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
그 때에 - 헤롯이 세례 요한을 처형시킨 A.D. 39년 이후이며, 갈릴리 전도의 후반기가 시작되는 때로 예수와 반대자들과의 갈등이 표면화되어 가는 시기이다. 개인적으로는 예수의 선구자로서, 구속사적으로는 구약의 종말과 신약의 출발을 증언하기 위하여 특별히 부름받은 세례요한은 세례 행위와 예수에 따른 메시아의 등의 직접적 방법으로 선구자의 사명을 감당하였지만 동시에 자신의 삶과 죽음을 통해서도 간접저긍로 예수의 메시아로서의 삶을 예표하였다. 다시 말하면 세례 요한의 삶과 죽음은 그 전체가 예수의 모형(模型)이었다. 즉 그의 투옥(14:3)을 통해서 예수의 수난의 삶이, 그리고 그의 죽음을 통해서 예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이 예표(豫標)되었다. 한편 이 세례 요한의 죽음을 기점으로해서 예수의 사역에는 다음과 같은 특징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1) 예수께서 직접 당신의 선구자라고 지칭하였다. 요한의 죽음 이후, 즉 의로운 말을 외치다가 세상 권력자에게 당하는 죽음에서 조차 당신의 예표의 역할을 한 요한의 죽음을 목격한 이후 예수는 본격적으로 스스로 당신이 메시야이심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시고 수차의 수난 예고를 하시는 등 당신의 메시야직의 절정인 십자가 고난을 준비하시게 된다. (2) 당시 팔레스틴 북부, 즉 헤롯 안디바스의 관할 지역은 물론 전 유대 땅에서 가장 큰 사회.종교적 이슈(issue)의 주제이던 세례 요한의 죽음은 결과적으로 예수 한사람에게 전 사회적 억압에 시달리던 일반 대중들은 예수에게 정치적인 기대를, 주로 정치 기득권층은 예수에게 적대적 감정을 가지게 되었다. (1),(2)의 사실을 종합래 볼 때, 예수는 전 구속사적 관점에서 사역을 행하고 미래를 준비하셨다. 그러나 세상은 예수의 행위의 참의미를 이해하지 못하여 부단히 자신들만의 편협한 시각으로 예수를 오해하고 있었다. 이런 오해는 예수 부활 이후에야 비로소 해소되기 시작한 것이다.
분봉왕 헤롯 - 여기서 분봉왕(* , 테트라아르케스)이란 '네 개로 이뤄진 한 벌'을 뜻하는 '테트라스'(* )와 '통치'를 뜻하는 '아케르'(* )의 합성어로 문자적인 뜻은 '한 나라의 1/4을 통치하는 자'이다. 다시 말하면 이들은 로마 황제의 임명을 받아 로마의 정복지역의 한 부분을 통치하는 괴뢰 정부의 왕을 가리킨다. 더 자세한 내용은 신약 개론 중 '정치적 배경'란을 참조하라. 본문의 헤롯은 헤롯대왕이 죽은 B. C. 4년 부터 A. D. 39년까지 네 개의 통치지역으로 나뉜 유대 땅 가운데서 갈릴리와 베레아를 다스렸던 헤롯 안티파스(Herod Antipas)이다. 따라서 이 시대를 주무대로 활동하셨던 세례 요한 및 예수와 관계가 깊었던 사람으로, 예수로부터는 그의 교활하고 간사한 성품 때문에 '여우'라고 불리우기도 하였다(눅 13:32).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그에게 심문(審問)을 받으심으로써 그는 세례 요한 및 예수의 처형에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되었다(눅 23:7).
예수의 소문을 듣고 - 막 6:14에 의하면 '예수의 이름이 드러난 것'이며, 눅 9:7에 의하면 예수의 행한 '모든 일'에 대해서 헤롯에게 보고(報告)가 된 것으로 묘사되고 있는데, 마가와 누가의 두 복음서에서의 예수에 대한 소문은 모두 그의 '제사 파송'과 관련된 것으로 편집되어 있다. 그러나 대략 A.D. 29년경, 즉 아무리 빨리 잡는다해도주께서 죽기 1년전에 있었던 제자들의 전도 파송의 결과, 제자들이 행한 사역과 능력에 의해서 예수에 관한 소문이 더욱더 멀리 퍼져나갔다고 하더라도 헤롯이 지금 처음으로 예수의 소문을 들었다고 하는 것은 이상하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이미 일년 이상 헤롯의 통치지역인 갈릴리에서 말씀을 전파하시고 이적을 행해 오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헤롯은 갈릴리에 오래 머무르지 않았고 주로 세례 요한을 가두어 놓았던 베레아의 마케루스(Machaerus) 궁전에 있었거나 또는 사치와 향락에 심취해 있었으므로(F.R.Fay, Homer A. Kent, Jr.) 갈릴리 지방에서는 그가 예수에 관해서 가장 나중에 알게된 사람 중에 속했을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한편 그의 신하들이 예수의 소문에 관해 언급하고 그 일을 문제삼으려고 하는 일은 예수의 사역이 예수의 진의(眞理)와는 달리 그들에게 얼마나 큰 정치적 위협(威脅)으로 다가오고 있었는가 하는 사실을암시한다. 우리는 이 사실에서 정의와 진리는 그것이 굳이 불의와 비진리를 정면으로 비난하지 않는다 해도 물과 기름이 서로 갈라지듯이 서로 서로를 밀어내기 마련인 것을 발견할 수 있다.
=====14:2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 누가는 이 부분에 대해 먼저 신하 중 몇몇이 보고하고 헤롯이 곧 그 사실을 거부하는 듯한 인상으로 기술하고 있다(눅 9:7-9). 이에 비해 마가는 헤롯이 신하들의 말에 동조(alignment)한 것으로 기술했다(막 6:14-16). 아마 이러한 차이는 시간의 흐름에 따튼 심경의 변화를 표현한 것으로, 누가는 헤롯이 신하의 말을 듣고 난 즉시 일어난 상태를, 마태와 마가는 시간이 조금 더 경과한 뒤에 헤롯의 감정이 가라일은 후 헤롯이 예수를 세례 요한으로 판단할 때의 일을 기술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세례 요한이라 - 헤롯이 예수를 다시 살아난 세례 요한으로 오해한 원인은 (1) 그가 예수그리스도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이며, (2) 예수의 사역과세례요한의 사역에 있어서 유사점, 곧 설교에 있어서의 회개 촉구와 하나님 나라 도래의 임박성 강조, 유대 교권주의자들에 대한 책망이 일치하기 때문이다. 사실 헤롯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예수를 부활한 세례 요한으로 이해(16:14)는 예수를 유일무이(有一無二)한 메시야로 고백한 제자들의 신앙고백과는 엄청난 질적 차이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말이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으니 - 이러한 결론을 내린 사실에서 적어도 헤롯은 미신적이며 절충적인 신앙을 소유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그는 바리새적인 부활관에 영향을 받은 듯, 자신이 살해한 요한이 부활하여 죽기 전보다 더욱 강한 모습으로 행동한다는 미신적 사고에 사로 잡혀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생각때문에 그는 훗날 예수를 십자가 형(刑)에 처하도록 하는데도 묵시적 동조를 하게 된다. 한편 유대인들의 부활관은 신약 시대에 이르러 정립된 것이 아니다. 성경에는 구약 시대에도 이미 부활사상이 있었음을 암시하는 몇몇 구절들(욥 14:13-15;단 12:2-3;호 6:2)이 있다. 그러나 부활사상이 훨씬 다양해지고 많은 사람들의 사고방식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었던 것은 신구약 중간시기를 거친 신약 시대였을 것이다. 특히 바리새파 사람들은 부활신앙의 열렬한 신봉자였고 사두개파 사람들은 부활사상을 전면 부정(否定)하였다(행 23:8).실로 여기서 죽은 자는 모두 부활하여 심판을 받는다는 신약의 가르침과 달리 바리새파 사람들은 부할은 의로운 유대인들에게만 해당한다고 주장하는 점에서 예수의 가르침과 차이점이 있다.
이런 권능이 - 세례 요한이 그의 사역 중에 비록 어떠한 표적도 해하지 않았다(요 10:41) 하더라도 헤롯의 이 말에 의하면 많은 사람이 그를 권세(* , 여수시아)와 능력(* , 뒤나미스)을 갗춘 자로, 즉 적어도 그는 권위를 인정받고 있었던 것이다. 구러나 요한의 권위에 정도가 문제가 아니라, 이런 자 심지어 11:11에 묘사한대로 여자가 낳은 자, 즉 사람의 피를 받고 태어난 자 중 가장 큰자가 예수에 대한 선구자로서 예수의 메시야직에 대한 증거라는 점에서 마태는 이를 부각시킨 것 같다.
운동하는 도다 - '운동하다'는 헬라어 '에네르게오'(* )는 '활기를 돋우다','움직이다'의 의미인 영어의 'energize'에 해당하는 말이다. 즉 무엇인가 초월적 힘이 한 인격에게 영감(靈感)과 (動力)을 주는 상태를 가리킨다. 예수는 성령의 감동으로 말미암아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가 다른 초자연적인 힘(바알세불 등)늬 도움으로 행한다고 생각했듯이 헤롯도 죽은 세례 요한의 영(靈)이 예수 안에서 그 권능들을 행하게 생각하였다.
=====14:3
전에 - 이 말은 3-12절의 내용이 적어도 1, 2절의 시점 이전에 일어났던 일의 회상(回相)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공관복음 모두 이 헤롯의 공포와 세례 요한 살해의 사건을 12제자 파송 사건과 연결시키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12제자 파송을 즈음하여 요한 살해가 있었고 12제자 파송으로 전국이 예수 소문으로 들끓자 헤롯이 두려워하였던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동생 빌립 - 헤릇 빌립 1(Herod Philp 1)세를 말한다. 헤롯 대왕과 대제사장의 딸 마리암네(Mariamne 2)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 헤로디아의 첫 남편이며 살로메의 부친이다. 한편 그와 헤롯 안티바스와의 관계는 이복 형제간이었다<헤롯왕가의 가계 도표 참조>.
헤로디아의 일 - 여기 헤로디아는 헤롯 안티바스의 이복 형제인 '아리스토블루스'(Aristobolus)의 딸이었다. 그녀는 헤롯 빌립, 곧 자신의 삼촌과 결혼하여 살로메를낳았다. 그런데 사바티안(Sabatian) 왕인 아레타스(Aretas)의 딸과 이미 결혼한 바 있는 또다른 삼촌 헤롯 안티바스가 그녀를 유혹하여 남편 빌립을 버리고 자신과 불법적인 재혼을 하게 했다.그런 까닭으로 인해 아레타스의 딸은 본국으로 도망가게 되고 끝내 두 나라 간에 전쟁이 발발 하게 된다. 결국 안티바스는 이 전쟁에서 참패하게 된다. 유대사가 요세푸스(Josephus)에 의하면 이때가 세례 요한을 참수(斬首)시킨 바로 직후였기 때문에 이 참패의 원인을 의인의 살해로 말미암은 징벌이라고 간주한다. 한편 본문의 '헤로디아의 일'이란 헤롯 안티바스와 헤로디아의 불법적인 결혼에 대한 세례 요한의 책망을 가리킨다. 이 일로 인해서 헤로디아는 신약의 엘리야인 세례 요한을 미워하고 죽이고자 계획하였는데(막 6:19), 이는 바알의 선지자를 죽인 일로 엘리야를 죽이고자 했던 이세벧의 경우와 좋은 대조가 되는 사건이었다(왕상 19:1,2).
옥에 가두었으니 - 요한은 유대인의 3대 요새(要塞) 중의 하나인 마케루스에 있는 감옥에 갇히었다고 한다. 이곳은 헤롯과 헤로디아가 주로 거처하는 베레아의 남부를 방어하는 요새로, 표고 736m의 사해 동편 황량한 사정에 위치하고 있었다. 요한의 투옥 이후에 그의 제자들 중 일부는 별개의 집단으로 계속 존속하고 있었으며 그가 옥에 갇혀 있을 동안에는 계속해서 그의 지시를 받았던 것 같다(11:2).
=====14:4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 헬라어 동사 '엘레겐(* )은 과거 미완료시상으로서 '그가 반복해서 말하곤 했다'라는 의미를 갖는다. 요한이 헤롯을 직접 만나 그를 책망했다고 하는 것 보다는 오히려 사람들에게 설교 하는 중에 혹은 세례를 주는 등의 여러 행위속에서 헤롯과 헤로디아의 불법적인 결혼에 대해 공공연히 비난하였음을 의미한다.
그 여자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 - '광야에서의 외치는 자의 소리'였던 세례 요한의 '고발 내용'이다. 요한이 헤롯을 책망한 것은 그가 첫번째 부인인 아라비아 왕 아레다(고후 11:32)의 딸을 버림으로써 외교적 갈등으로 인하여 나라의 정치적 위기를 몰고온 때문이라기 보다는 이방인 출신(헤롯대왕은 이두매 사람이었다)인 헤롯이 자신이 유대인이 되었음을 자처하면서도 유대의 율법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율법(레 18:16;20:21)에는 형제의 아내와 결혼할 수 있는 조건은 그 형제가 아들이 없이 죽었을 때 뿐이다. 그러나 헤로디아의 첫 님편인 헤롯 빌립 1세는 여전히 살아있었으므로 그들은 간음죄를 범한 것이며, 또한 헤롯파 헤로디아는 삼촌과 조카(헤로디아는 헤롯 대왕의 또 다른 아들 아리스 토블루스의 딸이다) 사이로 이들은 근친상간(近親相姦)의 죄를 범한 것이 된다.
=====14:5
헤롯이 요한을 죽이려 하되 - 그 이유는 두 가지, 즉 (1) 도덕적 이유, 즉 요한이 자신의 비윤리성을 비난했기 때문에, (2) 정치적 이유, 세례 요한이 민중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너무 심각해졌기 때문에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두 문제는 상호 연결된 것으로서 나누어서 생각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다만 유대인 사가(historian) 요세푸스(Josephus)등은 정치적 이유에 초점을 두고, 성경 기자들은 비교적 전자에 기울어진다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사실 세례 요한에게 있어 헤롯가문이나 로마의 식민체제 등을 비판하는 것이 임무는 아니었다. 오히려 구속사적 입장에서 구약의 종말과 하나님 나라의 도래로 인한 신약의 시작을 증언하는 것이 그의 주(主) 임무였다. 또한 그가 세속 정치인에게 오해를 받아 죽임을 당하는 것은 예수께서도 정치적 오해를 받아 죽임을 당한 것과 연결되어 다시 한 번 세례 요한이 예수의 선구자였음을 상기시켜 준다.
민중을 두려워하더니 - 막 6:20에서 헤롯이 요한을 두려워하여 그를 처형하지 못하고 있었다.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에 따르면 이때 헤롯이 요한을 단번에 처형치 못한 것은 백성들의 폭동을 우려했기 때문이라 전한다. 여하튼 예루살렘에 있는 종교지도자들을 제외한 민중의 태도는 세례 요한에 대하여 매우 호의(好意)적 인 것이었다(3:5, 6;11:7-4). 그에 대한 민중들의 신뢰와 지지의 원인은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볼 수 있다. (1) 유대지도자들과 율법주의자들의 죄악을 고발하고 그들을 책망하였기 때문이다. (2) 적국(敵國)인 로마를 등에 업고 민중들을 억압하고 있는 헤롯왕가를 비판하였기 때문이며, (3) 예수께서도 그를 크게 칭찬하셨으므로 예수를 따른 자들도 세례 요한을 참선지자요, 예수의 길을 예비하기 위한 선구자로서 인식하고, 사실을 사람들에게 전했기 때문이며, (4) 헤롯이 세례 요한을 불법적으로 감금한 것에 대한 사람들의 분노와 동정으로 인해서 세례 요한의 인기가 더욱 더 고조되고 전국민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14:7
헤롯의 맹세로 - 살로메의 육감적 독무에 심취한 헤롯 안티바스는 탐욕스럽고 권세있는 제왕(帝王)으로서의 기분을 맘껏 누렸다. 그는 분위기에 도취되어 마치 고대 페르시아 군주들이 하던 식으로 호언장담을 늘어 놓았다(에 5:3, 6;7:2).헤롯은 자기 어리석음에 도취되었던 것이다.
허락하거늘 - '호몰로게오'(* )는 '확언하다', '공언하다' 등의 의미로, 맹세와 다짐을 동반한(* , 메타) 허락으로서 반복될 수 없는 약속이다. 물론 왕이 기쁜 날을 맞아 신하에게 훌륭한 선물을 내리는 것은 일상의 일이었지만 헤롯은 자신이 이행해야 할 내용을 알지도 못하면서 기분에 도취된 채 호언 장담함으로써 돌이킬 수 없는 과오(過誤)를 저지르게 된다.
=====14:8
제 어미의 시킴을 듣고 - 그 당시 살로메는 육체적으로는 뭇남성의 시선을 집중시킬만큼 성숙했는지 모르나 정신적으로는 아직 제 어미에게 의존해야 할 만큼 미숙한상태였다. 이것이 바로 그녀가 악의 도구로 전락하게 된 크나큰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한편 본문의 '시킴'에 해당하는 원어 '프로비바스데이사'(* )는 '선동하다', '권면하다'는 뜻으로 헤로디아의 집요하고도 악의에 찬 일면을 보여준다. 여하튼 본문은 세례 요한의 죽음이 바로 헤로디아의 사주(使嗾)에 의한 것임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말이다. 요한의 죽음은 그녀의 간계(奸計)에 의한 것이었다. 헤로디아는 분명히 요한의 처형에 대해 끊임없이 헤롯을 졸랐을 것이다. 그러나 결심을 못하는 헤롯의 행동을 통해서도 자신의 요구를 포기하지 않던 헤로디아는 어린 딸을 이용하여 눈에 가시와 같이 자신의 부정(不貞)을 고발하던 요한을 제거하려 하였다.
세례 요뱐의 머리를 소반에 담아 - 헤로디아의 횹혈귀적인 완악상을 드러내 준다. 크리소스톰(Chrysostom)에 의하면, 이때 헤로디아는 자신의 부정한 결혼을 고발하던 요한의 칼날같은 혀가 침묵하고 있는 모습을 보기 원했기 때문에, 그리고 그러한 요한을 마음껏 저주하고 조롱하기 원했기 때문에 참수(斬首) 당한 요한의 머리를 요구했다고 한다. 한편 여기 언급된 '소반'은 타원형으로 된 얇고 큰 접시를 가리킨다.
여기서 내게 주소서 - '여기서'라는 말은 유대의 정치, 종교지도자와 로마시의 군관들이 모인 잔치 자리로서 연회석이자 공식적인 모임의 장소이다. 헤로디아는 헤롯이 그의 딸에 대한 맹세를 깨뜨릴 것을 염려하여 모인 사람들의 눈과 귀를 담보(擔保)로하여 그(헤롯)를 위협하고 요한의 처형을 더이상 지체치 말고 즉각 실행할 것을 촉구하였다.
=====14:9
왕이 근심하나 - 헤롯의 근심이 무죄한 자를 죽이는 것에 대한 양심의 가책 때문인지 아니면 요한의 죽음으로 인해서 일어날지도 모를 민란 대문인지 확실치는 않다. 어쨌든 그의 근심은 '양심의 최후 투쟁'(plumptre)이었으나 그는 의가 아니라 자신의 위치에 집착, 선택함으로써 악에게 굴복하는 결과를 가져 왔다. 자기의 맹세한 것 헬라어 '호르쿠스'(* )는 맹세의 뜻인 '호르코스'(* )의 복수형으로, 맹세가 여러 번 반복되었거나 아니면 그 맹세가 확정적일만큼 강력했던 것임을 의미 하는 말이다. 헤롯이 세례 요한을 처단하도록 허락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첫째, 고대 근동에서의 맹세는 율법에서도 평시되어 있는 바와 마찬가지로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있었다. 특히 성경적인 맹세는 하나님앞에서 거짓없음과 약속이행의 의지를 엄숙하게 맹세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위반할 경우 하나님으로부터 어떠향 처벌을 받더라도 이의(異意)가 없는 것을 의미한다(민 30:1-8, 강해 '서뤠과 맹세에 대하여') 신약 시대에 이르러 맹세는 하나님 대신에 신의 인격, 예배에 관련된 물체, 우주만물, 성전 등을 가리켜 맹세가 행해졌다. 그러나 맹세의 남용(남용)으로 인해서 예수께서는 일체(일체)의 맹세를 반대하시기도 하였다(마 5:34-37). 한편 구약의 인물 중에서도 경솔한 맹세로 인해서 절망적인 상태에 빠지게 된 사람으로 입다(삿 11:31-39), 사울(삼상 14:38ff)등이 있다. 둘째, 헤롯은 그의 왕으로서의 권위 때문에 맹세를 깨뜨릴 수 없었을 것이다. 고대 사회에서 왕의 말은 곧, 국법이었다. 그 예로 다니앨을 사자굴에 집어넣었던 메대 나라의 다리오 왕의 금령을 들 수 있다(단 6:14-15).
그 함께 앉은 사람들 - 막 6:12에 의하면 이곳에 초대된 사람들은 대신들과 천부장들과 갈릴리의 귀인듸이다. 이 사람들은 왕의 잘못을 제지하는 얼리야김의 방백들과는(렘 36:25) 달리 헤롯의 불의를 조장하고 촉구하는 자들이었을 겻이다. '같은 깃털을 가진 새들이 함께 모이듯' 헤롯의 주위에 모여드는 사람들은 모두 헤로디아와 같이 부정하고 사악 한 자들로서 왕의 잘못을 지적하는 대신에 그의 비위를 맞추고 아첨함으로써 세례 요한의 참수를 결단하게 하는 결정적 요소로 작용하였다. 그들이 바로 어리석은 헤롯의 맹세의 증인이 되었고 사악한 헤로디아의 살인에 동조자(同調者)가 되었다.
=====14:10
사람을 보내어...옥에서 목 베어 - 심문이나 재판의 판결없이 사람을 처형하는 것과 더구나 모세 율법에 따르면 목을 베어 죽이는 일은 종교적, 신앙 공동체에 대한 공적 범죄이외에는(출 32:27;신 13:6-18) . 참수헝은 그리이스나 로마의 관습을 따른 것이다. 헤롯과 그를 따르는 자들은 이러한 이방적 태도를 반율법적이고 반민족전인 것이어서 그가 아무리 유대인임을 자처한다고 하더라고 민중의 미움을 받는 이유가 되고 있다.
=====14:11
머리를 소반에 담아다가 - 헤로디아는 그녀의 부정과 불의를 끝없이 고발하던 세례요한의 혀가 잠잠해졌음을 확인하기 위하여 그의 머리를 요구한 것 같다. 그러나 요한의 처형이 정의를 부르짖던 그의 '소리'를 결코 잠재우지는 못했을 것이다.
여아에게 주니 - 여기서 '여아'(* , 코라시온)란 혼기(婚期)가 가까운 처녀를 가리킨다. 사실 그 당시 증근동 지방에서는 조혼(早婚) 풍습이 있었기 때문에 십대 중반에 이른 살로메에게 이 용어를 붙인 것은 무리가 아니었다.
제 어미에게 가져 가니라 - 헤로디아는 세례 요한의 목을 요구한 뒤 얼마지나지 않아 그의 목을 받아들 수 있게 되었다. 실로 악인은 피흘리기를 좋아하며, 그것을 신속히 행한다. 한편 루핀(Rufin)의 제롬(Jerome)은 이때 헤로디아가 뽀족한 바늘로 피로 젖은 세례 요한의 혀를 사정없이 찔렀다고 전한다. 한편 무고(誣告)한 피를 흘리게 한 헤롯은 얼마 후 그의 전처의 본국이었던 페트라(Petre)의 아레타스 왕과의 전투에서 참패하여 도주하였고, 또 로마 황제의 진노를 사게 됨으로써 로마 원로원에 의해 프랑스 리용으로 추방되어 거기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고 한다. 또한 살로메는 겨울에 얼음 위를 걷다가 얼음이 꺼져 그만 날카로운 얼음에 목이 찔려 죽었다고 한다(Josephus). 정녕 하나님은 요한이 아닌 헤롯과 그 일당의 목을 요구하신 것이다.
=====14:12
요함의 제자들이...장사하고 - 하나의 조직체로서의 요한의 제자들이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장면을 보여주는 구절이다. 요한의 제자들은 스승이 살아있을 때에 스승과 연락이 잦았으므로(11:2) 스승의 참수 소식을 곧바로 접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편 그들은 머리없는 스승의 시신을 안치한 후 곧 예수께 나아갔다. 즉 그들은 스승인 요한의 증언, 곧 예수가 하나님의 어린 양(요 1:35-40)이라는 말을 듣고 점차 예수를 신뢰하게 되었는데, 이제 그 스승이 죽자 더욱 적극적인 자세로 예수에게로 와서 그의 제자가 되려고 하였을 것이다. 이와 더불어 요한은 생전 뿐 아니라 사후에도 그의 영향력이 대단했는데, 그 결과로서 요한의 제자들은 팔레스틴을 벗어나 지역에서 여전히 작은 분파로서 존재하였었는데 그들은 대부분 예수를 중심한 복음의 충만한 지식을 지니지 못하고 단지 편협한 신앙적 지식만을 소유하고 있었다(행 18:24-19:7).
예수께 고하니라 - 막 6:30에 의하면 이 보고는 사도들의 선교 활동에 대한 보고였다. 그러나 마태는 이 보고가 요한의 처형에 관한 것임을 서술하는 가운데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의 제자들에게 흡수되었을 가능성을 암시하고 있다. 옥에 있는 요한에게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보고한(11:4 ff) 제자들이 요한의 처형 소식을 주님께 알렸다는 사실은 이미 그들이 예수와 스승 사이의 사상의 일치를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요한의 가르침대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은 자들이 많았을 것임을 의미한다.
=====14:13
예수제서 들으시고 - 본문에서 예수께서 들으셨다고 하는 내용은 '요한의 처형'에관한 소식이 아니라 예수의 권능에 대한 소문이 신하들에 의해 헤롯에게 보고되었고 헤롯이 그를 다시 살아난 세례 요한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고 하는 소식이다(1절). 따라서 3-12절의 내용은 부록적(附錄的) 설명임에 분명하다. 3절에 보면 요한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는 헬라어 '가르'(* , 왜냐하면)로 시작되는데, 이 '가르'는 어떤 사실에 덧붙여 설명하고자 할 때 쓰이며, 반면에 3절의 초두에 나타나는 '데'(* , 그리고)는 어떤 일을 새롭게 전개시코고자 할 때 사용되는 말이다(L. Cope).
따로 빈들에 가시니 - 세례 요한의 사후(死後) 헤롯이 이번에는 자신에 대해 주목하기 시작하였다고 하는 것과 헤롯의 미신적인 두려움과 그가 자신을 만나보기를 간절히 기대한다(눅 9:9)는 사실을 아신 예수께서는 해롯의 관할지역을 떠나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 벱새다 광야로 가셨다. 이때부터 예수의 사역은 주로 제자들을 염두에 두고 그들을 훈련하기 위한 것이 되었는데, 이는 그가 자신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길이 바로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지역 주위에서 발생한 여러 사건과 이적들은 예수의 공생애에 있어서 그 절정에 속하는 것이며 그 이후의 사건들은 수난을 예고하는 것이라고 하는 의의를 갖는다.
여러 고을로부터 걸어서 좇아간지라 - 예수께서는 전에도 바리새인들의 적의(敵意)를 피해 떠나신 적이 있는데(12:15), 이제는 헤롯 안티바스를 피해 안식과 묵상을 위해 떠나신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피하신 또 다른 이유는 12제자들이 선교 여행을 마치고 막 도착했기 때문이다(막 6:30;눅 9:10). 그 제자들은 영.육의 휴식기가 필요했고 자신들의 선교 방법에 대한 검토 및 예수께 복음의 비빌을 좀더 깨우침 받아야 했다. 한편 누가는 예수가 가신 빈들이 벱새다(눅 9:10). 즉 갈릴리 북동쪽 해안에 위치한 벱새다 율리우스(Bethsaida Julius) 지방에 속한 곳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사람들은 갈릴리 호수 해변을 따라서 도보(徒步)로 예수를 좇아갔을 것이다. 무리들은 선지자로 여기던 세례 요한의 처형소식을 듣고 목자 잃은 양처럼 방황하다가 예수 계신 곳을 듣고 그분에게서 영혼의 쉼을 얻고자 찾아 나선 것 같다.
=====14:14
예수께서 나오사 - 예수께서는 자신이 공개됨으로써 대적자들의 표적이 될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제자들과 조용한 무리를 향해 나아오셨다. 이것은 바로 인간 자신의 자유 의지에 의한 결단에 대해 선택, 구원하시기 위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주권 의지가 응답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큰 무리 - 직역하면 '많은 무리'라 된다. 한편 이 사람들의 수(數)를 21절과 막 6:44에서는 남자만 '오천 명'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그 당시 숫자 계산에 들지 않는 여자와 어린아이들을 포함한다면 이 무리는 적어도 만 오천내지 이만 명은 넘었을 것이다.
불쌍히 여기사 - (* , 스플랑크니조마이). 헬라어의 이 동사는 유대인듸이 참으로 애끓는 아픔의 세월을 보낸 디아스포라(Diaspora)상태로 살아가기 시작할 때 생겨났다고 한다. '불쌍히 여기다'라고 하는 말은 내장 혹은 심장 등 인간의 내부로부터 그 아픔을 느끼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히브리인들이 '내장'(* , 스플랑크나)을 인간의 깊은 감정이 거하는 곳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실로 '인간에 대한 긍휼'은 예수의 전인격성을 대표하는 속성으로, 자식에 대한 어버이의 간절한 정(情)이상의 애틋한 긍휼의 마음이다. 한편 예수의 인간에 대한 최대한의 긍휼은 바로 십자가 상에서의 대속의 행위로써 드러나고 있다. 그런데 예수께서 병을 고쳐주시는 경우 사람의 믿음을 보고서 행하시는 적도 있지만 흔히는 그 자신이 그들을 '불쌍히 여기심'으로 병고침의 이적을 행하셨다.
=====14:15
저녁이 되매 - 예수 당시의 유대인들은 저녁(* , 옵시아스)을 두 가지로 나누어서 이해하였는데, 제 1저녁은 늦은 낮, 주오후 3시부터 시작되고, 제 2 저녁은 일몰 이후 부터 시작되었다. 본문의 구절은 제 1저녁을, 23절에서는 제 2저녁시간을 가리킨다.
이곳은 빈들이오 - 빈들을 가리키는 말인 '에레모스'(* )는 광야 혹은 한적한 곳으로, 세례 요한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까지 메뚜기와 석청을 먹고 살았던 곳도 이러한 곳이었으며, 이스라엘 사람들이 만나와 메뚜기로 매일의 양식을 삼았던 곳도 바로 이러한 곳이었다. 따라서 마을이 없고 인적이 드문 이러한 곳에서 자연식품인 메뚜기와 석청 그리고 하나님의 도우심의 손길에 의해서 마련된 만나를 제외한 다른 떡이나 음식을 기대한다고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헤롯은 그의 찬란한 궁전에서 귀족들과 연회릍 벌렸지만 그 연회는 살인과 범죄의 현장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예수께서 그의 제자와 큰 무리들과 함께 베푸신 오병이어의 기적의 현장 '빈들'은 바로 하나님의 축복과 인간의 감사가 넘쳐나는 은혜의 땅이며, 천국잔치의 전례(前例)가 행해진 곳이다.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때가 벌써 지났으니'가 된다. 그렇다면 이 '때'란 어떤 상황을 말하는가. 이에 대해 예수께서 가르침을 마칠 때, 식사할 때, 무리들을 돌려보낼 때, 밝은 시간이 지나는 때 등으로 해석하는데 이 여러 견해들은 모두가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어느 것을 취하더라도 거의 동일한 의미일 것이다. 무리를 보내어...먹을 것을 사 먹게 하소서 - 어쩌면 현대에 만연하고 있는 금전만능적이고 지극히 타산적인 사고에서 나온 것처럼 들리는 제자들의 무책임한 발언이다. 사설 제자들 중에는 (아마 가릇유다일 것이다) 예수와 제자들에게 필요한 돈이 얼마쯤 남아 있었는지 알고 있는 사람이 있었을 것이며, 그 돈으로는 약 2만여명의 무리를 먹이기에 역부족임을 또한 알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제자들은 무리를 자기들에게서 떠나게 하는 것 밖에 다른 방도(方途)를 찾지 못했던 것이다.
=====14:16
갈 것 없다 - 문자적으로 '가게 할 필요가 없다'는 뜻으로서, 부정어 '우'(* )가 사용되어 강압적인 부정문이 되고 있다, 예수께서는 꽤 합리적이고 설득력있는 것과 같은 제자들의 주장을 이 한 마디의 말로 단호히 거부하셨다. 예수께서는 해산(解散)하기를 종용하는 제자들의 말에 따라 힘없이 돌아가는 병들고 굶주린 사람들을보고, 깊은 연민과 애정으로 돌아가려는 그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던 것이다. 실로 인간이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그리스도에게서 떠나는 일은 결코 필요치 않다. 정녕 예수께서는 지금도 인간이 안고 있는 그 어떤 문제일지라도 외면치 않고 당신의 넓은 품 안으로 받아 들이고 게신다(요 14:1).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 제자듸은 '스스로 사 먹게하소서'라고 말하였고 예수는 '너희가 그들에게 그것을 주라'고 하셨는데,이 말을 들은 제자들은 참으로 당황하지 않을수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이 명령에 쓰인 동사 '도테'(* )는 '주다'란 뜻의 '디도미'(* )의 제 2 과거형으로, 즉각적이고 긴급한 행동이 요구됨을 의미 한다. 실로 경제적으로 풍요롭지 못했던 제자들에게는 무리들에게 음식을 대접해야 할, 그것도 지금 당장 수행해야 할 의무가 주어졌다. 물론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거의 만명 가까이 되는 사람들을 먹일 수 있는 능력이나 수단을 가지고 있지 않음을 알고 계셨다. 그러나 이 말씀은 굶주린 군중들에 대한 그들의 책임감을 일깨워 주는 것과, 또한 자신에 대한 제자들의 신앙의 정도를 시험하기 위한 의도에서 행해진 것일 것이다. 물론 여기서의 책임은 무리들에게 물질적인 양식 뿐만 아니라 영적인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해야 할 사명을 가리킨다. 예수께서 사도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 치라, 먹이라'고 세 번이나 거듭 부탁하셨듯이(요 21:15-17) 본문에서도 제자들에게 그들의 사명을 잊지 않도록 당부하고 계신 것이다. 이러한 제자들의 책임은 현존하는 교회의 사명이기도 하다. 교회는 굻주리고 헐벗은 사람들에게 육의 양식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심령이 굶주리고 메마른 자에게 영원한 생명수를 마시게 할 할 책임이 있다.
=====14:18
내게 가져 오라 - 마태만이 이 말씀을 기록하고 있다. 이는 분명히 떡의 끝없는 분배 사건이 예수의 손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임을 암시하는 말이다. '먹을 것을 주라'는 예수의 명령을 이해치 못한 제자들의 연약한 믿음에서 기적이 형성된 것이 아니라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는 예수의 마음에서부터 그것은 발생되었다. 따라서 제자들은 기적의 공동 창조자가 아니라 기적의 분배자(分配者)에 불과하였다. 실로 제자들의 이러한 연약한 믿음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기까지 계속되었다. 따라서 예수의 '내게 가져오라'라고 하는 이 말은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키 위해 제자들에게로, 교회 자체에게로가 아니라 오로지 교회의 머리 이신 주님에게로만 자신을 가져가야 한다고 하는 사실을 암시한다.
=====14:19
잔디 위에 앉히시고 - 눅 9:14에 의하면 떼를 지어 한 오십 명씩 앉히셨다고 하였고, 막 6:40에 의하면 혹 백씩 혹 오십씩 알았다고 하였다. 여기서 '알았다'의 뜻인 '아나클리노'(* )는 물론 이스라엘인들의 보통의 식사 때의 자세와 마찬가지로 비스듬히 기대어 눕는 것을 의미한다. 여하튼 예수께서는 신령한 이적을 행하시기에 앞서 그 이적에 참여하게 될 무리들에게 먼저 '순종'과 '질서'를 요구하셨다. 한편 본문의 '잔디'에 관한 언급으로 보아 이때는 대략 3, 4월 경으로 추정된다.왜냐하면 팔레스틴에서는 우기(雨期)가 막 끝나가는 2월 중순 경부터 빈들에 잔디가 돋아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요 6:10). 더욱이 요한은 이때가 유월절(니산 월 14일)이 가까운 때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요 6:4). 참고로 유월절 기간이 다한 이후로는 잔디가 푸른 기운을 잃고 시들기 시작한다.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 이러한 행동은 유대 가정에 있어서 가장(家長)이면 누구나 하는 평범한 일이었다(롬 14:6; 딤전 4:5). 유대인 탈무드(Talmud)에 의하면 '감사없이 무엇을 즐기는 자는 하나님께 강도짓 하는 것과 같다'고 할 정도로 감사의 일상화(日常化)를 가르쳤다. 바로 예수께서 이 날의 잔치를 주관하시는 주인이시며,세 자들은 그의 시중꾼이며, 무리들은 잔치에 초대되어 온 손님들이다.여기서 '축사하다'의 뜻인 '유로게오'(* )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는 것을 말한다. 무엇을 먹기 전에 하는 유대인들의 공통된 기도의 내용은 '땅으로부터 양식을 얻게 하시는 우주만물의 왕이신 우리 주 하나님이시여 감사하나이다'였다. 본분에서 예수께서 행하신 기도의 내용 역시 그들앞에 적은 양이나마 음식이 놓여진 것에 대한 감사이지, 그 음식의 무한정한 증가를 간구한 기원에 집중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즉 예수께서 평소에 제자들과 함께 식사하실때 드리던 기도 그대로였을 것이다(26:26;눅 24:30).
떡을 떼어 - 떡을 떼시며 그것을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시는 예수의 손이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장정 5천명과 여자, 어린아이가 먹을 수 있었던 기적의 근원지요, 기적이 일어난 현장이며, 떡을 떼시는 그 순간이 바로 그러한 기적이 발생한 시점(時點)이다. 예수가 행하시는 기적은 이상한 주문(呪文)이나 신기한 동작이 필요치 않는 일상적인 자연스런 행동 속에서 이루어졌다. 조각이 계속해서 불어나며 떡덩어리가 결코 없어지지 않는 이 기적을 나타내는 말이 바로 '떡을 떼며'라는 이 단순한 한 마디의 말이다. 그런데 이 뗀 떡은 그것이 바로 인류의 영적 생명을 위해 찢기울 생명의 떡이신 예수와 그분의 육체의 모형이라고 하는 점에 그 큰 의의가 있다(요 6:26, 27). 예수께서는 그 많은 사람들을 배불리 먹게하기위하여 끊임없이 손으로 떡을 떼셨다. 오늘도 하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예수께서는 우리의 육과 영의 양식을 위해서 여전히 떡을 떼어주신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 제자들은 언제나 예수의 사건을 다른 사람보다 더 가가이, 더 먼저 경험한 목격자들이며 그 목격한 사실들을 전달해 주는 증인들이다. 떡과 물고기가 전해지는 이러한 과정은 생명의 양식인 그리스도의 말씀이 먼저 복음에 사로잡힌 자들에 의해 세상에 전달되는 과정과 동일하다.
=====14:20
다 배불리 먹고 - 겨우 목을 축이고 한 끼니를 때우는 정도가 아니라 사람들이 멀리 떨어진 자신의 집을 찾아 갈 기운을 얻을 수 있을 정도로 넉넉하게 떡과 물고기가 배급(配給)되었다는 말이다. 특히 '배불리 먹었다'고 하는 말은 아마도 미래에 있을 메시야 왕국의 잔치의 풍성함을 나타내기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더욱이 이는 그리스도의 몸은 온 인류의 영적 양식이 되며 모든 죄인의 죄악을 모두 사(赦)할 수 있는 큰 사랑의 힘을 지녔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남은 조각 - 기름으로 모든 빈 그릇을 채운 이적(왕하 4:1-7)과 스무 개의 보리떡과 자루에 담은 채소로 100명을 먹인(왕하 4:42-44) 엘리사의 기적과 신약에서 나오는 예수의 모든 기적들의 공통점은 바로 '사용하고도 남았다'고 하는 사실에 있다. 예수께서 병자들을 고치신 기적에서도 병자는 그 자신의 병을 고쳤을 뿐만 아니라 몸이 완전히 건강해지는 것을 체험한다. 이러한 차고 넘치도록 후히 주시는 사랑이 바로 하나님의 긍휼이다. 따라서 남은 조각들은 바로 주님이 행하신 기적의 조각들이며 주님의 사랑의 파편(破片)들이다. 한편 여기서 '남은 조각'은 단지 먹다가만 부스러기만을 의미하지 않고 예수께서 나눠주시기 위해 손으로 떼 놓은 조각듸까지를 포함한 말일 것이다.
열 두 바구니 - 열 두 제자가 각각 한 바구니씩 거둔 것이라 볼 수 있다. 사실 그 남은 조각들은 12제자들의 계속되는 식량이 되었을 것이다. 한편 바구니를 뜻하는 헬라어 '코피노스'(* )는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버들가지로 만든 음식담는 그릇으로서 여행자들의 휴대용 주머니로 활용된 것이었다. 그에 비해 예수께서 4천명을 먹인 이야기에서 나오는, 일급 광주리는(15:37) 헬라어 '스퓌리스'(* )로, 흔히 이방인들이 물고기나 과일을 담는데 사용하는 갈대로 만든 광주리였다. 그리고 오천 명, 떡 다섯 개, 열 두 바구니 등의 5와 '12'라는 숫자는 '모세 오경'과 '열 두 지파'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유대인들에게 의미 있는 슷자로 이해된다. 결국 이러한 점들은 많은 학자들로부터 오천 명을 먹인 기적은 유대인에게, 4천명을 먹인 기적은 이방인들에게, 예수가 생명이 됨을 나타내기 위해 기록된 것이라는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14:21
여자와 아이 외에 오천 명 - 오병 이어의 기적 사건은 예수께서 돌아가시기 만 1년전인 유월절이 임박한 기간에 베풀어진 것으로 보인다(요 6:4). 따라서 그 당시 무리들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이었기 때문에 많은 숫자가 한꺼번에 운집(雲集)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편 이때 모인 무리는 성인 남자만을 계수(計數)하는 유대인의 계산법에 따라 '오천 명'이었기 때문에 여자와 아이 (* , 파이디온, 조그마한 아이란 뜻)까지를 합산하면 1만 5천명에서 2만명 정도로 추산(推算)된다. 예수의 공생애 중에 최대의 군중이 운집한 것이다.
=====14:22
즉시...재촉하사 - '재촉하다는 '억지로 시키다'의 뜻이다. 예수께서 오천 명이 넘는 무리들을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배부르게 하신 후에 급히 서둘러 제자들을 무리로부터 멀리 떠나가게 한 이유는 다음과 갈이 추측해 볼 수 있다. (1) 주님은 한적한 곳에서 홀로 기도하기를 위하셨다(23절). (2) 예수께서는 그의 제자들 뿐만 아니라 동요하고 있는 무리들을 피하여 한적한 곳에서 잠시 쉬시기를 원했다(막 6:31-32). (3) 예수께서는 그의 제자들을 먼저 해산시킴으로써 자신을 왕으로 삼으려하는 백성듸의 의도와 분위기를 잠재우려고 하였다(요 6:15). 왜냐하면 그의 제자들은 주님을 도와 무리들의 잘못된 기대를 올바로 잡아줌으로써 주님을 돕기 보다는 오히려 자신들의 정치적 욕망을 성취하려는 기대에 빠져 있었으므로 그들이 남아있는 일이 예수에게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막 8:27-9:1 주제 강해, '메시야 사상 전개' 참조).
앞서 건너 편으로 가게 하시고 - 음식을 먹은 벱새다 광야의 건너편은 갈릴리 호수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게네사렛일 것이다(34절). 할편 요 6:17은 가버나움이라는 마을을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 웨스트코트(Westcott)와 모리스(Morris)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예수께서는 벱새다 율리우스에 근접해 있는 동쪽 해안에서 자신을 기다리라는 당부와 함께 제자들을 보내어 호수를 건너게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보내는'이라는 가정법 과거 동사와 함께 쓰인 '동안에'란 뜻의 '헤오스 후'(* )는 '때까지'(until)로 번역되어야 한다. 따라서 건너펀으로 가게 하셨다고 하는 의미는 주님께서 무리들을 해산시킬 때까지만 제자들이 앞서 가다가 그 후에 예수께서는 기도하시고 다시 제자들과 만나 건너편으로 건녀가시려고 했다는 것이다.
=====14:23
무리를 보내신 후에 예수께서 이제부터 그와 함께 하려는 많은 군중들을 집으로 돌려 보낸 이유는 다음과 같이 생각될 수 있다. (1) 여러가지 이적, 특히 오병이어 사건에서 그가 참 메시야이심이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무리들에게 옹위를 받으며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으며(21장), (2) 비록 그가 유대인들이 고대(苦待)하던 참 메시야이시라고 하더라도 메시야가 올 때 하나님께서는 자기 종들을 시켜 생선과 육류를 준비하여 잔치를 배설(排泄)할 것으로 생각하던 그들의 예측과는 달리 예수께서는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온 인류가 고대하는 구원자로서 오히려 유대인듸에게는 배척당하고 수난당하실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예수께서는 미리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리들의 갈채와 소란은 마귀의 유혹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먼저 여기서 '산'은 혼잡한 무리들과 격리된 영적 교제의 장소이다. 더불어 이곳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항해 모습을 주시(注視)할 수 있었을 것이다(막 6:48). 한편 예수께서는 자신이 행한 기적을 둘러싸고 중대한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종종 한적한 곳을 찾아나섰으며 그곳에서 기도와 명상을 하곤 하셨다(막 1:35;눅 5:16;6:12). 예수의 능력의 비밀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사실에 있을 뿐만 아니라 기도를 통해서 성부 하나님과 계속적으로 교제를 나눈 것에 있었다. 이것이 바로 그의 사역을 가눙케하는 예수의 내적인 삶의 본질이었다. 기도와 이적 행위 사이의 바른 관련성은 행위가 일차적으로 중요하고 기도로써 그 행위를 돕는 것이 아니라 기도가 최고로 중요한 것이며 행위는 그 기도를 입증하는 것일 뿐이다(Archbishop William Temple).
저물매 - 두번째 저녁을 의미한다(15절 참조). $4} 땐 육지에서 수찌나 떠나서. 헬라어 성경에서 이 표헌은 '데손 테스 달라세스'#르& 60# #$딛쇼초##4쥘싣)로, 박다한즈)운비 롤 의미한다. 이곳과 평햐구절인 요 6 } 질에는 '십여 키'로 표헌되고 있는데, 이는 조-7 스 타디온쫌 되는 거리이다. 그렇다면 1스타디온 (빽%2)은 1#.#8이므로 따라서 육지에서 배 까지의 거키는 4.와2 내지 5.#8에 해당한다 (제 1꿜 성경총른 '성경의 도량형'란 참조.) 바람이 거슬찌므로. 갈럴키 호수에서 부는 바 람은 폭피우를 동반한 돌피으로 급격한 기후변 동과 고난의 위혐성이 있다(막 4} 37) 요 6 } 18). 할편 성경 문학적으로 바람은 생의 딧없음 (시 훨} 쥡, 하나넘의 심환#엠 8 } 17), 사람 들올 흩어지게 하는 개난여1 6} #, 화람올 피혹하는 고훈(엠 4} #꿔 등올상징한다.
=====14:24
육지에서 수리나 떠나서 - 헬라어 성경에서 이 표현은 '메손 테스 달라세스'(* )로, '바다 한 가운데'를 의미한다. 이곳과 평행구절인 요 6:19에는 '십여 리'로 표현되고 있는데, 이는 25-30 스타디온쯤 되는 거리이다. 그렇다면 1스타디온(stadion)은 184.85m 이므로 따라서 육지에서 배까지의 거리는 4.6km 내지 5.5km에 해당한다(제 1권 성경 총론 '성경의 도량형'란 참조).
바람이 거슬리므로 - 갈릴리 오수에서 부는 바람은 폭퐁우를 동반한 돌풍으로 급격한 기후 변동과 고난의 위험성이 있다(막 4:37;요 6:18). 한편 성경 문학적으로 바람은 생의 덧없음(시 78:39), 하나님의 심판(렘 18:17), 사람들을 흩어지게 하는 재난(렘 49:36), 사람을 미혹하는 교훈(엡 4:14)등을 상징하다. 따라서 본문의 이 말은 환호, 열광하는 군중들을 뒤로하고 예수로부터 떠밀려 배를 타고 있는 제자들이 이미 마귀가 가져다 주는 시험, 즉 세상 권력에 대한 미련이 여전히 그들을 괴롭혔을 것이라고 하는 상상을 가능케 한다. 실로 그들의 배는 정면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거슬리고, 그들의 영혼은 그들을 향해 불어 오시는 성령의 바람을 거스렸다.
고난을 당하더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바사니조'(* )는 '시금석으로 시험하다', '고통을 주어 심문하다', '동요케 하다'등의 뜻으로, 제자들이 풍랑으로 인해 육체와 정신의 급격한 위기에 봉착(逢着)했음올 암시하는 말이다. 한편 제자들이 이러한 곤란을 경험하는 이 시간에 예수께서도 협곡(峽谷)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시면서 역시 고난 중에 하나님께 간구하고 계셨다. 물론 예수에게 있어서 고난은 바로 유대의 정치, 종교 지도자들 사이의 음모 구상과 박해공작(plot)에 대한 예견(foreknowledge)과 자신을 이 세상의 왕으로 삼으려는 군중들의 오해와 오랜 세월을 함께 지내면서도 예수 자신을 올바로 이해하고 평가하지 못하는 제자들의 무지 등등의 사유로 인해서 생겨난 것일 것이다. 이처럼 예수와 제자들은 그 시간에 함께 고통을 당하였으나 주님께서는 기도틀 통하여 그 고난을 스스로 극복하시고 능히 물리치셨다. 그에 반하여 제자들은 주남님 도우심으로써만 그 고난에서 헤어나올 수 있었다. 그들은 배 가까이 오신 예수 주님으로 확신할 때까지 배에서 고난을 당하였던 것이다. 한편 이때 예수께서는 그들의 고난을 친히 목격하고 계셨으나 즉시 그들을 찾지 않으셨다. 이는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훈련시키기 위한 조처로서(Chrysostom), 예수께서 육신으로 그들과 더불어 계시지 않더라도 그분의 보호하시는 능력이 여전히 그들 가운데 역사하고 있다는(8:23-27) 사실을 확신시키기 위해 이런 시련의 기간을 두셨던 것이다(Homer A. Kent, Jr.).
=====14:25
밤 사경에 - 유대인들은 밤을 3경으로 아누었으나(일경을 4시간씩, 막 6:48) 그이이스나 로마에서는 밤을 4경으로 나누었는데, 여기서 마태는 로마식을 따른 것 같다. 따라서 1경은 오후 6시부터 9시까지이며, 2경은 9시부터 12시까지, 3경은 12시부터 새벽 3시까지,그리고 본문에 묘사된 4경은 '새벽 3시부터 6시까지'의 시간을 말한다.
바다 위로 걸어서 - 예수의 만유의 주재로서의 초자연적 위상(位相)을 나타내주는 부분이다. 사실 바다 위를 걷기 위해서는 세찬 바람과 거친 물결 및 지구의 중력을 모두 극복해야 하는데, 예수께서는 이 모든 자연의 사슬들을 지배하시고 그 위에 우뚝서신 것이다. 한편 예수께서 물 위를 걸으신 기적 사건은 그 결과가 바로 제자들의 최초 신앙고백, 즉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33절)라고 하는 참 신앙적 고백을 하게 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것이다. 또한 그 뿐만 아니라 이 사건이 생략된 누가복음을 제외한 마태, 마가, 요한복음의 서술이 모두 오첨 명을 먹이신 급식 사건 다음에 기술되어 출애굽 사건을 연상케 함으로써 모세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바다를 건넜지만 예수는 스스로의 초자연적인 능력에 의해 바다 위를 걸었다고 하는 것, 즉 모세보다 탁월하신 예수의 신성(神性)을 나타내 보였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실로 예수(복음)의 새시대는 모세(율법)의 옛시대를 포함할 뿐 아니라 크게 능가(surpass)하고 있는 것이다.
=====14:26
유령(* , 팥타스마) - 이는 꾸며서 나왔다는 뜻인 '판타조'(* )에서 유래한 말로서 실체가 없는 허상(虛像), 곧 망령 또는 귀신을 의미한다. 이성적으로는 도무지 용납되지 않는 기(寄)현상 앞에 제자들은 그것을 하나의 환각 내지는 미신적 현상으로 오판(misjudgement)하였다. 적어도 그들은 '유령이라' 외치면서 그듸의 눈 앞에 직면한 죽음의 위기에 몸이 굳어버렸을 것이다.
=====14:27
안심하라 내니 - 여기 '안심하라'(* , 달세이테)는 말은 '담대하라', '용기를 내라'는 뜻이며, '두려워 말라'(* , 메 포베이스데)는 말은 즉시 '두려움에서 헤어나오라'는 뜻이다. 즉 두 용어는 결국 안심하라는 의미의 중복적 권면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안심하라', '두려워 말라'는예수의 권고의 말씀은 '나다'(* , 에고 에이미)라는 확신을 주는 말씀에 의해 더욱밑받침이 되고 있다. '나는 나다'라고 하는 것은 바로 여호화의 이름이기도 하며(출 3:14), 많은 병자들을 고치시고 굶주린 많은 사람들을 배부르게 하셨으며, 배 안에 있는 사람들을 제자로 삼으셔서 권능을 주신 분으로서의 예수 자신을 저들에게 확인시켜 주시기 위한 참으로 친근한 말씀이다. 이 위대한 위로의 말씀은 풍전 등화(風前燈火)와 같이 파선의 위기를 겪고 있는 제자듸 뿐만 아니라 압제자들로 부터 대박해를 당하여 신앙과 삶의 위협을 받고 있는 초대교회의 성도들에게 큰 힘이 되었을 것이며 오늘의 성도들에게도 동일한 힘을 주는 것일 것이다.
=====14:28
베드로가 - 물 위를 걸은 기록은 이곳에서만 나온다. 이 부분은 14-17장 가운데서베드로가 예수께 특별한 취급을 받는 세 경우(16:13-23;17:24-27) 중의 하나로서, 베노이트(Benoit)는 이 기사에서 이미 베드로가 수석 제자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만일 주시어든(* , 에이 쉬 에이) - 앞에 '에이'는 접속사이며, 뒤에 '에이'는 '...이다, 있다'의 뜻인 '에이미'(* ) 동사의 2인칭 단수 현재 직설법 형태이다.그런데 접속사 '에이'는 가정적 조건문에서는 '...인지, 아닌지'의 뜻을 갖지만,본문의 경우와 같이 결론이 확실한 내용에서 도출(導出)되어 직설법 동사와 연합되는 경우에는(* + 직설법) 토론적으로 사용되어 '과연 주님이시므로'의 뜻을갖는다. 따라서 '만일 주시어든'이라는 말은 베드로가 물 위로 걸어오는 사람이 주님이신가 아닌가를 시험하기 위한 의도에서 한 말이 아니라 예수께서 지금 물 위로 걸어 오신다고 하는 사실과 주님의 명령과 그 능력에 의해 그 자신도 물 위를 걸을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확실히 믿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직설적이고 열정적인 베드로의 일면을 보여준다.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 베드로가 '나로 하여금 물 위로 걷게 하소서'라고 말하지 않고 예수의 '명령'에 초점을 맞춘 것은 그분 자신의 말씀보다 그분의 초자연적 능력을 더 신뢰하는 오류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으로 친지를 창조하셨으며, 말씀(* , 로고스)이신 예수께서 육신이 되셔서 그 말씀으로 많은 병자들을 고치고 천국 비밀을 선포해 주심과 같이 베드로는 예수의 말씀 한 마디에 의해 자신이 그 무엇이라도 할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물 위를 걸으라고 하는 허락과 능력이 주어지기를 요구하는 베드로의 행동은 비록 순간적이기는 했지만 주님에 대한 확고한 신앙과 그분에 대한 열렬한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다.
=====14:29
오라 하시니...배에서 내려 - 예수의 '오라'는 명령에는 이미 당신을 믿고 오는 자에 대해 보호와 안전을 마련해 두고 계신 권위에 찬 명령이다. 한편 신앙이란 하나님의 명령에 자신의 전인격을 복종시켜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는 모험과 같다. 아브라함도 그의 나이 75세에 하나님께서 가나안으로 '오라' 부르시니 '갈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히 11:8),이스라엘 사람들도 '믿음으로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다'(히 11:29). 마찬가지로 베드로도 믿음으로 알지 못하는 세계(풍랑이 휘몰아치는 바다)로 나아갔다.
=====14:30
바람을 보고 - 충동적인 성격의 베드로가 예수에게로 나아가는 동안 관심의 대상이 달라졌음을 의미하는 말이다. 물론 이것은 '믿음'의 고갈(枯渴) 상태를 의미하기 보다는 예수의 초자연적 능력을 믿었지만 폭풍의 위험에도 침착히 인내할 수 있을 만큼의 더 큰 믿음이 없었다는, 즉 믿음의 수준의 문제인 것이다. 정녕 그는 예수(앞)만 바라봐야 함에도 불구하고 바람(밑)을 바라봄으로써 자신을 삼킬듯이 달려드는 풍랑에 대해 두려워 하게 되었다. 정녕 온전한 믿음의 눈은 결코 두 개의 초점 (예수와 세상의 풍파)을 가질 수 없다.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 베드로는 예수와 그 능력을 절대적으로 신앙하는 믿음의 빛을 잃었을 때, 그 즉시 예수의 보호권에서 벗어나 중력에 의해 빠져드는 자연 현상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실로 신앙 세계에는 중간 지대가 없다. 물 위(완전한 믿음)가 아니면 물 아래(완전한 의심), 둘 중 하나에만 머무르는 것이다.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 퀴리에 소손 메) - '구원하소서'의 뜻인 '소손'은 '구원하다'란 의미인 '소조'(* )의 부정 과거 명령형으로, 그때의 상황이 매우 긴박했음을 시사해준다. 물론 본문에서의 이 말은 물에 빠지게 된 베드로 자신의 몸을 구원해 달라고 하는 의미로 사용되었지만 종종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의미에서의 영혼구원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라는 말은 하나님을 떠났던 죄인이 그 죄악의 구덩이에서 헤어나오기를 원할 때 부르짖는 소리이며,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그 상태를 벗어날 수 없다고 하는 한계를 깨닫고 절망 가운데서 비로소 주님께 돌아설 때 하는 첫 마디에 해당한다.
=====14:31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 주님의 신속한 구원행위를 나타내는 말이다.더구나 예수께서는 물에 빠지는 그를 건지기 위해서는 단 한 마디의 명령으로 충분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친히 손을 내밀어 그의 몸을 붙잡으셨다고 하는 이 말은 특별히 주의 '붙잡으시는 사랑'을 경험하게 하시려는 의도가 있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실로 거친 죄악의 세상속으로 들어갈 때마다 즉시 붙잡아 주시는 주 손님에 의해 우리의 신앙생활은 보존, 유시될 수 있을 뿐이다.
믿음이 적은 자(* , 올리고피스토이) - 이 표헌은 신약성경에 모두 다섯 번 나오는데(6:30;8:26;16:8;눅 12:28), 항상 제자들에게 말할 때 사용되었다. 이는 가장 믿음이 깊어야 할 그들이 믿음이 부족하다는 사실이 예수로 하여금 그들을 책망하게 하는 요소가 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마태는 막 4:30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는 표현을 '믿음이 적은 자'라고 말하였는데, 이는 마태가 제자들이 이미 예수의 제자가 된 사실 자체가 어느 정도의 믿음을 소유하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 때문이다. 더욱이 본문에서 베드로는 비록 충동적이나마 그리스도와 그 능력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소유했던 터였다(28절). 한편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원했던 것은 '오라'하신 당신의 말씀을 끝까지 전적으로 신뢰하는 참 믿음이었다. 따라서 예수의 책망은믿음의 양(적다, 많다)이 문제가 아니라 어떤 상황 중에도 그리스도께 대한 영속적 신앙을 간직하는 것, 곧 그 믿음의 질적 측면을 강조한 말이다. 왜 의심하였느냐(* , 에이스 티 에디스타사스). '왜'(* )라는 말은 히브리어 '레마'(* )에 상당 하는 말로 대개의 일반적인 표현인 '디아 티'(* )와는 다음과 같은 차이가 있다. '디아 티'는 '무엇 때문에'(because of what)라는 의미의 '새'이며 '에이스 티'(* )는 '무엇을 위하며'(in order to wher)라는 의미의 '왜'이다. 즉 '에이스 티'는 '디아 티'의 물음에 비해 보다 호의적인 의도에서의 물음이다. 즉 예수께서는 베드로가 왜(because of what) 의심하였는지 그 의심의 원인을 알고자 하신 것이 아니라 '무슨 목적으로', 즉 '무엇을 위하여'(to what end) 의심하였는가를 물으신 것이다. 예수가 손을 내밀면 잡을 듯한 가까운 거리까지 도달한 베드로는 무엇을 의심하였는가(Turner)?한편 여기서 '의심하였느냐'란 말의 원뜻은 '이중적으로 하다'는 의미로서 마음이 두 갈래로 나뉘어져 어찌할 바를 몰라하는 상태를 일컫는다. 이는 다혈질적인 베드로의 심히 당황해 하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는 표현이다.
=====14:32
바람이 그치는지라 - 예수께서 물위를 걸으신 기적이 풍랑 중의 첫번째 기적이라면배에 오르자 마자 즉시 바람이 그친 것은 두번째 기적이다. '수고', '고통', '피곤'을 의미하는 '코포스'(* )에서 나온 '그치다'라고 하는 동사는 바람이 모든 만물의 주인이신 그리스도에 의해 그 고통 속에서 헤어나와 잠잠케 되고 평온함을 찾은 것을 의미한다. 이에 대해 막 4:41은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라고 표현하였다. 정녕 예수는 모든 만물을 지배하시는 만유의 주이신 동시에 모든 혼란과 두려움을 잠재우시는 질서와 평화의 왕이시다(요 14:27). 그가 거하시는 장소, 그가 머무시는 인격에는 영원한 샬롬만이 있을 것이다.
=====14:33
절하며(* , 프로스퀴네오) - 헬라어의 이 말은 제자들이 예수를신앙의 대상으로 경배하였다고 하는 말로, 이번 사건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깨달아 알므로써 가이사랴 빌립보에서의 전적인 신앙 고백(16:16)의 준비가 마련된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 - 이는 '메시야', '그리스도'라는 칭호에 상당하는 용어로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완전한 칭호로 예수를 불렀던 첫번째 경우이다(16:16;26:63;27:40, 43, 54). 물론 이 칭호는 3:17에 나타난 하늘의 성에서 계시된 바 있고, 광야 시험 중 사단도 이 칭호를 사용한 적이 있다(4:3, 6). 또한 예수 자신이 스스로를 '아들'이라 부른 경우도 있다(11:25-27). 실로 예수께서는 하늘과 흑암의 세력과 또한 땅의 무리들 및 자신이 스스로인정하시는 완전한 구주요 메시야이셨던 것이다(16장 주제 강해, '베드로의 신앙 고백' 참조).
=====14:34
게네사렛 - 갈릴리 호수 서안(西岸)에 자리잡고 있는 기후가 온화(溫和)할 뿐 아니라 비옥한 평야지대이며 북쪽에는 가버나움이, 남쪽에는 디베랴가 위치해 있다. 한편 게네사렛 사람들이 즉시 예수를 알아보고 그에게 모여 들었다고 하는 사실은 예수의 사역 범위가 얼마나 넓었는가를 말해준다.
=====14:35
그 근방에 두루 통지하여 - '통지하다'라는 의미의 헬라어 '아포스텔로'(* )는 사자(使者)를 보내어 소식을 전한다고 하는 뜻으로 게네사렛 사람들이 이웃과 주위의 모든 사람들에게 일일이 찾아 다니며 주님이 그들의 동리에 오신 사실을 가르쳐 주었음을 뜻하는 말이다. 또한 이는 마침내 예수의 공적인 사역의 범위가 온 유대 전역에까지 미치게 되었음을 암시하기도 한다.
=====14:36
옷가에라도 손을 데게 하시기를 - 예수의 신성에 대한 엄청난 소문은 9:20의 혈루증의 여인의 경우와도 같이 그분이 입은 옷을 손으로 대기만 하여도 병을 낫게 한다는 믿음을 갖게 하였다. 따라서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으므로 예수께서 한 사람씩 차례로 만져주시리라고 기대할 수 없었던 그들은 비록 예수께서 만져주시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병자 자신이 그분에게 손을 대기만 하여도 나을 것이라는 강렬한 믿음을 소유하였던 것 같다.
나음을 얻으니라(* , 디에소데산) - '완전히(* , 디아) 구원을 받다(* ,소조)' 의미로 병자들이 육신의 병에서 고침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영혼의 질병, 즉 죄된 세상의 여러 욕망이 주는 고통 속에서도 자유함을 얻게 되었다고 하는 이중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천국에 관한 여러 비유의 말씀들이 13:52에서 끝나고, 13:53부터는 제4부 기사가 시작된다.
17:27까지 해당하는 제4부 기사 부분에는 예수의 제3차 갈릴리 사역의 거의 전부에 해당하는 내용이 소개되고 있다.
제3차 갈릴리 사역의 기간 은 예수의 공생애 중 가장 활발한 사역기에 해당한다. 이처럼 예수의 활동이
본격화돠자 유대 지도자들의 반감 또한 고조되어 갔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한편 본장은 15장과 더불어 마태의 기적 모음 제2집 이라고도 불리운다. 기적 모음 제1집에 해당하는 8,9장에서 문맥상의 주제는 '메시야의 자기 계시', '제자화 훈련' 그리고 '핍박의 대두' 등의 세 가지 측면에서 주로 고찰된 바 있 다. 제2집에서도 세가지 주제는 골고루 나타난다. 다만 한 가지 두드러지는 차이 점은 14,15장에 이르러 '핍박'의 주제가 더욱 선명하게 부각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9장에서는 핍박의 점진적 '대두'라는 축면에서 고찰되었거니와, 이제 본장에 이르러서는 유대 지도자들의 핍박이 한층 가속화되어감을 보여준다. 특히 메시야의 자기 공개(公開) 이후에(16-13-20) 핍박의 열기는 마지막 정점을 향해 더욱 거세게 달아오른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장을 상고함에 있어 우리는 두 가 지 주제에 주목해 모기로 하자.
(1) 핍박과 하난님 나라. 고향에서 배척당하시며(13:53-58) 세례 요한의 순교
에 관한 소식이 들려오는 등(1-12절) 날로 위기 상황이 부각되어 옴에도 불구하
고, 예수는 조금도 움츠려들거나 두려워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고 오히려 더욱
당당하게 메시야적 권능을 행사하셨다. 이는 앞장의 천국 비유에서도 시사된
바와 같이 대적들의 온갖 훼방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나라는 계속 증거되고 또한
확장되어간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핍박자들의 기세등등한 위세 앞에 예수께서
무기력한 듯이 체포되고 이어 십자가상에서 참혹한 죽음을 당하실 때, 사람들
은 천국 복음의 메시지도 끝장난 것으로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보헤사 성령을 보내사 제자들의 연약해진 무릎을 일으켜
세우시고 온 세계를 향해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토록 하셨다(28:18-20;행 2:1-4). 설령 복음을 증거하는 사람은 핍박을 받고 매일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않으며(딤후 2:9)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않는 돌보 심(눅 21:18)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에, 예수는 대적들의 위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당신에게 맡겨진 사명을 일관되게 완수해나가셨던 것이다.
(2) 핍박과 제자화 훈련. 본장에 수록된 예수의 이적적 권능은 당신의 메시야 적 신성을 입증하는 자기 계시의 수단으로서도 이해될 수 있겠으나, 더욱더 노 골화되어가는 대적들의 위협으로 인해 불안해하는 제자들을 격려하기 위한 방도
로서 이해될 수 잇을 것이다. 대적들의 핍박이 가속화되고 예수를 추종했던 수 많은 무리들 또한 당신의 거듭된 말씀 증거와 이적들을 듣고 보고서도 영적 각 성에 이르지 못하자, 사실상 주님은 열두 제자를 교육하고 훈련시키는 일에 더
많은 시간과 정성을 할애하시게 된다(17:14-20:28). 이러한 맥락을 염두에 두
고 본장을 상고해 보면, 제자화 훈련을 위한 주님의 의도적 배려를 여러 곳에
서 발견할 수 있다(16, 19, 27, 31절 들).
앞에서도 잠깐 언급하셨듯이, 본장은 대적들의 핍박과 예수의 권능이라는
뚜렷이 부각되는 두 가지 주제에 의해 두 부분으로 대별된다. 면저 1-12절은 그
리스도의 선구자로 온 세례 요한의 순교(殉敎)에 관한 기사로서 고향 사람
들로부터 배척당하신 13:53-58의 기사와 더불어 '핍박'의 주제를 싣고 있다. 그리고 13-36절은 오병 이어의 이적(13-21절), 물 위를 걸으신 이적(22-33절) 및 게네사렛에서의 신유 기사(34-36절) 등을 통해 예수의 메시야적 권능을 보여주 는 내용이다.
1. 세례 요한의 순교(14:1-12)
본문은 마가복음 6:14-29와 누가복음 9:7-9에도 수록되어 있는 세례 요한의 죽음에 대한 기사이다. 연대적으로 볼 때 13절은 2절에 이어진다. 그리고 3-12절 은 마태가 예수께 대한 헤롯의 평(評)을 언급하면서(1, 2절) 앞서 일어난 세례
요한의 순교에 관한 기사를 삽입시킨 것이다. 마가는 본문의 기사를 열 두 제자
파송 기사에 연이어 수록하였는데, 시기상으로 마가의 기록이 정확하다 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마태는 마가보다 훨씬 간결하게 요약하여 서술하고 있는 바,
본기사에 관한 보다 상세한 내용은 마가복음 해당 본문의 강해에서 다루기로
하고 여기서는 마태가 본기사를 이곳에다 배치시킨 이유를 전후 문맥의 흐름에 준하여 고찰해 보기로 한다.
(1)핍박의 주제를 부각시키기 위함. 헤롯이 요한을 옥에 가둔 이유가, 3절에
는 헤롯의 불륜(不倫)에 대한 요한의 질책 때문으로 되어 있다. 물론 이는 사실
이지만, 헤록이 세례요한을 눈 속의 가시와도 같이 여기게 된 데에는 정치적
동기 또한 이면(裏面)에 깔려 있었을 것이다. 즉, 많은 사람들이 세례 요한을
따르다 혹시 모반이라도 일으키지 않을까하는 우려에서 요한을 체포하였다고
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세례 요한에게 품었던 헤록의 이러한 우려와 의혹은 예 수께 대해서도 동일 하게 표현되고 있음을, 본문은 보여주고 있다. 헤록대왕
(2:1)의 아들인 본문의 헤롯 안티파스(Herod Antipas)는 30년 이상 동안이나
갈릴리와 베레아 지역을 다스렸는데, 예수의 사역이 주로 헤롯 안티파스의 통
치 구역 내에서 수행되었음을 감안하면 예수께 대한 헤롯의 의혹과 핍박의 동
기를 가히 짐작할 수 있을 법하다. 결국 마태는 이 기사를 주께서 고향 사람들 로부터 배척받은 기사(13:53-58) 바로 다음에 연이어 수록함으로써, 각양으로
고조되어가는 핍박의 양상들을 강조하고자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2) 십자가 수난의 전조(前兆)를 보이기 위함. 이전에 세례 요한은 예수를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분'이라 증거한 바 있으며93:11), 예수께서는 세례 요한을 '메시야의 길을 앞서 예비하는 사자(使者)'라고 증거하셨다(11:10). 또한 세
례 요한 은 가까와 온 천국을 선포하였고 예수는 이미 임한 천국까지도 선포하였다는 범에서(4:17;12:28) 양자의 전한 바 메시지 또한 본질에 있어서는동일했다. 예수께 대한 헤롯의 평(評)으로 미루어 보건대(2절), 헤롯 또한 예수를
세례 요한과 동일한 일을 하고 다니는 자로 단정했던 것같다. 그러므로 본문은 세례 요한이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듯이 예수께서도 십자가상에서 참담한 죽음을
당하실 것임을 은연 중에 암시하고 있따고 볼 수 있다. 사실상 이 시점에 이르 러 고난의 정점인 십자가를 향한 걸음의 템포가 서서히 빨라지고 있다 하껫다. 구약 시대 중 가장 위대한 인물인 세례 요한이(11;11) 일개 여인 의 춤값에 팔 려 죽임당한 사실이나 온 인류의 구주이신 예수께서 가장 참혹한 형벌을 받아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사실은, 죄악되고 모순된 인류 역사의 아이러니(irony)이며 왜곡된 현실의 극단적 예라 하겠다.
2. 오병 이어(五餠二漁)의 이적(14:13-21)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 이상을 먹이신 이적 기사는 4복음서
에 모두 기록되어 있다(막 6:30-44;눅 9:10-17;요 6:1-14). 앞
단락(1-12절)에서
우리는, 예수의 소문을 들은 헤롯이 세례 요한에게 행했던 핍박의 화살을 이제 예수께로 돌리려고 하는 모습을 살펴보았다. 이러한 핍박의 기세가 비단 분봉
왕 헤롯 뿐만 아니라 유대 지도자들 사이에 하나의 공통 분모로서 급속히 확
산되어갔음은 물론이다. 이렇듯 날로 고조되는 박해의 위기 가운데서도, 영육간
의 궁핍을 채우고자 하시는 예수의 활동은 조금도 수그러지지 않았다. 본 기적 이 전후 문맥과 관련하여 지니는 의미에 대해서는 장 강해에서 보다 상세가게
다루었다. 따라서 여기서는 오병 이어의 기적 자체의 의미에 초점을 맞추기로
하자.
(1) 예수의 크신 긍휼을 드러냄. 예수를 좇아온 무리들의 대부분은 당신께 대 한 참된 믿음과 사랑을 지니지 못한 태 단순한 호기심이나 저급한 동기에서 모 여들었다. 예수께서는 누구보다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배고픔에 지쳐있는 무리들을 결코 외면하실 수 없었다. 예수의 이 마음은 "바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출 34:6)의 마음과 동일하다. 그리스도의 긍휼과 사랑은,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라는 말씀 속에 잘 나타나 있다(롬 5:8).
(2) 제자들의 사명을 상기시킴. 본문에서 예수는 무리들의 바구니에 음식이
가득 차도록 직접 채우지 않으시고 제자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전달되도록 하셨 다. 이는, 제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탄생할 새로운 공동체라고 하는 양떼의 목
자들이 되어야 함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이 목자들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그들에
게 맡겨진 사명을 감당해낼 수 없으며, 양들을 먹이는 데 필요한 모든 능력은
양떼의 목자장(牧者長)되시는 예수께로부터 말미암는다는 사실 또한 시사되어
있다(벧전 5:4).
(3) 창조주의 권능을 드러냄. (2)항이 제자화 훈련이라고 하는 일관된 문맥의
흐름과 관련된 주제를 다루고 있음과 마찬가지로, 본항 역시 메시야의 자기 계 시라고 하는 본서 전체에 걸쳐 나타나는 큰 주제에 연관된 내용이다. 본문의 기
적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시는(reatio ex nihilo) 창조주의 권능을 보여준다(롬 4:17). 이렇듯 하나님은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분이므로(6:11;출 16:4) 우리는 무엇을 입고 먹을까하는 문제에 모든 관심의 초점을 맞출 필요가 없다(6:25). 모든 것을 주께 의탁하고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뜻을 구하면, 주님은 우리의 필요를 따라 모든 것을 채워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 전체를 책임져 주실 것이다(6:33).
(4) 영의 양식을 상징함. 오병 이어의 기적을 목격한 무리들은 예수를 모세
나(출 16장) 엘리사와(왕하 4:42-44) 같은 위대한 선지자 정도로 여기고서 어찌하든 육신상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일에 몰두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예수의 관심은 육신의 배고픔보다는 그 무리들의 영혼의 굶주림에 있었다. 빈
들에 모인 무리들은 죄악으로 말미암아 점점 멸망에로 가까이 나아가는 무력한 자들이었다. 예수의 눈에 그들은, 마치 목자잃은 양처럼 가기 제 길로 나아가는
모습으로 비쳤을 것이다(사 53:6). 따라서 예수는 무리들에게 이 기적을 통해 무엇보다 그들이 영적으로 부요해지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16:7,8에서 밝히 드러나듯 제자들조차 육신의 빵에만 연연(戀戀)하고 있었다.
* 음식과 관련된 이적. 성경에는 음식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이적 사
역이 몇 군데 소개되고 있다.
+------------+--------+-------------------------------------+------------+| 발 생 시 기| 주체자 | 내 용 | 성경 구절 |+------------+--------+-------------------------------------+------------|| 출애굽시 | 하나님 |약 200만 명이 넘는 이스라엘인들에게 | 출 16:13-15|| | |조석으로 만나와 메추라기를 공급하심 | |+------------+--------+-------------------------------------+------------+| 선지자 | 하나님 |엘리야를 통해 사르밧 과부의 밀가루 통| 왕상 17:16 || 엘리사 시대| |과 기름병이 차고 넘치게 하심 | |+------------+--------+-------------------------------------+------------+| 선지자 | 하나님 |엘리야를 통해 보리떡 20개로 100명의 | 왕하 4:43, || 엘리야 시대|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 남을 정도로 제공| 44 |+------------+--------+-------------------------------------+------------+| 예수 시대 | 예 수 |가나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 요 2:1-11 || | |신 당신의 첫번째 이적 | |+------------+--------+-------------------------------------+------------+| 예수 시대 | 예 수 |벱새다 빈 들에서 5병 2어로 5천명 이상| 마 14:13-21|| | |을 먹이시고 12광부리 가득 남게 하심 | |+------------+--------+-------------------------------------+------------+| 예수 시대 | 예 수 |데가볼리에서 7병 2어로 4천명 이상을 | 마 15:32-39|| | |먹이시고 7광주리 가득 남게 하심 | |+------------+--------+-------------------------------------+------------+
한편 본문에 수록된 오병 이어 기적과 구약성경에 기록된 다른 이적들 간에
는 여러 면에서 차이나는 점도 있지만 또 여러 부분에서 다름과 같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먼저, 만나 사건은 하나님의 크신 긍휼과 창조주로서의 위대한 권능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본문의 기적과 유사하다. 지나날에 베풀어주신 구원과 보호의
은혜를 깡그리 잊어버리고 원망을 늘어놓는 백성들의 배은망덕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만나를 내려주심으로써 당신의 깊은 사랑과 크신 긍휼을 드러내셨던
것이다.
그리고 사르밧 과부의 처지를 돌아보신 이적은, 작은 것이지만 자기가 가진
최선의 것으로 헌신할 때 하나님께서는 넘치는 은혜로 보상하신다는 사실에서, 본 오병 이어 기적과 그 맥을 같이 한다. 사실 사르밧 과부의 음식과 또 어린
아이의 아주 미미한 도시락 음식은 모두 자기 자신의 생명(生命)과 직결되는 것
이었기에 그것을 아낌없이 헌신한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의 생명을 하나님께 드리
는 전폭적인 헌신으로 간주할 수 있다. 이 탁월한 헌신과 이 순수한 순종이야말
로 하난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한, 그리고 크고 넘치는 보상이 있게한 근본 원
인이었던 것이다.
이와 함께 엘리사의 이적과 오병 이어 이적과의 공통점은, 전자의 경우에
마련된 음식이 먹고도 남을 정도였던 것처럼 후자의 경우에 있어서도 먹고 남은
조각이 열 두 바구니에 가득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하나님의 차고 넘치는 은혜 를 시사한다. 실로 예수께서 오신 것은 우리로 생명을 얻게 하되 풍성히 얻게
하려 하심이다(요 10:10). 이와 같이 넘치는 은혜와 풍성한 생명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간절히 구하지 않거나, 혹은 구하되 세상적이고 정욕적인 의도 에서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하겠다(약 4:2, 3).
3. 물 위를 걸으심(14:22-36)
예수께서 물 위로 걸어오심(22-27절), 베드로의 용기와 시험(28-31절) 및 제
자들의 신앙 고백(32, 33절) 등으로 구성된 본문은 전후의 문맥적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신앙 생활을 위한 풍성한 교훈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매우 중요한 내용이다. 이제 살펴 보겠지만, 본문의 이적에 내포된 주제는 오병이어의 이적에 내포된 주제와 매우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다. 본단락 강해에서 는 여기 수록된 주제를 하나하나 상고하되 전후 문맥에 주안점을 두고 살펴보기로 하자.
(1) 예수의 신성(神性)에 대한 증거. 오병 이어의 이적과 마찬가지로 본문 또
한 예수께서 모든 피조물에 대한 절대 주권을 갖고 계신 하나님이심을 증거한
다(요 1:3). 이는 본서 전체에 일관되게 나타나는 예수의 자기 계시 혹은 자기
증거의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사항이다. 8:23-27에서도 예수께서 갈릴리 바다
의 풍랑을 한 마디 말씀으로써 잠잠케하신 바 있다. 머리 둘 곳도 없으신 나그 네의 삶을 살며(8:20) 대적들의 멸시와 핍박을 받고서 마침내 십자가 형틀에
달리셨던 그 예수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 당신이셨다는 사실은 믿음 의 눈으로써만 이해될 수 있는 역설이라 하겠다.
(2) 제자들의 신앙 연단. 본문은 또한 제자화 훈련이라는 큰 주제와 각별한 연관을 뱉고 있다. 본기사의 절정은 폭풍을 잔잔케하신 사실(32절)보다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라는 제자들의 고백에 있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 다(33절).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는 예수의 수세(受洗가시에 하늘로부터 들려온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말 속에 나타났고(3:17) 예수께서 스스로를 '아들'이라 하신 말씀 속에도 나타났다(11:25-27). 하지만 제자들이 이 칭호로써 예
수를 부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물론 당시 제자들이 이 칭호의 진정한 본체론
적(本體論的) 의미를 이해한 것같지는 않다. 하지만 그리스도께 대한 제자들의 인식이 점차적으로 발전되어갔다는 점은 분명히 지적될 수 있다. 교회의 초석
이 될만한 위대한 신앙 고백을 하고서도 그 직후에 호된 책망을 받은 베드로의 경우를 보더라도(16:13-23), 제자들의 예수께 대한 이해의 수준이 점진적으로 깊어가기는 하였으되 항상 불완전하고 미흡한 상태를 벗어나지는 못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제자들의 점진된 신앙 성장과 관련하여, 본문에서는 베드로의 과감 한 신앙적 도전이 우리의 주목을 끈다. 28-31절은 제자들 중 베드로의 모습이 부각된 세 가지 경우 가운데 첫번째 분분이다(16:13-23;17:24-27). 예수께서는 적절한 시기와 상황에 맞추어 제자들에게 신앙 훈련을 계속적으로 실시해 오셨으 며, 심지어 제자들에게는 예수께서 행하신 동일한 권능이 위임되기도 했다(10:1). 따라서 풍랑을 넘어 태연하게 걸어오시는 예수의 모습을 보고 격정적인 성격의 소유자인 베드로가 예수를 따라 행하고자 했던 어쩌면 자연스런 행동이었는지 모른다. 어쨌든 베드로를 위시한 제자들은 본문에서 보여주는 바와 같은 무수한 실패와 시행착오(試行錯誤)를 거듭한 연후에야 비로소 굳건한 신앙인으로 설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본장은 예수께서 갈릴리 건너편 북동쪽에 자리잡은 게네사렛 지방에서 많은 병자들을 고치셨다는 짤막한 기사로 끝난다(34-36절). 이 기사는 예수의 공적 사역의 범위가 온 유대 전역에까지 미쳤음을 시사한다. 대적들의 핍박이 가 열됨에 따라 열 두 제자들을 훈련시키는 일에 대한 예수의 관심이 더욱 각별해 졌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예수의 사역이 그들에게만 한정되지는 않았으며, 온 백성들에게까지 미쳤던 것이다. 한편, 바리새파와 엣세네파와 같은 엄격한 유대 종파들은 병자와 접촉되는 것을 부정하게 생각하였던바, 예수의 옷가에 손을 대는 병자들의 모습을 보았다면 의당 예수를 비난했을 것이다(36절). 이러한 정결법(淨潔法)에 대한 예수의 무관심한 듯한 태도는 곧바로 이어지는 15:1-20의 논쟁을 암시한다고도 볼 수 있겠다.
* 풍랑 이는 바다 위를 걸으신 예수. 한밤중 갈릴리 바다 위에 일어난 풍랑은 둑 가지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다. 먼저 이는, 대적들의 핍박이 거세어지며 주님의 대적들의 손에 잡히게 되는 환난의 때를 예고하며 또한 그 때에 제자들 이 믿음을 잃고 낙망하여 뿔뿔이 흩어지게 될 것이라는 예고라 보아도 무방하겠다. 다음에, 보다 거시적으로 이 풍랑은 오고 올 모든 성도들에게 닥칠 세상의 유혹과 위협을 상징한다고도 볼 수 있다. 이처럼 성도들 앞에는 항상 모진 세파
(世波)가 넘실거린다. 그러나 우리는 좌절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 같은
물결 위를 걸어서 심히 고난당하고 있는 제자들에게로 가까이 다가가시고 또
바다 속으로 빠져드는 베드로를 붙잡아 주심으로 구원하신 분이 바로 우리의 구
세주이기 때문이다. 한편 예수께서 풍랑 위를 걸으신 이 사건은 다음과 같은 교훈을 보여준다. (1) 예수는 모든 피조물에 대한 절대 주권을 갖고 계신 만유의
주, 하나님이시다(요 1:3). (2) 예수는 믿고 나아오는 자들에게 차고 넘치는 은
혜와 초월한 능력을 보여하신다(골 1:11). (3) 예수는 세파에 찢겨 상처받은 영혼을 찾아가시고 손을 내밀어 구원하신다(히 2:18). 진정 주님의 그 부드러운 손길은 우리의 연약한 심령을 붙들어주실 것이며 안전한 곳으로 인도하실 것이 다. "여호와여 나의 발이 미끄러진다 말할 때에 주의 인자하심이 나를 붙드셨사
오며 내속에 생각이 많을 때에 주의 위안이 내 영혼을 즐겁게 하시나이다"(시
94:18,19). 정녕 이것이 우리 신앙인의 유일한 안전 보장책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 때에 - 헤롯이 세례 요한을 처형시킨 A.D. 39년 이후이며, 갈릴리 전도의 후반기가 시작되는 때로 예수와 반대자들과의 갈등이 표면화되어 가는 시기이다. 개인적으로는 예수의 선구자로서, 구속사적으로는 구약의 종말과 신약의 출발을 증언하기 위하여 특별히 부름받은 세례요한은 세례 행위와 예수에 따른 메시아의 등의 직접적 방법으로 선구자의 사명을 감당하였지만 동시에 자신의 삶과 죽음을 통해서도 간접저긍로 예수의 메시아로서의 삶을 예표하였다. 다시 말하면 세례 요한의 삶과 죽음은 그 전체가 예수의 모형(模型)이었다. 즉 그의 투옥(14:3)을 통해서 예수의 수난의 삶이, 그리고 그의 죽음을 통해서 예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이 예표(豫標)되었다. 한편 이 세례 요한의 죽음을 기점으로해서 예수의 사역에는 다음과 같은 특징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1) 예수께서 직접 당신의 선구자라고 지칭하였다. 요한의 죽음 이후, 즉 의로운 말을 외치다가 세상 권력자에게 당하는 죽음에서 조차 당신의 예표의 역할을 한 요한의 죽음을 목격한 이후 예수는 본격적으로 스스로 당신이 메시야이심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시고 수차의 수난 예고를 하시는 등 당신의 메시야직의 절정인 십자가 고난을 준비하시게 된다. (2) 당시 팔레스틴 북부, 즉 헤롯 안디바스의 관할 지역은 물론 전 유대 땅에서 가장 큰 사회.종교적 이슈(issue)의 주제이던 세례 요한의 죽음은 결과적으로 예수 한사람에게 전 사회적 억압에 시달리던 일반 대중들은 예수에게 정치적인 기대를, 주로 정치 기득권층은 예수에게 적대적 감정을 가지게 되었다. (1),(2)의 사실을 종합래 볼 때, 예수는 전 구속사적 관점에서 사역을 행하고 미래를 준비하셨다. 그러나 세상은 예수의 행위의 참의미를 이해하지 못하여 부단히 자신들만의 편협한 시각으로 예수를 오해하고 있었다. 이런 오해는 예수 부활 이후에야 비로소 해소되기 시작한 것이다.
분봉왕 헤롯 - 여기서 분봉왕(* , 테트라아르케스)이란 '네 개로 이뤄진 한 벌'을 뜻하는 '테트라스'(* )와 '통치'를 뜻하는 '아케르'(* )의 합성어로 문자적인 뜻은 '한 나라의 1/4을 통치하는 자'이다. 다시 말하면 이들은 로마 황제의 임명을 받아 로마의 정복지역의 한 부분을 통치하는 괴뢰 정부의 왕을 가리킨다. 더 자세한 내용은 신약 개론 중 '정치적 배경'란을 참조하라. 본문의 헤롯은 헤롯대왕이 죽은 B. C. 4년 부터 A. D. 39년까지 네 개의 통치지역으로 나뉜 유대 땅 가운데서 갈릴리와 베레아를 다스렸던 헤롯 안티파스(Herod Antipas)이다. 따라서 이 시대를 주무대로 활동하셨던 세례 요한 및 예수와 관계가 깊었던 사람으로, 예수로부터는 그의 교활하고 간사한 성품 때문에 '여우'라고 불리우기도 하였다(눅 13:32).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그에게 심문(審問)을 받으심으로써 그는 세례 요한 및 예수의 처형에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되었다(눅 23:7).
예수의 소문을 듣고 - 막 6:14에 의하면 '예수의 이름이 드러난 것'이며, 눅 9:7에 의하면 예수의 행한 '모든 일'에 대해서 헤롯에게 보고(報告)가 된 것으로 묘사되고 있는데, 마가와 누가의 두 복음서에서의 예수에 대한 소문은 모두 그의 '제사 파송'과 관련된 것으로 편집되어 있다. 그러나 대략 A.D. 29년경, 즉 아무리 빨리 잡는다해도주께서 죽기 1년전에 있었던 제자들의 전도 파송의 결과, 제자들이 행한 사역과 능력에 의해서 예수에 관한 소문이 더욱더 멀리 퍼져나갔다고 하더라도 헤롯이 지금 처음으로 예수의 소문을 들었다고 하는 것은 이상하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이미 일년 이상 헤롯의 통치지역인 갈릴리에서 말씀을 전파하시고 이적을 행해 오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헤롯은 갈릴리에 오래 머무르지 않았고 주로 세례 요한을 가두어 놓았던 베레아의 마케루스(Machaerus) 궁전에 있었거나 또는 사치와 향락에 심취해 있었으므로(F.R.Fay, Homer A. Kent, Jr.) 갈릴리 지방에서는 그가 예수에 관해서 가장 나중에 알게된 사람 중에 속했을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한편 그의 신하들이 예수의 소문에 관해 언급하고 그 일을 문제삼으려고 하는 일은 예수의 사역이 예수의 진의(眞理)와는 달리 그들에게 얼마나 큰 정치적 위협(威脅)으로 다가오고 있었는가 하는 사실을암시한다. 우리는 이 사실에서 정의와 진리는 그것이 굳이 불의와 비진리를 정면으로 비난하지 않는다 해도 물과 기름이 서로 갈라지듯이 서로 서로를 밀어내기 마련인 것을 발견할 수 있다.
=====14:2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 누가는 이 부분에 대해 먼저 신하 중 몇몇이 보고하고 헤롯이 곧 그 사실을 거부하는 듯한 인상으로 기술하고 있다(눅 9:7-9). 이에 비해 마가는 헤롯이 신하들의 말에 동조(alignment)한 것으로 기술했다(막 6:14-16). 아마 이러한 차이는 시간의 흐름에 따튼 심경의 변화를 표현한 것으로, 누가는 헤롯이 신하의 말을 듣고 난 즉시 일어난 상태를, 마태와 마가는 시간이 조금 더 경과한 뒤에 헤롯의 감정이 가라일은 후 헤롯이 예수를 세례 요한으로 판단할 때의 일을 기술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세례 요한이라 - 헤롯이 예수를 다시 살아난 세례 요한으로 오해한 원인은 (1) 그가 예수그리스도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이며, (2) 예수의 사역과세례요한의 사역에 있어서 유사점, 곧 설교에 있어서의 회개 촉구와 하나님 나라 도래의 임박성 강조, 유대 교권주의자들에 대한 책망이 일치하기 때문이다. 사실 헤롯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예수를 부활한 세례 요한으로 이해(16:14)는 예수를 유일무이(有一無二)한 메시야로 고백한 제자들의 신앙고백과는 엄청난 질적 차이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말이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으니 - 이러한 결론을 내린 사실에서 적어도 헤롯은 미신적이며 절충적인 신앙을 소유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그는 바리새적인 부활관에 영향을 받은 듯, 자신이 살해한 요한이 부활하여 죽기 전보다 더욱 강한 모습으로 행동한다는 미신적 사고에 사로 잡혀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생각때문에 그는 훗날 예수를 십자가 형(刑)에 처하도록 하는데도 묵시적 동조를 하게 된다. 한편 유대인들의 부활관은 신약 시대에 이르러 정립된 것이 아니다. 성경에는 구약 시대에도 이미 부활사상이 있었음을 암시하는 몇몇 구절들(욥 14:13-15;단 12:2-3;호 6:2)이 있다. 그러나 부활사상이 훨씬 다양해지고 많은 사람들의 사고방식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었던 것은 신구약 중간시기를 거친 신약 시대였을 것이다. 특히 바리새파 사람들은 부활신앙의 열렬한 신봉자였고 사두개파 사람들은 부활사상을 전면 부정(否定)하였다(행 23:8).실로 여기서 죽은 자는 모두 부활하여 심판을 받는다는 신약의 가르침과 달리 바리새파 사람들은 부할은 의로운 유대인들에게만 해당한다고 주장하는 점에서 예수의 가르침과 차이점이 있다.
이런 권능이 - 세례 요한이 그의 사역 중에 비록 어떠한 표적도 해하지 않았다(요 10:41) 하더라도 헤롯의 이 말에 의하면 많은 사람이 그를 권세(* , 여수시아)와 능력(* , 뒤나미스)을 갗춘 자로, 즉 적어도 그는 권위를 인정받고 있었던 것이다. 구러나 요한의 권위에 정도가 문제가 아니라, 이런 자 심지어 11:11에 묘사한대로 여자가 낳은 자, 즉 사람의 피를 받고 태어난 자 중 가장 큰자가 예수에 대한 선구자로서 예수의 메시야직에 대한 증거라는 점에서 마태는 이를 부각시킨 것 같다.
운동하는 도다 - '운동하다'는 헬라어 '에네르게오'(* )는 '활기를 돋우다','움직이다'의 의미인 영어의 'energize'에 해당하는 말이다. 즉 무엇인가 초월적 힘이 한 인격에게 영감(靈感)과 (動力)을 주는 상태를 가리킨다. 예수는 성령의 감동으로 말미암아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가 다른 초자연적인 힘(바알세불 등)늬 도움으로 행한다고 생각했듯이 헤롯도 죽은 세례 요한의 영(靈)이 예수 안에서 그 권능들을 행하게 생각하였다.
=====14:3
전에 - 이 말은 3-12절의 내용이 적어도 1, 2절의 시점 이전에 일어났던 일의 회상(回相)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공관복음 모두 이 헤롯의 공포와 세례 요한 살해의 사건을 12제자 파송 사건과 연결시키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12제자 파송을 즈음하여 요한 살해가 있었고 12제자 파송으로 전국이 예수 소문으로 들끓자 헤롯이 두려워하였던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동생 빌립 - 헤릇 빌립 1(Herod Philp 1)세를 말한다. 헤롯 대왕과 대제사장의 딸 마리암네(Mariamne 2)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 헤로디아의 첫 남편이며 살로메의 부친이다. 한편 그와 헤롯 안티바스와의 관계는 이복 형제간이었다<헤롯왕가의 가계 도표 참조>.
헤로디아의 일 - 여기 헤로디아는 헤롯 안티바스의 이복 형제인 '아리스토블루스'(Aristobolus)의 딸이었다. 그녀는 헤롯 빌립, 곧 자신의 삼촌과 결혼하여 살로메를낳았다. 그런데 사바티안(Sabatian) 왕인 아레타스(Aretas)의 딸과 이미 결혼한 바 있는 또다른 삼촌 헤롯 안티바스가 그녀를 유혹하여 남편 빌립을 버리고 자신과 불법적인 재혼을 하게 했다.그런 까닭으로 인해 아레타스의 딸은 본국으로 도망가게 되고 끝내 두 나라 간에 전쟁이 발발 하게 된다. 결국 안티바스는 이 전쟁에서 참패하게 된다. 유대사가 요세푸스(Josephus)에 의하면 이때가 세례 요한을 참수(斬首)시킨 바로 직후였기 때문에 이 참패의 원인을 의인의 살해로 말미암은 징벌이라고 간주한다. 한편 본문의 '헤로디아의 일'이란 헤롯 안티바스와 헤로디아의 불법적인 결혼에 대한 세례 요한의 책망을 가리킨다. 이 일로 인해서 헤로디아는 신약의 엘리야인 세례 요한을 미워하고 죽이고자 계획하였는데(막 6:19), 이는 바알의 선지자를 죽인 일로 엘리야를 죽이고자 했던 이세벧의 경우와 좋은 대조가 되는 사건이었다(왕상 19:1,2).
옥에 가두었으니 - 요한은 유대인의 3대 요새(要塞) 중의 하나인 마케루스에 있는 감옥에 갇히었다고 한다. 이곳은 헤롯과 헤로디아가 주로 거처하는 베레아의 남부를 방어하는 요새로, 표고 736m의 사해 동편 황량한 사정에 위치하고 있었다. 요한의 투옥 이후에 그의 제자들 중 일부는 별개의 집단으로 계속 존속하고 있었으며 그가 옥에 갇혀 있을 동안에는 계속해서 그의 지시를 받았던 것 같다(11:2).
=====14:4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 헬라어 동사 '엘레겐(* )은 과거 미완료시상으로서 '그가 반복해서 말하곤 했다'라는 의미를 갖는다. 요한이 헤롯을 직접 만나 그를 책망했다고 하는 것 보다는 오히려 사람들에게 설교 하는 중에 혹은 세례를 주는 등의 여러 행위속에서 헤롯과 헤로디아의 불법적인 결혼에 대해 공공연히 비난하였음을 의미한다.
그 여자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 - '광야에서의 외치는 자의 소리'였던 세례 요한의 '고발 내용'이다. 요한이 헤롯을 책망한 것은 그가 첫번째 부인인 아라비아 왕 아레다(고후 11:32)의 딸을 버림으로써 외교적 갈등으로 인하여 나라의 정치적 위기를 몰고온 때문이라기 보다는 이방인 출신(헤롯대왕은 이두매 사람이었다)인 헤롯이 자신이 유대인이 되었음을 자처하면서도 유대의 율법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율법(레 18:16;20:21)에는 형제의 아내와 결혼할 수 있는 조건은 그 형제가 아들이 없이 죽었을 때 뿐이다. 그러나 헤로디아의 첫 님편인 헤롯 빌립 1세는 여전히 살아있었으므로 그들은 간음죄를 범한 것이며, 또한 헤롯파 헤로디아는 삼촌과 조카(헤로디아는 헤롯 대왕의 또 다른 아들 아리스 토블루스의 딸이다) 사이로 이들은 근친상간(近親相姦)의 죄를 범한 것이 된다.
=====14:5
헤롯이 요한을 죽이려 하되 - 그 이유는 두 가지, 즉 (1) 도덕적 이유, 즉 요한이 자신의 비윤리성을 비난했기 때문에, (2) 정치적 이유, 세례 요한이 민중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너무 심각해졌기 때문에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두 문제는 상호 연결된 것으로서 나누어서 생각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다만 유대인 사가(historian) 요세푸스(Josephus)등은 정치적 이유에 초점을 두고, 성경 기자들은 비교적 전자에 기울어진다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사실 세례 요한에게 있어 헤롯가문이나 로마의 식민체제 등을 비판하는 것이 임무는 아니었다. 오히려 구속사적 입장에서 구약의 종말과 하나님 나라의 도래로 인한 신약의 시작을 증언하는 것이 그의 주(主) 임무였다. 또한 그가 세속 정치인에게 오해를 받아 죽임을 당하는 것은 예수께서도 정치적 오해를 받아 죽임을 당한 것과 연결되어 다시 한 번 세례 요한이 예수의 선구자였음을 상기시켜 준다.
민중을 두려워하더니 - 막 6:20에서 헤롯이 요한을 두려워하여 그를 처형하지 못하고 있었다.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에 따르면 이때 헤롯이 요한을 단번에 처형치 못한 것은 백성들의 폭동을 우려했기 때문이라 전한다. 여하튼 예루살렘에 있는 종교지도자들을 제외한 민중의 태도는 세례 요한에 대하여 매우 호의(好意)적 인 것이었다(3:5, 6;11:7-4). 그에 대한 민중들의 신뢰와 지지의 원인은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볼 수 있다. (1) 유대지도자들과 율법주의자들의 죄악을 고발하고 그들을 책망하였기 때문이다. (2) 적국(敵國)인 로마를 등에 업고 민중들을 억압하고 있는 헤롯왕가를 비판하였기 때문이며, (3) 예수께서도 그를 크게 칭찬하셨으므로 예수를 따른 자들도 세례 요한을 참선지자요, 예수의 길을 예비하기 위한 선구자로서 인식하고, 사실을 사람들에게 전했기 때문이며, (4) 헤롯이 세례 요한을 불법적으로 감금한 것에 대한 사람들의 분노와 동정으로 인해서 세례 요한의 인기가 더욱 더 고조되고 전국민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14:7
헤롯의 맹세로 - 살로메의 육감적 독무에 심취한 헤롯 안티바스는 탐욕스럽고 권세있는 제왕(帝王)으로서의 기분을 맘껏 누렸다. 그는 분위기에 도취되어 마치 고대 페르시아 군주들이 하던 식으로 호언장담을 늘어 놓았다(에 5:3, 6;7:2).헤롯은 자기 어리석음에 도취되었던 것이다.
허락하거늘 - '호몰로게오'(* )는 '확언하다', '공언하다' 등의 의미로, 맹세와 다짐을 동반한(* , 메타) 허락으로서 반복될 수 없는 약속이다. 물론 왕이 기쁜 날을 맞아 신하에게 훌륭한 선물을 내리는 것은 일상의 일이었지만 헤롯은 자신이 이행해야 할 내용을 알지도 못하면서 기분에 도취된 채 호언 장담함으로써 돌이킬 수 없는 과오(過誤)를 저지르게 된다.
=====14:8
제 어미의 시킴을 듣고 - 그 당시 살로메는 육체적으로는 뭇남성의 시선을 집중시킬만큼 성숙했는지 모르나 정신적으로는 아직 제 어미에게 의존해야 할 만큼 미숙한상태였다. 이것이 바로 그녀가 악의 도구로 전락하게 된 크나큰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한편 본문의 '시킴'에 해당하는 원어 '프로비바스데이사'(* )는 '선동하다', '권면하다'는 뜻으로 헤로디아의 집요하고도 악의에 찬 일면을 보여준다. 여하튼 본문은 세례 요한의 죽음이 바로 헤로디아의 사주(使嗾)에 의한 것임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말이다. 요한의 죽음은 그녀의 간계(奸計)에 의한 것이었다. 헤로디아는 분명히 요한의 처형에 대해 끊임없이 헤롯을 졸랐을 것이다. 그러나 결심을 못하는 헤롯의 행동을 통해서도 자신의 요구를 포기하지 않던 헤로디아는 어린 딸을 이용하여 눈에 가시와 같이 자신의 부정(不貞)을 고발하던 요한을 제거하려 하였다.
세례 요뱐의 머리를 소반에 담아 - 헤로디아의 횹혈귀적인 완악상을 드러내 준다. 크리소스톰(Chrysostom)에 의하면, 이때 헤로디아는 자신의 부정한 결혼을 고발하던 요한의 칼날같은 혀가 침묵하고 있는 모습을 보기 원했기 때문에, 그리고 그러한 요한을 마음껏 저주하고 조롱하기 원했기 때문에 참수(斬首) 당한 요한의 머리를 요구했다고 한다. 한편 여기 언급된 '소반'은 타원형으로 된 얇고 큰 접시를 가리킨다.
여기서 내게 주소서 - '여기서'라는 말은 유대의 정치, 종교지도자와 로마시의 군관들이 모인 잔치 자리로서 연회석이자 공식적인 모임의 장소이다. 헤로디아는 헤롯이 그의 딸에 대한 맹세를 깨뜨릴 것을 염려하여 모인 사람들의 눈과 귀를 담보(擔保)로하여 그(헤롯)를 위협하고 요한의 처형을 더이상 지체치 말고 즉각 실행할 것을 촉구하였다.
=====14:9
왕이 근심하나 - 헤롯의 근심이 무죄한 자를 죽이는 것에 대한 양심의 가책 때문인지 아니면 요한의 죽음으로 인해서 일어날지도 모를 민란 대문인지 확실치는 않다. 어쨌든 그의 근심은 '양심의 최후 투쟁'(plumptre)이었으나 그는 의가 아니라 자신의 위치에 집착, 선택함으로써 악에게 굴복하는 결과를 가져 왔다. 자기의 맹세한 것 헬라어 '호르쿠스'(* )는 맹세의 뜻인 '호르코스'(* )의 복수형으로, 맹세가 여러 번 반복되었거나 아니면 그 맹세가 확정적일만큼 강력했던 것임을 의미 하는 말이다. 헤롯이 세례 요한을 처단하도록 허락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첫째, 고대 근동에서의 맹세는 율법에서도 평시되어 있는 바와 마찬가지로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있었다. 특히 성경적인 맹세는 하나님앞에서 거짓없음과 약속이행의 의지를 엄숙하게 맹세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위반할 경우 하나님으로부터 어떠향 처벌을 받더라도 이의(異意)가 없는 것을 의미한다(민 30:1-8, 강해 '서뤠과 맹세에 대하여') 신약 시대에 이르러 맹세는 하나님 대신에 신의 인격, 예배에 관련된 물체, 우주만물, 성전 등을 가리켜 맹세가 행해졌다. 그러나 맹세의 남용(남용)으로 인해서 예수께서는 일체(일체)의 맹세를 반대하시기도 하였다(마 5:34-37). 한편 구약의 인물 중에서도 경솔한 맹세로 인해서 절망적인 상태에 빠지게 된 사람으로 입다(삿 11:31-39), 사울(삼상 14:38ff)등이 있다. 둘째, 헤롯은 그의 왕으로서의 권위 때문에 맹세를 깨뜨릴 수 없었을 것이다. 고대 사회에서 왕의 말은 곧, 국법이었다. 그 예로 다니앨을 사자굴에 집어넣었던 메대 나라의 다리오 왕의 금령을 들 수 있다(단 6:14-15).
그 함께 앉은 사람들 - 막 6:12에 의하면 이곳에 초대된 사람들은 대신들과 천부장들과 갈릴리의 귀인듸이다. 이 사람들은 왕의 잘못을 제지하는 얼리야김의 방백들과는(렘 36:25) 달리 헤롯의 불의를 조장하고 촉구하는 자들이었을 겻이다. '같은 깃털을 가진 새들이 함께 모이듯' 헤롯의 주위에 모여드는 사람들은 모두 헤로디아와 같이 부정하고 사악 한 자들로서 왕의 잘못을 지적하는 대신에 그의 비위를 맞추고 아첨함으로써 세례 요한의 참수를 결단하게 하는 결정적 요소로 작용하였다. 그들이 바로 어리석은 헤롯의 맹세의 증인이 되었고 사악한 헤로디아의 살인에 동조자(同調者)가 되었다.
=====14:10
사람을 보내어...옥에서 목 베어 - 심문이나 재판의 판결없이 사람을 처형하는 것과 더구나 모세 율법에 따르면 목을 베어 죽이는 일은 종교적, 신앙 공동체에 대한 공적 범죄이외에는(출 32:27;신 13:6-18) . 참수헝은 그리이스나 로마의 관습을 따른 것이다. 헤롯과 그를 따르는 자들은 이러한 이방적 태도를 반율법적이고 반민족전인 것이어서 그가 아무리 유대인임을 자처한다고 하더라고 민중의 미움을 받는 이유가 되고 있다.
=====14:11
머리를 소반에 담아다가 - 헤로디아는 그녀의 부정과 불의를 끝없이 고발하던 세례요한의 혀가 잠잠해졌음을 확인하기 위하여 그의 머리를 요구한 것 같다. 그러나 요한의 처형이 정의를 부르짖던 그의 '소리'를 결코 잠재우지는 못했을 것이다.
여아에게 주니 - 여기서 '여아'(* , 코라시온)란 혼기(婚期)가 가까운 처녀를 가리킨다. 사실 그 당시 증근동 지방에서는 조혼(早婚) 풍습이 있었기 때문에 십대 중반에 이른 살로메에게 이 용어를 붙인 것은 무리가 아니었다.
제 어미에게 가져 가니라 - 헤로디아는 세례 요한의 목을 요구한 뒤 얼마지나지 않아 그의 목을 받아들 수 있게 되었다. 실로 악인은 피흘리기를 좋아하며, 그것을 신속히 행한다. 한편 루핀(Rufin)의 제롬(Jerome)은 이때 헤로디아가 뽀족한 바늘로 피로 젖은 세례 요한의 혀를 사정없이 찔렀다고 전한다. 한편 무고(誣告)한 피를 흘리게 한 헤롯은 얼마 후 그의 전처의 본국이었던 페트라(Petre)의 아레타스 왕과의 전투에서 참패하여 도주하였고, 또 로마 황제의 진노를 사게 됨으로써 로마 원로원에 의해 프랑스 리용으로 추방되어 거기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고 한다. 또한 살로메는 겨울에 얼음 위를 걷다가 얼음이 꺼져 그만 날카로운 얼음에 목이 찔려 죽었다고 한다(Josephus). 정녕 하나님은 요한이 아닌 헤롯과 그 일당의 목을 요구하신 것이다.
=====14:12
요함의 제자들이...장사하고 - 하나의 조직체로서의 요한의 제자들이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장면을 보여주는 구절이다. 요한의 제자들은 스승이 살아있을 때에 스승과 연락이 잦았으므로(11:2) 스승의 참수 소식을 곧바로 접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편 그들은 머리없는 스승의 시신을 안치한 후 곧 예수께 나아갔다. 즉 그들은 스승인 요한의 증언, 곧 예수가 하나님의 어린 양(요 1:35-40)이라는 말을 듣고 점차 예수를 신뢰하게 되었는데, 이제 그 스승이 죽자 더욱 적극적인 자세로 예수에게로 와서 그의 제자가 되려고 하였을 것이다. 이와 더불어 요한은 생전 뿐 아니라 사후에도 그의 영향력이 대단했는데, 그 결과로서 요한의 제자들은 팔레스틴을 벗어나 지역에서 여전히 작은 분파로서 존재하였었는데 그들은 대부분 예수를 중심한 복음의 충만한 지식을 지니지 못하고 단지 편협한 신앙적 지식만을 소유하고 있었다(행 18:24-19:7).
예수께 고하니라 - 막 6:30에 의하면 이 보고는 사도들의 선교 활동에 대한 보고였다. 그러나 마태는 이 보고가 요한의 처형에 관한 것임을 서술하는 가운데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의 제자들에게 흡수되었을 가능성을 암시하고 있다. 옥에 있는 요한에게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보고한(11:4 ff) 제자들이 요한의 처형 소식을 주님께 알렸다는 사실은 이미 그들이 예수와 스승 사이의 사상의 일치를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요한의 가르침대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은 자들이 많았을 것임을 의미한다.
=====14:13
예수제서 들으시고 - 본문에서 예수께서 들으셨다고 하는 내용은 '요한의 처형'에관한 소식이 아니라 예수의 권능에 대한 소문이 신하들에 의해 헤롯에게 보고되었고 헤롯이 그를 다시 살아난 세례 요한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고 하는 소식이다(1절). 따라서 3-12절의 내용은 부록적(附錄的) 설명임에 분명하다. 3절에 보면 요한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는 헬라어 '가르'(* , 왜냐하면)로 시작되는데, 이 '가르'는 어떤 사실에 덧붙여 설명하고자 할 때 쓰이며, 반면에 3절의 초두에 나타나는 '데'(* , 그리고)는 어떤 일을 새롭게 전개시코고자 할 때 사용되는 말이다(L. Cope).
따로 빈들에 가시니 - 세례 요한의 사후(死後) 헤롯이 이번에는 자신에 대해 주목하기 시작하였다고 하는 것과 헤롯의 미신적인 두려움과 그가 자신을 만나보기를 간절히 기대한다(눅 9:9)는 사실을 아신 예수께서는 해롯의 관할지역을 떠나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 벱새다 광야로 가셨다. 이때부터 예수의 사역은 주로 제자들을 염두에 두고 그들을 훈련하기 위한 것이 되었는데, 이는 그가 자신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길이 바로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지역 주위에서 발생한 여러 사건과 이적들은 예수의 공생애에 있어서 그 절정에 속하는 것이며 그 이후의 사건들은 수난을 예고하는 것이라고 하는 의의를 갖는다.
여러 고을로부터 걸어서 좇아간지라 - 예수께서는 전에도 바리새인들의 적의(敵意)를 피해 떠나신 적이 있는데(12:15), 이제는 헤롯 안티바스를 피해 안식과 묵상을 위해 떠나신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피하신 또 다른 이유는 12제자들이 선교 여행을 마치고 막 도착했기 때문이다(막 6:30;눅 9:10). 그 제자들은 영.육의 휴식기가 필요했고 자신들의 선교 방법에 대한 검토 및 예수께 복음의 비빌을 좀더 깨우침 받아야 했다. 한편 누가는 예수가 가신 빈들이 벱새다(눅 9:10). 즉 갈릴리 북동쪽 해안에 위치한 벱새다 율리우스(Bethsaida Julius) 지방에 속한 곳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사람들은 갈릴리 호수 해변을 따라서 도보(徒步)로 예수를 좇아갔을 것이다. 무리들은 선지자로 여기던 세례 요한의 처형소식을 듣고 목자 잃은 양처럼 방황하다가 예수 계신 곳을 듣고 그분에게서 영혼의 쉼을 얻고자 찾아 나선 것 같다.
=====14:14
예수께서 나오사 - 예수께서는 자신이 공개됨으로써 대적자들의 표적이 될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제자들과 조용한 무리를 향해 나아오셨다. 이것은 바로 인간 자신의 자유 의지에 의한 결단에 대해 선택, 구원하시기 위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주권 의지가 응답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큰 무리 - 직역하면 '많은 무리'라 된다. 한편 이 사람들의 수(數)를 21절과 막 6:44에서는 남자만 '오천 명'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그 당시 숫자 계산에 들지 않는 여자와 어린아이들을 포함한다면 이 무리는 적어도 만 오천내지 이만 명은 넘었을 것이다.
불쌍히 여기사 - (* , 스플랑크니조마이). 헬라어의 이 동사는 유대인듸이 참으로 애끓는 아픔의 세월을 보낸 디아스포라(Diaspora)상태로 살아가기 시작할 때 생겨났다고 한다. '불쌍히 여기다'라고 하는 말은 내장 혹은 심장 등 인간의 내부로부터 그 아픔을 느끼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히브리인들이 '내장'(* , 스플랑크나)을 인간의 깊은 감정이 거하는 곳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실로 '인간에 대한 긍휼'은 예수의 전인격성을 대표하는 속성으로, 자식에 대한 어버이의 간절한 정(情)이상의 애틋한 긍휼의 마음이다. 한편 예수의 인간에 대한 최대한의 긍휼은 바로 십자가 상에서의 대속의 행위로써 드러나고 있다. 그런데 예수께서 병을 고쳐주시는 경우 사람의 믿음을 보고서 행하시는 적도 있지만 흔히는 그 자신이 그들을 '불쌍히 여기심'으로 병고침의 이적을 행하셨다.
=====14:15
저녁이 되매 - 예수 당시의 유대인들은 저녁(* , 옵시아스)을 두 가지로 나누어서 이해하였는데, 제 1저녁은 늦은 낮, 주오후 3시부터 시작되고, 제 2 저녁은 일몰 이후 부터 시작되었다. 본문의 구절은 제 1저녁을, 23절에서는 제 2저녁시간을 가리킨다.
이곳은 빈들이오 - 빈들을 가리키는 말인 '에레모스'(* )는 광야 혹은 한적한 곳으로, 세례 요한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까지 메뚜기와 석청을 먹고 살았던 곳도 이러한 곳이었으며, 이스라엘 사람들이 만나와 메뚜기로 매일의 양식을 삼았던 곳도 바로 이러한 곳이었다. 따라서 마을이 없고 인적이 드문 이러한 곳에서 자연식품인 메뚜기와 석청 그리고 하나님의 도우심의 손길에 의해서 마련된 만나를 제외한 다른 떡이나 음식을 기대한다고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헤롯은 그의 찬란한 궁전에서 귀족들과 연회릍 벌렸지만 그 연회는 살인과 범죄의 현장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예수께서 그의 제자와 큰 무리들과 함께 베푸신 오병이어의 기적의 현장 '빈들'은 바로 하나님의 축복과 인간의 감사가 넘쳐나는 은혜의 땅이며, 천국잔치의 전례(前例)가 행해진 곳이다.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때가 벌써 지났으니'가 된다. 그렇다면 이 '때'란 어떤 상황을 말하는가. 이에 대해 예수께서 가르침을 마칠 때, 식사할 때, 무리들을 돌려보낼 때, 밝은 시간이 지나는 때 등으로 해석하는데 이 여러 견해들은 모두가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어느 것을 취하더라도 거의 동일한 의미일 것이다. 무리를 보내어...먹을 것을 사 먹게 하소서 - 어쩌면 현대에 만연하고 있는 금전만능적이고 지극히 타산적인 사고에서 나온 것처럼 들리는 제자들의 무책임한 발언이다. 사설 제자들 중에는 (아마 가릇유다일 것이다) 예수와 제자들에게 필요한 돈이 얼마쯤 남아 있었는지 알고 있는 사람이 있었을 것이며, 그 돈으로는 약 2만여명의 무리를 먹이기에 역부족임을 또한 알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제자들은 무리를 자기들에게서 떠나게 하는 것 밖에 다른 방도(方途)를 찾지 못했던 것이다.
=====14:16
갈 것 없다 - 문자적으로 '가게 할 필요가 없다'는 뜻으로서, 부정어 '우'(* )가 사용되어 강압적인 부정문이 되고 있다, 예수께서는 꽤 합리적이고 설득력있는 것과 같은 제자들의 주장을 이 한 마디의 말로 단호히 거부하셨다. 예수께서는 해산(解散)하기를 종용하는 제자들의 말에 따라 힘없이 돌아가는 병들고 굶주린 사람들을보고, 깊은 연민과 애정으로 돌아가려는 그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던 것이다. 실로 인간이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그리스도에게서 떠나는 일은 결코 필요치 않다. 정녕 예수께서는 지금도 인간이 안고 있는 그 어떤 문제일지라도 외면치 않고 당신의 넓은 품 안으로 받아 들이고 게신다(요 14:1).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 제자듸은 '스스로 사 먹게하소서'라고 말하였고 예수는 '너희가 그들에게 그것을 주라'고 하셨는데,이 말을 들은 제자들은 참으로 당황하지 않을수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이 명령에 쓰인 동사 '도테'(* )는 '주다'란 뜻의 '디도미'(* )의 제 2 과거형으로, 즉각적이고 긴급한 행동이 요구됨을 의미 한다. 실로 경제적으로 풍요롭지 못했던 제자들에게는 무리들에게 음식을 대접해야 할, 그것도 지금 당장 수행해야 할 의무가 주어졌다. 물론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거의 만명 가까이 되는 사람들을 먹일 수 있는 능력이나 수단을 가지고 있지 않음을 알고 계셨다. 그러나 이 말씀은 굶주린 군중들에 대한 그들의 책임감을 일깨워 주는 것과, 또한 자신에 대한 제자들의 신앙의 정도를 시험하기 위한 의도에서 행해진 것일 것이다. 물론 여기서의 책임은 무리들에게 물질적인 양식 뿐만 아니라 영적인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해야 할 사명을 가리킨다. 예수께서 사도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 치라, 먹이라'고 세 번이나 거듭 부탁하셨듯이(요 21:15-17) 본문에서도 제자들에게 그들의 사명을 잊지 않도록 당부하고 계신 것이다. 이러한 제자들의 책임은 현존하는 교회의 사명이기도 하다. 교회는 굻주리고 헐벗은 사람들에게 육의 양식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심령이 굶주리고 메마른 자에게 영원한 생명수를 마시게 할 할 책임이 있다.
=====14:18
내게 가져 오라 - 마태만이 이 말씀을 기록하고 있다. 이는 분명히 떡의 끝없는 분배 사건이 예수의 손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임을 암시하는 말이다. '먹을 것을 주라'는 예수의 명령을 이해치 못한 제자들의 연약한 믿음에서 기적이 형성된 것이 아니라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는 예수의 마음에서부터 그것은 발생되었다. 따라서 제자들은 기적의 공동 창조자가 아니라 기적의 분배자(分配者)에 불과하였다. 실로 제자들의 이러한 연약한 믿음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기까지 계속되었다. 따라서 예수의 '내게 가져오라'라고 하는 이 말은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키 위해 제자들에게로, 교회 자체에게로가 아니라 오로지 교회의 머리 이신 주님에게로만 자신을 가져가야 한다고 하는 사실을 암시한다.
=====14:19
잔디 위에 앉히시고 - 눅 9:14에 의하면 떼를 지어 한 오십 명씩 앉히셨다고 하였고, 막 6:40에 의하면 혹 백씩 혹 오십씩 알았다고 하였다. 여기서 '알았다'의 뜻인 '아나클리노'(* )는 물론 이스라엘인들의 보통의 식사 때의 자세와 마찬가지로 비스듬히 기대어 눕는 것을 의미한다. 여하튼 예수께서는 신령한 이적을 행하시기에 앞서 그 이적에 참여하게 될 무리들에게 먼저 '순종'과 '질서'를 요구하셨다. 한편 본문의 '잔디'에 관한 언급으로 보아 이때는 대략 3, 4월 경으로 추정된다.왜냐하면 팔레스틴에서는 우기(雨期)가 막 끝나가는 2월 중순 경부터 빈들에 잔디가 돋아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요 6:10). 더욱이 요한은 이때가 유월절(니산 월 14일)이 가까운 때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요 6:4). 참고로 유월절 기간이 다한 이후로는 잔디가 푸른 기운을 잃고 시들기 시작한다.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 이러한 행동은 유대 가정에 있어서 가장(家長)이면 누구나 하는 평범한 일이었다(롬 14:6; 딤전 4:5). 유대인 탈무드(Talmud)에 의하면 '감사없이 무엇을 즐기는 자는 하나님께 강도짓 하는 것과 같다'고 할 정도로 감사의 일상화(日常化)를 가르쳤다. 바로 예수께서 이 날의 잔치를 주관하시는 주인이시며,세 자들은 그의 시중꾼이며, 무리들은 잔치에 초대되어 온 손님들이다.여기서 '축사하다'의 뜻인 '유로게오'(* )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는 것을 말한다. 무엇을 먹기 전에 하는 유대인들의 공통된 기도의 내용은 '땅으로부터 양식을 얻게 하시는 우주만물의 왕이신 우리 주 하나님이시여 감사하나이다'였다. 본분에서 예수께서 행하신 기도의 내용 역시 그들앞에 적은 양이나마 음식이 놓여진 것에 대한 감사이지, 그 음식의 무한정한 증가를 간구한 기원에 집중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즉 예수께서 평소에 제자들과 함께 식사하실때 드리던 기도 그대로였을 것이다(26:26;눅 24:30).
떡을 떼어 - 떡을 떼시며 그것을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시는 예수의 손이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장정 5천명과 여자, 어린아이가 먹을 수 있었던 기적의 근원지요, 기적이 일어난 현장이며, 떡을 떼시는 그 순간이 바로 그러한 기적이 발생한 시점(時點)이다. 예수가 행하시는 기적은 이상한 주문(呪文)이나 신기한 동작이 필요치 않는 일상적인 자연스런 행동 속에서 이루어졌다. 조각이 계속해서 불어나며 떡덩어리가 결코 없어지지 않는 이 기적을 나타내는 말이 바로 '떡을 떼며'라는 이 단순한 한 마디의 말이다. 그런데 이 뗀 떡은 그것이 바로 인류의 영적 생명을 위해 찢기울 생명의 떡이신 예수와 그분의 육체의 모형이라고 하는 점에 그 큰 의의가 있다(요 6:26, 27). 예수께서는 그 많은 사람들을 배불리 먹게하기위하여 끊임없이 손으로 떡을 떼셨다. 오늘도 하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예수께서는 우리의 육과 영의 양식을 위해서 여전히 떡을 떼어주신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 제자들은 언제나 예수의 사건을 다른 사람보다 더 가가이, 더 먼저 경험한 목격자들이며 그 목격한 사실들을 전달해 주는 증인들이다. 떡과 물고기가 전해지는 이러한 과정은 생명의 양식인 그리스도의 말씀이 먼저 복음에 사로잡힌 자들에 의해 세상에 전달되는 과정과 동일하다.
=====14:20
다 배불리 먹고 - 겨우 목을 축이고 한 끼니를 때우는 정도가 아니라 사람들이 멀리 떨어진 자신의 집을 찾아 갈 기운을 얻을 수 있을 정도로 넉넉하게 떡과 물고기가 배급(配給)되었다는 말이다. 특히 '배불리 먹었다'고 하는 말은 아마도 미래에 있을 메시야 왕국의 잔치의 풍성함을 나타내기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더욱이 이는 그리스도의 몸은 온 인류의 영적 양식이 되며 모든 죄인의 죄악을 모두 사(赦)할 수 있는 큰 사랑의 힘을 지녔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남은 조각 - 기름으로 모든 빈 그릇을 채운 이적(왕하 4:1-7)과 스무 개의 보리떡과 자루에 담은 채소로 100명을 먹인(왕하 4:42-44) 엘리사의 기적과 신약에서 나오는 예수의 모든 기적들의 공통점은 바로 '사용하고도 남았다'고 하는 사실에 있다. 예수께서 병자들을 고치신 기적에서도 병자는 그 자신의 병을 고쳤을 뿐만 아니라 몸이 완전히 건강해지는 것을 체험한다. 이러한 차고 넘치도록 후히 주시는 사랑이 바로 하나님의 긍휼이다. 따라서 남은 조각들은 바로 주님이 행하신 기적의 조각들이며 주님의 사랑의 파편(破片)들이다. 한편 여기서 '남은 조각'은 단지 먹다가만 부스러기만을 의미하지 않고 예수께서 나눠주시기 위해 손으로 떼 놓은 조각듸까지를 포함한 말일 것이다.
열 두 바구니 - 열 두 제자가 각각 한 바구니씩 거둔 것이라 볼 수 있다. 사실 그 남은 조각들은 12제자들의 계속되는 식량이 되었을 것이다. 한편 바구니를 뜻하는 헬라어 '코피노스'(* )는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버들가지로 만든 음식담는 그릇으로서 여행자들의 휴대용 주머니로 활용된 것이었다. 그에 비해 예수께서 4천명을 먹인 이야기에서 나오는, 일급 광주리는(15:37) 헬라어 '스퓌리스'(* )로, 흔히 이방인들이 물고기나 과일을 담는데 사용하는 갈대로 만든 광주리였다. 그리고 오천 명, 떡 다섯 개, 열 두 바구니 등의 5와 '12'라는 숫자는 '모세 오경'과 '열 두 지파'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유대인들에게 의미 있는 슷자로 이해된다. 결국 이러한 점들은 많은 학자들로부터 오천 명을 먹인 기적은 유대인에게, 4천명을 먹인 기적은 이방인들에게, 예수가 생명이 됨을 나타내기 위해 기록된 것이라는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14:21
여자와 아이 외에 오천 명 - 오병 이어의 기적 사건은 예수께서 돌아가시기 만 1년전인 유월절이 임박한 기간에 베풀어진 것으로 보인다(요 6:4). 따라서 그 당시 무리들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이었기 때문에 많은 숫자가 한꺼번에 운집(雲集)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편 이때 모인 무리는 성인 남자만을 계수(計數)하는 유대인의 계산법에 따라 '오천 명'이었기 때문에 여자와 아이 (* , 파이디온, 조그마한 아이란 뜻)까지를 합산하면 1만 5천명에서 2만명 정도로 추산(推算)된다. 예수의 공생애 중에 최대의 군중이 운집한 것이다.
=====14:22
즉시...재촉하사 - '재촉하다는 '억지로 시키다'의 뜻이다. 예수께서 오천 명이 넘는 무리들을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배부르게 하신 후에 급히 서둘러 제자들을 무리로부터 멀리 떠나가게 한 이유는 다음과 갈이 추측해 볼 수 있다. (1) 주님은 한적한 곳에서 홀로 기도하기를 위하셨다(23절). (2) 예수께서는 그의 제자들 뿐만 아니라 동요하고 있는 무리들을 피하여 한적한 곳에서 잠시 쉬시기를 원했다(막 6:31-32). (3) 예수께서는 그의 제자들을 먼저 해산시킴으로써 자신을 왕으로 삼으려하는 백성듸의 의도와 분위기를 잠재우려고 하였다(요 6:15). 왜냐하면 그의 제자들은 주님을 도와 무리들의 잘못된 기대를 올바로 잡아줌으로써 주님을 돕기 보다는 오히려 자신들의 정치적 욕망을 성취하려는 기대에 빠져 있었으므로 그들이 남아있는 일이 예수에게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막 8:27-9:1 주제 강해, '메시야 사상 전개' 참조).
앞서 건너 편으로 가게 하시고 - 음식을 먹은 벱새다 광야의 건너편은 갈릴리 호수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게네사렛일 것이다(34절). 할편 요 6:17은 가버나움이라는 마을을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 웨스트코트(Westcott)와 모리스(Morris)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예수께서는 벱새다 율리우스에 근접해 있는 동쪽 해안에서 자신을 기다리라는 당부와 함께 제자들을 보내어 호수를 건너게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보내는'이라는 가정법 과거 동사와 함께 쓰인 '동안에'란 뜻의 '헤오스 후'(* )는 '때까지'(until)로 번역되어야 한다. 따라서 건너펀으로 가게 하셨다고 하는 의미는 주님께서 무리들을 해산시킬 때까지만 제자들이 앞서 가다가 그 후에 예수께서는 기도하시고 다시 제자들과 만나 건너편으로 건녀가시려고 했다는 것이다.
=====14:23
무리를 보내신 후에 예수께서 이제부터 그와 함께 하려는 많은 군중들을 집으로 돌려 보낸 이유는 다음과 같이 생각될 수 있다. (1) 여러가지 이적, 특히 오병이어 사건에서 그가 참 메시야이심이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무리들에게 옹위를 받으며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으며(21장), (2) 비록 그가 유대인들이 고대(苦待)하던 참 메시야이시라고 하더라도 메시야가 올 때 하나님께서는 자기 종들을 시켜 생선과 육류를 준비하여 잔치를 배설(排泄)할 것으로 생각하던 그들의 예측과는 달리 예수께서는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온 인류가 고대하는 구원자로서 오히려 유대인듸에게는 배척당하고 수난당하실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예수께서는 미리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리들의 갈채와 소란은 마귀의 유혹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먼저 여기서 '산'은 혼잡한 무리들과 격리된 영적 교제의 장소이다. 더불어 이곳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항해 모습을 주시(注視)할 수 있었을 것이다(막 6:48). 한편 예수께서는 자신이 행한 기적을 둘러싸고 중대한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종종 한적한 곳을 찾아나섰으며 그곳에서 기도와 명상을 하곤 하셨다(막 1:35;눅 5:16;6:12). 예수의 능력의 비밀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사실에 있을 뿐만 아니라 기도를 통해서 성부 하나님과 계속적으로 교제를 나눈 것에 있었다. 이것이 바로 그의 사역을 가눙케하는 예수의 내적인 삶의 본질이었다. 기도와 이적 행위 사이의 바른 관련성은 행위가 일차적으로 중요하고 기도로써 그 행위를 돕는 것이 아니라 기도가 최고로 중요한 것이며 행위는 그 기도를 입증하는 것일 뿐이다(Archbishop William Temple).
저물매 - 두번째 저녁을 의미한다(15절 참조). $4} 땐 육지에서 수찌나 떠나서. 헬라어 성경에서 이 표헌은 '데손 테스 달라세스'#르& 60# #$딛쇼초##4쥘싣)로, 박다한즈)운비 롤 의미한다. 이곳과 평햐구절인 요 6 } 질에는 '십여 키'로 표헌되고 있는데, 이는 조-7 스 타디온쫌 되는 거리이다. 그렇다면 1스타디온 (빽%2)은 1#.#8이므로 따라서 육지에서 배 까지의 거키는 4.와2 내지 5.#8에 해당한다 (제 1꿜 성경총른 '성경의 도량형'란 참조.) 바람이 거슬찌므로. 갈럴키 호수에서 부는 바 람은 폭피우를 동반한 돌피으로 급격한 기후변 동과 고난의 위혐성이 있다(막 4} 37) 요 6 } 18). 할편 성경 문학적으로 바람은 생의 딧없음 (시 훨} 쥡, 하나넘의 심환#엠 8 } 17), 사람 들올 흩어지게 하는 개난여1 6} #, 화람올 피혹하는 고훈(엠 4} #꿔 등올상징한다.
=====14:24
육지에서 수리나 떠나서 - 헬라어 성경에서 이 표현은 '메손 테스 달라세스'(* )로, '바다 한 가운데'를 의미한다. 이곳과 평행구절인 요 6:19에는 '십여 리'로 표현되고 있는데, 이는 25-30 스타디온쯤 되는 거리이다. 그렇다면 1스타디온(stadion)은 184.85m 이므로 따라서 육지에서 배까지의 거리는 4.6km 내지 5.5km에 해당한다(제 1권 성경 총론 '성경의 도량형'란 참조).
바람이 거슬리므로 - 갈릴리 오수에서 부는 바람은 폭퐁우를 동반한 돌풍으로 급격한 기후 변동과 고난의 위험성이 있다(막 4:37;요 6:18). 한편 성경 문학적으로 바람은 생의 덧없음(시 78:39), 하나님의 심판(렘 18:17), 사람들을 흩어지게 하는 재난(렘 49:36), 사람을 미혹하는 교훈(엡 4:14)등을 상징하다. 따라서 본문의 이 말은 환호, 열광하는 군중들을 뒤로하고 예수로부터 떠밀려 배를 타고 있는 제자들이 이미 마귀가 가져다 주는 시험, 즉 세상 권력에 대한 미련이 여전히 그들을 괴롭혔을 것이라고 하는 상상을 가능케 한다. 실로 그들의 배는 정면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거슬리고, 그들의 영혼은 그들을 향해 불어 오시는 성령의 바람을 거스렸다.
고난을 당하더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바사니조'(* )는 '시금석으로 시험하다', '고통을 주어 심문하다', '동요케 하다'등의 뜻으로, 제자들이 풍랑으로 인해 육체와 정신의 급격한 위기에 봉착(逢着)했음올 암시하는 말이다. 한편 제자들이 이러한 곤란을 경험하는 이 시간에 예수께서도 협곡(峽谷)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시면서 역시 고난 중에 하나님께 간구하고 계셨다. 물론 예수에게 있어서 고난은 바로 유대의 정치, 종교 지도자들 사이의 음모 구상과 박해공작(plot)에 대한 예견(foreknowledge)과 자신을 이 세상의 왕으로 삼으려는 군중들의 오해와 오랜 세월을 함께 지내면서도 예수 자신을 올바로 이해하고 평가하지 못하는 제자들의 무지 등등의 사유로 인해서 생겨난 것일 것이다. 이처럼 예수와 제자들은 그 시간에 함께 고통을 당하였으나 주님께서는 기도틀 통하여 그 고난을 스스로 극복하시고 능히 물리치셨다. 그에 반하여 제자들은 주남님 도우심으로써만 그 고난에서 헤어나올 수 있었다. 그들은 배 가까이 오신 예수 주님으로 확신할 때까지 배에서 고난을 당하였던 것이다. 한편 이때 예수께서는 그들의 고난을 친히 목격하고 계셨으나 즉시 그들을 찾지 않으셨다. 이는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훈련시키기 위한 조처로서(Chrysostom), 예수께서 육신으로 그들과 더불어 계시지 않더라도 그분의 보호하시는 능력이 여전히 그들 가운데 역사하고 있다는(8:23-27) 사실을 확신시키기 위해 이런 시련의 기간을 두셨던 것이다(Homer A. Kent, Jr.).
=====14:25
밤 사경에 - 유대인들은 밤을 3경으로 아누었으나(일경을 4시간씩, 막 6:48) 그이이스나 로마에서는 밤을 4경으로 나누었는데, 여기서 마태는 로마식을 따른 것 같다. 따라서 1경은 오후 6시부터 9시까지이며, 2경은 9시부터 12시까지, 3경은 12시부터 새벽 3시까지,그리고 본문에 묘사된 4경은 '새벽 3시부터 6시까지'의 시간을 말한다.
바다 위로 걸어서 - 예수의 만유의 주재로서의 초자연적 위상(位相)을 나타내주는 부분이다. 사실 바다 위를 걷기 위해서는 세찬 바람과 거친 물결 및 지구의 중력을 모두 극복해야 하는데, 예수께서는 이 모든 자연의 사슬들을 지배하시고 그 위에 우뚝서신 것이다. 한편 예수께서 물 위를 걸으신 기적 사건은 그 결과가 바로 제자들의 최초 신앙고백, 즉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33절)라고 하는 참 신앙적 고백을 하게 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것이다. 또한 그 뿐만 아니라 이 사건이 생략된 누가복음을 제외한 마태, 마가, 요한복음의 서술이 모두 오첨 명을 먹이신 급식 사건 다음에 기술되어 출애굽 사건을 연상케 함으로써 모세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바다를 건넜지만 예수는 스스로의 초자연적인 능력에 의해 바다 위를 걸었다고 하는 것, 즉 모세보다 탁월하신 예수의 신성(神性)을 나타내 보였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실로 예수(복음)의 새시대는 모세(율법)의 옛시대를 포함할 뿐 아니라 크게 능가(surpass)하고 있는 것이다.
=====14:26
유령(* , 팥타스마) - 이는 꾸며서 나왔다는 뜻인 '판타조'(* )에서 유래한 말로서 실체가 없는 허상(虛像), 곧 망령 또는 귀신을 의미한다. 이성적으로는 도무지 용납되지 않는 기(寄)현상 앞에 제자들은 그것을 하나의 환각 내지는 미신적 현상으로 오판(misjudgement)하였다. 적어도 그들은 '유령이라' 외치면서 그듸의 눈 앞에 직면한 죽음의 위기에 몸이 굳어버렸을 것이다.
=====14:27
안심하라 내니 - 여기 '안심하라'(* , 달세이테)는 말은 '담대하라', '용기를 내라'는 뜻이며, '두려워 말라'(* , 메 포베이스데)는 말은 즉시 '두려움에서 헤어나오라'는 뜻이다. 즉 두 용어는 결국 안심하라는 의미의 중복적 권면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안심하라', '두려워 말라'는예수의 권고의 말씀은 '나다'(* , 에고 에이미)라는 확신을 주는 말씀에 의해 더욱밑받침이 되고 있다. '나는 나다'라고 하는 것은 바로 여호화의 이름이기도 하며(출 3:14), 많은 병자들을 고치시고 굶주린 많은 사람들을 배부르게 하셨으며, 배 안에 있는 사람들을 제자로 삼으셔서 권능을 주신 분으로서의 예수 자신을 저들에게 확인시켜 주시기 위한 참으로 친근한 말씀이다. 이 위대한 위로의 말씀은 풍전 등화(風前燈火)와 같이 파선의 위기를 겪고 있는 제자듸 뿐만 아니라 압제자들로 부터 대박해를 당하여 신앙과 삶의 위협을 받고 있는 초대교회의 성도들에게 큰 힘이 되었을 것이며 오늘의 성도들에게도 동일한 힘을 주는 것일 것이다.
=====14:28
베드로가 - 물 위를 걸은 기록은 이곳에서만 나온다. 이 부분은 14-17장 가운데서베드로가 예수께 특별한 취급을 받는 세 경우(16:13-23;17:24-27) 중의 하나로서, 베노이트(Benoit)는 이 기사에서 이미 베드로가 수석 제자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만일 주시어든(* , 에이 쉬 에이) - 앞에 '에이'는 접속사이며, 뒤에 '에이'는 '...이다, 있다'의 뜻인 '에이미'(* ) 동사의 2인칭 단수 현재 직설법 형태이다.그런데 접속사 '에이'는 가정적 조건문에서는 '...인지, 아닌지'의 뜻을 갖지만,본문의 경우와 같이 결론이 확실한 내용에서 도출(導出)되어 직설법 동사와 연합되는 경우에는(* + 직설법) 토론적으로 사용되어 '과연 주님이시므로'의 뜻을갖는다. 따라서 '만일 주시어든'이라는 말은 베드로가 물 위로 걸어오는 사람이 주님이신가 아닌가를 시험하기 위한 의도에서 한 말이 아니라 예수께서 지금 물 위로 걸어 오신다고 하는 사실과 주님의 명령과 그 능력에 의해 그 자신도 물 위를 걸을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확실히 믿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직설적이고 열정적인 베드로의 일면을 보여준다.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 베드로가 '나로 하여금 물 위로 걷게 하소서'라고 말하지 않고 예수의 '명령'에 초점을 맞춘 것은 그분 자신의 말씀보다 그분의 초자연적 능력을 더 신뢰하는 오류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으로 친지를 창조하셨으며, 말씀(* , 로고스)이신 예수께서 육신이 되셔서 그 말씀으로 많은 병자들을 고치고 천국 비밀을 선포해 주심과 같이 베드로는 예수의 말씀 한 마디에 의해 자신이 그 무엇이라도 할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물 위를 걸으라고 하는 허락과 능력이 주어지기를 요구하는 베드로의 행동은 비록 순간적이기는 했지만 주님에 대한 확고한 신앙과 그분에 대한 열렬한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다.
=====14:29
오라 하시니...배에서 내려 - 예수의 '오라'는 명령에는 이미 당신을 믿고 오는 자에 대해 보호와 안전을 마련해 두고 계신 권위에 찬 명령이다. 한편 신앙이란 하나님의 명령에 자신의 전인격을 복종시켜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는 모험과 같다. 아브라함도 그의 나이 75세에 하나님께서 가나안으로 '오라' 부르시니 '갈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히 11:8),이스라엘 사람들도 '믿음으로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다'(히 11:29). 마찬가지로 베드로도 믿음으로 알지 못하는 세계(풍랑이 휘몰아치는 바다)로 나아갔다.
=====14:30
바람을 보고 - 충동적인 성격의 베드로가 예수에게로 나아가는 동안 관심의 대상이 달라졌음을 의미하는 말이다. 물론 이것은 '믿음'의 고갈(枯渴) 상태를 의미하기 보다는 예수의 초자연적 능력을 믿었지만 폭풍의 위험에도 침착히 인내할 수 있을 만큼의 더 큰 믿음이 없었다는, 즉 믿음의 수준의 문제인 것이다. 정녕 그는 예수(앞)만 바라봐야 함에도 불구하고 바람(밑)을 바라봄으로써 자신을 삼킬듯이 달려드는 풍랑에 대해 두려워 하게 되었다. 정녕 온전한 믿음의 눈은 결코 두 개의 초점 (예수와 세상의 풍파)을 가질 수 없다.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 베드로는 예수와 그 능력을 절대적으로 신앙하는 믿음의 빛을 잃었을 때, 그 즉시 예수의 보호권에서 벗어나 중력에 의해 빠져드는 자연 현상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실로 신앙 세계에는 중간 지대가 없다. 물 위(완전한 믿음)가 아니면 물 아래(완전한 의심), 둘 중 하나에만 머무르는 것이다.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 퀴리에 소손 메) - '구원하소서'의 뜻인 '소손'은 '구원하다'란 의미인 '소조'(* )의 부정 과거 명령형으로, 그때의 상황이 매우 긴박했음을 시사해준다. 물론 본문에서의 이 말은 물에 빠지게 된 베드로 자신의 몸을 구원해 달라고 하는 의미로 사용되었지만 종종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의미에서의 영혼구원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라는 말은 하나님을 떠났던 죄인이 그 죄악의 구덩이에서 헤어나오기를 원할 때 부르짖는 소리이며,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그 상태를 벗어날 수 없다고 하는 한계를 깨닫고 절망 가운데서 비로소 주님께 돌아설 때 하는 첫 마디에 해당한다.
=====14:31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 주님의 신속한 구원행위를 나타내는 말이다.더구나 예수께서는 물에 빠지는 그를 건지기 위해서는 단 한 마디의 명령으로 충분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친히 손을 내밀어 그의 몸을 붙잡으셨다고 하는 이 말은 특별히 주의 '붙잡으시는 사랑'을 경험하게 하시려는 의도가 있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실로 거친 죄악의 세상속으로 들어갈 때마다 즉시 붙잡아 주시는 주 손님에 의해 우리의 신앙생활은 보존, 유시될 수 있을 뿐이다.
믿음이 적은 자(* , 올리고피스토이) - 이 표헌은 신약성경에 모두 다섯 번 나오는데(6:30;8:26;16:8;눅 12:28), 항상 제자들에게 말할 때 사용되었다. 이는 가장 믿음이 깊어야 할 그들이 믿음이 부족하다는 사실이 예수로 하여금 그들을 책망하게 하는 요소가 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마태는 막 4:30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는 표현을 '믿음이 적은 자'라고 말하였는데, 이는 마태가 제자들이 이미 예수의 제자가 된 사실 자체가 어느 정도의 믿음을 소유하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 때문이다. 더욱이 본문에서 베드로는 비록 충동적이나마 그리스도와 그 능력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소유했던 터였다(28절). 한편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원했던 것은 '오라'하신 당신의 말씀을 끝까지 전적으로 신뢰하는 참 믿음이었다. 따라서 예수의 책망은믿음의 양(적다, 많다)이 문제가 아니라 어떤 상황 중에도 그리스도께 대한 영속적 신앙을 간직하는 것, 곧 그 믿음의 질적 측면을 강조한 말이다. 왜 의심하였느냐(* , 에이스 티 에디스타사스). '왜'(* )라는 말은 히브리어 '레마'(* )에 상당 하는 말로 대개의 일반적인 표현인 '디아 티'(* )와는 다음과 같은 차이가 있다. '디아 티'는 '무엇 때문에'(because of what)라는 의미의 '새'이며 '에이스 티'(* )는 '무엇을 위하며'(in order to wher)라는 의미의 '왜'이다. 즉 '에이스 티'는 '디아 티'의 물음에 비해 보다 호의적인 의도에서의 물음이다. 즉 예수께서는 베드로가 왜(because of what) 의심하였는지 그 의심의 원인을 알고자 하신 것이 아니라 '무슨 목적으로', 즉 '무엇을 위하여'(to what end) 의심하였는가를 물으신 것이다. 예수가 손을 내밀면 잡을 듯한 가까운 거리까지 도달한 베드로는 무엇을 의심하였는가(Turner)?한편 여기서 '의심하였느냐'란 말의 원뜻은 '이중적으로 하다'는 의미로서 마음이 두 갈래로 나뉘어져 어찌할 바를 몰라하는 상태를 일컫는다. 이는 다혈질적인 베드로의 심히 당황해 하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는 표현이다.
=====14:32
바람이 그치는지라 - 예수께서 물위를 걸으신 기적이 풍랑 중의 첫번째 기적이라면배에 오르자 마자 즉시 바람이 그친 것은 두번째 기적이다. '수고', '고통', '피곤'을 의미하는 '코포스'(* )에서 나온 '그치다'라고 하는 동사는 바람이 모든 만물의 주인이신 그리스도에 의해 그 고통 속에서 헤어나와 잠잠케 되고 평온함을 찾은 것을 의미한다. 이에 대해 막 4:41은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라고 표현하였다. 정녕 예수는 모든 만물을 지배하시는 만유의 주이신 동시에 모든 혼란과 두려움을 잠재우시는 질서와 평화의 왕이시다(요 14:27). 그가 거하시는 장소, 그가 머무시는 인격에는 영원한 샬롬만이 있을 것이다.
=====14:33
절하며(* , 프로스퀴네오) - 헬라어의 이 말은 제자들이 예수를신앙의 대상으로 경배하였다고 하는 말로, 이번 사건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깨달아 알므로써 가이사랴 빌립보에서의 전적인 신앙 고백(16:16)의 준비가 마련된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 - 이는 '메시야', '그리스도'라는 칭호에 상당하는 용어로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완전한 칭호로 예수를 불렀던 첫번째 경우이다(16:16;26:63;27:40, 43, 54). 물론 이 칭호는 3:17에 나타난 하늘의 성에서 계시된 바 있고, 광야 시험 중 사단도 이 칭호를 사용한 적이 있다(4:3, 6). 또한 예수 자신이 스스로를 '아들'이라 부른 경우도 있다(11:25-27). 실로 예수께서는 하늘과 흑암의 세력과 또한 땅의 무리들 및 자신이 스스로인정하시는 완전한 구주요 메시야이셨던 것이다(16장 주제 강해, '베드로의 신앙 고백' 참조).
=====14:34
게네사렛 - 갈릴리 호수 서안(西岸)에 자리잡고 있는 기후가 온화(溫和)할 뿐 아니라 비옥한 평야지대이며 북쪽에는 가버나움이, 남쪽에는 디베랴가 위치해 있다. 한편 게네사렛 사람들이 즉시 예수를 알아보고 그에게 모여 들었다고 하는 사실은 예수의 사역 범위가 얼마나 넓었는가를 말해준다.
=====14:35
그 근방에 두루 통지하여 - '통지하다'라는 의미의 헬라어 '아포스텔로'(* )는 사자(使者)를 보내어 소식을 전한다고 하는 뜻으로 게네사렛 사람들이 이웃과 주위의 모든 사람들에게 일일이 찾아 다니며 주님이 그들의 동리에 오신 사실을 가르쳐 주었음을 뜻하는 말이다. 또한 이는 마침내 예수의 공적인 사역의 범위가 온 유대 전역에까지 미치게 되었음을 암시하기도 한다.
=====14:36
옷가에라도 손을 데게 하시기를 - 예수의 신성에 대한 엄청난 소문은 9:20의 혈루증의 여인의 경우와도 같이 그분이 입은 옷을 손으로 대기만 하여도 병을 낫게 한다는 믿음을 갖게 하였다. 따라서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으므로 예수께서 한 사람씩 차례로 만져주시리라고 기대할 수 없었던 그들은 비록 예수께서 만져주시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병자 자신이 그분에게 손을 대기만 하여도 나을 것이라는 강렬한 믿음을 소유하였던 것 같다.
나음을 얻으니라(* , 디에소데산) - '완전히(* , 디아) 구원을 받다(* ,소조)' 의미로 병자들이 육신의 병에서 고침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영혼의 질병, 즉 죄된 세상의 여러 욕망이 주는 고통 속에서도 자유함을 얻게 되었다고 하는 이중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천국에 관한 여러 비유의 말씀들이 13:52에서 끝나고, 13:53부터는 제4부 기사가 시작된다.
17:27까지 해당하는 제4부 기사 부분에는 예수의 제3차 갈릴리 사역의 거의 전부에 해당하는 내용이 소개되고 있다.
제3차 갈릴리 사역의 기간 은 예수의 공생애 중 가장 활발한 사역기에 해당한다. 이처럼 예수의 활동이
본격화돠자 유대 지도자들의 반감 또한 고조되어 갔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한편 본장은 15장과 더불어 마태의 기적 모음 제2집 이라고도 불리운다. 기적 모음 제1집에 해당하는 8,9장에서 문맥상의 주제는 '메시야의 자기 계시', '제자화 훈련' 그리고 '핍박의 대두' 등의 세 가지 측면에서 주로 고찰된 바 있 다. 제2집에서도 세가지 주제는 골고루 나타난다. 다만 한 가지 두드러지는 차이 점은 14,15장에 이르러 '핍박'의 주제가 더욱 선명하게 부각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9장에서는 핍박의 점진적 '대두'라는 축면에서 고찰되었거니와, 이제 본장에 이르러서는 유대 지도자들의 핍박이 한층 가속화되어감을 보여준다. 특히 메시야의 자기 공개(公開) 이후에(16-13-20) 핍박의 열기는 마지막 정점을 향해 더욱 거세게 달아오른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장을 상고함에 있어 우리는 두 가 지 주제에 주목해 모기로 하자.
(1) 핍박과 하난님 나라. 고향에서 배척당하시며(13:53-58) 세례 요한의 순교
에 관한 소식이 들려오는 등(1-12절) 날로 위기 상황이 부각되어 옴에도 불구하
고, 예수는 조금도 움츠려들거나 두려워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고 오히려 더욱
당당하게 메시야적 권능을 행사하셨다. 이는 앞장의 천국 비유에서도 시사된
바와 같이 대적들의 온갖 훼방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나라는 계속 증거되고 또한
확장되어간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핍박자들의 기세등등한 위세 앞에 예수께서
무기력한 듯이 체포되고 이어 십자가상에서 참혹한 죽음을 당하실 때, 사람들
은 천국 복음의 메시지도 끝장난 것으로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보헤사 성령을 보내사 제자들의 연약해진 무릎을 일으켜
세우시고 온 세계를 향해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토록 하셨다(28:18-20;행 2:1-4). 설령 복음을 증거하는 사람은 핍박을 받고 매일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않으며(딤후 2:9)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않는 돌보 심(눅 21:18)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에, 예수는 대적들의 위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당신에게 맡겨진 사명을 일관되게 완수해나가셨던 것이다.
(2) 핍박과 제자화 훈련. 본장에 수록된 예수의 이적적 권능은 당신의 메시야 적 신성을 입증하는 자기 계시의 수단으로서도 이해될 수 있겠으나, 더욱더 노 골화되어가는 대적들의 위협으로 인해 불안해하는 제자들을 격려하기 위한 방도
로서 이해될 수 잇을 것이다. 대적들의 핍박이 가속화되고 예수를 추종했던 수 많은 무리들 또한 당신의 거듭된 말씀 증거와 이적들을 듣고 보고서도 영적 각 성에 이르지 못하자, 사실상 주님은 열두 제자를 교육하고 훈련시키는 일에 더
많은 시간과 정성을 할애하시게 된다(17:14-20:28). 이러한 맥락을 염두에 두
고 본장을 상고해 보면, 제자화 훈련을 위한 주님의 의도적 배려를 여러 곳에
서 발견할 수 있다(16, 19, 27, 31절 들).
앞에서도 잠깐 언급하셨듯이, 본장은 대적들의 핍박과 예수의 권능이라는
뚜렷이 부각되는 두 가지 주제에 의해 두 부분으로 대별된다. 면저 1-12절은 그
리스도의 선구자로 온 세례 요한의 순교(殉敎)에 관한 기사로서 고향 사람
들로부터 배척당하신 13:53-58의 기사와 더불어 '핍박'의 주제를 싣고 있다. 그리고 13-36절은 오병 이어의 이적(13-21절), 물 위를 걸으신 이적(22-33절) 및 게네사렛에서의 신유 기사(34-36절) 등을 통해 예수의 메시야적 권능을 보여주 는 내용이다.
1. 세례 요한의 순교(14:1-12)
본문은 마가복음 6:14-29와 누가복음 9:7-9에도 수록되어 있는 세례 요한의 죽음에 대한 기사이다. 연대적으로 볼 때 13절은 2절에 이어진다. 그리고 3-12절 은 마태가 예수께 대한 헤롯의 평(評)을 언급하면서(1, 2절) 앞서 일어난 세례
요한의 순교에 관한 기사를 삽입시킨 것이다. 마가는 본문의 기사를 열 두 제자
파송 기사에 연이어 수록하였는데, 시기상으로 마가의 기록이 정확하다 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마태는 마가보다 훨씬 간결하게 요약하여 서술하고 있는 바,
본기사에 관한 보다 상세한 내용은 마가복음 해당 본문의 강해에서 다루기로
하고 여기서는 마태가 본기사를 이곳에다 배치시킨 이유를 전후 문맥의 흐름에 준하여 고찰해 보기로 한다.
(1)핍박의 주제를 부각시키기 위함. 헤롯이 요한을 옥에 가둔 이유가, 3절에
는 헤롯의 불륜(不倫)에 대한 요한의 질책 때문으로 되어 있다. 물론 이는 사실
이지만, 헤록이 세례요한을 눈 속의 가시와도 같이 여기게 된 데에는 정치적
동기 또한 이면(裏面)에 깔려 있었을 것이다. 즉, 많은 사람들이 세례 요한을
따르다 혹시 모반이라도 일으키지 않을까하는 우려에서 요한을 체포하였다고
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세례 요한에게 품었던 헤록의 이러한 우려와 의혹은 예 수께 대해서도 동일 하게 표현되고 있음을, 본문은 보여주고 있다. 헤록대왕
(2:1)의 아들인 본문의 헤롯 안티파스(Herod Antipas)는 30년 이상 동안이나
갈릴리와 베레아 지역을 다스렸는데, 예수의 사역이 주로 헤롯 안티파스의 통
치 구역 내에서 수행되었음을 감안하면 예수께 대한 헤롯의 의혹과 핍박의 동
기를 가히 짐작할 수 있을 법하다. 결국 마태는 이 기사를 주께서 고향 사람들 로부터 배척받은 기사(13:53-58) 바로 다음에 연이어 수록함으로써, 각양으로
고조되어가는 핍박의 양상들을 강조하고자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2) 십자가 수난의 전조(前兆)를 보이기 위함. 이전에 세례 요한은 예수를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분'이라 증거한 바 있으며93:11), 예수께서는 세례 요한을 '메시야의 길을 앞서 예비하는 사자(使者)'라고 증거하셨다(11:10). 또한 세
례 요한 은 가까와 온 천국을 선포하였고 예수는 이미 임한 천국까지도 선포하였다는 범에서(4:17;12:28) 양자의 전한 바 메시지 또한 본질에 있어서는동일했다. 예수께 대한 헤롯의 평(評)으로 미루어 보건대(2절), 헤롯 또한 예수를
세례 요한과 동일한 일을 하고 다니는 자로 단정했던 것같다. 그러므로 본문은 세례 요한이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듯이 예수께서도 십자가상에서 참담한 죽음을
당하실 것임을 은연 중에 암시하고 있따고 볼 수 있다. 사실상 이 시점에 이르 러 고난의 정점인 십자가를 향한 걸음의 템포가 서서히 빨라지고 있다 하껫다. 구약 시대 중 가장 위대한 인물인 세례 요한이(11;11) 일개 여인 의 춤값에 팔 려 죽임당한 사실이나 온 인류의 구주이신 예수께서 가장 참혹한 형벌을 받아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사실은, 죄악되고 모순된 인류 역사의 아이러니(irony)이며 왜곡된 현실의 극단적 예라 하겠다.
2. 오병 이어(五餠二漁)의 이적(14:13-21)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 이상을 먹이신 이적 기사는 4복음서
에 모두 기록되어 있다(막 6:30-44;눅 9:10-17;요 6:1-14). 앞
단락(1-12절)에서
우리는, 예수의 소문을 들은 헤롯이 세례 요한에게 행했던 핍박의 화살을 이제 예수께로 돌리려고 하는 모습을 살펴보았다. 이러한 핍박의 기세가 비단 분봉
왕 헤롯 뿐만 아니라 유대 지도자들 사이에 하나의 공통 분모로서 급속히 확
산되어갔음은 물론이다. 이렇듯 날로 고조되는 박해의 위기 가운데서도, 영육간
의 궁핍을 채우고자 하시는 예수의 활동은 조금도 수그러지지 않았다. 본 기적 이 전후 문맥과 관련하여 지니는 의미에 대해서는 장 강해에서 보다 상세가게
다루었다. 따라서 여기서는 오병 이어의 기적 자체의 의미에 초점을 맞추기로
하자.
(1) 예수의 크신 긍휼을 드러냄. 예수를 좇아온 무리들의 대부분은 당신께 대 한 참된 믿음과 사랑을 지니지 못한 태 단순한 호기심이나 저급한 동기에서 모 여들었다. 예수께서는 누구보다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배고픔에 지쳐있는 무리들을 결코 외면하실 수 없었다. 예수의 이 마음은 "바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출 34:6)의 마음과 동일하다. 그리스도의 긍휼과 사랑은,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라는 말씀 속에 잘 나타나 있다(롬 5:8).
(2) 제자들의 사명을 상기시킴. 본문에서 예수는 무리들의 바구니에 음식이
가득 차도록 직접 채우지 않으시고 제자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전달되도록 하셨 다. 이는, 제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탄생할 새로운 공동체라고 하는 양떼의 목
자들이 되어야 함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이 목자들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그들에
게 맡겨진 사명을 감당해낼 수 없으며, 양들을 먹이는 데 필요한 모든 능력은
양떼의 목자장(牧者長)되시는 예수께로부터 말미암는다는 사실 또한 시사되어
있다(벧전 5:4).
(3) 창조주의 권능을 드러냄. (2)항이 제자화 훈련이라고 하는 일관된 문맥의
흐름과 관련된 주제를 다루고 있음과 마찬가지로, 본항 역시 메시야의 자기 계 시라고 하는 본서 전체에 걸쳐 나타나는 큰 주제에 연관된 내용이다. 본문의 기
적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시는(reatio ex nihilo) 창조주의 권능을 보여준다(롬 4:17). 이렇듯 하나님은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분이므로(6:11;출 16:4) 우리는 무엇을 입고 먹을까하는 문제에 모든 관심의 초점을 맞출 필요가 없다(6:25). 모든 것을 주께 의탁하고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뜻을 구하면, 주님은 우리의 필요를 따라 모든 것을 채워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 전체를 책임져 주실 것이다(6:33).
(4) 영의 양식을 상징함. 오병 이어의 기적을 목격한 무리들은 예수를 모세
나(출 16장) 엘리사와(왕하 4:42-44) 같은 위대한 선지자 정도로 여기고서 어찌하든 육신상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일에 몰두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예수의 관심은 육신의 배고픔보다는 그 무리들의 영혼의 굶주림에 있었다. 빈
들에 모인 무리들은 죄악으로 말미암아 점점 멸망에로 가까이 나아가는 무력한 자들이었다. 예수의 눈에 그들은, 마치 목자잃은 양처럼 가기 제 길로 나아가는
모습으로 비쳤을 것이다(사 53:6). 따라서 예수는 무리들에게 이 기적을 통해 무엇보다 그들이 영적으로 부요해지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16:7,8에서 밝히 드러나듯 제자들조차 육신의 빵에만 연연(戀戀)하고 있었다.
* 음식과 관련된 이적. 성경에는 음식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이적 사
역이 몇 군데 소개되고 있다.
+------------+--------+-------------------------------------+------------+| 발 생 시 기| 주체자 | 내 용 | 성경 구절 |+------------+--------+-------------------------------------+------------|| 출애굽시 | 하나님 |약 200만 명이 넘는 이스라엘인들에게 | 출 16:13-15|| | |조석으로 만나와 메추라기를 공급하심 | |+------------+--------+-------------------------------------+------------+| 선지자 | 하나님 |엘리야를 통해 사르밧 과부의 밀가루 통| 왕상 17:16 || 엘리사 시대| |과 기름병이 차고 넘치게 하심 | |+------------+--------+-------------------------------------+------------+| 선지자 | 하나님 |엘리야를 통해 보리떡 20개로 100명의 | 왕하 4:43, || 엘리야 시대|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 남을 정도로 제공| 44 |+------------+--------+-------------------------------------+------------+| 예수 시대 | 예 수 |가나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 요 2:1-11 || | |신 당신의 첫번째 이적 | |+------------+--------+-------------------------------------+------------+| 예수 시대 | 예 수 |벱새다 빈 들에서 5병 2어로 5천명 이상| 마 14:13-21|| | |을 먹이시고 12광부리 가득 남게 하심 | |+------------+--------+-------------------------------------+------------+| 예수 시대 | 예 수 |데가볼리에서 7병 2어로 4천명 이상을 | 마 15:32-39|| | |먹이시고 7광주리 가득 남게 하심 | |+------------+--------+-------------------------------------+------------+
한편 본문에 수록된 오병 이어 기적과 구약성경에 기록된 다른 이적들 간에
는 여러 면에서 차이나는 점도 있지만 또 여러 부분에서 다름과 같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먼저, 만나 사건은 하나님의 크신 긍휼과 창조주로서의 위대한 권능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본문의 기적과 유사하다. 지나날에 베풀어주신 구원과 보호의
은혜를 깡그리 잊어버리고 원망을 늘어놓는 백성들의 배은망덕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만나를 내려주심으로써 당신의 깊은 사랑과 크신 긍휼을 드러내셨던
것이다.
그리고 사르밧 과부의 처지를 돌아보신 이적은, 작은 것이지만 자기가 가진
최선의 것으로 헌신할 때 하나님께서는 넘치는 은혜로 보상하신다는 사실에서, 본 오병 이어 기적과 그 맥을 같이 한다. 사실 사르밧 과부의 음식과 또 어린
아이의 아주 미미한 도시락 음식은 모두 자기 자신의 생명(生命)과 직결되는 것
이었기에 그것을 아낌없이 헌신한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의 생명을 하나님께 드리
는 전폭적인 헌신으로 간주할 수 있다. 이 탁월한 헌신과 이 순수한 순종이야말
로 하난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한, 그리고 크고 넘치는 보상이 있게한 근본 원
인이었던 것이다.
이와 함께 엘리사의 이적과 오병 이어 이적과의 공통점은, 전자의 경우에
마련된 음식이 먹고도 남을 정도였던 것처럼 후자의 경우에 있어서도 먹고 남은
조각이 열 두 바구니에 가득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하나님의 차고 넘치는 은혜 를 시사한다. 실로 예수께서 오신 것은 우리로 생명을 얻게 하되 풍성히 얻게
하려 하심이다(요 10:10). 이와 같이 넘치는 은혜와 풍성한 생명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간절히 구하지 않거나, 혹은 구하되 세상적이고 정욕적인 의도 에서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하겠다(약 4:2, 3).
3. 물 위를 걸으심(14:22-36)
예수께서 물 위로 걸어오심(22-27절), 베드로의 용기와 시험(28-31절) 및 제
자들의 신앙 고백(32, 33절) 등으로 구성된 본문은 전후의 문맥적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신앙 생활을 위한 풍성한 교훈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매우 중요한 내용이다. 이제 살펴 보겠지만, 본문의 이적에 내포된 주제는 오병이어의 이적에 내포된 주제와 매우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다. 본단락 강해에서 는 여기 수록된 주제를 하나하나 상고하되 전후 문맥에 주안점을 두고 살펴보기로 하자.
(1) 예수의 신성(神性)에 대한 증거. 오병 이어의 이적과 마찬가지로 본문 또
한 예수께서 모든 피조물에 대한 절대 주권을 갖고 계신 하나님이심을 증거한
다(요 1:3). 이는 본서 전체에 일관되게 나타나는 예수의 자기 계시 혹은 자기
증거의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사항이다. 8:23-27에서도 예수께서 갈릴리 바다
의 풍랑을 한 마디 말씀으로써 잠잠케하신 바 있다. 머리 둘 곳도 없으신 나그 네의 삶을 살며(8:20) 대적들의 멸시와 핍박을 받고서 마침내 십자가 형틀에
달리셨던 그 예수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 당신이셨다는 사실은 믿음 의 눈으로써만 이해될 수 있는 역설이라 하겠다.
(2) 제자들의 신앙 연단. 본문은 또한 제자화 훈련이라는 큰 주제와 각별한 연관을 뱉고 있다. 본기사의 절정은 폭풍을 잔잔케하신 사실(32절)보다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라는 제자들의 고백에 있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 다(33절).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는 예수의 수세(受洗가시에 하늘로부터 들려온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말 속에 나타났고(3:17) 예수께서 스스로를 '아들'이라 하신 말씀 속에도 나타났다(11:25-27). 하지만 제자들이 이 칭호로써 예
수를 부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물론 당시 제자들이 이 칭호의 진정한 본체론
적(本體論的) 의미를 이해한 것같지는 않다. 하지만 그리스도께 대한 제자들의 인식이 점차적으로 발전되어갔다는 점은 분명히 지적될 수 있다. 교회의 초석
이 될만한 위대한 신앙 고백을 하고서도 그 직후에 호된 책망을 받은 베드로의 경우를 보더라도(16:13-23), 제자들의 예수께 대한 이해의 수준이 점진적으로 깊어가기는 하였으되 항상 불완전하고 미흡한 상태를 벗어나지는 못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제자들의 점진된 신앙 성장과 관련하여, 본문에서는 베드로의 과감 한 신앙적 도전이 우리의 주목을 끈다. 28-31절은 제자들 중 베드로의 모습이 부각된 세 가지 경우 가운데 첫번째 분분이다(16:13-23;17:24-27). 예수께서는 적절한 시기와 상황에 맞추어 제자들에게 신앙 훈련을 계속적으로 실시해 오셨으 며, 심지어 제자들에게는 예수께서 행하신 동일한 권능이 위임되기도 했다(10:1). 따라서 풍랑을 넘어 태연하게 걸어오시는 예수의 모습을 보고 격정적인 성격의 소유자인 베드로가 예수를 따라 행하고자 했던 어쩌면 자연스런 행동이었는지 모른다. 어쨌든 베드로를 위시한 제자들은 본문에서 보여주는 바와 같은 무수한 실패와 시행착오(試行錯誤)를 거듭한 연후에야 비로소 굳건한 신앙인으로 설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본장은 예수께서 갈릴리 건너편 북동쪽에 자리잡은 게네사렛 지방에서 많은 병자들을 고치셨다는 짤막한 기사로 끝난다(34-36절). 이 기사는 예수의 공적 사역의 범위가 온 유대 전역에까지 미쳤음을 시사한다. 대적들의 핍박이 가 열됨에 따라 열 두 제자들을 훈련시키는 일에 대한 예수의 관심이 더욱 각별해 졌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예수의 사역이 그들에게만 한정되지는 않았으며, 온 백성들에게까지 미쳤던 것이다. 한편, 바리새파와 엣세네파와 같은 엄격한 유대 종파들은 병자와 접촉되는 것을 부정하게 생각하였던바, 예수의 옷가에 손을 대는 병자들의 모습을 보았다면 의당 예수를 비난했을 것이다(36절). 이러한 정결법(淨潔法)에 대한 예수의 무관심한 듯한 태도는 곧바로 이어지는 15:1-20의 논쟁을 암시한다고도 볼 수 있겠다.
* 풍랑 이는 바다 위를 걸으신 예수. 한밤중 갈릴리 바다 위에 일어난 풍랑은 둑 가지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다. 먼저 이는, 대적들의 핍박이 거세어지며 주님의 대적들의 손에 잡히게 되는 환난의 때를 예고하며 또한 그 때에 제자들 이 믿음을 잃고 낙망하여 뿔뿔이 흩어지게 될 것이라는 예고라 보아도 무방하겠다. 다음에, 보다 거시적으로 이 풍랑은 오고 올 모든 성도들에게 닥칠 세상의 유혹과 위협을 상징한다고도 볼 수 있다. 이처럼 성도들 앞에는 항상 모진 세파
(世波)가 넘실거린다. 그러나 우리는 좌절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 같은
물결 위를 걸어서 심히 고난당하고 있는 제자들에게로 가까이 다가가시고 또
바다 속으로 빠져드는 베드로를 붙잡아 주심으로 구원하신 분이 바로 우리의 구
세주이기 때문이다. 한편 예수께서 풍랑 위를 걸으신 이 사건은 다음과 같은 교훈을 보여준다. (1) 예수는 모든 피조물에 대한 절대 주권을 갖고 계신 만유의
주, 하나님이시다(요 1:3). (2) 예수는 믿고 나아오는 자들에게 차고 넘치는 은
혜와 초월한 능력을 보여하신다(골 1:11). (3) 예수는 세파에 찢겨 상처받은 영혼을 찾아가시고 손을 내밀어 구원하신다(히 2:18). 진정 주님의 그 부드러운 손길은 우리의 연약한 심령을 붙들어주실 것이며 안전한 곳으로 인도하실 것이 다. "여호와여 나의 발이 미끄러진다 말할 때에 주의 인자하심이 나를 붙드셨사
오며 내속에 생각이 많을 때에 주의 위안이 내 영혼을 즐겁게 하시나이다"(시
94:18,19). 정녕 이것이 우리 신앙인의 유일한 안전 보장책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