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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1

메시야의 굴욕(2) (이사야 53:1-3)

그 선지자는 앞 장 끝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방인들 중에서 친절히 영접되리라는 것과, 열방과 열왕들이 그것을 환영할 것이고 그를 보지 않은 자들이 그를 믿으리라는 것을 예견하고 예언했었다. 그리고 비록 그들 중에는 그들의 기대를 일으킬 수 있고 그들로 복음을 환대하게 만들 수 있는 복음의 은혜에 대한 예언들이 없었지만, 복음이 처음 통고될 때, 그들은 그것을 신중하고 깊이 생각하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그가 놀랍게도, 구약에서 메시야의 오심을 미리 통고받았고 개인적으로 그를 알 기회를 갖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이 믿지 않을 것을 예고하고 있다. 다음 사실을 살펴보자.

Ⅰ. 그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멸시함(1절). 우리 구주 시대의 유대인들의 불신앙이 이 말씀을 응한 것으로 특별히 언급되어 있다(요 12:38). 그리고 그것을 또한 사도들이 유대인과 이방인들에게 가르친 것이 거의 성공을 거두지 못한 일에 적용되어 있다(롬 10:16).

1. 복음의 소식을 듣는 자들 중에는 그것을 믿는 자들이 극소수이다. 복음은 공개적으로 들어나게 통보된다. 구석에서 은밀히 말하여지거나 어떤 파에게 한정되지 않고 모두에게 선포된다. 그리고 그것은 매우 신실한 말이고 모두 받을 만한 가치가 크기 때문에 혹자는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받아들이고 믿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 반대이다. 미리 그리스도에 대해 말한 선지자들을 믿는 자들은 거의 없었다. 그가 친히 오셨을 때, 관원이나 바리새인들 중 어느 누구도 그를 따르지 않았고 여기 저기서 평민들 중 일부가 따랐다. 그리고 사도들이 온 세상에 이 소식을 가져왔을 때, 각 곳에서 일부의 사람들이 믿었으나 비교적 극소수였다. 오늘날, 이 소식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많은 사람들 중에 진심으로 그것을 받아들이고 그 권세에 복종하는 자들은 매우 적다.

2. 백성들은 "여호와의 팔이" 그들에게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복음의 소식을 믿지 않는다. 그들은 말씀과 함께하는 거룩한 능력을 분별하지도 않으며 인정하려 하지도 않는다. "여호와의 팔" 은 그리스도의 교훈을 확증하기 위해 역사된 이적 가운데서 또 놀라운 성공과 양심에 역사하는 그 세력 가운데서(52:10 에 적힌대로) "나타난다." 비록 그것은 조용한 음성일지라도 강하다. 그러나 그들은 이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뿐만 아니라 말씀을 이루는 성령의 역사를 스스로 체험하지도 못한다. 그들은 그들이 얻은 빛에 화합하지 않음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박탈당했기 때문에 복음을 믿지 않는다. 그러므로 당연히 그가 그들을 거부하시고 그들에게서 그 은혜를 거두어 가신다. 그리고 그들은 은혜의 결핍으로 인해 믿지 않는다.

3. 이것은 우리가 매우 감동을 받아야 할 일이다. 그것은 경악과 큰 탄식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어야 하며, 사역자들은 여기에서의 이 선지자처럼 하나님께 가서 그것을 그에게 호소할 수 있다. 이처럼 풍성한 은혜를 헛되이 받아, 그 귀한 영혼들이 가련한 못에서 멸망하게 되는 것은 얼마나 딱한 일인가! 그것은 저들이 치료되기를 원치 않기 때문이다.

Ⅱ. 그들은 그리스도의 외양이 초라한 것으로 인해 그의 인격을 멸시함(2,3절). 그들이 그의 인격에 대해 편견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교훈을 거절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세상에 있었을 때, 그가 전파하는 것을 듣고 그들이 들은 것을 시인할 수밖에 없었던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존중하거니 환대하려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매우 초라한 인물로 보이는 자에게서 나왔고 그에게 의탁해봐야 외적인 유익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음 사실을 살펴보자.

1. 그가 복종하신 천한 상태. 그리고 그가 스스로를 낮추시고 배우신 방법. 그가 세상에 들어오신 것과 그 속에서 그가 지니신 특성은 유대인들이 메시야에 대해 갖고 있던 관념이나 그에 관한 그들의 기대에 전혀 부합되지 않고 완전히 그 반대였다.

(1) 그의 혈통이 매우 위대하고 고귀하리라고 기대되었다. 그는 다윗, 즉 "세상에서 존귀한 자의 이름같은 이름을" 갖고 있는 (삼하 7:9)가문의 아들이 될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혁혁한 왕족이 쇠미하여 침체되었을 때 거기에서 나왔고 다윗의 아들로 추정되는 요셉은 가난한 목수에 불과했다. 아마도 그는 배를 만드는 자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친척들 대부분이 어부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여기에서 그가 북쪽, 갈릴리에 있는 초라하고 비천한 가문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마른땅에서 나온 줄기" 로써 나타내지고 있다. 즉, 그 곳은 메마르고 황무한 딸과 같이 푸르고 큰 것을 내리라고는 기대되어지지 않았고 이름이 나 있지 않은 곳이었으므로 거기에서는 선한 것이 하나도 나올 수 없다고 생각되었다. 그의 모친은 처녀였으므로 마른 땅 같았으나 그녀로부터, 실과일 뿐 아니라 그 줄기인 "그리스도" 가 나왔다. 돌밭에 뿌리운 씨는 뿌리를 뻗지 못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마른 땅에서 자라나셨을지라도, 그는 "다윗의 뿌리 또한 자손이니, 참감람나무의 뿌리이다.

(2) 그가 공개적으로 등장하고 장엄하고 괄목할 만한 모습으로 오리라고 기대되었다. 그러나 그러기는 커녕 그는 사람들 앞에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라났다. 하나님은 그를 주시하셨으나 사람들은 그를 눈여겨 보지 않았다. "그는 자라니기를 연한 순" 같이 조용하고 깨닫지 못하게, 그리고 아무 소리도 없이 자라났다. 곡식처럼 그 연한 순은 "어떻게 된 것을 알지 못하게" 자라났다(막 4:27). 그리스도는 연한 순으로 자라났다. 따라서 사람들은 그가 쉽게 짓밟히거나 어느 서리 내리는 밤에 시들어 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것이 시작될 때, 겨자씨 한 알처럼 매우 보잘 것 없게 보였다(마 13:31, 32).

(3)그가 얼굴이나 풍채에 있어서 어떤 특이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어 그것이 눈을 매혹하고 마음을 사로잡으며 그를 본 모든 사람들의 호감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기대되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이러한 종류의 것이 하나도 없었다. 즉, 그가 적어도 추하거나 기형으로 생겼다는 것이 아니라 그가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으며" 특출난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고운 모양과 풍채는 인간이 되신 신의 표정에서 찾아보리라고 사람들이 기대했었던 것이었다. 그를 본 자들은 그에게서 "그들이 흠모할 만한" 어떤 아름다움을 볼 수 없었다. 즉 그에게는 "남의 사랑하는 자 보다 나은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아 5:9). 모세는 태어났을 때 지극히 아름다웠고 그것은 행복한 전조로 간주될 정도였다. 다윗은 기름 부음을 받았을 때,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다웠다" (삼상 16:12). 그러나 우리 주 예수는 그러한 면에서 칭송할 만한 것이 없었다. 또한 그것은 이 세상에 나타난 그의 풍채를 가리키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 속에는 눈으로 볼 수 있는 영광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복음은 "지혜의 권하는 말로" 전파되지 아니하고 그 과제에 부합되는 있는 그대로의 꾸밈없는 말로 전파된다.

(4) 그가 즐거운 생을 살고 사람의 아들 딸들이 맛보는 모든 즐거움을 만끽할 것이며 이 모든 것은 그의 마음을 끌 것이라는 사실이 기대되었다. 그러나 그것과는 반대로, 그는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였다. 그의 마지막 장면은 비극적이었고 그 뿐 아니라 그의 전 생애가 그러했다. 비천할 뿐만 아니라 비참했다.

그러나 고생과 슬픔과 애태우는 고통의 사슬이 연속적으로 뒤따랐다.

블랙모어 경(Sir R. Blackmore)

이처럼 "우리를 위하여 죄(의 제물)가 되었" 으므로, 그는 죄가 우리에게 준 형벌, 즉 우리가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을 것" 이라는(창 3:17) 형벌을 감당하셨고,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에 대한 혹독하고 극단적인 판결을 매우 완화시켰다. 그의 형편은 여러 면에서 처참했다. 그는 정착하지 못했고 머리둘 곳이 없었으며 의연금으로 살아갔으며 방해와 위협을 당했고, "죄인들이 자기에게 거역함을 참으셨다." 그의 심령은 온유했고, 슬픔의 감정을 허용했다. 우리는 그가 웃으셨다는 것은 결코 읽은 적이 없으나 그가 우셨다는 것을 가끔 읽는다. 렌툴루스(Lentulus)는 로마 의원에게 보낸 예수에 관한 서한에서, "그는 웃는 것을 결코 보인 일이 없다" 고 말하고 있다. 그는 끊임없는 슬픔으로 인해 지치고 쇠약해졌기 때문에, 그가 삼십세가 조금 넘은 나이에 불과했을 때, 거의 오십세로 보였다(요 8:57). 슬픔은 그의 친한 친구였다. 즉 그는 다른 사람들의 슬픔을 잘 알고 계셨고 그들과 공감하셨으며 결코 그것을 경원하시지 않으셨다. 그는 변용하셨을 때, 자신의 죽음에 관해 말씀하셨고, 큰 업적을 거두셨을 때, 예루살렘에 대해 우셨다. 우리는 그를 살펴보고 애도하자.

2. 이 점에 대해 사람들은 그를 천하게 여김. 대체로, 사람이나 물건을 눈으로써 그리고 외부로 나타난 것으로 판단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그들은 그를 흠모할 만한 아름다움을 그에게서 발견하지 못했다. 그에게는 참된 아름다움, "열방의 흠모" 를 받기에 충분한 거룩한 아름다움과 선한 아름다움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 주위에서 살고 그와 대화를 나눈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아름다움은 하나도 보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영적으로 분별되었기 때문이다. 세상적인 마음은 주 예수에게서 어떤 훌륭함도 발견하지 못하며 그와 사귀거나 관계를 갖고자하는 열망을 불러일으킬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찾지 못한다. 아니, 그는 흠모를 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다." 그는 버림당하고 혐오를 받았으며 사람들의 비방의 대상, 천한 사람, 사람들이 친구로 삼기를 부끄러워하고 귀히 여기지도 아니한 벌레였고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천한 자로서 멸시를 당하였고 나쁜 사람으로 거부당했다. 그는 건축자들이 거절한 돌이었다. 즉 그들은 그가 그들을 통치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사람들은 좀더 사물을 바로 이해해야 했고, 비참한 상태에 있는 사람을 짓밟지 말고 잘 배려했어야 했으나,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찾아오신 자를 그들은 거부했다. "우리는 마치 그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는 자같이 그를 외면했고 그의 고난을 하찮게 여겼다. 그의 고난처럼 괴로운 고난은 없었다. 아니, 우리는 그에게 관심을 갖고 있지 않는 듯이, 그리고 그를 싫어하고 혐오하는 듯이 행동했다."

그것은 이렇게 해석될 수도 있다. "그는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같이 그의 위엄의 영광을 감추었고 그것을 베일로 덮었다. 따라서 우리가 베일을 통해 볼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다." 그리스도는 사람들이 죄로써 하나님의 명예를 훼손한 것에 대해, 하나님의 의에 사죄하시고자 했을 때(하나님은 그의 영예 이외에는 손상을 입을실 것이 없다), 그의 성육신에 합당한 영광을 자기 자신에게서 벗기심으로써, 뿐만 아니라 가장 나쁜 자들과 악인들에게 주어질 모욕에 자기 자신을 복종시키심으로써 그것을 행하셨다. 그리고 이처럼 스스로를 비천하게 함으로써 그의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셨다. 이것이, 우리가 그를 귀히 여겨야 할, 그리고 그를 영예롭게 할 방법을 연구해야 하는 좋은 이유다. 사람들이 거부한 그를 우리가 영접하자.

 

53:2 없음.

 

53:3 없음.

 

53:4

메시야의 굴욕(3) (이사야 53:4-9)

본문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알 수 있다.

Ⅰ.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상세한 설명. 그리스도께서 능욕을 당하시고 스스로 천하게 되시며 심지어는 십자가의 죽음에도 복종하시게 된다는 그 매우 처참한 상태에 관해 앞에서 많은 것이 언급되었으나 여기에서 더 많은 것이 언급되어 있다.

1. 그는 질고와 슬픔을 당하셨다. 그것에 익숙하셨기 때문에, 그는 그것과의 친분을 계속 지키셨고 그처럼 우울한 친분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셨다. 질고와 슬픔이 그에게 할당되어 있었는가? 그는 그것들을 담당하셨고 그의 운명을 탓하지 않으셨다. 그는 그것들을 감당하셨고 그것들을 피해 움추리거나 그 밑에 쓰러지지 않으셨다. 짐은 무겁고 길은 멀었지만, 그는 지치지 않고 끝까지 참고 나가 마침내 "다 이루었다" 고 말씀하셨다.

2. 그는 매를 맞아 상처를 입으셨다. 그는 "징벌을 받고 맞으며 고난을 당하셨다." 그의 슬픔이 그를 멍들게 했다. 그는 그것으로부터 고통을 느끼셨고 징벌받으셨다. 그들은 그의 가장 약한 부분을 건드렸다 특히 십자가 상에서 하나님이 모욕당하셨을 때, 그리고 하나님이 그를 버리셨을 때 그러했다. 그는 트집당하고 반박당하셨을 때, 최악의 인물로 낙인찍히고 온갖 종류의 악평을 받으셨을 때, 줄곧 혀로 맞으셨다. 마지막에는 잇달아 손으로 맞으셨다.

3. 그는 매질당하고 상처입으셨다. 그는 가장 나쁜 악인에게도 사십대 이상의 매를 허용치 않았던 유대인의 자비로운 율법의 제한 하에 채찍질당한 것이 아니라 로마 사람들의 관례대로 맞으셨던 것이다. 그리고 그가 당하신 채찍질은 빌라도가 그를 십자가에 못박는 것과 대등한 것으로 만들려 했기 때문에 의심할 것도 없이 보다 더 가혹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상처 입음의 서막임이 입증되었다. 그는 손과 발과 옆구리가 상처를 입으셨다. 비록 그의 뼈가 하나도 꺾여져서는 안 된다고 명령이 내렸지만, 그는 몸의 어느 부분도 거의 성하지 않았고(우리가 그를 위해 고난을 받도록 부름을 받을 때에도, 모두가 잠든 상태에 있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가시 면류관이 씌워졌던 그의 머리 정수리부터 발바닥까지 상처와 멍이 없는 곳이 없었다.

4. 그는 부당한 취급을 받았고 능욕당하셨다(7절). "그가 곤욕을 당하셨다." 불법적이고도 가혹한 대우를 받으셨다. 그는 그가 완전히 무죄하셨던 일로 책망당하셨고 온당치 않은 문책을 당하셨으며 그 속에서 그는 곤욕을 당하시고 해를 입으셨다. 그는 마음과 몸으로 "괴로우셨다." 괴로움을 당하셨을 때, 그는 그것을 기억하셨다. 그리고 비록 참고 계셨을지라도, 그 속에서 우둔해지시지 않았고 학대받는 자 즉, "저희를 대하는 자의 손에 권세가 있기" 때문에 위로자가 없는(전 4:1) 사람들과 함께 눈물을 흘리셨다. 학대는 쓰라린 고통이다. 그것은 많은 지혜자들을 우매하게 했다(전 7:7). 그러나 우리 주 예수는, 학대당하셨을 때 괴로워하셨을지라도 자신의 영혼을 지키셨다.

5.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다" 는 말로 시사되어 있듯이(8절). 그는 재판을 받고 감금되셨다. 하나님은 그에 대해 고소를 제출하셨고 그 고소에 준하여 그를 재판하셨고 그 문에 돌을 굴려 봉해 놓은 무덤에 그를 감금하셨다.

6. 그는 비록 매우 유효한 삶을 살았고 매우 선한 일을 많이 행하셨을지라도, 불시의 사망에 의해 "산 자의 땅에서 끊어졌다." 그리고 그의 행적들은 군중들이 그에게 돌을던진 이유로 생각되는 것이 전부였다. 그는 사망의 엄습을 당하시어 "악인과 함께" (왜냐하면 그는 두 강도 사이에서 십자가가 못박히시어 마치 그가 셋 중에서 가장 악한 자처럼 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자와 함께" (왜냐하면, 그는 존경받는 상담자, 요셉에게 속한 묘실에 장사되셨기 때문이다) 무덤에 안치되셨다. 비록 악인과 함께 죽으시고 범인들을 다루는 일반적인 과정대로 그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 장소에서 그들과 함께 장사되어야 했을지라도, 하나님은 그가 고난을 당하는 중에서도 그와 정말 죽어야 마땅한 자들 사이를 구분하는 표적으로써, 그가 무죄한 자와, 부자와 함께 무덤에 있으리라는 사실을 예고하셨고 하나님의 섭리도 그렇게 지시했다.

Ⅱ. 그의 고난의 의미에 대한 충분한 설명. 그처럼 탁월한 사람이 이러한 고역을 당하게 되리라는 것은 매우 큰 신비였다. 그리고 놀라면서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는가? 그가 어떤 악을 행했는가?" 하고 묻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의 원수들은 실지로 그를 그의 범죄로 인해 마땅히 고난받는 것으로 간주했다. 그리고 비록 그들이 그를 책잡을 만한 것을 제시하지 못했을지라도, 그들은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다" (4절). 그들은 그를 미워하고 핍박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고 생각했다. 즉, 하나님께서 그를 원수로 여기시고 그와 싸우신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더욱 그에게 분노하면서 "하나님이 저를 버리셨은즉 따라 잡으라" 고 말했다(시 71:11). 정당하게 맞는 자들은 하나님에게 맞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에 의해 방백들이 정의를 선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가 맞는 것은, 불경스러운 자, 속이는 자, 시저의 대적으로써 마땅히 사형에 처해지는 것이라고 간주했다. 그가 십자가에 달려 있는 것을 본자들은 그의 사유의 진상을 묻지 않고, 그가 문책당할 만한 죄를 범했고, 그러므로 그가 살아남지 못하는 보복을 당한다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이처럼 욥의 친구들은 욥의 고난 속에 어떤 특이한 죄가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맞는 것으로 여겼다. 그가 "하나님에게 맞았다" 는 것은(또는 혹자의 해석대로 비록 징벌받고 고난받았으나, 그는 하나님의 징벌받고 고난당한 자", 곧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사실이나, 그것은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그런 의미의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 모든 고난을 겪으셨을지라도,

1. 그는 가혹한 대우를 받을 만한 일은 조금도 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는 민족을 그르치고 소요를 일으켰다는 것으로 문책당하셨으나, 그것은 아주 무근한 것이었다. 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셨고" 선을 행하고 다니셨다. 그리고 그는 "궤휼 자" 라 지칭 받았으나, 결코 그러한 평을 받을 만한 일은 행하지 않으셨다. 즉 그 입에 궤사가 없으셨던 것이다(9절). 사도는 이러한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벧전 2:22).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다." 그는 말과 행위로 결코 남을 불쾌하게 하지 않으셨고 그의 대적들 중 그 누구도 "너희 중 누가 내게서 죄를 발견했느냐?" 라는 그의 말씀에 도전할 수도 없었다. 그에게 선고를 내린 재판관은 그에게서 책잡을 것을 발견치 못했음을 시인했고 그를 처형한 백부장은 분명히 그가 의인이셨다는 것을 고백했다.

2. 그는 고난을 겪으시면서, 그가 행악자로서 고난받으시지 않았다는 것을 나타내실 정도로 처신하셨다. 비록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다(7절). 아니, 그는 자신의 무죄함을 탄원하지 않고 값없이 자기 자신을 내어 주어 우리를 위해 고난당하고 죽으시려 했으며 아무런 이의도 제의하지 않으셨다. 그가 위대하고 거룩한 목적을 위해 자발적으로 고난에 복종하셨다는 사실은 십자가의 치욕을 제거하고 있다. 그는 지혜로써 그 판결을 피하실 수 있었고 그의 능력으로써 그 사형 집행에 저항하실 수도 있었다. 그러나 "기록되었으므로, 그는 그대로 고난을 받아야 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이 명령을 받았다." 따라서 그는 항의나 불만 없이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끌려가셨다(그는 "하나님의 양" 이시다). 그리고 "털깎는 자 앞에" 아니, "도살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다." 이것은 그가 고통 아래서 모범적으로 참으셨던 것(시 39:9)과 비방 아래서도 온유함을 지키셨던 것(시 38:13) 뿐만 아니라, 그가 그 아버지 뜻에 기꺼이 응하신 것을 시사하고 있다.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보소서, 여기 있나이다." 이 뜻에 의해 즉, 그가 우리의 죄를 위해 그의 영혼, 그의 생명을 바치신 것에 의해 우리가 성별케 된다.

3.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당하신 것은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이었고, 우리를 대신한 것이었다. 이러한 사실이 여기에서 분명하고도 충분하게 그리고 매우 다양하게 사용된 강조적인 표현으로써 나타나 있다.

(1)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모두 유죄라는 것은 틀림없다. 우리는 모두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6절). "우리는 다 양 같아서" 누구나 일반적으로 "그릇 행하였다." 인류의 모든 종족은 최초의 타락의 오점 아래 있으며 각 사람들은 여러 가지 사실 죄로 문책받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정당한 주인인 하나님께 그릇 행하였고, 그가 우리에 대해 계획하신 목적과 우리에게 정하신 방법에서 떠났다. 우리는 양같이 그릇 행했다. 양들은 방황하는 경향이 있으며, 그릇 행했을 때는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데에 익숙치 못한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진정한 성품이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뒷걸음치려는 경향이 있으나 우리 자신이 그에게로 돌아올 능력은 전혀 없다. 이것은 우리의 불행(우리가 푸른 초장을 벗어나 맹수들의 공격을 받게 되는 것)으로써 뿐만 아니라 우리의 죄악으로써 언급되어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벗어남으로써 그를 모욕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각기 제 갈길로 감으로써 하나님과 그의 뜻에 겨루어 우리 자신과 우리의 뜻을 세우기 때문인데 이것이 바로 죄의 악한 특성인 것이다. 하나님의 길을 순종으로 행하는 대신, 우리는 고의적으로 그리고 완고하게 돌아서서 우리의 길로, 우리 마음의 길로, 우리의 타락한 욕구와 감정이 인도하는 길로 행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세워 우리의 주인, 우리 자신의 조각가가 되게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뜻한 것을 행하며 우리가 원하는 것을 소유한다. 혹자는 그것을 다른 사람들의 악한 길과 구별하여 우리 자신의 악한 길을 시사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죄인들은 그들의 죄악, 그들이 사랑하는 죄를 갖고 있다. 그런데 이것은 그들을 매우 쉽게 습격하여 그들은 그들의 악한 길을 특히 좋아하며 그 속에서 자신들의 복을 빈다.

(2) 우리의 죄는 우리의 슬픔이며 질고이다(4절). 또는 "우리의 병과 상처로" 해석될 수도 있다. 칠십인역은 그것을" 우리의 죄로" 해석하고 있으며, 사도도 그렇게 보고 있다(벧전 2:24). 우리의 최초의 타락은 영혼의 아픔과 병, 고질병이다. 우리의 현행죄는 영혼의 상처인데, 만일 양심이 무디어져서 무감각하게 되지 않는다면, 그것이 양심을 고통스럽게 할 것이다. 또는 우리의 죄는 "근심과 슬픔" 이라 칭해진다. 우리의 모든 근심과 슬픔은 우리의 죄에 기인하며 우리의 죄는 모든 근심과 슬픔, 심지어는 매우 극단적이고 영원한 근심과 슬픔들을 받을만 하기 때문이다.

(3) 우리 주 예수는 우리 죄를 속죄하시고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를 죄의 형벌의 결과로부터 구원하도록 지정되셨고 또 그 일들을 착수하셨다.

[1] 그는 그의 아버지의 뜻에 의해, 그것을 행하도록 지명되었다. 즉, "여호와께서 우리의 모든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하나님은 그를 택하시어 불쌍한 죄인들의 구주가 되게 하셨고 그로 하여금 이 방법으로 그들의 죄와 그 형벌을 감당하심으로써 그들을 구원케 만드시고자 했다. 그것은 우리가 겪었어야 하는 것과idem----즉 같은 것이 아니고 tantundem----세상을 통치하는 하나님의 거룩함과 공익의 존엄을 유지하는 데에 대등되는 것 이상의 것이었다. 여기에서 다음 사실을 살펴보자.

첫째, 어떤 방법으로 우리는 우리가 죄로 인해 겪어야 할 멸망으로부터 구원되는가? 그것은 제물을 바치는 자의 죄가 그 제물 위에 그리고 모든 이스라엘의 죄가 속죄를 위한 엄소의 머리 위에 부과되었던 것같이, 우리의 죄를 그리스도께 놓음으로써이다. 우리의 죄는(난외에 있듯이) "그에게서 만나도록" 되었다. 즉, 그가 각 장소와 각 세대에서 구원하셔야 했던 모든 사람들의 죄가 그에게서 마주쳤고 그는 그것들을 경험하시게 되었다. 그들은 그를 잡기 위해 검과 몽치를 갖고 그를 돌격한 자들처럼(혹자의 해석대로) 그를 습격하게 되었다. 우리의 죄를 그리스도께 짐지우는 것은 죄를 우리에게서 제거하는 것을 암시한다. 우리가 만일 복음의 은혜에 복종한다면 율법의 저주 아래 놓이지 않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한 죄(즉, 속죄를 위한 제물)가 되시고,"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으심" 으로써 율법에 저주에서 우리를 구속하셨을 때, 우리의 모든 죄악은 그리스도께 놓여졌다. 이처럼 그는 죄짐에 무겁게 눌려 그에게로 오는 자들을 편하게 만들 수 있는 역량을 지니고 계셨다(시 40:6-12 참조).

둘째, 누구에 의해 이것이 정해졌는가? 그것은 그리스도로 하여금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게 하신 여호와였다. 그가 이러한 화해와 구원의 방법을 고안해 내셨고 그리스도가 이루셔야 했던 그 대속을 받아들이셨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단호한 뜻과 예지에 의해서" 사망에게 넘겨졌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죄를 그리스도가 지게 하실 권세를 갖고 계셨다. 그것은, 죄가 그를 거슬러 범해졌고 그에게 대해 또한 속죄가 이루어져야 했기 때문이며, 죄악을 담당해야 할 그리스도는 그의 아들 즉, 그의 사랑하는 아들이며, 무죄하신 그의 거룩한 자손 예수였기 때문이다.

세째, 누구를 위해 이 속죄가 행해져야 했었는가? 그리스도께서 지신 것은 "우리 모두의 죄" (의 대속물)였다. 그리스도에게는 모든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 공로가 충분히 있으며, 그에게는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한 진정한 예물이 있다. 그 예물을 스스로 배척하지 않는 자들은 아무도 물리치지 않는다. 그것은 이것만이 구원의 유일한 길임을 암시한다. 의롭게 되는 모든 자들은 그들의 죄를 그리스도께 둠으로써 의롭게 되며, 비록 그가 죄가 아무리 많더라도, 그리스도는 그 모든 짐을 감당하실 수 있다.



[2] 그는 우리를 구속하는 일에 착수하셨다. 하나님은 그에게 우리 죄악을 부과하셨다. 그러나 그가 그것을 승락하셨는가 그렇다. 승락하셨다. 혹자는 다음 말(7절)의 참된 풀이는, 그것이 강요되었고 그는 응하셨다고 생각하고 있다. 즉 거룩한 공의가 우리 죄의 속죄를 요구했고 그 모든 속죄를 이루는 일에 전념하셨다. 그는 처음부터 우리에게 속박된 자로서가 아니라 그 행위를 맡으신 자로서 우리의 보증이 되셨다. "나의 아버지여 내게 그 저주를 내리소서." 그러므로 그는 잡히셨을 때, 그가 스스로 그 손에 항복하셨던 자들에게, 이것이 그의 제자들을 놓아주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조건을 내놓으셨다.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의 가는 것을 용납하라" (요 18:8). 그는 자발적으로 우리의 빚을 지불하시는 일을 담당하셨으며, 그가 그 책임을 지셨다는 것은 우리에게 퍽 좋은 일이다. 이리하여 "그는 자기가 취하지 않은 것도 물어주게 되었다."

(4) 우리의 빚을 담당하셨기 때문에, 그는 그 형벌을 받으셨다. 솔로몬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타인을 위하여 보증인이 되어지는 그것 때문에 손해를 본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보증인이 되셨기 때문에 그런 징벌을 당하셨다.

[1] "그는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다" (4절). 그는 죄를 들여온 인간 성품의 공통적인 연약함과 인생의 공통적인 재앙에 복종하셨을 뿐만 아니라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도다" 고 말씀하셨을 때, 극심한 슬픔을 겪으셨다. 그는 이 때의 슬픔을 그 자신에게 무겁게 만드심으로써 우리의 슬픔을 가볍고 쉽게 만드시려 하셨다. 죄는 고통과 비참함 속에 있는 쓴쑥과 담즙이다. 그리스도는 우리 죄를 담당하셨고 그렇게 하여 "우리 슬픔을 담당하셨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에게 힘겨웁지 않게 하기 위해 우리에게서 거두어 가셨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고침을 받기 위해 그에게 온 병자를 불쌍히 여기신 것과 그가 그들을 고치시는 능력을 발휘하신 사실에 적용시켜 인용되어 있다(마 8:17).

[2] 그는 우리 죄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이것을 행하셨다(5절).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것을 속죄하시고 우리를 위해 용서를 얻기 위함이다. 우리 죄는 그의 머리의 가시였고 그 손과 발의 못이었으며 그 옆구리의 창이었다. 상처와 멍은 죄의 결과로써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했고 또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초래했던 것이었다(1:6). 이 상처와 멍은 비록 아플지라도 치명적인 것은 아닐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었다." 우리의 반란과 반항으로 인해 괴로움을 당하셨거나 고통을 겪으셨다(이 단어는 진통 중에 있는 여인의 고통에 사용된다). "그가 상함은" 또는 짓이겨지심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것이 그의 죽음을 초래한 원인이었다. "그가" 우리가 받아야할 "징벌을 받고 고난을 당함은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는 8절의 내용도, 이와 같은 취지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혹자는 그것을 이렇게 해석하고 있다. "그가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그는 우리 범죄함을 인하여" 사망에게 "내어 줌이되었다" (롬 4:25). 그러므로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죄를 위하여 죽으셨다" 는 이 셩경대로 이루어진것으로 언급되어 있다(고전 15:3). 혹자는 이것을 "내 백성의 범죄함에 의해" 죽으신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즉 신앙 고백상으로는 하나님의 백성이었던 유대인들의 악한 손에 의해 그가 징벌을 받으셨고 못박혀 죽으셨다(행 2:23). 그러나, 의심할 것도 없이, 우리는 그것을 옛날의 의미로 해석해야 하는데, 그것은 메시야의 과업에 대한 천사의 예언에 의해 즉, 그가 "허물을 마치며 죄가 끝나게 하며 화목이 영속되게 하리라" 는 다니엘에게 엄숙히 전달된 말에 의해 충분히 확증되고 있다(단 9:4).

(5) 우리에게 주어지는 결과는 우리의 평화와 나음이다(5절).

[1] 이것으로써 우리는 평화를 얻는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렸도다." 그는 이 징계에 복종함으로써 하나님과 사람간의 반목을 없애고 친목을 이루어 놓으셨다. 그는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셨다." 죄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혐오스러운 존재가 되고 그의 공의에 불쾌한 존재가 되었지만,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와 화해하시고 우리의 죄를 사하시어 우리를 멸망에서 구원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그와의 우정과 친교에 끌어들이시고 그렇게 함으로써 "화평(즉, 모든 선)이 우리에게 임한다" (골 1:20).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자라" (엡 2:14). 그리스도는 우리를 편안케 하시기 위해 고통을 겪으셨다. 그는 우리가 마음에 만족을 얻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가 사함받는다는 것을 알아 기뻐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셨다.

[2] 이것으로써 우리는 나음을 입는다. 즉,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 죄(sin)는 범죄(crime)이다. 그것 때문에 우리가 사형을 언도받았고 우리를 위해 그 용서함을 사셨다. 뿐만 아니라 죄는 병이다. 그것은 직접적으로 우리 영혼의 사망으로 향하며 그리스도께서 그 치료를 마련해 주셨다. 그가 채찍을 맞음으로(즉 고난을 겪음으로) 우리를 위해 성령과 하나님의 은혜를 사 주셨다. 그리하여 그는 우리 영혼의 병인 우리의 타락을 제어하셨고 우리의 영혼이 건강한 상태에 있도록 하시어 하나님을 섬기기에 합당하고 그를 즐거워할 수 있게 해 주셨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교리로써 또한 우리가 죄를 대적할 수 있도록 강력한 논증을 제공해 주심으로써 죄악의 주권은 우리 안에서 꺾여지며 우리는 죄를 양육시키는 것에 대해 저항력을 갖게 된다.

(6) 그리스도에 대해 이 결과는 그의 부활이었고 영원한 존귀에로의 진행이었다. 그것은 십자가의 모욕을 영구히 중단시킨다. 그는 제물로써, 양으로써, 자기 자신을 내어 주어 죽게 하셨으며 그가 스스로 바친 제물이 용납하심을 얻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하셨다. 이것에 관해 우리는 8절에서 읽을 수 있다.

[1] 그는 석방되셨다. "그가 감옥과 심판에서 풀려났도다." 그는 재판이 진행 중에 있을 때 음부에 갇혀 있었고 우리 빚으로 인해 구금되어 있었으며 심판이 그에게 불리한 듯이 보였으나, 그는 하늘로부터의 특별한 지시에 의해 음부의 감옥에서 꺼내어지셨다. 천사가 돌을 굴려 그를 자유롭게 하기 위해 일부러 보내어졌고 그에게 내려진 심판은 그것으로써 취소되었다. 이것은 그의 영예에 뿐만 아니라 우리의 위로에 이바지한다. 즉 그는 "우리의 허물을 인하여 넘겨졌으므로," 그가 "다시 사심은 우리의 의를 위해서" 이다. 보석금의 지불로 빚진 자가 석방되었다.

[2] 그는 발탁되셨다. "누가 그의 세대를 선언하리요?" (우리 성경과 다소 다름, 8절----역주) 즉 누가 그의 "나이" 혹은 "존속 기간" (이것이 문자적 의미이다) 곧 그의 생애의 기간을 말할 수 있으리요? 그는 부활하사 "다시는 죽지 않으신다." "사망이 더 이상 그를 다스리지 못한다." "죽으셨던" 자가 "이제 살아 있다." 그리고 "영원토록 사신다." 누가 그의 부활로 얻은 불멸성을 설명하며, 그의 연한을 헤아릴 수 있으리요? 그는 자기 백성들의 죄악으로 인해 사망에 복종하셨기 때문에, 이제는 영생에 이르렀다. 우리는 다윗이 "자기 세대를 섬겼다" 라고 말했듯이, 이 말씀은 그의 유용한 시기를 시사하며 그의 생애의 목적에 부합한 것을 시사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사망과 부활로써 세상에 주신 축복이 얼마나 큰지 누가 묘사할 수 있으리요?

혹자는 "그 세대" 라는 단어를 그리스도의 영적 자손으로 풀이하고 있다. 복음에 의해 그의 자손이 될 개종자들의 아침 이슬처럼 많은 수를 누가 셀 수 있겠는가?

이처럼 높이 들리우실 때,

그가 그의 무수한 믿음의 양자들을 보게 되리라.

성스러운 종족이 하늘의 높은 아아치를 아름답게 하는

별들을 능가하도다.

블랙모어 경(Sir R Blackmore)

모세가 이스라엘을 위해 했던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도의? 세대를 위해 이렇게 기도하자. "우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현재보다 천 배나 많게 하시며 너희에게 허락하신 것과 같이 복주시기를 원하노라" (신 1:11)

 

53:5 없음.

 

53:6 없음.

 

53:7 없음.

 

53:8 없음.

 

53:9 없음.

 

53:10

메시야의 굴욕(4) (이사야 53:10-12)

앞절에서 이 선지자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해, 그 행복한 결과에 대한 약간의 암시를 섞으면서, 매우 상세히 증언했었다. 여기에서 그는 다시 그의 고난을 언급하고 있으나 거기에 따를 영광을 자세히 예언하고 있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살펴 볼 수 있다.

Ⅰ. 그리스도의 굴욕의 공로와 그 고난. 그가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를 와서 보라. 그가 우리를 위해 행하신 것을 보라.

1. 그는 하늘의 찌푸리심에 복종했다(10절).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고통을, 또는 고문을 또는 "질고를 당케 하셨다." 그리스도께서 고난 중에 하나님의 진노를 만났다는 사실은 성령 어느 곳에도 적혀 있지 않고 다음과 같은 사실이 여기에 적혀 있다.

(1)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셨다. 즉, 사람들로 하여금 그를 상하게 하도록 허락하셨을 뿐만 아니라 칼로 깨어서 그를 치도록 하셨다(슥 13:7). 그들은 그가 자기의 어떤 매우 큰 죄로 인해 하나님께 맞는 것으로 알았다(4절). 그러나 그가 하나님께 맞은 것은 사실이었으나 그것은 우리의 죄 때문이었다. 여호와께서 그를 상하게 하셨다. 즉 그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셨다" (롬 8:32). 쓴 잔을 그의 손에 두시고 그로 우리의 죄를 담당케하여 그것을 부득이 마시게 하신 것은(요 18:11) 하나님이셨다. 그로 하여금 우리를 대신하여 죄와 저주가 되게 하시고 그의 모든 번제를 받아들이셨다는 표정으로 그것을 모두 재가 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이셨다(시 20:3).

(2) 여호와께서는 그가 질고를 당케 하실 정도로 상함을 받게 하셨다. 그리스도는 이 섭리에 손수 응하셨고 그의 아버지께서 그를 내어 주시는 일에서 마음의 상함을 입으셨다. 그리고 그는 고민하실 정도로 고통을 당하셨고 놀라며 슬퍼하셨다.

(3) 이것은 여호와께서 원하시어 그렇게 하기로 결정하신 것이었다. 그것은 영원하신 계획의 결과였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기뻐하셨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의 구원에 대한, 그리고 하나님의 영예를 보존시키고 향상케 하는 것에 대한 효과적인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2. 그는 제물로써 죄인의 자리에 그 자신을 대치시키셨다. 그는 "자기 영혼을 속죄물로 삼았다." 그리스도 자신은 이 말들을, 자기는 "자기의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셨다" 고 설명하고 있다(마 20:28). 사람들은 속건제물로써 수소와 수염소를 가져왔을 때, 그것들을 바쳤다. 즉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사람의 발 아래 두셨으므로 상호 관여되여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자기 자신을 제물로 만드셨다. 그것은 그 자신의 행동이며 행위였다. 우리는 우리 대신에 그를 둘 수 없었으나 그는 자기 자신을 두셨으며,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다윗이 말했던, 또는 말할 수 있었던 것 보다 더 높은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아버지여, 내 영혼을 맡기나이다. 내가 이것을 당신의 손에 제물의 생명과 사유의 값으로써 맡기나이다." 이처럼 그는 그가 의롭게 하시기로 예정하신 많은 사람들의 죄악을 담당하실 것이며(11절) 세상죄를 지심으로써 그것을 제거하실 것이다(요 1:29). 이것이 다시 언급되어 있다(12절).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셨다." 만일 그들이 그것을 자기 자신이 졌다면, 그들은 가장 낮은 음부로 빠져버렸을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강조되어 있는가를 보라.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할 때마다 우리는 그 속에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는 그를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3. 그는 우리에게 죄의 산이 되어 주심에 친히 복종하셨다(12절). 그는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였다. 그가 영혼을 마치 물을 버리듯이 거의 중요시하지 않고 그것을 버리심은 우리의 구속과 구원을 위한 지정된 방법이었다. 그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사랑치 아니하셨으며," 그의 추종자들, 순교자들도 그렇게 했다(계 12:11). 아니 오히려, 그는 그것을 전제처럼 쏟아 놓으시어 그의 제물을 완전케 하셨다. 그것을 포도주처럼 쏟아 놓으시어, 그의 살이 믿는 모든 자들에게 진정한 음식이 되는 것처럼, 그의 피가 진정 마시워질 수 있게 하셨다. 그의 고난 속에는 그 몸 전체가 총 동참했을 뿐만 아니라(시 22:14 "나는 물같이 쏟아졌도다). 그의 영혼의 항복이 있었다. 그가 그것을 사망에게까지 쏟아 놓으셨다. 그러나 그는 생명의 주(主)이신 것이다.

4. 그는 죄인들과 맞먹을 정도로 친히 고난을 당하셨으니 죄인들을 위한 중보자로 그 자신을 바치셨다(12절).

(1) 그가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다" 는 것은, 그의 고난을 더욱 심하게 했다. 그가 범인으로써 정죄받았을 뿐만 아니라 유명한 두 범죄자와 함께 처형당하셨고 마치 그가 셋 중에 가장 악한자인 것처럼 그 가운데 있었다는 것은 그 고난을 더욱 심하게 했다. 그런데 복음서 저자는, 그가 고난당하는 상황 속에서 이 예언이 이루어졌다고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다(막 15:27, 28). 아니, 누구보다 가장 극악한 범죄자였던 자 곧, 반역자이며, 강도이며 살인자였던 바라바가 백성들의 호의를 놓고 그리스도와 겨루었고 용서받는 자로 선택되었다. 즉 그들은 예수가 아닌 바라바를 풀어놓아 주고자 했던 것이다. 그의 온 생애를 통해, 그는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으셨다. 왜냐하면, 그는 안식일을 범한 지, 술취한 자, 그리고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로 불리웠고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2) 그가 고난 중에서 "범죄자를 위하여," 그를 욕하고 십자가에 못박은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셨다" 는 것은 그의 고난의 큰 찬사였고 그의 영예에 매우 크게 이바지했다. 즉, 그는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하고 기도하셨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가 그들을 용서하셨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그가 그들을 용서하시는 전제하에서 지금 행동하고 계시며, 다른 모든 범죄자들도 용사함 받으리라는 사실이 발견되리라는 것을 보여 주셨다. 그 기도는 보복이 아닌 긍휼을 부르짖는 그의 피맺힌 말씀이었다. 그리고 그 점에서 그것은 악한 손으로 피를 흘린 자들을 위해, 아벨의 사건보다 더 좋은 것을 말해 주고 있다.

Ⅱ. 그가 높이 들어 올려지신 상태에서 얻은 은혜와 영광. 그가 우리에게 부여하신 은혜는 그에게 부여된 영광 중에 가장 적은 것은 아니다. 이것은 구속의 언약에 의해 그에게 다짐되어 있으며 그 구절들은 그것에 대한 일말의 암시를 우리에게 주고 있다. 그는 그의 영혼을 속건 제물로 드리실 것을 약속하고 있으며 아버지께서 그를 창세 전부터 하나님으로써 그가 누린 영광으로써 뿐만 아니라(요 12:5) 중보자의 영공으로써 영화롭게 하시겠다는 그 약속을 감안하여, 아버지께서 그를 넘겨주고 그도 많은 사람의 죄를 지게 하실 일에 동의하고 계신다.

1. 그가 영존하신 아버지의 영광을 누릴 것이다. 이러한 자격하에, 그가 "세상에 오셨다" (9:6). 그리고 그는 세상을 떠나실 때, 그 자격에 응하시는 데에 실패하지 않으실 것이다. "많은 민족의 조상" 이 되고 그렇게 하여 "세상의 후사" 가 되리라는(롬 4:13, 17) 약속이 아브라함에게 주어졌다(이 점에서 그는 그리스도의 모형이었다). 그가 유대 교회의 뿌리였고 언약이 그와 그의 자손에게 주어진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는 전 세계 교회의 뿌리이며 그와 그의 영적인 자손에게 은혜의 언약이 주어지는데, 이것은 구속의 언약에 근거하고 있고 결합되어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것에 대한 은혜로운 약속의 일부를 알 수 있다 즉,



(1) 그 구속자는 그를 봉사하고 그의 이름을 전할 후손을 얻게 될 것이다(시 22:30). 참되게 믿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후손이다. 아버지께서 그들이 그에게 그렇게 되도록 하셨다(요 12:6). 그가 죽으심으로써 그들을 사서 깨끗케 하셨고, 한 알의 밀알로써 땅에 떨어짐으로써 "많은 열매를 맺으셨다" (요 12:24). 그 말씀 곧 다시 소생하게 되는 썩지 않는 씨는 그의 말씀이다. 성령 곧 그들의 개심의 위대한 장본인은 그의 성령이시다. 그리고 그들에게 새겨지는 것은 그의 형상이다.

(2) 그가 살아서 그 씨를 보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자녀들은 살아계신 아버지를 갖고 있다. 그리고 그가 살아계시므로 그들도 또한 살 것이다. 그가 그들의 생명이시기 때문이다. 비록 그는 죽었을지라도, 다시 살아나셨으며 그의 자녀들은 고아와 같이 내버려두지 아니하고 그들이 영과 축복과 아들의 기업을 견고히 지킬 수 있도록 충분히 돌보셨다. 그는 그들이 크게 번성한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여기에 쓰인 단어는 복수이다. "그가 그 씨들(his seeds)을," 그들의 무리를, 곧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자들을 "보게 될 것이다."

(3) 그가 친히 이 무수한 가졸들의 형편을 계속 돌보실 것이다. "그 날이 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자손들, 그들의 손자들을 보았을 때, 평안히 헤어지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의 가족들을 돌보시는 일을 다른 누구에게 맡기시지 않을 것이다. 그는 오래 사실 것이며, "그의 정사(政事)와 평강의 증가가 끝이 없으리라." 그가 언제나 살아계시기 때문이다.

혹자는 이것을 믿는 자들에게 관련시키고 있다. "그가 그날이 긴 그 씨를 보게 될 것이다." 이것이 시편 89편 29, 36절 곧 "그 후손이 장구하리라" 는 내용과 일치하고 있다. 세상이 있는 한, 그리스도는 그 위에 교회를 가지실 것이며 그 자신이 그것의 생명이 되실 것이다.



(4) 그의 큰 과업은 성공할 것이며 기대에 응할 것이다.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하나님의 목적이 성취될 것이며 그것 중 한 획이나 티끌도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1] 사람의 구속 사업은 주 예수의 손에 있으며 그것은 선한 손 안에 있다. 그것이 그의 손 안에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다행스러운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의 손이 우리에게 충분치 않으나 그는 끝까지 구원할 능력이 있으시기 때문이다. 그것은 모든 것들을 부국하시는 그의 손 안에 있다.

[2] 그것은 여호와의 선한 즐거움이다. 이것은 그것에 관한 그의 계획뿐만 아니라 그 속에 있는 그의 만족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그가 양들을 위해 자기 생명을 내어 주셨으므로 그를 사랑하셨고 그를 매우 기뻐하셨다.

[3] 그것은 그 길에 어떤 장애나 어려움이 있더라도 여지껏 형통했으며 앞으로도 형통할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실 것이다(46:10). 그리스도의 모형인 고레스는 하나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할 것이며(44:28) 따라서 틀림없이 그리스도도 성취하실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사업에 매우 완전한 자격을 갖추고 계셨고 그것을 매우 힘차게 수행하셨고 그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매우 잘 고안되어졌으므로 그것은 그의 아버지의 영예와 그의 모든 자손의 구원을 위해, 형통치 않을 수가 없었다.

(5) 그는 그 속에서 풍성한 만족을 얻을 것이다(11절).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다." 그가 그것을 미리 볼 것이다(그것은 그렇게 해석될 수 있다). 그가 그의 고난을 예상함과 동시에 그 얼마를 전망할 것이며 그 거래 조건에 만족할 것이다. 그것이 불쌍한 죄인들의 개종과 구원 속에서 성취될 때, 그가 그것을 볼 것이다.

[1] 우리 주 예수는 우리 구속과 구원을 위해 영혼이 심히 고통스러우셨으나 건지우게 되리라는 그리고 그가 겪으시는 모든 고통과 고민이 그것을 위한 것이며 그것을 촉진시키리라는 열렬한 소망을 품고 계셨다.

[2] 그리스도는 그의 교회의 창립과 그에게 주어진 모든 사람들의 영원한 구원 속에서 그의 영혼의 수고의 복된 열매를 보시며 또 보게 되실 것이다. 그는 어떤 일에 있어서도 그 목적에 못 미치는 일이 없을 것이며 그의 수고가 헛되지 않음을 친히 보게 될 것이다.

[3] 영혼의 구원은 주 예수께 큰 만족을 준다. 그는 많은 아들들이 그에 의해 은혜로 말미암아 영광으로 이끌려진다면, 그의 모든 고통이 잘 보답되고 그 자신이 충분히 보상을 받은 것으로 여기실 것이다. 이것으로 그에게 충분하다. 하나님은 영화롭게 되실 것이며 회개하고 믿는 자들은 의롭게 될 것이고 그때 그리스도께서 만족해하실 것이다. 이처럼 그리스도를 따라서, 우리도 우리가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권세에 이바지하는 어떤 일을 행할 수 있다면, 만족히 여겨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을 항상 우리의 음식으로 삼자.

2. 그는 영원한 의를 가져오는 영광을 얻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에 관해 그러한 사실이 예언되었기 때문이다(단 9:24). 그리고 여기에서 똑 같은 취지로 쓰여져 있다.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자식(그에 대한 지식과 믿음)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리라." 즉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고 그렇게 하여 죄로부터 우리를 의롭다 할 토대를 마련해 주실 것이다.

(1) 그리스도의 사망으로부터 우리에게 흘러 들어오는 큰 특권은 죄로부터의 의롭다함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홀로 우리를 멸망케 할 수 있는 죄로부터 면제되었고 홀로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하나님의 은총에게 용납하심을 얻었기 때문이다.

(2)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의를 구비해 주셨다 그것은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고 그것을 우리에게 전파하시고, 그의 성령이 우리안에 증거하게 하심으로써 이다. 인자는 땅에서 죄를 사하시는 권세도 갖고 계셨다.

(3) 그리스도가 의롭다 하시는 자들이 많이 있다. 전부는 아니더라도(무수한 사람들이 자기 죄로 멸망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곧 그가 속전하시기 위해 그의 생명을 주신 많은 사람들, 주 우리 하나님이 부르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될 것이다. 그는 여기 저기에서 특출하고 뛰어난 소수의 사람들이 아닌 많은 사람들은 곧 멸시받는 우리들을 의롭다 하실 것이다.

(4)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믿음에 의한 것이다. 그리스도와 은혜의 언약에 대한 우리의 동의에 의한 것이다. 이러한 방법으로 우리가 구원받는다. 왜냐하면 이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가장 영화롭게 되시며 값없는 은혜가 가장 진보되어 자아가 가장 낮추어지고 우리의 행복이 가장 효과적으로 견고케 되기 때문이다.

(5) 믿음은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며 지식이 없이는 참된 믿음이 있을 수 없다. 하고자 하는 의지와 호의를 얻기 위한 그리스도의 방법은 총명을 깨우치고 그것으로 하여금 거짓됨이 없이 거룩한 진리에 동의하게 함으로써 이루어진다.

(6) 우리를 의롭게 하는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과 그에 대한 믿음은 그들 하나님의 종으로써 그리고 우리의 보증인으로서 여기 있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1] 하나님의 목적을 수행하고 그의 영광의 권익을 견고케 하며 증진시키기 위해 고용된 자로서. "그는 내 의로운 종이며 사람들을 의롭게 할 자라." 하나님은 그것을 행할 권한을 그에게 부여하셨고 그를 지명하셨다. 그가 그것을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이며 그의 영예를 위한 것이다. 그는 스스로가 의로우시며 우리 모두는 그의 의로우심으로부터 그것을 받았다. 스스로가 의로우신 그가(왜냐하면 그가 책임질 만한 그 자신의 어떤 죄를 갖고 있었다면 우리의 죄를 속죄하실 수가 없었다)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의, 곧 주 우리의 의가 되셨도다."

[2] 우리를 위해 책임을 지신 자로서. 우리는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신 자, 그 짐을 그 자신이 지심으로써 우리가 그것에 눌려 쓰러지지 않도록 우리를 구원하신 자로서의 그를 알아야 하며 그를 믿어야 한다.

3. 그가 의심할 바 없는 승리와 세계적인 주권을 얻는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다(12절). 그가 이 모든 선한 봉사를 행했으므로, "내가 그로 존귀한 자와 함께 분깃을 얻게 하며," 아버지의 뜻대로, 큰 대장으로서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라." 대장은 싸움터에서 적을 몰라냈을 때 그 자신과 그의 군대를 위해 적을 탈취하는데 그것이 그 승리를 명백히 입증해 주며 전쟁의 모든 수고와 위험을 보상해 준다. 다음 사실을 명심하자.

(1) 성부께서는 그리스도의 봉사와 수난에 대해 큰 영광으로 보상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내가 그를 큰 자 중에 세우며 그 모든 크게 높이고 그의 이름을 만인 위에 두리라." 또한 그리스도께는 큰 재물이 배당되고 있다. 큰 부(富)도 그에게 할당된다. "그가 노획물을 나누리라." 즉 자기의 진실한 모든 군사들에게 풍성한 은혜와 위안을 나눠주리라.

(2) 그리스도는 정복하심으로써 영광 중에 오신다. 그는 이미 강한 자를 무장 해제시키고, 쫓아내시며, 그 노획물을 나누셨다. 그는 권세가와 권력자들, 죄와 사단, 죽음, 지옥, 세상과 육체를 이기셨다. 이것들이 그가 무장 해제시키고 노획해 버린 그 강자들이다.

(3) 그리스도가 보상으로 받은 영광과 나누어 가진 노략물의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그에게로 오게 되어있는 자발적이고, 신실하고 충성된 백성들이 무수하다는 점이다. 그래서 어떤 자는 본문을 이렇게 해석한다. "내가 많은 자들을 그에게 주리라. 그가 노획물로써 많은 자들을 얻으리라." 하나님은 "그의 주민으로는 이방인들을 그에게 주고, 그가 차지한 소유물로는 땅의 대부분을 그에게 주리라" (시 2:8).

(4) 하나님이 그에게 나눠주신 노획물은 그가 나누어서 자기 제자들에게 배분한다. 그가 "사로잡힌 자들을 사로잡으실 때," 그는 사람들에게 나눠 줄 선물을 사람들을 위해서 받으셨다.

 

53:11 없음.

 

53:12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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