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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
포도원.- 여기 "포도원"을 천국(교회)에 비유함은 구약에서부터 내려오는 어법이었다. 왜 포도원은 그렇게도 많이 천국에 대한 비유로 사용되었는가? 그 이유는, (1)팔레스틴 지방에는 무엇보다도 포도원이 많은 까닭이며, (2)또 그것은 자연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그것을 심은 자 곧, 농부가 있음이, 마치 교회의 설립자(하나님)와 관리자(그리스도)가 계심과 같기 때문이다. (3)포도원은 목재를 얻으려 함이 아니고 열매를 얻기 위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심은 영적 열매를 얻으려고 하시는 까닭이다.

=====마 20:2
한 데나리온씩 품군들과 약속하여.- "한 데나리온"은 로마의 화폐니 노동자의 하루 품 값이 될만한 돈이다. 약속을 받고 천국 노동에 들어간 자는 복음의 초청에 선참한유대인들을 가리킨다. 그들이 복음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요 6:29). 천국 노동에 선참하게 되었다고 해서 그 노동을 독점하게 된 것처럼 교만해지면 안될 것이었다. 그들이 비록 고용 관계로 천국 노동에 들어간 듯하나 그것 역시 그 근본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은혜로 그렇게 된 줄 알아야 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능력이 부족하여 그들을 고용하심이 아니고 그들을 그런 노동으로 훈련시켜 축복을 받을 만한 그릇이 되게 하시며, 또 안주셔도 될 보상을 사랑으로 주시기 때문이다(눅 17:7-10).그러나 이스라엘은 이 진리를 모르고 교만하였으니 그릇된 것이다.

=====마 20:3
제 삼시.- 이것은 현대의 오전 9시를 이름이다. 놀고 섰는 사람들.- 하나님 나라의 노동을 하지 않는 자는, 비록 다른 좋은 일을 하는 중에 있을지라도 놀고 섰는 사람과 같다. 그 이유는, 천국 노동 곧,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신앙으로 하는 일이 아니라면 그 무슨 일이든지 무용할 뿐 아니라 도리어 해로운 것이기 때문이다(요 6:28-29). 아! 시장같은 이 세상에 놀고 섰는 사람들이 아직도 얼마나 많은가? 본절에 관설된 "놀고 섰는 사람들"은 이방인을 가리킨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시간이 늦어도(세상 끝이 가까울지라도) 계속하여 사람들을 천국으로 불러 들인다(5-7 참조).

==== 마 20:4
여기 이른바 "너희도"라는 말은, 힘 있게 하는 말이니 그 주인이 저희에게도 포도원에 들어가 일할 수 있게 하는 주권을 보인다. 상당하게 주리라.- 이것은, 적어도 그들이 일하는데 비례하여 공정하게 주겠다는 말씀이다. 그는, 이렇게 말은 하면서도 속으로는 그 이상 줄 것을 암시하고 있다. 이것이 역시 그의 은혜로운 태도이다.

=====마 20:5,6
"육시"는 오늘날 우리 시간의 12시를 가리키고, "제 십일시"는 오후 5시를 가리킨다. 이렇게 그 주인은 여러 차례 나아가서 포도원 일군을 얻으려고 애썼다. 이것은,복음을 사람에게 주시어서 일을 시키시는(믿게 하시는)하나님의 사역을 비유한다. 혹이 말씀을, 전도자를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경륜에 적용시키는 경우에는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다. 곧, 하나님은 어떤 일정한 시기에만 일군을 세우시는 것이 아니고,그 어느 시기에든지 계속적으로 세우시어 그 일군의 충성하는 것을 보시고 상을 주신다는 것이다.

=====20:7
우리를 품군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과연 모든 사람들이 천국 노동 이외에그 무엇을 하든지 수고한 값이 없다. 그 이유는, 그들이 수고하여 어떠한 수입을 가진다 하여도 그것이 진정한 가치 있는 보수는 아니기 때문이다. 왜 그런고 하면, 그것은 내세의 생명을 얻는데 하등의 효과도 내지 못하는 까닭이다.

===== 마 20:8,9
저물매...제 십 일시에 온 자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늘.- 이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그 누구든지 세상 끝에 같은 구원을 받게 될 것을 이름이다.

===== 마 20:10-12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원망하여.- 이은, 유대인을 가리킨다. 그들은 실상으로 복음을 받은 이방인들을 시기하였으니 사도 행전을 보면 그 사실이 드러난다. 눅 15:25-32을 보면, 거기에도 역시 유대인의 시기가 비유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눅 15:25-32의 해석을 참조하여라.

====마 20:14,15
이 두 귀절은, 비유적으로 하나님의 공의, 그의 무상권, 그의 자비 이 세 가지 성질에 대하여 말한다.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공의로 판단하심이고,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란 말씀은 그의 무상권의 표시이고, "내가 선함으로네가 악하게 보느냐"- 란 말씀은, 그가 후에 온 자(이방인)도 누구보다 못지 않게 대우하시는 자비를 가리킨다.

===== 마 20:16
나중되었던 자가 하나님의 후한 은혜를 받는 경우는, 교회 역사상에 많이 있다.

======마 20:17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하실 때에-예수께서 갈릴리 지방의 사역을 마치신 후에 유대인들의 3대 절기 중의 하나인 유월절 행사에 참석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하신 때를 가르킨다한편29절을 참고해 보면 이 순간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머물럿던 곳은 여리고였음을 알수 있다.

======마20:20-21
마가복음에 따르면 (10:35),예수님께서 요청한 자는 야고보와 요한이었다.이러한 사실은 나머지 열 제자가 그들에게 분개한 사실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24절).

======20:22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야고보와 요한은 하나님 나라의 참된 성격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그 나라는 폭력과 정복을 통하여 이 땅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다.오히려 그 나라는 사람들의 눈에 실패처럼보이는 에수의 죽으심을 통하여 사람들의 마음속에 은밀히 임하는 하나님의 통치이다.물론 예수는 모든 사람들 앞에 영광과 권능으로 임하실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종말에 예수님이 심판주로 임하실 때를 말한다.잔을마실수 있느냐는 말씀은 예수의 고난과 죽음을 상징한다."할수 있나이다" 라는 야고보와 요한의 말은 스승을 위해 수치와 박해를 견디어 내겠다는 어느정도의 충성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수 있다.

=====20:25-27
여기서 예수는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위대함"이 어떤 것인지를 말씀하셨다.하나님을 모르는 세속 사회에서의 세력을 가진 사람은 대부분 부패하게 되어 지배자들은 쉽게 폭군이나 압제자로 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서는 그러한 권력자들을 위대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 있어서는 지배자이신 예수 자신이 섬기는 종이시다(28).따라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위대하다는 말은 예수의 성품을 따라 다른 사람을 섬기기 위해 자신을 기꺼이 드리는 사람에게만 붙여질 수 있는 이름이다.

====20:28
예수는 일생을 봉사받기 보다는 봉사하시면서 사셨다.남을 섬기는 삶의 가장 감동적인 실례는, 최후의 만찬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장면이며 봉사의 극치는 그 분의 죽으심에서 보여 졌다.



19장과 본장은 시간적, 공간적 배경이라는 측면에서 하나로 묶여질 수 있는
부분이다. 따라서 본장을 전후한 문맥의 흐름에 관해서는 19장 강해를 참조하기바란다. 다만 19장이 질문자들의 물음에 대해 예수께서 수돈적으로 대답하시는 내용이라 할 때, 상대적으로 본장은 예수의 능동적 교훈 및 능동적 자기 계시의
측면을 보여주고 있다. 특별히 우리는 본장을 상고함에 있어 다음 세 가지
측면에 유의해야 하겠다.
(1) 내용상 - 예수의 교훈이 집약됨. 예수의 메시지의 핵심은 그 무엇보다도
바로 '천국'에 집중되어 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고 외친 세례
요한의 증거(3:1,2)에서도 밝히 드러나듯, 예수께서는 잃어버린 낙원을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새롭게 건설하시는 천국의 주인이요 왕으로서 이 땅에 오신
것이다(사 61:1-9). 본장에서는 그와 같은 '천국'이라고 하는 핵심적 메시지가 반복, 집약되어 있다는 인상을 뿌렸이 드러낸다. 먼저, 우리가 구원받아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로 말미암음을 가르치는
비유는(1-16절) 본장 전체의 흐름을 주도하고 있다고 본다.
그리고 세번째 수난 예고는(17-29절) 천국의 영광과 안식에 이르는 도정에는
고난과 신령한 싸움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반복 천명한 맣씀이다.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에서 시작하여 예수의 대속적(代贖的) 죽으심과 부활을
재천명(再闡明)하는 본장의 흐름은, 홍해를 가르신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의
은혜에(출 14:10-31) 이어 광야 노정을 거친 후 마침내 가나안 복지에 이르게
되는(수 3:7-5:1) 출애굽 이후 가나안 정착까지의 이스라엘의 역사를 상기시켜 준다. 즉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를 신뢰하지 못하고 인간적 아집과
탐욕에 더 끌렸기 때문에 40년이라는 광야에서의 고난을 거친 연후에야 비로소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본문의 제자들은 물론성도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약속을 받고도 저 광야에서의 시행착오를 무수히 거친다음에야
비로소 성숙된 면모를 굳힐 수 있게 되며, 예수의 수난은 바로 그러한 인생의
크고 작은 모든 완고함과 무지함과 패역함에 대한 형벌을 대신 감당하신것이다.
다음에 등장하는 세베대의 두 아들의 야심에 관한 이야기는(20-28절) 거듭되는 예수의 천국에 관한 교훈에도 불구하고 당시 제자들의 주요 관심사는 너무도
세속적이었음을 단적으로 시사한다. 그리고 29-34절은 천국의 왕되신 예수의
무한한 긍휼(矜恤)과 자비(慈悲)를 보여주는 기사이다.
(2) 동기상 - 장기적 안목에 따른 교훈임. 앞에서 본장의 내용이 다분히
반복적이라는 점을 이야기하였다. 이러한 반복은 제자들의 무지를 여실히
암시하는 것임은 물론, 훗날 제자들의 성령의 조명하에 예수의 말씀들을 새로이
깨닫게 될 날을 겨냥한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본문에 등장하는 비유 또한
영적으로 미숙한 제자들의 편향되고 성급한 해석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의도를 내포한다. 실제로 이 비유에 내포된 하나님의 주권 사상을 당시
제자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훗날 사도 바울에 의해 신학적으로 명쾌하게 해석되었다(롬 9:19-29).
(3) 목적상 - 신약 교회의 여명(黎明)을 암시함. 본장의 비유에 나오는 '나중된 자로서 먼저될 자'란 곧 예수의 복음을 믿고 성도 공동체에 속하게 된 이방인을 가리킨다고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본문은 세계 만방의 모든 족속에게로
확산되어갈 복음의 역동성을 암시한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실제로 예루살렘의
유대인 무리들로부터 태동한 교회가 제차 이방 세계에로까지 그 지경을
넓혀나가면서 유대인 성도 간에는 미묘한 갈등이 존재했다. 심지어 예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조차 처음에는 이방인 선교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하다가
환상을 접하고 나서야 비로소 이방인 고넬료를 회심시키기 위해 가이사랴로
방문하게 되었다(행 10:9 이하). 요컨대 예수는 당신의 죽으심과 부활이후에 온
유대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확산될 교회에 대한 비전(행 1:8)을 여기서 암시하고 있다 하겠다.
천국에 대한 제자들의 무지와 곡해 및 천국의 실상과 천국 시민들의 합당한
자세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을 싣고 있는 본장은 마지막 한 주간이 시작되기전
시점에서 주어진 것이라는 점에서 더더욱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1. 포도원 품꾼 비유(20:1-16)
본문은 19장 말미에 나오는 베드로의 자만섞인 질문(19:27) 및 이에 대한
예수의 대답(19:30)과 직결되는 내용이다. 베드로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르노라고 자처한 나머지 예수의 보상을 바라는 기대에 잔뜩 부풀어 있었다.
그의 심중에는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하다는 특권 의식이 깃들어 있었는지도
모르며 자신의 율법적 행위를 주장하는 아집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으로도
보인다. 애에 예수는 먼저된 자로서 나중되고 나중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다는 말씀으로 대답을 맺으셨다. 본문 또한 예수의 그러한 말씀으로
끝맺음하고 있는바, 이 비유의 일차적인 목적이 제자들의 영적 우매를 깨우치게
하는 데 있었음을 잘 나타낸다.
본 비유는 단순히 상상에서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당시 포도철에 흔히
있었던 이야기이다. 팔레스틴의 포도철은 9월 말경인데 곧이어 장마가 뒤따르기
때문에 포도철 동안은 매우 바쁘다. 따라서 하루 종일이 아니더라도 다만
몇시간만 일하는 일꾼도 긴히 필요했다. 그리고 품삯을 받고 노동을 제공하기
위해 장터에는 아침부터 일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여기서
등장하는 집주인과 청지기 그리고 품꾼은 각각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도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본 비유의 핵심은 15절에 기록된 바와 같이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 있다. 실로 하나님은 모든 인간사, 특히 인간 구자원 문제에
있어서 당신의 절대적인 주권을 행사하신다(롬 8:29,30;고전 1:27,28).

*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 장터에서 하루의 품삯을 얻기 위해 일자리를 찾아
서성거리며 애태우는 품꾼들을 자기 일터로 거두어들인 본문의 집주인은 연인과
동정이 풍부한 자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사실 오늘난 만큼 바쁜 시대도 없다.
사람들은 늘 무엇엔가 골몰하여 일에 쫓기며 살아간다. 하지만 여러가지 세상
일에는 그렇듯 분주하지만 하나님의 포도밭을 가꾸는 일에는 지극히 태만한
사람들이 부지 기수(不知其數)라는 데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 따라서 분주하게 일에 쫓기는 자들이 사실상 가장 열심히 해야할 일, 가장 고귀한 일을 찾지못한
채 서성거리는 모습은 바로 본 비유에 등장하는 품꾼들 그것도 오후 늦게서야
일터로 부름받게 되는 품꾼들의 모습과 흡사하다.
하나님은 바로 이러한 방황자들을 긍휼히 여기사 그들로 영원히 썩지 않는 양식을 구하는 일에 참여하도록 부르고 계신 것이다(벧전 1;3,4). 이런 맥락에서
본 비유는 뉴렇게 익은 곡식 들판에서 추수할 일꾼들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애타는 음성을 떠올리게 한다(눅 10:2). 그리고 집주인이 하루 일을 마감하는 시간에 이르러 먼저 온 자나 나중 온 자에게 동일한 품삯을 지불했다는 사실은(10절) 실로 중요한 의미를 내포한다. 여기서 품삯을 구언에 비길 때, 구원은 근본적으로 인간의 선행이나 공로에 대한 대가로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죄인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말미암는다는 사실이 밝히 드러난다(엡
2:8).
그렇다고 하여 성도들이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크고 작은 상급을 전혀 기대해서는 안된다는 뜻이 아니다. 고전 3:8에는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는 약속의 말씀이 분명히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만 본문에서는
상급의 문제를 떠나 더욱 본질적이고 중요한 문제인 구원이 어디로서
말미암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을 뿐이다. 세상 만물을 지으시고 유지하시며 또한 새롭게 구속하시는 하나님의 피조물에 대한 절대적 주권은 구약 선지자들의
기록에서도 일관되게 강조되어 있으며(사 29:16;45:9;렘 18:1-10) 사도 바울 또한 토기장이 비유를 통해 하나님 주권 사상을 재차 강조하였다(롬 9:19-26).
하나님께서 절대적 주권자시라는 사실은 엄연하다.
하지만 당신은 그 주권을 마치 록군과도 같이 파괴적이며 무자비하게
행사하시지는 않는다. 본 비유에서도 집주인의 주권적인 뜻은 품꾼들을
착취하거나 괴롭히는 일에는 추호도 행사된 바 없으며, 여러 품꾼들에게 공히
은혜를 베푸는 일에 행사되었음에 유의해야 하겠다. 만일 우리가 영원한
멸망으로부터 영원한 생명에로 옮기워지게 하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깊이
깨달을 진대, 본문에 나오는 먼저 온 자처럼 나중 온 자들을 시기하여 불평하지
않을 것이다.

* 성도의 봉사 자세. 본문의 비유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 먼저 온 품꾼에다
초점을 맞추어보면, 성도 공동체 내에서 봉사해야할 성도의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깨달을 수 있다. 먼저 온 품꾼의 불평은 마치 돌아온 탕자를 시기한
그 형의 불평과 흡사하다(눅 15:25-28). 그 양자에 공통적인 사항은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고 기뻐하기 보다는 자기 이웃이나 형제의 축복에 대해 시기하는 마음이 앞섰다는 점이다. 이는 근본적으로 인간의 심성(心性)이 얼마나
이기적이며 자기 중심적 타성에 젖어있느가를 여실히 입증한다.
나아가 이 비유는 18:22-35의 무자비한 종의 비유를 연상시킨다.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업은 절대적이고 무한량한 용서의 은혜를 받았음을 깨닫는
자는, 그 이웃의 허물을 용서할 뿐만 아니라 그로 하여금 동일한 축복에
이르도록 최선의 노력으로 도우는 것을 당연한 도리로 여겨야 하겠다.
또한 본문은 수난을 앞두고서 일관되게 제자들에게 주지시키신 예수의 겸손과 헌신에 관한 교훈과 그 맥을 같이 한다(요 13장). 사단이 하는 중요한 일은
어떻게 해서든 하나님과 성도, 성도와 성도 간을 이간시켜 서로 반목(反目)케하는 것이다(계 2:9-16). 인간의 왜곡되고 비뚤어진 심성은 늘 자기 본위의 탐욕과 교만에로 치달아가기 쉽상이기때문에, 주께서는 성도 공동체에서 만큼은 서로 자신보다 남을 낫게 여기며(빌 2:3,4) 사랑의 원리(고전 13잘) 안에서 굳게 결합하는 아름다운 관계가 이루어지기를 줄곧 원하셨던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모든 성도는 나중 온 품꾼에 비유될 수 있다. 물론 성도들
중에는 디모데처럼 일찍부터 하나님의 일을 위해 수고하는 일꾼도 있고(딤후
1;5) 십자가 한편의 강도처럼(교회 전승에 따르면 오른편 강도, 27:38,44 주석 참조) 불 가운데서 구원받은 것같은 자도 있다(눅 23:42,43). 하지만 하나님의 크신 은혜 앞에서 크고 작은 상대적 공적을 내세워 배타적 교만에 빠질 권리는 그 누구에게도 없다. 그 누가 하나님 앞에서 채권 의식을 갖고 감히 삯을
요구할 수 있겠는가? 성도는 하난님의 명한 바를 다 행한 후에 스스로 무익한
종이라고 겸허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하겠다(눅 17:10).

* 먼저 된 자와 나중 된자. '포도원 품꾼 비유'는 앞장의 베드로의 질문과 예수의 대답(19:23-30)에 연관된 것이다. 즉 이것은 영생의 문제에 있어서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을 수 있음에 대하여 재차 밝히고 있는 부분이다. 여기서 '먼저 된자'란 하나님의 선민으로 택함 받고
타 민족에 앞서 복음의 진리를 먼저들은 유대인들을 가리킨다(15:24). 그러나
예수께서 이 비유를 통하여 나타내시려 한 요지는 먼저 된자(먼저 온자)나 나중
된자(나중온 자)나 모두 똑같은 품삯을 받는다는 데 있지 않다.
대신 그 요지는 (1) 먼저 된 자나 나중 된 자나 동일하게 영생을 얻는 것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에 의한 것(15절)이라는 점, (2) 이 같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하여선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는 점, (3) 인간이 구원을
얻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기인한 것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우리는 본 비유를 통하여 다시 한번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91) 우리가 구원을 얻음에 있어서 자랑할 만한 인간적 요소는 아무것도 없다. 즉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혈통적 요소조차도 하나님 앞에서는 내세울 수 있는
자랑거리가 되지 못한다(3:9,10). (2) 구원은 그 어떠한 인간적 공로와 노력에 의해서 획득될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에 의해서만 부여될 수
있다(롬 3:24). (3) 이 같은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사람에게 차별이 없이
주어진다(롬 3:22).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이 순간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구원을
받고 그의 일꾼이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고전 15:10)임을 명심하고
겸손히 하나님께 감사하며 영광 돌리는 삶을 살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2. 세번째 수난 예고(20:17-19)
예루살렘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시면서 예수께서 세번째가 당신의 수난을
예고하신 내용이다. 예루살렘에는 예수를 능욕하고 십자가에 못박기 위한
대적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제자들의 눈에는 곧 당도할 예루살렘이
예수를 새 왕으로 추대하는 정치적이고 지상적인 왕국의 도읍으로
기대되었다(20-28절). 세번에 걸쳐 수난을 반복하여 예언한 것은 (1) 십자가
사건이 구속사에서 차지하는 실로 막중한 비중을 강조하기 위함임과 아울러 (2)
제자들을 위시하여 예수를 따랐던 수많은 무리들의 위와 같은 그릇된 천국관
내지는 그릇된 메시야관을 바로 깨닫게하기 위함이었다.
첫번째(16:21-23)와 두번째(17:22,23) 수난 예고에 비해 본문에는 예수의 수난
과정이 비교적 상세히 예고되어 있다. 즉 가룟 유다의 배반으로 대제사장들의
손에 팔리우고 본디오 빌라도 앞에서 능욕(凌辱)과 채찍질당한 후 마침내
십자가에 달리게 되는 과정이 한두 마디로 압축 요약되어 있는 것이다.
기실 예수는 당신 앞에 닥쳐올 고난을 애당초부터 소상히 알고 계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으로 그 일을 감당하기 위해 '거역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 때리는 자들에게 등을 맡기며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뺨을 맡기셨던' 것이다(사 50:5,6). 본문에 관한 보다 상세한 내용은 막 10:32-34
강해를 참조하라.

3. 세베대의 두 아들의 야심(20:20-28)
두번째 수난 예고가 있은 후에도 제자들은 서로 '누가 크냐'고 하는 경쟁
심리를 노출시킨 바 있다(18:1-4). 본문은 한술 더 떠서 마음에 품은 세상적 야욕(野慾)과 시기심을 더욱 적나라하게 노출시킨다. 예수의 십자가 고난이 점점
가까와 옴에 따라 그와는 정반대로 제자들의 교만과 탐욕이 더욱 심해져갔다는 사실은 묘한 아이러니를 던져주며 인간의 죄악된 본성에 대해 깊은 절망을 갖게
한다.
진정 세상의 논리로 생각할 때는 제자들의 야심은 오히려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들은 가족과 일터을 버리고 일편 단심(一片丹心) 주를 따라 동고
동락(同苦同樂)하였던 자들이었다. 그리고 예수의 위대한 능력과 지혜는 예수의
메시야되심과 왕되심을 제자들로 하여금 믿게 하기에 충분하였다. 사실
로마군의 살벌한 군마와 창검이 요소요소마다 버티고 있는 상황에서 예수를
왕으로 삼는 메시야 왕국의 조만간에 로마 통치를 몰아내고 세월질 것이라는
믿음은 대단한 확신과 용기에서 기인하였음에 분명하다. 하지만 그들은
거듭되는 예수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메시야 왕국의 본질이 무엇이며 에수께서
세상에 오신 궁극적 목적이 무엇인지를 몰랐기 때문에 기껏해야 인간적 용기와 충성을 드러낼 뿐이었고 상대적 경쟁 의식과 시기심에서 놓여날 수 없었던
것이다.
한편 본절의 평행 구절(막10:35-45)에서는 야고보와 요한이 직접, 좌우편에
앉게 해줄 것을 예수께 구하였다. 아마 본문에서 세베대의 아내는 그 두 아들의
야심을 익히 알고 있었던 터라 그들을 대신하여 예수께 간구했던 것같다. 그녀는 육신의 혈통상 예수의 이모였으므로(참조, 요 19:25) 자신이 간구하면 더
효력이 있을 것이라 판단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누가는 본 기사의 전후를 마태와 같이 싣고 있지만(눅 18:31 이하) 본문은 생략하고 있다. 눅 22:24-30의
기사가 본문과 유사한 내용이지만 아마 이와는 다른 상황에서 발생했던 것으로 보인다.

* 크고자 원하는 제자들에게 요구되는 것. (1) 교만을 주의 할 것. 교만은
여러가지 죄악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것이다. 천사들이 자기의 지위를 지키지
않고 타락한 것도 스스로 하나님의 자리에 오르려는 교만 때문이었으며(유
1:6절) 아담과 하와가 금단의 열매를 따먹는 유혹에 넘어간 것도 교만
때문이었다(창 3:4-6). 예수께서는 인간 본성에 뿌리박은 교만의 해독을 너무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에 기회날 때마다 제자들에게 겸손을 가르치셨다(11:29).
본문의 제자들 또한 남보다 높은 위치에서 군림하고 싶은 교만한 욕심 때문에
서로 불화를 초래케 했다. 그러나 세상의 가치 가준과 예수의 그것은 엄청난
차이를 나타낸다. 따라서 스스로 자신을 내세워 높이려는 자들은 주님의 심판대
앞에서 수치(羞恥)를 당할 수밖에 없다(약 4:6).
(2) 섬기고 봉사할 것. 교만과 탐욕에 사로잡힌 제자들에게 예수는 당신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주지시키심으로928절) 십자가 수난을 앞두고 섬김의 도를
또한번 깨우치셨다. 예수는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는 말씀(요 15;13)을 친히 실천으로써 보이셨다. 사실 26절의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은 '큰 자만이 섬지근 자가 될 수 있다'는 말로 바꿔볼 수도 있다. 유아들의 속성은 일방적으로 받으려고 하는 데에 있다. 그러나 장성한 자는 자신의 문제에만 급급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애쓰는 것이다. 사랑하는 자를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는 기쁨을 아는 사람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행 20:35)는 말씀이 만고 불변(萬古不變)의진리임을 전적으로 수긍할 것이다.

4. 두 소경을 치유하심(20:29-34)
본문은 예수께서 여리고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할 때 일어난 일로서
공관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다. 마가(막 10:46-52)와 누가(눅 18:35-43)는
눈먼 소경 한 사람만을 언급하였고, 마가는 그의 이름을 바디매오라고 밝혔다. 아마도 마태는 보다 상세하게 기록하기 위하여 소경들의 숙자를 적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 9:27-31에도 본문과 유사한 치유 기사가 나오지만 각기 다른 상황에서
발생한 것이며 강조하는 내용 또한 차이를 보인다. 9:27-31은 두 소경의 믿음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반면 본문은 소경들의 간절한 열성과 예수의 자비로우신
긍휼을 부각시킨다.
한편 본문은 28절의 말씀대로 예수께서 많은 사람을 섬기는 삶을 살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즉 예수께서는 능욕의 십자가가 기다리는 예우랏렘을
목전에 둔 시점이었지만, 예수께서는 자신에게 닥칠 엄청난 시련에 대한 염려와
고뇌에 사로잡혀 있기는 커녕 병들고 약한 자들에게 끊임없는 연민을
보이셨다(34절). 예수께서 하늘 보좌를 버려두시고 사람의 모습으로 이 따에
오신 것부터가 죄인들을 향한 크신 긍휼에서 기인하였음 같이, 그분은 십자가의
참혹한 고통 중에 처한 상황에서도 함께 십자가에 달린 강도에게 연민을
보이셨다(눅 23:43). 실로 주님의 생애 전체는 온전히 남을 위한 헌신과 희생의
삶이었으며 겸손과 봉사의 삶 그 자체였다.

* 구원을 바라는 소경들의 열정. 본문에는 소경의 끈질긴 호소가 우리의
주의를 환기 시킨다. 아마도 예수를 둘러싼 무리들은 예수께서 이제 새 나라의 임금으로 측위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다고 하는 나름대로의 기대에
잔뜩 부풀어 있었기 때문에 예루살렘행을 지체시키는 소경들의 하소연을 매우
귀찮게 여겼던 것같다.
그러나 소경들은 무리들의 꾸짖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더욱 소리 높여 주의
도우심을 간구했다. 실로 그들은 이번이 아니면 더이상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참으로 절박한 의식을 가지고 그들의 어둠을 밝혀줄 예수께 힘을 다해
소리쳤다. 이러한 본문은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밤이 맞도록 씨름하며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하니하겠나이다'고 버텼던 야곱의
결사적인 간구를(창 32;24-32) 연상시킨다. 또한 예수께서도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할 것을 가르치기 위해, 과부의 집요한 요청에 불의한
재판관마저 그녀의 원한을 푸어주었다고 하는 비유를 말씀하신 바 있다(눅
18:1-8).
그런데 본문에서 소경들의 간구를 그토록 간절하게 만든 것은 오로지 눈을
떠보고 싶은 그 한 가지 염원(念願)이었다. 진정 그 염원은 수십년 동안 그들
가슴속에 깊이 묻어두어왔던 애타는 소망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육신의 눈이 먼
것도 참으로 답답한 일이지만, 영적인 눙이 어두워 일평생을 죄악되고 헛된
것에 종노릇하며 마침내는 영원한 멸망에 처하게 되는 것은 훨씬 더 참담한
일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빛되시는 예수께서 우리 곁을 지나시고 계실때를
놓치지 말고 그분의 옷깃에 매어달려야 한다. 진정 그분은 오늘도 권능에 찬
말씀과 성령의 내주하시는 역사속에서 우리를 친히 방문하고 계신다. 따라서
우리는 성령이 인도하시는 바에 따라 구체적인 기도 제목을 갖고 그분의
발걸음이 우리 앞에 멈춰질 수 있도록 간절히 부르짖어야 할 것이다(시 50:15; 렘 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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