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
얼마 후 밀 거둘 때에 - 팔레스틴 지방의 밀 추수는 대개 양력 5월 경에 있지만 지역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다. 한편 이스라엘의 추수 시기는 크게 세 단계로 구분되는데 보리는 유월절(양력3, 4월)에, 밀은 오순절(양력 5,6월)에, 그리고 무화과나,포도, 올리브 등은 장막절(양력 9, 10월)에 거두어 들인다(성경 총론, '성경총론, '성경의 도량형과 화폐 및 월력' 참조) 그러므로 삼손이 다시 그의 아내와 동거하기위해 아비 집 소라 땅(13:2 ; 14:19)에서 딤나(14;1, 5)로 돌아온 시기는 5월에서 6월 초순경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Cundall).
염소 새끼를 가지고 그 아내에게로 찾아가서 - 염소는 유목민들에게 있어서 귀한재산이었다. 13:15주석 참조. 때문에 이는 화해의 예물이나, 약조물(約條物) 또는 처가에 찾아갈 때의 선물등으로 곧잘 이용되었다(창 38:17, 20, 23). 본절에서도 삼손이그의 아내와 화해하고 다시 동거하기 위해 귀한 선물인 염소를 가지고 처가를 방문한것을 볼 수 있다. 한편 이로 볼때 삼손의 결혼은 사디카(Sadiqa) 결혼이었던 것 같다.사디카 결혼이란 우리 나라의 데릴 사위제도와 비슷한 것으로, 고대 근동에서 유행되었던 가모장적(家母長的) 혼인의 한 형태이다. 이 혼인에는 (1) 결혼 후 신랑이 신부집에 게속적으로 거주하는 비나(beana)혼과 (2) 신랑이 신부 집에 정기적으로 찾아가는 모타(Mota)등 두 종류가 있다(R. de Vaux).
내가...아내를 보고자 하노라 - 이로 보아 삼손은 아내에 대한 연모의 정으로 과거그녀와 동족들이 저지른 잘못(14:15-18)을 용서하고 아내와 더불어 새로운 삶을 살려한 것 같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계획과 호의(好意)는 곧 그의 장인에 의해 산산이 부숴지고 만다(2절).
=====15:2
본절에서는 삼손의 장인이 삼손의 아내를 다른 사람에게 주었기 때문에 그 동생을아내로 취할 것을 권고하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장인의 행동은 삼손의 급한성격때문에 임시 조치로 급하게 제시된 방안이거나, 아니면 삼손으로부터 다시 혼수감을 받기 위한 그의 탐욕에 기인한 잔꾀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로 인하여 삼손의 마음은 블레셋 족속 전체에 대한 증오심으로 재차 불타게 된 것이다.
그를 심히 미워하는 줄로 내가 생각한 고로 - 만일 삼손의 장인이 삼손과 그의 딸이 하나님앞에서 엄숙히 맺어진 사이라고 생각했다면 이러한 변명은 도저히 하지 못했을 것이다. 더군다나 그는 삼손으로부터 병폐(病幣)를 받고서 그의 딸을 내주었을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기꺼이 다른 사람에게 주어 버렸으니(14:20) 그 저의가어디에 있는지 능히 짐작할 수있다. 1:1-20 강해, '병폐와 빙물' 참조.
그 동생이...너는 그의 대신에 이를 취하라 - 얼핏 생각하면 삼손 장인의 이같은제의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삼손의 권리를 인정한 데서 나온 제의로 오해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과거 라반이 레아를 라헬인 양 꾸며 야곱을 속이고 그에게서 노동력을 착취한 것과 같은 행위이다(창 29:15-30). 즉 이같은 제의는 다름 아닌삼손의 장인이 삼손에게 또 다른 병폐를 기대하고서 제시한, 탐욕적 저의가 깔린 제안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삼손은 그러한 장인의 간악한 면모를 한 눈에 간파하고서 일언지하에 그의 제의를 거절했던 것이다(Pulpit COmmentay).
=====15:3
이번은 내가 블레셋 사람을 해할지라도 - 삼손은 장인의 간악한 처사(2절)가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블레셋 사람의 일반적인 태도로 간주하고 장인의 가족들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전 블레셋인들에게 복수할 결심을 굳히게 된다. 그리고 그는 여호와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모독한 족속들에게 원수 갚는 일은 하나님앞에서도 정당하다고 생각했다(민 32:22).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떠한 방식으로 삼손을 사용하시며,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시작하셨는가(13:5)를 발견하게 된다.
=====15:4
삼손이 가서 여우 삼백을 붙들어서 - 여기서 '여우'로 번역된 '슈알'(* )은 '승냥이'(jackal)를 가리키고 있음이 틀림없다(Wycliffe, Hervey, Keill &Delitzsch). 왜냐하면 여우는 보통 군거(群居)하지 않고 단독으로 다니며, 곤충, 과일, 작은 동물들을 잡아먹는 반면 승냥이는 무리를 지어 다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단독 생활을 하는 여우를 300마리나 잡는다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닌 것이다. 이것만보더라도 삼손이 잡은 300마리 짐승은 승냥이임에 분명하다.
그 두 꼬리 사이에 한 홰를 달고 - 여기서 '홰'란 흡수력이 강한 나무 막대기에기름을 듬뿍 묻혀서 불에 잘 타게끔 만들어 놓은 막대를 가리킨다. 그런데 전체 여우수가 300마리였으니 여우 2마리씩을 연결한 후 한 개의 채를 꽂았다 해도 최소한 150개의 채가 필요했었음을 알 수 있다.
=====15:5
곡식단과 아직 베지 아니한 곡식과 감람원을 사른지라 - 고래(古來)로 수많은 사람들이 이 사건의 역사성(歷史性)에 대해서 의문을 품어 왔다. 그러나 본 사건은 상식적인 견지에서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다고 판단된다. 즉 약 150개의 홰에 불이 붙자 300마리의 여우들은 뜨거움에 놀라서 내닫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여우들이 지나가는 곳마다 온통 불바다를 이루자 여우들은 아직 불이 붙지 않은 곳만을 찾아내 숨어들려고 했을 것이고 그러다보니 곡식 밭은 순식간에 전소(全燒)하게 되었을 것이다(Matthew Henry). 이와같이 곡식단을 불사르는 방법은 고대 농경 사회에는 흔히 있던보복 방법이었는데, 이러한 보복 행위는 그 지역의 한 해 경제를 송두리째 파괴하는것으로 매우 치명적이다.
감람원 - 이에 해당하는 '케렘 자이트'(* )는 '포도원과 감람원'으로도 번역될 수 있다. 이같은 번역을 취하는 성경으로는 70인역(LXX), KJV, NIV, 공동번역등이 있다. 한편 이는 당시 딤나 지방에 포도원이 많았던 점(14:5)에 비추어 볼 때그리 무리한 번역은 아니다.
=====15:6
블레셋 사람 - 딤나 주민은 물론 그밖의 다른 지역에 거하던 블레셋인들을 모두포함하는 말일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딤나 주민들만이 삼손을 응징하려 들었다면 그들이 삼손의 장인을 가리켜 굳이 '딤나 사람'이라고 표현치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대신 '그'라든가 아니면 '우리 지역에 사는 사람' 등으로 표현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누가 이 일을 행하였느냐 - 삼손의 보복 행위로 말미암아 한 해 수확물을 몽땅 소실(燒失)당한 블레셋인들은 극도로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블레셋 사람들이 정작 삼손을 잡아 처벌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신 그의 처가 식구들을 처벌하는 것이 쉬웠으므로, 이에 그들은 삼손의 장인과 그의 아내를 잡아 불로 태워 죽였던 것이다.
그 여인과 그의 아비를 불사르니라 - 고대 근동에서 불로 태워 사형시키는것은 간간이 있던 일로서 성경에서도 간음한 자에게 이같은 형벌을 내릴 것을 명하고 있다.(창 38:24 ; 레 20:14 ; 21:9). 신 25:1-4 강해. '성경에 나타난 형벌의 종류'참조. 한편 어떤 헬라어 사본이나 시리아어 사본에는 이 부분을 '그녀와 그녀의 아비집을 불살랐다'로 번역하고 있는데, 이는 8:15에 기록된 블레셋 청년들의 협박과 그내용이 일치한다(Cundall). 아무튼 삼손의 아내와 장인은 자기 동족들의 손에 의해 이처럼 끔찍한 죽임을 당하였다. 이는 그들이 일신상의 안일만을 도모하여 삼손을 배신하고 일종의 간음죄를 저지른 데 대한 당연한 형벌이다. 특히 삼손의 아내는 블레셋청년들의 협박을 두려워하여 남편을 배신하고 동족의 편에 붙기까지 하였지만(14:15-17), 결국 그 협박의 내용대로 죽임당하고 말았다. 여기서도 우리는 세상 만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참으로 오묘함을 엿볼 수 있다.
=====15:7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은즉 - 블레셋사람들이 삼손의 처가에 행한 처사(6절)에 대한 삼손의 태도 표명이다. 그런데 이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 학자들간의 견해는 다양하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견해는 곧 다음 두가지이다. (1) KJV는 본절을 '비록 너희가이 일을 하기는 했으되'(though ye have done this)로 번역하고 있다. 이는 곧 딤나여인의 간음 행위에 대한 블레셋인들의 응징에 대해서는 삼손이 호의적인 반응을 보인것으로 보는 견해이다. (2) 개역 성경에서처럼 '이것이 너희가 나를 대하는 것 이라면나도 그에 상응하는 보복을 행하겠다'는 뜻으로 보는 견해이다(Henvey). 그런데 사실블레셋 사람들이 특별히 삼손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취할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비록그들이 삼손의 처가를 징벌했다 할지라도 그것은 자신들이 입은 피해에 대한 응징이지삼손에게 호의를 보이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4-6절). 따라서 위의 두 견해 중 후자가더 타당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블레셋의 처사는 오히려 삼손의 증오심만 자극한결과를 빚고 만 것이다.
=====15:8
크게 도륙하고 - 삼손의 처가에 대한 블레셋의 처사는 이처럼 삼손으로 하여금 블레셋을 칠 빌미를 준 셈이 되고 말았다. 한편 여기서 '도륙하고'에 해당되는 원문은문자적 으로 '넓적다리 위의 다리'(쇼크 알 야레크, * )를 쳤다는뜻이다. 즉 직역하면 '넓적다리 위의 엉덩이'(hip on thigh)를 쳤다는 뜻이다. 그러나이는 어디까지나 히브리인들의 관용적 표현으로서 '상대방을 철저히 파멸시키는 것'을의미한다. 따라서 개역 성경의 의역(意譯)이 적절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Wylciffe,pulpit Commentary).
에담 바위 틈에 거하니라 - 대하 11:6에는 베들레헴 근방에 위치한 에담(Etam)이나온다. 그러나 그곳은 딤나와 너무 멀리 떨어진 곳으로 본절의 사건과 무관한 것같다. 한편 대상 4:32에 따르면 시므온 지파내에도 에담이란 지역이 있는데 본절의 에담은 바로 이곳인 것 같다. 더욱이 9절에서 블레셋사람들이 시므온 지파가 함께 거하고있는 유다(수 19:1)에 진을 친 것으로 보아 그곳이 틀림없는 것 같다. 아무튼 이로 보아 삼손은 자기 고향 소라에서도 안전을 유지하기가 힘들었던것 같다. 아니면 자기로인해 가족이나 친지들에게 해가 미칠 것을 염려하여 이곳 에담으로 피신한지도 모른다.
=====15:9
유다에 진을 치고 레히에 편만한지라 -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에게 당한 일(8절)에대하여 보복하기 위하여 삼손이 숨어 있는 유다지역을 칠 작정으로 레히(Lehi)에 진을쳤다. 그런데 이곳 레히의 정확한 위치에 대하여서는 알 수 없다. 다만 추측컨대 딤나나 소라, 에담 그리고 블레셋 접경(接境)에서 그리 멀리 떨어진 곳은 아닐 것이다. 혹자는 이곳을 브엘세바에서 6.4Km 지점에 있는 요새 엘 레히(el lechieh)인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Keil & delitzsch Commentary, Vol.2 p, 415).
반면 또 어떤 이는 벧세메스 부근에 있는 오늘날의 '킬벳 에시아그'(Khirbet es - Siyygh)일 것으로 주장하기도 한다.
=====15:10
유다 사람들이 가로되 - 여기에서 우리는 블레셋의 압제하에서 그들의 눈치만 살피며 삼손의 모험의 결과들을 두려워하는 비참한 유다인들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과거 갈렙을 필두로 하여 가나안 정착 초기에 보여준 유다 지파의 용맹성에 비해 볼 때(1장) 본절에 나타난 이러한 유다 지파의 모습은 가히 하나님을 떠난 백성들이 갖는전형적인 실태라고 볼 수 있다.
=====15:11
유다 사람 삼천 명이...삼손에게 이르되 - 5절에 따르면 당시 블레셋 군대는 약 1천명 정도였던 것 같다. 그런데 유다 백성들은 그보다 세 배나 더 많은 삼천 명이 동원되어 삼손을 잡으러 나섰다. 이는 당시 삼손의 힘이 어느 정도로 세었는지를 잘 시사해 준다. 한편여기서 우리는 당시 유다 지파가 얼마나 노예적 근성에 사로잡혀 있었는가를 가히 짐작할 수있다. 만일 유다 사람들이 삼손과 힘을 합쳐 블레셋에 대항했더라면 블레셋으로부터 독립할수 있는 좋은 계기를 마련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그들은 오히려 삼손을 잡아 원수들에게 내어주는 어처구니 없는 짓을 범하고만다. 이처럼 하나님을 떠난 자들은 단지 미온적이고 소극적인 상태로 머물러 있기만 하는것이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거스리는 배반 행위까지도 종종 범하게 된다(마12:30).
너는 블레셋 사람이 우리를 관할하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 당시 대부분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블레셋의 압제를 받고있긴 했으나 굳이 저항할 의사가 없었다. 그들은현실 안주내지는 무사 안일(無事安逸)을 지향하여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제사장 나라로서의 위대한 사명을 망각해 버렸던 것이다(출 19:6). 이는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서진취적으로 나아가기 보다는 애굽에서의 종살이를 그리워했던 광야 노정의 이스라엘백성의 모습과 흡사하다(출 16:2, 3). 따라서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의위치를 자각하고 노예적 굴종읕 벗어 던지고자 했던 삼손의 궐기(蹶起)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는 오히려 성가신 만용 정도로 여겨졌던것이다. 본절에서 유다인들이 삼손을 다그치는 것도 곧 '왜 쓸데없이 부스럼을 긁어 상처를 크게 만드느냐'는 무사 안일적 힐난이었다.
=====15:12
우리가 너를 결박하여...왔노라 - 이처럼 이제 삼손이 동족들의 손에 묶임을 당해이방 대적에게 넘기어지게 된 것은 가장 수치스러운 장면이다. 그런데 이는 무릇 경건한 자기핍박을 받으며(딤후 3:12), 선지자가 고향에서 배척을 받는다는 사실(마13:57)을 보여 주는 좋은 실례라 할 수 있다. 또한 삼손을 묶어 블레셋인에게 넘긴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은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도 허다하게 발견된다. 마치 안일한 생존이 최상의 행복인 양 몸을 사리기만 하며, 보다 숭고한 진리를 위해 봉사하는 일을조소하는 사람들이 우리 가운데에도 부지 기수인 것이다. 그러나 영원을 사모하는 귀한 마음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존재하되, 종속되지 아니하고 진리로 세상을극복하는 진취적 신앙을 늘 유지 함양해야 할 것이다(전 3:11 ; 요 16:33 ; 18:36).
너희는 친히 나를 찾지 않겠다고 내게 맹세하라 - 여기서 우리는 민족을 사랑하는삼손의 위대한 정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비열한 유다 사람들의 태도에 대해서 분노하며 책망했을 법도 하다. 그러나 삼손은 오히려 그 마음을 블레셋에게로 돌려 자신의동족으로 하여금 그토록 비굴해지도록 만든 블레셋에 대한 증오심을 더욱 불태웠다.그래서 삼손은 동족의 손에 순순히 이끌리어 블레셋인들에게 넘기어진 후 여호와께서주신 완력으로 블레셋인들을 쳐부수기로 마음먹고 이와같은 맹세를 유다 사람들에게촉구한 것이다.
=====15:13
새 줄 둘로 결박하고...그를 끌어내니라 - 그토륵 엄청난 힘을 소유한 삼손은 마치어린 양처럼 순순히 동족에게 포박되어 블레셋 사람들 앞에까지 끌려 간다. 이는 곧그가 대적할 대상이 동족이 아닌 블레셋 족임을 분명히 자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아무튼 여기서 우리는 유대인들과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에 의해서 원수 로마인의 손에넘겨져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연상하게 된다(행 8:32 ; 롬 8:36).
=====15:14
삼손이 레히에 이르매 블레셋 사람이...소리 지르는 동시에 -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이 결박된 채 오는 모습을 보고선 기뻐 어쩔 줄을 몰라하는 장면이다. 즉 그들은 이제까지 겪어 본 중에 가장 힘센 사람이므로 어떻게 손 써 볼 수 없었던 삼손이 꽁꽁묶여서 오는 모습을 보자 그의 주변으로 몰려 들며 환호성을 지른것이다(Wycliffe,Matthew Henry) 신의 권능이 삼손에게 임하매 - 여기서 '여호와의 신'은 곧 성령을 가리킨다. 3:10주석 참조. 즉 원수 블레셋 사람들이 포박된 삼손을 보고 승리의 환호성을 지를 때 삼손에게 성령의 권능이 임하였고, 포박된 줄은 불탄 삼과 같이 끊어지고 만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죽음의 결박을 푸시고 죄의 사슬을 끊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모습을 상기하게 된다(히 2:14).
=====15:15
라맛 레히 사건 나귀의 새 턱뼈를 보고 - 여기서 '나귀의 새 턱뼈'라는 것은 죽은 지 얼마 안된나귀의 턱뼈를 가리킨다.이것은 오래되고 마른 턱뼈보다 더 단단하여 부서지지 않으므로 당시의 위급한 상황에서 무기로 사용하기에는안성 마춤이었다(Lange).
그것으로 일천 명을죽이고 - 실로 피 튀기는 대학살이 행해졌음에도 불구하고 불과단 한 줄로 요약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블레셋 사람들이 포박된 삼손을 보고서 환호하며 뛰어오던 모습(14절)과 극적인 대조를 이룬다. 즉 승리의 환호성을 지르며 달려오던 대적들은 순식간에 고통의 절규를 부르짖으며 죽어갔던 것이다.
=====15:16
나귀의 턱뼈로 한 더미 - 삼손이 혼자몸으로 블레셋 사람 일천 명을 무찌르고서 이제 자신의 승리를 2행시로 노래하는 장면이다. 이 시에서 '나귀'(* , 하모르)와 '더미'(* , 하모르)는 동의어로서 언어 유희를 담은 시이다(MatthewHenry). 이것은 신 32:30에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어주지 아니하셨더면 어찌 한 사람이 천을 쫓으며 두 사람이 만을 도망케 하였을까'라고 기록한 바와 같이 삼손이 자신의 승리로 인해 이제 하나님께 영광돌리고 있는 것이다.
=====15:17
그곳을 라맛 레히라 이름하였더라 -여기서 '라맛 레히'(Ramath -Lehi)는 '턱의 산'이라는 뜻이다. 삼손은 나귀의 턱뼈로 승리케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념하기 위하여나귀의 턱뼈를 던져 떨어진 곳을 '라맛 레히'라고 불렀던 것이다. 아마 9, 14절에 언급된 '레히'라는 지명도 이때부터 생겨난 것으로 추정된다.
=====15:18
삼손이 심히 목마르므로 - 이로 볼때 삼손이 블레셋 일천 명과 대항하여 싸울 때(15절)에 유다 사람들 중에는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삼손이 싸우는 동안 모두 도망가 버렸음이 분명하다. 그러기에 일천명과 상대하여 싸운 삼손은이제 지치고 갈증이나서 기진 맥진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이렇게 갈증으로 인하여 죽음 직전에 이른 삼손은, 자칫 교만해지기 쉬운 상황에서 오직 하나님께 의지하는 자만이 참 삶을 얻는다는 진리를 더욱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다.
주께서 종의 손으로 이 큰 구원을 베푸셨사오나 - 이 때의 삼손은 마치 갈멜 산에서 바알의 제사장들을 이기고 이스라엘 광야에까지 도망갔던 엘리야가 로뎀나무 아래서 하나님께 죽기를 간구하던 그러한 심정이었을 것이다(왕상 19:4). 그렇지만 그는이제 하나님의 영광과 명예를 위해 자신을 살려달라는 기도를 하고 있는데, 여기에는다음과 같은 사실이 잘 나타나 있다. (1) 삼손은 하나님의 권능으로 인한 위대한 구원의 체험을 상기함과 동시에 자신의 무능함을 고백하며 하나님께 도움을 구했다(시30:10 ; 39:4). (2) 그는 스스로를 종으로 표현하면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용하고 계심을 고백했다. 그리고 이에 더불어 그는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사명감을 더욱 공고히 해 나갔다(롬 6:13). (3) 그는 자신의 죽음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것을 더욱 두려워했다. 만일 삼손이 할례받지 못한 자들의 손에죽게 된다면 라맛 레히에서 빛나게 했던 하나님의 명예까지도 더럽히는 일이 되고마는것이다. 삼손은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해 주실 것'(시 23:3)을 간구하였던 것이다.
=====15:19
하나님이 레히에 한 우묵한 곳을 터치시니 - 여기서 '한 우묵한 곳'에 해당하는'함마크테쉬'(* )는 '절구' 또는 '절구형태로 된 구멍'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고대의 주석가들LXX, Vulgate, KJV, Luther)은 나귀 턱뼈(15-17절) 모양이 이 절구모양과 비슷하므로 하나님께서 턱뼈의 우묵한 곳에서 물이 나오게 하셨다고 생각했다.그러나 '엔학고레'(부르짖는 자의 샘)란 단어에는 구체적인 대상을 나타내는 정관사가붙어 있다는 점과 엔학고레라는 이름이 본서 저자의 시대에까지 알려져 있다는 사실등을 볼 때 고대 주석가들의 해석은 옳지 않음이 분명하다. 아마 하나님께서는 나귀턱 뼈와 같은 모양의 뾰족한 절벽 사이 구멍에서 물이 흘러 나오게 하여 삼손의 갈증을 해갈해 주셨을 것이다(Keil, Lange, Studer). 이처럼 하나님께서 바위를 가르셔서물이 흘러나오게 한 사건은 성경에 여러 번 기록되어 있다(출 17: 6 ; 민 20:8, 11).그 사건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천지의 창조주이심을 입증하는 이적들이다.
=====15:20
라맛 레히 사건 본절에서는 '레히'에서 대승리를 거둔 삼손이 이제서야 비로소 동족의 냉대에서벗어나 이스라엘의 사사로서 인정받게 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건축자들에 의해 버려진 들처럼 버림받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머릿돌과 같이 승귀(昇貴)되신 것을 연상케 한다(시 118:22).
블레셋 사람의 때에 - 사사기의 기록은 엄격하게 연대순으로 배열되어 있다기 보다는 구속사적인 안목에서 연대별 순서가 무시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사사들의활동 범위가 국지적(局地的)이었기 때문에 연대적으로 둘이상의 사사들이 동시대에 활동한 경우도 있다. 그래서 삼손의 경우에도 그 활동 연대를 추정하기가 몹시 어려운데, 그에 관한 기록들과 본절을 참고할 때 삼손의 사사직은 블레셋에 대항하여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일과 결부되었음이 분명하다. 그래서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가B.C.1080-1060년에 걸쳐 활동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Cundall). 이렇게 볼때 삼손은 입다와 동시대인이면서 사무엘의 활동 시기와도 상당 부분 겹치는 것이다. 한편그의 활동 반경은 단 지파와 유다 지파에만 국한되었다.
사사로 이십 년을 지내었더라 - '레히'에서 블레셋족을 격멸한 일로 인하여 비로소 이스라엘의 사사로 정식 인정받은 삼손이 이후 20년 동안 사사로서의 공적 활동을하였음을 부언하고 있는 구절이다. 그러나 20년간은 블레셋의 이스라엘 압제 기간 40년(13:1)의 절반 밖에 못 미치는 기간이므로 삼손이 블레셋의 압제에서 이스라엘을완전히 구원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13:1 주석 참조.
전장(前章)은 아내의 배신으로 인해 수수께끼 게임에 진 삼손이 크게 분노한 채 아
비 집 소라 땅으로 돌아가는 장면으로 끝났었다(14:19). 그런데 이제 본장은 삼손이
아내에 대한 연정을 품고 다시 블레셋 땅 딤나로 돌아왔다가 이미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어버린 것에 분노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1-4절). 그리하여 삼손은 여우 삼백 마리
로 블레셋의 논밭을 불사르며(4,5절) 자기 처가집을 해안 블레셋인들을 크게 도륙(屠
戮)한다(6-8절). 그리고 자기를 잡으려는 것에 맞서 나귀 턱뼈로 블레셋 사람 일천
명을 쳐죽이는 대활약을 펼친다(9-20절). 그런데 이상과 같은 삼손의 행동은 다음 두
가지 관점에서 해석되어져야 할 것이다.
첫째, 인간들의 감정 대립에서 야기되는 온갖 비참한 인간사(人間事)의 저변에도 구
원자이며 심판자이신 하나님의 섭리가 계속해서 진행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가 블
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13:5)고 한 말씀을 근거로 한
해석이다. 즉 한갖 여인에 대한 연정(戀情)으로 인해 폭발해 버린 삼손의 복수극은
단순히 삼손 자신만의 복수이기 이전에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복수전
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하나님과 당신의 백성
들을 욕되게 하는 블레셋 사람들을 삼손을 통해 징계하신 것이다.
둘째, 문란한 사생활로 부도덕하게 보이는 삼손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여전히 민족
을 향한 사명감이 불타고 있었다는 것이다(3절 ; 14:4). 그러기에 삼손은 본장에서도
자신이 당한 모욕을 전체 이스라엘에 대한 모욕으로 생각하고 블레셋인들과 격전을 벌
인 것이다. 이로 볼 때 '여호와의 신의 권능이 삼손에게 임했다'(14절)는 것은 하나
님께서 일방적으로 삼손을 강요하여 구원의 도구로 사용한 것을 의미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설령께서는 결코 사람을 돌이나 막대기로 취급하지 않으시며 도덕적
인격체로 대우하신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혹자들이 생각하듯이 삼손을 고대의 신화속의 초인적 인간이
나 21세기의 초능력 소유자와 같이 만드셔서 사용하신 것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성령
은 인간의 지성을 깨우치고 마음을 감동시키셔서 그의 의지가 하나님의 선을 향하여
움직이도록 작용하시며 거기에다 육체적인 능력까지 공급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역
사상 보석처럼 찬란하게 빛날 수 있는 자들을 오직 믿음의 사람들, 즉 하나님을 향하
여 열정을 가진 사람들 뿐이라고 하겠다. 히브리서 11:38에선 이 같은 믿음의 사람들
에 대하여 "이런 사람은 감당치 못하도다"라고 평하고 있다.
1. 삼손의 보복적 활동(15:1-8)
장인이 자기 아내를 블레셋 사람에게 준 것(14:20)을 단순히 자신에 대한 모욕으로
생각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전체에 대한 모욕으로 간주, 삼손이 블레셋 사람들을 응
징하는 장면이다. 먼저 분노한 삼손은 여우를 이용하여 블레셋인의 곡식단과 밭을 불
사른다(1-5절). 그러자 블레셋인은 도리어 삼손의 장인과 처를 죽임으로써 보복을 가
해 온다(6절). 이에 극도로 분노한 삼손은 블레셋인을 크게 도륙하고나서 에담 바위
틈으로 피신한다(7, 8절). 이상과 같은 본문은 부정적 측면에서 뿐 아니라 긍정적 측
면에서도 우리에게 교훈을 준다. 이제 이를 생각해 보면 곧 다음과 같다.
2. 동포의 손에 포로가 된 삼손(15:9-13)
삼손으로 인하여 블레셋으로부터 크게 위협을 받게 된 유다 사람들이(9, 10절) 삼
손을 결박하여 블레셋 사람들에게 내어주는 장면이다(11-13절). 즉 앞서 삼손이 블레
셋인을 크게 도륙한 데 대하여(8절) 원한을 품은 블레셋족은 유다 사람을 상대로 삼손
을 결박, 그들에게 넘겨 준다.
이로 보건대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블레셋의 압제하에 있었으나 굳이 그들이 압제에
서 벗어나려는 노략을 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곧 현실 도피 또는 무사 안
일주의 사상에서 나온 것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선민 의식을 망각한 결과였다.
결국 이로 인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40여년 동안이나 블레셋의 식민지로서 허덕이게
되었는데(13:1)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한 진취성을 발휘하
기 보다는 애굽에서의 종살이를 그리워함으로 40일 광야 길을 40년 동안 헤매인 것과
유사하다(출 16:2, 3).
또한 본문은 유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의 위치를 자각하고 노예적 굴
종을 벗어 던지고자 했던 삼손의 궐기를 오히려 성가신 만용 정도로 여겼음을 보여 준
다. 그것은 특별한 선민 의식이 없는 그들에게는 삼손과 같은 지도자의 필요성조차
느낄 겨를이 없었다는 단적인 중거가 된다. 즉 그들이 실로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
로'(21:25) 행한 자들로서 온전한 하나님의 나라를 이르기 위해 단합심을 보이기 보다
는 뿔뿔이 자기 이기심을 좇아갔던 것이다. 그결과 삼손과 같이 민족 의식이 살아있
는 사람은 오히려 동족에 의해 이방대적에게 넘기워지게 되었는데 이는 무룻 경건한
자가 핍박을 받으며(딤후 3:12) 선지자가 고향에서 배척을 받는다는 사실(마 13:57)을
보여 주는 좋은 실례라 할 수 있다.
한편 아와같이 동족의 손에 잡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처럼 끌려가는 삼손의 모습
은 일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박히는 것까지 마다하지 않으신 예수 그리
스도의 숭고한 모습을 예표해 준다(사 53:7). 그리고 죄로 인하여 올바른 신앙적 양
심까지 상실한 채 굴욕적인 삶을 끝까지 고집한 간사는 유다인들의 모습은 오늘날 죄
의 사슬에 매여 안일한 삶을 벗어버리지 못하는 어라석은 현댕인의 모습을 투영해 준
다. 따라서 과거 얽매였던 죄악의 사슬에서 벗어난 우리 성도들은 항상 삼손과 같은
깨어있는 의식하에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본분을 망각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엡
2:1-10).
3. 삼손의 승리(15:14-20)
동족의 손에 의해 결박당해 대적 앞에 끌려간 삼손이 밧줄을 끊고서 마침 주위에
있던 나귀 턱뼈 하나를 주워 그것으로 블레셋 사람 일천명을 쳐죽이는 장면이다(14-17
절). 그리고 그로 인한 피로와 심한 갈증을 호소함으로써 삽손이 새로운 구원을 체험
하는 장면이다(18-20절). 이라한 번문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1) 삼손을 결박한 굵은 밧줄이 불탄 삼과 같이 끊어졌다는 것(14절)은 죽음의
밧줄을 끊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사망의 권세
가 잠시 그리스도를 결박할 수는 있었으나 종국에는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온
인류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셨기 때문이다(눅 24장).
(2) 삼손은 여호와의 신의 권능이 임했을 때 사슬에서 놓임을 받고 자유를 얻었다는
것이다(14절). 이와 같이 성령은 우리를 죄의 사슬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진리 가운데
서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하신다(요 16:7-13). 즉 구원은 진리 가운데서 성령이 인도
하시는 자유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는 것이다. 삼손이 나귀 턱뼈 하나로 놀라운 구
원의 사역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15, 16절)도 하나님의 능력과 자유 안에서 가능했
다. 바로 이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의 약한 것들을 들어서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
는 방법이기도 하다(고전 1:27).
(3) 이스라엘을 구원한 삼손이 정작 그 자신은 갈증으로 목말랐던 것(18절)은 각 성
도 개개인의 진정한 구원체험의 중요성을 보여 준다. 즉3, 7절에서 민족을 구원하는
구세주처럼 사기가 등등했고, 16절에선 승리의 노래를 불렀던 삼손이지만 정작 목마름
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의 연약함을 체험한 뒤에야 비로소 그는 이 구원이
여호와에게서 비롯된 것인 줄 깨닫게 된다(18절). 그리고 그의 기도에서도 자신의 죽
음보다 그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워질 것을 염려하는 성숙한 신앙의 면모를
보여 준다(18절). 이와 같이 진정한 구원은 여호와에게서 비롯되는 것이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자만이 그러한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고후 1:9, 10).
민족주의와 신앙의 관계 - 본서에서 삼손은 바록 개인적으로는 문란한 사생활의 일
각을 계속해서 드러내고 있지만(14:1 ; 16:1, 4) 민족주의적인 관점에서 볼 때 그는
당대의 큰 위인이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신앙인으로서 보여 준 그의
민족적 정신은 오늘날 우리에게 민족주의와 신앙의 바른 관계에 대한 깊은 교훈을 안
겨 준다. 그리고 과거 3.1 운동과 같은 역사적 사건을 체험한 우리로서는 참된 기독
교의 민족주의적 운동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데 삼손에게서
그에 대한 몇가지 교훈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신앙인으로서의 민족 운동은 한 민족 안에서 이데올로기적 대립을 극복해야 된
다는 것이다. 본장에서 우리는 삼손과 다른 유다인 간에는 어느 정도 이데올로기적
대립이 있었음을 감지하게 된다. 즉 유다인들이 삼손을 결박하여 블레셋인들에게 넘
겨 준 것(11-13절)은 그 당시의 시대적 아픔을 극복하는 방법에 대한 삼손과의 이견에
서 나온 충돌의 결과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삼손은 자신의 견해를 동포들에게 고
집하므로서 내부의 분란을 야기시키기 보다는 그러한 의견 마찰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
희생양이 된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대로 실현할 기회가 주어졌을 때 최선을 다
해 행동함으로써(14-17절) 장차 동족들의 공감대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
이 하나님께서 한분이시고 성령도 하나이시고 교회도 하나이듯 민족을 향한 마음도 하
나로 뭉쳐질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결실을 맛볼 수 있는 것이다.
둘째, 신앙인으로서의 민족 운동은 진정 신앙 운동과 병행함으로써만 민족주의와 신
앙을 서로 접목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만일 앞서 언급한 첫번째 요소만을 생각한다면 누구든 신앙인으로서의 민족주의자라고 말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삼손은 자신이 하나님께로 부름받은 종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에(18절) 이후 주체적 의식하에 20년 간이나 민족의 사사로서,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이다(20절). 결론적으로 그리스도인의 민족주의적 운동운 우선적으로 하나님안에서 부름받은 그분의 일꾼이라는 자각 의식에서 시작될 때 비로소 참된 결실을 맺을 수 있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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