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여 기억하소서 (예레미야 애가 5:1-16)
어느 "누구가 괴로움을 받고 있는가? 그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라." 그로 하여금 하나님께 그의 하소연을 쏟아 놓게 하라. 그리하여 그의 고민이 하나님 앞에 알려지게 하라. 하나님의 백성이 여기에서 그같이 하고 있다. 슬픔이 압도하기 때문에 은혜로운 보좌의 발판에 그들의 슬픔을 터뜨린다. 그리고는 평안하여진다. 그들은 악을 두려워해서가 아니라, 악을 느꼈기 때문에 한탄하는 것이다. "우리가 당한 일을 기억하소서(1절). 과거에 우리를 위협하던 것, 그리고 오래도록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 이제는 우리 앞에 당하였습니다."
" 우리는 그 아래서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것 같습니다. 과거를 기억하시고, 현재를 감찰하소서. 우리가 당한 환난을 적게 여기지 마시고, 주목할 가치가 적은 것으로 여기지 마소서" (느 9:32). 사실은 우리의 고난 중에서도 그것이 충분한 것이 될 수 있는 큰 위로는 하나님이 보시고 권고하시고, 우리가 당한 모든 것을 기억해 주시는 것이다. 우리는 기도 가운데서 우리의 문제들을 하나님의 의로우시고 자비로우신 권고하심에 맡길 필요가 있다.
그들의 모든 불평 속에 있는 한 말은 수욕(치욕)이라는 말이다. "우리의 수욕을 감찰하소서." 그들이 당한 환난은 그들의 지난날의 위엄과 부요에 비교하면 그들이 다른 백성들에게 끼쳤던 것보다도 더 큰 수욕이었다. 특별히 하나님과의 관계와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의지를 생각하면, 그리고 전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셨던 것을 생각하면 이것은 대단히 수긍이 가는 불평이다. 왜냐하면 이 수욕은 그의 백성을 위하여 그 수욕을 사용하셨던 하나님의 이름과 명예를 손상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의 크신 이름을 위하여 당신은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Ⅰ. 그들은 그들이 범한 죄의 치욕을 인정한다. 그들의 어렸을 때의 치욕, 즉 민족 초기의 치욕(이것은 에브라임이 자신을 한탄한 말이다. 렘 31:19), 이것이 그들의 불평의 한가운데 들어온다(7절). "우리의 열조는 범죄하고 없어졌고" 그들은 죽어 없어졌다. 그러나 "우리는 그 죄악을 담당하였나이다." 이것은 말씀과 같이 역정내는 불평도 아니고 하나님께 대한 불의한 비난도 아니었다(렘 31:29; 겔 18:2). "아비가 신 포도를 먹으므로 아들의 이가 시다." 그러므로 주의 길은 같지 아니하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죄에 대한 참회하는 고백이다. 그들의 조상 또한 죄 중에서 멸망하였고, 그 때문에 지금 바로 그들은 고난을 당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내린 심판이 너무나 컷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 자신의 죄와 함께 그들 조상들의 죄를 현재의 그들 속에서 본다고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조상들은 이 세상에서 두드러진 벌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나님은 그들 조상들에게는 죄를 묵인하시고(그는 조상들의 죄를 자손들에게 짊어지우셨다), 그 죄를 자손들에게 추적하여 자손들에게는 가혹함으로 정의를 채우셨다(마 23:35, 36). 여기에서 그들은 다음과 같이 한다.
1. 하나님의 정의에 그들 자신들을 복종시킨다. "주여! 당신은 우리에게 내리신 모든 것에서 의로우십시다. 우리는 행악하는 자의 종자요, 진노의 자식이며, 저주받은 자의 후예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죄가 많으며 그것을 좋아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벌로써 되돌아보신 죄를 우리는 회개로써 돌이켜 보아야 하고, 우리를 바로 잡기 위하여 하나님 정의롭게 행하시는 모든 일들에 대하여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에 주의하자.2. 그들은 하나님의 자비에 대하여 말한다. "주여! 우리의 열조들이 죄를 범하였고, 우리는 그들의 죄로 인하여 마땅히 매를 맞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없어졌습니다. 그들은장차 올 재난을 받지 않은 채 옮겨갔고, 우리가 당하는 이 재난을 보지도 아니했고, 몫을 나누어 살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죄악을 짊어졌습니다. 이제 여기에서 하나님은 의로우시지만 우리의 경우는 불쌍하고, 동정을 받아야 한다고 고백되어져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참회하고 우리 조상의 죄 때문에 고통받는 중에서도 인내한다면 우리를 벌하시는 그분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고, 곧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실 것을 기대할 수도 있다는 것에 주의하자.
Ⅱ. 그들은 그들의 진술에 있어서 당하는 고난에 대한 비난을 몇몇 특별한 구절들에서 그들의 불경건에 돌리는 경향이 있다.
1.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좋은 땅을 빼앗겼고, 적들이 그것을 소유하였다. 그 가나안은 그들의 유업이었다. 그것은 약속으로 받은 그들의 땅이었다. 하나님은 그들과 그들의 자손에게 그 땅을 주셨다. 그들은 그의 면류관으로부터 승인을 받아서 그것을 소유하였다(시 136:21, 22). 그러나 이제는 "그것이 외인에게로 돌아갔습니다. 그것을 소유할 권리가 없는 그들이, 이스라엘에게는 외인이요, 약속의 계약과는 상관이 없는 그들이 그 땅을 소유하였습니다. 그들이 우리가 지은 집에 거주하니, 이것이 우리의 치욕입니다." 하늘의 가나안은 빼앗길 수 없는 유산인 것이야말로 모든 영적 이스라엘의 행복이다. 그것은 결코 이방인에게로 돌아가지 아니할 것이다.2. 그들의 나라와 민족은 과부와 고아와 같은 상태가 되었다(3절). "우리는 아버지가 없습니다. (도움이 없는)우리에게는 보호자가 없고, 돌봄이 없습니다. 나라의 아버지인 왕은 베임을 당하였습니다. 아니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를 저버리고 내어버린 것처럼만 보입니다. 이스라엘에 자식을 많이 낳는 어머니 같은 성읍인 우리 어미는 지금 과부와 같으니 남편이 죽은 아내들과 같습니다. 위로도 없고 허물과 상처는 드러나니 이것이 우리의 수욕입니다. 체제를 갖추었던 우리가 이제는 모욕을 가지고 쳐다봅니다."
3. 그들은 그들 자신과 가족들의 필수품을 위하여 힘들게 일하였다. 전에는 그들은 모든 것에 있어 풍부하였었다. 물은 자유롭게, 쉽게 얻을 수가 있었으나, 그러나 이제는(4절) "우리가 은을 주고" 물을 마시니 물은 모든 사람에게 거저라는 말은(water is free to all) 더 이상 진실이 아니었다. 그들의 압박자들이 그렇게 많이 물을 퍼썼으므로 그들은 돈이나 노동으로 사지 않고는 맑은 물을 한 모금도 얻을 수가 없었다. 이전에는 쉽게 연료를 구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값을 주고 섶을 얻으오며" 비싼 값을 지불하고 섶을 얻는다. 이제 그들은 그들이 하늘 여왕을 위하여 과자를 구울 때 쓸 땔나무를 얻으려고 그들의 자식들을 부린 죄 때문에 벌을 받는다(렘 7:18). 그들은 압박자들에게 완전히 박탈당하였고, 고대의 관례에 따라 불과 물을 사용하는 것 둘 다 금지되었다. Interdico tivi aqua et igni-즉 나는 너희가 물과 불을 사용하는 것을 금한다. 그러나 빵을 위하여 그들은 무엇을 해야하는가? 진실로 그것은 다른 어느 것만큼이나 얻기가 힘든 것이었다.
(1)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빵을 얻기 위하여 자유를 팔았다(6절). "우리가 애굽 사람과 앗수르 사람과 악수하고 그들을 섬김으로 우리가 양식을 얻어 배 불리려고 그들과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거래를 하였다. 우리는 가엾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는 가장 힘든 때에 가장 천한 노동에 복종하는 것이 즐거웠다. 우리 자신과 가족들이 살아가기 위한 필수품을 얻으려고 기근 때에 애굽인들이 바로에게 하였듯이 우리를 그들에게 전적으로 봉사하는 종으로 넘겨주었다." 이웃에 있는 나라들은 밀을 얻기 위하여 유다와 무역을 하였었다(겔 27:17). 유다는 수확이 많은 땅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땅은 거민들을 삼켜 버렸고, 그들은 애굽인과 앗수르인에게 아부하기를 즐겨하였다.
(2) 그들 중의 다른 사람들은 먹을 것을 얻기 위하여 그들의 생명을 무릅쓰고 모험을 하였다(9절). "우리가 죽기를 무릅써야 양식을 얻사오니" 포위로 인하여 고립되고 모든 양식이 떨어졌을 때 그들은 양식을 얻기 위하여 포위군들의 손에 붙잡히는 위험을 무릅쓰고 성 밖으로 나가서 돌격하거나 도둑질을 하였다. 포위군들은 성 주위의 평원 모든 곳에 흩어져 있었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생명을 무릅쓰지 아니하고 우리 얼굴에 땀을 거의 흘리지 아니하며 쉽게 빵을 얻어 부요를 즐기는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자. 우리는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즐거움이 있고 필요한 것들을 생산할 뿐만 아니라 광야의 칼에 대한 어떤 공포도 없이 땅의 즐거움을 누리는 쾌락이 있는 것이다.
4. 자유로운 백성이었던 이들이 노예 신분이 되었다. 그들 자신의 주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 주변의 모든 것들의 주인이었다. 자유로운 백성이 노예 상태가 된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당한 어떤 수욕보다 적지 아니한 것이었다. "우리를 쫓는 자" 의 괴롭고 무자비한 멍에가 "우리의 목을 눌렀사오니" (예레미야가 말한 쇠 멍에가 그들에게 놓여졌을 것이다. 렘 28:14), 우리는 부리는 자의 명령에 따라 전적으로 주인을 섬기는 멍에 멘 짐승과 같이 부려졌다. 그들의 종살이를 더 괴롭게 하는 일이 있다.
(1) 그들의 노동은 애굽에서의 이스라엘의 그것과 같이 끊임이 없었다. 매일같이 임무가 부과되고, 또 지나쳤다. "우리가 수고하나 쉼이 없나이다." 떠나지도 못하고 쉴 틈도 없다. 멍에 멘 소는 밤에 멍에를 벗고 쉰다. 그같이 그들은 특별히 제정된 법에 의해서 안식일에는 쉬었다. 그러나 살기 위하여 일을 해야하는 바벨론에 있는 가난한 포로들은 밤도 안식일도 없이 노동하고 쉬지 못했다. 그들은 계속적인 노동으로 인하여 아주 피곤해져 버렸다.
(2) 그들의 주인들은 견딜 만한 자들이 아니었다(8절). "종들이 우리를 관할함이여." 종들이 다스릴 때보다도 더 약 오르는 것은 없다(잠 30:22). 이스라엘을 명령하는 갈대아의 높은 사람들 뿐 아니라 가장 천한 그들의 종들까지도 즐기며 그들을 학대하였고, 또 모욕하였다. 그들은 저들의 고갯짓을 받지 않으면 안 되었다. 가나안의 저주는 이제 유다의 운명이 되었다. "종의 종들이 된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통치를 받지 아니하고 그의 종인 예언자들로 말미암아 통치를 받았다. 그의 다스리심은 온화하고 은혜로왔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그들의 적과 종들에게 혹독하게 다스림을 받고 있는 것이다.
(3) 그들의 비통함이 개선될 가망이 없다. "그 손에서 건져낼 자가 없나이다. 포로에서 구출해 줄 이가 없을 뿐 아니라 우리를 학대하고 짓밟는 종들의 오만을 저지하고 없애 줄 사람이 없나이다." 사람들은 그들의 주인들이 그것을 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왜냐하면 종들의 행위는 그들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묵인하고, 도리어 고무하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이들은 점잖은 징계로는 고정될 가치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은 일축되고 그들은 종들로 되어버렸다. 여기서 그들은 기도하여야 할 것이었다. "여호와여 우리의 수욕을 감찰하소서."
5. 과거에는 축연을 베풀고 있던 때 지금은 굶주리고 있다(10절). "우리의 피부가 아궁이처럼 검으니이다." 무서운 기근의 폭풍 때문에 마르고 또한 탔다. 기근이 백성들에게 점차로 왔지만 그것은 격심하게 왔고, 그 앞에서 모든 것은 압도당하였다. 거기에는 저항이 있을 수 없었다. 이것은 또한 그들의 치욕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들이 포로 중에 이방인 중에서 받은 기근의 치욕을 본다(겔 36:30).
6. 모든 종류의 사람들이, 그들의 인격과 품격이 가장 위대한 사람일지라도 학대를 받고 수욕을 당하였다.
(1) 거룩한 산 시온에서 부녀들을 욕보였나이다(11절). 이 같은 지독한 악을 범한 슬픈 탄원이 있는 것이다.
(2) 위대한 사람들은 죽음에 놓여질 뿐 아니라 수치스러운 죽음에 처하여졌다. "방백이 매여 달리며," 마치 그들이 종인 것처럼 갈대아인의 손을 매어 달렸다. 그들은 거만하게 그들의 손으로 이 야만적인 집행을 실행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칼에 죽임을 당한 후에 방백들의 몸이 사울의 아들들의 몸과 같이 매어달린 것은 수치스런 죽음이었고, 그리고 실제로 그것은 민족의 죄악을 속죄하는 보상의 죽음이었다고 생각한다.
(3) 장관들과 권위있는 이들이 존경을 받지 못하였다. 직무를 수행하고 있는 나이 많은 "장로들의 얼굴이 존경을 받지 못하나이다." 이것은 갈대아인의 또 다른 날을 특별히 기억나게 한다(사 47:6). "늙은 이에게 네 멍에를 심히 무겁게 메우며."
(4) 노인의 근엄함도 고려되지 않음같이 소년의 연약함도 고려되지 않았다. 그들은 소년들에게 "맷돌을 갈게" 하였다. 아니 아마도 연자 맷돌이나 또 다른 것들을 움직였다. 그들은 마치 짐승과 같이 짐을 졌다. 그래서 그들이 소년일 때에 그들의 등이 상하여서 그 생활의 휴식이 그들을 더 비참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어린 자식들에게 짐을 지웠기 때문에 그들은 "섶을 지다가 엎드러졌다." 이 잔인한 감독들은 그렇게 비인간적이었다.
7. 그들의 즐거움에 끝이 오고 그들의 기쁨이 전혀 멸절되었다(14절). 유쾌하여지고 싶던 "소년들이" 그들의 "음악을 그치고" 버드나무에 거문고를 걸었다. 실로 음악을 그침은 늙은 사람에게는 잘 어울리게 된다. "모든 음악하는 딸들이 쇠퇴" 되는 때는 정중한 경멸로서 그것을 내려놓을 때이다. 그들의 소년들이 음악을 그치게 되는 때는 그 백성에게 큰 재앙인 것을 뜻한다. 그것은 백성의 몸이 겪는 재난과 함께 마음의 재난인 것이다. "그들의 마음에 희락이 그쳤고" 그들의 적들이 홍수와 같이 그들에게 들어온 이후로 기쁨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깊은 슬픔이 전달되어 한 사람의 슬픔의 파도는 또 다른 사람의 목에까지 흘러 들어갔다. 그러므로 그들은 슬픔에 아주 압도되어 버렸다. 이전에 기쁨으로 뜁뛰던 대신에 "우리의 무도가 변하여 애통이 되었사오며" 우리는 슬픔 속에 가라앉는다. 이것은 특별히 엄숙한 축제의 기쁨과 거기서 사용된 조심스럽고도 신성한 춤에 관련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삿 22:21). 이것이 슬픔으로 변하였다. 축제일에는 이전에 즐거웠던 일들이 기억되어서 슬픔이 더욱 가중되었다.
8. 그들의 모든 영광이 끝났다.
(1) 정의의 공적 집행은 그들의 영광이었다. "노인은 다시 성문에 앉지 못하오며" (14절). 강같이 흐르던 정의의 흐름이 지금은 그쳤다. 그렇게도 엄숙하던 법정이 지금은 조용해졌다. 재판관들이 살육되고 또는 포로로 잡혀갔기 때문이다.
(2) 왕의 위엄은 그들의 영광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역시 사라졌다. "우리의 머리에서 면류관이 떨어졌사오니." 왕이 굴욕에 떨어졌을 뿐 아니라, 왕관도 떨어졌다. 그에게는 후계자가 없다. 왕의 표상 [왕관, 홀, 보주(寶珠)등]은 모두 잃어버렸다. 땅의 면류관은 시들고 떨어지는 것이란 것에 유의하자. 그러나 하나님은 복되시니 거기는 시들지 않고 떨어지지 않는 영광의 면류관이 있고, "옮겨지지 아니하는 하늘 나라가 있다." 먼저의 모든 불평 외에 이 불평에 있어서만 그들은 죄를 참회하는 고백을 한다. "오호라! 우리 범죄함을 인함이니다. 아! 우리의 경우는 매우 통탄스럽습니다. 그것은 모두 우리들 자신 때문입니다. 우리는 파멸하고 일을 악화시키고 우리 손으로 망하였습니다. 우리의 죄 때문이니 하나님은 의로우십니다." 모든 우리의 비애는 우리 자신의 죄와 어리석음 때문인 것에 주의하자. 만일 우리의 머리에서 면류관이 떨어졌으면, 만일 우리의 탁월함을 잃고 천하게 되어졌으면, 우리의 죄악으로 인하여 우리의 면류관이 더럽혀지고 우리의 존귀가 땅에 떨어진 것이니 우리 탓이다.
불변하시는 하나님 (예레미야 애가 5:17-22)
여기에서 이것을 살피자.
Ⅰ. 하나님의 백성은 그들의 재난의 다른 어떤 것에 대해서 보다도 성전의 파괴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표현한다. 하나님의 집에 대한 관심은 그들 자신에 대한 관심보다도 더 그들의 마음 깊이에 있다(17,18절). "이러므로 우리 마음이 피곤하고," 그 무거운 짐 밑에 눌립니다. "이러므로 우리 눈이 어두우며" 우리의 시력이 다 하였습니다. 이것은 흔히 정신 착란, 또는 졸도와 같은 것이다. "그것은 시온산이 황무한 때문입니다. 그 거룩한 산 위에 성전이 세워졌습니다. 다른 황폐한 것을 인하여는 우리 마음이 슬프고 우리 눈이 눈물을 흘리나 이것을 위하여는 우리 마음이 피곤하고, 우리의 눈이 어두울 정도입니다." 종교를 파멸시키겠다고 협박하니까 종교에 대한 관심이 약해지는 것만큼 상한 백성의 마음을 무겁게 근심시키는 것은 없다는 것에 주의하자. 그리고 우리 자신에 대한 어떤 일시적인 괴로움보다 그것이 더 우리를 괴롭힌다고 하면, 그리고 우리가 만일 그것을 하나님께 호소할 수 있다고 하면 그것은 우리의 위로인 것이다. 백성들이 시온산을 더럽혔으므로 여우가 숲 속에서 자유롭게 놀던 것처럼, 그 위에서 놀 정도로 시온산을 황무케 하신 것은 의로우신 것이다. "시온산이 시랑의 밥이 된 것은" (시 63:10) 실로 슬픈 일이다. 그러나 이는 무엇보다도 죄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시 13:4).
Ⅱ. 그들은 하나님과 그 통치의 영원성에 대한 교리로서 스스로를 위로한다(19절).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계시오며." 이것은 그들이 "곤고한 자의 기도라" 고 제목을 붙인 편지에서 배운 것이다(시 102:12). 피조물로부터의 모든 위로가 우리에게서 떠나가고 우리의 마음이 낙심하였을 때 우리는 믿음으로 우리 자신을 고무할 수 있다.
1. 하나님의 영원성에 대하여. "당신은 영원히 계시오며" 세상을 뒤흔드는 것은 세상을 만드신 이를 교란시키지 못한다. 땅 위에는 변혁이 있으나 영원한 마음은 변함이 없다. 하나님은 아직까지도 동일하시며, 지혜와 거룩하심과 의로우시고 선하심이 영원하시다. 그에게는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다."2. 결코 실패하지 않는 그 통치의 영원성에 대하여. "주의 보좌는 세세에 미치나이다." 영광의 보좌, 은혜의 보좌, 그리고 통치하는 보좌는 모두 변하지 않고 옮겨지지 않는다. 이것은 "면류관이 우리 머리에서 떨어질 때도,"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사실이다. 우리의 보호자이었던 방백들의 보좌는 흙으로 떨어지고 그 속에 묻혔지만 하나님의 보좌는 아직까지 계속된다. 그는 아직까지 세상을 통치하시며 선한 교회를 위하여 세상을 통치하신다. 오! 시온이여, 주께 다스리시니 그 다스림이 영원하시도다.
Ⅲ. 지금 처하여 있는 비천한 상황에 대하여 하나님께 겸손히 간언을 드린다. 지금 그들이 하늘의 찌푸림 아래 있는 것이다(20절). "마치 우리가 마음에서부터 완전히 버림을 받은 것처럼 주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영원히 잊으시오며, 마치 우리가 당신의 나타나시는 증거를 완전히 빼앗긴 것처럼 우리를 이같이 오래 저버리시나이까? 마치 당신이 우리를 철저하게 버리시기나 한 것처럼 어찌하여 우리의 구원을 늦추십니까? 비록 당신의 성소의 보좌는 부서졌다 해도 당신은 동일하시며 하늘의 보좌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그들은 그들이 가졌던 하나님의 사랑과 나타나심의 가치를 표현한다. 지금은 그 증거와 위로를 빼앗긴 것이 사랑과 현현의 가치는 장구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 마지막 구절을 이 같은 간언으로 읽어도 좋다. 난외주에는 그같이 기록하였다. "주께서 우리를 아주 버리셨나이까? 우리를 향하여 웃으심과 자비스럽게 기억하심 뿐만 아니라 우리를 향하여 얼굴을 찡그리심과 당신이 하시는 표징까지도 우리에게 가까이 하실 뿐만 아니라, 당신의 면전에서 우리를 버리시고 우리가 당신에게 가까이 가는 것까지도 버리셨나이까? 당신은 우리에게 영구히 진노하시나이까? 당신의 선하심과 미쁨으로 화해시키는 것은 어찌 되오며 견고한 계약은 어찌되는 것입니까?" 우리는 그것을 다시 읽는다. "당신이 우리를 버리셨나이다. 당신의 가지신 두려움의 근거를 우리에게 주셨나이다. 주여! 얼마나 오랫동안 우리는 이 시험 중에 있어야 합니까? 우리는 하나님께 대하여 불평을 하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그와 더불어 변론을 할 수는 있으며, 또한 그가 우리를 버리셨다고 우리가 결론을 내리지는 않았지마는 우리는 그의 판단에 대하여 겸손히 그에게 변론할 수 있다는 것에 유의하자(예언자 예레미야와 같이; 렘 12:1). 특별히 그의 성소의 장구한 황폐에 대하여 말할 수 있는 것이다.
Ⅳ. 그들은 하나님께 대하여 자비와 은혜를 열심히 기도하였다. "여호와여! 영원히 우리를 버리지 마시고,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우리의 날을 다시 새롭게 하소서(21절)." 이 말들은 마지막에 놓여지지 않았지만 그러나 랍비들은 저 우울한 말들로(22절) 끝맺을 책들을 갖지 않았기 때문에 이 기도를 되풀이한다. 즉, 해는 구름 아래로 지지 않는다. 그래서 이 말씀들을 쓰는데와 읽는데 있어서 마지막을 삼았다. 그들이 여기에서 기도하는 것은
1. 그들이 자비하심을 받기에 적합하도록 준비하고, 하나님의 은총이 그들에게 돌아오게 되는 것이다.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리소서."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을 저버리고 잊어버리신 것을 불평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기도는 당신이 우리에게 돌이키소서가 아니고, 우리를 당신에게 돌이키소서이다. 이것은 멀리 떨어진 이유가 그들 자신에게 있는 것을 승인하는 뜻을 암시한다. 하나님은 결코 누구든지 하나님을 떠나기 전에는 먼저 그들을 떠나지 아니하시며 또한 그들이 하나님을 멀리하지 아니하는 한 그들을 멀리하지 아니하신다. 이것은 반복되는 기도와 일치한다(시 80:3, 7, 19).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주의 얼굴 빛을 비추사" 성실한 회개와 개심으로 우리를 우상 숭배에게서부터 당신에게로 "돌이키소서. 그러면 우리가 돌아가겠나이다." 이것은 그들 자신이 하나님께로 돌아 가기에는 약하고 무능하다는 것을 더욱 암시한다. 우리의 본성에는 하나님으로부터 떠나려는 경향은 있으나, 그의 은혜가 우리의 의지와 행동 양면에 작용하기 전에는 그에게로 돌아가려는 성향이 없다. 그래서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진실로 고백할 수 있는 은혜가 필요한 것이다. "우리를 돌이키소서.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돌이킬 수 없고 다만 끝없이 방황할 뿐입니다. 우리를 돌이키소서. 그러면 우리가 돌아가겠나이다" 라고 진실로 고백할 수 있는 은혜는 그렇게도 능력있고 효력이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진해서 돌아가려는 날은 능력 있는 전능한, 권능의 날이기 때문이다(시 110:3).2. 자비의 회복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 "우리를 당신에게로 돌이키소서. 옛날과 같이 우리의 날들을 새롭게 하소서. 우리의 선조들이 오래 전에 누리고 장구히 계속되었던 것과 같은 행복과 상태가 되게 하소서. 우리를 처음과 같이 본래와 같이 되게 하소서" (사 1:26). 만일 하나님이 그의 은혜로 우리의 믿음을 새롭게 하시면 그는 그의 은혜로 우리의 날들을 새롭게 하실 것이고, 그렇게 되면 "독수리와 같이" 우리의 "청춘을 새롭게" 하실 것에(시 103:5) 주의하자. 회개하고 그들이 먼저 할 일을 하면 기쁘게 되고 위로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는 영원부터 있었다(시 25:6). 그러므로, 그들이 희구하면 당시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전부 잊으신 것같이 보인다 할지라도 영원부터 있는 자비는 영원까지 있을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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