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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무리를 보시고 - '무리들'은 4:23-25에 언급된 '허다한 무리'를 가리킨다. 예수는자신의 뒤를 따르던 사람들을 향해 몸을 돌이키신다. 이때의 예수의 사역은 이미 절정에 달해 있었지만 사역의 내용은 단편적인 교훈을 포함한 병고침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천국 복음'(4:23)의 세밀한 내용을 가르치려 하시는 것이다.
산에 올라가 - 마 5-7장을 '산상 수훈'이라고 일컫게 한 구절이다. 누가복음에는 이 장소가 평지(눅 6:17)로 되어 있어 '평지 수훈'이라 불리우는 바 이러한 차이에 의하여 두 설교를 완전히 다른 것이라 주장하는 것은 성급한 일이다(눅 6:17 주석, 강해 참조). '산'(* , 토 오로스)과 그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와 아람어는 단순히 '산악지역', '산이 많은 지방'을 의미할 수도 있으며 또 '평지'가 산아래 평원(平原)이 아니라 산에 있는 평평한 지역이라고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어느 전승은 가버나움과 디베랴 사이의 한 언덕을 산상 수훈(the Sermon on the Mount)의 산으로 전하고 있으며 갈릴리에 내려오는 한 전설은 그 산 이름을 핫틴산이라 부르고 있으나 그 어느 것도 분명하지 않다. 한편 고대의 많은 주석가들은 예수께서 일부러 산에 올라가셨으며 그것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은 모세와 새로운 계명을 가르치는 자신과의 유사함을 나타내시기 위함이라고 주장한다. 그런 점에서 본문의 산을 흔히'신약의 시내산'이라 일컫기도 한다(Carr and Delitsch). 실로 예수의 메시지는 율법의 완성으로서의 복음이었고 예수께서는 모세보다 위대하신 새로운 모세의 실체이셨던 것이다.
앉으시니 - 유대의 랍비들이나 법을 제정하는 사람들의 엄숙한 교수 태도이다(13:2;23:2;24:3; 눅 4:20). 예수께서는 전도자이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친근하면서도 위엄있는 한 스승의 모습을 보인다.
제자들이 - (* , 호이 마데타이). 선택된 12제자들만 가리키는말이 아니라 상당 기간 동안 예수를 추종하며 교제하던 무리들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다(Alford). 마태는 의도적으로 10:1 이전까지는 12제자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는다. 또한 이 말은 완전히 성장한 신자들을 가리키는 용어도 아니다. 왜냐하면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게도 이 말이 사용되기 때문이다(11:2). 누가복음의 평행구절에도 '제자의 허다한 무리'라는 표현과 동시에 '많은 백성'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눅6:17). 이는 4:25 내용과 조화를 이룬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예수께서는 특별히 당신을 진실히 따르기로 소원하는 무리들을 따로 불러 가르치셨다는 것이다.
나아온지라 - 모세가 율법을 받을 때에 '시내산에서와 갈이'(출19:12) 백성들을 접근하지 못하도록 '금지'했던 일은 이 산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예수 자신이 그를 따르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나아가 그와 직접적으로 교제할 수 있도록 하는 유일한 길과 진리와 생명(요 14:6)이 되시기 때문이다. 예수의 계명을 듣고 지키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천국의 은전(恩典)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5:2
입을 열어 - 그리스도의 말씀의 엄숙한 권위를 나타내는 표현(13:35; 행 8:35;10:34)으로서 구약성경에서 유래하였다(욥 3:1;33:2; 단 10:16). 이 표현은 주로 격식이 갖춰진 상황이나 계시 전달의 장면에 사용되었다. 그리스도의 입이 열렸으니 '떡으로만 살던' 백성들에게 '생명의 말씀'이 주어지게 될 것이다(4:4).
가르쳐 - (* , 에디다스켄). 이것은 미완료 과거형이며 동작의 시작을 나타내는 말이다. 즉 예수께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는 뜻이다. 예수의 사역에는 가르침과 전파함과 치료함이 포함되어 있었다(4:23). 본문의 예수께서 행하신 '가르침'(* , 디다스코)의 최종 메시지는 천국'복음'(* , 유앙겔리온;4:23)이었으며, 이 '천국 복음'이야말로 산상 수훈의 중심 주제인 것이다.

=====5:3
심령이 가난한 자(* , 호이 프토코이 토 프뉴마티). 누가복음에는 단지 '가난한 자'(눅 6:20)로 표현되어 있다. 이런 차이에 대해 혹자는 이 구절은 누가의 정확한 기록에다 마태가 '심령이'라는 말을 덧붙임으로써 영적인 것으로 해석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구약에서도 '가난한 자'라는 말은 종말론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헬라어 '프토코스'(* , 가난한)와 동일한 의미를 지닌 여러 개의 히브리 단어 중 가장 중요한 '아나임'(* , 가난한 자)이란 말은 부자나 권력가들의 경제적 수탈과 사회적 억압(suppression)에서 자신을 구원할 능력이 없는 사람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 '가난한 자'들은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다(시 37:14;40:17;69:29; 잠 16:19). 이같이 가난한 자란 말은 그 내용적 측면에서 심령이 겸손하고 회개하는 자에 대한 구절들과 연관되어 있다(사 57:15;66:2). 더욱이 사 61:1은 장차 오실 메시야가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오실 것이라고 함으로써 가난한 자의 특성이 단순한 물질적 궁핍의 차원을 능가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눅 4:18). 이러한 점에서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단지 용기가 없다거나 물질적으로 궁핍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영적인 파탄(破綻)을 솔직이 시인하며, 하나님 앞에 선 인간은 무가치하며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자백하는 것이다(시 69:29;70:5;74:21; 사 61:1; 습 3:12). 또한 하나님 앞에서 오만한 자들과는 정반대되는 생활을 하기 때문에 그 오만한 자들로부터 박해를 받는 것이며(시 37:14;86:14), 그리고 자신의 죄를 통회하며 회개하는 것이다(시 34:6, 18;51:17; 사 66:2).
복이 있나니(* , 마카리오스) - 이 단어는 70인역(LXX)에서 히브리어 '아쉬레'(* )에 대응되어 사용되던 말로서 본래 외적인 번영을 의미하였으나 여기서는 주.객관적으로 한 인간의 축복받는 상태를 묘사한다. 이 단어의 배후에는 모든 불행한 환경(예를들면 '가난', '애통', '주리고 목마름', '핍박받음'등)의 원천(origin)인 죄에 대한 인식과, 이러한 불행을 완전하고도 효과적으로 치유(治癒)할수있는 거룩함에 대한 인식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마태복음의 경우 '복이 있다'는 것은 종말론적인 축복을 약속하는 것으로 육체의 가시적인 안락을 넘어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누리는 궁극적인 평안과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직접적으로 체험하는 한 인간의 유복한 상태를 말한다.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 마태는 메시야께서 통치하시는 나라를 "천국"(* , 헤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으로 나타낸다. 이는 메시야를 왕으로 그의 백성들을 천국의 시민으로 묘사하려는 마태의 면모를 보여 준다. 천국은 가난한 자, 즉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어 메시야의 통치를 향유하고 그가주시는 축복을 받을 자의 소유이다. 여기에서의 천국은 넓은 의미로 현세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누릴 모든 특권과 내세에서의 영원한 축복을 포함한다(Alford). 그러나 천국은 인간의 노력에 대한 대가와 보상이 아니라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내려지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에서 비롯한 선물(present)이다. 한편 첫번째 복과 마지막 복(10절)이 모두 천국에 대한 축복인것은 그 가운데 있는 것들도 모두 천국에 관계되어 있음을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첫번째 복과 마지막 복에서는 축복이 현제 시제로 표현되어 있어 천국이 우리가 지금 얻을 수 있고 들어갈 수 있는 현재의 실체라는 것을 명백하게 암시하고 있다(4:17;8:29;12:28).


=====5:4
애통하는 자(* , 호이 펜둔테스) - 앞 구절과 마찬가지로 사 61:1의 반영이다. 70인역(LXX)에서 이 어휘는 죽은 사람에 대한 애도 또는 자신과 타인의 죄에 대한 결과를 탄식하는 아픔을 묘사하는 말이다(Mc Neile). 심령이 가난한 자가 자신의 심령이 파멸하였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진실로 애통하는 자는 자신의 죄에 대해 깊이 슬퍼하고 철저히 '애통하는 자'의 자리에까지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특별히 이 애통은 영적인 측면의 애통을 말하는 것으로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는 불의(不義)에 대한 애통이며, 사람들이 자랑하던 바로 그 도덕성과 '자기 의'(self-righteousness)에 대한 애통이며, 하나님의 뜻을 진지하게 찾고 끝끝내 발견하려는 애통인 것이다. 실로 예수 당시 경건한 생활을 유지하던 자들은 이스라엘이 당하는 고난과 수치가 외세의 압제 이전에 그들 백성들의 개인적인 죄와 민족적인 공동의 죄 때문인 것으로 생각했고 그 때문에 수많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예수께서는 바로 이같은 회개의 눈물을 원하신다(4:17).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 세상의 소유나 기쁨으로 위로를 받지 못하고 애통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손길이 뻗쳐 온다. 여기서 '위로'(* , 파라칼레오)라는 말은 '곁으로'(* )와 '부른다'(* )의 합성어이다. 따라서 이는 당신의 백성에게 내주(內住)하시고 동거하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따뜻한 사랑의 행위를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메시야의 오신 목적은 이스라엘의 '위로'(눅 2:25)가 되려 하심이요, 성령이 오신 목적도 '위로자'(요 14:16)가 되기 위함이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위로는 회개의 눈물을 흘리고 있는 자에게 내려질 것이다. 그리고 이미 부분적으로 실현된 '위로'는 종말에 이르러서야 완전히 이루어질 천국에서의 '위로'(계 7:17;21:4)가 될 것이다. 진정 애통치 않는 자에게 현세와 내세의 위로는 전혀 기대될 수 없는 법이다.


=====5:5
온유한 자(* , 호이 프라 에이스) - '온유한'(* )이란 말은 시편 36:11의 70인역(LXX)에서 나온 것이다. 그 주제는 한 인간이 역경에 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하신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자를 끝까지 보살피실 것이라고 굳게 믿는 신앙으로 인하여 기업을 차지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온유'란 외형적인 폭력이나 잔인함의 반대어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사랑으로 인하여 고통받고, 그 고통을 오래 참음으로 인내하는 온화하고 부드러운 마음의 자세인 것이다(11:29; 약 3:13). 이에 대해 칼빈(Calvin)은 '온유란 부드러운 마음으로 살며 노하기를 더디하며 절제할 수 있는것'이라고 했으며,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는 '자연적 격노에 대하여 관용을 취하는 덕성'이라고 정의하였다. 실로 세상의 정복자들은 강한 힘과 권력으로 땅을 정복하였지만 예수께서는 온유하심으로(11:29;21:5) 세상만물과 천국의 주인이 되셨다. 한편, 본절과 7-10절에 있는 다섯 개의 축복 선언은 누가복음에 평행 구절이 없다. 이로 인하여 이것이 후대의 삽입이라고 주장(Wellhausen)하거나 마태의 것들이 누가복음과는 다른 부류의 사람들을 위한것이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지만 팔복은 하나의 통일체이며 그 모든 것들이 천국 시민(메시야의 백성)들이 지켜야 할 의의 규범(norm)인 것이다.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 '땅'(* , 게)이라는 단어는 마태복음에 45회 나온다. 그것은 유대 땅(2:6), 이스라엘 땅(2:20,21), 어느 지역(4:15;9:26, 31;11:24;27:45), 하늘과 땅 (천지) (5:18, 35), 하늘과구별되는 장소(6:10;9:6), 지면(10:29), 흙(13:5, 8, 23) 육지(14:24), 온세상(12:40, 42)을 가리키는 경우에 사용되었다. 본문의 땅은 시 37:11의 약속의 땅에 대한 인용이다. 여기에서 땅을 은유적으로만 해석하여 바다나 하늘에 반대되는 지리적인 공간이 아니라고 볼 필요는 없다. 그리고 땅의 의미를 이스라엘 땅에 국한(局限)시킬 필요는 없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는 구절의 진정한 뜻은 구약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약속(창 15:18)에 따라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처럼 신약의 성도들이 메시야 왕국의 절정이 되는 새 하늘과 새 땅(사 66:22; 계 21:1)에 들어가게 되리라는 것이다. 세상에서는 강하면서도 공격적인 자, 질서를 무시하는 난폭자가 땅을 차지하게 되지만 천국의 기업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온유한 자에게 주어질 것이다(시 37:1, 11, 22, 34). 왜냐하면 온유한 자는 그리스도에게 속해있기 때문이며, 그러므로 하늘의 축복과 땅의 축복이 모두 그들의 소유(고후 6:10)가 되고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나라를 상속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롬 8:17).


=====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 '심령이 가난함'(3절), '온유함'(5절) 그리고 '애통함'(4절) 만큼 영속적인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본능을 예수께서는 영적인 의미로 바꾸신다. 누가복음에는 단순히 '주린 자'(눅 6:21)로 묘사되어 있으나 마태복음에서는 그 주림의 목적을 '의'라 밝히고 있다. 즉 주림과 목마름은 이 땅위에 사는 모든 인생이 겪 는 육적인 기갈(starvation)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기 때문에 겪는 심각한 영적 기근을 가리킨다(시 42:2;63:1;107:9; 암 8:11-14). 이러한 굶주림과 목마름은 영으로 거듭난 자들이(요 3:3, 5)체험하는 새 생명의 영적 욕구이다(Alford). 이들이 갈망하는 의가 정확하게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많은 학자들이 하나님의 의가 전가(轉嫁)된 '종말론적인 구원'이거나 협의적으로는 '칭의'(稱義)라고 주장한다(Grundmann, Lohmeyer, McNeile, Schniewind, Schrenk, Zahn, Bornkamm, Bultmann). 그러나 어떤 학자들은 '디카오쉬네'(* , 의)라는 말이 마태복음에서 그러한 의미로 사용된 곳이 없다는 이유로 그 주장을반대한다(Przybylski, pp.96-98). 그러므로 '의'라는 말은 개인적이고도 인격적인 의로움(Hill, Greek Words pp.127 ff;Strecker, Weg.pp. 156-158)인 동시에 넓은 의미에서는 사회적 정의를 뜻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합당하다(Ridderbos, pp. 190 ff).
부연한다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세상적으로는 자신이 의로워져서 하나님의 뜻을 전적으로 행할 뿐 아니라 정의가 이루어질 것을 갈망하는 자요, 종말론적으로는 굶주림이나 목마름 같이 이 땅에서는 완전히 해결되지 못할 세상의 불의에 대한 하나님의 최후 승리와 의의 본향인 새 하늘과 새 땅을 사모하는 자들이다(벧후 3:13) 배부를 것임이요 - 이 말에 대한 헬라어 '코르타스데손타이'(* )는 푸른 잔디(막 6:39)를 뜻하는 '코르토스 클로로스'(* )와 마찬가지로 '먹이'나 '풀'에 해당하는 단어에서 파생된 것으로 가축을 먹여 살찌우는 데 사용하는 단어이다. 이는 결국 그리스도께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성도의 목자가 되시어 영생의 생명수와 하늘 양식으로 충만하게 채워 주신다는 의미이다(요 4:14;6:46-51). 진정 의를 구하는 곳에는 영혼의 평안(平安)함이 있으며, 그 완벽한 영혼의 만족이 바로 신앙의 대가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5:7
긍휼히 여기는 자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이 엘레에모네스'(* )는 '자비'란 뜻의 '엘레오스'(* )에서 파생한 용어이다. 특히 70인역에서 '엘레오스'는 '사랑'이란 뜻의 히브리어 '헤세드'(* )와 '동정'이란 뜻의 히브리어 '라하밈'(* )의 변역어로 쓰였다. 그중 구약에서 '헤세드'는 주인과 종, 또는 친지들 사이의 관계, 또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언약적 관계에서 발생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는 단지 감정이나 성품이 아니라 신뢰를 기반으로 한 구체적인 행위를 가리킨다. 따라서 구약에서 이 용어는 주로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역사(役事)를 의미했으며, 신약에서는 언약의 성취자이신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사역을 가리킨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본받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은 자들은 바로 '긍휼히 여기는 자'가 되는 것이다. 즉 긍휼히 여긴다는 말은 죄를 용서해 주는 것과 고통을 당하는 자와 궁핍한 자를 동정한다는 의미를 포괄(包括)한 것이다. 그리고 시련을 당한 자들의 상황에 깊이 동참하여 그들로 하여금 부담없이 도움을 청하게 하는것을 의미한다. 한편 긍휼히 여길 대상은 바로 이 죄악된 세상이며, 성도는 이 세상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실천하는 존재가 된다. 즉 성도에게만이 이 세상의 회복자로서의 자질이 주어져 있다.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 죄악된 세상을 긍휼히 여기고 세상의 참된 회복을 위해 실천하는 자에게는 신실하신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가 깃든다. 즉 긍휼에 대한 보상은 타인이 베푸는 긍휼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긍휼인 것이다(클레멘트 1서 13:2). 그러나 이 말은 우리가 베푸는 긍휼이 하나님의 긍휼의 필연적 근거(causal ground)가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시는(occasional ground)계기가 된다는 의미이다(6:14, 15). 실로 긍휼은 소자에게 한 잔의 물을 대접하는 일상적인 사소한 일에서부터 이 세상의 죄악된 세상과 투쟁하는 거대한 사역에 이르기까지 성도 안에 있는 일관된 태도인 것이다. 또한 본절은 긍휼하심을 받은 성도가 긍휼을 실천하며(요일 4:19), 그 실천으로 다시 하나님께로부터 긍휼하심을 받는 순환론적인 것이다. 이는 마치 눈덩이가 구르면서 더 큰 눈덩이가 되듯이 긍휼의 풍성함에 성도가 거한다는 그리스도의 놀라운 축복 선언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최종적인 보상은 최후의 심판 때 성도에게 주어진다(약 2:13).


=====5:8
마음이 청결한 자 - '마음'의 헬라어 '카르디아'(* )란 그리이스인들에게서 (1) 육체적으로 '신체의 중심 기관', (2) 비유적 으로 '감정이나 사고의 중심지'를 뜻하는데 쓰였다. 이 용어는 70인역(LXX)에서 히브리어 '레브'(* )나 '레바브'(* )를 번역할 때 사용되었다. 따라서 '카르디아'는 (1) 문자적로 '가슴', (2) 비유적으로 '인간의 사고, 종교적 윤리적 행위의 원천'(삼상 12:12)이라는 의미를 내포하였다. 더구나 신약에서 이 용어는 인간의 지.정.의의 근본 원천을 가리키는데 사용되었다(7:21; 눅 21:14; 요 16:6 등). 또한 '청결'의 헬라어 '카다로스'(* )는 당시 유대교의 정결 예식에서 주로 사용된 용어로서 도덕적, 종교 의식적인 정결을 의미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인간의 모든 사고와 행위의 원천인 마음을 탐욕과 두 마음에서 해방시키고 정결케 하는 근본적이고 내적인 청결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것은 그리스도로 인해 죄사함을 받고 신실한 주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성도의 마음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성도는 '두 마음'을 품는 자가 아니며(약 1:8),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 그리고 참 소망으로 성도의 교제를 돈독(敦篤)히 하는 자를 의미한다(히 10:22-25 참조).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 '볼 것임이요'의 헬라어 '와손타이'(* )는 '보다'라는 뜻의 '호라오'(* )의 미래형이다. 특히 '호라오'는 '눈으로 보다'라는 뜻인 '블레포'(* )와 '눈여겨 보다'라는 뜻인 '데아오마이'(* )와는 달리 '경험을 통해서 보다', 즉 '실제적으로 보다'라는 뜻이다. 한편 인간이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출 19:21;33:20; 삿 6:22 등). 이는 죄악된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볼 수 없을을 의미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커다란 영적 축복인 것이다. 실로 지금은 신앙의 눈으로 보게 되지만 결국에는 어떤 거짓도 폭로되고야 마는 지복 직관(至福直觀, beatific vision-하나님을 직접 보게 되는 축복)의 눈부신 광채 속에서 하나님을 보게 될 것이다(히 12:14; 요일 3:1-3; 계 21:22-27).


=====5:9

화평케 하는자 - 헬라어 '호이 에이레노포이오이'(* ) 는 단순히 '화평에 속한'(* , 에이레니코스) 사람이 아니라 '화평을 만들어 가는 자'를 의미한다. '화평'(* , 에이레네)은 히브리어로 '샬롬'(* )과 견줄수 있는데, 이 용어는 개인의 안녕(슥 6:13)이나 국가간의평화를 의미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 회복으로 인한 궁극적인 평화를 의미한다(사 54:10;66:10-14). 인류 역사상 가장 완벽한 화평의 실현자는 예수 그리스도이다(엡 2:14). 바로 예수의 대속적 사역이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회복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평화의 왕의 은혜로 구원얻은 성도들은 인간들 사이에서 예수께서 실현하셨던 평화의 사역을 지속적으로 수행해 가야만 하는 것이다. 실로 그분은 '평화의 왕'이셨다(사 9:6, 7; 눅 2:14; 요 14:27). 화평케 하는 것은 단순히 분쟁 등을 완화(緩和)시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화평케하는 진정한 본보기를 하나님이 대가를 치르면서 이룩하신 화평에서 찾아야 한다(엡 2:15-17; 골 1:20). 이러한 일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될 것이다. 구약성경에서는 이스라엘이 '아들'이라는 칭호를 갖고 있었다(신 14:1; 호 1:10). 이제는 '아들'이라는 칭호가 온유하고 심령이 가난하며 의를 사랑하고 긍휼히 여길 줄 알고 특별히 화평케 하는 일을 위하여 준비가 되어 있고 그로써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성품을 반영해 주고 있는 천국의 상속자(inheritor)들을 지칭하게 되었다. "세상에서 화평케 하는 일보다 더 하나님을 닮은 일은 없다"(Broadus). 이러한 축복 선언은 정치적 정열을 불태우고 있던 열심 당원들에게는 충격적인 내용이었을 것이 분명하다(Morison).


=====5:10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 - 이 구절은 팔복의 마지막 축복이며, 다음 두 구절은본절의 설명구에 해당한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다란 말씀은 물론 까닭없이 고난을 받았다는 사실을 의미하기는 하지만 기실 그 이상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계명을 지킴으로 고통당하는 것, 우상에게 절하거나 불의와 타협하기를 거부한 일로 고통당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 나라와 복음의 확장을 위해 진력하다가 고초당하는 것, 예수의 이름 때문에 명예가 실추되고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통제를 받는 것 등을 의미한다. 여기서 예수께서 메시지의 흐름을 화평케 하는 일에서 핍박으로 넘긴 것은 우연(偶然)이 아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증오와 편견을 기뻐하여서 화평케 하는자가 항상 환영받는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의에 주리거나 긍휼히 여기는 것이 예수의 제자가 되는 표시인 것처럼 반대를 받는 것도 예수의 제자가 된 표시이다(요 15:18-25; 행 14:22; 벧전 4:13, 14). 진정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받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딤후 3:12).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 이렇게 핍박받는 자들이 받는 보상은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 받는 복과 같은 것이다(3절). 즉 천국이 저희 것이다. 박해의 시련 속에서도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얻은 의에 굳게섰으므로 그들의 큰 복은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는 것이다. 즉 왕이신 메시야의 나라에서 얻어지는 모든 은혜와 은사와 영광은 그들의 것이다. 세상이 그들에게서 무엇을 빼앗든지 그것은 그들로부터 그 무엇도 빼앗을 수 없는 이 하늘나라의 소유에 의해서 보충되고도 남는다. 이로써 천국의 소유로 시작하고 그것으로 끝맺어지는 8복의 설교가 모두 끝이 난 것이다.

=====5:11
나를 인하여...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 이 구절에서는 10절의 핍박을 모욕과 박해와 비방(slander)에 이르기까지 확대시키고 있고 누가복음에서는 증오도 포함하고 있다(눅 6:22, 23). 10절에서는 '의를 위하여'라는 것이 핍박의 이유였으나 여기에서 예수는 '나를 인하여'라고 직접적으로 말한다. 이 구절은 우리가 생각하는 의로운 삶이라는 것이 바로 예수를 닮아가는 것임을 분명히 밝혀 준다. 동시에 제자들과 예수의 행하신 의를 동일시함으로써, 의로 가득차지 않고는 예수께 충성을 고백할 수없다는 사실을 밝혀 준다. 뿐만 아니라 이 구절은 기독론적인 주장을 암시하고 있다. 왜냐하면 제자들과 비교된 선지자들은 하나님께 충성하였기 때문에 박해를 받았고, 제자들은 예수에 대한 충성 때문에 박해를 받고 있다고 선언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선지자에 비견(比肩)되는 것은 예수가 아니라 제자들이다. 그리고 예수는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 놓고 있다.

=====5: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상이 큼이라 - 여기서 먼저 '기뻐하다'(* , 카이로)란 마음으로부터 일어나는 좋은 감정, 벅찬 기쁨의 상태를 의미하며, '즐거워하다'(* , 아갈리아오)란 외부로 넘치는 기쁨, 억제할 수 없는 역동적인 환희 등의 뜻으로서 '카이로'보다는 좀더 점층된 기쁨의 상태를 암시한다(눅 1:47;10:21; 요 5:35). 실로 예수의 제자들은 핍박 중에 있더라도 이러한 기쁨으로 기뻐할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하늘에서 받을 그들의 상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들의 받을 '상'(* , 미스도스)이란 무엇일까? 혹자는 이에 대해 '합당한 보상이란 단순히 그것을 목표로 하는 행동에 항상 결부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결국에는 그 행동 자체가 합당한 보상이라고 할 수 있다'(Lewis)고 한다.


=====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 '소금'(* , 할라스)은 고대의 종교 세계에서 인내와 순결과 부패 방지의 상징으로서의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따라서 그것은 거룩한 제사에 사용되었고(출 30:35; 레 2:13), 하나님과의 영원 불변하는 언약에 연관되었다(민 18:19). 그런데 예수께서는 주로 비유적인 의미에서 이 소금의 역할과 가치를 인정하셨다. 예를 들면 제자들은 희생의 의미를 담고서 소금처럼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막 9:49). 한편 본문에 언급된 바대로 소금이 그 맛을 잃는 것에 대한 언급(눅 14:34, 35)은 매우 흔한 이야기이면서도 동시에 상당히 중요한 의미(意味)를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사실 '소금과 햇빛보다 유용한 것은 없다'는 혹지(Pliny)의 말처럼 소금과 빛은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늘 대하는 것이기 때문에 많은 이야기들이 그로부터 생겨난 것이 분명하다. 앞서 소금의 여러 용도가 이야기되었지만 무엇보다도 소금은 음식을 보존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다. 고기에 약간만 뿌려 두어도 부패가 상당히 느려지게 된다. 그런데 엄격하게 말하자면 소금이 그 맛을 잃을 수는 없다. 염화나트륨(Nacl)은 완전한 화합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대 세계에서 사용되던 대부분의 소금은 소금물을 증류하여 얻은 것이 아니라 염분이 있는 늪지 등에서 추출된 것이기 때문에 불순물이 많이 섞여 있었다. 진짜 소금은 불순물보다 쉽게 녹기 때문에 용해되어 나오기 쉬웠고 그렇게 희석(稀釋)되어 소금이 추출되고 남은 나머지는 거의 쓸모가 없었다. 오늘날에도 이스라엘에는 아직도 맛을 잃은 소금이 평평한 지붕의 흙 위에 뿌려진다고 전해진다. 이 소금 때문에 흙은 더 단단해지고 새는 구멍이 생기지 않는다. 그리고 지붕이 운동장이나 공공집회의 장소도 되기 때문에 소금은 여전히 사람에게 밟히고 있는 것이다(Deatrick, 'salt', p. 47). 한편 '어떻게 다시 짜게 할 수 있는가'하는 본문의 질문은 슈바이쩌(Schweizer)가 지적한대로 어떤 구체적인 답을 듣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에 대하여 소금을 다시 짜게 할 수 있는것이 '노새의 태(胎)'와 같다고 대답한 랍비의말(노새는 번식력이 없으므로 결국은 불가능하다는 뜻)은 요점을 놓친 것이다(Schweizer). 여기에서 말하는 요점은 (1) 예수의 제자들이 천국의 규범에 따름으로써 세상에서 방부제로 행동하여야 하며, (2) 도덕적 기준이 저급하고, 끊임없이 변경되거나, 기준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이 세상 속에서 소독제의 역할을 해야


=====5: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 13절에서와 같이 '너희'가 강조된다. 너희, 즉 다른 사람이 아닌 제자들이 세상의 빛이라는 것이다. 비록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세상의 빛이라고 생각하였지만(롬 2:19) 진정한 빛은 선지자들이 예언한 바 고난받는 종 한 분뿐이다(사 42:6;49:6). 그리고 이것은 예수에게서 성취되었다(요1:9). 그에 따라서 예수의 제자들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비취는 새빛이 될 수 있는 것이다(엡 5:8, 9; 빌 2:15). 한편 빛은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종교적 상징이다. 신약에서와 마찬가지로 구약에서도 빛이 부정함에 대립되는 순수함, 거짓이나 무지와 대조되는 진리와 지식, 하나님에게 버림받은 자들에 대조되는 하나님의 계시와 임재를 상징하는 경우가 자주있었다.
산 위에 있는 동네 - 이 문구는 어떤 면에서 의미가 매우 분명하다. 고대의 마을은 흔히 흰 석회암으로 건축되었기 때문에 태양속에서 빛나는 것이 많은 사람들 눈에 보이고 쉽게 감추어지지 않는다. 밤에는 동네 주민들이 켜놓은 등불이 주변 지역에 빛을 드리우게 한다(Bonnard). 그런데 '산 위에 있는 동네'에 대한 말씀은 예루살렘, 여호와의 전의 산 또는 시온의 세계 속에서 뛰어나게 되고 모든 족속(族屬)이 그리로 몰려 올 때에 대한 구약의 예언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사 2:2-5;42 장;49장;54장;60장;Grundmann, Trilling, K.M. Campbell). 그러나 이것은 확실한 추측은 아니며 산 앞에 정관사가 없는 것으로 보아 이사야서의 예언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없다고 하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어쨌든 만일 전자의 주장이 옳다면 본문에서 예수의 제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모이는 참된 모임이고, 종말에 도래하는 천국의 전초기지이며, 그리스도의 참 빛을 세상에 비추는 순결한 반사체인 것이다. 이러한 주제는 모두 마태복음에서는 중심적인 것들이다(Carson).

=====5:15
사람이 등불을 켜서...비취느리라 - 이 구절은 공관복음서에 다같이 나오는 기사이다. 눅 8:16에는 씨뿌리는 비유 다음에 오고, 막 4:21에도 이 기사가 나타난다. 눅 11:33에도 이 기사가 나타난다. 공관복음서에 나타나는 이 기사는 문자적으로 유사해서 그 중 어느 것도 독립성을 인정할 수 없다. 그 누가의 구절(눅 8:16)은 서로간에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으며, 그중 특히 눅 11:33은 마태의 것을 닮았고, 막 4:21의 기사는 독특성을 지니고 있다. 일련의 이러한 일치성은 본문의 확신성을 더해주는 것이다. 그런데 굳이 선택한다면 다른 구절에 비해 눅 11:33이 가장 자연스러운 것 같다(The Pulpit Commentary). 한편 본문에 언급된 '말'(* , 모디오스)은 곡식의 양을 재는 나무 그릇으로 보통 8.25리터의 양을 담을 수 있는 용기로 알려졌다. 혹자는 이 말의 용도에 대해 등을 마루에 두고 불이 오랫동안 꺼지지 않도록 하려고 곡식을 재는 용기로 그것을 덮어두면 얼마동안은 효과가 있다(Tholuck)고 한다. 그리고 이에 비해 '등경'은 복음서에 4회, 그 외에 8회 정도 등장하는데, 그 대부분은 촛대가 아니라 '등불 받침대'를 뜻한다. 그런데 이스라엘 가옥 구조상 이 등경은 방 하나에 한개가 설치되었다고 한다. 여하튼 등경이 빛을 멀리 비치게 하는데 큰 역할을 하지만, 말은 빛을 비치지 못하게 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특히 이 말 아래 둔다는 것은 빛을 차단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실은 형식주의, 금욕주의, 전통주의의 제한성(制限性)에 연결된다(Lange). 그리고 등경은 성도와 교회의 개방적 특성과 연결된다(계 1:20). 실로 복음사역자 들은 마치 산 꼭대기에 선(사2:2) 자처럼 모든 사람 앞에서 자신의 행실과 언어를 통해 그리스도를 널리 전해야 한다.

=====5:16
이같이 너희 빛을...영광을 돌리게 하라 - 여기에서 예수는 이 비유를 더 심화시키고 있다. 예수의 제자들이 보여 주어야 하는 것은 그들의 '착한 행실'이다. 즉 그들은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나타내는 모든 의(義)를 행하여야 한다. 그리고 사람들이 이 빛을 보도록 해야한다. 혹시 이 때문에 박해가 일어나게 될지도 모른다(10-12절). 그러나 박해를 두려워해서 빛을 감추고 그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도 아버지를 영화롭게 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같이 빛을 비추고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 제자들이 살아가는 유일한 이유(理由)이다(고후 4:6; 벧젠 2:12). 또한 '증거한다'는 말에는 말 뿐 아니라 행동도 포함되는 것이다. 실로 선행이 따르지 않는 선한 말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다(Stier). 이같이 천국의 규범(3-12절)은 천국의 상속자들의 삶 속에서 작용하여 천국에 대한 증거를 만들어 낸다(13-16절). '소금'(13절)이 부패를 늦추는 소극적인 역할을 하고 제자들이 세상을 따라 가거나 타협하게 될 위험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는 것이라면, '빛'(14-16절)은 죄로 어두운 세상을 비추는 적극적인 면을 말한다. 그리고 덧붙여 제자들이 세상에서 물러나서 그 때문에 다른 사람들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기회를 잃게 될 것을 염려하여 경고하고 있다. 이에 대해 본회퍼(Bonhoeffer)는 '보이지 않는 곳으로 도피하는 것은 부르심의 거부다. 보이지 않게 숨으려는 예수의 공동체는 예수를 따르는 것이 아니다'고 하였다.


=====5:17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 여기서 먼저 '율법'이란 구약성경 전체를 뜻하기도 하고 축약된 의미로서 모세 오경을 가리키기도 한다. 그리고 '선지자'는 구약 역사서들로 구성된 초기 선지서들과 이사야 이후의 후기 선지서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개별적 의미보다 오히려 예수 당시 유대인이 신약이 기술되기 전에 구약을 지칭하는 관용적 표현으로 '율법과 선지자'라는 말을 사용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7:12;11:13; 눅 16:16; 요 1:45; 행 13:15; 롬 3:21). 한편 '폐하다'(* , 카탈뤼사이)란 건축물의 파괴와 연관된 표현으로서(24:2;26:61;27:40) 여기서는 어떤 규범이나 제도의 완전한 개편 또는 폐기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사실 예수를 비난했던 당시 유대인들은 스스로가 율법의 손상자와 파괴자 역할을 하기도 했다. 즉 합리성을 추구하는 사두개인들은 선지서들을, 고지식한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극단적인 엣세네파는 율법과 선지서들을 부분적으로 폐기함으로써 결국 율법의 파괴자가 된 것이다. 이에 비해 그들의 비난 대상이었던 그리스도는 그 모든 것의 완전한 성취자였던 것이다(Lange). 한편 '온 줄로'에서 '왔다'는 말은 예언자들에게 사용되었던 표현으로서(11:18, 19), 적어도 예수가 어떤 사명을 가지고 보냄을 받았다는 것을 보여 주고있다(Maier).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 이 부분에 대한 가장 훌륭한 해석은 율법과 선지자가 예수를 지시하고 있다고 볼 때 예수가 그것들을 완전케 하는 자이고, 동시에예수가 바로 그 성취라고 하는 것이다. 여기에 대조시키고 있는 것은 '버리다'와 '행하다'간의 대조가 아니라 '폐(廢)하다'와 '완전(完全)케하다'인 것이다. 그리고 마태복음에 있어서 문제되는 것은 '율법에 대해 예수가 어떻게 관계하고 있는가가 아니라 예수에 대해 율법이 어떻게 관계하는가인 것이다(Banks)' 한편 본문에 제시된 바 '완전케 하다'(* , 플레로오)는 말은 원래 '가득 채우다'는 뜻으로 여기서는 '그 깊은 뜻과 충분한 의미를 드러낸다', '모두 실행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결국 본문은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하나의 큰 목적을 제시하고 있는 바, 예수께서는 율법이 목적, 의도하는 그 온전한 뜻과 속깊은 내용을 완전히 드러내 보이시기 위해 오신 것이다(NcNeile). 이러한 사실은 당신의 권위로써 그 율법의 각 조항을 문자적 해석 이상의 궁극적 목적과 의도를 밝히신 21-48절에서 확실히 알 수 있다. 실로 구약성경이 가지는 실제적이고, 지속적인 권위는 구약성경의 풍성한 성취가 되시는 예수의 품격과 가르침을 통해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가 의도하는 바는 구약의 율법을 폐기하거나 강화하려는 것이 아니고 구약이 지시해 준 자기 자신의 권위에 입각하여 구약성경의 율법이 지향하는 바를 보여 주려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이 구절이 갖는 기독론적인 의미를 간과할 수 없다. 예수는 자신이 구약이 지향하는 종말론적인 목표(目標)임을 드러내고 있으며, 따라서 자신이 구약성경에 대하여 유일하게 권위있는 해석자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를 통해서만 구약성경의 근거를 얻고 의미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율법과 선지자가 가리키는 초점은 바로 예수였으니, 바로 이 점이 바울과 마태가 모두 의도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바울은 기독론적이고 종말론적인 해석을 통하여 구약성경에 접하고 있는데, 이러한 구약 해석의 기초를 놓은 분이 예수라는 점이 본 복음서에 의하여 분명해지는 것이다(Carson).


=====5: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멘 가르 레고 휘민) - '믿을 수 있는'이라는 말을 헬라어로 음역한 것이다. 구약에서는 이 말이 '틀림없이', '진실로'라는 부사로 자주 사용되었으며, 문장의 마지막에서 그 문장이 진실이거나 또는 진실임이 증명될 수 있다는 것을 보증하는 의미로 사용된 용례가 자주 보인다(기도에서 마지막에 '아멘'으로 화답하는 경우). 그리고 이 말로써 문장이 시작되기도 한다(렘 28:6; 계 7:12;19:4;22:20). 또는 '아멘'이 응답으로 쓰이는 경우도 있다(신 27:15-26; 고전 14:16; 계 5:14). 어쨌든 예수께서 하신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란 말씀은 당신의 절대적 권위에 입각해 어떤 한 진리를 단정적으로 선언하실 때 흔히 사용하셨다.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 이는 '세상의 종말까지는'으로 번역될수 있는 말로서 예수의 재림을 지향한 표현이다. 진정 세상 종말까지는 율법과 선지자는 폐해질수 없다는 것이 예수의 단정적 선언인 것이다. 일점 일획(一點 一劃)(* , 이오타 헨 에 미아 케라이아). '일점'이란 히브리어 문자에서 가장 작은 글자인 '요오드'(* )를 가리키며 헬라어로는 '이오타'(* )정도의 가장 작은 문자를 뜻하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일획', 즉 '케라이아'가 무엇을 가리키는가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 일획에 대하여 슈바츠(G. Schwaz)는 히브리어 문자 '와우'(* )라고 하고, 휠슨(Filson)과 렌스키(Lenski), 알렌(Allen), 잔(Zahn)은 비슷한 히브리어 문자들(* ; / ; / ; )을 구별하기 위하여 사용되는 작은 획이라고 이해한다. 그리고 타스커(Tasker)와 슈니빈트(Schniewind)와 슈바이처(Schweizer)처럼 순수히 장식적인 획이었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락스(Lachs)는 가장 작은 글자의 가장 작은 부분을 가리키기 위하여 '일점'과 연결지어서 사용된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어떤 경우든간에 예수는 여기에서 구약성경이 '붓 한번 살짝 움직인 정도'의 아주 조그마한 내용조차도 모두 권위를 갖는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같은 예수의 생각이 구약성경에 대한 최상의 견해이다.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 이는 분명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진 새 세상에서까지도 율법의 권위와 그 효력성은 계속될 것임을 시사한다고 볼 수 있다(24:35; 막 13:31). 그러나 이것으로써 이 구절의 의문점이 완전히 풀리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문자적 측면에서 예수께서는 안식일을 범하셨고(12:8), 이혼(divorce)에 관한 모세의 규범을 거부하셨으며(5:31, 32), 특히 음식에 관한 규정을 무효화시키셨었다(15:11). 그렇다면 땅이 지속되는 한 율법의 한 획도, 나아가 경건한 필사자(筆寫者)가 덧붙인 수식어 중 어느 하나까지도 없어져서는 안된다는 것을 마태는 어떠한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마태는 세상이 끝날 때까지는 율법의 어느 것도 없어지지 않는다는 엄격한 문자적 보존과 성취라는 측면에서 이해하기 보다는, 율법이 의도하는 것은 더욱 완전한 형태로 성취되며, 또한 모두 실제로 일어나고 실제로 이루어질 것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에서 일어나며, 어디에서 이루어지는가? 진정 그것은 예수의 가르침과 행위에서 그리고 그의 가르침과 행위를 계속하는 그의 제자들에게서 이루어질 것이다.

=====5:19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지극히 작다 일컬음 - 천국에서 지극히 작은 자와 큰 자 사이를 대조(對照)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이 구절은 천국 안에도 등급이 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고 본다. 11:11의 경우를 보더라도 그곳에서는 '극히 작은자'를 가리키는 말이 본절에 사용된 단어와 다르기는 하지만 그 의미하는 바는 동일하다(18:1-4). 한편 본 구절에서 '이 계명 중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는'자라는 표현은 자신들이 그릇된 판단에 의해 율법을 중요한 것과 중요치 않은 것으로 나누어 놓은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율법관에 일침을 가하는 표현이다(Meyer, Westein). 그런데 우리가 알 것은 위와 같이 지극히 작은 계명 하나라도 버리는 자가 천국에서 제외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다만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고 인정되거나 중요하지 않는 존재로 여겨질 것으로 생각된다. 이처럼 천국에서 특권을 누리는데 등급(grade)이 있다거나 천국에서도 수치를 당할 수 있다는 생각은 공관복음서의 다른 곳에서도 나타난다(20:20-28; 눅 12:47, 48). 이런 구분은 그 사람이'계명 중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소중히 여기며 신실히 지켰는가에 따라 이루어질 뿐 아니라 그가 얼마나 열심히 타인의 올바른 삶을 위해 계명을 가르쳤는가 하는 점도 기준이 될 것이다. 물론 '이 계명'이란 모든 율법과 선지자로 지칭되는 구약성경의 계명을 가리킨다. 이같은 모든 율법과 선지자는 예수가 오심으로써 폐기된 것이 아니라 성취된 것이다. 따라서 성경의 모든 계명은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다 실천되어야 한다(율법을 구분하는데 대하여는 22:36;23:23 주석 참조). 그러나 이러한 실천이 갖는 본질적인 성격은 이미 17, 18절에서 규정 되었다. 율법은 예수와 그의 가르침을 미리 지시해 주는 역할을 하였다. 따라서 예수의 말을 따르는 것이 율법을 지키는 올바른 길이다. 그렇게 되면 예수의 가르침이 구약의 계시를 성취한 것이므로 천국에서 등급이 정해지는 문제는 예수의 가르침을 어느 정도 따르고 실천(實踐)했는가에 의하여 결정된다. 따라서 구약이 미리 지시해 주었던 예수의 가르침을 순종하여야 하는 것이다(Carson).


=====5:20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낫지 못하면 - 은혜의 시대를 여시는 예수의 가르침은 관대하고 편리하게 되는 것이기 보다는 오히려 온전하게 되는 것을 요구한다(48절). 따라서 본문의 요구는 예수께서 당신의 제자에게서 바리새인들보다 더 나음을 요구한 것인데, 이는 그들이 보다 많은 계명과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마태는 근본적으로 유일한 계명, 즉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이중 계명으로 축소시켰다) 그들이 새로운 의 즉, 훨씬 더 포괄적인 의를 이행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바리새인과 서기관(2:4;3:7 주석 참조)은 이스라엘에서는 가장 엄격한 종교 집단의 무리들이었다. 예수께서 그들을 비판하신 것은 그들이 선하지 못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만족할 만큼 선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Hill). 그들이 만들어 놓은 복잡하고 수많은 규정때문에 도덕적인 사회가 이뤄질 수 있었는지는 모르나 그로 인해 율법의 권위가 상대적으로 실추되어 성경에서 요구한 성결이라는 철저한 요구에는 미치지 못하게 하였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본문에서는 바라새인들의 의가 부인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다만 예수의 제자들이 추구해야 할 의(義)의판단 기준이 되었다. 실로 예수의 제자들은 그들보다 한 단계, 즉 결정적인 단계를 더 나아가야 했던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율법 조문에 철저히 순종했는데, 그들은 모든 세금 이외에도 정확하게 수입의 10%를 헌금했으며, 하나님의 안식일과 율법의 가르침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가장 잔인한 순교(martyrdom)를 당했으며, 또 자신들의 삶에서 하나님이 다른 모든 것보다도 더 중요하게 될 때 비로소 자신들의 삶이 진정 인간적인 삶이 된다는 것을 알았다. 이러한 그들의 행위로는 진정 어떤 식으로도 비웃음을 당할 수 없었다. 그러나 예수의 제자들로부터는 그들보다 더 풍성하고 우수한 의(義)가 기대되었다. 즉 제자들은 형식적 삶과 선행 위주의 삶을 추구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보다 더욱 우월한 하나님께 대한 내면적인 열정과 사랑과 경건이 요구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의(義)의 결과로서 오직 하나님이 영광받으시는 참으로 인간적 욕망을 탈피한 하나님 중심적인 의(義)가 요청되었다. 실로 그들은 사 61:3이 말하고 있는 '의의 나무들'이어야 한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하나님의 의가 그들 안에서 세력이되며 그들을 통해서 세상 안에 들어오게 될것이다.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 이말은 천국이 상대적으로 남보다 더 나은 자가 들어가는 곳이 아니며 또한 율법의 형식이 아니라 율법의 근본 정신(사랑)을 지키는 자, 율법을 지적으로 잘 아는 자가 아니라 그것을 몸으로 실천해 나가는 자가 들어갈 곳임을 강조하고 있다.


=====5:21
옛 사람에게 말한 바 - 헬라어 본문은 '옛 사람들에 의해 이야기된 것'으로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야기되어 있다'라는 드문 표현은 신약성경에서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 즉 거의 독점적으로 성경 인용의 서두로 사용된다. 따라서 '옛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모세의 율법을 받은 '시내 산 세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살인한 자가 재판(裁判)을 받는다는 것은 십계명 중에는 구체적으로 밝혀져 있지 않으나 모세 율법에는 자주 이야기되어 있다(창 9:6; 출 21:12; 레 24:17; 민 35:16). 따라서 예수 당대의 사람들은 그들의 조상들에게 주어진 율법 속에 살인을 금지하고 살인자는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한 것을 확실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살인은 아무 생명이나 해하는 것이 모두 포함되는 것은 아니며, 또 살인을 금하는 것은 단순히 법률상의 명령이었을 수도 있다(창 9:6). 그리고 '심판', 즉 '크리시스'(* )란 마을마다 있었던 재판소(신 16:18; 대하 19:5;Jos, Antig. IV, 214;Wars II, 570-71)나 범죄 문제를 다루기 위하여 설립된 23인 평의회에서 진행되는 사법절차를 가리키는 것이다.
너희가 들었으나 - 예수께서는 율법에 깊은 이해가 있었던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에게 말씀하실 때는 흔히 '너희가 읽지 못하였느냐'(12:3, 5;19:5;21:16, 42)는 말로써 당신의 뜻을 전하시곤 하셨다. 본문의 이 '들음'에의 환기는 그 당시 예수의 말씀을듣고 있던 청중의 대부분이 종교적 특권에서 제외된 평범한 백성들이었음을 시사한다. 즉 그 일반 평민들은 회당에서 율법 교사들이 들려주고 가르쳐 주는 율법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간접 전달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요 12:34).


=====5: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 예수는 모세의 율법에 대한 완전한 성취자로서의 신적 권위를 1인칭 주어 '나'(* , 에고)를 통해 역설하셨다. 실로 예수께서는 단순한 문자적, 의식적 차원에서의 율법을 넘어서서 그것의 궁극적, 본질적 차원에서의 율법을 설명하시고 계신 것이다.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 예수는 살인의 근원은 분노(忿怒)이며, 분노도 원리상으로는 살인이라고 하는 자신의 가르침을 율법이 실제로 지향하는 바라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이 말의 의미는 사람이 살인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는 더 나은 의를 소유하고 있다고 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진정 형제에 대하여 분노하는 사람은 심판(* , 크리시스;21절)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런데 "세상의 어떤 법정에서도 내면적인 분노의 사건을 다루지는 않기 때문에"(Scott)그 심판은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심판이 분명하다. 한편 여기서 형제(* , 아델포스)란 남자 형제로 국한시켜서는 안 된다. 마태복음 에서는 이 말이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이 말이 분명히 혈연상의 형제 이상의 의미를 가지는 경우는 언제나 예수가 사용한 말에서 나오고 있다. 그리고 좁은 의미로 사용된 경우는 기자인 마태가 사용한 경우이다. 이로 미루어볼 때 서로를 '형제'라고 부르는 그리스도인의 습관은 예수의 가르침에서 비롯된 것 같다. 예수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가르치면서(6:9) 그러한 가르침의 한 부분으로 '형제'라는 말을 사용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도인 형제간에는 분노가 사라져야 하는 것이다. 이 구절에서 심판이 점점 엄중(嚴重)해진다는 것을 표현해 주는 수사법은 찾아볼 수 없다(Hendriksen). 왜냐하면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범죄에도 등급이 나누어져서 점점 심한 범죄로 이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또 형제에게 노하여 미련한 놈이라고 하는 자와 형제를 '라가'라고 욕하는 자가 분명히 구별되지는 않는다. 한편 형제를 모욕하면 '(하나님의)법정' (* , '쉬네드리온'은 '산헤드린'을 뜻할 수도 있고<개역 성경>, 법정을 의미할 수도 있다)에 서게될 뿐 아니라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Carson). 지옥불(* , 게엔나 투 퓌로스). 문자적으로는 '불붙은 게엔나'라는 이 표현은 히브리어 '게힌놈'(* , 힌놈의 골짜기)에서 나온 것이다. 이곳은 예루살렘 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옛날에는 이방신 몰록(Moloch)과 또한 혐오감을 불러 일으키는 몰록 제사 의식과 관련된 장소였다(왕하 23:10; 대하 28:3;33:6; 렘 7:31; 겔 16:20;23:37). 이러한 의식은 하나님이 금지한것이었다(레 18:21). 요시야 왕이 그러한 의식을 폐지할 때에 그는 이 골짜기를 오물과 죄인의 시체를 버리는 곳으로 만들어서 더러운 곳이 되게 하였다(왕하 23:10). 후기 전승에 따르면 1세기에도 이 골짜기
라가(* , 라카) - 이 단어는 '텅빈(무가치한)', '우둔한', '어리석은', '멍청한'이라는 의미의 아람어 '레카'(* )를 음역한 것으로서 상대의 인격을매우 경멸할때 사용하던 일종의 욕이다.
미련한 놈(* , 모레) - '라카'와 거의 같은 뜻의 모욕이다. 헬라인에게는 '모레'가 '어리석다'는 의미를 갖지만 히브리어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헬라어가히브리어 '모레'(* )를 연상시키게 하는데, 이 말은 도덕적 배신, 반란, 악이라는 의미를 갖는다(시 78:8<70인역 77:8>; 렘 5:23). 한편 혹자는(Bruce)는 이 양자의 차이에 대해 '라카'는 '어리석은 놈'이라는 뜻으로서 그 지적 수준이 아주 저급한 것을 꼬집는 말이며, '미련한 놈'은 '추악(醜惡)한 녀석'이라는 뜻으로서 그 인격과 마음이 매우 천박한 상태를 지적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어쨌든 두 용어 모두 상대방의 인격에 참혹한 상처를 안기는 욕임에 틀림없다 =====5:23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생각나거든 - 본문과 같은 내용의 일들은 실제 생활에서끝없이 많이 일어나는 사건이다. 물론 이 내용의 배경은 유대인의 예배 의식에서 연유한 것(예물은 희생 제물로 짐승을 사용하며, 제단은 성전안 마당에 위치함)이지만 그 뜻하는 바는 하나님의 존전에서(in presence) 엄숙하게 예배드리다가 양심에 거스리는 죄나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자기의 그릇된 행위가 기억난다면(막 11:25)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지체없이 화해의 노력부터 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진정 모든 것을 익히 알고 계신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고자 하는 자는 먼저 자신의 신변을 아무런 편견없이 살피는 그 자신의 정직한 판사가 되어야 한다. 물론 형제 중 한 사람이 까닭없이 어떤 형제를 비난하며 까닭없이 도리에 어긋나게 화를 낼 가능성도 있다. 그 때는 죄책이 비난 당한 당사자에게가 아니라 그에게 있을 것이다(Lenski). 어쨌든 하나님은 인간 상호간의 관계를 등한히 하는 자의 예배와 헌신과 헌물은 절대 받으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본문에서 묵시적으로 가르치고 있다(사 1:10-17). 따라서 성도는 항상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에 힘쓸 뿐 아니라 동시에 인간과의 수평적 관계에도 진력(盡力)해야 할것이다.

=====5:24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후에...예물을 드리라 - '먼저 화목하고'에 해당하는헬라어 '프로톤 디알라게디'(* )는 제 2부정과거 수동태 명령형으로서 '화목하게 하라'는 의미이다. 즉 이 말은 적극적 성격을 띠고 있는 단어로서 '솔선하여 화해하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이 동사는 상호 적대적인 관계에 놓인 이후에, 상호 양보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디알라게디'보다 자주 사용되는 '카탈라쏘'(* )라는 말에는 이러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지 않다(Lightfoot). 한편 상호간의 화해란 측면이 강조되는 이유는 '카타'(* )가 아닌 '디아'(* , '둘', '둘 사이')가 접두사로 사용되었기 때문일 것이다(Rovertson). 실로 제의적인것 보다는 인간적인 것을 우위에 두는 것(9:13;12:7;23:25, 26)은 마태의 기록에 있어서 특징적인 것이며 그 경향에 있어서는 예수 자신에게로 소급된다(막 7:15, 16). 여하튼 본문의 '먼저'라는 말은 '화목하고'라는 말과 짝을 이루어 매우 강조되고 있다. 이는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물의 가치나 중요성을 묻기 보다는 형제와의 화해가 얼마나 더 중요하며 가치 있는 일인가를 강조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실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물은 형제를 위한 따뜻한 사랑과, 격의없는 화해와, 생명을 내놓을 정도의 봉사 등일 것이다(25:40). 결국 구절에서 강조하는 바는 예배가 이웃들과의 관계로 인해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의 관계가 예배를 위해서 선행되어야 할 조건(terms)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Schweizer).

=====5:25

너를 송사하는 자...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 본 비유에서 채무자는 전례(前例)에 따라 그의 형제에게 악을 행한 사람임이 분명하다. 고대 세계에서는 채무자는 채무를 모두 변제할 때까지는 옥에 갇히게 되었으며 많은 채권자들은 이렇게 해결짓는 것으로 만족했다고 한다. 한편 누가복음에서는(눅 12:57-59) 이 상황을 응용하면서 회개할 줄 모르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너무 늦기 전에 하나님과 화해하도록 경고하고 있다. 따라서 원래는 종말론적인 말 많은 학자들이 내린 결론이다. 그런 관계로 다음과 같은 말로 재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만일 시비가 있어 법정에 갈 때에 법정 밖에서 문제를 청산해야 한다. 그 순간을 놓쳐버리면 더 이상의 화해의 기회는 오지 않을 것이다. 그 이후에는 오직 지옥의 고난에 직면하게 될것이다.' 한편 '길에 있을 때에'라는 말은 누가의 기록에 근거해 볼 때 법정에 시비를 가리기 위해 가는 도중의 길임을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 '길'은 마지막 기회'의 장(場)이라고 여겨진다. 이때 필요한 것은 '급히 사화하는 것'뿐이다. 실로 인간은 어떤 일을 쉽사리 미루어버리는 게으른 경향성이 있기 때문에 기회가 주어진 이상 더 이상 지체치 말아야 한다는것이다. 그리하여 형제에게 마음을 다한 '사화'곧 화목을 도모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 이 기회마저 놓쳐버린다면 '송사자'의 고소를 받은 '재판관'은 정식 재판에 회부하고 말 것이다.
재판관이 관예에게 - 여기서 '관예'(* , 휘페레테스)란 배의 노를 젖는 사람을 가리키나, 그 의미가 확대되어 종이나 회당에서 잔심부름을 하는 시중들을 가리키기도 하였다(눅 4:20조). 물론 본문에서는 재판관의 명령을 받아 그대로 집행하는 일종의 형리(刑吏)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본 교훈은 이 관예의 손에까지 넘기우는 것을 원치 않고 어찌하든지 주어진 화해의 기회를 은혜롭게 선용하라는 데 집중된다. 한편 '옥'(* , 퓔라케)은 상징적으로 지옥, 즉 '불붙는 게엔나'를 묘사한다(22절). 이에 대해 로마 카톨릭은 26절에 언급되고 있는 '네가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전에는'이란 문구에 집중하여 '퓔라케'를 연옥(purgatory)으로 말하며 이 상징된 장소에서 우리의 죄책의 빚을 갚아 버릴 길을 찾는다. 그러나 '퓔라케'는 연옥에 관련된 것이 아니라 심판적 공의와 완전한 상태에 관련된 것이 분명하다(Lange).

=====5:26진실로
네게 이르노니...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 결문의 장엄한 이러한 표현은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하는데, 일반적으로 이 결문은 종말적인 사건을 암시해 준다. 한편 18:34에 보면, 본절과 매우 유사한 표현이 비슷한 경향을 가지고 있는 비유 속에 나타나는데, 이는 하나님의 심판을 통한 최종적인 유죄 선고를 나타내 준다. 왜냐하면 마지막 빚 한 푼까지도 모두 지불한다는 것은 완전히 가망이 없기 때문이다. 눅 12:59에서도 이 명제는 상황이 더 계속되는 것을 보여 주는 것처럼 이해되었다. 마태는 언제나 하나님의 위협적인 심판을 암시하는 것을 강조했기 때문에(22:13;24:51;25:30, 46) 그는 확실히 여기에서도 심판주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을 생각했다(Schweizer). 호리라도(* , 톤 에스카톤 코드란텐). 이것은 라틴어의 '콰드란스'(quadrans), 즉 사분의 일 앗사리온(1앗사리온은 하루 품 삯에 해당하는 데나리온의 1/16정도에 불과)이나, 두 렙돈(막 12:42)에 해당하는 아주 작은 단위의 돈이다. 따라서 이 표현은 빚을 다 갚기까지 형벌을 면키 심히 어렵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것은 부정과거 가정법과 함께 '결코...하지 못하리라'는 뜻의 '우'(* )라는 이중 부정을 사용하여 더욱 강조되고 있다(Robertson).


=====5:27
간음(姦淫)치 말라 - 간음하지 말라는 구약성경의 계명(출 20:14; 신 5:18)은 유대교 문헌에서는 순결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절도의 문제로 다루어지는 것으로 나타난다. 즉 간음이란 남의 아내(약혼자도 해당)를 '도둑질'하는 것이다. 그런데 신약에서 예수는 그 행위를 모든 부녀자에게로 확대시키고 있다(28절).

=====5:28
여자를 보고...이미 간음하였느니라 - 예수는 제 7계명을 다른 차원, 즉 음욕조차도 용납되지 않는 완전한 순결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제 10계명에서 이미 이러한 점이 분명히 밝혀져 있다. 한편 '여자'를 나타내는 헬라어 '귀네'(* )는 '아내'보다는 '여자'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즉 예수는 유대 법에서 크게 문제시 하지 않는 범위까지 확대하는 철저한 도덕률을 원하셨던 것이다. 이와 같이 '율법을 엄격하게 해석하는 것은 사실상 율법을 무효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본래 의도에 맞추어서 변경하는 것이다'(Davies).
음욕을 품는(* , 에피뒤메사이) - 이 단어는 과거 부정사로 사용되었으며 원형이 '에피뒤메오'로서 '갈망하다', '욕망하다' 등의 뜻을 나타낸다. 이 단어는 긍정적 의미로 '원하다'는 뜻을 가질 수도 있으나 나쁜 의미로 사용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롬 1:24에서는 분명히 성적인 욕망과 관련되어서 사용되고 있다. 본 구절, 즉 '여자를 보고 음욕(carnal desire)을 품는'의 '프로스 토 에피뒤메사이 아우텐'(* )이라는 표현은 목적의 의미로서 '그 여자에게 음욕을 품으려고'라는 뜻이 되거나, 결과적인 의미로 '그 여자에게 음욕을 품게 되다'라는 뜻이 될 수도 있다. 여기에서는 전자의 의미를 갖는 것 같다. 즉 '아우테스'(* , 소유격)보다 '아우텐'의 의미인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서 '아우텐'이라는 목적격은 부정사에 대한 지시의 목적격(즉 의미상의 주어)의 기능을 하는 것으로 보아 '그녀가 음욕을 갖게끔 하려고'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타당성이 있다(Carson). 따라서 카슨(Carson)은 이 구절에 관한 주석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본문의 의미는 남자가 여자로 하여금 음욕을 품게하려고 바라본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의 의도가 성취되며 그는 '그 여자'와 간음을 하고, 여자도 간음한 여인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으로 인하여 예수의 가르침의 의미가 약화되는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문제의 핵심(核心)이 여전히 음욕과 마음속의 생각이기 때문이다.
마음에(* , 엔 테 카르디아 아우투) - 이 단어는 문자적으로 심장을 의미한 다거나 또는 인간이 지닌 지.정.의 가운데 감정적인 부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본문에서 의미하는 바는 지.정.의를 모두 포함하는 전인격을 가리킨다. 한편 이 말은 '떨리다', '두근거리다'라는 어원을 갖는 말에서 파생된 것이다. 예수께서는 외적인 행위 이전에 눈과 마음 안에서 이루어지는 간음에 그 중요성을 두신다(Robertson).

=====5:29,30
네 오른눈...빼어 내버리라 - 죄를 범하게끔 하는 신체의 부분들을 경계하라는 본구절 때문에 오리겐(Origen)과 같은 사람들은 스스로 고자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행위를 했다고 해서 만족할 만큼 예수의 가르침에 철저하였다고는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렇다고 해서 음욕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눈'은 우리 신체 중 우리를 범죄하게 하는 것, 특히 성적인 죄를 짓게 하는 것으로 가장 많이 비난을 받았던 부분이다(민 15:39; 잠 21:4;겔 6:9;18;12;20:8). 그리고 '오른눈'은 가장 좋은 눈을 말한다. 한편 '실족케 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칸달리조'(* )는 '나로 인하여 걸림돌이 되다', '나로 인하여 범죄하게 하다'(18:6-9;눅 17:2; 롬 14:21) 또는 '타인의 길을 방해하다', '믿지 못하게 하다'(11:6;15:12),'오해하게 하다'(17:27; 요 6:61) 등의 다양한 뜻으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이 단어와 같은 어원에서 나온 명사 '스칸달론'(* )은 덫을 작동시키는 '미끼가 달린 막대기', 즉 멸망으로 인도하는 유혹물(enticement)또는 '죄짓게 하는 유혹'(temptation to sin)이란 의미를 가진다. 이러한 사실과 본문의 맥락에서 살펴볼 때, '너로 실족케 하거든'이란 오른눈이 '너의 전존재를 죄짓는 유혹으로 이끌거든'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즉 오른눈은 유혹의 도구와 동기(動機)요, 원인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한편 이 구절에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음욕에 대한 것을 다루는 곳에 왜 '오른손'이 나오는가 하는 사실이다. 이것은 단순히 예를 들기 위한 것이거나 음욕도 도둑질의 일종이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혹자(Lachs)는 이 문제에 관해 이야기하기를 이 말이 남성의 성기를 가리키기 위한 완곡 어법이라고 한다. 즉 히브리어로 '야드'(* , '손')가 사 57:8에서는 이러한 용법으로 쓰였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점에서 이같은 주장을 펼치는 것이다. 어쨌든 죄를 짓는 부분을 잘라내거나 빼어 버리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는 문자적인 것보다 상징성이 강한 교훈으로서 예수의 제자들은 죄의 문제를 단호하고도 철저하게 해결하여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사실 인간에게 있는 상상력은 하나님이 주신 은사이다. 그러나 눈으로 인하여 더러운 것만 보게 된다면 상상력은 오염되게 될 것이다. 성적인 죄 뿐만 아니라 모든 죄가 상상으로부터 시작된다. 따라서 상상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가하는 것이 천국의 의(義)를 추구하는데 있어


=====5:31
또 일렀으되 - 이 도입 공식문은 본장에 나오는 다른 표현들보다 짧으며, 특히 접속사 '데'(* , 또)로 앞 부분과 연결되고 있다. 따라서 31, 32절은 원래 대구절의 형식을 갖고는 있지만 앞에 나오는 짤막한 가르침이 내용을 더 진전시키고 있는 것이다.
아내를 버리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 이 구절은 아내의 '수치스러운 일'에 관계된 이혼 법령인 신 24:1에서 확립된 조치를 요약한 것이다. 이 말은 원래 28절의 예수의 말씀이 겨냥하고 있는 것, 즉 여인을 보호하려는 목적을 정확히 가지고 있었다. 사실 모세 당시의 이혼 증서는 순전히 매사에 피동적일 수밖에 없는 여인의 지위와 인권을 보장하기 위한 안전 보장책(安全保障策)으로 주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이 이혼법은 차츰 남자의 손 안에서 편리한 도구가 되어갔는데, 남자들에게 일시적인 결혼을 허용하게 했고 때에 따라서는 단 하루만의 결혼도 허용함으로써 성적(性的)인 방종이 실제적으로 허용되는 악법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따라서 여성은 다시 물건, 즉 남자가 버리거나 또는 취할 수 있는 남자의 소유물로 전락했던 것이다. 한편 이러한 시류에 대한 보완으로써 바리새인 그룹 가운데 보수적인 샴마이 학파(School of Shammai)는 오직 이혼 조건이 부정(不貞)과 율법적인 위반에 국한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반해 상당히 진보적이고 자유로운 힐렐 학파(the Hillel school)는 어떤 이유이든지 간에 어느 한 쪽에서 이혼 의사가 있을 때에는 이혼을 허락해야 한다고 가르쳤던 것이다(19:3). 물론 각 파는 여자들의 인권(人權)을 보호할 목적으로 이같은 법조문을 만들어 내었으나 결국에는 단순히 자기네들이 내세운 법조문의 고수와 당위성 수립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힐렐보다 샴마이 학파의 견해에 더 가까운 교훈을 주셨지만 실제로는 샴마이 학파보다 더 신중하게 여자들의 인격과 권위를 옹호하셨음을 알 수 있다.

=====5:32
음행한 연고 없이...간음함이니라 - 예수께서는 음욕을 품는 것이 도덕적으로 볼 때 간음과 같은 것이라고 지적할 뿐 아니라(27-30절) 무고(誣告)한 이혼은 간음의 가능성을 낳는 죄악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런 견해는 이혼한 여자의 대부분이 재혼하게 된다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특별히 초대 교회 당시의 팔레스틴 에서는 결혼이 여자들이 자신의 경제적 사회적 안정을 취할 수 있었던 가장 확실한 방편이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쉽게 납득이 가는 일일 것이다. 그러한 결혼은 이혼당한 여자의 입장에서 보든지 그 여자와 결혼하는 남자의 입장에서 보든지 간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한편본문의 '음행한 연고 없이'란 다른 말로 '부정한 일을 저지른 확실한 사실이 없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한 마가와 누가의 기록에(막 10:2-12; 눅 16:18) 따르면 본 조건문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해 혹자는(McNail, De Wette, Bruce 등) 이 부분을 초대 교회 당시의 복잡한 교회내의 사정을 익히 알고 있던 후기 편집자의 첨가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지나친 비평적 입장이고 이 주장이 19:8, 9의 교훈과 그 맥(脈)을 같이한다는 점에서 분명 예수의 직접적인 교훈이라 확신할 수 있다. 한편 본 조건문을 역으로 이해하게 되면 '음행'(* , 포르네이아)을 한 자와는 당연히 하나님께서 짝지워 주신 결혼을 파기할 수 있다는 묵시적 교훈이 들어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본문을 통하여 기독교 윤리(基督敎 倫理)의 한 단계 더 높은 요구를 하시는 것이 분명하다(Meyer),즉 예수께서는 당시 인습적으로 이혼의 권한을 거의 전적으로 가지고 있던 남편들이 보호받아 마땅한 아내의 허물을 덮어주는 큰 사랑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을 가르치고자 하셨을 것이다(Augustine). 즉 예수께서는 당시 샴마이 학파의 가르침보다 더 초월적이고 고급한 기독교 윤리를 강조하셨던 것이다.
버리면(* , 아폴뤼온) - '가게하다', '이혼하다'의 현재 분사로 한 번 이혼한 후 다시 돌아보지 아니하고 평생 버려두는, 그리하여 그 이혼당한 여인으로 하여금 스스로 재혼(하나님의 관점에서는 간음죄에 해당)하게 만드는 악의적인 유기(遺棄)를 강조한다고 볼 수 있다.
간음하게 함이요(* , 모이큐데나이) - 이는 좀더 육체적이고 적극적인 죄악의 면모를 나타내는 '포르네이아'(* ) 보다 약한 뜻으로 어떤 법규정을 위반 했다는 일반적인 범법 행위로서의 간음을 강조한 말이다. 이로 보건대 이혼당하여 다시 재혼함으로써 간음하는 여인의 허물보다 고의적으로 아내를 버린 남편의 죄과(罪過)가 더욱 크고 심대(甚大)하다는 것을 알수 있다.

=====5:33
헛 맹세를 하지 말고...너희가 들었으나 - 마태는 이제 새로운 주제를 제시하고 있다. 여기에서 옛 사람에게 말한 바에 포함된 것은 구약성경을 직접 인용한 것이 아니라 출 20:7; 레 19:12; 민 30:2; 신 5:11;6:3;22:21-23 등의 내용을 정확하게 축약한 요약문이다. 모세의 율법에서는 거짓 맹세와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과 서약을 깨뜨리는 것을 금지하였다. 일단 여호와의 이름이 언급되면 그 이름을 걸고 맹세한 것은 사람이 하나님께 갚아야 할 채무(債務)가 되는 것이다. 마태는 23:16-22에 나오듯이 논쟁을 위한 배경 속에서 다시 이 주제를 다루는데, 거기에서 훌륭한 예(例)들을 많이 들고 있다. 여기에서의 배경은 분명히 논쟁을 위한 것은 아니고 다만 예수가 천국과 그 나라의 의를 어떻게 구약과 관련시키는가를 설명하고 있을 뿐이다.

=====5:34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 메 오모사이 호로스), 문법적으로 부정과거 부정사의 문형으로서 이를 정확히 해석하면 '절대 맹세하지 말라'는 강한 명령문이 된다. 그러나 이것을 문자적으로 이해하여 맹세 자체의 무용성(無用性)을 강조하는 내용이라고는 볼 수 없다. 사실 예수께서는 법정에선 스스로 맹세하셨다(26:63, 64). 그리고 사도 바울도 자주 맹세와 서약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롬 1:19; 고후 1:23; 갈 1:20). 그런 점에서 본문에서 제시하는 바 예수께서 강조하시는 것은 유대인들이 범해 온 습관적이고, 진실치 못하고 위선적(형식적)인 맹세를 단호히 거부하는 명령으로 보아야 한다. 만일 진실을 촉진시키기 위하여 마련된 맹세라는 제도가 영리한 거짓과 궤변적인 속임수를 사용하는 기회가 되어 버린다면 예수는 그것을 폐기시킬 것이다. 왜냐하면 방향은 근본적으로 순전하고도 일관된 진실성이 중요하다는 점이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전혀 맹세하지 않는다면 그릇된 맹세를 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것이다. 실로 불완전한 인간에게 있어서의 맹세는 맹세 그 자체가 지니는 언어의 유희(遊戱)와 자기 합리화(合理化) 및 자기 변호의 추악한 도구로 전락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하늘로도 말라 - 예수는 사람이 무엇으로 맹세하든 간에 어떤 형태로든 하나님과 관련이 있고 따라서 모든 맹세가 묵시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되어지는 것이라고 역설하였다. 이는 하늘이나 땅이나 예루살렘, 심지어는 머리카락 조차도 하나님의 통치와 소유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특히 본문의 '하늘'은 원래 하나님의 창조물이지만 이것으로 맹세하는 것은 곧 그 창조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맹세하는 것이 된다.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 이는 사 66:1을 암시하는 표현으로써 절대 주권을 가지시고하늘의 보좌에서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권위를 강조해 주고 있다(행 7:48). 실로 그 초월한 권위를 지니신 하나님의 보좌와 적절한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경솔하고 습관적이며 또 위선적인 맹세를 한다는 것은 참으로 하나님께 대한 모독이 아닐 수 없다. 바로 그같은 맹세는 철저히 삼가해야만 한다.

=====5:35
땅으로...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 하늘을 당신의 보좌 삼으신 하나님은 또한 땅을 당신의 발등상으로 삼으시고 그곳을 통치하신다. 그러므로 '하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땅' 도 맹세의 대상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예루살렘으로...큰 임금의 성임이요 - 시 48:2;99:2 의 내용을 암시한 표현이다. 그런데 마태는 본문을 '...으로 맹세하다'(* , 옴뉘나이 엔)는 앞의 두묘사(하늘로, 으로)와는 다른 히브리적인 표현법인 '...을 향하여 맹세하다'(* , 옴뉘나이 에스)로 묘사하고 있다. 이는 예루살렘에로의 지향성을 두드러지게 나타내고자 하는 의도적 변형(變形)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곳으로 유대인들에게는 궁극적 본향(本鄕)이요, 지향점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기도와 맹세 등 각종 종교적 행위를 함에 있어서 항상 예루살렘에로의 눈길을 돌리곤 하였다. 한편 '큰 임금'이라는 말 앞에는 관사가 붙어있다. 이것은 곧, 그 임금이 너무도 잘 알려진 탁월한 존재임을 강조한다고 본다. 따라서 '큰임금'은 모든 역사를 통해 잘 알려진 탁월한 왕, 곧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데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25:34).


=====5:36
네 머리로도 말라 - 머리가 인간 신체의 필수적인 부분이지만 만물이 하나님께 관련된 것 같이 우리의 머리도 하나님께 관련되었다. 그것은 우리의 것이라기 보다 하나님의 것이다. 더구나 이 머리털은 하나님에 의해서 세신 바 되었고, 또 그 머리카락의 색이 희고(노령) 검게(청년)하는것(그 연수를 정하시고 생(生)과 사(死)를 정하시는 것) 역시 하나님의 소관에 속한 것이다. 실로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털을 만드셨고 그것의 모든 원동력과 힘을 조성(造成)하셨다. 진정 인간은 자신의 머리털의 한 터럭도 희고 검게 만들 수 없다. 그러므로 그 머리털의 원소유자는 하나님의 것이 된다. 그런 점에서 인간은 인간 자신의 머리로 맹세할 수 없다.


=====5:37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 본문을 헬라어 원문에 더 가깝게 해석하자면 '그러나 너희는 옳다, 옳다라고 말하든지 아니오, 아니오라고 말하든지 하라'고 재번역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같은 말이 두 번씩 반복되었기 때문에 문제가 생겨났다. 어떤 랍비들의 의견에 의하면 '옳다'나'아니오'를 반복하여 쓸경우에는 그것이 맹세가 된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의견은 바로 예수가 비난하고 있는 비뚤어진 결의론적(決議論的) 사고라고 생각된다. 같은 말이 중복된 것은 NIV에서 분명하게 밝혀지고 있는 것처럼 설교자의 수사적 표현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약 5:12). 이렇게 되면 이단락(33-37절)에서 몇가지 결론을 내릴 수가 있다. 첫째 전후 관계로 볼 때 이 구절이 의도하는 것은 구약성경이 지향하는 진정한 방향, 즉 진실성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맹세가 핑계로 이용되지 않고 진실성이 위협을 받지 않는 곳이라면 그처럼 무분별하게 맹세를 폐기한다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둘째 성경을 보면 하나님도 '언약을 세운다'(창 9:9-11; 시 16:10; 눅 1:68; 행 2:27-31). 그것은 하나님께서 때로는 거짓말을 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들이 믿을 수 있도록 해 주기 위한 것이다(히 6:17). 우리가 또한 바울의 경우로 판단해 본다면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도 맹세를 하였다(롬 1:9 고후 1:23; 빌 1:8; 살전 2:5). 그 이유는 앞에 경우와 마찬가지이다. 예수 자신도 맹세를 하고 증언을 하였다(26:63-64). 또 우리는 예수의 설교가 대구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5:27-30;6:5-8). 여기에서는 예수가 정식으로 구약의 율법을 논박하고 있다는 점을 솔직하게 인정하여야 한다. 즉 율법이 허용(許容)하거나 명령하고 있는 것(신 6:13)을 예수는 금지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가 구약이 지향하는 바에 대하여 해석하고 있는 것이 권위가 있는 것이라면, 이제 그의 가르침으로 구약이 온전한 형태로 성취되고 있는 것이다(D.A. Carson).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 - 여기서 '악으로 좇아'(* , 투 포네루)란 '악로부터' 또는 '악한 자로부터'(거짓의 아비;요 8:44)로 번역될 수 있다. 결국 본문은 옳고 그름에 대한 분명하고도 책임감 있는 답변을 회피하고 오히려 그것을 넘어 하나님의 권위를 빌어 구구한 맹세를 하는 것은 분명 '악한 자로부터' 생겨난 허위와 위선에 따른 결과임을 보게 된다. 실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무흠을 확신할 수 있는 자는 '맹세'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고 도리어 그 옳고 그름을 진솔히, 그리고 단호하게 고백할 수 있다.



5:3-5:27까지는, 본서에 수록된 5대 강화 중 첫번째 것으로서 산상수훈(山上垂訓)
이라 불리운다. 예수의 교훈 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부분을 압축 요약하고 있는 이
산상수훈은 본서에서 뿐만 아니라 신.구약 성경을 통틀어 매우 중요한 의미를 시사하
고 있다. 여기서 '산상수훈'이란 예수께서 그의 공생애(公生涯) 초기에 갈릴리 호수
주위의 어느 한 산에서 유대인 무리들에게 행산 설교(1절;7:28; 눅 6:20-49)를 일컫는
말이다. 그런데 이 설교를 가리켜 특별히 '수훈(垂訓)이라고 칭하는 까닭은 그 내용이
후세에도 길이 전수되어서 뭇 사람의 교훈을 받을 수 있는 주옥(珠玉)같은 말씀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산상수훈은 내용상 다음과 같이 크게 다섯 단락으로 구분될 수 있다. (1)
여덟 가지 복(3-12절;눅 6:20-26) (2) 성도의 생활과 구약 율법(13-48절;눅 6:27-36)
(3) 구제, 기도 금식(6:1-34) (4) 순전(純全)한 삶의 원리(7:1-12; 눅 6:37-42) (5)
결론적 교훈(7:13-27;눅 6-43-49). 그런데 이상과 같은 내용은 사실상 구약의 율법을
재해석(再解釋)하고 그 폭과 깊이를 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같은 점은 "그러므
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
요 선지자니라"(7:12:라는 말에서 보다 단적으로 드러나는데, 우리는 이 말씀을 가리
켜 일명 '황금률'(黃金律)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그런데 본 산상수훈과 누가복음
6:17-49의 평지수훈과의 관련성에 대해서는 누가복음 해당 부분의 강해를 참조하기 바
란다. 그리고 산상수훈에 관련된 제반 문제들은 본장의 장(章) 강해 아래 부분에서 상
세히 다루기로 한다.
한편 본장은 네 개의 소단락으로 구분되며, 각 소단락은 둘씩 짝을 이루고 있다.
3-12절이 '복있는 자'의 상태(혹은 특징)에 관한 언급이라면, 13-16절은 복있는 자의
임무(사명)에 관한 언급이라 하겠다. 그리고 17-20절은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완성이
되심과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 또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러
야 한다는 원칙론적 사실을 지적한다. 그리고 21-48절은 17-20절에 대한 구체적 적용
례 네 가지를 열거하고 있다.
다음은 산상 수훈 내용 분석에 앞서 몇가지 유념해 두어야 할 사항이다.
(1) 산상수훈의 시기 문제. 시기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는 두 가지 사항에 유념해
볼 필요가 있다.
(까) 산상수훈이 과연 예수의 연속된 한편의 설교인지, 아니면 예수께서 여러 차례
에 겊쳐 행하신 교훈을 마태가 의도적으로 편집한 것이냐 하는 문제이다. 현대의 많은
주석가들은 여러가지 비평 방법을 동원하여 후설(後說)을 지지하고 있다. 그러나 다음
몇 가지 논거(論據)를 통해, 우리는 산상수훈이 예수의 연속된 한편의 설교임을 믿는
다. 다만 본 강화에 예수의 설교 내용이 토씨하나까지 그대로 옮겨져있는 것이 아니라
그 핵심 부분이 정리, 게재되었다는 점은 인정해야 할것이다. 그 논거들 중, 첫째로는
산상수훈의 논리적 일관성을 들 수 있다. 본 설교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중심 사
상, 곧 천국(4:23)이라는 주제를 향하여 전개되어간다. 둘째로는 여타 강화들과 마찬
가지로 본 강화 또한 공식적인 더투로써 끝맺음을 하고 있다
(7:28,29;11:1;13:53;19:1;26:1)는 사실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셋째로 예수 자신이 훌
륭한 교사의 모범이셨으므로 이토록 짜임새있고 긴 설교를 한번에 충분히 하실 수 있
었으리라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다) 시기 문제와 관련하여 고찰해 볼 두번째 사항은 누가복음에 수록된 평지수훈
과의 비교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누가복음의 평지수훈은 예수께서 열 두 사도를 부르
신 직후에 수록된 반면 본 산상수훈은 그보다 훨씬 앞부분에 수록되어 있다. 이는 아
마도 두 복음서 기자간의 강조점의 차이에서 비롯된 결과일 것이다. 즉, 마태는 예수
의 공생애 초기에 행해진 산상수훈을 수록함으로써, 예수께서 바로 구약의 성취자라는
사실을 보다 선명히 드러내고자 했던 것 같다. 예수는 본서에 기록된 내용 그대로의
산상수훈을 하셨고 유사한 내용으로 다른 기회에도 자주 설교하신 것으로 보인다.
(2) 해석상의 주안점. 산상수훈을 해석하는 방법론상의 문제에 있어 해석의 주안점
을 어디에 둘 것인가에 관해서 역사적으로 갖가지 견해들이 등장하였다. 여기서는 이
들을 간략히 검토해 봄과 아울러 본 강해에서 취하고자 하는 견해를 소개하기로 한다.
먼저 정통적인 루터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은총에다 초점을 맞춘다. 산상수훈이 은
총을 갈구해야 할 것과(5:3;7:7-12) 인간 자력으로는 결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수준
에 이를 수 없음을 강조하는 것은(5:21-48)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 또한 부분적
인 지적일 뿐이다. 두번째로, 온전한 의미에서 이미 종말이 '실현된' 것으로 이해하는
학자들은 산상설교를 다만 사회의 진보를 위한 윤리.도덕적 교훈일 따름이라고 주장한
다. 하지만 이 견해는 24장의 묵시적인 요소와는 전혀 양립될 수 없다. 셋째로는, 산
상수훈이 초대 교회의 교리 문답 교육을 위해 사용된 것이라고 보는 견해를 들 수 있
다. 이는 마태복음이 초대 교회 태동 이전의 예수의 행적과 교훈을 증거하기 위해 기
록되었다는 사실을 도외시한 견해이다. 이외에도 여러 주장들이 있지만 여기서는 생략
하기로 한다.
우리는, 산상수훈이 통일된 전체로서 갖는 의미와 마태복음 안에서의 전체적 맥락
속에서 갖는 의미를 고려해 볼 때, 산상수훈을 하나로 묶어주는 가장 두드러지는 주제
는 천국이라 생각한다. 천국에 관한 이야기는 팔복(八福)의 처음과 끝부분에서 등장하
며 율법의 성취자로서의 그리스도를 스스로 증거하시는 5:17-20에도 나타난다. 뿐만
아니라 천국에 관한 주제는 주기도문의 중심에도 나타나고(6:10)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6:33). 또한 천국은 성도의 궁극적
종착지로서 묘사되고 있다(7:21-23).

(3) 산상수훈의 윤리.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5:44)이다. 모든 가식을 버리고 하
나님 앞에서 완전히 행하라는 가르침, 혹은 모든 염려에서 놓여나 오직 여호와께 전폭
적으로 헌신하라는 등등의 모든 교훈들을 항상, 그리고 문자 그대로 실행에 옮기려고
한다면, 우리는 절망 가운데 빠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교훈들은 우리를 절
망 가운데 던지려고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러한 절망을 넘어 그리스도의 은혜 가운데
로 나아가게 하기 위해 주어졌다. 불의가 창궐(猖獗)하는 이 세상에서 이렇듯 고차적
수준의 윤리를 실천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그러기에 이를 실천하는 길은 분명 좁고
협착한 길이다. 하지만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보다 앞서서 온전한 모범을 보이신 예수
를 의지하는 자에게 있어서, 이 길은 고달프기만하지는 않으며 오히려 신의 성품에 동
참하는 영광스러운 감격의 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벧후 1:4).
여하튼 산상 수훈에서 발견되는 윤리적 가르침에 대해 정리해 보면 (까) '수훈'은
인간의 잠재 능력, 실천 가능성을 묻기 전에 먼저 하나님 나라의 주인이 과연 무엇을
바라고 계시며, 어떤 삶의 수준을 원하고 계신가를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수훈'은
단지 이상적(理想的) 인간상을 제시한 것이기 보다 예수 제자들의 당위적(當爲的) 인
간상을 제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다) '수훈'은 다음의 사실을 전면 거부한다. 그것
은 하나님 나라가 종말에 이르러서야 도래하듯이 그 교훈 역시 종말의 때 이후에야 비
로소 실천되어지는 잠정적(暫定的) 성격의 가르침이라는 견해이다(Schweitzer). 그러
나 하나님 나라는 예수의 초림으로 이미 왔듯이 그 가르침은 현재적 실천 윤리임이 분
명하다. (따) '수훈'은 단지 인간의 마음에 호소하는 정적 윤리가 아니라 인간의 전
인격과 전 삶에 호소하는 역동적인 윤리이다. (마) '수훈'은 이미 도래한 하나님 나라
와 완성될 하나님 나라의 틈바구니에 사는 예수의 제자들이(막 1장 강해 '하나님 나라
개념' 참조) 항상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라는 분명한 자기 인식을 하도록 독려하며, 또
그렇게 살아가는 방법을 원칙론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4) 산상수훈의 의의. 산상수훈이 전체 성경 내지는 마태복음에서 차지하는 위치
혹은 그 메시지 자체에 내포된 의미 등을 고려할 때, 우리는 산상수훈의 의의를 대략
두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다.
(까) 행동 기준으로서의 의의(구속사적 의의). 이는 이스라엘의 구속 역사, 특히
출애굽 및 그 직후의 역사와의 연관 하에 이해되어야 할 사항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의 노예 신세로부터 구원하시고 언약으로 그들을 특별한 백성으로 삼으신
후 율법을 주사 행동 기준으로 삼게 하셨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께서는 당신의 죽
으심과 부활을 통해 새로이 탄생할 언약 공동테, 곧 교회의 행동 기준을 마련해 주시
고자 이 산상수훈을 베후셨던 것이다. 하나님은 율법을 먼저 주신 후 그 율법에 순응
하는 자만 불러내신 것이 아니라, 홍해를 가를는 등 숱한 이적적 권능으로써 먼저 이
스라엘을 출애굽시키신 후에 율법을 베푸셨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 산상수훈 또한 천
국에 들어가기 위해 엄수해야 할 계명으로서의 성격을 갖는 것이 아니라, 천국 시민으
로 부름받은 자들이 그 시민답게 살아가야 할 행동 기준으로서의 성격을 갖는다 하겠
다.
(다) 심판의 기준으로서의 의의. 앞에서 고찰한 바와 같이 산상수훈이 제시하는 윤
리의 기준은 가히 절대적이다. 따라서 산상수훈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 모두를 하나님
의 심판 아래 있게 하며(롬 3:19), 오직 예수의 은혜만을 의지하도록 성도들을 권면할
다. 따라서 예수의 은혜를 부인하는 자들은 마지막 날에 이 산상수훈에서 제시된 심판
의 기준에 근거하여 멸망의 형벌에 처해지고 말 것이다.

(5) 산상수훈의 구조. 산상수훈은 예수의 모든 교훈을 압축, 집약하고 있는 설교답
게 매우 짜임새있는 구조를 보여준다. 이 설교는 크게 서론(5:3-12), 본론
(5:13-17:14)및 결론(7:15-27)으로 대별될 수 있다.
먼저 서론에 해당하는 8복(八福)이 산상수훈의 중간이나 끝부분에 오지 않고 맨 처
음에 위치하고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이는 서신서들의 내용을 볼 때 먼저 교리 부분
이 나오고 다음에 실천 부분이 나오는 것과 연관된다. 즉, 서신서들은 한결같이 먼저
큰 원리들과 수신자들에 관해 서술한 다음에, 그것 때문에 혹은 그것을 믿기 때문에
어떠한 일들을 실천해 나가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산상수훈도 이와 마찬가지이
다. 5:13이하의 나머지 부분들은 '복있는 사람', 곧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천국
시민의 상태에 오른 성도들을 전제로 한 권면과 명령들인 것이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
에게서 그리스도인다운 행위를 기대하는 것은 너무도 무모한 일이다. 그러므로 행위와
윤리 및 도덕면에서의 복음의 호소는 그 호소를 듣는 사람의 신분이 바로 그리스도인
이어야 한다는 전제에 기초를 두고 있다.
다음으로, 본문에 해당하는 5:13-7:14에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들이 어떤 삶
의 자세와 원리를 가지고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를 때로는 원칙론적으로 그리고
때로는 구체적 예증을 들어가며 서술해 나간다.
끝으로 결론부는(7:15-27) 그리스도의 은혜를 거부하는 자나 거짓 선지자들 혹은
입으로는 주를 부르되 실상은 믿음에서 떠난 자들 모두에게 임할 종말론적 심판을 예
고하는 내용이다. 그리고 우리는 본 셜교를 다시 열 개의 소단락으로 나누어 볼 수 있
는 데(5:3-12;13-16;17-20;21-48;6:1-18;19-34;7:1-6;7-12;13, 14;15-27 등), 결론에
해당하는 7:15-27을 제외한 각 소단락은 둘씩 짝을 지워 한 주제를 논하는 형태를 보
여준다.

1. 여덟 가지 복(5:1-12)
산상수훈 전체의 서론격인 본문은 천국 시민으로 부름받은 성도들의 삶의 원리와
그 특징을 보여준다. 한편 본문이 특징적으로 취하고 있는'A인 자는 복이 있나니 B인
것임이요'라고 축복 선언은 (1) 복 있는 자의 조건과 (2) 참복의 내용 및 신령한 보상
을 강조한 것으로서 이러한 양식은 구약성경의 지혜 문학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다
(시 1:1;144:15;잠 3:13;단 12:12).
그런데 우리가 이러한 양식을 'B하려면 A하라'의 형태로 바꾸어보면, 이는 권면 내
지는 명령의 의미가 분명함을 알 수 있다. 결국 팔복 선언의 한 구절 한 구절은 축복
선언인 동시에 명령이요 훈계인 셈이다.
한편 우리는 본문이 일관되게 '복이 있나니'라는 구절로 연결되고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즉, 예수께서는 성도들에게 가장 위대하고도 부요한 축복들을 주시기 위해 이
산상설교를 베푸신 것이다. 특히 본문의 8복은 행복의 일부가 아니라 행복 그 자체를
다룬 것으로, 그 조건으로서 하나님을 향한 성실한 성도의 신앙 자세를 그 결과로서
영원한 천국의 기쁨과 상급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실로 행복이야말로 온 세상 사람들 모두가 추구하는 공통된 목표일 것이다. 그러나
절대 다수의 사람들은 행복 추구의 대상 설정이나 방법 선택에 있어 어리석기 짝이 없
는 형태를 보이고 있다. 그들은 죄의 기만성에 사로잡힌 결과 행복과는 정반대되는 비
참함과 불운에로 인도되고 마는 것이다. 본문에 묘사된 '복'(福)들은 결코 일시적이고
물질적인 쾌락이나 명예를 지칭하지 않으며, 오직 종말론적이기는 하나 영적으로 지금
이 땅에서도 그 천국에 동참하고 있듯이 이8복도 이 땅에서 오늘날 영적으로 향유할
수 있는, 또 필연적으로 해야하는 것임을 깊이 인식해야 한다. 본문에 대한 좀더 심도
깊은 이해는 다음에 나오는 주제 강해를 참조하라.

* 산상 수훈에 나타난 팔복 연구. 여덟개의 축복 선언으로 구성된 8복은 독립된개
개의 항목으로 존재하지 않고 천국 시민에게 부여된 하나의 종합적이로 포괄적인 윤리
기준들이다.
(1) 배경, 먼저 본문이 갖는 양식적 배경은 구약의 지혜 문학, 특히 시편에 그 근
원을 두고 있다(E. Bammel, W. Zimmerlil). 그런데 시편 84:4, 5 등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구약 성경에 언급된 축복 선언은 둘 이상이 짝지어서 나오는 경우가 거의
없다. 그리고 본문의 시간 및 장소적 배경은 1,2절에 암시되어 있다. 예수께서는 공생
애를 시작한 직후부터 천국 복음을 전파하고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
치는 등(4:23) 핵심적 사역을 전개해 나가셨다. 온갖 병자들을 이적적 권능으로 치유
하신다는 소문을 듣고서, 옥은 그 권능을 직접 목격하고서, 수많은 군중이 예수께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현세적이고도 물질적인 축복을 구하는 자들이었을 것이
다. 이에 예수는 공생애 초기부터 이 무리들에게 천국이나 축복의 실상이 어떠하며,
또한 그러한 축복 가운데 있는 자들이 드러내어야 할 삶의 자태가 어떠한지를 분명히
밝히고자 하신 것이다. 하지만 그 무리들은 예수의 이 심오한 설교 내용을 듣긴 들었
어도 두무지 그 내용을 알지 못했음에 분명하다. 요가냐하면 열두 제자들마저, 예수께
서 대적들의 손에 사로잡혀 십자가에 처형되는 그 순간까지도 예수 생애의 의의를 헤
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2) 구조. 어떤 학자들은 8복을 구약의 십계명에 비교하기도 하고, 8복이 아니라 9
복(九福)내지는 7복으로 늘이거나 줄여서 말하기도 한다. 또 어떤 학자들은 8복 중 처
음 네 개가 하나님과 인간 간의 관계를 규정하는 한편 나중의 네 개는 성도들 상호간
의 대힌 관계에 관한 규정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본문의 구조를 인위적으로 무리하
게 분해하거나 짜맞추는 시도들은 무의미하다 하겠다. 본문의 여덟가지 축복들은 어떤
특정한 순서로 배열되었다기보다는, 천국 시민의 특질이라고 하는 단일한 주제를 다양
한 각도에서 여러개 나열하여 자연스러운 조화를 이루도록 하고 있다고 봄이 무난하겠
다. 다만, 한 가지 유념할 사항은 앞에서 는의되었듯이, 팔복의 처음과 끝이 '천국'의
축복에 관한 언급으로 시작되고 마무리됨으로써 본 설교의 메시지의 핵심이 무엇인가
를 시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3) 누가복음과의 비교. 본서의 5:3-12을 누가복을 6:20-26과 비교해 보면 사소한
차이점도 있지만 가장 큰 차이는 누가복음의 네 개의 축복 선언이 네 개의 저주와 나
란히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모두 2인칭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본서에서는
저주에 대한 언급이 없으며, 여덟 개의 축복 선언(3-10절)은 모두 3인칭 형식으로 되
어 있고 마지막것만 2인칭 형식으로 확대되어 그 뒤에 이어지고 있다(11,12절). 외경
에녹 1서 58:2에서 보는 바와 같이 신약성경 이전의 축복 선언에서는 2인칭을 사용한
경우가 거의 없었다. 그리고 전도서 10:16, 17의 헬라어 본문의 경우에만 축복 선언이
저주와 함께 나타난다. 따라서 마태복음의 축복 선언이 후기의 개작이라고 볼 마땅한
이유는 없다. 한편 듀퐁(Dupont)과 마샬(Marshall)은 누가는 제자들의 실제적인 상태
를 중점적으로 모사한 것이라고 하고 마태는 당위적인 요구를 중점적으로 설명한 것이
라고 주장하였다. 즉 누가는 예수의 가르침이 갖는 사회적 의미와 현상태는 종말에 역
전될 것이라는 사실을 주로 강조하였고, 마태는 천국에 들어가기 위하여 지금 요구되
는 그리스도인의 의의 기준을 말하려 했었다는 점이다. 이와 비슷하게 스트렉커(G.
Strecker)는 마태복음 축복 선언에서는 윤리가 종말론을 대치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즉 축복 선언이 메시야 시대와 관련된 종말론적 축복이라기보다는 그 시대에 들어가기
위해서 윤리적으로 갖추어야 할 요구 사항이 되었다는 것이다. 어쨌든 마태와 누가가
그들의 자료를 취사 선택하여 구성하였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 때문
에 두 가지 축복 선언에서 차이점이 생기기는 하였지만 그러한 차이가 지나치게 과장
될 필요는 없을 것이다.
(4) 교훈. 여기 열거된 여덟 가지 그리스도인다운 특질들과 참된 성도에게 약속된
축복들의 세부 사항에 관해서는 본장 주석에서 다루었으므로, 본 단락 강해에서는 팔
복 전체가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교훈에 대해 상고하는 데에 그치기로 하자. (까) 본문
의 '...한 자'란 '모든'성도들이 이르러야 할 상태이다. 팔복 강화의 교훈은 하나님의
사업을 위해 특별히 헌신하는 목회자나 선교사 등을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 모두에게 베풀어진 것이다. (다) 그리스도인들은 여기 나타나는 여러 특성들을'모두' 드러내어야 한다. 물론 성도들에 따라 어느 특성을 다른 특성에 비해 더 두드러지게 드러낼 수는 있지만, 궁극적으로 이 여덟가지 특성들은 하나님을 향한 성실한 신앙 자세라는 면에서 하나이다. 따라서 '애통함'이 없이는 '심령의 가난함'이 있을 수 없고, 또한 '마음이 청결'하지 않고서는 '애통할 수' 없다 하겠다. (따) 여기 열거 된 그리스도인 다운 특성들은 오직 성령의 능력에 의해서만 나타날수 있다. 이 특성들은 생래적(生來的)으로 타고난 좋은 성품을 가리키지 않으며 후천적 수양을 통해 획득한 결과를 의미하지도 않는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새생명의 열매들로서 나타나는 것일 따름이다. 복음은 가장 교만한 자도 가장 겸손하게 만들 수 있고, 가장 완약한 자도 가장 온유하게 만들 수 있다. 우뢰의 아들이라 불리 웠던(막 3:17) 요한이 사랑의 사도로 변화될 수 있었던 것 또한 이러한 이치로 말미암았다. (마) 본문은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 간의 근본적인 차이를 시사한다. 이 양자는 구하는 복의 종류나 기뻐하는 대상 등 여러 면에서 엄연한 차이를 보이는데, 이 차이는 외면적이거
나 부분적인 차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이고도 절대적인 차이를 드러낸다. 이는 가시나무와 무화과나무의 열매들이 서로 다를 수밖에 없는 이치와 같다(눅 6:44).
그러므로 성도들은 먼저 세상으로부터 철저히 자신을 성별(聖別)시킴으로써만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하겠다. 세상을 향한 성도의 사명을 잘못 인식한 나머지, 세상의 사악한 풍조를 교회에 들여와 교회를 세속화시키는 사례는 철저히 근절되어야 한다. (바) 팔복은, '천국'에서 시작하여 '천국'으로 끝나거니와, 우리는 여기서 이 세상과 다른 차원의 또 다른 영원하고 참된 세계에 관한 비젼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세상에서는 불의와 포학이 창궐하고 약육강식(弱肉强食)의 힘의 논리가 지배하며, 또한 권모와 술수가 처세의 능사(能事)로 통하기도 하지만, 천국에서의 삶의 법칙이나 통치 원리 등은 이와 전혀 대조적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이 세상에 존재하되 천국의 시민권을 가진 자로서(빌 3:20),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하는 일에 열성을 바치도록 부름받은 존재이다.

2. 그리스도인의 사명(5:13-16)
본문은 앞 단락(1-12절)과 짝을 이루고 있는 바, 여기서는 본문과 앞 단락과의 문
맥상의 연결에 주안점을 두고 고찰한 후 본문의 내용을 상고(詳考)하기로 하자.
즉 3-12절이 그리스도인의 특성 혹은 본연적인 모습을 그리고 있다면, 본문은 그리스도인이 감당해야 할 사명에 관한 언급이다. 그리고 전자가 그리스도인다운 성별(聖別)을 강조하였다면, 후자는 '그의 나라와 그의 뜻'이 이 땅에서도 실현될 수 있도록하기 위한 적극적 참여를 강조하고 있다.
이제 본문의 내용을 분석해 보면, 본문 자체에도 그러한 순서가 발견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성도의 사명을 빛과 소금에 각각 비유한 두 은유는(13절;14-16절), 먼저 '너희는...이라'는 그리스도인의 신분 혹은 상태에 관한 언급이 나온 후에 비로소 '...하라'는 식의 구체적 사명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명을 망각하는 자에 대한 실제적이고도 심각한 경고가 뒤따른다(13절 후반부).
실로 기독교는 죄악된 세상과 결별하고 영원한 피안(彼岸)의 세계에만 몰두하는 은둔생활을 조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성도들이 이 세상에 궁극적 소망을 두지 않고 영원한 천국을 대망하며 살아야함은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처럼 이 세상을 나그네와 행인의 심정으로 살아가야 죄악된 현실 논리에 연연해하지 않고 신앙의 정도(正道)를 더욱 과감히 걸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이와 동시에 성도는 신앙 공동체 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각 분야에 참여하여 이들 제분야가 모두 하나님 보시기에 보다 아름다와질 수 있도록 매진해야할 사명이 있다. 세상에 존재하되 세상에 물들지 않고 오히려 세상을 하나님 중심적으로 변혁시켜나가는 이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야말로 좁고도 험한 길이요 한 알의 밀알로 썩어져 백 배의 결실을 맺게 하는 일이다.
* 소금과 빛의 사명. 성도들이 이 땅에서 추구해 가야 할 근본적인 사명은 어떤 삶
의 모습으로든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롬 11:36;고전 10:33). 그런데 이 같은 사명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수행해 가야 할 것인지를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 바로 본문의 '소금으로, 빛으로'의 교훈이다.
여기서 먼저 소금과 빛의 공통점에 관해 살펴보기로 하자. 그 공통점은 양자 모두가 자체를 소모한다는 점이다. 즉 소금은 녹고 빛은 발산함으로써 그 본래의 기능을 발휘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성도들은 자기 희망과 봉사를 통하여 새로운 맛과 새로운 생명력 및 빛의 근원이신 그리스도를 이웃에게 공급할 수 있어야 한다(요 12:24). 이는 이기적이고 현실 기복적(祈福的)인 신앙 태도와는 뚜렷이 대조된다.
다음으로 그 차이점을 살펴보면, 소금이 음식물의 부패를 방지하는 소극적 역할을 담당한다면(약 1:27), 빛은 죄로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적극적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이다(엡 5:8; 빌 2:15).
한편 소금과 빛의 사명이 성도들에게 주어졌다는 것은, 이 세상이 부패와 어둠으로 가득하다는 뜻을 시사한다. 따라서 여기 성도는 자신이 거하는 세상의 실상을 분명히 깨닫고 세상과 혼합되지 않도록 엄연히 구별된 생활을 해야 할 것이다. 사실 수 많은 십자가 불빛이 도시 전체를 뒤덮고 있지만 오히려 성도들의 사역 활동은 점점 미미해져가는 현실을 살펴볼 때 '소금으로, 빛으로' 살도록 부름받은 성도의 본분이 더욱 요청될 수밖에 없다. 실로 죄악된 세상과 타협하므로 그리스도인 본연의 사명을 도외시하거나, 현실의 부조리와 죄악에 대해 비판적 조소만 던질 뿐 악한 세상 조류를 방관하는 자들이 많아질 때 세상은 더욱 큰 어둠으로 뒤덮일 것이다. 진정 참다운 성도는 세상과 구별될 뿐 아니라 세상에 대한 비판 가치에만 끝나지 않고 건설적 대안(代案)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대안의 실천에 솔선하는 자여야 하겠다.

3. 그리스도인의 의(義)의 수준(5:17-48)
앞서 두 단락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에게서 나타나야하는 특징(성품)들과 그리스도인에게 허락된 축복 및 그들에게 주어진 사명을 고찰해 보았다. 즉 3-12절이 산상수훈 전체의 서론인 반면 13-16절은 산상수훈 전체의 본론 중 서론격에 해당한다. 즉, 13-16절에서는 성도들이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는 사실이 원칙론적으로 규정되었다. 그런데 이제 본문으로부터는 그러한 사명을 어떻게 수행해 나갈 것인지를 보다 구체적으로 서술해가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구체적 실천 사항에 관한 내용(5:17-7:14)은 나름대로 체계있는 논리 진
전을보여준다. 먼저 본문(5:17-48)은 구약과 신약, 율법과 복음, 혹은 율법(구약)과
그리스도(그리스도인)등과의 관계를 비교하는 방법을 통해, 그리스도인의 의의 수준이 어느 정도여야 하는지를 거시적 안목에서 갈파(proclamation)하는 내용이다. 그리고 6:1-18은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의 외식적 종교 생활을 경계하는 형식을 빌어 성도의 신앙 생활이 하나님 앞에서 내면적으로 순수해야 할 것을 가르친다. 내면적 동기, 곧 마음에 관한 강조는 이미 앞에서 내면적으로 순수해야 할 것을 가르친다. 내면적 동기, 곧 마음에 관한 강조는 이미 5:28 등에서 시사된 바 있다. 그리고 6:19-7:14에서는 적용의 폭을 더욱 확대시켜 성도의 생활 전반에 걸쳐 늘상 염두에 두어야 할 삶의 원리들이 나열되어 있다.
지금까지 본단락을 전후한 문맥의 연결을 살펴보았거니와, 우리는 이제 본문의 내용에 들어가서 그 구조와 전반적 주제에 관해 고찰하기로 하자.
(1) 구조. 본 단락의 내용도 서론, 본론 및 결론으로 구분될수 있다. 먼저 서로
(17-20절)은,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완성이요 마침이 되시며(17, 18절)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 또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를 드러낼 수 있는 수준에로 요청받고 있음을(19, 20절) 원칙론적으로 단정짓는 내용이다. 그리고 본론(21-47절)은 17-20절에 규정된 원리를 보다 구체적으로 진술하기 위해 몇가지 실례를 들고 있다. 여기에 열거된 여섯가지 사례들은(제 6계명:21-26절; 제 7계명:27-30절; 이혼법:31,32절; 맹세법:33-37절; 복수법:38-42절; 사랑 실천의 대상:43-47절) 한결같이 '...한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의 형식으로 전개된다. 어러한 형식은, 예수께서 구약의 완성자되심을 시사함과 아울러, 예수께서 구약성경 자체를 비판하신 것이 아니라 구약성경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비판하고 계심을 암시한다. 끝으로, 결론부(48절)는 그리스도인에게 요구되는 수준이 바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分量)이 충만한 데까지임을(엡 4:13) 재삼 강조하고 있다. 장(章) 강해 중 '산상수훈의 의의'에서 지적한 것처럼, 48절은 결국 인간의 전적 무능을 깨우침과 아울러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만을 의지하도록 유도한다. 왜냐하면 본문에서 요구되는 의(義)란 하나님의 의에 다름아니며, 하나님의 의는 오직 믿음으로써만 얻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롬 1:17).
(2) 주제, 본단락에서 전반적으로 부각되는 주제는 (까) '구약과 신약의 곤계',
(다) '율법의 완성으로서의 복음', 그리고 (따) '그리스도에 대한 구약의 예언과 성
취'등이다. 이중 (까)항은 본서의 신약 서론에서 다루었고, (따)항은 1장 주제 강해에서 잠깐 언급하였다. 따라서 여기서는 (다)항을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우리는 예수께서 어떤 의미에서 율법을 완전케 하였는가를 고찰해 보아야 한다. 첫째로, 예수는 율법의 지향하는 바 혹은 율법에 함축된 정신을 온전히 드러내셨다. 즉, 율법은 단순히 규정된 여러 법조문들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같이 거룩한' 수준에 이르도록 요구하며(레11:45), 또한 하나님의 절대적 사랑인 '아가케'를 실천하도록 요구한다. 21-48절을 통해 예수께서 드러내신 것도 바로 이러한 사실이라 하겠다. 둘째로, 예수는 율법이 궁극적으로 지향하고 요구하는 바를 친히 만족시키셨다. 즉, 인생은 연약성과 유한성 및죄성으로 말미암아 율법의 요구 앞에서 죽을 수 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 있으되, 예수께서 인생을 '대신'하여 십자가 저주를 받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당신을 '믿는 자'를모두 의롭다고 여겨주시는 것이다(롬 3:24,25;5:9,10).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가 함께 부활한 것으로 간주된다(갈 2:20).
따라서 이제 그리스도인은 죄와 율법과 죽음에서 해방되어 의와 성령의 법과 생명에속하게 되었다. 요컨대 율법과 복음은 그 자체로서 단절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구속사적으로 동일한 연장선상에 있다. 그리하여 구약 시대 때나 신약 시대를 막론하고, 율법은 그리스도의 복음에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夢學先生)의 역할을 하도록 주어진것이다(갈 3:24,25). 다만 계시의 점진성이라는 차원에서, 구약 시대에는 율법이 복음을예표하는 데에 그쳤으나 신약 시대에 이르러서 복음의 실체가 온전히 드러남으로써 율법의 세 측면, 즉 의식법과 시민법과 도덕법은 복음 안에서 계승, 완성, 승화되었던것이다.

* 율법의 완성으로서의 복음. 복음의 주체이신 예수는 유대 지도자들이 강조하는바 문자적 율법 수행을 종종 거부하심으로써 율법 파괴자라는 낙인이 찍히게 된다.그러나 예수는 친히 율법의 완성자이심을 선포하셨고, 또 율법과 복음의 긴밀한 연결성과 그 발전적 관계성을 강조하기도 하셧다. 한편 이 같은 율법과 복음, 또는 율법의행위로 인한 의(義)와 복음의 은혜로 인한 의(義) 사이의 관계는 매우 심오한 것으로깊은 통찰이 요구되는 성경 주제 중 하나이다.
우선 구속사 전개의 방법론적 측면에서 이 양자의 관계를 살펴보면, (1) 율법 수여의 동기와 정신은 모두 다 그리스도의 등장과 사역을 예표하고 있다는 점에서(히8:5), (2) 예수께서는 구약 율법에 포함된 죄인을 향한 공의와 요구를 모두 충족시키셨다는 점에서(요 19:30), (3) 예수케서는 율법의 정신을 더욱 승화시키고 그 참뜻을나타내심으로써 완전한 천국 시민의 도덕률을 제시하셨다는 점에서 율법을 완성하신것이다. 따라서 율법과 복음은 부정과 폐지와 대치의 관계가 아니라, 긍정과 완성과발전의 관계임을 알 수 있다. 이런 양자의 관계를 비유하여 성경은 '그림자와 실체','몽학선생과 참선생'의 관계로 묘사하고 있다(갈 3:24; 히 8:5).
그런데 이와는 대조적으로 율법과 복음을 구원의 유효성이라는 관점에서, 또는 그목적 및 기능론적 측면에서 고찰할 때에는 양자는 첨예하게 대조되는 것을 발견할 수있다(갈 3장 주제 강해 '율법과 복음의 비교', '율법과 복음의 관계 및 단절성'을 참조하라).
한편 예수께서 율법의 완성으로서의 자신(복음)을 역설하신 이유는 (1) 당신의 율법에 대한 신앙 개혁적 가르침을 자신들의 종교적, 정치적 기득권(旣得權)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하는 자들의 오해를 불식(拂拭)시키기 위해서이고 (2) 율법 정신의 승화를가르치는 당신의 교훈을 빌미로 율법 페기론까지 주장할지도 모르는 방종한 자들을 동시에 경계하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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