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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 사데는 두아디라 남동 약 48km 지점에 위치한 도시로 현재 터키인 루디아의 수도였다. 이 도시는 상업적으로 번창한 도시였다. 특히 염직 공업과 양털 염색, 금모래가 유명하여서 사치와 부의 도시로 전략하였고 무역의 요충지가 되었다. 군사적인 면에서는 성채가 남쪽만을 제외하고 모두 암벽으로 되어 있어 난공 불락의 성을 이루고 있었기에 상당히 안일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사데 사람들은 그 안일함으로 인해 두 번 정복을 당하였다. B.C. 6세기 고레스(Cyrus)의 공격과 약 200년 후 안티오쿠스(Antiochus)의 침략이 그것이다. 종교적으로 사데는 시벧리(Cybele) 여신을 섬겼고 황제 숭배가 극심하였다. 한편 사데 교회의 기원은 분명치 않으나 역사가들의 말에 의하면 요한의 전도로 세워졌고 2세기에 이르러 변증가며 주석가로 유명했던 멜리토(Melito)가 이 교회의 감독이 됨으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물질적 부요로 말미암아 내적인 피폐로 안일과 부도덕의 모습이 교회에까지 침투하였다.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 본문은 사데 교회에 계시된 그리스도의 모습이다. '하나님의 일곱 영'은 성령을 가리키며(1:4,16,20, Lenski, Morris, 1:4 주석 참조), '일곱 별'은 교회를 보호하고 책임져야 하는 천사를 가리킨다(1:20 주석 참조). 한편 '가진'은 그리스도께서 성령과 천사의 역할을 주관하심을 시사한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이 하시는 주된 일은 내적인 생명을 주어 하나님의 사람으로 구원을 확증케 하는 일이다(요14:16). 그리스도께서 생명을 부여하고 살리시는 성령과 교회를 지키는 천사를 주관하신다는 사실은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지만' 실제로는 '죽었다'는 선언을 받은 사데 교회의 영적인 상태와 연관된 것으로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권고를 받아들여 회개한다면 언제든지 죽은 사데 교회를 다시 살릴 수 있으며, 신앙을 잃어버리지 않는 소수의 사데 교인을 지키고 계심을 시사한다(4절, Mounce, Moffatt, Ramsay, Ford).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 사데 교회의 '행위'가 사데 교회의 과거 업적을 말하는지 아니면 과거의 명성만 주장한 채 현재는 생명을 상실한 모습을 말하는지 분명하지 않으나 다음 절에서 '온전한 것이 없다'는 선언으로 보아 후자가 타당한 듯하다(Johnson). 실지로 사데 교회는 일곱 교회 중 이단의 특별한 위협이나 외부의 핍박이 가장 적은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이교적 문화나 주변 환경과 타합함으로 생명력을 잃어 버렸다. 사데 교회가 생명력을 상실한 사실을 단적으로 묘사한 '죽었다'는 표현은 사데에서 약 11km 떨어진 언덕같은 수많은 묘지를 암시한다. 이러한 표현이 종종 전통만을 고집하던 유대인들에 대한 비판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Kiddle, Moffatt) 사데 교회가 외적인 형식과 모습은 갖추었으나 신령한 모습은 상실했음을 강하게 부각시킨다.

=====3:2
 너는 일깨워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 '일깨워'에 해당하는 헬라어 '기누 그레고논'(* )은 현재 미완료 시상과 현재 능동태 분사가 결합되어 계속적인 경성(警醒)을 시사한다(Moffatt, Beck, Robertson). 이는 사데 지역이 난공 불락의 천연 요새로 되어 있다는 사실로 인해 안일에 빠져 두번씩이나 점령을 당했던 사데 지역 사람들에게는 특별한 경고가 되었을 것이다(Mounce, Lenski). 그리스도께서는 '일깨워'라는 권면을 사데 교회에 하심으로 회개할 것을 촉구함과(3절) 동시에 사데 교회가 비록 죽음 직전에 있으나 완전한 생명력을 상실한 것이 아님을 암시한다(Weymount). '죽게 된 것을'에 해당하는 헬라어 '하에메론 아포다네인'(* )은 미완료 능동태 시상으로 사데 교회가 부분적으로 살아있음을 보여준다(Swete).  한편 '굳게 하라'의 헬라어 '스테리손'(*  )은 부정 과거 능동태 명령형으로 아직 남아있는 영적 생명을 견고히 보존하는 것이 급선무임을 시사한다.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 '온전한'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플레로메나'(* )는 '충만함'을 나타내는 헬라어 '플레로오'(* )의 완료 수동태 분사로 절대적인 의미에서의 완전함이라기 보다 인간이 행할 수 있는 한계 내에서의 온전함을 말한다. 이것은 비록 사데 교회가 외적으로 보기에 풍성하며 모든 것을 갖추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기준에서 보시기에 허망하였음을 시사한다(Greijdanus).

=====3:3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 본문은 사데 교회를 향한 세 가지 명령이다. (1)생각하고.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므네모뉴에'(* )는 '염두에 두다'란 의미의 '므네모뉴오'(*  )의 현재 명령형으로 '항상 상태를 되돌아 보라'는 뜻이다(12:5). (2)지키어.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테레이'(* ) 역시 '유지하다'는 의미를 가진 헬라어 '테레오'(* )의 현재 능동태 명령형으로 이미 받았고 들었던 복음을 굳게 붙잡아야 함을 시사한다. (3)회개하라. 이것의 헬라어 '메타노에손'(*  )은 '돌이키다'는 의미를 가진 '메타노에오'(* )의 부정 과거 능동태 명령형으로 단번에 결정적으로 죄에서 돌이킬 것을 시사한다. 이러한 단회적이며 시급한 돌이킴에 대한 명령은 임박한 종말에 대한 심판을 내다보며 죄로 부패하기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야 함을 나타낸다(Behm).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내가 알지 못하리라 - 본문은 마24:34과 살전5:2을 반영한다.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고 권면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적으로 죄 속에 머물러 생명력을 상실한다면 마치 도적이 밤에 들이닥치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께서도 예기치 못할 때에 오셔서 반드시 심판하실 것이다. 한편 '알지 못하리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우 메 그노스'(* )는 제2부정 과거 능동태 가정법을 동반한 이중 부정으로 강조적이다.

=====3:4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 본문은 대부분의 사데 교인들이 영적으로 죽은 상태였으나 그 가운데 극소수의 예외가 있었음을 나타낸다.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에 대한 해석은 세 가지이다. (1)혹자는 단순한 도덕적 순결로 해석한다(Moffatt). (2)혹자는 성적인 불결에서 자신을 지키는 것으로 해석한다(Zahn). (3)혹자는 구원받은 자가 사회적인 풍조와 혼합에 물들지 않는 기독교적 성결로 해석한다(고후7:1, Lenski, Johnson). 세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 당시의 사데 교회가 처한 입장은 단순히 도덕적인 타락이나 성적인 범죄와 같은 일부분의 문제가 아니라 생명력을 잃어버리는 내적이고 기독교적인 문제였으며, '옷이 더럽다'는 것은 기독교적 순결에 대한 상징적 표현이기 때문이다(고전8:7; 고후11:2; 유1:23). 이러한 옷에 대한 예는 양모 산업이 발달하여 옷에 대해 관심이 많던 사데 사람들에게는 매우 적절한 것이다. 한편 '몇 명'의 헬라어는 '올리가 오노마타'(*  )로 문자적으로 '몇 이름들'이다(행1:15; 계11:13). 이는 비록 소수이기는 하나 하나님께 기억된 바 됨을 시사한다(Mounce, Ironside).
 희 옷을 입고 나와 함께 기다리니 - '흰 옷'에 대한 견해는 세 가지이다. (1)혹자는 '그리스도의 속죄로 말미암는 의'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Plummer). (2)혹자는 '최후에 그리스도인이 하늘 나라에서 누리게 될 영광과 성결'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Al-ford). (3)혹자는 '죄나 이교도적인 혼합에서 분리시켜 자신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Lenski). 세 가지 견해 중 첫번째와 마지막 견해가 타당하다. 사데 교회의 교인들은 외적인 겉모습에는 관심이 많았으나 그리스도에 대한 내적 정결과 이교(異敎)와의 분리된 삶에 대해서는 무관심하였기 때문이다(Johnson). 한편 '함께 다니리니'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백성이 그와 함께 교제함을 표현하는 것으로(창5:22; 요:6,7) 단순히 현재적인 교제는 물론 장차 그리스도와 함께 나눌 교제를 시사한다(Ladd, Greijdanus).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 '합당한'은 종말에 있게 될 심판의 기준에 타당함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2:7,17,27,28) 하나님의 은혜로 선택함을 받고 그리스도의 속죄의 공로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지속적인 관계를 누리는것을 시사한다(Clarke, Morris).

=====3:5
 본절은 사데 교인들 가운데서 믿음으로 승리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세 가지 약속이다.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 '이기는' 것에 대해서는 사데 교회의 경우 다른 소아시아의 교회와는 달리 외적 핍박이나 특별한 이단 그리고 신비주의가 언급되지 않아 구체적으로 알 수 없으나 문맥과 사데 교회가 처한 당시의 상황을 고려할 때 세상의 부패나 타협, 안일함에서 승리하는 것을 의미하는 듯하다. 한편 승리자에게 주어질 첫번째 약속은 '흰 옷을 입는다'는 것이다. '흰 옷을 입는다'는 말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구속의 피로 희게 되었으며(7:14) 교제를 통해 하나님의 거룩함과의, 영광을 닮아(18절; 6:11; 7:9,13; 19:14) 하나님 나라에게의 궁극적인 승리를 약속받음을 시사한다(4절 주석 참조, Ladd,Johnson).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 '생명책'은 신,구약 성경에서 자주 언급된다(13:8; 17:8; 20:12,15; 21:27; 출32:32; 시69:28; 눅10:20; 빌4:3). '생명책에 기록되었다'는 것은 구약성경에서 시민권을 소유한 자들을 의미하였으며(출32:32,33), 신약성경에서는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를 구별하는 의미로 쓰여 그리스도의 피로 의로워진 자들은 영생을 소유하고 하나님 나라에 속하게 되었음을 시사한다(13:8; 17:8; 20:12,15; 21:27; 눅10:20; 빌4:3, Rosh). 그리스도께서 승리자에게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리라'고 약속하신 것은 승리자를 생명이신 그리스도에게서 결코 분리할 수 없으며(롬8:38,39)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스도께 의존하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한 시민권을 허락하신다는 사실을 시사한다(Johnson, Beasley- Murray).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 본문은 승리자에게 주어지는 세번째 약속으로 마10:32을 반영한다(막8:38; 눅9:26; 12:8). 이것은 보다 적극적으로 하나님 아버지와 천사들 앞에서 공적(公的)으로 시인하시겠다는 약속이다. '시인하리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몰로게소'(* )는 법정에서 증언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끝까지 자신을 의지하여 승리한 자들의 이름을 하나님과 천사들 앞에서 증언하심으로 그들이 하나님 나라의 시민임을 확인하실 것을 시사한다.

=====3:6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 이에 대하여는 2:7 주석을 참조하라.

=====3:7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 '빌라델비아'는 사데 동남쪽 약 40km 지점에 위치한 고원 도시로 포도 생산지로 유명하였다. 그곳은 서머나와 루디아 왕국으로부터 동방으로 가기 위해 제일 먼저 들러야 하는 도시로 '동방의 관문'이라 일컬어지기도 했다. 농업과 상업이 발달하여 경제적으로 상당한 부를 누렸으나 지진이 잦아 피해가 많았다. 또한 많은 신전과 종교적 행사가 있어 A.D.5세기에는 '작은 아테네'로 불렸다. 그러나 빌라델비아는 이교 신전과 종교 행사가 많고 2,3장에 나타난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가 위치한 지역 중 가장 짧은 역사를 기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B. C. 159-138) 아시아가 이슬람 교도들에 의해 짓밟힐 때 유일한 기독교의 보루(堡壘)로서 신앙적인 면에서 가장 칭찬을 받은 지역이다(Lenski, Johnson). 한편 빌라델비아 교회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으며 단지 암미아(Ammia)라는 여선지자가 이 교회를 관할하면서(A.D. 100-160) 큰 부흥을 이룬 듯하다. 이 교회의 성장으로 흩어진 유대인들이 개종하는 역사도 있었으나 반면에 교회를 가장 반대하는 자들 역시 유대인들이었다.
 거룩하고 진실하사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 하기오스, 호 알레디노스'(*  )는 문자적으로 '거룩한 자, 진실한 자'를 의미한다. '호 하기오스'는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에 대한 칭호로 사용되었으나(사1:4; 5:19,24; 10:17,20; 12:6; 렘51:5; 겔39:7; 호11:9; 합3:3) 신약성경에서는 그리스도에게 적용되어 그의 신성과 메시야성을 나타내고 있다(막1:24; 요6:39; 행2:27; 13:35; 히7:26)또한 '호 알레디노스'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1)온전하며 충성된 자. 그리스도께서는 온전한 충성으로 메시야적 직무를 수행하신 완전한 분이심을 시사한다(Hort) (2)진실한 자. 이것은 구약에서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는 칭호로 사용되었으나(사65:16) 본절에서는 그리스도에게 적용되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참된 메시야로서 약속을 반드시 성취하는 분이시므로 예수의 메시야성을 부정하는 유대인들의 주장에 대한 반박으로 언급되었다(Mounce, Ladd).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 - 본문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모습은 사22:15-25을 반영한다. 이사야서에서 국고를 맡고 있는 셉나 대신에 엘리야김이 다윗의 집 열쇠를 맡아 다윗의 집 전체를 관리하는 권세를 행할 수 있게 되었다. 본문에서 '다윗의 열쇠'는 다윗의 집 즉 하나님 나라의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로서 하나님 나라의 특성인 영생의 수여권을 시사한다(Ladd, Beasley-Murray). 엘리야김이 다윗의 집을 관리하는 열쇠를 소유한 바와 같이 스리스도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다스리고 관리하는 열쇠를 소유하여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자와 들어갈 수 없는 자를 결정하신다(Johnson). 한편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는 '다윗의 열쇠를 가진 이'에 대한 해석으로 당시 빌라델비아의 정황을 반영한다. 당시 빌라델비아에 많이 거주하였던 유대인들은 오직 자신들만이 다윗의 나라를 유업으로 물려 받았다고 주장하였다. 그러한 상황 속에 살던 빌라델비아 교인들에게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다윗의 열쇠를 가진이'라고 계시한 것은 유대인들이 주장하는 선민 의식에 대한 반론이며, 그리스도 자신이 천국의 주권을 가진 메시야이심을 강조함으로 빌라델비아 교인들을 위로하신 것이다(1:18; 마28:18; 엡1:22; 히3:6).

=====3:8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 '열린 문'에 대한 해석은 세 가지이다. (1)혹자는 남북으로 로마와 소아시아의 수도 에베소를 연결하는 빌라델비아의 지리적위치 때문에 이를 '선교의 문'으로 해석한다(Ramsay, Swete, Alford, Clarke, Charles, Holtzmann). (2)혹자는 '그리스도의 문'이나, '기도나 순교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집접 나아가는 길'로 해석한다(Kiddle, Moffatt). (3)혹자는 천국으로 들어가는 '구원의 문'으로 해석한다(Ladd, Zahn, Rist, Beckwith). 이 가운데서 세번째의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 왜냐하면 12절과 본서의 종말론적(終末論的) 성격으로 볼 때 그리스도께서 열어주신 구원의 문을 닫을 사람이 없는 것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 - 본문은 그리스도께서 빌라델비아 교인들을 칭찬하신 내용이다. '적은 능력'에 해당하는 헬라어 '미크란 에케이스 뒤나민'(*  )은 '능력이 거의 없다'는 의미로 그 지역에서 빌라델비아 교인들의 신분이나 지위 등의 외적 능력이 변변치 못함을 나타낸다. 한편 '지키며'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이 에테레사스'(* )는 반의적인 강조 표현으로 문자적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켰다'를 의미한다. 이는 빌라델비아 교인들이 유대인들이 가하는 시련과 온갖 유혹 가운데서도(9절) 진리의 편에 굳게 서서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살았음을 시사한다.

=====3:9
 보라 사단의 회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않고 거짓말하는 자들 중에서 - 빌라델비아 교회가 처한 문제는 외적인 황제 숭배나 핍박같은 것도 아니었고 부도덕하게 혼합주의로 이끌어 가는 이세벧주의나 니골라당 같은 내적 문제도 아니었다. 그들이 처한 위기는 예수의 메시야되심을 부정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을 핍박하는 유대인들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그들은 혈통적인 면에서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고, 자신들만이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였다고 주장하나 예수의 메시야성을 부정함으로 사단을 추종하는 자들 즉 '사단의 회'가 되었다. 그들은 진정한 유대인이 혈통과 같은 외적인 요소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이루어지는 이면적(裏面的)인 것임을 망각하였다(롬2:28,29).
 몇을 네게 주어 저희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 유대인들은 본래 이방인들이 자신들에게 찾아와 굴복한다고 믿고 있다(사45:14; 60:14).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본문에서 유대인들이 생각하고 믿는 바와는 반대로 유대인들이 내면적인 유대인이 된 그리스도인들에게 찾아와 굴복할 것이라고 선언하신다. 이것에 대해서 혹자는 유대인들의 회심이라고 해석하나(롬9-11장, Ladd) 문맥상 본문은 예수의 메시야되심을 부인하는 '사단의 회'인 유대인들을 그리스도께서 심판하심을 나타낸다(Johnson, Mounce). 그리스도께서는 예수의 메시야성을 부인한 혈통적 유대인들을 징계하시고 심판하셔서, 이면적이고 영적인 유대인들인 그리스도인들에게 굴복케 하심으로 메시야이신 당신께서 그리스도인들을 사랑하고 계심을 드러내신다.

=====3:10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 '나의 인내의 말씀'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이다. (1)혹자는 '인내함으로 그리스도의 마지막 재림을 기다리라'는 명령으로 해석한다(눅21:19; 히10:36, Lohmeyer, Vincent, Zahn). (2)혹자는 '인내로써 죄많은 세상의 모순을 극복하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인내하라'는 말씀으로 해석한다(살후3:5; 히12:3, Johnson, Charles, Ladd, Alford, Moffatt).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 '시험의 때'에 관해서는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1)혹자는 빌라델비아 지역에서 교회가 당면한 여러 문제들에 대해 개인이 혹은 교회 공동체가 겪는 고통으로 해석한다(Payne). (2)혹자는 그리스도의 재림 시에 비그리스도인에게 임할 하나님의 진노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Ladd, Mounce, Johnson).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시험의 때'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면하게 하리니'와 상관 관계를 형성하여 그 의미를 더 분명하게 드러낸다. '면하게 하리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테레소 에크'(* )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혹자는 요17:15의 용례를 들어 전치사 '에크'(* , '...중에서 밖으로')가 사용된 것은 환난 가운데서 보호받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하면서 본문은 빌라델비아 교인들이 현재 처하고 있는 고통에서 보호받게 될 것을 말한다고 해석한다(Charles). (2)혹자는 약1:27의 용례를 들어 전치사 '에크'를 '아포'(* , '...로부터')의 의미로 보아 환난에서 떠나 보호를 받는 것으로 해석한다. 따라서 이는 장차 빌라델비아 교인들이 환난 그 자체에서 제외된다는 입장으로 해석한다(Moffatt, Rist). 이 드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시험의 때'가 그리스도의 재림시에 임할 하나님의 진노 또는 심판을 의미하기 때문이다(Johnson). 하나님께 순종하며 그 말씀을 따르고 지키는 그리스도인들은 비록 사단의 역사로 인한 고난은 받을지라도 그리스도의 재림시에 임할 하나님의 진노는 면하게 될 것이다.
 이는 장차 온 세상이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 본문은 앞서 언급된 '시험의 때'에 대한 보충문이다. 본서에서 '땅에 거하는 자들'은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교회를 대적한 비그리스도인들을 지칭한다(6:10; 8:13; 11:10; 13:8,14; 17:8). 그러기에 본절의 '시험할 때'는 그리스도인이나 비그리스도인 모두가 당하는 일반적인 환난의 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비그리스도인에게 임할 하나님의 진노의 때를 가리킨다.

=====3:11
 내가 속히 임하리니 - 본문은 본서의 중심 사상으로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된다. (1)심판의 측면. 그리스도의 재림은 악한 자들에 대한 공의의 심판을 목적으로 한다(마24:48-51; 살후1:7-9). 이는 에베소(2:5), 버가모(2:16) 및 사데 교회(3절)에 임하신 모습이다. (2)축복의 측면. 본문에서는 심판의 경고가 아닌 충성된 빌라델비아 교인들을 향한 축복의 재림의 약속을 나타낸다(2:16; 22:7,12,20, Johnson).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 '굳게 잡아'에 해당하는 헬라어 '크라테이'(* )는 현재 명령형 시제로 이제까지 빌라델비아 교회가 지켜온 믿음을 더욱 지속적으로 공고히 해야 함을 시사한다. 한편 '면류관'은 경기장에서 승리한 선수에게 주어지는 상을 의미하는 것으로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는 말은 경기장에서 선수가 상을 잃지 않도록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것과 마찬가지로(히12:1-4) 빌라델비아 교인들도 지속적으로 영적 무장을 통해 환난과 핍박 속에서도 인내의 말씀을 지켜 승리해야 함을 시사한다('면류관'에 대해서는 2:10 주석을 참조하라).

=====3:12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 본문은 당시 빌라델비아 교인들이 이해하기 쉬운 '성전 기둥'을 비유로 하고 있다. 당시 빌라델비아는 잦은 지진으로 건물들이 폐허가 되었으나 파괴된 건물 가운데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것은 신전의 돌 기둥뿐이었다(Ramsay, Johnson). 지진과 폐허 가운데 유일하게 남아 있는 신전 기둥을 본 빌라델비아 교인들에게 하나님이 거주하시는 하나님 성전의 기둥이 되게 하신다는 약속은 승리자들이 하나님 나라에서 중요하고 요동치 않는 위치를 차지하게 될 것임을 시사한다(렘1:18; 딤전3:15, Charles,Mounce, Ladd).
 내가...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 본문은 빌라델비아 교인들 중 승리자에게 주어진 두번째 약속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세 종류의 이름을 부여할 것이라고 약속한다. 이름을 부여받는 것은 당시 빌라델비아 교인들에게 있어서 친숙한 것이었다. 빌라델비아는 지진으로 인해 폐허가 되었을 때 티베리우스(Tiberius)의 도움으로 재건된 후 '네오가이사랴'(Neocaesarea)라는 이름을 부여받았고 후에 베스파시안(Vespasian) 황제의 성을 따라 '플라비아'(Flavia)로 개명되었다(A.D. 70-79). 이러한 경험을 한 빌라델비아 교인들에게 그리스도께서 이름을 부여하신다고 약속하신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1)하나님의 이름 -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하나님의 이름이 주어졌다(민6:27).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속하였음을 시사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승리한 빌라델비아 교인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이 주어진다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께 속하였음을 나타낸다(22:4, Ladd, Morris, Johnson).
 (2)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 - 하나님의 성인 새 예루살렘의 이름이 주어진다는 것은 승리한 자들이 하나님의 새 예루살렘의 시민권을 소유함을 시사한다(Mounce, Ladd, Morris).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소유한 것으로(빌3:20) 그때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거주할 것임을 암시한다.
 (3)나의 새 이름 - 그리스도의 새이름이 주어진다는 것은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새 이름, 곧 다른 모든 권세들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절대적인 권력과 인격 그리고 성품을 나타내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이름이 이긴자들에게 주어짐을 의미한다(19:12, Mounce, Morris, Beasley-Murray, Ladd) 다른 하나는 구속을 통해서 그리스도에게 속하였음을 나타낸다(사62:6; 65:15, Johnson).

=====3:13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 2:7절 주석을 참조하라.

=====3:14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 라오디게아는 빌라델비아 동남쪽 약72km, 에베소에서 동쪽으로 약 160km 지점에 위치한 도시로서 라이커스(Lycus) 계곡에 있는 여러 도시들 중 하나이다. 또한 맞은 편으로 10km 지점에는 히에라볼리가 약 14km 지점에 골로새가 위치해 있었는데 이 세 곳은 바울 서신에서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곳이다(골4:13,16). 이곳의 특징은 교통의 요충지였을 뿐만 아니라 모직물 공업의 중심지였으며 '브루기아 가루'마 알려진 안약과 의학교가 있었다. 또한 활발한 금융 거래로 풍요로운 생활을 누렸다. 그러나 이곳은 물 사정이 좋지 않아 히에라볼리와 골로새로부터 항상 수로를 이용해 물을 공급받아야 했다. 한편 라오디게아 교회는 에바브라가 설립하였으며(골4:12,13) 골로새 교회와 함께 바울이 지도하였다.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 '아멘이시요'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 아멘'(* )은 문자적으로 '아멘인 자'를 의미하며 구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칭호로 나타난다(사65:16). 이것은 70인역에서 '톤 데온 톤 알레디논'(*  , '진실한 하나님')으로 나타나면 '진리의 하나님'(the God of the truth, RSV), '이름이 아멘이신 하나님'(the God whose name is Amen, NEB)으로 번역되었다. 이는 하나님께서 진리이시며, 신실하심을 시사한다. 본문에서는 이러한 칭호가 그리스도에게 적용되어 라오디게아 교회의 신실하지 못함에 대한 그리스도의 신실성이 부각되고 있다(1:5,6; 고후1:20, Mounce). 한편 '충성되고 참된 증인'은 '아멘이시요'와 동일한 사상을 내포하는 칭호로(Ford, Beasley-Murray, Morris)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을 계시하시고 하나님이 신실하심을 증거하시기 위해 온전한 순종과 충성으로 구약의 모든 예언을 성취하셨음을 시사한다(1:5,9;2:13;고후1:20, Johnson).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의 헬라어 '헤 아르케 테스 크티세오스 투 데우'(*  )에서 '아르케'는 하나님의 모든 창조물의 최고(最?)의 근원을 나타낸다. 이 칭호는 그리스도의 또 다른 칭호 즉 '알파와 오메가'에서 '알파'에 해당되는 것으로(Beasley-Murray) 그리스도께서 피조물 가운데 처음이란 의미가 아니라 창조자이며 창조의 근본이심을 나타낸다(잠8:22ff.; 요1:1-3; 고전1:30; 골1:15; 히1:2,3, Moffatt, Charles, Lightfoot). 또한 이 칭호는 그리스도의 선재성(先在性)을 시사한다(Moffatt).

=====3: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 본문은 라오디게아 교인들이 열심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아무런 영향력이 없음을 책망하는 내용이다. 여기서 '차다'는 것은 라오디게아의 물 사정이 좋지 않아 약 16km 떨어진 골로새로부터 냉수를 공급받는 사실을 염두에 둔 것으로 그들이 불신의 상태로 세상에 속하였음을 시사한다. '더웁다'는 것은 인접한 히에라볼리의 온천수를 염두에 둔 것으로 신앙을 위한 열정을 비유한다. 그러나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차지도 덥지도' 즉 그리스도를 대적하며 세상과 타협하지도, 혹은 그리스도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소유하지도 않은 상태로 미지근하였다(16절). 즉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에 대해 무관심하고, 자만하는 자들이었다. 라오디게아 교인들에게 '차든지 덥든지'하라는 요구는 양자 중 반드시 하나를 선택하라는 의미라기보다 '차든지'와 '덥든지'의 중간 상태를 택하는 그들의 '미지근한 상태'에 대한 신랄한 책망이다(Johnson).

=====3: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 '미지근하여'라는 언급은 '차다', '더웁다'는 말과 관련되어 라오디게아 교회의 영적 상태가 무익하고 무력함을 나타낸다(Beckwith, Green, Rudwick). 라오디게아 사람들은 히에라볼리로부터 끌어온 온천수와 골로새로부터 수로를 통해 가져온 찬물을 공급받는 과정에서 물이 미지근하게 됨으로 식수로 사용하기에는 부적합하여 마시는 자마다 토하여 버렸다. 라오디게아 사람들이 미지근한 물을 토해 버리듯이 그리스도께서도 미지근한 영적 상태에 머물러 있는 라오디게아 교인들을 거부하고 버리겠다고 책망하신다.

=====3: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 '부요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플루테카'(* )는 현재 완료형으로 이제 완전히 부요한 상태에 도달했다는 의미이다.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스스로가 부요하여 더이상 바랄 것이나 부족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실질적으로 그들은 상당히 부요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영적으로는 매우 빈곤하고 곤고하다. 이러한 모습은 서머나 교회와 대조를 이룬다. 서머나 교회는 외적으로 가난하였으나 영적으로 부요하였던 반면에 라오디게아 교회는 그 반대였다.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 본문은 라오디게아 교회의 실상을 묘사한 것으로 두 부분으로 나뉜다(Mounce, Johnson). (1)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 '곤고한 것'은 전쟁으로 인해 모든 것이 약탈되거나 파괴당했을 경우를 묘사하는 것으로(시137:8; 롬7:24) 그 어떤 도움이 될 만한 것이 없는 상태를 나타낸다. 이러한 라오디게아 교인들의 영적 상태는 물질적 부와 정반대로 가련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Lenski, Moffatt, Morris). (2)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 '가난'은 라오디게아인들이 금융업이 발달할 정도로 물질적인 부를 축척한 것과는 달리 영적으로는 그리스도를 섬길 수 없는 상태 곧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해 알지 못하고 있음을 나타내며(2:9), '눈먼 것'은 라오디게아에 특수한 안약과 의학교가 있었던 것과는 달리 영적 시각 장애자로 분별력을 잃은 것을 의미하고, '벌거벗은 것'은 라오디게아의 검정색 양모가 유명했던 것과는 달리 그들이 영적으로 벗은 모습임을 시사한다(Mounce).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실상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인식하지 못한 채 스스로 부요하다고 착각하여 전혀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해 모르는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Johnson).

=====3:18
 본절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앞절과 동일한 방법으로 라오디게아에서 유명하고 풍부했던 것을 예로 들어 그들의 영적 무관심에 대해 권면하고 있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 그리스도께서는 영적으로 가난한 라오디게아 교인들에게 불로 연단한 금, 곧 시련을 통한 믿음을 사서 영적으로 부요해지라고 권면한다(사55:1, Johnson).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 라오디게아는 광택있는 검은 양모 생산지로 유명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양모가 아닌 '흰 옷' 곧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는 의의 옷을 입고 영적으로 수치스럽게 벌거벗은 것을 가리라고 권면하신다. 한편 그리스도께서는 이 지역의 특산물인 안약을 사서 치유하라고 권면함으로 그들의 영적 시각 장애를 치유하고 자신을 온전히 바라보라고 권면하신다(골1:27; 2:3).

=====3: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 하나님의 사랑은 주로 '아가파오'(* , '사랑하다')로 표현되는데 본절의 '사랑하는'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필로'(* )로 되어있다. 이러한 문자적인 차이로 인해서 혹자는 '아가파오'가 하나님께서 은혜로 사랑하시는 모습을 나타내는 반면에 '필로'는 그리스도의 판단으로 사랑하심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Bengel). 그러나 필로는 '아가파오'와 동일한 의미를 지닌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Barclay, Charles). 왜냐하면 신약성경에서도 자주 '필로'와 '아가파오'가 같은 뜻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요5:20; 16:27). 한편 '책망'의 헬라어 '엘렝코'(* )는 원래 '낮춤'을 의미하는 말로 '말로써 교훈하고 다스리는 것'을 나타내며(눅3:19; 딤전5:20), '징계'는 책망이 구체적인 형태로 나타나는 행위를 의미한다(히12:5,7). 그리스도께서는 그 사랑하는 자의 잘못을 방관(傍觀)하지 않으시며 사랑어린 책망과 징계로 인도하신다.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 '열심을 내라'의 헬라어 '젤류에'(*  )는 현재 명령형이며, '회개하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타노에손'(*  )은 부정 과거 시상이다. 이 두 개의 명령문의 시상 변화는 '단번에 결정적으로 회개하고 지속적으로 열심을 내라'는 의미를 갖는다(Moffatt, Rebertson).

=====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 '서서'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스테카'(* )는 현재 완료 시상으로 이미 오셔서 준비가 완료된 상태를 의미하며 '두드리노니'의 헬라어 '크루오'(* )는 현재 시상으로 지금도 계속해서 두드리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나타낸다. 이것은 죄인들을 향한 그리스도의 인내와 사랑을 알리시는 모습으로 불신앙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초청과 약속의 말씀이다(Mounce, Trench). 한편 '문'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혹자는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는 새로운 세상으로 해석한다(마24:33; 약5:9, Swete, Beckwith). (2)혹자는 라오디게아 교인들의 마음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Mounce, Johnson).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앞절에서 현재 회개하고 열심을 내라고 권면하였기 때문에 본문의 '문'은 현재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교제를 나누어야 하는 라오디게아 교인들의 마음을 지칭한다(Ladd).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 본문은 라오디게아 교인들이 그리스도의 회개 촉구의 권면을 듣고 회개하여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의 결과를 나타낸다. '먹고'의 헬라어 '데이프네소'(* )는 교제를 나누며 즐기는 식사를 가리킨다(Morris, Ladd, Johnson, Mounce). 라오디게아 교인들이 회개하여 그리스도를 영접할 경우 그리스도께서는 그들 안에 거하셔서 그들과 더불어 교제를 나누시며 친밀한 관계를 이루신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은 현재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들과 성령을 통해 교제하신다(요14:23).

=====3: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 본문은 승리자에게 주시는 약속이다. 그리스도께서 보좌에 앉으심은 그의 왕적 지위를 시사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하나님 아버지의 보좌에 앉음으로 왕적인 지위를 누리시는 것처럼 승리자에게도 그와 동일하게 권세를 허락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즉 이것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할 것에 대한 약속이다(1:6,9; 2:26,27; 5:10; 20:4-6; 눅22:28-30; 롬8:17; 딤후 2:12). 한편 '보좌에'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토 드로노'(* )에는 '위에'를 의미하는 전치사 '에피'(* )가 아니라, '안에'를 의미하는 '엔'(* )이 사용되어 단순히 보좌에 앉는 것뿐 아니라 그 이상의 명예와 권세를 주시며 참여하게 하시겠다는 약속을 시사한다(Plummer). 이렇게 그리스도의 권면을 받아들이고 회개하여 그리스도와 교제를 나누는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적인 통치를 공유하게 될 것이다.

=====3:22
 2:7 주석을 참조하라.

 

 

제 1막 제 5장 사데교회

1.받는 이들-사데교회
 두아디라에서 동남쪽으로 약 30마일(48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사데는 옛 루디아의 수도요 양모와 염색 공업의 중심지였다. 또한 사데는 이교의 여신 시벨레 숭배의 요지였으며, 쾌락주의의 온상으로 유명하였다. 우리에게 알려진 바 요한계시록에 관한 초기의 작품인 2세기 말엽 사데의 감독 멜리토에 의하여 쓰여졌다.

2.환상적으로 나타난 저자의 모습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는 주 예수 그리스도시다(1:4,16,20). 그분만 분명한 지각이 있고 사데 교회를 향해서 뿐만 아니라 모든 개교회에 대해서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라고 말씀하실 수 있으시다.

3.책망-그릇된 평판
 사데 교회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일반적인 칭찬의 말은 하나도 없고 책망뿐이다. 그 교회의 상태는 놀라우리 만치 건강치 못하다. 그 교회가 살아 있고 활동적이라는 이름, 즉 평판은 있으나 사실은 죽은 교회이다. 사데교회가 스스로 활력이 있다고 생각되는 것은 썩은 알맹이를 둘러싸고 있는 껍데기에 불과하다. 사데 교회의 전체 교인들은 그리스도께서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들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마23:27,28).하고 비난하신 서기관과 바리새인과 다를 바가 없다(딤전 5:6에는 일락을 추구하는 과부는 살았으니 죽은 자라는 표현이 있다). 이들은 경건의 능력을 인정하는 듯하지만 사실은 그것을 부인하는 생활을 하는 외형주의자들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딤후3:5).

4.권고
1]경계하라
(계3:2) 너는 일깨워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총체적인 영적 괴사 상태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생명의 잔재는 남아 있다. 그러므로 혼수 상태에서 각성하고 달리 손을 쓰지 않으면 곧 죽게 될 처지에서 구원받으라고 명령한다. 개선의 여지가 전혀 없다면 이런 식으로든지 혹은 다른 식으로든지 간에 사데교회에게 편지 쓸 아무 이유가 없을 것이다. 사람의 눈으로 볼 때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 같고 만사가 다 좋아 보이지만(앞절에 있는 대로)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시는 내 하나님 앞에서는 이 교회의 행위가 틀림없이 열정적으로 시작되었을지라도 온전하지 못하고(성취되지 못하고) 불완전하고 희미하므로 무의미하게 되었다. 지금은 사데 교회의 교인들이 잠에서 깨어나(롬13:11) 그들의 피곤한 손을 들고 연약한 무릎을 강하게 할(히12:12) 적기, 아마도 마지막 기회일 것이다. 무화과 나무 비유처럼 만일 주께서 오셔서 열매를 찾으려고 하시는데 하나도 찾을 수 없다면 얼마나 비참하겠는가! 그래서 주께서는 그 교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다음 해에 열매를 맺으면 좋고 선한 일이지만 그렇지 못하거든 찍어 내 버리소서"(눅13:7-9). 사데 교회가 영적으로 소생하고 그들의 행위를 완전하게 하기에 늦지 않았다는 것은 "너는 일깨워...... 그 남은 바를 강하게 하라"는 권면에 암시되어 있다. 주님께서 그들을 물리치지 않으시고 그들의 회복을 구하신 것은 그의 오래 참으심과 자비로운 은혜를 증거하는 것이다.

2]회개하라
(계3:3)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주님의 권고는 에베소 교회에게 주신 권고와 비슷한 방법으로 계속된다(2:5). 사데교회는 그들이 처음에 들었던 메시지와 그후 그들이 받고 환영한 교훈을 기억하여야 했다. 그리고 그들은 이상한 음성에 마음이 빼앗길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태만을 회개하는 심정으로 진리를 굳게 지켜야 했다. 이전에 그들에게 전파되었던 진리를 잊어버렸다는 것은 용서받지 못할 죄이다. 이와 똑같은 목적으로 사도 바울은 에베소에서 온 장로들에게 그들이 바울 자신에게서 받은 교훈을 기억하면서 깨어 지키라고 권고하였다(행20:31). 또한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에게서 들은 바른 말씀을 본받고 성령이 그에게 부탁하신 진리를 지키라고 권고하였다(딤후1:13,14). 그리고 디도에게 감독이 마땅히 행해야 할 일을 교훈 하였다.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 이는 능히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스려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이라"(딛1:9).

3]만일 경계하지 아니하면?
 주님은 사데 교회가 "깨어 있으라"는 부르심을 듣지 않는다면 그들이 나태하고 방종하여 주님을 만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을 때에 갑자기 도적같이 네게 이르겠다고 그들에게 경고하신다. 이것은 주님의 재림과 관련하여 신약성경 여러 곳에 자주 등장하는 비유이다(마24:42-44, 막13:33-37 눅12:39-40, 살전 5:2,4, 벧후3:10, 계16:15). 물론 이 말이 가르치는 요지는 도적은 알리지 않고 경고도 없이 예기치 않은 때에 사람들이 경계하지 않고 잠든 사이에 온다는 것이다. 본문에서 주님이 경고하시는 임함은 항상 긴박감을 주는 그의 재림을 가리킬 수도 있으나 이것은 또한 에베소 교회에게 경고하신 바-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2:5)- 비교하여 그에 필적할 만한 심판의 형태로 임하는 일시적인 방문일 수도 있다. 그들이 무시한 생명의 빛은 그 빛을 환영하는 다른 사람에게로 돌아갈 것이다.

4]신실한 소수를 격려하심
(계3:4)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사데 교회에는 암흑의 상황 속에서도 자기들이 옷 자기들의 생활을 지킨 신실한 사람들이 몇 명 남아 있었다. 이들은 모든 면에서 유혹을 피하여 도덕적으로 문란하거나 영적으로 불신실하게 되는 것을 피한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의 증거의 향기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빛은 계속 발하게 된다. 그들은 그 육체로 더럽힌 옷이라도 싫어한다(유23).
                                                                              
 "나와 함께 다니리라"는 주님의 약속은 주 하나님께서 그의 형상대로 지으신 사람들과 함께 다니시며 인격적인 사귐을 나누시던 타락 이전에 동산에서 향유하였던 모든 것의 창조주 되신 분과 나누는 거룩한 사귐을 구속받은 사람들에게 회복시켜 주시겠다는 약속을 의미한다. 함께 다닌다는 것은 구속주와 구원받은 사람들 사이에 있는 뜻과 감정의 완전한 조화를 표현하는 말이다(암3:3). 이것은 잃어버린 낙원의 복원, 곧 생명 나무에 가까이 간다는 말로 표현된 실재이다(계2:7,22:2,14,19).                                                   
                                                                              
 게다가 "흰 옷"을 입고 주님과 함께 다닐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한"(계7:9,14) 큰 무리들 가운데 있으면서 구주의 흠없는 순결로 옷 입은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계속해서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는 말이 첨가되었다. 하지만 그들이 합당한 이유는 그들에게 어떤 공덕이나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을 만한 근거가 있어서가 아니다. 사람이 그를 만드신 창조주와 함께 하는 태초의 사귐을 회복하는 본질적인 조건은 우리의 죄와 불경건의 오염을 깨끗이 씻는 것이며 이것은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속죄의 죽음을 당하신 성육하신 아드님, 어린양의 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합당함"은 복음을 통해 선포된 사죄와 화목의 은혜를 감사함으로 받은 사람에게 부여되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를 합당한 자라고 일컫는 것은 그들 개개인에게 합당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합당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혼인 잔치 비유에서 왕의 초청을 거절한 사람들은 합장치 않는 자들이다(마22:8). 또한 전적인 순종도 합당히 여겨 주실 것을 요청할 만한 공로가 되지 못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고 말씀하셨다(눅17:10). 요한계시록 5:1 이하의 기록을 보면 일곱 인으로 봉하여진 두루마리 책에 관한 내용이 있는데 요한은 누가 책을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고 질문한 후 이 책을 펴거나 보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않기로 크게 울었다. 그러나 결국 요한은 어린양이 그렇게 하기에 합당하다는 확신을 얻는다. 따라서 주께서 영광 중에 재림하실 때 전 피조물은 하나같이 구원받은 자의 합당함이 아니라 구주의 합당함을 찬양할 것이다(계4:11,5:9,12).

 자기 의라는 견지에서는 합당한 것이 없지만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와 그가 행하신 사역 안에서 의롭다 하심을 입은 사람들에게는 그리스도인의 삶 본연의 일종의 합당한 것-변함없는 신실함이 그 특징인-이 있다. 이런 면에서 보면 합당함은 적합한 것 또는 타당한 것과 동의어이다. 자기가 구원받았던 죄의 길로 다시 돌아가는 것은 자기 위치를 그리스도 안에 두고 있은 사람에게는 적합한 것이 아니며, 자신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삶이 변화된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는 것과도 어울리지 않는다. 그렇게 하는 것은 전혀 합당하지 않다. 은혜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것이 책임으로부터 면제해 주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인이 그의 주인으로부터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칭찬을 듣고자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마25:21).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향해서 그들이 부름 받은 부름에 합당한 생활을 하라(엡4:1), 그리고 빌립보 교회에게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빌1:27)고 그리고 골로새 교회를 향해서는 주께 합당히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가라고 권고하였다(골1:10,살전2:12,살후1:5). 사데교회에 있는 옷을 더럽히지 않는 자 몇 명이 합당한 자라고 불린 것은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생명에 대한 감사와 하나님께 대한 헌신의 반응으로 나타난 이 합당함도 하나님의 은혜와 뗄래야 뗄 수가 없다. 그 합당함이란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그리고 그 은혜에 의해서 표현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 안에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신다(빌2:13)고 외쳤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10)고 증거한다.

5.이기는 자에 대한 약속
(계3:5)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계3:6)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흰옷을 입는다는 것은 흰옷을 입고 주님과 함께 다닌다는 것과 같은 말이며, 그 약속의 성취는 어린양의 피로 씻음 받은 흰옷을 입은 허다한 무리, 즉 구원받은 자들에게서 찾을 수 있다(계7:9,14).

 영원한 생명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의 이름이 기록된 생명 책은 주께서 구속하신 그의 택함 받은 자의 이름을 다 주께서 아시며 그들 한 사람 한사람을 그가 사랑하신다는 진리를 상징한다(13:18,17:7,20:12,15,21:27 빌4:13). 그리스도께서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역하는 제자들에게 귀신들도 복종하는 것으로 인해 기뻐하며 전도 여행에서 돌아온 70명에게도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오직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인해 기뻐하라고 충고하셨다(눅10:17-20). 이와 비슷한 방법으로 히브리서 저자는 하늘에 등록된 장자에 대하여 언급한다(히12:23). 이 비유적 표현을 여자적으로 해석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름을 흐리게 한다는 것은 그 이름을 영원한 생명을 받은 사람들 가운데 있게 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그 이름이 흐리게 된 사람이란 회개하지 않은 죄인과 복음을 거절한 사람이다(출32:33,신9:14,29:19,20). 이런 말씀을 근거로 하늘에서 끊임없이 장부 정리하는 일이 있을 것이라고 상상하는 것은 잘못이다. 즉 마치 새 이름을 등록할 뿐만 아니라 기존의 이름을 지우고 또 지운 이름을 다시 쓰고 하는 일과 같은 계속적인 장부 정리가 하늘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개념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신분에 대한 (자기의 이름이 오늘은 있다가 내일은 지워질는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하나님의 구원 행위의 궁극적인 결과에 대한 하나님의 의지조차 믿지 못한 데서 생긴 것에 불과하며 그런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본문은 계시록 13:8의 창세이후로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 책에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니라는 말씀과 정확히 일치하는 내용이다. 반면 선한 목자는 그의 양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10:28)  "창세 전에 그 안에서 택함을 입은 자들"(엡1:4)인 그들을 위해 하늘에 간직한 기업은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이다(벧전 1:4).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구원받은 자들이 소유하고 있는 영생(요3:16,5:25)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보다는 사람에 의존하는 단지 순간적인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약속은 거짓으로 판명날 것인데 이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이기는 자의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는 계속되는 주님의 약속은 복음서에 기록된 바 사람 앞에서 주를 시인하고 복음을 부인하지 않고 주의 이름을 위해 핍박을 당하는 사람에게 약속하신 약속을 반복하며 확증한다(마10:32,눅12:8). 주님께서 시인하는 이름은 생명 책에 기록된 이름과 동일한 이름이다.


제 1막 제 6장 빌라델비아 교회

(계3:7)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 (계3:8)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 (계3:9) 보라 사단의 회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않고 거짓말 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저희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계3:10)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계3:11)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계3:12)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 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계3:13)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1.받는 이들-빌라델비아 교회
 빌라델비아 성읍은 사데에서 남동쪽으로 30마일(48Km)도 채 안되는 곳에 위치해 있다. 빌라델비아는 포도를 재배하는 곳으로 예로부터 디오니소스 숭배의 중심지였다. 빌라델비아 교회가 그렇게 힘있는 교회가 아닌 듯 싶지만 그 교회에 보낸 편지에는 책망의 말씀이 하나도 없다.

2.편지를 보내는 이의 모습
 거룩하고 진실하신 주께서 교회의 일원들에게 편지하시며(동일한 형용사가 6:10에 다시 등장한다) 그를 따르는 자들도 그가 거룩하시며 진리에 순종하신 것처럼 그들의 행위에서 거룩 하라는 부름을 받았다(벧전1:15,16,22). 연이어 나오는 구분에 대한 명칭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이라는 명칭은 히스기야 왕실을 섬겼던 엘리야김(왕하18:18,37)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는 이사야 22;22을 인용한 것이다. 그리스도는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임명되시고(엡1:22)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으로(마28:18) 하나님의 집에 충성하였다(히3:6). 그의 손에 들려진 열쇠는 진리와 권위의 상징이며 그것은 다윗의 열쇠이다. 주님이 바로 약속된 다윗의 자손이고 그 나라의 보좌는 영원하기 때문이다(삼하7:13,16,사9:7,계22:16). 그래서 천사 가브리엘이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타나 장차 그녀가 낳을 아들에 대하여 이렇게 선포하였다.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노릇 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눅1:32,33). 그의 권세가 절대적이라는 것은 그가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그가 닫으면 열 사람이 없다는 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우리에게 사망이 결정적인 것이요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을 것 같고 모든 것을 멸망시키는 것 같지만 사망까지도 그의 열쇠를 막지 못한다. 이미 우리가 살펴보아 확신하는 것처럼 그에게는 사망과 음부의 열쇠가 있으며(계1:18) 그는 구주와 심판자로서 궁극적인 권세를 가지고 있으시다(요5:22,25-29).

3.칭찬
(계3:8)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

 주님께서는 모든 교회의 영적 상태와 그들의 시련, 그들의 강함과 약함을 다 아신다. 앞절 내용의 계속으로 주님은 지금 빌라델비아 교회 앞에 열린 문을 두었다고 다시 말해서 문은 그분이 여셨으므로 아무도 닫을 사람이 없다고 선언하신다.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하나님께서는 옛적에 그가 고레스 앞에 문을 여실 것이며 그 문은 닫히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신 적이 있다(사45;1).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열린 문은 궁극적인 구원의 문이라기 보다는 현재 열린 기회의 문인 것같다. 시험을 받는 와중에서도 그 문은 복음의 능력을 증거하기 위해 열려있다. 이와 동일한 어조를 지닌 내용을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방인들에게 마음의 문을 여셨는지를 설명한 데서 찾을 수 있다(행14:27). 바울은 그가 보기에 에베소에는 광대하고 공효를 이루는 문이 열렸다(고전16:19)고 고린도 교회에 말했고 후에 드로아에서는 주안에서 그에게 문일 열렸다고 말했다(고후2:12). 바울은 골로새 교회에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의 문이 열리게 하기를 기도하라고 부탁했다(골4:3). 이제 두려운 적대 세력이 있는 빌라델비아에서 하나님께서는 어떤 대적하는 세력이라도 닫을 수 없는 문을 여셨다.

 이것을 빌라델비아 교회가 다른 교회에 비해 더 강한 요소는 아니었다. 사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적은 능력밖에 가진 것이 없는 약한 곳이다. 그러나 인간의 연약함이 하나님의 능력에 전혀 장애가 되지 못하였다. 오히려 반대이다. 인간의 연약함은 하나님의 능력의 증시와 그 능력의 강함을 나타내는 배경이 된다. 주님께서는 그의 신실한 종들에게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는 것이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그의 은혜라는 것을 확신시켜 준다. 이는 나의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그러므로 교회는 사도 바울처럼 이렇게 외칠 수 있고 또 마땅히 그렇게 외쳐야 한다. "이러므로 내가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12:9,10).

 빌라델비아 교회의 능력은 비록 적은 것이었지만 주께서는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큰 칭찬이며 승인이다. 모든 교회가 그런 칭찬을 들을 수 있도록 분투 노력해야 할 것이다. 빌라델비아 교인들은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여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신다는 진리를 실증하여 보였다(고전1:27). 사실 마지막 때에 가서 문제가 되는 것은 사람들 앞에서 얼마나 강했는가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신실하였는가 하는 데 있다(고전 4:1,2). 빌라델비아에서 물리적인 고난이나 이념적인 박해가 하나님의 강함을 무력하게 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그 다음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굴복한 사람들은 그들이 아니라 복음의 대적자들이었다.  

(계3:9) 보라 사단의 회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않고 거짓말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저희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유대인이라 주장하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로 구성된 사단의 회에 대해서는 2:9을 보라. 주께서 빌라델비아에 있는 그의 신실한 증인들의 발 앞에 사단의 회에 속한 사람들을 데려와 절하게 하겠다는 선언과 주께서 그 증인들을 사랑하신다는 인정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그것은 사단의 회에 속한 사람들이 스스로 자기들은 정복당한 원수라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는 의미 일수도 있고, 또는 그들이 주의 손아래서 겸손하게 되어 이전에 그들이 핍박하던 신자들과 연합하게 된다는 의미 일수도 있다. 그들은 신판에 처하게 되든지 구원에 이르게 되든지 할 것이다.  
 두 번째 의미가 이사야 60:14에 함축되어 있다. 그 말씀을 마음에 두고 이 본문을 기록한 것 같다. "너를 괴롭게 하던 자의 자손이 몸을 굽혀 네게 나아 오며 너를 멸시하던 모든 자가 네 발아래 엎드리어 너를 일컬어 여호와의 성읍이라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의 시온이라 하리라" 구약 예언의 맥락에서 예고되고 있는 내용은 이방인들의 나아 옴과 복종이다. 두 경우 모드 교훈의 핵심은 그들이 자원해서 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복음의 승리와 예수 그리스도의 지고성이 인정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권세에 궁극적으로 복종하는 일은 전 우주적으로 일어날 것이다. 예수님의 이름 앞에 모든 무릎이 꿇을 것이며 "모든 입이 예수 그리스도가 주이심을 고백하고 하나님 아버지에게 영광을 돌릴 것이다."(빌2:10,11).
                                                                              
 사단의 약속을 믿고 그의 회장에 참여하는 것은 무익하고 헛되나(마4:9-) 그와 대조적으로 신실한 하나님의 백성에게 향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흠이 없으며 모든 사람들이 알 수 있게 뚜렷하게 나타날 것이다.                                   
                                                                              
 주께서는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고 말씀하신다.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너를 사랑한다"(사43:4)고 말씀하시고 "내가 너를 사랑하였노라"(사43:4)고 말씀하시고 "내가 너를 사랑하였노라"(렘31:3)고 말씀하신 분이 바로 사도 요한이 그의 독자들에게 이미 상기시킨 무한한 대가를 들여 자신을 주시고 그의 피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심으로써 그의 사랑을 보여주신 주님이시다(계1:5). 또한 그분은 요한이 그의 복음서에서 "세상에 있는 자기의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 분이시다"(요13:1).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1세기 빌라델비아에 있던 신자들이나 모든 곳, 모든 신자들인 절대적인 의미에서 어떤 것이라도 심지어 그 어떤 것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확신이 있다(롬8:35-39).

(계3:10)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빌라델비아의 그리스도인들은 주를 위하여 환난을 당하면서도 그의 인내의 말씀, 곧 환난을 당할 때 인내하라는 그의 권고를 지켰다(또는 나의 인내의 말씀이라고 번역한 헬라어가 암시하듯이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처럼 인내로써 환난을 견디라는 권고 일수도 있다. 마치 히브리서 12:1,2처럼).                                   
                                                                              
 빌라델비아의 그리스도인들은 주께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 곧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를 면하게 하리라는 확신을 받았다. 이것은 우주적으로 실시되는 최종적인 심판을 의미한다. 고집스럽게 회개하지 아니하고 믿기를 거부하는 땅에 거하는 자들은 이 시험의 때에 닥치는 두려운 일들로 인해 놀라게 될 것이다(6:14-).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자기들의 진노를 짊어지신 십자가에서 받는 사람들은 이 최종적인 시험에서도 그리스도 안에서 안전함을 얻으며 그들이 현재 당하는 시험이 잠깐뿐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위로를 받는다. 그들의 죄에 대한 최종적인 심판은 이미 십자가에서 일어났다. 성육하신 아드님이 다른 사람을 위해 준비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같이 갈보리에서 있었던 그의 `시험의 때'는 그들을 대신해서 맞이하신 것이다. 이럼으로써 그들은 회개하지 아니하는 전 세상에 닥친 심판으로부터 구원을 받는다.

(계3:11)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주의 강림은 갑자기 일어날 것이며 그것은 항상 긴박한 것이다. 그러므로 늘 성실하고 방심하지 말아야 한다. 끝까지 충성하는 자에게 약속한 생명의 면류관을 잃는 것보다 더 슬픈 일은 없을 것이다(계2:10). 자기의 것이라고 생각되었던 면류관이 다른 사람에게 수여되는 것을 보며 주께서 "내가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시는 것(마25:12)을 듣는 것보다 더 괴로운 일은 없을 것이다. 여기서는 하나님의 은혜의 사역이 결국에는 실패하고 무로 돌아간다는 것을 암시하는 내용은 하나도 없다. 우리는 시험과 환난 중에서 불굴의 정신을 가지고 참으며 우리가 고백한 믿음에 대해서 신실해야 한다는 것이 본문이 강조하는 내용이다. 이렇게 되려면 끊임없이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강해지고 우리의 품성이 고양되어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의롭다 함을 얻는 것만이 은혜의 전부가 아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가 은혜이다.

4.이기는 자에 대한 약속(12-13)

 거대한 성당과 같은 장엄한 걸물의 기둥들은 힘과 든든함, 영원함을 가리키기에 적합한 상징들이다. 더욱이 이 기둥들은 전체 구조물과 분리할 수 없는 것들이다. 그래서 본문의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라"는 주님의 약속은 그가 성장하고 있는 우주적인 영적 성전에서 충만하고 지속적인 힘과 존귀함을 얻게 하겠다는 약속이다. 이것이 이기는 자의 진정한 그리고 적절한 지위가 될 것이라는 사실은 우리가 사는 타락한 세상의 존귀와 영예가 덧없이 사라지는 것과 달리 "그가 결코 나가지 아니하리라"는 약속으로 더욱 확실하게 된다. 즉 기둥은 그 특성과 기능상 옮길 수 없는 것이다. 시편 기자는 이와 동일한 확신을 가지고 기쁨으로 다음과 같이 외쳤다. "내가 주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시23:6, 27:4).
                                                                              
 사도 요한이 기록한 성전은 그것이 "하나님의 성전"이기 때문에 사람이 만든 이 세상에 속하는 구조물이 아니며 이 세상에 속한 물질로 만들어진 것도 아니다. 그 성전의 구성 요소는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이다. 사도 베드로는 그 신자들을 "신령한 성전으로 세워지는" 산돌(벧전2:5)이라고 묘사했고 바울은 그들이 "친히 모퉁이 돌이 되신" 그리스도와 함께 "주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간다"고 말했다(엡2:20-21,히3:6). 그러므로 영원한 영광에 함께 결속된 구원받은 허다한 무리가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될 것이며(엡2:22), 은혜로 주의 성전에 들어가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끊임없이 하나님을 섬길 것이다(계7:15).     
 만일 야고보, 베드로, 요한과 같은 사도들이 자기들이 교훈의 참됨과 그들이 확고한 지도력 때문에 교회의 기둥들이라고 불리울 수 있다면(갈2:9) 비유의 의미를 확대하여 심지어 건물 자체를 기둥이라고 묘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은 아주 흥미롭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서 3:15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를 "진리의 기둥과 보루(한글에서는 터)"라고 정의하였다. 여기서 기둥은 오고 오는 세대에 걸쳐 하나님의 성전으로 지어져 가는 모든 신실한 증인들로 구성된 집합적 의미가 기둥이다.
                                                                              
 이기는 자는 삼중 적인 의미를 지니는 특별한 이름이 그 위에 기록될 것이라는 약속을 또 받는다.                                                             
                                                                              
 첫째, 그것은 내 하나님의 이름으로서 하나님의 보살핌 아래에서 영원히 안전함을 얻는다는 것과 하나님께 귀중한 것이라는 의미를 지닌 하나님의 소유를 의미한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축복할 때 사용되는 대제사장의 강복의 말씀에 이런 중심적인 확신이 암시되어 있다. "그들이 내 이름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둘 것이요 나는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민6:22-27). 이와 마찬가지로 이 약속을 확증이라도 하듯이 요한은 요한계시록 14:1,22:4에서 구원받은 허다한 무리들은 자기 하나님의 이름의 표지를 지녔음을 목도한다.
                                                                              
 둘째 그것은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이다. 이 이름은 이기는 자의 참된 시민권을 표시한다. 그는 이 세상과 이 세상의 가치들과 단절하고 십자가에 못 박혔으나 지금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영광의 보좌에 앉으신 구주에게 온 마음을 드림으로써 이 세상에 대하여, 그가 이 땅에서 나그네와 순례자로 있으며 그에게는 여기에 거할 도성이 없으며 그는 그가 나온 본향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다고 선포한다(히11:13,16,13:14). 이 이름은 그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으며 그는 하늘로부터 오실 구주를 기다리고 있음을 표시한다(빌3:20).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의 어머니라"(갈4:26)는 것을 알게 됨으로써 이기는 자는 그가 첫 번째로 충성해야 할 대상이 어디인지를 모르지 아니한다. 참으로 주님의 백성이 결국 본향에 이르게 되었을 때 그들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이요 천상의 예루살렘"에 이르게 될 것이다(히12:22). 요한계시록의 절정에 달한 환상에서 요한은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고 있는 것을 본다(계21:1,2,10).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과 함께 기쁘게 거하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하나님의 창조물에 대한 그분의 모든 의도가 마침내 완전히 성취되는 하늘과 땅의 완전한 조화를 의미한다.                    

 셋째 그것은 나의 새 이름인데 이기는 자의 구주와 주님이 되신 주님의 새 이름이다. 이 이름은 자기의 보배로운 피라는 무한한 대가를 주고 구원하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완전한 구원을 인치는 것이다. 이기는 자는 바로 이런 분에게 속하여 그의 소유가 되며 그의 사랑과 은혜 안에서 그는 영원 무궁한 안전함을 얻는다(벧전1:18,19,고전6:19,20,계7:14-). 이것이 바로 이기는 자들의 삼중적인 이름이 상징하는 복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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