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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새벽에 - 본장 초두에 제시된 '새벽에'의 원문 '프로이아스 데'(* )를 직역하면 '그리고 (이른) 아침에' 로 번역할 수 있다. 이는 산헤드린 공의회가 해가 떠오른 후에야 비로소 공식 회의를 열 수 있다는 관례에 따라 이미 지난 밤사이에비공식적으로 예수의 사형을 결의한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해가 떠오른 때'를 기다려그 결의안올 정식 회의에 상정한 것을 묘사한 문구이다(눅 22 : 66). 실로 이것은 자신들의 불법을 위장하기 위한 합법적인 노력이었다.
예수를 죽이려고 -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의 평행구에는 없는 문구로서 마태는 26:59, 즉 '데제사장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를 반복하고 있다. 아마 예수의 적대자들은 예수에 관한 소송을 어떻게 제출할 것인가를 결정하였을 것이다. 그들의 심중에 있는 주된 소송 이유는 예수로 인해 자기를의 종교, 사회적인 각종 기득권을 잃게될 위험성 때문이었지만 저들이 내세우는 형식상의 이유는 예수께서 '신성모독'의 죄를 범했다는 것이었다(26:65,66). 그러나 신성 모독은 단순한 종교적 문제로서 그 당시 각 피지배 지역 주민들의 종교, 문화에 개방적이었던 로마의 한 행정관인 빌라도로하여금 사형 판결을 이끌어 내는데 있어 충분 조건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저들은알고 있었다. 따라서 저들은 결정적인 사형죄를 성립시키기 위하여 메시야의 왕권을공소(公訴)의 주제로 삼아 예수에게 반역죄를 뒤집어 씌움으로써 빌라도로 하여금 사형 판결을 내리도록 하려 했던 것이다(행 17 : 5-4). 함께 의논하고(* ,쉼불리온 에라본). 이 말은함께 숙의적 과정을 거친다는 뜻이기 보다 어떤 '결의안을 통과시키다'라는 라틴어법적 표현과 유사하다(Consillium Ca-pere). 결국 재차 산헤드린 공의회로 모인 그들이이미 제 1차 야간회의에서 결안된 예수의 사형 선고를 합법적 절차에 따라 새롭게 인준해 준 것이었다.

===마 7:2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여기 비판이란 말도 역시 평론 혹은 정죄를 의미한다. 그런데 여기에 말한 죄 값의 보응은 누구에게서 받는다는 것일까? 이것은 틀림없이 하나님에게서 받는다는 것일까? 사람은 누구를 그 죄대로 갚아 줄 권세도 없고 능력도 없고 또한 죄의 경중을 절대적으로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지혜도 없다. 오직 하나님께서만 이 어려운 일을 능히 하실 수 있다.

=== 마 7:3
형제의 눈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티는 작은 것이고 들보는 큰 것이다. 남을 아주 정죄하는 그것은 벌써 큰 죄이다. 그 뿐 아니라 그가 남을 아주 정죄하기 좋아하는 것을 봄녀 그의 생활이면에도 여러가지 다른 죄과들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어떤 사업을 위하여 인물을 비판하여 혹은 채용 혹은 퇴직시킬 수 있다. 그러나 그를 아주 정죄하는 것은 죄이다.

=== 마 7:4
의식하는 자 - 이것은 위의 말씀과 같이,(1)자기의 큰 허물을 못보고 남의 작은 것은 볼줄 아는 자 곧, 약대는 통으로 삼키고 하루살이는 걸러 먹는 자요 (2)내부적의 것은 못보고 겉으로 보이는 것은 잘 보는 자를 가리킨다.

==== 마 7:6
윗말 1-5절에서는 악한 마음으로 사람을 판단함에 대하여 경계하셨다. 그는 이제 그 듣는자들이 그의 말씀을 오해해서 남을 대하여 분변없는 주의 곧, 맹목적 타협 주의에 흐를까 우려하셔서 여기에 적합한 교훈을 주셨은 곧, 주님의 진리와 거룩한 일의 관게에 있어서는 신중히 분변하는 태도가 필요함을 말씀하신다.
거룩한 것. - 하나님께 드렸던 제물이니, 제사 후에 제사장들의 소유가 되는 것이다. 그와 같이 여기서 이것이 영적 제물 곧, 복음을 가리킨 듯하다. 복음이 요점은 우리를 대신한 속죄 제물이신 그리스도이다. 그로 말미암아 먼저 그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신 희생제가 십자가에서 거행되었다. 그 다음엔 그의 백성이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는 행위 곧, 복음을 믿는 일에 참예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 "거룩한 것"이란 말은 그리스도의 복음 진리 혹은 그것과 관계 있는 성직이라고 생각함이 좋다.
개. - 이것은 배교자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보다도 그것은 배로써 하나님을 삼는 거짓 일군들을 가리킨다. 바울도 거짓 일군을 "개"라고 하였다.(빌3:2), 거짓 일군의 특색은 (1)먹는 것과 대접 받는 것을 탐하여 다님이요(빌3:19) (2) 개가 보화를 알지 못하고 그것을 먹는 것인 줄만 알고 물고 찢는 것과 같이 거짓 일군들은 복음이 보화인 것을 알지 못하고 그것을 이용하여, 그들의 육체나 치는 길로 삼아 복음을 전한다 하면서 실상은 그 길을 해한다. 진주.- 이것은 진리나 지혜로운 말을 비유하는데 고대의 랍비 문학에도 그렇게 사용되어 말하기를, "미련한 자에게 지혜로운 말은 돼지에게의 진주니라"고 하였다. 그러면 여기의 진주는 역시 그리스도의 복음 진리 혹은 교회의 성직을 가리킨다. 이것을 그 윗 문구의 "거룩한 것"과 딴 것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 이 두말은 동일한 내용의 것을 두 가지 방면으로 관찰하는 것이니 하나는, 그것의 거룩함, 다음 하나는 그것의 귀중성들을 가리킨다. 이것은 즈안 박사의 해석이다. 돼지.- 이것 역시 위의 개와 동일한 내용의 인물들을 비유하였을 것이다.

====마 7:7,8
여기에 다시 기도에 관한 부탁이 나온다. 여기 기도에 두 가지 요점이 있는데, (1) 간절히 기도하라는 것.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이말씀들은 기구함에 있어서 모든 노력을 다 함이다. 그런데 이 명령사들이 모두 다 현제 시간의 명령사로 되어 있으니 이거서으 다그 행동의 계속성을 표시한다. (2) 어김 없이 주님을 믿고 기도할 것.
주실 것이요... 찾을 것이요.. 열릴 이니. - 이 말씀들은, 주님의 신실성에 대하여 가르치는 동시에 우리는 그를 믿어야 할 것을 가르친다. 칼빈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기도를 반드시 들으신다는 사실에 대한 확신처럼 우리의 기도를 작흥시키고 격려시키는 것은 없다. 의심을 품고 하는 기도는 무력하고 냉정하고 태만한 죽은 의식에 불과하다"라고 하였다.

==== 마 7:9-11
이 귀절들에 있어서 예수님의 강이유 논법이 다시 보인다. 죄인인 너희도 자식의 청구를 들어주거든 선하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니 아버지야 말할 것이 무엇이랴? 사49:15; 시27:10 참조. 좋은 것.- 이것은 영적인 것들이니 곧, 셩령님의 뜻에 합당하고 또 성령님이 주시는 것들인데 그것이 물질일 수도 있고 물질 아닌 다른 것들일 수도 있다. 누가 복음에서는 간절한 기도자에게 성령을 주신다고 하였는데 이와 동일한 내용 있는 말씀이다.(눅11:13)

==== 마 7: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칼빈은 이 말씀이먼저 말씀(7-11)과는 연락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말씀이 바로 윗말씀과 어떤 관계 있는 것을 발견하지 못한 것뿐이다. 이 귀절의 우리말 번역은 너무 의역이 되어 있다. 이 말씀의 원문을 글자대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곧, "사람들이 너희에게 행해 주기를 원하는 바의 모든 것들을 그와 같이 너희가 저희에게 행하라"고 할 것인데 이것은 두 가지로 적극성을 가지는 도덕률이다. (1) 인본 주의에서는 기소불욕을 물시어인하라(내가 원치 않는것을 남에게도 행치 말아라)라고 하여 겨우 악을 다른 사람에게 하지 않을 정도이지만 여기서는 자기에게 좋은 것을 남에게도 하라고 하였으니 적극적 도덕이다. (2) 이것은 남들이 나에게 선으로 갚아줄 줄 미리 생각하고 행하라느 말아므이 아니고 남들이야 네게 그렇게 행하건 아니 행하건 나는 그들에게 그렇게 행해야 될 것자르 가르친다. 눅6:30-26의 말씀을 보면 분명히 그뜻이다. 이것은 사랑의 정신으로 선을 행함이니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다(롬13:8-10). 세간에는 고래로 이와 비슷한 말들이 많이 있어 왔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다 소극적인 것이었을 뿐 적극적인 것은 아니었다.

==== 마 7:13,14
여기서 인생의 가는 길에는 "좁은 "것과 "넓은 "것이있다고 하셨으니, 이것은 (1) 고행주의로써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인가? 그렇지 않다. 이것은, 육체의 소욕대로 방종스러이 살 수 있는 넓은 길과 하나님의 복음 진리대로 따라가는 규범있는 생활의 길을 대립시킨다. 좁은 길이라고 하여 거기에는 낙이없고 고통만 있다 함은 불가하다. 이 좁은 길에는 도리어 감추인 만나를 먹는 참된 희락이 있는 것이다. (2) 이것은 자력으로써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사상을 포함하는 것인가? 그런 것도 아니다. 여기 이 비유가 포함한 뜻은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그리스도의 복음대로 따라가는 길이 함부로 범죄하는 생활에 비해서는 제한이 있고 절제가 있다. 그러나 이 좁은 길은 하나님의 은헤로 구원얻는 길이니 그 길을 가는 도중에도 생명과 희열이있고 그 길을 다 간후에는 영생의 면류관을 받는다.

==== 마 7:15
거짓 선지자.- 이것은 거짓 선생을 의미하는 바 위에서 말한대로 사람을 좁은 길로 인도하지 않고 넓은 길로 사람을 꾀어 이끄는 자들이다. 양의 옷을 입고....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 그들이 외식으로는 겸손하며사랑도 있고 모든 이익을 그들이 교훈에서 약속하니 그것이 양의 옷과같고, 그들의 마음속에는생명이 성령님이 없고 다만 자기들을 위하는 야욕만이 가득하였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교회를 "노략질하는 이리"와 같은 것이다.

==== 마 7:16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여기 열매란 것은 그이 교훈과 그것의 영향과 및 그의 행위를 의미한다. 혹설에 이것은 행위만을 가리킨다고 하나 이 해석은 합당치 않다. 그 이유는 좋은 행위도 악사상을 선전하기 위하여 이용적으로 나타나는 때가 많기 때문이다.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가시와 엉겅퀴는 인간이 범죄한 결과로 나타났으니(창3:18), 이 둘은 죄악의 상징이다. "포도"와 "무화과"는 의와 선의 비유인 듯하다.

==== 마 7:19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 이것은 거짓 교훈과 악사상의 무리를 하나님께서 반드시 벌하신다는 말씀이다. 이 세상에는 악사상의 소유자들로서 심판 받은 일이 많다. 그러나 최후 심판이 오기 전에는 이 무리가 다시 일어난다. 이는 마치 밭에서 잡초를 제하여도 얼마 후에 다시 잡초들이 나옴과 같다.

==== 마 7:21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 이 귀절은 율법을 완저히 행해야구원을 얻는다는 교리를 가르치시는 듯하다. 이 아래 귀절들이 모두 다 그러한 논조로 흐르는 듯하다. 그러나 여기 이 귀절들은, 구원의 이법을 말함이 아니고 심판 곧 정죄의 법칙을 말하는 것이다. 정죄의 원리가 있고서 그 후에 사죄의 규례가 생긴 것이다. 이 귀절들이 말하는 심판의 원리는 , 후일에 구원의 원리를 말씀하실 준비 계단인 것이다. 이 귀절들의 말씀을 가리켜 은혜로 말미암은 구원의 도리에 대한 전제하고 하는것은 가하나 , 은혜로 받는 구원의 제도를 부인한 것이라 함은 똑바른 신학적 관찰이 아니다.

==== 마 7: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여기 "그 날"은 이 세상 끝의 심판날을 이름이다. (눅10:12). 그 때에는 하나님이 일을 한다고 하던 자들도 구원을 얻지 못하고떨어지는 일이 많다. 그러므로 약3:1에 말하기를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고 하였다.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귀신을 쫓아 내며 주이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 거짓 신자들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이 주님을 사랑하여 그리함이 아니고 다만 자기들의 육체를 위하여 그의 이름을 이용하여 그러한다.

==== 마 7:23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 그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능한 일을 하였다고 했다. 주님은 어떤 때에 악인들도 이용하신다. 그러나 그들이 주님에게 일시 이용된 일이 구원 받을 조건은 아니다. 오직 주님은 나를 사랑으로 알아 주시고 나는 주님을 아는 신앙의 관계가 구원받는 방법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하셨다.(눅10:22)

===== 마 7:24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같으리니. - 곧, 거짓 선지자들이 말을 듣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 행하는 자는 반석에 집을 세움과 같다. 에수님의 말씀은 한개의 반석과 같이 든든하나 거짓 선지자들이 말은 모래와 같이 무너지고 만다. 예수님의 말씀은 영생하신 하나님이 말씀이니 만큼 하나님께서 그것을 언제나 감시하시며 또 그것을 가지시고 능력을 행하신다.(히4:12,13). 그러나 거짓 선지자의 말은 죽은 것과 같아서 생명의 능력이 없고 바람에 불리는 모래와 같다.

==== 마 7:25-27
이 부분에서 지혜로운 건축자의 두 가지 지혜와 어리석은 건축자의 두가지 우매가 나타났다. 지헤로운 건축자는 집을 짓는데 있어서 터가 든든해야 될 것을 알았고 또한 장차 풍우가 그 집에 부딪힐 것을 알았다. 그러나 미련한 건축자는 그 두가질마 다생각지 않았다. 우리는 신앙 인격을 건축함에 있어서 하나님 말씀 밖에 기초를 둘데 없는 줄 알아야 되며 또는 장래에 우리의 신앙 인격을 시험하는 환난이 온다는 것을 예감해야 된다.

==== 마 7:29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 예수님은 율법을 가르치실 때에 남의 사상을 취급하듯이 하시지 않았다. 모세의 율법은 하나님이신 에수님 자신이 모세에게 주셨던 것이니 곧 그 자신의 사상이다. 그러므로 율법에 대한 그의 교훈의 태도가 권위 있게 나올 것은 필연적 사실이다.



이제 본장에 이르러 저 위대한 산상수훈은 그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된다. 여기서
는 먼저 전후 문맥을 밝힘과 아울러 본장의 내용 구성을 개괄하고 이어 전체적으로 살
펴보아야 할 중심 주제를 상고해 보기로 한다.
(1) 문맥상의 고려 사항. 얼핏 보기에 본장은 앞장과 별다른 연관을 뱉지 않고 다
만 여러가지 단편적 교훈들을 부가적으로 수집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실
재로 본장은 앞장과 밀접한 연관을 뱉고 있으며 또한 산상수훈 전체에서 차지하는 위
치도 막중하다. 문맥의 흐름과 관련하여 지적될 수 있는 사실은 본장 전체가 여러가지
결론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는 점이다. 먼저 1-12절은 이웃에 대한 행위 규범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이웃은 신자와 불신자를 포함한 주변 사람들을 지칭하므로, 1-12
절은 6장 전체의 내용을 요약함과 아울러 결론을 내린 부분이라 할 수 있겠다. 즉
6:1-18에서는 그리스도인의 경건 생활에 대한 지침이, 6:19-34에서는 일반 생활에 대
한 지침이 각각 수록되어 있다. 1-12절은 이러한 원칙들을 실제의 삶 속에 실천해 나
감에 있어 주의해야 할 사항, 곧 이 원칙들에 대한 독선적 편견으로 상대방을 정죄하
거나 아예 이 원칙들에 근거한 영적 판단력을 상실하고마는 두 경우를 경계하면서 결
국 '이웃 사랑'(12절)이라는 대계명으로써 좌우로 치우치지 않는 결론을 도출(導出)해
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13, 14절은 5:3-7:12 전체의 결론이라해도 무방하다. 그리
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맡은 바 사명을 감당하는 것은 곧 '좁은 문'이라는 한 마디로
요약될수 있겠기 때문이다. 이미 우리는 5장 강해에서 산상수훈 전체의 구조상
7:15-27을 산상수훈의 결론부로 분석하였다. 그러나 전술(前述)한 맥락의 견지에서는
13,14절이 산상수훈 전체 내용을 사실상 결론짓고 있다 하겠으며, 15-27절은 종말론적
심판의 필연성에 근거하여, 주께서 명령하신 원리들과 교훈들을 철저히 그리고 끝까지
실천해 나가도록 당부하는 내용이라 하겠다.
(2) 내용 구성. 본장은 내용상 1-6;7-12;13,14;15-27;28,29절 등 다섯 개의 소단락
으로 구분 가능하다. 1-12;13,14및 15-27절이 각각 나름대로 결론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앞에서 살펴보았다. 여기서는 이중에서 1-12절의 내용 구성을
분석하는데에 그치기로 한다. 먼저, 우리는 7-11절을 편의상 괄호로 묶음으로써 본문
의 일관된 문맥 흐름을 보다 쉽게 파악할 수 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즉 1-12절은
한결같이 이웃에 대해 어떤 자세와 어떤 시각으로 대해야 할 것인지를 갈파하는 내용
이며 12절은 그 자연스런 결론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간절하고 끈기있는 간구를 당부
하는 내용인 7-11절은, 이웃을 독선적 안목으로 비판하거나 비진리와 더불어 무분별하
게 혼합되지 않고 오직 사랑의 대 전제하에서 올바른 영적 분별을 견지할 수 있게끔
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요청되는 기도의 중요성에 관한 교훈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28,
29절은, 산상수훈이 끝났음을 밝히는 부분이며 본서에 등장하는 5대 강화를 매듭짓는
형식적인 결론구들 중 처음 것이다(11:1;13:53;19:1;26:1).
(3) 전반적 주제. 본장 내용의 세부 사항은 각 단락 강해에서 상세히 다루기로 하
고, 여기서는 본장 전체에 걸쳐 두드러지게 드러난 두 가지 주제에 초점을 맞추어보기
로 하자. (가) 본문에서도 6장에서와 마찬가지로 신전 의식(神前意識)이 강조되고 있
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나무라면서 자신의 눈 속에 들보가 있는 것을 알지 못
하는 이유는 자신을 하나님 앞과 진리 앞에서 객관적으로 돌아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赦)해 주신 하나님을 늘 섬기며 지내는 사람은, 진리와 비진리에 대한 판단 만큼은
예리하게 내릴지언정 형제의 허물을 일방적으로 정죄하거나 모욕하지는 않으며 도리어
가급적이면 그 허물을 덮어주고 어찌하든 그 허물에서 벗어날 수 있는 도움을 베풀고
자 한다. (나) 본장 제목에서 시사된 바와 같이 본장은 믿음 생활의 실천을 강조하고
있다. 앞장에서는 그리스도인다운 삶의 기본 원리들이 제시되었으므로 이제 남은 것은
이러한 원리를 실천에 옮기되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부단히 실천해 나가는 것이다. 이
점에 관하여 본장은 무시로 기도와 간구에 힘씀 것과(7-11절) 종말론적 긴장을 항상
유지하라는 말씀(15-27절)으로써 권면하고 있다.

1. 비판과 분별(7:1-12)
장 강해에서도 언급하였다시피, 6장에서 제시된 경건 생활 및 일반 생활에 관한 원
리는 결국 이웃과의 관계에 구체적으로 적용될 때에야 비로소 그 진가를 발휘하게 된
다. 본문은 그러한 원리를 실천에 옮김에 있어 빠지기 위운 두 가지 대조적인 함정인
정죄와 비판, 혹은 무분별을 동시에 경계하고 있다. 결국 본문은 성도 상호간이나 성
도와 비신자간의 대인 관계(對人關係)에 초점을 모으로 있다 하겠는데, 이 대인 관계
는 7-11절에서 보여주는 대신(對神) 관계를 철저할 때에만 올바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1) 균형잡힌 대인 관계. 1-5절은 독선적 아집과 편견을 버리고 형제들에게 관용하
라고하는 화합의 원리를 가르치는 반면, 6절은 사랑이라는 명목 때문에 비신앙적 무리
들과 무분별하게 혼합되지 말고 영적 분별력을 강화하여 세속적이고 비신앙적인 악한
생활로부터는 과감하게 돌아서라는 단절의 원리를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화합
과 단절의 원리들은 '황금률'로 불리우는 12절의 사랑의 원리에서 통합된다. 이처럼
성도의 생활은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고 신앙의 정도(正道)를 걷는 균형잡힌 것이어
야 하며 이는 곧 좁고 협착한 길을 걷는 생활과 깊은 연관성을 지닌다(14절).
(2) 유통성있는 대인 관계. 또한 본문은 신앙적 교제를 나누거나 복음을 증거함에
있어 유의해야 할 사항에 관한 교훈이라고도 불 수 있다. 복음에 대하여 취하는 사람
들의 태도는 실로 다양하기 때문에, 성도는 자신의 기질이나 방법을 고집할 것이 아니
라 상대방의 영적 상태난 처지에 따라 융통성있게 대처할 수 있어야 하겠다. 예컨대,
예수께서도 위선적인 자기 의(self - righteousness)를 주장하는 바리새인들을 엄중하
게 꾸짖으신 반면(23:1-36), 사회적으로 멸시와 조롱의 대상이었던 세리와 창녀들에게
는 오히려 너그럽게 은혜로운 메시지를 전파하셨다(9:10-13). 또한 사도 바울은 비시
디아 안디옥에서 전도하던 중 유대인들의 핍박을 받자 그들에게는 더 이상 복음을 전
하지 않고 이방인들에게로 향하고자 하였으나(행 13:46),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이
되어' 아무쪼록 많은 사람을 구원에로 인도하고자하는 열망에는 변함이 없었다(고전
9:22).

*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하나님의 인도와 도우심을 간구하는 구체적인 방법으
로 삼중적(threefold) 기도법이 제시되었다. 이 삼중적 간구는 동일한 목적을 지닌 것
이지만 내용상으로는 뒤로 갈수록 점점 더 강조되고 적극적 의미를 지닌다.
즉 '구하라'는 첫번째 간구는 단순히 마음속의 간절한 기원을, 그 다음 '찾으라'는
그 기원이 행동화된 실천적 간구를, 마지막으로 '두드리라'는 좀더 역동적인 간청으로
서 하나님과의 만남을 전제한 열정적인 간구를 각각 의미한다. 이러한 세 유형의 간구
는 궁극적으오 기도할 때 최고의 성(誠)과 최대한의 인내와 최선의 노력을 다해 간구
하라는 일종의 명령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실로 우리가 이 같은 간구를 할 수 있는 이유는 (1) 영원 불변하며, 순결하고, 신
실한 속성을 지니신 하나님이 그 간구의 대상이기 때문이며 (2) 무엇보다 구하는 자에
게 '얻게'하고 찾는 자에게 '찾게'하며, 두드리는 자에게 '열리게'하겠다는 하나님의
궁극적 약속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 황금률(The golden Rule). 예수께서는 천국 시민의 가장 지고(至高)한 행동규범
으로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탁월한
교훈을 제시하셨다. 물론 이 교훈은 정확히 주고받는, 즉 타산적으로 똑같은 양만큼
받을 것을 기대하며 주라는 뜻이 아니다.
(1) 이 교훈은 철두 철미 이타적(利他的)인 윤리 규범으로서 본질적으로 이기적인
우리들에게 내가 남에게 기대하는 만큼 남도 나에게 기대하고 있음을 각성시켜 준다.
실로 우리의 욕구는 이웃의 욕구가 무엇인지를 알게 하는 척도이며, 우리의 요구의 양
은 곧 남에 대한 자기 부인(self-deny)과 자기 헌신의 양인 것이다(Lange).
(2) 서로 자기 권리 주장만을 앞세우지 말고 겸손하게 먼저 사랑하는 적극적 이타
주의에의 요구로 이해할 수 있다. 예수께서는 이 적극적 이타주의의 최고의 모범으로
서 십자가 희생을 결행하셨다(빌 2:8;요일 4:10). 한편 이웃 사랑의 실천적 측면에서
이 교훈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22:39)는 대계명과 그 맥을 같이 한다.
(3) 이웃의 뼈아픈 처지에 적극 동참함으로써 불화와 분쟁과 정죄 등으로 일그러져
가는 이 사회의 악순환의 고리를 제거하라는 명령으로 이해할 수 있다.

2.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7:13, 14)
본문이 5:3-7:12에 해당하는 전체 내용의 결론으로서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 점을
장 강해에서 지적한 바 있다. 그런데 본문은 5:3-7:12의 내용을 요약하는 차원에서가
아니라 거기에서 제시된 그리스도인다운 삶의 특성을 규명하는 차원에서 그리고 그 삶
의 원리를 구체적 삶 속에서 적용토록 하는 행동에의 요청이라는 차원에서 결론적 성
격을 띤다. 산상 수훈에 수록된 메시지는 우리의 지적 호기심을 만족시켜주는 일개의
철학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관중석에 앉아 경기장을 관람하는 태도로 산상수
훈을 대해서는 안 된다. 여타의 모든 성경 말씀과 마찬가지로 산상수훈은 우리의 전존
재를 다바쳐 구체적 삶의 결실로서 구현시켜야 할 사항인 것이다. '나를 따라 오너라'
는 예수의 명령을 듣고서 곧 그물을 버려두고 당신을 좇았던 베드로와 안드레처럼
(4:18-20), 우리는 복음의 메시지를 대했을 때 실제로 그 메시지대로 살기 위해 전폭
적 결단을 내려야 한다.
한편 본문은 참신앙인에게는 세상에서의 영육간의 고난이 필연적으로 있을 수밖에
없음을 가르쳐 주고 있으며 덧붙여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그 고난을 감수해야만 한
다는 사실을 곁들이고 있다. 실로 나그네로 살아가는 성도의 참된 휴식은 오직 천국에
서남 가능하다. 따라서 성도는 고난과 역경으로 점철(點綴)된 이 세상을 살면서 마음
의 눈을 아래가 아니라 위로, 뒤가 아니라 앞으로 두고 점진적 삶을 살아가야 한다(히
11:14). 우리들에게 있어서 안일한 타협이나 임기 웅변식의 처세술은 결국 우리를 넓
은 멸망의 문, 절망의 길로 이끌 것이다.
* 좁은 문과 좁은 길. 주님은 그리스도인다운 삶의 특성을 좁은 문과 좁은 길에 비
유 함으로써 산상수훈을 접하는 이들에게 선명한 이미지를 남기신다. 분문을 읽으면서
우리는 두 개의 문과 두 갈래의 길을 머리속에 즉시 떠올릴 수 있다. 여기서 먼저 좁
은 '문'에 관해 상고해 보면 이 좁은 문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그 시작부터 좁고 협착
(狹窄)하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즉 처음에는 넓다가 점점 좁아지거나 그 반대로 처
음에는 좁다가 점점 넓어지는 것이 아니라 시종일관 좁고 협착한 삶, 그것이 바로 성
도의 삶이다. 어떤 사람들은 지나치게 교리적이고 형식적인 신앙에 혐오를 느낀 나머
지 세상적 지혜와 육신적인 동기를 교회 내에 끌어들여, 기독교를 매력적이요 자극 적
인 어떤 것으로 간주하려고도 한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 자체가 좁은 문으로
부터 시작됨을 본문은 공공연하게 그리고 비타협적으로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이 문은 너무도 좁기 때문에 이 문을 통과하기 위해 우리가 포기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들이 있다. (가) 우리는 세속주의를 뒤에 남겨두어야 이 문을 통과할 수 있
다. 이 세상의 전통과 관습에는 세속주의적 요소가 가득하며, 우리는 그러한 기성화된
것들에게 동화되기 쉽상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타락된 풍조에 휩쓸려갈 것
이 아니라 비록 인기가 없고 초라해 보일지라도 오직 말씀에 입각한 단안(decision)을
내려향 한다. (나) 배제 되어야 할 것은 바로 '자아'(自我)이다. 여기서 자아란 곧 옛
사람의 타락한 성품을 가리킨다. 타락한 아담의 후예인 모든 자연인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인 까닭에(엡 2:3) 자력(自力)으로써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고자 하는 행위는 가시
나무에서 포도 열매를 따려는 것과도 같은 헛된 노력일 뿐이다. 결국 그리스도를 따르
는 길은 자기를 부인하고 오직 자신 안에 살아 역사하시는 그리스도께서 더욱 충만하
게 나타나시도록 할 때에만 가능하다(갈 2:20).
한편 예수의 말씀을 좇아 사는 자들 앞에는 좁은 '문' 뿐만 아니라 좁은 '길'이 기
다리고 있다. 단 한번의 비장한 각오와 결단으로써 좁은 문을 통과하기만 하면 그것으
로 모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서은 시작일 따름이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생
을 마감하는 그 순간까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수준에까지 이르기 위하
여(엡 4:13) 그리고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적하기 위하여(엡 6:12) 끝까지 일로 매진(一路邁進)해야 한다. 그리스도
인의 삶이 좁고 협착한 길에 비유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렇듯 어렵고 힘든 삶을 더
욱 어렵게 만드는 것은, 세상이 진리를 좇는 자를 항상 핍박한다는 사실이다. 그런 까
닭에 바울은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
라'고 말했다(딤후 3:12).
그러나 이토록 힘든 길이 앞에 놓여있다고 하여 지레 겁을 내어 주저앉아 버리거나
돌아설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현재 감당하는 수고나 고난과는 족히 비교할 수조차 없
는 엄청난 축복과 영광이 좁은 길의 목표 지점에서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도들은 이 길을 외로이 혼자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앞서 가신 발자취를
따라서, 그분으로부터 직접 공급되는 힘으로써, 그분과 함께 나아가기 때문이다.
한때 주님의 은혜에 감격한 나머지 자신의 전부를 주께 헌신하기로 하고 좁은 문을
들어섰던 자들이 혼자서 악전 고투(惡戰苦鬪)하다가 끝내 중도에서 주저앉게 되고마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요컨대 성도는, 비용을 계산해 보지도 않고 무작정 망대를 건
축하려드는 사람 혹은 적군의 수효를 헤아려 보지도 않고 싸우러 나가는 임금처럼 무
모하게 덤벼들 것이 아니라(눅 14:28-32) 그리스도인의 삶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미
리 깨닫고 모든 어려움을 능히 극복할 수 있도록 날마다 그리스도의 도우심을 힘입고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철두철미하게 무장해야 하겠다(엡 6:13-17).

3. 말씀의 실천(7:15-29)
산상수훈 전체의 결론부에 해당하는 15-27절은 각각 한쌍씩의 대조를 이루는 세 가
지 경고로 구성되어 있다(15-20;21-33;24-27절). 본문에서 특히 강조된 사항은 종말론
적 심판과 믿음의 실천이라 하겠다.
(가) 본문에는 '좋은 나무'와 '지혜로운' 건축자에 대한 축복의 말씀도 나타나지만
(17,24,25절) 전반적으로 종말론적 심판에 관한 경고가 지배적으로 부각되어 있다
(19,23,27절). 실로 우리 모두가 이 세상에서의 삶으로 인생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조
만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하고 그 심판의 결과 영원한 축복과 영원한 저주에로
갈라져야 한다는 이 엄연한 사실을 직시할 때, 우리는 우리의 삶을 잠시도 무의미하게
방치할 수 없음을 절감하게 된다.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一擧手一投足)이 백보좌 심판
대 앞에서 확연히 드러나게 된다는 사실은, 심리적 위축이나 불안과 공포로써 이해될
것이 아니라 온갖 환난과 역경에도 불구하고 숭고한 목표에로 매진토록 하는 위로와
격려로서 이해되어야 하겠다.
(나) 또한 본문의 세 경고는 한결같이 행함과 실천을 강조하고 있다(17,21,24절).
산상수훈의 본론을 마감하는 13,14절에서 실천에의 효청이 시사된 바 있거니와, 본문
은 이를 재차 반복하여 그리고 더욱 뚜렷이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산상수훈에 기록된
이 모든 말씀들을 남김없이 이해하고 또한 지적으로 동의하였을지라도 이를 직접 실천
에 옮기지 않는다면, 그의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일 따름이다9약 2:26).

* 좇은 나무와 나쁜 나무. 예수께서는 열매를 통해 그 나무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
다는 비유로써 거짓 선지자에 관해 경고하셨다(15-20절). 그들은 즐겨 지도자로 나서
고자하기 때문에 자신 뿐만 아니라 그를 따르는 많은 사람들까지 멸망으로 인도한다.
진정 예수께서는 이스라엘 공동체를 혼란의 도가니(melting pot)로 몰아넣었던 거짓
선지자들의 악영향을 너무도 잘 알고 계셨으므로(렘 6:13-15;겔 22:28) 당신으로 말미
암아 새로 생겨날 교회 공동체 내에도 거짓 선지자들이 출몰하리라 예견하셨다. 그 예
언대로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수많은 거싶 선지자들과 직면하게 되었다(행 20:29;고후
11:11-15;벧후 2:1-3). 이제 여기서는 거짓 선지자들의 특성과 메시지(혹은 분별법)에
관해 간단히 살피기로 하자.
(가) 특성 - 예수는 거짓 선지자들의 특징을 '양의 옷을 입은 이리'라는 말로 압축
하였는데(15절), 이는 곧 그들의 위장과 탐욕을 꼬집으신 지적이다. 멀리서 보면 가시
나무에 붙여있는 자그마한 검정 딸기가 포도로 보일 수 있고 엉겅퀴의 꽃은 마치 무화
과와 같이 보이지만(16절), 가까이서 자세히 살피면 그 차이가 명백히 드러난다. 이처
럼 거짓 선지자들도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여 나타나지만(고후 11;14), 결국은 자신의
이욕을 챙기며 탐욕을 충족시키는 일에 골몰하게 마련이다.
(나) 메시지의 특징 - 거짓 선지자들도 나름대로 성경을 인용하고 듣기에 그럴싸한
말들을 진지한 모습으로 전파하기 때문에, 성경 전체에 대한 통시적(統視的) 안목을
결여한 자들은 그들의 가르침에 미혹되기 쉽상이다. 하지만 그들의 행실이나 지향하는
노선 혹은 그 메시지의 특징 등에서, 우리는 그 거짓되고 사악한 실상을 간파할 수 있
다. 거짓 선지자들의 메시지의 특징을 단 하나로 제시하는 데에는 다소 무리가 있겠지
만, 구약 성경의 배경이나 산상수훈의 내용상의 흐름을 고려하건개 그들의 메시지는
박해에도 불구하고 생명에 이르게 하는 좁은 길을 인정하거나 가르치지 않으며 거짓
평강과 현세적 축복을 강조함을 알 후 있아(13, 14절;렘 8:11). 또한 그들의 메시지는
믿음을 무너트리며(딤후 2:18), 분쟁과 훼방을 조장하고(딤전 6:4,5), 경건치 아니함
에 점점 나아가게 한다(딤후 2:16).
따라서 성도들은 거짓 선지자들의 허황되가 달콤한 가르침에 미혹되지 말고, 먼저
그들의 삶의 열매 곧 그 행실을 통하여 그 가르침의 진위(眞僞)를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그와 더불어 그들의 거짓된 언행을 구별할 수 있는 영적 안목을 기르기 위해 성
경의 진리를 날마다 상고하고 성령의 인도와 훈계에 귀기울여야 한다(엡 4:25;딤전
2:4;딤후 2:15;벧전 1:22;요삼 1:3,4).

* 참된 제자와 그릇된 제자. 앞에서는 지도자로 자처하는 거짓 선지자들의 악한 영
향력을 경게시키면서 교회 지도자들의 막중한 책무를 상기시켰거니와, 이제 21-23절에
서는 그리스도의 제자된 일반 성도들이 빠지기 위운 위험을 경계시키고 있다. 즉 교회
내에는, 기독교의 제반 활동에 참여하고 교회에 출석하며 심지어 큰 권능을 행하는 등
명목상으로는 엄연한 그리스도인으로 보이면서도 실상은 도(道)의 초보조차도 알지 못
하는 자들이 잉아다는 것이다. 본문은 명목 뿐인 그리스도인의 허상(虛像)을 두 가지
측면에서 지적한다.
(가) 그릇된 확신 - '주여 주여' 하는 것은 분명 예수를 따른다고 하는 모종의 신
앙 고백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예수를 주(主)로 고백하면서도 십자가의 의미나 기타
성경에서 제시하는 참된 그리스도관에 대해서는 무지할 수도 있는 일이다. 우리는 이
러한 경우를 예수의 수제자 베드로를 통해 보게 된다. 그는 예수의 공생애 기간 동안
줄곧 예수 곁에서 지내며 그 권능을 목격하고 가르침을 받았으며, 마침내는 교회의 기
초가 될만한 위대한 신앙고백을 하였지만 자신이 고백한 '그리스도'의 의미를 바로 깨
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16:21-23).
(나) 인격적 헌신 없는 활약 - (가)항의영적인 확신을 갖게 하는 첫번째 영역인 교
리에 관한 내용이라면, 여기서는 두번째 영역 곧 행위의 영역을 지적하고자 한다. 성
도의 행실을 통해 나타나는 여러 성령의 열매들은 그리스도의 생명에 접붙임받음으로
써 자연스럽게 맺혀져야 한다.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교제, 그리스도께 대한 인격적 헌
신도 없이 자기 나름의 종교적 신념이나 열정으로 이적적 권능을 행한다고 하여 그것
을 성령의 역사라 볼 수는 없다. 귀신을 쫓아내고 이적적 권능을 행사하는 일은 마귀
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요컨대 본문은 '행하되', '하나님의 뜻대로'
행할 것을 강조한다 하겠다.


* 지혜로운 건축자와 어리석은 건축자. 산상수훈은 예수의 이 모든 말씀을 실천에
옮김으로써 살아있는 믿음을 보이라고 재차 강조하는 내용의 비유(24-27절)로써 그 대
단원의 막을 내린다. 이 두 건축자의 비유는 팔레스틴의 자연 환경을 이해할 때 보다
생생하게 다가오게 된다. 팔레스틴에서는 가뭄철이 되면 물 한 방울도 없이 바싹 말라
있다가 우기(雨期)에는 큰 개울로 변하는 골짜기(wadi)가 많았다. 따라서 여기에다 지
은 집은 폭풍우가 닥쳤을 때 맹렬한 급류에 휘말려 흔적조차 사라지고 만다.
실로 믿음이 있는 체하고 여러 신학적 교리에 능통한 것처럼 보이는 자라도 예수의
말씀대로 살아가지 않으면, 바로 이처럼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자나 다름없다는 것이
다. 이는 마치 돌받에 뿌리운 씨가 해가 돋으면 곧 시들고 마는 경우와 같다(13:21).
반면에 예수의 말씀을 진지하게 경청할 뿐만 아니라 들은 바 말씀을 구체적 삶 속에
적용시키며 순종하는 법을 몸소 체득한 자는, 온갖 시험과 환난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않고 끝까지 신앙의 경주를 완수한다(비교, 고전 3:10-15). 진정 참 신앙은 고난 중에
서 더욱 빛을 내는 법이다.
결국 산상수훈은 율법과 선지자의 성취이신 예수께 대한 전적 순종을 강력히 권고하는 말씀으로 끝난다 하겠다. 참으로 그분의 말씀에 깊이 뿌리박혀 그분의 말씀 위에 자신의 전인격을 올겨놓고 생활하는 실천적 신앙인만이 그리스도 재림의 날까지 든든히 설 수 있다. 한편 사도 요한은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고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 1:3)고 진술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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