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하 2:1
여호와께서 회리바람으로 엘리야를 하늘에 올리고자 하실 때에 - 여기 "회리 바람"
이란 말(* )은, 자연 법칙으로 성립되는 것을 가리키지 않고 초자연적(超自然
的)으로 된 현상을 의미하였을 것이다. 엘리야의 승천은 기적(奇蹟)인데 그것이 자연
계의 힘으로 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자연 현상으로 일어나는 바람도 하나님의 역사
로 되지만(사 29:6,40:24; 겔 13:11; 슥 9:14), 그것은 다만 자연 법칙에 의한 그의
역사이다. 초자연적 바람에 대하여는 욥 38:1; 행 2:2을 참조하라. 하나님께서 기적으
로 그의 성도를 하늘 나라로 데려가시는 일은 에녹에게도 이루어졌다(창 5:24; 히
11:5). 여기 "회리 바람"은 천사들의 사역을 상징하였을 것이다(히 1:7).
왕하 2:2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청컨대 너는 여기 머물라 - 엘리야가 자기의 승천하게
될 것을 내다보면서 제자 엘리사와 동행하기를 원치 않은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그는
자기의 최후에 하나님만 전적으로 의지하려고 도리어 그와 같은 고독(孤獨)을 원하였
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인간의 위로나 협력을 요구하지 않는 그의 신앙이기도 하
다. 사실상 그는 평소에도 고독을 택하는 선지자였기에 그의 거처하던 곳이 어떤 때에
는 사람 없는 광야나 높은 산 꼭대기였다(왕상 19:4; 왕하 1:9).
여호와께서 나를 벧엘로 보내시느니라 - 이 말씀은 엘리야의 선지자적 순종을 우리
에게 알려준다. 그는 순간 순간 하나님의 영적 지시를 따라 행동하였다. 왕상 17:2-5,
8-10, 18:1-2, 19:15-16,19 참조.
여호와의 사심과 당신의 혼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 여기 이른 바 "당신의 혼의
삶"이란 말(* )은 '당신의 영혼의 삶'이란 뜻이니, 이것은 육신의 생명과
대조된다. 엘리사는 영혼이 육신과 별도로 존재함을 믿었다. 왕상 17:21-22참조. 이
말이 "여호와의 사심"(* )이란 말(여호와의 영생)과 병행한 것만 보아도
제한된 육신의 생명을 의미하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이것은 영혼의 불멸을 가리킨다.
엘리사는 이 때 그 스승 엘리야를 끝까지 따를 결심이 변함 없음을 다짐한다.
왕하 2:3
벧엘에 있는 선지자의 생도들 - "선지자의 생도들"이란 말(* )
은 '선지자들의 아들들'이란 뜻인데 "선지자들의 제자들"이라고 번역함이 적합하다.
히브리 풍속에서 제자를 아들이라고도 한다. 이 때에 선지자의 제자들이 단체 생활을
하였던 것으로 알려진다. 삼상 10:5; 왕상 20:35; 왕하 6:1 참조. 그리고 사무엘이나
엘리야나 엘리사와 같은 선지자들이 이 단체를 지도하였고, 그 제자들은 예언 사역에
보조 역할을 한 것이다. 왕하 9:1 참조.
일설에, 이들이 입신(入神)도 하였다고 주장하는데 그것은 옳지 않은 말이다. 휠쉘(
Holscher)과 페델젠(Pedersen)에 의하면, "선지자의 무리가 산당에서 비파와 소고와
저와 수금을 앞세우고 예언하며" 내려왔다는 말씀(삼상 10:5)은, 그들이 음악의 도움
을 받아서 입신한 것을 가리킨다고 한다(Gustav Holscher, Die Propheten, Pedersen,
op. cit.,p.108). 그러나 그들이 그 때에 그런 악기를 사용한 것이 하나님을 찬송하기
위함이라고 함이 자연스럽다. 삼상 19:24에 대한 해석을 참조하라. 그 때에 우상 숭배
의 중심지였던 벧엘(왕상 12:29)에서도 우상과 반대되는 여호와의 선지자들이 양성된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것은 선으로 악을 이기는 하나님의 방법이다(롬 12:21).
여호와께서 오늘날 당신의 선생을 당신의 머리 위로 취하실 줄을 아나이까 - 여기
이른 바 "머리 위로"란 말은 윗세계, 곧 하늘나라로 옮김이 됨을 생각케 한다. 선지자
의 제자들에게도 엘리야의 승천할 사실이 이렇게 계시되었던 것은 그들의 신앙이 견고
해지기 위함이었다. 언제든지 예언과 그 성취는 이 목적을 가진다. 요 13:19, 16:4 참
조.
너희는 잠잠하라 - 이것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대하여 호기심으로 경솔히 말하지
말 것을 주의시킴이다. 사람의 호기심은, 진리를 사모함과 사랑함이 없이 육체적인 처
지에서 하나님의 이적을 구경하려는 심리에 불과하다. 하나님이 신자들에게 가까이 오
실 때에는 그들이 다 같이 직접 그와 접촉하도록 고요히 기도에 집중되어야 한다. 사
람은 침묵을 통하여 자기 마음눈을 자기 자신 속으로 향하게 만든다.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은 기도 생활이 약해진다. 전 5:2; 합 2:20 참조.
왕하 2:4-6
여호와께서 나를 여리고로 보내시느니라...여호와께서 나를 요단으로 보내시느니
라 - 2절에 있는 같은 말 해석을 참조하라.
왕하 2:7
선지자의 생도 오십 인이 가서 멀리 서서 바라보매 그 두 사람이 요단 가에 섰더니
- 선지자의 생도들이 50명이나 된 것은 그 때에 그들이 단체로 활동하고 있었던 사실
이 알려진다. 이런 단체는 일찌기 사무엘을 중심하여 있었는데(삼상 19:20), 그 후
200년이 지난 때에 다시 엘리야를 중심하고 있었다. 이 단체는 그 시대에 타락한 이스
라엘의 종교를 개혁하기 위한 것이다(Jhon D.Davis, The Westminster Dictionary of
the Bible, 1924, pp. 495-496). 이 때에 선지자의 생도들이 멀리서라도 엘리야의 승
천 광경을 바라보고자 하여 "요단 가"에 까지 간 것이다. 그들은 엘리사처럼 엘리야와
동행하지는 못하였다. 이렇게 엘리야와 그들 사이에 있었던 거리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던 그리스도와 그 제자들 사이의 간격을 생각케 한다. 마 26:36-39 참조. 사
람들이 거룩한 일에 있어서는 각기 그 성결의 정도에 따라서 주님을 가까이 할 수 있
다.
왕하 2:8
엘리야가 겉옷을 취하여 말아 물을 치매 물이 이리 저리 갈라지고 두 사람이 육지
위로 건너더라 - 엘리야의 "겉옷"은 선지자직을 상징한다. 엘리야가 일찌기 그의 겉옷
을 엘리사의 위에 던진 일이 있었으니(왕상 19:19), 그것은 그가 엘리사에게 선지자직
을 맡기는 상징적 행위였다. 그런데, 그가 이제는 그 겉옷을 말아가지고 물을 쳤을 때
에 물이 갈라졌으니 그것은 그의 선지자적 영감(靈感)의 권위가 얼마나 큰가를 보여준
다. 모세의 손에 들리운 지팡이는 아무 것도 아니었지만 하나님의 명령대로 그것을 사
용할 때에 홍해가 갈라졌다(충 14:16,21). 그와 같은 일례로 엘리야의 겉옷도 그 자체
가 능력을 지닌 것은 아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그것을 쓰셨으므로 요
단물이 갈라진 것이다.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고 성경은 말한다(시 62:11).
왕하 2:9
엘리사가 가로되 당신의 영감이 갑절이나 내게 있기를 구하나이다 - "당신의 영감
이 갑절"이라는 말(* )의 문자적 번역은 "당신이 받은 영력 안
에서 갑절"(Revised Standard Version: a double share of your spirit)이다. 70인역
도 이런 뜻으로 번역되었다(* ). 이것은 엘리
사가 엘리야의 제자(선지자의 아들)로서 맏아들, 곧 후계자의 분깃(신 21:15,17)을 청
구한 것이라고 한다. 벤징겔(Benzinger)도 이와 같은 견해를 가졌다(Der Erstgeborene
erbt einen doppelten Teil und Elisa will der Erstgeborene unter den geistigen
Sohnen Elisa ", d.h. ihr Haupt, sein.-Kurzer Hand-Commentar Zum Alten Testament,
Die Bucher Der Konige, 1899, s.131). 그러면 여기 "갑절"이란 말(* )은
양적(量的)으로 2배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엘리야의 후계자로서의 필요한 영력(靈
力)을 의미한다.
왕하 2:10
네가 어려운 일을 구하는도다 그러나 나를 네게서 취하시는 것을 네가 보면 그 일
이 네게 이루려니와 그렇지 않으면 이루지 아니하리라 - 이 말씀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참된 종의 신앙을 볼 수 있다. 그는 하나님의 처사를 의지하고 바라는 것 뿐이다. 그
는 영계(靈界)의 일에 대하여 자기의 권위로 주장할 듯이 월권하지 않는다. 엘리야는
승천하게 되리라는 계시를 일찌기 받은 바 있었고, 또 하나님의 인도로 요단 동쪽에
오기까지 하였다(8절). 그러나 그는 아직도 하나님의 처분을 바라볼 뿐이고 무엇이든
지 장담하는 말은 하지 않은 것이다. 엘리사의 소원을 성취해 주는 권리가 자기에게는
전혀 없다는 의미에서 그는 그것이 "어려운 일"이라고 하였고, 자기가 승천하게 될 시
간과 방법도 하나님이 홀로 아시고 또 홀로 주장하시는 것만큼 자기는 모른다는 의미
에서, "보면"(* ), "그렇지 않으면"(* )이란 가상적 언사들
을 사용하였다.
엘리야는 이렇게 하나님을 경외하였으며, 어디까지나 하나님 앞에서 믿고 순종하며
바라보는 태도로 시종일관하였다. 그와 반대로 불건전한 신비주의자는 자기를 신격화
(神格化)하여 남들에게 크고 높은 일을 헛되이 약속하기도 하며 장담하기도 한다.
왕하 2:11
두 사람이 행하며 말하더니 홀연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격하고 엘리야가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하더라 - "두 사람이 행하며 말하더니"란 문구(*
)는 다음과 같이 개역되어야 한다. "그들이(역설체임) 걸어가며 또
걸어가면서 말하되 또 말하더니"라고. 이것은 그 두 사람 사이에 이야기가 많았음을
알려준다. 그 이야기의 내용은 개인문제가 아니고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를 위한 것이
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변화하셨을 때에도 엘리야의 화제(話題)는 개인
문제에 관한 것이 아니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예수님의 별세에 관한 것이었다(눅
9:30-31). "불수레와 불말들"이란 문구(* )는 왕하 6:17
에도 나오는데 거기서는 이것들이 하늘 군대로 묘사되어 있다. 여기서 "불"(* )은
하나님의 영광을 상징하고, "수레"와 "말"은 천군(天軍)의 호위하는 능력을 가리킨다.
엘리야의 승천 사건은 또한 성경적 구원론을 보여준다. 그것은, 성도들의 영혼과 몸
이 마침내 저 세상(하나님이 계신 곳)에 거하게 됨을 의미한다. 엘리야의 승천은 엘리
야 개인의 구원 체험을 위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교회의 공동체를 위한 구원 계시의
사건인 것이다. 이 한 가지 사건으로 인하여 우리는 모든 진실한 성도들의 내세(來世)
소망을 알제 된다. 엘리야도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었다(약 5:17).
자유주의자들의 해석에 의하면, 엘리야의 승천 기사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고 하나의
전설이라고 한다(Benzinger, sie enthalten nicht Geschichte, sonder Legende.-Die
Bucher Der Konige, 1899, s. 129; Norman H.Snaith, the Interpreter's Bible, III.
1954, p.194:류 형기 편 성서주해 I. 1974, p.795).전설이란 것은 신빙성 없는 이야기
에 불과한 것이다. 학자들이 이렇게 주장하는 이유로서는 엘리야의 승천 기사(昇天記
事)가 초자연적 사건을 말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학설은 사실주의를 본
질로 한 성경의 입장을 모르고 잘못 말한 것이다. 예를 들면 엘리야의 승천할 일에 대
하여 선지자의 제자들도 미리 알고 있었는데(3,5), 이것도 초자연적 계시가 그들에게
전달된 증거이다. 성경의 초자연적 사건들을 믿지 않는 자들은 결국 성경을 전부 부인
하는 망동에 빠지게 된다. 또 어떤 학자들은 말하기를, 엘리야의 승천 기사는 사람들
이 위기를 당하여 밤중에 공중에서 그들을 도와줄 군대의 환상을 보는 것과 같은 것이
라고 하면서 한 예를 들기를, 브리테인(Britain)의 아더왕(King Arthur)이 스코틀랜드
의 각지에 나타난 적이 있었다고 한다(Theodore H. Gaster, Myth, Legend, Custom in
the Old Testament, 1969, p. 511). 그러나 이와같은 추측은 성경의 권위를 전혀 모르
는 망언(妄言)이다. 이 때의 엘리야의 승천 사건은 돌연한 환상과 같은 것이 아니고
사전에 그것이 대중에게 예고되었고(3,5,7) 또 그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것은 어디
까지나 역사적 사실이며 객관적 사건이다.
왕하 2:12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그 마병이여 - 엘리사는 승천하는 엘
리야를 보고 슬퍼하는 의미에서 이렇게 부르짖었다. "내 아버지"란 말은 자기의 스승
을 가리키고, "이스라엘의 병거와 그 마병"이란 말은 엘리야가 이스라엘에게 군대와
같아서 국가 방위의 능력이 되었던 사실을 가리킨다.
엘리사가 자기의 옷을 잡아 둘에 찢고 - 엘리사의 이 행동은 그의 슬픔을 표시한 것
이다.
왕하 2:13,14
엘리야의 하나님 여호와는 어디 계시니이까(14절 중간) - 이것은 엘리사가 엘리야
의 하나님을 찾는 기도이다. 이 기도의 응답은, 그가 엘리야의 겉옷을 가지고 요단물
을 쳤을 때 물이 갈라짐으로 나타났다. 엘리사는 엘리야의 참된 제자였다. 그것은 다
음과 같은 사실로 판명된다. (1) 끝까지 그의 스승을 따라감(2,4,6). (2)그 스승이 받
은 성령의 은혜를 사모함(9절). (3) 그 스승의 하나님을 그대로 섬기며 바라보며 찾음
(14절)이다. 이것을 보면, 그는 엘리야라는 인간을 숭배한 것이 아니고 그 스승과 함
께 해주셨던 하나님을 사모하며 따른 것이다. (4) 그는 시종일관 엘리야의 신앙 노선
을 지켰고 엘리야의 할 일을 이어 마쳤다. 엘리야의 할 일은 왕상 19:15-17에 지시되
었다. 하나님의 일은 이렇게 선배와 후배의 진실한 연합으로 많은 열매를 거둔다.
신자들이 지도자에게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면서 그 지도자를 존경하는 것이
옳은 일이다.
왕하 2:15-18
"선지자의 생도들"- 이 엘리야의 몸을 찾겠다고 "용사 오십 인"을 내보냈다. 그러
나 그들은 헛수고만 하였다. 그들이 하늘로 올라간 엘리야의 몸을 땅에서 찾아본 것은
잘못이다.
무리가 저로 부끄러워하도록 강청하매(17절 상반) - "부끄러워하도록"이란 말(*
)은 '실망하도록'이란 뜻이다. 곧, 선지자의 생도들이 엘리야의 몸을 찾아보겠
다고 강청하며 포기하지 않으므로 엘리사는 그들을 막는 일에 실망하고 가도록 허락했
다. 그는 이렇게 고집하지 않고(딛 1:17)남의 자유를 강압하지 않았다. 그들이 엘리야
의 몸을 찾지 못하고 돌아왔을 때 엘리사는 그들을 책망하지 않고 "내가 가지 말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라고 말했을 뿐이다. 그는 온유한 지도자였다.
왕하 2:19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지나이다 - 이 문구의 히브리어(* )는
그 땅이 생산을 못한다(barren)는 뜻이고,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진다는 의미는 없
다. 70인역(LXX)도 이런 뜻으로 번역되었다(* ).
왕하 2:20
새 그릇에 소금을 담아 내게로 가져오라 - "새 그릇"은 새롭게 한다는 뜻을 상징하
고, "소금"은 그 새롭게 된 것을 변함없이 유지함을 상징한다.
왕하 2:21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물을 고쳤으니 - 이 때에 엘리사가 취한 행동(소금을 물
근원에 던진 것)은 상징에 불과한 것이었고, 그 좋지 못한 물이 좋게 된 것은 하나님
의 말씀의 역사로 이루어졌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것을 창조하고 또 성화시키기도
하신다.
왕하 2:22
그 물이 엘리사의 말과 같이 고쳐져서 오늘날에 이르렀더라 - 에리사의 이 기적은
다음과 같은 영적 의미를 가진다. 곧, 인간의 몸에 건강을 주시는 이도 하나님이시고
(시 103:1-5), 인간의 상한 심령을 치료하여 주시는 이도 하나님이시란 것이다(시147:
3; 출 15:26). 하나님은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의 영육을 구원해 주신다. 살전 5:23;
벧전 4:19 참조.
왕하 2:23-25
엘리사는 "젊은 아이들"에게 조롱을 당하였을 때에 그들을 저주하였다. 그 때에 수풀에서 "암콤 둘"이 나와서 그 아이들 중 "사십이 명"을 물어 죽였다. 엘리사가 그 철모르는 아이들을 저주하여 비참하게 죽도록 한 것은 매우 잔인한 듯이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이 점에 있어서 두 가지 사실을 생각할 때에 이 난제가 풀린다. (1) "젊은 아이들"이라는 말(* )은 "젊은 청년들"이라고 번역될 수 있으니, 그들은 철모로는 어린 아이들이 아님. 창 41:12에 요셉을 가리켜 말할 때에 이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그 때 그의 나이는 30세였다(창 41:15). 히브리어에 "아이"라는 말은 따로 있으니, 그것은 이 본문에 사용된 낱말(* )과 다른 것(* )이다. (2) 이때에 그 청년들이 엘리사를 조롱한 것은 하나님을 반대하는 악한 배교죄(背敎罪)임. 그들의 말이 "대머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고 한 것은 하나님의 선지자를 멸시한 행동이다. 하나님은 그를 엘리야의 후계자로 높이기 시작하시는데 이들은 그와 정반대로 행동하였으니, 이것은 하나님을 대면하여 항거함과 같은 배교 행동이다. 이들의 이와 같은 배교 행위는 그들에게 임한 하나님의 징벌이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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