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망받는 장로들(에스겔 14:1-11)
Ⅰ. 여기에는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선지자에게 한 말이 나온다. 그들은 선지자를 통해 여호와께 신탁을 물으러 왔다. 그들은 나아와 그 앞에 앉았다(1절).
그들은 에스겔의 동료 포로가 아니어서 그의 사역을 늘 지켜보지 못 했을 것 같다(8장 1절에 나오는 자들처럼). 그들은 이따금씩 들으러 오는 자들이거나 업무차 바벨론에 온 예루살렘의 귀족들 이었을 것이다. 아마 왕의 심부름이나 공무로 바벨론에 왔다가 귀로에 선지자를 방문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선지자의 소문을 많이 들었고 따라서 선지자가 하나님께로부터 어떤 메시지라도 받았는지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만약 받았다면 그것은 그들의 협상에서 다소 길잡이라도 될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여기서 그들에게 준엄한 대답이 내려지는 것으로 보아 그들이 선지자를 함정에 빠뜨리거나 아니면 시험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온 것으로 의심할 만하다. 그들은 에스겔의 말 가운데서 예레미야의 예언과 상반되는 듯한 꼬투리를 잡으려고 나아왔다. 그래서 그들은 이를 인하여 그와 그의 예언을 다 비난할 수 있기를 기대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정직한 사람을 가장하고 선지자에게 찬사를 돌리며 하나님의 백성이 하는 대로 점잖게 앉았다. 악인이 외면적 종교 행위에 열중하고 있는 것을 본다는 것은 전혀 새로운 일이 아님을 주목하자.
Ⅱ. 하나님께서는 비밀리에 선지자에게 그들에 대한 설명을 하신다. 그들은 선지자에게 낯선 자들이었다. 그는 그들이 이스라엘의 장로라는 것밖에 몰랐다. 그것은 그들이 지닌 특성이었다. 선지자는 그들을 이스라엘의 장로로서 존경하며 맞았다. 그는 기꺼이 그들을 고상한 인품의 소유자로 보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진정한 모습을 그에게 보여 주신다. 그들은 우상 숭배자였다. 그들은 자기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어떤 신의 신탁도 받아들이려고 하는 자들이었다. 여기서 에스겔에게 묻는 것도 그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선지자에게 그들이 비호나 권면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지의 여부를 직접 물으신다. "그들이 내게 묻기를 내가 조금인들 용납하랴? 내가 그들의 문의를 내게 대한 영예로 생각하여 받아들이거나 그들을 흡족하게 하기 위해 대답하겠는가? 아니다, 그들은 그런 것을 기대할 만한 이유가 없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그들은 자기 우상을 그 마음에 들였다(세웠다=원의). 그들은 우상을 둘 뿐만 아니라 우상을 사랑한다. 그들은 우상과의 사랑에 혹하며 우상과 결합한다. 그들은 우상과 헤어질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들의 중심에는 우상이 들어있고 또 너무나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 집에 우상을 세워 두고 있었다. 지금은 비록 자기 우상의 방에서 멀리 떠나 있지만 그 마음에는 우상들을 들여 놓고 있다. 그들은 이따금씩 공상과 상상으로 우상들을 섬기고 있다. 그들은 우상들로 하여금 그 마음 위로 올라가게 만들었다(직역하면 그렇다). 그들은 그 마음을 우상에게 복종시켰고 우상은 거기서 왕노릇하고 있었다. 또한 그들은 선지자에게 물으러 왔을 때 우상을 제거한 것처럼 행세했지만 그것은 위장에 불과했다. 그들은 우상을 위해 은밀한 자리를 마련해두고 있었다. 그들을 자기들의 마음속에 우상을 계속 보존하고 있었다. 설령 그들이 잠깐 우상을 떠난다고 해도 그것은 cum animo revertendi- 즉 최후의 고별이 아니라 다시 그들에게 돌아오려는 의도를 가진 행위였다. 또는 그것은 영적 우상 숭배로 이해할 수 있다. 세상 부귀와 감각의 즐거움에 애착심을 두고 돈을 신으로 삼으며 자기 배로 하나님을 삼는 자들은 자기 우상을 그 마음에 들이는 자들이다. 성소에는 우상을 두지 않았으나 그 마음에는 우상을 들이는 자들이 많다. 이것은 하나님의 보좌를 찬탈하는 것이며 그 이름을 모독하는 것이나 다름 없다.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서 멀리하라" (요일 5:21).2. 그들은 죄악의 거치는 것을 자기 앞에 둔다. 그들의 은과 금을 죄악의 거침돌로 표현되고 있다. 그것은 은금의 우상이었다. 그 아름다움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우상에게 유혹되었다. 그래서 우상은 그들을 거치게 하고 그 죄에 빠지게 한 거침돌이었다. 또한 그들의 죄악은 그들을 곤두박질시키고 따라서 파멸속으로 넘어지게 한다. 죄인은 스스로를 시험하는 자이며(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라, 약 1:14) 따라서 스스로를 파멸시키는 자이다. "만일 네가 거만하면 너 혼자 그것을 당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그들은 죄악의 거치는 것을 자기 앞에 두고 눈으로 보면서도 그 위에 거친다. 이것은 그들이 그 결과야 어떻든 죄 가운데서 진행하겠다고 결심하는 것을 암시한다. "내가 낯선 자를 사랑하며 그를 따라 행하리라" 는 것이 그들의 마음의 언어였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런 파렴치한들에게 물음을 받으시겠는가? 그들은 그리스도를 희롱하여 무릎을 끓던 자들처럼 그에게 존귀를 돌리기는 커녕 오히려 이로써 모욕을 끼치지 않았는가? 이와 같이 하나님께 적대 행위를 계속하는 자들이 하나님께로부터 화평의 대답을 기대할 수 있는가? "에스겔아 ! 너는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Ⅲ. 하나님께서는 정당하신 노여움으로 에스겔에게 명령을 내리시는데 그것은 그들에게 응답을 주라는 것이다(4절). 그들은 하나님의 응답 거절이 인간 차멸이나 무시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족속 모두에게 대한 규칙으로 제시됐다는 것을 알아야 했다. 누구든지간에 우상에 대한 사랑과 연합을 계속하면서 하나님께 물으러 나온다면 하나님을 자기에게 대한 모욕으로 여겨 분개하실 것이며 그 사람의 가장된 경건대로가 아니라 그의 실제 죄악대로 응답하실 것이다. 그들은 선지자에게 나아오면서 선지자가 자기를 정중히 응대할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뻔뻔스러움을 벌하심으로써 그에게 응답하실 것이다. "말하기만 하면 시행되는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나아오는 자에게 그 우상의 많은 대로 응답하리라." 그 우상을 마음에 들이며(세우며) 그 마음을 우상에 두는 자들은 흔히 다수의 우상을 가진다는 데 주목하자. 겸손한 예배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그 자비의 많은 대로 응답하시지만 대담한 침입자에게는 그 우상의 많은 대로 응답하신다. 즉
1. 그 우상들의 소원대로 응답하실 것이다. 그는 그들을 그 마음의 정욕대로 내버려 두실 것이며 그들이 마음에 원하는 만큼 나쁘게 되도록 내버려 두실 것이어서 마침내 그들은 자기 죄악의 양을 채우게 될 것이다. 인간의 부패와 타락은 그 마음에 있는 우상이며 그것은 그들 스스로가 들어다 세운 것이다. 인간의 유혹과 시험은 자기 죄악의 거침돌이며 그것 역시 그들 자신이 갖다 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대로 그들에게 응답하실 것이다. 그들로 자기 진로를 취하게 하라.2. 그 우상들의 공과대로 응답하실 것이다. 그들은 우상 숭배자가 받아 마땅한 대로 응답을 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보통 우상 숭배자들을 처벌하실 때와 마찬가지로 그들을 벌하실 것이다. 즉 그들이 도움을 필요로 할 때 하나님께서는 자기들이 택한 신들에게로 그들을 보내실 것이다(삿 10:13, 14). 하나님은 인간의 외양과 겉보기 신앙을 따라서 그를 판단하지 않으시고 그 실제대로 즉 그 마음을 따라 판단하실 것이다. 이 점을 유의하자. 그리고 이 일의 결과는 어떻게 될 것인가? 이 위협적 응답은 어디까지 도달할 것인가? 하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5절). "이는 내가 이스라엘 족속을 그들의 마음에 먹은 대로 잡으며 그들을 세상에 노출시켜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아니, 그들을 저주에 노출시켜 파멸을 당케 하려 함이라." 죄인의 죄와 수치 그리고 고통과 파멸은 전부가 그들 자신에게서 나오며 그들의 마음은 그들 자신을 잡는 올무라는 데 주목하자. 죄인의 마음은 그들을 유혹하며 배반한다. 그들의 양심은 그들을 쳐서 증거하며 정죄하며 그들 자신에게 두려움이 된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들을 잡으시며 발견하시며 유죄 선고를 하시며 묶어서 심판에 넘기신다면 그것은 전부가 그들 자신의 마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이스라엘아 네가 네 스스로 명망케 했느니라. 이스라엘 족속이 다 그 우상으로 인하여 나를 배반하였으므로 그들은 그들 자신의 손으로 인해 파멸을 당한다." 다음 사실을 주목하자.
(1) 죄인의 파멸은 하나님께로부터의 배반에 기인한다.
(2)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께로부터 소외되는(배반하게 되는)것는 이런 저런 우상를 통해서이다. 피조물이 마음속에서 하나님이 차지하셔야 마땅할 자리와 지배를 얻었다는 것은 얼마나 가증한가 !
Ⅳ.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응답의 정도(7, 8절). 그 응답은 이스라엘 족속 전부를 대상으로 한 것이다. 같은 말씀이 반복되는데 이것은 위선자에게 대한 하나님의 지당하신 노여움을 암시한다. 그들은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배반하고 그와 전쟁 상태에 있으면서도 겉치레 신앙과 경건한 모양으로써 하나님을 조롱하는 자들이다. 다음을 살피자.
1. 이 선언은 누구에게 속하는가? 그것은 모든 이스라엘 족속과 관계 있을 뿐 아니라(3, 4절) 이스라엘 가운데 우거하는 외인과도 직결된 일이다. 이방인은 자기가 이스라엘에 체류하는 나그네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으로 우상 숭배의 구실을 삼으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그들은 자기 부조가 섬겼고 자기도 그 우상 예배 속에서 양육되었다고 해도 그 신들을 섬겨서는 안 되었다. 그들은 만일 우상 숭배를 완전히 부인하지 않는다면 이스라엘의 신탁이나 선지자로 부터 어떤 혜택도 기대해서는 안 된다. 개종자라도 진실하지 않으면 옹호받지 못한다는 데 주의하자. 위장된 회심은 회심이 아니다.2. 위선자들은 어떻게 묘사되는가? 그들은 우상과의 교제로 하나님을 떠난다. 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스스로 단절시키며 그에게 대한 이해 관계도 끊어버린다. 그들은 하나님과의 면식과 교통을 중단하고 그에게서 멀리 떠난다. 우상과 결합하는자는 하나님을 떠나는 자이며 하나님께로부터 스스로 분리하는 자이다. 하나님의 시야와 성취로부터 영원히 분리되는 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 대한 봉사로부터 스스로 분리하여 그에게 대한 충성에서 고의로 물러나는 자들은 예외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로부터 스스로 분리하면서도 하나님께 대해 물어보려고 선지자에게 나아오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겉으로는 선지자의 직분에 대해 존경을 품는 체 하지만 헛된 호기심을 충족시키고 시끄러운 양심의 입을 막기 위해 나아오는 것이다. 또는 그들은 사람들 중에서 명성을 얻거나 보존하기 위해 선지자에게 나아오지만 하나님과 친숙해 지려거나 그의 지배를 받으려는 염원은 전혀 품고 있지 않다.
3. 이처럼 하나님을 시시하게 보고 속이려고 생각하는 자들의 운명이 언급된다. "나 여호와가 친히 그에게 응답하리라. 나 혼자 그를 취급하게 하라. 내가 그에게 대답할 것이니 그 대답은 그를 혼란의 와중에 쓸어넣을 것이며 자기의 대담한 불경건을 후회하게 하리라." 그는 선지자의 말로 대답을 얻지 않고 하나님의 심판으로 응답을 얻게 될 것이다. "내가 그를 대적하리라." 이것은 그에게 대한 하나님의 노여움이 크다는 것과 그를 파멸시키겠다는 확고한 결의를 나타낸다. 하나님은 극히 참회치 않는 죄인도 능히 대적하실 수 있다. 외식자는 자기 명성을 건지겠다고 생각했다. 아니 칭찬을 받으려고 생각했다. 그러나 반대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징조와 속담이 되게 하실" 것이며 그에게 심판을 내려, 주위 모든 사람의 눈에 형편없이 보이게 하고 주목을 끌게 할 것이다. 마치 죄인 중 극악한 자를 외식하는 자가 받는 율에 처한다고 하듯(마 24:51) 그의 불행은 최대의 불행을 표현하는 데 인용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표본으로 만드실 것이다. 그에게 내리는 하나님의 심판은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희롱치 않도록 조심하라는 경고가 될 것이다. 하나님을 배반하면서도 하나님께 묻는 척하는 자들에게는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다. 위선자는 자기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간주 받아 그들 틈에 끼어 천국으로 가리라 생각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자기 백성 가운데서 끊으실 것이며 그를 발견해 내실 것이며 아무리 비좁은 무리 중에 끼여 있더라도 집어내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이로써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고 말씀하신다. 위선자의 색출로 하나님은 전지하시다는 것이 나타난다. 사역자들은 교인들이 말씀을 들을 때 감화를 받는지 못받는지 알지 못하나 하나님은 다 감찰하신다. 위선자의 형벌로써 하나님은 질투하는 분이시며 기만당할 수도, 당하려고 하지도 않으신다는 것이 드러난다.
Ⅴ. 경건을 가장하는 자들을 옹호하는 거짓 예언자들의 운명이 나온다(9, 10절). 에스겔은 이들 위선적 문의자들에게 위로의 대답을 하려 하지 않지만 그래도 그들은 좋은 말만 해 줄 다른 선지자들을 만나려고 한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그들은 하나님이 형벌의 일부로 거짓 선지자로 하여금 속이도록 허락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했다. "만일 아첨하는 선지자가 유혹을 받고 사실 무근한 희망을 그들에게 심어 준다면 이는 나 여호와가 그 선지자로 유혹을 받게 하였기 때문이다. 내가 유혹을 그 앞에 두도록 허락했고 그로 그 유혹에 넘어가게 했으며 악행을 계속하기로 결심한 자들을 그 악한 행로 속에서 더욱 완악해지도록 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죄를 지으신 분이 아님을 확인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만유의 주시오, 죄인들의 재판관이시며 왕왕 한 악인을 이용하여 다른 악인을 멸망케 하시며 한 악인을 이용하여 다른 악인을 미혹케 하신다는 것을 믿는다.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는 두 가지가 다 죄다. 따라서 그것들은 하나님께로서 오는 게 아니다. 이런 일을 당하는 자에게는 그 두 가지가 다 벌이다. 따라서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다. 이에 대한 완전한 본보기는 아합의 선지자들의 기사에서 읽을 수 있다(왕상 22:23). 아합의 선지자들은 하나님이 저희 입에 두신 거짓말하는 영에게 미혹을 당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다른 영을 보내사 그들로 그 거짓말을 믿도록 버려 두셨다. 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살후 2:10, 11). 그러나 거짓말 하는 선지자의 두려운 운명을 읽어보자. "내가 손을 펴서 그를 멸할 것이라." 하나님께서 그 거짓말하는 선지자를 통해 자신의 의로우신 목적을 이루시고 나면 그 선지자는 자신의 불의한 목적에 대해 셈을 치르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죄 많은 백성을 황폐시키시기 위해 갈대아인들을 사용하셨지만 갈대아인의 본노에 대해서도 벌하셨다. 그것은 공정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죄많은 백성을 미혹시키기 위해 거짓 선지자들과 거짓 그리스도인들을 이용하셨지만 그들 자신에게는 허위성을 들어 벌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점에서(이 부분에 대한 칼빈의 주석이 상기시켜 주듯) 하나님의 판단이 큰 바다와 일반이며 (시 36:6),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을 판단하기에는 무능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모든 비난자들을 만족시키고 침묵시킬 수 있을 정도로 하나님 처사의 공평성을 설명하진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온 세상 앞에서 의로우시다고 인정되실 날이 오고 있다. 특히 이 사례에서 그럴 것이다. 즉 그 때에는 악한길에 있는 외식자에게 아첨하는 선지자의 형벌이 부드러운 것만 구하고 말하는(사 30:10) 외식자의 형벌과 같을 것이다. 눈먼 인도자나 추종자가 다 같은 구덩이에 빠질 것이다.
Ⅵ. 이 두려운 운명을 방지하기 위해 그들에게는 선한 권면이 제공된다(6절). "그런즉 너희가 다 돌이켜 우상을 떠나라. 우상이 너희와 하나님을 분리시켰듯 너희는 우상과 분리되리라. 우상이 하나님의 얼굴을 너희에게서 돌리게 했으므로 너희는 너희 얼굴을 우상에게서 돌이키라." 이것은 우상의 타기를 의미할 뿐만 아니라 혐오감과 증오감을 버리라는 것도 의미한다. "너희가 역겨워하는 가증한 것에서 얼굴을 돌이키듯 우상에게서 돌이키고 떠나라. 그러면 너희는 여호와께 물으러 와도 환영을 받을 것이다. 자 오라 ! 우리가 함께 변론하자."
Ⅶ. 이스라엘 족속에 대한 이 모든 일의 결과는 좋게 나타난다. 가장한 선지자와 거짓 성도들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함께 멸망할 것이다. 이는 일부를 본보기로 삼아 백성의 대부분을 개혁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이는 이스라엘 족속으로 다시는 미혹하여 나를 떠나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 (11절). 형벌은 죄의 방지를 목적으로 하며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듣고 두려워하며 경고를 받게 하기 위한 것임을 주목하자. 하나님께로부터 이탈하여 방황하는 자들이 어떻게 되는지를 보게 될 때 우리는 그로써 하나님께 꼭 달라 붙게 된다. 그리고 만일 이스라엘 족속이 미혹하지 않으면 그들이 다시는 더럽혀지지 않을 것이다. 죄는 더럽히는 것임을 유의하자. 죄는 죄인을 하나님의 순수하시고 거룩하신 눈에 역겨운 존재로 비치게 하며 양심이 깨어나는 때에는 죄인 자신의 눈에도 그렇게 비치게 만든다. 따라서 그들은 더 이상 더럽혀지지 않을 것이다. 이는 "그들로 내 백성을 삼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려 함이라" 하나님이 언약을 맺으시는 자들은 먼저 죄의 더럽힘에서 깨끗이 하심을 받아야 한다는 데 유념하자. 그렇게 깨끗케 함을 받은 자들은 파멸에서 구원을 받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모든 특권을 누릴 수도 있게 될 것이다.
백성의 멸망 결정(에스겔 14:12-23)
이 문단은 다음 여러 가지 사실을 나타내는 데 목적이 있다.
Ⅰ. 민족적 죄악은 민족적 심판을 초래한다. 미덕이 파괴되고 무너질 때 그 외의 모든 것도 역시 곧 파괴되고 무너지는 법이다(13절). "가령 어느 나라 (원의:땅)가 내게 범죄할 때, 불의와 사악이 횡행할 때, 어느 나라가 불법함으로 죄악할 때, 죄인의 수가 많아지며 그 죄가 극히 흉악해질 때, 큰 불경건과 부도덕이 도처에 만연할 때는 그에 대한 형벌로 나가 손을 그 위에 펴리라." 하나님의 권능은 활기차게 공공연히 행사될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그 나라 방방곡곡까지 그리고, 그 국가의 모든 이익과 관심사에까지 확장되고 전개될 것이다. 심한 죄악은 심한 재앙을 몰고 온다는 데 주목하자.
Ⅱ.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 쓰라린 심판을 소유하고 계신다. 그는 그런 것들로써 죄많은 나라들을 벌하시며 온갖 심판을 다 자기 마음대로 부리시고 원하시는 대로 내리실 수 있다. 그는 백성을 계수한 다윗에게 어떤 심판으로 벌받으려 하는지 선택하라고 하셨다. 왜냐하면 어느 심판을 택해도 하나님의 목적에는 부합될 것이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의 목적은 다윗이 자랑하던 백성의 수효를 감소시키는 데 있는 때문이다. 그러나 다윗은 사실상 이 문제를 다시 하나님께로 돌렸던 것이다. "우리가 여호와의 손에 빠지기를 원하노라(삼하 24:14). 그로 우리를 징치할 채찍을 스스로 선택하시게 하라."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가 우주적 지배권을 소유하신다는 것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또 우리로 하여금 모든 관심사에서 하나님께 대한 의존의 필요성을 볼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하여 다양한 심판들을 사용하신다. 여기에는 네 가지 쓰라린 심판이 열거되고 있다.
1. 기근(13절). 일상적 자비의 거부와 억제는 그 자체만 해도 더 이상 백성을 괴롭힐 필요가 없을 정도로 충분한 심판이 된다. 하나님께서는 압제의 막대기를 가져 올 필요가 없으시다. 그것은 양식의 막대기(흠정역)를 끊는 데 불과하다. 그래도 그 일은 곧 성취된다. 그는 해마다 땅에서 나는 양식을 끊음으로써 사람과 짐승을 그 나라에서 끊으신다. 우리가 양식을 먹더라도 영양과 힘을 그것에서 얻지 못할 때는 하나님이 양식의 막대를 끊으시는 셈이다. "너희가 먹어도 배부르지 못하리라" (학 1:6).2. 사나운 짐승. 이것은 들에 있거나 아니면 식인성이어서 해독을 끼치는 짐승을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이들로 그 땅을 통행하게 하실 수 있다(15절). 또 그 땅의 모든 지역에 이 짐승들을 우굴우굴하도록 번식시켜 소나 양 따위의 가축을 잡아먹게 할 뿐만 아니라 남녀노소할 것없이 사람도 잡아먹게 하여 그 땅을 황무하게 하신다. 그래서 어떤 사람도 짐승 때문에 통행하지 못하게 하신다. 두 마리 곰에게 벧엘의 아이들이 해를 입었듯이 사자나 다른 맹수를 두려워하여 감히 큰 길로도 여행하려는 자가 없다. 사람들이 하나님께 대한 충성을 버리고 반역할 때 하나님이 동물을 궐기시켜 인간에게 대항하게 하시는 것은 지당하다(레 26:22).
3. 전쟁. 하나님은 때때로 칼, 곧 적군의 칼로써 죄많은 국가를 징계하신다. 그는 칼에게 사명과 명령을 내려 그 할 일을 실시하게 하신다(17절). 그는 "칼아, 이 땅에 통행하라" 고 하신다. 칼이 그 땅의 경계 지방만 들어가도 그 화는 여간 크지 않다. 하물며 칼이 그 나라의 내지를 통행하면 어떻겠는가? 하나님은 칼로써 사람과 짐승 곧 보병과 마병을 다 끊는다. 하나님은 칼의 힘을 빌어 자기 일을 수행하신다. 왜냐하면 칼이 그의 멋이며 또 칼은 그의 지시대로 행하기 때문이다.
4. 온역(19절). 온역은 때때로 한 도시를 휩쓸어버리는 무서운 질병이다. 하나님은 자기 분을 그 위에 쏟으신다. 전염병은 칼에 못지 않게 효과적으로 사람을 잘 죽인다. 그것은 병이란 독으로 사람을 죽인다. 이와 같이 여러 가지 형태의 죽음에 노출되어 있는 인류의 형편은 얼마나 비참한지 살펴 보라.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방법의 싸움을 준비하고 계시므로 한 가지 방법은 피하더라도 또 다른 심판이 기다리는 죄인의 차지는 얼마나 비참한가도 살펴 보라 !
Ⅲ. 하나님의 백성이 배반하고 반역할 때는 복합적 심판이 임하리라는 것을 각오해
야 마땅하다. 하나님이 죄많은 나라와 쟁변하시는 길은 여러 가지다. 그러나 만일 거룩한 도성인 예루살렘에 행음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네 가지 중한 심판을 다 보내실 것이다(21절). 이름과 신앙 고백에서 하나님꽈 가까우면 가까운 자일수록 더욱 더 엄한 셈을 치루게 될 것이다. 자기들이 불리우던 존귀한 이름에 먹칠을 하며 자기 입으로 고백하던 신앙에 거짓말을 보탠다면 그들은 벌을 일곱 배나 더 받을 것이다.
Ⅳ. 죄로 멸망에 합당한 곳으로 성숙된 땅일지라도 소수의 선한 사람들이 있을 수 있으며 또 흔히 있다. 심히 범죄한 땅에도 노아와 다니엘과 욥 같은 세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은 결코 부자연한 생각이 아니다. 다니엘은 그때 살아 있었고 아직 전성기를 맞이하지 않았지만 벌써 유명해져 있었다(적어도 다니엘에 대한 하나님의 이 말씀은 꼭 그를 그렇게 만들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누구보다 먼저 포로로 끌려갔다(단 1:6). 예루살렘에 있던 일부 유복한 무리들은 만일 다니엘이(물론 그들은 바벨론 왕궁에서 떨치는 그의 명성을 많이 들었겠지만) 예루살렘에 남아 있기만 했어도 하나님이 그를 위해 바벨론 술객을 살려 주셨듯 예루살렘도 살려 주실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니다. 옛 세계의 노아나 우스 땅의 욥처럼, 악한 시기와 장소에서 그 선함을 빛낸 다니엘이 너희에게 있을지라도 너희는 형벌의 유예를 얻지 못하리라" 고 말씀하신다. 극히 부패한 장소와 극히 타락한 시대에도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위해 예비하시는 잔존자가 있다. 그들은 자기 순전을 계속해서 굳게 지키며 명예롭게도 그 땅을 건질 자로 지목된다. 무죄한 자는 자기 나라의 구원자가 된다고 한다(욥 22:30 참조).
Ⅴ. 하나님은 극소수의 경건한 자를 위해 매우 악한 곳도 살려 두신다. 이것은 여기에서 하나의 기대로서 암시되고 있다. 즉 환난날에 예루살렘의 친구들은 이렇게 기대한다. "하나님은 틀림없이 우리와의 논쟁을 보류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가운데는 죄로 민족적 불의의 양을 채우는 자들이 있는 반면에 기도로 민족적 불의의 양을 비우는 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기보다 악인을 의인과 함께 살려두려고 하실 것이다. 소돔이 의인 열 사람을 인해 망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면 예루살렘도 그럴 수 있을 것이다."
Ⅵ. 노아나 욥이나 다니엘 같은 자들은 죄많은 백성에게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돌이키는 데 성공할 것이다. 노아는 완전한 사람이었다. 모든 육체가 타락했을 때도 그는 자기 순전을 지켰다. 노아 때문에 그의 가족들은 (함과 같이 악한 자도 있었지만) 방주 안에서 구원을 얻었다. 욥은 경건의 큰 본보기였고 자기 자녀와 친구를 위한 기도의 위력도 대단했다. 그가 기도할 때 하나님은 그의 곤경을 돌이키셨다(욥 42:10). 이들은 위대한 중재자 모세 훨씬 이전의 고대의 귀감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이들을 언급하시는 것은 유대 민족이 형성되기 이전에도 그런 특수한 하늘의 총아들이 있었다는 것을 암시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유대 민족이 파멸하게 되었을 때도 그런 자들이 존재했으면 하고 바라신다는 것을 암시하기 위해서다. 모세나 아론이나 사무엘 대신 이들이 이름이 사용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유독 고대만 치우쳐 중시한다고 생각할 자들이 있을까 하여 후대의 본보기도 여기에 등장시킨다. 그는 생존해 있는 본보기로써 고대의 영광이었던 노아와 욥 사이에 들어가 있다. 그는 포로인 다니엘이었다. 이것은 옛 사람들을 과대 평가함으로써 오늘날의 선한 자들의 유용성을 과소 평가하지 말라는 교훈을 우리에게 주기 위한 것이다. 포로된 이스라엘 자손들은 자기들의 이웃이요 환난의 동무인 다니엘이 노아나 욥 못지 않게 하늘의 총애를 받고 있는 자라는 사실을 알아야 했다. 그는 크게 겸손한 자요, 하나님을 위한 경건과 열심히 특심한 자였으며 항상 기도하며, 즉시 기도하는 자였기 때문이다. 현대라고 해서 하나님이 위대하고 선한 자들을 일으키지 않으시며 그런 자들을 위해 많은 일을 하시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
Ⅶ. 백성의 죄가 절정에 달하고 그들의 멸망을 위해 명령이 발해졌으면 아무리 선한 자의 경건과 기도라도 그 쟁변을 끝맺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것은 재삼 강조되고 있다. "비록 이 세 사람이 지금 예루살렘에 있을지라도 그들은 아들이나 딸도 구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을 인하여 소자들조차 목숨을 건지지 못할 것이다. 이스라엘의 유아는 모세의 기도 대상이었다(민 14:31). 아니다. 그 땅은 황무하게 될 것이다. 비록 모세와 사무엘이 그 앞에 섰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들의 기도를 들으려고 하지 않으실 터였다(렘 15:1). 인내의 남용은 결국 가차없는 진노로 변한다는 데 주목하자. 하나님께서는 다른 어느 곳보다 예루살렘을 더 엄하게 다루시려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인내하심 외에도 그들은 다른 어느 민족보다 큰 특권을 누렸기에 그것이 그들의 죄를 가중시키는 때문이다.
Ⅷ. 기도하는 경건자들이 비록 남을 구하는 데는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자기의 의로 자기의 생명만은 건질 것이다. 그들이 비록 공동의 재난을 당하지만 그들에게는 그 재난의 성질이 변경될 것이다. 그 공동의 재난도 그들에게는 악인이 받는 것돠 다를 것이다. 그 재난도 그들에게는 해를 끼치지 못할 것이고 느슨할 것이다. 그 재난은 성별되어 그들에게 유익을 기칠 것이다. 때때로 그들의 생명(영혼)은 현저히 구원을 받으며 적어도 그들의 영혼(영적 이익)은 안전하게 획득될 것이다. 설령 그들의 몸이 건짐을 받지 못하더라도 영혼은 건짐을 얻게 될 것이다. 진노하시는 날에 재물른 무익하지만(잠 11:4)의는 사망 즉 여기에서 경고되는 것과 같이 크고도 많은 사망에서 건진다. 이것은 공동의 타락시에 자신의 순전을 지키도록 우리를 독려한다. 즉 우리가 순전을 고수하면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받을 것이다.
Ⅸ. 하나님께서 심판으로써 최대의 황폐를 베푸실 때에도 일부 사람들은 자기 자비의 기념물로 보존하실 것이다(22, 23절). 완전히 멸망이 예정된 예루살렘에도 면하는 자가 남아 있을 것이다. 그들은 앞서 언급한 네 가지 중한 벌로써도 멸절당하지 않고 포로로 끌려 갈 것이다. 그것은 곧 새 세대의 씨앗이 될 자녀들이다. 그들의 아비들은 치료 불가능한 자들로 멸절되었다. 그러나 젊은 이들은 그 아비들처럼 완악한 죄악 중에서 자라나지 않았다. 이들은 승리한 적군에 의해 예루살렘 폐허 속에서 끌려 나올 것이다. 그들은 포로중에 있는 너희에게로 나아올 것이다. 그들은 꼭 해야 할 일이라면 기꺼이 행할 것이어서 보다 기꺼이 바벨론으로 갈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많은 친구들이 그들 앞에서 그리로 갔고 거기서 그들을 기꺼이 맞아 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올 때 너희는 그 행동과 소위를 보게 될 것이다. 너희는 그들이 이전에 지은 죄를 자유롭고 순수하게 고백하는 것을 들을 것이며 개혁의 약속과 함께 겸손한 참회의 고백을 듣게 될 것이다. 너희는 그들이 개혁하는 실례들을 보게 될 것이며 고난이 그들에게 얼마나 좋은 영향을 끼쳤는지 보게 될 것이다. 너희는 그들이 고난 아래서 얼마나 사려깊고 참을성 있게 처신하는지를 보게 될 것이다. 가까스로 얻은 모면은 그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로써 그들의 성질과 행동은 변화될 것이며 그들은 새 사람이 될 것이다.
1. 이로써 그들의 형제들은 만독을 얻게 될 것이다. "너희가 그 행동과 소위를 보며 위로를 얻을 것이다." 징계 아래 있는 자들이 회개하며 스스로 낮추며 하나님을 의로우시다 하고 자기 죄에 대한 벌을 감수한다는 것은 흐뭇한 광경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타인의 고난을 인하여 근심할 때(마땅히 그래야 하지만) 우리의 그런 근심 가운데서도 그들이 자기 고난을 활용하고 선용하는 것을 우리가 보게 되면 여간 위로가 되는 게 아니다. 포로들이 그 친구들에게 과거 자기들의 악함과 이런 심판을 내리시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고백했을 때 그 친구들은 매우 편안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예루살렘의 여러 재난과 자기 백성을 이렇게 범하시는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선하심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 것은 전부 다 인자한 의도를 지녔던 것으로 나타났을 것이다. "내가 예루살렘에 내린 재앙 곧 그 내린모든 일에 대하여 너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라. 너희가 그 일을 보다 잘 이해하게 되면 그 일에 대해 이전에 지녔던 그런 끔찍한 염려는 품지 않으면 안 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고난을 통해 유익을 얻는다면 그것을 우리들의 형제에게 알림으로써 그들을 위로하는 것은 우리가 그 형제들에게 갚아야 할 빚이다.2. 그것은 하나님의 명예에 기여할 것이다. "너희는 내가 예루살렘에서 행한 모든 일이 무고히 한 것이 아닌 줄을 알리라. 그것은 정당한 도발이 없이 한 일이 아니며 은혜로운 의도가 없이 한 일이 아니다." 고난이 제 할 일을 마치며 보냄받은 그 일을 성취할 때는 그 고난을 보내신 하나님의 지혜와 인자가 나타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로 의롭다고 칭송을 받으실 뿐만 아니라 영화도 받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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