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 지파의 몫 (여호수아 15:1-12)
유다와 요셉은 르우벤이 잃어버린 장자권을 이어받은, 야곱의 두 아들이었다. 유다는 통치권을 이어 받았고 요셉은 두 배의 분깃을 받았다. 그러므로 이 두 지파는 첫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는데 유다는 가나안의 남쪽 부분을 요셉은 북쪽 부분을 차지했었다. 그리고 이 두 지파 위로 일곱 지파가 자리를 잡고 있는데, 이 두 지파의 종속물로서 각자의 기업을 분배받았다. 베냐민과 시므온과 단의 기업은 유다에 종속되어 있고, 잇사갈과 스불론과 납달리와 아셀은 요셉에게 종속되어 있다.
이들 두 지파는 제일 먼저 기업을 책정 받았다고 그런데 후에 우리가 보게 되겠지만 이 일은 이 땅에 관한 정확한 조사가 없이 된 것 같다(18:9). 북부 지역과 남부 지역 전체에서 가장 괄목할 만한 부분으로 길갈에 가장 가깝게 워치하고 또 사람들이 가장 잘 알고 있는 지역을 우선 두 몫으로 나누어, 이들 두 정상 지파들 사이에 제비를 뽑게 했을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중 한 지파는 여호수아가 속한 지파였고, 다른 한 지파는 갈렙이 속한 지파였는데 그는 이 분할 문서에 적힌 첫 번째 위원이었다. 제비를 뽑은 결정에 따라서 우리가 본장에서 다루게 되는 남쪽 지역은 유다 지파에게로 떨어졌고 다음 두장에서 다루게 될 북쪽 지역은 요셉 지파에게로 떨어졌다. 이 일이 끝난 뒤에 보다 더 공정한 분배(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간에)가 나머지 일곱 지파에게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 일은 이 분할에 관해서 주어진 일반적인 규칙에 따른것이라고 생각된다(민 33:54). "수가 많으면 많은 기업을 주고 적으면 적은 기업을 주되 각기 제비 뽑힌대로 그 소유가 될 것인즉," 환언하면 "너희는 두 큰 부분을 지정하고 숫자가 보다 많은 지파인 유다와 요셉 두파로 제비를 뽑아 결정하게 하고 그리고 그 나머지는 보다 적은 몫으로 나누어 보다 숫자가 적은 지파들에게 할당되도록 하라" 는 것이다. 전자는 길갈에서 이루어졌고 후자는 실로에서 이루어졌다.
앞 본문에서 우리는 유다 지파 기업의 경계선을 보게 된다. 그런데 유다 기업은, 다른 지파도 그렇지만, "그 가족대로" 즉 그 가족의 숫자를 염두에 둔 것으로 이야기되고 있다. 이것은 여호수아와 엘르아살과 그리고 여타의 위원들이 각 지파 별로 제비를 뽑아 그 몫을 받게 되었을 때에 그것을 다시 보다 큰 부분으로 나누어(이 일도 마찬가지로 제비로 결정되었을 것으로 본다) 각 가족에게 그 기업을 분배하고 그리고 또다시 각 세대 별로 분배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처리는 이 최고 당국에 의해서 아주 잘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 일을 각 지파의 하급 행정관들에게 맡겨져서 분배하도록 되었을 경우 생겨났을지도 모르는 불만을 훨씬 더 줄어들게 했을 것이다.
여기에 나오는 이 지파의 경계선들은대체로 고정되어 있기는 하나, 절대 변경 불능은 아니다. 이들 경계선 내에 위치한 상당한 부분이 후에 시므온과 단의 분깃으로 할당된다.
1. 동방 경계는 염해뿐이었다(5절). 모든 바다가 다 짜다. 그러나 이 바다는 일반 보다보다는 훨씬 더 짰다. 그래서 이 바다에는 어떠한 생물도 존재하지 못하게 되었다. 아브라함 시대에 소돔과 고모라가 불과 유황으로 파멸되어 그 결과 이 죽음의 바다의 밑 바닥에 매장되었다.2. 남쪽 변경은 전체적으로 가나안 땅의 경계였다. 그것은 본문1-4절과 민수기 34장 3-5절을 비교해 보면 명백해질 것이다. 그래서 이 힘하고 용맹무쌍한 유다 지파는 전 국토의 변경지 즉 대대로 숙적인(비록 이들의 두 아버지는 쌍둥이 형제였지만) 에돔 족속들을 향해서 마주보는 그 변경지를 지키게 되었다. 그러므로 "유다 지파출신" 인 우리의 주님과 "그의 왕국도 에서의 산을 심판하실 것이다" (욥21).
3. 북쪽 경계선은 베냐민 지파의 분깃과 구분된다. 여기에서 르우벤 지파 사람인 "보한의 돌" 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6절), 그는 아마도 요단강을 건너온 르우벤 지파 군대의 위대한 지휘관으로 길갈에 있는 진에서 죽어 멀지 않은 이 돌 아래 매장된 것 같다. 마찬가지로 아골의 골짜기도 이 변경에 위치하고 있다(7절). 이것은 그들 지파의 한 사람인 아간이 이스라엘 회중에게 준 고통을 유다 사람들에게 기억하게 해 줌으로써 각자 자기들이 맡은 일에 너무 교만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을는지도 모른다. 이 북방 경계선은 예루살렘에 아주 가깝게 지나가고 있는데(8절) 너무 가까워서 시온 산이나 모리아 산이 이 부족의 분깃에 포함될 정도다. 그러나 이 예루살렘의 더 큰 부분은 베냐민 지파의 분깃에 들어 있다.
4. 서방 경계선은 처음에는 대해에 이르렀다(12절). 그러나 나중에 단 지파의 분깃이 이편에 있는 유다 지파의 분깃 중 상당한 부분을 떼어갔는데, 유다와 요셉 지파 사이의 분깃의 결정은 단지 누가 북쪽을 가지며 누가 남쪽을 가지는가에 대한 결정이었지 둘간의 경계를 변경할 수 없게 고정시키자는 것은 아니었다. 유다의 기업은 그 한계가 결정되어 있었다. 비록 용맹무쌍한 지파며 다른 지파에 대해 굉장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들은 자기들이 하고 싶은 대로 임의로 자기들의 소유를 확장하도록 방임되어서는 안 된다. 그들도 그들의 이웃들이 살아갈 수 있도록 생활해야 한다.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은 "땅의 한가운데" 혼자 자리잡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갈렙의 몫 (여호수아 15:13-19)
이 역사가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갈렙에 대해서 언급하고 그를 영예롭게 하기를 기뻐하는 것 같다. 그는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따르며 영화롭게 했기 때문이다.
Ⅰ. 여호수아가 헤브론의 산을 그에게 기업으로 허락해 준 것이 여기에 반복되고 있다(13절). 그에게 이것이 주어진 경우를 이야기 하고 있는데,
1.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명하신 대로" 했다. 비록 갈렙이 약속을 받고 정당하게 요청할 자격이 있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제비를 뽑아 땅을 분배하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에 단 하나뿐인 이 경우에도 하나님의 명령, 즉 신탁이 없이는 어떻게 달리 해 볼 수가 없었다. 이것은 절대로 자기의 옛 친구인 갈렙을 인정하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이 경우에도 하나님과 의논했을 거라고 생각된다. 어떠한 경우에 든지 조금의 의심이라도 있으면 하나님의 뜻을 찾아 보고 우리가 해야 될 길을 명백하게 알아 보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라고 본다.2. "유다 자손 가운데" 있던 땅을 분깃으로 주었다고 이야기되고 있다. 각 지파의 기업이 논의되기 전에 이 부분이 그에게 할당되어졌다. 하나님께서는 이 부분을 그렇게 지정하셨을 때 이미 이런 할당을 염두에 두신 것이 분명하다. 이것이야말로 갈렙이 그 형제들과 따로 떨어지지 않고 다른 지파의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살아가도록하기 위한 참으로 자비로운 배려였다.
Ⅱ. 갈렙이 이 분깃을 점령한 일에 관해서 듣는다.
1. 갈렙이 헤브론을 정복하는데서 그 자신의 용기를 보여 주었다(14절). "갈렙이 거기서 아낙의 세 아들을 쫓아내었다. "즉 갈렙과 그를 도와 준 사람들이 쫓아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본다. 이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이 일에 성공할 것이라고 말한 그의 확신이(14:12) 헛되지 않았으면 그의 기대가 응답되었음을 보여 주기 위해서 여기에 언급된 것이다. 그가 "이 거인들을 죽였다" 고 기록되지 않고 "거기서 몰아내었다" 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갈렙이 공격해 오자 그들이 그 앞에서 물러나 도망쳤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의 체력과 신장이 그들 마음의 용기를 지탱해 줄 수가 없었다. 그들은 사자의 얼굴을 가졌으나 벌벌떠는 토끼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때로는 "방백들의 심령을 꺾으시며" (시 76:12) "만민의 두목들의 총명을 빼앗으신다" (욥 12:24). 그러므로 교만한 자들의 자신감은 수치가 된다. 우리도 울부짖는 사자인 마귀를 대적하면, 그가 죽지는 않는다고 해도 도망치고 말 것이다.2. 그가 드빌를 정복하는 일에서 그와 함께 싸우는 이들의 용기를 격려했다(15절 이하). 이미 여호수아 자신이 드빌을 정복했는데도(10:39) 가나안 사람들이 이스라엘 군대가 없을 동안에 다시 이곳을 점령하고 산 것 같다. 그래서 두 번째로 이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갈렙이 자기와 자기 가족을 위해서 헤브론을 완전히 장악했을 때 그는 자기 자신의 유익만큼이나 공중의 유익에도 열심히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해서 드빌을 향해 계속 공격해 나갔다. 그리고 이 성이 완전히 정복될 때까지 군대를 해산시키지 않았다. 이 성은 헤브론 남방 약 10마일 거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성에대해 특별한 이해 관계가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는 이 성을 점령함으로써 자기 부족 전체에게 유익을 주려고 했다. 여기서 우리도 우리 자신의 것만을 추구하고 신경을 쓸 것이 아니라, 지체가 되어 있는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서 우리 스스로가 관심을가지고 참여하는 것을 배우도록 하자. 우리는 우리 자신만을 위해서 태어나지도 않았고, 또 "우리 자신만을 위해서" 살아서도 안 된다.
(1) 이 성의 이름에 주의를 기울여 보자. 이 성은 기럇세벨이라고 불리워졌는데, 그것은 "책의 도시" 라는 뜻이다. 또한 기럇산나(49절)라고도 부르는데, 어떤 변역에서는 이것을 "학문의 도시" 로 부르고 있다(70인 역본에는, grama,utwn으로 되어 있다). 어떤 이들은 이 도시에 가나안 인들의 대학이 있어서, 마치 그리스의 아데네처럼, 젊은이들을 교육시켰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아니면 이 곳에 그들의 역대기들이나 혹은 역사의 기록물들 및 그 나라의 고전들이 비치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갈렙으로 하여금 그토록 간절하게 이스라엘이 이 성을 지배하도록 한 것은 그들로 하여금 가나안 인들의 고대 학문을 배울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는지도 모른다.
(2) 갈렙은 이 성을 정복하는 일을 맡아 이 일에 고용된 병력을 통솔하는 자에게는 자기 딸과 상당한 몫의 기업을 주겠다고 제안했다(16절). 사울도 골리앗을 죽이는 자에게는 자기 딸을 줄 것을 약속했었다(삼상 17:25). 사울이든 갈렙이든 자기 딸을 그녀가 사랑할 수 없는 그런 사람과 결혼하도록 강요할 생각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다같이 비록 이 일이 자기들의 기분과 성향에 맞지 않는다고 해도 그 딸들이 자기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고 따를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갈렙의 집안은 존귀하고 부유할 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집안이었다. 그 자신이 "온 마음으로 여호와를 따랐을" 뿐만 아니라, 자기 자녀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쳤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어떤 젊은 남자에게든지 이 결혼은 바람직한 것이 되었을 것이다. 갈렙은 이 제안을 함으로써
[1] 이 중요한 곳을 점령하여 자기 나라에 봉사하고
[2] 또 잘 배웠고 용감한 남자에게 자기 딸이 좋은 결혼을 하게 될 것을 목적하고 있었다. 그런 남자는 "책의 도시" 에 대한 특별한 애정을 가진 학문의 사람일 것이고, 또 자기 나라에 봉사하고 자기 세대에 가치 있는 일을 하는 용감한 사람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 딸이 이와 같은 성품의 사람에게 결혼할 수만 있으면, 그 지파의 몫의 분깃이 많든 적든 간에, 자기 딸은 훌륭한 결혼 지참금을 받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3) 그 성은 갈렙의 조카 옷니엘에 의해서 용감하게 정복되었다. 갈렙은 아마도 이 제안을 할 때부터 그를 의중에 두었을는지도 모른다(17절). 젊었을 때부터 이렇게 용기를 나타낸 옷니엘은 오랜 후에 여호수아가 죽은 후 만년에 가서 이 민족의 일을 혼자서 맡아 하는 이스라엘의 구원자와 사사가 되었다. 이 세상을 출발하는 사람들은 위대하고 선한 야망을 가지고 제때에 시작하는 것이 좋다. 젊었을 때 탁월하게 봉사하면 늙어서 큰 명예가 있을 것이다.
(4) 여기서(모든 사람의 동의 한 대로) 옷니엘은 갈렙의 딸, 자기의 사 자매인 악사와 결혼했다. 옷니엘은 전부터 그녀에 대한 사랑을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그는 그녀를 얻기 위해서 이 대담한 일을 떠맡았을 것이다. 자기 나라에 대한 사랑이나 명예에의 야망이나 자기 백성의 족장에게 인정을 받으려고 하는 욕망은 그로 하여금 이 위대한 행동에 뛰어들게 할 수 없었을는지는 라도 악사에 대한 애정은 이 일을 하게 했다. 누구든지 자기보다 더 그녀의 사랑을 차지하려고 하는 행동을 하게 한다는 것을 그로서는 생각할 수조차도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 큰사랑의 불길에 고취되었다. 이와 같이 사랑은 죽음처럼 강하고 질투는 무덤처럼 잔인하다.
(5)지금 역사가는 땅을 분배하는 일를 기술하고 있기 때문에, 악사의 몫인 땅에 나가한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 준다. 우리가 볼 때 가나안을 정복한 이들은 이 많은 풍부한 도시들을 탈취해서 소유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돈은 굉장히 많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약속의 은덕으로 누리게 된 이땅이 훨씬 더 가치 있는 것이었다.
[1] 그녀는 약간의 땅을 갈렙이 주는 선물로서 얻었다고 이것은 그녀가 슬로보핫의 딸들이 그랬던 것처럼 자기 지파 내의 가족과 결혼했기 때문에 허락되었다. 갈렙이 "그녀에게 남방 땅을 주었다" (19절). 그러나 실제로 "남방 땅" 은 건조하고 가뭄이 잘드는 곳이었다.
[2] 그녀는 자기 요청보다 더 많은 것을 얻었다. 그녀는 자기 남편을 시켜 밭을 요구하게 하려고 했었다. 이 밭은 특별한 밭이거나 혹은 갈렙의 분깃에 속한 들판의 밭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갈렙이 결혼한 자기 딸에게 준 남방 땅에 연접되어 있었다. 그녀는 자기 남편이 자기 아버지와 가장 유리한 관계에 있다고 생각했다. 틀림없이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의 남편이 최근에 이루어 놓은 영광스러운 일을 굉장히 기뻐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남편은 그녀가 요청하는 것이 보다 더 타당하고 또 그녀가 훨씬 더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녀는 자기 의사와는 반대되지만 남편의 판단에 복종했다. 그리고 그녀는 이 큰 일을 맡아 처리했다.
첫째로 그녀는 자기 아버지가 자기를 데리고 남편의 집으로 갈 때 즉 자기 딸을 잘 시집 보내게 되었다는 만족감에서 그녀를 위해서는 무엇이라도 해 줄 생각이 있을 그 때를 기회로 포착했다.
둘째로 그녀는 "나귀에서 내렸다. "이것은 자기 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섬김의 표시었다. 그녀는 결혼하기 전에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자기 아버지를 섬기려고 했었다. 70인 역과 라틴어 역에는 그녀가 나귀에서 내리면서 "울고 한숨지었다" 라고 되어 있다. 그녀는 어떤 슬픔과 관심을 표시함으로써 자기 아버지로 하여금 그녀가 원하는 것을 요구할 기회를 줄 수 있게 했을 것이다.
셋째로 그녀는 이것을 "축복" 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이것이 그녀의 생활에 편의를 더해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기가 결혼하는 것은 아버지의 뜻에 대한 동의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아버지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도 되므로 아버지가 그녀를 축복하는 일을 거절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었다.
넷째로 그녀는 "샘" 만을 구한다. 그 샘이 없이는 그녀가 가진 땅은 경작이나 목축에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요구한 이것은 그 샘이 있는 밭까지도 의미한다. 그녀의 요청의 절도와 이치에 맞는 주장은 그녀에게 큰 유익을 안겨다 주었다. 물 없는 땅은 물기 없는 나무와 같고 피 없는 동물의 몸과 같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물을 한 곳으로 모이게 하사" 물을 곳곳에 지혜롭고 자비롭게 내려 주심으로써 땅이 사람의 삶을 위해서 풍성하게 도와 줄 수 있게 하셨다(시 104:10 이하 참조). 그래서 악사는 요구하는 바를 얻었고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가 요구하는 바를 주고도 더주었다. "그는 그녀에게 윗샘과 아랫샘을 모두" 주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보통 윗 밭 아랫밭을 구분하는 것처럼, 그 밭에 있는 샘에 따라 두 밭은 그렇게 불렀을 것이라고 본다. 이것을 하늘의 비와 땅의 샘으로부터 솟아나는 샘물로 된 밭 하나로 이해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흔히 비교하는 은유를 말해준다. 즉 우리가 영적 하늘의 축복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우리 영혼에 관계되는 윗샘의 축복으로 보고, 몸과 생명에 관계되는 것들은 아랫샘의 축복으로 본다.
이 이야기로부터 우리가 배울 교훈이 있다.
1. 우리가 보는 대로 정당하고 올바른 방법으로 획득하는 현세의 삶의 평안과 안일에 대한 온건한 욕망은 제10계명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2. 남편과 아내는 자기 가족의 공동의 선을 위해서 서로 권면하고 협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들은 하늘 아버지에게 가장 좋은 축복들, 즉 윗샘의 축복들을 요구하는 일에서 더욱 더 뜻을 모아야 한다.
3. 부모는 자기 자식들의 참된 유익을 위해서 자녀에게 주는 것은 손실로 생각하면 절대로 안 된다. 도리어 그들에게 생계는 물론 유산을 주는 데도 관대해야 하며, 특별히 부모가 의무를 질 때는 더욱 그렇다. 갈렙에게 아들이 있었다(대상 4:15). 그러나 이와 같이 자기 딸에게도 후하게 주었다. 자기 자녀들과 유익하게 나누어 가질 수 있는데도 그것을 자녀에게 주기를 아까와하는 그런 부모들은 자기와 자식들과의 관계를 잊어버린 부모들이다.
유다 지파의 도성들 (여호수아 15:20-63)
우리는 여기서 유다 지파의 기업으로 분배된 몇몇 도시의 이름을 보게 되는데, 이것들이 언급된 것은 이들로 하여금 자기들의 것을 알고 그것을 지키되 굳게 지켜서 비겹이나 나태 때문에 자기들의 소유를 잃어버리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Ⅰ. 여기에 성읍들의 이름이 기록되고 몇 분류로 숫자가 나뉘어 지는데 그것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좋은 이유가 있어서 그렇게 했을 것으로 본다.
1. 몇몇 성들은 "에돔 해변을 향한" 변경 도시라고 이야기되고 있다(21-32). 여기에 38개의 이름이 실려 있으나 29개의 성읍으로 이야기하고 있다(32절). 이들 성읍 중 9개는 후에 시므온의 분깃으로 넘어갔으며 19잘 2절 이하에 나타나는 것과 비교해 보면 시므론의 소유로 계수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유다 지파에 남은 것만이 계수되었다(비록 다른 것도 이름은 있지만).2. "평지에" 있는 것으로 이야기되고 있는 성읍들의(33절) 이름은 15개의 성읍이 있으나 14개로 계산되고 있다. 여기에 있는 그데라와 그데로다임이 한 도시의 두 이름이거나 혹은 두 부분으로 된 같은 성읍이라고 생각된다.
3. 16개의 성읍은 아무런 구분의 명칭없이 이름이 적혀 있는데(37-41절) 9개의 성읍이 더 추가되고 있다(42-44절).
4. 그리고 3개의 블레셋 성읍들 곧 에그론과 아스돗과 가사가 나온다(45-47절).
5. "산지의" 성읍들은 모두 11개인데(48-51절) 9개의 성읍이 더 추가되고(52-54절), 10개의 성읍이(55-57절), 또 6개의 성읍이(58, 59절) 그리고 2개의 성읍이(60절) 추가된다. 광야 성읍이 6개가 나오는데, 다른 성읍들 중에서도 몇몇은 그렇겠지만, 주민들이 거의 살지 않는 지방의 한 부분이라고 본다.
Ⅱ. 지금 여기서 우리가 찾을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1. 그런데, 우리는 후에 다윗성이 되고 우리 주 예수님이 태어나서 유명하게 된 베들레헴을 찾아 볼 수가 없다. 그러나 그 성읍은 아무리해도 이렇게 존귀하게 된 경우를 제외해 버린면 "유다의 수천의 고을 중에서도 작은 곳" 이어서(미 5:2), 성읍들 중의 하나로 계수되기에는 너무 작았었다. 그래서 이름이 적히지 않은 마을들 중의 하나가 되고 말았는지도 모른다. 그리스도는 자기가 관계하는 곳에 영광을 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지 그 곳들로부터 영광을 받으러 오신 것은 아니다.2. 예루살렘은 예속해서 여부스 사람들의 손에 있는 것으로 이야기되고 있다(63절). 왜냐하면 나태와 우매와 불신앙으로 "유다자손이 쫓아내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용기와 결단으로 이일을 하려고 했더라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승리를 안겨 주시지 않았을 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은 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할 수가 없었다. 예루살렘은 후에 거룩한 도시, 왕도, 위대한 왕의 도시, 이스라엘 온 땅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자랑거리가 되어야 했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되도록 계획하시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이토록 오랫동안 이들 사이에 끼어 살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성읍들을 정복하는 일에 있어서 이들이 나태한 데 대한 형벌로 보는 것이 정당할지도 모른다.
3. 유다의 성읍들 가운데서(모두 114개인데) 우리는 립나라는 성읍을 보게 되는데, 이 성읍은 요람 왕의 시절에 반역을 일으켜서 자유로운 독립 국가를 세웠던 것 같다(왕하 8:22). 또한 우리는 아마 사아왕이 살해된 라기스를 보게 된다(왕상 14:19). 이 곳은 우상 숭배의 무도를 한 곳이며(미 1:13) 이 곳에서 "시온의 딸의 죄가 시작" 되었다. 아히도벨의 성읍인 길로가 여기에 언급되고 있다. 드고아는 예언자 아모스의 고향이었다. 이 가까이서 여호사밧은 영광스러운 승리를 얻었었다(대하 20:20 이하). 또 마레사는 아사가 정복한 곳이었다.
이 지파의 여러 성읍들이 불운한 시절의 다윗의 역사에 나타난다. 아둘람, 십, 그일라, 마온, 엔게디, 시글락과 있이 이 지파에 계수된 이 성읍들은 다윗이 너무나 자주 드나들던 곳이다. 때때로 사울왕이 그를 여호와의 기업에서 내어 쫓았지만, 다윗은 할 수 있는 한 이곳 가까이 머물렀다. 유다의 광야는 그가 너무나 빈번히 다니던 곳이다. 그곳에세 세례 요한이 복음을 선포했고 하늘 나라가 시작되었다(마 3:1). 이 나라의 풍부는 틀림없이 "그 옷을 포도즙에 빨겠다" 고 한 이 지파에 대한 야곱의 축복의 응답이었다(창 49:11). 총괄적으로 말하면, "유다야 너는 너희 형제의" 질투거리가 아니라 "찬송이 될지라" 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