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애가 0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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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황량해진 예루살렘 (예레미야 애가 4:1-12)

이 장에서의 애가는 하나님의 심판이 예루살렘에 행하여짐으로 인한 심한 슬픔과 슬픈 변화에 대한 애가로 시작한다. 이전에는 "금과 같고 정금과 같았던" 그렇게 부하고 화려하던 성읍, 완전한 아름다움과 온 땅의 기쁨이었던 그 성읍이 흐려지고, 변화되고, 광택을 잃고, 가치를 잃어버리고 지금은 옛 성읍이 아니다. 이제는 부스러기가 되었다. 아! 얼마나 큰 변화가 여기에 있는가!

Ⅰ. 성전이 황폐하여졌다.

성전은 예루살렘의 영광이요, 보호자이었다. 그것이 적의 손 안에 버려졌다. 어떤 이들는 1절에서 말하고 있는 이 금은 "성전의 금이고" 정금은 금으로 입혀진 것으로(왕상 6:22)이해한다.

성전이 불탔을 때 금은 마치 가치가 거의 없는 것처럼 연기에 그을리고 더럽혀졌다. 그것은 쓰레기 속에 버려졌다.

그것은 "변하였다." 그것은 일반적인 용도로 바뀌어지고, 그것으로는 아무 것도 만들지 않았다. 기묘하게 새겨진 성소의 돌들은 갈대아 사람들이 그것을 부숴버릴 때 내던져지고, 또는 불의 세력으로 내려지고 쏟아져 나와 "모든 길거리에 버려졌다." 그것들은 구별됨 없이 다른 것들과 같이 파괴되었다. 성소의 하나님이 죄로 말미암아 철수하시도록 자극을 받으셨을 때 성소의 돌들이 이렇게 모욕을 당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Ⅱ. 특별히 시온의 아들들이라고 하는 왕들과 제사장들이 유린당하고 학대를 받았다. 그 하나님의 집과 다윗의 집은 둘 다 시온에 있었다. 이 두 집의 자손들은 존귀한 자들로 여겨졌다. 그들은 제사직과 왕직의 두 계약의 특전을 받은 상속자들이었다. 그들은 "정금에 비교되어졌다." 이스라엘은 금과 은의 창고가 있어서 보다도 그들이 있어서 더 부요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그들이 "질항아리같이 여김이 되었다." 그들은 질그릇같이 깨어지고, 그 안에 기쁜 것이 없는 그릇과 같이 내던져졌다. 그들은 가난하게 되고 포로로 잡혀가, 거기서 천하고 비열하게 되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그들을 짓밟고 모독하였다. 하나님의 백성들 위에 놓여진 모욕은 우리들에게 애가의 사건이 되어야 한다는 것에 유의하자.

Ⅲ. 어린아이들은 떡(빵)과 물이 없어서 굶주렸다(3,4절). 자식을 기르는 어머니들은 그들이 먹을 식물과 그 품에 있는 자식들에게 먹일 우유가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식물을 충당하는 데 있어 진실로 동정심이 많기도 했지만 그래도 실에 있어서는 알을 땅에 버려두는 광야에 있는 타조와 같이 잔인한 것처럼 보인다(욥 39:14, 15). 자식들에게 먹일 식물이 없어서 그들은 할 수 없이 자식들을 방지하게 되고, 그들을 잊어버릴 수 있는 짓을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어린 것들에게 아무 것도 먹일 것이 없을 때 그 자식들을 생각하는 것이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들은 물개나 들개나 고래보다도 더 나쁘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젖을 꺼내어 그 새끼들에게 빨게 하였으나, 내 백성의 딸들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어린 것들은 어른들처럼 자리를 이동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젖먹이 아이가 목이 말라서 혀가 입 천정에 달라붙는 것을 보는 것은" 더욱 고통스러운 일이다. 목을 축일 한 방울의 물도 없었기 때문이다. 어린 자식들이 그들의 부모에게 빵을 달라는 말만 하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부모가 그들에게 줄 것이 아무 것도 없었고 어느 친구도 그들에게 먹을 것을 줄 수가 없었다. 이 경우에 우리의 마음은 슬퍼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즐길 많은 것들과, 우리와 우리 자녀들을 위하여 가진 풍부한 식물과 우리가 소유한 집들로 인하여 감사해야 할 것이다.

Ⅳ. 좋은 계층에 있는 사람들도 극단적인 궁핍에 빠졌다. 그들은 좋은 가문에서 출생했고, 호화롭게 자랐고, 음식과 의복에 있어 가장 좋은 것에 익숙하였다. 그들은 진수를 먹고, 진기하고 좋은 모든 것을 가졌다.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서만 잘 먹는 반면에 그들은 그것을 잘 먹는 것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매일 호화롭게 열락" 하였다. 그들은 다만 붉은 빛을 추구하여 갔을 뿐만 아니라, 처음부터 붉은 빛 속에서 길리워지고, 결코 천하거나 일반적인 것과는 친숙하지 않았다. 그들은 붉은 빛 위에서 양육받았다(그 [말이 뜻하듯이). 그들의 말의 깔개와 그들이 걷는 양탄자가 붉은 빛이었다. 그러나 전쟁으로 인하여 이 모든 것이 벗겨지고 길 거리의 외로운 자가 되었다. 그들의 머리를 들이밀 집을 가지지 못하고 누울 침대도 없으며, 그들을 감쌀 옷도 없고, 따뜻하게 할 불도 없다. 그들은 "거름더미를 안고" 약간의 휴식을 얻기 위하여 그 위에 누우므로 즐거웠다. 아마도 어떤 사람들은 먹을 것을 찾아서 거름더미를 뒤졌을 것이다. 집 나간 탕자가 배가 고파서 찌꺼기로 배를 채웠듯이...... . 가장 화려하고 부요하게 사는 사람들은 그들이 곧바로 죽음 앞에까지 떨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모른다는 사실에 주의하자. 때로 "가난한 자가 진토에서 일으켜지는 것같이" (시 113:7) 또한 부자가 쓰레기더미로 떨어지는 실례도 있는 것이다.

유족한 자들이 양식을 위해서 품을 팔고(삼상 2:5)...... . 그러므로 부요한 사람들의 지혜는 너무 호화롭게 지내지 아니하는 데 있다. 곤경이 올 때 그들은 갑절로 곤경을 겪을 것이기 때문이다(신 28:26).

Ⅴ. 위엄에 뛰어난 사람들, 아니 아마도 뛰어나게 고결한 사람들도 일반적인 재앙을 다 른 사람들과 다같이 겪는다(7,8절). 그 존귀한 자들의 몸이 심히 변화되었다. 어떤 사람 들은 존귀한 사람들을 다만 젊은 신사인 명예로운 사람이라고 이해한다. 그들은 매우 깨끗하고, 산뜻하고, 옷을 단정히 입고, 몸을 씻고, 향료를 발랐다. 그러나 나는 그 존귀한 자들이란 바로 나실인의 서약을 하여 "주께 그 몸을 구별하여 드린 사람들" 중의 경건한 사람들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좋다고 본다(민 6:2). 가장 타락한 시기에 그들 중에 있는 이러한 사람들이 있었던 것은 아모스 2장 11절에서부터 나타난다. "내가 너희 청년들 나실인을 일으켰나니," 이 나실인은 비록 그들의 머리는 자르게 되어 있지 않았다 할지라도 식사를 삼가서 하고 자주 몸을 씻으며 특히 하나님께 자신을 바치고 하나님과 더불어 대화를 가지는 즐거움으로 인하여 모세와 같이 그들의 얼굴이 빛났으므로 그들의 몸이 "눈보다 깨끗하고," 우유보다 희였던 것이다. 포도주와 독주는 마시지 아니하였지만, 다니엘과 그 친구들이 채식과 물만 먹은 것같이, 매일 포도주로 열락하는 사람들보다도 더 건강한 안색과 밝은 표정을 가졌다. 그것은 모든 선한 사람들이 그들에게 대단한 존경과 숭앙을 가지게 하였던 것일 수도 있다. 아마도 눈으로 보기에는 그들이 모양을 내거나, 미모를 가지지 않았을지라도 주를 향하여 자신을 구별한 것은 마치 그들이 "산호보다 붉고 마광한 청옥과 같이 가치가 있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얼굴이 상하였고(그리스도에게 대하여 말하여지듯이, 사 52:14) 숯보다 검은 것이다. 그들은 한편 굶주리고, 또 한편 슬픔과 당혹으로 인하여 비참하게 보였다. 그들은 거리에서 알 사람이 없어지게 되었다. 그들을 존경하던 사람들은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지 아니하고 그들을 친하게 알던 사람들도 이제 거의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의 모습은 오랜 포위로 말미암아 그렇게 비참하게 변하였다. 그 가죽이 뼈에 달라 붙고, 그의 살이 여위고 소모되었다. "그 가죽이 마르고, 막대같이 되었고" 나무 조각같이 마르고 딱딱하여졌다. 하나님께 구별하여 드린 사람들이 아직 있다 할지라도 황폐한 심판이 확대될 일반적 재앙 속에 다른 사람들까지도 포함된다는 것이 대단히 슬퍼할 일이라는 것을 주의하자.

Ⅵ. 예루살렘은 서서히 함락되고, 오래 끌면서 죽었다. 기근은 어떤 다른 심판에서 보다도 더욱 그의 파멸을 가중시켰다. 이런 이유로 예루살렘의 파멸은 "소돔의 파멸보다 더 하였다." 소돔은 순식간에 엎드러졌다. 불의 소나기와 유황이 소돔을 급히 처치하였다. 지도자가 인도하는 것이 그에게는 없었다. 소돔은 예루살렘과 같이 오랜 포위를 당하는 일도 없었다. 그는 집을 때리는 주의 손으로 즉각 멸망하고 심판을 행하기에 오랫동안 걸리는 약한 존재인 사람에게 망하지 아니하였다(사 8:21). 예루살렘은 고통과 비참한 속에서 여러 달 동안을 지속하였다. 그리고 조금씩 그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느끼면서 죽어갔다. 예루살렘의 죄악이 소돔의 죄보다 더 하나님을 노하게 하였을 때 그 형벌이 그와 같았다고 하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소돔은 하나님의 말씀이나 그 예언자 같은 예루살렘이 가진 은총을 갖지 않았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의 심판은 소돔의 심판보다 더 무자비하였을 것이다. 극심한 기근은(마 11:23, 24) 여기서 두 가지 소름끼치는 실례를 보여 준다.

1. 9절의 원인이 된 지루한 죽음. 많은 사람들이 굶주려 죽어갔다. 개인집의 창고가 비어 버리고, 공공의 창고가 거의 바닥이 났기 때문에 그들은 구제를 받을 수 없었다. 그들은 "토지 소산이 끊어짐으로 칼에 찔리웠다." 굶주려 죽어가는 이들은 마치 그들이 칼에 찔리고 꿰뚫어지는 것같이 죽은 것은 확실하였다. 다만 그들의 경우는 더 비참한 것뿐이다. 칼날에 죽은 자는 "그들이 음부로 내려가는 순간에" 그들의 고통으로부터 곧 해방된다(욥 21:13). 그들은 죽음이 그들 앞에 오는 것을 보는 공포를 갖지 아니하며, 타격이 주어졌을 때는 그것을 거의 느끼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날카로운 투쟁이다. 그리고 그 일은 끝난다. 만일 우리에게 또 다른 세상이 준비된다면 우리는 그리로 가는 이 짧은 과정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빠르면 빠를수록 더욱 좋다. 그러나 기근으로 죽는 사람들은 쇠약해져 가고 굶주림은 그들의 정신을 초조하게 하고 괴로움으로 그들을 채운다. 그들은 연대적으로 죽었다(시 73:4).

2. 10절에 있는 야만적인 살인자들. "자비한 부녀가 손으로" 먼저 살인을 하고 그 후에 자기 자식들을 삶았다. 이것은 앞에서 애도되었다(2:20). 사람이 자식을 삶아 먹을 만큼 그렇게 악하게 되어지는 것과, 그러한 것에 유혹될 만큼 극단적 상황이 된다는 것은 크게 애도되어질 일이다. 그러나 오랜 포위로 말미암은 이 무서운 결과는 일반적으로 경고되어졌던 것이다(레 26:29; 신 28:53). 특히 예루살렘이 갈대아의 포로가 되는데 대해서(렘 19:9; 겔 5:10) 그들이 그 자녀들에게 먹일 것을 갖지 못하였다는 것과 그들을 위하여 식물을 만들 수 없었다는 것은 충분히 슬픈 일이지만, 그들 마음속에 그 자녀들이 먹을 것으로 보이고, 그들을 식물로 삼았다는 것은 더욱 나쁜 일이다. 나는 그것이 궁핍의 힘이 그 같은 사건을 만들어 내는 것인지, 또는 죄악의 힘이 그 같은 사건을 만들어 내는 것인지를 알지 못한다. 하지만 이방의 우상 숭배자들이 "자신들을 더러움에 내어 버려둔 것같이" (롬 1:26) 이 유대인 우상 숭배자들과 특히 그 여자들, "하늘의 여신에게 과자를 만들어 드리고" 그 자녀들에게도 그렇게 하는 것을 가르치던 유대 여자들은 "본성적인 사랑을 벗어버리고" 그 자녀들에게 그같이 행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그 자신들의 "본성을 부끄러운 데에 내버려 두었기"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에게 향한 수치스러운 일로 인하여 그들 위에 공의로운 심판이 내리는 것이다.

Ⅶ. 예루살렘은 철저히 그리고 놀라웁게 함락되었다.

1. 예루살렘의 파멸은 완전한 파멸이었다(11절). "주께서 분을 발하시며." 그는 철저하게 그의 일을 하셨다. 그가 예루살렘에 대하여 노하여서 목적한 모든 일을 실행하셨다. 그는 심판의 한 부분도 남겨두지 않으셨다. 그는 진노로 가득한 병을 밑바닥에다가 병의 찌꺼기까지 쏟아 부으셨다. 그는 "시온에" 불을 "붙여서" 집들을 사르고, 땅으로 평평히 만들어 버릴 뿐 아니라, 마치 그 위에는 더 이상 집을 짓지 아니하게 되는 것처럼 다른 화재가 불태우는 것 이상으로 "지대를" 살라 버렸다.

2. 그것은 놀라운 파멸이었다(12절). 그것은 세상의 왕들에게 놀라운 일이었다. 그 왕들은 예루살렘을 알고 있거나 또는 알고 싶어하는 이웃 나라의 왕들이었다. 아니 예루살렘은 알고 있거나 듣고 있었던, 또는 예루살렘에 대하여 읽고 있었던 세상에 사는 천하 모든 백성들에게도 놀라운 일이었다. 그들의 적과 "원수들이 예루살렘" 에 사는 것은 "천하 모든 백성들" 에게도 놀라운 일이었다. "성문으로 들어갈 것을 믿을 수 없었다." 그 이유는,

(1) 그들은 예루살렘의 성벽과 성채뿐만 아니라 그 국민의 많은 인구와 힘에 의해서 강하게 요새화되어 있었던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견고한 시온성은 난공불락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2) 그들은 예루살렘을 온 땅의 주가 그 거민들을 독특한 방법으로 소유하고 있는 "크신 왕의 성읍인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거룩한 성읍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어떠한 적들이 예루살렘을 공격하여도 그 공격을 헛되게 할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는 성읍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3) 그들은 예루살렘에 가한 많은 공격이 좌절된 것을 알고 있었다. 산헤립의 실패도 그 증거다. 그러므로 그들은 갈대아 사람들이 예루살렘의 주인이 되었다는 것을 들었을 때 놀랐던 것이다. 그리고 예루살렘이 그들에게 주어진 것은 확실히 하나님의 직접적인 섭리에 의해서 된 것이라고 추리하였던 것이다. 적이 예루살렘의 문을 깨뜨리고 들어간 것은 하나님의 위탁에 의한 것이었다.

 

4:2 없음.

 

4:3 없음.

 

4:4 없음.

 

4:5 없음.

 

4:6 없음.

 

4:7 없음.

 

4:8 없음.

 

4:9 없음.

 

4:10 없음.

 

4:11 없음.

 

4:12 없음.

 

4:13

예루살렘의 파괴 (예레미야 애가 4:13-20)

우리는 여기서 아래 내용을 가진다.

Ⅰ. 하나님이 그들 위에 이 파멸을 가져오게 하고, 그럼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정당화하게 한 그들이 책임진 죄(13,14절). 그것은 "예언자들의 죄와 제사장들의 죄" 때문이다. 백성들도 죄가 없지 않다. 아니다. 그들은 "그것을 좋게 여겼다" (렘 5:31). 그들이 행한 것같이 예언자와 제사장들이 행한 것을 그들이 즐거워한 것이다. 그러나, 그 잘못은 예언자와 제사장들에게 있는 것이다. 그들은 백성들을 더 잘 가르쳤어야만 했고, 꾸짖고 훈계하여야만 했고, 그리고 결국에 올 것을 그들에게 말했어야 했던 것이다. 그들에게 경고하지 않았던 이 파수꾼들의 손에서부터 그들의 피가 요구되어질 것이다. 백성들은 제사장과 예언자들에 비하여 파멸하도록 더 죄에 원숙하지 않았고 더 빨리 그 분량을 채우지도 않았다. 그들에게 책임지워진 특별한 죄는 거짓 예언자와 부패한 제사장들이 그들의 힘을 연결하고 그 가운데(유다) 있는 의인들의 피를 흘리는 것에 합심한 것이다. 그들은 몰록에게 희생을 드리기 위하여 죄 없는 아이들의 피를 흘릴 뿐만 아니라 진리와 참된 종교에게 증오의 대상이 되는 더 잔인한 우상에게 희생을 드리기 위하여 그들 중에 있는 의로운 사람의 피를 흘렸다. 이것은 여호와가 용서하지 않는 죄이다(왕하 24:4). 그리고, 그것은 최후의 파멸을 예루살렘에 가지고 온 죄이다(약 5:6). "너희가 의로운 자를 저주하고 죽였도다." 마치 그리스도 시대에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대하여 백성들을 격앙시키던 사람들이었던 것같이 제사장과 예언자들은 박해의 주모자이었다. 그들은 다른 방법으로 찬송하기를 주장하였다. 이들은 "거리에서 소경과 같이 방황하는 사람들이다" (14절). 정의의 좁은 길에서 빗나간 그들은 선한 모든 것에 대해서는 소경이고 음행하는 데에는 빨리 보여지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부패한 재판장들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그들은 알지 못하고 "그들이 아는 것을 행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어둠 속에서 행하고 있다" (시 82:5). 그리스도는 부패한 교사들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그들은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요" (마 15:14), 그들은 "성도의 순결한 피로써 그 자신들을 더럽혔으므로 사람들은 그들의 옷을 만질수 없었다." 그들은 모든 사람들이 그들에 대해서 싫어하도록 스스로를 만들었기 때문에, 선한 사람들이 죽은 시체를 만지기 싫어하듯 또는 부드러운 사람이 돌아보지 아니하는 죽은자의 피묻은 옷을 만지기를 싫어하는 것같이 그들에게 접촉하는 것을 싫어하였다. 예언자와 제사장들이 미움을 받게 만드는 것은 박해하는 영혼들조차도 쉬운 일이 아니다.

Ⅱ. 그들의 이웃의 증언은 그들의 죄를 입증하기 위하여, 또한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행하심이 정당함을 보이기 위하는 두 가지에 있어서 증거를 제시한다. 죄에 있어서 대단히 뻔뻔스럽게 된 어떤 사람들은 사람들이 자기들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에 대하여 주의하지 않는 것을 자랑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언자를 통하여 유대인들은 사람들이 그들에 대하여 말하는 것과, 이웃이 그들에 대하여 말하는 것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을 가르쳤다(15,16절). 그들이 말하는 것은 무엇인가? 아니 사람들이 그들에 대하여 외쳐 이르는 것은 무엇인가? 특히 이방인 중에서 부패한 제사장과 예언자들에 대하여 부르짖는 것은 무엇인가?

1. 그들은 실직적인 불의한 방식 속에 살면서 순결을 가장하는 것을 책망하였다. 그들은(이웃) 그들에게 외치기를 "가라, 부정하다." 그들은 그렇게 엄밀하기 때문에 이방인을 접촉하지 않으면서 이르기를 "떨어져라. 너는 네 자리에 섰고, 내게 가까이 하지 말라. 나는 너보다 거룩하니라" 했다. 그리스도를 송사하는 자들은 자신들이 더럽혀지지 아니하도록 재판정에 들어가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너는 하나님이 너를 그들의 손에 넘겨 주실 때 이방인이 너를 접촉하지 못하도록 할 수 있느냐? 네가 도망하여 방황할 때도 너는 그들에게 따로 서 있고, 너를 만지지 말라고 명할 것이다. 왜냐하면 너는 깨끗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헛된 일이다." 이 뱀들은 매혹되지 아니할 것이고, 황홀하여지지도 않을 것이다. 아니다. 그들은 "제사장들의 인격을 존중하지도 아니할 것이고," "장로들을 좋아하지도 아니할 것이다." 가장 훌륭한 사람이라도 그들에게는 비열한 사람일 것이다.

2. 그들(이웃)은 제사장과 예언자들의 죄를 꾸짖는다. 그리고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에게 향한 것과 진노로 인한 무서운 결과에 대하여 말한다. 그들은(이웃) 그들에게(거짓 예언자, 제사장) 부르짖기를 "가라 부정하다고 한다." 모두 거짓 제사장과 예언자들의 수치를 부르짖고, 하나님을 화나시게 하는 백성이 그 좋은 땅에서 계속 거주하는 것을 하나님은 본래 견디지 못하게 되실 것을 쉽게 예견할 수 있었다. 그들은 저들의 "법령과 재판은 의로왔다" 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저들이 "지혜와 지식있는 백성이기를 기대하였다" (신 4:6). 그러나 그들이 저들의 전혀 다른 면을 보았을 때 "가라, 가라고 했다." 그들은 곧 그 땅이 저들의 조상에게 하였던 것같이 저들을 토해낼 운명을 보았다. 그들이 "도망하고 방황하는" 야곱의 흩으심을 보았을 때 저들에게 그것을 말하였다. 그들은 말하기를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을 나누고" 모든 나라에 "흩으셨다" 했다. 그들이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나 예레미야나 기타 다른 이들과 같은 그들 가운데 있는 경건한 "제사장들을 높이지 아니하였고, 장로들도 대접" 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도리어 저들이 자기들의 타락한 행실을 저지하기 위하여 돌아 다녔을 때 저들의 그 권위를 멸시하였다. 바로 이방인은 이것이 그들을 파멸시킬 것을 보았던 것이다.

3. 그들(이방인)은 회복할 수 없을 만큼 파괴함에 있어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들은 저들이 자기들의 땅에서 추방됨을 보았을 때 "저희가 다시 거기 거하지 못하리라고 했다." 그들은 마지막 작별을 고하였으니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다시 그들을 권고치 아니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들 자신이 회복할 수 있겠는가? 여기에서 그들은 오해된 것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저들이 자기 하나님을 격노케 한 때문에 그들은 아주 버림을 당한 것 외 다른 어떤 것도 기대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할 만큼 그들은 대단히 깊이 관찰하였다.

Ⅲ. 그들 자신이 재앙 아래 있도록 된 자포자기. 그들이 이방인 중에서 그들에 관하여 말할 것을 들었으니, 이제는 그들 자신이 자기들에 대하여 하는 말을 들어 보라(17절). "우리가 어떤 의미로는 도움이 없을 것들을 바라보았다. 우리의 끝이 가깝고(18절), 교회와 국가들의 끝, 우리는 이 둘의 파멸의 바로 끝에 있다. 아니 우리의 끝은 왔다. 우리는 철저하게 파멸된다. 운명적인 최후의 시기가 우리의 모든 위로를 난처하게 한다. 우리의 번영의 날은 가득히 채워졌다. 그들은 도가 차고 완성되어졌다." 이렇게 그들의 공포는 주께서 다시 저들을 권고치 아니하시리라는 적들의 희망과 일치된다. 왜냐하면,

1. 낙담한 자들에게로 달아난 피난. 그들은 이 나라 저 나라 강한 동맹국들에게 도움을 구하였다. 그러나 목적을 이루지 못하였다. 헛된 것이 입증되었다. 그들이 기다렸던 원군은 들어오지 않았으며, 적어도 그들이 기대하였던 결과를 얻지 못하였다. 그들의 눈은 결코 오지 아니하는 자들을 바라봄으로 쇠약하였다. (17절) "그들은 바라보고 바라보았다." 그들은 큰 열심과 인내를 가지고 그들을 돕기로 약속한 나라를 간절히 바라보았다. 그러나 실패하고 그들의 기대는 꺾어지고 말았다. 그들은 이들을 "구원치 못한 나라" 였다. 그들은 갈대아군과 싸우기에는 너무나 약하였으므로 물러가고 말았다. 피조물에게 도움을 구하는 것은 헛된 일이다(시 60:11). 그러나 우리는 눈이 상하기까지 우리의 마음이 상하기까지 그것을 바라볼지도 모른다. 그러나 드디어 목적에 도달하지 못하고 만다.

2. 그들은 박해자들에게로 도망갔고 결국엔 그들에게 붙잡혔다(18절). "그들이 우리의 자취를 엿보니 우리가 거리에 행할 수 없도다." 갈대아군이 그 성읍을 포위하였을 때 그들은 성을 도망할 수 없을 만큼 성벽이 높았기 때문에 거리에 다니는 사람에게 포를 쏘았다. 또한 그들은 화살로 이 곳 저곳에서 이스라엘을 추적하였다. 성이 함락되고 모든 사람이 도망갈 때 그들의 박해자들은 하늘의 독수리가 먹이를 보고 날 때보다도 더 빨랐다(19절). 도망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들은 산 꼭대기에서도 쫓았다. 완전히 피했다고 생각될 때 그들은 퇴각을 차단하고 붙들기 위하여 광야에 매복한 자들에게 붙잡혔다. 왕 자신도 위급할 때에 도피할 수 있는 모든 편의를 가지고 있었지만 도망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보복이 백성과 함께 그를 추적하기 때문이다(20절). 그리고 "우리의 콧김, 곧 여호와의 기름 부으신 자가 저희 함정에 빠졌다." 어떤 이들은 이 사람은 전쟁에서 애굽왕에게 죽은 요시야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다윗집의 마지막 왕이요, 갈대아 군에게 추적을 당하다가 여리고 평야에서 포로가 된 시드기야로 생각된다(렘 39:5). 그는 주께로부터 기름부음을 받고 통치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임명하신 그 족속의 후계자이었다. 유대 백성은 그를 대단히 신뢰하였다.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가 저의 그늘 아래서 열국 중에 살던 자로다 하던 자이다." 여고냐가 포로된 이후의 남은 자들은 시드기야가 정부의 보호 밑에서 다시 뿌리박고, 열매를 맺으리라고 약속을 하였다. 그들은 생각하기를 자기들이 그와 같이 쇠약해졌기 때문에 이방인을 통치할 생각은 할 수 없다 할지라도 그들 중에서 살기 위하여 모욕을 당하지 아니하고 이방인들로 말미암아 갈기갈기 찢어지지는 않기 위하여 계락을 쓸 수가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모든 작은 희망을 붙잡으려는 관심뿐 아니라 그 희망이 그들을 회복시킬 것이라고 생각하는 관심들이 없어지는 경향이 있었다. 예루살렘은 사회 불안에 기생하는 소비병으로 죽어갔다. 그가 금방에라도 멸망할 것 같은때까지도 희망적인 징조의 모습을 만들고 그 위에 그가 회복될 것이라는 희망을 두었던 것이다. 그러나 무엇이 왔는가? "하루 밤에 시들어버린" 요나의 박넝쿨과 같이 되어져 버렸다. "여호와의 기름 부으신 자가 함정에 빠졌다." 마치 그가 전리품으로 먹혀지는 짐승일 뿐이었던 것같이 되었다. 하나님께 바쳐진 거룩한 존재이므로 범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되던 자를 그들은 그렇게 하찮게 여겼다. 우리가 어느 피조물을 우리의 콧김으로 하고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살 약속을 하였을 때 그 호흡을 정지시키고, 그것에게 기대하였을 때 우리에게서의 생명을 빼앗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었다는 것을 주의하자.

 

4:14 없음.

 

4:15 없음.

 

4:16 없음.

 

4:17 없음.

 

4:18 없음.

 

4:19 없음.

 

4:20 없음.

 

4:21

시온의 위로 (예레미야 애가 4:21,22)

다윗의 애가 시(詩)는 일반적으로 어떤 위로의 말들로 결론을 맺는다. 그것은 죽엄에서 생명, 어둠에서 빛이 비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 장에서의 애가도 그렇다. 하나님의 백성은 지금 큰 재난속에 있다. 그들의 모든 양상이 슬프고, 그들의 전망이 모두 지독히 무섭다. 그들의 악한 이웃인 에돔족은 그들에게 대하여 모욕을 가하고, 그들의 파괴자들로 하여금 그들에게 노하게 하기 위하여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한다. 그들의 형제 야곱에 대하여 그들의 난폭함이 그러하였을 때 것같이(욥 1:10) 예루살렘에 대한 그들의 심술이 이러하였다. 그들은 "훼파하라, 훼파하라(시 137:7)고 외쳤다. 이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용기를 붇돋우기 위한 예언이 여기에 있다.

Ⅰ. 시온의 형벌의 끝이 올 것이다(22절). 오! 시온의 딸아, "네 죄악의 형벌이 다 하였다." 받아야 할 형벌의 채워짐을 말함이 아니고, 하나님의 형벌을 파괴하기 위하여 설계하시고 결심하신 것이 채워진 것을 말함이다. 하나님의 정의를 영화롭게 하고 그들의 죄를 제거하는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다. 그 복역의 때가 끝났고, 죄악이 사함을 입었느니라(사 40:2). "그는 너를 포로로 더 오래 두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다음과 같이도 읽혀질 수도 있다. 그는 더 이상 너를 포로가 되게 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너의 포로를 돌이킬 것이며, 너를 영광스럽게 해방할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의 형벌을 그들에 보내어진 목적의 일을 다 성취할 때까지만 계속되는 것임을 주의하자.

Ⅱ. 에돔의 승리에 종말이 올 것이다. 그것을 반어적으로(비꼬아서) 말하고 있다(21절). "처녀 에돔아, 즐거워하며 기뻐하려므나." "고통 속에 있는 시온에 대하여 모욕을 계속하라. 너의 죄악의 분량을 채우기까지 그렇게 하라. 네 이웃의 공통된 운명으로부터 네가 지금 머무르게 되어 있는 것을 기뻐하라." 이것은 솔로몬이 방종한 쾌락을 즐기는 청년에 대한 책망과 같다.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라." 하나님이 너와 계산하러 오실 때에 할 수 있으면 즐거워하라. 하나님이 멀지 않아 너와 계산하실 것이다. 이제 예루살렘이 깊이 마시고 있는 떨리는 잔이 네게로 돌아갈 것이다. 그것은 금주하겠다는 맹세가 너의 몫이 될 때까지 돌고 돌 것이다. 이것은 비참한 가운데 있는 어떠한 사람에 대해서도 경멸하지 말아야 할 좋은 이유이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도 몸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그들의 경우가 언제 곧 우리의 것이 될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교회가 재난 가운데 있는 것을 보고 즐거워하는 자들은 그런 재난들의 도구가 된 자들과 더불어 재난의 후원자들로서 그리고 교사자들로서 파멸될 것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에돔의 파멸은 이 예언자가 예언하였다(렘 1:7). 하나님의 백성은 그런 전망을 가지고, 현재의 무례하고 오만한 저들에 대하여 자신들을 고무하여야 할 것이다.

1. 그것은 치욕적인 파멸인 것이다. 네가 마실 "잔이 네게 이를지니 네가 취하리라." 아주 얼이 빠지면 어찌할 바를 몰라서 너의 모든 계획이 흔들리고 너의 모든 기업이 넘어지고, 그 다음에는 노아가 취하였을 때 같이 "네가 벌거벗으리라." 그리고 모욕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을 비웃는 자들은 반드시 그들 자신이 그것을 당하게 되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언젠가는 비웃음을 받게 될 것이다.

2. 그것은 정의로운 파멸일 것이다. 하나님은 너의 죄악을 방문하며, 너의 죄를 찾으실 것이다. 그는 그 죄들을 벌하실 것이다. 거기에서 그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죄들을 발견하실 것이며 들어나게 하실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 대하여 이와 같이 행하시는데 대한 정당한 이유를 가지시게 되는 것이다. 죄에 대한 형벌이 정확하게 그 목적에 부응할 것이므로, 그 사실이 백일하에 드러나리라. 때때로 하나님은 죄악을 그렇게 심판하시기 때문에 달리는 자도 그 형벌 속에서 죄상을 발견할 것이다. 조만간 죄는 징벌되고, 발견된다. 어둠 속에 숨긴 모든 일이 드러나는 것이다.

 

4:22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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