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단의 블레셋 진영 공격(사무엘 상 14:1-15)
우리는 다음의 사실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Ⅰ. 우리는 블레셋 사람들의 힘을 제한시켜 놓으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거대한 힘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에 비해 사울과 함께 한 백성들은 숫적으로도 적었으며,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그리하여 블레셋 사람들은 이스라엘을 단번에 통째로 삼켜버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교회의 원수들이 가지고 있는 적개심을 묶어버리며, 제한시키는 보이지 않는 힘이 있다.
Ⅱ. 우리는 사울의 연약함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 나타난 사울은 어쩔 줄을 몰랐으며 조금도 기운을 차릴 수가 없었다.
1. 사울은 한 나무 아래 장막을 치고 있었으며, 다만 6백 명 가량의 인원이 그와 함께 있었다(2절). 그가 선택하고 신뢰하였던 3천 명의 사람들은 지금 어디에 갔는가?(13:2) 그가 절대로 신임하였던 그 사람들은 그가 그들을 꼭 필요로 하는 그 때에 그를 배반하였다. 그는 기브아에 그대로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으숙한 곳인 그 성읍의 변경 지대로 갈 수밖에 없었다. 거기서 그는 석류나무 아래 있었다. (글자 그대로 보면) 림몬(Ha Rimmon) 아래 있었다. 그런데 기브아 근처 림몬 바위에 있는 굴 속에 베냐민 사람 6백명이 숨었던 일이 있다(삿 20:47). 어떤 사람은 사울이 피할 곳을 찾아 그 곳에 갔었다고 본다. 이처럼 사울의 정신은 얼빠지고 소침해 있었다. 그는 하나님의 노여움 아래 있었으며, 블레셋 사람들의 침공만을 기다리는 가운데 사무엘의 경고가 그대로 실현되어 가고 있었다(13:14). 하나님의 보호하심에서 떠난 자는 결코 안전할 수가 없다.2. 사울은 제사장을 불러오고 하나님의 궤를 모셔 오기 위해 사람을 보냈다. 그리하여 제사장은 실로에서 왔으며, 하나님의 궤는 기럇여아림에서부터 왔다(3,18절). 사울은 한 번 자기 스스로가 제사를 드림으로써 잘못한 일이 있었다(13:9). 그는 이제 다시는 그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으려고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제사장을 모셔 왔다. 그리고 여전히 마음을 겸손하게 가지지 못하고, 변화하지 못한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어떤 특정한 부분만을 개혁함으로써 전능하신 하나님과 타협이 이루어지기를 희망하였다. 그는 여호와의 선지자신 사무엘의 버림을 받았다. 그러나 사울은 여호와의 제사장인 아히야를 자기에게 오라고 명령함음으로써 그 손실을 보상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사무엘이 자기에게 행했던 것과 같이 그가 자기를 견제하거나 꾸짖게 하지 못하게 하고, 오히려 자기가 그를 명령하고자 하였다(18,19절).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사역자를 가지고자 원하며, 설교도 그들이 듣기 좋은 말이 되기를 원한다. 또 사역자는 제사장으로서 무조건 자기들을 사랑으로 어루만져 주기만을 바란다. 그리고 충실하게 그의 일을 하며 공정하게 자기들을 대해주는 사역자에 대해서는 적의를 품는 수가 많다.
사울은 언약궤를 가져오게 하였다. 아마 그것은 그의 통치 기간에 언약궤를 조금도 이용하지 못하게 하였던 사무엘을 비난하기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사울은 언약궤를 가져옴으로 사무엘의 힘을 약화시키고자 하였는지도 모른다. 그 때는 누구도 다시는 언약궤를 진영 속으로 가져올 필요가 없없다고 믿었을 것이다. 그것은 최근에 언약 궤가 그들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블레셋 사람들에게 빼았겼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교의 진수는 잃어버리고 단지 그림자만을 즐기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버림받은 왕이 여기서 역시 버림받은 제사장을 꾀고 있다.
Ⅲ. 우리는 사울의 아들 요나단의 용기와 신앙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왕관을 쓸 자격에 있어서는 그가 그의 아버지보다 훨씬 더 적격자였다. "돌능금 나무에 맛있는사과가 달렸다" 고 홀 주교(Bishop Hall)는 말했다.
1. 그는 아무도 모르게(in cognito) 블레셋 진영으로 가고자 결심하였다. 그는 아버지에게도 자기의 계획을 말하지 않았다. 그가 이 일을 금지시키줄로 알았기 때문이었다. 또 사람들이 알아도 그의 용기를 좌절시키리라 생각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요나단은 반대를 받고자 원치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말도, 또 그들의 충고도 듣지 않기로 결심하였다(1,3절). 하나님의 뜻이 그를 충동하여 이 일을 시킨다는 것을 깨닫고 요나단은 제사장의 의견을 듣지 않고서도 그의 나라를 위해 그처럼 위험한 일에 뛰어들었다. 적진으로 가까이 가는 길은 매우 어려우며, 천연적인 요새로 둘러쌓인 길이었다고 기록되었다(4,5절). 그러나 그는 조금도 용기를 잃지 않았다. 바위가 아무리 굳고 날카로와도 그의 결심을 무디게 하거나 꺾지 못하였다. 위대하고도 관대한 심령은 반대에 부딪힐 때 오히려 생명력이 힘차게 솟아오르며, 그것을 뚫고 나가는 데서 큰 기쁨을 찾는다.2. 그는 그의 병기를 든 소년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어, 그를 따라서 이 멋진 모험에 뛰어들에 하였다(6절). "우리가 목숨을 걸고 원수들의 부대로 가자. 그리고 우리가 그들을 어떻게 혼란에 빠뜨리게 하나 보자" 고 말했다. 요나단이 어떻게 해서 그 소년에게 용기를 불어 넣어 주었는지 보자.
(1)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할례를 받지 않았다. 우리처럼 그들의 몸에 계약의 표지를 가지지 못했다. 두려워 하지 말라. 모든 일이 잘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처럼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할례의 표지가 있지만 그들에게는 없다.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시지 그들의 하나님이 아니시다." 우리가 우리의 적을 이렇게 여길진대 하나님도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으시기에 우리는 그들을 조금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2) "그들은 헤아릴 수 없이 숫자가 많아도 하나님은 우리 두 사람이 이기게 하신다. 여호와께는 어떤 제한이 없으시다.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에게는 어떤 한정이 있을 수 없다. 여호와의 구언은 숫자가 많든지, 적든지 매한가지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쉽사리 받아들일 수 있는 진리이다. 전능자에게는 그 일을 하시는 데 도구가 상관없는 것과 같다. 그러나 어떤 특수한 경우에 이를 적응시키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우리가 적고 힘도 없을 때에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도움도 받으신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신앙이 있다는 증거이다. 이러한 신앙으로 약한 자를 강하게 하고 비겁한 자를 용감하게 하자. 이러한 신앙을 하나님께 간구함으로 우리의 두려움을 극복하자. "강한 자나 약한 자 사이에는 주밖에 도와줄 이가 없다" (대하 14:11).
(3) "우리를 이용하여 영광을 드러내실 그분이 우리를 도우시지 않겠는가?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시며,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위해 기사와 이적을 베푸시리라." 우리가 비록 아직 확신을 가지고 있지 못할 때에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시기 위해 나타나신다는 희망을 가질 때, 우리는 용기를 가질 수 있다. 활동적인 믿음은 어떤 "가능성" 만을 보고도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할 수 있다. 요나단의 병기를 든 소년은 마치 그의 병기만 아니라 그의 마음도 들고 따라다닌 것 같으며, 그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그의 곁에 따라 가겠노라고 약속하였다(7절). 요나단은 하나님의 감동을 받았기 때문에 이런 어려움 모험에 자신을 내맡겼다고 보여진다. 그리하여 그는 자기 사환의 찬동의 말을 듣고 용기를 내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 위험이 너무나 컸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을 신뢰하기보다는 하나님을 시험하는 데로 빠져 들어갔을 것이다. 그는 여호수아가 모세의 말을 빌어서 한(신 32:30) "너희 중 한 사람이 천 명을 쫓으리라" (수 23:10)란 말을 굳게 믿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3. 그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이를 따르기로 굳게 결심하였다. 그는 이 일을 실행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께서 "주목하시는" 가운데 (시 32:8) 그를 인도하시리라 믿었으며, 그리하여 조심하여 그 뜻을 따르며 거기서 하나님의 방향 지시를 받으리라고 결심하였다. 그는 어떻게 하나님의 섭리를 받아들였으며 그것을 기초로 하여 어떻게 결심하였는가 보자. 그는 그의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보라, 우리가 그 사람들을 보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그들에게 우리를 나타내 보이자. 그런데 그때 그들이 조심스럽게 우리를 대하여 우리더러 거기 섰으라고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공격하지 말라고 지시하는 것인 만큼 우리가 그 이상 더 가지 말 것이며(9절), 만일 그들이 주제넘게 우리에게 도전해 오며, 맨 처음에 만나는 파수병이 우리더러 앞으로 나오라고 하면, 우리에게 공격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만큼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공격하여 앞으로 나가자.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10절). 요나단은 이처럼 확신을 가지고 이 일을 밀고 나갔다. 우리도 요나단처럼 그래야 한다.
(1) 하나님은 모든 인간의 마음과 혀를 주관하신다. 심지어 하나님은 하나님을 모르며, 그를 존중하지 않는 자들의 마음과 혀까지도 주관하심으로 그것들을 가지고 당신의 뜻을 펴시는 분이시다. 비록 그 혀가 다른 뜻의 말을 하며, 그 마음이 다른 것을 생각한다고 하여도 마찬가지다. 요나단은 하나님을 의지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제사장의 입을 통해서 하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블레셋 사람의 입을 통해서도 당신의 뜻을 알려 주신다고 믿고 있었다.
(2) 하나님은 여러 방법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자들이 밟아야 할 길을 지시하여 주시며, 온 마음을 다해 그 길을 따르도록 만들어 주신다. 때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힘이 아니라, 기대하지 못했던 힘에 의해 인도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우리를 위로하는지 모른다.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이시다.
4. 하나님의 섭리는 그가 기대하였던 표시를 보여 주었으며 요나단은 그 표시에 응답하고 나섰다. 요나단과 그의 병기를 든 소년은 블레셋 사람들이 잠들었을 때에 그들을 불의에 습격하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대낮에 그들에게 자기들의 모습을 나타냈다(11절). 그때 블레셋의 파수병은 다음과 같이 행동하였다.
(1) 그들을 멸시하였으며, 그들의 백성들이 겁쟁이라고 하여 비난하였고, 그들을 보기를 겁쟁이 군대의 일원으로 깔보았다. 그리하여 "보라, 히브리 사람들이 그 숨었던 구멍에서 나온다" 고 말했다. 만일 그리스도의 병사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비겁한 행동을 한다면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
(2) 그들은 요나단을 얕보았다(12절). 그들은 마치 그를 쳐다보기 위해서 가까이 오는 어린이처럼 생각하여 "우리에게로 올라 오라. 너희에게 한 가지 일을 보여 주리라" 고 말했다. 아마 골리앗의 말처럼 "고기를 공중의 새에게 주리라" (17:44)는 뜻이었을 것이다. 틀림없이 그들을 잡아버릴 수 있다고 믿고 그들을 가지고 희롱하였다. 이것 때문에 요나단은 크게 용기를 얻고 더욱 담대해졌다. 그리고 그의 사환에게도 용기를 얻고 더욱 불어넣어 주었다. 처음에 그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라고 하여 어떤 가능성만을 가지고 말했다(6절). 그러나 여기서는 확신을 가지고 (12절) 이렇게 말했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우리의 손이 아니라(그는 자기 영광을 구하지 않았다), 이스라엘의 손에 붙이셨느니라." 그는 오직 이익만을 구했다. 그의 신앙이 이처럼 강하여졌기 때문에 그는 어려움 없이 파수병 앞에 설 수 있었다. 그는 아무런 가려 주는 것이 없는 바위를 네 발로 기어 올랐으며(13절), 다만 그의 사환이 그를 따라 올라갔다. 그들 앞에는 아무런 인간적인 가능성이란 없었으며, 다만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5. 이 모험이 놀랍게도 성공하였다. 블레셋 사람들은 요나단을 베거나 그를 붙 잡으러 뛰어 내려온 것이 아니라 놀랍게도 그의 휘두르는 칼에 단번에 쓰러졌다(13절). 그들은 엎드러졌다.
(1) 그들의 상당한 수가 요나단과 그의 병기든 소년의 칼에 쓰러졌다(14절). 블레셋 사람 20명이 당장에 쓰러졌다. 어떤 사람들은 블레셋 사람의 수비대를 공격하였던 일이 있기 때문에(13:3) 그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요나단의 이름 때문에 블레셋 사람들이 그처럼 맥없이 쓰러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를 승리하게 한것은 오직 하나님의 오른손과 오른팔이 함께 하셨기 때문이다.
(2) 나머지 사람들도 놀라서 서로 충돌하였다(15절). "들에 있는 진에 떨림이 일어났다." 그들이 두려워하여야 할 눈에 보이는 원인은 없었다. 그들은 그 숫자도 많고, 기세도 당당했으며, 유리한 위치에 자리잡고 있었다. 이스라엘은 그들 앞에서 멀리 도망치고 없었다. 적이란 한 사람도 얼굴을 내미는 사람이 없었다. 다만 한 사람의 용사와 그의 사환이 나타났다. 그런데 그들은 포플러 나무 잎처럼 떨었다. 그 놀라움은 모두에게 있었다. 그들 모두가 떨었다. 심지어는 가장 대담하였던 "노략군" 들마저도 함께 떨었으며, 그들의 허리가 빠지고 그들의 무릎이 서로 부딪칠 정도로 떨었다. 그런데도 아무도 무엇 때문에,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그 원인을 알고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원어에 의하면) 이는 "하나님의 떨림" 이었다. 그것은 우리가 표현하고 있는 것과 같이 다만 커다란 떨림이었을 뿐만 아니라, 아무도 그 원인을 알 수도 없으며, 그것을 막을 길도 없는 떨림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손에서 부터 직접 내려진 초자연적인 떨림이었다. 인간의 마음을 지으신 분은 그 마음을 떨게하는 방법도 아시고 계신다. 그 혼란을 극도에 달하게 하고 자 하여 땅도 그들을 삼킬 듯이 떨었다. 영원하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을, 하나님은 그들을 두려워하게 만들 수 있으시다(잠 21:1; 사 33:14 참조).
블레셋의 패주(사무엘 상 14:16-23)
여기서 우리는 요나단과 그의 병기를 든 소년이 블레셋 사람들에 대해 거둔 놀라운 성과를 계속 발전시켜 나가는 것을 볼 수 있다.
Ⅰ. 블레셋 사람들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서로가 서로를 칼로 쳤다. 그들은 햇빛 아래 녹는 눈송이처럼 이리 저리 무너져 나갔다(16절). 왜냐하면 블레셋 사람들이 각각 칼로 그 동무를 쳤기 때문이었다(20절). 블레셋 사람들은 적과 싸우기 위해 되돌아 서지 못하고 두려움 때문에 도망쳐 가면서 적군이 뒤따라 오는 줄로만 알았다. 모든 칼과 창들이 그들의 수중에만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매우 안전하였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다만 사울과 요나단이 가지고 있던 무기만이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제 그들 자신들의 창과 같이 그들 자신을 멸망시키는 무기가 되게 함으로 그러한 안전책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를 보여 주셨다.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손에 의해 살륙당하는 것보다 더 비참한 살륙을 스스로의 손에 의해 받았다. 우리는 똑 같은 경우를 다른 곳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삿 7:22; 대하 20:23).
Ⅱ. 이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사라들이 활기를 얻고 블레셋 사람들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1. 기브아에 있는 파수대에 서 있던 사울의 파수꾼들이 즉시 이러한 사실을 주목하게 되었다(16절). 그들은 적진 속에 큰 혼란이 일어나고, 커다란 살륙이 그들 사이에 일어난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계수하여 본즉 요나단과 그의 사환만이 없었졌을 뿐, 그들의 군사들이 전원 그대로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17절). 이것이 그들에게 커다란 생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그리고 감히 그 두 사람이 그처럼 많은 군사들과 싸워서 그런 일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이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2. 사울은 하나님께 묻고자 하였지만 곧 이를 취소하였다. 사무엘이 그와 멀리 떨어져 있지 아니했을 것 같은 데도 그는 자기를 굽혀 사무엘에게 묻고자 하지 않았다. 사무엘이 베냐민 기브아에 올라 갔다는 말을 읽은 일이 있다(13:15). 그대신 사울은 언약궤를 가져오라고 하였다(18절). 그것은 블레셋 사람들이 혼란 중에 빠졌을 때 그들을 공격해도 안전할 것인가를 알고자 원했기 때문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안전할 것인가를 하나님께 묻기는 하되, 그들의 책임과 의무에 대해 묻는 이들은 적다. 그러나 적진의 소동이 점점 더 증가하는 것을 알게 되자, 사울은 돌연히 제사장에게 그런 의식을 즉시 중단하라고 하여 이렇게 명령하였다. "네 손을 거두라(19절). 더 이상 묻지 말라. 그 대답을 이상 더 기다리지 말라." 제사장이 기도하기 위하여 손을 드는 것을 막은 사울은 참으로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여호수아가 아말렉과 싸우고 있을 때 모세는 계속 그의 손을 쳐들고 있었다. 그것은 사울이 하나님께 묻기를 중단 한 것과 같다. 그는 왜 이런 어리석은 일을 했을까?
(1) 너무나 사실이 명백하기 때문에 이 이상 대답이 더 필요없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서 그로 하여금 이 일을 하도록 허락해 주실 것인가를 물어야 했을 것이다. 그것이 더 명백한 사실이었을 것이다.
(2) 그는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그는 멸망해 가는 적군과 급히 싸우기 위해서 드리던 예배를 끝까지 기다릴 수 없으며, 하나님께서 어떤 대답을 그에게 내리실지 참고 기다려 볼 수 없으리만큼 초조했었다. 심히 작은 일이 헛되고, 욕심에 끌린 마음을 종교적인 행사로부터 머리를 돌리게 만든다. 믿는 자는 결코 이처럼 조급하게 굴지 않으며, 어떤 사업이라도 하나님을 저버리고 갈 만큼 시급한 것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3. 사울과 그의 적은 군사들이 적극적인 공격을 적군에 대해 감행하였다. 모든 백성들이 "함께 외쳤다" 고도 읽을 수 있다(20절). 그것은 하나님께서 대적을 치러 나갈 때 나팔을 불라고 지시하였지만, 나팔이 없었기 때문이었다(민 10:9). 그들은 숫자가 얼마되지 않았기 때문에 소리를 치자 금방 모일 수가 있었다. 지금의 그리스도는 우리의 영적인 원수들을 정복하고 패주시켰다. 그러므로 이제 그를 의지하면 우리는 담대할 수 있다.
4. 이제 모든 히브리 사람들, 심지어는 조금도 어떤 기대를 가지지 못했던 사람들까지도 블레셋 사람들을 대항해서 싸움에 나섰다.
(1) 이스라엘편에서 도망하여 블레셋 사람들에게 가 있던 사람들도 이제는 블레셋과 대항해서 싸우게 되었다(21절). 어떤 사람은 그들이 포로로 붙잡혀 있다가 이제 그들 편으로 돌아섰다고 본다. 그러나 그들은 지원해서 블레셋 사람들이 패주하는 것을 보고 이스라엘의 마음을 되찾아 가지고 조국을 위해 용감하게 싸웠다.
(2) 이스라엘 진을 떠나서 산에 가서 숨었던 사람들도 그들의 자리로 돌아와서 추격전에 참가하였다(22절). 그들은 이제위험이 지나고, 승리도 확실하기 때문에 열심히 직무에 충실함으로써 지난 날의 자기들의 비겁했던 행동을 속죄하고자 하였다. 그들이 이제 나타났다고 해서 도무지 칭찬받을 일은 되지 못한다. 그러나 그들이 계속해서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들은 더욱 꾸중을 들어 마땅했을 것이다. 승리가 확실하며 더우기 정의를 위한 것임에도 하나님을 위하여 싸우지 않는 자는 정말 비겁하고 소심한 자들이다. 이처럼 모든 사람이 블레셋을 대항해서 싸웠으며, 그들은 칼이나 창이 하나도 없었으면서도 많은 블레셋 사람들을 살륙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여호와께서 그 날에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다" 고 기록하였다(23절).하나님은 그들을 통해서 일하셨다. 왜냐하면 그들이 없이는 하나님께서 아무 것도 하실 수 없으시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구원은 여호와로 말미암은 것이다."
사울의 경솔한 맹세(사무엘 상 14:24-35)
여기에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승리의 날에 당했던 어려움에 관한 기사가 있다. 그러한 잘못이 기쁜 일에는 항상 따르게 마련이다. 그리고 모든 것이 잘되어 갈 때 우연이긴 하겠지마는 잘못된 처리로 말미암아 언제나 방해가 있게 마련이다.
Ⅰ. 사울은 사람들에게 그 날 중에는 아무 것도 먹지 말라고 명령하였으며, 먹는 자에게는 저주가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24절).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짐작할 수 있다.
1. 왕으로서 사울은 병사들에게 이러한 금령을 내리며, 그들을 저주로 묶어 놓을 수 있는 힘이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 명령에 복종하였다. 그리고 요나단이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랬지만) 저주 받은 물건을 건드려서 범법자가 되었을 때, 제비라는 수단을 통해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그가 범법하였음을 찾아내면서도, 그 때까지는 이 일에 대해서 사울이 하나님께 한 번도 여쭈어 보지 않았다.2. 사울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 그랬을 것이다. 그것은 곧 한동안 굶주렸던 사람들이 블레셋 사람들의 버려진 진영에서 많은 음식을 보고, 너무나 탐내어 배불리 먹다보면, 적을 추격할 기회를 잃어버리고, 그날의 일을 망칠 우려가 없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일을 막기 위해서 그는 어떤 음식도 입에 대지 말라고 명령했으며, 자기도 역시 같은 제약을 지켰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가혹한 명령을 내리는 데 있어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잘못을 사울은 저질렀다.
(1) 그 계책이 졸렬했으며, 지혜롭지 못했다. 왜냐하면 시간을 얻기는 했겠지만 적을 추격할 만한 힘을 잃어버렸을 것이기 때문이다.
(2) 그것은 백성들에 대해 너무 가혹하며 인정이 없는 처사였다. 그것은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는 것" 보다 더 가혹한 처사였다. 큰 잔치를 벌이지 말라는 명령은 내릴 만한 것이라고 보여지지만, 맛도 보지 말라는 것은 지나치게 가혹한 처사였다.
(3) 그러한 금령을 내리면서 저주를 선포하고 맹세를 시킨 것은 경건치 못한 처사였다. 그가 만일 저주 이외에는 벌을 줄 수가 없었다면 어떻게 그의 군사들을 훈련할 수 있었을까? 그러한 죄에 대해 죽음을 선포하며, 더우기 죽음이라는 저주를 내리는 것은 지나친 처사이다. 높은 사람들은 꾸짖고, 시정하게 할 수 있어도 낮은 사람들은 저주할 수 없는 법이다. 우리의 원칙은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는 것이다. 다윗이 저주하기를 좋아하는 그의 원수를 말했을 때 아마 그것은 사울을 의미했을 것이다(시 109:17, 18).
Ⅱ. 백성들은 사울의 명령을 준수했지만 많은 불편을 겪었다.
1. 군사들은 애가 많이 탔다. 왜냐하면 그들은 적을 추격해 가면서 꿀이 많은 수풀 속을 지나 가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아마 블레셋 사람들이 쫓겨 가면서 벌집을 떨어뜨렸기 때문에 벌꿀이 나무에서 떨어져 땅에 많이 흘렸던 것으로 보여진다. 가나안은 꿀이 넘쳐 흐르는 땅이라는 말이 있는데, 여기에 그 증거가 있다. 그들은 반석, 굳은 반석에서 꿀을 빨았다(신 32:13). 하지만 그들은 저주받을까 두려워서 꿀을 맛보지조차 못했다(25,26절). 그들은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가지기에 합당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극도의 굶주림속에서도 자기 자신과 식욕을 극복할 수 있었다. 우리도 이런 경우에 두려움 없이 먹어서는 안 되며, 잔치를 벌여서도 안 된다.2. 요나단은 이 사실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저주에 빠져들게 되었다. 그는 그의 아버지가 내린 명령은 듣지 못했다. 그는 용감하게 일선에 나가 뛰며, 적을 추격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그 명령을 꼭 지켜야 할 의무가 면제된다고 보여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나중에 그런 저주가 의당한 것으로 보고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아무런 괴로움이 없이 지팡이 끝으로 벌꿀을 찍고, 그것을 빨았다(27절). 그리고 그것 때문에 생기를 얻었다. 굶주림과 피로때문에 희미해 오던 "그의 눈이 밝아졌다." 그 때문에 그의 얼굴에 희색과 생기가 돌았다. 옆에 있던 사람들도 그것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29절). "보라, 내 눈이 이렇게 밝아졌다" 고 그는 말한 바가 있다. 그는 백성 중의 한 사람이 그 명령을 알려 주기 전까지는 조금도 해가 되며 두려움이 되는 줄을 몰랐다. 그 소식을 듣고서야 자기가 올가미 속에 빠진 것을 알았다. 생각 없는 아버지들의 경솔함 때문에 많은 좋은 아들들이 여러모로 괴로움을 받고 시달림을 받게 된다. 요나단 편에서 볼 때 그는 아버지의 어리석음 때문에 그가 상속받을 수있었던 왕관을 놓쳤다. 이것도 그런 나쁜 징조중의 하나였다.
3. 군사들은 블레셋 사람들을 추격하기에 지쳤으며, 점점 더 맥이 빠지고 있었다. 요나단은 그런 결과가 나올 것을 미리 알았다. 영양실조에 걸려서 그들의 정신은 축 늘어지고, 그들의 힘도 빠질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새로운영양 보충이 없으면 우리는 즉시 일을 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 인간의 육체가 가진 자연법칙이다. 날마다의 양식이 떨어지면 날마다의 일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우리의 아버지께서는 날마다 우리에게 우리의 양식을 은혜로 주신다. "떡은 인간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게 만들어 준다." 그러므로 요나단은 "그들이 임의로 먹었다면 그 살륙함이 더욱 많았을 것이다" 고 바르게 생각할 수 있었다(30절). 그러나 실제로는 그들이 매우" 굶주렸으며 피로에 지쳐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일보다는 고기에 마음이 더 쏠려 있었다.4. 죄악의 결과는 저녁에 나타났다. 그 제약이 풀려 먹을 수 있게 되었을 때, 너무나 허겁지겁 정신 없이 먹어댔기 때문에 하나님의 율법에서 금한 것도 잊어버리고, 고기를 그 피째 먹었다(32절). 두 끼를 굶으면 소를 통째로 먹는다는 말이 있다. 이들이 바로 그런 꼴이었다. 그들은 소를 격식대로 도살할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다. 그들은 소를 땅에 쓰러 뜨리고 보통 때와 같이 피를 모조리 뽑아내도록 그것을 거꾸로 매어 달지 않았다. 또 제대로 요리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채 끓이거나 굽기도 전에 고기에 매달려 집어 먹었다(32절). 이것을 알게 되자 사울은 그들의 죄를 꾸짖었다(33절). 그는 "너희가 범죄하였도다" 라고 부르짖었다. 그러나 마땅히 여호와의 백성들로 하여금 범죄케 한 사실에 대해 반성하여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반성은 하지 않았다. 이러한 불법을 시정하기 위해서 사울은 큰 돌을 자기 앞으로 굴러오게 하고, 자기가 보는 앞에서 소와 양들을 죽이게 하였다(33절). 백성들은 그의 말을 따라서 그대로 하였다(34절). 그들은 그들의 왕이 바로잡아 주는 데 따라서 쉽사리 자기들의 잘못을 고치고 개선해 나갔다. 통치자들이 제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르면 백성들을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움직이게 할 수 있다.
Ⅳ. 이때 사울은 제사를 드릴 수 있도록 단을 쌓았다(35절). 그것은 그들이 얻은 승리에 대해 감사를 표하기 위한 것이 아니면, 그들이 범한 죄에 대해 속죄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본다. 그것은 사울이 "처음으로 쌓은 단" 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아마 짐승들을 죽이기 위해 굴러오게 한 그 돌을 보고 그것을 단으로 바꾸어야 되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 일이 없었다면 도저히 그런 일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사울은 하나님으로부터 점점 더 멀리 떨어지면서 오히려 하나님을 위해 단을 쌓았는데, 하나님의 능력을 거부하면서도 외양적으로는 가장 열심인 척 나타내는 것과 같다. 호세아 8장 14절을 보면 "이스라엘은 자기를 지은 자를 잊어버리고 전각들을 세웠다" 는 말이 있다. 어떤 사람은 "그가 단을 쌓기 시작하였다" 라고 읽는다. 사울은 단을 쌓기 위한 초석을 가져다 놓았지만, 싸움에 승리하는 일에만 도취되어 그 단이 완성되는 것을 기다릴 수가 없었다.
요나단에게 내린 사형선고와 구명(사무엘 상 14:36-46)
Ⅰ. 사울은 블레셋 사람들에 대해 교만을 떨었다. 그는 군사들이 저녁을 먹자마자 밤새어 블레셋 사람을 쫓아가서 "한 사람도 남기지 말자" 고 제안하였다(36절). 사울은 열심을 보여주었지마는 재량을 베풀 줄을 몰랐다. 군사들은 극도로 피곤하였기 때문에 먹을 것에 굶주렸던 만큼 잠도 모자랐다. 그러나 성급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은 자기만 알고, 다른 사람들의 사정은 몰라 준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 마음대로 알고, 다른 사람들의 어려움을 생각하여 주지 않는다.
하여간 백성들은 그들의 왕의 말을 복종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감히 반대를 하지 못하고 최선을 다해 그 명령을 따르기로 결심할 수밖에 없다. 왕이 가기를 원하면 자기들도 따라가겠노라고 말했다. "왕의 소견에 좋은 대로 하소서." 다만 제사장만이 갑자기 중단되었던(19절) 의식을 계속하여 신탁을 구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이리로 와서 하나님께로 나아가사이다" 라고 말했다. 제사장이 그러한 제안을 했을 때 사울은 부끄러움 때문에 그 제안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 "내가 블레셋 사람을 쫓아 내려 가리이까? 내가 속히 가리이까?" 라고 묻기를 원했다(37절).
Ⅱ. 사울은 그의 아들 요나단의 죄를 알게 되었다. 나머지 기사는 전부 그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사울이 요나단을 문책하는 동안 블레셋 사람들이 도망쳤다. 성급한 결심이 어떠한 위험을 가져올는지 모른다.
1. 하나님은 불쾌함을 표시함으로써 사울로 하여금 저주받은 사건을 찾게끔 하였다. 사울이 제사장을 통하여 하나님께 신탁을 구했을 때, 하나님은 "대답지 아니 하셨다" (37절).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대해 응답지 않으시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어떤 죄가 하나님을 노엽게 하여 드렸는지 찾아보게 만드는 것이다. "이 죄가 뉘게 있나 알아 보자" (38절). 하나님은 귀가 멀어서 우리의 기도를 듣지 못하신 것이 아니다. 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 놓은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밀어 놓으신다면, 우리의 마음 속에 어떤 죄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 우리는 그것을 찾아 내어서 제거해 버리고, 없애버려야 한다.사울은 금단의 과실을 먹음으로써 이스라엘 진영을 괴롭힌 아간과 같은 사람이 있다면 그는 누구든지 간에 반드시 죽으리라고 하나님을 두고 맹세했다. 그는 비록 요나단이라 할지라도 그렇게 하겠다고 맹세했는데, 말하자면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죽으리라고 한 말은, 요나단이 바로 그 사람이란 것은 도무지 알지 못하고 한 말일 것이다(39절). "반드시 죽으리라" 는 저주는 요나단에게 임하여 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백성들은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요나단이 그런 명령을 어긴 사실을 감히 그에게 고하지 못하였다.
2. 요나단이 범법자라는 것이 제비에 의해 밝혀졌다. 사울은 요나단과 자기를 한편에, 그리고 백성들을 한편에 두고 제비를 뽑게 하였다. 아마 사울은 요나단도 자기처럼 죄가 없으리라고 확신하였던 모양이다(40절). 백성들은 사울이 너무 열중한 것을 보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왕의 소견에 좋은 대로 하소서" 라고 묵인하였다. 사울은 제비를 뽑기 전에 "하나님이여 실상을 보이소서" 라고 기도하였다(41절). 그것은 사건이 분명히 밝혀지기를 바라며 동시에 자기의 무죄가 밝혀지기를 바라는 심정의 토로이다. 그 때의 그 분 위기는 공평무사한 것이었다.판단은 그 때문에 누구가 해를 받든지 간에 진실한 것이어야 한다. 제비는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것이기게 반드시 기도하고 뽑아야 한다. 우리는 제비를 통해 하나님께서 지시하여 주시고, 결정하여 주시기를 기도하여야 한다(행 1:24). 그러한 까닭에 어떤 사람은 거룩한것을 가지고 나쁜 일에 사용하는 것이라고 하며, 제비를 가지고 놀음을 하는 것을 비난한다. 드디어 요나단이 뽑혔다(42절). 하나님의 뜻은 이렇게 하여 합법적인 권위를 도와주고 지지하여 주신다.
3. 요나단은 솔직하게 사실을 고백하였다. 그리고 사울은 그에게 저주하고 죽음을 선언하였다. 요나단은 사실을 거부하지도 않고 이를 은폐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다만 자기는 "죽어야 한다" 고 생각하니 그것이 아쉬웠다(43절). 요나단은 정말 그 법을 몰랐다고 주장할 수도 있었으며, 자기의 공로를 내세울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관대한 마음으로, 그 결정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하나님과 나의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라고 그는 말했다. 요나단은 자기가 죽음의 사자들을 불러서 사람들에게 보낼 때와 마찬가지로 그것을 자기가 받아들일 때에도 용감하였다. 싸움에 용기가 필요한 것같이 굴복당하는 데도 용기가 필요하다. 사울은 아버지의 정 때문에, 또는 그 처사가 가혹하다는 생각때문에 처벌을 약화시키는 일을 하지 않았으며, 도리어 자기 자신을 어떻게 하더라도 자기의 말, 더우기 자기의 맹세에 충실하여야 하는 사람처럼 행했다. 사울은 다른 저주를 첨가하면서 요나단에게 판결을 굽히지 않았다. "요나단아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내가 그 법을 너에게 실행치 않으면, 하나님이 내게 그 이상의 법을 내리시리라" (44절).(1) 사울은 하나님께 여쭈어 보지 않고 너무 서둘러 선포하였다. 요나단은 자기에게 내린 판결에 대해 항변할 만한 충분한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 요나단이 행한 것은 "악 그 자체" (malum in se)가 아니었다. 그는 알지 못하고 그 금령을 어겼다. 그러므로 반역이나 불복종이 죄로 다스려지지는 않을 수도 있었다.
(2) 사울은 격노한 가운데 그 일을 행했다. 요나단이 비록 죽을 만한 죄를 범했다고 하더라도, 더우기 아버지로서, 부드러움과 동정심을 가지고 판결하여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모든 인간적인 감정과 자연적인 애정을 모조리 벗어던진 사람 모양으로 기고 만장해서 판단을 내렸다. 정의는 진노와 가혹함을 가지고 시행될 때 그 가치가 떨어진다.
(3) 그 선언이 시행되지 않을 때 사울은 그 저주를 자기에게로 돌렸다. 그리하여 그 저주가 그 자신에게로 돌아갔다. 요나단은 이를 피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울이 이를 피하게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고 파문을 받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경우라도 그런 악담의 저주를 하지 말며, 하나님으로 하여금 우리의 말에 동하게 하시지 말며, "우리의 혀가 우리의 해함" (시 64:8)이 되지 못하게 하여야 한다. 그가 굴린 돌이 스스로에게로 돌아 올 것이다. 하지만 요나단에게 너무 가혹하다고 보였을 때 그것을 자기에게로 돌린 것을 보면 사울에게 요나단에 대한 연민의 정이 없지 않았다고 보여진다. 하나님은 사울로 하여금 그의 성급한 선포가 너무 지나쳤다는 것을 깨닫게 하여 주었다. 그 때문에 사울은 그와 같은 죄를 범할는지 모른다는 것을 두려워하게 하였다. 하나님은 이 모든 성가신 사건들을 통해서 사무엘을 제쳐놓고 제사를 드린 그 오만함을 시정해 주려고 하셨다. 잘못 시작된 원정은 책망이 없이는 정지될 수 없다.
4. 백성들은 요나단을 그의 아버지의 손에서부터 구출하여 주었다(45절). 지금까지 그들은 사울의 눈치를 살펴가며 그의 뜻에 가납할 말만을 해 왔었다(36,40절). 그러나 이 때 요나단의 생명이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러서는 사울의 말이 그들에게 있어서 절대적인 것이 되지 못했다. 이제 그들은 열심을 다해서 사울의 선언에 반대 의사를 표시하였다. "나라를 위해 그렇게 사랑하고, 축복을 가져온 - 요나단이 죽어야 합니까? 그는 나라를 위해 용감하게 자기 생명을 내던졌으며, 우리의 생명과 승리가 그로 말미암아 보전되었는데, 그의 생명이 법과 명예의 겉차림 때문에 희생되어야 합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자가 그런 처분을 받는 것을 그대로 보고만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한 사업에 그릇으로 사용한 사람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그처럼 열성인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로서는 마땅한 일이다. 사울은 요나단을 죽이겠노라 맹세하였다. 그러나 그들도 맹세하여 그의 맹세에 반기를 들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옵나니, 그의 머리만이 아니라, 그의 머리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겠나이다." 그들은 폭력으로 사울을 구하지 않고, 정당한 사리와 그들의 결단으로 그를 구하였다. 조세푸스(Josephus)는 말하기를 그들은 하나님께 그를 그 저주에서 풀어주기를 기도하였다고 했다. 그들은 요나단을 위해 "그가 오늘 하나님과 동사하였다" 고 변명하여 주었다. 이 말은 곧 "그가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일을 했으며, 하나님은 그의 열심을 사셨다. 그러므로 그의 생명은 귀하기 때문에 함부로 저버릴 수 없다" 는 내용이다. 사울은 요나단과 자기 사이가 부자관계라는 것을 완전히 잊어버리지 않았으며, 요나단이 구명되기를 속으로는 원했을는지 모른다. 그래서 자기 자신으로서는 발설하지 못하지마는 요나단의 구원받는 것을 기뻐하였는지 모른다. 그렇지만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자는 그를 나무랄 수 없다.
5.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블레셋 사람들에 대한 추격은 파기되었다(46절). "사울이 블레셋 사람 따르기를 그쳤다." 따라서 완전한 승리의 기회는 놓쳤다. 이스라엘의 방패가 서로 충돌하는 동안 그것 때문에 나라의 안전이 손해를 받았다.
사울의 궁정과 진영(사무엘 상 14:47-52)
여기에는 사울의 궁정과 진영에 관한 일반적인 기록이 있다.
1. 그의 궁정과 그리고 가족, 그의 아들과 딸들의 이름(49절), 그리고 그의 아내와 그의 군대의 장관이었던 사촌 형제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50절). 다른 곳에는 사울의 다른 아내, 둘째 부인인 리스바와 그녀의 몸에서 태어난 자녀들의 이름이 기록되었다(삼하 21:8).2. 그의 진영과 군사 활동에 대한 기록이 있다.
(1) 그는 그의 군대를 이렇게 모집하고 소집하였다. "사울이 힘 있는 자나 용맹 있는 자를 보면, 다시 말해서 군인으로서 적합하다고 보이는 사람이 있으면, 사무엘이 이미 왕의 하는 일이 이런 것이라고 말했던 것과 꼭 마찬가지로(8:11), 그들을 불러 모았다" (52절). 그리고 그가 만일 상비군을 두어야만 했다면, 자기 뜻대로 불러 오고 싶은 사람을 불러오기만 하면 되었다.
(2) 그는 그의 군대를 다음과 같이 운영하였다. 그는 사방에서 쳐들어 오는 적의 공격을 막고 나라를 지켰으며, 그들의 습격을 방지하였다(47,48절). 그는 이스라엘의 변경을 침공해 오는 대적들을 막아서 수비하기만 하였던 것 같다. 그는 그들을 실망시킴으로 그들을 괴롭혀 주었던 경우가 있었던 것과 같이, "향하는 곳마다 이기었다." 그가 싸운 대부분의 적은 블레셋 사람들이었으며, 그의 사는 날 동안에 그들과 큰 싸움이 있었다고 한다(52절). 그는 왕가의 권위를 자랑할 만한 이유도 가지지 못했으며, 그이 이웃이 그를 시기할 만한 것을 가지지도 못했다. 왜냐하면 그는 왕이 된 뒤에 조금도 기쁜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괴로와하지 않고서는 그의 대적들을 괴롭게 할 수가 없었다. 그의 왕관은 가시로 장식된 왕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