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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수일 후에(* , 디 헤메론) - 이는 정확한 날들의 수를 지시하는 말이기 보다 오히려 예수께서 그곳을 떠나셨을 때와 돌아오셨을 때 사이의 빈 기간을지칭하는 표현이다.
다시 가버나움에. . . 소문이 들린지라 - 예수께서는 가버나움을 떠나신 뒤에 갈릴리의 여러 지방을 두루 다니셨다. 앞서 이야기된 바에 따르면(1:21) 예수께서 가버나움으로 가신 것은 갈릴리에서의 선교 활동을 위해서였으나 치유받은 문둥병자의 인간적인 열성에 의해 잠시 그곳을 떠나셨다가 다시 팔레스틴 북쪽 지역, 특히 갈릴리 사역의 활동 중심지였던 가버나움에 돌아오신 것이다. 한편 마가는 자신의 복음서에서 간혹 '다시', 즉 헬라어로 '파린'(* )이란 말을 사용함으로써 이미 보도한 상황과 지금부터 전개될 상황과의 긴밀한 연관성을(13절;3:1, 20;4:1;5:21;7:14, 31) 보여주려는데 노력하고 있다. 따라서 이 구절에 나타난 '집'은 1:29에 나타난 '시몬과 안드레의 집'으로 추정할 수가 있다. 예수께서 마을에 들어 오시자 그 소문은 곧 인근각처에 퍼지게 되었다. 예수에 관한 이야기가 소문으로 퍼진다는 것은 마가의 전형적인 표현이다(3:8, 21;5:27).

=====2:2
많은 사람이 모여서. . . 도를 말씀하시더니 - 1:33에서 이미 주어진 인상이 보다 확대된다. 즉 예수의 소문을 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한번 만나보기 위해 베드로의집 앞에 인산 인해(人山人海)를 이뤘던 것이다. 이러한 장면에 대해 특별히 마가는 그집 문 주변이 거의 통행 불능 상태에 이르렀음을 기록함으로써 당시의 상황을 더욱 현장감있게 묘사했다. 한편 예수는 이런 상황에 처하여 그들이 기대하는 바 이적을 행치않으시고 오직 천국 복음을 선포하기 위한 기회로 이용하셨다. 그런데 마가는 예수께서 말을 전하심에 관해 구체적인 설명도 없이 '도( , 톤 로곤)를 말씀하시더니'라고 간단히 기술하고 있다.
마가는 4:14 - 20에서도 다시 한 번 구체적인설명 없이 '말씀'을 전하신 것을 담백한 어조로 묘사하고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도'(道)란 과연 무엇을 가리키는가 ? 성경에서는 흔히 이 말이 '구원의 메시지', '복된소식', '복음' 등의 의미로 사용되었으며(Lane), 특별히 '하나님 나라의 비밀'(thesecret of the Kingdom, 4:11)이란 뜻으로 사용되었다. 실로 예수께서는 자신의 인기에 영합한 일시적 문제 해결로서의 이적을 행치 않으시고 인생의 궁극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 참생명의 진리를 가르치셨던 것이다.

=====2:3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 중풍(paralysis)은 뇌일혈(cerebralhemorrhage) 등으로 인해 신체의 일부나 반신 또는 몸 전체가 마비되어 사용할 수 없게 되는 병이다. 그래서 중풍 환자는 말하는 것을 물론 걸을 수도 없고 몸을 자유롭게사용할 수도 없었기에 타인의 도움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여기 등장하는 '네사람'에 대해 그 환자의 친구인 상전의 명령을 받은 종들로 보는 견해도 있고, 또 그환자의 가족이나 친구들로 보는 견해도 있다. 어쨋든 이 네 사람은 그 환자를 위해 아낌 없는 헌신을 다하는 참된 의미의 동료요 형제요 친구였다. 누가의 보고에 따르면 이때 네 사람은 환자를 침상에 뉘고 그 침상의 네 모퉁이를 네 사람이 메고 왔음을 곧알 수 있다(눅 5:18). 실로 침상을 운반하는 일에 적극 동참한 자들의 예수께 대한 절대적 신뢰와 협력과 진취적 노력및 아름다운 협동은 그리스도께 넉넉히 인정받을 만한것이었다.

=====2:4
무리를 인하여. . . 데레갈 수 없으므로 - 헌신적인 4명의 동료들의 도움으로 병자가예수께서 계신 집에 당도했으나 수많은 군중들이 입추(立秋)의 여지도 없이 그 문 앞에 둘러서 있었기 때문에 정작 만나 뵈어야 할 예수께는 도무지 다다를 수가 없었다.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 . 달아내리니 - 4명의 동료들은 포기하지 않고 모든 최선을 다했다. 결국 그들은 우회하는 방법이지만 가장 적극적인 행동을 취했다. 즉 바깥계단을 통해서 지붕 위로 환자를 메고 올라가 지붕을 뜯어내고 예수가 있는 곳으로 환자를 달아내렸다. 한편 팔레스틴의 전형적인 서민 주택은 보통 흙벽돌로 된 단층 슬라브형으로 지붕이 평평하며, 방은 하나로 되어 있는 조그마한 형태이다. 그리고 바깥은지붕으로 계단이 놓여 있어 지붕 위로 올라갈 수 있게 되어 있다. 지붕은 보통 나무로들보를 놓은 후, 짚으로 엮어 그 위에 놓고 그 사이를 흙으로 채워 비를 막도록 되어있다. 가끔 들보 위에 기와를 놓고 다시 그 위에 짚과 흙으로 덮기도 했다(2:1 - 28 주제 강해 '예수 당시의 서민 가옥 구조' 참조). 따라서 중풍병자를 지붕 위로 올려 온사람들은 지붕을 덮고 있는 흙과 짚, 석회, 판자, 기와 등을 떼어내고(이때 분명히 먼지가 집 안으로 쏟아졌을 것이다) 막 드러난 들보(the now exposed beams) 안으로 그환자를 달아내렸을 것이다. 한편 본문의 '상'(* , 크라밭톤)은 일반서민들의 짚으로 만든 자리나 담요 같은 누울 것을 가리킨다.

=====2:5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 '죄 사함을 받게 하는 기적'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가능하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현명함과 또 열심있는 믿음을 보셨다. 그런데 여기서 '저희'란 단지 침구를 메고 온 4명의 동료만이 아니라 중풍병자까지를 포함한 5명을 함께 지칭하는 말로 보아야 할 것이다(Cranfield, Robertson). 사실 본 사건을통해 중풍병자의 믿음을 전혀 배제할 수 없는 것이, 예수께서 바로 그 환자에게 '죄사함'의 은혜를 허락하셨기 때문이다.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 예수는 환자의 병을 고쳐 주는 대신 그 사람의죄를 용서해 주셨다. 우리는 여기서 그 환자가 필요로 했던 바가 죄의 용서가 아니라바로 중풍병의 치료였다고 피상적인 생각을 할 수 있다. 그리고 또 이 환자가 어떤 특별한 죄를 지었던 것같지는 않다. 그러나 그 환자의 경우에서 인간은 누구나 다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었다는 사실이 더욱 분명해지고 또한 모든 고통은 인간이 하나님에게서 떠남으로 기인되었다는(사 59:1, 2) 구약성경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진리가예증된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 예수께서는 인간에게 가장 절실히 필요한 것에 관심을 기울이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병을 고쳐 증거할지라도 이는 또 하나의 뚜렷한이적에 관한 내용으로 머물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Schweizer). 어쨌든 예수께서 육신의 병을 고치러 온 자에게 영혼의 죄까지 사해 주신 사실을 통해 (1) 육신의 병고침은한시적(限時的)인 것이지만 영혼의 죄사함은 영원하며, (2) 육신의 질병이 직접적인 죄의 결과는 아니지만 인류 최초 범죄 이후 병과 죽음이 시작되었다는 본질적 측면에서 볼 때 육신의 질병보다 그 본질적인 원인인 죄가 먼저 해결되어야 하며, (3) 전자는 부분적이요 조건적이고 후자는 전체적이요 절대적이고, (4) 전자는 인간의 방법으로도 가능할지 모르나 후자는 오직 예수 당신만이 하실 수 있는 것임을 보여 준다. 한편 본문의 '소자야'(* , 테크논)란 말은 흔히 랍비들이 제자들을 향해 쓰는 호칭인 동시에 친근한 손아래 사람에게 칭하던 매우 부드럽고 따사로운 호칭이다(마9:2).

=====2:6
서기관들이. . . 마음에 의논하기를 - 저자 마가는 이미 1:22에서 '서기관들'을 언급한 바 있다. 눅 5:17에서는 그들이 '갈릴리 각 촌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그들이 온 것은 단순한 호기심 이상의 이유가 있었음이 분명했다. 즉 그들은 신학적인 관점에서 예수를 어떻게든 책(責)잡기 위해서 왔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군중들 틈에 끼어 자리를 잡고 앉아 예수의 일거수 일투족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으며 그 마음은 예리한 칼날같이 모든 상황을 점검하며 서로의 의견을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예수께서 죄 사함에 관한 말씀을 하시자, 그들은 좋은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했다.

=====2:7
이 사람이. . . 참람하도다 - 전통주의적이요 사변적인 비평가들의 판단은 명백하게 옳았다. 오직 하나님만이 죄를 용서하실 수 있다. 그러나 이 점에서 그들이 잘못 이해한 것은 하나님의 삼위일체의 속성과 메시야의 특질이었다. 사실 그들은 메시야조차도죄를 사할 수 없었고 오직 야웨 한 분만이 죄를 사할 수 있다고 믿었다. 결국 그들은야웨와 메시야의 일체성을 전혀 알지 못했던 것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그들은 이 땅에메시야로 강림하신 예수께서 삼위일체의 두번째 위격인 하나님의 아들(聖子)이라는 사실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삼위일체 중 한 위격이 행하시는 바는 다른 두 위격이 행하시는 바와 함께 깊이 관련되어 있다. 엄밀하게 이야기해서 삼위일체의 세 위격은 서로가 매우 확연히 구분되기 때문에 세 위격은 홀로 또는 서로가 독특한 일을행한다고 할 수 있다. 동시에 세 위격은 한 분이신 하나님과 연합되어 있기 때문에 세위격 중 어떤 한 위격이 행하는 바는 불가분적으로 다른 두 위격과 관련되어 있다. 예를 들어 창 1:1, 2을 표면적으로 보면 하나님과 성령, 두 위격이 창조 역사를 주도하신 것으로 나타낸다. 그러나 뒤이어 나오는 창 1:3 및 요 1:3에 비추어 볼때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 곧 성자 예수에 의해서도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이러한 것은 서로 모순되는 내용이 아니다. 이 내용은 단순히 삼위일체의 각각 다른 위격의 입장에서 형성된 진리일 뿐이다. 따라서 여기서 예수께서 중풍병자에게 사죄의말씀을 하신 것은 하나님과 구별되지 않은 아버지 하나님(聖父)의 능력으로 그렇게 행하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에 온전히 거룩하셨다. 그러나 그의거룩한 본성은 그가 자원함으로 이 세상에 오셨기에(요 1:14;빌 2:5 - 8;요일 4:2, 3)인간 본성의 한계 내에서 국한되었다. 이 땅에 계시는 동안 예수께서 행하셨던 능력있는 사역은 그를 통해서 일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진 것이다(NIV, Disciple's Bible).
참람하도다(*, 블라스페메이) - 이 말은 인간 관계에 있어서는주제넘고 건방지며 사악하게 타인을 비방, 중상한다는 뜻이고, 하나님에 대해서는 신의 특권을 탈취하거나 그분을 불경스럽게 모독한다는 뜻이다. 한편 율법(레24:16)에서는 참람죄를 범한 사람은 예외없이 돌로 쳐죽이도록 되어 있다. 사실, 후에 스데반은 이러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 의해 돌에 맞아 죽게 된다(행 7:54 - 60). 따라서 율법에 능통한 서기관들의 입장에서 갈릴리 목수 출신에 불과한 예수의 사죄 선포는 분명 참람한(blasphemous)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사실 그들이 생각한 대로 만약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단지 인간 예수에 불과했다면 그들이 주장하는 바가 옳았을 것이다. 실로 그들은 영적으로 어두움에 거하던 자들로서 진리의 빛이 그들에게 비춰졌지만 감히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불행에 처하고 말았다(요 1:5).

=====2:8
속으로. . . 의논하는 줄을. . . 곧 중심에 아시고 - 서기관들은 예수의 행동에 관한 그들의 오해를 겉으로 드러내 놓고 표현하지는 않았다. 마가는 단지 '그들은 마음에 의논하였다'고 했다. 실로 그들의 마음의 표정은 얼굴과 분위기로써 넉넉히 표출될 수있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그들의 내면의 요동을 '중심에 아시고', 즉 '당신의 영으로 감지(感知)하시고' 그들의 의도를 간파하셨다(마 9:4;눅 5:22). 이처럼 예수께서 그 마음을 꿰뚫어 본 것은 분명 직관적으로 상대의 심령을 읽어내시는 당신의 초자연적인 능력에 연유한 것으로서, 이러한 사실은 현재의 그리스도론적 사고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즉, 하나님이시며(롬 9:14;빌 2:6;딛 2:13)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마 16:16)이신 그리스도는 만왕의 왕이며 만주의 주(계 19:16)로서 전능하시며(마 28:18) 전지하시고(요 1:48) 무소 부재하신(마 18:20) 신적 속성을 지니셨으며, 창조(요 1:3)와 보존(골 1:17), 죄의 용서(눅 7:48)와 심판(요 5:27)의 신적 사역 및 성령을 보내시고(요 15:26) 죽은 자를 살리심으로(요 5:25) 완전한 신이심을 나타내 보이셨다. 이와 함께 예수는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식했을 뿐만 아니라(마11:27;요 17:1), 스스로를 하나님과 동등한 자로 여기셨다(요 5:18, 21;12:44, 45) 따라서 학자들은 이것을 신적 인간 개념(* - - conception, 데이오스 - 아네르 - 컨셉숀)과 결부시켰다. 즉, 그리스도는 죄인을 대표하기 위하여 필연적으로 인간이어야했으며, 구속자가 되기 위하여는 반드시 하나님이어야 했다. 참 신성과 참 인성을 동시에 가진 그리스도는 완전한 인간이며 하나님이었으나 통일된 인격을 가지셨다. 한편 이러한 신적 능력을 행하시는 행위자에 관해서는 이미 구약성경에서 그분의 신적탁월성을 강조하고 있다. 즉 '각 사람의 마음을 아시고. . . 주만 홀로 인생의 마음을 아시는' 분이시고(왕상 8:39), '사람의 심장을 감찰하시는'(삼상 16:7;시 7:9;렘 11:20)분, 그분이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다.

=====2:9
중풍병자에게. . . 어느 것이 쉽겠느냐 - 예수께서는 서기관들의 생각을 아시고 단지구두(口頭)로써의 사죄 선언과 현상적으로써의 완전한 치유 이적 중 어느 것이 쉽겠느냐라는 질문으로 그들의 답변을 구하셨다. 물론 예수께서 말씀하신 의미로는, 그 질문중 어느 것도 더 쉽다고 답할 수 없다. 사람들에게는 두 가지 모두가 똑같이 불가능한일이며, 하나님에게는 똑같이 쉬운 일이다. 아마도 서기관들에게는 어느 누구도 죄 사함의 성취를 입증할 수 없으므로 죄 사함에 관한 말이 더 쉽게 여겨졌을 것이다. 그리고 '일어나. . . 걸어가라'고 말하는 것은 실지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것이므로 더 어렵게 생각되었을 것이다.

=====2:10
인자가 땅에서. . . 알게 하려 하노라 - 서기관들은 9절에서 예수께서 제시한 선택적질문에 어느 한 쪽도 무책임하게 답할 수 없었다. 그러나 예수는 어느 쪽에서도 같은결과가 나타나는 말씀을 하실 수 있었다. 사실 예수께서는 먼저 인간적 측면에서가 아니라 신(神)의 관점에서 더 어려운 편, 곧 그들이 볼 수 없었던 죄사함을 선택하셨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이제 모든 사람이 그가 실제로 죄를 사하는 권위와 능력을 소유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도록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는 치유의 기적을 행하신다. 예수께서는 이 땅에서 심판의 날까지 기다리지 않고 지금 여기서 죄를 사하는 권리와 권능을 갖고 계실 뿐 아니라 그것을 행사하신다(Robertson).
인자(* , 호 휘오스 투 안드로푸) - 직역하면'사람의 아들'(the Son of Man)로서 그리스도께서 즐겨 사용하신 자기 자신에 대한 메시야적 명칭이자 타인으로부터 쉽게 공격을 받지 않는 당신의 인성(人性)을 강조한 표현이다(눅 5:24 주제 강해 '인자'참조). 즉 '인자'란 인간으로서 우리와 함께 거하시기를 기뻐하시는 겸손한 예수의 모습(identity)은 물론, 이 땅에서의 그리스도의 거룩한 권위(authority)와도 관련되어 있다. 한편 이 용어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과 함께 마가가 즐겨 사용한 메시야 칭호이다. 그런데 이 호칭은 구약성경과경외전(經外典)인 유대인들의 묵시 문학(默示文學)에서 찾아볼 수 있는 용어로서, 특히 구약에서는 주로 '사람'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시 8:4;겔 2:1, 3, 6, 8;단7:13, 14). 그리고 묵시 문학에서는 주로 여호와의 날 곧 종말에 천군 천사들을 대동하고 이 땅에 심판주로 임하실 메시야라는 뜻으로 전달되고 있다(Taylor, Grant). 그런데 마가복음에서 제시하는 바 이 '인자' 개념은 주로 심판주로서의 메시야란 의미와더불어 이 세상의 죄인을 지금 용납하시고 그 죄를 지금 사유(赦宥)하시는 하나님과 동등한 신분으로서의 메시야로 이해하고 있다(2:28;14:62). 즉 그분은 심판의 시점까지 기다리시지 않고 지금 여기에서 당신의 직권(職權)으로 죄를 용서하시는 것이다(Robertson).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 이 구절의 첫 부분은 서기관들에게 말씀하신 것으로 보통 이해되고 있다. 그렇다면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라는 부분은 이제 서기관들이아니라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신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한 하나의 삽입구가 된다. 그러면 여기서 말씀의 대상이 바뀌는 자연스럽지 못한 상황이 발생된다. 그러나 본문의 상황 설명이 옳은 것이라면, 예수께서는 아마도 어떤 몸의 동작 변화로 이야기의 대상을바꾸었을 것이다. 한편 달리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본 사건의 종합적인 상황을 알고있던 저자 마가가 상황의 급격스런 변화라는 어색한 표현 기법을 사용해서라도 독자들에게 본 사건의 전체적인 이해를 돕기 위해 위와 같이 진술하였다고 보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위에서 말한 자연스럽지 못한 문제로 해결이 된다(Wessel). 예수께서는 처음부터 서기관들의 태도에는 관심이 없었고 중풍병자에게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다.

=====2:11
내가 네게 이르노니(* , 소이 레고) - 이는 예수가 지니신 신적 권위를 대변하는 말이다(마 5:22, 28). 즉 이는 의학적 기술이나 귀신들의 힘을 빌리는무술적(巫術的) 치유와는 달리 예수 자신이 죄의 결과인 질병에 대한 지배력을 갖고있는 하나님이심을 공언하시는 절대 권위자로서의 선언이다.
일어나. . . 집으로 가라 - 동료 4명의 도움에 의해 들것에 실려왔던 그 환자에 대한완전한 치료를 선언하시는 3중적 명령(일어나, 가지고, 가라)이다. 실로 예수의 권위에 찬 명령은 그 자체 내에 역동적 능력이 있어 그 명령하신 바가 그대로 성취되도록한다(12절). 한편 이러한 완전한 치료는 바로 죄 사함을 입증했다. 예수께서 '일어나라'고 말씀하심으로써 분명히 병 고침이 일어난 것처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말씀의 결과로 이제 죄 사함이 실제로 일어난 것이다. 이에 대해 헌터(Hunter)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예수께서 그들이 볼 수 없는 다른 일도 자신이 행하셨다는사실을 그들이 알도록 하기 위해, 그들이 볼 수 있는 이적을 또한 베푸셨다. '

=====2:12
그가 일어나 곧. . . 나가거늘 - 중풍병자에게는 '곧'(* , 유뒤스) 반응이일어났다. 실로 치료는 즉각적이었다. 특히 '모든 사람앞에서', 즉 모든 무리와 죄를사하시는 예수의 권위에 대항했던 서기관들 앞에서 그는 일어나 상을 가지고 나갔다. 이에 대해 벵겔(Bengel)은 말하기를 '먼저는 상이 그를 들고 왔으나 이제는 그가 상을들고 간다'는 말로써 엄청난 그 변화를 회화적으로 묘사하였다. 이로써 예수는 서기관들에게 항변 없이도 그들의 비뚤어진 심사(7절)에 일침(一針)을 가하신 것이다. 그리고 진실의 확증을 위해 필요한 2, 3인의 증인보다 더 많은 증인들이 예수의 탁월한 능력을 확신함으로써 더 이상의 변론이 아무런 가치가 없게 되었다.
저희가 다 놀라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 먼저 '놀라다'(* , 엑시크테미)는 말은 '이탈하다', '제 정신을 잃다'는 뜻으로 그 충격의 여파가 매우 큼을보여 준다. 한편 예수의 이적을 목격한 무리들의 반응에 대해 각 복음서 기자들은 무리들이 '두려워하며'(마 9:8), 또는 '놀라고, 심히 두려워하여'(눅 5:26)라는 표현으로 그 상황을 푹넓게 묘사하고 있다. 결국 이는 그 무리들이 크나큰 충격 앞에 복합적인 감정을 지니게 되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실로 이 같은 충격과 공포는 적어도 그들이 하나님의 임재나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느끼게 되었음을 말해 주는 동시에 자신들의 본원적인 죄의식이 싹트기 시작했음을 보여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사 6:5). 그러한 사실은 대변이라도 하듯이 그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다', 실로 이 송영(頌榮)은 그들이 마침내 그들 앞에 계신 예수가 바로 하나님이 보내신 자, 곧 하나님의 능력을 대변하는 자, 다시 말하면 메시야로 믿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간접적인 모습이다.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 누가의 평행구(눅 5:26)에서는 '기이한 일을 보았다'고 묘사함으로써 표현상의 차이를 드러낸다. 그러나 그 근본 의도는 그들이 과거에 이런 일을 전혀 보지 못했지만 이제 처음으로 이런 일을 본다는 것이다. 실로 이중풍병자의 치유는 그야말로 잠자던 유대인들의 심령에 들어닥친 하나님의 기습(attack)이었던 것이다. 한편 이 기사의 중요성은 예수께서 절망에 빠진 불구자를 긍휼히 여겨 그의 중풍병을 고치셨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이 사건의 강조점은바로 죄 사함에 있는 것이다. 중풍병자가 지닌 문제의 근원은 바로 죄였다. 예수께서주로 관심을 기울이신 것은 바로 이점이었다. 예수께서는 그의 죄 사함의 행위로써 하나님의 나라가 사람들 사이에 임했음을 선포하셨던 것이다.

=====2:13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 나가시매 - 본문 이하는 예수께서 다섯 번에 걸친 종교 지도자들과의 충동 사건 중 두번째로 해당한다. 특히 본 사건은 종교적으로 버림받은 자였던 세리 레위(마태)를 부르시는 내용이다. 그런데 마가는 본 구절의 연결어로 '다시'(* , 팔린)라는 말을 쓰고 있는데, 이는 본 사건이 독립된 단위의 전승임을 시사해 준다. 그러나 시간상으로는 독립된 구절이라 보지만 내용상으로는 최초 4제자를 부르시는 1:16 이하와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본사건의 장소는 갈리리 해변, 곧 가버나움에서 남쪽으로 약간 떨어진 해변 지역으로 추정된다.
예수께서. . . 가르치시니라 - 여기서 그 가르치심에 대해 미완료 시제인 '에디다스켄'(* )을 사용함으로써 예수의 가르치는 사역이 지속적(持續的)으로이뤄졌음을 보여 준다. 실로 예수의 공생애 사역에서 가장 탁월하고 중심되는 것은 이 진리의 가르침이라 할 수 있다. 한편 바닷가에서 가르치시는 장면은 4:1에서도 반복된다. 바닷가에서의 설교가 예수에게 고유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어쨌든 예수께서교육의 장(場)으로 바닷가 주변의 지방을 상당히 애용한 것만은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 교육은 교실이나 주간 계획표에 따른 정확한 교육 시간에 한정되기보다는어떠한 장소, 어느 시간에도 항상 이뤄져야 하는 전인적이고 전(全) 공간적인 것이어야 한다.

=====2:14
또 지나가시다가(* , 카이 파라곤) - 이 말의 원어는 1인칭주격 현재 분사로서 예수의 활발하고도 능동적인 모습을 연상시켜 준다. 이때 예수께서는 갈릴리 해변 지역에서의 가르치심을 마치고 세관이 있는 큰 도로 쪽으로 그 행보를 옮기고 계셨을 것이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 여기서의 레위는 일반적으로 마태와 동일인물로 간주되고 있다. 실제로 마 9:9의 동일 사건에서 그를 마태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아마도 '레위'는 그의 본명(本名)이고, '마태'('하나님의 선물'이란 뜻)는 그의 사도명(使徒名)일 것이다. 그는 갈릴리 분봉왕이던 헤롯 안디바(Herod Antipas)에 의해 세리로 고용되었다. 그런데 마태가 거주하던 가버나움 근교의이곳은 교통의 요충지로 다메섹에서 지중해에 이르는 큰 도로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애굽으로 통행하던 대로가 서로 만나는 교차로 근처에 위치하여 정치, 경제적으로상당히 중요한 몫을 담당하고 있었다(Donald W. Burdick). 특히 이곳은 헤롯 빌립의관할지인 데가볼리로부터 오는 여행자들이 안디바 관할 지역에 처음으로 들어서는 곳, 즉 가버나움을 통해서 갈릴리와 유대 지역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된 곳이었다. 한편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문자적으로 '세를 징수하는 곳에있었다'는 뜻으로 그의 신분이 세리였음을 단정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한편 유대인의자료에 의하면 이 세리는 두 계층의 세무 관리로 구별된다고 한다. 즉 수입세와 인두세를 걷어들이는 관리와 교량이나 운하나 국도에서 통과세를 걷어들이는 관리인데, 후자가 더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왜냐하면 후자의 경우 세금 부과를 임의로 정할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세관에 앉아 있는 레위는 아마도 다메섹에서 가버나움을 거쳐 지중해 해변 쪽으로 가는 노상에 위치한 통행료를 징수하던 곳에서일하였던 듯하다. 실로 그는 동족 유대인들로부터 철저한 경멸과 증오를 받는 죄인의 그룹에 속했던 자였다고 볼 수 있다.
나를 좇으라(* , 아코루데이 모이) - 이 명령은 현재 미완료형으로서 단 한번의 호출이 아닌 계속적으로 끊임없이 예수의 삶과 가르침과 행위를 좇을 것을 명령한 제자에의 부름이다. 더욱이 이 명령은 레위가 현재까지 수행하고있던 직업을 완전히 포기하고 질적으로 새로운 직업(사람낚는 어부)를 선택하라는 생(生)의 변화에의 요구이기도 하다(1:16, 17). 한편 경제. 사회적으로 상당한 기득권을가진 레위가 예수의 부르심을 순응하는 데는 주저할 요소가 많이 있었을 것이다. 예컨대 어부는 쉽게 고기잡이로 다시 돌아갈 수 있지만(예수의 십자가 사건 후 몇몇 제자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레위로서는 그의 직업으로 다시 복귀할 수 있는 가능성이란 거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당시 세리라는 직업은 비록 인격적, 도덕적으로는비난을 받던 직업이지만 빨리 돈을 벌 수 있는 유망(有望)한 직종으로서 많은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기도 했다고 한다(W. W. Wessel). 그러나 그는 예수의 부르심에 대한위대한 결단을 함으로써 영원한 생명에의 유업과 더불어 예수의 위대한 복음 선교의동역자로 일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이때 마태는 일반적으로 12제자 중 가장 나중에예수의 부름을 받은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Lenski).

=====2:15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 먼저 여기서 '앉아'(* , 카타케이스다이)란 '기대다', '식사 자세를 취하다'는 뜻으로 유대 전통에 따라 기대어 눕다시피한 자세를 가리킨다. 그런데 레위의 집에서 가졌던 식사는 레위가 예수의 한 제자가 되기 위해서 이제 집을 떠나고자 하기 때문에 그를 위해서 베풀어진 송별회였을수도 있고, 혹은 단순히 레위가 자기 친구들에게도 예수를 만나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키 위해 베푼 것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다.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 . 함께 앉았으니 - 여기서 '예수와 함께 앉았으니'를 뜻하는 헬라어 '쉬나네케인토 토 예수'(* )라는말씀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함께 음식을 들고 있었음을 뜻하는 것으로 여기서의주인역은 레위가 아니라 예수였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따라서 이 공동 식사는 인습적인 장벽을 허무시고 죄인들과 교제하기 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월적인 사랑이 담긴 뜻깊은 자리였던 것이다. 한편 이에 대해 혹자(Lane)는 이 구절의 주석을 다음과같이 한다. "이 구절의 관심은 메시야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드신다는 것이 무엇을의미하는가에 집중된다. 예수께서 그 나라로 죄인들을 부르신다는 17절의 말씀과 관련지어 보면, 음식을 나눈다는 것의 근본적인 의미는 메시야의 죄 사함인 것이며, 또한식사 자체도 메시야적 잔치를 암시하는 것이다.
" 세리 - 세리들은 특히 지배자로부터 세금 징수를 청부받아 이미 백성들의 고혈을짜고 온갖 수탈(收奪)을 일삼던 자를 가리킨다. 레위와 같은 경우 국경을 통과하는 상품들에 부과되었던 변칙적인 세금을 징수하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로마 제국의 모든지방은 각기 로마 정부의 비호 아래 고유한 관세 구역을 이루었다. 특히 로마 정부에의해 인정된 피지배인 단체들과 피지배 국가들도 징세권을 행사했다. 한편 조세(tax)와는 달리 관세(customs)의 수입은 황제의 국고가 아니라 지방 군주의 금고로, 즉 갈릴리에서는 헤롯 안디바의 금고로 들어갔다. 그런데 관세의 징수는 국가 관리가 아니라 세금 청부업자(pubicani)를 통해 이루어졌다. 이들은 일년 동안의 일정한 세금액을 정해서 일정한 지역의 관세를 청부 맡았다. 그리하여 여분은 그들이 가질 수 있었고, 대신 모자라는 부분은 보충해야 했다. 따라서 그들은 당연히 부하들의 징세를 독촉할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놀라운 사실은 일반 백성에게 부과될 세금액이 거의 정해지지않았기 때문에 남용하거나 문란하게 될 소지가 매우 컸다. 아니나 다를까 탐욕스런 세리들은 세액이 규정되어 있지 않은 점을 멋대로 이용하여 백성들의 고혈을 마구 짜내어 갔던 것이다(Gnilka).
죄인들 - 이 말은 모세의 율법과 관련하여 바리새인들의 해석대로 따르지 않은 사람들을 가리킨다. 그러나 여기서 이 말은 '하나님의 도덕률을 범한 자들'이라고 하는일반적 통년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만일 마가가 그것을 의도하였다고 하면 '세리와 또 다른 죄인들'이라고 표현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 낱말은 본문에서 바리새인들이 보기에 자기들의 서기관적 전통에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으므로 천민들이라고 비하하여 가리키는 사람들의 계층적 통칭인 전문어이다(요 9:24;Lane). 예수께서 자신의 핵심적인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그처럼 평판이 좋지 않던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을 포함시킨 것과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신 것(고대 사회에서는 친분을 나타내는 표시)은 '서기관들'이 입을 다물고 있기에는 너무나 엄청난 것이었다(16절).
저희가 많이. . . 예수를 좇음이러라 - 세리와 죄인들은 그의 동료 레위가 초대한 식사에 기꺼이 응했을 뿐 아니라 레위의 앞선 바대로 그들도 예수의 가르침과 친화력에 쉽게 동조되었다. 실로 그들은 가난한 마음으로써 영혼의 의사요, 친구요, 진리되신예수를 쉽게 받아들였던 것이다.

=====2:16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 호이 그람마 테이스 톤 파리사이온) - 좀더 구체적으로 해석하면 '바리새파에 속하는서기관들'이 된다. 이 바리새파 사람들은 평민 계층의 종교 집단으로서 율법과 유전에있어서 철저한 보수주의자(保守主義者)들이며, 특히 그들은 의식법에 강조점을 두었다(Donald W. Burdick). 따라서 그들은 율법을 문자적으로 지키려 들지 않는 자들에 대해서는 극히 배타적이었고 정죄하기 일쑤였다(요 7:49). 한편 이 종파의 기원이나 선조에 대해서는 별반 알려진 것이 없다. 아마도 그들은 마카비 시대에 맛다디아(Mattathias)와 그의 아들들과 힘을 같이 했던 경건한 유대인들인 하시딤(Hasidim)의후예였을 가능성이 있다. 종교적 자유를 쟁취한 뒤에, 그들은 정치적 독립도 요구하면서 대부분 마카비 일가를 떠났다. 바리새는 히브리어 '파라쉬'(* )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며 그 뜻은 '분리'를 나타낸다. 따라서 그들은 흔히 '분리주의자'로 취급되었다. 한편 그들이 '바리새인'이란 이름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하스모니안 왕조의요한 힐카누스(John Hyrcanus)가 통치하던 때로 여겨진다(B. C. 135 - 104). 유대사가 요세푸스(Josephus)는 말하기를 '바래새인들이란 율법을 정확하게 해석하여 종교적 항목들을 준수함에 있어 자신의 나라의 다른 사람들에 비해 탁월하다는 평판을 듣고 있는한 무리들의 유대인들'이라고 했다(Jos. , Wars I. 110V. 2). 실로 그들중에 많은 사람들은 경건하고 믿음이 깊었지만, 예수와 충돌을 일으켰던 자들은 전통적 종교의 가장나쁜 요소들, 예컨대 시기, 위선 및 종교적 형식주의 등에 집착(執着)한 그릇된 종교관을 보여 주었다. 이에 대해 메츠거(Metzeger)는 이야기하기를 '바리새주의는 종교의존재의 의의를 율법에 일치시키는 것으로 보고, 또 하나님의 은혜가 율법을 행하는 자들에게만 약속된다는 식의 종교 개념을 가질 때 나타나는 왜곡된 현상이다'라고 했다. 한편 본문에서 보듯이 예수와 바리새인들 사이의 가장 격렬한 논쟁의 초점은 죄의 정의에 관한 것에 모아졌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정의에 따라 예수가 계율에 정한 바죄인들과의 교제 금지를 무시했기에 그가 바로 죄인이며, '죄인'이기 때문에 예수의메시야되심을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다르게 죄를 정의했다. 예수는가르치시길 비록 인습적으로 죄인의 부류에 속한 자이지만 겸손히 자신의 무가치함을 인정하고 철저히 자기를 부인함으로써

=====2:17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 이는 당시 팔레스틴 지역에서 유행하던 격언으로서, 예수께서는 당신의 성육신(Incarnation) 목적을 이 격언을 통해 단정적으로선언하셨다. 한편 여기 '건강한 자'란 타인에게 그 어떤 종교적 도움도 필요치 않다고느끼는 일종의 종교적 교만자를 빗댄 말이다. 특히 치료자되신 예수의 치유 은혜를(출15:26) 거부하는 자, 그는 자칭 건강한 자인 것이다. 실로 예수께서는 자기 의(義)를추구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타인의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하고 특히 영혼의 의사되신 예수(말 4:2)의 치유사역에 자신의 온 인격을 내놓을 수 있는 병든 자, 곧 '죄인들'을 부르러 오신 것이다. 진정 예수의 부르심은 구원에 이르는 것이다. 그분의 초청은 죽음에서 생명으로의 부르심이요(요 5:24), 절망에서 소망에로의 부르심이며, 죄인에서 의인에로의 부르심이다(사 1:18). 그런데 이 일에 가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병자 의식(病者意識), 곧 자신이 결함이 있는 자로서 반드시 치료 받아야만할 존재라는 자기 존재의 정확한 인식이 있어야 한다(눅 18:13). 실로 예수의 이 말씀은 복음의 본질을 나타낸 것이라해도 틀림이 없을 것이다. 하나님이 죄인을 구하신다는 교리는 기독교에서 새로이 형성된 것이 아니다. 어떤 유대인도 이것을 부인하지는않았다. 다만 그들이 생각하던 것보다 새로운 것이 있다면 "하나님은 자신의 죄인됨을진솔히 고백하는 자를 기쁘게 받으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이 죄인임에도 사랑하시고 구원하신다"는 주장이다. 이는 어느 시대에 있어서도 참된 기독교의 진정하고 영광된 교리이다(Hunter).

=====2:18
요한의 제자들. . . 금식하고 있는지라 - 먼저 본 금식 논쟁이 발생하게 된 동기를 살펴보면 앞절에 베풀어진 세리 레위의 잔치가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지켜오던 금식일에 베풀어짐으로써 일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여기 언급된 '요한의 제자들'은 율법의 준수와 전통의 고수라는 점에서 바래시인들과 그 정신을 같이 한 것을 보게 된다. 즉 그들은 유대 전통에 따라 일주일에 두 번씩(둘째 날과 다섯째 날) 금식을 한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이때 세례 요한은 헤롯의 궁이 있던 '마케루스'(Machaerus)에서 감금 생활을 하는 상태였다. 그의 제자들이 선생의 부재 중에도 금식을 계속 실천해 온 것은 결국 세례 요한의 평소 가르침의 결실이라 할 수 있다. 어쨌든 분명한것은 세례 요한의 금식은 그야말로 참경건과 금욕과 절제 생활에 근거한 것이지만 바리새인들은 오직 형식주의적인 입장에서 금식을 한 것이다. 한편 구약성경에 보면 속죄일에만 금식하는 규정이 나타난다(레 16:29, 31;23:27 - 32;민 29:7).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포로 생활이 끝난 뒤에 부림절(Purim), 예루살렘 함락일 같은 날 등 매년네 번의 금식을 지키는 전통(傳統)을 세웠음을 볼 수 있다(슥 7:5;8:19). 그런데 신약시대에 와서 엄격한 바래새인들은 일주일에 두 번(월요일과 목요일:눅 18:12) 금식을행했다. 어떻게 이 매주 2회의 금식이 전통이 되었는지는 확인하기가 어렵다. 아마도이것은 경건과 자기 헌신의 표현으로 행하는 것인 듯하다. 본문이 전하는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에 관한 기사는 추측컨대 앞서 이야기한 자기 경건과 자기 헌신의 외적인 표시로서 행한 것인 듯하다(Lane).
바리새인의 제자들 - 이 구절은 신약 성경에서 유일하게 나타나는 경우이다. 원래바리새인들은 교사가 아니므로 제자들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이 표현은 다소 어색한점이 있다. 그러나 그들 중에 일부는 서기관 계열에 소속되어 나름대로의 제자들을 거느리기도 했다. 그 외에도 또한 이 용어가 바리새인들의 교훈과 의식에 영향을 받은사람들을 가리키는 비전문적인 용어로 쓰였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므로 '바리새인의제자들'이란 표현은 후자의 의미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Wessel).
금식하는데 - 왜 이 두 무리들이 금식하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는 저자 마가는 언급하고 있지 않다. 아마도 요한으로부터 철저한 경건(敬虔) 생활을 교육받았던 요한의제자들의 경우는 그 당시 요한이 감옥에 있었기 때문에 금식을 했거나, 또는 메시야시대를 기다리는 의미에서(Lane) 금식했을 수도 있다. 또한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그날이 그들이 일 주일에 두 번 지키는 금식일에 해당되었기 때문에 금식했을 것이다. 여하튼 두 경우 다 그들은 금식을 해야 참된 경건을 보여 준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따라서 '혹이'(마태는 마 9:14에서 이때 질문자가 요한의 제자들임을 밝히지 않고 있다)예수께서 와서 왜 예수의 제자들은 금식을 통하여 참된 종교적 경건을 보여 주지 않느냐고 질문하고 있다.

=====2:19
혼인집 손님들이. . . 금식할 수 없나니 - 예수께서는 그릇된 금식관에 집착하고 있는자들을 향하여 비유로 답변하신다. 본 비유의 강조점은 예수와 함께 있을 때 누릴 수있는 기쁨에 있다. 따라서 자기 절제와 슬픔의 표시인 금식은(삼상 31:13;삼하12:11 - 23;눅 5:35). 예수와 함께 있을 때는 부적절한 것이다. 유대인의 혼인식은 특히경사스런 행사였다. 손님들은 때로는 한주간이나 계속되는 축하연에 참석하기도 했다. 그처럼 즐거운 잔치 중에 금식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다. 오직 그날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이 최고조에 이르는 극락(極樂)의 시간들로서 심지어 율법에서조차 혼인식 전후에는 여러 의무에서 제외시키는 등의 배려를 하고 있는 것을 보게된다(신 20:7). 한편 본문의 '혼인집 손님들'이란 문자적으로 '혼인집 아들들'로서 신랑의 친구들 및 신랑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을 통칭한다 하겠다. 본절에서는 특히 그들을 예수의 제자들 및 예수와 함께 천국 잔치의 기쁨을 앞당겨 맛보고 있는 구속받는 자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예수는 스스로 그 잔치의 주역인 신랑으로 자처하신다(호 2:19, 20). 실로 그 잔치의 주역인 예수가 그들과 함께 있는 동안에는 그들이기뻐하며 금식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를 빼앗길 때에는 금식이 어울릴 것이다.

=====2:20
신랑을 빼앗길 날. . . 그 날에는 - 이 말씀의 근본 의도는 미구(未久)에 닥쳐올 예수의 고난과 십자가 처형을 암시하려는 데 있다. 사실 예수께서 고난의 잔을 마시고 제자들을 떠나가신 이후부터 제자들은 예수의 고난에 동참하며, 또 금식을 하기도 했다. 한편 본문의 '빼앗길 날'에서 '날'(* , 헤메라이)은 복수인데 반해, '그 날에는'의 '날'(* , 헤메라)은 단수인 것을 보게 된다. 이에 대해 예수의 고난과 십자가의 날은 여러 날에 해당하나 그의 죽음 이후로부터 있게 될 종말의 날은 확실히 한 단위로 취급되어야 했기 때문이라 보는 견해가 있다. 그렇다면 이 '날'의 변화는 곧 닥쳐올 종말의 때를 예언, 강조하기 위한 표현법에 해당한다고 보겠다.
빼앗길(* , 아파르데) - 이 단어는 원형 '아파이로'(* )에서온 것으로, 신약성경에서는 이 구절과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평행 구절에서만(마9:15;눅 5:35) 나타난다. 그 의미는 (매우 격렬하게) '빼앗다', '제거하다'로서 어떤고통스럽고 미어지는 듯한 이별의 장면을 연상케 한다. 이에 대해 혹자(Bracher, Nida)는 '이와 같은 동사는 그 뺏앗음이 자연스럽게 발생한 것인지 혹은 돌발적이거나 억지에 의한 것인지는 나타내지 않는다. 그러나 전체의 문맥으로 보아 이는 슬픔을 유발시키는 억지에 의한 빼앗김인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는 자신의 사역 시초부터 그의죽음에 직면했다. 예수의 제자들의 삶은 바로 이 같은 예수를 중심으로 하여 형성되었다. 실로 예수의 공생애 3년간의 모습은 바로 그들 제자들이 지니는 기쁨의 이유이다. 그리고 그분의 죽음은 바로 그의 제자들이 금식을 해야 할 이유가 된다. 어쨌든 자신의 죽음에 초점이 맞추어진 예수의 사역은 모든 죽어 있는 종교와 심령들에게 새로운진실과 생명력을 불어 넣고 있다'고 한다.

=====2:21
생베 조각을. . . 더하게 되느니라 - 예수께서 도래하심으로써 시작된 새로운 진리, 새로운 교훈, 새로운 삶의 자세는 결코 옛 형식들안에 국한될 수 없음을 보여 주는 비유이다. 여기서 예수께서 가르치신 새로운 복음을 상징하는 '생베 조각'은 헬라어로'라쿠스 아그나푸'(* )라 하여 '표백 처리하지 않고, 재단하지 않은 천', 즉 새로 짠 천, 사람의 손을 거치기 전의 올을 촘촘히 한 천을 뜻한다. 이에 비해 옛 율법주의 구조와 낡은 형식 위주의 유대주의를 상징하는 '낡은 옷'은 거의 헤어져 조그마한 자극에도 찢어져 버릴 참으로 생명력이 결여된 천을 가리킨다. 이러한 생명력이 결여된 것들에 생베 조각처럼 그 활동력과 생명력이 왕성(旺盛)한 예수의 새로운 교훈과 복음을 붙이려고 하면 그 헤어짐이 더하게 되는 것이다(마9:16). 따라서 예수께서 가르치시는 바 새로운 교훈과 은혜의 복음 및 생명의 진리는아무리 작은 부분이라 하지만 형식적이고, 바리새주의적인 옛 율법주의와는 절대로 합할 수가 없는 것이다(Lenski). 오직 새로운 진리에는 새로운 가치관과 새로운 형식이요구될 뿐이다.

=====2:22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 고대, 특히 유목 생활을 하던 팔레스틴에서는 물이나 포도주를 염소 가죽 부대에 보관하여 이동 중에 취식했었다. 그런데 이때 새 가죽은 부드럽고 유연해서 비록 발효가 덜 된 포도주를 담더라도 신축성 있게 그 변화에대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미 신축성을 잃고 늘어난 낡은 가죽 부대는 유연성이 없기 때문에 터뜨려지기 쉬웠다. 즉 포도주가 발효하면서 생긴 가스가 낡은 가죽 부대를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다 버리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것은 매우 부적절하며, 어리석은 경우이다. 마찬가지로 옛 유대주의에 물든사고와 생활 양식에다가 무한한 생명력과 폭발적 운동력이 깃든 예수의 복음을 결합시킨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고 불가능한 일이다.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 본문은 5, 6C의 것으로 추정되는 베자 사본과 옛 라틴 사본에는 생략되어 있다. 따라서 간혹 본문은 눅 5:38에 있는 원문을 후기에 인용삽입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권위 있는 사본들에는 본문이 언급되어있으므로 특별히 본문의 후기 첨가설을 인정할 만한 이유가 없다. 한편 본문에 두번언급된 '새'라는 말 중 첫번째 '새'(* , 네오스)는 시간적으로 새로운 것을, 두번째 '새'(* , 카이노스)는 본질적으로 새로운 것을 가리킨다. 이는 가장'최근에' 만들어진 포도주는 전혀 이상이 없이 탄탄하고 실한 '최상의' 가죽 부대에담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우치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다. 실로 근본적으로 변화된 새심령과 삶에 구약 율법의 완성이요, 형식적 율법주의를 능가(凌駕)하는 새 시대의 새진리가 결합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2:23
안식일에. . . 밑발 사이로 지나가실새 - 먼저 '밀'(* , 스타퀴스)이란 밀이외에 보리, 옥수수 등을 통틀어 일컫는 '곡식'이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본 사건은 유월절(4월에 해당)과 밀 추수를 기념하는 칠칠절(5 - 6월에 해당) 사이에 발생한 것이라 볼 수 있다. 한편 본 기사를 기록한 마가는 예수와 그 일행의 모습을 더욱 박진감있게 표현하고 있다. 즉 본문의 '지나가실 새'(* , 파라포류에스다이)는 마치 밀밭 가장자리에 있던 예수 일행이 밀밭 중심으로 들어가서 계속 지나가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길을 열며 이삭을 자르시 - 여기서 '길을 열며'(* , 호돈 포이에인)란 (1) 단순히 '길을 가다'는 관용적 표현이기도 하고, (2) 마치 귀빈의 행차를 위해 도로를 정비하던 고대 세계의 풍습처럼 예수가 지나가시기 편리하도록 제자들이 길을 여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만약 (2)의 견해를 취한다면 제자들은 먹기 위해 이삭을 자른 것이기 보다 오히려 길을 만들기 위해 이삭을 잘랐다고하는, 마태의 보고와는(마 12:1) 다른 가능성이 생기게 된다. 그러나 전체 문맥을 살펴보면 분명 제자들은 먹기 위해 이삭을 잘랐음을 알게 된다. 한편 예수의 제자들이 행한 일은 율법에는 분명히 허용되고 있다. "네 이웃의 곡식 밭에 들어갈 때에 네가손으로 그 이삭을 따도 가하니라"(신 23:25). 굶주린 이웃이 타인의 곡식 밭에 들어가서 그 주린 배를 채운다 할지라도 관용과 긍휼의 정신으로 그것을 용납하라는 은혜로운 규정이다. 그러나 아울러 율법은 땀흘려 농사 지운 타인의 소유가 지나치게 침해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굶주림을 채우는 것 이상의 반출(搬出)이나 절취는 엄격히 금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로 보건데 하나님의 율법은 사랑과 공의가 충만한 그야말로 조화롭고 온전한 생활 규범이다. 즉 하나님을 더불어 사는 삶을 살도록 배려하셨고 모두의 권리를 인정하고 공익을 보호하시려고 하셨다. 여하튼 이러한 은혜로운 규범에따라 마침 시장했던 제자들이 타인의 밭에서 이삭을 자르는 것 자체는 별 문제가 되지않았다. 문제는 제자들이 이삭을 자르고 손으로 비비어 먹은(눅 6:1) 그때가 바로 안식일이었다고 하는 것이다. 유대 율법주의자들에 의하면 이는 두 가지 죄를 범한 것이된다. 첫째, 이삭을 잘랐으니 이는 안식일에 추수한 결과가 되므로 죄악이 된다. 둘째, 자른 이삭을 손으로 비볐으니 이는 안식일에 타작한 결과가 되므로 죄악이 되는것이다. 안식일을 지키는 일에 있어서 힐델 학파와 샴마이 학파간에는 다소 의견의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유대교내에서는 안식이에 지켜야 할 조항을 39개로 규정해 놓고 있다. 따라서 예수와 제자들이 이날 보여준 이러한 행위는 의식적 율법 준수를 가장 중요시하는 바리새인들이 보기에는 도무지 용납할 수 없는 일로 받아들여졌다.

=====2:24
바리새인들이. . . 못할 일을 하나이까 - 제자들의 행동이 바리새인들의 비판적 시비에 걸려든 까닭은 곡식의 이삭을 자르는 행동 때문이 아니라 그 행동이 안식일에 있었기 때문이다. 실로 그들은 이삭을 자르는 동작을 일종의 곡식을 거두어 들이는 추수작업이라고, 또 누가의 보고에서 보듯이(눅 6:1) 손으로 이삭을 비비는 것을 타작하는행위로 해석하였으며, 제자들의 단순한 그 행위를 안식일의 규례를 깨는 불경건한 노동 행위라고 본 것이다(출 20:10). 사실 율법은 안식일에 곡식 거두는 일을 공적으로 금지하고 있다(출 34:21). 그리고 '미쉬나'에 보면(M. Sabbath 7:2) 안식일의 금지 사항 39개 항목 중에 세번째로 금하고 있는 것이 곡식의 수확 행위이다. 한편 서기관들의 견해에 따르면 제자들의 불미스러운 행위에 대한 책임은 선생에게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바리새인들은 예수께 직접 항의하였다. 저희들은 법적으로 무엇이 허용되고무엇이 금지되고 있는가의 할라카(Halakha)의 문제를 들고 나왔다. 짐작컨대 그들이이처럼 예수께 분한 모습을 보인 것은 안식일을 범한 사실에 대한 처벌에 앞서서 법적으로 반드시 경고해야 한다고 하는 조항을 충족시키기 위해서일 것이다(Lane).

=====2:25
예수께서 가라사대 - 예수께서는 반대로 질문하심으로 바리새인들의 비난에 대처하셨다. 여기서 예수의 질문은 그들로 하여금 긍정적인 답변을 유도하시려 한 것이다. 그가 언급하신 사건은 삼상 21:1 - 6에 기록된 것이다.
다윗이. . . 핍절(乏絶)되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 다윗과 그 무리들은 사울왕의 살해 위협에 쫓기며 핍절하고 시장할 때에 진설병, 곧 고운 가루로 구원 성결한 상 위에두 줄로 진설한 12덩이의 떡을 먹었었다. 본래 율법에는 매안식일에 새로운 떡을 성소에 들임으로써 이전것과 교체하였으며 교체된 떡은 제사장들이 먹도록 되어 있었다(출25:30;35:13;39:36;레 24:5 - 9;Jos. , Antiq. III. 255 - 56. X. 7). 따라서 다윗의 행동은 엄연히 율법에 반(反)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 일로 인해 구약 어느 곳에서도정죄받지 않았다. 실로 예수께서 말씀하신 바는 안식법에 위반된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 아니고 하나님 시각에서는 그러한 위반도 용납되고 정당화 될 수 있는 좀 더 고차원적이고 궁극적인 법률관이 있다는 것이다. 즉 본문에서 강조하는 바는 '인간의 핍절과 배고픔은 종교의 의식주의보다 상위(上位)의 법에 해당한다'(Earle)는 사실이다. 진정 예수께서는 인간의 생명과 직결된 원초적인 필요가 단순한 모든 의식 규범과 형식적 종교 행위보다 우선한다는 것을 선언하고 계신 것이다(Donald W. Burdick).
읽지 못하였느냐(* , 우데포네 아네그노테) - '읽다'에 해당하는 '아네그노테'는 원형 '아나기노스코'(* )의 제2 과거 직설법의 형태로 사용되었다. 이 동사는 '다시', '새로운'등의 뜻을 나타내는'아나'(* )와 '배우다', '알게 되다' 등의 뜻을 나타내는 '기노스코'(* )의 합성어이다. 따라서 이 단어의 정확한 의미는 '정확히 알다', '이해하다', '구별하다' 등이 된다. 그러므로 예수의 질문은 구약에 기록된 바 다윗의 일을 읽고그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느냐, 올바로 이해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2:26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 , 에피 아비아다르 아르키에레오스) - 앞서 이야기했듯이 이 내용은 삼상 21:1 - 6에 기록된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곳에 기록된 내용에는 대제사장의 이름이 아비아달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아히멜렉으로 나오는 것이다. 이 사건이 일어났을 때는 아비아달의 부친인 아히멜렉(아비멜렉)이 대제사장이었고 다윗이 진설병(陳設餠, 거룩한 떡)을 얻었던것도 아히멜렉에게서 였다. 이 구절과 평행되는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에서는 이 말이기록되지 않았고 또 상당수의 사본에도 발견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어려움을 더해 준다. 이 부분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아버지와 아들이 동일한 제사장 직무에 임했기 때문에(Grotius), 아버지와 아들의 이름이 혼용되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에등의 견해가 있다. 그러나 어느 것 하나 만족스런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여기서 가장 합리적인 추론을 한다면 다음 몇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브루스(Bruce)의 견해와 거의 일치하는데, 아비멜렉의 아들은 두 가지 이름 곧 아비멜렉과 아비아달로 혼용하고 있다(삼상 22:20;삼하 8:17;대상 18:16;24:3, 6, 31). 그리고 또 다른 추론을 해 본다면 다윗이 놉에 갔을 때 아비아달 부자가 함께 그곳에 있었고, 또한 함께 다윗의 무리를 돌보아 주었다. 그후 아버지 아히멜렉은 사울의 손에 죽고 아들 아비아달이 그 대(代)를 이어 대제사장이 되었다(R. C. H. Lenski). 따라서본문에서 마가는 아비아달을 대제사장으로 자연스럽게 명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가장 적절할 듯하다.
하나님의 전 - 직역하면 '하나님의 집'으로서 예루살렘 근처 놉에 있던 성막, 곧회막을 가리킨다. 특별히 이 명칭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처소라는 의미에서 신. 구약을 통틀어 자주 사용되던 용어이다(대하 5:14;딤전 3:15).
진설병을 먹고 - 다윗과 그와 함께 한 자들은 사울을 피하여 놉에 갔을 때 매우 굶주려 진설병을 먹었었다. 진설병은 문자적으로 '그 얼굴(앞에 놓여진)의 떡'(* , 레헴 판님)이라는 뜻으로 그 의미가 전하는 대로 하나님의 현존하시는 처소인 성소에 진설되는 떡 곧 제단의 떡을 말한다(출 25:30;35:13). 이는 곧 하나님과의 생명적 관계를 소원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헌상(獻上)하는 예물로서 궁극적으로생명의 떡(요 6:35)으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를 상징한다. 성소 안에는 금으로 입힌탁자 위에 새로 구운 열 두 덩이의 진설병을 두 줄로 매 안식일마다 진열하도록 율법에 규정하고 있다. 이 열 두 덩이의 진설병은 향과 함께 봉헌되고, 그 다음 주의 진설병이 제단에 놓여질 때까지 그 자리에 계속 놓아 둔다. 다시 새로 구운 진설병을 바꾸어 놓고, 먼저 봉헌했던 진설병은 성소에서 물려 제사장들이 먹는다(출 25:30;레24:5 - 9). 따라서 이러한 이유에서 진설병을 먹는 것 자체는 위법이 아니다. 예수께서 주안점을 두신 것은 바로 이것이다. 즉 하나님의 심령을 닮은 인간인 다윗이 기근으로 심한 고통을 받을 때 그는 제사장에게 도움을 청하여 하나님께 드려진 진설병을 얻었다. 사실 속인들이 진설병을 먹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레 24:9). 그러나 하나님에게바치는 거룩한 떡을 먹어서라도 생명은 보호를 받아야 하는 것이 그 당시 다윗의 상황이었고 하나님은 그것을 기꺼이 용인(容認)해 주셨던 것이다. 이것이 당시 실증법이었던 율법보다 더 근원적인 하나님의 자연법이 바르게 적용된 한 실례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이유에서, 아니 그 이상의 이유로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자르는것은 불법이 아니라 합법적인 일이며, 그들이 손으로 비비어 먹은 그 곡식 낟알은 그들의 배고픔을 충족시켜 생명을 보호해 주는데 참으로 필요했던 것이다.

=====2:27
또 가라사대 - 마가는 예수의 독립적인 말씀을 어떤 주제와 관련시켜 삽입하고자할 때 이런 표현을 사용하곤 했다(4:2, 11, 21, 24, 26;6:10;7:9 등). 여기서의 진술도 그런 방향에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이 분명한 본구절의 배경은 설명되지 않았으나 그 내용의 방향은 분명하기 때문에 이곳의 논쟁 기사에는 특별히 적절한 표현인 것이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 - 예수께서는 안식일이 그 자체를 위해 창조된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임을 밝히셨다. 안식일의 목적은 사람을 가두어 두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다. 즉 노동으로부터의 안식과 예배드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키 위함이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그 당시로서 그렇게 과격한 표현은 아니었다. 예컨대 랍비 시므온 벤 메나샤(Simeon ben Menasya)도 '안식일이너희에게 맡겨진 것이지 너희가 안식일에 구속되는 것이 아니다'고 했다(MelkitaShabbata I;출 31:14). 한편 이 교훈에서 크게 중요한 것은 안식일이란 부차적(副次的)인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만일 안식일의 완전한 휴식이 사람에게 오히려 피해와 상처를 입힌다면 새로운 변화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얼마간의 노동이 궁극적으로 인간에게 도움이 되고 생명과 구원에 크나큰 촉매제가 된다면 차라리 휴식을 포기하고 소매를 걷어붙여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안식일 휴식 규정을 어기면서까지 그들의 배고픔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이삭을 비비어 거두어 들이는일종의 작은 노동을 용인하시고 묵허하셨던 것이다. 실로 사람이 안식일만을 위하다멸망하는 것보다는 생명 보존과 새 생명 탄생을 위해 안식일 굴레를 벗는 것이 나을것이다. 이처럼 율법의 멍에는 인간을 법조문에 찌들게 하지만 예수의 멍에는 쉽고 가벼우며, 또 궁극적으로 생명과 환희를 맛보게 한다(마 11:30).

=====2:28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 먼저 '이러므로'란 안식일 논쟁의 비약적 결론구를 제시하기 위한 접속어라 할 수 있다. 실로 예수는 당신이 가르치시는 진리에 대해 단정적이고 선언적으로 선포하심으로써 당신의 초월적인 권위를 나타내 보이신다. 유대교는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려는 노력에 인간의 전생활 영역을 안식일 규정으로 얽매어 놓았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편협한 율법주의에 빠져들었다. 이에 예수께서는 '인자가 안식일의 주인'이심을 선언하심으로써 안식일 관행은 이제 당신의 뜻과목적에 따라 새롭게 규명(糾明)되어야 함을 강조하셨다. 특히 이 같은 선언은 예수께서 안식일 규정을 마음대로 뜯어 고치시겠다는 자기 고집에서가 아니라 그 규정을 새롭고도 온전하게 주석하시고 설명하실 수 있는 당신의 자격과 신분을 선언하신 것이다(Donald W. Burdick). 한편 본문의 '인자' 선언은 마가가 관심을 가진 바 '인자 기독론'에 조화를 이룬다 즉 마가는 자신의 복음서를 통해(10절 주석 참조) 드러난 바 영광스런 하늘의 인자는 지금 바로 이곳에 나타나셔서 죄 사함의 권세를 행사하실 뿐 아니라 특히 안식일 논쟁의 결론을 내리시는 권위를 가지고 계심을 강조하고 있다(Grant, Taylor).
자세한 것은 눅 1:3 - 5 주제 강해 '안식일과 예수님과의 관계'를 참조하라.



앞장에는 예수의 공생애 사역을 위한 준비 과정과 예수께서 공생애 초기부터 큰 권능으로 병자들을 고치신 사건들이 기록되었다. 계속해서 본장도 예수의 소문을 들은 자들이 사방에서 몰려드는 장면으로 시작하고 있다. 한편 여기 수록된 단편적 기사들은 같은 시기에 한꺼번에 그리고 연속적으로 일어났다고 생각되지는 않으며, 일련의 연속된 기사들로 배열한 데에는 마가 나름대로의 독특한 의도를 반영하고 있다 할 수 있다. 본장에서 마가가 부각시키고자 한 것은 대략 두 가지로 생각되어질 수 있다.
(1) 종에 대한 핍박의 대두. 내용의 흐름상 2:1-3:6을 한 단위로 묶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 부분에 수록된 다섯 기사들은(2:1-12;13-17;18-22;23-28;3:1-6) 한결같이 예수와 대적들간의 대립 관계를 보여준다. '이방의 갈릴리'(사 9:1)를 중심으로 한 예수의 사역과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기존 종교 세력과의 마찰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날이 갈수록 예수의 명성이 드높아감으로써 유대교 지도자들은 자신의 정치적, 종교적 기득권을 침해당할지도 모른다는 조바심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15:10;마 27:18). 게다가 본장에서도 밝혀 드러나듯이 예수는 유대교 지도자들의 외식주의적이고 형식주의적인 신앙의 폐단을 은연중에 절책하셨기 때문에 그들의 반감과 적의가 더욱 불타올랐던 것이다.
본문은 예수께 대한 대적들의 비난이 날이 갈수록 그 정도가 심해감을 보여준다. 처음에는 대적들이 단지 '마음속으로' 의논하다가(6절), 그 다음에는 '예수의 제자들'에게 비난을 늘어놓았으며(16절), 마침내는 '예수'께 직접 비난하였다(18, 24절). 이러한 대적들의 훼방과 비난 이면에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방해하려는 사단의 음흉한 궤계가 숨어 있었다(4:15;고후 2:11;벧전 5:8). 실로 공생애에 들어가기 직전 광야에서 예수를 시험했던 사단이 (1:13) 이렇듯 집요하게 방해 공작을 펴고 있었던 것이다.
(2) 종의 사명이 암시됨. 예수는 사회적으로 멸시당했던 세리 마태를 불러 장차 열두 제자들 중 한 사람으로 세우고자 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의 집에서 소위 죄인 취급받았던 비천한 자들과 더불어 식사하기까지 하셨다(14, 15절). 이는 죄인을 회개시켜 천국 백성이 되도록 하시는 당신의 사명을 상기시킨다. 이러한 사명은 '죄사함'을 선포하신 사실에서도 매우 잘 드러난다(5절). 이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예수께서는 스스로 종이 되셨으며 마침내는 당신의 생명을 희생 제물로 바치셨다. 한편 20절에는 예수께서 대속의 죽음을 당하시리라는 사실이 은연중에 예고되어 있다.

1. 중풍병자를 고치심(2:1-12)
본 치유 사건은 갈릴리 바다의 서북 해안에 위치한 가버나움에서 일어났다. 가버나움은 예수의 제 2의 고향이었으며(마 4:13), 예수의 여러 이적들과 수많은 교훈들을 목격하고 또한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회개치 않음으로 인해 가혹한 심판의 경고를 받은 바 있다(마 11:23), 한편 본문은 예수께서 성도를 위한 영원한 대제사장으로서(히 2:17) 또 구속주로서 자신을 스스로 증거하신 자기 계시라는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내용이다. 여기 수록된 사건의 추이에 따라 그 내용을 상고해 보기로 하자.
(1) 중풍병자 친구들의 믿음. 중풍병자의 친구들은 어떻게 해서든 그 환자를 예수께 데려가기 위해 흙벽돌로 된 지붕 기와를 뜯어내고 구멍을 내어 병자를 달아 내렸다(4절, 주제 강해 '예수 당시의 서민 가옥 구조' 참조). 이와 같은 결례를 무릅쓰면서까지 예수께 나아간 것은 중병에 걸린 친구에 대한 사랑도 컸지만 예수의 권능에 대한 확고한 믿음 때문이었던 것 같다. 이들의 과감한 행동을 통해 우리는 어떤 장애물을 만나도 실망하거나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끝내 그것을 극복해내는 불굴의 신앙을 암시받을 수 있다.
(2) 예수의 의외적(意外的) 선포, 병상에 누워 있는 중풍병자를 향해 던지신 예수의 말씀은(5절) 둘러선 무리들에게는 너무도 의외적이며 놀라운 선포로 들렸을 것이다. 왜냐하면, 중풍병과 죄사함이 서로 연관되었음을 보여주는 외관상의 단서도 없었고 더구나 죄사함을 선포하는 예수의 당당한 권세가 무리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특히 본문의 서기관들은 신학적인 문제들에 매우 민감하였으므로 스스로 죄사함을 선포하시는 예수를 '참람하다'고 한 것이 그들로서는 당연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죄사함의 권세가 오직 하나님께만 있는 줄은 알고 있었으나 예수가 바로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라는 점은 결코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중풍병자가 어떤 특정한 죄의 결과로 병에 걸렸는지에 관해서는 본문에 밝혀져 있지 않으나 전후 문맥으로 미루어 그의 병은 범죄와 관련이 있는 듯이 보인다(마 9:1-8 강해 참조). 따라서 예수는 단지 중풍병에 걸려 신음하는 환자에게 긍휼을 표하고 그 질병을 고쳐주시는 데에 그친 것이 아니라 보다 근원적인 문제에 관심을 보이신 것이다. 결국 이 중풍병자는 메시야 시대에 누리게 되리라고 약속된 축복들을(사 35:6;렘 31:8) 경험한 셈이며, 중풍병자를 향한 예수의 놀라운 선포 곧 영육간의 완전한 치유에 관한 선포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다는 표적이기도 했다.
(3) 신학 논쟁에로의 비화. 하나님께만 있는 사죄권을 예수께서 행사하시려 하자, 서기관들은 이를 심각한 신학적 도전으로 단정했다. 그들은 예수의 신성(神性)을 결코 인정할 수 없었으므로 예수를 신성 모독자로 몰아붙일 수 밖에 없었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이 신성을 여러 차례에 걸쳐 스스로 증거하였으며(14:62;요 10:33등), 이는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의 분노를 자아내었고 그들의 예수 살해 음모에 정당성을 부여하기에 충분하였다(3:6)
본문에서 예수는 서기관들의 악의에 가득 찬 의혹을 간파하고서 역질문을 행하셨다(9절). 이러한 역질문은 논쟁상의 충돌이 벌어질 때 예수께서 즐겨 취하신 방법이다(3:4;11:30;12:37). 실제에 있어서는 죄를 사하는 것보다 몸을 치유하는 것이 훨씬 쉽다. 하지만 중풍병자가 치유함을 받아 걸어가면 이적적 권능의 명백히 확인되지만, 죄사함을 받은 데 대한 표시는 외관상으로 뚜렷이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아마 서기관들은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시는 것 보다는 중풍병자에게 걸어가라고 명하시는 일이 더 힘들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서기관들의 이러한 의중을 잘 알고 계셨던 주님은 말씀으로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셨던 바로 그 권능으로써 중풍병을 즉각적으로 치유하셨으며, 이로써 당신이 죄를 사하실 수 있는 신적 권세의 소유자임을 증거하신 것이다. 예수의 죄사하는 권세에 관해서는 마 9:1-8 강해 부분을 참조하라.

* 예수 당시의 서민 가옥 구조. 예수 당시 일반 서민들은 대개 흙집으로 된 단칸방에서 살았다. 집은 보통 단층이지만 방이 높은 칸과 낮은 칸으로 나뉘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방의 높은 칸은 가족들의 숙소로 사용되었고, 낮은 칸은 가재 도구나 기타 물건의 저장소로 이용되었으며, 밤이나 비가 올 때에는 가축 우리로도 사용되었다. 흙집으로 재료로 쓰인 흙벽돌은 대체로 구운 것이 아니라 진흙을 햇볕에 말린 것이었다. 이러한 가옥 구조를 부분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지붕. 지붕을 덮기 위해서는 먼저 벽에서 벽까지 튼튼한 대들보로 가로지르고 나뭇가지를 덮은 후에 그 위에 진흙과 모래와 자갈을 섞어 뒤덮고서 굴림대 돌로 평평하게 다졌다. 따라서 지붕은 일종의 평평한 옥상으로서 밖으로 나있는 계단을 통해 올라가게 되어 있었으며, 지붕 위에는 다락방을 들이는 경우가 많았다(눅 22:12). 당시 지붕은 다목적용이었던 바, 공지 사항을 공표하는 장소(마 10:27), 경배와 기도 장소(행 10:9), 위급시의 도망로(마 24:17), 잠자리, 곡식이나 과일을 말리거나 익히는 장소 등으로 사용되었다. 한편 본문에서 중풍병자의 친구들은 흙벽돌로 된 지붕 기와를 벗겨내고 구멍을 내었던 것으로 보인다.
(2) 창문. 길 쪽으로 창문을 가급적 작게 달았으며, 도적의 침입을 방지하기 위해 나무빗장을 부착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3) 바닥. 별다르게 바닥을 위한 시설을 갖추었다기보다는, 땅을 골라 다진 것 혹은 이따금씩 진흙에 석회를 섞어 굳히거나 자갈이나 잔 돌맹이를 석회와 섞어 굳힌 것이 바닥으로 쓰였다. 다음 그림을 참조하면 당시 가옥 구조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2. 세리 마태를 부르심(2:13-17)
이 기사는 비록 짧지만 가히 복음의 핵심이라 할 메시지를 담고 있다. 특히 여기서 가장 초점을 맞추고 살펴보아야 할 사항은 예수의 부르심이라는 주제이다. 이제 그 부르심의 성격, 대상, 결과 등을 본문의 사건에 근거하여 상고해 보기로 하자.
(1) 부르심의 성격. 예수는 세관을 지나다가 거기 앉은 세리 마태에게 '나를 좇으라'는 단 한 마디의 명령을 내리셨다(14절). 그 세리를 제자로 삼기 위해 사전 접촉을 한 바도 없었고 처음 만나 긴 대화를 나누거나 설득시키려 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예수의 이 단호한 한 마디의 부르심은 그 어떤 장황한 변론보다도 더 권세 있고 호소력이 있었다. 그것은 일방적 선포에 가까왔다. 이렇듯 절대적이고 긴박한 부르심에 대해 우리는 합리적 이성을 내세워 사사건건 따지려 들어서는 안 된다. 마태는 예수의 권세에 압도당하여 그리고 그분의 믿음직한 손에 자신의 전부를 맡기려는 마음에서 즉각적으로 그 부르심에 순종하였다. 비록 마태는 동료 유대인들로부터 비난받는 세리의 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예수께 관한 소문을 듣고서 남몰래 회개하며 흠모해 왔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가 예수의 절대적 부르심 앞에 자신의 자리를 단호하게 떨치고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은 강한 믿음의 결단(決斷) 때문이었다.
(2) 부르심의 대상. 당시 세리의 신분은 멸시와 비난의 대상이었다(본장 주제 강해 '세리에 관하여' 참조). 예수께서 세리를 당신의 열 두 제자 중 하나로 부르시고, 또한 죄인들과 함께 잔치 석상에 앉으신 사실은(15절) 당신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잘 보여 준다. 특히 이러한 목적은 바리새인들의 비난에 답하신 17절 말씀에 분명히 밝혀져 있는 바, 이 말씀은 복음의 핵심에 다름없다. 예수께서 부르러 오신 '죄인'과 '병자'는 구체적 범죄를 저지르거나 특정한 병고에 시달리는 자(者)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아담의 후예인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흉악한 죄인들이며 사망에로 인도하는 치명적인 영혼의 질병으로 신음하고 있다(롬 5:12). 당시 율법주의자들은 율법의 세부 조항들을 형식적으로 철저히 준수함으로써 스스로 의인이라 자처하였지만, 그것은 자신의 영적 상태를 바로 보지 못한 자기 기만이었을 뿐이다.
오늘날의 각박하고 타산적인 사회에서 원죄니 영혼의 부패성이니 하는 말들은 시대 감각에 맞지 않는 진부하고 쓸모 없는 것으로 간주되기 십상이다. 그리하여 성도들마저도 특별한 윤리적 결격 사유가 없는 한 자신의 삶은 정당하다고 여기며 심지어 현실의 논리에 맞추어 적절히 대응하는 상황 윤리를 신봉하기까지 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자신의 병을 부인하는 자가 의사의 도움을 거부하듯이, 자신의 영혼이 심각하게 부패되었음을 절감하지 못하는 자는 주의 은혜로우신 손길을 맞이할 수 없다. 스스로 의롭고 정당하다고 여기고 주의 간섭과 임재를 거부하는 완악함과 거짓됨이야말로 가장 치명적인 병폐라 하겠다(요일 1:8, 9). 요컨대 우리는 죄인을 부르러 오신 주 앞에 나아가 겸손히 무릎 꿇고 우리의 모든 죄를 자백함으로써, 속사람을 날로 새롭게 변화시키시는 주의 신령한 은혜를 체험하여야겠다(고후 4:16).
(3) 부르심의 결과. 예수께서 세리 마태를 부르신 후 그의 집에서 함께 식사하신 것은 죄인에 대한 용서와 화해가 이루어졌음을 암시하며 장차 메시야 왕국에서 벌어지게 될 잔치를 예시한다(마 22:2). 특히 본문은 이러한 용서라는 측면에서 그리스도의 주권적 사죄(赦罪)의 은총을 주요 주제로 다루는 1-12절의 내용과 상통한다. 이처럼, 예수의 부르심에 믿음으로 순종하는 자들은 주께서 다시 오시는 날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참석하는 특권을 누릴 것이다(눅 13:29;계 19:7).

* 세리에 관하여. 세리란 세무 행정이나 세금 징수에 종사하는 자를 말한다. 로마 제국당시의 세리들은 대개 로마인들이었으며, 이들은 속국의 주민들을 고용하여 해당 지역의 세금을 대신 거둬들이게 하거나 통행세를 직접 거두게 했다. 공관 복음서에 나오는 '세리'( , 텔로네스)는 바로 후자에 속한 유대인 세레들을 가리킨다(마 5:46;18:17;눅 5:27).
당시 로마 정부가 부과했던 세금은 그 종류가 다양했다. 그 중 가장 크고 중요한 세금은 인두세(人頭稅)였는데, 이는 14세 이상의 모든 남자와 12세 이상의 모든 여자에게 부과되었다. 이 인두세와 토지 종류에 따라 바쳐졌던 토지세는 로마 관리들이 직접 거두는 직접세였다. 그리고 이러한 직접세 외에도 수출입 상품에 부과되는 통행세 등의 간접세가 있었으며, 공관복음서에 나오는 세리들이 거둬들인 것은 주로 간접세였다. 이때 유대인 세리들은 지나치게 과중한 세금을 부과하기 일수였고 관청에 보고하고 남은 여분의 세금을 자기들의 몫으로 착복하였다. 따라서 당시 세리들은 일종의 사회적 계급의 한 부류로서 동족 유대인들로부터 미움을 받았다. 그들은 로마 압제자들에게 아부하여 자기 동족을 희생시켜 치부(致富)하고자 하는 변절자로서 지탄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성전세등의 명목으로 일반 백성의 주머니를 착복하며 풍요로운 생활을 누렸던 종교 지도자들에게조차 동족애와 종교 생활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하였다. 더욱 더 금전에 집착케 하는 악순환을 가중시켰다.
이렇듯 동족으로부터 소외당하고 멸시당했던 세리들에 대해 예수는 오히려 각별한 관심을 표하셨다. 세리 마태를 열 두 제자 중 하나로 부르신 것이나(마 9:9-13), 죄사함받은 세리에 대한 비유(눅 18:9-14) 혹은 세리장 삭개오에 대한 구원 선포(눅 19:2-10) 등이 그러한 관심을 뒷받침한다. 이는 복음이 형식적 율법 준수로 말미암아 스스로 의로와질 수 있다고 믿었더 유대교 지도자들보다는 냉대와 소외 속에서 심령이 상해 있었던 세리들에게 더 가까왔음을 보여 준다. 실로 하나님은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있는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을 택하사 스스로 교만한 자들을 폐하려 하신다(고전 1:26-31).

3. 금식 논쟁(2:18-22)
예수 당시 엄격한 바리새인들은 일주일에 두 번 금식을 행했다고 한다. 본문의 바리새인들과 요한의 제자들은 아마도 공식적으로 정해진 중요한 금식일에 금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에 4:1-3 주제 강해 '금식에 대하여' 참조). 예수와 그 제자들이 금식에 동참하지 않는다고 비난하고 나선 자들은 아마도 예수를 대적하는 일에 앞장섰던 바리새파 사람들이었으리라 짐작된다. 그들은 이미 예수께서 스스로 죄 사하는 권세를 가졌다고 선포하신 사실이나(10절) 부정한 자로 간주된 죄인들과 함께 생활하는 모습(15절)을 보고서 예수를 핍박하고 제거하기로 마음을 굳히고 있었을 터였다. 따라서 그들이 예수를 힐난한 것은 금식 규례 그 자체의 준수 여부의 문제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이를 기화(奇貨)로 삼아 예수를 제거할 단서를 찾고자 함이었다. 이러한 저의를 예수는 너무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에, 당신의 답변 또한 단지 금식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고 보다 궁극적이고 포괄적인 문제를 거론하신 것이다. 예수의 대답 속에 담긴 주요 메시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형식주의자들에 대한 비난. 당시 유대주의자들은 율법의 참된 정신을 뒷전으로 미루고 겉으로 드러난 형식에만 열중함으로써 자기의(自己義)를 내세우고자 하였으며, 금식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마 6:16). 이에 대해 예수는 금식의 본질적 목적이 어디 있는가를 깨우치고자 하셨으며, 나아가 율법 시대와 복음 시대 및 유대교와 기독교의 근본적 차이점을 주지시키기 위해 두 가지 비유를 동원하셨다(본장 주제 강해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참조).
(2) 메시야의 자기 계시. 율법폐기론자로 몰아붙이려는 대적들에게 예수는 먼저 자신의 바로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로서 기쁨과 평강의 나라를 이룩할 자임을 은연중에 밝히셨다. 그들이 예수의 신분을 제대로 알아 보았다면 예수를 괴로운 금식에로 끌어들이려 하지도 않았을 것이며, 금식 문제로 감히 예수를 힐난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마치 자기 눈이 먼 것을 알지 못하고서 환한 대낮에 어둡다고 불을 켜려드는 소경과 다름없었다.
한편 예수께서 자신을 혼인 잔치의 신랑으로 비유하신 것은 메시야 왕국이 이미 도래 하였음을 시사한다. 교회와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신부와 신랑의 관계에 비유된 것은 신약의 여러 구절들에게 발견되며(엡 5:31, 32), 천국의 혼인 잔치에 관한 언급은 앞 단락의 내용과도 긴밀히 연결된다(13-17절 강해 참조). 또한 20절의 말씀은 주께서 당신의 수난을 미리 예고하신 내용이라 할 수 있다. 요컨대 이 짤막한 비유적 말씀 속에는 예수의 메시야로서의 신분과 사역이 뚜렷이 함축되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손에 팔리어 십자가 고난을 당하셨다고 하는 아리어니칼한 이야기는 당시나 지금이나 믿음의 눈으로써만 파악할 수 있는 비밀 중의 비밀이다(골 4:3).
*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금식 문제를 놓고 항변하는 자들에게 하신 예수의 말씀(21, 22절)은 그들을 크게 당혹시켰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날은 유대인들 사이에서 공식적으로 요구되었던 금식일들 중 하나였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금식의 문제와 '새 포두주는 새 가죽 부대에'라는 말씀과의 연관성은 동일선상에서 선뜻 이해하기 쉽지 않다. 왜냐하면 금식 자체는 결코 배척이나 경멸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예수는 이 말씀을 단지 금식 문제와 연관하여서만 하신 것이 아니라 보다 포괄적이고 궁극적인 견지에서 하셨다고 볼 수 있다. 이 말에 내포된 의미를 상고해 보자.
(1) 시대적 경륜상의 의미. 예수의 초림이 갖는 역사적 의의는 실로 중대하다. 곧 예수의 초림은 인류의 전체 역사를 양분하는 분기점에 해당된다. 이제 구약의 율법 시대는 가고 예수 안에서 복음 시대가 새로이 열렸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주의자들은 여전히 율법의 무거운 짐을 자초할 뿐만 아니라 복음의 여명이 밝아오는 것을 오히려 방해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2) 내용과 형식이라는 측면에서의 의미. 구약 시대에 요구되었던 모든 제사 제도 혹은 갖가지 절기나 의식들은 그 시대의 언약적 계시에 맞는 형식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새로와진 사상과 보다 선명해진 신약의 계시를 담을 수 있는 그릇 곧 형식 또한 그 내용물에 적합한 것으로 적응하고 변화함이 당연하다. 예컨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사 온전한 희생 제사를 단번에 성취시키셨음에도 불구하고, 소위 그리스도인이라 자처하는 사람이 구약의 제도에 따라 짐승을 잡아 제사를 지낸다면 얼마나 모순되겠는가 ! 당시 유대주의자들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밝혀 드러내고자 하신 하나님의 경륜보다는 그들 자신의 종교적 입장이나 준수에 철저하다고 자부했지만 그것마저도 제대로 감당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는 바, 그들은 율법의 정신이나 본질에는 무지한 채 다만 형식적이고 피상적인 의식(儀式)에만 철저히 하는 이율배반적 허상을 드러내고 있었다. 본문에서 문제의 발단이 된 금식만 하더라도, 그들은 금식의 본래적 의의나 목적 보다는 금식하는 행위 그 자체에 오히려 비중을 두고 있었다(에 4:1-3, 주제 강해 '금식에 대하여').
한편 예수의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의 영적 통찰을 통해 잘 해석되어 있다. 예를 들면, 바울은 예수의 복음 안에서 율법으로부터 벗어났음을 환희에 찬 어투로 갈파하면서 '영의 새로운 것'을 '의문(儀文)의 묵은 것'과 대조시켰다(롬 7:4-6).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께 의롭게 여기심을 받는 것이 '율법의 행위'에서가 아니라 은혜에의 '믿음'에서임을 설파하였다. (갈 3:1-14). 결국 예수는 '새 포두주는 새 부대에'라는 말씀을 통해, 기독교가 유대교의 울타리 속에서 개혁주의적 한 분파 정도로 남을 수 없음을 천명하신 것이라 하겠다. 율법과 복음 간에는 엄연히 연속점이 있고 예수가 구약의 폐지자가 아니라 완성자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갈 3:15-29, 주제 강해 '율법과 복음의 관계 및 단절성' 참조), 소위 유대주의와 예수의 진리는 양립하거나 조화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심지어 오늘날 기독교 교회 내에도 명목은 복음주의자들이나 실상은 케케묵은 율법주의의 틀에 갇혀 생명력을 상실한 화석화된 신앙에 해당되는 자들이 있음은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4. 안실일 논쟁(2:23-28)
본문의 사건이 발생한 시간이나 장소는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았다. 그러나 본문은 내용상 2장을 끝맺고 3장을 자연스럽게 도입하는 다리 역할을 한다. 즉, 본장의 초반부에서부터 시작된 예수와 대적들간의 충돌은 본문에 이르러 더 심각한 문제의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3:1-6에 가서는 더욱 살벌한 분위기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 기사는 마 12:1-8;눅 6:1-5에도 수록되어 있으나 구체적 설명에 관한 한 본문 내용이 비교적 더 상세하다. 예컨대, 다윗과 그 부하들이 진설병을 먹은 때 ('아비아달 대제사장의 때')를 밝힌 점이나(26절) 27절의 말씀 등은 타복음서에는 찾아볼 수 없다. 이는 예수의 사역 자체를 강조하려는 마가의 저작 의도를 반영하는 것이다. 안식의 의의, 안식일과 예수와의 관계, 안식일과 주일과의 관계 등에 대해서는 출 16:21-30;눅 6:1-5;고전 16:2의 주제 강해에서 각각 다루었으므로 참조하기 바란다. 여기서는 본문에 기록된 사건의 자연스런 추이에 따라 바리새인들의 비난과 예수의 논증이라는 두 항목으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하자.
(1) 바리새인들의 비난. 이들은 인간적 유전이나 전통을 근거로 예수를 비난했다.
(가) 비난의 배경. 앞 단락에서 거론된 바 있는 금식의 문제와 마찬가지로 안식일 준수에 관한 논쟁도 바리새인들이 위선적이고 형식주의적인 종교관으로부터 야기된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진정으로 섬기는 일 보다는 자기 자신의 명예나 이익에 더 큰 관심을 두었기 때문에, 율법의 더 중한 바 의(義)와 인(仁)과 신(信)은 멀리한 채 자질구레한 세부 조항에 집착하였다(마 23:23). 만일 예수의 제자들이 내면적 도덕법상의 하자를 드러내었다면 바리새인들의 비난이 이토록 거세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위장된 고상한 종교 생활 이면에는 위증이나 강탈 혹은 무절제 등 은밀한 도덕적 범죄가 비일비재하였기 때문이다.
(나) 비난의 증거.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제자들을 비난한 것은 밀 이삭을 먹은 것 자체에 근거하지는 않았다(신 23:25). 다만 그들의 비난의 근거는 안식일에 '일했다'는 것이었다. 느헤미야와 에스라의 개혁이 있은 후 율법학자들은 안식일 준수에 관한 세세한 규정들을 만들어 내었으며, 이 규정들은 껍질이 속을 보호하듯이 안식일의 정신을 보존하고 율법에 더욱 철저하고자 하는 선한 의도에서 마련되었다. 하지만 신구약 중간기가 길어지는 동안 안식일 준수의 참된 정신은 고갈되어갔고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뜻을 강화하고 형식적 경건성을 내세우기 위해 안식일의 세부 규정들을 견강 부회적(牽强附會的)으로 해석하거나 불필요한 세목들을 첨가하기도 했다. 본문의 바리새인들은 이삭을 자른 행위를 추수 행위로, 그리고 이삭을 손으로 비빈 것을 타작 행위로 각각 여겨 안식일에 노동하였다는 비난을 가한 것이다.
(2) 예수의 논증. 예수께서는 구약성경을 근거로 하여 안식일의 참뜻을 드러내셨다.
(가) 논증 방법. 대적들의 비난적인 힐문에 대해 주께서는 오히려 역질문을 가하심으로 그들의 입을 봉해 버렸다. 특히 우리는 예수께서 구약성경 말씀에 근거하여 논지를 펼쳐 나가신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바리새인들은 인간적 전통이나 유전에 근거하여 공격을 가한 반면에, 예수는 성경의 권위를 빌어 당신의 변론에 대한 정당성을 증거하신 것이다. 본문에 인용된 이야기는 삼상 21:1-6에 기록되어 있다. 다윗과 그와 함께한 자들은 피난길에 핍절하고 시장할 때 진설병을 먹었었다. 당시 율법에는 매 안식일에 새로운 떡을 성소에 들여 진설하고 이전 것은 제사장들이 먹도록 규정되어 있었다(출 25:30;레 24:5-9). 따라서 다윗의 행위는 분명 율법에 위반된 것이었지만, 특수한 상황이 고려된 까닭에 그는 그 일로 인해 정죄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에 근거하여 예수는 인간의 핍절을 채우는 일이 종교적 의식 이행 보다 더 중요함을 설파하셨다. 이처럼 성도들은 논쟁이나 회의의 여지가 있는 모든 상황에 대비하여 항상 하나님의 말씀으로 굳게 무장되어 있어야 하겠다. 성경을 깨우치고 그 진리의 보고를 자기 것으로 만드는 데에는 왕도가 있을 수 없다. 늘 성령의 인도하심을 기도하며 성경을 두루 상고하고 그 말씀을 현실 생활 가운데서 적용해 가는 길만이 지름길이라 하겠다.
(나) 논증의 내용(성격). 예수께서는 안식일의 참된 목적과 의의를 있는 그대로 밝혀 드러내셨을 따름이었지만, 대적들은 예수의 대답을 듣고 자못 놀라움과 당혹감에 사로잡혔던 것 같다. 그들은 예수께서 안식일 폐기를 주장하신다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예수의 논증의 요지는, 안식일이 올무나 억압 수단으로서 제정된 것이 아니라 인간을 더욱 복되고 자유롭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마련된 제도라는 내용이다. 엿새 동안의 힘든 노동으로부터 자유를 누리며 하나님과 신령한 교제에 몰두할 수 있게끔 하는 안실일은 사람에게 허락된 특권이요 선물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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