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안 (요한 2서 1:1-4)
대개 옛날 서신은 본서와 마찬가지로 문안과 기원으로 시작했다. 참 신앙은 옛 서식을 새롭게 성별하며 발랄하고 사랑스러운 표현으로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Ⅰ. 문안을 하는 자의 이름은 익명으로 하고 단순히 선택된 신분 즉 "장로"로만 나타나고 있다. 표현과 문체, 그리고 사랑에 대한언급은 요한 1서의 저자의 것과 동일함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그 당시 생존자 중 가장 연로한 사도며, 수석 장로라고 생각할 수 있는 당시의 장로이다. 옛날 이스라엘에서의 장로는 존경할 만하고 또 존경을 받아 마땅한 자였는데, 하나님의 복음적 이스라엘 안에 있어서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연로한 제자는 존귀한 자이다 연로한 사도와 제자들을 위한 지도자들을 위한 지도자는 더욱 귀한 자들이다. 거룩한 봉사와 경험을 쌓는 가운데 늙게 된 그는 이미 천국을 보고 경험했으며, 그가 처음에 믿던 때 보다 더욱 더 가까이 천국에 이르게 되었다.
Ⅱ. 문안을 받는 자. 믿음을 소유한 현숙한 부인과 그의 자녀들이다. 즉 "택하심을 입은 부녀와 그의 자녀에게" 문안을 하고 있다. 혈통과 교육, 그리고 신분에 있어서 뛰어난 숙녀이다. 복음이 이러한 사람들 사이에 들어가게 된 것은 기쁜 일이다. 귀인들과 숙녀들이 주 그리스도와 그의 신앙에 접할 수 있게 된 것은 다행한 링이다. 비록 많은 귀인들이 부름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어느 누구보다 그리스도에게 더욱 큰 은혜를 입었다. 여기에서 그 부인의 특성을 나타내는 말씀이 있다. "택하심을 입은 부녀"이다. 단순히 선택된 자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택함을 받은 자를 말한다. 거룩한 행실로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증거를 나타내는 부녀는 참으로 사랑스럽고 아름답게 보인다. 그리고 "그의 자녀들"이 있다. 아마도 그 부녀는 과부인 듯 싶다. 이렇게 볼 때 그녀와 그의 자녀들은 그 가정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을 것이며, 이 가정은 모범적인 가정으로, 살아 있는 하나의 서신으로 나타날 수도 있었다. 그 자녀들은 훌륭하게 묘사되고 또한 격려되며 좀 더 그들의 가정적인 사랑과 질서, 그리고 의무 이행에 있어서 잘 훈련을 받았을 것이다. 그 자녀들은 기독교 문서를 통해 잘 알려졌고, 그들 자신도 또한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그들 자신을 격려하고 조심시키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들을 사랑하고 칭찬하는 자들이 그들의 안부를 물은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부녀와 그의 자녀들은 그들이 받은 존경으로 말미암아 더욱 많이 알려지게 되었다. 더욱이 그들은 아래와 같은 사실로 더욱 유명하게 되었다.
1. 사도 자신에 의하여 알려지게 되었다. 즉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요," "내가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한 자"이다. 그리스도의 사랑하는 제자였던 사도 요한은 사랑의 기교와 수련을 터득한 사람이었다. 그는 각별히 주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였다.2. 믿는 모든 형제들과 요한을 아는 모든 성도들에 의하여 알려지게 되었다. 즉 "나뿐 아니라 진리를 아는 모든 자도 그리하는 것"이라고 했다. 덕망과 선함은 드높은 곳에서 아름답게 빛난다. 진리는 응답을 요구하며 순수한 신앙의 확증을 깨달아 안 사람은 그 사실을 고백하고, 또한 다른 사람에게 증거해야만 한다. 다른 사람의 신앙을 존중하고 귀하게 여기는 일은 훌륭한 증거이며, 또한 크나큰 사명이기도 하다. 이 부녀와 그의 자녀에게 베푼 사랑과 존경의 근거는 진리에 대한 그들의 관심에 있었다. "즉 우리 안에 거하여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할 진리를 인함이로다." 기독교 신앙은 살아 있는 믿음에 기반을 두고 있다. 유사성은 애정을 유발할 수 있다. 즉 그들 자신 안에 있는 진리와 경건을 귀히 여기는 자는 역시 다른 사람들 안에 있는 진리와 경건을 귀히 여기며, 이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도 귀히 여길 수 있다. 사도와 다른 그리스도인들은 그의 존귀와 경건에 합당하리 만큼, 또는 그의 사랑과 그의 진실한 신앙에 합당하리 만큼 그 부녀를 사랑했다. 우리들의 사랑은 단순히 어떤 감정과 기분에 이끌린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믿음은 오직 우리들의 마음과 심령 속에 또한 우리의 신뢰와 사랑 속에 살아 있어야 한다. 진실로 믿음이 한번 뿌리를 박은 곳에서 그 믿음은 영원히 존속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바 기독교의 성령은 소멸되지 않을 것이며, "영원히 우리와 함께 거하게 될 것이다."
Ⅲ. 문안은 하나의 사도적인 축복이다.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있으리라"(3절). 거룩한 사랑은 존귀한 이 믿음의 가정 위에 놀라운 축복을 쏟아 붓는다. 곧 있는 자는 더 많은 것을 받게 될 것이다. 아래의 몇 가지 점을 유의해 보자.
1. 이러한 축복은 누구로부터 오는 것인가?(1) 하나님 아버지, 곧 모든 은혜의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다. 그는 축복의 샘이요, 모든 축복은 그로부터 우리에게 온다.
(2)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비롯된다. 그는 또한 거룩한 축복의 동기가 되며 전달자가 되신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란 특이한 신분으로 구별된다. 어느 누구도 이러한 아들이 될 수 없다. 이 아들은 "아버지의 영광의 광채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나신 영원한 생명이시다"(요일 1:2).
2. 사도 요한이 아버지와 아들에게 간구하는 바가 무엇인가?
(1) 은혜. 거룩한 사랑과 선의(good-will) 다시 말해서 모든 선한 것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죄많은 인간에게 주어지는 영적인 축복이 참된 은혜가 아닐 수 없다.
(2) 자비. 값없이 베푸시는 사죄와 용서이다. 이미 풍성한 은혜를 받은 자는 계속적인 용서를 필요로 하게 된다.
(3) 평강. 안전하고 성결된 모든 외적인 행복과 더불어 하나님과의 화해 속에서 이루어지는 영혼의 평온과 양심의 평안이다. 이러한 것들은 진리와 사랑 가운데에서 문안하는 자의 진실하고 뜨거운 사랑이나, 문안을 받는 자의 지속적인 진실과 풍성한 사랑으로 구하여지게 된다. 이러한 축복은 택하심을 입은 부녀와 그의 자녀 속에 있는 참된 믿음과 사랑을 길이 보존하게 될 것이다. 진심으로 이러한 축복이 함께 하기를 기원한다.
Ⅳ. 탁월한 이 부녀의 자녀들의 모범적인 품행에 대한 축복. 이러한 신앙적인 많은 자녀를 소유한 부모들은 참으로 복된 자들이다. "너의 자녀 중에 우리가 아버지께 받은 계명대로 진리에 행하는 자를 내가 보니 심히 기쁘도다"(4절). 아마도 이 부녀의 아들들은 견문을 넓히기 위해서, 혹은 사업이나 가정 일로 인하여 세계를 널리 여행한 것 같다. 그리고 여행 중에 당시 사도 요한이 거주하고 있었으리라 추측되는 에베소에 들려 그곳에서 반갑게 그를 상면했을 법하다. 일찍이 신앙을 훈련시키는 것은 얼마나 좋은 일인가를 생각해 보라! 비록 신앙이 교육에 기초를 둔 것은 아닐지라도 교육은 귀한 것이며, 젊은이로 하여금 불신앙적인 악영향에 대처할 힘을 키우도록 하는데 방편이 된다. 그러므로 젊은 여행자들로 하여금 신앙을 지니고 여행에 임하도록 해야 하며 가정에서는 신앙을 떠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가는 곳마다 악한 풍습을 배우게 될 것이다. 때로 택하심은 가계를 따라 전달되는 경우가 많음을 알 수 있다.
본문에서 "택하심을 입은 부녀와 택하심을 받은 자녀라"는 말을 볼 수 있다. 자녀들은 그들의 부모 덕분에 사랑스러운 존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녀들이나 그의 부모는 값없이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덕분으로 귀한 존재가 되었다. 여기에 나타난 사도의 기쁨을 통해 훌륭한 부모의 보살핌으로 양육된 자녀를 보는 일은 기쁜 일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를 본 사람들은 그 부모를 축하하게 되며, 이러한 놀라운 축복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뻐하게 될 것이다. 많은 자녀들을 하늘나라와 하나님 앞에 인도한 이 부녀는 얼마나 복된 사람인가! 위대하신 최고 절대의 심판자(하나님)로부터 자녀들에 대한 칭찬을 듣는 일은 그 부녀에게 있어서 얼마나 기쁜 일인가!
노경에 있는 훌륭한 목회자들과 또한 다른 모든 연로한 제자들에게 있어서 그들이 죽어 세상을 떠날 때 하나님을 섬기며 신앙을 지키게 될 소망에 찬 새로운 세대들을 보여주는 일은 기쁜 일임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참된 행실의 기준이 있음을 본다. 즉 "아버지의 계명"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만 우리의 행실은 진실되며 우리의 말은 참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 (요한 2서 1:5,6)
우리는 이제 본 서신의 의도와 핵심에 보다 가까이 이르게 되었다.
Ⅰ. 사도의 간구. "부녀여 내가 이제 네게 구하노니." 그가 구하는 바가 무엇임을 생각하려면 그의 말의 방법을 주목해 볼 만하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어떤 특별한 부탁이나 사랑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일반적인 의무와 준수를 이름이다. 보다 부드러운 것이 효과가 있을 경우에는 보다 거치른 방법은 불필요하다기 보다는 오히려 해로운 것이다. 사도는 모든 사람에 대해서 친절했다. 보다 부드럽고 부녀에 대한 존경심과 사도적인 온유함으로 사도는 겸손하게 구하였다. "부녀여 내가 이제 구하노니" 요한은 다른 사도가 그의 서신을 받는 자에게 말하듯이 하고 있다. 즉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와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허락하신 능력에 따라 편리한 방법으로 너희에게 담대히 명령할 수 있으나 사랑으로 나이 많은 장로로서 너희에게 간구하노라"고 말한다. 권위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사랑이 효력을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보다 많은 권위를 주장하게 되면 더욱 더 그 권위는 경멸을 받게 됨을 종종 보게 된다. 사도적인 목회자는 존경함으로 그의 동료들을 사랑하고 구하게 될 것이다.
Ⅱ. 부녀와 그의 자녀에게 요구되는 것.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사랑이다. "서로 사랑하자"(5절). 그리스도인의 덕성이 뚜렷한 사람도 아직 그 안에 더욱 성장되어야 할 여지가 남아 있다.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너희가 친히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살전 4:9, 10).
1. 사랑은 아래와 같이 권고되어진다.(1) 사랑은 의무 즉 "계명"으로 권고되어진다. 하나님의 명령은 우리의 마음과 심령을 지배할 수 있다.
(2) 그 사랑의 의무는 옛날부터 권고되어진 것이다. "이는 새계명같이 네게 쓰는 것이 아니요 오직 처음부터 우리가 가진 것이라." 그리스도인의 상호적인 사랑에 관한 계명은 주 그리스도에 의한 사랑의 새로운 시행과 허용이란 관점에서 "새로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상호적인 거룩한 사랑에 대한 문제로 볼 때에 그것은 자연적이며 유대교적 혹은 기독교 신앙만큼이나 오랜 것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피차간 사랑해야만 한다는 이 계명은 어디서든지 기독교에 꼭 수반되는 것이다.
2. 이 사랑은 그 계명이 가지고 있는 열매 맺는 특징으로 설명되어진다. "또 사랑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 계명을 좇아 행하는 것이니"(6절). 곧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들의 사랑과 복종에 대한 시험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행하는 것이 우리 자신에 대한 사랑이며 우리의 형제에 대한 사랑이다. "계명을 지키면 큰 상급이 있게 된다." 이 계명은 서로 사랑하며 거룩한 행동을 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행하게 되는 기독교의 진실한 상호적인 사랑의 증거를 말한다. 비신앙적이며 비기독교적인 상호간의 사랑도 있다. 절대적 순종은 그리스도인의 선하고 진실한 덕성의 증거가 된다. 이러한 신앙적인 순종을 도모하는 자는 기필코 기독교적인 사랑에 이를 것이 틀림없다. 이것은 복음적인 입장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의무이다. "계명은 이것이니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바와 같이 그 가운데 행하라 하심이라"(6절). 다시 말해서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는 말이다. 이러한 사랑의 퇴락과 또한 배교에 대한 예견이 사도로 하여금 사랑에 대한 의무와 기본적인 계명을 보다 더 부지런하고 열심 있게 수행하도록 한 것이다.
미혹하는 자에 대한 경고 (요한 2서 1:7-9)
본 서신 중 매우 중요한 부분인 이곳에서 몇 가지 사실을 알아보자.
Ⅰ. 부녀에게 전달된 불길한 소식. 그것은 미혹하는 자가 번창한다는 소식이다. "미혹하는 자가 많이 세상에 왔나니," 이 보고는 보고의 이유를 말하고 있는 부분에서 소개되고 있다. 너희의 사랑을 지키도록 하라. 이는 세상에 사랑의 파괴자들이 이르렀기 때문이다. 믿음을 파괴하는 자들은 사랑을 파괴하기에 이른다. "공동인 믿음은 공동적인 사랑의 기반이 된다." 그리고 "당신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살아야 한다. 그리하면 이것이 당신을 구하게 될 것이다. 당신의 안전을 힘써 지켜야 한다. 이는 미혹하는 자가 많이 세상에 나왔기 때문이다." 남을 슬프게 하는 소식을 믿음의 친구들에게 전하는 수가 있다. 이것은 그들을 슬프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시련을 대비케 하는 방법이 되기 때문이다.
1. 미혹하는 자와 그의 거짓됨.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이다"(7절). 그는 주 예수에 대한 그릇된 생각과 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이 되심이나 나사렛 예수가 그리스도 즉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을 받아 이스라엘의 구속을 위해 이미 약속하신 바 메시야이심과 육신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셨음을 부인하는 자이다. 이러한 자는 그리스도가 아직 앞으로 오셔야 할 것으로 기대한다. 주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세상의 구세주가 되심에 대한 확증을 부인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2. 악화 일로의 경우. "이러한 자가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다." 그는 사람들을 속이고 주 그리스도 영광과 그의 왕국을 더럽힌다. 그는 세상에 비추인 빛과 그리스도 자신이 나타낸 확증과 하나님이 그의 아들에 대해 보여주신 증거를 거부하는 사기군이요 의도적인 협잡군이다. 그는 주 그리스도의 인격과 존귀와 유익에 대해 의도적인 반대를 하는 자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들의 정체는 주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심으로 밝혀지게 될 것이다. 주 그리스도의 이름과 권위에 대해 미혹케 하며 반대를 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지 말자. 사도 시대에도 이러한 자들이 있었던 것이다.
Ⅱ. 택하심을 입은 부녀에게 주어진 권고. 주의와 경고는 언제나 필요하다. "너희를 삼가라"(8절). 미혹하는 자들과 그들의 속임수가 많아질수록 제자들은 이에 대해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유혹이 많아짐으로 택하심을 입은 자까지도 이로써 위험을 당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두 가지 점을 주의해야 한다.
1. "사도들이 일한 것과 행한 것 혹은 그들이 얻은 것을 잃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8절). 신앙적인 노력이 헛되어 돌아가는 일은 참으로 유감된 일이다. 어떤 자들은 시작은 훌륭하나 드디어 그들의 모든 수고가 헛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젊어서부터 계명을 지킨 소망 있는 사람이 세상에 대한 사랑의 억제와 그리스도에 대한 보다 큰사랑의 결핍으로 모두를 상실해 버리는 경우가 있다. 신앙을 고백하는 자들은 이미 얻은 바를 잃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에 대한 좋은 평판을 들을 뿐만 아니라 많은 은혜와 죄악에 대한 확신, 세상의 허무성과 신앙의 우월성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깨달아 알게 된다. 그들은 "내세의 소망과 성령의 은사를 맛보았다." 그러나 아직도 모든 것을 잃고 있다. "너희로 하여금 진리를 좇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자를 너희가 멀리하였도다." 그리스도의 훈련장에서 얻어진 훌륭하고 귀한 지식을 잃어버리는 것은 유감된 일이다.2. 그들을 위해 확정된 상과 존귀와 영광과 찬양을 잃지 말아야 한다. "온전한 상을 얻으라."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누구에게든지 주어지는 온전한 상을 얻도록 하라. 만일 귀한 것이 있다면 영광 중에 높은 곳에서 당신을 위해 준비되어 있는 은혜의 빛과 사랑과 평화를 잃지 말라."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계 3:11). 온전한 상을 얻는 길은 그리스도에 대해 진실하며 끝까지 믿음 안에서 사는데 있다.
Ⅲ. 사도의 권고와 주의와 경고에 대한 이유. 그것들은 두 가지이다.
1. 복음의 빛과 계시로부터 이탈함에 따른 위험과 죄. 그것은 결과적으로나 실제적으로 하나님 자신을 떠나는 것이 된다. "지나쳐 그리스도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마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교훈이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한다. 이로써 하나님은 인간들을 구원으로 이끄시며 그 자신에게로 이끄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교훈에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을 거스리는 자가 된다.2. 기독교의 진리를 고수함으로써 얻어지는 유익과 행복. 기독교의 진리는 우리를 그리스도에게(진리의 대상과 주체가 되는) 또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아버지에게 매어 놓는다. 이는 그리스도와 아버지는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는 자(뿌리를 박고 근거를 둔 자)는 아버지와 아들을 동시에 소유한 자이다. 그리스도의 교훈으로 말미암아 우리들은 아버지와 아들에 대한 지식에 눈을 뜨게 된다. 그 교훈으로 말미암아 우리들은 아버지와 아들에 대해 성화된 상태에 이르게 된다.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요 15:3), 이러한 정결함이 하늘나라에 합당한 자로 만든다. 그리스도의 교훈에 대해 증거하신 것처럼 위대하신 하나님은 그 교훈에 귀중한 가치를 부여하신다. 우리는 아버지의 아들과 복된 관계를 가지기를 원하고 바라는 만큼 거룩한 교훈을 믿고 사랑해야만 한다.
미혹자에 대한 경고 (요한 2서 1:10,11)
Ⅰ. 여기에서 사도는 미혹하는 자들에 대한 필요한 경고와 아울러 대우 관계를 지시하고 있다. 그들은 그들을 그리스도의 사역자처럼 대우해서는 안 된다. 주 그리스도는 그의 사역자들로부터 미혹하는 자들을 구분하며 그의 제자들을 보존하실 것이다. 사도의 지시는 소극적이다.
1. "미혹하는 자들을 도와주지 말라." 즉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 말고 인사도 말라." 아마도 이 부녀는 우리가 다음 서신에서 찾아 볼 수 있는 관대한 집주인이며 여행하는 사역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을 잘 돌보아 준 가이오와 같은 사람이었던 것 같다. 이 미혹하는 자들은 다른 사람들 혹은 그곳에 방문한 바 있는 보다 훌륭한 사람들에게 베풀어진 동일한 환영을 받을 것을 기대한 것 같다. 그러나 사도는 이를 허락지 아니했다. "그들을 너의 집에 들이지 말라." 긴박한 궁핍 가운데 있을 그들이 푸대접을 받게 될 때 그들은 적지 아니 실망하게 될 것이다. 믿음을 부인하는 자들은 사람을 멸망으로 이끄는 자들이다. 택함을 입은 부녀들도 신앙적인 의무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가져야만 한다.2. "미혹하는 자들의 하는 일을 축복하지 말라. 즉 인사도 말라." 기도와 간절한 기원으로 그들의 사업에 시중들지 말라. 악한 일은 거룩한 축복의 대상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은 거짓과 유혹죄의 후원자가 아니시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전도 사업에만 축복을 빌어야 한다. 그러나 치명적인 악의 번식을 막을 수 없거든 상종을 금하도록 하라.
Ⅱ. 미혹하는 자를 위한 후원과 도움을 금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예하는 자임이니라"(11절). 이런 경우의 호의와 사랑은 죄에 참예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의 죄악에 분담자가 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얼마나 지혜롭고 조심성이 있어야만 하는가! 세상에는 다른 사람들의 범죄에 참예하게 되는 길이 너무나 많다. 즉 그것은 불의한 침묵, 게으름, 무관심, 사적인 기여, 공적인 지지와 협조, 내적인 시인, 또는 공적인 변호와 방어로써 이루어진다. 주여 다른 사람의 죄에 동참한 우리의 허물을 용서하여 주소서.
마지막 인사 (요한 2서 1:12,13)
사도 요한은 다음과 같이 이 서신을 끝맺고 있다.
1. 그는 추후에 직접 얼굴을 대하고 더 많은 것을 말하기를 원한다. "내가 너희에게 쓸 것이 많으나 종이와 먹으로 쓰기를 원치 아니하고 오히려 너희에게 가서 면대하여 말하려 하니 이는 우리의 기쁨을 충만케 하려 함이라." 어떤 때는 글자로 쓰는 것보다 말로 하는 것이 더 나은 경우가 많다. 펜과 잉크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은 고맙고 즐거운 일이다. 그러나 개인적인 면담은 더욱 고맙고 즐거운 마음을 상대방에게 준다. 사도는 아직 여행하거나 또는 전도 여행하기에 어려움을 당하리 만큼 늙지는 않았다. 성도의 교제는 어떠한 방법을 통해서든지 유지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의 교제는 서로의 기쁨을 가져오게 한다. 훌륭한 목회자들은 그들의 동역자들로부터 오는 기쁨을 얻게 된다.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을 인하여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롬 1:12).2. 가까운 친척들이 그 부인에게 보내는 문안으로 본 서신을 마치고 있다. "택하심을 입은 네 자매의 자녀가 네게 문안하느니라"(13절). 이 가정에 은혜가 충만하게 넘쳤다. 여기에 두 자매와 택하심을 입은 그들의 자녀가 있다. 얼마나 그들은 하늘의 놀라운 축복을 귀중히 여기었을까! 사도는 질녀들이 그들의 숙모에게 행해야 할 의무와 예의를 삽입하고 있다. 손아래 사람들의 의무를 명백히 하고 있다. 분명히 사도는 접근하기 쉬운 사람이었고 친절하고 경건한 교제를 나누었으며, 또한 그의 질녀들 안에서 그녀의 기쁨을 더하게 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은혜 받은 자녀들과 다른 모든 친척들로부터 기쁨을 누리는 이러한 부녀와 같은 자들이 많아지기를 기원한다. 아멘.
Previous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