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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 이들은 종교, 정치, 사회적인 사상 및 의식면에서 서로극단적인 대립 관계를 띠고 있는 자들이다. 이런 이들이 예수를 대적하기 위해서 함께 온 것은 하나님과 그분의 뜻을 대적하기 위하여 세상이 어떻게 그들의 모든 것을 저버리고 연합할 수 있는 가를 잘 보여준다(시 2:2). 특히 본문 '호이 파리사이오이 카이 사두카이오이',(* )로서 두 집단을 지칭하는데 관사(* , 호이)가 하나만 사용되었다. 이것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예수를 대적하기 위해서 온전히 하나가 되었음을 보여준다. 한편 12:28-45과 1-20등에서는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비교적 객관적 자세로 예수의 능력이나 율법에 대한 예수의 진리를 알아보려고 하였으나 본절에서는 그들과 사상 및 이념, 주의, 주장이 전혀 다른 사두개인들과 연향하여서 예수를 넘어뜨리기 위해 시험하였는데, 이는 그들의 적대감이 더욱 더 깊어지고 노골화되었음을 암시한다.
예수를 시험하여 - '시험하여'의 헬라어 '페이라조'(* )는 '조사하다', '입증하다', '유혹하다'등의 뜻이 있다. 이것은 사단이 예수 광야에서 시험하여 넘어뜨리려 했던 말과 같은 것이다(4:1). 그들은 예수를 잘 모르는 상태에서 좀 더 알아보려는 것이 아니라 (1) 처음부터 자기들의 기존 신앙 체계만 고집하는 선입관을 가졌던 동시에 (2) 예수를 무조건 음해(陰害)하려는 저의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하늘로서 오는 표적 - 그 당시 랍비들은 지상에서 연출되는 각종 이적들은 사단과 그 수하의 졸개들에 의해서도 능히 실현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 대신 하늘로부터 전해진 이적들은 오직 하나님에 의해 실현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바로 그런 관점에서 그들은 예수에게 모세의 때에 내려졌던 만나 사건(출 16장;요 6:32)이나 여호수아의 간구로 인해 허와 달이 멈춰졌던 사건(수 10:12-14), 사무엘 시대의 우뢰 사건(삼상 7:10) 및 엘리야의 갈멜산 승리 사건(왕상 18:30-40)과 같은 초자연적인 하늘의 기사들을 요구했던 것이다(chrysostom). 이러한 요구에 응할 때에만 그들은 예수의 신적(神的) 진정성을 인정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속깊은 저의는 그러한 이적의 유무(有無)와는 관게없이 어떻게든 예수를 넘어지게 하려는 데 그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눅 16:31). 따라서 그들이 표적을 구한 것은 그들이 예수를 믿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이 과연 하늘로부터 오신 메시야인지 당신 스스로 입증해 보라는 지극히 도전적인행동이라 하겠다. 여기에서 '표적'(* , 세메이온)이란 '표시', '이적' 등의 뜻으로서 결정적이고 놀라운 증거라는 뜻을 갖고 있다. 바리새인들은 서기관들과 함께 12:38에서도 예수께 표적을 보여주기를 청했었다, 그러나 진정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표적이나 기사가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순결하고도 온전한 믿음이었다(고전 1:22,23).
청하니(* , 에페로테산) - 이 말의 원형 '에페로타오'(* )는 요청하다는 뜻외에 '심문하다', '갈망하다'는 뜻도 있다. 더욱이 이 '에페로타오'는 관용적으로 사용되어 '어떤 중요한 판단을 위해문제를 제기한다'는 의미로도 사용되었다고 한다(Pulpit Commentary). 따라서 그들은 자신들의 질문이 그리스도를 판단하는데 결정적인 근거로 삼을 자료가 될 것이었기 때문에 심문하듯 예수를 다그쳤던 것이다.

=====16:2
대답하여 가라사대 - 본문과 평행 구절인 막 8:12는 '마음속에 깊이 탄식하시며 가라사대'(And he sighed deepiy in his spirit, and saith, KJV)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예수께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듸의 악하고도 편협한 질문의 저의(底意)를 깨달으시고 그들의 악함에 대해서 심령 깊숙한 곳에서 탄식하신 것을 가리킨다.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 이처럼 저녁하늘이 붉으면 맑은 아침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열대와 극 지방을 제외하고는 거의 공통된 현상이다. 한편 유대인들은 하늘의 변화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그 변화들을 통해 때의 징조를 예측했다고 한다(Virgil, Pliny). 그리고 심지어 랍비듸은 기상의 변화에 따른 각종 생활의 지혜를 교육했으며, 신년(新年)에는 그 해의 강우량을 예측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처럼 유대인들은 자연계의 제현상들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표명했다.
흐리면(* , 스튀그나존) - 이 말은 주로 침울한 감정이 얼굴로 표출된 상태를 나타내는데 사용되었다(막 10:22). 그런데 가끔 분위기나 기후를 표현할 때도 사용되어 매우 짙은 어두움을 가리키기도 한다. 여기서는 어둠침침한 상태를 나타낸다.
날이 궂겠다 - 이를 표현한 원어 '케이몬'(* )은 단순히 찌푸린 날씨가 아닌 폭풍우치는 날씨를 Emt한다. 본문에서는 문맥상 날씨의 궂은 정도를 가리킬 수도 있고 궈은 날씨가 어김없이 찾아들것이라는 사실에 초점을 맞췄다고도 볼 수 있다.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 - '천기'(* ... ,토 프로소폰 투 우라누)란 '하늘에나타나는 자연적인 제현상'(the face of the heaven)을 의미한다.
시대의 표적(* , 세메이아 톤 카이론) - 여기서 시대를 뜻하는 '카이론'은 과거에서 미래로 나아가는 어떤 특정한 시점을 가리킨다. 특별히 본문에서는 유대 민족이 대망하던 메시야의 초림 내지는 재림의 매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시대'에 관한 비밀한 정보들을 여러가지표적들(signs)을 통해 나타내 보이셨던 것이다. 즉 세례 요한의 때에 대한 긴박한 선포(막 1:15), 다니엘이 예언한 70이레의 마지막 주간의 도래(단 9:1-27장), 유대 전방에 걸친 메시야 도래에 대한 기대감 고조(눅 2:26, 38), 예수께서 친히 구약 예언의 성취로 오신 자신을 증거하고 이적을 베푸신 사실(12:8,32;13:37;24:30;눅 17:22-35) 등을 통해 시대를 분별할만한 중요한 표적들을 제시하셨다. 한편 본문에서 '시대의 표적'(signs of the times)은 원문에서는 복수형으로 쓰여져 있다. 이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과 섭리 등을 나타내시기 위해 특별히 보여주시는 것으로 전자는 단순한 물리적 차원의 현상을, 후자는 그 이면에 신적(神的) 목적이 있는 영적 차원의 현상을 가리킨다. 특히 후자, 즉 표적이란 성육신하신 예수가 말과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는 새시대의 증거를 가리킨다. 우리들의 세계는 영적 차원과 물질적 차원이 있다. 따라서 눈에 보이는 물리적 차원의 세계에서는 아무리 유능하고 박식하다고 하더라도 이것만으로는 결코 전인적인 인간이 될 수 없는 것이다.

=====16:3
악하고 음란한 세대 - 악하고 음란하다는 말은 동의어를 반복하여 강도의 뜻을 나타낸 것일 수도 있다. 또 한편으로는 음란자라는 말이 특히 구약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불신과 범죄의 뜻으로 자주 사용되었던 점에 착안하여 악하다는 말은 각 개인의 심성이 츙악하고 추하게 타락된 상태를 가리키고 음란하다는 말은 그런 개인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불충스러움을 말하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사람들도 있다(Watchman Nee).
표적을 구하나 - 표적을 구한것 자체는 결코 죄가 아니었다. 하나님은 여러 기회에 순전한,즉 공정하고 진실한 심령을 가진 자들을 확신시켜 주시기 위하여 각종 표적을 때에 맞게 주셨던 것이다. 그러나 문졔는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즉 이미 그 마음에 순결성을 상실하고 편견과 독단에 의하여 진리를 통찰할 능력을 상실한 자들이 이미 충분한 표적과 가르침이 주어졌음에도 악한 의도로 표적만 계속 구했다는 것이 문제였던 것이다. 요나의 표적 박에는...없느니라 - 표적을 보여 달라는 자들에 대한 대답으로서 구체적 표적을 당장 보여주는 것도 아니다. 그례다고 표적을 안 보여 주신 것도 아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있어서 요나의 표적이라는 말은 단순히 과거의 사건으로만 이해되었을 것이므로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표적을 안보여 주신 것이다. 그러나 현대의 우리입장에서 보면 예수는 모든 표적 중의 표적, 즉 요나처럼 자신도 3일동안 죽으셨다 살아날 것을 강력히 암시한 것으로서(욘 1:17) 분명 결정적 표적을 제시하신 것인데, 다만 그것이 미래형일 뿐이라는 것이다. 어찌되었는지 간에 예수의 이 대답은 당시의 바리새인들에게 일종의 파라독스(paradox)처럼 들렸을 것이 분명하다. 한편 이 표적은 예수께서 어려움에 직면하실 때마다 제시하신 것으로서(12:38-40;요 2:18-22), 믿는 이에게는 구원과 부활의 확실한 증표가 되지만,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에 의해 필연적으로 주어질 심판의 전조(前兆)가 될 것이다. 계속해서, 예수께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요구하는 표적을 당장 보여주지 않고 선지자 요나의 표적만을 언급하신 이유는 다음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1)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요구하는 표적을 들어줄 경우 잘못된 그들의 비신앙적 욕구와 호기심을 들어 주는 것이 되어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근본 목적과 사역을 행하시는 뜻, 즉 하나님께 영광돌리고 당신 자신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야되심과 당신이 전하신 진리를 나타내시기 위해 표적을 행하신다는 뜻에 위배 되기 때문이다. (2) 스스로 죄의 길에 서서 마음의 눈을 닫은 그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표적은 그들의 비신앙적인 욕구와 호기심을 일시적으로 채워주는 표적이 아니라 그듸의 인습적 관념을 극적으로 깨뜨리고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게 해줄 결정적 표적이었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었기 때문이다.
저희를 떠나 가시다 - 이는 예수께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과 교제를 끊으시고 멀리 하시는 것을 뜻한다. 이런 교제의 단절은 1차적으로는 인간 관계의 단절이지만 예수와 바리새인들의 경우에 있어서는 축복 교훈의 기회의 박탈이라는 측면도 있다. 예수께서는 공생애 동안 먼저 죄인들을 찾아가시어 가르치셨지만 그들이 끝내 거절할 때에는 3년 밖에 안 되는 공생애의 특수성을 고려하시어 곧 그들을 떠나시곤 했다.

=====16:5
거짓 교훈에 대한 경계 건너편으로 갈새 - '마가단' 지경(15:39)의 반대편 또는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으로(13절) 가기 위해 '벱새다'가 있는(막 8:22) 갈릴리 호수 북동편으로 가는 것으로 추정된다(15:39;16:13). 이에 제자들만 간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더불어 동행하셨다(6절).
떡 가져가기를 잊었더니 -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이 마가단에서 황급히 출발했기 때문이리라. 아마도 그 당시 마가단에서 바리새인들과 예수의 긴장 상태가 극에 달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때 제자들의 수중에는 배 안에 있었던 오래된 한덩이 떡만 있었을 뿐이었다(막 8:14).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 - 누룩(malt)란 다른 음식물에 들어가 그 음식물을발효시키는 효소이다. 즉 누룩이 들어가면 음식물은 본래의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변한다. 성경은 이점에 착안하여 주로 나쁜 관점에서 타인에게 강한 정신적 전염을 시키는 것을 누룩으로 묘사하고 있다(출 12:5;레 2:11;고전 5:6-9;갈 5:9).여기서 누룩은 율법과 계명을 인본주의적으로 해석하여 일반 백성을 인습적으로 오도(misleading)하는 당시 교권주의 자들의 잘못된 교훈을 상징하는 말로 쓰였다(12절). 한편 본문에서 누룩이 단수로 쓰였는데 이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모두에게 걸린다. 이것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누룩이란 측면에서 한 통속(通俗)임을 시사한다. 그런데 그 다각의 특징상 바리새인의 누룩은 전통과 외적 시식에만 치중하며,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신앙을 고수함으로써 예수의 메시야성(性)을 부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사두개인의 누룩은 모세 오경 외의 모든 성경과 하나님의 예정을 부인하고, 특히 사단의 실체와 부활 교리를 부인했으며, 개인의 자유를 극대화 함으로써 철저히 현실지상주의적인 삶을 지향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두 부류의 누룩은 시대를 초월하여 극단의 보수와 극단의 자유주의 사상으로 항상 존재해 왔다, 실로 참 신앙인은 이 두 양극 우(愚)를 극복하고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의 신앙과 끝임없는 자기 개혁을 통하여 그리스도 복음의 순수성을 확립해가야 한다. 한편 본문과 평행 구절인 막 8:15에는 '사두개인' 대신 '헤롯' 으로 대치하고 있는데, 그것은 아마도 정치, 경제적으로 우위(優位)를 점하고 있었던 사두개인들 가운데 많은 수가 헤롯당원으로 활용했던 그러한 표현을 사용했을 것이다.

=====16:7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 여기서 우리는 다음 두 사실을 알 수 있다. (1) 예수 말씀의 진의(眞意)를 파악하지 못한 제자들의 어리석음 (2) 예수께서 가르치신 영적 교훈을 제자들이 서로 의논하여 깨달은 것이 아니고 오직 예수께서 다시 설명해 주셔서 깨달았다는 것(8-11절) 등이다.
떡을 가져오지 아니하였도다 - 지금 영의 눈이 어두워진 재자들은 예수께서 가르친교훈의 참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자신들의 실수로 빚어진 현상적인 문제에 집착하여 떡이 없음을 걱정하고 있다. 그런데 그 당시 일반적인 떡의 모양과 크기는 둥글며 지름이 약 15cm, 두께가 약 1.5cm 정도였다고 한다. 이는 보통 밀기울을 빻은 소맥분(小麥分)으로 만들어졌으나(삿 6:19;삼상 28:24;왕하 4:41), 때로는 보리 가루로 만들어지기도 했다(민 5:15;여하 2:10;요 6:9). 한편 이는 6절의 예수의 영적 교훈을 이 땅의 현실적 문제에 대한 지적으로 받아들인 제자들의 무지와 오해를 드러내 주는 구절이다. 그 이유는 단적으로 아직 이들이 예수의 참 정체, 즉 예수께서 신적 메시야이시란 사실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특히 이 사건이 예수께서 4천명을 먹이신 사건에 연이어 일어난 것임을 고려할 때 예수의 능력에 대한 제자들의 무지는 아직도 심각한 상태이며, 더 나아가 예수께서 영원과 절대의 구원 문제에까지 권능과 능력을 갖고 계시다는 사실에 대한 무지의 반증이기도 하다. 한편 우리는 이런 어리석음과 오해는 이 당시 제자뿐만 아니라 현대의 신자들 중에도 많음을 발견한다. 즉 예수께 영원한 절대적 구원이 아닌 이 땅의 빵과 권력의 축복만 요구하는 기복(圻福)주의자들이 바로 이런 어리석음과 오해를 재현시키고 있다.

=====16:8
예수께서 아시고 - 여기서 '아시고'(* , 그누스)는 체험적 앎보다 직관적으로 인식한 상태를 의미한다. 즉 예수는 제자들의 대화를 전해 듣거나 였들은 것이 아니라 그들의 내면에 있는 생각들을 직관적으로 통찰하시고 계셨음을 나타낸다.
믿음이 적은 자들아 - 예수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가끔 사용하신 독특한 표현이다(6:30;8:26;14:31). 이는 '믿음이 없는'(17:17)이라는 표현과는 달리 그들이 예수의 인격과 신분을 믿긴 믿되 그분의 능력 또는 역사(役事)를 온전히 믿지 못하고 의심하거나(14:31) 잊고서 생각치 않고 있음을 지적한 말이다(Clarke). 그리스도는 당선의 사람들에게 온전하고도 전적인 믿음을 바라고 계신다(히 11:6).
어찌 떡이 없음으로 서로 의논하느냐 - 예수께서는 그들의 물질 중심의 사고를 질타(叱咤)하시고 그들로 하여금 진리에 대한 바른 시각을 지니도록 인도하시려 하셨다.
그러나 믿음이 없이는 그리스도께서 계시하시는 진리를 조금도 파악할 수가 없다(히 11:1,2)

=====16:9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 여기에서 깨달음이란 이성적 깨달음 또는 지적 인지(認知,perception)를 가리킨다. 이는 곧 제자들이 예수께서 베푸신 교훈과 각종 이적을 접하고서도 아직 이성적 지식으로 완전히 수납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반영한 말이다(15:16). 이는 곧 이적을 경험하는 그 자체가 전인적인 지식에 이르게 할 수 없음을 가르친다. 진정 성령의 내적 조명(illumination)없이는 진리가 진리로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다(요 14:26).
몇 바구니 - 여기 '바구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코피노스'(* )는 여행자들이 지니고 다녔던 조그마한 손바구니를 가리킨다. 이는 오병이어의 기적적 급식(給食) 사건(14:13-21) 뒤에 제자들이 그 남은 떡 조각을 거둬들일 때 사용했던 용기이다. 이는 뒤이어 나오는 '광주리'(10절)란 말과 대조되어 오병이어 사건과 칠병이어 사건이 본질적으로 다른 각각의 두 이적이었음을 확연히 보여준다.

=====16:10
몇 광주리 - '광주리'에 해당하는 원어 '스퓌리스'(* )는 장년(壯年)이 그 속에 들어가 웅크릴 수 있을 만큼의 큰 바구니이다(15:37;행 9:25). 이는 9절에서 말하는 '바구니'보다 훨씬 더 큰 것으로 칠병이어 사건 때 사용되었던 것이다(15:32-38).
기억지 못하느냐 - 예수께서 제자들을 질책하신 또 하나의 이유는 그들이 '기억'해야만 했던 그 순간에 과거의 이적적 체험을 망각하고 있었다는 데 있다. 즉 그들은 예수의 두 이적 사건 흘러간 과거의 일로 간과해버렸지 그것을 산 경험, 산 지식으로 수용하여 현실 성활에 재현, 재생시키지 못했던 것이다. 한편 이스라엘 백성들은 일찍부터 과거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와 기적 사건들을 대대 후손에게 전하고 기억하도록 하는 종교 교육을 시행했었다(신 7:18,19;32:7;대상16:12,13:시 77:11;78:4,11;105:5, 6;106:7,13,21).

=====16:11

어찌 내 말한 것...깨닫지 못하느냐 - 예수께서는 거듭해서 제자들의 잘못된 인식과 무지를 책망하고 계신다. 사실 예수께서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이미 주어진 수많은 증거들을 믿으려 하지 않고, 인위적인 표적만을 구했기 때문에 그들의 '교훈'을 질타하셨다. 그런데 제자들이 지금 예수와 그가 베푸신 이적을 믿지 않는 바로 그러한 불신앙적 태도에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예수께서 베푸신 이적들은 믿음을 강요하지 않는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자는 그 이적들이 지닌 중요한 의미들을 확실히 인식하게 될 것이다. 이런 이유로 예수께서는 두 급식 사건이 주는 상징적인 의미를 다시 기억토록 촉구하셨뎐 것이다.

=====16:12
그제야 제자들이...깨달으니라 - 예수께서는 자신의 제가들에게 마치 어린아이와 같이 하나하나 설명하며 진리를 깨치도록 하시지 않으셨다. 대신 당신이 주신 계시를 그들이 깊이 생각하여 스스로 깨닫도록 하는 영적 훈련을 통해 성슥한 제자로 자라게 하셨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 - 이는 위로부터 내려온 참계시와는 반대되는 인본주의적 교훈을 가리킨다. 이를 좀더 세분하면 바리새인들은 형식적 율법주시자요 전통주의자들로서 자기 힘으로 얻는 의(義)를 강조하였다. 특히 그들의 의식과 유전은 위선적이며, 이율 배반(二律背反)적인 것으로 마침내 영적인 무지와 전인적인 죽음을 초래하게 만든다(눅 12:1). 이에 비해 사두개인들은 모세 5경시 권위만 인정하고 부활과 영생과 사후의 영원 세계 및 귀신의 실재를 거부하는 현세주의, 이성주의, 자유주의, 기복주의적 이론가들이었다(행 23:8). 특히 그들은 실친적인 면에서 언행이 불일치한 위선자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이스라엘 제사장 계급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으면서, 교묘한 합리주의적 교훈을 통해 백성들을 미혹했다(6절).

=====16:13
가이사랴 빌립보 - 이곳은 예루살렘 서북방, 지중해 연안의 항구 도시인 '가이사랴'와는 구별된다(행 10:1). 따라서 본문의 가이사랴 빌립보나 갈릴리 호수 북방 약40km 지점, 헬몬산 기슭 해발 약 345m에 위치한 아름답고 조용한 마을이다(막 8:27). 이 마을은 원래 조그마하였으나 헤롯 대왕의 아들 분봉왕 헤롯 빌립(눅 3:1)에 의해 확장되었다. 한편 그는 로마 황제 '디베료 가이사'를 기념하는 의미에서 이곳을 '가이사랴'라 하였고, 거기에 자기 이름을 추가하여 '가이사랴 빌립보'라 불렀다. 이곳 주민들은 데부분이 이방인으로 우상 숭배자들이었다. 그중 원주민들은 바알을, 헐라계 사람들은 산림과 야수(野獸)의 신(神)인 '판'(pan)의 산당을 지었으며 헤롯은 가이사 아우구스도에게 아부하기 의하여 이곳에 황제 신전을 건립해 놓았다. 이러한 우상의 땅에서 예수 제자들에게 당신이 대한 바른 신앙 고백을요구하셨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곳에서도 무리들을 위해 봉사하시기도 했지만주된 사역은 12제자에게 국한되었다.
물어 가라사대(* , 에로타) - 여기 헬라어 '에로타'는 행위의 시작을 가리키는 미완료 과거 시제로서 '묻기를 시작했다'는 뜻이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공생애를 중간 결산하시고 이제 본격적으로 십자가 수난 사건을 위하여 제자들을 훈련시킬 필요성을 느끼시고 그들에게 제자로서의 핵심적 사항을 문답식으로 교육시키셨다. 그 첫째 질문이 예수 자신, 곧 인자에 대한 사람들의 견해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한편 예수께서는 이 같은 질문에 앞서 먼저 성부 하나님께 자신의 앞 일을 의탁하시는 기도를 드리셨다(눅 9:18). 실로 중요한 시점이 이를 때마다 예수는 이처럼 마음을 하늘로 향하시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 이를 직역하면 '나는 스스로를 인자로 부르는이, 사람들은 나를 무엇이라 표현하는가 ?'이다. 이에 비해 마가와 누가는 '인자'란 용어를 생략하고 있다(막 8:27;눅 9:18). 여기서 어느 형태의 질문이 본래의 것인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복음서에서 예수만이 이 칭호를 사용하신 것과, 이 칭호로서 예수 자신의 칭호로서 메시야를 가리키는 의미로도 사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 본서의 형태가 원혜이라 보는 것이 타당한 듯하다. 아마 마가와 누가는 이방 출신 독자들의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 이 칭호를 삭제하고, '나'라는 1인칭 칭호만을 쓴 것 같다. 한편 여기서 인자란 예수께서 당신 자신을 나타내실 때 즐겨 표현 하신 말씀 중의 하나이다. 이 말씀은 사복음서에 81번, 공산 복음서에만 69번 나오는이, 단 두번의 경우(눅 24:7;요 12:34)를 제외하고는 모두 예수께서 직접 당신의 입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께서 당신을 '인자'라 표현하신 데에는 (1) 당신께서는 하나님의 위격과 성품을 가지신(요 5:26), 즉 '신성의 모든 강만이 육체로 거하신'(골 2:9)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시기 위해 성육신하신 완전한 사람이심을 암시한다. (2) 예수께서 단 7:13, 14에 암시되어 있는 것처럼 구약에서 예시하고 있는 구원자이신 메시야 또는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실현키 위해 오신 이심을 암시한다(21절;20: 18, 19,28). 더 자세한 내용은 눅 5:24의 강해 '인자의 개념'을 참조하라. 여하튼 예수께서 하신 이 질문은 당신의 생대를 마감하시면서 당신과 접촉한 모든 사람들을 향해 던진 신앙 고백적이며, 종말론적인 물음이다. 실로 이 물음은 예수를 믿든 믿지않든 호흡이 있는 인격들이면 예시없이 대답해야만 하는 존재론적인 질문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 질문에 대한 대담은 곧 그의 현재와 미래를 영원히 결정짓는 것이기 때문이다.

=====16:14
더러는 - 백성들이 '인자'이신 예수께 대하여 온전한 지식을 갖추지 못했음을 암시하는 말이다. 비록 대부분이 다시 오기로 약소된 예언자적 인물이나 메시야와 연관이 있는 인물로 이해하고는 있었었만 아무도 예수의 메시야성을 정확히 간파하지 못했던 것이다. 한편 본문 이하를 살펴보면 제자들은 사람들의 견해가 '예수께 호의적이다'라는 사실을 보고하고자 하는 의도적인 인상을 준다. 그 예로 그들은 예수를 소의 '바알세불' 또는 죄인의 친구(11:19)라는 일부 극단적인 견해들은 생략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레 요한 - 하나님을 위해 가장 최근에 폭발적인 영과 능력(눅 1:17, 80)으로 일한 자이며 그의 메시지가 예수의 천국 선교 메시지와 거의 일치했던(4:17) 자이다. 따라서 유대인들이 예수를 세례 요한으로 착각한 것은 분봉왕 헤롯 빌립처럼(14: 1, 2) 예수의 능력과 행하신 역사를 보고 과거 세례 요한의 능력과 복음 전파의 폭발적인 영을 기억한 데에서 기인(起因)되었다. 이것은 또한 죽은 세례 요한이 다시 살아났다는 유대인들의 잘못된 부활 신앙관에서도 비롯되었다(14:2).
엘리야 - 구약에서 가장 열성적으로 백성들의 타락과 종교적 불의를 꾸짖었딘 선지자 중의 한 사람으로서(왕상 19:10), 말라기에서 바로 그가 메시야가 오시기 이전이 그분의 선구자로서 와서 메시야의 길을 예비한다고 기록되었다(말 4:5, 6). 특히 그는 죽음을 경험치 않고 승친(昇天)했기 때문에(왕하 1:11) 이러한 기대는 더욱 고조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와는 대조적으로 예수께서는 세례 요한을 가리켜 엘리야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었다(11:14). 한편 이처럼 유대인들이 예수를 엘리야로 오해한 것은 예수의 신성(神性)을 보지 못한 비신앙적인 태도에서 비롯된 듯하다.
예레미야 -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가장 많이 눈물을 흘리며(렘 9:1;14: 17;31:16;애 1:2, 16) 애쓴 선지자로 평가되고 있다. 따라서 예루살렘을 향해 눈물지으셨던 예수와 쉽게 연결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눅 19:41). 또한 예레미야의 죽음과 연관된 유대인의 후기 전승 및 구약 외경 마카비 하(下) 2:1-12;15:14, 15 등에 의하면 그가 메시야가 오시기 이전에 그분의 신구자로 와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다시 불러 모으시고 저희를 다시 긍휼로 받으시기까지 장막, 언약궤, 분향단 등을 드러내어 하나님의 영광을 재현할 자라고 기록되었다. 또한 카미그낙(J. Carmignac) 같은 학자는 예레미야의 경우처럼 예수도 이스라엘에 대해 부정적 예언을 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는 그가 예레미야와 같은 비운(悲運)의 선기자로 보였을 것이라 주장한다.
선지자 중의 하나 - 이 말은 그 당시 종말론적 기대들이 매우고조되어 있었음을 입증한다. 그 당시 사람들 가운데는 모세(신 18:15), 이사야(에스드라하 2:18), 에스라(에스드라하 14:9)처럼 다시 부활하여 일련의 종말을 예비하는 큰 선지자가 나타날 것이라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평행구인 눅 9:19에는 '옛 선지자 중의 하나가 살아났다 하나이다'라고 기록함으로써 위의 분위기를 더욱 확중적으로 제시해 주고있다.

=====16:15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 이는 헬라어 '휘메이스 데 티나 메 레게테 에이나 이(* )로서 직역하면 '그러나 너희는 나를 누구라 말하느냐'이다. 이는 분명 예수께서 앞의 견해들(14절)에 대해 못마땅해 하셨음을 암시한다. 즉 예수께서는 세상 사람들은 나에 대해 정확히, 온전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너희는 나를 어떤 존재로 인식하고 있는 가라는 물음을 제자들에게 던지신 것이다. 특히 여기서 '너희는'( , 휘메이스)은 2인칭 복수 형태의 강조적 표현으로서 예수께서 한 두 제자에게만 질문한 것이 아니라 특별히 12제자들 각자에게 관심을 두시고 강조하여 질문하신 것을 암시한다. 이는 예수께서 신앙의 주관성과 구원의 개별성을 염두에 두신 것이라 볼 수 있다(겔 18:20). 베드로의 고백은(16절) '너희'라는 복수 인칭으로 질문하신 예수시 물음에 대해 자신을 위시한 12세자 모두를 대신한 예언적 기능을 하는 것이었다.

=====16:16
시몬 베드로 - 사실 베드로는 부르심을 입은 이후 그의 적극적이고 충동적인 성격에 따라 예수 앞에서 자기 주장을 내세우고 남보다 앞서 나서는 등의 열성적인 면을 보여 주었다. 본문에서도 역시 베드로는 다른 동료 제자들이 주저하며 마음속으로 베드로와 동일한 신앙 고백을 준비하고 있는 순간에, 담대하고도 신속하게 천금(千金)갈은 신앙 고백을 하게 된다. 한편 '시몬'이란 이름은 히브리어 본명으로서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는 뜻이 있다(4:18). 그런데 예수께서는 이 신앙고백 사건을 통해 시몬에게 '게바'(수리아 명칭으로서 반석이라는 뜻), 곧 '베드로'(게바와 동일한 의미어인 헬라어 명칭)란 이름을 새로이 부여하셨다. 한편 그는 예수의 십자가 사건 때까지 자신의 인간적 열성을 나타냄으로써 게속 실패했으나(23절;17:4, 5;26:31-35, 69-75),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고 성령이 임하신 오순절 이후에는 제자들 가운데서 항상 우선이 되어주님의 복음을 증거하며(행 2:14;3:3-7;4:8;8:14)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같은 역할을 하였다(갈 2:9).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 주 예수에 대한 고백 중 가장 완벽한 것 가운데 하나로서 기독교 신조(信條)의 핵심을 이른다. 이 고백 가운데에 예수의 인성('그리스도')과 신성('하나님의 아들'), 에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 예수의 본질적 신분 등이 담겨 있다. 물론 베드로의 이 고백은 전혀 새롭고 획기적인 내용이 아니라, 일전에 몇몇 제자들(요 1:41, 49)과 가버나움에서 무리가 예수를 떠나갈 때 베드로에 의해 고백되어진 것이다(요 6:69). 그러나 예수의 초기 사역 당시(4장) 예수의 메시야되심을 단순히 정치적 측면에서 받아 들이려 했던 대중들의 기대를 회피하시기 위해 그러한 신앙 고백을 크게 부각시키지 않으셨다. 하지만 이제 메시야의 신분과 사역의 특성 및 목적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오류들(14절)을 바로 잡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바른 신앙 고백 요구하시게 된 것이다. 여기에서 '주(* ,쉬)는 단순히 2인칭 대명사인 '당신'을 뜻한다. 그리고 '그리스도'란 히브리어(* , 마쉬아흐)를 헬라어로 번역한 것으로서 '기름부음 받은 자'란 뜻이다. 이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으신 분으로서 하나님의 일을 하시여 하나님의 종이시라는 뜻이다. 이는 그분의 인성(人性)을 대변해 주는 말이기도 하다(21절;20:28;눅 24:7). 그런데 구약에서 하나님의 종으로서 기름부음을 받은 자들은 제사장, 왕, 선지자들이었다(출29:29;30:30;삼상 16:13;26:11;왕상 19:16;시 89:20;사 45:1). 따라서 예수께서는 대제사장. 왕, 선지자의 역할을 감당하실 참 메시야이셨던 것이다(1:1;눅 1:32, 33;행 3:22, 23;히 4:15;5:6,10). 한편 본문에는 '그리스도'라는 말과 '하나님의 아들이란 말 앞에 관사 '호'(* )가 붙어 있는데 이는 예수, 바로 그분이 일반의기름부음 받은 자들을 능가하는 오랫동안 대망해 오던 구원자, 곧 메시야가 되심을 힘주어 강조하는 표현임과 동시에 그분의 절대 유일성과 초월성을 강조해 주는 표현이다. 이와 더불어 '살아계신'(* , 토 조온)이란 '내재적 생명이 충만하신', '영원히 생존하시는' 등으로 번역될 수 있다. 실로 이러한 표현은 오직 영원자존적 존재이신 하나님께만 사용될 수 있는 표현으로(요 5:26;살전 1:9) 과거와 더불어 지금과 미래에도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신적 탁월성을 두드러지게 나타내 보이고 있다. 또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 그분의 신성(神仙)을 강조하는 말로서그분은

=====16:17
바요나 시몬아 - 여기서 '비'(* ,바르)는 아람어로서 '아들'을 뜻하며, '요나'(* )는 시몬베드로의 아버지로히브리어 '요하나'(* , John, 요한으로도 부름, 요 1:42)의 축소형이며, '비둘기'라는 뜻이다. 그리고 '시몬'(* )은 베드로의본명으로서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는 뜻이다. 이처럼 예수께서 베드로의 원래의 이름을 부르신 것, 즉 새 이름인 '베드로'(요 1:42)라 부르시지 않고 '바요나 시몬아'라고 부르신 것은 뒤의 말씀과 연관시켜 볼 때 매우 의미가 크다 하겠다. 실로 그의 천연적인 신분인 갈릴리 호수의 어부로서의 시몬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참다운 신앙고백을 한 것은 자신의 지혜, 신분, 지식 등과 같은 탁월성 등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였다. 예수께서는 바로 이러한 사실을 분명히 깨닫게 하기 위해 그의 옛 이름을 그의 아비의 이름과 더불어 사용하신 것이다.
네가 복이 있도다 - 신약성경에서 유일회적(唯一回的)으로 한 개인에게 국한시켜 사용된 이 말은 단순한 칭찬의 정도를 뛰어 넘어 탁월한 하나님의 축복의 선언이다. 한편 베드로가 받은 축복의 종류는 물질적인 것에 국한되지 않고 거룩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친히 특별한 계시의 은총을 누린 것이었다(Pulpit Commentary). 이러한 사실은 개역 성경에는 번역되지 않았으나 헬라어 원문이는 바로 뒤이어지는 말 앞에 축복의 이유를 밝히는 '호티'(* , 왜냐하면, for)가 첨가되어 있다는 점에서 더욱 확실해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 여기서 '알게 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포칼류토'(* )는 '계시하다', '보여주다'는 뜻으로서 하나님께서 자신과 자신의 뜻을 스스로 알리실 때 사용되는 용어이다. 실로 하나님의 이러한 계시의 산물(産物)로서의 영적지각 능련이 있을 때에만 인간은 온건한 지식을 소유할 수 있다.
헐육(* , 사르크스 카이 하이마) - 이를 직역하면 '육신과 피'를 의미한다. 이는 타락한 본성을 가진 죄인된 인간 그 자체와 그의 본성적인 재능, 지식, 지혜 등을 뜻한다(갈 1:16;엡 6:12;히 2:14). 베드로의 이러한 천연성으로서는 도무지 영적 진리를 간과(看過)할 수 없어 것이다. 즉 타락한 이성, 거듭나지 못한 분별력으로는 복음의 비밀을 조금도 이해할 수 없었다.
하늘에 계신 네 아버지시니라 - 이는 베드로의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앙 고백의 대구이자 그가 말한 고백의 진정성을 인정하신 것이다. 여하튼 영적 진리는 성부 하나님께서 제공하신 영적 능력의 소지자에게 한정적(限定的)으로 드러나는 것이다(고전 2:11-14). 이러한 영적 분별력이야말로 베드로가 받은 '복'의 핵심적 요소이다. 한편 예수께서는 성삼위 하나님의 본질적 관계성 및 그 각 위의 상호 교호적(interaction)인 인격성 그리고 각 위(位) 사이의 뜨거운 사랑의 관계를 나타내는 말로서 '내 아버지'란 호칭을 사용하셨다(11:27;20:23:26:39, 42). 그리고 성부 하나님의 초월적 신분 강조키 위해 '하늘이 계신'이란 말로 수식하고 있다(5:34).

=====16:18
또 내가 네에게 이르노니(* ,카고 데 소이 레고) -이를 직역 하면 '또한 나도 네게 이르노니'이다. 이는 성부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주는 그리스도요...'라고 바른 신앙 고백을 하거나 하신 것처럼 나도 베드로 너에게 한 가지진리를 말하겠노라는 의미로 이해할수 있다McNel).
너는 베드로라 - '베드로'란 헬라어로 '페트로스'(* )로서 '돌' 또는 '반석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돌멩이, 돌덩이' 등을 의미한다. 이는 아람어 '게바'(요 1:42;고전 15:5;갈 1:18)에 해당하며, 이 '게바'는 예수 당시에 널리 통용되던 이름이다(4:18). 예수께서는 일전에 그를 향해 이같은 이름을 주실 것이라 예언하셨는데(요 1:42), 이제 그것을 실현하시고 계신 것이다.
내가 이 반석(盤石) 위에 - 앞에 제시된 '페트로스'가 남성형 고유 명사인데 비해 여기의 '반석'(* , 페트라)은 여성형 일반명사로서 '바위 덩어리'를 의미한다. 이러한 언어적 차이 때문에 베드로와, 예수께서 자신의 교회를 세우시는 반석을 동일시하려는 것을 전면 부정하는 주장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한편 본문의 '반석'이 의미하는 바에 대한 여러 견해들을 살펴보면 (1) 베드로는 단순히 '돌'이라는 의미에 지나지 않고 베드로 자신이 중언한 바처럼 예수께서 친히 '반석'이 되신다는(벧전 2:5-8)견해이다(Augustine, Gander, Lenski, Luther). 이는 예수께서 교회를 세우는 자도 되는 동시에 교회의 기초도 된다는 논리적 모순 때문에 받아들이기 어렵다 (2) 로마 천주교회의 주장처럼 이 말이 교황의 수장권(收藏權)의 기초를 마련한다는 견해이다(H.M. Riggle, J. Gibbons). 즉 볘드로는 예수로부터 직접 천국 열쇠를 부여받은 교회의 기초석으로서 베드로의 후계자가 곧 모든 교회와 천국의 전권을 위임받는다고 한다. 그러나 유한하고 유흠(有欠)한(23절) 자가 영원한 교회의 기초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와(고전 3:11) 모든 신앙 고백자의 기초 위에 세워진다(갈 2:9;엡 2:29;벧전 2:5). (3) 계시된 진리, 곧 베드로가 증거하는 신앙 고백을 뜻한다(Allen, Calvin, Jerome, Clarke, Robinson). (4) 로마 카톨릭의 극단적인 해석에 반대하는 개신교의 반발이 아니라면 베드로 그 자체로 보는 것도 좋다는 견해이다(Bruce, Plummer). 이 견해를 뒷받침하는 것으로, 초기 헬라어에서 '페트로스'와 '페라'가 각각의 뜻으로 사용되었으나, 주로 시어(詩語)에 국한되었다는 점이다. 더욱이 이 헬라어의 기초가 되는 아람어는 두 경우 모두 '게바'로 사용되고 있다. 즉 '너는 게바라, 내가 이 게바 위에...'로 표현된다. 그 이유는 이 단어가 이름으로도,또한 반석이라는 의미로도 쓰였기 때문이다. 또한 아람어와 같은 어원인 시리아어로 기록된 '페쉬타 사본'(Peshhitta)에는 이 두 단어가 두 구절 속에서 구분없이 사용되고 있다. 본 주석은 (3), (4)의 견해를 절충한 것을 가장 타당한 것으로 보고 있다. 한편 더 자세한 내용은 본장 16-19절 강해 '베드로의 신앙고백 해석'부분을 참조하라.
내 교회 - 이는 헬라어로 '무 텐 여클레시아'(* , the church of me)로서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교회를 말한다. 이것은 마치 하와가 아담에게 나와서 다시 아담에게 돌아가 둘이 한 몸이 되었듯이,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산출되어서 다시 몸된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에게 예속될 것을 시사하는 표현으로 볼 수 있다(창 2:20-25;엡 5:22-32). 한편 여기에서 '교회'란 '에크'(* , ...로부터)와 칼레오'(* , 부르다)의 합성어로서 교회가 세상에서부터 하나님의 나라 가운데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로 구성되었음을 암시한다(요 1:16,19). 한편 70인역(LXX)의 '에클레시아'는 '집회', '회의', '모임' 등의 뜻인 히브리어 '카할'(* )을 번역한 것으로, 이 히브리어 명사는 본래 여러 종류의 집회들과 관련되어 사용되었으나(Munchen), 점차 하나님의 백성, 곧 여호와의 성별된 무이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어졌다. 그런데 이 히브리어 '카할'은 매우 광의적(廣義的)으로 사용되어서 반드시 '에클레시아'로만 번역되지는 않는다. 예컨대 70인역(LXX)에서 이 단어는 가끔 '회당', '군중' 등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한편 70인역에서 일반적으로 '회당'에 한정되어 번역되는 용어로는 '에다'(* , 연합된 회중이란 뜻)라는 단어이다. 이 단어는 70인역에서 '에클레시아'로 번역된 적이 없다. 따라서 본문에 '에클레시아'가 사용된 것은 매우 적절하다. 왜냐하면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제도, 조직, 예배 형태 및 회당에 대한 강조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본문의 '에클레시아'는 구약의 '카할'과 같이 넓은 의미로 쓰여진 것이다. 사실 뒤에 이어지는 '세운다'는 개념 조차도 구약에 연유된 것이다(룻 4:11;삼하 7:13;시 28:5;118:22;렘 1:10;암 9:11). 이와 관련해서 래드(G. E. Ladd)는 자기의 에클레시아를 세우겠다는 예수의 선언은 예수에 의해 확립된 공동 단체가 구약의 이스라엘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관계임을 시사해준다. 바로 이 공동 단체가 장차 새계시와 연관을 맺게 되는 '믿음의 눈을 지닌 신실한 남은 자로 간주된다'고 주장했다. 예수는 이제 자신이 메시야로 인정되자, 자기의 에클레시아, 자기의 백성, 곧 자기의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선언하신 것이다. 한편 본문의 구절은 예수께서 당신의 메시야직을 은연(隱然) 중에 드러내고 있다는데 그 중요점이 있다. 실로 여호와의 백성은 이제 이 땅에 오시고, 신앙
통치는 메시야의 백성을 불러내어 구분하기 때문이다. 메시야의 나라는 메시야에 의해 세워지고, 그 백성은 바로 그곳에 모이게 된다. 또한 예수의 에클레시아는 종말론적으로 완성될 최종의 신앙 공동체를 지향하는 역사에 나타난 전초 기지이다. 실로 그 나라가 최종 완성될 때 메시야의 백성은 그 나라가 제공할 수 있는 최고의 풍성한 축복을 얻게 될 것이다. 따라서 그 어떤 세력도 메시야가 친히 세우신 교회를 제거할 수 없으며, 또한 그것이 완성되지 못하도록 방해할 수 없는 것이다.
서 세우리니(* ,오이코도메소) - 헬라어 원문에서는 '내가 세울 것이다'라는 미래형을 사용하고 있다. 이는 예수께서 베드로가 행한 신앙 고백의 실체 위에 장차 교회를 세우실 것을 암시한다. 사실 교회는 두 가지 측면에서의 기원을 가진다. (1) 근원적인 기원. 하나님의 영원하신 작정 안에는 이미 창세전부터 하나님 자신의 은헤를 나타내기 위하여 교회 조직이 이루어졌다(엡 1:3-6).(2) 역사적 기원. 그리스도의 예언(8절)대로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으로 신약 교회가 성립되었다(행 2:2-4;4:32). 구약에 이미 '교회'라 불리우는 광야의 이스라엘 무리가 있었지만(행 7:38) 이는 장차 주님께서 세우실 교회의 예표(豫表)였고, 실제는 주넘께서 당신의 교회를 세우신 것은 하나님의 성령이 성도들 위에 임하신 오순절 때이다. 하나님의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근거하여 새생명으로 거듭난 성도들 위에 임하셔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로 연합하여 주님의 몸, 즉 교회가 되게 하셨다(행 2:1-4;4:32;고전 12:13).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 여기에서 '음부'란 헬라어로 '하데스'(* )로서 '지하 세계, '죽은 자의 거처' 등의 의미를 지닌다. 이는 히브리어로 선인과 악인이 구분없이 들어가는 '죽은 자의 영역'이란 뜻의 '스올'(* )과 같은 뜻으로 사용되었다. 히브리인들의 전승에 따르면 이곳은 어둡고 소외된 장소로서 매우 높고 단단한 성벽과 문으로 둘러처져 있기 때문에 인간을 한 번 받아들이면 다시는 내어보내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권세'(* , 퓔라이)란 문자적으로 '대문'이란 뜻이다. '음부의 권세'란 '음부의 문'(gate of Hades)이라는 의미로서, 음부로 들어가는 문에는 항상 죽음이 따르게 된다. 따라서 '음부의 권세' 및 이와 유사한 표현들은 정경(욥 17:16;38:17;시 9:13;107:18;사 38:10)이나, 유대인의 외경에서(솔로몬의 지혜서 16:13;마카비 3서 5:51;솔로몬 시가서 16:2), 또는 이방 문서에서도(Homer, Iliad 9. 312;Odyssey 11. 277; a Schylus Agam 1291;Euripedes Hecuba 1) 자주 나타나는데, 쓰일 때마다 이 말은 사망과 임종을 의미한다. 따라서 RSV는 본문의 구절을 '사망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the powers of death shall not prevail)고 번역하고 있다. 한편 여기서 '이기지 못하리라'를 나타내는 '카티스퀴수'(* )은 '대항하여 힘을 겨루다'는 뜻의 '카티스퀴오'(* )의 직설법 미래 3인칭 형태로서 결국 죽음의 세력이 교회의 한 부분도 이길 수 없거나, 비록 잠시 이긴다 하더라도 곧 패망하여 영원히 굴복할 것이라는 강한 암시(暗示)를 제공하고 있다. 실로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설립된 그리스도의 교회는 육체적 사망의 권세 아래 놓일 수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문'을 깨뜨리시고 죽음의 정복자로서(롬 6:9;계 1:18) 군림하시기 때문이다(Alford). 죽음을 물리치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히 생존하셔서 모든 성도들의 부활의 보증(保證)이 되실 뿐 아니라 교회의 영속성의 영원한 지지자(支持者)가 되신다(고전 15:50-58).

=====16:19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 본문은 사 22:22에서 유래한 내용으로서 그곳에는 다욋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야의 절대 주권을 예언하고 있다(계 3:7). 한편 여기 '열쇠'는 청지기로 임명된 자에게 주어지는 것으로서 창고관리에 대한 전권(全權)을 위임하는 표식, 문 열고 닫을 수 있는 권위를 상징한다. 그리고 '천국'은 지금까지 이야기되고 있는 교회, 곧 광의적인 의미에서의 그리스도 교회를 가리킨다. 실로 예수께서는 바른 신앙 고백을 한 베드로에게 장차 세워질 교회에서 어떤 특별한 권한을 부여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약속의 대상에 대해서 몇 가지 대별(大別)되는 견해가 있다. (1) 로마 카톨릭 교회의 주장으로서 베드로 한 사람에게 그 약속이 주어졌고, 역사적으로 그의 후계자인 교황에게 그 권한이 계속 부여되고 있다는 견해이다. (2) 그리스도의 재림과 연관하여 천년 왕국 기간 동안 이 세상을 통치할 성도들을 가리킨다는 견해이다(A.J. McClain).(3) 특히 그 중에서도 베드로에게 더욱 많은 권한이 주어졌다는 견해이다(Plummer). (4) 12사도를 대표하는 베드로와 12사도,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 교회 전체를 가리킨다는 견해이다(Wycliffe, Hendriksen). 이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 왜냐하면 천국(교회)은 궁극적으로 유대인들(행 2:14)과 이방인들(행 10:1-11;15:7, 14) 모두에게 개방되어 있기 때문이다(28:18-20). 그렇다면 '천국의 열쇠'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 그것은 베드로로 대표되는 교회가 계시에 의혜 점차 깨달아지는 천국 복음을 선포함으로써(4:23) 상당수의 사람들에게는 천국을 열어 주지만, 상당수의 사람들에게는 천국의 문을 닫아버리는 것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사도행전에는 이러한 사실이 성취되는 것을 보게 되는데(행 2:14-39;3:11-26;4:11, 12:8:20-23) 바로 이런 방법으로 주께서는 교회에 구원 받은 자들을 더하게 하시고(행 2:45), 자기 교회를 강건하게 세우시는 것이다(18절). 이와 더불어 '천국의 열쇠'가 매고 풀 수 있는 통제권이 따르는 것으로 보아 공개적이고도 심각한 범죄를 범한 자에게 교회를 통한 천국의 축복을 금할 수 있는 치리 및 입법 통제권을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다(행 8:21;고전 5:1-13). 실로 이 땅의 교회에서 치리(18:17;딛 3:10)는 천국의 통제권과 긴밀한 연관을 지닌다(8:12). 이로써 원소유자이신 예수께서 인간에게 위탁하신 '천국의 열쇠'는 사도들을 위시한 이 땅
비들의 '묶은'것들을 '푼다'는 말을 통해 두 학파간의 차이를 설명하기도 한다. 여하튼 본문의 '풀고', '맨다'는 말은 여러 방법으로 해석되고 있다. (1) 로마 카톨릭 교회는 이를 베드로의 수장권(首長權)과 절대적 권한을 가리킨다고 한다. (2) 특별히 죄를 면제하는 권한을 가리킬킨다는 견해이다. (3) 단순히 교회에서 행동의 규범, 곧 허락과 금지를 설정할 수 있다는 견해이다.(4)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약속하신 교회 치리권과 그의 권위의 탁월함을 근거로 해서 그가 제정하는 규칙과 그의 사도적 권위에 합당하게 권면하고 실행한 내용들이 하늘에서도 인정되고 비준(比準)될 것이라는 견해이다(Josephus). 물론 이 견해는 베드로의 권세를 이을 후계자가 없다는 사실을 전제할 때, 그리고 베드로는 교회의 기초요, 처음으로 놓인 돌이라는 사실을 받아 들일 때 비로소 인정될 수 있는 견해이다. 결국 베드로는 '구원사적 수위직'(salvation historical primacy)을 차지하게 된 것이며, 그를 기반으로 다른 사람들이 놓여지고 또한 매고, 푸는 권한을 행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계급 제도나 사제주의 및 성직자의 독재 개념은 본문과는 관련이 없는 것이다. 한편 메시야의 종말론적 백성인 교회가 천국의 열쇠, 곧 매고 푸는 일을 감당해야 한다면, 그 일의 하나는 앞에 언급된 대로 진리 선포와 사도적 권위예 의한 권위와 권면 이외에 신앙 고백으로 교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에 대한 권징(權懲) 일것이다. 사실 초대 교회사를 추적해 보면 분명 권징은 사도들, 장로들, 나아가서 온 교회의 특수한 임무임을 알 수 있다(고전 5:1-13;고후 13:10;딛 2:15;3:10 ,11). 더욱이 권징은 그리스도에 대한 철저한 신앙 고백을 근거하였을 뿐 아니라 도래할 메시야 왕국을 대망하는 무리들로 구성된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을 수행하고, 스스로의 거룩을 유지하기 위해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사실 교회가 담당한 진리의 참된 선포는 이 권징을 전제한 것이며 또한 이를 수반해야만 하는 것이다.

=====16:20
이에(* , 토테), '그리고 나서', 그 때에'(then)를 의미한다, 이는 시각적인 연속성을 강조한 말로서 베드로의 신앙 고백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의 말씀이 있은 바로 직후라는 의미를 지닌다. 제자들을 경계하사...이르지 말라 하시니라 - 예수께서 '그리스도', 곧 메시야라는 사실이 베드로에 의해 고백되자 예수께서 즉각 함구령(緘口令)을 내리신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1) 제자들은 예수에 대한 믿음을 가진 자들로서 그들은 스승이 스스로를나타내신 방법과 한계성 안에 머물러야만 했기 때문이다. 사실 사람들을 회심케 하고 천국 시민으로 만드는 결정적 요소는 이같은 예수에 대한 믿음과 그분의 뜻에 절대 순복(順服)하는 것이다. (2) 제자들의 욕망에 찬 생각들을 잠재우시기 위해서였다. 비록 당시 예수께 대한 신앙 고백이 되어졌다 하더라도 제자들은 아직 예수의 고난받는 메시야 상(像)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메시야 도래의 선포자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기에는 여전히 부족했다. 곧 이어지는 베드로의 실수는(22절) 이같은 사실을 여실히 증명해 준다. 실로 제자들은 예수의 십자가, 부활 사건을 직접 목격하고서야 비로소 예수의 사역의 본질과 그분이 가르치신 천국 개념을 바르게 이해하고 전파할 수 있었다. (3)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당시 유대인들은 단순히 육신적인 필요와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각종 이적과 기사를 보고 예수를 그들의 왕으로 삼으려 했다(요 6:14, 15). 실로 그들은 예수께서 이땅에 오신 목적도, 하나님의 뜻과 경륜(經綸)도 알지 못한 채 오히려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방해하는 격이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구약에서 예시된 메시야를 그의 정치적인 욕구, 즉 현재 외부(로마)의 압제(壓制)로부터 그들을 해방시켜줄 정치적 혁명 세력으로 보았던 것이다(요 12:34;행 1:6). 이런 관념을 가지고 있는 자들에게 예수께서 당신이 '그리스도'시라는 것을 알리실 경우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셔야 할 당신의 사역의 노정에 더웅 더 혼선만 빚을 우려가 있기 때문에 당신 자신에 대해서 함구령을 내리신 것이다(막 3:12).

=====16:21
이때로부터 - 예수께서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되어지시고,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약속하신 이후부터라는 말씀이다. 한편 이 표현은 여러 학자들(Lohmeyer, Stonehouse, kingsberry)이 주장하는 것처럼 본서 가운데 중요한 전환점을 이루는 두 부분(4:17)가운데 한 곳이 아니라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 사역의 일대 변화를 이루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후부터 예수께서는 당신의 십자가 수난을 공개적으로 거듭 역설(力說) 하심으로써(17:12, 22, 23;20:19;26:12) 제자들로 하여금 '그매'를 준비하게 하셨다.
예루살램에 올라가 -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증심이요, 구약 율법 교육과 각종 종교적 의식의 중심지이다. 율법의 완성으로서 오신 예수께서는 바로 이곳이 당신의 수난의 현장이 될 것엄을 언급하고 계신 것이다. 한편 예수께서 당신의 수난이 준비되고 있는 에루살렘에 욜라 가셔야만 했던 것은 그것이 구약 선지자들의 예언한 바였을 뿐아니라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이다(26:54;눅 24:26, 46). 즉 예수께서는 예비된 고난의 잔을 능등적으로 수용하심으로써 인류의 모든 죄문제를 해결하시고 인류의 구원자요 소망이 되실것이었다(막 10:45;요 1:29;고후 5:21).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 이들은 산헤드린(sanhedrin) 공회를 구성하고 있는 세 부류의 무리들이다(2:4). 그런데 마태가 특별히 이들 각각을 여기에 언급한 데는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다고 보는 학자들이 있다. 즉 '장로듸' 이란 유대의 열두제자들 가운데에서 재덕(才德)을 겸비하고 존경받는 행정 지도자들이며, '대제사장들'이란 일반적으로 구약 솔로몬 시대에 대제사장으로서 나오는 '사독'(왕상 2:35)의 후예들로서 사두개인들 가운데서 배출되어지는 선민 이스라엘의 종교적 최고 지도자들이었고, '서기관들'이란 '율법사'(22:35;눈 7:30;10:25;11:45, 46, 52) 또는 '교법사'(눅 5:17; 행 5:34)로 불리우는 자들로서 율법 보존과 백성의 종교교육을 담당했던 무리들이다. 따라서 이 세 부류의 공회원들은 이스라엘의 사회, 종교를 대변하는 무리들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이들이 예수의 수난과 죽음을 마련했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정치, 사회, 종교계 전체가 예수를 배격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Nosgen).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야 -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가장 핵심적인 사역의 내용을 일컫는 말이다. 실로 예수께서는 인류의 죄를 대속키 위해 백성 대신 죽음의 형벌을 맛보셔야만 했다. 그러나 죽으심 그 자체가 당신의 최종 목표가 아니었다. 만약 성경의 복음이 예수의 대속 희생에서 그쳤다면 그것은 사랑과 희생의 복음은 될 수 있었을지 모르나 구원과 승리의 복음은 못되었을 것이다. 한편 여기서 '제 삼 일에'란 '사흘반에'(막 8:31)란 표현과 동일한 것으로서 반드시 72시간(24*3) 꽉찬 때라는 의미보다는 오혀려 하루 중 일부를 하루로 계산하여(Hendriksen) 이뤄지는 사흘째 되는 날로보아야 할 것이다.
비로소(* , 에릍사토) - 이는 '시작하다'는 뜻의 '아르코'(* )의 부정과거로 예수 생애가 새로운 국면(局面)에 접어들게 되었음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16:22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 예수를 위한 베드로의 인간적인 열정을 잘 보여준다. 특별히 '붙들고'(* , 프로스라보메노스)란 '프로스'(* , 옆으로 )와 '람바노'(* , 손에 취하다 , 사로잡다 )의 합성어의 중간태 분사로서 마치 자기가 그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될 사명이 있는 것처럼 강압적으로 붙잡고 강권하는 모습을 나타내준다. 한편 본문과 평행을 이루는 막8:32의 수리아 시내 사본(Syriac Sinaitic)에는 본 장면을 '그가 마치 예수를 불쌍히 여기기나 하듯이'라고 표현하여 베드로의 인간적이며 정적(靜的)인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본문에서 '간하여'(* , 에피티마오)란 '꾸짖다', '견책하다', '강력히 책망하다'(rebuke) 등의 뜻을 갖는다. 이는 베드로가 올바른 신앙 고백을 한 후 예수의 수난과 죽으심에 대한 말씀을 듣자 책망조로 예수의 뜻을 가로막고, 어떻게든 그분의 뜻을 돌이키려고 훈육(訓育)한 하실을 보여준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 히레오스 소이 퀴리에) - 본문은 헬라어 '히레오스'를 어떻게 번역하느냐에 따라 두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먼저'히레오스'를 '호의를 가진', '자비로운', '은혜로운' 등으로 보아 '주여 이 일이 당신에게 정녕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자비를 베푸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는 '주여, 당신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를 빕니다'(Gracious to you, Lord)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이보다 '히레오스'가 히브키어 '하릴라'(* , 결코...않다)와 같은 의미로 쓰였을 가능성이 더 많다. 이는 70인역(LXX)에서흔히 쓰는 용법으로서, 누구와 맞서는 상황에서 '결코'(never), '그 일이 당신과는 전혀 관계 없을 것입니다', '하나넘이 금하실 것입니다' 등의 의미를 지닌다. 그렇다면 여기서 베드로는 메시야되신 예수를 인류구속을 위한 고난의 종(사 53장)으로 이해하는 데는 완전히 실패하고 만것이다(Wycliffe). 결국 베드로의 이 말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자면 예수에 대한 열정적이고도 직선적인 사랑을 나타낸 것이고, 부정적으로 보자면 하나님의 뜻을 철저히 왜곡하고 구속사의 큰 흐름을 거스리는 인간적인 발상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구속 사역의 참의미와 영원한 메시야 왕국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고 혈기방자한 인간의 감정을 내세을 때 사단의 도구가 되기 때문이다. 이 일이 결코...미치지 아니하리이다(* , 우메 에스타이 소이 투토) - 이틀 직역하면 '이일이 결코 당신에게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this never shall be to you)이다. 이는 마치 베드로 자신이 그 일의 발생을 미연(未然)에 방지할 수 있는 자인 것처럼 단호한 부정의 의지를 피력(披瀝)한 것이다.

=====16: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 혹자는(B.F.Meyer) 이를 '예수께서 베드로를 외면하시며(등을 돌리시며)'라고 해석하기도 하나 문맥 전개상 조화되기 어렵다. 오히려 예수께서 베드로를 꾸짖기 위해 그를 향해 돌아서신 것으로 보는 것이 더욱 합당하다. 예수께서는 다음과 갈은 세 가지의 호된 비난을 하신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 가라 - 이 명령은 예수께서 사단과 직접 대면(對面)하셨을 때 이미 하신 바 있다(4:10). 한편 이는 베드로 자신이 사단이라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가 사단에게 이용받은 도구, 즉 사단이 베드로를 통하여 예수를 넘어뜨리기 위하여 가까이 왔음을뜻한다. 이와 같이 사단은 살아있는 생물, 특히 사람들을 매개체(媒介體)로 자신이 목적하는 바에 접근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창 3:1-5;요 13:27;행 5:3;계 12:9). 한편 이 꾸짖음은 단순히 사단의 도구가 된 베드로가 예수의 시야로부터 벗어나야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의 헛된 생각이 예수가 추구하는 길에 놓인 장애물이 되므로 그 길에서 즉시 제거되어야 함을 뜻한다. 따라서 이는 베드로로 하여금 제자의 신분으로 돌아가라는 요구로 볼 수 있는데, 사실 제자란 따르는 존재이지 주의뜻을 거스리고, 이끄는 자가 아닌 것이다(막 1:17, 20;8:34).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 스칸다론 무 에이) - 이를 직역하면 '너는 나에게 장애물(방해물)이다'(you are an offense to me) 라는 뜻이다. 이것은 사단이 예수를 결코 넘어뜨리게 할 수는 없으나 예수의 사역을 방해하고 훼방하기 위해서 베드로를 통해서 교묘하게 덫을 놓고 있음을 암시한다. 사실 조금전만해도 예수께서는 베드로를 '반석'이라 부르셨다. 그러나 사단의 도구로 전락(轉落)한 지금 그를 다른 종류의 '반석', 곧 장애물이라 부르고 있는 것이다(벧전 2:8). 마치 사단이 예수에게 고난없는 영광과 왕권을 제공하려 했던 것처럼 메시야가승리자요 정복자로 오실 것이라는 당시 사람들의 기대감을 그대로 지닌 채 이제 사단과 똑같은 방해 요소로 등장하고만 것이다. 한편 베드로가 오해함으로써 예수에게 넘어지는 자가 되었던 그 고난의 메시야 개념은 예수의 부활 후에는 다른 유대인들로 하여금 거리끼게 하는 것이 되고 만다(고전 1:23). 하나님의 일...사람의 일 - 베드로는 하나님의 일, 즉 하나님께서 이미 계획하시고 섭리한 바대로 예수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수난받고 죽어야 한다는 것(21절)을 생각지 않고, 사람의 일, 곧 예수가 수난의 현장에 가면 안된다는 생각에 집착(執着)했던 것이다. 실로 그는 철저히 인간의 이성에 근거하여 세속적 관점에서 예수의 수난 사건을 평가함으로 써 결국 예수에게 크나큰 수치와 장애를 안겨 주고 말았다(Chrysostom).

=====16:24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 여기서 '따른다'는 것은 스숭의 삶과 가르침에 온전히 순복하는 참 제자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이러한 참된 제자의 요건을 전제한 것은 당신의 임박한 수난과 마찬가지로 제자들도 그와 유사한 수난과 고초를 당하게 될 것을 익히 아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직 당신을 따르기에는 너무 미흡한 제자들에게 당신을 전적으로 순종하며 수난당할 각오를 가져야 한다는 사실을 힘주어 가르치셨던 것이다. 여기서 예수를 따르는 데는 내적으로는 자기 부인과 외적으로는 역경 가운데서의 적극적 순종이 수반되어야 할다.
자기를 부인하고 - 이는 예수를 따르는 자에게 요구되는 소극적 측면으로서 자기의 이기적 욕망과 생각과 주장, 그리고 부패한 옛자아, 옛사람을 철두철미 굴복시키는 것을 말한다. 사실 아담의 타락 이후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서 육신(* , 사르크스)이 타락한 본성을 가진 죄인됨 인간 그 자체(롬 7:14,18)가 됨으로써 그의 이성, 감정, 의지 등이 완전히 부패되었다(참조, 렘 17:9;롬 1:18-32). 바로 이러한 본성적 존재로서는 예수의 제자로 결코 따라 나설 수 없다. 한편 이러한 제자의 요건을 망각(妄却)했던 베드로는 훗날 자기를 부인하는 대신 예수를 부인하고야 만다.
자기 십자가 - 당시 로마의 지배 아래 살던 팔레스틴의 유대인이라면 십자가 형벌을 선고받은 죄수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처형장까지 가야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27:32) 더불어 유다의 대반란으로 인해 수많은 십자가 형틀을 목격해야 했던 그들로서는(Josephus, 행 5:37) 죽음의 짐이요, 죽움의 상징인 십자가를 메라는 참의미가 무엇인지를 뼈 속 깊이 이해했을 것이다(10:38). 한편 예수께서 친히 골고다 험한 언덕에서 이 십자가 형을 당하신 이후 제자들에게 있어서 이 말은 단순한 상징을 넘어 엄숙한 제자로서의 결단의 조건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친히 십자가를 지신 일은 인류 구속의 대업을 완성하시는 유일, 단회적인 행위였으나 제자들의 십자가 짐은 예수를 따름에 있어서 생겨나는 다양하고도 지속적인 행위일 것이다, 비록 그렇다 할지라도 제자들은 각자의 십자가를 거룩한 기쁨과, 무한한 감격과 감사로, 그리고 가장 가치있는 일로 받아들이며 끝까지 지고 예수의 발자취를 좇아가야 할 것이다(빌 3:12-14).
좇을 것이니라(* , 아코루데이토) - 시제는 현재 명령형으 로서 한두 번 따라가는 정도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끊임없이 좇아오라는 강한 명령이다. 실로 주의 제자된 자는 억지로, 이따금씩 그분의 길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전심전력으로 부단한 노력과 헌신을 통해 계속 좇아가야만 한다.

=====16:25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 여기서 '목숨'(* , 프쉬케)이란 '영혼'(soul), '생명' 등을 의미한다. 이는 목숨이 단순히 육체적 생명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영혼 및 인격의 중심 또는 그 사람의 자아까지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사람이 자기 목숨을 구원코자 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하여 지나친 애착을 갖고 육체적 생명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거나(히 2:15) 인격적 자아, 곧 지성, 감정, 의지 등을 고수(固守) 보존함을 뜻한다. 이것은 결국 '자기를 부인하는' 것에 위배되는 일로서 종말에 얻게 될 영원한 생명을 상실(喪失)하게 한다. 따라서 이 구절은 종말론적이며 존재론적인 결단이 요구되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10:39).
제 목숨을 잃으면 채으리라 - 자아를 버리고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음에 넘기우면 그는 오히려 종말에 이르러 영원한 생명의 환희를 맛보게 될 것이다. 정녕 이 말씀을 하시는 예수께서 참생명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이 역설적 진리가 가능한 것이다(요 11:25, 26;15:1-7). 예수의 참제자는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일시적 생명을 단호히 버릴 줄 아는 신앙의 용기가 필요하다. 한편 본문예서 '찾으리라'는 말은 '구원하리라'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이는 단순히 무엇을 '얻는다'는 말보다 더욱 완전하고도 충만한 상태를 암시한 다. 즉 이 '구원'은 뜻밖의 구원을 의미한다(외경 지혜서 5:2).

=====16:26
얻고도...잃으면 - 여기에서 '잃으면'(* , 제미오데)이란 '해를입히다' '손해 보다'는 뜻의 '제미오오'(* )의 부정과거 가정법으로서 아직 성취되지는 않았지만 확실히 잃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예상하고 있는 표현이다. 이는는 '얻고도'(* , 케르데세)라는 말이 능동태롤 취하고 있는데 비해 수동태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 의미심장하다고 할 것이다, 즉 비로소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최상의 것을 얻는다 할지라도 필연적으로 하나님 안에서의 생명을 잃어버리게 된다면 어떤 유익이 있겠느냐는 역설적 대구인 것이다(눅 9:25).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 이는 인간 영혼(생명)의 최고 가치성과 유일성 및 단회적 생명성을 강조한 말이다. 즉 예수께서는 비록 세상에서 취할 수 있는 온갖 부와 명예는 잃고 난 뒤에도 다시 취할 수 있지만 인간의 영혼은 한 번 상실하면 도무지 회복할 수 없는 고귀한 것임을 강조하셨다. 이제 현존하는 모든 사람들은 '온 천하'냐 '자기 목숨'이냐 라는 종말른적 선택을 해야만 한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한 가치가 있는 것을 선택하기 원하신다(룻 1:16, 17;왕상 18:21;히 11:25).

=====16:27
인자가...오리니 - 예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선택하는 일에 모범을 보이셨을 뿐 아니라(24절;10:24, 25) 장차 있을 당선의 재림과 심판을 제시함으로써 제자들을 향하여 십자가를 지고 자신을 따르도록 다시 한 번 고무(鼓舞)시키셨다. 한편 여기서 예수와 더불어 오게 될 천사들은 예수의 사자(使者)들이며 종말적 추수 때에 심판의 대행자들(agents)로서 수종들 것이다(13:41;24:31;25:31, 32).
아버지의 영관으로(* , 엔 테 독세투 파트로스,아투루) - 이를 직역하면 '그의 아버지의 영광 안에서'이다. 예수께서는 이 땅에 거하실 때도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신'(골 2:9) 하나님의 본체이셨다. 마찬가지로 그분은 당신의 십자가(24절) 지시고 부활 승천하신 후 지금도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된 분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안에 거하신다. 그리고 그분은 이 땅에 다시 오실 때 '아버지의 영광으로' 재림하실 것이다. 여기서 '아버지의 영광으로'란 그분의 신성(神性)을 강조하는 말인 동시에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에게 부여하신 초월적 특권을 강조하는 말이다. 실로 예수께서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권한'을 가진 것이 바로 그분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오신 것에 대한 확실한 중거이다.
각 사람의 행한대로 갚으리라 - 여기에서 '행한'(* ,프랖시스)은 '행한 일(행 19:18), '기능', '활동'(롬 12:4) 등을 의미하는 것으로 각 개인에게 주어진 직임을 온전히 수행했는지(눅 12:47, 48;고전 3:12-14;계 20:13)에 관한 평가가 근거가 되는 실천적 삶을 일컫는다. 한편 비록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라 할지라도(엡 2:8) 각 개인은 종말에 이르러 하나님 앞에서 현세의 삶에 대해 평가를 받게 될 것이다(고후 5:9). 즉 예수께서는 형벌과 더불어 행위에 따른 적절한 상급을주실 터인데, 이는 각 사람의 일한 대로 주어지는 차등적(差等的)이며 조건적인 것이다(고전 3:8;딤후 4:6-8;계 22:12).

=====16:28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 본문은 인자, 곧 예수의 오심과 그분이 지닌 왕권의 실재성을 강조한 것으`로(Wycliffe) 임박한 예수 자신의 수난과 또한 각 제자들의 수난의 현장에서도 결코 두려움 없이 제자의 길을 걸어가도록 권면하신 말씀이다. 그런데 본문은 상당히 난해한 구절로 여겨져 왔으며, 그런 만큼 그 해석이 다양하다. (1) 막 9:1과 연관시켜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가 말할 때 이미 도래했었고, 제자들은 그것을 '보고'(깨닫고) 있었다는 것이다(C.H. Dodd). 그러나 이것은 '보다'는 말을 왜곡 해석함으로써 생겨난 견해이다. 더욱이 마태는 마가의 표현인 완료분사(* , 엘레뤼뒤이안, '이미 왔다')와는 달리 현재분사(* , 에르코메논)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본문 해석으로는 적절치 못하다. (2) 부활 사건 또는 오순절 사건을 가리킨다는 견해이다(Calvin, Grotius). 이 해석이 설득력이 있기는 하나 '여기 섰는 자들' 중에 죽기전에 설명하기에는 시간적으로나 문맥상으로 충분치 못하다. (3) A.D. 70년의 예루살렘 멸망으로 보기도 한다(Gaechter, Clarke, Westein). 그러나 바로 앞절(27절)이 예수의 졔림을 이야기 하고 있다는 점에서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4) 예수의 재림을 가리킨다고 본다(Allen). 그러나 예수의 선교는 세상 끝날까지 계속 되어야 하는 것으로(마28:20), '여기 섰는 자들'이 죽기 전에 그 선교적 사역이 완수되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급하다. (5) 얼마 후에 있을 변화산 사건을 예고한 것이라 본다(Bengel, Chrysostom, Hilary). 그러나 이 사건이 불과 얼마 후에 일어날 것이라면 예수께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진지한 언어를 사용하신 것이나 '여기 섰는 자들중 죽기 전에...'라는 말을 사용했다고 보기에는 너무 터니 없다. 더욱이 변화산상에서의 3제자에게 함구령을 내리신 것과 본문의 공개적 가르침과는 문맥상 일치를 이룰 수 없다(17:9). 이상의 견해들 보다 (6) 본문을 좀더 일반적 언급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 갈다. 즉 본문은 부활, 오순절 등의 특수한 사건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 부활 후 여러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왕권이 나타날 것을 가리킨다고 보는것이다. 그 예로 제자들의 급증과 이방인에게로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들 수 있다. 즉 '거기 섰던 자들'중 다수는 예수의 복음이 로마 제국 전역에 확산되는 것과 개종자들을 풍성히 거두어 들이는 수확의 현장을(9:37,38) 목격하였을 것이다. 특히 이러한 해석은 공관복
광스런 부활의 아침을 맞이하시고, 또한 오순절 성령을 통해 각 심령들에 영웡히 임재하셨을 뿐 아니라, 지금도 하늘 우편에 거하시며 당신의 교회를 친히 다스려가심으로써 당신의 약속을 온전히 성취해 가고 계신다(엡 1:19-23;빌 2:9;벧전 1:3;계 12:10).


본장에 이르러 예수의 자기 계시(self-revelation)는 결정적 전환점을 맞기에 이른
다. 다시 말해서 이전까지는 단 한번도 스스로 또 공개적으로 당신이 메시야이심을 드
러내신 적이 없는데, 본장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제자들에게 당신이 바로 구약에 약속
된 다윗왕권의 계승자요(사 9:6,7;마 1:1) 여자의 후손으로서 온 그 메시야이심을 밝
히드러내셨던 것이다. 물론 단락 강해에서 보다 더 구체적으로 상고하겠지만, 본장에
서 비로소 공개되기 시작한 메시야의 자기 계시의 내용을 크게 개략해 보면 다음과 같
다 : (1) 메시야로서의 신분 -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2) 메시야로서의 사역의 내
용 - 십자가 수난과 부활.
저자 마태에게 있어 본장에 수록된 메시야의 자기 공개 사건은, 예수께서 사역 초
기부터 밝히시지 않고 공생애가 거의 끝나갈 무렵에야 비로소 드러내셨다는 시기 문제
와 아울러 메시야가 왕이나 정복자의 모습으로 등장할 것이라는 통념과는 정반대로 고
난의 종으로서 오셨다는 역설적 내용 등 양자 모두가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따라서
독자인 오늘날의 우리도 여기에 주의를 집중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구체적 내용의
의미 분석은 각 문단 강해에서 다루기로 한다.
한편, 본장은 종교 지도자들과의 갈등 및 제자들에 대한 경계와 자기 공개 당시의
세상의 영적 상태를 암시하는 첫째 단락(1-12절)과, 베드로의 신앙 고백을 다루는 둘
째 단락(13-20절) 그리고 제1차 수난 예고에 관한 내용인 세째 단락(21-28절)으로 나
누어진다. 둘째 단락과 세째 단락은 일단 좁은 의미에서 두 단락으로 나뉘지만 메시야
의 자기 공개라는 넓은 측면에서는 하나로 묶어질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는 메시야로
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수난당하셨으며, 또한 수난 당하심으로 말미암아 메시야로
서의 사역을 완수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양자는 논리의 단위상 나눌 수는 있지만
실제적으로는 불가분벅 관계에 있다 하겠다.

1. 표적을 구하는 자와 떡을 구하는 자(16:1-12)
예수를 적대하던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이 표적을 구하고 예수의 제자들은 스승의
가슴속에 있는 원래의 뜻을 아직도 헤아리지 못한 채 계속 떡의 차원, 즉 이 세상의
물질적 차원만 생각하고 있음을 노출시킨 본문은 외면적으로는 바로 앞 단락의 7병2어
사건과 연결된 하나의 기사이다. 그러나 동시에 본 단락은 예수께서 메시야로서 당신
을 계시하실 당시 세상 사람들의 영적 상태를 보여주는 이른바 예수의 자기 계시의 영
적 배경이라고도 하겠다. 그렇지 않다면, 성경에 기록된 이외에도 수차 있었을 지도자
들과의 갈등 및 그들에 대한 예수의 경계를 굳이 그토록 중요한 예수의 자기 계시 사
건 앞에서 새삼 언급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 두 기사를 분석해보면 큰
은혜를 체험할 수 있다.
(1) 표적을 구한 종교 지도자들. 주지하다시피 이 내용은 12:38-45의 사건과 유사
하다.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예수는 갈등을 일으켜 왔는데, 그
중에 표적을 구하는 방법으로 예수를 시험한 것이 본서에 두 번 기록되어 있다. 어쟀
든 우리는, 13:54부터 점증되기 시작한 예수와 유대 지도자들 간의 갈등이 이 부분을
고비로 결정적 상태에 이르러 마침내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즉, 지금까지의 충돌은 그래도 회의와 질시 정도의 차원이었으나 본 단락 이후
부터는 적대시할 정도로 악화되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이후부터는 예수께 대한 종교
지도자들의 적의의 양상은 사뭇 고조되어 살해의 저의를 노출하기에 이르른다
(19:1-9;21:12-17,23-27;22:15-46;23:1-36;26:1-5). 그리하여 이 사건은 예수의 자기
계시 중 특히 수난(受難) 예고 부분과 연결되는 것이다.
(2) 떡을 구하는 자들. 떡을 매개로 한 예수와 제자들 간의 대화를 통해, 우리는
제자들의 관심사가 현세적 차원을 결코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 사
건도 외면적으로는 1-4절의 사건 이후 예수께서 종교 지도자들의 악영향을 누룩에 빗
대어 교훈한 것이다. 또 상당수의 주석이 본문을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경계의 교훈이
라는 축면에서만 생각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전체 문맥이라는 거시적(巨視
的)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본문의 의미를 떡의 누룩을 소재로 한 이 대화에서 은연중
에 발견할 수 있다. 즉, 제자들의 관심은 영적 차원의 문제보다 언제나 육적 차원의
문제에만 쏠려 있었으며, 예수는 이렇듯 암매(暗昧)한 영적 상태에 처한 제자들에게
자기 계시를 주셔야만 하였다는 안타까운 정황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마태의 숨은
뜻이었다. 어찌 이 당시의 제자들 뿐이겠는가. 예수께서 수난을 당하시고 승천하시어
복음의 본질과 실체가 만 천하에 드러난 현대에도 우리는 예수께 떡만을 구하는 어리
석음을 되풀이하는 경우가 흔한 것이다.

2. 신앙 고백을 통한 자기 계시(16:13-20)
본문은 예수께서 당신의 공생애를 중간 결산하고 이제 본격적으로 십자가 수난 사
건을 위하여 당신 스스로와 제자들을 준비시키기 시작하는 일대 전환점이다. 즉 이 부
분은 약 3년에 걸친 공생애의 결과를 베드로의 신앙 고백을 통하여 정리하시는 장면이
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존재를 정확히 고백한 베드로의 고백이 있은 직후 당신의 지상
사역의 절정이라할 수 있는 십자가 수난 사건을 뒤이어 예고하심으로써(21-28절) 당신
의 생애의 일대 전환점을 마련하신다. 그런데 이때는 시기적으로 십자가 수난 사건으
로부터 약 두달 전쯤의 일이다. 한편 이 부분에서 결과적으로 도출되는 결론은, 공생
애 기간 동안 제자들과 함께 동고동락(同苦同樂)하며 가르치던 예수가 바로 '그리스
도', 즉 메시야이시며, 또한 '하난님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전자가
기능적 측면에서 주께서 모든 인류에게 대해 가지시는 의미 또는 직분을 말하는 것이
고, 후자는 예수의 속성 또는 신분을 말하는 것이라 하겠다. 어쨌든 이러한 신앙 고백
이 인간인 제자 베드로에 의해서 고백되어졌다는 것은 예수의 수세시(受洗時)에 들려
졌던 하늘의 증거가(3:17) 마침내 사람들에게서까지 인지되고 고백되게 되었다는 점에
서 중요한 구속사적(球贖史的) 의의를 갖는다 하겠다. 우리는 이 부분을 두가지 입장
에서 관찰할 수 있다. 물론 이 두 입장은 불가분적 관계에 있어 어느 하난만 고집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 베드로의 신앙 고백이 지니는 해석학적 관점. 이러한 관점에는 두 가지가 있다.
1. 그 하나는 베드로의 입장에서의 해석이다. 베드로의 입장에서 보면 베드로가 행
한 신앙 고백 자체가 강조된다. 그는 역사상 최초로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예언되고
또 기대되던 메시야에게 처음으로 당신이 메시야이시라고 고백을 한 삶이 되는 영광을
안았다. 그리하여 특별히 17-19절의 축복을 받게 되었다. 베드로 신앙 고백의 역사적
의의는 아무리 강조되어도 지자치지 않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중요한
사실 하나는 베드로의 고백 내용이지 인간 베드로 자신이 아닌라는 점이다. 이 점을
크게 혼동한 태표적인 예가 바로 로마 카톨릭의 교황권 교리이다. 그들은 17-19절의
예수의 축복 내용을 오해하여 이 구절을 근거로 교황권의 우너형으로서 베드로를 가상
하고 그를 승계한 자가 교황이므로 교황은 교회에 대하여 절대적 권한을 가진다는 허
황된 교리까지 갖기에 이르렀다. 한편 우리는 13-20절 본문에 대한 베드로의 입장에서
의 해석 그 자체가 무의미하다거나 그 관점이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다음 세가지
이유에서 이러한 해석은 예수의 입장에서의 해석에 종속되어야 마땅함을 강조할 필요
가 있다.
(1) 17절에도 명시되어 있득이 베드로가 자신의 신앙 고백 내용을 깨달은 것은 그
가 남보다 지혜로와서 연구하거나 고안해낸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깨닫게 해주시는
은혜에 힘입은 것이었다. 따라서 베드로가 영광스럽고 축복되기는 할찌언정 베드로의
역할이 주도적(主導的)이지는 않았으므로, 다시 말해서 그의 신앙 고백 때문에 예수께
서 메시야가 되신 것도 아니며 베드로가 인간적 지혜로써 예수의 메시야되심을 발견한
것도 아니므로, 우리는 본문에서 베드로의 역할이 주도적이었다고 볼 수 없다.
(2) 두번째로, 베드로가 저러한 신안 고백을 하게 된 배경 문제를 고려해 보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예수께서 가만히 계시는 데 갑자기 베드로가 주도적으로 나서서
당신의 메시야되심을 고백하였던 것이 아니라, 구속사의 위대한 전환점에서 이제는 스
스로를 공개할 필요에 직면하신 예수의 교육적인 질의응답(質疑應答)의 과정을 통해
서, 즉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새로운 내용을 인상적으로 가르치기 위한 방법
의 하나로 묻는 질문과 이 질문에 대한 대압의 과정을 통해 베드로의 신앙 고백이 있
게 되었다는 것이다. 자기 계시의 필요성을 절감하신 예수께서 택한 시기와 방법에 의
하여 베드로가 수동적으로 질문에 답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깨닫게 하시는 은혜에 의
하여 신상 고백을 하였을 따름이므로, 우리는 본 단락을 예수의 입장에서 이해해아 한
다는 것이다.
(3) 끝으로 생각해 보아야 할 사항은, 본문을 베드로의 입장에서 해석하는 것이 예
수 입장에서의 해석보다 더 중요하고 가치있다고 주장하려는 자는 당연히 베드로 신앙
고백의 완전성을 입증해야만 할 것이다. 무론 베드로가 예수를 '그리스도시며 살아계
신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한 것 자체는 완벽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예
수의 수난과 부활 및 영광에 이르는 전 과정까지도 동시에 이해하여야만 완전할 수 있
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베드로의 신앙 고백 자체는 절대적으로 옳았지만, 그 신앙
고백 속에 내포된 구속사적 의미에 대해서는 두무지 알지 못했던 것이다. 바로 뒷 단
락의 23절에서 예수께서 베드로를 심지어 사단이라 표현하시면서까지 책망한 장면에서
이 사실이 잘 드러난다. 23절에서 예수께서 베드로의 인격 전체를 절대적으로 저주하
신 것이 아니라 그의 무지와 인본주의적(人本主義的) 생각을 책망하였듯이, 본단락에
서도 더욱 중요한 것은 베드로의 신앙 고백 내용이지 그의 전체 인격은 아닌 것이다.
2. 본문에 대한 두번째 해석은 예수의 입장에서의 해석이다. 이 경우에는 예수의
자기 계시라는 축면이 강조된다. 한편, 이러한 입장을 취할 때에 우리는 본문을 다시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까) 예수의 두 질문과 제자들의 응답(13-16절). (다) 베
드로에 대한 예수의 축복(17-19절). (따) 함구령(20절). 이 중에서 (다)항은 주제 강
해 '베드로의 신앙 고백에 따른 약속'을 참조하고 (따)항은 막 3:12을 참조하도록 하
며, 여기서는 예수께서 주신 두 질문의 의미만을 되새겨보기로 한다.
예수는 먼저 남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다. 이것은 나에 대한 세상의 객
관적 평가가 무엇이냐는 물음이다. 두번째는 예수는 범위를 좁혀서 그러면 너희는 나
늘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셨다. 이는 나에 대한 너희의 주관적 평가는 무엇이냐는 물
음이다. 예수께서는 능동적이고 구체적으로 이 질문을 제자들에게 던짐으로써 제자들
에게 각성(覺醒)의 기회를 주셨다. 그 옛날 예수께서 던지신 이 질문은 오늘도 교회와
성경을 통한 성령의 역사로 우리에게 던져 진다. 예수는 지금도 살아계시기 때문에 이
물음은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중요하다. 첫번째 질문에 대해서 우리는 세상의 평가와
신학 지식 등으로 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두번째 질문은 그 누구에 의해서도 대
신 대답되어질수 없다. 또 이 물음은 내가 기분내키는 대로 대답해도 좋을 성질의 물
음이 결코 아니다. 이 물음은 예수께서 생명과 죽음, 구원과 형벌의 전제로 물으신 것
이기 때문에 얼버무리거나 피할 수도 없다. 우리는 그 대답을, 남의 눈을 의식해서 또
는 지깃이나 신앙을 자랑하기 위해 조작하거나 꾸며낼 필요가 없다. 다만 나의 중심으
로 답하면 내 중심을 보시는 이가 들으실 것이다(삼상 16:7). 이제 나의 진정한 대답
은 무엇인가? 이는 우리가 본문을 통해 다시 한 번 숙고해야 할 대주제이다.

* 베드로의 신앙 고백에 따른 약속. 베드로의 신앙 고백을 들으신 예수께서는 그 같
은 신앙의 토대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약속하셨다(16:18). 그런데 로마 카톨릭에
서는 이 말을 예수께서 베드로라는 한 개인의 인겨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뜻으로
이해하고 또 이를 16:19과 연결시킨 뒤 교황은 이런 베드로의 권위를 계승받은 사람이
므로 교황 없이는 교회가 없고 오직 교황이 다스리는 교회만이 교회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예수의 말씀을 잘못 이해한 데서 나온 오류이다. (1) 먼저 반석 위에
라 할 때(16:18) 이는 베드로라는 인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가 행한 신앙 고
백을 가리킨다. 이는 베드로가 나성 명사인데 반하여 반석(헬, 페트라)이 여성 명사인
점에서도 강력히 지지를 받는다. (2) 성도들의대표로 신앙 고백을 행한 베드로는 바로
뒤이은 내용에서 '사단아 물러가라'(23절)는 책망(責望)을 받는다. 이처럼 유한한 인
간이 영원한 교회의 기초가 될 수 없다. 교회의 기초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
리고 간접적으로 신앙 고백을 행하는 모든 성도들이다(고전 3:11; 엡 2:20). (3) 더욱
이 베드로를 포함한 사도직은 예수 복음 전파의 출발점이라는 특수한 시대적, 일회적
사명이지 무슨 특별한 권한을 가진 것으로서 사도의 임의대로타인에게 계승될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다(행 6:6, 사도직에 대하여). 그와 더불어 베드로 등의 사도직은 교
황을 중심으로 한 교권 계급 제도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으로 교황 제도는 순전히
로마 카톨릭 교회사의 산물에 불과하다(벧전 2:13). 그리고 메시야이신 예수가 지사의
정치적 왕국이 아니라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것은 너무나도 중요한 말로서 예수 구원
사역의 본질이 유대인이 생각했던 것처럼 자기 민족만의 이 땅에서의 정치적 구원이
아니라 전우주적, 영원한 구원임을 보여주고 있다(8:11-13, 유대인과 이방인 구원의
관계). 또한 로마 카톨릭은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천국 열쇠를 주시겠다고 말씀하신 것
(16:19)도 오해하여 인간 베드로와 자칭 그 후계자들에게 천국과 이 땅에서의 교회의
전권(全權)이 주어진 것인 양 생각하는데, 이는 크게 잘못된 것이다. 예수께서 베드로
에게 말씀하신 천국은 하늘 나라의 영원한 천국이 아니라 이 땅에 있을 참 교회를 지
칭한다. 그리고 열쇠를 준다는 것은 당시의 문화적 배겨에서 나온 말로서 권한을 위힘
한다는 것이다.
이 것은 다름과 같은 의미로 이해되지 결코 로마 카톨릭의 견해를 지지하지 않는
다. (1) 일차적으로 베드로 개인에 대한 약속으로 그가 오순절 이후 복음 전파를 시작
할 장본인임을 말한다. (2) 이차적으로 이는 예수께서 베드로를 위시한 모든 주의 참
일군들, 즉 장차 인어날 교회의 참 일군들에게 당신의 뜻을 좇아서 교회를 간접적으로
치리할 권리를 주시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의 사도권과 오늘날의 교회 제도의 치리
권자(治理權者) 하고는 질적 차이가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사도권자, 즉 베드로와 12
사도는 예수님의 직접적 대리권자로서 단회적 소명을 받았으나 오늘나르의 교회지도자
들은 성경에 언급된 사도들의 교훈과 예수님의 명령의 정신에 비추어 이를 간접적으로
적용하는 자들일 뿐이다. 그리고 그 열쇠로서 맨다는 것은 금지를 의미하고 푼다는 것
은 허용을 의미하는 당시의 관용어였다(16:19). 즉 이는 사도들이 교회 생활에서 성도
의 생활을 치리할 권한이 있음을 암시한다.

* 교회의 권세. 교회를 세우신 그리스도께서는 교회 전체에, 특별히 교회의 지구언
에게 복음의 사역을 감당할 권세를 주셨다(16:19;행 20:28).
(1) 교회의 권세와 본질: 국가 권세도 교회 권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주신 것이
나(롬 13:1) 일반 은총의 영역에 머문다는 차이점을 지닌다. 즉 교회 권세만이 신령성
을 지니는 것이다(16:19;요 20:22,23;행 20:28;고전 5:4,12). 그러나 이 권세는 본질
적으로 그리스도에게만 속하고 인간은 단지 사역자에 불과하다.
(2) 교회권세의 종류: (까) 교리권 -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지키고(행
20:29-31;딤전 1:3,4;딤후 3:13,14), 가르치며(28:19,20;딤전 4:13;딤후 2:2), 성례를
시행하고(28:19,20;행 10:47,48), 신조와 신앙 고백을 작성하며, 장래 사역자를 위한
교육에 철저해야 한다(딤후 2:2). (다) 치리권 - 교회 질서의 유지를 위하여 권징(勸
懲)하는 권한을 지닌다(16:19;18:18;요 20:23). (따) 봉사권 -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자기 희생으로 많은 사람에게 유익을 준 것을 본받아 병든 자를 찾아가 위로하며, 물
질적으로 가난한 자를 구제하여야 한다(6:4;롬 12:8;고후 9:9).

3. 예수의 첫번째 수난 예고(16:21-28)
앞 단락이 '내가 바로 메시야인 그이다'라고 하는 예수의 메시야 신분에 대한 자기
계시라면, 이 단락은 메시야로서 행하실 사역의 구체적 내용에 관한 자기 계시라 할
수 있다. 이 단락의 내용은 너무도 충격적이었다. 승리자와 통치자로서 등장할 것으로
예상했던 메시야가 수난을 받아 외관상 패배자(敗北者)의 모습으로 등장할 것이라는
말씀,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리라는 전대미문(前代未聞)의 놀라운 예고, 그리고 메
시야를 따르는 자에게는 능력과 권위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난에의 동참이
요청된다는 것 등이 그러하였다.
현대 성도들, 즉 예수의 수난과 불활을 과거의 당연지사로 믿고 있는 우리들은 이
메시지가 그 당시 제자들에게 준 충걱과 경이를 너무 십게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 그
것도 예수의 수난과 부활을 너무도 확신하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예수께서 이렇듯 명백
히 보여주신 고난에의 요청을 천국에 관한 기복적 신안 때문에 희석시키기 때문인 경
우가 많다.
어쨌든 이 단락은 내용상 (까) 예고의 말씀(21절), (다) 베드로와의 대화(22,23
절), (따) 고난 동참 요구와 상급 약속(24-28절)으로 세분된다.

* 예수의 수난 예고. 예수께서 자신의 죽음에 관해 말씀하신 것이(21절) 이번이 처
음은 아니었다(9:15;10:28;12:40;17:11,12). 그러나 이전에는 예수께서 다만 상징적
표현(요 2:19;3:14) 내지는 감추어진 언어로써 당신의 죽음을 예고하셨을 따름이며,
본문에서 처읊으로 분명한 말씀오로 밝히셨다.
한편 본서에는 네 번에 걸친 예수의 직접적 수난 예고가 언급되는데, 그 중 제1예
고는 수난의 전반적 측면과 이에 대한 제자들의 동참을 촉구하고 있는 반면 제2예고는
(17:22,23) 예수의 체포를 , 제3예고는(20:17-19) 예수의 십자가 수난 장면을 구제적
으로 예언한것이다. 그리고 제4예고는 (26:1-5) 예수께서 가룟 유다에게 배반당할 것
을 예고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껏 직접적인 수난 예고를 유보하고 계셨던 예수께서 베드로의 신앙 고
백이 있은 직후에 비로소 그 사실을 공개하신 것은 (1) 제자들의 그리스도에 관한 지
식이 어느정도 성숙했기 때문이다. 실로 예수는 제자들이 진리의 한 부분을 깨달았을
때, 그 다음에 필요한 진리에로 이끄셨던 것이다. (2) 곧 닥쳐올 수난에 대비하여 제
자들의 유대주의적 메시야관을 완전히 고쳐줄 필요성을 느끼셨기 때문이다. (3) 제자
들로 하여금 수난에 동참할 준비를 갖추게 하기 위해서였다. (4) 유대인들의 박해가
점점 고조되어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가까왔음을 분명히 인식하셨기 때문이다.
어쨌든 예수의 십자가 수난이 공개되기 시작함으로써 이제껏 예수를 따르거나 배척
하던 자들의 입장이 더욱 분명해졌으며, 예수의 십자가 수난을 재촉하는 핍박의 열기
또한 절정에로 치닫기 시작하였다. 또한 육신적이고 이기적 동기에서 예수를 따라왔던
많은 무리들 또한 이제 등을 돌렸을 뿐만 아니라, 일말의 배신감마저 느끼고서 예수의
죽음을 최촉(催促)하는 일에 앞장서는 지겨에까지(27:22,23) 나아가기 시작했다. 실로
예수의 십자가 수난은 영원한 멸망과 영원한 생명을 나누는 가장 중요한 잣대가 되었
던 것이다(고전 1:23,24).

* 베드로의 만류와 예수의 책망. 본장 전체에 걸쳐 명암이 엇갈리는 역설적 장면이
박진감 넘치게 묘시되었는데, 특히 탁월한 신앙 고백(16절) 직후에 베드로가 범한 실
책(22절) 및 그에 따른 주님의 신랄한 질책은(23절) 가히 충격적이라 할 만하다. 베드
로가 예수의 자발적인 죽음에의 결심을 감히 만류하는 장면은 당돌하다 못해 안스럽기
까지 하다. 아마도 그는 조금 전에 들었던 예수의 극찬으로 인해 한껏 기분이 고조된
상태에 있었을 것이며, 가히 돌발적이라 여겨졌을 예수의 수난 예고로 인해 심한 당혹
감에 빠졌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문제는 그가 고백했던 메시야가 바로 이사야 53장의 '고난의 종'인 줄을 깨
닫지 못한데에 있었다. 그의 만류는 필경 인간적 선의에서 나왔을 터이지만 예수는 이
를 사단의 말이라 몰아붙이기까지 하셨다(23절). 이처럼 호된 질책은, 십자가 사건이
야말로 부활 사건과 더불어 구속사의 핵심이라 할 만큼 중요하다는 사실 및 긍휼에 풍
부하신 주께서 진리에 대해서만큼은 얼마나 철저하고 엄격하신지를 절감케 한다.
한편 그러한 베드로의 안타까운 실책은, 꼭 베드로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육
신적이며 세상적 안목에 길들여진 우리 모두에게 언제 어느 곳에서나 나타날 수 있다.
그러므로 성령의 조명에 따라 늘 말씀을 상고(詳考)하며 항상 기도에 힘쓸 때에만, 우
리는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는 것이다(24절).

* 고난 동참과 상급 약속. 베드로에 대한 책망의 말씀에 이어지는 24-28절 내용은
십자가 수난과 부활의 예고의 주요 목적이 무엇이었는지를 보여준다. 즉, 예수는 무려
네 차례에 걸친 예고를 통해, 당신이 직접 수난에 직면되었을 때 제자들로 하여금 두
려워하지 않고 영광스런 부활의 승리에 대한 믿음을 갖게끔 하고자 하신 것이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사로잡히고 십자가에 못박히게 되었을 때
제자들은 온통 실망과 공포에 사로잡혀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26:56).
그러나 28절에 밝히 약속한 바처럼, 오래 전부터 약속되어 온 메시야와 그 영원하
고 찬란한 왕국은 반드시 도래하기 마련이었다. 다만 그러한 영광엥 이르는 방법과 광
정에 있어서 제자들과 예수의 생각은 현저한 차이를 나타내었을 뿐이다. 제자들은 하
나님의 영원하신 계획을 알 도리라 없었으므로 당장 가시적으로 나타날 정치적 메시야
를 대망했고 그 기대가 허물어졌을 때에는 모든 것이 끝난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예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영광의 나라를 도래케 하기 위해 스스로 십
자가의 길을 택하셨고, 제자들에게도 동일한 십자가의 길을 요구하셨다(24,25절). 그러므로 본문의 말슴은, 소위 출세의 신학 내지는 기복(祈福)의 신앙으로써 십자가를 제거시키거나 윤색 시키려는 우리 주위의 일부 교회들에 대해 엄중한 경고의 일침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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