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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
천국은 마치 과 같으니 - 이것은 예수의 천국 비유 서두의 정형(定型)이다. 여기` 과'에 여격이 쓰이는데, 이것은 ` 에서와 같은 그런 상황이다'라는 말의 간결한 표현이다(Jeremias). 그러므로 여기서는 천국이 어떤 왕과 같은 것이 아니라, '천국은 어떤 왕이 자기 아들을 위하여 베푼 혼인잔치와 같다'고 이해해야 한다.
자기 아들을 위하여 - 그 임금에게 자기의 아들은 그 나라의 상속자이자 자기의 모든 것이다. 그의 출생과 성장은 아버지인 임금에게 얼마나 큰 기쁨이었는지 알 수 없다. 더욱이 그 아들이 다 커서 혼인도 하고 이제는 나라를 맡을 수도 있게 되었으니 왕궁에는 행복과 권세와 명예가 가득했다. 왕은 이 혼인과 잔치의 성사에 정성을 다하며 친히 모든 일을 주도하시는 것을 본다. 여기서 임금은 하나님을, 아들은 예수 자신을 가리키는 것은 분명하다. 예수는 자신의 사역, 곧 천국의 사역을 왕이 아들을 위해 베푸는 혼인 잔치로 말씀하신 것이다.
혼인 잔치 - 원문에는 `가무스'(* )라고 복수로 되어 있는데, 그것은 아마 여러 날 계속되는 잔치이기 때문일 것이다. 유대의 결혼 축제는 대개 7일이나 그 이상 밤낮으로 계속된다. 성년이 된 한 남자와 여자가 사랑으로 결합하는 것을 축하하는 그 잔치는 기쁨과 풍요로움으로 가득찬 축제이다. 천국이 이런 '혼인 잔치'로 비유 된 것이 생소한 것은 아니다. 구약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이스라엘을 아내로 맞아들인 남편으로 말씀하셨다(사 54:5). 거기에 상응(相應)하여 신약에서도 그리스도께서 그의 교회와의 연합으로 남편이 되심을 말하고 있다(엡 5:23-32). 그리고 혼인 잔치로서의 천국 묘사는 계 19:7-9에서 그 절정에 이른다. 이렇게 죄인들이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메시야 왕국의 사랑과 기쁨을 혼인과 결부시키는 것은 신 .구약에서 통일성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의 첫 이적의 영광이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도 의미심장한 일이다(요 2:1-11).

=====22:3
종들을 보내어 - 대개 부자들의 잔치는 날짜를 정하고 종들을 보내어 미리 손님을 청해 두지만 시각은 알리지 않고 당일에 준비가 마쳐지는 대로 다시 종들이 나가서 인도하여 오는 것이 관습이었다(에 5:8;6:14). 더구나 왕자의 혼인은 나라의 큰 일이므로 이런 절차들이 아주 엄밀하고 신중하게 진행되었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 종들을 구약의 선지자들로 보나, 천국의 임박함을 처음 선포한 세례요한이라고 하는 것이 타당하다. 이 종들은 바로 구약의 각 시대마다 하나님의 나라와 메시야의 도래를 예언했던 신앙의 선조들과 선지자들이다. 그래서 세례 요한의 천국 초대장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마 3:2)는 천국 시작의 선포였다. 특히 세례 요한은 신부를 취하는 신랑의 친구로서 자기에게 큰 기쁨이 있다는 비유(요 3:29)에서 예수를 신랑으로 소개하였다.
그 청한 사람들을 - '초청을 받은 사람들을'(* , 케클레메누스)에서 '청하다, 부르다'(* , 칼레오)의 현재완료 수동분사로서 그 초청이 과거에 단회적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다시 종들을 보내는 그 시점까지 계속 유효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구약에서 아브라함에게서부터 시작하여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어져 왔고 그것이 결코 취소되거나 잊혀지지 않았다가 때가 되매 실제로 시작되고 초청이 온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왕궁의 행사에는 백성들을 대표하여 고관대작(高官大爵)들이 초청을 받고 참석한다(막 6:21). 마찬가지로 천국의 약속과 초대의 말씀도 이스라엘의 선생들과 지도자들에게 맡겨졌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약속과 초청의 말씀을 바르게 해석하여 백성들을 인도할 책임이 있었다. 그들은 세례 요한에게 '네가 누구냐, 왜 세례를 주느냐?'고 물었던 자들로서(요 1:19-28) 지금 예수와 논쟁하고 있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다.
오기를 싫어하거늘 - `싫어하다'(* , 우크 에델론)는 미완료형으로서 그들이 왕의 초대를 '끝끝내 원하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그들은 지극히 완고한 마음으로 왕의 초대를 거절했다. 왕의 초청을 받은 사람들이 그 잔치에 가기를 싫어했다는 것은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혹시 내분(內紛)의 조짐이 있거나 반란의 기운이 무르익은 나라의 상황이라면 모르겠지만, 외부적으로는 전혀 그런 조짐이 없이 그들은 반드시 응하겠다고 약속을 했고 기다리기까지 했던 것이다. 그러나 막상 잔치가 임박하자 그들은 태도를 돌변하여 본색을 드러내었다. 그 거절의 이유를 그 왕궁의 혼사에 걸맞는 중한 선물을 바치기 싫어서라고 말하는 이가 있는데(Derrett), 그것이 고유한 관습이었음에는 틀림이 없지만 본 비유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어쨌든 이것은 예수 자신의 비유 해석대로(21:32) 유대의 지도층들이 끝내 세례 요한을 믿지 않은 것을 가리킨다. 세리와 창녀들로 대표되는 죄인들에게 회개와 세례를 허용하는 세례 요한의 사역과 메시지(3:7-10)는 그들의 전통과 질서에 정면으로 배치(背馳)되었기 때문이었다.

=====22:4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 왕의 영적인 의무이다. 그런데 그 명(command)을 무시하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이 또 한 번 간청(懇請)하다시피 청하러 종들을 보내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그 백성들에 대한 깊은 사랑과 오래 참으심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의 '다른 종들'은 바로 예수 자신과 그의 사도들로 시작된 신약 시대의 전도자들이다. 예수는 세례 요한을 이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마 4:17)고 선포하셨다. 이와 더불어 예수께서는 12사도와 70인 전도대에게도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눅 10:9,11)는 메시지를 주어서 파송하셨다.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 여기서 오찬(* , 아리스톤)은 유대인들이 들던 하루 두 끼니 가운데 첫번째 끼니를 가리키는 말로서 보통 늦은 아침(midmoming)쯤에 갖는 식사를 가리킨다. 그런데 며칠을 계속되는 성대(盛大)한 혼인 잔치의 풍습으로 볼 때, 이 '오찬'은 잔치가 시작되는 식사이이었을 것이다(Meyer).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 그런데 그 오찬은 친히 왕이 자기의 소유물로 정성껏 풍성하게 준비한 것이었다. 그 잔치를 위해서 양(量)과 질(質)에 있어서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음식이었다. 이것은 왕의 잔치가 초대받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충분하고 실제적인 만족을 줄 수 있는가를 강조하는 것이다. 천국도 그 백성들을 구원하기에 충분한 것이 준비되어 있다. 천국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롬 1:16).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는 신랑이시면서 신부를 값주고 사기 위해서 친히 제물이 되신 분이시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자신의 몸을, 사람들이 먹고서 영원히 사는 생명의 떡으로(요 6:47-58), 자신에게서 나오는 생수가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하는 것으로(요 4:14) 말씀하셨다.

=====22:5
저희가 돌아보지도 않고 - 이것은 '도외시하다' 혹은 '개의치 않다'는 의미로서(A.T.Robertson) 전혀 관심이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들의 이 큰 무례함은 교만과 무지 때문이었다. 유대의 지도층은 요한과 예수의 천국 선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이 기대한 메시야와 그의 왕국은 자신들의 전통 위에 세워져야 하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리스도는 다윗의 뒤를 이은 용사로서 군사적인 프로그램에 따라 자기들과 함께 이스라엘의 독립을 선포하고 로마와 열방을 정복해 나가 천하의 왕국을 세워야할 자인데, 예수는 오히려 자신들에게 회개하라고 대적(對敵)하니 고려할 가치도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유대 백성들도 자신들이 바라던 정치적인 해방과 현세적인 이득을 가져다 줄 것같지 않자 나중에는 다 예수버리고 만다.
하나는 자기 밭으로, 하나는 자기 상업차로 가고 - 그들 가운데는 무관심하고 냉담한 소극적인 자들이 있었다. 예들 들어 예수의 천국초청과 명령을 뒤로 하고 크게 고민하면서 자기의 신(神)인 재물을 향하여 갔던 젊은 부자관원(눅 18:18-23)이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것보다 자기들의 밭과 상업을 더 가치있게 여긴 것이다. 그들은 외형적이고 문자적인 율법 준수(observance)에서 얻은 자기의와 공로로 구원받을 수 있을 것으로 믿으면서 세상의 안전과 쾌락을 위해서 돈을 좋아했던 바리새인들이었다(눅 16:14).

=====22:6
그 남은 자들은 죽이니 - 헤롯왕은 그리스도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고는 바로 살해할 것을 계획하고 무고(無辜)한 어린아이들을 죽였다(2:1-16). 자기의 기득권을 뺏기지 않기 위해 위험한 세력을 근절(根絶)시켰던 것이다. 더욱이 그의 아들 헤롯 안티파스는 세례요한을 잡아 죽였다(막 6:17-29). 그리고 지금은 유대 지도층들이 그 마음속에 시기와 질투(27:18)로 가득차서 예수께 대한 적대감과 살의(殺意)를 노출시키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들은 표면적으로는 자신들의 민족의 안전과 사회 질서의 안녕을 위해서라고 했다(요 11:47-53). 그러나 그것은 분명 자기들의 이권과 명예를 사수하기 위한 위선책에 불과했다. '능욕하고'(* , 휘브리산)라는 말은 학대하다는 말보다 더 혹심한 모욕과 처벌을 뜻한다. 그들은 예수께 "네가 그리스도냐, 그러면 선지자 노릇해 보아라"며 침뱉고 주먹으로 쳤었다(26:65-68). 이와 함께 그들은 구약 시대에 선지자들을 죽였던(23:35) 선례가 있고, 이어서 예수의 사도들을 투옥하고 죽일 것이었다(행 4:1-3;5:17,18;8:1).

=====22:7
임금이 노하여 불사르고 - 왕의 간곡한 초청을 거절한 자들에게 왕이 분노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것은 왕 자신에게 대한 모욕이요, 반역이기 때문이다. 이제 왕은 종들을 보내지 않고 군대를 보낸다. 그 '군대'(* , 스트라튜마타)는 대군이 아니라 한 무리의 군인들을 가리킨다. 전란(戰亂)이 심한 팔레스틴 지역에서 자신에게 고분고분하지 않은 어떤 도시를 왕이 군대를 보내 파괴하는 것이 전혀 낯선 일은 아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자비와 인내가 끝나는 시점에서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은 시작된다. 이제 그들은 더이상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 살인자들이었고, 예루살렘 성도 더이상 하나님의 거룩한 성이 아니라 그 살인자들의 동네(* , 텐 폴린아우톤)였기 때문이다. 이 예언은 주후 70년경 디도(Titus) 장군의 로마 군대에 의해 문자 그대로 응하였다. 이 부분을 후대의 가필(加筆)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이제 예수께서 당신의 죽으실 것(20:17-19)과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24:2)을 예언하시는 마지막 주간에 이스라엘 민족과 예루살렘 성의 멸망을 경고하시는 것이다. 로마 군대가 하나님의 군대는 아니나, 고레스와 다른 경우들처럼(사 10:5;45:2) 간혹 하나님은 이방의 군대를 당신의 뜻을 성취하시는 도구로 사용하신다.

=====22:8
청함 사람들은 합당치 아니하니 - 처음 초청을 받은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과 그들의 지도자들에게 그 초청은 이제 무효화되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초청이 효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의 초청을 거절했기 때문이다(Lenski). 이제는 혈통적 이스라엘이 아니라 회개한 이방인과 죄인들을 포함하는 새로운 이스라엘이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의 권리를 갖는다.

=====22:9
사거리 길에 가서 - 사거리 길(* , 타스 디여소두스톤 호돈)은 성읍 경계에서 지방으로 통하는 길들이 시작되는 넓은 광장으로 형성된 곳이다. 이곳은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고 왕래하는 곳이다.
사람을 만나는 대로 - 그곳의 사람들은 처음에 초청을 받은 사람들과는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다. 눅 14:21에는 분명하게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로 드러난다. 이들은 바리새인들이 혐오하던 죄인들이었다. 왕의 분노는 무자격자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갑절의 호의(好意)로 나타났다. 스스로 의인이라고 하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를 거부하고, 예수는 세리와 사마리아인 같은 죄인들의 친구가 되셨다.

=====22:10
악한 자나 선한 자나 - 바리새인에게는 자신들의 기준에 의한 선악의 개념이 뚜렷했다. 그들은 자칭 의인들이었고 세리와 창녀들, 병자들, 가난한 자들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죄인들, 악인들로 여겼다. 그러나 그들이 전통적으로 세운 선악의 기준을 하나님께서는 참고하시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의모를 보지 않으시고 그 중심을 보신다.

=====22:11
한 손님들이 다 참석하면 잔치가 시작된다. 이들 문화권에서는 잔치에 주인이 처음부터 함께 하지 않고 식사 시간이 되면 자기의 모습을 드러내서 손님들을 환영하는 것이 상례로 되어 있다(Jeremias). 이는 예수께서 재림하셔서 양과 염소를 갈라내듯이 심판하시는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보러'(* , 데아사스다이)라는 말은 대상의 참된 성질과 특성을 의도적으로 자세히 살피는 것을 의미한다. 왕은 이 잔치에 부적격(不適格)한 사람을 즉시 찾아내는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마지막 때에는 하나님 앞에서 드러나지 않는 것이 없다(고후 5:10).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 - 고대 동방에서는 잔치의 주인이 초청한 사람들에게 예복을 한 벌씩 주는 것이 관례라고는 하나(왕하 10:22), 1세기의 혼인 잔치에서는 그것이 확실하지않고, 본 비유에서도 그것은 밝혀지지않고 있다. 그러나 길에서 바로 온 사람들에게 알맞는 예복이 있을 리도 없고 자기의 것을 가지고 올 여유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궁정의 행사에 참여하거나 왕을 알현(audience)하려는 자에게 왕으로부터 예복이 주어지는 관습을 고려할 수밖에 없다. 그들에게는 선악이 문제되지 않고, 원래의 신분과 처지를 가리고 그 잔치에 합당한 예의와 함께 왕께 대한 예(禮)를 갖추는 예복이 문제였다. 이 예복은 하나님이 입혀주시는 의의 옷, 구원의 옷(사 61:10)이며, 세례요한과 예수께서 천국에 들어가는 조건으로 말씀하신 회개와 믿음(롬 10:9,10)이라는 옳은 행실이다(계 19:8). 이렇게 천국의 심판의 기준이 외형적인 선악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믿음이라는 것은 당시의 전통적인 유대교가 그리는 심판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들은 각자가 행한 의의 분량만큼 구원과 상급을 얻고 이방인과 죄인들은 결코 메시야 왕국의 잔치에 참여할 수 없다고 여겼는데, 오히려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회개하여 하나님이 주신 예복을 입은 것만으로 구원을 누리는 것이다. 예복을 입지 않은 이 사람은 바로 가룟유다를 가리키는 것이라고도 하나(Tasker), 오히려 예수의 답변을 듣고 있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교훈을 받은(16:6-12) 율법주의자들과 세속주의자들이라고 보는 것이 더욱 적절하며, 이들은 교회에 함께 있으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진리를 멸시하다가(고전 15:12-19) 종말에 심판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

=====22:12
친구여 - '친구여'(* , 헤타이레)라는 말은 포도원 품꾼의 비유에서 불평하는 일꾼(20:13)에게와 가룟유다(26:50)에게 사용되었다. 이것은 애정이나 특별한 선의가 담긴 말이 아니라 손아래 사람에게 하는 그저 무관심한 투의 말이다.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않고 - 남들은 다 왕이 주는 예복을 입었는데, 그것을 입지 않고 자기의 옷을 그대로 입고 있음을 자신의 지식과 행위로 구원받기에 충분하다고 믿는 자고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들은 가라지들이고(13:24-30), 염소들이며(25:41-46),`주여 주여'하면서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다(7:21-23).

=====22:13
사환들에게 말하되 - 1-10절에는 `종들'(* ,둘로이)이 사용되었고, 11-14절에는 `사환들'(* , 디아코노이스)이 사용되었으므로 이 비유가 원래는 독립된 두 비유였음을 암시한다고 하나, 왕의 밑에서 전령으로 일하는 자들과 잔치를 담당하고 수종드는 자들이 달리 불리우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면 이 사환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을 보좌하고(마 13:41,49) 영원천국에서 성도들에게 수종들 천사들일 것이다. 한편 그들이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의 수족을 결박하는 것은 반항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바깥 어둠에 내어 던져지고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가는 것은 마지막 심판의 형벌에 대한 일관된 묘사이다(8:12;13:42,50;24:51;25:30). 그것은 즉각적이고도 철저한 형벌이며 영원한 형벌이어서 더이상의 자비나 기회가 없다. 그러나 그들의 의식은 생생하여 절망과 한탄과 분노로 불타오른다. 그런데 이것이 사랑의 하나님과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하여 단지 경고나 과장된 표현이라고 하는 학자들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가치를 가볍게 여기는 자들이 하나님의 형벌도 무서워하지 않는다. 진정 지옥의 형벌을 두려워하는 것은 결코 유치한 신앙이 아니다.

=====22:14
청함을 받은 자 택함을 입은 자 - 개역 성경에는 원문의 '왜냐하면'(* ,가르)이 생략되었는데, 이것은 이 비유의 결론을 이끄는 말이다. 임금이 처음에 손님들을 초청했지만 그 초청을 받아들이고 예복을 입어 '택함을 입은 자들'(* , 에클레크토이)은 소수였다. 그러나 손(guest)이 가득했기 때문에(10절) 잔치를 맛본 사람이 소수였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이스라엘 모두를 먼저 초청했는데, 그들 거의가 거절하여 택함을 입지 못한 비극적인 현실을 지적하시는 것이다. 여기서 택함을 입었다는 것은 이제 잔치를 맛볼 수 있는 자격을 얻은 것을 말한다(눅 14:24). 그 조건은 부르심을 받고, 주시는 예복을 입는 것이다. 인간 편에서는 다 받는 것뿐이다. 선택의 교리의 핵심이 여기에서 나온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시고 인도하시지 아니하면 아무도 예수를 알 수 없고 예수께 갈 수 없다(16:17;요 6:65).하나님의 택정함을 이루는 것은 이렇게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의 사역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택함을 입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적고 효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는 인간의 교만이 그토록 크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학자들이 이 결어를 마태가 후대에 삽입한 것으로 보기도 하는데 청중과 논적(論敵)을 향한 결론적 경구로서 진정한 예수의 말씀임을 부인(否認)하기 어렵다.

=====22:15
이에 바리새인들이 가서 상론하고 - `이에'(* ,토테)는 때로 시간적인 의미보다는 앞뒤의 사건을 논리적으로 연결해 주는 접속사로 쓰이는 마태의 독특한 용법이다(90회). 예수를 잡아야 하나 예수께서 백성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으므로 다른 방도를 찾아야 했다. 여기 바리새인들만 언급한 것은 막 12:13에서 대제사장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을 가리키는 '저희'와 모순되는 것 같으나 서기관들과 장로들은 거의가 바리새인들이었고, 계속해서 진행되는 예수께 대한 올무를 놓는 일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에 대표로 쓴 것이다.
말의 올무에 걸리게(* , 파기듀소신) - `올무에 걸리게 하다'는 말은 본래 사냥에 사용되는 말로서 한 대상에 대해 주도면밀하게 함정이나 덫을 설치하는 것을 말한다. 그들이 자기들의 메시야를 죽이기 위해 모든 종교적인 지식과 현실적인 모든 상황을 이용하여 덫을 놓는 생생한 표현이다.

=====22:16
자기 제자들을 헤롯당원들과 함께 - 그들은 예수를 정치적인 올무에 빠지게 하려고 헤롯당원들과 함께 가도록 했다. 사실 그 양자는 종교적이고 정치적인 면에서 서로 다른 견해로 잦은 충돌을 일으켰던 사이였으나 예수에 관한 문제만은 일찍부터 협력하여 일을 꾸몄었다(막 3:6). 평행구인 눅 20:20은 헤롯당원들을 동행시킨 바리새인들의 의도는 로마의 총독의 손으로 예수를 처지하려는 것이었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연로(年老)한 바리새인들은 연소(年少)한 제자들을 보내어 '선생님'이라고 부르면서 접근하도록 했는데, 그것은 자기들의 위신과 체면을 지키고, 새로운 얼굴들을 내세워 진실한 구도자의 모습으로 가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예루살렘에는 힐렐(Hillel) 학파와 샴마이(Shammai) 학파가 있었다. 누가는 그들이 정탐(spying)했었다고 말하는데, 정탐은 자기의 신분을 감추기 위함이며, 그들은 전략을 완전히 바꾸었다. 그들은 예수로부터 원하는 대답을 이끌어내기 위해, 즉 대답을 하지 않으면 안되도록 온갖 최고의 칭찬을 시작한다. 그 첫째가 '선생님이여'(* , 디다스칼레)이다. 이것은 랍비와 같은 의미인데, 진리와 권위를 갖춘 가르치는 자로 인정하는 것이다. 처음에 그들이 와서 '네가 무슨 권세로'라고 했던 말투와는 전혀 달리 예수를 칭찬하고 추켜 세우는 전략을 사용한다. 둘째는, '당신은 참되시며'(* , 알레데스)라는 말이다. 이 말은 바리새인들이 참으로 입에 담기 어려운 말이었으나 예수를 선지자로 믿는 백성들이 듣도록 한 말일 것이다. 이것은 '선한 선생님'이라는 표현같이 그들로서는 파격적인 높임이었음이 틀림없다. 참되신 선생은 옳은 것과 그른 것을 판단하여 가르칠 수 있다. 다시 한 번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라고 하여 강조한다.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니, 또한 그것을 참되게 가르치는 자는 어렵고 미묘한 문제라 할지라도 명쾌한 답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셋째로,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라고 하여 지금까지 그렇게 참되게 가르치고 행하는데 있어서 예수는 백성들의 여론과 인기를 고려하지 않았고 관원들의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았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바로 이어지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이다'라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평가하시는 방식인데, 그처럼 사람이 가진 권세나 사람들의 평판을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하셨다는 말이다. 이렇게 열렬한 지지자로서 진정으로

=====22:17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 예수 당시 유대 지방의 납세 문제는 민감한 문제였다. 갈릴리 지방의 분봉왕 헤롯은 종교적으로는 유대인이었으므로 그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은 종교적인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유대 지방은 아켈라오가 폐위되고 황제의 직속령으로 재편성되어 황제가 임명하는 총독이 다스리게 되자 유대 백성들은 로마 황제인 가이사에게 직접 세금을 바치는 격이 되었다. 한편 이때 가이사는 A.D. 12-37년에 로마를 통치한 티베리우스 황제였다. 그리고 로마 정부는 매 14년마다 한 번씩 그 각 지방에서 바쳐야 하는 세금의 총량을 결정하기 위해 인구 조사를 실시했다(눅 2:1). 이스라엘에서는 바벧론 유수때부터 이방 지배자들에게 조공(朝貢)을 바치는 일이 문제된 적이 없었다.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인구 조사를 즈음하여 갈릴리 사람 유다(행 5:37)가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이신데 이방 왕들에게 세금을 바쳐 그를 인정한다면 이는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라고 주장하였다. 그의 반란은 진압되었어도 가이사에 대한 납세의 적법성(適法性) 문제는 계속 신학적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더욱이 하나님의 선민이 예루살렘성전이 있는 유대 땅의 소출(所出)에서 십일조를 성전에 바치면서 그 동일한 소출에서 떼어 이방인 왕의 통치아래 있다는 표로 세를 바치는 것을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꺼림직하게 여겼다(F.F.Bruce).과격분자들인 열심당은 그 일을 수치(羞恥)로 여겼다. 그러나 헤롯당은 헤롯가문을 재흥시켜 헤롯 대왕의 호시절로 돌이키려고 로마 제국에 협력하면서 납세도 적극 권장하던 자들이었다. 어쨌든 지금 예수는 궁지에 빠졌다. 납세를 찬성하면 열심당과 바리새인들과 일반 백성들로부터 외면을 당하여 그들이 환영하는 메시야가 될 수 없고, 납세를 반대하면 헤롯당원과 사두개인들, 로마 총독과 헤롯 왕으로부터 정치범으로 몰리게 되기 때문이다. 바리새인들의 생각에 예수가 로마에 대한 납세를 찬성하지 않으실 것은 분명한 일이었다. 사실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서 살려는 그들에게도 그 문제는 큰 고민이었다. 여하튼 바리새인들의 사악함은 하나님의 도에 참된 예수의 견해 중에서 율법에 열심인 자신들과 일치되리라고 예상한 점을 이용한 데 있다. 왜냐하면 이 문제가 예수를 옭아매기에 충분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세 - 로마 제국이 강요하는 세금은 토지세와 소득세와 인두세가 있었다. 여기의 '세'(* , 켄소스)는 인두세로서, 로마 정부는 자기들의 통치를 받은 속주에서 남자는 14세 이상부터, 그리고 여자는 12세 이상부터 65세에 해당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부과하였다. 한편 라틴어의 Census라는 말은 바로 이 인두세에서 유래하였다.

=====22:18
예수께서 저희의 악함을 아시고 - 예수는 그들의 정중하고 호의적이며, 간절한 물음 속에 있는 살의와 사악함을 보셨다. 이에 대해 마가는 '외식함', 누가는 '간계'라고 표현했다(막 12:15;눅 20:23). 그들의 입으로 말한 바 '외모를 보지 않으시는' 예수는 당신을 시험코자 하는 그들의 중심을 다 아셨고 그것을 백성들 앞에 드러내셨다. 예수는 그 질문이 가지고 있는 함정과 덫을 바로 아셨던 것이다.

=====22:19
셋돈 데나리온 하나 - 이 세금은 로마 황제가 발행하는 은화로 바쳐야 했다. 고대사회에서 화폐는 왕권의 상징으로 어떤 왕이 왕위에 오르면 즉시 자기 자신의 화폐를 발행했다. 왕위를 노리는 자까지도 자기의 왕직의 실재성을 과시하기 위해 화폐를 발행했다(W.Barclay). 이것이 데나리온인데, 당시 가장 널리 유통되던 화폐였고, 거기에는 재임 중인 황제의 이름과 칭호가 찍혀 있어서 황제의 재산임을 나타냈다. 그 가치는 성인 남자의 하루 품삯이었고, 로마 군인의 하루 품삯이었다. 세금은 매년 일인당 한 데나리온을 내야 했다.

=====22:20
이 형상과 이 글이 뉘 것이냐 - 이 데나리온 주화의 한 면에는 황제의 신성을 표시하는 월계관을 쓰고 있는 황제 티베리우스의 두상과 '존엄한 신의 존엄한 아들 티베리우스가이사'라는 글이 새겨져 있으며, 다른 면에는 '지극히 높은 사제'(Pontifex Maximus, 폰티펙스막시무스)라는 라틴어 글과 신들의 평화를 나타내는 홀과 감람나무 가지를 각각 왼손과 오른손에 쥐고서 신들의 보좌에 앉아 있는 황제의 어머니의 그림이 새겨져 있었다. 그러니 이런 이방인의 우상숭배적인 화폐가 유대인들에게 얼마나 큰 혐오감을 일으켰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로마 정부는 이 화폐를 쓰게 함으로 자기들이 지배하는 권세를 피지배민들로 하여금 피부로 느끼게 하고 인각시키는 것이었다. 랍비들은 큰 나라를 이루게 하겠다는 하나님의 아브라함에게 대한 약속은 구체적으로는 아브라함과 사라의 모습이 새겨진 화폐가 세계에 통용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고 믿었다(Beasley-Murray). 초기의 헤롯가에는 유대인의 종교관 때문에 이러한 형상 새기는 일을 피했으나 분봉왕 빌립이 이것을 유대 주화에 도입했다. 그 뒤로 헤롯 아그립바 1세가 이 일을 행했던 것이다(Robertson).

=====22:21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 '가이사'(* , 카이사르)는 최초의 로마 황제 율리우스 가이사(Julius Caesar, B.C. 100-44)의 성(姓)이었으나 나중에는 '황제'의 공식 직함 명칭이 되었다. 예수의 질문은 너무 당연하고 무해(無害)하게 보여서 바리새인들은 거침없이 대답하였다. 그러나 예수는 항상 질문자의 입에서 대답을 이끌어내셨다.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 예수께서는 바리새인의 입에서 나온 같은 말로 대답하신다. 데나리온의 화상과 글이 가이사의 것이면, 그 주화는 가이사의 것이다. 그들 모두가 가지고 다니던 데나리온 주화는 로마 황제의 주화였고, 그것은 곧 이스라엘이 로마 황제의 통치 아래 있음을 분명히 증거하는 것이었다. 예수는 그들의 입으로 그 주화가 황제의 소유임을 말하게 하셨다. 한편 랍비들의 가르침에 따르면 화폐 주조(鑄造)의 권리가 한 나라의 통치자에게 있음을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그 사실이 통치 권력의 증거가 되어 있었고, 거기에 저항하는 것은 불법이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께서도 하나님의 뜻으로 로마의 지배 아래에 있다면 로마에 세금을 바칠 뿐만 아니라 그 법을 준수하고 합당한 요구에 응하는 것은 당연한 의무임을 강조하셨다. 예수의 이 첫 대답은 문자적으로는 반민족적이고 친로마적인 입장이었으나 뒷 말씀과 연결될 때는 참으로 기이하고 심오한 도(道)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십일조와 성전세와 헌물들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당시 하던 관례대로이다. 그러나 문제는 주화가 황제의 소유이므로 황제에게 바쳐야 한다면 하나님의 소유에서 제외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만물에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이 인각되어 있는뎨( 롬 1:20),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받으실만큼 영광과 존귀를 받으시고 있는가? 예수는 상황의 본질을 정확히 아셨다.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충성심 때문에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하나님께 합법적인가를 물은 그들이 실은 하나님께 바쳐야 할 것을 하나님께 전혀 바치지 않고 있었다. 실로 그들은 의(義)와 인(仁)과 신(信)은 버렸던 것이다(23:23). 그들의 문제는 바로 그것이었다. 그들이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바로 바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또한 그들은 가이사의 것도 가이사에게 돌리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에 멸망당하고 만다. 결국 주후70년, 성전이 파괴되고 성전세 반세겔까지 로마정부의 강요로 로마에 있는 쥬피터 카피돌리누스에 바치게 되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인 교회에 그 영역과 경계를 정하신 말씀이시다. 교회는 이스라엘 민족만이 아니라 온 세상에서 하나님의 분명한 형상을 찾아 하나님께로 돌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통치영역이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복음에는 하나님의 생명과 권세가 나타나 있어서 복음을 믿는자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되어, 하나님의 소유가 되기 때문이다. 이 복음의 통치권은 예수의 속죄의 죽음과 부활로 하나님의 것이 최초로 하나님께 온전히 돌려짐으로 세워진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가이사의 것을 제외한 당신의 것을 받으신다. 하나님이 주시고 받으시는 것에 비하면 가이사가 주고 받는 것은 얼마나 시시한가? 교회는 하나님께 받고 하나님께 드리기 위한 질서이고, 시민 생활은 가이사에게 받고 가이사에게 바치는 질서이다. 어느 요구도 다른 요구를 방해하지 않는다. 가이사가 자기의 것만을 요구할 때는 그에게 시민으로서 복종하는 것이다. 여기에 근거해서 바울은 롬 13장에서 그리스도인의 시민 생활을 가르친다. 그러나 교회는 가이사가 하나님의 것까지 요구했을 때는 육체를 줄지언정 하나님께 속한 영광을 가이사에게 바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것이 더 포괄적이고 우월하기 때문이다. 바치라(* , 아포도테)는 17절의 ' 바치다'(* , 두나이
이다.

=====22:22
기이히 여겨 - 그들은 예수에게 이런류의 해답이 나오리라고는 상상치 못했다. 그 대답은 바리새인과 헤롯당원들의 협공을 피하면서 도리어 그들의 부패한 심장을 찌른 것이다. 그들은 도리어 '하나님의 것'이라는 무거운 짐을 안게 되었다. 그들은 압도당하여, 즉 '기이히 여겨'(* , 에다우마산) 놀라고 감탄할 뿐이었다. 그러나 이 말을 전해 들은 그들의 선생들은 눅 23:2에서 예수의 이 말씀을 왜곡하여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지 말라고 선동(agitation)했다고 고소한다.

=====22:23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 사두개인(3:7, 주석 참조)들은 숫자상으로는 많지 않았으나 부유한 귀족들이며 지배 계급에 속한 자들이었다. 제사장들은 대부분 사두개인들이었다. 그들은 헬라 사상을 받아들였으며, 자기 민족의 역사적 근거로서 모세 오경은 인정했으나, 기타의 구전, 문서들, 특별히 바리새인들의 유전과 서기관들의 성경 해석과 적용을 배척했다(Winer). 그들은 물질만이 유일한 실체라고 믿었다. 그래서 만약 부활이 있다면 그것은 땅에서의 생전의 동일한 조건이 그대로 유지되어 현생의 불합리하고 모순된 삶이 변함없이 개속되므로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당시 유대교는 죽음 이후의 일들에 대해서 다양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대부분의 경건한 자들은 사람이 죽으면 최후의 부활까지는 음부(스올)에서 그림자처럼 미약한 존재의 형태로 있게 된다고 믿었다. 그러나 사두개인들은 사람은 죽음과 더불어 영혼과 육체가 다 없어진다고 믿었다. 그들은 영혼의 존재와 부활의 교리가 오경에서 증명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신 31:16;32:39을 인용하여 오경에서 몸의 부활을 증명하려 했다. 그리고 오경외에 사 26:14에서도 부활을 증명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이 몸의 부활을 원칙적인 교리로 고수했어도 그들의 논의는 필요없는 상상과 억측으로 흘렀다. 한 예로 그들은 부활했을때 어떤 옷을 입고 부활할 것인가를 문제 삼았다. 그리고 어떤 모양으로 부활할 것인가의 논의는 삼상 28:14(죽은 사무엘이 알아볼 수 있게 나타난 사건)에 근거하여 죽을 때 가졌던 모양 그대로, 불구자는 불구인 그대로 부활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모든 유대인들은 성지 팔레스틴에서 부활한다고 믿고 외국에서 죽은 자들은 지하의 공로(空路)를 통해서 팔레스틴에 이르러 부활한다고 했다(W. Barclay). 그들에게도 부활은 육체의 부활 그 이상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사두개인들은 그들의 교리가 만들어내는 많은 모순 때문에 그것을 비웃고 믿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바리새인들은 부활을 부인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축복으로부터 제외된 자라고 규정했다.
그 날에 물어 가로되 - 마태만이 그 질문이 같은 날에 있었다는 것을 기록한다. 유대 지도층의 세 파가 예수를 시험한 그 날(화요일)은 질문의 날이었다(Tasker).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원들의 실패를 보고 사두개인들은 자신들의 입장과 논리로 예수를 굴복시킴으로 예수와 함께 경쟁자들을 제압하여 자신들의 우월성을 드러내고자 했던 것이다. 이것은 사두개인들이 예수와 직접 관계한 유일한 경우이다. 그들은 예수가 바리새파의 전통적인 부활교리를 받아들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사두개인들은 그 교리의 모순된 점을 공격하여 백성의 인기가 최고도에 달한 '선생님'이신 예수로 대답할 수 없게 만들어 망신을 주고자 하는 것이다.

=====22:24
선생님이여 - 그들도 바리새파의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존경과 위엄으로 자신들의 악의를 가장한다. 그러나 자신들에 대하여 가졌던 우월감 때문에 아첨까지는 하지 않는다.
모세가 일렀으되 - 그들은 모세를 언급하면서 자신들의 종교적 이론의 근거가 모세에게 있음을 은연(隱然)중 강조한다.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장가들어 - 이것은 신 25:5,6의 요약 인용이다. 그들은 신명기를 모세의 말로 인용한다. 신명기까지의 첫 다섯전을 모세의 저작으로 받는 것은 유대인의 정설(定說)이었다. 원래 레 18:16;20:21에서는 죽은 형제의 미망인과는 결혼을 금지했다. 그러나 신 25:5에서는 형제가 자식이 없이(원문: 아들이 없이)죽으면 그 형제가 형수(제수)를 취하여 아내 삼도록 했다. 여기 `아내에게 장가들어'(* , 에피감브류세이)는 무자(無子)한 과부인 형수에게 장가드는 자에 대해서 쓰였다(창 38:8;신 25:5). 신약에는 이곳에 한 번 나온다. 모세 이전에도 이 수혼(嫂婚)의 풍습은 있었다(창 38:8). 그리고 고대에서 근세까지 여러 동양 민족들에게서 그 관습을 찾을수 있다. 하나님께서 이 관습을 이스라엘의 법으로 정착시키신 것이다. 그리고 수혼법이 적용되는 무자한 과부를 취할 수 있는 이웃 친척도 같은 지경에 사는 형제에게 국한되었다. 그리고 그 의무는 거부할 수 있었다. 만약 그 의무를 거부하는 경우에는 당사자가 증인들 앞에서 그 남자의 신을 벗기고, 침 뱉고, 저주했다(신 25:7-10). 그러나 이것은 예수 당시에는 거의 퇴화된 법조문이었다고 한다.
형을 위하여 후사를 세울지니라 - `형을 위한'은 원문에 `그의 형제에게'(* , 토 아델포 아우투)이다. `후사'(* , 스페르마)는 원래 파종(播種)을 위해 보관해 둔 씨를 뜻한다. 그리고 `세울지니라'(* , 아나스테세이)는 `일으키다'(raise up)는 뜻이다. 수혼법은 자식이 없음으로 인하여 가문이 끊기는 것을 가장 큰 재앙으로 여겼던 고대적인 사고에 뿌리를 두었다(Speaker). 형수와의 새로운 결혼에서 낳은 첫 아이는 죽은 형제의 법적인 아들로 간주되어 죽은 형제의 이름을 물려 받고 그의 족보에 오르고 그의 상속자가 되는 것이다.

=====22:25
우리 중에 칠 형제가 - 이 말로 사두개인들은 자신들이 예수께 제시한 예증이 대단히 현실적인 것으로서 부인할 수 없는 상황임을 강조한다.
끼쳐두고 - `아페켄'(* )은 '남겨 두었다'는 의미이다.

=====22:26
둘째와 세째로 일곱째까지 - 모든 결혼이 아이를 생산하는데 실패했다. 아이가 있었다면 부활 때에 아이를 낳은 형제의 아내가 되는 것이 당연하므로 끝까지 아이를 낳지 못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실제 있었던 사실인지, 논쟁의 극적인 효과를 위해서 실제 있었던 어떤 경우를 확대하여 꾸며낸 이야기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이 이야기가 실제적으로는 여러 가지 이유로 실행 불가능하다고 해도 법적인 가능성 때문에 이야기 자체의 사실성을 따지지 않는다. 예수께서도 이 이야기의 사실성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22:27
최후에 죽었나이다 - 사두개인의 시각에서 볼 때 그 여인의 죽음은, 곧 지상에서의 삶 뿐 아니라 그 이상의 어떤 가능성도 바랄수 없는 완전한 종결로 보았다(신약 총론 '신약의 종교적 배경' 참조). 그러나 하나님의 시각에서는 그 여인은 여전히 존재하며 영원한 심판을 받기 위해 언젠가는 죽음의 문을 열고 일어나야할 잠재적인 부활체였다. 이 신앙에 입각하여 바울은 부활의 영광을 확신했으며(고전 15:19), 또 니케아 신경(Nicene Creed)은 '죽은 자의 부활과 내세의 생명'에 대한 뜨거운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이다.

=====22:28
부활 때에 일곱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 - 이것은 철학적인 토론을 하기 좋아하는 사두개인들이 바리새파와 부활을 믿는 자들의 입을 막기 위해 만들었던 수수께끼였던 것 같다. 그들이 노리는 것은 분명했다. 부활 후의 삶이 이 세상에서의 삶과 정확히 대응된다면 부활한 그 여인은 근친상간의 결혼의 죄의 책임을 지든지 그 형제들 중의 한 아내로 지목이 되어야 했다. 따라서 그 여인이 부활 후에 누구의 아내가 될 것인지 그 대답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부활의 개념은 불합리한 것이 될 뿐이다. 사두개인들은 이 수혼법(嫂婚法), 계대(繼代) 결혼법이 모세의 법인데 모세가 그런 육체의 부활을 믿었다면 율법을 준수했을 때 그런 불합리한 문제가 발생되는 그런 계명을 명했을 리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활의 교리는 모세도 알지 못했던 것이며, 솔로몬 시대 이후에야 발전하기 시작했다고 주장했다(Lenski). 이 문제는 과연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바리새인들이 대답할 수 없는 어려운 문제임이 틀림없었으며, 사람을 만드시고 그 존재와 운명을 아시는 하나님만이 대답하실 수있는 것이었다.

=====22:29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 '성경'(* 하이 그라파이)은 구약전체의 문서를 가리킨다(눅 24:27, 44;요 5:39). 예수는 부활 교리가 전 성경(선지자와 시편을 포함)에 걸쳐 지지(支持)를 받고 있다고 가르치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전 성경이 예수를 증거하고 있는데, 만약 부활 교리가 모든 성경에서 가르쳐지지 않는다면 예수의 부활도 불가능한 것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예수의 눈에는 모세오경을 잘 믿는다는 사두개인들이 성경을 부인하는 것으로 보였는데, 그것은 그들이 부활에 대한 성경의 명백한 교훈(욥 19:25-27;사 26:19;단 12:2)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편 여기서 '하나님의 능력'(* , 헤 뒤나미스 투데우)이란 말씀으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능력이다. 천사와 같은 영적인 존재를 만드신 하나님께서 영혼과 흙이 된 육체를 통하여서 영적인 몸을 만드시는것(고전 15:42-44)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사두개인들은 사람을 현생에서의 육체적 상태로 만드신 것에 하나님이 최고의 능력을 발휘한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고 경시하는 큰 죄악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알지 못하는 고로 - 원문은 '메 에이도테스'(* )로서 문자적으로는 '보지 못하므로'이다. 이 말씀은 눈으로 성경과 피조계를 보면서도 그 안에서 바른 진리와 하나님의 성품과 능력을 깨닫지 못하는 유대의 지도자들에 대한 책망이다(요 3:10;9:41). 사두개인들은 세상 철학으로 성경과 하나님을 판단한 것이다. 오해하였도다(* , 플라나스데)는 중간태로서 '너희가 너희 자신을 위하여 스스로 기만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것은 그들의 마음의 완악함과 하나님의 진리에 대하여 무감각한 상태를 지적한다.

=====22:30
원문에 제시된 본문에는 '왜냐하면'이란 뜻의 `가르'(* )가 생략되어 있는데,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어떻게 나타나는가에 대한 설명의 도입부인 것이다. 예수는 먼저 부활의 성격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부터 언급하고 다음에 성경으로 입증하신다.
부활때에는 시집도 아니가고 - 현생에서의 결혼은 하나님께서 인류를 번식시키기 위한 창조 법칙이다. 그래서 결혼의 중요한 기능의 하나는 출산이다. 그러나 부활 때는 창조의 목표가 완성된 마지막 때이므로 더 이상 출산이 필요 없고, 그러므로 자연히 성적 만족을 요구하는 본능도 없어진다. 부활의 몸은 이렇게 존재의 규모와 질(質)이 달라지므로 결혼관계가 해소(dissolution)되고,결혼이 필요가 없게 된다. 또한 이 세상의 쾌락과 만족과는 다른 새롭고 영원한 즐거움과 만족이 있게 된다. 이 대답으로부터 어떤 이들은 천국에서는 그 이전의 삶이나 여러 관계들에 대한 기억조차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에 대한 확실한 근거는 없다. 여하튼 오늘날에도 선한 어머니는 그녀의 모든 자녀를 다 사랑할 수 있고 또한 그들에게 사랑을 받을 수 있듯이, 일곱 형제들의 아내는 틀림없이 모든 형제들을 사랑할 수 있을 것이며 그들 모두의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D.A. Carson).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 예수는 부활체의 상태를 가장 분명하게 천사들과 비교해서 가르치신다. 천사들이 영적인 존재이듯이 부활한 인간의 몸도 영적인 존재이다. 그러나 천사 되는 것이 아니라 천사의 존재 특성과 유사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크리소스톰(Chrysostom)은 부활한 몸은 무성(無性)이라고 했으나 그렇게 단정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결혼이 필요 없다고 하셨지 남녀의 구별이 없어진다고 말씀하시지는 않으셨기 때문이다. 남녀의 구분은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의 은혜를 드러내는 증거로 존속될 것이다. 천사들과 비교해서 말씀하신 것은 천사들의 존재를 부인하는 사두개인들에 대한 또 한 번의 공격이며, 천사들의 실재와 영적인 특성을 완전히 계시하신 것이다.

=====22:31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 - 예수는 이제 성경의 증거를 들어 부활의 사실을 입증하신다. 예수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신 말씀(출 3:6)이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만이 아니라 현재의 이스라엘 청중에게도 하신 것으로 말씀하셨다. 이로 보건대 하나님의 말씀은 당신의 언약 안에 있는 백성들에게 영원한 말씀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들은 시공(時空)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있으므로 그 말씀을 늘 읽고 바로 깨닫는 일이 중요하다.

=====22:32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로라 - '나는 의 하나님이다'(* , 에고 에이미 호 데오스)라는 이 말씀은 당신의 언약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자기 소개의 정형이다. 하나님은 언약의 상대방인 아브라함의 이름을 들어 스스로를 소개하신다. 대개 우리는 유명한 사람들과의 관계를 드러냄으로 우리 자신을 높인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히려 연약한 피조물의 이름에 즐거이 자신의 존재를 결부시킴으로 그와 맺은 언약의 소중함과 그것에 대한 당신의 신실하심을 보이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선조들의 하나님으로서 틀림없이 약속을 지켜오신 분으로 소개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의 생존의 근거가 되시는 분이다. 또한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이스라엘이 한 민족으로 조성되는 기반으로 쓰임을 받았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그렇게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여기고, 그들의 후손됨을 구원의 보장(保障)으로 여겼던 것이다(3:9;요 8:39). 한편 본 구절은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었노라'고 과거 시제를 사용해야 문법적으로 옳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현재 시제를 사용하신 의미를 예수께서는 간과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 누가는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눅 20:38)는 예수의 해석을 첨가했다. 실로 예수는 부활과 영혼의 존재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신다. 하나님께서 현재 시제를 사용하셨다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더이상 죽은 자가 아니다. 그들은 존재가 소멸되어 버린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살아 있다는 것이다. 비록 그들의 육체는 썩어 흙이 된 지 오래지만 그 영혼들은 하나님과 함께 있어서 실제적으로 그리고 구체적으로 살아 있는 것이다. 그들이 죽어 멸절(滅絶)되었다면 그들과 후손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들이 참여할 수 없고, 지켜 볼 수 없는 언약의 성취는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당시 그 말씀을 들었던 모세와 백성들도 만약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죽어 멸절되었다고 믿었다면 하나님의 그런 말씀을 비웃었을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인용한 그 본문은 이 논증의 맥락에 있어서는 영혼의 존재와 그 불멸성을 증명하는데는 충분하지만 부활을 증명하는 데는 충분하지 못한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은 부활은 물론 천사의 존재와 영(靈)의 존재도 부인했다. 그러므로 문제는 영혼의 불멸성과 부활 사이의 선택이 아니라, 모든 것의 멸절로서의 죽음과 사후의 생명 사이의 선택이었다(D.A. Carson).영혼의 불멸이 육체의 부활을 암시한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예수께서는 오경의 기록자인 모세의 권위에 호소하여 자기들의 논리를 합리화시키려 하는 사두개인들에게 오경에 있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말씀을 통하여 부활의 교리를 확증하신 것이다.

=====22:33
무리가 놀라더라 - 누가는 바리새파로 거의 확실시 되는 어떤 서기관들이 '선생이여 말쏨이 옳으니이다'라고 대답했다고 기록하고 있다(눅 20:39). 그들은 자기들의 정치적, 사상적 반대파인 사두개파를 예수께서 완전히 격파하신 것을 기뻐한 것이다. 대부분의 백성들도 유대교 안에서 날카로운 대립을 일으켰던 신학적 난제를 단지 성경만으로 해결하신 예수의 신적 지식에 대하여 놀라움을 금할수가 없었다.

=====22:34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 바리새인들은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는 말을 들었고, 소수는 그 자리에서 직접 보았을 것이다. 사두개인들은 벙어리가 되어 다 물러갔다. 그들로서는 예수께서 사두개인들에게 패(敗)하지 않은 것이 일단은 안심이었다. 헤롯당원들과 사두개인들이 예수께 물었던 것은 유대의 정통성에 벗어나 있는 자신들의 입장을 합리화시켰던 이론들로서 예수께서 이 논쟁에서 패했다면 그 반대 편에서 모든 면에서 정통성이 있다고 믿었던 바리새파도 잘못하면 함께 넘어지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자기들이 예수를 넘어뜨리면 정통성은 더욱 확실해지고, 예수를 신임하나 율법을 모르는 무식한 백성들로부터(요 7:49) 예수를 분리시켜 처리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여기 '모였다'(* , 쉰에크데산)에 `에피 토 아우토'(* )가 번역되지 않았는데, 이것은 행 2:1처럼 '같은 장소'를 의미한 것이다. 이 문구는 사 2:2의 인용이며(26:3에 반복사용), 원수들이 그리스도를 잡아 죽이기 위해 함께 모이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Tasker). 바리새인들은 마치 총회로 모이는 것처럼 무리를 지어 모였다. 그러나 그들의 대책은 이미 바닥나 있었다. 첫번째 질문이 바로 그들이 짜내고 짜낸 유일한 묘책(妙策)이었다. 그래도 그들은 포기하지 않고 다시 모여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려는 것을 보면 그들의 적의가 얼마나 뿌리 깊은가를 알 수 있다.

=====22:35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 마가는 '한 서기관'(* , 그람마튜스)으로 기록했다. '율법사(* , 노미코스)는 '교법사'(* , 노모디다스칼로스)로도 불리우는데, 율법의 해설자이고 가르치는 박사들로서 넓게는 서기관에 속한다. 그들은 율법에 정통한 신학자들이며 법률 전문가들이었다. 이미 그 당시에는 성경 뿐만 아니라 성경 해석과 유전들이 방대했고, 실제 생활의 민사(民事)적인 일들에 적용하는 데는 전문적인 교육과 훈련이 필요했다. 그런데 막 12:28-34에는 그 서기관이 질문을 하는 것을 책잡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두개인들을 논박하여 물리치신 것을 기뻐하며 나왔으므로 대단히 우호적인 분위기이다. 그러나 이점 때문에 마태의 기록과 상충되지는 않는다. 마태는 바리새파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의도를 표현하고 있고, 마가는 그들 중에서도 내심 예수께 호의적인 소수가 예수의 사두개파를 이기신 것을 기뻐하고 더욱더 자기들과 일치하는 점을 드러내기 위해 물었던 상황을 기록한 것이다. 또한 눅 10:25-37에는 율법사가 영생에 대한 질문을 하고 그의 입으로 두 큰 계명을 말한다. 그리고 유명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로 연결된다. 이것은 같은 내용이 다른 상황에서 다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누가는 이것을 생략할 수 있다.

=====22:36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 마가복음에는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이다(막 12:28). 이는 동일한 의미이다. 한편 본문의 '크다'(* , 메갈레)는 말이 정도나 계급에 대하여 사용될 때 최상급으로 '제일 중요한'이라는 의미가 된다(Arndt Gingrich). 유대인들이 계명들을 크고 작은, 곧 중요하거나 사소한 법들로 구별했던 것은 철두철미한 율법 준수의 정신에서 그리하였다. 대표적인 것은 탈무드에 나오는 랍비 아키바의 이야기이다. 한쪽 다리로 서 있을 동안에 율법 전체를 설명하라는 이방인의 도전에 부정적 황금률-너에게 싫은 것은 남에게도 하지 말라-이 '율법의 전체'이며 그 나머지는 주석에 불과하다고 답했다. 또 한편 랍비들은 율법을 세밀하게 나누어서 율법 중에 613(십계명 글자의 수) 계명이 있다고 보고 그중에 248(사람 몸의 지체 수)조는 적극적, 365(일년의 날 수)조는 소극적인 금지 계명으로 분류하였다. 그 중에는 중요하여 우선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 정해져 있었다(15:4-6의 예). 이러한 변론의 정당한 근거로 그들은 다윗(시 15:2-5, 11계명), 이사야(사 33:15, 6계명), 아모스(암 5:4, 2계명), 미가(미 6:7, 3계명), 하박국(합 2:4, 하나의 계명) 등의 율법 요약 선례를 들었다. 어떻게 하면 율법을 더 온전히 지킬 수 있겠는가하는 율법에 대한 열심이 이런 방식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이것은 학문적이고 실제적인 중요한 문제였다. 더욱이 사두개인들은 모세 오경만을 인정했기 때문에 성경에는 명백하게 기록되지 않은 유전은 인정하지 아니함으로 바리새인들과 자주 충돌했었던 것이다. 눅 20:39, 40의 증거를 보면 이미 예수의 답변은 존경받는 율법사들에 의해 유대인 중에서 우세한 견해였던 것을 보게 된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율법을 연구함으로 영생을 얻는다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대로 행치 아니하였고(23:2-4), 구약의 목표요 정점인 그리스도를 알고 영접하는 데 실패하였다.

=====22:37
마음을 다하고 사랑하라 - 신 6:5의 인용이다. 이것은 가정이나 성전에서 매일의 예배에 사용한 신앙 고백문인 '쉐마'(* )의 한 부분으로 매일 두 번씩 소리 높여 암송함으로 유대인에게는 가장 익숙한 것이었다. 특히 이것은 십계명의 전반부, 하나님께 대한 계명의 포괄적인 요약이다. 유대인 아이들은 이 구절을 외우는 것으로 교육이 시작된다. 바리새인들은 신 6:8, 9에 따라 '쉐마'를 문의 오른편 기둥에 기록하고 또 이것을 기록한 작은 양피지를 상자에 넣어 끈으로 이마와 왼팔에 잡아 매었다( 경문 , 23:5). 마음(* . 카르디아)은 외식이 아닌 진정한 의지를 강조한 말이다. 목숨(* ,푸쉬케)은 육체적 생명을 뜻하며, 이는 적당히 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걸고 하는 것을 강조하는 말이다. 뜻(* , 디아노이아)은 지적 능력을 뜻하는 말로서, 맹목적인 것이 아니라 분명한 이해와 통찰력을 가졌음을 강조한 것이다. 다하여(* , 엔 홀레)는 '전부 안에서, 전체로써'라는 말이다. 신 6:5의 원문은 '뜻' 대신에 '힘'이고, 마가와 누가에는 '힘'이 첨가되어 있다. 그런데 인간론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들은 서로 분리되는 개념이 아니라 중복되는 개념들로서 강조하는 것이지 의미상의 별 차이는 없다. 결국 전 인격을 기울여, '존재의 전 기능을 다하여'(Tasker), 전 생에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뜻이다.
사랑하라 - 원어 (* , 아가페세이스)는 미래 시상인데, 이것은 명령어의 대용어로서 법조문에 쓰이는 방식이다(Lenski). 이것은 단순한 애정이나 사랑을 나타내는 '필레오'(* )과는 엄격하게 다르다. 자기 이해를 초월한 순수하고 무목적 ,무조건적인 사랑이다. 이런 사랑은 우리 자신에게는 없는 것이다. 이 사랑을 하려고 하면 우리에게 정말 하나님의 근원적인 사랑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을 알 수 있다(요일 4:10).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과 율법이 서로 상반되는 것이 아님을 볼 수 있다. 이 사랑의 온전한 모습은 예수에게서만 발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예수의 사랑을 풍족하게 누리고, 그 사랑의 능력으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할 수 있고, 이웃에 대하여도 고전 13장의 수준으로 나아갈 수 있다(요 13:43).

=====22:38
크고 첫째 되는 - 원문상 (* , 헤 메갈레 카이 프로테)'가장 큰'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카이'는 설명적 용법으로서 가장 크기 때문에 첫째라는 말이다. 막 12:31에는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다'는 말로 표현된다.

=====22:39
둘째는 그와 같으니 - 분명히 이웃사랑은 두번째이다. 하나님은 항상 처음이다. 그러나 그것이 둘째를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포괄한다. 하나님은 모든 것의 원인이요, 기초이기 때문이다. '그와 같다'(* , 호모이아 아우테)는 문자적으로 '그녀와 동일하다'인데, 이 3인칭 여성 대명사는 '크고 첫째 되는 계명'(* , 헤 엔톨레; 여성 명사 단수)을 가리킨다. 즉 둘째도 첫째 계명과 같이 큰 계명이라는 뜻이다. 이처럼 예수는 첫째 계명과 둘째 계명을 같은 것으로 보신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같은 하나의 계명으로 보신다. 이것이 바리새인들의 견해와 다른 것이다. 그들은 사람의 유전으로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다하면 어떤 경우에는 이웃에 대한 의무, 부모를 돌보는 것까지를 하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생각했다(15:1-9). 더욱이 그들은 원수는 미워했으며, 조건적인 사랑을 추구했고, 죄인들을 미워했다(5:43-47). 그러나 예수께서 완전케 하신 율법은 사람의 유전을 배제하고 두 개명을 사랑이라는 말로 연결하여 하나로 만드신 것이다. 요한은 그것을 요일 4:20, 21에서 설명하고 있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 - 이것은 레 19:18의 인용으로서, 본서에서는 이미 5:43;19:19에서 언급되었다. 이것은 십계명의 후반부, 사람에 대한 계명의 포괄적 요약이다. 하나님 사랑은 반드시 이웃 사랑으로 결실된다. 이 두 계명의 결합은 '12족장의 언약'에도 나타나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이 그 문헌이 기독교 이전에 쓰여졌다는 것을 부인한다. 그렇다해도 누가복음의 평행구가 보여주듯이 이 두계명을 함께 묶어서 말하는 것이 예수에게서 처음 시작된 것은 아니다. 이것은 서기관들의 형식적인 일치라고 볼 수 있다. 그들의 행위는 잘못되고,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알지 못하는 것이 많았고 그리고 그들이 알지 못하여 주를 죽였어도, 그들이 모세의 자리에서 율법을 지키는 데는 열심인 것은 사실이었다. 한편 이 이웃의 개념이 레 19:18에는 이스라엘 사람과 그 땅에서 함께 사는 외국인을 포함했으나 예수로 말미암아 원수(5:44)를 비롯한 도움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눅 10:29-37)에게까지 확대된다. 사실 누가복음의 그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사마리아인이 이웃을 사랑하는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것은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이웃 개념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것이다. 이렇게 예수의 이웃 사랑 개념은 온 세상의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구속의 사랑에서 비롯되는 것이다(요 11:52). 그러므로 이웃 사랑의 계명은 언약공동체의 존재 방식으로서 온전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형상과 능력의 반영인 것이다(5:48).
네 몸과 같이 - 원문은 '호스 세아우톤'(* )으로서 문자적으로는 '네 자신처럼'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이 시인되면서 이웃 사랑의 표준으로 제시된 것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이것은 문자적인 억지 해석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자신을 무의식적으로, 본능적으로 돌본다. 그리고 자기자신에 대한 돌봄은 무조건적이어서 그에 대한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는다. 또한 사람은 자신의 잘못을 쉽게 용납하고 잊어버리고, 자신의 허물에 대해서는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관대하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이미 지나칠 정도로 사랑하고 있다. 이 사랑이 너무 과해서 우리는 이기적이고 타락하고 부패한다. 그러나 우리 이웃에 대해서 우리는 얼마나 무관심하고 냉정하고 계산적인가? 예수는 먼저 내 자신을 사랑하고 이웃도 그 만큼 사랑하라는 순서나 정도가 아니라 이웃과의 형제적인 연합을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이웃에 대하여 그가 마치 '내 자신'인 것처럼 사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새계명이다.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요 13:34).

=====22: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 이 말씀은 그 뜻을 바로 알기가 무척 힘들다. 문자적으로는 이 두 계명에 그 모든 율법과 그 선지자들이 매달려 있다는 '강령'(* , 크레마타이)라는 말이다. 먼저 이 '두 계명'은 서로 분리되거나 대등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원인과 결과처럼, 뿌리와 열매처럼 연결되어 있다(사 1:17;58:6, 7). 그리고 그 모든 율법과 그 선지자들은 구약성경전체를 강조하여 말한 것이다. 또 구약성경의 요체는 율법이라 할 수 있다. 율법에 하나님을 전적으로 사랑하라는 것이 법조문으로는 나오지 않지만 그 계명들의 근본 정신이 바로 여호와하나님 사랑이다. 모든 법은 항상 그 법을 만드는 근본 정신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근본 정신이 무시되면 법조문은 껍데기에 불과하다. 전구약의 계시와 역사의 목표와 의의는 하나님나라에 있다. 법은 그 나라의 성격과 형태를 결정한다. 하나님께서는 그 나라를 위한 이스라엘과의 언약 관계에서 하나님을 '마음으로부터 사랑하는' 것을 근본적으로 요구하신다(신 10:12). 마음으로부터의 하나님 사랑은 다른 모든 종교적 의식들의 기둥이다(삼상 15:22;호 6:6;암 5:21-24;미 6:6-8).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공동체적 질서로서 연합과 사랑을 요구하신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사랑의 질서위에 세워진다. 그리고 이 사랑은 십계명의 전문에 나타난 바 이미 충분히 베풀어진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합당한 반응이어야 한다. 이것이 없으면 하나님과 공동체 사이에, 또 공동체 내부에서 나라가 설 수 없으니 성경과 민족과 역사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는 말이 바로 이런 의미이다. 물론 사랑하는 것이 유일한 계명이어서 다른계명들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최고의 법인 사랑의 법을 지킨다는 것은 다른 구체적인 법조문을 지키는 것으로 나타난다. 말하자면 자동적으로 다른 계명들이 준수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두 사랑의 계명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사실상 모든 율법 준수가 헛된 것이다. 율법에 열심인 바리새인들의 율법준수가 오히려 비판을 받는 것은 단지 구원을 받기 위한 조건으로서 율법을 지켰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자기 희생과 관용이 없고 보이기 위한 행위만 무성하며 스스로 의롭게 여긴 것이다. 예수의 이 사랑의 계명은 모든 율법 준수의 동기와 그 자세를 규정하고 있으며, 적극적인 현신과 자기희생과 관용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것은 산상보훈(5:17
질문(22:41)을 통해서 가르치시는 것이다.

=====22:41
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에 물으시되 - '모였을 때'(* , 쉰에그메논)라는 완료분사는 '그들이 여전히 예수 주위에 모여 있을 때'라고 번역할 수 있다(Knox). 공관복음의 평행구들(막 12:35-37;눅 20:41-44)은 본문을 예수의 바리새인들에 대한 질문과 그들의 답변으로 구성하지 않고 서기관들의 가르침을 이끌어 내거나, 혹은 서기관들에게 일방적으로 묻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그 내용은 아무런 차이가 없다. 서기관들의 대부분이 바리새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말씀은 단지 바리새인들에게만 가르치기 위함이 아니라 그들과 문답을 통해 모여든 유월절 축제의 순례자와 모든 백성들을 가르치시려는 의도로 시작되었음을 평행구들의 전체적인 상황에서 우리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서로 다른 형태로 기록된 것은 그들의 기록 목적에 따른 편집자의 권한이다.

=====22:42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 이 질문은 유대 지도층과의 공식적인 논쟁의 출발이 된 그들의 질문-'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또 누가 이 권세를 주었느뇨'(21:23)-에 대한 예수의 역습(counterblow)이다. 예수는 당신 자신이 '그리스도'라고 주장하시는 대신 '그리스도'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무지와 편견을 드러내서 그들의 판단의 한계를 깨우치시는 것이다.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 이 견해는 가장 보편적으로 수납되었던 것이고 선지자와 시편에 근거하는 것이었다(삼하 7:13,14;사 11:1, 10;렘 23:5). 장차 오실 메시야가 다윗의 자손이라는 사실은 예수 자신도 예루살렘 입성시에 기쁘게 받아들인 적이 있다(21:15,16). 마태는 거듭해서 그리스도이신 예수가 다윗의 자손이라는 사실을 호칭(9:27;15:22;20:30;21:9,15)과 족보(1:1-16) 뿐 아니라 유대인의 왕(2:2;21:5;27:11,29,37,42)이라는 표현으로써 강조하고 있다. 예수께서 이것을 부인하하려는 것은 아니다. 단지 메시야 개념이 세속화되어서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의미에서의 '유대인의 왕'이라는 개념으로만 한정되었기 때문에 여기에 대한 철저하고도 근본적인 변혁이 있어야 했다고 생각하셨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당신이 그리스도이심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셨던 것이다(16:20).

=====22:43
다윗이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 예수는 시 110편(LXX역에는 109편)을 인용하여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주가 되는 사실을 밝히신다. 먼저 예수와 바리새인들 그리고 대부분의 유대인들 사이에 시 110편이 메시야 예언이라는 점과 그것이 다윗에 의해 기록되었으며, 또한 다윗은 '성령의 감동으로'(* , 엔 프뉴마티) 시편을 지었다는 사실에는 이론(異論)이 없이 일치하는 것을 본다. 여기서 예수는 다윗의 자손인 그리스도가 그 조상인 다윗 자신에 의해서 이미 성령이 깨닫게 하심으로,'주'(* )로 불리워졌음을 지적하심으로 메시야의 초월성을 조상인 다윗의 입의 증거로 입증하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유대의 지도층으로부터 책잡힌 유일한 항목은 당신의 신성의 주장이었기 때문이다(요 5:17, 18;8:56-59;10:24-38). 즉 예수의 신성 주장은 메시야의 초월성 예언을 응하게 하는 것이었는데, 그들은 메시야 신성에 대한 이해가 없었던 것이다. 물론 그들도 예수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에 그 모든 가르침과 기적이 가능했다고 인정한다(요 3:2). 그러나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요 10:33). 유일신 야웨 하나님을 섬기면서 이방 문화와 정치 질서 속에서 사는 그들에게 있어서 우상숭배와 신격화는 그들이 가장 민감하게 느끼고 반응하는 문제였고 결코 허용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예수의 초월성 주장을 신속하고 정확하게 이해했으며 그 이유로 죽이려고까지 했다. 그들은 인간적인 용사, 다윗의 전투적인 용맹을 물려받은 한 자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메시야'를 기다리되 하나님의 아들 혹은 하나님 자신이 아닌 '하나님의 종'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메시야가 굉장한 능력과 권세로 일하여 그의 존재와 나라가 영원하리라는 기대까지는(요 12:34) 있었지만, 영원한 선재(요 8:58), 하나님을 친아버지로 부르고, 아버지와 '하나'라는 주장(요 8:54;10:30)까지 소화할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 점을 가르치시는 것이다. "다윗의 수많은 자손들 가운데서 누가 그리스도이냐?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만으로 어찌 그리스도가 되겠느냐? 다윗의 자손이면서 그의 주이신 자가 바로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는 바로 다윗의 주이시다. 그리고 너희들이 나를 참람죄로 죽이려 하지만, 너희들이 기다리는 그리스도도 다윗의 주이니 그도 참람하다하여 죽이겠구나"라는 말씀이다.

=====22:44
주께서 내 주께 - 윈문은 '야웨(* )께서 내 주(* ,아도나이)께'로 되어 있다. 70인역(LXX)이 모두 '야웨'(* )를 '주'(* , 퀴리오스)로 번역한고로 우리말로는 이상하게 들리는 것이 사실이다. 물론 신구약에는 종이 주인에게, 백성이나 신하가 높은 지위에 있는 자에게, 아내가 남편에게 '주'(* , 아돈)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왕이 된 다윗이 '나의 주'라고 불러야 할 분은 하나님밖에 없다. 그는 이스라엘의 가장 강력한 왕이었고 그보다 더 큰 영광을 누린 사람은 없다. 그러므로 다윗은 성령의 깨닫게 하심으로 이미 자기의 후손인 메시야가 한낱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으로서 오시는,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임을 분명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삼위일체의 신관(神觀)이 이미 메시야 예언에서 형성된다. 이것은 결코 철학적 사고의 반영이 아님을 볼 수 있다.
이르시되 - 원문(* , 느옴)은 귀에 대고 속삭이는 비밀한 통첩(通牒)을 의미하여 하나님께만 쓰인다(Lenski).
내가 네 원수를 앉았으라 - 그리스도의 '원수'(* , 에크드로이)는 마귀와 그 세력들이다. 처음부터 거짓말하고 살인한 마귀와 그의 부하들이며, 그의 뜻을 따르는 사람들이다. 예수는 당신을 믿지 않고 죽이려 하는 유대인들에게 마귀의 자식들이라고 하셨으며(요 8:44), 가룟유다를 마귀라고 하셨다(요 6:70). 마귀는 하나님의 거룩하고 의로운 통치를 비방하며, 백성들로 그 통치를 받지 않도륵 하여 하나님을 대항하고 그 일을 훼방한다. 그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는 원수가 승리하는 것 같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부활시키심으로 죄와 죽음의 악의 세력에 대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셨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승천하시면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시고 하나니 우편에 앉으셨다. 고대의 왕들은 정복당한 왕들의 목을 발로 밟음으로, 그들의 승리의 기개를 드높였다(수 10:24). '발 아래 둔다'는 말은 바로 이런 의미이다. 즉 완전한 폐배와 굴복인 것이다. 이는 모든 악의 세력을 근절(eradication)하기 위한 마지막 심판의 때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우편에 앉는다는 말은 장소적인 개념보다는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과 위엄에 동참하여 통치권을 행사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이 모든 일들이 야웨의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행위로 소개된다. 과연 그리스도는 어린양처럼 원수들의 죽음의 함정으로 무기력하게 끌려가셨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권세로 원수를 결박하고 심판하시는 것이다.

=====22:45
다윗이 자손이 되겠느냐 -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그의 살던 촌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는 성경의 예언(사 9:6,7;미 5:2)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갈릴리 출신의 목수 요셉의 아들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정할 수 없었다(요 8:41,42). 반면에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의 초월성에 관한 예언(단 7:13;말 3:1)을 들어 갈릴리 출신 인간 예수를 인정하지 않았다(요 7:27). 그렇기 때문에 예수는 당신이 그리스도이신 증거를 권세있는 가르침과 표적과 기사로 이미 충분하게 나타내셨다(요 7:31;10:24-38). 그러나 그들은 항상 자기들의 전통과 왜곡된 성경 지식으로 그리스도를 심사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자기들과 상관없이 오시고, 또 자기들을 인정하지 않으실 리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지도층은 늘 예수를 시험한다(12:38;막 8:11;눅 11:16). 그러나 예수는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보이라는 그들의 요청에는 한 번도 응하지 않으신다. 그리스도를 다윅이 주로 알았다면 누구도 주이신 그리스도를 심사할 수 없는 것이다. 실로 주께서는 사람의 증거를 받으실 수가 없다. 그래서 예수는 스스로 증거하시고 아버지의 증거로서 행하셨다(요 8:18). 그리고 오히려 주께서 그 백성들을 심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첫 선포가 '회개하라'였다는 사실이 바로 이를 반영한다. 또한 세례요한이 그리스도에 앞서 와서 회개를 선포하고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에게 스스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경고한 것이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3:7-12). 그러나 유대의 지도층은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무도 회개하지 않았고, 세례 요한에 대해서도 아무런 입장을 표명(表明)하지 못하였다. 그들늠 세례 요한이 자기들의 전통적 질서와 배치되었으나 백성들로부터는 선지자로 여겨지고 있었기 때문에 잡지 못했을 따름이다. 예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예수를 '주'로 부르지 않았다. 그들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이요, 서기관들이었다. 그들, 권위자들이 '주'라고 부를 수 있는 분은 하나님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대의 지도층은 예수를 칭할 때 보통 2인칭 호격으로서의 '당신'이라고 했으며, 호의를 가지고 경의를 표할 때 조차 반드시 `선생님'(* , 랍비)이라는 칭호만 사용했다(19:16;요 3:2). 이 공식적인 논쟁의 시작에서 그들은 예수께 '네가'라고 했다(21:23).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최고 회의
22:16)라는 표현으로 자신의 신비를 온전히 계시하셨다.

=====22:46
한 말도 능히 묻는 자도 없더라 - 바리새인들은 다윗의 자손인 그리스도가 동시에 다윗의 주로서 하나님이시라는 영감된 말씀을 감히 부인할 수 없었다. 그것은 자기들이 문제로 삼을 수도 없었던 사실이었다. 결국 그들은 누가 그리스도인지 심사할 자격이 없음이 드러났다. 그러나 끝까지 바리새인들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이신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지식의 열쇠를 가진 책임자들로서 자신들과 이스라엘 전체를 기만(期瞞)하는 죄악을 범하는 것이다(눅 11:52).마태는 이 해설로 논쟁 기사 전체(21:23-22:45)를 종결짓는다. 마가와 누가는 이미 세 질문에 대한 예수의 대답으로 그들이 더 이상 아무것도 물을 수 없었음을 밝힌다(막 12:34;눅 20:40). 예수는 그들의 질문에 다 대답하셨으나 그들은 예수의 질문에 한 번도 바르게 대답한 적이 없었다. 여기에서 유대 지도층과의 합법적이고 공식적인 대화는 끝난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이 알지 못하는 것을 고려하지 않고, 자기들이 아는 잘못된 지식으로 자기들의 주를 죽이려는 일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제 불법으로 예수를 체포하고 거짓으로 고소하는 일밖에 할 수 없게 되었다. 이 날은 수난주간의 화요일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대부분의 백성들이 즐겁게 들은(막 12:37) 예수의 이말씀이 나중에, 즉 예수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후에 다윗과 마찬가지로 성령의 감동을 받은 베드로에 의해서 오순절 설교(행 2:34-36)에서 다시 언급되면서 유대 백성들의 마음을 찌른다. 그리고 그 답변은 당시 예루살렘에 있었으리라고 생각되는 한 바리새인에 의해서-그도 성령의 감동을 받아-이루어진다.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시라"(롬 1:3, 4).




전장(前章)에서 우리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의 공공연한 책망, 대적들의 시험 및 예수의 비유 등을 살펴 보았다. 이제 전장에 이어 본장 서두에 등장하

비유는 내용면에서 점층적으로 심화된 것이며, 대적들의 핍박의 움직임 또한 더욱
간교해졌음을 보여준다. 본장에 수록된 내용의 구체적 의미를 상고하기 이전에,
다음 세 가지 사하을 유의해 보기로 하자.
(1) 문맥상의 유의점. 먼저 우리는 전후 문맥상, 대적들의 질문이 더욱
교묘해지고, 이와 더불어 예수의 대답 또한 더욱 적극적 차원에서 대적들의
간계를 파함과 아울러 진리의 실상을 객관적으로 드러내는 일에 보다 치중하고 있음을 유의해야 하겠다. 본장의 대적들은 산헤드린 공회원들의 간교한 질문 속에
내포된 옥가미를(21:23) 쉽게 벗어 나시는 주님의 놀라운 지혜를 이미 목도한 바
있던 터인지라, 이제 더욱 간교한 방법을 동원하고 있다. 이들은 당시
교리적으로는 정치적으로 미묘한 딜레마(dilemma)를 내포하고 있었던 문제들을 골라 질문하였다(17절;23-28절;36절). 뿐만 아니라 그들은 예수의 경계심을
늦추기 위해 아첨의 말로써 질문을 시작하였다(16절;24절). 이는 노골적인 적의를
드러내며 예수께 접근했던 21:23에서의 경우와는 대조적이다. 반면 저들의 간교한
의중을 꿰뚫어보셨던 예수는 수비적 자세에서 질문에 답하신 것이 아니라 진리 선포자로서의 자세, 나아가 대적들의 사악한 의도를 공박하는 자세로 일관하셨
다.
이러한 사실은 대적들과의 질의 응답 과정(15-40절)에서 뿐만 아니라 '다윗의
주'로서의 자신을 계시하는 부분(41-46절)에서도 명백히 드러나며, 특히 23장에
가서 더욱 확연해진다.
(2) 대적들의 연합. 예수를 올가미에 씌우기 위한 질문자로서 본장에 등장하는
바리새인들과 헤롯 당원들(16절) 및 사두개인들(23절)은 교리적인 면에서나 혹은
현실의 정치적 상황을 보는 시가면 등에서 현격한 견해 차이를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모함하는 일 만큼은 아무런 이의없이 함께
도모하였다. 그들의 눈에는, 예수께서 그들의 기득권(旣得權)을 위협하는 공동의
적으로 보였음에 분명하다. 그들에게 공통적인 점이 있었으니, 곧 진리를
거역하며 피흘리기를 좋아하고 정직한 자의 생명을 찾는 것이다9잠 29:10).
(3) 내용 구성. 본장의 매용은 크게 세부분으로 구분된다. 먼저 1-14절은
전장의 젓째(21:27-31)와 둘째(21:33-40) 이유에 이어지는 세번째 비유이며,
15-40절은 대적들의 여러 질문들에 대해 예수께서 답하시는 내용이다. 그리고
41-46절은 예수의 역질문 및 자기 계시 부분이다. 이중에서 15-40절은 다시 세 단락으로 나뉘는데, 첫째 부분(15-22절)은 바리새인들과 헤롯 당원들이 공모하여
던진 정치적 질문이며, 둘째 부분(23-33절)은 사두개인들이 부활 문제를 놓고
시도한 신학적 질문이었다. 그리고 셋째 부분(34-40절)은 가장 큰 계명을 묻는 종교적 질문이다.

1. 혼인 잔치 비유(22:1-14)
이 비유 역시 앞장에 나오는 두개의 비유와 연속되는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몇가지 점에서 세부적 차이를 보인다. 첫째로 앞의 두 비유가 인간의 패역한
행위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반면 본문은 구원을 값없이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한다. 둘째로 앞의 비유들에서는 책망의 대상이 유대의 종교
지도자였던 반면 여기서는 그 대상의 범위가 전체 유대인에게로 확대되었다.
세째로 앞의 두 비유는 마침내 메시야이신 예수를 살해하기 까지에 이르는
이스라엘의 패역(悖逆)한 역사를 돌아보고 회고의 성격이 짙은 반면, 본 비유는
하나님의 종말론적 심판까지 시사하는 예언적 성격을 띠고 있다.
한편 누가복음 14;16-24에도 유사한 비유가 수록되었지만, 본문의 비유가 더
상세사며 심층적이라 하겠다. 이제 우리는 본 비유의 배경을 먼저 살펴본 후
구체적 내용을 고찰해 보기로 하자.
(1) 비유의 배경. 당시 유대인들에게 왕의 혼인 잔치와 예복에 관한 이야기가 두루 알려져 있었다고 한다. 아마도 예수는 그처럼 익히 알려져 있었던
이야기에 적절히 살을 붙여 당신의 의도하셨던 교훈을 효과적으로 전달하시고자
했던 것 같다. 그 이야기란 이러하다. 어느 왕이 잔치를 배설(排設)하기로 하고
구체적 시일을 정하지 않은 채 여러 손님들을 청했다. 유대에서는 손님을 큰
연회에 초대할 때 서신이나 사람을 보내 일차 미리 알린 후 잔치 당일에 다시
종을 보내어 영접해 오게 하는 퐁습이 있었다. 따사러 초대받은 손님들은 잔치 준비의 상황을 보아가며 미리 준비하고 있어야 했다. 어떤 자들은 때에 맞추어 기름을 바르고 정장을 갖춘 후 궁문 앞에서 기다렸다. 하지만 미련한 자들은
각자의 일에 정신을 빼앗긴 나머지 막상 잔치의 시작을 알리는 기별을 받고서는
제 시간에 당도할 수 없어 밖에서 구경만 했다는 것이다.
(2) 잔치의 성격. 혼인 잔치는 한마디로 기븜의 축제라 할 수 있다. 이
잔치에는 손님들을 즐겁게 해줄 온갖 살진 짐승과 포도주 그리고 노래 마당이
마련되어 있었다. 여기서 혼인 잔치 석상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도래하게
되는 하나님의 나라를 상징한다. 하나님은 평강과 희락으로 특징지워질 수 있는
당신의 나라에 온갖 즐거움을 일부러 버리고 금욕적 수도에 들어가거나
음울(陰鬱)한 문제에만 몰두하는 종교로 생각하는 것은 오해다. 그리스도교는
빛과 희망과 기쁨 가운데로 인도하는 생명력있는 종교인 것이다.

* 이방인에게 개방된 혼인 잔치. 혼인 잔치 비유에 등장하는 '청함받은 자'는 유대인들을 상징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 가운데 선민으로
택함받아 율법을 받는 등 여러 종교적 특권을 누릴 수 있었다(롬 3:2). 따라서 다른 어느 민족보다도 하나님의 나라에 가까워야 마따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스스로 진리를 곡해하거나 인간적인 편의와 세속적 탐욕에 걸맞게 율법을
해석하여 그 진의를 망각함으로써 한층 더 진리로부터 멀어지게 되고 말았다.
이로 인해 은혜로운 천국의 복음은 이제 온 세게의 이방인들에게로 향하게
되었다(롬 9:30-33). 본 비유에서 임금은 종들에게 사거리 길에 가서 만나는
사람마다 초청해 들이도록 명하였다(9절). 이는 복음이 모든 사람에게 개방되어
있음을 뜻한다. 유대인이나 이방인, 가난한 자나 부유한 자, 남녀 노소를
막론하고 그 누구나 천국 잔치에 초대되었다. 이는 인간적인 기준으로서의
선악에 상관없이 오직 은혜로 구원 받게 되는(엡 2:8) 진리를 깨우쳐 준다.
실로 하나님은 인간잉 지닌 과거의 선악에 구애됩 없이 오직 당신의 기브신
뜻에 따라 부르시고 또한 초대하신다. 다만 한가지 갖추어야 할 조건이 있으니,
그것은 예수를 구원의 주로 고백하는 신앙의 예복(11절;롬 10:9)이다.

* 초청을 거부한 자에게 내려진 심판. 혼인 잔치에 먼저 청함받은 자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개인 일과 사업을 핑계로 초청을 거부하였다(5절). 이는 육신적
쾌락이나 생계에 연연하느라고 가장 중요한 생명을 상실해버린 경우에
해당한다. 실로 불신 가운데 처한 세상 사람들의 주요 관심사는 돈이나 땅, 사업
혹은 쾌락에 있다. 그들은 채워질 수 없는 탐욕을 채우느라고 늘 분주하고
다급하다. 그들 앞에서 영혼의 구원에 관한 진지한 이야기를 끄집어내면 오히려
조롱당하기 십상이다.
한편 청함받은 자들 중에는 심지어 종들을 죽이는 자들까지 있었다(6절). 이는
선을 악으로 갚고 은혜를 원수로 갚는 극단적 악인의 모습이다. 이들은
진리에대해 무관심한 정도를 넘어 지빈리로써 그들의 이욕(利慾)을 추구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진리에 대해 적극적으로 핍박하기까지 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잔치 초정에 소극적이든, 적극적이든 거부하는 것으로만
일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초청에의 거부는 단순한 관계 단절
이상으로서, 임금(하나님)의 진노에 찬 심판을 이끌어내고야 만다.
한편 임금의 심판은 두 부류의 사람들에게 내려졌다. 먼저, 종들을 살해한
자들에게 군대를 보내 진멸토록 하였다(7절). 이들은 직접적으로는 예수를
핍박하여 죽음 가운데로 몰아갔던 유대교 지도자들을 가리키지만 더 넓게는
모든 불신 세력을 가리키기도 한다. 그 다음으로 심판의 대상으로 지목된 '에복
입지 않은 사람'(11절)은 소위 신자를 가장하나 실상은 예수와 상관이 없는
사이비 성도들을 상징한다. 따라서 본문의 심판은 이중적 성취의 성격을 갖는다.
즉, 1차적으로는 A.D.70년의 에루살렘의 멸망으로 성취되었으며, 궁극적으로는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날 최종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다(25:31-46). 진정 하나님의
초정을, 무관심으로든(5절), 반역으로든(6절), 태만으로든(12절) 그 어떤
형태로서든 거부하는 자에게는 그 책임이 필연적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롬
1:20).

2. 납세에 관한 질문(22:15-22)
앞에서 예수는 세가지 비유로써 대적들을 공박하셨다. 이제 본문에서부터는
대적들의 반공(反攻)이 다시 시작된다. 본문은 대적들의 정치적, 신학적, 종교적
질문들 중 그 첫번째 것을 싣고 있다.
(1) 질문의 의도.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아까'라는
질문은 어떻게 해서든 에수를 말의 몰무에 걸리게 하려는 간교한 술책의
일환이었다(17절). 당시 로마 정부는 곡식의 십분의 일 및 기름과 술미 오분의 일을 지세(地稅)로 거두었고, 소득의 백분의 일을 소득세(所得稅)로 거두었다. 그리고 14세에서 65세까지의 남자와 12세에서 65세까지의 여자들은 일꾼의 하구
임금에 해당하는 한 데나리온을 인두세(人頭稅)로 내었다. 여기서 논의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인두세이다 이 세금은 유대인 성인들로부터 강제로 징수되어 로마
황제에게 바쳐졌던 것으로 유대인들에게 있어선 항상 저항감을 불러 일으켰다. 특히 본문에서는 납세에 대해 상반된 견해를 가지고 있었던 바리새인들과 헤롯 당원들이 오월동주(吳越同舟)격으로 합작하는 광경을 보여준다. 바리새인들은
주로 납세에 반대하는 입장이었고 후자는 갈릴리 분봉왕 헤롯의 패거리로서
로마의 주구(走拘)나 다름 없었다. 간교하고 집요했던가를 알 수 있다. 한편
그들의 질문에 대해 '가하다'로 대답할 경우에는 유대인들로부터 이스라엘의
명예를 실추시킨 자라는 비난을 듣게 될 것이고, '불가하다'로 대답하면
가이사에 대한 반도(叛徒_로 고발당하게 될 것이다.
(2) 질문의 방법. 대적들은 예수께 대한 적의를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아첨하는 말로 질문을 시작함으로써 경계심을 늦추도록 하고자 했다. 시편
기자의 말대로 '그 입은 우유 기름보다 미끄러워도 그 마음은 전쟁이요 그 말은
기름보다 유하여도 실상을 뽑힌 칼'이었다(시 55:21). 한편 사단은 불화살이나 칼로 성도를 위협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고 나타나서(고후
11:14) 달콤한 것으로 성도를 유혹한다. 여행자의 외투를 벗기는 것은 거센
바람이 아니라 내리쬐는 햇볕이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스라엘의
대역사(大力士) 삼손이 파멸에 처하게 된 것은 블레셋 군대 때문이 아니라
블레셋 여인 들릴라의 감미롭게 위장된 사랑 때문이었다(삿 16장). 솔로몬이
타락하게 된 것은 외부의 적들 때문이 아니라 수많은 부인들의 아첨
때문이었으며(왕상 11:1-8), 히스기야왕의 과오 또한 앗수르의 강력한
군사력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바벨론 사자들의 아첨때문이었다(왕하
20:12-18). 뿐만 아니라 가룟 유다는 입맞춤으로써 예수를 팔아 넘겼다(26:49).
요컨대, 노골적인 적대와 핍박도 견디기 힘들지만 교묘한 아첨을 이기기란 더
힘들다 하겠다.

*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세금 문제를 빌미로 도전해 오는 적대자들에게
예수께서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말씀하셨다(21절). 이는 대적들의 교묘한 질문 의도를 단번에 봉쇄함과 아울러 문제의 정곡을 찌른 대답이었다. 그런데 이 간단 명쾌한 말씀을 해석하는
데에는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가 따른다. 왜냐하면 어디까지가 가이사의 것이며 어디까지가 하나님의 것인지에 관한 정확한 구분이 힘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시에는 로마에게 세금을 내는 일에 대해 유대인이 굉장한 반감을 갖고 있었고
심지어는 무장 반란이 발발하는 사태까지 빚어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황에서 예수께서는 어디까지가 가이사의 것인지 구체적으로
밝히시지도 않았고, 이스라엘의 독립을 위한 혁명적 투쟁이 정당한가에 대해
당신의 의견을 밝히 드러내지도 않으셨다. 하지만 이 말씀 속에는 분명
헤롯왕과 같은 현실 타협을 용납하지 않으며, 열심당과 같은 환상적 민족주의도
원치 않는 당신의 높으신 뜻이 담겨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세상의 국가
조직 속에 살아가야 하는 천국 시민의 기본 자세를 명쾌하게 밝히고 있다. 즉, 성도는 세상의 권력과 제도들을 일방적으로 부시해 버릴 것이 아니라 질서를
위해 정부의 권위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본질적으로 질서의
근원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롬 13;1-4;벧전 2:13-17). 하지만 세상 권력에
대한 성도의 복종은 그것이 하나님의 법에 합당할 때에라는 조건이 붙은
것이다(행 4;19). 국가 권력이 불의를 행할 때에 성도는 거기에 야합(野合)하거나

맹목적으로 굴종할 것이 아니라 적법한 절차를 거쳐 공의의 회복을 앞장서야
한다. 요컨대, 예수는 신의 도성과 세속의 도성이라고 하는 두 도시의 시민임을
전제로 하시고서 먼저 천국 시민다운 삶을 우선적으로 지향함과 아울러 세상
나라의 서우언으로서의 권리와 책임 또한 충실히 감당할 것을 가르치신 것이다.

3. 부활에 관한 질문(22:23-33)
바리새인들과 헤롯 당원들의 교묘한 정치적 질문에 이어 이번에는
사두개인들이 부활 문제를 들고 나와 예수를 궁지에 몰아 넣고자 시도하였다.
사두개인들은 주로 예루살렘 귀족이나 대제사장 무리들로 구성되었으며 모세
오경만을 정경으로 인정하고 나머지 전승 문서들의 권위는 부인하였다.
교리적인 면에서 그들은 인간의 자유 의지를 강조하였고 내세(來世)나 부활
혹은 천사나 마귀 등의 영적 존재를 믿지 않았다. 반면에 바리새인들은
사후세계(死後世界)와 영혼의 불멸을 믿었다. 사두개인들의 눈에 예수는
바리새인의 전통적인 부활 교리를 받아들이고 있는 것으로 비쳤던 것같다.
본문의 사두개인들은 많은 군중들 앞에서 에수를 궁지에 몰아넣기 위해
나름디로 치밀한 준비를 갖춘후에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들은 모세 오경만을
철저히 신뢰한 자들답게 신 25:5에 기록된 계대 결혼(levirate marriage)에 관한
규정을 먼저 전제로 제시하였다. 계대 결혼(繼代結婚)이란, 결혼한 형제가
후손을 보지 못한 채 죽었을 경우에 다른 형제가 이 죽은 형제의 아내와
결혼하여 후손을 잇게하며 의지할 데 없이 홀로 남은 과부를 보살피게 하기위한
제도를 말한다. 이 성경 구절에 근거하여 사두개은들은 부활 교리의 논리적
허구를 드러내고자 하였다. 그러나 예수의 탁월한 신적 지혜 앞에 그들은
스스로 무지를 폭로하는 결과만 초래하였을 뿐이다.

* 사두개인들의 영적 무지. 예수는 사두개인들의 부활에 관한 질문에서 두러난
그들의 영적 무지를 두가지로 지적하셨다(29절).
(1) 성경에 대한 무지였다. 그들은 모세 오경 중 한 구절을 자신만만하게 들고
나왔다. 하지만 그들은 물질만이 유일한 실체이며 그러므로 부활한 상태 또한
지상에서의 삶과 동일선상에 있을 수밖에 없다고 하는 저들의 독단적 생각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초월적인 실재에 관하여 논함에 있어 인간의 단편적
사고를 포괄적인 진리인 양 착각한 저들의 무모한 아집은 선 무당이 사람잡는
격이나 다름 없었다. 오늘날 도처에 창월(猖獗)하는 이단 세력 또한 스스로
설정한 전제의 틀에다 성경을 뜯어 맞추는 일에 능수 능란하다. 이렇듯 성경의 어느 한 구절에 무모하게 집착하여 단편적 해석을 내리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성경 전체는 일관된 통일성을 지니기 때문에 우리는 앞뒤의 문맥과 평행 구절을
참조하여 통전적(通典的) 안목으로 성경을 해석할 수 있어야 하겠다. 한편
본문으로 돌아가, 예수께서도 의도적으로 모세 오경의 한 구절을 인용하사
사두개인들의 논리적 허구를 지적하셨다(32절;출 3:6). 이 구절을 통해 예수께서
강조하고자 하신 바는, 비록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죽은지 이미
오래되었지만 그들은 죽음으로써 끝나버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있으며 마지막 날에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부활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2)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무지였다. 즉 그들은 자신들의 합리적 사고와 이성적
판단 아래 하나님의 권위와 능력을 제한함으로써, 인간을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더욱이 부활케도 하시는 하나님의 초월적인 권능을 무시했던
것이다(롬 4:17; 히 11:19). 더욱이 그들은 하나님의 부활의 능력이 오직
사자(死者)를 그 원래 죽기 전 생활로 되돌려 놓는 유치한 정도의 것으로만
상상할 수 있었을 따름이다. 진정 온 세상을 당신의 능력으로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죽어버린 인간을 새롭게 변화된 부활체로 다시 살리실 수 있다.

* 부활에 대한 구약성경의 증거. 본문에서 예수는 의도적으로 모세 오경중의
한 구절을 인용하사 오경의 해석에 있어서 만큼은 정통적이라 자부했던
사두개인들의 거짓 논리를 논박하셨다.
한편 본문에 제시된 것 외에도 구약성경에서는 부활을 증거하는 구절이 많다. 예컨대 시 16:10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예언한 구절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대하
26:23;28:27;32:33 등에서는 죽음을 '잔다'는 말로 표현함으로써 후일 부활로써
깨어나게 될 것을 암시하고 있다. 특히 시 16:10;겔 37:13;단 12:2 등은 죽은
자의
부활을 직접 묘사한 예언이다.
이처럼 구약성경의 곳곳에 부활에 관한 언급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두개인들은 인간의 합리적 사고의 범주로써만 성경을 이해하려고 했기 때문에
부활 교리는 터무니 없는 것으로 이해할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은 하나님이
만물과 온갖 생명의 창조주이시며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분이심을 믿는
믿음을 갖지 못했던 것이다(창 1장).

* 부활체의 특성. 사두개인들의 생각으로는, 설사 부활이 있다 하더라도 부활의
상태는 지상에서 생활하던 모습과 별 차이를 보이지 않아야 하는 것처럼
여겼다. 이에 예수는 부활한 모습을 천사에 비김으로써 사두개인의 이러한
억측을 물리치셨다. 하지만 사두개인은 천사의 존재를 인정치 않는다는 데에 또
하나의 중대한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한편, 부활한 예수의 나타나심을 직접 목격하였던 사도 바울은 고린도 전서
15장에서 부활의 확실성과 부활한 몸의 상태에 관해 치밀한 논리로 갈파하고
있다. 부활한 육체는 마치 천사의 몸과 같이 신령하여(고전 15:44) 다시 썩지
아니하며(고전 15:42) 영광스럽다는 것이다(고전 15:43).

4. 가장 큰 계명(22:34-40)
에수의 탁월한 신적 지혜와 권세있는 가르침 앞에 사두개인들의 입이
봉해지자, 끝으로 바리새인들이 재차 질문에 나섰다. 그런데 예수 당시
구전(口傳)이나 성문(成文)의 형태로 전해 내려온 계명들이 무려 613개나 되었고
그 중 248개는 '...하라'는 계명미여, 365개는 '...하지 말라'는 계명이었다고 한다.
그처럼 다 외우기에도 벅찬 수많은 계명들 중에서 어느 계명에 우선적으로
충실해야 할 것인지에 관한 문제를 놓고 고민했던 유대인들도 많았을 것이다.
그와 같은 상황하에서 본문의 율법사(律法師)는 예수를 시험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한편 막 12:28-34와 눅 10:25-28에도 평행 기사가 수록되어 있지만 세부적인
면에 있어서는 많은 차이점을 보인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 율법사는
예수를 시험하기위해 질문을 던졌으나, 마가복음에서는 율법사가 진지하게 묻는
태도를 보여주며 율법사에 대한 예수의 칭찬으로 끝난다. 그리고
누가복음에서는 율법사가 두 가지 큰 계명을 대답하고 있다. 특히 누가의
기사는 마태의 기사에 비해 시기적으로 앞선 것으로 봄이 무난하다. 본문에
수록된 예수의 대답은 율법의 여러 계명과 사랑과의 관계를 한마디로 요약하고 있다.

* 계명의 근본 원리이자 궁극 목표로서의 사랑. 어느 계명이 크냐고 묻는
질문에 대해 예수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두 마디로 간단히
대답하셨다.
여기서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은 신 6:5의
인용이다. 이 구절은 유대교의 근본 신조였던 소위 '쉐마'의 일부였는데,
이스라엘의 아이들이 제일 먼저 외는 문구가 바로 쉐마였다. 그리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은 레 19:18의 인용이다. 이 두 계명은 각각 하나님과
인간과의 수직적 관계와 인간 상호간의 수평적 관계를 규정하고 있으며, 기타
모든 계명들의 근간을 이루는 근본 원리로서 제시되었다. 다시 말해서 십계명을
위시한 모든 율법 조항들은 이 두 계명을 구체화시킨 것에 다름 아닌 것이다.
이와 더불어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사랑은 모든 율법의 완성이라는 점이다(롬
13:10). 바꿔 말하면 모든 계명과 율법의 지향하는 바는 사랑이다. 이 사랑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의미하는 '아가페'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형식상의
의식을 철저히 준수하거나 구체적 계명들을 하나하나 지켜나간다고 하여 율법을
다 지켰노라 장담할 수 없다. 오히려 구약의 율법은 준수의 대상이기 이전에,
인생의 전적 무능 상태를 깨닫게하여 율법의 성취자이신 예수께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夢學先生)의 역할을 하는데 더 큰의의가 있다 (갈 3:24,25).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려면, 우리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고 대속의
십자가를 지신 예수의 은혜를 깨닫지 않으면 안된다. 사(赦)함을 많이 받은 자가
더 많이 사랑할 수 있기 때문이다(눅 7:47).

5. 다윗의 주(主)이신 그리스도(22:41-46)
본문은 세차례에 걸친 대적들의 질문에 대한 결론의 성격을 띠고 있으며
그들에 대한 경고를 실은 23장에 대한 도입부의 역할을 한다.
한편 이제까지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를 시험하는 질문 공세를
퍼부었다(15-40절). 이제 여기서는 예수께서 도리어 그들에게 역질문을
가하신다. 예수는 그들이 당신을 핍박하였던 것은 결국 그들의 그리스도관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임을 아셨다. 따라서 예수는 그들에게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으셨던 것이다. 앞에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나를 누구라
하느냐'(16:15)고 물으신 바 있거니와, 여기서는 거꾸로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를 물으셨다.
이를 통해 예수는 바리새인들이 믿고 대망했던 메시야란 이스라엘을 이방
세력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시켜 줄 위대한 왕이었음을 간접 시사하고 있다. 실로
바리새인들은 인간인 그리스도를 대망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사람의 모습을 입고 오신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요
1:14). 그들은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위풍 당당(威風堂堂)한 왕의 모습을
고대했개 때문에, 외모상으로 보잘것 없이 초라한 풍채로 오신 고난받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상상할 수 없었다(사 53:2). 그러나 예수는 인류의 구원을
위해 종의 형체로 오사 십자가에 달리셨다. 그리고 그분은 부활하사 하나님
우편에 않아계시다가 마지막 날 심판주로서 재림하실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런 점에서 시 110:1에서 다윗이 '주'로 고백했던 분이 바로 예수를 가리켰던 것이다.
요컨대 바리새인들을 위시해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은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시고자 했던 하나님의 크고도 넓으신 뜻과 경륜은 알지 못한 채, 목전의
현실적 이익에 탐닉하거나 자신들의 기들권이 포함된 기존 질서를 유지하는
일에만 관심이 있었다. 바리새인들에 있어 가장 큰 문제점은 형식적 위선적
신앙 생활을 하면서도 나름대로 하나님을 잘 섬기노라고 스스로 자처하는
것이었다. 진리에 대해 무관심한 자들은 예수께 대해서도 무관심했다. 반면
바리새인들은 왜곡된 진리를 참 진리인 양 붙들었기 때문에 진리의 실체이신
예수를 적극적으로 핍박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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