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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

공평무사할 것을 권고함(로마서 14:1-23)

Ⅰ. 당시 교회에 일어났던 공교로운 다툼에 대한 얘기. 우리 주님께서도 이것이 올 것이라고 미리 말씀하셨지만 이것이 오고야 만 것은 그들 가운데 불화를 막고 통일을 유지하는 지혜와 사랑이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1. 그들 가운데 음식과 날자의 구별 문제에 있어서 의견 차이가 있었다. 이 둘이 가장 심각한 문제를 일으켰기에 지목되었지만 다른 비슷한 문제도 많이 있었을 것이다. 내용은 이렇다. 로마 교회 교인들 가운데는 본래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이 섞여 있었다. 로마 유대인들이 믿었다는 기록도 있다(행 28:24). 이 유대인들은 어릴 적부터 음식과 절기에 관한 의식 율법을 지켜왔다. 이 습관이, 곧 몸에 베어버린 이것이 그들이 그리스도인이 되고 난 후에도 육신에서 근절되지 못하고 있었으니 특별히 과거에 집착한 나머지 쉽사리 그걸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의 경우가 그렇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의식 율법이 사문화되었다는 걸 모르고 있었다. 그러기에 다른 신자들은 이 점을 잘 알고 문제 삼지 않았지만 이들은 계속 의식을 지키며 실천해 왔다.

(1) 음식에 대해서(2절). "어떤 사람은 아무 것이나 먹을 수 있다고 믿지만"(새번역). 이 사람은 깨끗하고 더러운 음식을 구별하는 의식적인 구별이 더 이상 통용되지 않으며 하나님의 온갖 피조물은 좋은 것이요 아무 것도 피할 게 없다는 걸, 곧 "그 자체가 더러운 것은 하나도 없다"(14절)는 걸 확신하는 것이다. 그가 이것을 확신한 것은 복음의 전체적인 흐름에서뿐 아니라 할례의 사도인 베드로가 이 목적으로 받은 계시에서다(행 10:15, 28). 이것을 믿음이 강한 그리스도인은 분명히 알고 있었기에 자기 앞에 놓여진 음식은 양심에 물어볼 필요도 없이 먹을 수 있었다(고전 10:27). 다른 한편 "연약한 자"는 이점에서 불만을 품고 율법이 금한 음식은 아직도 여전히 불결한 것이라서 그걸 멀리하기 위해 고기를 전혀 먹지 않고 "채소를 먹는다." 곧 이 흙에서 나온 열매만으로 만족하는 것이다. 연약한 양심이 얼마나 절제하고 자기를 부정하고 있는가를 보시라. 이것을 체험해 보지 않고는 양심의 억제력과 강제력이 얼마나 큰가를 알 수 없다.

(2) 날자에 대해서(5절). 아직도 자신들이 의식 율법에 메여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 날을 다른 날보다 낫게" 여겼으니 유월절, 오순절, 새 절기, 장막절 같은 걸 지키면서 이 날들이 다른 날보다 중한 것으로 생각하고 특별한 절차를 지켜 거룩하게 여기는 가운데 스스로 이런 날에는 종교적인 안식과 행사에만 집착하였다. 한편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철폐되고 무효화되었다는 것을 아는 자들은 모든 날을 똑같이 여겼다. 우리는 주일을 제외하고는 모든 날을 똑같이 취급해야 하니 주일만은 모든 신자들이 만장일치로 지켰다. 그밖에 유대인들의 캐캐묵은 절기는 관심도 두지 않고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여기서 말하는 사도의 의견은 이런 음식과 절기의 문제는 그것이 일부 사람들의 습관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사소한 문제에 불과하며 따라서 이들도 이러한 음식과 절기 문제를 무시해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본래 이방인이었다가 유대 교사들의 감화로 그런 구별을 믿고 실천할 뿐 아니라 그게 구원에 필수적인 것으로 알고 믿으며 유대 절기를 공공연하게 지키던 갈라디아 교우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는 이것이 뒤바뀌어 얘기되고 있다. 곧 이들은 복음의 의도를 무시하고 은혜에서 떨어져가는 자들이라고 지탄을 받고 있다(갈 4:9-11). 로마인들은 그것을 연약해서 지켰지만 갈라디인들은 고의적으로 사악한 가운데 지켰다. 그래서 사도는 이들에게 각각 다르게 대하고 있다. 이 편지는 갈라디아서 보다 조금 앞서 씌여진 것으로 생각되어지고 있다. 사도는 의식 율법이 점차적으로 사라져가 명예로운 매장으로 끝날 것을 원했던 것 같다. 이 로마인들로 말하면 이들은 울면서 이 율법이 무덤에 이르기까지 따라간 자들이요 갈라디아인들은 다시 무덤을 파헤치는 격이었다.

2. 불씨는 의견 차가 아니라 이 의견 차를 잘못 다룬 데 있다.

(1) 믿음이 강하고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충분히 알고 있는 자들은 그렇지 못하고 약한 자들을 멸시했다. 그런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우정으로 도와 부축해 줘야 할텐데 이들이 합법적인 것으로 조심스러워하는 걸 어리석고 미신적인 사람들로 우습게 보고 짓밟은 것이다. 이처럼 지식을 가진 자들은 거기에 들뜬 나머지 동료 형제들을 깔보고 조롱하기가 쉽다.

(2) 믿음이 약하고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쓸 줄 모르던 자들은 강한 자들을 심판하고 정죄하였으니 마치 이들을 방종한 그리스도인, 육적인 사람들, 자기들의 하는 일을 돌보지 않고 온갖 모험을 감행할 뿐, 한 군데도 정착하지 않는 자들로 취급했다. 그들은 이들을 율법을 어기는 자로, 하나님의 법도를 멸시하는 자로 여긴 것이다. 이런 정죄는 서로 큰 감정을 불러 일으켜 사랑에 금이 갈 뿐이다. 바로 이것이 병이었다. 오늘날도 교회에 그 뿌리가 남아 있다. 마찬가지의 의견차, 마찬가지의 잘못된 태도가 교회의 화평을 깨뜨리고 있다.

Ⅱ.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 다툼을 달래고 악영향을 방지하는 데 필요 적절한 지침과 안내가 제시되어 있다. 명의의 처방처럼 사도의 지침은 합리적인 것이다. 그는 양쪽을 다 처벌하지 않고 다 설득시킴으로 쌍방이 참을 것을 종용하고 있다. 훌륭한 중재인처럼 강한 자들에게는 너무 깔보지 말라는 식으로 약한 자들에게는 너무 단죄하지만 말라는 식으로 나오고 있다. 분쟁 당사자들이 이 공정한 중재를 따르며 각자의 주장을 버리고 의견차를 은혜에 희생할 것 같으면 만사는 쉽게 회복될 것이다. 그의 규칙을 살펴 보자. 강한 자에게는 어떻게 나오며 약한 자에게는 어떻게 나오며 또 이 둘을 다 상대로 할 때는 어떻게 나오는가를 살펴 보자.

1. 약한 자들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1절)(받아들이고 의심스러운 다툼거리에 내버려 두지 말라). 이것이 일반적인 규칙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모두 일치하는 일에 정성을 쏟을 것이지 의심스러운 문제를 가지고 왈가왈부할 게 아니다. "그를 영접하라"(proslamba,nesqe). 곧 "그를 네가 데려가라." 지극한 애정과 온정으로 그를 초대하라. 그를 돕고 격려하도록 "네 손을 그에게 뻗치라"(porrigite manum). 네 친구라 맞아 얘기를 주고 받으며 온갖 정성을 다해 환대해 주라. 그를 받아들이되 그와 싸우려고 역설적인 문제를 가지고 의견 충돌을 하려고 그래서 그의 머리에 쓸데없는 생각을 불어 넣어 그를 당황케 하고 신앙을 털어버리게 하기 위해서 불러들이지는 말라. 네 교우도서의 우정과 교제가 그런 쓸데없는 말의 실랑이와 논쟁으로 산만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그의 약한 데를 찔러 그를 단죄하고 정죄하지 말라는 얘기다. 그를 발가벗기려는 뜻에서가 아니라 그를 가르쳐 강하게 하기 위해서 그를 받아들이라(고전 1:10; 빌 3:15, 16).

2. 강한 자들은 약한 자들을 멸시해서는 안 되며 약한 자들은 강한 자들을 판단해서도 안 된다(3절). 이것은 양쪽을 다 지목하는 말이다. 양쪽에 모두잘못이 있어서 서로 잘못을 깨우쳐야 하는 경우는 드문 일이다. 그는 우리가 형제를 멸시해도 판단해서도 안 된다고 주장한다. 왜 그런가?

(1) 하나님께서 그를 받아들이셨으며 그가 받아들인 자들을 우리가 거절하는 건 그분에게 수치가 되기 때문이다. 믿음이 약하다해서 참된 은혜를 가진 자를 하나님은 결코 내쫓지 않으시는 하나님이다. 강한 갈대를 결코 꺾지 않으시는 하나님이다. 강한 신자나 약한 신자나, 먹는 자나 먹지 못하는 자나 그들이 참된 신자라면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 있다. 우리는 우리 형제들을 깔보거나 멸시하고 단죄하고픈 시험을 받을 때 "하나님은 이들을 받아들이지 않으셨는가? 그렇다면 내가 감히 그들을 거절할 수 있겠는가?"하고. 아니, 하나님은 그를 받으셨을 뿐 아니라 "저를 세우셨다"(4절). 너는 먹는 자는 그의 방자함으로 넘어지고 먹지 못하는 자는 그의 공포와 걱정으로 가라앉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러나 이들에게 참 신앙이 있다면 곧 하나님을 바라보는 눈이 있어서 한 사람은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지혜있게 잘 쓰고 다른 한 사람은 억지로 그걸 참는다면, 이 둘은 다 세움을 받을 것이다. 곧 한쪽은 정직함으로 다른 한쪽은 그의 위로로 세움을 받을 것이다. 이 소망은 하나님의 능력에 근거한 것이다. 왜냐하면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 따라서 그는 자신의 백성을 지키기 위해서 이 능력을 행사하실 것이다. 우리 혹은 남의 영적 난제와 위험에 있어서 우리의 대부분의 위로와 소망은 이 하나님의 능력에 근거하고 있다(벧전 1:5; 유 24).

(2) 그들은 자기 주인의 종들이기 때문이다(4절).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우리는 남의 하인들을 붙잡고 늘어지며 트집잡고 단죄하는 건 실례로 여긴다. 신자들은 약하든 강하든 우리들의 형제지 우리 하인이 아니다. 이런 못된 판단은 선생이 많아서는 안 된다는 식으로 경계하고 있다(약 3:1). 우리가 우리 형제들을 판단하려 드는 건, 특별히 우리 눈에 안 보이는 그들의 생각과 의중을 판단하고 그들의 인격과 사람됨을 몇 가지 안 되는 실례를 가지고 판단하는 건 우리 스스로 형제들의 주인이 되어 사실상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서는 격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보시는 것은 우리와 다르며 그분만이 그들의 주인이지 우리가 아니다. 우리 형제들을 판단하고 단죄하는 가운데 우리는 우리 소관이 아닌 걸 가지고 덤벼드는 격이 된다. 우리 할 일도 많지 않은가. 정 그런 실력을 발휘하고프면 우리 자신의 마음과 행동을 상대로 하는 게 좋다. "그 서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다." 그의 운명은 그 주인에게 달린 것이지 우리에게 달린 게 아니다. 우리가 상호간의 판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롭고 틀림이 없는 판단에 따라 서고 넘어진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른다. 이것이야말로 진리대로 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대 형제의 송사가 그대 판단에 달려 있다면 그건 재판관이 아닌 자의 손에 놓여진 것이다. 하늘의 법정이야말로 유일한 시험의 법정이니 그곳에서의 심판만이 확정적이요 정확하다. 그리고 양심이 바르다면 그대의 못된 단죄에서부터 이 하늘법정으로 상고하시는 게 낫다."

(3) 이 쪽이나 저 쪽이나 그들이 진정한 신자요 요점에 있어서 올바르다면 하나님을 바라보는 눈이 있고 그들의 하는 일에서 그를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6절). "날을 중히 여기는 자," 곧 유대 금식과 절기를 지키면서도 그걸 남에게 강요는 하지 않고 자기 생각에 그 날은 세상 일을 쉬고 하나님을 예배해도 아무 지장이 없다고 생각하기에 기꺼운 마음으로 그렇게 하는 자는 잘하는 일이다. 다른 면에 있어서 이 사람이 훌륭한 그리스도인으로서 행동하는 걸 봐서도 이 면에 있어서도 그의 눈은 한 눈이요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긴다"는 걸 알 수 있다. 따라서 하나님은 그가 절기 지키는 면에 있어서 다소 실수가 있다해도 그의 정직한 의도는 받아들이실 것이다. 머리가 허약하고 부족하다고 해서 마음의 성실과 정직이 배척받는 건 아니다. 우리는 이처럼 훌륭한 주인을 모시고 있다. 다른 한편 "날을 중히 여기지 않는 자"는, 이 날 저 날을 구별하지 않는 자, 곧 이 날은 거룩하고 저 날은 평일이다. 이 날은 운이 좋고 저 날은 재수가 없다 하는 식이 아니라 모조리 똑같은 날로 취급하는 데 그는 앞서 지적한 형제를 멸시하거나 반대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게 아니다. 선량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러한 원칙에서 행동할 리가 없다. 따라서 우리는 "그가 주를 위해서 날을 중히 여기지 않는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 그는 하나님께서 아무런 구별을 두지 않는다 걸 알기에 그런식으로 날자를 구별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날을 그에게 바침으로 그를 영화롭게 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뒤에 나오는 예도 마찬가지다. 자기 앞에 놓여진 게 뭣이든, 그게 피든 돼지고기든 먹을 수만 있다면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는다." 이 사람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허락하신 자유를 알고서 그의 영광을 위해 활용하는 자로서 복음 시대에 허락된 우리의 자유를 확대하고 율법의 제약의 멍에를 벗어버리는 자다. 이런 사람은 그가 먹을 수 있는 다양한 음식과 그걸 먹을 수 있는 자유, 그리고 이 모든 일에 있어서 그의 양심이 얽매이지 않은 점을 "하나님께 감사한다." 다른 한편 의식 율법이 금하는 음식을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않는다." 그것이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는 이유는 그의 생각에 금지된 것으로 확신하는 걸 먹음으로 하나님을 거스릴까봐 두려워하기 때문이요, 그가 "하나님께 감사하는" 이유는 그것 말고도 달리 먹을 것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자기 생각에 금지된 열매인 줄로 아는 걸 의식적으로 먹지 않으면서도 그는 정원에 다른 과일들을 자유롭게 먹을 수 있는 걸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이다. 이처럼 양쪽이 다 자기들 하는 일에 있어서 하나님을 안중에 두며 정직하게 하는데 그 어느 편이고 심판하거나 욕할 이유가 뭔가? 우리가 고기를 먹든 채소를 먹든 그것은 다 우리의 모든 은혜의 원저자요 시혜자며 그걸 성결하게 해주시고 맛있게 해 주시는 분인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표시인 것이다. 샌더슨 감독도 34번째 디모데 전서4장 4절 본문 설교에서 이런 똑같은 얘기를 하고 있다. 여기서 보건데 식사 전후에 하는 "식사 기도"는(고전 10:30) 약한 자나 강한 자나 가릴 것 없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행하는 당시 교회의 일반 습관이었다. 곧 그리스도를 본받아 교회 대대에 걸쳐 실시되는 전통적이요 사도적이며 훌륭한 그리스도인의 습관이다(마 6:11; 마 26:26, 27; 행 27:35). 우리가 피조물들을 사용하기 전에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것을 감사하는 것이나 후에 이걸 주신 데 감사하여 하나님의 이름에 감사를 돌리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euvlogei/n이나 euvcarisei/n은 뒤섞여 쓰이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속단하여 멸시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그는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는 게 참기독교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 주고 있다. 따라서 반대현상이 명백히 들어나기 전에는 사소한 차이가 있는 자들이라도 다 받아들일 줄 알아야겠다. 참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그는 그 목표와 목적(7, 8절) 그리고 동기에서 다루고 있다(9절).

[1] 우리의 목표와 목적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다. 특수한 목적이 그 행동을 규정하듯이 마찬가지로 일반적인 윤곽과 경향은 그 상태를 규정한다. 우리가 무슨 길을 걷고 있는가를 알려면 우리가 무슨 목표를 향해 걷고 있는가를 보면 된다.

첫째,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다. 우리는 자아 부정에 대해서 일찍이 배운 바 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다" 이것이 모든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로 일치하는 점이다. 다른 여러 면에서는 제 아무리 의견을 달리하더라도 말이다. 어떤 자는 약하고 어떤 자는 강해도 모두가 자기를 의해서 살지 않는 다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자기이름을 그리스도에게 내어 맡긴 자 치고 자기 유익 추구하는 자는 없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은 분명히 참된 기독교의 바탕에 위배된 사람이다.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주인이 아니요 소유주가 아니니 우리 맘대로 우리를 쓸 수 있는 입장에 있는 게 아니다. 우리 삶의 임무는 우리를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이다. 우리가 날마다 직면하면서도 구출받고 있는 우리 죽음의 임무는 우리 자신을 떠들어대는 게 아니다. 우리는 날마다 죽어가는 처지에 무모하게 그런 위험을 무릅쓰는 게 아니다. 우리가 실제로 죽음에 직면한다 해도 그것 역시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다. 곧 그것은 단지 우리가 몸의 옷을 벗고 육신의 짐을 벗어버리는 데만 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주를 위한 것이니 곧 우리가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주님의 면전에 있기 위한 것이다.

둘째, "주를 위하여"다(8절). 곧 우리의 모든 권력과 심판이 위임되고 그분 안에서 우리가 모든 선한 일을 하는(골 3:17) 주 그리스도를 위함이니 우리의 규칙으로서의 그리스도의 뜻을 생각해서요 우리의 목표로서의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서다(골 1:21). 그리스도는 우리가 사나 죽으나 목표로 하는 우리의 소득이다. 우리가 사는 것은 모든 생활에 있어서 그를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요 우리가 죽는 것도, 그것이 자연사든 급사든, 그를 영화롭게 하며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해서다. 그리스도는 우리 모두의 중심부이시니 생사의 모든 선이 일치하는 곳이다. 그리스도를 모든 일에 있어서 전부로 모시는 것만이 참된 기독교다. 따라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그에게 바쳐진 몸이요 그에게 의지하는 몸이요 그를 위해 설정되어 있으며 그분을 중심으로 방향 설정하는 몸이다. 더러는 약하고 더러는 강하지만, 곧 사소한 일에 있어서는 키가 다르고 능력이 다르고 이해력이 다르며 실제 생활이 다르지만 그러나 모두는 주님의 것들이다. 곧 모두가 그리스도를 생각하며 그를 섬기고 그를 위해 자신들을 활용하며 그에 따라 그에게 마땅히 받아들임을 받는 자들이다. 그런데도 마치 우리들은 그들의 주인이요 그들은 우리를 기쁘게 하는 자들이요 그들의 서고 넘어짐이 우리 손에 달린 것마냥 이들을 판단하고 멸시하는 게 당연한 노릇인가.



[2] 이 동기(9절). 그것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열매요 목표인 그의 절대 주권과 지배에 근거하고 있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그는 다시 살아 나심으로 이전에 가졌던 영광 곧 하늘의 생명을 찾으신 것이다)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 다시 말해 그가 우주적인 군주, 만군의 주(행 10:36), 곧 생물 무생물을 총망라한 주인이 되기 위해서다. 그가 모든 것의 머리되심은 교회를 위해서다. 그는 만물을 다스리도록 살아 있는 자들의 주이자 죽어서 이것들을 받아들이고 다시 일으키는 자들의 주이기도 하다. 이것이 그의 굴욕의 대가로 그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빌 2:8, 9)이다.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다"(마 28:18)고 말씀하신 것도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후에 하신 말씀이니 이 능력을 힘입어 제자들에게 만천하에 전도할 것을 위탁하고 있다(19, 20절). 그리스도께서 영혼들과 양심을 지배하기 위해 그처럼 값비싼 대가를 지불하셨으며 이 지배권을 행사하시는 데 있어 정당하고 이론의 여지가 없는 권리를 행사한다면 우리는 형제들의 양심을 심판하므로 그 지배권을 침범하는 일이 없어야겠다. 이미 죽은 자들의 이름과 기억에 욕을 돌리고 싶어질 때 우리는 그리스도께서는 산 자들의 주이시자 죽은 자들의 주도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그들이 이미 죽었으면 그들이 계산은 끝난 것이요 그걸로 충분하다. 여기에서 우리는 심판하지 말고 멸시하지 말아야 할 또 다른 이유를 찾게 된다.

(4) 왜냐하면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조만간 결산을 봐야 하기 때문이다(10-12절). 저 큰 심판의 날을 믿는 눈으로 바라보는 자는 성급한 판단을 내리지 않을 것이다. 약한 "네가 어찌하여" 강한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그리고 강한 너는 "어찌하여" 약한 네 "형제를 업신 여기느뇨?" 왜 믿는 자들끼리 물고 뜯으며 서로 단죄하고 심판하긴가? "우리가 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리라"(고후 5:10). 그리스도께서 대심판이 되실 것이요 인간들의 영원한 상태를 그들의 행위에 따라 결정한 권위와 능력이 그에게 주어져 있으니 우리는 우리의 최종 운명에 대해 그분의 판단만 기다릴 뿐이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그는 그리스도의 우주적 주권과 지배를 말하는 구약 성경 구절을 인용하고 있다(11절).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이것은 이사야 45장 23절에서 인용한 것이다. 거기에는 "내가 나를 두고 맹세하였다"는 말이 여기서는 "내가 살았노니"하는 말로 바뀌었다. 하나님께서 "내가 살았노니"하고 말씀하시는 것은 자기 자신을 두고 맹세하는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자신에게 생명이 있다는 건 하나님에 대권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나의 입에서 의로운 말이 나갔다"는 말을 덧붙이고 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의 지배에 대한 예언으로 최후 심판의 날의 심판에 이것이 연결되어 있는데 이 지배권의 가장 두드러진 행사는 그때 가서 이뤄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신성(Godhead)의 입증이니 그는 여호와요 하나님이시니 성부 하나님과 동일하시다. 그분에게도 신의 존경이 드려져야 마땅하다. 이것은 중보자인 그분을 통해서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들어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다(행 17:31). 무릎을 끓고 입으로 고백하는 것은 내면의 숭경과 찬양의 외면적 표현에 불과하다. "모든 무릎과 모든 혀가" 자유로든 강제로든 무릎을 꿇고 고백할 것이다.

[1] 그의 모든 친구들은 그것을 자유로 하거나 그의 능력의 날에 자발적으로 될 것이다.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드리는 영혼의 자발적이요 전반적인 복종이다.

첫째, 그에게 무릎을 꿇는 일에 있어서 이해는 그의 진리에 무릎을 꿇고 의지는 그의 율법에 무릎을 꿇으며 온 몸이 그의 권위에 무릎을 꿇는 것이다.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숭경과 찬양의 자세다. 우리 요셉 앞에서도 "엎드리라"하는 명령이 내려졌었다(창 41:43). 육체의 단련 그 자체만으로는 유익이 없지만 그것이 내면의 경외와 존경으로 이어질때는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둘째, 그에게 고백한다는 말은 그의 영광, 은혜 그리고 위대하심을 인정한다는 말이요 반면에 우리의 천함과 더러움을 인정한다는 말이니 우리의 죄를 그에게 고백한다는 말이다. 이런 식으로 이 구절을 보는 이들도 있다.



[2] 그의 모든 원수들도 좋든 싫든 그렇게 하게 되고 말 것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실 때면 아니 그 이전에 그의 원수들에 대한 승리와 그들의 그에 대한 복종에 대한 모든 예언이 완전히 성취되고 말 것이니 그때 가서 이들은 그의 발등상이 되고 말 것이요 땅의 흙을 핥게 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있다(12절). "우리 각인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우리가 남의 이야기를 해 줄 필요도 남이 우리 얘기를 해 줄 필요도 없다. 오직 각자의 일을 각자가 직접 얘기할 것이다 우리의 시간을 어떻게 보냈으며 우리의 기회를 어떻게 선용했으며 우리의 행동과 그 방법을 다 고하게 될 날이 올 것이다. 그러므로

첫째, 우리는 남을 판단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그들도 우리에게 상관이 없고 우리도 그들에게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갈 2:6). "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치 아니 하시기 때문이다." 그들의 상태가 어떠하든 그들의 행동이 뭐든 그들의 자기들의 주인에게 고할 것이지 우리에게 고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들이 어떻게 해서든 그들의 기쁨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잘하는 일이겠지만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들의 신앙에 대한 지배권이 없다.

둘째, 우리는 우리 자신을 판단할 일이 너무도 많다. 우리 스스로 숙고해야 할 일만으로도 벅차다. "각각 자기 일을 살피라"(갈 6:4). 자신의 계산을 해 보라. 자신의 마음과 삶을 뒤져 보라. 여기에 골머리를 앓아 보라, 그러면 자신을 판단하고 낮추는 자는 자기 형제를 쉽사리 판단하고 업신여기려 들지 않을 것이다. 이 모든 차이점은 마지막날 그리스도의 손에 맡겨 드리자.



(5) 기독교의 강조점이 이런 문제에 있지도 않지만 또 여기에 둘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은 우리 신앙에 필수적인 것이 아니요 이 쪽 사람이나 저쪽 사람 모두에게 마찬가지다. 이래서 그는 다음의 권고를 하게 되는 것이다(17,18절). 왜 너는 네 열심을 신앙에 있어서 그렇게 사소한, 일고의 가치고 없는 문제를 가지고 찬반 어쩌고 하며 시간을 허비하겠는가? 하는 식이다. 어떤 이들은 이것이 이처럼 불상사를 초래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스스로 억제해야 한다는 식으로 해석하지만 그러나 사도는 이 양쪽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는 이런 사소한 문제에 대한 열기를 겨냥하고 있음에 틀림 없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이하.

[1] 진정한 기독교의 본질.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다. 그것은 우리를 다스리는 종교요 왕국으로써 하나님의 능력과 지배에 충심으로 복종의 관계에 서 있다. 복음 세대는 특수한 의미에서 구약 율법 세대와 구별되는 "하나님의 나라"다(마 3:2; 4:17).

첫째, 그것은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음식을 먹거나 마시거나 안 먹거나 안 마시는 데 있는 게 아니다. 기독교는 먹고 마시는 일에 있어서 어떤 법칙을 제시하지 않는다. 유대교에서는 음식규정이 까다로와(히 9:10) 제물에 있어서 어떤 것은 못 먹게 하고(레 11:2) 어떤 것은 여호와 앞에서 먹게 하는 등 가리는 게 많았으나 이 모든 조항이 이제는 철폐되고 무효화하고 말았다(골 2:21, 22). 이제 이 문제는 방임 상태에 놓여 있다.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다"(딤전 4:4). 다른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니 그것은 할례도 무 할례도 아니다(갈 5:6; 6:15; 고전 7:19). 우리는 하나님께 천거하는 것은 사소한 문제에 있어서 이 편을 드느냐 저 편을 드느냐에 달린 것이 아니다. 최후 심판날에는 "누가 고기를 먹었느냐? 누가 채소를 먹었느냐?" "누가 거룩한 날을 지키고 누가 안지켰느냐?" "누가 정통이요 누가 비정통이냐?"하는 식의 질문이 아니라, "누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를 행하고 누가 그러지 않았느냐?"하는 질문만이 있을 뿐이다. 하나님 나라를 겉 모양과 습관 그리고 상황에 결부시키는 나머지 본질적인 것을 불식하는 죄보다 더 파멸적인 것은 없다.

둘째, 그것은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이런 것들이 기독교 본질의 일부이니 우리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것을 추구하는 데 열성을 다 할 것이요 그것만을 염두에 둘 것이다. 의, 평강 희락은 아주 함축적인 말로써 신앙의 바탕과 철학(superstructure)을 내포하고 있다. 외람되이 본인이 이 말의 의미를 규정해 본다면 이런 식이 될 것이다. 하나님에게 있어서 우리의 지대한 관심은 "의"다. 곧 그리스도의 죽음의 공로로 의롭게 되고 그의 은혜의 성령으로 성화되어 하나님 앞에 입고 나타날 의다. 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의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우리 형제에게 있어서, 우리의 지대한 관심은 "평강"이다. 곧 이들과 평화롭게 사랑으로 사는 것이요 모든 인간과 더불어 평화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위대한 화해자(peace-maker)가 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다. 우리 자신에게 있어서 우리의 지대한 관심은 "성령 안에서 희락"이다. 곧 복되신 성령에 의해서 우리 믿는 자들의 마음 속에 이뤄지는 영적 기쁨이나 믿는 자들은 하나님을 그들의 화해된 아버지로, 하늘을 돌아갈 집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가 된 다음에는 그 분 안에서 하나가 되고 그분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는 게 신앙의 본질이어야 한다. 분명히 우리에게는 우리 신앙의 본질인 평강과 희락을 주시는 좋은 주인이 있다. 기초가 놓여진 다음에라야, 오직 그 때 가서야, 우리는 성경 안에서의 평강과 희락을 기대할 수 있다(사 32:17).

셋째, 하나님의 나라는 이 모든 일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18절)이다. 곧 그리스도를 우리의 중보자로 그의 뜻을 우리의 법칙으로 그의 영광을 우리의 목적으로 삼고 이 먹고 마시는 일을 하는 것이다. 우리의 선행이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그걸 행하는 데 있어 그리스도를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그의 뜻과 계획을 섬겨야하니 그의 뜻과 계획이란 무엇보다도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시키는 것이요 다음에 우리를 서로를 화해시키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 말고 기독교의 할 일이 뭔가? 우리를 위해 우리의 구원을 위해 종의 모습을 취하신 그분을 섬기는 것은 우리의 마땅한 본문이 아닐 수 없다.



[2] 하늘 나라의 혜택. 이것을 체대로 지키는 자는

첫째, 하나님에게 인정을 받는다. 그런 사람은 우리의 표준에는 안 맞을지라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자다. 하나님의 사랑과 총애를 독차지하는 사람이니 그 사람됨과 그의 행동이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를 즐겁게 할 필요가 더 이상 없다. 하나님께서 그대의 행위를 인정하면 그대는 그대의 음식을 즐겁게 먹어도 좋다. 하나님 자신으로 더불어 가장 기뻐하는 그런 자를 하나님은 제일 반가워하신다. 이러한 자들이야말로 성령 안에서 얻어지는 평화와 기쁨을 만끽하는 자들이다.

둘째, 그런 사람은 인간들의 인정을 받는다.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만한 사람은 우리의 인정을 받게 마련이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걸 우리가 기뻐하지 않을 수 있는가? 성화라는 게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일이 아니고 뭣인가? 인간들의 인정을 무시해서 안 된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하는 일이 모두 인간들 보기에 정직하고 좋은 평판이 되는 일이어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첫째로 바랄 것은 하나님의 인정이다. 왜냐하면 조만간 하나님께서는 모든 세상을 그의 마음에 들도록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3. 여기에 주어진 또 하나의 규칙은 의심스러운 문제에 있어서 각자는 하나님께서 깨우쳐 주신 빛에 따라 행동해도 좋을 뿐 아니라 그것에 따라 행동하는 게 마땅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5절에 주어진 것이다. "각각 자기 맘에 확정할지니라." 곧 "이런 문제에 있어서는 네 자신의 판단에 따라 실천하고 남들도 역시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두라. 타인들의 실천을 단죄하지 말라. 그들도 그들의 의견을 따르게 내버려 두라. 만약에 그들이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확신한다면 그들을 정죄하지 말고 오직 네 온건한 견해로 봐서 틀리거든 그들의 실천을 네 규범으로 삼지 않으면 되는 것이요 그 거꾸로도 마찬가지다. 의심하는 문제는 양심의 명령에 반대되는 행동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라. 먼저 행동을 취하기 전에 네가 하고자 하는 것이 합당한가 하는 문제를 확신하도록 하라." 의심스러운 문제에 있어서는 확실한 쪽 울타리에서는 게 현명하다. 만약에 믿음이 약한 그리스도인이 고기를 먹는 게 합당한가 하고 의심스러워 한다면 그는 그 문제에 있어서 확신을 얻을 때까지 그걸 금하는 게 상책이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남에게 강요할 필요도 없지만 남들의 실천을 우리의 규범으로 삼을 필요도 없으며 오직 우리 자신의 이해력이 명령에 따를 뿐이어야 한다. 이 목적을 위해 그는 14절과 23절에서 이 이론을 펴고 있다.

(1) 잘못 알고 있는 양심의 명령에 거슬려 행동하지 말 것(14절). 어떤 일이 사소해서 그걸 하지 않는 그 자체가 죄가 되지 않을 때 곧 그걸 행하는 게 죄가 된다고 확신하고 있으면, 남들에게는 그렇지 않아도 우리에게는 죄가 된다. 왜냐하면 이 때 우리는 비록 착각하고 있고 오해하고 있는 양심이지만 이 양심을 거슬려 행동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1] 이 문제에 있어서 사도 자신의 확신. "내가 알고 확신하는 것은 곧 나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나의 자유를 익히 알고 있는데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 없다는 점이다. 그것이 인간 신체를 위한 음식이라면 어떠한 의식 율법에 의해서 불결하게 되거나 금지된 음식이 될 수 없다는 점이다." 유대인들은 그들이 특수한 민족이 되기 위해서 다른 면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음식에 있어서 금지 조항이 않았다(레 11:44; 신 14:2, 3). 죄가 모든 피조물에게 저주를 초대한 것이다.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하는 말씀처럼 피조물 사용과 그것들에 대한 지배권이 없어지게 되어 결과적으로 이것들 모두가 인간에게 불결하게 되었다(딛 1:15). 이것의 증거로 하나님께서는 의식 율법을 통해 어떤 것은 사용을 금하셨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이 저주를 제거하셨기 때문에 이 문제는 다시 자유롭게 되었으며 금지조항도 없어졌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 확신의 원저자이자 그 동기가 되시는 주 그리스도에 의해서 확신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 확신은 저주를 제거해 버리고 피조물 전반에 대한 우리의 권리를 회복시켜 주며 특별히 구별하는 금지 조항에 종지부를 찍은 그리스도의 죽음의 효력에 바탕을 둔 것이다. 그 결과 이제는 아무 것도 그 자체로서는 불결한 것이 없게 되었다. 하나님의 온갖 피조물은 선하다. 그 어느 것도 "속된" 것이 없다(ouvde,n koinovn). 사도행전 10장 14절에 있는 a,ka,qarton이란 말도 마찬가지다. 그 어느 곳도 "속되거나 불결한 것"이 없다. 바울이 그 어느 것도 속되다거나 불결하지 않다는 확신을 가지게 된 것은 이 문제에 대한 베드로에게의 계시뿐 아니라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의 죽음이 보여 주모든 의도와 복음의 경향에서 얻어진 것이다. 이것이 바울의 확신이었으며 그는 이에 따라 실천하였다.

[2] 그러나 자기처럼 확신을 갖지 못한 자들에게 그는 경고하고 있다.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그게 그 사람 자신의 잘못에 불과하더라도 "속되니라." 이 특별난 경우가 일반적인 규칙을 낳는다. 곧 그 문제 자체로서는 어떠하든 자기 자신이 그걸 정말 부당한 것으로 믿는 걸 행하는 자, 그에게 있어서는 그게 죄가 된다. 이것은 우리의 창조 법칙에 의한 것이니 우리의 의지는 그 선택, 동기, 방향이 모든 점에 있어서 우리 이해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 이것은 자연의 질서이기도 하니 우리의 이해가(비록 잘못된 이해라도) 그건 죄라고 말하는데, 그걸 행하면 이 질서가 깨어지고 마는 것이다. 이것은 악을 행하고자하는 "의지"가 된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에게 죄로 보이는 것이라면 그걸 죄로 알고 행하는 우리의 의지에는 똑같은 타락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걸 행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이 행동 그 자체를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어느 인간의 양심에 달려 있다는 뜻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관계 설정은 바꿀 수 있다는 얘기다. 인간의 판단과 의견이 그 자체로서는 선한 것을 자기 자신들에게 악한 것으로 만들지라도 그들 자신은 그 자체로서 악한 것을 그 자체나 그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선하게 만들 수는 없다. 어떤 사람이 만일 자기 아버지의 축복을 구하는 게 좋지 않다고 확신하고 있다면 이 잘못된 확신으로 그게 본인에게는 악의 되지만 그러나 자기 아버지를 저주하는 게 좋다고 확신하는 사람에게는 이 확신이 그것을 선하게 만들 수 없는 노릇이다. 바리새인들은 "고르반"으로 자기 부모를 부양의 거절 구실을 삼아도 좋다고 가르쳐 왔다(마 15:5, 6). 그러나 바울의 잘못된 양심이 기독교에 대한 그의 분노나(행 26:9) 그들의 분노(요 16:2)를 정당화할 수 없듯이 이것도 더 이상 통용이 되지 않는 얘기다.

(2) 우리는 의심하는 양심의 명령을 거슬려 행동해서는 안 된다. 하지 않아도 죄가 아닌 줄 알지만 그걸 행하는 게 합당한가 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분명치 않은 것은 그 의심가운데 머물러 있는 동안은 행하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기" 때문이다(23절). 곧 그에게는 그것이 죄로 되어 그가 "저주받기 "때문이다(katake,kritai). 그의 양심이 정죄받는 것은 그가 "믿음으로 쫓아하지 아니한 연고"다. 곧 합법적으로 해도 된다는 확실한 확신이 없는 걸 행하기 때문이다. 가령 돼지 고기를 먹는 게 합당한가 하는 걸 그는 확실히 알지 못하면서도 남들이 먹는 걸 보기 때문에 자기 식욕을 채우기 위해서 그렇게 해도 지탄을 받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끌려 그걸 먹게 된다 하자. 이런 경우 자기 자신의 양심은 그를 범법자로 정죄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규칙은 우리가 알고 있는 선에서 행동할 것이지 그 이상은 초과하지 말자는 것이다(빌 3:15, 16). "믿음으로 쫓아 아니하는 것은 모든 것이 죄니라." 이것을 일반적으로 취하자면"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히 11:6)는 말씀과 동일하다. 우리가 종교 생활에 있어서 무슨 일을 하든 그게 믿음의 원리에 입각해서, 곧 그리스도의 뜻을 우리의 규범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우리의 목표로, 그리고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의 유일한 탄원으로 믿는 마음에서 행하는 게 아니라면 잘했다는 평판을 듣지 못하게 되고 말 것이다. 이것이 여기서는 보다 더 엄격한 것 같다. 뭐든 믿음에 의한 것이 아니면(곧 그 행동의 합당성 여부를 확신하지 않고 행하면) 그것은 양심에 위배되는 죄다. 사실은 죄가 아닌 것이지만 양심이 부당하다고 말하는 걸 행하는 자는 그게 실제로 죄인 경우에 양심이 그건 부당하다고 말해도 행하기 쉬운 자다.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의 촛불로써 양심을 타락시키고 압력을 가하는 것은 그것이 실수에 의한 것일지라도 위험한 일이다. 이것이 "자기의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책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22절)하는 말씀의 의미인 것 같기도 하다. 자기 자신의 양심과 판단으로는 해서는 안 된다고 저주하는 것을 실천하는 사람은 너무도 많다. 곧 쾌락, 이익 추구나 습관 때문에 그렇게 자신에게 관대하게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그것을 행하고 있는 동안에도 그의 마음은 거짓말을 하며 그의 양심은 그것 때문에 자신을 저주하는 것이다. 이제 자신의 양심의 도전과 비난을 받지 않게 행동을 가리며 자신의 마음을 자신의 원수로 삼지 않는 자는 복이 있다. 내면의 안정과 평온이 있는 자는 복이 있다. 고난의 때에 양심의 증거야말로 크나큰 위로가 되기 때문이다. 인간들이 우리를 저주해도 우리의 마음이 우리를 저주하지 않는다면 그것으로 족하다(요일 3:21).

4. 또 다른 규칙은 이 문제를 분명히 알고 있으며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유를 잘 알고 있는 자들에게 해당하는 것으로 약한 형제를 넘어지게 하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13절에 기록되어 있다. "그런 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자." "지금까지 사랑의 덕을 이루지 못하는 일에 머물러 있었던 것만으로 충분하니 더 이상 거기에 머물러 있지 않도록 하자." 그는 이 권고를 좀 더 자세히 설명하기 위해서 자기 자신도 여기에 포함하고 있다. "…말자." 이것은 마치 "이것은 나로서도 반대해왔던 것이니 너도 그걸 포기하도록 하라. 대신 남의 실천을 단죄하는 대신에 우리 자신의 경우를 드려다 보고 도리어 부딪힐 것이니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을 판단하라. 우리 형제가 넘어지게 하는 계기가 될 것을 행하지 않도록 조심하자.

(1) 우리 형제에게 슬픔을 주지 않도록 조심하자. "마음이 약해서 그런 음식을 먹는 건 부적당하다고 생각하는 자는 자기 생각에 금한다고 보는 율법을 준수하는 마음과 그대가 그걸 범함으로 그대 영혼이 해를 본다고 생각하기에 갖는 그대 영혼에 대한 관심 때문에 그는 그대가 그걸 먹는 걸 보고는 몹시 괴로워하는 것이다. 특별히 그대가 그대의 약한 형제에게 만족을 주려는 생각에서 상냥하게 나오지 않고 고의적으로 나올 때 그러하다." 그리스도인들은 서로를 슬프게 하거나 그리스도의 소자(小者)등으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을 저지르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마 18:6, 10)

(2) 우리 형제에게 죄책을 주지 않도록 조심하자. 젖자는 "거칠 것" 곧 우리 형제를 깜짝 놀라게 하며 크게 실망케 하는 것이요 이것은 "넘어지게 하는 계기"(pro,skommaa,h[ skavndalon)다. "네 약한 형제가 순전히 네 본을 받고 그의 양심에 거슬려 행동하고 그가 가진 빛에 반대되는 행동을 해서 자기 영혼에 죄책을 끌어 들였다면 그게 네게는 합당할지라도 그에게는 그러지 못하기에, 이런 계기를 만들어 준 책임소재는 네게 있다" 이에 대한 설명이 고린도 전서 8장 9-11절에 잘되어 있다. 똑같은 의미에서(21절) 그는 합법적인 것이라도 그걸 사용하므로 누구든 넘어지게 하는 일은 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권하고 있다.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않는 것이……아름다우니라." 이것은 정말 먹어도 되는 것이요 맛있는 것이지만 그게 마을 넘어지게 하는 것이라면 그걸 사용할 수도 있고 또 그걸 사양해야 마땅하다. 그것은 "아름답다." 곧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요 우리 형제에게 유익한 것이요 우리 자신에게 아무런 해도 없는 것이다. 다니엘과 그의 동무들도 채소와 물만 먹고 살았지만 왕의 식탁에서 먹는 자들보다 더 혈색이 좋았다. 이것은 남을 위한 자아부정으로 바울에게도 그 예를 찾을 수 있다(고전 8:13).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하고서 그는 "나는 식물을 먹지 않겠다." 곧 자신을 파괴하겠다는 식으로 얘기하지 않고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말한다. 사소한 일로 네 형제가 넘어지고 마음을 상하며 죄에 빠지고 고민한다면, 곧 "거리끼게"(약하게) 한다면, 그의 은혜가 약화되고 그의 위로가 약화되고 그의 결심이 약화된다면 모두 이 때문이라는 얘기다. "거리끼게"(약하게), 곧 그의 단죄와 과민으로 그의 약함을 보여 주는 계기를 만들어 준다는 얘기다. 약한 자들을 약하게 해사는 안 되겠다. 곧 꺼져가는 등불을 끄거나 상한 갈대를 꺾지 말아야 한다는 얘기다. 이 경고를 강화해 주는 동기를 좀 더 살펴 보자.

[1] 이로 말미암아 깨어지고 마는 그리스도인의 사랑의 법칙을 생각해 보자(15절). "만일 식물을 인하여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곧 너는 합법적으로 한다고 할지라도 모세 율법이 금하는 걸 먹는 너를 보고 번민하게 되는 경우 너는 말랄 것이다." 저 친구 참 멍청하고 샛님같은 소리만 하는군, 그건 그리 대단한 문제가 아니란 말야"하고. 이런 경우 우리는 대부분 약자편에 그 책임을 돌릴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강한 자, 더 많이 아는 그리스도인 쪽을 향해 꾸중하고 있다 :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치 아니함이라" 이처럼 사도는 약한 자 편을 들고 있으니 지식에 결핍있는 쪽보다 사랑에 결핍이 있는 자를 정죄하고 있다. 이것은 다른 데서도 마찬가지니 사랑의 길이 "제일 좋은 길"이기 때문이다(고전 12:31). 지식은 교만케하지만 사랑은 덕을 세운다(고전 13:1-3).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치 아니함이라." 우리 형제들의 영혼에 대한 사랑이 최선의 사랑이다. 참 사랑은 그들의 평안과 순결에 보다 더 관심을 갖게 하며 우리의 양심뿐 아니라 그들의 양심에 관심을 갖게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거기에 약하다 해도 참 은혜를 가진 자들에게 온정을 베푸신다.

[2] 그리스도의 죽음의 목적을 생각해 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식물로 망케하지 말라"(15절).

첫째, 한 영혼을 죄에로 이끄는 것은 그 영혼의 파멸을 위협하는 것이다. 그의 신앙을 뒤흔들어 놓고 그의 정욕을 불러 일으키며 그로 하여금 양심의 빛을 거슬려 행동하게 유혹하므로 너는 그를 유대교에 들어가게 하는 계기를 그에게 주어 멸망시키고 있다. "망케하지 말라"(Mh. avpo,llue)이 원어는 철저한 파멸을 뜻한다. 죄의 시작은 물을 터 놓는 것과 같은 것으로 우리는 그게 이 영원한 파멸쪽에서 언제 그칠 것인지 장담할 수 없다.

둘째,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을 위해 돌아가시기까지 보여 아직 사랑을 생각하면 이들의 행복과 구원을 관심있게 생각지 않을 수 있으며 그들을 훼방놓는 짓을 삼가지 않을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해 생명을 바치셨는데 우리가 누구라고 그들을 위해 고기 한 점을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높이 평가한 저들을 우리는 과소평가할 것인가? 그는 그들을 위해 자기 몸을 바칠 정도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셨는데 우리는 그들을 위해 고기 한 점을 삼갈 수 없을 정도로 무가치하게 생각할 것인가? "네 식물로," 너는 그 음식이 네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그러나 그것으로 맘이 상한 네 형제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의 구속의 일부라는 것을. 기억하라. 네가 네 형제를 멸망시키고 있는 한 너는 악마의 목적을 조장하고 있다. 악마는 위대한 파괴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너는 있는 힘을 다해 그리스도의 목적을 훼방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위대한 구주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너는 네 형제뿐 아니라 그리스도까지 마음 상하게 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의 마음은 구원 사업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위해 죽은 자들이 도대체 하나라도 멸망 받을 수 있는가? 우리가 그것을 그리스도의 죽음의 일반적 의도에서 생각한다면 복음 시대에 모두가 구원받는 다고 보기 때문에 멸망받는 수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죽음이 선택 받은 자들만을 위한 것이라면, 비록 일단 그리스도에게 주어진 자는 아무도 멸망하지 않을 것이지만(요 6:39) 그래도 네 힘닿는 데까지는 그들을 멸망시키려 드는 것이다. 설령 그들이 멸망받지 않는다 해도 네 덕분이 아닌 것은 멸망케 하는 방향으로 일을 한 너는 그리스도에게 공공연한 반기를 든 셈이기 때문이다. 아니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해 죽으셨다는 걸 네가 믿을 수밖에 없도록 하기 위해서 너는 더러 멸망시킬 수도 있다(고전 8:10, 11 비교).



[3] 하나님의 일을 생각해 보라(20절). "식물을 인하여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말라. 은혜의 일 특별히 네 형제의 영혼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믿음의 일을 파괴하지 말라." 평안과 위로의 일은 그런 잘못에 의해 깨어질 수 있으니 그러므로 그걸 조심하라. 하나님께서 이뤄 놓으신 일을 네가 풀어 헤치지 말아라. 너는 마땅히 하나님과 더불어 일 할 것이지 그의 일을 방해하지 말아다.

첫째, 은혜와 평안의 일은 하나님의 일이다. 그것은 그분에 의해서 그분을 위해 행해지는 일이요 그의 일은 시작이다(빌 1:6). 그리스도께서 위해 죽은 자들(15절)을 가리켜 여기서는 하나님의 일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걸 유의하자. 우리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는 우리가 할 수 없는 일과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각자 성도는 하나님의 작품이요 농작물이며 건물이다(엡 2:10; 고전 3:9).

둘째, 우리는 이 일을, 우리 일이건 남의 일이건, 파괴하는 쪽으로 기우는 일은 그 어느 것이고 삼가도록 해야겠다. 우리 자신이나 남의 은혜와 평안을 훼방놓느니 보다는 우리의 성향과 식욕,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절제하는 편이 훨씬 낫다. 많은 사람들이 먹는 것과 마시는 일로 자신들 속에 이뤄지고 있는 하나님의 일을 파괴하는 수가 많은데(육신을 달래고 북돋아 주며 거기서 나오는 정욕을 만족시키는 일보다 더 파괴적인 것이 따로 없다), 마찬가지로 남에게 고의적으로 거침돌을 주어 그들 속에 이뤄지는 하나님의 일도 마찬가지가 되게 하고 만다. 네가 파괴하고 있는 일이 뭔가를 잠시 생각해 보라. 그건 "하나님의 사업"이다. 그의 일은 영광스러운 일이 아닌가. 그 사업을 뭣 때문에 파괴하고 있나를 생각해 보라, 오직 배만 위하고 또 배는 그것만 위하는 "음식" 때문이다.



[4] 실족케하는 악을, 그리고 그게 우리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얼마나 오용하는 것인가를 생각해 보라. "만물이 다 정하다"는 점을 그는 인정하고 있다. 우리가 고기를 먹는 것은 합당하다. 아니 의식 율법이 금하고 있는 그런 음식까지도 먹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자유를 남용하면 그게 우리에게 죄가 된다.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하니라." 합당한 일이 부당하게 처리될 수도 있다. "거리낌으로 먹다"는 말은 아무 생각없이 먹는다거나 고의적으로 그의 형제를 실족케 하려고 먹는 그런 의미를 갖는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실족케 하는 당사자들에 대한 꾸중이다. 물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유와 쉽사리 성내지 않고 악을 생각치 않는 사랑이 없어서 무턱대고 연약하게 실족하는 자들에게도 책임이 없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는 화살을 강한 자들에게 돌리고 있다. 이들이 질책을 더 잘 견디고 고치는 일도 먼저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것을 두 가지 면에서 강조하고 있다.

첫째, "그러므로 너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16절). 남들이 기독교를 전반적으로 욕하지 않게, 특별히 너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유를 욕하지 않게 조심하라. 복음은 너희 선한 것이요 거기서 오는 모든 특권과 자유 또한 너희 선한 것이다. 사소한 문제에 있어서 그걸 판단할 줄 아는 지식도 너희 선한 것이다. 곧 네 형제가 갖지 못한 선한 것이다. 이제 이걸 비방하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말이다. 재갈 물리지 않은 혀가 악평하는 것은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그런 계기를 만들어 줘서는 안 되겠다. 우리의 잘못 때문에 욕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딤전 4:12). "누구든지 너를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라." 널 깔보지 못하게 하라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네 지식과 힘을 사용하는데 사람들로 하여금 그게 하나님의 율법에의 불순종이라는 욕을 듣지 않도록 조심하라. 많은 경우에 있어서 우리의 유익과 명성을 위해 우리는 옳다고 생각하는 일이지만 그게 우리 명성에 편견을 가져 오고 오명을 가져 올 염려가 있을 때는 그걸 삼가야 한다. 그런 경우에는 우리 자신이 수치를 당하는 것보다는 자제하는 편이 낫다. 비록 그게 하찮은 잘못이지만 독파리와 같이 지혜와 존경의 명성을 깡그리 뭉개고 마는 수가 있다(전 10:1). 우리는 이걸 보다 일반적으로 적용할 줄 알아야겠다. 우리가 선행을 하되 그것이 욕을 먹지 않는 방향에서 처리해야겠다. 그 자체로서는 훌륭하고 좋은 일이지만 일처리를 잘못해서 욕을 먹고 핀잔을 사는 수가 많다. 좋은 기도, 좋은 설교, 좋은 강의가 가령 시가의 배열이 잘못되거나, 표현 부족 기타 다른 부대적인 상황 배열에 신경을 못쓰는 바람에 욕을 먹는 수가 많다. 그런 하찮은 부대적 잘못 때문에 욕을 하는 건 욕하는 사람 잘못이지만 그러나 그런 계기를 마련해 준다는 점에 우리의 어리석음이 있다. 우리가 주장하고 실천하는 선한 것을 의해서라도 욕을 사지 않도록 조심하자.

둘째,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22절). 여기서 말하는 믿음이란 의롭게하는 믿음이 아니라(그건 숨길게 아니라 우리의 행위로 들어내야 한다),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문제에 대한 지식과 확신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 경우에 분명한 것을 알고 있는가? 모든 음식을 똑같이 먹고 모든 날을(주일만 제외하고) 똑같이 지킬 수 있는가?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곧 네 마음 속으로나 기뻐할 것이지 그걸 오만하게 사용하여 네 약한 형제를 걸려 넘어지게 하지 말라." 이런 하찮은 문제에 있어서 우리는 우리의 확신을 번복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유익보다는 해를 가져올 때는 때때로 그걸 감출 수도 있다.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곧 네 자신에게만 준칙으로 적용할 것이지 남에게는 강요할 수 없는 것이다. 네 혼자만의 즐거움으로 그치라. 의심스러운 문제에 있어서 명확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건 우리가 맘놓고 행동할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런 명확한 지식이 없는 자들에게 도사리는 주저함, 질투, 그리고 의심에서 해방되어 자유로 행동할 수 있다는 얘기다.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갈 6:4)는 말씀과 비교해 보시라. 자기의 일을 말씀이라는 시금석에 가져와 시험해 보고 하는 일에 있어서 정확을 기하도롤 하라. 그러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만 있고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라." 바울은 이런 문제에 있어서 확신이 있었다. "내가 확신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는 이 확신을 자기만 간직했지 그걸 사용해서 남이 걸려 넘어지게 하지 않았다. 이런 논란의 대상이 되는 문제에 명확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각자들만 그걸 간직하고 남에게 강요하지 않는다면 얼마나 교회가 행복하게 되겠는가1 이걸 강요하는 것보다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반대되는 것도, 교회의 평안과 양심의 평안에 파괴적인 것도 없다. 꼭 필요한 일에 있어서는 연합하고 필요치 않은 일에 있어서는 자유롭게 하되 이 둘에 있어서 모든 걸 사랑으로 하자. 그러면 만사는 쉽게 치유되고 말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그런 확신을 주신 목적은 이런 자유를 갖고 있음으로 해서 하나님에게 거리낌이 없는 양심을 가지라는 것이다. 이것으로 우리는 만족하자. 하나님 앞에서 가지고 있는 서이야 말로 참 위로인 것이다. 하나님 보시기에 올바른 것만이 참으로 올바른 것이다.

5. 여기 일반적인 규칙이 d하나 더 기록되어 있다. "이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자"(19절). 여기에 우리 형제에 대한 우리의 임무의 요점이 있다.

(1) 우리는 상호간의 화평을 위해 힘써야 한다. 화평을 기원하고 그걸 떠들어대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그 정반대의 길을 가는 자들이 많다. 하찮은 것에 있어서 갖은 자유, 약하고 섬세한 자들에 대한 공손한 태도, 그리고 하나님의 일에 대한 열심, 이 모든 것이 화평을 이루는 일들이다. 온유, 겸손, 자아 부정, 사랑은 화평의 원천이요 화평을 이루는 요소들이다. 우리는 언제고 화평으로 즐거워하지만은 않는다. 전쟁을 기뻐하는 자들이 부지기수다. 그러나 화평의 하나님은 우리가 화평을 이루는 일을 따를 때만이 우리를 받아주실 것이다.

(2) 우리는 상호간의 덕을 위해 힘써야 한다. 전자는 이것을 낳게 마련이다. 우리가 서로 물고 뜯으며 싸우는 동안에는 서로 덕을 세울 수 없다. 우리가 진정한 신앙 안에서 곰곰히 그걸 생각하고 충고하며 견책하며 교훈하며 모범을 보이며 자기만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세우도록 하면 서로 덕을 세울 수 있는 길은 많이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건물이요 하나님의 성전으로서 서로 붙들어 세워 줄 필요가 있으며 서로의 영적 상징을 위해 힘쓸 필요가 있다. 부축을 받지 않을 정도로 강한 자도 없고 덕을 세울 수 없을 정도로 약한 자도 없다. 따라서 우리는 남을 붙들어 세워줌으로 우리 자신에게 혜택을 가져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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