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
그 때에...안식일에 - 이삭이 익은 것으로 미루어 보아 예수께서 돌아가시기 일년 전 4월의 유월절과 밀추수를 기념하는 칠칠절(태양력으로는 5-6월에 해당)의 중간 어느 한 안식일이다. 그런데 이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안식일을 취하신 날로서, 율법에는 이 날을 기념할 것과 쉴 것을 동시에 명하고 있다. 만약 이 명령을 어기는 자에게는 죽음과 같은 극단의 형벌이 예비되어 있었다(출 20:9 ff ; 31:14 ff ;신 5:12 ff).
밀밭 사이로 가실새 - 먼저 랑게(Lange)에 의하면 전답(田畓)으로, 루터(Luther)에 의하면 곡식으로 이해되고 있는 '밀밭'(* , 스포리모스)은 파종한 밭 혹은 곡식 밭으로 이해되며, 그중에서도 특별히 '보리밭'으로 해석 될 때가 많다. KJV에서는 '곡식밭'(grainfieled)으로 번역하고 있다. 한편 본문에 언급된 바 제자들이 이삭은 잘라 먹은 일에 대한 시비가 논쟁의 초점으로 대두된 것으로 보아 이때 예수의 사건은 바리새인들이 규정하고 있는 안식일에 여행할 수 있는 거리(약 1.8km) 내에서 발생한 것이 분명하다. 한편 그 당시 팔레스틴에 있는 경작지들은 대부분 길고 좁다란 이랑으로 되어 있었는데, 그 이랑 사이의 땅이 사람이 지나다니는 통로로 활용되었다.
제자들이 사장하여 - 그 당시 제자들은 안식일의 그지 조항을 간과해 버릴 만큼 몹시 배가 고파 있었던 것이다. 이는 그 당시 예수의 선교활동이 매우 활발하고도 촉급하게 진행되고 있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이삭을 잘라 먹으니 - 율법에 의하면 이 행위는 추수하는 것과 동일한 일로 간주되었다. 한편 평행구인 눅 6:1에 보면 '손으로 비비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는 타작(打作)에 해당되며 만약 그 이삭 껍데기를 입으로 불어 털어 버렸다고 한다면 그것은 정미(精米)하는 행위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신 23:25에는 시장할 때 남의 밭에 가서 이삭을 잘라 먹는 행위가 허용)許容)되고 있다. 따라서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먹은 행위 자체는 결코 죄가 되지 않지만 그 일을 안식일에 행했다고 하는 문제가 발생된 것이다. 실로 유대인들의 율법주석서 미쉬나(Mishina)에 따르면 '안식일에 어린 양이 한 입에 넣을 남큼의 이삭을 잘라 취하는 것도 죄가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M. Sabbath, 7:4).
=====12:2
바리새인들이 보고 - 이는 한 순간의 동작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관찰을 의미한다. 즉 그들은 칼끝같은 눈초리로 예수의 무리들을 항상 예의 주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께서 고하되...당신의 제자들이 - 바리새인들의 시선은 현상적으로는 제자들에 게 머물러 있었지만 근본적으로는 예수께 고착(固着)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즉, 그들은 사사건건(9:14 ; 15:2) 제자들의 반율법적 행위를 빌미로 예수께 도전과 비난을 일삼았다.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 - 여기서 '하지 못할 일'에 해당하는 '욱크여세스틴'(* )는 '합당치 못한 일'을 의미한다. 한편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일에 대한 규정은 모세의 율법에 의한 것이 아니라 조상의 유전에 의한 것으로 39개의 항목이 있다. 즉, 39개 항목이 기록된 할라카(Halakah)에 의하면 성전에서 예배드릴 경우나 기근(饑饉) 등으로 인해 생명이 위태로울 경우에는 그것을 지키지 않아도 되지만 본문의 경우에서처럼 피할 수 있는 경우에는 밀추수를 하는 일은 엄연한 범법(犯法)행위가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본 사건이 있은 때보다 훨씬 후에는 이 조항들이 다소 완화되어 안식일일지라도 손으로 곡식을 잘라 먹는 것은 허락하지만 어떤 기구를 사용하는 것만큼은 금지하였다(The Gemara).
=====12:3
다윗이...시장할 때에 한 일 - 이는 삼상 21:1-6에 나오는 사건으로서, 다윗이 요나단의 도움으로 자신을 죽이려던 사울을 피하여 호위병 몇 명과 함께 도망하다가 놉에 있는 하나님의 전(殿)에 들어가 제사장 아히멜렉이 주는 거룩한 떡으로 그들의 주린 배를 간신히 채웠던 일을 말한다. 그런데 이일은 제사장만이 그 거룩한 떡, 즉 하나님 전에 진열되었던 12개의 떡을 먹을 수 있다고 하는 모세의 율법(레 24:5-9)을 위배(違背)한 행위가 된다. 또한 삼상 21:5-6의 본문에는 진설병이 방금 대체(代替)되어 있는 것처럼 묘사되어 있기 때문에 이 사건이 안식일에 발생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이를 뒷받침이라도 하듯이 유대사가 요세푸스는 진설병은 금요일에 만들어져 다음날 안식일에 진설했고, 그 묶은 것은 대체되어 제사장의 몫이 되었다고 한다(Josephus, Antiq., III, 10:7). 여하튼 예수의 의도는 다윗이 시장할 때 몬세의 율법을 어겼으므로, 시장한 그의 제자들이 조상의 유전을 어긴 행위도 용납될 수 있는 것이며, 어떤 예외(exception)들을 허용해야 한다고 하는 사실들을 주장하시려는 것이 아니다. 예수는 다만 구약 자체는 다윗의 그러한 행위를 정죄하지 않았다고 하는 사실을 지적함으로써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지나치리만큼 무리하게 해석하는 것은 성경의 근본 정신에 어긋난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려는 것이다(Cranfield). 즉 예수의 기본 관점은 '안식일이 너희에게 주어진 것이지, 너희가 안식일에 주어진 것이 아니다'(Mek Exod 26:13 ; 2 Macc. 5:19)에 지나치리 만큼 매사에 적용하고, 유전을 사람보다 더 귀한 것으로 여기는 태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실로 아히멜렉이 율법의 규정을 어기면서도 다윗과 그의 소년들에게 떡을 주었다고 하는 사실을 알고 있는 바리새인이라고 한다면 시장한 예수의 제자들의 행위를 당연히 용납했어야지 정죄해서는 안되었던 것이 아닌가(Hooker).
=====12:4
하나님의 전 - 이는 솔로몬 때에 건축된 성전이 아니라 광야의 여행길을 앞서 가며 이스라엘을 인도했었던 그 희막을 가리킨다(삿 18:31). 그러나 '하나님의 전'이라는 이 표현은 신.구약을 통틀어 하나님이 거처(居處)하시는 거룩한 곳이라는 보편적 의미로 흔히 사용되기도 했다(대하 5:14 ; 딤전 3:15).
진설병 - 이스라엘 12지파의 수(數)에 따라 성소의 금상위에 두 줄로 배설했던 12개의 떡이다(출 25:30 ; 레 24:5-8). 이는 제사 제물이 아니라 여호와의 생명적 교제를 상징하는 것이며, 궁극적으로 주의 거룩한 성만찬을 예시(豫示)하고 있다.
=====12:5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 다윗의 안식일 예외 조항에 이은 두번째 예외 사례이다. 안식일 법은 출 20:8-11과 신 5:12-15의 십계명 중 제 4계명에 근거를 둔 것이다. 그러나 제사장들은 아무 일도 할 수 없도록 규정한 안식일 규례에도 불구하고 성전안에서 매 안식일마다 하나님께 경배드리는 의식(儀式)을 행할 때 몇 가지의 일들, 예를 들어 진설병은 대체시키는 것(레 24:8), 수양 둘을 희생제물로 드리는 것(민 28:9-10) 등의 직무를 행한다. 이러한 율법의 규정은 안식일에 관한 법이 하위법이요, 성전에 관한 법이 상위법이며 또한 상위법을 지키기 위해 하위법을 범(犯)해도 된다고 하는 사실을 구약성경 자체가 인정하고 있다고 하는 것을 의미한다. 문제는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일 규정을 범한 것과 안식일에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먹은 행위와 어떤 연관성이 있는가 하는 사실이다. 존칼빈(J. Calvin)은 '성전법이 희생드리는 일과 모든 외적 제사에 관련된 제사장들이 안식일 범법행위를 거룩한 것으로 인정한다고 한다면, 참되고 신령한 성전인 예수께서는 그 예배자들이 신성한 의무를 행할 때 그들이 범한 모든 과오(예를 들어 안식일을 범하는 것)를 보다 더 거룩케 하실 능력이 있다. 더욱이 제자들은 현재 복음으로 인해서 다소 거룩해진 그들의 영혼과 육신을 강건하게 하여 복음전파 사역을 제대로 감당하려고 하는 생각에 열중해 있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제자들이 안식일을 범한 행위는 제사장들이 안식일에 제사를 지냄으로써 안식일 규정을 어기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의 대속사업의 지속과 복음전파를 돕는 것과 예배를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할 때에 이는 결코 과오로써 인정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실로 제사장들이 안식일에도 불구하고 성전 제사를 집례(執禮)하기 위해 일을 하여도 율법적으로 아무런 하자(瑕疵)가 없었다면, 그 성전과 제사의 궁극적 존재이신 예수와 그의 사역을 위해 안식일을 범한 제자들의 행동도 아무런 문제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 예수께서는 율법 자체가 예외적이기는 하지만 분명히 안식일의 노동을 명시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레 24:8) 안식일에 대한 당신의 새로운(유대인의 고답적인 사고에 대한 입장을 표명하셨다. 실로 예수께서는 안식일을 위한 외적이고 통속적인 규례를 철폐(abolition)하시고(F.R.Fay)이제 하나님 중심의 내적이고 본질적인 규례를 깨우치고 계신 것이다.
=====12:6
성전보다 더 큰 이 - 성전법이 안식일 법에 우선하듯이 성전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활동은 성전법보다 우선한다. 이구절의 논쟁의 형식은 할라카(Halakah)의 매 규정들을 확립시키는 데에 있어서 이미 공인(公認)된 논증 절차인 '칼 와호메르'(qal wahomer)에 해당한다. 이 '칼 와호메르'는 문자적으로는 가벼운 것과 무거운 것, 즉 어떤 애매모호한 논리에 대해 더 분명한 논리를 제시하는 논쟁법이다(Daube). 한편 성전보다 '더 큰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이존'(* )은 남성명사일 수도 있고 중성명사일 수도 있다. 따라서 이 '메이존'에 대한 견해는 (1) '예수가 하나님께 예배드린 것'이 성전에서의 '제사장 예배'보다 더 위대하다는 의미라고 하는 게하르트슨(B. Gerhardsson)과 힐(David Hill)의 주장, (2) 성전보다 더 크다는 것은 사랑의 계명을 의미한다고 보는 시갈(Sigal)과 콘 쉐어봐(Chon Sherbok)의 견해가 있다. 이들은 7절의 '자비를 원한다'는 말씀을 근거로 삼고 있다. 또한 (3) 성전보다 더 큰 것이 굶주림에 대한 긍휼의 생각 혹은 사랑의 운동이라고 여기는 슈티엘의 견해가 있으며, (4) '메이존'은 바로 예수 자신을 가리킨다고 보는 보른캄(Bomkamm)과 그랜더(Georfges Grander)의 견해가 있다. 이중 (4)의 견해가 가장 설득력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는데 이 주장에 따르면 성전은 안식일보다 더 크고 예수는 성전보다 더 크신 분이시다. 이는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의 율법 이해에 의해서도 알 수 있는데, 율법은 바로 예수 자신을 가리키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 분 안에서 율법은 비로소 완상된다고 하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5:17-48). 여기에서 더 나아가서 자신을 성전보다 더 큰 이라고 표현한 것에 대해 이는 예수의 권위가 제자들이 안식일에 이삭을 잘라 먹은 행위를 무죄(無罪)케 하는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뒷받침한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Lohmeyer). 따라서 예수가 그의 모든 제자들이 바로 신약 시대에 있어서 제사장이 된다고 하는 사실을 암시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 주장은 크게 환영받지 못하고 있다. 이와는 별개로 '예수가 성전보다 더 큰 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것은 바로 예수 자신의 권위와 제사장들의 권위를 대조하는 문제에 관한 것'이라고 하는 견해가 있다(Carson). 사실 성육신(Incamation)하신 말씀으로서의 신인(神人), 즉 성전의 실체이신 예수의 절대적이고 여원한 권위는 제한적이고 상대적인 인간 제사장의 그것을 훨씬 능가
=====12:7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 이미 앞에서(9:13)인용된 바 있는 호 6:6의 말씀으로 '자비가 제사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자비의 헬라어인 '엘레오스'(* )는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친절과 구제 행위로서 중심에 사랑과 자비와 헌신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과 부합되는 경건한 행위이다. 그리고 제사를 뜻하는 '뒤시아'(* )는 연기로 제사를 올리는 희생 제물이나 제사행위를 말한다. 물론 여기서는 단순히 형식적이고 습관적이며 무의미한 종교 행위라는 의미가 강하게 내포되어 있다. 따라서 '자비를 원한다'고 하는 것은 단순히 제사 행위를 부인하거나 중단해 버리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종교적 의무를 배겨고한 채 온전히 인본주의만을 주장한 것도 아니다. 이것은 분명 하나님의 뜻, 곧 사랑의 계명을 온전히 실천하는 자비의 행위를 율법의 의무보다 우위에 두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자비와 제사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할 피치 못한 경우가 생겼을 때에는 제사보다는 오히려 자비가 먼저 베풀어 진다고 해서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예배가 소홀해졌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너희가 알았더면 - 예수는 또 다시 바리새인들이 성경을 바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책망하셨다. 즉 율법을 대하는 바리새인들의 태도는 호세아 시대 사람들이 피상적(superficial)이고 위선적으로 종교의식에만 관심을 기울였던 것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고 책망하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율법의 진정한 의미, 즉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에 대해서 알지 못하며 그들의 유전인 할라카가 바로 이를 입증한다고 하는 것이다. 실로 종교의식에만 관심을 갖는 바리새인들의 잘못은 '모든 세대 사람들의 공통된 과오'에 속한다고 피력한 칼빈(Calvin)의 견해는 깊이 음미해 볼 만한다.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 - 이로써 제자들은 예수로부터 무죄(innocent)하다고 하는 선언을 받은 셈이다. 물론 제자들이 죄가 없다고 하는 것은 그들이 배가 고픈 상황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는 로르도르프(Rordorf)의 견해보다는 오히려 성전보다 큰 이가 그들과 함께 게시며 그들의 행위를 정당하다고 인정했기 때문이라고 하는 카슨(Carson)의 주장이 더 적절한 해석이 될 수 있다.
=====12:8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 - <눅 6:1-5 주제 강해 '안식일과 예수님과의 관계' 참조>. 막 2:27에는 안식일 제정(制定)의 근본 목적을 정의한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라는 말씀이 있는데 마태와 누가는 이를 생략하고 있다. 마태는 1-7절의 말씀의 요점을 제사와 자비의 대조적 비교나 안식일의 기원은 사람의 안식을 위한 것이라고 하는 사실에 두지 않고 오히려 기독론(Chriistology)에 그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사람에 대한 언급은 생략하고 인자가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였다. 랑케(Lange)에 의하면 주님은 그 자신이 신령한 안식이 되시므로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은 안식일 준수(observance)가 되며 그를 떠나는 것은 바로 안식일의 파괴가 된다고 하였다. 특히 '주인'이라는 말은 어떤 일에 대한 주체적 운용자(運用者)라는 측면에서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는 안식일을 소유하고 주관하며 안식일 규례를 해석하며, 지금까지 가려워졌던 안식일이 지닌 참 자유함과 참 평안을 들추어내 모든 이들에게 그것들을 향유(enjoyment)할 수 있게 하실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칼빈(Calvin)은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는 말씀은 바로 안식일에 얽매여야 하는 의무로부터 사람들을 해방시키기 위한 권세를 예수께서 받으셨다고 하는 것이며, 따라서 사람들로 하여금 감당할 수 없이 복잡하고 까다로운 율법을 멍에에서 벗어나서, 멍에를 대신 져 주시는 주님에게로 와서 쉼을 얻으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하였다. 실로 인간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신 종말론적 메시야이신 인자, 곧 예수는 그 인간들을 위해 안식일을 개방하고 계신다.
=====12:9
거기를 떠나 - '떠나다'의 뜻인 헬라어 동사 '메타바이노'(* )의 일상적 의미는 '자리를 바꾸다'이지만 특별한 본문에서는 이야기를 화제나 그 이야기가 진행되던 장소와 시간 등이 전면적으로 바뀌었음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요 5:24 ; 오일 3:14에서는 사마에서 생명으로 옮기웠음을 나타낼 때 이 '메타바이노'를 사용하고 있다. 한편 본문의 평행구인 눅 6:6에 의하면 회당에서 손 마른 자를 고친 사건이 일어난 날은 밀밭에서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먹은 사건이 바로 그 안식일과는 다른 인식일 날로 보고(report)하고 있다. 따라서 마태가 사용한 '메타바이노'란 말과 누가의 기록에 의해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신 날이 같은 안식일이 아니라 또 다른 안식일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시간의 공백과 장소 변경이 예수께서 유월절을 예루살렘에서 보내시고 거기를 떠나 갈릴리로 되돌아가신 여정(旅程)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그레스웰). 물론 '메타바이노'는 복음서의 다른 곳에서도(11:1 ; 15:29) 이미 '되어진 한 여정'을 나타내는데 사용되었으며, 요 7:3에서도 '여기를 떠나'의 뜻인 '메타베디 엔튜덴'(* )이라고 하는 유사한 표현이 갈릴리에서 유다로 간 여행에 사용되고 있다. 여하튼 비록 이동된 장소가 과연 어디였는지 또 시간적으로 1-8절과 얼마만큼의 간격이 있는지는 확정적으로 단정할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그 날이 바로 '안식일'이었으며 그것 때문에 논쟁이 발생되었다고 하는 사실이다.
저희 회당에 들어 가시니 - 본장에서의 두번째 사건인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신 것과 그에 따른 논쟁의 무대(setting)가 된 '저희 회당'이란 표현은 마태가 복음서를 기록할 당시(A.D. 50-70년경) 이미 세워져 있었던 초대 기독교 공동체로서의 교회와 유대교 회당 간의 거리감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었다. 저들의 회당은 유대인들이 본격적인 디아스포라(Diaspora) 시대를 이루게 되었던 바벧론 포로기와 학사 에스라 통치 시기에 성전과 율법으로부터 멀리 떨어지게 된 유대인들을 위해 설립된 것으로 A.D. 70년 예루살렘이 파멸되기 직전까지만 해도 예루살렘 안에서 약 480여개의 회당이 되었다고 한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회당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으며, 따라서 경건한 유대인이라고 불리우는 사람의 경우 그는 매일 회당을 방문하였으며, 모든 유대인들은 안식일과 절기 때에는 반드시 회당을 방문하곤 하였다. 한편 유대교 회당은 초기 기독교 복음 전도자들이 최초의 설교와 말씀전파를 행하였던 선교의 매체(媒體)라고 하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행 9:20). 그런데 예수께서 '저희 회당'에 들어가신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날이 안식일이었음은 더욱 더 분명해 진다. 회당에 대한 좀더 풍부한 이해를 위해서는 죽 4:15-30의 주석, 주제 강해 '유대교 회당과 초대교회'를 참조하라.
=====12:10
한편 손 마른 사람 - 이 사람은 뇌의 손상으로 인한 중풍이 아니라 피의 순환이 불순함으로 손의 근육기능을 상실한 자를 가리킨다(왕상 13:4). 한편 눅 6:6에 의하면 마른 손은 더구나 오른 손이었다. 그리고 외경 가운데 나사렛파와 에비온파가 사용한 복음에서 제롬(Jerome)이 인용한 것(Wordsw. & White's edition of the Vulgate, A.D. 383)에 의하면 이 사람은 예수께 지신은 '손으로 벌어먹고 사는 석공이 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한편 랑케(Lange)에 의하면 이 사람은 우연히 그 회당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주의 대적자들에 의해, 주를 모함하고 송사하기 위한 '악의적 도구'로 사용되기 위해 특별히 불려왔다고 한다.
사람들이 예수를 송사하려 하여 - 회당은 유대인들의 종교 사회의 중심지로서, 결정짓거나 특정한 사실을 발표, 공표하거나, 서약을 행하거나, 재판을 행하거나 죄인을 석방하는 등의 공적인 일을 위한 회합(會合) 장소였다. 즉 회당은 율법을 연구, 가르치는 학교와 기도의 처소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지방 법정으로서의 역할까지도 감당하였다. 따라서 이곳에서 유대인들이 예수를 송사하려 한 것은 곧 예수를 의식적으로 음해(陰害)할 목적으로 지방 법정에 고소하고자 한 것이 된다. 실로 바리새인들은 여전히 예수를 고소할 증거와 명분을 찾아 기회만 있으면 그를 정식재판에 회부(reference)하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그러나 손 마른 사람을 이용한 저들의 이번 모략이 성공하지 못하자 마침내 그들은 예수를 감옥으로 보내는 것이 아니라 아예 직접 살해할 음모를 꾸미는 데까지 발전하게 된다(14절).
물어 가로되 - 마가와 누가에 의하면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송사할 고소거리를 찾기 위해 그의 행위를 감시하고 있었다고 하였다. 울법을 연구하는 곳이며 기도처로서 유대인들 스스로가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회당 안에서 저들은 회당의 목적과는 반대로 악의에 찬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마태는 마가와 누가로 보고(막 3:1-6 ; 눅 6:6-11)와는 달리 바리새인들이 보다 진취적이고 공격적으로 손 마른 사람의 불행한 처지를 이용해 예수에게 질문을 던짐으로써 예수가 먼저 그의 병을 고치는 기적을 행하고 그것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지지와 갈채를 받게 되는 일을 미연(未然)에 방지하려고 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저들의 의도에 의하면 저들은 자신들의 질문 때문에 예수께서 병자를 고침으로써 고의(故意)로 안식일 규정을 어길 수도 없고, 또 예수께서 손 마른 자를 외면하심으로써 제사보다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라는 당신의 지난번 가르침을 스스로 파기(破棄)할 수도 없게 만들려 했던 것이다. 실로 저들은 예수를 위선적이고 편파적이며 일관성이 없는 자로 비난을 피할 수 없는 진퇴양난(進退兩難)의 상황에 빠지게 만들려 이 같은 교묘한 질문을 던진 것이다.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 이 질문은 눅 14:3에서 예수가 저들에게 한 질문과 똑같다. 본문에 의하면 바리새인들의 질문은 '그것이 자비로운 것인가'가 아니라, '여세스티'(* ), 즉 합법적(lawful, KJV)인가 하는 것에 머물러 있다. 그들 조상의 유전에 의하면 만일 사람의 목숨이 위태로울 경우라면 안식일일지라도 의사는 그 사람의 병을 치료할 수 있었다(Mishnah, Yomah 8:6 ; Mek Exod 22:2 ; 23:13). 그러나 문제는 목숨이 위태로운 정도의 경우란 어느 정도를 말하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본문의 경우 , 즉 중풍이든 아니면 어떤 다른 이유에서든 손에 힘이 없어지거나 손이 말라버린 상황은 그것이 결코 시각을 다투어 치료를 받아야 할 만큼 위급한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바로 이것이 그들이 제기한 질문의 출발점이 되었다. 한편 A.D. 1C경의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환자들을 간호하는 것을 허락하는 율법에 대해서 상세히 논의한 바 있었다고 한다(Mishnah Eduyoh 2:5 ; M. Sabbath 6:3 ; Mek Exod 22:2 ; 23:13).
=====12:11
양 한 마리...안식일에...붙잡아 내지 않겠느냐 - 이 논쟁은 눅 13:15 ; 14:5와 유사성이 있다. 비록 쿰란 공동체는 기껏해야 동물 스스로가 구덩이에 빠져 나올 수 있도록 널판지를 넣어 줄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으나 바리새인들은 이보다 더 적극적인 보호 규정을 제시하고 있다. 즉 그들은 일차적으로 웅덩이에 빠진 동물이 그 웅덩이에서 안식일을 무사히 지낼 수 있을 정도의 음식을 넣어주면 2차적으로는 그 동물의 목숨이 위험할 경우는 사람이 직접 그 동물을 끌어낼 것을 규정하고 있다(Maimonides, Talmud).
=====12:12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 예수의 답변은 또 다시 '칼 와호메르'(qal wahomer)의 성격을 띠고 있다(6절). 즉 한마리 양과 한 인간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하게 취급되어야 하느냐는 것이다. 사실 시 144:3에 의하면 사람은 하나님에 의해 특별히 생각되어지는 존재이다. 본문에 나오는 손 마른 사람은 웅덩이에 빠진 양 한 마리보다 물론 귀하다. 그러나 바리새인들 안식일에 웅덩이에 빠진 양은 건져낼지언정 손 마른 사람에게 자비(mercy)를 베풀려는 마음은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 즉 예수를 송사 하려는 것의 도구로 삼았을 뿐이었다. 바리새인들의 이러한 태도에 대해 예수께서는 만일 안식일에 동물에게 선을 행하는 것이 허용된다면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은 훨씬 의롭고, 보다 당연한 처사(conduct)임을 주장하셨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옳으냐는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대해 예수께서는 선을 행하는 것이 옳다라고 대답하셨다. 저들은 안식일에 선한 일이나 둘 중의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다만 규정된 법규만을 지키려 하였으나 예수께서는 적극적인 의미에서 선을 행해야 한다고 하심으로써 율법의 규정을 뛰어 넘으셨다. 예수의 관심은 안식일이 선을 행하기 위해 존재하는가, 악을 행하기 위해 존재하는 가에 그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여기서 선은 바로 불쌍한 자들에게 자비(mercy)를 베푸는 일과 연관된다. 이 말씀은 제자들의 행위를 무죄한 것으로 선언하신 7절의 말씀을 연상(association)시킨다. 즉 이삭을 잘라 먹은 제자들의 행위나 손 마른 사람을 고칠 예수 자신의 행위는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 자신에 의해 선한 것으로 선언되고 있는 것이다. 막 3:4 ; 눅 6:9에서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을 주제로 한 예수의 반론(反論)에도 역시 저들이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함으로써 선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이 비록 안식일에 이뤄진다 하더라도 우선적으로 행해져야 하는 것이라고 하는 사실이 자명(selfevidence)하게 인정되었다. 실로 안식일에는 세속적 관심에 대해서는 쉬어야 하겠으나 하나님과 인간 생명과 관련된 선한 일에 대해서는 열심으로 일을 해야 하는 것이다.
=====12:13
손을 내밀라 하시니 저가 내밀매 - 마태는 지금 바리새인들의 무자비하고 불신앙적인 태도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기 때문에 손이 마른 자가 예수에 대해 신뢰와 믿음을 갖게 되었는지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 한편 예수께서는 다른 곳에서 병자 약한 자를 고치셨을 때와는 달리 병자의 몸에 손 조차 대지 않으시고 다만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그대로 즉시 존재케 되었다고 보고하고 있는 창 1:3의 말씀처럼 손을 내밀라고 하는 단 한마디의 '말씀'에 의해서 치유의 기적을 베푸셨다. 이러한 기적과 치유 앞에 우리는 예수의 권위에 찬 말씀과 더불어 바리새인들과의 논쟁을 통해서 예수의 말씀이 옳은 것임을 확신케 된 손 마른 자의 즉각적 순종에 대해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실 안식일에 대한 랍비들의 유전에 의하면 손 마른 자는 결코 병고침을 받아서는 안되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의 악을 꾸미기 위한 도구로 사용될 뻔했던 그는 안식일에 소극적으로 무엇을 하지 않는 것보다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는 것이 하나님이 더 기뻐하시는 일임을 깨닫고 자신을 예수의 신성(神性)을 입증하는 선한 도구로 기꺼이 제공했다. 실로 그러한 순종과 결단에 의해서 그는 부자연스러운 육체의 속박(束縛)에서 벗어나는 축복을 부여받게 되었다.
회복되어 성하더라 -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께서는 밀이삭 사건을 통해서는 자신이 죄 사하는 권세를 가진 분이심을, 손 마른 사람의 사건을 통해서는 사람을 온전케(육체와 영혼 모두를) 하는 능력이 있으신 분이시라고 하는 사실을 확증하셨다. 여기서 '회복되어 성하더라'라는 말의 문자적인 의미는 '아포카디스테미'(* )의 과거형이 사용되어 '완전하게 나았다', 즉 이미 완치(完治)된 상태를 묘사하고 있다. 따라서 치유의 순간이 손을 내밀기 이전이었는지 이후이였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손을 내미는 것은 바로 손이 낫게되었음을 입증하는 행위'에 불과했다고 볼 수 있다(Alford). 예수께서는 믿음의 고백을 들으시고 당신께 간청하는 환자들의 병을 고치셨었다. 이번의 경우에도 손을 내밀라고 하는 당신의 명령에 대해 순종과 믿음의 고백으로서 그가 손을 내밀므로 그의 병을 고치셨다고 보는 것이 좋은 듯싶다. 그리고 한편 병자의 믿음의 고백은 치유의 선행 조건이 아니라, 치유의 병행 조건이었다. 이는 사도 바울이 주장한 바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10)는 진리와 부합(符合)된다. 진정 예수로 말미암아 나을 수 있다고 하는 믿음과 참으로 낫고자하는 깊은 열망을 동시에 가졌었던 손 마른 자는 예수의 창조적인 능력 앞에 온 전케 되는 축복을 얻게 되었다.
=====12:14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 이는 예수를 율법 위반자로 규정한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동일한 건물 내에 있기 조차 꺼려하는 행동으로 보이는 건물 내에 있기 조차 꺼려하는행동으로 보이는 결별 선언이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예수는 랍비가 아닌 더 이상 접촉해서는 안 되는 한낱 부정(惡)한 자였던 것이다.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거늘 - 안식일에 예수께서 선(善)을 행하고 생명을 구하신 것과는 반대로 바리새인들이 악을 꾀하여 사람을 죽일 모의를 한다는 것이참으로 아이러니킬(ironical)하다. 시갈(Sigal)은 여기서 사용된 '죽일꼬'에 해당하는헬라어'아폴레소스'(* )이 '죽이다'의 뜻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회당의 결의에 의해서 파문시키다'의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바리새인들이 단지 할라카식의 논쟁(율법규정에 대한 해석 문제)으로, 그들의 견해와 다른 이론을 제시한다고 해서 사람을 처형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마태는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에 어떠한 행동들을 해야만 율법의 주장과 일치하는가를 문제삼은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자신을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한 것에서, 그리고 제자들의 행위와 자신의 행위가 유대인들이 볼 때는 율법의 규정을 어긴 것이라고 할지라도 만물의 주요, 성전의 주이시며, 안식일의 주이신 예수 자신에 의해서 무죄로 선고받고 그 정당성을 부여한 것에 대해서 분노를 느끼고 있음을 지적함으로써 바리새인들의 살해 의지를 분명히 암시하고 있다. 한편 막 3:6에 의하면 바리새인들이 헤롯당과더불어 예수를 죽일 모의(conspiracy)를 하고 있다고 기록한 반면에 마태복음은 헤롯당(Herodians)을 전혀 언급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학자들의 많은 이견(異見)이 있다.어떤 학자는 바로 그 점이 마태복음이 A.D. 70년 이후에 기록되었다는 이론을 입증시킨다고 주장하였다. A.D. 70년 이후에는 헤롯당이 유대 땅에 존대하지 않았으며 기독교의 유일한 적대세력을 바리새파이기 때문에 굳이 헤롯당이 거론될 필요가 없기 때문에 마태가 이 말을 생략한 것으로 이해된다(Hummel, Hill). 그러나 이것은 마태의 기록 의도를 잘못 이해한데서 비롯된 오해이다. 즉 마태는 율법의 위반(unlawfulness)이라는 측면에서 예수를 사형에 처하고자 했던 주도 세력이 바리새인들이었음을 강조하고자 한 것이다. 실로 그들은 자신들의 살의(殺意)를 실천키 위해 정치적인 세력(헤롯당)을 이용했던 것이다. 본문에서부터 비로소 시작된 예수 살해 의도는 이후로 예수의선교 사역이 더욱 빛을 보면 볼 수록 노골화, 구체화 되어간다.
=====12:15
예수께서 아시고 - 여기 '아시고'에 해당하는 원어 '그누스'(* )는 '알다'는 뜻인 '기노스코'(* )의 제 2부정과거 능동태 분사로서 벌써부터 확연히 인지(認知)하고 계셨음을 보여준다. 이는 예수의 신적(神的) 능력의 탁월성을 암시하는 것인 동시에 예수를 둘러싸고 있던 바리새파 사람들의 경색(梗塞)되고 분노에 찬 모습이 노출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거기를 떠나가시니 - 헬라어 '아나코레오'(* )는 '철수하다', '물러가다'(KJV, withdrew)의 뜻으로 이는 바리새인들의 의논이 예수를 죽일 모의와 차원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 모의가 당장 실천의 차원으로 직접 예수를 배척하거나 죽이려고 시도했던 일은 이미 여러 번 있었다. 그때마다 예수는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때를 기다려 물러나시곤 하였으며 또한 마태도 예수의 물러나심에 대한 기록 뒤에 반드시 구약의 인용문을 첨가하여(2:22, 23 ; 4:12) 예수의 이 행위 마저도 이미 구약에서 예언된 바 그대로의 모습임을 입증하려 하였다. 더욱이 예수의 이 피신(避身)은 당신이 친히 제자들에게 가르치셨던 지혜로운 위기 극복법(10:23)을 몸소 실천하신 것이기도 했다.
사람이 많이 좇는지라 - '좇는다'고 하는 동사가 제자됨(fellowship)을 의미하는 용어이기는 하지만 많은 사람이 제자가 되기 위해 예수를 좇은 것은 결코 아니다. 아마도 많은 사람이라고 하는 말 속에는 이 날이 비록 안식일이라고 할지라도 바리새인들의 반대에 맞서 자신의 병을 고치고자 하는 많은 병자들이 속해 있었을 것이다. 또한 많은 사람이라고 하는 이 표현은 예수를 잡아 죽이려고 시도(attemot)하고 있는 소수의 바리새인들과 대조적으로 비교하기 위해 특별히 사용되었을 것이다.
저희 병을 다 고치시고 - 20절에 인용된 이사야서에 의하면 예수가 많은 병자들을 고친 행위가 바로 심판에서 이길 때까지 상한 갈대를 꺽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는 것과 같은 맥락의 긍휼과 사랑의 역사(役事)임을 의미한다. 실로 예수는 고생하며 유리(流離)하는 자들(9:36)과 수고하여 무거운 짐진 자들(11:28), 그리고 연약한 자들에게 결코 냉담하지 않으시고 궁극적인 구원을 가져다 준다. 왜냐하면 예수는 바로 그들의 메시야이기 때문이다.
=====12:16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 - 예수의 함구령은 그가 행하신 치유 기적이 그를 사람들의 눈에 더욱 더 강하게 드러나게 함으로써 대중들의 흥분이 더욱 더 고조되고(W. Argyle), 따라서 그 일이 반대자들의 적대감을 더욱 더 크게 부채질하게 될 것임을 염려하여 내려진 명령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보다는 이미 네번에 걸쳐서(8:4 ; 9:30 ; 16:20 ; 17:9) 행해진 바대로 예수 자신을 단순히 기적행하는 자로 나타내시지 않기 위해서 내려진 함구령이라고 보는 것이 더욱 적절하다. 당시 유대인들의 메시야 상(像)은 그들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구원하고 해방시켜줄 정치적 메시야로서 신적(神的) 권능을 소유한 자였다. 그러므로 예수가 메시야 이외의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던 불치(不治)의 병들을 치유하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들은 당장 그에게 몰려들어 자기들의 임금을 삼으려고 함으로써, 결국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부활을 통한 당신의 메시야 사역을 감당치 못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때때로 내려지는 이 함구령(緘口令)의 시한(時限)은 막 9:9에 의하면 부활 때까지인데 이는 예수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부활 이후에 가능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12:17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 바 - 이하에 인용된 사 42:1-4은 70인역(LXX)에 의한 것이 아니라 히브리어 원문의 자유로운 인용이다. 한편 이사야의 인용구는 바로 앞의 예수의 함구령과 연관해서 성령과 이방인들이라고 하는 두 주제를 뚜렷이 제시하고 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Cope, Hill). 즉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지만'(19절) 성령부음을 받은 그가 공의를 행하고 있기 때문에)예를 들어 많은 병자들을 고치심) '이방인들은 그의 이름을 바라게'(21절) 되리라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사야는 행위자(agent)이신 여호와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도구로서, 고난받는 종으로서의 메시야를 예언하엿다. 그리고 이 예언은 당시의 많은 사람들, 특히 바리새인들에 의해 핍박받고 있는 예수의 모습 속에서 성취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마태는 무엇보다 무리를 자극하지 않으려는 예수의 사역이, 곧 이사야가 예언한 바 메시야 사역과 일치하고 있음을 강조하고자 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당신이 전파하신 천국을 영적이고도 의로운 관점에서 가르치고 계셨으며, 그런 점에서 예수는 격앙된 분위기로 군중을 선동(煽動)하거나 폭발적인 소문을 통해 당신의 신분이 노출(exposure)되는 것을 원치 않으셨기 때문이다. 더욱이 예수는 당신으로 인해 약한 영혼들을 거스리기를 원치 않으셨다.
=====12:18
나의 택한 종...나의 사랑하는 자로다 - 사 42:1 ; 43:10 ; 44:1의 인용으로 특별히 '나의 택한 종'이란 히브리어로는 '내가 붙드신 나의 종'이 된다. 즉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위하여 한 이상적(理想的) 종을 붙잡으셨는데, 그런 점에서 '붙잡다'는 말은 선택한 자를 내밀(內密)하게 기억하시면서 지극히 관심을 두고 있음을 암시한다. 한편'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나의 사랑하는 자로다'라는 표현은 이미 예수께서 세례 받으실 때에 하늘로서 들려왔던 소리(3:17 ; 17:5)로서, 예수께서 하나님의 만족과 인정과 축복을 동시에 받고 있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어떤 대상을 사랑하는 것과 선택하는 것은 서로 밀접(密接)하게 관련된 것이므로, '마태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범주(category)안에 하나님의 종으로서 예수의 역활까지도 포함시킨 것은 아니다'라고 하는 킹스베리(Kingsbury)의 견해는 부적절하다. 오히려 마태는 마가복음에서 언급된 '하나님의 아들'(막 3;11)을 생략하고, 본문에서는 다만 예수가 구약에서 예언된 하나님의 종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고 보는 힐(Hill)의 견해가 더욱 더 설득력 있게 보인다. 예수는 아들의 위치를 버리고 하나님께 선택된 바의 종의 위치를 기꺼이 받아들이셨다.따라서 예수는 하나님이 특별한 설교 목적을 갖고 선택하신 종의 위치를 기꺼이 받아 들이셨다. 따라서 예수는 하나님이 특별한 선교 목적을 갖고 선택하신 종이요, 하나님이 성령으로 기름부은 자이다. 한편 본분의 '종'에 해당하는 헬라어 명사 '파이스'(* )는 '아이'에 대한 애칭으로, 구약에서는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종종 하나님께로부터 '그의 종'이라고 불리웠다(사 41:8). 따라서 이 '파이스'는 사람들 사이에서 신분상의 종으로 통용되고 있는 '둘로스'(* )와는 달리, 종으로서의 메시야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메시야임을 분명히 나타내주고 있는 말이다.
내 성령을 줄터이니 - 하나님이 당신의 영(spirit)을 주신다는 것은, 곧 그를 통해 하나님 자신의 활동하실 것을 내포한 말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참여 의사(will)는 예수의 말씀과 사역에 초월적인 권위와 능력을 부여한 것이 되며, 이같이 주어진 능력과 권위의 실현은, 곧 이 땅에 하늘 나라가 도래했음을 입증해 주는 확실한 근거가 된다(28절).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 이방에 심판을 알리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택하신 종인 메시야의 독특한 직무에 해당된다. 한편 이 직무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가에 대해서는 많은 이견들이 있다. 여기서 '심판'의 뜻인 헬라어 '크리시스'(* )가 '율법', '판결', '정의', '결정하는' 등의 뜻을 지닌 히브리어 '미쉬파트'(* )에 해당하는 것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심판'이라고 해석된 이 단어에 대해 (1) 델리취(Delitzsch)는 모든 관계에 있어서 생(生)의 규범과 표준으로서 종교의 실제적인 면을 보인 '진실한 신앙'으로,(2)헨드릭슨(Hendriksen)은 죄인들의 회개하고 주 예수께 나아와 믿음으로 구원을 얻고 주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야 한다는 내용의 '복음'으로, (3) 칼빈(Calvin)은 심판이라는 말을 통해 공평과 의(義)의 충만함을 정체(正體)로 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대의 한 구석에만 한정시키는 것이 아니라, 전세계로 확장시키는 것이 메시야의 임무라고 하였으며 (4) 알포드(Alford)의 경우, 심판은 바로 최후 심판을 의미한다고 보았으며, (5) 카슨(D.A. Carson)의 경우, 여기서 문제삼고 있는 심판 혹은 공의란 하나님이 모든 이방 나라들을 위해서 자신의 본성을 계시하시는 것(사 51:4)인 동시에 사람들이 계시(revelation)된 하나님의 본성, 즉 공의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실을 요구한 것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일반적인 제견해들에 비해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한다고 하는 것은 율법을 통해서 계시되고, 선포되었던 하나님의 공의, 즉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실천을 복음을 통해서 예수께서 재천명하시고 그의 제자들이 그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심판'은 하나님의 거룩한 경륜(經綸)의 대강(大綱)으로서 예수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의미이다. 한편 본문의 전파 경로가 암시되어 있는데, 예수께서 원래 목적하신 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영혼들에게 우선 복음이 전파될 것이지만(10:6 ; 15:24), 그들의 핍박과 배척으로 그 대상이 이방인에게로 확장될 것이었다(8:10 ; 15:28). 이러한 사실은 선교의 지상 명령 부분(28:19-20 ; 행 1:8)에 이르러 확연히 드러나게 된다.
=====12:19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 이는 메시야의 직무에 이은 그 이행 방법 또는 태도 중의 하나이다. 한편 아사야의 예언에서는 '그는 외치지도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사 42:2)로 묘사되어 원래의 의미를 더욱 정확히 보여주고 있다. 본문에 제시된 '다투다'는 말은 언쟁이 심화된 상태를 뜻하는 말로 아사야의 의도처럼 '큰 소리로 외치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이와 함께'들레다'의 뜻인 '크라우가조'(* )는 '부르짖다', '야단스럽게 떠들다'(cry out, KJV)를 의미하는데 이는 종교적 기쁨이나 소리나 전쟁에서의 승리의 외침이 아니라, 조용히 들리는 지혜자의 말(전 9:17)과 대조(contrast)를 이루는 '우매(愚昧)한 어른의 호칭'을 뜻하는 말이다. 또한 '크라우가조'는 신약이외에서는 마술과 악마의 영역에서 지하 세계의 신들을 불러내는 소리로 이해되었다. 신약에서도 이 말은 예수께서 귀신들을 쫓아내실 때 귀신들이 지르는 것으로서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막 5:5 ; 9:26)를 말하며, 행 19:28에서는 왁자지껄하는 폭도들의 소란으로, 계 21:4에서는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로부터 쫓겨난 분노를 나타내는 외침을 표현할 때 사용되었으나 긍정적으로는 하나님께 대한 탄원(歎願)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 역시 고난과 섬김의 종인 메시야의 자세를 표현하고 있는 말이다. 그러나 메시야가 논쟁하지 않고 외치지 않고 길거리에서 소리 드높여 선포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가 완벽한 침묵을 고수(固守)하고 있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다만 메시야로서의 그의 모습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하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다. 따라서 메시야가 16절에서와 같이 자신을 드러내지 않은 채로도 얼마든지 그의 메시야 직무를 수행할 수 있으며, 또한 지금하고 계신 것이다. 그와 더불어 참다운 종이란 그의 말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의 행함에 의해서 자신의 직무를 다하는 자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12:20
상한 갈대...꺼져가는 심지 - 이 표현은 종이 자비심이 많고 오래 참으시며, 온유하신 사람임을 보여준다. 이 표현에서 사용된 두 상징에 대해 카슨(D.A. Carson)은 상한 갈대는 고생하며 유리(流離)하는 자들(9:36)을 꺼져가는 심지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11:28)을 말한다고 하였다. 또한 제롬(Jerome)은 전자는 이스라엘을, 후자는 이방인을 표현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상한 갈대란 사회의 구조적 모순, 유대 사회에서는 율법주의자들에 의해 죄인으로 낙인찍힌 사람들의 육체를, 그리고 꺼져가는 심지란 그들이 영혼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이 두 비유는 연약하고 무력한 사람들을 상징하낟고 봐야할 것이다. 즉 '상한 갈대'란 연약한 인간(왕하 18:21 ; 겔 29:6), 고통과 좌절로 인해 심령이 산산히 부서져 쇠잔해 있는 영혼을 가리키며, '꺼져가는 심지'는 마지막 한가닥 소망마저 다 없어져가는 인생, 양심의 빛을 상실해 심령이 어두워져가는 영혼 등을 의미한다. 실로 상한 갈대는 오직 하늘의 기원으로 소생하고, 꺼져가는 심지는 신령한 기름을 흡수(absortion)함으로써 회생(回生)할 수 있다(Clarke).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 사 42:4에 의하면 '세상에 공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로 메시야 직무 수행의 목적을 나타내는 말로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심판하여 이길 때'란 월리암스(A. Williams)에 의하면 '하나님의 법의 계시를 인간의 마음에서 성공시키는 것'을 뜻한다. KJV에 의하면 이 구절은 '그가 심판을 승리로 몰고 갈 때까지'(until he expel to victory the judgment)로서, 고난의 종인 메시야가 세상 사람들이 기대하는 바의 영광을 통해서가 아니라, 온유와 겸손과 섬김의 도(道)를 통해서 하나님의 공의를 세상의 악의 세력 위에 세우게 될 때까지를 말한다. 이는 긍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의미한다. 예수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죽음을 정복하셨고 하나님의 공의를 이 땅 위에 굳게 세우셨다.
=====12:21
이방들이 그 이름을 바라리라 - 사 42:4에 의하면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이다. '섬'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이'(* )의 기본 개념은 '거주 가능한 땅'으로, 이사야 본문에서는 내륙지방과 구별되는 해안지방(coast)을 의미한다. 해안지방은 부분적으로 뵈니게인과 블렛세인과의 교역(交易)이 이뤄지고 있는 곳이기 때문에 '섬'이란 말이 가끔은 '이방'을 가리키기도 하였다. 또한 마태는 70인역(LXX)을 따라서 '율법' 대신에 '이름'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바라리라'(will put their hope, NIV)는 관용적인 표현으로서 '기대한다', 또는 '기다린다'는 의미이다. 이런 사실들에서 결국 이방이 바라고 소망하는 바는 율법의 완성이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사실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랑게(Lange)에 의하면 메시야의 이름은 '하나님의 진리를 요약한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문은 그리스도의 은혜가 이방인들에게도 동일하게 임하게 될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분명히 선언하는 말이다.
=====12:22
그 때에(* , 토테) - '그 때'가 언제인지 정확한 시점은 알 수 없으나 아마도 9-21절 사건보다 훨씬 후에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귀신들려 눈 멀고 벙어리 된 자(* , 다이모니조메노스 뒤플로스 카이 코포스) - 헬라어 원문의 정확한 의미는 '그 사람은 귀신이 들리게 되었으므로 눈이 멀고 벙어리가 된 자'이다. 마태는 그 사람의 병을 원인이 특별히 '귀신에 의한 것'임을 강조함으로써 예수의 능력이 귀신의 힘에 의한 것이라고 하는 바리새인들의 모함(謀陷)이 논리적으로 모순이 있는 것임을 분명히 하려고 하였다. 또한 이러한 표현을 통해서 예수가 다윗의 자손 메시야이심을 알지못한 바리새인들이 바로 '영적으로 귀신들려 눈 멀고 벙어리 된 자'라고 하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예수께서 고쳐 주시매 - 마태를 위시한 공관복음서 기자들은 본 사건이 이적이라는 사실 그 자체보다는 바리새인들과 충돌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기 때문에 본 치유 이적을 간략히 소개하는데 그쳤다. 여하튼 예수께서는 그 근본적인 장애 요인이었던 영적 장애(귀신들림)에 대한 근원적인 치유를 하심으로써 육체적인 장애(시각, 언어)를 제거해 주셨다. 실로 그분은 영. 육의 온전한 구세주이시다.
=====12:23
무리가 다 놀라 -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죽어버린 교훈에 이미 익숙해 있었던 무리들은 예수의 생명력 넘치는 이적 앞에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이처럼 실재하는 천국은 기습적으로, 각 사람들의 마음에 돌입한다.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 예수의 치유의 기적을 보고 놀란 사람들 중 첫번째 부류의 사람들이 나타낸 반응의 말이다. 이 물음은 헬라어'메티'(* )로 시작되는 부정 의문문으로서 부정(不定)하는 답을 예상하고는 있으나 그것에 대한 결정적인 확신이 아직 없기 때문에 반신반의(半信半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따라서 이 말은 '아무래도 그가 다윗의 자손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으나 그들 자신들이 메시야가 오면 표적을 행하리라고 하는 사실(38절)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의 치유기적이 혹시 메시야의 징표(徵表)를 나타내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생긴다'고 하는 것이다. 실로 예수가 권능으로 사람들의 병을 고친 것은 무리들의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께서 세상의 왕과 같은 권세를 행사(行使)하지 않고 지금껏 고난받는 종의 모습을 취하고 계셨기 때문에 예수의 메시야됨에 대해 의혹을 품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여기서 예수 자신이 생각하고 있었고 십자가 사건과 부활 사건 이후에 기독교 공동체가 이해하게 되었고 고난받는 종으로서의 메시야상(像)과 유대 국가의 멸망이후 포로기를 거치면서 형성된 유대인의 정치적 메시야상(像)이 근본적으로 불일치된다고 하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예수는 배타적 민족주의에서 파생된 저들의 메시야니즘(Messianism)을 거부하고 자신의 고난과 섬김의 삶을 통한 인류구원을 위한 메시야의 길을 걸으셨다. 한편 그곳에 모든 사람들, 즉 병고침을 받은 자나 그 사건을 지켜본 자들은 예수가 메시야이실 것이라고 하는 확신을 갖게 되었으나 그곳에 함께 있던 바리새인들 때문에 자신들의 생각을 감히 단정(decisive)적인 말로 표현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하는 추측이 있다. 유대인들의 정치적인 메시야의 상(像), 즉 다윗의 자손으로서 다윗왕국을 재현(再現)시켜줄 이상적인 왕에 대한 칭호인 '다윗의 자손'이라는 표현에 대해서는 마 1장의 주석, 주제 강해를 참조하라.
=====12:24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 예수의 치유 능력을 보고 놀란 사람들 중 두번째 부류의 사람들이 나타난 반응 속에서 나온 말이다. 첫번째 부류의 삶들이 품고 있는 일말(一抹)의 희망, 즉 예수가 메시야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일축(一蹴)하고 그 확신을 제거키 위한 노력에서 나온 적대적 표현으로, 실제로 예수와 그들 사이의 바알세불 논쟁의 계기가 된 문구이다. 사단이 예수의 영(靈)속에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예수가 더러운 귀신에 들렸다고 하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막 3:30 ; 요 8:48). 한편 귀신의 왕 바알세불은 간혹 바알세붑으로도 불리우는데(왕하 1:6), 이 말은 땅의 주인인 '바알'이라는 뜻으로 가나안 원주민들이 섬기던 우상의 이름에 그 기원이 있다. 후에 유대교에서는 귀신들의 두목인 사단을 가리키는 수 많은 명칭들 중의 하나로 취급하였다(10:25).
=====12:25
저희 생각을 아시고 -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이 품고 있는 생각을 정확히 알고 계셨다. 그 시점에 바리새인들은 예수가 얼마나 강력한 존재인가를 비로소 명확히 알게 되었던 것이다.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동네...집 - '나라'(* , 바실레이아)는 영토적 지역을 말한다기 보다는 전체를 움짖일 수 있는 힘으로서 왕권, 주권(主權)을, '동네'는 정치적 사회, 즉 이웃 공동체 집단을, '집'은 건물이 아니라 가장(家長)을 위시한 질서 체계가 바로 잡힌 가족 공동체를 의미한다. 이러한 집단일수록 외부에서 쳐들어오는 세력에 의해서는 하나로 결집되어 그 세력을 막아내지만 내부에서 발생되는 싸움에 의해서는 완전히 파멸될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점에 있어서는 사단이 그의 부하들인 귀신을 조종(操縱)하는 사단의 나라도 동일한 것이다(H. Kruse). 즉 만약 귀신들(demons)의 군주인 사단이 그의 부하들을 쫓아낸다면 그는 사실상 자신을 쫓아내는 것과 다를바 없다. 왜냐하면 그의 부하들은 바로 그의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Broadus). 한편 여기서 귀신들은 흔히 역사의 전면에서 실제적으로 활약하는 악의 세력으로, 사단은 그 실제적 활약자들의 배후에 존재하는 궁극적 악의 실체로 이해된다. 더 자세한 내용은 4장 강해 '사단과 귀신'을 참조하라.
=====12:26
사단이 만일 사단을 쫓아내면 - 이 말은 사실상 모순(contradiction)이다. 사단의 나라에는 사단만이 귀신들의 왕이므로 따라서 이말은 사단이 그의 부하세력인 귀신이 사람을 사로 잡고있는 상태에서 그를 축출해 내버리는 것을 뜻하며 이는 그들 나라의 파멸을 자초(自招)하는 결과가 된다. 실로 사단은 그 나름대로의 합리적인 통찰력과 분별력이 있다는 점에서 자기 파괴적 행동은 삼가 할 것이다. 그러나 엡 6:12 ; 계 20:7-10에 의하면 사단의 나라는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분명히 존재하게 됴마 것이다.
=====12:27
너희의 아들들 - 단순히 '너희(바리새인) 사람들'(your peoele, NIV)을 의미할 수도 있고 바리새인들의 가르침을 받고 있는 자들, 즉 제자들이나 그 당원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도 있다. 어떤 학자들에 의하면 '너희늬 아들들'이란 표현이 바리새인의 제자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선지자들의 아들들'의 의미로서 옛부터 가나안과 유다에 족속해 있던 마술사(삼상 28:7-14, 신점한 자 혹은 박수)들을 가리킨다고 한다. 이들을 히브리어로는 '오브'(* )라고 부르는데, 이는 원래 바람을 일으키기 위한 풀무같은 도구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신접(新接)한 자가 그것을 가지고 기체와 같은 영(靈)을 구멍에서 불어내는 동작을 취한데서 나온 이름이다. 물론 이스라엘에서는 일찍이 이들의 행위를 금지(禁止)시킨바 있다(레 19:31 ; 20:6, 27 ; 신 18:11). 그러나 왕조시대에는 이방 문물과 종교의 수입으로 인해 이러한 행위와 이에 대한 미신이 깊이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왕하 21:6; 23:24 ; 대하 33:6). 물론 본문에서의 바리새인들의 제자들 혹은 추종자들 역시 그들 역시 조상의 영향을 받아 귀신을 쫓아내는 등의 능력이 있었음은 분명하다.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 예수 당시 유대인들은 몇몇 그릇된 상황과 관습에 의존하여 귀신을 쫓아내는 일이 흔했다고 한다(행 19:13 ; 외경 Tobit 8:2,3 ; Justin Martyr 85). 특히 유대사가 요세푸스의 보고에 따르면(Josephus, Antiq. VIII, 45-48 ; id., Wars VIII, 185) '솔로몬은 귀족 축출(逐出)법을 터득하여 각종 질병을 치료하고 후대에 전하였는데, 그 방법에 의해 치료받은 자가 다시 그 귀신의 지배를 받지 않을 만큼 완벽한 치료법을 구사(驅使)했다. 이 치료법은 오늘날 까지도 효과적이다. 내가 목격한 바로 베스파시안(Vespasian) 황제 때 엘리아살(Eleazar)이라는 사람이 황제와 그 아들, 지휘관들과 군중들 앞에서 귀신들린 자를 치료하는 것을 보았다. 그의 치료법은 솔로몬이 창안한 것 중 하나로 한 식물 뿌리로 된 반지를 귀신들린 자의 코에 꿰고 그것으로 귀신을 끌어내어 그 사람이 졸도하면, 그때 솔로몬의 이름과 솔로몬이 만든 주문(呪文)을 외우면서 귀신에게 다시는 그 사람에 들어가지 말 것을 명하는 것이었다. 이로써 솔로몬의 지혜와 기술이 매우 명확히 증명되었다'고 한다. 여하튼 당시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전통에 의해 전수(傳受)된 주술이나 마술들로 인간이 필연적으로 지닐 수밖에 없는 질병과 슬픔과 악에서 구원받으려 했던 것만은 사실이다. 더욱이 초대 교회 교부였던 이레니우스(Ireneaus) 는 그의 '이단 교서'(2권, 4:2)에서 유대인들이 사술(black magic)을 사용하면서도 여호와의 이름을 불러 귀신을 쫓는 습관이 되었다고 전한다. 그런 까닭에 그들 바리새인들이 말한대로 예수께서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었다면 그 당시 유대인들 역시 바알세불의 도움에 의해 귀신을 축출했다고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 예수의 말씀의 요지였다.
저희가 너희 재판관이 되리라 - 예수께서는 저들이 제자들의 귀신을 쫓아내는 것에 대해서 일체 부정하거나 인정하는 등의 말씀은 없으셨다. 다만 바리새인들은 저들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러한 일을 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는 것을 가정하면서 따라서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즉 '너희의 아들들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귀신을 쫓아낼 수 있다면 그들은 너희들이 내게 대하여 잘못된 말을 한 것, 즉 바알세불의 힘을 입었다고 한 것 때문에 너희를 위선자요 죄인으로 선고하리라'고 하는 표현이다. 실로 바리새인들의 제자들이 하나님의 도움으로 귀신을 쫓았다면, 유독 예수만을 바알세불의 능력하에 있다고 하는 것은 부당(不當)한 일임에 분명했다. 예수의 이 반론에 의해서 이제는 바리새인들이 오히려 진퇴양난(進退兩難)에 빠지게 되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제자들의 귀신축출 행위가 바알세불에 의한 것이라고도 할 수 없고 또한 예수의 행위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한 것이라고도 주장할 수 없게 되었다.
=====12:28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 평행구절인 눅 11:20에 의하면 '하나님의 손'은 바로 하나님의 능력과 권능을 의미하는 구약적 표현(출 8:19 ; 31:8 ; 시 8:3)으로서 '성령을 힘입는'것과 결과적으로 동일한 묘사이다. 예수의 귀신축출행위와 사단과의 연관성은 논리적 모순임을 지적함으로써 그들의 사악한 시기심을 밝혀내신 예수께서 이제 자신의 행위가 성령의 임재와 사역에 의한 것으로 역(易)으로 그리스도의 권세가 지상에서 명백히 드러난 것은 바로 하나님의 영을 통해서 임을 주장하셨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 '임하다'의 뜻인 '프다노'(* )는 '뒤따라 잡다'(overtake)의 의미로 본문에서는 제 1과거형으로 어미변화가 되어서(* , 에프다센) '이미 임한 것'을 가리킨다. 이런 사실에 근거해 웨슬리(Wesley)와 스티어(Stire)는 본문을 '하나님 나라는 너희가 찾을 수 있을 정도로 너희 앞에 전개되어 있다'로 해석하였다. 예수가 하나님의 성령의 권능으로 귀신들을 쫓아내고 사람들의 병을 고친 것은 분명히 사단의 왕국이 괴멸(壞滅)되고 있음을 보이는 것인 동시에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성령이 현재적(現在的)으로 역사한다고 하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던(Dunn)은 '이미 실현된 종말'(the realized eschatology)이라고 불렀다. 그에 의하면 '종말론적인 성령'(the eschatological Spirit)은 예수에 의해서 이 땅에 강림했으며 또한 종말론적인 나라(the eschatological Kinddom)도 역시 예수에 의해서 그 시작이 알리어졌다. 종말론적인 성령이 활동하는 그곳에 하나님 나라의 활동도 진행되고 있으며 그 활동이 일어나고 있는 곳은 바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역사의 현장 그 한 복판에서이다. 한편 하나님의 나라는 성경적으로 볼 때 단순한 축복의 장소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가 미치는 전 영역을 가리킨다. 이런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성과 미래성을 가지고 있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성육신 사건으로 인해 이 땅에 실제적이고도 종말론적으로 도래했으나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다. 그것은 훗날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완성된 형태로 도래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천국은 이미(alredy) 도래하였으나 아직(not yet) 완성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12:29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 이 구절에 대해서 예수의 재림으로 인한 종말적 사건으로 이해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이 구절은 종말의 완성으로 이해될 필요없이 순수히 예수의 사역(work)을 나타내는 것으로, 즉 기독론의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몇몇의 유대 문헌에는 메시야의 시대가 도래하면 메시야가 사단을 결박할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Moses, 10:1 ; 계 20:2). 여기서 '강한 자'란 사단을 가리키는데 예수는 자신이 귀신을 쫓아내는 행동을 통해 (1) 자기가 이미 사단을 결박하고 있다고 함과 (2) 따라서 자신이 귀신의 왕인 사단 보다도 더 강한 자('능력이 더 많으신 이', 3:11)라는 사실과 (3) 이 세대의 종말이 지금 여기서 실현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즉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현존하여 악의 권세를 다스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재림으로 인한 완성된 종말의 날이 될 때까지 그 강한 자인 사단의 세력은 여전히 이 세상에서 그 영향력을 미치고 있겠지만 그는 이미 예수에 결박되어 있는 존재이다. 한편 '강한 사람'의 뜻인 '이스퀴로스'(* )가 손과 관련된 기능, 수완이 좋은 사람을 나타내며 특별히 사단에 관련된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견해(Campbell)가 있으나 본문의 맥락에서 벗어난 것이므로 환영받지 못하고 있다.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 '세간'으로 번역된 헬라어 '스퀘에'(* )의 문자적 의미는 '그릇들'(vessels)이다. 이는 결국 사단에게 사로 잡힌 자, 즉 귀신들린 자를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늑탈하다'의 뜻인 '디아르파조'(* )는 약탈을 하되 모두 털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KJV에 의하면 특별히 이 '늑탈하다'(plunder)라는 말은 전시(戰時)나 내란(內亂)때 적들로부터 물건을 샅샅이 약탈당한다고 하는 뜻이다. 따라서 이 말은 사단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신 전복자 예수께서 지금껏 사단이 마음대로 지배하던 이 세상에서 영혼과 육체 모두가 마귀의 지배를 받고 있는 사람들을 한 사람씩 물건을 빼앗아 악의 세력에서 건져질 것을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빼앗은 그들 모두를 다시 인생의 원래의 주인이신 하나님께로 되돌려 보내시어 하나님이 주시는 힘, 즉 성령에 따라 사는 자가 되게 하시겠다고 하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즉 그리스도의 권세있는 사역은 십자가, 부활 사건 이전에 부터 이미 활발히 시작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이 같은 사실은 사 49:24, 25의 예언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여하튼 지금은 이미 도래된 메시야의 시대이고 예수께서 사단의 소유물이 되었고 사람들을 하나하나 자신의 품으로 회수(回收)하시는 기간이다. 따라서 지금은 예수에 의해 사단의 집이 약탈(掠奪)되어 가는 과정이며 사단의 집이 모두 털린 후에, 즉 악의 세력에서 모든 사람이 풀려난 후에 예수의 재림으로 결박된 사단은 영원히 멸망 당하게 될 것이다. 눅 10:17, 18의 칠십 명의 전도인들에 의하면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이 그들에게도 항복하였으며 예수께서는 사단이 하늘로 번개같이 떨어짐을 목격했다고 하였다. 사단이 권세의 무너짐은 상대적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계속 힘차게 뻗어나가고 있음을 의미하며 이러한 사역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복음전파와 그 실천적인 삶에 의해 점차 진전(development)되다가 마침내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완성될 것이다.
=====12:30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 - 여기서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의 반대적 의미는 막 9:40과 눅 9:50에 의하면 '우리'(마가) 또는 '너희'(누가)를 '위하는 자'이다. 그런데 이것은 마가복음에서는 예수와 그의 제자들에게 무관심한 자들에 대해 언급한 것이며 누가복음에선 예수를 따르기를 거부하는 어떤 사람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다. 이에 비해 본문의 논지는 매우 직선적으로 중립적인 태도가 있을 수 없음을 말하는데, 이는 하나님의 권세와 사단의 권세가 서로 투쟁하는 와중(渦中)에서 중립적 입장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한편 본문의 '함께 아니하는 자'에 대해 크리소스톰은 '마귀'로, 벴겔과 네안더는 앞에서 나온 '유대 마술사' 등을 언급한다고 본다. 이 중에 크리소스톰의 견해가 환영받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 '함께 아니하는 자'란 단순히 예수와 그의 가르침에 대해 무관심한 자, 예수와 연합(union)하기를 싫어하는 자를 말한다기 보다는 좀더 적극적인 의미에서 바리새인들과 그의 추종자들처럼 '공공연히 예수를 비난하고 서로 의문을 제기하는 자'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 - 구약에서 흔히 하나님이 추수하는 분으로 묘사되었듯이 신약에서 예수는 마지막 날에 이르기까지 계속적으로 모으고 또한 추수하시는 분으로 묘사되고 있다(3:12 ; 13:30).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예수의 기적행위를 보고 그를 메시야로 고백하려는 자들에 대해 예수가 바알세불의 힘을 입은 자라고 거짓 증언함으로써 사람들이 예수를 영접하려는 것을 방해하였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의 전진과 확산을 막기 위해 예수로 부터 사람들을 흩으려는 자들이 바로 '모으지 아니하는 자', 곧 흩어버리는 자들인 것이다. 실로 예수의 위대한 사역은 바로 잃어버린 양을 찾아 모으고 또 모으는 것이다. 이에 비해 사단은 되찾은 양 조차도 다시 빼앗고 될수 있는 대로 그들을 흩으려는 악한 본성을 지니고 있다. 여하튼 본문은 예수의 사역에 있어서 결단코 중간적 입장에 머무를 수 없음을 강력히 시사해 주고 있다. 정녕 예수의 사역에 적극 동참치 않는 자들은 예수의 나라를 전면적으로 반대하는 자들인 것이다.
=====12:31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 공동번역에서는 '사람들이 어떤 죄를 짓거나 모독하는 말을 하더라도 그것은 다 용서받을 수 있지만'으로 번역되어 있다. 헬라어 본문의 문자적인 의미 역시 '사람에 의해 저질러진 죄와 비방은 사하심을 받게 될 수 있으나'의 뜻으로 이래된다. 이는 하나님의 자비가 무한, 풍성하므로 인간의 모든 죄악이 도말(塗抹)될 수 있다는 성경의 보편적 진리를 입증해 준다(시 63:3 ; 86:5 ; 130:3,4 ; 사 1:18 ; 미 7:19 ; 요일 1:7). 더욱이 이 진리를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의 예수의 대속사역은 완전, 충만하여 그 어떤 죄악일지라도 능히 용서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한편 여기 언급된 '훼방'에 해당하는 헬라어 '블라스페미아'(* )는 '심한 비방'이나 상대방에 대한 지독한 '모독'(9:3) 또는 어떤 대상은 '반대하여 말하다'(32절)는 뜻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사람이 하나님을 비방하는(blasphemy) 행위에는 매우 심각하게 대처(reaction)했다(26:65). 그러나 예수는 이 부분에서 인자, 곧 자신을 거역하는 행위와 심지어 암묵(unspokenness)적 의미에서이지만 하나님을 훼방하는 행위 조차도 용서의 가능성이 주어짐을 시사하셨다.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 이 선언은 하나님의 자비가 예수의 대속 사역에 어떤 결함이나 불충분성이 있기 때문이 아니다. 더욱이 성삼위 하나님의 위상(位相) 중 제 3위에 해당하는 성령의 탁월성을 강조한 것이라고 볼 수도 없다. 한편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란 성령의 이지적 사역을 사단의 능력으로 간주하는 것이라 보는 학자들이 있다(Broadus, Chafer, Gebelein). 그런 점에서 바리새인들은 이미 그 죄를 범하고 말았는데, 그들은 성령의 능력을 덧입은 예수의 이적을 바알세불의 소치(result)로 매도했던 것이다(24절). 이와 대조적으로 본문을 단순히 예수를 헐뜯고 비난하는 바리새인들에 대한 경고일 뿐이라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 그런데 우리는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성령의 독특한 사역에 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즉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로부터 영원 발생하신 분으로서(요 15:26 ; 16:7 ' 롬 8:9 ; 갈 4:6) 창조와 구속을 완성하는 사명을 맡으셨다. 그런 까닭에 그분은 죄인들에게 죄를 자각케 하고, 예수의 초청을 수락(acceptance)케 하며, 영원한 진리를 깨닫게 함으로써 더 성숙한 신앙 인격체로 자라나게 하신다. 그러므로 비록 성부를 경원(敬遠)시 하고 성자를 미워한 자라 할지라도(딤전 1:13), 이 성령의 거듭나게 하는 역사로 인해 참회(懺悔)의 자리를 설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바로 이 성령이 역사를 거부하고 적극적으로 비방, 모독하는 것은, 곧 참회와 중생에 이를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차단(遮斷)해 버리는 일로서 결국 심판에 회부될 수밖에 없는 불행한 결과를 낳게 된다(요 3:36). 한편 신.구약을 통틀어 용서받을 수 없는 죄에 대한 규정한 것이 있다. 그것은 '짐짓 범한 죄', 곧 의지적 결단에 의해 자행한 죄이다(민 15:30 ; 히 6:4-6 ; 10:26-32 ; 요일 5:16). 다시 말하면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이며, 은혜의 빛이 어떻게 비취는가를 알면서도 의식적으로 그것으로부터 돌아서는 것을 말한다. 이는 부지중(不知中)에 교회를 핍박했던 바울의 경우(고전 15:9)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범죄이다. 이같은 범죄는 '성령을 훼방하는 것'과 긴밀한 관련성이 있다. 즉 예수가 행하시는 놀라운 사역들(치유, 금식, 부활하심 등)이 분명히 하나님과 성령의 능력안에서 행해지는 것임을 충분히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완강하게 부인하는 것은 결단코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성령의 역사가 분명
=====12:32
누구든지 말로 - 앞 구절에서도 소개한 바 있듯이 '훼방', 곧 '블라스페미아'는 의지적 범죄로서 특별히 '말'에 의한 성령이 거르침을 강하게 내포하고 있다. 사실 '말'이란 인간 내면을 외부로 표출(表出)시키는 통로로서 '말에 의한 훼방'은, 곧 전인격적 훼방을 암시한다(24절).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 본문에서 나오는 '인자'라는 칭호가 무엇을 의미하는 가에 대해서는 분명치 않다. 혹자는 이를 막 3:28의 평행구와 연관시켜 복수 개념('인자들')으로 읽음으로써 단순히 사람들을 지시하는 말로 이해한다. 그러나 '인자'란 마태가 일반적으로 사사한 바대로(8:20) 성육신(Incarnation)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Origen). 한편 인자를 거역하는 것과 성령을 거역하는 것의 차이점에 대한 견해는 (1) 인자의 성령보다 덜 중요하다거나, (2) 전자는 세례받기 이전과 관련된 문제이고, 후자는 세례받기 이전과 관련된 문제이고, 후자는 세례받은 이후에 관련된 문제라고 하거나, (3) 또는 전자는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사람을 후자는 그리스도인 예언자들의 권위를 부인한다는 것, (4) 또 전자는 예수의 인성을 후자는 예수의 신성을 가리킨다 등등 많은 견해가 있으나 타당하지 않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5) 스텐달(Stendahl)과 보링(M.E. Boring)의 견해로서 인자를 거역하는 자들을 불신앙인들로서 만약 그들이 그리스도인이 된다면 죄사함을 받을 수 있다. 반면 성령이 거역하는 자들은 오순절 사건 이후에 성령강림을 체험한 그리스도인들로서 후에 배교(背敎)하거나 성령의 감동을 받아 말하는 다른 그리스도인의 메시지를 거부하는 자들로서 이들은 결코 죄사함을 받을 수 없다'고 하였다. 물론 이 견해 역시 일면 타당한 점은 있으나 전적으로 환영할 수는 없는 주장이다. 이러한 제 견해들에 비해 다음 견해는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즉 (6) 인자를 거역한다고 함은 예수 그리스도가 전하는 복음의 진리를 거부하거나 거스리는 것을, 그리고 성령을 거스리는 것은 예수가 성령의 권능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 것과 같은 놀라운 사건들(치유, 금식, 부활하심 등등)이나 성령의 내적인 감동이나 회개에 역사가 분명히 하나님 능력 안에서 행해지는 것임을 충분히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완강하게 성령의 사역을 부인하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이 해석이 정당하다면 인자와 성령의 차이는 어느 정도 부수적인(relatively incidental)것에 해당한다. 요컨대 성령을 거역하는 것은, 곧 예수 자신의 주장들을 거역하는 셈이 된다. 실로 '인자를 거역하는 데'서 전진하여 '성령을 거역하게' 되는데, 이렇게 되면 그 죄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다. 정녕 성령을 거역하는 일은 종말론적인 범죄로서 영원한 세계에 영향을 미
거역하면(* , 카타) - 일반적인 의미로서 무엇을 '반대한다'는 의미이다. 특별히 본문에서는 성령의 제 사역과 그분의 존재 자체에 대한 전면적 부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말'을 통한 훼방한 행위는 이 거역 중에 한 부분에 속한다.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 이 말을 단지 관용적 표현으로 취급하여 결단코 용서받지 못한다고 하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Plummer). 그러나 이것은 너무 안이한 해석이다. 한편 '세상'의 뜻인 헬라어 '아이온'(* )은 '세대'라는 말로 번역할 수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을 '이 세대', 즉 구약의 우대인 세대(율법시대)로, '오는 세상'은 '오는 세대', 즉 신약의 그리스도인 세대(은혜시대)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Clarke). 그러나 대체로 현존(現存)하는 세상과 예수의 재림으로 이뤄질 미래의 영원한 세계라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Calvin). 한편 유대인들은 전 역사를 메시야 이전과 이후 세계로 양분하여 생각하고 있다(에스라드마 2서 5:47,50). 그리고 로마 카톨릭에서는 '오는 세상에서의 사하심'이라는 말을 통해서 이 '오는 세상'을 현 세상과 마지막 세상 사이의 중간 기간으로 이해 함으로써 이 구절을 그들의 연옥(purgatory)설의 근거로 삼고 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용서받지 못하고, 즉 회개치 않고 죽은 불신앙인도 세상 끝날에는 용서받을 수 있다고 하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강림이 그분의 미래적 강림(* , 파루시아)의 기초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현존하는 이 세상의 모든 역사는 미래에 다가오는 세상의 역사와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가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죄사함을 받지 못할 것이라고 선포하신 것은 바로 성령 훼방의 죄를 범한 사람은 영원히 사함을 받을 수 없는 위치, 즉 마귀들과 같이 하나님의 용서와 자비의 범주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음을 의미한다.
=====12:33
나무도 좋고 실과도 좋다 하든지 - 열매에 의한 나무 판단의 교훈은 이미 7:17, 18에서 본 바 있다. 한편 본문을 이중적 구조로 이해하여 첫번째 등장하는 나무와 살과를 성령을 힘 입은 그리스도 자신과 그의 치유에 의한 선한 결과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두 번째 등장하는 나무와 실과를 스스로 악히기(나무) 때문에 성령을 훼방하는 말(열매)을 할 수밖에 없었던 바리새인들의 행각(行脚)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Alford). 실로 나무는 필연적 인과(因果) 관계에 있는 것으로 좋으면 둘다 좋고 나쁘면 둘 다 나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귀신을 쫓아내고 정의를 외치는 예수의 실과(fruit)는 결국 그 근본 나무가 선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들은 너무도 분명한 예수의 실과를 부인하지 못하였으니까 대신 예수의 나무를 비방했는데, 그들의 허구성(虛構性)이 이제 논리로 격파당한 것이다. 예수는 근본과 결과를 모두 선한 교사이신 동시에 자신의 실체를 정확히 소개, 변호할 수 있는 능력의 교사이기도 하셨다.
제3부 기사 부분인 11, 12장이 천국 복음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반응 및 이에 대한
예수의 답변이 주된 내용을 이루고 있음은 11장 강해에서 언급한 바이다. 특히 본장에
서는 날로 교묘하고 치열해가는 대적들의 비난과 음모가 집중적으로 소개되고 있다.
본장을 상고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전후 문맥의 흐름에 유의해 본 다음에 본문 자체의
내용을 분석하고 타 복음서의 내용과 간략하게 비교하기로 하자.
(1) 문맥상의 유의 사항. 본장은 그 내용상 11장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됨이 마땅하
기 때문에 중복을 피하고자 하므로 이에 관한 보다 상세한 내용은 11장 강해를 참조하
면 될 것이다. 여기서는 본장에 뚜렷이 부각된 다음 두 가지 사항에 초점을 맞추어 보
자. (까) 핍박의 가속화(加速化). 주지하다시피, 천국 복음이 두루 확대되고 온갖 이
적적 권능이 행사되자 사람들의 반응은 뚜렷이 양분되었다. 즉 일반 군중들은 대체로
예수를 환호하며 그 주위로 몰려들었던 반면 당시 종교적, 사회적 기득권자들은 예수
제거 음모에 점점 박차를 가하였다. 심지어 예수를 추종했던 자들마저 복음의 메시지
에 대한 진정한 깨달음에서라기 보다는 육신의 빵에 대한 갈망에서 모여들었기 때문
에, 핍박과 환난이 닥치면 뿔뿔이 흩어지고 심지어는 예수를 적극적으로 비방하고 모
욕할 자들이 대부분이었다(27:23). 11장은 바로 그와 같은 백성들의 영적 무지와 소그
적 불응에 관한 내용이라 해도 무방하겠다. 반면 그 뒤에 계속 연결되는 본장은 예수
와 그 복음을 적극적으로 대적하는 핍박에 관한 기록이다. (다) 메시야의 자기 계시.
대적들의 악독한 계교(計巧)와 비방에 답변하시는 중에, 예수는 '성전보다 더 큰이 '
(6절), '안식일의 주인'(8절), '고난 받는 종'(17-21절), '요나보다 더 큰이'(41절),
그리고 '솔로몬보다 더 큰 이'(42절) '하나님의 아들'(50절) 등자로 자신을 증거하셨
다. 하지만 예수의 이러한 자기 증거는 다분히 간접적이고 우회적(迂廻的)이며, 심지
어 예수는 자기를 나타내지 말도록 경계하기까지 하셨다(16절). 정해진 때가 무르익을
무렵에야 비로소 예수는 당신의 메시야적 신분 및 그 사역의 방법을 직접적이고도 공
개적으로 밝히셨거니와(16:13-21) 아직은 그러한 때가 아니었고 또한 당신의 사역의
참뜻을 알지 못한 채 표적에만 관심을 보이는 악한 세대(39절)에게 자신을 공개하면
도리어 당신이 목적한 바 공생애의 여정에 지장을 받을 것이며 또 비난과 모욕만 당할
것이었기 때문에 스스로를 간접적으로 증거하는 데에 그쳤던 것이다.
(2) 내용 구성. 예수께 대한 반대가 본장의 주된 내용임은 앞에서 지적된 바이거니
와, 이러한 주제에 착안하여 본장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첫 부분(1-45절)에
는 예수를 적극적으로 대적하는 자들이 등장하며, 둘째 부분(46-50절)은 예수의 신분
과 사역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던 가족들의반대라고 보아도 무방하겠다. 이중에서,
대적들의 비난과 이에 대한 예수의 답변은 4회에 걸쳐 반복되는데
(1-8;9-21;22-37;38-45절), 1-8절과 9-21절의 내용은 '안식일 논쟁'이라는 단일 제목
으로 묶을 수 있다. 그리고 대적들의 비난에 대한 예수의 네 차례에 걸친 답변 속에
는, 당신의 사역에 대한 변론과 베시야로서의 자기 증거 및 대적들의 허위 폭로와 그
들에 대한 심판 경고 등의 내용이 골고루 나타난다.
(3) 타 공관복음서와의 비교. 본장 내용과 평행을 이루는 세 공관복음서들 중 누가
복음의 기록이 가장 간략하므로(눅 6:1-11;8:4-18), 그리고 누가복음과 마가복음은 시
간적으로 동일한 순서에 따라 사건들을 배치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주로 본장과
마가복음의 평행 부분을 비교하기로 하자. 마가복음에 따르면 본장의 1-21절 내용은
예수께서 제1차 갈릴리 사역 당시 열 두 제자를 세우신 사건 이전에 발생한 이야기이
다(막 3:1-12). 그러므로 1-21절의 시간적 배경은 예수의 산상수훈(5-7장) 이전인 셈
이다. 반면에 22-50절은 제2차 갈릴리 사역 기간 중에 일어난 이야기이다. 여기서도
마태의 독특한 기록 의도가 잘 드러난다. 복음서는 단순히 예수의 행적을 시간순으로
나열한 전기(傳記)나 어록(語錄)이 아니라, 후대인들에게 신앙상의 지침과 모범을 보
여주기 위해 각 기자들이 나름대로의 독특한 관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 책이다
(4복음서 총론 중 '4복음서의 비교', '공관복음 문제' 등을 참조하라). 특히 마태는
타 복음서 기자들에 비해 시간적 선후(先後) 문제보다 주제별 구성 원칙에 더욱 충실
하였던 바, 본장 또한 그러한 특징을 여실히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사야
42:1-4의 인용 구절인 18-21절은 4복음서 중 마태복음에만 수록된 내용으로서, '고난
받는 메시야'에 관한 구약의 예언이 예수를 통해 성취되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처럼
구양성경이 빈번하게 인용된 것 또한, 유대인 독자들에게 에수께서 구약의 예언을 성
취하신 메시야이심을 증거하려는 본서의 기록 목적을 반영한다. 이제 이러한 몇 가지
사실을 염두에 두고서, 본장의 내용을 네 단락으로 나누어(1-21;22-37;38-45;46-50절)
구체적으로 상고해 보기로 하자.
1. 안식일 논쟁(12:1-21)
본문은 내용상 앞장의 28-30절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율법의 정신을 망각한 채
다만 형식적 규례들에 집착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율법의 무거운 집에 시달리게 하였던
바리새인들의 가르침은, 진리 안에서의 참된 '자유'를 가르치신(요 8:32) 예수의 교훈
과 당연히 충돌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본문에는 당시 유대인들이 얽매였던 '무거운
짐들' 중에서 대표적인 짐이라 할 수 있었던 안식일의 금계(禁戒)에 관한 문제가 제시
되어 있는 것이다. 이제 본문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고찰하기에 앞서 여기 수록된 안식
일 논쟁의 배경을 간략히 살펴보고 이어서 타 복음서와의 평행 부분을 비교해 보기로
하자.
(1) 논쟁의 배경. 엿새 동안 수고한 심신을 쉬면서9출 20:10) 하나님의 위대하신
창조 사역을 기억하고(창 1:1-2:3) 하나님께 온전히 예배드리며 신령한 영적 교가를
나누도록 하기 위해 마련된 안식일 제도는 하나님의 직접적 명령에 그 기원을 두고 있
다(출 16:21-30;31:12-17). 그리고 안식일 준수느 십계명 중 제4계명에 해당하며*출
20:8-11) 안식일에 일하는 자는 사형에 처해졌다(출 31:14;35:2). 그러나 예수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안식일의 참된 뜻보다는 그 형식적 준수 자체에 더욱 골몰한 나머지
온갖 금지 규례들을 문자적으로 지키기 위해 힘을 낭비하였다. 본문에서도 그들은 예
수의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먹은 것을 '일'한 것으로 단정하고 정죄하였던 것으로 보
인다.
(2) 타 복음서와의 비교. 마가복음 2:23-3:12와 누가복음 6:1-11에도 본문과 평행
되는 기사가 수록되어 있다. 이 중 사건의 세부적 설명은 마가복음에서 가장 소상히
다루어졌는데, 이는 예수의 사역을 강조하는 마가복음의 특징을 반영한다. 반면 마태
는 막 3:7-12의 내용을 단 두 절로(15,16절) 압축해 버리고 대신 이사야 42:1-4의 예
언을 첨가시킴으로써(17-21절) 구약의 성취자로서의 예수의 위상(位相)을 강조하며 에
수의 삶의 의미 문제에 보다 깊은 관심을 나타내고 있다.
(3) 내용상의 특징. 본문자에 관한 보다 상세한 주해(註解)는 주석 부분을, 그리고
안식일의 의의나 안식일과 주일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눅 6:1-10와 고전 16:2 및 출 31
장 등의 주제 강해를 각각 참조하기 바라며, 여기서는 본문 내용에서 드러나는 전반적
인 특징에다 초점을 맞추어 보기로 하자. (까) 구약이 많이 인용됨. 안식일에 이삭을
잘라먹은 제자들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비난을 일축시키기 위해 예수는 삼상 21:1-6의
고사(故事)를 인용하셨다. 그리고 스스로 율법 준수에 철저하노라고 자부하는 바리새
인들의 허상을 드러내개 위해 의도적으로 율법상의 규례로써 반박하셨다(5,11절). 뿐
만 아니라 선지자의 글을 인용하사(호 6:6) 당신의 말씀의 진실성을 보다 확고히 입증
코자 하셨다. 한편, 18-21절은 본서의 저자인 마태 자신이 구약 성경을 인용하여 예수
를 증거한 내용이다. (다) 논지를 심화시키심. 바리새인들은 안식앨에 이삭을 잘라 먹
은 행동을 심각하게 비방하고 나섰다. 하지만 예수는 이삭이 아니라 진설병, 곧 오직
제사장만이 먹을 수 있었던 진설병을 다윗이 먹었던 사실을 지적하심으로써 문제를 더
욱 심화시키셨다. 그리고 이어 당신을 '성전보다 더 큰 이', '안식일의 주인' 등으로
언급하심으로써 보다 근본적인 진리에로 인도하고 계신다. 이러한 사실은 뒤에 곧바로
이어지는 치유 기사(9-13절)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7절) 혹은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12절)와 같은 말
씀은, 율법의 더 중한 바 의(義)와 인(仁)과 신(信)을 버리고 박하(薄荷)와 회향(茴
香)과 근채(芹菜)의 십일조를 드리는 일에만 골몰했던 의식자들에 대한 경고의 말씀과
그 맥을 같이한다(23:23). (따) 만백성의 구주이신 예수의 모습을 드러냄. 마태에 의
해 본문에 인용된 이사야 42:1-4의 말씀은918-21절) 점점 고조되는 핍박의 열기와 때
를 같이하여 인용되었다는 점에서 각별한 주의를 환기시킨다. 즉, 대적들의 핍박과 모
욕에도 불구하고 메시야께서는 그들과 더불어 '다투지도 들레(make a nose)지도' 아니
하고 무력(武力)이 아니라 오직 사랑으로써 당신의 사역을 완수하시며, 또한 '상한 갈
대'요 '꺼져가는 심지'와도 같은 연약한 인생을 위해 친히 대속의 십자가를 지는 '고
난받는 종'으로써 당신의 사역을 완수하신다는 것이다. 특히 이사야서의 인용 구절은
유대인들의 냉담과 팝박으로 말미암아 예수의 복음이 이방인들에게로 확대되어갈 것임
을 부각시키고 있다(18, 21절). 이는 당시 유대인들의 편협한 국수주의나 선민으로서
의 특권 의식에 대한 경계였다고도 볼 수 있겠다. 요컨대, 17-21절 내용이 얼핏 보기
에는 안식일 논쟁(1-13절)과 별다른 관계를 맺고 있지 않는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대적들의 핍박에 대응하는 메시야의 사역 제도, 형식적 율법준수나 배타적 교리 보다
는 사랑으로써 영육간의 필요를 공급하시는 메시야의 사역 방법 그리고 온 세상 만민
을 구원하신다고 하는 메시야의 사역 범위 등의 측면에서 앞내용과 무난하게 연결되고
있는 것이다.
* 성전보다 더 큰 이. 유대인들은 성전에 대하여 극단의 존경심을 가졌다. 왜냐하
면 그들은 성전을 유일하신 여호와의 상징으로서 실체이신 하나님 다음가는 존재로 여
겼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성전을 금(金)으로 입히고 성전을 모독하는 자를 극
형에 처하기까지 했다(행 6:13). 바로 이러한 상황 중에 예수는 자신을 가리켜 '성전
보다 더 큰 이'로선언하셨던 것이다.
따라서 이 선언은 (1) 유대적 관점에서 볼 때 형식적인 성전과 율법을 초월한 존
재, 곧 예수 자신의 절대적 신성(神性)을 공개적으로 선포한 것이다. (2) 신약적 관점
에서 성전은 사실상 임마누엘로 오실 예수를 예표하는(히 8:5) 일시적이고 모형적 역
할을 하는 것으로 예언된 임바누엘의 도래로 인해 그 직능을 모두 마쳤음을 나타낸 것
이다.
이제 임마누엘로 오신 예수는 한시적인 성전의 기능을 전적으로 승화, 성취하신 것
이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절대적 가치로 여겼던 율법과 유전으로써 예수를 평가하거
나 정리하는 일은 참으로 그릇된 일이 아닐 수 없다. 진정 그분은 모세보다 크시며 아
브라함보다 크신 분으로서(요 8:58) 그 어떤 인간의 평가 기준에서도 초월하여 계시는
'성전보다 더 크신 분'이시다. 실로 그분은 오직 믿음과 찬양의 대상일 뿐이다.
* 이사야의 입을 통해(사 42:1-4) 본 에수의 성품. 장차 임할 메시야를 고대하며
예언했던 선지자 이사야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메시야의 성품이 발견된다.
(1) 조용하고 인내심이 강한 성품. 즉 그분은 '다투지 아니하며, 들레지도(소리 지
르지도) 아니하기에 아무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할 것이었다.' 진정 예수는 이 예
언과 마찬가지로 온갖 비난과 악의적인 도전에도 그리고 죽음의 순간에서도 아무런 불
평을 하시지 않고 조용히 하나님의 뜻을 이뤄가셨다(26:62,63;27:14;사 42:2;53:7;요
8:6).
(2) 인자하고 지극히 친절하며 온유하신 성품. 즉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고 꺼
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는' 것이 바로 그분의 모습이
다. 진정 그분은 좌절과 실의로 인해 마음이 어그러진 바, 외적으로 보기에 회복 가능
성이 거의 없어 보이는 버려진 영혼들마저 끝까지 감싸 안으시며 그들의 구원과 회복
을 위해 힘쓰신다(9:9-13;사 42:3;57:15). 이같은 뜨거운 열정과 끈끈한 인간애(人間
愛)야말로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들의 구원의 근본 동인(動因)인 것이다.
2. 바알세불 논쟁(12:22-37)
앞단락에 이어 본문에서도 예수께 대한 핍박에 관한 주제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어떻게 해서든 예수를 제거하려고 안달하였던 대적들의 음흉한 저의에는 변함이 없었
다. 하지만 본문은 그들의 핍박 양상이 시일이 지남에 따라 더욱 격렬하고 노골화되어
갔음을 보여준다. 앞에서는 대적들이 그나마 객관적 근거하에 예수를 제거할 만한 구
실을 찾기 위해 이모저모로 노력하였음을 시사한다. 하지만 그들이 논쟁으로써 예수의
지혜를 따라잡을 수 없음을 번번히 알게 되자, 이제 본문에서는 다짜고짜로 예수를 귀
신의 왕 바알세불에 접신(接神)된 자로 몰아붙이고 있는 것이다. 본문의 내용에 관한
보다 상세한 주해는 마가복음 평행 부분93:20-30)의 강해에서 다루기로 하고 여기서는
대략적인 내용을 분석하는 데에 그치기로 한다.
본 단락은 내용상 네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첫 부분(22-24절)은 바알세불 논쟁의
배경과 경위를 밝히는 내용이다. 둘째 부분925-27절)은 대적들의 비방에 대해 예수께
서 정연한 논리로써 반박하신 내용이다. 예수께서는 두 가지 논거로써 반박하셨다. 먼
저, 만일 예수께서 바알세불의 힘을 빌어 귀신을 쫓아내셨다고 한다면, 바알세불이 자
신의 세력을 제거해 버린 셈이 되고만다는 사실이 지적되었다. 그리고 두번째로는, 바
리새인들 중에도 귀신을 내어 쫓는 자들이 있었는데 귀신을 내어쫓는 일을 바알세불의
역사(役事)로 몰아붙이는 것은 자기 모순이 아니냐는 지적이었다. 세째 부분(28-30절)
에서 예수는, 대적들의 비방과 모함에 대해 변호하는 차원을 넘어 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셨다. 그리고 이어서 마지막 부분에서는 (31-37절) 대적들에 대
한 엄중한 경고와 심판이 선언되었다. 그중에서도 31,32절은 성령의 역사를 바알세불
의 역사라고 비방한 죄가 얼마나 큰 죄악인가를 지적하고 있으며 33-37절은 대적들의
근본적 죄성에 대한 엄중한 심판 선언이 제시되고 있다.
* 용서받지 못하는 죄. 무한한 사랑으로 인간을 구원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은 인간
이 범한 그 어떤 죄라도 '회개'하기만 하면 '용서'해 주실 것이다(사 1:18;요 3:16).
그러나 단 한 가지 죄, 곧 '성령을 웨방하는 죄'는 정녕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이
는 예수의 십자가 대속 사역이나 하나님의 자비가 한계성을 지녔거나 또는 성령이 성
부, 성자보다 더 절대적 위상(位相)을 지녔기 때문이 아니다.
그러면 과연 '성령을 훼방하는 죄'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이의 대답에 앞서 성령의
중요한 사역을 살펴보면 (1) 죄인들로 하여금 죄를 깨닫고 회개하게 하며, (2) 중생케
하고, (3) 예수의 초청을 받아들이게 하며, (4) 빛과 진리로 인도한다. 이를 한 마디
로 말하면 성령께서는 창조와 구속의 완성을 위해 활동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란 (1) 인간의 심령에 찾아오셔서 감화 감동케 하여
회개의 길로 인도하시는 성령의 적극적 활동을 의지적으로 배척, 비난하는 것, (2) 성
령의 역사가 분명함에도 오히려 그것을 사단의 일로 단죄(斷罪)하는 것, (3) 성령의
능력과 후원을 덧입고 방해하거나 핍박하는 것, (4) 성령의 역사를 사칭(詐稱)하여 자
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 등을 가리킨다고 본다. 이처럼 성령의 사역을 고의적으로 적
극적으로 방해하는 사악한 심령은 참회와 중생의 기회를 더 이상 가질 수 없기 때문에
끝내 영영한 심판의 자리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요 3:36).
3. 요나의 표적(12:38-45)
본문은, 주님께서 표적을 구하는 자들의 완악한 심령을 호되게 질책하신 내용이다.
왜냐하면 본문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표적을 구한 것이 믿음을 갖기 위해서가 아니
라 예수를 모함할 구실을 찾기 위해서였기 때문이다. 이미 예수는 문둥병자를 위시한
수많은 병자들을 고치셨고(8:2-4;눅 4:40, 41) 죽은 자를 살리시는(9:24,25) 이적적
권능을 허다하게 나타내 보이신 바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이적들을 본문의 바리새인 들
도 보거나 들었을 터였다. 그러나 대다수 사람들은 주께서 이적을 베푸신 목적을 깨닫
지 못하였으며 본문의 대적들은 그 이적을 사술(邪術)로 간주하였던 것으로 보인다(24
절).
본 단락의 내용을 상고함에 있어 우리는 다음 두 가지 특징적인 사하에 초점을 맞
추기로 하자.
(1) '천국'과 '핍박'이라는 주제가 부각됨. 천국 복음의 확장과 더불어 대적들의
핍박이 가속화되어갔다는 사실은 본장 강해에서도 언급된 바 있거니와, 본문에서도 그
러한 주제가 계속 이어진다. 즉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주목적은 죄인들을 불러 회개
케하고 그리하여 천국 백성으로 삼는 데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표적 자체에만 관심
이 잇는 완악한 세대에게 본문은 경고를 발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 경고의 직접적
대상은 표적 보여주기를 간구한 선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었지만, 예수는 당시 유대 백성
들의 일반적 완악성을 통감하셨던 까닭에 '이 세대 사람' 전체(42절)에게 경고의 메시
지를 발하셨다. 예수께선 전하신 천국복음의 메시지를 배척하거나 냉담하게 대했던 유
대인들의 영적 상황을 예수는 '나중 형펀애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된 귀신 들린 자의
상태에 비유했다(43-45절). 이 비유가 역사적으로는, 바벧론 포로 생활로부터 귀환한
유대인들이 우상 숭배를 버렸으나 그 이후 인존주의적이고 형식주의적인 종교 생활로
말미암아 참된 신앙을 상실하고만 것을 가리킨다. 이는 13장의 천국 비유 가운데 '돌
밭'에 떨어진 씨에 비견될 수 있겠다(5절). 어떤 계기에 의해 복음과 접하게 되었을
때 즉각적 관심을 보이기는 하되 근본적 변화가 뒤따르지 않는다면 그러한 인간적 관
심은 십게 변질되고 만다. 그리고 한때 복음을 믿노라고 하다가 불신앙에로 돌아선 자
들은 더욱 철저히 무관심해지거나 반대자로 변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복음에 관한 지
식을 나름대로 정립하고 있으므로 그 역(逆)논리로써 복음을 공박하려하기 때문이다.
역시 유대교 지도자들이 그토록 복음의 진리를 핍박한 이유 또한 그들 나름대로의 종
교와 신앙에 몰두하고 있었기 때문이라 하겠다.
(2) 십자가 수난과 부활이 암시됨. 본격적인 수난 예고는 메시야의 공개적 자기 계
시와 함께 이루어졌다(16:17-21). 그러나 예수는 당신이 이 땅에 나신 목적을 애초부
터 잘 알고 계셨기 때문에 당신의 자의식(self-consciousness) 속에서 십자가 수난과
부활이 늘 예건되어 있었다. 본문에서 예수는, 표적을 구하는 자들에게 가장 결정적인
표적으로서 '요나의 표적'을 언급하셨는데 이 또한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자의
식을 반영한다. 한편, 요나 사건 외에 구약성경에서 갈보리 십자가 사건을 예측하는
것으로 우리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외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
했던 사건을 기억할 수 있다(창 22:1-19). 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구속사적으로 직결되는 예측적 사건이었다.
4. 그리스도의 영적 가족(12:46-50)
본문에는 예수의 육신상의 가족이 찾아오게 된 배경이 밝혀져 있지 않지만, 마가복음 3:20,21 및 전후 문맥을 통해 우리는 그 배경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즉, 대적들이 예수를 귀신들린 자로 취급하고 핍박의 열기를 더해가자, 가족들은 예수의 신변을 염려하여 집으로 데려가고자 했던 것 같다. 가족들이 예수를 직접적으로 배척하지는 않았지만, 예수의 신분과 사역의 참된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오직 인간적 염려에 사로잡힌 나며지 그 활동을 반대하고 제한하려 한 것은 복음의 걸림돌 가운데 하나였다(10:36). 아마도 가족들의 눈에는 어려서부터 탁월한 재능을 보였던(눅 2:40) 유능한 예수께서 일생을 낭비하고 있는 것으로 비쳤을지도 모른다. 한편 본문에 언급된 예수의 말씀 속에는 다음과 같은 의도가 내포되어 있을 것으로 보인다.
(1) 제자들에 대한 위로. 날로 흉포해져가는 핍박의 기세와, 당대의 대다수 백성들을 겨냥한 예수의 비관적 경고(39-42절) 등을 접한 제자들은 고립감과 불안을 떨쳐버릴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자들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심으로써 제자들을 위로하셨다. 오늘날 성도들도 진리를 위해 핍박당할 때에 허막(虛寞)한 광야에 홀로 선 듯한 고립감에 지레 빠져들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당신의 구속 역사를 완성시키기 위해 항상 당신의 뜻에 순종하는 믿음의 용사들을 남겨두시기 때문이다. 엘리야 시대에도 모든 사람들이 바알에게 무릎을 끓은 것처럼 보여차지만, 사실은 무려 7천명에 달하는 신앙의 용사들이 남아 있었다(왕상 19:18).
[2) 교회 공동체의 결속 강화. 본문의 말씀은 육신상의 가족관계를 부인하거나 무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요 19:26,27) 다만 예수를 중심으로 새로이 형성되어가는 공동체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또한 하나님의 뜻을 실행하는 일에 우선권을 주기 위한 것이었을 따름이다. 예수의 피로 사신 바된 교회는 인종과 지역을 초월하는 우주적 실체이며 과거와 현재는 물론 미래의 모든 성도들이 함께 동거하는 영구적 공동체이다. 따라서 교리 공동체의 성원들은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함께 살아가게 될 참된 가족이요 한 몸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하겠다(고존 12;12;계 5:9).
(3) 제자화 훈련의 일환. 본문은 단순히 가족들의 영적 무지와 반대를 보여주려는데 일차적 목적을 두고 있지는 않다. 보다 더 중요한 주안점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가를 가르치려는 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천국 복음을 위해서는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마저 버려야 할 상황 마저 감수해야 한다는 의미이다(눅 18:29).
* 예수의 영적 가족들. 예수는 모친과 등생들이 당신을 찾아온 때에 당신이 추구하는 영적 가족상을 제시하셨다. 그것은 "하늘에 게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는 사실이다.
예수께서 이런 새 가족상을 제시한 근본 의도는 출생과 유전으로 이뤄지는 육체적 가족 관계보다 영혼의 거듭남으로 하나님을 신앙하게 된 신앙 공동체의 관계가 하나님 나라에서 더욱 소중하다는 사실을 가르치고자 하셨던 것이다. 그렇다고 지상에서의 혈연적 가족 관계가 결코 무시되거나 부정되어서는 안된다.
실제로 예수는 당신의 죽음을 밑거름으로 세워질 교회를 통하여 보다 더 위대한 영적 가족 관계를 맺기 전에 먼저 이 땅의 한 가정에 아들로 태어나 육신적 혈연 관계를 맺으셨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예수는 유년 시절 요셉과 마리아에게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밝힘으로써 자신은 단지 혈연적 가족 관계에만 묶일 수 없는 분이심을 드러내보이셨다(눅 2:49).
실로 에수께서는 당신의 십자가 희생을 통하여 단절되었던 하나님과 인간 관계를 회복하셨을 뿐 아니라(갈 3:19,20;딤전 2:5; 히8:6;9:15) 시기와 분쟁과 상처로 얼룩진 인간과 인간 상호간의 관계마저 회복하시는 새 가족에의 길을 여셨다(롬 12:5). 정녕 찢어진 사회가 하난가 되고 분열된 인류가 한 가족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시고 또한 모범을 보이신 바, '하늘에 계신 성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참신앙의 자리에 서야만 한다(롬 12:4; 고전 6:5;12:12-27;엡 4:25;5:30). 이를 무시한 그 어떤 평화 운동도 인류를 근본적으로 하나되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 때에...안식일에 - 이삭이 익은 것으로 미루어 보아 예수께서 돌아가시기 일년 전 4월의 유월절과 밀추수를 기념하는 칠칠절(태양력으로는 5-6월에 해당)의 중간 어느 한 안식일이다. 그런데 이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안식일을 취하신 날로서, 율법에는 이 날을 기념할 것과 쉴 것을 동시에 명하고 있다. 만약 이 명령을 어기는 자에게는 죽음과 같은 극단의 형벌이 예비되어 있었다(출 20:9 ff ; 31:14 ff ;신 5:12 ff).
밀밭 사이로 가실새 - 먼저 랑게(Lange)에 의하면 전답(田畓)으로, 루터(Luther)에 의하면 곡식으로 이해되고 있는 '밀밭'(* , 스포리모스)은 파종한 밭 혹은 곡식 밭으로 이해되며, 그중에서도 특별히 '보리밭'으로 해석 될 때가 많다. KJV에서는 '곡식밭'(grainfieled)으로 번역하고 있다. 한편 본문에 언급된 바 제자들이 이삭은 잘라 먹은 일에 대한 시비가 논쟁의 초점으로 대두된 것으로 보아 이때 예수의 사건은 바리새인들이 규정하고 있는 안식일에 여행할 수 있는 거리(약 1.8km) 내에서 발생한 것이 분명하다. 한편 그 당시 팔레스틴에 있는 경작지들은 대부분 길고 좁다란 이랑으로 되어 있었는데, 그 이랑 사이의 땅이 사람이 지나다니는 통로로 활용되었다.
제자들이 사장하여 - 그 당시 제자들은 안식일의 그지 조항을 간과해 버릴 만큼 몹시 배가 고파 있었던 것이다. 이는 그 당시 예수의 선교활동이 매우 활발하고도 촉급하게 진행되고 있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이삭을 잘라 먹으니 - 율법에 의하면 이 행위는 추수하는 것과 동일한 일로 간주되었다. 한편 평행구인 눅 6:1에 보면 '손으로 비비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는 타작(打作)에 해당되며 만약 그 이삭 껍데기를 입으로 불어 털어 버렸다고 한다면 그것은 정미(精米)하는 행위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신 23:25에는 시장할 때 남의 밭에 가서 이삭을 잘라 먹는 행위가 허용)許容)되고 있다. 따라서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먹은 행위 자체는 결코 죄가 되지 않지만 그 일을 안식일에 행했다고 하는 문제가 발생된 것이다. 실로 유대인들의 율법주석서 미쉬나(Mishina)에 따르면 '안식일에 어린 양이 한 입에 넣을 남큼의 이삭을 잘라 취하는 것도 죄가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M. Sabbath, 7:4).
=====12:2
바리새인들이 보고 - 이는 한 순간의 동작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관찰을 의미한다. 즉 그들은 칼끝같은 눈초리로 예수의 무리들을 항상 예의 주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께서 고하되...당신의 제자들이 - 바리새인들의 시선은 현상적으로는 제자들에 게 머물러 있었지만 근본적으로는 예수께 고착(固着)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즉, 그들은 사사건건(9:14 ; 15:2) 제자들의 반율법적 행위를 빌미로 예수께 도전과 비난을 일삼았다.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 - 여기서 '하지 못할 일'에 해당하는 '욱크여세스틴'(* )는 '합당치 못한 일'을 의미한다. 한편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일에 대한 규정은 모세의 율법에 의한 것이 아니라 조상의 유전에 의한 것으로 39개의 항목이 있다. 즉, 39개 항목이 기록된 할라카(Halakah)에 의하면 성전에서 예배드릴 경우나 기근(饑饉) 등으로 인해 생명이 위태로울 경우에는 그것을 지키지 않아도 되지만 본문의 경우에서처럼 피할 수 있는 경우에는 밀추수를 하는 일은 엄연한 범법(犯法)행위가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본 사건이 있은 때보다 훨씬 후에는 이 조항들이 다소 완화되어 안식일일지라도 손으로 곡식을 잘라 먹는 것은 허락하지만 어떤 기구를 사용하는 것만큼은 금지하였다(The Gemara).
=====12:3
다윗이...시장할 때에 한 일 - 이는 삼상 21:1-6에 나오는 사건으로서, 다윗이 요나단의 도움으로 자신을 죽이려던 사울을 피하여 호위병 몇 명과 함께 도망하다가 놉에 있는 하나님의 전(殿)에 들어가 제사장 아히멜렉이 주는 거룩한 떡으로 그들의 주린 배를 간신히 채웠던 일을 말한다. 그런데 이일은 제사장만이 그 거룩한 떡, 즉 하나님 전에 진열되었던 12개의 떡을 먹을 수 있다고 하는 모세의 율법(레 24:5-9)을 위배(違背)한 행위가 된다. 또한 삼상 21:5-6의 본문에는 진설병이 방금 대체(代替)되어 있는 것처럼 묘사되어 있기 때문에 이 사건이 안식일에 발생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이를 뒷받침이라도 하듯이 유대사가 요세푸스는 진설병은 금요일에 만들어져 다음날 안식일에 진설했고, 그 묶은 것은 대체되어 제사장의 몫이 되었다고 한다(Josephus, Antiq., III, 10:7). 여하튼 예수의 의도는 다윗이 시장할 때 몬세의 율법을 어겼으므로, 시장한 그의 제자들이 조상의 유전을 어긴 행위도 용납될 수 있는 것이며, 어떤 예외(exception)들을 허용해야 한다고 하는 사실들을 주장하시려는 것이 아니다. 예수는 다만 구약 자체는 다윗의 그러한 행위를 정죄하지 않았다고 하는 사실을 지적함으로써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지나치리만큼 무리하게 해석하는 것은 성경의 근본 정신에 어긋난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려는 것이다(Cranfield). 즉 예수의 기본 관점은 '안식일이 너희에게 주어진 것이지, 너희가 안식일에 주어진 것이 아니다'(Mek Exod 26:13 ; 2 Macc. 5:19)에 지나치리 만큼 매사에 적용하고, 유전을 사람보다 더 귀한 것으로 여기는 태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실로 아히멜렉이 율법의 규정을 어기면서도 다윗과 그의 소년들에게 떡을 주었다고 하는 사실을 알고 있는 바리새인이라고 한다면 시장한 예수의 제자들의 행위를 당연히 용납했어야지 정죄해서는 안되었던 것이 아닌가(Hooker).
=====12:4
하나님의 전 - 이는 솔로몬 때에 건축된 성전이 아니라 광야의 여행길을 앞서 가며 이스라엘을 인도했었던 그 희막을 가리킨다(삿 18:31). 그러나 '하나님의 전'이라는 이 표현은 신.구약을 통틀어 하나님이 거처(居處)하시는 거룩한 곳이라는 보편적 의미로 흔히 사용되기도 했다(대하 5:14 ; 딤전 3:15).
진설병 - 이스라엘 12지파의 수(數)에 따라 성소의 금상위에 두 줄로 배설했던 12개의 떡이다(출 25:30 ; 레 24:5-8). 이는 제사 제물이 아니라 여호와의 생명적 교제를 상징하는 것이며, 궁극적으로 주의 거룩한 성만찬을 예시(豫示)하고 있다.
=====12:5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 다윗의 안식일 예외 조항에 이은 두번째 예외 사례이다. 안식일 법은 출 20:8-11과 신 5:12-15의 십계명 중 제 4계명에 근거를 둔 것이다. 그러나 제사장들은 아무 일도 할 수 없도록 규정한 안식일 규례에도 불구하고 성전안에서 매 안식일마다 하나님께 경배드리는 의식(儀式)을 행할 때 몇 가지의 일들, 예를 들어 진설병은 대체시키는 것(레 24:8), 수양 둘을 희생제물로 드리는 것(민 28:9-10) 등의 직무를 행한다. 이러한 율법의 규정은 안식일에 관한 법이 하위법이요, 성전에 관한 법이 상위법이며 또한 상위법을 지키기 위해 하위법을 범(犯)해도 된다고 하는 사실을 구약성경 자체가 인정하고 있다고 하는 것을 의미한다. 문제는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일 규정을 범한 것과 안식일에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먹은 행위와 어떤 연관성이 있는가 하는 사실이다. 존칼빈(J. Calvin)은 '성전법이 희생드리는 일과 모든 외적 제사에 관련된 제사장들이 안식일 범법행위를 거룩한 것으로 인정한다고 한다면, 참되고 신령한 성전인 예수께서는 그 예배자들이 신성한 의무를 행할 때 그들이 범한 모든 과오(예를 들어 안식일을 범하는 것)를 보다 더 거룩케 하실 능력이 있다. 더욱이 제자들은 현재 복음으로 인해서 다소 거룩해진 그들의 영혼과 육신을 강건하게 하여 복음전파 사역을 제대로 감당하려고 하는 생각에 열중해 있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제자들이 안식일을 범한 행위는 제사장들이 안식일에 제사를 지냄으로써 안식일 규정을 어기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의 대속사업의 지속과 복음전파를 돕는 것과 예배를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할 때에 이는 결코 과오로써 인정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실로 제사장들이 안식일에도 불구하고 성전 제사를 집례(執禮)하기 위해 일을 하여도 율법적으로 아무런 하자(瑕疵)가 없었다면, 그 성전과 제사의 궁극적 존재이신 예수와 그의 사역을 위해 안식일을 범한 제자들의 행동도 아무런 문제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 예수께서는 율법 자체가 예외적이기는 하지만 분명히 안식일의 노동을 명시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레 24:8) 안식일에 대한 당신의 새로운(유대인의 고답적인 사고에 대한 입장을 표명하셨다. 실로 예수께서는 안식일을 위한 외적이고 통속적인 규례를 철폐(abolition)하시고(F.R.Fay)이제 하나님 중심의 내적이고 본질적인 규례를 깨우치고 계신 것이다.
=====12:6
성전보다 더 큰 이 - 성전법이 안식일 법에 우선하듯이 성전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활동은 성전법보다 우선한다. 이구절의 논쟁의 형식은 할라카(Halakah)의 매 규정들을 확립시키는 데에 있어서 이미 공인(公認)된 논증 절차인 '칼 와호메르'(qal wahomer)에 해당한다. 이 '칼 와호메르'는 문자적으로는 가벼운 것과 무거운 것, 즉 어떤 애매모호한 논리에 대해 더 분명한 논리를 제시하는 논쟁법이다(Daube). 한편 성전보다 '더 큰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이존'(* )은 남성명사일 수도 있고 중성명사일 수도 있다. 따라서 이 '메이존'에 대한 견해는 (1) '예수가 하나님께 예배드린 것'이 성전에서의 '제사장 예배'보다 더 위대하다는 의미라고 하는 게하르트슨(B. Gerhardsson)과 힐(David Hill)의 주장, (2) 성전보다 더 크다는 것은 사랑의 계명을 의미한다고 보는 시갈(Sigal)과 콘 쉐어봐(Chon Sherbok)의 견해가 있다. 이들은 7절의 '자비를 원한다'는 말씀을 근거로 삼고 있다. 또한 (3) 성전보다 더 큰 것이 굶주림에 대한 긍휼의 생각 혹은 사랑의 운동이라고 여기는 슈티엘의 견해가 있으며, (4) '메이존'은 바로 예수 자신을 가리킨다고 보는 보른캄(Bomkamm)과 그랜더(Georfges Grander)의 견해가 있다. 이중 (4)의 견해가 가장 설득력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는데 이 주장에 따르면 성전은 안식일보다 더 크고 예수는 성전보다 더 크신 분이시다. 이는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의 율법 이해에 의해서도 알 수 있는데, 율법은 바로 예수 자신을 가리키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 분 안에서 율법은 비로소 완상된다고 하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5:17-48). 여기에서 더 나아가서 자신을 성전보다 더 큰 이라고 표현한 것에 대해 이는 예수의 권위가 제자들이 안식일에 이삭을 잘라 먹은 행위를 무죄(無罪)케 하는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뒷받침한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Lohmeyer). 따라서 예수가 그의 모든 제자들이 바로 신약 시대에 있어서 제사장이 된다고 하는 사실을 암시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 주장은 크게 환영받지 못하고 있다. 이와는 별개로 '예수가 성전보다 더 큰 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것은 바로 예수 자신의 권위와 제사장들의 권위를 대조하는 문제에 관한 것'이라고 하는 견해가 있다(Carson). 사실 성육신(Incamation)하신 말씀으로서의 신인(神人), 즉 성전의 실체이신 예수의 절대적이고 여원한 권위는 제한적이고 상대적인 인간 제사장의 그것을 훨씬 능가
=====12:7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 이미 앞에서(9:13)인용된 바 있는 호 6:6의 말씀으로 '자비가 제사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자비의 헬라어인 '엘레오스'(* )는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친절과 구제 행위로서 중심에 사랑과 자비와 헌신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과 부합되는 경건한 행위이다. 그리고 제사를 뜻하는 '뒤시아'(* )는 연기로 제사를 올리는 희생 제물이나 제사행위를 말한다. 물론 여기서는 단순히 형식적이고 습관적이며 무의미한 종교 행위라는 의미가 강하게 내포되어 있다. 따라서 '자비를 원한다'고 하는 것은 단순히 제사 행위를 부인하거나 중단해 버리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종교적 의무를 배겨고한 채 온전히 인본주의만을 주장한 것도 아니다. 이것은 분명 하나님의 뜻, 곧 사랑의 계명을 온전히 실천하는 자비의 행위를 율법의 의무보다 우위에 두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자비와 제사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할 피치 못한 경우가 생겼을 때에는 제사보다는 오히려 자비가 먼저 베풀어 진다고 해서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예배가 소홀해졌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너희가 알았더면 - 예수는 또 다시 바리새인들이 성경을 바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책망하셨다. 즉 율법을 대하는 바리새인들의 태도는 호세아 시대 사람들이 피상적(superficial)이고 위선적으로 종교의식에만 관심을 기울였던 것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고 책망하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율법의 진정한 의미, 즉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에 대해서 알지 못하며 그들의 유전인 할라카가 바로 이를 입증한다고 하는 것이다. 실로 종교의식에만 관심을 갖는 바리새인들의 잘못은 '모든 세대 사람들의 공통된 과오'에 속한다고 피력한 칼빈(Calvin)의 견해는 깊이 음미해 볼 만한다.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 - 이로써 제자들은 예수로부터 무죄(innocent)하다고 하는 선언을 받은 셈이다. 물론 제자들이 죄가 없다고 하는 것은 그들이 배가 고픈 상황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는 로르도르프(Rordorf)의 견해보다는 오히려 성전보다 큰 이가 그들과 함께 게시며 그들의 행위를 정당하다고 인정했기 때문이라고 하는 카슨(Carson)의 주장이 더 적절한 해석이 될 수 있다.
=====12:8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 - <눅 6:1-5 주제 강해 '안식일과 예수님과의 관계' 참조>. 막 2:27에는 안식일 제정(制定)의 근본 목적을 정의한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라는 말씀이 있는데 마태와 누가는 이를 생략하고 있다. 마태는 1-7절의 말씀의 요점을 제사와 자비의 대조적 비교나 안식일의 기원은 사람의 안식을 위한 것이라고 하는 사실에 두지 않고 오히려 기독론(Chriistology)에 그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사람에 대한 언급은 생략하고 인자가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였다. 랑케(Lange)에 의하면 주님은 그 자신이 신령한 안식이 되시므로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은 안식일 준수(observance)가 되며 그를 떠나는 것은 바로 안식일의 파괴가 된다고 하였다. 특히 '주인'이라는 말은 어떤 일에 대한 주체적 운용자(運用者)라는 측면에서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는 안식일을 소유하고 주관하며 안식일 규례를 해석하며, 지금까지 가려워졌던 안식일이 지닌 참 자유함과 참 평안을 들추어내 모든 이들에게 그것들을 향유(enjoyment)할 수 있게 하실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칼빈(Calvin)은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는 말씀은 바로 안식일에 얽매여야 하는 의무로부터 사람들을 해방시키기 위한 권세를 예수께서 받으셨다고 하는 것이며, 따라서 사람들로 하여금 감당할 수 없이 복잡하고 까다로운 율법을 멍에에서 벗어나서, 멍에를 대신 져 주시는 주님에게로 와서 쉼을 얻으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하였다. 실로 인간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신 종말론적 메시야이신 인자, 곧 예수는 그 인간들을 위해 안식일을 개방하고 계신다.
=====12:9
거기를 떠나 - '떠나다'의 뜻인 헬라어 동사 '메타바이노'(* )의 일상적 의미는 '자리를 바꾸다'이지만 특별한 본문에서는 이야기를 화제나 그 이야기가 진행되던 장소와 시간 등이 전면적으로 바뀌었음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요 5:24 ; 오일 3:14에서는 사마에서 생명으로 옮기웠음을 나타낼 때 이 '메타바이노'를 사용하고 있다. 한편 본문의 평행구인 눅 6:6에 의하면 회당에서 손 마른 자를 고친 사건이 일어난 날은 밀밭에서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먹은 사건이 바로 그 안식일과는 다른 인식일 날로 보고(report)하고 있다. 따라서 마태가 사용한 '메타바이노'란 말과 누가의 기록에 의해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신 날이 같은 안식일이 아니라 또 다른 안식일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시간의 공백과 장소 변경이 예수께서 유월절을 예루살렘에서 보내시고 거기를 떠나 갈릴리로 되돌아가신 여정(旅程)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그레스웰). 물론 '메타바이노'는 복음서의 다른 곳에서도(11:1 ; 15:29) 이미 '되어진 한 여정'을 나타내는데 사용되었으며, 요 7:3에서도 '여기를 떠나'의 뜻인 '메타베디 엔튜덴'(* )이라고 하는 유사한 표현이 갈릴리에서 유다로 간 여행에 사용되고 있다. 여하튼 비록 이동된 장소가 과연 어디였는지 또 시간적으로 1-8절과 얼마만큼의 간격이 있는지는 확정적으로 단정할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그 날이 바로 '안식일'이었으며 그것 때문에 논쟁이 발생되었다고 하는 사실이다.
저희 회당에 들어 가시니 - 본장에서의 두번째 사건인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신 것과 그에 따른 논쟁의 무대(setting)가 된 '저희 회당'이란 표현은 마태가 복음서를 기록할 당시(A.D. 50-70년경) 이미 세워져 있었던 초대 기독교 공동체로서의 교회와 유대교 회당 간의 거리감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었다. 저들의 회당은 유대인들이 본격적인 디아스포라(Diaspora) 시대를 이루게 되었던 바벧론 포로기와 학사 에스라 통치 시기에 성전과 율법으로부터 멀리 떨어지게 된 유대인들을 위해 설립된 것으로 A.D. 70년 예루살렘이 파멸되기 직전까지만 해도 예루살렘 안에서 약 480여개의 회당이 되었다고 한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회당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으며, 따라서 경건한 유대인이라고 불리우는 사람의 경우 그는 매일 회당을 방문하였으며, 모든 유대인들은 안식일과 절기 때에는 반드시 회당을 방문하곤 하였다. 한편 유대교 회당은 초기 기독교 복음 전도자들이 최초의 설교와 말씀전파를 행하였던 선교의 매체(媒體)라고 하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행 9:20). 그런데 예수께서 '저희 회당'에 들어가신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날이 안식일이었음은 더욱 더 분명해 진다. 회당에 대한 좀더 풍부한 이해를 위해서는 죽 4:15-30의 주석, 주제 강해 '유대교 회당과 초대교회'를 참조하라.
=====12:10
한편 손 마른 사람 - 이 사람은 뇌의 손상으로 인한 중풍이 아니라 피의 순환이 불순함으로 손의 근육기능을 상실한 자를 가리킨다(왕상 13:4). 한편 눅 6:6에 의하면 마른 손은 더구나 오른 손이었다. 그리고 외경 가운데 나사렛파와 에비온파가 사용한 복음에서 제롬(Jerome)이 인용한 것(Wordsw. & White's edition of the Vulgate, A.D. 383)에 의하면 이 사람은 예수께 지신은 '손으로 벌어먹고 사는 석공이 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한편 랑케(Lange)에 의하면 이 사람은 우연히 그 회당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주의 대적자들에 의해, 주를 모함하고 송사하기 위한 '악의적 도구'로 사용되기 위해 특별히 불려왔다고 한다.
사람들이 예수를 송사하려 하여 - 회당은 유대인들의 종교 사회의 중심지로서, 결정짓거나 특정한 사실을 발표, 공표하거나, 서약을 행하거나, 재판을 행하거나 죄인을 석방하는 등의 공적인 일을 위한 회합(會合) 장소였다. 즉 회당은 율법을 연구, 가르치는 학교와 기도의 처소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지방 법정으로서의 역할까지도 감당하였다. 따라서 이곳에서 유대인들이 예수를 송사하려 한 것은 곧 예수를 의식적으로 음해(陰害)할 목적으로 지방 법정에 고소하고자 한 것이 된다. 실로 바리새인들은 여전히 예수를 고소할 증거와 명분을 찾아 기회만 있으면 그를 정식재판에 회부(reference)하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그러나 손 마른 사람을 이용한 저들의 이번 모략이 성공하지 못하자 마침내 그들은 예수를 감옥으로 보내는 것이 아니라 아예 직접 살해할 음모를 꾸미는 데까지 발전하게 된다(14절).
물어 가로되 - 마가와 누가에 의하면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송사할 고소거리를 찾기 위해 그의 행위를 감시하고 있었다고 하였다. 울법을 연구하는 곳이며 기도처로서 유대인들 스스로가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회당 안에서 저들은 회당의 목적과는 반대로 악의에 찬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마태는 마가와 누가로 보고(막 3:1-6 ; 눅 6:6-11)와는 달리 바리새인들이 보다 진취적이고 공격적으로 손 마른 사람의 불행한 처지를 이용해 예수에게 질문을 던짐으로써 예수가 먼저 그의 병을 고치는 기적을 행하고 그것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지지와 갈채를 받게 되는 일을 미연(未然)에 방지하려고 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저들의 의도에 의하면 저들은 자신들의 질문 때문에 예수께서 병자를 고침으로써 고의(故意)로 안식일 규정을 어길 수도 없고, 또 예수께서 손 마른 자를 외면하심으로써 제사보다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라는 당신의 지난번 가르침을 스스로 파기(破棄)할 수도 없게 만들려 했던 것이다. 실로 저들은 예수를 위선적이고 편파적이며 일관성이 없는 자로 비난을 피할 수 없는 진퇴양난(進退兩難)의 상황에 빠지게 만들려 이 같은 교묘한 질문을 던진 것이다.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 이 질문은 눅 14:3에서 예수가 저들에게 한 질문과 똑같다. 본문에 의하면 바리새인들의 질문은 '그것이 자비로운 것인가'가 아니라, '여세스티'(* ), 즉 합법적(lawful, KJV)인가 하는 것에 머물러 있다. 그들 조상의 유전에 의하면 만일 사람의 목숨이 위태로울 경우라면 안식일일지라도 의사는 그 사람의 병을 치료할 수 있었다(Mishnah, Yomah 8:6 ; Mek Exod 22:2 ; 23:13). 그러나 문제는 목숨이 위태로운 정도의 경우란 어느 정도를 말하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본문의 경우 , 즉 중풍이든 아니면 어떤 다른 이유에서든 손에 힘이 없어지거나 손이 말라버린 상황은 그것이 결코 시각을 다투어 치료를 받아야 할 만큼 위급한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바로 이것이 그들이 제기한 질문의 출발점이 되었다. 한편 A.D. 1C경의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환자들을 간호하는 것을 허락하는 율법에 대해서 상세히 논의한 바 있었다고 한다(Mishnah Eduyoh 2:5 ; M. Sabbath 6:3 ; Mek Exod 22:2 ; 23:13).
=====12:11
양 한 마리...안식일에...붙잡아 내지 않겠느냐 - 이 논쟁은 눅 13:15 ; 14:5와 유사성이 있다. 비록 쿰란 공동체는 기껏해야 동물 스스로가 구덩이에 빠져 나올 수 있도록 널판지를 넣어 줄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으나 바리새인들은 이보다 더 적극적인 보호 규정을 제시하고 있다. 즉 그들은 일차적으로 웅덩이에 빠진 동물이 그 웅덩이에서 안식일을 무사히 지낼 수 있을 정도의 음식을 넣어주면 2차적으로는 그 동물의 목숨이 위험할 경우는 사람이 직접 그 동물을 끌어낼 것을 규정하고 있다(Maimonides, Talmud).
=====12:12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 예수의 답변은 또 다시 '칼 와호메르'(qal wahomer)의 성격을 띠고 있다(6절). 즉 한마리 양과 한 인간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하게 취급되어야 하느냐는 것이다. 사실 시 144:3에 의하면 사람은 하나님에 의해 특별히 생각되어지는 존재이다. 본문에 나오는 손 마른 사람은 웅덩이에 빠진 양 한 마리보다 물론 귀하다. 그러나 바리새인들 안식일에 웅덩이에 빠진 양은 건져낼지언정 손 마른 사람에게 자비(mercy)를 베풀려는 마음은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 즉 예수를 송사 하려는 것의 도구로 삼았을 뿐이었다. 바리새인들의 이러한 태도에 대해 예수께서는 만일 안식일에 동물에게 선을 행하는 것이 허용된다면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은 훨씬 의롭고, 보다 당연한 처사(conduct)임을 주장하셨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옳으냐는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대해 예수께서는 선을 행하는 것이 옳다라고 대답하셨다. 저들은 안식일에 선한 일이나 둘 중의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다만 규정된 법규만을 지키려 하였으나 예수께서는 적극적인 의미에서 선을 행해야 한다고 하심으로써 율법의 규정을 뛰어 넘으셨다. 예수의 관심은 안식일이 선을 행하기 위해 존재하는가, 악을 행하기 위해 존재하는 가에 그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여기서 선은 바로 불쌍한 자들에게 자비(mercy)를 베푸는 일과 연관된다. 이 말씀은 제자들의 행위를 무죄한 것으로 선언하신 7절의 말씀을 연상(association)시킨다. 즉 이삭을 잘라 먹은 제자들의 행위나 손 마른 사람을 고칠 예수 자신의 행위는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 자신에 의해 선한 것으로 선언되고 있는 것이다. 막 3:4 ; 눅 6:9에서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을 주제로 한 예수의 반론(反論)에도 역시 저들이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함으로써 선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이 비록 안식일에 이뤄진다 하더라도 우선적으로 행해져야 하는 것이라고 하는 사실이 자명(selfevidence)하게 인정되었다. 실로 안식일에는 세속적 관심에 대해서는 쉬어야 하겠으나 하나님과 인간 생명과 관련된 선한 일에 대해서는 열심으로 일을 해야 하는 것이다.
=====12:13
손을 내밀라 하시니 저가 내밀매 - 마태는 지금 바리새인들의 무자비하고 불신앙적인 태도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기 때문에 손이 마른 자가 예수에 대해 신뢰와 믿음을 갖게 되었는지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 한편 예수께서는 다른 곳에서 병자 약한 자를 고치셨을 때와는 달리 병자의 몸에 손 조차 대지 않으시고 다만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그대로 즉시 존재케 되었다고 보고하고 있는 창 1:3의 말씀처럼 손을 내밀라고 하는 단 한마디의 '말씀'에 의해서 치유의 기적을 베푸셨다. 이러한 기적과 치유 앞에 우리는 예수의 권위에 찬 말씀과 더불어 바리새인들과의 논쟁을 통해서 예수의 말씀이 옳은 것임을 확신케 된 손 마른 자의 즉각적 순종에 대해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실 안식일에 대한 랍비들의 유전에 의하면 손 마른 자는 결코 병고침을 받아서는 안되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의 악을 꾸미기 위한 도구로 사용될 뻔했던 그는 안식일에 소극적으로 무엇을 하지 않는 것보다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는 것이 하나님이 더 기뻐하시는 일임을 깨닫고 자신을 예수의 신성(神性)을 입증하는 선한 도구로 기꺼이 제공했다. 실로 그러한 순종과 결단에 의해서 그는 부자연스러운 육체의 속박(束縛)에서 벗어나는 축복을 부여받게 되었다.
회복되어 성하더라 -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께서는 밀이삭 사건을 통해서는 자신이 죄 사하는 권세를 가진 분이심을, 손 마른 사람의 사건을 통해서는 사람을 온전케(육체와 영혼 모두를) 하는 능력이 있으신 분이시라고 하는 사실을 확증하셨다. 여기서 '회복되어 성하더라'라는 말의 문자적인 의미는 '아포카디스테미'(* )의 과거형이 사용되어 '완전하게 나았다', 즉 이미 완치(完治)된 상태를 묘사하고 있다. 따라서 치유의 순간이 손을 내밀기 이전이었는지 이후이였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손을 내미는 것은 바로 손이 낫게되었음을 입증하는 행위'에 불과했다고 볼 수 있다(Alford). 예수께서는 믿음의 고백을 들으시고 당신께 간청하는 환자들의 병을 고치셨었다. 이번의 경우에도 손을 내밀라고 하는 당신의 명령에 대해 순종과 믿음의 고백으로서 그가 손을 내밀므로 그의 병을 고치셨다고 보는 것이 좋은 듯싶다. 그리고 한편 병자의 믿음의 고백은 치유의 선행 조건이 아니라, 치유의 병행 조건이었다. 이는 사도 바울이 주장한 바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10)는 진리와 부합(符合)된다. 진정 예수로 말미암아 나을 수 있다고 하는 믿음과 참으로 낫고자하는 깊은 열망을 동시에 가졌었던 손 마른 자는 예수의 창조적인 능력 앞에 온 전케 되는 축복을 얻게 되었다.
=====12:14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 이는 예수를 율법 위반자로 규정한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동일한 건물 내에 있기 조차 꺼려하는 행동으로 보이는 건물 내에 있기 조차 꺼려하는행동으로 보이는 결별 선언이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예수는 랍비가 아닌 더 이상 접촉해서는 안 되는 한낱 부정(惡)한 자였던 것이다.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거늘 - 안식일에 예수께서 선(善)을 행하고 생명을 구하신 것과는 반대로 바리새인들이 악을 꾀하여 사람을 죽일 모의를 한다는 것이참으로 아이러니킬(ironical)하다. 시갈(Sigal)은 여기서 사용된 '죽일꼬'에 해당하는헬라어'아폴레소스'(* )이 '죽이다'의 뜻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회당의 결의에 의해서 파문시키다'의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바리새인들이 단지 할라카식의 논쟁(율법규정에 대한 해석 문제)으로, 그들의 견해와 다른 이론을 제시한다고 해서 사람을 처형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마태는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에 어떠한 행동들을 해야만 율법의 주장과 일치하는가를 문제삼은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자신을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한 것에서, 그리고 제자들의 행위와 자신의 행위가 유대인들이 볼 때는 율법의 규정을 어긴 것이라고 할지라도 만물의 주요, 성전의 주이시며, 안식일의 주이신 예수 자신에 의해서 무죄로 선고받고 그 정당성을 부여한 것에 대해서 분노를 느끼고 있음을 지적함으로써 바리새인들의 살해 의지를 분명히 암시하고 있다. 한편 막 3:6에 의하면 바리새인들이 헤롯당과더불어 예수를 죽일 모의(conspiracy)를 하고 있다고 기록한 반면에 마태복음은 헤롯당(Herodians)을 전혀 언급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학자들의 많은 이견(異見)이 있다.어떤 학자는 바로 그 점이 마태복음이 A.D. 70년 이후에 기록되었다는 이론을 입증시킨다고 주장하였다. A.D. 70년 이후에는 헤롯당이 유대 땅에 존대하지 않았으며 기독교의 유일한 적대세력을 바리새파이기 때문에 굳이 헤롯당이 거론될 필요가 없기 때문에 마태가 이 말을 생략한 것으로 이해된다(Hummel, Hill). 그러나 이것은 마태의 기록 의도를 잘못 이해한데서 비롯된 오해이다. 즉 마태는 율법의 위반(unlawfulness)이라는 측면에서 예수를 사형에 처하고자 했던 주도 세력이 바리새인들이었음을 강조하고자 한 것이다. 실로 그들은 자신들의 살의(殺意)를 실천키 위해 정치적인 세력(헤롯당)을 이용했던 것이다. 본문에서부터 비로소 시작된 예수 살해 의도는 이후로 예수의선교 사역이 더욱 빛을 보면 볼 수록 노골화, 구체화 되어간다.
=====12:15
예수께서 아시고 - 여기 '아시고'에 해당하는 원어 '그누스'(* )는 '알다'는 뜻인 '기노스코'(* )의 제 2부정과거 능동태 분사로서 벌써부터 확연히 인지(認知)하고 계셨음을 보여준다. 이는 예수의 신적(神的) 능력의 탁월성을 암시하는 것인 동시에 예수를 둘러싸고 있던 바리새파 사람들의 경색(梗塞)되고 분노에 찬 모습이 노출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거기를 떠나가시니 - 헬라어 '아나코레오'(* )는 '철수하다', '물러가다'(KJV, withdrew)의 뜻으로 이는 바리새인들의 의논이 예수를 죽일 모의와 차원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 모의가 당장 실천의 차원으로 직접 예수를 배척하거나 죽이려고 시도했던 일은 이미 여러 번 있었다. 그때마다 예수는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때를 기다려 물러나시곤 하였으며 또한 마태도 예수의 물러나심에 대한 기록 뒤에 반드시 구약의 인용문을 첨가하여(2:22, 23 ; 4:12) 예수의 이 행위 마저도 이미 구약에서 예언된 바 그대로의 모습임을 입증하려 하였다. 더욱이 예수의 이 피신(避身)은 당신이 친히 제자들에게 가르치셨던 지혜로운 위기 극복법(10:23)을 몸소 실천하신 것이기도 했다.
사람이 많이 좇는지라 - '좇는다'고 하는 동사가 제자됨(fellowship)을 의미하는 용어이기는 하지만 많은 사람이 제자가 되기 위해 예수를 좇은 것은 결코 아니다. 아마도 많은 사람이라고 하는 말 속에는 이 날이 비록 안식일이라고 할지라도 바리새인들의 반대에 맞서 자신의 병을 고치고자 하는 많은 병자들이 속해 있었을 것이다. 또한 많은 사람이라고 하는 이 표현은 예수를 잡아 죽이려고 시도(attemot)하고 있는 소수의 바리새인들과 대조적으로 비교하기 위해 특별히 사용되었을 것이다.
저희 병을 다 고치시고 - 20절에 인용된 이사야서에 의하면 예수가 많은 병자들을 고친 행위가 바로 심판에서 이길 때까지 상한 갈대를 꺽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는 것과 같은 맥락의 긍휼과 사랑의 역사(役事)임을 의미한다. 실로 예수는 고생하며 유리(流離)하는 자들(9:36)과 수고하여 무거운 짐진 자들(11:28), 그리고 연약한 자들에게 결코 냉담하지 않으시고 궁극적인 구원을 가져다 준다. 왜냐하면 예수는 바로 그들의 메시야이기 때문이다.
=====12:16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 - 예수의 함구령은 그가 행하신 치유 기적이 그를 사람들의 눈에 더욱 더 강하게 드러나게 함으로써 대중들의 흥분이 더욱 더 고조되고(W. Argyle), 따라서 그 일이 반대자들의 적대감을 더욱 더 크게 부채질하게 될 것임을 염려하여 내려진 명령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보다는 이미 네번에 걸쳐서(8:4 ; 9:30 ; 16:20 ; 17:9) 행해진 바대로 예수 자신을 단순히 기적행하는 자로 나타내시지 않기 위해서 내려진 함구령이라고 보는 것이 더욱 적절하다. 당시 유대인들의 메시야 상(像)은 그들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구원하고 해방시켜줄 정치적 메시야로서 신적(神的) 권능을 소유한 자였다. 그러므로 예수가 메시야 이외의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던 불치(不治)의 병들을 치유하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들은 당장 그에게 몰려들어 자기들의 임금을 삼으려고 함으로써, 결국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부활을 통한 당신의 메시야 사역을 감당치 못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때때로 내려지는 이 함구령(緘口令)의 시한(時限)은 막 9:9에 의하면 부활 때까지인데 이는 예수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부활 이후에 가능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12:17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 바 - 이하에 인용된 사 42:1-4은 70인역(LXX)에 의한 것이 아니라 히브리어 원문의 자유로운 인용이다. 한편 이사야의 인용구는 바로 앞의 예수의 함구령과 연관해서 성령과 이방인들이라고 하는 두 주제를 뚜렷이 제시하고 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Cope, Hill). 즉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지만'(19절) 성령부음을 받은 그가 공의를 행하고 있기 때문에)예를 들어 많은 병자들을 고치심) '이방인들은 그의 이름을 바라게'(21절) 되리라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사야는 행위자(agent)이신 여호와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도구로서, 고난받는 종으로서의 메시야를 예언하엿다. 그리고 이 예언은 당시의 많은 사람들, 특히 바리새인들에 의해 핍박받고 있는 예수의 모습 속에서 성취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마태는 무엇보다 무리를 자극하지 않으려는 예수의 사역이, 곧 이사야가 예언한 바 메시야 사역과 일치하고 있음을 강조하고자 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당신이 전파하신 천국을 영적이고도 의로운 관점에서 가르치고 계셨으며, 그런 점에서 예수는 격앙된 분위기로 군중을 선동(煽動)하거나 폭발적인 소문을 통해 당신의 신분이 노출(exposure)되는 것을 원치 않으셨기 때문이다. 더욱이 예수는 당신으로 인해 약한 영혼들을 거스리기를 원치 않으셨다.
=====12:18
나의 택한 종...나의 사랑하는 자로다 - 사 42:1 ; 43:10 ; 44:1의 인용으로 특별히 '나의 택한 종'이란 히브리어로는 '내가 붙드신 나의 종'이 된다. 즉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위하여 한 이상적(理想的) 종을 붙잡으셨는데, 그런 점에서 '붙잡다'는 말은 선택한 자를 내밀(內密)하게 기억하시면서 지극히 관심을 두고 있음을 암시한다. 한편'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나의 사랑하는 자로다'라는 표현은 이미 예수께서 세례 받으실 때에 하늘로서 들려왔던 소리(3:17 ; 17:5)로서, 예수께서 하나님의 만족과 인정과 축복을 동시에 받고 있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어떤 대상을 사랑하는 것과 선택하는 것은 서로 밀접(密接)하게 관련된 것이므로, '마태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범주(category)안에 하나님의 종으로서 예수의 역활까지도 포함시킨 것은 아니다'라고 하는 킹스베리(Kingsbury)의 견해는 부적절하다. 오히려 마태는 마가복음에서 언급된 '하나님의 아들'(막 3;11)을 생략하고, 본문에서는 다만 예수가 구약에서 예언된 하나님의 종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고 보는 힐(Hill)의 견해가 더욱 더 설득력 있게 보인다. 예수는 아들의 위치를 버리고 하나님께 선택된 바의 종의 위치를 기꺼이 받아들이셨다.따라서 예수는 하나님이 특별한 설교 목적을 갖고 선택하신 종의 위치를 기꺼이 받아 들이셨다. 따라서 예수는 하나님이 특별한 선교 목적을 갖고 선택하신 종이요, 하나님이 성령으로 기름부은 자이다. 한편 본분의 '종'에 해당하는 헬라어 명사 '파이스'(* )는 '아이'에 대한 애칭으로, 구약에서는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종종 하나님께로부터 '그의 종'이라고 불리웠다(사 41:8). 따라서 이 '파이스'는 사람들 사이에서 신분상의 종으로 통용되고 있는 '둘로스'(* )와는 달리, 종으로서의 메시야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메시야임을 분명히 나타내주고 있는 말이다.
내 성령을 줄터이니 - 하나님이 당신의 영(spirit)을 주신다는 것은, 곧 그를 통해 하나님 자신의 활동하실 것을 내포한 말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참여 의사(will)는 예수의 말씀과 사역에 초월적인 권위와 능력을 부여한 것이 되며, 이같이 주어진 능력과 권위의 실현은, 곧 이 땅에 하늘 나라가 도래했음을 입증해 주는 확실한 근거가 된다(28절).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 이방에 심판을 알리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택하신 종인 메시야의 독특한 직무에 해당된다. 한편 이 직무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가에 대해서는 많은 이견들이 있다. 여기서 '심판'의 뜻인 헬라어 '크리시스'(* )가 '율법', '판결', '정의', '결정하는' 등의 뜻을 지닌 히브리어 '미쉬파트'(* )에 해당하는 것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심판'이라고 해석된 이 단어에 대해 (1) 델리취(Delitzsch)는 모든 관계에 있어서 생(生)의 규범과 표준으로서 종교의 실제적인 면을 보인 '진실한 신앙'으로,(2)헨드릭슨(Hendriksen)은 죄인들의 회개하고 주 예수께 나아와 믿음으로 구원을 얻고 주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야 한다는 내용의 '복음'으로, (3) 칼빈(Calvin)은 심판이라는 말을 통해 공평과 의(義)의 충만함을 정체(正體)로 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대의 한 구석에만 한정시키는 것이 아니라, 전세계로 확장시키는 것이 메시야의 임무라고 하였으며 (4) 알포드(Alford)의 경우, 심판은 바로 최후 심판을 의미한다고 보았으며, (5) 카슨(D.A. Carson)의 경우, 여기서 문제삼고 있는 심판 혹은 공의란 하나님이 모든 이방 나라들을 위해서 자신의 본성을 계시하시는 것(사 51:4)인 동시에 사람들이 계시(revelation)된 하나님의 본성, 즉 공의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실을 요구한 것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일반적인 제견해들에 비해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한다고 하는 것은 율법을 통해서 계시되고, 선포되었던 하나님의 공의, 즉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실천을 복음을 통해서 예수께서 재천명하시고 그의 제자들이 그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심판'은 하나님의 거룩한 경륜(經綸)의 대강(大綱)으로서 예수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의미이다. 한편 본문의 전파 경로가 암시되어 있는데, 예수께서 원래 목적하신 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영혼들에게 우선 복음이 전파될 것이지만(10:6 ; 15:24), 그들의 핍박과 배척으로 그 대상이 이방인에게로 확장될 것이었다(8:10 ; 15:28). 이러한 사실은 선교의 지상 명령 부분(28:19-20 ; 행 1:8)에 이르러 확연히 드러나게 된다.
=====12:19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 이는 메시야의 직무에 이은 그 이행 방법 또는 태도 중의 하나이다. 한편 아사야의 예언에서는 '그는 외치지도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사 42:2)로 묘사되어 원래의 의미를 더욱 정확히 보여주고 있다. 본문에 제시된 '다투다'는 말은 언쟁이 심화된 상태를 뜻하는 말로 아사야의 의도처럼 '큰 소리로 외치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이와 함께'들레다'의 뜻인 '크라우가조'(* )는 '부르짖다', '야단스럽게 떠들다'(cry out, KJV)를 의미하는데 이는 종교적 기쁨이나 소리나 전쟁에서의 승리의 외침이 아니라, 조용히 들리는 지혜자의 말(전 9:17)과 대조(contrast)를 이루는 '우매(愚昧)한 어른의 호칭'을 뜻하는 말이다. 또한 '크라우가조'는 신약이외에서는 마술과 악마의 영역에서 지하 세계의 신들을 불러내는 소리로 이해되었다. 신약에서도 이 말은 예수께서 귀신들을 쫓아내실 때 귀신들이 지르는 것으로서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막 5:5 ; 9:26)를 말하며, 행 19:28에서는 왁자지껄하는 폭도들의 소란으로, 계 21:4에서는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로부터 쫓겨난 분노를 나타내는 외침을 표현할 때 사용되었으나 긍정적으로는 하나님께 대한 탄원(歎願)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 역시 고난과 섬김의 종인 메시야의 자세를 표현하고 있는 말이다. 그러나 메시야가 논쟁하지 않고 외치지 않고 길거리에서 소리 드높여 선포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가 완벽한 침묵을 고수(固守)하고 있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다만 메시야로서의 그의 모습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하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다. 따라서 메시야가 16절에서와 같이 자신을 드러내지 않은 채로도 얼마든지 그의 메시야 직무를 수행할 수 있으며, 또한 지금하고 계신 것이다. 그와 더불어 참다운 종이란 그의 말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의 행함에 의해서 자신의 직무를 다하는 자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12:20
상한 갈대...꺼져가는 심지 - 이 표현은 종이 자비심이 많고 오래 참으시며, 온유하신 사람임을 보여준다. 이 표현에서 사용된 두 상징에 대해 카슨(D.A. Carson)은 상한 갈대는 고생하며 유리(流離)하는 자들(9:36)을 꺼져가는 심지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11:28)을 말한다고 하였다. 또한 제롬(Jerome)은 전자는 이스라엘을, 후자는 이방인을 표현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상한 갈대란 사회의 구조적 모순, 유대 사회에서는 율법주의자들에 의해 죄인으로 낙인찍힌 사람들의 육체를, 그리고 꺼져가는 심지란 그들이 영혼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이 두 비유는 연약하고 무력한 사람들을 상징하낟고 봐야할 것이다. 즉 '상한 갈대'란 연약한 인간(왕하 18:21 ; 겔 29:6), 고통과 좌절로 인해 심령이 산산히 부서져 쇠잔해 있는 영혼을 가리키며, '꺼져가는 심지'는 마지막 한가닥 소망마저 다 없어져가는 인생, 양심의 빛을 상실해 심령이 어두워져가는 영혼 등을 의미한다. 실로 상한 갈대는 오직 하늘의 기원으로 소생하고, 꺼져가는 심지는 신령한 기름을 흡수(absortion)함으로써 회생(回生)할 수 있다(Clarke).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 사 42:4에 의하면 '세상에 공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로 메시야 직무 수행의 목적을 나타내는 말로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심판하여 이길 때'란 월리암스(A. Williams)에 의하면 '하나님의 법의 계시를 인간의 마음에서 성공시키는 것'을 뜻한다. KJV에 의하면 이 구절은 '그가 심판을 승리로 몰고 갈 때까지'(until he expel to victory the judgment)로서, 고난의 종인 메시야가 세상 사람들이 기대하는 바의 영광을 통해서가 아니라, 온유와 겸손과 섬김의 도(道)를 통해서 하나님의 공의를 세상의 악의 세력 위에 세우게 될 때까지를 말한다. 이는 긍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의미한다. 예수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죽음을 정복하셨고 하나님의 공의를 이 땅 위에 굳게 세우셨다.
=====12:21
이방들이 그 이름을 바라리라 - 사 42:4에 의하면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이다. '섬'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이'(* )의 기본 개념은 '거주 가능한 땅'으로, 이사야 본문에서는 내륙지방과 구별되는 해안지방(coast)을 의미한다. 해안지방은 부분적으로 뵈니게인과 블렛세인과의 교역(交易)이 이뤄지고 있는 곳이기 때문에 '섬'이란 말이 가끔은 '이방'을 가리키기도 하였다. 또한 마태는 70인역(LXX)을 따라서 '율법' 대신에 '이름'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바라리라'(will put their hope, NIV)는 관용적인 표현으로서 '기대한다', 또는 '기다린다'는 의미이다. 이런 사실들에서 결국 이방이 바라고 소망하는 바는 율법의 완성이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사실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랑게(Lange)에 의하면 메시야의 이름은 '하나님의 진리를 요약한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문은 그리스도의 은혜가 이방인들에게도 동일하게 임하게 될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분명히 선언하는 말이다.
=====12:22
그 때에(* , 토테) - '그 때'가 언제인지 정확한 시점은 알 수 없으나 아마도 9-21절 사건보다 훨씬 후에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귀신들려 눈 멀고 벙어리 된 자(* , 다이모니조메노스 뒤플로스 카이 코포스) - 헬라어 원문의 정확한 의미는 '그 사람은 귀신이 들리게 되었으므로 눈이 멀고 벙어리가 된 자'이다. 마태는 그 사람의 병을 원인이 특별히 '귀신에 의한 것'임을 강조함으로써 예수의 능력이 귀신의 힘에 의한 것이라고 하는 바리새인들의 모함(謀陷)이 논리적으로 모순이 있는 것임을 분명히 하려고 하였다. 또한 이러한 표현을 통해서 예수가 다윗의 자손 메시야이심을 알지못한 바리새인들이 바로 '영적으로 귀신들려 눈 멀고 벙어리 된 자'라고 하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예수께서 고쳐 주시매 - 마태를 위시한 공관복음서 기자들은 본 사건이 이적이라는 사실 그 자체보다는 바리새인들과 충돌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기 때문에 본 치유 이적을 간략히 소개하는데 그쳤다. 여하튼 예수께서는 그 근본적인 장애 요인이었던 영적 장애(귀신들림)에 대한 근원적인 치유를 하심으로써 육체적인 장애(시각, 언어)를 제거해 주셨다. 실로 그분은 영. 육의 온전한 구세주이시다.
=====12:23
무리가 다 놀라 -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죽어버린 교훈에 이미 익숙해 있었던 무리들은 예수의 생명력 넘치는 이적 앞에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이처럼 실재하는 천국은 기습적으로, 각 사람들의 마음에 돌입한다.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 예수의 치유의 기적을 보고 놀란 사람들 중 첫번째 부류의 사람들이 나타낸 반응의 말이다. 이 물음은 헬라어'메티'(* )로 시작되는 부정 의문문으로서 부정(不定)하는 답을 예상하고는 있으나 그것에 대한 결정적인 확신이 아직 없기 때문에 반신반의(半信半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따라서 이 말은 '아무래도 그가 다윗의 자손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으나 그들 자신들이 메시야가 오면 표적을 행하리라고 하는 사실(38절)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의 치유기적이 혹시 메시야의 징표(徵表)를 나타내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생긴다'고 하는 것이다. 실로 예수가 권능으로 사람들의 병을 고친 것은 무리들의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께서 세상의 왕과 같은 권세를 행사(行使)하지 않고 지금껏 고난받는 종의 모습을 취하고 계셨기 때문에 예수의 메시야됨에 대해 의혹을 품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여기서 예수 자신이 생각하고 있었고 십자가 사건과 부활 사건 이후에 기독교 공동체가 이해하게 되었고 고난받는 종으로서의 메시야상(像)과 유대 국가의 멸망이후 포로기를 거치면서 형성된 유대인의 정치적 메시야상(像)이 근본적으로 불일치된다고 하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예수는 배타적 민족주의에서 파생된 저들의 메시야니즘(Messianism)을 거부하고 자신의 고난과 섬김의 삶을 통한 인류구원을 위한 메시야의 길을 걸으셨다. 한편 그곳에 모든 사람들, 즉 병고침을 받은 자나 그 사건을 지켜본 자들은 예수가 메시야이실 것이라고 하는 확신을 갖게 되었으나 그곳에 함께 있던 바리새인들 때문에 자신들의 생각을 감히 단정(decisive)적인 말로 표현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하는 추측이 있다. 유대인들의 정치적인 메시야의 상(像), 즉 다윗의 자손으로서 다윗왕국을 재현(再現)시켜줄 이상적인 왕에 대한 칭호인 '다윗의 자손'이라는 표현에 대해서는 마 1장의 주석, 주제 강해를 참조하라.
=====12:24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 예수의 치유 능력을 보고 놀란 사람들 중 두번째 부류의 사람들이 나타난 반응 속에서 나온 말이다. 첫번째 부류의 삶들이 품고 있는 일말(一抹)의 희망, 즉 예수가 메시야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일축(一蹴)하고 그 확신을 제거키 위한 노력에서 나온 적대적 표현으로, 실제로 예수와 그들 사이의 바알세불 논쟁의 계기가 된 문구이다. 사단이 예수의 영(靈)속에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예수가 더러운 귀신에 들렸다고 하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막 3:30 ; 요 8:48). 한편 귀신의 왕 바알세불은 간혹 바알세붑으로도 불리우는데(왕하 1:6), 이 말은 땅의 주인인 '바알'이라는 뜻으로 가나안 원주민들이 섬기던 우상의 이름에 그 기원이 있다. 후에 유대교에서는 귀신들의 두목인 사단을 가리키는 수 많은 명칭들 중의 하나로 취급하였다(10:25).
=====12:25
저희 생각을 아시고 -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이 품고 있는 생각을 정확히 알고 계셨다. 그 시점에 바리새인들은 예수가 얼마나 강력한 존재인가를 비로소 명확히 알게 되었던 것이다.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동네...집 - '나라'(* , 바실레이아)는 영토적 지역을 말한다기 보다는 전체를 움짖일 수 있는 힘으로서 왕권, 주권(主權)을, '동네'는 정치적 사회, 즉 이웃 공동체 집단을, '집'은 건물이 아니라 가장(家長)을 위시한 질서 체계가 바로 잡힌 가족 공동체를 의미한다. 이러한 집단일수록 외부에서 쳐들어오는 세력에 의해서는 하나로 결집되어 그 세력을 막아내지만 내부에서 발생되는 싸움에 의해서는 완전히 파멸될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점에 있어서는 사단이 그의 부하들인 귀신을 조종(操縱)하는 사단의 나라도 동일한 것이다(H. Kruse). 즉 만약 귀신들(demons)의 군주인 사단이 그의 부하들을 쫓아낸다면 그는 사실상 자신을 쫓아내는 것과 다를바 없다. 왜냐하면 그의 부하들은 바로 그의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Broadus). 한편 여기서 귀신들은 흔히 역사의 전면에서 실제적으로 활약하는 악의 세력으로, 사단은 그 실제적 활약자들의 배후에 존재하는 궁극적 악의 실체로 이해된다. 더 자세한 내용은 4장 강해 '사단과 귀신'을 참조하라.
=====12:26
사단이 만일 사단을 쫓아내면 - 이 말은 사실상 모순(contradiction)이다. 사단의 나라에는 사단만이 귀신들의 왕이므로 따라서 이말은 사단이 그의 부하세력인 귀신이 사람을 사로 잡고있는 상태에서 그를 축출해 내버리는 것을 뜻하며 이는 그들 나라의 파멸을 자초(自招)하는 결과가 된다. 실로 사단은 그 나름대로의 합리적인 통찰력과 분별력이 있다는 점에서 자기 파괴적 행동은 삼가 할 것이다. 그러나 엡 6:12 ; 계 20:7-10에 의하면 사단의 나라는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분명히 존재하게 됴마 것이다.
=====12:27
너희의 아들들 - 단순히 '너희(바리새인) 사람들'(your peoele, NIV)을 의미할 수도 있고 바리새인들의 가르침을 받고 있는 자들, 즉 제자들이나 그 당원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도 있다. 어떤 학자들에 의하면 '너희늬 아들들'이란 표현이 바리새인의 제자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선지자들의 아들들'의 의미로서 옛부터 가나안과 유다에 족속해 있던 마술사(삼상 28:7-14, 신점한 자 혹은 박수)들을 가리킨다고 한다. 이들을 히브리어로는 '오브'(* )라고 부르는데, 이는 원래 바람을 일으키기 위한 풀무같은 도구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신접(新接)한 자가 그것을 가지고 기체와 같은 영(靈)을 구멍에서 불어내는 동작을 취한데서 나온 이름이다. 물론 이스라엘에서는 일찍이 이들의 행위를 금지(禁止)시킨바 있다(레 19:31 ; 20:6, 27 ; 신 18:11). 그러나 왕조시대에는 이방 문물과 종교의 수입으로 인해 이러한 행위와 이에 대한 미신이 깊이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왕하 21:6; 23:24 ; 대하 33:6). 물론 본문에서의 바리새인들의 제자들 혹은 추종자들 역시 그들 역시 조상의 영향을 받아 귀신을 쫓아내는 등의 능력이 있었음은 분명하다.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 예수 당시 유대인들은 몇몇 그릇된 상황과 관습에 의존하여 귀신을 쫓아내는 일이 흔했다고 한다(행 19:13 ; 외경 Tobit 8:2,3 ; Justin Martyr 85). 특히 유대사가 요세푸스의 보고에 따르면(Josephus, Antiq. VIII, 45-48 ; id., Wars VIII, 185) '솔로몬은 귀족 축출(逐出)법을 터득하여 각종 질병을 치료하고 후대에 전하였는데, 그 방법에 의해 치료받은 자가 다시 그 귀신의 지배를 받지 않을 만큼 완벽한 치료법을 구사(驅使)했다. 이 치료법은 오늘날 까지도 효과적이다. 내가 목격한 바로 베스파시안(Vespasian) 황제 때 엘리아살(Eleazar)이라는 사람이 황제와 그 아들, 지휘관들과 군중들 앞에서 귀신들린 자를 치료하는 것을 보았다. 그의 치료법은 솔로몬이 창안한 것 중 하나로 한 식물 뿌리로 된 반지를 귀신들린 자의 코에 꿰고 그것으로 귀신을 끌어내어 그 사람이 졸도하면, 그때 솔로몬의 이름과 솔로몬이 만든 주문(呪文)을 외우면서 귀신에게 다시는 그 사람에 들어가지 말 것을 명하는 것이었다. 이로써 솔로몬의 지혜와 기술이 매우 명확히 증명되었다'고 한다. 여하튼 당시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전통에 의해 전수(傳受)된 주술이나 마술들로 인간이 필연적으로 지닐 수밖에 없는 질병과 슬픔과 악에서 구원받으려 했던 것만은 사실이다. 더욱이 초대 교회 교부였던 이레니우스(Ireneaus) 는 그의 '이단 교서'(2권, 4:2)에서 유대인들이 사술(black magic)을 사용하면서도 여호와의 이름을 불러 귀신을 쫓는 습관이 되었다고 전한다. 그런 까닭에 그들 바리새인들이 말한대로 예수께서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었다면 그 당시 유대인들 역시 바알세불의 도움에 의해 귀신을 축출했다고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 예수의 말씀의 요지였다.
저희가 너희 재판관이 되리라 - 예수께서는 저들이 제자들의 귀신을 쫓아내는 것에 대해서 일체 부정하거나 인정하는 등의 말씀은 없으셨다. 다만 바리새인들은 저들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러한 일을 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는 것을 가정하면서 따라서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즉 '너희의 아들들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귀신을 쫓아낼 수 있다면 그들은 너희들이 내게 대하여 잘못된 말을 한 것, 즉 바알세불의 힘을 입었다고 한 것 때문에 너희를 위선자요 죄인으로 선고하리라'고 하는 표현이다. 실로 바리새인들의 제자들이 하나님의 도움으로 귀신을 쫓았다면, 유독 예수만을 바알세불의 능력하에 있다고 하는 것은 부당(不當)한 일임에 분명했다. 예수의 이 반론에 의해서 이제는 바리새인들이 오히려 진퇴양난(進退兩難)에 빠지게 되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제자들의 귀신축출 행위가 바알세불에 의한 것이라고도 할 수 없고 또한 예수의 행위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한 것이라고도 주장할 수 없게 되었다.
=====12:28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 평행구절인 눅 11:20에 의하면 '하나님의 손'은 바로 하나님의 능력과 권능을 의미하는 구약적 표현(출 8:19 ; 31:8 ; 시 8:3)으로서 '성령을 힘입는'것과 결과적으로 동일한 묘사이다. 예수의 귀신축출행위와 사단과의 연관성은 논리적 모순임을 지적함으로써 그들의 사악한 시기심을 밝혀내신 예수께서 이제 자신의 행위가 성령의 임재와 사역에 의한 것으로 역(易)으로 그리스도의 권세가 지상에서 명백히 드러난 것은 바로 하나님의 영을 통해서 임을 주장하셨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 '임하다'의 뜻인 '프다노'(* )는 '뒤따라 잡다'(overtake)의 의미로 본문에서는 제 1과거형으로 어미변화가 되어서(* , 에프다센) '이미 임한 것'을 가리킨다. 이런 사실에 근거해 웨슬리(Wesley)와 스티어(Stire)는 본문을 '하나님 나라는 너희가 찾을 수 있을 정도로 너희 앞에 전개되어 있다'로 해석하였다. 예수가 하나님의 성령의 권능으로 귀신들을 쫓아내고 사람들의 병을 고친 것은 분명히 사단의 왕국이 괴멸(壞滅)되고 있음을 보이는 것인 동시에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성령이 현재적(現在的)으로 역사한다고 하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던(Dunn)은 '이미 실현된 종말'(the realized eschatology)이라고 불렀다. 그에 의하면 '종말론적인 성령'(the eschatological Spirit)은 예수에 의해서 이 땅에 강림했으며 또한 종말론적인 나라(the eschatological Kinddom)도 역시 예수에 의해서 그 시작이 알리어졌다. 종말론적인 성령이 활동하는 그곳에 하나님 나라의 활동도 진행되고 있으며 그 활동이 일어나고 있는 곳은 바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역사의 현장 그 한 복판에서이다. 한편 하나님의 나라는 성경적으로 볼 때 단순한 축복의 장소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가 미치는 전 영역을 가리킨다. 이런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성과 미래성을 가지고 있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성육신 사건으로 인해 이 땅에 실제적이고도 종말론적으로 도래했으나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다. 그것은 훗날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완성된 형태로 도래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천국은 이미(alredy) 도래하였으나 아직(not yet) 완성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12:29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 이 구절에 대해서 예수의 재림으로 인한 종말적 사건으로 이해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이 구절은 종말의 완성으로 이해될 필요없이 순수히 예수의 사역(work)을 나타내는 것으로, 즉 기독론의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몇몇의 유대 문헌에는 메시야의 시대가 도래하면 메시야가 사단을 결박할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Moses, 10:1 ; 계 20:2). 여기서 '강한 자'란 사단을 가리키는데 예수는 자신이 귀신을 쫓아내는 행동을 통해 (1) 자기가 이미 사단을 결박하고 있다고 함과 (2) 따라서 자신이 귀신의 왕인 사단 보다도 더 강한 자('능력이 더 많으신 이', 3:11)라는 사실과 (3) 이 세대의 종말이 지금 여기서 실현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즉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현존하여 악의 권세를 다스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재림으로 인한 완성된 종말의 날이 될 때까지 그 강한 자인 사단의 세력은 여전히 이 세상에서 그 영향력을 미치고 있겠지만 그는 이미 예수에 결박되어 있는 존재이다. 한편 '강한 사람'의 뜻인 '이스퀴로스'(* )가 손과 관련된 기능, 수완이 좋은 사람을 나타내며 특별히 사단에 관련된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견해(Campbell)가 있으나 본문의 맥락에서 벗어난 것이므로 환영받지 못하고 있다.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 '세간'으로 번역된 헬라어 '스퀘에'(* )의 문자적 의미는 '그릇들'(vessels)이다. 이는 결국 사단에게 사로 잡힌 자, 즉 귀신들린 자를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늑탈하다'의 뜻인 '디아르파조'(* )는 약탈을 하되 모두 털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KJV에 의하면 특별히 이 '늑탈하다'(plunder)라는 말은 전시(戰時)나 내란(內亂)때 적들로부터 물건을 샅샅이 약탈당한다고 하는 뜻이다. 따라서 이 말은 사단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신 전복자 예수께서 지금껏 사단이 마음대로 지배하던 이 세상에서 영혼과 육체 모두가 마귀의 지배를 받고 있는 사람들을 한 사람씩 물건을 빼앗아 악의 세력에서 건져질 것을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빼앗은 그들 모두를 다시 인생의 원래의 주인이신 하나님께로 되돌려 보내시어 하나님이 주시는 힘, 즉 성령에 따라 사는 자가 되게 하시겠다고 하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즉 그리스도의 권세있는 사역은 십자가, 부활 사건 이전에 부터 이미 활발히 시작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이 같은 사실은 사 49:24, 25의 예언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여하튼 지금은 이미 도래된 메시야의 시대이고 예수께서 사단의 소유물이 되었고 사람들을 하나하나 자신의 품으로 회수(回收)하시는 기간이다. 따라서 지금은 예수에 의해 사단의 집이 약탈(掠奪)되어 가는 과정이며 사단의 집이 모두 털린 후에, 즉 악의 세력에서 모든 사람이 풀려난 후에 예수의 재림으로 결박된 사단은 영원히 멸망 당하게 될 것이다. 눅 10:17, 18의 칠십 명의 전도인들에 의하면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이 그들에게도 항복하였으며 예수께서는 사단이 하늘로 번개같이 떨어짐을 목격했다고 하였다. 사단이 권세의 무너짐은 상대적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계속 힘차게 뻗어나가고 있음을 의미하며 이러한 사역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복음전파와 그 실천적인 삶에 의해 점차 진전(development)되다가 마침내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완성될 것이다.
=====12:30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 - 여기서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의 반대적 의미는 막 9:40과 눅 9:50에 의하면 '우리'(마가) 또는 '너희'(누가)를 '위하는 자'이다. 그런데 이것은 마가복음에서는 예수와 그의 제자들에게 무관심한 자들에 대해 언급한 것이며 누가복음에선 예수를 따르기를 거부하는 어떤 사람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다. 이에 비해 본문의 논지는 매우 직선적으로 중립적인 태도가 있을 수 없음을 말하는데, 이는 하나님의 권세와 사단의 권세가 서로 투쟁하는 와중(渦中)에서 중립적 입장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한편 본문의 '함께 아니하는 자'에 대해 크리소스톰은 '마귀'로, 벴겔과 네안더는 앞에서 나온 '유대 마술사' 등을 언급한다고 본다. 이 중에 크리소스톰의 견해가 환영받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 '함께 아니하는 자'란 단순히 예수와 그의 가르침에 대해 무관심한 자, 예수와 연합(union)하기를 싫어하는 자를 말한다기 보다는 좀더 적극적인 의미에서 바리새인들과 그의 추종자들처럼 '공공연히 예수를 비난하고 서로 의문을 제기하는 자'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 - 구약에서 흔히 하나님이 추수하는 분으로 묘사되었듯이 신약에서 예수는 마지막 날에 이르기까지 계속적으로 모으고 또한 추수하시는 분으로 묘사되고 있다(3:12 ; 13:30).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예수의 기적행위를 보고 그를 메시야로 고백하려는 자들에 대해 예수가 바알세불의 힘을 입은 자라고 거짓 증언함으로써 사람들이 예수를 영접하려는 것을 방해하였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의 전진과 확산을 막기 위해 예수로 부터 사람들을 흩으려는 자들이 바로 '모으지 아니하는 자', 곧 흩어버리는 자들인 것이다. 실로 예수의 위대한 사역은 바로 잃어버린 양을 찾아 모으고 또 모으는 것이다. 이에 비해 사단은 되찾은 양 조차도 다시 빼앗고 될수 있는 대로 그들을 흩으려는 악한 본성을 지니고 있다. 여하튼 본문은 예수의 사역에 있어서 결단코 중간적 입장에 머무를 수 없음을 강력히 시사해 주고 있다. 정녕 예수의 사역에 적극 동참치 않는 자들은 예수의 나라를 전면적으로 반대하는 자들인 것이다.
=====12:31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 공동번역에서는 '사람들이 어떤 죄를 짓거나 모독하는 말을 하더라도 그것은 다 용서받을 수 있지만'으로 번역되어 있다. 헬라어 본문의 문자적인 의미 역시 '사람에 의해 저질러진 죄와 비방은 사하심을 받게 될 수 있으나'의 뜻으로 이래된다. 이는 하나님의 자비가 무한, 풍성하므로 인간의 모든 죄악이 도말(塗抹)될 수 있다는 성경의 보편적 진리를 입증해 준다(시 63:3 ; 86:5 ; 130:3,4 ; 사 1:18 ; 미 7:19 ; 요일 1:7). 더욱이 이 진리를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의 예수의 대속사역은 완전, 충만하여 그 어떤 죄악일지라도 능히 용서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한편 여기 언급된 '훼방'에 해당하는 헬라어 '블라스페미아'(* )는 '심한 비방'이나 상대방에 대한 지독한 '모독'(9:3) 또는 어떤 대상은 '반대하여 말하다'(32절)는 뜻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사람이 하나님을 비방하는(blasphemy) 행위에는 매우 심각하게 대처(reaction)했다(26:65). 그러나 예수는 이 부분에서 인자, 곧 자신을 거역하는 행위와 심지어 암묵(unspokenness)적 의미에서이지만 하나님을 훼방하는 행위 조차도 용서의 가능성이 주어짐을 시사하셨다.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 이 선언은 하나님의 자비가 예수의 대속 사역에 어떤 결함이나 불충분성이 있기 때문이 아니다. 더욱이 성삼위 하나님의 위상(位相) 중 제 3위에 해당하는 성령의 탁월성을 강조한 것이라고 볼 수도 없다. 한편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란 성령의 이지적 사역을 사단의 능력으로 간주하는 것이라 보는 학자들이 있다(Broadus, Chafer, Gebelein). 그런 점에서 바리새인들은 이미 그 죄를 범하고 말았는데, 그들은 성령의 능력을 덧입은 예수의 이적을 바알세불의 소치(result)로 매도했던 것이다(24절). 이와 대조적으로 본문을 단순히 예수를 헐뜯고 비난하는 바리새인들에 대한 경고일 뿐이라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 그런데 우리는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성령의 독특한 사역에 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즉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로부터 영원 발생하신 분으로서(요 15:26 ; 16:7 ' 롬 8:9 ; 갈 4:6) 창조와 구속을 완성하는 사명을 맡으셨다. 그런 까닭에 그분은 죄인들에게 죄를 자각케 하고, 예수의 초청을 수락(acceptance)케 하며, 영원한 진리를 깨닫게 함으로써 더 성숙한 신앙 인격체로 자라나게 하신다. 그러므로 비록 성부를 경원(敬遠)시 하고 성자를 미워한 자라 할지라도(딤전 1:13), 이 성령의 거듭나게 하는 역사로 인해 참회(懺悔)의 자리를 설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바로 이 성령이 역사를 거부하고 적극적으로 비방, 모독하는 것은, 곧 참회와 중생에 이를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차단(遮斷)해 버리는 일로서 결국 심판에 회부될 수밖에 없는 불행한 결과를 낳게 된다(요 3:36). 한편 신.구약을 통틀어 용서받을 수 없는 죄에 대한 규정한 것이 있다. 그것은 '짐짓 범한 죄', 곧 의지적 결단에 의해 자행한 죄이다(민 15:30 ; 히 6:4-6 ; 10:26-32 ; 요일 5:16). 다시 말하면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이며, 은혜의 빛이 어떻게 비취는가를 알면서도 의식적으로 그것으로부터 돌아서는 것을 말한다. 이는 부지중(不知中)에 교회를 핍박했던 바울의 경우(고전 15:9)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범죄이다. 이같은 범죄는 '성령을 훼방하는 것'과 긴밀한 관련성이 있다. 즉 예수가 행하시는 놀라운 사역들(치유, 금식, 부활하심 등)이 분명히 하나님과 성령의 능력안에서 행해지는 것임을 충분히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완강하게 부인하는 것은 결단코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성령의 역사가 분명
=====12:32
누구든지 말로 - 앞 구절에서도 소개한 바 있듯이 '훼방', 곧 '블라스페미아'는 의지적 범죄로서 특별히 '말'에 의한 성령이 거르침을 강하게 내포하고 있다. 사실 '말'이란 인간 내면을 외부로 표출(表出)시키는 통로로서 '말에 의한 훼방'은, 곧 전인격적 훼방을 암시한다(24절).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 본문에서 나오는 '인자'라는 칭호가 무엇을 의미하는 가에 대해서는 분명치 않다. 혹자는 이를 막 3:28의 평행구와 연관시켜 복수 개념('인자들')으로 읽음으로써 단순히 사람들을 지시하는 말로 이해한다. 그러나 '인자'란 마태가 일반적으로 사사한 바대로(8:20) 성육신(Incarnation)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Origen). 한편 인자를 거역하는 것과 성령을 거역하는 것의 차이점에 대한 견해는 (1) 인자의 성령보다 덜 중요하다거나, (2) 전자는 세례받기 이전과 관련된 문제이고, 후자는 세례받기 이전과 관련된 문제이고, 후자는 세례받은 이후에 관련된 문제라고 하거나, (3) 또는 전자는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사람을 후자는 그리스도인 예언자들의 권위를 부인한다는 것, (4) 또 전자는 예수의 인성을 후자는 예수의 신성을 가리킨다 등등 많은 견해가 있으나 타당하지 않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5) 스텐달(Stendahl)과 보링(M.E. Boring)의 견해로서 인자를 거역하는 자들을 불신앙인들로서 만약 그들이 그리스도인이 된다면 죄사함을 받을 수 있다. 반면 성령이 거역하는 자들은 오순절 사건 이후에 성령강림을 체험한 그리스도인들로서 후에 배교(背敎)하거나 성령의 감동을 받아 말하는 다른 그리스도인의 메시지를 거부하는 자들로서 이들은 결코 죄사함을 받을 수 없다'고 하였다. 물론 이 견해 역시 일면 타당한 점은 있으나 전적으로 환영할 수는 없는 주장이다. 이러한 제 견해들에 비해 다음 견해는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즉 (6) 인자를 거역한다고 함은 예수 그리스도가 전하는 복음의 진리를 거부하거나 거스리는 것을, 그리고 성령을 거스리는 것은 예수가 성령의 권능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 것과 같은 놀라운 사건들(치유, 금식, 부활하심 등등)이나 성령의 내적인 감동이나 회개에 역사가 분명히 하나님 능력 안에서 행해지는 것임을 충분히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완강하게 성령의 사역을 부인하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이 해석이 정당하다면 인자와 성령의 차이는 어느 정도 부수적인(relatively incidental)것에 해당한다. 요컨대 성령을 거역하는 것은, 곧 예수 자신의 주장들을 거역하는 셈이 된다. 실로 '인자를 거역하는 데'서 전진하여 '성령을 거역하게' 되는데, 이렇게 되면 그 죄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다. 정녕 성령을 거역하는 일은 종말론적인 범죄로서 영원한 세계에 영향을 미
거역하면(* , 카타) - 일반적인 의미로서 무엇을 '반대한다'는 의미이다. 특별히 본문에서는 성령의 제 사역과 그분의 존재 자체에 대한 전면적 부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말'을 통한 훼방한 행위는 이 거역 중에 한 부분에 속한다.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 이 말을 단지 관용적 표현으로 취급하여 결단코 용서받지 못한다고 하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Plummer). 그러나 이것은 너무 안이한 해석이다. 한편 '세상'의 뜻인 헬라어 '아이온'(* )은 '세대'라는 말로 번역할 수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을 '이 세대', 즉 구약의 우대인 세대(율법시대)로, '오는 세상'은 '오는 세대', 즉 신약의 그리스도인 세대(은혜시대)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Clarke). 그러나 대체로 현존(現存)하는 세상과 예수의 재림으로 이뤄질 미래의 영원한 세계라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Calvin). 한편 유대인들은 전 역사를 메시야 이전과 이후 세계로 양분하여 생각하고 있다(에스라드마 2서 5:47,50). 그리고 로마 카톨릭에서는 '오는 세상에서의 사하심'이라는 말을 통해서 이 '오는 세상'을 현 세상과 마지막 세상 사이의 중간 기간으로 이해 함으로써 이 구절을 그들의 연옥(purgatory)설의 근거로 삼고 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용서받지 못하고, 즉 회개치 않고 죽은 불신앙인도 세상 끝날에는 용서받을 수 있다고 하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강림이 그분의 미래적 강림(* , 파루시아)의 기초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현존하는 이 세상의 모든 역사는 미래에 다가오는 세상의 역사와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가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죄사함을 받지 못할 것이라고 선포하신 것은 바로 성령 훼방의 죄를 범한 사람은 영원히 사함을 받을 수 없는 위치, 즉 마귀들과 같이 하나님의 용서와 자비의 범주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음을 의미한다.
=====12:33
나무도 좋고 실과도 좋다 하든지 - 열매에 의한 나무 판단의 교훈은 이미 7:17, 18에서 본 바 있다. 한편 본문을 이중적 구조로 이해하여 첫번째 등장하는 나무와 살과를 성령을 힘 입은 그리스도 자신과 그의 치유에 의한 선한 결과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두 번째 등장하는 나무와 실과를 스스로 악히기(나무) 때문에 성령을 훼방하는 말(열매)을 할 수밖에 없었던 바리새인들의 행각(行脚)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Alford). 실로 나무는 필연적 인과(因果) 관계에 있는 것으로 좋으면 둘다 좋고 나쁘면 둘 다 나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귀신을 쫓아내고 정의를 외치는 예수의 실과(fruit)는 결국 그 근본 나무가 선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들은 너무도 분명한 예수의 실과를 부인하지 못하였으니까 대신 예수의 나무를 비방했는데, 그들의 허구성(虛構性)이 이제 논리로 격파당한 것이다. 예수는 근본과 결과를 모두 선한 교사이신 동시에 자신의 실체를 정확히 소개, 변호할 수 있는 능력의 교사이기도 하셨다.
제3부 기사 부분인 11, 12장이 천국 복음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반응 및 이에 대한
예수의 답변이 주된 내용을 이루고 있음은 11장 강해에서 언급한 바이다. 특히 본장에
서는 날로 교묘하고 치열해가는 대적들의 비난과 음모가 집중적으로 소개되고 있다.
본장을 상고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전후 문맥의 흐름에 유의해 본 다음에 본문 자체의
내용을 분석하고 타 복음서의 내용과 간략하게 비교하기로 하자.
(1) 문맥상의 유의 사항. 본장은 그 내용상 11장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됨이 마땅하
기 때문에 중복을 피하고자 하므로 이에 관한 보다 상세한 내용은 11장 강해를 참조하
면 될 것이다. 여기서는 본장에 뚜렷이 부각된 다음 두 가지 사항에 초점을 맞추어 보
자. (까) 핍박의 가속화(加速化). 주지하다시피, 천국 복음이 두루 확대되고 온갖 이
적적 권능이 행사되자 사람들의 반응은 뚜렷이 양분되었다. 즉 일반 군중들은 대체로
예수를 환호하며 그 주위로 몰려들었던 반면 당시 종교적, 사회적 기득권자들은 예수
제거 음모에 점점 박차를 가하였다. 심지어 예수를 추종했던 자들마저 복음의 메시지
에 대한 진정한 깨달음에서라기 보다는 육신의 빵에 대한 갈망에서 모여들었기 때문
에, 핍박과 환난이 닥치면 뿔뿔이 흩어지고 심지어는 예수를 적극적으로 비방하고 모
욕할 자들이 대부분이었다(27:23). 11장은 바로 그와 같은 백성들의 영적 무지와 소그
적 불응에 관한 내용이라 해도 무방하겠다. 반면 그 뒤에 계속 연결되는 본장은 예수
와 그 복음을 적극적으로 대적하는 핍박에 관한 기록이다. (다) 메시야의 자기 계시.
대적들의 악독한 계교(計巧)와 비방에 답변하시는 중에, 예수는 '성전보다 더 큰이 '
(6절), '안식일의 주인'(8절), '고난 받는 종'(17-21절), '요나보다 더 큰이'(41절),
그리고 '솔로몬보다 더 큰 이'(42절) '하나님의 아들'(50절) 등자로 자신을 증거하셨
다. 하지만 예수의 이러한 자기 증거는 다분히 간접적이고 우회적(迂廻的)이며, 심지
어 예수는 자기를 나타내지 말도록 경계하기까지 하셨다(16절). 정해진 때가 무르익을
무렵에야 비로소 예수는 당신의 메시야적 신분 및 그 사역의 방법을 직접적이고도 공
개적으로 밝히셨거니와(16:13-21) 아직은 그러한 때가 아니었고 또한 당신의 사역의
참뜻을 알지 못한 채 표적에만 관심을 보이는 악한 세대(39절)에게 자신을 공개하면
도리어 당신이 목적한 바 공생애의 여정에 지장을 받을 것이며 또 비난과 모욕만 당할
것이었기 때문에 스스로를 간접적으로 증거하는 데에 그쳤던 것이다.
(2) 내용 구성. 예수께 대한 반대가 본장의 주된 내용임은 앞에서 지적된 바이거니
와, 이러한 주제에 착안하여 본장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첫 부분(1-45절)에
는 예수를 적극적으로 대적하는 자들이 등장하며, 둘째 부분(46-50절)은 예수의 신분
과 사역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던 가족들의반대라고 보아도 무방하겠다. 이중에서,
대적들의 비난과 이에 대한 예수의 답변은 4회에 걸쳐 반복되는데
(1-8;9-21;22-37;38-45절), 1-8절과 9-21절의 내용은 '안식일 논쟁'이라는 단일 제목
으로 묶을 수 있다. 그리고 대적들의 비난에 대한 예수의 네 차례에 걸친 답변 속에
는, 당신의 사역에 대한 변론과 베시야로서의 자기 증거 및 대적들의 허위 폭로와 그
들에 대한 심판 경고 등의 내용이 골고루 나타난다.
(3) 타 공관복음서와의 비교. 본장 내용과 평행을 이루는 세 공관복음서들 중 누가
복음의 기록이 가장 간략하므로(눅 6:1-11;8:4-18), 그리고 누가복음과 마가복음은 시
간적으로 동일한 순서에 따라 사건들을 배치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주로 본장과
마가복음의 평행 부분을 비교하기로 하자. 마가복음에 따르면 본장의 1-21절 내용은
예수께서 제1차 갈릴리 사역 당시 열 두 제자를 세우신 사건 이전에 발생한 이야기이
다(막 3:1-12). 그러므로 1-21절의 시간적 배경은 예수의 산상수훈(5-7장) 이전인 셈
이다. 반면에 22-50절은 제2차 갈릴리 사역 기간 중에 일어난 이야기이다. 여기서도
마태의 독특한 기록 의도가 잘 드러난다. 복음서는 단순히 예수의 행적을 시간순으로
나열한 전기(傳記)나 어록(語錄)이 아니라, 후대인들에게 신앙상의 지침과 모범을 보
여주기 위해 각 기자들이 나름대로의 독특한 관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 책이다
(4복음서 총론 중 '4복음서의 비교', '공관복음 문제' 등을 참조하라). 특히 마태는
타 복음서 기자들에 비해 시간적 선후(先後) 문제보다 주제별 구성 원칙에 더욱 충실
하였던 바, 본장 또한 그러한 특징을 여실히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사야
42:1-4의 인용 구절인 18-21절은 4복음서 중 마태복음에만 수록된 내용으로서, '고난
받는 메시야'에 관한 구약의 예언이 예수를 통해 성취되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처럼
구양성경이 빈번하게 인용된 것 또한, 유대인 독자들에게 에수께서 구약의 예언을 성
취하신 메시야이심을 증거하려는 본서의 기록 목적을 반영한다. 이제 이러한 몇 가지
사실을 염두에 두고서, 본장의 내용을 네 단락으로 나누어(1-21;22-37;38-45;46-50절)
구체적으로 상고해 보기로 하자.
1. 안식일 논쟁(12:1-21)
본문은 내용상 앞장의 28-30절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율법의 정신을 망각한 채
다만 형식적 규례들에 집착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율법의 무거운 집에 시달리게 하였던
바리새인들의 가르침은, 진리 안에서의 참된 '자유'를 가르치신(요 8:32) 예수의 교훈
과 당연히 충돌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본문에는 당시 유대인들이 얽매였던 '무거운
짐들' 중에서 대표적인 짐이라 할 수 있었던 안식일의 금계(禁戒)에 관한 문제가 제시
되어 있는 것이다. 이제 본문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고찰하기에 앞서 여기 수록된 안식
일 논쟁의 배경을 간략히 살펴보고 이어서 타 복음서와의 평행 부분을 비교해 보기로
하자.
(1) 논쟁의 배경. 엿새 동안 수고한 심신을 쉬면서9출 20:10) 하나님의 위대하신
창조 사역을 기억하고(창 1:1-2:3) 하나님께 온전히 예배드리며 신령한 영적 교가를
나누도록 하기 위해 마련된 안식일 제도는 하나님의 직접적 명령에 그 기원을 두고 있
다(출 16:21-30;31:12-17). 그리고 안식일 준수느 십계명 중 제4계명에 해당하며*출
20:8-11) 안식일에 일하는 자는 사형에 처해졌다(출 31:14;35:2). 그러나 예수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안식일의 참된 뜻보다는 그 형식적 준수 자체에 더욱 골몰한 나머지
온갖 금지 규례들을 문자적으로 지키기 위해 힘을 낭비하였다. 본문에서도 그들은 예
수의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먹은 것을 '일'한 것으로 단정하고 정죄하였던 것으로 보
인다.
(2) 타 복음서와의 비교. 마가복음 2:23-3:12와 누가복음 6:1-11에도 본문과 평행
되는 기사가 수록되어 있다. 이 중 사건의 세부적 설명은 마가복음에서 가장 소상히
다루어졌는데, 이는 예수의 사역을 강조하는 마가복음의 특징을 반영한다. 반면 마태
는 막 3:7-12의 내용을 단 두 절로(15,16절) 압축해 버리고 대신 이사야 42:1-4의 예
언을 첨가시킴으로써(17-21절) 구약의 성취자로서의 예수의 위상(位相)을 강조하며 에
수의 삶의 의미 문제에 보다 깊은 관심을 나타내고 있다.
(3) 내용상의 특징. 본문자에 관한 보다 상세한 주해(註解)는 주석 부분을, 그리고
안식일의 의의나 안식일과 주일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눅 6:1-10와 고전 16:2 및 출 31
장 등의 주제 강해를 각각 참조하기 바라며, 여기서는 본문 내용에서 드러나는 전반적
인 특징에다 초점을 맞추어 보기로 하자. (까) 구약이 많이 인용됨. 안식일에 이삭을
잘라먹은 제자들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비난을 일축시키기 위해 예수는 삼상 21:1-6의
고사(故事)를 인용하셨다. 그리고 스스로 율법 준수에 철저하노라고 자부하는 바리새
인들의 허상을 드러내개 위해 의도적으로 율법상의 규례로써 반박하셨다(5,11절). 뿐
만 아니라 선지자의 글을 인용하사(호 6:6) 당신의 말씀의 진실성을 보다 확고히 입증
코자 하셨다. 한편, 18-21절은 본서의 저자인 마태 자신이 구약 성경을 인용하여 예수
를 증거한 내용이다. (다) 논지를 심화시키심. 바리새인들은 안식앨에 이삭을 잘라 먹
은 행동을 심각하게 비방하고 나섰다. 하지만 예수는 이삭이 아니라 진설병, 곧 오직
제사장만이 먹을 수 있었던 진설병을 다윗이 먹었던 사실을 지적하심으로써 문제를 더
욱 심화시키셨다. 그리고 이어 당신을 '성전보다 더 큰 이', '안식일의 주인' 등으로
언급하심으로써 보다 근본적인 진리에로 인도하고 계신다. 이러한 사실은 뒤에 곧바로
이어지는 치유 기사(9-13절)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7절) 혹은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12절)와 같은 말
씀은, 율법의 더 중한 바 의(義)와 인(仁)과 신(信)을 버리고 박하(薄荷)와 회향(茴
香)과 근채(芹菜)의 십일조를 드리는 일에만 골몰했던 의식자들에 대한 경고의 말씀과
그 맥을 같이한다(23:23). (따) 만백성의 구주이신 예수의 모습을 드러냄. 마태에 의
해 본문에 인용된 이사야 42:1-4의 말씀은918-21절) 점점 고조되는 핍박의 열기와 때
를 같이하여 인용되었다는 점에서 각별한 주의를 환기시킨다. 즉, 대적들의 핍박과 모
욕에도 불구하고 메시야께서는 그들과 더불어 '다투지도 들레(make a nose)지도' 아니
하고 무력(武力)이 아니라 오직 사랑으로써 당신의 사역을 완수하시며, 또한 '상한 갈
대'요 '꺼져가는 심지'와도 같은 연약한 인생을 위해 친히 대속의 십자가를 지는 '고
난받는 종'으로써 당신의 사역을 완수하신다는 것이다. 특히 이사야서의 인용 구절은
유대인들의 냉담과 팝박으로 말미암아 예수의 복음이 이방인들에게로 확대되어갈 것임
을 부각시키고 있다(18, 21절). 이는 당시 유대인들의 편협한 국수주의나 선민으로서
의 특권 의식에 대한 경계였다고도 볼 수 있겠다. 요컨대, 17-21절 내용이 얼핏 보기
에는 안식일 논쟁(1-13절)과 별다른 관계를 맺고 있지 않는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대적들의 핍박에 대응하는 메시야의 사역 제도, 형식적 율법준수나 배타적 교리 보다
는 사랑으로써 영육간의 필요를 공급하시는 메시야의 사역 방법 그리고 온 세상 만민
을 구원하신다고 하는 메시야의 사역 범위 등의 측면에서 앞내용과 무난하게 연결되고
있는 것이다.
* 성전보다 더 큰 이. 유대인들은 성전에 대하여 극단의 존경심을 가졌다. 왜냐하
면 그들은 성전을 유일하신 여호와의 상징으로서 실체이신 하나님 다음가는 존재로 여
겼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성전을 금(金)으로 입히고 성전을 모독하는 자를 극
형에 처하기까지 했다(행 6:13). 바로 이러한 상황 중에 예수는 자신을 가리켜 '성전
보다 더 큰 이'로선언하셨던 것이다.
따라서 이 선언은 (1) 유대적 관점에서 볼 때 형식적인 성전과 율법을 초월한 존
재, 곧 예수 자신의 절대적 신성(神性)을 공개적으로 선포한 것이다. (2) 신약적 관점
에서 성전은 사실상 임마누엘로 오실 예수를 예표하는(히 8:5) 일시적이고 모형적 역
할을 하는 것으로 예언된 임바누엘의 도래로 인해 그 직능을 모두 마쳤음을 나타낸 것
이다.
이제 임마누엘로 오신 예수는 한시적인 성전의 기능을 전적으로 승화, 성취하신 것
이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절대적 가치로 여겼던 율법과 유전으로써 예수를 평가하거
나 정리하는 일은 참으로 그릇된 일이 아닐 수 없다. 진정 그분은 모세보다 크시며 아
브라함보다 크신 분으로서(요 8:58) 그 어떤 인간의 평가 기준에서도 초월하여 계시는
'성전보다 더 크신 분'이시다. 실로 그분은 오직 믿음과 찬양의 대상일 뿐이다.
* 이사야의 입을 통해(사 42:1-4) 본 에수의 성품. 장차 임할 메시야를 고대하며
예언했던 선지자 이사야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메시야의 성품이 발견된다.
(1) 조용하고 인내심이 강한 성품. 즉 그분은 '다투지 아니하며, 들레지도(소리 지
르지도) 아니하기에 아무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할 것이었다.' 진정 예수는 이 예
언과 마찬가지로 온갖 비난과 악의적인 도전에도 그리고 죽음의 순간에서도 아무런 불
평을 하시지 않고 조용히 하나님의 뜻을 이뤄가셨다(26:62,63;27:14;사 42:2;53:7;요
8:6).
(2) 인자하고 지극히 친절하며 온유하신 성품. 즉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고 꺼
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는' 것이 바로 그분의 모습이
다. 진정 그분은 좌절과 실의로 인해 마음이 어그러진 바, 외적으로 보기에 회복 가능
성이 거의 없어 보이는 버려진 영혼들마저 끝까지 감싸 안으시며 그들의 구원과 회복
을 위해 힘쓰신다(9:9-13;사 42:3;57:15). 이같은 뜨거운 열정과 끈끈한 인간애(人間
愛)야말로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들의 구원의 근본 동인(動因)인 것이다.
2. 바알세불 논쟁(12:22-37)
앞단락에 이어 본문에서도 예수께 대한 핍박에 관한 주제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어떻게 해서든 예수를 제거하려고 안달하였던 대적들의 음흉한 저의에는 변함이 없었
다. 하지만 본문은 그들의 핍박 양상이 시일이 지남에 따라 더욱 격렬하고 노골화되어
갔음을 보여준다. 앞에서는 대적들이 그나마 객관적 근거하에 예수를 제거할 만한 구
실을 찾기 위해 이모저모로 노력하였음을 시사한다. 하지만 그들이 논쟁으로써 예수의
지혜를 따라잡을 수 없음을 번번히 알게 되자, 이제 본문에서는 다짜고짜로 예수를 귀
신의 왕 바알세불에 접신(接神)된 자로 몰아붙이고 있는 것이다. 본문의 내용에 관한
보다 상세한 주해는 마가복음 평행 부분93:20-30)의 강해에서 다루기로 하고 여기서는
대략적인 내용을 분석하는 데에 그치기로 한다.
본 단락은 내용상 네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첫 부분(22-24절)은 바알세불 논쟁의
배경과 경위를 밝히는 내용이다. 둘째 부분925-27절)은 대적들의 비방에 대해 예수께
서 정연한 논리로써 반박하신 내용이다. 예수께서는 두 가지 논거로써 반박하셨다. 먼
저, 만일 예수께서 바알세불의 힘을 빌어 귀신을 쫓아내셨다고 한다면, 바알세불이 자
신의 세력을 제거해 버린 셈이 되고만다는 사실이 지적되었다. 그리고 두번째로는, 바
리새인들 중에도 귀신을 내어 쫓는 자들이 있었는데 귀신을 내어쫓는 일을 바알세불의
역사(役事)로 몰아붙이는 것은 자기 모순이 아니냐는 지적이었다. 세째 부분(28-30절)
에서 예수는, 대적들의 비방과 모함에 대해 변호하는 차원을 넘어 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셨다. 그리고 이어서 마지막 부분에서는 (31-37절) 대적들에 대
한 엄중한 경고와 심판이 선언되었다. 그중에서도 31,32절은 성령의 역사를 바알세불
의 역사라고 비방한 죄가 얼마나 큰 죄악인가를 지적하고 있으며 33-37절은 대적들의
근본적 죄성에 대한 엄중한 심판 선언이 제시되고 있다.
* 용서받지 못하는 죄. 무한한 사랑으로 인간을 구원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은 인간
이 범한 그 어떤 죄라도 '회개'하기만 하면 '용서'해 주실 것이다(사 1:18;요 3:16).
그러나 단 한 가지 죄, 곧 '성령을 웨방하는 죄'는 정녕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이
는 예수의 십자가 대속 사역이나 하나님의 자비가 한계성을 지녔거나 또는 성령이 성
부, 성자보다 더 절대적 위상(位相)을 지녔기 때문이 아니다.
그러면 과연 '성령을 훼방하는 죄'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이의 대답에 앞서 성령의
중요한 사역을 살펴보면 (1) 죄인들로 하여금 죄를 깨닫고 회개하게 하며, (2) 중생케
하고, (3) 예수의 초청을 받아들이게 하며, (4) 빛과 진리로 인도한다. 이를 한 마디
로 말하면 성령께서는 창조와 구속의 완성을 위해 활동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란 (1) 인간의 심령에 찾아오셔서 감화 감동케 하여
회개의 길로 인도하시는 성령의 적극적 활동을 의지적으로 배척, 비난하는 것, (2) 성
령의 역사가 분명함에도 오히려 그것을 사단의 일로 단죄(斷罪)하는 것, (3) 성령의
능력과 후원을 덧입고 방해하거나 핍박하는 것, (4) 성령의 역사를 사칭(詐稱)하여 자
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 등을 가리킨다고 본다. 이처럼 성령의 사역을 고의적으로 적
극적으로 방해하는 사악한 심령은 참회와 중생의 기회를 더 이상 가질 수 없기 때문에
끝내 영영한 심판의 자리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요 3:36).
3. 요나의 표적(12:38-45)
본문은, 주님께서 표적을 구하는 자들의 완악한 심령을 호되게 질책하신 내용이다.
왜냐하면 본문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표적을 구한 것이 믿음을 갖기 위해서가 아니
라 예수를 모함할 구실을 찾기 위해서였기 때문이다. 이미 예수는 문둥병자를 위시한
수많은 병자들을 고치셨고(8:2-4;눅 4:40, 41) 죽은 자를 살리시는(9:24,25) 이적적
권능을 허다하게 나타내 보이신 바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이적들을 본문의 바리새인 들
도 보거나 들었을 터였다. 그러나 대다수 사람들은 주께서 이적을 베푸신 목적을 깨닫
지 못하였으며 본문의 대적들은 그 이적을 사술(邪術)로 간주하였던 것으로 보인다(24
절).
본 단락의 내용을 상고함에 있어 우리는 다음 두 가지 특징적인 사하에 초점을 맞
추기로 하자.
(1) '천국'과 '핍박'이라는 주제가 부각됨. 천국 복음의 확장과 더불어 대적들의
핍박이 가속화되어갔다는 사실은 본장 강해에서도 언급된 바 있거니와, 본문에서도 그
러한 주제가 계속 이어진다. 즉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주목적은 죄인들을 불러 회개
케하고 그리하여 천국 백성으로 삼는 데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표적 자체에만 관심
이 잇는 완악한 세대에게 본문은 경고를 발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 경고의 직접적
대상은 표적 보여주기를 간구한 선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었지만, 예수는 당시 유대 백성
들의 일반적 완악성을 통감하셨던 까닭에 '이 세대 사람' 전체(42절)에게 경고의 메시
지를 발하셨다. 예수께선 전하신 천국복음의 메시지를 배척하거나 냉담하게 대했던 유
대인들의 영적 상황을 예수는 '나중 형펀애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된 귀신 들린 자의
상태에 비유했다(43-45절). 이 비유가 역사적으로는, 바벧론 포로 생활로부터 귀환한
유대인들이 우상 숭배를 버렸으나 그 이후 인존주의적이고 형식주의적인 종교 생활로
말미암아 참된 신앙을 상실하고만 것을 가리킨다. 이는 13장의 천국 비유 가운데 '돌
밭'에 떨어진 씨에 비견될 수 있겠다(5절). 어떤 계기에 의해 복음과 접하게 되었을
때 즉각적 관심을 보이기는 하되 근본적 변화가 뒤따르지 않는다면 그러한 인간적 관
심은 십게 변질되고 만다. 그리고 한때 복음을 믿노라고 하다가 불신앙에로 돌아선 자
들은 더욱 철저히 무관심해지거나 반대자로 변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복음에 관한 지
식을 나름대로 정립하고 있으므로 그 역(逆)논리로써 복음을 공박하려하기 때문이다.
역시 유대교 지도자들이 그토록 복음의 진리를 핍박한 이유 또한 그들 나름대로의 종
교와 신앙에 몰두하고 있었기 때문이라 하겠다.
(2) 십자가 수난과 부활이 암시됨. 본격적인 수난 예고는 메시야의 공개적 자기 계
시와 함께 이루어졌다(16:17-21). 그러나 예수는 당신이 이 땅에 나신 목적을 애초부
터 잘 알고 계셨기 때문에 당신의 자의식(self-consciousness) 속에서 십자가 수난과
부활이 늘 예건되어 있었다. 본문에서 예수는, 표적을 구하는 자들에게 가장 결정적인
표적으로서 '요나의 표적'을 언급하셨는데 이 또한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자의
식을 반영한다. 한편, 요나 사건 외에 구약성경에서 갈보리 십자가 사건을 예측하는
것으로 우리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외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
했던 사건을 기억할 수 있다(창 22:1-19). 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구속사적으로 직결되는 예측적 사건이었다.
4. 그리스도의 영적 가족(12:46-50)
본문에는 예수의 육신상의 가족이 찾아오게 된 배경이 밝혀져 있지 않지만, 마가복음 3:20,21 및 전후 문맥을 통해 우리는 그 배경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즉, 대적들이 예수를 귀신들린 자로 취급하고 핍박의 열기를 더해가자, 가족들은 예수의 신변을 염려하여 집으로 데려가고자 했던 것 같다. 가족들이 예수를 직접적으로 배척하지는 않았지만, 예수의 신분과 사역의 참된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오직 인간적 염려에 사로잡힌 나며지 그 활동을 반대하고 제한하려 한 것은 복음의 걸림돌 가운데 하나였다(10:36). 아마도 가족들의 눈에는 어려서부터 탁월한 재능을 보였던(눅 2:40) 유능한 예수께서 일생을 낭비하고 있는 것으로 비쳤을지도 모른다. 한편 본문에 언급된 예수의 말씀 속에는 다음과 같은 의도가 내포되어 있을 것으로 보인다.
(1) 제자들에 대한 위로. 날로 흉포해져가는 핍박의 기세와, 당대의 대다수 백성들을 겨냥한 예수의 비관적 경고(39-42절) 등을 접한 제자들은 고립감과 불안을 떨쳐버릴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자들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심으로써 제자들을 위로하셨다. 오늘날 성도들도 진리를 위해 핍박당할 때에 허막(虛寞)한 광야에 홀로 선 듯한 고립감에 지레 빠져들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당신의 구속 역사를 완성시키기 위해 항상 당신의 뜻에 순종하는 믿음의 용사들을 남겨두시기 때문이다. 엘리야 시대에도 모든 사람들이 바알에게 무릎을 끓은 것처럼 보여차지만, 사실은 무려 7천명에 달하는 신앙의 용사들이 남아 있었다(왕상 19:18).
[2) 교회 공동체의 결속 강화. 본문의 말씀은 육신상의 가족관계를 부인하거나 무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요 19:26,27) 다만 예수를 중심으로 새로이 형성되어가는 공동체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또한 하나님의 뜻을 실행하는 일에 우선권을 주기 위한 것이었을 따름이다. 예수의 피로 사신 바된 교회는 인종과 지역을 초월하는 우주적 실체이며 과거와 현재는 물론 미래의 모든 성도들이 함께 동거하는 영구적 공동체이다. 따라서 교리 공동체의 성원들은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함께 살아가게 될 참된 가족이요 한 몸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하겠다(고존 12;12;계 5:9).
(3) 제자화 훈련의 일환. 본문은 단순히 가족들의 영적 무지와 반대를 보여주려는데 일차적 목적을 두고 있지는 않다. 보다 더 중요한 주안점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가를 가르치려는 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천국 복음을 위해서는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마저 버려야 할 상황 마저 감수해야 한다는 의미이다(눅 18:29).
* 예수의 영적 가족들. 예수는 모친과 등생들이 당신을 찾아온 때에 당신이 추구하는 영적 가족상을 제시하셨다. 그것은 "하늘에 게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는 사실이다.
예수께서 이런 새 가족상을 제시한 근본 의도는 출생과 유전으로 이뤄지는 육체적 가족 관계보다 영혼의 거듭남으로 하나님을 신앙하게 된 신앙 공동체의 관계가 하나님 나라에서 더욱 소중하다는 사실을 가르치고자 하셨던 것이다. 그렇다고 지상에서의 혈연적 가족 관계가 결코 무시되거나 부정되어서는 안된다.
실제로 예수는 당신의 죽음을 밑거름으로 세워질 교회를 통하여 보다 더 위대한 영적 가족 관계를 맺기 전에 먼저 이 땅의 한 가정에 아들로 태어나 육신적 혈연 관계를 맺으셨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예수는 유년 시절 요셉과 마리아에게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밝힘으로써 자신은 단지 혈연적 가족 관계에만 묶일 수 없는 분이심을 드러내보이셨다(눅 2:49).
실로 에수께서는 당신의 십자가 희생을 통하여 단절되었던 하나님과 인간 관계를 회복하셨을 뿐 아니라(갈 3:19,20;딤전 2:5; 히8:6;9:15) 시기와 분쟁과 상처로 얼룩진 인간과 인간 상호간의 관계마저 회복하시는 새 가족에의 길을 여셨다(롬 12:5). 정녕 찢어진 사회가 하난가 되고 분열된 인류가 한 가족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시고 또한 모범을 보이신 바, '하늘에 계신 성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참신앙의 자리에 서야만 한다(롬 12:4; 고전 6:5;12:12-27;엡 4:25;5:30). 이를 무시한 그 어떤 평화 운동도 인류를 근본적으로 하나되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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