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과 소개(고린도 전서 1:1-9)
전체 서신에 대한 사도의 서문을 살펴 보자.
Ⅰ. 편지의 기명(inscription). 그 때의 편지를 쓰는 관습에 의하면 편지를 쓴 사람과 편지를 받는 사람의 이름이 기입되었다.
1. 이 서신은 그가 손수 세운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이방인들의 사도인 바울의 것이 다. 고린도 교인들 중에는 그의 사도직을 문제시한 사람들도 있었고(9:1, 2), 그의 인격 과 사역을 비방한 지들도 있었다(고후 10:10). 가장 성실하고 유용한 목사도 이런 경멸을 들을 수 있다. 이런 사도의 자격을 요구하면서 편지를 시작한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바울" 그는 이 명예를 자기의 것으로 만 들지 않고 그것에 대한 신령한 사명을 가지었다. 거짓 교사들이 바울을 비방하고 경솔하고 미혹된 추종자들이 거짓 교사들과 바울을 동등하게 취급하는 이 때에 바울의 자격을 주장하고 자기의 직책을 강조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었다. 그의 사도적인 자격과 권위를 주장한 것은 바울 안에 있는 교만이 아니고 그의 사명에 대한 성실 때문이 었다. 이 사실을 더 분명하게 나타내기 위하여 지위가 낮은 사역자인 소스데네를 언 급한다. 바울의 형제인 소스데네는 동료적인 사도가 아니라 동료적인 사역자이며 한때 유대인 회당의 지도자였으나 그 후에 기독교로 개종했고 아마 고린도에서 탄생한 사람이며 그리고 고린도 사람들에게 친근한 소스데네를 같이 말함은 고린도 사람들의 마음을 얻기 위함이었다. 소스데네가 사도적인 영감을 받았다고는 볼 수 없다. 그러므로 바울은 전 서신을 통하여 자기 자신의 이름으로만 말하고 있다. 바울은 어떠한 경우에 있어서도 그의 사도적 권위를 약화시키지는 않았으나 자기가 사역하는 사람들의 유익을 위하여 친절하고도 겸손한 일을 할 준비는 항상되어 있었다. 이 편지가 보내어지는 사람들은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 처럼 성화되었으므로 세례를 받을 때 그에게 헌신되고 그리고 거룩해야 할 의무가 있으며 성화를 고백하는 것이다. 만약 고린도 사람들이 진실로 거룩하지 않다면 그것은 그들의 잘못이요 수치다. 다음 사실을 주목하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성화시키는 것은 기독교의 설계이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딛 2:14). 고린도에 있는 교회와 함께 바울은 이 서신을 "또 각 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의 주와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보낸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속적이고 무신론자와 다른 점은 기도없이 살 수 없는 일이며, 예수의 이름을 부른다는 점에서 유대인과 이교도들과 구별된다. 예수는 그들의 공통의 주요 머리이다. 다음을 관찰하자. 기독교 세계의 모든 곳에는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은 모든 장소에 남은자(remnamt)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을 생각하고 그들과 교제를 나눠야 한다.Ⅱ. 사도적인 축복.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쫓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평강의 왕의 사도는 평화의 전파자와 사역자가 되어야 한다. 복음은 이 축복을 가지고 다니고 복음의 설교자가 충심으로 원하고 기도하는 이 축복이 그가 사역하는 자들의 상태가 되기를 빈다. 은혜와 평화는 하나님의 은총이요, 화해이다. 그것은 실로 모든 축복의 요약이다. "여호와께서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민 6:26)는 것은 구약의 축복 형식이었다. 그러나 복음에서 우리가 가지는 잇점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1. 하나님의 평화를 어떻게 얻는가를 지도받는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에 의해서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죄인들이 하나님과 화목할 수 도 없고 어떤 유익을 얻을 수도 없다.2. 무엇이 우리가 이 평화를 누리도록 자격을 부여하나를 듣는다. 즉 은혜이다. 첫째 는 은혜요, 그 다음이 평화다. 하나님께서 평화를 죄인들에게 부여하시기 전에 죄인들 을 그에게 화해시키신다.
Ⅲ. 고린도인들을 위하여 하나님에게 드리는 바울의 감사. 바울은 그의 서신을 친구를 위한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기도로 시작한다. 아래 사항을 주목하자. 우리의 친구들에 게 대한 우리의 사랑은 그들을 위한 기도와 감사로 가장 잘 나타난다. 우리가 받은 은사와 은혜와 위로 때문에 서로 하나님에게 감사하는 것은 성도의 교제의 한 일이 다. 바울은 감사를 한다.
1. 예수를 믿는 그들의 믿음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4절) 예수는 하나님의 은혜를 얻게 하며 취급하시는 분이다. 믿음으로 예수와 연합되고 그의 성령과 공로에 참여하는 자는 하나님의 은총의 대상이 된다.하나님은 그들을 사랑하시고 충심의 선의를 베푸시며 아버지 같은 웃음과 축복을 부여해 주신다.
2. 그들의 영적 은사의 풍요함 때문에 고린도 교회가 유명한 것이었다. 어떤 은사에 있어서 어떤 교회보다 뒤지지 않았다(7절). 그는 구변과 지식을 자세히 논한다(5절).하나님께서 이두 은사를 주실 때 사용할 능력도 주셨다. 지식의 뿌리가 없는 사람들 이 꽃 같은 구변은 가지고 있다. 그들의 말은 내용이 없다. 많은 사람들이 지식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사용할 구변이 없다. 그것은 수건에 싸둔 것과 같다. 그러나 하나 님께서 이 두 은사를 주실 때 그 사람은 잘 사용할 능력을 갖추게 된다. 고린도 교회가 구변과 지식의 풍족한 은사를 받았을 때 많은 찬양을 하나님에게 바치는 것이 합당하다. 이 두 은사가 기독교 진리에 대한 증거가 되며 그리스도의 증거가 될 때 더욱 그렇다(6절). 그들은 "성령의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히 2:4)이었다. 이 것들로써 하나님은 그들의 사명과 교리에 증거해 주셨다. 그래서 어떤 교회에 더 많은 은사가 주어지면 더 많은 사도들이 전한 진리에 대한 증거가 있고 그들의 사명에 대한 증거가 있게 된다. 고린도 교인들이 진리에 대한 그와 같은 터전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와 같은 기대를 가지고 사는 것이 당연하다(7절).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특징이다. 우리의 신앙은 이 점에 집착되어 있다. 우리가 참으로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는 재림을 믿고, 기다리고 그리고 그 재림을 위하여 준비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기독교 신앙에 우리가 확고히 서면 설수록 더욱 더 우리는 주님의 재림을 믿고 더욱더 열렬하게 재림을 고대한다.
Ⅳ.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그리스도의 능력과 사랑에 기초한 앞으로 고린도 교인들이 가질 소망에 관하여(8,9절). 그들에게 선한 일을 시작하시고 지금까지 그 일을 계속하신 하나님은 그것을 미완성으로 남겨두시지 않는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는 자들은 하나님에 의하여 보호되고 끝까지 견고히 지켜진다. 이런 사람들은 "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게 된다." 이것은 엄한 정의의 원리에 의함이 아니고 은혜로운 사면에 의하여, 엄한 율법 안에서가 아니고 풍부하고도 값없는 은혜로 되는 것이다. 이런 목적으로 그리스도에 의하여 보호되고 굳게 지켜지는 것은 얼마나 좋은 일인가! 우리들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이와 같은 특권을 소망하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고! 심판날에 우리가 흠없이 나타나도록 그리스도의 능력에 의하여 우리들 자신의 타락이나 사탄의 유골에서 해방되어 보존되는 이 일이 어떠한가! 하나 님의 신실하심이 우리 소망을 지탱해 주는 이 영광스러운 대망이여!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또한 이루시리라"(살전 5:24).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가까이 접근시키고 우리를 그리스도와 교제하게 하신 이는 신실하시다. 하나님은 진심으로 신뢰 할 수 있다. 그의 부르심을 듣고 오는 사람들은 결코 실망하지 않는다. 우리가 그에게 진실하다면 그는 결코 성실치 못한 일이 없다. "그는 그의 성실함을 폐하지 아니한다 "(시 89:33).
분열의 원인(고린도 전서 1:10-13)
이제 바울은 그의 주제에 언급한다.
Ⅰ. 바울은 그들이 하나가 되고 형제애를 가지도록 권면한다. 그리고 분리를 책망한 다. 그들의 불행한 분리가 잘 되도록 바라는 어떤 이로부터 바울은 소식을 들었다. 이 소식을 어떤 이가 전함은 교회에 대한 악의도 아니고 사역자에 대한 반감도 아니고 바울의 중재로 분리된 과열을 식히고저 함이었다. 바울은 그들에게 아주 상냥한 태도로 쓴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을 권하노니" 만약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그 귀하고 가치있는 이름을 생각한다면 하나가 되어라. "다 같은 말을 하고 분열을 피하라(원문대로)." "즉 피차의 사랑에서 멀어진 것을 피하라. 할 수 있는 한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신앙의 큰 일들에 있어서 한 마음을 품고 감정으로 하나가 될 수 없으면 사랑으로 하나가 되라. 큰 일에 있어서 하나가 되면 작 은 일에 대한 분리나 분쟁을 없앨 수 있다."
Ⅱ. 바울은 분쟁의 근원을 암시한다. 교만이 밑에 놓여 있었다. 이것이 그들을 갈라놓았다. "교만에서 다툼만 일어날 뿐이라"(잠 13:10). 그들은 그들의 사역자에 대하여 싸웠다. 바울과 아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충실한 사역자였다. 그리고 그들의 신앙과 기쁨을 도와 주는 이들이었다. 그러나 분쟁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당을 짓고 고상하고 영적인 선생으로 불렀고, 다른 이들은 아볼로를 아마 가장 열렬한 웅변가로 불렀고, 또 어떤 이들은 게바를 혹은 베드로를 그때의 가장 권위있는 사람으로 불렀다. 왜냐하면 그는 할례받은 사도였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다른 사람들은 다 그만 두고 그리 스도만을 따랐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도 타락하기 쉬운 것같이 복음과 그의 제도 가 차이와 불화와 분쟁의 도구가 되었다. 이것은 우리 신앙의 잘못이 아니고 인성의 타락과 부패의 증거이다. 교만이 기독교인들을 얼마나 적대하게 만드는가를 명심하라. 그리스도와 그의 종들을 분리시키고 그들을 서로 경쟁하는 자들로 만든다.
Ⅲ. 바울은 그들의 불화와 싸움에 대하여 충고한다. "그리스도가 나뉘었느뇨?" 아니다.
오직 한 분의 그리스도가 계실 뿐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혔느냐? 혹은 그를 사역자 외에 다른 이로 여기었느냐? 혹은 "바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느냐?" 신성한 예배시에 나를 경배하거나 나의 제자가 되었느냐? 그런 권리를 너희에게서 요구하였느냐. 이것은 너의 구 속자 하나님의 고유한 권리이다. 사역자가 아무리 훌륭해도 그리스도의 자리를 대신 한 수 없다. 사역자들은 그리스도의 권위를 가져오는 어떤 일도 주장하지 못한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주요, 희생이요, 우리의 주님이요, 지도자다. 그리스도가 나뉠 수 없는 것같이 그들 사이에 여러 이름 없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바울이 준 세례(고린도 전서 1:14-16)
여기서 바울은 그의 사역을 설명한다. 바울은 몇 사람만 세례 준 것을 하나님에게 감사한다. 고린도에 있는 회당장이었던 그리스보와(행 18:8) 가이오와 스데바나 집 사람 만 세례 주고 그 외는 기억 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것이 어찌 감사의 일이 될 수 있 나. 모든 민족에게 세례를 주는 것이 사도의 임무가 아니였던가? 바울은 그의 의무의 태만을 하나님에게 감사하였나? 전연 세례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고 자기 자신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자기의 제자를 만들고 그들의 머리가 되는 그런 일로 세례를 주지 않았음을 하나님에게 감사한다. 세례 주는 일은 다른 사역자에게 맡기고 바울은 더 유용한 복음 전하는 일로 시간을 보냈다. 이것이 더 중요하며 바울은 이것을 그의 사명이라 생각했다. 세례 주는 일은 조수들에게 맡기고 다른 사람이 할 수 없는 복음 전하는 일을 바울이 했다. 이런 뜻으로 바울은 말한다. "세례를 베풀기 위함이 아니고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그를 보냈다." 다음 사항을 주목하자. 사역자들은 그들의 임무의 어떤 부분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지만 그리스도의 영광과 영혼의 구원 에 가장 기여하는 일을 위하여 특별히 보냄을 받았다고 생각해야 한다. 바울이 그들 가운데서 행한 주요한 일은 "복음과(17절) 십자가와(18절)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23절)를" 전하는 것이었다. 사역자들은 그리스도의 군인들로서 십자가의 군기를 세우고 나타내야 한다. 그는 자기의 상상이 아니고 복음을 전해야 한다. 즉 십자가에서 못박힌 구속자를 통하여 평화의 기쁜 소식과 하나님과의 화평을 전해야 한다. 십자가에서 못박힌 그리스도는 우리의 모든 희망과 기쁨의 원천이다. 그의 죽음에 의하여 우 리가 산다. 이것이 바울이 설교한 내용이고 모든 사역자들이 설교한 내용이고 모든 성도가 살아야 할 기초이다.
바울의 전도 방법과 그 성공(고린도 전서 1:17-31)
Ⅰ. 바울이 복음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하는 방법.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며 "(17절)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2:4) 웅변의 유창함과 헬라인이 자랑하고 사도를 반대하는 자들이 전하는 철학적인 섬세한 말로 바울은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아니하며 진리의 힘이 아닌 예술의 힘으로 성공이 이루워지지 않도록, 십자가에서 못박힌 그리스도의 소박한 교리가 아니고 강한 웅변으로 복음이 전하여져서 십자가의 명예가 감소되지 않도록 바울은 복음을 전했다. 바울은 가마리엘 문하에서 유대의 학문을 배웠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함에 있어 서 그의 학문을 버렸다. 그는 소박한 언어로 십자가에서 죽은 그리스도를 전했다.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서 죽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인간의 구주이며 구원을 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으며 그의 통치와 율법을 복종해야 함을 사람들에게 말했다. 이 진리는 기교적인 옷이 필요 없다. 그것은 자체 의 빛으로 빛나며 신령한 권위로 세상에 퍼지며 인간의 도움이 아니고 성령의 역사로 전파된다.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의 소박한 전도가 이방인의 웅변과 철학보다 더 능력이 있었다.
Ⅱ. 이런 전도의 여러 효과들. 멸망하는 자에게는 그것은 미련한 것이나 구원을 얻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다(18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23,24절).
1.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는 유대인에게 거리낌이다. 유대인들은 그것을 넘어갈 수 가 없었다. 그들은 대망하는 메시야가 현세의 위대한 왕이라는 생각을 가졌다. 그러므로 그렇게나 볼 모양이 없고 그렇게나 저주스러운 죽음을 한 사람을 그들의 왕이나 구속자로 고백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그를 경멸하고 저주를 받을 만하다고 생각하고 십자가에서 죽였기 때문에 여러 가지의 기적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만족시키지 못 하였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한다(22절)(마 12:28).2.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었다. 그은 십자가에서 죽은 그리스도를 비웃고 사도의 말을 경멸하였다. 그들은 지혜를 찾았다. 그들은 지혜와 독서를 한 사람이고 예술과 학문을 연마하고 여러세기 동안 지식과 학문의 근원이 되어왔다. 십자가의 소박한 진리가 그들의 구미를 만족시키지 못하고 허영을 채우지 못하고 호기심과 변론을 만족 시키지 못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십자가를 경멸하였다. 자기를 구원하지 못하는 자에 의하여 구원을 받으라고! 저주를 받고 비천하며 천한 생활을 하고 모욕적인 죽음을 당한 사람을 믿으라니 어처구니 없구나! 이것은 인간의 이성과 학문의 교만을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교리를 받아들이고 그런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우매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리하여 그들은 그들의 교만과 고집 가운데서 멸망하도록 되어 있었다. 구원을 받은 사람은 십자가의 교리에 적용되고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의 신비를 알게 된 사람들임을 명심하자.
Ⅲ. 구약의 예언과 같이 인간의 지혜를 이긴 십자가의 승리를 볼 수 있다(사 19:14). " 내가 지혜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지혜있는 자가 어디 있으며 선비가 어디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 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19,20절). 이 세상의 가치있는 학문이 그리스도교의 계시와 십자가의 영광스러운 승리에 의하여 부끄럽게 되고 무색케 되었다. 이방인 의 정치가와 철학자, 유대인의 랍비와 박사들, 자연의 비밀을 탐구하는 자들, 이들이 모두 난처하게 되었다. 이 진리는 가장 훌륭한 정치가와 철학자와 유대인이나 헬라인 의 현학자들을 초월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할 때 그의 고유한 길을 택하셨다. 그러므로 "이 세상은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21절). 세상의 뽐내는 학문이 이 세상을 하나님께 접근시키지 못한다. 그들의 지혜에도 불구하고 무지 가 넘치고 있으며 불의가 차 있다. 인간은 자기의 지식으로 뽐내나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참이 아니고 세상적인 판단으로 보면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구원 하신다.
1. 전도의 내용이 세상적으로 현명한 사람에게는 어리석은 것이다. 그의 죽음으로 우 리가 살고 그의 저주를 통해서 우리가 축복을 받고 그의 정죄를 받아 우리가 의롭게 되는 생활이 자만으로 눈이 어둡고 편견과 이성과 철학의 교만으로 차 있는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은 일이었다.2. 복음을 전하는 방법이 그들에게는 역시 어리석은 일이었다. 지혜와 웅변으로 유명한 사람이 교회를 세우고 복음을 전하는데 채용되지 않았다. 몇 사람의 어부들이 부름을 받고 이 사명을 위하여 보내졌다. 이들은 세계 만민을 제자로 삼도록 위임을 받았다. 이들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식을 세상에 전파할 그릇이었다. 이들은 첫눈에 하나님으로부터 온 사람 같은 장엄함과 숭고함을 찾을 수가 없다. 학문과 지혜로 뽐내는 자들은 전하는 사람들의 처지를 보고 복음을 경멸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롭다"(25절). 허영의 사람들이 비난하는 신령한 행동의 방법이 그 들의 모든 학문과 지혜보다 더 진실하고 확고하며 성공적인 지혜를 가지고 있다. "형제들아 너희의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26절). 기독교의 형편을 주시하라. 학문과 권력과 명예로운 가문의 사람들을 부르지 않았다. 우리의 종교는 외부적으로 볼 때 비천하고 연약하다.
(1) 세상적으로 유명한 사람이 복음의 사역을 위하여 선택되지 않았다. 하나님은 철학자나 웅변가나 정치가나 부나 권력이나 흥미있는 사람을 선택하여 은혜와 평화의 복음을 선포하시지 않았다. 지혜와 학문이 많은 사람이 복음의 성공을 위하여 기여하리라 생각하기 쉽지만 육으로 지혜있는 사람을 택하지 않았다. 능력있는 사람이나 귀족도 아니다. 인간들은 이들이 복음을 세상에 전하는데 더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사람이 보는 것처럼 보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세상의 어리석은 것들과 세상의 연약한 것들과 세상의 비천한 것들과 비천하고 낮은 신분과 교양이 없는 사람들을 택하여 복음의 전도자와 교회의 설립자로 만드신다. 하나님은 우리보다 더 좋은 판단자이 시기에 무슨 기구나 조치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적합 할까를 아신다.
(2) 유명한 신분이나 인격자가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부르심을 받지 않았다. 전도자가 가난하고 미약했던 것같이 예수를 믿는 사람도 그러했다. 지혜있는 자나 권력이 있는 자나 귀족이 십자가의 교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의 처음 기독교인은 연약하고 어리석고 비천했다. 지식 수준이 낮고 재산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신령한 지혜가 얼마나 좋으며 복음의 성공을 위해서 좋은 길이 없던가!
Ⅳ. 모든 일이 얼마나 잘 되었나의 설명을 들어보자.
1. 인간의 교만과 허영을 타파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세상의 어리석은 일을 택하여 지혜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셨다. 학문이 없는 사람을 택하사 학문이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만들며, 세상의 연약한 것들을 취하사 능력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비천한 계급과 환경에 있는 자들을 택하사 세상 임금의 권력과 권위를 부끄럽게 하였다.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을 폐하려 하시었다." 즉 유대인들이 멸시하는 이방 인들을 회개시켜 유대인들의 제를 폐지하고 세상을 경시하는 잘못을 꺽였다. 유대인들은 이방인을 없는 것들로 말했다. 이리하여 에스더 위경에서 그 여자는 이렇게 기도한다. 하나님께서 "없는" 자들에게 왕권을 주시지 마옵소서(에스더 위경 14:11). 에스드라(Esdras)는 그의 외경에서 "이방인을 없는자들로"말한다(에스드라 후서 6:56, 57).바울이 아브라함을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이 하나님은 없는 것 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롬 4:17)하였다. 복음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의 교 만을 꺽기에 알맞고 헬라인의 자랑하는 학문을 부끄럽게 하며 유대인들이 자기를 귀 하게 여기고 이방인들을 무시하는 제도를 멸하신다.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 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29절). 자랑할 여지가 없다. 신령한 지혜만이 구 원의 방법을 계획한다. 신령한 은혜만이 그것을 계시하고 알린다. 이 두가지 점은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이다. 교리와 발견이 인간의 모든 예술과 권위의 도전에도 불구하고 펴져나갔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교만을 덮고 부끄럽게 하셨다. 복음의 섭리는 인간 을 겸손하게 하는 계획이다.
2. 그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기독교의 실체와 생활에는 능력과 영광이 있다.비록 사역자가 가난하고 배우지 못하였으며 신자들이 비천한 계급이지만 주의 손이 전도자에게 함께 하였다. 그래서 듣는 사람들의 마음에 역사하였다. 그리스도는 사역 자와 교인들에게 위대함과 영광이었다. 우리가 가진 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의 "지혜와 의로움과 구속함이 되셨다." 이것은 우리가 필요한 전부이다. 우리의 지식으로는 하나님의 일을 알 수가 없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우리의 지혜가 되었다. 우리는 죄가 있고 정의에 복종해야 한다. 그는 우리의 의로움이 되고 우리의 구속과 희생이다. 우리는 타락하고 부패했다. 그는 우리의 거룩함이 되었다. 이것이 영적 생활의 원천이다. 성령에 의하여 머리이신 그이로부터 각 지체에게 전달되었다. 우리는 속박되었으나 그는 우리의 구속이 되고 우리의 구주요 해방자다. 아래 점을 관찰하자. 그리스도가 의로 주어지는 어떠한 영혼도 거룩하게 된다. 죄의 능력에서 해방하지 않고서는 죄의 벌에서 벗어나게 하시지 않는다. 마침내 그리스도는 완전한 구속자가 되시고 영혼을 죄에서 해방하고 육체를 무덤의 속박에서 풀어 준다. 이 모든 계획은 "모든 육체가 주안에서 자랑하도록 함이다"(31절). 주안에서 영광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우리의 구원은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인간은 겸손해야 하고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고 높임을 받아야 한다. 이것이 전체의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