유를 허락해 주신 것이다. 여기 "스스로 아시고"(에피그누스 엔헤아우토)란 완전하고도 초월적인 지식을 의미한다. 결국 이 말은 예수께서 그 여인의 행위의 동기와 그 결과에 이르기까지 모두 알고 계셨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당신의 능력이 나간 줄 아신 것이 수동적인 의미에서의 지식이 아니라 곧 그 여인이 치료된 사실을 예수께서 뒤늦게 아신 것이 아니었다. 이는 예수께서 그 치료의 전반적인 상황에 대한 능동적인 깨달음, 곧 당신이 그 능력을 능동적으로 계획하셨고 또한 발휘하셨음을 보여 준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 예수께서 그 간은 사실에 대해 전혀 모르셨기 때문에 이 질문을 하신 것이 아니었다. 예수는 내밀한 이적을 주위의 모든 사람들에게 공개하시기 위해 이 같은 빌문을 의도적으로 하셨을 것이다(Calvin Donald W. Burdick). 그와 더불어 생각되는 바는 33, 34절의 내용으로 보아 치료받은 사람과 인격적(人格的)인 관계를 기 위함인 것으로도 보인다. 병의 치료는 단순히 물리적인 치료만이 완전 치유가 아니다. 병으로 인한 정신적 고통 역시 신체적 고통 못지 않게 큰 것이므로 인격적 만남 속에 병이 치유되어야 함을 보여 준다. 그리고 그녀가 그녀의 졍을 고침받은 것이 미신적 신앙 때문에서가 아니라 진정한 신앙 때문이라는 사실을 그녀가 손으로 당신의 옷자락만 잡기보다 그 영(靈)으로 당신의 거룩한 인격을 잡기를 바라셨던 것이다.
=======5:31
제자들이 여짜오되. . . . . 물으셨나이까 - 여기서 제자들은 예수께서 손을 댄 사람을 찾으시는 것에 대하여 불만 섞인 응답을 하고 있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려 혼잡하고, 또 사람들이 밀리고 있는 상황에서 누가 옷에 손을 대었는지 어떻게 알겠느냐는 식의 반문이다. 이 사실은 혈루증을 치유한 사실이 예수와 환자 자신밖에 므른다는 사실과 제자들의 영적 무지(육체적 접촉만 생각하고 영적 교감(靈的交感을 도외시함)를 암시하고 있다. 그리고 치유받은 여인은 즉각 나타나 고백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여인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 상당히 큰 두려움을 갖고 있음을 보게 된다.
======5:32 - 33
예수께서. . . . . . 둘러 보시니. . . . . 여자가. . . . . 사실을 여짜온대 - 예수께서는 바로 군중들을 향해 몸을 돌리고 직접 찾으신다. 그리고 이 광경을 지켜 보는 치유받은 여인은 더 이산 사실을 숨긴 채 있을 수 없었다. 이 여인은 몹시 뚜려워하며 예수 앞에 엎드려 사실을 고백한다. 여기서 두 가지 강조점을 결견할 수 있다. 첫째는 예수께서 여인을 찾으시는 행위이다. 제자들의 충명스런 변명에도 불구하고 계속 치유된 여인을 찾고 있는 장면("둘러 보시니"는 미완요시제)은 치유받은 자로부터 감사의 인사를 받기 위힘도 아니고 치유를 확이니하기 위한도 아니다. 오직 치유받은 사람과의 인격적 만남을 통해 그녀로 하여금 바른 신앙을 갖게끔 하기 위힌 것이다(30절 주석 참조). 이것은 예수께서 고난받고 고통당하는 사람에 대한 강한 관심과 뜨거운 사랑 및 다함 없는 연민을 갖고 있음이 암시된다. 둘째는 치유받은 여인의 행위이다. 그녀는 몹시 두려워 하고 있었다. 이유는 ① 자신의 병이 종교적으로 부정한 것이고 따라서 죄인 취급받는 신분이기 때문에 군중들 틈에 끼여들였다는 것을 공개하기에는 두려운 사실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② 또 그런 부정한 몸으로 예수의 옷자락을 만졌다는 사실이 특히 여자의 신분으로서 불경건한 행위였기 때문일 것이다. ③ 그녀는 자신이 지금 받은 은혜를 예수로부터 훔쳐 낸 것 같은 심령을 가졌을 것이다. 즉 그녀는예수 몰래 예수의 신적 능력을 이용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④ 마지막으로 예수에 대한 깊은 경외감(敬畏感)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이 여인이 예수 앞에 엎드린 모급은 22절의 장면을 연상케 한다. 즉 치유의 기적을 체험한 이 여인은 예수에 대하여 신적인 권위와 초월적인 능력을 느꼈을 것이고 따라서 그에 따른 경외감이 두려움으로 나타났을 것이다. 한편 그녀는 예수의 강권적인 요구로(내밀한 요구였음) 자신의 만성적인 몹쓸 질병과 그 기적적 치유에 대한 모든 사연들을 무리들 앞에서 공개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소위 신앙간증오로서, 결과적으로 예수의 크나큰 은혜에 부응하여 그분께 무한한 존귀와 영광을 돌리는 일이 되었으며, 또 그녀가 완전한 정상인이 되었음을 공개적으로 알리는 일이 되기도 했다. 실로 "은혜 위에 은혜"의 역사가 주어진 것이다.
==========5:34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 예수께서 치유받은 여인에게 공개적으로 내린 구원 선언이다. 여기서 "딸아"(뒤가테르)란 성숙한 여자나 소녀를 향하여 애정어린 마음으로 친밀히 부르는 호칭으로서(23절) 예수께서 여인을 향하여 친히 이렇게 말씀하신 곳은 복음서 가운제 본문이 유일하다. 실로 예수께서는 그녀로 하여금 그녀가 예수의 옷자락을 만졌기 때문에 치유의 기적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그녀가 지닌 "믿음" 떼문에 완전한 회복(구원)을 얻은 것임을 주지시키셨다. 그 "믿음"은 그녀가 예수에게 치유의 능력이 충만함을 확신한 것이다(27, 28절 주석 참조). 그리고 그 믿음을 행위로 옮겼을 때 이 여인의 가장 절망적 문제였던 혈루증이 완전히 치유된 것이다. 여기서 "구원하였으니"(세소켄)란 완료시제를 취하고 있어 그 구원이 이미 그녀에게 확실히 주어졌음을 소개한다. 그리고 여기서 이 구원은 현상적으로는 육체적 구원과 영적 구원은 서로 밀접히 연관되어 묘사되고 있다(2:1 - 12). 따라서 이 치유의 체험은 질병으로 인한 모든 육체적 고통과 자신이 부정한 죄인이라는 정신적. 영적 굴레로부터 벗어남을 뜻한다(25절 주석 참조). 이와 같은 구원 선언을 예수께서는 군중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선언함으로써 이 여인이 더 이상 죄인이 아님을 선언하고 있으며, 아울러 예수는 이 여인을 소외 당했던 사회로 다시 복귀시키고 있다. 예수께서는 이 같은 자유와 회복을 허락하시려고 그 여인을 그렇게 찾았던 것이다. 이 여인은 더 이상 죄인이 아니며 또한 부정한 여인이 아니다. 한 사람의 구원은 죄의식으로부터 풀려나는 것 뿐만 아니라 건강과 평화로운 사회 공동체에 복귀하여 행복한 삶을 누리는 것까지 포함되는 것이다. 때문에 예수께서는 구원 선언을 한 다음"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 라고 감동적인 선언을 하고 있다. 여기서 "평안히 가라"(Go in pease, NIV)는 문자적로 "평화를 향하여 가라"는 뜻보다 "평화의 상태를 지니고 가라"로 보는 것이 좋다. 즉 예수께서는 그녀에게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평화의 은총을 선사하신 것이다. 이 평안은 히브리인들의 전통적 인사말인 "샬롬"(삿 18:6 ; 삼상 1:17)을 훨씬 능가하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제공하신 것이다(요 14:27). 이 "평안"에 대해 혹자(Anderson)는 말하기를 "여기서 꼭 내적인 고뇌로부터의 해방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가짐으로써 얻게 되는 생명의 완전
======5:35
아직 말씀하실 때에 - 마다의 현장감 넘치는 서술 기법이 또 한 번 돋보인다. 여기서 이야기는 급전환된다. 혈루증 치유 기적으로 무리들과 함께 멈추어서 지체하는 사이에 야이로의 집으로부터 전갈이 왔다. 물론 지금껏 예수 곁에서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던 야이로의 마음은 탈대로 다 타버린 상태였을 것이다. 그러한 애타는 상황 가운데 전해 진 내용은 야이로의 딸이 죽었다는 사실이다. 이 이야기는 혈루증 치유와 예수의 구원 선언으로 고조된 분위기를 잠재우는 소식이었다.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 여기서 "죽었나이다"(아페다넨)는 제 2과거 직설법의 형태를 취하고 있어 그 죽음이 변할 수 없는 확실한 사실임을 보고하고 있다. 따라서 이제는 더 이상 손 쓸 필요가 없다는 암시를 주고 있다.
어찌하여 선생을 괴롭게 하나이까 - 이는 더 이상 희망이 없는 상황을 강하게 묘사하고 있다. 즉 야이로의 딸의 죽음을 전한 자는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예의 바르고 합리적인 발상으로써 예수를 더 이상 괴롭히지 말 것을 간한 것이다. 한편 본문의 "괴롭게 하다"란 뜻의 원어 (스퀼로)는 원래 짐승의 가죽이나 나무의 껍질을 벗길 때 사용하던 말로서 가혹하리만치 혹독한 고통이나 쓰라림을 뜻한다(마 9:36). 따라서 이 말은 더 이상 예수를 "귀찮게 하거나 마음에 부담을 주지 말라"는 매우 단호한 요청으로 볼 수 있다.
========5:36
곁에서 들으시고 - 야이로의 딸이 죽었다는 사실을 예수께서 직접 들은 것이 아니라 심부름꾼이 야이로에게 하는 말을 "엿들으셨다"(파라쿠사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이 전한 말을 아예 무시하셨다. 실로 예수의 생명을 충성하게 하시는 사역 앞에서 이같은 절망적 소식은 아무런 가치가 없었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계속 당신이 목적하신 바를 추진해 가셨고, 더불어 딸의 죽음 소식 앞에 절망하고 있는 야이로를 격려하셨다. 이에 예수는 절망에 사로잡힌 야이로를 향해 희밍을 선언한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메 포부 모논 피스튜에) - "두려워 말라", "믿기만 하라"는 이 이중 명령은 모두 현재형을 취하고 있어 그 같은 상태를 계속 유지하라는 엄명이다. 이는 곧 죽음의 소식에 마음 흔들리지 말고 지금껏 나를 향해 지니고 있었던 그 믿음, 그것을 계속하여 지니라는 말씀이다(롬 4:20, 21). 실로 예수는 당신의 신적 본성을 의지하고 죽음을 훨씬 뛰어넘는 당신의 초월적인 능력을 계속 바라보게 하신 것이다 두려움과 믿음은 항상 적대적 관계이다. 따라서 극한 절망 속에 있을 바로 그 시점에 모든 부정적 요소(두려움)를 떨치고 절대적 존재이신 예수를 절대 신뢰하는 것은 참 용기요 참믿음이다. 예수께 지속적 신뢰를 갖는 이 믿음이야말로 곧 생명의 유일한 열쇠이다.
====5:37
베드로와 야고보와. . . 요한 - 여기서부터 예수의 동행인이 제한된다. 즉 베드로아 야고보 그리고 요한만 예수와 동행한다. 예수께서는 지금 곧 일어나게 될 생명의 이적을 직접 확인하고 후세에 전할 증거자로 3인의 가장 친밀한 제자를 선택하신 것이다(신 19:15). 이 외에도 변화산 사건 때에도 이 세 제자가 언급되었고(9:2 ; 마 17:1 ; 눅 9:28), 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할 때에도 이 세 제자의 이름이 거론된다(14:33 ; 마 26:37). 이 사실로 미루어 예수는 제자들 중에 이 세 제자를 가장 신뢰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예수께서 이 세 사람 외에 다른 여타의 사람을 물리신 이유는 확실치 않으나 아마도 당신의 사역의 진지함을 더하게 하시기 위해서 이거나(구경거리로 삼게 되지 않기 위해) 또 다른 방해 요인을 제거하기 위해서 였을 것이다. 혹자(Robertson)는 야이로 가정의 주택 구조가 작았기 때문이라고 하는 재미있는 이유를 제시하기도 하나 당시 야이로가 사회적으로 유력한 인사였다는 점에서 그의 주택이 내우 협소했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는 주장이다.
=========5:38
훤화함과. . . . . 울며. . . . . 통곡함 - 여기서 "훤화함"이란 어지러울 정도로 시끄러이 떠드는 것을, "심히 통곡함"이란 마치 꽹과리가 울려 대듯이 크게 울어대는 상태를 일컫는 말이다. 예수께서 야이로의 집에 도착하였을 때 이미 집안은 초상집의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모여서 시끄럽게 떠들며 통곡하고 있었다. 마태복음에서는 피리를 불고 소란스럽게 떠들고 있음을 묘사한다(마 9:23). 유대인들의 장례식은 흔히 정중한 분위기 보다는 조금 격앙스럽게 피리를 불고 통곡하며 소란하다. 또 돈을 주고 사람을 고용하여 피리를 불고 울게도 하였다. 이처럼 직업적으로 울어 주는 자들은 주로 여인드로서 머리카락을 풀어 헤치고 대성통곡하는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그 통곡 소리는 가슴 또는 손바닥을 치며 함창 혹은 교창(交昌)으로 이뤄 다. 한편 사ㅚ적으로 유력한 인사였던 야이로 집안이었기에 이러한 고용 통곡꾼 뿐 아니라 많은 조문객(弔問客)과 가족 친지들을 합한다면 야이로의 집은 참으로 혼란스러웠을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풍경은 죽음의 절망감과 함께 정신 못차릴 정도의 소음과 호란스러움으로 인해 또다른 절망감으로 들어가세 한다. 어쨌든 야이로 집에 모여든 사람들은 다만 슬퍼하거나 그 아이의 죽음을 이용하여 자신의 이익을 챙길 뿐 그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거나 야일로 집안에 궁극적인 평안을 제공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5:39
어찌하여 훤화하며 우느냐 - 예수께서는 절망적인 초상집 분위리를 극적으로 전환시키고 있다. 즉 장례 풍습에 따라 통곡하며 소람스럽게 떠드는 행위를 급지시키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이 말씀을 달리 표현하면 "어찌하여 이처럼 야단들이냐 이제 그만 치우라"는 뜻이 될 것이다. 그 이유는 아이가 죽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 혹자는 이를 축어적(逐語的)으로 해석하여 아이가 정말 죽지 않고 단지 기절한 상태에 있었다고 주장한다(Olshausen). 그러나 누가의 기록(눅 8:55) 중 "그 영이 돌아와"라는 표현에서 보듯이 그 아이는 분명 영(靈)과 육(肉)이 분리된 죽은 상태에 있었다. 그리고 죽은사람을 잠자는 것으로 표현하는 것은 헬레니즘(Hellenism)과 유대 문화권에서 나타나는 완곡 어법이다(창 47:30 ; 단 12:2 ; 요 11:11 ; 행 7:60 ; 고전 15:18 ; 살전 5:10). 특별히 생명과 부활(Resurrection)의 주이신 예수께서 인간의 죽음을 바라보실 때 그것은 영원한 허무나 절망이 아니라 잠시 잠간의 잠에 불과한 상태였음이 분명하다. 특별히 이 말씀은 그 소녀의 소생을 전제한 말씀이라는 점에서 볼 때 비록 죽음의 실재성은 명확한 사실이나 그것은 단지 한시적(限時的)인 수면 상태와 같은 것에 불과했던 것이다(고전 15:51).
진정 죽음과 삶의 지배권을 가지신 이 예수의 말씀은 모든 죽은 자와 죽어가는 우리 인생들에게 부활의 아름다운 희망을 갖게 하는 복음이 아닐 수 없다(욥 19:25 - 27).
=====5:40
저희가 비웃더라 - 예수께서 선언한 희망의 믿음이 다시 한 번 절망의 벽에 부딪힌다. 즉 인간의 죽음을 영구한 종말로 보았던 주변의 사람들이 본질적(本質的)으로 무지한 자신들의 실상은 파악하지 못하고 오히려 예수의 무지를 비웃었던 것이다. 여기서 "비웃더라"(카테게론)는 단어는 미완료 시제로서 그들의 조롱섞인 비웃음이 계속되었음을 보여 준다. 어쨌든 이 비웃음은 결과적으로 그 소녀의 죽음이 현상적(現象的)으로 명확한 사실이었다는 점과 또 이후에 그 소녀를 살리신 예수의 능력은 참으로 신비하고 초월한 이적이었음을 반증하는 일이 되고 말았다.
저희를 다 내어 보내신 후에 - 여기 "내어 보내셨다"(에크발론)는 말은 강압적으로 몰아내셨다는 뜻으로 위엄에 찬 예수의 권위를 엿보게 한다. 실로 예수는 당신의 능력과 존재를 부인ㅇ하고 희심하는 자들은 생명의 기적을 체험하는 특권에서 제외시키고자 비난과 조소로 일관하는 무리들을 매몰차게 쫓아내셨다. 그리고 그곳에 당신의 이적의 세 증인(제자들)과 그 아이의 부모만을 동참케 하셨다. 이 장면은 한 방문객에 불과한 예수가 그 집의 참 주인으로 향사하시는 기이한 모습을 보여 준다(Benger, Robertson). 실로 예수가 주인으로 있는 가정은 곧 생명의 기적을 맛볼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질 것이다.
========5:41
아이의 손을 잡고 - 예수의 치유 행위는 다양하게 나타난다. 여기서는 아이의 손을 잡는다. 이는 죽음을 향해 뻗는 생명의 손길로서 처음 야이로가 바닷가에 찾아와 예수께 간청할 때 아이에게 손을 얹어 달라고 한 사실을 기억나게 하는 장면이다(23절). 이처럼 어린아이의 손을 잡는 예수의 모습은 참으로 진지하고 애정어린 인자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절망에 처한 사람을 주님이 손잡아 주리라는 표현은 출 3:20 ; 7:5 ; 시 37:24 ; 눅 1:66 ; 행 11:21 등 여러 군대 나타난다. 진정 주님은 절망 속에 헤메이는 영혼들의 손을 부드럽게 잡으시고 참생명에로 인도하시는 친절한 안내자요 신실한 보호자가 되신다(시 23:2, 4). .
달리다굼(탈리타 쿰) - 이 말은 예수 당시 팔레스틴에서 통용되던 아람어 탈리타 쿰에서 유래한 말로서 "탈리다"(소녀야란 뜻)와 "쿰"(일어나라는 뜻)의 합성어이다. 이를 번역하면 "소녀야 일어나라"는 말이다. 그런데 본문에서 해석할 때 "내가 네게 말하노니"라는 말을 첨가시키고 있다. 이것은 "달리다굼"이라는 말이 어머니가 아침에 아이를 깨울 때 사용하는 평범한 일상어라고 보았을 때, 그 말의 신적 권위를 높이기 위해 마가가 추가시켜 해석한 첨가어로 보인다. "달리다굼"이라는 말은 여기서만 나오고 마태복음(일으키시는 행동만 기록)과 누가복음(번역문만을 기술)에서는 이 말이 없다. 여기서도 사실성과 생동감(生動感)을 특히 강조하는 마가의 문장 기법이 돋보인다. 즉 마가는 주님께서 친히 사용하신 아람어의 이 단문을 마치 현장을 재현하듯 분명히 기록하여 독자들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는 것이다. 한편 마가는 이 아람어와 함께 번역문을 병기함으로써 아람어에 생소한 이방 독자들을 향해 성실한 노력을 보여 주고 있다.
소녀야. . . . . . . . 일어나라(토 코라시온. . . . . 에게이레) - 여기서 "일어나라"는 뜻의 "에게이레"는 2인칭 단수 현재 명령형으로서 단호하고도 권위에 찬 예수의 명령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사실 이 말은 앞에도 언급했듯이 해가 뜨는 아침에 부모가 아이를 사랑스러운 어조로 깨울 때 흔히 쓰던 말이었다는 점에서 본 장면은 새 아침의 환희와 정겨움을 더해 준다. 실로 생명(生命)과 부활(復活)의 새 지평을 여신 예수께서는 친히 그 아침을 마면하셨을 뿐 아니라 모든 죽어 있는 영혼들에게 그 아침을 맞이하도록 "달리다굼"으로 친히 깨우고 계신 것이다.
====5:42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 여기서는 치유의 결과가 즉각적으로 나타난다. 즉 예수의 말씀대로 일어났을 뿐만 아니라 걸었다고 묘사한다. 더욱이 마가는 "일어난"(아네스테) 동작을 단순 과거 시제로 처리하고 곧이어 "걸어다닌"(페리에파테이) 동작을 미완료 시제로 묘사하여, 즉각적으 로깨어나 계속 방안을 이리저리 걸어다닌 사실을 생생히 기록하고 있다. 특히 그녀의 나이가 12세였다는 사실은 그녀의 동작이 얼마나 가볍고 발랄했을까 하는 상상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실로 그녀는 생명은 물론 원기(元氣)까지 회복하였던 것이다(Swete). 한편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걸었다는 이야기가 없다. 그 이유는 소녀가 다시 살아난 사실에 모든 관심을 집중시켜 기술하고자 했던 기록적 특징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소녀의 나이가 12살이라는 사실을 누가복음에서는 이 이야기의 첫 부문에서 밝혔지만(눅 8:42) 마가는 이야기의 마지막에서 밝히고 있다. 실로 이 12살이라는 나이는 인생에 있어서 이제 막 꽃이 피려는 시기(유대법상으로는 만 12년 6새월 이후에는 겨혼 가능 연령이 됨)이다. 특이한 점은 소녀의 나이와 이야기의 중간에 일어났던 혈루증에 걸린 여인의 투병 기간이 같은 12년으로 일치하고 있는 점이다. 성경에서 이 "12"라는 숫자가 완전수인 동시에 하나님의 경륜과 계획의 성취를 나타내는 수라는 사실과 연결하여 생각해 봄직하다(창 49:28 ; 겔 43:16 ; 계 21:12, 14).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 소녀의 소생과 원기 회복은 주위 사람들에게 정신을 잃게 할 만큼 큰 충격으로 다가갔다. 여기서 놀라는 사람들은 40절에서 언급한 사실로 미루어 소녀의 부모와 요한, 베드로, 야고보이었을 것이다. 그 중 누가의 기록에 의하면 그 부모가 가장 큰 충격을 맏은 것으로 나타난다(눅 8:56). 특히 마가는 그들이 놀란 것을 "크게"라는 말과 "놀라거늘"이라는 반복법을 통하여 그들이 마치 황홀지경(恍惚之境)에라도 빠진 듯이 완전히 이 나간 상태에ㅔ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 기적은 둔중 속에서 공개적으로 일어난 혈루증 치유 기적과는 전혀 달리 실내에서 그리고 몇 명 안되는 목겨자만 있는 은밀한 곳에서 조용하게 일어난 점이 특징적이다.
========5:43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 - 여기서 예수는 또 다시 기적적인 사건에 대해 목격자들에게 비밀로 할 것을 명령한다(1:44 ; 3:12 ; 마 12:16 ; 16:20 ; 17:9 ; 눅 8:56). 이것은 귀신들린 자를 치유하고 그 사실을 알리라고 한 점과(19절) 혈루증 환자의 치유를 공개적으로 선언한 사실(34절)과는 대조적이다. 예수의 이 같은 행위는 메시야의 자기 공개 시기가(마 16장) 이를 때까지 언제나 그러했듯이 당신의 놀라운 이적과 가사에 관한 소문이 대중들에 의해 문제화(問題化) 되지 않게 되기를 바란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 아이가 살아난 것을 비밀로 하기에는 불가능하기 때문에(이미 많은 사람들이 아이의 죽음을 알고 있었고, 따라서 그 부모들이 그 아이들을 숨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여기서 마가는 메시야 은닉의 주제(Messianjc - secret motif)를 인위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에 대해 혹자(Cranfield)는, 예수께서 그러한 말씀을 한 것은 그 일을 절대적으로 비밀에 붙이라는 의미로 한 것이 아니라 단지 가능한 한 그 일이 널리 알려지지 않기를 원했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즉 알 필요가 없는 자들에게까지 그 기적에 대해 알게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실로 메시야로서 예수의 신성은 그것을 믿을 준비가 되어 있는 자들에게는 공개되지만 그것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감춰진다. 어쨌든 마태는 그 소문이 온 땅에 퍼진 사실을 보고하고 있다(마 9:26).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 이 명령은 소녀가 완벽하게 다시 살아났음을 확인하게 한다. 즉 모든 몸의 기능이 정상적인 모습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이는 즉각적이면서도 완전한 인간 회복이요, 부분적 구원이 아니라 전체적인 구원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예수의 치유 기적을 소개한 본장에서 치유 받은 모든 사람들의 완전한 회복이 강조되었다. 귀신들린 자는 가족과 사회 공동체로 복귀함으로써 구원을 받았고 혈루증 환자 역시 근본적 치료로써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 문제가 모두 해결되었다(34절 주석 참조). 아야로의 딸도 죽은 것이 아니라 잠자는 것이라고 말하심으로써 소녀에게 전혀 이상이 없음을 말리면서 정상적으로 잠에서 막 깨어난 아이처럼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신 것이다. 한편 예수의 이 같은 명령은 전인적인 생명을 다시 제공하신 크나큰 사랑과 더불어 그 아이가 몹시 아파있을 동안 매우 굶주려 있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아시고 그 아이에게 자상하게 먹을것까지 제공하게 하시는 당신의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사랑을 보여 준다. 진정 예수는 영혼의 문제뿐 아니라 육신의 문제까지도 해결하시는 궁극적인 해결자이셨던 것이다.
예수의 사역이 확대됨과 아울러 예수께 대한 핍박의 기세가 더욱 고조되며, 이에 비해 예수의 사역은 점증되는 핍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점차 확대되어갔다는 사실에 관해서는 3장 강해에서 이미 설명한 바 있다. 종의 사역과 종에 대한 핍박이라고 하는 이 대조적인 두 주제는 본서 전체에 걸쳐 교차되거니와, 본장에서는 다시 종의 권능과 사역에 초점을 맞추어져 있다. 전후 문맥이나 내용 분석상 본장에서 주의깊게 고찰되어야 할 사항은 다음과 같다.
(1) 종의 위대한 치유 권능을 보여 준다. 4:35-41 강해에서 짧게나마 언급하였듯이, 본장 또한 4장의 비유에 등장하는 하나님 나라의 설립으로부터 완성까지의 전과정을 주관하시는 분이 바로 예수이심을 증거하는 역할을 한다. 4:35-41에서는 자연계를 지배하시는 창조주로서의 예수의 권세를 보여주거니와, 본장에서는 위대한 의사이신 예수의 권능을 소개한다. 이러한 여러 이적적 권능들은 하나님의 아들이자 메시야로서의 예수의 신분을 분명히 입증하고 있다. 예수는 인류 구원을 위해 스스로를 비어 종의 형체로 낮아지셨지만 본질상 하나님과 하나이셨던 것이다(빌 2:7).
(2) 종에 대한 핍박을 고조시키는 주요 요인을 보여 준다. 서두에서 말하였듯이, 예수의 사역이 날로 확대되고 놀라운 이적적 권능을 목격한 무리들의 환호 소리가 높아감에 따라, 대적들의 핍박 또한 한층 교묘(巧妙)해지고 악랄해져 갔다. 이러한 맥락에서 다음장인 6장은 예수께 대한 대적들의 핍박이 고조되는 상황을 간접적으로 암시하기 위해 고향 사람들의 배척 기사(6:1-6) 및 세례 요한의 순교 기사(6:14-29)를 소개하고 있다 하겠다.
(3) 봉사하시는 종의 모습을보여 준다. 본장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의 놀라운 권능을 증거할 뿐만 아니라 온갖 질병과 죄악으로 신음하는 인생들을 긍휼히 여기사 그들을 사랑의 손으로 어루만지시는 종의 봉사를 표현하고 있기도 하다. 예수께서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소유하셨지만, 이 권세를 군림하거나 자신의 명성을 떨치는 데 사용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인들을 위해 섬기며 봉사하는 데에 사용하셨다. 장차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것이었지만, 이 또한 권세와 권능이 없어서가 아니라 오직 인류를 향한 간절한 사랑 때문에 스스로 택한 고난과 죽음의 길이었을 뿐이다.
한편 본장에는 세 치유 기사가 수록되어 있는데(1-20, 21-34, 35-43절), 이 세기사에서 나타나는 공통점을 살펴봄으로써 본장의 강해를 끝맺기로 하자.
첫째로, 이들 세 치유 기사에는 공히 유대 의식법상 불결하게 여겨지던 것들이 등장한다. 즉, 귀신들린 사람이 그 사이에 거했던 '무덤'(3절), 혈루증 걸린 여인의 '피'(25절) 그리고 야이로의 딸의 '시신'(35절;레 21:1) 등이 그것이다.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이 의식법상 불결하다고 여겨 접근하기를 꺼려했던 자들에게 가까이하사 치유하심으로써, 형식에 얽매인 자들에게(3:4) 무언의 책망과 아울러 병들고 상한 자들에 대한 당신의 크신 긍휼과 사랑을 밝혀 보여 주셨다.
둘째로, 본장의 세 기사는 한결같이 치유함 받은 과정을 극적인 상황으로 묘사함으로써 주님의 이적적 권능의 탁월성을 여실히 부각시키고 있다. 즉, 아무도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광폭하게 날뛰던 광인이 온전해진 것이나, 열 두 해를 앓으면서 온갖 약을 다 써 보아도 효험이 없던 혈루병 환자가 예수의 옷에 손만 대고도 나은 사실 혹은 장사 지낼 준비를 하고 있던 죽은 아이를 한 마디 말씀으로 소생시키신 것 등이 모두 극적이라 하겠다.
1. 귀신들리 광인을 치유하심(5:1-20)
예수께서 귀신을 내어쫓으신 기사는 본서의 곳곳에 등장하지만(1:21-28;3:7-12등) 전후 상황을 본문처럼 소상하게 묘사한 예는 없다. 그리고 마 8:28-34;눅 8:26-39에도 평행 기사가 나오지만, 그중 본문이 가장 자세하게 소개한다. 귀신들림과 축사에 관한 내용은 9:14-29 주제 강해에서 다루었으니 참조하기 바란다. 그리고 마 8:28-34의 강해에서는 예수의 자기 계시적 측면, 곧 예수의 메시야적 권세를 부각시켰거니와, 본 강해에서는 주께서 크신 사랑과 선을 베푸시고도 오히려 경원시당하신 사실에 좀더 유념하기로 하자.
(1) 예수의 크신 긍휼. 풍랑을 잠잠케 하신 4:35-41의 이적 기사와 마찬가지로 본문 또한 예수의 메시야적 권능을 증거하시고 있음은 앞에서 언급한 바 있고, 마태복음 평행 기사의 주해에서도 집중적으로 다루었으니, 여기서는 사단의 잔인성과 귀신들린 자의 비참함 및 이에 대한 예수의 크신 긍휼에다 초점을 맞추어 보자.
무덤 사이에 거하면서 밤낮 소리지르며 돌로 자해 행위를 일삼는 광인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사단의 잔인한 파괴성을 절감할 수 있다. 실로 사단은 인간을 죽이고 멸망시키는 일에 골몰할 뿐이다(요 10:10). 때로 사단은 고아명의 천사로 가장하여 나타나기도 하고(고후 11:14), 달콤한 말로 유혹하기도 하지만, 그러한 사단의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과 인간사이를 이간시켜 파멸로 이끄는 것이다. 사단 자신 또한 영원한 파멸에 처해질 운명이기 때문에 사단의 달콤한 유혹에 넘어가는 자들의 궁극적 운명은 불을 보듯 환한 것이다(계 19:20).
어쨌든 이처럼 포악한 사단의 공략을 받아 함몰되어 버린 영혼과 정신 및 육체를 지니게 된 그 광인은 그야말로 가장 비극적인 인간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예수께서는 바로 이렇게 상실한 인격, 절망적인 영혼에게 찾아오셔서 당신의 다함없는 사랑과 완전한 구원의 은총을 제공하셨던 것이다. 실로 이것이 당신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목적이기도 하다. 더욱이 예수는 당시 사회로부터 완전히 소외된 그 광인을 소생시키기 위해 주변에 있던 약 2, 000마리의 돼지 떼를 희생시킴으로써 인간을 향한
당신의 크신 긍휼을 나타내 보이셨으며 천하보다 귀한 인간의 존엄함으로 재천명하셨다(요 21:26).
(2) 배척받으신 예수. 본문에도 예수께서 그 크신 긍휼대로 은혜를 베푸셨음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배척당하시는 고난받는 종의 모습이 나타난다(17절). 거라사인들은 한 영혼이 귀신의 올무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된 엄청난 축복과 은혜에 대해 감격하기 보다는 이천 마리의 돼지떼가 몰살당함으로 말미암은 경제적 손실에 연연하여 예수를 경원시하였다. 이는 인생의 근본 문제 보다는 목전의 현실적 손익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현실주의와 남이야 어떻게 되든 자신의 일만 염려하는 이기주의를 보여 주는 실례라 하겠다.
요컨대, 우리의 주위에는 우리를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사단의 세력이 항상 기회를 엿보고 있다. 사단은 불순종의 아들들의 마음속에서 역사하며(엡 2:2), 할 수만 있으면 택한 자들마저 미혹케 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마 24:24). 본문의 광인과 같이 꼭 귀신들린 상태는 아니라 할지라도 사단의 역사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이 각종 환난과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거라사 광인의 참담한 발작은 어쩌면 죄악 속에서 허둥대는 인생의 가련한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비참한 상황에로 몰아넣는 사단의 계교(計巧)를 분쇄하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엡 6:11).
* 예수의 행적. 이천년 전, 수많은 선지자들과 주의 백성들의 고대하던 메시야가 이스라엘 한 작은 마을에 탄생하셨다. 그리고 30년 후, 그분은 지금까지의 자신의 개인적인 삶을 마감하시고 마침내 인류 구원을 위한 위대한 공생애를 시작하셨다. 불과 3년, 아주 짧은 공생애 기간이었지만 그분은 우리의 영혼을 살찌우는 수많은 말씀과 우리의 삶에 기쁨과 희망을 불어넣는 수많은 이적을 이루시면서 그 흙먼지 나는 팔레스틴의 고을과 산야(山野)를 찾아 다니셨다. 오직 잃어버린 백성, 절망한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말이다. 이제 3여년 짧은 세월 동안 그분이 순례하셨던 팔레스틴의 여러 곳을 추적해 보면서 땀내음 나는 그분의 그 진한 사랑과 은혜를 다시 한번 회상해 보기로 한다.
2. 혈루증 앓는 여인을 고치심(5:21-34)
혈루증에 걸린 여인에 대한 치유 기사(25-34절)는 야이로의 딸을 소생시키신 내용(21-24, 35-43절) 사이에 삽입되어 있다. 이러한 삽입 기사는 시간의 경과를 알려줌과 아울러 본치유기사의 긴박감을 극적으로 고조시키는 효과를 드러낸다.
마 9:20와 눅 8:43-48에도 본문과 평행을 이루는 내용이 나오지만 간략한 언급에 그칠 뿐이며, 그 중 본문의 기록이 가장 상세하다. 즉 본문에는 여인이 혈루병에 걸려 고생하는 모습과 예수께 나아와 치유함받는 과정 등이 비교적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물론 본문에서 이야기의 초점은 병자를 긍휼히 여기사 그 질병을 치유해 주신 예수의 권능과 자비에 맞추어져야 하지만 편의상 내용 전개의 순서에 따라 혈루병에 걸린 여인의 투병 과정과 믿음 그리고 결과적 축복 등의 순서로 고찰해 보기로 하자.
(1) 투병 과정. 마가는 이 여인의 절망적인 상황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12년 동안 수시로 하혈하는 심각한 병을 치유하기 위해 이 여인은 유명하다는 의원을 다 찾아다니며 온갖 종류의 치료를 다 받아보느라고 갖가지 고통을 당했으며, 그 결과 가산마저 탕진하는 이중 삼중의 난관에 처해 있었다. 모진 질병에 걸려 완치를 쉽사리 낙관(樂觀)할 수도 없는 처지에서 수술실로 실려 들어가는 경험을 해본 사람은 이 여인의 답답한 심경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건강할 때는 건강의 소중함과 고마움을 별로 느끼지 못하다가 막상 병상에 드러눕게 되면 건강이 최상의 소원으로 부각되며 다른 어떤 것을 다 허비하면서라도 건강하게만 될 수 있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이 여인 또한 이와 동일한 생각에서 모든 것을 허비하였지만 남은 것은 더 악화된 질병이었으므로 그 절망감이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을 터였다.
(2) 여인의 믿음. 이 혈루병 걸린 영인은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 본 후 그 한계에 직면하여 자포자기 상태에 있던 중 예수에 관한 소문을 듣고 나아왔다. 물론 이 여인의 마음속에는 물에 빠져 허덕이는 자가 지푸라기라도 잡아 보려 한다는 식의 심리가 작용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전후 문맥으로 미루어 보건대, 우리는 그런 식으로만 단정할 수는 없으며 오히려 예수의 신적 권능을 확신한 여인의 신령한 믿음의 눈에 주목하게 된다. 여인이 치유함받기 위해 예수의 겉옷을 만진 것 또한 다분이 미신적인 느낌을 주지만, 오히려 역(逆)으로 여인의 큰 믿음을 보여 주는 행동이라 할 수 있다. 여인은 혈루병이 의식법상으로 부정하게 여겨짐을(레 15장) 알았던 까닭에 감히 예수 앞에 나서지 못하고 비록 예수와 직접적으로 대면하지 않더라도 그의 옷에 손만 닿는다면 자신의 병이 나으리라고 굳게 믿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중요한 것은 여인이 예수의 옷을 만진 것 자체가 아니라 옷을 만지는 행동 이면에 있는 절박감과 굳은 확신이라 하겠다.
(3) 결과적 축복. 예수께서는 여인이 몰래 자기 옷에 손을 대어 치유받은 사실을 알고서 그 여인을 찾으셨다(32절). 이는 그 여인을 꾸짖기 위함이 아니라 그녀와의 인격적 만남을 통해 신령한 축복을 나눠주시기 위함이었다. 이 여인의 간절한 소망은 육신상의 건강을 회복하는 것이었지만 예수는 육신 뿐만 아니라 영혼까지 치유해 주고자 하셨던 것이다(2:5).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의 여러 치유 이적들은 병자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주님의 자비로우심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주께서 우리 영혼의 질병 곧 죄악을 치유하시기 위해오신 권세있는 분임을 입증하는 역할까지 하고 있다 하겠다.
전쟁터의 참호 속에서는 무신론자가 없다는 말이 있듯이, 인생의 벼랑에 서서 극적으로 신앙을 갖게 되거나 새로이 회복하는 경우는 흔하다. 하지만 우리는 상황과 여건에 관계없이 늘 주께 의탁, 헌신함으로써 모든 무력감과 좌절, 고뇌와 번민, 타락과 방종 혹은 이기나 교만으로부터 벗어나는 복된 삶을 누려야겠다.
* 성경에 나타난 육체의 질병들. 이스라엘 백성은 아열대성 기후로 말미암아 생기는 질병에 잘 걸렸던 것 같다. 그러나 구약 시대에는 물론이고 신약 시대에 이르러서까지도 이스라엘인들이 가진 의료에 관한 지식은 극히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고대 팔레스틴에서 유행한 여러 질병들에 대한 성경상의 보고는 불충분한 것이다. 즉, 성경에는 열, 출혈, 고름, 가려움 등과 같은 증세만을 언급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병의 특징이 어떤 것인지에 관해 추측할 뿐인 경우가 많다. 다음에서 성경에 주로 등장하는 몇 가지 주요한 병에 대해 살펴보겠다.
(1) 문둥병. 이스라엘 사람들은 문둥병을 대단히 두려워하였다. 그 까닭은 이 질병으로 인해 생기는 신체적 괴로움 때문만 아니라 이 병에 걸리면 의식적으로 부정한 자로 간주되어 사회에서 엄격히 격리, 추방되었기 때문이다(레 13:24-46, 주제강해 '문둥병 규례의 제반 의의' 참조). 문둥병은 두 가지 주요 형태로 나타나는데, 첫번째는 레프로마투스(Lepromeatous)라고 명명되며 치료받지 않으면 치명적인 상태에까지 이른다. 두번째는 보다 양성적(陽性的)인 형태로서 투베르쿨로이드(Tuberculoid)라 명명되며 1-3년 내에 치유된다. 구약성경에서 치유함받은 문둥병자가 제사장에게 가서 확인받은 경우는 후자의 형태에 걸린 것으로 보인다(레 14:2-9).
(2) 간질. 유전이나 사고에 의한 뇌손상 등이 원인이며, 마 17:15-18의 경우에는 귀신들림이 원인으로 되어 있다. 증세로 환자가 갑자기 나뒹굴어지며 의식을 잃고 경련으로 인해 온몸을 떨며 입에서 거품을 흘리는 발작을 한다.
(3) 종기. 성경에서 사용된 종기라는 말은 여러 형태의 피부병, 곧 농포(膿疱), 단순한 종기, 뾰루지, 농양(膿瘍) 등을 망라했던 것 같다. 히스기야의 종기는 피부 깊은 곳에서 곪은 농양이었음이 분명하며(왕하 20:7), 애굽에 내린 여섯번째 재앙인 독종은 극심한 가려움 증세와 함께 물집이 생기고 급기야 화농해서 고름이 흐르게 되는 피부병이다(출 9:8-12).
(4) 하혈. 자궁 출혈 혹은 질 출혈의 원인은 대략 다음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는, 호르몬 불균형으로 인해 월경 주기가 늘어나거나 연속적으로 출혈이 빈발하는 경우이다. 둘째는, 유섬유종(Fibroid Tumors)으로 인한 출혈이며, 세째는 암의 초기 형태인 악성 종창으로 인한 출혈이다. 5:25에 나오는 여인은 아마 첫번째 혹은 두번째의 경우에 해당될 것이다.
(5) 설사병. 근동인들에 있어 이 병은 매우 흔했다. 때에 따라서는 치질로 발전하여 때때로 결장 하단부가 탈장(脫腸)되기도 하는데, 여호람의 병이 바로 이 경우에 해당한다(대하 21:18).
(6) 폐병. 이 병은 성경에 두 번 언급되며(레 26:16;신 28:22), 두 경우 모두에 있어 폐병은 이스라엘의 패역함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로 말미암아 생겼다.
(7) 소경. 이는 고대의 팔레스틴 지역에 있어 일반적인 질병이었다. 가난, 비위생적 생활 조건, 밝은 태양, 지나친 열, 불어오는 바람, 사고 등도 소경이 되게 하는 몇 가지 요인이었지만, 주요 원인은 전염성 병균에 대한 무지였다. 성경에 언급된, 날 때부터의 장님은(요 9:1) 아마도 눈의 임질이었을 것이다. 이 병은 산모의 질 속에 잠복하고 있던 임질균이 해산 당시 태아의 눈 속에 침투함으로써 생긴다. 그리고 드라코마로 인해 소경이 되기도 하는데, 이 질병의 전염균은 바이러스(virus)이다.
(8) 열병. 이스라엘의 여름철 기온은 매우 높았으나 이 뜨거운 공기를 조절하는 장치가 없었다. 따라서 뜨거운 뙤약볕 아래 힘든 육체 노동을 해야 하는 경우에는 일사병에 걸리기 쉬었다. 일사병의 특징은 체온이 106-7 F 가량 높아지면 계속 땀을 흘리고 의식을 잃는 데 있다. 신 28:22에 언급된 열병은 아마 이 일사병으로 짐작된다. 성경에는 이외에도 여러 질병들이 언급되나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3. 야이로의 딸을 소생시키심(5:35-43)
중간에 삽입된 혈루병 걸린 여인에 대한 치유 기사(25-34절)에 이어 본문은 22절로부터 시작된 야이로의 딸에 관한 이야기로 다시 우리의 주의를 집중시킨다. 본문의 사건에 담긴 의미를 상고하기 이전에 우리는 딸을 구하기 위해 예수 앞에 나아온 야이로의 모습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야이로는 회당장이라는 사회적 체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예수의 발 앞에 엎드려 간구하였다(22절). 이는 그가 딸을 구하기 위해 얼마나 노심초사하였는지를 보여줌과 아울러 예수의 치유 권능에 대한 강한 믿음을 가졌음을 시사한다. 그는 한 순간이라도 빨리 예수를 자기 딸이 누워있는 집으로 모셔 가고자 조바심내었으므로, 무리들 사이에 멈추사 혈루병에 걸린 여인을 고치시는 예수의 느긋하신 모습을 보고 인내의 한계점에 도달했는지도 모른다(시 13:1;69:3;119:82;요 11:6). 하지만 인간의 절망이 곧 하나님의 기회라는 사실을 확신하였다면 야이로는 그토록 조급해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이에 본문의 사건에 담긴 의미를 상고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생명의 주(主)이신 예수. 앞에서는 자연계를 다스리시는 창조주요(4:35-41), 또한 영계를 지배하시는 분(1-20절)으로서 자신을 계시하셨던 예수께서 이제 생명의 주인이 되심을 계시하신다. 본문 외에도 성경에는 죽은 자를 소생시키는 몇몇 이적들이 수록되어 있다. 하지만 엘리사가 수넴 여인의 아들을 회생시킨 것이나(왕하 4:32-37), 바울의 유두고를 살린 것과는(행 20:7-12) 달리, 예수는 자신의 능력으로써 죽은 여아를 살리심으로써 나사로를 살리실 때와(요 11:1 ff. ) 마찬가지로 당신의 신성(神性)을 밝혀 증거하셨다.
(2) 부활에 대한 예시. 죽은 아이를 살리신 사건은 예수께서 죽음을 물리치고 부활하사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실 것을 암시한다(고전 15:23). 첫 사람인 아담의 범죄 이후로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다가오는 저주가 되고 말았다(롬 5:17). 부유한 자나 가난한 자, 학식이 있는 자나 무식한 자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에게 죽음이 닥친다는 점에서 죽음은 차라리 공평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으로서 죽음 이후에는 심판이 있다고 성경은 증거한다(히 9:27). 따라서 심판 이후에 맞게 될 두번째 죽음 곧 영원한 지옥에 처하게 되는 것이야말로 가장 두려운 형벌이다(계 20:14). 예수께서는 죄악으로 말미암아 초래된 모든 저주들에서 인생을 해방시키기 위해 십자가를 대신 지셨을 뿐만 아니라 사흘 만에 부활하사 스스로 죽음의 권세를 잡은 사단을 물리치시고 당신을 믿는 모든 성도들에게도 동일한 부활의 새생명을 허락하셨다(시 49:15;요 5:25;6:40;요 11:25).
(3) 믿음의 중요성.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야이로는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버린 듯한 허탈감에 사로잡혔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는 '믿기만 하라'고 당부하셨다(36절). 죽음이라는 한계 상황 앞에서는 누구나 체념이 앞서게 마련이지만, 하나님은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전능자이시므로 모든 한계 상황을 타개하실 수 있음을 본문은 시사한다(롬 4:17).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하나님이 이루고자 하시는 일이 당신의 뜻에 부합되느냐 아니냐 하는 것이며, 2차적으로는 받아들이는 자에게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다. 실로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에 참여케 하는 으뜸가는 요소라 하겠으며, 인간측에 요구되는 최선의 노력이자 최소한의 노력이기도 하다. 요컨대, 본문은 혈루증 여인의 치유 기사와 함께(25-34절)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치유 이적의 근본 목적이 예수의 메시야적 신성을 증거하는 데 있었음을 보여 준다.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주께서 지금도 우리 속에 인격적으로 내주하사 역사하고 계심을 확고히 믿는 믿음은 불안과 절망의 자리를 평강과 소망의 자리로 변화시켜 줄 것이다.
(4) 제자화 훈련의 중요성. 공생애가 진전됨에 따라 예수께서 수많은 무리들에게 복음을 전하시고 그들의 질병을 치유하시는 사역을 계속해 나가셨지만, 갈수록 정예화(精銳化)된 소수 제자들에 대한 훈련과 교육에 비중을 많이 두셨음을 우리는 유의해야 한다.
야이로의 죽은 딸을 소생시키는 현장에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등 세 제자만 동행이 허락되었다(37절). 이들 세 사람은 변화 산상이나(9:2), 겟세마네 동산(14:33) 등 예수의 공생애 중 중요한 순간에 항상 예수 곁에 있었다. 수많은 추종자들 중 열 두 제자를 따로 세우신 예수께서는 열 두 제자들 중에서도 이 세 제자를 특별히 구별하여 장차 초대 교회에서 중추적 역할을 감당할 수 있도록 집중적인 훈련을 시키셨다(행 3:11-16;8:14, 25). 이 세 사람이 특별히 지목된 데 대해서 나머지 제자들은 인간적인 질투에 사로잡혔을지도 모른다(마 20:21). 그러나 이러한 선택은 주님의 주권적인 뜻에 의한 것이며, 또한 장차 탄생할 초대 교회의 전체 성도들의 유익을 도모하기 위한 목적에서 취해진 배려였기 때문에 이기적이며 편파적인 동기에서의 편애와는 차원이 달랐다.
오늘날 날로 심각한 양상을 띠어가는 교권주의도 그러한 섬김의 도를 망각함에서 기인한 것이다. 하나님의 교회 내에 여러 교직자들을 세우신 것은 세상 제도에서처럼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게 하시기 위함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하는 하나의 단일체 곧 한 몸을 세우기 위한 봉사자들로 삼으시기 위함이었다(마 20:25-28;고전 12:4-31).
* 예수 당시의 주요 사회 계층 및 종교 계층. 성경 본문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 중에 하나는 그 역사, 문화, 종교, 배경을 정확히 이해하는 일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배경 이해를 통해서 성경 시대 당시의 상황을 좀더 깊이 살펴볼 수 있으며, 그 성경 본문이 형성되게 된 이유와 목적을 추정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여기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활동하셨던 당시의 중요 사회, 종교 계층에 대한 대략적인 연구를 해두었다.
1. 사회 계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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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 분 | 특 징 및 역 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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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회당의 우두머리로 집회를 인도하고 회당 건물의 유지, 운용, |
| | 회당장 | 보존을 책임질 뿐만 아니라 예배 질서와 신성함을 유지하는 책 |
| | | 임을 맡고 있었으며, 또한 토라(율법)의 낭독이나 설교 등을 |
| | | 할당해 줄 권리를 갖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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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당 | 핫 잔 | 회당의 서열 2위로 종교 회의의 지도자 역할을 하며 회당장의 |
| | | 조수로서 제반 직무를 수행하고 정리하였으며 후에는 기도를 |
| | (Hazzan) | 암송하는 일과 성서를 낭독하는 일을 맡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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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랍 비 | 랍비 학교를 졸업한 자들로 안식일에 회당에서 율법의 어려운 |
| | (Rabbi) | 점을 해석하고 가르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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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유대인의 최고 재판소였던 산헤드린에서 주로 제사장과 사두개 |
| | 산헤드린 | 인들로 구성된 72명의 공회원이 있었다. 대제사장은 이 집단의 |
| | 공 회 원 | 의장이었으며, 이들은 사법권과 행정권을 가진 영향력 있는 정 |
| | | 치적 집단으로 군림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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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회 | 지방 | 각 지방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처리하는 지방 공회에는 7-23명에|
| | 공회원 | 이르는 장로들로 구성된 공회원이 있었다. |
| +----------+------------------------------------------------------------+
| | | 산헤드린은 유대 백성에게 세금을 받아 총독에게 바치는 일을 |
| | 세 리 | 대행하였다. 이들은 이 일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세금 |
| | | 청부인, 곧 세리를 채용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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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1년에 한 번 속죄일에 지성소로 들어가는 특권과 산헤드린 의 |
| | | |
| | 대제사장 | 장의 권한을 가졌다. 구약의 세습 제도가 중지되고 왕으로부터 |
| | | 임명되는 관행이 생기고 부터는 그 권위가 상당히 실추되었다. |
| +----------+------------------------------------------------------------+
| | 성 전 의 | 대제사장 차기 후보로서 희생 제사 집행에 있어서 대제사장을 |
| | | 돕고 경우에 따라 그 권한을 대행하였으며 산헤드린 회원이었 |
| | 두목 | 다. |
| +----------+------------------------------------------------------------+
| 성전 | 수석 | 봉헌 제물과 성전 재정을 주관하는 상당한 권리자로서 산헤드 |
| | 제사장들 | 린 회원이었다. |
| +----------+------------------------------------------------------------+
| | 일반 | 1만 8천명에 이르는 이들은 24반열로 나뉘어져서 매년 두 번 |
| | | 일주일씩 성전 희생 제사를 수행하였다. 이들은 나름대로의 직 |
| | 제사장들 | 업을 가졌다. |
| +----------+------------------------------------------------------------+
| | 레위인 | 1만여명에 이르는 이들은 24반열로 나뉘어 음악 및 다양한 형 |
| | | 태의 성전 봉사를 하였다. |
+------+----------+------------------------------------------------------------+
| | | 유대인들이 바벧론 포로로 잡혀 있을 때 율법에 대한 깊은 연 |
| 자유 | 서기관 | 구가 시작되었고 율법을 복사하는 전문가들이 생겼는데 이들이 |
| | | 서기관이다. 이들은 랍비, 율법사등으로 불리워지기도 하였는 |
| 처소 | (율법사) | 데 대부분 바리새인으로 각각 공공기관 또는 사설 단체에 속하 |
| | | 여 율법의 이론적 발전, 율법의 교수, 율법의 적용에 힘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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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종교 계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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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분 | 바 리 새 파 | 사 두 개 파 | 엣 세 내 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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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스라로부터 시작된 유| 다윗과 솔로몬 시대 때 | 마카비 전쟁 약 50년전 |
| | 대주의에 충성하는 한 | 유명했던 대제사장 사독| 제사장 제도가 속화되기|
| 기 | 부류가 마카비 시대 때 | 의 이름에서 기원된(삼 | 시작할 때, 헬레니즘에 |
| | 생겨났다. 이들은 '하시| 하 8:17) 이 집단은 하 | 반대하고 유대 정통주의|
| | 딤', '하시디안'이라 불| 스모니안 시대에(B.C.16| 를 표방한 집단이 나타 |
| | 리워진 경건 집단으로서| 6-63) 구체적인 집단으 | 났다. 이들은 처음에는 |
| | 에스라를 모세 다음가는| 로 두각을 나타내었다. | 작은 공동단체에 머물렀|
| 원 | 유대교의 창설자로 숭앙| 예루살렘 귀족이나 대제| 으나 B.C말에는 사해 엔|
| | 하였던 바리새파이다. | 사장 무리들로 구성된 | 게디에서 큰 집단을 이 |
| | | 이들은 A.D. 70년 예루 | 루었다. |
| | | 살렘 성전 파괴로 몰락 | |
| | | 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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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세 율법(토라) 외에도| 모세 오경만을 정경으로| 모세 율법을 기본으로 |
| 경 | 각종 구전 전승을 정경 | 인정하고 나머지 전승 | 다른 종교 서적을 심도 |
| | 과 동일하게 취급하여 | 문서들의 권위는 부인하| 있게 연구하였다. |
| 전 | 권위있고 영감된 것으로| 였다. | |
| | 인정하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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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자유 의지와 하나님 | 1. 제사 의식에 대해 지| 1. 율법의 각종 정결 |
| | 의 주권은 상충되지 | 대한 관심을 가졌다.| 예식을 철저히 지켰 |
| 교 | 않는다고 보았다. | 2. 인간의 자유 의지를 | 다. |
| | 2. 천사와 마귀는 체계 | 강조했다. | 2. 성전 제사에는 불참 |
| | 적인 계급 제도를 가| 3. 내세, 부활, 영적 세| 했으나 예물은 드렸 |
| | 지고 있다고 보았다.| 계, 천사와 마귀 등 | 다. |
| 리 | 3. 사후 세계와 영혼의 | 의 존재를 믿지 않았| 3. 경전 연구와 경전 생|
| | 불멸, 보상과 상급을| 다. | 활을 강조하였다. |
| | 믿었다. | | 4. 맹세를 중히 여기고 |
| | | | 영생을 믿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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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율법을 중요시하는 | 1. 사두개파는 당시 보 | 1. 극단적인 종파주의자|
| | 바리새인은 당시 민 | 수주의 자로서 민중 | 로 공동생활을 하였 |
| | 중들의 존경의 대상 | 들의 종교 성향을 이| 다. |
| | 이었다. | 해하지 못했다. | 2. 사유 재산을 부인하 |
| 특 | 2. 민중과 밀착된 그들 | 2. 민중들로부터 유리되| 고 검약한 생활을 하|
| | 의 교리는 신약 성경| 었으므로 민중들과 | 였다. |
| | 에 자주 등장하여 그| 더불어 생활하신 그 | 3. 노예 제도를 부인하 |
| | 리스도의 비판을 받 | 리스도와 큰 마찰을 | 고 결혼을 꺼려하였 |
| | 았다. | 일으키지 않았다. | 다. |
| | 3. 율법에 대한 집착과 | 3. 현세에 집착했으므로| 4. 숙명론적인 경향이 |
| | 더불어 이상적 메시 | 경건한 마음과 태도 | 있었다. |
| 징 | 야 왕국에 대한 소망| 를 상실하였다. | |
| | 이 강했다. | | |
| | | | |
| | 4. 그들의 교훈은 신학 | | |
| | 적인 면보다는 윤리 | | |
| | 적인 면이 강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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