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튜 헨리 주석, 에스겔 1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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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

시드기야의 포로에 대한 예고(에스겔 12:1-16)

아마 에스겔은 하나님의 영광된 환상을 너무나 즐겨 회상한 나머지 그 이상이 자기에게서 떠나가자 다시 자기에게 임하기를 원했을 것이다. 그는 이상을 한 번 보고 두 번 보았으므로 세 번째로 그 은총을 받았으면 하고 원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또 환상에 접했다는 기사를 찾아보지 못한다. 그렇지만 "여호와의 말씀은 그에게 임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여러 모양으로 우리조상에게 말씀하셨고(히 1:1) 또 그들은 왕왕 전능자의 이상을 보지 못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기 때문이다. 믿음은 이상보다 확실한 예언의 말씀을 들음에서 나온다(롬 10:11). 우리는 환의와 황홀 없이도 하나님과의 교제를 유지할 수 있다. 이 문단에서 선지자가 지시받은 것은 다음과 같다.

Ⅰ. 그는 명백한 표징과 행동으로 시드기야의 임박한 포수(捕囚)를 나타내라는 지시를 받는다. 그것은 예언되어야 할 일이었으며 이미 포로된 자에게 예언되고 있다. 왜냐하면 시드기야가 왕위에 있는 동안 그들은 그가 바벨론 왕을 적당히 요리할 것이라고 기대한 때문이다. 시드기야는 바벨론의 멍에를 벗어버리려고 계획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 포로들은 아마 큰 기대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시드기야는 그런 계획을 꾸미고 있는 동안 남몰래 그들을 격려하여 희망을 주었을지도 모른다. 즉 자기가 곧 구원하려고 한다거나 아니면 포로 교환으로 그들의 자유를 확보하겠다고 비밀리에 전갈을 보냈을 수도 있다. 이런 헛된 희망에 부풀에 있는 한 그들은 고난에 복종하려 했을 리가 없으며 그 고난을 통해 유익을 얻지도 못했다. 그러므로 시드기야가 구원자는커녕 곧 같은 포로 신세가 되리라는 것을 그들에게 깨닫게 해 주는 작업이 필요했다. 또 그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우리는 선지자가 나중처럼(10절)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해도 충분했을텐데 왜 이런 복잡한 전달 방법을 사용하는지 의아스러움을 느낀다. 그러나 선지자는 그들을 예언에 대비시키기 위해 먼저 그 징조를 보여야 했다. 그는 그들의 눈에 먼저 말하고 그런 다음 그들의 귀에 말해야 했다.

1. 그가 이런 방법을 사용해야 했던 이유(2절). 그것은 그들이 우둔하고 몰지각한 백성이었던 때문이다. 그들은 듣기만 하면 곧 잊어버리거나 주의를 기울이려 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면, 적어도 그들은 그 말에 전혀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아니면, 적어도 그들은 그 말에 전혀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그 말은 그들에게 아무런 인상도 감동도 주지 않을 것이다. "네가 패역한 족속중에 거하도다. 그런 자들에게는 말이 거의 아무런 작용도 하지 않는다." 그들은 "눈과 귀" 가 있으며 지적 능력과 기능을 가지고 있지만 "보지 못하며 듣지 못한다." 그들은 우상 숭배자였다. 우상 숭배자의 특성은 자기들이 섬기는 우상과 같이 무감각하다는 것이었다. 우상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한다(시 115:5, 6, 8). 하나님의 빛에 대해 눈을 감고 하나님의 법에 대해 귀를 막는 자는 패역한 족속으로 간주된다는 데 주목하자. 고의적으로 무지한 자들 즉 인식 수단과 기능을 소유하면서도 이들을 사용하지 않으려는 자들의 무지는 구실이 되긴커녕 죄에 대한 그들의 패역을 더욱 가중시킬 것이다. 보지 않으려는 자만큼 눈먼 자도 없고 듣지 않으려는 자만큼 귀먹은 자도 없다. 그들은 보지 않으며, 듣지 않는데 이는 패역한 족속이기 때문이다. 원인은 모두 그들 자신에게서 나온다. 총명(이해)의 어두움은 의지의 완고함에서 기인한다. 이것이 바로 선지자가 표적으로 말해야 하는 이유이다. 마치 농아들의 교육이 손이나 몸이 시늉으로 이루어지듯 그는 백성들에게 징조로써 말해야 했다. 이는 그들로 하여금 교훈을 받거나 수치감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사역자는 자기들이 다루는 자들의 연약성에 순응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고집성에도 순응해야 하며 이에 따라 그들을 다루어야 한다. 사역자가 만일 패역한 자들 가운데 거주하면 그들에게 보다 명백하고 보다 강조적으로 말해야 하며 그들에게 가장 잘 먹혀드는 방법을 취해야 한다. 그래야 그들은 변명의 여지가 없게 된다.

2. 그들을 각성시키고 감동시키기 위해 선지자가 취해야 했던 방법. 그는 이사에 필요한 모든 행구를 갖추지 않으면 안 되었다(3절). 그는 여행복과 여비를 마련해야 했다. 그는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야 했다. 그는 주거가 정해지지 않아 거소를 바꾸지 않을 수 없는 자처럼 이사해야 했다. 이것도 낮에 사람들의 목전에서 행해야 했다. 그는 모든 가정 집물을 꾸려서 부치기 위해 전부 끄집어 내어야 했다(4절). 대문이나 성문은 죄다 폐쇄되어 통과할 수 없거나 아니면 적군이 수비하고 있어서 감히 통과할 수가 없으므로 그는 성벽을 뚫어 그 틈으로 자기 물건을 몰래 운반하지 않으면 안되었다(5절). 그는 수행할 종이 없으므로 물건을 손수 자기 어깨에 메고 나가야 했다. 그는 황혼녘에 이 일을 행하지 않으면 안 되었으니 이는 들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효과를 최고로 거두기 위한 방편을 마련했다. 즉 저물 때에 그들의 목전에서 살금살금 나가야 했다. 그나마도 그는 불안과 떨림으로 나가야 했고 포로되어 가는 자처럼 나가야 했다(4절). 그는 보이기를 부끄러워하거나 알리기를 두러워하는 자처럼 얼굴을 가리워야 했다(6절). 또는 이것은 아주 큰 근심과 걱정을 상징한다. 그는 망해서 빈털털이가 된 장사꾼처럼 떠나야 했다. 즉 어쩔 수없이 점포를 폐쇄하고 잠적하거나 고향을 떠나는 상인처럼 나가야 했다. 이와 같이 에스겔은 직접 그들에게 표적이 되어야 했다. 아마 그는 이 모든 어려움에 투신하기를 주저하고 희롱과 조소에 노출되는 것을 망설이는 듯이 보였던 것 같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를 안정시키시기 위해서 "그들이 보면 비록 패역한 족속이라도 혹 생각이 있으리라. 헛된 자만심을 버리게 되리라" 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극히 악한 자에 대해서도 절망해서는 안 되며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생각하게 하고 회개하도록 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을 각성시키고 회심시키기 위해 적당한 수단을 계속 사용해야 한다. 왜냐하면 생명이 있는 동안에는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사역자들은 비록 그것이 단지 성공의 가능성(혹 성공할지 모르지만)에 불과하더라도 에스겔이 이사하는 경우처럼 극히 어렵고 불편한 직분이라도 기꺼이 해내야 한다. 단지 한 영혼이 각성하여 "생각" 하게 되더라도 우리의 돌봄 과 수고는 그 보람을 얻게 되는 셈이다.

3.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 에스겔은 기꺼이 그리고 꼭 그대로 순종했다(7절). "내가 그 명대로 행하였다." 그가 특히 이로써 우리와 목회자들 모두에게 가르치는 것은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의 모든 명령, 심지어 극히 어려운 명령일지라도 기쁨으로 순종하라는 것. 그리스도께서도 손수 순종을 배우셨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도 그래야 한다.

(2) 다른 사람들의 영혼을 위해서는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행하라는 것. 그는 우리에게 깨달음을 얻지 못할 자들을 각성시키기 위해 어떤 고난과 수고도 사양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사랑하는 자들아 이 모든 것은 너희의 덕을 세우기 위함이라" (고후 12:19). 즉 "우리는 너희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무슨 일이라도 기꺼이 한다."

(3) 우리가 남을 감동시키기를 원하는 그것으로 우리 자신도 감동받으리라는 것. 에스겔은 자기 청중에게 우울한 전망을 보여 주려할 때 먼저 자기 자신부터 우울한 환경을 맛보았던 것이다.

(4) 이 세상에 멀찍이 앉아 있다가 떠날 준비를 하며 우리의 행구를 들고 나서라는 것. 이는 우리가 여기에 영구한 도성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히 13:14). "이것이 너희 쉴 곳이 아니니 일어나 떠날지어다. 그것이 이미 더러워졌으니(막 2:10), 너희는 패역한 족속(집:흠정역) 중에 거하지 말고 이사할 준비를 하라." 이처럼 악한 집, 이처럼 악한 세상을 떠나고 싶지 않을 자가 누구인가?

Ⅱ. 에스겔은 자기의 이런 표적과 행동을 어떤 말로 설명해야 할지를 지시받는다. 아가보는 자기 수족을 동여매고 그 의미를 설명했다(행 21:10 이하).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표적의 설명을 일러주신 것은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였다. 이는 그로 하여금 하나님께 교시를 계속 의존하도록 하시기 위함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일을 행하실 뿐 아니라 우리에게 어떤 일을 행하라고 지시도 하시는데 아마 우리가 지금은 그 의미를 모를 것이지만 나중에는 알게 될 것이다.

1. 사람들이 이 표적의 의미를 묻거나 아니면 그들이 최소한 이 행위의 뜻을 물어야 한다는 것이 가정되고 있다(9절). "이스라엘 족속이 네게 묻기를 무엇을 하느냐 하지 아니하더냐? 나는 그들이 물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은 비록 패역한 족속이지만 날마다 하나님을 찾는 자들처럼(사 58:2) 하나님의 의사를 알려고 묻는다. 그러므로 선지자는 그들로 하여금 그 의미를 묻도록 하기 위해 기괴한 일을 행해야 했다. 그들의 의문에 대한 대답이 나올 때라야 그들이 주목해서 그 말을 듣고 유익을 얻으려 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이것이 그런 질문조차 하지 않은 백성들의 무감각성을 암시한다고 해석한다. "이 패역한 족속이 네게 무엇을 하느냐고 묻기조차 안하지 않느냐? 그렇다, 그들은 그 일을 주목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이 묻지 않을지라도 그들에게 그 의미를 말해 주어라." 하나님께서 자기의 사역자들을 통해 우리에게 메시지를 보내실 때는 우리가 그 전언을 얼마나 즐겨 받아들이는지 관찰하고 계신다는 것을 명심하자. 그는 우리가 그 말씀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하며 어떻게 묻는지 귀를 기울여 들으시며 만일 우리가 그 말씀에 주의하지 않고 지나쳐 버린다면 하나님께서는 무척 노여워하실 것이다. 일단 그 말씀을 듣더라도 우리는 계속적인 가르침을 맏아서 사역자들에게 마음을 쏟아야 한다. 우리가 만약 이와 같이 알려고 따른다면 결국 알게 될 것이다.

2. 선지자는 그들에게 이 표적의 의미를 말해야 했다. 전체적으로 "이것(원의:이 짐)은 예루살렘 왕에게 대한 예조이다" (10절). 그들은 그것이 누구인지 알았다. 그들은 비록 포로 중에 있었지만 자기들의 왕이 예루살렘에 있고 이스라엘 족속이 거기서 건재하고 있다는 것을 자랑했으며 때가 되면 잘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그러나 너는 그들에게 네가 하는 일로 예루살렘에 있는 친구들의 운명을 읽을 수 있다고 말하라. 나는 너희 징조라고 말해 주어라" (11절). 사역자들의 행동이 교인들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듯 하나님의 섭리는 때때로 그들이 무엇을 각오해야 하는지 말해 주려고 한다. 사역자들이 미정착 상태나 이사는 사람들에게 이 세상에서 무엇을 기대해야 하는지의 경고가 된다. 즉 그것은 계속이 아닌 부단한 변화를 가리킨다. 고난의 때가 임할 무렵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저희가 먼저 너희에게 손을 대리라" (눅 21:12)고 말씀해 주셨다.

(1) 백성은 포로로 끌려갈 것이다 (11절). "내가 행한 대로 그들이 당할지라." 그들은 자기 집에서 강제로 끌려갈 것이며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이고 그들의 처소는 그들을 더 이상 알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 처소에 대해 그것이 우리의 안식처라고 말할 수 없다. 우리는 죽기 전에 그곳에서 얼마나 멀리 옮겨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2) 군왕은 탈주 시도를 하나 소용없을 것이다. 그 역시 포로로 끌려 갈 것이기 때문이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시드기야 면전에서 꼭 같은 말을 한다. "네가 그 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반드시 사로 잡히리라" (렘 34:3). 에스겔이 여기서 예언하는 대상자는 자기들의 왕을 신뢰하여 그로부터 구원을 얻을 것을 기대하던 자들이었다.

[1]왕은 직접 자기 재화를 지고 갈 것이다. 왕은 가장 값비싼 재물 얼마를 자기 어깨에 메고 나갈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군왕도 짐군으로 변하게 하실 수 있다는 것을 주목하자. 호화로운 시종별배를 거느리고 백주에 도성을 행차하곤 하던 자가 이제는 손수 자기 짐을 지고 어두울 때 그 성에서 몰래 빠져 나가게 될 것이다. 죄가 사람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살펴보자. 왕궁에 이르는 길은 요소요소가 적군에게 엄격히 감시를 당하기 때문에 그들은 성벽을 뚫고 그리로 가지고 나갈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 집을 스스로 부수는 자가 될 것이며 자기 재물을 몰래 들어내게 될 것이다. 전쟁의 칼이 모든 권리와 재산을 말살시킬 때는 그렇게 된다.

[2]그는 가면이나 면갑으로 위장하고 탈출을 시도할 것이다. 이것은 그의 얼굴을 가리우게 될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기 앞만 볼 수 있을 뿐이며 눈으로 땅을 보지 아니할 것이다. 위의를 갖추고 있을 때는 남에게 보이기를 좋아하던 그가 이제 도주의 신세가 되자 남에게 보이기를 두려워한다. 왕이 자기 얼굴을 가리우고 땅을 눈으로 보지 않으려 하는 이상 그들은 어느 누구도 자기 모습을 자랑하거나 주변을 돌아보고 과도히 기뻐해서는 안 되었다.

[3]그는 죄수가 될 것이며 포로로서 바벨론에 끌려 갈 것이다. "내가 내 그물을 그의 위에 치고 내 올무에 걸리게 하리라" (13절). 그것은 갈대아인의 그물과 올무일 것 같은데 하나님은 그것을 자기 것이라고 하신다. 여호와의 칼을 피하려고 생각하는 자들은 그의 그물에 걸린 제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예레미야는 시드기야 왕이 바벨론 왕을 눈으로 보게 되고 바벨론으로 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에스겔은 그가 바벨론에 끌려가며 비록 거기서 죽을지라도 그 땅을 보지 못하리라고 말한다. 아마 트집잡기 좋아하는 자들은 이 두 선지자가 서로 상반되는 예언을 했다고 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는 그가 바벨론왕을 볼 것이라고 말했고 다른 하나는 그가 바벨론을 보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양자의 예언은 다 진실한 것으로 드러났다. 즉 그는 바벨론 왕을 립나에서 보았다. 바벨론 왕은 거기서 그의 모반에 대해 유죄를 선고하고 그의 두 눈을 뽑았다. 그래서 그는 바벨론으로 끌려 갔으면서도 그곳을 보지 못한 것이다. 포로들은 자기들의 왕이 정복자로서 바벨론에 와 자기들을 고통에서 해방시켜 줄 것으로 기대했었다. 그러나 그는 포로로 오게 될 것이며 그의 수치는 그들의 고통을 더욱 크게 가중시키게 될 것이다. 왕이 자기들을 보지 못할 때 그들은 그런 왕을 봄으로써 기쁨을 얻지 못했다.

[4]왕의 모든 경호병들은 흩어질 것이며 그에게 전혀 도움을 주기 못할 것이다(14절). "내가 그 호위하는 자를 사방으로 흩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고립무원한 중에 있게 될 것이다. 내가 그들을 이방인 가운데로 흩으며 열방 중에 헤치리라(15절). 그래서 그들이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기념물로 되게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재기하리라는 희망이 있지 않은가? 한 때에 도주하는 자라도 다른 때 전투할 수 있지 않는가? 아니다. "내가 또 그 뒤를 따라 칼를 빼리라. 그 칼은 그들을 발견하는 쪽쪽 도륙을 낼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빼시는 칼은 그 의도하시는 바를 꼭 시행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드기야의 흩어진 부대 중 몇 사람이 도피하게 될 것이다(16절). "그러나 내가 그 중 몇 사람을 남기리라. 비록 그들이 전부 흩어지게 될 것이지만 전부 다 멸절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일부 사람들은 목숨을 부지하게 될 것이다. 그들을 이처럼 각별히 살려 주시는 목적은 아주 주목할 만하다. "그들로 이르는 이방인 중에 자기의 모든 가증한 일을 자백하게 하리라." 그들이 당하는 고난은 그들을 제 정신으로 돌아가게 할 것이며 올바로 자각하게 할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자기들에게 임하는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인식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을 격동시켜 자기들과 쟁변하게 만든 죄를 솔직히 고백하게 될 것이다. 이로써 그들은 자비로 살아남게 되었다는 것이 나타나듯 그들은 자기들을 살펴 주신 하나님의 은총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돌아갈 것이다. 그것은 적당하고 감사하는 귀환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망의 구렁텅이에서 건지셨을 때 우리는 그 구원의 목적을 주목해야 한다. 즉 다른 사람들 중에서 유독 우리를 살려내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우리의 참회의 고백으로써 남들을 훈화시켜 덕을 세우기 위하심이다. 고난을 통해 이런 경지에 이르게 되는 자들은 하나님이 여호와시라는 것을 알게 되고 남들도 하나님을 알도록 도울 수 있다. 하나님이 어떻게 악한 것에서 선한 것을 끌어내시는지 주목하자. 자기 나라에서 하나님께 많은 불명예와 해를 깨쳤던 자들의 이산은 다른 나라에서 하나님께 많은 존귀와 봉사를 바칠 회개자의 이산으로 나타난다. 레위인은 저주로 야곱 중에 나뉘며 이스라엘에서 흩어졌지만 그것은 축복으로 변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로써 야곱에게 하나님의 율법을 가르칠 극히 아름다운 기회를 얻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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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근의 예고(에스겔 12:17-20)

여기에서 선지자는 다시 유다와 예루살렘에 임하는 황폐화의 징조가 되고 있다.

1. 그는 특히 무리 중에 있을 때 근심과 불안 중에서 먹고 마셔야 했다(17, 18절). 선지자 자신은 비록 위험의 요소가 없었고 안전과 풍부 속에서 살았지만 떨면서 떡을 먹으며(근심의 떡, 시 127:2, 흠정역) 놀라고 근심하면서 자기 물을 마셔야 했다. 이것은 포위기간 중 예루살렘에 있을 자들의 비참한 상태를 나타낸다. 이것은 그가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데 근심과 불안 중에 있는 것처럼 가장 해야 했다는 것이 아니다. 이 심판을 굳게 믿고 있지만 그것을 전혀 원치 않는다는 것을 나타내 보이면서 그는 이 심판을 예언해야 했다. 그는 심판을 전망하면서 그 자신이 슬픔과 불안에 사로잡혔다. 사역자들이 회개치 않는 죄인들에게 임하는 파멸을 말할 때는 여호와의 두려움을 아는 자답게 박진감있는 표현을 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로 단지 선을 행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어려움을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

2. 그는 예루살렘 거민도 마찬가지로 근심과 불안감으로 먹고 마셔야 한다고 그들에게 말해야 했다(19, 20절). 이스라엘에 집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나 그리로 피해 오는 이스라엘 땅의 사람들은 다 근심하면서 그 식물을 먹고 놀라면서 그 물을 마실 것이다. 그 이유는 두 가지 중 하나이다. 즉 예루살렘이 오래 버티지 못할까봐 염려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곧 궁핍을 당하게 될 것이기도 한 때문이다. 아니면, 그들은 끊임없이 적군의 놀램을 각오해야 했기 때문일 것이다. "네 생명은 의심나는 곳에 달린 것 같다" (신 28:66).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이 소유하고 있는 것을 즐기지도 못하고 또 그들의 소유가 그들에게 아무런 유익도 주지 못할 것이다. 근심과 불안이 우세하게 되면 우리의 모든 위안물도 쓴맛 나게 만들며 그 자체가 아주 쓰라린 심판이 된다는 데 주목하자. 그들은 곤경에 처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들을 궁핍케 만드는 자들의 손에 의해 점차로 궁하게 되며 도시와 지방이 다 황폐하게 된다. 이 심판에서 의도하는 것은 도시와 농촌의 완전한 멸망이다. "땅에 가득한 것이 황무하게 됨이라." 그 땅은 모든 장식물과 그 모든 열매를 빼앗기게 되며 물론 사람이 거하는 성읍들도 황폐하게 된다. 왜냐하면 성읍은 들의 공궤를 받기 때문이다. 이런 전반적 황폐화가 그들에게 다가오기에 그들이 근심과 불안으로 자기 떡을 먹는다는 것은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이제 다음 사실을 살펴보자.

(1) 심판의 원인은 그들의 악함 때문이다. "그것은 이 땅 모든 거민의 강포를 인해서이다. 그들이 피차간에 행한 불의와 압제와 해악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예배로 자기에게 입힌 모욕 때문에도 그들을 심판하려 하시지만 이 강포 때문에도 그들을 심판하려 하신다. 한 민족의 도덕적 타락은 다른 모든 것의 타락을 가져온다는 데 주목하자. 이웃이 서로 삼킬 때 하나님께서 원수를 불러와 그들 모두를 삼키게 하시는 것이 당연하다.

(2) 이 심판의 효과는 매우 좋다.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그리고 만약 그들이 이 심판으로 하나님을 올바로 알게 된다면 그것은 그들이 이 황폐화로 잃어버린 모든 상실을 보상하게 될 것이다. 혈과 육에는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 우리를 하나님께 대한 지식에로 안내하고 그 지식을 증진시키는 데 유용한 고난은 복된 고난이다.

 

12:18 없음.

 

12:19 없음.

 

12:20 없음.

 

12:21

백성에게 보내는 하나님의 전언(에스겔 12:21-28)

이 태평스럽고 무사려한 백성을 일깨워 임박한 심판을 각오하게 하는 데는 다양한 방법이 사용되었다. 이것은 그들을 분기시켜 회개하게 하고 개혁하게 하여 심판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파멸의 예언은 환상으로 확증되었고 징조로 설명되었다. 모든 것은 누가 생각해도 감화를 받을 만큼 증거와 능력으로 확증되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그들이 어떻게 이 정죄를 회피하는지 보게 된다. 그들은 이런 유죄 판결에 대해 경고된 이 심판이 결국 오긴 하더라도 오랜 시간이 지나야 올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자기를 방어한다. 그들은 이런 생각으로 베개를 높이하고 무사태평을 구가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런 생각은 응징을 받고 하나님이 각각 다른 시기에 선지자를 보내 전한 별개의 메시지에서 헛되고 무근한 생각으로 밝혀진다(21, 26절). 그 두 메시지는 동일한 취지의 말이었다. 선지자는 그들에게 미망을 깨우쳐 주기 위해 이토록 정성을 쏟고 고심을 한다. 다음사실을 관찰하자.

Ⅰ. 그들은 심판이 지체되리라는 생각으로 기대에 젖어 있었다. 그들에게는 한 가지 속담이 있었는데 그것은 이스라엘 땅에서 잠언이 되었다(22절).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날이 더디다(연장되었다). 심판은 올 것으로 예상되던 때에 오지 않고 날에서 날로 (de die in diem) 연기되는 것 같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묵시가 응험이 없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이는 일부 묵시가 응험이 없는 것 같기 때문이다. 또 멸망이 아직 이르지 않기 때문에 결코 파멸 따위는 오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지을 수 있다. 우리는 다시는 선지자를 신뢰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피해를 입었다기보다 놀랐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또 다른 속담이 있었다. 앞의 속담이 그들의 확신을 깨뜨리지 못한다면 이 속담이 그들의 애정을 냉각시키고 그들의 관심을 비하시킬 터였다. "그 묵시는 여러 날(한참 뒤) 후의 일이라. 이것은 먼 훗날의 사건을 가리킨다. 그래서 그가 예언하는 일들은 사실일지 모르나 아주 먼 훗날의 일이기에 우리가 지금 골머리를 앓을 필요는 없다(27절). 우리는 환난이 이르기 전에 존귀와 평강 가운데서 죽을 수 있다." 그리고 만일 환난이 참으로 그렇게 연기된다면 그들은 히스기야처럼 편안할 수 있을 터였다. "만일 나의 사는 날에 태평과 진실이 있을진대 어찌 선하지 아니하리요?" (왕하 20:19) 그러나 그것은 큰 착오였다. 그들은 자기 기만으로 자멸에 떨어질 따름이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바로 그 점을 크게 노여워하시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그것은 하나님의 인내심을 무참히 남용하는 짓이었다. 일시 적으로 침묵을 지키신다고 해서 하나님을 자기들과 같은 즐로 생각한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다(시 50:21). 마땅히 그들을 회개에 이르게 하실 하나님의 참으심이 그들을 죄 중에서 완악하게 하였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대한 판결이 조속히 시행되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의 행위가 악하지 않는 듯이 생각하려고 했다. 그들은 날이 더디다는 이유로 묵시 자체가 응험이 없다고 결론지었다.

2. 그런 생각은 그들 중에 있던 거짓 선지자들의 옹호를 받았다. 이것은 하나님의 신탁을 맡은 이스라엘 족속 중에 허탄한 묵시나 아첨하는 복술이 있다는 하나님의 말씀(24절)에서 엿보이는 것이다. 거짓 신들을 숭배함으로써 자기를 기만하는 자들이 거짓 예언을 신용함으로 스스로 속는다는 것은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들 중에 유혹을 역사하게 하사 그들을 우상 숭배에 내어 주신 것을 지당하다.

3. 이 말들은 속담이 되었다. 이 말들은 부지런히 전파되어 모든 사람의 입에 오르내렸다. 이 말들은 인구에 회자될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동의를 얻었다. 그것은 속담이 흔히 그렇듯 옛날 속담과 마찬가지로 그 당시의 속담이 되었다. 타락하고 악한 말이 속담으로 된다는 것은 그 나라의 전반적 퇴폐성을 표시한다. 하나님의 말씀과 방법에 대해 속담으로써 인간의 편견을 굳게 하는 것은 사탄의 궤계이며 하나님께 대한 큰 모독이 된다.

Ⅱ. 그들은 자기 지만을 할 뿐이라는 확언을 듣는다. 왜냐하면 심판은 재촉될 것이며 이런 모독적 속담은 사실과 직면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날이 가까우며(23절) 나의 말이 하나도 더디지 않을 것이라 하라(28절)." 악한 날이 자기들에게서 멀다고 한 것은 하나님만 격동시켜 그 날을 더 빨리 임하게 할 것이다. 그 날이 올 때에는 그들에게 너무나 쓰라리고 무거운 날이 될 것이며 너무도 많은 두려움과 놀람을 가져다 줄 것이다. 그는 그들에게 더욱 사실을 고해야 한다.

1. 하나님은 그들을 헛된 희망으로 들뜨게 하던 거짓 속담과 거짓 예언을 틀림없이 침묵시키실 것이며 그들로 하여금 이 두 가지를 다 부끄러워하게 하실 것이다.

(1) "내가 이 속담을 그치게 하리라." 복수의 날이 이르러 예언의 일점 일획도 땅에 떻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게 될 때에는 그들이 "날이 더디고 묵시가 응험이 없다" 는 속담의 사용을 부끄러워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자기 눈을 뜨고 잘못을 교정하지 않으려는 자는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 그 잘못을 깨닫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패역한 것을 말하는 모든 입은 닫혀질 것이기 때문이다.

(2) "허탄한 묵시가 다시 있지 못하리라" (24절). 백성들에게 평강을 누릴 것이며 곧 고난의 끝을 보게 될 것이라 말했던 거짓 선지자들은 사실에 의해 그 잘못이 드러나게 될 것이며 따라서 자기들의 거짓 주장을 부끄러워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머리를 숨기고 입을 다물게 될 것이다. 진실이 잘못보다 오래 되었듯이 잘못보다 오래 남을 것이다. 진실은 먼저 출발했기에 경주에서 이긴 것이다. 참 선지자의 묵시

와 예언은 시행되며 완전한 능력과 힘과 덕 가운데 있다. 그것은 법을 주고 신용을 얻는다. 그러나 허탄한 묵시와 아첨하는 복술은 상실되고 망각되며 이스라엘 족속 중에 다시 있지 않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진실은 크며 승할 것이기 때문이다.

2. 하나님께서 자기가 하신 말씀을 틀림없이 매우 속히 이루시리라는 것. 그는 얼마나 위엄을 갖고 말씀하시는가 ! "나는 주라, 여호와라." 그 영화로우신 이름은 말씀의 이행으로 자기 말씀에 존재를 부여하시는 하나님임을 나타낸다. 따라서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약속을 믿으면서 살던 족장들에게는 하나님이 여호와라는 자기 이름으로 알려지지 않으셨다(출 6:3). 그러나 그는 자기 약속을 이행한다는 점에서 여호와실 뿐 아니라 자기의 경고를 실현시키신다는 점에서도 여호와시다. 그들은 자기들과 관계를 맺고 있는 하나님이 크신 여호와라는 것을 알아야 했다. 그러므로

(1) 그는 그들이 듣든지 아니듣든지 말씀하실 것이다(2:5). "나는 여호와라. 내가 말하리라." 하나님은 누가 부인하든지 간에 자기 말씀을 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신탁은 생명의 도라고 불리우는데(행 7:38) 이는 이교도의 신탁이 오래 전에 벙어리가 된 데 반해 하나님의 신탁은 여전히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역자들은 세상 끝까지 존재해 왔고 존재할 것이며 그들은 계속 계승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서 말씀하실 것이다. 비록 그들에게는 멸시와 천대가 옷입힐지라도 그것은 그들의 사역을 종식시키지 못할 것이다. "패역한 족속아 ! 내가 너희 생전에 말하리라."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최악의 시대에도 자기를 증거하지 아니 하신 것이 아니니(행 14:17) 자기를 대언하고 자기에게서 말씀을 받아 말할 사람들을 세우셨다. "내가 말하리라. 그리고 그 말은 서리라."

(2) 그가 하시는 말씀은 이루어질 것이다. 그 말씀은 그 참 의도와 의미를 따라서, 그 말씀의 완전한 범위와 정도대로 어김없이 성취될 것이다. "내가 말하고 이루리라" (25절). 왜냐하면 하나님의 마음은 변치 않고 그의 말은 짧아지지도 않으며 무한하신 지혜가 쩔쩔매지도 않으시는 까닭이다. 인간에게는 말하는것과 행하는 것이 두 가지 작업이지만 하나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는 dictum, factum- 즉 말해지자 행해진다. 창조 역사에서처럼 섭리의 역사에서는 그가 말씀하시면 그대로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그가 빛이 있으라 하니 빛이 있었고, 궁창이 있으라 하매 궁창이 있었기" 때문이다. (민 23:19; 삼상 15:29 참조). 그들은 "모든 묵시가 응험이 없다" 고 말하지만(22절) 하나님은 "아니다. 모든 묵시는 효력이 있을 것이다. 묵시는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모든 징조는 그 나타내던 일대로 응하리라" (23절)고 말씀하신다. 전능자의 이상을 보는 자들은 허탄한 묵시를 보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실행하심으로써 자기 종들의 말을 확실히 증거하신다(막 16:20).

(3) 그것은 아주 곧 성취될 것이다. "네가 묵시의 응함을 보게 될 날은 가깝다(23절). 더 이상 지체함이 없으리라는 것이 선언되고 맹세되었다(계 10:6). 하나님의 참는 시기는 만료되었다. 그래서 그는 더 이상 판결의 실행을 미루지 않으실 것이다. "그 일이 다시는 더디지 아니하리라. 그는 네게 대해 오래 참으셨다. 그러나 그는 항상 참지는 않으실 것이다. 패역한 족속아 ! 그 말은 너희 생전에 이루어지리라. 너희는 경고된 그 심판을 보고 거기 참여하게 되리라. 보라 심판자가 문 밖에 서 계시느니라(약 5:9). 의인은 화액 전에 옮겨지게 되지만 이 패역한 족속은 그렇게 조용히 사라지지 못할 것이다. 아니, 그들은 살다가 급히 데려감을 당하며 세상에서 쫓겨날 것이다." 이 말은 28절에서도 반복되고 있다. "나의 말은 하나도 다시 더디지 않을지니 심판이 급히 재촉할 것이다. 활 시위를 오래 잡아다니면 다닐수록 화살은 더 깊이 꿰뚫을 것이다." 우리가 죄인들에게 심판, 죽음, 천국, 지옥 따위를 말하고 거룩한 생활을 설득하려할 때 그들은 노골적인 악한이 아니더라도(그들은 내세의 상벌을 믿는다고 말할 것이다) 이 위대한 진리의 힘을 외면하고 그 영향력을 회피한다. 이것은 그들이 저 세상 일을 매우 요원한 것으로 간주하는 데서 온다. 그들은 "당신들이 보는 묵시는 여러 날 후의 일이며, 당신들은 아주 먼 때에 대해 예언하는도다. 좀더 가까이 올 때 생각해도 충분할 것이다" 라고 말한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와 죽음, 우리와 두려운 영원 사이는 단 한 발자국에 불과하다. 잠시후면 묵시가 말할 것이며 거짓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간의 회복에 관심해야 하며 미래 상태에 대해 가급적이면 속히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미래이긴 하나 매우 가깝고 회개치 않는 죄인들이 자는 동안도 그들의 저주는 졸지 않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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